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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포항제철 성공하면서 고시 콤플렉스 털어내”

포항제철은 포항을 이전 시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모시켰다. 건설 초기의 포항제철, 그리고 포항이 철강 도시로 변모하는 과정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했다. 이대공 이사장은 그때의 기억을 하나씩 되짚어냈다. 홍 : 포항제철 입지가 선정된 이후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이 : 친구 신명수[전 동방유량 회장]에게 찾아가 물었다. 제철 공장이 들어서면 뭐가 바뀌게 되는지를. 한 달 후에 신명수가 나를 불러서 “일본식으로 제철소가 성공하면 인구가 10배는 늘어날 것”이라고 하며 블록 공장을 해보라고 권했다. 재밌는 게 제철 공장은 블록이 아닌 강철판으로 짓는다. 제철, 압연, 후판 공장 모두 그렇다. 그런데 신명수는 제철소를 블록으로 짓는 줄 알고, 친구인 날 돕기 위해 블록 공장을 하라고 권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블록 공장은 하지 말라고 말을 바꿨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터질 일이다. 그는 구획정리 사업과 건축업도 권했다. 그즈음 포항에서 70만 평 구획정리 사업을 주도한 게 나다. 1968년 말쯤이다.홍 : 그렇다면 사업을 하시다가 포항제철에 입사하셨군요.이 : 제철소가 들어서는 걸 알게 된 후 언론이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했다. 그곳에 살던 주민들의 불만도 있었다. 조상들이 농사짓던 논과 밭을 낮은 가격에 내놓기가 싫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니 언론을 상대할 사람, 대민(對民) 업무할 사람, 대관(對官) 업무할 사람이 필요했다. 포항제철 고준식 수석부사장이 김장섭 당시 국회의원에게 이런 일을 해줄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던 모양이다. 김장섭 의원의 추천으로 포항제철에 들어가게 됐다. 사실 당시 나는 월급쟁이보다는 사업을 하고 싶었다. 야구 배트 수출과 양송이 사업, 구획정리 사업으로 돈을 제법 벌었던 시기였다. 그런데 선배들의 추천과 제의를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1969년 1월 13일 포항제철에 입사했다.홍 : 포항제철이 들어서면서 포항은 어떤 변화를 겪게 됩니까?이 :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변화가 일어났다. 사람들이 모여드니까 고용부터 급격히 증대되었다. 건설 현장에서는 주로 포항 사람들이 일했다. 그들이 받는 일당도 적지 않았다. 음식점과 술집도 번창했다. 건설업체가 포항으로 많이 오게 되니 그 회사 직원들이 퇴근 후면 밥 먹고 술 마시며 지역경제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줬다. 포항 시내가 와글와글할 때였다. 한국에 좋은 직장이 많이 없던 시기였기에 일자리를 찾아 외지에서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홍 : 포항제철은 어떤 발전 과정을 거치게 되는지요?이 : 박정희 대통령이 제철소를 살피러 포항에 11년 동안 13번 왔다. 대통령이 오면 경호를 위해 헬기가 3대 떴다. 어느 헬기에 대통령이 탔는지 알 수 없었다. 건설 과정에서 관계자 격려, 현장 확인을 위한 방문이었다. 시민들도 ‘대통령이 저렇게 큰 관심을 가지는 회사가 포항제철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전 세계에서 포항제철처럼 짧은 기간에 성공한 제철소는 없다. 103만 톤으로 시작해 850만 톤, 광양을 포함하면 2,100만 톤까지 철강을 생산했으니. 지금은 4,000만 톤 이상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일본 수출입은행 원금을 다 갚고 벼락처럼 성장했다. 조선, 가전, 자동차 등 관련 업체도 동시에 발전했다. 1973년 이전엔 남한의 경제 상황이 북한보다 못했다. 1973년부터 남한이 앞서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가 포항제철 때문이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1973년은 포항제철 용광로에서 쇳물이 나오기 시작한 해다.홍 : 1970년대 포항에 포항제철 외에 어떤 업체가 있었는지요?이 : 농수산물 가공업체 정도였지 별게 없었다. 그땐 영일만에 설치된 정치망에서 정어리나 방어가 잡히던 시절이고 그게 산업이라면 산업이었다. 그 정도의 어촌이 포항제철의 등장으로 비약적, 압축적으로 성장한 것이다.홍 : 포항제철 입사 초기에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하셨는지요?이 : 한마디로 멸사봉공(滅私奉公)의 마음이었다. 위국헌신(爲國獻身)의 태도도 있었다. 1969년 1월에 입사하니 박태준 회장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32평 목조건물에서 목숨을 걸고 전쟁하듯 일하고 있었다. 내가 그 건물을 ‘롬멜 하우스’라 이름 지었고, 지금도 포스코역사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만약 제철소를 제대로 만들지 못하면 ‘우향우(右向右)’해서 바다에 빠져 죽겠다는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는 일하는 것이 자신과 미래 세대를 위한 길이자 우리가 사는 길이라 믿었다. 그 믿음으로 세계적 강국이 되고자 모두가 한마음으로 땀을 흘렸다. 포항 시민들도 제철소가 자신들 삶에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게 되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많은 사람이 포항제철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당시 포항제철 작업복을 입고 시내에 나가면 누구나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포항제철 직원이 되길 원하는 이들이 점차 늘어났다.포항제철 건설 초기의 현장 사무소인 ‘롬멜 하우스’를 2010년 3월 11일자 연합뉴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포항제철이 창립됐던 1968년 제철소 건설 부지인 영일만에 자금 100만 원으로 지어졌던 첫 현장 사무소의 별칭이다. 야전 사령부 역할을 하는 2층 목조건물이 사막이나 다름없는 황무지에 중장비들과 함께 들어선 모습이 마치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롬멜 전차군단과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 허허벌판에서 세계적인 철강회사를 일궈낸 포항제철 정신의 상징이 된 롬멜 하우스는 포항 포스코역사관에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홍 : 포항제철 입사 후에 어떤 일을 맡았습니까?이 : 4-2호봉 신입사원으로 발령이 났다. 서울까지 포함해서는 잘 모르겠는데 포항 직원으로는 39번이었다. 홍보와 대민, 대언론, 대관청 업무를 하며 정신없이 살았다. 그때도 포항제철 관련 업체에서 일하는 이들이 수천 명이었다.홍 : 1970년대에 경제발전과 함께 민주화와 인권 문제도 자주 거론됐지요.이 : 우리 사회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있다. 똘똘 뭉쳐 일만 하다 보니 산업화 세력이 보지 못한 부분도 있다. 우리는 당시 정권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열정적으로 일했고 그만한 대우를 받았지만, 같은 시기에 고생한 민주화 세력도 적지 않게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홍 : 직접 본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의 관계는 어땠나요?이 : 1970년대 박태준 회장을 처음 인터뷰한 사람이 「조선일보」정태기[전 한겨레신문사 대표이사] 기자다. 박 회장은 정 기자와의 인터뷰를 처음에는 사양했으나, ‘할 말은 제대로 하자’고 결심하고는 인터뷰에 응했다. 사람들의 반응이 좋았다. 이후 언론계에서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많은 기자가 해직되었다. 이른바 ‘백지 광고’가 나오기도 했다. 그즈음 민주화 세력이 고생하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박태준 회장은 정태기 기자와의 인연을 귀하게 여겨 정 기자가 한겨레신문사로 갔을 때 포항제철 관련 업체를 주주로 참여하게 했다. ‘조선일보’ 사진부장 임희순 기자도 생각난다. 그는 내가 부장이던 시절에 포항제철로 옮겨와 많은 역사적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아름다운재단을 만들 때 박태준 회장이 집 판 돈 13억 6천만 원 중 10억 원을 기부했다. 이처럼 산업화 세력도 민주화 세력을 이해하려 했고, 인연도 맺었다.홍 : 포항은 포항제철 건립으로 산업도시가 된 셈이네요.이 : 포항은 포항제철의 성공과 더불어 발전한 도시다. 건설 당시에 강원산업과 현대 등 굴지의 업체가 다 관여했다. 대한민국 10대 건설업체는 대부분 포항에서 일거리를 얻었다. 포항제철과 관련된 사업을 해야 돈을 벌 수 있었던 시기가 1970년대다. 그 시절은 2년마다 공장을 확장했다. 고용과 생산량은 높아지고, 노동자가 받는 임금은 지역경제 활성화로 이어졌다. 포항에 없던 호텔도 생겼다. 미국 ‘유에스 스틸(United States Steel Corporation)’은 1980년대에 이미 ‘유에스엑스(USX)’가 됐다. 철강에서 화학, 운송, 파이낸싱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했다. 언젠가는 철강의 가격경쟁력이 후진국을 못 따라갈 것을 정확하게 예측한 것이다. 1970년대에 크게 성장한 포항제철도 이를 보고 배울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홍 : 1970년대는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까?이 : 서울대 법대에서 나오는 월간지가 있다. 거기에 사법시험에 실패하고 은행에 입사해서 한국은행 총재까지 한 사람이 ‘고시 콤플렉스’라는 글을 썼다. 한국은행 총재까지 했지만 사법시험에 떨어진 열패감을 버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 글을 읽고 ‘나도 고시 콤플렉스를 평생 안고 살면 어쩌나’고민했다. 그런데 포항제철 제2고로가 만들어진 1976년에 고시 콤플렉스를 털어냈다. 내가 판사나 검사보다 훨씬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대공1941년 포항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포항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20대 중반에 서울·인천에서 석유곤로와 야구 배트 등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했다. 1967년 포항으로 돌아와 양송이 재배·가공업을 하다가 1969년 포항제철에 입사해 홍보실장, 비서실장, 총무이사, 포항공대 건설본부장, 부사장을 거쳤다. 포항제철 건설 시기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24년간 제철보국의 신념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포항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이사장, 아름다운재단 이사,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포항지역회 이사장, 경상북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포항지역발전협의회장 등을 맡았으며, 현재 재단법인 애린복지재단 이사장으로 있다.대담·정리 : 홍성식(경북매일신문 기자) /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8-10

이젠 방송인 아닌 정치인으로 불러달라

우리는 여전히 전쟁터 속에서 살고 있다. 6·25와 베트남전의 트라우마에 갇힌 60대 이상은 물론이고 30·40대에게도 멀리 중동전쟁 포성의 여운이 남아있어서일까. 출근길도 밥 먹으러 가는 길도 전쟁이요, 취업도 대학 가는 길도, 집 구하는 일까지 전쟁이다. 90년대 바그다드의 중동 전선에서 종군기자로 활약한 이진숙(전 대전MBC 사장)에게도 돌아온 조국 대한민국은 여전히 전쟁터다. 2년 전 고향 대구로 내려와 시내 한복판 오피스텔에 진을 친 이진숙은 이제 방송인 아닌 정치인으로 불러달라고 한다.- 2020 도쿄올림픽의 3관왕 여자 양궁선수 안산의 앞머리 쇼트커트가 불러온 페미 논쟁이 일었다.△논쟁에서 정작 안산은 없고 페미만 남았더라. 남성에 비해 상대적 약자인 여성 인권 보호와 양성평등의 의미로 쓰여야 할 페미니즘이 남성혐오와 동의어로 전의된 인상이다. 안산의 언어에서 나는 남성혐오 표현을 발견할 수 없었고 참으로 불건강한 논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산을 넘어 선 진영간 대립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명쾌하다. 같은 시기 서울 종로 책방의 쥴리 벽화 문제는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여성 비하를 넘어 심각하고 중대한 개인의 인격 침해다. 우리 사회가 좀 더 냉정해져야 하겠다. 이 문제는 말로만 여성친화를 외치는 진보진영의 위선을 여지없이 폭로한 현장이다. 여성의 성까지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내로남불식 정권의 이중성이 드러난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문제에서 여성가족부가 입 다물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야당 일부에서 주장하는 여성가족부 폐지 주장에 대한 입장은.△문제는 여성가족부의 존폐 여부보다 여가부가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느냐는 거다. 이 질문에 ‘일을 제대로 했다’고 답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여성의 인권 향상과 성 평등 가치 확산이라는 당초 설립 취지를 위해 얼마나 기여했느냐. 제대로 못하니까 폐지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여당 단체장들의 잇단 성 추문이 여가부 문제를 더욱 확산시키는 계기가 된 건 아닌가.△그렇다. 지난해 8월 당시 여가부 장관은 박원순 오거돈 전 시장들의 사건이 권력형 성범죄냐는 질문에 “수사중인 사건의 죄명을 규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답변해 여성들의 화를 돋우었다. 법적인 판단은 사법부에서 하더라도 여가부 장관은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얘기했어야 했다. 당시 장관은 보호받아야 할 여성 피해자가 아니라 자신보다 큰 권력, 임명권자를 의식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사건 관련 입장문에서 ‘고소인’ ‘피해 고소인’이라는 말을 써서 피해자는 물론 국민들의 분노를 샀던 것으로 기억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 ‘Me Too’광풍이 몰아치면서 젠더(gender) 논쟁이 일어났다. 지방 출신 방송 기자로서, 여성으로서 경험을 들려 달라.△소수자는 항상 불안하다. 10명 중 9명이 칼국수를 먹자고 하는데 혼자서 냉면을 먹자고 하면 냉면으로 결론나기는 힘들다. 이럴 때는 칼국수를 먹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인생에서는 칼국수와 냉면을 넘어서는 경우가 많다.내가 입사했던 1986년 동기 13명 중 2명이 여성이었다. 지방 출신에 지방대, 거기다 여성이었으니 말 그대로 ‘3중고’였다. 수습 때 특종도 했지만 수습 끝나고 부서배치에서 남들 다 간다는 사회부가 아닌 문화부로 발령이 났다. 다른 여기자는 국제부로 갔다. 시작 때부터 3중의 장애물에 포위돼 ‘잘 나가는’ 직장에서 생활하는 건 또 다른 전장이었고 전투였다.- 여성이어서 부서배치에서 불이익을 받았다는 것인가. 그러면 사회부 기자는 언제 했나.△문화부에서 악바리처럼 일했고 그게 눈에 띄어 사회부로 배치 받았다. 새벽 네 시 기상, 네시 반 경찰 순회, 여섯 시 캡 보고 등 고된 일정 때문에 남자 기자들은 탈출하고 싶어하던 부서였다. 그러나 여기자들은 “사건기자도 못 한 주제에...”라는 말을 듣기 싫어서, 그리고 ‘그들’과 같은 훈련을 받고 싶어서 사회부 배치를 원했다.- 부서배치 불이익은 그 후로도 직장 생활 내내 계속되었나.△입사해서는 사회부 기자가 되고 싶었고 나중에는 국제문제 전문기자, 특파원이 되고 싶었다. 1990년대 중반쯤인가, 당시 워싱턴에서 근무하던 남편이 대기업 뉴욕지사장으로부터 “이 기자는 절대 워싱턴 특파원이 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 누가 여성에게 워싱턴 특파원 자리를 주겠느냐”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고 10년 뒤에야 나는 워싱턴 특파원이 되었다. 그동안 한국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여성계에서는 여전히 남녀불평등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오히려 역차별이라고 주장하는 남성들도 있다. 유리천장 논리에는 동의하나.△동의한다. 수치가 말해 주고 있지 않는가.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21 글로벌 성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조사대상 156개국 중 102위를 기록했다. 방글라데시(65) 우간다(66) 케냐(95) 보다도 못한 지위다. 경제활동참여 기회 부문에서 123위, 교육 부문에서 104위였다.- 문재인 정부가 여성친화적이라고 자랑했는데 정치 부문에서 여성정책은 어떤가.△좌파 정부가 비교적 잘 하고 있는 것이 여성의 정치 참여라고 칭찬해주고 싶다. 외교부에 강경화, 법무부에 추미애, 교육부에 유은혜, 국토교통부에 김현미, 고용노동부에 김영주 등 이른바 주요부처에 여성을 장관으로 임명한 것은 우파 정부와 구분된다. 우파가 보수꼴통이라는 프레임을 쓰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여성 정책이기 때문이다.- 종군기자의 경력으로 전쟁을 체험했다. 징병제인 우리나라에서 여성에게도 군대 가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걸프전(1991), 소말리아 내전(1993), 동티모르 내전(1999), 이라크전(2003) 등을 취재했다. 시체가 피투성이 부상자들과 뒤엉켜 나뒹구는 절망과 폐허의 전장을 목격하고는 피지도 않는 담배를 세 개피나 피웠던 기억도 있다.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국방의 의무를 위해 군복무하는 데 대한 2030세대 일부 청년 남성들의 저항감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진학이나 취업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는 호경기 상황이라면 남성들의 불만은 상대적으로 적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경제 상황이 악화되고 취업이 치열해지면서 불만의 타깃이 여성으로 향한 점도 있지 않을까 추정해 본다.여성도 군대에 가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사회적 합의라는 절차가 필요하다. 모병제로 점차 이동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점차적으로 모병 규모를 늘려 가면 어떨까 생각한다. 말만큼 쉽지는 않을 것이다.- 위기에 강한 리더십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한다. 그 배경이 궁금하다.△세상에 전쟁만한 위기는 없다. 그 전쟁을 세상에 알린 것이 나 이진숙이다. 종군기자로서 소속사 MBC에는 특종을 안겨줬고 그걸로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진숙의 MBC에는 나쁜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당시 사장(김재철)이 MB 정권의 충견이라는 비난이 있었고 이진숙이 그 하수인이라는 비난이 들끓었다.△2012년 MBC가 노조의 170일간 장기 파업이라는 최대 위기에 직면했을 때 홍보국장과 기획본부장을 맡았다. 진보성향 노조가 악의적인 선동과 마타도어식 허위 주장을 펼쳤지만 보수적 일부 우파 간부들 조차 자신이 타깃이 되는 것이 두려워 비겁하게 숨었다.파업이 70일 넘고 100일을 넘어서자 ‘불법 정치 파업이다’라고 주장하던 간부들조차 ‘노조가 이기면 어쩌지...’라거나 일부 간부들이 뒤로 노조에 격려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노조가 허위 주장 노보를 내면 홍보국장은 층층시하 절차를 거치느라 즉각적인 대응을 할 수 없었다. 기획본부장이 되어 사장에게 대외대응의 전권을 허락받은 뒤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노조의 허위주장들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항복을 받아냈다. MBC를 구했다는 응원 문자를 많이 받기도 했고 ‘이다르크’라거나 ‘김사장의 장세동’이라는 별명도 그 때 얻었다.- 방송인에서 정치계에 뛰어들었다. 언제, 무엇을 하겠다고 정치에 입문했나.△자유한국당의 인재영입케이스로 정치에 입문했다. 당시 문화권력의 횡포를 목격하고는 우리 사회가 더 이상 불건강한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신념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다. 문화는 미래 세대를 키워내는 자양분이자 토양이다. 나는 우리 딸이, 우리의 미래 세대가 왜곡된 이념과 왜곡된 문화 속에서 살아가도록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기자 출신이어서 그런가. 공무원이나 관료 출신 정치인에 대해 좋은 감정은 아닌 것 같다. 대구의 정치인에 대한 평가가 아주 낮다.△공무원의 철밥통은 괜히 생겨난 게 아니다. “일 더한다고 월급 더 주나” 하는 관념에 익숙한 게 공무원이다. 그런 공직자는 대구 같은 위기의 도시에는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나이가 든 사람들에게는 대구가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대구는 청년들이 빠져 나가는 도시다. 늙어가는 도시라는 말이다. 더 이상 미래가 없는 도시다. 지금 대구에는 위기를 관리할 리더십이 필요하다. - 대구의 미래를 어떻게 그려나가야 한다고 보나.△멀리 봐야 멀리 간다고 했다. 대한민국 안에서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나는 MBC 본사에서 일했고 남편은 현대자동차에서 퇴직했다. MBC는 1961년, 현대차는 1967년 설립했다. 한국의 특수 상황에서 정부 통제와 보호를 받았던 MBC는 현재 위축돼 있는 반면 생존을 위해 전 세계 기업과 경쟁했던 현대자동차는 명실상부 글로벌 기업이 되었다. 현대자동차의 도약 비결은 경쟁력이었다. 대구가 글로벌 시티로 부상하기 위해서, 경쟁을 통해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이진숙 (60)대구에서 남도초 구남여중 신명여고를 나와 경북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잠시 교단에 섰다.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과 존스홉킨스국제학대학원(SAIS)을 졸업했다. MBC에 기자로 입사해서 걸프전 종군기자로 명성을 떨치고 워싱턴 특파원과 워싱턴지사장, MBC기획본부장, 보도본부장, 대전MBC사장에서 퇴직하고는 정치에 띄어들었다./이경우 편집위원

2021-08-09

“양송이 수출 사업 위해 1967년 귀향”

서울대 법대에 다니던 이대공은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을 겪는다. 눈앞에서 진압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는 모습도 목격했다. 역사적 혼란의 시기에 무엇을 고민했고 어떻게 살았는지 들어보았다. 홍 : 20대 초반에 겪은 4·19는 어땠습니까?이 : 1960년 4월 5일 서울대 법대 입학식을 했다. 이후 18일 고려대에서 시위가 있었다. 19일 철학 강의를 듣고 있는데, 1년 선배가 문을 열고 들어와 전단지를 뿌렸다. “나가자, 시위하러 가자”고 하니 교수님이 “공부를 구태여 하겠다는 사람은 강의실에 있고, 그게 아니면 나가라”고 했다. 아마 거리로 나서서 시위에 참여하라는 뜻이었지 싶다.홍 : 그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겪었는지요?이 : 우리가 앞장섰다. 그때 내 친구의 모습이 찍힌 사진이 ‘동아일보’ 1면 에 실렸다. 동대문경찰서 인근에서 경찰과 맞섰다. 그때 서울 거리에는 돌이 거의 없었는데, 마침 동대문경찰서 근처 공사장에 쌓아놓은 벽돌 더미가 있었다. 경찰이 곤봉으로 시위대를 구타하자 학생들이 공사장의 벽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시위대 대부분은 서울대 법대, 문리대, 미술대 학생들이었다. 학생 수가 진압에 나선 경찰 수보다 많았다. 다른 대학 학생들도 길거리 곳곳으로 나왔다. 동대문경찰서를 거쳐 당시 국회의사당으로 향했고, 이화여대 학생들도 모였다. 뜨거운 열정이 사회의 불의를 참고 보지 못했기에 나선 것이었다.홍 : 시위할 때 위험한 장면도 있었겠습니다.이 : 학생들이 선봉에 서서 앞으로 나아갔는데 통인동 파출소에서 저지당했다. 바로 앞이 경무대였다. 거기까지 행진한 것이다. 그때 기마경찰이 총을 쐈다. 순간적으로 사격을 해대니 놀란 사람들이 높은 담을 훌쩍 뛰어넘었다. 자기도 모르는 괴력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총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날 서울대 법대 동기 하나가 죽었는데,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포항에서도 경찰서가 점거되는 등 시위가 격렬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홍 : 1961년 5·16군사정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이 : 가난하고 혼란한 상황이었기에 강한 지도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고, 군사 쿠데타는 안 된다는 친구도 있었다. 강원도 홍천군 동면 수타사(壽9641寺) 근처에서 함께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동창과 이에 대한 찬반을 놓고 토론했던 기억이 난다. 박정희와 박태준은 우리나라 국민들이 좀 더 풍요롭게 살 수 있도록 한 공로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가 여러 측면에서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경제 대국도 되었으니 다양한 차원에서 평가가 필요하다고 본다.홍 : 1964년에는 한일협정 반대 운동이 있었지요.이 : 그때는 사법시험 준비로 정신이 없어 시위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동독과 서독이 분단돼 있을 때 서독으로 광부와 간호사들을 만나러 갔다. 그때 서독 총리에게 “우리도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하자, 서독 총리는 “일본에 전쟁 배상금을 빨리 받아서 경제를 발전시키고 한일 관계도 재정립하라”는 조언을 했다고 한다. 그 돈(대일 청구권 자금)이 포항제철을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다. 포항제철 건설을 결심한 게 박정희고, 이를 건의한 게 박태준이다. 그것이 지금의 포항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홍 : 1960년대 포항의 경제 상황은 어땠습니까?이 : 포항만이 아닌 대한민국 전체가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영일만의 정치망 어장에서 나오는 게 포항의 수입 거의 전부였다. 사람을 채용해줄 회사와 단체가 거의 없었다.홍 : 20대에 영향을 받은 인물은 누굽니까?이 : 포항제철 박태준 회장이다. 스물아홉 살에 그를 만났다. 20대 중반에 사법시험을 포기하고 서울대 행정대학원에 다녔는데 재미가 없었다. 그즈음 사업을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 주도 드라이브 정책을 펼칠 때는 나도 수출을 했고, 개발 주도 드라이브를 걸 때는 구획정리 사업을 했다. 그러던 중에 박 회장을 만났다.홍 :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후 사업을 하셨다니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이 : 일본으로 석유곤로를 만들어 수출했다. 일본의 아이디어와 기술을 바탕으로 인천에서 만들어 팔았는데, 다른 곤로는 잘 팔리는데 내가 만든 건 판매가 부진했다. 곤로 수출 사업은 실패였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동방유량 신명수 회장의 조언으로 망개(청미래덩굴) 이파리를 지리산에서 채집해 일본에 팔았다. 망개 이파리는 방부제 역할을 한다. 망개떡이 상하지 않게 해주는 것이다. 냉장 유통이 없던 시대니까 장사가 잘되었다.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아이디어 사업이었다.홍 : 그 후에 다른 사업도 하셨는지요?이 : 당시 한국에서는 야구가 인기를 얻기 전이었는데, 일본에서는 인기가 대단했다. 그걸 감안해 야구 배트를 만들어 수출했다. 그 사업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벌었다. 나중에 포항에서 구획정리 사업을 할 수 있는 밑천이 거기서 나왔다. 사법시험 공부하듯 하면 뭐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신문을 통해 세상과 경제의 흐름을 파악했다. 요즘도 신문을 열 가지 이상 읽고 있다. 신문 읽기는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와 감각을 준다. 홍 : 사업하던 시절의 에피소드 하나 들려주시죠.이 : 야구 배트는 물푸레나무로 만든다. 수령이 얼마 되지 않은 나무여야 하고, 색깔도 하얀 게 좋다. 가지가 벌어진 나무로 만들면 배트가 부러지기 쉽다. 잘 다듬어진 방망이를 2개월 동안 온돌에서 말리는 과정을 거친다. 그렇게 만든 야구 배트를 일본 회사로 수출했다. 그런데 어떤 때는 납품된 것의 반 이상을 불합격시키는 것이었다. 아마도 불합격품까지 가져가 일본에서 완제품으로 만들어 팔지 않았을까 싶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두 트럭 분량의 야구 배트를 영등포에서 만들어 인천의 보관창고로 보냈다. 그런데 그날 예고되지 않은 비가 왔다. 비는 배트에 치명상을 입힌다. 저녁을 먹던 내가 인부들과 달려가 포장막으로 야구 배트를 덮었다. 뒤늦게 보관창고에 도착한 다마자와 사장이 20대 청년이던 내게 열 번 넘게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했다. 거래가 끝난 상품까지 책임지려는 마음가짐을 좋게 본 것이다. 그날 “앞으로 당신 제품은 검사를 하지 않고 통과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홍 : 포항으로 돌아온 건 언제지요?이 : 1967년 양송이를 재배해 수출하려고 포항으로 왔다. 그 사업을 위한 공장을 만들기 위해 땅을 샀다. 800평을 샀는데 평당 200원쯤 준 것으로 기억한다. 나와 아내가 직접 흙벽돌을 찍어 양송이 가공업체를 지었다. 1967년 10월 1일엔 장기영 당시 부총리가 포항에 내려와 포항제철이 들어설 지역을 알렸다. 라디오를 통해 그걸 들었다. 흥미로운 건 바로 그날 박정희 대통령의 결정으로 장기영 부총리가 해임됐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그날 이후로 포항의 역사가 확 바뀌고 천지가 개벽했다. 아마 새로운 포항 역사의 시작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당시 5만 명이던 인구가 지금 50만 명이 됐으니.홍 : 포항제철 건설 당시의 분위기를 들려주시죠.이 : 공장 부지로 땅이 수용되는 것을 사람들이 반대했다. 조상 대대로 농사를 지어온 땅이니 낮은 가격에 수용되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땅과 관련 없는 이들은 포항제철 건설을 환영했다. 보통 사람들은 제철 공장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시절이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양송이 수출업을 하려고 땅을 샀다. 평당 50원에서 500원쯤 하던 시절이다. 지금의 상도, 대도, 해도, 죽도는 모두 섬이었다. 밀물과 썰물이 오가는 갈대밭은 평당 50원에 불과했다. 땅을 사려는 사람이 있으면 땅 주인들은 불안한 마음에 대부분 땅을 팔았다. 그런 땅을 내가 양송이 재배와 가공장 설립을 하려고 샀다. 이대공1941년 포항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포항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20대 중반에 서울·인천에서 석유곤로와 야구 배트 등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했다. 1967년 포항으로 돌아와 양송이 재배·가공업을 하다가 1969년 포항제철에 입사해 홍보실장, 비서실장, 총무이사, 포항공대 건설본부장, 부사장을 거쳤다. 포항제철 건설 시기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24년간 제철보국의 신념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포항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이사장, 아름다운재단 이사,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포항지역회 이사장, 경상북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포항지역발전협의회장 등을 맡았으며, 현재 재단법인 애린복지재단 이사장으로 있다.대담·정리 : 홍성식(경북매일신문 기자) / 인물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8-08

“하루에 고래 세 마리는 위판되었다”

1937년생인 최원복 씨는 1962년부터 1982년까지 구룡포에서 고래 전문 중매인을 했다. 구룡포의 고래 중매인 중 최연장자로 구룡포의 고래 역사에 대해 얘기해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분이다. 김도형(김) : 근황은 어떻습니까?최원복(최) : 시간 나는 대로 궁도장에 나간다. 1985년부터 건강도 챙길 겸 궁도를 하고 있다.김 : 어릴 때 구룡포는 어떤 곳이었는지요?최 : 아버지는 김천 사람이고 어머니는 칠곡 사람이다. 1935년에 부모님이 구룡포로 왔다. 구룡포 북방파제 공사가 마무리될 무렵이 아닌가 싶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정어리가 많이 나고 없는 사람이 살기에는 그렇게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열 살 때 구룡포에 콜레라가 닥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바람에 나도 힘든 인생을 살았다.김 : 고래고기 중매업은 언제부터 하셨습니까?최 : 1962년 군 복무를 마치고 구룡포에서 시작했다. 1968년까지는 고래만 하다가 그 이후로는 다른 생선도 취급했고, 고래고기 중매는 1982년까지 했다.김 : 당시 얘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해주신다면.최 : 1970년대 초반 구룡포에 참치 원양업이 성행했다. 참치 밑밥이 꽁치인데 마침 그때 구룡포가 꽁치 주어장이어서 원양어선에 꽁치 대주는 장사를 1982년까지 했다. 그때 돈을 좀 벌었는데 오징어 장사하다가 다 까먹었다. 1986년에 일본 사람과 ‘선동(船凍) 오징어’(배에서 잡아 바로 얼린 오징어)를 거래해서 얼마간 회복했다.김 : 1970년대는 구룡포가 활황일 때지요?최 : 구룡포와 대보(현 호미곶) 합쳐서 인구가 3만 명이 될 정도로 활기가 있었다. 지금은 구룡포 인구가 만 명도 안 될 거야.김 : 요즘 오징어가 많이 비싸지요?최 : 광복 전에 구룡포에 정어리가 그렇게 많았다고 하는데 다 사라졌고, 명태도 사라졌지. 오징어도 어떻게 되려는지 모르겠어. 오징어가 얼마나 비싼지 최근에 6만 5천원에 한 상자 샀지.김 : 고래 거래하실 때는 밍크고래 위판이 많았겠군요.최 : 그렇지. 밍크고래는 17자(5.1m)부터 25자(7.5m)까지가 가장 많이 잡혔다. 하루에 세 마리는 위판되었다. 그만큼 밍크고래가 많이 잡혔다는 얘기지.김 : 고래고기 가격은 어느 정도였는지요?최 : 1980년대 초반까지 소고기 값의 3분의 1이었다.김 : 고래 중매업은 어땠습니까?최 : 치열했다. 새벽에 수화(手話)로 일하고 나면 진이 다 빠졌다. 수화가 그럴듯해 보이는데 실제로는 정말 힘들다. 그 때문에 집안에서 누가 장사한다고 하면 말리게 된다.김 : 수입은 어느 정도였습니까?최 : 치열하게 경쟁해서 고래를 사들여도 벌이는 신통찮았다. 쌀이 귀할 때 고래고기 장사를 한 덕분에 끼니마다 고래고기를 먹기는 했다. 그때는 구룡포 사람들이 고래고기를 많이 먹었다.김 : 고래고기는 어디에서 많이 팔았습니까?최 : 구룡포시장 좌판에서도 팔았지만 포항 죽도어시장에 가서 많이 팔았다. 여기서 해체한 고래고기를 삶아서 궤짝에 넣은 다음 버스를 타고 포항 가서 죽도어시장 수산회사에 넘겼다.김 : 과거에 포항 가는 길이 힘들었을 텐데.최 : 말도 마라, 길이 얼마나 험했는지. 특히 청림 쪽을 지나갈 때는 정말 힘들었다. 구룡포에서 대구까지 트럭 타고 가는 데 4시간 30분 걸렸으니. 1962년에는 구룡포에서 서울까지 가는 데 15시간이나 걸렸다.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된 후 트럭을 타고 달려보니 장판에 구슬 굴러가는 것 같더라. 구룡포에서 포항 가는 도로가 포장된 후에는 한 번 달려본 다음에 일부러 다시 왕복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김 : 혹시 고래고기를 일본에 팔기도 했나요?최 : 1982년쯤 그러니까 고래고기 장사를 거의 접을 무렵이다. 포항에서 일본 시모노세키 가는 선어(鮮魚) 수출선이 있었다. 아우와 둘이서 고래고기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판로를 찾다가 포항 효창수산을 통해 그 선어 수출선으로 일본에 보냈다. 일본에서 온 영수증을 보니까 내가 판 고래고기 내용이 정확하게 적혀 있었다. 당시 구룡포에도 한 수산업자가 시모노세키 가는 선어 수출선을 갖고 있었다.김 : 포항 쪽 고래 유통에 대해 아시는 게 있는지요?최 : 포항 사정은 시의원을 한 최일만 씨가 잘 안다. 논산훈련소 동기이기도 해서 각별한 사이다.김 : 포경 금지 후에 고래 값은 어떻게 되었습니까?최 : 엄청 올랐다. 나가수(참고래) 한 마리가 몇 년 전에 1억 원 넘게 위판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오죽하면 바다의 로또라 하겠는가. 고래 전문 중매인 최원복 씨. 김 : 일제강점기 포경업에 대해 들은 얘기가 있는지요?최 : 일제강점기 때 장생포 포경선이 구룡포에 와서 고래 위판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물러나면서 그들이 갖고 있던 포경선을 우리 사람들이 넘겨받아 포경업을 계속 이어갔을 것이다.김 : 구룡포에서 포경업을 한 강두수 씨는 어떤 분인가요?최 : 일제강점기 때 구룡포에서 수산회사에 근무하다가 광복되면서 포경선을 넘겨받아 포경업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인심이 좋은 분이었고, 지금 그분 아들이 70대 중반인데 구룡포에 살고 있다.김 : 구룡포읍 행정복지센터 앞마당에 있는 제1동건호는 김건호 씨가 기증했다고 들었습니다.최 : 김건호 씨는 강두수 씨의 생질로 강두수 씨한테 수산업을 배웠다. 70대 중반에 작고했는데, 구룡포 길거리에 벚나무를 심기도 했고 좋은 일을 많이 했다.김 : 수산업 하던 분들이 구룡포 지역사회에 영향을 많이 준 것 같습니다.최 : 그렇게 볼 수 있다. 광복 직후 중·고등학교 개교하고 운영이 어려울 때 수산업 하던 사람들이 학교를 살렸다.김 : 구룡포에서 포경선 탔던 분 중에 생존자는 몇 명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최 :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나. 구룡포에 고래 해체하는 사람도 서너 명 있었는데 모두 돌아가셨다.김 : 요즘 고래고기 전문 식당은 어떤가요?최 : 장사가 괜찮을 것이다. 이문도 좋고 고래고기를 찾는 사람들이 꾸준히 있으니까. 최근에 강구에서 고래가 정치망에 걸려 구룡포의 한 고래고기 식당에서 사왔다고 하더군. 구룡포 어판장에서 해체한 고기를 5만 원어치 사서 친구 여남은 명과 어울려 소주 한잔했는데 소주 한 박스를 비웠다. 소주 안주에 고래고기는 그저 그만이다.김 : 고래고기는 12가지 맛이 난다고 하는데 실제로 어떻습니까?최 : 천만의 말씀, 50가지 맛이 난다. 부위별로 독특한 맛이 있다. 고래를 그냥 삶으면 비린내가 나서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고래 삶을 때 소주와 마늘, 생강, 커피 가루를 넣으면 비린내가 싹 사라진다. 육회는 된장에 찍어 먹어도 맛이 좋다. 나가수는 삶으면 살이 퍼지는데 밍크고래는 살이 제 모양을 유지하고 부드럽다. 고래고기는 소화가 잘되고 많이 먹어도 살찌지 않는다.김 : 맛있는 고래고기를 알아보는 방법이 있는지요?최 : 껍질이 두꺼워야 한다. 껍질이 두꺼우면 살코기에 기름기가 있고, 껍질이 얇으면 살코기에 기름기가 별로 없다. 멸치부터 고래까지 모든 생선은 껍질이 두꺼워야 맛이 좋다.대담·정리 : 김도형(THE OCEAN 편집위원)

2021-08-04

‘베르사유 궁전’에도 없었던 화장실 신라 왕궁엔 첨단 수세식이 있었다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인간에게는 보편적인 욕망과 욕구가 존재한다. 이 욕구와 욕망의 실현을 열망한다는 차원에서 보자면 2021년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과 1천300여 년 전 통일신라시대 사람들은 크게 다르지 않다.7~8세기. 막 삼국을 통일하고 나라의 힘을 키워가던 신라인들은 동궁과 월지를 비롯한 크고 아름다운 건물을 짓고, ‘불교미술의 꽃’이라 불러도 좋을 여러 조각품들을 만들어냈다. 지금 우리가 유적과 유물이라 부르는 것들이다.동궁과 월지에선 2만 점에 가까운 각종 유물이 출토됐다. 적지 않은 양이다. 이 가운데 ‘목간(木簡)’과 ‘수세식 형태를 갖춘 화장실’은 욕망과 욕구 충족이라는 면에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흥미를 끈다.무언가를 기록하고자 하는 욕망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종이가 만들어지면서 기록이란 작업은 보다 수월해졌다. 그런데 종이가 없던 시절엔 어디에 글씨를 남겼을까? 바로 목간이다.무언가를 먹은 후 배설하는 건 고대인이나 21세기 인간이나 마찬가지. 보다 깨끗하고 쾌적한 공간에서 배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욕구는 화장실의 형태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고 그 정점에 있는 게 수세식 화장실이 아닐까. 동궁과 월지에서 나온 목간을 통해 본 당대의 현실목간은 무언가를 기록해 후대에 남기고자 하는 고대인의 욕망을 해소시켜줬다. 바로 그 목간을 ‘한국 고고학사전’은 아래와 같이 정의하고 있다.“문서나 편지 등의 글을 일정한 모양으로 깎아 만든 나무 또는 대나무 조각에 적은 것으로, 나무에 새긴 것을 목독(木牘), 대나무에 새긴 것을 죽간(竹簡)이라고 한다. 두 가지를 구별하지만 한국에선 아직 죽간이 발견된 사례가 없어 총칭해 목간이라 한다.주로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 또는 널리 쓰이기 이전에 사용됐다. 따라서 목간의 사용과 소멸은 종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목간은 중국의 고대 유적을 비롯해 일본의 고대 유적, 인도나 로마시대 유적에서도 발견된다. 목간은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당대의 정치·사회상이 기재돼 있기에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동궁과 월지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나온 목간은 200여 점으로 알려졌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한 이들 목간에 관한 설명을 인터넷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나무위키’에서 확인할 수 있다.“1975년 안압지(월지) 유물 발굴 과정에서 51점의 목간이 최초 출토된 이후 지속적으로 목간이 발견됐다. 2006년 기준으로 102점이 발견되었으며, 이후 계속된 발굴로 현재 200여 점의 목간이 발견된 상태다. 몇 점을 제외하고는 안압지 북서편에 위치한 임해전지의 제4건물지에서 제5건물지로 통하는 이중 호안석축 아래서 수습됐다. 경주 월지 목간은 나무판의 위쪽에 홈을 내거나 구멍을 뚫어 끈을 묶고 어디에 걸거나 매달 수 있도록 하였으며, 서체는 주로 예서체이나 간혹 초서체로 쓴 것도 있으며, 칼로 글자를 새긴 것도 있다.”앞서 언급한 것처럼 목간은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가 어떠했는지를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 그렇기에 많은 역사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돼왔다.동궁과 월지에서 나온 목간 역시 마찬가지다. 목간에 쓰였거나 새겨진 글씨들을 통해 당시 신라의 관청명과 주요 건물을 경비하던 사람들의 숫자, 나아가 제작 연대까지 추정할 수 있다.예를 들자면 출토된 목간에 쓰인 ‘세택(洗宅)’은 왕을 근거리에서 보좌하는 관청이고, 중국 당나라의 연호가 적힌 보응사년(寶應四年)은 765년이며, 궁궐을 경비하는 보초의 근무 상태를 기록한 목간을 통해서는 동궁의 구조까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는 것.한국고대사학회가 발행한 하시모토 시게루의 논문 ‘월지(안압지) 출토 목간의 연구 동향 및 내용 검토’에 따르면 “월지의 목간은 1975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출토된 목간으로 현재 어느 정도 내용을 알 수 있는 목간은 40여 점이 있다”고 한다. 논문은 이렇게 이어진다. “약재명, 같은 글자를 반복해서 쓴 습서 목간, 문호를 쓴 목간이 몇 점씩 있고, 가장 많은 것은 부찰이며 약 20점이 있다. 그중 14점은 ‘연월일+作(작)+동물명+가공품명+용기’라는 기재양식으로 쓰인 식품 부찰이다.” 1천 년 전 신라인들도 젓갈을 먹었을까?식품 부찰(附札·기억할 만한 것을 표시하기 위해 글을 써 붙인 것)이라…. 여기서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일어난다.만든 날짜와 가공한 방식, 식재료와 담긴 용기의 재질까지를 기록한 목간을 해석한다면 통일신라시대 사람들이 어떤 음식을 즐겨 먹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아닌가.특히나 동궁과 월지는 신라 귀족과 왕족의 주요 활동공간이었으니, 당시 상류층의 식생활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귀한 자료가 바로 이 목간일 터. 그들의 밥상에는 어떤 반찬이 차려졌을까?이런 궁금증을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낸 책 ‘유적과 유물로 본 신라인의 삶과 죽음’이 친절하게 풀어주고 있다. 다음과 같은 설명이다.“월지 목간 가운데 가물치(加火魚), 노루(獐), 돼지(猪), 새(鳥), 전복(鮑), 즙(汁) 등 각종 식품명이 기록된 것들이 있다. 이들은 연월일과 만드는 방법(作·治), 동물명과 가공품명 등을 적어 음식물을 보관하던 용기에 부착된 부찰 목간에 해당한다. 이 형식에서 연월일은 제작 일시, 작치(作·治)는 가공하는 방식을 의미하며 동물명은 재료를 가리킨다. 특히 동물명 뒤에 오는 갑(醘), 해(醢), 조사(助史)를 우리말 식해와 젓갈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식품은 용기에 담아 물품창고에 보관하였을 것이다.”그랬다. 1천 년 훨씬 이전에도 사람들은 길짐승과 날짐승, 물고기 등을 가리지 않고 먹었고, 여기에 과일이나 채소를 길러 오늘날의 주스와 유사한 음료를 만들어 마시기도 한 것이다.통일신라의 고대인들이 각종 육류를 이용해 젓갈을 담그는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은 이채롭고 재밌다. 젓갈을 만든 날짜까지 정확히 기록함으로써 숙성 시기를 표기하고, 유통 과정에서의 변질을 막아내기까지 했다니 신라인들의 식생활은 요즘 못지않았던 듯하다.여기서 갑작스레 머리를 스친 생각 하나. 앞으로 7~8세기 신라를 소재로 TV드라마나 영화가 제작된다면 동궁과 월지에서 잔치를 연 신라 왕의 “오늘 가물치 젓갈은 유별나게 숙성이 잘 돼 입에 맞구나”라는 대사를 한 번쯤 넣어보면 어떨까. 신라엔 이미 1천300여 년 전 수세식 화장실이…먹는 음식 이야기에 이어 화장실을 말하려니 민망하다. 그러나, 서두에 쓴 것처럼 배설은 부정할 수 없는 인간 보편의 욕구. 피해갈 수 없는 스토리이니 독자들의 이해를 부탁한다.지난 2017년 신문과 방송을 통해 놀라운 사실이 보도된다. 동궁과 월지를 조사·발굴하던 이들에 의해 현대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형태의 수세식 화장실이 발견된 것이다. 이 특별한 유구(遺構·과거 토목건축 구조와 양식의 실마리가 되는 자취)를 ‘나무위키’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동궁과 월지의 신라시대 화장실은 화장실 건물 내에 변기시설, 오물 배수시설까지 함께 발굴됐다. 초석건물지 내에 변기가 있고, 변기를 통해 나온 오물이 잘 배출돼 나갈 수 있도록 점차 기울어지게 설계된 암거(暗渠)시설까지 갖춘 복합 변기형 석조물이 있는 구조다. 변기형 석조 구조물은 양 다리를 딛고 쪼그려 앉을 수 앉는 판석형 석조물과 그 밑으로 오물이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타원형 구멍이 뚫린 또 다른 석조물이 조합된 형태며, 구조상 변기형 석조물을 통해 내려간 오물이 하부의 암거로 배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땅 밑과 위에는 수십 미터에 달하는 기다란 화강암 배수로가 있는데, 현재는 땅 위에 있는 일부 배수로만 확인되나 실제로는 그 밑에 엄청난 길이의 배수로가 존재한다. 일부 배수로는 이를 따라서 월지 내부로 이어져 있어, 당시 건축기술과 배수기술이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준다.”발효식품을 만들어내는 등 지혜로운 식생활을 즐겼음은 물론 배설하는 공간까지 기품 있게(?) 설계한 1천300여 년 전 신라 사람들. 그렇기에 당시 동궁과 월지를 출입했던 왕과 왕자, 귀족들은 이미 현대적 라이프 스타일과 유사한 삶을 살았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세계사 개념사전’에는 전 세계 화장실의 역사를 쓴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거기엔 아름답기로 이름 높은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는 화장실이 없었다는 사실과 함께 “베르사유 궁전을 드나들던 여자들은 선 채로 화려한 여러 겹의 드레스 안에서 볼일을 보았고, 남자들은 기둥과 커튼 뒤에서 배설을 해결했다. 결국 지독한 냄새를 없애기 위해 인테리어를 자주 바꾸고 향수를 사용하게 된 것”이라는 에피소드가 나온다.예술과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어느 나라보다 높은 프랑스. 최상류층이 무도회와 파티를 열던 17세기 베르샤유 궁전에는 없던 화장실이, 그것도 수세식 화장실이 신라 동궁과 월지에는 7세기 무렵부터 존재했다.신라와 프랑스, 화장실과 관련한 아득한 1천 년의 간극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그려지는 웃음을 어쩔 수 없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8-04

“10년 새 5번째 직업… 취미였던 공예가 정착의 아이템 됐어요”

32살의 만들기를 좋아하고, 꽃을 좋아하는 아가씨가 경상북도의 칠곡에 터전을 잡았다. ‘무엇을 하는가’하고 살펴보니, 꽃을 이용한 팔찌와 귀걸이, 화환, 브로치, 컵받침 등을 만들어 판단다. ‘이게 사업이 될까’하고 생각했는데, 만든 물건이 제법 잘 팔린단다. 한 달에 4천개나 팔린 팔찌도 있고, 외국에서 제품을 배송해달라고 연락이 오기도 한다. 수입이 좋을 때는, 동년배 대기업 직원의 2배를 훌쩍 넘어섰던 것은 ‘안비밀’이다. 여름 더위가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7월의 끝자락, 칠곡에 위치한 ‘나는꽃’의 대표 정아름(32) 씨를 만났다.“‘나는꽃’은 제가 꽃에서 영감을 많이 받고 작품과 상품을 만들기 때문에 지은 이름이에요. 그리고 ‘나는꽃’ 카페는 다양한 공예 체험을 하는 동시에 커피도 마시고 작품 감상도 할 수 있는 힐링공간이죠.”그녀의 이야기대로 ‘나는꽃’은 아기자기한 공예품부터 코끝을 간지르는 것 같은 꽃작품들이 천지였다. 이 모든 작품들은 논이 펼쳐져 있고 작은 동산을 끼고 있는 카페 겸 작업장에서 만들어졌다. 이런 그녀의 최대 히트작은 ‘동백꽃 필 무렵’이라는 이름의 팔찌다. 브라질과 미국, 홍콩, 필리핀, 베트남의 개인 소비자들이 번역기를 돌려서 사고 싶다는 이메일을 보내올 정도다.경북경제진흥원에 따르면, ‘나는꽃’의 작품은 지난 2019년 베트남 수출 박람회에도 진출했었다. 대략 30개의 샘플을 들고갔는데, 현장에서 모두 팔렸다. 이후 1천개 단위의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1천개의 주문을 정아름 대표 혼자서 만들 수는 없는 일. 결국 수출 주문을 거절해야 했다. □ 변덕 심했던 아가씨… 창작 작품 들고 칠곡으로“저는 22살부터 일찍 일을 시작해서 직업을 5번이나 바꿨어요. 변덕이 심하다고 부모님께 항상 혼나고 걱정만 끼치는 못난 딸이었죠. 뭐 그렇다고 회사에서 일을 못해 혼난다거나, 직원들과 어울리지 못한 것은 아니었어요. 그냥 회사 입사 1년을 넘기고 업무에 적응하면, 재미가 없는 거죠.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는 회사 생활이 지겨워서 못 견디겠더라구요. 5번째 직업을 가졌을 때도, 역시나 위기가 찾아왔죠. 끈기가 없는 제가 너무 답답하고 한심스러워서 화가 나더라구요. 그때 처음으로 제 자신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을 해봤어요. ‘내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도대체 나는 어떤 일을 해야 맞는 걸까’, ‘나의 다양한 경험을 살려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라는 생각이었죠.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내가 질리지 않고, 오래 할 수 있는 일을 하자’였어요. 그게 바로, 취미로 쭉 해오던 공예, 창작 작품 활동이었죠.”아름 씨의 고향은 경상남도 사천시다. 5번이나 직업을 바꿔가며 살았던 곳은 서울과 대구 등의 대도시. 물론 아름 씨도 칠곡에 정착하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그것은 여느 청년들의 고민과 다를 것이 없었다.“겁이 많이 났죠. 과연 일을 하면서 밥값은 벌 수 있을까. 도시생활을 하면서 높은 월세를 내던 탓에 모아둔 돈이 별로 없어서 사업을 하려니 엄두가 나지 않았거든요. 음…. 칠곡은 대구에서 프리마켓과 축제 참여로 만나며 친해진 작가님들이 추천해주셨어요. 아마 그게 칠곡과의 인연인 것 같아요. 물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 와서 사업장을 열고, 정착 생활을 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죠. 하지만 사업을 하면서 사람들과 친해지고 칠곡군에서 나름 활동을 하면서 적응이 된 것 같아요.”그런데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부모님께 혼나고 걱정만 끼쳤던 딸이 로컬인 칠곡으로 사업을 하러 간다는 데, 반대는 심하지 않으셨을까. “저희 부모님은 어릴 때부터 제 똥고집을 알기 때문에 크게 반대는 없으셨어요. 제가 하는 일에 성인이 되어서는 반대를 하신 적은 없었죠.(웃음) 그래서 제가 이렇게 고집있게 사업을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닐까요?”아름 씨는 지금의 생활이 너무나 만족스럽다. 자신의 삶 중에 지금이 가장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시기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녀에 따르면, 도시와 비교해서 잠자는 시간도 줄었고, 더욱 바쁘게 살고 있지만, 신기하게도 가끔 있었던 공황장애도 사라졌다. 마음의 안정과 자연의 영감을 받으며 일을 하고, 성과도 만족할 만큼 내고 있다고….이러한 아름 씨의 실력은 어떠할까. 그것도 해외에서 주문이 밀려들 정도인데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름 씨는 이름난 액세서리 디자이너 밑에서 공부를 한 적이 없다. 오직 취미 생활 뿐이었다. 해외 유학은 꿈도 못 꿨고, 그저 서울의 작은 디자이너 회사에서 일한 것이 창업 직전까지의 경력이었다.“취미가 돈이 된다는 것이 너무 신기하고 행복했어요. 어머니도 처음에는 제가 월급의 대부분을 재료 구입비로 쓰니까 싫어하셨는데, 요즘에는 주변 분들에게 자랑하고 다니세요. 사실 저는 제가 만드는 것이 ‘제품’이 아니라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작품명도 정성들여 짓고, 작품을 하나 하나 만들 때마다 소비자들에게 좋은 일이 생겼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죠.” □ 시골과 도시의 경계는 사실상 없어… 포기하지 않고 꾸준하게이러한 그녀에게 시골이라고 불리어지는 로컬의 비전을 물었다. 그녀는 어떻게 생각할까.“‘저는 하루를 후회 없이 알차게 살자!’는 것이 좌우명이에요. 그래서 사실 미래비전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하지만 저 같은 청년들이 경북에 많아진다면, 도시 청년의 시선들이 긍정적으로 바뀌겠죠. 그래서 경북이 조금 살기 편하고, 재밌는 곳이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저는 도시의 청년들에게 로컬의 삶을 권하고 싶어요.”그리고 이런 그녀에게 도시의 향수란 것은 없다. 정아름 씨가 단호하게 생각하는 것은 ‘로컬의 문화 수준이 도시에 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나는꽃’의 주문량으로도 증명됐다. ‘나는꽃’ 고객의 80%는 서울과 경기도 등 수도권이다. 오히려 지방의 특색이나 분위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지방의 특색을 이용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까요? 저는 매일 하루하루가 너무 설레고 행복해요. ‘오늘은 어떤 일을 하지?’, ‘어제 올린 신상에 어떤 응원의 댓글이 달리고, 주문이 들어왔을까?’하고 말이죠. 5년과 10년 후에도 이 행복함과 감사함을 유지하려고 계속 열심히 일을 했으면 해요. 그러다 보면 분명 더욱 설레고, 행복한 일들이 생길 테죠. 그때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행복감을 느끼게 해줄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해요.”이러한 그녀의 ‘행복 바이러스’는 조금씩 칠곡에 전염되는 듯하다. ‘나는꽃’ 카페에서는 지역민들과 함께 만든 공예품을 전시하고 판매했다. 어린이들이 나무 공예제품, 패브릭 아트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도 만들었다. 카페 앞에 널찍한 공간을 확보해 어린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곳도 마련했다. 이렇게 카페를 중심으로 전시와 체험, 놀이라는 다목적 공간을 만들어 놓으니 지역 주민들의 반응도 좋았다.“처음에는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체험을 주로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구미대학교에서 연락이 와서 체험을 하기도 했어요. 거기다가 제가 원래 시골에서 자라면서 다문화 가정을 많이 봤었거든요. 그래서 다문화 가정 자녀들을 초청해서 거의 무료로 체험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요. 코로나19로 많이 줄긴 했지만, 그 여파가 지나가면 다시 지역 주민들이 모이는 힐링의 공간, 놀이의 공간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그리고 칠곡으로 내려온 후 창작을 위한 감성이 더 많이 생긴 것 같다는 그녀. 그네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도 작품이 떠오르고, 뒷동산에 오르며 만나는 꽃잎에서도 아이디어가 생각난다고 한다.“꼭 도시에 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남들이 사는 방식도 존중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거기에 억지로 끼워 맞추면서 살 필요는 없잖아요. 시골에 일자리가 없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으면 되지 않을까요? 저도 처음 이 일을 시작하면서 돈을 벌기보다는 그저 재료값이나 벌면 충분하다는 생각이었어요. 포기하지 않고 꾸준하게 하면 분명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1-08-03

“큰형 이진우의 권유로 경기고, 서울대 법대 진학”

전쟁의 포연이 채 가시지 않은 1950년대 중반 대부분의 포항 사람들은 가난했다. 그럼에도 ‘배워야 살고, 공부만이 빈곤에서 벗어날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에 교육열은 매우 높았다. 당시 학생들은 어떤 꿈을 꾸며 미래를 그려갔을까? 홍 : 10대 중반 시절의 추억을 말씀해주신다면.이 : 전쟁의 참화 속에서 먹고살 방법이 거의 없었다. 농사도 힘들었다. 우리도 논밭이 없었다. 미군 구호품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던 시기다. 밀가루와 버터 등 미국이 보내주는 여러 가지 생활물품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앞서 말했듯 포항에 고아들이 많아 선린애육원이 만들어졌다. 포항제일교회가 주도했고 아버지가 앞장섰으며 미군들이 도왔다.홍 : 전쟁 직후엔 학교를 제대로 운영하기가 어려웠을 것 같은데.이 : 열세 살 국민학교 졸업반 때는 폭격을 피한 공장에서 가마니를 깔고 노천 수업을 했다. 죽음의 공포와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교육열은 저마다 특별했다. 대한제국 멸망 후 교육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한 어른들이 많았다. 교사들은 일제강점기 36년과 전쟁의 비극을 이야기했다. 죽어도 공부는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나는 포항국민학교를 다녔다. 한 반이 40~50명이었고 6개 반이었다. 한 학년이 250명쯤 됐다. 전교생은 1천명이 넘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학업에 열정을 가졌다. 이후 포항중학교에 입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지중학교가 생긴 것으로 기억한다.홍: 1950년대 포항의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어떤 환경에서 공부했는지요?이: 교장 선생님을 포함한 교사들은 조회 때마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했다. “배워야 산다”고. 한글을 제대로 습득해 우리말을 쓰고 읽고 익혀야 한다고 그랬다. 독서도 열심히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앞으로는 미국과 관계를 맺어야 하니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하라고 말했다. 당시 교사들은 선견지명이 있었다. 지금 한국은 국민소득이 3만 달러가 넘고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지만 그때는 대부분 빈곤에 시달렸다. 광복 후의 혼란과 전쟁의 참화를 겪은 교사들은 애국자였고 제대로 교육하겠다는 의욕이 높았다. 학생들을 단호하게 지도한 것도 그런 열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홍 : 그런 상황에서도 즐거운 추억은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이 : 당시의 내 또래 학생들은 체력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고, 싸워서 남에게 지면 안 된다는 의식이 있었다. 포항중학교 근처 희망고개에서 적지 않은 싸움이 있었다. 지금처럼 지저분한 싸움은 아니었다. 마주 선 상대 중 한 명의 코피가 터지면 끝나는 깔끔한 싸움이었다. 왕따 같은 건 없었다. 사나이 대 사나이로 맞붙곤 했다. 고등학교 때 서울에 가서는 그 싸움 실력을 써먹었다. 1년에 한 번쯤 다툼이 있었는데 내가 다 이겼다. 공부도 코피가 터질 정도로 했다. 참고서가 없어서 교과서 한 권을 다 베끼기도 했다. 국어, 수학, 영어 교과서를 달달 외우다시피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선행 학습이 되었다. 중학교 1학년 때 2~3학년 교과서를 다 베꼈다. 총기(聰氣)가 있을 때라 내용이 외워졌다.홍 : 당시 교사들은 어떤 태도로 학생들을 가르쳤는지요.이 : 교사들은 학생들을 공부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거기에 더해 학생들이 건강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까지 더해졌다. 영어 선생님은 특히 인기가 좋았다. 웅변대회에 나갔던 경험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때는 교사와 학생들 간에 신의가 있어 눈에 보이지 않는 숙제라도 성실하게 수행하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하루에 물구나무 10번 서기’라는 숙제를 내준다면 지금 학생들은 그걸 하겠나.홍 : 고등학교 시절은 서울에서 보냈다고 들었습니다.이 : 1957년 포항을 떠나 서울 경기고등학교로 갔다. 중학교 2학년 때 서울대 법대에 다니던 형님이 영어의 직접화법과 간접화법에 대해 물었다. 내가 대답을 하니 다른 영어 문제를 또 질문했다. 그것도 답했다. 그랬더니 형님이 나를 서울로 데려갈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서울대 사범대에 다니고 있던 누나는 서울대 사대부고에 가기를 원했다. 그런데 형님이 서울대 주요 학과를 보면 경기고등학교 출신이 많으니 거길 가야 한다고 설득했다. 홍 : 경기고 입시와 서울대 입학 당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이 : 당시 포항엔 입시 정보가 거의 없었다. 서울에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보러 가니 선택과목이 상업이었다. 그걸 한 달 반 동안 공부해서 시험을 치렀다. 다행히 합격했다. 경기고에는 전국의 수재들이 모였다. 내가 입학할 당시 경기중학교 학생 대다수가 경기고등학교에 왔고, 다른 학교 출신은 전체의 10%인 60명 정도였다. 경기고 교사들은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고, 학생들도 대부분 ‘금수저’였다. 서울대 입시에 가보면 경기고 교복을 입은 수험생들이 넘쳐났다. 조선일보에 난 기사 ‘한국의 파워엘리트’에 따르면 당시 경기고 학생 중 60%가 서울대에 갔다. 내가 입시를 본 해에도 전교생 중 360여 명이 서울대에 들어갔다.홍 : 서울대 법대 진학은 어떻게 결정하셨는지요?이 : 공부를 해야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원래 법대보다는 천문기상학이나 지질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런데 형님이 말렸다. “너, 그 학문을 공부하면 외국 가서 박사 학위를 받아야 하는데 힘들다”며. 사실 그때 제대로 된 일기예보가 있었겠나, 지질학과를 나와서 취직이 됐겠나. 그래서 법대로 갔는데 적성에는 맞지 않았다. 법대 진학은 내 결정이 아니라 형님의 의사가 많이 반영되었다.홍 : 고등학교 시절에 친한 친구는 누가 있는지요?이 : 동방유량 신명수 회장이 고등학교 동기다. 그 친구 집을 가보니 건물부터 내부까지 전부 으리으리했다. 나는 대본소집 가난한 아들인데, 친구는 선대부터 큰 부자였다. 요샛말로 금수저 중의 금수저인데 공부까지 잘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미국에 유학하고 돌아와서는 가업을 이어받아 회사를 경영했다. 세계적 로펌 김앤장의 창업자 김영무와 전남 목포의 큰 주류업체 사장 아들도 고등학교 동기다. 김영무의 어머니는 고종(高宗)의 영어 통역사였다. 권력과 돈을 가진 집안 아이들이 경기고에 적지 않았다. 김영무의 아버지는 의사였는데, 그 당시 집 안에 에어컨과 냉장고가 있는 걸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홍 : 사법시험은 보셨나요?이 : 1960년대 초중반엔 사법시험 합격자가 겨우 20여 명이었다. 나도 모든 걸 걸고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나 결국 합격하지 못했다. 김영무는 시험을 보다가 구토를 했는데, 약도 먹지 않고 시험을 마쳤다. 약을 먹으면 정신이 흐려져 공부한 걸 잊어버릴 수도 있다는 아버지의 판단에서였다. 서울대 법대 시절엔 나와 동기들 모두가 목숨을 내놓고 공부를 했다.홍 : 1960년대엔 서울과 포항을 오가며 생활하셨지요?이 : 대한민국이 격변하는 시기였다. 대학 때는 죽기 살기로 공부했다. 서울대 도서관이 동숭동에 있었는데 걸어서 10분 거리에서 하숙했다. 법대 도서관에 자리를 잡아놓고 밤낮없이 사법시험 준비에 매달렸다. 1967년에 포항제철 입지가 결정됐다. 10월 1일이었다. 포항은 그전까진 별다른 생산시설이 없었다. 나는 방학 때도 포항에 가지 않고 서울에서 공부에 전념했다.홍 : 포항의 친구들은 어떤 삶을 살았는지요?이 : 포항은 조용한 어촌이었다. 젊은이들은 대부분 객지로 나갔다. 포항에서는 큰 꿈을 펼치기가 힘들었다. 이대공1941년 포항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포항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20대 중반에 서울·인천에서 석유곤로와 야구 배트 등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했다. 1967년 포항으로 돌아와 양송이 재배·가공업을 하다가 1969년 포항제철에 입사해 홍보실장, 비서실장, 총무이사, 포항공대 건설본부장, 부사장을 거쳤다. 포항제철 건설 시기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24년간 제철보국의 신념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포항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이사장, 아름다운재단 이사,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포항지역회 이사장, 경상북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포항지역발전협의회장 등을 맡았으며, 현재 재단법인 애린복지재단 이사장으로 있다.대담·정리 : 홍성식(경북매일신문 기자) /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8-03

통합신공항·행정통합은 대구·경북의 발전 동력이다

대구경북 미래가치 창조의 중심이라는 비전을 갖고 출범한 대구경북연구원은 30년 동안 지식경제자유구역, 첨단의료복합단지 조성, 3대문화권 사업 등 지역의 굵직한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오창균 원장은 “시·도지사가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면 연구원이 뒷받침해 가능했다”며 “앞으로는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소프트웨어 개발에 중점을 두겠다”고 말한다. 대구시 남구 대명동의 기업 빌딩에 세들어 살고 있지만 사기는 충천하고 의욕은 창창하다.- 대구 경북 발전이 정치 경제적으로 정체되고 있는 것은 다중 포위망에 갇혀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대구 경북은 공간적으로는 경부고속도로와 경부선 중심의 국가 발전축이었으나 그 축이 서해안을 중심으로 이동했다. 경제 지도도 추풍령 이남의 비수도권으로 분류되면서 이 지역은 자연히 동남권 주변부로 밀려났다. 경제 산업구조도 섬유와 전자 철강 중심의 지역산업이 4차 산업시대에 접어들면서 전환기를 맞고 있다. 문화적으로도 폐쇄적이라는 외부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가 인정하고 않고 와는 상관없이 우리 지역에 대한 비판 세력이 만만찮은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연구원이 찾아낸 돌파방안은 어떤 것인가.△이런 고립과 주변화를 돌파하려면 과감한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지리적 변방화와 경제산업적 주변화를 반전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수단으로 도출된 것이 통합신공항과 대구경북 행정통합이다. 이 지역 발전에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강조하는 이유다. 대구와 경북을 확 바꿀 엄청난 대역사가 될 것이다.- 두 개의 프로젝트 모두 상당한 비판이 있다. 연구원이 주장하는 대구경북행정통합의 바람직한 모습은 어떤 것인가.△비판은 당연하다. 모두가 찬성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가야 할 길이라면 가야 한다.대구경북 행정통합 논의는 시·도민과 함께하는 ‘공론’ 방식으로 접근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앞으로 행정통합 역시 시·도민의 의견을 따르는 방식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라고 본다. 특히 지역 내부의 합의 형성을 위해 광범위한 주민 설명회와 정치 경제계를 비롯한 각계의 전문가와 함께 하는 토론회를 통해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관심도를 높여야 한다.- 그런데 행정통합 논의는 현재 중단돼 있다.△중단된 것이 아니라 더 굳건히 나가기 위한 보완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대구경북행정통합공론화위원회가 지난 4월 ‘논의를 2022년 지방선거 이후에 재논의 할 것’을 건의했고 시· 도가 이를 수용함에 따라 일시 중단된 것이다. 현재 공론화위원회는 지난해 7월부터 올 5월 사이의 공론 활동에 대한 백서 작업을 진행 중이다.- 최근 대구시장과 경북도지사를 비롯, 영남권 5개 단체장이 울산에서 영남권 미래발전협의회를 열고 공동 성명도 발표했다. 대구경북의 행정통합이 이뤄지면 다음 과제로는 영남권 통합으로 수도권 일극체제에 맞서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물론이다. 전국 인구의 절반(50.2%)이 수도권에 거주하고 있는데 비해 영남권은 비수도권에서는 가장 많은 인구(24.9%)가 살고 있다. 우리 연구원을 비롯한 부산 울산 경남 등 4개 연구원은 인구의 4분의 1이 살고 있는 제2도시권의 경쟁력을 강화하여 수도권 중심이 가져오는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성장 거점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고 있다.- 구체적인 성과를 들어보라.△이번 영남권 미래발전협의회에서 대구경북통합신공항의 조속 건설과 2030 부산세계박람회 유치를 위해서도 공동으로 노력하고 협력하기로 했고 이를 협약서에 명문화했다.- 대구경북통합신공항 문제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통합신공항 이전지 확정 이후로 대구시와 경북도 모두 사업추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법적 절차에 따라 통합신공항 건설 기본계획을 수립중에 있으며 국토부도 민간공항 부분 건설을 위한 타당성 검토 절차를 진행중이다. 연구원은 종전부지 개발 마스터플랜 마련에 참여하고 통합신공항 중심의 주변지역 발전방안 마련을 위한 연구도 수행하고 있다. 통합신공항을 중심으로 한 교통망 체계 구축도 지원하고 있다.- 통합신공항에 대한 일부 반대 여론도 여전한 것 같다. 특히 공항의 역할과 관련해서도.△거기에 대해서는 “지금까지의 공항 개념은 잊어라”고 말해주고 싶다. 새로 건설되는 공항은 농촌에서 농사 지어 겨울에 한 번 세계 여행가면서 이용하는 공항의 역할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세상이 변하고 있다. 신공항이 개항할 때쯤이면 어떤 역할을 하게 될는지 상상해 보라. 디지털 카메라나 스마트폰의 발전 속도와 우리 생활 영역에 침투한 현실을 봐라. 더 이상 고추 말리는 공항이라는 폄하에 움츠리거나, 지점과 지점을 이어주는 공항의 역할에 한정지을 때가 아니다.- 군위군이 신공항 건설의 전제조건으로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대구시 편입은 연착륙할 것 같은가.△ 군위군의 대구시 편입에 대해서는 대구시와 경북도도 행정적 절차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도 의회 일부에서 군위군의 대구 편입에 따른 상대적 불이익을 거론하고 있지만 원만히 양해하면 어렵지 않게 성사될 것으로 본다.- 인구문제도 국가적 숙제가 됐다. 특히 우리 지역은 수도권 집중 현상과 맞물려 저출산 고령화와 함께 인구유출이라는 이중 삼중의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어떤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것인가.△인구 정책이나 출산율 문제는 바로 지방소멸과 직결된다. 이제 더 이상 몇몇 농어촌 낙후지역의 문제가 아니다. 그만큼 단편적인 정책이 아닌 국가 차원의 근본 해결책이 나와야 한다. 이런 문제는 고용과 임금 주택 교육 기본소득 보장 노후문제 보건의료 정책과 맞물려 나타나는 사회 현상이다. 전진국들은 이 문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사회 재설계를 시도하고 있다. 경제적 기회를 확대하되 공동체 윤리와 시장경제의 역동성 결합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핵심이다.- 우리의 문제로 돌아와서 해결책을 찾는다면?△국가 차원의 정책 변화다. 이민과 영주권 정책을 포함한 본격적인 국가 재설계에 나서야 한다. 현실적으로 당장 실현이 어렵다면 지역에서라도 단순한 현금 투입을 지양하고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돈으로 출산율을 높이겠다는 발상이 얼마나 가겠는가.- 현재 대구시내 곳곳에 재개발이 진행되면서 무분별한 개발의 인상이 짙다. 이에따라 일부 아파트는 미분양 사태까지 빚어지고 있다. 행정이 손 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연구원으로서 조율은 하고 있나. 어떤 그림과 방향을 제시하고 있나.△대구시는 물론 연구원도 최근 대구의 주택 공급과잉에 대한 상항을 우려하고 있다. 2018년 연구원이 수립한 대구시 주거종합계획에는 2027년까지 대구시의 주택 수요에 대한 추정치가 나와 있고 이를 기반으로 계획이 수립돼 있다. 그러나 최근 주택은 적정 공급선을 넘어서 단기적으로 과다 집중 공급되고 있는 상황으로 보인다. 현재 대구시는 지난 2007년과 같은 대규모 미분양 사태를 막기 위한 방안을 모색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연구원도 주택시장 안정화를 위한 대구시 주도 대안마련에 참여하고 있다.- 연구원 내부를 들여다보면 설립 30년이 된 지금 연구 성과물 없다는 지적이 있다.△시대가 변했다. 연구원의 과제나 방향도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옛날처럼 대형 프로젝트(4대강 사업 같은 토목공사)가 없어지고 정책과제와 기본과제 중심으로 연구하고 있기 때문이다.지금은 지역의 미래를 위해 대구경북 경제통합과 대구경북 행정통합 등 손에 잡히지 않아도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중장기 발전 구상과 정책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연구원이 대구시와 경북도의 재정 지원에 의존하는데 문제는 없나. 연구원의 결과물에 대한 의심도 있는 것으로 듣고 있다.△관변기관으로서의 아픔이 없지 않다. 대구시와 경북도의 예산으로 운영되다 보니 연구결과가 주문생산 됐다거나 의뢰한 자치단체가 요구한 결론이 아니냐는 의심일 것이다. 그러나 정책 잘못을 연구원이 인지하고도 없애거나 은폐하려 하지 않았다. 행정기관의 잘못을 은폐하거나 수치를 조작하거나 결과를 왜곡하는 일은 있을 수도 없고, 또 없었다. 결단코.- 대구경북연구원 최초의 내부 출신 원장이다. 현재 연구원 자체의 문제점이나 해결 과제는 무엇으로 보나.△연구원 개원 초 연구원 6명 중 5명이 경제 경영학 전공자였다. 지금 정규직 연구원이 박사급 65명으로 경제 산업 도시계획 환경 문화 관광 사회 복지 교통 전분야에 걸쳐 대구 경북의 종합행정을 커버하고 지원하고 있다.공공기관으로 이익창출보다는 지역민의 이익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정책을 연구하고 과제를 수행한다. 예산 중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 이를 설득하는 일이 중요하다. 사회 경제적 여건은 급변하고 코로나19 같은 변수까지 발생하면서 연구 수요도 보다 세분화되고 전문화되고 있다. 정책 환경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선도적인 정책 대안 발굴을 위해서는 우수인력 확보가 절실하다.- 개원 30년을 맞은 연구원으로서 앞으로 미래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역할과 비전을 위한 준비는 하고 있나.△대구 경북 시도민의 삶의 질 향상과 경쟁력있는 지역 창조라는 사명을 갖고 대구경북 미래 가치 창조의 중심이라는 비전으로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미래가치를 선도하는 창조적 연구개발 강화, 시도민이 공감하는 정책 연구와 지속 가능한 경영체계 구축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연구원 구조 개혁을 위한 외부 용역을 맡겼다. 객관성 확보를 위해서도 제 머리를 깎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 오창균(吳昌畇·59)대구 심인고 졸. 경북대 사회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주리대학교에서 사회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 대구경북연구원에 연구원으로 들어와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지역발전 전문위원과 18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경제2분과 실무위원으로 참여했다. 대구평생교육진흥원장과 농촌살리기 정책포럼 공동대표를 맡았으며 2011년부터 현재까지 지방분권운동대구경북본부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이경우/편집위원

2021-08-02

“6·25전쟁 때 피난민 도와주던 연일 주민들 고마워”

한 사람의 생애는 어떤 방식으로건 그가 살아온 지역과 연관을 맺게 된다.올해 산수(傘壽)에 이른 이대공 애린복지재단 이사장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사업을 한 10대 중반에서 20대 중반까지 10년 정도를 제외하면 인생의 대부분을 포항에서 보냈다.8·15광복 직후와 6·25전쟁, 포항제철의 설립과 발전 과정, 포항공대 설립에 얽힌 이야기 등을 다섯 차례의 대담을 통해 들었다. 홍성식(이하 홍) : 1941년생은 태어날 때부터 운명처럼 격동의 시기를 맞이한 것 같습니다.이대공(이하 이) : 다섯 살 때 광복을 맞았고 열 살 때 전쟁을 겪었으니 그렇게 얘기할 수 있겠다. 가정사도 그랬다. 해방되던 해에 두 살 된 동생이 콜레라로 죽었다. 콜레라에 걸리면 대부분 사망하던 시절이다. 백신도 없었고, 치료제도 없었다. 죽은 동생을 사과 궤짝에 넣고 아버지가 기도하며 입에 엿을 넣어주던 기억이 난다. 가난해서 못 먹던 시절이니까. 그리고는 공동묘지에 묻었다. 아버지(재생 이명석)는 꿈을 펼치기 위해 열한 살에 영덕에서 대구까지 걸어가기도 했다. 부친은 일본에서 공부했고, 책을 많이 읽은 분이다. 그 책으로 대본점을 했고, 덕분에 우리 가족은 극빈자는 면할 수 있었다.홍 : 1940년대 포항 아이들은 어떻게 살았는지요?이 : 해방 이전에는 동네에서 회람판이 돌았다. 일제가 거기에다 뉴스와 회보를 실었다. 일본은 철저히 우리를 통제했다. 우리 집이 그걸 읽고 나면 옆집에 가져다줬다. 좌익과 우익의 대결이 심각한 시절이었다. 큰형님(이진우)이 고등학생이었는데, 우파는 모자를 거꾸로 쓰고 좌파는 바로 썼다. 형님이 해방 이후 시내에 나가서 시위하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위험하다고 말렸다. 그러면 형님은 맨발로 도망치듯 밖으로 나가 데모를 하곤 했다. 사회가 혼란했다.1945년 광복을 기점으로 정치세력들 사이에 형성됐던 ‘애국 대 매국(친일)’이라는 대립 구도는 신탁통치 실시 문제를 계기로 ‘좌익 대 우익’의 구도로 전환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에 따르면 신탁통치를 둘러싼 대립 구도에서 역사적 정당성이나 과거의 친일 경력은 문제되지 않았다. 오직 상대방을 정국(政局) 무대에서 제거하고, 자신들이 의도한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는 것만이 목적이었다. 이런 구도를 중심으로 양 진영은 각각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격렬하게 대립한다. 한국 전체에서 벌어진 이런 상황은 포항에서도 예외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홍 : 어쨌든 학생의 본분은 공부 아닙니까?이 :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의식은 모든 아이들이 가졌다. 가난한 시절이지만 교육열이 높았다. 당시 교사들은 지금과 달랐다. 억눌렸다가 해방된 경험을 한 교사들이니 남다른 의욕과 애국심이 있었다. 사도(師道)가 확립되어 있었다. 학부모들도 교사를 존경했다. 회초리도 많이 맞았지만, 교사의 매를 나쁘게 보지 않았던 시절이다.홍 : 유년의 기억 중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면.이 : 어릴 때라 자전거 안장에 올라앉으면 발이 페달에 안 닿으니 옆으로 올라타서 페달을 밟았다. 그러다가 체인이 벗겨져 톱니바퀴에 다리를 다쳤다. 핏줄이 끊어졌다. 이후로 축구나 달리기 같은 운동을 하면 발이 불편했다. 그게 50대까지 이어졌다. 포항제철에서 은퇴하고 난 후에 미국에 가서야 혈관을 잇는 수술을 했다. 큰 수술이었다. 당시엔 요즘 아이들처럼 혼자서 온라인게임을 한다거나 하지 않고 공동체 놀이를 했다. 달리기를 가장 많이 했고, 낡은 공을 구해 축구도 열심히 했다.홍 : 1940년대엔 가족들 간의 유대감이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 같습니다.이 : 할아버지 때부터 기독교를 믿었다. 지금 내 손자들도 똑같다. 새벽 4시면 일어나 다 함께 찬송가를 부르고, 아버지가 성경 이야기를 해줬다. 우리 세대는 ‘군사부일체’의 이념이 몸에 밴 사회에서 자랐다. 당시 교감 선생님이 매질을 많이 했다. 종아리에 피가 나도록 때렸다. 게으름을 피우는 학생이 있으면 사람 만들겠다고 그랬던 것 같다. 사명감과 의욕이 없다면 체벌도 할 필요가 없다.홍 : 학교에서 체벌이 허용되던 시대였군요.이 : 약속을 안 지키거나 숙제를 하지 않거나 하면 주판으로 머리를 문지르기도 했는데, 교사들이 사적인 감정으로 한 체벌은 아니었다. 아이들을 낙오자로 만들지 않기 위한 방편이었다. 대부분의 교사들이 열정과 사명감을 가지고 가르치던 시대였고, 아버지의 권위와 선생님의 권위가 인정되던 시절이었다.홍 : 6·25전쟁 때 기억이 있는지요?이 : 너무나 뚜렷하게 기억난다. 1950년 7월 말에 포항이 함락되었다. 그 전쟁은 명백한 남침이다. 1개월 만에 북한군이 포항까지 내려온 건 준비된 전쟁이었다는 이야기다. 당시에 아버지가 트럭을 빌려 짐을 싣고 피난을 가려 했다. 아버지가 사과 궤짝에 넣어둔 원고와 어머니의 재봉틀을 가지고 간 기억이 또렷하다.홍 : 전쟁 때 선명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면.이 : 형산강 섬안 인근 다리에서 미군 병사가 피난민들을 제지했다. 피난 가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했다. 북한군이 들어와 있기에 피난민 중에 스파이가 섞였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고등학생인 형이 영어를 알아들었다. 포항이 함락되었던 때다. 콩과 밀을 볶은 비상식량을 둘러메고 다시 북쪽으로 올라갔다. 지금의 영일대해수욕장쯤으로 기억한다. 어머니는 짐이 많아 빠르게 움직이지 못했다. 지금의 포항제철 근방에 참외밭이 있었다. 참외가 노랗게 익어 있었으나 아무도 따 먹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전쟁이 주는 공포와 두려움 탓이었을 것이다. 홍 : 전투 장면을 보기도 했습니까?이 : 북쪽으로 올라가는데 미군의 반격이 시작됐다. 당시 포항 인구는 5만 명이 안 되었다. 수도산은 거의 헐벗은 상태인데, 거기로 학도병들이 목숨을 걸고 돌진했다. 풀도 나무도 없어 전부 노출된 상태인데 “돌격~”이라 외치며 뛰어올라갔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교복을 입고서 총을 들고 돌진하는 그들이 안타까웠다. 거기로 북한군이 기관총을 쏘았다. 바라보던 어른들이 “저런, 저런” 하며 발을 굴렀다. 그 학생들은 전국에서 모여든 학도병들이었다. 부당한 일에 대항해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는 걸 보니 숭고함이 느껴졌다. 학생들이 오죽하면 군복도 입지 않고 저러겠나 싶었다. 그들이 포항을 비롯해 우리나라를 지켰다.홍 : 전쟁에 관한 또 다른 기억이 있는지요?이 : 미군 비행기의 공습도 기억난다. 그때 빛이 소리보다 빠르다는 걸 알았다. 비행기가 내려올 때 기총소사를 하는데, 총소리는 비행기가 올라가고 나서야 났다. 소리가 빛보다 느린 것이었다. 영일만에 미군 미주리호(Missouri號)가 들어왔다. 배에서 함포사격을 하는데, 그게 판세를 결정지었다. 비행기가 나타나면 인민군이 숨을 수 있었으나, 함포사격은 금방 포탄이 떨어지니 숨을 겨를이 없었다. 사격을 하던 미주리호가 환하게 불을 밝힌 장면이 떠오른다. 포항 시내로 포탄이 날아가는 소리, 시내에 떨어져 터지는 폭음까지 생생하게 들었다. 어린 나이에 전투 장면을 실제로 목격한 것이다.홍 : 가족들은 어디로 피난을 갔는지 궁금합니다.이 : 포항이 함락된 후 미군이 초토화 작전을 전개했다. 그때 우리 가족은 연일 쪽으로 갔다. 식량이 모자라서 피난도 오랜 기간 버틸 수가 없었다. 모두가 가난한 시절임에도 피난민을 돕던 연일 주민들이 생각난다. 자신들의 음식을 나눠주던 고마운 이들이었다. 너나없이 힘들었고 정말 피폐한 때였다.홍 : 어린 시절 마음의 상처가 컸을 것 같습니다.이 : 포항 시내로 돌아오다가 형산강 다리에서 시체 한 구를 봤다. 민간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 포항은 피해가 심각했고 거리마다 고아들이 가득했다. 북한군들은 퇴각하며 불을 지르고, 미군은 소이탄을 쏴 도시를 불태웠다. “찌익~찌익~” 하는 소리가 두려웠다. 당시 포항은 대부분 목조건물이었으니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때 미군 부대와 함께 목사들도 왔다. 포항제일교회(현 소망교회)는 폭격을 맞지 않았는데, 그 모습이 미국 ‘타임’지에 실렸다. 미군이 교회 십자가를 보고 폭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쟁 이후에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이대공1941년 포항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포항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20대 중반에 서울·인천에서 석유곤로와 야구 배트 등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했다. 1967년 포항으로 돌아와 양송이 재배·가공업을 하다가 1969년 포항제철에 입사해 홍보실장, 비서실장, 총무이사, 포항공대 건설본부장, 부사장을 거쳤다. 포항제철 건설 시기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24년간 제철보국의 신념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포항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이사장, 아름다운재단 이사,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포항지역발전협의회 이사장, 경상북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등을 맡았으며, 현재 재단법인 애린복지재단 이사장으로 있다.대담·정리 : 홍성식(경북매일신문 기자) /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8-01

연못 서쪽 5개 건물 아래 등서 1만8천여 점 우르르

대부분의 인간은 100년을 살지 못한다. 그러나 지적 호기심은 인간보편의 것이라서 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과거와 미래를 궁금해 한다.미래는 현재를 통찰함으로써 일정 부분 예측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이 살기 이전 시간인 과거는 어떤 방식으로 알 수 있을까?고문헌을 통한 해석, 입에서 입으로 이어져온 옛이야기의 채록과 종합 등 여러 가지 방식의 연구 형태가 있을 수 있다. 유물을 통해서 과거를 유추하는 것도 그중 한 방법이다.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매혹적인 궁원(宮院) 동궁과 월지가 어떤 모습이었고, 거기서 왕과 귀족들은 어떤 방식의 삶을 살았던 것인지 떠올릴 수 있게 해주는 유물들이 적지 않다.역사학계에 의하면 현재까지 동궁과 월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1만8천여 점이 넘는다. 월지와 주변 건물에서 나온 것이 1만 5천여 점, 발굴 조사가 진행된 ‘가 지구’에서 1천300점이 넘게 출토됐다고 한다.동궁과 월지에서 발견된 유물은 주로 연못 서쪽에 있는 5개 건물지를 중심으로 연못 안쪽 반경 6m 내외의 토양층에서 나왔고, 그 종류는 와전류, 용기류, 목재류, 토기류, 금속류, 철제류, 석제류, 동물뼈 등으로 다양하다고 알려져 있다. 연못 속 유물들, 1974년 첫 모습을 드러내다그렇다면 통일신라의 높은 미적 감각과 예술성을 보여주는 동궁과 월지의 유물들은 언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까. 땅 속에 그 형상을 감추고 있던 각종 유물이 1천 년 세월을 뛰어넘어 환한 햇살 아래 나타난 것은 1974년이다.그 요약된 과정을 이상준의 논문 ‘동궁과 월지 조사 연구 현황과 과제’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동궁과 월지) 유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은 1971년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 수립되면서부터다. 이 계획에는 경주시의 사적지를 15개 지구 단위로 구분하고, 이중 ‘월성지구’ 개발에 안압지, 계림, 반월성을 포함하였다. 안압지는 준설 및 개수, 조림, 토지 매입이 주요 사업 내용이었는데 발굴조사는 사업에 포함되지 않았다.당시에는 연못 발굴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월성을 발굴해 장기적으로 궁성을 복원하고자 하였다. 1974년 드디어 연못 준설이 시작되었고, 이 과정에서 다량의 기와를 비롯한 유물들이 쏟아져 나옴에 따라 해당 공사를 중단하고, 이듬해인 1975년부터 1976년까지 발굴조사를 추진하게 되었다.발굴 결과 ‘동궁과 월지’의 정확한 규모와 호안의 축조 상태, 3개의 인공섬과 입수·배수 시설, 주변 건물지의 배치 구조 등이 확인됐다. 이후 발굴 결과를 토대로 1977년부터 1980년까지 복원·정비 공사를 실시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통일을 위한 전쟁 과정에서 넓은 영토와 보다 많은 자산을 축적한 신라는 7세기 중반 화려한 궁궐과 정원을 만들며 국력을 내외에 과시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축조된 것이 동궁과 월지다.그런 까닭에 거기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당시 신라 고위층의 생활방식과 주거양식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당대의 국교 역할을 했던 불교가 어떤 방식으로 예술화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줬다.동궁과 월지의 조사발굴은 1974년 이후 쭉 이어졌는데 1980년엔 연못 서쪽 호안에 접해 세워졌던 5개의 건물터 중에서 3개를 복원했고,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는 초석을 복원해 노출시켰다.한국문화유산답사회에 따르면 이 유물들은 당시 왕과 군신들이 이곳에서 잔치를 벌일 때 못 안으로 빠진 것과 935년 신라가 멸망해 동궁이 폐허가 된 뒤 홍수 등 천재로 인하여 못 안으로 쓸려 들어간 것, 그리고 신라가 망하자 고려 군대가 동궁을 의도적으로 파괴하면서 못 안으로 물건들을 쓸어 넣어 버린 것 등으로 추정된다.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발행한 책 ‘신라의 유적과 유물’에도 동궁과 월지의 유물 출토 과정과 실재했던 건물에 관한 내용이 간략하게 설명돼 있다.“1975년 안압지(월지) 준설공사 중에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면서 2년에 걸쳐 실시된 발굴조사를 통해 동서200m·남북180m에 이르는 대형 연못과 대형 건물지군이 확인됐으며, ‘월지’명 유물들과 ‘의봉사년개토(儀鳳四年皆土·의봉은 당나라 연호로 의봉사년은 679년에 해당)’명 기와 등이 출토됐다.이밖에 태자와 그 가족들이 거처하는 전각과 동궁 예하 궁아들, 만수방과 같은 건물들이 거기에 존재하였다. 임해전의 정문은 임해문으로 추정되고, 또 동궁에 인화문이 있었으며, 안압지에서 발견된 목간에 보이는 여러 문들도 거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된 유물은 신라 번성기 고위층의 생활상 보여줘그렇다면 신라가 통일 이후 전성기를 누리기 시작한 시기에 조성된 동궁과 월지에선 어떤 유물들이 나왔을까?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최근 발간한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동궁과 월지의 유물들 중 가장 많이 출토된 것은 와전류(기와 종류)로 주로 서편 건물지 아래 연못 바닥면에서 수습됐다고 한다.기와편에 보이는 문양의 종류는 100여 종이 넘고, 전돌 역시 20여 종에 달한다는 것이 이어지는 설명.그것들 외에도 치미편, 귀면와, 이형와 등 5천700여 점이 출토됐다는데, 출토된 유물 중에서 보상화문 전편에 음각된 문양전을 통해 제작 연대를 추정할 수 있었고, 또 암키와 등 문양에 양각으로 앞서 말한 ‘의봉4년개토’라 새겨진 명문 기와를 확인하면서 제작 연대를 알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동궁과 월지 발굴조사에선 기와류와 함께 각종 토기와 자기, 금속과 나무로 만들어진 유물도 상당수 나왔다.돌베개가 출간한 ‘답사여행의 길잡이-경주’에는 동궁과 월지 출토 유물 중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것 몇 가지가 소개돼 있다.이 책의 설명에 의하면 동궁과 월지에서 출토된 불상들은 7세기에서 10세기 초에 만들어진 불상들로 통일신라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이 가운데 ‘금동아미타삼존판불’의 본존은 화려한 연꽃의 2중 대좌 위에 설법인을 하고 당당히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 좌우에는 협시보살이 허리를 한껏 휘어지게 하고 서 있다.본존과 보살에 별도의 두광이 있고 이를 감싼 큰 광배가 전체를 연결하고 있어서 완벽한 삼존 구도를 느낄 수 있는 높이 27㎝의 이 판불(板佛·동판 등에 새기고 채색한 불상)은 통일신라 전기의 불상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금동초심지가위’도 이채롭다. 당시 신라 왕족과 귀족들의 기품을 보여주듯 초의 심지를 자르는 데 썼던 길이 25.5㎝의 이 가위는 잘린 심지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날 바깥에 반원형의 테두리를 세웠고, 화려한 당초무늬 장식까지 갖췄다.이외에도 당나라의 제작 기법을 따른 ‘칠기 연꽃봉오리 장식’과 해학과 익살이 느껴지는 도깨비가 새겨진 ‘귀면와’, 고대 유물 가운데서는 보기 드문 나무로 만든 주사위(주령구) 등도 동궁과 월지에서 모습을 드러낸 귀한 유물들이다.이 가운데 주령구(酒令具)는 신라인들의 술자리 놀이방식을 어렴풋이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 흥미롭다. ‘위키백과’는 주령구를 이렇게 설명한다.“1975년 경주 동궁과 월지에서 출토된 정사각형 면 6개와 점추이 육각형 면 8개로 이루어진 14면체 주사위다. 정사각형 면의 면적은 6.25평방센티미터, 육각형 면의 면적은 6.265평방센티미터로 확률이 거의 14분의1로 균등하게 돼있다. 재질은 참나무다. 각 면에는 다양한 벌칙이 적혀 있어 신라인들의 풍류를 보여주고 있다.”실제로 발굴된 주령구에는 재밌는 벌칙(?)들이 쓰여 있어 신라 왕과 귀족들의 주석(酒席)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노래가 없더라도 춤을 춘다’ ‘다른 사람이 놀려도 화내지 않는다’ ‘술 세 잔을 단숨에 마신다’ ‘간지럼을 태우더라도 참는다’ 등 주령구에 적힌 문구를 볼라치면 1천 년 전 신라 사람들 역시 오늘날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신라 동궁과 월지의 본래 모습 제대로 재현하려면…앞서 언급된 논문 ‘동궁과 월지 조사 연구 현황과 과제’를 쓴 이상준은 “발굴 당시의 모습을 알지 못하는 일반인들은 현재의 모습이 동궁과 월지의 전부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 당시에는 그 권역이 지금보다 훨씬 범위가 넓었고, 수많은 전각들이 즐비한 웅장한 모습”이었다고 말한다.이에 덧붙여 그는 동궁과 월지가 가지는 역사 속 위상을 되찾고, 제대로 된 모습을 되찾기 위해서는 ‘기존에 생산돼 있는 고고 자료에 대한 철저한 분석’ ‘원래 범위에 대한 보다 철저한 확인’ ‘용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수로 조사·연구’ ‘주차장지를 비롯한 남쪽 지역에 대한 재발굴’ 등이 필요하다고 조언하고 있다.이는 비단 동궁과 월지 관련 유물의 조사발굴만이 아닌, 다른 지역 역사 유적에 대한 조사와 발굴을 진행하는 과정에서도 귀담아 들을 가치가 충분한 지적일 듯하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7-28

“제철공장이 들어서기 전에는 영일만에 밍크고래가 많았지”

1949년 구룡포 구평리에서 태어난 김정환 씨는 전복, 해삼 등을 잡던 머구리배(잠수부가 바다 밑에서 조개 등을 잡는 배)를 타다가 18세에 포경선을 탔고, 21세에 장생포로 건너가 줄곧 고래를 잡았다. 포경선에서 조리사부터 시작해 3등 세라, 2등 세라, 1등 세라를 거쳐 갑판장까지 했다. 김도형(김) : 어떻게 포경선을 타게 되었는지요?김정환(환) : 아는 사람이 소개해주더군. 마침 한 자리가 비어 있었지. 3년 정도 구룡포에서 목선을 타면서 일을 배웠는데, 철선을 타야 돈을 많이 벌 수 있어서 장생포로 갔어. 목선과 철선은 수입에서 차이가 꽤 났거든.김 : 구룡포에서 포경선을 탈 때 어디로 다녔는지요?환 : 북쪽으로는 호미곶 지나서 강구, 축산으로 다녔고, 남쪽으로는 양포, 감포로 다녔지.김 : 과거에 영일만에 밍크고래가 많았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어땠나요?환 : 제철공장이 들어서기 전에는 영일만 쪽에 밍크고래가 많았지. 감포, 호미곶, 칠포, 죽변에도 꽤 있었고.환 : 장생포에서 철선 탈 때는 어디로 다녔는지요?환 : 2월에 군산 어청도로 갔고, 5월이 되면 동해에서 움직였지. 그러다가 다시 전라도 가서 조업했고, 여름이 되면 나가수(참고래) 같은 큰 고래를 잡으러 동해로 왔지. 울릉도, 독도 쪽에 100자(30m)짜리 나가수가 나타났거든. 서해 쪽으로는 처음에 어청도를 다녔는데 거기가 전진기지였던 셈이지. 그다음에 흑산도로 갔고, 백령도에도 갔는데 3년 정도 지나니 못 오게 하더군. 그래서 항구에는 못 들어가고 그 근방에서 고래를 잡았지. 격렬비도 근처에도 갔고 고래 추격하느라 산둥반도 가까이 갔는데 중국에서 간섭을 안 하더군. 중국 배를 ‘짱구리선’이라 불렀는데 근처에 가면 연탄 냄새가 났어.김 : 고래 특성을 얘기해주신다면.환 : 밍크고래는 이것저것 다 잘 먹는데 나가수는 ‘곤지(새우 새끼)’만 먹어. 그래서인지 몰라도 밍크고래보다 나가수가 맛이 좋지. 12월이 되면 돌고래가 북쪽에서 어장 쪽으로 붙어서 내려오는데 전복, 해삼을 먹는다고 하더군. 1월이 지나면 부산 앞바다를 지나 대마도 쪽으로 간다고 들었어. 우연히 작은 돌고래가 잡혀서 먹어봤는데 맛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 껍질이 두껍고 전복처럼 쫀득쫀득하지. 돌고래는 참 귀해. 텔레비전에 나오는 돌고래는 ‘곱시기’라고 하는데 뱃사람이 말하는 돌고래와는 달라. 솔피(범고래)라고 있는데, 이놈은 밍크고래나 곱시기도 잡아먹어. 대단한 놈이지. 멀리서 솔피가 나타나면 나가수나 밍크고래, 곱시기는 도망가버려. 몇 번 잡아봤는데 일고여덟 마리가 떼지어 다녀. 수놈은 한 마리뿐이야. 돛대지. 아주 커. 나머지는 암놈이고. 솔피 한 놈이 밍크고래를 잡으면 그 주변으로 다른 놈들이 빙 둘러서서 살을 이빨로 물어뜯어. 밍크고래가 바다 밑으로 내려가면 안 되니까 한 놈은 밍크고래 밑에서 떠받치고 있고. 솔피 무리가 나타나서 총을 쏘아 한 마리 맞으면 바다에 피가 흥건할 거 아냐. 그런데 다른 솔피들이 도망을 안 가고 그 옆에 붙어 있어. 그러면 포수가 또 총을 쏘게 돼. 솔피는 바다의 왕이지.김 : 고래가 등장하는 영화를 보면 망통에서 쌍안경으로 고래를 관찰하는데 실제로는 어떻습니까?환 : 쌍안경으로는 안 되고 두 눈으로 살피지. 경험이 있어야 하고 시력이 좋아야 해. 고래는 숨 쉬러 물 위로 한 번 올라오면 서너 번 더 올라와. 망통에서 그걸 보게 되면 고래 근처로 빠르게 접근해서 총을 쏘지. 고래도 사람처럼 허파로 숨을 쉬잖아. 처음에는 작살을 맞고도 잘 가다가 시간이 지나면 퍼지고 말지.김 : 포경선에서 선원들 사이에 역할 분담은 어떻게 했습니까?환 : 갑판장은 오래 앉아 있고, 기관장과 선장이 교대 근무를 하지. 세라는 두 시간씩 교대하고. 고래를 추격할 때는 갑판장이 마이크를 잡고 이쪽으로 가라, 저쪽으로 가라 지시해. 포경선에서는 포수가 대장인데 대개 오십이 넘어야 될 수 있어. 김 : 목선과 철선은 어느 정도 차이가 있습니까?환 : 구룡포 목선은 해승호가 15t, 영어호가 10t밖에 안 되고 속도도 느려서 멀리 못 갔지. 목선으로는 큰돈 벌기 힘들어. 철선은 60t에서 80t 정도에 속도도 빠르고 멀리 갔지. 내가 구룡포에서 목선을 탈 때 장생포에는 일본에서 소나를 도입한 철선 동방호가 한 해에 100마리 이상 잡았어. 그때는 철선 타는 게 하늘의 별 따기였어. 직장 다녀서는 그만큼 벌 수 있나. 턱도 없지. 또 목선은 배가 작아 배 위에서 고래를 깰 수 없으니 끌고 들어왔지(김정환 씨는 고래 해체를 ‘깬다’고 표현했다). 철선은 웬만한 고래를 배 위에서 다 깨는데 진짜 큰 고래는 어쩔 수 없이 와이어에 감아서 끌고 들어왔어. 고래를 배 위에서 깨서 운반선에 옮겨 보낼 때도 있었고.김 : 포경선 탈 때 수입은 어느 정도였습니까?환 : 구룡포에서는 월급 없이 수당으로 받았고, 장생포에서는 월급에 수당이 붙었지. 22자(6.6m) 넘으면 두 마리 계산을 했고. 장생포에서 포경선 타고 서해 다닐 때는 고래를 워낙 많이 잡아서 월급보다 수당이 더 많았지. 이따금 부수입도 생겼어. 포경선에서 고래고기를 절여놓았다가 장생포에 오면 뒷거래를 했지. 전라도 사람들은 고래고기를 잘 먹던데 거래는 안 하더군. 전라도 가면 그쪽 배 옆에 우리 배를 붙여서 우리가 잡은 고래고기하고 그쪽에서 잡은 가자미, 조개, 꽃게를 바꾸기도 했지.김 : 고래 가격은 어느 정도 되었습니까?환 : 15자(4.5m) 새끼 밍크는 150만 원에서 200만 원, 20자(6m)는 250만 원에서 300만 원 정도 했어. 요즘은 크기는 물론 선도나 껍질 두께에 따라 가격 차이가 나지.김 : 포경선이 다른 어선에 비해서는 안전하다고 하더군요.환 : 포경선은 노는 날이 많아. 비 오고 안개 끼면 앞이 안 보이니 바다에 나갈 수 없고, 파도가 높으면 배가 속도를 못 내고 위험해서 출어를 못 하지. 밤에도 보이는 게 없으니 움직일 수 없고.김 : 그래도 사고 위험은 있지 않을까요?환 : 나도 죽을 고비가 한두 번 있었어. 갑판장 시절에 포수가 총을 쐈는데 헛방을 했어. 키를 총 쏜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데 순간 그렇게 못 한 거야. 그러자 배 위에 허술하게 놔둔 큰 밍크고래가 한쪽 방향으로 밀려서 배가 확 쏠려버렸지. 빨리 키 풀어라 고함지르고 난리가 났어. 우와 겁나데. 또 한 번은 항구에 정박해둔 배에서 합선으로 불이 나 곤욕을 치렀지. 아무리 그렇다 해도 다른 배에 비하면 안전한 편이야.김 : 포경선 탈 때 추억이라 할까요, 한 토막 얘기해주신다면.환 : 벌이가 괜찮을 때 흑산도 가서 돈 좀 썼지. 흑산도가 뱃사람들의 수도 아닌가. 그때 한 세월 갔어. 추억이라고 하기엔 그렇고, 1970년 4월 서해 격렬비도 앞바다에서 간첩선 격침시킬 때 바로 옆에 있었지. 조명탄이 대낮처럼 하늘을 밝히고 정말 살벌했어.김 : 포경선 타면서 기분 좋았던 때는 언제입니까?환 : 뱃사람이야 고기를 많이 잡을 때가 가장 좋지. 나가수 같은 큰 고래를 잡으면 만선기를 달고 항구로 들어가지. 뱃고동 세 번 울리면서. 그래도 너무 많이 잡으면 지쳐. 고래는 무게가 있으니까. 전라도 가서 하루에 밍크고래 서너 마리 잡으면 몸도 힘들어. 고래 잡는 것도 힘들지만 그걸 배 위에서 다 깨야 하니 얼마나 지치겠어. 소금에 절여놨다가 운반선에 넘겨주는 일이 또 힘들어. 배에 기름도 넣어야 하고 얼음도 실어야 하고, 밤새 선원들이 그 일을 하다 보면 낮에는 꾸벅꾸벅 졸다가 배 옆으로 고래가 지나가도 모르지.김 : 포경 금지되고는 무슨 일을 하셨는지요?환 : 작은 작업선 타다가 형제들이 힘든 뱃일은 그만하라고 해서 철강 공단에 들어갔어. 배도 팔아치우고 용접 기술을 배워 한동안 잘했지. 10년을 못 채웠는데 IMF가 터져 공단에 일거리가 없는 거라. 공치는 날이 한두 달이 될지 몇 년이 될지 도무지 알 수가 있나. 얼마 갖고 있지 않은 재산은 자꾸 까먹고. 도저히 안 돼 사표를 내고 다시 배를 탔지. 시간이 좀 지나서 철강 공단의 그 회사에서 다시 일 좀 해달라고 연락이 왔는데 어떻게 다시 가겠어. 계속 배를 탔지.김 : 구룡포에서 포경선 탔던 분들 소식은 듣는지요?환 : 포수나 선장 하던 분들은 거의 돌아가셨고, 갑판장 하던 분들도 얼마 남아 있지 않을 거야.김 : 뱃일이 힘들 텐데 앞으로도 계속하실 겁니까?환 : 나이 들어도 놀 수야 있나. 지겨워서 놀지도 못해. 뱃일을 하는 데까지 해야지.대담·정리 : 김도형(THE OCEAN 편집위원)

2021-07-28

올 여름휴가문경어때요?

백두대간의 대야산 자락의 선유동계곡에 닦아져있는 선유동천 나들길은 신선(仙)이 노닐(遊)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란 뜻을 담고 있듯이 아름답고 계곡미가 빼어나 문경8경의 하나로 꼽히는 곳이다.계곡물이 투명하고 하얀 너럭바위와 계곡 양 옆에 펼쳐진 깊은 숲과 계류를 드리운 오랜 소나무들이 많아 한층 운치를 더해 주고 있다.선유동은 웬만한 가뭄에도 어린이들이 물놀이를 할 수 있을 만큼 항상 맑고 풍부한 계곡물이 흐르고 바닥이 암반으로 돼 있어 여름철 물놀이 장소로 제격이다.선유동천나들길은 제1코스와 제2코스로 나뉜다. 제1코스(선유동계곡)에는 칠우대, 칠우폭포, 선유칠곡(완심대, 망화담, 백석탄, 와룡담, 홍류천, 월파대, 칠리계)과 선유구곡(옥하대, 영사석, 활청담, 세심대, 관란담, 탁청대, 영귀암, 난생뢰, 옥석대), 학천정 등의 명소가 있다.제2코스(용추계곡)에서는 무당소, 용소암, 용추폭포, 월영대 등의 명소를 만나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갯길 ‘하늘재’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갯길인 하늘재는 옛길을 따라 형성된 작은 계곡과 월악산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어우러져 온전히 자연에 집중할 수 있는 힐링 여행지이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아달라니사금(阿達羅尼師今)’ 시대 기록에 의하면 하늘재는 서기 156년, 신라 아달라왕 3년에 북진을 위해 ‘계립령 길을 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와 신라의 대립이 정점을 이루면서 고구려 온달장군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하고,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로로 중요한 거점이 되기도 했다.하늘재는 흙길을 따라 산책로가 이어지는데 경사가 가파르지 않아서 천천히 걷기에 제격이다. 꽤 높은 지대이기도 하고 하늘을 거의 다 덮을 만큼 울창한 숲길이라서 여름에도 더위를 잊고 오롯이 자기를 돌아보며 걸을 수 있는 고갯길이다. 산행을 위한 도구도 굳이 필요하지 않다. 편한 운동화에 간단한 복장이면 그만.◇자연에서 힐링∼문경단산관광모노레일단산모노레일은 산악 모노레일로 능선을 따라 상부승강장까지 오르다보면 조령산, 주흘산부터 소백산까지 백두대간의 광활한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 상부승강장에 오르면 대기 온도가 5∼6도 정도 낮아 시원함을 바로 느낄 수 있다.8인승의 아담한 모노레일이지만 푹신한 시트와 안전벨트를 갖추고 있어 최고경사인 42° 구간을 지날 때는 마치 우주왕복선을 탄 기분마저 든다. 소요시간은 상행 35분, 하행 25분이 소요되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감상하다 보면 지루할 틈이 없다.단산 정상에 도착하면 다양한 즐길거리가 마련돼 있는데, 아이들이 좋아하는 모험시설인 챌린지 시설, 숲속썰매장, 캠핑러들을 위한 숲속캠핑장, 인생샷을 찍을 수 있는 하늘 쉼터, 그네포토존, 초승달포토존, 어린왕자 포토존이 있고 단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힐링올레길도 조성돼 있어 체력단련에도 으뜸이다. ◇힐링의 최고 장소 ‘문경새재·문경생태미로공원’그 옛날, 새들도 날다가 쉬어간다는 높고 험준한 새재는 가장 아름다운 옛길로 남아 있으며 특히 1관문에서 3관문까지 7km 황톳길을 청정한 공기를 마시며 맨발로 걸을 수 있어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각광 받고 있다.부드러운 황톳길은 계곡과 잘 어울리고 울창한 숲은 시원한 한여름 그늘을 제공한다. 길 옆 작은 도랑의 물소리를 들으며 느릿느릿 걷다보면 일상의 피로가 한 번에 풀릴 것이다.문경새재 내 새롭게 조성된 문경생태미로공원은 옛길박물관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개장 1년 만에 입장객 10만 명을 넘어선 인기 관광지다. 도자기 미로, 연인의 미로, 돌 미로, 생태 미로 등 4개 테마의 미로를 비롯해 유아체험 숲 놀이터, 생태연못, 전망대, 산책로 등 다양한 체험 녹지공간이 조성돼 있다.‘암행어사 출두요!’ 프로그램은 문경새재의 과거길이라는 콘텐츠에 익살스러운 도깨비의 스토리를 더한 모바일 체험게임이다. 이 프로그램은 문경새재를 넘어 과거시험을 치르러 가던 중 암행어사가 도깨비들의 장난으로 잃어버린 짐을 찾아가는 스토리로 진행된다.미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경새재 입구의 농특산물 판매장에서 판매하는 미션지도와 스마트폰이 필요하다. 미션지도는 3천원을 주고 구입해야한다. 미션지도는 유료이지만 한복을 입고 체험할 수 있는 한복 체험권이 동봉되고, 미션을 마치면 얻을 수 있는 농산물 상품권을 생각하면 오히려 저렴한 편이라는 생각이 든다.이 프로그램에선 도깨비를 연기하며 미션 진행을 도와주는 연기자들을 지역 내 전래놀이팀으로 꾸려 미션 상품인 농산물 상품권과 더불어 코로나로 어려운 요즘 시민과 함께 상생하는 구조를 이뤄냈다는 점도 칭찬할만하다.◇살아있는 자연학습의 배움터 ‘돌리네습지’돌리네(Doline)라는 지역명은 석회암지대에 생성된 접시모양의 움푹 파인 땅을 의미하며, 산북면 굴봉산에 위치한 문경 돌리네습지는 석회암 지역이지만 특이하게도 물이 풍부하게 고여 있어 한여름에도 마르지 않아 세계적으로도 매우 희귀하며, 국내에선 문경이 유일하다.일반적으로 습지는 강가, 시냇가 주변이나 해안가에 형성되며, 산 정상 부근에는 빗물이 빨리 빠져나가 습지가 형성되기 어렵다. 하지만 문경 돌리네습지는 석회암이 빗물에 용해되고 남은 점토질과 광물이 계속 쌓여 물이 잘 빠지지 않은 덕분에 웅덩이에 물이 고이면서 습지가 만들어졌다. 벼, 사과, 오미자 등 경작도 가능한 곳이 문경 돌리네습지이다.돌리네습지에는 습지 생태계, 초원 생태계, 육상 생태계가 공존해 731종에 이르는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수달, 담비, 삵, 구렁이 등 멸종위기야생동물과 꼬리진달래, 낙지다리, 틀통발 등 희귀식물까지 서식하여 혼자 여행도 좋지만 가족단위 여행에도 추천한다. 습지를 조용히 거닐며 해설사분의 생생한 이야기를 듣다보면 어느덧 돌리네 습지의 매력에 흠뻑 빠져든다.최근 전동차 운행이 시작되었는데, 전동차를 타고 둘레길을 따라가다보면 숲 속에 온전히 나 홀로 있는듯한 기분이 들며, 힐링이 배가 된다.◇가족 모두 즐거운 테마파크 ‘문경에코랄라’문경에코랄라는 문경석탄박물관과 가은오픈세트장이 에코타운과 야외체험시설 등의 새로운 시설 및 다양한 콘텐츠로 만나 테마파크로 새롭게 태어났다.백두대간 생태자원이라는 핵심 콘텐츠와 친환경 녹색문화의 중심 문경에서 영상·문화 콘텐츠를 결합한 생태·녹색에너지·환경 테마의 휴양문화공간으로 조성돼 모든 연령층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 콘텐츠 테마파크이다.에코스튜디오는 자연생태 테마파크인 에코팜과 체험형 영상미디어 스튜디오인 미디어센터로 구성된다. 자이언트 포레스트는 동화마을을 테마로 한 놀이시설이며, 에코랄라의 핵심 시설인 에코타운에는 360° 원형 스크린과 특수조명, 천정오브제 등을 사용한 영상쇼가 펼쳐지며, 백두대간의 절경과 생명력 넘치는 숲 등을 표현한 다양한 미디어아트 전시도 진행되고 있다.이외에도 영상제작, 촬영, 편집의 모든 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촬영스튜디오와 친환경 농법에 대해 알아보는 에코팜, 어린이 놀이공간인 키즈플레이 등도 조성돼 있다.자이언트 포레스트는 ‘에코랄라에 거인이 살고 있다는 창작동화’를 기반으로 다양한 놀이시설을 조성해둔 야외체험시설이다. 거인광장, 숲마을 동물친구들, 종이배 연못, 거인의 숲 등 귀엽고 다채로운 조형물이 조성돼 있다.석탄박물관 옆에는 탄광촌이 있어 당시 광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탄광촌에 개관한 은성사진관에서는 70~80년대 교복 등 의상을 대여해 입어볼 수 있고, 셀프사진촬영과 즉석인화도 가능하다.은성갱도 실감체험관은 석탄을 캐던 실제 갱도 공간에 홀로그램, 증강현실 등 첨단 기술과 창작 뮤지컬이 합쳐져 탄생한 곳으로, 마치 광부들과 함께 탄광 속을 탐험하는 것과 같은 생생함을 느껴볼 수 있다. ◇이색 여행지 ‘잉카마야박물관’푸르른 산세가 아름다운 문경의 길을 따라 걷다보니 조용한 시골마을에 발길이 멈춘다.이곳은 전 볼리비아 대사 부부가 중남미 문화를 널리 알리기 위해 개관한 잉카마야박물관으로 박물관 입구에는 고대 잉카제국의 옛길을 뜻하는 ‘Camino Real’이라고 글씨가 써져 있는데 이 길은 잉카문명의 후예인 인디언이 만든 그 길은 남미 안데스 산맥을 따라 잉카제국의 수도 페루를 거쳐 볼리비아∼칠레∼아르헨티나를 잇는 5천㎞에 달하는 도로망이며, 문경 역시 옛날 한양으로 가는 중요한 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박물관 곳곳에는 외교관 생활동안 모은 유물들이 전시돼 있어 잉카마야 문명에 관심있거나 새롭게 알고 싶은 분들 방문해보길 권한다.박물관 밖에는 시원한 나무 그늘을 벗 삼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캠핑장도 운영되고 있다.◇역사 탐방 ‘운강 이강년 기념관·박열 의사 기념관’운강기념관은 대한제국시대 구국의 일념으로 의병을 일으켜 빛나는 승리를 거둔 도창의대장 운강 이강년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곳이다.2002년 4월에 개관한 기념관은 선생의 숭고한 위업을 재조명하고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기념관은 유물전시관, 사당, 관리사 등으로 구성돼 있으며, 유물전시관에서는 선생의 의병활동 연보, 교지, 간찰, 만사 및 관련 유품이 전시돼 있고, 사당에는 영정이 모셔져 있다.애국애족의 국민정신을 고취하는 운강기념관은 고난의 시대에 민족을 떠 받쳐 온 역사의 저력을 담아내고 있다1922년 2월 박열은 ‘일제’라는 권력에 대해 강한 저항 정신을 담은 한편의 시를 청년잡지에 기고했고, 이를 읽은 가네코 후미코는 깊이 동감하며 함께 인연을 맺게 됐다.이후 두 사람은 한국의 유학생 및 일본인 사상가들과 함께 흑로회·불령사 등의 사상단체를 조직하는 한편, 제국주의의 부당성과 ‘천황제’의 악랄함에 대해 사상잡지 ‘후테이센징[太い鮮人]’·「現社會」등을 발간, 통렬하게 비판하고 그 과정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일왕 부자와 지배계급을 폭살시킬 계획을 은밀히 추진하고 있었다.‘대역사건’으로 일제의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본인이었으며, 적진 한복판이라 할 수 있는 일본 동경에서 온몸으로 일본제국주의와 ‘천황제’에 맞서 싸운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인 청년과 일본인 여성이 함께 활동을 이어 나갔다는 점에서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박열의 동반자 가네코 후미코는 왜 조선인의 편에 섰을까? 박열의사 기념관에 와서 이야기를 만나보면 인생관을 새롭게 접해볼 수 있다./강남진기자 75kangnj@kbmaeil.com

2021-07-28

“소극적 누나와 적극적 동생의 콜라보 사진에 영양을 담아요”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동서상가 3층 ‘단듸랩’. 있어 보이는 이름 만큼이나 아기자기한 또는 이쁘게 꾸며진 스튜디오로 생각했다. 실상은 오래된 건물에 오래된 화장실, 바로 옆에 아이들을 위한 작은 교습소가 있는 곳이었지만 말이다. 이곳에 현실남매 허진희(32)·허진수(30) 씨가 꿈을 키워가고 있다.“조금 스튜디오가 그렇죠? 영양에서 스튜디오를 구할 때, 군청 주무관님과 함께 돌아다녔지만 한정된 예산에 넓은 장소로 구할 수 있는 곳이 많이 없었어요. 그래도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생각하면, 나쁘지는 않아요.”‘건물 외관과 스튜디오가 다르다’는 기자의 말에 웃으면서 대답한 진희 씨의 말이다. 실제로 ‘단듸랩’의 스튜디오는 외관과 달리 흰색 배경을 바탕으로 넓직하게 꾸며져 있었다. 사진을 위한 배경 공간과 아기자기한 탁자 등 여느 사진관과 큰 차이는 없다.‘단듸랩’은 ‘단디해라(제대로 해라)’라는 경상도 방언에서 따왔다. ‘단듸랩’은 가족사진과 단체사진, 증명사진 등 인물사진부터 제품사진, 스냅샷, 광고편집 디자인 등 전문 사진촬영·편집을 제공하는 스튜디오다. 현재는 인물사진보다는 제품의 스냅샷 등을 주력으로 하고 있다고…. “저희가 어려서 그런지 영양분들이 잘봐주시는 것들도 있더라구요. 물론 제품의 스냅샷과 광고편집 디자인 같은 것은 지금까지 영양을 비롯해 경상북도에 흔하지 않은 사업이었어요. 그래서인지 대부분 의뢰해주시는 분들이 만족해주시더라구요. 저는 감사할 뿐이죠.”‘단듸랩’의 작은 성공에는 동생 진수 씨의 몫도 크다. 누나인 진희 씨의 말로는 ‘인싸(인사이더)’의 교과서라는 진수 씨다. 진수 씨에 따르면, 우선 하루 커피 두 잔은 기본이다. 동네 형님(?)들과 함께 하는 축구 모임은 필수고 골프도 수준급이며, 지난해에는 산나물 축제위원회 추진위원도 맡았다. 처음에는 난생 처음 보는 외지인이 나타났으니 “저 녀석들은 누구야?”라는 텃세 아닌 텃세를 겪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가 형님이다. 사실은 아버지뻘의 나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농사짓는 형님’, ‘비료 장사하시는 형님’ 등 영양군 곳곳에 형님들이 포진해 있으니 사진과 디자인 관련되는 일만 있으면 무조건 ‘단듸랩’이 추천 대상 1순위인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요즈음 고추농사도 시작했어요. 500평 정도 되죠. 아! 물론 아는 형님께서 추천해주신 거죠. 매일 새벽에 나가서 고추를 돌보고 있어요. 벌레가 먹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고, 농작물의 수확이 좋지 않을까 걱정을 하죠. 애착이 가기도 하고, 이미 시작했으니 결과가 좋아야죠.”동생 진수 씨의 고추 농사 이야기에 누나 진희 씨는 “동생은 이미 영양 사람 다 됐어요”라고 했다. 그 말대로, 영양에서 2년을 넘기지 않은 진수 씨의 얼굴은 검게 타 있었다. 손가락 역시 도시 청년의 그것은 아니었다. 여기저기 그을려지고 상처가 있는 손가락이었다. □꿈이 현실로… 영양에서 차근차근현실남매인 허진희 씨와 허진수 씨는 서울 인근인 고양시 출신이다. 영양에는 어떠한 연고도 없다. 이들이 시골 중의 시골인 영양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무엇일까.진희 씨는 서울 상수동과 여의도 벤처기업에서 마케팅 업무를 했다. 출퇴근을 위해서는 매일 1시간 이상 지하철에서 보내야 했던 시간이었다. 특히, 마케터로서의 일 자체는 즐거웠지만, 자신이 부품 취급을 당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미래가 불안정하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고, 그로 인해 우울해지기까지 했다. 그러던 가운데, 떠오른 곳이 영양이었다.“물이 너무 깨끗하고 공기도 좋잖아요. 분위기도 좋고요. 늘 생각했던 것이 영양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거였죠. ‘단듸랩’도 마찬가지에요. 옛날부터 사진을 취미 이상으로 했어요. 회사 생활을 하면서 제품 사진 정도는 찍었으니 취미 수준은 아니었죠. 다만, 소극적인 성격이 문제였어요. 그래서 동생이 필요했구요.”소극적인 진희 씨와는 달리 적극적인 진수 씨는 남매의 사업에는 적격이었다. 대학에서 체육과 관광을 전공했고 천성이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며, 단체에 소속되어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심지어 과일 장사, 유아 체육 강사, 스키강사, 회사 영업사원 등 그동안 해온 거의 모든 일이 활달하고 유쾌하지 않으면 못하는 일이었다. 어찌보면 누나와의 사업 궁합은 좋은 셈이었다. 가족 관계는 모르겠지만 말이다.“매일 싸워요. 늘 사소한 문제로 투닥거리죠. 그래도 일하는 것에는 완벽해요. 서로 조율해야죠. 누나도 마찬가지고 저도 목표가 있거든요.”진수 씨의 말대로 현실남매의 목표는 영양에서 기반을 잡는 것이다. 미래를 위한 수입을 안정화하는 것. 그래서 진희 씨와 진수 씨의 사업도 다각화 중이다.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가 통한 것일까. 처음 1년 1천500만원으로 잡았던 매출이 매달 평균 400만원의 매출로 껑충 뛰었다. ‘단듸랩’이 생각하는 사진 콘셉트를 영양분들이 받아들이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기분 좋은 오산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하지는 않는다. 이제 32살과 30살의 청년이 영양에서 미래를 꿈꾸기 위해서는 말이다.“고추 농사를 시작한 것도 목표를 이루기 위한 것이죠. 이제는 영상 쪽으로 발을 넒히고 싶어요. 준비도 하고 있구요. 또 관광과 관련한 일도 생각하고 있어요. 대체적으로 지역의 축제는 농산물 판매에 초첨이 맞춰져 있어요. 물론 저도 그것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축제 자체를 즐길 수 있고, ‘꼭 오고 싶은 영양’을 모토로 지역 관광을 활성화하고 싶어요. 독특한 콘텐츠로 무장하면 분명히 가능할 것 같아요. 영상 디자인이 그 중의 하나일 수도 있구요.” □영양에 청년들이 많았으면 좋겠어요경북의 오지라고 불렸던 영양에서 기반을 만들어가고 있는 허진희 씨와 허진수 씨. 이미 두 사람은 스스로를 영양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다.“아직 서울이나 수도권에서는 영양에 대해서 잘 몰라요. 저희가 택배를 주문한 적이 있는데, 택배 기사분이 전화가 오더라구요. ‘강원도인데 단듸랩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씀이셨죠. 택배기사분이 경북 영양을 강원도 양양으로 착각하신 거에요. 친구들도 영양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도 같구요. 그런데 저희가 이곳에 내려오고, 영양에 다녀갔던 친구들이 많아요. 그리고 영양의 자연과 주위를 보고 반한 친구들도 많구요.”그래서 진희 씨와 진수 씨에게 물었다. ‘영양으로 온 것에 대해 만족하고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이들의 대답은 단호했다.“만족하고 있어요. 물론 아직 넘어야 하는 산이 많은 것도 사실이죠. 그래서 더욱 노력하고 있는 것이구요. 서울의 남자친구에게 이야기를 했어요. 이후의 일이지만, 주말부부도 생각하고 있구요. 근본적으로는 남자친구와 결혼하게 되면, 영양에 살고 싶어요.” “저도 여자친구에게 영양에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여자친구의 조건이 연봉 5천만원이더라구요.(웃음) 처음에는 불가능할 것 같았지만, 지금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더 커요. 농사를 짓고, 앞으로 계획하는 일이 제대로 된다면 분명히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마지막으로 진희 씨와 진수 씨에게 질문을 던졌다. 영양에 청년들이 많아졌으면 하냐고 말이다. 이들은 말했다.“당연하죠. 청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아는 사이에 동업은 절대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그것도 현실남매라면 오죽하랴. 하지만 서로를 밀어주고 끌어줄 수 있다면 ‘동업’도 나쁘지는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각자가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시너지 효과를 내고 하나가 되면, 또 다른 사업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 진희 씨와 진수 씨 남매처럼 말이다. 처음에는 도시 생활에 대한 염증으로 시작한 영양 생활. 그저 영양의 자연이 좋고, 행운이 가미되었던 귀농 생활. 하지만 스스로가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까./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1-07-27

집콕생활에 지쳤다면?은어축제 접속하세요!

봉화은어축제는 문화체육관광부 지정 5년 연속 우수축제로 선정됐으며, ‘대한민국 축제 콘텐츠 대상’에서 2020년 축제관광부문 대상, 2021년 비대면 축제 대상을 수상하는 등 매년 50여만 명이 찾는 대한민국 대표 한여름 축제이다.지난해 코로나19로 촉발된 언택트 문화의 확산에 따라 ‘온라인’ 축제로 개최돼 축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올해로 23번째를 맞은 봉화은어축제는 지난해에 이어 두번째 ‘온라인’으로 개최한다. △ ‘내 곁에 ON, 봉화은어축제’봉화군이 주최하고 (재)봉화축제관광재단이 주관하는 제23회 온라인 봉화은어축제는 ‘내 곁에 ON, 봉화은어축제’라는 주제로 31일부터 8월 8일까지 봉화은어축제 전용 온라인 채널 ‘봉화은어TV’와 축제 홈페이지, SNS 등 다양한 플랫폼을 기반으로 열리게 된다.올해 주제는 코로나19로 지친 일상에 봉화가 주는 선물로 ‘온라인을 통해 당신 곁으로 찾아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전 국민들에게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희망과 긍정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봉화군과 (재)봉화축제관광재단은 최근 코로나19의 확산세가 꺾이지 않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개최가 확정된 봉화은어축제는 당초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추진하고자 노력해왔으나 지역주민들과 관광객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 비대면 온라인으로 개최하기로 최종 방침을 정했다.따라서 축제의 핵심 콘텐츠인 은어 반두잡이와 맨손잡이 체험이 전격 취소됐으며 이와 관련된 구이체험과, 물난장 놀이터, 전시행사 등 각종 오프라인 행사들도 취소 또는 대폭 축소돼 운영된다. 대신 주무대를 온라인으로 옮기는 만큼 한층 강화된 온라인 프로그램과 이벤트로 관광객들의 아쉬움을 달랠 계획이다. △ LIVE로 만나는 온라인 콘텐츠지난해 처음 도입돼 높은 판매고를 올리며 큰 호응을 얻은 은어 판매 드라이브 스루는 올해 축제 개막에 앞서 7월 24일부터 판매를 시작,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구입이 가능하다.차량에 탑승한 상태 그대로 은어를 구매할 수 있어 간편하며 무엇보다 관광객 밀집을 예방할 수 있어 방역에도 효과적이다.판매가격은 kg당 1만5천원으로 시중에서 구입하는 것보다 저렴한 가격에 은어를 맛볼 수 있다. 올해는 즉석에서 만든 은어구이와 튀김을 함께 판매함으로써 다양한 은어요리를 맛있고 간편하게 즐길 수 있다. 은어 판매 드라이브 스루는 다음 달 15일까지 계속될 예정이며 행사 물량 소진 시 조기종료 될 수 있다.유튜브 채널 봉화은어TV에서는 축제기간 동안 매일 오후 2시 30분에 봉화은어축제를 주제로 다양한 온라인 프로그램이 전개된다.유명 쇼호스트, 개그맨과 함께 라이브로 만나는 은어 드라이브스루 판매 ‘드라이브 커머스’, 전문 요리사가 전하는 명품 은어요리 소개 코너 ‘수박향 은어! 요리 클라쓰’가 방송돼 봉화은어축제를 다채롭게 즐길 수 있다.또 봉화의 유명산을 배경으로 최소한의 캠핑 도구들만 이용해서 펼쳐지는 ‘와일드 캠핑 브이로그’와 최신 트렌드인 차박(자가용 이용 캠핑)으로 봉화에서 하루를 만끽하는 ‘그린 봉화, 차박 봉박’ 등 1급 청정지역인 봉화의 자연을 알리는 프로그램도 준비돼 있어 캠핑 애호가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8월 6일부터 8일까지는 코로나19로 지친 일상에 선물을 준다는 온라인 봉화은어축제의 취지에 맞게 코로나19로 고생하는 의료진들을 응원하기 위한 ‘LIVE IN 봉화, 덕분에 콘서트’가 매일 오후 7시 30분 ‘봉화은어TV’라이브를 통해 무관중 콘서트로 진행된다. △ 남녀노소 즐기는 온라인 콘테스트축제 홈페이지와 SNS에서는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 가능한 온라인 이벤트가 펼쳐진다.은어축제를 주제로 한 창작 만화 그리기 대회인 ‘봉화 4컷 웹툰 그리기 대회’와 제2회를 맞는 ‘I LOVE 봉화 랜선사생대회’가 개최되고 축제 마지막 날 온라인 시상식을 통해 소정의 상품도 증정한다.이 외에도 ‘은어 숏폼 챌린지’, ‘봉화은어축제 6행시 짓기’, ‘알쏭달쏭 초성퀴즈’, ‘은어축제 틀린그림 찾기’ 등 은어축제만의 특색 있는 이벤트를 통해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할 계획이다.자세한 소개 및 참가방법은 봉화은어축제 공식 홈페이지(http://www.bonghwafestival.or.kr)를 통해 확인 가능하다.엄태항 봉화군수는 “지난해 좋은 평가를 받았던 ‘온라인’ 봉화은어축제의 성공적인 개최 경험을 토대로, 올해는 보다 새롭고 참신한 온라인 프로그램과 이벤트로 집에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축제를 만들겠다”며 “변화하는 시대의 요구에 발맞춰 봉화은어축제의 변화와 도전을 바탕으로 새로운 축제문화를 선도해 나갈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하겠다”고 밝혔다./박종화기자 pjh4500@kbmaeil.com

2021-07-27

12년 공직생활의 끝자락… “아직도 마무리 할 일 많아”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달성군에는 여전히 유효하다. 2010년 17만6천여 명이었던 달성군 인구는 전국적 인구 절벽 속에서도 10년 동안 9만 명이 늘어나 6월말 현재 26만 명을 넘어서며 변화와 도시성장을 증명하고 있다. 2010년 3천611억원이었던 군 예산도 지난해엔 1조113억원으로 3배 가량 커졌다.2010년 첫 취임한 이래 11년째 군수실을 지키고 있는 김문오 군수는 행사가 없는 시간이면 집무실 CCTV화면을 집중한다. 비슬산 대견사와 송해공원, 도동서원, 사문진 등 달성군의 문화 관광 8개 거점 지역을 실시간 모니터하는 것이다. 방송국 앵커 출신에 3선 단체장 경력의 김 군수. 그의 달성자랑은 막힘도 거침도 주저함도 없이 숨 가쁘다. -3선 민선군수로 이제 임기가 10달도 못 남았다. 남은 임기동안 어떤 일들에 집중할 생각인가.△나는 아직 할 일이 많다. 비슬산 케이블카 건설, 송해기념관 준공, 도동서원 누리길사업, 다사 행정복합타운 건설과 현풍의 충혼탑 재건립, 화원읍사무소 리모델링, 여성문화복지센터 마무리 등 벌여놓은 일들을 해야 한다.-누가 달성 군수가 되더라도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김문오 군수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 남아있나.△그것들이 모두 내가 해야 할 일들이다. 왜냐하면 모두 내가 벌였던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할 일들이 끝이 없다.-김 군수의 재직기간동안 달성군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김 군수가 일을 많이 한 것은 전국적으로도 소문이 났다. 스스로 평가해 본 적이 있나. 자랑을 한 번 해 달라.△돌아보니 지난 11년은 달성군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변화를 이뤄낸 시간이었던 것 같다. 대구 변방의 존재감 없던 달성군은 이제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고 이제는 대구를 넘어 대한민국의 중심 도시로 당당히 자리매김해 나가고 있다고 자랑하고 싶다. 그야말로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변하는 발전을 거듭하며 달성의 위상을 드높였다. 지난해 달성군은 개청 이래 전국 82개 군 단위에서는 유일하게 예산 1조원을 돌파했고 전국적인 인구 절벽의 위기 속에서도 조출생률 전국 2위, 합계 출산율 전국 15위를 기록하며 줄어가는 대구 인구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됐다고 자부할 수 있다.-지난달엔 김 군수가 거버넌스 지방정치대상 최우수상을 받는 등 달성군은 도시 발전만큼 각종 상도 많이 받은 것으로 안다. 상이란 상은 죄다 받으려 하는 욕심 많은 군이라고도 하더라.△최근 고용노동부로부터 전국 지방자치단체 일자리대상 우수상을 받았고 지난달 행안부의 국가재난관리 유공 대통령상과 서울국제관광박람회에서 최우수상을 받는 등 올해에만도 중앙행정기관 등으로부터 13개의 상을 받았다. 지난해엔 42개나 된다. 모두 군민과 직원들이 열심히 일 한 결과일 것이다.-군수로서 소임을 충실히 한 것인데, 군민들도 자부심이 상당할 것 같다.△달성은 낙동강과 비슬산, 국가산업단지와 테크노폴리스라는 동력을 발판 삼아 성장했다. 인구가 늘어나 유가 옥포 현풍 등 3개면이 읍으로 승격하면서 군내에 6개 읍 체계를 갖추게 됐다. 균형 발전과 보편적 복지, 다양한 교육 문화 정책을 통해 떠나가는 달성이 아닌 ‘머무는 달성’으로 변화시켰다. 2020년 하반기 행정수요 조사에서 지역민 80%가 ‘달성군에 계속 살고 싶다’고 답했다. 군민들의 자부심이니 군수로서는 군 경영에 성과를 거둔 셈이다.-달성의 발전은 특히 인구 증가로 드러난다. 인구 증가와 경제성장, 지역 문화관광 산업 인프라 구축 등 분야마다 변화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 같다. 배경과 전망을 듣고 싶다.△처음 군수 취임당시 17만6천900여 명이던 달성군 인구가 지난 달 현재 26만 명을 넘어서 꾸준히 상승곡선을 그리며 30만 명을 바라보고 있다. 달성군은 대구 산업 경제의 70%를 책임지는 신성장 허브 도시다. 테크노폴리스와 대구국가산단이라는 산업 경제 인프라 쌍두마차를 발판으로 인구성장과 경제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것이다.유가읍과 현풍읍에 걸쳐 조성된 테크노폴리스가 국내외 연구 및 교육 집적단지를 갖춘 미래형 첨단 과학도시로 자리를 굳혀 가고 있다. 국가산업단지도 물산업 클러스터와 초대형 물류센터, 업체의 입주가 본격화되면서 영남권 중추산업단지로 부상하고 있다. 여기에 일자리를 찾는 젊은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인구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코로나19 팬데믹으로 관광 산업이 위축되면서 가까운 관광코스들이 언택트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달성군은 관광산업 인프라에도 많은 투자를 했고 성과도 얻었다. 달성의 관광 현황과 앞으로의 전망은.△코로나로 관광산업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언택트 관광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코로나 사태에 안전한 여행을 원하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달성은 비슬산 대견사 중창부터 마비정 벽화마을, 사문진 역사공원, 송해공원, 비슬산 관광명소화 사업까지 체계적이고 과감한 정책을 추진해서 실질적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하고 있다.-달성이 과학산업단지로 성장한 이면에 문화도시로서의 역량도 주목받고 있다.△코로나가 기승을 부린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많은 문화 행사와 축제들이 미뤄졌지만 달성군은 지난 10년 동안 문화와 관광에 역점을 두고 행정력을 집중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달성 100대 피아노 콘서트’와 ‘달성 대구현대미술제’는 대한민국 대표 문화축제로 자리매김했다. 100대 피아노 콘서트는 지난해 코로나로 열리지 못했는데 올해는 코로나가 숙지면 더욱 내실 있게 준비해서 10회를 대한민국 대표 명품축제로 열 계획이다.달성은 지난해 대구 최초로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는 예비문화도시로 지정됐다. 대구에서는 달성군이 유일하다. 화원읍에서 진행된 문화적 도시재생사업이 지역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내년에는 법정 문화도시로 승격할 것을 자신한다.-대구시가 신청사를 달서구 두류정수장 부지로 옮기기로 했다. 달성군이 시청 청사를 유치하려다가 실패했다. 군민들의 실망감이 클 것 같다.△오히려 군의 위상을 높이는 정말 좋은 기회였다. 시청 유치를 희망하면서 26만 달성군민이 하나로 똘똘 뭉쳤다. 군민이 대구시청 청사 유치라는 하나의 목표를 놓고 화합하고 단결하는 축제의 장을 만들었다. 대구의 변방으로 인식되던 달성군이 대구의 절반을 차지하며 대구의 중심이라는 실상을 알리는 기회가 됐다. 달성의 브랜드 가치를 한껏 드높였으니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무상의 자산이자 큰 성취를 얻은 것이다. 군민의 자긍심을 높인 계기가 됐다.-앞으로 대구시의 달성은 어떤 도시를 지향해 가야 한다고 생각하나.△대구 땅의 절반을 차지하는 달성군은 낙동강과 비슬산이라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고 있다. 대구가 발전하려면 달성을 활용해야 한다. 달성은 군이지만 인구의 5%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군의 평균 연령이 41세로 젊은 도시다.21세기는 환경과 정보 관광이 문화와 접목해서 먹거리를 생산하는 구조로 나가야 한다. 국가산업단지와 테크노폴리스를 중심으로 한 문화 관광 산업도시를 지향해 나가야 할 것이다. 내년 본격 분양될 달성산단은 강소기업을 유치해서 대기업과 안배하는 방향으로 추진했으면 한다.-세 번의 선거 중 두 번을 무소속으로 출마해 상대를 꺾었다. (한 번은 정당 공천을 받아 무투표 당선됐다.) 무소속 군수로 군정에 어려움은 없었나. 자치단체장의 정당 추천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선거 과정에서 상대 진영의 진정과 고소 고발이 이어져 심리적으로 힘들고 성가신 일이 많았다. 별 것도 아닌 일로 선거법 위반이라며 걸고 넘어졌다. 물론 지금은 모두 무혐의로 판정 났고 다 지나갔다.무소속이어서 개인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특히 꼭 필요한 예산을 삭감당할 때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정당에 가입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았고 피해를 입은 것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기초단체장은 정당 추천제를 없애야 한다는 것이 소신이고 현재도 무소속이다.-3선 군수로서 후회 같은 것은 없나. 어떤 군수로 남고 싶나.△아무 미련도 후회도 없다. 처음 민선 5기 군수로 취임하면서 ‘인기 있는 군수보다 기억에 남는 군수가 되겠다’고 약속했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그 약속을 지킬 수 있게 해 준 27만 달성군민에게 감사한다. 군수에 처음 당선됐을 때의 초심, 군민에 대한 공복으로서 군민을 위해 한 몸 불사른다는 열심을 군수를 마칠 때까지 지킨다는 뒷심으로 남은 임기동안 군정에 임할 것이다. 그래서 비슬산 참꽃보다 더 활짝 핀 100년 달성의 꽃에서 달성 발전의 화룡점정을 기어이 찍겠다.-아직 이른 질문 같은데, 임기를 마치면 그다음엔 어떻게 100세 시대를 보낼 것인가. 세간에는 중도에 군수직을 사퇴하고 국회의원에 도전할 것이라는 설도 있었는데, 계획이 있나.△사생활의 복원이다. 그동안 골프도 손 놓고 오직 군정에만 매달렸던 지난날들이었다. 그런 의혹 때문에 군정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단호히 ‘군수직을 성실히 수행하겠다’고 천명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이제 군수직을 내려놓으면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김문오(金文澳)1949년 대구. 경북대사대부고, 경북대 법대 졸.대구MBC 보도국장과 뉴스데스크 앵커, 한국언론재단 기금이사를 거친 언론인 출신.2010년 무소속으로 출마해 선거의 여왕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총재가 지원하는 후보를 꺾고 5대 민선 달성군수에 당선됐다. 6대 지방선거에서는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해 무투표 당선되는 기록을 세우더니 지난 2018년 7대에서는 또다시 당 공천에 반발,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해 자유한국당 후보를 꺾고 압도적 표차로 당선됐다./이경우 편집위원

2021-07-27

우리의 딸들을 위해 정계에 뛰어들어

과거 포항에서 주목받는 여성 예술인은 누가 있었을까. 또 어떤 이유로 여성의 정치 진출이 이루어졌을까. 지역 여성들의 활동상을 갈무리한 ‘포항여성사’는 어떻게 발간되었을까.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 여성들의 활동 폭은 넓어지고 깊이도 더해진다. 김경희의 목소리에도 힘이 붙는다. 최 : 문화예술 쪽 얘기를 들어보고 싶군요. 과거에 여성이 예술을 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으니 그 세계에 대해서도 잘 아실 것 같습니다.김 : 서울대학교 미대 회화과에 입학해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중간에 그만두고 포항에 왔다. 그런 사정 때문에 예술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솔직히 부담스럽다. 하지만 미술 교사를 했었기에 미술 교육에 대해서는 몇 마디 할 수 있겠다. 미술 쪽은 비용이 많이 들어 학교 현장에서도 힘든 점이 있었다. 재료 살 돈이 없어서 목탄 대신 버드나무를 썼고, 비싼 유화 물감 대신 수채화를 지도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고민했고 최선을 다했다. 그때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고맙게도 제자들이 열심히 해주어서 미술대학에 진학하고 미술 교사로 재직하며 다시 학생들을 지도하는 선순환 구조가 이루어졌다. 참 고마울 뿐이다. 나와 동연배의 예술인들은 대부분 그러했을 것이다. 예술 각 분야에서 자신의 작업에 최선을 다하며 후배와 제자들을 헌신적으로 이끌어주었다.최 : 다른 예술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한 여성은 누가 있는지요?김 : 재능을 가진 분들이 의외로 많다. 다만 여성이기 때문에 능력을 인정받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남편을 따라 타 지역에서 포항으로 온 여성 예술인들도 설 자리를 잡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특히 기억에 남는 분은 시조 명창 김정미와 동해안별신굿 이수자 정채난이다. 그리고 문인화를 하는 손성범도 있다.시조 명창 김정미는 1978년 포항에 정착해 대한시우회 포항 지회에서 시조창을 가르치며 국악 인구의 저변 확대를 위해 앞장선 국악인이다. 그의 열정 덕분에 포항에서 많은 명창이 배출될 수 있었다. 동해안별신굿 이수자 정채난은 김재출(동해안별신굿 김정희 이수자의 아버지이며 김석출의 동생)과 결혼해 포항으로 온 후 남편에게 소리와 춤을 배웠다.최 : 포항여중, 포항여고 재학 시절에 방정분 선생에게 음악을 배웠지요. 방정분 선생의 역할이랄까, 영향력은 어느 정도였습니까?김 : 방정분 선생은 이화여전 성악과를 졸업하고 1950년대 초부터 포항여고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그 당시 학생들은 음악이 낯설 정도로 음악에 대한 이해가 낮았다. 그렇기에 방정분 선생이 학생들에게 미쳤던 영향은 적지 않았다. 나 또한 그가 꾸려가는 합창단에서 노래를 배우며 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포항 여성 예술인들의 활동이 뚜렷해졌다. 문학, 국악, 음악, 미술, 서예, 무용, 연극, 사진 등에서 여러 모임과 단체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1990년대로 넘어가면서 더 활성화된다.최 : 정계에도 뛰어들었습니다. 쉽지 않은 결단을 한 것 같은데.김 : 지역에도 여성 정치인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섰다. 누군가는 깃발을 들어야 했다. 남성 정치인이 대부분인 상황에서 거의 모든 정치적·사회적 현안은 남성 중심적 사고로 관철될 수밖에 없다. 여성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안은 여성의 의사가 반드시 반영돼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고, 주변 사람들과 상의 끝에 어렵게 결단을 내린 것이다.최 :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얘기해주신다면.김 : 1995년 제2대 지방자치선거에서 민주자유당 비례대표 1번을 받아 당선되었다. 이때 도의회에 다섯 명의 여성이 진출했는데 모두 비례대표였다. 나는 교육사회복지위원회 소속으로 의정 활동을 했다. 경상북도 여성발전기금 조례, 여성정책개발원 설치 조례 제정 등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최 : 여성의 인권 신장을 위해서도 앞장섰는데. 김 : 남녀차별금지에 대해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남자나 여자나 똑같은 사람이다. 그것이 기본임을 알기에 그걸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을 일깨워주고 싶었다. 여성 중에서 여성에 대해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생각을 바로잡아주려고 애썼다. 결코 남성을 겨냥한 활동은 아니었다. 그리고 여성단체가 일을 제대로 하려면 여성 공무원들에게 기회가 주어지고 능력이 제대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성 공무원 편에서 힘이 될 수 있는 일을 도왔다. 우리들의 딸과 그 딸의 딸들을 위해 그들이 차별받지 않는 삶을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앞장섰다.1960~1970년대 여성을 무시하고 여성단체는 단체 취급도 하지 않던 사회 분위기에 정면으로 맞섰던 김경희. 자유당 말기 변석화가 국회의원에 출마한 이후 맥이 끊겼던 여성의 정계 진출은 김경희가 경상북도 의원에 당선되면서 새로운 지평을 연다. 이는 단순히 김경희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 여성사에 작지 않은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최 : 2001년 ‘포항여성사’가 발간됩니다. 당시 사회 상황을 고려하면 간단한 작업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김 : 새 밀레니엄을 맞이하면서 ‘포항여성사’ 발간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여성의 권익 신장이 올바른 방향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여성운동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잘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정장식 포항시장의 배려로 사업 계획이 확정되었고, 편찬위원과 집필진이 꾸려졌다. 여성에 대한 기록, 그것도 포항 여성에 대한 생활, 문화, 경제, 교육 등 다방면의 기록을 하나로 모으고 엮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 일에 참여한 사람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추진했기에 가능했다.2001년 2월 10일, ‘포항여성사’ 발간을 앞두고 여성사 내용에 대한 평가와 포항 여성의 과제 그리고 발전 전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김경희, 황복희, 김보미, 김귀현, 김조숙자 다섯 명의 여성이 모여 여성 발전을 위해 해야 할 일에 대하여 논의했다. 그 자리에서 어떤 부분이 취약한지, 어떤 부분을 더 채워나갈지를 살펴보며 여성문제는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며 여성들만이 노력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라는 시사점을 얻었다. 그리고 여성의 잠재력을 개발하여 좀 더 활발하게 지역사회 발전에 응용할 수 있는 방향이 모색되어야 하고, 또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개인과 사회의 발전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최 : 다른 지역보다 여성사가 먼저 발간된 것은 포항 여성계의 저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입증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김 : 그렇게 볼 수 있다. ‘포항여성사’ 발간은 단순히 책 한 권을 내는 사업이 아니라 포항 여성의 역량을 역사적 맥락에서 점검하고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사업이었다. 여성의 시각에서 여성의 활동을 중심으로 일련의 과정을 서술한다는 것이 얼마나 깊은 의미가 있는가. 각 분야별로 편찬위원과 집필위원이 고생을 많이 했다. 특히 1970년대 이전의 자료와 사진을 찾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지만 후대(後代)에 더 중요한 일이기에 결코 쉽지 않은 일을 해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우리 지역에서 여성들의 활동하는 모습을 하나로 묶어 발간할 수 있었던 것은 의미가 큰 작업이었다. 김경희포항에 산 지 올해로 여든여덟 해가 지났다. 그사이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와 4·19가 있었지만 유년의 기억은 늘 가슴 뛰게 빛났다. 포항여중과 포항여고 재학 당시 합창부와 미술부를 병행할 정도로 예술을 사랑하는 소녀였고, 미술부원들 간의 약속을 지키고자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할 만큼 신뢰를 소중하게 여겼다. 모교인 포항여고에서 교직 생활을 했으며, 결혼 후 4녀를 둔 가운데 여성 권익과 여성 교육을 위해 쉼 없이 뛰었다. 1973년 포항새마을 부녀회장, 1977년 새마음봉사단 단장을 맡았고, 같은 해 죽도동 여성회관추진위원회에 총무로 있으며 여성회관이 건립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했다. 1981년부터 죽도유아원과 새마을 협동유아원 원장으로 5년간 근무했고, 1984년 포항불교여성회를 창립해 지금까지 37년간 회장직을 맡고 있다. 1987년에는 포항의 여성단체를 총괄하는 여성단체협의회를 조직해 회장직을, 1989년에는 전문직 여성클럽(BPW)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1990년에 포항여성회관 초대 관장(5급)으로 추대되었지만 봉사 정신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과는 맞지 않음을 깨닫고 자리에서 내려왔다. 1995년 통합 여성단체협의회 회장직을, 같은 해 경상북도 5대 도의원에 당선되었으며, 포항시 여성상을 수상했다. 1985년 대통령 훈장 근면장을 받았고, 2003년에 한국불교여성개발원이 선정한 108인에 추대되었으며, 2001년에는 포항시민상과 대통령 공로장을 받았다.대담·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

2021-07-27

“구룡포에서 포경선 탈 때 한 해에 고래 50마리 잡아”

구룡포에서 포경선 선원 두 명을 만났다. 먼저 소개하는 이영식 씨는 1936년 구룡포 구평리에서 태어나 17세에 구룡포에서 포경선을 처음 탔다. 10년 동안 구룡포에서 고래잡이를 하다가 장생포로 건너가 선장까지 했고, 국제포경위원회(IWC)가 1986년부터 전면적으로 고래잡이를 금지하면서 포경선에서 내렸다. 김도형(김) : 여러 종류의 어선이 있는데 포경선을 탄 이유가 궁금합니다.이영식(이) : 일반 어선을 타다가 포경선을 탄 사람도 있는데 나는 선원 생활을 포경선에서 시작했다. 무엇보다 포경선이 다른 어선보다 안전한 편이었다. 비가 내리거나 바람이 강하게 불면 바다에 나가지 않았고 야간작업도 거의 없었다. 작은 사고는 이따금 있어도 큰 사고는 드물었다.김 : 처음 탄 포경선은 어떤 배였습니까?이 : 구룡포 강두수 씨가 선주인 영어호(永漁號)와 해승호(海勝號)를 탔다.김 : 구룡포에서 포경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혹시 알고 계신지요?이 : 광복 전에 강두수 씨가 구룡포에서 일본인 선주 사무장을 하다가 광복되면서 포경업을 했다고 들었다. 목선(木船)에 망통(고래를 발견하기 위한 전망대)과 총을 달아 포경선으로 썼다.김 : 포경선에는 몇 명이 탔습니까?이 : 목선은 보통 일곱 명이고, 나중에 장생포에 들어온 철선(鐵船)은 여덟 명에서 열세 명 정도 된다. 목선에는 포수, 선장, 기관장, 갑판장, 1등 세라 두 명, 2등 세라 한 명이 탔다. 철선에는 3등 세라도 있고, 고래 해체를 전담하는 해부장도 있었다.김 : 포경선은 포수 역할이 중요하겠지요?이 : 포수가 대장이다. 선장보다 포수가 높다. 선장은 배를 좀 탄 사람 중에 시력이 좋은 사람이 맡았고 실제로 포수가 다했다. 월급도 포수가 가장 많이 받았다. 그런데 포수는 면허가 없다. 선장과 기관장은 면허가 있어야 했다. 선박 검사를 받을 때는 선장, 기관장 면허가 필요했다. 혹시 문제가 생기면 법적인 책임은 선장이 지고, 실질적인 책임은 포수에게 있었다.김 : 포경선의 특징을 얘기해주신다면.이 : 세계 포경의 선구자는 노르웨이다. 일본이 그걸 배웠고 우리가 그걸 또 배웠다. 그래서 포경선에서는 일본어를 많이 쓰고 영어도 좀 섞어 쓴다. 배 방향을 오른쪽으로 바꿀 때는 ‘시나볼’, 왼쪽은 ‘보루’라 했고, 총을 오른쪽으로 향할 때는 ‘미기’, 왼쪽은 ‘히라이’라 했다. 포경선은 무리 지어 다니지 않고 각자 알아서 움직인다. 새벽 4시 반쯤 나가서 해가 지기 전까지 고래를 찾아다녔다. 망통에 두세 사람이 올라가서 고래를 찾았다. 쌍안경으로는 고래를 볼 수 없다. 불과 1, 2초 사이에 고래가 나타났다 사라지는데 쌍안경으로 보이겠나. 정신 바짝 차리고 바다를 살펴야 했다. 고래가 입을 치밀 때나 꼬리를 끄덕 들 때 총을 쏜다. 경험 많은 포수들은 헛방이 거의 없었다. 소나(SONAR, 음파탐지기)가 들어오면서 사람이 망통에 올라가는 일이 없어졌다. 조업을 나가면 가까운 항구에 정박하고, 밤에는 고래를 잡을 수 없으니까 야간작업은 거의 없었다. 해 질 녘에 고래를 딱 한 번 잡아봤다. 장생포에서 선장 할 때였는데, 고래가 배에 딱 붙어 왔다. 운이 좋은 날이었다.김 : 포경선에 달려 있는 총은 어떤 종류인가요?이 : 50밀리(㎜)에서 90밀리까지 있다. 구룡포 목선은 50밀리였다. 60밀리도 있긴 했는데 70밀리가 가장 많았다. 70밀리는 일제 때 쓰던 걸 부산에 가서 수리해 썼다. 80밀리는 울산에 있는 공업사에서 만들었고. 90밀리는 이승만 대통령 때 우리 해역을 넘어온 일본 포경선에서 압수한 것이었다.김 : 고래는 언제 잘 잡혔는지요?이 : 밍크고래는 5월에 가장 많이 잡혔다. 6, 7월에는 나가수(참고래)도 꽤 잡혔다.김 : 고래 해체는 어떻게 했는지요?이 : 목선은 고래를 끌고 와서 항구에서 해체하고, 철선은 배 위에서 바로 해체했다. 목선도 15자(4.5m) 정도의 작은 밍크고래는 배 위에서 해체하기도 했다. 장생포에는 정식 해체장이 있었고, 구룡포에는 해체장이 없어서 위판장에서 해체했다.김 : 당시 잡았던 고래는 어떤 게 있습니까?이 : 밍크고래가 가장 많았고, 나가수, 돌고래도 있었다. 놀이공원에서 보는 돌고래는 진짜 돌고래가 아니라 일본 말로 ‘고시’라고 하는데 뱃사람들은 별로 안 쳐주었다. 진짜 돌고래는 ‘고꾸’라고 불렀다. 길이가 50자(15m)나 됐고 나가구 가격의 두 배에 거래될 정도로 비쌌다.김 : 돌고래 얘기를 좀 더 해주시지요.이 : 돌고래는 음력 10월 말 시베리아 쪽에서 한반도 동해안으로 오는데, 연안에 딱 붙어서 이동했다. 이듬해 봄 남쪽으로 돌아서 다시 북쪽으로 갔다. 고래 중 가장 맛있고 껍질이 두껍고 기름도 많이 나왔다.김 : 밍크고래는 크기가 어느 정도였는지요?이 : 새끼는 10자(3m)보다 조금 더 크고, 대개 14자(4.2m)에서 20자(6m) 정도 됐다. 혜성호를 탈 때 포항 용덕리 앞바다에서 29자(8.7m)를 잡았는데 그게 가장 컸다.김 : 나가수는 어땠나요?이 : 나가수는 태평양에서 자라다가 성장하면 우리 연안에 나타났다. 아무리 적어도 40자(12m)는 되었다. 포수들은 밍크고래보다 참고래 잡기가 힘들다고 했다. 힘이 좋고 빨리 움직이기 때문에 조준하기가 힘들 수밖에 없다. 통상 한두 마리가 다니는데 드물게 20~30마리가 몰려다닐 때도 있었다.김 : 구룡포 시절 고래를 얼마나 잡았는지요?이 : 1960년대 초 영어호 탈 때는 영일만은 물론 강원도 주문진, 경북 죽변, 경남 욕지도를 두루 다니면서 한 해에 밍크고래 50마리 가까이 잡았다.김 : 고래 가격은 어느 정도였나요?이 : 좀 큰 밍크고래는 1천만 원 정도 했다. 가장 맛있는 부위는 일본 말로 ‘오노미’라 하는 꼬리살이다. 일본 사람들이 그걸 좋아했는데 양이 얼마 안 나왔다. 처음에는 국내에서 소비되다가 일본에 수출했다. 수출하는 고래고기는 아무래도 좀 비쌌다. 울산 사람들이 구룡포 고래고기를 사들여서 일본에 수출하기도 했다. 구룡포 어판장에서 솥 걸어놓고 삶아서 팔기도 하고, 고래고기집도 몇 군데 있었다.김 : 구룡포 포경선 선원은 어느 지역 사람이었나요?이 : 구룡포와 흥환, 대보, 삼정 사람들이 많았고, 용덕, 칠포 사람도 있었다.김 : 포경선을 타면 수입은 어느 정도 되었는지요?이 : 구룡포에서는 만 원 수입이 생기면 선원은 2천200원을 받았다. 장생포에서는 기본급에 수당이 따로 붙었다.김 : 장생포 쪽이 후했나 봅니다.이 : 그랬다. 내가 장생포로 옮긴 것도 그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장생포 포경선이 목선에서 철선으로 바뀌고 일본에서 소나가 들어오면서 고래 잡는 숫자가 구룡포와 차이가 많이 났다. 그러니 선원들에게 돌아가는 몫도 구룡포보다 장생포가 많았던 것이다.김 : 포항 쪽 포경선 얘기는 기억나는 게 없는지요?이 : 구룡포보다 포항에 포경선이 먼저 있었다. 장생포가 포경기지로 크고 포항은 사업이 잘 안 되니까 구룡포보다 먼저 포경업을 접은 게 아닌가 싶다. 선배들한테 들은 얘기인데, 포항 출신 김성룡 공군 참모총장이 한때 포항에서 포경 회사 사무장을 했다. 광복 전에 일본에 있다가 광복이 되고 포항에 왔는데, 그때 잠시 그 일을 했다는 얘기다.김 : 구룡포에 포경선은 언제까지 있었는지요?이 : 영어호가 포경 금지될 때까지 남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김 : 구룡포에서 포경선 탔던 분들 근황은 어떻습니까?이 : 살아 있는 사람이 다섯 명 정도 될까 싶다. 나이가 있으니까 아프기도 하고 자주 보지는 못한다. 나머지는 다 고인이 되었을 거다. 김 : 포경선 타고 어디까지 가봤는지요?이 : 구룡포 목선은 강원도 주문진에서 통영 욕지도까지 갔다. 장생포에서 철선 탈 때는 흑산도, 어청도까지 갔다. 어청도에는 해체된 고래를 운반하러 가기도 했다. 그걸 부산 가서 팔았다. 선배들 얘기가 산둥(山東)반도 쪽에는 물 반 고래 반이라 했다. 소나가 들어오면서 서해 고래를 엄청 잡았다. 그때 중국에는 포경선이 없었으니 오죽했겠나.김 : 포경선 탈 때 언제 가장 기분이 좋았는지요?이 : 포경선 탄 사람은 다 그랬겠지만 나 역시도 큰 고래 잡아서 만선기 달고 고동 울리면서 항구에 들어갈 때가 최고였다.김 : 고래 잡으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이 : 1985년 일본 근해에서 밍크고래 여덟 마리를 봤다. 암놈이 젖 떨어지고 새끼 가질 때 되면 수놈이 그걸 알고 몰려든다. 암놈 한 마리에 새끼 한 마리, 그리고 수놈 여섯 마리 도합 여덟 마리를 한꺼번에 다 잡았다.김 : 구룡포읍 행정복지센터 앞마당에 있는 포경선은 어떤 배입니까?이 : 10t쯤 된다. 원래 포경선은 아니고 일반 어선에다 망통 올리고 70밀리 포를 달았다.김 : 혹시 사고 경험은 있는지요?이 : 장생포 시절에 명신호 선장을 했는데, 부산 앞바다에서 충돌 사고가 나서 두 사람이 죽었다. 큰 사고였다. 내가 탄 배는 아닌데, 창원호라고 장생포 배가 양포 앞바다에서 사고 난 적도 있다. 고래가 보여서 총을 쐈는데 헛방이 되었고 롤러로 감다가 제대로 안 감겼다. 그 바람에 창살이 튀어서 선원이 즉사하고 말았다.김 : 포경이 금지된 후에 보상은 얼마나 받았습니까?이 : 장생포에서 포경선 선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보상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단체행동을 해야 했고 돈도 모았다. 예산은 법이 있어야 만들 수 있는데 포경선 보상을 해줄 수 있는 법이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보상금이 나왔는데 기본 100만 원에 경력 30만 원을 더해 130만 원을 받았다. 그런데 소문은 5천만 원 받았다고 났다. 포경 금지 후에 일본이 고래를 잡으니 우리도 잡자는 얘기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대담·정리 : 김도형(THE OCEAN 편집위원)

2021-07-26

‘따스한 나눔 복지’ 실천으로 주민 생활 살피는 청송군

복지란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삶의 질에 대한 기준을 높이고, 국민 전체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어 노력하는 정책’을 의미한다는 설명이 이어진다.보편적 인권을 중요시하는 현대사회에 있어 복지의 중요성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 대부분 전문가들의 일치된 목소리다.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고, 밝음이 존재하는 곳엔 어두움도 있기 마련이다. 복지는 빛의 반대편에 있는 그늘과 밝음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어두움에 눈 돌리지 않고 관심과 손길을 보내는 행위를 의미할 터.21세기 한국의 지방자치단체들은 바로 이러한 적극적 복지정책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다. 청송군 역시 마찬가지다. 청송군은 더불어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따스한 지역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이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멈추지 않고 있다.최근에도 청송군은 노년층을 위해 경로당 개·보수와 환경 개선을 진행했고, 어르신들을 위한 다양한 복지정책을 만들어냈다.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제기되고 있는 출산율 저하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도 고심 중이다. 진보키즈카페 등의 설립과 운영이 이와 관련된 복지 정책이다. 안정적인 보육 환경의 조성은 출산율을 높이는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가 될 수 있다.공부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경제적 여건 때문에 절망하지 않도록 청송인재양성원을 운영해 균등한 교육의 기획도 제공하고자 노력했다. 학교 급식 등 교육 여건 개선사업도 상시적으로 추진되고 있다.지난해와 올해는 장기화되고 있는 ‘코로나19 사태’로 위기를 맞은 지역민들을 위한 복지 지원 서비스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경북재난긴급지원금과 정부재난지원금으로 저소득층이 생활안정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처럼 일상적이며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청송군의 각종 복지정책이 어떤 방식으로 준비되고 실현되었는지를 아래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지역 어르신들의 행복과 편안함 위해 노력 기울여청송군은 ‘함께여서 따뜻한 나눔 복지’라는 군정 목표 아래 민선7기 3년 동안 지역 주민의 욕구를 반영하는 다양한 복지정책을 추진해 군민 모두가 행복한 포용적 복지실현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고 있다.청송군은 먼저 어르신이 행복한 청송 건설을 위해 경로당 7곳을 신축하고, 경로당 134곳을 개·보수해 어르신들의 쉼터인 경로당 환경을 개선했다.또한 다양한 경로당 프로그램 제공으로 어르신들의 행복한 노후와 여가생활을 지원했고, 만70세 이상 노인 5천여 명에게 본인부담금 1천원으로 목욕을 할 수 있도록 목욕비를 지원하고 있어 좋은 평가를 받았다.아울러 일상생활에 손길이 필요한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노인돌봄서비스 사업을 시행해 생활 안정을 도모했으며, 특히 노인일자리 및 사회활동 지원사업으로 노령층의 소득을 보전하고 더불어 경제적 안정까지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출산 장려와 보육환경 개선사업도 진행 중아이 키우기 좋은 보육 환경 조성과 출산 분위기 장려를 위한 노력도 청송군의 주요 과제였다. 이를 위해 진보키즈카페를 만들었는데 이 사업은 윤경희 청송군수의 공약사업으로 2018년 12월부터 추진됐고, 2020년 8월에 개장해 운영하고 있다.실내 놀이시설(472㎡)과 실외 바닥분수(330㎡)로 구성된 키즈카페는 어린이들에게는 다양한 놀이공간을, 주민들에게는 쉼터 역할을 하고 있으며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하고 있다.이에 더해 청송군 내 아동이 있는 저소득 가정에 공평한 양육 여건 및 출발 기회를 보장하기 위한 ‘드림스타트’ 사업을 통해 임산부 및 만0~12세 아동과 그 가족의 건강, 복지, 보육을 통합한 전문적 맞춤 서비스를 제공했다. 그 결과 보다 나은 양육 환경과 자녀 관계 증진 등의 긍정적인 효과를 거뒀다.다음으로 양질의 보육환경 조성을 위해 민간어린이집을 국·공립어린이집으로 전환했고, 청송어린이집이 국토교통부 공공건축물 그린리모델링 공모사업(사업비 3억8천만 원)으로 선정돼 쾌적하고 안전한 보육 환경을 조성할 수 있었다. ◆청송인재양성원 통해 양질의 교육기회 제공21세기를 준비하는데 반드시 필요하다고 할 수 있는 교육 환경 개선과 양질의 교육기회 제공을 위해서는 청송인재양성원을 운영하고 있다.지역 학생들에게는 장학금를 제공하고, 이와 함께 중·고등학교 신입생 교복구입비를 지원함으로써 학부모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고, 관내 22개 초·중·고교와 청송교육지원청에 학교급식 및 교육 여건개선 사업비를 지원해 교육의 공공성을 강화하고 교육복지를 실현시켰다는 것은 청송군의 빼놓을 수 없는 주요 복지 정책 중 하나다.장애인들을 위해서는 장애인의 자립을 돕고 소득을 보장하기 위해 장애인 일자리사업을 활성화 하는 등 장애인의 안정적인 생활 향상에 힘쓰고 있다. 신체적·정신적인 사유로 일상생활이 어려운 장애인에게는 장애인활동 지원서비스를 통해 사회참여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 청송군의 일관된 방침이다.또한 4개 장애인복지시설에서 수어교육, 여성장애인 일자리교육(재봉틀·한지공예), 시각장애인 점자교육, 목공교육, 상담 등을 실시해 장애인의 사회활동 참여를 장려하고 있다.◆코로나19로 인해 어려움 겪는 주민들도 지원청송군은 국민기초생활보장을 위해 부양의무자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군민들에게 생계비, 의료비, 주거비, 자녀 교육비를 지원하고 있다.더불어 우울증, 정신질환, 알코올중독, 사회부적응, 가족관계 해체 등의 문제를 안고 있는 관내 가구에 대해서도 전문가 그룹의 사례 관리가 이루어지도록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 군청의 설명이다.특히 오랜 기간 이어지고 있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어려움에 처한 저소득 주민을 지원하기 위해 경북재난긴급지원금과 정부재난지원금(한시생계지원·위기가구 긴급생계지원) 등으로 9천726가구 1만3천753명에게 60억2천300만원을 지원함으로써 코로나19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는 저소득층의 생활안정을 지원하고 있다.이와 동시에 자원봉사센터를 통해 저소득·취약계층을 위한 이웃사랑 자원봉사 활동과 다양한 행사에서의 질서유지, 환경 정화 등의 봉사활동도 전개 중이다. 특히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군민 백신 접종 및 예방 활동에서 자원봉사자의 역할이 크게 빛을 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또 자원봉사단체와 연계한 지역 주민들이 각자가 가진 재능을 기부하는 형태로 안심케어주택 지원사업을 운영해 열악한 주거환경을 개선해 주는 등 취약계층의 주거안정도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맞춤형 복지서비스로 행복한 복지청송 건설이밖에도 권역별로 배치돼 있는 맞춤형복지팀은 복지사각지대에 놓인 대상자를 발굴해 맞춤형 복지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군 관계자는 “앞으로도 청송군지역사회보장협의체, 명예사회복지공무원, 마을 이장 등의 촘촘한 인적안전망을 구축해 복지서비스 수준을 향상시켜 나가겠다”고 말했다.이러한 꼼꼼한 복지정책으로 보다 살기 좋은 청송군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윤경희 군수는 “군민 모두가 행복한 복지청송 건설을 위해서는 정부의 지원뿐만 아니라 지역 내 다양한 복지욕구에 적합한 맞춤형 복지서비스 제공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앞으로도 복지가 필요한 곳을 찾아내 현실에 맞게 지원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을 전했다./김종철·홍성식 기자

2021-07-26

위기의 삶, 시민 일상 속 ‘문화 돌봄’으로 사회를 잇다

“이제 단순한 문화콘텐츠를 제공하기 위한 문화 정책은 그 한계를 넘어서야 합니다. 시민들에게 문화예술 향유와 체험이 주는 행복감뿐 아니라 재난, 환경, 경제, 사회 전반의 위험 요소 속에서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문화적 연구가 필요합니다. 법정문화도시 선정에 이어 문화로 사회 곳곳을 진단하거나 처방하고 시민의 일상 속 문화 실현을 위한 문화안전망 체계를 준비하는 이유입니다.”법정문화도시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문화적 돌봄 차원의 ‘문화안전망’ 사업을 선제적으로 시작한 포항문화재단의 설명이다. 포항시는 지난 2017년 규모 5.4 촉발 지진이 지역사회를 강타한 사건을 계기로 문화도시 사업에 적극성을 띠고 있다.아직 국내에서 명확한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회적 안전망과는 다른 ‘문화’가 지닌 가치와 강점을 바탕으로 한 문화적 연결망을 구축해 나가고 있다. 법정문화도시 사업의 일환으로 포항문화재단이 추진 중인 문화안전망의 개념과 의미에 대해 진단하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사회에 대비해 우리가 준비할 것이 무엇인지 모색해 본다. □위험사회, 일상이 멈추다코로나19 팬데믹의 장기화가 어느덧 2년이 다 돼가고 있다. 사람과 사람과의 물리적인 ‘거리 두기’만큼 우리 사회의 모든 면에서 정상적인 작동이 멈췄다.근래 우리 사회가 부르짖는 큰 가치 중의 하나인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다. 바이러스의 전염이 이 정도까지 우리 삶을 장악할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문제는 이러한 위기는 우리 삶, 도처에 도사리고 있고 언제 어떤 모습으로 우리의 삶을 덮칠지 모른다는 것이다.SF 소설가 제임스 호건은 그의 저서 ‘광장의 오염’에서 “새롭게 등장한 위험은 더이상 특정 지역이나 집단에 한정되지 않는다”고 밝히면서 근대화가 진행될수록 그로 인한 위험과 불안이 증대하는 위기의 일상화가 된다고 서술하고 있다.또 사회학자 울리히 백은 사회가 발전할수록 위험사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위험사회’란 현재형의 ‘위험한 사회가 아닌, 위험이 사회의 중심 현상이 되는 사회’를 의미한다. 위험이 중심으로 작용하는 사회이며 위험을 결정하기 위해 늘 점검해야 하는 사회라고 말하고 있다.그러면서 21세기의 위험은 ‘danger’가 아니라 ‘risk’라고 규정하고 있다. 자연재해나 전쟁 같은 불가항력적 재난이 아니라 정체경제사회적인 환경과 결합돼 나타나는 재난이라고 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과 기술발전, 환경훼손, 경제사회 발전에 따른 의도되지 않은 부작용이거나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해킹, 미세먼지, 지구온난화, 플라스틱 폐기물, 남미와 아프리카의 자연파괴, 테러, 세계금융위기,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회, 세월호 사건 등 재난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이 많다.멀리 생각할 것도 없이 포항지역만 하더라도 2017년 지진과 철강산업 다변화에 따른 지역 경제위기 등의 재난요소로 인해 시민의 삶을 위기의 혼돈 속으로 몰아넣었다.재난으로 인해 삶의 축이 흔들리면서 다양한 사회현상학적 패러다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불안한 미래로 인한 결혼과 출산 거부 등 솔로 사회가 만연화되고 있고 경쟁과 적대, 혐오의 시선이 사회적으로 팽배해지고 있다.지난 8일 제주 서귀포에서 진행된 문화도시 정책포럼에서 조한혜정 연세대 교수는 기조강연에서 “위험 요소가 만연한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은 삶과 인간이 도구화되지 않는 사회실현을 위해서는 사회적 모성 즉, 모두를 돌보며 상생하는 ‘사회적 돌봄’, ‘사회적 탯줄 잇기’의 필요성과 실천”에 대해 역설했다.이처럼 재난, 환경, 경제, 사회 전반의 위험요소 속에서 사회적 차원의 안전망 시스템은 이제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필수불가결한 논제가 됐다. □ 문화로 사회 곳곳을 진단 및 처방, 시민의 일상 속 문화 실현문화안전망 사업은 2017년 포항에 지진이 발생되면서 시작됐다. 흥해지역을 중심으로 상당한 재산피해를 입었고 보상과정에서 주민사회의 갈등이 양상화되면서 가뜩이나 힘든 지역사회에 큰 상실감을 안겨줬다. 무엇보다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주거지의 상실로 인해 우울감 등 심리적 방역이 뚫리면서 시민의 평범했던 일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당시 법정문화도시 예비사업을 준비 중이던 포항시와 포항문화재단이 지진으로부터 상실된 시민의 일상복귀를 위한 다양한 문화적 방식을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 문화안전망 사업의 출발이었다. 당시만해도 지진피해의 대책이 물리적 복구와 주민 피해보상 중심으로 진행되던 상황이었고 국내에서는 그동안 발생한 적 없는 초유의 재난사태라 그 어떤 사례나 문화적 연구가 전무했다.무엇보다 시민의 일상 회복이라는 추상적이고도 담론적인 과제에 대해 ‘문화적 방식’이라는 명확한 개념 도출이 쉽지가 않았다. 다만 물리적 피해가 아닌 시민사회의 공동체 상실 등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부분에 대한 진단과 회복의 실마리는 ‘문화’가 지닌 가치와 힘에서 결국 답이 나올 거라는 기대감이 있을 뿐이었다.문화안전망의 사업추진을 위해 지진 이후 시민의 삶을 들여다보고 이를 문화적 차원에서 고민하고 기획활동을 담당할 민간 문화재생활동가(F5)를 발굴하고 양성했다. 워크숍 등 역량강화 과정을 거친 이들이 각기 다른 시민의 관점에서 재난도시들과의 교류를 통해 포항에 적용할 프로그램 연구를 진행했다. 2019년 ‘재난 도시 간 유쾌한 어깨동무’ 포럼 개최 등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복구과정에서 활약한 민간활동가들과의 교류, 세월호 아픔을 겪은 안산과 지하철 참사를 경험한 대구 등 국내 재난도시들과의 교류를 진행하며 재난의 동질적 아픔을 공유하고 문화적 방식의 매뉴얼을 연구했다.이후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이 전 세계적으로 강타하면서 포항 문화안전망 사업은 지진에서 나아가 다양한 사회적 범주로 확장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인식하게 된다. 더불어 재난은 우리 삶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고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닥칠지 모른다는 일상적 관점에서 고민하고 접근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됐다.코로나19로 인해 생명존엄의 상실, 두려움, 불안한 미래, 우울감, 그로 인한 일상의 멈춤은 심각단계를 넘어 삶을 위협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따라서 문화안전망에 대한 방향 또한 시민 일상을 보다 확대한 다양한 계층 발굴과 사회 현상학적 접근을 통해 우리 사회의 문화 사각지대를 탐사하고 발굴하는 것으로 확대했다. 사회안전망 테두리 안에서 문화가 시민 일상에 밀도있게 연결돼 불안한 삶에서 안전한 삶으로의 전환을 모색해야 함을 다양한 시민그룹들과의 공론과정에서 도출됐다.따라서 문화안전망은 문화로 사회 곳곳을 진단 및 처방함으로써 시민의 일상 속에서 문화를 실현하고, 공동체의 문화자치 도시의 문화주권을 강화함으로써, 문화사회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회 안전망의 하나다.포항 문화도시 문화안전망 사업은 문화재생활동가 F5를 중심으로 집담회 등 다양한 시민그룹과의 소통과 공감프로그램을 통해 이뤄졌다. 시민의 목소리와 바람을 듣고 기록하며 그들에게 어떤 방식의 문화적 처방을 해줄 지에 대한 연구와 기획도 했다.문화도시사업의 일환인 문화안전망 사업은 이와 동시에 포항문화재단 전 사업부서의 프로젝트와 연결해 코로나 팬데믹 사회에서 보다 다양한 시민들에게 문화적 소외가 없는 문화안전망 사업을 추진했다. 또 코로나로 인해 잃어버린 시민 일상을 아카이빙한 전시 ‘잃어버린 봄을 찾아서’, 코로나로 인해 등원을 못한 미취학 어린이를 위한 ‘문화돌봄교실’, ‘시네마테라피’, ‘일상기록키트 방문 전달’‘예술인창작지원’ ‘시민커뮤니티 발굴 및 거점공간 지원’ 등이 대표적인 사업들이다. □ 명확한 개념 설정, 입체적이고 빈틈없는 촘촘한 안전망체계 구축해야지진과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며 재난이라는 국소적인 접근에서 출발한 포항문화안전망 사업은 이제 시민의 삶 전체 영역을 아우르는 문화연결망 구축을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문화안전망’의 보다 명확한 개념 설정과 구체적인 방법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지진과 코로나라는 특수한 영역을 넘어 모든 시민에게 보편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포항형 문화안전망에 대한 구체화된 매뉴얼과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 특히 급속한 경제성장과 도시구조의 재편에 따라 포항제철 설립을 중심으로 유입된 인구층과 포항 1세대 은퇴인구, 직업으로서 유입됐지만 정서적으로 안착되지 못한 외부유입층, 매연과 공장 굴뚝에 휩싸여 정서적 여유로움을 보장받지 못한 공단 근로자 등 산업화 중심의 성장구조에서 발생한 문화적 소외 계층, 도농공산어촌의 도시특성, 특수한 상황에 놓인 개별 맟춤형에 이르기까지 입체적이고 빈틈없는 촘촘한 진단체계를 갖춰야 할 것이다.그와 동시에 문화기본권에 기초한 시민의 문화 권리적 측면에서 다양한 시민층과의 논의의 과정을 통해 시민의 삶과 문화를 연결하는 제도화된 문화안전망 시스템 구축도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일 것이다.법정 문화도시사업을 추진 중인 포항문화재단 문화도시사업단은 올해 시민포럼의 주제를 ‘문화안전망’으로 설정하고 총 4회에 걸친 포럼을 통해 시민, 전문가가 머리를 맞대어 ‘포항형 문화안전망 구축’을 위한 토대 마련에 나섰다. 시민논의 과정을 거친 후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문화안전망이 실효적으로 적용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포항문화재단 관계자는 “문화기본권적 측면에서 시민의 고른 문화적 향유가 이뤄질 수 있는 문화안전망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문화적으로 고립되고 소외받는 일이 없도록 하는 문화생태 조성을 위해 더 촘촘한 문화연결망을 구축해 나가겠다”고 밝혔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1-07-25

“남자들 기죽이는 건 다 해보자”

세상에 첫길을 내려면 여러 사람이 함께 걸어야 한다. 혼자 걸어서는 첫길을 낼 수 없다. 포항 여성사도 마찬가지다. 여러 사람의 지혜와 힘이 모여 포항 여성의 역사가 서서히 만들어졌다. 물론 일이 이뤄지는 과정에는 누구보다 먼저 고민하고 앞장선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포항 여성들은 언제 어떻게 한마음이 되어 모였으며, 어떤 일을 했을까.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최 : 포항의 여러 여성단체 역사를 살펴보면 김경희란 이름이 자주 등장합니다.김 : 내 나이 아흔이 다 되어가는데 친목계까지 합하면 17개 단체에 나가고 있다. 새마을부녀회 활동이 출발이 됐고, 가장 오랜 기간 회장을 맡고 있는 단체는 불교여성회다. 1984년부터 지금까지 회장을 하고 있으니 장기 집권이 아닌가 싶다. 절은 산 중에 있다. 젊어서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찾아다닐 수 있지만 나이 들면 몸이 따라주지 못하겠다 싶었다. 그래서 쉽게 찾아가 수양할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주변 사람들과 그런 취지에서 의논을 했다. 스스로 자유롭게 모여서 기도하는 단체를 만들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고, 불교계의 YWCA 같은 불교여성회가 조직된 것이다. 조직이 구체화되자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차원태 변호사 건물의 5층을 빌려서 했다. 그런데 인원이 40~50명 되니까 장소가 협소했다. 회관을 지을 생각도 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부산각 건물 2층을 빌려서 모이다가 부산각 지하가 넓어서 그쪽으로 옮겼다. 법회를 한 후 바로 식사를 하기에도 편리해서 지금까지 그곳에 터를 잡고 불교여성회 모임을 하고 있다.한국여성불교연합회 포항불교여성회는 1984년 포항시민회관에서 6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장이두 큰스님을 모시고 설법회를 열며 창립총회를 했다. 그 후 전국불교 연합회 포항불교여성회로 개칭했다.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과 나라의 평화를 이룩하여 세상을 불국정토로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최 : 불교여성회에서는 어떤 일을 했는지요?김 : 매년 어린이 심장이식기금을 전달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봉사도 함께 해왔다. 봄가을에는 성지순례도 하는데 이름 있는 절이란 절은 다 다녔다. 회원들은 내가 나눠준 좋은 글을 참 좋아한다. 혼자만 알고 느끼면 뭐가 좋은가. 나는 좋은 것은 모두 나눠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깨우침이 가득한 스님들의 좋은 말씀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 스님들의 좋은 말씀을 복사해두었다가 매달 모임 때 회원들에게 나눠주었다. 그 일도 20년 넘게 하고 있다. 코로나 이후 모임이 끊어졌지만 그 일이 내 평생의 일임을 알기에 불교여성회는 내가 목숨을 다하는 날까지 이어갈 것이다.최 : 1980년대 포항에는 어떤 여성단체가 있었는지요?김 : 봉사 단체가 많았다. 변석화가 초대 회장이었던 대한부인회, 안인화가 초대 회장이었던 포항적십자 봉사대, 박경애가 초대 회장이었던 걸스카우트 포항지부, 홍윤옥 회장이 맡았던 포항YWCA, 그리고 포항차인회 등의 단체가 있었다.최 : 그 많은 단체를 하나로 묶은 여성단체협의회 회장을 맡았더군요.김 : 김보미 포항시 과장이 나를 불러 개별적으로 활동하는 여성단체를 하나로 묶는 총괄 단체가 있으면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전적으로 동의했다. 지역의 여성단체들이 서로 협력하고 힘을 모은다는 점에서 아주 긍정적인 제안이었다. 그렇게 포항시 여성단체협의회가 발족되었고, 새마을부녀회장이었던 내가 초대 회장을 맡았다. 처음에는 사무실도 예산도 없었다. 김보미 과장이 예산을 만드느라 고생이 많았다.1970년대에도 크고 작은 여성단체가 있었지만 친목을 위한 단체가 대부분이었다. 여성이 주축이 되어 여성의 일을 추진할 수 있는 단체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여성단체를 통해서 여성들의 활동 영역이 넓혀지기를 김경희는 원했고, 그것이 가능하도록 최선을 다했다.최 : 여러 단체를 하나로 결집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김 : 여러 사람, 여러 단체를 상대하다 보면 내 생각을 진솔하게 전달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느끼게 된다. 아무리 좋은 의견도 삐딱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진심은 통한다는 믿음을 품고 여성단체 관계자들을 만나 협의회 결성의 취지를 설명했다. 그렇게 활동한 결과,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성단체 대부분이 협의회에 가입했다. 회원 수가 무려 2만 6천여 명에 달하는 명실공히 포항을 대표하는 여성단체협의체가 결성된 것이다. 이 협의체를 통해 여성의 능력 개발, 사회참여 확대, 성차별 해소, 여성 지위 향상 같은 여성 사업에 한결 더 힘이 실리게 되었다.포항시 여성단체협의회는 보건복지부의 여성단체 활성화 방안의 일환으로 추진된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 방안도 결국은 여성이 주축이 돼 일궈낸 일이다. 출범의 계기가 어떠하든 여성단체협의회는 많은 일을 해냈다. 여성의 사회참여 확대를 위해 여성 지도자 양성 과정을 만들었고 여성단체 활동 평가회 등을 개최했다. 회원 단체 간의 정보 교환과 공동 관심 사업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또한 여성의 시정 참여 확대를 위해 포항시의 각종 위원회에 여러 회원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다.최 :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업이 있는지요?김 :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높일 수 있는 좋은 방법으로 무엇이 있을지 의논한 끝에 여성문화축제를 해보자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전국 최초로 여성문화제가 기획되었다. 포항여성문화제에서는 여성백일장, 서예대회, 바둑대회 등 포항 여성들의 기량을 뽐내는 대회를 열었다. 특히 서예대회는 백일장처럼 시간제한을 두고 여성들의 서예 능력을 겨루었다. 행사 당일 문화예술회관 안팎에 화선지를 펼치고 붓을 들던 여성들의 모습이 장관을 이뤘다. 여성들만 참가하는 바둑대회, 패션쇼, 사진전 등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사실 남자들 기죽이는 건 다 해보자는 마음도 있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게 이런 것인가를 온몸으로 느꼈다. 그리고 정말 뿌듯한 것은 포항여성상을 제정한 것이다. 여성들의 권익 신장을 위해 크게 공헌한 여성을 선정해 시상하자고 내가 제안했다. 그렇게 안이화, 손정식, 박경애, 홍윤옥, 김봉순이 제1회 포항여성상 수상자가 되었다. 포항여성상은 포항시가 1997년부터 여성의 권익 증진과 봉사활동에 기여한 지역 여성을 선정해주는 상으로, 2016년 제19회까지 이어졌다. 2017년 이후 포항시는 실질적 양성평등 실현이라는 여성 정책 패러다임의 변화로 조례를 개정하고 양성평등상을 시상하고 있다.최 : 전문직여성클럽은 어떻게 결성되었는지요?김 : 여성이 힘을 가지려면 공적 체제와 결합해야 한다. 그런 역할을 해줄 공무원이 필요했는데 김보미가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면 그는 그것을 행정의 틀 안에서 소화해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나도 그도 서로의 전폭적인 지지자였다. 그를 만나 여러 가지 일을 해냈다. 전문직여성클럽(Business Professional Women‘s clubs)도 그중 하나다. 전문직 여성을 모아보면 어떻겠느냐고 김보미가 제안했다. 지역에도 전문직 여성들이 꽤 있는데, 그들을 모아서 여성의 권익을 향상하는 데 힘을 보태면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곧바로 전문직 여성들을 만나 뜻을 전했고, 대구 클럽의 후원으로 1989년 포항클럽이 결성되었다.전문직여성클럽(B.P.W) 포항클럽은 1989년 4월, 김경희 초대 회장을 중심으로 김춘희, 김보미, 김희숙, 박영희, 이순자, 이정주, 한정자가 모여 결성되었다. 초창기에는 친목 도모에 머물렀으나 1994년 포항에 전국대회를 유치하며 활기를 띠었다. 특히 1990년대 중반부터 지역 내 여중·고생들을 대상으로 전문직 진로 교육에 적극적으로 나섰다.최 : 그 밖에 주목할 만한 여성계의 활동이 있는지요?김 : 여성 신년 교례회도 주목할 만하다. 새해에 여성들이 모여 한 해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를 논의하는 자리다. 여성 정치인들과 여성단체에서 활동하는 분들을 모았다. 여성 언론인도 있고 시장 부인, 국회의원도 있다.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힘을 보태주니 힘이 났다. 김경희포항에 산 지 올해로 여든여덟 해가 지났다. 그사이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와 4·19가 있었지만 유년의 기억은 늘 가슴 뛰게 빛났다. 포항여중과 포항여고 재학 당시 합창부와 미술부를 병행할 정도로 예술을 사랑하는 소녀였고, 미술부원들 간의 약속을 지키고자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할 만큼 신뢰를 소중하게 여겼다. 모교인 포항여고에서 교직 생활을 했으며, 결혼 후 4녀를 둔 가운데 여성 권익과 여성 교육을 위해 쉼 없이 뛰었다. 1973년 포항새마을 부녀회장, 1977년 새마음봉사단 단장을 맡았고, 같은 해 죽도동 여성회관추진위원회에 총무로 있으며 여성회관이 건립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했다. 1981년부터 죽도유아원과 새마을 협동유아원 원장으로 5년간 근무했고, 1984년 포항불교여성회를 창립해 지금까지 37년간 회장직을 맡고 있다. 1987년에는 포항의 여성단체를 총괄하는 여성단체협의회를 조직해 회장직을, 1989년에는 전문직 여성클럽(BPW)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1990년에 포항여성회관 초대 관장(5급)으로 추대되었지만 봉사 정신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과는 맞지 않음을 깨닫고 자리에서 내려왔다. 1995년 통합 여성단체협의회 회장직을, 같은 해 경상북도 5대 도의원에 당선되었으며, 포항시 여성상을 수상했다. 1985년 대통령 훈장 근면장을 받았고, 2003년에 한국불교여성개발원이 선정한 108인에 추대되었으며, 2001년에는 포항시민상과 대통령 공로장을 받았다.대담·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

2021-07-25

밍크고래의 집단 서식지였던 영일만

포항 남구 구룡포읍 행정복지센터 앞마당에는 한 척의 어선이 전시되어 있다. 제1동건호라는 명칭의 어선이다. 뱃머리에 총이 달려 있어 한눈에 포경선임을 알 수 있다. 작고한 구룡포 유지 김건호가 기증한 이 배는 구룡포가 포경 기지였음을 보여주는 상징이다.흔히 고래 하면 울산 장생포를 떠올린다. 지난 2008년 고래문화특구로 지정된 울산 장생포에는 고래박물관, 고래문화마을, 고래바다 여행선 등 다양한 고래 관광 인프라와 국립수산과학원 고래연구센터가 들어서 있다. 국내 고래 관련 논문을 보더라도 대부분 울산 장생포를 무대로 작성되었다.그렇다면 포항과 구룡포는 어떠한가? 포항과 구룡포에도 과거에 고래가 많았고 포경업이 활발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이야기의 흔적이 제1동건호이고 포항과 구룡포의 고래고기 전문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이야기를 입증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자료는 빈약하고 연구논문은 전무한 실정이다. ‘포항시사’, ‘구룡포수산업협동조합사’ 등에 포경 자료가 일부 있으나 그 실체를 보여주는 데는 한계가 있다.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포항과 구룡포의 포경에 관한 역사적 실체를 확인하고, 이를 통해 이 지역 고래의 분포와 포경의 연구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쓰였다. 다행스럽게도 한국 포경에 관한 독보적 저작인 박구병의 ‘한국 포경사’(수산업협동조합중앙회, 1987)에서 포항과 구룡포의 포경에 관한 특기할 만한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이 글에서는 우선 ‘한국 포경사’를 중심으로 포항과 구룡포의 포경 역사를 정리하고, 현재 구룡포에 거주하고 있는 고령의 포경선 선원 2명, 고래 전문 중매인 1명과의 대담을 싣는다. 19세기부터 고래 무덤이 된 동해포경업은 19세기 내내 왕성하게 이루어졌다. 조명용 램프 연료로 고래기름을 쓰는 방법이 고안되면서 고래의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고래 뼈는 여성용 코르셋으로, 수염은 칫솔 등으로 사용되는 등 버릴 부분이 하나도 없을 만큼 고래 한 마리의 유용성은 대단히 높아 고래 관련 제품, 고래기름 없는 생활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다케다 이사미, ‘바다의 패권 400년사’, AK커뮤니케이션즈, 2021, 72∼73쪽 참조).이러한 이유로 고래의 천국이던 바다는 고래의 무덤이 된다. 동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 선조들은 동해를 ‘경해(鯨海)’라 부를 만큼 동해에 고래(鯨)가 많았지만 조선 시대까지 포경은 산발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서구 열강이 동해에 진출하면서 양상은 달라진다. 1849년 약 120척의 미국 포경선은 동해를 거침없이 드나들었고, 19세기 말에는 일본과 러시아의 포경선이 동해에서 각축전을 벌인다. 조선 정부도 뒤늦게 포경에 눈을 뜨고 1883년 3월 김옥균을 동남제도개척사겸관포경사(東南諸島開拓使兼管捕鯨事)로 임명하지만, 의미 있는 활동을 하지는 못했다.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데 이어 1910년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면서 동해의 고래를 독차지한다. 영일만 근처에서 수많은 밍크고래 포획포항이 한국 포경사에서 주요한 무대로 등장하는 시점은 1940년이다. 한일병합 이후 일본은 울산, 제주도, 대흑산도, 대청도, 유진, 장전 등을 근거지로 참고래, 대왕고래, 향고래, 돌고래, 보리고래, 귀신고래, 긴수염고래 등을 대거 포획하다가 1940년부터 밍크고래와 해돈(海豚)으로 눈을 돌린다. 1937년에 시작된 중일전쟁이 장기화되고 식량 등 각종 물자가 부족해지자 그 대응책으로 수산업 분야에서는 종래 포경업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소형 고래인 밍크고래와 해돈류를 잡기 시작했다. 태평양전쟁 후에는 이러한 시도가 더 강화되었다. 박구병은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밍크고래, 해돈 대상의 포경업은 비록 소규모 경영이고 일본인 주도의 것이기는 하였으나 그것이 한국에 소재한 회사 ‘조선수산개발주식회사’가 한국에 선적을 둔 포경선을 사용하여 행한 포경업이었다는 점에서 포경사에서 별도의 장을 할애하여 서술할 만한 의의를 지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구병, 위의 책, 312쪽조선수산개발주식회사는 처음에 시험·조사 어로(漁撈)의 명목으로 포경업을 시작하는데, 여기에 동원된 포경선은 18t 규모 제1호환(鯱丸), 5t 규모 제1환일환(丸一丸), 16t 규모 제2환일환이다. 이 세 척의 소형 포경선은 선체가 경쾌하여 방향 전환이 용이하고, 선상에서 총을 쏘아 강철 작살로 고래를 사살할 수 있다.이들 포경선은 모두 포항에 근거지를 두고 영일만을 중심으로 조업하였다. 1941년 4∼5월에 첫 출어를 하는데 영일만의 만구(灣口)와 만내(灣內)에서 가장 많은 밍크고래를 잡았다. 이 점에 대해 박구병은 밍크고래 자원 연구에서 참고할 가치가 큰 자료라 하였다. 조선수산개발주식회사가 작성한 1941년 월별 밍크고래 포획 두수(頭數)를 보면, 1941년 4월부터 12월까지 제1호환이 84두, 제1환일환이 37두, 제2환일환이 61두이며, 그중 제1호환이 영일만 근처에서만 무려 62두를 포획하였다. 이 결과를 보면 영일만 근처에 수많은 밍크고래가 서식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밍크고래의 크기는 6∼7m 정도가 가장 많았다. 세 척의 포경선은 이후에도 포항을 근거지로 계속 활동했으며, 1941년 182두, 1942년 240두, 1943년 183두, 1944년 168두의 밍크고래를 포획하였다. 포경기지에 고래처리장은 필수 시설이다. 1941년 7월 1일자로 조선어업보호취체규칙 제8조에 규정된 고래처리장 설치에 관한 허가를 받는데, 그 장소는 포항을 비롯해 속초, 장전, 덕원에 있으며 처리장 면적은 각 50평이었다.광복 후에도 포항은 밍크고래의 근거지조선수산개발주식회사는 일제강점기에 포항에 주재소를 두었고 여기에서 포경 업무를 담당하였다. 광복 이후에 이 회사는 귀속 사업체로 존속되었으며 포항 주재소는 출장소로 격상되었다. 밍크고래 포경업은 미군정청의 방침에 따라 두세 척의 어선을 인수받아 포항을 근거지로 계속되었다. 포항 출장소가 작성한 1946년 7월 1일부터 1947년 3월 18일까지 제11대경환(大慶丸)호가 동해안을 주어장으로 밍크고래를 포획, 판매한 실적을 보면 39두 포획에 34두를 영일어업조합에서 판매하였다. 이 자료를 볼 때 광복 후에도 포항은 밍크고래의 근거지였음을 알 수 있지만 6·25전쟁 후에 상황은 서서히 변한다.1952년 말 부산수산대학 재학생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19척의 포경선 중에 포항에는 원문길 소유의 제3해산호(海産號), 나원신 소유의 제3호호(鯱號)가 있고, 구룡포에는 강두수 소유의 해승호(海勝號), 제9영어환(永漁丸)이 있다. 3년 후 1955년경 부산수산대학 재학생이 다시 조사한 자료에는 국내 19척의 포경선 중 포항에 안달문 소유의 해덕호(海德號), 구룡포에 강두수 소유의 해승호(海勝號), 제9영어호(永漁號), 주길호(住吉號)가 있다. 1959년 한국포경어업수산조합이 작성한 포경업자 현황에는 구룡포 강두수가 있으나 포항의 포경업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자료를 종합해보면 포항은 6·25전쟁 후에 포경업이 하향세를 보이다가 1950년대 말에 공식 자료에서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구룡포는 강두수 중심으로 포경업이 자리를 잡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울산 장생포에 밀리는 구룡포 포경업1962년 한국포경어업수산조합이 작성한 조합원별 포경선 현황에는 강두수 소유의 제9영어호, 제13영어호가 있으며, 이 해에 제9영어호는 밍크고래 12두, 제13영어호는 14두를 포획한다. 일제강점기에 비해 포획 두수가 크게 줄어든 것이다. 8년 후 1970년 3월 12일 포경어업협동조합이 작성한 포경선 현황에는 총 22척 중 제9영어호와 제13영어호가 있지만 이후 공식 자료에는 보이지 않는다.1970년의 이 현황은 포경 역사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69년 6월 건조된 동방수산 소유의 제1동방호, 제3동방호, 제5동방호가 새롭게 등장하는데 세 척 모두 철조선(鐵造船)에 81.9t, 450마력의 위용을 갖추고 있다. 그에 비해 1935년에 건조된 제9영어호와 1953년에 건조된 제13영어호는 목조선(木造船)에 17t 미만, 50마력 미만에 불과하다. 울산 장생포에는 큰 자본이 유입되면서 최신식의 대형 포경선이 투입된 반면, 구룡포는 노후화된 소형 포경선으로 지탱하면서 두 지역은 경쟁력에서 큰 차이가 난다. 이에 따라 구룡포의 포경선 선원들도 울산 장생포로 이동하게 되고, 구룡포는 포경기지의 명성을 차츰 잃게 된다.제9영어호와 제13영어호가 공식 자료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구룡포 포경업의 명맥이 끊겼다고 단정할 수 없다. ‘구룡포수산업협동조합사’와 구룡포 주민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1970년대에도 구룡포에서 포경은 계속 이루어졌고, 당시 구체적 상황에 대해서는 조사가 필요하다. 포항과 구룡포에서 고래 위판이 활발하였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포경선이 사라진 포항은 물론 구룡포도 고래 위판으로 한동안 각광을 받았고, 이곳에서 위판된 고래고기는 일본으로 수출되기도 했다. 포항과 구룡포의 고래 이야기는 아직도 많은 궁금증을 품은 채 계속 이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구룡포에 거주하고 있는 포경선 선원과 고래 전문 중매인의 육성을 통해 그 궁금증의 일부를 풀어보고자 한다.글/김도형 THE OCEAN 편집위원

2021-07-21

정치·문화·예술 ‘통일신라 최전성기’ 꽃피우다

예술과 문화를 꽃피우기 위해서는 탄탄한 정치·경제적 토대가 우선돼야 한다는 것은 이미 역사를 통해 증명된 바 있다.나라의 곳간이 텅텅 비어있고, 외세의 침략이 빈번한 상황에서 대규모의 화원을 조성하고, 신하들을 위로하며 격려할 공간을 만들고, 왕자의 교육과 왕위 계승에 도움을 줄 궁전을 축조하는 왕은 없거나 드물 듯하다.경주의 대표적 유적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동궁과 월지도 이런 전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고대왕국 신라가 만든 동궁과 월지의 발굴조사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경주 동궁과 월지 조사·연구 마스터플랜 수립 연구’에서 동궁과 월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사적 제18호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의 궁원지로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 제30대 문무왕 14년(674) 2월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그곳에 온갖 화초를 심고 진기한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을 시작으로 953년 신라가 고구려에 귀부(歸附)할 때까지 262년간 왕이 군신(群臣)을 위해 항연을 베풀었던 장소이자 태자(太子)가 거처하는 동궁(東宮)으로 알려져 있다.”이 설명처럼 동궁과 월지는 7세기 중반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이 시기의 신라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분명 국력과 나라의 기세가 약했을 때는 아닐 것이다. 태종무열왕에서부터 시작된 신라의 전성기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펴낸 책 ‘신라사 총론’은 위의 질문에 아래와 같이 답하고 있다.“신라 중대(654~780)는 제29대 태종무열왕대부터 제36대 혜공왕대까지로, 태종무열왕과 그 직계 후손이 재위한 시기였다. 중대 초기 신라는 당과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켰다.그러나 당이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려는 야욕을 보이자 신라는 이를 무력으로 물리치고 드디어 삼국통일을 달성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이전보다 영토와 인구가 크게 늘어나고, 발달된 선진 문물을 수용함으로써 이후 100여 년에 걸쳐 유례없는 번영을 이룩하였다.”앞서의 언급처럼 ‘신라 중대’가 ‘유례없는 번영을 이룩한’ 시기라면 태종무열왕과 그의 아들 문무왕, 손자 신문왕이 통치했던 7세기 중후반은 신라 번영기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는 동궁과 월지가 만들어진 때와도 일치한다.그렇다면 나라의 힘을 키워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하고, 불교문화와 예술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까지 만들어 통일신라의 골격을 형성시킨 태종무열왕, 문무왕, 신문왕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당나라와 연합해 백제를 굴복시킨 태종무열왕은 654년부터 661년까지 신라를 통치했다. 그의 이름 김춘추는 굳이 역사서만이 아니라 신라를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서도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다.폐위된 진지왕의 손자였던 태종무열왕에 관해서는 흥미로운 기록들이 많은데, ‘두산백과’가 소개하는 것들을 인용하면 이렇다.“‘삼국사기’에 따르면, 무열왕은 풍채가 영준하고 거동이 위엄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세상을 다스리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그가 하루에 쌀 서 말과 꿩 아홉 마리를 먹었으며,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는 아침과 저녁 두 끼만 먹었는데도 하루에 쌀 여섯 말과 술 여섯 말, 꿩 열 마리를 먹었다고 나온다.‘삼국사기’에는 무열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인 642년에 딸인 고타소가 백제군에게 죽임을 당하자 직접 고구려로 가서 원병을 요청해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으려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태종무열왕 김춘추는 진골(眞骨) 출신의 최초 신라 왕이었다. 그는 정치적 욕망의 실현을 위해 당대의 거물 김유신의 누이와 정략결혼을 했는데, 그 이유를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김춘추는 김유신의 누이인 문희와 정략적인 측면에서 혼인함으로써, 왕위에서 폐위된 진지왕계와 신라에 항복해 새로이 진골귀족에 편입된 금관가야계간의 정치적·군사적 결합이 이루어졌다.즉, 진지왕계인 김용춘·김춘추는 김유신계의 군사적 능력이 그들의 배후세력으로 필요하였다. 또한 금관군주 김구해계(金仇亥系)인 김서현·김유신은 김춘추계의 정치적 위치가 그들의 출세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아버지가 닦아 놓은 터전에서 통일 이룬 문무왕아버지 김춘추와 어머니 문희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신라 제30대 왕에 오른 문무왕은 김유신 등과 힘을 합쳐 고구려를 제압하고 당나라 세력을 축출함으로써 삼국 통일을 이뤄냈다. 그는 661부터 681년까지 20년간 신라를 통치했다.‘동궁과 월지의 건설자’이기도 한 문무왕이 이뤄낸 삼국 통일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역사학자들이 적지 않다. 이와 관련해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행한 ‘신라의 삼국 통일’ 중 한 대목을 읽어보자.“현재 ‘한국사’ 교과서에는 ‘신라가 당을 축출함으로써 삼국 통일이 완수되며,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은 하나가 되어 단일한 민족문화와 사회를 만들 수 있었다’고 묘사되어 있다.또 ‘이 시기의 예술세계는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켜 통일과 균형의 아름다움을 통해 불교세계의 이상을 실현하였다’고 하여 신라의 삼국 통일이 갖는 민족사적 의의와 통일 이후 신라의 문화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신라의 삼국 통일 과정에서 보여준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헌신적 지도력, 신라 화랑의 빛나는 용기 등에 대해서도 신라 당대부터 끝없는 찬사가 이어져왔다.”‘인물한국사’에 의하면 문무왕은 태자 시절부터 아버지 태종무열왕 이상의 능력을 보여줬다고 한다. 아래와 같은 서술이다.“아버지가 왕위에 오르기도 전인 진덕여왕 때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고, 늦게 왕위에 오른 아버지를 도와 병부령(군사에 관한 업무를 총괄하던 우두머리)의 자리에서 나라의 기강을 잡았다.아버지는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사비성을 함락한 승전보 속에 생애를 마쳤지만, 아들은 계속되는 백제의 부흥운동을 제압하고, 고구려를 쳐서 멸망시킨 다음 당나라 군사마저 쫓아내기까지 과중한 임무를 맡아야 했다.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태종무열왕의 업적이 화려한 서곡에 불과할 정도로 문무왕은 통일의 주역으로서 자신의 몫을 다했다.”동궁과 월지 등 현재까지도 그 흔적이 남이 있는 유적을 여럿 만들어낸 문무왕은 죽음과 묘지 선택까지 드라마틱했다.그의 묘는 경주시 문무대왕면 봉길리 앞바다 바위 아래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해변에서 200m쯤 떨어진 곳이다. 사람들은 이를 ‘문무대왕릉’이라 부르고 있다.최고 권력자인 왕의 유택(幽宅)이 땅 위 거대한 봉분 속이 아닌 유실의 위험성이 높은 바다 한가운데 마련된 이유는 “내가 죽으면 용이 되어 우리 백성들을 괴롭히는 왜구를 막아 내겠다”는 문무왕의 유언 때문이었다고 한다.정치적으로나 문화·예술적으로 ‘성공한 군주’라 평가 받는 문무왕이지만, 그와 아버지 태종무열왕이 이뤄낸 삼국 통일에 관해서는 비판적 평가도 없지 않다.세상사 모든 일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책 ‘신라의 삼국 통일’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실려 있다.“‘한국사’ 교과서나 개설서에는 ‘신라의 삼국 통일은 당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였고 고구려의 고토 만주를 잃어버린 불완전한 통일’이라는 통일의 한계점을 강조하는 부정적 시각도 반드시 곁들여져 있다.심지어 ‘신라의 삼국 통일은 통일이 아니며, 단지 백제의 멸망에 불과하다. 고구려를 이어 발해가 등장했기 때문에 삼국시대에서 양국시대 또는, 남북국시대로 바뀐 것에 불과하다’는 통일 자체를 부정하는 견해까지도 나와 있다.”신문왕, 장인까지 처형하며 왕권을 강화하다문무왕 사후 신라 제31대 왕에 오른 신문왕은 문무왕의 장자다. 태자가 된 것은 665년, 681년에 왕의 자리에 올랐고 12년간 재위했다. 그는 신라 역사 속에서 강력한 전제 왕권을 만들어낸 통치자로 평가받고 있다.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김용만은 ‘인물한국사’에서 왕권의 강화를 위해 장인까지 처형한 신문왕에 관해 아래와 같이 쓴다.“681년 7월 1일 삼국 통일의 영웅 문무왕이 세상을 떠났고, 16년간 태자 자리에 있던 정명이 왕위에 올라 신문왕이 되었다. 신문왕은 자신의 역할을 정확히 알고 있던, 냉정하면서도 판단력과 실천력이 뛰어난 임금이었다. 그는 즉위한지 한 달 만인 8월 8일 반란 모의죄로 소판(蘇判) 김흠돌, 파진찬(波珍6E4C) 흥원, 대아찬(大阿6E4C) 진공 등을 처형했다. 놀랍게도 김흠돌은 신문왕의 장인이었다.”여기서 이름이 언급된 김흠돌, 흥원, 진공 등은 삼국 통일까지의 전쟁 과정에서 큰 공을 세운 이들이었다. 그럼에도 신문왕이 즉위 직후에 그들을 처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역사학계는 외척들의 호가호위(狐假虎威)와 왕 주변에 포진한 귀족들의 저항을 싹부터 잘라내려는 의도에서였다고 보고 있다.이 추정은 김흠돌 처형 이후 신문왕이 왕의 권력과 권위를 넘볼 이들이 없는 집안의 여자를 새로운 왕비로 택했다는 것에서 힘을 얻는다.동궁과 월지가 만들어지던 7세기 중후반은 삼국 통일에 이은 왕권 강화로 대규모의 토목공사가 별다른 걸림돌 없이 진행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무열왕, 문무왕, 신문왕으로 이어지는 이 시기는 ‘통일신라 최전성기’로 불리는 8세기 초중반의 토양으로 역할하지 않았을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7-21

“사람들에게 파티 문화 알리고, 우리의 꿈도 펼쳐요”

7번 국도를 따라 경상북도의 끝자락으로 향한다. 뜨겁게 내리쬐는 여름바다를 구경하고 있노라면, 어느새 경북 울진군의 한자락에 다다른다. 대게와 원자력발전소 등으로 유명한 곳. 한 때는 강원도의 일부이기도 했기에 독특한 지역색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곳에 ‘파티공작소’라는 생소한 이름의 카페(?) 아니 케이터링 업체가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박지영(35) 씨와 이미영(34) 씨. 이들은 도시에서 울진으로 정착한 청년들이다. “경력단절 여성들의 재취업 프로젝트라는 생각을 가지고 시작했어요. 저는 영상제작을 전공했고, 미영이는 제과·제빵을 했죠. 그리고 지금은 공부를 위해 쉬고 있지만 막내는 호텔 경영을 전공했어요. 우리가 3명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파티라고 하면 소품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서 음식 만드는 것, 준비하는 것까지 하게 된다면 우리의 능력을 모두 발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죠. 곧바로 아이템을 파티로 잡고 파티공작소라는 이름으로 창업을 했어요.”말 그대로 두 사람은 모두 경력단절 여성이었다. 울산이 고향인 지영 씨는 부산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영상제작을 전공하고 서울에서 영화현장 스태프와 보도국 스태프로 일했다. 미영 씨의 고향은 울진이다. 결혼 전까지 개인 제과점과 대형 스파의 고객관리팀장으로 일했었다. 하지만 지영 씨와 미영 씨는 결혼과 함께 전업주부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이런 두 사람이 만나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저는 울진에 연고가 없어요. 처음 울진에 왔을 때, 큰 아이가 12개월 되던 무렵이었죠. 귀촌 후 외롭다기보다는 나만의 세상에 온 듯한 느낌이 있을 때, 미영이를 만났어요. 첫째가 동갑이라는 공통점과 경력단절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금방 가까워질 수 있었죠. 나름 미영이 고향이 울진이라 유익한 정보들도 얻을 수 있었구요. ”“저는 울진이 고향이고 부모님과 형제들이 울진에 있어요. 다시 적응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죠. 하지만 저도 지영이 언니처럼 매장을 오픈하기 전까지는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였어요. 현재는 파티공작소에서 메뉴개발과 매장관리를 맡고 있죠.”□ 나의 꿈과 아이를 위한 선택한참을 바쁘게 살아갈 시기의 이들이 내륙의 외딴섬이라고 불렸었던 울진으로 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도 촌사람들에게는 생소한 ‘파티’라는 아이템을 들고 말이다.“경력단절 여성을 위한 강의를 듣다가 취업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친구들을 모으고 준비를 하는 과정에 구청에 자문을 많이 구했거든요. 그때 담당했던 주무관님이 ‘이 아이템이라면 도시청년시골파견제를 통해서 더욱 성장할 수 있는 아이템’이라고 말씀해주셔서 용기를 가지게 됐어요. 아! 울진이요? 사실 도시 생활이 너무 삭막하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신랑이랑 귀촌을 해보자하고 마음을 먹고 있었죠. 그리고 ‘아이 낳고 살기 좋은 울진’이라는 슬로건을 보고 정착했어요.”그렇다고 이들에게 부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파티공작소’를 생소하게 바라보는 울진의 시선을 견뎌야 했고,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막내를 떠나보내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하는 옛 어른들의 말씀이 진리일까. 울진의 파티공작소는 어느새 지역의 명물로 자리를 잡았다. 박지영 대표에게 지금의 느낌을 물었다. “시골파견제의 도움을 받기도 했고, 어쨋든 저는 지금 너무 만족하고 있어요. 울진이라는 곳이 공기도 너무 좋고 아이들을 키우기에도 너무 좋은 환경이더라구요. 도시에서 느낄 수 있는 문화생활은 부족하지만, 내 아이들을 위한 너무 좋은 환경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어서 만족해요. 우리는 청년이기도 하지만 엄마거든요.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죠. 하지만 늘 노력하고 있어요.”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 대체 울진의 파티공작소는 무엇을 하는 곳일까. 포털의 검색창과 주위의 도움을 구해도 알 길이 없었다.“아직도 도대체 뭐하는 곳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아요. 여러가지 아이템을 보유하고 있어서인 것 같아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파티를 바탕으로 한 복합공간이에요. 파티를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많잖아요. 음식도 당연히 필요하지만, 기획을 하는 사람과 음악, 소품들이 함께 있어야 파티가 빛이 나죠. 저희는 이러한 파티를 울진의 경단여들과 함께 만들어 가고 싶어요. 코로나19 때문에 조금 더디게 진행하고 있지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싶어요. 일종의 꿈?” 기억에 남는 것은 울진에서 처음 진행했던 초등학생들을 위한 원데이클래스라고 한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디저트 만들기라고 할까. 울진에서는 처음 진행하는 것이라 설렜다는 박지영 씨는 수업을 위한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반응은 좋았다. 카프레제와 카나페를 퓨전한 메뉴를 만들기도 했고, 크래커 위에 장식을 놓기도 했다. 파티공작소에서 직접 구워간 머핀에 아이들이 생크림 토핑을 하는 모습도 흐뭇했다고….□ 망설이지 말고 도전하라울진이라는 시골은 이들에게 어떠한 의미일까. 도시가 그립지는 않을까. 그리고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어떠할까하고 말이다. 사실 지영 씨와 미영 씨의 귀촌은 선택 사항이 아니었다. 남편의 결정에 따랐던 것. 오히려 오고 싶지 않은 마음이 조금은 있었다고 한다. 오히려 친정 어머니는 울진에 이사한 지영 씨를 보고 우시기까지 하셨다고 하니 말이다. “큰 도시는 이미 많아요. 제가 직접 아이를 키우고 살다보니 부족한 것들이 있더라고요. 성장앨범 찍어줄 수 있는 곳도 없고, 애들을 데리고 체험을 할 수 있는 곳도 부족했고, 그래서 제가 직접 한번 해보자. 다른 아이들에게도 기회를 주고 싶다는 생각에 울진에서 하면 잘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물론 처음 귀촌을 계획했을 때는 이상적인 삶을 꿈꾸기도 했어요. 회사 생활의 스트레스와 안녕하고, 해보고 싶은 일을 하고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고, 내 아이들을 흙과 물이 넘치는 그런 곳에서 놀 수 있게 하고 싶었죠. 아마 불영계곡을 넘어 내려오던 중 만난 푸른 주변 풍경과 에메랄드 빛 바다가 보이는 해안가로 펼쳐진 7번 국도가 유혹을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은 어떠할까.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이들에게 귀농과 귀촌에 대한 솔직한 느낌을 물었다. “로컬이 고향이 아닌 친구들에게는 낯선 환경, 그리고 귀향하는 청년들에게는 어른들의 시선이 아닐까 싶어요. 이런 청년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가 필요한 것 같아요. 나의 적성과 직업을 찾아 돌아오는 청년들을 실패자나 낙오자가 아닌 우리 마을을 실리러 오는 구원투수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큰 도시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돌아온 마을의 자랑? 그리고 무엇인가 도전하는 청년들에게 연륜과 경험에서 나오는 지혜들을 팍팍 전수해주셨으면 하구요.”그랬다. 지영 씨와 미영 씨는 울진에서 새로운 꿈을 마련한 셈이다. 그리고 이들의 5년과 10년 후는 어떠할까.“파티공작소를 사회적 기업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계획을 하고 있어요. 귀향한 청년들과 전문직 경단여를 필요한 직군에 모집하고, 커뮤니티를 형성해 지역 발전을 위한 재능기부를 하는 것이 목적이에요. 코로나19로 많이 늦춰졌지만 조급해 하지는 않아요. 천천히 한 단계씩 나아가겠죠.”“저희는 울진의 파티플래너 1호라고 자부하고 있어요. 파티플래너라는 이름으로 지역의 학생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갓난아이를 데리고 도시로 나가 성장앨범 촬영을 하는 번거로움을 해소시키고자 셀프스튜디오를 운영하기도 했죠. 아이들과 베이킹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 없어 원데이클래스도 열었구요. 이렇게 아이템이 늘어나는 이유는 울진이 아닌 주변 도시에서 소비생활을 하는 군민들을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에요. 망설이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도전을 먼저 했으면 좋겠어요. 그저 저만의 꿈으로 간직할 수밖에 없었을 텐데 말이죠. 다른 분에게도 새로운 시작이 되는 그런 사업이었으면 좋겠어요.”/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1-07-20

새마을복 입고 포항 구석구석 안 다녀본 데 없어

여성단체가 거의 없던 시대,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조직된 새마을부녀회는 여성들이 사회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적인 통로였다. 그 통로에 첫발을 딛고 열정적으로 걸어갔던 김경희. 세 번째 만남에서는 1970년대 포항에서 일어났던 새마을운동을 중심으로 포항의 변화와 여성들의 움직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최 : 삶을 돌아볼 때 가장 잘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김 : 새마을운동이 아닌가 싶다. 사실 1970년대 포항은 거의 모든 면에서 뒤떨어져 있었다. 생활도 그렇고 교육도 그랬다. 그 어려운 시절에 새마을운동이 있었기에 포항이 자생력을 갖추었다고 본다.최 : 약력을 살펴보니 1973년부터 포항새마을부녀회장을 맡았습니다.김 : 돌아보면 그 자리를 맡게 된 것도 행운이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그걸 맡았기에 마음껏 일해볼 수 있었다.최 : 주로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김 : 포항시 24개 동에 새마을부녀회를 알리기 위해 여기저기 바쁘게 다녔다. 허구한 날 바깥으로 나다녔으니 다른 집 같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싶다. 남편이 이해해주지 않았으면 벌써 쫓겨났을 것이다. 동네마다 가서 과수원이 있으면 함께 과일도 따고, 농사를 짓고 있으면 비료도 함께 날랐다. 새마을복 세 벌을 번갈아 입으며 포항 구석구석 안 다녀본 데가 없다.최 : 새마을부녀회의 목표는 무엇이었는지요?김 : 여성들의 의식을 계몽하고 식생활을 개선하는 게 주안점이었다. 당시에는 여성에게 배움의 기회가 적어 새마을부녀회원들 대부분이 국민학교 출신이었다. 학력과 상관없이 새마을 교육에 참여했던 회원들은 일주일간 교육을 받고 나오면 모두 새마을 지도자가 되었는데 자부심이 대단했다. 초창기 회원들은 ‘잘 살아보자’는 일념으로 열성적으로 활동했다.새마을운동은 물질적 풍요는 물론, 정신적 풍요를 동시에 누리는 마을 혹은 공동체를 만들자는 운동이었다. ‘새마을부녀회’는 1970년대 초 생활개선 구락부, 가족계획 어머니회, 부녀 교실, 저축 금고 새마을 어머니회로 활동하던 각각의 여성단체를 하나로 모아 1977년에 통합 조직하면서 탄생되었다.최 : 지금처럼 교통편이 좋은 것도 아니고 식당이 많은 것도 아닌데 어려운 점이 많았겠습니다.김 : 요즘처럼 탈것도 먹을 것도 흔한 시절이 아니었다. 튼튼한 두 다리로 걸어다녀야만 했다. 그때 만났던 사람이 김보미 포항시 계장〔전 포항시 북구청장〕이다. 김보미와 당시 읍면동 회장이었던 김영자와 함께 장성동 어머니 친목회 행사에 갔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아파트 대단지가 들어서 있지만, 그때는 장성동 주변이 다 산골짝이었다. 비포장도로를 한참 걸어가야 하는 외곽지였다. 그런 곳이니 당연히 먹을 것, 입을 것이 풍족할 수 없었다. 장성동 부녀자들과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다 보니 점심때가 훌쩍 지났다. 얼마나 배가 고팠겠는가. 그 시절에는 서로 챙길 줄 알았다. 먹을 것이 없으니 집집마다 탁주를 받아와서 커다란 다라이에 바닷가에서 뜯어온 거뭇거뭇한 진저리 해초를 넣고 조선파를 썰어 넣어 간장에 버무렸다. 그걸 가운데 놓고 대청마루에 둘러앉아 주민들과 탁주에 진저리 나물을 먹으며 점심을 해결했다. 지금이야 진저리가 거름통으로 들어가지만, 그때는 그걸로 한 끼를 때웠다. 그렇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며 탁주를 마시고, 흥이 나서 노래도 하고, 그러다 더욱 흥이 나서 또 마시다 보면 너도나도 취해서 시름이 다 사라졌다. 그날 나는 김영자에게 업혀 왔다. 그때는 그렇게 살았고 일했다.최 : 새마을부녀회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요?김 : 1980년 9월 창립해서 생활개선 사업, 가족계획 사업 등을 추진했다. 생활개선은 말 그대로 주변의 더러운 것들을 하나하나 치우고 정리하는 일이다. 부녀회원들이 동마다 구석구석 하수구 청소를 했고 부엌도 개조했다. 그리고 생활개선을 위해 요리 전문가를 초빙해 포항여고 기숙사에서 포항의 여성 대표들을 먼저 가르쳤다. 포항 여성들의 계몽 교육과 바른 먹거리 식생활 교육도 이루어졌다.최 : 잊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을 것 같습니다.김 : 산아제한 교육도 새마을부녀회에서 맡았다. 주로 학교 강당 같은 데서 ‘하나만 낳아야지 둘셋 놓으면 거지 만든다’는 내용의 교육을 했다. 피임 교육도 동네별로 했는데, 교육을 하고 나면 동네 아이들이 콘돔을 풍선인 줄 알고 입에 물고 다니기도 했다. 여자들에게는 먹는 피임약을 줬는데, 시어머니가 며느리 혼자 좋은 약을 먹는 줄 알고 며느리가 집을 비울 때마다 두세 알씩 몰래 먹기도 했다. 지금은 아이를 낳지 않아 심각한 문제인데, 그때는 산아제한 때문에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많았다.가족계획 사업의 주요 내용은 피임약 보급, 피임 시술, 사회적 지원, 계몽 홍보 교육 등이었다. 1912년부터 광복 전까지 우리나라 출생률은 상승과 하락을 반복했다. 그리고 급격한 인구 증가가 국가적인 문제였던 1960~1980년대에 정부는 강력한 산아제한 정책을 펼쳤다. 정부의 산아제한 정책이 지속된 탓에 한국의 합계 출산율은 목표였던 인구 대체 수준 2.1명을 달성한 후에도 빠르게 감소했다. 그리고 1984년에는 1.76까지 떨어졌다. 최 : 새마을부녀회에서 했던 여러 가지 일 중에서 보람된 일은 무엇인지요?김 : 1985년 포항에서 전국소년체전이 개최되었다. 종합운동장에서 대회가 열렸는데, 출전하는 선수들 밥을 해먹이겠다는 마음에 24개 동 새마을부녀회에서 모두 나와 운동장에 텐트를 쳤다. 그런데 당일 새벽부터 비가 내리는 바람에 앞이 깜깜해졌다. 부녀회 회원들 모두가 나와 팔을 걷어붙였다. 누가 시켰다면 그렇게 했을까. 종합운동장에 고인 물을 손바닥으로 퍼내고 걸레로 닦아내기 시작했다. 정말 한마음으로 빗물을 닦았다. 며칠 후 미국에 있는 후배가 신문에서 나를 보았다며 전화를 했다. 우리가 운동장에 고인 빗물을 손으로 퍼나른 이야기가 미국에서 보도되었다는 것이다.최 :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네요.김 : 그만큼 단결도 잘되고 화합도 잘되었다. 그래서 새마을부녀회를 잊을 수 없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방향을 알려준 것이 바로 새마을운동이다. 이 일을 하지 않았다면 과연 내가 무슨 일을 했을지 모르겠다. 새마을복 세 벌이 내 인생의 옷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새마을부녀회는 공동기금 마련을 위해 구판장 운영, 절미 저축, 공동 경작 등의 사업을 했으며, 정부에서 추진하는 민간 계몽과 정부 시책 홍보 및 실천 조직으로서 전방위 역할을 했다. 농산물 직거래 활동, 강원도 감자 사주기 운동, 농촌 일손 돕기 자원봉사 등을 매년 실시했으며 새마을 알뜰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다. 건전한 휴가 보내기, 호화 혼수 안 하기 등 근검절약 분위기 조성과 기초 질서 확립 캠페인, 나라 사랑 국기 달기 캠페인을 전개했고, 납세 의무자와 시민의 역할 교육과 우리 동네 개혁 운동을 위한 간담회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96년 고철 모으기 캠페인에서는 경상북도 1위를 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최 : 어떤 단체보다 희생정신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김 : 현장에서 험한 일을 마다 않고 헤쳐 나갔다. 하수구에 있는 쓰레기도 건져내고 쥐도 잡고. 회원 모두 남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일이라 여기며 일했기에 가능했다. 사실 먹고 사는 게 어려웠던 시절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고아원에 가려 한다, 노인들 밥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십시일반으로 쌀이 모였다.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곡식 창고는 열쇠로 여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여는 것이었단 생각이 절로 든다. 그것뿐이었던가. 여성도 남성만큼 할 수 있다는 패기를 보여주자며 해병대에 가서 1박 2일 훈련도 받았다. 총 쏘는 것도 배우고 험한 훈련도 했다. 다른 지역 부녀회에서는 감히 생각도 못할 일을 포항에서 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그렇게 열성적으로 일한 공로로 포항시 새마을부녀회장 1대 김경희, 2대 정경숙, 3대 김숙자, 4대 서차분 그리고 5대 황복희를 비롯해 읍면동 회장으로 활동한 김영자, 박순조, 김미자, 권양자, 정수남 회장이 대통령 훈장을 수훈했다. 새마을부녀회가 있었기에 여성들의 단체가 조직적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김경희포항에 산 지 올해로 여든여덟 해가 지났다. 그사이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와 4·19가 있었지만 유년의 기억은 늘 가슴 뛰게 빛났다. 포항여중과 포항여고 재학 당시 합창부와 미술부를 병행할 정도로 예술을 사랑하는 소녀였고, 미술부원들 간의 약속을 지키고자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할 만큼 신뢰를 소중하게 여겼다. 모교인 포항여고에서 교직 생활을 했으며, 결혼 후 4녀를 둔 가운데 여성 권익과 여성 교육을 위해 쉼 없이 뛰었다. 1973년 포항새마을 부녀회장, 1977년 새마음봉사단 단장을 맡았고, 같은 해 죽도동 여성회관추진위원회에 총무로 있으며 여성회관이 건립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했다. 1981년부터 죽도유아원과 새마을 협동유아원 원장으로 5년간 근무했고, 1984년 포항불교여성회를 창립해 지금까지 37년간 회장직을 맡고 있다. 1987년에는 포항의 여성단체를 총괄하는 여성단체협의회를 조직해 회장직을, 1989년에는 전문직 여성클럽(BPW)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1990년에 포항여성회관 초대 관장(5급)으로 추대되었지만 봉사 정신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과는 맞지 않음을 깨닫고 자리에서 내려왔다. 1995년 통합 여성단체협의회 회장직을, 같은 해 경상북도 5대 도의원에 당선되었으며, 포항시 여성상을 수상했다. 1985년 대통령 훈장 근면장을 받았고, 2003년에 한국불교여성개발원이 선정한 108인에 추대되었으며, 2001년에는 포항시민상과 대통령 공로장을 받았다.대담·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

2021-07-20

생활체육 통해 전문체육인 육성해야 한다

대구시체육회가 관선의 굴레를 벗고 특수법인으로 출범한 지 이제 한 달. 관선과 민선을 줄타기하면서 살림을 맡아오고 있는 신재득 사무처장(63)의 명패는 사무실 책상 위에 굳게 박혀 있었다. 전문체육과 생활체육을 통합해서 2016년 재출범한 대구시체육회에서 생체협 출신인 신 처장은 특별히 ‘풀뿌리 체육의 활성화’를 강조한다. 법인으로 독립했지만 청사는 여전히 대구시 소유인데 ‘나가라고야 하겠나’ 하면서 구태여 넘겨받을 생각은 없어 보인다.대구시체육회는 지난해 7월 40년 북구 고성동 시대를 마감하고 대구스타디움이 내려다보이는 수성구 대흥동 대덕산 기슭의 새 집으로 이사왔다.-체육회가 최근 엄청난 변화를 몸소 겪고 있다. 지난해 대구시장이 회장을 맡던 관선 체제에서 민선으로 바뀌고 1달 전에는 특수법인으로 법률적으로도 독립했다.△지난 6월 8일 특수법인으로 정식 출범했다. 사실 종전까지는 임의단체로 정체성이 모호한 면이 있었다. 이제 법인이 됐으니 안정적인 기반으로 자율적 독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셈이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안정적으로 예산을 지원받을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기부금을 받아도 영수증 처리할 수 있게 됐고 수익사업도 벌일 수 있게 됐다.-종전 대구시장이 맡던 회장을 민선으로 뽑았다. 관선 체제와 민선 체제에서 무엇이 달라졌나.△사무처장의 역할은 민선 시대라고 달라지지 않았다. 회장의 지휘 감독을 받아 사무처의 업무를 총괄하고 소속 직원을 지휘 감독하며 회장님을 필두로 체육회의 임원, 종목단체 회장들과 함께 체육을 통해 시민들의 건강과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체육을 통해 대구의 브랜드를 높이는 데 기여하는 것이고 거창하게 말하면 대구 체육의 위상을 국제적으로 드높이는데 역할 하는 것이다.-법인화와 민선 회장으로의 변화라는 대전환에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닐 것 같다. 재정 독립 방안에는 문제가 없나.△기대만큼 우려 또한 없지 않다. 지켜봐야 하겠지만 여전히 예산을 지방자치단체가 쥐고 있으니 자치단체장과 정치색이 다른 민선 회장이 들어서서 알력이 생길 수도 있다. 경기도 등 일부 지역에선 벌써 불협화음이 나오는 곳도 있다고 들었다. 이제 민선으로 출범한 지 한 달이 됐으니 앞으로 잘 꾸려나가야 할 것이다.-대구시체육회 사무처장으로 전국 17개 시도체육회 사무처장협의회 회장도 맡고 있다.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중요한 문제다. 체육회가 법인이 되긴 했지만 지방자치단체가 예산을 삭감하는 문제는 언제든지 생길 수 있다. 지방체육회 차원에서 지방체육회에 대한 지방비 보조를 의무화하도록 국민체육진흥법을 바꾸려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지방자치단체가 자치권 침해를 이유로 법안 통과가 미뤄지고 있다. 체육회와 자치단체가 체육회에 대한 지자체의 재정 지원을 ‘해야 한다’와 ‘할 수 있다’로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사실 종전 체육회는 엘리트체육 중심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체육회는 최근 이원화돼 있던 생활체육과 엘리트체육을 2016년 합병했다. 신 처장은 종전 대구시 생활체육협의회 부회장이었다. 두 영역간의 관계는 어떻게 되고 합병 이후 어떻게 운영되고 있나.△체육은 모든 국가정책의 기본이다. 거기서 생활체육과 전문체육을 나눠서 운영하는 나라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난 권위주의 시대에는 국위선양이라는 명분으로 전문체육을 중시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생활체육의 중요성이 더 커지고 있는 추세다. 일본에는 초등학교에 전문 체육선수가 없더라. 중국도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운동을 시키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풀뿌리 체육의 활성화를 모토로 삼고 있다.-대구시체육회도 법인화하면서 기구를 개편했나. 엘리트체육과 생활체육을 어떻게 조화시킬 작정인가.△전문체육과 생활체육의 영역이 가능하면 자연스럽게 융화될 수 있도록 노력해왔다. 이번 기구 개편에서도 생활체육과 엘리트체육의 부서를 통합했다. 서로에게 이로운 상호 작용을 하는 유익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생활체육이라는 기초 위에 엘리트체육이라는 벽돌을 쌓아 나갈 때 비로소 어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튼실한 시스템이 갖춰질 것이다.엘리트체육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가 좋은 성적을 내고 또 훌륭한 지도자로 자리 잡아 다시 생활체육에 기여하는 선순환 구조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두 영역을 굳이 구분하여 관계 지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상호 보완적이며 필수 불가결한 형태로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생활체육이 활성화되는 것이 중요하다. 대구시체육회의 모토가 ‘건강 백세 시대, 체육으로 행복한 대구’라고 들었다. 국민 소득이 높아지고 선진국으로 갈수록 소수 체육 엘리트보다 모든 시민이 삶의 질 향상과 개인의 행복을 위해 체육도 기여해야 하는 것으로 해석하면 되겠나.△이제 엘리트 체육과 생활 체육을 나누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생각한다. 당장 마주친 고령사회에서 스포츠를 즐기며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국민의 권리를 국가가 책임지고 지원해줘야 한다. 대구시체육회는 지역 실업팀의 경기력을 유지하면서 풀뿌리 체육을 확산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해서 시민 누구나 체육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나가려 한다. 생활체육을 통해 전문 체육인을 양성하는 시스템으로 가는 것이다.-그러면 운동선수에게 대학입시에서 특별히 대우하거나 병역 특혜를 주는 개발도상국가 시절의 양성 시스템은 이제 벗어나야 할 때가 됐다는 말인가. 심하게 말해서 올림픽이나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에게 또 특별 예우하거나 혜택을 주는 것도 이제는 바꿔야 할 때라며 시비 거는 사람이 있는데.△운동선수들의 대학입학이나 군 특례제도는 과학 예술분야에서 행해지는 시스템으로 운동선수들만의 특례는 아니다. 이런 시스템은 사회 전체의 변화와 발맞추어 체육 분야에서도 일부 개정은 돼야 한다는 데 공감한다. 그렇지만 체육 분야만 고쳐야 한다는 데는 동의하기 어렵다. 올림픽이나 세계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것이 개인 영광이지 국위 선양이 아니라는 생각은 너무 편협하고 나가도 너무 나갔다. 우리가 손흥민 류현진 김연아 선수들에게 환호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개인의 영광보다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제도적인 보완은 필요하지만 구시대의 유물이라 폄하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코로나19 사태가 체육계도 비켜가지 않았다.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결해 나갈 생각인가.△지난해 7월 새집으로 이사 오면서 한창 상승 무드를 타던 대구 체육이 코로나로 직격탄을 맞은 꼴이다. 대구시가 2019년 전국체전에서 18년 만에 7위를 했는데 지난해엔 연기됐고 많은 체육 행사들이 취소되면서 예산도 운영에 필수적인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대구시에 반납했다. 그 돈은 코로나 재난지원금으로 활용됐다. 올해 전국체전이 경북 김천에서 열릴 예정인데 불투명하다. 개최지가 경북이어서 대구와 상생 무드를 조성하기 좋은 분위기인데 정말 아쉽다. 대구FC와 삼성 라이온즈의 성적도 좋고 체전을 준비하고 있는 선수들도 열심인데 코로나19의 확산세를 보면 초조하다.-그렇다고 아주 경기를 안 할 수도 없을 것 아닌가. 더구나 시민들은 체육활동을 통해 코로나 시대를 극복하려는 움직임도 있는데 체육회가 그런 시민들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할 것 아닌가.△선수들은 방역 지침을 지켜가면서 훈련하고 있고 체육회도 방역지침을 지켜가면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올해 ‘2021 대구국제마라톤대회’를 언택트 레이스로 개최하고 ‘언택트 컬러풀 혼운챌린지’ ‘2021 대구 마스크 쓰GO 시민정신 걷기대회’ 등을 비대면으로 진행하기도 했다. 또 생활체육 지도자들이 영상 편집 교육을 통해서 코로나 확산에 대비한 비대면 수업을 진행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또 시민들에게는 체육을 통해 건강하고 일상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도록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맞는 다양한 비대면 사업을 새롭게 발굴해서 나가겠다.-우리 사회에서 선후배 간 갑질이나 남녀간 성폭력 문제가 예민하게 두드러지고 있다. 특히 체육계에서 더욱 심각한 것 같은 느낌이다.△시대가 바뀌었다. 어디에서든 일어나서는 안 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다만 운동선수들은 합숙훈련 등 선수들끼리 같이있는 시간이 많아서 좀 더 일어날 소지가 높은 것이 사실이다. 특히 성폭력 문제는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실업팀 선수들에게는 체육회 차원에서 외부 강사를 초빙해서 성인지 감수성 교육을 하는 등 교육과 지도를 통해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체육계에 오래 몸담아 온 사무처장으로서 개인적으로 욕심이 있다면.△법인이 됐으니 우리 사회에 기부문화가 체육회로도 더 확산됐으면 좋겠다. 그래서 선수들에게 장학금을 줘서 재능 있는 선수들이 대학가서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할 수 있도록 지원했으면 한다. 지금 스포츠는 과학적으로 훈련해야 한다. 좋은 성적을 기록하려면 재정적 뒷받침이 필요하다.또 육상과 수영 등 기초종목을 육성하고 싶다. 특히 수영을 위한 인프라가 필요하다. 육상 종목의 인프라는 어느 정도 마련됐는데 수영장은 너무 부족하다. 구태여 국제 규격의 수영장일 필요는 없다. 일반 시민들이 참여하는 프로그램들을 늘여 생존수영도 가르치는 수영장을 접근성 좋은 곳에 많이 확보하고 싶다. ◇신재득 (申載得)1958년 대구 출생. 영남대 체육과와 스포츠과학대학원 석사, 계명대에서 체육정책으로 체육학박사를 받은 체육행정가. 축구명문 청구고 졸업후 축구부 후원회장을 맡아 전국 합숙훈련을 동행했다. 이후 대구생활체육회 부회장과 대구시체육회 정책협력관을 거쳐 2019년 통합된 대구시체육회의 공모직 사무처장에 임명됐다. 17개 시도체육회 사무처장협의회 회장과 달구벌스포츠클럽 대표, 대구경북체육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이경우 편집위원

2021-07-20

아이스케이크 팔아 모은 돈이 여성회관 건립의 종잣돈

두 번째 만남 전에 점심 도시락 2인분을 준비했다. 나와 그의 도시락이 아니라 그와 남편의 도시락이었다. 동갑내기로 60년 이상 함께 살고 있는 남편의 점심이 늘 걱정이라고 첫 인터뷰를 할 때 지나가는 말로 했다. 두 번째 인터뷰도 점심 전에 마쳐야 한다고 해서 도시락을 드리며 조금이라도 더 붙잡고 싶은 마음에 준비했다고 말했다. 그는 유쾌하게 웃었고, 포항여성문화회관 건립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최 : 포항여성문화회관은 시 사업소로 운영되고 있지만 당초 민간 차원에서 자생적으로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김 : 1970년대 초반 여성단체는 새마을어머니회가 가장 규모가 컸고, 한국부인회 등이 미약하게 활동했다. 여성단체 대부분이 친목과 봉사 위주로 활동할 때였다. 어느 날 포항여고 총동창회 손정식 회장이 몇몇 사람들과 함께 나를 불렀다. 그때 나는 여자청년단 총무 자격으로 자리에 함께했다. 다양한 얘기가 오갔는데 무엇보다 여성과 어린이들을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 시급한 것은 재원이었다. 건물을 지을 자금이 필요했다. 그래서 여성회관 건립 추진위원회가 만들어졌고, 독자적으로 자금을 마련키로 합의했다. 모임 회비만으로 건립 기금을 마련하기는 어려워서 추진위원회 결정으로 송도해수욕장에서 수익 사업을 하기로 했다. 그렇게 장사를 시작했다.최 : 장사는 어떻게 했는지요?김 : 아침에 포항극장(현 롯데시네마)에 가서 잔돈을 바꾸고 아이스케이크, 사이다, 빵, 담배 등을 리어카에 담아 송도해수욕장으로 갔다. 그곳에 낡은 텐트를 치고는 가지고 온 것들을 팔았다. 밤에는 팔다 남은 물건들을 모래에 파묻었다. 그렇게 두 달 동안 송도에서 살다시피 했다. 해수욕장에서 맨발로 두 달을 버텼으니 새까맣게 탔다. 매일 교대로 나가며 장사해서 돈을 모았다.최 : 많이 힘들었겠습니다.김 : 손정식 선배가 나 아니면 믿을 사람이 없다고 해서 내가 나선 것이다. 그때 막내가 네 살인가 다섯 살이었다. 매일같이 남편을 설득해 송도에 나갔다. 남편이 아이를 업고 나를 찾아 송도에 오기도 했다. 내가 남편이었다면 이해할 수 있었을까 싶다. 남편은 나를 믿었고, 그래서 아직도 남편이 고맙다. 남편이 없었다면 절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유명한 태풍, 사라호도 거기서 맞았다.여성회관 건립 추진위원회의 위원장은 손정식이 맡았다. 어렵게 마련한 건립 기금으로 여성회관을 지었지만, 강사 섭외가 쉽지 않았다. 손정식이 수산전문대학(현 포항대학) 등을 찾아다니며 강사를 초빙했고, 자신도 교양과목을 가르쳤다. 손정식은 여성회관 초대 명예 관장으로 여성회관을 운영하며 여성의 삶 개선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고, 그 곁에 김경희가 있었다.최 : 그렇게 자금을 확보해서 여성회관이 죽도동에 건립된 것인가요?김 : 그 자금이 종잣돈이 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했다. 하지만 그렇게 건립 자금이 모인 게 화제가 돼 각계각층에서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시 예산과 지역의 기업 등에서 후원해주지 않았다면 여성회관 건립은 무산되었을 것이다. 최 : 1974년 여성회관이 죽도동에 현판을 내걸었을 때 감회가 남달랐겠습니다.김 : 나는 당시 새마을부녀회 회장으로 늘 새마을복을 입고 다녔고, 그날도 복장이 다르지 않았다. 여성회관 개관식에 정말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 여성회관 옆에 죽도1동 동사무소가 있었는데 동장 나이가 우리 아버지보다 많아 보였다. 그런데 시장이 와서 갑자기 준비를 덜 했다고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동장에게 험한 말을 하는 게 아닌가. 경상북도에서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와 있고 포항에서도 내로라하는 인물들은 다 와 있는데 말이다. 게다가 나에게 “아주머니, 아주머니!”라며 막 부르면서 함부로 대하질 않나. 정말 꾹꾹 참았다. 행사가 끝난 후 관장 사무실에 여성들이 모두 모여 차를 마셨다. 국회의원 부인, 포항시 부시장 부인도 함께 있었다. 내가 여권신장부터 하자고 말문을 열고는, 어떻게 시장이 이런 행사에서 막말을 할 수 있느냐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랬더니 다음 날 아침 일찍 시장에게 전화가 왔다. 아마 부시장 부인이 시장 부인에게 말했지 싶다. 시장은 다짜고짜 화를 내며 여자들 앞에서, 그것도 국회의원 부인도 있는데 자신의 험담을 해서 되겠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조목조목 시장의 언행을 짚어주고는, 시장이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 하고 전화를 탁 끊었다.최 : 어떻게 그렇게 당찰 수 있었는지요?김 : 바른말 하는데 뭐가 무섭나. 그 후로 시장을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중앙국민학교에서 열린 행사에 갔다가 만나게 됐다. 새마을어머니회에서 예비 훈련을 받아야 된다고 해서 수백 명이 자비로 군복을 입고 중앙국민학교에서 결성식을 했다. 단상에 올라가보니 시장과 나 단 둘만 있었다. 24개 동 새마을어머니회 여성 전부가 군복을 입고 시장에게 경례를 붙이자 시장 기분이 어떠했겠는가. 뿌듯하지 않았겠는가. 그 순간 시장이 낮은 목소리로 “회장님, 미안합니다. 그때는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라고 말을 건넸다. 그래서 나도 미안하다고 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손정식 관장이 나에게 “쪼매난 게 간도 크다”고 했다. 잘못되었다고 판단되면 바로잡아야 하는 게 내 성격이다. 그래서 별명이 싸움꾼이 된 것이다.그가 여성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과감하게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말을 듣는 내내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는 젊은 날의 그를 만날 수 있었다.최 : 여성회관은 1989년 시 사업소로 전환되었지요?김 : 민간단체로 운영하다 보니 예산이 늘 문제가 되었다. 어떻게 해결해보려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운영위원 회의에서 여성회관을 시 조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고, 시 사업소 직제인 포항시여성복지회관이 된 것이다.여성회관이 민간기관에서 시 직제로 바뀐 후 교육시설은 물론 운영 사업 전반에 걸쳐 눈에 띄는 변화가 있었다. 포항시여성복지회관은 전국 어느 사회교육기관 못지않은 수준으로 올라섰다. 그렇게 10년을 운영하게 되자 교육 수요가 확장되고 공간 문제도 대두되었다. 매년 수강생을 1천800명씩 배출하니 더 넓은 공간과 현대식 시설을 갖춘 여성회관의 신축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1998년 우현동에서 새 회관의 기공식을 갖고 2001년 입주하게 되었다. 현재 포항시여성문화관은 수영장을 겸한 지하 2층 지상 3층으로, 지역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교양강좌를 운영하며 시니어 대상 강좌와 남성 교양강좌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최 : 1988년에 여성복지회관 관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관장직을 그만두는데, 무슨 일이 있었나요?김 : 손정식이 명예직 관장으로 있다가 내가 그 자리를 맡게 되었다. 그때 그 자리는 공무원 5급 대우가 되었다. 두 달 동안 서울에서 관장 교육을 받고 석 달쯤 관장 업무를 해보니까 내 적성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이내 사표를 냈다. 남들은 그 좋은 자리를 왜 그만두느냐고 난리였다. 하긴 그 당시에 여성 공무원이 5급까지 가기도 쉽지 않은데, 일반 여성이 공무원 5급 대우 자리를 스스로 내던진다는 게 이해가 되었겠는가. 그런데 말이다. 매일 현장을 살피며 일하던 사람이 종일 의자에 앉아 있으니 한 번도 아프지 않던 몸이 슬슬 아프기 시작했다. 그래서 과감히 사표를 냈다. 사표를 내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가자 거짓말처럼 펄펄 날아다녔다. 그때 숙명처럼 알았다. 나, 김경희는 평생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걸. 김경희포항에 산 지 올해로 여든여덟 해가 지났다. 그사이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와 4·19가 있었지만 유년의 기억은 늘 가슴 뛰게 빛났다. 포항여중과 포항여고 재학 당시 합창부와 미술부를 병행할 정도로 예술을 사랑하는 소녀였고, 미술부원들 간의 약속을 지키고자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할 만큼 신뢰를 소중하게 여겼다. 모교인 포항여고에서 교직 생활을 했으며, 결혼 후 4녀를 둔 가운데 여성 권익과 여성 교육을 위해 쉼 없이 뛰었다. 1973년 포항새마을 부녀회장, 1977년 새마음봉사단 단장을 맡았고, 같은 해 죽도동 여성회관추진위원회에 총무로 있으며 여성회관이 건립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했다. 1981년부터 죽도유아원과 새마을 협동유아원 원장으로 5년간 근무했고, 1984년 포항불교여성회를 창립해 지금까지 37년간 회장직을 맡고 있다. 1987년에는 포항의 여성단체를 총괄하는 여성단체협의회를 조직해 회장직을, 1989년에는 전문직 여성클럽(BPW)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1990년에 포항여성회관 초대 관장(5급)으로 추대되었지만 봉사 정신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과는 맞지 않음을 깨닫고 자리에서 내려왔다. 1995년 통합 여성단체협의회 회장직을, 같은 해 경상북도 5대 도의원에 당선되었으며, 포항시 여성상을 수상했다. 1985년 대통령 훈장 근면장을 받았고, 2003년에 한국불교여성개발원이 선정한 108인에 추대되었으며, 2001년에는 포항시민상과 대통령 공로장을 받았다.대담·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 /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7-18

천년왕국 신라 ‘다른 보물들’ ‘또 다른 매력’으로 손짓하네

이탈리아 로마에 가서 콜로세움만 보고 오는 사람이 있을까? 단언컨대 없다. 로마에 갔다면 콜로세움과 함께 도시에 즐비하게 들어선 수많은 고대 유적을 보고, 이탈리아 전통가요인 칸초네가 흘러나오는 카페에서 얇고 담백한 피자 한 판은 맛보게 된다. 어떤 관광객이건.프랑스 파리에 간다면 어떨까? 딱 에펠탑만 보고 파리를 떠나는 여행자가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게 분명하다. 센 강에서 유람선도 타보고, 그 유명한 프랑스 포도주도 한 병 마시고, 밤에는 물랑 루즈에 가서 화려한 쇼도 보게 된다. 그게 새로운 도시를 발견하는 즐거움이다.경주도 마찬가지다. 단 하나의 유적이나 유물과 만나기 위해 긴 시간 자가용이나 버스, 기차를 타고 경주에 가는 이들은 드물다. 그 사람이 특정한 유물이나 유적 한 가지만을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라면.동궁과 월지는 빼놓을 수 없는 경주 여행의 보물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곳만을 하루 종일 돌아볼 수는 없는 일 아닌가.그러기엔 동궁과 월지 주변에 너무나 많은 천년왕국 신라의 ‘다른 보물들’이 흩어져 여행자를 기다리고 있다. 걸어서 30분 안팎이면 갈 수 있는 곳에 있으니 크게 힘을 들일 필요도, 번거로울 것도 없다. 동궁과 월지 지척엔 또 다른 관광 랜드마크가…흥미로운 관광지로서 동궁과 월지의 위상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수원대학교 양정석 교수는 ‘세계유산으로서 동궁과 월지의 가치와 보존’에서 이렇게 쓴다.“사적 제18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경주 동궁과 월지는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26번지에 위치한다. 이 유적은 사적으로 지정된 1963년부터 2011년 명칭이 변경되기 전까지는 경주 임해전지로 불렸다.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경주 임해전지나 동궁과 월지보다는 안압지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고 있다. 이미 임해전지라는 명칭으로 사적 지정이 되었지만, 발굴조사 당시에도 그리고 보고서가 나온 후에도 그 명칭은 안압지였다. 이렇게 안압지로 잘 알려져 있던 경주 동궁과 월지는 현재 경주 역사문화관광의 랜드마크가 되었다.”양 교수의 표현처럼 동궁과 월지는 떠오르는 21세기 경주 관광의 랜드마크다. 낮과 밤이 모두 흥미롭고 아름답다. 이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다.하지만, 앞서 말했듯 동궁과 월지 한 곳만을 방문하기에는 뭔가 아쉽다. 왜냐? 주위에 ‘또 다른 경주 역사문화관광의 랜드마크’가 여럿 있기 때문이다.지난 5년 동안 취재를 위해 경주를 50여 차례 찾았다. 그 경험을 토대로 신라 역사와 문화의 향기를 품고 있는 동궁과 월지 주변 관광지 몇 곳을 소개하려 한다. 더불어 젊은 여행자들에게 각광받고 있는 경주의 핫 플레이스까지.‘코로나19 사태’가 전 세계를 덮치기 전엔 적지 않은 유럽 사람들을 경주에서 볼 수 있었다.2017년 초여름이다. 20대 초반의 독일 여대생 둘을 만났다. 자기들 상식의 영역에선 ‘작은 산’처럼 보이는 능(陵·왕의 무덤)이 줄줄이 늘어선 생소한 풍경에 크게 뜬 눈으로 입을 벌리고 서 있는 그녀들에게 물었다. “어때요? 놀랍죠?”“네. 근데 저게 정말 무덤 맞나요?”멀고 먼 유럽에서 10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날아온 독일 학생 둘을 깜짝 놀라게 한 경주의 유적지는 다름 아닌 대릉원이었다.동궁과 월지에서 천천히 걸어도 채 30분이 걸리지 않는 곳에 자리한 신라의 또 다른 보물. ‘나무위키’는 대릉원을 이렇게 설명한다.“경주시 황남동에 있는 옛 신라의 왕, 왕비, 귀족층의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고분 밀집 지역. 사적 제512호다. 대릉원이란 이름의 기원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미추 이사금을 대릉에 장사지냈다’는 부분에서 따와 지었다.대릉원이라고 하면 좁게는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 황남동 고분군 쪽을, 넓게는 바깥쪽의 노서동, 노동동 고분군 등을 포함한다.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데다 경주 시가지에 있어 접근성이 좋고, 천마총처럼 신라 왕릉 내부를 관람할 수 있는 고분도 있기에 경주를 찾는 관광객들은 거의 필수로 찾는 곳 중 하나다.”대릉원이 매혹적인 건 거대한 왕들의 무덤을 볼 수 있다는 것만이 아니다. 능의 앞뒤로는 철마다 다른 꽃들이 피어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으며, 여기에 더해 대릉원을 둘러싼 돌담길은 낭만적인 연인들의 산책 코스로도 그저 그만이다. 천마총을 봤다면 다음은 길 건너 첨성대로대릉원에 들어가서 천마총을 보지 않는다면 소가 빠진 만두를 먹는 것과 같지 않을까? 천마총은 동산처럼 솟아 있는 경주의 왕릉 내부가 어떤 형태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비단 역사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은 둘러볼 가치가 충분하다며 경주시 문화관광 홈페이지가 천마총 방문을 권한다.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대릉원의 고분군 중 유일하게 공개하고 있는 155호 고분 천마총은 옆에 위치한 황남대총을 발굴하기 위해 시범적으로 발굴한 곳이다. 당시 기술로는 황남대총 같이 거대한 규모의 무덤을 발굴하기가 힘들었기 때문.1973년 발굴 과정에서 부장품 가운데 자작나무 껍질에 하늘을 나는 말이 그려진 말다래(말을 탄 사람의 옷에 흙이 튀지 않도록 가죽 같은 것을 말의 안장 양쪽에 늘어뜨려 놓은 기구)가 출토돼 천마총(天馬塚)이 되었는데, 이 천마가 말을 그린 게 아닌 기린을 그린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천마총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축조된 고분으로 추정되는데 금관, 금모자, 새 날개 모양 관식, 금 허리띠, 금동으로 된 신발 등이 피장자가 착용한 그대로 출토되었다. 천마총 금관은 지금까지 출토된 금관 중 가장 크고 화려한 것이다.”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는 우리들 생각처럼 명확하고 분명한 게 아니다. 인간의 삶 내부에는 언제나 죽음이 똬리를 틀고 있고, 삶 이후의 죽음이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그게 최고의 권력을 행사했던 왕이건, 이름 없이 살다간 필부(匹夫)건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인간의 본질을 고민하게 하는 공간 대릉원과 천마총을 살펴봤다면 다음은 거길 나와 조그만 도로를 건너 첨성대와 만나보면 어떨까.대릉원에서 10분쯤 걸어가면 여행자의 눈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첨성대.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 석조 건축물은 신라 선덕여왕 때(632~647년)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펴낸 책 ‘신라의 학문과 교육·과학·기술’은 신라의 천문과 역법을 설명하며 첨성대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신라의 천문학을 논할 때 우리는 흔히 두 가지 측면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하나는 신라 왕궁 월성의 북쪽 노지에 우뚝 서 있는 첨성대(국보 31호)의 존재이고, 다른 하나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수록된 30건의 일식 기록이다.첨성대는 그 말뜻이 별을 바라보는 대라는 점에서 일찍부터 천문관측대로서의 조형물이라는 인식이 팽배하였고, 정상부에 놓인 우물정자형 사각 틀과 아래로 갈수록 넓어지면서 둥그스름해지는 상방하원 형태의 곡선형 조형미가 가히 신라인의 하늘 이상을 잘 담아내는 것으로 주목받았다.”그 옛날 신라인들의 미적 감각과 빼어난 과학기술을 알게 해주는 첨성대는 중년의 한국인들에겐 ‘수학여행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로도 유명하다.1970~80년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던 이들의 집에는 까까머리나 갈래머리를 하고 교복을 입은 채 첨성대 앞에서 친구들과 포즈를 잡고 찍은 사진 한두 장은 있기 마련.그래서일까? 첨성대 주변에선 들뜬 목소리로 자녀들에게 자신의 청춘시절을 이야기해주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경주, 특히 첨성대가 보이지 않는 곳이라면 쉽게 포착되지 않을 정겹고 훈훈한 풍경이다. 경주 와서 황리단길을 빼놓으시려고?낯선 도시를 여행하는 즐거움 중 빼놓을 수 없는 하나가 ‘맛집’ 아닐까. 경주를 찾는 이들에게 이미 고유명사로 자리 잡은 황리단길은 독특한 감각의 인테리어로 꾸며진 카페와 세계 각국의 요리를 세련되게 차려내는 식당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황리단길 역시 대릉원, 첨성대와 묶어서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다. 산보하듯 걸으면 금방이다. 한국관광공사의 설명을 보자.“황남동 포석로 일대의 ‘황남 큰길’이라 불리던 골목길로, 전통한옥 스타일의 카페나 식당, 사진관 등이 밀집해 있어 젊은이들의 많이 찾는 곳이다. 황리단길이라는 이름은 황남동과 이태원의 경리단길이 합쳐진 단어로 ‘황남동의 경리단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1960~70년대 낡은 건물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어 옛 정취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거리다.”정갈하게 개조된 한옥 레스토랑에서 크림파스타를 먹거나, 늘어선 기와지붕이 한눈에 보이는 루프탑 주점에서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들이켠다면 여행의 기쁨이 보다 커질 게 분명하다. 주머니가 가벼운 관광객이라면 황리단길 길거리 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좋다.이처럼 동궁과 월지 주변엔 ‘또 다른 매력’을 갖추고 사람들의 발길을 기다리는 곳이 적지 않다. 이 여름이 다 가기 전 그 매력에 빠져보길 권한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7-14

도민 모두가 디지털 세상을 누릴 수 있도록

(재)포항테크노파크(이하 포항TP)가 경상북도의 인공지능(AI)·소프트웨어(SW) 인재양성에 앞장서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디지털 인재 양성을 위해 오는 2025년까지 약 1조원을 투자해 AI·SW 핵심인재 10만명 양성계획을 마련, 지난해부터 추진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기획한 D(Data)·N(Network)·A(AI) 기반의 대한민국 회복전략프로젝트인 ‘디지털 뉴딜’의 일환이다.정부의 계획과 발맞춰 포항TP 경북SW진흥본부는 경북지역 SW전문강사를 양성해 일자리를 창출하고, 체계적인 초·중·고 SW교육과 AI복합 전문과정 등을 운영하고 있다. 모든 경북도민들이 AI·SW교육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찾아가는 방문교육 및 실시간 온라인 교육방식도 강화하고 있다.포항TP 경북SW진흥본부는 올해 과기정통부가 선정하는 ‘SW전문인력양성기관’으로 지정됐다. SW전문인력양성기관은 소프트웨어진흥법에 근거해 매년 우수한 SW인재양성 기업·기관을 대상으로 선정된다. 과기정통부는 2021년 총 24개의 SW전문인력양성기관을 선정했는데 경북지역에는 유일하게 포항TP 경북SW진흥본부가 뽑혔다. 지난해부터 핵심인재양성사업인 SW미래채움사업과 지역 ICT이노베이션스퀘어 확산사업 등 SW인재양성사업을 수행해 온 포항TP 경북SW진흥본부는 지역 내 SW교육 전문기관으로서의 역할에 더욱더 충실할 수 있게 됐다. ◇SW미래채움 사업인재 양성의 핵심사업 중 하나인 ‘경북SW미래채움 사업’은 경북 지역의 SW교육의 불균형 해소와 SW교육 환경 조성이 목표다. 이를 위해 환동해·백두대간 SW미래채움센터 구축 및 SW체험 프로그램 운영, SW전문강사 양성, 단계별 SW교육 프로그램 개발·운영 등을 수행하고 있다.큰 성과를 내고 있는 아이템은 SW강사양성과정이다. 지난해 SW강사양성과정을 운영해 경북지역의 미취업 청년(17명), 경력단절 여성(32명), 퇴직전문가(4명) 등 100명에게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등 지역사회에 보탬이 됐다. 대표적으로 포스코ICT에서 상무로 퇴직해 현재 강사로 활약하는 김춘식 강사가 있다.김춘식 강사는 “기업에서 은퇴 후, 제2의 인생의 설계하면서 SW미래채움 강사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됐다. 34년간의 직장생활에서 체득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초중등 학생과 원만히 소통하며 저의 경험을 공유하도록 하겠다”고 SW강사로서의 각오를 밝혔다.SW전문강사들은 경북도 내 초·중·고 학생들에게 체계적인 교육을 제공하고, 도서 벽지의 학생들에게는 ‘찾아가는 SW교육’과 같은 적극적인 활동도 진행 중이다. SW교육을 널리 알리고 활성화하는 노력 덕택에 지난해 경북지역 초·중·고 SW교육 수료생은 3천119명이나 배출됐다. SW미래채움 코딩프로젝트 챌린지와 수업과정안 공모전에서 과기정통부 장관상(최우수상)을 각각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춘 SW체험교육의 활성화를 위해 포항과 안동에 각각 환동해 SW미래채움센터와 백두대간 SW미래채움센터를 각각 구축, SW체험교육장과 VR체험존 등을 마련해두고 있다. 최근에는 울릉중학교 전교생을 대상으로 SW체험캠프를 개최하는 등 지역아동센터나 도서 벽지 학교를 대상으로 한 SW교육도 확대해나가고 있다.포항TP 이점식 원장은 “이번 울릉중학교 SW체험캠프를 통해 도서 지역 학생들에게 SW교육이 더욱더 필요하다고 느꼈다. 도서, 산골 등 교육 소외지역에 찾아가는 SW교육을 더욱 확대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ICT이노베이션스퀘어 확산사업‘ICT이노베이션스퀘어 확산사업’은 지역산업의 미래경쟁력 확보를 위해 AI 및 블록체인 핵심인재 양성을 목표로 하며, 개발공간과 테스트 장비 등을 제공하는 경북ICT이노베이션스퀘어 운영과 AI, 블록체인 실무 인재 양성을 위한 AI복합 교육운영으로 크게 구성돼 있다.김천혁신도시에 위치한 경북ICT이노베이션스퀘어는 창업 특강, 기술 세미나, 멘토링, 경진대회, 취·창업 행사, 혁신 기술 아이디어 교류 등 지역의 교육 거점이자 아이디어 사업화 및 창업 지원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AI·SW 개발에 관심 있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개방형 창의공간과 고성능 PC 및 테스트용 스마트 기기 등을 제공하며, 이용자는 사전 신청(ictcog.or.kr)을 통해 모두 무료로 이용 가능하다.AI복합 교육운영은 경북·강원·대구지역 일반인 대상으로 AI·블록체인 기본·고급·BM(Business Model) 과정 등 단계별 맞춤형 전문가 교육(80∼160시간)과 지역산업과 연계한 특화과정을 실시간 온라인과 대면 교육방식으로 병행 진행하고 있다. 기업현장에서 진행되는 현장 실습프로젝트 과정을 제공한다.지난해 ICT이노베이션스퀘어 조성사업은 AI·블록체인 전문가 양성교육을 통해 권역 내 761명의 실무인재를 양성했으며, 취·창업을 준비하는 수료생 중 9% 정도가 실제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는 성과를 거뒀다. 그 결과 사업 평가에서 1위를 달성해 인센티브로 2021년도 국비 28억원을 추가 확보하게 됐다.사업을 운영하는 포항TP 경북SW진흥본부는 올해 ICT이노베이션스퀘어 확산사업을 통해 인공지능·블록체인 양성교육 1천50명, 취·창업 프로그램 37회 등 전년대비 목표를 상향 조정해 추진할 계획이다. 아울러, 인센티브로 확보한 예산은 지역기업과 연계한 실습 프로젝트 중심의 교육과정 등을 운영해 교육 수료생에게 지역기업으로의 취업 연계 및 현장 실습을 지원한다.포항TP 경북SW진흥본부 관계자는 “앞으로 SW미래채움사업과 ICT이노베이션스퀘어 확산사업의 연계를 통해 AI·SW 인재양성의 저변 확대뿐만 아니라 실무인재 양성에 더욱 주력할 계획”이라면서 “경북도민 모두가 디지털 격차와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노년층을 대상으로 건강을 체크하고 병원 예약까지 가능한 인공지능 건강지킴이 교육, 농민들에게 사물인터넷을 적용한 인공지능 스마트팜 체험 교육, 소상공인을 위한 비대면 온라인 비즈니스 교육 등 모든 도민을 대상으로 필요한 AI·SW교육을 제공하겠다”고 전했다./이바름기자 bareum90@kbmaeil.com

2021-07-14

“우리의 이야기를… 그림 그리고, 책과 영화에 담아요”

“5년과 10년후요? 지금과 크게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지금처럼 주어진 일을 하면서 살 것이고, 책을 만들고 영화를 제작하겠죠. 큰 욕심이 없는 것일 수도 있구요. 그래도 의성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저희의 책들을 많은 분들이 봐주시고 공감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은 있지 않을까요?”경북 의성의 안계. 시장을 끼고 도는 골목길에서 청년부부 황영 대표와 그의 아내 김은영 대표를 만났다. 첫인상을 이야기하자면, 만화 캐릭터를 닮은 바가지 머리와 바캉스를 연상시키는 옷차림이랄까. 동심과 함께 산다는 느낌을 받으며 들어선 그들의 작업실, 아니 전시 공간에는 빼곡한 작업물들이 촘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의성의 안계시장길에서 그림책 출판과 전시를 하는 ‘고라니북스’의 황영 대표와 아내 김은영 대표, 이들은 같은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하며 만난 사이다. 대구 출신인 이들은 자신들의 창작 작업과 생계를 위해 별도의 돈벌이를 하며 예술가의 길을 걷고 있다. 일명 ‘돈 안되는 길’“빌어먹고 산다”는 예전 부모님들의 2대장인 ‘시인’과 ‘미술가’, 아이러니하게도 황영 대표와 김은영 대표는 책을 만들고 그림을 그린다. 여기에 영화까지 만들고 있다고 한다. 이미 출품한 독립영화만 여러편이다.“의성에 와서 풍족하지는 않지만 먹고 살만큼은 벌고 있어요. 여러가지 일을 받고 있거든요. 대구에서 하던 일을 포함해서 의성군에서도 도와주시구요.”이들의 길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보통의 국문과와 미대 출신들이 선택하는 학원과 학교, 기업의 길을 가지 않았기 때문에 생계 유지를 위한 아르바이트는 필수였다. 그중에는 아파트 외벽에 그림을 그리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아파트 외벽에 그림을 그리는 일은 상당한 고액 아르바이트다. 그만큼 힘들기 때문이다. 한 달만 일을 해도 몇 개월 치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을 정도다. 이 일을 아내인 김은영 대표가 했다고 한다.일명 ‘도슨트 알바’도 이들의 일거리였다. 전시회에서 관람객들에게 작품과 작가에 대해 설명하는 일이다. 또 갤러리에 그림을 거는 ‘디스플레이 알바’도 있었다. 주위에 따르면, 황영 대표가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무려 9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군복무 시기를 빼더라도 9년 중 3년 정도는 아르바이트로 보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2년 전부터 정착한 의성은 이들에게 또 다른 기회의 땅이다.“독립출판을 하고 있어요. 독립영화도 만들고 있고요. 독립출판요? 생소하실텐데, 일반적이지 않은 책들을 만들어요. 기성서점에는 들어가지 못하죠. 성인들을 위한 동화도 있구요. 화장실 등에서 간편하게 볼 수 있는 작은 책들도 있구요. 물론 출판과 영화가 돈이 되지는 않아요. 하지만 이런 경험들을 바탕으로 저희가 하고 싶은 영화를 제작하는 거죠.” □고라니북스?… 이제 시작그런데 독립출판도 하고, 독립영화도 제작하는 이들이 기반도, 연고도 없는 경북 의성에 정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경상북도의 ‘도시청년시골파견제’가 도움이 됐다고는 하지만, 앞으로의 진로를 결정하는 데는 이유가 부족하지 않을까.“제일 큰 것은 생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경쟁률이 좀 쎄더라구요. 애초에 높은 경쟁을 피하려고 합격률이 높은 의성에 지원한 것도 있죠. 도시에서는 가만히 있어도 심장이 빨리 뛰었어요. 자극을 선택하지 않아도 자극이 자동으로 주어지는 세계였으니까요. 하지만 시골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자극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으니, 그렇지 않은 시간에는 온전히 자신에게 몰입할 수 있는 장점이 있죠. 그리고 처음에는 안경 디자인 회사에 다녔어요. 그런데 조금 답답한 마음이 있었죠. 안경 디자인이 파격적인 시도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단순 반복적인 일이 많거든요. 틀을 벗어날 수도 없고, 창의적인 일도 아니었어요. 여러가지 갈증도 있었구요.”그러면서 주섬주섬 전시되어 있는 책들을 가져와 보여준다. 모두 독립출판의 결과물이다. 대부분의 책들에는 글자보다 그림이 훨씬 많다. 이들이 미술학도라는 증거다. 물론 얼핏 이해하기 어려운 책들도 있는 것이 사실.“대구에 있을 때는 한 권 정도 출판한 것이 전부에요. 그런데 나머지는 의성에 와서 출판한 것들이죠. 지금은 전국에 있는 독립출산물 서점으로 나가고 있어요. 고라니북스의 이름을 달구요.”‘고라니북스’는 황영 대표와 김은영 대표의 사업체 이름이다. “도로 위에 있는 고라니를 본 순간, 갈 길 잃은 우리 시대의 청년들을 보는 것 같았다”는 것이 작명의 이유다. 아이러니하게도 경북 의성을 비롯한 북부지역 곳곳에서는 외곽 도로에서 가끔씩 고라니가 출몰한다. 그리고 이들이 고라니를 처음 본 것도 답사를 위해 의성을 찾았을 때다. 처음으로 경험해보는 광경을 목격한 순간, 오히려 의성이 예술활동을 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라는 기대감이 생겼다고.“이미 저희는 의성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도 찍었구요. 9월에도 한 편의 영화를 제작할 겁니다. 궁극적으로는 장편 영화를 제작하는 거에요. 저희의 이야기가 담긴 영화거든요. 지금 시놉시스 정도가 완성된 상태에요. 여기 전시를 해놓은 것들이 영화의 콘티죠.”□도시에서는 숨겨야 했던 우리의 이야기그런데 황영 대표와 김은영 대표를 만나면서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출판을 하고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프라가 중요하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투자도 있어야 하고 말이다. 시골인 의성에서 어떻게 가능할까.“사실 크게 부족하다고 느끼지는 않아요. 독립영화에 대한 지원도 있거든요. 부족한 것은 저희가 충당하구요. 제작 장비나 배우들은 물론 서울이나 도시로 가야하죠. 그런데 그것이 불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물론 갑갑한 면도 있죠. 예술하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쯤은 아내와 함께 서울 등의 도시를 찾아요. 공연도 보고 전시회도 감상하구요.” “일도 대구에서보다 더 많아요. 의성에서 막걸리나 수제 맥주를 만드는 분들이 저희에게 라벨을 의뢰하기도 해요. 비용을 많이 받지는 않지만, 제가 만든 캐릭터와 연동해서 라벨을 만들면 서로에게 좋지 않을까 해요. 또 우리 캐릭터를 활용해서 과일박스를 만들면 그냥 판매하는 것보다 소비자의 구매의욕을 더 높을 수 있고, 지역 브랜드를 한 차원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어요. 애초 의성으로 오는 것이 단지 작업장을 옮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하죠. 저희가 생각하는 영화 제작을 더 착실하게 준비할 수 있구요.” 그렇다면 황영 대표와 김은영 대표에게는 의성에 정착한 것이 일종의 꿈을 이루는 과정이었을까. 하지만 ‘꿈’이라는 이야기에 황영 대표는 고개를 갸웃거린다.“꿈이라기 보다는…. 지금 의성에서 하고 있는 것들은 조금씩 실현이 되고 있는 것 같아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영화 제작에도 한 걸음 나간 상태구요. 아마 대구에 있었다면, 여전히 꿈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아마도 과거에 황영 대표가 만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이라는 독립영화가 ‘서서히 알아주는’이라는 이상으로 변해가는 것이 아닐까. 현실 세계에서 살고 있는 뱀파이어 여자 노동자는 출중한 능력을 가지고도 자신의 꿈을 숨기고 살아가야만 한다. 한 때 황영 대표는 뱀파이어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도시에서 알바를 병행하며 자신만의 삶을 추구했던 개인 창작자의 삶. 하지만 의성에 정착한 이후 뱀파이어는 조금씩 자신의 능력을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저희의 이야기가 담긴 장편 영화를 꼭 완성하고 싶어요. 그것을 위해서 의성에 온 것이구요. 물론 그 한편으로 끝나지는 않을 거에요. 아직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야기는 많잖아요. 그리고 의성에 보탬이 되는 일도 하고 싶구요.” /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1-07-13

동네병원 문 닫으면 국민이 피해 본다

숙지는가 싶더니 또 다른 변이가 생겨나 지구촌을 긴장시키는 코로나19는 확산과 진정을 반복하면서 어느덧 일상이 됐다. 코로나19가 우리 사회를 밑바탕에서부터 흔들며 바꾸어놓았는데 의료계야말로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다. 코로나19가 대구를 강타했을 때 그 최전선에 대구의 의료인들이 있었고 D방역은 세계적으로 K방역의 모델이 되었다.환자 진료를 마치자마자 한달음에 의사회관으로 달려온 정홍수 대구시의사회장은 ‘코로나19가 언제쯤 끝이 날 것 같냐’는 질문에 “내년이면 집단 면역이 형성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금 수도권을 중심으로 코로나19 확산세가 무섭다. 종식을 위해 의사회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대구시의사회는 백신접종지원센터를 직접 운영하고 많은 의사들이 위탁의료기관에 참여하는 등 전방위적으로 국가적 현안인 코로나 19의 종식을 위해 뛰고 있다. 또 시민들이 안심하고 백신 접종에 참여하도록 유튜브를 제작 보급하고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시민들에게 객관적이고 검증된 의학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코로나19 백신 접종 양상이 처음보다 많이 달라졌다. 너도 나도 백신 접종을 하겠다고 하니. 그런데 처음에는 왜 그렇게 접종 예약률이 떨어졌을까. 지금 백신 공급 사정도 원활하지 못한 것 아닌가.△백신 접종 부작용에 대한 언론의 지나친 관심이 시민들에게 부정적 여론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올 3월만 해도 우리나라의 백신 접종률이 아프리카 후진국보다 낮은 세계 100위권 밖이었다.백신 공급에 문제가 생긴 것은 코로나19 팬데믹 초기엔 방역에 치중했고 또 코로나 치료제 개발에 공을 들였던 때문인 것 같다. 방향이 달랐던 것이다. 백신 아닌 치료제 개발로, 결과적으로 오판한 셈이 됐다.-정치권에서 수술실 CCTV 설치를 법제화하려고 하는데 의료계에서는 반대하는 것 같다. 당연히 CCTV를 설치해서 환자를 보호해야 하는 것 아닌가.△수술실의 CCTV 설치 문제는 정말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환자들에게 득보다 실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환자의 프라이버시나 인권 측면에서도. 한 예로 지금도 환자의 신상을 담은 영상물이 시중에 돌아다니고 있지 않나.의료계에도 문제가 크다. 감시 받으면서 적극적인 수술을 하려 않을 것이다. 수련의 교육에도 문제가 생긴다. 의료기술의 발전과 의료 수준 향상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국민의 80% 이상이 수술실 CCTV 설치에 찬성한다고 들었다. 대리수술 등 최근 의사들의 일탈도 문제가 심각하다.△공직자들이 근무시간에 무엇을 하는지, 국회의원 사무실에 CCTV를 설치하자는 설문조사를 해보면 찬성률이 훨씬 높게 나올 것이다. 대리수술 등 불법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수술실 입구에 CCTV를 설치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인기에 영합하는 정책이 아니라 무엇이 국민을 위한 것인지에 대한 공감의 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의사의 의견도 들어보고 시범사업 등 단계를 거쳐 누가 생각해도 타당한 방법으로 진행돼야 한다.일부 의사들의 일탈 문제는 사회적 논의 이전에 의사회 차원에서 자율적 정화를 강화하고 있다. 대리수술 뿐 아니라 사무장병원 운영이나 불법 환자 유인 등에 대해서도 의사회는 자율정화위원회를 통해 고발하고 면허 박탈까지도 조처하는 등 강력히 처리해 나갈 것이다.-최근 정부가 의원급의 비급여 진료비 공개를 확대하려고 하고 있다. 환자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 시대적 추세이고 또 의료 발전을 위해 바람직한 현상인 듯 보이는데 의사회의 입장은 어떤가.△현재 우리나라 건강보험 제도는 최선의 진료가 아닌 보편적 진료를 추구하고 있다. 환자는 누구나 최선의 진료를 받고 싶어 한다. 그런데 현실은 한정된 보험 재원으로 모든 환자에게 최선의 진료를 할 수 없다. 비급여 진료비용 공개가 전면 시행되어 진료비가 통제되면 앞으로는 환자가 최선의 진료를 받고 싶어도 불가능해 질 수 있다.과도한 규제는 결국 의료의 질을 낮추는 결과를 낳게 된다. 정부가 비급여 진료비 공개를 통해 진료비를 통제하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도 된다.-원격진료에 대한 의료계의 입장은 무엇인가. 특히 코로나19 사태 이후 비대면 진료는 국민들의 의료 편의를 위해 가야 할 길인 것 같은데?△진료의 기본 원칙은 대면진료다. 우리나라 의료 접근성과 시스템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런데 정부에서는 환자의 편의성과 경제성을 내세우며 비대면 진료를 추진하고 있다. 원격 진료는 이득보다 오진과 그에 따른 책임소재 불분명 등 단점도 고려해야 한다. 의료산업화 측면이 아니라 보건의료 정책 차원에서 추진해야 하고 대면진료의 보완 수단이어야 한다.-비대면 원격진료를 반대하는 것은 의사들의 이기주의와 기득권 지키기인 것 같다. 환자의 입장에서는 시간과 비용을 절약하면서 전문의의 진료를 받을 수 있으니 좋은 것 아닌가.△모든 것이 대형화되고 서울로 집중되는 현실에서 의료마저 서울 큰 병원으로 집중되면 의료전달체계가 왜곡되고 결국 국민들이 피해자가 된다. 서울대병원에서 전국 명의들을 고용해서 도서벽지에서 강원도 오지까지 환자들의 원격진료를 맡게 되면 동네의원들은 모두 문을 닫아야 한다. 병원 문턱이 높아 간단한 진료에도 몇 달씩 기다려야 한다는 다른 나라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았나. 우리에게도 현실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그래서 진짜 원격진료가 필요한 곳은 의료접근성이 떨어지는 도서 벽지와 오지 등으로 제한하고 1차적으로 지역의원에서부터 원격진료를 실시하자고 주장한다.-그러고 보니 의사회는 정부와 정치권의 정책에 반대만 하는 것으로 보인다.△모든 것을 법으로 규정하려는 정책 당국 탓이 더 크다. 부동산 정책이 그걸 대변해준다. 그때마다 많은 규제를 만들었지만 부동산 정책이 결국 실패하지 않았나. 의료정책은 그보다 더 심한 것 같다. 의사 문제가 생기니 의사면허관리법으로 면허를 규제하려 하고, 대리수술 문제가 생기니 CCTV 설치법을 만들려 하고, 성범죄특별법, 실손보험청구간소화법, 의료기사법, 안경사법, 간호사법, 물리치료사법 등 현실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보지 않고 법으로 해결하려 하니 국민이 피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한번 법이 제정되면 부작용으로 폐기하기까지 10년 20년이 걸리니 의사회가 법 제정 이전에 충분히 논의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메디시티 대구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의료산업 육성을 추진하지만 주위에서는 아직도 대구의 의료기술을 믿지 못하고 서울의 대형병원을 찾는 환자들이 많은 것 같다. 솔직히 대구 의료계의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대구의 의료 수준은 서울 뿐 아니라 세계 어디에도 뒤처지지 않는 최고 수준이라고 자부한다. 한국인에게 흔한 위암이나 대장암의 경우 서울과 대구의 대학병원 간 치료 성적이 동등하다는 연구 결과도 논문으로도 확인됐다. 또 지역 환자의 지역병원 입원 치료를 말하는 입원환자의 자체 충족률은 대구가 82%로 전국 최고 수준이다. 근거 없는 소문이나 추측만으로 지역 의료 수준을 낮춰 보는 인식은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중병이나 희귀병은 서울 대형병원으로 가야 하지만.이 부분에서 지역 상급병원의 능동적인 자세 전환도 필요하다. 특정 분야에서 실력과 명망 있는 교수와 특화된 병원의 적극적인 홍보로 지역에서도 스타 교수를 키워야 한다.-지역 의료기관의 발전을 위한 실질적인 노력도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대구시의사회가 지역의 5개 상급종합병원과 함께 ‘지역의료발전과 의료전달체계 개선’을 주제로 공청회도 갖고 함께 종합체육대회를 열어 친선을 다지는 등 지역의료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동네의원에서 환자를 서울 아닌 지역 종합병원 전문의를 소개하거나 직접 안내하고 종합병원은 가벼운 환자를 동네의원으로 보내주고 있다. 대구에서 서울로 빠져나가는 의료비가 연간 5천억원으로 추산되고 교통비 등을 합하면 연간 1조원이 증발한다. 서울에서 수술하고 지역에서 예후 진료를 받는 환자들로서는 사실 피해를 보는 것이다. 종합병원이 혈압약이나 정형외과 약을 6개월, 10개월씩 처방해주는 행위도 지양해야 한다.-국내에서도 지방과 서울 등 대도시간 의사 수급 불균형이 심각하다. 지난해에는 공공의료기관 설립문제로 한바탕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국민보건 차원에서 의과대학 정원을 늘리거나 지역공공의과대학 설립은 필요한 것 같은데….△도시와 지방 간 의사수급 불균형은 의사 공급의 문제가 아니라 의사가 지방에서 의원을 유지할 수 없는 현실 때문이다. 현재 의료 시스템으로는 지방에서 의원 경영상 유지가 안 되니 경쟁이 심하더라도 인구가 많은 도시에서 개원하려는 거다. 의사숫자를 아무리 늘려봐야 도시에서 미용 등 비보험 진료 의사만 늘어나지 지방에서 개원하는 의사는 늘지 않을 것이다.현재 매년 배출되는 의사만으로도 몇 년 후면 한국 인구증가율 대비 의사 공급이 넘쳐 날 것이라는 OECD 통계도 있다. 굳이 통계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대구의 경우 시민 누구든지 예약 없이 당일 어떤 전문의의 진료든지 받을 수 있다. 심지어 같은 질병으로 하루에 여러 의료기관을 방문하는 환자도 수두룩한 것이 현실이다.-결국 우리 의료수가가 현실적으로 너무 낮게 책정돼 있다는 것인가.△다 아는 이야기다. 지방에 흉부외과 산부인과 일반외과 등 필수 의료인력이 부족하다고 하는데 막상 이들 전문의들은 일자리가 없어서 도시에서 자기 전공과는 상관없는 미용관련 진료를 하고 있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근본적으로 지방병원에서는 내원하는 환자수가 적은 흉부외과 등을 개설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의사수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저수가 때문에 의사들이 일 할 자리가 부족한 것이다. 아주대병원의 이국종 교수 사례가 증명해 보였다./이경우 편집위원

2021-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