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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포항공대가 건학 이념을 실천하기를 기대해”

포항공대는 박태준 회장의 교육에 대한 확고한 철학과 아낌없는 지원으로 만들어졌다. 한국의 미래에 투자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은 노벨상 수상자를 낼 수 있는 대학, 첨단 학문을 연구해 미래 먹을거리를 찾아낼 수 있는 대학을 만드는 것이라는 의지가 포항공대 설립을 현실화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포항공대의 오늘을 있게 했는지 궁금했다. 홍 : 포항공대 설립 과정을 구체적으로 들려주시죠.이 : 학교 허가를 신청하고, 허가를 받기 위한 학사 계획을 제출해야 했다. 어떻게 학생을 뽑고, 어떤 연구시설을 지을 것인지, 또 어떤 연구자를 교수로 임용할 것인지를 고민하던 상황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도와준 분들이 서울대 공대 교수들이었다. 당시 서울대 공대 학장은 서울대 전체 컴퓨터 용량보다 더 큰 용량의 컴퓨터를 갖추고자 하는 우리의 열정적인 창학(創學) 의지를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기초과학과 응용과학 분야에서 240명의 학생만 선발하라는 조언도 했다. 당시 문교부 대학정책실장도 큰 도움을 주었다. 포항공대 설립에 힘을 보탠 사람은 이들뿐만이 아니다. 사원 주택 부지 10만 평을 포항제철 연수원 부지와 기꺼이 바꿔준 조선내화 회장, 4만 평의 땅을 기증한 천신일 세중 회장, 훨씬 비싼 땅을 후대의 교육을 위해 자신의 땅과 맞바꿔준 황대봉 대아그룹 회장 등이 포항공대가 만들어질 수 있게 도움을 준 분들이다.홍 : 포항공대 설립 과정에 여러 사건과 일화가 있을 듯합니다.이 : 주거지역을 학교 지역으로 바꾸는 허가를 낼 때는 당시 이상배 경북도지사가 도움을 줬다. 만약 포항공대 설립 허가가 나지 않으면 다시 주거지역으로 바꾼다는 조건부 허가였다. 이 과정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문교부 간부와 내가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문교부 대학정책실장과 청와대 민정비서관의 조언도 도움이 되었다. 사실 포항공대는 돈을 벌기 위해 만든 대학이 아니라 돈을 쓰기 위해 만든 대학이었다. 포항제철이란 국영기업이 교육에 투자하려는 뜻을 이해한 많은 사람의 도움이 빠른 시간 안에 학교 설립을 가능하게 했다.홍 : 포항공대 초대 학장인 김호길 박사 이야기도 궁금합니다.이 : LG가 경남 진주에 4년제 대학을 만든다고 해서 재미과학자협회장이던 김호길 박사가 한국에 왔다. 하지만 그 작업이 지지부진했다. 그러자 김 박사가 전두환 대통령에게 “연암공전이 4년제 대학이 될 것이라 알고 들어왔는데 정부가 속였다. 그러니 국호를 대한민주공화국이 아니고 대한사기공화국으로 바꾸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대단한 기백이고 또한 괴짜가 아닌가. 삼고초려(三顧草廬)해서 모시려 했는데 거절하다가 포항제철의 교육에 대한 열정과 의지를 믿고 포항공대 초대 학장이 되었다.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김호길(1933~1994) 박사는 물리학자이자 교육행정가다.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했고 미국 메릴랜드대학 교수와 로런스 버클리 국립연구소 선임과학자, 연암공과대학교 학장을 거쳐 1985년 포항공대 초대 학장이 되었다. 한국 최초의 가속기물리학자이자, 한국 첨단 과학기술 교육의 기틀을 닦은 과학교육 개혁가로도 평가받는다.홍 : 그런 분을 초대 학장으로 모신다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이 : 박태준 회장과 김호길 박사가 처음 면담할 때 자리를 함께했다. 노벨상을 받는 학교를 만들겠다, 고부가가치 연구에 중점을 두겠다, 철강이 아닌 다른 먹을거리도 찾아내겠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데 대뜸 김호길 박사가 박 회장에게 “당신은 쇠만 만드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뭘 아는 사람이네요”라고 했다. 하긴 전두환 대통령에게도 할 말은 하는 사람이니 그런 말을 못 할 것도 없었다. 나는 중간에서 분위기가 어색해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앞으로 20년 후 포항제철 부속 포항공대가 아닌, 포항공대 부속 포항제철이 되면 박 회장이 내 밑으로 들어오시라”는 말에 박태준 회장이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는 그날 밤에 내게 지시했다. “초창기에는 김호길 같은 사람이 필요하니 다른 사람 찾지 말고 무조건 김호길 박사를 학장으로 모셔오라”고.홍 : 김호길 학장과 함께하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았겠습니다.이 : 김호길 박사와 독일 아헨 공대(RWTH Aachen University)에 갔을 때다. 김 박사는 박태준 회장이 기업을 운영하는 능력은 탁월하지만, 교육 전문가가 아닌데 좋은 대학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런 의문을 씻어준 일화다. 우리가 머물던 아헨의 호텔로 박 회장이 전화를 걸었다. 마침 국제철강협회 일로 영국 런던에 있을 때였다. 박 회장이 내게 “포항공대에 오려는 학자들이 많으냐? 그분들은 주로 무슨 질문을 하더냐”라고 묻길래, “박 회장은 교수들 조인트도 까느냐라고 물어서 철강 공장에서 신는 안전화 앞부분엔 철이 들어가 있다. 그걸 확인하려고 그러는 것이지 조인트를 까는 것이 아니다. 유치원 젊은 교사들에게도 존댓말을 쓰는 사람이 박태준 회장이라고 답했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박 회장이 크게 웃었다. 이 대화를 옆에서 듣던 김호길 박사가 “기업의 최고 경영자와 부하 직원이 이처럼 격의 없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나누는 분위기를 보니 포항공대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홍 : 교수 초빙 과정에는 어려움이 없었습니까?이 : 포항공대는 처음부터 학자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폈다.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그때 최고 연봉을 받던 다른 사립대 교수보다 월급을 20퍼센트 더 지급했다. 학교가 세워질 즈음 나와 김호길 학장 둘이서 세계를 돌며 스무 군데가 넘는 대학을 다녔다. 한국 교수가 많은 대학 도시들이었다. 미국 보스턴,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이다. 포항공대와 인근에 연구 조건, 생활 조건, 자녀들의 교육 조건까지 고려한 여러 시설을 만들었다. 연구자 우선의 풍토가 생긴 것이다. 교수들은 자녀 교육을 제일 중요시했다. 이를 예언한 듯 유치원부터 초·중·고등학교까지 포항에 만들어 최고의 교육 환경을 조성했다. 교수로 올 분들에게 “서울 이상의 자녀 교육 인프라를 갖춘 도시가 포항”이라고 홍보했다. 최근에 한전공대를 만드는 팀들이 찾아와 포항공대 설립 노하우를 묻기에 가장 먼저 교수 자녀들을 위한 교육 환경을 만들라고 조언했다. 홍 : 포항공대가 첫 입학생을 받은 게 1987년인가요?이 : 그렇다. 기대 이상으로 좋은 학생들이 왔다. 서울대 공대 커트라인인 학력고사 280점 이상 학생에게만 응시 자격을 줬다. 그게 어떤 효과를 가져왔냐면 ‘포항공대는 불합격한 학생도 280점 이상의 고득점자’라는 이미지를 만들었다. 응시 자격을 제한하는 게 기회균등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으나, 로펌에 문의하니 문제될 게 없다는 답변이 왔다.홍 : 지금 포항공대에 거는 기대는 어떤 건지요?이 : 건학 이념의 실천이다.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는 학교, 고부가가치 연구를 통해 포스코의 경영 다각화에 도움을 주는 학교가 되길 바란다. 1989년에 노벨상 수상자 부부 10명을 포항에 초청했다. 그들을 포항제철이 만든 초등학교로 모셨다. 노벨상 수상자가 아이들에게 물었다. “만약에 아빠와 엄마의 팔이 세 개라면 어떤 일이 생길 것 같나요”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1~2학년들은 신이 나서 손을 들고 “높은 선반에 놓인 과자를 쉽게 먹을 수 있어요”, “농구를 하면 최고의 선수가 될 것 같아요”라며 시끌벅적 대답을 내놓는데 고학년 교실로 갈수록 손을 들고 대답하는 아이가 없었다. 그때 노벨상 수상자 중 한 명이 “왜 학년이 높을수록 학생들이 경직돼 있나요? 이 학교에선 1년에 유리창이 몇 장이나 깨지죠?”라고 물었다. 그때 교장 선생님이 “한 장도 깨지지 않는다”고 답하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면 이 학교 학생들 중에선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수 없을 것 같아요.” 이 에피소드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홍 : 앞으로 한국 교육이 어떻게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이 : 아이들의 적성을 살리고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할 수 있는 교육 환경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가르치는 사람들부터 다음 세대의 발전 포인트가 어디에 있고, 어떤 인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 계속 고민해야 한다. 미래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교육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또한 기업 이익의 사회 환원 중 가장 가치 있는 게 교육에 대한 투자라고 믿는다. 박태준 회장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기도 하다. 교육에 투자하는 건 미래에 투자하는 것이다. 한국의 미래는 교육에 달려 있다.홍 : 끝으로 젊은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주시죠.이 :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서는 후세에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 남을 위해, 나라를 위해,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 한 번쯤은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어떨까. 우선 먹기 좋은 달콤한 곶감보다 현재는 고생되지만 앞날의 열매를 수확하려 노력을 아끼지 않는 청년들을 응원하고 싶다. 이대공1941년 포항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포항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20대 중반에 서울·인천에서 석유곤로와 야구 배트 등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했다. 1967년 포항으로 돌아와 양송이 재배·가공업을 하다가 1969년 포항제철에 입사해 홍보실장, 비서실장, 총무이사, 포항공대 건설본부장, 부사장을 거쳤다. 포항제철 건설 시기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24년간 제철보국의 신념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포항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이사장, 아름다운재단 이사,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포항지역회 이사장, 경상북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포항지역발전협의회장 등을 맡았으며, 현재 재단법인 애린복지재단 이사장으로 있다.대담·정리 : 홍성식(경북매일신문 기자) /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8-24

“역동적인 ‘내 일’ 하고 싶어서 고향 성주로 내려왔죠”

경상북도 성주에 형제가 운영하는 체험농장이 있다. 전체 부지만 50만㎡가 넘는다. 이름은 ‘우리동네 하늘목장’으로, 농업회사법인 (주)우리동네에서 운영하고 있는 오프라인 농장의 한 곳이다. ‘우리동네 하늘목장’은 경관농업 중심의 지역 내 유휴시설을 활용해 농촌체험관광 사업을 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1만5천 명이 다녀갔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강타한 올해에도 매월 3천 명이 찾는 인기 장소다.“원래 올해에는 5만 명을 목표로 했는데, 코로나19 이후에는 연 50만 명을 목표로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고 있어요. 하늘목장에 오시면 넓은 밀밭과 자작나무 숲이 기본으로 제공되고, 밀과 꽃이 어우러진 경관을 통해 힐링하고 치유할 수 있는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죠. 또 꽃피는 3월부터 낙엽이 떨어지는 11월까지 계절별 다양한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거에요. 여기서 무엇을 하냐구요? 할 것은 많죠. 밀밭 촌캉스, 숲길 걷기, 캠프닉(캠핑과 피크닉), 텃밭, 지역농산물 먹거리 체험, 농산물직거래 마켓, 카페, 곤충체험 및 농산물 가드닝 체험 등이 있어요.”이곳에서 (주)우리동네를 운영하고 있는 대표농부 여찬현·여국현 씨를 만났다. 형제인 여찬현·여국현 대표는 전형적인 시골 사람이다. 도시 유학으로 고향을 떠났지만, 직장생활 이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전형적인 귀농인이다. 고향에 돌아오기까지 형인 여찬현 대표는 갖가지 일을 접했다고 한다.“부모님 덕분에 초등학교 시절에 일찍 도시로 유학을 갔죠. 법조인이 되고자 법대를 갔지만, 전역 후에는 서울에 금융회사에서 일을 했어요. 그러다 창업이라는 것에 눈을 뜨게 되었고, 직장을 그만두고 대구로 내려와 IT분야 플랫폼 사업도 했었죠. 그러다 5년 전인가? 우연한 기회에 선배의 농업회사 일을 도와주다 농업에 관심과 눈을 뜨게 되었어요. 본격적으로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단순 농업이 아닌 농사업을 하기 위해 다시 고향인 경북 성주로 오게 됐죠.” □ 동생과 함께… 고향에서 새로운 창업을물론 여찬현 대표 혼자 창업한 것은 아니다. 그의 곁에는 동생 여국현 씨도 함께다. 이들이 농업회사법인을 설립한 것은 지난 2019년 2월이다. 경북경제진흥원의 도시청년시골파견제의 도움을 받았다.“형제가 함께 하는 사업은 일단 마음이 편해요.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어서 마음적으로 상당히 안정감을 주는 것 같아요. 또 모든 일에 자기의 일처럼 책임감을 갖고 밤이든 새벽이든 회사일에 있어서 내일처럼 하죠. 서로 믿고 맡길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죠. 단점요?(웃음)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고 편하게 행동했던 것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일도 있고, 형제라서 때로는 편하게 하고 싶은 것들을 하다 보니 업무 시스템을 무시하는 경우가 있어 싸우는 일도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주변 직원들이 눈치를 보게 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아요. 서로 장단점을 알아가고 있어서 더 나아지겠죠?”그런데 이들 형제가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경제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새로움에 대한 갈망이었다. 더욱이 시골 출신의 형제들은 도시에서 적응을 하지 못한 듯했다. 서울과 대구에서 직장 생활을 경험한 여찬현 씨는 좋은 사람들과 재미있게 삶을 이어갔지만, ‘성취감’이 문제였다. 안정적인 직장생활보다는 조금 더 역동적인 ‘내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강하게 했다. 창업을 했지만 쉽지 않았다. 큰 손해를 보지는 않았지만, 아쉬움이 컸다. 동생인 여국현 씨도 힘든 타지 생활을 하다가 견디지 못하고 마침 부모님 곁에서 농사를 돕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믿을 만한 형이 함께 일하자니 안 할 이유가 없었다.“나 중심의 변화를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도시에서 생활을 할 때는 대기업이나 기존에 형성되고 만들어진 것들을 이용하기 위해, 내가 시스템에 맞쳐야 했죠. 그리고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틀에서만 일을 하죠. 하지만 로컬은 나를 중심으로 변화와 새로운 환경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무도 가지 않고, 소멸되는 곳이 때로는 기회고 새롭게 만들 수 있는 시작이 될 수 있다고 봐요.”그래서인지 형제의 하루는 바쁘다. 원래 농업이라는 것이 주말이 따로 없다고 하지만, 꽃피는 3월부터 낙엽이 떨어지는 11월까지는 잠시의 쉴 틈도 만들기가 어렵다. 특히, 자연식 농업을 추구하는 형제는 지금이 가장 바쁜 시기라고 한다.“저희 농장에 오시는 분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있어야 하죠. 다양한 콘텐츠 개발 및 농장 내 환경, 시설 정화를 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바빠야 해요. 또 배움도 있어야 하죠. 그래도 항상 힘들기보다는 즐겁다는 생각으로 일하고 있어요. 방문하는 분들이 ‘와 이쁘다, 여기 너무 좋다’라는 말을 할 때마다 뿌듯함도 느끼구요. 남의 일이 아닌 제 일을 하고, 제 머리에서 나오는 것들을 실행하고 현실화하는 것이 더 즐겁고 만족도가 상승하는 것 같아요. 아! 고향이라서 더 그런가요?”성주가 고향인 여찬현·여국현 씨는 여타의 귀농인들이 겪는 텃세도 겪지 않았다. 고향이기 때문이다. 형제에 따르면, 성주에서도 물이 좋고 공기가 좋은 포천계곡으로 유명한 가천면에서 초등학교 6학년까지 생활했다. 25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지금도 부모님이 살고 계신다.“성주는 과거보다 많은 것들이 변했죠. 그동안 가끔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시대의 변화와 함께 그 모든 것들을 지켜봤죠. 외형적으로는 더욱 현대화되고 살기에 더 좋아졌죠. 하지만 사시는 분들은 그대로에요. 정이 많고 마음이 따뜻한 분들이 많아서 적응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없었어요. 또 부모님이 계시니까 어른들도 저희를 자식처럼 여기시거든요. 그래서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고 계세요. 한 다리 건너면 모두 아시는 분이고, 뉘집 아들인지 아셔서 다들 잘해주시죠.” □ 귀농·귀촌?… 지역 특색을 고민하라!문제는 귀농과 귀촌을 고민하는 청년들이 모두 이들 형제와 같은 처지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지금도 귀농과 귀촌을 고민하는 청년들이 망설이고 있다. 농촌 활성화는 지금 거의 모든 지역의 절체절명의 과제지만, 오겠다는 청년은 한정되어 있다. 농촌에서 사람이 떠나니 일자리가 사라지고, 일자리가 없으니 도시에 간 청년들이 돌아오고 싶어도 올 수가 없는 상태다. 그러다 보니 상당수의 농촌은 가까운 미래에 소멸 지역이 될 운명에 처했다.“시골에서 자란 친구들은 다시 시골에 돌아오겠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아요. 도시의 편리한 생활에 익숙해져서 로컬에 오기가 쉽지 않죠. 또 결혼을 한 친구들은 아이를 키우고 교육을 하기에 부족한 것들이 많아서 더 쉽게 움직이지 못하는 것 같아요. 대부분의 청년들이 로컬에 오기 힘든 것은 기존 생활을 과감하게 버리지 못하거나 뚜렷한 비전 제시가 없고, 자기 주도적이고 자기가 무엇을 잘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들을 활용하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이죠. 즉, 지역에서 어떻게 자리 잡아가고 정착할 것인지에 대해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 제일 문제인 것 같아요. 그래서 청년들이 지역의 특성이나 환경을 잘 분석해야 할 것 같아요.”그렇다면 여찬현·여국현 대표는 로컬에서의 비전을 가지고 있을까. 향후 5년이나 10년 이후에도 로컬의 삶에 만족할 수 있을까. 이것이 궁금해졌다.“이미 로컬과 도시의 경계는 없어지고 있다고 봐요. 교통의 발달과 인프라가 확장되면서 도시와 지역의 경계는 점점 옅어지고 있죠. 그래서 로컬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구요. 전 코로나19가 해결되더라도 이러한 모습이 장기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봐요. 사람이 없어지는 곳에 좋은 콘텐츠 및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면, 많은 사람들이 찾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남들이 하지 않고 남들이 꺼려하는 곳이지만, 생각을 바꾸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로컬은 앞으로 비전이 있다고 보죠.”“도시에 대한 향수요? 제가 촌사람이라 그런 생각은 없는 것 같아요. 아마 혼자서 농사를 지었다면, 도시에 대한 향수가 컸을 수도 있죠. 하지만 매주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함께 일하는 청년들이 치열하게 농장을 만들고 새롭게 변화를 하다보니, 도시에 대한 향수는 크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도 경북 성주는 인근에 대도시와도 가깝고 주변에 인프라도 좋아서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죠. 처음 농장을 만들 때 시골의 시골스러움과 도시의 편안함을 함께 불어 넣어보자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그 생각을 반영하면서 만들고 있죠.”마지막으로 이들 형제의 꿈을 물었다. 형제들은 대답했다. 지금과 같은 농장을 전국에 10개 이상 만들겠다고 한다. 하나의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이야기다./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1-08-24

“포항공대 건설본부 설립 후 22개월 만에 포항공대 만들어”

포항제철을 이야기할 때 박태준 회장을 빼놓을 수 있을까? ‘철강왕’ 박태준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대공 이사장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오랜 시간 박 회장의 진면목을 지켜볼 수 있었다. 홍 : 박태준 회장과 오랜 시간 일했습니다.이 : ‘포항제철=박태준’이 아닐까. 무섭게 가차 없이 일처리를 했지만 한편으로는 사람을 따스하게 감싸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한 번은 포항제철에서 철근이 사라지는 일이 있었다. 모든 현장마다 철근을 풍족하게 책정했으니 과다 계상된 철근을 빼내 외부에 파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포항 언론인들에게 듣고 내가 적발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박태준 회장이 다른 기업에서 대표로 있을 때 물건을 빼돌리던 조직폭력배들과 맞붙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었다. 과거에 큰 공을 세운 직원이었던 것이다. 내 보고를 들은 박 회장은 “그는 목숨을 걸고 고생하며 회사에 공헌한 사람인데, 내보내더라도 명예롭게 퇴직시켜야 한다”고 했다. 결국 철근을 빼돌린 사람은 절도가 아닌 사물함 정리정돈 불량으로 회사를 나가게 되었다. 박 회장의 뜻을 알아차린 그가 눈물을 보이던 모습이 기억난다.홍 : 박태준 회장의 품성을 보여주는 다른 일화도 있는지요?이 : 1973년 포항제철을 만들 때의 이야기다. 직위가 높건 낮건 목표치를 정해 현장에서 콘크리트 타설 일을 했다. 목표가 한 달에 700㎥였는데, 단 1㎥가 모자란 699㎥를 타설한 사람을 대기발령했다. 냉정함을 보여 모든 직원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물론 연말에는 그 직원을 사면했다. 박 회장은 원리원칙과 따스함, 냉철함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가진 인물이었다. 한 번은 여자 문제를 일으킨 간부 직원 한 명이 미국으로 연수를 간 적이 있다. 징계와 관련된 인사 명령을 내리면 귀국하지 않을 것을 알고 해외 지사장 회의를 개최한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귀국시켰다. 한 여성의 고통과 어려움을 해결해주기 위해 포항제철 해외 지사장 모두를 한국으로 불러들인 것이다.홍 : 이사장님 삶에서 포항제철은 어떤 의미인가요?이 : 아이덴티티(identity)이자 자부심이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이뤄가던 획기적인 일터였다. 마지막에는 오해로 인해 곤혹스러움도 겪었지만 내 인생 자체였다. 20대 후반부터 50대 초반까지 ‘내가 곧 회사고, 회사가 곧 나’라는 생각으로 살았다.홍 : 포항과 포항제철은 어떤 관계입니까?이 : 불가분의 관계다. 박태준 회장은 포항제철 본사를 포항으로 정했다. 더 큰 규모의 광양이 아니었다. 애초에 포항제철 건설은 정부가 주도했다. 그럼에도 의도하지 않게 토지 매입 단계 등에서 많은 포항 시민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래서 본사를 포항에 두고 세금을 포항에 내려고 했다. 한때 포항제철은 지방세를 1,000억 원 이상 납부했다. 그게 포항 발전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믿는다.홍 : 광양제철소 건설 때는 어떤 일이 있었나요?이 : 광양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광양제철소가 들어서는 지역은 개펄이 많았다. 거기서 조개 등을 캐 생활비를 벌고, 아이들의 학비를 해결하던 지역민들이 보상을 요구했다. 얼마만큼의 조개를 채취했고, 어느 정도의 돈을 벌었는지 구체적인 데이터가 없었다. 어판장이나 수협에도 그런 자료는 없었다. 재판을 한다면 광양 주민들이 이길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박태준 회장은 “가능하면 지역민들의 요구대로 해주라”고 말했다. 내 기억에 의하면 보상금의 규모가 수백억 원이었다. 박 회장은 땅과 개펄에서 삶을 이어가던 이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홍 : 지금의 포항제철을 지켜보는 심경은 어떤가요?이 : 박 회장은 돌아가실 때까지 포항제철이 정치에 휘둘리는 것을 아쉬워했다. 나 역시 그런 마음이 없지 않았다. 박 회장 때부터 포항제철 고위 간부들은 사돈의 팔촌도 특별대우를 해서 회사에 취직시켜주지 않았고 지금도 그 원칙을 지켜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좋은 전통은 지켜가야 그 가치가 더욱 높아지는 것이다.홍 : 포항제철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이 : 이제는 철강 일변도로 나가지 말고 선진국의 철강 기업들처럼 경영 다각화에 힘썼으면 하는데, 지금까지는 잘하고 있는 것 같다. 더불어 교육사업에도 힘써야 할 것이다. 예전에 포항공대를 만든 것도 그런 뜻에서다. 기초과학을 통해 노벨상 수상자를 내고, 응용과학을 통해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포항제철이 지향해야 할 미래다. 창업 정신을 기억하고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떤 정치적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박태준 회장이 종이 마패를 만들던 심정으로 임직원 모두가 사심 없이 일하기를 기대하고 부탁한다. 홍 : 포항제철이 포항공대를 만들기 위한 준비는 언제부터 했습니까?이 : 포항공대 건설본부 설립은 1985년 2월 5일이다. 설립 3년 전부터 당시 포철장학회에서 기획하고 준비했다. 내가 포항제철연수원장으로 있을 때 박태준 회장이 찾아와 대학 설립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기초과학을 가르치고 배워 노벨상 수상자를 빨리 배출해야 하고, 응용과학을 통해 고부가가치 연구를 해야 한다는 뜻을 들었다. 지속적으로 포항제철을 발전시키기 위한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건설본부 조직이 만들어졌다. 내가 본부장을 맡았다. 그 시기에 포항의 산업체 근로자를 위시해 시민 11만여 명이 포항에 4년제 대학을 만들어달라는 탄원서를 냈다. 그때는 4년제 대학 설립이 쉽지 않았다.홍 : 포항공대를 만든 이유는 무엇입니까?이 : 박태준 회장이 현직에 있을 때 여러 번 이야기했다. “나는 쇠 만드는 공장과 함께 사람 만드는 공장도 세웠다”고. 쇠 만드는 공장은 제철소, 사람 만드는 공장은 14개 유치원과 초·중·고등학교 그리고 포항공대를 의미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게 박 회장의 의지였다. 포항공대 건설본부장으로 일하며 박 회장의 지시를 받고 영국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를 다녀왔다. 귀국 후에 박 회장이 “거기 대학들은 얼마나 됐느냐”고 물어서 “600년이 넘었습니다”라고 답하니 “우리도 그처럼 600년을 이어갈 수 있는 대학을 만들자”며 격려했다.홍 : 교육에 대한 철학과 학교 설립 의지가 대단했군요.이 : 옥불탁불성기(玉不琢不成器), 이게 무슨 말이냐면 아무리 좋은 옥도 다듬지 않으면 그릇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지금도 포스코교육재단에 박태준 회장의 휘호가 남아 있다. 나 역시 포스코교육재단에서 오래 일했다.홍 : 포항공대가 만들어지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겠습니다.이 : 세계 각국의 여러 대학을 다녔다. 벤치마킹한 건 캘리포니아공대다. 그 대학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많이 나오고 고부가가치 연구도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1984년쯤 박태준 회장 부부가 그 대학 부총장을 만나 “우리도 이처럼 좋은 대학을 만들고 싶다”는 뜻을 전하니, 한국을 낮춰보고 “준비와 설립 과정이 쉽지 않을 것”이라며 우려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오기가 생겼고, 결국은 건설본부 설립 후 1년 10개월 만에 포항공대를 만들었다. 이대공1941년 포항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포항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20대 중반에 서울·인천에서 석유곤로와 야구 배트 등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했다. 1967년 포항으로 돌아와 양송이 재배·가공업을 하다가 1969년 포항제철에 입사해 홍보실장, 비서실장, 총무이사, 포항공대 건설본부장, 부사장을 거쳤다. 포항제철 건설 시기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24년간 제철보국의 신념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포항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이사장, 아름다운재단 이사,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포항지역회 이사장, 경상북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포항지역발전협의회장 등을 맡았으며, 현재 재단법인 애린복지재단 이사장으로 있다.대담·정리 : 홍성식(경북매일신문 기자)

2021-08-23

청송군, 2021전국지방자치단체 평가 종합 2위, 경북 1위 차지

지역 균형 발전과 지방자치단체 역량 제고를 위해 한국지방자치학회와 한국일보가 최근 공동으로 주관한 ‘2021년도 전국 지방자치단체 평가’에서 청송군이 2019년에 이어 농어촌 기초자치단체 부문에서 종합 2위, 경북 1위를 차지했다.특히 지방자치단체 평가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재정역량 분야에서 82개 군단위 지자체 중 1위를 차지해 주목된다. 청송군은 이미 2020년 지방자치단체 재정분석 결과 최우수 자치단체로 선정된 바 있고, 2019년부터 예산대비 채무비율 제로(zero)를 달성해 지금껏 이어오고 있다. 여기에 태풍 피해복구비 등 특별교부세와 국도비 확보를 위한 노력도 수상에 견인차 역할을 했다.청송군은 현장 중심의 소통행정으로 군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군정을 펼치는데 중점을 둬 행정서비스 분야(전국 11위)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고령화 시대 어르신들의 일자리 확충과 발 빠른 코로나19 백신접종으로 지역 안정을 도모한 것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2020년부터는 농민수당을 전격 시행해 반향을 일으켰으며, 코로나19 위기상황에서 지역 소상공인에게 맞춤형 재난지원금도 청송사랑화폐로 적기에 지급함으로써 청송군민이 상생할 수 있는 계기도 마련했다.수상 소식을 접한 윤경희 청송군수는 “항상 군민을 위해, 군민과 함께한다는 마음으로 군정을 펼치고 있다. 작지만 강한 청송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소감을 밝혔다.아래 청송이 전국 지방자치단체 평가 종합 2위의 영광을 차지할 수 있었던 구체적인 이유들을 소개한다. ◆지자체 재정분석에서 높은 평가 받은 청송군청송군은 2020년 지방자치단체 재정분석(2019 회계연도) 결과 경북도내 시·군에서 유일하게 ‘최우수 자치단체’로 선정돼 지난해 말 행정안전부장관 표창을 받았다.행정안전부가 243개 지방자치단체를 대상으로 실시한 재정분석은 전국 지방자치단체를 5개 동종단체로 구분해(특·광역시, 도, 시, 군, 구) 자치단체의 재정현황 및 성과를 전년도 결산자료에 근거해 건전성·효율성·계획성 3개 분야 13개 주요 재정지표를 토대로 분석하는 대표적 지방재정 모니터링 제도다.청송군은 세외수입에 대한 자체수입비율이 전년대비 0.5% 증가한 3.77%로 유형평균 3.39%보다 높은 수치를 나타냈으며, 지방세 징수율도 전년대비 2.12% 증가한 97.08%로 유형평균 95.98%와 비교해도 높은 수치를 나타냈다. 이에 재정 효율성 분야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또한 통합유동부채비율이 전년도 4.06%에서 2.92%로 감소했고, 공기업부채비율도 전년도 161.02%에서 0%로 감소해 재정 건전성 분야에서도 우수한 것으로 평가 받았다. 이로써 특별교부세 인센티브 9천만 원을 지원받았다. 이는 세입 확충과 세출 절감을 위해 모든 공직자가 노력해 이룬 성과다.또 청송군은 2020년 2년 연속 채무 제로를 달성했다. 2019년 태풍 ‘매미’ 피해복구사업(40억 원)의 채무를 모두 상환해 채무 제로를 달성한 뒤, 2020년까지 2년 연속 채무가 없는 상태를 이어가며 탄탄한 재정력을 보여준 것이다.코로나19 위기가 장기화되는 등 재정 수요가 폭증한 상황에서 4번의 추경을 통해 재난지원금, 소상공인 지원, 코로나19 방역을 비롯해 태풍 ‘마이삭’과 ‘하이선’ 재해복구사업 등에도 적극 대응한 가운데 2년 연속 채무 제로를 달성해 성과가 더욱 빛났다.2020년 말 채무가 없는 지방자치단체는 전국에 8개였고, 경북에서는 청송군이 유일했다. 이는 여비 등 경상경비를 대폭 삭감하고, 체납 세금 징수 등의 노력으로 재원을 확보해 코로나19 위기상황에 대응하고, 국비 확보를 위한 총력을 기울인 결과였다.당시 윤경희 군수는 “앞으로도 군민들에게 부담이 되는 신규 채무발행 없이 효율적인 재정운용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 코로나19 위기, 민·관이 협력해 적극적으로 대처코로나19 확산과 경기침체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역 소상공인들에게 맞춤형 재난지원금을 지급한 것도 호평을 받았다.청송군의 재난지원금은 코로나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지역 소상공인들과 아픔을 함께 하기 위해 마련됐다. 경북도내에서 가장 먼저 소상공인 재난지원금을 지급한 것은 윤경희 군수의 적극적 의지와 청송군의회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지원이 이뤄지기까지는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소상공인 간담회, 지역 소상공인 단체들과의 논의가 이었다. 이후 긴급 의원간담회를 거쳐 예비비 사용 승인을 받았다.이후 2021년 1월 1일 기준 청송군에 주소와 영업장을 두고 있는 소상공인 개인사업자가 공지된 신청 절차를 거쳐 재난지원금을 수령할 수 있었다.신분증과 사업자등록증을 가진 신청자들은 읍면사무소를 찾아 정해진 절차에 따라 청송사랑화폐로 50만원(단란주점, 유흥주점 등 집합금지 업종은 100만원)을 지급 받았다.코로나19 백신 1차 접종에서도 청송군의 대처는 눈에 띄었다. 지난 4월 15일부터 75세 이상 어르신을 대상으로 시작한 청송군의 코로나19 백신 1차 접종은 일주일 만에 성공적으로 마무리 됐다.군은 어르신들의 안전하고 체계적인 백신 접종을 위해 철저한 준비과정을 거쳤다. 접종센터 종사자들은 사전교육을 수료했고, 접종 준비부터 접종 직후 이상반응 모니터링까지 모의훈련을 가졌다.청송군 코로나19 백신 예방접종센터를 열어 어르신들의 백신 접종이 원활히 진행되도록 행정력을 집중했으며, 청송군자원봉사센터는 적극적 봉사활동으로 협력했다. 민·관이 한마음이 된 것이다.마을별로 전세버스를 운행해 어르신들이 안전하고 신속하게 접종할 수 있도록 도왔고, 군수를 포함한 공무원들이 현장에서 1:1 전담 안내에 나섰다. 또한 군내 농·축협, 청송군여성단체협의회 등도 매일 10명의 봉사자들이 예방접종센터 안내, 어르신 부축, 손 소독, 질서유지 등의 활동을 펼쳤다.그 결과 지난 4월 22일 접종 대상자 4천464명 중 3천890명이 백신 접종에 동의해, 최종 3천772명이 무사히 접종을 마칠 수 있었다. 대상자 기준으로는 84.5%, 동의자 기준으로는 96.9%의 상당히 높은 접종률이었다. 이는 경북의 타 시·군보다 월등히 높은 수치였다. ◆ 어려움 겪는 농가에 농민수당 청송사랑화폐로 지급올 1월 4일부터 청송군은 2021년도 농민수당을 지역 농·축협을 통해 농민들에게 지급했다.농업과 농촌의 지속가능한 발전과 농업의 공익적 가치를 인정하고, 이를 유지 및 증진시키기 위해 도입한 청송군 농민수당은 2020년도 첫 지급을 시작했다. 올해 2회째인 농민수당 지급액은 지난해와 같이 경영체당 50만원이었다. 이는 지역 화폐인 청송사랑화폐로 지급됐다.청송사랑화폐는 지역 자금의 타 지역 유출을 막고, 소비를 촉진하기 위한 지역경제 활성화 대책의 하나로 발행해 유통되고 있다.청송군은 각종 재난지원금, 농민수당, 농산물택배비 등을 청송사랑화폐로 지급해 지역 상권 활력 회복과 침체된 지역경제 살리기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지난해엔 총 260억 원을 발행했고, 올해는 경제적 파급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총 410억 원을 발행할 예정이다. 이중 330억 원을 10% 특별할인 판매한다는 것이 청송군의 설명.청송사랑화폐는 소상공인들과 소비자들의 반응이 긍정적이라 추가로 국비 확보를 통해 발행규모를 확대할 수도 있다.지급에 앞서 청송군은 농민수당 심의위원회를 개최해 지급대상자를 최종 확정했고, 이를 읍면사무소를 통해 대상 농가에 통보했다. 올해 농민수당 지급 대상농가는 6천156호였다.지급기간은 3월 31일까지였고, 대상 농가는 기간 내 주소지 지역 농·축협을 방문해 수령했다. 거동이 불편하거나 불가피한 사정으로 직접 수령이 어려운 농가는 위임을 통해 대리인 수령도 가능하게 만들었다.이와 관련 윤경희 군수는 “코로나19 사태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지역 농민들에게 농민수당이 힘이 되었으면 한다”며 “앞으로도 농민들이 농업에 대한 자부심을 품고 일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김종철·홍성식기자

2021-08-23

“북구미IC ~군위IC 고속도로·철도 건설되면 구미 수출 탄력”

삼성과 LG의 주력 라인이 빠져 나가면서 침체 일로를 걷던 구미공단이 활력을 되찾고 있다. 생산과 수출이 증가하고 고용이 늘어나면서 수출 한국을 견인했던 명성을 회복할지 관심을 받고 있다. 3천여 회원사를 둔 구미상공회의소 윤재호 회장(54)은 “이제 더 이상 빠져나갈 기업은 없다”며 “앞으로는 회원사들과 함께 구미를 새로 일구어낼 것”이라 기염이다.자신감과 박력 넘치는 경영인이자 정치에서부터 노동 환경 농업 에너지 등 관심 가는 곳마다 자신의 이론을 갖고 있는 전형적인 21세기 멀티 페르소나다.어린 시절 배를 곯아 어려운 후학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며 기부에서도 늘 앞자리를 차지하는 젊은 기업인. 그의 표정만큼 구미 경제의 앞날도 밝아질 것이다.- 윤 회장이 새 기운을 몰아왔나. 코로나19가 지역과 업종을 가리지 않고 경제 전반에 쓰나미를 가져왔는데 올들어 구미공단이 생산과 수출에서 활기를 띠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지난해 상반기까지는 수출 실적이 저조했다. 그러나 올 상반기 구미의 수출은 작년 같은 기간보다 33.6%나 증가했다. 수치상으로는 10개월 연속 지난해보다 늘어났고 고용도 고용보험가입자 기준으로 증가하고 있다.- 수출이 중국으로, 품목은 무선통신기기와 반도체로 특정 국가와 특정 종목에 치우친 감이 있다..△수출국가가 중국(44.9%)과 미국(17%) 베트남(5.7%) 홍콩(3.9%) 등으로 특정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구미상의는 현재 수출액이 적은 중동과 중남미로 시장을 확대하기 위해 코트라 구미분소와 함께 다양한 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다.수출품목도 무선통신기기와 광학기기, 반도체가 주도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LG디스플레이, LG이노텍, SK실트론 등 대기업을 중심으로 IT산업이 발달한 지역이고 삼성의 스마트폰 수요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반도체 부품업체와 장비업체 등 경쟁력있는 중소기업까지 지속적 설비투자를 하고 있다. 또 제품의 수요 확대로 수출실적이 개선되고 있어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세계적으로 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나면 수출 대신 현지투자(FDI)가 늘어날 것이라고 UNCTAD(유엔무역개발회의)가 2021 세계투자보고서에서 밝혔다. 수출로 먹고 살던 시대는 끝났다는 식의 극한 평가도 나오고 있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구미의 대응책은 뭔가.△ 삼성 LG SK 현대차 등 주요 대기업과 그 협력업체는 이미 중국과 미국 베트남인도 브라질 등 전 세게계적인 글로벌 생산기지를 갖추고 있다. 코로나로 이미 세계주요 공장에서 일시적으로 셧 다운을 경험했고 현재도 코로나로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해외 생산기지에서 가동에 차질을 빚고 있다.- 그 대응책은 무엇인가.△ 구미가 단순 생산기지 차원을 넘어 글로벌 IT수출기지로 입지를 더 확고히 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대구경북은 물론 수도권 우수 인력 확보가 관건인데 다양한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우수 인력확보는 구미공단의 최대 현안 중 하나가 되는 것 같다. 무슨 특단의 대책이라도 세워야 할 것 같다.△ 전국에서 우수 인력들이 구미로 내려오고 또 내려오면 머무를 수 있게 하도록 고민하고 정책을 세워야 한다. 무엇보다 구미역에 KTX 정차 등으로 교통접근성을 높이고 백화점 쇼핑몰 등 즐길거리와 각종 인프라를 확충해서 머무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특히 수도권에서 지방으로 근무지를 이전하는 연구 인력에 대해서는 소득 공제를 확대해 주는 등 직접적인 혜택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우리 상의에서는 중앙 정치권과 관계기관 등에 여러 차례 건의서를 올리고 자체적으로 대책마련 회의도 가졌다.- 7월부터 5인 이상 49인 이하 사업장에서도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고 있다. 올 1월부터는 50인 이상 사업장에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됐다. 구미지역에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나.△ 한 마디로 누가 누구를 위해 제정한 법인지 묻고 싶을 지경이다. 현장에서는 기업도 노동자도 모두 불만이다. 기업으로서는 인력 활용을 원활하게 하고 노동자들도 더 일해서 더 벌 수 있는 유연한 대체근무가 가능해 졌으면 좋겠다. 노동자들은 잔업을 더 해서라도 돈을 더 벌고 싶은 것이 현실적으로 솔직한 심정이더라. 더 열심히 일해서 더 많이 벌고 싶은 길을 막은 것 아닌가 싶다.- 현실적으로 어렵고 힘들다고 불만이 많은 것 같다. 어떻게 대응하고 있나.△ 올 1월 주 52시간 근무에 대한 의견을 물었더니 72%가 경영에 애로가 발생한다고 응답했다. 업체에 따라 근무형태가 달라 주 52시간을 활용하기 어려운 근로자가 있기 때문이다. 구미산단 가동업체(1,973개 사)중에는 50인 미만 사업장이 89%(1,755개 사)를 차지하고 있다. 업체 특성상 물량 변동이 극심해 업체로서는 일률적인 주52시간제 적용이 어렵고 근로자들도 실질적인 임금 감소라며 반발이 심했다. 제도 안착을 위한 1년간의 계도기간을 줄 것과 8시간 추가 연장근로를 50인 미만 사업장에도 확대 시행해 달라고 건의했다.- 구미가 대구경북통합신공항의 배후 도시로 각광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전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선제적 대응도 필요할 것 같다.△ 구미에서 신공항을 경유하는 북구미IC ~군위IC 간 고속도로와 철도가 건설되면 5단지 분양에도 탄력을 받게 될 것이고 내륙 최대 IT 수출단지로 위상을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구미가 갖고 있는 첨단 IT 제조기술을 토대로 항공 전자 부품산업을 전략적으로 유치하고 항공물류단지 거점을 마련해서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상의가 중심이 돼서 대책을 마련해 나갈 것이다.- KTX 구미역 문제는 공단의 인력충원에서부터 공단 활성화와 구미가 발전하기 위한 현안의 중심인 것 같다.△ 구미 지역 기업인들의 수도권 출장은 물론 바이어 등 외부 손님들이 구미 공단을 방문할 때 KTX역이 멀어 불편하다는 호소를 끊임없이 듣고 있다. 구미상의로서는 KTX의 구미 정차가 하루 빨리 실현될 수 있도록 하고 이와 함께 통합신공항 배후도시로 구미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동구미역의 신설을 위해서도 각계에 건의하는 등 노력하고 있다. - 구미 소재 매출액 상위 100대 기업 중 전기 전자가 46개, 기계금속이 18개, 화학 12개, 자동차 부품 11개 등 90개 업체가 제조업이었다. 또 50년 이상 된 기업이 계림요업과 티에스알, 세로닉스, 대아산업 등 4개 업체이며 이들은 구미공단과 역사를 같이 하고 있다. 제조업과 향토기업 중심의 구미공단이 좀 더 젊어질 필요가 있지 않나.△ 100대 기업 중 50년 이상 4개사를 비롯, 20년 이상 26개사로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다. 5년 미만 기업은 2개사뿐이다. 그러나 지난해 구미에서 신설법인이 669개로 전년보다 15% 늘어났고 제조업이 208개나 됐다.구미상의로서는 해외나 관외 투자도 중요하지만 구미에 본사를 둔 향토 기업이 구미공단의 주력으로 보고 이들이 신증설 투자 시 보조금을 지원해 주고 연구개발에 꾸준히 투자할 수 있도록 각종 인센티브와 함께 규제완화에도 노력하고 있다.- 구미공단에 향토 기업이 많은 만큼 창업자의 2세 3세가 가업으로 경영을 승계한 기업도 많을 것으로 보인다. 상속세와 증여세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공식조사는 없었지만 상당수 기업이 경영을 승계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상속세와 증여세 문제에 대해서는 법을 다루는 정치인들에게 따져보고 싶다. ‘돈 벌어 봤느냐’라고. 기업인으로서 기업이 나라를 살려냈다고 생각한다. 기업으로서는 계속 경영해서 세금을 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세금 낼 돈이 없어 기업이 공중분해 되어서야 되겠나. 상속세와 증여세 문제는 기업의 계속 경영 차원에서 접근해 줬으면 좋겠다.- 가업으로서의 기업 승계도 어렵지만 창업은 더 어려운 것 같다.△ 구미의 현실을 보면 순수한 창업이 쉽지 않다. 대기업의 하청이나 분사에서 독립해서 창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성공률이 높은 것 같다. 인력충원 문제도 그렇게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대기업의 문어발식 확장이라고 일방적으로 몰아붙일 일만은 아니다. 그것이 창업의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윤 회장의 주광정밀도 창업 28년이 됐다. 흑연 제조업이라 해서 반도체와 ICT 중심의 첨단공단이라 할 구미에서는 좀 엉뚱한 업종으로 알았는데 구미공단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첨단 필수 산업인 것 같다.△ 젊어서 겁 없이 사업을 시작했지만 대한민국 흑연 1세대로서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최고 기술력을 갖췄다고 자부한다. 고객이 만족하는 최고의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고 자신한다. 흑연은 먼지가 많이 발생하는 사업장이어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깨끗한 사업장으로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다.- 회사에 노동조합은 있나.△ 없다. 내가 젊었을 때 노동운동을 했다. 그러나 지금 노동조합은 그때의 순수성을 잃고 너무 정치적으로 편향된 느낌이다.- 사회적 기부도 많이 해서 기부왕이라고 소문났다. 모교 경북기계공고에 장학금과 특별기금을 마이스터고 저소득층 자녀들을 위한 장학금도 내고 1억이상 기부자클럽인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으로 대구경북에서 최고액 11억원을 기부했다고도 했다.△ 지금도 길가다 짐 들고 가는 노인을 보면 들어드린다. 어렸을 때부너 남을 도와주는 것이 내가 편했다. 아너소사이어티를 몰랐을 때는 이름 없이 기부했다. 돈을 벌었으면 사회에 도움을 주어 더블아 사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하는 것 아닌가. 같이 살아야지. 윤재호 구미상공회의소 회장 □ 윤재호 구미상공회의소 회장(54)청송 출신으로 경북기계공고를 졸업하고 1993년 대구기능경기대회에서 선반부 동상을 받으면서 기술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궁금증은 어떻게든 풀어야 하고 늘 공부하는 기업인이다. 2015년 한국기계가공학회 최우수 논문발표상을 받고 금오공대에서 명예공학박사학위를 받았다.2012년 기능한국인에, 2016년에는 컴퓨터 응용가공분야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됐다.1994년 창업한 주광정밀은 흑연제품과 흑연전극, 초정밀 부품가공, 지그제작, 금형제작을 주생산품으로 섬성전자와 LG전자,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등에 공급하고 있다. 2014년 베트남 현지법인을 설립했다./이경우 편집위원

2021-08-23

이건 전부 오로지 바이러스 십구 때문이야, 아니 십팔 때문이야

문학은 인간에게 ‘위로’를 선물할 수 있다. 갑작스레 나타난 바이러스로 인해 온 세상이 공황에 빠져 있는 지금. 소설가 김강 씨가 1천 년 전 신라 동궁에서 열린 연회를 소재로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된 후의 경주를 상상해 마음 따스해지는 작품을 썼다. 이를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김강 씨는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쓴 작가인 동시에 내과의사다. 편집자 주연꽃이 만발하네. 사람도 만발이네. 어휴, 도로 양쪽에 주차해놓은 차들 좀 봐. 사람들도 장난 아니게 많겠지. 땡볕에 고생 좀 하겠는걸. 그래도 휑한 것보다는 낫지. 십팔인지 십군지 하는 바이러스. 난 왜 자꾸 십구보다 십팔이라고 하는 거지? 아무튼, 그 사태가 해결되었으니 망정이지 어쩔 뻔 했어. 경주로 단체 관광을 올 생각을 했겠어? 가게 문 열어놓고 면상을 맞대며 한숨만 쉬고 있겠지. 그러니 저 정도 줄 설 수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다행이다 생각해야지. 그렇지 않아?어허, 벌써 일어서지 마. 아직 조금 더 가야 해. 저기 보이는 게 첨성대니까 여기는 대릉원쯤 되겠네. 차 밀리는 것을 봐서는 내리려면 한참 남았어. 안압지, 아니 월지 근처에 간다 해도 주차도 해야 하고 우리가 일어선다고 바로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아무튼 시간이 걸릴 거야. 앉아 있어. 조금만 기다리자고.참, 내가 하나만 일러줄게. 월지를 둘러보고 나면 보통 옆에 있는 연 밭으로 가거든. 가기 싫어도 가게 돼 있어. 사람들이 모두 거기로 갈 거니까. 연 밭에 가거든 꽃대 아래를 살펴봐. 선명한 분홍의 덩어리가 붙어있는 걸 볼 수 있을 거야. 예뻐. 뭘 것 같아? 그거 왕우렁이 알이야. 왕우렁이 알 본 적 없지? 있다고? 외래종이라고? 이 사람이. 글로벌 시대에 토종, 외래종 구별이 가당키나 해?허, 참. 아직도 저러고 있네. 저기 맨 앞자리에 앉아있는 둘 보이지? 서로 고개를 외로 돌리고 앉아 있잖아. 중국집 하는 앤드류하고 빵집 주인 왕 씨야. 일 년 전이었나? 앤드류와 왕 씨가 다퉜어. 이후로 둘 사이가 회복이 안 되더라고. 그래서 오늘 내가 특별히 상가 번영회 총무한테 부탁을 했지. 둘이 같이 앉혀보라고. 아직까지는 의미 없네, 의미 없어. 하긴 한 번 틀어진 사이가 쉽게 풀리진 않겠지.다툰 이유가 뭐냐고? 다투는데 이유가 있나. 쌓인 것들이 폭발하는 거지. 그냥 쌓이겠어? 특별히 어느 한 사람을 두고 쌓인 거겠어? 세상이 그랬던 거지. 올해가 이천이십삼 년이니 사 년 전 바이러스 십구가 나타났지. 한창 기승을 부렸고 거리두기다 방역강화다 해서 상가 분위기가 영 아니었어. 누구하나 웃지 않던 시절이었지. 하루 종일 가게에 앉아 텅 빈 거리만 보고 있었어. 그렇게 멍하니 보다 보면 이상한 생각도 나고 곱게 보이던 것도 미워 보이고 그러는 거잖아.물론 둘 사이가 저렇게 된 계기는 있지. 도화선 같은 것 말이야. 그러니까 그날은 재활용 쓰레기를 수거해가는 날이었어. 여름이었어. 더웠지. 예전 같으면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 그날따라 빵집 왕 씨가 자기 가게에서 나온 폐지들을 쓰윽 본 거야. 그런데 이게 뭐야? 빵집에서 나온 폐지들 틈에 당근 상자가 보인 거지. 당근 상자 안에 흙도 조금 남아 있고, 물기도 좀 있고 하여튼 좀 그랬나 봐. 왕 씨가 상자를 들고 중국집으로 갔어. 앤드류를 불러냈지.이름이 왜 앤드류냐고? 외국인이었어. 지금은 한국인이고. 교포 2세야. 앤드류 김. 모국 방문한다고 들어왔다가 자장면 맛에 반해서 눌러앉았어. 귀화도 했고. 우리 상가에서 중국집을 한 지가 벌써 이십 년 다 되어가. 빵집 왕 씨하고 비슷한 시기에 개업을 했으니까. 하여튼 왕 씨가 중국집 문을 열고 앤드류에게 이리 나와 보라고 했어. 고운 말, 부드러운 말투였겠어?넓은 홀, 여남은 테이블 중 딱 한 테이블에 손님들이 있었어. 정수기 관리하시는 분들이었다지 아마? 상가 장사가 안 되니까 정수기 관리하시는 분들이 자기들 거래 업체를 돌아가며 방문해서 사 먹어주기도 하고 그랬나 봐. 고마운 일이지.아무튼 자장면을 먹고 있던 손님들이 자장면 면발을 입에 문 채 고개를 돌려 왕 씨를 보았지. 탕수육 소자 정도는 추가로 시켜줬으면 하고 손님들을 바라보던 앤드류는 들고 있던 메뉴판을 놓쳤고. 메뉴판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소리가 조금 크게 났어. 근데 그 소리를 들은 왕 씨가 또 오해한 거지.이게 뭘 잘했다고? 지금 던진 거야? 너, 던진 거지?앤드류가 얼마나 황당했겠어?아니 그게 아니고, 놀라서 메뉴판을 놓친 건데.왕 씨도 그 말을 듣고는 아차 했을 거야. 그런데 어떻게 해. 그 상황에서. 그랬어? 내가 오해했네. 미안. 그럴 수는 없었을 것 아니야? 왜 못 그러냐고? 보통은 그러기 힘들지. 왕 씨는 물러설 수가 없었어.이 자식이 말끝도 흐리고. 이제 아래위도 없다 이거지? 그래 아래위 없다 치자. 그렇게 나오겠다면 나도 그렇게 대해주면 되니까. 그건 그렇고, 이 박스 왜 우리 쪽에 갖다 놓은 건데? 이 당근 박스 말이야. 우리는 당근 쓸 일 없거든.그렇게 말하고는 당근 박스는 중국집 바닥에 던져버렸어. 박스에 있던 흙과 마른 잎사귀들이 중국집 바닥에 흩어졌지. 어머나. 손님들이 소리를 질렀어. 그렇게 시작된 거야. 앤드류가 박스를 집어 들고 박스에 인쇄된 영농조합 명칭을 가리키며 우리는 여기서 당근을 사지 않는다, 말했지만 왕 씨 귀에 들어올 리 없었지. 우리 상가에서 당근을 쓸 가게는 중국집 말고는 없거든. 빵집에서는 고로케 만들 때나 간혹 쓰기는 하겠지만, 왕 씨 말로는 쓰는 양이 많지 않아 박스로 사서 쓰지는 않는다 하더라고.그날 둘은 드잡이를 하는 상황까지 갔어. 좌우로 상가가 늘어선 텅 빈 거리 한 복판에서 큰 목소리와 욕설이 오고 갔지. 결국 파출소에서 온 경찰이 중재를 하고 나서야 끝났어. 사실 그게 경찰까지 올 일은 아니지. 빈 박스야 누구 것이든 모아 놓으면 되는 것이고. 설령 자기 것이 아닌 박스가 들어와 있다고 해도 누구 것인지 찾아 나서는 사람도 잘 없지. 자기 일하기도 바쁘니까 말이야. 그리고 그 박스가 중국집 것도 빵집 것도 아닐 수도 있잖아.상가에 있는 가게 중 누구든 마트에서 물건을 사고 담아올 때 썼던 빈 박스 중 하나일 수도 있지. 그러니까 평소 같으면 별 문제가 될 일이 아니었다는 거야. 이건 전부 오로지 바이러스 십구 때문이야, 아니 십팔 때문이야. 저 두 사람 그 전에는 사이가 좋았거든.그런데 내가 누구냐고? 누구기에 저 둘의 사연을 이리도 잘 아냐고? 나, 상가 번영회장이지. 번영회장이면 우리 상가에서 벌어지는 일은 다 알지. 암, 다 알고말고. 오늘 이 행사를 기획하고 밀어붙인 사람도 나야.이제 바이러스 십구 사태도 마무리 되었으니 좋은 일이 생기지 않겠어. 상가에도 활기가 돌 것이고. 그러니 풀 것은 풀고 사과할 건 사과하고 해야지. 다툰 것이야 저 둘이지만 상가의 다른 가게 사장들 사이도 그리 썩 좋았던 것은 아니니까. 굳이 말하려면 많아. 저기 있는 둘도 그렇고, 맨 뒤에 앉아 있는 저 둘도 그렇고. 그래서 다 같이 가자고 했어.저기 누각 보여? 누각 앞에 연못이 있어. 월지. 동궁은 어디냐고? 동궁은 없어. 동궁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자리만 있지. 태종무열왕 알지? 문무대왕도 알고? 원래는 그 태종무열왕의 아들이자 문무대왕의 동생인 김인문의 집이었다네. 김인문이 당나라에 가서 외교를 잘 했대.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을 이끌어냈지. 문무대왕이 그 공을 치하해서 집을 하사했는데, 이후 나당 연합이 깨어지면서 상황이 바뀐 거야. 당나라 군대가 신라와 전쟁을 하러 오면서 김인문을 앞장세워서 온 거지. 김인문을 신라 왕으로 삼겠다는 것이었어. 김인문은 역적이 되었고 문무대왕은 집을 헐어버렸지. 그 자리에 동궁과 월지를 만든 거야. 소설가 김강 동궁에 얽힌 이야기 하나만 더 할까?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이 왕건을 초대했고 동궁에서 큰 연회를 열었어. 견훤으로부터 신라를 구해달라는 것이었지만, 아닌가? 구해줘서 고맙다는 것이었나? 아무튼. 그 자리에서 왕건에게 신라를 맡아 달라 부탁을 했다네. 신라의 백성들을 위해서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그게 쉬운 결정이었겠어? 잠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려와. 동궁에 대해서 어찌 그리 잘 아냐고? 신문만 잘 봐도 다 알게 되어 있어. 신문에 연재기사로 나왔었거든. 장사도 안 되고 하니 하루 종일 신문을 정독했거든.다 왔네. 이제 곧 내리겠어. 내릴 준비하자고. 그러고 보니 말이야. 앤드류는 김 씨고 빵집은 왕 씨니까. 옛날에 경순왕과 왕건이 만났던 것하고 같네. 김 씨와 왕 씨가 만난 거잖아. 차에서 내리면 저 둘을 불러놓고 경순왕과 왕건 이야기를 해줘야겠어. 괜찮은 명분이 될 것 같지 않아?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 그렇지 않아?동궁을 배경으로 한 따뜻한 일화가 한 가지 더 생기는 거지. 대략 천 년 만에 말이야.

2021-08-18

나만의 사진과 영상으로, 로컬 콘텐츠를 만들다

경상북도 구미시에 카메라를 든 청년이 산다. ‘24프레임즈’, 이름만 들어도 왠지 리드미컬하고 모던한 이미지다. ‘24프레임즈’의 신동율(31) 대표. 그는 ‘진부함을 거부하는 청년 작가집단’이라는 이름으로 창업했다.외부에서는 ‘24프레임즈’를 가리켜 청년 특유의 열정과 패기, 투지가 돋보이는 스타트업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저희의 중점 사업분야는 ‘행사영상 제작, 홍보영상, 비대면 중계행사’ 등을 전담하는 미디어콘텐츠 사업부와 ‘바디프로필, 제품촬영, 행사사진 촬영’을 전담하는 스튜디오 사업부로 나누어져 있어요. 문화 사업이 다른 시·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경북 구미에서 내실 좋은 팀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죠.’‘24프레임즈’의 신동율 대표에 따르면, 구미 지역 소상공인과 기업을 대상으로 한 홍보영상 제작을 아이템으로 창업해 지역 공기관으로 사업의 외연을 넓혔다. 특히, 바디프로필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다양한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그런데 신동율 대표의 고향은 구미가 아니다. 그렇다고 경북도 아니다. 그는 감자와 추위로 유명한 강원도 출신이다. 강원도 출신의 청년이 어떻게 구미로 오게 됐을까. “아무래도 뜨거웠던 대학 시절의 열정과 많은 추억들이 깃든 도시가 구미에요. 그래서 이곳에서 생활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늘 젊게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어요. 경쟁력과 제조업 기반의 산업도시에서 미디어 콘텐츠를 제대로 만드는 회사를 세운다면, 기존 광역시·도의 업체와 작업하던 소비자 입장에서 시간과 비용을 절약하게 되어 충분히 경쟁력이 있으리라 판단했죠.”10년 전, 20살의 강원도 청년은 구미 금오공과대학교 기계공학과에 입학했다. 군대 시절 2년을 제외하고 10년을 구미에서 살아왔다고 한다.“대학을 입학한 이래 구미는 제게 제2의 고향이 되었죠. 저는 학교 수업보다는 동아리 활동이 더 즐거웠어요. 대학 3학년 때는 총동아리연합회장도 맡았죠. 그 과정에서 영상제작과 행사기획의 매력에 푹 빠졌어요. 영상제작을 업으로 삼아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행사기획사에 취직도 했었죠. 돌이켜 보면 좋은 시간이었지만 다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 쉽지 않은 길, 아이디어로 개척강원도 삼척에서 나고 자란 청년이 어쩌다 구미까지 와서 창업을 하게 된 것일까.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그의 말대로, 신동율 대표는 100만원도 안 되는 월급을 받고 주말도 없이 일했다. 하지만 노력한 대가가 따라와 주지 않았다고 한다. 요식업 분야에 취업하고 지점관리 현장에 투입되기도 했지만, 어쩌다보니 회사의 홍보영상을 찍는 업무를 하기도 했다. 결국, 대학 시절 함께 동아리 활동을 했던 친구들과 온라인 쇼핑몰을 창업해 보자는 생각으로 중국에서 유튜브 영상 녹화 제작에 사용하는 마이크를 들여와 팔기 시작했다. 사무실도 없이 각자의 집에서 컴퓨터를 놓고 일했지만 즐거웠다고….이런 신 대표를 확 뜨게 만든 것은 제품 리뷰에 영상을 활용하면서다.“국내 마이크 판매자들 대부분이 마이크에 대한 수치 자료를 제공하지만, 마이크의 핵심인 음질에 대한 정보는 거의 제공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우리는 판매 제품에 대한 리뷰 영상을 만들어서 올렸어요. 당시만 해도 제품 리뷰에 영상을 활용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거든요.”“영상을 만드는 제작사는 많죠. 레드오션이죠. 하지만 대도시와 달리 구미 같은 지방 도시에는 영상을 제작하는 회사가 거의 없어요. 대도시보다 기회가 적지만, 그만큼 경쟁자도 적죠. 그래서 우리가 갖고 있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구미에서 충분히 영상제작으로 부가가치 높은 사업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렇다면 지금 신 대표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을까.“회사를 다니던 시절에 비하면 바쁨의 정도는 비슷해요. 하지만 ‘나만의 일’을 한다는 점에서 훨씬 기쁜 마음으로 일하고 있어요.”이런 신동율 대표에게는 꿈이 있다. 사실 ‘24프레임즈’는 무형의 형태를 제공하는 서비스업이다. 영상이나 사진을 촬영하고 콘텐츠를 제작하는 일은 큰 제조시설이나 장비를 필요로 하지 않기에, 현재와 같이 지방에 거점을 두고 있으면서도 서울과 경기도, 대구, 부산 등에서 업무를 진행하는 일이 훨씬 많다.“지방의 업체나 담당자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서울의 일을 많이 하는 팀이니까 믿음직하다’는 이야기를 가끔 들을 때가 있어요. 저는 앞으로 거점인 구미나 경상북도의 프로젝트를 수행해 나가는 일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봐요. 그래서 가장 확실한 로컬팀이 되고 싶어요. 지역 문화재와 관광시설, 기업, 경상북도나 구미시의 여러 프로젝트에서 가장 영상 콘텐츠를 잘 만드는 그런 회사요.” □ 청년들이 찾고 싶은 로컬?… 지역 인프라부터 생겨야사실 신동율 대표의 ‘24프레임즈’는 부침도 있었다. 바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이다. 코로나19 사태가 확산되면서 공기관에서 주최하는 행사들이 줄줄이 취소됐다. 또 대학축제와 지역 페스티벌 등 ‘24프레임즈’의 주요 일거리였던 행사들이 모두 올스톱되면서 벼텨낼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눈을 돌린 것이 ‘바디프로필 촬영’이다.“카메라는 있는데 뭐든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증명사진이나 가족사진을 찍어주는 것도 생각해 봤는데, 이미 사진관이 있어서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했죠. 구미에 뭐가 없을까 살펴봤더니 바디프로필 사진관이 눈에 띄었어요. 제가 워낙 운동을 좋아하다 보니 그쪽에 사업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현재 ‘24프레임즈’는 확장을 거듭하고 있다. 입소문을 타고 스튜디오를 찾는 고객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매출도 늘었다. 여기에 스타트업의 홍보영상도 제작하고 있다.이러한 신동율 대표에게 청년들의 귀농·귀촌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정주여건과 대중교통, 기타 편의시설 등 사회 인프라적인 측면들에서 한참 모자란 것이 문제인 것 같아요. 가령 로컬에서 기업을 한다고 하면, 실질적으로 로컬 문화를 활용한 사업을 전개하는 것은 어렵고, 매우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소비수요 또한 영향이 커요. 인스타그램이나 기타 플랫폼 광고를 진행하면, 경상북도와 경상남도를 모두 합쳐도 경기도의 절반에 미치지 못하죠. 즉, 내가 판매하고자 하는 물건이 얼마나 해당 지역의 수요와 부합하는가를 면밀하게 조사해야 하죠. 이런 과정에서 청년들에게는 위험부담이 큰 지방보다는 기본 수요를 충족시키는 수도권이 더욱 메리트 있는 선택이 되고 있죠.”“가장 큰 비전은 ‘블루오션’이라고 생각해요. 아직 수도권에 비해서 문화나 인프라적인 측면에서 부족한 것이 사실이고, 이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영상이나 디자인 등의 콘텐츠는 필수인 시대가 되었죠. 내실을 다지는 향후 1~2년 뒤에는 그 결실이 있을 것이라 봐요.” 그래도 그는 구미에 정착한 것이 마음에 든다. 짧은 창업기간 동안 여러 차례 난관을 뚫은 신 대표는 과거에 느끼지 못했던 책임감과 사명감도 갖게 됐다. 일순간에 삐끗하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절벽에 서 있는 느낌이라고 한다. 이제는 자신이 책임져야 할 직원도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신 대표는 자신의 생각을 하나씩 실천에 옮기고 있다. 바로 지역을 위한 나눔이다. 신 대표는 초등학교 때 집안형편이 어려웠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 기억 때문일까. 신 대표는 경상도 지역 대학생들의 봉사단체인 대학생협의회 회원들과 지역 사회의 소외된 가정을 대상으로 연탄봉사와 청소봉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아울러 영상과 사진을 통해 지역사회에 도움이 되는 방법도 찾고 있다.“보다 좋은 영상, 보다 좋은 사진과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청년들이 구미에도 있다는 것을 많은 분들께서 알아주실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창업일로부터 만 2년차가 지난 지금부터의 2년 동안 더욱 성장하겠습니다.”/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1-08-17

“박태준 회장 물러나고 검찰 조사받아”

지금보다 한 세대 전 직장인들은 개인생활을 희생하며 회사를 위해 일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어떤 보람과 긍지가 있었기에 그럴 수 있었던 건지 요즘 청년들은 궁금해한다. 지금으로부터 30~40년 전 직장생활의 기쁨과 환멸에 대해 들어봤다. 더불어 1993년 포항제철이 겪은 위기에 관해서도 물었다. 홍 : 누구보다 바쁜 인생을 살았습니다. 혹시 취미가 있으신가요?이 : 스쿠버다이빙을 좋아한다. 바닷가에서 살던 사람이라 대여섯 살 때부터 동빈내항에서 수영을 했다. 배를 매어놓은 밧줄을 잡고 개헤엄을 쳤다. 한 번 시작하면 한두 시간을 물에 있었다. 1971년에 포항 해병대 장교를 알게 돼 스쿠버다이빙을 시작했는데, 최근에도 시간이 나면 가끔 하고 있다.홍 : 중년이 된 이후에 젊은이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이 : 1990년대 들어서면서 다양성이 공존하는 사회가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화 세력이 부각되었고, 아주 다양한 문화가 등장했다. 직업도 다양해졌고, 청년들이 다음 세대의 먹을거리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모습도 보았다. 세상이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우리 세대가 아닌 다음 세대를 중심으로 모든 걸 판단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마디로 사회가 다양화되고 진취적으로 변한 것 같다.홍 : 1980~1990년대에 기억나는 에피소드 하나 소개해주시죠.이 : 포항제철은 1980년대 후반에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과 미래를 논의한 적이 있다. 철강만 만들어서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박태준 회장의 판단에서였다. 미국 철강회사들도 사업을 다각화했다. 향후 철강산업이 사양화된다는 걸 내다본 것이다. 이에 박 회장이 소프트뱅크와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정보통신과 소프트웨어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하기 위해서였다. 그즈음 손정의 사장이 한국에 두 차례 들어와 포항, 광양, 서울 등지에서 원격 영상회의를 함께했다. 평소 박태준 회장은 한 달에 30권의 책을 읽었다. 읽은 책에서 참고할 게 있으면 메모해 임원들에게 보여줬다. 철강업이 사양화되고 후발국에 밀린다는 걸 책을 통해 예측했을 것이다. 사업의 다각화를 위한 소프트뱅크와의 양해각서 체결은 박 회장의 안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시에 “10년 후에는 첨단산업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포항제철과 광양제철 사업 수입의 몇 배가 될 것”이란 박 회장의 말을 대부분이 잘 이해하지 못했다. 소프트웨어 산업이 이렇게 성장할 것이라고 쉽게 예측할 수 없었던 탓이다.홍 : 1980년대 후반에 포항에서도 노동운동이 시작되었지요?이 : 1987년에 노조 담당 상무가 되었다. 이른바 노동자 대투쟁 시기다. 포항제철은 일사불란한 분위기였는데 노동조합이라는 변수가 등장했다. 급진적인 노동문화가 생겨나던 때여서 힘들었다. 노동조합과 타협, 이해관계 조정 등을 위해 노력했다. 새벽까지 노조와 협상하고 소주도 마시고 그랬다.홍 : 잊을 수 없는 일화 하나 더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이 : 1973년 6월 9일 아침 7시 30분 세계가 포항을 주목했다. 용광로에서 첫 쇳물이 제대로 나오는지 모두가 지켜보고 있었다. 기대를 만족시키듯 쇳물이 쏟아졌고 모두가 만세를 부르며 환호하는데 오직 박태준 회장 한 사람만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는 사진이 찍혔다. 다른 언론사 사진기자들은 쏟아지는 쇳물에 포커스를 맞추는데 그때 누군가 박 회장의 얼굴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그런데 그 사람이 퇴직할 때 사진 소유권이 자기에게 있다며 그 사진을 가지고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진을 돌려달라고 하니 거절했다. 다시 전화를 걸어 “사진을 찍은 카메라는 당신 것이 아니고 회사 소유이며, 근무시간에 찍은 것이니 당신은 업무 수행 중이었다. 그러니 사진의 소유권은 당신이 아닌 회사”라고 설득해 결국 돌려받았다. 그 사진은 포항제철 역사의 중요한 기록으로 지금도 남아 있다.6월 9일은 철의 날이다. 이날은 1973년 6월 9일 한국 현대식 용광로에서 처음 쇳물이 생산된 날을 기념해 제정되었다. 포항제철만이 아니라 국내 철강업계 역사로 볼 때도 의미가 큰 날이다. 포스코 뉴스룸은 “1968년 포항제철(현 포스코)이 설립된 이후 5년여 만인 1973년 6월 9일 처음으로 쇳물을 생산하게 되었다. 바로 그날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용광로에서 생산된 쇳물 덕분에 지금의 포스코, 한국의 철강업계가 존재하게 되었다. 이후 포항제철은 건설과 조업을 병행하는 가운데 세계 최대의 제철소라는 타이틀을 획득하게 됐고, 1992년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 완공을 통해 철강 생산 2천100만t의 25년 대역사가 마무리되었다”고 쓰고 있다. 홍 : 1993년 포항제철에 위기가 왔지요?이 : 박정희 대통령 사후에 정치적 울타리가 없어졌다. 박태준 회장이 정치권으로 간 것은 포항제철을 잘 지키며 발전시키기 위해서였다. 사심은 없었던 것으로 안다. 포항에 20년 이상 내려와 있는 박 회장을 그리워한 딸이 결혼하면서 보내온 편지가 기억난다. 1992년 10월에 광양제철소 준공식이 끝난 후에 당시 김영삼 대통령 후보가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박태준 회장에게 했다. 박 회장은 “나는 정치를 하려는 것이 아니니 전면에 나서기 어렵다”고 사양했다. 여러 사람들이 “제의를 수락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조언했으나 박 회장은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다”라는 뜻을 꺾지 않았다. 그래서였는지 ‘박태준이 김영삼에게 비판적’이라는 말이 세간에 돌았다.홍 : 검찰 조사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이 : 1993년 6월에 박태준 회장과 나를 포함한 포항제철 주요 간부들이 출국금지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미리 정보를 알게 된 박 회장은 그전에 일본으로 갔다. 우리 임원들 중 누구도 김영삼 대통령을 비판하지 않았는데 분위기가 그렇게 흘렀다. 내가 부정한 돈을 받았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나름대로 검찰 조사 준비를 철저히 했다. 결론을 말하자면 무혐의였다. 추정컨대 정치권에서 우리를 밉게 봤던 것 같다.홍 : 검찰 조사 때 어떤 일이 있었나요?이 : 대검에서 조사받을 때 넥타이와 허리띠를 풀었다. 신발도 고무신으로 바꿔 신었다. 지금 시각으로는 명백한 인권침해고 불법행위다. ‘무죄추정의 원칙’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내 수첩에 청와대와 안기부 인사의 전화번호가 왜 적혀 있는지도 따져 물었다. 검찰은 내가 제시한 자료를 확인하기 위해 국세청과 출입국관리소에 직접 전화까지 했다. 40시간가량 잠을 재우지 않으니 힘들었다. 어쨌건 검찰청에 들어간 다음 날 자정쯤 가져간 넥타이와 허리띠를 가져다주며 돌아가도 좋다고 했다. 그날 저녁 화장실에서 만난 포항제철 임원 한 명이 “저녁을 먹지 않은 사람은 오늘 나간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았다. 구속할 것이 아닌데 집으로 갈 사람에게 밥을 먹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홍 : 인생의 큰 고비로 여겨지는데, 또 기억나는 일은 없는지요?이 : 후배 윤석만(전 포스코 사장)이 생각난다. 1993년 내가 검찰의 감시를 받는 와중에 그가 집 앞으로 찾아와 전화를 걸었다. “지금 전화가 도청되고 있을 텐데 어쩌려고 하느냐” 물으니 “선배님은 기독교 장로고, 저는 불교 신자 아닙니까. 여기에 있건 감옥에 가건 다 신의 뜻인데 뭘 그렇게 걱정하세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대범하고 능력도 뛰어나고 의리까지 보여준 사람이다. 이대공1941년 포항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포항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20대 중반에 서울·인천에서 석유곤로와 야구 배트 등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했다. 1967년 포항으로 돌아와 양송이 재배·가공업을 하다가 1969년 포항제철에 입사해 홍보실장, 비서실장, 총무이사, 포항공대 건설본부장, 부사장을 거쳤다. 포항제철 건설 시기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24년간 제철보국의 신념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포항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이사장, 아름다운재단 이사,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포항지역회 이사장, 경상북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포항지역발전협의회장 등을 맡았으며, 현재 재단법인 애린복지재단 이사장으로 있다.대담·정리 : 홍성식(경북매일신문 기자) /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8-17

“박태준 회장의 신임 덕분에 48세에 부사장 승진”

‘우향우 정신’과 ‘종이 마패’는 급격하게 성장하던 포항제철의 상징처럼 회자된다. 많은 시민이 포항제철과 연관되어 살아가던 당시의 포항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홍 : 포항제철이 한창 건설되던 시기의 분위기는 어땠습니까?이 : 포항제철은 대일 청구권 자금으로 만들어진 기업이다. 조상들이 겪은 수난의 대가로 건설하는 포항제철은 실패해서는 안 되는 회사였다. 박태준 회장의 ‘우향우 정신’은 그냥 해보는 말이 아니었다. 아마도 포항제철의 앞날이 어두웠다면 몇 사람의 사표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박 회장은 진짜로 영일만에 뛰어들어 목숨을 버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순신 장군이 말한 ‘생즉사 사즉생’과 비슷한 게 아니었을까. 포항제철과 관련된 기록영화 ‘고난과 시련 그리고 영광’에는 박 회장이 “목숨을 걸고”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홍 : 1980년대는 포항이 성장가도를 달리던 시기였죠.이 : 포항제철이 포항과 광양에 양대 제철소를 짓고 그야말로 세계 굴지의 제철소로 도약하던 시기였다. 광양제철소는 박태준 회장의 결정과 의지로 만들어졌다고 보면 된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에 서거해 광양제철소 완공을 보지 못했다. 광양제철소 완공은 1992년 10월이었다. 입지 선정 때 광양에 하느냐, 아산에 만드느냐로 의견이 갈렸다. 아산은 배가 접안하기 어렵고, 수로 확보도 어려웠다. 광양제철소 건설을 결정한 건 전두환 대통령이다. 포항과 광양을 합쳐 철강 생산량 2,100만 톤을 달성했다. 포항제철 건설을 시작한 지 24년 6개월 만이었다. 박태준 회장이 박정희 대통령 묘소에 가서 이 사실을 말씀드렸다. 1970년대에 이어 1980년대에도 고도성장하면서 일면 조업, 일면 건설을 지속했다.홍 : 포항제철의 경제적 파급효과가 어느 정도였습니까?이 : 철강업은 국가기간산업이라 파급효과 역시 상당하다. 포항제철이 생기면서 자동차, 조선, 가전, 건설업 등 관련 사업도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한국의 경우 제철업이 석유화학 사업보다 관련 사업 파급도가 더 크다. 나는 40대에 이사가 됐고, 1985년에 상무, 1989년에 부사장이 돼 최선을 다하며 그 시절을 보냈다.홍 : 포항 시민들은 포항제철에 우호적이었나요?이 : 대부분의 시민들이 포항제철에 협조하고 박수를 보내며 응원했다. 독불장군으로 우리만 잘한 게 아니다. 포항시, 경상북도, 대한민국이 함께했다. 특히 광양제철소 건설은 동서 화합에도 일조했다. 국가 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포항제철의 역할을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있었다.홍 : 포항제철이 지역 발전에 기여한 내용도 궁금합니다.이 : 영세했던 협력업체들이 튼튼한 기업으로 성장했다. 철강산업공단도 형성되었다. 포항제철은 세계 철강업계에서 주목받았다.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이 신일본제철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회장에게 “우리도 포항제철과 똑같은 공장을 만들고 싶다”고 했더니 이나야마 회장이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다”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일자리가 늘어나면서 포항의 전반적인 생활수준도 좋아졌다. 다수의 협력업체들이 중견기업으로 도약했다. 조선내화는 내화벽돌을 만들었는데, 포항제철에 고열고압 벽돌을 납품하며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또한 포항 시내가 활기를 띠고, 교육열도 더욱 높아졌다. 포항제철은 박태준 회장의 의지를 발판 삼아 지역에 14개의 유·초·중·고등학교를 만들었다.홍 : 포항제철이 비약적 성장을 이룬 바탕에는 뭐가 있을까요?이 : 미국의 하버드대학, 스탠포드대학 MBA 과정에 포항제철의 성공 사례가 과목으로 개설됐다. 거기서도 우리의 성공을 인정한 것이다. 일본의 노무라연구소와 미쓰비시연구소에서도 포항제철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연구했다. 원료를 저렴하게 구입했고, 공사 기간을 단축했으며, 기술 습득이 빨랐던 게 이유였다. 초기에 열간압연(熱間壓延) 공장에서 빠르게 기술을 전수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박태준 회장의 일본 인맥과 유창한 일본어가 큰 역할을 했다. 원활한 소통을 통해 신뢰감을 준 것이다.홍 : 제철소가 지역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겠습니다.이 : 경상북도에서 조사한 걸 봤는데 포항제철에서 일하는 지역민은 30퍼센트쯤 되었고, 광양제철소에서는 호남 사람들이 40퍼센트가량 일했다. 그만큼 고용효과가 컸다. 비단 제철소에 근무하는 사람들만 아니라 관련 업체에서 일하는 사람과 그들이 드나드는 식당과 주점, 숙박업소 등을 모두 합하면 직간접적으로 포항제철과 관련을 맺고 있는 지역민들의 숫자는 엄청났다.홍 : 1970~1980년대 노동자들의 일상이 궁금합니다.이 : 퇴근 후 당구장에도 가고 음식점과 술집 등에서 여가 시간을 즐겼다. 포항제철에서 만들어낸 경제적 부를 포항시에서 소비하고 도시를 발전시켰다. 1970년대부터 효자동에 주택단지도 만들었다. 당시 포항제철 작업복은 철강과 같은 쇳물 색깔이었다. 그 옷이 포항 시내에 넘쳐났다. 그들이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풍경도 장관이었다. 작업복을 입고 술집에 가지 말라는 회사의 지시를 철회해달라고 업소 주인들이 부탁하기도 했다.홍 : 1980년대 정권의 경영 간섭은 없었나요?이 : 천만다행으로 전두환, 노태우 정권 때는 경제인을 건드리지 않았다. 포항제철의 인사나 경영 등에서 압력을 받은 적은 없다.홍 : 전설처럼 전해지는 ‘종이 마패’ 이야기가 궁금합니다.이 : 박정희 대통령이 박태준 회장을 믿고 국영기업체인데도 조달청이 아니라 포항제철에서 필요한 물품을 직접 구입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래야 물품을 구입할 때 중간에서 누가 장난을 치지 못하니까. 박태준 회장이 자율권을 가지고 경영할 수 있도록 해준 배려가 ‘종이 마패’에 담긴 뜻으로 볼 수 있다. 박 대통령 서거 후에는 외압을 막으려고 박태준 회장이 정계에 진출했다. 정치를 하겠다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포항제철을 바깥의 압력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정계 진출이었다.포항제철 건설 초기에 회사를 외압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역할을 한 ‘종이 마패’는 박태준 회장의 메모에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로 서명한 문서다. ‘포스코 50년사’에는 “이 한 장의 종이가 제철소 설비와 원료를 구매할 때 정치자금이나 리베이트(rebate)를 요구하는 이들을 막아주는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는 대목이 나온다. 박태준 회장의 지갑 속에 늘 간직돼 있던 종이 마패는 현재 포스코역사관에 보관 중이다. 홍 : 한 직장에서 24년을 보냈습니다. 어땠나요?이 : 내 인생의 절정기였다. 과장 때 박태준 회장에게 발탁돼 차장, 부장, 이사, 상무, 부사장으로 평균 3년마다 진급했다. 마흔여덟 살에 부사장이 되었다. 전례가 드문 초고속 승진이었다. 모든 외압은 박태준 회장이 막아줬다. 내 사번이 39번이다. 포항제철의 역사가 시작될 무렵 입사했다. 과장 때인 1973년부터 시작해 1993년까지 만 20년을 임원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내가 유일할 것이다. 모두 박 회장의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포항제철에서 나오던 ‘쇳물’이란 월간지에 박태준 회장의 발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우스개처럼 글을 써서 호되게 야단을 맞은 것 외에는 어려움 없이 긍지를 가지고 일할 수 있었다.홍 : 1980년대 직장 문화는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 같습니다.이 : 그때는 죽기 살기로 일했기 때문에 오전 근무만 하는 토요일에 회식을 했다. 그런데 회식할 때도 반드시 비상연락망은 가동시켰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간을 가리지 않고 박태준 회장이 호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는 휴대전화가 없던 시대라 호출기를 차고 다녔다. 그러니 회식 때도 마음 놓고 술을 마셔본 적이 없다.홍 : 요즘 젊은 세대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이 : 우리 세대는 회사와 나라의 발전에 힘을 보태고 싶다는 헌신감과 사명감으로 일했다. 그런데 이제는 많이 달라졌다. 지금 젊은이들은 다양성을 추구한다. 우리 세대는 눈앞의 목표를 보고 달렸는데, 이제는 다양한 길이 열려 있는 것 같다. 내 자식들만 봐도 그렇다. 돈벌이만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개성을 발휘하는 시대로 가고 있다. 이런 풍조가 세계적인 흐름 같기도 하다.이대공1941년 포항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포항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20대 중반에 서울·인천에서 석유곤로와 야구 배트 등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했다. 1967년 포항으로 돌아와 양송이 재배·가공업을 하다가 1969년 포항제철에 입사해 홍보실장, 비서실장, 총무이사, 포항공대 건설본부장, 부사장을 거쳤다. 포항제철 건설 시기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24년간 제철보국의 신념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포항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이사장, 아름다운재단 이사,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포항지역회 이사장, 경상북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포항지역발전협의회장 등을 맡았으며, 현재 재단법인 애린복지재단 이사장으로 있다.대담·정리 : 홍성식(경북매일신문 기자) /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8-16

“인공지능·빅 데이터 활용에 인권·공정성 지켜야”

모바일과 SNS(사회관계망 서비스), IOT(사물인터넷)와 AI(인공지능) 등을 통해 수집 분석한 빅 데이터가 사람의 생각을 읽고 미래를 예측한다, 데이터가 돈이 되고 곧 권력이 되는 시대다. 조지 오웰의 1984가 현실이 되고 빅 브라더는 우리 생활 현장 깊숙이 침입했다.20여 년 빅 데이터 연구와 효용에 천착해 온 디지털 점쟁이 박한우 영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50)는 “이제 데이터 복지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라며 인공지능과 빅 데이터 활용에 인권과 공정성을 지켜야 한다고 주창했다. 영남대 한복판 낡은 문과대학 연구실에서 컴퓨터 사회과학을 하는 그는 정작 모바일보다 데스크 탑 컴퓨터가 편하다.- 2020 도쿄올림픽에서 한국여자배구가 세계 4위 터키를 꺾은 것도 빅 데이터가 힘이 된 듯하다. 선수 출신도 아닌 감독 라바리니는 오로지 데이터를 철저히 분석함으로써 먼저 나를 알고 상대를 파악해 내 강점을 최대한 활용해 상대의 약점은 파고들었다. 빅 데이터의 이론이 스포츠를 통해 본격 속살을 드러낸 느낌이다.△높이뛰기 선수 우상혁이 데이터 분석을 통해 한국신기록을 자신했다는 인터뷰를 봤다. 이번 도쿄 올림픽에서 빅 데이터의 이용은 더욱 일반화됐지만 이미 미국 프로야구에서 일찍이 빅 데이터의 활용이 증명됐다. 프로야구 선수들이 장타를 치려면 공을 높이 쳐야 한다는 것이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였고 실제 홈런 선수들의 타격 방향이 뜬공으로 바뀌고 있다.- 빅 데이터의 이론이 우리 사회에 본격 등장한 지 10여 년이 지났다. 박 교수가 처음 빅 데이터 이론을 펼쳤을 때와 지금 우리 사회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비교해 달라.△ 개인의 소비생활에서부터 기업이나 공공기관에서 생산해 내는 엄청난 데이터들을 빅 데이터라 했다. 그런데 그 방대한 데이터가 형태에서 음성과 문자를 넘어 사진과 동영상 관계망 등 지금까지는 무시해왔던 사람들의 사소한 행위들까지 모두 데이터화하고 있다.이제 빅 데이터는 스포츠에서뿐 아니라 선거와 재난관리, 기업의 경영과 영업 마케팅 도시 도로와 개발 환경 등 소용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국가와 기업의 정책 수립과 경영 전략에서 의사소통과 결정 등 모든 방면에서 빅 데이터가 동원되고 있다. 심지어 개인의 DNA 유전자 생체 정보까지도 데이터가 되고 있다.- 빅 데이터의 개념이 달라진 것인가. 이에 따른 사회적 대응 방안이 필요할 것 같다.△ 개념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확장된 셈이다. 데이터의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많아졌고 다양해지고 특히 비정형화한 데이터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개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모든 행위와 심지어는 생각 까지도 데이터화 되고 있는 것이다. 신용카드를 사용하면서 자신의 사용 내역이 데이터로 수집돼 소비 패턴이 분석되고 기업의 판매마케팅에 활용되기도 하고 생산방식에 이용되기도 한다. 분석 방법이 인공지능과 기계 학습을 통해 인과성을 더욱 정확하게 밝혀낼 수 있게 됐다. 예측력이 높아진 것이다. 유 튜브를 볼 때 내 생각을 미리 읽어 내가 관심 있는 것, 보고 싶은 것만 보게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확증편향을 심화시키는 것이다. 빅 데이터를 통해 인간의 욕구를 더욱 분명하게 잘 파악하고 있다. 그만큼 맞춤화되고 정교해지고 정밀화했다. 인간의 욕구를 심리학에서 분석하던 방식이 빅 데이터에 적용된 것이다.- 무서운 이야기다. 정보의 수집 방법도 진보하고 다양화되고 있다고 생각해도 되겠나. 새로운 문제점이 생겨날 것 같은데.△사람들의 인식과 행동에 관련된 모든 신호들이 모두 정보가 되어 수집되고 있다. 사람들의 이동과 통화 문자 소셜미디어 인터넷 검색 트랜드 전자상거래 등 모든 데이터들이 IOT(사물인터넷) ,각종 센서와 SNS를 통해 수집되고 분석되고 있다. 모바일이나 인터넷에서 정보에 접근하기 위해 ‘동의’를 꾹 누르는 행위가 그런 수집을 가능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다.이 과정에서 데이터 수집과 분석 과정에서 개인의 인권 침해는 없는지, 또 공정성이 침해되지는 않는지 같은 감시가 필요하다. 사회적 정의와 공공 이익을 위해 빅 데이터가 활용되어야 한다.- 대구에서 코로나19가 창궐하던 지난 해 2월 소셜 미디어에서 뉴스가 유통되는 방식을 빅 데이터로 분석한 걸로 알고 있다. 어떤 결론을 얻어냈나. 또 다른 영역으로 확장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재난과 스포츠는 빅 데이터의 입장에서는 즉각 대응이라는 점에서 매우 닮았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확산이라는 재난 사태에서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가장 빨리 상황을 처리할 수 있느냐는 것을 빅 데이터로 분석했다.당시 사람들이 어떤 문제에 집중하는지를 알 수 있었고 거기에 맞춘 대응책도 나왔다. 또 코로나19 사태 당시 사용 언어를 빅 데이터로 분석한 결과 남성과 여성의 언어가 다른 점도 밝혀냈다. 남성과 여성의 코로나를 인식하고 대응하는 방식에서 차이가 나는 것을 확인했다.이젠 부동산 시장에서도 그냥 ‘역세권’이라면 ‘역에서 몇 분’이라거나 ‘몇 m’라는 식의 물리적 아날로그식 개념에서 휴대폰 주파수 분석을 통해 유동인구를 집계 분석해 지역 한계를 분명하게 특정하게 됐고 이를 선거운동 등에서도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빅 데이터는 통계와 비슷한 것 같다. 근본적인 차이점은 무엇인가.△ 통계는 기존의 강한 신호를 바탕으로 분석해서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빅 데이터는 ‘약한 신호’를 놓치지 않고 그 맥락을 찾아내 효과를 측정하는 것이다.세렌디피티(serendifity)라는 ‘느닷없는’ ‘약한 정보’까지도 수집해 이를 알고리즘을 통해 객관화시키는 것이다. 데이터 간의 연관, 관계 분석을 통해 데이터의 맥락을 짚어내는 것이다. 그만큼 정확성을 높이는 것이 빅 데이터다.- 통계 기법을 활용한 여론조사가 신뢰도를 의심받고 있다. 빅 데이터가 그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여론조사는 응답률이 5%도 되지 않는다. 결국 답변할 사람만 답변한다는 말이다. 이는 누가 어떻게 답하느냐는 것을 어느 정도 조정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일 수 있다. 무작위로 샘플을 모집하고 또 그 대상들이 성실히 답변하는 식의 여론조사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응답자에 가중치를 적용하고 조사방법과 통계 분석 처리 방법과 기술이 아무리 과학적이고 정확해도 그 답변 자체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면 조사 자체도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이다.데이터 자체가 정크 데이터일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빅 데이터는 정보 자체가 정직하다. 빅 데이터의 정보는 생산자가 의도하지 않지만 갈수록 다양화되고 비정형화되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생산하는 정보가 데이터가 되어 기업들이 이익을 가져가고 있지만 생산자인 개인에게는 전혀 이익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빅 데이터에 대한 활용이 커질수록 데이터 생산자에 대한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 이제는 국가와 사회도 데이터 복지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인문학자인 내가 지금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데이타 복지’다. 빅 데이터와 정보화사회가 발전할수록 개인이 생산자가 되고 기업들은 그 정보들을 수집해서 이익을 창출하고 있다. 거기에 대한 이익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 대통령직속 정책기획위원회에 “데이터 생산자에게 이익의 일부를 돌려줘야 한다”는 내용의 건의서를 올린 것도 그 때문이다.- 데이터 복지라니, 생소한 개념이다. 성과는 얻어냈나.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개인이 사용한 카드나 모바일이 생산한 데이터 정보를 금융권이나 통신사 배달앱, OTT 등이 수집 분석해 이익을 얻었으면 고객에게 환원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그랬더니 “의의는 있으나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만큼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며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식의 답변이 돌아왔다. 법 규정이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문화지체현상을 보여준 것이라 생각한다.앞으로는 개인은 더욱 분절화 되고 고립이 심화되며 파편화될 수 있다. 기업이 생산하면 개인들이 소비했던 것이 전통 시장의 일상 모습이었다. 그러나 빅 데이터에서 개인이 데이터의 생산자가 되고 기업이 데이터의 수집을 통해 수익을 가져가는 것이다.지금 전화에서 음성 통화 외에 문자는 모두 무료로 제공되고 있다. 이것은 경쟁자인 카카오톡이나 SNS 소셜 미디어의 등장에 따른 경영전략일 수도 있지만 그 문자 메시지는 데이터화되어 사업자들에게 이익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컴퓨터 소프트웨어 기술에서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한 이유다.-우리나라는 인터넷 강국이라 했고 한 때는 소프트웨어를 활용한 정보화 분야에서 세계적인 선도주자라고 했다. 지금도 그 명성이 유효하나.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선진국으로 진입했지만 정보화에서는 오히려 후진국보다 뒤쳐진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일종의 문화 지체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정보화 사회 초기 산업화에는 유선(케이블)이 성패를 결정했다. 우리나라가 강국일 수 있었다. 그런데 유선에서 무선으로 정보화 산업이 발전하면서 후발 국가들이 무선으로 곧바로 진입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가 된 것이다. 우리는 유선에서 무선으로 환승하는 데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지금 정보화는 데이터를 중심으로 지능화하고 있다.- 하드웨어에서 강점을 보였으나 소프트웨어에는 약하다는 이야기로 들린다.△우리나라는 정보화에서 빅 트랙 플렛폼 기업에 너무 종속된 면이 있었다. 세계무대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인문사회학적 접근이 필요한 이유다. 정보에서도 개인의 리터러시(문해력)가 약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해결해야 할 과제다. □ 박한우(50)영남대 언론정보학과, 디지털융합비지니스대학원, 동아시아문화대학원 교수영주에서 초교 3학년때 대구로 전학와서 성광고와 한국외국어대와 서울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지능정보화사회진흥원(NIA)에서 연구원으로 있다가 IMF때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네덜란드 왕립 아카데미 연구회원을 거쳐 2003년 영남대에서 언론학부 교수로 있으면서 컴퓨터공학자들과 빅데이터 이론을 비롯 뉴미디어언론학을 강의하고 있다. SSCI저널에 논문 100편 이상 게재. 30대에 이미 논문 피인용수와 구글 검색에서 디지털정보 관련 국제 학회로부터 인정받은 빅 데이터 권위자./이경우 편집위원

2021-08-16

평화로운 고래 서식지였던 영일만의 옛이야기 복원해야

구룡포의 포경선 선원이었던 이영식, 김정환 씨와 고래 중매인이었던 최원복 씨의 이야기를 씨줄 날줄로 엮어보면 1950∼1960년대 구룡포 포경업의 윤곽이 눈에 들어온다. 그 역사를 좀 더 명료하게 보기 위해 또 한 사람을 만났다. 구룡포 포경선 선주인 강두수 씨의 아들 강신규 (75)씨다. 강신규 씨의 증언을 통해 구룡포 포경에 관한 의미 있는 내용을 접할 수 있었다.첫째, 1919년생인 강두수 씨는 일제강점기 때 구룡포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던 수산회사에서 근무하다가 광복 후에 그 수산회사의 배를 넘겨받아 포경업을 시작했으며 포경선 3척과 꽁치잡이배 2척을 보유했다.둘째, 1970년 3월 12일 포경어업협동조합이 작성한 포경선 현황에 강두수 씨 소유의 제9영어호(永漁號)와 제13영어호가 있지만 이후 자료에는 보이지 않는다. ‘한국포경사’에는 “1972년에는 제9영어호 및 제13영어호가 퇴출하였다”(435쪽)고 나온다. 하지만 실제로는 포경이 금지될 때까지 제9영어호와 제13영어호를 포함해 5척이 포경선이 고래를 찾아 계속 출항했다. 영어호 외에도 저인망선 등을 개조해 포경선으로 활용한 것이다.셋째, 강두수 씨는 자신 소유의 해승호(海勝號)를 폐선할 1970년 무렵에 일본에서 철조선 도입을 검토했다. 크고 성능 좋은 철조선으로 먼 바다에 나가 더 많은 고래를 포획할 것인지, 아니면 기존의 목조선으로 연근해에서 밍크고래 포획에 집중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다가 후자 쪽을 선택했다.넷째, 포경어업협동조합이 작성한 ‘포경선별·종류별 고래 포획 두수 추이’를 보면 제9영어호와 제13영어호는 밍크고래를 1963년 10두·12두, 1964년 11두·13두, 1965년 9두·11두를 각각 포획했다(위의 책 389쪽). 이 통계는 신뢰성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포경선이 이 정도의 고래를 포획했다는 것은 상식과 거리가 멀다. 포경선이 한 달 평균 한 마리 정도의 밍크고래를 포획해서는 포경선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강신규 씨도 당시 포경선이 출항하면 적어도 밍크고래 한 마리는 포획했다고 말했다.‘한국포경사’에서 제시한 자료와 강신규 씨 증언 사이에 왜 이러한 괴리가 있는 것일까? ‘한국포경사’에서도 “어획고 통계는 그 정당성을 기하기 어려운 것이나 우리나라 포경업에서 고래 포획 통계도 예외는 아니다”(454쪽)라고 하며 이 문제를 짚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포경업을 가장 장기간 경영하였고 1971년 5월부터 1975년 7월까지 포경어업협동조합 조합장을 역임한 백용주 씨의 말에 의하면 통계상의 포획고가 실제 포획고보다 훨씬 적었다. 그가 조합장으로 취임하여 고래 포획 통계를 조사해보았더니 그것이 ‘엄청나게’ 적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과소평가된 이유는 앞서 몇 가지가 거론되었지만 그 가장 큰 이유는 장생포에 양륙(揚陸)되어 그곳에서 판매된 것만 보고되었기 때문이라고 백씨는 말하였다. 포획된 고래는 장생포뿐만 아니라 구룡포, 죽변, 포항 등지에서도 양륙되어 판매되었고 부산에도 소량이 양륙되었다고 한다. 박구병, 위의 책, 454쪽고래 포획 통계는 이러한 정황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다섯째, 강신규 씨는 영일만에 밍크고래가 많았던 것은 크릴새우 덕분이라고 했다. 가을보리가 익어서 고개를 숙이는 5월, 대량의 크릴새우가 영일만으로 유입되었고, 먹이사슬에 따라 밍크고래도 따라왔다는 것이다. 이때 호미곶 인근의 대동배·흥환·발산 주민들은 많은 크릴새우를 어획해 상당한 소득을 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영일만에 제철 공장이 건립되면서 해안에 각종 구조물이 구축되었고 이 때문에 크릴새우도 밍크고래도 영일만으로 들어올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제철 공장이 들어서기 전에 영일만에 밍크고래가 많았다”고 한 김정환 씨의 증언과 맥을 같이한다.1947년 구룡포 연근해에서 귀신고래 포획돼강신규 씨는 한 장의 사진을 건넸다. 1947년 12월 24일 영어호가 39자(11.8m) 귀신고래를 포획한 기념사진이다. 당시에도 귀한 고래였는지 마을 주민 상당수가 고래 주변에 모여 있다. 한국계 귀신고래는 1965년 한반도 연안에서 5마리가 잡힌 뒤 자취를 감췄다. 2008년부터 국립수산과학원이 귀신고래 사진을 찍으면 500만 원, 혼획(混獲)되었거나 좌초한 개체를 신고하면 1천만 원을 포상금으로 주지만 수령자는 아무도 없다. “귀신처럼 멕시코로 간 ‘한국계 귀신고래’”, ‘한겨레신문’2012. 4. 23. 참조울산 고래박물관에 게시된 ‘우리나라 귀신고래 발견·포획 수량’을 보면 1911년부터 1964년까지 총 1천338마리의 귀신고래가 발견·포획되었다. 특이한 것은 이 자료에 따르면 1933년에 한 마리가 발견·포획되고 15년 후인 1958년에 한 마리가 다시 발견·포획될 때까지 단 한 마리의 귀신고래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1947년 영어호가 포획한 귀신고래는 이 자료에도 누락되어 있는 것이다. 구룡포 연근해에서 귀신고래가 포획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이 사진은 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포항의 포경업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포항시의원을 지낸 최일만(84) 전 죽도시장 상인연합회장을 만났다. 최일만 전 회장은 죽도시장의 형성·발전과 삶의 궤적을 함께해온 죽도시장의 산증인이다. 특히 한때 포항-시모노세키 간 수출선을 운영할 정도로 수산업을 꽤 크게 하였고, 이 분야에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갖고 있다.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제강점기에 밍크고래의 근거지였던 포항은 6·25전쟁 후에 포경업이 하향세를 보이다가 1950년대 말에는 자료에서 자취를 감춘다. 최일만 전 회장은 실제로 1950년대에 포항에서는 포경업이 인기가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수요 부족을 꼽았다. 당시 포항에서 고래고기가 유통되기는 했지만 수요가 많지 않았고, 고래고기를 보관할 수 있는 냉동 시설이 부족해서 포경업은 별 매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구룡포는 포경업이 지속되고 있었고 장생포는 포경업이 계속 커지고 있었기에 포항에서 포경선을 계속 보유해야 할 이유가 사라진 것으로 볼 수 있다. 1,300만 년 전 고래 화석이 발견된 포항포항은 고래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2005년에는 1,300만 년 전 돌고래 화석이 국내 최초로 포항에서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다. 이 화석을 분석한 연구 결과는 ‘한국에서 발견된 최초의 돌고래 화석’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국제학술지 ‘커런트 사이언스(Current Science)’에 실렸다. 또한 전(前) 전남대학교 한국공룡연구센터 연구원 민재웅은 “우리나라에서 현재까지 고래 화석[수염고래(Mysticeti), 이빨고래(Odontoceti)]은 포항분지 연일층군에서 주로 발견되고 있다”고 했다. ‘포항분지 두호층에서 발견된 이빨고래 화석 연구’, 전남대 석사학위 논문, 2013고래와 관련된 대부분의 논문이 장생포를 무대로 발표된 반면, 포항과 관련된 고래 논문은 화석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 이채롭다.지구상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래 사냥 그림인 반구대 암각화는 약 7,000년 전 신석기시대에 제작되었다. 포항에서 발견된 고래 화석은 1,300만 년 전 신생대 시기로 추정된다. 이런 사실 앞에서 포항은 고래 서사를 어떻게 만들고 전개해야 할까? 흘러가버린 옛이야기로 치부하고 말 것인가 아니면 역사적 사실을 복원하고 미래지향적으로 계승할 것인가.밍크고래의 평화로운 집단 서식지였고 귀신고래와 큰 고래들이 지나다녔던 영일만. 포항은 그러한 역사적·문화적·생태적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하기 위해서라도 고래 서사를 깊이 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포항의 고래 관련 자료를 폭넓게 조사하고 관련 인물에 대한 구술 채록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일제강점기 때의 자료를 확보하려면 일본에 있는 자료를 찾아보는 노력도 필요할 것이다. 구술해줄 생존자는 이제 몇 명 남아 있지 않다. 시간이 많지 않다.필자 : 김도형(THE OCEAN 편집위원)

2021-08-11

신라왕실·귀족 화려한 생활상 한눈에

박물관을 찾는다는 건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인식하고 미래를 추측하는 행위에 가깝다. 우리가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수백 년 전 혹은, 수천 년 전 사람들의 생활상을 미루어 짐작하며 살피는 게 바로 박물관 방문이 아닐지.동궁과 월지는 7세기에 만들어졌다. 21세기를 사는 누구도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했다. 그러니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다.“통일신라시대 사람들은 어떤 걸 먹고,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을까?”국립경주박물관 안에는 월지관이 있다. ‘코로나19 사태’에다가 폭염으로 아스팔트가 녹아내릴 정도의 무더위였지만, 기자가 경주를 찾은 7월 말에도 월지관을 포함한 경주박물관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방학을 맞은 아이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알려주고 싶은 아버지와 어머니, 신라의 유물에 관심을 가진 역사학도들, 거기에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서 서라벌 사람들의 과거 행적을 살피는 연인들까지 남녀노소 불문이었다.이들을 반겨 맞는 월지관은 어떤 곳일까. 경주시청 문화관광 홈페이지의 설명부터 확인해보자.“월지관은 경주 동궁과 월지(안압지)에서 발견된 약 3만 점의 통일신라시대 문화재 중에서 엄선한 1천100여 점의 문화재를 주제별로 전시해 통일신라 문화, 특히 왕실의 생활문화 전반을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월지는 신라 동궁 안에 있던 인공 연못. 조선시대 이래 오랫동안 안압지로 불렸으나 신라 사람들은 월지라고 했다. 문무왕 14년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월지관에는 용면문와, 금동판불상(보물 제1475호), 금동초심지가위(보물 제1844호) 등 신라 왕실과 귀족의 화려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문화재들이 전시돼 있다.” 청아한 연꽃… 경주박물관 주위 풍경 더위 식혀줘자가용이 아닌 대중교통으로 경주를 찾는 여행자도 월지관이 자리한 국립경주박물관을 쉽게 찾을 수 있다. KTX 기차가 멈추는 신경주역에선 버스로 25분, 경주고속버스터미널과 시외버스터미널에선 시내버스를 타고 10분 남짓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 동궁과 월지, 그리고 경주박물관이다.만약 버스에서 내렸다면 박물관에 입장하기 전 동궁과 월지부터 둘러보고, 인근 연못에 하얗게 무더기로 피어있는 연꽃과 만나보기를 권한다. 쏟아지는 여름 햇살과 폭염에 등줄기로 땀이 흘러내릴 수도 있지만, 연분홍과 하얀색이 하모니를 이루는 청아한 연꽃의 자태는 짜증스런 더위를 식혀주기에 충분하고도 남는다. 연꽃은 더러운 진흙 속에서도 특유의 생명력과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다. 그렇기에 동양은 물론 서양에서도 예부터 연꽃을 귀하게 취급해왔다.신라는 부정할 수 없는 ‘불교왕국’이었다. 이를 반영하듯 동궁과 월지 주변에 환하게 꽃을 피운 연꽃은 불교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관련된 ‘두산백과’의 부연이다.“불교의 출현에 따라 연꽃은 부처의 탄생을 알리려 꽃이 피었다고 전하며, 불교에서의 극락세계에서는 모든 신자가 연꽃 위에 신(神)으로 태어난다고 믿었다. 인도에서는 여러 신에게 연꽃을 바치며 신을 연꽃 위에 앉혔다. 불교에서도 부처상이나 승려가 연꽃 대좌에 앉는 풍습이 생겼다. 중국에서는 불교 전파 이전부터 연꽃이 진흙 속에서 깨끗한 꽃이 달리는 모습을 속세에 물들지 않는 군자의 꽃으로 표현했고, 종자가 많이 달리는 현실을 다산의 징표로 하였다. 중국에 들어온 불교에서는 극락세계를 신성한 연꽃이 자라는 연못이라고 생각하여 사찰 경내에 연못을 만들기 시작했다.”2021년 속세의 무더위를 ‘내세의 꽃’이라 불리는 연꽃을 바라보며 잠시잠깐 식혔다면 이제 월지관으로 갈 차례다.모처럼 경주를 찾았으니 당연지사 월지관 지척의 신라역사관과 신라미술관, 옥외전시장과 어린이박물관도 돌아볼 기회를 놓칠 수 없다.이 모든 전시장을 품에 안은 경주박물관을 찾은 날은 한낮 기온이 섭씨 35도를 오르내렸다. 그야말로 땡볕이었다. 그럼에도 입장하는 관람객들은 QR코드 체크와 체온 확인 등을 질서 있게 거치며 코로나19 방역에 적극 협조하고 있었다. 토기와 기와… 신라 왕실의 문화를 만나는 시간월지관은 개방감을 주는 2층 형태로 설계됐다. 자연스런 동선을 따라 1층을 거쳐 2층으로 가면 아래층 중앙부가 훤히 보여 시원스러운 느낌을 준다.동궁과 월지 발굴·조사에선 많은 수의 토기가 출토됐다. 그렇기에 월지관에선 다양한 형태의 토기를 확인할 수 있다.실용성은 물론 수려한 조형미까지 두루 갖춘 통일신라시대의 토기를 보고 있으면 ‘1천200~1천300여 년 전에도 저런 예쁜 도자기에 물과 술, 음식을 담아 먹었다니 신라인의 생활수준은 지금에 비해도 결코 낮지 않았네’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그렇다면 신라의 토기는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져 어떻게 유통된 것일까?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펴낸 책 ‘유적과 유물로 본 신라인의 삶과 죽음’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이런 문장이다.“삼국시대 이후 토기의 생산과 공급은 왕실 및 중앙 귀족에 의해 관리됐으며 전업공인 집단에 의해 대량생산이 이루어졌다. 경주 손곡동·물천리 토기 가마군은 왕실에 의해 이루어진 대량 생산 체제를 보여주는 대표적 유적이다. 이 지역은 토기를 대량생산 할 수 있는 환경적 요소를 갖추고 있다. 토기 가마의 입지는 충분한 연료 공급, 토기 제작을 위한 작업 공간, 가마 축조를 위한 적합한 지형(고도·경사도·풍향 등), 소비자와의 교통로 등 복잡한 요인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중략) 경주 지역에서는 5~6세기 손곡동·물천리 토기 가마군을 중심으로 왕실과 국가 주도의 대규모 생산 활동이 이뤄졌다. 그 후 7~8세기 이후에는 북쪽으로 화산리 가마군, 서남쪽으로는 화곡리 가마군 등 다원화된 거점을 중심으로 생산 활동이 있었고, 여기에서 생산된 토기와 기와가 왕경에 공급된 것으로 이해된다.”앞서 언급했지만, 월지관엔 동궁과 월지에서 발견된 유물 1천 점 이상이 전시돼 있다.신라 장인의 빼어난 조각기술을 실감하게 해주는 불상(佛像)에서부터 서라벌 사람들이 사용하던 숟가락과 당시 건물에 달려 있던 문고리까지. 그중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이 있으니 바로 기와다.꽃무늬를 새긴 것에서부터 도깨비의 형상을 조각한 것까지 신라의 기와가 보여주는 모습은 다채롭고도 인상적이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1천 년 전 기와를 만든 신라인의 숨결까지 느껴지는 듯했다.‘한국의 박물관: 기와’라는 책에선 통일신라시대 기와에 관한 서술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설명을 통해 월지관에 전시된 기와의 아름다움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추정해보는 것도 흥미롭다.“통일신라시대의 기와는 7세기 후반 고신라의 전통을 바탕으로 고구려 및 백제의 영향과 당나라의 자극에 힘입어 폭넓은 복합과정을 거치면서 다양한 양식변화를 낳고 있다. 통일신라 초기는 우리나라의 와전사(瓦塼史·기와의 역사)에 있어서 크나큰 전환점이 되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각각 특색 있게 전개돼 온 삼국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성당문화(盛唐文化)의 외연적인 자극에 따라 유래 없는 복합과정을 거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중략) 월지에서 출토된 ‘조로2년(調露二年)’명의 보상화문전의 예로써 통일신라의 문화는 신라의 통일과 함께 급속도로 발전하였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국토의 확장에 따르는 국력의 신장은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토목공사를 일으키게 하였고 그중에서도 궁전, 사찰 등 목조건축의 성황과 이에 따르는 장식성의 강조로써 지붕을 치장하는 일이 크게 일어나게 된다.” 신라 나무배도 월지관의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미려한 형상으로 밥상이나 술상 위에 오른 토기를 사용했고, 예술작품에 가까운 기와로 장식된 건물에서 삶을 영위했던 신라의 왕과 귀족들.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호사스러움은 화려한 석조 건축기술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대 캄보디아 크메르 왕조나 중세 유럽의 귀족들도 부러워할 정도였을 것 같다.월지관에서 빼놓지 않고 살펴봐야 할 출토 유물 중엔 목선(木船·나무로 만든 배)도 있다. 박물관 1층 가운데 전시된 것이다.이 배가 발견된 것은 1975년 4월. 1천 년 이상 연못 속에 꼭꼭 숨겨져 있던 목선은 월지의 중도와 소도 사이에서 뒤집힌 채 모습을 드러냈다. 이걸 옮기는 건 쉽지 않은 문제였다.심하게 부식돼 스펀지와 유사한 상태였던 목선은 3개월의 이동 준비기간을 거쳐 지금으로부터 46년 전 햇볕 뜨겁던 여름날 20여 명 인부들에 의해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그 와중에 선체가 두 조각으로 부러지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며.어쨌건 이런 과정을 거쳐 한국에서 발견된 목선 중 가장 오래 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동궁과 월지의 나무배는 현재 월지관 환한 조명 아래서 21세기 사람들과 만나고 있다. 1천 년 전 그 배에 올랐던 신라 사람들은 지금의 이런 상황을 상상이나 해봤을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8-11

아버지의 포도클립으로 대박… “꿈이 생겼어요”

지방에서 서울에 정착한 청년들의 꿈은 무엇일까. 어떠한 상황을 바라고 서울로 향하는 것일까. 처음 서울에 올라온 청년들은 부모님에게서 독립했다는 자유로움과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뿌듯함을 가진다. 휘황찬란한 서울의 밤거리를 돌아다니기도 하고, 고단한 일을 마치고 작은 자취방에서 시원한 맥주 한 캔을 기울이기도 한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맞닥뜨리는 것은 ‘생활의 어려움’이다. 한 달마다 찾아오는 서울의 살인적인 월세와 각종 공과금은 차라리 보지 않았으면 한다. 몇푼 벌어보겠다고 새벽부터 지하철과 버스에 몸을 맡기고 출근했지만, 퇴근은 요원한 일이다. 영천에서 ‘포도클립’을 생산하는 이소민(30) 대표도 그랬다. “영천에 내려온 이유요? 다들 비슷하지 않을까요? 서울에서 살기 힘들어서죠. 얼마되지 않는 월급에 일은 힘들죠. 서울에서 일하는 동안 휴가를 제대로 즐기지도 못했어요. 하루에 2~3시간 이상을 잤던 기억이 거의 없어요. 영천에 와서는 너무 좋아요. 일단 자는 시간이 늘었거든요.(웃음) 월급으로 따지면 들어오는 돈도 늘었구요. 영천에 내려오기를 정말 잘한 것 같아요.”이소민 대표는 특이한 이력을 가졌다. 20대와 30대 청년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꿈꿨을 연예인 매니저 출신이다. 10대 청소년들의 장래희망 1위라는 ‘연예인’의 화려함을 책임지는 사람들 말이다.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 만한 연예인이 소속된 매니지먼트 회사에서 근무했던 이소민 대표다. 5년 이상의 매니저 생활로 영천에 내려올 즈음엔 팀장으로 승진도 했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부터 예능 방송과 콘서트를 좋아했기에 일하는 것 자체가 무척 행복했다고 한다. 유명 연예인들을 직접 눈앞에서 보고 함께 대화도 할 수 있으며, 그들을 키운다는 것 자체가 보람이었다.“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너무 힘들었어요. 아까 말했듯이 잠자는 시간도 거의 없었구요. 스케줄이 많다보니 몸이 견디지를 못했죠. 생활비도 문제였어요. 대부분이 아시겠지만, 매니저라는 직업은 급여가 많지를 않아요. 최저임금은 꿈도 못꾸죠.” □ 아버지의 포도클립이 딸의 포도클립으로2019년 영천에 내려온 이소민 대표. 영천은 그녀의 고향이었다. 부모님도 계시고 5살 터울의 여동생도 영천에 있었다. 다른 귀농·귀촌의 청년들과는 다른 출발이었다. 하지만 할 것이 마땅하게 없었다. 특히, 자신이 매니지먼트 회사에서 길러왔던 다양한 역량을 발휘할 곳이 전혀 없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다 ‘포도클립’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이소민 대표의 ‘포도클립’은 지난 2016년 아버지가 개발한 것을 개량한 제품이다.‘포도클립’은 포도를 재배할 때 줄기를 굵은 철사에 고정하는 클립이다. 이 대표의 말에 따르면, 줄기가 있는 과일을 재배하기 위해서는 클립이 필수라고 한다. 농업 용어로 말하면 ‘포도순 걸이’다. ‘포도클립’을 사용하면 포도순이 Y자 형태가 되기 때문에 포도가 예쁘게 자라고 수확도 매우 쉽다. 그런데 기존의 ‘포도클립’은 1회용인 경우가 많고, 재활용하면 금방 고장 나서 다시 사야 한다.“사실 도시에 살면 포도클립이 무엇인지 잘 몰라요. 저도 아버지가 포도클립을 개발하셨지만 잘 몰랐어요. 영천에 와서 알았죠. 영천은 포도농업이 매우 발달해 있고,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샤인머스켓 열풍이 불어서 관련 농사를 짓는 분들도 많아요. 아버지가 개발한 포도클립을 개량시켰죠. 마침 서울 생활이 너무 힘든 상황이어서 아버지와 주변 분들에게 조언을 받으며 조금씩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나가기 시작했어요. 만약 아버지가 없었으면 불가능했겠죠. 지금도 아버지가 설계 같은 것은 대부분 해주시거든요.”이소민 대표와 아버지의 포도클립은 지난 2018년 후반기에 세계여성발명대회에서 금상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 경북경제진흥원의 공모사업에 당선되면서 경제적 지원까지 받을 수 있었다.“매니저 생활이요? 그때는 힘들었는데, 지금은 많이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매니저들은 연예인의 방송 출연을 위해서 많은 영업을 해야 하거든요. 얼굴에 철판은 기본이죠. 포도클립 영업도 마찬가지에요. 더욱이 포도클립을 이용하시는 분들이 대부분 60대 이상의 고령자세요. 여타의 제품 홍보하는 것과는 다르죠. 그런데 연예인 매니저 홍보보다는 오히려 헐렁한 스케줄이죠. 특이한 것만 빼면요. 도시라면 대부분 영업시간이 정해져 있지만, 이곳에서는 달라요. 아침 6시라도 전화가 와서 ‘지금 갈게’하면 그때가 일이 시작되는 시간이고, 밤 8시라도 ‘내일 아침에 클립 끼워야 하는데’하면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거든요. 어떻게 보면 ‘막무가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게 시골 영업의 매력이죠.”그렇다면 포도클립을 파는 이소민 대표의 매출은 어떻게 될까. 사실 포도클립의 단가는 그렇게 높지 않다. 작은 포도클립은 개당 9원 정도고, 큰 포도클립은 개당 15원 정도에 팔린다. 2천 개를 팔아야 3만원 정도의 매출이 발생하는 셈이다. 그래서 궁금증이 일었다. 영천에 내려온 이소민 대표는 먹고 살만한 상황일까.“서울에 있을 때보다 훨씬 낫죠. 지금 생산한 것의 70% 정도는 농협이나 기관에 나가거든요. 30% 정도는 따로 연락오시는 분들에게 팔리구요. 생각보다 많이 나가요. 영천과 상주 지역은 저희 제품이 많이 나가구요. 이제 경기도 쪽으로 진출하고 있어요. 또 요즘 젊은 농부들은 인터넷 검색이 익숙하기 때문에 온라인 홍보물을 보고 많이 연락도 오구요. 최근에는 샤인머스켓이 큰 인기를 끌면서 우리 제품도 덩달아 인기를 얻고 있어요. 이제 포도클립을 넘어서 복숭아와 사과에도 사용할 수 있는 클립을 개발해 이미 시제품이 나와 있는 상황이에요.” □ 먹고 살 수 있는 길… 로컬도 좋아요인터뷰의 말미. 이소민 대표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 영천에서의 삶이 만족하고 행복하냐고 말이다.“당연히 만족하고 있어요. 물론 서울처럼 화려한 면은 없어요. 일단 이곳에서는 남는 시간이 없거든요. 다행히 제가 집순이라서 그런지 크게 불편함은 없어요. 결혼도 아직 생각은 없구요. 아마 아버지는 이미 포기하셨을 거에요.(웃음) 집순이라서 문화 생활은 거의 없어요. 단지 조금 외롭다는 것 뿐이죠. 그래도 지금이 더 행복해요. 그리고 이곳이 고향이라 많은 도움이 되는 것도 같아요. 다들 아버지고 삼촌들이거든요.”이소민 대표의 향후 꿈은 포도클립을 자체생산하고 해외에 진출하는 것이다. 지금 이 대표의 포도클립 생산은 사실상 외주 형태다. 설계한 포도클립을 외부 공장에서 생산해 팔고 있는 것이다. 인근에 일본 농가에 가위를 수출하는 회사가 있어 포도클립을 보내봤는 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다만, 일본에서 포도를 키울 때 쓰는 철사가 한국 제품보다는 얇기 때문에 개선이 필요하다. 이런 부분을 개선한다면 일본 포도 농가에 진출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또 포도 뿐만이 아니라, 복숭아와 메론 등의 클립도 생산이 가능하다.“자체생산을 넘어서 여러가지 클립에 도전하고 있어요. 지금 개발하는 것도 있구요. 지금 매출도 나쁜 것은 아니지만, 저희와 경쟁하는 제품이 있거든요. 일단 목표는 경쟁 제품을 이기고 저희 제품을 우리나라 점유율 1위로 만드는 거죠.”이러한 이소민 대표에게 향후 5년과 10년 후의 모습을 물었다. 그리고 로컬에 내려오는 청년들에게 조언도 부탁했다.“크게 변하는 것은 없을 것 같아요. 일단 목표가 있으니까요. 크게 생각은 해보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열심히 해보려구요. 그래야 목표가 이뤄지지 않겠어요? 조금전에 말했듯이, 저희 제품이 우리나라를 석권하는 것이 큰 목표죠. 아마 될 것 같아요. 열심히 한다면 말이죠.”“창업 초기에는 불안함이 적지 않았어요.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사업인데다 농업의 실질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몰랐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번 기회에 도전하지 않으면 도저히 서울 생활을 이어나갈 자심이 없었죠. 일단 도전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1-08-10

“포항제철 성공하면서 고시 콤플렉스 털어내”

포항제철은 포항을 이전 시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모시켰다. 건설 초기의 포항제철, 그리고 포항이 철강 도시로 변모하는 과정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했다. 이대공 이사장은 그때의 기억을 하나씩 되짚어냈다. 홍 : 포항제철 입지가 선정된 이후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이 : 친구 신명수[전 동방유량 회장]에게 찾아가 물었다. 제철 공장이 들어서면 뭐가 바뀌게 되는지를. 한 달 후에 신명수가 나를 불러서 “일본식으로 제철소가 성공하면 인구가 10배는 늘어날 것”이라고 하며 블록 공장을 해보라고 권했다. 재밌는 게 제철 공장은 블록이 아닌 강철판으로 짓는다. 제철, 압연, 후판 공장 모두 그렇다. 그런데 신명수는 제철소를 블록으로 짓는 줄 알고, 친구인 날 돕기 위해 블록 공장을 하라고 권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블록 공장은 하지 말라고 말을 바꿨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터질 일이다. 그는 구획정리 사업과 건축업도 권했다. 그즈음 포항에서 70만 평 구획정리 사업을 주도한 게 나다. 1968년 말쯤이다.홍 : 그렇다면 사업을 하시다가 포항제철에 입사하셨군요.이 : 제철소가 들어서는 걸 알게 된 후 언론이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했다. 그곳에 살던 주민들의 불만도 있었다. 조상들이 농사짓던 논과 밭을 낮은 가격에 내놓기가 싫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니 언론을 상대할 사람, 대민(對民) 업무할 사람, 대관(對官) 업무할 사람이 필요했다. 포항제철 고준식 수석부사장이 김장섭 당시 국회의원에게 이런 일을 해줄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던 모양이다. 김장섭 의원의 추천으로 포항제철에 들어가게 됐다. 사실 당시 나는 월급쟁이보다는 사업을 하고 싶었다. 야구 배트 수출과 양송이 사업, 구획정리 사업으로 돈을 제법 벌었던 시기였다. 그런데 선배들의 추천과 제의를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1969년 1월 13일 포항제철에 입사했다.홍 : 포항제철이 들어서면서 포항은 어떤 변화를 겪게 됩니까?이 :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변화가 일어났다. 사람들이 모여드니까 고용부터 급격히 증대되었다. 건설 현장에서는 주로 포항 사람들이 일했다. 그들이 받는 일당도 적지 않았다. 음식점과 술집도 번창했다. 건설업체가 포항으로 많이 오게 되니 그 회사 직원들이 퇴근 후면 밥 먹고 술 마시며 지역경제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줬다. 포항 시내가 와글와글할 때였다. 한국에 좋은 직장이 많이 없던 시기였기에 일자리를 찾아 외지에서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홍 : 포항제철은 어떤 발전 과정을 거치게 되는지요?이 : 박정희 대통령이 제철소를 살피러 포항에 11년 동안 13번 왔다. 대통령이 오면 경호를 위해 헬기가 3대 떴다. 어느 헬기에 대통령이 탔는지 알 수 없었다. 건설 과정에서 관계자 격려, 현장 확인을 위한 방문이었다. 시민들도 ‘대통령이 저렇게 큰 관심을 가지는 회사가 포항제철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전 세계에서 포항제철처럼 짧은 기간에 성공한 제철소는 없다. 103만 톤으로 시작해 850만 톤, 광양을 포함하면 2,100만 톤까지 철강을 생산했으니. 지금은 4,000만 톤 이상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일본 수출입은행 원금을 다 갚고 벼락처럼 성장했다. 조선, 가전, 자동차 등 관련 업체도 동시에 발전했다. 1973년 이전엔 남한의 경제 상황이 북한보다 못했다. 1973년부터 남한이 앞서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가 포항제철 때문이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1973년은 포항제철 용광로에서 쇳물이 나오기 시작한 해다.홍 : 1970년대 포항에 포항제철 외에 어떤 업체가 있었는지요?이 : 농수산물 가공업체 정도였지 별게 없었다. 그땐 영일만에 설치된 정치망에서 정어리나 방어가 잡히던 시절이고 그게 산업이라면 산업이었다. 그 정도의 어촌이 포항제철의 등장으로 비약적, 압축적으로 성장한 것이다.홍 : 포항제철 입사 초기에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하셨는지요?이 : 한마디로 멸사봉공(滅私奉公)의 마음이었다. 위국헌신(爲國獻身)의 태도도 있었다. 1969년 1월에 입사하니 박태준 회장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32평 목조건물에서 목숨을 걸고 전쟁하듯 일하고 있었다. 내가 그 건물을 ‘롬멜 하우스’라 이름 지었고, 지금도 포스코역사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만약 제철소를 제대로 만들지 못하면 ‘우향우(右向右)’해서 바다에 빠져 죽겠다는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는 일하는 것이 자신과 미래 세대를 위한 길이자 우리가 사는 길이라 믿었다. 그 믿음으로 세계적 강국이 되고자 모두가 한마음으로 땀을 흘렸다. 포항 시민들도 제철소가 자신들 삶에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게 되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많은 사람이 포항제철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당시 포항제철 작업복을 입고 시내에 나가면 누구나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포항제철 직원이 되길 원하는 이들이 점차 늘어났다.포항제철 건설 초기의 현장 사무소인 ‘롬멜 하우스’를 2010년 3월 11일자 연합뉴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포항제철이 창립됐던 1968년 제철소 건설 부지인 영일만에 자금 100만 원으로 지어졌던 첫 현장 사무소의 별칭이다. 야전 사령부 역할을 하는 2층 목조건물이 사막이나 다름없는 황무지에 중장비들과 함께 들어선 모습이 마치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롬멜 전차군단과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 허허벌판에서 세계적인 철강회사를 일궈낸 포항제철 정신의 상징이 된 롬멜 하우스는 포항 포스코역사관에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홍 : 포항제철 입사 후에 어떤 일을 맡았습니까?이 : 4-2호봉 신입사원으로 발령이 났다. 서울까지 포함해서는 잘 모르겠는데 포항 직원으로는 39번이었다. 홍보와 대민, 대언론, 대관청 업무를 하며 정신없이 살았다. 그때도 포항제철 관련 업체에서 일하는 이들이 수천 명이었다.홍 : 1970년대에 경제발전과 함께 민주화와 인권 문제도 자주 거론됐지요.이 : 우리 사회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있다. 똘똘 뭉쳐 일만 하다 보니 산업화 세력이 보지 못한 부분도 있다. 우리는 당시 정권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열정적으로 일했고 그만한 대우를 받았지만, 같은 시기에 고생한 민주화 세력도 적지 않게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홍 : 직접 본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의 관계는 어땠나요?이 : 1970년대 박태준 회장을 처음 인터뷰한 사람이 「조선일보」정태기[전 한겨레신문사 대표이사] 기자다. 박 회장은 정 기자와의 인터뷰를 처음에는 사양했으나, ‘할 말은 제대로 하자’고 결심하고는 인터뷰에 응했다. 사람들의 반응이 좋았다. 이후 언론계에서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많은 기자가 해직되었다. 이른바 ‘백지 광고’가 나오기도 했다. 그즈음 민주화 세력이 고생하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박태준 회장은 정태기 기자와의 인연을 귀하게 여겨 정 기자가 한겨레신문사로 갔을 때 포항제철 관련 업체를 주주로 참여하게 했다. ‘조선일보’ 사진부장 임희순 기자도 생각난다. 그는 내가 부장이던 시절에 포항제철로 옮겨와 많은 역사적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아름다운재단을 만들 때 박태준 회장이 집 판 돈 13억 6천만 원 중 10억 원을 기부했다. 이처럼 산업화 세력도 민주화 세력을 이해하려 했고, 인연도 맺었다.홍 : 포항은 포항제철 건립으로 산업도시가 된 셈이네요.이 : 포항은 포항제철의 성공과 더불어 발전한 도시다. 건설 당시에 강원산업과 현대 등 굴지의 업체가 다 관여했다. 대한민국 10대 건설업체는 대부분 포항에서 일거리를 얻었다. 포항제철과 관련된 사업을 해야 돈을 벌 수 있었던 시기가 1970년대다. 그 시절은 2년마다 공장을 확장했다. 고용과 생산량은 높아지고, 노동자가 받는 임금은 지역경제 활성화로 이어졌다. 포항에 없던 호텔도 생겼다. 미국 ‘유에스 스틸(United States Steel Corporation)’은 1980년대에 이미 ‘유에스엑스(USX)’가 됐다. 철강에서 화학, 운송, 파이낸싱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했다. 언젠가는 철강의 가격경쟁력이 후진국을 못 따라갈 것을 정확하게 예측한 것이다. 1970년대에 크게 성장한 포항제철도 이를 보고 배울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홍 : 1970년대는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까?이 : 서울대 법대에서 나오는 월간지가 있다. 거기에 사법시험에 실패하고 은행에 입사해서 한국은행 총재까지 한 사람이 ‘고시 콤플렉스’라는 글을 썼다. 한국은행 총재까지 했지만 사법시험에 떨어진 열패감을 버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 글을 읽고 ‘나도 고시 콤플렉스를 평생 안고 살면 어쩌나’고민했다. 그런데 포항제철 제2고로가 만들어진 1976년에 고시 콤플렉스를 털어냈다. 내가 판사나 검사보다 훨씬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대공1941년 포항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포항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20대 중반에 서울·인천에서 석유곤로와 야구 배트 등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했다. 1967년 포항으로 돌아와 양송이 재배·가공업을 하다가 1969년 포항제철에 입사해 홍보실장, 비서실장, 총무이사, 포항공대 건설본부장, 부사장을 거쳤다. 포항제철 건설 시기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24년간 제철보국의 신념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포항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이사장, 아름다운재단 이사,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포항지역회 이사장, 경상북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포항지역발전협의회장 등을 맡았으며, 현재 재단법인 애린복지재단 이사장으로 있다.대담·정리 : 홍성식(경북매일신문 기자) /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8-10

이젠 방송인 아닌 정치인으로 불러달라

우리는 여전히 전쟁터 속에서 살고 있다. 6·25와 베트남전의 트라우마에 갇힌 60대 이상은 물론이고 30·40대에게도 멀리 중동전쟁 포성의 여운이 남아있어서일까. 출근길도 밥 먹으러 가는 길도 전쟁이요, 취업도 대학 가는 길도, 집 구하는 일까지 전쟁이다. 90년대 바그다드의 중동 전선에서 종군기자로 활약한 이진숙(전 대전MBC 사장)에게도 돌아온 조국 대한민국은 여전히 전쟁터다. 2년 전 고향 대구로 내려와 시내 한복판 오피스텔에 진을 친 이진숙은 이제 방송인 아닌 정치인으로 불러달라고 한다.- 2020 도쿄올림픽의 3관왕 여자 양궁선수 안산의 앞머리 쇼트커트가 불러온 페미 논쟁이 일었다.△논쟁에서 정작 안산은 없고 페미만 남았더라. 남성에 비해 상대적 약자인 여성 인권 보호와 양성평등의 의미로 쓰여야 할 페미니즘이 남성혐오와 동의어로 전의된 인상이다. 안산의 언어에서 나는 남성혐오 표현을 발견할 수 없었고 참으로 불건강한 논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산을 넘어 선 진영간 대립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명쾌하다. 같은 시기 서울 종로 책방의 쥴리 벽화 문제는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여성 비하를 넘어 심각하고 중대한 개인의 인격 침해다. 우리 사회가 좀 더 냉정해져야 하겠다. 이 문제는 말로만 여성친화를 외치는 진보진영의 위선을 여지없이 폭로한 현장이다. 여성의 성까지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내로남불식 정권의 이중성이 드러난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문제에서 여성가족부가 입 다물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야당 일부에서 주장하는 여성가족부 폐지 주장에 대한 입장은.△문제는 여성가족부의 존폐 여부보다 여가부가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느냐는 거다. 이 질문에 ‘일을 제대로 했다’고 답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여성의 인권 향상과 성 평등 가치 확산이라는 당초 설립 취지를 위해 얼마나 기여했느냐. 제대로 못하니까 폐지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여당 단체장들의 잇단 성 추문이 여가부 문제를 더욱 확산시키는 계기가 된 건 아닌가.△그렇다. 지난해 8월 당시 여가부 장관은 박원순 오거돈 전 시장들의 사건이 권력형 성범죄냐는 질문에 “수사중인 사건의 죄명을 규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답변해 여성들의 화를 돋우었다. 법적인 판단은 사법부에서 하더라도 여가부 장관은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얘기했어야 했다. 당시 장관은 보호받아야 할 여성 피해자가 아니라 자신보다 큰 권력, 임명권자를 의식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사건 관련 입장문에서 ‘고소인’ ‘피해 고소인’이라는 말을 써서 피해자는 물론 국민들의 분노를 샀던 것으로 기억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 ‘Me Too’광풍이 몰아치면서 젠더(gender) 논쟁이 일어났다. 지방 출신 방송 기자로서, 여성으로서 경험을 들려 달라.△소수자는 항상 불안하다. 10명 중 9명이 칼국수를 먹자고 하는데 혼자서 냉면을 먹자고 하면 냉면으로 결론나기는 힘들다. 이럴 때는 칼국수를 먹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인생에서는 칼국수와 냉면을 넘어서는 경우가 많다.내가 입사했던 1986년 동기 13명 중 2명이 여성이었다. 지방 출신에 지방대, 거기다 여성이었으니 말 그대로 ‘3중고’였다. 수습 때 특종도 했지만 수습 끝나고 부서배치에서 남들 다 간다는 사회부가 아닌 문화부로 발령이 났다. 다른 여기자는 국제부로 갔다. 시작 때부터 3중의 장애물에 포위돼 ‘잘 나가는’ 직장에서 생활하는 건 또 다른 전장이었고 전투였다.- 여성이어서 부서배치에서 불이익을 받았다는 것인가. 그러면 사회부 기자는 언제 했나.△문화부에서 악바리처럼 일했고 그게 눈에 띄어 사회부로 배치 받았다. 새벽 네 시 기상, 네시 반 경찰 순회, 여섯 시 캡 보고 등 고된 일정 때문에 남자 기자들은 탈출하고 싶어하던 부서였다. 그러나 여기자들은 “사건기자도 못 한 주제에...”라는 말을 듣기 싫어서, 그리고 ‘그들’과 같은 훈련을 받고 싶어서 사회부 배치를 원했다.- 부서배치 불이익은 그 후로도 직장 생활 내내 계속되었나.△입사해서는 사회부 기자가 되고 싶었고 나중에는 국제문제 전문기자, 특파원이 되고 싶었다. 1990년대 중반쯤인가, 당시 워싱턴에서 근무하던 남편이 대기업 뉴욕지사장으로부터 “이 기자는 절대 워싱턴 특파원이 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 누가 여성에게 워싱턴 특파원 자리를 주겠느냐”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고 10년 뒤에야 나는 워싱턴 특파원이 되었다. 그동안 한국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여성계에서는 여전히 남녀불평등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오히려 역차별이라고 주장하는 남성들도 있다. 유리천장 논리에는 동의하나.△동의한다. 수치가 말해 주고 있지 않는가.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21 글로벌 성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조사대상 156개국 중 102위를 기록했다. 방글라데시(65) 우간다(66) 케냐(95) 보다도 못한 지위다. 경제활동참여 기회 부문에서 123위, 교육 부문에서 104위였다.- 문재인 정부가 여성친화적이라고 자랑했는데 정치 부문에서 여성정책은 어떤가.△좌파 정부가 비교적 잘 하고 있는 것이 여성의 정치 참여라고 칭찬해주고 싶다. 외교부에 강경화, 법무부에 추미애, 교육부에 유은혜, 국토교통부에 김현미, 고용노동부에 김영주 등 이른바 주요부처에 여성을 장관으로 임명한 것은 우파 정부와 구분된다. 우파가 보수꼴통이라는 프레임을 쓰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여성 정책이기 때문이다.- 종군기자의 경력으로 전쟁을 체험했다. 징병제인 우리나라에서 여성에게도 군대 가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걸프전(1991), 소말리아 내전(1993), 동티모르 내전(1999), 이라크전(2003) 등을 취재했다. 시체가 피투성이 부상자들과 뒤엉켜 나뒹구는 절망과 폐허의 전장을 목격하고는 피지도 않는 담배를 세 개피나 피웠던 기억도 있다.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국방의 의무를 위해 군복무하는 데 대한 2030세대 일부 청년 남성들의 저항감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진학이나 취업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는 호경기 상황이라면 남성들의 불만은 상대적으로 적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경제 상황이 악화되고 취업이 치열해지면서 불만의 타깃이 여성으로 향한 점도 있지 않을까 추정해 본다.여성도 군대에 가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사회적 합의라는 절차가 필요하다. 모병제로 점차 이동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점차적으로 모병 규모를 늘려 가면 어떨까 생각한다. 말만큼 쉽지는 않을 것이다.- 위기에 강한 리더십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한다. 그 배경이 궁금하다.△세상에 전쟁만한 위기는 없다. 그 전쟁을 세상에 알린 것이 나 이진숙이다. 종군기자로서 소속사 MBC에는 특종을 안겨줬고 그걸로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진숙의 MBC에는 나쁜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당시 사장(김재철)이 MB 정권의 충견이라는 비난이 있었고 이진숙이 그 하수인이라는 비난이 들끓었다.△2012년 MBC가 노조의 170일간 장기 파업이라는 최대 위기에 직면했을 때 홍보국장과 기획본부장을 맡았다. 진보성향 노조가 악의적인 선동과 마타도어식 허위 주장을 펼쳤지만 보수적 일부 우파 간부들 조차 자신이 타깃이 되는 것이 두려워 비겁하게 숨었다.파업이 70일 넘고 100일을 넘어서자 ‘불법 정치 파업이다’라고 주장하던 간부들조차 ‘노조가 이기면 어쩌지...’라거나 일부 간부들이 뒤로 노조에 격려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노조가 허위 주장 노보를 내면 홍보국장은 층층시하 절차를 거치느라 즉각적인 대응을 할 수 없었다. 기획본부장이 되어 사장에게 대외대응의 전권을 허락받은 뒤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노조의 허위주장들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항복을 받아냈다. MBC를 구했다는 응원 문자를 많이 받기도 했고 ‘이다르크’라거나 ‘김사장의 장세동’이라는 별명도 그 때 얻었다.- 방송인에서 정치계에 뛰어들었다. 언제, 무엇을 하겠다고 정치에 입문했나.△자유한국당의 인재영입케이스로 정치에 입문했다. 당시 문화권력의 횡포를 목격하고는 우리 사회가 더 이상 불건강한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신념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다. 문화는 미래 세대를 키워내는 자양분이자 토양이다. 나는 우리 딸이, 우리의 미래 세대가 왜곡된 이념과 왜곡된 문화 속에서 살아가도록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기자 출신이어서 그런가. 공무원이나 관료 출신 정치인에 대해 좋은 감정은 아닌 것 같다. 대구의 정치인에 대한 평가가 아주 낮다.△공무원의 철밥통은 괜히 생겨난 게 아니다. “일 더한다고 월급 더 주나” 하는 관념에 익숙한 게 공무원이다. 그런 공직자는 대구 같은 위기의 도시에는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나이가 든 사람들에게는 대구가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대구는 청년들이 빠져 나가는 도시다. 늙어가는 도시라는 말이다. 더 이상 미래가 없는 도시다. 지금 대구에는 위기를 관리할 리더십이 필요하다. - 대구의 미래를 어떻게 그려나가야 한다고 보나.△멀리 봐야 멀리 간다고 했다. 대한민국 안에서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나는 MBC 본사에서 일했고 남편은 현대자동차에서 퇴직했다. MBC는 1961년, 현대차는 1967년 설립했다. 한국의 특수 상황에서 정부 통제와 보호를 받았던 MBC는 현재 위축돼 있는 반면 생존을 위해 전 세계 기업과 경쟁했던 현대자동차는 명실상부 글로벌 기업이 되었다. 현대자동차의 도약 비결은 경쟁력이었다. 대구가 글로벌 시티로 부상하기 위해서, 경쟁을 통해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이진숙 (60)대구에서 남도초 구남여중 신명여고를 나와 경북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잠시 교단에 섰다.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과 존스홉킨스국제학대학원(SAIS)을 졸업했다. MBC에 기자로 입사해서 걸프전 종군기자로 명성을 떨치고 워싱턴 특파원과 워싱턴지사장, MBC기획본부장, 보도본부장, 대전MBC사장에서 퇴직하고는 정치에 띄어들었다./이경우 편집위원

2021-08-09

“양송이 수출 사업 위해 1967년 귀향”

서울대 법대에 다니던 이대공은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을 겪는다. 눈앞에서 진압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는 모습도 목격했다. 역사적 혼란의 시기에 무엇을 고민했고 어떻게 살았는지 들어보았다. 홍 : 20대 초반에 겪은 4·19는 어땠습니까?이 : 1960년 4월 5일 서울대 법대 입학식을 했다. 이후 18일 고려대에서 시위가 있었다. 19일 철학 강의를 듣고 있는데, 1년 선배가 문을 열고 들어와 전단지를 뿌렸다. “나가자, 시위하러 가자”고 하니 교수님이 “공부를 구태여 하겠다는 사람은 강의실에 있고, 그게 아니면 나가라”고 했다. 아마 거리로 나서서 시위에 참여하라는 뜻이었지 싶다.홍 : 그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겪었는지요?이 : 우리가 앞장섰다. 그때 내 친구의 모습이 찍힌 사진이 ‘동아일보’ 1면 에 실렸다. 동대문경찰서 인근에서 경찰과 맞섰다. 그때 서울 거리에는 돌이 거의 없었는데, 마침 동대문경찰서 근처 공사장에 쌓아놓은 벽돌 더미가 있었다. 경찰이 곤봉으로 시위대를 구타하자 학생들이 공사장의 벽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시위대 대부분은 서울대 법대, 문리대, 미술대 학생들이었다. 학생 수가 진압에 나선 경찰 수보다 많았다. 다른 대학 학생들도 길거리 곳곳으로 나왔다. 동대문경찰서를 거쳐 당시 국회의사당으로 향했고, 이화여대 학생들도 모였다. 뜨거운 열정이 사회의 불의를 참고 보지 못했기에 나선 것이었다.홍 : 시위할 때 위험한 장면도 있었겠습니다.이 : 학생들이 선봉에 서서 앞으로 나아갔는데 통인동 파출소에서 저지당했다. 바로 앞이 경무대였다. 거기까지 행진한 것이다. 그때 기마경찰이 총을 쐈다. 순간적으로 사격을 해대니 놀란 사람들이 높은 담을 훌쩍 뛰어넘었다. 자기도 모르는 괴력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총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날 서울대 법대 동기 하나가 죽었는데,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포항에서도 경찰서가 점거되는 등 시위가 격렬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홍 : 1961년 5·16군사정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이 : 가난하고 혼란한 상황이었기에 강한 지도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고, 군사 쿠데타는 안 된다는 친구도 있었다. 강원도 홍천군 동면 수타사(壽9641寺) 근처에서 함께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동창과 이에 대한 찬반을 놓고 토론했던 기억이 난다. 박정희와 박태준은 우리나라 국민들이 좀 더 풍요롭게 살 수 있도록 한 공로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가 여러 측면에서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경제 대국도 되었으니 다양한 차원에서 평가가 필요하다고 본다.홍 : 1964년에는 한일협정 반대 운동이 있었지요.이 : 그때는 사법시험 준비로 정신이 없어 시위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동독과 서독이 분단돼 있을 때 서독으로 광부와 간호사들을 만나러 갔다. 그때 서독 총리에게 “우리도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하자, 서독 총리는 “일본에 전쟁 배상금을 빨리 받아서 경제를 발전시키고 한일 관계도 재정립하라”는 조언을 했다고 한다. 그 돈(대일 청구권 자금)이 포항제철을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다. 포항제철 건설을 결심한 게 박정희고, 이를 건의한 게 박태준이다. 그것이 지금의 포항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홍 : 1960년대 포항의 경제 상황은 어땠습니까?이 : 포항만이 아닌 대한민국 전체가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영일만의 정치망 어장에서 나오는 게 포항의 수입 거의 전부였다. 사람을 채용해줄 회사와 단체가 거의 없었다.홍 : 20대에 영향을 받은 인물은 누굽니까?이 : 포항제철 박태준 회장이다. 스물아홉 살에 그를 만났다. 20대 중반에 사법시험을 포기하고 서울대 행정대학원에 다녔는데 재미가 없었다. 그즈음 사업을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 주도 드라이브 정책을 펼칠 때는 나도 수출을 했고, 개발 주도 드라이브를 걸 때는 구획정리 사업을 했다. 그러던 중에 박 회장을 만났다.홍 :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후 사업을 하셨다니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이 : 일본으로 석유곤로를 만들어 수출했다. 일본의 아이디어와 기술을 바탕으로 인천에서 만들어 팔았는데, 다른 곤로는 잘 팔리는데 내가 만든 건 판매가 부진했다. 곤로 수출 사업은 실패였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동방유량 신명수 회장의 조언으로 망개(청미래덩굴) 이파리를 지리산에서 채집해 일본에 팔았다. 망개 이파리는 방부제 역할을 한다. 망개떡이 상하지 않게 해주는 것이다. 냉장 유통이 없던 시대니까 장사가 잘되었다.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아이디어 사업이었다.홍 : 그 후에 다른 사업도 하셨는지요?이 : 당시 한국에서는 야구가 인기를 얻기 전이었는데, 일본에서는 인기가 대단했다. 그걸 감안해 야구 배트를 만들어 수출했다. 그 사업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벌었다. 나중에 포항에서 구획정리 사업을 할 수 있는 밑천이 거기서 나왔다. 사법시험 공부하듯 하면 뭐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신문을 통해 세상과 경제의 흐름을 파악했다. 요즘도 신문을 열 가지 이상 읽고 있다. 신문 읽기는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와 감각을 준다. 홍 : 사업하던 시절의 에피소드 하나 들려주시죠.이 : 야구 배트는 물푸레나무로 만든다. 수령이 얼마 되지 않은 나무여야 하고, 색깔도 하얀 게 좋다. 가지가 벌어진 나무로 만들면 배트가 부러지기 쉽다. 잘 다듬어진 방망이를 2개월 동안 온돌에서 말리는 과정을 거친다. 그렇게 만든 야구 배트를 일본 회사로 수출했다. 그런데 어떤 때는 납품된 것의 반 이상을 불합격시키는 것이었다. 아마도 불합격품까지 가져가 일본에서 완제품으로 만들어 팔지 않았을까 싶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두 트럭 분량의 야구 배트를 영등포에서 만들어 인천의 보관창고로 보냈다. 그런데 그날 예고되지 않은 비가 왔다. 비는 배트에 치명상을 입힌다. 저녁을 먹던 내가 인부들과 달려가 포장막으로 야구 배트를 덮었다. 뒤늦게 보관창고에 도착한 다마자와 사장이 20대 청년이던 내게 열 번 넘게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했다. 거래가 끝난 상품까지 책임지려는 마음가짐을 좋게 본 것이다. 그날 “앞으로 당신 제품은 검사를 하지 않고 통과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홍 : 포항으로 돌아온 건 언제지요?이 : 1967년 양송이를 재배해 수출하려고 포항으로 왔다. 그 사업을 위한 공장을 만들기 위해 땅을 샀다. 800평을 샀는데 평당 200원쯤 준 것으로 기억한다. 나와 아내가 직접 흙벽돌을 찍어 양송이 가공업체를 지었다. 1967년 10월 1일엔 장기영 당시 부총리가 포항에 내려와 포항제철이 들어설 지역을 알렸다. 라디오를 통해 그걸 들었다. 흥미로운 건 바로 그날 박정희 대통령의 결정으로 장기영 부총리가 해임됐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그날 이후로 포항의 역사가 확 바뀌고 천지가 개벽했다. 아마 새로운 포항 역사의 시작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당시 5만 명이던 인구가 지금 50만 명이 됐으니.홍 : 포항제철 건설 당시의 분위기를 들려주시죠.이 : 공장 부지로 땅이 수용되는 것을 사람들이 반대했다. 조상 대대로 농사를 지어온 땅이니 낮은 가격에 수용되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땅과 관련 없는 이들은 포항제철 건설을 환영했다. 보통 사람들은 제철 공장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시절이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양송이 수출업을 하려고 땅을 샀다. 평당 50원에서 500원쯤 하던 시절이다. 지금의 상도, 대도, 해도, 죽도는 모두 섬이었다. 밀물과 썰물이 오가는 갈대밭은 평당 50원에 불과했다. 땅을 사려는 사람이 있으면 땅 주인들은 불안한 마음에 대부분 땅을 팔았다. 그런 땅을 내가 양송이 재배와 가공장 설립을 하려고 샀다. 이대공1941년 포항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포항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20대 중반에 서울·인천에서 석유곤로와 야구 배트 등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했다. 1967년 포항으로 돌아와 양송이 재배·가공업을 하다가 1969년 포항제철에 입사해 홍보실장, 비서실장, 총무이사, 포항공대 건설본부장, 부사장을 거쳤다. 포항제철 건설 시기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24년간 제철보국의 신념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포항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이사장, 아름다운재단 이사,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포항지역회 이사장, 경상북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포항지역발전협의회장 등을 맡았으며, 현재 재단법인 애린복지재단 이사장으로 있다.대담·정리 : 홍성식(경북매일신문 기자) / 인물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8-08

“하루에 고래 세 마리는 위판되었다”

1937년생인 최원복 씨는 1962년부터 1982년까지 구룡포에서 고래 전문 중매인을 했다. 구룡포의 고래 중매인 중 최연장자로 구룡포의 고래 역사에 대해 얘기해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분이다. 김도형(김) : 근황은 어떻습니까?최원복(최) : 시간 나는 대로 궁도장에 나간다. 1985년부터 건강도 챙길 겸 궁도를 하고 있다.김 : 어릴 때 구룡포는 어떤 곳이었는지요?최 : 아버지는 김천 사람이고 어머니는 칠곡 사람이다. 1935년에 부모님이 구룡포로 왔다. 구룡포 북방파제 공사가 마무리될 무렵이 아닌가 싶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정어리가 많이 나고 없는 사람이 살기에는 그렇게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열 살 때 구룡포에 콜레라가 닥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바람에 나도 힘든 인생을 살았다.김 : 고래고기 중매업은 언제부터 하셨습니까?최 : 1962년 군 복무를 마치고 구룡포에서 시작했다. 1968년까지는 고래만 하다가 그 이후로는 다른 생선도 취급했고, 고래고기 중매는 1982년까지 했다.김 : 당시 얘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해주신다면.최 : 1970년대 초반 구룡포에 참치 원양업이 성행했다. 참치 밑밥이 꽁치인데 마침 그때 구룡포가 꽁치 주어장이어서 원양어선에 꽁치 대주는 장사를 1982년까지 했다. 그때 돈을 좀 벌었는데 오징어 장사하다가 다 까먹었다. 1986년에 일본 사람과 ‘선동(船凍) 오징어’(배에서 잡아 바로 얼린 오징어)를 거래해서 얼마간 회복했다.김 : 1970년대는 구룡포가 활황일 때지요?최 : 구룡포와 대보(현 호미곶) 합쳐서 인구가 3만 명이 될 정도로 활기가 있었다. 지금은 구룡포 인구가 만 명도 안 될 거야.김 : 요즘 오징어가 많이 비싸지요?최 : 광복 전에 구룡포에 정어리가 그렇게 많았다고 하는데 다 사라졌고, 명태도 사라졌지. 오징어도 어떻게 되려는지 모르겠어. 오징어가 얼마나 비싼지 최근에 6만 5천원에 한 상자 샀지.김 : 고래 거래하실 때는 밍크고래 위판이 많았겠군요.최 : 그렇지. 밍크고래는 17자(5.1m)부터 25자(7.5m)까지가 가장 많이 잡혔다. 하루에 세 마리는 위판되었다. 그만큼 밍크고래가 많이 잡혔다는 얘기지.김 : 고래고기 가격은 어느 정도였는지요?최 : 1980년대 초반까지 소고기 값의 3분의 1이었다.김 : 고래 중매업은 어땠습니까?최 : 치열했다. 새벽에 수화(手話)로 일하고 나면 진이 다 빠졌다. 수화가 그럴듯해 보이는데 실제로는 정말 힘들다. 그 때문에 집안에서 누가 장사한다고 하면 말리게 된다.김 : 수입은 어느 정도였습니까?최 : 치열하게 경쟁해서 고래를 사들여도 벌이는 신통찮았다. 쌀이 귀할 때 고래고기 장사를 한 덕분에 끼니마다 고래고기를 먹기는 했다. 그때는 구룡포 사람들이 고래고기를 많이 먹었다.김 : 고래고기는 어디에서 많이 팔았습니까?최 : 구룡포시장 좌판에서도 팔았지만 포항 죽도어시장에 가서 많이 팔았다. 여기서 해체한 고래고기를 삶아서 궤짝에 넣은 다음 버스를 타고 포항 가서 죽도어시장 수산회사에 넘겼다.김 : 과거에 포항 가는 길이 힘들었을 텐데.최 : 말도 마라, 길이 얼마나 험했는지. 특히 청림 쪽을 지나갈 때는 정말 힘들었다. 구룡포에서 대구까지 트럭 타고 가는 데 4시간 30분 걸렸으니. 1962년에는 구룡포에서 서울까지 가는 데 15시간이나 걸렸다.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된 후 트럭을 타고 달려보니 장판에 구슬 굴러가는 것 같더라. 구룡포에서 포항 가는 도로가 포장된 후에는 한 번 달려본 다음에 일부러 다시 왕복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김 : 혹시 고래고기를 일본에 팔기도 했나요?최 : 1982년쯤 그러니까 고래고기 장사를 거의 접을 무렵이다. 포항에서 일본 시모노세키 가는 선어(鮮魚) 수출선이 있었다. 아우와 둘이서 고래고기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판로를 찾다가 포항 효창수산을 통해 그 선어 수출선으로 일본에 보냈다. 일본에서 온 영수증을 보니까 내가 판 고래고기 내용이 정확하게 적혀 있었다. 당시 구룡포에도 한 수산업자가 시모노세키 가는 선어 수출선을 갖고 있었다.김 : 포항 쪽 고래 유통에 대해 아시는 게 있는지요?최 : 포항 사정은 시의원을 한 최일만 씨가 잘 안다. 논산훈련소 동기이기도 해서 각별한 사이다.김 : 포경 금지 후에 고래 값은 어떻게 되었습니까?최 : 엄청 올랐다. 나가수(참고래) 한 마리가 몇 년 전에 1억 원 넘게 위판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오죽하면 바다의 로또라 하겠는가. 고래 전문 중매인 최원복 씨. 김 : 일제강점기 포경업에 대해 들은 얘기가 있는지요?최 : 일제강점기 때 장생포 포경선이 구룡포에 와서 고래 위판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물러나면서 그들이 갖고 있던 포경선을 우리 사람들이 넘겨받아 포경업을 계속 이어갔을 것이다.김 : 구룡포에서 포경업을 한 강두수 씨는 어떤 분인가요?최 : 일제강점기 때 구룡포에서 수산회사에 근무하다가 광복되면서 포경선을 넘겨받아 포경업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인심이 좋은 분이었고, 지금 그분 아들이 70대 중반인데 구룡포에 살고 있다.김 : 구룡포읍 행정복지센터 앞마당에 있는 제1동건호는 김건호 씨가 기증했다고 들었습니다.최 : 김건호 씨는 강두수 씨의 생질로 강두수 씨한테 수산업을 배웠다. 70대 중반에 작고했는데, 구룡포 길거리에 벚나무를 심기도 했고 좋은 일을 많이 했다.김 : 수산업 하던 분들이 구룡포 지역사회에 영향을 많이 준 것 같습니다.최 : 그렇게 볼 수 있다. 광복 직후 중·고등학교 개교하고 운영이 어려울 때 수산업 하던 사람들이 학교를 살렸다.김 : 구룡포에서 포경선 탔던 분 중에 생존자는 몇 명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최 :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나. 구룡포에 고래 해체하는 사람도 서너 명 있었는데 모두 돌아가셨다.김 : 요즘 고래고기 전문 식당은 어떤가요?최 : 장사가 괜찮을 것이다. 이문도 좋고 고래고기를 찾는 사람들이 꾸준히 있으니까. 최근에 강구에서 고래가 정치망에 걸려 구룡포의 한 고래고기 식당에서 사왔다고 하더군. 구룡포 어판장에서 해체한 고기를 5만 원어치 사서 친구 여남은 명과 어울려 소주 한잔했는데 소주 한 박스를 비웠다. 소주 안주에 고래고기는 그저 그만이다.김 : 고래고기는 12가지 맛이 난다고 하는데 실제로 어떻습니까?최 : 천만의 말씀, 50가지 맛이 난다. 부위별로 독특한 맛이 있다. 고래를 그냥 삶으면 비린내가 나서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고래 삶을 때 소주와 마늘, 생강, 커피 가루를 넣으면 비린내가 싹 사라진다. 육회는 된장에 찍어 먹어도 맛이 좋다. 나가수는 삶으면 살이 퍼지는데 밍크고래는 살이 제 모양을 유지하고 부드럽다. 고래고기는 소화가 잘되고 많이 먹어도 살찌지 않는다.김 : 맛있는 고래고기를 알아보는 방법이 있는지요?최 : 껍질이 두꺼워야 한다. 껍질이 두꺼우면 살코기에 기름기가 있고, 껍질이 얇으면 살코기에 기름기가 별로 없다. 멸치부터 고래까지 모든 생선은 껍질이 두꺼워야 맛이 좋다.대담·정리 : 김도형(THE OCEAN 편집위원)

2021-08-04

‘베르사유 궁전’에도 없었던 화장실 신라 왕궁엔 첨단 수세식이 있었다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인간에게는 보편적인 욕망과 욕구가 존재한다. 이 욕구와 욕망의 실현을 열망한다는 차원에서 보자면 2021년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과 1천300여 년 전 통일신라시대 사람들은 크게 다르지 않다.7~8세기. 막 삼국을 통일하고 나라의 힘을 키워가던 신라인들은 동궁과 월지를 비롯한 크고 아름다운 건물을 짓고, ‘불교미술의 꽃’이라 불러도 좋을 여러 조각품들을 만들어냈다. 지금 우리가 유적과 유물이라 부르는 것들이다.동궁과 월지에선 2만 점에 가까운 각종 유물이 출토됐다. 적지 않은 양이다. 이 가운데 ‘목간(木簡)’과 ‘수세식 형태를 갖춘 화장실’은 욕망과 욕구 충족이라는 면에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흥미를 끈다.무언가를 기록하고자 하는 욕망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종이가 만들어지면서 기록이란 작업은 보다 수월해졌다. 그런데 종이가 없던 시절엔 어디에 글씨를 남겼을까? 바로 목간이다.무언가를 먹은 후 배설하는 건 고대인이나 21세기 인간이나 마찬가지. 보다 깨끗하고 쾌적한 공간에서 배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욕구는 화장실의 형태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고 그 정점에 있는 게 수세식 화장실이 아닐까. 동궁과 월지에서 나온 목간을 통해 본 당대의 현실목간은 무언가를 기록해 후대에 남기고자 하는 고대인의 욕망을 해소시켜줬다. 바로 그 목간을 ‘한국 고고학사전’은 아래와 같이 정의하고 있다.“문서나 편지 등의 글을 일정한 모양으로 깎아 만든 나무 또는 대나무 조각에 적은 것으로, 나무에 새긴 것을 목독(木牘), 대나무에 새긴 것을 죽간(竹簡)이라고 한다. 두 가지를 구별하지만 한국에선 아직 죽간이 발견된 사례가 없어 총칭해 목간이라 한다.주로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 또는 널리 쓰이기 이전에 사용됐다. 따라서 목간의 사용과 소멸은 종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목간은 중국의 고대 유적을 비롯해 일본의 고대 유적, 인도나 로마시대 유적에서도 발견된다. 목간은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당대의 정치·사회상이 기재돼 있기에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동궁과 월지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나온 목간은 200여 점으로 알려졌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한 이들 목간에 관한 설명을 인터넷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나무위키’에서 확인할 수 있다.“1975년 안압지(월지) 유물 발굴 과정에서 51점의 목간이 최초 출토된 이후 지속적으로 목간이 발견됐다. 2006년 기준으로 102점이 발견되었으며, 이후 계속된 발굴로 현재 200여 점의 목간이 발견된 상태다. 몇 점을 제외하고는 안압지 북서편에 위치한 임해전지의 제4건물지에서 제5건물지로 통하는 이중 호안석축 아래서 수습됐다. 경주 월지 목간은 나무판의 위쪽에 홈을 내거나 구멍을 뚫어 끈을 묶고 어디에 걸거나 매달 수 있도록 하였으며, 서체는 주로 예서체이나 간혹 초서체로 쓴 것도 있으며, 칼로 글자를 새긴 것도 있다.”앞서 언급한 것처럼 목간은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가 어떠했는지를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 그렇기에 많은 역사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돼왔다.동궁과 월지에서 나온 목간 역시 마찬가지다. 목간에 쓰였거나 새겨진 글씨들을 통해 당시 신라의 관청명과 주요 건물을 경비하던 사람들의 숫자, 나아가 제작 연대까지 추정할 수 있다.예를 들자면 출토된 목간에 쓰인 ‘세택(洗宅)’은 왕을 근거리에서 보좌하는 관청이고, 중국 당나라의 연호가 적힌 보응사년(寶應四年)은 765년이며, 궁궐을 경비하는 보초의 근무 상태를 기록한 목간을 통해서는 동궁의 구조까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는 것.한국고대사학회가 발행한 하시모토 시게루의 논문 ‘월지(안압지) 출토 목간의 연구 동향 및 내용 검토’에 따르면 “월지의 목간은 1975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출토된 목간으로 현재 어느 정도 내용을 알 수 있는 목간은 40여 점이 있다”고 한다. 논문은 이렇게 이어진다. “약재명, 같은 글자를 반복해서 쓴 습서 목간, 문호를 쓴 목간이 몇 점씩 있고, 가장 많은 것은 부찰이며 약 20점이 있다. 그중 14점은 ‘연월일+作(작)+동물명+가공품명+용기’라는 기재양식으로 쓰인 식품 부찰이다.” 1천 년 전 신라인들도 젓갈을 먹었을까?식품 부찰(附札·기억할 만한 것을 표시하기 위해 글을 써 붙인 것)이라…. 여기서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일어난다.만든 날짜와 가공한 방식, 식재료와 담긴 용기의 재질까지를 기록한 목간을 해석한다면 통일신라시대 사람들이 어떤 음식을 즐겨 먹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아닌가.특히나 동궁과 월지는 신라 귀족과 왕족의 주요 활동공간이었으니, 당시 상류층의 식생활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귀한 자료가 바로 이 목간일 터. 그들의 밥상에는 어떤 반찬이 차려졌을까?이런 궁금증을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낸 책 ‘유적과 유물로 본 신라인의 삶과 죽음’이 친절하게 풀어주고 있다. 다음과 같은 설명이다.“월지 목간 가운데 가물치(加火魚), 노루(獐), 돼지(猪), 새(鳥), 전복(鮑), 즙(汁) 등 각종 식품명이 기록된 것들이 있다. 이들은 연월일과 만드는 방법(作·治), 동물명과 가공품명 등을 적어 음식물을 보관하던 용기에 부착된 부찰 목간에 해당한다. 이 형식에서 연월일은 제작 일시, 작치(作·治)는 가공하는 방식을 의미하며 동물명은 재료를 가리킨다. 특히 동물명 뒤에 오는 갑(醘), 해(醢), 조사(助史)를 우리말 식해와 젓갈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식품은 용기에 담아 물품창고에 보관하였을 것이다.”그랬다. 1천 년 훨씬 이전에도 사람들은 길짐승과 날짐승, 물고기 등을 가리지 않고 먹었고, 여기에 과일이나 채소를 길러 오늘날의 주스와 유사한 음료를 만들어 마시기도 한 것이다.통일신라의 고대인들이 각종 육류를 이용해 젓갈을 담그는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은 이채롭고 재밌다. 젓갈을 만든 날짜까지 정확히 기록함으로써 숙성 시기를 표기하고, 유통 과정에서의 변질을 막아내기까지 했다니 신라인들의 식생활은 요즘 못지않았던 듯하다.여기서 갑작스레 머리를 스친 생각 하나. 앞으로 7~8세기 신라를 소재로 TV드라마나 영화가 제작된다면 동궁과 월지에서 잔치를 연 신라 왕의 “오늘 가물치 젓갈은 유별나게 숙성이 잘 돼 입에 맞구나”라는 대사를 한 번쯤 넣어보면 어떨까. 신라엔 이미 1천300여 년 전 수세식 화장실이…먹는 음식 이야기에 이어 화장실을 말하려니 민망하다. 그러나, 서두에 쓴 것처럼 배설은 부정할 수 없는 인간 보편의 욕구. 피해갈 수 없는 스토리이니 독자들의 이해를 부탁한다.지난 2017년 신문과 방송을 통해 놀라운 사실이 보도된다. 동궁과 월지를 조사·발굴하던 이들에 의해 현대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형태의 수세식 화장실이 발견된 것이다. 이 특별한 유구(遺構·과거 토목건축 구조와 양식의 실마리가 되는 자취)를 ‘나무위키’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동궁과 월지의 신라시대 화장실은 화장실 건물 내에 변기시설, 오물 배수시설까지 함께 발굴됐다. 초석건물지 내에 변기가 있고, 변기를 통해 나온 오물이 잘 배출돼 나갈 수 있도록 점차 기울어지게 설계된 암거(暗渠)시설까지 갖춘 복합 변기형 석조물이 있는 구조다. 변기형 석조 구조물은 양 다리를 딛고 쪼그려 앉을 수 앉는 판석형 석조물과 그 밑으로 오물이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타원형 구멍이 뚫린 또 다른 석조물이 조합된 형태며, 구조상 변기형 석조물을 통해 내려간 오물이 하부의 암거로 배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땅 밑과 위에는 수십 미터에 달하는 기다란 화강암 배수로가 있는데, 현재는 땅 위에 있는 일부 배수로만 확인되나 실제로는 그 밑에 엄청난 길이의 배수로가 존재한다. 일부 배수로는 이를 따라서 월지 내부로 이어져 있어, 당시 건축기술과 배수기술이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준다.”발효식품을 만들어내는 등 지혜로운 식생활을 즐겼음은 물론 배설하는 공간까지 기품 있게(?) 설계한 1천300여 년 전 신라 사람들. 그렇기에 당시 동궁과 월지를 출입했던 왕과 왕자, 귀족들은 이미 현대적 라이프 스타일과 유사한 삶을 살았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세계사 개념사전’에는 전 세계 화장실의 역사를 쓴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거기엔 아름답기로 이름 높은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는 화장실이 없었다는 사실과 함께 “베르사유 궁전을 드나들던 여자들은 선 채로 화려한 여러 겹의 드레스 안에서 볼일을 보았고, 남자들은 기둥과 커튼 뒤에서 배설을 해결했다. 결국 지독한 냄새를 없애기 위해 인테리어를 자주 바꾸고 향수를 사용하게 된 것”이라는 에피소드가 나온다.예술과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어느 나라보다 높은 프랑스. 최상류층이 무도회와 파티를 열던 17세기 베르샤유 궁전에는 없던 화장실이, 그것도 수세식 화장실이 신라 동궁과 월지에는 7세기 무렵부터 존재했다.신라와 프랑스, 화장실과 관련한 아득한 1천 년의 간극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그려지는 웃음을 어쩔 수 없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8-04

“10년 새 5번째 직업… 취미였던 공예가 정착의 아이템 됐어요”

32살의 만들기를 좋아하고, 꽃을 좋아하는 아가씨가 경상북도의 칠곡에 터전을 잡았다. ‘무엇을 하는가’하고 살펴보니, 꽃을 이용한 팔찌와 귀걸이, 화환, 브로치, 컵받침 등을 만들어 판단다. ‘이게 사업이 될까’하고 생각했는데, 만든 물건이 제법 잘 팔린단다. 한 달에 4천개나 팔린 팔찌도 있고, 외국에서 제품을 배송해달라고 연락이 오기도 한다. 수입이 좋을 때는, 동년배 대기업 직원의 2배를 훌쩍 넘어섰던 것은 ‘안비밀’이다. 여름 더위가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7월의 끝자락, 칠곡에 위치한 ‘나는꽃’의 대표 정아름(32) 씨를 만났다.“‘나는꽃’은 제가 꽃에서 영감을 많이 받고 작품과 상품을 만들기 때문에 지은 이름이에요. 그리고 ‘나는꽃’ 카페는 다양한 공예 체험을 하는 동시에 커피도 마시고 작품 감상도 할 수 있는 힐링공간이죠.”그녀의 이야기대로 ‘나는꽃’은 아기자기한 공예품부터 코끝을 간지르는 것 같은 꽃작품들이 천지였다. 이 모든 작품들은 논이 펼쳐져 있고 작은 동산을 끼고 있는 카페 겸 작업장에서 만들어졌다. 이런 그녀의 최대 히트작은 ‘동백꽃 필 무렵’이라는 이름의 팔찌다. 브라질과 미국, 홍콩, 필리핀, 베트남의 개인 소비자들이 번역기를 돌려서 사고 싶다는 이메일을 보내올 정도다.경북경제진흥원에 따르면, ‘나는꽃’의 작품은 지난 2019년 베트남 수출 박람회에도 진출했었다. 대략 30개의 샘플을 들고갔는데, 현장에서 모두 팔렸다. 이후 1천개 단위의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1천개의 주문을 정아름 대표 혼자서 만들 수는 없는 일. 결국 수출 주문을 거절해야 했다. □ 변덕 심했던 아가씨… 창작 작품 들고 칠곡으로“저는 22살부터 일찍 일을 시작해서 직업을 5번이나 바꿨어요. 변덕이 심하다고 부모님께 항상 혼나고 걱정만 끼치는 못난 딸이었죠. 뭐 그렇다고 회사에서 일을 못해 혼난다거나, 직원들과 어울리지 못한 것은 아니었어요. 그냥 회사 입사 1년을 넘기고 업무에 적응하면, 재미가 없는 거죠.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는 회사 생활이 지겨워서 못 견디겠더라구요. 5번째 직업을 가졌을 때도, 역시나 위기가 찾아왔죠. 끈기가 없는 제가 너무 답답하고 한심스러워서 화가 나더라구요. 그때 처음으로 제 자신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을 해봤어요. ‘내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도대체 나는 어떤 일을 해야 맞는 걸까’, ‘나의 다양한 경험을 살려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라는 생각이었죠.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내가 질리지 않고, 오래 할 수 있는 일을 하자’였어요. 그게 바로, 취미로 쭉 해오던 공예, 창작 작품 활동이었죠.”아름 씨의 고향은 경상남도 사천시다. 5번이나 직업을 바꿔가며 살았던 곳은 서울과 대구 등의 대도시. 물론 아름 씨도 칠곡에 정착하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그것은 여느 청년들의 고민과 다를 것이 없었다.“겁이 많이 났죠. 과연 일을 하면서 밥값은 벌 수 있을까. 도시생활을 하면서 높은 월세를 내던 탓에 모아둔 돈이 별로 없어서 사업을 하려니 엄두가 나지 않았거든요. 음…. 칠곡은 대구에서 프리마켓과 축제 참여로 만나며 친해진 작가님들이 추천해주셨어요. 아마 그게 칠곡과의 인연인 것 같아요. 물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 와서 사업장을 열고, 정착 생활을 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죠. 하지만 사업을 하면서 사람들과 친해지고 칠곡군에서 나름 활동을 하면서 적응이 된 것 같아요.”그런데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부모님께 혼나고 걱정만 끼쳤던 딸이 로컬인 칠곡으로 사업을 하러 간다는 데, 반대는 심하지 않으셨을까. “저희 부모님은 어릴 때부터 제 똥고집을 알기 때문에 크게 반대는 없으셨어요. 제가 하는 일에 성인이 되어서는 반대를 하신 적은 없었죠.(웃음) 그래서 제가 이렇게 고집있게 사업을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닐까요?”아름 씨는 지금의 생활이 너무나 만족스럽다. 자신의 삶 중에 지금이 가장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시기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녀에 따르면, 도시와 비교해서 잠자는 시간도 줄었고, 더욱 바쁘게 살고 있지만, 신기하게도 가끔 있었던 공황장애도 사라졌다. 마음의 안정과 자연의 영감을 받으며 일을 하고, 성과도 만족할 만큼 내고 있다고….이러한 아름 씨의 실력은 어떠할까. 그것도 해외에서 주문이 밀려들 정도인데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름 씨는 이름난 액세서리 디자이너 밑에서 공부를 한 적이 없다. 오직 취미 생활 뿐이었다. 해외 유학은 꿈도 못 꿨고, 그저 서울의 작은 디자이너 회사에서 일한 것이 창업 직전까지의 경력이었다.“취미가 돈이 된다는 것이 너무 신기하고 행복했어요. 어머니도 처음에는 제가 월급의 대부분을 재료 구입비로 쓰니까 싫어하셨는데, 요즘에는 주변 분들에게 자랑하고 다니세요. 사실 저는 제가 만드는 것이 ‘제품’이 아니라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작품명도 정성들여 짓고, 작품을 하나 하나 만들 때마다 소비자들에게 좋은 일이 생겼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죠.” □ 시골과 도시의 경계는 사실상 없어… 포기하지 않고 꾸준하게이러한 그녀에게 시골이라고 불리어지는 로컬의 비전을 물었다. 그녀는 어떻게 생각할까.“‘저는 하루를 후회 없이 알차게 살자!’는 것이 좌우명이에요. 그래서 사실 미래비전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하지만 저 같은 청년들이 경북에 많아진다면, 도시 청년의 시선들이 긍정적으로 바뀌겠죠. 그래서 경북이 조금 살기 편하고, 재밌는 곳이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저는 도시의 청년들에게 로컬의 삶을 권하고 싶어요.”그리고 이런 그녀에게 도시의 향수란 것은 없다. 정아름 씨가 단호하게 생각하는 것은 ‘로컬의 문화 수준이 도시에 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나는꽃’의 주문량으로도 증명됐다. ‘나는꽃’ 고객의 80%는 서울과 경기도 등 수도권이다. 오히려 지방의 특색이나 분위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지방의 특색을 이용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까요? 저는 매일 하루하루가 너무 설레고 행복해요. ‘오늘은 어떤 일을 하지?’, ‘어제 올린 신상에 어떤 응원의 댓글이 달리고, 주문이 들어왔을까?’하고 말이죠. 5년과 10년 후에도 이 행복함과 감사함을 유지하려고 계속 열심히 일을 했으면 해요. 그러다 보면 분명 더욱 설레고, 행복한 일들이 생길 테죠. 그때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행복감을 느끼게 해줄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해요.”이러한 그녀의 ‘행복 바이러스’는 조금씩 칠곡에 전염되는 듯하다. ‘나는꽃’ 카페에서는 지역민들과 함께 만든 공예품을 전시하고 판매했다. 어린이들이 나무 공예제품, 패브릭 아트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도 만들었다. 카페 앞에 널찍한 공간을 확보해 어린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곳도 마련했다. 이렇게 카페를 중심으로 전시와 체험, 놀이라는 다목적 공간을 만들어 놓으니 지역 주민들의 반응도 좋았다.“처음에는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체험을 주로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구미대학교에서 연락이 와서 체험을 하기도 했어요. 거기다가 제가 원래 시골에서 자라면서 다문화 가정을 많이 봤었거든요. 그래서 다문화 가정 자녀들을 초청해서 거의 무료로 체험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요. 코로나19로 많이 줄긴 했지만, 그 여파가 지나가면 다시 지역 주민들이 모이는 힐링의 공간, 놀이의 공간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그리고 칠곡으로 내려온 후 창작을 위한 감성이 더 많이 생긴 것 같다는 그녀. 그네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도 작품이 떠오르고, 뒷동산에 오르며 만나는 꽃잎에서도 아이디어가 생각난다고 한다.“꼭 도시에 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남들이 사는 방식도 존중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거기에 억지로 끼워 맞추면서 살 필요는 없잖아요. 시골에 일자리가 없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으면 되지 않을까요? 저도 처음 이 일을 시작하면서 돈을 벌기보다는 그저 재료값이나 벌면 충분하다는 생각이었어요. 포기하지 않고 꾸준하게 하면 분명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1-08-03

“큰형 이진우의 권유로 경기고, 서울대 법대 진학”

전쟁의 포연이 채 가시지 않은 1950년대 중반 대부분의 포항 사람들은 가난했다. 그럼에도 ‘배워야 살고, 공부만이 빈곤에서 벗어날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에 교육열은 매우 높았다. 당시 학생들은 어떤 꿈을 꾸며 미래를 그려갔을까? 홍 : 10대 중반 시절의 추억을 말씀해주신다면.이 : 전쟁의 참화 속에서 먹고살 방법이 거의 없었다. 농사도 힘들었다. 우리도 논밭이 없었다. 미군 구호품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던 시기다. 밀가루와 버터 등 미국이 보내주는 여러 가지 생활물품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앞서 말했듯 포항에 고아들이 많아 선린애육원이 만들어졌다. 포항제일교회가 주도했고 아버지가 앞장섰으며 미군들이 도왔다.홍 : 전쟁 직후엔 학교를 제대로 운영하기가 어려웠을 것 같은데.이 : 열세 살 국민학교 졸업반 때는 폭격을 피한 공장에서 가마니를 깔고 노천 수업을 했다. 죽음의 공포와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교육열은 저마다 특별했다. 대한제국 멸망 후 교육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한 어른들이 많았다. 교사들은 일제강점기 36년과 전쟁의 비극을 이야기했다. 죽어도 공부는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나는 포항국민학교를 다녔다. 한 반이 40~50명이었고 6개 반이었다. 한 학년이 250명쯤 됐다. 전교생은 1천명이 넘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학업에 열정을 가졌다. 이후 포항중학교에 입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지중학교가 생긴 것으로 기억한다.홍: 1950년대 포항의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어떤 환경에서 공부했는지요?이: 교장 선생님을 포함한 교사들은 조회 때마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했다. “배워야 산다”고. 한글을 제대로 습득해 우리말을 쓰고 읽고 익혀야 한다고 그랬다. 독서도 열심히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앞으로는 미국과 관계를 맺어야 하니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하라고 말했다. 당시 교사들은 선견지명이 있었다. 지금 한국은 국민소득이 3만 달러가 넘고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지만 그때는 대부분 빈곤에 시달렸다. 광복 후의 혼란과 전쟁의 참화를 겪은 교사들은 애국자였고 제대로 교육하겠다는 의욕이 높았다. 학생들을 단호하게 지도한 것도 그런 열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홍 : 그런 상황에서도 즐거운 추억은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이 : 당시의 내 또래 학생들은 체력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고, 싸워서 남에게 지면 안 된다는 의식이 있었다. 포항중학교 근처 희망고개에서 적지 않은 싸움이 있었다. 지금처럼 지저분한 싸움은 아니었다. 마주 선 상대 중 한 명의 코피가 터지면 끝나는 깔끔한 싸움이었다. 왕따 같은 건 없었다. 사나이 대 사나이로 맞붙곤 했다. 고등학교 때 서울에 가서는 그 싸움 실력을 써먹었다. 1년에 한 번쯤 다툼이 있었는데 내가 다 이겼다. 공부도 코피가 터질 정도로 했다. 참고서가 없어서 교과서 한 권을 다 베끼기도 했다. 국어, 수학, 영어 교과서를 달달 외우다시피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선행 학습이 되었다. 중학교 1학년 때 2~3학년 교과서를 다 베꼈다. 총기(聰氣)가 있을 때라 내용이 외워졌다.홍 : 당시 교사들은 어떤 태도로 학생들을 가르쳤는지요.이 : 교사들은 학생들을 공부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거기에 더해 학생들이 건강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까지 더해졌다. 영어 선생님은 특히 인기가 좋았다. 웅변대회에 나갔던 경험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때는 교사와 학생들 간에 신의가 있어 눈에 보이지 않는 숙제라도 성실하게 수행하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하루에 물구나무 10번 서기’라는 숙제를 내준다면 지금 학생들은 그걸 하겠나.홍 : 고등학교 시절은 서울에서 보냈다고 들었습니다.이 : 1957년 포항을 떠나 서울 경기고등학교로 갔다. 중학교 2학년 때 서울대 법대에 다니던 형님이 영어의 직접화법과 간접화법에 대해 물었다. 내가 대답을 하니 다른 영어 문제를 또 질문했다. 그것도 답했다. 그랬더니 형님이 나를 서울로 데려갈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서울대 사범대에 다니고 있던 누나는 서울대 사대부고에 가기를 원했다. 그런데 형님이 서울대 주요 학과를 보면 경기고등학교 출신이 많으니 거길 가야 한다고 설득했다. 홍 : 경기고 입시와 서울대 입학 당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이 : 당시 포항엔 입시 정보가 거의 없었다. 서울에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보러 가니 선택과목이 상업이었다. 그걸 한 달 반 동안 공부해서 시험을 치렀다. 다행히 합격했다. 경기고에는 전국의 수재들이 모였다. 내가 입학할 당시 경기중학교 학생 대다수가 경기고등학교에 왔고, 다른 학교 출신은 전체의 10%인 60명 정도였다. 경기고 교사들은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고, 학생들도 대부분 ‘금수저’였다. 서울대 입시에 가보면 경기고 교복을 입은 수험생들이 넘쳐났다. 조선일보에 난 기사 ‘한국의 파워엘리트’에 따르면 당시 경기고 학생 중 60%가 서울대에 갔다. 내가 입시를 본 해에도 전교생 중 360여 명이 서울대에 들어갔다.홍 : 서울대 법대 진학은 어떻게 결정하셨는지요?이 : 공부를 해야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원래 법대보다는 천문기상학이나 지질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런데 형님이 말렸다. “너, 그 학문을 공부하면 외국 가서 박사 학위를 받아야 하는데 힘들다”며. 사실 그때 제대로 된 일기예보가 있었겠나, 지질학과를 나와서 취직이 됐겠나. 그래서 법대로 갔는데 적성에는 맞지 않았다. 법대 진학은 내 결정이 아니라 형님의 의사가 많이 반영되었다.홍 : 고등학교 시절에 친한 친구는 누가 있는지요?이 : 동방유량 신명수 회장이 고등학교 동기다. 그 친구 집을 가보니 건물부터 내부까지 전부 으리으리했다. 나는 대본소집 가난한 아들인데, 친구는 선대부터 큰 부자였다. 요샛말로 금수저 중의 금수저인데 공부까지 잘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미국에 유학하고 돌아와서는 가업을 이어받아 회사를 경영했다. 세계적 로펌 김앤장의 창업자 김영무와 전남 목포의 큰 주류업체 사장 아들도 고등학교 동기다. 김영무의 어머니는 고종(高宗)의 영어 통역사였다. 권력과 돈을 가진 집안 아이들이 경기고에 적지 않았다. 김영무의 아버지는 의사였는데, 그 당시 집 안에 에어컨과 냉장고가 있는 걸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홍 : 사법시험은 보셨나요?이 : 1960년대 초중반엔 사법시험 합격자가 겨우 20여 명이었다. 나도 모든 걸 걸고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나 결국 합격하지 못했다. 김영무는 시험을 보다가 구토를 했는데, 약도 먹지 않고 시험을 마쳤다. 약을 먹으면 정신이 흐려져 공부한 걸 잊어버릴 수도 있다는 아버지의 판단에서였다. 서울대 법대 시절엔 나와 동기들 모두가 목숨을 내놓고 공부를 했다.홍 : 1960년대엔 서울과 포항을 오가며 생활하셨지요?이 : 대한민국이 격변하는 시기였다. 대학 때는 죽기 살기로 공부했다. 서울대 도서관이 동숭동에 있었는데 걸어서 10분 거리에서 하숙했다. 법대 도서관에 자리를 잡아놓고 밤낮없이 사법시험 준비에 매달렸다. 1967년에 포항제철 입지가 결정됐다. 10월 1일이었다. 포항은 그전까진 별다른 생산시설이 없었다. 나는 방학 때도 포항에 가지 않고 서울에서 공부에 전념했다.홍 : 포항의 친구들은 어떤 삶을 살았는지요?이 : 포항은 조용한 어촌이었다. 젊은이들은 대부분 객지로 나갔다. 포항에서는 큰 꿈을 펼치기가 힘들었다. 이대공1941년 포항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포항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20대 중반에 서울·인천에서 석유곤로와 야구 배트 등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했다. 1967년 포항으로 돌아와 양송이 재배·가공업을 하다가 1969년 포항제철에 입사해 홍보실장, 비서실장, 총무이사, 포항공대 건설본부장, 부사장을 거쳤다. 포항제철 건설 시기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24년간 제철보국의 신념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포항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이사장, 아름다운재단 이사,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포항지역회 이사장, 경상북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포항지역발전협의회장 등을 맡았으며, 현재 재단법인 애린복지재단 이사장으로 있다.대담·정리 : 홍성식(경북매일신문 기자) /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8-03

통합신공항·행정통합은 대구·경북의 발전 동력이다

대구경북 미래가치 창조의 중심이라는 비전을 갖고 출범한 대구경북연구원은 30년 동안 지식경제자유구역, 첨단의료복합단지 조성, 3대문화권 사업 등 지역의 굵직한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오창균 원장은 “시·도지사가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면 연구원이 뒷받침해 가능했다”며 “앞으로는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소프트웨어 개발에 중점을 두겠다”고 말한다. 대구시 남구 대명동의 기업 빌딩에 세들어 살고 있지만 사기는 충천하고 의욕은 창창하다.- 대구 경북 발전이 정치 경제적으로 정체되고 있는 것은 다중 포위망에 갇혀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대구 경북은 공간적으로는 경부고속도로와 경부선 중심의 국가 발전축이었으나 그 축이 서해안을 중심으로 이동했다. 경제 지도도 추풍령 이남의 비수도권으로 분류되면서 이 지역은 자연히 동남권 주변부로 밀려났다. 경제 산업구조도 섬유와 전자 철강 중심의 지역산업이 4차 산업시대에 접어들면서 전환기를 맞고 있다. 문화적으로도 폐쇄적이라는 외부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가 인정하고 않고 와는 상관없이 우리 지역에 대한 비판 세력이 만만찮은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연구원이 찾아낸 돌파방안은 어떤 것인가.△이런 고립과 주변화를 돌파하려면 과감한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지리적 변방화와 경제산업적 주변화를 반전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수단으로 도출된 것이 통합신공항과 대구경북 행정통합이다. 이 지역 발전에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강조하는 이유다. 대구와 경북을 확 바꿀 엄청난 대역사가 될 것이다.- 두 개의 프로젝트 모두 상당한 비판이 있다. 연구원이 주장하는 대구경북행정통합의 바람직한 모습은 어떤 것인가.△비판은 당연하다. 모두가 찬성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가야 할 길이라면 가야 한다.대구경북 행정통합 논의는 시·도민과 함께하는 ‘공론’ 방식으로 접근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앞으로 행정통합 역시 시·도민의 의견을 따르는 방식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라고 본다. 특히 지역 내부의 합의 형성을 위해 광범위한 주민 설명회와 정치 경제계를 비롯한 각계의 전문가와 함께 하는 토론회를 통해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관심도를 높여야 한다.- 그런데 행정통합 논의는 현재 중단돼 있다.△중단된 것이 아니라 더 굳건히 나가기 위한 보완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대구경북행정통합공론화위원회가 지난 4월 ‘논의를 2022년 지방선거 이후에 재논의 할 것’을 건의했고 시· 도가 이를 수용함에 따라 일시 중단된 것이다. 현재 공론화위원회는 지난해 7월부터 올 5월 사이의 공론 활동에 대한 백서 작업을 진행 중이다.- 최근 대구시장과 경북도지사를 비롯, 영남권 5개 단체장이 울산에서 영남권 미래발전협의회를 열고 공동 성명도 발표했다. 대구경북의 행정통합이 이뤄지면 다음 과제로는 영남권 통합으로 수도권 일극체제에 맞서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물론이다. 전국 인구의 절반(50.2%)이 수도권에 거주하고 있는데 비해 영남권은 비수도권에서는 가장 많은 인구(24.9%)가 살고 있다. 우리 연구원을 비롯한 부산 울산 경남 등 4개 연구원은 인구의 4분의 1이 살고 있는 제2도시권의 경쟁력을 강화하여 수도권 중심이 가져오는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성장 거점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고 있다.- 구체적인 성과를 들어보라.△이번 영남권 미래발전협의회에서 대구경북통합신공항의 조속 건설과 2030 부산세계박람회 유치를 위해서도 공동으로 노력하고 협력하기로 했고 이를 협약서에 명문화했다.- 대구경북통합신공항 문제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통합신공항 이전지 확정 이후로 대구시와 경북도 모두 사업추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법적 절차에 따라 통합신공항 건설 기본계획을 수립중에 있으며 국토부도 민간공항 부분 건설을 위한 타당성 검토 절차를 진행중이다. 연구원은 종전부지 개발 마스터플랜 마련에 참여하고 통합신공항 중심의 주변지역 발전방안 마련을 위한 연구도 수행하고 있다. 통합신공항을 중심으로 한 교통망 체계 구축도 지원하고 있다.- 통합신공항에 대한 일부 반대 여론도 여전한 것 같다. 특히 공항의 역할과 관련해서도.△거기에 대해서는 “지금까지의 공항 개념은 잊어라”고 말해주고 싶다. 새로 건설되는 공항은 농촌에서 농사 지어 겨울에 한 번 세계 여행가면서 이용하는 공항의 역할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세상이 변하고 있다. 신공항이 개항할 때쯤이면 어떤 역할을 하게 될는지 상상해 보라. 디지털 카메라나 스마트폰의 발전 속도와 우리 생활 영역에 침투한 현실을 봐라. 더 이상 고추 말리는 공항이라는 폄하에 움츠리거나, 지점과 지점을 이어주는 공항의 역할에 한정지을 때가 아니다.- 군위군이 신공항 건설의 전제조건으로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대구시 편입은 연착륙할 것 같은가.△ 군위군의 대구시 편입에 대해서는 대구시와 경북도도 행정적 절차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도 의회 일부에서 군위군의 대구 편입에 따른 상대적 불이익을 거론하고 있지만 원만히 양해하면 어렵지 않게 성사될 것으로 본다.- 인구문제도 국가적 숙제가 됐다. 특히 우리 지역은 수도권 집중 현상과 맞물려 저출산 고령화와 함께 인구유출이라는 이중 삼중의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어떤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것인가.△인구 정책이나 출산율 문제는 바로 지방소멸과 직결된다. 이제 더 이상 몇몇 농어촌 낙후지역의 문제가 아니다. 그만큼 단편적인 정책이 아닌 국가 차원의 근본 해결책이 나와야 한다. 이런 문제는 고용과 임금 주택 교육 기본소득 보장 노후문제 보건의료 정책과 맞물려 나타나는 사회 현상이다. 전진국들은 이 문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사회 재설계를 시도하고 있다. 경제적 기회를 확대하되 공동체 윤리와 시장경제의 역동성 결합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핵심이다.- 우리의 문제로 돌아와서 해결책을 찾는다면?△국가 차원의 정책 변화다. 이민과 영주권 정책을 포함한 본격적인 국가 재설계에 나서야 한다. 현실적으로 당장 실현이 어렵다면 지역에서라도 단순한 현금 투입을 지양하고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돈으로 출산율을 높이겠다는 발상이 얼마나 가겠는가.- 현재 대구시내 곳곳에 재개발이 진행되면서 무분별한 개발의 인상이 짙다. 이에따라 일부 아파트는 미분양 사태까지 빚어지고 있다. 행정이 손 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연구원으로서 조율은 하고 있나. 어떤 그림과 방향을 제시하고 있나.△대구시는 물론 연구원도 최근 대구의 주택 공급과잉에 대한 상항을 우려하고 있다. 2018년 연구원이 수립한 대구시 주거종합계획에는 2027년까지 대구시의 주택 수요에 대한 추정치가 나와 있고 이를 기반으로 계획이 수립돼 있다. 그러나 최근 주택은 적정 공급선을 넘어서 단기적으로 과다 집중 공급되고 있는 상황으로 보인다. 현재 대구시는 지난 2007년과 같은 대규모 미분양 사태를 막기 위한 방안을 모색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연구원도 주택시장 안정화를 위한 대구시 주도 대안마련에 참여하고 있다.- 연구원 내부를 들여다보면 설립 30년이 된 지금 연구 성과물 없다는 지적이 있다.△시대가 변했다. 연구원의 과제나 방향도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옛날처럼 대형 프로젝트(4대강 사업 같은 토목공사)가 없어지고 정책과제와 기본과제 중심으로 연구하고 있기 때문이다.지금은 지역의 미래를 위해 대구경북 경제통합과 대구경북 행정통합 등 손에 잡히지 않아도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중장기 발전 구상과 정책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연구원이 대구시와 경북도의 재정 지원에 의존하는데 문제는 없나. 연구원의 결과물에 대한 의심도 있는 것으로 듣고 있다.△관변기관으로서의 아픔이 없지 않다. 대구시와 경북도의 예산으로 운영되다 보니 연구결과가 주문생산 됐다거나 의뢰한 자치단체가 요구한 결론이 아니냐는 의심일 것이다. 그러나 정책 잘못을 연구원이 인지하고도 없애거나 은폐하려 하지 않았다. 행정기관의 잘못을 은폐하거나 수치를 조작하거나 결과를 왜곡하는 일은 있을 수도 없고, 또 없었다. 결단코.- 대구경북연구원 최초의 내부 출신 원장이다. 현재 연구원 자체의 문제점이나 해결 과제는 무엇으로 보나.△연구원 개원 초 연구원 6명 중 5명이 경제 경영학 전공자였다. 지금 정규직 연구원이 박사급 65명으로 경제 산업 도시계획 환경 문화 관광 사회 복지 교통 전분야에 걸쳐 대구 경북의 종합행정을 커버하고 지원하고 있다.공공기관으로 이익창출보다는 지역민의 이익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정책을 연구하고 과제를 수행한다. 예산 중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 이를 설득하는 일이 중요하다. 사회 경제적 여건은 급변하고 코로나19 같은 변수까지 발생하면서 연구 수요도 보다 세분화되고 전문화되고 있다. 정책 환경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선도적인 정책 대안 발굴을 위해서는 우수인력 확보가 절실하다.- 개원 30년을 맞은 연구원으로서 앞으로 미래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역할과 비전을 위한 준비는 하고 있나.△대구 경북 시도민의 삶의 질 향상과 경쟁력있는 지역 창조라는 사명을 갖고 대구경북 미래 가치 창조의 중심이라는 비전으로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미래가치를 선도하는 창조적 연구개발 강화, 시도민이 공감하는 정책 연구와 지속 가능한 경영체계 구축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연구원 구조 개혁을 위한 외부 용역을 맡겼다. 객관성 확보를 위해서도 제 머리를 깎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 오창균(吳昌畇·59)대구 심인고 졸. 경북대 사회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주리대학교에서 사회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 대구경북연구원에 연구원으로 들어와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지역발전 전문위원과 18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경제2분과 실무위원으로 참여했다. 대구평생교육진흥원장과 농촌살리기 정책포럼 공동대표를 맡았으며 2011년부터 현재까지 지방분권운동대구경북본부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이경우/편집위원

2021-08-02

“6·25전쟁 때 피난민 도와주던 연일 주민들 고마워”

한 사람의 생애는 어떤 방식으로건 그가 살아온 지역과 연관을 맺게 된다.올해 산수(傘壽)에 이른 이대공 애린복지재단 이사장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사업을 한 10대 중반에서 20대 중반까지 10년 정도를 제외하면 인생의 대부분을 포항에서 보냈다.8·15광복 직후와 6·25전쟁, 포항제철의 설립과 발전 과정, 포항공대 설립에 얽힌 이야기 등을 다섯 차례의 대담을 통해 들었다. 홍성식(이하 홍) : 1941년생은 태어날 때부터 운명처럼 격동의 시기를 맞이한 것 같습니다.이대공(이하 이) : 다섯 살 때 광복을 맞았고 열 살 때 전쟁을 겪었으니 그렇게 얘기할 수 있겠다. 가정사도 그랬다. 해방되던 해에 두 살 된 동생이 콜레라로 죽었다. 콜레라에 걸리면 대부분 사망하던 시절이다. 백신도 없었고, 치료제도 없었다. 죽은 동생을 사과 궤짝에 넣고 아버지가 기도하며 입에 엿을 넣어주던 기억이 난다. 가난해서 못 먹던 시절이니까. 그리고는 공동묘지에 묻었다. 아버지(재생 이명석)는 꿈을 펼치기 위해 열한 살에 영덕에서 대구까지 걸어가기도 했다. 부친은 일본에서 공부했고, 책을 많이 읽은 분이다. 그 책으로 대본점을 했고, 덕분에 우리 가족은 극빈자는 면할 수 있었다.홍 : 1940년대 포항 아이들은 어떻게 살았는지요?이 : 해방 이전에는 동네에서 회람판이 돌았다. 일제가 거기에다 뉴스와 회보를 실었다. 일본은 철저히 우리를 통제했다. 우리 집이 그걸 읽고 나면 옆집에 가져다줬다. 좌익과 우익의 대결이 심각한 시절이었다. 큰형님(이진우)이 고등학생이었는데, 우파는 모자를 거꾸로 쓰고 좌파는 바로 썼다. 형님이 해방 이후 시내에 나가서 시위하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위험하다고 말렸다. 그러면 형님은 맨발로 도망치듯 밖으로 나가 데모를 하곤 했다. 사회가 혼란했다.1945년 광복을 기점으로 정치세력들 사이에 형성됐던 ‘애국 대 매국(친일)’이라는 대립 구도는 신탁통치 실시 문제를 계기로 ‘좌익 대 우익’의 구도로 전환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에 따르면 신탁통치를 둘러싼 대립 구도에서 역사적 정당성이나 과거의 친일 경력은 문제되지 않았다. 오직 상대방을 정국(政局) 무대에서 제거하고, 자신들이 의도한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는 것만이 목적이었다. 이런 구도를 중심으로 양 진영은 각각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격렬하게 대립한다. 한국 전체에서 벌어진 이런 상황은 포항에서도 예외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홍 : 어쨌든 학생의 본분은 공부 아닙니까?이 :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의식은 모든 아이들이 가졌다. 가난한 시절이지만 교육열이 높았다. 당시 교사들은 지금과 달랐다. 억눌렸다가 해방된 경험을 한 교사들이니 남다른 의욕과 애국심이 있었다. 사도(師道)가 확립되어 있었다. 학부모들도 교사를 존경했다. 회초리도 많이 맞았지만, 교사의 매를 나쁘게 보지 않았던 시절이다.홍 : 유년의 기억 중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면.이 : 어릴 때라 자전거 안장에 올라앉으면 발이 페달에 안 닿으니 옆으로 올라타서 페달을 밟았다. 그러다가 체인이 벗겨져 톱니바퀴에 다리를 다쳤다. 핏줄이 끊어졌다. 이후로 축구나 달리기 같은 운동을 하면 발이 불편했다. 그게 50대까지 이어졌다. 포항제철에서 은퇴하고 난 후에 미국에 가서야 혈관을 잇는 수술을 했다. 큰 수술이었다. 당시엔 요즘 아이들처럼 혼자서 온라인게임을 한다거나 하지 않고 공동체 놀이를 했다. 달리기를 가장 많이 했고, 낡은 공을 구해 축구도 열심히 했다.홍 : 1940년대엔 가족들 간의 유대감이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 같습니다.이 : 할아버지 때부터 기독교를 믿었다. 지금 내 손자들도 똑같다. 새벽 4시면 일어나 다 함께 찬송가를 부르고, 아버지가 성경 이야기를 해줬다. 우리 세대는 ‘군사부일체’의 이념이 몸에 밴 사회에서 자랐다. 당시 교감 선생님이 매질을 많이 했다. 종아리에 피가 나도록 때렸다. 게으름을 피우는 학생이 있으면 사람 만들겠다고 그랬던 것 같다. 사명감과 의욕이 없다면 체벌도 할 필요가 없다.홍 : 학교에서 체벌이 허용되던 시대였군요.이 : 약속을 안 지키거나 숙제를 하지 않거나 하면 주판으로 머리를 문지르기도 했는데, 교사들이 사적인 감정으로 한 체벌은 아니었다. 아이들을 낙오자로 만들지 않기 위한 방편이었다. 대부분의 교사들이 열정과 사명감을 가지고 가르치던 시대였고, 아버지의 권위와 선생님의 권위가 인정되던 시절이었다.홍 : 6·25전쟁 때 기억이 있는지요?이 : 너무나 뚜렷하게 기억난다. 1950년 7월 말에 포항이 함락되었다. 그 전쟁은 명백한 남침이다. 1개월 만에 북한군이 포항까지 내려온 건 준비된 전쟁이었다는 이야기다. 당시에 아버지가 트럭을 빌려 짐을 싣고 피난을 가려 했다. 아버지가 사과 궤짝에 넣어둔 원고와 어머니의 재봉틀을 가지고 간 기억이 또렷하다.홍 : 전쟁 때 선명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면.이 : 형산강 섬안 인근 다리에서 미군 병사가 피난민들을 제지했다. 피난 가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했다. 북한군이 들어와 있기에 피난민 중에 스파이가 섞였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고등학생인 형이 영어를 알아들었다. 포항이 함락되었던 때다. 콩과 밀을 볶은 비상식량을 둘러메고 다시 북쪽으로 올라갔다. 지금의 영일대해수욕장쯤으로 기억한다. 어머니는 짐이 많아 빠르게 움직이지 못했다. 지금의 포항제철 근방에 참외밭이 있었다. 참외가 노랗게 익어 있었으나 아무도 따 먹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전쟁이 주는 공포와 두려움 탓이었을 것이다. 홍 : 전투 장면을 보기도 했습니까?이 : 북쪽으로 올라가는데 미군의 반격이 시작됐다. 당시 포항 인구는 5만 명이 안 되었다. 수도산은 거의 헐벗은 상태인데, 거기로 학도병들이 목숨을 걸고 돌진했다. 풀도 나무도 없어 전부 노출된 상태인데 “돌격~”이라 외치며 뛰어올라갔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교복을 입고서 총을 들고 돌진하는 그들이 안타까웠다. 거기로 북한군이 기관총을 쏘았다. 바라보던 어른들이 “저런, 저런” 하며 발을 굴렀다. 그 학생들은 전국에서 모여든 학도병들이었다. 부당한 일에 대항해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는 걸 보니 숭고함이 느껴졌다. 학생들이 오죽하면 군복도 입지 않고 저러겠나 싶었다. 그들이 포항을 비롯해 우리나라를 지켰다.홍 : 전쟁에 관한 또 다른 기억이 있는지요?이 : 미군 비행기의 공습도 기억난다. 그때 빛이 소리보다 빠르다는 걸 알았다. 비행기가 내려올 때 기총소사를 하는데, 총소리는 비행기가 올라가고 나서야 났다. 소리가 빛보다 느린 것이었다. 영일만에 미군 미주리호(Missouri號)가 들어왔다. 배에서 함포사격을 하는데, 그게 판세를 결정지었다. 비행기가 나타나면 인민군이 숨을 수 있었으나, 함포사격은 금방 포탄이 떨어지니 숨을 겨를이 없었다. 사격을 하던 미주리호가 환하게 불을 밝힌 장면이 떠오른다. 포항 시내로 포탄이 날아가는 소리, 시내에 떨어져 터지는 폭음까지 생생하게 들었다. 어린 나이에 전투 장면을 실제로 목격한 것이다.홍 : 가족들은 어디로 피난을 갔는지 궁금합니다.이 : 포항이 함락된 후 미군이 초토화 작전을 전개했다. 그때 우리 가족은 연일 쪽으로 갔다. 식량이 모자라서 피난도 오랜 기간 버틸 수가 없었다. 모두가 가난한 시절임에도 피난민을 돕던 연일 주민들이 생각난다. 자신들의 음식을 나눠주던 고마운 이들이었다. 너나없이 힘들었고 정말 피폐한 때였다.홍 : 어린 시절 마음의 상처가 컸을 것 같습니다.이 : 포항 시내로 돌아오다가 형산강 다리에서 시체 한 구를 봤다. 민간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 포항은 피해가 심각했고 거리마다 고아들이 가득했다. 북한군들은 퇴각하며 불을 지르고, 미군은 소이탄을 쏴 도시를 불태웠다. “찌익~찌익~” 하는 소리가 두려웠다. 당시 포항은 대부분 목조건물이었으니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때 미군 부대와 함께 목사들도 왔다. 포항제일교회(현 소망교회)는 폭격을 맞지 않았는데, 그 모습이 미국 ‘타임’지에 실렸다. 미군이 교회 십자가를 보고 폭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쟁 이후에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이대공1941년 포항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포항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20대 중반에 서울·인천에서 석유곤로와 야구 배트 등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했다. 1967년 포항으로 돌아와 양송이 재배·가공업을 하다가 1969년 포항제철에 입사해 홍보실장, 비서실장, 총무이사, 포항공대 건설본부장, 부사장을 거쳤다. 포항제철 건설 시기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24년간 제철보국의 신념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포항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이사장, 아름다운재단 이사,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포항지역발전협의회 이사장, 경상북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등을 맡았으며, 현재 재단법인 애린복지재단 이사장으로 있다.대담·정리 : 홍성식(경북매일신문 기자) /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8-01

연못 서쪽 5개 건물 아래 등서 1만8천여 점 우르르

대부분의 인간은 100년을 살지 못한다. 그러나 지적 호기심은 인간보편의 것이라서 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과거와 미래를 궁금해 한다.미래는 현재를 통찰함으로써 일정 부분 예측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이 살기 이전 시간인 과거는 어떤 방식으로 알 수 있을까?고문헌을 통한 해석, 입에서 입으로 이어져온 옛이야기의 채록과 종합 등 여러 가지 방식의 연구 형태가 있을 수 있다. 유물을 통해서 과거를 유추하는 것도 그중 한 방법이다.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매혹적인 궁원(宮院) 동궁과 월지가 어떤 모습이었고, 거기서 왕과 귀족들은 어떤 방식의 삶을 살았던 것인지 떠올릴 수 있게 해주는 유물들이 적지 않다.역사학계에 의하면 현재까지 동궁과 월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1만8천여 점이 넘는다. 월지와 주변 건물에서 나온 것이 1만 5천여 점, 발굴 조사가 진행된 ‘가 지구’에서 1천300점이 넘게 출토됐다고 한다.동궁과 월지에서 발견된 유물은 주로 연못 서쪽에 있는 5개 건물지를 중심으로 연못 안쪽 반경 6m 내외의 토양층에서 나왔고, 그 종류는 와전류, 용기류, 목재류, 토기류, 금속류, 철제류, 석제류, 동물뼈 등으로 다양하다고 알려져 있다. 연못 속 유물들, 1974년 첫 모습을 드러내다그렇다면 통일신라의 높은 미적 감각과 예술성을 보여주는 동궁과 월지의 유물들은 언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까. 땅 속에 그 형상을 감추고 있던 각종 유물이 1천 년 세월을 뛰어넘어 환한 햇살 아래 나타난 것은 1974년이다.그 요약된 과정을 이상준의 논문 ‘동궁과 월지 조사 연구 현황과 과제’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동궁과 월지) 유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은 1971년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 수립되면서부터다. 이 계획에는 경주시의 사적지를 15개 지구 단위로 구분하고, 이중 ‘월성지구’ 개발에 안압지, 계림, 반월성을 포함하였다. 안압지는 준설 및 개수, 조림, 토지 매입이 주요 사업 내용이었는데 발굴조사는 사업에 포함되지 않았다.당시에는 연못 발굴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월성을 발굴해 장기적으로 궁성을 복원하고자 하였다. 1974년 드디어 연못 준설이 시작되었고, 이 과정에서 다량의 기와를 비롯한 유물들이 쏟아져 나옴에 따라 해당 공사를 중단하고, 이듬해인 1975년부터 1976년까지 발굴조사를 추진하게 되었다.발굴 결과 ‘동궁과 월지’의 정확한 규모와 호안의 축조 상태, 3개의 인공섬과 입수·배수 시설, 주변 건물지의 배치 구조 등이 확인됐다. 이후 발굴 결과를 토대로 1977년부터 1980년까지 복원·정비 공사를 실시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통일을 위한 전쟁 과정에서 넓은 영토와 보다 많은 자산을 축적한 신라는 7세기 중반 화려한 궁궐과 정원을 만들며 국력을 내외에 과시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축조된 것이 동궁과 월지다.그런 까닭에 거기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당시 신라 고위층의 생활방식과 주거양식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당대의 국교 역할을 했던 불교가 어떤 방식으로 예술화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줬다.동궁과 월지의 조사발굴은 1974년 이후 쭉 이어졌는데 1980년엔 연못 서쪽 호안에 접해 세워졌던 5개의 건물터 중에서 3개를 복원했고,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는 초석을 복원해 노출시켰다.한국문화유산답사회에 따르면 이 유물들은 당시 왕과 군신들이 이곳에서 잔치를 벌일 때 못 안으로 빠진 것과 935년 신라가 멸망해 동궁이 폐허가 된 뒤 홍수 등 천재로 인하여 못 안으로 쓸려 들어간 것, 그리고 신라가 망하자 고려 군대가 동궁을 의도적으로 파괴하면서 못 안으로 물건들을 쓸어 넣어 버린 것 등으로 추정된다.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발행한 책 ‘신라의 유적과 유물’에도 동궁과 월지의 유물 출토 과정과 실재했던 건물에 관한 내용이 간략하게 설명돼 있다.“1975년 안압지(월지) 준설공사 중에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면서 2년에 걸쳐 실시된 발굴조사를 통해 동서200m·남북180m에 이르는 대형 연못과 대형 건물지군이 확인됐으며, ‘월지’명 유물들과 ‘의봉사년개토(儀鳳四年皆土·의봉은 당나라 연호로 의봉사년은 679년에 해당)’명 기와 등이 출토됐다.이밖에 태자와 그 가족들이 거처하는 전각과 동궁 예하 궁아들, 만수방과 같은 건물들이 거기에 존재하였다. 임해전의 정문은 임해문으로 추정되고, 또 동궁에 인화문이 있었으며, 안압지에서 발견된 목간에 보이는 여러 문들도 거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된 유물은 신라 번성기 고위층의 생활상 보여줘그렇다면 신라가 통일 이후 전성기를 누리기 시작한 시기에 조성된 동궁과 월지에선 어떤 유물들이 나왔을까?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최근 발간한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동궁과 월지의 유물들 중 가장 많이 출토된 것은 와전류(기와 종류)로 주로 서편 건물지 아래 연못 바닥면에서 수습됐다고 한다.기와편에 보이는 문양의 종류는 100여 종이 넘고, 전돌 역시 20여 종에 달한다는 것이 이어지는 설명.그것들 외에도 치미편, 귀면와, 이형와 등 5천700여 점이 출토됐다는데, 출토된 유물 중에서 보상화문 전편에 음각된 문양전을 통해 제작 연대를 추정할 수 있었고, 또 암키와 등 문양에 양각으로 앞서 말한 ‘의봉4년개토’라 새겨진 명문 기와를 확인하면서 제작 연대를 알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동궁과 월지 발굴조사에선 기와류와 함께 각종 토기와 자기, 금속과 나무로 만들어진 유물도 상당수 나왔다.돌베개가 출간한 ‘답사여행의 길잡이-경주’에는 동궁과 월지 출토 유물 중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것 몇 가지가 소개돼 있다.이 책의 설명에 의하면 동궁과 월지에서 출토된 불상들은 7세기에서 10세기 초에 만들어진 불상들로 통일신라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이 가운데 ‘금동아미타삼존판불’의 본존은 화려한 연꽃의 2중 대좌 위에 설법인을 하고 당당히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 좌우에는 협시보살이 허리를 한껏 휘어지게 하고 서 있다.본존과 보살에 별도의 두광이 있고 이를 감싼 큰 광배가 전체를 연결하고 있어서 완벽한 삼존 구도를 느낄 수 있는 높이 27㎝의 이 판불(板佛·동판 등에 새기고 채색한 불상)은 통일신라 전기의 불상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금동초심지가위’도 이채롭다. 당시 신라 왕족과 귀족들의 기품을 보여주듯 초의 심지를 자르는 데 썼던 길이 25.5㎝의 이 가위는 잘린 심지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날 바깥에 반원형의 테두리를 세웠고, 화려한 당초무늬 장식까지 갖췄다.이외에도 당나라의 제작 기법을 따른 ‘칠기 연꽃봉오리 장식’과 해학과 익살이 느껴지는 도깨비가 새겨진 ‘귀면와’, 고대 유물 가운데서는 보기 드문 나무로 만든 주사위(주령구) 등도 동궁과 월지에서 모습을 드러낸 귀한 유물들이다.이 가운데 주령구(酒令具)는 신라인들의 술자리 놀이방식을 어렴풋이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 흥미롭다. ‘위키백과’는 주령구를 이렇게 설명한다.“1975년 경주 동궁과 월지에서 출토된 정사각형 면 6개와 점추이 육각형 면 8개로 이루어진 14면체 주사위다. 정사각형 면의 면적은 6.25평방센티미터, 육각형 면의 면적은 6.265평방센티미터로 확률이 거의 14분의1로 균등하게 돼있다. 재질은 참나무다. 각 면에는 다양한 벌칙이 적혀 있어 신라인들의 풍류를 보여주고 있다.”실제로 발굴된 주령구에는 재밌는 벌칙(?)들이 쓰여 있어 신라 왕과 귀족들의 주석(酒席)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노래가 없더라도 춤을 춘다’ ‘다른 사람이 놀려도 화내지 않는다’ ‘술 세 잔을 단숨에 마신다’ ‘간지럼을 태우더라도 참는다’ 등 주령구에 적힌 문구를 볼라치면 1천 년 전 신라 사람들 역시 오늘날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신라 동궁과 월지의 본래 모습 제대로 재현하려면…앞서 언급된 논문 ‘동궁과 월지 조사 연구 현황과 과제’를 쓴 이상준은 “발굴 당시의 모습을 알지 못하는 일반인들은 현재의 모습이 동궁과 월지의 전부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 당시에는 그 권역이 지금보다 훨씬 범위가 넓었고, 수많은 전각들이 즐비한 웅장한 모습”이었다고 말한다.이에 덧붙여 그는 동궁과 월지가 가지는 역사 속 위상을 되찾고, 제대로 된 모습을 되찾기 위해서는 ‘기존에 생산돼 있는 고고 자료에 대한 철저한 분석’ ‘원래 범위에 대한 보다 철저한 확인’ ‘용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수로 조사·연구’ ‘주차장지를 비롯한 남쪽 지역에 대한 재발굴’ 등이 필요하다고 조언하고 있다.이는 비단 동궁과 월지 관련 유물의 조사발굴만이 아닌, 다른 지역 역사 유적에 대한 조사와 발굴을 진행하는 과정에서도 귀담아 들을 가치가 충분한 지적일 듯하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7-28

“제철공장이 들어서기 전에는 영일만에 밍크고래가 많았지”

1949년 구룡포 구평리에서 태어난 김정환 씨는 전복, 해삼 등을 잡던 머구리배(잠수부가 바다 밑에서 조개 등을 잡는 배)를 타다가 18세에 포경선을 탔고, 21세에 장생포로 건너가 줄곧 고래를 잡았다. 포경선에서 조리사부터 시작해 3등 세라, 2등 세라, 1등 세라를 거쳐 갑판장까지 했다. 김도형(김) : 어떻게 포경선을 타게 되었는지요?김정환(환) : 아는 사람이 소개해주더군. 마침 한 자리가 비어 있었지. 3년 정도 구룡포에서 목선을 타면서 일을 배웠는데, 철선을 타야 돈을 많이 벌 수 있어서 장생포로 갔어. 목선과 철선은 수입에서 차이가 꽤 났거든.김 : 구룡포에서 포경선을 탈 때 어디로 다녔는지요?환 : 북쪽으로는 호미곶 지나서 강구, 축산으로 다녔고, 남쪽으로는 양포, 감포로 다녔지.김 : 과거에 영일만에 밍크고래가 많았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어땠나요?환 : 제철공장이 들어서기 전에는 영일만 쪽에 밍크고래가 많았지. 감포, 호미곶, 칠포, 죽변에도 꽤 있었고.환 : 장생포에서 철선 탈 때는 어디로 다녔는지요?환 : 2월에 군산 어청도로 갔고, 5월이 되면 동해에서 움직였지. 그러다가 다시 전라도 가서 조업했고, 여름이 되면 나가수(참고래) 같은 큰 고래를 잡으러 동해로 왔지. 울릉도, 독도 쪽에 100자(30m)짜리 나가수가 나타났거든. 서해 쪽으로는 처음에 어청도를 다녔는데 거기가 전진기지였던 셈이지. 그다음에 흑산도로 갔고, 백령도에도 갔는데 3년 정도 지나니 못 오게 하더군. 그래서 항구에는 못 들어가고 그 근방에서 고래를 잡았지. 격렬비도 근처에도 갔고 고래 추격하느라 산둥반도 가까이 갔는데 중국에서 간섭을 안 하더군. 중국 배를 ‘짱구리선’이라 불렀는데 근처에 가면 연탄 냄새가 났어.김 : 고래 특성을 얘기해주신다면.환 : 밍크고래는 이것저것 다 잘 먹는데 나가수는 ‘곤지(새우 새끼)’만 먹어. 그래서인지 몰라도 밍크고래보다 나가수가 맛이 좋지. 12월이 되면 돌고래가 북쪽에서 어장 쪽으로 붙어서 내려오는데 전복, 해삼을 먹는다고 하더군. 1월이 지나면 부산 앞바다를 지나 대마도 쪽으로 간다고 들었어. 우연히 작은 돌고래가 잡혀서 먹어봤는데 맛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 껍질이 두껍고 전복처럼 쫀득쫀득하지. 돌고래는 참 귀해. 텔레비전에 나오는 돌고래는 ‘곱시기’라고 하는데 뱃사람이 말하는 돌고래와는 달라. 솔피(범고래)라고 있는데, 이놈은 밍크고래나 곱시기도 잡아먹어. 대단한 놈이지. 멀리서 솔피가 나타나면 나가수나 밍크고래, 곱시기는 도망가버려. 몇 번 잡아봤는데 일고여덟 마리가 떼지어 다녀. 수놈은 한 마리뿐이야. 돛대지. 아주 커. 나머지는 암놈이고. 솔피 한 놈이 밍크고래를 잡으면 그 주변으로 다른 놈들이 빙 둘러서서 살을 이빨로 물어뜯어. 밍크고래가 바다 밑으로 내려가면 안 되니까 한 놈은 밍크고래 밑에서 떠받치고 있고. 솔피 무리가 나타나서 총을 쏘아 한 마리 맞으면 바다에 피가 흥건할 거 아냐. 그런데 다른 솔피들이 도망을 안 가고 그 옆에 붙어 있어. 그러면 포수가 또 총을 쏘게 돼. 솔피는 바다의 왕이지.김 : 고래가 등장하는 영화를 보면 망통에서 쌍안경으로 고래를 관찰하는데 실제로는 어떻습니까?환 : 쌍안경으로는 안 되고 두 눈으로 살피지. 경험이 있어야 하고 시력이 좋아야 해. 고래는 숨 쉬러 물 위로 한 번 올라오면 서너 번 더 올라와. 망통에서 그걸 보게 되면 고래 근처로 빠르게 접근해서 총을 쏘지. 고래도 사람처럼 허파로 숨을 쉬잖아. 처음에는 작살을 맞고도 잘 가다가 시간이 지나면 퍼지고 말지.김 : 포경선에서 선원들 사이에 역할 분담은 어떻게 했습니까?환 : 갑판장은 오래 앉아 있고, 기관장과 선장이 교대 근무를 하지. 세라는 두 시간씩 교대하고. 고래를 추격할 때는 갑판장이 마이크를 잡고 이쪽으로 가라, 저쪽으로 가라 지시해. 포경선에서는 포수가 대장인데 대개 오십이 넘어야 될 수 있어. 김 : 목선과 철선은 어느 정도 차이가 있습니까?환 : 구룡포 목선은 해승호가 15t, 영어호가 10t밖에 안 되고 속도도 느려서 멀리 못 갔지. 목선으로는 큰돈 벌기 힘들어. 철선은 60t에서 80t 정도에 속도도 빠르고 멀리 갔지. 내가 구룡포에서 목선을 탈 때 장생포에는 일본에서 소나를 도입한 철선 동방호가 한 해에 100마리 이상 잡았어. 그때는 철선 타는 게 하늘의 별 따기였어. 직장 다녀서는 그만큼 벌 수 있나. 턱도 없지. 또 목선은 배가 작아 배 위에서 고래를 깰 수 없으니 끌고 들어왔지(김정환 씨는 고래 해체를 ‘깬다’고 표현했다). 철선은 웬만한 고래를 배 위에서 다 깨는데 진짜 큰 고래는 어쩔 수 없이 와이어에 감아서 끌고 들어왔어. 고래를 배 위에서 깨서 운반선에 옮겨 보낼 때도 있었고.김 : 포경선 탈 때 수입은 어느 정도였습니까?환 : 구룡포에서는 월급 없이 수당으로 받았고, 장생포에서는 월급에 수당이 붙었지. 22자(6.6m) 넘으면 두 마리 계산을 했고. 장생포에서 포경선 타고 서해 다닐 때는 고래를 워낙 많이 잡아서 월급보다 수당이 더 많았지. 이따금 부수입도 생겼어. 포경선에서 고래고기를 절여놓았다가 장생포에 오면 뒷거래를 했지. 전라도 사람들은 고래고기를 잘 먹던데 거래는 안 하더군. 전라도 가면 그쪽 배 옆에 우리 배를 붙여서 우리가 잡은 고래고기하고 그쪽에서 잡은 가자미, 조개, 꽃게를 바꾸기도 했지.김 : 고래 가격은 어느 정도 되었습니까?환 : 15자(4.5m) 새끼 밍크는 150만 원에서 200만 원, 20자(6m)는 250만 원에서 300만 원 정도 했어. 요즘은 크기는 물론 선도나 껍질 두께에 따라 가격 차이가 나지.김 : 포경선이 다른 어선에 비해서는 안전하다고 하더군요.환 : 포경선은 노는 날이 많아. 비 오고 안개 끼면 앞이 안 보이니 바다에 나갈 수 없고, 파도가 높으면 배가 속도를 못 내고 위험해서 출어를 못 하지. 밤에도 보이는 게 없으니 움직일 수 없고.김 : 그래도 사고 위험은 있지 않을까요?환 : 나도 죽을 고비가 한두 번 있었어. 갑판장 시절에 포수가 총을 쐈는데 헛방을 했어. 키를 총 쏜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데 순간 그렇게 못 한 거야. 그러자 배 위에 허술하게 놔둔 큰 밍크고래가 한쪽 방향으로 밀려서 배가 확 쏠려버렸지. 빨리 키 풀어라 고함지르고 난리가 났어. 우와 겁나데. 또 한 번은 항구에 정박해둔 배에서 합선으로 불이 나 곤욕을 치렀지. 아무리 그렇다 해도 다른 배에 비하면 안전한 편이야.김 : 포경선 탈 때 추억이라 할까요, 한 토막 얘기해주신다면.환 : 벌이가 괜찮을 때 흑산도 가서 돈 좀 썼지. 흑산도가 뱃사람들의 수도 아닌가. 그때 한 세월 갔어. 추억이라고 하기엔 그렇고, 1970년 4월 서해 격렬비도 앞바다에서 간첩선 격침시킬 때 바로 옆에 있었지. 조명탄이 대낮처럼 하늘을 밝히고 정말 살벌했어.김 : 포경선 타면서 기분 좋았던 때는 언제입니까?환 : 뱃사람이야 고기를 많이 잡을 때가 가장 좋지. 나가수 같은 큰 고래를 잡으면 만선기를 달고 항구로 들어가지. 뱃고동 세 번 울리면서. 그래도 너무 많이 잡으면 지쳐. 고래는 무게가 있으니까. 전라도 가서 하루에 밍크고래 서너 마리 잡으면 몸도 힘들어. 고래 잡는 것도 힘들지만 그걸 배 위에서 다 깨야 하니 얼마나 지치겠어. 소금에 절여놨다가 운반선에 넘겨주는 일이 또 힘들어. 배에 기름도 넣어야 하고 얼음도 실어야 하고, 밤새 선원들이 그 일을 하다 보면 낮에는 꾸벅꾸벅 졸다가 배 옆으로 고래가 지나가도 모르지.김 : 포경 금지되고는 무슨 일을 하셨는지요?환 : 작은 작업선 타다가 형제들이 힘든 뱃일은 그만하라고 해서 철강 공단에 들어갔어. 배도 팔아치우고 용접 기술을 배워 한동안 잘했지. 10년을 못 채웠는데 IMF가 터져 공단에 일거리가 없는 거라. 공치는 날이 한두 달이 될지 몇 년이 될지 도무지 알 수가 있나. 얼마 갖고 있지 않은 재산은 자꾸 까먹고. 도저히 안 돼 사표를 내고 다시 배를 탔지. 시간이 좀 지나서 철강 공단의 그 회사에서 다시 일 좀 해달라고 연락이 왔는데 어떻게 다시 가겠어. 계속 배를 탔지.김 : 구룡포에서 포경선 탔던 분들 소식은 듣는지요?환 : 포수나 선장 하던 분들은 거의 돌아가셨고, 갑판장 하던 분들도 얼마 남아 있지 않을 거야.김 : 뱃일이 힘들 텐데 앞으로도 계속하실 겁니까?환 : 나이 들어도 놀 수야 있나. 지겨워서 놀지도 못해. 뱃일을 하는 데까지 해야지.대담·정리 : 김도형(THE OCEAN 편집위원)

2021-07-28

올 여름휴가문경어때요?

백두대간의 대야산 자락의 선유동계곡에 닦아져있는 선유동천 나들길은 신선(仙)이 노닐(遊)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란 뜻을 담고 있듯이 아름답고 계곡미가 빼어나 문경8경의 하나로 꼽히는 곳이다.계곡물이 투명하고 하얀 너럭바위와 계곡 양 옆에 펼쳐진 깊은 숲과 계류를 드리운 오랜 소나무들이 많아 한층 운치를 더해 주고 있다.선유동은 웬만한 가뭄에도 어린이들이 물놀이를 할 수 있을 만큼 항상 맑고 풍부한 계곡물이 흐르고 바닥이 암반으로 돼 있어 여름철 물놀이 장소로 제격이다.선유동천나들길은 제1코스와 제2코스로 나뉜다. 제1코스(선유동계곡)에는 칠우대, 칠우폭포, 선유칠곡(완심대, 망화담, 백석탄, 와룡담, 홍류천, 월파대, 칠리계)과 선유구곡(옥하대, 영사석, 활청담, 세심대, 관란담, 탁청대, 영귀암, 난생뢰, 옥석대), 학천정 등의 명소가 있다.제2코스(용추계곡)에서는 무당소, 용소암, 용추폭포, 월영대 등의 명소를 만나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갯길 ‘하늘재’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갯길인 하늘재는 옛길을 따라 형성된 작은 계곡과 월악산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어우러져 온전히 자연에 집중할 수 있는 힐링 여행지이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아달라니사금(阿達羅尼師今)’ 시대 기록에 의하면 하늘재는 서기 156년, 신라 아달라왕 3년에 북진을 위해 ‘계립령 길을 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와 신라의 대립이 정점을 이루면서 고구려 온달장군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하고,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로로 중요한 거점이 되기도 했다.하늘재는 흙길을 따라 산책로가 이어지는데 경사가 가파르지 않아서 천천히 걷기에 제격이다. 꽤 높은 지대이기도 하고 하늘을 거의 다 덮을 만큼 울창한 숲길이라서 여름에도 더위를 잊고 오롯이 자기를 돌아보며 걸을 수 있는 고갯길이다. 산행을 위한 도구도 굳이 필요하지 않다. 편한 운동화에 간단한 복장이면 그만.◇자연에서 힐링∼문경단산관광모노레일단산모노레일은 산악 모노레일로 능선을 따라 상부승강장까지 오르다보면 조령산, 주흘산부터 소백산까지 백두대간의 광활한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 상부승강장에 오르면 대기 온도가 5∼6도 정도 낮아 시원함을 바로 느낄 수 있다.8인승의 아담한 모노레일이지만 푹신한 시트와 안전벨트를 갖추고 있어 최고경사인 42° 구간을 지날 때는 마치 우주왕복선을 탄 기분마저 든다. 소요시간은 상행 35분, 하행 25분이 소요되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감상하다 보면 지루할 틈이 없다.단산 정상에 도착하면 다양한 즐길거리가 마련돼 있는데, 아이들이 좋아하는 모험시설인 챌린지 시설, 숲속썰매장, 캠핑러들을 위한 숲속캠핑장, 인생샷을 찍을 수 있는 하늘 쉼터, 그네포토존, 초승달포토존, 어린왕자 포토존이 있고 단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힐링올레길도 조성돼 있어 체력단련에도 으뜸이다. ◇힐링의 최고 장소 ‘문경새재·문경생태미로공원’그 옛날, 새들도 날다가 쉬어간다는 높고 험준한 새재는 가장 아름다운 옛길로 남아 있으며 특히 1관문에서 3관문까지 7km 황톳길을 청정한 공기를 마시며 맨발로 걸을 수 있어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각광 받고 있다.부드러운 황톳길은 계곡과 잘 어울리고 울창한 숲은 시원한 한여름 그늘을 제공한다. 길 옆 작은 도랑의 물소리를 들으며 느릿느릿 걷다보면 일상의 피로가 한 번에 풀릴 것이다.문경새재 내 새롭게 조성된 문경생태미로공원은 옛길박물관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개장 1년 만에 입장객 10만 명을 넘어선 인기 관광지다. 도자기 미로, 연인의 미로, 돌 미로, 생태 미로 등 4개 테마의 미로를 비롯해 유아체험 숲 놀이터, 생태연못, 전망대, 산책로 등 다양한 체험 녹지공간이 조성돼 있다.‘암행어사 출두요!’ 프로그램은 문경새재의 과거길이라는 콘텐츠에 익살스러운 도깨비의 스토리를 더한 모바일 체험게임이다. 이 프로그램은 문경새재를 넘어 과거시험을 치르러 가던 중 암행어사가 도깨비들의 장난으로 잃어버린 짐을 찾아가는 스토리로 진행된다.미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경새재 입구의 농특산물 판매장에서 판매하는 미션지도와 스마트폰이 필요하다. 미션지도는 3천원을 주고 구입해야한다. 미션지도는 유료이지만 한복을 입고 체험할 수 있는 한복 체험권이 동봉되고, 미션을 마치면 얻을 수 있는 농산물 상품권을 생각하면 오히려 저렴한 편이라는 생각이 든다.이 프로그램에선 도깨비를 연기하며 미션 진행을 도와주는 연기자들을 지역 내 전래놀이팀으로 꾸려 미션 상품인 농산물 상품권과 더불어 코로나로 어려운 요즘 시민과 함께 상생하는 구조를 이뤄냈다는 점도 칭찬할만하다.◇살아있는 자연학습의 배움터 ‘돌리네습지’돌리네(Doline)라는 지역명은 석회암지대에 생성된 접시모양의 움푹 파인 땅을 의미하며, 산북면 굴봉산에 위치한 문경 돌리네습지는 석회암 지역이지만 특이하게도 물이 풍부하게 고여 있어 한여름에도 마르지 않아 세계적으로도 매우 희귀하며, 국내에선 문경이 유일하다.일반적으로 습지는 강가, 시냇가 주변이나 해안가에 형성되며, 산 정상 부근에는 빗물이 빨리 빠져나가 습지가 형성되기 어렵다. 하지만 문경 돌리네습지는 석회암이 빗물에 용해되고 남은 점토질과 광물이 계속 쌓여 물이 잘 빠지지 않은 덕분에 웅덩이에 물이 고이면서 습지가 만들어졌다. 벼, 사과, 오미자 등 경작도 가능한 곳이 문경 돌리네습지이다.돌리네습지에는 습지 생태계, 초원 생태계, 육상 생태계가 공존해 731종에 이르는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수달, 담비, 삵, 구렁이 등 멸종위기야생동물과 꼬리진달래, 낙지다리, 틀통발 등 희귀식물까지 서식하여 혼자 여행도 좋지만 가족단위 여행에도 추천한다. 습지를 조용히 거닐며 해설사분의 생생한 이야기를 듣다보면 어느덧 돌리네 습지의 매력에 흠뻑 빠져든다.최근 전동차 운행이 시작되었는데, 전동차를 타고 둘레길을 따라가다보면 숲 속에 온전히 나 홀로 있는듯한 기분이 들며, 힐링이 배가 된다.◇가족 모두 즐거운 테마파크 ‘문경에코랄라’문경에코랄라는 문경석탄박물관과 가은오픈세트장이 에코타운과 야외체험시설 등의 새로운 시설 및 다양한 콘텐츠로 만나 테마파크로 새롭게 태어났다.백두대간 생태자원이라는 핵심 콘텐츠와 친환경 녹색문화의 중심 문경에서 영상·문화 콘텐츠를 결합한 생태·녹색에너지·환경 테마의 휴양문화공간으로 조성돼 모든 연령층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 콘텐츠 테마파크이다.에코스튜디오는 자연생태 테마파크인 에코팜과 체험형 영상미디어 스튜디오인 미디어센터로 구성된다. 자이언트 포레스트는 동화마을을 테마로 한 놀이시설이며, 에코랄라의 핵심 시설인 에코타운에는 360° 원형 스크린과 특수조명, 천정오브제 등을 사용한 영상쇼가 펼쳐지며, 백두대간의 절경과 생명력 넘치는 숲 등을 표현한 다양한 미디어아트 전시도 진행되고 있다.이외에도 영상제작, 촬영, 편집의 모든 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촬영스튜디오와 친환경 농법에 대해 알아보는 에코팜, 어린이 놀이공간인 키즈플레이 등도 조성돼 있다.자이언트 포레스트는 ‘에코랄라에 거인이 살고 있다는 창작동화’를 기반으로 다양한 놀이시설을 조성해둔 야외체험시설이다. 거인광장, 숲마을 동물친구들, 종이배 연못, 거인의 숲 등 귀엽고 다채로운 조형물이 조성돼 있다.석탄박물관 옆에는 탄광촌이 있어 당시 광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탄광촌에 개관한 은성사진관에서는 70~80년대 교복 등 의상을 대여해 입어볼 수 있고, 셀프사진촬영과 즉석인화도 가능하다.은성갱도 실감체험관은 석탄을 캐던 실제 갱도 공간에 홀로그램, 증강현실 등 첨단 기술과 창작 뮤지컬이 합쳐져 탄생한 곳으로, 마치 광부들과 함께 탄광 속을 탐험하는 것과 같은 생생함을 느껴볼 수 있다. ◇이색 여행지 ‘잉카마야박물관’푸르른 산세가 아름다운 문경의 길을 따라 걷다보니 조용한 시골마을에 발길이 멈춘다.이곳은 전 볼리비아 대사 부부가 중남미 문화를 널리 알리기 위해 개관한 잉카마야박물관으로 박물관 입구에는 고대 잉카제국의 옛길을 뜻하는 ‘Camino Real’이라고 글씨가 써져 있는데 이 길은 잉카문명의 후예인 인디언이 만든 그 길은 남미 안데스 산맥을 따라 잉카제국의 수도 페루를 거쳐 볼리비아∼칠레∼아르헨티나를 잇는 5천㎞에 달하는 도로망이며, 문경 역시 옛날 한양으로 가는 중요한 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박물관 곳곳에는 외교관 생활동안 모은 유물들이 전시돼 있어 잉카마야 문명에 관심있거나 새롭게 알고 싶은 분들 방문해보길 권한다.박물관 밖에는 시원한 나무 그늘을 벗 삼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캠핑장도 운영되고 있다.◇역사 탐방 ‘운강 이강년 기념관·박열 의사 기념관’운강기념관은 대한제국시대 구국의 일념으로 의병을 일으켜 빛나는 승리를 거둔 도창의대장 운강 이강년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곳이다.2002년 4월에 개관한 기념관은 선생의 숭고한 위업을 재조명하고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기념관은 유물전시관, 사당, 관리사 등으로 구성돼 있으며, 유물전시관에서는 선생의 의병활동 연보, 교지, 간찰, 만사 및 관련 유품이 전시돼 있고, 사당에는 영정이 모셔져 있다.애국애족의 국민정신을 고취하는 운강기념관은 고난의 시대에 민족을 떠 받쳐 온 역사의 저력을 담아내고 있다1922년 2월 박열은 ‘일제’라는 권력에 대해 강한 저항 정신을 담은 한편의 시를 청년잡지에 기고했고, 이를 읽은 가네코 후미코는 깊이 동감하며 함께 인연을 맺게 됐다.이후 두 사람은 한국의 유학생 및 일본인 사상가들과 함께 흑로회·불령사 등의 사상단체를 조직하는 한편, 제국주의의 부당성과 ‘천황제’의 악랄함에 대해 사상잡지 ‘후테이센징[太い鮮人]’·「現社會」등을 발간, 통렬하게 비판하고 그 과정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일왕 부자와 지배계급을 폭살시킬 계획을 은밀히 추진하고 있었다.‘대역사건’으로 일제의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본인이었으며, 적진 한복판이라 할 수 있는 일본 동경에서 온몸으로 일본제국주의와 ‘천황제’에 맞서 싸운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인 청년과 일본인 여성이 함께 활동을 이어 나갔다는 점에서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박열의 동반자 가네코 후미코는 왜 조선인의 편에 섰을까? 박열의사 기념관에 와서 이야기를 만나보면 인생관을 새롭게 접해볼 수 있다./강남진기자 75kangnj@kbmaeil.com

2021-07-28

“소극적 누나와 적극적 동생의 콜라보 사진에 영양을 담아요”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동서상가 3층 ‘단듸랩’. 있어 보이는 이름 만큼이나 아기자기한 또는 이쁘게 꾸며진 스튜디오로 생각했다. 실상은 오래된 건물에 오래된 화장실, 바로 옆에 아이들을 위한 작은 교습소가 있는 곳이었지만 말이다. 이곳에 현실남매 허진희(32)·허진수(30) 씨가 꿈을 키워가고 있다.“조금 스튜디오가 그렇죠? 영양에서 스튜디오를 구할 때, 군청 주무관님과 함께 돌아다녔지만 한정된 예산에 넓은 장소로 구할 수 있는 곳이 많이 없었어요. 그래도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생각하면, 나쁘지는 않아요.”‘건물 외관과 스튜디오가 다르다’는 기자의 말에 웃으면서 대답한 진희 씨의 말이다. 실제로 ‘단듸랩’의 스튜디오는 외관과 달리 흰색 배경을 바탕으로 넓직하게 꾸며져 있었다. 사진을 위한 배경 공간과 아기자기한 탁자 등 여느 사진관과 큰 차이는 없다.‘단듸랩’은 ‘단디해라(제대로 해라)’라는 경상도 방언에서 따왔다. ‘단듸랩’은 가족사진과 단체사진, 증명사진 등 인물사진부터 제품사진, 스냅샷, 광고편집 디자인 등 전문 사진촬영·편집을 제공하는 스튜디오다. 현재는 인물사진보다는 제품의 스냅샷 등을 주력으로 하고 있다고…. “저희가 어려서 그런지 영양분들이 잘봐주시는 것들도 있더라구요. 물론 제품의 스냅샷과 광고편집 디자인 같은 것은 지금까지 영양을 비롯해 경상북도에 흔하지 않은 사업이었어요. 그래서인지 대부분 의뢰해주시는 분들이 만족해주시더라구요. 저는 감사할 뿐이죠.”‘단듸랩’의 작은 성공에는 동생 진수 씨의 몫도 크다. 누나인 진희 씨의 말로는 ‘인싸(인사이더)’의 교과서라는 진수 씨다. 진수 씨에 따르면, 우선 하루 커피 두 잔은 기본이다. 동네 형님(?)들과 함께 하는 축구 모임은 필수고 골프도 수준급이며, 지난해에는 산나물 축제위원회 추진위원도 맡았다. 처음에는 난생 처음 보는 외지인이 나타났으니 “저 녀석들은 누구야?”라는 텃세 아닌 텃세를 겪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가 형님이다. 사실은 아버지뻘의 나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농사짓는 형님’, ‘비료 장사하시는 형님’ 등 영양군 곳곳에 형님들이 포진해 있으니 사진과 디자인 관련되는 일만 있으면 무조건 ‘단듸랩’이 추천 대상 1순위인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요즈음 고추농사도 시작했어요. 500평 정도 되죠. 아! 물론 아는 형님께서 추천해주신 거죠. 매일 새벽에 나가서 고추를 돌보고 있어요. 벌레가 먹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고, 농작물의 수확이 좋지 않을까 걱정을 하죠. 애착이 가기도 하고, 이미 시작했으니 결과가 좋아야죠.”동생 진수 씨의 고추 농사 이야기에 누나 진희 씨는 “동생은 이미 영양 사람 다 됐어요”라고 했다. 그 말대로, 영양에서 2년을 넘기지 않은 진수 씨의 얼굴은 검게 타 있었다. 손가락 역시 도시 청년의 그것은 아니었다. 여기저기 그을려지고 상처가 있는 손가락이었다. □꿈이 현실로… 영양에서 차근차근현실남매인 허진희 씨와 허진수 씨는 서울 인근인 고양시 출신이다. 영양에는 어떠한 연고도 없다. 이들이 시골 중의 시골인 영양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무엇일까.진희 씨는 서울 상수동과 여의도 벤처기업에서 마케팅 업무를 했다. 출퇴근을 위해서는 매일 1시간 이상 지하철에서 보내야 했던 시간이었다. 특히, 마케터로서의 일 자체는 즐거웠지만, 자신이 부품 취급을 당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미래가 불안정하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고, 그로 인해 우울해지기까지 했다. 그러던 가운데, 떠오른 곳이 영양이었다.“물이 너무 깨끗하고 공기도 좋잖아요. 분위기도 좋고요. 늘 생각했던 것이 영양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거였죠. ‘단듸랩’도 마찬가지에요. 옛날부터 사진을 취미 이상으로 했어요. 회사 생활을 하면서 제품 사진 정도는 찍었으니 취미 수준은 아니었죠. 다만, 소극적인 성격이 문제였어요. 그래서 동생이 필요했구요.”소극적인 진희 씨와는 달리 적극적인 진수 씨는 남매의 사업에는 적격이었다. 대학에서 체육과 관광을 전공했고 천성이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며, 단체에 소속되어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심지어 과일 장사, 유아 체육 강사, 스키강사, 회사 영업사원 등 그동안 해온 거의 모든 일이 활달하고 유쾌하지 않으면 못하는 일이었다. 어찌보면 누나와의 사업 궁합은 좋은 셈이었다. 가족 관계는 모르겠지만 말이다.“매일 싸워요. 늘 사소한 문제로 투닥거리죠. 그래도 일하는 것에는 완벽해요. 서로 조율해야죠. 누나도 마찬가지고 저도 목표가 있거든요.”진수 씨의 말대로 현실남매의 목표는 영양에서 기반을 잡는 것이다. 미래를 위한 수입을 안정화하는 것. 그래서 진희 씨와 진수 씨의 사업도 다각화 중이다.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가 통한 것일까. 처음 1년 1천500만원으로 잡았던 매출이 매달 평균 400만원의 매출로 껑충 뛰었다. ‘단듸랩’이 생각하는 사진 콘셉트를 영양분들이 받아들이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기분 좋은 오산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하지는 않는다. 이제 32살과 30살의 청년이 영양에서 미래를 꿈꾸기 위해서는 말이다.“고추 농사를 시작한 것도 목표를 이루기 위한 것이죠. 이제는 영상 쪽으로 발을 넒히고 싶어요. 준비도 하고 있구요. 또 관광과 관련한 일도 생각하고 있어요. 대체적으로 지역의 축제는 농산물 판매에 초첨이 맞춰져 있어요. 물론 저도 그것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축제 자체를 즐길 수 있고, ‘꼭 오고 싶은 영양’을 모토로 지역 관광을 활성화하고 싶어요. 독특한 콘텐츠로 무장하면 분명히 가능할 것 같아요. 영상 디자인이 그 중의 하나일 수도 있구요.” □영양에 청년들이 많았으면 좋겠어요경북의 오지라고 불렸던 영양에서 기반을 만들어가고 있는 허진희 씨와 허진수 씨. 이미 두 사람은 스스로를 영양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다.“아직 서울이나 수도권에서는 영양에 대해서 잘 몰라요. 저희가 택배를 주문한 적이 있는데, 택배 기사분이 전화가 오더라구요. ‘강원도인데 단듸랩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씀이셨죠. 택배기사분이 경북 영양을 강원도 양양으로 착각하신 거에요. 친구들도 영양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도 같구요. 그런데 저희가 이곳에 내려오고, 영양에 다녀갔던 친구들이 많아요. 그리고 영양의 자연과 주위를 보고 반한 친구들도 많구요.”그래서 진희 씨와 진수 씨에게 물었다. ‘영양으로 온 것에 대해 만족하고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이들의 대답은 단호했다.“만족하고 있어요. 물론 아직 넘어야 하는 산이 많은 것도 사실이죠. 그래서 더욱 노력하고 있는 것이구요. 서울의 남자친구에게 이야기를 했어요. 이후의 일이지만, 주말부부도 생각하고 있구요. 근본적으로는 남자친구와 결혼하게 되면, 영양에 살고 싶어요.” “저도 여자친구에게 영양에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여자친구의 조건이 연봉 5천만원이더라구요.(웃음) 처음에는 불가능할 것 같았지만, 지금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더 커요. 농사를 짓고, 앞으로 계획하는 일이 제대로 된다면 분명히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마지막으로 진희 씨와 진수 씨에게 질문을 던졌다. 영양에 청년들이 많아졌으면 하냐고 말이다. 이들은 말했다.“당연하죠. 청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아는 사이에 동업은 절대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그것도 현실남매라면 오죽하랴. 하지만 서로를 밀어주고 끌어줄 수 있다면 ‘동업’도 나쁘지는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각자가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시너지 효과를 내고 하나가 되면, 또 다른 사업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 진희 씨와 진수 씨 남매처럼 말이다. 처음에는 도시 생활에 대한 염증으로 시작한 영양 생활. 그저 영양의 자연이 좋고, 행운이 가미되었던 귀농 생활. 하지만 스스로가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까./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1-07-27

집콕생활에 지쳤다면?은어축제 접속하세요!

봉화은어축제는 문화체육관광부 지정 5년 연속 우수축제로 선정됐으며, ‘대한민국 축제 콘텐츠 대상’에서 2020년 축제관광부문 대상, 2021년 비대면 축제 대상을 수상하는 등 매년 50여만 명이 찾는 대한민국 대표 한여름 축제이다.지난해 코로나19로 촉발된 언택트 문화의 확산에 따라 ‘온라인’ 축제로 개최돼 축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올해로 23번째를 맞은 봉화은어축제는 지난해에 이어 두번째 ‘온라인’으로 개최한다. △ ‘내 곁에 ON, 봉화은어축제’봉화군이 주최하고 (재)봉화축제관광재단이 주관하는 제23회 온라인 봉화은어축제는 ‘내 곁에 ON, 봉화은어축제’라는 주제로 31일부터 8월 8일까지 봉화은어축제 전용 온라인 채널 ‘봉화은어TV’와 축제 홈페이지, SNS 등 다양한 플랫폼을 기반으로 열리게 된다.올해 주제는 코로나19로 지친 일상에 봉화가 주는 선물로 ‘온라인을 통해 당신 곁으로 찾아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전 국민들에게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희망과 긍정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봉화군과 (재)봉화축제관광재단은 최근 코로나19의 확산세가 꺾이지 않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개최가 확정된 봉화은어축제는 당초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추진하고자 노력해왔으나 지역주민들과 관광객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 비대면 온라인으로 개최하기로 최종 방침을 정했다.따라서 축제의 핵심 콘텐츠인 은어 반두잡이와 맨손잡이 체험이 전격 취소됐으며 이와 관련된 구이체험과, 물난장 놀이터, 전시행사 등 각종 오프라인 행사들도 취소 또는 대폭 축소돼 운영된다. 대신 주무대를 온라인으로 옮기는 만큼 한층 강화된 온라인 프로그램과 이벤트로 관광객들의 아쉬움을 달랠 계획이다. △ LIVE로 만나는 온라인 콘텐츠지난해 처음 도입돼 높은 판매고를 올리며 큰 호응을 얻은 은어 판매 드라이브 스루는 올해 축제 개막에 앞서 7월 24일부터 판매를 시작,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구입이 가능하다.차량에 탑승한 상태 그대로 은어를 구매할 수 있어 간편하며 무엇보다 관광객 밀집을 예방할 수 있어 방역에도 효과적이다.판매가격은 kg당 1만5천원으로 시중에서 구입하는 것보다 저렴한 가격에 은어를 맛볼 수 있다. 올해는 즉석에서 만든 은어구이와 튀김을 함께 판매함으로써 다양한 은어요리를 맛있고 간편하게 즐길 수 있다. 은어 판매 드라이브 스루는 다음 달 15일까지 계속될 예정이며 행사 물량 소진 시 조기종료 될 수 있다.유튜브 채널 봉화은어TV에서는 축제기간 동안 매일 오후 2시 30분에 봉화은어축제를 주제로 다양한 온라인 프로그램이 전개된다.유명 쇼호스트, 개그맨과 함께 라이브로 만나는 은어 드라이브스루 판매 ‘드라이브 커머스’, 전문 요리사가 전하는 명품 은어요리 소개 코너 ‘수박향 은어! 요리 클라쓰’가 방송돼 봉화은어축제를 다채롭게 즐길 수 있다.또 봉화의 유명산을 배경으로 최소한의 캠핑 도구들만 이용해서 펼쳐지는 ‘와일드 캠핑 브이로그’와 최신 트렌드인 차박(자가용 이용 캠핑)으로 봉화에서 하루를 만끽하는 ‘그린 봉화, 차박 봉박’ 등 1급 청정지역인 봉화의 자연을 알리는 프로그램도 준비돼 있어 캠핑 애호가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8월 6일부터 8일까지는 코로나19로 지친 일상에 선물을 준다는 온라인 봉화은어축제의 취지에 맞게 코로나19로 고생하는 의료진들을 응원하기 위한 ‘LIVE IN 봉화, 덕분에 콘서트’가 매일 오후 7시 30분 ‘봉화은어TV’라이브를 통해 무관중 콘서트로 진행된다. △ 남녀노소 즐기는 온라인 콘테스트축제 홈페이지와 SNS에서는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 가능한 온라인 이벤트가 펼쳐진다.은어축제를 주제로 한 창작 만화 그리기 대회인 ‘봉화 4컷 웹툰 그리기 대회’와 제2회를 맞는 ‘I LOVE 봉화 랜선사생대회’가 개최되고 축제 마지막 날 온라인 시상식을 통해 소정의 상품도 증정한다.이 외에도 ‘은어 숏폼 챌린지’, ‘봉화은어축제 6행시 짓기’, ‘알쏭달쏭 초성퀴즈’, ‘은어축제 틀린그림 찾기’ 등 은어축제만의 특색 있는 이벤트를 통해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할 계획이다.자세한 소개 및 참가방법은 봉화은어축제 공식 홈페이지(http://www.bonghwafestival.or.kr)를 통해 확인 가능하다.엄태항 봉화군수는 “지난해 좋은 평가를 받았던 ‘온라인’ 봉화은어축제의 성공적인 개최 경험을 토대로, 올해는 보다 새롭고 참신한 온라인 프로그램과 이벤트로 집에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축제를 만들겠다”며 “변화하는 시대의 요구에 발맞춰 봉화은어축제의 변화와 도전을 바탕으로 새로운 축제문화를 선도해 나갈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하겠다”고 밝혔다./박종화기자 pjh4500@kbmaeil.com

2021-07-27

12년 공직생활의 끝자락… “아직도 마무리 할 일 많아”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달성군에는 여전히 유효하다. 2010년 17만6천여 명이었던 달성군 인구는 전국적 인구 절벽 속에서도 10년 동안 9만 명이 늘어나 6월말 현재 26만 명을 넘어서며 변화와 도시성장을 증명하고 있다. 2010년 3천611억원이었던 군 예산도 지난해엔 1조113억원으로 3배 가량 커졌다.2010년 첫 취임한 이래 11년째 군수실을 지키고 있는 김문오 군수는 행사가 없는 시간이면 집무실 CCTV화면을 집중한다. 비슬산 대견사와 송해공원, 도동서원, 사문진 등 달성군의 문화 관광 8개 거점 지역을 실시간 모니터하는 것이다. 방송국 앵커 출신에 3선 단체장 경력의 김 군수. 그의 달성자랑은 막힘도 거침도 주저함도 없이 숨 가쁘다. -3선 민선군수로 이제 임기가 10달도 못 남았다. 남은 임기동안 어떤 일들에 집중할 생각인가.△나는 아직 할 일이 많다. 비슬산 케이블카 건설, 송해기념관 준공, 도동서원 누리길사업, 다사 행정복합타운 건설과 현풍의 충혼탑 재건립, 화원읍사무소 리모델링, 여성문화복지센터 마무리 등 벌여놓은 일들을 해야 한다.-누가 달성 군수가 되더라도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김문오 군수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 남아있나.△그것들이 모두 내가 해야 할 일들이다. 왜냐하면 모두 내가 벌였던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할 일들이 끝이 없다.-김 군수의 재직기간동안 달성군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김 군수가 일을 많이 한 것은 전국적으로도 소문이 났다. 스스로 평가해 본 적이 있나. 자랑을 한 번 해 달라.△돌아보니 지난 11년은 달성군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변화를 이뤄낸 시간이었던 것 같다. 대구 변방의 존재감 없던 달성군은 이제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고 이제는 대구를 넘어 대한민국의 중심 도시로 당당히 자리매김해 나가고 있다고 자랑하고 싶다. 그야말로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변하는 발전을 거듭하며 달성의 위상을 드높였다. 지난해 달성군은 개청 이래 전국 82개 군 단위에서는 유일하게 예산 1조원을 돌파했고 전국적인 인구 절벽의 위기 속에서도 조출생률 전국 2위, 합계 출산율 전국 15위를 기록하며 줄어가는 대구 인구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됐다고 자부할 수 있다.-지난달엔 김 군수가 거버넌스 지방정치대상 최우수상을 받는 등 달성군은 도시 발전만큼 각종 상도 많이 받은 것으로 안다. 상이란 상은 죄다 받으려 하는 욕심 많은 군이라고도 하더라.△최근 고용노동부로부터 전국 지방자치단체 일자리대상 우수상을 받았고 지난달 행안부의 국가재난관리 유공 대통령상과 서울국제관광박람회에서 최우수상을 받는 등 올해에만도 중앙행정기관 등으로부터 13개의 상을 받았다. 지난해엔 42개나 된다. 모두 군민과 직원들이 열심히 일 한 결과일 것이다.-군수로서 소임을 충실히 한 것인데, 군민들도 자부심이 상당할 것 같다.△달성은 낙동강과 비슬산, 국가산업단지와 테크노폴리스라는 동력을 발판 삼아 성장했다. 인구가 늘어나 유가 옥포 현풍 등 3개면이 읍으로 승격하면서 군내에 6개 읍 체계를 갖추게 됐다. 균형 발전과 보편적 복지, 다양한 교육 문화 정책을 통해 떠나가는 달성이 아닌 ‘머무는 달성’으로 변화시켰다. 2020년 하반기 행정수요 조사에서 지역민 80%가 ‘달성군에 계속 살고 싶다’고 답했다. 군민들의 자부심이니 군수로서는 군 경영에 성과를 거둔 셈이다.-달성의 발전은 특히 인구 증가로 드러난다. 인구 증가와 경제성장, 지역 문화관광 산업 인프라 구축 등 분야마다 변화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 같다. 배경과 전망을 듣고 싶다.△처음 군수 취임당시 17만6천900여 명이던 달성군 인구가 지난 달 현재 26만 명을 넘어서 꾸준히 상승곡선을 그리며 30만 명을 바라보고 있다. 달성군은 대구 산업 경제의 70%를 책임지는 신성장 허브 도시다. 테크노폴리스와 대구국가산단이라는 산업 경제 인프라 쌍두마차를 발판으로 인구성장과 경제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것이다.유가읍과 현풍읍에 걸쳐 조성된 테크노폴리스가 국내외 연구 및 교육 집적단지를 갖춘 미래형 첨단 과학도시로 자리를 굳혀 가고 있다. 국가산업단지도 물산업 클러스터와 초대형 물류센터, 업체의 입주가 본격화되면서 영남권 중추산업단지로 부상하고 있다. 여기에 일자리를 찾는 젊은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인구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코로나19 팬데믹으로 관광 산업이 위축되면서 가까운 관광코스들이 언택트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달성군은 관광산업 인프라에도 많은 투자를 했고 성과도 얻었다. 달성의 관광 현황과 앞으로의 전망은.△코로나로 관광산업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언택트 관광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코로나 사태에 안전한 여행을 원하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달성은 비슬산 대견사 중창부터 마비정 벽화마을, 사문진 역사공원, 송해공원, 비슬산 관광명소화 사업까지 체계적이고 과감한 정책을 추진해서 실질적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하고 있다.-달성이 과학산업단지로 성장한 이면에 문화도시로서의 역량도 주목받고 있다.△코로나가 기승을 부린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많은 문화 행사와 축제들이 미뤄졌지만 달성군은 지난 10년 동안 문화와 관광에 역점을 두고 행정력을 집중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달성 100대 피아노 콘서트’와 ‘달성 대구현대미술제’는 대한민국 대표 문화축제로 자리매김했다. 100대 피아노 콘서트는 지난해 코로나로 열리지 못했는데 올해는 코로나가 숙지면 더욱 내실 있게 준비해서 10회를 대한민국 대표 명품축제로 열 계획이다.달성은 지난해 대구 최초로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는 예비문화도시로 지정됐다. 대구에서는 달성군이 유일하다. 화원읍에서 진행된 문화적 도시재생사업이 지역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내년에는 법정 문화도시로 승격할 것을 자신한다.-대구시가 신청사를 달서구 두류정수장 부지로 옮기기로 했다. 달성군이 시청 청사를 유치하려다가 실패했다. 군민들의 실망감이 클 것 같다.△오히려 군의 위상을 높이는 정말 좋은 기회였다. 시청 유치를 희망하면서 26만 달성군민이 하나로 똘똘 뭉쳤다. 군민이 대구시청 청사 유치라는 하나의 목표를 놓고 화합하고 단결하는 축제의 장을 만들었다. 대구의 변방으로 인식되던 달성군이 대구의 절반을 차지하며 대구의 중심이라는 실상을 알리는 기회가 됐다. 달성의 브랜드 가치를 한껏 드높였으니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무상의 자산이자 큰 성취를 얻은 것이다. 군민의 자긍심을 높인 계기가 됐다.-앞으로 대구시의 달성은 어떤 도시를 지향해 가야 한다고 생각하나.△대구 땅의 절반을 차지하는 달성군은 낙동강과 비슬산이라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고 있다. 대구가 발전하려면 달성을 활용해야 한다. 달성은 군이지만 인구의 5%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군의 평균 연령이 41세로 젊은 도시다.21세기는 환경과 정보 관광이 문화와 접목해서 먹거리를 생산하는 구조로 나가야 한다. 국가산업단지와 테크노폴리스를 중심으로 한 문화 관광 산업도시를 지향해 나가야 할 것이다. 내년 본격 분양될 달성산단은 강소기업을 유치해서 대기업과 안배하는 방향으로 추진했으면 한다.-세 번의 선거 중 두 번을 무소속으로 출마해 상대를 꺾었다. (한 번은 정당 공천을 받아 무투표 당선됐다.) 무소속 군수로 군정에 어려움은 없었나. 자치단체장의 정당 추천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선거 과정에서 상대 진영의 진정과 고소 고발이 이어져 심리적으로 힘들고 성가신 일이 많았다. 별 것도 아닌 일로 선거법 위반이라며 걸고 넘어졌다. 물론 지금은 모두 무혐의로 판정 났고 다 지나갔다.무소속이어서 개인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특히 꼭 필요한 예산을 삭감당할 때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정당에 가입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았고 피해를 입은 것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기초단체장은 정당 추천제를 없애야 한다는 것이 소신이고 현재도 무소속이다.-3선 군수로서 후회 같은 것은 없나. 어떤 군수로 남고 싶나.△아무 미련도 후회도 없다. 처음 민선 5기 군수로 취임하면서 ‘인기 있는 군수보다 기억에 남는 군수가 되겠다’고 약속했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그 약속을 지킬 수 있게 해 준 27만 달성군민에게 감사한다. 군수에 처음 당선됐을 때의 초심, 군민에 대한 공복으로서 군민을 위해 한 몸 불사른다는 열심을 군수를 마칠 때까지 지킨다는 뒷심으로 남은 임기동안 군정에 임할 것이다. 그래서 비슬산 참꽃보다 더 활짝 핀 100년 달성의 꽃에서 달성 발전의 화룡점정을 기어이 찍겠다.-아직 이른 질문 같은데, 임기를 마치면 그다음엔 어떻게 100세 시대를 보낼 것인가. 세간에는 중도에 군수직을 사퇴하고 국회의원에 도전할 것이라는 설도 있었는데, 계획이 있나.△사생활의 복원이다. 그동안 골프도 손 놓고 오직 군정에만 매달렸던 지난날들이었다. 그런 의혹 때문에 군정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단호히 ‘군수직을 성실히 수행하겠다’고 천명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이제 군수직을 내려놓으면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김문오(金文澳)1949년 대구. 경북대사대부고, 경북대 법대 졸.대구MBC 보도국장과 뉴스데스크 앵커, 한국언론재단 기금이사를 거친 언론인 출신.2010년 무소속으로 출마해 선거의 여왕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총재가 지원하는 후보를 꺾고 5대 민선 달성군수에 당선됐다. 6대 지방선거에서는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해 무투표 당선되는 기록을 세우더니 지난 2018년 7대에서는 또다시 당 공천에 반발,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해 자유한국당 후보를 꺾고 압도적 표차로 당선됐다./이경우 편집위원

2021-07-27

우리의 딸들을 위해 정계에 뛰어들어

과거 포항에서 주목받는 여성 예술인은 누가 있었을까. 또 어떤 이유로 여성의 정치 진출이 이루어졌을까. 지역 여성들의 활동상을 갈무리한 ‘포항여성사’는 어떻게 발간되었을까.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 여성들의 활동 폭은 넓어지고 깊이도 더해진다. 김경희의 목소리에도 힘이 붙는다. 최 : 문화예술 쪽 얘기를 들어보고 싶군요. 과거에 여성이 예술을 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으니 그 세계에 대해서도 잘 아실 것 같습니다.김 : 서울대학교 미대 회화과에 입학해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중간에 그만두고 포항에 왔다. 그런 사정 때문에 예술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솔직히 부담스럽다. 하지만 미술 교사를 했었기에 미술 교육에 대해서는 몇 마디 할 수 있겠다. 미술 쪽은 비용이 많이 들어 학교 현장에서도 힘든 점이 있었다. 재료 살 돈이 없어서 목탄 대신 버드나무를 썼고, 비싼 유화 물감 대신 수채화를 지도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고민했고 최선을 다했다. 그때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고맙게도 제자들이 열심히 해주어서 미술대학에 진학하고 미술 교사로 재직하며 다시 학생들을 지도하는 선순환 구조가 이루어졌다. 참 고마울 뿐이다. 나와 동연배의 예술인들은 대부분 그러했을 것이다. 예술 각 분야에서 자신의 작업에 최선을 다하며 후배와 제자들을 헌신적으로 이끌어주었다.최 : 다른 예술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한 여성은 누가 있는지요?김 : 재능을 가진 분들이 의외로 많다. 다만 여성이기 때문에 능력을 인정받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남편을 따라 타 지역에서 포항으로 온 여성 예술인들도 설 자리를 잡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특히 기억에 남는 분은 시조 명창 김정미와 동해안별신굿 이수자 정채난이다. 그리고 문인화를 하는 손성범도 있다.시조 명창 김정미는 1978년 포항에 정착해 대한시우회 포항 지회에서 시조창을 가르치며 국악 인구의 저변 확대를 위해 앞장선 국악인이다. 그의 열정 덕분에 포항에서 많은 명창이 배출될 수 있었다. 동해안별신굿 이수자 정채난은 김재출(동해안별신굿 김정희 이수자의 아버지이며 김석출의 동생)과 결혼해 포항으로 온 후 남편에게 소리와 춤을 배웠다.최 : 포항여중, 포항여고 재학 시절에 방정분 선생에게 음악을 배웠지요. 방정분 선생의 역할이랄까, 영향력은 어느 정도였습니까?김 : 방정분 선생은 이화여전 성악과를 졸업하고 1950년대 초부터 포항여고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그 당시 학생들은 음악이 낯설 정도로 음악에 대한 이해가 낮았다. 그렇기에 방정분 선생이 학생들에게 미쳤던 영향은 적지 않았다. 나 또한 그가 꾸려가는 합창단에서 노래를 배우며 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포항 여성 예술인들의 활동이 뚜렷해졌다. 문학, 국악, 음악, 미술, 서예, 무용, 연극, 사진 등에서 여러 모임과 단체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1990년대로 넘어가면서 더 활성화된다.최 : 정계에도 뛰어들었습니다. 쉽지 않은 결단을 한 것 같은데.김 : 지역에도 여성 정치인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섰다. 누군가는 깃발을 들어야 했다. 남성 정치인이 대부분인 상황에서 거의 모든 정치적·사회적 현안은 남성 중심적 사고로 관철될 수밖에 없다. 여성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안은 여성의 의사가 반드시 반영돼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고, 주변 사람들과 상의 끝에 어렵게 결단을 내린 것이다.최 :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얘기해주신다면.김 : 1995년 제2대 지방자치선거에서 민주자유당 비례대표 1번을 받아 당선되었다. 이때 도의회에 다섯 명의 여성이 진출했는데 모두 비례대표였다. 나는 교육사회복지위원회 소속으로 의정 활동을 했다. 경상북도 여성발전기금 조례, 여성정책개발원 설치 조례 제정 등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최 : 여성의 인권 신장을 위해서도 앞장섰는데. 김 : 남녀차별금지에 대해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남자나 여자나 똑같은 사람이다. 그것이 기본임을 알기에 그걸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을 일깨워주고 싶었다. 여성 중에서 여성에 대해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생각을 바로잡아주려고 애썼다. 결코 남성을 겨냥한 활동은 아니었다. 그리고 여성단체가 일을 제대로 하려면 여성 공무원들에게 기회가 주어지고 능력이 제대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성 공무원 편에서 힘이 될 수 있는 일을 도왔다. 우리들의 딸과 그 딸의 딸들을 위해 그들이 차별받지 않는 삶을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앞장섰다.1960~1970년대 여성을 무시하고 여성단체는 단체 취급도 하지 않던 사회 분위기에 정면으로 맞섰던 김경희. 자유당 말기 변석화가 국회의원에 출마한 이후 맥이 끊겼던 여성의 정계 진출은 김경희가 경상북도 의원에 당선되면서 새로운 지평을 연다. 이는 단순히 김경희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 여성사에 작지 않은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최 : 2001년 ‘포항여성사’가 발간됩니다. 당시 사회 상황을 고려하면 간단한 작업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김 : 새 밀레니엄을 맞이하면서 ‘포항여성사’ 발간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여성의 권익 신장이 올바른 방향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여성운동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잘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정장식 포항시장의 배려로 사업 계획이 확정되었고, 편찬위원과 집필진이 꾸려졌다. 여성에 대한 기록, 그것도 포항 여성에 대한 생활, 문화, 경제, 교육 등 다방면의 기록을 하나로 모으고 엮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 일에 참여한 사람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추진했기에 가능했다.2001년 2월 10일, ‘포항여성사’ 발간을 앞두고 여성사 내용에 대한 평가와 포항 여성의 과제 그리고 발전 전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김경희, 황복희, 김보미, 김귀현, 김조숙자 다섯 명의 여성이 모여 여성 발전을 위해 해야 할 일에 대하여 논의했다. 그 자리에서 어떤 부분이 취약한지, 어떤 부분을 더 채워나갈지를 살펴보며 여성문제는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며 여성들만이 노력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라는 시사점을 얻었다. 그리고 여성의 잠재력을 개발하여 좀 더 활발하게 지역사회 발전에 응용할 수 있는 방향이 모색되어야 하고, 또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개인과 사회의 발전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최 : 다른 지역보다 여성사가 먼저 발간된 것은 포항 여성계의 저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입증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김 : 그렇게 볼 수 있다. ‘포항여성사’ 발간은 단순히 책 한 권을 내는 사업이 아니라 포항 여성의 역량을 역사적 맥락에서 점검하고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사업이었다. 여성의 시각에서 여성의 활동을 중심으로 일련의 과정을 서술한다는 것이 얼마나 깊은 의미가 있는가. 각 분야별로 편찬위원과 집필위원이 고생을 많이 했다. 특히 1970년대 이전의 자료와 사진을 찾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지만 후대(後代)에 더 중요한 일이기에 결코 쉽지 않은 일을 해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우리 지역에서 여성들의 활동하는 모습을 하나로 묶어 발간할 수 있었던 것은 의미가 큰 작업이었다. 김경희포항에 산 지 올해로 여든여덟 해가 지났다. 그사이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와 4·19가 있었지만 유년의 기억은 늘 가슴 뛰게 빛났다. 포항여중과 포항여고 재학 당시 합창부와 미술부를 병행할 정도로 예술을 사랑하는 소녀였고, 미술부원들 간의 약속을 지키고자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할 만큼 신뢰를 소중하게 여겼다. 모교인 포항여고에서 교직 생활을 했으며, 결혼 후 4녀를 둔 가운데 여성 권익과 여성 교육을 위해 쉼 없이 뛰었다. 1973년 포항새마을 부녀회장, 1977년 새마음봉사단 단장을 맡았고, 같은 해 죽도동 여성회관추진위원회에 총무로 있으며 여성회관이 건립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했다. 1981년부터 죽도유아원과 새마을 협동유아원 원장으로 5년간 근무했고, 1984년 포항불교여성회를 창립해 지금까지 37년간 회장직을 맡고 있다. 1987년에는 포항의 여성단체를 총괄하는 여성단체협의회를 조직해 회장직을, 1989년에는 전문직 여성클럽(BPW)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1990년에 포항여성회관 초대 관장(5급)으로 추대되었지만 봉사 정신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과는 맞지 않음을 깨닫고 자리에서 내려왔다. 1995년 통합 여성단체협의회 회장직을, 같은 해 경상북도 5대 도의원에 당선되었으며, 포항시 여성상을 수상했다. 1985년 대통령 훈장 근면장을 받았고, 2003년에 한국불교여성개발원이 선정한 108인에 추대되었으며, 2001년에는 포항시민상과 대통령 공로장을 받았다.대담·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

2021-07-27

“구룡포에서 포경선 탈 때 한 해에 고래 50마리 잡아”

구룡포에서 포경선 선원 두 명을 만났다. 먼저 소개하는 이영식 씨는 1936년 구룡포 구평리에서 태어나 17세에 구룡포에서 포경선을 처음 탔다. 10년 동안 구룡포에서 고래잡이를 하다가 장생포로 건너가 선장까지 했고, 국제포경위원회(IWC)가 1986년부터 전면적으로 고래잡이를 금지하면서 포경선에서 내렸다. 김도형(김) : 여러 종류의 어선이 있는데 포경선을 탄 이유가 궁금합니다.이영식(이) : 일반 어선을 타다가 포경선을 탄 사람도 있는데 나는 선원 생활을 포경선에서 시작했다. 무엇보다 포경선이 다른 어선보다 안전한 편이었다. 비가 내리거나 바람이 강하게 불면 바다에 나가지 않았고 야간작업도 거의 없었다. 작은 사고는 이따금 있어도 큰 사고는 드물었다.김 : 처음 탄 포경선은 어떤 배였습니까?이 : 구룡포 강두수 씨가 선주인 영어호(永漁號)와 해승호(海勝號)를 탔다.김 : 구룡포에서 포경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혹시 알고 계신지요?이 : 광복 전에 강두수 씨가 구룡포에서 일본인 선주 사무장을 하다가 광복되면서 포경업을 했다고 들었다. 목선(木船)에 망통(고래를 발견하기 위한 전망대)과 총을 달아 포경선으로 썼다.김 : 포경선에는 몇 명이 탔습니까?이 : 목선은 보통 일곱 명이고, 나중에 장생포에 들어온 철선(鐵船)은 여덟 명에서 열세 명 정도 된다. 목선에는 포수, 선장, 기관장, 갑판장, 1등 세라 두 명, 2등 세라 한 명이 탔다. 철선에는 3등 세라도 있고, 고래 해체를 전담하는 해부장도 있었다.김 : 포경선은 포수 역할이 중요하겠지요?이 : 포수가 대장이다. 선장보다 포수가 높다. 선장은 배를 좀 탄 사람 중에 시력이 좋은 사람이 맡았고 실제로 포수가 다했다. 월급도 포수가 가장 많이 받았다. 그런데 포수는 면허가 없다. 선장과 기관장은 면허가 있어야 했다. 선박 검사를 받을 때는 선장, 기관장 면허가 필요했다. 혹시 문제가 생기면 법적인 책임은 선장이 지고, 실질적인 책임은 포수에게 있었다.김 : 포경선의 특징을 얘기해주신다면.이 : 세계 포경의 선구자는 노르웨이다. 일본이 그걸 배웠고 우리가 그걸 또 배웠다. 그래서 포경선에서는 일본어를 많이 쓰고 영어도 좀 섞어 쓴다. 배 방향을 오른쪽으로 바꿀 때는 ‘시나볼’, 왼쪽은 ‘보루’라 했고, 총을 오른쪽으로 향할 때는 ‘미기’, 왼쪽은 ‘히라이’라 했다. 포경선은 무리 지어 다니지 않고 각자 알아서 움직인다. 새벽 4시 반쯤 나가서 해가 지기 전까지 고래를 찾아다녔다. 망통에 두세 사람이 올라가서 고래를 찾았다. 쌍안경으로는 고래를 볼 수 없다. 불과 1, 2초 사이에 고래가 나타났다 사라지는데 쌍안경으로 보이겠나. 정신 바짝 차리고 바다를 살펴야 했다. 고래가 입을 치밀 때나 꼬리를 끄덕 들 때 총을 쏜다. 경험 많은 포수들은 헛방이 거의 없었다. 소나(SONAR, 음파탐지기)가 들어오면서 사람이 망통에 올라가는 일이 없어졌다. 조업을 나가면 가까운 항구에 정박하고, 밤에는 고래를 잡을 수 없으니까 야간작업은 거의 없었다. 해 질 녘에 고래를 딱 한 번 잡아봤다. 장생포에서 선장 할 때였는데, 고래가 배에 딱 붙어 왔다. 운이 좋은 날이었다.김 : 포경선에 달려 있는 총은 어떤 종류인가요?이 : 50밀리(㎜)에서 90밀리까지 있다. 구룡포 목선은 50밀리였다. 60밀리도 있긴 했는데 70밀리가 가장 많았다. 70밀리는 일제 때 쓰던 걸 부산에 가서 수리해 썼다. 80밀리는 울산에 있는 공업사에서 만들었고. 90밀리는 이승만 대통령 때 우리 해역을 넘어온 일본 포경선에서 압수한 것이었다.김 : 고래는 언제 잘 잡혔는지요?이 : 밍크고래는 5월에 가장 많이 잡혔다. 6, 7월에는 나가수(참고래)도 꽤 잡혔다.김 : 고래 해체는 어떻게 했는지요?이 : 목선은 고래를 끌고 와서 항구에서 해체하고, 철선은 배 위에서 바로 해체했다. 목선도 15자(4.5m) 정도의 작은 밍크고래는 배 위에서 해체하기도 했다. 장생포에는 정식 해체장이 있었고, 구룡포에는 해체장이 없어서 위판장에서 해체했다.김 : 당시 잡았던 고래는 어떤 게 있습니까?이 : 밍크고래가 가장 많았고, 나가수, 돌고래도 있었다. 놀이공원에서 보는 돌고래는 진짜 돌고래가 아니라 일본 말로 ‘고시’라고 하는데 뱃사람들은 별로 안 쳐주었다. 진짜 돌고래는 ‘고꾸’라고 불렀다. 길이가 50자(15m)나 됐고 나가구 가격의 두 배에 거래될 정도로 비쌌다.김 : 돌고래 얘기를 좀 더 해주시지요.이 : 돌고래는 음력 10월 말 시베리아 쪽에서 한반도 동해안으로 오는데, 연안에 딱 붙어서 이동했다. 이듬해 봄 남쪽으로 돌아서 다시 북쪽으로 갔다. 고래 중 가장 맛있고 껍질이 두껍고 기름도 많이 나왔다.김 : 밍크고래는 크기가 어느 정도였는지요?이 : 새끼는 10자(3m)보다 조금 더 크고, 대개 14자(4.2m)에서 20자(6m) 정도 됐다. 혜성호를 탈 때 포항 용덕리 앞바다에서 29자(8.7m)를 잡았는데 그게 가장 컸다.김 : 나가수는 어땠나요?이 : 나가수는 태평양에서 자라다가 성장하면 우리 연안에 나타났다. 아무리 적어도 40자(12m)는 되었다. 포수들은 밍크고래보다 참고래 잡기가 힘들다고 했다. 힘이 좋고 빨리 움직이기 때문에 조준하기가 힘들 수밖에 없다. 통상 한두 마리가 다니는데 드물게 20~30마리가 몰려다닐 때도 있었다.김 : 구룡포 시절 고래를 얼마나 잡았는지요?이 : 1960년대 초 영어호 탈 때는 영일만은 물론 강원도 주문진, 경북 죽변, 경남 욕지도를 두루 다니면서 한 해에 밍크고래 50마리 가까이 잡았다.김 : 고래 가격은 어느 정도였나요?이 : 좀 큰 밍크고래는 1천만 원 정도 했다. 가장 맛있는 부위는 일본 말로 ‘오노미’라 하는 꼬리살이다. 일본 사람들이 그걸 좋아했는데 양이 얼마 안 나왔다. 처음에는 국내에서 소비되다가 일본에 수출했다. 수출하는 고래고기는 아무래도 좀 비쌌다. 울산 사람들이 구룡포 고래고기를 사들여서 일본에 수출하기도 했다. 구룡포 어판장에서 솥 걸어놓고 삶아서 팔기도 하고, 고래고기집도 몇 군데 있었다.김 : 구룡포 포경선 선원은 어느 지역 사람이었나요?이 : 구룡포와 흥환, 대보, 삼정 사람들이 많았고, 용덕, 칠포 사람도 있었다.김 : 포경선을 타면 수입은 어느 정도 되었는지요?이 : 구룡포에서는 만 원 수입이 생기면 선원은 2천200원을 받았다. 장생포에서는 기본급에 수당이 따로 붙었다.김 : 장생포 쪽이 후했나 봅니다.이 : 그랬다. 내가 장생포로 옮긴 것도 그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장생포 포경선이 목선에서 철선으로 바뀌고 일본에서 소나가 들어오면서 고래 잡는 숫자가 구룡포와 차이가 많이 났다. 그러니 선원들에게 돌아가는 몫도 구룡포보다 장생포가 많았던 것이다.김 : 포항 쪽 포경선 얘기는 기억나는 게 없는지요?이 : 구룡포보다 포항에 포경선이 먼저 있었다. 장생포가 포경기지로 크고 포항은 사업이 잘 안 되니까 구룡포보다 먼저 포경업을 접은 게 아닌가 싶다. 선배들한테 들은 얘기인데, 포항 출신 김성룡 공군 참모총장이 한때 포항에서 포경 회사 사무장을 했다. 광복 전에 일본에 있다가 광복이 되고 포항에 왔는데, 그때 잠시 그 일을 했다는 얘기다.김 : 구룡포에 포경선은 언제까지 있었는지요?이 : 영어호가 포경 금지될 때까지 남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김 : 구룡포에서 포경선 탔던 분들 근황은 어떻습니까?이 : 살아 있는 사람이 다섯 명 정도 될까 싶다. 나이가 있으니까 아프기도 하고 자주 보지는 못한다. 나머지는 다 고인이 되었을 거다. 김 : 포경선 타고 어디까지 가봤는지요?이 : 구룡포 목선은 강원도 주문진에서 통영 욕지도까지 갔다. 장생포에서 철선 탈 때는 흑산도, 어청도까지 갔다. 어청도에는 해체된 고래를 운반하러 가기도 했다. 그걸 부산 가서 팔았다. 선배들 얘기가 산둥(山東)반도 쪽에는 물 반 고래 반이라 했다. 소나가 들어오면서 서해 고래를 엄청 잡았다. 그때 중국에는 포경선이 없었으니 오죽했겠나.김 : 포경선 탈 때 언제 가장 기분이 좋았는지요?이 : 포경선 탄 사람은 다 그랬겠지만 나 역시도 큰 고래 잡아서 만선기 달고 고동 울리면서 항구에 들어갈 때가 최고였다.김 : 고래 잡으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이 : 1985년 일본 근해에서 밍크고래 여덟 마리를 봤다. 암놈이 젖 떨어지고 새끼 가질 때 되면 수놈이 그걸 알고 몰려든다. 암놈 한 마리에 새끼 한 마리, 그리고 수놈 여섯 마리 도합 여덟 마리를 한꺼번에 다 잡았다.김 : 구룡포읍 행정복지센터 앞마당에 있는 포경선은 어떤 배입니까?이 : 10t쯤 된다. 원래 포경선은 아니고 일반 어선에다 망통 올리고 70밀리 포를 달았다.김 : 혹시 사고 경험은 있는지요?이 : 장생포 시절에 명신호 선장을 했는데, 부산 앞바다에서 충돌 사고가 나서 두 사람이 죽었다. 큰 사고였다. 내가 탄 배는 아닌데, 창원호라고 장생포 배가 양포 앞바다에서 사고 난 적도 있다. 고래가 보여서 총을 쐈는데 헛방이 되었고 롤러로 감다가 제대로 안 감겼다. 그 바람에 창살이 튀어서 선원이 즉사하고 말았다.김 : 포경이 금지된 후에 보상은 얼마나 받았습니까?이 : 장생포에서 포경선 선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보상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단체행동을 해야 했고 돈도 모았다. 예산은 법이 있어야 만들 수 있는데 포경선 보상을 해줄 수 있는 법이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보상금이 나왔는데 기본 100만 원에 경력 30만 원을 더해 130만 원을 받았다. 그런데 소문은 5천만 원 받았다고 났다. 포경 금지 후에 일본이 고래를 잡으니 우리도 잡자는 얘기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대담·정리 : 김도형(THE OCEAN 편집위원)

2021-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