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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예술로 기록되는 경북 산불의 흔적

2025년 봄 경북을 덮친 대규모 산불의 흔적이 예술로 기록된다. ‘검은 봄 – 2025 경북산불사진기록’ 전시가 오는 28일까지 대구 하빈PMZ평화예술센터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제10회 대구사진비엔날레 프린지 포토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산불 피해 현장의 생생한 기록과 예술적 재해석을 통해 재난의 기억을 되새긴다. 전시는 2025년 3월 22일 경북 의성에서 시작해 안동·청송·영양·영덕으로 확산된 산불의 흔적을 담았다. 검게 타버린 숲, 살아남은 나무, 초록으로 되살아나는 자연의 모습 등 23점의 사진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시된다. 박창모 작가를 비롯해, 대구·경북 언론사 사진기자 공정식(뉴스1), 김영진(매일신문), 김진홍(대구일보), 이용선(경북매일)과 대구·경북 소방관, 그리고 피해 지역 주민이 직접 촬영한 사진 작품들은 재난의 물리적 피해와 정서적 충격을 다층적으로 보여준다. 전시를 기획한 박창모 사진작가(계명대학교 대외홍보팀)는 “재난은 예고 없이 찾아와 물리적·정서적 단절을 낳는다”며 “예술은 이를 구원하지 못하지만, 관객이 작품 앞에서 잠시 멈춰 서서 기억의 의미를 되새기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전시는 말하기보다 듣는 방식에 가까운 작업이다. 관객이 각자의 방식으로 재난의 흔적을 마주하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전시 관람은 무료이며,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토요일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운영된다. 일요일은 휴관한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가을빛 물든 ‘영양 자작나무숲’ 가족·연인 힐링 발길 이어진다

국제밤하늘공원으로 이름난 영양군 수비면 죽파리의 ‘영양 자작나무숲’이 단풍빛으로 물들며 깊어가는 가을 정취를 자아내고 있다. 하얀 자작나무 줄기 사이로 붉고 노란 낙엽이 내려앉아 마치 수묵화를 보는 듯한 고요한 풍경이 펼쳐진다. 자작나무숲은 해발 800m 검마산 자락에 1993년 인공 조림돼 현재 축구장 40개 규모인 34ha에 이른다. 지난해 ‘국유림 명품 숲’으로 선정된 이후 전국적인 생태 트레킹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영양 자작나무숲은 1코스(1.49㎞)와 2코스(1.52㎞)로 구성돼 있다. 경사가 완만해 초보 산악인이나 가족 단위 탐방객에게 인기가 높다. 숲길을 따라 약 40분 정도 오르면 전망대가 나타나고,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하얀 숲의 전경이 압도적이다. 서울에서 온 강건욱씨(55)는 “아이들과 함께 걷기 딱 좋은 코스였다”며 “하얀 나무 사이로 비치는 단풍빛이 정말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대구에서 방문한 김병철씨(43)는 “사진으로만 보던 풍경을 실제로 보니 또다른 감동이 있다”며 “도심 속 피로가 단번에 풀리는 기분이다”는 소감을 전했다. 하얀 자작나무 수피와 단풍잎이 어우러지는 10월 말부터 11월 초순은 숲이 가장 아름다운 시기이다. 햇살에 반짝이는 자작나무 줄기와 낙엽길을 밟는 산책은 그 자체로 치유의 시간이다. 영양군은 ‘별빛 트레킹’, ‘자연 속 명상길’ 등 체험형 관광 프로그램을 확대하고, 무장애 탐방로와 포토존·쉼터 등 편의시설도 단계적으로 보완할 계획이다. 오도창 영양군수는 “자작나무숲은 영양지역 대표 생태 관광자원인 만큼 탐방 인프라 개선과 숲 해설 프로그램을 확충해 탐방객들이 다시 찾고 싶은 명품 숲으로 만들겠다”면서 “숙박·체류형 관광과 연계해 지역경제 활성화도 꾀하겠다”고 밝혔다. /장유수기자 jang7775@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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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두·사과 복합 재배로 새 희망 키우는 ‘청송 낙원농장’

10월 말, 경북 청송군 파천면 중평마을의 낙원농장은 사과 농장으로 완벽히 변모해 있다. 3월에 심은 사과나무들이 계절이 가을로 깊어지는 지금, 풀을 베고 골을 정리하며 반듯하게 자란 나무 사이를 걷는 농부의 미소가 고요하게 퍼진다. 긴 농사 여정의 한 가운데서, 그는 2년 후 수확을 떠올리며 골을 정리하고 나무를 가다듬는다. 반면, 최근 몇 년 반복된 자두 농사의 실패는 그에게 깊은 상처였다. 15년 동안 자두 농사를 이어왔지만, 최근 3년간은 농비조차 건지기 어려울 만큼 수확이 저조했다. 그의 자두나무는 올해 3월 경북을 덮친 산불의 여파로 막 피려던 꽃망울이 말라버렸고, 긴 여름 내내 이어진 불볕더위에 열매가 성숙하기도 전 햇볕에 설익었다. 그나마 남은 열매도 해충 피해가 심했다. 8월 말, 수확을 앞두고 열매가 이르게 색을 띠자 농부는 올해도 자두 농사는 끝났다는 것을 직감했다. 실제로 수확 결과는 더 참담했다. “만지는 것마다 성한 것이 없을 정도였다”라는 그의 말에는 절망이 담겨 있었다. 조금씩 벌레 먹은 자국이 남은 자두를 마주한 농부는 망연자실했고, 작년 9월 수확 10여 일 전부터 이상 징후를 감지했던 아픈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해 그는 응애라는 해충을 발견하고, 재빨리 주변 나무의 두 배수에 살충제를 쳤다. 일시적으로 해결된 듯 보였다. 하지만 응애는 순식간에 농장 전체로 번져버렸고, 잎은 녹색 상태로 말라버렸으며 열매는 익기 직전 성장을 멈췄다. 결국 농장 전체 수확을 포기했다. 그는 담당 기관들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제초제 친 것 아니냐”는 기술센터 직원의 질문을 듣는 등 제대로 귀 기울여 주는 곳은 없었다. 그 전년도에는 태풍과 지속된 비 때문에 잘 익은 자두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고, 남은 자두조차 과육이 터져 폐기해야 했다. 가입한 재해보험도 기대했던 보상은 턱없이 부족해 “보험에 대한 불신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라고 그는 말했다. 위기가 생활의 위협으로 다가오자 분산된 소득원 마련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농부는 연이은 자두 수확 실패와 작년 병충해 여파로 ‘이 나무들이 제대로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겼고, 품종을 바꾸는 결단을 내렸다. 3월 25일 청송을 휩쓴 산불에 자두나무도 피해 갈 수 없었다. 피해가 컸다. 중평마을의 낙원농장에도 자두나무의 30% 이상이 불에 탔지만, 그날 새로 심은 사과 묘목은 일부만 피해를 보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귀농 14년 차인 그는 말한다. “맞벌이하지 않았다면 시골에서 농사만으로 살기 어려웠다.” 농업소득은 단지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철저한 준비와 하늘의 도움까지 있어야 가능하다. 사과나무를 심어 자두와 사과 두 가지 품목으로 소득원을 분산하면 위기도 분산된다. 한가지가 안 되더라도 다른 하나가 잘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사과나무 사이를 거닐며 상쾌한 바람을 맞는 그의 모습에서 단단한 결의를 본다. 그는 실패를 되새김하지 않고 새로 돛을 올린다. 올해는 실패했지만, 잘 크고 있는 사과나무를 보며 부농의 꿈을 품어본다. 그는 그렇게 다시 길을 걷는다. 사과나무가 바람에 흔들린다. 잎 사이로 햇살이 은은히 비치고, 농부는 그 틈새에서 내일을 꿈꾼다. 아마도 2년 후, 이 사과나무들이 실한 열매를 맺고 농부의 미소가 더 크게 번지리라. 청송의 가을이 깊어갈수록 낙원농장의 내일도 조금씩 그 빛을 더해가기를 기대해 본다. /손정희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묵은 서신들, 한국 근현대사의 소중한 사료(史料)

여든여덟 노모가 상자에서 낡은 종이뭉치를 주섬주섬 꺼낸다. 빛이 바래고 향이 묵은 수십 통의 편지들이다. 스물셋 꽃다운 나이에 시집가던 날, 친지와 친구들이 써 준 축사, 시집간 딸이 그리워 보내 온 친정어머니 서신, 시집살이 힘들어도 덕으로 감내하라 일러주던 친정오빠의 단정한 필체, 그리고 신행을 앞둔 신부에게 보낸 새신랑의 애정 담긴 편지까지, 모두가 한 시대를 통째로 품은 시간의 기록이다. 축사와 편지를 쓴 이들은 어느새 고인이 되었지만 그들의 글은 여전히 남아 65년 세월을 친구 모친과 함께하며 그 곁을 지킨다. 살다보면 ‘살아낸다’는 노랫말이 와 닿을 때가 있다. 누구라도 여든여덟의 인생을 되돌아보면 한 편의 소설이 된다. 어른들이 놋그릇을 애지중지 감추는 것을 보며 자랐고 어딘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이른 나이에 시집을 가던 동네 언니들, 보따리를 이고 진 피난민들이 마을과 집 마당으로 들이닥치던 것을 기억하는 어르신은 멀어진 세월을 회상하느라 이야기가 끝이 없다. 혼란과 공포 속에서도 다시 봄은 오고 삶은 이어진다. 결혼은 어려운 시절에도 여전히 축복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까지도 며느리의 시집살이는 숙명처럼 여겨졌고, 지켜야 할 예법과 해야 할 집안일은 끝이 없었다. 사랑방 손님이 끊이지 않던 시절, 그래도 푸념 없이 성실히 살았다. 온화한 성품으로 음식과 수(刺繡) 놓기를 좋아하는 모친의 지난한 시절 속, 마음의 버팀목이 되어준 것이 바로 이 묵은 서신들이다. 친정엄마의 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훔치고, 오라비의 글을 되새기며 시집살이 고됨을 감내한다. 가장 아끼는 것은 두루마리에 쓴 형부의 긴 축사다. ‘논 서마지기를 줘도 처제와 바꾸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던 시절, 시집가는 처제에게 쓴 애정이 절절한 축사를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줄줄이 외우신다. 종종 꺼내보는 원본이 훼손될까 염려되어 그 긴 축사를 복사해 거실 벽에 기다랗게 붙여 드렸더니 “왜 여태 이 생각을 못했을까”시며 뒷짐을 지고 천천히 읽으시는 어르신 눈에는 젊은 날의 추억이 고요히 되살아난다. 서신들은 한자가 간간이 섞인 한글로 쓰였다. 일본어를 강요받던 시대를 벗어나 비로소 우리말과 글로 편지를 쓰는 흔흔함이 편지 곳곳에 묻어난다. 친정어머니 편지는 흘림이 심해 읽기가 다소 힘들고, 아직은 태양력보다 월력(음력)에 더 익숙했던지 서신에 기록된 날짜가 ‘단기’로 표기되어 있다. 한 장 한 장이 개인의 삶을 넘어 한국 근현대사의 소중한 사료(史料)처럼 느껴진다. 긴 두루마리 축사들은 그 자체로 가사(歌辭)를 닮았다. ‘글’이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는 양반의 전유물이었지만 언문(한글)의 탄생으로 평민과 부녀자도 작가를 꿈꾸게 되고, 자연을 읊고 임금을 기리던 가사는 임진왜란을 거치며 일상의 애환을 담은 산문시로 발전한다. 모친의 편지는 그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다. 힘들었던 세월에도 순간순간 행복했던 기억들이 그리움으로 남는다. 모진 세월 견디신 어르신들이 한 분 두 분 세상을 떠나며 그들의 삶은 추억이 되고 역사가 된다. 오래된 서신 속에는 단순한 글이 아니라 한 세대가 품었던 사랑과 인내 그리고 인간의 품격이 고스란히 스며있다. ‘무엇이 한사람의 삶을 지탱하게 하는가?’ 묵은 향 뿜어내는 어르신의 서신이 그 답을 조용히 일러준다. 사랑, 그리고 기억이다. 살아 온 날들은 흘러가도 편지는 남아 이야기를 이어간다. /박귀상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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