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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등록일 2026-05-31 18:16 게재일 2026-06-01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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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철호 지역문화포럼 따로또같이 대표

고대 인도의 베다 문헌에는 ‘소마(Soma)’라는 신비로운 음료가 등장한다. 그것이 마황이었는지, 광대버섯이었는지는 지금도 논쟁 중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 정체가 아니다. 소마는 인간이 신의 세계와 접속할 수 있다고 믿었던 통로였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손에 잡히는 무언가에 기대어 왔고, 믿음은 그렇게 몸과 감각을 통해 작용해 왔다.
 

나는 가끔 인간에게 ‘믿으려는 본능’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불확실한 세계 속에서 희망을 붙잡으려는 이 습성은 시대와 지역을 넘어 반복되어 왔다. 우리 사회만 보아도 그렇다. 제도 종교 너머에 무속과 민간신앙이 깊게 스며 있고, 서낭신·조왕신·삼신할매 같은 존재들은 여전히 삶의 구석구석에 살아 있다. 그것을 미신이라고 부르기엔 무언가 어색하다. 그 믿음들은 삶을 견디기 위한 오래된 방식에 가까웠고, 나약함이라기보다 생존에 가까운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믿음은 언제나 두 얼굴을 가진다.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소마’를 다시 불러낸다. 그의 소마는 고통을 없애주는 약이지만, 동시에 사유를 멈추게 하는 약이다. 달콤한 평온은 매혹적이지만 인간을 무력하게 만든다. 실제로 환각 물질이 의식 확장의 가능성으로 주목받던 시절에도, 끝은 결국 중독과 붕괴였다. 믿음이든 물질이든, 감각을 마비시키는 순간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 의존이 된다.
 

얼마 전 신문에서 마약 유통망의 핵심 인물이 검거됐다는 기사를 보았다. 한때 멀게만 느껴지던 단어가 이제는 일상 가까이에 와 있었다. 불안을 잊게 해주고 고통을 눌러준다는 그 약속은, 형태만 달라졌을 뿐 인류가 오래전부터 반복해 온 소마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대의 제의도 비슷했을 것이다. 신에게 소마를 바치던 의식은 결국 인간이 자신의 불안을 하늘로 올려보내는 행위였을 테다. 믿음은 그렇게 삶의 균열을 메우는 방식으로 존재해 왔다. 문제는 믿음이 사유를 대신할 때다. 현실을 직면하는 대신 어떤 확신이나 의식에 자신을 통째로 맡기는 순간, 우리는 선택할 힘을 잃는다. 그것은 마약을 닮았다. 잠시 위안을 주지만, 결국 삶의 주도권을 흐리게 만든다. 그렇다고 믿음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많은 순간 믿음은 인간을 버티게 해주는 힘이었으니까. 중요한 것은 단 하나의 질문이다. 그 믿음이 삶을 대신하는가, 아니면 삶을 견디게 하는가.
 

요즘 우리는 너무 쉽게 빠른 위로를 찾는다. 그러나 사유를 건너뛴 위안은 오래가지 않고, 더 큰 공허로 되돌아온다. 그럴 때면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장독대 위에 물 한 그릇을 올려두고 가족의 안녕을 빌던 할머니의 모습. 거기엔 자극도, 복잡한 교리도 없었다. 다만 가족과 이웃의 삶을 향한 조용하고 간절한 바람이 있을 뿐이었다.
 

믿음이 아름다울 수 있다면, 그것은 현실을 지우는 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견디게 하는 힘일 것이다. 소마는 신과 인간을 잇는 통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인간을 신에게 종속시키는 매개이기도 했다. 우리가 무언가를 믿는다면, 그 믿음이 우리를 더 깨어 있게 하는지 물어볼 수 있어야 한다.

/손철호 지역문화포럼 따로또같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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