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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4차산업 심장될 ‘2차전지의 성지’ 함께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대해 얘기한다. 예측은커녕 대응하기에도 바쁜 지금이지만, 바이러스 공포 속에서 분명해진 건 앞으로 미래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변하리라는 큰 흐름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동안 신성장동력으로 평가받는 데 그쳤던 친환경, 에너지와 같은 특정 산업군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유망주에 올랐다. 특히 유럽연합을 비롯한 세계 주요국들이 환경 규제를 통한 탄소중립을 선언하면서 전기차 시장이 호황을 맞았다.지난 1998년에 설립된 (주)에코프로(대표이사 이동채)는 대기환경 사업을 기반으로 전기차 핵심부품인 이차전지 양극재를 생산하는 기업이다. 최근 전 세계 산업 생태계에 지각변동이 일면서 전기차 시장의 급성장과 함께 에코프로는 가파른 성장세에 올라탔다. 정부는 2022년을 미래차 대중화의 원년으로 삼고 전기차용 이차전지를 ‘제2의 반도체’로 육성하기로 했다. 이동채 회장은 “이차전지는 전기차뿐만 아니라 앞으로 항공운수업을 포함한 전 영역으로 확장돼 4차 산업시대의 ‘심장’과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지난해 그룹 전체 매출액이 1조원에 달한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코로나 사태가 초래한 유례없는 위기 상황에서 기업 성과를 창출하고 성장을 이끈 동력이 무엇입니까?“코로나 유행을 계기로 친환경 에너지 산업이 국제적으로 주목받으면서 전기차 시장의 규모가 커지고 이차전지 배터리 산업도 성장 구도에 진입했습니다. 그간 축적된 기술과 품질 경쟁력이 이러한 산업 기류에 힘입어 좋은 결실로 이어졌다고 봅니다.”-회계사 출신이신데, 사업 성공의 촉이라고 할까요. 기후환경 분야에서 어떤 특별한 비전을 보았습니까?“지구 온난화와 온실가스 문제로 이산화탄소 감축이 의무화된다면 언젠가 전기차 시대가 반드시 올 것이란 확신이 있었습니다. 90년대 후반에 ‘온실가스 관련 기술 및 솔루션 사업’을 내걸고 에코프로를 만들었는데, 그때도 물론 환경 문제가 대두되긴 했지만 시장 규모가 작아서 실제로 사업을 추진하는 데 여러 제약이나 어려움이 많았어요. 결국 다른 환경사업 아이템을 찾던 중 2004년쯤 이차전지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이차전지의 핵심소재인 양극재를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었어요. 때마침 제일모직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양극재를 개발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 길로 찾아가 우리도 양극소재 개발에 힘을 보태게 해달라고 했습니다.”-제일모직 입장에서는 에코프로 말고도 “소재 개발을 위한 아이디어가 있다”며 찾아오는 기업들이 줄을 섰을 텐데요.“당연하지요. 여러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초고용량 양극활물질 공동개발’이라는 국책과제를 함께 진행하게 됐습니다. 우리 회사는 양극재에서 가장 중요한 중간소재인 전구체 개발을 맡았어요. 그런데 연구성과가 나오기도 전에 제일모직이 중도 포기하겠단 결정을 내렸습니다. 공동개발 과제였기에 우리도 사업을 계속 이어갈지 선택해야 했어요. 고민이 많았습니다.”-포기하지 않았기에 지금의 에코프로가 있겠지요?“분명 미래 전기차 시대에는 용량이 크고 출력이 강한 양극재에 대한 수요가 증가할 것이란 ‘촉’을 따랐습니다. 제일모직으로부터 관련 기술이나 특허, 설비 등을 유상으로 양도받아 독자적으로 차세대 양극재 개발을 시작했어요. 처음부터 ‘인간을 편하고 이롭게 하는 기술’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란 믿음으로 시작한 일이었습니다.”-초창기에 회장님과 직원 1명, 이렇게 단 두 분이서 에코프로를 창업하셨지요?“지금은 직원 수가 1천700명 정도 됩니다. 7개의 가족사가 있는데 이 중 에코프로와 에코프로비엠이 상장기업입니다. 불과 22년 새 매출 1조원에 바이오나 게임 회사를 제외한 정통 제조업으로 코스닥 시가총액 1∼2위를 다투는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그만큼 투자도 통 크게 하셨습니다.“포항에만 2010년 10월 기준으로 약 3천200억원을 들였어요. 올해는 1조원을 투자하기로 포항시와 앞서 협약을 맺었는데, 회사 내부에서는 이보다 70% 정도 더 늘려 2024년까지 총 1조7천억원을 투자할 계획입니다.”-돈의 흐름이 포항으로 집중되는듯합니다.“지금까진 본사가 있는 청주를 중심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해왔다면, 올해부터는 포항이 중심입니다. 전체 생산량이나 부가가치, 매출액 부문에서 포항이 차지하는 비중이 청주를 앞서는 첫해가 될 것입니다.”-왜 포항입니까?“이차전지 양극재 생산을 위한 최고의 제조 생태계를 조성하고 싶었습니다. 장소를 물색하던 중 포항 영일만산업단지가 눈에 띄었어요. 원료 수입이나 제품 수출에 용이한 물류 입지적인 측면에서도 탁월했고요. 제가 찾던 최적지였습니다.”-회장님이 꿈꾸는 양극재 생태계가 ‘에코배터리 포항캠퍼스’로 현실화하는 건가요?“현재 영일만산단 10만평 부지에 짓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가 완료되면 폐배터리를 재활용해 양극재 완제품을 만들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한 곳에 집적된 하나의 단지가 국내·외 최초로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간 중국이나 일본에서 수입해온 양극재 중간소재를 국내에서 직접 생산할 수 있게 되고, 수입산 저가의 니켈이나 코발트, 리튬을 고도의 기술로 정제해 이차전지용 고급 소재로 전환할 수도 있습니다.”-단순히 시간이나 비용이 절감되는 효과만 있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보통 국내 이차전지용 양극재 기업들은 전체 부가가치의 25∼30% 정도를 몫으로 가져갑니다. 예를 들어 양극재 가격이 킬로그램 당 20달러라고 친다면, 생산회사의 부가가치는 5∼6달러 정도입니다. 이걸로 임직원들 급여와 설비 감가상각, 전기나 가스비 등 각종 비용을 처리해요. 여기다 또 미래를 위한 투자까지 계획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킬로그램 당 13∼14달러의 양극재를 창출해 부가가치를 65∼70%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면 어떨까요? 배터리 고부가가치 생산은 기업에 큰 경쟁력이 됩니다.”-포항시도 ‘이차전지 도시’를 목표로 함께 팔을 걷어붙였습니다.“폐배터리 리사이클 특구로 지정된 포항시가 이차배터리 포항캠퍼스에 다양한 기업이 입주할 수 있도록 매력적인 유인책을 많이 내놓았으면 합니다. 리사이클 업체뿐 아니라 양극 및 음극 업체 등 연관 산업이나 관계기관들로 영역을 넓혀야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향후 10년내 폐배터리 산업이 하나의 커다란 비즈니스 분야로 자리 잡을 것으로 예상돼 포항 블루밸리국가산단의 전망도 매우 밝다고 봅니다.”-사실 어려움을 겪는 중소업체들이 많습니다. 대기업과 비교하면 기술력이 받쳐주지 않는 것도 있겠지만, 규모나 원가 경쟁력 등을 이유로 소재를 개발해 시장화될 때까지 버텨내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올해는 특히 코로나 충격이 컸습니다. 우리 지역에도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업체들이 많은데, 이들을 위한 사업 노하우를 제안하신다면요.“기술 그 자체만으로 경쟁력이 있어야 합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사업에 중소기업들까지 뛰어들어 성공하기란 굉장히 어렵습니다. 남들은 하지 않으려 한다든가 혹은 다수가 주목하지 않는 분야에서 개발 가치가 있는 사업 아이템을 찾는 게 우선입니다. 개발이 힘들고 국산화하기 어려운 기술부터 찾아야 해요.”-요즘 젊은 사람들은 일과 삶의 균형을 중시하는 ‘워라밸’에 가치를 둡니다. 회장님은 여가를 어떻게 보내시나요? 골프 실력이 상당하다고 들었습니다만.“골프를 좋아하지만 실력이 꽤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웃음). 주로 혼자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아요. 매일 저녁 8∼9시가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 퇴근합니다. 귀가 후에는 휴식을 취해요. 무념무상, 일명 ‘멍 때리는 시간’을 30분 정도 갖기도 하고요. 드라마나 다큐멘터리도 즐겨 봅니다.”포항 대성면 남성리에서 나고 자란 이동채 회장은 포항중학교 졸업 후 대구상업고, 영남대 경영학과를 나와 한국공인회계사를 지냈다. 1남7녀로 8남매 대가족에, 집안 형편은 넉넉지 않아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고향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추억을 하나 물었더니 “중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집까지 거리가 8∼10km 정도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까마득한데, 아침마다 두세 시간을 걸어서 학교에 갔습니다. 어린 나이에 힘든 줄도 모르고 친구들과 장난도 치며 즐겁게 다녀서 그런지 유난히 그때 기억이 오래 남아있습니다”라고 했다. 등하교 왕복 시간을 따지면 하루 4∼6시간을 두 발로 걸어다니던 소년은 커서 전기자동차 시대를 앞당기는 역할을 하고 있다./김민정기자 mjkim@kbmaeil.com

2021-01-03

바이러스에 취약 철강산업… 작년 자동차·조선 위기의 해

2020년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빼놓고 말하기 어렵다. 코로나19의 영향을 얼마나 받았느냐, 그리고 얼마나 빨리 극복했느냐에 따라 업체별로 제품별로 시황이 엇갈렸다. 한국의 철강업계는 2021년까지 코로나19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으로 보고 있고, 2022년 이후 정상 궤도에 진입할 것으로 전망하며 대책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2021년 한국 철강수요는 어떻게 되고, 제품별 상황은 어떨지, 주요 이슈들에 대해 짚어본다.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은 수요산업2020년 한국의 철강 수요 산업은 코로나19로 어려운 한 해를 보내고 있다. 8월까지 자동차 생산은 16.3%줄었고, 조선 건조는 12.2%, 수주는 56.3% 감소했다. 주요 수요산업 중 건설만 지표가 소폭 개선됐을 뿐이다.최대 철강 다소비 산업인 자동차의 경우 2월부터 4월까지 코로나19로 자동차 공장의 가동이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특히 세계자동차 부품 조달 체계가 코로나19로 무너지는 가운데 중국산 와이어링 하네스 공급이 차질을 빚으면서 생산을 못하는 날이 많았다. 이러한 상황은 해외 공장에서도 벌어졌는데 특히 현대자동차의 북미 공장은 5월에 한대도 생산을 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웠다. 다행히 정부의 자동차 소비 진작을 위한 개별소비세 인하, 그리고 잇단 신차 출시 영향으로 코로나19의 부정적 영향이 감소해 시간이 가면서 점차 회복되고 있다. 그러나 올해 자동차 생산은 전년보다 13.0% 감소한 344만대 정도에 그칠 전망이다. 내수는 2.1% 감소, 수출 29.7% 감소가 예상된다.조선은 부진의 골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코로나 19로 전 세계 교역량이 급감하면서 신조선 발주량도 뚝 끊겼다. 연간으로 전년대비 64%나 신조선 수주가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신조선 수주의 감소로 상당한 기간 동안 조선용 강재의 수요 회복을 기대하기 어려울 전망이다.건설은 코로나19 영향을 가장 덜 받은 산업이다. 한국에서 코로나19가 대구를 중심으로 확산되었을 때 일부 현장의 공사가 중단되기는 했지만, 자동차처럼 밀집된 것이 아니어서 사실상 공사 차질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주택가격 급등으로 분양시장이 활기를 띠면서 향후 수요 증가를 기대하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가전도 코로나19의 수혜를 일부 본 것으로 분석된다. 가정에 머무는 시간이 많다 보니 프리미엄 가전으로 교체하는 수요가 늘었고, 코로나19에 대한 경각심이 확산되면서 세탁기와 건조기 등의 국내외 판매도 호조를 이어갔다. 최근 관련 철강제품의 출하량이 늘어나고 있다.생산 감소 원인은 코로나19와 고로 합리화코로나19 악재가 한창이었던 2∼4월 국내 조강생산량은 전년동월대비 14∼15% 감소했다. 그러나 8월에는 감소폭이 2.1%로 둔화됐다. 8월까지 누계 조강생산량은 4천380만t으로 전년동기대비 8.7% 감소했다.조강생산량 감소는 포스코의 광양제철소 3고로 합리화와 화입 지연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된다. 광양 3고로는 5월에 개수가 끝났지만 코로나19로 자동차를 중심으로 수요가 급감하면서 이례적으로 화입을 늦췄고, 7월 10일에 가동을 재개했다. 이외에도 자동차 경기에 민감한 특수강, 특히 세아베스틸은 6∼7월 기간 동안 2∼3주씩 공장 가동을 수시로 중단해 생산량이 급감했다. 그 결과 4∼7월 유례없는 조강생산 감소기를 보냈다. 다행히 7월 이후 주문이 늘어나고 있고 수입도 많지 않아 철강 시장은 빠르게 안정을 찾아 가고 있다.철근은 코로나19의 영향이 거의 없었던 것을 가격 흐름에도 확인할 수 있다. 국내 철근 가격은 코로나가 기승을 부렸던 시점인 3월부터 오히려 빠르게 올랐다.이후에도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10월에는 연중 최고가격인 67만원까지 올랐다. 이에 맞춰 중국산도 반응했다.코로나19 확산이라는 어수선한 경제와 사회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철근 가격이 크게 올랐던 것은 1분기 수익성 악화로 고전하던 제강사들이 적극적으로 감산을 기반으로 할인을 줄이고, 원가 반영이 가능한 수준까지 철근 가격을 올렸기 때문이다. 생산보다 이익 구조를 안정시키겠다는 철근업계의 의지가 가격에 반영된 것이다.반대로 열연강판은 코로나 확산과 함께 가격이 크게 하락했다. 2월에 65만원 정도 거래됐던 국산 열연강판이 5월 말에는 60만원으로 떨어졌다.가격은 8월을 지나면서 빠른 회복세를 탔는데, 하나는 수요가 늘어나면서 수급이 타이트해졌고, 두 번째는 중국의 철강 수요가 증가하면서 철강 원료 가격이 올라 원가 압박이 커지자 열연강판 가격도 함께 상승한 것이다.업계 당면 과제가 된 수익성 개선수요 감소에 대한 부담과 원가 상승에 대한 압박으로 철강사 마다 수익성 확보가 최대 현안으로 떠올랐다.영원히 적자를 보지 않을 것 같았던 포스코조차 2분기에 별도 기준 1천85억원 적자를 기록했고, 영업이익률도 -1.8%로 떨어지는 등 고전을 했다. 주력인 자동차용 강판 판매가 급감하면서 수출과 내수에서 모두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 적자의 가장 큰 이유이다. 2분기에 포스코의 판매량은 776만t으로 지난해 2분기보다 98만4천t, 11.3%나 줄었다. 3분기에는 2천619억원의 영업이익과 4.0%의 영업이익률을 보이면서 회복되는 모습을 보였는데, 평소 1조원의 영업이익을 생각하면 정상화까지 갈 길이 멀다.다만, 원재료 가격 상승을 제품 가격에 전가시키기 위한 노력에다 하반기에 내수 시장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 회복돼 올해 포스코의 영업이익률은 4% 정도로 축소될 것으로는 보인다. 그러나 이는 지난해 8.5%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것이다.현대제철은 봉형강류가 선전을 하면서 이익률이 다소 나아졌지만 손익분기를 간신히 넘기는 수준에 머물렀다. 철강경기 하락면에서 전기로 업체인 대한제강의 수익성이 눈에 띄게 호전된 것은 특이하다. 봉형강류를 생산하는 대한제강은 지난해 4%에 머물렀던 영업이익률이 지난해 3분기를 바닥으로 회복되기 시작해, 2분기에는 10.4%까지 늘어났다. 비수기인 3분기에도 8.6%로 선방했다.냉연 단압은 고로사들과 달리 좋은 성적을 거뒀다. 코로나19로 수요가 급감하자 내수 시장은 물론이거니와 수입 시장에서 싸게 열연코일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서 롤 마진이 크게 개선됐다.실제로 KG동부제철의 경우 올해 상반기에 460억원의 영업이익과 4.6%의 영업이익률을 거뒀다. 지난해 연간 1.2%보다 4배 가까이 이익률이 늘어난 것이다. 목표도 5%로 잡고 이익률 향상을 추진 중이다. 냉연 단압의 경우 최근 열연코일 수급이 타이트 해진데다 포스코의 가격 인상이 이어지고 있어 수익성 악화 가능성이 있지만, 일부 냉연업체는 올해 깜짝 실적을 발표할 것으로 예상된다.강관은 수출과 내수에서 모두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열연코일 가격이 올랐지만 제품 가격 반영이 더디고, 고객들의 반발도 크다. 지난 몇 년간 미국의 수입 규제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코로나19까지 번지면서 수익성이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2019년 이후 크고 작은 구조조정 진행 중판재류에서는 동부제철이 KG그룹이 인수해 KG동부제철로 재탄생했고, 스테인리스 냉연 박판업체인 대양금속도 새로운 주인이 생겼다. 또 최대 일반형강 생산업체인 한국특수형강도 매직홀딩스가 인수를 했다.KG동부제철은 재무구조 개선이 상당히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마련하기 위해 한창이다. 특히 컬러강판 투자를 시작하는 등 미루어두었던 성장 전략이 작동하기 시작했다.한국특수형강도 매직홀딩스에서 성장 전략으로 70만t급 철근 압연기를 새로 놓겠다고 발표하고 설비 계약에 들어가는 등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대한제강이 와이케이스틸을 인수한 것도 철근업계에 주목을 받았다. 일본 야마도고교가 한국시장에서 철수를 선언하고 대한제강에 매각을 한 것이다. 대한제강은 와이케이스틸을 인수해 철근 분야에서 현대제철 동국제강과 함께 3강 체제를 구축하게 됐고, 향후 3년 내 부산공장 폐쇄와 당진 이전을 진행할 예정이다. 철근 시장이 새로운 경쟁 체제가 임박한 모습이다.이 외에도 현대제철이 숙원인 H형강 투자를 올해 시작했고, 동국제강 KG동부제철 DK동신 등이 컬러강판을 신규로 가동하거나 재가동을 발표했다./스틸앤스틸·스틸데일리 제공정리/박동혁기자 phil@kbmaeil.com

2021-01-03

로봇 일하고, 인재 모이는 스마트 미래도시로 간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제 위기 극복과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해 세계 경제를 선도하기 위한 국가발전 전략인 한국판 뉴딜이 내년부터 본격 추진된다.수도권 확대로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대구시 역시 ‘지역형 뉴딜’사업을 추진, 지역 산업혁신 가속화를 통한 지역 발전의 새로운 전기 마련해 나갈 계획이다.대구시는 민선6기부터 지역의 산업구조를 전통산업에서 미래산업 중심으로 혁신하며, 현대로보틱스 유치, 국내 최초 국가물산업클러스터 구축, 광역단체 최초 스마트시티 국제표준 획득 등의 주목할만한 성과를 창출해왔다.정부의 한국판뉴딜과 연계한 ‘대구형 뉴딜’은 코로나19로 잠시 멈춰졌던 지역의 산업혁신을 가속화하고, 도심융합특구 조성, 서대구 역세권 대개발 등 지역의 대형사업들과 접목해 지역 발전의 새로운 전기가 되어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를 위해 대구시는 지역 산업구조 대전환과 미래도시 선도모델 구현이라는 목표 아래 산업뉴딜, 공간뉴딜, 휴먼뉴딜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산업뉴딜산업뉴딜은 지역 산업 전반에 디지털 기술을 접목해 미래산업의 성장판을 넓히는 마중물 기능을 하게 된다. 최근 대구시는 그동안 미래자동차 인프라를 구축해 왔다. 시는 이를 바탕으로 지난해 12월 8일 정부의 자율주행 유상운송 시범운행지구로 선정되는 등 성과를 내고 있다.이에 따라 대구시는 50억원을 들여 달성군 구지면 국가산단 5천619㎡ 부지에 지상 2층 규모로 연구 장비, 실험실, 관제실을 갖춘 자율주행 융합지원센터를 건립하고 핵심부품 개발과 디지털트윈 기반 도심 자율주행 리빙랩 구축 등 다양한 사업을 통해 ‘완성형 자율주행 실증도시’로서 위상을 더욱 굳건히 한다는 계획이다.로봇산업의 경우 대구시는 지난해 7월 대구 이동식 협동로봇 규제자유특구가 제3차 규제자유특구로 지정돼 첨단제조로봇 산업 육성의 날개를 달았다. 이동식 협동로봇(Mobile Manipulator)은 작업 현장에서 이동식 대차 위에 협동로봇이 결합한 형태의 신기술이 적용된 신제품이다.대구는 국내 로봇산업 분야에서 경기, 서울에 이어 비수도권 1위로 성장해 현대 로보틱스 등 글로벌 로봇기업 5개사와 세계 11개국 13개 클러스터가 참여하는 글로벌 로봇 클러스터(GRC)도 확보하고 있다.세계 각국은 이동식 협동로봇 시장 선점을 위해 응용연구와 표준화작업이 경쟁적으로 진행 중에 있어 국내 로봇기업의 글로벌 로봇시장 선도를 위해서는 우리나라의 국제표준 선점이 시급한 시점이다.따라서 대구시는 특구 내 실증을 통해 이동식 협동로봇의 안전성과 효율성을 검증해 기술과 제품 경쟁력을 확보하고, 실증데이터를 활용해 이동식 협동로봇의 안전기준안 마련으로 국내외 표준 선도에 기여할 계획이다.이동식 협동로봇 규제자유특구 지정으로 참여기업의 매출증대 1천767억원, 수출 1천916만 달러, 신규고용 384명과 국내외 로봇기업 7개사의 유치를 기대하고 있으며, 특히, 지역의 경제적 파급효과로 생산유발효과 2천359억원, 부가가치유발효과 642억원, 고용유발효과 684명을 추정되고 있다.아울러 5G 기반 첨단제조로봇 실증기반 구축사업을 통해 산업현장의 생산성 한계를 극복하고 가치사슬 확장을 통해 지역 중소기업의 동반성장도 기대되고 있다.시민 삶 속에서 체감하는 생할 전방위 디지털·비대면 인프라도 대대적으로 확산한다. 우선 시민의 자유로운 디지털 서비스 접근을 위해 2023년까지 공공와이파이 500개소 등 프리 와이파이 대구를 조성하고, 교통·안전·복지·재난 등 도시문제 관련 데이터댐 구축과 AI 기반 통합플랫폼을 구축한다.디지털 기반 전통제조업 경쟁력 제고와 민생경제 활성화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산업단지 대개조사업과 연계한 스마트 그린산단 조성, 스마트 공장 도입, 스마트물류시스템 구축 등 ‘제조공정-생산-물류’의 스마트화를 통해 제조현장의 생산성을 높이고, 대구형 배달앱 구축으로 디지털 상생경제를 실현에도 앞장선다.□ 공간뉴딜산업뉴딜에 대한 체감도를 높이기 위한 공간뉴딜도 적극 추진한다. 공간뉴딜은 그간 대구시가 추진해온 도심공간 테스트베드 전략을 뉴딜과 연계해 확대한 개념으로, 실제 삶의 현장에서 산업뉴딜이 구체화되고 실현되는 장을 제공한다.대표적 사례는 최근 국토부 공모사업에 선정된 도심융합특구를 들 수 있다. 옛 경북도청 부지, 경북대학교, 삼성창조캠퍼스를 잇는 도심융합특구는 지방 대도시에 기업·인재가 모일 수 있도록 산업·주거·문화 등 우수한 복합인프라를 갖춘 공간을 조성하는 것으로 핵심이다.옛 경북도청 터는 반경 1㎞ 안에 경북대와 삼성창조캠퍼스가 있어 기존 인프라와 지원 프로그램을 연계·활용하기 쉽다. 또 반경 3㎞안에는 제3산단, 검단공단, 금호워터폴리스, 엑스코, 동대구역, 복합환승센터, 대구역, 오페라하우스, 복합스포츠타운, 동성로 도심 등이 있어 산업·교통·문화 인프라도 잘 갖춰져 있다. 여기에 특구를 지나는 대구도시철도 엑스코선 사업이 이뤄질 경우 특구와 대구시 주요 거점 간 접근성이 크게 향상될 것으로 기대된다.대구시는 특구를 데이터, 네트워크, 인공지능 등 신기술 산업이 중심이 되는 공간으로 조성한다. 기업지원 기관과 연구소 등이 입주하는 혁신선도공간, 앵커기업과 혁신기업이 입주할 기업공간, 일터와 쉼터의 조화를 위한 문화융합공간 등을 조성해 빅데이터, AI, 복합사물인터넷 등 다양한 신기술과 인재들이 모여 리빙랩 실증, 창업 인큐베이팅, 사업화 등을 통해 앞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창조적 디지털 기술의 요람으로 만든다.대구시는 내년 2월 기본계획 수립용역을 추진하며, 입주기업 500개 유치, 신규 일자리 1만개 창출, 20·30대 청년층 고용비율 65% 달성 등의 구체적인 목표도 설정할 계획이다.□ 휴먼뉴딜대구형 뉴딜의 성공적인 추진을 위해 빠질 수 없는 부분이 바로 혁신인재 양성과 안전망 강화를 위한 휴먼뉴딜이다.대구시는 산학연관 맞춤형 인재양성 프로젝트인 휴스타 사업과 연계해 뉴딜 혁신인재를 중점적으로 양성하고, 취약계층 대상 뉴딜 공공일자리 사업 추진, 통합일자리 정보제공을 위한 ‘일자리종합플랫폼’ 구축을 통해 청년을 비롯한 중·장년층, 여성 등 맞춤형 일자리 제공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대구시는 한국판뉴딜을 지렛대 삼아 이미 대구시가 시작한 5+1 산업구조 혁신의 속도감을 더욱 높이고, 디지털·그린기술 융복합을 통해 대구형 뉴딜을 발판으로 지역 전체의 성장이 이어질 수 있도록 전문가 뉴딜 씽크탱크 운영, 시민 아이디어 공모 등 시민참여에 기반해 대구형 뉴딜의 추진동력을 더욱 키워나갈 방침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최근 국토부 공모사업에 대구시의 도심융합특구 선정을 들 수 있다.권영진 대구시장은 “대구형 뉴딜의 성공을 위해서는 조세감면이나 금융 지원, 규제특례 등 파격적이고 다각적인 인센티브 지원이 필요하다”며 “옛 경북도청 부지, 경북대학교, 삼성창조캠퍼스를 잇는 도심융합특구를 대구형 뉴딜의 핵심 플랫폼으로 조성해 지역 산업혁신 가속화와 지역 발전의 새로운 전기 마련하는 것은 물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구형 뉴딜로 성공시키겠다”고 말했다./이곤영기자 lgy1964@kbmaeil.com

2021-01-03

완만하지만 점차 회복 전망… 철강사, 신성장동력 날갯짓

■ 2021년 철강시장 주요변수는 코로나19와 미·중 무역분쟁내년 한국의 철강시장은 코로나19로부터 세계경제가 얼마나 빨리 벗어나는가, 중국의 철강 수요와 수출입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내년 철강 시장에 긍정적인 요소라면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와 함께 미·중 무역분쟁의 완화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분쟁이 완화된다면 한국처럼 수출을 해야 하는 나라에서는 교역이 활기를 띨 것이어서 긍정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코로나19 백신 개발 역시 철강 수요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 같다. 중국이 과거처럼 수출 시장에 부담이 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중국이 올해처럼 순수입국을 유지할 것인가도 관심이다. 또한 주요 수요기업들이 점차 코로나19 영향에서 벗어나고, 각국이 투자를 확대하면서 철강 시장도 점차 활기를 띨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악재도 많다. 여전히 코로나19는 부담스러운 존재이고, 올해 중국정부의 정책으로 인해 중국의 철강 소비가 크게 늘었지만, 내년에는 크게 둔화되거나 제로 성장 가능성도 예상할 수 있다. 중국이 다시 순수출국으로 전환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또한 CO2와 같은 환경문제도 여전히 부담스럽고, 철강 생산량 증가에 따른 철강 연원료 가격도 높게 형성될 것으로 예상된다.전체적으로 철강 수요 측면에서 본다면 2022년 정도 되어야 코로나19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내년에도 코로나 영향은 불가피할 전망이다.수요 산업별로는 올해 부진했던 자동차 생산이 약 7% 정도 늘어날 것 같고, 가전이 5%, 건설투자가 약 2%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은 내년에도 5% 감소해 부진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렇게 본다면 내년 한국의 조강생산량은 올해보다 약 5% 안팎의 증가가 예상된다.■ 코로나19로 감소한 생산량 회복에는 시간 필요제품별로는 2020년보다는 좋아지겠지만 큰 폭으로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는 적다. 이러한 예상은 내년 주요기업의 사업 계획에서도 드러나는데, 올해 포스코의 조강생산은 약 3천450만t 정도가 될 것으로 보인다. 내년에는 3천400만t 정도를 예상하고 있다. 그만큼 회복속도가 빠르지 않다는 반증이다. 판재류는 5∼6% 정도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자동차용을 중심으로 수요가 회복될 것으로 보인다. 자동차와 함께 가전용 판재류의 수요도 꾸준히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올해 판재류 대표 품목인 열연코일의 국내 수요는 3천만t대 초반으로 떨어지겠지만 내년에는 3천200만t대 중후반으로 회복될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2018년의 3천460만t이나 2019년의 3천350만t에 비해선 적을 것이다. 수출도 해외 수요가 늘어나면서 평소 수준인 680만t 정도를 회복할 것 같다.관건은 중국산이나 일본산 수입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인데, 특히 중국산이 변수가 될 것 같다. 봉형강류는 철근을 중심으로 수요가 늘어날 것 같다. 당초에는 2022년까지 철근 수요가 계속 줄어들어 900만t 전후까지 감소할 것으로 예상됐다. 일부에서는 800만t대 진입을 우려하기도 했다.그러나 최근 주택가격이 크게 올랐고, 프로젝트 파이낸싱 집행도 늘어나면서 건축허가면적과 착공면적이 늘어나고 있다. 철근 소비도 올해 950만∼980만t 정도에서 내년에는 980만∼1천만t 정도로 늘어날 전망이다. 큰 폭은 아니지만 약 20만t 이상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철근업계의 관심은 소비보다 이익으로 이동해 있다. 올해 수익 창출의 비결인 적극적인 감산과 가격 주도권의 확보, 그리고 할인 축소 및 폐지 등이 내년에도 관철이 될 것인가에 따라 수익성이 엇갈릴 것으로 예상된다. 내년에는 대한제강의 와이케이스틸 인수로 경쟁 제강사의 숫자가 줄어들게 되며, 철 스크랩과 철근에서 제강사의 시장 장악력이 향상될 것으로 보인다.H형강은 최근 수년간 큰 변화가 없는데 PC공법 적용 사례가 늘어나면서 H형강 시장을 대체하고 있지만 물류센터 건설 수요가 늘어나면서 대체를 상쇄했다.최대 변수는 수출이다. 주력시장인 동남아시아 등에 새로운 공급사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고, 수출 환경은 악화되고 있다. 수출 수익성도 하락하고 있다. 국내 시장은 약 260만t 전후에서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수출 감소가 내수 시장의 경쟁 심화로 이어질 것인지 아니면 철근처럼 감산을 통한 수익성 향상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 기로에 서 있다.또 다른 변수는 중국산 무역 규제의 연장 여부다. 연장이 된다면 현 시장구조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지만 종료된다면 시장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다.■ 수익성, 통상마찰 등 해결과제 산적내년에 철강사들이 주목하는 것은 △수익성 △통상마찰 △코로나19와 비대면 영업 △새로운 성장동력 등이 거론된다.그중 수익성 문제는 모두에게 화두이다. 수출이 많은 기업들은 수출 수익성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에 주목하고 있다. 또 자동차 조선 등 주요 수요산업들이 과점화 돼 있어 이들 업체들과의 협상력을 어떻게 제고해 나갈 것인가도 관건이다.대표적인 사례가 조선용 후판인데, 후판은 심각한 공급과잉을 보이고 있고, 현대중공업그룹처럼 몇몇 기업에 대한 소비 의존도가 높아 철강사들이 가격 협상력을 갖기 어려운 구조이다.세계 경제 회복이 더디다는 점을 고려하면 수출도 관건이다.. 올해 수출 가격이 많이 떨어졌다. 1∼9월 철강재 평균 수출 가격은 784달러이다. 이는 지난해 905달러에 비해 크게 떨어진 것이다. 수출 금액도 지난해 2천53만달러에서 올해는 1천697만달러로 줄었다. 수출량은 4.6% 감소했지만 수출 금액은 17.3%나 줄었다.대표적인 수출 품목인 보통강 열연의 경우 수출량은 지난해보다 18% 증가했지만 수출 금액은 3.6% 감소했다. 평균 수출 가격은 459달러인데, 지난해 562달러에 비해 103달러 하락했다. 반대로 원료인 철광석은 1∼9월까지 수입량은 7.1% 줄었다. 수입 금액은 이보다 적은 5.0% 감소했다. 평균 수입가격은 93달러로 지난해보다 2달러 올랐다. 수출 감소도 감소이지만 수출 수익성이 나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세계적인 철강 무역분쟁이 변수이기는 하지만 세계 경제가 다소나마 회복되면 수출 수익성도 다소 개선될 것이라고 생각한다.통상마찰도 내년 한국 철강시장의 중요한 화두 중 하나다.포스코를 중심으로 스테인리스 판재에 대한 AD가 진행 중이다. 또 현대제철과 동국제강은 중국산 H형강의 연장뿐 아니라 베트남 바레인산 등에 대한 신규 규제도 검토하고 있다.올해 포스코는 일본산 열연코일이 저가로 유입되면서 AD를 검토할 수 있다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물론 실현되지는 않았다. 한국 철강사들은 수출비중이 높아 대체로 수입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한국 시장이 축소되고 있고 수출 환경이 악화되고 있다. 한국 철강사들도 수입에 호의적일 수 없게 된 것이다. 무역분쟁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된 것이다. 한국에 수출을 하고자 하는 해외 업체들은 이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코로나19 장기화 속 새로운 성장동력 찾아야코로나19의 확산이 한국 철강업계에 준 충격은 생산 판매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재택근무의 확산에 따른 노사 관계, 코로나로부터 생산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고객 접점관리에서 비대면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특히 한국시장에서는 그 동안 철강 전자상거래가 매우 제한적이었다. 최근 비대면 영업의 일환으로 전자상거래를 고민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물론 한국 시장은 중국 등과 달라 전자상거래가 정착되기에는 많은 난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코로나19가 철강업계에 던져 준 화두는 철강산업도 바이러스에 취약하다는 것이고, 우리 모두 코로나와 같은 재난에 항상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포스코와 현대제철은 수소와 같은 신에너지 사업에 새롭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규모의 경제를 확보를 위해 동종사 인수를 검토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또한 신규 사업에 대한 진출 모색도 계속 이어질 것 같다.한국 철강산업은 수요 감소와 공급과잉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올해는 코로나19까지 퍼지면서 더욱 혼란스러운 상태이다. 올해는 지난해보다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크게 좋아질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코로나19의 조기 종식과 세계 경제가 활성화 된다면 한국 철강기업들도 활기를 찾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스틸앤스틸·스틸데일리 제공정리/박동혁기자 phil@kbmaeil.com

2021-01-03

방역·경제 살리기 최우선 가치… “포항시민의 삶 지킨다”

“시민의 삶 지키기 위해 방역과 경제 두 마리 토끼 잡겠다”경북 제1의 도시, 동해안 최대의 도시, 더 나아가 대한민국 최고의 철강 도시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던 포항시는 그동안의 침체된 지역사회를 변화시키고 나아가 경제 활력과 시민의 행복을 염원하는 모두의 기대와 희망을 품고 새로운 도전과 혁신적 정책으로 많은 변화를 일궈왔다.하지만 초유의 ‘코로나19’ 사태는 비켜나갈 수 없었다. 그럼에도 절치부심, 포항이 다시 한 번 꿈틀대고 있다. 온 세상을 침체의 늪으로 빠뜨린 ‘코로나19’ 와중에도 ‘함께하는 변화 도약하는 변화’를 기치로 시민이 체감하는 ‘보다 나은 포항’을 만들기 위해 포항시는 새로운 2021년을 준비하고 있다.□코로나 극복포항시는 지난해 초 전국에서 처음으로 구성한 민·관 합동방역시스템의 경험을 시작으로 그동안 방역현장에서 겪었던 다양한 경험들을 토대로 더 안정적이고 체계적인 방역시스템을 통해 ‘코로나19’ 위기 극복에 더욱 선제적으로 나서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무엇보다도 ‘방역만큼 중요한 것은 지역경제 살리기’라는 구호를 시정의 최우선 가치로 삼고 있다. 우선은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운 상황이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는 판단에 따라 소상공인과 중소기업 지원에 대한 지원 확대를 통해서 시민의 삶을 지키는데 전력을 다한다는 방침이다.올해에도 지역경제 활성화의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포항사랑상품권을 전국 최대 규모인 3천억원 규모로 발행하는 한편, 우선 경제방역 예산 800억원을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손에 잡히는 경제효과를 노리겠다는 복안이다.방역과 시민행복 일자리, 여성시간선택제와 노인일자리 등 공공일자리 확보는 물론 청년 일자리 지원책 확대에도 적극적인 지원을 통해서 민생을 챙기고 지역경기부양에 힘을 쏟도록 하겠다는 입장을 거듭 확인했다.□미래 먹거리 확보여기에 무엇보다도 포항시가 2021년뿐만 아니라 향후 주력하고 있는 분야는 미래 먹거리 산업이다. 이차전지와 바이오, 헬스분야를 핵심 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방침이다.그동안 포항은 주력인 철강 산업의 경쟁력을 드높이고,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는 미래 신 성장산업을 육성하는데 지속적으로 투자해 온 덕분에 지난해부터 이차전지와 바이오·헬스산업을 중심으로 가시적이고 괄목할 만한 성과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블루밸리국가산단을 중심으로 관련 산업의 핵심동력이 착착 들어서고 있고, 관련업계의 핵심기업들이 제조공장 건립을 비롯해 투자 약속들이 속속 진행되고 있는가 하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글로벌 주도권을 차지할 바이오·헬스케어 관련기업도 지역 투자를 위해 줄을 서고 있다.뿐만 아니라 포항시는 ‘바다’를 주목한다. 그래서 2021년부터 바다를 활용한 해양문화관광과 물류산업 육성에도 본격 나선다는 방침이다.지난해 9월부터 영일만항을 모항(母港)으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일본 마이즈루를 취항하고 있는 국제카페리를 물류뿐만 아니라 관광객 유치를 위한 중요 수단으로 활용하는 한편, 인입철도 개통으로 컨테이너 물동량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영일만항을 물류산업의 기반으로 자리매김하겠다는 계획도 단계적으로 마련하고 있다.□인프라 확충 및 시민 복지 실현인프라와 관련해서는 동해안고속도로의 주요 연결구간인 동해안횡단대교의 건립을 통해 부산·울산 등 산업도시와 영일만항의 물류를 연결하는 ‘경제대교’이자, 동해안 관광객들의 매력을 더해줄 ‘관광대교’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국비확보에 지속적으로 노력을 기울여나간다는 입장을 대외적으로 분명히 하고 있다.또 대기개선 사업, 도심숲 조성, 생태하천복원 등 친환경 녹색사업을 포괄하는 ‘그린웨이 프로젝트’로 모든 시민들이 염원하는 깨끗한 공기, 푸른 도심, 맑은 물을 통한 시민의 건강권 보장과 함께 살고 싶은 지속가능한 환경도시를 만들어가겠다는 계획도 꼼꼼히 챙긴다는 방침이다.이밖에도 지진피해로부터 실질적인 피해구제가 이뤄지고 정부와 지속적인 소통을 통해 지역경제 활성화와 공동체 회복과 같은 남은 과제를 깨끗하게 해결하는 한편, 지진으로부터 안전한 도시, 그리고 공공형 생활복지 인프라를 대폭 확충해 지역과 세대 간 균형 잡힌 복지의 기초를 놓겠다고 약속했다.이강덕 시장은 “도시의 미래는 지속가능성에 있는 만큼 감염병이 만든 사회·경제적 위기를 변화의 기회로 만들고 생존을 위한 변화와 혁신을 지속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코로나19’를 우리의 삶과 도시의 미래에 대해 다시 한 번 더 생각하게 하는 경고음이라고 생각하고 시민의 꿈과 희망의 어울림, 지속가능성 확보, 행복의 가치를 실현시켜 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전준혁기자jhjeon@kbmaeil.com

2021-01-03

백신 생산 글로벌 전진기지 부상 야심찬 도약

경북 안동시가 코로나19 백신 생산 전진기지로 거듭나고 있다. 백신 기업의 시료 생산을 지원할 정부 산하 실증지원센터가 올해 상반기부터 본격적으로 가동에 들어가는 데다 지역 대기업의 백신 개발이 가속하고 있기 때문이다.3일 안동시 등에 따르면 경북바이오산업단지(이하 바이오산단)에 입주한 SK바이오사이언스(주)가 지난해 7월 아스트라제네카와 영국 옥스퍼드대학이 개발한 코로나19 백신 후보물질의 원액·완제를 생산·공급하는 위탁생산(CMO) 계약을 체결한 데 이어 8월에는 미국 바이오기업 노바백스와 코로나19 백신 후보물질 공정 개발과 생산, 글로벌 공급에 대한 위탁개발생산(CDMO) 계약을 맺었다. 현재 두 회사 백신 모두 생산에 돌입한 상태다. 앞서 정부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이 올해 2∼3월 중 SK바이오사이언스 위탁 생산을 통해 국내 도입될 것으로 예상했다. 또 SK바이오사이언스의 자체 백신 개발의 경우 개발 완료 시점을 이르면 올해 말 또는 내년 초로 내다봤다.이 때문에 현재 SK바이오사이언스의 자체 백신 개발과 백신 위탁 생산(CMO) 등 코로나19 백신과 관련해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자체 개발 중인 백신의 경우, ‘NBP2001’과 ‘GBP510’ 등 두 가지 백신에 대한 연구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합성항원백신 ‘NBP2001’은 지난해 11월 24일 식약처 임상1상 시험계획(IND) 승인 후 즉시 임상에 돌입했다.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 지원으로 개발 중인 ‘GBP510’ 또한 연내 임상 진입을 목표로 지난달 9일 식약처에 임상시험계획을 제출한 상태다.SK바이오사이언스는 코로나19 백신 외에도 다양한 자체 개발 백신으로 세계의 관심을 받고 있다.자체 개발한 독감백신 ‘스카이셀플루’는 지난해 세포배양 독감백신으로는 세계 최초로 WHO(세계보건기구) PQ(Pre-qualification, 사전적격성평가) 인증을 획득했다.WHO PQ는 엄격한 기준에 따라 백신의 제조과정, 품질, 임상시험 결과를 평가해 안전성 및 유효성을 인증하는 제도다. PQ 인증을 획득한 업체에 한해 유니세프(UNICEF), 파호(PAHO, 범미보건기구) 등 UN 산하기관이 주관하는 국제 입찰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고 다수의 개발도상국에서 중요한 허가 참고사항으로 인정된다.또 게이츠재단의 지원 아래 국제백신연구소와 장티푸스백신 임상을, 글로벌 기구인 PATH(Program for Appropriate Technology in Health)와 소아장염백신 개발을 진행하고 있고 사노피 파스퇴르와 공동 개발 중인 차세대 폐렴구균백신은 올해 미국에서 임상 2상에 진입했다.세계 최고 수준의 설비와 규모를 자랑하는 백신공장 안동 L하우스에서 최신 백신들의 개발이 완료되는 즉시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는 점도 SK바이오사이언스를 주목하는 요인으로 손꼽히고 있다.SK바이오사이언스는 지속적인 연구개발 투자와 적극적인 사업 확장을 통해 장기적으로 성장세를 이어간다는 방침이다. 실제 2018년 분할 설립 후 매년 매출의 16%가량(지난해 기준 277억원)을 연구개발비로 활용해오고 있다. 현재도 백신 생산량 증가에 대비해 안동공장 증축 투자를 진행 중이다. SK바이오사이언스는 지난 2012년 1천200억원을 투자해 백신 공장을 구축한 데 이어 2018년부터 2022년까지 5년간 1천억원을 들여 1, 2차 증설투자를 이어가고 있다.아울러 SK바이오사이언스는 개발, 생산, 상업화 등 백신 사업 전 과정에서 자체 확립한 핵심역량을 바탕으로 글로벌 민관 기구들과의 협력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한 전 세계 백신 수요의 증가와 국가 간 개발 경쟁이 심화한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며 △본격적 해외 오퍼레이션 확보 △연구·개발 파이프라인 강화 △사업모델 확장 등 신규사업 확대를 위한 노력도 한층 강화한다.SK바이오사이언스 관계자는 “앞으로도 높은 기술력을 토대로 연구개발 과제들을 지속 추진하는 한편, 외부 기관, 정부 지원 등을 포괄하는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해 연구개발 성과를 극대화하고자 한다”고 밝혔다.경북도와 안동시는 바이오산단 인프라 확충에 속도를 내고 있다. 국비와 지방비 278억원을 투입, 비임상 단계의 백신 연구개발을 지원할 ‘백신상용화기술지원센터’를 오는 3월 착공해 2022년 6월 가동할 계획이다.특히 최근 준공식을 하고 본격 가동을 시작한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동물세포실증지원센터는 올해까지 장비를 도입하고 약처의 GMP(의약품 제조 품질 관리 기준) 승인을 받아 본격적으로 백신 대행생산을 앞두고 있다. 이 센터는 지난 2017년부터 약 4년간 총 1천29억원이 투입돼 안동 경북바이오 일반산업단지 내에 연면적 1만6천120㎡의 3개 동으로 신축됐다.임상 및 상용화 백신 대행 생산을 지원하는 센터에는 주요 생산 시설인 생물안전3등급(BSL-3)의 원액 생산라인(200ℓ 2개 라인, 1천ℓ 1개 라인)을 비롯해 완제품 생산라인으로 바이알 라인(1만2천병/hr), 프리필드 시린지 라인(1만도즈/hr) 등의 공정 개발시설이 설치될 예정이다.이 작업이 완료되면 국내 중소 규모 백신 기업들이 센터의 인프라를 활용, 백신 임상용 시료와 제품 생산에 나설 수 있다. (주)셀리드 등 4개 백신 기업은 코로나19 백신 개발을 위해 지난해 7월 센터와 대행생산 협약도 맺었다. 기업들은 장비 구축에 차질이 없도록 경북도와 안동시에 협조를 요청하는 등 백신 개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이와 별도로 안동시는 기존 바이오산단 인근에 약 49만5천537㎡ 규모의 바이오2차 일반산업단지가 2023년 준공을 목표로 순조롭게 추진하고 있다.안동시 관계자는 “경북바이오2차 일반산업단지에 바이오, 백신, 식품 등 지역 전략 산업에 기업들이 투자하도록 적극 홍보하는 한편 각종 인센티브 지원으로 우량기업을 유치해 고용창출과 지역경제 활성화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다./손병현기자why@kbmaeil.com

2021-01-03

세계적인 바이오 클러스터 도약 새 날개 달아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고통을 받고 있는 가운데, 오히려 이를 계기로 바이오산업은 단순한 고부가가치 산업에서 인류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필수 산업으로 그 가치를 드높이고 있다. 경북도는 일찌감치 바이오 관련 산업의 육성을 위해 발 빠른 투자와 사업을 진행해 왔으며, 그 성과가 이제 점차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경북도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포항시는 잠재력 있는 인프라를 기반으로 바이오산업 선도 도시로 진입하기 위해 클러스터를 조성해나가고 있으며, 안동시도 백신과 관련해 위탁생산에 들어가며 생산기지로서 그 위상을 공고히 하고 있다. 양 도시가 가지는 장점을 바탕으로 바이오산업의 메카로 거듭나기 위한 경북의 노력에 대해 알아본다.미래 유망 신성장 동력 산업으로 주목받고 있는 바이오산업은 생명공학기술을 바탕으로 생물체의 기본정보를 활용해 인류의 건강증진, 질병예방, 진단·치료에 필요한 유용물질과 서비스 등을 활용해 고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산업이다. 또한, 바이오산업은 다른 산업과 달리 연구개발 중심의 기술집약적 산업으로 기초연구에서부터 신약후보물질 발굴 후 제품화하기까지 소요시간이 길고 개발 비용도 큰 반면, 성공확률은 낮아 정부와 지자체의 전략적 지원이 필요한 산업이다. 이처럼 바이오산업은 연구개발, 임상실험, 상용화의 연결과 연구기관, 의료기관, 바이오 기업과의 긴밀한 연계가 성공의 열쇠이기에 클러스터(Cluster)조성이 필수다. 포항은 바이오산업 선도 도시로 진입하기 위해 바이오산업 육성에 필요한 클러스터를 조성해나가고 있다.포항 바이오산업의 잠재력 및 경쟁력으로 △포스텍과 한동대 등 우수한 바이오 인재 △3·4세대 방사광가속기, 생명공학연구센터, 포스텍 및 한동대 Germ-Free 등 바이오 핵심 연구시설 △포스텍 및 한동대 기술창업을 비롯해 제넥신, 압타머사이언스, 화이바이오메드 등 40여개의 기술력 있는 바이오벤처를 꼽을 수 있다.현재까지의 성과는 출중하다. 포스텍의 우수한 연구역량 및 연구장비 지원, 벤처기업 공동연구 등을 통한 바이오 벤처 보육 및 바이오 핵심 연구시설인 바이오 오픈 이노베이션센터(BOIC)가 올해 11월 26일 준공식을 가졌다. 포스텍 생명공학연구센터 옆에 위치한 이곳에는 시스젠랩(유전체 연구 및 기술개발 사업), 바이오컴(바이오 촉매를 이용한 CO2 포집 및 자원화), 셀렉신(항암 면역치료제 개발), 노바셀테크놀로지(펩타이드 기술 플랫폼 기반 의약품 및 소재 개발), 에이앤폴리(천연 유래 나노바이오 고분자 신소재 개발), 이뮤노바이옴(면역제어 파마바이오틱스, 면역질환 치료제), 티엠비(의료용 실리콘, 창상피복재), 루카헬스(지질 활용 플랫폼 기반 의약품 및 소재 개발), 네오이뮨텍(면역항암제 개발, 종양학 및 면역학 임상개발) 등이 입주해 있다.4세대 방사광 가속기와 Cryo-EM(극저온 전자현미경)을 활용해 세포막단백질 구조기능 연구를 통해 항체신약을 개발하는 바이오 신약개발 핵심 인프라인 세포막단백질 연구소 유치도 눈여겨볼 만하다. 극저온 전자현미경은 2017년 노벨화학상 수상에 기여한 최첨단 장비로 정제된 단백질(시료)을 초저온 초고속으로 얼리고 세포 모습을 최적의 이미지 영상 조건을 탐색 후 고해상도 카메라로 이미지 영상을 획득해 이미지 프로세싱을 통해 세포를 3차원 구조로 구현해 내는 장비다. 질병유발 원인인 세포막단백질처럼 큰 세포 구조 규명에 유리하다. 올해 3월에 착공했으며 내년 4월에 준공예정이다.내년 6월 준공예정인 식물백신기업지원시설도 있다. 이곳은 기존 동물세포 및 미생물에서 백신을 추출하던 기술에서 벗어나 식물에서 백신을 추출하는 그린백신 실증지원 시설이다. 바이러스를 직접 배양하지 않아 안전성이 높고, 신속하게 백신생산이 가능하다.포항의 포스텍과 한동대는 우수한 인재가 많은 연구중심 대학으로 양질의 논문이 많고 글로벌 연구 경쟁력도 갖춰져 있다.포스텍에서는 우선 2020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혁신성장 선도 고급연구인재육성(KIURI) 사업에 선정돼 바이오 신약개발 석박사 양성 및 바이오 창업 보육 지원, 바이오 전문인력 양성(대학·연구소 연계) 등을 수행하고 있다. 이를 통해 바이오 핵심 기술 혁신을 이끌 연구 인재 역량을 강화하고 이러한 인재를 산업계와 교류해 바이오 기업 등으로 진출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 외에도 4세대 방사광가속기를 활용한 신약원천기술 및 신약 개발사업도 눈에 띈다.한동대 역시 난치성 만성 B형 간염 치료 기술 개발(CRISPR/Cas9), 염증성 장질환(IBD) 치료용 프로바이오틱스 개발 등을 수행하고 있다.바이오 관련 기업의 유치에도 속도가 붙고 있다. 국내 굴지의 제약기업인 한미사이언스가 포항시-경상북도-포스텍과 올해 6월 MOU를 체결했으며, 이를 통해 경상북도, 포스텍, 포항시와 함께 신약개발 및 바이오 분야 전문인력 교육·훈련과 인적교류 및 포항의 연구시설 및 장비 공동 이용 등 포항에 3천억원 규모의 중장기적 투자가 예정돼 있다. 포항융합기술산업지구 내 투자협약 체결 성과도 독보적이다.2022년부터 2024년까지는 3D프린팅기반 인공장기 실증지원센터 구축사업을 통해 첨단바이오산업 인프라가 확충된다. 포스텍 컨소시엄이 사업을 주관하며, 바이오 인공장기(Artificial Organ) 생산을 위한 장비 및 GMP시설 구축, 미니장기 기술개발을 통한 동물대체시험평가법 정립 등을 사업내용으로 하고 있다. 세포막단백질연구소 내에서는 2022년부터 2024년까지의 기간에 150억원이 투입돼 혁신 신약개발 지원용 극저온전자현미경 지원시스템 구축사업이 진행된다. 포스텍이 주관하며, 극저온 전자현미경 및 고성능 컴퓨터시스템 구축, 바이오기업 구조분석 지원 등의 역할을 수행할 예정이다./전준혁기자 jhjeon@kbmaeil.com

2021-01-03

2022년 대선 길목…여야, 서울·부산시장 보선 사활 건 승부

2021년 신축년 새해에도 정치권의 기상은 그리 밝지 않다. 문재인 정부가 약속했던 협치는 간곳없고, 강대강의 대립으로 싸움박질이 일상이다. ‘올오어나씽’이 될 수밖에 없는 대통령제 하에서 여야 정치권은 항상 극단적인 대치 정국을 이룬다. 특히, 총선에서 여권이 과반수 이상 의석을 차지할 경우 모든 입법권력을 장악해 입법독재를 권리인 양 휘두르기 십상이고, 이에 맞선 야권은 여권의 입법독재를 규탄하면서 강도 높은 반대투쟁을 전개하게 되는 구도다. 이미 여권이 지난 연말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를 설립하면서 당초 야당에게 약속했던 공수처장 비토권을 박탈하는 법률안 개정을 강행함으로써 여당 주도의 입법독재가 시작됐다. 이제 군소야당으로 구성된 야권은 다수의 횡포에 무력한 한계를 절감하면서 국민 여론에 기대 정부·여당의 실정을 비판하며 민심을 야권으로 끌어모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새해 정국에서는 민주당 출신 서울·부산시장의 성추문으로 인한 퇴진에 따라 실시하게 된 보궐선거가 가장 핫한 이슈로 다가온다. 경북매일신문은 신년특집 기획기사로 여야가 내년 대통령선거의 시금석으로 여기는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 전망에 대해 알아본다.□서울·부산시장 선거 전망…정권 재창출·탈환 교두보 총력전새해 여야 정치권의 관심은 온통 4월 서울시장·부산시장 보궐선거에 쏠려 있다. 특히, 서울시장 자리를 놓고 사활을 건 승부가 펼쳐질 예정이다.서울시장을 사수해 정권을 재창출하겠다는 여당, 서울시장을 교두보로 정권을 되찾겠다는 야당의 총력전이 예상된다.선거공학적으로는 야권의 ‘후보단일화’ 여부가, 선거공약으로는 ‘부동산 대책’이 키워드다.여야 모두 후보경선이 남아있고, 선거국면에서 어떤 이슈가 급부상할 지 모르는 상황이어서 4월 보궐선거의 승부를 예단하는 것은 쉽지 않다.그렇다 해도 서울·부산 보궐선거가 모두 민주당 측 인사의 여성문제로 발생한 선거여서 전체 구도가 여당보다는 야당에 유리한 국면인 데다, 지난 연말 여론조사 결과 등을 종합하면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 승부는 일단 야권후보에게 다소 유리한 것으로 점쳐진다.□서울시장 선거…부동산 대책·안철수發 야권 단일화가 변수서울시장 선거전의 최대 화두는 야권의 ‘후보 단일화’다. 대권 유력후보로 거론되던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서울시장 출마를 전격선언했기 때문이다.국민의힘 내부에서도 나경원 전 의원이 출마를 고심하고 있고, 조은희 서초구청장, 김선동 전 사무총장, 이종구 전 의원, 이혜훈 전 의원, 박춘희 전 송파구청장 등이 이미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여기에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 유승민 전 의원 등 대권주자급 후보들에게도 출마 요청이 잇따르고 있어 이들의 출마 여부 역시 변수다.야권 예비후보들은 반문연대, 야권연대 등을 통해 단일후보를 내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단일화 방식에 대한 견해는 약간씩 엇갈린다.안 대표는 입당 가능성을 시사했지만, 아직은 당 대 당 단일화에 무게가 실려 있다. 결국 한 울타리 안에서 단일화 경선을 제안하는 국민의힘 측과 범야권 열린 경선을 치르자는 의견이 어떻게 정리될지가 핵심이다.사실 국민의힘 예비 경선은 100% 국민 여론조사, 본 경선에서 ‘당원 20% + 국민 80%’로 정하기로 확정한 상태다. 그러나 야권 후보들이 입당을 하지 않는다면 경선룰을 다시 손봐야 하는 상황이다. 야권이 어떻게 원만하게 단일후보를 내세울 수 있느냐가 이번 선거의 가장 큰 관전포인트다.더불어민주당은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문으로 인해 극단적 선택을 함에 따라 치르게 선거에 후보를 내느라 당헌까지 바꾸는 무리수를 감행했다.상황은 녹록치 않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지키는 박영선 벤처기업부 장관이 서울시장 출사표를 던져야 그나마 싸워볼 만한 경쟁구도를 갖춰질 것이란 얘기다.현재는 4선 중진 우상호 의원이 출마를 선언했고, 박주민 의원이 출마를 고심하는 정도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등판론도 있지만 추-윤 갈등으로 중도보수층에 인심을 잃은 추 장관이나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 사건과 라임·옵티머스펀드 사건에 관련있는 임 전 실장이 선거에 뛰어들 가능성은 낮다. 일단 민주당에서는 야권의 단일화 추이를 지켜보며 선거전략을 짜자는 분위기다. 어쨌든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여성 후보’들간 싸움이 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야권엔 국민의힘 나경원 전 의원과 조은희 서초구청장이, 여권에서는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선두권을 지키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와있기 때문이다.에이스리서치 조재목 대표(정치심리학 박사)는 “4월 보선 가운데 1천만 유권자의 서울시장 선거결과가 대선에 미치는 영향이 가장 클 것”이라며 “야권에서는 기존 나경원, 오세훈 후보의 출마여부, 그리고 안철수 후보가 어떤 방식으로 합류하느냐가 중요하다”면서 서울시장 후보단일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그는 또 “현재의 여론은 추-윤 갈등으로 야권이 다소 유리할 것으로 판단하나 보궐선거는 투표율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면서 “민주당이 서울 기초단체장이나 광역·기초의원이 더 많은 점을 감안하면 국민의힘이 여론에선 이기고, 실제 선거에선 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부산시장 선거…국민의힘 예비후보 8명 민주당 정중동 행보부산시장 선거판도 서울 못지 않게 치열하게 펼쳐질 전망이다.일단은 민주당 출신의 오거돈 전 시장이 성추문 사퇴로 치러지는 보궐선거여서 야권에 유리한 국면으로 야권후보들의 출마선언이 잇따르고 있다. 벌써 선관위에 등록된 야권 예비후보만 해도 박민식·유재중·이진복·박형준·이언주 전 의원을 포함해 8명이다.이에 반해 민주당에서는 아직 부산시장 출마를 선언한 유력 후보가 없다.김해영 전 의원이 불출마를 선언한 가운데 김영춘 국회 사무총장의 전략공천론, 전현희 국민권익위원장 차출론이 흘러나오고 있다.선거 지형이 서울보다 더 불리하다고 평가되는 데다, 가덕도 신공항 건설 카드도 반향이 기대보다 크지 않아 여당에서도 필승전략을 고심하는 분위기다.부산시장 사퇴 이후 시정을 이끈 부산시의 ‘투톱’, 변성완 부산시장 권한대행과 박성훈 경제부시장이 각각 민주당, 국민의힘의 후보군으로 거론되고 있어 추후 행보가 관심거리다./김진호기자 kjh@kbmaeil.com

2021-01-03

포스코, 뜨거운 용광로 열정으로 ‘코로나 팬데믹’ 헤쳐나간다

2020년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온 세상을 뒤덮은 특별한 한 해였다. 수개월 만에 코로나19가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이어지면서 세계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국내 철강산업도 코로나19의 영향권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자동차, 조선 등 수요산업 관련업체들이 긴축경영에 나서면서 발주량이 급감했고 설상가상으로 중국산 저가제품이 유입되면서 국내 철강사들 사이에서 위기감이 높아졌다. 코로나19 정국 속에서 국내 철강산업을 이끌고 있는 포스코는 높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월드 톱 프리미엄(World Top Premium) 제품 생산에 공을 들이고 있다. 지난 2017년 초고장력 자동차강판인 ‘기가스틸(Giga Steel)’을 성공적으로 런칭한 포스코는 지난해부터 프리미엄 강건재 ‘이노빌트(INNOVILT)’생산에 본격 나서며 판매량 확대에 집중하고 있다.□프리미엄 기술력과 노하우로 건설자재시장 진출포스코는 판재류 중심 철강재 생산의 비중이 높아 철근, 형강이 주로 판매되는 건설업체들과의 거래가 활발한 편은 아니었다.건설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위해 강건재 제작사들과 협력을 시작한 포스코는 더 가볍고, 강하고, 아름답고, 경제적인 강건재를 속속 개발하는데 성공했다.하지만 비즈니스 대부분이 B2B(Business to Business) 형태로 이뤄지다 보니, 포스코가 새로 개발한 제품을 최종 사용자인 고객들에게 직접 알리기 쉽지 않았다.그런데 국내 건설시장에서 새로운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공간의 안전성, 친환경성의 가치가 높아질수록 건설사나 시공사 같은 비즈니스 당사자 못지않게 고객의 생각도 자재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포스코는 국내 건설시장이 더 이상 완전한 B2B 구조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고객과도 적극적으로 대화하는 B2B2C(Business to Business+Business to Customer)로 커뮤니케이션 방식의 전환을 시도하기로 했다.이같은 결과 포스코는 지난 2019년 11월 프리미엄 건설자재 브랜드 이노빌트를 론칭했다.그동안 자동차강판·가전강판 등에서 쌓아 온 프리미엄 기술력과 노하우를 건설자재시장으로 확대해 고객의 가치를 키우겠다는 것이 목적이었다.이노빌트는 혁신을 뜻하는 Innovation, 가치의 Value, 건설의 Built를 결합시킨 것으로, 포스코 프리미엄 스틸이 거듭해온 혁신으로 건설산업의 가치를 함께 높이겠다는 의지를 담았다.슬로건은 ‘Built the next, Let’s INNOVILT’이며 브랜드의 핵심 가치로는 미래기술(Hi-Tech), 독창성(Creativity), 친환경(Sustainability), 상생(Partnership)을 추구한다.□66개사 102개 제품 인증완료포스코 이노빌트의 높은 기술력은 EBS 크리에이터 ‘펭수’의 보금자리를 만들어주는데 처음으로 활용됐다.포스코는 지난 2019년 12월 전 세대에 걸쳐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EBS 크리에이터 ‘펭수’에게 철로 만든 집을 지어줬다.펭수는 최고의 크리에이터가 되기 위해 남극에서 건너온 EBS 연습생으로 소품실에서 생활하고 있다. 포스코는 집 없이 소품실 구석에서 지내는 펭수를 위해 새 숙소를 지어주기로 하고, 포스코와 고객사가 함께 만드는 건설자재 브랜드 이노빌트를 적용해 약 한 달간의 제작기간을 거쳐 ‘펭숙소’를 완공했다.이노빌트 제품인증 작업도 본격화됐다.포스코는 지난 2019년 12월 제1차 이노빌트 브랜드위원회를 개최해 국내 17개사 23개 제품을 이노빌트 인증제품으로 선정하고 고객사와 브랜드 사용협약을 체결했다.이후 지난해 10월 제4차 이노빌트 브랜드위원회까지 총 66개사의 102개 제품이 이노빌트 인증 제품으로 등록됐다.인증 제품에는 구조용 강건재부터 일반 소비자들도 쉽게 접하는 인테리어 자재까지 다양하게 포함됐고, 인증 제품 절반 이상이 포스코와의 공동 개발을 통해 상용화됐다.제품 발굴뿐 아니라 선정된 제품이 시장에서 활발히 판매될 수 있도록 공동 마케팅과 홍보 활동에도 박차를 가했다.‘고객과 함께하는 이노빌트 카운슬’을 개최해 얼라이언스사가 종합 건설사, 설계사와 직접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고 동시에 롯데건설 등 대형 건설사와 각종 MOU를 체결해 비즈니스 판로도 여러 군데 개척했다.일반 소비자에게 다가가기 위한 활동도 놓치지 않았다. 지난해 4월 개관한 더샵갤러리에는 곳곳에 이노빌트 제품을 배치해서 방문객이 주택에 적용되는 프리미엄 강건재의 실제 모습을 체험할 수 있도록 했고, 같은해 7월에는 대중을 대상으로 이노빌트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홍보영상도 론칭했다.□고객사와 동반성장 추구포스코 브랜드위원회의 철저한 심사를 통해 이노빌트 제품인증을 받은 고객사들은 인증 후 높아진 판매수요를 실감하고 있다.포스코와 공동연구 끝에 이노빌트 SP-CIP강관철근망 상용화에 성공한 (주)한국소재는 지난해 6월부터 자동 용접 설비를 갖춰 본격 시장 공략에 나섰다.철근망은 지반 공사용 자재로, 땅속에 타설해 지반의 붕괴와 성능 저하를 막는 기능을 한다.이노빌트 강관철근망은 기존 철근을 포스코 고강도강으로 제작한 STG800 강관으로 대체한 제품이다. 무게가 기존 제품 대비 40% 낮아지고 공장에서 제작해오기 때문에 현장에서는 이동과 설치가 아주 간편하다.덕분에 건축 공기가 획기적으로 줄어든다는 후기가 업계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본격 영업을 한지 6개월 만에 폭발적인 주문을 받고 있다.양철진 (주)한국소재 대표는 “보수적인 건설 시장을 신제품이 뚫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인데 대기업이 품질을 보증한다는 브랜드를 가진다는 것은 기대이상의 영업효과가 있다”며 “업계에서 이노빌트라는 브랜드를 달고 검증을 마친 상황이니 업계에서 영향력이 커졌다”고 설명했다.한국소재와 포스코의 합동 작전이 빛을 발해, GS건설의 대구 용산동 주상복합사업 현장에 제품이 적용되었고 이외에도 대형 건설사들의 문의가 계속되고 있다. 한국소재는 내년 강관철근망의 판매량 1만 t, 매출액 500억원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의조산업의 이노빌트 ES700 초경량 시스템비계는 포스코 PosH690으로 만든 초경량 강관 UL700으로 제작한다.의조산업은 초경량 시스템비계를 판매 혹은 임대하는 사업을 하면서 수많은 설치 시공사와 협업하고 있다. 최근에는 단순히 그들과 거래를 하는 단계를 넘어, 의조산업의 제품만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설치 시공사 육성의 길을 모색 중이다.정병기 의조산업 사장은 “자재 제작사, 설치사가 서로 물건을 주고받기만 하는 상황에서, 이제는 협력해서 제품을 업그레이드하고 더 좋은 설치 시공 방법을 연구할 수 있다”며 “이렇게 창출된 부가적인 시너지는 작업자와 최종 사용자들의 이익이 되고 건설 산업 밸류 체인이 함께 성장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한편, 지난해 12월 27일까지 건축시장을 선도할 이노빌트 제품 모집을 진행한 포스코는 올 1분기 내로 제5차 브랜드선정위원회를 거쳐 제품 추가인증작업을 완료할 예정이다. /박동혁기자 phil@kbmaeil.com

2021-01-03

붓으로 풀어내는 시나위자유로움의 한계를 깨다

타필비묵(打筆飛墨).대구에 기인이 있다. 일필휘지로 먹을 치고, 서예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어 훨훨 날게 한 사람. 그가 바로 붓으로 먹을 친다는 ‘타필비묵’의 타묵 퍼포먼스로 명성이 높은 율산 리홍재 명인이다. 대구 경북의 명인을 찾아 인터뷰를 하며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지역 각계각처의 예술 방면에 기인들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율산을 만난 첫 느낌은 진짜 광대를 만났다는 신선한 놀라움이었다. 그의 내면에서 꿈틀대는 행위예술의 범주를 예측할 수 없고, 그 자유로움의 한계를 짐작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는 내가 그 동안 인터뷰로 만난 여러 아름다운 광대 중에서 단연 으뜸이다. 온몸에 가시를 담은 밤산. 그 내면에 숨어 있는 진정성을 알리는 방법은 밤산을 이루는 알을 깨뜨릴 수밖에 없고, 알을 깨뜨리는 방법으로 그는 타묵 퍼포먼스를 택했다.말과 글을 굵은 획에 담아 그림인 듯 붓을 치며 자연의 매개물을 화선지에 생생하게 담아내는 방식이 율산에게는 알을 깨뜨리는 행위나 다름없다. 서예를 단순히 사각 프레임에 가두는 전통을 뛰어넘어 세상으로 끌어낸 것은 기존의 질서를 넘어서는 일이기도 하지만 두터운 자기만의 세계를 깨고 세상으로 걸어 나오는 과정이기도 하다. 진정성을 향한 그의 행보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언제부터 서예를 하셨어요?”“어릴 때부터. 초등학교 5학년?”어릴 때부터 한자를 좋아해서 한자사전을 갖고 놀았다. 한자를 보면 기분이 좋아졌다. 할아버지가 서당을 하셨지만 그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의 공부는 완전한 독학이다. 학과공부보다 글씨 쓰기가 좋았고, 그 유별난 취미생활이 그대로 그의 인생이 되었다. 1976년 죽헌 선생의 사숙에서 안진경 서체로 시작으로 모든 서체를 두루 섭렵하고 전각과 문인화 등, 붓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독학으로 갈고 닦은 그에게는 꺼내지 못할 영역이 없다 하겠다.부모님이 혹시 서예를 하셨느냐고 물으니 아니라고 한다. 그에게는 먹물 유전자가 없다. 어릴 때부터 글을 쓰는 것이 좋았고, 한자가 좋아서 반복해서 쓴 것이 전부다. 나무꼬챙이로 한자사전에 있는 글귀를 땅바닥에 옮겨 적을 때 이미 서예의 길은 시작되었다는 말인데, 독학서생이어서 그의 예술 세계가 더 자유롭고 독창적이었던 게 아닐까 싶다. 김천시 감문면 구야리의 평범했던 소년은 자기만의 서체를 찾아 끊임없는 연습을 반복했다. 의도하지 않았던 즐김이 훈련이 되어 오늘의 율산을 만들긴 했지만, 혼자 힘으로 자기 세계를 일궈 나가다 보면 더러 한계에 부딪치기도 했을 것이다.“열정만으로는 힘들었을 텐데요. 한계를 어떻게 극복했어요?”“서예를 버리는 것으로 나를 찾았어요.”서예는 단순히 글을 쓴다는 개념을 초월해서 예술로 진입한 지 오래다. 담뱃갑 포장지와 편백나무 알갱이, 포도 씨, 앵두 씨 같은 자연의 재료를 서예에 활용하며 그의 예술 세계는 새롭게 태어난다. 남다른 그의 생은 한지를 사러 다니던 필방에서 시작되었다. 그를 눈여겨보던 필방 주인 김진구 씨를 만난 것이 1976년이고, 1979년에 그의 주도 아래 반 타의적으로 ‘율림서도원’의 원장이 되었을 때 그의 나이 약관 23세였다. 그는 배우면서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 작품생활에 심취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타묵’의 삶이 시작되었다. 24세에 첫 개인 전시회를 갖고 일흔일곱 점의 작품을 꽤 높은 가격으로 팔았다고 한다. 그 후 불혹에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부문 초대작가가 되었다. 본격적인 타묵 퍼포먼스는 1997년 울산에서 초대형 붓을 휘호할 사람을 찾으며 시작되었다. 그 후 2000년 봉정사 법요식에서 삭발을 하고 휘호하는 모습이 전국에 중계되면서 본격적으로 타묵 퍼포먼스의 작가로 입지를 굳혔다.자고전(自古展). 나로부터 옛 것을 짓는다는 뜻을 지닌 自古展 전시회의 팸플릿을 펼치자 그림 같은 글씨가 살아 꿈틀거릴 듯 생기 있는 모습을 드러냈다. 자세히 보니 여러 팸플릿에 담긴 작품이 모두 큰 글씨와 작은 글씨의 조합이다. 한달음에 써 내린 큰 글씨 주위로 깨알 같이 작은 글씨가 여백을 가득 채우고 있다.“이게 만자행(萬字行)입니다.”만자행은 율산이 자기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일궈낸 작품들의 연작이라고 한다. 작품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한 자씩 정성 들인 글씨를 얼마나 많이 써야 할까. 오래 전에 서예를 배우러 다니며 雙鶴銘(쌍학명) 144자를 전지 한 장에 담은 적이 있어서 서예를 할 때의 그 지고지순한 인고의 과정을 조금은 알고 있다. 깨알 같은 글자 수천만 개보다 일필휘지로 써 내린 큰 글씨가 차라리 편하게 여겨지는 건 글씨가 작다고 쉽게 쓸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만자행의 ‘萬’은 많음을 뜻한다고 했다. 붓으로 쓸 수 있는 가장 작은 글씨로 화폭을 가득 채우는 방식의 만자행을 보고 있자니 세상사의 한 모습이 보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그렇지 않은가. 큰 산이 있고 그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그런 모습. 작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림 같기도 한 그 글씨는 분명히 우리네 삶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율산이 만자행을 처음 접한 것은 아버지 회갑잔치 때에 壽자와 福자로 병풍을 만들어 드린 순간부터였다. 천 개의 壽와 천 개의 福으로 이루어진 병풍을 받은 아버지 마음이 어땠을지. 세필로 쓴 작은 글자의 수를 일일이 세어가며 많은 시간을 들여 딱 천 자씩 완성하였다. 아스팔트에 콩을 심듯이 큰 글씨 주위로 작은 글자를 새기며 아버지의 천수를 빌고 복을 빌었을 그 마음이 충분히 짐작된다. 일자일획으로 千壽千福(천수천복)을 써서 오래 살고 만복을 누리라는 뜻의 생애 첫 번째 만자행은 거의 일 년에 걸친 작업이었다. 그 작품으로 병풍을 만들어 아버지의 회갑 기념으로 드렸다. 서예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이 그때부터였다.“작품을 구상할 때 가장 먼저 염두에 두는 것이 뭔가요?”“자연입니다. 물과 불, 바람과 구름, 나무와 돌을 비롯한 자연의 모든 것이 작품의 소재가 됩니다.”그에게는 자연의 흐름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그대로 작품으로 환원된다. 자연을 닮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것. 그게 바로 예술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닐까 싶다. 소설가가 소설을 구상하며 인간의 삶을 생각하고 자연의 흐름과 그 놀라운 변화에 귀를 기울이듯이 율산 역시 인류의 바탕이 된 자연이 그를 이루는 실체임을 온전히 인식하고 있다. 글씨도 음악처럼 빠르고 느리고, 길고 짧은 붓의 움직임대로 흐르는 리듬을 갖고 있다며, 서예는 춤과 리듬이 있는 음악이고 회화는 경음악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 선율은 글이 가진 흐름이나 속도에서 나타난다고 한다.필방 주인 김진구 씨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시작된 율림서도원에서 제자를 양성하고 글씨로 의미를 전달하는 예술의 생을 일구며 30년을 보냈다. 그가 평소에 제자들에게 이르는 말은 ‘네 것을 만들어라!’는 가르침이었다. 자기 것을 만드는 것은 알을 깨는 행위이다. 자신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그 인고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하고, 그것은 모든 예술가들에게 주어진 운명임과 동시에 의무이고 고통이다. 예술가들에게 피해갈 수 없는 단 하나를 들라면 바로 그 말일 것이다. 자기 것을 만드는 것. 율산서도원에서 봉산문화거리의 도심방산장으로 옮겨 앉으며 율산의 생은 굴곡 많은 격동기를 지나 타묵 인생의 절정에 이른다. 서까래와 흰 회벽이 그대로인 한옥에 갤러리와 작업실이 함께 하고 있어서 그의 작품을 가득 담고 있다.“인생철학이 뭔가요?”“무용지용(無用之用)이라고 할까요?”쓸모없는 것을 아는 자라야 무엇이 참으로 쓸모 있는지 말할 수 있고, 광야를 걷는 자에게는 두 발 둘 곳만 있으면 된다지만, 그렇다고 발 둘 곳만 남기고 주위를 천 길 낭떠러지로 판다면 사람이 그 길을 어떻게 갈 수 있겠느냐는 그 말은, 주변의 쓸모없는 땅이 있기에 두 발이 딛을 땅이 쓸모 있게 된다는 말에서 유래된 無用之用이다. 장자의 ‘외물편’에 나오는 얘기이다. 율산은 쓸모없는 듯싶은 작은 티끌 하나도 흘려버리지 않고 쓸모 있음으로 만든다. 살아온 모든 순간을 예술로 승화시킨 것처럼 그에게는 삶의 매순간이 소중하고, 자연 속의 씨알 하나조차도 그가 이뤄낸 예술처럼 귀하고 귀하다.율산의 타묵 퍼포먼스는 서예 인구의 저변 확대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일반인들은 서예를 모른다. 서예는 그저 붓으로 한문을 옮겨 쓴 글씨일 뿐, 그것을 예술로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사각 프레임 속에서 잠을 자는 서예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어 사람들에게 서예는 이런 것이다 하고 보여주는 것으로 율산 리홍재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서예의 실체를 보여준다./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0-12-30

길고 넓게 두른 담장과 노목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당당한 품격의 영해향교

영해와 평해의 해(海)는 바다해지만 물산이 풍부하고 바다처럼 넓다는 의미도 포함될 것이다. 비록 평해와 영해가 울진과 영덕으로 편입되었지만 넓고 크기로는 한 수 위다. 영해도 큰 고을로 넓고도 넓은 벌판과 물산이 풍부하여 그만큼 수탈도 많이 당하는 운명이었다. 그래서 탐관오리를 처단하고 조선을 뒤흔든 이필제의 난이 일어난 영해였다.영해의 향교도 좋은 위치로 잘 옮겨 오늘날 문화 전달의 매개체 역학을 하기에 좋은 장소로 손색이 없다.#. 설레임 안고 가는 영해 향교와 관아사람도 매력이 있어야 설레임이 있듯이 지역도 마찬가지로 말 못할 아픔이나 굴곡진 변곡점이 있어야 애착이 가고 이끌리게 된다. 영해는 지금은 면으로 격하되었지만, 원래 고구려의 우시군(于尸郡)이었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는 유린군(有隣郡)이 되었다. 고려 초인 940년(태조 23년) 예주(禮州)로 시작하여 1259년(고종 46년) 잠시 덕원소도호부로 승격되었다 다시 예주로 잠시 환원했다가 1310년(충선왕 2년) 영해부로 강등되어 약 600여년 장구한 세월을 이어오다 1896년 영해군이 되었다. 오늘날 영덕군으로 편입되어 영해면이 된 것은 1913년이다. 모순된 봉건사회와 외세에 저항한 영해의 기질이 곳곳에 흐르고, 고택들이 즐비한 인량 전통마을과 괴시리 전통마을이 숨 쉬고 있어 더욱 발걸음 가볍게 영해를 찾았다. 평지에 자리 잡은 영해면은 군 단위의 읍 모양 넓게 펼쳐져 있고 로터리가 그 옛날 영광의 흔적을 안고 영해 3·18 독립만세운동 기념탑과 의연하게 길손을 맞이하고 있었다.옮겨온 영해향교에 갔다. 산언덕에 넓게 자리 잡은 영해향교는 향교로서의 권위와 격이 풍겨 마음이 즐거웠다. 초라한 영덕향교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건립시기도 고려시대인1346년에 지어졌다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은 조선 중기 1529년(중종 24년)이었다. 건물도 당당하여 한껏 권위를 세우고 있었다. 건물 자체를 보고 즐기는 맛이 차곡차곡 채워졌다. 길고 넓게 두른 담장도 노목이 품어내는 연륜과 주고받으며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향교에서 내려다본 영해는 큰 고을이었다. 우측 발아래는 영해의 옛 이름 예주생활관 건물이 위용을 자랑하고 담장 끝에 고목의 앙상한 가지는 허공에 맨살을 드러낸 채 파란 하늘과 속삭이고 있었다. 사람 없는 영해향교를 찬찬히 둘러보고 옛 영해부 관아가 있던 영해면사무소로 발길을 돌렸다.옛 관아(영해면사무소)는 사방을 조망하기 좋은 야트막한 산언덕 읍성 안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거의 없애버려 옛 관아 건물은 흔적도 없다. 다만 정문 우측에 조금 남아있던 책방관사(부사의 보좌가 살던 곳)를 복원해 놓았다. 읍성의 흔적도 거의 없고 높게 쌓은 축대는 일본성 같은 기분이 든다. 정문 들어가 왼쪽 끝에는 영해부사와 군수 했던 관리들이 자기를 잊지 말라는 공덕비, 그것도 영원히 잊지 말라는 오매불망비가 즐비하다. 이들은 얼마나 선정을 베풀었을까? 아니면 얼마나 수탈했을까?#. 백성의 고혈을 짜는 관리들영해관아의 흔적은 거의 사라졌지만 150년 전 어마어마한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1800년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면에서 꽃을 피우던 정조가 죽자 12살 어린 순조가 등극하고 외척 안동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1860년대는 민란의 시대라 할 만큼 혼란스러웠는데 임술민란으로 통칭되는 1862년(철종 13년) 진주 단성에서 시작하여 전국에 37회나 일어났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서양세력의 각축장으로 변하는 암울한 위기의 연속이었다. 관찰사와 수령은 돈과 뇌물로 사고팔아 심할 때는 부임도 안했는데 또 다른 부임자가 오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돈과 뇌물로 벼슬하면 온갖 명목으로 수탈하는 탐관오리해야 본전을 찾는다. 더 착취하여 큰 뇌물로 더 큰 벼슬을 하였고, 과거도 대리시험에 온갖 부정으로 세도가들이 독차지했다.이 시기에 태어난 이필제(1825~1871년)는 봉건사회의 모순을 몸소 겪고 자란다.1860년 4월에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1823~1863년)는 1863년(철종 14년) 11월20일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경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합송되어가는 길목인 조령 초곡에 수 천 명의 동학교도들이 햇불을 들고 눈물을 흘리는 광경을 본 38살의 이필제(본명 이근수)는 동학에 입교한다. 이필제는 교주 최제우가 처형당한지 7년째 되는 1871(고종 8년)년 3월10일 밤 9시 600여명의 동학도인과 농민이 교조신원과 관의탐학을 규탄하고자 탐관의 소굴로 알려진 이곳 영해부관아를 포위했다. 한밤중에 갑작스런 군중의 침입에 당황한 포졸들의 발포로 1명이 죽고 1명이 부상당했지만 관아를 점령했다. 이필제는 도망가던 영해부사 이정을 붙잡아 관아 뜰에 꿇어앉히고 죄를 물었다. “…. 백성을 학대하고 재물을 탐한 죄”등등을 꾸짖었지만 끝내 반성하지 않자 죽였다. 소를 잡아 나누어먹고 탈취한 관아의 돈 140을 자신들의 경비 40냥을 썼고, 100냥은 영해읍 5개동에 헐벗은 농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정부에서도 어떤 적인지도 몰라 당황했고 이웃고을의 수령들은 영해봉기에 두려움에 떨며 모두 다 도망갔다. 이필제는 어떤 연유로 영해까지 와서 혁명을 하게 되었는가?#. 혁명가 이필제1825년(순조 25년) 충청도 홍주(지금의 홍성)에서 시골양반으로 태어난 이필제는 1860년 진천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했다. 무과에도 합격했으나 관직은 없는 선달로 충청도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세상물정을 몸소 체험하면서 변혁의 불길을 당기고 있었다. 1850년 25살에 외가인 경상도 풍기에 갔을 때 헌헌장부에 학식이 뛰어나 외삼촌 안재벽, 안재억은 풍기 서부면 교촌에 사는 이름난 선비 허선에게 소개시킨다. 허선은 이필제의 시 ‘남정록’을 보고 “…. 대양국(大洋國·서양나라)은 오래지 않아 천하를 소동시켜 우리에게 심한 독을 끼칠 것이다. 서쪽으로 대양을 누르고 북쪽으로는 흉노를 막는 일이 그대에게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원컨대 그대는 자애하여 늙은이의 말을 노망들었다 하지 말고 진충보국하여 큰 공훈을 세우라”고 극찬한다. 조선시대 포도청에 관한 기록 ‘우포도청등록’에 전한다. 이리하여 이필제는 자신이 진인 즉 메시아로 정감록의 정도령을 자임하며 이때부터 나라를 바로잡고 북벌하여 중국까지 정벌한다는 꿈을 키워간다.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명나라 태조(주원장)도 거지 아이 300명으로 일을 일으켰느니, 사람의 일은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 1천명의 군사로 동쪽으로는 일본 대마도를 치고, 서쪽으로는 중국을 쳐서 한 달 안에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허무맹랑하다고 할 수 있지만, 1842년 아편전쟁 당시 영군은 20척 함대에 4천군사로 4억 중국을 제압했으니 큰 꿈을 꾸는 혁명가에게는 망상이 아니다. 이런 이필제가 어떤 연유인지 1859년(철종 10년) 4월에 영천으로 귀양와 1860년 1월에 풀려난다. 1869년 진천거사를 계획했다가 밀고로 실패하고, 12월에는 남해거사를 준비하다 여의치 않아 포기한다. 다음해 1870년 2월 28일 산청 덕산 에서 사람들을 모아 진주관아를 습격하여 군기를 탈취하기로 했는데 밀고하는 자가 있어 진주봉기는 실패하고 영해로 온다. 1871년 2월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이 찾아온다.이필제는 “한 번 선생(최제우)의 수치를 씻고 창생의 재앙을 구하고 이어 중국에서 왕조를 창업하는 것입니다…. 스승께서 동쪽에서 받았으므로 그 도를 동학이라고 하였으니, 동(東)은 동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영해는 우리의 동해입니다. 3월 10일이 선생께서 돌아가신 날이니 그 날에 거사하겠소.”이필제는 북벌보다는 교조신원에 비중을 두어 무력봉기는 반대했지만, 봉기할 것을 결심하여 동학교도들이 대거 모인 것이다. 이렇게 하여 영해관아를 점령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주민들의 호응이 없어 관군의 공격을 피해 일월산으로 향했다. 조령 초곡에서 단양을 중심으로 거사를 준비하다가 거사 직전 조령별장의 수색으로 피했다가 1871년 8월 2일 문경에서 체포되어 12월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교수형을 당하였다.그에게 자금을 보내주고 후원해준 공주부호 심홍택(沈弘澤)은 포도청 심문에서“우연히 그와 친하게 지내게 되었는데, 언어와 거동과 풍채가 과연 훌륭하여 평생 처음 보는 뛰어난 남자였다. 이런 인품과 기질로도 ‘출신’의 이름을 면치 못하는 것이 실로 가긍하여 천금을 아끼지 않고 도와준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요, 그 사람을 깊이 아꼈기 때문이다.”했다. 심홍택은 매맞아 죽었고 아들 심상학은 옥에 갇혔다.뛰어난 문장솜씨에 시도 잘 지었고, 나라를 걱정하며 눈물을 흘리는 그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고, 반듯한 용모와 기개로 믿음을 얻었고, 탁월한 용병술과 인품으로 모든 사람을 이끌었던 이필제는 봉건의 모순을 타파하고 동양의 황제가 되려는 큰 야망을 품은 탁월한 혁명가였다. 영덕의 의병장 신돌석 장군도 (당시에는 영해)서 태어나 큰 영향을 받았고, 동학혁명을 이끈 전봉준도 자신의 자를 이필제가 이름 썼던 명숙(明叔)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이 영해관아는 영의정 허적(1610~1680년)이 경상도 관찰사 때 영해에 순찰 왔다가 객사에 머물면서 원통하게 죽은 16살 과거급제자가 몽달귀신으로 나타나 원한을 풀어주는 이야기기 있다. 밀양에 원통하게 겁탈당하고 죽은 아랑의 이야기같이 전국에 비슷한 몽달귀신 이야기가 비슷하다. 우리 시대도 이런 몽달귀신이 많이 나와 법의 이름으로 온갖 조작을 하여 원통하게 죽은 억울한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 주었으면 좋겠다. 백두산 기행과 동경기행을 쓴 당주 박종도 이곳 영해에 16년 귀양와 죽었다. 끝 /글·사진= 기행작가 이재호

2020-12-29

뚝심으로 만든 한국형 벨벳, 세계무대를 주름잡다

벨벳 갤러리 ‘영도다움’에 들어서자 붉은 커튼과 초록색 벽지가 시선을 끌었다. 실내장식이 모두 벨벳으로 이루어졌다. 의자의 안감은 물론이고 전시되어 있는 핸드백과 여권케이스를 비롯한 홈퍼니싱의 소품이 온통 벨벳을 소재로 하고 있었다. 그 중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이 초록색 벽지였다. 의자의 부드러운 안감처럼 벽지 역시 벨벳이었다. 그 초록색이 스칼렛 오하라를 생각나게 했다. 남북전쟁을 소재로 한 불후의 명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비비안 리가 역을 맡은 스칼렛 오하라는 영화를 대작으로 만드는데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전쟁으로 삶의 궁지에 처한 스칼렛이 돈 많은 남자 레트 바틀러를 만나러 간다. 돈을 빌리러 가는 곤궁한 상황이지만 결코 초라해 보이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저택의 창을 가린 초록색 커튼을 떼어냈다. 스칼렛의 드레스가 되어준 초록색 커튼의 소재가 바로 벨벳이었다.“벨벳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신 것 같은데. 언제 어떻게 인연을 맺었어요?”“결혼 전부터 남편이 국제 고무공장의 방한화에 쓰이는 털을 납품했어요. 털이 박힌 섬유가 벨벳의 시작이었어요. 비로드가 밀수로 들어올 때였어요.”어느 날 창업주이신 고 이원화 회장이 외국인은 머리를 둘 가졌느냐며, 그들이 만든 것을 우리가 못 만들 이유가 없다면서 벨벳의 조직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벨벳의 소재 개발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독일제 벨벳 조각을 들고 우리나라 과학연구소를 다 찾아다녔지만 끝내 조직을 찾지 못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어서 이 회장이 벨벳의 조직을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우리 기계의 1미터가 한 폭이면 1:1 조직, 2:2 조직으로 변형을 거듭하며 수많은 번의 실패 끝에, 마침내 합당한 조직을 찾아내게 되었다. 조직을 성공시켜서 천을 짜냈으니 염색을 해야 했다. 가마솥에 불을 때서 직접 염색할 때였는데, 어렵게 짠 벨벳 한 필을 제대로 염색할 곳이 없었다. 은행에도 돈이 없을 때여서 이 회장은 가공공장을 만들어야 한다며 집안의 사돈 팔촌까지 동원해서 돈을 긁어모았다. 막상 염색을 해보니 솥마다 색이 달랐다. 옷 한 벌을 지으려면 세 마 일곱 치가 필요한데, 한 필에 옷 세 벌이 채 나오지 않는가 하면 물이 빠지고 앉았다 일어서면 털이 눕는 부작용까지 잇따랐다.“소재를 수입하지 않고 고생하며 개발한 이유가 뭘까요?”“수입하면 일은 쉽게 하지만 우리 것을 갖지 못하잖아요.”언제까지나 수입에 의존할 수 없으니 우리 것을 가져야 한다는 이 회장의 절실한 바람이 있었기에 오늘날 벨벳을 세계시장으로 보내는 쾌거를 이룰 수 있었다. 우리 것을 갖는다는 건 그렇듯 누군가가 온 생애를 바쳐야 가능한 일이고, 뼈를 깎는 노력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소재 개발에 매달리며 연구를 거듭한 창업주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에 영도다움의 오늘이 있다고 여겨진다.영도다움의 ‘다움’이란 말이 재미있다. 자기다움, 아름다움, 사람다움에서 따온 ‘다움’을 브랜드의 이름으로 삼은 창의력이 돋보인다. 사람이건 사물이건 자기다움으로 빛날 때 비로소 진정성을 가지는 것이니. 이는 세계 일류를 향한 영도다움의 열정을 대변하며 그 가치를 더한다. 게다가 이원화 회장이 원단에 새겨 넣으신 세 마리의 독수리 문양으로 ‘쓰리 이글’이라는 브랜드 네임을 얻었다. 날개를 펼친 독수리의 모습을 자카드에 새겨서 영도의 첫음절 Y를 상징한 발상은 독특함을 넘어 브랜드의 자존심을 돋보이게도 한다.이원화 회장은 또 영도벨벳을 견제하는 일본에 맞서서 1980년에 일본산 아세테이트 원사 대신에 국산 폴리에스테르 원사를 쓰는 신제품 개발에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영도벨벳은 1996년에 국산 벨벳을 개발해내기에 이르렀다.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분지도시 대구에서 이루어낸 영도다움의 신화는 끝이 없다. 앉았다 일어서면 털이 눕는 약점을 보완하는가 하면, 물세탁을 가능하게 함으로서 벨벳의 접근을 쉽게 하는 것으로 상품의 품질을 최고급으로 끌어올려 우리의 벨벳을 당당하게 세계무대에 서게 했다.IMF라는 외환위기를 맞아서 몸집 줄이기에 나서야 했던 때를 떠올리며 류병선 회장은 잠깐 회한에 잠겼다. 직원을 줄여야 했고 밤늦도록 잔업까지 해가며 워크아웃을 탈출하기에 온 전력을 기울일 때였다, 그 위기의 순간에 외친 말이 바로 ‘하면 된다’였다. 류 회장은 벨벳으로 못할 것이 없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어려울 일에 부딪칠 때마다 ‘해봤나?’라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예전에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한 말이었다. 일을 해보지도 않고 미리 못한다고 물러앉는 것은 류 회장의 방식이 아녔다. 그녀는 일을 시작하던 처음에 빈손이었다는 사실을 똑똑히 기억했다. 처음부터 있어서 일을 시작한 것이 아녔다. 다 잃어도 본전이라고 생각하면 두려울 게 없었을 터.“장학금이라던가, 좋은 일도 많이 하시던데요.”“돈을 쓰긴 하지만 방향도 모르고 쓰지는 않아요.”경제인연합회에서 이혼한 여성을 돕자는 건의가 나왔는데, 류 회장은 못 도운다고 딱 잘랐다. 여성이 되어서 자기가 낳은 아이도 책임지지 못하면서 이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하겠느냐고 일갈했다. 차라리 미혼부·미혼모는 도운다고 했다. 아이를 버리지 않고 책임지는 마음이 예쁘다고. 개개인 사정이야 있겠지만 자기 가정 하나 못 다스리고 이혼한 여성은 도울 필요가 없다며, 이 사회는 한 남자나 자기가 낳은 아이, 혹은 가정 속의 식구 몇 명을 다스리는 것에 비교할 수 없도록 살벌하다고 한다. 이혼녀와 미혼모를 통해서 류 회장은 작은 비유로 보다 큰 것을 말해주었다.“벨벳의 원조가 어느 나라일까요?”“프랑스 파리라고 해야겠죠.”벨벳은 ‘털투성이의’라는 뜻을 지닌 중세 프랑스어 ‘블뤼’(velu)에서 왔다고 백과사전에 기록되어 있다. 프랑스 왕실의 카펫과 커튼, 의자 안감이 모두 벨벳으로 이루어진 상상을 해본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 파리 사교계를 몹시 그리워하던 시절, 프랑스의 최고급 원단 역시 벨벳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입은 드레스 역시. 밀수와 수입에 의존하던 벨벳을 우리나라에서 직접 생산해낸 영도다움의 역사는 1960년대에 시작되어 1972년에 수출을 시작하고, 1988년에 1천만 불 수출탑을 수상했다. 벨벳 특허만 14종이라니 놀랄 만하지 않은가. 벨벳의 조직을 찾아내고 자재 생산까지 해낸 것이 모두 ‘하면 된다’는 정신이 이루어낸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류 회장은 돈을 벌고 일을 한 것이 행복한 가정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고 했다.한국에 옳은 벨벳공장 하나 만들겠다며 이원화 회장이 500억을 투자했다. 기계를 리스로 가져온 터라 환율 차이 때문에 폭탄 같은 빚에 떠밀려 부도를 내야 할 입장이 될 즈음, 부부가 다짐한 것이 바로 부도를 낸 부모로 남지 말자는 것이었다. 구조조정을 시작으로 공장을 옮기며 회사의 몸집 줄이기에 나섰다. 그런 어려움을 견딘 끝에 마침내 워크아웃에서 탈출했고 직원들에게 30%의 성과금을 나누어줄 수 있게 되었다.“그때 어떤 마음이었어요?”“너무 기뻐서 직원들에게 큰 절을 했어요. 고맙다. 여러분들의 노력으로 성과금을 가져갈 수 있게 된 거라고.”때로는 할 말이 없어서 만세 삼창을 부르기도 했단다. 그때 직원들과 함께 외쳤던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는 해냈다’는 그 말이 바로 류 회장의 철학이다. 그녀는 직원들을 가족이라고 표현한다. 단순히 비위를 맞추기 위한 말이 아니라 진심 어린 마음이어서 직원들에게 큰 절을 할 수 있는 거라며 가족들의 고초를 진심으로 공감했다. 굳은 땅에 물이 고이는 법이다.“어떤 마음으로 사세요?”“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삽니다. 옛말에 ‘열심히 하면 뒷골 야시가 돌본다’는 말이 있어요. 직원들을 가족으로 여기며 함께 어려움을 극복해가다 보면 어려움을 헤쳐 나가게 되어 있어요.”벽에 걸려 있는 사훈에 ‘머리에는 지혜를, 얼굴에는 미소를, 가슴에는 사랑을, 손에는 늘 일이 함께 하게 하소서’라고 씌어 있다.“코로나의 위기를 맞은 소상공인들에게 어떤 말씀을 해드리고 싶으세요?”“위기는 어떤 곳이든 다 있어요. 코로나19 사태를 가족의 중요함을 깨닫는 계기로 삼으면 좋을 것 같아요.”돈이 있다고 다 행복한 것도 아니고, 작게는 가정이고 크게는 직장이 되는 그 ‘가족’의 중요함을 깨달아야 한다며, 다시 한 번 가족의 소중함을 강조한다.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며, 남을 나무라기 전에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며 말 매듭을 짓는다. /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0-12-23

‘당신의 희생 있었기에’칠곡군민 마음 모였다

1950년 6·25전쟁 당시 많은 외국 청년들이 대한민국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낯선 타국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 많은 6·25참전국 중 하나가 바로 에티오피아이다. 당시 에티오피아 셀라시에 황제는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한국전쟁에 자국 청년 6천37명을 파병했다. 이들은 3주간의 항해 끝에 부산에 도착해 253차례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다. 하지만 이들 청년들 중 122명이 전사하고 5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한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쳐 싸워준 이 고마운 나라 에티오피아가 지금은 지속된 내전과 가뭄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6·25전쟁 낙동강 방어선 전투 중 가장 치열했던 다부동 전투가 펼쳐졌던 칠곡군이 에티오피아에 지난 은혜를 갚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이에 본지는 호국평화도시 칠곡군이 진행하는 에티오피아 보훈 사업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봤다./ 편집자주△ 에티오피아에 칠곡평화마을을 조성하다‘호국평화’를 도시 정체성으로 삼고있는 칠곡군은 2014년 지역 대표축제인 낙동강세계평화 문화 대축전에 ‘평화의 동전 밭’을 조성하면서 본격적으로 에티오피아 돕기에 나섰다.‘평화의 동전 밭’에는 코흘리개 어린이에서 백발의 노인까지 참여하면서 매월 최대 1천260만원의 성금이 모였다. 칠곡군은 이 성금으로 에티오피아 티조 지역에 초등학교 2곳, 식수저장소 2개, 마을 수도 9개 등을 조성했다.또 2017년에는 에티오피아 디겔루나주 티조 워레다에 위치한 사구레초등학교를 방문해 칠곡군 유치원과 초등학생 5천여 명의 성금으로 건립한 ‘도서관 준공식’을 가졌다.왜관초등학교 학생들이 고사리 손으로 만든 걱정을 사라지게 한다는 ‘걱정인형’과 사회적협동조합에서 준비한 색안경, 캐치볼, 제기 등의 장난감도 전달했다.당시 칠곡군 방문단원들은 사구레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직접 걱정인형을 옷에 달아주고 한국의 전통 민속놀이인 제기차기를 선보이며 놀이방법도 가르쳐줬다.이어 칠곡군 순심연합총동창회의 성금으로 만들어진 식수 저장시설의 준공식을 갖고 물탱크에 연결된 마을 수도시설을 통해 주민들이 양질의 식수를 활용하는 것도 확인했다.대한민국을 가난에서 구한 새마을운동도 에티오피아 티그라이주에 전파했다. 티그라이주 새마을 시범마을에 새마을 조직 육성을 통한 주민의식 개혁과 새마을회관 건립, 마을안길 포장 등 환경개선, 소득증대사업을 지원했다.지금은 코로나19로 인해 잠시 중단됐지만 칠곡군은 에티오피아 짐마케네티 지역에 두 번째 칠곡평화마을을 조성할 계획이다.△ 칠곡군의 결초보은올해 초 국내에서 코로나19가 급속히 확산하면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던 당시 백선기 칠곡군수는 에티오피아에서 날아온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그 편지의 주인공은 멜레세 테세마(Melese Tessema·90) 에티오피아 6·25 참전용사회장이었다.그는 편지에 “코로나19와 힘겨운 전쟁을 치르고 있는 백선기 군수와 대한민국 국민들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며 “70년 전 추호의 망설임 없이 한국을 위해 싸웠듯이 지금이라도 당장 대한민국으로 달려가 바이러스와의 전쟁에 참여하고 싶지만, 저의 주름과 백발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기도뿐이라 매일 코로나가 대한민국에서 사라지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백 군수의 건강과 나의 자랑스러운 또 하나의 조국 대한민국에 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기도한다”며 “파이팅 칠곡! 파이팅 대한민국!”이라는 응원으로 편지를 마무리했다.하지만, 이후 코로나19는 전 세계로 급속하게 확산하면서 에티오피아에도 큰 피해를 입혔다.제대로 된 마스크 하나 없는 에티오피아 실정을 알게 된 백선기 군수는 ‘은혜가 사무쳐 죽어서도 잊지 않고 갚는다’는 뜻의 결초보은(結草報恩)으로 에티오피아를 돕는데 두팔을 걷어붙였다. 처음부터 군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에티오피아를 돕는 사업을 진행했던 백 군수는 이번에도 군민들의 자발적인 동참을 이끌어내기 위한 아이디어를 냈다. 그게 바로 ‘6037을 아십니까’ 캠페인이다.△ ‘6037을 아십니까’백선기 군수는 지난 4월 자신의 SNS에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6037명의 헌신에 ‘결초보은’을 위해 6037장의 마스크를 마련하자는 ‘6037 캠페인’을 시작했다.백 군수는 “이제는 우리가 이들의 은혜에 보답해야 할 때”라며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지원을 위한 마스크 기부 동참을 호소했다.백 군수의 호소는 칠곡지역 뿐만 아니라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지역에서는 뇌병변 장애 1급인 장윤혁(45)씨가 휠체어를 타고 마트와 약국을 돌며 어렵게 구한 마스크 365장을 기부하는가 하면, 박덕용(86) 6·25참전유공자회 칠곡군지회장은 어버이날 자녀가 구해준 공적 마스크 30장을 에티오피아 전우를 위해 기부했다. 칠곡군의 인문학마을 주민과 아파트 부녀회는 참전용사를 위해 재봉틀을 돌려 직접 면 마스크를 제작했고, 8개 읍·면 주민과 공무원은 물론 한국전통가요협회 대구지회, 용인외대부고 등 전국 각계각층에서 마스크 기부가 잇따랐다.또 칠곡군 박종석 주무관이 직접 제작한 ‘6037 캠페인을 아시나요’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유튜브 게시 4일 만에 조회수 5만건을 돌파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영상을 접한 가수 소향은 ‘6037 캠페인’홍보대사를 자처하기도 했다. 캠페인 시작 2개월 만에 목표로 했던 수량의 5배가 넘는 3만장 이상의 마스크가 모아졌고,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손편지도 속속 도착했다.칠곡군은 지난 6월 주한 에티오피아 대사관을 방문해 군민 기부를 통해 마련한 마스크 3만장 및 손소독제 250병 등 코로나19 방역물품과 손편지 700여 통을 전달했다. 지난달에는 마스크 3만장 추가 전달에 이어 최근에 모인 마스크 6만장도 대사관에 전달할 계획이다.△ 6·25참전 후손들을 위한 70년 만에 다시 찾아온 성탄절에티오피아 참전 용사를 위한 사업뿐만 아니라 참전용사 후손에게 성탄절 선물 보내기에도 나섰다. 지난달부터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후손에게 성탄절 선물을 보내는 ‘70년 만에 다시 찾아온 성탄절’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백선기 칠곡군수는 70년 전 에티오피아 6·25전쟁 참전용사의 희생과 헌신에 대한 결초보은을 위해 산타로 변신했다.백 군수는 22일 노량진에 거주하고 있는 에티오피아 6·25 참전용사 후손인 크두스(10)군과 동생 마피(7)양에게 화상으로 성탄절 선물을 전달했다.이날 백 군수는 성탄 메세지와 선물에 대해 설명하고, 참전용사 후손인 이스라엘 씨에 대한 장학증서를 전달했다.산타로 변신한 백 군수의 선물 주머니에는 코로나19로 외출이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집에서라도 행복한 성탄절을 보내길 바라는 칠곡군민들의 마음이 가득했다.소망 어린이집 어린이들은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들고 기혼 여성들로 구성된 그림 동아리 ‘그리메’회원은 크리스마스 액자를 제작했다.지역 인형극단 상상은 내전 중인 에티오피아의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다문화 가족 전통놀이 체험키트’를 제작했고 수피아 미술관장은 꿈을 그려보라는 의미로 크레파스와 캔버스를 보내왔다.또 온화한 에티오피아와 달리 한국의 혹독한 추위를 걱정하는 선물도 있었다. 북삼읍 어로1리 할머니들은 손뜨개로 목도리를 제작했고, 석적읍 한솔솔파크 아파트 부녀회는 겨울 감기에 좋다는 생강차를 만들었다.백선기 군수는 사비를 들여 내의를 마련했으며, 연평도 포격 참전용사는 핫팩을 보내왔다. 석적읍 망정1리 주민들은 참전용사 후손을 위해 김장을 하고 기산면 농부 김종기 씨는 손수 수확한 햅쌀을 보냈다.이밖에도 대구경북 청년밴드의 헌정곡과 아나운서가 접은 종이학도 눈길을 끌었다. 이들의 성탄 선물은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후원회를 통해 크리스마스 이브인 24일 참전용사 후손에게 전달될 예정이다.백선기 군수는 “저를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산타로 만들어준 칠곡 군민들이 자랑스럽고 감사하다”며 “70년 전의 희생과 헌신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분들의 따스함만 이라도 돌려주고 싶다. 참전용사에게는 명예를 후손에게는 희망과 용기를 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20-12-22

영덕하면 대게?…복사꽃 무릉도원과 의병장 신돌석 장군이 떠오른다

#. 안쓰러운 영덕 향교바닷가 영덕 강구항을 지나서 북으로 가다가 내륙으로 조금 들어가면 영덕읍이 나온다. 영덕 향교는 집들이 빼곡히 들어선 골목길 접어들어 숨은 듯이 말없이 길손을 맞이한다. 보통의 향교가 시내중심부에 있기에 평지에 넓게 있거나 산을 백그라운드로 등지고 있는데 영덕향교도 조그마한 언덕을 등지고 있지만, 아파트가 점령해버려 숨이 막힌다. 규모도 작고 사람 하나 없는 향교는 그냥 마지못해 서 있는듯 했다. 영덕향교가 옮겨와야 할 운명이었다 하더라도 지금의 영덕향교는 초라함을 넘어 안쓰러웠다. 이처럼 집이나 건물들은 장소가 대단히 중요하다.향교나 서원은 일정한 법칙에 의해 지어지기에 문을 들어서면 중심 되는 강당이 중앙에 있고 좌,우에 강학 공간인 동무, 서무가 있다. 뒤에는 제향공간인 대성전이 있는데 영덕향교도 이를 충실히 따랐다.영덕향교는 1410년(태종 10년) 영덕읍 덕곡리에 창건했다가 일제강점기인 1914년 영덕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면서 이 향교를 교실로 사용한다. 향교의 존재가치로 중요한 위폐는 영덕읍 화개리의 가옥을 구입하여 봉안한다. 10년 뒤(1924년) 영덕공립보통학교의 교사가 신축되면서 위폐를 다시 옮겨온다. 1940년에는 1군 1향교의 방침에 합병된 영해향교의 위폐를 옮겨와 봉안하고 영덕 향교의 위폐는 묻어버린다.1950년 우리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으로 영덕 향교건물들은 불타고, 1965년 영덕 유림들의 뜻을 모은 성금으로 화개리 현 위치에 옮겨지은 것이 오늘날의 영덕 향교인 것이다.아쉬움 안고 큰길로 나오자 길옆에 항일 의병장 신운석(1839~1896년) 장군 순국기념비가 오늘의 영덕을 지켜보고 있다. 제국주의 일본이 야금야금 조선을 집어삼킬 때 분연히 일어나 맞서다 죽은 선열들이 많다. 이 근처에서 태어난 신운석 장군도 1896년 영덕의진의 의병장이 되어 일본군과 영덕에서 격렬한 전투를 치르다 패하고 피신해 있다가 체포되어 고진 고문에 혀를 깨물고 항거하다 총살당한 분이다. 머리 숙여 묵념하고 축산면 신돌석 생가로 향했다.#. 생가는 쓸쓸하고옛 영해지역인 영덕 축산면 도곡리 신돌석(1878~1908년) 생가를 찾았다. 사람 하나 없는 주차장에 생가도 수리한다고 어수선하여 예전에 왔을 때보다 더욱 쓸쓸했다. 그러면 이곳에서 자랐던 신돌석(본명 신태호) 장군은 어떤 사람이었는가.생가 인근 도곡2동(복대비) 외가에서 태어난 1878년은 조선왕조의 막바지로 온갖 모순을 안고 기울어져가는 시기였다. 제국주의 열강들의 각축장이 된 조선은 바람 앞에 촛불 같은 운명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이런 어지러운 세상에 시대의 운명을 안고 태어나 보통사람이 하기 힘든 역사의 한 획을 긋는다.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신돌석은 장대한 신체로 힘이 장사로 많은 일화를 남긴다. 그리고 어릴 때는 상당한 개구쟁이였고 골목대장을 뛰어넘는 동해안을 휘젓고 다니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파악한 민족을 사랑한 의병장이었다.1894년은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걸고 동학농민 혁명이 일어난다. 다음해인 1895년 8월에 일본낭인(무사)들이 밤중에 궁궐에 침입하여 민비(명성황후) 사진 들고 민비와 비슷한 궁녀들을 칼로 찔러 죽이고 시체를 불태워버린다. 이른바 민비시해사건인데 전국의 의병들이 분을 참지 못하고 일어난다. 신돌석도 1896년 3월 13일 19살 나이에 영해에서 100여명의 의병을 모아 일본군을 습격하는 등의 많은 업적으로 영해의병의 중군장이 되어 일본에 큰 타격을 주었다. 1905년 강압적인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이 빼앗기는 주권국가로의 지위를 잃었다. 이에 신돌석은 동생 신경우와 1906년 생가가 있는 이 도곡 마을에서 다시 300여명의 ‘영릉의병장’이 되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전쟁이란 정신력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무기다.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을 한방에 보내 버린 것도 히로시마에 투하한 원자폭탄이었다. 만약이란 가정 하에 3차 대전이 일어난다면 핵으로 인간은 말살될 운명에 처해있다. 의병들이 아무리 민족적 울분으로 용맹한 정신으로 무장했더라도 막강한 신식무기의 일본을 상대하기 힘든 것이다. 그래서 신돌석이 용맹을 떨칠 수 있었던 것도 동해안 산악지대를 이용한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이었다.이 생가도 1850년경 신돌석 장군 아버지 신석주가 지었으나 1940년 일제는 독립의지를 꺾고자 불태워 일부는 무너졌고 1942년 일부를 새로 지어 기와집으로 꾸몄으나 1955년 현재의 초가로 복원했고 2020년 다시 수리하고 있다. 뻥 뚫린 벌판에서 모진 겨울바람이 소리 없이 날아온다.신돌석 장군 흉상.#. 태백산 호랑이의 업적신돌석 장군의 의병들은 군율이 엄격하고 민폐를 끼치지 않아 가는 곳마다 호응을 얻어 보호를 받았고 아버지는 가산을 털어 아들을 도왔으며 매부도 처남도 모두 신돌석 장군 휘하의 의병에 참여했다. 상놈 의병장이 양반을 능멸했다고 목을 쳐버리는 일이 횡행하던 당시 평민 신분으로 의병장이 된 신돌석 장군 의병 휘하에는 양반들도 있었으니 그의 탁월한 능력 때문이다. 어릴 때 30리 떨어진 서당에서 학문을 익힌 것도, 울산에 만석꾼 아들로 판사 그만두고 대한광복회 총사령관이던 박상진 의사 이강년 의병장들과도 깊이 연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웃고을 울진 평해 월송정에 올라 “단군의 옛터가 쇠퇴함을 한탄하네./ 남아 스물일곱에 이룬 것이 무엇인가./”이처럼 한탄하면서 사나이 포부의 시 한 수 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자랄 때 동학혁명과 고향 영해에는 탁월한 혁명가 이필제의 난(1870년)을 듣고 자란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스포츠나 전쟁에서 뛰어난 기량의 선수도, 지략이 뛰어난 장군도, 승리하는 업적이 없으면 빛을 발하지 못한다. 그러면 태백산 호랑이라는 별칭을 얻은 신돌석 장군의 업적은 무엇인가?300여 명 휘하의 의병으로 영해부에 주둔해있던 일본군을 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고, 울진에서는 바다에 떠있는 일본 병선 아홉 척을 부수었다. 울진은 1890년부터 일본어부와 수산업자들이 전복과 해삼 등 자원을 쓸어가 어민들의 원성이 높았던 지역이다. 1907년에는 의병들이 3천여 명으로 많은 의병부대가 되어 동해안 영덕, 울진, 영양, 청송, 경주와 강원도 일대까지 일본군을 공격하여 일본인들은 신돌석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 신돌석 명성을 듣고 해산당한 구식군대와 전국에서 의병들이 모여들었다. 의병을 말리러온 영해군수 경광국은 “누가 그 의기를 그르다고 하랴마는 독단으로 군대를 일으키려하니 말리려온 것뿐이오. 눈빛은 햇 불같고 다리는 하늘을 건널 만 하니 참으로 장군이로다.”했고 박은식(1859~1925년)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영해에서 봉기한 평민출신 의병장 신돌석의 부대는 일월산과 백암산을 근거지로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전개하여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했다.#. 도끼에 목은 날아가고이렇게 되니 일본군들은 신돌석 장군 잡는데 혈안이 되었다. 투항자 면책특권의 귀순법으로 죄를 묻지 않는 회유정책과 현상금을 걸었다. 결국 여기에 우리의 영웅은 쓰러진다. 인간생존에 직결되는 기후가 의병들에게 겨울은 혹독하여 의병들도 흩어지고 군량미도 떨어져 1908년 따뜻한 내년을 기약하고 전략적으로 해산한다.“지금 적들의 무리들이 현상금을 걸고 내 머리를 구하는데…. 짐승 같은 무리에게 생명을 빼앗기기보다 차라리 서쪽으로 건너가서 만주나 중국으로 가서….” 이런 마음을 먹고 몸을 피해 다니다가 1908년 12월 11일 밤 9시쯤 영덕군 북면 눌곡(현 영덕군 지품면 눌곡)의 옛 부하였고 고종사촌(이종, 외사촌 설도 있음) 김상렬(일명 김자성) 형제 집으로 갔다. 상금에 눈이 먼 형제는 반갑게 맞이하고 독한 술을 먹이고 12월 12일 밤 1시쯤 깊이 잠든 신돌석의 목을 도끼로 내리쳤다. 김상렬 형제는 그의 시체를 메고 일본 군대로 갔다. 신돌석의 머리라고 상금 달라 하니 일본군 장교는 “산사람 잡아오라했지 죽여오라 했느냐”며 호통치고 돌려보냈다.일본 측 기록은 김상렬, 김도룡 부하와 갈등이 빚은 결과로 우리 측은 현상금(몰래 상금 주었다는 설) 때문이라 했다. 또 돌로 쳐 죽였다는 설도 있다. 시체는 영덕군으로 옮겨져 시신확인 작업을 거쳐 가족에 인도되어 생가 뒷산 봉우리에 묻혔다가 1971년 국립묘지로 이장했다. 부인 한재여 여사는 모진 고초를 겪으며 불에 탄 집에서 힘든 삶을 살았고, 유일한 외아들은 독이 든 과자를 먹고 죽었다.이렇게 하여 귀신처럼 나타났다 사라졌기에 태백산 호랑이라 불린 신돌석 장군은 처참하게 죽는다. 그것도 일본군과 싸우다 죽었으면 덜 원통하지만 현상금에 마음이 뒤집힌 동족 친척에게 죽었으니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생가에서 나와 신돌석 장군 유적지를 성역화해 놓은 곳에 갔다. 곳곳에 흩어져 있던 유허비와 기념비도 옮겨 놓았다. 전시관과 사당을 혼자서 쓸쓸한 마음 안고 둘러보았다./글·사진= 기행작가 이재호

2020-12-22

고령군, 발빠른 경제정책 통해 코로나 탈출구 찾는다

어떤 형태의 재난 속에서도 인간의 삶은 이어진다. 우리가 함께 지나온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공포와 공황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일상을 파괴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 신종 바이러스의 출현은 한국은 물론, 전 세계를 혼란에 빠뜨렸고, 지금도 그 여파가 여전히 거세다.아직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넋 놓고 앉아있을 수만은 없다. 어떠한 비극과 고통도 언젠가는 끝이 나기 마련이고, ‘포스트 코로나시대’를 준비하지 않고서는 미래를 설계하기 어렵다. 지역민들이 처한 경제적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기 위한 지방자치단체의 노력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이는 앞서 말한 ‘지속될 인간의 삶’을 위한 준비에 다름없다. 고령군 역시 이런 흐름에서 비껴가지 않았다. 군민과 군청, 공무원과 상인들이 하나가 돼 ‘코로나19 사태’에 적극적으로 맞섰던 고령군의 지역경제 활성화 정책을 하나하나 세밀하게 짚어보는 것은 그 의미가 작지 않다. 아래 고령군이 구체적으로 어떤 경제 활성책과 지원책을 펼쳤는지 점검해본다.▲장기적 정책과 단기 부양책 병행해 지역경제 활성화올 초부터 급작스레 진행된 코로나19 감염병의 전국적 유행으로 인해 한국인 전체가 매우 힘든 2020년 한 해를 보내고 있다. 어느 지역 할 것이 상황은 비슷하다. 치솟는 확진자 숫자와 감염의 속도를 보고 있으면 위기의식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이에 고령군은 코로나19 사태 초기부터 군민의 협조로 선제적인 방역 대응을 펼쳤고, 각종 지역경제 활성화 대책을 수립·시행함으로써 어두운 터널 같은 코로나19 시대를 극복하려 애썼다.특히, 고령군은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손님이 끊어져 위축되고 있는 지역 상가와 음식점을 지원하고, 전통시장과 취약계층의 보호를 위해 발 벗고 나서고 있다. “장기적으론 포스트 코로나시대 경제 부활의 청사진을 그려가면서, 단기적 부양책을 동시에 시행해 당장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군민들을 찾아 실질적인 도움을 주려 뛰고 있다”는 것이 고령군청의 설명이다.예측하지 못했던 코로나19 사태의 장기화로 고령군 또한 지역경기 침체라는 큰 위기가 찾아왔지만, 발 빠르게 ‘경제 살리기 비상대책 TF팀’을 구성해 군민들의 생계 안정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지원 대책을 꾸준히 내놓고 있다. 그 구체적 내용은 ◇200억 원 규모의 고령사랑상품권(제로페이, 고령사랑카드) 발행 ◇소상공원 지원(약 17억 원) ◇취약계층 지원사업(약 74억 원) ◇중소기업 운전자금 지원(약 1천155억 원) ◇지역 고용대응 특별지원(약 1억 원) ◇특별 공공근로사업 및 희망일자리사업(약 16억 원)으로 요약이 가능하다.▲고령사랑상품권, 지역 상가에 큰 도움… 고령사랑카드도 출시고령군은 이미 1999년부터 지역 내 소비를 촉진하고, 소상공인의 영업에 도움을 주고자 고령사랑상품권을 발행해오고 있다.코로나19 사태로 급박한 상황에 처한 올해는 이에 대한 특별대책으로 ‘고령사랑상품권 10% 특별적립 행사’를 진행하고, 군청의 모든 공직자가 급여의 일부를 상품권 구매에 사용하는 등 지역경제 살리기에 앞장서 주목받았다. 특히 4월엔 코로나19가 초래한 지역경기 침체 극복을 위해 대구·경북 지역에선 최초로 비대면 결제가 가능한 ‘제로페이 모바일 고령사랑상품권’을 출시해 소비자들은 물론 가맹점으로부터도 호응을 얻었다.모바일 상품권을 통해 소비자는 10% 할인된 금액으로 물품을 구입할 수 있었고, 가맹점은 수수료 부담 완화와 상가 수익 창출이라는 효과를 동시에 얻었다.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정책이었던 셈이다.지난 11월에는 카드형 상품권인 ‘고령사랑카드’도 출시됐다. 더불어 상품권 10% 구매 할인행사도 연말까지 진행할 계획이다.이에 힘입어 2020년 고령사랑상품권 발행액은 역대 최대 규모인 200억 원에 이를 전망이다. 이는 위축된 지역 소비심리 회복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관내 고령사랑상품권 가맹점은 지류 1천100곳, 모바일 500곳, 카드형 790곳이 등록돼 있다”고 고령군 관계자는 설명한다.▲소상공인과 취약계층에 대한 신속한 지원코로나19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피해를 입은 고령군 2천여 업체에게는 소상공인 경제회복비, 점포재개장 지원금 등을 골자로 하는 ‘소상공인 긴급 생활안정자금’을 3회에 걸쳐 연말까지 11억 원 지원하게 된다. 또한 ‘소상공인 새 희망자금 현장 접수’를 진행해 주민들의 접수 관련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또, 자금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저신용 소상공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소상공인 특례보증 및 이차보전 지원사업’도 병행했다.이와 함께 자영업자들이 부담하는 카드 수수료의 일정 비율을 지원해주는 ‘소상공인 카드수수료 지원사업’(4억1천만 원 규모)과 ‘소상공인 점포재개장 지원사업(1억9천만 원 규모) 등도 시의적절하게 추진함으로써 소상공인들의 경영난 완화를 위해 작은 부분까지 세밀하게 접근했다는 평가를 받았다.지난 4월에는 코로나19 위기에 대응해 예산 191억 원을 증액했으며,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재난긴급생활비 지원(30억 원), 한시적 긴급복지 지원(12억 원), 저소득층 한시생활 지원(10억 원), 위기가구 긴급생계 지원(4억 원), 코로나19 극복 희망일자리 사업 추진(13억 원), 코로나19 격리자 생활비 지원(4억5천만 원), 코로나19 격리자 생필품패키지 지원(1천500만 원) 등의 사업을 때맞춰 시행해 취약계층에 대한 신속한 경제 지원 및 복지정책을 실시하고 있다.▲중소기업 운전자금 지원·지역 고용 특별지원 사업도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일시적으로 자금 수급이 어려운 중소기업의 경영안정화에도 관심을 쏟았다. 해당 중소기업의 자금난을 해소하기 위한 운전자금을 모두 3회에 걸쳐 지원한 것.장기화 되고 있는 코로나19 위기로 소비·수출·관광 등 지역경제 전반에 타격이 예상됐기에 관내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코로나 극복 중소기업 특별자금 이차보전’(101개 업체) 정책도 시행했다.도내에 사업장을 두고 매출액이 10% 이상 감소한 중소업체에게는 ‘중소기업 경영안정자금 특별지원’(30개 업체)의 혜택을 볼 수 있도록 조치했다.여기에 더해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는 지역 중소기업에게는 운전자금을 융자·지원하고, 대출이자의 일부까지 지원했다. 기업 경영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진행된 ‘중소기업 운전자금 지원’(154개 업체·442억 원)이 그 실질적인 사례다. 위의 지원사업은 총 285개 업체에 1천155억 원의 융자 추천으로 현실화됐다.이와 관련 고령군은 “경기 침체로 힘든 상황에 처한 중소기업의 생산성 향상과 경영 안정을 통해 지역경제를 다시 살리고, 일자리 창출에도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군은 ‘지역 고용대응 특별지원 사업’을 통해 코로나19 사태로 직접적인 타격을 입은 무급휴직 근로자와 특수형태 근로종사자·프리랜서 등도 지원했다.총사업비 1억여 원으로 추진된 이 정책은 232명에게 최대 87만원을 지급해, 코로나19로 인해 고용 위기에 처한 특수형태 근로자들의 생활 안정에 작게나마 도움을 줬다.▲곽용환 고령군수 “한국판 뉴딜사업과 발맞출 것”특별공공근로사업과 희망일자리사업도 코로나19 사태를 이겨내기 위한 고령군의 주요 사업이었다. 이 사업들은 코로나19 감염병 예방을 위한 학교 방역, 노인복지시설 보호, 쓰레기 분리 사업, 환경정비 사업 등으로 구체화됐고, 실직자와 폐업자 등 취약계층의 생계 지원 등에 일조했다.곽용환 고령군수는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취약계층, 소상공인, 중소기업인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앞으로도 신속하고 적극적인 지원을 통해 ‘누구나 살고 싶은 아름다운 도시 고령’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이와 함께 “포스트 코로나시대에 대비해 ‘한국판 뉴딜사업’이라는 국가정책 방향에 발맞춰 군민들이 실생활에서 활성화된 경제를 체감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전병휴 기자 kr5853@kbmaeil.com

2020-12-21

雪景처럼 차갑고도 뜨거운 시인 김선향의 노래

‘코로나19’로 인해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렇다면 외출을 자제하는 사람들은 뭘 하며 지낼까? TV 보는 시간이 대폭 늘어났다는 언론 보도를 가끔 접한다. 나쁘지 않다. 인간에겐 감각적 즐거움의 충족도 필요하니까.하지만 ‘이성적 채움’을 원하는 이들에겐 TV 앞에서만 머무는 게 그다지 즐거운 일은 아닐 듯. 이럴 때 독서만한 게 있을까? 시집을 읽는다는 건 비어가는 영혼의 곳간을 채우는 행위가 분명하다.최근 시인 김선향(54)이 2번째 시집을 펴냈다. 한국 나이로 마흔 살에 늦깎이 등단했고, 첫 시집을 상재한 지 4년. 누군가는 “너무 성급하게 새 시집을 출간한 것 같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그러나 천만에. 김선향의 제2시집 ‘F등급 영화’는 이런 우려를 불식한다. 아래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마흔 살 늦깎이 등단… 열정적 시인의 삶 고스란히4년 만에 두번째 시집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 ‘눈길’김선향의 첫 시집 ‘여자의 정면’.▲빛나는 것들이 아닌 상처받은 인간과 사물에 대한 애정자신과 더불어 세상을 살아가는 ‘슬픈 사람들’에 대한 지극한 애정과 관심이 행간마다 묻어나는 김선향의 시들은 훌쩍 다가선 한겨울 설경처럼 차갑게 맑고, 어머니의 포옹처럼 따스하다. 먼저 ‘F등급 영화’에 수록된 절창 중 하나인 ‘첫눈’을 읽어보자.전당포 외벽 철제계단 위로 미끄러지며커피 배달을 가는 여자 가죽스커트 터진 치맛단 속을 돌아백반집 앞 양파 다듬는 노부부 검버섯을 지우며종합병원을 막 빠져나온 영혼에도 잠시 머물다저녁내 부엌 쪽창에서 어른거리다그저 아름답게만 보이는 첫눈이 실상은 ‘전당포 외벽’이나 다방 종업원의 ‘터진 치맛단’, 늙은 부부의 ‘검버섯’처럼 남루한 풍경 위로도 내린다는 문학적 발견. 예사롭지 않다. 통념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이를 알아챈 동료 시인 문태준은 아래와 같은 말로 김선향의 최근 시를 해석하고 있다.“이 세계의 약자를 관심에서 배제하지 않고 숭고한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받들어 모신다. 이주민, 난민, 철거민 그리고 감정노동자에 대해 공동체가 온당한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고 처우할 것을 요구한다.”그렇다. 김선향에겐 세상 빛나고 잘난 것들보다 상처받고 아픈 것들이 관심사다.그러한 태도는 인간에게나 사물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된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문장을 쓸 수 없다. 같은 시집에 수록된 ‘공평무사’라는 노래다. 아래 인용한다.초원의 여자는/허벅지를 벌리고 앉아/두 팔로 감싼다/오른쪽은/아기한테/왼쪽은/야윈 새끼양한테/젖을 물린다/새하얀 새끼양의 이빨에 물린/왼쪽 젖꼭지엔/언제나 붉은 핏방울/왼쪽 젖가슴은 오른쪽보다/훨씬 크게 불어났다/짝짝이 젖가슴도 생채기도/아랑곳없다/초원의 여자는/어미 잃은 새끼양의 어머니/사내아기의 어머니아마도 시의 배경은 몽골 초원의 게르(Ger) 앞이 아닐까. 아니, 가축을 키우는 한국 시골마을 마당의 풍경이라 해도 좋겠다.제 아이와 말 못하는 짐승을 동시에 품어 안고 젖을 먹이는 여자의 모습은 재론의 여지없이 숭고해 보인다. 조건 없는 희생과 사랑으로 이야기되는 모성(母性)의 한 정점을 그려낸 작품. 적지 않은 남성 독자들을 찡하게 만들 법하다.시적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김선향의 제2시집 ‘F등급 영화’.▲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의제로서의 새로운 페미니즘‘F등급 영화’엔 함께 모여 낭송하고픈 빼어난 시가 여럿 담겼다. ‘후남 언니’ ‘구체관절인형’ ‘반도체 소녀’ ‘겨울 아침’ ‘공정거래’ ‘자전거를 타는 여자’ 등등. 하지만 지금은 그러기 힘든 시절. 앞서 말했듯 사회적 거리두기가 필요한 시기니까.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시집을 깊은 감각과 넓은 시각으로 읽어낸 문학평론가 최진석의 이야기를 다소 길지만 옮긴다. 일종의 ‘2020년 오늘의 김선향론(論)’이다.“김선향이 직조하는 시적 풍경의 탁월함은 여성성의 풍요로운 모태 위에서 이 세계의 온갖 사건들을 세심하게 짚어내는 데 있다. 무엇보다도 이주민 여성들의 슬픈 내면을 포착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이 겪은 수난의 시간을 정직하게 직시하며, 남성 지배 사회에서 독립자존하기 위해 쟁투하는 여성들의 삶을 흔들림 없이 묘사하려는 의지는 그녀의 여성성이 모호한 전통적 관념과는 달리 우리 시대의 의제로서 페미니즘이라는 입지점에 서 있음을 시사한다.”소녀 시절을 거쳐 국문학도 때부터 꿈꾸었던 ‘시인의 삶’에 마흔 살까지 가닿지 못한 건 김선향의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건 자신 외부에 존재하는 타자의 뜻, 혹은 여성에게 책 읽고 글 쓸 시간을 주지 않는 한국사회의 매정함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마음껏 시를 쓸 수 있게 된 지금의 시간이 김 시인에겐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다.출발이 늦었으니 남들보다 몇 배 더 시와 시인의 삶에 열정을 쏟고 있다는 게 어렵지 않게 느껴진다. 이번 시집 ‘F등급 영화’는 그 증거물이라 해도 무방하다.김선향 시인.▲‘오늘의 김선향’과 ‘어제의 김선향’을 두루 살펴보려면사람의 현재는 과거의 총합이자 총체다. 미래는 현재와 과거를 통해 예측이 가능하다. 지난 2016년 김선향의 첫 시집 ‘여자의 정면’이 출간됐을 때 기자는 이런 독후감을 썼다.“시인은 ‘여자의 정면’이라고 차갑고 딱딱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김선향의 첫 시집에선 정면은 물론 측면과 뒷면, 여기에 때론 추악한 ‘인간의 배후’마저 따스하게 포옹하는 선한 마음이 어렵지 않게 읽힌다. 바로 이 대목이 김선향을 ‘날것의 언어’로 ‘기성 질서에 대한 시적 거부권 행사’를 성공적으로 이뤄낸 여성 시인의 하나로 인정하게 한다.”책장에 꽂힌 ‘여자의 정면’을 다시 펴든다. 자신이 처음으로 낸 시집을 받아들고 환하게 웃었을 김선향의 얼굴이 새삼 그려진다. 동시에 이런 시를 발견한다. ‘도둑고양이’다. 아니, 도둑고양이처럼 춥고 가련한 여자의 이야기다.쥐도 새도 모르게아기를 지우고산부인과 지하식당에서땀을 뻘뻘 흘리며설렁탕을 퍼먹었다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차가운 금속기구로 뱃속 아기를 긁어낸 후 소의 살과 뼈로 끓인 국물을 마신다는 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일까란 끔찍한 질문을 던지면서도, 스스로는 평상심과 냉철함을 잃지 않는 담담한 태도.세상을 직시하는 시적 촉수가 예민하지 않다면 만들어낼 수 없는 문장이다. 짧지만, 그래서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시.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었으니 겨우 4년 만에 자신이 차지한 시의 영역을 괄목할 정도로 넓힐 수 있었을 터. 12월 말. 앞으로 추위는 더 매서워질 테고 북쪽에서 불어온 차가운 바람은 기세를 드높이며 목덜미를 때릴 게 분명하다. 이럴 때 필요한 게 바로 ‘위로’가 아닐지.시를 포함한 문학이 선물하는 위로는 다른 어떤 것이 줄 수 있는 위로보다 따스하다. 우리는 그걸 이미 알고 있다. 김선향의 ‘F등급 영화’와 ‘여자의 정면’은 코로나19가 마구잡이로 횡행하는 2020년 겨울의 참담함을 견디게 해줄 좋은 친구다. 곁에 두길 권한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12-17

풍자와 해학으로 관객과 어우러지다

탈놀이의 신명이 전통이 된 마을에 경사가 났다. 1999년 4월 21일,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한국에 와서 73세 생일을 맞았다. 마을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안동 하회마을 담연재에서 여왕과 함께 생일잔치를 할 사람을 뽑기로 영국대사관과 안동시가 협의를 했다. 여왕과 생일이 같은 사람 다섯 명을 담연재로 초대했는데 그 중에서 하회마을에 살고, 탈춤공연도 하고, 장승목각까지 하는 김종흥 목석원 원장이 여왕과 함께 축배를 드는 사람으로 내정되었다. 세계의 시선이 한자리에 모이는 순간이었다.그 역사적 현장에서 여왕과 함께 축배를 든 김종흥 명인을 만났다. 그가 준 명함에 백발을 날리며 나무를 쪼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69호 하회별신굿탈놀이 이수자, 국가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 이수자, 대한민국 장승명인’이라는 이력이 씌어 있었다. 하회마을 입구에서 웃는 얼굴로 손님을 맞는 장승들이 모두 그의 작품들이고, 목석원은 명인이 한평생을 보낸 삶의 현장인 동시에 작업장이었다.“하회마을이 고향이세요?”“하회마을 등 너머 중리에서 살았어요. 중리의 살림을 정리하고 다락 논을 사들여 하회마을에 들어와서 장승을 깎고 탈춤을 추었어요.”하회별신굿탈놀이의 인간문화재이신 이상호 선생의 권유로 탈춤을 시작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흥으로 시작한 탈춤이 어느 새 30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지역적인 특성이라고 해야 할까. 안동 특유의 문물과 풍습이라고 할 수 있는 농악과 탈춤이 그를 국보적인 광대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즐겨 쓴 것이 중탈이고 양반탈이었다. 하회탈이 국보로 지정된 것이 1965년인데 그때 이미 마을에 하회별신굿탈놀이 전수관이 있었고, 공연장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 1세대 장인께서 하회별신굿탈놀이를 복원해놓으셨다고.하회별신굿탈놀이의 유래는 먼 고려시대로부터 전해지고 있다. 800년 전에 만든 하회탈의 원형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하회별신굿탈놀이이의 전통 역시 꾸준히 맥을 잇고 있다니 그 뿌리 깊은 탈춤의 역사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코로나 때문에 침체되긴 했지만 지금도 탈춤 공연을 매일하고 있다며, 평일에는 17명 정도의 인원으로 구성되고 주말에는 직장인을 포함해서 25명 정도가 출연한다고 일러준다.“탈놀이를 할 때 혹시 그날그날 대사나 춤사위에 변화를 줍니까?“국보로 지정된 탈놀이가 13개나 됩니다. 13개 중에서 탈이 국보로 지정된 것은 하회탈뿐입니다. 마당놀이의 특성대로 간혹 즉흥적인 재담을 곁들이기도 하지만 대사 한 줄 춤사위 하나 바꾸지 않고, 문화재에 등록이 된 그대로 전통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마당놀이를 연상하면 당장 넓은 마당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모습과 둥그렇게 비어 있는 마당에서 탈을 쓰고 춤을 추는 이들의 춤사위가 얼른 떠오른다. 하늘을 이고 땅을 밟으며 관객과 재담을 주고받는 마당놀이의 장면은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한두 번은 보았음직한 장면이다. 예전에 남사당패가 그렇게 놀았고, 그 전통을 이어받아 열린 공간에서 관객과 하나가 되는 우리만의 문화가 바로 놀이마당이다. 예로부터 끊임없이 외세의 침입을 받아온 우리 민족은 삶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활짝 열린 마당에 모여 덩실덩실 춤을 추며 액을 막고 삶의 의지를 되찾았다. 어려울수록, 힘들수록, 흥을 되살려 노래와 춤으로 어려움을 극복했던 민족. 마당놀이는 우리에게 삶의 에너지였다.“장승도 깎고 탈춤도 추시는데 어느 쪽이 먼저였어요?”“장승이 먼저였죠. 분재를 하며 나무를 만진 것이 40년인데, 하회탈은 30년입니다. 목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하회탈까지 깎게 되었어요.”그 동안 깎은 장승이 육백여 점이나 된다고 한다. 그 중 외국으로 나간 것이 이백여 점이라며 탈춤 해외공연의 역사도 그쯤 된다고 했다. 장승과 하회탈의 목재가 같은 종류냐고 물으니, 장승은 소나무로 깎고 하회탈은 오리나무로 깎는다고 한다. 소나무와 오리나무의 쓰임새가 다르다. 소나무는 우리네 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이고,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뒷산 언덕바지에 뿌리를 내려 오래도록 마을을 내려다보는 터줏대감 같은 나무다. 소나무의 친숙한 향과 질긴 생명력 때문에 장승을 깎을 때 주로 소나무를 많이 쓴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하회탈은 오리나무로 깎는다고 한다. 겨울 숲을 둘러보면 나뭇가지 끝에 작은 아기 솔방 같은 열매가 달린 나무가 있다며, 그게 바로 하회탈의 재료가 되는 오리나무라고 한다. 소나무처럼 단단하고 재질이 균일해서 틀어지거나 갈라짐이 적어서 하회탈을 만들기에 적절하다고 한다.“어떻게 해서 나무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까?”“일찍부터 정원을 가꾸고 조형물 만드는 것을 좋아했어요.”어릴 때 집 가까운 주막에 장승이 서 있었다고 한다. 왕방울 같은 눈과 주먹코, 뻐드렁니의 단순한 얼굴에 표정이 있다는 걸 알고는, 소나무에 밑그림을 그려서 깎아나가다 보니 투박하나마 표정을 가진 얼굴이 나오더라고 했다. 한낱 나무에 불과한 것이 한 쌍의 장승으로 완성된 순간, 의미를 가진 존재로 등극했다. 초례를 치른 신혼부부가 그러하듯이 한 쌍의 장승 역시 고운 옷을 입혀 합궁을 치르게 한 후에야 마을입구에 세웠다던가. 끌 자국까지 생생한 장승이 투박한 매력의 자유로움을 뜻한다면 하회탈은 주름 하나까지 섬세하게 그려야만 표정이 나올 정도로 정교한 작업이라고 한다. 장승은 못 생긴 얼굴 그대로 민중들의 다양한 표정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하회탈보다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예술로 여겨진다. 이즈음에는 해학적인 요소로 창의적인 작업을 곁들여 전통대로 만드는 지겨움을 덜어낸다며, 장승도 지역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고 귀띔해준다.“탈춤을 출 때 어떤 역을 맡으세요?”“양반과 파계승을 골고루 맡지만 파계승을 더 많이 합니다.”왜 파계승일까? 체격과 표정의 전달 면에서 파계승이 더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힘들게 나무를 깎아서 장승을 만드는 것처럼 탈춤을 추는 그의 춤사위 역시 온몸으로 살아온 사람만의 풍부하고도 곡진한 삶이 배어있기 때문에 공연장에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 게 아닌지. 파계승의 탈을 쓰고 불교와 승려의 타락을 풍자로 꼬집는가 하면 양반탈을 쓰고 양반계급의 위선과 독선을 풍자로 조롱하며.어릴 때 동네 풍물놀이에 끼어들던 그 흥을 어쩌지 못하고 김종흥 명인은 30년 동안 탈춤을 추며 살고 있다. 여왕이 탈춤을 보며 발로 장단을 맞추고 어깨를 들썩이며 흥을 돋우더라며 웃는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일 테니 오래 기억할 만하다. 여왕에게도 특별한 경험이었을 것 같다.“탈춤이 안동 브랜드로 자리 잡은 것이 언제부터예요?”“고려 중엽 때부터 당제를 지내며 마을을 지키던 전통이 식민지 시대에 잠깐 맥이 끊겼다가 해방이 되고 복원되었어요.”명함에 씌어 있지 않지만 자신이 당제를 지낼 때 제사장에 해당하는 산주라고 귀띔해준다.“산주는 어떤 일을 하죠?”마을에 궂은 일이 있을 때, 혹은 정원대보름 동제를 지낼 때 산주는 보름 전부터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제사를 준비한다. 산주가 주산에서 성황신의 내림을 받아야 탈놀이를 시작할 수 있다. 본격적으로 하회별신굿놀이가 벌어지면 산주는 제를 올리며 신이 내려오기를 기다린다. 신이 무동을 타고 내려오면 집안에 액이 있는 사람이 재물을 건네며 소망을 비는 것으로 하회별신굿탈놀이의 10마당이 시작된다.산주로 지정되면 죽을 때까지 그 직함을 가지고 마을을 지켜야 한단다. 마을에 큰 재앙이 닥쳤을 때 산주를 중심으로 광대들이 모여 하회별신굿탈놀이를 한다고. 그날만은 하회탈을 쓴 광대들이 피지배층의 입장이 되어 풍자와 해학으로 지배계층의 잘못을 맘껏 꼬집으며 할 말을 다 한다며, 지배계층의 양반들 역시 그 탈놀이를 보며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계층 간의 불화와 갈등을 씻는다고 한다.오늘날까지 관광 상품화된 탈춤은 고려시대 이후 줄기차게 그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탈춤은 그대로 관객들과 한판 어우러지는 재담이라며, 김종흥 명인은 현대적 감성으로는 다소 괴리감이 느껴질지 모르지만 우리 선조가 살아온 토속적인 풍습으로 바라보았으면 좋겠다고 한다.뒤를 이을 제자를 키우고 있느냐는 물음에 명인은 민속학과를 전공한 아들을 가르친다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한다. 가까이에서 보고 자란 사람만큼 잘 배운 사람이 있을까. 한길을 걸어가는 아버지와 아들의 미래가 훤히 보인다./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0-12-16

밭 갈던 농부가 발견한 ‘봉평 신라비’… 월송정이 바다와 숨쉬는 낭만의 울진

우리가 까마득한 옛날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문자로 알 수 있는 시대를 역사시대라면 문자 이전의 시대인 선사시대는 유물이나 그림을 통해서 유추할 뿐이다. 역사시대라 하더라도 기록의 문헌이 다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지만, 기록유물 중에 돌로 새긴 석비가 그래도 오래간다. 신라시대 비석은 동해안을 중심으로 많이 분포한다. 그 중 하나가 울진의 봉평신라비다.#. 죽변 봉평리 신라비의 기막힌 사연갈수록 도로는 거미줄 같이 이어져 전국 어디라도 빠르게 갈 수는 있지만 감동은 반감 된다. 가히 길 공화국이라 해도 손색없는 대한민국이다. 경주에서 울진은 도로를 넓게 잘 닦아놓아 시간은 단축되어도 꽤 먼 거리다. 그러나 구불구불 해안 따라 이어진 바다를 옆에 끼고 가던 옛길의 그 낭만적인 운치는 사라졌다.울진은 남북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어서 남쪽 후포에서 북쪽 북면까지 길게 놓여있다. 안동도 댐 때문에 수몰지가 많아 옮겨진 고택이 많지만 울진도 이상하리만치 옮겨진 고택들이 많다. 다만 가정집 보다는 정자나 향교를 옮겨 울진을 몇 번이고 오갔다. 가을에는 그래도 희망을 푸른 바다에 담아 왔지만, 12월 겨울바다는 코로나19 여파로 온 세계와 전 국민이 움추린 쓸쓸함을 안고 왔다. 비석박물관 입구에는 울진에 흩어져 있던 강원도 관찰사, 평해 군수, 울진 현령들이 무슨 선정을 베풀었는지 선정비와 오매불망비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3개나 세워놓은 한심한 현령 김태희도 나그네 발길을 멈추게 한다. 주인공 봉평리 신라비를 옮겨놓은 전시관은 코로나19 때문에 문은 닫혀있고 뒤에는 전국의 유명한 25기의 비석을 실물대로 세워놓았다.1988년 1월 20일 울진 봉평리의 주두원씨는 자신의 논에 긴 돌이 박혀있어 농사에 방해되어 포클레인으로 빼내어 하천에 버렸다. 두 달 뒤인 3월 20일 권대선 봉평리 이장은 버려져있는 이 돌을 정원석 하기 위하여 지나가는 포클레인으로 마을 옆 빈터로 옮겨놓는다. 촉촉이 내리던 비는 돌에 묻었던 흙을 씻어내어 희미한 글씨가 보인다고 이장이 울진 군청에 알리고 군에서는 도에 알려 여러 사람을 거쳐 신라시대 석비임이 밝혀진 것이다. 이와 같이 중요한 유물이 세상에 알려질 때는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발견되거나 알려지는 것이 허다하다. 울진의 봉평리 신라비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가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봉평리 비에 담겨진 내용이 신라 봉평비는 어떤 내용을 새겨놓았는가. 높이 204cm로 금이 간 변성화강암의 자연석에 한 면에 400여자(398자)를 신라 특유의 예서, 해서체 중간 형태로 한자를 예술적으로 새겨 넣었다. 아직까지도 완벽한 해석을 못하는 것은 그냥 돌인 줄 알고 포클레인으로 이리저리 옮길 때 떨어져 나간 알 수 없는 30여자의 글씨가 있고, 신라식의 독특한 한문을 사용해 해석하기가 난해하기 때문이다. 이런 전제를 두고 내용은 고구려에서 신라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울진은 고구려인 되기도 신라인 되기도 애매하여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무슨 사건인지 모르지만 지금의 울진(거벌모라, 남미지)지역 신라로 편입되는 과정에 울진 주민들이 길이 좁고 험한 이야개 성에 불을 지르고 성을 침범하는 항쟁을 일으키자 신라중앙군(大軍)으로 반란을 진압한다. 524년(법흥왕 11년) 1월 15일 법흥왕(매금왕)과 13명의 고위 귀족들이 모여 명을 내린다. 신라육부는 사후처리로 칡소(얼룩소) 잡아 피가 솟는 것을 보고 재판한다. 관련자에게 장육십대, 장백대 등의 형을 부과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다스린다. 그래서 이 비를 울진에 세운 것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방민에게 주지시킨다는 내용이다.법흥왕은 법을 흥하게 했다는 이름대로 불교를 공인하고 율령을 반포하는 신라의 23대 왕이다. 그런데 이 석비를 새길 때 법흥왕(牟卽智寐錦王)이라 하지 않고 매금왕이라 했다. 충주 남한강변에 있는 중원 고구려비(423년 추정)에 이런 내용이 있다. “고구려왕이 점령하고 신라왕(매금·寐錦)과 오랫동안 형제(동생)의 연을 맺는다.” 그리고 이 봉평 신하 비를 세운 524년은 법흥왕 11년인데 삼국사기에는 “가을 9월에 왕이 남쪽변경에 순행하여 영토를 넓혔는데 가야국왕이 와서 만났다.”는 기록뿐이다. 그 다음해인 525년에도 “봄 2월에 대아찬 이등을 사벌주의 군주로 삼았다.”고 기록돼 있다. 전자는 봉평 신라비가 없었다면 울진의 상황을 전혀 알 수 없는 것이고, 525년에도 울산 천전리 각석에 525년과 539년에 각석한 명문으로 신라시대를 폭넓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돌에 새긴 신라비와 울진의 향기지난 8일부터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신라비 중에서 가장 오래된 포항 흥해읍 중성리 신라비를 특별전시 하고 있어 울진 봉평리 신라비를 보고 와서 13일에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갔다. 평소에는 빽빽했던 경주박물관도 가족들만 간간히 보이고 한산하여 온전히 신라를 만날 수 있었다. 신라비 중에서 가장 먼저 새긴 501년(지증왕 2년)의 중성리 신라비는 포항에서 특별 손님으로 전시되어 입구에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글씨도 신라 특유의 서체로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크지도 않은 자연석에 새겨놓았고, 여러 남산신성비와 명할 산성비도 동시에 모아놓았다.임신서기석 비가 30cm 정도 높이로 앙증스럽게 서있다. 임신년(552년, 651년, 682년, 732년) 6월 16일에 두 사람이 하늘, 지금부터 3년 이후에 충도를 집지하고 허물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일 이를 어기면 하늘에 큰 죄를 지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 이런 내용으로 두 신라 젊은이의 단단한 결심을 느낄 수 있다.필자는 80년대부터 남한에 흩어져 있는 신라 비는 다 보았다. 대개의 신라 석비들이 자연석 돌에다 가공 없이 그냥 새기는데 드물게 이차돈 순교비는 6각형으로 다듬고 글자 하나 하나도 바둑판 그리듯 선을 그어 5면에 글자를 새겨 넣었다.한 면은 이차돈의 목이 잘려 땅에 떨어지고 흰 피가 솟구치고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 그림을 새겨 넣었다. 이 순교비는 817년(헌덕왕 9년)에 만든 것이지만 이차돈이 26살인 527년(법흥왕 14년) 순교 때의 장면이다. 여기에 이차돈의 아버지 길승(吉升)의 이름이 나오고 봉평 신라비에는 길선(吉先)으로 나오는데 활동 연대가 같으니까 표기 혹은 발음의 유사성으로 같은 사람을 지칭할 것이다.현재까지 발견된 신라비 중에 포항 중성리비가 가장 오래되었고 뒤를 이어 503년 포항 냉수리비, 532년 창녕비, 551년 단양적성비, 555년 북한산 순수비. 668년 마운령과 황초령비가 줄을 잇는다.8회에 걸쳐 울진을 마무리하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우선 행정구역이 삼국시대는 고구려에서 신라로, 조선시대 대한민국 때는 강원도에서 경북으로 왔다 갔다 하는 운명이었다. 울진읍을 지나다보니 강원도 이용원 간판이 강원도의 흔적을 안고 있었다. 대게도 울진이 원조지만 명성은 영덕에 빼앗겼고, 전국 최고의 금강송 소나무에서 나오는 송이도 명성은 봉화의 송이축제에 빼앗겼다. 최고의 질 좋은 노천탕 덕구온천과 백암온천도 부곡, 수안보, 온양, 동래온천에 비해 빛이 바랬다. 김시습의 송이 예찬 시로 위로를 삼아야 하는 슬픈 운명의 울진이다. 그래도 울진은 깊은 산과 넓고 푸른바다를 안고 천년고찰 불영사와 2억5천만년 전에 형성된 석유굴, 관동팔경 중 제1경 망양정, 월송정이 바다와 숨쉬고 있는 낭만이 흐르는 아름다운 고장이다.송이를 예찬한 선조들의 글도 많고 여러 문헌에도 전한다.목은 이색은 “예전 사람들은 신선이 되겠다며 불로초를 찾아다녔는데, 신선이 되는 가장 빠른 길은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라 송이버섯을 먹는 것이다.”했고 추석을 앞두고 친구로부터 받은 송이에 감동하여 “존경하는 스님을 찾아가서 고상히 즐기겠다.”는 감사의 글을 남겼다. 노계 이인로는 “소나무와 함께하고 복령의 향기를 가진 것”이라 했다. 세종도 명나라 황제께 송이를 보냈고, 연산군은 송이 욕심에 송이 금표지역을 처음 정했고, 왕만 54년 한 영조도 송이를 평생 즐겼고 83세 마지막까지도 송이를 찾았다 한다. 다방면에 많은 글을 남긴 서거정(1420~1488)도 “팔월(음력)이면 버섯 꽃이 눈처럼 환하게 피어라. 씹노라면 좋은 맛이 담박하고도 농후하네. 송이 예찬 시를 남겼다.일본에서도 한국의 송이 향을 “마츠타케올”이라 하여 최고로 친다. 외갓집이 울진이었던 매월당 김시습(1435~1493년)은 “고운 몸은 아직도 송화향기 서렸네. 마자 이가 시원한 것 깨달았네. 말려 다래끼에 담았다가 가을되면 노구솥에 푹푹 쪄서 맛보리라.”고 송이를 노래했다. 산속의 황금이라는 송이는 북한의 묘향산과 금강산에 많이 나지만, 분단되어 갈 수 없는 곳이고, 강원도 양양, 삼척, 경북 봉화, 영덕, 경주 남산 등에서 나지만 지금은 안동, 청송, 청도, 창녕 등에서도 난다. 동의보감에는 “송이는 맛이 매우 향미하고, 송기(松氣)가 있다. 나무에서 나는 버섯 가운데서 으뜸이다.”고 적었다.어우야담에 진기한 음식으로 묘향산과 금강산의 송이버섯구이를 꼽았다. 송이는 양양 것도 좋지만, 울진 송이를 최고로 친다. 그것은 소나무의 향과 해풍, 기온이 만들어낸 천혜의 자연조건 때문이다.봉평 신라비가 처음 있었던 자리에 가보니 예전에 보았던 기억은 아련한데 가까이 붙어있는 죽변 해수욕장에서 불어오는 푸른 동해 바람이 온갖 생각에 잠기게 한다./글·사진= 기행작가 이재호

2020-12-15

코로나19 뚫고 이룬 청정이미지로 ‘2020 대한민국 환경대상’

이승율 청도군수의 2020년은 아직 달력이 남아있으나 잊지 못할 한해다.현장에 답이 있다는 문견이정(聞見而定)의 마음으로 2020년을 시작했다.올해 2월부터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코로나19 사태를 맞았다. 경북에서 두 번째로 많은 확진자(155명)가 발생했지만,슬기롭게 극복해 전국적인 청정이미지를 구축하고 대한민국 환경대상을 수상했다.이 군수는 지자체단체장 중 유일하게 새마을운동 중앙회 주최 ‘새마을운동 50주년 기념행사’에 초청받았다. 군은 최대의국·도비 확보로 안정된 20201년 군정운영의 기반을 마련하는 등 다사다난한 해를 보내고 있다.▲ 슬기로운 코로나19 극복2월 19일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신종 바이러스인 코로나19 확진자가 대남병원에서 집단 발생했다.질병본부 역학조사단과 범정부특별대책지원단이 지역에 상주하고 행정이 마비될 정도에까지 이르렀지만 침착함을 잃지 않고 슬기롭게 대처했다.신속한 환자이송과 치료, 사회복지시설 코호트 격리 등 철저한 방역으로 확산을 차단해 코로나19 극복 전국 모범사례 지역으로 인정받았다.또 감영병으로는 국내 처음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됐다.긴급재난지원과 긴급생계비, 소상공인과 근로자를 지원하고 희망 일자리와 각종 세제와 수수료 감면으로 군민의 생활이 곧바로 제자리에 돌아오도록 했다.코로나19로 전국적인 명성의 정월 대보름행사와 소싸움축제, 청도반시축제·세계코미디아트페스티벌 등의 취소로 지역경제가 타격을 입기도 했다. 하지만, 특유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한 지역 특산물 판매운동과 해외수출 추진 등으로 상쇄시켰다.▲ 대한민국 환경대상 수상청도군은 올해 대한민국 환경대상을 비롯해 수많은 상을 받았다.농식품 수출정책 우수상, 경북자원봉사 대상, 전국 기초단체장 공약경진대회 우수상, 전국 농촌지원사업 경진대회 최우수상 등 11월까지 15개의 상을 받았다. 연말이 지나면 수상실적은 더 풍성할 것으로 보인다.지속 가능한 친환경사회로의 구현과 활동을 장려하고자 대한민국환경대상위원회가 주최하고 환경부와 교육부, 농림축산식품부, 산업통상자원부, 해양수산부, 식품의약처가 후원하는 환경대상은 인간중심 비전과 친환경사회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이들을 발굴·격려하는 대한민국 환경분야 최고 권위 있는 상이다.청도군은 자원순환 부문 대상을 받아 청정 청도를 유지하고자하는 군의 의지를 보여줬다.청도군은 지자체 중 유일하게 추진하는 재활용품 모으기 경진대회를 2000년부터 개최해 들과 하천에 버려지는 고철과 빈병, 농약병 등 폐자원을 수집해 농토와 하천의 환경을 보호했다.수집된 재활용품 13만t을 판매한 19억 2천만원의 수익금으로는 지역의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뒀다.▲최대의 극·도비 확보청도군이 역대 최대 규모인 1천821억원의 국·도비를 확보해 2021년 예산에 반영했다.이는 지난해 1천431억원보다 27%인 390억원이 증가한 것이다.이중 국비 1천404억원은 자연재해위험개선지구정비 사업에 69억원, 스마트지방상수도지원사업 56억원, 신재생에너지융복합지원 사업 29억원 등으로 사용되고, 도비 417억원은 신원지구농어촌생활용수개발 사업 43억 등에 투입된다.군은 지난 2월 국·도비 확보 추진계획보고회를 시작으로 예산확보를 위해 총력을 다했다.▲ 높은 공약이행률 이뤄청도군의 민선 7기 공약사업은 9대 분야, 86개 단위사업, 92개 세부사업으로 구성돼 있다.2020년 상반기 기준 △농산물 공판장 확장 이전 △농기계 임대사업소 확대 등 완료 36건, 추진 중 56건으로 공약 이행률은 64.3%나 된다. 민선 7기 임기가 많이 남았음을 고려하면 상당한 성과다.또 △지역 특화작물 육성 △농업창업 지원 및 귀농 귀촌 정책 추진 △전원주택단지 유치 △전통시장 활성화 △청도자연휴양림 조성 △노인복지기금 확충 등 주요 사업들도 임기 내 완료한다.대구-경산-청도 광역전철을 포함한 5건의 대형 사업은 관련법령·상위계획 검토, 국·도비 예산 확보를 위한 계획 수립 등 임기 내 기반 조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 업무 추진 가속도를 높여 군민과 소중한 약속인 공약사업을 완수한다.▲ 새마을운동 50주년 기념식에 초청 돼2020년은 세계가 주목하고 현실에 반영시키고 싶은 새마을운동 50주년의 해다.새마을운동은 조국 근대화의 초석으로 대한민국의 현재를 있게 한 전국적인 운동임을 부인할 수 없다.청도는 새마을운동 발상지다. 새마을운동중앙회는 지난 6월 25일 새마을운동 50주년 기념식을 열었다.코로나19로 인해 행사 참석인원은 기존 1천여 명에서 150명 안팎으로 줄였지만, 전국 자치단체장 중 유일하게 이승율 군수를 초청했다.새마을운동중앙회는 유기농업을 실천하고 비닐·플라스틱 사용과 수입고기를 줄이는 등 생활 속 실천으로 지구온난화를 막고 미세먼지를 줄여나가겠다는 내용의 ‘생명살림 국민운동 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했다.청도군은 이미 2000년부터 자원재활용에 나서는 선진행정을 실천하고 있다.▲드라이브 스루·방송으로 특산물 판매이 군수는 코로나19로 지역의 특산물인 미나리와 복숭아 등의 판매가 부진하자 드라이브 스루로 판매에 나섰다.청도반시 판매를 위해서는 특별판매방송에 출연하는 등 발품을 팔았다.특히 전국적 명성을 얻고 있는 한재 미나리가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자 미나리 재배농가에 택배비용을 지원하고, 군청 직원들을 상대로 미나리 팔아주기 운동을 펼쳤다.복숭아 판매를 위해서는 신세계백화점 대구점과 서울 영화관에서 홍보활동을 이어갔다.청도반시축제가 취소되자 대구MBC, 네이버가 함께 한 네이버 쇼핑 라이브 특별판매행사에 출연해 쇼 호스트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공모사업으로 772억원 확보행정력 집중과 군정 주요업무 추진현황 수시 점검을 통해 군정 전반에 대한 문제점을 꾸준히 개선 보완하면서 침체된 지역경기 활성화와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적극 노력했다.그 결과, 가금·예리지구 풍수해생활권 종합정비사업 400억원, 청도드림생활봉사센터 생활SOC복합화사업 67억8천만원, 농어촌의료서비스 개선사업 59억2천만원, 고수7리 뒷마지구 생활여건 개조사업 48억6천만원, 신재생에너지 융복합 지원사업 47억6천만원, 청도시장 주차장 조성사업 29억7천만원 등 총 36건의 공모사업 선정으로 772억원의 예산을 확보했다.이는 지난해 30건, 627억원보다 145억원이 늘어난 것이다.이 외에도 삶의 만족도부문 전국 4위를 비롯해 100대 사업의 꾸준한 추진, 2030 비전전략 수립, 일자리 창출을 위한 노력, 새로운 관광자원 개발 등이 올해 성과로 꼽히고 있다.이승율 군수는 “코로나19가 종식될 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변화의 모습을 느낄 수 있는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겠다”고 밝혔다./심한식기자 shs1127@kbmaeil.com

2020-12-13

그들에게 차안의 번뇌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더없이 슬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차안의 사람이기 때문일까 …

어쩌다 보니 40여 개 나라를 여행했다. 세칭 ‘돈 많고 시간 넉넉한’ 팔자 좋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다.1950년 한국전쟁을 전후해 몰락한 조부와 세상에 대한 불평과 분노를 가슴에 안고 일찍 죽은 선친을 가진 가난한 노동자지만, 끽해야(?) 4만km가 조금 넘는 둘레를 가진 ‘내가 태어난 별’ 지구를 한 바퀴쯤은 돌아보고 싶었다.서른 즈음부터 1년이면 1~2번, 많게는 3번까지 다른 나라로 향하는 비행기나 배에 올랐다. 짧게는 3~4일에서 길게는 10개월의 기간. 그런 장단기 여행자의 삶이 20년 가까이 이어졌다.2020년은 특별하고 비극적인 해로 모든 여행자들에게 기록될 것이 분명하다. 한국은 물론,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와 중동, 남·북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 어느 지역 할 것 없이 지구 전체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몰고 온 공포에 떨고 있다.외국 여행은 고사하고 제 나라 다른 도시로의 이동과 이웃 간의 왕래마저 눈치가 보이고 두려운 시절. 13세기 페스트가 그려낸 ‘지옥의 풍경’이 이러했을까?자신의 뜻이 아닌 바이러스로 인해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으니, 반대급부로 낯선 곳으로의 여행에 대한 갈망은 무한으로 증폭한다. ‘꼭 한 번 다시 가고 싶었던 나라’에 대한 그리움도 이에 비례해 커진다.▲달관한 듯, 그러나 서글픈 인도인들의 눈동자“놀랍다” 또는 “생소하다”는 표현이 딱 잘 어울리는 국가 인도. 유럽 사람들은 “인크레더블 인디아(Incredibl India)”라고 말한다.인도는 기자의 첫 번째 장기 배낭여행지였다. 28박29일 동안 뭄바이에서 트리밴드럼까지 인도의 남서쪽 해변을 따라 떠돌았다. 당연지사 많은 현지인들을 만났다.‘이번 삶이 끝이 아니고, 다음 생이 존재한다’는 윤회를 믿는 대부분의 인도 사람들. 태반이 힌두교도인 그들은 현실의 가난과 고통을 애써 외면한다. 하루에 한 끼, 그것도 우리 돈 1천 원에 미치지 못하는 허술한 식사를 하면서도 매일 웃는다.또한, 인도인들 절대다수의 머릿속엔 ‘해외 여행’이라는 개념이 없는 듯했다. 남부 해변에서 내륙으로 조금 들어간 작은 마을의 개천가. 다정해 보이는 할머니와 손녀를 만났다.이빨이 3~4개밖에 남지 않은 할머니는 자신이 몇 살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녀는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인도의 인권운동가·1869~1948)가 살아 있을 때 태어나 기자를 만난 그날까지 동네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다고 했다.당연지사 한국이 어디쯤 붙어있는 나라인지도 몰랐다. 비행기? 버스도 타본 적이 없다고 했다. 손녀딸이 더듬거리며 할머니의 생을 짧게 요약해줬다. 긴 설명도 필요치 않았다.그 노파에게 세상이란 죄 없이 갇힌 감옥이었을 거라 생각했다. 2020년 오늘, 우리의 답답함을 80년쯤 살아낸 것이다. 상상력조차 가닿지 않는 아득한 세월이다.그러나, 그럼에도 할머니는 낯선 여행자를 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손녀도 마찬가지.두 사람의 눈동자는 차안(此岸)의 잡다한 번뇌와 고민을 보고 있지 않았다. 달관(達觀)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하지만 더없이 슬퍼 보이기도 했다. 그건 기자가 피안(彼岸)을 보지 못하는, 어쩔 수 없는 ‘차안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을까?지금도 인도 할머니와 손녀를 만난 그날, 그 장면이 떠오를 때면 한 개인이 어쩔 수 없는 삶의 비의(悲意)와 눈물을 탁월하게 형상화해낸 이승철(62) 시 ‘순천 와온에 와서’의 문장이 눈앞으로 흘러간다.▲2020년 오늘, 우리는 윤회를 믿는 염소보다 행복한가?그것이 실연인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슬픈 사연을 가진 시적 화자는 저물녘 석양이 심장을 쪼그라지게 만드는 서쪽 바닷가 와온마을에 간다.거기서 ‘다시는 너로 인해 무너지지 않겠노라며/얼마나 다짐하며 속울음 삼켰던가’라고 가슴을 치며 ‘바다를 품지 못한 육신은 저리도 허허로웠다’고 한탄한다.그러나 너나없이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돌봐야 할 식구가 하나 둘 사라지고, 썰렁해진 빈 방에서 홀로 담배나 피워대는 허망한 일에 다름없다.그래서다. 그곳이 와온마을이건, 인도의 바닷가마을이건 ‘육통 구멍에 들숨 하나 모셔 살기 힘들어/그날 또다시 찾아간 와온 바다 위로/곰삭은 뼛가루만 말없이 넘실대고 있었다’고 시를 마무리한다.이탈리아의 거장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Bernardo Bertolucci·1941~2018)가 연출한 영화 중에 ‘리틀 부다(Little Buddha)’란 게 있다.불교 큰 스승의 환생이라고 지목된 꼬마아이의 행적과 해탈을 향해 가는 석가모니의 삶에 카메라를 밀착시킨 이 작품에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등장한다.곧 목이 잘릴 염소 한 마리가 울고 있기에 백정이 묻는다.“죽음이 슬퍼서 그러느냐?”염소가 답한다.“아니다. 나는 1만 번째 다시 태어날 땐 사람이 된다는 약속을 받았다. 9999번 환생을 겪었고 지금이 1만 번째 죽음이다. 다음 생엔 사람으로 태어난다. 슬퍼서가 아니라 기뻐서 운다.”그런데 염소가 아닌 사람으로 태어나는 게 과연 기쁜 일일까? 베르톨루치 감독이 객석을 향해 던진 화두의 선명함이 영화를 본 지 26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 안에 남았다.시인이란 세상과 인간을 회의하고 아프게 들여다보는 존재.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시인 이승철 역시 이런 말로 2020년 코로나19 시대를 사는 우리가 2600년 전 윤회를 믿었던 염소보다 진정으로 행복한지 묻고 있다.“황량하던 농갓집 햇살과 더불어 온종일/나부대며 쏘다닐 때 썰물 져 가던 먼 바다/한 목숨이 왜 이리 길어야 하는지 생각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12-10

연극이 끝나고 홀로 객석에 남아

때로는 나무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권도훈 대표가 처음 이상화 생가터를 발견했을 때, 그 집은 4년 동안이나 거주자가 없는 상태로 버려져 있었다. 그 집을 발견하기 전까지 그는 광고대행사 대표인 동시에 대학에서 겸임교수로 강의를 하던 시각디자이너였다. 동업을 하던 선배의 자살과 사랑하는 동생까지 잃은 이중고를 겪으며 정신적 공항으로 사업체와 강의를 모두 내려놓은 상태였다. 이전할 사무실을 찾아다니던 그가 우연히 그 집 마당에 발을 들였는데 그때 그를 사로잡은 것이 바로 권 대표가 ‘상화나무’라고 이름 지은 한 그루의 라일락나무였다. 온통 뒤틀린 상태로 비스듬히 누운 나무를 보며 그는 충격과 감동으로 얼어붙었다. 4년 동안이나 버려져 폐허나 다름없는 집에 감도는 어떤 기운이 그를 감쌌다.정신이 얼얼한 상태로 그 집을 보고 나오던 중 골목어귀에 붙어 있는 ‘이상화 생가터’라는 팻말을 발견했다. 그 순간 그는 와! 하고 함성을 울렸다. 그날부터 그의 생몸살이 시작되었다. 집은 갖고 싶은데 주머니는 텅 비었고, 그 집에 다가설 방법을 찾다 호된 몸살을 앓았다. 경제적 절벽에 부딪친 그가 찾아낸 것은 국토부 산하의 도시재생 사업의 방편이었던 분양보증 ‘허그(HUG)’를 통한 재생사업 프로그램이었다.“이 집이 온전한 이상화생가 그대로인가요?”“안타깝게도 생가는 허물어졌고, 라일락뜨락은 1956년에 새로 지은 한옥입니다.”상화생가의 자료를 찾던 중 400평이 넘던 상화 생가터(서문로 2가 11번지)가 1956년에 4필지로 나눠진 것을 알았다. 웃방망치길을 끼고 있는 11-1번지는 상화의 사랑채 ‘담교장’이었고, 11-3번지가 바로 지금의 ‘라일락뜨락’이었다. 독립운동의 주역들이 모여서 나랏일을 도모하던 상화의 생가. 19세의 이상화 시인이 독립선언서를 만들어서 웃방망치길로 빠져나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이 바로 이상화 시인이 ‘담교장’이라고 이름 붙인 사랑채였다.이미 땅이 나눠지고 본가가 허물어져 주인이 바뀐 것까지는 어쩔 수 없지만, 권 대표는 이상화 시인이 시를 쓰고 독립선언문을 작성하던 생가터에 그를 지켜보던 200여 살의 라일락나무가 살아있는 것만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상화생가를 모델로 도시재생 프로그램에 응모해서 당당하게 당선이 되었다. 그 어려운 과정을 통해서 그는 마침내 집을 갖게 되었고, 사면초가였던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가세가 기울어져 생가를 처분하고 여러 번 이사한 끝에 이상화 시인이 마지막 4년을 보낸 곳이 지금의 이상화 고택이었다. 이상화 시인이 돌아가신 날이 4월 23일인데, 공교롭게도 그날 한 날 한 시에 빙허 현진건 선생님도 세상을 떠났다. 4월에 태어난 이상화 시인은 4월에 그렇게 떠났다. 처음 상화생가에서 라일락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것을 보고 권 대표는 4월에 돌아가신 이상화 시인이 꽃으로 오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시각디자이너의 감성이 매우 문학적이다.“본업과 전혀 다른 길인데, 어떻게 카페를 생각하게 되었어요?”“커피를 좋아하는 이유도 있지만, 카페는 사람들과 쉽게 조우할 수 있는 곳입니다. 조앤 k 롤링이 엘리펀트라는 카페에서 ‘마법사의 돌’을 써서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듯이, 저도 다양한 분들과 문화교류를 하고 싶었어요.”카페에 한 무리의 손님들이 들어왔다. 권 대표가 손님들을 위해 커피를 내릴 때 카페 안팎을 둘러보았다. 마당에 비스듬히 누운 라일락나무는 언제 봐도 정겹다. 카페테리어의 한편에 그림을 그리는 책상이 있고 책상에 대나무로 짠 등이 밝혀져 있다. 이안 맥밀런이 찍은 비틀즈의 ‘애비 로드’ 재킷 사진이 벽에 붙어 있었다. 상화생가의 주인답게 마스크를 끼거나 학생모를 쓴 이상화 시인의 초상화가 카페 곳곳을 지킨다. 권 대표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어서 이상화 시인의 초상화도 직접 그렸다. 사진인 듯 컷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상화 시인과 권 대표가 서로를 살리는 듯,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친근감이 감돌았다.사업 실패와 막냇동생을 잃은 슬픔으로 생의 바닥까지 내려앉은 권 대표는 상화나무를 보며 다시 살아볼 꿈을 가졌다. 가장 낮은 곳에 내려앉은 그에게 이상화 생가가 운명 같은 끌림으로 그를 당겼다고 여겨진다. 그는 그 끌림에 이끌려 4년간 버려져 있던 폐허에 안겨 자기만의 희망을 일구었다. 이상화 시인과 관련된 서적에서 문서상의 오류까지 찾아낼 정도로 그는 시인의 역사 찾기에 열중했다. 그러라고 권 대표를 그 자리로 불러들인 것인지.“상화생가를 중심으로 대표님의 인생이 바뀐 느낌이에요. 어떠세요?”“사람들이 이상화 시인과 어떤 관계냐고 물을 때마다 존경하는 시인이라고 대답합니다. 그 외에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어요. 그분은 목숨을 바쳐 시대의 불운과 싸웠고, 저는 그 시인의 정신에 고무되어 여기까지 왔습니다.”이상화 시인을 증명하는 일. 권 대표는 그 집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며, 그저 사람들이 쉬고 싶을 때 와서 쉬었다 갔으면 좋겠다고 한다. 시각디자이너였던 그가 강한 운명적 끌림에 의해 그 집에 머물게 된 것 역시 그는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엔 어떠한 계산도 있을 수 없고, 모든 것이 우연히 이루어진 자연스러운 만남일 뿐이라고 한다.“대구의 중심에 이런 문학적 공간이 생긴 걸 저는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문학을 생각하셨나요?”“조앤 k 롤링이 자주 가던 카페를 생각한 건 사실이지만 저는 문학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곳이 본래 생가터였던 만큼 이상화 시인이 문학적 구심점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그의 웃음이 소탈하다. 문학과 동떨어진 방외인이어서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조용히 다가와서 머물다 가는 사람들이 작가들이라면, 그보다 자연스러운 만남이 어딨을까. 달리 말이 필요치 않다.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대에 젊은 목숨을 바쳐 저항시를 읊던 이상화 시인의 생가터이고,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자라던 나무가 저렇게 의연히 버티고 있는 데야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실은 작가들이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따져보면 작가들보다 외로운 이들이 있을라고. 누가 고립시킨 것도 아니고, 제 운명대로 스스로를 옭매는 자발적 고립자들. 그들이 조용히 머무를 곳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2년 동안 혼자 놀았다면서 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어요?”“죽을 정도로 괴로운 순간에 저 나무가 저를 구해주었어요. 저 나무를 보는 순간 쇠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어요. 시인이 시로 시대의 불운에 항거했다면 나무는 몸으로 말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4년간 집이 비어 있었는데도 나무는 저 홀로 꽃을 피우며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커피장사도 처음이었고, 정신적 공항 상태가 깊을 때여서 이 집에 머무른 지난 2년간 너무나 평화로웠다고 했다. 손님 없는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울 지경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얼마간 문을 닫고 있는 동안 혼자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며 적응할 시간을 충분히 가졌다. 많은 위안을 받았다.“코로나가 덮쳤을 때 병원으로 커피폭탄을 나르셨죠? 그 얘기 좀 해줘요.”“마스크를 낀 이상화시인의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손님 중 한 분이 전화로 커피를 살 수 있느냐고 물었어요. 의료진들이 커피 마실 곳이 없다고.”그 얘기를 듣고 그는 더치커피를 내려 폭탄처럼 생긴 작은 용기에 담았다. 한 방울씩 내린 커피를 용기에 담아서 병원으로 가져갔다. 밀려드는 환자들에게 치여 의료인들이 영안실에서 쪽잠을 자고 있을 때였다. 권 대표는 100인분의 커피폭탄을 2~3일에 한 번씩 코로나 거점병원으로 열 번쯤 날렸다. 커피 한 방울이 죽음과 싸우는 의료진들에게 위로가 되어 주기를 바랐다.막냇동생이 마지막을 보낸 병원으로 커피를 나르며, 그는 살아서 장례식을 치른 동생을 생각했다. 사경을 헤매는 동생을 보며 그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동생이 딱 한 번만 깨어나게 해달라고. 기적처럼 동생의 의식이 돌아왔다. 그는 동생에게 보고 싶은 사람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그는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동생은 보고 싶은 사람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새벽에 조용히 떠났다. 동생의 죽음을 경험할 탓일까. 동산병원에 커피를 나를 때의 마음이 그랬다. 사람이 살고 죽는 문제에 비하면 살아가며 겪게 되는 크고 작은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어떨 때는 나무 같아요, 카페를 지키는 제 자신이.” 사람들이 다녀간 후, 텅 빈 가게에 앉아 나무를 보고 있으면 자신이 나무처럼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는 것 같다고 했다. 아무도 묶는 사람이 없지만 그는 스스로 그 달가운 형벌을 감당한다. 기꺼이./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0-12-09

율곡 이이가 백세의 스승으로 칭송한 고독한 천재 방랑자 매월당 김시습

울진향교도 두 번이나 옮기는 우여곡절을 겪지만 개교하는 학교의 교사로 교육기능을 다한 울진교육의 요람으로 큰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번화가에서 벗어나 초라한 향교가 되어있다. 월계서원도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었다. 지리적으로 산이 막혀 낙후된 지역인 울진은 귀양 오거나 무슨 연고로 와서 지방민에게 질 높은 학문의 세계로 이어지게 했다. 가정 이곡과 매월당 김시습, 만휴당 임유후, 조위 등의 문장으로 한 가닥 하는 사람들이 머물면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조용히 숨 쉬고 있는 울진향교늦은 가을과 초겨울이 교차되는 계절은 나아감을 멈추고 자신을 뒤돌아보는 시간이다. 만물이 생동하는 꽃피는 봄과 폭염의 더위를 알차게 보낸 사람들은 수확의 열매라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반성하며 새로운 다짐으로 희망의 내년을 기약하는 게 우리네 삶이다. 그러나 이것도 인간의 의지대로 작동이 안 되는 빨간불이 켜졌다. 그렇게 잘났다고 교만하던 인간을 능가하는 알 수 없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인간의 의지가 무력해지는 것도 받아들이고 자연을 파괴한 인간의 원죄라는 반성부터 먼저 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자연과 인간 동식물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고민해야 된다. 오늘은 하늘도 감응 하는지 먹구름 짙게 드리우다가 간간이 햇빛으로 새로운 희망을 준다.이런 어수선한 마음으로 울진 향교에 들어섰다. 정면 골목 좌우와 경사진 향교 주위를 집들이 고만고만하게 들어서 있어 도회지의 달동네와 조선시대를 연상케 한다. 향교 뒤에는 산이 가파르게 받치고 있다. 이웃 평해 향교가 고려시대 창건했다면 울진 향교는 한참 늦은 1484년(성종 15년)에 월변동에 창건했다가 1697년(숙종 23년)에 고성리 성저동으로 옮겼다. 여기서도 인연이 안 되어 1872년(고종 9년)에 현 위치로 옭기는 우여곡절을 겪는다.산 아래 비탈지고 협소한 공간이라 동무도 없고 균형도 미흡하지만, 이 향교에서 1908년 사립명동학교가 개교되고, 1945년 해방 후에는 울진국민학교(현 울진남부초등학교)가 개교했다.뒤이어 지금의 울진고등학교는 1946년 9월에 울진공립초등중학교로 설립하여 이 울진향교를 가교사로 개교하여 사용한 울진교육의 출발점으로 큰 역할을 한 곳으로 의미를 부여해야 된다. 시간을 되돌려 이 향교에서 조선 중기에 근처 근남면 수곡리 출신 예언가 격암 남사고와 울진 선비들의 일화도 아른거린다.향교를 나와서 비탈진 골목길을 걸어서 산으로 올랐다. 벽화가 군데군데 보여 생기가 돈다. 우리나라 곳곳에 벽화가 많이 그려져 있는데 간간이 멋있고 세련된 것도 있지만 대개가 어설픈 것은 프로 화가들이 그리는 것이 아니라 거의 봉사 차원에서 아마추어들이나 미대생들이 아르바이트로 그리다보니 그런 것이다. 그러나 벽화가 굳이 세련될 필요는 없다. 그 골목과 주위와 조화를 이루면 된다. 여기에는 나라 사랑의 주제로 유독 태극기가 많이 그려져 있다. 마침 마스크 쓴 채 혼자서 그리고 있는 한 분도 화실에서 그림 배우는 분이었다.산 정상에 가까워지자 우리나라 최고의 질 좋은 소나무 고장답게 미끈하게 쭉 뻗은 붉은 적송의 울진 금강송들이 호위하듯 위세를 뽐내고 있다. 울진은 바닷가에 있다 보니 왜구의 침입이 잦아 이곳에는 고읍성과 고현성이 소실대고 6번이나 옮긴 특이한 읍성인데도 흔적은 거의 없다. 산 정상에는 애국선열들을 기리는 충혼탑(옛 사친정터)이 서있고 일제강점기에 신사 세웠던 자리에는 해방이 되자 망향대를 세워놓았다. 다시 내려오자 비탈진 골목길에 할머니 한 분이 무, 배추 몇 포기를 손수레에 싣고 가는 모습에서 오늘날 쇠락한 향교를 연상하게 된다.#. 두 효자비와 산속에 숨어있는, 옮겨온 월계서원울진향교에서 하천 따라 월계서원 가는 길가에 두 효자비가 있다. 신안 주씨 효자 주경완은 아버지 주세홍이 학질로 1년 넘게 앓자 자기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묻힌 종이를 태워 술에 타 드려 효험을 보았고, 아버지가 큰 종기를 앓자 추운 겨울에 밤새워 기도하여 토용(土龍·지렁이)을 구하여 그 약으로 낳게 하였다. 어머니도 종기를 앓자 아버지 방법대로 하여 낳게 하였고, 부모상을 당하여서는 시묘 살이 3년 동안 죽만 먹고 정성을 다해 부모에 효도했다고 1578년(선조 11년)에 정려했다. 지금 비는 1879년(고종 16년)에 세웠다.그 앞에는 울진 장씨 장서린의 효자도 어릴 때 아버지상을 당하자 3년 동안 죽만 먹었다. 홀어머니께 효도하면서 외출하면 반드시 밤중이라도 집으로 돌아왔고 때로는 호랑이가 태워주었다는 전설의 고향 같은 이야기도 전한다.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어머니 입에 넣어 소생시켰고, 3년 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예를 다 하였다고 1633년(인조 11년)에 정려했다. 예전에는 효자들은 달리 방법이 없어 주로 손가락 잘라 피를 드리는 방법이 유일했다. 손가락 자른 효자가 양성된 그 시대 효의 한 단면이다.큰길가 밭에는 중년 지난 부부가 무, 배추 뽑기에 한참이고 허공에 매달려 있는 시래기가 초겨울 바람에 일렁인다.여기서 하천을 따라 가다가 다리 건너 조금 오르니 숨은 듯이 월계서원이 겨울 햇살을 받고 있었다. 서원 앞에는 산줄기가 언덕 되어 싱싱한 소나무를 꼿꼿하게 세워두고 있었다. 월계서원은 전국적으로 알려진 서원은 아니고 울진 장씨 관시조인 장말익과 그의 8세손 장양수를 배향하는 문중적인 성격이 강하다. 울진 장계 호월리에 1856년(철종 7년)에 월계사로 출발하여 1862년(철종 13년)에 월계서원으로 사액 받았다가 1868년(고종 5년)에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25년 현 위치로 옮겨 광복 후 월계서원으로 복칭 되었다.이 서원은 국보각의 특이한 건물이 하나 있다. 장양수급제패지(張良守及第牌)로 현존하는 패지(위임장등의 공식문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고려시대 과거제도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그 옆에 장씨 유허비에는 늙은 부부가 떨어진 낙엽을 포대에 정성스럽게 주워 담고 있었다.#. 매월당 김시습과 울진에 머물다 간 사람들고려시대 ‘죽부인전’으로 유명한 가정 이곡(1298~1351년)은 원나라에서 벼슬하고 아들이 유명한 목은 이색이다. 원나라에서 벼슬한 과거급제 자 중에 정식과거에 합격한 사람은 이곡이 유일하다. 그는 영해 괴시리 마을이 처갓집이라 관동, 울진지방을 주유하면서 선사관, 월송정, 성류굴기 등의 많은 글을 남겨 그 향기가 전한다.고독한 방랑자 매월당 김시습(1435~1495년)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어머니가 울진의 선사 장씨(仙槎 張氏)라 울진과는 깊은 인연이 있다. 여덟달 만에 글을 알았고 천부적 자질을 본 외할아버지가 말을 못해도 뜻이 통하는 한문 ‘천자문’을 우리말보다 먼저 가르쳤기에 김시습은 자라서도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붓과 먹을 쥐면 마음속의 생각을 글자로 다 써냈던 신동이었다. 3살 때부터 외할아버지께 글을 익혀 그때부터 사를 지을 줄 알았다. 1439년 봄 5살의 김시습에게 70살의 정승 허조(1369~1439)가 찾아왔다. 늙은 나를 위해 ‘老(노)’자로 시구를 지어 보아라. 하니 곧바로 “老木開花心不老(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마음은 늙지 않았다).”했다. 5세 신동 이야기는 유명한데 김시습을 존경을 넘어 숭배한 윤춘년(1514~1567년)의 기록은 “다섯 살에 세종께서 승정원에 부르시어 시로 그를 시험한 뒤 크게 칭찬하시고 비단 50필을 내려주시며 스스로 가져가게 하니 선생은 비단 끝을 이어 매어 어깨에 끌고 가버리니 모두가 놀라 자빠졌다. 이에 이름이 온 나라에 진동하여 ‘오세’라 불렀지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고”고 기록해 놓았다.김시습은 훗날 50세 무렵에 그 시절을 기억하며 “아주 어릴 때 황금 궁궐에 나갔더니 영릉(세종)께서 비단 도포를 내리셨다. 지신 사는 날 무릎에 앉히시고 내시는 글을 쓰라고 졸라대었지. 참 영물이라고 다투어 말하고 봉황이 났다고 다투어 보았건만, 어찌 알았으랴 집안이 기울면서 굴러 떨어져 쑥밭에서 늙을 줄이야!”라 읊었다.7,8세에 유가경전을 통달했고, 아홉 살에는 시문을 즉석에서 지을 줄 알았다. 이런 그가 15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어 외가의 농장이 있는 울진의 어머니 묘소를 지키며 외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았다. 어머니의 3년 상이 끝나기도 전에 외할머니는 돌아가시고 조숙한 천재는 송광사서 불교에 귀의하고 설잠(雪岑)의 법명을 썼다.훗날 “열다섯에 어머니 여의고, 외할머니 손에 이끌려 자랐지만 할머니도 곧 땅 속 몸이 되시어 홀연 쓸쓸해졌지.”라고 회고했다. 병약한 아버지는 계모를 두었고 김시습 자신도 결혼 생활이 원만하지 못했고 불행한 삶을 시(전하는 시만 2천200여수)로 달래야 했다. 뒷날 정통유학자인 퇴계 이황은 색은행괴(索隱行怪) 하는 하나의 이인(異人)이라고 비판했지만, 율곡 이이는 “백세의 스승으로 공자를 보려거든 그를 보아라.”고 극찬했다.김시습이 울진 주천대를 자주 찾았지만 주천대란 이름을 지은 만휴당 임유후(1611~1673년)가 1628년 동생 지후가 반란음모로 발각되어 숙부인 예조판서 임취정(1561~1628년)과 두 아들이 죽임을 당하자 사직하고 주천대 옆에 집을 짓고 서 20여 년간 살았다.조위(1454~1503년)는 김천 출신이지만 아버지 조계문이 울진 현령으로 있을 때 8살 때 울진에 왔다가 14살 때 다시 내려와 공부했다. 매형이 점필제 김종직이라 그이 영향도 많이 받지만 무오사화 때 연루되어 순천 귀양지에서 죽는데 어릴 때 울진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문학적인 자양분을 듬뿍 받아 홍귀달(1438~1504년)은 “구름이 흐르며 무지개를 토하는 만장의 문장”이라고 평했다./글·사진= 기행작가 이재호

2020-12-08

포항제철소 대기개선 TF활동으로 ‘친환경 제철소’ 탈바꿈

포스코 포항제철소가 친환경 제철소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매년 설비투자 예산의 10%를 환경개선에 투자해온 포스코는 지난해 친환경제철소 구축을 위해 1조원 상당의 환경개선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포항제철소는 미세먼지 저감을 위해 질소산화물 제거용 친환경 설비, 원료 밀폐화 설비 등 대규모 친환경 설비 투자는 물론 포항시와 함께 대기개선 TF를 운영해 대기환경 개선에 대한 사회적 요구에 대응하고 있다.특히, 전체 미세먼지의 65%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진 질소산화물(NOx) 과 황산화물(SOx) 배출 저감에 주력하고 있다.포스코 포항제철소가 포항시 남구 동해면 소재 연오랑세오녀 공원에 설치한 대기환경 감시카메라의 모습. /포스코 제공□대규모 환경투자로 지역경제 활성화 기여포항제철소는 올해 11월 질소산화물 배출량을 대폭 저감하는 청정설비인 SCR(선택적 촉매환원·Selective Catalytic Reduction) 설비를 준공해 가동함으로써 친환경 제철소 구축에 한발 더 다가서게 됐다.질소산화물은 공기 중에서 수증기, 오존 등과 화학 반응해 미세먼지를 발생시키는 대기오염물질로, SCR설비는 촉매를 이용해 연소가스에 포함된 질소산화물(NOX)을 질소(N2)와 수증기(H20)로 분해하는 청정설비다. 이번 SCR 준공으로 소결공장에서 발생하는 질소산화물은 최대 80% 이상 낮아질 것으로 기대된다.특히 이번 SCR설치에는 지난 2년여 동안 연인원 10만5천738명의 건설인력이 참여해 고용창출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했다.올해 12월 말에는 밀폐형 석탄 저장설비인 사일로 8기가 완공된다. 밀폐식 구조인 사일로가 준공되면 원료를 보관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산먼지 등이 크게 줄어들 것으로 기대된다. 이밖에도 포항제철소에서는 부생가스 발전시설의 SCR 설치, 노후 발전설비를 대체할 친환경 복합발전기 설치 등이 진행되며 대기오염물질 배출량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는 TMS(Tele-Monitoring System) 시스템 추가 설치와 대기질 예보 기능을 갖춘 대기환경관리시스템 등 스마트 기술을 활용한 친환경 관리시스템 개발도 추진 중이다.남수희 포스코 포항제철소장은 “미세먼지 감축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의 성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며 “향후에도 포스코는 환경문제에 있어서 책임있는 역할을 다하며 친환경 설비 구축으로 깨끗하고 맑은 제철산업의 미래경쟁력을 확보해 나가겠다”고 밝혔다.□지역 주민 관점에서 미세먼지, 냄새 저감 활동 펼쳐지난 2019년 6월 출범한 대기개선 TF는 지역 주민이 체감할 수 있는 환경 개선을 목표로 만들어진 특별 조직이다.대기개선TF는 미세먼지와 냄새 저감 개선 활동을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조직으로, 포스코와 그룹사, 협력사 외에도 포항산업과학연구원(RIST) 등의 환경, 조업, 정비, 기술, 연구 인력이 참여했다.TF는 2024년까지 대기오염물질을 기존 대비 35% 수준으로 감축하는 것을 목표로 지난해부터 설비 투자부터 환경 개선 시스템 구축까지 집중적인 환경 개선활동을 펼치고 있다.비산먼지 발생이 우려되는 곳은 법에서 정한 기준에 맞게 억제설비를 설치, 운영중이며 환경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짐에 따라 더욱 개선효과를 높이고자 슬래그 냉각장 루프, 진출입로, 세륜장의 살수시스템을 추가 및 강화하고 슬래그 배재작업 현장 입구 연장과 자동문 설치로 비산먼지를 보다 집중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아울러, 냄새 저감을 위해 냄새 발생 예상 지점에 측정기를 설치하고 악취를 없애는 이동식 설비를 도입했다.냄새가 발생하는 공정에는 냄새 저감 후드를 설치하고 직원 스스로 의식과 행동을 변화해 적극적으로 개선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독려했다. 일터 내 먼지를 제거하는 환경혁신의 날을 진행한 것이나, 직원이 직접 휴대용 냄새측정기를 들고 악취 근원을 찾아 해결하는 냄새지킴이 활동을 전개한 것도 적극적인 개선 활동의 일환이었다.대기개선 TF 출범 1년만에 보인 성과는 놀라웠다. 설비 투자를 비롯해 정비, 일상 개선 등 다양한 활동을 벌인 결과, 미세먼지는 농도는 이전보다 20% 가까이 저감시켰고, 냄새 초과율도 전년 대비 90% 이상 개선했다.현재 포항제철소는 사전 사후 관리도 더욱 철저하게 실시하고 있다. 대기 환경 관리를 위해 제철소 내 18개의 감시카메라를 설치하고, 포항 환호공원에도 1대의 감시 카메라를 설치해 모니터링 해왔다. 지역 주민의 입장에서 대기 환경을 더 꼼꼼하게 모니터링하기 위해 지난 2월 남구 연오랑세오녀 공원과 송도동, 북구 환호공원을 비롯한 사외 지역에 4대의 대기환경감시카메라를 추가 설치하는 등 철저한 환경 감시를 시행 중이다.□포스트 코로나 시대 친환경 강재 개발 집중최정우 포스코 회장은 지난 10월 ‘월드 스틸 다이나믹스(WSD)’가 개최한 ‘철강산업 전략(Steel Success Strategies)’온라인 콘퍼런스에서 ‘포스트 코로나 메가트렌드와 철강산업: 새로운 10년’이라는 주제로 기조연설을 진행했다. 최 회장은 약 25분간 영어로 발표한 연설에서 코로나로 가속화될 경제·사회구조 변화와 이로 인한 철강산업의 메가트렌드에 대해 전망했다. 그는 미래에도 인류 삶의 질을 높이는 가장 중요한 소재는 철강이 될 것이라며 △뉴모빌리티 △도시화 △디지털화 △탈탄소화 △탈글로벌화가 향후 철강산업 메가트렌드라고 정의했다.최 회장은 “뉴모빌리티 시대에 대비해 철강업계가 철강의 높은 경제성과 친환경성을 기반으로 초경량 고강도 차체 및 샤시 소재 개발 등을 통해 자동차산업 패러다임 변화에 적극 대처해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도시화 확산으로 건설용 강건재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고, 메가시티의 집중화 및 복잡화를 해소하기 위한 건축물과 인프라의 분산 배치, 자연재해 및 미세먼지 대비 등을 위한 건축 소요가 지속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며 “철강업계는 이를 위한 고성능, 다기능 친환경 강재 개발에 집중해야 한다”고 제안했다.아울러 “4차 산업혁명시대 철강업계의 최종 목표는 제철소의 설비 및 공정데이터 바탕의 실시간 시뮬레이션을 통해 최적의 설비와 공정 제어가 이뤄지는 디지털 트윈 제철소”라며 “철강업계 탄소중립을 위해서는 공정상 부득이 발생하는 CO2와 철강공정 부산물을 활용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하며, 장기적으로는 수소에 기반한 철강공정의 탈탄소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최 회장은 연설을 마치며 수소시대 도래에 대응해 주요 철강사들간 탄소 저감 기술 협업과 정보 공유를 골자로 하는 ‘그린 스틸 이니셔티브(Green Steel Initiative)’추진도 제안했다./박동혁기자 phil@kbmaeil.com

2020-12-06

매력적인 귀농·귀촌을 꿈꾼다면… 뜨는 성주로 가자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말이 있다. 짐승도 마지막 순간엔 고향으로 고개를 돌린다는데 사람은 오죽할까.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전에 태어난 1970년대 이전 한국인들 대부분의 고향은 농촌, 혹은 어촌이었다.21세기에 들어서면서 귀농·귀촌의 바람이 전국 각지에서 불고 있다. 이제는 거기에 청년들까지 가세하는 형국.하지만, 향수와 낭만적 감성만으론 농촌에서의 행복한 삶이 가능할 수 없다.성주군은 귀농을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체계적인 지원과 효율적인 교육을 제공함으로써 도농복합도시로서의 힘을 키워가고 있다. 그 실질적 사례를 찾아가 성공 귀농을 이룬 이들을 만나봤다.▲‘최고의 귀농·귀촌지 성주군’ 만들기 위해 노력성주군은 대구와 구미, 김천 등의 도시와 인접했고, ‘성주 제1경’으로 칭해지는 가야산 만물상부터 현대화가 만든 새로운 풍광 ‘제8경 비닐하우스 들판’까지 빼어난 경치가 일품인 도농복합도시다.여기에 전국적으로 이름이 높은 ‘참외’라는 특산물까지 가지고 있어, 귀농귀촌인이 정착하기에 적합한 조건을 두루 갖춘 지역으로 평가받고 있다.21세기에 들어서며 농촌이 가진 향수와 매력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귀농을 꿈꾸고 있지만, 그 꿈을 현실에서 실현시키는 경우는 아직 드물다.귀농에 대한 동경이야 누구나 가질만하지만, 이제까지 살아온 삶의 패턴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두려움이 사람들을 망설이게 만든다. 이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귀농 지역의 선택도 쉽지 않지만, 귀농할 경우 자신이 키울 작목의 선정은 그보다 더 어려운 문제다.하지만, “성주군으로의 귀농은 경우가 다르다”고 성주군청은 자부한다. “대도시와의 접근성이 좋아 도시와 농촌의 장점을 합친 생활이 가능하고, 성주참외라는 빼어난 특화 품목이 있기 때문”이라는 게 군청의 이어지는 부연.성주군으로 귀농한 이들 사이에선 “고품질 성주참외만 생산하면 판로는 걱정 없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고 있다. 이는 과장이 아니다. 성주참외는 성공 귀농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성주군 농업기술센터 관계자는 말한다. “성주참외의 높은 인기와 원활한 판매 유통망은 물론이거니와 대구, 구미, 김천 등이 자동차로 30분 거리 안에 인접해 있어 교통·교육·의료 환경도 여타 대도시에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고.사회·복지 서비스를 유지하면서 뛰어난 자연 환경까지 갖춘 성주군은 맑은 공기와 관광객들을 매혹하는 풍광의 청정지역 귀농·귀촌 적합지로 호평 받고 있다.“최근엔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조용한 농촌으로의 귀농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져 전입 인구가 대폭 증가했다”는 게 성주군청의 설명이다.군은 이에 발맞춰 2021년 전입을 희망하는 귀농·귀촌인에게 이사 비용과 주거 임대료 지원을 위한 예산을 편성했고, 이를 반영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성공적인 귀농인들은 도시에서의 생활 안 부러워지난 2016년 성주군 성주읍에 귀농해 정착한 손병철(47)씨는 이제 하우스 12동에서 참외를 키워 연수입 1억6천만원을 벌어들이고 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성주참외 전문 농부’가 된 것이다.도시에서 건설업을 하다가 참외 재배를 하던 여동생 가족의 투병생활을 목도하며, 새로운 인생 설계와 함께 동생의 권유로 귀농을 결심했다는 손씨.그는 “여동생 가족과 함께 살아갈 방법을 궁리한 끝에 귀농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결정을 받아들여준 아내와 세 아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남편이자 아버지라면 어디서 무엇을 하건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 믿어준 가족 덕분에 망설임 없이 귀농할 수 있었습니다. 고마운 일이지요”라며 웃었다.손씨는 농사짓는 면적을 작게 하는 대신 관리를 세밀하게 하고 있다고 말한다. 참외 농사를 지으면서부터는 도시에서와 달리 가족들과 함께 있는 시간도 길어져 행복감도 커졌다고 한다.그는 귀농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이런 조언을 들려준다.“처음부터 욕심내지 않고 작게 시작해 성실하게 재배 면적을 늘려간다면 도시에서보다 더 큰 만족감과 수익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고, 스트레스도 받지 않을 것”이라고.이와 관련 성주군 농업기술센터는 “성주참외에 대한 다양한 지원과 귀농 교육 프로그램을 더욱 확대·발전시킬 것”이라며, “초기 강의와 교육 자료를 반복 학습해 귀농 선배들에게 잘 배우고, 스스로 적응하려는 마음가짐을 가진다면 누구나 성공적인 귀농을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서른한 살, 젊은 귀농인의 ‘성주 정착기’ 주목 받아표고버섯을 재배해 연 7천만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이주한(31) 씨는 세칭 ‘젊은 귀농인’이다.그는 경북대 농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농업법인에서 2년간 실무 경험을 거쳤고, 평소 꿈꾸던 농업창업을 위해 친척의 권유로 성주군 농업기술센터를 방문하게 됐다. 거기서 귀농창업 관련 자료를 보며 귀농 교육 중점사항까지 알게 됐고, 땅만 구해진다면 성주로 귀농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고향이 아닌 곳에서 출발해야 했던 이씨에게 ‘도시 근교 농업 가능지역’ 성주군은 매력적인 곳이었다. 젊은 청년농업인이 정착할만한 최적지였던 것.그의 현재 귀농 2년차. “전공과 다르지만 내가 좋아하는 작목과 기후 환경, 작물 재배·수확·포장 등 다양한 경험을 해볼 수 있었기에 향후 유망한 작물인 표고버섯을 키우기 시작했다”고 말한다.이씨는 “실현 가능할지 모르는 계획일지라도 농업에 대한 자신의 목표와 1년차, 3년차, 5년차, 10년차까지의 방향성과 가치관을 확고하게 세운다면 미래는 밝을 것”이라며, “구체적이고 수치화된 사업계획서를 작성해 꾸준히 실행하며 이를 발전적으로 수정해 나간다면 가족은 물론 이웃 주민들의 신뢰도 얻어낼 수 있을 게 분명하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사실 도시에 비해 농촌은 대부분의 것들이 주민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특징이 있다.이 때문에 일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다보면 언젠가는 인정을 받게 된다. 이를 젊은 귀농인 이주한 씨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귀농인이 필요로 하는 전 과정 효율적으로 지원성주군 농업기술센터에 따르면 매년 성주로 귀농하는 사람들은 170여 명에 이른다. 이들 중 70%는 성주참외 재배를 희망한다고 한다. “전국적으로 알려진 성주참외가 귀농 성공의 가능성을 높여주기 때문”이라고.성주군은 귀농인을 위한 다양한 지원과 교육을 통해 성공적인 ‘성주 정착’을 조력하고 있다.성주군으로의 귀농을 결심했다면 가장 먼저 성주군 농업기술센터와 귀농·귀촌정보센터를 방문해 전문가들의 상담을 받아보는 게 좋다. 이곳에서는 귀농 관심 단계에서부터 정착에까지 필요한 맞춤식 조언과 정보를 구할 수 있다. 귀농 희망자들의 여건과 적성, 기술 수준, 자본 능력까지 고려해 적합한 작목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는 것.올해 초 구축된 귀농·귀촌정보센터엔 방문과 전화 상담이 매일 10건 이상이다. 이는 예년에 비해 170% 가량 증가한 수치. “코로나 19 사태 등이 사람들의 귀농 욕망을 키우고 있다”는 게 센터의 진단이다.전문가들의 귀농 상담을 받았다면, 다음은 영농기술 습득을 위한 온·오프라인 교육과 자신이 기르고자 하는 작물에 맞는 정착지를 물색해야 한다. 이후엔 농지와 주택 구입, 영농계획 수립 등이 이어질 터. 성주군은 이 전 과정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각오다.또한 성주군농업기술센터는 귀농 농업창업, 귀농인 주택 구입, 귀농인 농어촌진흥지원, 신규 농업인 현장실습 등을 추진할 예정이며, 농촌사회 복지사업이라 할 농업 관련 융자 및 보조사업, 농기계 임대사업 등도 지원하고 있다.특히 ‘귀농인을 위한 융자사업’은 타 지역에서 성주군을 찾아온 새내기 농민들의 안정적인 정착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고 있다./전병휴기자 kr5853@kbmaeil.com

2020-12-03

리듬있는 삶의 공간을 짓다

복합시설, 도시계획, 재개발계획, 공동주택은 물론이고 도서관, 평생학습관, 체육관, 공연장 같은 공공시설까지, 도시가 필요로 하는 전반적인 프로젝트를 설계하시는 건축공학박사 이창환 씨를 토담건축사사무소 아래의 카페에서 만났다. 어떤 건물을 설계했는지 물으려는데 먼저 말씀해주신다. 누구나 익히 알 수 있는 건축물로 아양아트센터와 포항 뱃머리마을 평생교육원, 안동하회별신굿놀이공연장을 비롯해서 대구대, 금오공대, 영남이공대 등의 도서관과 체육관 기숙사, 대구대학교 경산캠퍼스 외의 다수 건축물을 이 건축사가 설계했다고 한다. 건축물은 한 번 짓고 나면 오래도록 그 자리에 머물며 주변 환경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라며, 항상 프로젝트마다 최선을 다 한다며 탁자에 두꺼운 책자를 내놓았다. 제목이 ‘콘셉트(concept)’인데 책장을 들추자 디자인이 돋보이는 건물의 위엄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 책자 안에 있는 건물이 모두 이 건축사가 설계한 건물들이었다.“그림으로 봐서 그런지 건물이 화려해 보이네요.”“공모전 중심으로 설계한 건물이어서 그럴 겁니다. 시대와 소통하면서도 지속성을 지닌 건물을 설계하는 것이 모든 건축가들의 염원인데, 공모전은 그 프로젝트만의 특별함으로 인정받아야 하고, 우선 실용적인 기능과 디자인이 두드러져야 하거든요. 설계경기에 치중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외양이 화려해졌어요.”“그 동안 지으신 건물 중에서 특별히 손꼽을 수 있는 건물이 무엇인가요?”“내 손으로 지은 건물이면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 중에서 인상이 깊은 건물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포항 뱃머리마을 평생학습원과 아양아트센터를 들 수 있겠어요.”연꽃 봉우리 같기도 하고 상모돌리기를 연상하게도 하는 뱃머리마을 학습관은, 문화의 장으로 지어진 공간 같지 않게 우아하면서도 내면이 실용적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지역민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지어진 점을 높이 들었다. 그런가 하면 아양아트센터는 적은 비용으로 다양한 공간을 담은 공공시설로서 실용적인 면에서나 기능적인 면에서 보나 체육과 문화를 함께 공유할 수 있게 잘 지은 건물이라고 했다. 뱃머리마을의 평생학습관이 외유내강의 건물이라면 아양아트센터는 내유외강의 건물이라고 할까. 언뜻 그런 생각이 들었다. 뱃머리마을의 학습관이 아름다운 외양으로 주목을 끌었다면 아양아트센터는 주변 환경 과 잘 어우러지고 내부시설 또한 수영장까지 빠짐없이 갖춘 실용성이 높은 건물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아양아트센터라면 팔공산이나 공항 가는 길에 동부의 랜드마크처럼 서 있는 건물이 아닌가. 친구가 거기서 날마다 수영을 하고 있으니.“큰 건물을 한 점 설계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려요?”“건물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아양아트센터는 거의 일 년 걸렸습니다.”이 건축사는 건축가이면서 의료재단 이사 또는 장학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대구 영광학원 특수학교의 장애인을 위해서 꾸준하게 기부를 해오고 있다. 설계사무실 운영과 대학교 건축학 학도를 위해 20년 이상 강의를 한 분이시다. 책자를 보니 함께 일하는 직원이 열댓 명이나 된다.“사무실 직원을 뽑을 때 특별한 기준이 있나요?”“저는 경력사원채용보다는 건축학과 5년을 졸업하고 3년 실무경력을 쌓아야 시험 칠 자격이 주어지는 졸업예정인 건축학도를 우선적으로 채용하고 있습니다.”그는 자신이 짓는 건물만큼이나 실용적인 그릇이다. 장래가 보이는 제자들이나 신입생들을 가르쳐서 크게 쓰려는 의식은 아무나 쉽게 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흔히 그러지 않는가. 잘 가르쳐서 일 좀 하겠다 싶으면 높은 임금을 찾아서 점프하는 것이 다반사이거늘. 아예 그렇게 하라고 자리까지 깔아주니 배우는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스승이다. 이런 사람이 더 많은 사회가 되어야 하는데, 돈의 논리 앞에 자신의 이익을 내줄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렇게 배워서 나간 인재들 중에 큰 회사나 건축설계 분야로 진출해서 잘된 제자들이 많다니 내가 다 고맙다.“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아름다운 건물은 어떤 것입니까?”“건축은 종합예술입니다. 건축을 제대로 알려면 팔십쯤, 한 생애를 살고 난 후에야 진정한 건축물을 알까 말까인데, 우리나라는 건축가들이 너무 일찍 피고 너무 일찍 시드는 경향이 있어요. 아까운 인재들이 너무 일찍 사라지는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젊을 때는 우선 봐서 형상이 특이하고 남들이 하지 않는 형태를 좋은 건축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며, 좋은 건축은 기능이 중요하기 때문에 생활하는 사람이 안락감을 느끼며 편해야 한다고. 이 건축사의 말씀에 의하면, 자기 집을 세 번만 지어보면 진정한 집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이 머무는 사무실을 짓는데 계획 기간만 6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자기 입장에서 집을 지어보면 모든 면에서 심사숙고의 시간을 거치기 때문에 비로소 건물다운 건물이 완성되는 과정을 실감할 수 있다. 건축은 사람과 같다는 말씀이 마음에 쏙 들어온다. 덕지덕지 화장을 한 모습보다 본래의 모습이 아름다운 건물이 진정한 건축물이라고. 계명아트센터를 짓기 전에 외국에 나가서 수많은 건물을 보며 공부를 했다고 한다. 붉은 벽돌과 흰색 벽돌의 조화로움으로 지어진 클래식한 건물이 눈앞에 훤히 떠오른다. 그곳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뮤지컬의 선율과 율동까지 생생하다. 건물을 지을 때 외관도 단정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기능성이 뛰어나야 하기 때문에 대학교육시설과 도시공간이 맞닿는 부분까지 생각하고 설계를 했는데, 나중에 건축물이 현상설계 당선작의 원안대로 보존되지 못하고, 필요에 의해, 외관이 변형되는 걸 보며 마음이 안 좋았다고 속내를 살짝 비추었다.“집값이 무섭게 치솟는 현상이 우리나라만의 것인지 아니면 전 세계적인 형상인지 궁급합니다.”“집값이 오르는 건 전 세계적인 현상이라고 봐야 합니다. 복합적인 문제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주택이 자본주의의 또 다른 권력으로 자리 잡고 있는 현세대에, 집의 재산적 가치와 둥지로서의 가치 중에서 어디에 더 큰 의미를 둬야 할지 모르게 되었어요.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요즘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은 부동산이 있으면 일단 사들이고 봅니다. 몇 층이고 환경이 어떤지에 대한 것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그들은 투자적 가치로서 부동산을 바라볼 뿐입니다.”오늘날 도시의 불균형이 극심한 것은 애초에 도시계획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온 나라가 아파트화 되는 비정상적인 현상이 불안한 미래를 예고하지만 이제는 너무 나가버려서 돌이킬 수 없게 되고 말았다.“건축에 대한 선생님만의 철학은 무엇입니까?”“건축물이 곧 사람입니다. 건축을 할 때 가장 먼저 그 집에서 살 사람을 생각해야 합니다.”건축물은 그 안에 들어가서 사는 사람들의 ‘삶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한다며, 자칫 건축가의 기호대로 건축물을 지을 우려가 있는데, 가장 조심해야 하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라고 한다. 남에게 보여주기보다 건축물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패턴에 맞추어서 지어야 한다고. 그 집에서 살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사는 사람이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는 집을 짓겠다는 마음이어야 한다고 귀띔해주신다.“건축을 할 때 혹시 전통을 생각하시는지요.”“영천시립도서관은 건물을 지을 때 전통을 의식하고 지었어요. 우리 전통 가옥의 서까래를 재해석해서 건축물에 인용하고, 그것을 새로운 기법으로 만들었고. 그런가 하면 뱃머리마을의 평생학습관은 우리 전통의 상모돌리기에서 착상을 가져왔는데, 부포를 세워 고갯짓을 할 때 연꽃 봉오리처럼 보이는 상모돌리기의 동작을 가져왔기 때문에,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건축물이 사물놀이 형태를 띱니다. 남쪽으로 형산강이 흐르고 있는 모습까지 건축물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어떤 건축을 남기고 싶으세요?”“일반인은 자기 집을 평생에 한 번 짓습니다. 한 번이기 때문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 세밀하게 설계해야 합니다. 의사는 의료사고가 나면 한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만 건축가는 그 속에 사는 사람 모두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의사들보다 더 조심해야 합니다. 가족 전부의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요.”점심시간이 되며 카페에 손님이 많아졌다. 의자소리, 말소리, 쟁반소리. 내가 앉아 있는 곳은 천장이 이층 높이 뚫려 있고,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식탁이 놓여 있는 카페 천장 위로 토담설계사무실의 모습이 살짝 비친다. 어쩌면 사무실 직원들이 카페로 점심을 먹으러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를 떴다./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0-12-02

문장에 능하여 선조대 문장 8대가 이산해, 평해 유배시절 수많은 詩文 남겨

향교는 사학인 서원과 달리 관학이라 도심지 주변 5리 내에 있어야 되기에 잘 옮기지 않는데 울진과 진보, 영덕, 영해 등 동해변에 있는 향교들은 자주 옮겼다. 그것은 행정구역의 변경이 가장 큰 원인이다. 평해도 원래 군으로 독립되어 있다가 울진군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읍성도 도심지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 도심 속에 있다보니 그 기능이 사라지고 도시화로 개발되면서 없어지는 운명에 처했다. 평해 읍성도 일부만 남아 그 흔적도 희미하다.#. 동네북이 된 평해사는 사람은 변함없는데 행정의 편의따라 동네북처럼 이리저리 마음껏 휘둘린 평해는 고구려 때는 근을어(斤乙於), 신라 때는 명주, 고려 때는 동계, 조선시대는 강원도에 속했다. 울진을 우진아현(于珍也縣), 평해를 근을어라 부르다 고려 초에 평해로 불렀으며 충렬왕 때 군으로 되었다. 1914년 강원도 평해군은 울진군에 흡수되고 평해면은 기성면에 편입되고 월송면이 평해면으로 된다. 1963년 강원도 최남단 울진군은 경상북도 최북단 군으로 바뀐다. 또 평해면이 1980년 평해읍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오늘의 평해는 행정의 변화에 따라 쇠락한 시골의 전형적인 면 단위 같이 북적대는 사람도 없고 한산하다. 평해 중·고등학교가 산언덕에 제일 큰 건물이 되어 웅장하게 버티고 있다. 읍사무소 오른편으로 가파르게 오르면 평해 향교가 산비탈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평해 향교의 역사는 1484년(성종 15년) 조선시대 지은 울진향교보다 127년 빠른 1357년(공민왕 6년)에 명수학교라는 이름으로 반월산 아래에 지었다가 1407년(태종 7년)에 김한철 군수가 지금의 성릉동으로 옮겨지었다. 우리나라 향교 어디를 가나 문은 잠겨있고 1년에 한두 번 제사지내는 것 뿐이다. 간간히 예절교실이나 충효교육 하는 것 외는 방치수준이라 완벽하게 제사지내는 반쪽 형식만 남았다.조선의 제도와 법의 기틀을 만든 삼봉 정도전(1342~1398년)은 “학교는 풍화지원(風化之源)인 동시에 인재가 이곳으로부터 배출되며 나라를 다스리고 어지럽게 하는 것은 결국 인재의 성쇠에 달려있고, 인재의 성쇠는 오로지 학교의 흥폐에 달려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향교는 서울의 성균관(태학, 국학)과 함께 국가의 지방관학으로 800여 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고려시대부터 시작한 향교는 조선에 들어와서는 지방의 관학으로 제향과 강학을 동시에 담당했던 곳이다. 조선에서는 각 지방에 1읍1교의 원칙을 두어 전국 각지에 1교씩 향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했다.#. 고향사람과 귀양자가 본 428년 전의 평해“풍진 세상에 무, 문관으로 분주히 살아왔다.(風塵奔走武文間), 나이가 들어서야 고달픈 새로 돌아왔다.(暮境方知倦鳥環). 크게 한하는 것은 고향마을이 도회지와는 멀리 떨어진 외진 곳에 꽉 막혀서 이곳 사람들은 좋은 스승을 만날 수도 없고 아무리 똑똑해도 배경이 없으니 중앙에 나아가 출세할 수도 없는 울진(평해)사람들을 보고 매우 가슴 아프다.그러나 이곳 고향 마을이 비록 작지만, 맑고 고요한 마을로 이곳은 호중계(壺中界·신선이 머무는 곳)라 한다고 하였다. 이곳은 태백산의 한 가지로 나누어진 모태(母胎)가 되는 산이며…. 황여일(1556~1622년)이 동래부사를 끝으로 고향 평해 기성 사동으로 돌아와 해월헌을 만귀헌으로 고쳐짓고 쓴 글이다.다음은 1590년 영의정이 된 아계 이산해(1539~1609년)가 2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국정을 잘못 운영해 왜적의 침입을 초래했다는 죄목으로 파직당하고 평양에서 다시 탄핵을 받아 강릉, 동해, 삼척을 거처 지금의 울진 평해로 와서 쓴 ‘기성풍토기’다.“내가 처음 유배지로 갈 때 기성 경내로 들어서니 날이 이미 캄캄하여 사동의 서경포에 임시로 묵게 됐다. 이 포구는 바다와의 수십 보가 채 안 되고 띠 풀과 왕대 사이에 민가 10여 채가 보였는데, 집들은 울타리가 없고 지붕은 겨릅과 나무껍질로 이어져 있었다. 맨땅에 한참을 앉았노라니 주인이 관솔불을 밝혀 비추고 사방 이웃에서 사람들이 구경하러 모여들었다. 그들은 남자는 쑥대머리에 때가 낀 얼굴로 삿갓도 쓰지 않고 바지도 입지 않았으며 여자는 어른 아이 없이 모두 머리를 땋아 쇠 비녀를 지르고 옷은 근근이 팔꿈치를 가렸는데, 말은 마치 새소리와 같이 괴이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방으로 들어가니 비린내 때문에 코를 감싸 쥐고 구역질이 나려 했으며, 이윽고 밥을 차려왔는데 소반이며 그릇이 모두 고약한 냄새가 나서 가까이 할 수가 없었다. 주인 할아범과 할멈이 곁에서 수저를 대라고 권하기에 먹어보려 했지만,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이에 내가 몹시 놀라 벽지에는 반드시 별종의 추한 인종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살고 있나 생각했다.”‘해빈단호기’에서는 그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바닷가의 단호(바닷가에 사는 미개인의 집)란 것으로 기성에만 열한 곳이 있으니 사동도 그 중 하나라 했다.연이어 ‘기성풍토기’를 일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토질이 척박해 곡식을 심기에 적합하지 않으니 분뇨를 거름으로 주지 않으면 양식을 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집집마다 거처 가까운 곳에 뒷간을 지어두는데 이는 남들이 분뇨를 훔쳐갈까 염려해서다…. 물은 맑지도 차지도 않으며 독한 기가 항상 자욱이 피어 병이 들었다 하면 거의 일어나지 못하는 탓에 온 고을에 노인이 적다…. 이 지방의 풍속이 귀신을 숭배해 집집마다 작은 사당을 짓고…. 여인으로서 다소 의식이 풍족 한자는 모두 무당이다. 성씨는 손씨와 황씨가 많고 명색이 향교에 소속됐다는 이들도 글은 모르고 모두 활을 잡는다. 인심은 순박한 듯하지만 실상은 싸움과 소송을 좋아한다…. 사람을 안장할 때는 대다수 산꼭대기에 묻고 혼인을 할 때는 굳이 먼 곳에서 배필을 구하지 않으며 예법은 소략하나 적서(嫡庶)의 구별은 분명하다…. 생산되는 어종은 은어, 복어, 광어, 방어, 대구, 문어 등인데 맛이 그다지 좋지는 않다.”#. 옛 평해의 특이한 사람들이보다 12년 전(1580년)에 45세에 강원도 관찰사로 온 송강 정철은 평해 군수의 융숭한 영접을 받으며 관동팔경 중 여기 평해에 월송정과 망양정 두 곳을 자신의 감정에 취한 신선의 입장에서 노래했다. 반면에 아계 이산해가 54세 영의정에서 3년이나 평해에 귀양살이 하면서 쓴 ‘안주부전’은 이런 내용이다. “내가 황보리에 와서 우거하게 되었을 때 마을 사람들이 다투어 인사차 왔는데 그 말석에 삿갓으로 몸을 덮었고 턱에서 땅까지의 거리가 한 자도 채 못 되는 사람이 있었다…. 아 참으로 매우 괴이한 일이다. 옛날에 한양서 보았던 그 여자도 여태껏 잊히지 않아 괴로운 터에…. 어쩌면 천지 사이에 사람으로서 형체를 갖추지 못한 자가 둘이 있는데 내가 이들을 다 본 것이 아닐까. 그런데 내가 황보리에 산지 오래되어 그 사람됨을 알고 보니, 언어와 응대가 보통사람들보다 훨씬 민첩하였고 인사(人事)와 조백(早白)과 곡절들을 모두 마음속에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몸은 불구이지만 마음은 불구가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씨름을 잘하여 상대와 붙었을 때는 마치 모기가 산을 흔들려는 것처럼 터무니없어 보이다가 비틀대는듯 상대의 가랑이 사이로 파고들어 허리춤을 잡고 다리를 걸면 누구도 손길 따라 넘어지지 않는 이가 없어 비록 무인이나 장사라 할지라도 그를 이기는 사람이 드물었다. 아들 넷을 두었다…. 아, 사람의 정신과 재기(才氣)가 육신에 구애받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러기에 사람으로서 불구인 자로, 미치광이,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 멍청이 등 이러한 사람들이 어찌 한량이 있으리오. 그렇지만 또 육신은 멀쩡하면서 마음이 불구인 자들이 있으니, 이 둘을 서로 비교해 본다면 과연 어떠하겠는가. 황보리에 살던 그 사람은 안(安)씨이고 이름이 응국(應國이다.”귀양은 개인적으로는 불행이지만 그 지역사람들에게는 선진학문을 배울 수 있는 행운이다.사람은 관직이 승승장구하고 거침없이 잘 나갈 때는 사물을 세밀하게 보지도 못하고 사람의 향기도 알지 못한다. 그러다가 귀양 가면 대부분 나락으로 떨어지거나 죽음인데 고통과 외로움을 잘 승화시키면 훌륭한 문학과 예술이 잉태되는 것이다. 이산해도 평해에 와서 글씨와 문장이 더욱 깊이가 있게 되었다. 1536년(중종 31년)에 아버지 이지번이 귀양 왔던 평해 곽간의 집에 자신도 귀양살이하는 운명의 인연에 아버지가 벽에 쓴 시를 보관하고 있었다. 이산해는 토함 이지함의 조카로 정치적으로는 동인에서 대북파의 영수였지만 글씨와 문학에도 뛰어났다. 그의 문집 ‘아계유고’의 시 840수 중 483수가 평해서 쓴 것이다. 허균은 “초년에는 당시를 배웠고 만년에 평해로 귀양가 있으면서 조예가 극도로 깊어졌다.”고 평했다.그러나 평해로 귀양온 그의 불행은 옷깃을 여미게 한다. 큰 아들은 20세에 이미 요절했고, 이덕형(1561~1613년)에게 시집간 둘째딸은 왜적을 피해 자결했고, 며느리도 죽고, 넷째아들도 병으로 죽었다.삼척부사 이사충의 아들 이윤은 어머님 병이 위독해지자 자신의 다리 살을 베어 드리고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드려 한 달을 연명케 하였고 아버지가 병이 위독하자 열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아버지의 입에 넣어 몇 달을 더 살게 하고 3년 시묘 살이 했던 효자비가 있다.이웃에 사는 안응준이란 일곱 살 아이는 어머니가 병으로 죽어가자 손가락 잘라 피를 넣어 아침에 깨어났다고 이산해는 적고 있다.1676년(숙종 2년)에 평해 출신 승려 처경(處瓊)은 소현세자의 유복자를 사칭하다가 처형당하는데 평해 손도의 아들로 용모가 매우 수려했다고 하는데 무슨 이유일까?./글·사진= 기행작가 이재호

2020-12-01

문경시, 코로나 선제적 방역… 지자체 우수 모델로 주목

코로나19의 세계적 확산은 우리에게 전례 없는 과제를 던져주며 삶을 변화시키고 있다. 코로나19의 확산세가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국내 코로나19의 3차 대유행이 본격화하는 분위기이다. 100명대에서 200명대, 300명대로 단계적으로 증가해 온 신규 확진자가 400명, 500명까지 치솟았다. 모임, 가족, 일터, 장례식장, 예식장, 운동과 음악 동호회 등 꼬리를 무는 일상감염이 전국을 휘감고 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문경시는 매번 전국 최고의 위기 대응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선제적인 예방과 방역 활동으로 전국 최고의 안전 도시, 청정 도시, 건강 도시, 더 나아가 감염병으로부터 안전한 도시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코로나 극복 1 · 예견과 선제적 대응문경은 주로 외부 요인에 의한 감염이 발생해 사실상 지역사회 감염은 낮은 청정지역이다.이는 코로나19 대확산을 예견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한 문경시의 조치 때문이다.올해 1월 코로나19 국내 확진자가 발생하자 즉각 비상방역대책반을 가동하는 등 정부 대응에 한발 앞서 심각단계 대응체제로 전환했다.버스터미널, 기차역, 관광지, 공공청사 등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곳엔 대인소독기를 2월부터 운영했으며, 전국 최초로 대인소독차를 이용해 찾아가는 방역을 실시 중이다.찾아가는 대인소독차는 지난 7월 중앙안전대책본부에서 전국 지자체를 대상으로 ‘코로나19 지자체 방역관리 실태 확인 점검’ 결과, 주요 수범사례로 선정돼 전국으로 소개 됐다.사회복지시설 내 코로나가 확산되던 3월에는 복지시설 25곳에 예방적 코호트 격리를 2주간 실시해 감염병 확산을 차단했다.이 시설에는 생활형 음압실(50실) 뿐만 아니라 외부로부터 오염물질 유입을 차단하기 위한 의류소독기와 위생복을 보급했다.병원에는 병실 부족을 해소하고, 코로나19 의심환자를 분리해 병원 내 감염을 차단하기 위해, 음압병실(4실)을 설치했다.음압병실은 에어 샤워기, 음압장비, 화장실, 냉·난방 장치 및 산소공급 장치 등을 갖추어 일반 환자들은 안심하고 병원을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4월에는 생활권이 상당히 겹치는 인근 지자체에서 2차, 3차 감염으로 의심되는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하자 공무원들은 주말도 반납한 채 마스크 쓰기 운동을 펼쳤고, 시민 건강 전수 조사를 실시했다.그리고 학교의 개학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승객이 많아지자 승객 및 운전기사를 보호하기 위해 대중교통 감염예방 차단막도 모두 설치(좌석버스 22대, 택시 285대) 했다. 식당, PC방, 노래방 등 다중이용시설과 종교시설에 대해서는 수시로 방역 활동 및 점검을 실시해 건강하고 안전한 문경을 지키고 있다.◇코로나 극복 2 · 경제도 손 놓을 수 없어사회적 거리두기가 강조되고 코로나19의 여파로 지역 경기가 어려워지자 시는 코로나19 확산방지와 경기 활성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위해 드라이브 스루 행정을 추진했다.먼저 상춘객으로 붐비는 문경새재 등 외지에서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밀집된 식당 내 식사를 꺼리는 것에 착안해 ‘드라이브 스루 문경 도시락’을 도입, 방문자와의 접촉을 최소화시켰고, 비대면 소비의 증가로 문경시 전 지역으로 확대했다.지역 내 경기 활성화를 위해 관외 및 해외로 가던 도움단체 선진지 견학 및 워크숍을 관내로 변경하고, 지역 내 관광업체 버스를 임대해 견학을 실시했으며, 간부공무원 등 택시 타기 운동을 추진해 지역 내 소비 촉진에 힘을 쏟았다.농업 분야에는 출향인 등을 대상으로 서한문 3천500통을 발송하고, 농산물 소비 촉진 운동을 전개해 약 2억 원의 지역 농특산물을 판매해 농업인에게 힘을 보탰다.◇포스트 코로나 대비 · 문경 뉴딜 프로젝트 추진(공공+민간)지난 5월 민관이 협력해 포스트 코로나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본부장을 시장으로 하고, 코로나19방역팀, 민생안정팀, 경제활성화팀 3개팀을 주축으로 하는 문경시 BC(Beyond Corona) 경제살리기 범시민 추진본부를 구성, 방역과 일상이 공존하는 문경 건설에 나섰다.또한 변화되는 사회 시스템에 대비하고 공공기관의 3밀(밀폐·밀접·밀집)을 개선하기 위해 공공청사 구조개선을 실시했다.먼저 사무실 내 거리두기를 실천하기 위해 시장 접견실을 과감히 축소했으며, 밀집도가 높은 민원실의 구조 개선을 위해 이용이 저조한 구내식당을 과감히 폐쇄해 농협 및 은행을 기존 구내식당으로 이동 배치하고, 사무실에 거리두기가 가능하도록 공간을 넓히고, 국가 방역의 소통 창구 역할을 하고 있는 영상회의실을 확장시켰다.특히 읍면동 행정복지센터의 구조를 전면 재배치해 민원인과 공무원 모두가 안전하도록 시스템을 변경했다.지난 9월부터는 민간시설로 확대해 전국 첫 감염병 예방시설 지원사업을 시작했다.전국적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음식점과 학원, 헬스장, 탁구장, 노래방, PC방, 숙박업 등 감염병 예방시설이 필요한 지역 내 소상공인 업소를 대상으로 환기시설(환기구, 환기창, 환기덕트, 가림막 설치 등), 환기 및 소독 물품(공기살균기, 소독기 등) 및 사업장 내 환경개선(입식시설, 주방시설, 화장실 등)을 위한 감염병 예방시설지원 뉴딜사업에 30억 원을 투입, 사업비의 90%를 지원하며, 업체 수는 약 600개에 달한다. 이는 감염병으로부터 안전한 문경을 만듦과 동시에 건설 경기에 활력을 불어넣어 지역 경제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제22회 문경찻사발축제는 랜선타고 함께 해요!문화체육관광부 지정 명예문화관광축제인 2020 문경찻사발축제가 1일부터 15일까지 ‘랜선타고 ON 문경찻사발이야기’란 주제로 온라인(www.sabal21.com)으로 개최한다.문경찻사발축제는 사기장과 망댕이가마, 차(茶)와 찻사발을 테마로 해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지역문화를 알리기 위해 1999년 시작했으며, 문경지역의 전통 도자기를 매개체로 그동안 문경의 문화, 관광자원, 특산물을 대외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해오고 있다.2012년부터 2016년까지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5년 연속 최우수축제를 거쳐 2017년, 2019년 문화체육관광부 대표축제에 선정됐으며, 2020년 명예문화관광축제로 지정됐다.올해로 22회째를 맞이하는 문경찻사발축제는 코로나19라는 새로운 상황 속에서 축제 전용 플랫폼을 구축해 도자기시장 확장뿐 아니라 언택트 축제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전 세계인 모두가 시간과 지역의 제한 없이 즐길 수 있는 온라인 축제의 장점을 살려 문경도자기의 전통성과 예술성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기회의 장이 되도록 만들어 나갈 예정이다.이번 축제에는 문경지역 전통 장작가마를 사용하는 35개 요장이 참가했으며, 차담이 TV에서 도예가들의 영상을 만나볼 수 있다.주요 축제 내용으로는 △미스터 트롯 ‘김수찬’과 함께하는 랜선타고 ON 온라인 개막식을 시작으로 △배우 ‘이광기’의 실시간 명품경매 △요즘 자연인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개그맨 ‘윤택’의 시골알바 △종이접기의 대가 ‘김영만’선생님, 게임 유튜버 아진쌤과 함께하는 놀러 ON 금손 △문경출신 인기 웹툰작가 ‘귀찮’의 찻사발 드로잉 △차담이 문경랜선 투어 △집콕 연극제 ‘사발, 내사발’ 등 다양한 콘텐츠로 대중과 만난다.문경찻사발축제의 메인 콘텐츠인 도자기 전시 부분은 ‘내 손안에 전시관’을 통해 온라인으로 만날 수 있으며, 문경도자기박물관과 문경도자기홍보판매장에 축제기간 동안 전시된다.21년간 문경찻사발축제의 변천사도 한눈에 볼 수 있다.명예문화관광축제 기념 문경도예 특별전과 소원 접시달항아리 희망전은 코로나19 상황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길 바라는 문경시민의 마음을 담았다.2020 문경찻사발축제는 인터넷 검색창에 ‘문경찻사발축제’를 검색하거나 유튜브 ‘차담이TV’ 검색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이와 함께 △행복 한사발 집콕 키트 후기공모전 △문경찻사발축제 추억의 사진앨범 이벤트 △축제 실시간 방송참여 이벤트 △도자기 구매자 대상 경품 추첨 △설문조사 참여 △축제 사전홍보(제22회 문경찻사발축제 22글자 축하글, 찻사발댄스 챌린지)등 다양한 이벤트를 계획하고 있다.문경시 관계자는 “새로운 시도로 색다른 콘텐츠로 구성된 ‘2020 온라인 문경찻사발축제’가 문경도자기만이 가진 매력으로 지친 마음에 위안이 되고 지역경제 활성화에 새로운 촉매제가 되길 소망하고 있다”고 말했다./강남진기자 75kangnj@kbmaeil.com

2020-11-30

젊은 기자, 한국 역사와 정치를 논하다

‘기자 유성운’을 처음 만난 건 13년 전 몽골 울란바토르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였다. 동아일보에 막 입사한 신입이었던 그는 용모가 반듯했고 예의가 깍듯했다.3박4일의 일정을 함께 하며 곁에서 지켜보니 취재에도 열심이었고, 문장도 탄탄했다. 이른바 신언서판(身言書判)을 두루 갖춘 청년. 역사를 전공했다는 유성운은 기자보단 학자, 또는 소장 연구자에 가까운 사람이란 인상기가 남았다.그 주관적 판단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중앙일보로 자리를 옮긴 그는 정치부에서 일하며 ‘유성운의 역사·정치’라는 글을 연재했다. 기존의 정치 기사에서는 볼 수 없던 파격이었다. 신문 구독자들의 관심도 높았다. 수십 편의 역사 관련 논문을 검토하고, 이를 21세기 한국 정치·사회 현실 속에 어색하지 않게 녹여내는 15년차 중견 기자로 성장한 것이다. 시간과 고민을 쏟아부어 쓴 글은 반드시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 그에겐 일종의 팬덤(Fandom)도 생겼다.‘리스타트 한국사 도감’은 최근 출간된 유성운의 책이다. 앞서 말한 ‘유성운의 역사·정치’를 다시 다듬고 깎아 만들어낸 땀의 결과물.‘유성운의 역사·정치’를 보완해 출간된 ‘리스타트 한국사 도감’.▲흥미 유발하는 영남 유림의 이야기도 다수 담겨책은 크게 5개의 장으로 구성됐다. 고대인 삼국시대의 역사를 오늘날 현실 정치와 연결시키는 게 그 출발점. 이후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는 ‘국왕’ ‘사림(士林)’ ‘임진왜란’으로 세분해 각각의 역사에서 21세기 지금의 정치와 연계시킬 지점을 찾아내고 있다. 순서대로 읽어도 좋지만, 어떤 한 부분을 따로 읽는다 해도 독서의 흐름은 방해받지 않는다. 개별 원고마다 완결성을 갖추고 있어서다.자유분방한 유성운의 문체는 ‘딱딱하고 재미없다고 오해받는 역사와 정치’에 부드럽게 칠해진 향기 좋은 윤활제가 되어준다.유성운은 저자 서문을 통해 “책에 담긴 글들은 한국사를 전공한 정치부 기자의 공부 노트”라고 고백했다.이 ‘공부 노트’의 가독성을 높여주는 건 출판사가 정성 들여 책 속에 넣은 수백 가지의 지도와 도표다. 그것들만 봐도 책의 대략적 지향과 핵심이 파악될 정도. 출판 과정에서의 수고가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개인적인 느낌을 말한다면 ‘신라에 나타난 처용은 페르시아 왕자인가?’ ‘영조는 왜 10여 년이나 금주령에 집착했을까?’ ‘성리학의 거두 이황은 수십만 평 땅부자였다!’였다란 소제목이 붙은 글들이 인상적이었다. 아무래도 기자가 생활하는 공간이 경상북도이기에 신라와 영남 유림의 큰 스승으로 불리는 퇴계 이황의 이야기에 관심이 갔고, ‘금주령을 엄격하게 지키려 했던 영조의 고집은 어디에서 연유했을까’란 의문은 주당으로서의 관심이었다.이외에도 ‘김춘추와 금춘추, 왜 김씨 발음이 변했나?’ ‘왕건이 호남 차별을 정말 유훈으로 남겼나?’ ‘토지개혁 외친 건국 공신, 경기도 땅 20% 챙겼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이 망하지 않은 이유’ 등으로 명명된 챕터도 적지 않은 독자들이 무릎을 치며 읽을 듯하다.공부하는 기자, 특정 분야에서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갖춘 기자가 드문 시대다. 많은 기자들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오만 가지 사건을 따라가려면 그것만으로 지치고 시간이 없다”고 항변한다. 유성운은 이 항변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는 ‘드물고 귀한 기자’다.“역사칼럼 쓰는 나… 김구라가 알아봐서 깜짝 놀랐어요”인터뷰 ‘리스타트 한국사 도감’의 저자 유성운‘리스타트 한국사 도감’을 읽은 후 몇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유성운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대면했다면 보다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겠지만, ‘코로나19 사태’를 무시할 수 없었다. 해서 인터뷰는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진행됐다.-역사와 현실 정치를 결합시키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책을 쓴 이유는.▲마크 트웨인은 “과거는 그대로 반복되지는 않을지라도, 분명 그 운율은 반복된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역사를 배울 때는 크게 느낄 수 없었는데, 신문사 입사 후 정치부에서 일해보니 역사의 운율이 다시 반복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를 들어 고려 시대 권문세족의 대토지 소유를 비난하며, 조선을 개창한 신진사대부들이 기득권으로 변모한 과정은 요즘 새로운 기득권으로 자리 잡은 586세력을 떠올리게 한다. 또 세계 최강대국 몽골을 상대로 극단적인 고립과 투쟁을 40여 년간 펼쳤던 고려의 상황은 현재 미국을 상대로 저항하는 북한과 비슷한 면이 있다. 서울에 집을 마련하느라 고군분투했던 18세기 사람들의 모습은 지금 집값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시민들과 다르지 않다. 역사라는 학문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 길잡이 역할이 아닐까? 우리가 서 있는 지점을 어떻게 바라보면 좋을지 고민을 나눠보고 싶었다.-집필 과정에서의 에피소드는.▲역사를 다시 공부하면서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됐다. 2006년 대학을 졸업했는데, 이후 학문적 성과가 많이 쌓여 있었다. 예를 들어 내가 학교 다닐 때는 조선시대 토지 단위인 1결이 도대체 어느 정도의 크기인지 알 수 없었다. 생산량에 따라 정했기 때문에 토지 비옥도에 따라 1결의 크기가 달라졌다. 그런데 지금은 연구가 거듭되면서 몇몇 지역에선 대강을 파악할 수 있게 됐다. 그에 따라 퇴계 이황이 경북 일대에 수십만 평의 토지를 가졌던 거부란 것도 알 수 있었다.-‘유성운의 역사·정치’를 꽤 오래 연재했다. 기억에 남는 독자는.▲기자 생활하면서 좋은 기사를 많이 썼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그때는 별 반응이 없던 분들이 ‘역사·정치’에 반응을 보인 경우가 많았다. 검찰 간부, 교사, 해외 교포 등 의외의 분들이었다. SNS상에선 친구가 많이 늘었다. 대부분 중장년 남성이다. 기사가 여당에 비판적이었는데도 잘 읽었다며 전화를 준 여당 사람도 있다. 김구라 씨도 기억에 남는다. 지난 2월 만났는데 명함을 줬더니 “아, 그 중앙일보에 역사 칼럼 쓰시는 분이죠?”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독자들이 어떤 것에 포커스를 맞춰 책을 읽었으면 하는지.▲갈등이 첨예화하고 선과 악의 이분법이 횡행하는 시대다. 그 갈등을 증폭시키는 기제 가운데 역사가 있기도 하다. 불행한 일이다. 과거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 보여줬듯 역사를 지지층 결집과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광기로 이어진다. 그래서 이런 점에 대한 경계를 삼고자 정리한 원고들이 있다. 관심을 부탁한다. 더불어 우리의 시각으로만 남을 재단하면 우리 모습을 제대로 보기 어렵다. 그런 이유로 소위 ‘국뽕’이라는 것을 걷어내고 담백하게 한국의 과거를 보고자 했다. 세종이나 정조에 대해서도 평가가 후하지만은 않다. 실망할 독자도 있을 것이다.-당신이 바라보는 오늘날 한국 정치는.▲훈구파와 사림의 대결과 유사한 구도다. 훈구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한데 이들은 조선 건국세력이다. 성리학을 건국 이념으로 삼긴 했지만 매몰되진 않았다. 계급 이동의 사다리도 작동했고, 부(富)에 대한 인식도 부정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후 나온 사림들은 이들을 손가락질 하면서 정통 성리학 사회로 탈바꿈시켜야 한다고 봤다. 그들이 사상투쟁에서 결국 승리했고,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 후기다. 먹고 사는 문제보다 이념이 중요하고, 상대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매장하는 사회였다. 지금 그 2라운드가 벌어지고 있는 듯해 걱정스럽다.-앞으로의 계획은.▲기후 변화와 조선 사회의 변동을 엮어보는 작업을 꼭 해보고 싶다. 쉽지 않은 주제이니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11-26

“등록금 걱정 없이 마음껏 꿈꾸고 배울 수 있어요”

경북도립대학교는 작지만 강한 명품 대학이다. 대학에서 10분 거리에 도청 신도시가 들어섬에 따라 그동안 약점으로 지적됐던 청년 문화 공간 부족 문제가 해소되어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맞고 있다. 인구 10만의 도청 신도시가 2027년 완성되면 경북 북부권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가 될 전망이다. 경북도립대학교는 이러한 기회를 발판 삼아 경북을 넘어 전국 일류 공립대학으로서 거듭날 준비를 하고 있다.□ 학자금대출이 필요 없는 공립대학경북도립대학교 학생은 등록금 걱정이 없다. 2021학년도 등록금은 학기당 약 122만 원(대학정보공시기준)으로 전국대학 평균 등록금의 42%에 불과하다.2018학년도부터 신입생의 입학금을 폐지해 교육비 부담을 더 낮췄다. 등록금 부담이 없다고 장학혜택이 적은 것은 아니다.2019년 한 해 동안 재학생 1인당 장학금은 평균 188만 원(대학정보공시기준)이다. 특히 사회적 약자와 저소득층을 위한 다양한 장학제도를 마련하고, 아동보호시설에서 진학한 학생에게는 등록금을 전액 면제할 뿐만 아니라 생활비를 지원해 공립대학으로서의 공공성 강화라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든든한 경북도가 설립하고 지원하는 공립대학인 경북도립대학교는 미래를 이끌어갈 대학생들이 교육비 걱정 없이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배우고 익힐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2019년 유지취업률 전국 도립대 중 1위경북도립대학교의 2019년 취업률은 70.9%다. 단순 취업률은 전국 평균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단순한 취업률이 아닌 취업의 질을 측정하는 유지취업률을 봐야 졸업생들이 얼마나 양질의 일자리에 취업했는지 알 수 있다.유지취업률은 대학 졸업생이 취업 후 취득한 건강보험직장가입 자격을 유지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취업의 질을 측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손꼽힌다.교육부는 대학별 유지취업률을 매년 4번 조사하는데 경북도립대학교는 2019년 4번의 유지취업률 조사에서 전국 도립대학 중 3월(90.2%, 1위), 6월(87.5%, 1위), 9월(83.2%, 1위), 11월(81.5%, 1위) 모두 1위를 기록, 경북도립대학교 졸업생들이 질 좋고 안정적인 일자리에 취업하고 있음을 증명했다.□ 공무원이 되고 싶다면 경북도립대학교를 선택하라경북도립대학교는 공무원 양성대학으로 유명하다. 지난 3년간 일반행정직, 사회복지직, 토목직, 소방직 등 97명이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또한 2019년 대학정보 공시를 분석한 결과 경북도립대학교 졸업생이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에 취업한 비율은 18.6%로 전국 전문대학의 4.1%보다 4배 이상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거기에 더해 2019년 9월부터 공무원 집중 양성을 위한 ‘공무원 양성원’(기숙형)을 운영,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기숙사비와 식비, 교재비 및 인터넷 강의비 지원, 성적 우수자 장학금 지원, 무료 특강, 개인 독서실 지원 등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현장 직무능력 중심 교육으로 산업체가 원하는 인재 양성경북도립대학교는 현장 직무능력 중심의 교육과정을 운영한다. 전공별로 학생들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편성하고 100여 개 산업체 및 기관과의 업무협약을 바탕으로 현장실습을 강화해 직업교육의 명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이렇게 직무능력을 갖춘 경북도립대학교의 인재는 해외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국내 최고 자동차 판금 및 도장기술력을 인정받는 자동차과는 호주 등 해외지역까지 전문 인력을 공급하는 등 현장 직무능력 중심 교육과정의 모범이 되고 있다. 앞으로도 대학은 산업 현장에 최적화된 인재 양성에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제2기숙사 신축으로 학생복지 극대화농촌 지역 소재 대학이라도 불편함은 없다. 경북도립대학교 인근에 위치한 도청 신도시에는 대학생이 즐겨 찾는 각종 프랜차이즈 매장들이 즐비하다. 사실 학생들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대학이 강의, 특강 등 촘촘한 교육과정을 제공하기 때문에 불편할 여유도 많지 않다. 교육과정이 촘촘한 만큼 재학생 10명 중 6명 이상이 기숙사에서 생활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한 기숙사를 제공하고 있다.2021년에는 대지면적 8만3천72㎡, 지하 1층, 지상 4층의 156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를 신축해 학생들에게 더욱더 나은 교육환경을 제공할 계획이다.또한 기숙사에 입사하지 못한 영주·안동·점촌·상주 등 학교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사는 학생들은 매일 운행하는 통학버스로 등·하교할 수 있으며 대구와 구미, 청주, 서울에 사는 학생들은 매주 운행하는 통학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물론, 통학버스는 무료다.□ 받은 것보다 더 돌려주는 대학, 꿈과 미래를 만드는 대학대학이 학생들에게 등록금이나 계절학기 수강료 등으로 받은 금액 대비 대학이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 투자한 금액을 비율로 나타낸 교육비 환원률이라는 지표가 있다.경북도립대학교 2019회계연도 재무보고서에 따르면 경북도립대학교의 교육비 환원률은 610%이다. 쉽게 말해 대학이 매년 학생들에게 받은 것의 6배를 돌려주고 있다는 의미이다. 대학의 취업률, 교육비 등 대학 선택의 기준은 여러가지다. 경북도립대학교는 공립대학인 만큼 재학생들이 자신의 꿈과 미래를 차곡차곡 준비할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하고 있으며, 졸업 후 학자금대출에 발목 잡히지 않고 성공적인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경북도립대학교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교육부, 중소벤처기업부로부터 각종 국책사업에 선정되는 등 명실상부한 명문 공립대학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신도청시대 중심대학으로서 경북 도정 발전 전략의 싱크탱크, 지역공동체 HUB 기능 등 공익적 역할이 앞으로 더욱더 기대되고 있다.정병윤 경북도립대학교 총장은 “우리 대학은 경북도가 설립하고 300만 도민이 후원하는 작지만 강한 실용 명문 대학으로 앞으로도 공립 고등 교육기관으로서 주어진 소임과 사명에 최선을 다할 것이며, 이와 관련한 교육 투자를 아낌없이 전폭적으로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며 “이를 통해 새 경북 시대 중심대학으로 거듭나겠다”라고 말했다.한편 경북도립대학교는 12월 7일까지 2021학년도 신입생 수시 2차 모집을 실시한다. 선발인원은 전체 모집인원 413명 중 정원 내 54명, 정원 외 4명으로 총 58명을 모집하고 수시 2차 학과별 정원 내 전형 모집인원은 ▷자동차과 5명 ▷소방방재과 3명 ▷토목공학과 4명 ▷전기전자과 4명 ▷군사학과 2명 ▷응급구조과 5명 ▷보건미용과 2명 ▷축산과 5명 ▷지방행정과 주간 9명, 야간 8명 ▷사회복지과 3명 ▷유아교육과 3명 ▷생활체육과 1명이다.모집 시기별 한 번만 지원 가능하며 중복 지원할 수 없다. 수시모집은 일반고특별전형을 제외한 모든 전형에서 면접을 시행하며, 면접은 12월 11일부터 12일까지 양일에 걸쳐 진행한다. 합격자 발표는 12월 16일이다./정안진기자 ajjung@kbmaeil.com

2020-11-26

목 베인 피가 냇물을 이뤄 흐르다 멈춰 끝난 곳 ‘피끝마을’

조선 500년, 가장 애틋한 아픔이 서린 우리 역사의 흔적이 영주시에 남아 있다.금성대군의 단종복위 실패로 이어진 대학살로 피로 물든 강줄기의 끝자락이라는 이름의 피끝마을.단종복위 1차 실패로 금성대군이 순흥도호부(영주)로 위리 안치 됐던 곳.단종복위 실패로 죽음을 맞이한 금성대군의 충절을 받들어 신격화해 현재까지 이어지는 두레마을 성황제가 열리고 있다.단종으로부터 왕권을 찬탈한 수양대군은 권력의 화신인가, 왕권 강화를 위한 결단이었나. 순흥은 역모의 땅인가, 충절의 고장인가를 두고 현재까지 다양한 의견들이 이어지고 있다.◎ 피끝마을영주시 안정면 동촌1리의 다른 이름이며 조선 시대 단종 복위 운동과 관련이 있다.마을 이름은 ‘피’가 냇물을 따라 흐르다 멈춰 ‘끝’난 곳이라는 데서 유래한다.1457년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의 단종복위 거사가 실패하자 세조의 측근인 한명회와 6촌간인 안동부사 한명진이 군사를 이끌고 와 순흥도호부에 불을 지르고 인근 백성을 무참하게 죽였다.그리고 다시 한양에서 철기병이 출동해 2차 학살을 저질렀다.이로 인해 당시 도호부였던 순흥은 황폐화되고 근방 30리 안에 산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전해진다.(정축지변) 당시 순흥과 주변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284호에 1천679명이 살았지만, 단종복위 사건으로 300여명의 백성들이 희생 됐을 것으로 현재 역사가들은 추론하고 있다. 단종애사의 묘사에 따르면 순흥 청다리 아래 목 잘려 죽은 사람들의 피가 죽계천을 타고 4km나 흘러 멈춘 곳이 지금의 동촌1리이며, 때문에 ‘피끝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순흥에 본적을 두고 있던 순흥 안씨는 이때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전해진다. 단종복위 사건으로 당대 최고의 명문가인 순흥 안씨는 평민으로 추락하고 대부분 순흥을 떠나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 순흥도호부 (지금의 순흥면)순흥은 역모의 땅이라 해 온갖 차별을 받게 되고 당시 도호부였을 만큼 컸던 순흥은 이 사건을 계기로 폐부가 되고 행정 구역은 각각 영천(榮川), 풍기, 봉화로 나뉘어져 통합 되게 된다.순흥에 소수서원을 세운 주세붕이 정축지변 당시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이 밤마다 울어대자, 이들을 달래고자 바위에 붉은 글씨로 경(敬)이라 새겼다는 ‘경자바위’의 유래가 조선 후기의 유학자인 이야순(1755년 ~ 1831년)의 글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경자 바위는 소수서원 내 죽계천변에 현존하고 있다.금성대군 역시 이때 잡혀 죽임을 당했으며 왕실 족보인 종적에서 지워지기까지 했다.이때 연루된 인물들은 영조 14년에 이르러 복권된다. 그리고 영조 18년 금성대군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기 위한 금성단이 순흥에 세워진다.현재도 지역 주민들이 어린이들을 놀릴 때 ‘순흥의 청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하는데, 흔히 전해지는 것처럼 방탕한 유생들의 사생아들을 이 다리에 버려 키운 것이 아니라, 정축지변 당시 고아가 된 어린 아이들이 이곳에 버려졌다가 키워진데서 유래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금성대군은 어떤 인물인가이름은 유(瑜).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며, 단종의 숙부이다. 1433년(세종 15) 금성대군에 봉해졌다. 수양대군이 정권탈취의 야심을 갖자, 형의 행동에 반대하다 1455년 단종 3년 모반혐의로 삭녕에 유배되고, 다시 광주로 옮겨졌다.1456년 성삼문·박팽년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이 실패하자, 이에 연루돼 경상도 순흥(영주)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이곳에서 부사 이보흠과 함께 고을 군사와 향리를 모으고 도내의 사족들에게 격문을 돌려서 의병을 일으켜 단종복위를 계획했으나, 거사 전에 관노의 고발로 실패해 반역죄로 처형당했다.금성대군의 묘소를 찾던 순흥부의 주민들은 금성대군이 사약을 받고 사사된 곳에서 그의 혈흔이 묻은 돌을 발견하고 주변에 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다.이를 금성단이라 하고 현재 영주시 순흥면 소수서원 인근에 있다.금성대군 혈석을 모신 두레골 서낭당은 영주시 단산면 단곡3리 소백산 국망봉 동편 기슭에 있다.◎ 금성대군을 모신 두레골 성황제조선 후기 때 순흥고을에 사는 이선달이란 사람이 꿈을 꾸었는데 금성대군이 나타나 “내 피묻은 혈석이 죽동 냇물에 있으니 이를 찾아 거두어 달라”고 하면서 돌의 모양도 알려 주었다.이선달은 이튿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죽동 냇물을 뒤져 돌을 발견하고 죽동 서낭당에 안치하게 된다. 순흥 사람들은 매년 정월 대보름날 정성을 모으고 소를 잡아 제사를 지냈다.구한말에 이르러 왜군이 나타나 행패를 부리고 서낭당에 침을 뱉는 등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이 무렵 어느 주민의 꿈에 금성대군이 또 나타나 “죽동 서낭당은 있을 곳이 못되니 청결한 자리로 옮겨달라”고 일렀다.이로인해 금성대군의 혈석은 소백산 국망봉 바로 밑 두레골에 옮겨서 모시게 되었는데 이 일을 주관한 사람들이 바로 상민(常民) 자치기군인 순흥초군청이었다.두레골 성황당이 특이한 것은 접시에 참기름을 붓고 심지를 넣어 만든 성화(聖火)로 사당을 밝히는 것과 황소를 잡아 즉석 제물로 올린다는 것, 엄동설한에도 제관들이 계곡 얼음을 깨고 목욕재계하는 것, 옛 나무꾼들이 새옹에 밥 짓는 방법으로 장작불에 밥을 지어 새앙을 올린다는 것 등이 있다.순흥초군청은 “우리나라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두레골 성황제는 무형문화재로 등재 돼야 하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야 한다며 현재까지 내려오는 순흥초군청 관계자들과 지역민들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단종 그는 누구인가단종은 1441년(세종 23)에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홍위(弘暐)다. 1448년(세종 30) 8세의 나이로 왕세손에 책봉되고 1450년 문종의 즉위와 함께 왕세자가 됐다.1452년 5월, 문종이 죽으면서 왕위에 올랐다. 이때 단종의 나이 12세였다.단종은 즉위 1년 만에 숙부인 수양대군이 일으킨 정란(靖亂)으로 유명무실한 왕이 되고 1454년 1월에 송현수(宋玹壽)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단종과 정순왕후 사이에는 후사가 없었다.1455년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1457년(세조 3) 6월에 성삼문, 박팽년 등의 집현전 학사들이 단종 복위 운동을 펼친 것을 기화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됐다. 이때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노산군으로 강등됨과 동시에 영월로 유배된 단종은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계획이 사전에 발각됨에 따라 사약을 받았다./김세동기자 kimsdyj@kbmaeil.com

2020-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