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기자, 포항을 산책하다<br/>설머리 물회지구서 해상스카이워크 3.3㎞
‘걷는다’는 행위는 단순히 물리적인 움직임만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산책, 도보, 걷기 등의 단어 속엔 ‘철학적 함의(含意)’가 담겨 있다.
승려들은 일정 기간 동안 좁은 방이나 토굴에 스스로를 가두고 거기서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찾기 위해 정진한다. 우리가 동안거(冬安居)와 하안거(夏安居)라고 부르는 수양의 방식이다.
그러나, 동안거나 하안거는 종교라는 매개체를 통해 상당한 경지에 오른 이들이 취하는 수양의 방법. 일상에 쫓기는 보통 사람들에겐 그럴 여유와 시간이 없다.
승려들이 움직임을 최대한 자제하는 것으로 어떤 지향점에 이르고자 한다면, 일반인들은 부지런히 몸을 움직임으로써 사념(思念)이나 잡념을 떨치고 육체적 건강을 찾고자 하는 게 아닐지.
10여 년 전쯤이다. 너나들이로 지내던 선배의 아들이 큰 병에 걸렸다. 겨우 중학교 2학년인 자식이 의식을 잃고 병원에 누워 있으니 아버지는 넋이 나갈 수밖에.
그즈음이다. 선배는 하루에 5~6시간을 목적지 없이 걸어 다녔다. 강변이나 호숫가, 심지어 동네 좁은 골목길까지 헤집고 다니는 그에게 물었다.
“왜 그토록 걷기만 하는 겁니까?”
돌아온 답은 간명했다.
“그래야 지금의 아픔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으니까.”
맹목적인 산책 혹은, 의도적으로 고민과 고뇌를 멈추고 무작정 걷는다는 행위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치료법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어렴풋이 알게 됐다.
식도락·관광 공존 '설머리물회지구'서
수십개 횟집·식당 지나 '환호공원'으로
공원 안 717개 계단 조형 스페이스워크
해상 보행로 스카이워크와 함께 유명세
해안길 건너엔 포항제철·구룡포 풍경도
항구초등校 지나 만나는 크고 작은 카페
여남동 산책길선 멸치 건조 모습도 선물
▲잡스런 생각 떨치며 ‘설머리 물회지구’를 출발
아들의 생사를 걱정하던 선배만큼은 아니겠지만, 누구나 한두 가지의 고뇌와 고민은 안고 살아간다. 삶이 지속되는 한 그것들은 온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게 인간의 생이다.
갱년기에 들어서며 우울증을 호소하는 40~50대가 한국 어디에나 적지 않다. 의사들은 “그럴 땐 의식적으로라도 걱정거리를 떠올리지 말고 산책을 하는 게 좋다”는 조언을 한다.
짙푸른 가을 바다의 풍광과 작은 어촌마을의 고요함 속을 걷는 건 비단 우울한 중년만이 아닌 지리멸렬하게 반복되는 생활에 지친 사람들 모두에게 위안을 선사할 듯하다.
그래서다. 이번에 선택한 산책 코스는 설머리 물회지구에서 포항 해상스카이워크까지.
3㎞가 조금 넘는 이 구간에선 청량한 동해의 파도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맑은 햇살 아래 멸치를 말리는 목가적인 풍광도 만나보는 게 가능하다.
출발지점인 설머리 물회지구에 섰다. 수십 개의 횟집과 각종 해산물로 만든 음식을 파는 식당들이 가득하다.
포항시 문화관광 홈페이지가 설머리 물회지구의 ‘특미’라고 불리는 포항물회에 관해 상세한 설명을 들려준다.
“영일대해수욕장 끝에는 설머리 해안마을이 있다. 이곳은 바다를 끼고 있어 먹을거리가 풍성하다. 포항물회는 고기를 잡느라 바쁜 어부들이 급하게 한 끼를 때울 요량으로 방금 잡은 물고기를 회쳐 고추장과 물을 넣고 훌훌 들이마신 것에서 유래된 음식이다. 처음엔 어부들 사이에서 유행하다가 차차 주민들에게 알려지면서 포항물회라는 특유의 음식으로 정착했다. 물회의 재료로는 가자미, 광어, 도다리 같은 흰살생선을 주로 사용하지만, 오징어와 한치, 해삼, 성게 등의 해산물도 물회의 재료가 될 수 있다.”
TV 맛집 소개 프로그램에 나왔다는 식당에서 물회 한 그릇과 서비스로 나온 매운탕을 먹고 해상스카이워크가 있는 여남동을 향해 출발했다. 테트라포드에 앉아 있던 갈매기 몇 마리가 길을 안내하듯 앞장섰다.
▲영화배우 하정우가 하루 3만보를 걷는 이유는
설머리 물회지구를 지나 환호공원을 왼편에 끼고 해안 길을 걷는다. 바다 건너편으로 포항제철이 보이고, 멀리 구룡포가 가물거린다.
평일 한낮이라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주말이면 포항의 새로운 관광 랜드마크(Landmark)가 된 스페이스워크와 해상스카이워크를 보려는 시민과 관광객들로 인해 주변 도로가 막힐 정도라고.
환호공원 안에 설치된 스페이스워크는 길이 333m에 717개의 계단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조형물이다. 낮에 올라가면 포항 바다를 한 눈에 담을 수 있고, 밤이 되면 조명이 밝혀져 색다른 정취를 자아낸다.
이번 산책의 종착점인 해상스카이워크는 유리로 만들어진 400여m의 보행로 아래 새파란 영일만 바다가 출렁이는 모습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환호공원 해안로를 지나 여남동으로 가는 길엔 여유로운 모습으로 낚싯대를 드리운 노인들이 몇몇 보였고, 날씨가 제법 차가운데도 반바지 차림으로 바다 곁을 달리는 이들도 있었다.
포항의 산책로를 소개하는 기사를 연재하며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연예인들 중에도 ‘걷기운동’을 즐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
그중 영화배우 하정우는 하루에 3만보를 걷는 ‘산책 마니아’인 동시에 2018년엔 ‘걷는 사람, 하정우’라는 책까지 냈다고 한다. 의외다.
책을 낸 출판사에 따르면 하정우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이 세상의 맛있는 것들을 직접 두 손으로 요리해 먹고, 두 발로 열심히 세상을 걸어 다니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많이, 오래 걷느냐”는 질문 앞에 설 때면 하정우는 이런 대답을 내놓는다고.
“돌아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오직 걷기밖에 없는 것만 같았던 시절도 있었다. 연기를 보여줄 사람도, 내가 오를 무대 한 뼘도 없었지만, 그래도 내 안에 갇혀 세상을 원망하고 기회를 탓하긴 싫었다. 걷기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았던 과거의 막막한 날에도, 잠까지 줄여가며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지금도 꾸준히 나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이 정도의 진정성을 가진 ‘산책자 하정우’라면 분명 포항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걸을 수 있는 ‘설머리 물회지구-해상스카이워크 코스’도 좋아하지 않을까? 진지하게 포항행을 권하고 싶어졌다.
▲가을 햇살 아래 멸치를 말리는 여남동 사람들
뒷목을 간질이는 햇볕을 받으며 항구초등학교를 지나니 정겨운 어촌마을 풍경이 펼쳐진다. 여남동이다. 여기에도 크고 작은 카페와 식당, 펜션 등의 숙박업소가 늘고 있다. 그만큼 찾아오는 이들이 많아진다는 증거일 터.
거기까지 걸어가니 바다 색깔은 더 푸르러졌고, 공기가 한층 달콤하게 느껴졌다. 불과 몇km 거리인 시내와는 전혀 다른 빛깔과 냄새. 오른편으론 ‘미니 해수욕장’이라 불러도 좋을 조그만 백사장이 앙증맞게 자리를 잡았다.
해변 주위엔 그물망을 펼쳐 눈부신 햇살에 멸치를 널어 말리는 작업장이 서너 군데 보였다. 잘 건조된 멸치는 현장 판매도 하고, 택배로도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모양이었다.
도심에서 겨우 1시간 떨어진 곳에서 바닷가 소읍(小邑)의 풍광을 보게 될 줄 몰랐기에 한참을 멸치 건조장 앞에서 서성거렸다. 할아버지 한 분이 보이길래 물었다.
“이거 사진 좀 찍어도 되나요?”
“뭘? 멸치 말리는 걸? 허허허. 그걸 뭐 하러 물어봐. 그냥 찍어요.”
11월 가을 햇살보다 환한 여남동 어르신의 너털웃음이 좋았다. 그날 산책에서 받은 가장 큰 선물 같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