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노병들, 장사상륙작전을 말하다 < 1 >
한국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할리우드 배우 메간 폭스와 빼어난 연기력을 인정받는 김명민 등이 출연한 곽경택 연출의 영화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을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영화는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이어진 ‘비극의 한국전쟁사’, 그중 주요 사건 중 하나를 영상에 담았다. 소재가 된 건 1950년 9월 15일 결행된 장사상륙작전.
카메라는 겨우 18~19세 청년 772명이 학도병으로 자원해 순수한 애국심 하나만을 무기로 포탄 쏟아지는 조선인민군과의 전투 현장에서 어떤 영웅적 행위를 보여줬는지를 좇는다.
‘인천상륙작전' 펼쳐진 1950년 9월15일 후방교란 목적 작전 나서
1유격대대, 7번국도 봉쇄로 인민군 보급 루트 끊고 200고지 탈환
확인된 전사자만 139명… 퇴각 후 남겨진 학도병도 50여 명 달해
지난 3월 중순. 영화 속 배우가 아닌 실제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된 학도병을 만났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슬프고도 참혹했다.
“거기가 정확히 어디인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도착해보니 태풍의 영향으로 집채만 한 파도가 몰아치는 해변이었죠. 상륙선에서 뛰어내려 백사장으로 헤엄치던 전우들 수십 명이 바로 내 눈앞에서 죽었어요. 그날 새벽 장사해변은 지옥이었습니다.”
71년 6개월 전 ‘그날’을 떠올리며 말을 이어가던 장사상륙작전기념사업회 류병추(91) 회장의 목소리가 떨렸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류 회장은 대구 대건중학교 5학년 학생. 겨우 열여덟 살 홍안의 청년이었다.
“나라가 없다면 학교도 없고, 나도 있을 수 없다”는 순정한 애국심에 어쩌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 수도 있는 학도병에 망설임 없이 지원했다. 조부와 아버지는 유 회장의 학도병 지원 사실을 한참 후에야 알았다.
1950년 9월 15일 새벽. 미국에게 제공받은 상륙선 LST문산호에 올랐다가 익사하거나 총에 맞아 죽은 이들의 절대다수 역시 류병추 회장과 비슷한 마음으로 참전을 결심한 10대의 어린 학도병들.
이런 비극을 야기한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시작됐다.
당시 소비에트연방 공산당 서기장이던 이오시프 스탈린(Iosif Stalin·1879~1953)의 동의 아래 탱크와 전투기 등을 지원받은 북한 조선인민군은 마른 대나무가 쪼개지는 속도로 남하한다.
1945년 해방 이후 몇 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제대로 된 군사조직을 채 갖추지 못한 상태였던 남한 육·해·공군은 첨단 소련제 무기로 파죽지세(破竹之勢)하는 조선인민군의 기세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탱크 앞에 맨손에 든 수류탄으로 맞서는 슬픈 촌극이 곳곳에서 발생했다.
△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희생된 수백여 명의 학도병들
전황은 하루가 다르게 북한쪽의 승리로 기울어갔다. 전쟁이 시작된 지 3개월이 가까워질 무렵엔 경상남·북도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남한 땅이 북한의 손에 들어갔다.
한국군 수뇌부와 남한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한 UN군 사령부 고위급 장성들에겐 상황을 단숨에 뒤집어엎을 획기적인 작전이 필요했다.
UN군 사령관 맥아더는 “성공 확률이 매우 낮고, 크나큰 희생이 예상된다”는 본토(미국)의 우려가 있었음에도 인천상륙작전을 치밀하게 기획해 추진하게 된다. 아무리 찾아봐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한국군 총참모장이던 정일권 육군 소장 등도 이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의 승패가 좌우될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위해 여러 방안이 논의되고 만들어졌다.
1950년 9월 15일 개시된 인천상륙작전 3일 전엔 서해안 전라북도 군산으로 미군과 영국군 부대가 출동한다. 조선인민군의 판단을 흐리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로부터 이틀 뒤. 인천상륙작전이 있던 같은 날 새벽엔 동해안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장사동 해변으로 지원병(학도병이 90%) 772명이 헤엄을 치거나 해변 소나무에 연결된 로프를 이용해 육지에 올라섰다. 이게 바로 장사상륙작전이다.
고대 전략서(戰略書)엔 “동쪽을 흔들어 적을 혼란스럽게 만든 후 서쪽을 공격한다”는 병법이 등장한다. 이는 고대 전쟁은 물론 현대전에서도 곧잘 사용된 전술이다.
다수의 군사 관련 연구자들은 장사상륙작전을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교란전술의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공 확률이 수천분의 일인 ‘불가능에 가까운 작전’이었기에 당시 UN군과 한국군 지휘부가 예상했듯 희생이 컸다.
미군과 한국군 자료와 문서 등을 통해 확인된 전사자만 139명. 그 외에도 92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고, 퇴각할 때 장사해변에 남겨져 조선인민군의 포로가 되거나, 저항하다가 숨진 이들도 50여 명에 가깝다. 재론의 여지없이 젊은이들의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 북한군 최정예 2군단 예하 부대와의 전투를 불사하며…
LST문산호를 타고 지금의 장사해수욕장에 상륙한 72년 전 부대의 정식 명칭은 ‘대한민국 육군 독립 제1유격대대’였다.
이름은 거창했지만 군복을 입은 지 겨우 보름 만에 폭탄이 터지고, 마구잡이로 총알이 난사되는 전투 현장으로 투입된 학도병 위주의 독립 제1유격대대는 제대로 된 사격 훈련 한 번 받지 못한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전공은 혁혁했다. 당시 북한 조선인민군 최정예로 평가받던 2군단 예하 부대와 당당히 맞서 7번 국도를 봉쇄함으로써 조선인민군의 동해안 보급 루트를 끊어버렸고, 장사해변 인근 산등성이에 설치된 소련제 기관총이 쏟아내는 수천 발 총탄 앞에서도 두려움을 이기고 세칭 ‘200고지’를 탈환했다.
그래서였을까? 한국전쟁이 휴전된 지 7년 후인 1960년 더글러스 맥아더는 예상을 뛰어넘는 전공을 세운 장사상륙작전 참여 학도병들에게 “헌신적이고 충성스러운 전우로 당신들을 기억할 것”이란 내용을 골자로 하는 친서를 보냈다.
장사상륙작전이 있은 후 69년이 지난 늦은 시점이었지만 한국군 최고 통수권자의 격려도 없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6월 청와대에 초청된 한국전쟁 참전 용사 유병추 회장을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공헌한 분”이라 말한 것.
△ 장사상륙작전 참전 학도병 훈장 추서는 여전히 논의 중?
대통령의 언급이 있은 이듬해부터 육군본부는 장사상륙작전 참전 사망자와 생존자에 대한 훈장 추서 등을 고민했다. 담당 사무관이 유 회장을 만나러 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가시적인 상황 진전은 현재까지 없다.
장사상륙작전 학도병들의 훈장 추서와 수여는 여전히 논의만 하고 있는 것인가?
이와 관련 육군본부에서 한국전쟁 참전자 상훈(賞勳) 관련 업무를 맡고 있는 사무관 J씨는 “한국전쟁 관련 문서를 통해 실명과 공적이 기록된 분들이 아니라면 훈장 추서와 수여가 어려울 듯 하다”며 안타까움을 전했다.
꼭 문서에 실명과 공적이 명시된 이들에게만 훈장이 돌아가야 하는 것일까? 합리적 정황 증거와 당시를 기억하는 명백한 증인들이 있다면, 훈장 추서와 수여를 검토하는 방향으로 법을 개정하는 건 불가능한 일일까?
1950년 충북 영동농업중학교 5학년이던 이영희(91) 씨도 장사상륙작전에 참여한 학도병이다.
아버지와 함께 대구로 피난을 와있던 상황에서도 나라가 처한 위기를 걱정하며 참전을 결심했던 이씨는 “70년이 넘게 흘렀다. 훈장이 중요한 게 아니다. 젊은 날 나의 선택이 가치 있었다는 걸 후손들에게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장사상륙작전 참전 학도병 유병추, 이영희 씨와 경북 영덕군 지품면 출신으로 20대 중반에 입대를 자원해 같은 작전에서 생사를 함께 한 배수용(99) 씨. 그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훈장이라는 형식이 중요한 게 아니다. 보다 중요한 건 더 늦지 않게 국가가 죽어간 우리의 전우를 잊지 않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을 뿐이다.”
학도병이 맞서 싸운 조선인민군 2군단은
中 공산당부대 이끈 ‘백전노장' 무정 지휘 북한군 최정예 부대
한국전쟁이 시작된 1950년. 남한과 북한의 군인들은 모두 체계적인 현대식 군사 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보유한 무기도 지금의 시각으로 보자면 조악한 수준. 당시 북한 조선인민군 지휘부에는 중국에서 군사 활동을 경험한 이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
그들 중 김병희(1905~ 1951·일명 무정장군·사진)는 돌올한 군사 전략가였다. 1930~40년대 중국 공산당의 주력부대 중 하나였던 ‘국민혁명군 제8로군’ 포병 1천여 명을 통솔한 포병단장 출신이었던 것.
김일성보다 나이가 일곱 살 많았던 김병희는 “겨우 대위 계급장 달고 돌아온 자가 가당찮게 장군 소리를 듣는다”며 군 관련 경력이 일천한 김일성을 낮춰 보기도 했다.
한국전쟁에서 김병희는 조선인민군 2군단을 지휘한다. 풍부한 전투 경험으로 단련된 김병희의 2군단은 재론의 여지없는 북한군 최정예 부대였다. 장사상륙작전 참전 학도병들은 바로 그런 조선인민군 2군단 예하 부대와 싸웠다.
전쟁 전에는 총 한 번 쏴본 적 없는 10대 후반 어린 학도병들이 김병희라는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의 전술에 맞서 대등한 전투를 벌였다. 그들 가슴 속에 순정한 애국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