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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향 머금은 바닷바람과 추억이 만나 발길 이끄는 곳

홍성식기자
등록일 2022-11-29 18:12 게재일 2022-11-3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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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기자, 포항을 산책하다<br/>송도 소나무 숲길과 해변 길 돌아보기 4㎞
숲길과 해변 길을 함께 산책할 수 있는 송도 솔밭 도시숲
숲길과 해변 길을 함께 산책할 수 있는 송도 솔밭 도시숲

동빈큰다리를 건너니 불어오는 바람에 소나무 향기가 실렸다. 코끝을 기분 좋게 간질이는 좋은 냄새다. 초겨울 도심의 회색 거리가 환해졌다.

5분이나 걸었을까? ‘울울창창(鬱鬱蒼蒼)’이라 불러도 무색하지 않을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쭉쭉 뻗은 키 큰 소나무와 계절을 잊고 피어난 새하얀 장미, 거기에 산책자의 흥미를 자극하는 조각상들까지.

이름 하여 ‘포항 송도 솔밭 도시숲’이다. 도시와 숲이라는 이질적 두 단어가 여기선 불협화음이 아닌 최상의 하모니를 이룬다.

송도 솔밭 도시숲은 어떻게 생겨나고 조성된 공간일까? 여행 플랫폼 ‘트립어드바이저’가 이 궁금증을 풀어준다.

“이 소나무 숲은 1929년 어부보안림(魚付保安林)으로 지정됐고, 1945년 해방 후 더 많은 나무를 심어 포항의 대표적 방풍림이 됐다. 이후 솔밭으로 불리며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1968년 철강산업단지 조성 이후 백사장 손실과 함께 솔밭이 훼손되기 시작했고, 고층 아파트와 아스팔트 길이 생겨나며 솔밭의 이미지가 위기를 맞았다. 이에 2017년 솔밭 재생을 목적으로 도시숲 사업을 시작해 각종 편의시설, 조형물, 솔내음 둘레길, 족구장 등을 만들어 도시숲으로 재탄생했다.”

 

훼손으로 유실 위기 지역대표 방풍림

조형물·둘레길 등 만들어 새롭게 탄생

16년만에 재개장하는 송도해수욕장은

백사장 건너편 포항제철 풍경 볼거리로

동빈큰다리 아래 꾸며진 포항함 체험관

퇴역 1천200t 초계함 구경도 재미 쏠쏠

송도 솔밭 도시숲 안내판
송도 솔밭 도시숲 안내판

▲ 그리운 사람 떠올리는 소나무 숲길

 

낮에도 하늘을 가릴 정도로 빽빽한 소나무 숲 저편에 차가운 푸른 보석의 색채로 바다가 빛난다. 송도 해변이다.

소나무 숲길과 해변 길이 지척이라 한꺼번에 걸어볼 수 있으니, 이곳을 ‘걷기운동의 최적지’라고 불러도 탓할 사람은 없을 듯했다.

짧아서 아쉬운 가을을 보내고, 길고 지루할 게 분명한 겨울을 맞이하는 시기. 그래선지 솔잎 사이로 쏟아지는 11월 오후의 햇살 한 줌이 더 귀하게 느껴졌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여기에 소나무 향기가 더해져 어떤 산책로보다 쾌적했다.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안기거나 안아주고 싶은 누군가의 체온이 그리워지는 계절이 성큼 다가왔다. 이럴 때면 너나 할 것 없이 애틋한 기억으로 남은 지난 시절의 인연이 그리워진다. 아프고 시린 사랑 없이 성장하는 인간은 세상에 없으니까.

동빈큰다리 아래 자리한 포항함 체험관
동빈큰다리 아래 자리한 포항함 체험관

시인 김이하(63)도 그랬던 것 같다. 그가 포항에 와서 송도 솔밭 도시숲을 걸었는지는 알 수 없다.

허나, 김 시인의 포항 방문 여부와 무관하게 아래 인용하는 시 ‘오늘, 그대에게’는 솔숲 길을 산책하며 낭송하기 안성맞춤이다. 귀 기울여 들어보자.

 

울먹거리던 마음이

끝내 산을 넘지 못했다

나무 끌텅을 딛기도 전에

새소리에 귀를 내기도 전에

바람에 귀밑털을 날리기도 전에

마음이 뭉텅뭉텅

네 생각에 베이고

우울한 한 생이

끝내 너를 넘지 못했다…(후략)

 

그렇다. 사람은 언제나 무언가의 결핍과 불화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울먹거리기도 하고, 뭉텅뭉텅 베이는 마음에 우울 속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우울한 한 생이/끝내 너를 넘지 못했다’는 슬픈 고백도 나온다.

그러나, 결국 상처를 주며 떠나간 ‘너’와의 만남과 헤어짐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있을 수 없는 법. 김이하의 시는 그걸 노래하고 있는 게 아닐지.

사라지는 가을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잠시 섬세한 감상에 휩싸였다. 산책자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자, 이제 기운을 차리고 걷는 속도를 조금 높여 바다로 가보자.

송도 해변에 설치된 조형물 ‘천사의 기도’.
송도 해변에 설치된 조형물 ‘천사의 기도’.

▲ 한 시절 ‘동해안 최고 해수욕장’으로 불렸던 송도

 

몇 주 전 포항운하관 전시장에서 송도해수욕장의 1970년대를 찍은 흑백사진을 본 적이 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커다란 모래사장에 송곳 꽂을 틈 하나 없었다.

포항에서 태어나고 자란 60대 후반의 상인은 그 시절을 뚜렷하게 기억했다. 약간의 과장이 섞였을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들려줬으니.

“포항 사람은 물론이고, 대구와 부산에서 온 가족들, 방학을 맞아 오랜 시간 버스를 타고 동해까지 달려온 서울 대학생들이 여름 내내 끊이질 않았어. 거기서 8월 한 달 쭈쭈바(합성수지 용기에 담아 얼린 얼음과자)만 팔아도 1년을 먹고살았다니까.”

오른편으로 송도 해변을 끼고 15분가량 걸었다. 바다 건너로 포항제철이 보였다. 몇몇 조형물을 지나며 그게 어떤 의도로 만들어진 작품인지 알아보는 재미도 만만찮았다.

대규모 철강공장이 들어서기 전 송도해수욕장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반세기 전 풍경이니 기자는 알 수 없는 일. 그래서 ‘나무위키’에서 포항 송도를 검색했다.

“일제강점기에 포항이 읍으로 승격되던 1931년 정식으로 해수욕장으로 개장되며 백사송림(白砂松林·새하얀 모래와 소나무 숲)의 휴양지로 알려졌다. 1935년 형산강 제방 축조공사의 여파로 규모가 반으로 줄었지만, 1945년 해방 후에도 포항을 대표하는 해수욕장이었다.”

그랬던 송도해수욕장이 제 모습을 잃은 건 1960년대 후반부터다. 철강단지 조성과 함께 송도 자체가 도시화되면서 소나무 숲을 잠식했고, 1970년대 두 차례의 큰 해일로 백사장이 사라진 것. 방파제로도 모래 유실을 온전히 막기 어려웠다고 한다.

편의시설 등이 잘 갖춰진 송도 산책길
편의시설 등이 잘 갖춰진 송도 산책길

▲ 부활 기다리는 송도해수욕장 지나 ‘포항함 체험관’으로

 

송도 해변이 최고의 주가를 올릴 때 엄마 손 잡고 물장구치던 아이들은 이제 중년이 됐다. 송도해수욕장의 50년 전을 기억하는 이들에겐 낭만적 추억 하나가 사라진 셈이다.

그러나, 실망하기엔 아직 이르다. 최근 들려온 낭보(朗報)가 있으니 ‘내년에 송도해수욕장이 재개장 한다’는 것. 2012년부터 포항시와 포항지방해양수산청이 주도한 ‘송도해수욕장 복원사업’이 막바지 작업을 끝내고 2007년 폐장 이후 16년 만에 다시 문을 연다.

잊고 살았던 유년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2023년엔 적지 않은 50~60대 피서객들이 송도 해변으로 몰려오지 않을까?

오후 4시경 시작한 산책을 이어가던 시간. 솔밭과 해수욕장에 초저녁 어둠이 찾아들었다.

젊은 연인들이 적잖게 보였다. 아마도 조개구이와 통닭을 파는 ‘송도 해변 맛집’을 찾아온 것이리라. 내년 여름엔 송도해수욕장이 청춘과 중년이 어우러지는 공간이 됐으면.

1시간 조금 넘게 소나무 숲과 백사장을 오가며 4㎞를 걸었다. 이제 걷기운동을 마무리할 때가 됐다. 아까 건너온 동빈큰다리 쪽을 향했다.

다리 아래 군함 한 척이 정박해 있다. ‘포항함 체험관’이다. 그날은 시간이 늦어 그냥 지나쳤는데, 다음날 다시 가보니 한 번쯤 살펴볼 가치가 충분하다.

30여 년간 우리 바다 수호의 임무를 완수하고 퇴역한 해군의 1천200t급 초계함인 포항함은 퇴역 후 교류 관계가 잦았던 포항시 동빈내항에 선상 병영체험관으로 꾸며졌다.

안내를 맡은 직원의 위트와 친절함이 돋보였던 포항함 체험관. 무료 관람이니 부담 없이 찾아볼 수 있는 송도 산책의 마무리 코스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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