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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중기 경북도지사 예비후보 영덕서 민심 청취

더불어민주당 오중기 경북도지사 예비후보가 지난 4일 영덕시장 방문과 포항 라한호텔에서 열린 경북 공천자 대회를 연이어 소화하며 본격적인 선거 체제에 돌입했다. 이번 행보는 지역 민심을 직접 확인하고 당내 후보들과 결의를 다지는 자리로, 경북에서의 승리를 통해 전국적 변화를 이끌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오 예비후보는 이날 영덕시장을 찾아 상인들과 일일이 손을 맞잡으며 지지를 호소했다. 이 자리에는 강부송 영덕군수 에비후보, 임민혁 경북도의원 예비후보, 김미애 영덕군의원 예비후보 등 지역 출마자들이 함께했다. 시장 곳곳에서 영덕 군민들은 “당보다 사람”이라며 특정 정당에 얽매이지 않고 지역을 위해 헌신할 일꾼을 원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특히 한 주민은 “당이 무슨 소용이냐, 정말 우리를 위해 열심히 일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오 후보의 손을 꼭 잡았다. 다른 어르신은 “이제 진짜 경북을 위해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며 변화에 대한 갈망을 드러냈다. 오 예비후보는 이에 “경북 민심이 변화를 말해주고 있다”며 자신감을 표출했다. 같은 날 오후 포항 라한호텔에서는 민주당 경북도당이 ‘경북 공천자 대회 및 필승 결의 대회’가 열렸다. 오 예비후보는 필승 결의문을 통해 “경북에서 치르는 선거는 늘 험난했지만 이번 선거의 의미는 어느 때보다 남다르다”며 “경북에서 민주당이 승리해야만 무너진 정의를 바로 세우고 대한민국의 변화를 완성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피현진기자 phj@kbmaeil.com

포항 죽도4구역 재개발 본격화… 원도심 재편 시험대

포항 죽도4구역 재개발사업이 정비구역 지정 고시를 기점으로 본격화됐다. 포항시는 지난 29일 죽도동 602-1번지 일원 ‘죽도4구역 재개발사업’에 대한 정비계획 결정 및 정비구역 지정을 확정하고 지형도면과 함께 고시했다. 이번에 지정된 정비구역 면적은 총 8만2083.9㎡로, 도심권 내 비교적 대규모 사업지에 해당한다. 시는 체계적인 개발을 위해 전체 면적의 약 24.1%인 1만9757.2㎡를 도로와 공원 등 기반시설로 배정했다. 특히 6228.2㎡ 규모의 공원 조성과 함께 인근 교통 흐름 개선을 위한 도로망 확충이 포함되면서, 단순 주택 공급을 넘어 생활 인프라 개선까지 병행하는 구조다. 핵심 주거용지(5만9058㎡)에는 최고 34층 이하 규모의 공동주택 1441세대가 들어선다. 건폐율은 18% 이하, 용적률은 248% 이하가 적용돼 과밀도를 억제하면서도 효율적인 토지 이용을 도모했다. 공급 물량의 대부분은 전용면적 85㎡ 이하 중소형으로 구성됐다. 전체의 95.7%인 1379세대가 실수요 중심 평형으로 계획됐으며, 85㎡ 초과 대형은 62세대에 그친다. 공공성 확보를 위한 장치도 포함됐다. 전체의 5.4%인 78세대는 임대주택으로 배정돼 서민 주거 안정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이와 함께 교육연구시설, 근린생활시설 용지를 별도로 확보해 주거·교육·생활 기능이 결합된 복합형 도시 구조를 지향했다. 안전성과 교육환경 보호 역시 주요 설계 기준으로 반영됐다. 내진 설계 적용은 물론, 화재 대응을 위한 소방차 진입 동선 확보, 침수 피해 예방을 위한 우수관망 구축이 의무화됐다. 북서측에 인접한 포항남부초등학교에 대한 일조권 분석 결과도 교육환경평가 기준을 충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향후 사업시행인가 단계에서도 교육청과 협의를 지속해 학습권 침해를 최소화한다는 방침이다. 사업은 정비구역 지정 고시일로부터 5년 이내 관리처분계획 인가를 목표로 추진된다. 재개발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갈등을 완화하기 위한 세입자 대책도 포함됐다. 저소득층 이주 대상자에 대한 생활 보상과 함께 재정착 지원 상담체계를 운영해 이주 충격을 최소화하겠다는 구상이다. 죽도4구역은 도심 접근성이 높은 입지에도 불구하고 노후 주택 밀집으로 장기간 개발 수요가 누적돼 온 지역이다. 이번 정비구역 지정으로 사업 추진의 제도적 기반이 확보되면서, 향후 북구 주거지 재편의 핵심 축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커졌다. 공급 규모와 입지, 기반시설 확충 계획을 감안할 때 원도심 재생의 시험대이자, 동시에 과잉 공급 논란 속 지역 주택시장에 미칠 파장까지 함께 검증받게 될 전망이다. /임창희 선임기자 lch8601@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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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기자 단상) 김유신 장군의 여동생들

신라사에는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는 인물이 많다. 그러나 김유신 장군의 여동생들은 사서 속에 이름과 삶의 자취가 남겨진 인물이다. 삼국유사와 화랑세기에는 보희, 문희, 정희 세 자매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삼국유사 ‘태종 춘추공’ 조에 나오는 보희와 문희 자매의 일화는 이렇다. 어느 날 언니 보희가 꿈을 꾸었다. 선도산에 올라 소변을 보았더니 온 서라벌이 가득 찼다는 꿈이다. 왕후가 될 길몽으로 해석되었음에도 보희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를 들은 동생 문희는 비단 치마를 주고 그 꿈을 샀다. 한 번의 교환이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게 된다. 얼마 뒤 정월 오기일, 김유신은 김춘추와 축국을 하다가 일부러 그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렸다. 그리고 집으로 데려와 여동생에게 꿰매게 했다. 처음에는 보희를 부르려 했으나 그녀가 사양하자, 문희가 나섰다. 단정히 차려입은 문희는 김춘추의 옷고름을 꿰맸고, 그 이후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마음을 두게 된다. 이후 문희는 김춘추의 아이를 잉태한다. 김유신은 이 일을 빌미로 동생을 벌하겠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덕만공주가 남산으로 행차하는 때를 맞춰 뜰에 장작을 쌓고 불을 피우자, 공주는 연기의 까닭을 물었다. 곁에 있던 김춘추는 그 일이 자신과 관련된 것임을 깨닫고 급히 달려가 문희를 구했다. 마침내 문희는 김춘추와 혼례를 올렸다. 훗날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의 왕후, 문명왕후가 되어 7남 1녀를 두었다. 화랑세기에는 그 뒷이야기도 전한다. 꿈을 팔았던 보희는 문희가 왕후가 된 뒤 후회했으나 다른 사람과 혼인하지 않고 있다가 훗날 김춘추가 그녀를 후궁으로 맞으면서 ‘영창부인’이 된다. 보희도 두 아들을 두었다. 언니와 동생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왕실과 인연을 맺었다. 또 다른 여동생 정희도 신라 왕실과 깊은 관련을 맺었다. 그녀는 김달복과 혼인해 흠신, 흠운, 흠돌을 두었다. 딸 흠신은 보로전군에게 시집가 두 딸을 낳았고, 흠운은 요석공주의 첫 남편으로, 655년 백제 조천성을 공격하다 전사했다. 흠돌은 문무왕 때 장군으로 활약했으나 훗날 반란을 일으켜 목숨을 잃었다. 정희의 자녀들 역시 신라 정치사의 한복판에 서 있었던 것이다. 김유신의 세 여동생은 저마다 다른 삶을 살았다. 문희는 왕후가 되었고, 보희는 후궁이 되었으며, 정희는 자녀를 통해 신라 왕실과 혈연을 이었다. 이들의 삶은 개인의 운명을 넘어 신라 왕실과 국가사의 흐름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오늘 우리는 저출산과 고령화라는 심각한 현실 앞에 서 있다. 아이 울음소리가 줄어드는 시대에, 세 자매의 이야기는 가정과 후손, 그리고 사람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한 나라를 지탱하는 힘은 결국 사람에게서 나온다.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가문과 나라를 생각하며 역사를 이어간 사람들이 있었기에 신라가 천년 왕국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려운 시기다. 국민 각자가 자신의 일에 충실하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다. /김성문 시민기자

(가정의달 특집) 군 제대와 공무원 시험 합격

대한민국의 한 아들로서 국방의 의무를 마치고, 이제야 어머님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미 크게 변해 있었습니다. 젊은이들은 더 나은 삶을 찾아 도시와 해외로 떠났고, 나라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저는 군 복무 동안 어머님께 효도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불효자였습니다. 죄송한 마음을 안고 집안일을 돕던 중, 공직자를 공개경쟁 시험으로 선발한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마침 영양군에서도 시험 공고가 나왔고, 저는 이것이 제 길이라 여겼습니다. 지역과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삶이야말로 제가 가야 할 길이라 믿었습니다. 책을 구해 들고 마을 앞 솔밭 동산의 약천정에 올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남포등과 촛불을 밝히며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오직 한 길만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한 시간이었습니다. 합격자 발표 날, 면사무소 친구와 함께 숨죽여 기다리던 중 내무과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명단을 확인하니 제 이름이 또렷이 적혀 있었습니다. 저는 곧장 집으로 달려가 어머님께 알렸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제 손을 꼭 잡으시며 “그렇게 애쓰더니 해냈구나.” 하시며 눈시울을 붉히셨습니다. 그날의 모습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처음으로 어머님께 기쁨을 드렸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어머님, 고맙습니다.” 그 한마디를 전하며 손을 꼭 잡았습니다. 임용을 앞두고 인연을 만나 청송 진보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첫딸이 태어나 기쁨이 더해졌습니다. 이후 대구시로 전출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어머님의 곁을 떠나는 아쉬움 속에서도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으로 맡은 바 책임을 다했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 행정사무관 승진 시험에 합격하였고, 가장 먼저 어머님께 달려가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어 아버님 묘소에 가서도 “둘째 아들이 사무관이 되었습니다.” 하고 큰절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어머님의 건강은 점차 나빠졌습니다. 더 잘 모시지 못한 마음에 조급함이 커졌습니다. 1993년에는 아버님의 뜻을 기려 약천정 뒤뜰에 예술추모비를 세웠고, 어머님께서도 불편한 몸으로 그 자리를 함께하셨습니다. 하지만 세월은 기다려주지 않았습니다. 어머님께서는 84세의 나이로 저희 곁을 떠나셨습니다. 이제야 효도를 해보려 했건만 너무도 빨리 떠나신 어머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집니다. 어머님을 보내드린 뒤 저는 마음을 다잡고 공직에 더욱 매진했습니다. 감사과장과 도시정비과장, 수성구청 총무국장과 행정관리국장을 맡으며 책임을 다했습니다. 2003년에는 영양군 수비면 고향에 아버지의 뜻을 기리는 금경연화백예술기념관도 세웠습니다. 공직을 마친 뒤에는 지역의 권유로 구의회 의원에 출마하여 주민들의 지지로 당선되었고, 지역 발전을 위해 힘을 보탰습니다. 그 모든 길 위에는 언제나 어머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함께했다고 믿습니다. 지금도 어려운 시절 저를 키워주신 어머님을 떠올리면 가슴이 저려옵니다. 어머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지난날이 후회스럽습니다. 부디 이 못난 자식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제 글을 마무리하며 다시 말씀드립니다. 어머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훗날 저도 어머님 곁으로 가게 된다면 지난날의 모든 이야기를 다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부디 주님 곁에서 평안히 계시기를 빕니다. 무술년 오월 불효자 막내 태남 올림 /정리=방종현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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