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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추고랑과 학산천

등록일 2026-02-23 15:58 게재일 2026-02-24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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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철호 지역문화포럼 따로 또 같이 대표

추운 겨울이면 콧물을 훌쩍이며 수갯도(앉은뱅이 스케이트)를 끌고 나섰다. 얼음이 완전히 얼지 않은 날에는 발밑이 불안했지만, 그마저 겨울철 최고 놀이의 일부였다. 여름이면 태풍 뒤 불어난 물살에 중학교 앞 다리 밑으로 돼지가 떠내려가던 장면을 멀찍이서 지켜보며, 세상이 얼마나 거칠고 생생하며 동시에 두려운지 알게 되었다. 지금은 ‘학산천’이라 불리는 그곳, 내가 살던 포항시 덕수동에서 조금만 걸으면 닿던 놀이터를 우리는 깨추고랑(깨추·‘붉은 찔레 열매’를 뜻하는 경북 북부 사투리. 왜 깨추고랑이라 불린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아마 그 주변에 깨추가 많이 자란 듯)이라 불렀다.

새로이 단장되었다는 그곳을 설레이는 마음으로 다시 걸었다. 한때 흙과 물과 위험이 뒤섞여 있던 곳은 아스팔트 아래로 사라졌다가, 이제는 복원이라는 이름으로 전과 다른 깨끗한 모습을 되찾았다. 콘크리트로 정갈해졌고 보행로는 안전해졌다. 도시의 기준으로 보자면 성공적인 정비일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서자 이상하게도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풍경은 남아 있지만 서사는 사라졌고, 장소는 존재하지만 삶의 흔적은 지워져 있었다. 학산천은 보기 좋은 하천이 되었지만, 더 이상 내 삶 속의 장소가 아니었다.

기억이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질 때는 굳이 표식을 남길 필요가 없지만, 단절되는 순간 사람들은 기념비와 기록으로 그것을 붙잡으려 한다. 지금의 학산천은 이 아이러니를 그대로 보여준다. 물길은 복원되었지만, 그곳에서 살았던 시간과 감각을 불러내는 장치는 어디에도 없다. 그 결과 이 하천은 추억의 장소가 아니라 안전과 깨끗함을 돌보는 관리의 대상이 되었다. 도시의 하천은 단순한 경관 시설이 아니다. 그것은 동네의 성장기였고, 공동의 기억이 축적되던 생활 공간이었다. 깨추고랑이라는 이름 속에는 동네 사람들의 언어가 있었고, 위험과 놀이, 일과 휴식이 뒤섞인 삶의 리듬이 담겨 있었다.

인문 지리학자 이푸 투안이 ‘공간과 장소’라는 저서에서 말했듯, 공간은 인간의 경험과 삶, 애착이 녹아들 때 비로소 장소가 된다. 이름이 바뀌고 이야기가 지워지는 순간, 그곳은 누구 것도 아닌 중립적인 공간으로 남는다.

나는 학산천을 다시 깨추고랑으로 부르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이름이 불리던 시절의 감각과 기억을 함께 공유하고 남기자는 것이다. 안내판 하나, 짧은 기록이나 QR코드 하나, 혹은 주민의 목소리를 담은 작은 오디오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다. 아이들이 “여기서 예전에는 뭐 하고 놀았어요?”라고 묻고, 어른들이 “우리는 여기서 이렇게 컸지”라고 답할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이 하천은 현재와 과거가 만나는 문화적 장소가 될 것이다.

문화는 새로 만드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미 살았던 시간을 존중하고, 사라진 그때의 감성을 다시 불러오는 일에서 문화는 시작된다. 이제 학산천이 동네의 풍경이 아니라, 동네의 이야기로 다시 흐르기를 바란다. 개인의 향수가 아니라, 모두의 기억이 조용히 겹쳐지는 곳으로. 그것이 진짜 복원의 모습이 될 것이다.

/손철호 지역문화포럼 따로 또 같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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