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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행복한 희망’ 도시재생으로 변화의 새 바람 불어넣어

이승율 청도군수의 민선7기 3년은 코로나19의 큰 위기 속에서도 안정적인 군정 추진과 전략사업·공모사업 발굴로 지역 발전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2019년 30건, 627억원이었던 공모사업이 2020년에는 청도 보건소 신축 등 47건 842억원으로 늘고 올해 상반기에만 16건에 721억원의 사업비를 확보했다.이를 바탕으로 2021년 예산이 군 최초로 5천억원을 넘어섰다.2020 대한민국 환경대상 등 각종 기관 평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전국 228개 시·군·구 중 ‘삶의 만족도’에서 4위를 차지하는 등 지역민이 안심하고 살기 좋은 지역으로 변해가고 있다.이청득심(以聽得心, 귀 기울여 경청하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최고의 지혜)을 올해의 사자성어로 삼아 소통과 변화의 현장 행정을 이끈 이 군수의 군정 성과와 방향을 살펴본다. ◇지속 가능한 미래 농업생태계 구축청도는 농업도시로 미래 먹거리 확보가 최우선 과제로 공모사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예산을 확보했다.군은 안정적인 농업기반 조성을 위해 남성현지구 과실전문생산단지 조성과 가마실, 덕암, 쇠실, 문수, 내동지구가 공모에 선정돼 사업을 추진 중이며 원동, 운산지구는 신규 공모를 준비하고 있다.또 딸기 하이베드단지 조성, 기후변화에 대비한 아열대 작물 실증센터 건립, 신소득 작목 개발과 특화작물 육성, 농산물가공센터 운영, 농업인 조직체 가공 플랜트 구축, 농촌체험관광 확대 등 6차 산업 육성과 농업 부가가치 향상을 위한 다양한 농업정책을 추진했다.농산물 가격안정기금 조성과 농산물 집하장 건립, 농특산물 공선장 및 로컬푸드 매장 확대, 농특산물 온·오프라인 마케팅 및 해외수출 지원 강화 등 농가소득 증대를 위한 유통체계 구축으로 성과를 거두고 있다.농가 일손 부족 해소를 위한 농촌일자리지원센터 운영과 귀농 귀촌 종합지원센터와 농민사관학교 운영, 청년 농업인 육성 등 미래농업 전문인력을 양성하고 농기계임대사업소 확대 운영, 농기계 택배 서비스, 농작물 재해보험 등 농민의 복지와 편의 증진에 적극적으로 노력했다.특히 청년들이 초기 부담 없이 고소득 스마트 팜 농업에 진입할 수 있는 임대형 스마트 팜 조성과 대형 APC 건립, 농산물 안전분석실 건립 등 미래 지역농업을 위한 구상을 구체화하고 있다.◇따뜻한 군민 맞춤형 사회 안전망 확충지역 특색을 살린 어르신들을 위한 노인복지기금 모금액이 애초 계획했던 30억원을 넘어선 31억원에 이르고 노인 일자리와 사회활동 지원, 노인 맞춤 돌봄 서비스, 저소득 독거노인 간병비와 화장장려금 100%를 지원했다.대중교통 취약지역에 행복버스와 행복택시를 운영하고 나눔 냉장고무료 빨래방 운영, 복지신문고 운영, 건강마을 조성 등 찾아가는 현장 복지서비스를 제공했다.시니어복지타운과 자원봉사센터, 생활문화센터를 아우르는 복합시설 청도드림생활봉사센터, 풍각보건지소 건립, 청도군 보건소를 이전 신축, 건강생활지원센터 조성으로 최상의 보건·의료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장애인의 삶의 질을 위해 장애인복지관을 건립하고 나눔 숲 조성, 월곡 장애인복지회관 리뉴얼 등으로 지역주민과 함께 소통하고 화합할 수 있는 공간도 새롭게 조성한다.출산장려금 지원 확대, 외래산부인과 운영 등 저출산 극복을 위한 시책 추진과 가족센터 건립, 민간어린이집 국·공립 전환 운영, 공동 육아 나눔터 및 다함께돌봄센터 개소, 학교급식 지원 등으로 아이 키우기 좋은 환경도 조성했다. ◇신성장 산업 육성 및 지역경제 활성화새로운 성장산업을 찾고자 노력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 청도자연드림파크 조성이다.지역을 획기적으로 변모시킬 청도자연드림파크는 298㎢ 규모에 2천657억원이 투자돼 자연드림치유센터, 친환경 농산물 단지 및 신소재 연구센터 등이 조성되고 800명 이상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역점사업으로 2025년 준공한다.또 화양읍 삼신리 일원에 청도 수제 맥주센터 건립으로 청도반시와 복숭아를 이용한 수제 맥주를 생산해 청정자연을 찾는 청도 관광산업과 연계로 새로운 소득원과 일자리를 창출하게 된다.지역 유휴시설을 활용해 지역 청년 농부 등 민간 자생조직의 액션그룹을 육성하고 창의적인 농업 활력 제고를 위한 농촌 신활력플러스 사업, 공공 일자리 창출, 소상공인 및 중소기업 지원, 전통시장 활성화, 청도사랑상품권 10% 특별할인, 청도 맛집 발굴 및 음식점 문화개선사업 등으로 지역 경기를 활성화했다.◇사통팔달의 교통과 활기 넘치는 도시재생경북 남부권과 울산 국가산업단지를 잇는 운문령 터널 개통과 돈치재 터널을 포함해 산동지역을 동서로 잇는 청도 온천 접근로 개설 등으로 사통팔달의 교통 인프라 건설을, 주거와 행정, 복지가 복합된 청도읍 도시재생뉴딜사업을 추진했다.매전~건천 시설개량, 운문~도계 시설개량, 범곡네거리~모강교차로 국도 4차로 확장 등 광역도로망 구축과 수월~화산2리 및 덕암~내리·안인리 도로 확·포장, 유등~칠곡 도로 개설, 고평교 개체공사 등 각종 농어촌도로 확·포장 공사도 추진 중이다.청도읍 도시재생 뉴딜사업은 총 365억원으로 청도읍사무소, 공공임대주택(90세대), 가족센터, 영상미디어센터, 건강생활지원센터 등을 포함하는 생활혁신센터를 건립하는 것으로 2023년 준공이 목표다.노후화된 청도 공용버스터미널을 철거하고 새롭게 공용주차장, 상생협력상가, 활력 쉼터 등을 조성하는 210억원의 도시재생 인정사업도 올해 공모사업으로 확정돼 2023년에 마무리한다.청도역도 새롭게 개축해 청도 중심지에 변화의 새 바람을 불어넣는다.농촌중심지 활성화사업(화양읍·각북면·이서면)과 기초생활거점 육성사업(각남면·운문면·매전면), 농촌협약 및 농촌생활권 활성화 사업 추진으로 지역의 균형발전에도 노력하고 있다.◇매력 있는 교육·문화·관광도시 조성청도군은 행복학습센터 운영 등 지역특화 평생교육을 지원하고 150억원의 인재육성장학기금을 조성해 우수 인재를 위한 장학금 지급을 확대할 계획이다.또 청도 공공도서관을 비롯한 작은 도서관과 스마트도서관 건립으로 지역 교육환경 인프라를 구축하고 화랑과 세속오계의 정신·문화·체험활동을 경험할 수 있는 청도 신화랑풍류마을 일원에 화랑랜드, 신화랑 달빛수련 길, 롤러코스터 짚라인, 베이스볼파크 등의 다양한 사업을 신속히 마무리해 지역의 문화·레저 관광명소로 발전시켜 나갈 예정이다.새마을대학 개설, 새마을운동 기록관 건립, 해외 새마을 시범마을 조성, 흙 살리기 운동과 재활용품 경진대회 등을 통해 새마을정신을 계승·발전시킨 결과, 올해 새마을운동중앙회가 주최하는 전국 시군 평가에서 최우수상을 받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산림의 생태·휴양체험을 할 수 있는 청도 자연휴양림을 올해 개장하고 유등연지 관광자원화사업, 운문산 둘레 길, 싱그러운 청도로, 청도강길 문화보전 생태탐방로, 영남알프스 및 남산 생태탐방로 등 청도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활용한 특색 있는 치유와 힐링의 공간 조성으로 매력 있는 문화·관광도시로 변모시키고 있다. ◇군민이 안전하고 살기 좋은 청도스마트 ICT타운 시범사업을 통해 주민들에게 스마트 케어 및 안심마을 서비스, 스마트 팜 시설 구축 등 융·복합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고 각종 범죄와 재난·재해로부터 24시간 군민들의 안전을 도모하는 청도군 CCTV 통합관제센터도 운영하고 있다.풍수해생활권 종합정비와 자연재해위험지구 정비, 생태하천조성사업 등 각종 재해예방사업 추진으로 군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안전한 청도군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했다.지역의 주축이 될 청년들을 위해 읍면별로 특색있는 마을 환경을 조성하는 주민 참여형 마을 가꾸기 사업, 귀농·귀촌 청년층을 위한 공공임대주택, 공동보육시설, 커뮤니티 시설 등을 갖춘 청년 농촌보금자리 조성 공모사업도 추진하고 있다.이승율 청도군수의 민선 7기 마지막 1년은 △삶이 넉넉하고 살고 싶은 가슴이 따뜻한 청도 △기후변화와 6차산업에 대응하는 경쟁력과 자생력을 갖춘 부자 농촌 △체류형 관광산업 육성 △지역 전략산업 구축을 통한 활력이 넘치는 지역경제 △생활 SOC 사업과 청도형 뉴딜사업을 통한 지역 균형개발 △군민과 소통하고 섬김의 열린 행정으로 지역민의 행복지수를 높이는 데 사용되어 진다. /심한식기자 shs1127@kbmaeil.com

2021-07-04

제주·경북의 해녀 분쟁 이후 경북 해녀 증가

1954년부터 표면화된 제주도 해녀와 경북어업조합 간의 생업 관할권 갈등은 법적 투쟁으로 치닫고 1968년 대구지법의 판결로 막을 내린다. 이 판결로 우리나라 해녀의 역사, 특히 제주와 경북의 해녀 역사가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본다.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최초의 수산업법 법률 제295호가 1953년 9월 9일 공포되었다. 수산업법을 제정할 당시 제주도는 해녀 어장에 대한 제반 규정을 정비하고자 해녀 어장을 상공부장관의 허가제로 하고 경남 2천500명, 경북 2천 명, 전남 1천 명, 전북 300명, 충남 200명, 강원도 500명, 제주 2만 8천명 등 총 3만 5천 명의 ‘입어권(入漁權)’ 설정을 제안하였다. 입어권이란 공동어장 내에서 수산 동·식물을 채취할 수 있는 권리로 해녀 어장의 관습법상의 어장 이용을 명시적으로 인정한 법률 용어다. 당시 정부는 해조류 증산 정책에 따라 일제강점기 총독부의 해녀 어업 정책을 답습해 해녀 어장을 확대하는 방안으로 입어권을 설정하였다. 그리고 혹시 모를 분쟁에 대비해 수산청장의 재정(裁定)을 구할 수 있다는 조항을 신설하였다. 경북도에서 제주도 해녀의 어장 진입 막아수산업법 제40조 입어관행 조항에서는 해녀가 입어료를 납부하면 어장 이용이 가능했지만, 경북도내 어업조합은 지역의 관습이라며 해녀의 어장 이용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제주도는 1954년 경북도내 어업조합의 어장 공매(公賣)를 규탄하는 진정서를 상공부장관에게 보냈다. 제주도와 경북어업조합 관련자들은 수십 차례 회의를 하였고 제주 지역구 국회의원 3명은 경북 도지사를 만나 입어권 인정을 요구하였다.제주도어업조합은 1954년 4월 30일과 1955년 1월 31일 ‘제주도 출가잠수 일동 대표자 김종대’ 이름으로 수산청장에게 입어 어장에 대한 재정(裁定) 청구를 신청하였다. 1956년 1월 13일 상공부장관 김일환은 수산업법 제69조에 따라 양남어업조합 70명, 감포어업조합 121명, 양포어업조합 279명, 구룡포어업조합 434명, 대보어업조합 166명 총 1천75명에게 매년 5월 1일부터 8월 31일까지 제주 해녀에게 천초(우뭇가사리), 은행, 앵초, 패류어업을 허가해 줄 것을 명령하였다.수산업법 10조에 따라 마을어장의 매매는 엄연히 금지되어 있지만 경북도내 어업조합은 어장을 공매하고 제주 해녀의 어장 이용을 인정하지 않았다. 경북도 어업조합 실무자들은 관내에 해녀 수가 상당히 불어났기 때문에 제주 해녀가 필요 없고, 패류의 양식과 미역바위 잡초 제거에 막대한 노력과 예산을 투자하면 제주 해녀가 채취해가서 두통거리라고 호소하였다. 경북도내 어업조합은 제주 해녀의 어장 이용은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어장 이용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1967년 경북 감포·양포·구룡포·대보 어업조합은 ‘입어관행권 소멸 확인 소송’인 재정 청구를 대구지법에 청구하였다. 이 소송의 골자는 제주 해녀의 입어권을 부정하는 소송으로 입어관행은 소멸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1968년 8월 20일 대구지법 제6민사부는 수산업법 제40조 “관행에 따라 취득하는 입어권이라 함은 반드시 단체로 가지는 경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개인으로서도 입어관행이 있으면 그 개인이 가지는 권리도 말하는 것이므로 입어관행권 소멸 확인 소송은 성립된다”고 판결하였다. 즉 입어의 관행은 장기간 중단하거나 입어권자가 사망하면 소멸하고 상속이나 양도되는 것이 아니므로 말소 절차를 이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경북도 어업조합은 제정 신청을 통해 입어관행을 폐지하였고 이로써 70년간 유지되어온 제주 해녀의 입어관행이 사라졌다. 제주도의 ‘해녀 안 보내기 운동’ 그리고 ‘고무옷’의 도입입어관행에 따라 공동 어장을 이용했던 해녀들의 권리가 부정됨에 따라 제주도에서는 ‘해녀 안 보내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따라 1969년 제주도 해녀 1만 9천805명 중 도외로 출향한 해녀는 1천160여 명으로 전체 해녀의 6%에 불과하였다. 제주도 해녀의 50%를 상회하던 도외 출향은 경북 재정지구 청구 패소 이후 1972년 917명, 1973년 867명, 1974년 683명, 1975년 509명으로 감소하였다. (‘출가 해녀 3년새 반감’, 제주신문 1976. 1. 6)1968년 경북 어장으로 출향한 제주 해녀는 654명이었으나 1970년 85명, 1973년 199명, 1976년 92명으로 감소하였다. 1975년 7월 영남일보 기사에 따르면 당시 경북도내 해녀는 1천937명인데 이중 제주도 출신은 381명, 지역 출신은 1천556명이다. (‘해녀 대부분 생활난-93%가 연간 30만 원 미만’, 영남일보 1975. 7. 10). 이 제주 해녀들은 지역 남자와 결혼했거나 이주한 해녀를 말한다.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경북 어장에는 지역의 정체성을 가진 해녀들이 성장하였다. 바다 작업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다 일을 천시하였고 여성의 바다일은 부끄러운 직업으로 여겼던 경북 여성들은 해녀가 되고자 물질을 배웠다. 처음에는 바닷가에서 고동도 줍고, 도박홍조류 지누아릿과에 속한 해조(海藻)도 뜯다가 점차 물질 실력이 향상되었는데, ‘고무옷’이 도입되면서 본격적인 해녀가 되었다.포항 장기면 신창1리 김해녀는 6남매의 맏딸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부모님의 농사를 거들면서 점심을 먹고 난 후 1~2시간씩 목욕하러 바다에 가서 물질을 배웠다. 전복이나 고동, 해조류 등을 따오면 부모님은 신기하고 기특하게 여기셨다. 딸이 바다에 갔다 오면 부식량이 늘어났기에 크게 반대를 하지 않았다. 김해녀는 결혼한 후 해녀가 되었다. 직업이 없는 남편을 대신해서 해녀 직업을 선택하였고 고무옷을 외상으로 구입해 물질을 시작하였다. 김해녀가 해녀가 된 1975년쯤 경북의 모든 해녀가 고무옷을 입었다.해녀의 잠수복인 고무옷은 해녀 어업의 기술적 변혁이다. 작업 시 추위를 막아주어 기존 30분 이내의 작업이 3~5시간으로 증가하였고 무엇보다 해녀에 대한 여성으로서 수치심이 사라졌다. 13살부터 해녀가 된 영덕읍 창포리 김해녀는 고무옷의 고마움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고무옷을 입고 하니깐 괜찮지. 옷을 벗고 일하면 그렇지만은 옷을 다 입고 하면은 얼굴만 보이니깐 객지 사람들이 쳐다봐도 아무 불편 없지. 객지 사람들이 ‘저 사람들 해녀다. 저렇게 우째 하는교?’하면 좀 민망은 하지. 그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가 돈을 벌지만 저런 직업을 가지고 사냐? 이래 생각할 수도 있지?”독도로 간 해녀해녀의 독도 진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50년대 후반 제주 해녀는 독도 어장으로 이동하였다. 독도에는 물이 없고 비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거주지도 없었으나 넓은 미역어장이 있었다. 해녀들은 서도 물골 자갈밭에 가마니 몇 장을 깔고 자거나 나무로 2층 단을 만들어 비바람을 피해 살았다.1954년 조봉옥 해녀는 울릉도에 사는 시삼촌이 독도에서 물질을 하면 돈벌이가 될 것이라고 종용하자 세 살짜리 딸과 시아버지, 시누이, 동네 친구 2명과 함께 울릉도에서 전주(錢主)의 오징어 배를 타고 독도로 갔다. 같은 시기에 독도로 간 박옥랑, 김순하, 박애자 해녀는 오징어 장사를 하는 포항 친구의 권유로 울릉도를 경유하여 독도로 갔다. 해녀 개인별로 어장을 찾아 독도로 간 것이다.1959년 19살에 독도에 간 김공자 해녀는 제주 해녀 36명과 남자 10명 등 45명이 함께 독도에서 미역 채취업을 했다. 당시 독도의용수비대가 독도 어업권을 확보하면서 해녀를 집단 모집하였다. 독도의용수비대는 처음 서도에 거주하였으나 동도로 이전하였고 해녀들은 서도 물골에 생활하였다. 미역어장이 넓게 분포되어 있지만 물이 없다면 살 수 없었기에 물이 나오는 물골을 신성시하였고 물골 수신(水神)에게 제사를 올렸다.해녀들은 독도의용수비대를 도와 독도를 지키는 데 헌신했다. 1954년 홍순칠 독도의용수비대 대장이 독도에 막사를 지으려고 통나무를 싣고 왔는데 물가까지 옮길 수 없었다. 해녀들은 바다에 떨어뜨린 통나무를 물가까지 밀어주고 막사를 짓는 데 도움을 주었다. 또한 식수가 떨어져 곤경에 처했을 때 해녀들은 서도 물골에서 물을 실어 동도에 살던 대원들에게 전달하였다. 그리고 파도로 울릉도 보급선이 독도에 접안할 수 없어 경비대원들이 아사 직전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해녀들은 풍랑 속에 뛰어들어 부식물을 전달했다.“이불을 뜯어 밧줄을 만들고 그 밧줄로 몸을 묶은 후 거센 풍랑 속으로 뛰어들었지요. 우리가 배에서 부식을 받아 헤엄쳐 오면 독도경비대원들은 이불 끈 밧줄을 끌어당기면서 우리를 도왔어요. 힘센 장정들이 얼마나 마음이 급했던지 바닷가에까지 다 나왔는데도 계속 끌어당기는 바람에 바위의 굴 껍질에 긁혀 상처가 많이 나서 고생했어요.” (김순이 해녀)해녀들은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풍랑 속에 뛰어들어 독도의용수비대의 식량을 보급하는 등 독도 역사에 굵은 발자국을 남겼다.글 /김수희(독도재단, 경제학 박사)사진 : 김수정(사진작가)

2021-06-30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왕권의 절정과 저무는 왕조의 비애

경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려 황리단길과 대릉원, 첨성대를 거쳐 인왕동에 이르면 국립경주박물관 맞은편에 위치한 동궁과 월지가 사람들을 맞이한다.‘오래된 미래’라 불러도 좋을, 1천 년 저편에서 빛나는 고대 왕국 신라가 영화를 누렸던 흔적이 2021년을 사는 여행자와 마주하는 순간이다.한 600년 전쯤엔 오늘날 우리가 그랬듯 조선시대의 명문장가가 이곳을 찾았던 모양이다. 조선 초기의 학자이자 문신인 김시습(1435~1493). ‘매월당’이란 호로 더 유명한 김시습은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세 살 때부터 외조부로부터 글자를 배우기 시작해 다섯 살 때는 시를 지을 줄 아는 신동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의 문집 ‘매월당시집(梅月堂詩集)’엔 다음과 같은 시가 실렸다. 안하지(安夏池) 옛 터못을 뚫어 물을 채우니 물고기 소라 자라고물길을 당겨 중심에 대니 콸콸 흐르네여기서 놀이하다 신라는 나라를 잃었는데지금은 봄물로 좋은 벼가 자라나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간행한 ‘우리 조상들이 다녀간 신라 왕경 경주’에 따르면 김시습은 21세 때인 세조 원년(1455년)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절망해 머리를 깎고 승려가 돼 전국을 떠돌았다.역사 유적과 아름다운 산천을 보며 글을 짓고 시를 썼던 그는 지금의 경주 남산 인근에 ‘금오산실’을 짓고 칩거한 적이 있다. 은둔의 예술가로 살았던 것이다.그곳에서 7년간 머물며 한문 소설 ‘금오신화’를 집필한 김시습은 경주 일대 명승고적을 돌아보면서 시 또한 많이 지었다고 한다.신라 왕과 귀족, 외국 사신들의 ‘놀이 공간’?세월의 무상함과 폐허 위에 남겨진 기억의 파편을 형상화한 듯 보이는 ‘안하지 옛 터’는 현재의 동궁과 월지를 지목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이 시에서 ‘못’은 월지를 말한다. ‘안하지’는 안압지(월지의 옛 명칭)의 다른 이름이다.김시습의 ‘안하지 옛 터’ 중 ‘여기서 놀이하다 신라는 나라를 잃었는데…’라는 3행은 의미심장하다. 유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놀이’는 유학자가 지양해야 할 행위다.이는 동궁과 월지가 웅장한 모습을 현실에서 드러내고 있던 신라시대엔 ‘놀이’를 하다가 ‘나라를 잃은’ 공간이 있었다는 이야기일까? 김시습의 시에 쓰인 ‘놀이 공간’은 임해전(臨海殿)을 지칭하고 있는 듯하다.임해전은 국가에 경사스런 일이 있이 있거나, 멀리 이방에서 귀빈이 방문했을 때 왕과 신하들이 연회와 접대장으로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시대 건축물이다.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만든 책 ‘신라의 통치제도’에서 역사학자 주보돈은 월지와 동궁, 임해전에 관해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월지는 궁 바깥이 아니라 궁 안에 존재한 연못이었다. 거기에는 주요 건물로서 임해전이란 부속 건물을 세워 국왕 주도의 연회나 외국 사신 접대를 거행하던 곳이었다. 따라서 월지는 본래부터 동궁의 부속 건물이 아니었다. 동궁보다 먼저 건설된 점도 그를 방증하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치 동궁에 소속한 듯이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또 동궁은 월지궁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월지가 동궁 소속 연못이었다고 섣불리 단정하기는 어렵다.”월지가 동궁 소속 연못이었는지, 동궁의 부속 건물이었는지는 학자에 따라 의견이 갈린다.하지만, 임해전이 왕이 신하와 사신들에게 베푼 잔치가 열린 곳이라는 주장에는 대부분이 동의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역시 임해전을 이렇게 설명한다.“삼국시대 신라의 안압지 서쪽에 있었던 궁궐 건물이다. 안압지, 곧 월지가 있던 궁성은 태자가 거처하던 동궁이 된다. 673년에 문무왕의 아우인 김인문이 임해군공(臨海郡公)의 작호를 지녔던 점을 생각할 때 임해전은 곧 김인문의 처소이거나 본디 그와 관련된 건물이 아닌가 짐작된다. 안압지를 끼고 있는 임해전은 나라에 경사스런 일이 있을 때나 귀한 손님들이 왔을 때 군신들의 연회 및 귀빈의 접대 장소로 이용되었다. 임해전은 867년(경문왕 7년) 1월에 중수되었다. 이는 경문왕이 자신의 왕위에 도전하는 세력들의 반란을 진압한 뒤,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과시하기 위한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행해진 것이라 하겠다. 1970년대 중반에 발굴·조사된 유적은 이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통일신라 융성 흔적 증명해줄 임해전의 위치는인공적으로 조성한 커다란 연못 위에 배를 띄우고, 귀한 꽃과 희귀한 동물이 뛰어놀게 만든 월지에서 나라의 최고위층과 외국 왕을 대신한 사절단이 좋은 술과 안주를 나눴던 공간으로 추정되는 임해전.화려한 잔치가 펼쳐지던 그때가 ‘신라의 호시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통일 이후 신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번영을 누렸고, 임해전은 그 번성의 한복판에서 환히 웃는 사람들의 파티장으로 역할했을 것으로 짐작된다.그랬다. 옛사람들도 현대인과 다르지 않게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을 좋아하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유희의 인간)였다.김시습은 신라가 멸망한 수백 년 뒤에 이곳을 찾아 그림자조차 사라진 임해전의 번성기 모습을 그려봤을 것이다. 존재와 소멸 사이의 간극을 아프게 되새기며, 그때는 이미 논으로 변한 과거 왕국의 흐릿한 기억을 더듬었을 듯하다.여기서 궁금증 하나. 600여 년 전 김시습이 추억했고, 2021년 우리가 그 흔적을 더듬어 반추하는 임해전은 처음 만들어질 땐 어디쯤 세워진 것일까?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행한 ‘신라의 건축과 공예’에서 이 의문을 풀어줄 문장을 발견할 수 있다. 다음과 같다.“월지는 경주시 인왕동, 월성 동북쪽에 잇다. 주위는 평탄지로 광활하고 논밭으로 되어 있으며 남서쪽에 월성이 마치 병풍을 두른 듯 막고 있다. 발굴되기 이전 월지 주변에는 버드나무가 드문드문 심어져 있고, 동과 북쪽 연못 변에는 야트막한 언덕이 솟아 있어 아늑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또 연못 동쪽 호반 변에는 1926년에 건립된 ‘임해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연못 서쪽 평탄지에는 임해전지라고 생각되는 동서 지점의 지상에 화강석의 석구(石溝)가 노출돼 있어 대규모 건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이 설명에 의하면 임해전은 월지의 평탄지 주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해 이희준의 논문 ‘동궁과 월지 동편 신라왕경 유적의 조성 시기 및 성격 검토’는 좀 더 범위를 좁혀 임해전의 위치를 이야기하고 있다.“안압지와 주변 지역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 문무왕대 세워진 동궁(월지궁)과 주요 관청이 있던 곳으로 동궁을 세우기 전에 먼저 못을 파서 원지(園池·정원과 연못)을 만들고(674년) 그 후에 동궁을 축조(679~680)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궁 안에는 국가 대사와 관련해 안압지를 바라보며 연회를 베풀던 임해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동궁 안에 자리한 안압지(월지)를 마주하고, 왕과 국빈이 잔치를 열었던 건물’인 임해전. 보다 정확한 위치 파악을 위해선 앞으로도 역사학계와 전문가들의 지속적인 조사와 발굴이 필요하지 않을까.‘삼국사기’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관련 기록들임해전은 신라의 전성기는 물론, 쇠퇴기까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주요한 ‘실물 키워드’이기도 하다.1145년 김부식이 고려 인종의 명령으로 편찬한 기전체 역사서 ‘삼국사기(三國史記)’엔 고려 건국 직전에 존재했던 신라 왕조에 대한 기록이 세세하게 남겨져 있다. 여기엔 임해전 관련 기록도 여럿이다.효소왕 6년 9월(697년)과 혜공왕 5년 3월(769년)엔 “왕이 임해전에서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소성왕 2년 4월(800년)을 다룬 대목에선 “거센 폭풍으로 인해 나무가 부러지고 기왓장이 날아갔으며 임해문과 인화문이 파괴됐다”는 역사가 실렸다. 그 외에도 “문성왕 9년 2월(847년) 평의전과 임해전을 중수했다”는 사실까지 확인할 수 있다.보다 흥미로운 기록은 “헌강왕이 임해전에서 직접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놀았다”는 서술과 신라가 기울어가던 경순왕 5년 2월(931년)엔 “태조(왕건)를 임해전에서 극진하게 예우하며 접대했다”는 것이다.이 짤막한 기록들엔 고대 왕의 인간적 면모와 떠오르는 왕조(고려) 앞에 머리 숙인 저무는 왕조(신라)의 비애가 고스란히 담겼다.이런 걸 감안하면 임해전은 단순한 ‘놀이 공간’이 아닌 신라의 흥망을 지근거리에서 가장 정확하게 지켜본 주요한 역사 유물로 평가돼야 하지 않을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6-30

“처음에는 진짜 힘들었지만 경험 키워 기업체로 키울겁니다”

참외로 유명한 성주군. 초여름 더위를 자랑이라도 하듯 곳곳에서 노오란 참외가 반겨주는 곳이다. 느릿느릿 다니는 아이보리색 마을버스도 참외밭을 지나고, 좁은 시골길의 참외 비닐하우스 주변으로는 농군들이 땀을 흘린다. 휴대폰 와이파이도 제대로 잡히지 않는 물소리 큰 개천 주변에서 청년 농부 최영준 씨와 최민규 씨를 만났다.  24살 때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는 최영준 씨는 올해 12년차 농부다. 성주가 고향인 영준 씨는 특산품인 참외를 비롯해 다양한 작물을 재배한다. 12년차 농부답게 트랙터 등 농기계에 익숙한 것은 덤이다. 올해 26살인 최민규 씨는 시골에서 보기 힘든 20대 농부다. 민규 씨는 3년 전 한국농수산대학을 졸업하고 성주에 정착했다. 대구 수성구에 본가가 있지만, 성주에 연고는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를 도와주는 일종의 품앗이, 작목반 소속이다. 그런데 성주 출신인 35살 청년 농부와 갓 대학을 졸업한 26살 사회 새내기를 이어준 것은 무엇일까. 그것도 시골 술자리에서 처음 만났다는 둘 사이에 말이다. “사실 촌에서 정착한다는 것이 보기는 쉬워보여요. 매스컴에서도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지원도 많이 하죠. 생각해보세요. 귀농해서 농사만 짓는다고 하면 정부에서 1억씩, 2억씩 빌려주고 한 달에 100만원씩 지원금도 주거든요. 그런데 처음에는 진짜 힘들어요. 또 객지에서 온 사람들한테 경계심도 많아요. 그런게 많거든요. 그래서 젊은 사람들끼리 무엇인가를 해보자. 시너지 효과가 있을 것이다고 생각했죠. 내가 힘들어도 다른 사람이 일을 하니까 더 힘을 내고, 같이 하는 것. 이런 식으로 일을 하니까 오히려 교우관계도 좋아지고 서로 도움을 줄 수 있게 됐죠.”이렇게 해서 모인 이들이 모두 7명이다. 이들은 서로와 서로를 멘토와 멘티 관계로 묶고 있으며, 개인마다 다른 품종을 재배하면서 품앗이를 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3년차 농부 민규 씨에서 12년차 농부 영준 씨는 일종의 스승이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도, 수확이 한창인 하우스 안에서도 영준 씨는 끊임없이 민규 씨에서 조언을 한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죠. 철저한 준비가 필요해요. 공부도 필요하죠. 또 자기 고집만 있어서도 안되요. 공부도 없고 고집만 있는 사람이 촌에서 살아남는 것은 못봤거든요.” □ 시대가 변한 농촌… “농사도 이제 창업이죠.” 얼핏 궁금증이 일었다. 35살과 26살에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도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이들은 왜 이른 나이부터 농사라는 꿈을 찾고 있는 것일까. 사실 26살 민규 씨는 처음부터 농사를 짓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것도 연고도 없는 성주에 말이다. “한농대는 학년이 올라가면 실습을 해요. 제가 실습을 한 곳이 성주였어요. 그리고 자유롭고 비전이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던 중에 군대 문제가 겹쳐 영농후계자로 군대를 다녀와 2018년부터 농사를 시작했죠. 원래는 참외로 농사지으려고 했지만 농사지을 마땅한 땅이 없었고, 그 당시 나와 있던 대형하우스를 사게 됐어요. 첫 회에 이것저것 많이 하려다보니 잘 되지 않아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높은 방울토마토를 선택하게 됐구요.” 민규 씨의 이야기를 흐뭇하게 듣고 있던 영준 씨도 말을 보탰다.“저도 그랬어요. 우선 농사라는 것이 자유롭거든요. 내 사업체니까요. 저도 한농대 졸업하고 공장도 다녀보고 장사도 해봤죠. 하지만 어느 순간 ‘이게 아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리고 농업에 비전이 있다고 생각했죠. 한편으로는 다른 회사에 다니는 것보다는 좀 자유롭지 않을까도 생각했구요. 해보니까 정말 자유롭더라구요. 그리고 농사라는 것이, 땅이라는 것이 일종의 제 사업체다보니까 내가 열심히 하고 노력하면 그만큼의 결과가 나오는 거잖아요. 저는 생각을 해요. 이 부분을 빨리 깨우친 사람은 시골에 들어온다구요.” 영준 씨와 민규 씨의 말대로일까. 12년차 농부와 3년차 농부는 이미 성과를 내고 있었다.  3년차 농부인 민규 씨는 스스로 ‘멜빵청년’이라는 브랜드를 갖고 있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 갔던 유럽 연수에서 보았던 네덜란드 젊은 청년들의 멜빵바지를 본 이후다. 민규 씨는 멜빵바지를 보고 토마토를 따는 네덜란드 청년들을 보고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젊다는 감정을 느꼈다고 한다.  지금은 자신이 수확하는 방울토마토의 박스와 스티커, 명함을 패키지로 구성했다. 보통 아버지가 하시는 과일가게와 성주 로컬푸드, 개인적 거래도 물량을 소화하고 있고 수익도 나고 있다. 12년차인 영준 씨는 세 아이의 아빠이기도 하다. 세 아이 모두 성주에서 태어났다. 민규 씨가 귀띔한 것에 의하면, 영준 씨는 참외와 콩, 논농사까지 2만평 가까이 하고 있다. 각종 기계에 대한 자격증도 있으며 연수익은 1억원이 넘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이들에게 어려움이 없었을까.  “올해 12년째 농사를 짓고 있지만, 어린 나이에 정말 힘들었죠. 처음 3년 동안은 아무 생각이 없을 정도였어요. 사실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농자금이 대부분 빚이에요. 농업인들은 수확을 한 이후에 이를 갚아야 하죠. 그런데 경험이 없다 보니까 나중에는 생활비도 힘들더라구요.”“저도 첫 해 농사를 끝내고 1천만원 적자를 봤어요. 기반을 마련한 것도 아니고 트랙터를 팔고 대출도 쓰고 정말 힘들었죠. 수확량도 너무 적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원래 첫 수확은 적게 나오는 것이더라구요. 1화방이 익고 2화방이 익은 후 3화방이 나와야 수확이 많이 나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거죠. 그래서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고, 경험하는 것이 중요한거죠.” □ 젊은 농촌… 뭉쳐서 사는 곳 이야기를 하면서 영준 씨와 민규 씨를 살폈다. 10년 이상을 농촌에서 살아온 영준 씨는 특유의 검게 탄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3년 차인 민규 씨는 아직 앳된 모습이었다. 앳된 모습의 민규 씨에서 여자친구와 이후의 이야기를 물었다. 아울러 영준 씨에게는 세 아이의 아빠로서 시골은 어떤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여자친구가 다른 곳에서 양봉업을 하고 있어요. 아마 결혼을 하면 성주에서 살 것 같은데, 잘은 모르겠네요. 그렇지만 둘다 후회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부모님도 마찬가지구요. 요즘은 아버지가 많이 격려도 해주세요.” “시골이 아이들 교육에 어렵다는 이야기도 알고, 문화적으로도 대도시에 비하면 누릴 것이 없는 것은 맞죠. 하지만 이제 농촌도 변하잖아요. 성주에서 조금만 나가면 대구에요. 차로 이동하면 얼마 걸리지 않아요. 그리고 앞으로 농업은 고소득 직종이에요. 충분히 저희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해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인터뷰의 마무리가 다가오는 시간, 영준 씨와 민규 씨에게 질문을 던졌다. 10년과 20년 후의 모습은 어떠할까하고 말이다.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지금은 7명이 뭉친 작목반이죠. 그런데 언제까지 저희가 작목반일까요. 지금 저도 그렇고 민규도 마찬가지고, 다른 청년 농부들은 모두 재배하는 품목이 달라요. 어쩌면 일종의 경험을 쌓고 있는 것이죠. 10년, 그리고 20년 후면 농업 인구가 많이 줄어들거에요. 농사는 지어야 하는 데, 농업인구는 적다면? 아마 농업도 일종의 기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저희가 다르게 재배하고 있는 품목이 하나하나의 계열사가 되는 거죠.” 그리고 이들은 ‘귀농’에 대해서도 꾹 참아왔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귀농과 귀촌도 철저하게 준비가 필요해요. 어느 지역의 땅값이 얼만지, 어느 지역에 어떠한 품종이 잘 자라는지 등등 많은 공부가 필요하죠. 지금 보면 대부분의 귀농이 개인주의적이에요.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농사라는 것이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더라구요. 경험도 필요하고 뭉쳐야 더 잘되더라구요. 뭉치면 시너지 효과거 엄청나죠.(웃음)” /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1-06-29

슬로우 라이프, 길에서 찾은 자유

카메라 가방을 메고 나서는 게 일상이 된 사람에게 물음을 하나 던져본다. 그에게는 여행이 먼저일까 사진이 먼저일까. 여행을 좋아하고, 여행기가 고스란히 시와 사진집으로 환원되는 사진작가 류형우의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그를 만났다. 그는 길에서 찾은 길 위의 행복을 위해 세속적인 관계를 하나씩 내려놓았다. 의사였던 사람이 진료실을 나왔고, 예총 회장직도 단임으로 내려놓았고, 열의가 많아서 40여 개의 단체에 개입되어 있던 사회활동을 하나씩 접었다. 에너지가 고갈된 느낌이었다던가. ‘지진지퇴(知进知退)’라고, 일만 하다 죽고 싶지 않더라고 했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는 말이 있다. 사진기를 메고 온 산야를 헤매는 게 즐거움이었는데 어느 날 허리를 다쳤다. 허리의 통증으로 걷지 못하는 동안 별 상심이 다 들었는데, 정상적으로 걸을 수만 있으면 정말 좋은 마음으로 살겠다고 마음먹었다. 간절한 바람 탓일까. 아주 천천히 건강이 회복되었다. 아기걸음마를 떼듯이 조금씩 움직였다. 류 작가가 건강을 회복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버킷 리스트 중의 하나였던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는 것이었다. 의사가 아직 무리라고 하는데도 그냥 길을 나섰다. 오로지 걷기 위한 여행이었다. 성 야고보가 걸었던 길을 따라 하루에 20~30㎞씩 걸었다. 프랑스 북부의 생장에서 피레네산맥을 넘어 스페인 산티아고로 이어지는 총 800㎞를 걷는 길이었다.첫날 걸으며 배낭이 지나치게 무겁다는 것을 알았다. 긴 행군에 필요한 간식을 시작으로, 일상의 필수 도구라는 생각으로 꽉꽉 채워 넣었던 짐들이 육신을 너무 힘들게 했다. 배낭에서 짐을 좀 내려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욕심을 버려야 무념무상도 이루어지고, 비워야 또 채워지는 것이니.걷는 동안 한껏 단순해진 머리로 살아온 삶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았고, 사진도 많이 찍었다. 이후 자신감이 붙어서 희말라야 ABC를 포함한 여러 산들도 다녀오고, 드디어 높이 5,895m의 탄자니아 킬리만자로 등정에 도전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고, 지구온난화로 정상의 빙하가 녹고 있는 산이었다. 등산객 한 사람당 가이드와 포터, 셰프를 포함한 세 명이 공식적으로 배정되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운 그 나라만의 일자리 창출 수단이라고 했다.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이 대부분인데 그들은 바비 맥퍼린의 ‘Don‘t Worry, Be Happy’나 ‘하쿠나마타타’ 같은 노래를 부르며 등산객들에게 용기와 즐거움을 주더라고 했다. 그들이 의외로 참 많은 걸 갖고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고.“고산증이 심각했을 텐데 그나마 괴로움을 조금 덜어주었겠어요.”“걱정 마, 문제없어, 힘든 산행으로 어렵게 살면서도 다 잘 될 거라는 노랫말처럼 청년들이 늘 행복하게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어요. 그들 덕분에 고산증을 이겨내고 정상에 갈 수 있었어요.”류 작가는 가난하지만 운명에 순응하는 심성과 자연만으로 풍요로운 나라 아프리카를 그렇게 만났다. 여행은 이렇듯 각 나라의 문화와 풍속, 삶의 일부분을 알게 해준다. 그 힘든 여정 속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건 그들의 의식이 그 만큼 건강하고 긍정적이란 말일 것이다. 류 작가는 거기서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삶의 풍요로움은 재물이나 권력 같은 물질적인 풍요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탐욕스럽지 않은 상태에서 오는 의식의 지향성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집어넣어서 배낭이 무거웠던 것처럼 그의 삶 역시 너무 많이 지니고 산다는 반성도 했다.“의사였다는 말을 들었는데 병원을 그만둔 이유가 뭘까요?”“일만 하다 죽고 싶지 않았어요.”누구나 부러워하는 사회적 지위를 내려놓은 지금 그는 다만 전직 의사일 뿐이고 전 예총 회장일 뿐이다. 평소 사회구성원으로서 사회적 역할이나 참여에 대한 고민을 늘 해왔기 때문에 사회단체를 직접 만들기도 하고 참여도 하며 많은 단체에 몸담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적을 둔 병원이 지역민의 도움으로 성장한 터여서, 나누는 마음으로 지역민을 위한 문화공간 ‘예지앙’을 열었고 그곳을 모태로 ‘수성문화원’을 만들기도 했다. 사회에 돌려드릴 부분이 있을 것 같아서 단체에 기여하며 봉사하는 마음으로 일을 했다. 어느 날 부친이 ‘나아갈 줄 알면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한다’며 ‘지진지퇴(知进知退)’라는 액자를 만들어주셨는데 그것이 그의 좌우명이 되었다. 앞만 보고 돌진하는 아들의 걸음을 잠시 멈추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류 작가가 예총 직무를 시작하기 전에 병원 일을 정리한 것도 그런 마음이었다. 병원 일을 해가며 예총 회장직에 앉아 있는 건 예술인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총 일을 하는 동안에는 오로지 예총만 생각하기로 했다.“일을 열심히 하셨는데, 예총 회장직을 단임으로 끝내셨네요.”“호랑이 등에 올라타면 내리고 싶어도 못 내려요. 저는 운이 좋았어요.” ‘자리에 대한 탐욕은 인간을 추하게 만든다.’는 자각이 단임으로 일을 놓게 만들었다. 자신의 한계는 본인이 더 잘 안다며 그가 여유로운 웃음을 지었다. 평소에 매우 건강하셔서 백수 할 줄 알았던 부친이 일흔세 살에 돌아가셨다. 잦은 화재와 사업 실패로 고생만 하셨는데, 아버지가 그렇게 일찍 가실 줄 몰랐다.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고자 하나 부모가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했던가. 바쁜 사회생활을 핑계로 소홀했던 아쉬움이 노환으로 편찮으신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형식적인 모자관계가 아닌 진정한 가족과 행복의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가치가 가족 사랑이고 행복이어서, 이후 모자 사이의 관계는 물론이고 가족을 생각하고 표현하는 방법까지 달라졌다. 사회적 역할에 함몰되고 보여주기 위한 삶에 치중하는 동안 잃어버린 소중한 삶의 가치를 그렇게 되찾았다.“지난해에 첫 개인전을 가지셨는데 어떤 작품들인가요?”“삶의 가치와 생명의 기쁨을 주제로 한 50여점의 작품을 선보였어요. ‘길 위에서 길을 찾다’라는 주제로 트레킹에서 찍은 사진을 담은 전시회였어요.”주중에는 안동 하회의 시골집에서 비교적 여유로운 삶을 살아간다. 아내와 함께 산에도 다니고 사진도 찍으며. 항상성을 유지하되 하루하루를 주도적으로, 쫒기는 삶이 아닌 진정한 자기만의 슬로우 라이프를 실천한다고.“혹시 어떤 새로운 계획을 갖고 계세요?”“지금 이대로가 좋지만 혹 시간이 허락하면 하회마을의 사계를 사진집에 담아보고 싶어요. 코로나가 풀리면 세계 곳곳의 오지 트레킹도 가고.”류 작가는 삶이 비누거품 같다고 한다. 허상을 좇으며 열심히 달리다 녹슨 기차처럼 어느 순간에 멈추고 마는 것이 인생이니, 남은 시간이라도 가치 중심으로 자신의 주관적 의지대로 살며, 등에 진 짐을 조금 내려놓고 슬로우 라이프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싶다고 한다.“성공한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돈이나 부귀영화, 권력 같은 부유함보다 세상을 마감할 때 가족들로부터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라는 말을 들을 수 있으면 그게 바로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글을 쓰는 사람들이 거미줄처럼 제 속의 문장을 뽑아 쓰듯이 사진작가 역시 끝이 없는 길을 걸으며 자연과 사물과 세상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카메라에 담는다. 예술의 완성도를 위해서 일상에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천천히 자신의 템포대로 걸으며 슬로우 라이프를 실행하는 것이다. 내려놓아야 살 수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 자체가 나름 의미 있는 삶의 이력이지만 혹 과유불급으로 살아온 것은 아닌지 돌아보았다고.류 작가는 대구수성문화원 초대원장과 파티마여성병원 원장 등을 역임했다. 10대 대구예총 회장을 역임하며 대구문화예술 발전과 지역의 문화예술 행사를 주도했고 대구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예총 예술문화상을 수상했다. 왕성한 사회 참여와 역할로 대통령상과 보사부장관상, 통일부장관상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글 장정옥 소설가 (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끝

2021-06-29

“6·25 이후 한때 오천 미군부대가 포항을 먹여 살려”

학창 시절에 해방과 6·25전쟁이라는 격변기를 통과했으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얼마나 많을까. 선생은 아픈 허리 탓에 수시로 자세를 바꾸며 그 시절을 힘겹게 회상했다. 학도병 이야기를 할 때는 간간이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참혹한 전쟁과 그 후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안 : 동지 다닐 때 운동부나 동아리 같은 활동도 하셨는지요?이 : 포항 상업학교는 대구 상업학교를 형님으로 모셨어. 대구 상업학교 교사가 동지의 체육 교사로 와서 럭비를 가르쳤지. 경북에서 럭비 하는 데가 세 군데 있었는데 대구 상업학교, 대구 능인학교, 포항 동지야. 대구 아이들보다 포항 아이들이 덩치가 컸어. 연습 장소가 염밭 쪽인데 거기는 물이 빠지면 부드러우니까 연습하면서 깨지고 넘어져도 다치지 않았지. 대구는 전부 자갈밭이라, 거기에 시합 한 번 갔다 오면 얼굴을 다 버렸지. 포스코 다리를 건너면 그 일대가 전부 염밭이라. 일본이 들어와서 염밭을 일부 죽이긴 했는데, 대도, 해도 다 합쳐봐야 100세대가 안 됐을 걸. 대구 상업학교가 포항 아이들을 그렇게 키웠지.안 : 학창 시절에 6·25가 터졌습니다. 학생들에게 큰 충격이었을 텐데.이 : 남로당 박헌영이 해방될 때 영덕 창수에 와 있었어. 해방되자 박헌영이 포항으로 나오면서 남로당을 조직했지. 그 바람에 포항에서 남로당이 굉장히 강했어. 원래 동해안 이쪽이 그런 기질이 있지. 동학도 여기서 시작됐잖아. 동학혁명이 뭐냐면 쉽게 말해 왕권을 민권으로 바꾸자는 거지. 아무튼 박헌영이 남로당을 만들어서 교육하니 좌익이 많았지. 우리는 중학교 1학년 들어가면서부터 요즘 말로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틈바구니에서 공부했어. 포항중학교는 우익인 학생연맹이 많았고, 동지에는 좌익인 학생동맹이 많았어. 6·25전쟁이 터지고 학생연맹이 주관이 되어 학도병이 됐는데, 학도병 지원은 동지가 가장 많았지. 내가 중학교 4학년 때 6·25가 났고 나도 군대를 갔어. 운이 좋아 험한 곳에 가도 손가락 하나 안 다쳤어. 몇 번 울기는 했지만.안 : 중학교 4학년이면 요즘 학제로 고등학교 1학년인데.이 : 4학년 마친 애들은 고등학교 졸업한 걸로 간주했어. 육사도 시험 치면 가고. 중학교 졸업이 고등학교 졸업이었으니까.안 : 그럼 그것으로 학창 시절은 끝이었나요?이 : 6·25전쟁이 끝나고 9개월간 군 생활을 마치고 나서 고2에 자동 편입됐어. 군대도 갔다 오고 나이가 많아서 규율부장을 맡았지. 6·25 전부터 힘이 좋았고 운동도 잘했어. 그런데 전주 이씨 집안이어서 씨름으로 소를 몇 마리 타도 집에는 한 마리도 못 가져왔어.안 : 집에서는 힘쓰는 운동을 못 하게 했는지요?이 : 씨름은 쌍놈이 한다고 해서 못 하게 했지.안 : 규율부장은 힘이 좀 있었는지요?이 : 내가 규율부장을 할 때 오천 미군부대에서 하우스 보이 100명 이상이 출퇴근했어. 나이는 나와 비슷한데 동지 야간부를 다니니까 아무래도 수준이 좀 낮았지. 그 친구들은 미군부대에서 심부름하고 걸레질하고 빨래도 했어. 미군들이 하기 곤란한 걸 다 했지. 과거에 식모를 정지에 사는 간난이라고 해서 정지간나라고 했는데, 그런 셈이지. 그 친구들 형편이 얼마나 좋냐 하면, 일단 밥을 실컷 먹었어. 그리고 좋은 걸 먹어. 필요한 물건도 다 구할 수 있어. 자전거도 탔는데, 전부 일제 후지(Fuji)야. 미군들은 휴가를 일본으로 갔어. 그러면 하우스 보이들이 자전거 좀 사달라고 부탁을 해. 오천 부대에서 자전거 탄 아이들이 40∼50명씩 나와 봐라, 그 모습이 어떤지. 동지중학교 4, 5, 6회 아이들은 미군을 통해 나온 자전거를 탔어. 내가 규율부장이니까 등교 때 검사하면 주머니에 껌 아니면 초콜릿, 그리고 뭐가 나와도 나왔지. 라이타 돌도 나왔는데, 가져오면 팔아먹기 좋았어. 그렇게 당시에 미군부대를 통해 부속물이 많이 나왔어. 그걸 사려고 오천 부대에 장사꾼이 늘 서 있었지. 미군이 오면 뭐 팔 것 없냐고 물었어. 그러니 하우스 보이 주머니에는 늘 돈이 있었고, 말보르, 카멜 같은 양담배도 있었지. 하우스 보이들이 동지중학교에 많았는데 규율부장이라고 내 몫을 별도로 챙겨줬지.안 : 오천 미군부대도 포항 역사에서 간단치 않은 의미가 있었겠습니다.이 : 포항의 한 시절을 오천 미군부대가 먹여 살린 거지. 당시에 오천면은 큰 면은 아니었지만 화려한 동네였어. 순전히 미군 때문이지. 부대 하나가 주둔하면 동네가 살았어. 청림동도 부자 동네였지. 일단 밥을 안 굶어. 딴 데는 4, 5월이 되면 쌀이 없어 절절매. 해방될 때 여기는 미군 주둔 지역이야. 1950년대 해병대가 들어오고. 미군 주둔 지역이니까 양색시들도 와 있었어. 그 색시들도 알고 보면 하이 클래스야.안 : 양색시가 하이 클래스라는 건 생소한 얘기입니다.이 : 당시 양색시는 적어도 중학교는 나왔어. 기본적인 영어는 할 줄 알았지. 당시 여자들은 국민학교만 나와도 중상 클래스에 들어가. 내가 오천면 서기 할 때 양색시들과 대화하면서 왜 저렇게 됐을까 하고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 수준 있는 애들이 많았어.안 : 청림동 일대에 그런 술집이 많았는지요?이 : 그게 미군부대 입구에 있어야 미군들이 나오자마자 헌병 눈을 피해서 빨리 들어갈 수 있잖아. 헌병들도 웬만하면 모른 척했지.안 : 포항수산대학교를 졸업하셨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진학했을 텐데 당시 수산대학교 분위기는 어떠했나요? 이 : 포항수산대는 하태환 선생이 6·25전쟁 중에 설립했어. 재학 중에는 군대에 안 가도 되니까 학교에 서로 들어가려고 하는 바람에 오히려 포항 사람들은 못 들어갔지. 1, 2회 졸업생들은 서울 사람, 피란민, 대구의 유명한 학교에는 진학하지 못했지만 실력 있는 사람들이었어. 포항 사람은 10%밖에 안 되고 나머지는 외지 사람들이었지.안 : 전쟁 중에 학교를 설립했다는 게 놀랍네요.이 : 그렇지. 어쨌든 학교에 들어가면 2년 동안은 피해 있었지. 그만큼 학교 들어가는 게 힘들었고. 그런데 졸업하기도 전에 전쟁이 끝나버렸거든. 그때는 동지초급대학교라고 했다가 나중에 포항수산초급대학이 됐어. 그런데 학생 수가 너무 적었어. 150명밖에 안 됐지. 어로과, 수산과, 증식과가 있는데 한 과에 50명이 정원이야. 이건 정규 학생이고 나머지는 청강생이라고 해서 한 과에 몇십 명씩 붙어 있어. 정규생은 150명인데 실제로는 300명 이상 됐지.안 : 무슨 과에 다니셨는지요?이 : 나는 고기 잡는 어로과였어. 입학할 때 군대에 갔다 왔고 가정적으로 안정돼 있어서 대학 다닐 때 운영위원회 회장을 했지. 학생회장인 셈이야. 그 덕분에 포항대학교 총동창회장을 20년째 하고 있고.안 : 졸업하고 전공을 살렸는지요?이 : 포항수산대가 2년제였으니까 졸업하고 공부를 더 해야 했는데 내가 바람이 좀 들었지. 일본에 가려다 못 가고, 여러 복잡한 일을 거쳤어. 그러다 군대 영장이 나왔어. 내가 그전에 9개월간 군 생활을 했으니 그걸 증명하는 게 귀향증이야. 부대에서 사진 같은 걸 붙인 거지. 당시 군대는 36개월 복무인데 국방부에 그 자료로 병적확인원을 내면 9개월간 면제를 받는단 말이야. 그런데 국방부에 병적 정리가 안 돼 있으니까 군번이 없다고 해서 인정을 못 받았어. 그 바람에 1956년에 재입대를 했지.안 : 군대 갔다 온 대한민국 남자 상당수가 재입대 영장을 받고 다시 군대 가는 꿈을 꾼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습니다. 재입대한 군 생활은 어떠했습니까?이 : 훈련소에 갔을 때 마침 연병장에서 씨름판이 벌어졌지. 내가 1등을 하니까 훈련병에서 대번 씨름선수가 되었어. 당시에 돈 안 들이고 운동하는 건 씨름밖에 없다 해서 육본에서 각 부대에 씨름부를 창설하라고 지시가 떨어진 거야. 명절 때는 지방 씨름대회도 나갔지. 내가 마지막으로 1958년 2군 사령부 씨름부에서 우승을 했어. 그때는 덩치도 컸고 씨름 실력이 대단했어. 그렇게 한 2년 군 생활을 하고 있는데 고향 동네에 큰 물난리가 났어. 당시에 여러 사유의 제대가 있었는데, 의가사제대 중에 수해가 나면 그 지역 군인들은 제대시켜줬어. 그래서 의가사제대 신청을 했더니 곧바로 제대라. 그렇게 25개월 정도 군 생활을 했지. 이석수 선생. 이석수1933년 경북 영일군 연일읍에서 태어나 국민학생 시절에 해방을 맞았고, 6·25전쟁에 참전해 동족상잔의 참혹함을 직접 겪었다. 포항수산대학을 졸업한 후 타지에서 목재상과 제약회사에서 잠시 근무했다. 1963년 2월 오천면사무소에서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건설부 소속으로 행정사무관, 국회 건설위원회에서 행정서기관, 건설부 과장, 국장 등을 거쳐 원주지방국토관리청장으로 공직 생활을 마쳤다. 퇴직 후 대한건설협회 상임감사로 일하다가 1995년 경상북도 정무부지사를 맡았다. 공무원 시절이나 퇴직 후에 고향을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가장 큰 일은 26년간 자료를 모아 자비로 ‘이석수의 포항 땅 이야기’를 출간한 것이다. 이 책에는 약 3천 꼭지의 포항 땅에 얽힌 이야기와 최신판 사진이 수록돼 있다. 대통령 근정포장(건설사업유공), 황조근정훈장 등 여러 기관에서 수여하는 상을 받았다.대담·정리 : 안준우(소설가) / 인물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6-29

해녀는 가혹한 역사의 산물

고대에 물질은 한반도 남부와 제주도 지역에서 성행하였다. 깊은 바다에서 다양한 패류(貝類)를 채취하면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얼굴과 몸에 문신을 했고 이는 풍습이 되었다. 중국 고전 ‘예기’에 “머리를 풀고 문신(文身)은 고대 한반도 주변 나라의 물질 풍속”이라는 기록이 있고, ‘후한서’에는 “삼한(三韓) 사람들이 문신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신라시대에는 허리에 새끼줄을 매고 물질하는 해인(海人)이 있었다. ‘본초습유(本草拾遺)’에는 “신라의 해인은 허리에 새끼줄을 매고 잠수하여 깊은 바다에서 나는 대엽조(大葉藻, 바닷말의 하나)를 채취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신라에서는 미역 같은 해조류를 물질로 채취하였다. 전복 등의 공물 때문에 고초 겪은 제주 사람들5~6세기에 제주에서는 진주 같은 보석을 캐는 물질 어업이 발달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문자왕 13년(504)에 “진주는 탐라에서 생산된다(珂則涉羅所産)”고 하였고 이 진주는 중국 위나라로 유통되었다. 905년(延喜5) 일본 천황이 편찬한 연희식(延喜式) 법전에는 ‘탐라복(耽羅鰒)’이 등장한다. ‘탐라복’은 제주와의 교역품으로 공납된 것인지, 일본 해녀가 제주로 건너가 채취한 것인지, 제주 사람이 일본으로 가서 채취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제주의 전복을 말하는 것은 분명하다. 일본 평성궁(平城宮) 발굴 과정에서 출토된 745년(天平 17년) 목간(木簡)에도 ‘탐라복’ 기록이 나온다. 이런 기록을 종합해보면, 제주에는 잠수 기술 능력이 탁월한 해양민이 있었고, 진주와 전복을 교역품으로 번창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 1079년(문종 33년) 탐라에 다녀온 고려 사신이 진주 2개를 왕에게 바친 기록도 있다. 빛이 별같이 반짝여서 야명주(夜明珠)라고 한 것은 제주가 선사 이래 잠수 어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음을 증명한다.천년 왕국 탐라국은 10세기에 고려가 들어서면서 독립국의 지위를 잃게 된다. 숙종 10년(1105) 탐라는 고려의 일개 지방으로 전락하고, 고종 때(1213~1259) 탐라의 명칭은 지방을 뜻하는 지금의 ‘제주(濟州)’로 바뀌었다. 이후 제주 역사는 외부에 의한 경제적 착취, 환경파괴가 일어나면서 시련과 고난의 역사로 점철되었다. 고려에 편입된 직후 제주 사람은 중앙에 전복과 말 등 공물 바치는 일로 큰 고초를 겪었다. 남성들은 육지로 도망갔고 더 이상의 이탈을 묵인할 수 없던 조정은 1629년(인조7), 1778년(정조2) 두 차례에 걸쳐 출륙금지령을 내렸다. 전쟁, 군사, 어로 등 각종 군역과 잡역에 남성이 동원되면서 물질은 여성의 몫이 되었다. 특히 여성은 관의 허가 없이 절대 제주를 떠날 수 없는 출륙금지령은 제주 여성의 삶을 더욱 고립시켰다.수탈 견디지 못한 제주 남자들 육지로 도망 가제주에서 잠수 활동을 하는 여자를 잠녀(潛女), 포아(浦娥), 포여(浦女)라고 한다. 10세기 전반 일본 헤이안(平安) 시대 성립된 백과사전적 성격인 ‘왜명류취초(倭名類聚抄)’에는 잠녀(潛女)는 잠수하는 여자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잠녀 기록은 1630년 이건이 남긴 ‘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이다. 이 책에서 잠녀는 ‘미역을 따는 여자(採藿之女謂之潛女)’ 또한 ‘생복을 잡아서 관아에 바치는 역(生鰒之捉亦採取應官家所徵之役)’이라고 하였다. 또한 이들은 “미역을 캐낼 때에는 소위 남녀가 발가벗은 알몸으로 낫을 갖고 바다에 떠다니며 미역을 캐어 남녀가 서로 섞여 있으나 부끄러이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전복을 잡을 때도 마찬가지”라고 기록하였다.이후 여러 기록에서 잠녀가 등장한다. 1694년 제주 목사 이익태가 쓴 ‘지영록(知瀛錄)’에는 ‘진상 추인복을 잡는 채복잠녀(進上搥引鰒專責於採鰒潛女)’와 ‘채곽 잠녀 800명(採藿潛女多至八百)’으로 역할을 구분하였다. 해녀는 전복을 진상하는 해녀와 미역을 채취하는 해녀로 구분되어 관리되기 시작한다. 당시 제주의 전복 진상은 포작간(鮑作干)이라는 호적에 등록된 남성들이 매년 조달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전복 진상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16세기에 과중한 부역과 수탈을 견디지 못한 제주 포작간들은 전복 채취를 목적으로 육지로 도망갔고, 사천, 고성, 진주 등지에 집성촌을 형성했다. 이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고기잡이를 주업으로 생활하였다. 수령들은 모든 해산물 진상을 이들에게 맡겼고 이후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면서 조선 정부는 전국에 있는 포작간과 포작선을 징발해 전투를 치렀다. 징발되면 살아서 돌아오기 어려워 포작간들은 내륙으로 도망가거나 숨어버렸다. 임진왜란 이후 포작간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고기잡이를 하지 않았다. 이후 잠수어업은 제주에서만 확인되었고 전복 진상은 수군이나 제주 해녀 등 특정 어민이 맡게 되었다.전복 수요 충족하기 위해 제주 해녀 동원17세기 중엽 조정에서 많은 전복 진상을 요구하였고 제주 포작인들은 수량을 채울 수 없었다. 포작인은 전복 채취를 위해 한겨울에 알몸으로 들어갔으나 “물에 빠져 죽어 열 중에 두셋만 남게 되었다”(남사록(南槎錄)), “형틀과 채찍을 가하였으나 수량을 채우지 못한다”(남천록(南遷錄))는 기록처럼 고문을 가해도 진상할 수량을 채울 수 없었다. 포작인들은 결혼을 하지 못해 혼자 살다가 죽었고 과부라도 “거지 노릇을 하다 죽을지언정 포작하는 사람의 아내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남사록(南槎錄))고 하였다. 17세기 양반가의 음식 문화가 발달하면서 전복 소비가 증가했고 포작인에게 매질을 가해도 진상 수량을 채울 수 없게 되자 조정에서는 제주 해녀를 동원해 전복을 채취하기 시작하였다. 제주도 목사 이익태는 미역을 채취하는 해녀들에게 전복 채취 기술을 습득시키고 ‘잠녀록안(潛女錄案)’에 기록해 관리하였다. 그 상황을 1694년 이익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미역을 따는 잠녀들은 (전복 캐는 일을) 익숙지 못하다고 핑계를 대면서 죽기를 작정하고 저항하며 이를 피할 꾀만 내고 있다. 장차 전복을 캐는 잠녀가 없어지지 않을까 염려하고 또한 역을 고르게 하고자 미역을 따는 잠녀들에게 전복 캐는 것을 익히도록 권면하여 추(搥)·인복(引鰒)을 (전복 잠녀들과 함께) 나누어 배정하였다.-이익태, ‘증감십사(增減十事)’, (지영록(知瀛錄)). 추(搥)·인복(引鰒)이란 전복을 두드려 넓게 펴서 말린 전복으로 해녀는 전복 채취뿐만 아니라 전복을 말려 제조한 후 진상하였다. 전복 진상은 해녀의 몫이 되었고 1702년 제주 목사 이형상은 “섬 안의 풍속이 남자는 전복을 따지 않음으로 다만 잠녀에게 맡긴다”고 하였다. 한겨울 남자들도 물속으로 들어가 채취하기 어려운 전복 기술이 여성에게 전수되어 해녀가 진상역에 동원되었다. 제주 해녀 사회는 위계질서로 조직되어 대상군(大上軍), 상군(上軍), 중군(中軍), 하군(下軍)으로 계급화되었고, 대상군은 전복 진상 등의 책임자로 해녀를 통솔하였다. 지금도 해녀 사회에서는 이런 질서가 존재하고 있다.집안의 자랑이 된 해녀조선시대 미역 어업은 제주도를 중심으로 활발히 이루어졌다. 제주에서는 미역 판매로 상인들이 부자가 되었고 교역상들은 제주도를 왕래하며 미역을 사고팔았다. 정부는 구황식품으로 활용하였고 노약자나 허약자의 보양식, 산후 음식으로 알려지면서 제주의 미역 어업은 발전하였다. 미역을 채취하는 해녀를 귀히 여겼고 해녀는 집안의 자랑이 되었다. 1764년(영조 40년) 53세에 제주 의금부도사로 부임해 ‘탐라록’을 지은 신광수는 “탐라의 여자애들 풍습에 혼인 상대로 잠녀를 귀중히 여겨, 잠녀 둔 부모들은 우리 딸은 먹고 살 걱정이 없다고 자랑한다”고 하였고, ‘잠녀가(潛女歌)’도 남겼다.이월 개인날에 성 동쪽 마을에서는집집마다 여인들이 물가로 나간다.비창 하나 망사리 하나 테왁 하나소중이에 알몸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고깊고 푸른 물에 의심 없이 바로 내려가날리는 낙엽처럼 공중에 몸을 던지니북쪽 사람은 놀라워하는데 이곳 사람은 빙긋이 웃어장난으로 물장구치며 물줄기를 마음대로 타기도 하고.제주 해안가 여성은 열 살이 되면 해녀가 되었고 두려움 없이 바다에 뛰어들어 미역을 채취하였다. 미역은 쌀농사를 지을 수 없는 제주 사람들에게 생계 걱정을 해결해주는 양식과 같았다. 그렇기에 관아에서는 미역을 강제적으로 거둬들였다. 제주에서는 해녀 어업이 활발하였고 개항 직후에는 돈벌이를 위해 일본, 러시아 등지로 진출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여성 잠수 전문가, 해녀의 탄생은 제주 역사의 산물이다.글 /김수희(독도재단, 경제학 박사)사진 : 김수정(사진작가)

2021-06-28

‘참여와 소통’으로 현장목소리 담아 ‘변화와 혁신’ 선도

윤경희 청송군수의 임기가 종착지에 가까워지고 있다. 지난 3년 동안 “군민과 함께하는 행복청송”이라는 슬로건 아래 다가올 미래를 위해 바쁘고 숨차게 달려온 청송군.변화와 혁신의 중심이 되겠다는 의지로 그 어느 때보다 알찬 군정 성과를 내며 보다 나은 내일을 설계하고 있는 청송군은 최근 지난 3년간 걸어온 시간을 되돌아보고 향후 계획을 천명했다. 아래 그것들을 요약해보자 한다. ◆‘세일즈 군수’ 자처한 윤경희가 보여준 성과들윤경희 군수는 취임 전 군민들과 했던 약속들을 가볍게 넘기지 않고 주민들 삶의 질과 직결된 5대 분야 65개 공약사업을 확정해 추진하고 있다.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한국매니페스토 실천본부 지방자치단체장 공약이행평가’에서 3년 연속 최고 등급을 받았다.또한, ‘대한민국 대표브랜드 대상’에서 2년 연속 2관왕을 달성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취임 초부터 발로 뛰는 ‘세일즈 군수’를 자처하며,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쏟았기에 ‘청송사과’는 ‘대한민국 대표브랜드 9년 연속 대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맑고 청정한 자연환경을 직관적으로 표현한 도시브랜드 ‘산소카페 청송군’도 2년 연속 대상을 수상해 청송군이 지켜가고 있는 자연 본연의 가치를 대외적으로 인정받았다.그 밖에도, 2019년 전국지방자치단체 평가 농어촌 기초자치단체 부문 종합 2위, 2020년 행정안전부 지방재정분석평가 최우수, 청송사과축제 대한민국 대표 문화관광축제 지정 등 굵직굵직한 성과물들을 내놓았다.윤경희 군수의 청송호는 민선7기 3주년에 받아든 성적표가 우수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빛나는 앞날을 위해 현재도 각 분야에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발 빠른 코로나19 대응과 선진적 농업정책 펼쳐청송군은 다른 지자체와 마찬가지로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어려운 시간을 보냈지만, 군민의 자발적 방역과 선제적인 행정조치로 위기를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 지난해 연말 코로나 청정지역이던 청송군에 갑작스럽게 확진자가 발생했지만 행정 조치는 침착하고 신속했다.확진자 발생 지역에 임시선별검사소를 즉시 설치해 밀접접촉자 뿐만 아니라 의심증상자와 검사희망자에 대한 선제 검사 조치와 치밀한 방역체계를 구축한 덕에 지역사회의 대규모 전파를 막을 수 있었다.이는 우수한 행정력을 인정받아 행정안전부로부터 특별교부세를 확보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청송군은 코로나19 종식을 위한 백신 접종 지원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군은 접종률을 높이기 위해 마을별 셔틀버스와 담당 공무원을 배치해 체계적이고 안전한 접종을 실시했다.여기에 군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더해져 전국 최상위 수준의 백신 접종률을 기록했다. 올 하반기에는 접종 대상자의 70~80%까지 접종을 완료해 조기에 집단면역을 형성할 계획이다.청송군은 실속 있는 농업 지원 정책과 기술 개발로 지속가능한 농업경쟁력을 견인하고 있다. 농민수당을 선제적으로 시행해 경상북도로 반향을 일으켰고, 농산물 택배비를 지원함으로써 농가 소득안정을 지원하고 있다.또 청송사과 품질보증제도를 마련해 소비자의 신뢰를 높였다. 특히, 농민들의 염원이었던 청송사과 유통센터 운영체제를 변경해 농산물 산지 공판장을 개설하고 출하농가에 대한 선별 수수료를 지원하기도 했다.청송황금사과 ‘황금진’ 상표 출원등록을 완료해 톡톡 튀는 컬러와 새콤달콤한 맛으로 소비자들의 눈과 입을 사로잡으며 완판행진도 이어가고 있다. 미래 사과 산업에 대응하기 위해 청송황금사과 연구단지도 조성 중이며, 올 하반기부터는 청송군 농산물 안전성 분석센터도 시범 운영할 계획이다. ◆포용 복지와 상생의 지역경제 선순환 구조 만들어경로당 위주의 격리형 노인정책에서 활동 중심의 놀이형 노인정책으로의 전환을 모색하고 있는 청송군은 노인복지에 대한 인식 변화를 이끌고 있다. 파크골프장을 조성해 건강한 여가생활을 지원하는 한편, 노인일자리 사업을 확대해 보다 많은 어르신들이 일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이와 더불어 의료 사각지대 해소를 위해 산남지역 건강증진실을 설치해 지역사회의 건강플랫폼을 구축했고, 안덕면에 응급의료 전용헬기장을 조성해 위급 상황에서의 신속한 대처가 가능해졌다.또한 청송군의 미래를 이끌어 갈 인재 육성을 위해 진보키즈카페 조성, 중고등학교 신입생 교복구입비 지원, 돌사진 촬영비 지원, 국공립어린이집 확충, 청송인재양성원 운영 등 교육 분야에 대해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청정한 자연친화 도시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산소카페 청송군’ 브랜드를 활용한 청정마케팅과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한 언택트 관광 정책 또한 눈길을 끈다.4만 평 규모의 백일홍, 청보리 단지가 있는 ‘산소카페 청송정원’과 사계절 멋을 달리하는 ‘청송솔빛정원’을 새로운 힐링공간으로 조성해 나가고 있고, 산림레포츠 휴양단지와 주산지 주변 관광지를 단장해 청송을 체류형 관광지로 변모시키는 중이다.여기에 대한민국 대표축제로 지정된 청송사과축제는 다양한 먹을거리와 알찬 프로그램들로 재정비해 올 가을 관광객들을 맞을 준비에 여념이 없다.청송군은 올해 410억 원 규모의 청송사랑화폐를 발행한다. 농민수당 등 각종 지원금을 청송사랑화폐로 지급하고 특별할인 판매액도 330억 원으로 확대해 지역경제에 온기를 불어넣고 있다.130억 원 규모의 ‘진보 도시재생 뉴딜 공모사업’에 선정돼 낙후된 경제·문화·공동체에 대한 전반적인 지역 재생사업도 추진할 수 있게 됐다.또한 전체 면적의 82%를 차지하는 풍부한 산림자원을 활용한 경제산림 정책으로 한국청년산림사관학교 유치에 힘쓰고 있으며, 지역 소멸위기에 대한 대안으로 기존 4개의 교정시설에 여성교도소·비상대기숙소·법무연수원을 추가로 유치해 국내 최대의 종합교정타운을 구축할 계획이다. ◆정주여건 향상과 군민의 군정 참여 활성화청송우회도로가 완공되면서 상주-영덕 고속도로와의 연계로 접근성 향상과 함께 도로 이용 편의성도 높아졌다.지방상수도 운영선진화 사업을 추진해 2017년 대비 유수율을 20% 가량 높인 것도 군정 성과의 하나다. 또한 공공하수처리시설 증설 및 농어촌마을 하수도 설치사업을 추진해 쾌적한 주거환경을 만들어가고 있다.앞으로도 청송군은 삼자현터널 건설, 안동-영덕간, 포항-안동간 국도건설 공사를 조기에 완료해 사통팔달 교통 인프라를 구축해 나갈 예정이다.더불어 청송읍 도지재생뉴딜사업 공모, 농촌중심지 활성화 사업, 전선지중화 사업을 내실 있게 추진함으로써 정주여건 개선과 주민 삶의 질 향상에도 최선을 다할 방침이다.민선7기 청송 군정의 핵심가치는 참여와 소통이다. 이를 위해 군민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군정에 담고자 다양한 주민참여제도를 운영 중이다.주요 정책과 현안사항에 대한 군민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청송군 지역발전 협의회’를 운영하고 있고, 군민들이 직접 공약 추진상황을 점검하는 ‘공약 군민배심원단’도 지속적으로 이어간다.또한 시공간적 제약 없이 각종 소식과 재난 예방정보를 신속·정확하게 전달하는 스마트 마을 방송 시스템도 도입했다.이와 관련해 윤경희 군수는 “변화하지 않는 모든 것은 도태되기 마련이다. 우리 사회는 늘 새로움을 원하고 있으며, 농촌도 그 변화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라며 “‘산소카페 청송군’이 대한민국 농촌의 혁신과 변화를 선도해나가기를 원한다. 수많은 난관들이 있겠지만, 군민들과 함께라면 이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더 나은 내일을 꿈꿀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지난 3년간 민생 현장 곳곳을 누비며 달려온 윤 군수는 “청송군민들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남은 임기 동안에도 군민들의 안락한 삶을 위해 발로 뛸 것”이라고 약속했다./김종철·홍성식기자

2021-06-28

“동양 최대의 포도농장 덕분에 포항은 덕을 많이 봤지”

인터뷰는 일주일에 한 번꼴로 진행되었다. 마침 선생은 허리를 다쳐 병원에 다녀온 후라 인터뷰를 제대로 소화해낼지 걱정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동양 최대 규모였던 포항 포도농장에 얽힌 이야기, 그리고 해방 전후 포항을 이끌어갔던 주요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차례였다. 안 : 포항 포도농장은 동양 최대 규모로 알려져 있는데, 가 본 적이 있는지요?이 : 포도는 해풍을 맞아야 맛이 좋아져. 미츠와(三輪) 포도농장이라고, 규모가 대단했지. 어릴 때 소풍을 포도농장으로도 갔어. 너무 오래돼 기억이 흐릿한데 여하튼 끝도 없이 큰 포도농장이었지. 그 포도농장이 뭐가 특이하냐면 우리나라에서 농사짓던 제도를 바꿔버렸어. 집단 농사로 바꿔버린 거야. 우리는 옛날에 집단 농사가 아니거든. 그리고 우리는 농사를 지으면 품앗이를 해. 서로 품을 나누지. 그런데 일본 사람이 와서 돈을 주는 거야. 우리나라에 없던 현금 지급 제도가 생긴 거지. 나중에 포도농장을 밀어버리고 비행장을 만들었잖아. 그 비행장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이 지역 사람들이 살았어. 왜? 비행장 징용 때문이지. 일본으로 가야 할 징용을 전부 그 비행장으로 보낸 거야. 그래서 포항은 일본 강제징용이 완전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다른 지역보다는 덜한 편이었지. 아무튼 포도농장 덕분에 포항은 덕을 많이 봤어. 품앗이가 아니라 돈을 지급하는 식으로 농사 제도가 바뀌었고, 비행장을 만드는 바람에 징용을 덜 가게 됐고. 해방 후에는 미군이 들어와서 미군 덕을 봤지. 6·25 때 해병대가 없었으면 여긴 다 날아갔을 거야. 미군이 와 있었기 때문에 안 넘어갔지.1차 세계대전 중 일본은 와인 수입이 힘들어지자 포항에 와인용 포도밭을 만들어 와인을 대량생산했다. 지금 해병사단 안에 있는 일월지와 골프장 일대, 청림동 해병 숙소 일대와 동해, 도구에 걸쳐 약 200만㎡에 이르는 동양 최대였다고 한다. 1931년 6월 25일자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1930년 포도 수확 5만 관(20만㎏)에 포도주(미츠와 포도주-포도 농장주 이름이 미츠와 젠베에(三輪善兵衛)였다) 1천 석(18만ℓ)과 브랜디 100석(1만 8천ℓ)를 생산했다. 제품도 프랑스 고급 와인에 뒤지지 않고, 향도 비할 데 없이 좋을 정도라고 기록돼 있다. 또한 조선의 경북이란 지역에서 일본 최고의 국산품이 나온다면서 ‘포도는 야마나시(山梨)부터’라는 말이 예부터 전해지지만 오늘날에는 ‘조선의 경북’으로 고칠 필요가 있다고 기록했다. 미츠와 농장은 1939년까지 포도주 1천500석(27만 ℓ)을 생산했으며, 그 후 일부 지역에 비행장이 건설되었다. 한때 직원 15명, 한국인 인부가 연인원 3만 2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 해방 후에도 ‘삼륜포도주공사’라는 이름으로 1960년대까지 와인을 생산했지만, 그 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안 : 해방 무렵 인상 깊었던 일이 있다면 말씀해주시지요.이 : 그해 7월 10일 열차가 개통됐지. 그전에도 열차가 있긴 했는데 폭이 좁은 협궤 열차였어. 그 협궤 바깥으로 틀을 짜고 철로를 놓았어. 다 놓고 난 다음에 협궤를 뜯어냈지. 이게 지금도 사용되는 국제 규격이야. 그리고 아마 8월 15일 포항, 경주 간 철로가 개통됐을 거야.협궤는 현재 국제 규격인 표준궤보다 폭이 좁은 철로를 말한다. 포항역은 1918년 11월 1일 협궤노선의 보통 역으로 영업을 시작해 1945년 7월 10일 표준궤를 개통하고, 지금은 사라진 구 역사(驛舍)를 신축 준공했다. 당시 철도 시설은 일본의 독점적인 사업이 돼 한국의 이익보다 일본의 독점적인 이익이 되었다. 한국인을 강제 동원하고 토지를 헐값에 사들여 부설된 철도는 일제에 높은 수익을 안겼다. 1936년 4월 29일자 ‘동아일보’에는 그해 봄, 포항, 영덕, 청송 등지의 500여 명이 만주 이민 열차로 포항역을 떠나는 기사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남루한 의복에 허술한 보따리에 바가지를 단 것을 지고 이고 어린 자녀들을 혹은 업고 손목을 이끌고 혹은 늙은 부모를 이끌고 창백한 얼굴에 눈물을 머금고 정든 고향과 친척들을 이별하는 비애에 싸여 프레트 홈은 일시에 눈물바다를 이루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금치 못하게 한다.”안 : 우리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대에 유년 시절을 보내셨는데, 기억나는 일화가 있다면 한 가지만 더 얘기해주시지요.이 : 정치인 김무성의 부친인 김용주 선생과 나의 부친이 알고 지내던 사이인데, 김용주 선생이 포항에서 처음 열린 신식 결혼식에 주례를 섰지. 1938년인가 1939년쯤인데, 그 결혼식에 우리 집안도 초청을 받아서 할머니가 다녀왔어. 김용주 선생은 부산제이공립 상업학교를 나와서 스무 살 때 포항 식산은행에 들어갔지. 몇 년 근무해보니 돈은 고기 잡는 사람이 아니라 파는 사람이 번다는 걸 알게 됐어. 그래서 식산은행을 나와서 운수사업을 했어. 나중에 청어로 생선 기름 만드는 비누공장을 차리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그 사업을 시작했지. 아무튼 돈을 벌어서 사립학교를 인수해 영흥국민학교를 만드는데, 교장으로 있을 때 그 학교 여교사 결혼식 주례를 섰지. 신랑은 쌍용그룹 창업주인 김성곤 회장이라. 할머니에게 신식 결혼식은 뭐가 다르냐고 하니까 색시 얼굴을 실컷 봐서 좋더라고 하는 거야. 그전 결혼식에는 색시 얼굴을 볼 수 없었지.해촌(海村) 김용주는 동빈동에 정어리기름으로 비누 만드는 공장을 세웠다. 당시 영일만 일대에는 정어리와 청어가 많이 잡혔는데, 정어리가 너무 흔해 생선 취급도 받지 못했다. 지금의 송도 다리 건너 왼쪽에 일본인이 경영했던 정어리기름 공장이 있었는데, 이 정어리기름은 주로 식용으로 쓰였지만 비누 및 약품 제조에도 이용되었다. 해촌은 사재를 털어 구 제일교회 앞에 있었던 영흥학당을 정규 과정의 영흥보통학교로 만들었다. 포항 최초의 사립 초등학교인 셈인데, 해방되면서 공립학교로 바뀌어 개교 100년을 훌쩍 넘겼다.안 : 당시 중등학교 상황은 어떠했는지요?이 : 일본이 들어와서 학교를 세우는데, 처음엔 서울, 평양, 대구 등 세 곳을 중심으로 했어. 대구가 포화 상태가 되자 다섯 개 도시의 책임자를 불러 학교를 세우라고 했지. 포항, 안동, 상주, 김천, 경주가 그곳으로 나름대로 학교의 기능이 필요한 지역이었지. 포항도 학교 하나를 가져가라고 하니까, 경주나 다른 곳도 그렇지만 전부 남자 중학교만 원했어. 안동은 나무가 많아 농림학교를 원하고, 상주는 누에고치를 하니 농잠 중학교, 김천은 당시에 사립학교가 있었고, 그런데 포항은 아무것도 없어. 포항은 여학교를 가져가라고 해서 남자 중학교가 못 오고 여학교가 먼저 왔어. 그래서 포항여중이 1939년에 먼저 생겼고, 포항중학교가 생긴 건 1943년이지.안 : 그럼 포항중학교에 입학했는지요?이 : 시험을 쳐서 포항중학교에 합격했지. 그런데 하태환 선생이 동지중학교를 세웠는데, 큰삼촌하고 연일국민학교 10회 동기였어. 삼촌은 읍사무소 총무계장인가 했고. 동지중학교는 1946년 3월 5일 개교했는데, 그때는 사립을 한 수 낮춰 봤어. 가난한 애들이 가는 데가 사립학교였던 거지. 포항중학교는 좀 괜찮게 사는 애들이 갔고. 그런데 포항중학교에 가려면 여기서 창포까지 걸어가야 하는데 오죽했겠나. 왕복 50~60리라. 그때 동지에서 자기네 학교에 오면 학비를 면제해준다고 삼촌을 통해 제안이 왔어. 그래서 포항중학교 간 지 사흘 만에 동지중학교로 갔지. 당시 동지중학교는 죽도시장 앞에 있는 아파트 부지에 있었어. 원래 그 자리는 일본이 군량미를 실었던 미곡 창고였고. 일본이 떠나고 나니까 학교를 그곳으로 옮겼지. 원래 동지중학교가 어디서 시작했냐면 지금 포스코 1고로 있는 데서 100m만 가면 해변이 있었는데, 바로 그 자리야. 거기에 일본 80연대가 있었고, 해방 후에 이 빈터를 깔고 앉은 게 동지중학교지. 그런데 그 주변이 전부 군영 땅이라 동지중학교는 더 있고 싶어도 있을 수가 없어 죽도시장 건너 미곡 창고로 갔어.안 : 혹시 동지중학교를 설립한 분들 중에 아직 살아 있는 분도 있는지요?이 : ‘6인회’라고 하는데, 그때 대학을 나온 여섯 명을 모아 하태환 선생이 상업학교를 세웠지. 창설 멤버가 6인이야. 다 돌아가시고 한 사람만 살아 있어. 강만철 씨라고 올해 아흔아홉이지. 이분이 스물세 살에 일본 대학으로 유학을 갔고, 나중에 초대 도의원을 지냈어. 내 담임이었는데 지금도 가끔 나랑 대화하지. 나는 3월에 입학해 그해 9월에 학적 변경 때문에 2학년이 되었어. 9월 학기제가 3월로 바뀐 게 30년 정도밖에 안 돼.안 : 당시 학창 생활은 어떠했는지요?이 : 힘들었지. 대구 상업학교는 형편이 좋아서 주산도 배우고 전표도 배웠는데, 우리는 실습 용구를 살 형편이 안 됐어. 남들 책을 얻어서 보고, 주판 살 형편이 안 돼 빌려서 썼지. 주판이 꽤 값이 나갔어. 당시에는 상업학교에 많이 진학했어. 상업학교라도 나와야 면서기를 한다고 말이지. 인문계는 관직으로 가고, 상업학교는 은행을 비롯해 경제 쪽으로 갔지. 하태환 선생이 일본에서 대학을 나와 상업학교를 빨리 세운 거야. 이석수 선생. 이석수1933년 경북 영일군 연일읍에서 태어나 국민학생 시절에 해방을 맞았고, 6·25전쟁에 참전해 동족상잔의 참혹함을 직접 겪었다. 포항수산대학을 졸업한 후 타지에서 목재상과 제약회사에서 잠시 근무했다. 1963년 2월 오천면사무소에서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건설부 소속으로 행정사무관, 국회 건설위원회에서 행정서기관, 건설부 과장, 국장 등을 거쳐 원주지방국토관리청장으로 공직 생활을 마쳤다. 퇴직 후 대한건설협회 상임감사로 일하다가 1995년 경상북도 정무부지사를 맡았다. 공무원 시절이나 퇴직 후에 고향을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가장 큰 일은 26년간 자료를 모아 자비로 ‘이석수의 포항 땅 이야기’를 출간한 것이다. 이 책에는 약 3천 꼭지의 포항 땅에 얽힌 이야기와 최신판 사진이 수록돼 있다. 대통령 근정포장(건설사업유공), 황조근정훈장 등 여러 기관에서 수여하는 상을 받았다.대담·정리 : 안준우(소설가) / 인물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6-27

지방소멸 극복 쉼 없이 달려온 ‘봉화’… 상생발전 기반 완성

‘새로운 변화와 도전, 더불어 풍요로운 봉화’ 실현을 비전으로 엄태항 봉화군수가 이끄는 민선7기 봉화군정이 어느덧 3주년을 맞으며 지방소멸에 맞선 상생발전의 탄탄한 기반을 완성해가고 있다.민선7기 봉화군은 ‘전원생활 녹색도시 봉화’ 건설이라는 목표 아래, 봉화퍼스트, 햇살복합영농, 녹색전원생활, 최고의 문화관광, 노후가 행복한 복지를 5대 군정운영 방향으로 설정하고 쉼 없이 달려왔다. ◇봉화퍼스트 지역경제 선순환 모델 ‘표준’민선 7기 모든 정책의 귀결점인 봉화퍼스트, 민선7기 3년 동안 봉화군은 외부로의 자본 유출을 막기 위해 봉화사랑상품권 발행, 시장애 불금축제 등 다양한 봉화 관내 자본 선순환 정책을 펼쳐오고 있다.봉화군은 6월 현재까지 누적 발행액 321억 원의 봉화사랑상품권을 유통했으며, 다양한 문화공연과 흥이 넘치는 시장애불금축제로 한산했던 시장을 지역경제 활성화의 현장으로 바꾸어 놓았다.민간 각계각층의 인물로 구성된 봉화퍼스트추진위원회(위원장 정해수)를 구성해서는 봉화퍼스트 정책추진의 컨트롤타워를 맡게 함으로써 민간의 유연한 아이디어를 발굴하고 봉화퍼스트 추진의 항구적 추진동력을 확보할 수 있게 했다.◇햇살영농 봉화의 희망이 되다봉화군은 경북 최초로 에너지 기본조례와 에너지 기금 운용 조례 제정에 이어 2020년 3월 봉화군민 녹색에너지 협동조합을 설립해 지역주민 주도의 녹색에너지 사업 참여 기반을 마련했다.봉화읍 화천리, 도천리 일원의 분양형 태양광발전사업(16.2MW 규모)은 2022년 준공을 목표로 추진 중이다.또한 공유지를 활용한 협동조합형 태양광 발전사업(20MW 규모)은 지역주민이라면 누구나 소규모 자본으로도 쉽게 참여 할 수 있게 했다. 발전수익을 마을기금으로 활용하는 마을단위 태양광 발전사업은 2020년부터 시작해 봉화군 관내 157개 마을 전체로 확대해나갈 계획이다.이외에도 산간지역의 풍력을 이용한 석포면 오미산 풍력발전사업(60MW 규모) 유치를 통한 석포면 전체 주민의 지분참여로 지역주민의 실질적 소득증대에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2019년 도내 최초로 시행한 농업인 경영안정자금은 올해 6천834농가에 80만원씩 총 54억 원을 봉화사랑상품권으로 지급했다.올 하반기 완공예정인 농산물산지유통센터와 농축임산물 전시판매장을 개장, 지역농산물의 판로확대와 농가소득 증대를 통한 농업경영의 선진화를 도모해 나갈 계획이다.◇봉화의 관광, 세계 최고·최초 지향엄태항 군수의 뚝심 있는 군정추진 방식에 걸맞게 봉화군이 추진하는 관광개발 사업에는 유독 최고,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따라붙는다.올해 실시설계 용역을 시작해 2023년 말 준공을 목표로 추진 중인 청량산 명승둘레길 조성사업은 총 192억 원의 사업비로 기존 탐방로를 대체할 신규 탐방로 약 1.1km 개설이 핵심이다.탐방로에는 총 길이 600m, 높이 170m의 세계 최장 산악 출렁다리가 조성된다.내성천경관전망인도교 조성사업은 87억원의 총사업비로 지난 5월 착공에 들어가 내년 7월 완공 예정이다.복합문화공간의 인도교(길이 116m, 폭 10m)와 봉화 대표 특산물인 송이를 형상화한 높이 66m의 전망타워도 조성된다. 봉화군을 대표하는 새로운 랜드마크이자 하천 위에 세워지는 최초의 전망타워가 될 예정이다.이와 연계한 호골산 관광명소화 사업은 총사업비 33억원의 도심 어트랙션 관광 인프라 사업으로 840m 길이의 짚와이어와 전망대, 탐방로, 경관조명 등을 2023년 6월까지 설치해 은어·송이 축제 체험프로그램을 다양화하고 내성천을 명품화할 계획이다.봉화은어축제는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지난해 경북도 최초로 온라인 축제를 개최해 새로운 축제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제9회 대한민국축제콘텐츠대상에서 비대면 축제 대상을 수상했다.봉화군은 더욱 새로운 프로그램을 준비함으로써 내성천 일대의 관광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확충을 통한 내성천 新르네상스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누구나 살고 싶은 봉화 건설녹색에너지와 연계한 테마형 전원주택 조성사업은 1차 지구인 물야면 북지리 60세대, 춘양면 소로리 25세대를 내년 분양을 목표로 90억 원의 사업비로 추진 중이다. 봉화읍 삼계리에는 도심형 주택단지 100세대를, 춘양면 도심리에는 국립백두대간수목원과 국립청소년산림센터 직원들의 거주편의를 위한 실거주형 주택단지 60세대를 약 100억원의 사업비로 2023년까지 조성할 예정이다.버섯클러스터 사업은 물야면 북지리 일원에 총사업비 155억원을 투입해 2022년까지 버섯 재배단지 대규모 조성과 재배사 위 친환경 에너지 발전시설 지원으로 귀농·귀촌인의 안정적 정착을 도모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아울러 봉화읍과 춘양면의 도시재생 인정사업 공모 선정으로 원도심 개발에 속도를 붙여 나가고 있다.총 사업비 180억원의 봉화읍 농촌중심지활성화 사업과 총 3개소의 기초생활거점육성사업, 2개소의 농어촌 새뜰사업도 추진 중이다. 지난 17일에는 5년 간 총사업비 430억원의 농촌협약사업 공모사업에 선정되는 쾌거를 거둠으로써 춘양생활권(춘양·법전·소천·석포) 정주요건 개선 대변혁의 기회를 잡았다.◇군정사에 빛나는 새 전환점으로 기억되길엄태항 봉화군수는 “봉화군의 민선7기 3년은 지방소멸이라는 위기에 맞서 지역발전이라는 대명제를 완수하기 위해 쉼 없이 달려온 그 어느 때 보다 역동적인 시기였다” 면서 “3만1천여 군민과 공직자 모두 희생을 감내하며 군정과 군민의 하나 된 힘으로 슬기롭게 코로나19라는 초유의 국가적 위기도 이겨내왔다”고 말했다.이어 “봉화 미래발전을 이끌 주요 핵심사업들을 성공적으로 완수해 민선7기가 봉화군정사에 빛나는 새로운 전환점으로 기억되길 희망한다”며 “민선7기 남은 1년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희망으로 군민의 행복과 봉화 발전을 위한 소중한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군민이 준 귀중한 책무에 한 치의 소홀함도 없도록 하겠다”고 했다. /박종화기자 pjh4500@kbmaeil.com

2021-06-27

해묵은 난제 착착 해결… 미래 기대되는 영천 앞당겨

최기문 영천시장은 ‘시민을 행복하게, 영천을 위대하게’라는 시정목표를 내세우며, 취임 초부터 시민 불편사항을 하나하나 챙기는 세심함과 함께 굵직한 국비 확보로 시민 행복과 영천발전에 모든 열정을 쏟았다.최 시장은 시민과의 약속인 공약사업을 완성해 현재까지 총 54건 중 42건의 공약을 이행한 결과, 2021년도 한국매니페스토 공약평가에서 A(우수)등급 받아 ‘약속 잘 지키는 시장’으로서의 면모도 보여줬다.작은 불편 사항부터 크고 굵직한 사업까지 빈틈없이 챙기며 지역의 오랜 숙원사업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가고 있는 최 시장의 지난 3년간의 주요성과를 살펴보고 앞으로 영천발전을 위한 계획을 들어봤다. ◇ 취임 3주년 맞은 소회지난해부터 시작된 코로나19 사태로 잠시 위기는 있었지만 민관군 방역단의 활약과 끊임없는 기부, 방역수칙 준수 등 시민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기반으로 다중이용시설 640개소 임시휴업, 두 차례에 걸친 전 시민 재난지원금지급 등 최 시장의 과감한 위기관리 능력이 어우러져 코로나19를 잘 막아내고 있다.또한 대구도시철도 1호선 금호(경마공원)연장을 위해 정세균 국무총리, 권칠승 국회의원, 이종후 국회예산정책처장, 최기주 대도시권광역교통위원장을 만나는 등 최 시장의 파격적인 행보는 지난 4월 22일 국토부 제4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안)에 금호연장이 반영되는 쾌거로 이어졌다.이 모든 것이 시민들이 믿고 협조해준 덕분이라는 최 시장은 어떠한 어려움도 시민들의 염원과 공직자들의 강력한 의지만 있다면 헤쳐 나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 코로나19 대응과 지역경제회복 위한 계획지난해 2월 19일 첫 확진자가 발생했다. 지역은 감염 공포에 휩싸였다. 하지만 시민들의 자발적인 협조와 영천시의 다중이용업소 휴업조치, 철저한 방역과 소독 등 신속한 조치가 어우러져 3월 7일 이후 코로나19 확진자 증가세를 막을 수 있었고, 대구경북 최초 1인당 20만원의 전 시민 재난긴급생활비 지급으로 침체된 지역경제가 점차 활력을 되찾았다.올 2월 설 명절 전에도 전 시민 대상으로 1인당 10만원의 ‘제2차 영천형 재난지원금’을 지급하며 얼어붙은 소비심리 회복에 힘썼다. 특히 지역화폐인 영천사랑상품권 활용으로 지역 경기 활성화에 힘을 보탰다.영천사랑상품권 10% 특별 할인 판매기간을 연중 시행하고 있으며 지난해 카드형 영천사랑 상품권을 출시해 젊은 층 수요 확대에 기여했다. 가맹점 확대로 소비 가능한 곳을 더욱 늘렸다.공설시장 사용료를 25% 상시 인하와 코로나19 경제회복비, 소상공인 카드수수료, 소상공인 특례보증 및 이차보전을 실시했으며, 중소기업 운전자금 이차보전 지원 실시 및 소상공인이 생계형 자동차 구입 시 취득세를 100만원까지 감면해주는 등 맞춤형 지원에 힘썼다.◇ ‘해결사’로서 지역의 오래된 난제들 해결‘시민이 생활하면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도시’로 만들어야겠다는 확고한 철학이 있었다.많은 성과가 있지만, 그 중에서 최우선적으로 추진했던 사업이 바로 ‘대구-경산-영천 광역교통 무료환승시스템 구축’이다.2018년 10월 최 시장은 권영진 대구시장을 만나 직접 건의했다. 권 시장은 이를 수용했고, 대구은행에서 광역교통시스템 구축을 위해 9억7천만원을 기탁하면서 사업이 급속도로 추진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대구시, 경산시와 협의를 거쳐 2019년 8월 13일 대구, 경산간 광역교통 무료 환승이 이루어졌다. 이와 함께 신녕, 청통간 추가요금도 폐지해 대구, 경산을 오고가는 직장인과 학생들의 교통비 부담을 크게 줄였다.또 금호~청통~신녕 간 시내버스 노선 신설로 지역 간 교류강화와 영천경마공원 개장 등에 대비해 교통편의 시설 확충에 힘썼다.승강장에 에어커튼과 온열의자, 바람막이를 설치하여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들을 위한 세심함도 돋보였다. 매년 실시하는, 한 해의 가장 우수한 시책을 뽑는 ‘2019 영천시정 베스트 7 시민투표’에서 시민들에게 가장 많은 선택을 받았다. 이외에도 △마을버스와 행복택시(1000원 택시) 확대 운영 △영천~인천공항간 리무진 버스 운행 등으로 최 시장 취임 후 교통환경이 크게 개선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숙원사업들도 하나씩 이루었다. 40년 숙원이었던 금호대창 하이패스IC 설치 확정과 상습정체구간이었던 금호-하양간 6차로 확장사업 확정 (국비 250억원 확보), 현재 용화·용산·성곡리를 시작으로 연차적으로 급수가 이루어지고 있는 자양면 지방상수도 공급사업 실시 등 지역 주민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사업들이 하나씩 실현되고 있다.농촌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농가의 가장 큰 고민인 부족한 일손부족 문제는 완산동 농촌인력지원센터와 동부권 농기계임대사업소 개소로 해결했으며, 올 8월부터는 북부권에도 농기계임대사업소를 운영할 예정이다.또한 농가마다 서로 달랐던 포장재를 ‘스타영천, 스타과일’로 통일하고, 영천별빛한우 브랜드를 개발해 우리농산물의 품격을 높이고 있다.지난 3월에 한방마늘산업특구 지정과 함께, 하반기에는 조교동 농산물도매시장이 새롭게 문을 열 예정으로, 코로나19와 냉해피해로 어려움을 겪었던 농촌에 힘을 실을 것으로 기대된다. ◇ 국비확보 위해 동분서주최 시장은 코로나 19가 다소 안정세로 접어들자 국회와 세종으로 달려갔다. 지난해 5월 정세균 국무총리를 시작으로 이종후 국회예산정책처장, 영천출신 권칠승 의원, 최기주 대도시권광역교통위원장 등을 만나 대구도시철도 1호선 금호연장과 지역발전에 꼭 필요한 다수의 국비사업을 건의했다.그 결과 대구도시철도 1호선 금호연장은 지난 4월 22일 국토교통부 공청회에서 제4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에 반영되었고, △한국폴리텍대학 로봇캠퍼스 설립인가 △영천댐 상류지역 하수도정비사업 (국비 280억원) △완산동 상점가 주차환경개선사업 (국비 84억원) 확보 △평생학습도시 지정 등 성과를 냈다.국비는 지난 해까지 총 99건, 2천765억원을 확보, 연 1천억원이 넘는 성과를 거뒀다. 2019년의 경우, 언하공업지구 활성화 시범사업 (국비 500억원), 성내지구 마을정비형 공공주택사업 (국비 376억원) 등 한 해 동안에만 총 47건 1천465억원의 국비를 확보하기도 했다. ◇ 기업 투자유치와 일자리 창출 성과·인구 목표 달성그동안 기업 유치와 고용률 향상 등 지역경제 인프라 확충에 온 힘을 다했다.우수 기업 유치를 위해 취임 직후, 각계각층 전문가로 구성된 ‘범시민기업투자유치위원회’ 출범 △중소기업 운전자금 지원 △투자유치진흥기금 설치 및 지원 △찾아가는 기업지원 SOS추진단 운영으로 코로나19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기업 투자유치를 이끌어 내었다. 그 결과 총 26건 1천794억원의 투자유치 협약을 체결했다.지난해 영천첨단부품소재산업지구도 100% 분양을 완료했으며, 부족한 산업부지확보를 위한 영천하이테크파크지구(스타밸리)와 금호일반산업단지 공영개발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영천하이테크파크지구는 북영천IC, 금호일반산업단지는 금호2219대창 하이패스 IC(신설 예정)가 있어 원활한 물류수송이 가능한 교통인프라 조성으로 우수 기업 유치가 기대된다.일자리(고용률)에서는 전국 최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2018년도 고용률 67.6%, 2019년도 고용률 69%, 2020년 고용률 66.4%로 민선7기 이후도내에서 고용률 1위 도시로서 지위를 이어오고 있으며, 최근에는 지역 청년 CEO들을 찾아가 소통하며 지역 일자리도 꼼꼼히 챙겨나가고 있다.지역 경쟁력 확보를 위해 ‘인구증가’를 시정 최우선 과제로 강조했다.2018년 7월 31일 기준 영천시 인구는 10만 186명을 기록, 모두가 인구 10만 붕괴를 우려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시민 모두 동참을 이끌어 내기위해 영천 주소 갖기 운동을 실시했다.출산양육지원금 최대 1천300만원까지 지원 하고 예식비 30만원에서 100만원으로 확대 지원 등 지원시책을 대폭 확대 했다.이후, 다자녀가구 지원 △청년을 위한 군복무장병 상해보험지원 △신혼부부를 위한 전세자금 대출이자 지원과 △중소기업에 대해 기숙사 임차비·청년일자리 지원까지 각계각층 맞춤형 지원으로 힘쓰고 있다.분만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 산후조리원 등을 갖춘 영천제이병원이 개원, 다함께 돌봄센터 1호점 개소 등으로 돌봄사각지대 해소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1호점 개소를 시작으로 내년엔 완산동, 금호읍에 각 1개소를 추가해 총 3개소로 확대할 계획이며 화북, 화남, 자양 등 농촌지역에도 보육문제 해결을 위해 화북면에 위치한 북동권역 국공립 어린이집 설치도 진행 중이다.2019년 초·중·고 무상급식 시행 후 지난해 공·사립 유치원까지 확대해 유치원 초·중·고·특수학교까지 60여 개, 8천여 명을 대상으로 급식비를 전액 지원하고 있다.이같은 노력으로, 4월 말 기준 인구 10만 2천 529명으로 2011년 이후 최다 인구를 기록했다. ◇ 남은 임기 중 가장 역점적으로 추진할 사업대구 도시철도 1호선 금호연장 추진을 중심으로 향후 10년이 영천 미래가 결정될 중요한 시기이다. 상반기에 제4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에 금호연장이 확정, 고시 되면 얼마나 빨리 도시철도 1호선 금호연장공사가 추진될 수 있을지가 핵심이다.2024년 경마공원 개장과 금호일반산업단지 공영개발, 금호 신월리 아파트 조성(2천세대) 등 금호 인근 개발사업과 그 시기를 맞추어 추진돼야 하고, 아울러 금호~하양간 국도 6차로 확장, 청통·와촌 간 국지도 확장, 금호대창 하이패스 IC 개통, 금호·대창 간 지방도 4차로 확장 등 유동인구 증가에 대비할 추가적인 교통로 확보도 시급한 상황이다.도시철도1호선 연장의 파급효과를 청통, 신녕 인접지역을 비롯한 시내권, 더 나아가 전 지역으로 어떻게 연계하고 확장시킬지에 대한 종합적인 계획을 추진할 예정이다.최기문 시장은 “지난 3년을 쉬지 않고 달려왔지만,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다. 시민들과 함께 소통하며, 행복한 도시, 미래가 기대되는 영천을 만들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다”면서 “코로나 19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방역에 협조해준 시민들에게 감사하며, 앞으로도 시정에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한다”고 말했다./조규남기자 nam8319@kbmaeil.com

2021-06-24

‘대구미래역량교육’으로 교육의 백년대계 내실 다진다

미래학자들은 4차 산업혁명이 교육에 큰 변화를 몰고 올 것이라고 예견했고, 코로나19가 그 변화를 성큼 앞당겼다.지난해 초 코로나19 확산으로 사상 초유의 개학 연기에 이어 온라인 개학이 이뤄졌고, 먼 미래의 일로 여겼던 모든 것이 빠르게 현실화돼 가고 있다.학교 현장에 에듀테크가 보급됐고, 학생들이 다양한 학습 플랫폼과 스마트 기기를 활용해 온·오프라인으로 수업을 받는 장면이 더는 낯설지 않은 모습이 됐다.대구교육은 코로나 19 대응을 넘어 미래교육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고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의 방향을 모색해 대구미래역량교육의 초석을 내실 있게 다지고 있다. □교실혁명을 선도하는 대구미래역량교육대구시교육청은 ‘미래를 배운다. 함께 성장한다’는 비전 아래 전국에서 처음으로 학생의 ‘미래역량’에 주목해 대구미래역량교육을 도입했다.개별화 맞춤형 교육을 통한 미래역량 함양, 한 학생도 놓치지 않는 다품교육, 교육활동 중심의 학교 자율성 강화, 함께하는 따뜻한 교육공동체 조성에 힘을 쏟는 등 교육 현장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특히, 대구교육청에서 학생들의 미래역량을 기르기 위해 선도적으로 추진하는 국제 바칼로레아(IB, International Baccalaureate) 프로그램은 공교육 혁신 모델로 자리 잡고 있다.IB 교육은 지식을 집어넣는 주입식 교육을 벗어나 생각을 끄집어내는 개념 기반 탐구 중심 수업과 평가를 통해 학생주도적인 배움과 성장을 지원하는 교육 시스템이다.1968년,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비영리 교육재단 IB 기구(IBO)에서 개발해 현재 전 세계 161개국 5천465교에서 운영 중이다.대구교육청은 2019년 7월 IB 본부와 국제 바칼로레아 디플로마 프로그램 한국어화 MOC 체결 뒤 공교육 내 IB 프로그램 추진을 통해 창의융합형 인재 양성을 위해 힘썼다.그 결과 올해 1월에는 전국 최초로 국공립 IB 인증학교 2교(경대사대부초, 경대사대부중)를 배출했다.코로나19 속에서도 IB 교육 중장기 로드맵이 차질 없이 진행 중이고, IB 한국어화로 원하는 학생 누구나 IB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됐을 뿐만 아니라 교육 환경이 열악한 지역의 공립학교에 IB 프로그램을 도입해 지역 간 교육 불균형도 해결하고 있다.아울러, 수업과 평가뿐만 아니라 학생, 교사, 교육환경, 학교문화까지 근본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IB 교육을 통해 지난 40여년 동안 정답 찾기 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 교육의 패러다임을 질적으로 개선하고 미래사회가 요구하는 인재를 키워낼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AI 기반 에듀테크 활용 맞춤형 개별화교육대구교육청은 2018년부터 에듀테크(Edu-Tech) 활용교육을 일찍 도입한 덕분에 지난해 극심한 지역 감염 속 위기 상황에서도 전국에서 가장 먼저 원격수업을 안정화했다.강은희 대구시교육감은 IT기업을 경영한 경험을 바탕으로 2018년 취임 이후부터 학교 무선인터넷 환경을 본격적으로 구축하고, 학생 1명당 스마트기기 1개 보급, 초·중·고 교원 노트북 추가 지원 등 4차 산업혁명시대를 대비한 디지털학습 환경을 역점적으로 조성해왔다.이런 에듀테크 생태계를 기반으로 감염병 위기 속에서도 방역과 학습을 병행하며 안정적인 교육활동을 추진한 결과, ‘원격교육시스템 in 대구’라는 주제로 지난해 교육 분야 정부혁신 우수기관으로 선정돼 최우수상을 받았다.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가속화 된 교육의 디지털 대전환 흐름은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온택트(Ontact) 시대를 맞아 올해 대구교육청은 대구형 블렌디드 수업 모델인 ‘D-블렌디드 러닝’을 개발해 학교 현장에 적용하고 있다.D-블렌디드 수업은 온·오프라인의 혼합을 통해 개별화를 보장하고 협력학습으로 함께 성장해 가는 대구형 학생 맞춤형 수업으로, 원격수업을 넘어 뉴노멀 교실수업을 선도하고 있다.또한, 기초학력 채움교사제, 1수업2교사제, 학습보조강사제, 두뇌기반교육 등 맞춤형 학력 향상 프로그램을 촘촘하게 추진하면서, 대구형 AI 교육 프레임워크를 개발하고 AI 활용 수학점핑학교, 온라인 튜터, LMS 기반 온라인 학습플랫폼 제공 등 인공지능을 활용한 맞춤형 학습, 학습이력관리, 피드백을 지원해 코로나 상황 속 학력 저하 우려 속에서도 기초학력을 안정적으로 다졌다. □ 미래교육을 담는 교육 공간, 그린스마트 미래학교미래형 교육과정을 담아낼 수 있도록 친환경, 스마트 학교시설 인프라를 구축하는 동시에 미래 수요에 대응한 적정 규모 학교 신설 및 교실 증축, 교육 공간 확충 등 교육 환경도 대폭 개선한다.다양한 수업과 놀이, 쉼이 있는 초등학교 미래교실 리노베이션 및 놀이공간 조성, 고교학점제 대비 창의융합적 교육활동을 위한 중·고등학교 미래교육공간 구축, 특수교육환경 리노베이션, 도서관 현대화 등 사용자 참여 설계 기반의 공간혁신을 통해 미래형 공간으로 재구조화하고 있다.또한, 신재생에너지 설비 등 에너지 절약과 학생 건강을 고려한 제로에너지 그린학교를 구현하고, 미래형 교수·학습이 가능한 첨단 ICT 기반 스마트 교실을 구축해 디지털 기반 교육 인프라를 조성한다.이밖에도 상상제작소, 수학체험센터, 대구학생예술창작터, 민주시민교육센터 구축 등 학생 배움 중심 교실 수업을 위한 미래교육 공간을 지속적으로 확충하고 있다. □ 무상교육 완성, 함께 가는 다품교육 확대대구교육청은 올해, 고교 무상교육 시행과 함께 중학교 신입생을 대상으로 무상교복을 지원했다. 또한, 코로나19로 인한 학부모의 가계 부담을 완화하고자 오는 2022년 전면 시행 예정이었던 고등학교 전 학년 무상급식을 애초 계획보다 1년 앞당겨 올해 초·중·고 전체 무상 급식시대를 열었다.강 교육감 취임 이후 무상급식을 지속적으로 확대해온 결과, 3년 만에 중학교와 고등학교 무상급식을 완성하게 됐다.취약계층 학생들에게 더욱 촘촘하고 빈틈없는 지원을 위한 ‘다품복지망’도 운영한다.교육복지사업을 경제·돌봄·정서·학습·특정대상지원의 5개 분야로 분류하고 체계화한 다품복지망 로드맵과 원스톱 소통체계를 전국 최초로 구축해 각급 학교의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학생들에게 종합적인 지원을 하는 등 촘촘한 복지 안전망을 바탕으로 한 아이도 놓치지 않는 다품교육을 실현해 나간다는 방침이다.학생들이 능력, 환경, 지역, 장애, 국적 등에 관계없이 모두가 배움의 기회를 얻고 잠재력을 꽃피우며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학업중단 예방 대안교육, 다문화교육, 특수교육에 대한 지원도 더욱 강화했다.치유형 대안교육 위탁기관을 운영해 학업중단 위기에 있는 학생들이 치료와 학업을 병행하며 학업을 지속해 건강한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울 뿐만 아니라, 다국어 통역ㆍ번역 서비스 등 다문화 가정의 언어 소통 부담을 완화하고 다문화 학생의 학교 적응력을 높이는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 지역과 함께 하는 미래교육, 대구미래교육지구학령기 인구 감소에 대응해 지자체와 연계한 특색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교육 균형 발전과 지역 인재 양성을 위해 지자체와의 소통·협력도 강화한다.대구미래교육지구는 지난해 시범 운영을 시작으로 올해 대구지역 8곳 구·군으로 확대 추진하는 교육청·지자체·지역사회 협력 사업이다.민·관·학 네트워크를 통해 저녁 틈새 돌봄, 방과후 프로그램, 진로교육 등 마을학교 간 교육과정 연계 및 프로그램 개발을 통한 학습, 돌봄, 안전망을 조성해 지역 전체의 교육력을 높이고 있다.강은희 대구시교육감은 “대구교육가족은 모든 아이들이 언제 어디서나 개별화된 배움으로 미래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의 방향을 함께 모색하며 미래교육을 향한 걸음을 힘차게 내딛고 있다”며 “안전한 학교 울타리 안에서 학생에게는 희망과 용기를, 학부모에게는 믿음과 신뢰를 교직원에게는 열정과 보람을, 지역사회에는 공감과 행복을 주는 대구미래역량교육을 펼쳐 학생들의 미래역량을 꽃 피울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심상선기자 antiphs@kbmaeil.com

2021-06-24

4차순환도로 연말 개통 등 교통사각지대 해소 ‘숨통’

대구시는 도심혼잡 해소 및 대구·경북 광역경제권을 형성하기 위해 교통량 분산에 혼신의 힘을 쏟고 있다. 올해 말 대구4차순환고속도로의 개통을 앞두고 있으며, 대구권 광역철도 사업도 추진 중에 있다. 이런 상황이지만 재건축·재개발 및 대규모 개발사업 입주민들의 교통사각지대 해소 요구 민원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대표적으로 대구권 광역철도 추가역 신설 요구, 신교통 트램건설 촉구, 엑스코선 연장노선 및 수성남부선 지상철 등에 대한 촉구 민원이 몰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향후 대구시가 어떤식으로 해결해나갈지 시민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본지는 창간 31주년을 맞아 대구시가 전하는 앞으로의 교통 변화와 민원에 대한 해결책에 대해 알아봤다. □4차순환도로 올해말 완공 예정대구지역 교통문제는 분지 특성에 따라 여러가지 요인이 작용하는 복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이중 미군부대 반환에 따른 3차순환도로와 4차순환도로의 건설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앞으로 대구교통지도의 대변혁을 예고하고 있는 상황이다.이와 동반해 시민들의 교통사각지대 해소 요구에 대한 민원도 커지고 있다.대구시에 따르면 국도와 고속도로를 연결하는 도시외곽순환도로(4차순환도로) 사업이 올해 말 완전 개통예정이다.이 사업은 대구시 주변도시를 연결하는 8개 방사형 도로가 도심을 통과함에 따라 도심지 주요교차로 지정체로 산업단지 물류수송 및 시민교통 불편이 가중돼 이를 해소코자 지난 1987년 도로기본계획으로 수립한 오래된 숙원사업이다. 대구4차순환도로의 전체 연장은 61.6㎞이다. 현재는 절반가량인 29.1㎞(민자 17.7㎞, 일반 11.4㎞)가 대구시에서 건설해 운영중에 있다.잔여 공사 구간인 대구4차 순환고속도로공사 구간은 성서∼지천∼안심 구간으로 총 연장은 32.5㎞이다. 진·출입 시설(나들목 7곳, 분기점 4곳)이 설치되며, 설계속도 80㎞/h, 4차로로 건설중에 있다.총사업비는 1조 5천258억원, 국비 40%, 도로공사 60% 씩 재원을 분담해 건설된다.대구4차 순환고속도로공사는 지난 2014년 3월부터 7개 공구로 나누어 공사 계약과 착공에 들어가 지난해 12월 말 기준 80% 공정율을 보이고 있으며, 오는 12월 4차 순환도로 완전개통을 목표로 공사가 진행중에 있다.대구시는 공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대구 도동 측백수림(천연기념물 제1호, 1962년) 보호 및 향산마을 주민 생활환경 피해 개선을 위해 노선을 변경(터널 2곳 추가)해 사업을 시행하는 등 지역 환경 보전을 위해 노력했다.특히, 지역환경 보호를 위한 측백나무 숲 구간 노선변경을 위해 추가적인 도로선형 재설계 및 도로구역 변경고시, 토지보상 등을 시행해 착공 후 4년이 지난 2018년 공사를 추진했음에도 철저한 공정계획 검토를 통해 올해 준공까지 차질없이 진행중이다.공사의 대부분이 교량 및 터널 등의 대형구조물(터널 8곳, 교량 49곳)로 구성돼 공정 및 품질관리에 만전을 기했으며, 가장 연장이 긴 금호대교(825m)는 금호강을 횡단하는 교량으로 경간장(교각과 교각 사이의 거리)이 최대 175m로 시공에 정밀을 요하는 공법으로 철저한 품질관리를 통해 교량 공사를 완료했다.□교통난해소 민원도 봇물4차순환도로의 경우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지만, 지역의 재개발·재건축 및 대규모 주택개발사업이 늘어나며 입주민들의 교통사각지대 해소 요구 민원이 넘쳐나고 있다.옛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상황과 현재 진행되는 사업들과의 불균형으로 인해 교통혼란이 가속되기 때문이다. 이는 한 지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다수의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으로 현재 대구시가 파악한 교통혼란 해소요구 민원은 크게 4가지로 나뉜다.대구권 광역철도에 원대역 등 추가역 신설 요구, 신교통 트램건설 촉구, 엑스코선 연장노선, 수성남부선 지상철 건립 등이다.광역철도 추가역 신설의 경우 대구산업선 호림역, 서재·세천역 추가역 신설 소식에 형평성을 고려해 대구권 광역철도 장래역으로 지정된 원대역(가칭)을 비롯한 추가역(가천역, 사월역, 지천역 등)에 대해 전액시비를 투입 설치해 달라는 민원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또 신교통 트램건설 촉구 민원은 민선7기 공약사항으로 지난 2018년 7월 착수해 추진중인 ‘신교통시스템 도입 사전타당성조사 용역’결과발표를 앞두고 서구·달서구 두 지역간 유치를 위한 민원이 다수 발생하고 있다.서구의 경우 기존 순환선인 서대구로 관통과 두류네거리 통과노선 유치를 주장하고, 달서구는 와룡로 죽전네거리, 본리네거리를 통과하는 노선을 유치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이어 엑스코선 연장노선 및 수성남부선 지상철 건립에 대한 민원도 주민들의 서명운동 등으로 과열양상을 보이고 있다.지난해 12월 엑스코선 예비타당성 통과발표 이후 연경·도남 지구 대규모 개발사업 입주민들의 교통사각지대 해소 요구 민원 발생했으며, 대구시는 대구 수성구 상·중·파동과 달성군 가창면 주민들이 수성남부선 지상철 건설 현수막과 서명운동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민원해결의 관건은 예산대구권 광역철도 사업의 경우 기존 경부선 여유용량을 활용한 저비용, 고효율 철도망 구축사업이다.앞서 국토교통부는 제4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2021∼2030년)에 앞으로 광역철도를 비수권으로 확대추진 할 방침에 따라, 대구·경북 통합신공항을 경유하는 대구경북선을 광역철도사업으로 추진하는 것으로 발표한 바 있다.현재 대구권 광역철도 2단계(구미∼김천, 22.9㎞, 458억원) 사업이 신규 사업으로 발표된 상황이다.이에 대구시는 민원에 대해 대구권 광역철도 2단계 사업에 추가역을 우선 포함한 신규사업 발굴을 위한 용역비를 빠르면 올해 추경예산에 확보해 현 교통여건 변화와 수요분석 등 사전타당성 용역을 착수해 국비지원사업으로 추진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방침이다.주민들이 요구하는 트램노선, 엑스코선 연장노선, 수성남부선 지상철의 경우 도시철도망 구축계획 반영, 예타통과 등 현 시점에서 경제성이 미확보된 상황으로 순조롭게 추진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 대구시의 입장이다.□난제속 대구시 트램노선 등 최선책 강구중여러 난제가 깔려있지만 대구시는 최선의 교통 대책을 찾고 있다.우선 대구시는 트램노선에 대해 예타 통과를 위한 관련 법령 및 지침 개정을 선행할 방침이다.대구시 입장에서는 트램의 경우 국내도입 사례가 없어 그 효과를 체험하지 못했기에 도입이 조심스러운 것은 사실이다.우선 트램은 기존 차로를 활용해 건설되기에 기존차로(2차로 정도)를 잠식하는 형태로 건설된다.이에 따라 자동차 이용자들의 불편이 예상되지만, 교통분담을 자동차에서 대중교통(트램)으로 이전하는 것이다. 이에 따른 불편은 대중교통 우선 이용이라는 시민의식의 변화도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이 대구시의 입장이다.향후 대구시는 도시철도망 구축계획 변경(안)에 대한주민 및 관계 전문가 의견수렴을 위해 주민공청회를 오는 25일 가질 예정이다.공청회 이후 일정으로는 국토교통부에 도시철도망 구축계획 변경승인을 위한 본 협의 위해 시의회 의견을 청취한 후, 국토교통부에 신청하면 국토교통부는 내부 전문기관 및 관계부처의견을 수렴해 대구시와 협의절차를 거쳐 내년 하반기 도시철도망 구축계획(변경) 승인을 고시할 예정이다.윤정희 대구시 교통국장은 “최근 대구시 곳곳에서 재개발·재건축 아파트 사업이 진행 중으로 도시철도 유치를 위한 입주(예정)주민들의 집단민원 양상으로 번지고 있는 실정”이라며 “매년 버스 및 도시철도 재정지원금이 증가하고 있는 상태로 향후 지방재정을 감안한 효율적인 투자가 될 수 있도록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이어 그는 “오는 6월 25일 실시하는 도시철도망 구축계획 변경안 공청회 결과 발표가 뜨거운 관심이 큰 만큼, 공청회 결과에도 적극 수용하는 배려가 어느 때 보다 절실한 시점이라 생각된다”며 “의견수렴 절차가 마무리되면 후속 절차인 사업시행을 위한 절차도 조속 추진해 나가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김재욱기자 kimjw@kbmaeil.com

2021-06-23

절대 권력 이을 후계자 위한 군왕의 첫번째 내리사랑으로

모두가 짐작하겠지만 고대의 왕은 현대의 통치자와는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이 달랐다. 오늘날의 대통령이나 수상은 선거라는 제도를 거쳐 국민들로부터 위임 받은 권력을 일정 기간 동안 행사하는 사람이다. 민주주의의 성장이 가져온 결과다.반면 고대의 왕들은 신(神)이나 하늘을 대신해 백성을 통치하는 사람으로 인식됐다. 대부분은 선출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전해지는 방식을 통해 최고 권력자의 지위를 승계했다.고대왕국 신라도 마찬가지였다. 다수의 신라시대 왕들은 자신의 핏줄을 이어받은 아들을 후계자로 삼고자 했다. 아들이 없을 경우 딸이 왕이 되거나, 방계 혈족이 권력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있었으나, 그런 경우는 많지 않았다.1천300여 년 전 지금의 경주시 인왕동에 우뚝 솟아 그 미려함과 웅장함을 뽐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동궁’은 왕의 아들, 즉 태자(太子·왕조시대의 차기 왕위 계승자)가 머물며 교육받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절대 권력의 바통을 손앞에 두고 있던 왕의 아들이 당대의 석학들로부터 학문을 배우며, 왕가의 관습과 제도를 익히고, 때로는 유유자적 산책을 즐겼을 동궁을 ‘나무위키’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신라의 별궁으로, 신라의 태자가 사는 곳이었다. 왕이 사는 법궁인 경주 월성과는 원화로를 사이에 두고 북동쪽으로 매우 가까이 있으며 황룡사의 남서쪽에 있다. 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과도 아주 가깝다. 궁궐은 신라 때는 수십 개 전각이 늘어서 있었지만 지금은 1, 3, 5호 건물지 3개만 복원한 상태다.또한 이곳의 심벌은 월지라는 이름의 인공 호수인데, 사실 궁궐로서의 이미지보다는 과거 통칭이었던 안압지라는, 월지 호수와 누각으로서 훨씬 잘 알려져 있다. 이 인공호수는 신라 왕궁 안쪽의 친수구역으로 경복궁의 경회루처럼 풍류와 연회 장소로 만든 곳이다.”신라인의 생활상 알 수 있는 유물 쏟아진 곳동궁과 그 일대 유적들은 고대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물들로 평가받고 있다. 거기에다 통일신라시대 정원의 원형이 잘 보존돼 있고, 당시의 건축 형태를 유추할만한 실마리도 여러 군데서 찾을 수 있다.또 하나 특이한 점은 통상의 고대 유물들처럼 무덤에서 출토된 죽은 자를 위해 부장품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사용된 물건이 다수 발견됐다는 것이다. 문고리, 빗과 가위, 목간, 물품 제조일자 꼬리표, 그릇 등의 신라시대 유물은 동궁과 월지에 유명세를 더해줬다.동궁은 신라가 국력을 키워가며 고구려와 백제를 제압해 삼국통일을 이룬 직후에 축조된 것이라 이야기된다.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나라가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추지 못했거나, 힘이 약해졌을 때는 성을 만들어 낼 다수의 백성들과 건축 기술자를 동원해 이런 대규모 공사를 진행하기가 어렵지 않겠는가.왕의 권력과 왕위를 이을 후계자의 권위가 어느 때보다 강력했기에 만들어졌을 동궁. 그 막전막후의 과정을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는 ‘신라의 왕권 강화와 발전’(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발행)을 살펴보자.“문무왕은 679년 2월에 궁궐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중수하였다. 8월에는 처음으로 동궁을 짓고 비로소 내외제문(內外諸門)의 이름을 정하였으며, 사천왕사를 완성하고 남한성을 증축하였다. 또 681년 6월에는 수도에 대규모 토목공사를 계획하였다.(…중략) ‘삼국유사’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문무왕이 수도에 성곽을 쌓으려 하였다고 밝혀 나성을 쌓으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나성 축조에만 한정되지 않고, 중대왕실의 통치이념을 구현할 수 있는 도성으로의 혁신을 시도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외부의 침입을 막아줄 성을 쌓고, 불교를 중히 여기던 그 시절답게 나라가 관리하는 거대한 사찰을 세우고, 왕국의 중심도시를 새롭게 만들어가던 7세기 신라.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태자의 거처이자 교육장인 동궁을 만들었다는 건 왕이나 필부(匹夫) 모두 마찬가지로 자신의 자식을 귀하게 생각하고 아끼는 마음은 다를 바 없다고 말하면 지나치게 확대된 해석일까? 이 질문에 답해줄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왕의 후계자가 머물던 곳은 월지궁? 동궁?신라 35대 왕인 경덕왕은 아들이 태어나지도 않았던 상태에서 동궁을 보수했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신라의 왕권 강화와 발전’을 다시 인용한다.“745년(경덕왕 4년) 동궁이 수리된다. 동궁이라는 곳은 왕실의 후계자가 거처하는 곳인데, 아직 왕자가 태어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동궁을 수리한다는 것 자체가 경덕왕의 후사에 대한 염원을 담았다고 할 수 있다.752년(경덕왕 11년) 8월에 동궁아관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시기에도 왕자는 출생하지 않았다. 사료 상에는 경덕왕에게 공주가 태어났다는 기록이 없으나, 동궁을 수리하거나 동궁아관을 설치했을 당시 왕자의 출생을 기대할 만한 일이 나타났을 가능성이 있다.”이처럼 ‘왕자의 출생을 기대할 만한 일’이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태어날 아이가 머물 공간을 깔끔하게 리모델링 하고, 아들이 교육받고, 신변을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기관을 설치한 경덕왕.경덕왕은 아버지가 아닌 형으로부터 권력을 승계 받은 왕이었다. 그랬기에 더더욱 왕위를 물려줄 아들을 갈망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건 경덕왕은 우여곡절 끝에 수리한 ‘동궁의 주인’이 될 아들을 낳았고 그가 8살에 왕위에 오른 혜공왕이다.여러 명의 왕자들이 인품 훌륭한 학자에게 교육받던 공부방이자, 보디가드가 딸린 안전가옥으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시대의 동궁.사람들은 동궁과 ‘월지궁’을 같은 공간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몇몇 사람들은 동궁과 월지궁을 헛갈려 하는데, 이 두 명칭에 대해서는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간행한 ‘신라의 유적과 유물’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월지는 월성 북편에 위치한 안압지의 원래 명칭이고, 이곳에 월지궁이 있었는데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동지로 불리기도 했다. 헌덕왕대의 기록을 보면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어 수종을 태자로 삼아 월지궁에 들게 한 사실과 이 지역을 발굴·조사 하였을 때, 태자 혹은 동궁이라는 명문의 유물이 출토된 것을 미루어 보면 월지 주변에 태자궁이 있었음이 확실하다.문무왕대에 대대적으로 월성을 중수하고 궁궐의 구조도 재편하였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때 월지궁이 동궁으로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월지에는 연희를 위한 임해전이 있어 이 지역은 동궁으로 쓰인 동쪽과 연희를 위한 공간인 서쪽 임해전으로 이원적 궁궐 구조를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위의 설명처럼 사실 안압지(월지)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에는 월지란 이름을 가진 것 외에도 ‘동궁’이란 이름이 새겨진 유물이 상당수 나왔다.이에 일부 역사학자들은 왕족이 거처하는 월지궁은 동궁의 다른 명칭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고 말한다.역사의 부침 겪은 신라의 동궁동궁과 월지궁의 관계는 ‘통일신라의 궁원지, 동궁과 월지의 조사와 연구’에 실려 있는 이재환의 논문 ‘신라 동궁과 고대 동아시아 동궁 체계 비교 검토’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이재환은 “월지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월지와 월지궁, 태자, 동궁, 동궁관 간의 연결고리를 너무도 명확하게 보여준다”며 “출토 유물과의 대응이 모호한 급장전을 제외하고, 동궁관으로 구분된 9개 관부 중 8개 관부에 각각 대응하는 유물들이 월지에서 모두 출토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 주장에 이어지는 문장을 보자.“이를 감안할 때 월지가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 그 주변의 궁명은 월지궁으로 보이는데, 동궁관이 월지전과 월지악전을 관할 하에 두고 있으므로 월지궁이 곧 동궁이며, 동궁관의 다른 관부 관련 유물들도 월지에서 출토되었고, 태자와 동궁 관련 유물 또한 월지에서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이 동궁은 왕위 계승 예정자의 동궁이기도 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동궁이라 불렸을 수도, 월지궁이라 불렸을 수도 있는 아득한 옛날 신라의 건축물. 권력의 승계가 구체적으로 준비되던 그곳이 정확히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추측할 뿐이며, 조사와 발굴 작업을 토대로 동궁의 원형을 찾기 위한 현대인의 노력이 존재할 뿐.신라가 역사 속에서 더 이상 힘을 뻗어나가지 못하고 사라진 후 동궁 역시 과거의 화려한 빛을 잃어갔다. ‘고려사’ 등의 문헌에서도 이름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사학자들에 따르면 고려는 멸망한 신라 왕조의 흔적과 유물을 없애기 위해 동궁의 전각들을 무너뜨리고 허물었다고 한다.일제강점기에는 동궁이 있던 자리 일부를 동해남부선 철도 건설을 위해 훼손하기도 했다. 이처럼 신라 왕자들의 거처는 달콤한 꿈에서부터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악몽까지를 다양하게 거치며 오늘에 이르렀다.역사의 부침은 인간만이 아니라 유적과 유물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일까? 동궁과 월지를 걷다보면 고대 왕국 태자들의 웃음과 울음이 동시에 들리는 듯하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6-23

전국에서 세 번째 많은 포항 해녀, 독특한 문화 정체성 유지

우리 몸은 70%가 물로 이루어졌고 물을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갓 태어난 아기는 물에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숨을 멈추고 팔과 다리로 휘젓는 동작을 한다. 물속에서 태어난 신생아가 헤엄치는 모습은 편안하게 보인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몸짓은 헤엄이다. 무의식의 몸짓이다. 인간은 바다 속에서 먹이를 찾아 물질을 하였고 물질은 바다의 문화가 되었다. 바다에서 물질은 의식의 몸짓이며 생산의 몸짓이다.인간이 물속으로 들어가 각종 어패류와 해조류, 어류 등을 식량으로 삼기 시작하면서 물질이 시작되었다. 인류가 식량자원으로 조개류를 채집한 것은 30만 년 전으로 추정되며 전 세계적으로 조개무지가 출현한 것은 20만 년 전으로 소급된다. 선사유적지 조개더미인 패총은 원시인이 조개, 굴, 소라, 전복 등의 조개류를 먹고 버린 해안가의 생활 유적으로 전국 해안가에서 확인된다. 국가별·시대별로 다르게 인식된 나잠(裸潛) 어민물질은 남녀 구분이 없으나 국가별, 시대별로 다르게 인식되었다. 물질을 직업으로 하는 나잠(裸潛) 어민은 한국 해녀, 일본 해녀와 해남, 그리스 해면잡이 잠수부(sponge diver), 남태평양 투아모아 열도의 진주 조개잡이 잠수부, 호주 북부 토레스 해협의 조개잡이 어민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스·남태평양·호주의 나잠 어민은 남성이 진주나 해면을 캐었고, 한국 해녀와 일본 해녀, 해남은 전복과 해조류를 채취하였다. 하지만 한국 해녀는 전복뿐만 아니라 작살로 문어나 물고기를 잡는 등 일반 어민과 동일한 행동 양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스·남태평양·호주의 나잠 어민은 스쿠버 장비 등을 이용한 압축공기 잠수부로 전환하였으나, 한국과 일본 어업에서는 스쿠버 장비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한국의 나잠 어업은 마을어장에서 맨몸으로 잠수해 전복, 소라, 미역 등 해산물을 직업적으로 채취하는 어민을 말한다.한국 나잠 어업의 역사적 기원은 제주도 해녀를 제외하면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복, 홍합, 해삼, 각종 패류나 미역, 다시마 등과 같은 해조류를 즐겨 먹었고 왕가나 지배계급에서도 일상 음식으로 먹었지만, 누가 어떤 방식으로 조달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조선시대 전복과 같은 해산물을 제주도 해녀가 조달하였고 산후 음식이자 건강 보약식으로 이용된 미역과 다시마는 동해안과 남해안 남성들이 배 위에서 긴 장대에 낫을 단 낫대나 회전용 트릿대를 이용해 채취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반도의 나잠 어업은 제주도 해녀가 가장 오랫동안 유지해 왔던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물질 노동복 ‘잠비’2021년 3월 해양수산부는 경상북도 ‘떼배 돌미역 채취어업’을 제9호 국가중요어업유산으로 지정했다. 제주도 해녀 어업, 보성 뻘대 어업, 남해 죽방렴 어업과 함께 경상북도 돌미역 채취를 동해안의 대표 어업으로 선정한 것이다. 돌미역 어업은 통나무를 엮어 만든 뗏목배를 이용해 배 위에서 미역을 보고 긴 낫으로 잘라내는 어로 방식으로 지금도 울진과 울릉도에서 지속되고 있다. 해녀가 물에 들어가 낫으로 미역을 베어오면 떼배 어민은 바람의 방향과 특성, 바닷물의 흐름 등을 살펴 배 위에서 미역을 채취한다. 미역의 이용 방식은 해녀 어업과 비교하면 비능률적이고 비경제적이지만 수백 년 지속된 독특한 바다 자원 관리 방식이다.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펴낸 ‘수산편람(水産便覽)’에는 물속 자원의 이용 방법을 기록하였다. 한국에서 해조류를 채취하는 방법은 나잠, 간권(竿捲), 겸(鎌), 예채(刈採), 예취(刈取) 등이 있다. 나잠은 해녀처럼 물질을 해서 채취하는 것, 간권은 장대를 이용해 바다 속에 있는 미역을 틀어서 채취하는 트릿대 방식이다. 그리고 겸·예채·예취는 낫을 이용해 미역을 베는 것을 말하며 오늘날 동해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낫대 방식이다. 대체로 함경도와 강원도, 경북 동해안은 미역을 낫대로 베고 갈퀴로 건지고, 경남·경북·충남은 트릿대로 미역을 돌려 감아 건져 올리는 간권으로 미역을 채취했다. 물속으로 들어가 미역을 채취하는 곳은 제주도 해녀뿐이었다.포항의 해안도로를 걷다 보면 해녀가 검은색 고무 잠수복을 입고 물 위에 뜨도록 만든 ‘두룽박’과 ‘망사리’, 해산물을 채취하는 데 쓰는 ‘꼬끼’를 들고 바다로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과거 광목으로 만든 해녀복을 입었을 때는 평상복을 입고 이동하였다. 해녀들은 광목으로 만든 해녀복을 ‘잠비’라고 불렀다. ‘잠비’는 물에 들어갈 때 갖추어 입는 ‘장비’라는 뜻인데 ‘일을 할 때 장비와 설치를 갖추어 입다’라는 노동복 개념이다. 제주도에서는 물질하는 데 사용하는 소중한 옷이라는 뜻으로 ‘소중이’라고 불렀다. 제주에서는 나잠 어업이 제주의 전통적 가치로 전승되어 ‘소중이’로 인식되었으나, 경북에서는 노동에 필요한 ‘잠비’로 수용된 것이다.경북 해녀 70%가 살고 있는 포항해녀들이 가장 바쁜 계절은 봄이다. 봄철은 해녀의 주수입원인 미역 채취 기간이다. 어획물은 계절마다 달라 봄에는 미역 외에도 문어, 보라성게, 해삼, 전복을 채취하고 여름에는 우뭇가사리, 가을에는 말똥성게, 해삼을 잡는다. 성게는 일본으로 수출되는 효자 상품이며 채취와 제조, 판매까지 전 과정을 해녀가 담당하므로 해녀의 육지 일상은 언제나 바쁘다.4~5월께 포항 해안가와 방파제 부근에는 미역을 한 올 한 올 겹쳐 넓적한 형태로 만든 것을 볼 수 있다. 바닷바람과 햇볕이 잘 드는 방파제가 건조하기에 가장 적당하다. 이 미역은 모두 해녀가 물속에 들어가 낫으로 끊어 온 것으로 자연적으로 돌에 붙어 자랐기에 ‘자연산 돌미역’이라고 한다. 해녀는 고무옷을 입고 물안경을 쓰고 ‘나바리’라는 무거운 납을 벨트에 장착시켜 숨을 참고 물속에 들어가 쉼 없이 올라가고 내려오면서 망사리 가득 미역이 차면 육지로 끌어올린다. 채취부터 건조까지 모든 작업을 해녀가 한다.해녀가 되려면 본인이 거주하는 기초지방자치단체에 나잠 어업으로 신고하면 된다. 전국 해녀수를 보면(2017년), 제주도가 3천985명으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경상북도는 1천593명이다. 울산광역시 1천474명, 충청남도 1천310명, 전라북도 611명, 부산광역시 938명, 경상남도 598명, 강원도 371명, 전라남도 370명, 인천광역시 306명 순으로 전국에 총 1만1천556명의 해녀가 있다. 경북의 해녀는 포항시가 1천68명으로 가장 많고 영덕군 160명, 경주시 152명, 울진 75명, 울릉군 10명이다. 경상북도는 제주도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해녀가 많고 포항시는 울산광역시에 이어 전국에서 세 번째로 해녀가 많다. 포항은 경북의 해녀 약 70%를 차지하는데 포항시의 어촌계별 해녀(2020년 5월 현재)를 보면 구룡포읍 251명, 호미곶면 249명, 장기면 102명, 동해면 109명, 청하면 60명, 여남·환호·두호·해도 등 포항시내 51명, 송라면 47명, 흥해읍 10명 총 901명이다. 경북의 해녀는 포항 구룡포와 호미곶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포항 해녀는 중요한 해양 문화 콘텐츠포항 해녀의 성장은 해방 후 국가의 수출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해방 후 정부는 해조류 수출을 목표로 우뭇가사리 어장 개발과 한천(寒天) 수출 증산 정책에 앞장섰다. 개인업자의 개입을 금지하고 우뭇가사리 양식 시험을 하는 등 해외에서 각광받는 우뭇가사리의 생산과 수출을 면밀히 관리하였다. 포항으로 수천 명의 제주 해녀가 건너와 우뭇가사리를 채취하였고, 1948년 ‘영남일보’에 ‘경북으로 제주 해녀 천오백명 내도’ ‘수국 전사의 꽃다운 존재인 제주 해녀가 금년에도 활약이 기대된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보도되었다. 국가 중요 수출품목으로 지정된 우뭇가사리 채취를 위해 매년 수천 명의 제주 해녀가 국가의 지원으로 영일, 구룡포, 양포 등지에서 활동함에 따라 포항 여성은 바다 자원의 경제적 가치와 해녀라는 직업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 포항 해녀는 제주 해녀의 직간접적인 영향으로 성장한 것이다.포항 바다는 수심이 깊지 않고 우뭇가사리는 연안 가까이 20~30m 수심 바위에 부착되어 전복 채취처럼 숙련된 물질 기술이 필요 없다. 우뭇가사리 어장인 울산, 기장, 거제도 지역은 조류가 빠르게 흐르고 어장이 깊어 제주 해녀와 같이 물질에 익숙한 해녀들이 오랫동안 이용했다. 하지만 포항 어장은 미개척 어장으로 해안가에 사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해녀가 될 수 있는 어업 조건을 갖추고 있다. 특히 1960년대 후반 일본에서 도입된 ‘고무옷’이라는 잠수복은 보온력을 증강시켜 사시사철 물속 활동이 가능하게 했고, 신체를 드러내는 수치감도 없애주었기 때문에 해녀의 양적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포항 해녀는 매년 감소하고 있어 현존하는 해녀가 ‘마지막 세대’일지 모른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환경오염과 자연 생태계 변화로 생산량이 감소하고 있는 것도 해녀 어업을 위태롭게 하는 요인이다.해녀 어업과 문화는 전국에 분포되어 있다. 부산, 울산, 경남 거제도에는 제주 해녀가 모여 살고 있는 집성촌이 있지만, 경북은 각 어촌에 소수의 제주 출신 해녀가 거주하고 있을 뿐 제주 해녀와의 직접적인 문화적 교류는 거의 없다. 제주도 다음으로 해녀가 많은 경북은 해녀 문화도 제주도와 다른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1960년대 후반 포항 해녀는 제주도 해녀를 능가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결혼한 여성도 물질 기술만 터득하면 경제적으로 충분한 수익과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았다. 전통적 어촌 사회에서는 남성의 역할을 강조하고 여성의 역할을 보조적 수단으로 인지했으나 직업적 해녀의 등장으로 여성의 가치가 달라진 것이다. 포항의 해녀 문화는 동해의 풍부한 해안 생태계를 기반으로 빠르게 성장하였고, 경북 어촌의 정체성 확립과 해양 문화 콘텐츠의 기반으로 경북이 보존·전승해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글 /김수희(독도재단, 경제학 박사)사진 : 김수정(사진작가)

2021-06-23

청년이 꿈꾸는 도시, 대구시가 함께 뜁니다

청년실업률, 청년 창업, 5년 사업지속률 등 현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이 삶의 무게에 짓눌려 갈 길을 헤매고 있다. 장부와 지자체마다 청년 관련 정책을 쏟아내고 있으나 현실 안으로 파고들지 못하며 겉돌고 있다.정부에 따르면 올해 청년 구직자 지원사업 규모는 55만5천명에 이른다. 이 중 비대면·디지털 공공일자리와 지역주도형 청년일자리 등 정부가 직접 채용하거나 민간에 보조금을 줘서 만든 일자리가 13만5천명 규모이다. 3월 1차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으로 기존에 진행된 청년디지털일자리 사업에 6만 개가 추가됐다.그러나 행정안전부의 ‘공공빅데이터 청년인턴십’은 올해 4월 1천20명을 모집했지만, 정원을 채우지 못해 현재 238명을 추가로 뽑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의 ‘K푸드 온라인 코디네이터’ 사업은 첫 모집에 지원자가 미달돼 30명을 다시 모집했다. 서울 동대문구의 ‘지역주도형 청년일자리’도 정원 20명에 6명이 미달되는 등 정부와 지자체에서 추진하는 청년 일자리 사업이 녹록지 않다. 이는 청년 모집기업 대부분 중소업체이고 근무기간도 짧은 등 청년들의 눈높이에 맞지 않는 일자리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 대구시, ‘청년희망공동체 대구’로 청년 문제 해결대구시는 청년이 겪는 다양한 문제를 지역사회의 연대와 협력으로 ‘청년희망공동체 대구’를 선언하고 청년이 머무르며 꿈과 희망을 실현할 수 있는 도시로 만들어가고 있다. ‘청년희망공동체 대구’는 2019년 12월 19일 청년들이 지역에서 꿈을 실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대학, 기업, 언론, 시민사회 등 지역사회 주체가 함께 노력하자는 약속이다. 따라서 청년은 스스로 도전과 자강을, 대학은 맞춤형 인재양성과 산학협력 생태계 조성을, 기업은 고용친화 기업환경조성으로 청년유입 촉진을, 언론은 청년들의 삶을 조명하고 청년 발언기회 확대를, 대구시는 대구형청년보장으로 사회진입을 지원한다.이 선언은 청년의 미래가 곧 지역의 미래라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급변하는 산업구조와 그로 인한 청년인구 유출 등으로 위협받고 있는 지역의 위기극복과 지속가능한 성장 발전을 위해 청년이 마음껏 도전하고 도약할 수 있는 환경을 함께 만들자는 지역사회의 의지를 담은 전국 최초의 사회적협약이다.2020년 코로나19로 어려움이 가중된 상황에서 ‘청년희망공동체 대구’의 정신은 더욱 빛났다. 그 해 3월 청년과 시민단체가 함께한 ‘1339 국민성금캠페인’에는 5만5천여명이 참여했다. 이를 시작으로 한국장학재단과 함께 대학생을 격려하기 위한 캠퍼스로 찾아가는 ‘청년응원한데이’, 청년이 선호하는 조직문화를 가진 지역기업을 청년들과 함께 현장을 탐방하고 보도해 청년에게는 일자리 정보를 제공하고 청년이 선호하는 기업문화를 확산한 KBS대구경북방송총국의 ‘취업 Cheer UP’ 등 사회 곳곳에서 다양한 협업이 이루어졌다. 12월은 2020년 한 해 동안 청년과 지역사회가 함께한 협업사례(22개)를 공유하고 확산하는 ‘청년희망공동체 대구 사례공유회’를 개최하기도 했다.또 2020년 대한적십자사 대구지사와 함께 코로나19로 취업절벽에 직면한 미취업청년의 사회진입을 응원하는 ‘코로나19극복 미취업청년 응원상품권’ 지원사업을 추진했다. 지역사회 기부금을 활용해 지역 청년을 응원한 이 사업은 청년의 어려움에 공감하고 청년이 꿈꾸는 행복한 대구를 위해 지역공동체가 함께한다는 ‘청년희망공동체 대구’의 가치를 지역청년들이 체감하는 계기가 됐고, 2021년 코로나19 장기화로 힘든 청년의 사회진입을 응원하는 ‘대구청년 취업응원카드’지원사업으로 이어졌다.□ 대구시 청년 생애이행과정부터 지원하는 ‘대구형 청년보장제’‘청년희망공동체’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와 참여는 타 지자체보다 선도적으로 시작한 대구의 청년정책에서 시작됐다. 2018년 9월 청년공감원탁회의에서 발표한 ‘대구형 청년보장제’는 청년위원회, 청년정책연구모임 ‘청년ON’ 등 청년들의 생생한 목소리와 아이디어를 담았고, 청년과 지역공동체가 함께 청년이 겪는 사회문제를 공유하고 해법을 모색하는 ‘청년희망공감토크’와 ‘민·청·관 청년정책TF’의 논의를 거쳐 만들어졌다.기존 취업지원 일색의 공급자 관점의 한계를 뛰어넘어 청년의 삶 관점에서 생애이행과정(교육기→사회진입기→직업기→안정기)을 입체적 포괄적으로 지원하는 수요자 맞춤형 정책이 대구형 청년보장제의 핵심이다.취업지원 위주의 단편적 접근방식에서 탈피해 주거, 복지, 문화, 참여 등 청년 삶의 다양한 측면과 생애이행 단계별 핵심계층에 대한 문제점을 기반으로 촘촘하게 세분화한 맞춤형 청년지원정책으로 2020년 53개 사업에 13만6천여명의 청년이 참여했다. 올해도 청년도전·희망·행복·자강·귀환 5대프로젝트, 71개 사업을 통해 대구청년이 스스로 역량을 높일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1천339억원(국비 371억원, 시비 484억원, 구·군비 56억원, 기타 428억원)이 투입되는 대구형 청년보장제 71개 사업 중 일자리 분야는 자동차산업 활력 제고를 위한 청년고용창출 지원사업 등 27개 사업이다. 창업 분야는 청년소셜벤처 육성사업과 C-seed 청년 스타트업 육성 사업 등 5개 사업, 주거분야는 대구행복기숙사 건립과 신혼부부 전세자금 금융이자지원 등 4개 사업이 시행된다.교육분야는 대경혁신 인재양성 프로젝트와 대구청년학교 딴길 등 12개 사업, 복지·문화분야는 청년생활종합상담사업과 청년힘아적금 등 12개 사업, 참여·권리분야는 대구청년네트워크 운영과 청년소셜리빙랩 등 11개 사업이 추진되는 등 사회진입기에 있는 청년의 사회진입활동을 집중적으로 지원한다.사회진입의 문턱에서 진로탐색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취업준비생, 니트(NEET) 등 대구시 거주 만 19세~34세의 미취업청년의 맞춤형 사회진입을 조력하는 ‘청년사회진입활동지원금(대구형 청년수당·12억원)’은 2천400명의 청년을 대상으로 수당과 함께 프로그램(청년생활상담 및 진로탐색 교육 등)을 연계해 사회진입을 지원한다. 또 정부자산형성 지원사업의 사각지대인 불안정 단기일자리 청년(600명·10억8천만원)의 미래설계와 사회정착을 위한 소액자산형성을 지원 사업인 ‘청년희망적금’ 정책도 추진하고 있다.청년일자리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일자리 미스매칭 해소를 위한 ‘청년일자리 예스매칭’ 사업과 청년 스스로 사회문제를 인식하고 해결책을 찾아가는 ‘청년소셜리빙랩’ 등 대구만의 차별화되고 특색있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대구형 청년보장제’는 청년들이 체감하는 수요자중심 정책으로 청년들의 희망사다리가 되고 있다.2021년은 청년의 삶 관점에서 청년정책과 국가균형발전정책을 연계하기 위한 정책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지난 3월 26일에는 국가균형발전위원회와 공동으로 ‘청년 지방유턴을 위한 토크콘서트’를 개최했다. 청년인구의 수도권 집중으로 인한 지방과 수도권의 불균형을 해소하고 지역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청년의 지방이주 정착지원을 위해 국가균형발전위원회와 국무총리실 등이 참여하는 ‘공동특위’ 구성과 대구가 추진하고 있는 시범사업의 규모 확대 및 전국적 확산 등을 건의했다.대구시는 2020년 수도권으로 출향한 청년들에게 지역의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대구탐방의 기회를 만들어 대구에서 취·창업의 새로운 기회를 재발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청년귀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올해는 지역의 중소·중견기업의 경력직 구인수요와 지역으로 돌아오고 싶은 귀환청년을 매칭해 일자리와 지역정착을 지원하는 ‘청년귀환 경력직 일자리 예스매칭’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지역 중소·중견기업과 귀환청년을 매칭해 청년 일자리를 창출하고 충할청년의 지역유턴 정착을 지원하는 이 사업은 경력 1년~ 5년미만의 귀환 미취업 청년을 대상으로 기업에게는 청년 인건비를 2년간 매월 160만원을, 귀환 취업청년에게는 월급여 200만원과 근속장려금 150만원, 이주지원금 300만원을 지원한다.권영진 대구시장은 “그동안 청년들과 함께 소통하고 애쓴 노력들로 인해서 ‘대구형 청년보장제’는 우리 청년들의 사회진입을 위한 희망사다리가 되고 있다”며 “이제는 대구가 청년들이 꿈을 맘껏 펼칠 수 있는 ‘청년희망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청년을 중심으로 지역사회가 소통을 넘어 연대해야 한다”고 말했다./이곤영기자 lgy1964@kbmaeil.com

2021-06-22

“포항에 전국을 제패한 씨름장사가 있었어”

구순을 바라보는 원로와 장시간의 인터뷰가 가능할지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를 만나자마자 염려는 기우였음을 알게 되었다. 골격은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단단했고, 목소리는 또렷한 중저음이었다. 그는 유강에 사무실을 마련해놓고 지인들과 교류하거나 지역 현안을 고민하고 있었다. 사무실은 그의 삶을 압축해놓은 듯했다. 넓은 책상과 응접탁자 위에 수십 권의 책과 서류, 메모지로 가득한 것이 노학자의 서재를 보는 듯했다. 그가 악수를 청했는데 악력이 그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했다. 그렇게 이석수 선생과 만났다. 안준우(이하 안) : 젊었을 때 힘깨나 썼을 것 같습니다.이석수(이하 이) : 젊은 날에 씨름을 좀 했는데, 처갓집에 소 여러 마리 갖다 줬지.안 : 그 정도면 거의 선수였겠습니다.이 : 선수 생활도 좀 했다. 당시엔 씨름대회가 많았지. 단오, 칠석, 명절 때는 전국 곳곳에서 대회가 열렸어.안 : 포항에서도 씨름대회가 자주 열렸는지요?이 : 포항은 씨름이 센 곳이라서 크고 작은 대회가 자주 열렸어. 기억에 남는 큰 대회는 포항경찰서 건립 기공식 때 열린 대회야. 1953년인가 이듬해인가, 그즈음에 기공식 기념으로 전국씨름대회를 했고 내가 3등을 했지.안 : 전국대회 3등이면 대단했겠습니다. 씨름으로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또 있었나요?이 : 포항고 6회 졸업생 박두진이 전국대회에서 우승하고 나중에는 씨름협회 회장도 했지. 동지중학교는 경북대회에서 두 번 우승했어. 동지상고 교사로 씨름을 가르친 김종태라는 사람도 있어. 고향이 영천 금오인데, 힘이 장사라 금오장군이라 불렀지. 동전을 손가락으로 구부릴 정도로 힘이 셌어. 그런데 이북에 몇 번 갔다 온 걸로 알려졌고, 구속되어 결국 사형을 당했지. 다행히 제자나 아는 사람은 포섭하지 않았어. 이북에 그이 이름을 딴 김종태 도로가 있다고 하지.1968년 1월 한반도에 긴장감이 고조된다. 1월 21일 북한의 무장 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려고 서울에 침투한 사건이 터졌고, 이틀 후에는 미국 군함 푸에블로호가 동해에서 북한에 나포됐다. 8월 24일 중앙정보부가 대규모 공안 사건인 통일혁명당 사건을 발표한다. 김종태는 이 사건의 최고 책임자로 지목된 인물로 1969년 그의 조카 김질락 등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한국민족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북한은 1961년 9월 1일 개교한 해주사범대학을 김종태의 사형 집행 직후인 1969년 7월 12일 ‘김종태사범대학’으로 개칭했고, 1990년 10월 ‘김종태대학’으로 개칭했다. 또한 ‘평양전기기관차공장’을 김종태의 이름을 따 ‘김종태전기기관차연합기업소’로 변경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이 김종태를 얼마나 예우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안 : 일제강점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그때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이 : 1940년에 국민학교에 갔는데 우리 때부터 입학시험을 쳤어. 구술시험이지. 이때부터 한글을 쓸 수 없었어. 1939년까지는 한글이 있었는데, 조선어라고 해서 초등학교에서 일본 말을 가르쳤어. 우리가 입학하던 해부터 한글은 전혀 못 썼어. 학교에서 우리말을 하면 벌금을 내야 했지.안 : 태어난 곳은 유강인데 국민학교는 어딜 다녔는지요?이 : 연일국민학교를 다녔지. 공부를 가장 잘하는 데가 연일국민학교였어. 여기 떨어지면 포항국민학교에 가야 해. 그때는 포항국민학교가 아니라 영일국민학교라 했지. 어떤 지역에 학교가 필요하면 일본 사람이 학교명을 그 지역명으로 세웠지. 포항국민학교, 구룡포국민학교, 그게 전부 일본 사람 거라. 우리가 세운 학교는 그때 포항에 아마 두 개 있었을 거야. 창주국민학교라고 있었는데 그게 우리 거야. 안강국민학교는 일본이 만든 것이고, 안강제일국민학교는 우리가 세운 거지. 우리가 국민학교에 들어갈 때 남부국민학교가 생겼어. 그때는 포항 제2영일국민학교라 했지.안 : 구술시험은 어떤 식이었는지요?이 : 일본 말로 물었지. 국민학생이니까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었지. 차렷은 어떻게 하느냐, 아버지는 일본 말로 무엇이냐, 이런 걸 물었지. 남부국민학교가 생기기 전에는 연일국민학교 시험 쳐서 떨어지면 영일국민학교, 영일국민학교 떨어지면 양동국민학교로 가야 했어. 참 멀었지. 나중에 포항국민학교가 커졌어. 용흥동 포항의료원 근처에 교회가 있잖아. 그게 우리 어렸을 때 형산면사무소야. 우리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는 국민학교가 아니고 보통학교라 했지. 중학교는 고등보통학교. 1940년부터 학제가 바뀌는 바람에 많이 달라졌지.안 : 연일국민학교까지는 꽤 멀었겠습니다.이 : 우리 집에서 3.5㎞쯤 됐을 거야. 효자에서 넘어가는 다리는 없었고 잠수교가 있었지. 잠수교가 없어진 지 얼마 안 돼. 포스코가 들어오고 난 뒤에 없어졌지. 잠수교는 비가 오면 물이 이만큼 차서 못 건너가. 비 오는 날이면 학교 가려고 새벽 일찍 밥을 먹어도 큰 다리로 돌아서 갔어. 그 다리를 섬안 다리라 했는데, 현재의 섬안 다리는 아니야. 해도를 그때는 섬안이라 했지. 섬의 안이란 뜻인데, 해도, 상도, 죽도를 섬안이라 했어.안 : 그때는 그 지역이 섬이었는지요?이 : 그렇지. 삼각주 식으로.안 : 과거 포항 지도를 보면 다섯 개 도(島)가 섬 안에 있더군요.이 : 지금 형산(兄山) 맞은편에 제산(弟山)이 있지. 굴 있는 쪽이 제산이고, 건너 형님 산이라고 해서 형산이라. 제산은 동생 산인 셈이지. 형산강 강물이 위에서 내려오면 형산 제산 협곡에 와서 제 맘대로 가지. 제방이 완료된 게 1930년쯤일 거야. 신작로를 만들면서 제방을 하잖아. 제방을 하기 전에는 물이 내려와서 한 시절은 북쪽으로 흐르고, 한 시절은 남쪽으로 흘렀지. 그러니 나중에는 섬이 생기는 거라. 삼각주지. 아무튼 비가 많이 오면 잠수교로 못 가. 비가 조금만 와도 잠겨. 3학년, 4학년 되면 학교 안 가는 아이들도 있지만 부지런한 아이들은 일찍이 가. 섬안 다리를 건너 대송국민학교를 거쳐 연일국민학교로 가지. 학교는 연일국민학교가 주였고, 부수적으로 4년제 학교가 오천, 동해, 대송국민학교야. 4년 마치고 5학년 되면 연일국민학교로 가야 했어. 오천 쪽에 연일국민학교 출신이 많지. 오천에서 연일까지 20리가 넘어. 수업하다가 비가 와서 강물이 넘친다 싶으면 강북 아이들은 빨리 집에 가라 그랬지.안 : 교사들은 어느 쪽 사람이었는지요?이 : 우리 쪽 일본 쪽 반반이었는데. 교장, 교감은 다 일본 사람들이지.안 : 어떤 과목을 배웠는지요?이 : 국어, 산수 같은 걸 배웠지. 그리고 수신(修身)이라고 굉장히 중요한 과목이 있었지.안 : 처음 들어보는 과목입니다.이 : 윤리, 도덕이지. 그 과목이 아주 중요했어. 아침에 학교 가면, 요즘으로 치면 일본 시를 외우는 식이었지. 그때 일본 사람들은 정신교육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어. 그래서 월요일 첫 수업은 어느 학교 할 것 없이 수신 시간이었지. 일제는 1941년 3월 교육령 일부를 개정해 ‘초등학교 규정’을 공포하고 종래 소학교라는 명칭을 일본과 마찬가지로 국민학교로 바꾸었다. 국민학교라는 명칭이 의미하는 것은 “동아 및 세계에서의 일본의 역사적 사명을 감안해 국민의 기초를 완수할 수 있는 교육체제를 확립”한다는 것으로, 바로 일제의 침략 전쟁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국민을 양성해내는 교육이 목표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개편에서 종래 선택과목으로나마 존속하고 있었던 조선어 과목을 완전히 폐지해 조선어의 말살을 시도했다. 시행령을 살펴보면 1조 1항에서 국민학교의 교과는 국민과, 이수과, 체련과, 예능 및 작업과로 나누었으며, 2항에서 국민과는 수신, 국어, 국사 및 지리 과목으로 한다고 규정했다.안 : 일제강점기에는 국민학생들에게도 노역을 시켰습니다. 혹시 기억이 있는지요?이 : 4학년부터 상급반인데 근로소년단이란 것을 만들어 일을 시켰어. 연일국민학교에서는 학생들을 데리고 밭농사를 많이 했지. 여름에는 풀을 해서 퇴비를 많이 만들라는 거지. 학교 별로 시합도 붙였지. 운동장도 반 이상 갈아서 작물을 했어. 그래서 우리는 학교 갈 때마다 풀을 베어 말려서 가져갔지. 겨울에는 보리를 밟았어. 4학년부터는 완전히 일꾼 취급을 했어. 소나무를 치고 나면 진이 나오잖아. 그걸 꼬아서 기름을 만드는데, 포항에는 성모병원 올라가는 데 꼬는 곳이 있었어. 일본 말로 ‘소카이’ 기름공장이 거기야. 4학년부터는 소카이 따러 가고, 그다음에는 풀 베러 가고, 겨울에는 심지어 소똥 말린 걸 가져갔지.안 : 어린 학생들에게 그 정도 노역을 시켰다면 어른들은 말할 것도 없었겠습니다.이 : 집집마다 일주일에 며칠간 일하러 나오라, 부역하러 나오라 명령이 떨어졌지. 우리 집에는 한 달에 열 품이 떨어졌어. 열흘 나와서 일하라고 명령이 떨어지면 우리 집은 소하고 구루마(수레)하고 일꾼들하고 가서 사흘만 하면 됐지. 소도 한 대가리, 구루마도 한 대가리, 사람도 한 대가리. 그런 게 없는 사람들이 열흘 일할 때 우리 집은 사흘만 하면 됐어.안 : 집안이 부유한 편이었는지요?이 : 우리 동네에는 서른 가구 남짓 살고 있었는데, 구루마 있는 집이 세 집 정도 됐어. 구루마 있는 집은 보통 일꾼이 두 명이야. 새끼 일꾼이라고 하지. 우리 집은 논이 많아서 일제 때 공출이 200가마쯤 됐어.안 : 강제징용 피해자는 어느 정도였는지요?이 : 포항은 징용 피해자가 다른 곳보다 적었어. 그 유명한 포도농장 덕분이지. 계속대담·정리 : 안준우(소설가) / 인물 사진 : 김훈(사진작가) 이석수1933년 경북 영일군 연일읍에서 태어나 국민학생 시절에 해방을 맞았고, 6·25전쟁에 참전해 동족상잔의 참혹함을 직접 겪었다. 포항수산대학을 졸업한 후 타지에서 목재상과 제약회사에서 잠시 근무했다. 1963년 2월 오천면사무소에서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건설부 소속으로 행정사무관, 국회 건설위원회에서 행정서기관, 건설부 과장, 국장 등을 거쳐 원주지방국토관리청장으로 공직 생활을 마쳤다. 퇴직 후 대한건설협회 상임감사로 일하다가 1995년 경상북도 정무부지사를 맡았다. 공무원 시절이나 퇴직 후에 고향을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가장 큰 일은 26년간 자료를 모아 자비로 ‘이석수의 포항 땅 이야기’를 출간한 것이다. 이 책에는 약 3천 꼭지의 포항 땅에 얽힌 이야기와 최신판 사진이 수록돼 있다. 대통령 근정포장(건설사업유공), 황조근조훈장 등 여러 기관에서 수여하는 상을 받았다.

2021-06-22

통합신공항, 구미의 산업구조를 바꾸다

작년 8월 28일 대구시와 경상북도의 숙원 사업이었던 통합신공항 이전부지가 오랜 진통 끝에 공동후보지인 ‘군위 소보-의성 비안’ 지역으로 확정됐다. 통합신공항 건설은 463만평 규모에 사업비 9조원을 투입해 2028년 개항을 목표로 하는 사업으로, 생산유발 36조원, 부가가치 유발 15조원, 일자리 40만개 창출이 기대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통합신공항 건설이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은 지역경제를 다시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꼽히고 있다. 이러한 통합신공항 건설의 최대 수혜지역이면서 배후도시가 바로 구미시이다. 구미시는 그동안 대한민국은 물론 대구·경북의 산업화를 이끌어 왔지만, 최근 세계적인 불황 등으로 침체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구미시가 통합신공항 건설을 통한 재도약 준비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들여다봤다. △통합신공항 배후도시 구미공항 배후도시는 공항에서 20㎞ 내외에 위치한 도시를 일컫는 말로, 구미시는 ‘군위 소보-의성 비안’ 지역에 들어서는 통합신공항과의 거리가 10㎞ 이내이다. 이로 인해 구미시가 현재 가지고 있는 국가공단이라는 특성과 그 인프라를 통해 신공항과의 시너지 효과는 충분하다.또 구미는 지금까지 대구·경북 경제권의 중심적인 역할을 충실히 해왔고, 여기에 공항까지 첨가되면 그 역할은 더욱 가속화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특히, 물류비용에 있어 아주 유리한 조건을 갖춤으로써 새로운 신성장 산업들이 적극적으로 지역에 유치될 것으로 전망된다.한 예로 인천광역시의 경우 인천국제공항이 들어선 이후 지역 내 총생산 규모가 대구광역시, 부산광역시를 앞서 나가는 도시로 성장, 발전해 나갔다. 지역에 공항이 들어서면서 항공물류와 관련된 신산업들이 많이 유치됐기 때문이다. 구미시 역시 반도체 산업뿐만 아니라 의료, 바이오, 이차전지 등의 새로운 성장산업들이 항공물류와 연관시켜 유치될 수 있도록 다양한 계획들을 추진하고 있다.△공항경제권과 국가5산업단지구미시는 공항을 중심으로 생성되는 관련 인프라와 산업, 교통, 관광 자원 등을 연계하는 공항경제권을 국가5산업단지와 결합시키기 위한 환경 조성에 역점을 두고 있다. 우선 신공항과의 접근성으로 인한 물류비용 절감과 글로벌 접근성이 크게 향상된다. 이는 국내외 기업과의 인적·물적 교류의 활성화로 이어진다. 이에 따라 지역 기업들의 활동 반경이 확장돼 기업 투자유치 및 5공단 분양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고 그에 맞는 산업들을 적극 유치할 수 있게 된다.특히, 항공화물로만 운송이 가능한 반도체, 바이오 관련 기업 및 항공부품·정비 기업을 중점적으로 유치해 지역 전자산업 기업과 협업 네트워크를 구축해 항공(드론) 전자 부품 거점단지 조성 및 항공(드론)MRO 클러스터 구축을 추진할 방침이다.여기에 구미시의 강점인 ICT, IOT 산업을 활용한 항공기 스마트캐빈사업을 중점적으로 육성할 예정이다. 현재 항공기 기체 및 부품의 경량화 추세로 탄소소재의 활용도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구미5산업단지에는 글로벌 탄소섬유기업인 도레이첨단소재를 비롯한 20여 개의 탄소산업 관련 기업들이 입주해 있어 탄소산업 집적지로서의 항공산업 메카로도 거듭날 조건이 충분하다. 더욱이 항공산업은 전통적인 기계산업과 첨단소재산업, IT기술 등이 집약되어야 하는데 구미시는 대한민국 전자산업의 메카로서 삼성, LG, 한화, SK 등 대기업을 비롯한 전자관련 기업과 군수장비를 생산하는 기업이 대거 국가산업단지에 입주해 있어 민군공항인 신공항 연계 항공전자산업산업 육성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구미시는 국가산업단지에 이미 구축된 이러한 조건들을 최대한 활용해 국내 최대의 공항경제권을 가진 도시로 거듭난다는 계획이다. △통합신공항을 위한 광역교통망 구축구미시는 신공항이 본격적으로 가동이 되면 물류비용 절감과 글로벌 접근성으로 구미가 진정한 글로벌 도시로서의 위상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구미시는 지난 10년간 대기업들이 구미를 떠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공항과의 거리 문제로 판단, 신공항이 들어서면 항공을 이용하는 소재부품 산업이 다시 구미에서 부흥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여기에 코로나19로 최근 해외로 진출했던 기업들이 다시 국내로 복귀하는 현상까지 더해지면서 구미시는 공단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정책에 열정을 쏟고 있다.특히, 구미 국가산업단지와 남부권 항공물류 수송 경쟁력 강화 및 공항 이용객들의 접근성 향상을 위해 철도와 도로 등 광역교통망을 구축할 계획이다. 연계 철도는 전주에서 김천-구미-구미산단-신공항-영덕에 이르는 동서횡단철도와 서대구-신공항-의성을 잇는 공항철도 두 노선을 2021년 고시 예정인 제4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에 반영하기 위해 다각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또 연계 도로는 현재 건설 중인 북구미IC에서 군위JC간 고속도로 신설과 해평면에서 연결되는 지방도 927호선이 현행 2차로에서 4차로로 확장될 수 있도록 중앙정부 등 관계기관에 적극 건의하고 있다. 현재 시공중인 장천면에서 군위IC까지의 국도67호선 선형개량 공사는 조기에 마무리될 수 있도록 요청한 상태다.△하늘길 동맹을 맺다구미시는 통합신공항으로 발생하는 부가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선 배후도시들이 함께 뜻을 모아 준비해야 한다고 판단해 지난 4월 5일 구미, 군위, 의성, 칠곡과 ‘하늘길 동맹 협약’을 체결했다. 이날 또 지역의 상생 발전 도모 및 통합신공항 시대를 대비하기 위한 포럼도 개최해 각 지역의 의견을 수렴하기도 했다. 지난 6월 4일에도 ‘하늘길 동맹 실무회의’를 열어 각 지역의 실무자들이 모여 지속적인 협력 발전 방안을 논의하고 상생협력 사업 발굴을 위해 공동 용역을 추진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날 회의로 올해 하반기 4개 지역은 공동으로 ‘공항배후도시 구상 및 발전방안 연구용역’을 추진한다. 이 연구용역을 통해 공항배후도시로서 발전방향과 비전을 제시하고, 지속성장을 위한 핵심사업 발굴 및 세부추진계획도 수립할 예정이다. △구미시의 체계적인 신공항시대 준비구미시는 신공항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지난해 11월 신공항전략TF팀을 신설하고 4개팀(총괄전략팀, 항공산업팀, 광역교통팀, 도시기능개선팀) 1자문 위원회(산·학·연 전문가 및 구미시의회)로 구성된 신공항전략추진단을 구성해 공항경제권 100만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지난 2월 9일에는 신공항전략추진단 정책회의를 열어 대구경북통합신공항 이전에 따른 발전전략 및 분야별 핵심사업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가졌고, 현재까지 광역교통망 구축, 항공산업 육성, 도시기능개선 3개 분야 총 27개의 사업을 발굴했다. 또 지난 3월 24일 구미시와 국내 최대 101개 회원사가 가입된 한국항공우주산업진흥협회·경운대학교가 협약을 체결해 항공우주산업 육성과 전문 인재 양성을 위한 발판도 마련했다. 구미시는 신공항시대를 맞으면 관광산업에 가장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에 구미시는 구미에서만 가능한 산업유산 관광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50여 년간 축적된 구미의 산업유산들을 관광자원화해 대한민국이 성취한 산업에 대한 자부심, 나아가 대구·경북 시도민들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산업경제발전의 발자취와 그 자원들을 볼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여기에 금오산, 비봉산, 천생산, 낙동강 등의 자연자원과 2천년의 역사를 가진 서원, 사찰 등의 전통문화유산도 함께 연계할 수 있는 관광산업을 만들어 나갈 예정이다./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21-06-22

이건희 미술관 유치, 대구는 준비된 도시

문화가 미래의 자산이고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 한다. 문화와 예술의 가치를 이야기하면서도 막상 부딪치면 늘 경제나 정치의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 지금까지의 통념을 깨부수는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이건희 미술관이다. 이점찬(61·경일대교수·도예가) 대구미술협회장을 만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대담은 대구시가지가 환히 내려다보이는 수성호텔 신관 11층에서 코로나19 방역대책 준수 아래 이뤄졌다.지금 대구 경북의 현안 중 하나는 이건희 미술관 유치다. 우리 지역뿐 아니라 대한민국을 통틀어서도 그렇다. 삼성 일가에서 고 이건희 회장의 컬렉션을 기증하자 문재인 대통령이 별도의 특별 전시실을 마련하라는 지시를 내리면서 수면위로 떠올랐다.이점찬 대구미협 회장은 “언제 미술관 문제가 이렇게 국민적 관심을 받은 적이 있었더냐?”고 되묻는다. “이건희 미술관의 등장은 돈 주고도 광고할 수 없었던 문화의 중요성과 의미를 국민들에게 깨우칠 기회를 줬다. 컬렉션의 기증보다 더 큰 선물을 국민들에게 준 것이다.” 이건희 미술관 건립 이슈는 대구에 기회-전국의 20개도 넘는 지역에서 이건희 미술관을 유치하겠다고 나섰다. 저마다 나름의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대구시는 대구에 이건희 미술관이 들어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명분과 당위성은 무엇인가. 대구가 경쟁력에서 자신 있나?△물론이다. 대구가 이건희 미술관을 유치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차고도 넘친다. 무엇보다 삼성의 연고지가 대구다. 천하가 다 아는 이야기다. 삼성은 대구에서 태어나서 성장했다. 이건희 컬렉션 기증자의 뜻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대구시민의 삼성에 대한 애정도 다른 도시와는 차원이 다르다.그리고 대구의 미술에 대한 열정이나 기여도 면에서도 다른 도시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특히 근대미술 분야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번 이건희 미술관의 등장은 대구시로 봐서는 기회이고 개인적으로도 절묘한 타이밍이라 생각한다.-타이밍이라니, 무슨 이야기냐?△3년 전 미협회장에 출마하면서 근대미술관 유치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건희 미술관지역이 이슈가 되기도 전인 최근 대구시와는 합의를 거쳤고 국립미술관 공론화 준비 과정에서 이건희 미술관이 등장한 것이다. 이건희 미술관이 유치되면 대구근대미술관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미술관은 대구미술계의 숙제이자 개인적인 꿈이고 목표이다. -이건희 미술관이 대구에 들어서면 그런 공약과 꿈이 실현되는가.△대구 전체를 야외 미술관으로 만들고 싶었다. 현재 운영 중인 대구미술관과 올 가을 건립에 들어가는 간송미술관에다 근대미술관을 잇는 트라이앵글을 구상했다. 여기에다 김광석거리와 대구 근대골목들을 잇는 아트 로드(Art Road)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이 이건희 미술관을 유치하면 지역이 더 확장되지만 대구의 야외 미술관화에는 한 걸음 다가서게 된다.-대구의 근현대 미술이 대한민국 미술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정도인가.△대구는 우리나라 근대미술의 산실이자 메카다. 민족시인 이상화의 형 이상정과 이여성을 시작으로 이인성 이쾌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수많은 미술가들이 대구에서 태어났고 대구를 중심으로 활약했다. 고대 시서화(詩書畵)와 현대를 잇는 한국 근대미술에서 대구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런 맥이 지금의 국내외 미술계 현실이다. 대구미협이 근대미술 대표작가 작품전을 계속해오고 있는 것도 그런 흐름이다. 협회는 오는 7월 근대미술조망전으로 지역 원로 작가 전선택 선생의 100수 기념전을 준비하고 있다.대한민국을 세계 10위권으로 올려놓은 힘이 교육에 있다면 미술교육도 그런 바로미터 중 하나다. 대구지역은 서울 다음으로 미술대학이 많고 한 해 1천500명의 졸업생이 배출된다. 대구미협 회원만도 2천700명이다.-이건희 미술관이 대구근대미술관과 어떻게 연결되나?△현재 대구에 있는 국립미술관은 현대미술을, 2024년 개관을 목표로 건립되는 간송미술관은 고대미술품을 전문으로 취급하게 된다. 그래서 1920년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작품을 전시할 근대미술관이 필요한 것이다. 이번에 삼성이 기증한 2만3천여 점의 미술품 가운데 한국 작가의 작품은 근현대 작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국립미술관에 기증한 컬렉션 중 근대작가의 작품이 절반을 넘어섰다. 이건희 미술관이 대구에 온다면 기존 미술관에 시너지 효과를 더해줄 것이다. -그런 것이 모두 대구 중심의 이야기 아닌가. 다른 도시들도 모두 나름의 명분을 가지고 있다. 특히 황희 문화체육부 장관의 이야기는 특정지역으로 결정될 우려도 배제할 수 없는 명분 만들기 인상이 짙다. 묘한 분위기다. 냉정하게 우리 주장을 좀 더 객관화할 필요는 없나.△그렇지 않다. 이건희 미술관 문제라면 대구는 준비된 도시다. 그리고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 대구시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권영진 대구시장은 산격동 옛 경북도청 부지에 2천500억 원을 들여 미술관을 짓겠다고 했다. 부지 사용권한을 가진 문체부에서 허가만 해준다면, 이철우 경북도지사도 적극 협조해 주기로 했다. 유치를 준비하던 경주시도 대구시 유치에 힘을 보태기로 했다. 대구시는 합리적이고 구체적인 제안서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시민단체도 이건희 미술관 유치에 힘을 보태고 있다. 대구미협과 대구관광협회, 유대구운동이 중심이 된 미술관유치시민추진단에 대구상공회의소 등 8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이젠 서문시장 상인들까지 미술관이 유치돼야 한다는 데 공감하더라. 민간단체가 주도하는 성금 모금과 서명운동도 보폭을 넓혀가고 있다. 또 다른 정치적인 물밑 움직임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지역출신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다방면에서 다각도로 접촉할 것이다.-그래도 지금까지 정부의 행태를 보면 장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유치를 위한 심의위원회를 구성해도 위원 선정부터 위원회 구성까지 절차가 공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하긴 가덕도신공항 결정 사례를 보면 장담할 수 없긴 하다. 대구경북통합신공항 유치를 위해 동분서주했는데 가덕도 공항을 결정하니 힘이 빠지더라. 수많은 논리와 객관적 자료를 제쳐두고 합리적 절차 대신 정치적으로 결정하면 방법이 없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그렇다면 플랜B를 준비해야 하지 않겠나. 문화와 미술관의 중요성만큼이나 우리 시민들의 의식각성이 중요하다. 지역분권이니 국가 균형발전 측면에서도 지방을 이야기하는데 문화인프라가 열악한 대구가 상대적으로 유리한 면도 있다.△대구를 문화도시라 했고 대구 시민의 문화 수준은 전국평균을 웃돈다는 통계도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문화 인프라는 너무 뒤처져 있다. 박물관과 미술관을 외형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지만 대구의 실태는 다른 광역시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너무 빈약하다. 대구시에는 현재 4개의 미술관이 있는데 문체부의 2020전국문화기반시설총람에 따르면 대구의 인구 100만 명당 문화기반시설은 36.5로 17개 전국 광역시 중 16위다.문재인 대통령의 ‘문화비전 2030’에는 지역문화 분권 실현과 다양한 지방 문화 보호라는 의제가 포함돼 있다. 수도권에 집중된 문화 인프라를 지역으로 분산시켜 지역민에게도 문화예술 향유의 기회를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정작 계획만 그렇게 세웠지 현실적인 실천은 없었다. 그런 면에서 이건희 미술관은 대구에 위치하는 것이 더욱 당연하다.관광객보다 지역민에 어떻게 돌려줄 것인가가 중요-흔히 빌바오 효과를 들먹인다. 문체부장관도 그러면서 수도권 어쩌고 했다.△제대로 알고 이야기해야 한다. 빌바오는 마드리드에서 400km나 떨어져 있다. 2017년 내가 갔을 때 인구 37만 명의 빌바오에 연 150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빌바오가 구겐하임 미술관을 결정할 때는 외국 관광객보다 지역민을 우선으로 꼽았다. 빌바오시의 30개 단체 800여 회원들이 지역민에게 어떻게 문화 혜택을 돌려줄 것인가를 끊임없이 토론하고 고민했다.-유럽은 사실상 한 나라다. 관광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닌가.△유럽은 어디를 중심으로 컴퍼스를 들이대도 반경 2시간 거리에서 2천만 명의 관광객 인프라를 갖고 있다. 그러나 빌바오는 관광객보다 지역민을 우선으로 구겐하임을 건설했다. 1천500억원을 들여 미술관을 짓고 1조원을 들여 네르비온강을 살려냈다. 이것이 빌바오가 성공한 이유다. 전국의 수많은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이 빌바오에 출장 가서 현장을 보고 왔다.그러나 무엇을 보고 자기 지역에서 어떻게 적용했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랭크 게리의 미술관 건축이나 디자인 같은 외형만 보고 온 것은 아닌가. 지역민보다 실체도 없는 일회성 관광객 수만 부풀리는 허세 프로젝트가 관광산업을 어렵게 만든다. 빌바오의 실체를 얼마나 살펴보고 확인했는지는 아직 국내에서 그런 효과를 내는 지자체가 없으니 알 길이 없다.-대구에 이건희 미술관이 유치되고 또 성공적으로 건설되기까지 시민 전체의 콘센서스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인가.△문화는 시간이 필요하다. 대구시가 현안이 있을 때마다 원탁회의를 만들어 시민 의견을 수렴하려는 것도 좋은 시도 같다. 시민과 시청과 시의회의 문화 마인드가 도시의 품격과 성공적인 문화 인프라를 가능하게 만들 것이다./이경우 객원논설위원

2021-06-22

공간구조 혁신 통한 신산업지속가능한 도시성장 이끌어

대구시민들은 권영진 대구시장의 민선7기 3년간 주요성과에 대해 ‘서대구 역세권 개발, 신청사 건립, 대구공항 통합이전지 최종 확정 등 공간구조 대혁신 본격화’를 손꼽았다. 또 미래성장을 이끌 ‘사람을 키우는 인재도시 대구만들기’ 전략의 필요성을 높게 평가하고 향후 대구시 역점시책으로 ‘경제회복 및 청년 일자리 창출’을 선택했다. 권 시장은 지난 민선7기 3년 주요 성과에 대해 지난 민선6기부터 주력해 온 산업구조 개편과 공간구조·시정 혁신에 더욱 매진하고, 여기에 더해 사람을 키우는 인재 도시를 만들기 위한 기틀을 마련해, 더 큰 대구의 미래를 만드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해왔다고 밝혔다.민선7기 대구시는 급변하는 미래에 대응하기 위해 집중해 온 ‘물·로봇·미래차·의료·에너지+스마트시티’의 5+1신산업 중심으로 산업구조 개편을 추진해 각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나타내고 있다.물산업클러스터 내 112개사 물기업 집적을 통한 3천296억원의 투자 유치를 이끌어 냈고 현대로보틱스 유치와 이동식 협동로봇 규제자유특구 지정, 3년 연속 전기차 선도도시 국가브랜드 대상과 친환경차 보급 특광역시 1위, 국토부 자율차 시범 운행지구 선정, 스마트웰니스 특구 지정과 첨단임상시험센터 건립 등 의료산업 전주기 지원, 신재생에너지 보급률 특광역시 2위와 가스공사의 900억원 규모 수소 생태계 조성, 국내 유일 다보스 포럼 ‘G20 스마트시티연합’ 가입 등의 성과를 내고 있다.특히 물산업 8.4%(전국 평균 4.6%), 로봇 14.5%(5.8%), 미래차 1.4%(-1.0%), 의료 22.8%(9.1%), 에너지 25.6%(7.4%) 등 5대 신산업의 전 분야의 6년간(2014~2019년) 부가가치 연평균 성장률이 전국 평균을 크게 웃돌아 성장세를 증명하고 있다.또 제조업 스마트공장 구축률 전국 2위를 기록하는 등 지역 생산의 88.5%를 차지하는 대구 전통산업단지를 대수술하는 9천896억 규모 산단대개조 사업도 추진해 대구 경제의 새로운 역동성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대구·경북 최대 현안사업인 통합신공항 이전부지 확정, 대구시청 신청사 이전지 결정, 110년만의 성매매집결지 폐쇄, 60년만의 캠프워커 헬기장 등 부지 반환, 40년만의 안심연료단지 개발 등으로 대구의 도심이 바뀌고, 서대구 역세권 개발을 통한 동서 균형 발전축 마련과 4차 순환도로, 대구산업선 철도, 도시철도 엑스코선 등 사통팔달 교통망 구축으로 공간구조 혁신을 통한 신산업과 지속 가능한 도시 성장의 기반이 마련되고 있다.새롭게 탄생한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와 DGB대구은행 파크는 세계적인 명품 시설로 시민들의 자부심이 되었고 치맥페스티벌과 딤프를 비롯한 4대 축제, 서문시장 야시장, 대명유수지 등 다채로운 볼거리, 즐길거리를 발굴해 대구가 꼭 가보고 싶은 도시로 변모했다.시민 참여 분야에서도 그동안 시민원탁회의, 주민참여예산제 등으로 꾸준히 키워 온 시민의 참여 시정 역량을 바탕으로 전국 최초 시민 공론화를 통해 ‘신청사’ 건립지를 결정했으며, 전 세계에 모범이 되는 ‘대구참여방역’ 모델을 탄생시킨 점도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권 시장은 민선7기 향후 과제로는 방역과 백신접종을 차질 없이 추진해 시민의 일상 회복을 앞당겨 내년 5월에 열리는 ‘세계가스총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산업과 공간구조 개편에 ‘사람을 키우는 인재도시 대구’의 기반을 더해 새로운 대구의 미래를 만들어가며, 대구경북통합신공항 건설, 달빛내륙철도 건설 등 주요 현안의 해결과 영남권과 영호남의 상생·협력을 통한 지방자치와 분권을 선도할 계획이다./이곤영기자 lgy1964@kbmaeil.com

2021-06-22

통합 신공항 ‘성공적 건설’로지역경쟁력 제고 초석 다질터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민선 7기 3년을 돌아보며 가장 기억에 남는 성과에 대해 대구경북 통합신공항 이전지 확정을 첫손에 꼽았다.신공항은 2014년 이전 논의가 시작된 이래 6년간 답보상태에 머물러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민선 7기 이후 합의를 통한 부지 선정과 숙의형 주민투표 등 민주적 절차를 통해 실타래를 풀었다. 숱한 난관이 있었지만 군위에 현장사무소를 설치하는 등 마지막까지 사투를 벌인 끝에 마침내 지난해 8월 군위군 소보면, 의성군 비안면으로 이전지를 최종 확정했다.이 지사는 “지역 스스로의 의지와 결단으로 일궈낸 성과라 자랑스럽고, 세계와 경쟁하는 더 큰 경북을 위한 백년대계의 기틀을 마련했다”며, 앞으로 공항을 빠르게, 제대로 만드는데 전념할 것이라고 밝혔다. 혁신을 통한 행정 시스템의의 변화도 눈에 띈다. 지난 5월, 경북은 정부합동평가에서 2년 연속 1위로 선정됐다. 또한 국민권익위원회가 주관한 ‘2020년도 공공기관 청렴도’측정에서도 17개 시도 중 최고 등급을 받았다.특히, 최근 중앙부처와 각 지자체들로부터 큰 주목을 받고 있는 ‘경북형 사회적 거리두기 완화’는 방역과 지역 경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경북형 사회적 거리두기 완화’는 이 지사가 중대본 회의 때마다 “확진자가 많고 인구 밀도도 높은 서울과 확진자가 하나도 없는 울릉도를 같은 잣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며 수차례 건의한 끝에 어렵게 시작되었으며, 현재 총 16개 시군으로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국비 확보 분야에서도 매년 최고 기록을 경신하며 ‘TK패싱’ 우려를 불식시키고 있다. 경북도가 2021년 건의사업으로 확보한 국비는 총 5조808억원으로, 지난 2018년 3조5천579억원과 비교하면 무려 42.8%나 증가했으며, 일반 보조사업까지 합하면 총 9조7천억원에 이른다.4차산업혁명 시대에 대비해 미래 신산업의 기틀을 마련한 것도 뻬놓을 수 없는 성과다. 동해안권의 경우, ‘혁신원자력 기술연구원’ 설립, ‘차세대 배터리 규제자유특구’ 등이 국책사업으로 선정되었으며 ‘철강산업 재도약 기술개발사업’은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했다.북부권은 기존 SK바이오사이언스를 중심으로 한 백신 클러스터와 ‘대마(헴프)산업화 규제자유특구’, ‘하이테크 베어링산업 기반구축’ 등 미래 신성장 엔진이 확실히 구축되고 있다.내륙권의 경우 ‘산단대개조 사업’, ‘자율주행트램 부품/모듈 기반 사업’ 등이 국가공모로 선정됐으며, ‘홀로그램 기술개발사업’은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하면서 기존 전자, 자동차 부품산업을 대체해 나가고 있다.아쉬운 점도 있다. 우선, 국가적 난제인 수도권 집중과 인구소멸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지방소멸위기지역지원 특별법’이 지난해 발의 되었지만, 현재까지 국회에 계류중이다.정부 탈원전 정책으로 인한 지역의 피해도 참으로 안타까운 부분으로 꼽았다. 특히, 공정률 99%로 건설이 끝난 신한울 1·2호기의 경우 운영허가를 신청한 지 약 78개월이 지났지만 가동되지 못하고 있고, 신한울 3·4호기는 공사직전에 중단된 상태다. 이로 인한 직간접적인 피해액은 무려 13조원에 달한다. 특히, 최근 영덕 천지원전이 백지화됨에 따라 정부가 원전 자율유치금 380억원을 회수하겠다고 나서 대응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이 지사는 앞으로 신공항의 성공적 건설을 통해 지역 경쟁력을 높이고, 지역 간 통합과 균형발전, 개헌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경북이 대한민국의 중심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혼신을 다할 각오를 밝혔다. /이창훈기자 myway@kbmaeil.com

2021-06-22

가족과 함께 하는 로컬생활… “아이들 어릴 때 지역으로 오세요”

경상북도 영천시. 말 산업으로 제2의 도약을 꿈꾸는 곳. 그리고 항공산업 유치로 미래 먹거리를 준비하는 곳이다. 영천의 중심에는 고층 아파트가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시내를 조금만 벗어난 도로는 교통체증을 모르는 듯 자동차를 보기가 힘들고, 탈탈거리는 경운기를 모는 할아버지가 뒷자리에 할머니를 태우고 느릿하게 움직인다. 오래된 전봇대를 감싼 이름 모를 나무의 뿌리넝쿨처럼 시간의 흐름을 간직한 곳. 그곳에 청년 정승권 씨가 산다. 이곳에 산다는 청년 ‘PLACERS’의 정승권 대표, 그의 명함에 ‘Local Master Planner’이라는 특이한 글귀가 있었다. 직역하면 ‘지방 전문 계획’이다. “제가 하는 일이 일종의 새로운 주거 트렌드를 만드는 겁니다. 방송에서 소개된 ‘바퀴달린 집 2’도 저희가 디자인한 건데요. ‘로컬을 아름답게 디자인한다’는 것이 저희 회사의 모토라고 할 수 있죠.그의 말대로 정승권 대표의 회사 ‘PLACERS’의 소개들에는 “이색적인 곳에서 색다른 추억을 경험하고자 하는 이들에겐 거칠기 짝이없는 폐공장이 인더스리얼 컨셉의 멋진 카페가 되어지고 자유롭게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황량한 공간에 놓여진 컨테이너 박스 하나가 노마드 컨셉의 공간이 될 것입니다. 또한 행여 평범한 공간이라 할지라도 그곳을 채우는 음악이 우리의 감성을 채우기도 합니다. 공간에서의 경험은 우리가 인지하는 모든 부분에서 고민되어져야 합니다”는 글이 씌어 있었다.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왜 ‘영천’인 것일까. 일반적인 ‘귀농·귀촌’과는 다른 그의 정착. 서울의 굵직한 건축사회를 다니던 청년은 왜 경북 영천의 시골 마을로 왔을까. 인구도 줄고 있던 집도 폐가가 되어가는 마당에 시골에 새로운 공간을, 그것도 아름다운 공간을 창조하는 일을 하겠다는 게 말이 될까.“기회의 땅으로 보였어요. 만들어진 시스템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도전해볼 수 있는 곳이죠. 그리고 재미있어요. 도시에서는 사는 것이 ‘살아내는’ 느낌이었다면, 이곳에서는 제가 스스로 ‘살아가는’ 느낌이죠.”그리고 그의 ‘로컬’에 대한 자랑이 장시간 이어진다. ‘10년 전 황량했던 영천 시외버스터미널의 기억이 아직도 있다’는 기자의 말에 “여전하다. 변한 것이 없어요”라며 웃음을 짓던 정승권 대표.“보통 우리가 지역 또는 로컬이라고 이야기를 하면, 외진 곳이나 시골이라는 식의 수식어가 붙어요. 하지만 이제는 사람들의 이동반경과 행동반경이 객관적인 접근성을 넘어 심리적으로 멀리가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많이 줄었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2~3시간 가는 것에 대해서도 ‘멀다’라는 생각이 있었죠. 그런데 이제는 좋은 곳이 있어서 찾아가는 분들을 보면, 가고자 하는 목적이 워낙 분명하고 심리적인 거리가 대단하게 줄었죠. 저희 건축물을 체험하시는 분들도 수도권 쪽의 분들이 많아요. 고객분들이요? 원하는 바가 분명하게 있다면 많이들 오시죠.”아니나 다를까. 인터뷰 내내 신경쓰였던 뒤편 화이트보드에 적혀 있던 안산을 비롯한 경기도, 강원도 등의 지명이 고객분들이었다니. 순간 부러움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거짓말일테다. □ 로컬의 단점요? 외로움이죠... 가족과 함께 이겨내고 있어요이제 우리나이로 마흔. 하지만 삼심대를 힘주어 말하는 정승권 대표는 82년생 청년이다. 그의 고향은 경남 거창, 하지만 인생의 절반을 서울에서 보냈다. 이제 영천살이 3년차의 청년이다.“건축회사를 다녔어요. 마지막에는 회사에서 사업기획 팀장을 했죠. 모든 기업이 그렇겠지만, 변화를 해야 하죠. 기존의 방식대로 사업하기가 힘들어요. 사실 팀장으로 있으면서 많은 공부를 한거죠. 사업을 위한 공부요. 사실 회사 생활 10년차 되는 다음날에 바로 사직서를 냈어요. 입사 때부터 10년을 목표로 하고 일을 했죠. 10년차가 되면 그만두고 사업을 해야겠다라는 것이요.”그의 말을 종합하면 ‘운’도 좋았다. 사업을 고민하던 중에 경상북도에서 추진하는 청년유입정책이 있었고, 좋은 조건을 찾아 영천으로 오게 됐다. 정승권 대표의 아내가 영천 출신인 것은 덤. 이러한 그에게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로컬 생활’의 단점에 대해서 말이다.“1~2년차 때는 살아남아야 하니까. 힘들다는 생각도 못했어요. 그래서 지금은 가족 밖에 없어요. 그게 좀 단점이죠. 제가 생각할 때, 로컬에서 이겨야 하는 1순위가 외로움인 것 같아요. 물론 외롭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사치라고 느낄 정도로 너무 정신없다고 생각하기는 하죠. 하지만 저도 사람이니까. 가끔 힘들 때 친구들을 만나서 맥주 한 잔 하고 싶을 때도 있잖아요. 다행히 내일 친구들이 서울에서 내려온다고 하네요. 오랜만에 회포를 푸는 거죠.(웃음)”정승권 대표의 가족이라는 말에, 그의 가족에 대해 물었다. 아내와 2살·5살의 아이와 함께 하고 있다는 그는 “사실 막내인 둘째는 영천이 고향”이라고 했다. 정 대표가 영천에 정착한 이듬해에 태어난 셈이다. 그런 그가 힘주어 말한 것이 있다.“애기들이 어릴 때, 빨리 내려와야 해요. 만약 저도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면, 많은 고민을 해야 했을 거에요. 교육이요? 물론 중요하죠. 하지만 저는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생각에 올인을 하고 투자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요. 저도 서울로 학교를 다녔고, 취업을 해보려고 발버둥을 쳐보고, 패턴에 맞춰서 삶을 살았고 회사도 다녔죠. 스스로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다시 돌아간다면 서울로 갈까하고요. 하지만 서울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하기보다는 내 미래를 위한 다른 것을 준비했을 것 같아요. 만약 로컬에 있었다면 가까운 부산이라든지 국립대를 가서 자격증을 따거나,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삶을 살면서 제 스스로의 역량을 키웠을 것 같아요.” □ 10년후… 로컬에서 아이들과 함께 꿈을문득 영천살이 3년차인 그의 사업 규모가 궁금해졌다. 그에게 회사의 매출을 물었다. “1~2년차 때는 거의 없었죠. 지금은 (웃음) 먹고는 살아요. 어느 정도는요. 그리고 지금 직원이 저를 포함해 정규직이 5명이구요. 계약직이 6명. 오픈 그린이라고 하는 곳에 3명. 디자인팀 1명이 근무하고 있죠.”사실 정승권 대표는 귀촌 3년 만에 성공적인 사업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이를 반증하듯, 정 대표는 도시청년 우수사례에 선정되기도 했으며, 지난해에는 외부에서 영천으로 유입시킨 직원만 3명에 달하기도 했다. 정 대표는 또 영천시와 함께 지역 발전에 도움이 되는 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영천시와 플레이서스가 함께 하는 집 짓기 학교’가 그것. 기수별 30명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11월에는 5기가 개강한다.그런 그에게 10년, 20년 후의 모습을 물었다.“10년 후요? 아유. 꿈이죠. 아직은. 하지만 다양한 분야의 프로젝트에서 독특한 콘텐츠를 제공하고 싶어요.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통한 다양한 크리에이터와 함께 고객 요구에 맞는 특별한 장소를 창조하고 싶죠. 경북에만 있는 것이 아닌 전라도와 강원도, 제주도 그리고 해외까지도요. 그리고 지금 제조업 공장을 열어 놓고 힘들어 하시는 분들이 많잖아요. 저는 디자인과 제작기술, 수주 경험을 기반으로 그런 것들을 함께 하고 싶어요.”“개인적으로는 가족에 대한 문제요? 아이들이 학교를 가도 솔직히 영천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 물론 아이들이 중학교를 가고 고등학교를 가게 되면 필요한 부분이 생기고, 또 아이들이 원하는 부분이 있겠죠. 즉, 기회의 가치를 선택하는 경우 말이에요. 하지만 저는 초등학교까지는 로컬에서 자급자족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이들과 함께 로컬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꿈꾸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죠.”/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1-06-22

대한민국 산업화 이끈 포항, 3대 신성장 동력 장착 큰 걸음

포항시가 철강도시를 넘어서 다양한 연구 인프라와 미래 산업 생태계 구축을 선도하면서 바이오헬스·배터리·수소연료전지 등 ‘3대 핵심 신산업의 최적지’로 입지를 탄탄하게 다지고 있다.포스코로 대표되는 포항의 철강산업은 지난 반세기 대한민국 산업화와 근대화를 이끌어 왔지만, 철강 일변도 산업 구조는 점차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포항시는 위기의 시기를 도약의 기회로 만들기 위한 준비를 꾸준히 해왔고, 그 결실이 점차 나타나고 있다. 아시아 최고의 연구중심대학 포스텍과 3·4세 방사광가속기를 뿌리삼아 포항산업과학연구원(RIST), 나노융합기술연구원 등 세계 최고 수준 RD 기관과 포스텍·한동대 등 수준 높은 교육 환경에서 배출된 우수한 인재 등 풍부한 연구개발 인프라를 갖추고 있어 ‘첨단산업 육성의 최적지’로 평가받고 있고 있다. □포항의 신산업 동력 미래 먹거리 바이오산업포항의 3대 신산업 동력 중에서 바이오헬스와 관련한 인프라 구축 등 성과가 먼저 눈에 띈다.포항시는 바이오산업을 체계적으로 육성 지원하기 위해 ‘2020년 바이오산업 육성을 위한 시설 설치 및 운영 조례’를 제정해 산업 성장을 위한 제도를 마련했고, 바이오산업 인프라 조성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바이오 벤처기업 공동연구 등을 통한 바이오 벤처 보육 및 핵심 연구시설인 바이오오픈이노베이션센터(BOIC)가 지난해 준공됐다. 이어 올해 포항융합기술산업지구 내 극저온전자현미경(Cryo-EM)을 활용해 신약을 개발할 수 있는 또다른 핵심 시설인 세포막단백질연구소를 4월 준공했다. 또한, 식물백신 생산을 위한 기반시설과 식물백신 개발 중소·벤처기업을 지원·육성하기 위한 그린백신실증지원센터 준공을 앞두고 있다.특히, 포항은 3·4세대 방사광가속기와 극저온전자현미경 등 첨단 연구 장비를 갖추고 있고, 인공지능(AI) 기반 신약개발 연구기관인 인공지능연구원, 첨단 소재 분야 협업기관인 나노융합기술원 등 다양한 연구기관과의 협업체계도 갖추고 있어 ‘AI·구조기반 신약개발 바이오 벤처·스타트업’의 기술 개발에 강점을 가지고 있다.또한, 포항은 포스텍·한동대 등에 1천여명의 생명과학분야 교수·학생과 연구 인력이 있어 인적자원이 풍부하며 강소연구개발특구, 포항융합기술산업지구의 창업 특구와 포스코·포스텍 벤처 펀드를 바탕으로 현재 40여개의 유망 바이오벤처가 소재하는 등 바이오 산업 관련 인프라가 풍부하다.포항시는 이런 강점을 바탕으로 정부에서 추진 중인 ‘K-바이오 랩허브 구축사업’을 준비 중이다. K-바이오 랩허브는 중소벤처기업부가 공모 중인 국비 규모 2천500억원 규모의 사업으로 지난 2012년 미국 보스턴에 설립된 비영리 창업지원 기관 랩센트럴을 벤치마킹해 실험시설·사무공간·네트워킹 등을 제공해 바이오 벤처 스타트업을 육성하는 사업이다. 전국 12개 지자체가 유치의향서를 제출했고, 7월 최적의 후보지 1곳을 선정할 계획이다.포항시는 사업공고가 발표된 이후, K-바이오 랩허브 지역 유치 세부계획을 수립할 실무추진단 TF팀을 즉각 구성했고, 최종 사업계획서를 지난 6월 14일 제출했다. 특히, 경북도와 대구시는 이번 사업 공동 대응을 위해 경북의 과학·연구·산업 인프라를 중심으로 대구가 협력해 타 지역과의 유치전에 공동 대응하기로 힘을 모아 유치 가능성을 더욱 높였다. 포항시는 이번 공모사업에 행정력을 집중해 최종 선정을 위해 노력 중이며, 이를 통해 포항이 명실상부한 ‘환동해 바이오 클러스터의 중심도시’로 도약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포항 산업구조 다변화, 배터리에서 답을 찾다포항시가 철강중심 산업구조를 개편하고 미래 신성장 동력확보를 위해 꾸준한 노력의 일환으로 2019년 ‘배터리 리사이클링 규제자유특구’로 선정됐다.규제자유특구란 지역을 단위로 지역과 기업이 직면한 신사업 관련한 덩어리 규제를 패키지로 완화해 주는 제도다. 포항은 ‘전기차 사용후 배터리 종합관리 실증’, ‘전기차 사용후 배터리 재사용 실증’, ‘재사용 불가 배터리 재활용 실증’ 등 3개 사업에 대한 규제특례를 지정받았다.포항시는 특구를 중심으로 배터리 재활용(리사이클링)산업이 향후 활성화되면 국가 전체적으로 볼 때 현재 90%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배터리 소재에 대한 무역불균형 해소(약 30% 수입대체 효과)와 더불어 매립·소각을 하지 않아 배터리 재활용(리사이클)으로 인한 환경오염 예방과 탄소 중립을 통해 금전적으로 환산할 수 없는 효과를 거둘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포항시는 배터리 규제자유 특구 지정 이후 에코프로(양극재), 포스코케미칼(음극재) 두 앵커 기업을 필두로 투자유치 약 1조5천억원 고용 3천300명을 창출했으며,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중소벤처기업부의 ‘규제자유특구 성과평가’에서 전국 유일 2년 연속 최고등급인 우수특구로 선정됐다.또한, 후속사업으로 최근 환경부의 국가 전략 그린 뉴딜사업인 전기차 사용후 배터리 자원순환 클러스터(사업비 457억원 전액 국비)도 유치에 성공했다.블루밸리 국가산업단지 내 ‘이차전지 종합 관리센터’가 올해 안으로 건립되고, 예타사업으로 추진 중인 가속기 기반 ‘차세대 배터리파크 조성사업’까지 완성된다면 명실공히 ‘배터리산업 메카도시’로서의 위상을 갖게 될 것으로 시는 기대하고 있다. □수소연료전지 발전 클러스터 구축, 수소경제 활성화 이끈다포항시는 친환경 수소연료전지 산업 생태계 구축을 통한 수소경제 활성화에도 선도적으로 나서고 있다.이를 위해 포항시는 수소연료전지 산업 생태계 조성을 위한 인프라를 다지고 있다. 2011년부터 ‘수소연료전지 테스트베드 구축사업’을 통해 연료전지 시험평가장비 54종(142억원) 구축을 완료했다.또한 포스텍, 한동대, RIST, 포항금속소재산업진흥원(POMIA), 포항가속기연구소, 포스코, 한국퓨얼셀, 포항테크노파크 등 지역에 기반을 둔 연료전지 분야 산·학·연 연계 협력 네트워크가 잘 갖춰져 있다.특히, 포항테크노파크에서 운영 중인 ‘수소연료전지 인증센터’는 1∼5㎾급 고분자전해질 연료전지(PEMFC) 시스템의 장기 신뢰성 평가 및 실증, 환경실험설비를 활용한 제품 성능평가체계 등을 구축하고, 한국인정기구(KOLAS) 인정 획득을 앞두고 있다.센터는 사업비 100억원을 투입, 오는 2023년까지 연료전지 대용량 장비를 구축해 KS인증시험기관 지정과 국내 유일 대용량 수소연료전지 전분야 검인증이 가능하도록 할 계획이다.포항시는 지난 2019년 정부의 ‘수소산업 클러스터 공모사업’에 선정돼 예비타당성조사를 거쳐 수소연료전지 발전 클러스터를 구축한다는 방침이다.이 사업은 ‘세계 톱3 수소연료전지 발전 클러스터’를 목표로 △산·학·연·관 산업생태계 조성을 통한 산업 경쟁력 강화 △연료전지 산업 공급망(Supply Chain) 구축을 통한 혁신산업 육성 △클러스터 내 기업 유치를 통한 신규일자리 창출을 위해 오는 2027년까지 1천863억원을 투입해 포항 블루밸리국가산업단지 일원에 ‘기업 집적화 단지’, ‘부품·소재 성능평가 센터’, ‘국산화 실증단지’ 조성을 추진할 계획이다. “포항을 신약개발 중심지로 육성”이강덕 포항시장 인터뷰-철강도시 포항이 바이오산업을 새로운 먹거리로 선정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포항은 그동안 포스코를 주축으로 하는 철강 산업의 대표도시로 자리매김 해왔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국내외 철강 수요 둔화와 설비 과잉으로 수익성이 악화돼 침체를 겪었으며, 철강산업의 위기는 곧바로 지역경기 침체로 이어졌다. 이에 포항시에서는 기술개발을 통한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을 통한 철강산업 고도화 방안 추진과 더불어 새로운 미래 먹거리산업으로 배터리, 바이오산업을 집중 육성하고 있다. 특히 바이오산업은 전 세계적인 인구 고령화와 감염병 위험 증가 등으로 급속한 성장이 예상되는 유망 분야이며, 최근 5년간 17만개의 일자리가 증가하는 등 고용 기여도가 높은 산업이다. 정부에서도 바이오산업을 ‘BIG3 산업’중 하나로 선정하고 집중적으로 지원을 하고 있다. 포항시에서는 철강산업에 집중된 산업구조의 다각화를 모색해왔고, 포스텍·한동대의 우수한 바이오 연구인력과 구조기반 신약개발에 필수인 제3·4세대 방사광가속기 및 고해상도 극저온현미경 등의 첨단장비를 바탕으로 바이오산업을 적극 육성 중이다.-K-바이오 랩허브 사업 심사가 한창 진행 중인데 포항 유치 가능성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중소벤처기업부에서 후보지 공모 중인 ‘K-바이오 랩허브 구축사업’은 국비 2천500억원 규모로 현재 12개 광역지자체에서 유치를 희망하고 있다. 포항은 방사광가속기와 극저온전자현미경 등을 활용한 구조기반 신약개발에 최적의 인프라를 보유하고 있으며, 포스텍, 한동대를 중심으로 우수한 바이오 인력이 1천여명 가량 상주하고 있다. 이러한 인프라를 바탕으로 경제자유구역인 포항융합기술산업지구 내 한미사이언스와 같은 대형제약회사와 벤처캐피탈의 투자가 이어지고 있어 바이오 벤처 창업에 우수한 환경을 갖추고 있다. 포항시는 ‘K-바이오 랩허브’ 유치를 위해 관련 기관과 T/F팀을 구성해 공모사업에 대응 중이며, 지역 내 기관·단체들과의 네트워크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고 대정부 건의활동을 활발히 추진 중이다. 지난 6월 10일 경북도·대구시 간 상생·협력을 통해 포항을 중심으로 유치 활동을 하기로 합의를 함에 따라 유치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 상황이다.-포항시가 K-바이오 랩허브 유치에 성공한다면 지역에 어떤 파급효과를 기대할 수 있나.△총 3천350억원(국비 2천500억원, 지방비 850억원)이상의 대규모 사업인 K-바이오 랩허브 구축사업에 선정되는 지자체는 바이오 벤처들의 창업 활성화와 집적화로 국가 주력사업인 ‘바이오산업의 중심지’가 될 것이다. 이에 따라 인구 유입, 일자리 창출 등이 이루어 질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정부와 민간기업의 투자 유치를 통해 지역경제 파급효과도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K-바이오 랩허브의 원조격인 미국 보스턴의 랩센트럴 자료에 의하면 2013년부터 126개의 기업지원, 약 6조7천억 원의 투자유치, 2천395개의 일자리 창출 등의 성과를 얻은 것으로 보고됐다.-앞으로 포항 바이오산업 발전을 위해 준비 또는 추진 중인 사업이 있는가.△지역의 강점인 제3·4세대 방사광가속기와 고해상도 극저온전자현미경 등을 활용한 구조기반 신약개발 사업 지원과 마이크로바이옴 핵심연구지원센터 구축사업 등을 통해 포항을 신약개발의 중심지로 육성할 계획이다. 그리고 바이오 규제자유특구 지정, 식물기반 백신 생산 인프라 마련을 통해 식물기반 의약품 개발과 기업 유치로 그린바이오 산업 거점도시로 도약하겠다. 또한 바이오프린팅 활용 인공장기 모델 개발, 제3세대 치료제로 불리는 디지털 치료기기 등 바이오 신산업 분야도 적극 개척할 계획이다./박동혁기자 phil@kbmaeil.com

2021-06-22

대선 D-8개월…윤석열·이재명 각축 속 후보들 춘추전국시대

내년 3·9대선을 앞두고 여야 정치권의 대권후보 경쟁이 뜨겁다. 대선 전초전격인 4·7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전이 국민의힘 압승으로 끝남에 따라 야권의 우세가 점쳐지는 가운데 여권도 변화와 쇄신으로 민심을 돌려놓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여야 잠룡들은 일제히 수면 위로 머리를 내밀고 차기 대선 티켓을 확보하기 위한 총력전에 나섰다. 여론조사상 야권에선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여권에선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지지도 1위로 나타나고 있지만, 본격적인 대선 후보경선 결과는 아직 예측불허다. □ 야권 대선 구도야권의 대권주자는 윤석열 검찰총장을 비롯해 국민의힘 홍준표 의원, 원희룡 제주지사, 유승민 전 의원, 최재형 감사원장,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 하태경 의원 등이 꼽힌다. 야권 후보 가운데 지지도 1위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지난 3월 총장직에서 물러난 후 명망가들을 찾아 민심을 청취하며 화제의 중심에 섰다. 101세 철학자 김형석 명예교수를 찾아 만난 것은 ‘정치를 해야할 이유’를 찾는 과정으로 이해됐고, 노동전문가 정승국 중앙승가대 교수를 만난 것은 청년실업과 양극화 해소라는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해결을 위한 해법을 모색하는 행보로 읽혔다. 서울대반도체연구소 정덕균 석좌교수를 만나고, 블록체인과 코딩교육분야 2030 스타트업 창업가를 만난 것은 한국의 미래먹거리에 대한 해법을 찾는 경제행보로 보였다. 외교부 차관 출신 김성한 고려대 교수와 비핵화와 미중 갈등 등 하국의 외교문제해법을 놓고 토론한 것이나 현충일에 천안함 생존 전우회장을 만난 것 역시 2030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보훈행보였다. 그러나 최근 대권도전 선언이 임박한 시점에서 스텝이 꼬인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특히 지난 19일 ‘윤석열 X파일’의혹을 두고 야권발(發) ‘불가론’이 나온 데 이어 하루 뒤인 20일 윤 전 총장이 처음 참모로 뽑은 이동훈 대변인이 갑자기 사퇴해 이같은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선발 대변인의 사퇴로 6월말로 예정됐던 대권 도전선언도 늦춰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야권의 잠룡으로 꼽혀온 최재형 감사원장,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 역시 조만간 대권 행보에 나설 전망이다. 가족의 반대로 대권참여를 망설였던 것으로 알려진 최 감사원장은 7월 초 감사원장직을 사퇴하고 대선 출마의 뜻을 밝힐 것으로 알려졌다. 최 원장은 지난 3월 문재인 정부의 월성원전 1호기 경제성 평가 조작 의혹을 감사하는 과정에서 ‘절차에 불법성이 있었다’며 청와대와 대립각을 세우면서 야권의 주목을 받았다. 최 원장은 보수 진영 입장에서는 경선흥행 카드로 안성맞춤이다. 경선 흥행은 지지세 결집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이는 대선에서도 유리하다. 최 원장은 개인적으로 아름다운 스토리도 있다. 고교 시절 장애인 친구를 업어 등교시키며 함께 서울대에 입학했고, 나란히 사법시험에 합격해 사법연수원을 수료했다. 두 딸을 키우면서 두 아들을 입양해 키운 스토리도 있다. 또 하나의 야권 잠룡으로 꼽히는 김 전 부총리는 사단법인 ‘유쾌한 반란’을 세워 공익활동에 매진하며, 출마 선언시기를 가늠하는 중이다. 김 전 부총리는 첫 행보로 지난 20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서 노숙인을 상대로 무료급식 봉사에 나섰다. 정치적 의도와 관계없는 행사라고 했지만, 정치권에서는 대선 행보의 일환이라는 평가다. 김 전 부총리는 문재인 정부 초대 경제 부총리로 임명됐지만,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현금성 복지 지출의 급격한 증가 등을 포함한 ‘소득주도성장론’을 두고 청와대 및 친문(친문재인) 인사들과 대립한 끝에 사퇴했다. 김 전 부총리는 조만간 여권의 보편 복지·현금 지원에 반대해 온 자신의 주장을 담은 책을 발간할 것으로 알려졌다.당밖의 주자외에 당내 기존 주자들도 대선채비에 시동을 걸고 있다. 조만간 복당할 예정인 홍준표 의원은 지난 19일 페이스북을 통해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은 국정 운영 능력에 대한 자질 검증과 자신과 가족들에 대한 도덕성 검증을 모두 통과 해야 한다”며 윤석열 전 검찰총장에게 견제구를 날렸다. 유승민 전 의원은 지난 20일 대구에서 청년 지지 모임인 ‘희망 22 동행 포럼’ 창립 포럼을 갖고, 이 자리에 진중권 전 교수를 초청해 ‘보수정치의 진정한 변화’란 제목의 기조연설을 듣고, 대담을 가졌다. 유 전 의원은 이 자리에서 “대한민국 대통령만이 해결할 수 있는 여러분의 일자리, 주택문제, 우리 경제를 일으키는 문제, 대한민국을 안전하게 지켜나가는 문제 등 대통령만이 할 수 있는 문제 해결에 열정과 집착이 있다”면서 대권도전의 뜻을 확고히 했다. 유 전 의원은 조만간 경제철학 등을 담은 저서를 출간하고, 본격 대권 행보에 나설 방침이다. 원희룡 제주지사도 최근 언론을 통해 “과학기술을 통한 ‘부국강병’으로 무너진 일자리와 ‘내 집 마련’의 희망을 복원하겠다”며 대권도전의지를 밝혔다. 원 지사는 현재 도지사로서 코로나19 방역을 온 힘을 집중하고 있지만 당이 대선 경선 버스를 띄울 8월께 정리된 국가 비전을 가지고 대선출마 선언을 할 방침으로 알려졌다. 국민의힘 현역 의원 가운데는 처음으로 부산 해운대갑 지역구의 3선 의원인 하태경 의원이 지난 15일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고, “과학과 지성이 몰상식과 괴담을 이기는 대한민국, 제가 대통령이 되어 만들고 싶은 나라”라고 포부를 밝혔다. 바야흐로 야권의 대선후보 경선이 불붙기 시작했다.□ 여권 대선 구도여당인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로는 이재명 경기지사를 필두로 이낙연 전 대표, 정세균 전 총리의 ‘빅3’에 이어, 최문순 강원도지사와 양승조 충남도지사, 이광재·박용진·김두관 의원, 추미애 전 법무장관이 출마를 선언하거나 앞두고 있다. 문제는 경선일정을 두고 연기하자는 주장이 나와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민주당 당헌에는 대선 선거일(내년 3월 9일) 전 180일까지 대통령 후보자를 선출하도록 돼 있다. 역산하면 오는 9월 10일까지 후보를 선출해야 한다. 이대로라면 오는 11월에 대선 후보를 결정하는 국민의힘보다 두 달 정도 빠른 일정이 된다. 경선 일정은 각 후보·캠프의 이해득실과 무관치 않다. 2017년 19대 대선을 앞두고도 후발주자였던 박원순, 안희정, 이재명 후보는 연기를 주장했고, 1위였던 문재인 후보는 경선 연기를 반대했다. 현행 경선을 연기하자는 주자 측은 이 지사가 지지율 독주를 무기 삼아 논의 자체를 막는다고 공격하고 있다. 대선 후보 경선이 국민과 당원의 참여를 독려해 축제 분위기가 조성돼야 하는데 코로나19 상황으로 대규모 인원이 참여하는 경선이 되기 어렵다는 논리다. 반면 규정대로 경선을 진행하자는 이 지사 측은 연기론을 추격 주자들이 이재명 대세론을 꺾기 위한 시간벌기용에 불과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또 연기가 흥행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경선 시점이나 방식보다는 인물과 콘텐츠 승부라는 얘기다. 그러나 어쨌든 본선 경쟁력을 생각한다면 결국 이 지사가 통 크게 경선 연기를 수용해야 한다는 여론도 적지 않다. 우선 당 밖의 윤석열, 안철수, 홍준표, 김동연, 최재형 등이 국민의힘으로 모여드는 과정을 통해 야권이 주목받는 동안 민주당 후보는 관심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4·7 재보선 당시 야권이 안철수-오세훈 단일화로 막판까지 컨벤션 효과를 올리며 승기를 잡은 사례도 있었다. 일단 더불어민주당은 대선 경선 연기 문제에 대해 22일 오전 의원총회를 열어 논의한 뒤 의총 결과를 토대로 경선 연기 여부를 지도부가 결정할 방침이다. 이런 가운데 이재명 지사는 지난 17일 김경수 경남도지사와 ‘경기·경남 공동발전을 위한 정책연구와 정보공유에 합의하는 업무협약’을 맺었다. 한마디로 여권내 여론조사 1위라는 지위를 이용해 당내 친문인사들을 파고들며 세력확장에 나선 것이다. 또한 이 지사는 이해찬 전 대표의 ‘광장’을 확대개편한 전국조직 격인 ‘민주평화광장’을 결성, 조직정비에 나섰다. 이해찬계 조정식 의원이 공동대표를 맡았고, 이해찬계 인사들도 대거 합류해 이 지사 조직과 ‘광장’의 화학적 결합이 이뤄지고 있다는 후문이다.이낙연 전 대표도 당 대표직을 내려놓은 후 자신의 대권 지지모임인 ‘신복지 포럼’조직을 크게 확충하며 세를 불리고 있다. 이 전 대표는 지난 20일 경북 구미 구미코컨벤션센터에서 당 내외 주요 인사와 민주당원 2천22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한 가운데 ‘내 삶을 지켜주는 나라, 신복지 경북포럼(이하 경북포럼)’출범식을 가졌다. 신복지포럼은 부산(5월 9일), 경남(5월 23일), 대구(6월 1일), 울산(6월 5일)에 이어 영남권에선 5번째, 전국 17개 광역시도 중 16번째다. 상임대표는 강태호 전 동국대교수와 박경조 민주평통부의장, 배영애 김천지역위원장, 정우동 영천·청도지역위원장, 강부송 군위·의성·청송지역위원장, 김영태 전 상주·의성지역위원장이 맡았다. 정세균 총리도 자신의 지지조직인 ‘균형사다리 대구본부’ 발대식에 참석하기위해 대구를 찾는 등 지지조직 확충에 힘을 쏟고 있다. 여기에다 대선 출마를 선언한 박용진 의원이 바람을 일으키며 지지율 3, 4위를 오르내리고 있고, 원조 친노(친 노무현)인 이광재·김두관 의원, 추미애 전 법무장관도 대권도전을 선언하고, 드라마틱한 반전승부를 노리고 있다. /김진호기자 kjh@kbmaeil.com

2021-06-22

‘사통팔달’ 광역교통망, 통합 신공항의 미래 밝힌다

지난 2008년 경북도청 이전이 안동·예천으로 확정되고, 2016년 완전히 이전한 지 6년째 접어들었다. 그동안 경북도는 신도청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간선도로망 구축에 박차를 가해 동서4축 상주~영덕 구간 107.7㎞과 상주~영천 민자고속도로(93.9㎞)를 개통했다.지방도의 접근성 강화를 위해서는 안동과 예천에서 진입하는 도로를 개통했고, 총사업비 480억 원으로 국도 28호선~도청신도시(지보 어신리~호명 금능리, 4.6km) 진입도로 개설, 국도 34호선 용궁~개포간 선형개량사업에 51억원, 국도 28호선(예천~지보) 확장 등도 이뤄냈다. 아울러, 지역 간 연결도로 추진으로 연계성을 확보하고 노후·불량 구간을 개선해 교통사고를 사전 예방하기 위해 사업비 78억원을 투입해 군도사업 3개 지구와 지역현안사업 3개 지구, 농어촌도로 정비 7개 지구와 재난위험교량(D급)인 작곡교(예천)와 고항교(예천)를 개체했다.경북도는 2028년 개항을 목표로 대구·경북통합신공항의 초석 다지기에도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도는 올해 도정의 첫 번째 과제로 대구·경북 통합신공항의 구체화를 선정했다. 이에 따라 공항연계 광역교통망 확충도 계획대로 진행되거나 추진 중에 있다.지난해 신공항 이전지가 군위·의성으로 결정되자 도는 민항 주무처인 국토교통부 출신의 경제부지사를 임명하고 조직개편을 통해 건설도시국과 통합신공항추진단을 경제부지사 직속으로 뒀다. 이는 신공항 교통망과 주변 SOC 사업 등 산재한 신공항 관련 숙제를 풀기 위한 것으로 분석된다.경북도의 통합신공항 연예 및 광역도로망 확충 사업은 8개 노선(429.6km)에 12조 4천6억원이 투입되는 거대한 사업이다.먼저 대구·경북 통합 신공항 연계 교통망의 핵심인 대구·경북선이 제4차 국가 철도망 구축 계획안에 반영됐다. 대구·경북선은 서대구에서 출발해 통합 신공항과 의성군을 잇는 66.8km의 노선으로 사업비는 1조6천123억원(단선)이다. 광역철도로 건설되는 만큼 노선 계획과 역사 신설, 부대시설 조성 등에 지자체의 의견이 주요하게 반영될 수 있다.다만 경북도가 서울과학기술대 등에 의뢰해 지난해 8월 완료된 ‘사전타당성조사용역’ 결과 복선(2조1천821억원)이 깔리면 금상첨화지만 사업비를 감안하면 일단 단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철도가 놓이면 경부선과 중앙선을 연결하는 간선철도 기능을 톡톡히 할 것으로 점쳐진다. 여기서 꼭 짚고 갈 난제가 있다. 일반철도로 고시돼야 한다는 점이다. 일반철도로 반영되면 사업비와 운영비를 전액 정부가 부담하게 된다. 반면 광역철도는 국가와 지자체가 사업비(건설비)를 7대 3, 차량구입비는 5대 5로 부담해야 한다. 운영비(연간 308억원 추산)는 지자체가 책임져야 한다. 철도운영 초기에 적자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경북의 선택지는 분명해진다.두 번째로는 동서화합과 국토균형 발전을 위한 숙원 사업의 하나인 전주~김천 간 동서횡단철도를 대구·경북 통합신공항과 연계해 김천에서 신공항, 의성을 잇는 77.4km노선을 계획했다. 이 노선은 향후 영덕까지 연결할 계획으로 그 실현 가능성에 관심이 쏠렸으나 현재는 제4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 초안에서 해당 구간이 누락됐다. 이 사업은 2조1천124억이 투입되는 사업으로 계획돼 있다. 이 노선의 누락과는 별개로 도가 계획했던 의성~영덕 노선(80.0㎞)은 추가됐다.도는 향후 김천~신공항~의성 구간에 대한 공항 이용 수요 확보는 물론 항공 화물 처리에 반드시 필요한 구간인 만큼 6월 말 고시 예정인 국가계획에 추가 검토사업으로 반영될 수 있도록 총력 대응한다는 전략이다.경북도내에서 국가철도망구축안에 반영된 철도노선은 신규 사업으로 현재 예타 진행 중인 문경·경북선(문경~상주~김천) 73km구간에 1조 3천714억원, 점촌-영주간 전철화사업 56km구간에 980억원이 확정됐다. 또 추가 검토사업으로 점촌-안동선(점촌~신도청~안동) 54.4km구간 7조 3천279억원, 중부권 동서횡단철도(서산~문경~울진) 330km구간 4조 7천824억원 등이 포함됐다.마지막으로 도담에서 영천으로 이어지는 중앙선 복선화 사업도 현재진행형이다. 현재 안동까지 완공된 중앙선 복선화 사업은 총 40조원 이상의 예산이 투입되는 사업으로 청량리~안동 구간에 신형 KTX(EMU 260)가 투입된다. 이 노선은 수도권과 경북 북부를 연결하는 반나절 생활권 시대를 열면서 수도권에서 경북도청으로의 접근성도 한층 높여준다. 이 중앙선 복선화 사업은 현재 안동에서 영천 구간을 공사중이며, 현재 공정률은 70%로 오는 2022년 6월 완공될 예정이다.눈여겨 볼 사항은 수서발 중앙선(수서~광주~여주~원주) 이다. 청량리역 선로 용량이 이미 포화여서 운행 횟수를 늘리긴 쉽지 않고, 기존 중앙선 종착역인 청량리역은 중앙선 이외에 1호선 전철, 강릉행 KTX 등 5개 노선이 지나고 있어 중앙선 복선화 공사가 완공되면 안동·영주~단양~서울(청량리)서울수서에서 1시간대로 연결되게 된다. 또 영천~신경주 구간이 완공되면 기존 경부고속철도 KTX 노선인 신경주~울산역~부전역까지 연결된다. 이럴 경우 중앙선을 이용해 고속철도로 청량리(수서)에서 부산까지 이동할 수 있어 수도권은 물론 부산 경남권에서 경북도청까지의 접근성도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통합신공항과 연계한 새로운 물류기반 확충을 위해 광역교통망 구축으로 통합신공항 접근성 향상을 위해 고속도로와 지방도 역시 새롭게 손본다. 도는 북구미IC에서 군위JC로 연결되는 고속도로와 성주~대구간 고속도로를 신설하고, 중앙고속도로 읍내JC와 의성IC 확장한다.먼저 북구미IC에서 군위JC로 연결되는 고속도로는 총 길이 25km로 1초 1천억이 투입되는 사업으로, 통합신공항에 인접한 구미 국가산단과 남부권의 항공물류 수송 경쟁력 강화가 목적이다. 2천400개 기업이 집적된 구미국가산단은 2019년 말 기준 국내 전체 국가산단 중 수출액이 3위(171억달러)를 차지한다. 경부고속도로와 중앙고속도로·중부내륙고속도로·상주~영천고속도로와 연계 효과도 크다.정부가 약속한 사드 배치에 대한 보상이자 경북 남서부 지역과 대구·경북 통합신공항의 접근성이 강화를 위한 대구~성주 간 고속도로는 총 길이 18.3km(왕복 4차로)로 7천820억이 투입된다. 이 고속도로는 올해 말 개통될 예정인 대구 4차 순환도로와도 연결돼 대구시의 교통량을 분산하는 효과도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읍내IC(칠곡 동명)~의성IC 구간(총연장 40㎞)은 왕복 4차에서 6차로로 확장한다. 사업비는 1조 2천억원이며 통합신공항과의 접근성 개선차원에서 나온 사업으로 교통혼잡을 막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통합신공항 최대 이용객인 대구시민 항공수요를 누수 없이 최대한 흡수하려면 필수불가결한 사업이라는 것이 경북도의 입장이다. 실제 2019년 기준 대구공항 항공여객 행동특성분석조사결과를 보면, 대구공항 이용객의 63%는 대구시민이다.특히, 이 사업은 공항IC 신설과도 직접 관련성이 있다. 이 도로가 확장되면 군위IC와 의성IC 사이에 공항 IC를 만들어 통합신공항 진입로와 연결시킬 수 있다. 공항IC 신설은 지난해 7월 경북도 등이 공동후보지로 이전부지를 확정하려고 할 때 군위군 설득을 위해 서명한 공동합의문에 첫째 항목에 올라 있다.동군위 IC와 신공항을 연결하는 지방도와 경북도청에서 신공항을 연결하는 지방도도 계획돼 있다. 동군위IC~신공항 연결 지방도는 총 길이 25.5km로 예산은 6천250억원이 소요될 것으로 나타났다. 도청에서 신공항을 연결하는 지방도는 총 길이 35km에 8천750억원의 예산이 들 것으로 도는 예상하고 있다. 이들 지방도 역시 경북도청과 신공항으로의 접근성에 중점을 두고 계획됐다.도는 정부 예비타당성 조사 통과 및 중앙부처 예산에 통합신공항 광역교통망 확충반영 되도록 총력 대응한다는 전략으로 가장 큰 숙제였던 광역 교통망 연결이 해결되면 신공항과 연계한 시·군별 발전 계획 수립도 보다 구체화될 것으로 보인다. /피현진기자 phj@kbmaeil.com

2021-06-22

ESG가 미래다…포스코, 탄소 저감 앞장서며 ESG 경영 박차

‘환경(Environment)·사회(Social)·지배구조(Governance)’얼핏 보면 별로 특이할 것도 없어 보이는 이 세가지 단어가 지금 기업 경영에 있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기업의 비재무적 요소인 이들 단어의 앞글자를 따 ‘ESG’라고 부르며 너도나도 ESG 경영 열풍에 탑승하고 있다. ESG의 역사나 의미는 차치하고, 일단 기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고객의 입장에서만 보면 이런 인기가 얼핏 이해가 된다. 예전에는 판매되는 물품의 가격과 품질 등을 중요시했다면, 똑똑한 고객을 자처하는 요즘 시대 소비자들은 본인들이 소비하는 물건들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떠한 방식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느냐에 대해 많은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친환경, 공정무역 등의 가치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바라보면 된다. 다만, 이런 ESG 경영이 “최종 소비재를 판매하는 기업에만 해당되는 것일까”라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니다. 오히려 지속가능성과 글로벌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기초산업에서의 ESG가 더욱 중요할지도 모른다. 국내 철강산업을 이끌고 있는 포스코의 ESG 경영을 예로 기초산업에서의 ESG는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 알아본다. □포스코의 ESG경영 소개최근 글로벌 기업들 가운데 환경적(E), 사회적(S) 책임을 다하지 않거나 지배구조(G)가 불건전한 기업의 재무 성과가 갑자기 악화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투자기관 및 주주 등 이해관계자들이 ESG관련 활동 성과의 공개를 요구하고 있다. 또한 이해관계자들은 공개된 기업의 ESG정보를 투자 의사결정에 반영하고 있어, 기업 주가 및 가치평가에 미치는 영향이 점점 커지고 있다. 특히 포스코는 세계적인 철강 전문분석기관인 WSD로부터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철강사’에 11년 연속 1위로 선정됐고, S&P Global Platts의 Global Metals Awards에서 철강산업 리더십(Steel Industry Leadership)부문 최우수 기업으로 선정되는 등 글로벌 철강업계를 리드하는 대표기업으로서 기업의 ESG활동에 대해 더욱 무게를 두고있다.포스코는 2018년 7월 최정우 회장의 취임과 함께 ‘더불어 함께 발전하는 기업시민’을 새로운 경영이념으로 선포한 바 있다. 기업시민 선포 1년 후인 2019년 7월에는 임직원들이 기업시민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으로서 기업시민헌장을 선포했다. 그리고 헌장 선포 1주년을 맞아 기업시민이라는 목적지로 안내할 구체적인 지도로 ‘기업시민 실천가이드(CCMS)’를 제정했다.‘기업시민 실천가이드(CCMS)’는 임직원들에게 100년 기업으로 지속 성장하는데 실질적인 가이드가 되도록 기획·재무, 생산, 마케팅, 구매, R&D 등 전사 업무를 총 13개의 모듈로 분류하고, 임원부터 직원들까지 참여한 토론을 거쳐 내용을 작성하고 수정해 현장의 언어로 모듈별 미션/사례/배경/가이드/요약 등의 내용을 담았다. 이와 함께 포스코는 기업경영활동에 ESG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주요 회사 투자기관 및 주주들의 ESG 정보 활용이 증대됨에 따라 이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글로벌 철강사 최초로 포스코의 ESG성과를 대외에 홍보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전담 조직인 ‘ESG그룹’을 ‘기업시민실’ 내에 신설하고 운영 중에 있다.이어 올해는 이사회 산하에 ‘ESG위원회’를 신설해 회사의 환경, 안전·보건, 지배구조 등 ESG관련 주요 정책들을 이사회에 부의해 최종 결정키로 했다. 또한 2019년에 만든 CEO 자문기구인 ‘기업시민위원회’에도 안전, 환경, 조직문화 전문가를 보강하고 확대 개편해 ESG에 대한 전략 자문을 한층 강화했다. 특히 지난해 발간한 기업시민보고서에는 국내외 관련 업계 벤치마킹과 이해관계자 인터뷰를 통해 의견 수렴 범위를 확대하고 GRI(국제 보고서 가이드라인), TCFD(기후 관련 재무정보공개 테스크포스) 권고안, SASB(지속가능성 회계기준위원회) 기준 등 글로벌 가이드라인과 UN SDGs(지속가능발전 목표)를 고려해 회사가 직면한 이슈들을 선정하고 이에 대한 중장기 대응 전략을 공개했다.이 밖에도 포스코는 국내 제조업 최초로 TCFD 지지 선언, 글로벌 철강사 최초 ESG 채권 발행, 책임 있는 광물구매를 위한 RMI 가입 등 글로벌 지속가능성 흐름에 선도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기업이 사회와 함께 ‘더불어 함께 발전하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또한 포스코는 2019년부터 매년 상·하반기마다 ‘기업시민 전략회의’를 개최해 기업시민 추진 경과와 향후 추진 계획들을 점검하는 시간을 가진다. 올해는 지난 4월 16일 ‘2021년 상반기 기업시민 전략회의’를 개최해, 시대변화에 선도적으로 기업시민을 선언한 포스코 그룹이 어떻게 차별화된 경쟁력을 창출하고 궁극적으로 100년 기업을 만들어나갈 것인지를 논의했다.특히 이번에 열린 기업시민 전략회의에는 포스코 임원을 비롯해 22개 그룹사 사장단 및 11개 해외법인장 등이 온·오프라인으로 참석한 가운데, 서울대 송재용 석학교수, 홍익대 신형덕 교수의 포스코의 기업시민 활동 분석이 발표됐다.포스코의 기업시민 실천활동을 5단계(1단계 기초, 2단계 참여, 3단계 혁신, 4단계 통합, 5단계 전환)로 분석한 결과, 3단계 이상의 우수 사례가 68%로 나타났으며, 그 중 △벤처플랫폼 조성활동 △해양정화활동 △성과공유제를 포함한 협업형 공동개발이 기업시민 실천활동의 대표 사례로 평가됐다.전미경영학회 국제경영분과 회장이기도 한 송재용 교수는 “포스코는 2018년 기업시민을 경영이념 선포 후 단순히 선언에 그친 것이 아니라, CCMS와 같은 실천 가이드를 통해 진정성 있게 실천하고 있는데 놀랐다”고 평가했다. 또한 기업시민에 기반한 업무와 일상활동 강화를 위해서 톱다운 리더십과 함께 최근 ‘마이 리틀 챌린지’ 플랫폼과 같이 MZ 세대의 참여를 유도한 것은 보텀업의 자발적인 이니셔티브 활성화 측면에서도 효과적일 것이라고 덧붙였다.마이 리틀 챌린지는 올해 시작된 포스코임직원들의 기업시민 실천활동으로, 같은 목표를 가진 동료들이 함께 자발적으로 작지만 의미 있는 목표를 설정하고 원하는 습관을 형성하는 도전 프로그램이다. 텀블러 사용하기, 일상 속 걷기, 분리수거하기 등 부서별 2~3개 총 245개 챌린지에 6천여 명의 포스코 임직원이 참여하고 있다.송재용 교수는 이번 연구와 같이 객관적 분석을 통해 우수 사례를 Best Practice로 삼고 적극적으로 전파해 주는 것이 선도적으로 기업시민을 선언한 포스코에 거는 기대라고 강조했다.□기업시민 5대 브랜드 체제 발표더불어 포스코는 ‘19년 12월 발표한 기존 기업시민 6대 대표사업을 △동반성장(Together With POSCO) △벤처육성(Challenge With POSCO) △탄소중립(Green With POSCO) △출산친화(Life With POSCO) △지역사회와 공존(Community With POSCO)을 내용으로 하는 기업시민 5대 브랜드 체제로 개편했다. 기업시민 5대 브랜드는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사회경제적 이슈와 문제 해결을 위해 사회의 구성원인 포스코가 기업시민으로서 스스로 찾고 실천하기로 한 솔루션 모음이라 할 수 있다.‘Together With POSCO’는 성과공유제, 개방형소싱, 철강상생협력펀드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협력 기업에 대한 단순 지원 위주에서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함께 추구하는 ‘기업시민 동반성장’으로 확대 지원하는 브랜드다.‘Challenge With POSCO’는 벤처밸리 조성과 벤처펀드 투자로 구성되는 ‘포스코 벤처플랫폼’을 기반으로, 유망한 벤처기업들을 발굴하고 육성·투자해 포스코그룹의 혁신과 지속 성장의 원동력으로 만드는 벤처육성 브랜드다.‘Green With POSCO’는 포스코가 지난해 선언한 2050 탄소중립 달성을 위한 바다숲 조성, 클린오션봉사단, 임직원들의 탄소저감 활동 등이 포함된 브랜드다. 포스코는 탄소중립을 위해 기업시민으로서 많은 이해관계자들과 함께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과 파트너십 활동을 통해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 나가고 있다.그 일환으로 포스코는 최근 평창군 봉평면 덕거리 일대에서 호주 원료공급사 BHP, 친환경 사회적 기업 트리 플래닛(Tree Planet)과 함께하는 평창 노후 산림지역 숲 복원 사업의 시작을 기념하기 위한 식목 행사를 가졌다. 이번 숲 복원 사업은 산림이 노후화된 강원도 평창의 3㏊ 부지에 1만 그루의 어린나무를 심어, 탄소 흡수량을 11%가량 증가시켜 탄소 중립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는 포스코의 ‘Green with POSCO’ 실천 활동이다. 포스코와 BHP는 앞서 한-호 양국의 환경 보호와 지역사회 공헌을 위해 GEM 매칭펀드를 체결한 바 있다. 숲 복원은 해당 펀드 기금을 활용하고 친환경 사회적기업인 트리 플래닛을 통해 운영될 예정이다.또한 포스코는 지난해 6월 ‘경력단절 없는 육아기 재택근무제’를 국내 기업 최초로 시행하며 저출산 해법을 위한 포스코형 롤모델을 제시한 바 있다. 추가로 미래세대를 위한 양질의 교육기회 제공, 청년들의 취업과 창업을 지원하는 프로그램 운영 등을 통해 출산친화 ‘Life With POSCO’ 브랜드를 추진한다.마지막으로 ‘Community With POSCO’ 브랜드를 통해 포스코그룹의 사업장이 위치한 포항과 광양 그리고 서울,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지역주민들과 함께 다양한 사회문제 해결을 통해 기업과 사회가 함께 발전하는 모델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이 외에도 포스코는 ESG 관점 구매 방침으로 중소공급사 ESG 정착 지원에도 나서고 있으며, 물류 파트너사 종합심사제를 도입해 ESG 경영을 강화하고 있다. 또한 올해 기업시민보고서에는 국내 업계 최초 ESG Fact Book 신설 및 해외 사업장 포함한 ESG 데이터 첫 공개에 나서는 등 ESG를 기업에 녹아들게 하는데 앞장서고 있다./전준혁기자 jhjeon@kbmaeil.com

2021-06-22

포항, 한국 무속의 특별한 공간

‘오구굿’은 동해안 무속에서 망자천도굿을 부르는 이름으로 오귀굿, 오위굿이라고도 한다. 생로병사의 마지막 단계인 죽음을 위한 제의로, 사람이 죽은 후 일정한 기간 안에 행해야 한다. 사람이 죽은 직후 행하는 굿을 ‘진 오구’라고 하고, 사망한 지 일 년 이상 지난 다음에 하는 굿은 ‘마른 오구’라고 하여 구분한다. 이는 중부 지역인 서울도 마찬가지여서 서울굿에서는 망자천도굿을 ‘진오귀굿’이라 부르고, 죽은 직후에 행하면 ‘진진오귀’, 일 년 이상 시간이 지난 후에 하는 굿을 ‘마른 진오귀’라 한다. 시신의 ‘질고’, ‘마른’ 상태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죽은 자의 넋을 위로하는 오구굿오구굿은 죽은 망령을 위로하여 극락세계로 천도하기 위해 행하는 굿이다. 전라도에서는 씻김굿, 중부 지역인 서울굿에서는 진오귀굿이라 부르는 등 지역마다 그 이름이 다르다. 오구굿은 신앙성이 강하기 때문에 가장 많이 하는 굿이기도 하다. 이 굿은 망령을 저승으로 보내는 굿이지만, 동해안 지역에서는 주로 원통하게 죽은 망령, 즉 객사(客死), 수사(水死), 미혼사(未婚死) 등으로 죽은 망령을 위안하는 굿이다. 특히 뱃일하는 사람이 익사하여 보상금을 받은 유족들이 행하는 것이 가장 많았다. 큰 사고로 여러 사람이 사망했을 때는 합동으로 오구굿을 하기도 한다.민간신앙에서는 망자가 숨을 거둔 후 바로 저승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기간과 과정을 거쳐 간다고 생각했고, 그 과정 중 하나가 오구굿이다. 오구굿 제의의 순서를 살펴보면, 먼저 부정굿을 한 뒤 마을의 수호신인 골맥이 서낭을 모신다. 특히 물에서 죽은 영혼을 모시는 ‘넋건지기’를 한 후, 넋을 굿당에 모시기도 한다. 이어서 조상굿을 하고 초망자굿이 이어진다. 초망자굿은 죽은 이의 넋을 위로하는 것이다. 이때 무당은 한지로 망인의 모습을 오린 넋과 그 넋을 담은 상자인 ‘신태집’을 들고 춤을 추면서, 죽은 이의 한을 위로한다. 신태집은 굿판에 온 망자의 혼이 임시로 거처하는 공간으로, 동해안뿐만 아니라 전라남도 씻김굿, 남해안 오귀새남굿에서도 등장한다. 바리데기굿은 발원굿이라고도 하는데, 오구신을 청하여 망인을 저승으로 모셔주기를 부탁하는 굿이다. 무당은 부모를 위해 저승에 가서 약물을 길어온 효녀 바리데기가 오구신으로 좌정하기까지의 신화를 구연한다.포항 오구굿의 사례민속학자 최길성이 1972년 8월 31일부터 9월 1일까지 조사한 ‘청진오구굿’은 당시 주소로 ‘영일군 청하면 청진리’에 있는 50여 호의 해변 마을인 청진에서 했던 오구굿이다. 이 굿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최길성이 펴낸 ‘한국무가집 2(1992)’에 기록되었다. 굿은 이 마을에 사는 최씨가 26세에 사망한 자신의 형제를 위해 의뢰하였다. 망자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형들의 어업을 도우며 살았는데, 저인망 어선을 타고 제주도로 잠수(일명 머구리)를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유명을 달리했다.어업조합에서 유족인 최씨에게 당시 돈으로 보상금 20만 원을 주었는데, 일부는 장례 비용으로 쓰고 남은 돈으로 망자를 위한 오구굿을 한 것이다. 망자는 젊은 나이에 사망한 데다 미혼이었기 때문에 이 오구굿에서는 역시 미혼으로 죽은 여성인 김씨의 영혼을 신부로 맞이하는 굿을 겸하였다. 이 오구굿을 맡은 무당은 이금옥(李金玉) 만신 외 8명이었다.오구굿에서는 특히 바다에 빠진 넋을 건지는 과정을 주목해야 한다. 바닷가에 망자의 가족들과 무당들이 바다를 향해 서면, 무당이 징을 치며 독경을 한다. 독경을 마친 후 넋전을 놋주발에 담고 무명 헝겊으로 싸매어 바다로 던지면, 가족들은 들고 있던 떡을 바다로 던진다. 이때 살아 있는 수탉을 바다에 던지는데, 수탉이 다시 바닷가로 헤엄쳐 나오면 이를 바다에 빠진 망자의 혼이 되돌아온 것으로 생각한다. 처음에 바다로 던졌던 넋전을 다시 거두어 소반에 얹고, 돌아온 닭도 다리를 묶어 소반에 올린다. 그러면 망자의 가족은 소반을 들고 집으로 가니, 망자를 집으로 다시 데려가는 것이다. 집 마당에서는 앞서 말했던 대로 망자 최씨와 망자 김씨 두 영혼의 혼례식이 이루어졌다. 오구굿의 꽃 바리데기 신화동해안 망자천도굿의 명칭이 오구굿인 것은 바리데기 신화에서 따온 것이다. 바리데기가 목숨을 바쳐 저승 여행을 하는 이유는, 아버지 오구대왕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다. 바리데기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전승되는 대표적인 한국 신화로 서울에서는 ‘바리공주’라 하며, 호남이나 동해안에서는 바리데기라 한다. 줄거리는 버려진 딸이 아비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인간이 갈 수 없는 저승 여행을 감행하는 이야기다. 김태곤이 1976년 2월 23일부터 26일까지 조사한 김석출의 바리데기를 중심으로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바리데기는 오구대왕과 길대부인의 일곱 번째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버려진 아이다. 버려져 죽을 지경에 처했다가 비리공덕 부부에게 기적적으로 구조되어 무사히 성장한다. 세월이 흐른 후 오구대왕은 병에 걸리는데, 인간 세상에는 약이 없고 서천서역국의 동수자가 지키는 약수와 꽃을 구해야 했다. 여섯 공주에게 차례로 서천서역국에 가서 약수를 구해 오라고 하지만 모두 갖은 핑계를 대면서 가지 않는다. 결국 자신들이 버렸던 바리데기를 다시 찾게 된다. 열다섯으로 성장한 바리데기는 부모와 재회하자마자 부모의 병을 고치기 위해 남장을 하고 여행을 떠난다. 바리데기는 서천서역국으로 가는 험난한 여행길에 석가모니에게 도움을 받기도 하고, 여러 가지 주문과 주령을 들고 지옥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들을 구원하기도 한다.마침내 서천서역국 동대산에 이르러서 동수자라는 남성을 만난다. 동수자는 천상에서 죄를 얻어 삼십 년 동안 약수를 지켰다. 그가 다시 천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인간 여자와 결혼하여 삼 형제를 낳는 것이다. 동수자는 남장한 바리데기가 여성인 것을 알아본다. 그는 바리데기와 같이 목욕하는 척하다가 옷을 숨긴 후, 아이를 낳아달라고 한다. 결국 바리데기는 동수자와 혼인하여 아들 셋을 낳은 후에야 약수와 꽃을 구해 인간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그사이 동수자는 죄를 탕감받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결국 바리데기 혼자 아들 셋을 데리고 쩔쩔매고 있으니 배 한 척이 와서 태워준다.문수지장경 따리시고 오방다꺼니 오르시고 선주가야 오른 인물석가여래 오르시고 일력들아 동력들아 화장하야 오른님을 바양노금살번께 발공도 주정이 보면 물 한솥 연화대 어느 탄울이 오르시고일력들아 동력들아 화장하야 오른님은 화양노금산부채 발공도 주절 벌어 물항수 연화대 아미타불이 오르시고이 노래는 바리데기가 배를 탄 모습을 노래한 ‘용선가’의 일부분이다. 여기서 불교의 여러 신들이 등장하여 함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용선가’의 ‘용선’은 선박 운행의 무사태평을 기원하고, 조상신들이 용선을 타고 좋은 곳으로 천도하라는 의미를 담은 동해안굿의 상징물이다. 바리데기는 한국 무속의 전통적인 신이지만, 이 신화에는 다양한 불교의 신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무속의 세계관에서 바리데기보다 높은 신이다. 바리데기는 지장보살, 석가여래세존님, 저승 시왕 같은 신보다 아래에 있는 신이다. 고유의 신보다 불교의 신을 높게 보았던 것이다.바리데기는 마침내 이승에 도착한다. 하지만 한 농부에게 오구대왕이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른다는 소식을 듣는다. 바리데기는 서둘러 가서 관을 열고 약수와 꽃으로 오구대왕을 되살린다. 그 후 오구대왕님과 길대부인은 천상의 견우직녀성이 되고, 바리데기 일곱 자매는 북두칠성이 되는데 그중 떨어져 있는 별이 바리데기다. 바리데기의 세 아들은 삼태성이 된다. 무엇보다 바리데기는 망자들의 왕생극락을 인도하는 저승의 신이 된다. 그래서 망자천도굿에서 바리데기를 잘 모셔야 망자의 저승 가는 길이 편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바리데기는 무당의 조상신이자 몸주 노릇을 하여 모든 무당의 섬김을 받는 신이기도 하다.바리데기 신화에서도 확인되는 것처럼 오구굿은 불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동해안굿에서는 불경을 독경하면서 의례를 진행하며, 죽은 영혼은 불교와 같이 ‘영가’라 부른다. 영산맞이와 같은 굿거리에서는 화랭이들이 바라나 꽹과리를 들고 염불을 하고, 극락춤을 추는 것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본인의 위패를 불명으로 써서 신단에 놓거나, 굿당 신단 위에 극락문을 만들어 연꽃의 조화로 장식하기도 한다. 무속 의례를 행하는 무당들도 무속과 불교의 관련성을 부인하지 않으며, 때로는 무속이 불교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역사적으로 토착 민간신앙이었던 무속은 삼국시대 한반도에 들어온 고등 종교인 불교의 영향을 받아 의례의 특성이나 내세관 등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점이 가능했던 것은 한국 무속 자신은 배척받았으면서도 개방성을 통해 외부적인 요소를 수용하면서 변화 발전하는 방식으로 전승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국 무속의 특징은 동해안굿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동해안굿의 미래동해안굿은 한국의 어느 무속권보다 전승 집단이 굳건하며, 무속을 신뢰하고 지지하는 토박이들의 믿음이 존재한다. 김석출이라는 걸출한 화랭이는 떠났지만, 그 맥을 이을 뛰어난 전승자가 있고 젊은 화랭이들의 배움의 열망이 계속되어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한국 무속은 우리 안에 새겨진 정신적 문신이다. 자기부정을 통해 형성된 문화 정체성은 그 문화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한국 무속의 위상을 재평가하고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무속 문화를 어떻게 되살릴지 고민해야 한다. 한국 무속은 수많은 문화 콘텐츠에서 한국 문화의 정체성과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요소로 활용 가능성이 충분하지만, 무속에 대한 오래된 터부와 편견은 여전히 이를 민속예술 안에 가두고 있다는 게 아쉽다.이번 연재를 통해 포항은 김석출이라는 뛰어난 만신이 태어난 곳이자 호탈굿을 중심으로 한 별신굿, 넋을 건져내었던 오구굿이 열렸던 한국 무속의 특별한 공간이었음을 상기하게 되었다. 현재 포항의 별신굿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포항의 별신굿을 비롯한 무속을 되살리기 위해 앞으로 연구자는 물론, 지방자치단체와 시민단체, 지역 주민 모두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글 / 염원희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2021-06-21

“기관 역할 최소화한 ‘주민·생활’ 중심의 자치분권 지향해야”

2021년은 지방자치가 부활한 지 30년이 되는 해다. 또 지난해 전부 개정이 이뤄진 지방자치법과 자치경찰제의 본격 시행을 앞둔 중요한 해이기도 하다.대통령소속 자치분권위원회는 지난 1991년 우여곡절 끝에 지방자치가 부활한 지 30주년을 기념해 대한민국 지방신문협의회와 함께 지난 17일 영남일보 대강당에서 ‘문재인 정부 출범 4주년·지방자치 부활 30주년 기념 대구·경북권 대토론회’를 가졌다.온·오프라인으로 진행된 이날 토론회에서는 김순은 대통령소속 자치분권위원회 위원장이 ‘문재인 정부 자치분권 관련 법제의 성과와 의미’, 최근열 경일대 경찰행정학과 교수가 ‘자치분권 2.0 시대 지역의 대응과 과제’로 발제를 했다. 이어 최백영 자치분권위원회 위원, 오창균 대구경북연구원장, 이창용 지방분권 운동 대구 경북본부 상임대표, 최영호 대구시 정책기획관, 송국건 영남일보 서울본부장이 토론에 참여해 현안과 대응 과제를 제시했다. △김순은 대통령소속 자치분권위원회 위원장 = 문재인 정부는 연방제 수준의 자치분권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권력기관의 민주적 개혁과제(자치경찰 포함), 획기적인 자치분권 추진과 주민참여의 실질화, 지방재정 자립을 위한 강력한 재정 분권, 교육 민주주의 회복 빛 교육자치 강화, 세종특별시 및 제주특별자치도 분권 모델의 완성의 5가지를 국정과제로 진행하고 있다. 대통령 소속 자치분권위원회에서는 자치분권 종합계획을 세우고 자치분권 실행 계획에 따라 33개 추진과제와 136개 실행과제로 구체화 한 바 있다. 이에 따라 문재인 정부 들어 자치분권 법령 사전 협의제 도입(지방자치법 시행령), 강력한 재정 분권 추진(부가가치세법 등 개정), 중앙권한 지방 이양(지방일괄이양법 제정), 지방자치법 전부 개정, 자치 경찰체 도입 등의 자치분권 관련 입법 성과를 거둔 바 있다. 앞으로는 지방자치법 개정 기본 취지에 맞는 과제 구현이 숙제로 남았다. 지방자치법 부수 법안의 조속한 처리와 풀뿌리 지방자치의 취지에 부합되도록 권한 이양을 지속해서 추진해야 한다. 또 주민자치회 관련 법률 제·개정안의 조속한 처리도 필요하다.△최근열 경일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 대구 경북은 현재 저출산 고령화 등으로 인한 지역 소멸, 낮은 청년 고용률과 높은 비정규직 근로자 비율이라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구 경북 행정통합, 대구 경북 통합 신공항, 코로나 19에 따른 사회갈등 등의 현실적인 문제도 마주하고 있다. 지방소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지방소멸 위기 지역 지원특별법의 제정으로, 대구 경북 행정통합은 지방자치법 개정 또는 광역지자체 통합지원특별법 제정을 통해 규모화된 자치 분권형 행정체제 수립 지원이 가능할 것이다. 군 공항 이전이 확정된 수원, 광주와 함께 대구 경북 통합 신공항 특별법 재추진으로 국책사업화를 추진하고 읍면동 주민자치회 활성화 및 주민참여 예산제 활성화를 통해 주민주권 및 참여해 운영 강화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자치분권 시대를 맞아 이처럼 지역 문제에 대한 효율적인 대응은 지역 주민과 지방정부의 자치역량 강화로 가능할 것이다. 지방자치단체의 역할 이행의 수준이 자율성과 다양성 및 책임성을 통해서 결정된다면 자치분권의 수준은 기존보다 전반적으로 제고되어 지방자치단체의 역할 이행 수준을 현저히 향상할 수 있다.△김현기 대구가톨릭대 행정학과 교수 = 균형 발전정책의 대전환이 절실하다. 대구·경북은 인구 감소, 지역소멸 등 심각한 위기상황이다. 지역사회와 지방정부 스스로 혁신체제를 구축하고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지역 균형 발전 정책 틀의 대전환이 필연적이다. 수도권 정책, 균형 발전특별회계 등 주요 균형 발전정책 수단이 그 기능을 잃고 있다. 오히려 비수도권과의 격차를 벌리는데 재원이 투입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 지도 오래다. 대전환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다.특히 소멸 위기의 지역 간 특별자치단체 구성 또는 통합체계 구축을 통해 경쟁력 회복을 할 수 있도록 균형 재원을 집중하고, 이와 결합한 지역대학의 활용도를 높여야 할 것이다. 비수도권 지역대학들에 대한 과감한 투자와 참여를 통한 지역혁신체계의 재건이 필요하다. 또 지방정부·교육청·산업계와 강하게 결속된 혁신네트워크에 권한과 재원을 줘야 한다. 아울러 지방 이전 재원들을 추가 발굴하여 공공+민간자금 형태의 지속 가능 지역 펀드를 대폭 확대함으로써 영세한 지역 기반 산업 육성과 지역(신용) 금융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오창균 대구경북연구원장 = 국가적 차원에서 자치분권, 균형 발전 및 국가 발전이 상호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지역 차원에서도 3대 과제 구현을 위해 시·도 행정통합을 통한 초광역 단위 자치분권, 균형 발전 및 지역 발전을 동시에 이루도록 지원이 필요하다. 첫째는 중앙-지방 사무 배분 기준의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 지방자치법상 자치사무를 포괄적으로 예시하고 있으나 이와는 무관하게 개별법령에서 사무의 소관을 정하고 있으며, 아직도 자치사무와 위임사무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남아 있다. 두 번째로 주민자치회 설치, 기능, 행정·재정 지원 근거 등 규정 마련도 필요하다. 주민자치권 강화와 관련해 지방자치법 전부개정 시 미반영된 주민자치회 본격 실시의 법적 근거를 마련해 지역 단위 협업체계 구성·운영하는 것이 필요하다. 세 번째로 지방자치법과 지방분권법의 통합 추진도 필요하다. 지방자치법과 지방분권법(지방자치 분권 및 지방행정 체제개편에 관한 특별법)을 묶어 자치 분권법으로 통합하는 방안 검토가 필요하다.△이창용 지방분권운동 대구경북본부 상임대표 = 지방분권의 앞으로의 과제는 제2차 지방이양일괄법 제정 추진과 지방자치법 개정이다. 전국지방분권협의회 주도로 대학, 산업, 고용, 주택, 교육, 문화, 의료 분야 중심의 제2차 지방이양일괄법 제정 추진이 시급하다. 또 지방자치법 개정으로 현 지방자치법 28조 1항 단서 조항을 삭제하고 지방입법권을 확대해야 한다. 현 지방자치법은 지방 정부에게 국가의 위탁조례, 하청 조례만 허용하고 있어 국가가 시키는 조례만 제정하고 자발적인 조례 제정 금지된다. 주민 발안 청구제에서 주민 발안제(비상가동장치, 엑셀레이터)로, 발안 형식 주민투표제에서 주민 투표제(비상제어장치, 브레이크)로바꾸고 읍면동 자치를 도입해야 한다. 읍면동 자치제도 도입을 통해 정치체제의 무게중심을 권력 피라미드 최정상에서 지역과 시민에게로 이동시킬 때 사회평화와 정치안정을 가져올 수 있다.△최영호 대구시 정책기획관 = 지역 특성 반영을 위해 조례의 제정범위 확대가 필요하다. 지방자치단체는 ‘법령의 범위에서’ 조례를 제정할 수 있다는 현 조항을 ‘법령을 위반하지 않는 범위에서’ 조례 제정으로 수정해야 한다. 현재는 주민의 권리 제한·의무 부과 시, 법률의 위임이 있어야 한다.지방자치법 개정도 필요하다. 지방자치단체는 법령의 범위에서 그 사무에 관하여 조례를 제정할 수 있다. 주민의 권리 제한 또는 의무 부과에 관한 사항이나 벌칙을 정할 때 법률의 위임이 있어야 한다는 법률위임 단서 조항의 삭제가 필요하다. 지역 정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자치 조직권 강화도 필요하다. 지역 특성 및 행정수요를 고려하여 ‘조례’로 위임해야 한다.△송국건 영남일보 서울본부장 = 자치분권 30년은 미완의 역사다. 제도적 자치분권은 여러 유형의 시행착오를 거쳐 완성 단계(양적 자치분권)에 이르렀으며 이 기간은 지방자치단체, 지방의회 등 기관 중심, 시스템 중심의 자치분권 시대였다. 향후 자치분권은 완성된 틀에 다양한 내용물을 넣어 실질적인 효과를 얻는 단계로 가야 한다. 일종의 질적 자치분권이다. 따라서 자치분권 2.0 시대엔 지방자치단체와 지방의회 등 기관의 역할을 필요한 부분만으로 최소화하고 주민 중심, 생활 중심의 자치분권 을 지향해야 한다. 정권으로부터의 자치분권 독립도 중요하다. 자치분권은 정치 분야가 아닌 국가 분야의 문제다. 자치분권은 정권이 입맛에 맞춰 선택하는 대상이 아니라 정권의 성격과 상관없이 국민 생활에 필수요소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따라서 자치분권 2.0시대엔 정권에 따라 흔들리지 않을 원칙의 확립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헌법 개정 때 ‘자치분권’ 명문화 등이 구체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지역 언론은 30년 동안 지방자치단체와 지방의회 등이 주도하는 양적 자치분권의 현상을 보도하고 견제하는 역할에 충실해 왔다. 앞으로 자치분권 2.0 시대엔 주민 생활 구석구석을 살피며 삶의 질 향상에 필요한 제언, 방향설정에 주력하는 질적 자치분권의 선도 역할이 요구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지방자치제도의 방향 설정에도 언론의 중요한 역할이 요구된다. /김재욱기자kimjw@kbmaeil.com

2021-06-20

진귀한 금수 노니던 절대권력의 상징은 시간의 흐름속에 쇠락한 연못으로…

어떤 위대한 사람이 만들어 탄탄하게 구축한 권력이라도 10년을 지속해 이어지기가 힘들고, 모든 이들이 입을 모아 그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어여쁜 꽃도 열흘 밤낮이 지나면 시든다는 이야기가 있다.세칭 ‘권불십년 화무십일홍(權不十年 花無十日紅)’이다. 명멸을 거듭했던 우리 땅의 고대·중세 왕국들도 이 냉혹한 명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니, 그 나라 안에 만들어진 거대한 축조물과 조형물도 유사한 길을 걸었다.7세기 중반 신라가 통일왕조의 골격을 완성하던 시기에 축조된 안압지(현재 명칭 월지) 역시 만들어질 당시의 위상과 품격을 시간의 흐름 속에 잃어갔다.왕조의 이름이 두 번이나 바뀌고, 천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후 조선 후기 사람인 강위(姜瑋·1820~1884)가 신라의 중심도시 경주를 찾았고, 거기서 한때 번성의 절정을 누렸던 안압지의 흔적을 본 모양이다.강위는 실학자이자 개화사상가였다. 1873년과 이듬해에 걸친 두 번의 중국 여행을 통해 근대 문물에 눈뜬 그는 역관들과도 친숙해 해외 사정을 잘 알았다. 또한, 서세동점(西勢東漸·서양이 동양을 지배하게 될 것이란 예측)의 위기를 우려한 선비였다. 그런 강위가 아래와 같은 시를 남겼다. 열두 봉우리 낮아졌고아름다운 전각도 황폐해졌는데푸른 못은 옛날 같고기러기는 길게 우는구나천수사 분향한 곳 찾지를 말 것을들풀에 깊이 묻힌 내불당 자취.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펴낸 ‘신라의 건축과 공예’는 위의 시를 인용하며 “고려 왕조가 되면서 안압지의 관리가 소홀해졌다는 것을 강위의 시문을 통해 알 수 있다”고 설명한다.더불어 위 시를 통해 “안압지가 화려한 모습을 잃고 기러기 떼의 서식지로 전락하며 황폐해졌음을 유추할 수 있다”고 부연하고 있다.당시 안압지(雁鴨池)로 불리던 오늘날의 월지는 앞서 이야기된 시를 근거로 해석하자면 왕과 강력한 권력을 가졌던 대신들, 나라의 주인이 될 왕자와 당대의 대학자들이 오가던 국가의 주요 랜드마크에서 ‘기러기와 오리가 무리 지어 노니는 그저 그런 평범한 연못’이 된 것이다.만들어질 당시의 안압지는…누구도 정확하게 예상하기 힘든 역사의 흐름 속에서 안압지는 쓸쓸한 풍광을 담은 쇠락한 연못으로 변해갔다.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의 막바지에 이르는 1천150년의 속절없는 시간 속에서.그러나, 안압지가 조성될 당시부터 이런 보잘것없는 모습이었던 건 분명 아닌 듯하다.국립경주문화연구소가 낸 ‘경주 동궁과 월지 조사연구 마스터플랜 수립 연구보고서’에 등장하는 아래 서술을 보면 안압지가 만들어질 당시의 모습을 대략적으로나마 유추해볼 수 있다.“동궁과 월지(안압지) 주변 일대는 신라시대 왕경(王京)의 중심부로 월성, 황룡사지, 분황사, 구황동 원지(九黃洞 苑池), 전랑지(殿廊地) 등 왕궁과 국찰 관련 유적이 밀집되어 있다.신라는 5∼6세기대 중앙집권화 단계를 거치면서 계획적인 행정도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현재까지 확인된 신라의 주요 사찰과 계획도시로서의 왕경은 대체로 이 시기 이후에 조영된 것으로 보인다.”한창 힘을 뻗어나가며 당대 유일의 한반도 고대 왕국으로 진화 중이던 신라의 한가운데 자리했던 안압지는 인근에 왕이 머물던 거처가 있었고, 주위에 나라가 후원하던 거대한 사찰이 존재했던 요지 중에 요지에 건설된 인공 연못이었다. 앞서 말한 연구보고서는 이렇게 이어진다.“동궁과 월지와 남쪽에 위치하는 월성은 신라 궁성과 관련된 궁궐 및 원지유적이다. 월성은 통일신라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신라의 왕궁터이며, 현재 동문지 발굴조사 및 해자, 월성 내부에 대한 조사가 진행 중이다.월성 서쪽에서 확인된 대형 건물지는 관청과 관련된 시설로 추정하고 있고, 국립경주박물관의 미술관 및 연결통로 구간에서 발견된 ‘남궁지인(南宮之印)’명 명문과 2012년 박물관 남측 부지 발굴조사를 통해 이 지역이 궁궐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이런 설명을 통해 우리는 통일신라시대를 전후한 서라벌의 풍경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다. 안압지와 동궁, 월성….당시 그것들의 규모와 아름다움은 과연 어떠했을까? 이 궁금증은 천년을 지속된 신라 역사에 관한 의문과 함께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각종 고문헌에 등장하는 ‘안압지’라는 명칭‘신라 천년의 공예와 건축’에 의하면 안압지라는 이름이 문헌에 처음 나타나는 건 조선 성종(1469~1494) 때다. 그즈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렸다.“안압지는 천주사 북쪽에 있으며, 문무왕이 궁 안에 못을 만들고 돌을 쌓아 산을 만들어 무산십이봉을 상징하여 화초를 심고 짐승을 길렀으며, 서쪽에 임해전이 있었다. 그 주춧돌과 섬돌이 밭이랑 사이에 남아있다.”영화를 누리던 신라 시절을 지나 800년 후 조선시대에 다시 본 안압지의 흔적은 농민이 경작하던 밭의 주춧돌과 섬돌 정도로만 남아있었던 것이다. 막막하고 쓸쓸한 풍경인 동시에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잔해(殘骸)’라는 허무한 문학적 수사가 떠오른다.여기에 더해 ‘동경잡기(東京雜記)’는 ‘동국여지승람’과 유사한 내용을 싣고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지 못하나 애장왕 5년 갑신년에 중수한 바 있다”고 첨가하고 있다.그로부터 300년 이상의 세월이 더 흐른 뒤인 1783년 간행된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에도 안압지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이런 문장이다.“궁내에 연못을 파고 돌을 쌓아 중국의 무산 십이봉의 형상을 한 산을 만들어 꽃을 심고 진기한 새를 길렀다. 그 서쪽에 임해전이 있었으며, 지금 그 연못을 안압지라고 부른다.”안압지 조영의 사상적 배경과 준공 시기는지금 이 시간 세상에 존재하는 누구도 안압지가 만들어지던 당시를 살아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안압지가 조성된 정확한 이유와 이를 지시한 문무왕의 마음 속 뜻을 알 수 없다. 다만 추측할 뿐이다.그렇다면 안압지가 만들어진 사상적 배경은 뭘까? 이 역시 앞서 말한 이유로 인해 학설이 분분하다.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유적의 건설 이유가 “신을 대신해 백성을 통치하는 왕의 권위를 보여주기 위해서” 혹은, “절대 권력자 어머니의 내세 삶을 편안하게 해주려고” 등으로 학자마다 견해가 갈리는 것처럼.안압지 조영의 사상적 배경이 어떤 것이었느냐에 관해서도 ‘신라의 건축과 공예’는 언급하고 있다. 이런 내용이다.“…그간 다양한 학설이 주장되었다. 중국의 무산 십이봉설에서부터 시작하여, 통일 왕권을 과시하는 기념사업과 문무왕 자신을 위한 환경 조성 사업설, 신선 사상과 불교의 정토사상설, 산신(山神) 신앙과 용왕 신앙, 그리고 천신(天神) 신앙설, 또 불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 같다는 주장과 아미타불신앙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까지 많은 주장이 있다.”위의 서술에서 안압지 건설에 영향을 미친 사상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면 안압지의 준공 시점과 건립 시기는 1978년 문화공보부에 의해 간행된 ‘안압지에 대한 발굴조사보고서’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해당 부분을 요약하면 ‘삼국사기’의 기사는 안압지 공사가 준공된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 보고서는 이렇게 이어진다. 축약해 옮긴다.“674년 2월에는 안압지가 완성돼 이미 온갖 화초가 심어지고 진귀한 새와 짐승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안압지 공사를 완성하려면 1년의 공사 기간으로는 조성하기 힘들며, 꽃나무를 심어서 그것이 착근되고 새와 길짐승이 살 수 있게 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또한 동궁의 창건 또한 문무왕 19년(679년) 8월 이후의 일로 기록돼 있다. 동궁 역시 상당한 공사 기간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안압지의 조성은 674년 이전에 시작되었다고 봐야 한다.”1천300여 년 전 만들어진 안압지는 이처럼 번성과 쇠락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21세기 현재는 발굴과 복원이 진행되고 있다. 안압지가 사고할 수 있는 인격체였다면 자신의 오늘을 어떻게 판단하고 말할지 궁금하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6-16

선한 삶의 방식 택하면 감염병도 이겨낼 수 있어

2019년 12월에 시작된 코로나19 팬데믹이 지속되고 있다. 감염병의 시대, 사회적 거리두기가 계속되면서 사람들은 초반에 느꼈던 긴장감보다는 감염병에 대한 피로감을 느끼는 것이 현실이다. 의학이 고도로 발달한 시대이지만 새로 출현한 감염병을 감당하지 못하는 현실을 겪으며, 그렇다면 전통사회에서는 감염병을 어떻게 극복하고자 하였는지 궁금해진다. 광인굿, 심청굿, 손님굿다른 무가권도 그렇지만 특히 동해안굿에서는 광인굿, 손님굿, 심청굿 등 질병을 물리치는 여러 제의가 이루어졌다. 광인굿은 광인(狂人), 즉 미친 사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행하는 무속 제의다. 귀신에 의해 정신이상자가 된 사람에게 귀신을 떼어내는 목적으로 행했고, 다른 굿처럼 귀신을 달래기보다는 위협을 가하여 쫓는 축귀(逐鬼)의 제의다. 심청굿은 한국 고전소설의 주인공인 심청을 신으로 모셔 마을 사람들의 안질(眼疾)을 없애주기를 기원하는 독특한 제의이다. 판소리 ‘심청가’가 조선 후기에 생겨난 것이니 심청굿은 비교적 근래에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광인굿, 심청굿이 개인의 질병을 없애고자 하는 목적을 가졌다면, 손님굿은 손님으로 불리는 ‘두창(천연두)’을 가져온다는 신을 모시고 달래서 공동체의 바깥으로 내보내는 의례다.동해안의 손님굿은 두창신인 손님을 모시고 달래어 이 병에 걸린 병자를 낫게 하기 위한 병굿의 성격을 지니므로, 이는 신을 모시는 의례임과 동시에 ‘병자를 위한 의례’라 할 수 있다. 손님굿의 앞부분에 서사 형식의 무가를 구송(口誦)하고, 후반부에 두창신을 내보내는 의례인 ‘말놀이’를 한다. 두창신은 강남천자국(江南天子國)에서 한반도로 들어온다. 실제로 두창이라는 질병의 발생지가 인도였고 대륙을 거쳐 한반도에 들어왔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러한 과정이 손님굿 신화에도 반영되었다. 손님신이 한국 무속의 대표적인 외래신(外來神)이다. 손님신이 한반도로 들어오는 여행의 과정을 ‘노정기(路程記)’라 하는데, 중국에서 들어와 한반도 전역을 휩쓸었던 두창의 전염 과정에 대한 문학적 상상력이다.‘손님’은 어떤 신인가강남천자국에서 한반도로 들어와 집집마다 방문하는 손님신을 잘 대접한 노구할매는 복을 받고, 불손하게 대하고 구박한 장자(長者)는 외동아들 막둥이를 두창으로 잃게 될 뿐만 아니라 패가망신한다. 1979년 김유선 만신이 노래한 손님굿은 “의학이 발달하여도 손님신을 두려워하고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시기가 1979년이므로 현대 의학, 특히 서양 의학을 의식한 말인 것으로 짐작된다. 현대에 두창 치료의 의미가 사라졌음에도 치병굿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하며 굿을 시작하고 있다. 1977년에 김석출이 노래한 손님굿의 도입부에서 “하루는 손님네가 회의를 하여 세계 각국을 살펴보니 우리 조선국은 좋은 약도 없고 처방조치도 없고 침술과 한약뿐이니, 마마 천연두는 치료가 안 되니 손님신을 모셔놓고 굿을 하여”라 하여 손님신은 두창을 치료하기 위해 한반도에 왔으며, ‘침술과 한약’으로 일컬어지는 한의학보다 무속이 우위에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이러한 표현을 통해 이 굿이 질병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의례라는 점, 그리고 이 굿의 전승 집단은 손님굿과 같은 병굿을 한의학, 서양의학과 같은 의료행위와 동일 선상에 두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의학의 발달로 현재 무속의 치유적 의미는 미약하지만 적어도 무속 집단은 이 의례의 의미와 목적을 믿고 있으며 그러한 신앙 의식을 바탕으로 전승이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손님네가 삐끌어지만참 자손들을 꼼보도 맨들 수 있고병신도 맨들 수 있고눈도 또 새따먹게도 맨들고코빙신도 입비뚤이도 맨들고뱅신을 모도 맨들어 노니그래도 아무리 세월이 좋아서 주사가 좋고 약이 좋다 해도손님네 잘 모시야 됩니다.손님네로 지칭되는 두창신은 ‘꼼보’라는 두창의 결과를 내리는 신일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다양한 질병과 장애를 줄 수 있다. 두창은 사라진 병이지만 현재에도 굿판에서 두창신이 의미 있는 이유는 단지 두창에 한정하여 이 굿을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손님신의 의미는 ‘질병신 일반’으로 확장해도 무방하다.손님신은 강남국, 강남대왕국, 강남천자국으로 지칭되는 곳에서 시준손님, 문신손님, 각시손님, 호방손님의 네 신이 한반도로 들어오는데, 이 중 각시손님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각시손님의 ‘각시’는 막 결혼한 젊은 여성을 가리키는 말로, 결혼한 여성은 출산과 연관되기 때문에 각시손님은 여신 고유의 생산력, 생명력을 상징한다. 흥미로운 점은 다른 문화권의 두창신도 주로 여성신으로 나타난다는 것. 인도의 시탈라마타, 중국의 낭낭, 아프리카의 소포나 등은 하나같이 여성 신격이다.인도의 작은 도시나 마을의 지역신 혹은 마을신들 대부분은 천연손님신이며 여신이다. 중국의 두진낭낭(痘疹娘娘) 역시 여신이며 어머니신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각시손님은 여신, 특히 모신(母神)이기에, 질병신이면서 동시에 치유신이다. ‘치유’는 죽어가는 생명을 되살리는 행위로 생명, 재생, 부활을 의미한다. 각시손님은 막둥이를 두창에 걸려 죽게 하지만, 자신을 잘 모신 서울 이정승댁 육남매는 두창을 가볍게 앓게 하여 이 병에 면역력이 생길 수 있도록 돕기도 한다. 당신은 ‘손님’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여러 손님신들은 의주 압록강에 당도하여 배 한 척을 빌리려 하는데, 뱃사공이 뱃삯으로 각시손님에게 “하룻밤만 수청을 들어주면, 배 한 척을 빌려주겠다”고 희롱한다. 화가난 각시손님은 이틀 만에 뱃사공의 일곱 아들 중 여섯 명을 죽이고, 뱃사공도 물에 빠져 죽게 한다. 마지막으로 일곱째 아들마저 죽이려 하자, 뱃사공의 아흔 살 넘은 어머니가 자손 하나만 남겨달라고 간청한다. 각시손님은 “병신 자식도 좋다면”이라며 일곱째 아들을 열두 가지 질병을 가진 병자로 만들어 살려준다.각시손님이 이같이 혹독한 징벌을 내린 것은 뱃사공이 공동체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를 했다는 데 원인이 있다. 특히 굿 문화의 패트런(patron)은 대다수 여성이다. 굿이 여성문화로서의 성격이 강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뱃사공의 각시손님 희롱은 굿에 참여하는 대중의 공분을 사는 행위였음이 분명하다. 무당이 주재하는 굿판이 마련되는데 물질적·물리적·감정적 도움을 주는 여성을 의식한 규범이기에 공감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한반도에 들어온 손님신들은 가난한 노구할매 집에 머물고자 하지만, 노구할매는 대접할 음식조차 없어 이웃의 부잣집인 장자네에 가서 대접받기를 권한다. 손님굿은 가난하지만 손님신에게 정성을 다하는 노구할매와 부유하지만 손님신을 박대하는 장자를 대조한다. 착한 노구할매는 장자의 외아들 막둥이가 15세가 되도록 두창에 걸리지 않은 것을 염려하여 장자의 아들이 두창에 가볍게 걸리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장자는 두창신이 허름한 노구할매의 집에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며, 그 집에 불을 지른다. 장자는 아들이 위독해지자 그제야 손님신을 모시려 하지만, 아들의 병이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면 다시 예전의 태도로 돌아간다. 결국 막둥이는 죽어 손님신을 모시고 다니는 마부가 되어버린다.손님네는 누구든지 들 때는하루 이틀 앓아서사흘나흘 만에는 구실이 돋아나며닷세엿세 만에 꺼먼 딱지 앉아서이레 여드레만에 꺼먼 딱지 떨어지며열흘열이틀 열사흘 만에는야정예를 내여 보내는데아무리 구실이 돋을 때를기다리고 바래도구실이 안 돋어난다이 내용은 두창의 병세가 진행되는 과정이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회복하면 질병에 대한 면역력을 얻어 다시는 걸리지 않게 되므로, 이는 질병에 대한 매우 중요한 정보였을 것이다. 이것이 무가의 일부로 노래되었다는 점은, 당시 두창에 대한 이와 같은 민간의 의료지식이 보편적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이 신화에서 뱃사공과 장자는 신을 모셔야 한다는 규범을 위반하였다. 뱃사공은 여성을 희롱하였으며 장자는 타인과 나누는 데 인색하였다. 공동체가 우선시되었던 농경사회에서 부를 가진 자가 자신의 부를 이웃과 나누지 않는 것은 공동체의 질서에 위배되는 악에 해당하며, 이는 징벌 또는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다. 이에 비해 노구할매는 장자와 다르게, 자신이 가진 적은 것도 이웃과 나눠야 한다고 믿으며 이를 실천하였다. 그러므로 노구할매는 공동체적 삶에 적합한 이상적인 존재다.감염병을 이겨내는 힘동해안 손님굿의 서사 구조는 악인인 장자와 선인인 노구할매를 대조하고, 공동체 에서의 삶의 방식에 문제를 제기한다. 장자와 노구할매는 개별 인간형이 아닌, 한 인간 안에 내재한 악마성과 성스러움의 상징적 표현일 것이다. 신화학자 노스럽 프라이(Northrop Frye)는 신화와 원형적 상징의 대표로 신과 악마의 구조를 든다. 이들 대조적인 구조는 각각 묵시적, 악마적이라 부르고 신은 바람직한 존재, 악마는 바람직하지 못한 존재다. 손님굿은 표면적으로는 신을 잘 대접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 같지만, 실은 공동체의 삶에서 자기 안의 성스러움과 악마성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묻고 있는 신화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노구할매처럼 우리 모두가 선함을 택한다면 감염병이라는 재난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글 / 염원희(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2021-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