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기획ㆍ특집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외모 관리로 ‘노마스크’ 기대감 UP

어딜 가나 마스크를 써야 하는 코로나 일상에 사람들 ‘얼굴’ 보기가 힘들어졌다. 거리두기로 만남이 뜸해진 것도 있지만, 다들 눈만 빼놓고 코와 입을 가리고 다니다보니 서로의 생김새를 찬찬히 들여다보기가 좀처럼 쉽지 않아서다. 주변엔 온통 마스크만 둥둥. 민낯이 실종됐다.갖가지 규제가 파고든 삶 가운데 뜻밖의 자유가 생겼다. 이름하야 ‘어차피 마스크 쓸 거니까’ 자유. 남자는 매일 귀찮게 수염을 깎지 않아도 되고, 여성들은 화장하지 않은 맨얼굴로 외출하며 묘한 홀가분함을 느낀다. 마스크 착용으로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마저 자연스레 가릴 수 있게 돼 얼굴 치장에 드는 수고를 덜게 됐다.어느덧 코로나 팬데믹 2년차에 접어들어 이젠 한 몸과도 같은 마스크에 의지해 외모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을법하다 싶었더니 아뿔싸, 섣부른 짐작이었다. 이 시국을 빌려 마스크로 가릴 수 있는 부위를 ‘새로고침’하겠단 사람이 성형외과에 줄을 선단다. 올 6월부터 코로나 백신 접종에 속도가 붙기 시작하면서 곧 ‘노(No) 마스크’ 시대가 돌아올 것이란 기대감으로 외모 관리에 막판 열을 올리는 분위기다. 마스크 착용을 빌미로 요즘 많이들 한다는 성형술이 궁금해진 기자는 취재를 핑계 삼아 견적 상담을 받아보기로 했다.미리 고백하건데, 서른 중반 여성인 기자는 넘치는 볼살에 둥근 얼굴형을 가졌다. 십대 때까지만 해도 부모님을 비롯한 지인들은 “젖살이라 나중에 크면 다 빠진다”고 했지만, 정작 빠져야 할 얼굴살은 서른 넘어서도 그대로인데 큰소리치며 장담하던 이들은 전부 발을 뺐다. 동글동글하고 넙데데한 얼굴에 입체감을 불어넣어줄 병원을 수소문해 대안을 찾아 나섰다. □ 성형 진입장벽 낮아지고 5분짜리 시술 성행현대의학의 놀라운 효과를 기대하며 지난 8일 포항의 한 성형외과 의원에 도착했다. 얼굴에 직접 칼을 대지 않고 피부에 주사제를 주입하는 방식의 비수술적 치료를 주로 하는 곳인데, 업계에서는 ‘쁘띠 성형’, 환자와 의사 사이에서는 보통 ‘시술’로 불린다.로비에 들어서자 예닐곱 명이 등받이가 없는 소파에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남녀 한 커플 외엔 모두 여자 손님. 창구에 앉아 있던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약을 했는지 물었다.첫 방문이라 상담부터 받고 싶다 했더니 인적사항을 간단히 적어달라며 손바닥만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접수를 마친 뒤, 직원은 “예약 손님을 우선 진료하기 때문에 대기 시간이 길어질 수 있다”고 안내했다. 순번 대기 중인 사람들 쪽으로 몸을 돌려 맨 뒤쪽 소파 끄트머리로 가 자리를 잡았다. 긴장감에 자꾸만 엉덩이를 들었다 놨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영락없이 초짜 티를 냈다.그 사이 자동문이 열리고 180cm 정도 돼 보이는 남성 2명이 들어왔다. 실내에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었지만, 말소리가 없어 워낙 조용한 탓에 이들이 창구에서 나누는 대화가 귀에 선명히 박혔다. “오늘 제모 3회차 맞으시죠? 잠시만 앉아 기다려주세요.” 젊은 남자 둘이서 여름대비 털 관리를 하러 온 모양이었는데 수염일까, 겨드랑이일까 어느 부위를 제모하려나 싶어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했다.“이○○님, 강○○님, 이○○님” 호명 소리에 소파에 앉아 있던 사람들 중 커플 한 쌍과 여자 한 명이 일어섰다. 이들은 간호사를 따라 대기석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 숫자 2가 적힌 진료실 앞에 앉았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한 여성이 두 손으로 양 턱의 끝을 솜이나 거즈 같은 걸로 누른채 걸어 나와 그 부위에 어떤 시술을 받은듯 보였다. 곧이어 대기 중이던 여성 한 명이 진료실로 들어갔고, 약 오 분 간격으로 다음 차례가 돌아왔다.이십여 분쯤 지났을까. 드디어 내 이름이 불렸다. 검은색 재킷과 치마를 입은 여성을 따라 반투명 유리문이 달린 방으로 들어가니 책상에는 ‘상담 코디네이터’라 적힌 명패가 놓여 있었다. 일반적으로 패션업계 종사자를 칭하는 ‘코디네이터’는 병원과 같은 의료기관에선 환자 상담을 도맡아 관리하는 역할을 한다.성형외과 코디네이터의 경우 환자가 코 수술을 원한다면 눈이나 턱선 등 얼굴 전체적인 균형을 고려해 적합한 시술을 추천하거나 또는 다른 치료를 권하는 식으로 상담을 진행한다.“오늘 어떤 상담을 도와드릴까요?”“요즘 들어 유난히 얼굴이 평면적으로 보여서요”“마스크 한 번 벗어보시겠어요?”가려져 있던 속살을 두 눈으로 확인한 코디는 “얼굴에 볼륨감을 더하면 훨씬 입체감 있어 보일텐데”라며 모니터 화면에 사진을 몇 장 띄우기 시작했다. “여기 보시면, 이 분도 처음엔 얼굴이 세로로 길고 밋밋했는데 여기 볼이랑 턱에 필러를 넣었어요. 보세요, 이렇게. 어때요? 전혀 티 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전보다 갸름해졌죠? 여기 이 분도 마찬가지”라며 여러 명의 시술 전후 모습을 곁들여 설명을 이어갔다.“고객님도 코 바로 옆 앞볼 쪽에 필러를 넣으면 얼굴에 굴곡이 생겨서 느낌이 달라질 거예요. 우선 이것부터 해보시고, 다음번에 턱에도 살짝 맞으면 얼굴이 훨씬 작아보여요. 요 턱끝 필러는 워낙 많이 하기도 하고, 만족도도 높은 편이라. 저도 사실 여기”하며 본인 턱을 가리켰다.처진 얼굴 살을 끌어올려 한 살이라도 더 어려보이게 해준다는 슈링크, 인모드 등 각종 리프팅 시술은 영어인지 불어인지 낯선 명칭에다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그런데도 점점 흔들리기 시작한 눈동자를 감지한 코디는 야무지게 한 방을 더 날렸다.“오늘 바로 시술도 가능하세요. 한 10분 정도? 끝나면 얼굴이 조금 부어 보일 수 있는데, 마스크 쓰니까요. 다른 분들도 그래서 큰 걱정 않으시고 상담 끝나면 바로 시술받고 가세요. 내일 출근하거나 일상생활에도 전혀 지장없고요.”“비용은요?” 본론으로 들어가 얼마인지 묻고 말았다. 직원은 책장에서 파일 하나를 꺼내 “여기 표 보시면, 볼쪽 필러는 100만 원에 부가세 별도고요. 음, 저희 병원 처음이시니까 턱 보톡스 서비스로 해드릴게요. 필러랑 같이 하시면 두 배로 효과 보실 거예요”라고 말했다.돈 백만 원이 든다는 소리에 그제서야 정신이 번뜩 들어 “생각 좀 해보고 다시 올게요”라고 말했다. 속내를 알아챈 코디는 “비용이 부담돼서 고민이시죠? 그래도 돈 들인 만큼 후회 안 하실 거예요”라며 능숙하게 받아쳤다.□ 마스크 벗는 날, 서로 얼굴 알아볼까?이왕 온 김에 다른 시술은 뭐가 있는지, 인기 있는 걸 추천해달라고 했다. “보톡스랑 필러는 흔하게 하세요. 예전엔 이마랑 눈가를 많이 하셨는데, 마스크 쓴 뒤론 팔자주름을 펴거나 입술을 도톰하게 보이는데 관심이 많아졌어요. 아, 입꼬리 필러도 인기인데. ‘별그대’드라마 나온 탤런트 김수현씨 아시죠? 드라마 끝난 지가 언젠데, 마스크 쓰고 나서 그분처럼 해달라는 손님이 부쩍 늘었다니까요. 고주파 주사같은 피부 관리는 남자분들도 두 분씩 같이 오셔서 받으시고요. 시술 끝나면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르거나 2∼3일가량 약간 멍이 들기도 하는데, 요즘엔 크게 개의치 않는 분위기고요. 마스크로 가리니까 누가 알겠어요?”다른 방법이 없을까 싶어 이번엔 동네를 옮겨 눈과 코 성형을 전문으로 한다는 병원으로 향했다. 아까보다 사람이 더 많은 듯했는데, 남녀 성비가 비슷한 점이 눈에 띄었다. 병원복도 끝 ‘피부관리실’이라 적힌 곳 앞에는 남자 네 명이 둘씩 떨어져 앉아 대기 중이었다.마찬가지로 예약을 하지 않아 접수를 마치고 15분 정도 기다리고서야 진료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앞서 병원에서처럼 얼굴 고민을 털어놓자, 이곳 의사는 심부볼 제거 수술을 권했다.70만원 상당의 시술인데, 입 안쪽 피부를 절개해 지방주머니를 제거함으로써 볼살 윤곽이 세련돼 보이는 효과가 있다고. 망설이는 모습을 본 의사는 “천천히 생각해보고 오세요. 상담하면 열 명 중에 절반 이상은 결국 다시 와서 해달라고 하시더라고요”라고 말했다.“마스크 영향도 있지만,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서 그런지 최근 들어 눈이나 코는 기본이고 가슴 성형도 많이 해요. 지금 코 수술은 한 달 정도 기다려야 예약을 잡을 수 있고요.”이날 병원 두 군데를 돌아 넉넉히 200만원은 있어야 외모 콤플렉스를 해결할 수 있단 견적을 받았다. 상담 중에 시술 부작용이나 위험성을 먼저 알려준 곳은 없었다. 남녀 불문하고 외모 관리에 분주한 모습에 이러다 마스크를 벗고서 못 알아보면 어쩌나 싶기도. 전문가들은 “코로나 유행으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신을 관찰할 여유가 생겼고, 여행길이 막혀 경비 지출이 줄어든 대신 목돈이 생기자 성형수술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진 사회현상”으로 해석한다.얼굴 생김새를 어떻게 고치든 성형 여부는 차치하고, 하루빨리 마스크 벗는 날이 오길. 주변 친구와 동료의 코가 예전과 달라진 듯해도 굳이 물어보지 않는 센스도 함께 갖춰서 말이다./김민정기자 mjkim@kbmaeil.com

2021-06-15

보는 것에서 느끼는 것으로

아름다움에도 각도가 있다. 신천을 걷다 보면 물을 거슬러 오를 때와 물길을 따라 내려올 때의 느낌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물을 거슬러 오를 때는 돌과 풀을 헤치다 폭포에서 시원하게 떨어지는 물의 속살을 훤히 볼 수 있는데 반해서, 물길을 따라 내려올 때는 다만 물의 겉모습만 보게 되므로 거슬러 오를 때의 감흥을 그대로 느끼지 못한다. 영화를 보는 것도 그와 같다. 좋은 영화를 한눈에 알아보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물길을 거슬러 오르듯이 영화를 반복해서 보게 된다. 좋은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것을 나는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행위와 같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처음 볼 때와 두 번 볼 때의 감흥이 다른 것은 보는 각도가 달라서이고, 물의 속살과 상처를 바라보듯이 영화를 더 깊이 느끼기 때문이다. 대구에 세 개의 큰 영화제가 있다는 사실을 오오극장의 서성희 대표와 인터뷰를 하고서야 알았다. 대구·경북독립영화협회가 주최하는 대구단편영화제가 있고, 전국 최초로 지역 시민사회와 복지단체, 노동조합 등 시민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운영되는 대구사회복지영화제가 있고, 또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구여성영화제가 있다.대구단편영화제는 올해 스물두 돌을 맞았고, 대구사회복지영화제는 열한 돌이고,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는 세상을 위하여!’ 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대구여성영화제는 2012년에 출범해서 올해 아홉 돌을 맞는다. 대구에는 또 예술영화관으로 널리 알려진 동성아트홀과 독립영화관으로 유일한 오오극장이 있어서 영화애호가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름난 영화제가 셋이나 되고 예술영화를 걸 수 있는 공간까지 준비되어 있어서 매년 젊은 영화인들이 대구로 몰려온다. 서 대표는 독립영화제로서 대구단편영화제가 전국 최고의 수준을 자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단편소설 단편영화. 단편이란 어휘의 밀집성과 꽉 찬 작품성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녀를 만난 김에 독립영화에 관한 얘기를 들어본다.“독립극장의 개념부터 말씀해주세요.”“독립영화는 상업 영화 자본에 의지하지 않고 제작되는 영화를 말하며, 대기업화된 제작사의 종속에서 벗어나 자본시스템으로의 독립, 정치로부터의 자유로운 독립을 포함합니다.”독립영화는 우선 자본으로부터의 독립과 상업 영화의 지배적인 내러티브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한다. 자본이 대기업화 되는 상업영화의 투자 규모가 평균 총제작비 100억 정도라면 독립영화는 4억~10억 미만의 저예산으로 만드는 영화를 말한다고 매우 구체적으로 내용을 일러준다. 대구·경북 단편영화제 출품작이 1000여 편인데 그 중에서 30편~ 50편을 뽑는다고 한다.“단편영화제의 의미가 뭐예요.”“서사구조와 영화미학의 완성을 익히는 단거리경주라고 할까요? 지역에서 영화제는 전국 영화인과의 교류를 위해서도 꼭 해야 할 일이라고 봐요.”대구독립영화제도 21회나 되는 연식이 쌓여 매년 200여 명의 감독들과 스태프들이 대구를 찾고 있다며, 서 이사장은 단편영화를 찍은 감독이 결국은 장편영화를 찍더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인다. 봉준호 감독도 단편영화를 찍었다고. 단편영화를 한 편 찍으려면 인적 네트워크가 최소한 10여 명이 함께 해야 하는 작업이라 자본이 많이 들기 때문에 대구에서는 그 마저도 확보하기 어려운 처지라며 영화인들의 고충을 슬쩍 드러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하겠다는 청년이 매년 늘어나고 있다는 긍정적인 변화를 언급하며, 서 대표는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대구영상미디어센터에서 영화교육을 실시하고 있지만 시간과 공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라고 한다. 예술이란 게 본래 뜨거운 불덩어리 같은 것 아닌가. 아름다움에 취해서 가까이 가면 너무 뜨겁고, 거리를 두면 안타깝고, 그렇다고 외면하면 영원히 꺼져버리는 것. 예술은 늘 예술가들의 피와 땀을 먹으며 표가 나지 않게 천천히 자라다 어느 순간 아름답게 피어오르는 불꽃같은 것이지.영화를 가르치는 학교도 없는 대구가 질적으로 수준 높은 영화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이 놀랍다. 슬며시 궁금해진다. 대구가 영화학교 하나 갖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우리들의 시네마 천국’ 잡지를 읽어 보면 이름만으로도 뜨르르한 대구 출신의 영화감독들이 많다. 그 이름을 잠깐 언급해 보면 ‘임자 없는 나룻배’로 데뷔한 이규환 감독을 비롯해서 선산 김씨의 김유영 감독, 한국 전쟁기의 유일한 작품을 남긴 민경식 감독, 성악과 출신의 조긍하 감독, 경북 하양의 딸이자 한국 최초의 여성 감독인 박남옥 감독이 있고, 대구상고 출신의 박철수 감독, 그 유명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찍은 배용균 감독, 경북대 출신의 교사 출신 이창동 감독까지 모두 전후 한국영화의 부흥을 이끈 분들이다.내게 있어서 영화는 그저 재미있게 보면 되는 것이어서, 그 흥미로운 장르의 뒤편에 이토록 고생스러운 누군가의 노력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했다. 환경이 어려운 아이들이 사이좋게 지낸다던가. 서 대표는 대구영화계가 꼭 그렇다고 한다. 형편이 어렵다 보니 어려운 상황에서도 저희들끼리 똘똘 뭉쳐서 서로 협력하기 때문에 발전하는 거라고, 대구영화계의 성과를 다소 시니컬하게 피력한다. 그 세계에 오래 몸담고 있다 보니 속사정을 너무 잘 알아서 그럴 것이다. 그러면서 서 대표는 영화가 프로젝트형 예술이어서 인력과 기반 인프라가 구축되기 쉽지 않다고 한다. 인재를 키우는 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빠듯하고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대구·경북영화영상사회적협동조합과 세 개의 대구영화제가 각자의 자리에서 꿋꿋하게 자라주었으니 지역의 한 사람으로서, 그 동안 참여해준 많은 영화인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영화를 어떻게 시작했어요?”“고등학교 때에 무용을 했는데 남경주의 뮤지컬을 보고 감동 받아서 연극영화과에 지원했어요. 연극영화과에 갔다가 나중에 영화로 전공을 바꾼 것이 인생을 탈바꿈한 계기가 되었어요.”졸업하자마자 영화사 기획실에 입사했다. 감독이 되려면 영화 연출부 막내로 현장에 나가야 하는데, 부모님의 지원 없이 서울에서 혼자 지내는 게 겁이 나더라고 한다. 그래서 선택한 영화기획이 적성에 맞아 재밌게 서울생활을 할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영화 마케팅공부를 해보려고 미국 유학 준비를 하던 중에 IMF가 터졌다. 연극을 하다 배우가 되고 싶었고 영화를 찍고 싶기도 했는데, 어쩌다 보니 공부를 하게 되었다면서 박사과정도 늦었고 결혼도 늦었다. 나중에는 공부가 운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몰두했다며 서 대표가 예쁘게 웃는다. 모든 게 늦은 편이라고. 무대에 세워도 해낼 것 같은 얼굴이다.“오오극장과 어떻게 인연을 맺었는지 얘기 좀 해주세요.”“어쩌다 보니 쓰게 된 감투가 대구·경북영화영상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인데, 저의 첫 번째 사업이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을 맡은 일이에요.” 영화관이 생긴 지 6년이고, 대구시에서 위탁받아 운영하는 대구영상미디어센터장은 3년차다. 서 대표는 대구에서 영화를 기획하고 만들고 제작하고 상영하는 일까지 지원해주고 있다. 상업 영화가 97%를 차지하고 있는 불합리한 상황이 오래 지속되면 영화의 뿌리는 약해지고 줄기는 말라버리는 기현상이 발생한다고 염려를 한다. 정책적으로 독립영화 지원이 열악하다는 말일 터이다. ‘검은 사제들’도 단편영화를 확장한 영화라고 귀띔해준다. 엘리트를 성장시키기 위한 전문 영화교육기관도 만들어져야 한다고 전문가다운 의견을 피력한다. 영화를 만들겠다는 열의로 꽉 찬 청년 감독들을 배양하는 독립영화 지원이 시급하다며, 대구가 영화를 가장 잘 만드는 지역으로 손꼽힐 정도가 되고, 슬슬 전망이 보인다고 한다. 대구·경북에 영화과가 전무했다. 2022년 3월에 영남이공대가 ‘시네마스쿨(YNC Cinema School)’을 개원한다. 대구·경북 최초로 정규 대학과정에 영화과가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대구시 교육청에서 2022년 3월에 ‘대구학교미디어교육센터’가 예술융합창작지원을 목적으로 문을 연다. 대구 최초로 초중고 학생을 대상으로 한 예술 창작 미디어 센터로 영화 관련 예술 미디어 기초 교육이 다져지는 역사적인 순간이다.서 대표는 영화학 박사과정을 마쳤다. 경영학과 (영화)마케팅으로 논문을 쓴 이후, 지금까지 영화 아닌 일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오로지 한 길을 걸어온 영화인이다. /글 장정옥 소설가 (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1-06-15

어촌 공동체를 지켜온 축제의 한마당

동해안의 수많은 어촌에서는 어로가 중요한 생업 수단이기 때문에 사나운 바다에 나가야 하는 부담과 두려움을 항상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어촌에서는 안전과 풍어를 동시에 바라게 되고, 이러한 소망을 기원할 수 있는 제의를 자연스레 찾게 되었다. 동해안의 마을마다 전승되는 ‘별신굿’은 늘 위험에 노출된 어촌 공동체를 안정시키고 단합을 도모하는 장이 되어 왔다.동해안의 각 마을에서 무당이 주관하는 큰 규모의 마을굿을 ‘별신굿’이라 한다. 이는 마을별로 오랫동안 공동체의 단합에 기여했던 오랜 역사성을 가진 제의다. 별신굿이라는 말뜻이 궁금할 것이다. ‘별신’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신을 특별하게 모신다’는 의미로 풀이되기도 하지만, 서라벌의 ‘벌’과 같이 ‘평야나 들의 신’이라 해석하기도 하고, 대부분 바닷가에서 쓰는 말인 만큼 ‘뱃신’, 즉 ‘배의 신’을 뜻하는 말이 변하여 ‘별신’이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동해안의 별신굿은 매년 행해지기보다 3년·5년·10년에 한 번씩 한다. 마을마다 개별적으로 이루어지기에 그 시기가 유동적이기는 해도 지속적으로 전승되고 있다. 어촌 주민들이 손꼽아 기다린 별신굿별신굿의 목적은 마을 공동체의 단합을 도모하는 역할이 가장 컸고, 구성원들이 모여 무당의 난장굿을 즐기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축제성’이 강조되는 자리였다. 별신굿이 꾸준히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은 구성원 모두의 보편적 소망인 풍요를 기원하는 목적을 지녔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바다의 상태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업으로 살아야 했던 지역에서는 어로 활동의 풍요로운 결과야말로 마을의 모든 주민이 바라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기에 별신굿의 존재는 누가 뭐라 할 것 없이 같은 소망을 기원하는 자리였다. 특별한 오락이 없던 시대에 재능 있는 화랭이들의 노래와 춤, 연극을 볼 수 있음은 물론이고, 다 같이 먹고 마시는 자리가 주는 즐거움은 별신굿을 손꼽아 기다리게 만드는 이유였을 것이다.별신굿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전통신앙인 무속을 중심으로 했겠지만, 유식(儒式) 제의가 굿을 하기 전에 이루어지고 마을의 농악대가 참여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복합적인 성격을 가진 행사였다. 굿이라는 제의의 과정은 마을별로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부정굿, 당맞이굿, 청좌(請座)굿, 세존(世尊)굿, 성주굿, 천왕굿, 심청굿, 군웅(구능)굿, 손님굿, 계면굿, 용왕굿, 거리굿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우선 부정굿으로 굿판 주변을 정화하고 차례로 신들을 불러 모신다. 그렇게 굿판을 깨끗이 한 다음 가장 먼저 마을신을 불러 모셨다. 마을신보다 높은 신도 많겠지만, 마을굿을 하는 것이니 별신굿에서 가장 먼저 모시는 것은 마을신이 되어야 한다. 그다음부터는 하늘에서 인간세계로 내려왔다는 천상신인 세존부터 줄줄이 신을 불러 모신다. 그리고 신을 모실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소망을 기원할 수 있었다. 다른 지역도 그렇겠지만, 동해안굿에서는 때로 무당뿐만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이 적극적으로 굿에 참여하며 즐기기 위해 굿판의 가운데에 나서서 화랭이와 함께 연극을 하기도 하고, 무당 옷을 대신 입고 춤을 추기도 했다.동해안 굿음악은 다양하고 복잡한 장단을 전승동해안굿 하면 지화(紙花)가 떠오른다고 할 정도로 굿판을 장식하는 종이꽃의 화려함은 어느 무가권에서도 따라올 수 없다. 동해안 별신굿의 굿당에는 각종 지화들이 장식되는데 연봉이 2~5개, 12개의 꽃다발이 다섯 묶음 정도 배치된다. 오구굿으로 가면 열 종류도 넘는 꽃들이 형형색색 굿상의 배경으로 장식된다. 별신굿에서는 지화의 사이에 용떡을 3~5개 놓는다. 또한 지화의 좌측과 우측에는 팔각등과 용선이 장식되어 있다. 정면에는 죽은 자의 넋을 받는 종이 인형인 ‘넋전’이 세 종류 정도 자리잡게 된다. 넋전의 아래에는 그날 모실 신을 위한 제물이 차려진다.동해안굿을 전승하는 세습무는 집안 대대로 무업과 음악을 잇는 생득된(ascribed) 예술가다. 이런 예술적 배경으로 인해 동해안굿 음악은 타악기 위주로 편성되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장단을 전승한다. 또한 같은 전승자가 연행하더라도 별신굿마다 굿의 연행 양상은 조금씩 차이가 나기 때문에 지역별로 연구되었다. 전통음악을 연구하는 전남대 이용식 교수는 2013년 5월 24일부터 25일까지 열린 포항시 구룡포 별신굿의 현장을 바탕으로 별신굿 음악을 연구하였다. 그에 의하면 별신굿의 음악은 무악 장단으로 다장(多章) 형식으로 된 것이 많다. 청보 장단은 5장이고, 제마수 장단, 부정 장단, 삼공잽이 장단 등은 3장이다. 이들 장단은 대개 느린 혼소박 장단으로 시작해서 빠르고 단순한 장단으로 진행된다. 장단이 빨라지면서 장구의 변주 가락도 다양해진다. 구룡포 별신굿 무악의 장단은 3+2+3 또는 3+2+3+2의 혼소박 장단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특히 3+2+3의 혼소박이 단위를 이루어 5~6박이 하나의 악구를 이루는 장단은 청보 1장, 제마수 1장, 부정 1장, 드렁갱이 3장, 자삼 장단 등에서 나타난다. 이런 혼소박 장단은 복잡한 박자 구조로 되어 있고, 장구와 꽹과리가 매우 복잡한 변주 가락을 연주하는 점이 동해안 별신굿의 음악적 특징이다. 주민들의 건강과 안전을 기원하는 ‘호탈굿’동해안굿은 신화가 발달했을 뿐만 아니라 화랭이에 의해 연극적 재현이 이루어지는 굿놀이가 발달했다는 점이 중요한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을 보여주는 동해안 별신굿의 한 굿거리로 호탈굿이 있다. 종이로 만든 탈을 쓴 호랑이가 굿판에 등장하면 포수역을 맡은 무당이 이 호랑이를 잡는 굿놀이다. 과거 호환(虎患)은 무서운 재앙 중 하나였다. 호랑이에 물려 죽은 사람의 영혼을 마을굿에 모셨던 것이 ‘범굿’이라 불리던 호탈굿이다. 영일군 구룡포읍 강사리에서도 호탈굿이 이루어졌다. 민속학자 최길성은 1971년 음력 10월 5일 하루 동안 포항 구룡포읍 별신굿에 등장하는 호탈굿을 조사하였다. 이날 이루어진 굿에서 호탈굿은 별신굿의 맨 마지막 굿거리인 거리굿의 바로 앞에서 연행되었다. 별신굿의 거의 막바지에 연행하기 때문에 이 굿거리를 할 때에는 모닥불을 피우거나 등불을 달게 되고,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굿판에 생기는 어둠과 빛의 조화가 호탈굿의 배경이 된다. 이날 호탈굿에서 포수는 무당 김석출(책에는 김경남(金景南)이라 써 있다)이, 호랑이는 무당 제갈태오(諸葛泰伍)가 맡았던 것으로 기록되었다.호탈굿의 과정은 크게 ‘호랑이 등장-포수 등장-호랑이 사냥-호랑이의 가죽 매매’로 구성된다. 먼저 준비된 굿판에서 잽이들이 무악을 연주하면 호탈을 쓴 호랑이 역을 맡은 화랭이가 등장해 굿판 가운데 있는 소나무의 주위를 돌면서 춤과 재주를 보인다. 포수가 총을 대신해 작대기를 어깨에 메고 등장하면, 이를 보고 호랑이가 숨는다. 과거에는 호탈굿을 포함한 별신굿이 끝나면 호랑이가 먹고 가라고 소를 잡아 소머리를 산에 묻었다고 한다. 동해안 굿놀이를 연구한 이균옥 교수는 호탈굿의 각 장면과 연행 후 소머리를 묻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호랑이의 등장 장면은 ‘위협의 발생’이며, 포수의 등장 장면은 ‘위협의 해소 가능성’이다. 그리고 포수가 호랑이를 사냥하는 행위는 ‘위협의 해소’이며, 사람이나 가축 대신 소머리를 산에 묻는 행위는 이후에 호환이 없기를 바라는 마을 사람들의 간절한 ‘기원’이다. 아래의 인용문은 최길성이 1971년에 조사한 구룡포읍 강사리 별신굿에서 호탈굿의 한 대목이다.포수 : 온 김에 이 범을 잡아야 동네가 안과태평하겠는데, 이 범을 꼭 잡아야 되겠소.잽이 : 그렇지.포수 : (총을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다가 범을 찾는다. 범은 이리저리 피한다. 포수가 범을 발견하고 총을 겨누면서) 네 이놈 범아, 땅땅땅(잽이가 장구를 딱딱딱 친다. 한 사람이 포수가 겨누는 총 밑에서 숯불을 던져 총알이 나가는 시늉을 한다. 호랑이는 총알을 맞고 이리저리 두세 번 뒹굴다가 죽는다. 포수가 호랑이 가죽을 벗긴다고 하여 호탈과 종이로 만든 가죽을 벗겨 들고 판다). 이 산중의 호랑이를 잡아 가죽을 벗겼으니 이 동네서 사야 안 되겠소.잽이 : 그렇지.(어촌계장이 나와서 돈 1천원을 내고 가죽을 받아가지고 모닥불에 던져 태워버린다.)포수와 호랑이로 분한 화랭이들의 동작과 대사를 통해 별신굿 굿놀이의 일단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포수는 숨어 있는 호랑이를 찾아내어 총을 쏘아 잡은 후에는 가죽을 벗기는 시늉을 한다. 그리곤 반드시 그 가죽을 어촌계장이나 이장, 제관에게 돈을 받고 팔았다. 한지로 만든 호피를 산 이들은 이를 불에 태운다. 인용문에 나온 포수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호탈굿을 하는 목적은 그 마을의 안과태평이다. 호환이 빈번하던 시대에 마을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목적으로 별신굿에서 호탈굿을 행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호환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지만, 주민들의 건강과 안전을 기원하는 의미가 남아 비교적 근래까지도 포항 구룡포에서는 호탈굿을 행하였다. 호탈굿은 별신굿의 개성적인 굿놀이이자 무속의 역사성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별신굿에서는 호탈굿 외에도 다양한 연극적 굿놀이가 이루어지고, 굿판에 참여한 청중은 큰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글 / 염원희(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2021-06-14

이준석 개인 지지했다기보단 정치권 세대교체 전략적 선택

지난 11일 국민의힘 당대표로 이준석이 선출됐다. 제1야당의 30대 당수가 탄생한 것이다. 한국 정치사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그동안 정치는 알게 모르게 우리 사회 각 분야를 적잖게 견인해 왔다. 이준석 당 대표는 파격적인 유권자 선택 결과다. 그 점에서 많은 국민들이 젊은 야당 대표가 열어갈 앞길에 관심과 기대를 가지고 있다.이에 본지는 국민의힘 전당대회 직후 20~30대 젊은 작가 4명으로부터 ‘이준석 열풍’의 이유, 향후 국민의힘이 어떤 개혁의 길을 걸을 것인지, 젊은 야당 대표에게 거는 기대 등을 주제로 의견을 들어봤다. 이준석 대표와 동시대를 살아온 2030세대는 이 대표에게 공정과 공감 그리고 배려를 주문했다. 이병철(이하 이): 안녕하세요. 급하게 주말에 여러분을 한 자리에 모았습니다. 지난주 국민의힘 전당대회(11일)에서 원내 경험이 없는 만 36세의 이준석 후보가 당 대표로 선출됐습니다. 정치권의 눈도 ‘이준석 현상’을 주도한 2030세대에 쏠리고 있습니다.그렇다면 실제 2030세대는 이번 선택과 결과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자못 궁금해집니다.이번 좌담은 그 의미 등을 나눠보고자 마련했습니다. 함께 해 준 시인이자 싱어송라이터 강백수 씨(이하 강), 소설가 문은강 씨(이하 문), 시인 윤여진 씨(이하 윤), 더운 날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이준석이 당대표가 될 거라고 예상하셨나요?강, 문, 윤: 예상했습니다. 워낙 압승을 점치는 뉴스가 많이 나왔으니까요.이: 그렇군요. 물론 저도 최근에는 당연히 이준석 후보의 당선을 예상했지만,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어요. 차기 대선과 지방선거를 치르려면 야권 통합이라는 과제를 완수해야 하는데, 기존 정치권의 문법과 협상에 능숙한, 산전수전 다 겪은 중진급 ‘관리형 당대표’를 선출하리라고 봤었습니다. 지난 4월 설문조사에선 이준석의 이름이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반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이: 국민의힘은 왜 젊은 당대표 이준석을 선택했을까요?강: 지난 4월 서울과 부산 시장 보궐선거 당시 2030세대의 표심이 대거 국민의힘을 향했습니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국민의힘뿐만 아니라 모든 정당이 2030세대의 선택을 결코 무시할 수 없게 되었고요. 기존 장년세대 지지층이 탄탄한 국민의힘이 2030세대의 지지까지 얻어 내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승리할 동력을 만들겠다는, 일종의 전략적 선택이었다고 봅니다.문: 혁신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선택지 중 하나는 세대교체겠지요. 국민의힘은 기존의 낡은 보수 이미지로는 대선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깨달았을 거예요. 이준석은 보수의 기조를 유지하되 기존 정치인들과 다른 문법으로 청년 세대뿐만 아니라 다양한 세대에서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뭔가 바꿔야 한다’는 야당의 불안이 이준석이라는 젊은 대표를 내세울 수 있는 지점으로 작동했다고 봅니다. 보수의 변화를 바라는 것이 단순히 청년 세대의 열망만은 아니었음이 이준석 당대표 선출을 통해 증명됐고요.윤: 그동안 보수정당은 ‘보수다움’이라는 강박에 함몰되어 있었다고 생각해요. 보수정당뿐만 아니라 정치권 전반의 문제인데, 당대표나 주요 직책은 최소 2선, 3선의 중진이 맡아야 한다는 경직된 사고가 결국 청년 세대와 불통하는 ‘꼰대 문화’로 나타나 왔죠. 정치권 특유의 ‘다움’에 대한 강박을 버리고, 청년과 장년이 공존해야함을 어필한 것이 당대표로 선출된 원동력이 아닌가 싶어요.이: 거칠게 말하자면, 국민의힘에 인물이 없기 때문에 이준석이 대표가 됐다고 봐요. 이준석의 역량을 깎아내리는 게 아니고, 낡은 정치인들 사이에서 더 존재감이 뚜렷해졌다는 것이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총선 패배 이후 지루한 횡보를 거듭하던 야당이 새로운 리더십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대권주자로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있지만, 당을 이끌어나갈 지도부로는 마땅한 인물이 없었죠. 주호영이나 나경원, 김무성 전 의원 등은 능력과 자질, 경험이야 충분하지만 기성 정치권의 쇄신과 개혁을 원하는 국민들을 설득하기에는 너무 이미지가 낡았으니까요. 이준석 당대표는 국민의힘이 안정 대신 개혁 노선을 설정할 때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카드였다고 봅니다.이: 이번엔 질문 범위를 보다 좁혀서, 2030세대는 왜 젊은 당대표를 선택했을까요?강: 이준석 개인에 대한 지지라기보다는 정치권의 구태에 대한 반감의 결과일 것입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느낀 실망감으로 젊은 세대가 더불어민주당에 표를 던졌지만, 돌아온 결과는 역시 실망스러웠죠. 지난 서울·부산 재보궐선거에서 나타났듯 그 다음 선택은 국민의힘이었습니다. 거의 양당제에 가까운 한국 정치의 특성상 A 아니면 B, 다시 B 아니면 A로 돌아가야 하는 무한 반복의 굴레에 염증을 느낀 2030세대가 그 굴레 안에서 사람이라도 바꿔보자고 한 게 야당 지도부의 세대교체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문: 저 역시 2030세대가 이준석을 지지한 것은 이준석이라는 개인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고 봅니다. 현 청년세대는 기성세대에 대한 신뢰가 없습니다. 존경할 수 있는 인물이 없다는 것이죠. 소위 ‘꼰대 집단’이라고 불리는 보수 집단부터, 대의를 부르짖는 것에 심취해있을 뿐 ‘피해 호소인’ 작태에서 나타났듯 당장 한 개인의 인권을 유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진보 세력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기성세대에게 실망해왔습니다. 오늘날 2030세대는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 말하고, 공정성과 투명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2030세대에게는 진영을 나누고,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대결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고루한 문법으로 점철된 정치권에서 이준석이 보여준 행보는 청년세대에게 변화와 혁신을 꿈꾸게 하기 충분했다고 봅니다.이: 정치권에 2030세대를 대변할,‘우리 세대 대표’가 하나쯤 있었으면 하는 열망이 작용한 결과로 보입니다. 각 정당마다 30대 의원들이 있고, 정의당에는 만 28세의 류호정 의원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 비례대표나 초선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진 못하거든요. 재계에는 30대 총수들이 수두룩하고, 언론에서도 30대 기자들이 맹활약하고, 스포츠에서도 30대 지도자들이 탄생하는데 정치에서만큼은 그동안 2030세대가 어린아이 취급을 받아왔습니다. 적어도 청년 세대가 원하는 것을 어른들보다는 잘 알고 공감하리라는 기대가 이준석 당대표에게 향했을 겁니다.윤: TV 토론과 유세 연설, SNS 등 경선 과정에서 보여준 모습들에서 청년세대가 매력을 느꼈던 것 같아요. 개개인의 개성과 장점, 능력을 존중하는 가치관이라든가 논리정연하게 자기 생각을 전달하는 말솜씨가 좋게 보였고, 기성 정치인들이 청년 정책에 있어 뜬구름 잡듯 모호하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반면 청년세대들이 공감할 수 있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한 점이 2030에게 어필하지 않았나 싶습니다.이: 이준석을 선택한 국민의힘의 당심과 일반 국민들의 민심은 얼마나 일치할까요? 일치 혹은 괴리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강: 세대교체의 필요성은 국민의힘 내부에서만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녹색당, 기본소득당 등 소규모 정당들에는 이미 30대 당대표가 있고, 정의당 역시 젊은 의원들을 중심으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청년층의 정치참여 필요성은 일반 국민들 상당수가 느끼고 있던 부분이고,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이준석을 선택한 국민의힘의 당심은 민심을 상당부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죠. 향후 여당 역시 이러한 방향으로의 변화를 모색할 것이라 예상해봅니다.이: 저는 평소 보수야당을 지지하는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진보여당을 지지하지도 않았죠. 합리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를 오가는 중도적 성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이준석 당대표 선출은 백퍼센트 지지합니다.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지만, 당장 지금으로선 ‘국민의힘이 참 잘했다’라는 생각이 들 만큼 동의가 됩니다. 아마 극좌나 극우가 아닌 이상, 특히 중도층 그리고 2002년 노무현, 2011년 안철수처럼 새로운 인물의 등장을 원하는 청년세대는 국민의힘의 선택에 전적으로 동의할 겁니다.윤: 글쎄, 잘 모르겠습니다. 이준석 당대표가 선출된 후 민심은 제자리걸음만 하던 보수야당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킬 영웅적 존재를 기대하는 것 같은데, 전통적인 당심은 경륜이 부족한 당대표를 물가에 내놓은 아이마냥 걱정스레 지켜볼 수도 있겠죠. 이: 이준석이라는 정치인의 평소 인상, 이미지는 어땠나요?강: 과학고와 하버드라는 최고의 엘리트코스를 밟으며 빠르게 성장한 만큼 자기주장이 뚜렷하고 때로는 그것이 지나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문: 개인적으로 이준석이라는 정치인을 신뢰하지는 않아요.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코스를 밟았고 ‘젊은’ ‘남성’ ‘기득권’으로서의 행보를 걸어왔으니까요. 약육강식의 실력경쟁을 강조하면서 사회와 인간에 대한 이해도가 현저하게 낮다는 것 역시 보여주었습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오로지 자신의 실력으로만 경쟁하자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는 듯합니다. 이준석 당대표를 보고 있노라면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배제하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 혐오 감정을 이용하는 것이 과연 사회발전을 위하여 옳은 방향인지에 대하여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는 당대표가 되고 첫 메시지로 ‘공존’을 강조했습니다만, 그가 꿈꾸는 공존이 과연 어떤 모양인지 미지수입니다. 불평등과 차별로 점철된 사회 속에서 공정한 능력주의를 부르짖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윤: 이슈화되기 전까지는 사실 잘 몰랐어요. 지인들로부터 ‘요즘 30대 젊은 정치인이 있다더라’, ‘이 사람이 말을 잘해서 자꾸만 보게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습니다. 당선 소식과 함께 뉴스를 살펴보니 과연 자신의 생각 그대로 말을 잘 전달하는 사람으로 보입니다.이: 엘리트 학벌을 지니고 사회 경력 없이 곧장 ‘박근혜 키즈’로 정계에 입문했죠. 큰 시련 없이 성장해온 ‘온실 속 화초’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과거 TV토론회나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나 예상 밖의 변수가 발생했을 때 당황하며 허점을 보이는 경우를 종종 봤는데, 세련된 엘리트 이미지와 그늘을 이루는 유약한 인상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서울시장 재보궐선거에서 안철수 후보에게 맹공을 가하고, 진중권, 김어준 등 정치권의 ‘빅 마우스’들과 난전을 벌이는 걸 보니 정치의 근육이 붙어 꽤 단단해졌다는 느낌이 듭니다. 10여 년 동안 보수정당에서 ‘0선’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닌 채로 중책을 맡아오며 전투력과 내공을 다진 듯 보입니다.이: 이준석의 장점은 무엇이고 한계는 무엇일까요?강: 장점은 앞서 말한 것처럼 세련된 엘리트 이미지, 그리고 ‘나이가 깡패’라는 젊음이겠죠. 저는 토론자로서의 이준석을 자주 봤는데, 자신이 틀렸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토론에 임하는 모습이 부정적인 쪽으로 인상적이었어요. ‘말하는 정치인’으로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을지 모르겠으나 ‘듣는 정치인’으로서 역량을 갖추었는지는 미지수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공감 능력의 부족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정치인 이준석의 큰 과제라고 봐요.문: 이준석은 그간의 행보를 통해 2030세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할 말은 한다’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박근혜 키즈’로 새누리당 최연소 비상대책위원으로 발탁되었지만 당 지도부를 향해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고 대구에서 박근혜 ‘탄핵 정당론’을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대표가 된 이후에는 대변인을 토론경쟁으로 선발하겠다고 발표하는 등 말 그대로 파격행보를 보여주고 있죠.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 이준석이 보수의 새로운 대표로서 낡은 정치권에 새로운 돌풍을 일으켜 주리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러한 모든 행보가 이준석이라는 프로듀서가 만들어낸 하나의 비즈니스 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평생을 기득권으로 살아온 이준석이 소시민의 실질적인 삶의 문제를 공감해줄 수 있을까요?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경험 부재에 대한 우려도 있습니다. 단순히 ‘젊은’ 정치인을 벗어나 이제는 당대표로서의 리더십과 추진력, 안정감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준석이 그것을 해내지 못한다면, 그저 흥미만을 일으키고 사라지는 반짝 스타, 그 이상이 되지 못할 겁니다.이: 홍정욱 전 의원과 비슷한 이미지를 지녔다고 봅니다. 엘리트 출신의 30대 정치인, 홍정욱 만큼은 아니지만 잘생긴 외모 등등. 홍정욱 전 의원은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대중들이 위화감과 이질감을 느꼈다면, 비슷한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이준석은 예능 방송 출연과 활발한 SNS 활동 등으로 친근함을 쌓아왔습니다. 이건 굉장히 큰 강점이라고 여겨집니다. 당대표 수락 연설에서 임재범의 ‘너를 위해’ 가사를 패러디한 센스에 벌써 대중들이 환호하고 있습니다. 엘리트면서도 친근한 이미지를 잘 활용한다면 정치권에 새바람을 일으키며 향후 대권주자가 될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이번에 2030세대에게 지지를 받았지만, 남성들에게 폭발적인 지지를 얻었지 여성들과는 페미니즘 논쟁으로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한쪽의 지지를 얻기 위해 다른 한쪽과 대립하는 모습은 과거 김기춘이 지역갈등을 선거에 활용한 구태정치를 연상케 하는 점이 있습니다. 자기 논리를 확실히 주장하는 것은 장점이나 그 논리 안에 타자에 대한, 특히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결여되었다면 ‘통합’ 대신 ‘갈등’을 야기하게 될 겁니다. 당대표에 오르면서 ‘공정’을 강조했는데, 이걸 잘 들여다보면 결국 ‘능력주의’거든요. 능력만 중요하게 여기는 경쟁주의가 사회에까지 확대된다면 승자와 패자로 공동체가 양극화될 우려가 있습니다. ‘공정’으로 포장된 능력주의 가치관이 이준석이 쥔 양날의 검이 아닐까 싶습니다.이: 국민의힘은 어떤 변화를 보일까요? 이준석 돌풍이 부럽다던 여당은 어떤 쇄신을 모색할까요?강: 이준석 대표는 2030 당원 가입을 대폭 늘려 3만명 정도의 당원을 추가 확보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국민의힘은 이준석 대표를 전방에 내세워 2030 지지층을 확보하는데 주력할 것이고, 국민의당과 합당을 모색함으로써 당의 외연을 확장하는데 집중할 것으로 보입니다. 여당 역시 30대 정치인 풀을 두텁게 확보하고 있으나 이러한 인재들을 전면에 내세워 당정을 펼치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들에게 보다 전면에 나설 기회를 주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이: 이준석 대표가 경선 과정에서 천명한 바대로 공천제도에 개혁이 일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자격 검증을 실시하겠다는 발언에 벌써 내년 지방의회 공천을 받으려는 이들이 엑셀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하니 이미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셈이죠. 이준석 대표가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 유승민 전 의원 등과 가깝다고는 하나 친이계, 친박계, 김무성계 등 기존 계파 정치와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우리나라 정당정치의 고질병인 인맥 중심의 계파 정치가 해체되는 변화가 진보여당보다 보수야당에서 먼저 일어날 수도 있겠습니다. 반면 여당은 그동안 그 어떤 쇄신과 변화 의지도 보이지 않았는데, 이번에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부동산 투기 의혹에 연루된 의원 12명에게 탈당을 권유한 것이 이준석 돌풍에 대응하는 쇄신의 신호탄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이: 이제 마지막 질문입니다. 보수야당의 30대 대표 이준석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강: 당대표로서 맞닥뜨려야 할 상황들은 그동안 경험했던 정치 환경과는 차원이 다른 전쟁터일 텐데, 청년 정치인의 패기와 당대표로서의 권위를 양손에 쥔 채 기죽지 말고, 쫄지 말고 당당하게 자기 생각을 펼쳐나가길 바랍니다.윤: 보수정당에 새로운 질서를 구축해주길,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를 연결해주는 선이 되어주길 바랍니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청년 정책을 펼쳐주길 또 기대해봅니다.문: 그냥 꼰대보다 더 무서운 게 젊은 꼰대라고 해요. 젊은 꼰대는 늘 자신만만하고 확신에 차있습니다. 자신이 이루어낸 성공이 모두 자신의 능력 덕분이라고 생각하지요. 충분한 결과를 내어놓지 못하는 사람들을 게으르거나 멍청하다고 치부합니다. 각자의 상황을 살펴보지 못한 채로 제 눈에 맞는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는 아집, 이것이 꼰대들이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무조건 새로운 것은 아닐 겁니다. 효율성과 공정성을 앞세운 ‘실력주의’를 내세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잘 생각해주길 바랍니다. 정말로 자신이 이루었던 모든 것이 오직 자기 실력만으로 이룬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만일 자신이 지금과 다른 환경에서 자라왔다면 그때에도 이준석이 지금의 이준석일 수 있었을지 고민해보길 바랍니다. 세상에는 사각에 놓인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겁니다. 여러 우려를 뛰어넘고 진정으로 국민을 위해 일하는 당대표가 되길 바랍니다.이: ‘이준석 군’이라고 조롱한 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관이나 ‘장유유서’ 운운한 정세균 전 총리 등 진보여당의 꼰대 훈수를 생각하면 이 대표의 당선 자체만으로 정치권에 ‘쇄신’이라는 큰 화두가 던져졌다고 봅니다. 이제 당대표가 되어 운신의 결과 폭이 예전과는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카풀 서비스와 택시 업계의 갈등 문제를 체감해보기 위해 택시면허를 취득해 2개월간 택시기사로 일한 것이나 블록체인 산업과 2030세대의 절망감을 이해하기 위해 가상화폐 투자를 시작한 것처럼 몸으로 뛰고 현장을 찾는 구체적 실천들을 많이 보여주길 기대해보겠습니다.정리=홍성식기자

2021-06-13

“청소년에게 쉼표를”

안동시 평생학습원은 2003년 대구·경북 최초의 평생학습도시로 지정된 이래로 적극적인 시민들의 참여와 소통을 바탕으로 다양한 교육정책 및 양질의 평생학습체계를 구축했다.이를 통해 시민들의 잠재능력 개발을 위한 교육 운영 확대로 평생학습 기회를 제공하고 평생학습을 통한 개인의 자아실현, 자긍심 고취 및 다양한 평생학습프로그램을 운영하며 학습 문화조성과 평생학습도시 정착에 기여해 오고 있다.특히 ‘한국정신문화의 수도’에 걸맞는 안동시 평생교육원이 미래 안동을 이끌어갈 청소년들의 꿈을 응원하며 청소년들을 위한 쉼표가 있는 사업들을 운영하고 있다. △ 청소년이 행복한 건전한 환경조성한국정신문화의 수도이자 교육도시로 널리 알려진 안동은 ‘행복안동’ 만들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2017년 초등학생 전 학년을 대상으로 무상급식을 실시하고 2019년 3월부터는 초등학교 포함 관내 유치원·중학교에 무상급식을 확대하는 등 경북도청 소재지 도시에 걸맞는 각종 청소년위원회를 활발히 운영해 청소년들의 폭력예방과 건전한 청소년 보호 육성에 앞장서고 있다.사회적 약자보호와 지역치안 안전을 위해서는 2008년 창립된 지역치안협의회를 각계 각층 21명의 위원으로 안동시지역사회안전위원회로 격상해 어린이와 여성, 청소년, 노인,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 보호와 지역치안의 안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안동경찰서, 안동시교육지원청, 경상북도청소년진흥원, 안동시청소년지원센터, 365청소년지원단, 28햄 등 청소년관련단체 및 유관기관과 함께 예방활동을 전개하는 등 사각지대에 놓인 학교 밖 청소년들을 조기에 발견해 비행, 범죄 연루 사전 차단과 폭력 예방에 힘쓰고 있다.또 청소년 락페스티벌과 청소년 가요제, 1318 청소년 한마당 축제를 개최해 청소년들이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청소년 문화를 창출할 기회를 제공하고 청소년 어울림마당 행사를 대면, 비대면으로 진행하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다. △ 청소년전화 1388 상담서비스 진행안동시청소년상담복지센터는 코로나19감염병, 장기적 온라인 수업, 외부활동의 제한 등 급격한 생활환경 변화로 인한 불안, 우울감 및 인터넷·스마트폰 과사용, 가족간 갈등으로 인해 심리적 고민을 호소하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청소년전화 1388을 상시 운영한다.상담의 형태는 전화상담, 화상상담, 대면상담, 사이버상담, 집단상담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청소년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서비스를 제공한다.청소년전화1388은 청소년과 학부모, 교사 등 일반시민 누구나 청소년을 위해 이용하는 전화로서 청소년 상담, 긴급구조, 청소년안전망 연계, 청소년활동 정보제공 등 청소년관련 다양한 문제에 대해 365일 24시간 원스톱서비스 제공을 목적으로 다양한 상담에 대응하는 만큼 청소년의 상담내용 등 개인비밀보장을 바탕으로 고민을 호소하는 청소년이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다.또 지역사회 내 청소년 호소문제가 고위기로 증가 되고 있어 청소년 자살·자해·성폭력 문제 개입을 위해 집중상담프로그램을 적용해 고위기청소년을 위한 상담서비스를 우선 제공하며 더불어 청소년의 보호·위기예방, 건강한 심리성장을 위한 상담 전문기관으로 적극 운영하고 있다.△ 청소년안전망 통한 안전한 사회 만들기안동시는 가출·비행·방임·성문제 등 복합·심화되고 있는 위기청소년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올해 청소년안전망을 활발히 운영하고 있다.대표적 서비스로 복지사각지대 위기청소년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청소년특별지원이 있다.올해는 11명의 청소년에게 매월 생활지원비를 지원, 사례관리를 통해 청소년의 건강한 성장을 도모하고 있다.지속적인 위기청소년의 발굴 및 서비스연계를 위해 학교·경찰 등 연계기관과의 정보 공유와 청소년안전망 사례회의로 위기청소년 관리에 사각지대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이 밖에 조손·한부모·소년가장 등 위기가정의 청소년을 발굴해 상담멘토와 1:1로 매칭하는 등 상담, 학습, 생활관리, 문화활동을 지원하는 멘토링을 운영하고 있다.올 4월~11월까지 8개월간 12명에게 위기상담서비스를 지원하며 더불어 위기청소년 관리를 확대한 촘촘한 청소년안전망으로서의 기능을 활성화하고 있다.안동시청소년상담복지센터는 올해에도 청소년안전망의 허브기관으로서 위기청소년 발굴·지원·관리를 위해 기본사업 수행에 충실하며 위기청소년예방을 위해 활발히 활동할 예정이다. △ 학교 밖 청소년의 건강한 성장 도와안동시는 학교밖 청소년지원센터(이하 꿈드림센터)를 통해 학교밖청소년을 대상으로 급식지원을 한다.전년도 기준 안동지역 학교 밖 청소년 수는 159명으로 그동안 재학생에게 지원되는 급식을 지원받지 못해 성장기인 청소년으로서 끼니를 거르는 환경에 노출될 수밖에 없어 건강과 성장에 제한적 요소가 발생되었다.이에 따라 2020년도 학교밖청소년 급식지원으로 5월~11월 급식지원을 원하는 청소년 75명을 대상으로 대면, 비대면(거주지 배송)등 2천379회 혜택을 줬으며 더불어 규칙적인 식습관 및 건강한 성장을 도울 수 있었다.올해도 학교밖청소년 급식지원은 꿈드림 센터를 이용하는 학교 밖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무료 지원되며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급식키트 발송으로 진행됐다.급식키트는 균형적인 영양과 편의성을 고려한 식품으로 구성되며 비대면 배송으로 청소년들이 외부의 접촉 없이 안전하게 가정에서 받아볼 수 있다.급식지원과 함께 학교 밖 청소년의 개인적 특성을 고려한 상담·교육·취업·자립지원 등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해 학교 밖 청소년이 건강한 사회구성원으로 성장하도록 지속적으로 지원한다.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평생교육의 기회와 권리를 누릴 수 있는 평생학습도시 ‘행복안동’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손순희 평생교육과 과장은 “미래 안동을 이끌어갈 청소년교육과 시민 평생교육, 문화향유를 위해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사업부서로서 창의적인 사업 개발과 함께 현재 추진 중인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시민 만족도를 높이고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장유수기자 jang7775@kbmaeil.com

2021-06-10

정치·외교적 수완과 문화·예술 감각 갖춘 ‘돌올한 군왕’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압도하며 한반도 유일의 고대 왕국으로 커가던 7세기 중후반. 동궁과 월지는 그즈음 왕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졌다.아득한 세월이 흐른 뒤에 미미하게 남겨진 흔적과 역사 속 문헌을 토대로 복원된 이 사적지는 누구도 이론(異論)을 내놓을 수 없는 21세기 경주의 주요 유적이자 매혹적인 여행지로 자리하고 있다.이를 증명하듯 관광과 문화를 도시의 주된 중심축으로 삼고 발전하고자 하는 경주시의 문화관광 홈페이지는 자랑스럽게 ‘동궁과 월지’를 여행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이런 설명을 통해서다.“안압지 서쪽에 위치한 신라 왕궁의 별궁터다.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931년에 왕건을 초청해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문무왕 14년(674년)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 3개의 섬과 못의 북쪽과 동쪽으로 12봉우리의 산을 만들었으며, 여기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일제강점기엔 철도가 지나가는 등 훼손을 입었던 임해전 터의 못 주변에는 회랑지를 비롯해 크고 작은 건물터 26곳이 확인되었다. 그 중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해 서쪽 못가의 신라 건물터로 보이는 5개 건물터 중 3곳과 안압지를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기자를 포함해 경주를 찾는 이들은 불국사와 대릉원, 첨성대와 김유신의 유택(幽宅)을 빼놓지 않고 찾게 된다. 이는 언급한 유적지가 간직하고 있는 ‘천년의 신라 혼’을 확인하는 행위와 다름없기 때문.여기에 ‘신라인의 정신’이 담긴 유적지 하나를 더 포함시키고자 한다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동궁과 월지가 아닐까”라고 답할 듯하다.바로 이 동궁과 월지가 상상력이 아닌 현실의 거대하고 미려한 실물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한 사람은 누구일까? 이는 비단 몇몇 사람들만의 궁금증은 아닐 것이다. 기자 역시 궁금하다. 과연 누굴까?건축물은 최고 권력자 권위의 상징으로…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를 불문하고 권력자들은 자신의 통치 기간이 타자(他者)에게 호의적으로 평가될 업적으로 가득하기를 열망한다. 이것은 이전에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쉽게 깨어지지 않을 권력의 간과할 수 없는 속성이다.그래서다. 한반도는 물론 가까이서 명멸을 거듭했던 아시아의 숱한 왕조와 유럽의 명망 높은 가문들은 오랜 세월 사라지지 않고 자신들의 치세(治世)를 기억하게 해줄 건축물을 만드는데 골몰했다. 여기에 천문학적 재화를 쏟아 붓고 엄청난 노동력을 투입했음은 물론이다.지난 2018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를 찾았다. 거기 머무는 기간의 절반은 직업을 가진 샐러리맨으로 지냈고, 절반은 가벼운 마음의 여행자로 보냈다.비엔나 국립 오페라극장과 그 주변을 취재했던 일이 끝난 후, ‘비엔나 여행자’로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이 쇤브룬 궁전이었다.많은 관광객들의 심정과 마찬가지로 한때 전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화와 몰락을 가장 가까이에서 엿보고 싶었다. 이쯤이면 누가 이런 질문을 던질 것도 같다. 쇤부른 궁전은 대체 어떤 곳이냐? ‘위키백과’가 나서 이런 대답을 내놓는다.“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큰 궁전이자 방문객이 가장 많은 유적지 중 하나다. 문화적으로도 가장 뜻 깊은 곳이기도 하다. 쇤브룬 궁전의 정원은 한 시절 유럽을 호령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품격과 취향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50만 평에 이르는 대지와 궁궐은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됐고, 쇤브룬 공원 안에 있는 비엔나 동물원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원이다.18세기 중엽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여름 별장으로 지어진 쉰브룬 궁전은 1892년부터 빈 13구역 히칭에 위치해 있다. 이 궁전의 이름은 1619년 마티아스 황제가 사냥하다가 샘터를 발견했을 때 ‘이 얼마나 아름다운 샘인가’라고 외쳤다는 일화에서 유래됐다.”해가 떨어질 무렵. 수백 명의 여행자와 적지 않은 숫자의 비엔나 시민들이 쇤브룬 궁전의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여유로운 발걸음으로.때는 장미가 피던 초여름 무렵. 색깔을 달리하는 꽃들과 잘 정돈된 정원수, 여기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귀여운 아기들까지 더해져 쇤부른의 광대한 정원은 더없이 근사한 풍광을 연출하고 있었다.‘쇤부른’은 막시밀리언 2세, 동궁과 월지의 창조자는‘쇤부른 궁전’이라는 오스트리아의 관광 명소를 만든 일등공신은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인 막시밀리안 2세다. 그는 ‘쇤부른 궁전 정원의 창조자’로 불린다.16세기 중반 카터부르크 지역을 사들여 동물원을 만들라고 명령한 막시밀리안 2세는 진귀한 동물들이 뛰노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했던지, 다시 아름다운 꽃과 희귀한 식물들까지 대량으로 식재해 식물원까지 조성하게 한다. 쇤부른 궁전의 매혹적인 대(大) 정원은 여기서 시작됐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이는 450여 년 전을 기록한 유럽 역사의 한 부분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900여 년이나 앞서 동양의 고대 왕국 신라는 ‘국립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불러도 좋을 공간을 만들어냈다. 그게 어디냐고? 많은 이들이 짐작했겠지만 동궁과 월지다.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여행자들을 매료시키는 쇤부른 궁전과 정원을 만들라고 명령한 이가 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언 2세라면, 동궁과 월지 조성을 명령한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라는 질문.이 질문과 의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인용된 이희준의 논문 ‘동궁과 월지 동편 신라왕경 유적의 조성 시기 및 성격 검토’를 펴봐야 한다. 거기엔 이런 내용이 실렸다. ‘삼국사기’의 기사(記事·역사적 사실을 적은 글) 중 일부다.“문무왕 14년(674년) 궁 안에 못을 파고 가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금수를 길렀다.”“문무왕 19년(679년) 동궁을 짓고 궁궐 안팎 여러 문의 이름을 정했다.”이제 의문이 풀렸다. 맞다. 문무왕이다. 그는 동궁과 월지를 만든 신라의 왕. 요즘 방식으로 위트 있게 말하자면 ‘동궁과 월지의 건축주’라고 부를 수도 있을 듯하다.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행한 책 ‘신라의 왕권 강화와 발전’에는 문무왕의 기질과 업적을 간략하게 정리한 대목이 등장한다. 요약하자면 이렇다.“문무왕은 현실적 난제들을 해결하고자 일찍부터 외교,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매우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 결과 마침내 고구려를 멸망시키면서 삼국 간에 장기간 치열하게 전개되던 전쟁을 종식시켰다. 또한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을 위해 일시 군사동맹을 맺었던 당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축출하였다.또 자신의 세력기반인 무열왕계와 김유신계를 적절히 활용해 권력기반을 강화하는 데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왕권 강화를 위한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신문왕(문무왕의 아들)대에 전제왕권이 확립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이처럼 문무왕은 정치적인 측면과 외교 차원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현명한 통치자였다. 이 부분에 대해선 역사학계에서도 별다른 이견이 없다.여기에 월지와 동궁까지 조성하고 축조함으로써 문무왕은 정치·외교적 수완과 함께 고급스런 문화·예술적 취향까지 드러냈다. ‘돌올한 신라의 왕’ 중 한 사람이었음이 분명해 보인다.통일시대 열어간 문무왕은 어떤 사람이었을까현대인들의 진일보한 상상력조차 발휘되기 어려운 까마득한 옛날 근사한 인공 연못을 만들고 오만 가지 화초를 심어 월지를 조성한 사람. 당시로선 보기 힘들었을 동물들까지 거기서 뛰놀게 만들어 자신의 권위와 통일신라의 힘을 보여주고자 했던 인물.한 걸음 더 나아가 향후 왕위를 이어갈 태자들이 교육과 인격 수양을 할 공간인 동궁까지 건설토록 지시한 문무왕의 문화적 감수성은 보통이 아니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른바 ‘문무겸비(文武兼備)의 지도자’가 아니었을지.고운기와 장선환의 ‘인물한국사’는 문무왕을 ‘신라를 신라답게 만든 장본인’이라 평가하며 그의 삶을 이렇게 약술하고 있다.“신라 제30대 문무왕(재위 661∼681년)은 태종무열왕과 문명왕후의 아들이다. 어머니 문명왕후는 김유신의 누이인 문희다.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아버지를 도와 국사의 중대한 책무를 다하였으며, 왕위에 올라서는 백제와 고구려를 통합하는 일의 거의 전부를 해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삼한을 통합한 실질적인 왕으로, 이후 신라의 국격(國格)을 한 단계 높인 명군으로 추앙받는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6-09

해외에서도 높이 인정받은 예술적 가치

‘만신’은 무당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김석출 만신의 가계도를 보면, 할아버지인 김천득(金千得)이 무업을 시작하였고, 그의 세 아들이 뒤를 이었다. 뒤이어 김석출은 3대로 무업을 계승하였다. 김석출은 그의 부인 김유선(金有善)과 함께 중요 무형문화재 제82-가호(동해안 별신굿)다. 그런데 김석출은 재주가 많아 동해안굿뿐만 아니라, ‘호적(태평소)의 1인자’이자 ‘지화(紙花) 제조의 1인자’로 명성이 높다. 현재 김씨 집안의 무업은 김석출 만신의 9남 1녀 중 변난호(邊蘭湖)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세 딸인 김영희, 김동연, 김동언과 김용택(김호출의 자), 김정희(김재출의 자)가 부산 일대에서 이어가고 있다. 또한 동해안 별신굿을 잇기 위해 양자와 양녀로 들인 이수자, 전수생도 있어 김석출 만신의 사망 후에도 동해안 무속은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 무계를 형성하게 된 계기김석출의 할아버지 김천득은 일찍부터 한지 장사를 하였다. 이를 통해 부를 축적했기 때문에 그 지역에서는 소문난 알부자였다고 한다. 김석출의 구술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이미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조랑말에 엽전 한 전대씩을 메고 다니며 마음껏 돈을 쓰던 한량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포항시 흥해장에 나가 풍어제(별신굿)를 구경하다가, 굿을 하는 열 살 아래의 무녀에게 반하면서 인생이 바뀌게 된다. 이 무녀가 바로 김석출의 할머니 이옥분(李玉粉)으로, 김씨 집안의 내력을 바꿔 놓은 장본인이다. 당시 김천득 집안에서는 양반 가문에 ‘무당’을 데려왔다고 매를 때려 다스리려 했다지만, 집안의 대가 끊길까 봐 자식에게 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김씨 일가는 양반 가문임에도 무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집안의 허락을 받은 김천득은 아내인 이옥분에게 무업을 배워 무당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다.이후 김천득은 선창꾼으로 화랭이의 삶을 살았다. 꽹과리·장구·징·제금 등의 악기에 능했다고 전해지며, 염불이나 거리굿을 잘했고 선창꾼으로서 재주가 뛰어났다고도 한다. 활발하게 활동하던 김천득은 마흔 살에 돌연 무업을 그만두었고, 바로 무과를 준비해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관직만으로는 생활이 되지 않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고, 공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무당 출신이라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재산을 빼앗기는 일까지 겪으면서 결국 병이 들었다.김석출을 인터뷰했던 국문학자 유영대 교수가 2006년에 쓴 글을 보면, 이런 할아버지에 대한 김석출과 가족들의 심경을 확인할 수 있다. 김석출은 할아버지가 “장구체 놓고 신을 가뒀다가 심(心)에 병이 들었다”고 표현했다고 전한다. 신명(神明)이 가득한 사람이 그 신(神)을 풀어내지 못하자 결국 그 신이 몸에 병으로 나타난 것임을 무속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김천득의 삶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가족들은 그 후 누구도 무속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신명에 순응하는 삶을 받아들인 것이다.김천득과 이옥분 사이에 김범수, 김성수, 김영수 삼형제가 태어났는데, 김석출은 둘째 김성수의 아들이다. 김천득의 세 아들은 모두 예능적 재주가 뛰어났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김석출의 큰아버지인 김범수의 재주가 가장 뛰어나 화랭이로서 뿐만 아니라 농악과 창극 분야에서도 활동했다고 하니 예술가의 피가 면면히 흐르는 가계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범수는 포항 바깥으로 나가 활동하면서 얻은 음악적 기량을 동해안 무속음악에 접목해 발전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김석출의 아버지인 김성수 역시 고향에만 머무르지 않고, 북쪽에서 남쪽에 이르는 드넓은 동해안굿 권역에서 활동하였다.큰아버지와 아버지의 폭넓은 활동은 김석출에게도 영향을 주게 된다. 김석출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외지에서 굿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으므로 자연히 식견이 넓어지고 무업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었다. 큰아버지의 음악적 재능은 조카인 김석출에게도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또한 김석출의 아버지 대에 이렇게 넓은 지역을 아우르는 활동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인데, 김석출 가계의 무업이 이미 이 시기에 동해안 남과 북에 걸쳐 활동 범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김석출 주변의 예술인김석출은 김성수와 이선옥의 3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3남 모두 뛰어난 무속 재능을 갖고 활동하였고, 그 자녀들 역시 현재 동해안 무속을 이끄는 위치에 있다. 민속학자 윤동환이 김석출을 인터뷰한 내용에 따르면, 김석출은 열세 살 위 형인 김호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큰형을 따라 일곱 살부터 굿판에 출입하면서 자연스럽게 무업을 익혔고, 형님에게 본격적으로 무업을 배운 후 열두 살 무렵부터는 어른들과 비견될 만큼의 예능을 갖추었다. 열다섯 살에서 열여덟 살(1936~1939년) 무렵부터 부산에서 활동했는데, 굿을 하러 가면 인물이 좋아 여자들이 많이 따랐다는 얘기도 있다. 김석출의 재주를 알 수 있는 에피소드로, 광인굿을 연행하는 재주를 들 수 있다. 동해안의 화랭이는 광인굿에서 작두를 타는데, 김석출이 처음으로 작두에 오른 것은 열여섯 살 때로 재주가 비상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석출이 열예닐곱 살 무렵에는 강원도 삼척에 거주하던 작은아버지가 맡은 굿에 불려가기도 했다.김석출이 무악 인생에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은 24세에 부산에서 전라도의 태평소왕이라 불리던 방태진 선생과의 만남을 통해서다. 방태진은 유랑 공연단체의 단원으로 의상 감독 겸 반주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김석출은 방태진의 호적 소리에 사로잡혀 자신에게 호적을 가르쳐주기를 청하였다. 방태진이 한 가락씩 일러주면 김석출이 그 소리를 따라서 내는 방식으로 배웠는데, 같은 가락을 세 번 이상 일러주지 않았기 때문에 가락을 얻어듣기 위해 언제나 귀를 바짝 기울여야 했다고 한다. 그렇게 어렵사리 배운 호적 가락이 당시에는 겁 많고 수줍은 청년의 소리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농익은 김석출표 시나위 가락으로 탄생하게 되었음을 유영대와의 인터뷰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석출이 ‘호적의 1인자’라는 신화는 이러한 인연으로 시작된 것이다.김석출 만신은 포항에서 태어나 자라 굿을 익혔지만, 성장 후에는 경상남도로 이주해 이 지역의 굿을 익혔다. 또한 그 활동 반경이 동해안의 북쪽과 남쪽을 아울렀기에 동해안 지역의 다양한 굿을 습득할 수 있었다. 김석출의 이러한 경험이 중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그 과정에서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동해안 남부와 북부 지역의 굿을 상호 전파하고 교섭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김석출이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한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화랭이로서 기량을 다지면서, 동시에 특별한 무엇인가를 위해 찾아 나서는 김석출 자신의 예술가적 욕구가 강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열정이 김석출의 예술 세계를 형성하고 만개하게 했으며, 동해안굿이 새로운 전기를 만나게 된 계기를 만들어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해외 활동과 음반 활동김석출 만신은 국내에만 머무르지 않고 해외에서도 활동하였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동해안굿뿐만 아니라 전통연희나 예술에도 조예가 깊은 정통 명인이기도 했기에 활동이 국내에 한정되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1982년 일본 도쿄국립극장 초청 공연을 비롯해 1994년 교토·오사카 공연, 1995년과 1996년에 요코하마 페스티벌 참가, 1996년 유라시안 에코스 호암아트홀 공연, 1997년 영국 런던 로열홀 공연을 통해 동해안 무속음악과 김석출의 존재를 세계에 알렸다. 이러한 공연을 계기로 한국의 무속음악을 접한 해외 음악인들이 무속음악을 배우겠다고 한국으로 와 동해안 굿판에서 활동한 사실은 무속음악의 예술성과 예술인으로서 김석출의 실력을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다.해외 활동과 함께 굿 음악 음반을 통해 김석출의 음악이 대중과 만나는 기회도 이루어졌다. 그가 참여한 음반으로는 ‘높새바람’(삼성나이세스, 1993), ‘동해안 별신굿’(서울음반, 1993), ‘무악(巫樂) 동해무속사물’(삼성뮤직, 1994), ‘동해오구굿’(삼성뮤직, 1995), 94 일요 명인명창전 동해무속음악(실황)’(서울음반, 1996), ‘김석출 결정판’(삼성뮤직, 1997), ‘동해안 별신굿과 오귀굿’(국립국악원, 1999) 등이 있다. 남겨진 음반을 통해 김석출이 떠난 후에도 그의 예술 세계가 영원할 수 있게 되었다.글 / 염원희(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2021-06-09

촌에 사는 서울내기 30대… “아직은 애기농부입니다”

“귀 밑 머리에 흙이 붙어 있으면, 성공한 농부야. 손에 있는 흙을 털어내는 것은 하수야. 빗소리가 처마를 쿵쿵 치는데도 집안에만 있으면, 농부라고 할 수 있나”작고한 아무개 선생님이 막걸리 한 잔을 들이키며 하던 소리다. 스스로 평생을 ‘촌구석’이라고 부르던 곳에서 은거하던 그는 농사 예찬론자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너도 촌에 와서 살아라”였다.경상북도 영양군은 아직도 ‘오지’라고 불린다. 상주와 영덕을 잇는 고속도로가 생겼지만, 고속도로를 나가면 굽이굽이 1차선 도로를 1시간 이상 통과해야만 도착할 수 있다. 마을 주민들도 낯선 차량의 등장에 한참을 쳐다보는 그런 곳이고, 자동차 길 안내도 오류를 일으키는 곳. 그곳에 청년 농부 이강우 대표가 산다. 아직 어린 멜론의 모습. 이강우 대표는 지난해부터 멜론 재배를 시작했으며 올해가 2번째다. 영양군에 정착한 이강우 대표는 ‘촌에 와서 사는 사람’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도 안산에서 쭉 자랐던 89년생 이강우가 ‘촌’에 와서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제가 농사를 짓게 될지는 전혀 몰랐어요. 하지만 창업에 대한 꿈은 항상 가지고 있었죠. 다만, 경제적인 부분이 창업을 막았고, 취업을 했어요. 영양이라는 곳은 잘 몰랐는데, 지역에 있는 연구소로 1년 정도 발령을 받아 일을 했죠. 그런데 제가 도시생활을 했다 보니까 농촌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었어요. 1년 정도 살다 보니까 너무 좋은거에요. 사람이 너무 많은 환경에서 살다가, 시골이라는 환경이 너무 좋았죠. 다행하게도 회사에서 와이프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됐죠. 또 ‘내가 원래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는 과정에, 경상북도의 청년 창업 촉진 공고를 보면서 창업을 하게 됐어요.”이야기를 나누며 얼핏 그의 얼굴을 살폈다. ‘서울내기’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의 검게 그을린 얼굴에 농부의 상징인 밀짚모자가 어울리는 모습이다. 옷에도 군데군데 흙이 묻어 있는 작업복 스타일. 그럼에도 경상도 사투리가 아닌 서울말을 쓰는 그는 ‘서울내기’였다. 그래서 조심스레 ‘텃세’에 대해 물었다. ‘텃세’에 대한 그의 대답은 “제가 느끼지 못한 것일까요?”였다.“사실 저는 주위분들이 농민이다 보니까 텃세에 대해서는 많이 들었어요. 귀농·귀촌을 하고 한 곳의 마을에 정착하기까지 일종의 관계가 있잖아요. 도시에서는 아파트 옆동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살다가 사람과 사람의 인프라가 발전한 농촌에서 살기 위해서는 일종의 적응기간이 필요하겠죠. 그런데 저는 이러한 텃세를 전혀 느껴보지 못했어요.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을 해봤는데, 영양에 사는 분들의 저를 보는 인식이 ‘서울 토박이’, ‘서울내기’라는 식의 첫인상을 들지 않게 했던 것 같아요. 주위의 어르신분들께도 저는 한 번도 제 주장을 나타낸적이 없어요. 저는 항상 배우려는 입장에서 그분들을 응대했고, 존중했어요.”정말 ‘텃세’가 없었던 것일까. 귀농·귀촌을 꺼리는 이유의 가장 상단에 위치한 것이 ‘텃세’인데, 이강우 대표에게 자세하기 물었다.“처음 이야기하는 것인데, 사실 제 주거지가 영양 읍내에요. 영양에서는 가장 번화가죠. 마을단위에서 살면 텃세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직 겪지를 못했어요. 운이 좋은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단 한 번도 영양에 와서 (사람 문제로)힘들었던 적은 없었어요.” □초보 농부? 멜론으로 승부수를인터넷에서 이강우 대표의 사업체 이름인 ‘신아푸드’를 검색하면, 곳곳에서 그의 소식을 알 수 있다. 이강우 대표의 아내인 황사원 씨가 직접 ‘멜론농사이야기’라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멜론이 자라는 과정과 방법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덤이다. 그런데 영양에서 멜론이라니….“아직 애기농부죠. 제가 원래는 ‘새싹땅콩’이라는 농산물로 처음 창업을 했어요. ‘새싹땅콩’은 수경재배기라는 기계를 통해 재배를 하는 것이니, 정식 농부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어요. 특히, (직업상)농부로 인정을 받으려면 농업경영체 등록을 해야 정식 농업인이 되는 과정이 있거든요. 그런데 ‘새싹땅콩’으로는 농업인으로 등록이 되지 않는 과정이 있었어요. 사실 실질적인 농사라고 하는 활동은 작년 여름부터에요.”그의 말대로 스마트팜 한켠으로는 덜자란 멜론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그러고보니 인터뷰를 하는 사무실 책상에도 반으로 잘린 ‘아기 멜론’이 있다.“작년부터 멜론을 키우고 있어요. 진짜 후회하고 있기도 하고요(웃음). 멜론이라는 작물이 진짜 어려워요. 손도 무지하게 많이 가고요. 멜론은 진짜 어려운 작물인 것 같아요. 경험치가 쌓이고 있지만, 멜론은 2번 째 작기에요. 너무 애기죠? 농업인으로 치면 너무 애긴데, 배워가는 과정이고 제 노하우를 만들고 있는 과정이더라구요, 제가 직접 해보고 실패하더라도 해보고 망하는 것이 누군가 원망을 하지 않게 되잖아요. 논문만 보고, 그런걸 해서 유도리있게 변화시켜가면서 해보고 있는 중이에요.”이강우 대표의 이야기대로, 그는 여전히 공부 중이다. 농업에 대한 지식이 떨어진다고 생각한 이 대표는 근처의 안동대 원예육종과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0.1%도 안되는 30대 농부, 많아졌으면 해요”한동안 계속되는 이강우 대표의 ‘멜론 예찬론’에 제동(?)을 걸기 위해, 그의 농장을 둘러보았다. 마침 나타난 손님들. 근처에서 멜론을 재배하는 분들이라고 한다. 얼핏보기에도 나이가 지긋한 손님들은 온실에서 재배되는 멜론들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갖가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한참 손님들과 이야기를 마친 이강우 대표는 “농사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시스템이죠. 저에게 스마트팜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기회가 오고, 연결되면서 길을 개척하고 있다는 것. 힘든 시기가 찾아오니까 기회도 찾아온거죠. 물론 멜론을 한다고 해서 바로 상품성 있는 멜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에요. 재배기술을 익히는 것에만 몇 년 걸린다고 하니까 그것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하는 거죠. 지금 오신 분들은 근처 밭에서 멜론을 재배하시는 분들인데, 온실에서 재배하는 멜론에 대해서 공부하러 오신거에요. 미진한 기술이지만 이렇게 서로 공유를 하는 거죠.”그러면서 그는 농촌의 현실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5% 남짓 인구의 농촌. 그나마도 대다수가 고령 인구인 농촌에 대해서 말이다.“제가 농업대에서 학문을 배우고 재배를 하다보니 현실이 보이더라구요. 저희 농업 인구가 전 국민의 5% 이내죠. 고령화된 농부들이 많으니 향후 10년 이내에 은퇴를 하시는 분들도 많을 거에요. 어느 한 논문에서 미래에 농업인들의 수가 2%대로 떨어진다는 통계도 본적이 있어요. 30대 농부는 0.1%도 안될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농업의 길을 택했어요. 하루하루가 힐링이 되는 느낌을 아시나요? 힘은 들죠. 하지만 뭔가 재미있어요. 제가 재미있는 것을 하는 것이 잘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죠. 또 적성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것이 재미있어요. 한 분야에 대해서 내가 랭커가 되듯이 기술자가 되는 길은 순탄하지 않아도 육성의 재미를 느끼고 작물의 생육 시스템이라든지, 환경 자체를 컨트롤하고 이해하고, 공부할 수 있는 부분이요.”이강우 대표와의 이야기 말미, 그의 미래에 대해서 물었다.“아직 아이들은 없어요. 그렇다고 나중에 아이가 생겨도 도시로 내보내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제가 제 아이의 길을 정해주고 싶지는 않아요. 아이가 하고 싶은 것을 해주고 싶지만, 생각해보지는 않았어요. 나중에 자녀가 생기면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은 그래요.”“10년 후요? 저와 같은 청년들을 돕고 싶어요. 체험도 시켜주고, 실습도 시켜주고요. 앞장서서 영양군에 청년을 늘려주는 방법도 찾을 것 같고, 멜론을 영양군의 대표 특산품으로 만들고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노하우를 전파하고 있지 않을까 해요. 지역에 또 하나의 길을 만드는 것이 제 꿈이죠.”/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1-06-08

멈출 기미 안보인다… 현장 입모아 “철강재 가격이 미쳤어요”

□ 미친 철강재 가격지난 주말 만났던 지역의 한 건설사 사장은 벌겋게 달아 있었다. “철근을 구하지 못해 현장을 세워야 할 판이다. 메이커들은 t당 90만원 이하에 출고한다는데 유통상에 가면 품귀를 이유로 현금가 120만원에도 구하기가 쉽지 않다. 철강공장에서 나왔다는 철근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며 울상을 지었다.철스크랩 업체 B사 대표는 “회사 야드가 거의 비었다. 트럭 몰고 다니는 소상(小商)들마저 고철을 자기 마당에 쌓아두고 시장에 내놓지를 않는다. 값은 오르는데 정작 고철이 없다”고 분위기를 전했다.철근 H빔 등을 생산하는 한 제강사 임원은 “고철 같은 자재비와 인건비가 올랐고 환경·노동·세제 등 사회적 법적 규제강화에 따른 비용도 늘어 제품 값을 올려도 수익성은 이전과 변함이 없다. 조만간 추가 제품가격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했다.각각 입장이 다른데도 철강재 가격폭등과 이런 추세가 이어질 것이라는 예상은 같았다. 그래서인지 현장에서는 “철강재 가격이 미쳤다”는 말이 일반화됐다.원료 조달자, 생산자, 소비자 등 현장의 말을 종합하면 ‘미쳤다’는 말이 가장 적합한 표현인 듯도 하다.올 들어, 특히 지난달 이후 최근 철근 열연 후판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철(鐵)’이라고 이름 붙은 제품은 모두 다 가격이 두 자릿수로 올랐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서서히 시작된 상승세는 ‘어느 정도 선에서 멈추겠지’했는데 아니었다. 작년의 강세가 올 들어서는 폭등세로 바뀌었고 상반기 막바지인 지금도 철강재 가격상승세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제품가격만 오르는 게 아니다. 철광석 고철 같은 원자재는 물론이고 구리 주석 리튬 등 비철금속이나 석탄가격도 무섭게 값이 뒤고 있다.제강·철강사 등 철강업계는 코로나 팬데믹 위기 속에서 맞은 호황세를 두고 물들어 올 때 노젓자며 가동률을 최대치로 끌어 올리고 있다. 반면 건축 건설 등 철강수요 산업은 자재 폭등에다 품귀현상까지 겹치면서 작업계속 여부를 고민하는, 양극화가 절정에 이르렀다.철강재 가격이 왜 이렇게 가파르게 오를까?국내 업계는 지난해 연말 이후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 원부자재와 제품가격 폭등 이유를 △미국-중국간 갈등 심화에 따른 원자재 수급난과 중국의 제품수출 규제 △코로나 팬데믹에 따른 2019 하반기~ 2020 상반기 주요 철강 생산국의 가동률 저하에 따른 제고감소 △이산화탄소 배출규제 강화 여파로 고로철강사들의 생산량 축소여파 △3월말 수에즈운하에서 발생한 파나마선적 컨테이너 화물선 ‘에버기븐호’ 좌초 사고에 따른 화물운송료 상승 등에서 찾고 있다.□ 미국과 싸우며 원자재 빨아들이는 중국이같은 여러 요인 중에서도 가격폭등을 초래한 주된 이유는 중국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더 자세하게 말하면 미국과 중국의 경제전쟁 때문이다.트럼프 대통령 재임 중기쯤 본격화된 미국과 중국간 외교·경제 등 다방면에 걸친 대결구도가 바이든 대통령 취임 이후 철강 등 원자재 분야에서는 ‘전쟁’으로 표현될 만큼 더 심화되고 있다.중국은 지난해 연말부터 미국의 경제분야 대중국 압박이 더 거세질 것으로 예상하고 대비책으로 자국산 철강제품의 해외수출을 사실상 막고 있다. 세수제도 변경을 통해 자국내 철강제품 수출장벽을 높여버린 것이다.중국은 우리나라의 부가가치세와 비슷한 개념의 증치세(增値稅)를 모든 제품에 부과한 뒤 수출품의 경우 이를 전액 환급해줬다.이에 따라 중국산 철강제품은 증치세 세율(13%)만큼 가격경쟁력을 확보했고, 여기에다 인건비 등이 다른 생산비용도 상대적으로 저렴해 한국 미국 일본 등에 비해 가격경쟁력이 월등히 높았다.이랬던 중국 정부가 지난 5월 1일부터 열연, 냉연, 철근, 선재, 도금강 등 철강제품 증치세 환급제를 폐지, 자연스레 그만큼의 가격인상 효과와 함께 국제 철강제품 시장에서 중국산이 귀해졌다.중국의 정책변화는 곧바로 국제철강시장을 마구 흔들어 놓는, ‘철강팬데믹’을 유발하기에 이르렀고 중국산 수입품 의존도가 높은 우리 국내 철강재 시장이 혼란에 빠졌다.포스코 마케팅 관계자는 “전세계 철강업계와 수요업계가 졸지에 중국 정책결정권자들의 입만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처지다. 중국의 정책에 변화가 없는 한 수급불안과 가격혼란 상황은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중국은 또 ‘원자재 싹쓸이’에 나서면서 철광석 고철 등이 국제시장에서 아예 말라 버렸고 이런 와중에 원자재 수입의존도가 높은 한국이 가장 먼저 피해당사자가 돼 버렸다.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이 ‘중국의 자원확보 정책 → 증치세 폐지 → 수출규제 → 자재수입 확대 → 국제 원자재가 상승 → 한국의 품귀현상’이라는 연쇄반응을 일으킨 것이다.□ 중국에 휘둘리는 세계 철강시장중국이 자국산 제품수출 규제와 원부자재 수입확대를 시행한지 6개월이 지나면서 철강제품과 자재의 동반품귀와 가격폭등의 강도는 날로 세지고 있다.업계에 따르면 전세계의 연간 철강재 총생산량은 대략 18여억t 정도이고 이중 10억t 가량을 중국이 생산하고 있다. 또한 중국은 자국내 모두 247개의 제철소에서 생산한 제품의 30% 가량을 수출하는 것으로 알려져 중국은 철강분야 세계 최대 생산국이면서 소비국·수출국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중국에서 코로나 사태가 진정세로 접어든 작년 하반기 이후 SOC와 건설·건축 중심의 경기부양책을 펴면서 실제 자국내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도 중국 정부가 제품수출 규제와 원자재 수입확대책을 시행하는 이유다.철스크랩(부스러기 고철) 업계는 한국을 비롯해 중국, 일본, 베트남, 터키 등 다섯 개 나라를 주요 고철수입국으로 분류한다.이중 터키는 미국산을 독점하다시피하며 들여가고, 나머지 나라들에서 나오는 고철류를 한·중·일·베트남 등 4개국이 나누어 가지는 양상이었는데 올 들어 중국이 바닥의 부스러기까지 긁어가면서 나머지 3개국은 제대로 된 국제고철을 구경조차 못하는 처지다.국내 최대 고철업체 관계자는 “중국의 싹쓸이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당장도 문제가 크지만 이런 현상이 최소 향후 2년간은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는 게 더 걱정되는 대목”이라고 했다.이 관계자는 2008년과 2012년에 경험했던 것보다 훨씬 더한 철강원자재 대란이 올 연말~내년 1분기쯤에 나타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실제 철스크랩 가격의 표준이 되는 중량A(상태좋은 철근이나 H빔 조각) 가격은 지난해 6월초 kg 당 360~370원 선이었으나 만 1년이 지난 이달초에는 kg당 520원까지 올랐다.□ 고철대란 와중에 한국산도 중국에 팔려간다한국산 철스크랩의 중국수출량 또한 폭증하고 있다. 국내에서 품귀현상이 심각한데 우리 고철이 중국으로 미친 듯 수출되고 있는 것이다.관세청 자료에 따르면 올해 1월~4월 중국으로 수출된 한국산 철스크랩은 모두 4만7천247t. 이는 지난 한 해 동안 대중국 수출량 1만8천268t의 약 세배에 이르는 것이다. 또 지난 5월 한 달 대중국 수출량은 2만8천89t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보다 무려 17배나 늘어나는 등 중국으로 빠져나가는 고철이 매달 폭증세다.이 현상은 중국 업체들이 10~20%의 웃돈을 쥐어주는데 따른 것으로, 눈앞의 이익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중소 스크랩업체들을 나무랄 수도 없다.국내 12개 대형 제강업체(전기로에서 고철을 녹여 철근 H빔 등을 만드는 업체)들의 5월말 현재 철근(13mm 기준) 공장도 가격은 t당 85만원 선으로 알려져 있으나 자재난과 제품품귀가 지속되면 조만간 90만원 돌파는 불가피할 전망이다. 일관제철업계 ‘나홀로 호황’ 속 정부·정치권 역할부재 원성 포스코·현대제철, 후판 가격 상승 힘입어 코로나발 부진 털고 급격한 반등 성공건설·자동차 등 수요산업은 직격타… 제품가격 상승 인한 국민부담 가중 우려□ 코로나 사태와 정책부재가 악화 부추겼다 최근 철강제품가격 폭등이면에도 코로나 팬데믹이 작용했다. 세계 최대 철광석 생산국인 브라질과 호주(특히 브라질)에서 코로나 19 확산세가 꺾이지 않으면서 지난해 이후 채굴량이 크게 줄어들어 철광석 가격이 적정선의 두 배로 뛰었다. 코로나19에 대한 공포감으로 국내외 모든 철강업체들이 코로나 확산방지책의 하나로 조업을 축소하면서 재고가 줄어든 것도 현재 제품품귀의 한 이유로 꼽힌다. 최근 정부를 비롯해 UN 등 세계기구와 환경단체들이 기후협약과 탄소중립을 명분으로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많은 고로제철사들에 대한 규제와 압박을 높인 것도 철강사태 요인 중 하나로 지적된다. 각종 규제로 고로제철사는 생산량이 줄고 상대적으로 전기로 제강사는 생산을 늘리는 게 추세인데, 이는 고로제철사들의 제품이 결국은 고철로 돌아나오는, ‘철광석-고로제철사-고철-전기로 제강사 제품’이라는 철강재의 순환구조를 기형적으로 만들어 버려 고철품귀를 유발했다는 것이 철강업계의 분석이다. 철광석 녹이는 양이 줄면서 고철발생량이 줄고, 결국 이것이 고철 값과 철강제품 값을 올라가게끔 작용을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정부가 이런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를 살펴본 뒤 탄력적인 정책을 만들어 내지 못하면 결국 중국만 유리해지는 ‘철강분야 중국속국 상황’도 배제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를 내놓고 있다. 철강사 관계자들은 “지난 3월 23일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무역항로인 수에즈운하에서 길이 400m의 화물선 에번기븐호가 좌초되면서 통행이 엿새동안 중단됐는데 이 사고가 나자 해운사들이 모든 화물 운송료를 t당 1만5천원~2만원 올린 것도 수출입 철강원부자재 가격상승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며 “이 때도 우리 정부는 아무른 대응방침을 내놓지 못했다”고 질타했다.□ 철강사들 최고실적 행진 속 표정관리 이런 와중에 포스코와 현대제철 양사 체제인 일관 제철업계(고로에서 철광석을 녹여 철판을 만드는 방식)는 호황이다. 지난달 12일 국제 철광석 가격은 t당 237. 57달러로 사상 최고점을 찍었다. 한 달이 지난 현재는 약간은 빠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200달러를 기준점으로 두고 매일 치고받는 양상이다. 예년 정상가의 두 배다. 선박건조에 주로 들어가는 후판(두께 6㎜ 이상의 두꺼운 철판) 가격이 지난달 14일 t당 120만원을 돌파, 2차 원자재 대란이 빚어졌던 2011년 이후 10년 만에 t당 100만원대에 재진입했다. 조만간 신고점(新高點)이 재등장할 것이라는 시나리오도 나온다. 일찌감치 호주 등지 철광석 광산 직접 투자했던 포스코는 철광석 확보와 조달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고 도입가격 또한 전세계에서 가장 유리한 정도로 알려져 있어 현재의 철강제품가격 고공행진이 곧바로 수익성 향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포스코는 올해 1분기에 1조5천520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려 10년만에 최근 10분기 최대실적치를 기록했다. 현대제철도 같은 기간 3천39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려 작년 4분기 대비 약450%의 신장세를 보였다. 국내 초거대 두 철강기업은 전반적인 경기 불황속 ‘나홀로 호황’에 표정관리중이다.□ 소비자인 국민만 부담가중, 아파트 분양가 자동차 등 가격인상 불가피 그러나 대형 철강사들의 영업이익 폭증 등 호조세 뒤에는 건설 전기·전자 등 수요산업의 부담가중과 아파트 분양가 및 철강재를 자재로 쓰는 각종 소비재의 제품가격 상승으로 이어져 최종 소비자인 국민들의 부담가중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 당장 큰 걱정거리다. 한 대형건설사 대표는 “작년 상반기 분양완료한 아파트의 실제 착공은 지금쯤이다. 그런데 지하 공사에 들어가는 쉬트파일, 건물 뼈대에 사용되는 H빔과 철근 등 철강재 가격이 분양시점 대비 사실상 30% 이상 올랐다. 시멘트도 마찬가지다. 수익성에 빨간불이 켜졌다”고 말했다. 또 다른 건설사 대표도 “최근의 철강재와 시멘트 등 주요 자재가격 인상분만 계산해도 작년 같은 기간 대비 평당 10만원 가량 원가가 가중될 전망”이라고 했다. 현대제철 동국제강 등 국내 12개 제강사와 대형건설사들이 들어있는 건자재협회는 철근 등을 협의해 가격을 결정해 품귀현상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덜하지만 규모와 자금력이 달리는 중소 건설사들은 철근을 구하지 못해 작업에 차질이 우려되는 상황에 직면했다. 자동차 업계에 따르면 승용차 한 대 가격에서 철강재의 원가비중은 대략 10% 선, 조선업계는 컨테이너나 유조선같은 선박의 경우 배값의 20% 정도를 철강재 가격이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는데 작년 연말 이후 계속된 철강재 가격상승은 한국산 자동차와 선박의 가격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것이라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현추세 향후 1년 이상 지속 예상, 정부·정치권 역할부재에 대한 원성 높아 9개월 넘게 이어지는 철강대란 와중에 정부와 정치권의 역할부재에 대한 원성도 높아지고 있다. 철강사나 소비업체 관계자들은 “정부는 품귀상황 실황중계만 하고 있을 뿐 원부자재 수급안정책이나 제품의 대한 매점매석 행위에 대한 단속 등 어느 하나도 제대로 없다”면서 “하기 싫어서 안하는 것인지 몰라서 못하는 것인지 답답하다”면서 “국회와 여야 정당은 네탓 공방만 할 뿐 근본적인 대응책은커녕 관심조차 없는 현실에서 꼬박꼬박 내야하는 세금이 아깝다”고 원색적인 비판을 퍼붓고 있다. 이에 정부 측은 여러 매체를 통해 현 상황이 미-중간 갈등, 특히 중국에서 비롯된 문제여서 예견하기 어려웠다는 점을 들며 원자재 수입선 다변화를 모색하고 시장교란·왜곡 행위에 대해서는 조만간 단호하게 대응하겠다는 원론적 입장만 내놓고 있다. 한편 철광석과 고철 및 철강제품 가격폭등 외에도 작년 6월 1일과 올 6월 1일까지 만 1년간을 비교하면 구리 31%, 석탄 38,6%, 리튬 91%, 알루미늄 24.7%, 주석 51.6%, 아연 12%, 니켈 9.4% 등 모든 철강자재 가격이 두 자릿수 내지는 두 배 가까이 올랐다. 이들 중 3~4개 품목은 매주 당 국제거래 가격이 7~8%씩 오르고 있는데 제철·제강 업계 모두 최소한 앞으로 12개월 이상은 원자재와 제품가 모두 현시점 대비 강세 또는 강보합세를 유지할 것으로 예측, 우리 경제 전반에 불안감을 주고 있다. 특히 모든 철강제품의 45% 이상을 소비하는 건설업계에 대해서는 비상대책이 절실하다. 업체들이 이미 분양한 아파트 입주 예정자들에게 추가분양가를 요구할 수도, 공사를 중단할 수도, 그렇다고 적자를 보면서 공사를 강행할 수도 없는 얽히고설키는 상황이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박정출 객원논설위원

2021-06-08

자신만의 방식으로 만든 옷

이노센스의 일층 매장에서 천상두 디자이너를 만났다. 매장에서 얘기를 나누다 패션쇼 동영상을 보기 위해 이층 카페로 올라갔다. 가수를 알려면 노래를 들어봐야 하고, 화가를 알려면 그림을 봐야 하고, 디자이너의 진면목을 알려면 그가 만든 옷을 보는 게 가장 빠르다. 천 대표도 그런 예술의 속성을 알기 때문에 패션쇼를 보여주겠다고 했을 것이다. 물론 매장에 옷이 가득하지만 그냥 옷걸이에 걸려 있는 옷과 모델이 입은 옷은 차원이 다르니.밤이 되면 명망 있는 지인들이 모여들어 화려하게 부상할 공간이지만 낮이어서 카페에 불이 꺼져 있고, 긴 탁자에 침전된 고요가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재즈가 흐를 것 같은 어둑한 그대로, 가볍게 실내등 하나만 켠 채로 커피부터 따라준다. 어둠 속에서 찬연히 빛나는 흰색 커피잔의 유니크한 모습에 매료되었다. 특이한 모양의 흰색 손잡이를 살피고 있노라니, 천 대표가 ‘내가 만든 거예요.’ 한다. 신은 참 짓궂다. 어쩌자고 재능덩어리에게 여러 개의 달란트를 한꺼번에 주셨는지. 어둠 속에서 희게 빛나는 커피 잔에 감탄하고 있을 짬도 없이 천 대표가 패션쇼 동영상을 열어준다. 2014 대구패션페어에서 프랑스의 모자 디자이너이자 무형문화재 셀린 로베르트(Cenline Robert)와 컬래버레이션으로 이루어진 바잉 쇼 영상이었다. 인터뷰 중에 그녀의 이름이 여러 번 등장하는 게 궁금해서 물었다. “선생님에게 저 패션쇼의 의미는 무엇인가요?”“제 인생에서 가장 기록적인 일이라고 할까요. 지금까지는 그래요.”누구나 자신의 일생 중 기억에 남는 사람 한 명쯤 마음에 품고 있기 마련이다. 어떤 식으로든 한 개인의 발전에 크게 영향을 끼친 사람이라고 할까. 어려운 시기에 발돋움할 계기가 되어주었다거나, 아무 것도 보여줄 수 없는 상황인데도 무작정 믿어주었다거나, 또는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거나. 그런 사람을 마음에 둔 사람은 행복하다. 천 대표에게 셀린 로베르트가 그런 사람이었던가 보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155년 전통의 3대째 이어져 온 모자디자이너였다. 파리에 갔을 때 그녀가 먼저 패션쇼를 해보자고 제의를 하더란다. 프랑스 최고의 모자디자이너가 천 대표의 작품을 알아봐주었다는 말이다. 아파트 한 채는 털어 넣어야 할 것 같은 파리에서의 큰 쇼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사절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다.천 대표는 경제적 사정으로 물리친 파리 패션쇼 대신에 한국에서 쇼를 준비했다. 무대에 올릴 작품을 사진에 담아서 보냈더니 셀린 로베르트가 흔쾌히 호응하며 모자를 한 상자 가득 담아서 보내주었다. 그 모자로 즐겁게 쇼를 진행할 수 있었다. 패션쇼를 위해 한국에 온 셀린 로베르트에게 천 대표는 직접 만든 옷을 선물했다. 그 옷을 입고 무대 인사를 하는 그녀를 보며 천 대표의 가슴이 얼마나 벅찼을지 짐작되고도 남는다. 혹시 모자를 잃어버리면 어쩌나 걱정되어 패션쇼가 끝나자마자 모자를 돌려보냈다며, 나중에 모자를 모두 구입해서 홍콩 바이어들에게 옷과 함께 팔았다고 한다. 지난날을 즐겁게 회상하는 천 대표를 보며 아름다운 추억을 가진 사람보다 더 큰 부자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패션쇼를 준비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려요?”“육 개월 정도?”작품의 영감을 얻기 위해 따로 여행을 하느냐고 물으니 영감은 예고 없이 다가오는 것이어서 집안이나 화장실, 길을 걷다 일상에서 잘 얻는다고 한다. 그 예를 보여주듯이 천 대표가 패션쇼의 한 장면을 가리킨다. 한 모델이 쓰고 있는 장미꽃 화관이 길에서 주운 조화였다고 한다. 은행을 다녀오던 중에 장미꽃 조화를 주워서 머리띠로 만들었다며, 그렇게 영감을 길에서 자주 만난다고 한다.“언제 어떻게 해서 옷을 하게 되었어요?”“중학교 때에 어머니께 재봉틀 사용법을 배운 게 시작이었어요.”나일론 소재의 청바지 다리를 반으로 잘랐다. 자른 부분에 메탈 반짝이를 풀로 붙여 재봉틀로 박아서 자기만의 옷을 만들었다. 친구에게 자랑을 했더니 말광대 같다고 놀리는 바람에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만든 옷을 자랑하고 싶은데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서 서운했다. 음악선생님은 그에게 성악을 전공하라고 하셨지만 그의 가슴에 이미 옷에 대한 관심이 자라고 있었다. 평범한 걸 거부하는 것부터 남달랐다. 옷을 맞출 때도 일일이 디자인을 일러준 탓에 특이하게 입는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제대하고 진로를 고민할 때, 친구들이 옷을 만들어보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옷을 만들겠다는 신념으로 무작정 남성복을 만드는 가게를 차렸다. 서문시장의 장인급 재단사에게 옷을 맡겼다.“그 무모함을 젊음이라고 해야 할까요?”“자신을 믿어주는 용기라고 해야겠죠.”스스로를 믿는 용기로 대구백화점 앞 사루비아 양화점 옆에 가게를 열었다. 남성복 가게인데 특이한 디자인 탓인지 여자 손님이 더 많았다. 여성복 매장으로 종목을 바꾸고, 아서 펜 감독의 영화 ‘보니 앤 클라이드(Bonnie and Clyde)’의 제목을 따서 가게 이름을 지었다. 독일군 야전점퍼에서 힌트를 얻어 남녀 구별 없이 입을 수 있는 유니섹스 모드로 옷을 만들었다. 마네킹도 직접 만들었다. 낚싯줄을 천장에 매달고 바가지에 얼굴을 그려서 허수아비처럼 흐늘거리게 디스플레이해서 옷을 걸었다. 무엇이든 남달라야 했다. 얼김에 여성복으로 종목을 바꾸었지만 아는 게 너무 없었다. 여성복을 하려면 용어부터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옷 만드는 공장의 직원을 채용해서 그들에게 하나하나 용어를 배웠다. 그러다 패션 트렌드가 정장으로 바뀌며 또 한 번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 정장을 하려면 먼저 옷 만드는 법부터 배워야겠기에 일본으로 갔다. 세계적인 최고급 상품을 보며 신의 조각이라고 생각했다. 정장을 한 벌 사라는 하용수 형의 권유대로 조르지오 아르마니 정장을 23만엔에 샀다. 그때만 해도 큰돈이었다. 그 옷을 가져와서 분리하는데 이틀 걸렸다. 돋보기로 봉재선 하나하나 핀으로 꽂아가며 패턴을 익혔다. 완벽하게 재생하고서야 정장에 대한 감각을 익힐 수 있었다. 대구에서 정장만은 자신을 따라올 자가 없다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욕망과 실제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유럽인과 아시아인의 체형이 달라서 아르마니 정장이 제 가치를 발휘하지 못했지만, 그 옷을 한국 여성들의 패턴에 맞게 구성하는데 5년이 걸렸다. 정장에 맞게 매장의 상호도 바꾸었다. 디자이너이자 영화배우인 하용수 씨가 지어준 이름이 바로 ‘이노센스(INNOCENCE)’였다. 유니섹스의 최초 발생지인 삼일고가도로의 광교에서 하용수 씨가 음악카페 ‘유혹’을 운영하며 ‘대블 바이 익스프레서’라는 케주얼 매장을 운영할 때였다. 오사카에서 처음 만나 친해졌지만 하용수 씨도 대구 향촌동이 고향이었다.“혹시 살며 후회스러웠던 적이 있으세요?”“오사카 미나미에서 이노센스 매장을 열었던 적이 있어요.”국내와 일본을 드나들며 운영했는데 불경기 때문에 성급하게 매장을 철수한 것이 후회스러웠다고 회상한다. 경기가 나쁘면 여자들이 지갑부터 닫는다는 의견에 귀를 기울인 탓이었다. 실패가 두려웠다. 그때 마음 약하게 먹지 않고 견뎠으면 지금쯤 오사카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고, 세계시장과 교류하기도 한층 쉬웠을 텐데. 그 후 그는 중국시장을 개척해서 일 년에 두 번 내지 세 번 꾸준히 패션쇼를 하고 있다. 대련, 베이징, 상하이, 연길, 칭다오, 온주, 정저우, 충칭 외 중국 전역에서 패션쇼를 했다. 옷을 만들어놓은 상태에서 코로나가 닥쳐 모든 행사가 멈추었다. 그래도 지난해 11월 5일에 엑스코에서 패션쇼를 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대구에서 활동하시는 디자이너는 어떤 분들이세요?”“고급 옷을 만들던 미스 김텔라, 코코 박동준을 가장 먼저 손꼽지만 두 분 모두 돌아가셨어요.”지금은 패션 아카데미 회원으로 최복호, 전상진, 김용만, 이응도, 변상일, 최태용, 김서룡 등이 있고, 90년대 크리에이터 디자이너 그룹에 소속된 박항치, 하용수, 김영세, 신장경, 이상봉, 박윤수, 장광효, 선미수 등과 활동했다며 천 대표는 영원히 디자이너로 남고 싶다는 바람을 펼친다. 어느 소속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의 옷을 만들고 싶은 고집이 올곧다. 그가 말한다. 10년을 입어도 어제 만든 것처럼 변하지 않는 옷을 만드는 게 꿈이라고. 또 어떤 세계로 나아가게 될지 알 수 없지만 항상 세계를 향해 문을 열어둔다고 한다.대구광역시장 표창장과 광저우 패션협회 최우수디자이너상, 한국섬유산업연합회장 표창을 받았고, 미국독립기념 초청 패션쇼, 프랑스 후즈 넥스트, 중국 대련패션쇼·상하이 패션쇼,·청도 패션쇼 등, 난치병 어린이 돕기 자선 패션쇼와 불우이웃돕기 패션쇼로 수많은 업적을 쌓았다./글 장정옥 소설가 (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1-06-08

동해안굿의 근간 만든 포항 출신 김석출

무속이란 민간층에서 무당을 중심으로 전승되는 종교 현상으로 한국 민간신앙의 한 형태다. 민간신앙에는 한 가정의 주부가 중심이 되어 집안에 모시는 ‘가신신앙’, 마을 단위로 전승되었던 ‘마을신앙’, 민속 종교로 일정한 체계를 갖춘 ‘무속신앙’이 있다. 무속신앙을 말할 때 가장 많이 듣는 말이 강신무(降神巫)와 세습무(世襲巫)일 것이다. 학계에서는 한강을 기준으로 통상 이남은 세습무권으로, 이북은 강신무권이라고 보았다. 강신무는 신병을 겪고 무당이 된 경우이고, 세습무는 무업을 배우거나 대물림하는 경우를 말한다. 실제로 두 지역의 굿이 연행(演行)되는 과정과 무속의 전통, 무당의 성격에 차이가 있다. 한국 무속은 특정 지역별로 무가권이 구분돼민속학자 김태곤은 한국 무속은 강신무 중심이며, 이는 북방계통에서 유래한 것이고, 세습무는 강신무에서 분화하여 변천된 것으로 보았다. 반면 민속학자 최길성은 강신무와 세습무를 별개의 문화로 보고, 한반도는 남방계와 북방계가 섞여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편의상 이원론으로 구분하지만, 최근에는 강신무와 세습무를 별개로 보지 않고 상호보완적으로 존재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사실 강신무에도 세습적인 요소가 존재하며, 세습무에도 신 관념이 뚜렷하고 신단을 모시는 사례를 볼 수 있다. 게다가 요즘은 세습무권이라 하는 한강 남쪽 지역에서도 강신무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어서 이런 구분이 사실상 큰 의미를 갖지는 못한다.하지만, 강신무권과 세습무권이라는 구분이 아니더라도, 무속신앙은 ‘굿’이라는 제의를 연행하는 방법이나 굿에서 노래하는 신화인 서사무가(敍事巫歌)가 무엇을 전승하는지에 따라 다양한 관점에서 ‘무가권(巫歌圈)’을 구분할 수 있다. 한국 무속은 특정 지역별로 무가권이 구분된다. 한강 이남 지역을 살펴보면, 강신무를 중심으로 한 서울굿, 충청도굿, 전라도굿, 남해안굿, 제주도굿과 함께 동해안의 해안선을 따라 연행되는 ‘동해안굿’이 있다. 북한 지역은 조사하기 어려워 ‘북한 지역 무속’으로 포괄적으로 다루기도 했지만, 한국전쟁 때 월남한 무속인들을 대상으로 황해도굿과 함경도굿이 조사되었기 때문에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등 지역별로 무가권 연구가 이루어진다. 동해안굿은 예술성과 놀이성이 뛰어나이렇게 지역별로 무가권을 구분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국 무속을 관통하는 공통 원리가 존재한다. 굿은 ‘청신(請神)-오신(娛神)-송신(送神)’의 순서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부정굿으로 굿을 시작하며 마지막에 굿을 끝내면서 잡귀잡신을 위한 굿거리를 마련한다는 것이 대표적인 공통점이다. 이러한 공통점을 공유하면서 이 글에서 자세히 살펴보려는 동해안 무가권은 그 나름의 특징이 있다. 다른 지역에 비해 화랭이(세습무 집안의 남성 악사)의 재주를 보여주는 ‘놀이성’이 매우 뛰어나 몇 날 며칠 굿을 놀면서 구성원들이 함께 즐겼던 굿의 원형적 모습이 살아 있는 곳이 바로 동해안이다. 게다가 지금도 여전히 많은 토박이들이 굿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수많은 무속 연구자들의 연구 터전이기도 하다.동해안 무가권의 범위는 강원도 고성을 최북단으로 하여 남쪽으로는 부산 다대포에 이르는 지역을 말한다. 이 지역에서 행해지는 모든 굿을 아울러 동해안굿이라 부른다. 동해안 무속은 말 그대로 어촌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어촌은 자연환경의 지배력이 크고, 협업을 통한 공동 노동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 어로 작업의 위험성으로 인한 위기의식의 해소와 공동체적 유대가 반드시 필요한 지역이기 때문에 개인 또는 공동의 소망을 주술 종교적인 방법으로 해소하려는 열망이 강하다. 어쩌면 그러한 열망의 결과물로 형성된 신앙이 동해안굿이라 할 수 있다.굿은 지역사회의 종교 문화적 토대 위에 형성되어 지역적 특성이 여실히 반영되어 있기에 동해안굿은 해안가의 특징과 전통을 바탕으로 구성되었다. 게다가 동해안의 각 지역민들은 굿을 통해 신앙 종교적으로 희구하는 한편, 예술적·놀이적 욕구도 충족해 왔기에 동해안굿은 종교성과 놀이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한국의 굿에서 동해안굿은 예술성과 놀이성이 뛰어나다고 평가된다. 이러한 평가에는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동해안굿의 음악은 리듬이 세련되며, 반복되면서 차츰 빨라지는 다이내믹한 장단이 큰 매력이다. 동해안 별신굿의 장단은 매우 다채롭다. 굿거리나 동살풀이, 삼공잽이 외에도 푸너리, 드렁갱이, 배기장, 삼오장 등 독특한 이름을 가진 장단으로 구성된다. 선율악기 없이 타악기로만 연주되는 동해안굿의 사물 장단은 섬세하며 기교가 뛰어나다. 동해안굿의 세습은 김석출에서 출발오랫동안 동해안굿 현장을 연구한 민속학자 윤동환은 동해안굿을 전승하는 두 개의 세습무 집단을 모두 조사하였다. 김해 김씨 집안인 김석출(2005년 사망)과 은진 송씨 집안인 송동숙(2006년 사망) 무계는 동해안굿을 전승하는 두 개의 축이었고, 그들이 활동하는 곳은 동해안의 북단과 남단까지다.김석출(金石出)은 1922년 경북 영일군(현재 포항시 북구) 흥해읍 환호동에서 태어났으며, 무속인 김성수의 둘째 아들로 김경남(金京南)이라고도 한다. 김석출의 본적은 조부의 출생지를 이어받아 경북 영일군 흥해면 옥성동 26번지다. 영일군은 1995년 1월 행정구역 개편 때 포항시로 통합되면서 폐지되었으므로 지금의 포항시가 김석출의 고향인 셈이다. 동해안굿의 세습을 설명하려면 김석출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데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김석출은 ‘중요 무형문화재 제82-가호 동해안 별신굿 보유자(악사)’이자 명예 보유자로 지정되어 있다. 그의 예술적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저절로 동해안굿을 이해하게 된다고 할 정도로 그의 삶은 동해안 무속의 지도와 마찬가지다. 김석출은 굿판에서 일곱 살 때부터 잔심부름을 하고, 여덟 살부터는 징채를 잡았다고 하니 아주 어릴 때 무업에 입문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동해안 굿판에서는 나이나 경력보다 ‘무업을 잘하는가’ 하는 점이 우선시된다. 그래서 재주가 많았던 김석출은 어린 시절부터 굿판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김석출은 열아홉 살에 결혼하고 나서도 한동안 포항에 살면서 무업을 계속했고, 형제들과 걸립을 다니며 각 분야의 민속 예인들을 만나면서 자신의 예술 세계에 깊이를 더할 수 있었다. 이후 동해안 무속의 전승 주체였음은 물론, 해외 공연과 다수의 음반 활동을 통해 동해안굿의 예술성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현재는 딸들과 사위, 조카 등 김석출 만신의 가계에서 동해안 세습무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동해안굿의 근간은 김석출에 의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연재될 글에서는 포항에서 나고 자라 동해안굿의 핵심 전승자가 된 김석출을 중심으로 동해안에서 행해진 별신굿과 오구굿이 어떤 굿인지 살펴보고, 특히 감염병을 극복하고자 했던 무속 제의인 손님굿을 자세히 이야기하려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포항을 중심으로 한 동해안굿의 미래와 앞으로의 가능성을 가늠하려 한다.글 / 염원희(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2021-06-07

“청소년의 꿈, 어르신들의 건강한 삶을 지켜드립니다”

영천시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생애주기별 꼼꼼한 복지 정책을 통해 청소년들에게는 꿈과 희망을, 어르신들에게는 다양한 건강관리 시스템 통해 보다 편리하고 건강한 생활환경을 만들어가고 있다.영천 인구는 지난 4월 30일 기준 10만 2천529명으로 10년 만에 최대치를 기록했다. 이 같은 성과는 각계각층별 맞춤형 복지 효과로 보고, 앞으로도 따뜻한 복지서비스 제공 및 역량 강화로 소외된 이웃이 발생하지 않고 행복한 영천이 되도록 행정력을 집중한다는 계획이다.이처럼 전 생애에 걸친 맞춤형 복지 실현으로 살기 좋은 도시, 영천으로 거듭나는 영천의 주요 사업들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 건강하고 활기찬 노후생활 보장어르신의 여가공간인 경로당의 관리 시스템화로 다양한 혜택들을 적절하고 형평성 있게 지원될 수 있도록 체계를 마련했다.등록경로당 419개소마다 운영비, 냉난방비 등 연간 435~450만 원 상당의 보조금을 지급하고, 2021년 기준 5억 원을 들여 100여 건의 보수공사가 진행됐다. 또한, 경로당별 배상책임 및 화재공제 보험에 가입하고 방역과 전기안전 점검을 시행했으며 에어컨, 냉장고, TV 등의 비품을 지원했다. 미등록 경로당에도 난방비가 지급되는 등 편안한 여가활동을 위한 다양한 복지혜택을 제공하고 있다.올해 주목할 만한 것으로 2021년 상반기 중 1억 원의 예산을 들여 경로당에 안전 손잡이 및 미끄럼방지 매트를 설치했다.◇ 노인 일자리 사업 통한 소득보장 기회 제공노인 일자리는 2020년 기준 정원 1천748명에서 올해 기준 정원 2천79명으로 총 331명이 증가했다. 사회 서비스형 사업인 실버도우미(어린이집 업무지원), 시니어금융업무지원단(은행 업무지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력이 증원됐고, 시장형 사업에서도 도시락 주문업체인 ‘엄마애(愛)도시락 사업’도 신규 개업했다. ◇ 맞춤형 돌봄으로 노인복지 사각지대 없앤다생활지원사가 방문과 전화로 안부를 확인하며, 사회관계 향상 프로그램과 신체건강·정신건강분야 생활교육 등 노인맞춤형돌봄서비스 운영으로 생활 속에서 단조롭고 무료한 생활을 더욱 건강하고 활기차게 보낼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수행 인력은 전담사회복지사 12명, 생활지원사 171명이 활동 중이며 대상 어르신은 2천776명이다. 독거노인 및 중증장애인의 가정에서 화재, 낙상, 건강상 응급상황 등 발생 시 이를 실시간으로 안심센터 및 소방서(119) 등과 연계해 주는 정보통신기술(ICT) 기반 차세대 응급안전안심서비스 장비를 300명의 독거노인에게 전달했다.이처럼, 노인의 복지증진과 건강한 노후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걸맞은 온 오프라인 형식을 모두를 활용한 맞춤형 돌봄서비스로 노인돌봄 사각지대 해소에도 꼼꼼히 챙겨나가고 있다.◇ 신체와 정신 모두가 건강한 청소년 육성청소년들이 건강한 사회구성원의 일원으로 성장하도록 지원하고 있는 영천시는 청소년상담복지센터, 청소년수련관, 청소년 문화의 집, 청소년 방과 후 아카데미 등을 실시하며 청소년과 관련한 다양한 사업을 운영 중이다.지역 청소년 자치기구인 ‘청소년 참여·운영위원회’는 관내 중·고등학생 50명으로 이루어져, 청소년의 시각에서 지역 내 현안과 이슈 등 정책결정을 바라보며 입장을 대변하는 활동기구로서 청소년의 목소리를 내고, 청소년 정책 수립에 반영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 밖에도 학교주변과 유해업소 밀집지역의 정기적인 점검 및 각종 공익 캠페인 활동을 통해 청소년의 일탈을 예방하는 등 청소년 보호사업도 지속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 아이낳고 키우기 좋은 환경 조성지난해 9월, 24시간 분만할 수 있는 환경과 산후조리원 등을 갖춘 원스톱 출산시스템이 있는 ‘영천제이병원’의 개원으로, 지역 산모들이 겪는 원정 출산의 불편함을 해소할 수 있게 됐다. 이 외에도 출산양육지원금 지원과 아기사랑 택시 운영, 임산부 친환경농산물 지원사업 시행으로 아이 낳고 키우기 좋은 환경 조성에 힘쓰고 있다. 양육공백이 발생한 가정의 만 3개월 이상~12세 이하 아동을 대상으로 돌봄 서비스를 제공해 양육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한 ‘아이돌봄서비스’는 영아종일제, 시간제, 질병감염아동지원 등으로 구성돼 있다.◇ 초등돌봄 사각지대 해소… 돌봄센터 1호점 개소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방과 후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영천시 ‘다 함께 돌봄센터 1호점’이 LH문외센트럴타운 내 주민 공동공간에 지난 1일 개소했다. 전체면적 100㎡ 규모로 활동실, 상담실, 사무실, 조리실을 두고 있으면 이용 정원은 초등학생 20명이다. 학습지도, 생활교육, 체험활동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계획하여 초등학생의 돌봄 공백 없는 맞춤형 돌봄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다 함께 돌봄 센터는 부모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모든 초등학생이 이용할 수 있고, 저학년 학생·맞벌이 가정·다자녀 가정 자녀가 우선 이용할 수 있어 맞벌이 부부와 같이 양육에 어려움을 겪는 가정의 부담을 줄이고, 초등학생 돌봄 사각지대를 없애는데 주력하고 있다.1호점 개소를 시작으로 내년엔 완산동, 금호읍에 각 1개소를 추가해 총 3개소로 확대할 계획이며 앞으로 돌봄이 필요한 지역에 지속적으로 다 함께 돌봄 센터를 추가 설치해 나갈 예정이다.◇ 농촌지역 보육환경 개선 위한 공공보육 제공농촌지역의 취약한 보육여건 개선을 위해 공공보육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화북면 일대 보현산녹색체험터에 전체면적 150㎡ 규모로 내년 3월 개원할 예정인, 북동권역 국공립어린이집을 신규 설치한다. 영천시 북동권역인 화북면, 화남면, 자양면에 사는 아동들이 주로 이용할 것으로 예상되며, 귀농·귀촌하는 청장년층 자녀들의 보육 수요에 충분히 대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공동주택 내 국공립어린이집 확충신규 공동주택 내 국공립어린이집 2개소도 추가 설치한다. 올 3월부터 입주를 시작한 ‘e편한세상 영천’ 1차·2차 아파트가 해당된다. 개원준비를 거쳐 내년 3월에 어린이집을 개원할 예정이다. 현재 영천시 어린이집은 총 47개소이며, 그 중 국공립어린이집은 9개소이다. 내년 북동권역 국공립어린이집과 e편한세상 영천 1차·2차 국공립어린이집까지 개원하면 총 12개소가 돼 돌봄 취약 지역인 농촌의 한계를 극복하고 보다 촘촘한 아이 돌봄 서비스가 가능해질 전망이다. ◇ 코로나19 위기, 영천형 재난지원책 마련코로나19가 발생한 지난해에는 총예산 265억을 투입, 4월 저소득층, 중위소득 100% 이하 2만4천919가구, 5월 중위소득 100% 초과 2만6천913가구, 12월 소득감소 위기가구 2천209가구를 대상으로 세 차례 재난지원금을 지원했으며, 경북 최초로 전 시민에게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했다.2월에는 전 시민을 대상으로 선불카드 형태로 10만 원을 지원하는 제2차 영천형 재난지원금사업을 추진해 5월 현재 9만9천803명, 98.77% 지급률을 달성하고 있다. 5월 10일부터는 소득감소 위기가 발생한 중위소득 75% 이하 저소득 가구의 생활지원을 위해 가구당 50만 원을 지급하는 한시 생계지원 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예산 13억 원을 투입해 6월 말 지급 할 예정이다.시는 저소득층의 생활안정을 위해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의거 시 인구의 6.7%인 6천870명에게 연 200억 원 예산을 편성해 생계급여, 장제급여, 해산급여를 지원하여 지역 내 복지사각지대 해소와 취약계층의 생활 안정을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다.◇ 위기상황 없애는 한시적 긴급복지지원사업 연장작년부터 시행 중인 한시적 긴급복지지원사업은 기존의 긴급복지지원보다 완화된 신청기준을 적용하여 지원대상의 폭을 넓혔다. 지난 한 해 동안 긴급생계비 1천464건, 긴급의료비 137건 등 총 1천731명에게 45억2천만 원을 지원했으며, 올해 들어서는 5월 현재까지 긴급생계비 281건, 긴급의료비 40건 등 총 6억1천만 원을 지원했다.◇ 촘촘한 복지안정망 구축 통해 복지사각지대 최소화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위기가구를 발굴·지원하기 위해 읍·면·동 맞춤형 팀, 지역사회보장협의체, 명예사회복지공무원 등으로 구성된 위기가구발굴단과 함께 찾아가는 복지상담, 복지사각지대 조사를 실시해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가는데 디딤돌 역할을 하고 있다. 발굴단은 올해 1천939세대의 복지사각지대 위기가구를 발굴하고 기초생활보장, 차상위계층, 긴급지원, 기타 공적급여 지원 등의 복지서비스 신청을 안내했으며, 공적급여 지원이 어려운 가구 1천179세대에는 후원물품 등 민간자원을 연계했다. 촘촘한 복지안전망 강화로 위기가구를 적기 발굴하여 공공·민간서비스의 통합적인 제공을 통해 복지사각지대를 해소하고자 한다.◇ 장애인용 하이패스 감면단말기 무상 지원지난해 도에서 실시한 장애인 하이패스 감면단말기 무상지원 사업이 큰 호응을 얻어 장애인 이동권 증진과 경제적 부담을 덜고자 시는 올해 도내 최초로 도 사업 140대 외 시비를 추가 확보해 자체사업으로 장애인용 하이패스 감면단말기를 무상으로 500여 대 지원한다.최기문 영천시장은 “아이를 낳고, 키우기 좋은 환경 조성이 인구증가로 이어져 영천이 발전하는 길이라 생각한다”며 “영천의 미래를 이끌어나갈 아이와 청소년, 영천의 발전을 이끌어온 어르신들 모두가 행복한 삶 보장을 위해 힘쓰겠다”고 밝혔다./조규남기자 nam8319@kbmaeil.com

2021-06-03

미각의 즐거움이 넘치는 포항

포항의 상징은 포스코다. 포항을 대표하는 또 다른 상징은 어떤 것이 있을까? 구룡포 과메기, 호미곶 일출, 죽도시장 등이 그 뒤를 따른다. 그런데 포항시의 공식 상징인 시화나 시목은 무엇인지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포항의 시화는 장미, 시목은 해송, 시조는 갈매기다. 전국 어디에나 있는 것이니 딱히 포항만을 상징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데 국민 생선이라 할 만한 꽁치는 흔하지만, 포항이 먼저 떠오른다. 과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꽁치도 포항의 상징으로 한자리를 차지할 만하지 않을까? 시어(市魚)를 정한다면 포항의 시어는 꽁치라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포항과 울릉도에서 즐겨 먹는 꽁치 완자 요리전국에 널리 알려진 포항 꽁치 요리의 대명사는 과메기지만 과메기 외에도 포항 사람들의 꽁치 사랑은 유별나다. 포항에서는 꽁치 하나로 참 다양한 요리를 만들어낸다. 구워 먹고 끓여 먹는 것은 기본이고 날것은 회로 먹고, 전도 부쳐 먹고 죽도 끓여 먹는다. 소금에 절여 젓갈로도 담가 먹는다. 다양한 꽁치 요리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과메기와 함께 포항을 대표하는 꽁치 요리는 꽁치 다대기다. 뼈째 다져서 만든 꽁치 완자를 넣고 끓이는 음식이 바로 꽁치 다대기인데 꽁치국, 꽁치 당구국, 꽁치 다대기 추어탕, 꽁치 시락국 등의 다양한 이름과 형태로 진화해 왔다. 꽁치 완자 요리는 울릉도의 관문인 포항과 울릉도에서 함께 즐기는 향토 음식이다. 울릉도에서는 꽁치 완자에 섬엉겅퀴를 넣고 끓이는 꽁치 완자 엉겅퀴 된장국이 대표 요리다. 구룡포의 이름난 꽁치 시락국숫집 벽면에는 시락국수 먹는 법이 쓰여 있다.“꽁치 완자를 으깬다. 청양고추를 넣는다. 산초 가루를 넣는다.” 국수 먹는 법이 어디 정해져 있겠는가마는 낯선 음식 앞에서 주저하는 이들에게 일종의 가이드처럼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으깨지 않고 완자를 통으로 먹을 수도 있고, 매운 것 싫은 사람은 청양고추를 안 넣어도 되고, 산초 향이 싫은 사람은 산초 없이 먹어도 된다. 꽁치 완자를 넣은 시락국에 국수를 말면 시락국수가 되고 밥을 말면 시락국밥이 된다. 전국 각지에 가장 흔한 국밥 중 하나가 시락국이다. 통영에 가면 장어 뼈를 우린 국에 시래기를 넣고 끓인 시락국이 있고, 내륙의 시골 장터에는 돼지고기 육수에 시래기를 넣은 시락국이 있다. 그냥 된장만 푼 시래기 된장국도 우리가 즐겨 먹는 음식이 아니던가. 음식은 지역의 특성을 반영한다. 포항의 꽁치 완자 요리가 소중한 문화인 것은 꽁치의 살뿐만 아니라 칼슘이 풍부한 뼈까지 버리지 않고 다져서 완자로 만들어 먹었던 옛 포항 사람들의 지혜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포항에서도 꽁치 완자 시락국을 끓이는 방법은 집집마다 다르다. 그때그때 값싸고 흔한 생선을 넣고 육수를 내는 집도 있고, 멸치 육수만 쓰는 집도 있고, 달리 육수를 내지 않고 꽁치 완자와 야채만 넣고 끓여내는 집도 있다. 역시 요리에는 고정된 레시피가 없다. 다만 꽁치 완자를 넣는다는 점만 동일하다. 하지만 이 꽁치 완자를 만드는 법도 제각각이다. 꽁치 살과 뼈를 다져서 사용하는 것은 같은데 완자를 만들면서 여기에 밀가루를 섞는 집도 있고 밀가루를 전혀 쓰지 않고 꽁치만을 사용하는 집도 있다. 꽁치 완자 시락국은 꽁치를 도마에 놓고 칼로 다져서 만드니 꽁치 다대기, 꽁치 당구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하지만 요즈음 식당에서는 그런 재래식 방법으로 만드는 것이 힘드니 대부분 꽁치를 방앗간에서 갈아다 완자를 만들어 쓴다. 집에서 소량으로 만들 때만 전통 방식대로 직접 손으로 다진다. 밀가루를 섞은 꽁치 완자는 모양이 좋고 잘 부서지지 않아 씹는 맛이 있지만 국물이 텁텁하다는 단점도 있다.밀가루를 쓰지 않고 온전히 꽁치 원재료만으로 완자를 만들기는 쉽지 않다. 접착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밀가루 안 쓰는 완자 만들기를 고수하는 집에서는 완자를 미리 만들어두지 않고 수제비처럼 물이 끓을 때 꽁치 다대기를 숟가락으로 떼어서 넣는다. 꽁치 다대기는 끓는 물에 빠지는 순간 굳어지기 때문에 밀가루가 없어도 완자 모양을 유지할 수 있다. 담백한 국물 맛을 원한다면 이 방식의 꽁치 완자 요리를 만들면 된다. 꽁치 다대기는 전을 부쳐 먹기도 한다. 포항 음식은 꽁치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풍성한가. 모리국수, 생선탕에 국수를 넣어 먹는 데서 유래포항에는 꽁치 시락국수에 필적할 만한 특별한 전통 국수 요리가 또 하나 있다. 모리국수다. 모리국수는 생선탕에 국수를 넣어 먹던 데서 유래했다. 옛날에는 생선을 끓여서 뼈를 발라내고 살을 넣고 추어탕처럼 끓인 국물에 국수를 말아 먹었다. 일종의 어탕 국수였다. 지금은 멸치 육수를 쓰는 집이 많다. 오늘은 구룡포 일본인 가옥 거리의 대천식당에서 모리국수를 먹는다. 본래 구룡포 모리국수는 미역초라는 물고기를 주원료로 만들었다. 미역초의 학명은 무점등가시치다. 남해안에서는 고랑치라 부른다. 동해안에서는 헤엄칠 때 모양이 미역과 닮았다 해서 미역초, 길다고 해서 장치라고도 한다. 미역초는 4∼7월 사이가 맛있다. 그래서 모리국수도 이때가 제철이다. 미역초는 살이 단단해서 회로 먹으면 씹히는 살맛이 일품인데 척추 뼈가 굵고 억세 국물이 잘 우러난다. 모리국수에 미역초를 쓰는 것은 육수가 좋아서다. 미역초를 넣은 미역국도 구룡포 사람들이 즐겨 먹는 향토 음식이다. 국물이 텁텁한 맛이 없고 다른 어떤 생선보다 깔끔하다. 모리국수는 미역초가 흔하던 시절에는 미역초가 1순위였지만 지금은 귀한 물고기가 돼서 다른 물고기로 대체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생선이든 싱싱한 생선으로 끓여야 비린 맛이 없고, 시원하고 고소하다. 모리국수는 푹 끓여 뼈를 걸러내고 진국에 국수를 말아내는 민물고기 어탕 국수와는 차이가 있다. 즉석에서 매운탕 끓이듯 생선을 통째로 넣고 바로 끓인다. 먹을 때마다 즉석에서 바로바로 끓이니 손이 많이 간다.모리국수는 옛날 구룡포에서 집집마다 즐겨 끓여 먹던 음식이다. 본래 재료는 정해진 것이 없었다. 한 집에 보통 식구가 십여 명이나 되니 먹을 것이 귀했다. 미역초뿐 아니라 다양한 물고기와 고둥, 새우, 문어, 홍게 같은 해산물을 넣고 육수를 끓이다 국수를 넣으면 양이 많아져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쌀이 귀하던 시절 최고의 영양식이었다. 온갖 해산물에 미역 같은 해초뿐만 아니라 취나물, 고사리 같은 산나물을 넣고 끓이기도 했다. 때로는 신김치를 넣고 끓이기도 했다. 가족들이 다들 모여서 배불리 먹는다 해서 모리국수란 이름이 붙여졌다.모리국수에는 무가 들어가야 시원하다. 먼저 미역초를 깔고 무, 콩나물 등 야채를 넣고 끓이다 육수가 어느 정도 우러나면 국수를 넣어서 익힌 뒤 먹는다. 문어, 홍게, 고둥 같은 해물도 고명으로 들어가니 시원한 맛이 배가 된다. 국수는 생면을 쓰는데 생면을 흐르는 물에 한 번 씻은 뒤 끓는 육수에 넣는다. 그래야 국물이 텁텁하지 않고 개운한 맛을 낸다. 간은 새우젓으로 한다. 민물 어탕 국수의 눅진함과는 또 다른 담백하면서도 깊은 맛이 매력이다. 포항 와인의 부활을 꿈꾸며“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소년 시절에 참으로 좋아하던 시, 이육사의 ‘청포도’. 포항 청림동에는 청포도 문학 거리가 있고 다양한 포도나무가 가로수로 심어져 있다. 또 호미곶 새천년광장에는 청포도 시비도 있다. 그런데 어째서 안동 태생인 이육사의 시비가 포항에 있는 걸까? 이육사는 1936년 7월 당대의 유명한 한학자였던 사촌형과 이종형이 살고 있는 포항에 휴양차 와 있었다. 동해면 송도원에 머물면서 동양 최대의 포도 농장인 미쓰와(三輪) 포도원을 둘러봤고 영일만을 바라보며 시상을 떠올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청포도’를 완성한 뒤 국내에서 발표했다. 육사의 시 ‘청포도’가 탄생한 곳이 포항인 것이다. 지금은 짐작하기도 힘들지만 한 시절 포항은 와인의 주산지였다.일제강점기, 포항시 동해면과 오천면 일대에는 미쓰와(三輪) 포도원이 있었다. 이 농장에서 생산된 포도를 원료로 만들었던 삼륜 포도주는 명포도주로 알려져 애주가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미쓰와 젠베에가 1918년 2월 국유지 약 16만 5천㎡를 헐값에 불하받아 미쓰와 포도원을 열었다. 1934년에는 포도원의 면적이 약 198만 3천400㎡에 이르렀고 연인원 3만 2천여 명의 조선인들이 동원돼 포도 농사를 지었다. 미쓰와 포도원은 100여 종의 서양 포도를 시험 재배해 20여 종을 심었다. 1935년 기준 연간 생포도주 1천석, 브랜디 100석, 감미 포도주 500석 이상을 생산했다. 와인 종류도 다양했고 증류주인 브랜디까지 만들어냈다. 레드, 화이트, 감미 화이트, 감미 레드 와인과 브랜디, 포켓 브랜디 등이 생산됐다.해방 후에도 이 농장에서는 ‘삼륜포도주공사’라는 이름으로 포도주가 생산됐다. 이 농장의 포도주는 1960년대까지 ‘포항 포도주’로 시중에 판매됐지만 1966년 방부제 과다 사용이 문제가 돼 폐업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병대교육훈련단과 포항비행장이 자리한 곳이 바로 미쓰와 포도농장 자리다. 1970년대에는 두산 포도원이 청하와 흥해 지역에 들어서면서 영일만 청포도가 부활했다. 총 98㏊의 땅에서 연간 700∼800t의 포도를 생산했다. 이 지역은 강수량이 적고 연간 최저 온도가 높아 포도 재배에 적지였다. 이 농장에서는 양조용 청포도 리스링과 사이벨, 먹포도 엠비에이 등 3종이 재배됐으며, 이 포도를 원료로 20년간 마주앙 와인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포도주 개방으로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1996년부터 생산이 중단됐다. 이래저래 포항은 와인과 인연이 깊은 땅이다. 다시 이 지역에 포도원을 되살리고 와인을 만든다면 포항의 새로운 산업으로 되살아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와이너리 투어와 해양 관광, 해양 레포츠의 만남. 아주 매력적인 포항의 미래 관광자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글·사진 / 강제윤 시인·(사)섬연구소 소장

2021-06-02

천년왕국의 내밀한 서사를 간직하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도 이 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경주는 아름답고 비밀스러우며 놀라운 고대 천년왕국 신라의 숨결을 간직한 도시다.”단순히 시내를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역사책에서 얻는 이상의 지식과 감흥을 얻어낼 수 있는 공간이 바로 경주다.우리 땅 어디에 이만한 역사 학습의 공간이 또 있을까? 10번을 다시 찾아도 서라벌이 안팎으로 간직한 천년왕국의 내밀함을 모두 헤아리기는 힘들다.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젊은이들의 활력으로 넘치는 황리단길을 지나 거대하게 솟은 대릉원의 고분을 바라보며 걷다보면 어느덧 첨성대가 보이고, 이내 ‘동궁(東宮)과 월지(月池)’에 이르게 된다.낮에는 조용한 연못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길 수 있고, 화려한 조명이 불을 밝히는 밤이면 갓 연애를 시작한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각광받는 경주의 손꼽히는 명소. 신라 역사에 관심을 가진 아이들에게는 현장 학습의 기회를 제공하고, 가족들끼리의 피크닉도 즐길 수 있는 곳. 동궁과 월지는 매력적인 경주의 보물 중 하나다.이곳엔 많은 이야기와 사연들이 숨겨져 있다. 아무리 큰 상상력의 날개를 펴도 가닿기 힘든 아득한 옛날인 1천300여 년 전 만들어져 21세기에 이른 지금까지 제 안에 간직한 비밀을 다 드러내지 않고 있는 동궁과 월지.본지는 2021년 특집기사로 ‘아름다운 신라 화원 동궁과 월지’를 기획해 연재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지난 역사를 통해 현재를 인식하고 미래를 준비한다’는 의도에서 마련된 것이다. 독자들의 관심과 애정 어린 질책을 기대한다. 월지는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경주시 인왕동에 위치한 월지는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8호로 지정됐다. 보기에 따라서는 곳곳에 산재한 다른 연못과 별 다를 바 없이 느껴질 수도 있지만, 월지는 그 안에 신라 천년의 역사를 담고 있는 아주 특별한 연못이다.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간행한 책 ‘신라의 유적과 유물’은 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월지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군신이 모여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임해전의 위치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주조에 ‘안압지는 천주사 북에 있다. 문무왕이 궁내에 연못을 파고 돌을 쌓아 무산 12봉을 상징하고 화초를 심고 진귀한 새를 길렀다’고 기록돼 있다.”안압지는 2011년 월지로 불리기 이전의 연못 명칭이다. 연못 서쪽에는 임해전터가 있다.앞서 언급된 고문헌 ‘삼국사기’의 기록을 다시 한 번 읽어보자. 여기서 월지와 동궁의 건립 당시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을 터.“문무왕 14년(674년)에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宮內穿池造山 種花草 養珍禽奇獸) 또한, 같은 왕 19년에는 궁궐을 화려하게 중수하고 동궁을 지었다(重修宮闕 頗極壯麗 創造東宮).”기자는 취재로 서너 번, 경주 여행을 하며 다시 두어 번 동궁과 월지를 방문했다. 20세기에 태어나 살고 있는 사람들은 7세기 지금의 경주 땅 신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어떤 사람들이 웃고 울며 살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그러나, 미루어 짐작은 가능하다. 역사 공부는 그래서 필요한 게 아닐까. 신라의 국력이 나날이 커져가던 문무왕 통치 시기. 권력자들은 대내외에 힘을 드러낼 수 있는 매력적인 공간을 만들고자 했을 것이다.아시아의 태국과 캄보디아가 거대한 석조 건축물을 축조해 왕의 권위를 높였고, 더 멀리는 로마와 그리스가 미려하고 웅장한 건물을 만들어 자신들의 능력을 드러냈듯이.신라의 태자가 머문 것으로 추정되는 월지와 동궁은 축조 후에도 여러 차례 개축과 중수를 거쳤다.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삼국사기’를 인용해 아래와 같이 동궁과 월지의 변모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679년에 궁궐을 매우 화려하게 고쳤다고 하였고, 804년(애장왕 5년), 847년(문성왕 9년), 867년(경문왕 7년)에는 임해전을 중수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697년(효소왕 6년) 9월과 769년(혜공왕 5년) 3월, 860년(헌안왕 4년) 9월, 881년(헌강왕 7년) 3월에는 군신들이 연회를 가졌다고 하였으며, 931년에는 신라의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을 초청하여 주연(酒宴)을 베풀고 위급한 정세를 호소하기도 하였다.”이처럼 여러 왕에 의해 보수가 명해진 월지와 동궁은 통일신라 시기의 중요한 역사와 함께 한 빼놓을 수 없는 유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임해전(臨海殿)에 대한 궁금증월지의 서쪽에는 임해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임해전터로 보이는 곳에는 아직도 밭이랑 사이에 초석과 섬돌이 남아 있다고 한다.“동궁과 월지는 임해전이 속한 통일신라의 동궁지로 알려진 곳”이란 게 앞서 언급한 책에 실린 내용.임해전에 관해서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 ‘삼국사기’ 효소왕 6년(697)조다. 여기 실린 바에 따르면 임해전은 왕이 군신(群臣)에게 연회를 베풀던 장소였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안압지(월지) 서쪽에 임해전이 있는데 언제 창건되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짤막하게 기록돼 있다고 한다.이러한 옛날 기록을 볼 때 임해전은 안압지와 유사한 시기(674년 전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앞에서 말한 대로 7세기 후반은 신라가 여러 차례의 전쟁을 통해 힘을 과시하며 삼국통일을 이룬 시기다.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이어지던 전투에서는 주목받는 전략가와 장수, 용기를 보인 병졸이 있기 마련. 이런 사람들을 치하하기 위한 연회가 자주 열릴 수밖에 없었을 터다.동궁과 월지를 돌아보다가 임해전터에 서있으면 당시 신라 왕과 공을 세운 신하들이 술잔을 앞에 놓고 터뜨리는 호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이런 상상을 뒷받침하듯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포함한 여러 고문헌에는 임해전에 관련한 서술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이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안압지를 끼고 있는 임해전은 나라에 경사스런 일이 있을 때나 귀한 손님들이 왔을 때 군신들의 연회와 귀빈 접대 장소로 이용되었다. 769년(혜공왕 5년) 3월 이곳에서 왕이 베푼 연회가 있었고, 860년(헌안왕 4년) 3월에는 경문왕이 화랑으로 활동할 때 헌안왕이 이곳에서 베푼 잔치에 참석했다가 사위로 택해지기도 했다. 또, 881년(헌강왕 7년) 3월에는 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향연을 베풀고서 흥에 겨워 직접 거문고를 탔고, 신하들은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놀았다고 한다.”임해전은 백제 의자왕 때 세워진 망해정(望海亭)에서 착상을 얻어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맥락과 성격은 임해전 앞에 있던 안압지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는 게 학계의 견해.안압지에는 무산(巫山) 12봉을 본떠서 돌을 쌓아 산을 만들었다.현대에 와서 진행된 발굴 결과 안압지에서는 세 섬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곧 삼신산(三神山)을 상징한다는 게 통설이다.이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삼신산은 신선이 살고 있다고 전하는 중국 바다의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州山)의 3산으로, 안압지가 단순한 못이 아니라 바다로 상징되었다는 증거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동궁을 둘러싼 논란은 아직도 현재진행형동궁은 말 그대로 신라의 왕자가 머물며 공부하던 궁이다. 최고 권력자로부터 후계자로 지목된 인물이 기거했으니, 그 규모와 화려함이 대단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동궁은 태자의 권위를 드러내는 생활공간인 동시에 빼어난 학자들로부터 왕이 되기 위한 수업을 받는 학습공간이기도 했을 것이다.동궁의 역할에 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분분하다. 사학자 김병곤은 논문 ‘신라 동궁의 역할과 영역-임해전 및 안압지와의 상관성을 중심으로’를 통해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동궁과 월지에서 동궁은 문무왕 19년(679년)에 만든 곳으로 태자의 권위를 드러내며 독자적인 주거 공간의 제공과 군왕에 어울리는 자질 향상을 위해 각종 교육을 실시하는 장소였을 것으로 보며, 이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큰 이견이 없다. 하지만 연회를 베풀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월지 및 그 인근의 전각과 태자의 교육기관인 동궁이 하나로 묶여있는 점은 동궁 및 그에 속하는 관청의 위치 문제, 월지궁 혹은 임해전과의 구분, 사적 명칭 문제 등 현재까지도 많은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월지와 동궁, 임해전은 각각 그 안에 천년의 시간 속에 축적된 내밀한 스토리를 품고 있다. 또한 관련된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의 갖가지 사연을 지켜봤을 게 분명하다.앞으로의 연재를 통해 흥미로운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심정으로 동궁과 월지에 얽힌 모든 것을 독자들과 함께 차근차근 알아가고자 한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6-02

포항 여남 카페촌, 가보셨나요?

전염성 강한 코로나19가 되레 인간의 사회적 욕구를 키웠다. 일상생활에 여러 제약이 생기면서 그동안 오프라인에서 이뤄진 활동들은 온라인으로 무대를 옮겨야만 했다. 반복된 거리두기 연장조치에 인내심이 바닥난 이들은 새로운 공간을 찾아 떠나는 분위기다. 온택트 시대에 온라인으로 대체 불가능한 욕망은 코로나 걱정 없이 머물 수 있는 장소에서 비로소 해소된다.포항시 북구 여남동이 ‘코로나 시대 힐링 동네’로 각광받고 있다. 해안도시 포항의 장점을 최신 라이프 스타일과 접목한 카페들이 인기를 주도한다. 카페 옥상에서 탁 트인 바다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들이 SNS를 통해 퍼지면서 이목을 끌었다. 사진 한 장을 건지기 위해 수고를 마다치 않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여남 카페는 ‘포항에서 반드시 가봐야 할 풍경맛집’으로 통한다.□인생샷 촬영 핫플레이스로 부상소문을 따라 지난달 27일 요즘 ‘핫(hot)’하다는 여남동을 찾았다. 포항 영일대 해수욕장에서 환호동 방향으로 가다 보면 왼쪽 한 편 언덕배기에 크고 작은 단독 건물들이 옹기종이 모여 있다. 언뜻 보기에 펜션같기도 한데, 크기와 모양만 다를 뿐 전부 바다를 정면으로 마주한 모습이다. 간판을 찾기도, 읽기도 어렵지만 현대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이곳 건축물은 음료와 디저트를 파는 매장이다. 카페 미하스, 그랑블루, 에스루프탑 등 10여 곳이 최근 5∼6년새 여남에 자리 잡으면서 온 동네가 커피 향으로 물들었다.여러 카페 중에서도 ‘티베이’에 유독 사람이 많은 편이다. 네이버 포털사이트에 등록된 방문자 리뷰만 600여 개. 주변 카페 중 가장 많다.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데다 꼭대기층에서 내려다봤을 때 바다 전경을 가리는 구조물이 없어 ‘오션뷰 맛집’이란 칭찬 일색이다.주말엔 유명 맛집만큼이나 줄을 서 기다릴 각오를 해야 한다. 매번 사람이 많아 수차례 걸음을 돌렸다는 하소연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종종 올라올 정도. 전용 주차장이 있지만, 휴일엔 대부분 종일 만차다. 거기다 날씨까지 맑다면? 그날 운은 타이밍에 맡기길. 포항 시민들 사이에서도 핫플레이스로 알려진 곳이라, 알 만한 사람들은 가급적 붐비는 때를 피해 방문한다.이날 오전 티베이에서 만난 직장인 정호연(33·포항시 북구)씨는 “평일 오픈 시간보다 10여 분 정도 일찍 도착하면 사람이 적어 코로나 걱정 없이 차 한 잔 마시는 여유를 느낄 수 있다”며 카페 단골임을 입증했다. 그는 “서울 사는 부모님이나 친구들이 포항에 오면 어김없이 티베이에 들르는데 다들 여기만 한 힐링 장소가 없다고 입을 모은다”고 했다.‘그동안 가 본 카페 중에 최고’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꼽는 티베이의 가장 큰 매력은 4층 루프탑에서 드러난다. 지붕 없는 건물의 꼭대기층에 오르면 코끝으로 바다 내음이 스친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사라진 한 폭의 그림같은 경관에 절로 카메라에 손이 간다. 옥상 한쪽 면에 바다 방향으로 세워진 난간이 포토존이다. 방명록을 남기듯 세상에 한 장뿐인 인생샷을 건지려는 사람들이 꼬리를 물고 줄을 선다.루프탑 야외테이블에서 만난 20대 여성 4명은 인천에서 왔다고 했다. SNS에서 다른 사람들이 티베이에서 찍어 올린 사진을 보고 ‘인천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바다 전망’에 반해 포항길을 택했다고. 고교 동창 사이인 이들은 직장인 2명이 연차를 내고, 휴학생과 공무원 시험준비 중인 친구까지 일정을 맞춰 전날 저녁에 도착해 영일대 해수욕장 근처 숙소에서 하루를 묵었다.평소 카페투어가 취미인 김수영(26·여)씨는 “철이 없었죠, 커피 한 잔 마시겠다고 포항까지 왔다는 게”라며 한창 인기몰이 중인 카페사장 최준의 유행어 ‘철이 없었죠’를 인용해 자신을 소개했다. 이어 “2년 전부터 재미로 이색 카페를 찾아다니며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팔로워 수가 5만명이 넘는다”며 “요즘은 어딜 가나 커피집이 즐비해 있어 특색이 있어야만 시간을 들여서라도 가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고 말했다.사진 몇 장 찍겠다고 대체 이 먼 곳까지 오는 이유가 뭘까. 그는 “코로나 시대를 살면서 사진으로 기록하는 것이 얼마나 값진 일인지 새삼 느끼게 됐다”며 “자유롭게 여행할 수 없는 아쉬움을 과거 여행 사진을 찾아보며 달래고 있다. 보고 있으면 당시 느꼈던 감정이 떠올라 나에게도 이런 멋진 순간이 있었음에 위안을 얻는다”고 답했다. □머물고 싶은 동네가 뜬다티베이 바로 옆 ‘그랑블루’는 입구에 노스터디존(No Study Zone) 팻말을 내걸고 있다. 카페에서 공부나 작업을 하며 오래 앉아 있는 손님이 많아지자 지난해 6월부터 ‘장시간 공부 금지’ 방침을 내놨다. ‘장시간’이 얼마만큼인지에 대해 카페 관계자는 “노트북을 갖고 온 손님을 관심 있게 본다”고 했다. “빈자리가 나지 않아 헛걸음하는 고객을 최대한 줄이려는 조치”라고도 덧붙였다. 손님들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오래 머무는 데는 이유가 있을 터. 세련미가 돋보이는 모던한 인테리어와 온화한 색감의 조명이 자아내는 아늑함이 그랑블루의 매력이다. 이곳 특유의 운치는 비 오는 날 창밖으로 바다 경치를 감상할 때 배가 된다.언덕 고지에 터를 잡은 카페 ‘미하스’는 야외 테라스에서 빼어난 바다 전경을 만끽하는데 제격이다. 특히 밤바다 위에 불을 밝힌 포스코와 영일대 해수욕장이 어우러진 야경은 “포항 야경이 장관”이라는 소문이 퍼지는 데 제대로 한몫했다.지난 2015년 카페촌에 입성한 미하스는 코로나 이후 집꾸미기에 관심이 높아진 20∼30대로부터 재조명되고 있다. 카페 주인의 감각이 엿보이는 건물 내부는 ‘따라하고 싶은 인테리어 표본’으로 불린다. 미술 갤러리에서 볼 법한 풍경사진과 그림이 벽 곳곳에 걸려 있고, 실내 장식품과 인테리어 소품은 유럽풍 감성을 풍긴다. 방문자들 사이에 “화장실마저 감각적”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미하스는 매장에서 생두를 직접 볶아 원두로 만들어 핸드드립을 즐기는 손님들을 단골로 만들었다.캠핑동호회 회원들과 지난 주말 이곳을 찾은 최선호(43·충북 청주)씨는 “얼마 전 강릉 카페거리도 가봤지만, 포항은 동해를 품은 해양도시의 매력이 여느 곳과는 다른 특별함이 있다”며 “미하스처럼 멋스러운 카페에서는 커피의 향과 맛도 특별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카페동네’‘카페촌’으로 유명세를 탄 여남동은 포항의 가장 큰 매력이자 장점인 바다 자원을 활용해 관광명소로 급부상했다. 코로나19 장기화에 국내여행 수요가 증가하면서 여남 카페는 다른 관광지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인파가 몰리지 않으면서도 방문할 가치가 있는 장소로 주목받고 있다. 모종린 연세대 교수는 저서 ‘머물고 싶은 도시가 뜬다’를 통해 “지역만의 특색 있는 로컬 자원과 라이프 스타일을 접목한 콘텐츠가 만들어졌을 때 사람과 돈이 모인다”고 했다.인근에서 작은 슈퍼마켓을 운영 중인 한 주민은 “인적이 드문 한적한 동네에 3∼4층 높이의 건물이 하나씩 들어서자 오고 가는 사람마다 대체 뭐 하는 곳인지 궁금해하고, 심지어 성(城)인지 성당인지 물어보기도 한다”며 “보통 영일대 해수욕장으로 사람이 몰리지만 요즘엔 카페로 향하는 골목 입구를 물어보는 외지 손님이 늘어 여기저기 길을 알려주기 바쁘다. 주말엔 특히 젊은 사람들이 많이 와 동네 전체가 들썩인다”고 했다. 발길이 머무는 동네는 이렇게 생명력을 띤다./김민정기자 mjkim@kbmaeil.com

2021-06-01

몸의 요구를 알아채는 일

김민정 원장이 상자의 리본을 풀었다. 상자 속에 국화꽃 모양의 들깨타르트와 흑임자 다식이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궁중 잔치 기록서에 의하면 다식에는 황률다식, 송화다식, 흑임자다식, 녹말다식, 강분다식, 계강다식, 청태다식, 신감초말다식 외에 오곡다식과 산약다식 등, 여러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차에 곁들여 먹는 음식’이라는 뜻의 다식은 오색의 전통문양을 다식판으로 찍어내기도 하고, 김 원장처럼 손으로 정성껏 매만져 모양을 만들기도 한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에 차를 마시며 국화꽃 모양의 흑임자다식을 먼저 맛보았다. 검정깨의 고소함에 어우러지는 조청 맛이 은근한 미감으로 다식의 풍미를 더했다. “발효음식에 눈을 뜬 계기가 있나요?”“2010년도에 교통사고로 크게 다쳤어요. 면역성에 도움이 될까 하고 약용식물을 연구하다 발효음식을 만났어요.”인진쑥과 아카시아 꽃, 솔잎 오디, 산야초를 채집해서 발효시켜 먹으며 건강을 회복했다. 발효요리를 시작한 초기에는 누구나 다 아는 대로 설탕물과 산야초를 1 : 1 비율로 담그다 차츰 설탕을 줄이고 올리고당과 꿀 조청을 넣는다거나 배를 섞어서 버무리거나, 재료를 달리하며 전통방식의 발효를 변화해 나갔다. 첨가물을 넣을 때도 산야초 성분 속에 있는 좋은 성분을 빼내도록 프락토 올리고당과 같이 좋은 재료를 사용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발효의 세계를 확장시켜 나갔다. 정답은 아니지만 수십 년의 실전으로 경험을 쌓아가며 개발하고 찾아낸 연구 결과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며 삶에 이익이 되도록 널리 알리는데 힘썼고, 단맛을 줄이는 일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요리연구를 하던 중에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은?”“어릴 적 어머니와 함께 한 기억이었어요.”어머니가 제사음식을 한다거나 다른 요리를 할 때마다 딸을 곁에 앉혀두고 제사음식과 묵나물 같은 여러 가지 산나물 다듬는 법을 가르쳤다. 어머니는 어린 딸에게서 요리로 제 몫을 할 싹수를 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고향이 청송이고 송소고택 있는 덕천마을이다. 어릴 때 아버지가 많이 아팠다. 시골에 살아도 농토가 없어서 어머니가 멀리까지 행상을 하러 다니셨다. 어린 그녀가 어머니의 빈자리를 맡아서 집안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토속음식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그녀는 어릴 때부터 문학소녀에 대한 꿈을 갖고 있었다. 문예대회에서 상도 받았지만 몸이 아픈 아버지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꿈을 접었다. 86년도에 문화센터에서 요리강의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음식 일을 한 이후로 37년이 흘렀다. 출장요리부터 집들이 요리 등, 불러주는 대로 가서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그만큼의 세월이 흘렀다며 소탈하게 웃는다. 그녀의 웃음이 갓 다듬은 산나물처럼 건강하다.“발효요리와 함께 식용곤충요리를 하신다고 들었어요.”“흰점박이꽃무지, 장수풍뎅이애벌레, 메뚜기, 백강잠, 번데기, 귀뚜라미, 밀웜 등 7가지를 정식으로 식용곤충요리로 허가받았어요.”김 원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식용곤충요리연구협회를 창립했다.  잘 키운 농가의 식용곤충을 선택해서 단백질이 풍부한 곤충요리를 연구한다. 코로나가 오기 전까지 대경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곤충요리 수업을 했다. 맨 처음 식용곤충요리를 알리기 위해 시식회를 한 적이 있다며 그때의 얘기를 들려준다. 식용곤충요리에 대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대구광역시 농업기술센터를 찾아갔다. 식용곤충요리 전시회와 시식회를 겸하도록 장소 제공을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흔쾌히 자리를 내주더라고 했다. 그다지 큰 기대를 갖지 않고 시작한 행사가 음식이 모자랄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을 때 모두 놀랐다. 처음의 성공을 시작으로 2회 전시회를 겸한 시식회가 성공하자, 대구광역시의 도시농업박람회에서 요리대회를 해달라는 제의를 했다. 그렇게 요리라이브로 열 배 이상의 효과를 거두며 매스컴의 관심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성공을 예상했어요?”“메뚜기 잡으러 다니던 생각을 하며 벌인 일이었어요.”그렇게 큰 성공을 거둘 줄 몰랐다고 한다. 굼벵이, 메뚜기, 밀웜 모두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이 식용으로 먹어오던 것이었다. 전혀 새로운 것도 아니고, 없는 것을 만들어낸 것도 아닌데 많은 사람들이 호응해주어서 너무 기뻤다며 김 원장이 함빡 웃음을 지었다. 솔직한 담론과 매순간 망설임 없이 뛰어드는 적극적인 용기까지 속속들이 건강한 에너지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그녀는 요리에 관한 것이면 저절로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에너지가 샘솟는 다고 한다. 어처구니없도록 일을 못했는데도 용감하게 뛰어다닌 걸 보면 의욕이 왕성했던 걸 알겠더란다. 돼지고기와 미삼을 활용한 음식과 애피타이저로 요리왕 선발대회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상을 받았다며, 미삼으로 샐러드를 만들고 양파 링 속에 미삼을 넣어 수삼샐러드를 만들었다고 한다.“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하나만 들려주세요.”“무모할 정도로 용감했던 얘기 하나 할게요.”2007년도에 중국 광저우의 ‘삼청각’이라는 한식당을 호텔 이층에 오픈하는데 와서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아직 요리를 한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운데도 망설이지 않고 달려간 용기가 오늘의 그녀를 만들었다. 호텔 한식당에서 넉 달 동안 일을 했던 그 시간이 김 원장에게는 한식에 대해 적극적으로 연구 실습하는 계기가 되었다. 직원들과 의사가 통하지 않아서 밤마다 그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쳤다. 중국인 직원들을 앉혀놓고 자신은 바빠서 중국말을 배울 시간이 없으니 너희들이 우리말을 배우라고 했다. 광저우 호텔에서 일을 하는 동안 자신이 더 많이 배웠다며 그녀는 낯선 곳으로 겁 없이 달려간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한다. 우리나라 밥상에서 기본적인 반찬이 되는 음식들이 중국에서는 반찬 하나하나가 모두 메뉴구성이 되고 돈으로 환산되는 것이 한국과 다르더라고 꼬집었다. 언제 어느 때고 푸짐하게 내놓는 우리네 밥상의 정겨움이 돈의 가치로 바뀌는 영업방식이 낯설었나 보다.“코로나로 인한 변화를 꼽는다면?”“마냥 손 놓고 기다릴 수가 없어서 발효식품의 메뉴개발을 시작했어요.”역시 적극적이다. 잠시도 두 손 놓지 못하고 움직이는 것이 그녀의 에너지를 확인시킨다. 강의와 모임이 중단된 한가한 틈을 이용해서 고추장이나 된장, 간장을 재래의 방식에서 벗어나 즉석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현대적 방식을 연구했다고 한다. 제대로 된 자연발효간장을 맛있게 먹으려면 3년이 걸린다. 발효는 기다림이다. 기다림 속에서 사람도 성숙해 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 연유로 김 원장은 코로나로 여유로워진 시간을 이용해서 버려야 할 것과 권장해야 할 것을 찾아내고 세세하게 기록해서 치유음식으로 발전시키는 연구를 한다. 그 시작이 빙초산 대신에 레몬을 넣어서 초장을 만드는 건강한 음식 개발이다.그녀는 또 신체 각 기관별 치유 음식으로 다섯 가지 맛과 색으로 음양오행과 오장육부에 도움 되는 음식도 연구 중이다. 간은 녹색에 신맛이고, 심장은 붉은색에 쓴맛이고, 비장은 노란색에 단맛이고, 폐장은 흰색에 매운맛, 신장은 검은색에 짠맛이 도움을 준다. 폐가 좋아하는 흰색 음식으로 무와 양파, 율무, 배가 있고, 심장에 좋은 적색 음식으로 쑥, 익모초, 도라지, 커피, 작설차처럼 쓴맛을 내며, 위와 췌장 같은 소화기에 좋은 황색 음식으로 인삼, 고구마, 호박 등의 참외가 있고, 신장과 방광, 관절 에 좋은 흑색 음식으로 검은콩, 다시마, 멸치 등의 해조류가 있다. 그 밖에 동물의 간과 쓸개에 좋은 녹색 음식으로 메밀, 팥, 견과류가 간의 활성화를 돕는다.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단맛 짠맛 신맛 쓴맛 매운맛을 골고루 적절하게 섭취하는 것이 건강한 식생활의 기본이다. 음식에는 정확한 답이 없고, 자기 방식이 옳다고 함부로 주장할 일도 아니다. 현명하게 몸의 요구를 알아채는 게 중요한 것일 뿐. 김 원장은 자신이 연구한 것을 누군가 공유한다면, 그것은 그분과 자신의 방식이 맞아서 그런 거라며 알고 보면 몸의 요구는 그렇게 쉬운 거라고 한다. 정보를 나누어 가지며 몸의 요구를 알아채는 것.김 원장은 향토음식 식문화대전 요리대회 통일부 장관상, 재능나눔 공헌대상, 대한민국문화교육대상 등의 포상 경력에 더하여, 대한민국 요리명인으로서 발효요리와 식용곤충요리연구로 사회에 재능기부도 하고, 국민건강에 이바지하며 나누는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1-06-01

들큰새콤한 동해안 사람들의 소울 푸드

삭은 혀끝이 거머쥘 감칠맛 어디 있겠냐고/어머니, 할머니, 할머니의 그 할머니/구황하려 매운 손끝으로 버무려 온 물가재미식해/한 젓가락 듬뿍 퍼 올리고 싶다/흔하디흔한 물가재미 큼직큼직 채 썰어/무며 조밥, 마늘, 고춧가루에 비벼 간 맞춘 뒤/오지에 담아 아랫목에 두면 며칠 새/들큰새콤 퀴퀴하게 삭아 있던 밥식해,/왜 오묘함은 가슴과 사귀는 좁쌀 별인지/밤새워 푸득거리는 눈발 한 채여도 안 서럽던!- 김명인, 「물가재미식해」 전문술을 마시지 않아도 취하게 하고, 앉아서도 여행을 떠나게 만드는 공간이 있다. 나에게는 통영의 동피랑이 그런 곳이다. 10년 넘게 살고 있지만 동피랑은 날마다 설레고 날마다 여행을 떠나게 만든다. 그런데 이번 포항 여행에서 그런 공간을 또 하나 발견했다. 포항 여행자들은 바다를 보기 위해 구룡포나 호미곶을 찾지만 솔직히 나는 포항 시내 죽도시장 부근 동빈내항 풍경이 더 매력적이었다.죽도시장이 가까이 있기도 하지만 동빈내항이 내려다보이는 숙소에서는 주야간 풍경 모두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인공과 자연의 조화로움이 더없이 편안하고 좋았다. 어선이 들고 나는 밤의 항구는 여행자의 노스탤지어를 한껏 자극했고 조명이 들어온 포스코의 풍경은 어느 먼 나라에 와 있는 듯한 흥취를 자아냈다. 그야말로 여권 없는 해외여행이었다.등잔 밑이 어둡다니 아마도 포항 사람들은 동빈내항의 그토록 아름다운 밤 풍경을 접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 풍경이 바라다 보이는 숙소에서 묵을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꼭 멀리 가야 여행이 아니다. 문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여행은 시작된다. 집 떠나면 다 여행이다. 포항 여행자들만이 아니다. 포항 사는 사람들도 동빈내항이 바라다 보이는 숙소로 가끔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동네 여행자. 내가 사는 동네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함경도부터 경주까지 동해안 사람들이 즐겨 먹어포항에서 여러 날 머물다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동빈내항과 죽도시장의 풍경이 사무치게 그립다. 아무래도 포항과 사랑에 빠진 듯하다. 언제 또 동빈내항 부근에 방 하나 잡아 놓고 한 열흘쯤 아무 일도 안 하면서 죽도시장으로 출근해 맛난 시장 음식을 안주로 주야장천 술만 마시다 와도 좋을 것 같다. 개복치며 두치며 꽃새우회며 청어회며 말똥성게며 꽁치 다대기며 횟대기 밥식해며 무엇보다 밥식해의 그 쿰쿰하고 아련한 맛이 입맛을 다시게 만든다.죽도시장은 맛의 천국이다. 포스코가 포항의 척추라면 죽도시장은 포항의 심장이 아닐까. 죽도시장은 어시장, 농산물시장, 죽도시장 등 세 개의 시장이 동심원을 그리며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1만8천760㎡ 면적에 25개 구역, 2천500여 개 점포가 들어서 있는 동해안 최대의 전통 시장이다. 시장 어딜 가나 유혹하는 맛들이 널려 있으니 죽도시장은 미각의 제국이다.동해안 사람들의 소울 푸드인 밥식해. 울진 태생의 김명인 시인에게도 식해는 영혼을 따뜻하게 배불리는 음식이었다. 밥과 생선을 넣고 발효시켜 먹는 요리인 식해는 가장 토속적인 동해안 음식이다. 식해는 함경도 북청부터 강원도 속초, 경북 울진, 포항, 경주 감포까지 동해안 사람들이 두루 즐긴다. 밥을 넣고 발효시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라 밥식해라고도 부른다. 함경도나 강원도에서는 조밥을, 경상도에서는 쌀밥을 주로 넣어 발효시킨다. 포항에서는 쌀밥을 넣어 만든다. 포항의 밥식해는 대체로 흰살 생선인 가자미, 횟대, 오징어 등을 넣어 만들지만 전갱이나 꽁치 같은 등 푸른 생선으로 만들기도 한다. 백고동으로 만든 식해도 있다. 밥식해는 젓갈처럼 장기간 발효시켜 먹는 음식이 아니다. 그래서 젓갈 해(醢)자를 쓰지만 실제로는 그리 짜지 않다. 간성현감을 지냈던 택당 이식이 쓴 ‘간성지(杆城志)’에는 연어, 황어, 은구어(은어), 전복, 홍합식해도 등장한다. 요즘은 바다에만 서식하는 어류를 주로 쓰지만 과거에는 강과 바다를 오가는 어류가 풍부해 식해의 재료가 됐던 것이다. 이 식해들은 왕실로 진상되기도 했다. ‘간성지’에 따르면 동해안에서 젓갈은 주로 생선알로 담았고 생선살은 주로 식해를 담아 먹었다. 식해 담는 법은 동해안 어느 지역이나 엇비슷하다. 먼저 막 잡은 생선의 내장을 제거하고 물기를 쪽 뺀 뒤 잘게 썰어 소금으로 간을 하고 엿기름을 넣어 하루쯤 1차 발효시킨다. 여기에 쌀을 쪄서 고두밥을 만든 뒤 식힌다. 무는 채 썰어서 소금에 절인다. 절인 무채의 물기를 짜낸 다음 고춧가루, 마늘 등의 양념을 만들어 가자미에 넣고 버무린다. 양념된 가자미와 고두밥을 섞어서 비빈다. 그런 다음 따뜻한 방에서 2∼3일 발효시키면 먹을 수 있다. 포항의 원조 밥식해는 횟대기 밥식해17세기 초 이 땅에 고추가 처음 들어오기 전까지는 고춧가루를 넣지 않은 밥식해를 만들었다. 제사 음식에 고춧가루를 쓰지 않는 이유는 귀신이 붉은색을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우리 조상들은 귀신이 붉은색을 싫어하다는 속설을 믿었으니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실상 과거에는 어떤 음식에도 고춧가루가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고춧가루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제사를 모셨고, 제사 음식에는 당연히 고춧가루가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니 제사 음식에 고춧가루를 쓰지 않는 것은 귀신 때문이라기보다 그 오랜 전통을 따른 것이라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포항 지역 제사상에도 여전히 흰 밥식해가 올라간다. 식해는 여름에 담글 때는 무를 넣지 않는다. 그래야 물이 생기지 않는다. 빨리 삭히려면 엿기름을 넣지만 천천히 삭혀 먹으려면 엿기름을 넣지 않는다.포항의 원조 밥식해는 횟대기 밥식해다. 횟대기의 학명은 대구횟대다. 포항에서는 홋대기라고도 부른다. 횟대기는 성대(달갱이)처럼 날개 같은 옆지느러미가 달려 있다. 횟대기는 대구횟대, 가시횟대, 빨간횟대(홍치) 등이 있는데 최고로 치는 것은 대구횟대다. 횟대기는 생선살이 유난히 찰지고 쫄깃한 식감이 좋지만 요즘은 값이 비싸 쉽게 접하기 어렵다. 그래서 죽도시장에서도 근래는 가자미식해가 더 많이 만들어진다. 과거에는 애경사에도 빠지지 않는 음식이었다. 지금도 추석이나 설 명절에는 집집마다 밥식해를 만든다.‘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향토 음식 편’(1984)에는 가자미식해를 동해안 향토 음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가자미식해는 얼큰하게 매우면서도 달착지근하고 산뜻한 맛이 일품인데, 12월부터 3월 초에 나는 가자미로 담아야 맛이 좋고, 꼬리 쪽에 가느다란 노란 줄이 있는 참가자미로 담그면 더욱 좋다”고 했다. 조선 후기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가자미, 청어, 잉어, 밴댕이, 크고 작은 새우, 오징어, 문어, 꼴뚜기, 각종 조개와 굴, 홍합, 가자미, 북어, 멸치 등 모든 생선들로 젓갈을 담글 수 있다고 소개되는데 ‘생선식해[諸魚食醢’ 항목의 가자미식해 만드는 법은 이렇다.“흰 멥쌀밥에 엿기름과 누룩가루를 넣어 잘 섞고 물도 몇 종지 넣어 발효시킨다. 그런 다음 가자미를 꺼내 물기를 제거하고 햇볕과 바람에 잘 말렸다가 잘게 썰어서 다시 소금에 버무려 두었다가 익은 다음에 먹는다.”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조리법이다. 또 청어나 잉어를 이용해 식해 만드는 법도 등장한다.“청어 혹은 잉어를 세 손가락 너비로 잘라 깨끗이 씻는다. 생선 5근에 볶은 소금 4냥, 끓인 기름 4냥, 생강과 귤껍질 채 0.5냥, 고춧가루 1분, 술 1잔, 식초 반잔, 파 채 2줌, 밥을 조금 섞어 함께 골고루 잘 섞은 후 도자기병에 단단히 눌러 넣는다. 다음은 대나무 잎으로 입구를 촘촘하게 덮고 대나무 꼬챙이를 꽂아 고정시킨다. 5~7일이면 숙성된다.”1680년경에 저술된 조리서 ‘요록(要錄)’은 식해에 산초를 넣으면 맛이 좋다고 전한다.“물고기에 소금을 좀 짜게 쳐서 2~3일 밤 재운 후, 깨끗하게 씻은 다음 눌러서 짠 물을 뺀다. 현미 쌀로 죽을 쑤고 절인 생선에 섞어서 항아리에 담아 놓고 삭힌 후에 죽을 씻어낸다. 다시 백미로 밥을 지어서 섞어 담가 놓으면 색이 변하지 않고, 산초를 넣으면 맛이 좋다.” 여기서는 향신료인 산초를 넣어 식해를 더욱 고급화했음을 알 수 있다. 서유구의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도 식해 만드는 법이 등장한다.“큰 생선 1근을 토막으로 잘라서 물에 닿지 않게 깨끗한 천으로 닦아 물기를 말린다. 여름철에는 소금 1냥 반을 쓰고 겨울철에는 소금 1냥을 써서 절인다. 한동안 지나서 절인 생선에서 소금물이 흘러나오면 다시 물기를 닦아낸 다음 생강 채, 귤피 채, 시라, 홍국, 찐밥과 파기름을 한데 넣고 골고루 섞어서 자기 항아리에 꼭꼭 눌러 담고 대나무 잎으로 덮고 대꼬챙이를 꽂아둔다. 항아리를 뒤집어 봤을 때 소금물이 모두 없어졌으면 생선이 숙성된 것이다. 또한 본래 생선을 절였던 소금물에 담그면 고기가 쫄깃하고 부드럽다.”요즘 식해는 동해안의 음식 문화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식해 문화가 전국적으로 퍼져 있었고 해산물뿐만 아니라 돼지, 꿩 등 육류나 식물을 이용한 식해도 많았다. 의관 전순의가 1459년 지은 ‘산가요록(山家要錄)’은 지금까지 전해지는 이 땅의 가장 오래된 요리책이다. 이 책에는 생선, 양, 돼지껍질, 도라지, 죽순, 꿩, 원미(쌀을 굵게 갈아 쑨 죽) 등 식해 조리법이 일곱 가지나 소개되어 있다. 포항이 식해 문화를 더욱 널리 계승하려면 생선 식해에 한정하지 말고 육류와 식물을 이용한 식해도 개발해 보는 것이 어떨까. 채식주의자들이 많아진 시대이니 포항의 농산물로 만든 식해 또한 널리 사랑받게 되지 않을까 싶다. 글·사진 / 강제윤 시인·(사)섬연구소 소장

2021-05-31

문경시, 과감한 기업유치 투자로 경제 활성화 이끈다

‘기업하기 좋은 도시 건설’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문경시가 괄목할만한 기업 투자유치와 실적을 올리고 있다.문경시는 2016년 기업유치 전담팀을 구성해 적극적인 기업 맞춤형 전략으로 신기제2일반산업단지 및 농공단지 등에 많은 기업들의 투자유치를 이끌어 냈다.우량기업 유치를 목표로 전 행정력을 집중한 결과 가은제2·영순제2농공단지를 100% 분양 완료하고, 산양제2농공단지에 6개 기업을 유치했다.신기제2일반산업단지에는 10개 기업과 MOU를 체결하고, 이 중 8개 기업과 입주계약을 체결하는 등 지난 2년간 총 43개 기업을 유치해 1천645억원의 투자를 이끌었으며, 863명의 고용창출 성과까지 거뒀다.이러한 기업유치 실적은 2016년 경북도 투자유치대상 평가에서 시·군부문 우수상, 경북도 일자리 창출 추진실적 평가 2016∼2017년 2년 연속 최우수상 수상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문경시는 앞으로도 과감한 기업유치를 위한 지속적인 투자로 지역경제 활성화를 이끈다는 방침이다. 이에 본지는 문경시가 추진하는 과감한 기업유치투자 정책과 지역경제활성화에 미칠 영향에 대해 들여다봤다.◇문경시의 과감한 기업투자 지원책문경시는 투자금액 20억원 이상이고 상시고용인원 20명이상의 기업에게 20억원 초과금액의 10%를 50억원 한도 내에서 투자유치보조금으로 지급하고 있다. 2008년 이후 현재까지 총 18개 기업에게 147억8천700만원을 지원해 1천874억3천400만원의 신규 투자를 창출 했다.또 지방 투자 활성화를 위해 지방에 10억원 이상 투자 및 10명 이상의 신규 고용 기업에 대해 산업통상자원부와 지방자치단체가 공동으로 재정자금을 지원하는 지방투자촉진보조금을 활용해 총 6개 기업에 약 105억3천700만원을 지원해 475억9천900만원의 신규 투자를 창출하는 성과를 거뒀다.여기에 자금난으로 기업경영에 어려움을 겪는 중소기업에 대해 운전자금 융자 추천하고, 그에 대한 이자의 일부를 지원, 기업경영 안정화를 도모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1년 간 최대 3% 이차보전, 제조업 외 10개 업종 및 도 중점 육성기업은 최대 3억(우대업체 5억) 융자 추천하며, 34개기업에 93억6천300만원(2021년 5월 26일 기준) 융자 추천 할 계획이다.◇기업유치 위한 기반 시설 확충문경시는 기업 유치를 위해 기반 시설 확충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일을 할 수 있는 청년들을 지역에 유입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올해 신규사업으로 언택트산업분야 청년일자리지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청년일자리를 창출하고 청년에게 적합한 지역 일자리 발굴·제공해 자산형성이 가능한 수준의 소득을 창출하는 지속 가능한 경제활동을 지원하고, 인구감소, 청년유출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지역에 청년 유입을 지원하기 위해서다.언택트산업분야 청년일자리지원사업에 선정된 10명(8개사)은 총사업비 2억2천236만원(국비 1억1천239만원, 도비 3천299만원, 시비 7천698만원)으로 지원대상은 만 39세 이하의 미취업 청년 10명이다.언택트 관련 중소기업이거나 제조업이며 종목이 전자상거래업이고 통신판매업신고증을 보유한 중소기업의 지원내용은 인건비 2천만원/인, 월 200만원(10개월)이며, 기타지원으로는 기본소양교육, 직무교육 등이다.또 시효 20년 연장과 폐광기금 산정기준 변경을 담은 폐광지역개발지원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이하 폐특법)이 올 2월 26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됨에 따라 폐특법 소멸시효가 기존 2025년 12월 31일에서 2045년 12월 31일로 변경됐다.이로인해 폐광기금 산정방식도 새롭게 바뀌게 됐다. 기존 강원랜드 법인세 차감전 당기순이익의 25%에서 카지노업 총 매출액의 13%로 변경된다.문경시의 경우 2020년 기준 폐광기금 교부액 169억원에서 230억원으로 61억원(약 36%) 가량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며, 코로나19로 인한 운영중단 등 경기 상황에 따라 기복이 큰 당기순이익에서 보다 안정적인 총매출로 산정 기준이 변경되면 향후 25년간 총 5천억원 내외의 안정적인 폐광기금 확보가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문경시는 이 기금을 기업유치를 위한 기반시설 확충에 투자할 계획이다.◇기업과 노동자가 원하는 도시 만들기문경시는 단순한 기업유치가 아니라 기업 이전 등이 인구 증가로 이어지길 바라고 있다. 이를 위해 기업과 노동자가 원하는 도시를 만들고자 한다.이를 위해 우선 문경 국립 UNKRA 산업역사관 건립 사업을 추진한다. 신기동 941, 942번지 일원(구 쌍용양회 공장 내)에 부지면적 1만3천㎡ (건축면적 2천500㎡, 연면적 1만㎡)에 2021년부터 2026년까지 총사업비 495억원(공사비 471억원, 용역비 24억원)을 들여 개방형 수장고, 상설전시(UNKRA관 등), 어린이체험 등 한국전쟁 후 UN의 특별임시기구였던 UNKRA(국제연합한국재건단) 산업역사관을 건립한다.문경시는 UNKRA(국제연합한국재건단) 재건사업의 일환으로 설립된 문경 시멘트공장을 대상으로 산업유산의 지속가능한 활용방안을 도출하고, 지역재생 모델 창출과 새로운 관광자원화를 모색할 계획이다.또 문경중앙시장 어울림마당 다목적광장 조성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현재까지 문경중앙시장 닭전골목 토지 및 노후건물 매입 및 노후건물 철거를 실시하고 있으며, 2022년까지 지상변압기 이전설치(3EA)를 위한 실시설계, 철거공사, 2023년까지 점포 138곳에 다목적 광장 조성 1식(막구조물 설치, 화장실, 먹거리점포 신축 등)을 마무리할 방침이다.문경시는 지역 대표 전통시장인 중앙시장을 복합 문화공간으로 조성해 전통시장 활성화와 관광자원으로도 활용할 계획이다.이밖에도 도시가스 공급시설 설치가 어려운 단독주택지역 등에 대한 도시가스 공급시설 설치 지원을 통해 주민 에너지복지 향상 및 서민 연료비 부담을 완화할 예정이다. 단독주택 등에 대한 도시가스 보조금 지원조례 개정을 통해 도시가스 보급률 향상을 위한 공급사업 투자확대도 추진 중에 있다.◇코로나19 방역 선제적 대응 수범사례문경시는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감염병 예방에 취약한 다중 이용시설을 개선해 ‘청정문경’이미지와 더불어 코로나19로부터 안전한 산업도시 이미지로 침체된 지역경제를 활성화를 꾀하고 있다.문경시의 감염병 예방을 위한 시설개선 지원사업은 총사업비 57억원(2020년 30억원, 2021년 27억원)으로 밀집·밀접·밀폐시설 및 고위험시설인 음식점, 목욕장, 실내체육시설, 노래방, PC방 등 고위험 시설에 감염병 예방을 위해 지원했다.전국최초로 2020년 7월 15일 감염병 예방시설 지원 조례를 제정해 총사업비 1천만원 한도로 90%지원하고 있으며, 노후시설 개보수 지원은 총사업비 500만원 한도에서 90% 지원한다. 환기시설(덕트, 환풍기, 환기창 등) 및 가림막 설치 지원, 노후시설(바닥, 벽체, 화장실 등) 개보수 지원, 살균기, 소독기 등 감염병 예방물품 구입을 지원하면서 코로나19 확산 예방에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20년 음식점(330곳), 이미용업(124곳), 주점(40곳), 학원(36곳), 노래방(15곳) 등 573곳에 지원을 완료했으며, 2021년에는 6월말까지 음식점(390곳), 이미용업(48곳), 주점(20곳), 학원(20곳), 목욕탕(11곳) 등 517곳을 지원한다.문경시는 쾌적한 영업환경 조성을 통한 감염병 예방과 청정 문경 이미지를 기업유치에도 적극 활용할 방침이다./강남진기자75kangnj@kbmaeil.com

2021-05-30

차세대 배터리산업 선도 인구 유입 새 성장 동력으로

◇철의 도시에서 해양관광문화도시까지도시의 경쟁력은 상징의 대결이다. “천년 수도”하면 대한민국 국민 10명 중 10명 모두가 경주를 떠올리지 않을까. 대게하면 영덕, 나주는 배, 담양의 죽세공품까지. 어떤 도시를 꾸미는 수식어는 결국 그 도시의 정체성과 같다.포항은 철강도시였다. 포스코(POSCO)가 없었다면 지금의 포항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기업은 그 존재만으로 한 지역에 미치는 사회·경제·문화적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한반도 동남쪽 끝 유배지였던 포항이 전국적으로 10여 개에 불과한 ‘대도시’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역시나 알파벳 ‘Z’로 더 많이 알려진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의 존재 덕분이었다.1968년 7만1천여명이었던 포항시 인구 수는 1970년 포항제철 착공 이후 급속도로 늘었다. 1973년 10만8천여명, 1980년 20만1천여명, 1988년에는 30만명을 돌파했다. 해병대 전역자들을 제외하면, ‘포항 = 철강도시’라는 등식에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다. 올해 1월 한국은행 포항본부가 발표한 연구보고서가 이를 뒷받침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2014년∼2016년 기준 포항의 산업별 생산액 평균을 비교해봤을 때 제조업 비중이 무려 43.5%로 나타났다. 건설업 5.8%, 사업서비스업 5.4% 도매및소매업 4.9% 등 다른 업종은 3∼6% 정도에 불과하다. 특히, 제조업 중에서도 1차금속이 75.4%로 압도적이다. 제조업, 그중에서도 1차금속 산업이 포항 경제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전 세계적으로 철강산업이 성장 한계에 부딪히면서 포항이라는 도시의 성장도 덩달아 멈추기 시작했다. 포항은 2007년 이래 실질 GRDP(지역내총생산)가 대체로 감소세였다. 2010년을 넘어서면서 포항의 인구 증가세가 둔화됐고, 2016년에는 감소세로 돌아섰다. 새로운 먹거리산업을 찾고 있는 포항시의 눈에 띈 업종이 바로 해양관광산업. 이미 지구촌에서 신성장동력으로 주목받고 있는 해양관광에 포항시도 뛰어든다.2012년 기준 세계관광객 규모가 10억명을 넘고, 시장 규모가 1조2천억달러를 차지하는 관광산업 중에서도 해양관광이 차지하는 비중은 50%나 된다. ‘영일만(迎日灣)’이라는 천혜의 자연조건을 가진 포항에게 해양관광산업은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화진·월포·칠포·영일대·도구·구룡포해수욕장 등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는 유명 해수욕장에 더해 포항공항, KTX포항역 등 교통편도 발달해 있었다. 연안크루즈 사업, 장길리 복합낚시공원, 연오랑세오녀테마파크, 호미반도 해안둘레길 조성에 더해 전국해양스포츠제전과 같은 국내 굵직한 해양스포츠 대회를 유치, 개최하는 등 심혈을 기울였다.하지만 해양관광도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실현하기 위한 포항시의 이러한 움직임들은 현재까지는 실패에 가깝다. 포항 영일대해수욕장 앞 연안을 순회하던 포항영일만크루즈(주)는 최근 사업을 철수했고, ‘국내 최초 부력식 해상공원’으로 대대적으로 알려졌던 포항캐릭터해상공원 역시 개장 1년만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다. 나머지 관광지들은 대부분 타지역 관광객들이 아닌 포항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만 이용되는 수준이다. 포항시 수천억원의 예산이 해양관광산업에 투입됐지만 포항을 떠나 타 지역으로 이주하는 시민들의 발길을 붙잡지 못했다. 인구 유입 관점에서 보면 낙제점이다. ◇미래 포항은 배터리 선도도시다시 기업이다. 포항의 미래 수식어는 배터리 선도도시다. 2019년 포항은 차세대 배터리 리사이클링 규제자유특구로 지정됐다. 포항영일만1·4일반산업단지 및 블루밸리국가산업단지 일원 99만2천358.72㎡(약 30만평)가 특구로 지정되면서 이곳에서 4년동안 배터리 관련 활용기술 개발 및 산업 활성화가 집중적으로 이뤄진다.참여기업은 민간 11개, 재단법인 1개다. (재)경북테크노파트와 (주)해동엔지니어링은 ‘전기차 사용 후 배터리 종합관리사업’을 진행한다. 에스아이셀, (주)포엔, (주)에임스, (주)피엠그로우, (주)솔라라이트, (주)빈센 등 6개 기업은 ‘전기차 사용 후 배터리 재사용 사업’을, (주)에코프로GEM과 GS건설(주), 성일하이텍(주), (주)뉴테크엘아이비 등 4개 기업은 ‘재사용 불가 배터리 재활용사업’을 추진한다.GS건설은 배터리 리사이클링 산업에 1천억원을 투입하기로 하면서 포항 영일만4일반산업단지에 공장을 짓기로 했다. 지난해 1월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GS건설-경북도-포항시 간에 진행된 ‘배터리 리사이클링 투자 협약식’에 참석하는 등 관심을 보였다. 양극소재 사업의 선두주자인 (주)에코프로는 자회사들인 비엠(BM), 지이엠(GEM), 이노베이션, 이엠(EM) 등을 앞세워 포항에 수천억원 이상의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포스코케미칼은 이차전지 인조흑연 음극재 생산공장을 건립 중이다.이들 세 기업은 전 세계 배터리 업계의 ‘빅(Big)3’로 불리는 만큼, 포항이 앞으로 대한민국을 넘어 지구촌 배터리 시장에서의 가장 핵심 도시로 도약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배터리 산업과 관련한 기업의 포항러쉬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정부 평가에서도 포항 배터리 규제자유특구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2년 연속으로 최고등급인 ‘우수 특구’로 선정되기도 했다. 말 그대로 훈풍이다.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것은 모두 갖춰졌다. 기업은 언제 어디서나 인재를 원하고, 인재는 일자리를 찾아 전국으로 떠난다. 현재 배터리 산업에서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포항에 둥지를 틀었고, 틀고 있다. 50만 인구 감소 위기와 마주한 포항이 인구 정책을 위해 무엇보다 선택해야 하는 건 다름아닌, 기업과 청년들이 바라는 서로의 ‘니즈(Needs)’를 파악해 매칭, 충족시켜주는 집중력이다. 과거 철강도시였던 포항의 찬란한 영광이 배터리산업으로 인해 재현되길 바라본다. 이강덕 포항시장 이강덕 포항시장에게 듣는다“생애 전반 걸친 종합 인구정책 추진 시민이 평생 함께 할 수 있는 포항으로 성장”-감소세였던 포항시 인구가 최근 반등했다. 어떤 시책이 주효했나△인구 50만 명이 무너질 경우 시민들이 겪게 될 불편을 막고자 ‘51만 회복’을 시정 최우선 정책으로 정했다. 그 중에서도 ‘포항사랑 주소 갖기 운동’과 ‘주소이전지원금 사업’을 전 공직자는 물론 시민, 대학, 군부대, 시민단체 등과 함께 협력해 범시민적 캠페인으로 적극 추진한 결과, 성과를 거두고 있다. 지난해 말 내국인 기준 50만 2천916명이던 인구가 올해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면서 4월말 기준 50만4천103명으로 1천187명 증가했다.지난해에는 같은 기간 1천816명 감소했던 것에 대비해 실질적으로는 3천명 이상의 증가 효과를 본 것으로 보고 있다. 포항에 거주하면서 전입신고를 하지 않은 ‘숨은 인구’를 찾는데 주력하면서 인구 문제에 대한 시민 공감대와 동참 분위기를 폭넓게 형성하고, 전입자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제공할 방안을 계속해서 찾고 있다.-인구 증가의 지속성 및 청년층의 인구 유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역의 먹거리 산업 개발이 필수적이라는 목소리가 많다△중장기적으로 인구 증가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포항이 살기 좋은 여건이 마련돼 머무르고 싶은, ‘삶의 질이 좋은 도시’라고 인식의 전환이 이뤄져야 한다. 이를 위한 ‘일자리 창출’, ‘정주여건 개선’ 등 다양한 시책을 마련하고 있다. 양질의 일자리 창출과 청년 취·창업 기회를 극대화하기 위해 중추 산업인 철강산업의 재도약 기술개발사업 등을 추진해 경쟁력을 계속 확보하는 한편, 신소재·신산업 육성과 기업 유치, 청년 창업 지원에 노력하고 있다.특히, 지역 산업 생태계를 다변화해 일자리를 안정적으로 창출하기 위해 ‘제2의 반도체’라 불리며 유망한 미래산업으로 각광받는 배터리산업을 필두로, 건강에 대한 관심과 투자 증대로 급성장하고 있는 바이오·헬스 산업의 연구 인프라 구축 및 기업 유치, 해상케이블카·환동해복합전시센터 건립, 환호공원 체험형 조형물 ‘클라우드’ 등을 통한 해양관광산업 육성까지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포항 산업의 차세대 주자는 역시 배터리인가△탄소 중립 실현을 위한 온실가스 배출규제 등이 강조되면서 전기차 산업이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고 전기차 배터리 수요가 급증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포항시는 지난 2019년 중기부의 배터리 규제자유특구 지정 이후 배터리 선도도시 포항을 목표로 배터리산업에 시정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그 동안 우리시는 이차전지산업 육성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인 결과 배터리기업 유치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에코프로, GS건설, 포스코케미칼 등 대기업들의 투자뿐만 아니라 중소기업들의 투자도 이어지고 있으며, 현재 배터리관련기업의 투자금액은 2조원, 고용인원은 3천여명으로 지역경제 활성화와 고용창출에도 큰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현재 포항을 우리나라 배터리 전략특구로 육성하기 위해 환경부 등 여러 부처와 협업으로 기술 개발과 실증, 기업육성의 전주기적 기업지원 인프라 구축을 위해 매진하고 있다. 올해 7월 ‘이차전지 종합관리센터’가 준공 예정이며, 환경부와는 500억원 규모의 ‘사용 후 배터리산업화 플랫폼 구축사업’과 이차전지기업 지원과 육성을 위한 ‘배터리 자원순환 클러스터 조성사업’도 추진중이다. 이외에도 산업통상자원부와는 3천억원 규모의 이차전지 부품소재장비 제품화 국산화 기술 개발을 위한 ‘차세대 배터리파크 조성사업’도 추진하고 있다.포항시는 이차전지산업 인프라와 국내 최고 연구 인력을 보유한 포스텍 철강에너지소재대학원 등을 적극 활용해 ‘원료생산 → 배터리소재 생산 → 배터리 제조 → 배터리 재활용’으로 이어지는 이차전지 밸류체인 생태계 조성으로 이차전지산업을 포항의 제2도약을 견인하는 신산업으로 육성해 나갈 계획이다.-포항시민들에게 포항의 청사진을 제시해 달라△회색의 철강도시 이미지에서 벗어나,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 지속가능한 환동해중심도시로 ‘삶과 도시의 대전환’을 이뤄 가겠다. 이를 위해 생애 전반에 걸친 인구정책을 종합적으로 추진해 시민과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포항을 만들고자 한다.저출생 극복을 위해 아이돌봄서비스, 직장맘SOS서비스 등을 통한 일과 가정의 양립과 돌봄 사각지대 없는 안전한 보육 환경을 조성해 아이 낳고 키우기 좋은 도시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다. 청춘센터 및 청년창업LAB 운영, 중소기업 정규직 프로젝트, 배터리 및 바이오·헬스 분야 신성장 산업 육성, 블루밸리 국가산단 투자유치, 강소연구개발특구 조성 등 청년들의 취·창업 지원과 지역 내 신규 일자리 확충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도시재생 뉴딜사업, 행복주택 제공, 학산천 복원 등 그린웨이 프로젝트 확대, 해양관광산업 육성 등 정주여건 개선을 통해 도시경쟁력과 생활만족도를 동시에 높여나가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세대를 아우르며 시민과 상생할 수 있는 도시’로 성장할 수 있도록 전력을 기울이겠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이바름기자 bareum90@kbmaeil.com

2021-05-30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미래형 밀레니엄 도시 ‘영주시’

영주시는 유불문화가 공존하는 도시로 현대인의 삶의 가치와 중요성,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질문과 그 해답을 얻기 위한 미래 지평을 열어가는 대표적 도시다.과거를 통한 현재, 이를 바탕으로 미래 100년을 열어가는 대표적인 도시로 성장 원동력을 키워가고 있다. 영주시는 미래를 열어가는 연결고리로 전통문화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한 한테마파크 선비세상완공을 앞두고 있다. 또, 2022년에 개최될 영주 세계풍기인삼엑스포는 6차 산업을 통한 미래 100년 먹을거리 준비와 인삼을 주제로 생명공학의 새 지평을 여는 중심점이 될 전망이다.영주 첨단베어링산업단지 조성사업은 4차 산업 혁명시대에 대응하기 위한 미래형 산업으로 이 또한 영주지역의 미래 100년의 먹을거리를 준비하는 대표적 사업이다.◇한국 전통문화의 중심 한테마파크 선비세상영주시는 옛 전통과 선비문화를 영주의 대표적 경쟁력으로 키운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이를 위해 순흥면과 단산면 일원 960,974㎡(약 30만평)면적에 총사업비 1천670억원을 들여 한테마파크 선비세상 조성 사업을 추진 중이다.대한민국 한(韓) 문화의 중심지가 될 선비세상은 한복, 한식, 한옥, 한글, 한지, 한음악 등 6가지 테마의 매력 있는 한 스타일을 담아내고, 전통문화와 선비정신의 세계화, 관광화, 산업화를 이루어 영주의 100년 미래 문화산업으로 키워나가게 된다.영주가 가진 유네스코 세계유산 소수서원과 선비촌을 활용한 인성 프로그램 활성화와 세계인성 포럼 개최, 선비대상 시상, 국립인성교육진흥원 유치로 인성교육의 중심도시로 성장시켜 나갈 예정이다.선비세상은 전국 단일 최대 전통문화 단지로 한옥, 한복, 한식, 한글, 한지, 한음악 등 브랜드 6개 분야가 주 테마다.선비세상은 2008년 9월, 문체부의 광역경제권, 선도프로젝트사업에 선정, 2013년 10월 토목, 건축, 전기, 통신, 소방 등 시설을 착공했다.올해 5월 현재 지하구조물, 전통건축 골조완료, 내부공사 중으로 진행률 83%를 보이고 있다.12월 중 토목, 건축, 전기, 통신, 소방 등 공사 완료와 2022년 5월 중 확정측량 및 실시계획 변경승인 후 준공검사를 완료할 계획이다.◇2022영주 세계풍기인삼엑스포영주시는 인삼을 활용한 6차 산업의 기반과 인삼을 통한 생명공학에 접근성을 높이고자 2022영주 세계풍기인삼엑스포를 개최한다.2017년 10월 21일 제20회 영주풍기인삼축제 개막식을 통해 세계 속 고려인삼의 종주국으로서의 위상 정립을 위해 2022영주 세계풍기인삼힐링엑스포 유치를 위한 추진 선포식을 했다.영주시는 2022년 세계풍기인삼힐링엑스포 개최의 필요성과 당위성에 대해 산업적 차원과 국가적 차원, 지역적 차원으로 구분하고 있다.산업적 차원은 미용, 의료, 헬스, 바이오 등 다양한 산업을 연계해 신규 시장 수요를 창출하기 위한 다양한 제품 개발을 통한 풍기인삼의 세계화를 추진한다.인삼산업의 재 위치와 산업경쟁력 강화 등 산업잠재력과 고려인삼 수출 및 소비확산 플랫폼 구축의 필요성에 의한 시장 잠재력, 융복합 산업으로 인삼클러스터 구축, 제품잠재력 확산이 산업적 차원의 주요 포인트다.국가적 차원은 풍기인삼의 역사, 문화를 바탕으로 스토리텔링을 추진하고 식품, 캐릭터, 상품을 개발해 풍기인삼이 세계인삼의 메카로 자리매김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이를 위해 인삼 종주국으로서 위상 회복과 국제 전시장을 마련해 고려인삼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국가브랜드로서의 입지를 높이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지역적 차원을 보면 산학 협력을 통한 인삼산업 전문클러스터를 구축, 지역특화산업의 상생효과와 지역균형발전, 경북도와 영주시의 전략적 산업으로 육성해 인삼종주지로서의 경제성장 및 지역브랜드 강화를 도모하게 된다.2022영주 세계풍기인삼힐링엑스포는 생명 가치의 연결, 인삼 산업의 미래 창조라는 주제로 개최된다.엑스포 기본구상 및 타당성 연구용역(2018.11월)에 따르면 2022세계풍기인삼힐링엑스포 개최를 통한 입장권 판매수입 72억, 임대수익, 후원·휘장·광고·협찬 수입 27억 원 등 직접적인 수입 99억원과 경제적 파급 효과로 생산유발 효과 2천474억원, 부가가치 유발 효과 1천5억원, 취업 유발 효과 2천798명 등 다양한 사업의 파급 효과 발생이 기대된다. 방문 예상객은 176만명이다.산업적 파급효과에는 인삼산업 경쟁력 강화 및 발전, 지역주민 소득 및 고용증대, 풍기인삼 관련제품의 수출 및 소비촉진이 기대 되고 있다.◇미래 100년 먹을거리 첨단베어링산업단지영주시는 포스트 코로나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대비해 지역에 첨단산업 발전 기반을 조성하는 등 발 빠른 대응을 펼치고 있다.시는 첨단베어링 국가산업단지를 조성을 통해 영주시를 첨단산업 중심지로 조성하고, 이를 통해 지역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간다는 계획이다.영주가 추진하는 영주 첨단베어링 국가산업단지는 경북 북부지역 최초로 조성되는 것으로, 지방공기업평가원(이하 평가원)에서 2020년 4월부터 10월까지 실시한 신규 투자사업 타당성 검토를 통과하는데 이어 올해 3월 29일 경북도 2013 영주시 2013 경북도개발공사 간의 사업실시협약이 체결됨에 따라 조성사업에 속도를 높일 수 있게 됐다.시는 그동안 지역의 새로운 미래를 약속할 수 있는 산업 발굴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그 가운데서도 첨단베어링 산업 발전에 역량을 집중했다.국내 베어링산업의 앵커기업인 일진그룹 (주)베어링아트 영주공장 설립을 발판으로 2018년 11월 국내 유일의 베어링전문 연구기관인 하이테크베어링 시험평가센터를 준공하고 2019년 9월 (주)베어링아트는 영주공장 증설을 위해 영주시 장수면 일원 3만평의 부지에 2024년까지 3천억원 규모의 투자양해각서를 체결하는 등 베어링산업 중심도시로의 도약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2018년 3월 87명의 전문가와 민간인으로 구성된 영주 첨단베어링산업 클러스터 조기조성 시민추진위원회(위원장 김진영)를 구성해 세미나, 토론회, 포럼, 간담회 등을 개최해 시민 공감대 형성과 시민의지를 결집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오고 있다.민간부문의 노력과 함께 시는 2019년 초부터 시청, 시의회, 베어링시험평가센터와 경량소재기술센터 등 관계자들이 직접 전국 500여 개의 베어링 및 경량소재 전후방기업을 방문, 영주 첨단베어링 국가산업단지 조성에 대한 홍보와 입주 의향기업 확보에 노력을 기울였다.이 같은 노력의 결과 2019년 8월부터 2020년 1월까지 경상북도개발공사가 시행한 리서치에서 73개 기업이 입주의향을 밝힌 것으로 조사됐다.특히 영주시는 2027년 준공을 목표로 국가산업단지계획 수립에 적극 나서고 있다.적서동, 문수면 일원에 총사업비 3천165억원, 136만㎡ 규모로 조성되는 국가산업단지의 원활한 기업유치를 위해 당초 3.3㎡당 122만원으로 산정됐던 조성원가를 50만원 가량으로 하향하고 조성원가 대비 분양가 차액에 대해 국비를 포함한 1천859억 원을 단계적으로 지원할 예정이다./김세동기자 kimsdyj@kbmaeil.com

2021-05-26

바람과 햇볕으로 조리한 마법의 요리

기록에 남은 과메기의 시작은 조선의 바다를 물 반, 고기 반으로 만들 정도로 풍성했던 청어다. 청어는 조선의 선비들에게 단백질을 공급하는 중요한 생선이었기에 비유어(肥儒魚)라고도 했다. 선비를 살찌우는 물고기. 포항에는 과거에 청어가 얼마나 많이 잡혔는지 지명으로 남아 있을 정도다. 호미곶의 까꾸리께라는 곳이 그곳이다. 청어 떼가 해안으로 밀려오면 까꾸리(갈퀴)로 긁어모았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 까꾸리께다. 그야말로 물 반 고기 반이던 전설 같은 시대의 이야기다. 유럽에서도 청어는 대구와 함께 가장 중요한 생선이었다. 식량인 동시에 축재 수단이기도 했다. 유럽의 청어는 소금에 절여서 유통됐다. 지금도 네덜란드를 비롯한 북유럽에서는 ‘하링’이라는 전통 방식의 청어 초절임이 팔리고 있다. 교회가 육식을 금지하는 기간에 청어는 주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자산어보’에 등장하는 청어 과메기과메기는 대개 11월부터 2월까지 말린다. 구룡포 삼정리 해변에는 아직도 재래식으로 해풍에 건조하는 과메기가 생산된다. 대부분 공장식 시스템을 통해서 실내 온풍 건조로 만들어지고 있으니 해변 덕장의 건조 과메기는 귀하다. 삼정리 어업의 역사는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청동기시대에도 그물로 물고기를 잡았던 증거물들이 출토됐다. 2002년 구룡포에서 호미곶까지 해안도로를 내면서 삼정리, 석병리의 고분군에 대한 발굴 조사를 했는데, 어업 관련 유물이 151점이나 발굴됐다. 삼정리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나온 토제 어망추도 그중 하나다. 어망추는 그물 끝에 달아서 그물이 가라앉게 만드는 기구다.청동기시대부터 삼정리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물을 이용해 물고기를 잡았고 지금도 삼정리 어민들은 같은 바다에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으며 살아간다. 참으로 장구한 어업의 역사가 이어져온 해변이다. 청동기시대에도 사람들은 물고기를 말려 먹었을 것이니 청어나 꽁치를 과메기로 만들어 먹었을 가능성이 크다. 대량으로 물고기를 어획한 토제 어망추가 바로 그 증거다.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에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고래잡이를 했던 그림이 남아 있고, 구룡포 삼정리에도 청동기시대 암각화가 남아 있다. 고래 사냥을 해서 고래고기를 먹었던 청동기인들이니 과메기인들 못 만들어 먹었을 까닭이 없다. 그렇다면 과메기의 역사는 물경 3000년에 이른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삼국지’의 ‘위지 동이전’에는 “옥저 사람이 고구려에 조부(租賦)로서 맥포(貊布)와 함께 어염(魚鹽) 및 해중 식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나오고, 2020년 10월 국립중앙박물관은 재발굴 결과 경주 서봉총에서 쏟아져 나온 유물 중에 백제의 조문객이 가져온 민어의 흔적이 나온 것을 보면 2000년 전에도 건어물 문화가 널리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대와 선사시대부터 생선을 말려 먹는 문화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과메기만 없었을 것인가.일반적으로 과메기는 청어나 꽁치를 수분 함유량이 40퍼센트 정도 되도록 말린 것이다. 정약전은 ‘자산어보’에서 청어 과메기를 소개한다. 관목청(貫目鯖) 항목에 나오는 이야기다.“모양은 청어와 같고, 두 눈이 뚫려 막히지 않았다. 맛은 청어보다 좋다. 이것으로 얼간포를 만들면 맛이 매우 좋다. 때문에 청어 얼간포를 관목청어라 부른다. 영남 바다에서 잡히는 놈이 가장 드물고 귀하다.” 과메기는 청어의 눈을 꿰어서 만든 관목어, 관목청으로 불리다 과메기가 된 것이다. 청어에 소금을 약간 뿌려서 살짝 저리는 ‘얼간’을 해서 건조한 생선이 과메기였다. 서유구의 ‘전어지(佃漁志)’ 청어(青魚, 비웃) 항목에도 과메기가 등장한다.“우리나라 청어포 역시 자적색이 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다만 그 고기를 엮는 법은 등을 가르지 않고 새끼로 엮어서 햇볕에 말린다. 이렇게 하면 먼 곳에 부치거나 오래 두어도 상하지 않는다. 민간에서 ‘관목(貫目)’이라고 하는 것은 두 눈이 새끼줄로 꿸 수 있을 만큼 투명한 것을 말한다. 잡는 즉시 선상에서 말린 것이 품질이 우수하다고 한다.”‘영남읍지’(1871)에는 영일, 청하, 영덕 지방의 토산품으로 관목(과메기)이 거론되고 있다. 이규경이 1800년대 초 편찬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단순한 과메기가 아니라 훈제 청어 이야기가 등장한다.“청어를 연기에 그을려 부패를 방지하는데 이를 연관목이라 부른다.”본래 생산지에서 훈제 과메기를 만들기도 했지만 한양으로 운반한 후에 훈제한 뒤 판매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훈제하면 부패하지 않고 오래 보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훈제 과메기는 “비싼 값을 받는다”고 했다.포항에서도 직접 훈제 과메기를 만들어 먹는 풍습이 있었다. 냉훈법으로 말려 먹은 과메기가 그것이다. 겨우내 청어를 얼렸다 녹였다 반복하면서 건조시켰는데 연기가 빠져나가는 구멍인 부엌의 살창이 건조장 역할을 했다. 당시에는 땔감으로 솔가지를 많이 사용했는데 솔가지가 타면서 연기가 빠져나갈 때 솔향이 과메기에 스며들었다. 살창으로 들어오는 찬바람과 부엌에서 나가는 온기에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서 과메기가 만들어졌고, 여기에 연기로 훈연하며 솔향까지 첨가된 것이다. 솔향 훈제 과메기는 단순한 건조 과메기와는 또 다른 고급 과메기였다. 되살려낸다면 아주 고급 요리가 되지 않을까.과메기는 살창뿐만 아니라 집집마다 뒤꼍 담벼락에도 널어 말렸다. 어촌에서 흔히 생선을 건조해 먹는 방식이다. 이후 좀 더 체계화된 것이 청어를 새끼줄에 엮어 말리는 방식이다. 조기 또한 자갈밭에 널어서 말리는 방식이 점차 새끼줄에 엮어 덕장에서 말리는 방식으로 변천해 온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꽁치나 청어를 새끼줄에 엮어 통으로 말리는 통과메기가 전통적인 방식이다. 내장을 제거하지 않고 한 접씩 새끼줄로 엮어 보름쯤 말린다. 건조 과정에서 내장의 성분이 살에 스며드니 과메기의 향이 진하다. 엮어서 말린다 해서 엮거리라고도 한다. 뼈와 내장 등을 제거하고 말린 배지기 과메기근대에 새롭게 만들어진 것은 배지기 과메기다. 먹기 좋게 뼈와 내장, 머리 등을 제거하고 말려서 만든 것이다. 생선의 등을 칼로 따서 말리는데 칼로 베어졌다 해서 베지기 혹은 배지기다. 지느러미와 머리를 자르고 배를 갈라 내장도 제거한 뒤 등뼈를 중심으로 양분해서 말린다. 먹을 때는 껍질만 제거하면 된다. 배지기는 손질한 생선을 바닷물로 씻은 뒤 민물로 한 번 더 씻어 말린다. 과거에는 바닷물에만 씻었는데 짜다는 이들이 있어 민물로도 씻어준다. 민물에는 2∼3분 담갔다가 건져내 말린다.배지기 과메기는 속살이 바깥을 향하게 한 뒤 건조대에 걸어서 말린다. 바람이나 햇볕이 좋으면 이틀 정도면 먹을 수 있다. 하루면 물기가 빠지고 이틀이면 딱 먹기 좋게 꾸득꾸득 마른다. 이때 덕장에서 바로 걷어 상품으로 출하한다. 냉동실에 보관하고 먹어도 되고, 포처럼 먹고 싶으면 더 꼬들꼬들 말려서 먹어도 좋다. 전통적인 통과메기가 훈제 과메기로 바뀐 것은 1923년께 일본인들이 홋카이도의 청어 가공법을 들여오면서 확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인들이 청어 살과 별개로 청어 알을 선호한다는 점도 배를 따서 말리는 방식이 확산된 계기로 작용했다.과메기는 손가락으로 눌러서 탄력이 있는 정도면 잘 숙성 건조된 것이다. 과메기를 먹는 방법은 다양하다. 김과 미역, 배추 등에 싸서 고추장을 찍어 먹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음식 먹는 것이 본디 정해진 방법이 있겠는가. 옛날 구룡포에서는 김장김치에 둘둘 말아 싸 먹기도 했다. 아니면 그냥 맨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그야말로 자기 취향대로 먹으면 된다. 싱싱하여 비리지 않게 잘 마른 과메기는 아무것도 찍지 않고 그 자체로 먹는 것이 가장 맛있다. 본연의 맛을 뛰어넘을 수 있는 부재료란 없다. 원재료가 충실할 때 부재료는 의미가 없다. 과메기는 미나리를 넣고 무쳐 먹어도 좋고 불에 구워 먹어도 별미다. 건강에 두루 좋은 과메기한국 사람들은 생선회도 유독 씹히는 맛을 선호한다. 꽁치나 청어도 살이 무른 생선이다. 하지만 말랑말랑할 정도로 말리는 과메기는 그 맛이 쫀득쫀득하다. 특히 꽁치 과메기의 식감이 좋다. 꽁치 과메기는 쫀득쫀득한 식감으로 많은 사람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등 푸른 생선은 지방이 많다. 그래서 쉽게 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얼간을 해서 말리면 오랫동안 보존이 가능하다. 지방은 공기와 만나면 바로 부패한다. 그런데 지방이 많은 꽁치가 부패하지 않고 말라서 과메기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꽁치의 몸을 둘러싼 껍질 덕분이다. 껍질이 부패를 방지하고 숙성 발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요즘 과메기의 주원료인 꽁치는 한류성 어류다. 1960년대부터 흔하던 청어가 자취를 감추자 청어와 비슷한 맛을 내는 꽁치가 과메기의 재료로 등장해 전성기를 구가했다. 동해안의 꽁치도 1930년대 이전에는 손으로 잡는 손꽁치 잡이만 있었다. 1938년 후반부터 꽁치 유자망 어업이 시작됐고 1980년대까지 동해안의 대표적 어종이었다. 청어를 대체해 과메기를 만들 수 있을 만큼 풍족했던 꽁치도 2000년대 들어 어획량이 급감했다. 그래서 현재는 포항의 과메기도 대부분 원양에서 잡아온 냉동 꽁치로 만들어진다.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과메기는 포항을 비롯한 인근 동해안 지역 음식이었으나 1990년대 중반 이후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포항의 대표적인 특산물로 자리 잡게 됐다. 과메기의 주재료인 꽁치는 전체 지방의 82%가 불포화지방이고 꽁치 100g당 열량은 262㎘다. 열량이 낮으니 다이어트 식품으로 제격이다. 또 불포화지방이니 혈관 건강에 좋다. 오래 두어도 기름이 굳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게다가 꽁치는 레몬보다 비타민C가 세 배나 많다고 한다. 꽁치는 과메기로 만들었을 때 생꽁치보다 DHA와 오메가3의 양이 증가한다. 과메기를 안주로 먹으면 술에 쉽게 취하지 않는다는 말도 빈말이 아니다. 과메기에 숙취 해소 물질인 아스파라긴산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술안주인 동시에 해장 음식이기도 하니 과메기는 대체 얼마나 미덕이 큰 음식인가.글·사진 / 강제윤 시인·(사)섬연구소 소장

2021-05-26

“주민들이, 살고 있는 마을의 가치를 안다면… 당신은 ‘좋은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눈빛과 표정이 티 없이 맑은 사람’. 포항 흥해에서 마을활동가로 일하는 김명준(49)씨를 처음 만났을 때 든 느낌이었다. 서른아홉에 포항으로 온 김씨는 현재 사회복지사와 마을활동가 역할을 병행하고 있다.마을활동가란 자신의 거주하는 공간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그곳의 미래 발전 방안을 고민하는 사람.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지향하며 구체적 개선 방식을 공부하고, 전파하고, 실행하는 게 마을활동가다.‘도시재생’도 마을활동가가 맡은 역할 중 하나.‘인구 증가와 산업기술 발달로 이미 만들어진 도시 환경이 그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돼 가는 걸 막고,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계획적으로 개선하는 사업’이 도시재생의 사전적 의미.외형과 내면이 균형을 이루는 바람직한 ‘재생의 방법’을 고민하며, 자신의 생활 기반인 흥해의 긍정적 변화를 하나하나 만들어가고 있는 마을활동가 김명준을 지난주 수요일 본사 편집국에서 만났다. 김씨는 마을활동가와 협동조합의 일원으로서 살아가는 일상을 편안한 말투로 들려줬다. 아래 그의 꿈과 희망, 오늘의 삶과 내일의 계획을 소개한다.-출생지와 출신 학교, 전공은.△대구에서 태어나 어릴 때는 경기도에서 자랐다. 대학은 안동과 경산에서 다녔다. 보건학을 공부하다가 공대로 옮겼고, 대학원 전공은 사회복지학을 선택했다. 2010년 포항으로 왔다. 경북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일하게 되면서다. 30대 후반에 포항과 인연을 맺게 됐다.-지금 하고 있는 일은 뭔가.△중앙엘림복지재단에서 사회복지 일과 흥해에서 마을활동가 일을 하고 있다.-‘흥해 특별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에서 활동한다고 들었다. 어떤 단체인지.△2017년 포항 지진 이후 생겼다. 포항시에서 지진 등 재해를 담당하는 부서가 도시산업안전과인데 거기서 방재와 도시재생 등의 업무를 맡는다고 알고 있다. 현재 포항시청에서 공무원들이 파견돼 흥해행정복지센터에 자리 잡고 지진 피해 복구 등 지역이 처한 어려움을 돕고 있다.-‘마을활동가’라는 단어가 생소하다.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지진 이전부터 마을활동가는 존재했다. 주민을 위해 일하고픈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이웃과 소통하며 공동체를 활성화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들었다. 거주하는 마을의 복지 향상과 환경 개선 등을 위해 일한다. 급료는 받고 있지만 최저 시급 수준이다.자부심과 열정이 없다면 하기 힘든 일이다. 내 경우도 사회복지 일을 하는 시간 외에는 거의 대부분을 마을활동가로 동분서주한다. 휴일에도 일을 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힘들기보다는 보람 있다.-흥해는 포항 지진 당시 큰 피해를 입었다. 지금 상황은.△거기서 삶을 이어온 주민 중 상당수가 집이 부서지는 등의 크고 작은 피해를 겪었다. 그간 정부와 지자체에서 피해 주민 주거 안정 등 복구를 위해 노력했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흥해를 떠났다. 남아 있는 주민들의 삶도 녹록지 않다.경제적인 어려움은 물론 정신적인 고통과 상처를 아직 극복하지 못한 이들이 없지 않다. 마을활동가로 일하는 여섯 사람 중 한 분도 아직 약을 복용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흥해는 아직 지진이 준 생채기를 온전히 극복하지 못한 상태다.-도시재생을 위해 만든 ‘흥해 특별도시재생대학’은 어떤 일을 하는지.△특별재난지역 선포로 국토부에서 예산이 지원됐다. 그것으로 흥해의 도시재생사업이 시작됐다. 특별도시재생대학은 특별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에서 마련한 하나의 프로그램이다. 도시재생 과정의 방법과 필요성을 교육하고, 사업 수행 과정에서의 문제점을 발굴해 해결해나가는 방법 등을 강의하고 있다. 또한, 도시재생과 관련된 기획서를 작성하는 방법도 가르친다. 현재는 코로나19로 인해 초급과 중급 과정에 20명 정도가 수강하고 있다.-흥해에서의 도시재생은 어떤 방법이 돼야 할까.△도시의 중심지역이 신시가지로 옮겨가는 경우 구도심은 소외된다. 그 소외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고, 환경을 개선하는 도시재생은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다. 흥해의 경우엔 지진 피해 보상 등과 함께 예전의 활력 넘치던 지역으로 돌아가기 위한 다양한 방면의 노력들이 함께 진행돼야 진정한 의미의 도시재생이 되지 않을까.-‘건빵제작소’라는 협동조합이 만들어졌다고 들었다.△‘건강한 빵 제작소’라는 의미를 담은 명칭이다. 지난해 경북 협동조합 창업자금으로 설립됐다. 마을활동가 3명과 함께 공모사업에 기획서를 내면서 그 출발을 알렸다. 흥해의 특산물인 시금치와 딸기 등을 이용해 좋은 빵을 만들고, 이를 통해 발생하는 경제적 이익을 주민들에게도 나눠준다는 차원에서 시작한 것이다.사실 작년까지는 상황이 어려웠다. 하지만, 올해 다시 주민공모사업에 선정됐으니 철저하게 준비해 본래 목적한 사업을 현실화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하반기면 실무 작업이 진행될 듯하다.-여러 가지 일을 병행하고 있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관심 때문인가.△중고교 시절까지는 문학소년이었다. 윤동주의 ‘서시’를 암송해 칭찬을 받기도 했다.(웃음) 사실 보건학과 공학을 전공한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현실적인 문제를 감안한 아버지의 권유로 대학에선 실용적 학문을 공부했다. 그런데, 대학원에선 사회복지를 전공했으니, 결국 내가 좋아하던 분야로 돌아온 것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현재 가장 집중하고 있는 일은.△마을활동가에 중점을 찍고 있다. 매주 목요일 도시농업 전문가 과정을 공부 중이다. 협동조합과 마을기업에 관해서도 좀 더 깊이 있는 고민을 하고 싶다. 내가 꿈꾸는 건 장애인과 노인 등 소외계층이 함께 잘 살 수 있는 자생공동체마을을 만드는 것이다. 그 꿈을 이룰 기회를 흥해에서 잡은 것이라 생각한다.-바람직한 도시재생 방안은 뭔가.△외형적 재건과 문화·예술적 향유가 더불어 어우러지는 방식으로 진행돼야 한다고 믿고 있다. 어느 한쪽에만 치우쳐선 제대로 된 길로 가기 어렵다. 도시재생에 관심을 가진 기업도 적극적으로 참여시켜 경제적 기반을 만들어가야 한다.-진정한 의미의 ‘좋은 마을’이란 뭘까.△그곳에 사는 사람들 스스로가 자신이 생활하는 공간의 긍정적 가치를 알아가면서, 거기서 함께 살아갈 다음 세대를 마음 놓고 길러낼 수 있는 곳이 아닐까.-마을활동가로서 추구하는 가치는.△성별과 사회적 지위, 세대를 뛰어넘어 누구나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자신이 존중받기 위해선 먼저 남을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누구나 각자가 지향하는 최고의 가치가 있고 나름의 세계관이 있다. 그게 다를지라도 언젠가는 하나의 길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 인식이 필요하다고 본다.-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면.△마을활동가와 협동조합 일을 하며 순수해진 것 같다. 현실에서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방법을 고민하게 됐다. 성과와 실적이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시적(詩的)으로 말하자면 이제야 보는 꽃의 아름다움이 아닌 기르는 꽃의 아름다움을 알게 됐다고 할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끝

2021-05-26

코로나 종식까지 ‘한마음 한뜻으로’

‘코로나19 사태’가 야기한 고통과 그늘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현재는 코로나 백신 접종과 철저한 방역이 더욱 강조되고 있는 상황.청송군은 선제 방역과 코로나19 백신 접종률 두 가지 모두에서 합격점을 받고 있다. 아래 코로나19 극복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청송군의 사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행정력 집중해 코로나19 백신 접종률 높인 청송군청송군은 지난달 15일부터 75세 이상을 대상으로 코로나19 백신 1차 접종을 진행했다. 이에 앞서 군은 안전하고 체계적인 예방접종을 위해 철저한 준비과정을 거쳤다.접종센터 종사자의 사전교육과 접종 직후 이상 반응 모니터링까지 사전 점검을 위한 모의훈련을 가졌던 것.4월 15일 ‘청송군 코로나19 백신 예방접종센터’가 열렸고, 접종이 원활히 진행되도록 행정력을 집중했다. 청송군자원봉사센터는 봉사활동을 펼쳤다. 마을별로 전세버스를 운행해 어르신들의 안전하고 신속한 접종을 돕기도 했다.윤경희 청송군수와 공무원들은 현장에 나와 안내에 나섰다. 또한 농·축협, 청송군여성단체협의회 등의 기관과 단체 회원들도 입구 안내, 어르신 부축, 손 소독 등에 힘을 보탰다.그 결과 센터 운영은 단시간에 자리를 잡았고, 지난달 22일 대상자 4천464명 중 3천890명이 백신 접종에 동의했고, 3천776명이 접종을 마쳤다. 대상자 기준으로는 84.6%, 동의자 기준으로는 97.1%의 높은 접종률이었다. 이는 경북의 타 시·군보다 월등히 높은 수치.이에 윤 군수는 “접종에 응해 주신 주민들과 군민의 안전을 위해 현장에 참여해주신 공무원과 자원봉사자들에게 감사드린다”는 인사를 전했다.이어 이달 6일부터는 2차 접종을 시작했다. 1차 접종에서 철저한 준비와 체계적인 운영으로 코로나19 백신 접종 우수 사례로 꼽힌 청송군은 2차 접종에서도 이전의 성공적 경험을 이어갔다.1차 접종 때와 마찬가지로 2차 접종에서도 각 마을별로 전세버스를 운행해 접종자의 편의를 도모했고, 공무원들이 1:1 전담 안내에 나섰다. 군내 여러 기관의 자원 봉사활동 또한 계속됐다.이는 안전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신속하고 체계적인 백신 접종을 위해 행정력을 집중하고자 했던 청송군의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결과 코로나19 백신 2차 예방접종도 순조로웠다. 1차 접종에 이은 2차 접종에서도 우수 사례로 평가받기에 충분한 성과를 보인 것이다.◇ 어르신들의 협조와 공직자·자원봉사자의 노력이 이룬 성과2차 접종 시기에도 윤경희 군수를 비롯한 공직자들과 자원봉사자들은 비가 내리는 날에도 1:1 전담 안내를 하며 안전한 백신 접종을 위해 애썼다. 2차 접종은 13일까지 진행됐다.신속한 백신 접종을 위해 노력한 이들은 “백신 예방접종센터 운영의 최고 원칙은 안전”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런 마음가짐이 현실에서 이뤄진 것일까. 코로나19 백신 1·2차 접종을 모두 마친 결과 청송군은 경상북도에서 최상위 수준의 접종률을 기록했다.청송군의 2차 접종 대상자는 3천691명. 이중 3천547명이 접종에 동의했고, 최종 3천547명이 접종을 마쳐 대상자 기준 96.1%, 동의자 기준 100%의 접종률을 보인 것. 기대 이상의 성공이었다.1차와 2차 예방접종의 성공과 높은 접종률의 배경에는 어르신들의 적극적 참여와 공직자, 자원봉사자들의 노력이 있었다는 평가다. 이는 민·관이 한마음으로 코로나 극복에 매진한 모범적인 사례를 보여준 것으로 기록될 듯하다.이에 윤 군수는 “청송군의 백신 접종률이 높은 것은 군민 모두가 코로나19 종식을 바라는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자평했다.현재 청송군은 다음달 3일까지 만60~74세를 대상으로 하는 백신 접종 예약을 받고 있고, 의료 접근성을 고려해 안덕보건지소, 진보보건지소에서도 코로나19 백신접종을 추진할 예정이다.지난 17일에는 청송군 코로나19 예방접종센터에서 확대간부회의가 열렸다. 이날 윤경희 군수는 업무 추진에 대한 논의와 함께 코로나19 방역 및 백신 접종현장에서 땀 흘린 공직자들을 격려했다. 많이 지친 상황이지만 앞으로도 협력해 코로나를 슬기롭게 극복해나가자는 메시지였다.앞서 언급한 것처럼 청송군은 4월 15일부터 5월 13일까지 코로나19 백신 1·2차 접종을 모두 완료한 결과 경북도내 최상위 수준의 접종률을 기록했다.◇ 코로나19 선제 방역에서도 합격점 받았던 청송한편, 청송군은 코로나19 방역에도 힘을 써왔다. 경북북부제2교도소로 이감된 코로나 확진자들을 관리하는 교도관과 의료진을 위로하는 지역 농업인단체의 따스한 손길이 그 과정에서 주목받았다.청송군 농민단체협의회를 이끌고 있는 한국농업경영인 청송군연합회(회장 곽동주)와 청송사과협회(회장 우영화)는 올 초 청송사과 50박스와 사과즙 40박스를 경북북부제2교도소에 전달했다.이 두 단체는 청송군에서 회원이 가장 많은 농업인 자생조직. 이들은 교도관과 의료진이 소임을 다해 줄 것과 이감된 코로나 확진자들의 빠른 쾌유를 기원한다는 메시지도 함께 보냈다.곽동주 회장은 “엄중한 상황이니 서로 협조해 지역사회 전파 없이 코로나 상황이 종식될 수 있도록 힘을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을 전했다.우영화 회장 역시 “이감된 재소자들이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감염된 상황에서 청송군민이 따뜻하게 맞이해 주는 게 국민감정에 부합하는 것”이라는 위로의 말을 보탰다.당시 청송은 교정당국, 자생단체와의 연석회의를 진행해 코로나가 지역사회로 전파되지 않도록 모든 역량을 집중해 줄 것을 부탁했다. 더불어 다양한 방식의 모니터링을 통해 위험을 막아냈다.이외에도 청송군은 경북 군부에서 유일하게 코로나19대응 임시선별검사소 운영비 6천만 원과 코로나19대응 인센티브 1억 원 등 총 1억6천만 원의 특별교부세를 확보했다.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하기 시작하자 선제적으로 보건의료원과 해당 읍·면에 임시선별검사소 8곳을 설치·운영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확진자 37명을 조기에 찾아내는 성과도 올렸다. 코로나19가 확산되지 않도록 행정력을 동원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포함한 방역활동에 최선을 다한 것.설 명절에도 코로나19 방역을 위한 청송군의 노력은 지속됐다. 연휴 가족 모임으로 인한 감염 차단과 숨은 감염자 조기 발견을 위해 산남지역 코로나19 임시선별검사소의 운영 기간을 연장한 것이다.임시선별검사소에서는 증상 유무와 관계없이 희망하는 주민 누구나 검사를 받을 수 있었고, 특히, 감염 우려가 높은 특별 방역대책 기간인 2월 8일부터 14일까지는 운영 시간도 합리적으로 조정했다.선제적 진단 검사를 위한 보건의료원 내 워킹 스루, 드라이브 스루 방식 도입과 발생 지역에 이동선별검사소 4곳을 별도로 운영하는 등 청송군의 선제방역은 적지 않은 성과를 올린 것으로 평가된다.◇ 코로나19 사태 종식 때까지 극복 노력 지속돼야청송군은 올해 초 코로나19 예방을 위한 기초작업이라 할 수 있는 전 군민 대상 방역마스크 무료 배부도 실시했다. 이는 무증상 감염자에 의한 전파 차단과 명절 기간 수도권 인구 유입에 따른 지역 내 코로나 확산 방지를 위해서였다.그 기간 청송군은 마을 이장과 읍·면사무소 직원을 통해 KF94 방역마스크를 1인당 8장씩 배부했다. 군은 이미 코로나19 발생 초기에도 군민들에게 마스크를 1차 배부한 적이 있다.이처럼 청송군은 코로나19 방역과 백신 접종에서 모범을 보이고 있다. 윤 군수는 “어떤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코로나19 사태가 종식될 시점까지 청송군의 코로나19 극복 노력은 지속될 것이 분명하다./김종철·홍성식기자

2021-05-25

널리 이로운 세상을 펼치다

조선시대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전남 강진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며 여유당전서 500여 권을 집필했다. 다산으로 하여금 유배지의 길고 긴 외로움과 고통을 견디며 집필 활동을 할 수 있게 해준 것이 바로 차(茶)였다. 다산이 살았던 초당 가까이에 백련사가 있었다. 그 백련사에 다산을 다도의 길로 인도한 혜장선사가 있었다. 두 사람은 차 동무가 되어 함께 차를 마시며 주역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혜장선사는 다산으로 하여금 길고 긴 유배의 외로움을 견디며 집필활동에 전념할 수 있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팔공산 자락에 보이차를 연구하시는 분이 있다고 해서 찾아 나섰다. 차방의 문을 밀고 들어가자 옹기종기 놓여 있는 다기가 눈길을 끌었다. 말갛게 머리를 깎은 여승이 두 손을 합장하며 맞아주었다. 그녀는 부처님에 귀의한 스님이 아니라 차에 온 생을 맡긴 사람이었다. 말갛게 깎은 머리와 잿빛 승복이 어떤 마음으로 차 생활에 임하는지 알게 해주었다. 김경순 위원에게 보이차의 정의가 뭐냐고 물으니 햇볕에 말린 운남대엽종 쇄청차를 건조와 증압을 거쳐 자연 발효한 차라고 한다. 마주앉기 바쁘게 물 끓는 소리가 들리고, 김 위원이 흰색 다기에 갈색차를 따라주었다. 그 갈색이 바로 체지방 흡수를 막아주는 갈산지방이라던가.“차를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예요?”“사십아홉 살인가? 차를 제대로 알고 싶어서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어요.”김 위원이 원광대 차문화학과에 진학한 것이 49세 때였다고 한다. 비교적 늦은 출발이었지만 흔한 말로 그녀에게는 나이가 숫자에 불과했고, 오래 마음에 품었던 염원을 향해 거침없는 발길을 내딛었다. 차 문화를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 석사 박사 과정을 거친 후 다학연구소의 연구위원이 되기까지 운남성 6대 차산지를 빠짐없이 찾아다니며 대설산, 양패, 용춘, 명랑, 반잡, 승강, 반잡 등의 품질 좋은 고수차를 만들기에 온 시간을 다 바쳤다. 모차를 사서 자신만의 브랜드로 만들어서 ‘홍익차문화연구중심 고수순록’으로 완성시킨 것이 2014년이라며 그날의 감회를 돌아보는 듯 그녀는 시선을 멀리 둔다.“보이차도 종류가 다양할 텐데요.”“운남성 보이차의 조례법 품평사에 의하면, 운남성에서 생산되어야 하고, 대엽차 고수차여야 하고, 햇볕에 말려야 진짜 보이차라고 합니다.”보이차의 네 가지 진위판별법을 보면 생산 원료를 속인다거나, 대엽종 고수차가 아닌 밭차를 사용한다거나, 생차를 자연 발효시키지 않고 반생 반숙 같은 악퇴법으로 빨리 발효시킨다거나, 발효 방법을 속이고 저장날짜를 속이는 것은 모두 가짜라고 못을 박는다. 가장 중요한 것이 차의 저장 날짜인데, 압병한 차에 발효한 날짜를 정확하게 기록해야 하고, 차를 사는 사람도 4월 20일 전에 딴 것으로 골라야 진짜 보이차를 마실 수 있다며, 차 정보를 정확하게 읽어야 한다고 재삼 강조했다.“좋은 차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좋은 차는 잎 모양이 균일하고 흑갈색의 색상과 윤기를 유지하고 있어요.”차 품평사가 해야 할 일이 바로 좋은 차를 널리 알게 해주는 것이라며, 김 위원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차를 마시도록 돕기 위해 영상 강의로 진짜 차와 가짜 차의 분별법을 일러준다고 한다. 흔히 골동경매에서 산 싸구려 차를 보이차라고 선물로 주는 현실이 너무 황당해서 유튜브 강의로 보이차 진위 판별 4계명을 목이 아프게 설명한다며, 자신이 먹지 않는 차를 선물로도 주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선물은 귀한 사람에게 주는 귀한 마음이라며, 나쁜 차를 선물할 거면 차라리 참외를 사가는 게 낫다며, 나쁜 차를 진짜인 것처럼 속이면 안된다고. 예를 들어서 생산일 12월12일 채취했다고 표기되어 있다면 그것은 제대로 된 차가 아니라 가지치기로 만든 독이라고 한다. 그런 차는 먹어서도 안되고 선물로 줘서도 안된다고.“녹차와 보이차의 차이를 말해주세요.”“녹차와 보이차는 발효과정으로 구분됩니다. 녹차가 잎을 따는 즉시 솥에 덖어서 발효가 안되게 하는 덖음차라면 보이차는 잎을 말려 효소발효시키는 것이 녹차와 다르다고 보면 됩니다.”그러면서 김 위원은 물의 온도와 다례법의 차이에서도 구별된다고 한다. 녹차를 쪄서 증차로 만들면 물 온도 80도로 우려도 되지만, 우리나라는 녹차를 솥에 덖어서 만들기 때문에 잎차에 카페인이 그대로 남을 수밖에 없다. 녹차 다례법을 보면 차를 우려낼 때 다완에 부어서 일차적으로 물을 부어서 식힌 다음에 붓기 때문에 카페인이 그대로 남지만, 100도 이상의 온도로 끓인 보이차는 카페인으로 인해 밤에 잠 못 드는 법은 없다고 한다. 김 위원은 중국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사온 모차를 엄격한 공정 과정을 거쳐 ‘홍익고수보이차’라는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어냈다.찻잎을 딸 때 차청이 맑은 것을 선택해야 한다. 누렇게 변한 잎이 많으면 거칠고 찻잎이 맑지 않다. 좋은 차를 마시기 위해서는 찻잎이 까맣게 발효한 대엽차의 맑고 크고 균일한 잎을 판별할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한다. 고수 보이차 나무는 아주 큰 나무다. 녹차나무는 관목이라 나무가 작다. 중국의 동백나무라고 하는 차나무 ‘카멜리아 시넨신스’는 기후에 따라서 다르게 자란다. 대엽종과 중엽종, 소엽종, 변의종이 있다. 소엽종에서 딴 잎차는 생차가 되고 대엽종에서 딴 잎차만 보이차라고 운남 조례법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엽종이 잘 자라지 않고 찻잎이 소엽종이어서 초청 녹차만 생산될 뿐, 보이차를 만들지 못한다. 그 대신 우전 녹차는 보이차보다 비싸다. 중국에는 500년 된 고수차나무가 있고, 기네스북에 오른 수령 2천700년 된 나무도 있다. 오래된 나무에서 딴 잎만 모은 것을 ‘단주’라고 하는데, 그런 차의 가치는 돈으로 따질 수 없다고 한다.“보이차의 좋은 점이 뭐예요?”“첫째 보이차는 물을 많이 마실 수 있어요.”갈색으로 변한 차의 갈산성분이 체지방의 흡수를 막아줘서 지방흡수를 도와주고, 다이어트 식품으로서의 효과를 발휘한다. 카테킨과 펩틴은 변비를 막아주고 핏속의 콜레스테롤을 막아서 피를 맑게 해준다. 폴리페놀 성분이 염증발생 억제, 암 발생을 막아주는가 하면 탄닌의 떫은 성분은 철분을 함유하고 있어서 피로회복을 도와주기도 한다. 카페인을 많이 먹으면 심장이 뛰는데 데아민이 이를 억제해주는 길항작용을 하기 때문에 마음이 평온해져서 피로회복에 도움이 된다. 보이차를 왜 그렇게 좋아하느냐고 물으니 오래된 차나무에서 딴 잎을 오래도록 보관할 수 있어서 좋다고 한다.2003년도 보이차 매장을 열던 해에 맹해 차장 하던 사람에게서 차를 산 뒤 차방을 열었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무모한 시절이었다고 지난 시간을 회상했다. 차를 제대로 알기 위해 힘들게 공부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차방을 열 수 있었고, 대설산 차산지에 가서 직접 찻잎을 사서 정통방식의 발효과정을 거쳐 ‘홍익고수보이차’ 라는 자신만의 브랜드를 갖게 되었다고 감회 어린 시선으로 차방을 둘러본다.‘삼국지’에 유비가, 적군에게 100년 된 차를 빼앗길 뻔한 지경에 이르자 옹기에 차를 넣어 물에 띄워 지켰다는 내용이 있다며, 100년 된 보이차는 죽은 사람도 살리는 기운을 가졌다고 한다. 또한 보이차는 눈병도 치료해준다며, 제갈공명이 운남성 차산지를 지나다 병사들의 눈병을 낫게 해준 이야기를 해준다. 제갈공명이 고대 6대 차산지를 지나치다 지팡이를 꽂았더니 큰 차나무가 자랐는데 그 잎을 따서 달여 먹게 했더니 병사들의 눈병이 나았다는 얘기였다. 그 찻잎이 바로 오늘의 보이차라고. 그런 연유로 김 위원은 한국차연합회에서 제갈공명의 옷과 모자를 쓰고 차 자리에 참석해서 시연한 적이 있다며, 그날 사람들이 공감해줘서 기쁘고 즐거웠다고 지난 시간을 추억했다.차를 마시는 이유가 뭘까?김 위원은 ‘홍익’이라는 이름대로 널리 이로운 세상을 펼친다는 의미를 언급하며 함께 마시고, 함께 건강하고, 함께 행복하기 위해서 약용 효과를 지니고 있는 차를 즐겨 마시는 거라며, 사람들이 차를 마시는 것은 함께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정의를 내렸다. /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1-05-25

“제상에 굵은 고기 쓰는 건 자손 크게 되게 해달란 뜻이지”

오늘 영일만은 망망하고 흐리다. 바다는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공포의 대상이다. 그런데 어째서 바다를 보면 안도감이 들까? 바다가 무서워 배 타는 것도 겁내면서 정작 바다를 바라보는 것은 좋아한다. 바다를 통해 위안을 얻는다. 어째서 그럴까? 우리는 모두 바다에서 왔기 때문이다. 우리들 모두가 어미에게서 왔듯이. 우리 육상 생명들의 기원은 바다다. 그래서 우리의 기원을 알려주는 비밀이 어떤 언어권의 문자에는 뚜렷이 남아 있다. 한자어 바다(海)에는 어미(母)가 들어 있고, 프랑스어 ‘어머니(m00E8re)’에는 ‘바다(mer)’가 깃들어 있다. 우연일 리가 없다. 필연이다. 바다는 어머니고 어머니는 곧 바다다. 바다처럼 모든 것을 다 받아주는 어머니. 어머니처럼 모든 것을 다 받아주는 바다.포항에서는 대물 어류들이 자주 밥상에 올라와우리는 어느 때부터인가 바다에 대한 막연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지만 실상 바다는 우리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주는 어머니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먹이를 주는 자애로운 어머니. 우리가 오만하지만 않으면 바다는 우리를 징벌하지 않는다. 오늘도 죽도시장에는 온갖 해산물들이 넘쳐난다. 이토록 풍요로운 먹거리들은 어디서 왔을까? 바다에서 왔다. 어머니 바다의 선물이다. 고래부터 멸치까지 바다에서 나는 수산물 중 죽도시장에 없는 것은 대한민국 어느 시장에도 없다. 경북 지방의 제수음식 중 가장 특별한 생선 요리인 돔배기도 영천과 함께 죽도시장이 본향이다. 돔배기는 경상도 전체의 보편적 음식은 아니다. 대구, 포항, 영천, 경주 등의 경북도 동남부 지방과 안동 등 북부 지방 일부, 부산, 울산 지역에서 주로 먹는다.실상 도시 사람들에게 상어 요리는 결코 흔한 음식이 아니다. 상어라면 먼저 식인 상어를 떠올리는 사람들에게 상어 요리는 상상이 쉽지 않은 음식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경북 지방의 상어 요리인 돔배기가 유명하지만 실상 전라도 해안이나 섬 지방에서도 상어를 즐겨 먹는다. 남해안 섬에 살았던 나는 상어 요리를 자주 먹고 자랐다. 죽상어(까치상어)는 회나 무침으로 많이 먹었고 말려서 포로도 먹었다. ‘부전’이라 부르던 상어 알은 쪄서 간식으로 즐겼다. 전대미(개상어)라는 아주 작은 상어는 회무침으로도 먹었지만 내장을 탕으로 끓이면 별미 중의 별미였다. 어른 몸보다 큰 대형 상어도 잔치 음식으로 즐겨 사용했다.동해라는 큰 바다에 인접한 포항 지역에는 유난히 대물 어류들이 자주 밥상에 오른다. 고래부터 상어, 개복치도 모두 대물이다. 게다가 서남해와는 달리 문어 또한 대왕문어를 참문어로 쳐줄 정도로 대물이 대접받는다. 상어를 먹는 문화가 보편화된 것도 동해라는 큰 바다가 있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포항 지역 어민들은 동해 먼바다로 나가 가오리를 미끼로 상어를 잡았다. 8월 전후에 상어가 가장 많이 잡혔다.돔배기, 토막 내서 염장한 상어의 살코기포항 지방에서 돔배기는 명절이나 제사 모실 때 빠지지 않는 제수 음식이다. “제상에 굵은 고기 쓰는 건 자손들 크게 되게 해달라는 뜻이지. 소고기 올리듯이. 돔배기도 올리는 거요.” 죽도시장에서 만난 돔배기 상인 김차봉 할머니 말씀이다. 할머니는 한자리에 앉아 40년 동안 돔배기를 손질해 팔아왔다.돔배기는 토막 내서 염장한 상어의 살코기다. 주로 꼬치에 꿰어 굽거나 쪄서 조리해 먹는다. 기름기가 거의 없어서 맛이 담백하고 비린내도 없다. 하지만 더 맛있게 먹는 법이 있다. 소 갈빗살에 양념하듯이 양념을 만들어 돔배기에 바른 뒤 굽거나 찐다. 명절이나 제사 때 돔배기 산적을 만들어 쓰고 남은 것은 소금 간을 더 강하게 해서 절였다가 두고두고 반찬으로 먹기도 한다. 염장된 상어는 물에 담가 소금기를 뺀 뒤 쪄서 반찬으로 먹는다. 해안가 마을에서는 잔치집에서도 상어 고기를 썼다. 비싼 소는 잡을 수 없으니 큰 고기인 상어를 썼던 것이다.돔배기용 상어는 워낙 큰 물고기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통 마리로 살 일이 없었다. 그래서 판매점에서도 작게 토막 내서 팔았다. 돔박돔박 네모나게 토막을 내서 파는 물고기라 해서 돔배기란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상어의 살은 돔배기뿐만 아니라 탕의 재료로도 쓰인다. 상어 중에서도 귀상어와 청상아리, 참상어, 악상어(준달이)만이 돔배기로 만들어진다. 청상아리는 고기가 부드럽고, 참상어는 감칠맛이 난다. 귀상어의 살은 검붉고 어두운 색이지만 청상아리는 살색이 밝고 붉은빛이다. 귀상어가 그중 가장 귀하게 대접받아 값도 비싸다. 청상아리는 모노상어, 귀상어는 양제기(양지)라고도 부른다. 청상아리는 돌고래만큼이나 커서 살이 많으니 돔배기의 재료로 적당하다.돔배기는 숙성 정도에 따라 맛이 다르다. 계절에 따라 절이는 소금의 양도 다르고 숙성 기간도 다르다. 담백하고 밋밋한 돔배기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소금 간과 시간이 만들어내는 숙성의 맛이다. 옛날에는 상어를 토막 내고 간을 한 후 2~3개월 정도 숙성된 것을 돔배기라 했다. 굴비와 비슷한 정도의 기간을 숙성시킨 것이다. 하지만 요즈음은 상어를 냉동으로 쓰는 까닭에 미리 염장하지 않고 손님이 구매를 하면 그때 염장해 준다. 그래서 숙성 기간이 짧다. 겨울에는 3~4일, 여름에는 1~2일 정도 실온에서 숙성시킨 다음 물에 깨끗이 씻어서 하루쯤 말린다. 그렇게 꼬들꼬들해진 돔배기를 요리해 상에 올린다.본래의 돔배기 맛과는 조금 다르게 변화한 셈이다. 음식 문화는 조건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니 가공 방법이 조금 달라졌다 해서 변질됐다고 할 수는 없다. 명절이나 제사, 잔치 뒤끝에 남은 돔배기는 껍질과 함께 잘게 썰어서 야채, 소고기 등을 첨가해 탕을 끓여 먹기도 한다. 돔배기에는 콜라겐과 펩타이드 성분이 많아 성인병에 좋다고 한다. 단백질이 많고 지방이 적은 건강식품이기도 하다. 한의학에서는 상어를 ‘교어(鮫魚)’라 하는데 오장을 보하는 효능이 있으며, 특히 간과 폐, 피부 질환이나 눈병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북한 지역에서도 상어 지느러미 완자찜이나 철갑상어찜 같은 상어를 이용한 다양한 요리가 발달했다. 제주도 사람들도 무채를 썰어 넣고 별상어(개상어, 두툽상어)회, 무침을 즐긴다. 상어의 껍질을 벗겨 머리와 뼈를 발라낸 다음 소금을 약간 뿌려 꾸덕꾸덕하게 말렸다가 굽는 상어 산적(상어 적갈)도 제주 향토 음식이다. 경북 경산에서는 상어 초무침 요리도 즐긴다.지질학 기록에 따르면 상어는 데본기(3억 6000만~4억 800만 년)에 탄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적으로 상어는 200~250여 종이 서식하고 있다. 청새리상어(Prionace)나 백상어, 레몬상어 같은 이름은 상어의 색에서 유래된 것이다. 상어는 더러 동족도 잡아먹는다. 상처를 입어 피가 나는 상어가 있을 때는 상어 떼가 공격하여 잡아먹는 무자비한 어류다. 사람 또한 바다에서는 그저 상어의 먹잇감에 불과하다.두치, 식용 상어의 부산물로 만들어돔배기가 주로 의례용 상어 요리라면 또 다른 상어 요리인 두치는 주당들이 사랑하는 안줏감이다. 두치는 돔배기를 만들고 난 부산물로 만드는데 이것이야말로 진짜다. 두치는 상어 지느러미와 껍질, 연골, 머리 등에 고명을 넣고 돼지고기 편육처럼 눌러서 만든다. 전남 목포 등지에서는 홍어 부산물을 편육처럼 눌러서 만들기도 하는데 두치와 형태가 비슷하다. 서해안에서 박대 껍질로 만드는 벌버리묵도 같은 계통의 음식이라 할 수 있다. 포항에서는 두치, 영천에서는 두투머리라 한다. 두치는 식감이 최고다. 쫄깃한 식감에 약간의 삭힌 맛이 더해서 아주 특별한 맛이 된다. 더러 끓여서 묵으로 만들기도 한다.중국에서는 상어 지느러미만 주로 먹는다. 중국에서는 그 귀하다는 샥스핀과 비슷한 요리가 죽도시장에서는 아주 저렴한 가격에 팔려 나간다. 일본에서는 일부 내륙 지방에서만 상어를 먹고 대부분은 어묵 재료로 쓰인다. 샥스핀(shark‘s fin)은 대형 상어의 꼬리와 등지느러미를 건조시킨 것인데, 중국어로는 위츠(魚翅)라 한다. 샥스핀으로 끓인 위츠탕(상어 지느러미탕)은 제비집 요리와 함께 최고의 중국 요리 중 하나로 꼽힌다. 명나라 때 탄생한 샥스핀 요리는 황실 요리가 발달했던 청나라 시대 이후 중국의 대표적인 고급 요리가 됐다. 황실이나 귀족들만 먹었던 샥스핀이 현대에 와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상어 포획량이 급격히 증가했다. 하지만 상어의 몸은 상품성이 없는 까닭에 상어 포획 과정에서 지느러미만 잘라내고 몸체는 버려서 죽게 만드는 잔인성이 문제가 돼 점차 금기 음식이 되고 있다.상어의 살은 돔배기로 먹고 남은 부산물인 지느러미로 만들어 먹는 두치는 다르다. 식용 상어의 부산물로 만드는 것이니 탓할 일이 아니다. 멸종 위기 종이나 불법 포획이 아닌 식용 상어의 부산물로 만드는 까닭에 도덕적 비난을 받을 이유가 없는 향토 음식 문화다. 중국의 샥스핀을 대체할 만한 뛰어난 요리, 숨겨진 보물이 포항에 있다.글·사진 / 강제윤 시인·(사)섬연구소 소장

2021-05-24

지역의 특색을 ‘인구 데드크로스’ 극복 해법으로

◇인구데드크로스에 살길 찾는 지방자치단체2020년 우리나라는 인구 데드크로스(Dead Cross)에 접어들었다. 사망자 수가 출생자 수를 앞지르는 ‘인구 마이너스’ 현상이 당초 예상보다 9년이나 앞당겨져 나타났다. 오래전부터 예견됐던 인구 감소 및 지역 소멸 위기가 어느새 피부로 와닿을 만큼 현안으로 다가오면서, 전국의 모든 지방자치단체들은 지금 이순간까지도 ‘사람 모시기’ 정책 마련을 위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지자체들이 인구 수를 늘이기 위해 선택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특색있는 인구 정책을 수립, 수행하면서 타 지자체의 인구를 끌어오는 방법과 지자체 내에서 출산을 장려해 출산율을 높이는 방법이다. 전자는 지자체간 출혈 경쟁이 불가피하지만 성공한다면 단기적으로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사실상 대부분의 지자체들이 인구 정책의 최우선으로 선택하고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주소이전지원금이나 종량제봉투 지급 등 인센티브를 지원하는 게 대표적이다. 출산율이 높더라도 진학 또는 일자리, 기타 등등의 이유로 본적(本籍)을 떠나는 이들이 적잖기 때문에 지자체들은 대체로 후자보다는 전자를 선호한다.◇결혼과 출산으로 인구 잡는다 경남 창원시인구가 100만이 넘는 대도시인 창원시가 발표한 인구 정책에 한때 세간의 시선이 집중됐다. 올해 1월 창원시는 인구 유입의 한 방법으로 결혼드림론(Dream loan)을 소개했다. 경제적 사정으로 결혼을 망설이는 미래세대를 위한 획기적인 지원으로 결혼과 양육 부담을 경감, 도시로 인구를 유입시키기 위해 마련한 방편이었다.보건복지부와 금융기관 등과의 협의를 통해 창원에 주소를 둔 남녀가 결혼을 하게 되면 최대 1억원의 목돈을 저리로 대출해주고, 이들이 자녀를 출산하면 단계적으로 이자와 원금 상환까지 지원한다. 첫째를 낳으면 이자 면제, 둘째 출산 시에는 대출 원금의 30%, 셋째 아이를 낳으면 1억원의 대출금을 모두 갚아주는 식이다.예산 과다 지출 등을 포함한 부작용과 제도 악용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으나, 현재 타당성 연구 용역 결과를 바탕으로 계획을 수립 중인 창원시는 시민 의견 수렴 이후 올해 말까지 해당 사업을 확정지은 뒤 내년 초 공고, 하반기에 시행하기로 목표를 잡고 있다.창원시 관계자는 “내부 수립중이었던 내용이 언론에 나가면서 이슈가 됐는데 그대로 시행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아직 정해진 건 없고, 보완작업을 거쳐 내년 하반기에 시행하는 게 현재로써는 목표”라고 밝혔다.◇경북도 내 최초 인구정책과 설립한 영천시경북도에서는 영천의 소식이 ‘핫(Hot)’하다. 지난 3일 영천시는 4월말 기준 인구 수가 10만 2천529명으로, 2011년 이후 10여년만에 최대 인구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지난 2011년말 기준 10만 4천182명이었던 영천시 인구는 해마다 감소해 2018년 7월말 10만 186명까지 줄어들었다.인구 10만명선 붕괴라는 초유의 위기를 영천시는 경북도내 최초로 인구정책과를 신설해 대응했다. 우선 실제로 영천시에 거주하지만 전입신고를 하지 않은 직업군인이나 군무원들이 전입하게 되면 전입지원금 20만원과 생활지원금 30만원을 지급하고, 초·중·고·대학생이 영천시에 전입신고를 하면 역시나 전입지원금 20만원에 기숙사비(주택임차료)를 한 학기당 20만원씩 주기로 했다. 또 전입유공지원금 제도를 마련해 개인에게는 1명당 5만원, 기관이나 기업에게는 50만원부터 최대 1천만원까지 지원하기로 하는 등 참여를 적극 독려했다.추가로 영천∼대구 간 대중교통 환승시스템 도입 및 복선 전철사업, e-편한 세상 입주 등 정주여건이 개선되면서 복잡적으로 작용, 감소세였던 인구가 증가세로 돌아섰다. 행정조직을 개편, 도시의 인구 정책 및 관련 사업을 역점적으로 추진한 점이 큰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최기문 영천시장은 “대구도시철도 1호선 영천경마공원(금호) 연장 등 중·장기 대책과 전입시민 지원 등 단기 대책을 병행해 인구가 계속 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지역 특색 살려 인구 모시기 나선 강원도 양양군강원도 내에서는 양양군의 사례가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인구 수가 3만명이 채 안되는 양양군은 천혜의 자연환경을 활용해 도시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데 주력하고 있다.국내 서핑 1번지 양양군에는 연간 50만명에 달하는 서핑 관광객들이 몰리는 것으로 추산된다. 양양군은 지난 2019년 서핑해양레저 특화지구 조성사업을 추진했다. 서핑해변 14곳에 편의시설을 구축하거나 양양군과 서핑을 접목한 캐릭터 제작, 서핑라운지와 전망 데크 조성 서핑지상연습시설과 코인샤워장, 서핑보드 거치대 등을 설치한다. 수십만의 서퍼 및 관광객들의 편의를 증진시키기 위한 방편이다. 아울러 서핑을 중심으로 주변 관광지와 먹거리를 연계하는 등의 활동도 지자체가 역점적으로 진행하는 중이다.이러한 노력은 조금씩 결실을 맺고 있다. 지방 소멸 등의 위기 속에서도 양양군의 인구는 오히려 늘고 있다. 강릉이나 고성 등 강원도내 다른 시·군에서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양양군의 인구는 늘었다는 게 상징적이다. 지난 5년 동안 강릉에서는 1천명이, 고성군에서는 4천명에 가까운 인구가 감소한 것과 대조적으로 양양군의 인구는 700명이 넘게 늘었다. 도시의 이미지를 확립하면서 인구 감소세가 꺾여 상승곡선을 타게 됐다.특히, 도시가 갖고 있는 장점을 최대한으로 살리면서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의 ‘니즈(needs)’를 충족시키는 전략적인 접근은, 일과 삶의 균형인 ‘워라밸(Work-Life Balance)’을 중시하는 젊은이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자연 환경에 더해 정부의 투자와 지역의 특색을 강조한 지자체의 차별화 정책이 긍정적인 효과를 보고 있는 대표 사례로 소개되고 있다./이바름기자 bareum90@kbmaeil.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1-05-23

잡을 수 없어 더욱 애달픈 사랑의 맛

포항 죽도시장 고래고깃집에 앉아 낮술을 마신다. 2021년 5월 13일, 이 고래고기 노포에서는 고래고기를 부위별로 담아 모듬 수육으로 포장 판매하고 있다. 한 접시에 3만 원, 5만 원, 7만 원 등 세 종류다. 3만 원짜리 한 접시면 두 사람이 술 몇 병 마시기에 부족함이 없다. 다른 지역에 비해 가격이 월등히 싸 부담스럽지 않다. 고래고기 접시에는 뱃살, 갈빗살, 꼬리살, 옆구리 살, 간, 허파까지 고루고루 담겨 있다. 소고기처럼 부위마다 맛이 다 다르다. 그래도 역시 가장 맛있는 부위는 뱃살이다. 고래고기 한 접시에 거나해지고 말았다. 여행자에게 이런 호사가 또 있을까. 러일전쟁 이후 구룡포 등지에서 고래고기 먹는 문화 확산이 땅에서는 선사시대부터 고래잡이가 있었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는 고래잡이배와 포경 도구들이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7000년 전 신석기인들 중에 고래잡이를 전문으로 하는 해양 수렵 집단이 존재했다는 뜻이다. 암각화에는 북방긴수염고래, 혹등고래, 귀신고래와 범고래, 참돌고래 등이 등장한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작살을 쏴서 이런 대형 고래를 사냥했다는 증거다. ‘삼국사기’에도 고래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동해인(東海人) 고주리(高朱利)가 고래 눈을 왕에게 바쳤는데 밤에도 빛이 났다.”고구려 민중왕 4년, 서기 47년2020년 10월 국립중앙박물관의 재발굴 결과 경주 서봉총에서 신라 왕족의 제사 음식이 다량 확인됐다. 어류에는 청어, 방어 같은 흔한 생선은 물론이고 성게알, 복어와 돌고래의 유체까지 나왔다. 신라시대에도 고래고기를 먹었다는 증거다. 고려, 조선시대의 기록에도 고래에 대한 기록이 간간이 남아 있지만 선사시대처럼 포경업을 전문으로 하는 어로 집단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죽은 고래가 밀려오면 수습해서 사용하는 정도였다. 그래서 손암 정약전도 ‘자산어보’에서 죽어서 떠내려온 고래를 “삶아서 기름을 내고, 눈은 술잔을 만들고, 수염으로는 자를 만들고, 그 척추를 자르면 절구를 만들 수 있다”고 기록했다.근대 유럽, 미국 등은 기름을 얻기 위해, 또 일본은 식용 고래잡이를 했던 것과 달리 조선시대 말까지도 우리 조상들은 상업적 포경을 하지 않았다. 서양에서 고래잡이 산업이 급성장한 것은 급격한 산업화로 기름 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1850년대 북극 큰고래 한 마리에서 뽑아낸 고래기름은 275배럴이었다. 참고래 한 마리에서도 평균 130배럴의 기름을 얻을 수 있었다. 한반도 부근에서 포경이 합법화된 것은 1899년 고종이 러시아 포경업자에게 동해안의 포경을 허가해 준 때부터였다.“러시아인 헨리 게제린그에게 경상도 울산포, 강원도 장진포, 함경도 진포도를 고래잡이 근거지로 허락해 주었다.” ‘고종 실록’ 1889년 3월 29일자물론 이전에도 동해에서 외국 포경선들의 고래잡이가 있었다. 1849년 한 해 동안 최소 130척의 미국 포경선이 동해에서 고래잡이를 했다. 조선 정부는 1900년 2월 ‘일본원양어업회사’에도 포경 허가를 내주었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일본은 한반도 근해의 포경업을 독점했다. 이 무렵부터 장생포, 구룡포, 서귀포, 흑산도, 어청도, 대청도 등 포경업 전진기지를 중심으로 고래고기를 먹는 문화도 확산됐다. 1903년부터 1944년까지 한반도 근해에서 일본 포경선이 잡은 대형 고래만 8천259마리다. 공식 기록된 것이 그러하니 실상은 그보다 더 많은 대형 고래가 포획됐을 것이다. 일제 포경선에 의해 한반도 해역의 대형 고래는 씨가 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열두 가지 맛이 난다는 고래고기1921년 4월 27일자 ‘매일신보’는 “조선의 경업(고래잡이)은 11월부터 익년 4월 말일까지 반년간에 했어도 항상 200두의 산획(産獲)을 유지한바, 산지는 주로 대흑산도, 대청도, 울산 전진이다”라고 전한다. 포획된 고래는 “모두 곧 배 안에서 처리되어 고기, 기름, 냉동 간장(冷凍肝臟), 증골(蒸骨) 등 광범위로 남김없이 이용”된다고 보도하고 있다. 포경선이 잡은 고래들은 위 기사처럼 배 안에서 처리되기도 했지만, 각지의 포경 근거지로 옮겨져 공장에서 가공 처리돼 대부분 일본으로 보내졌고 일부는 지역에서 유통됐다.해방 후에도 한국의 바다에서는 한동안 고래잡이가 이어졌다. 하지만 무분별한 고래 남획으로 세계적으로 고래의 개체수가 줄어들자 1946년 국제포경위원회가 만들어져 규제에 나섰다. 국제포경위원회는 본래 전면적인 포경 금지가 아니라 적절하게 고래 수를 관리해 고래잡이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됐지만 고래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자 1986년부터 상업적 포경을 전면적으로 금지시켰다. 포항 지역의 고래잡이는 구룡포 강두수의 해승호가 1951년 12월 20일 제 1호 허가를 얻으며 시작됐다. 이때부터 구룡포항은 정부 시책에 따라 고래잡이 항으로 육성되었고 1977∼1978년에 최고의 어획고를 올렸다. 하지만 1980년을 고비로 고래 어획이 급감했다. 한국에서는 혼획된 고래들만 식탁에 오를 수 있다.2019년 기준 한국 연안에서 혼획된 고래는 1천960마리였다. 상괭이 1천430마리, 돌고래 374마리, 낫돌고래 71마리, 밍크고래 63마리였다. 혼획은 그물에 우연히 걸려들거나 죽은 사체가 떠밀려 와 잡힌 경우를 말한다. 고의로 잡은 흔적이 없으면 혼획한 자가 고래를 유통 판매할 수 있도록 해경에서 허가해 준다. 포경 금지에도 고래고기 문화가 지속될 수 있는 이유다. 다만 상괭이 등 보호 대상 10종의 사체는 유통이 금지된다. 보호종이 아닌 밍크고래 등은 경매를 통해 유통된다. 하지만 혼획이 지나치게 많아 혼획된 고래라도 유통은 일정한 수로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고래고기는 열두 가지 맛이 있다고 한다. 같은 포유류인 소고기와 맛이 비슷하다. 부위에 따라 날것으로도 먹거나 익혀서 먹는다. 회, 수육, 육회, 초밥, 튀김, 찌개, 두루치기, 전골 등 조리법도 다양하다. 고래기름은 연료뿐만 아니라 화장품, 비누의 원료로 사용됐다. 고래수염은 유럽 여성의 속옷인 코르셋을 만들기도 했다. 향유고래 배설물인 용연향은 최고의 향수 재료다. 고래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살코기뿐만 아니라 껍질, 갈비, 혓바닥, 창자, 콩팥, 염통, 눈, 허파 등 고래의 내장과 부산물도 삶아서 수육으로 먹는다. 일본 문화의 영향 탓에 아직도 고래고기 부위는 일본식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고래 꼬리 1.5∼2m 사이의 붉은 살코기를 두툼하게 썰어 회로 먹는 것은 막찍기라 한다. 고래 꼬리를 소금에 절였다가 뜨거운 물에 데쳐서 썰어 먹는 것은 오배기다. 최고급 부위인 뱃살은 삼겹살처럼 보이는데 회로 먹기도 하고 삶아 먹기도 한다. 이것은 우네다. 꼬리살 바로 윗부분은 마블링이 좋아 최상급으로 여겨진다. 오노미다.한국, 일본뿐만 아니라 고래고기는 북극의 에스키모와 노르웨이에서도 즐겨 먹었다. 고래는 소고기 요리와 거의 흡사한 조리법으로 요리해 먹었다. 고래가 흔하던 시절에는 무를 썰어 넣고 고래 국을 끓였다. 그대로 소고기 뭇국 맛이었다. 고래 불고기, 전골, 두루치기 등도 소고기 대용의 요리였다. 소고기보다 고래고기가 흔하던 시절 이야기다. 지금은 고가의 최고급 요리가 됐다. 가격은 비싸도 고래고기는 중독되면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매력적이다. 잡을 수 없어 더 애달프게 만드는 맛, 고래는 애달픈 사랑의 맛이다. 포항에서 큰일 치를 때 내놓는 개복치개복치는 몸길이 2∼4m, 몸무게가 최대 2t까지 나가는 거대한 물고기다. 개복치는 가장 많은 알을 낳는 물고기이기도 하다. 한 번 산란에 무려 3억 개가량의 알을 낳는다. 성체가 된 개복치는 범고래, 백상아리 등을 제외하면 천적이 없다. 하지만 3억 개 알 중 성체가 되는 개체는 한두 마리에 불과하다. 개복치가 얼마나 귀한 물고기인지 알 수 있는 척도다. 개복치의 학명은 ‘Mola mola’, 라틴어로 맷돌을 뜻한다. 한국에서는 안진복, 골복짱, 깨복짱이라고도 하는데 복어목의 한 종이다. 개복치도 상어처럼 지느러미가 더 별미다. 중국에서는 등쪽의 흰 창자를 용창이라 해서 귀하게 여긴다.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하루 수십 마리씩 잡혀 죽도시장으로 들어왔던 대형 개복치가 요즘은 하루 한두 마리 보기도 어렵다. 수온 변화 등이 원인으로 짐작된다. 개복치는 흔한 생선이 아니라서 일반인들이 쉽게 접하기도 어렵고 맛을 본 사람도 드물다. 하지만 포항에서는 옛날부터 개복치 요리를 즐겨 먹는 풍습이 있었다. 그것이 여전히 이어져 죽도시장에는 개복치를 취급하는 상점이 여럿이다. 대부분은 삶아서 직접 먹을 수 있게 유통된다. 개복치 살은 그대로 콜라겐 덩어리다. 개복치 살은 잘라도 붉은 피가 흐르지 않고 우유 빛깔이다. 네모나게 잘라놓으면 영락없이 묵이나 두부처럼 보인다. 개복치는 몸집이 워낙 커서 고래를 해체하듯 긴 칼을 들고 자른다. 먼저 지느러미부터 잘라내고 뱃살, 옆구리 살, 몸통, 머리 순서로 차례차례 잘라 나간다. 살은 부드러워 슬슬 쉽게 잘라진다. 잘라낸 개복치 살은 껍질을 벗기고 이물질을 제거해서 깨끗이 손질한다.적당한 크기로 잘라낸 개복치 살은 펄펄 끓는 가마솥에 넣어서 삶는다. 삶은 개복치 살은 다른 조리 없이 작게 잘라서 양념장이나 초장에 찍어 먹으면 된다. 맛은 야들야들 탱글탱글 곤약보다 쫄깃하다. 살 자체로는 무향 무맛이니 양념 맛이다. 무맛이란 맛이 없다는 게 아니라 순수한 맛이란 뜻이다. 껍질은 삶아서 우뭇가사리처럼 만들어 먹거나 수육으로 먹는다. 뱃살은 회 무침으로, 머리뼈와 머릿살은 찜으로 요리해 먹기도 한다. 근육은 갈아서 어묵 재료로 쓰기도 한다. 포항 사람들은 상어 살인 돔배기처럼 개복치도 큰일 치를 때 사용했다. 내륙 사람들이 애경사 등 대사를 치를 때 큰 몸집의 소나 돼지를 잡았던 것처럼 바닷가에서는 상어나 개복치 같은 대형 생선을 사용했다. 진짜 부잣집에서는 고래를 썼다. 포항에서는 큰일에 큰 물건을 쓰던 전통이 개복치를 먹는 풍습으로 남은 것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개복치를 먹을 수 있을까. 무조건 안 먹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사라져가는 대물들의 맛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바다 생태계 살리기에 더 적극적이어야 하지 않을까.글·사진 / 강제윤 시인·(사)섬연구소 소장

2021-05-19

“예술과 사회를 연결해 주는 조그만 역할이 제가 갈 길이죠”

문화와 예술이 세상에 미치는 선한 영향력을 신뢰한다고 말하는 최미경 씨.그간 취재를 위해 여러 차례 포항 꿈틀로를 찾았다. 그곳에선 적지 않은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고, 열정과 젊음을 바쳐 자신이 지향하는 세계를 완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작가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포항시 중앙동 옛 아카데미 극장과 중앙파출소 일대에선 지난 2016년부터 ‘문화도시 조성사업’이 진행됐고, 회화, 공예, 음악, 공연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는 문화예술인들 다수가 거기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이른바 꿈틀로의 탄생이었다.청포도 다방은 ‘꿈틀로의 문화사랑방’이라 불러도 무방한 곳이다. 2019년 봄부터 2년 동안 청도포 다방을 운영하며 북 콘서트와 그림 전시회, 인문학 강좌 등을 열어온 문화예술 기획자 최미경 씨는 훌쩍 큰 키에 환한 웃음이 인상적인 사람이다.얼마 전 청포도 다방 운영을 끝낸 최씨가 최근 새로운 작업실을 열었다. ‘예술인보호구역’이라고 했다. 이 역시 꿈틀로에 자리 잡은 문화 공간.시원시원한 어법과 사람을 가리지 않는 친절함으로 포항 문화예술계의 마당발 노릇을 기꺼이 해내고 있는 최미경 씨를 만나 그간 진행한 문화 행사와 향후 계획 중인 프로젝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문화와 예술을 통해 작지만 선한 영향력을 세상에 선물하고 싶다”는 최씨의 꿈과 희망을 아래 옮긴다.-출생지와 전공은.△부산에서 태어났다. 서울예술대에선 문예창작을 공부했고, 현재는 홍익대학교 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과에 다니고 있다.-문학소녀의 과정을 거친 것인가.△초등학교 6학년 크리스마스 아침에 김소월의 시집을 선물 받았다. ‘초혼’이었다. 그게 내가 처음으로 만난 시(詩)고, 생애 첫 번째 시집이다. ‘슬퍼서 좋았다’라는 말 말고는 당시 느낌을 설명할 길이 없다. 가슴 아릿한 슬픔이 좋았다.-포항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는지.△남편의 직장이 포항으로 결정됐다. 그때 부산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포항으로 이주했다.-포항의 ‘문화 사랑방’인 청포도 다방을 운영했다. 어떤 곳인가.△1950년대 사진작가 박영달 씨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던 곳이다. 이후 10년간 예술인들의 아지트 역할을 하며 문화와 예술을 논하는 장소였다. 포항시가 문화도시 사업을 진행하며 예술인들을 모을 수 있는 공간에 대한 고민을 했고, 그 결과 청포도 다방이 2018년 리뉴얼되면서 꿈틀로에 터를 잡게 된 것으로 안다.-청포도 다방 운영을 한 기간과 운영을 결심한 이유는.△2019년 3월부터 2021년 3월까지였다. 2018년 포은중앙도서관 상주작가로 있었다. 계약기간이 2019년 5월 종료되면서 거처를 고민하던 차에 청포도 다방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어 운영을 결정했다. 지역 작가들의 새 책을 소개하며 북 콘서트를 여는 ‘언니네 책다방’, 지역 미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청포도 미술관’, 인근 주민들이 참여하는 ‘수다와 담론 사이-미담소담’ 등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싶었기에 걱정 속에서도 마음을 굳혔다.-청포도 다방에서 진행한 문화행사 중 기억에 남는 것은.△매달 셋째 주 목요일 진행했던 언니네 책다방이다. 2019년 5월부터 2021년 3월까지 모두 15회 행사를 열었다. 김일광, 김동헌, 서숙희, 고영민, 김만수, 허용호 등 시인과 소설가, 수필가, 아동문학가 등 다양한 작가들이 참여했다. 그들의 작품을 시민들과 함께 읽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청포도 다방 운영이 끝난 후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 언니네 책다방이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 문화기획사 ‘스토리 랩 숨비’에서 언니네 책다방을 이어갈 수 있게끔 후원을 해줬다. 그 덕분에 행사를 이어갈 수 있게 됐다. 4월에 차영호 시인에 이어 5월에는 김일광 작가의 청소년 소설 ‘산남의진 의병장 최세윤’을 놓고 지역민들과의 만남을 이어간다.-청포도 다방의 ‘문화기획자’로 생활한 기간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이전의 최미경을 돌아보면 출간했던 책 말고는 문화예술과 딱히 연결된 선이 없었다. 하지만 청포도 다방을 운영하며 문화소통 창구의 역할을 하게 된 후엔 내게 따라붙는 수식어가 많아졌다. 그 수식어들이 불분명했던 내 예술적 가치관을 뚜렷하게 만들어줬다. 청포도 다방은 내가 인간적·문화적 성장을 꿈꿀 수 있었던 공간이었다.-현재는 뭘 하며 지내고 있는지.△지난 3월 청포도 다방 운영이 마무리 될 무렵 꿈틀로 입주작가로 선정됐다. 새로 시작한 작업실 명칭은 ‘예술인보호구역’이다. 조금 거창하지만 ‘찾아온 예술인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보호하자’라는 마음에서 그런 이름을 붙였다.-예술인보호구역은 어떤 일을 하게 되는지.△청포도 다방에 있으면서 많은 예술가를 만났다. 그 과정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일은 예술인 스스로가 자신을 보호하는 장치를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예술활동 증명이 특히 그랬다. 지난 몇 해 동안 20여 명 예술인들의 예술활동 증명을 도왔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서 시행하고 있는 예술인창작지원금도 소개해 줬다.한국예술위원회,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지역 문화재단 등에서 문화예술 분야의 공모가 시작되면 이를 분야별로 매칭해 연결해주고 그와 관련해 조언을 한다. 더불어 지역 작가들과 함께 예술사업을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올해 당신이 기획하는 문화·예술·교육 사업은.△크게 2가지다. 첫째는 경북문화재단에서 진행하는 남성 은퇴자들을 위한 ‘우아한 0교시’다. 오는 6월부터 포항의 남성 은퇴자들을 위한 문화예술교육을 진행하게 된다, 두 번째는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 주관하는 ‘물·흙·나무 그림책 프로젝트’다. 이를 위해 예술인 5명과 함께 9월부터 명도학교로 들어가게 됐다. 이런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기획은 예술가와 일반인들의 간극을 좁히는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앞으로도 예술인들과 협업할 수 있는 기획을 계속해서 진행할 예정이다.-그 외에는 어떤 작업들을 해나갈 것인지.△포항의 근현대사를 인물을 통해 재조명하는 기획에 참여하고 있다. 이를 위해 경북 여성계에 큰 영향을 끼친 김경희 여사를 인터뷰 해 그분의 이야기를 정리하고 있는 중이다. 포항문화재단 상주공연 단체로 선정된 벨라미치문화예술연구소 정하해 대표와의 인연으로 칸타타 시나리오 작업도 맡게 됐다. 도시재생 마을공동체 역량강화사업인 ‘철이 끓는 시간’과 관련해서는 포항의 주물공장과 동빈내항 철공소, 그리고 남빈동의 철물점을 연결하는 이야기를 책으로 펴낼 계획이다.-향후 진행될 프로젝트는.△온·오프라인에서 동시에 포항 화가들의 작품을 판매하는 루트를 마련하고자 한다. 이는 예술인들에게 무엇을 해주는 것이 구체적 도움이 될 수 있을까라는 고민 끝에 나온 기획이다. 사람들이 예술작품을 좀 더 쉽게 만나고 구입할 수 있는 루트를 만드는 건 문화성숙도를 높이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또 하나가 있는데, 포항의 역사적 공간을 창조적 시선으로 구현하는 작업이다. 그 프로젝트가 구체화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1년 후에도, 아니 10년 후에도 예술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술의 가치와 효용성을 알리는 조그만 역할을 하고 싶다. 그게 내 길인 것 같다.-도움을 주고받는 예술가들에게 한마디.△‘내가 하는 일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라는 회의가 들 때마다 위로해주고, 자극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때문에 포항이라는 낯선 도시에서 이만큼 자리 잡을 수 있게 됐다. 그러니, 나도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는 인간이 되고자 오늘도 예술과 사회를 연결하는 다양한 방법을 고민 중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5-19

삼위일체의 성스러운 포항 음식

포항의 정체성을 만들어낸 것은 영일만이다. 내륙으로 쑥 들어간 바다가 만(灣)이다. 영일만이 있어 포항이란 항구도시가 생겨났다. 영일만은 포항의 어머니다. 그런데 만이 저 혼자 만이 됐을 리 없다. 바다나 호수에서 돌출되어 3면이 물로 둘러싸인 땅이 곶(串)이다. 곶이 있어 만이 있다. 돌출된 땅이 있으니 들어간 바다도 있는 것이다. 호미곶이 있어 영일만이 있다. 네가 있어 내가 있듯이. 호미곶은 포항의 아버지다. 포항은 영일만과 호미곶이 만나 낳은 자식이다. 영일만과 호미곶은 포항의 시원이다.최근 이재원 포항지역학연구회 회장과 동행하여 찾아간 송도 위판장은 생선 경매를 준비하는 상인과 어부들, 경매사들이 뒤섞여 소란스럽다. 포항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이 회장이 포항에 왔으면 꼭 봐야 한다고 새벽잠을 설쳐가며 데려와 준 곳이다. 경매사들이 종을 들고 딸랑딸랑 경매 시작을 알린다. 경매 시간에 맞추려면 어부들은 새벽 두세 시부터 밤바다로 나가 그물을 걷어와야 한다. 이날 송도 위판장에는 참가자미, 광어, 아귀, 청어들이 주종목이다. 아귀와 청어도 활어로 나왔다. 부두에 막 뱃머리를 댄 청어잡이 어선에서는 자망에 주렁주렁 꽂힌 청어를 따느라 분주하다. 그물에서 따낸 청어는 바로 위판장으로 옮겨진다. 성질 급한 청어를 활어로 살리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살리기만 하면 가격이 두 배니 정성껏 살려 보려고 노력한다.30마리 남짓 담긴 청어 선어는 한 광주리에 2만 원, 활청어는 4만 원이다. 3만5천원에 낙찰되는 활청어 광주리도 있다. 활어나 선어나 청어는 값이 헐하다. 마리당 1천원 내외. 아귀는 한 광주리에 1만5천원, 강원도에서는 값비싼 장치도 여기서는 한 광주리에 1만9천원에 낙찰된다. 선호하는 생선이 다르니 같은 생선이라도 지역마다 값은 천차만별이다. 그 귀하고 비싸다는 줄가자미도 몇 마리 나왔다. 1㎏ 조금 넘을 듯한 줄가자미는 얼마쯤 받을까? 어부의 아내가 볼멘소리도 대답한다.“10만 원 조금 넘어요. 근데 횟집으로 가면 30만 원쯤 받아요. 젤로 많이 고생한 우리가 젤로 적게 받아요.”밤샘 어로에 지친 어부 아내의 목소리에는 유통 구조에 대한 불만이 가득하다. 포항 시내에서는 두 군데 위판장에서 생선 경매가 열린다. 송도 위판장에서는 주로 활어 경매가, 죽도시장 위판장에서는 선어 경매가 이루어진다.포항, 바다와 불가분의 관계포항(浦項), 그 이름처럼 포항은 오랜 세월 바다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살아왔으며 포항 사람들은 바다에 의지해 어로(漁撈)를 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포항 사람이 아니면서 조선시대 포항 어업사에 가장 중요한 기여를 한 인물이 있다. 다산 정약용이다. 인천의 연평도에는 임경업 장군이 조기잡이의 신으로 숭배된다.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잡혀간 소현세자를 구하러 가던 임경업이 연평도에 들러 조기잡이 방법을 전수해 주었다는 이유에서다. 물론 전설이다. 임경업 이전에도 연평도에서는 조기잡이가 성했고 어전을 둘러싼 다툼도 있었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전히 연평도 사람들 가슴에는 임경업이 조기의 신으로 살아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포항에서는 다산이 포항 어업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드물다.다산 정약용은 1801년 1월 신유박해 사건에 연루되면서 2월 29일 장기현 유배형이 결정되었고, 3월 9일 장기현 마산리(현 마현리)에 도착한 후 황사영 백서 사건이 터지기까지 7개월 동안 유배살이를 했다. 그 기간에 130여 수의 시를 지었다. 정조 시대 다산은 신도시 화성의 축조를 공학적으로 설계했고, 기중기 등 선진적인 문물을 제작해 사용할 정도로 과학과 기술에도 해박했다. 어업에서도 선진적인 기술을 공부해 상당한 식견이 있었다. 다산의 유배 시절 장기의 어부들은 여전히 칡넝쿨로 만든 그물을 사용해 물고기를 잡았다. 원시적인 그물인지라 칡넝쿨 그물은 고기가 많이 들면 쉽게 터져 어부들에게 손실을 안겼다.유배자 다산은 어부들에게 명주실과 무명실(면사)로 그물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고 적극 권유했다. 명주나 무명실로 만든 그물 또한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코팅을 입히는 기술이 필요했다. 다산이 장기 어부들에게 알려준 것은 소나무 껍질을 다린 물에 그물을 담갔다가 말려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일명 갈물 들이기다.갈물 들인 그물은 한결 견고해서 튼튼하게 오래 사용할 수 있었다. 어획량을 늘리는 데 획기적인 기술이었던 것이다. 명주실이나 무명 그물을 사용하고 갈 가마에서 갈물을 들이는 어구 사용법은 현대의 나일론 그물이 등장한 1950년대까지도 사용했던 어업 기술이다. 다산이 얼마나 선구적인 어로법을 가르쳤던 것인지 짐작하기 충분하다. 실학자로서 포항 어업 기술 발전에 이바지한 다산은 포항 어업의 소중한 역사다. 그러므로 포항의 어업사에서는 다산을 적극적으로 기릴 필요가 있다.물회와 막회, 전국적인 명성 얻어아침 죽도시장 좌판에는 막회를 썰어주는 여인들이 줄지어 앉아서 부지런히 칼을 놀린다. 새벽 경매를 통해 들어온 막횟감은 청어, 병어, 가자미, 학공치, 성대 등 그때그때 많이 잡히고 저렴한 생선들이 주류다. 이날 죽도시장 좌판의 청어 막회는 5마리에 1만 원이다. 말할 수 없이 싸다. 도시 선술집에서는 비싼 횟감인 청어회가 이토록 헐하다니. 막횟감용 가자미는 주로 물가자미다. 참가자미는 동그랗고 물가자미는 서대처럼 길쭉하다.포항의 물회와 막회는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생선회의 역사는 얼마나 되었을까? ‘논어’에는 2500년 전 공자도 생선회를 즐겼다고 전한다. 논어 ‘향당’ 편에는 “밥은 흰 쌀밥만 좋아하지 않으셨고, 회도 잘게 썬 것만 좋아하지 않으셨다. 쉬어서 냄새가 나는 밥과 상한 생선, 썩은 고기는 드시지 않았다”고 나와 있다. 이렇듯 인류가 생선회를 먹어온 역사는 장구하다. 공자뿐일까. 본래 인류의 조상들은 불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을 날것으로 먹었다. 생선 또한 날것으로 먹었으니 생선회의 역사는 최초의 인류가 나타난 수십, 수백만 년 전부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우리 조상들도 옛날부터 생선회를 즐겼다. 조선 영조 시대 의관 유중림의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는 회를 먹는 법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껍질과 뼈를 제거하고 오직 하얀 살만을 얇게 썰어 흰 종이 위에 펴서 햇볕에 잠깐 쬐었다가 날카로운 칼로 실처럼 가늘게 썰어 사기 접시에 얇게 깐다. 이와 별도로 생강과 파를 각각 반치가량을 실처럼 가늘게 썰어 회를 놓은 접시 가운데 놓고, 또 볶은 된장을 대추알 만한 크기로 만들어서 역시 생강과 파 옆에 놓고, 종지에 겨자즙을 담아 상에 올린다. 만약 여름철이면 회 접시를 얼음 소반에 받쳐 올린다.” 증보산림경제 9권겨자즙에 생선회를 찍어 먹고 여름에는 얼음 위에 생선회를 올려놓고 즐겼으니 우리 조상들의 회 문화는 고급스럽기 한량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얼음 깔고 겨자에 찍어 먹는 호사를 누구나 누렸겠는가. 바닷가 사람들은 갓 잡은 생선을 막 썰어서 된장에 찍어 먹고 김치에 싸 먹는 막회 문화를 발달시켰다.횟밥, 포항의 독특한 막회 문화가 낳은 산물포항은 막회의 고장. 호미곶 대보항 노포에서 막회와 물회를 앞에 두고 낮술을 마신다. 술이 단 것은 오로지 싱싱한 회 덕분이다. 막회는 안주가 되고 물회는 해장국이 되는 천상의 궁합. 갓 잡은 생선을 막 썰어서 된장이나 고추장에 찍어 먹거나 야채와 고추장을 넣고 비벼 먹는 것이 막회다. 물회는 막회와 불가분의 관계다. 막회에 야채, 고추장을 넣고 비벼 물이나 육수를 부으면 물회가 된다.횟밥도 포항의 독특한 막회 문화가 낳은 산물이다. 막회 무침에 밥을 함께 내주는 것이 횟밥이다. 주로 대중적인 꽁치회를 사용하지만, 고급 생선을 사용하기도 한다. 횟밥은 한 끼 식사로도 좋지만 밥을 먹으면서 가볍게 한잔하기에 좋은 안주다. 고된 노동을 마친 어부들이 저녁을 먹으면서 반주하기 좋은 음식이다.막회는 제철에 많이 잡히는 값싸고 흔한 생선을 막 썰어서 먹는 것이라 청어, 고등어, 꽁치, 방어, 가자미, 전어, 횟대, 성대, 숭어 등이 주재료다. 그중 청어, 꽁치, 방어 등 등푸른 생선으로 만드는 물회나 막회는 기름기가 많아 쉽게 상한다. 그래서 등푸른 생선으로 회를 먹는 것은 쉽지 않다. 포항 같은 바닷가라 가능한 요리다.본디 막회나 물회, 횟밥은 바닷가 어민들의 음식이었다. 일손은 바쁘고 달리 찬거리를 장만할 틈이 없을 때 갓 잡은 생선을 썰어서 밥과 고추장, 흔한 야채나 바다에서 막 건져낸 해초 등을 넣고 비벼 먹었다. 국물을 먹고 싶어도 국 끓일 조건이 여의치 않으니 막회 무침에 그냥 물을 부어 먹던 것이 물회의 시초다. 그래서 막회와 물회뿐만 아니라 횟밥까지도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된다. 그야말로 삼위일체인 음식. 막회와 물회, 횟밥은 성스러운 생명의 음식이다.글·사진 / 강제윤 시인·(사)섬연구소 소장

2021-05-17

매력적인 신도시로 젊은이들 발길 이끈다

◇시흥시의 도시개발사업, 전국 17번째 대도시를 만들다인구 50만명을 넘어서면서 전국에서 17번째 대도시 타이틀을 달게 된 시흥시의 올해 4월 기준 인구 수는 51만98명이다. 그러나 1989년 1월 1일 시로 승격한 시흥시의 당시 인구는 9만3천284명에 불과했다. 도농복합도시였던 시흥시에 30년 동안 무려 40만명의 인구가 몰렸다.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시흥시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서울의 위성도시인 시흥시는 지리적으로 북쪽에는 부천시와 광명시가 있고, 서쪽에 인천광역시, 동쪽에는 과천시가 있다. 남쪽으로는 안산시와 의왕시까지. 서해와 붙어 있긴 하지만 위치만 놓고 봤을 때 크게 매력적이지 않은 이 도시에 사람들이 계속해서 몰린다.2015년부터 7년 동안 시흥시의 인구는 증가세다.오래전 경인공업지대에 포함되면서 꾸준히 성장한 시흥시의 인구는 2010년 40만명선을 돌파한 이후 정체기를 맞이한다. 오름세였던 그래프가 꺾이면서 2011년 들어 다시 39만명으로 내려앉게 되고, 조금씩 시흥시의 인구는 줄어든다. 연 2천∼3천명 수준으로 감소세는 크지 않았으나, 무엇보다 상승곡선이 멈춘 데 더해 하향선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도시의 성장이 한계에 다다른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왔다.시흥시의 선택은 도시개발사업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신의 한 수’가 됐다. 당시 시흥시는 기초자치단체 중에서 최대 규모의 직영도시개발사업을 시작한다.1998년 공유수면 매립 이후 개발이 멈춰버린 군자지구에 2006년 공영개발사업을 통해 얻은 개발이익 700억원을 투자, 신도시 조성사업을 실시하기로 하고 2012년 배곧신도시로 명칭을 확정한다. 같은해 이곳에 서울대학교 시흥국제캠퍼스 조성안이 구체화되면서 배곧신도시 조성사업은 전국적인 관심을 받게 된다. 신도시 내 대단위 아파트들의 러브콜이 물밀듯이 몰려들게 되고, 2015년부터 하나씩 입주하게 되면서 침체 위기에 처했던 도시는 이때를 기점으로 다시 부흥기를 맞는다.추가로 장현, 목감, 은계지구 등 오래전부터 계획됐던 택지개발사업 역시 탄력을 받게 되고, 감소세였던 시흥시의 인구 수는 2016년 40만명선을 재돌파한 이후 현재까지 매년 2만∼3만명씩 늘어나고 있다.지난해에는 배곧신도시 내 배곧지구가 황해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되면서 1조6천억원의 예산 투입이 결정됐다. 오는 2027년까지 서울대 시흥스마트캠퍼스, 800병상 규모의 배곧서울대병원 등 글로벌 교육·의료 복합클러스터와 연면적 약 4만5천㎡ 규모의 데이터센터, 영상 인공지능(AI)센터, 7개 대학과 8개 기관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SK텔레콤 등 국내 유수 기업들이 참여하는 육·해·공 무인이동체 연구단지가 조성될 예정이다. 도시개발과 택지지구개발 등을 통해 도시를 부흥시킨 시흥시의 성공사례라고 할 수 있다. ◇기업 유치의 힘, 화성시화성시는 전국 도시 중 가장 많이 인구가 몰리는 곳이자, 젊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구증가율 전국 1위(2019년 기준)에 순이동인구 전국 1위(2020년 11월 기준), 평균 연령은 전국 2위(2020년 12월 기준 화성시 37.4세, 전국 43.2세)다. 출산율도 1이 넘고, 재정자립도 역시 전국 기초자치단체 중에서 1∼2위를 다툰다. 경기도 내 28개 시와 3개 군 가운데서도 단연 으뜸이다.2021년 4월 기준 86만4천687명으로, 100만명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는 화성시의 인구는 2000년 이후부터 급격하게 증가했다. 10년간 전국에서 인구가 가장 많이 늘어난 도시가 화성시다. 이는 서울 등 수도권의 다른 도시로부터 동탄신도시 등으로 인구가 계속해서 유입되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경기도 내 다른 서울시의 위성도시들처럼, 화성시의 인구 유입 이유 역시 신도시개발로 인한 도시의 성장이 가장 크다는 데 토를 달 인물은 없다.화성시는 그러나 경기도 내 수많은 다른 베드타운(침상도시)들과는 다르다. 화성시는 ‘직장과 주거공간이 근거리에 위치해 있다’는 의미의 직주근접도시다. 서울로 출퇴근하는 화성시민이 아니라, 화성시에 적을 두고, 화성시 안에 있는 기업에 다니는 자급자족의 도시가 바로 화성시다.30개의 대기업과 478개의 중소기업, 7천720개의 소기업이 화성시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들 기업 종업원 수만 합해도 17만명이 넘는다. 반도체, 기계금속, 화학, 전기전자, 목재제지, 섬유피혁, 비금속광물 등 업종도 국한돼 있지 않고 다양하다. 흔히 아는 삼성전자·LED·중공업, 기아자동차, LG전자 공장부터 한미약품, 대웅제약과 같은 유명 제약회사도 즐비하다. 동방·동탄·발안 등 10여 곳이 넘는 일반산업단지와 동탄도시 첨단산업단지, 아산 국가산업단지 등도 조성돼 있어 화성시 경제의 큰 축을 담당하고 있다. 굵직한 기업들이 둥지를 튼 도시는 자동으로 노동 인구가 유입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청년층의 증가다. 화성시는 2015년부터 2020년 사이 전국 226곳의 기초자치단체 중에서 20∼30대 인구가 가장 많이 증가한 도시다. 이 기간에 화성시에는 7만5천365명의 청년들이 들어왔다. 젊은이들에게 화성시가 여러 의미에서 매력적인 도시라는 의미다. 상업시설(오피스·상가·숙박시설)의 공실률도 전국에서 가장 낮은 지역 중 하나인 것으로 전해진다. 생산과 소비 모든 부분에서 화성시는 순환적 구조가 이미 잘 갖추어져 있는 셈이다.최근 화성시는 신세계그룹과 손잡고 관광도시로의 변모도 꾀하고 있다. 한국수자원공사와 신세계프라퍼티 컨소시엄이 4조6천억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투자, 화성국제테마파크 조성사업을 추진하기로 하면서 화성시에 훈풍이 불고 있다. 약 70조원의 경제유발효과와 함께 1만5천명의 직접고용, 11만명의 고용유발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화성시가 직접고용인력의 50% 이상을 화성시민으로 고용하도록 하는 협약을 맺으면서 화성시로 향하는 청년들의 러쉬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이바름기자 bareum90@kbmaeil.com

2021-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