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기자, 포항을 산책하다 옛 포항역서 포항도시숲 왕복 3.5㎞ <br/>도심 가로질러 1시간 남짓 여정길엔 아기자기한 카페 ‘즐비’<br/>덕수공원엔 충혼탑·사찰·전망대까지… 수도산서 등산도 즐겨 <br/>키 큰 나무 가지런한 학산동 포항숲선 여유로운 ‘힐링의 시간’
“먹는 것 조절하고 많이 걷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어.”
자신과 아들 둘 모두 당뇨병을 앓고 있는 시인 A씨의 말이다. 주위를 돌아보면 당뇨로 고생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걸 알 수 있다.
당뇨는 소변에 당분이 많이 섞여 나오는 병으로 탄수화물 대사를 조절하는 호르몬 단백질인 인슐린이 부족해 생기는 것이다. 갈증과 잦은 소변으로 고생하는 당뇨병 환자들. 정도가 심한 경우엔 인슐린 주사까지 맞아야 한다.
인체에서 인슐린은 만들어지지만 그 양이 적은 경우인 ‘제2형 당뇨’는 고지방·고단백 음식이 일상화된 식단 변화와 운동 부족이 병의 원인인 경우가 흔하다고 한다.
‘걷기 좋은 포항의 산책길’ 관련 기사를 쓰면서 당뇨에 관한 이야기를 왜 이렇게 길게 주절대는지 궁금할 수 있겠다. 다 이유가 있다.
당뇨는 ‘관리가 가능한 질병’으로 불린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식이 조절과 더불어 꾸준히 운동을 이어간다면 당뇨의 급작스런 악화와 합병증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다는 게 의학계의 일반화된 견해다.
▲‘걷기운동’은 당뇨 환자 위한 효과적 치료법
이제 가을도 끝자락에 이르렀다. 빨갛고 노란 낙엽이 거리 곳곳을 뒹군다. 며칠 후면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만추의 풍경이 곧 사라질 듯하다.
더 늦기 전에 단풍 아래를 걷고 싶어 선택한 이번 산책로는 옛 포항역에서 덕수공원을 거쳐 학산동 포항도시숲을 오가는 구간. 대략 1시간 남짓이면 왕복이 가능한 도심의 보석 같은 길이다.
지금은 철거됐지만, 지난 세기 많은 이들이 추억이 묻어 있는 옛 포항역. 현재는 폐철도공원으로 변화되고 있는 출발지에 서서 다시 한 번 시인 A의 말을 떠올렸다.
“나 같은 당뇨 환자에겐 걷기운동이 무엇보다 좋은 약이지.”
실제로 그렇다. 대한당뇨병학회는 “당뇨병 환자라면 매일 최소 30분씩 걷는 것이 좋다. 걷기는 당뇨인들에게 많이 권장되는 운동이다. 누구나 쉽게 시도할 수 있고 특별한 장비나 기술이 없어도 되며, 장소를 따질 것도 없이 집 근처, 혹은 회사 근처에서 언제든 할 수 있다는 것이 걷기운동의 장점”이라고 권유하고 있다.
비단 당뇨 환자만이 아니다. 현대인들의 안고 사는 성인병 대부분이 운동 부족과 과도한 스트레스에서 온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바로 이 성인병의 주범 중 하나인 운동 부족을 비용 들이지 않고 해결하는 가장 간편한 방법이 걷기, 즉 ‘산책’이 아닐까?
옛 포항역 부지에서 시작해 덕수공원으로 가는 길엔 정겨운 풍경들이 자주 눈에 띈다. 커피는 물론 향긋한 전통차와 과일주스 등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조그만 카페가 여럿 있다.
아기자기하게 장식된 가게 안에서 커피나 차를 마셔도 좋겠지만, 기왕지사 산책에 나섰고, 한낮엔 아직 추위를 느낄 정도가 아니니 테이크아웃 한 음료를 길 곳곳에 마련된 벤치에서 즐겨도 좋을 것 같았다.
기자 역시 진한 커피 향을 느끼며 한참을 길가에 앉아 있었다. 머리 위로 붉은 단풍잎 몇 개가 떨어졌고, 잠시잠깐 삶에 단풍이 들기 전 푸르렀던 청춘의 한 시절을 회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짤막한 등산을 원한다면 덕수공원으로
‘이 길이 예전엔 기차가 지나던 철길이었구나’라는 걸 알게 해주는 차단기와 철로를 지나니 서산터널이 보인다. 거길 스쳐 포항초등학교 뒷길로 들어서니 단풍은 더 농밀하고 짙어졌다. 곧게 뻗은 나무들이 만들어낸 총천연색 터널 같았다.
노부부는 다정하게 손을 잡고 산책을 즐기다가 잠시 쉬기 위해 길 옆 나무 의자에 앉았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애틋해지는 게 부부의 정’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영감님이 관절이 많이 안 좋아요. 그래서 격한 운동은 하지 못하고, 하루에 한두 시간쯤 함께 걷는 것으로 건강을 챙기고 있어요. 내가 사는 동네에 이런 산책길과 공원이 있다는 게 행운이죠.”
7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할머니의 말이 다정하고 따스하게 들렸다. 부부는 거리가 얼어붙는 한겨울이나 폭우 쏟아지는 장마철이 아니면 언제나 이 길에서 가벼운 걷기운동을 한다고 했다.
반세기 이상을 함께 살았을 두 사람이 앞으로도 오래오래 해로(偕老)하기를 마음속으로 빌며 다시 산책을 이어갔다.
길의 왼편으로 ‘덕수공원’이라 쓰인 커다란 바위가 보인다. 포항에서 7년 넘게 살았지만 기자는 처음 와보는 곳.
어떤 곳일까? 이 궁금증에 한국관광공사 홈페이지 ‘대한민국 구석구석’이 자세하게 답한다.
“덕수공원은 포항시 북구 덕수, 우창, 중앙, 용흥동 일부 지역으로 수도산에 위치한다. 부지 면적은 45만4천650㎡로 조경시설, 휴양시설, 운동시설(체력단련장·다목적운동장·게이트볼장), 지압로, 사찰, 사당, 전망대 등의 시설과 녹지로 구성돼 있다. 덕수공원은 인근 지역민들의 운동, 여가 보내기 장소로 사랑받고 있으며, 수도산을 찾는 관광객들도 꼭 한 번 들러보는 곳이다.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을 기리는 충혼탑과 향토문화 창달에 기여한 재생 이명석의 문화공덕비가 설치돼 있다.”
덕수공원 입구에서 멀지 않은 충혼탑과 작은 연못 위쪽으로 수도산을 오르는 길이 보였다. 갖가지 장비와 단단한 결심 없이도 누구나 가볍게 오를 수 있는 등산 코스라고 한다.
곧 우리 곁에서 사라질 가을 산의 아름다움과 정취를 느껴보고 싶은 이들은 따끈한 차 한 잔 보온병에 담아 수도산에 올라도 좋을 것 같다.
▲포항도시숲에서 오랜만에 들어본 새 소리
10년 전쯤이다. 2주가량 동남아시아를 여행하며 라오스에서 며칠 머물렀다. 한국처럼 산이 많은 라오스 북부.
그때 숲 속 조그만 호텔에서 묵었는데 새 소리에 잠을 설쳤다. 아침에 일어나 숲길을 걸었을 때도 이름을 알 수 없는 새 몇 마리가 날아와 구슬프게 울었다. 자주 듣거나 보지 못한 모습이었기에 그 기억이 쉽게 잊히지 않는다.
사실 현대화된 도심에서 새 소리를 듣기는 쉽지 않다. 서울과 부산 등의 대도시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고층 아파트를 옆에 두고 버스와 택시가 도로를 달리는 포항 한가운데서 청아한 새 소리를 듣다니….
덕수공원에서 내려와 길 하나만 건너면 키 큰 나무들이 줄지어 선 풍경이 산책자를 반갑게 맞이한다. 학산동 포항도시숲이다. 바로 거기서 새가 울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잘 정돈된 나무들과 인상적인 조형물, 거기에 편하게 쉴 수 있는 여러 개의 벤치까지. 포항도시숲은 시민들에게 휴식을 제공하는 또 하나의 근사한 공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칼국수 가게에서 점심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도시숲을 가로질러 커피숍으로 걸어갔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것인지 다들 얼굴에 웃음꽃이 환했다.
답답한 도시의 일상에서 잠깐이나마 벗어나 자연 속으로 들어온 그들의 웃음은 곱게 단풍 든 나무가 선물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다시 새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에서 노래하는 것인지 궁금해 하늘을 올려다봤다. 11월 중순의 하늘이 티끌 한 점 묻지 않은 푸른 비단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 가을 하늘은 포항도시숲을 나와 다시 옛 포항역으로 걸어가는 내내 기자를 따라왔다. 아주 친절한 산책 파트너였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