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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무대 뒤에 남겨진 질문

등록일 2026-01-11 16:03 게재일 2026-01-12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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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철호 지역문화포럼 따로 또 같이 대표

지난해 경주에서 열린 APEC 문화행사는 국가가 세계를 향해 내민 하나의 문화적 얼굴이었다. 완성도 높은 연출과 막대한 예산, 그리고 이름만으로도 신뢰를 얻는 유명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장면들은 분명 인상적이었다. 국제 행사의 성격에 걸맞은 스케일과 이미지, ‘알리기 위한 문화’로서의 역할은 충분히 수행해냈다. 그러나 그 화려한 무대를 바라보는 지역의 시선은 단순한 감탄만으로 채워지지 않았다. 같은 도시, 같은 시간 속에서 지역 예술가들은 여전히 ‘예산 부족’이라는 익숙한 문장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문제의식이 떠오른다. 그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예술의 아우라는 작품이 놓인 고유한 시간과 장소,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삶의 맥락에서 발생한다고 말했다. 기술이 고도화되고 규모가 확장될수록 예술은 더 많은 사람에게 도달할 수 있지만, 동시에 삶의 자리에서 분리될 위험도 커진다. 벤야민이 경고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 삶과 분리된 예술은 결국 소비되고 사라지는 이미지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APEC 문화행사가 국제적 이미지로서의 아우라를 가졌다면, 지역 문화는 일상의 시간 속에서 천천히 생성되는 또 다른 종류의 아우라를 지닌다.

지역 문화의 힘은 크기나 화려함이 아니라 밀도에 있다. 골목과 시장, 항구와 학교, 그리고 그 공간을 오랫동안 지켜온 사람들의 기억과 이야기는 대체 불가능한 문화 자산이다. 이러한 맥락 위에서 축적된 문화는 쉽게 복제할 수 없고, 외부에서 단기간에 이식할 수도 없다. 이를 외부의 화려한 콘텐츠로 덮어버리는 순간, 문화는 삶에서 떨어져 나가고 배경으로 전락한다. 벤야민이 말한 ‘전통의 단절’은 거창한 파괴가 아니라, 바로 이런 무심한 대체에서 시작된다.

오히려 저예산 문화행사가 지닌 가능성은 이 단절을 피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장비와 기술, 홍보가 부족한 대신 기획은 필연적으로 삶에 가까워진다. 지역 예술가와 주민이 주체가 되고, 관객이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참여자가 될 때 문화는 일회성 이벤트를 넘어 기억으로 남는다. 이는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한 ‘행위(praxis)’의 개념과도 맞닿아 있다. 아렌트에게 행위란 사람들 사이에서 관계를 만들고, 그 관계가 시간 속에서 지속성을 획득하는 실천이었다. 지역 문화는 바로 이러한 행위가 반복되고 축적되는 장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국가급 축제가 아니다. 필요한 것은 지속 가능한 문화 생태계다. 해마다 반복되는 작고 꾸준한 문화 활동, 눈에 띄지 않더라도 멈추지 않는 실천들이 지역의 정체성을 만든다. 예산은 줄어들 수 있어도, 시간 속에서 쌓인 신뢰와 연대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APEC 문화행사가 국가의 얼굴이었다면, 지역 문화는 지역의 심장이다. 심장은 크지 않아도 된다. 다만 멈추지 않고 뛰어야 한다. 벤야민의 말처럼, 진짜 아우라는 언제나 삶의 자리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지역 문화는 오늘도 그 자리에서,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생성되고 있다.

/손철호 지역문화포럼 따로 또 같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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