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함산에 깃든 신라 역사와 경주 이야기<br/> ① 토함산의 역사와 전설
신라인들에게 토함산은 어머니와도 같은 산이었다. 제주도에 한라산이 있어서 제주인들의 숨결이 되었듯이 신라인들에게 토함산은 호국의 염원을 담은 진산으로 지극한 숭배의 대상이었다. 신정일치 시대였던 신라 시대는 국가 대사가 있을 때마다 하늘이나 산신에게 제를 지냈다. 아무 곳에서나 제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신라인들은 신성하게 여겼던 영산을 찾았다. 당시 신라에는 토함산 등 5개의 영산이 있었다. 이를 오악(五岳)이라 불렀다.
신라 오악은 중국의 음양오행사상과 산악신앙에서 영향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 때 오악은 동쪽의 타이산(泰山), 서쪽의 화산(華山), 남쪽의 헝산(衡山), 북쪽의 헝산 (恒山), 중부의 쑹산(崇山)이 있다. 중국 역시 조정에서 대사를 앞두고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신라의 ‘경주 5악(五岳)’은 선도산이 서악(西岳)이고 남산이 남악(南岳), 백율사 뒤편에 있는 소금강산이 북악(北岳), 토함산이 동악(東岳), 경주에서 제일 높은 단석산이 중악(中岳)이다. 이중 토함산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불국사와 석굴암이 자리 잡고 있어 불교의 성지이자 유적지로 이름이 높다. 흔히 불국사와 석굴암은 위대했던 신라 불교미술의 정수라 한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한국 사람들에게는 마치 영혼의 인장처럼 뇌리에 찍힌 낙인 같다고도 할 수 있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칭하는 말의 성찬은 셀 수 없을 정도다. 당연히 불국사와 석굴암을 만들었던 신라인들의 진심은 오직 불국(佛國)하나였을 것이다. 왜 신라인들은 부처의 나라(佛國)를 꿈꾸었을까? 부처의 나라가 고단한 민초들의 삶과 무슨 관련이 있기에 신라인들은 모든 열정을 바쳐 신묘한 석불을 제작한 것일까? 너무도 잘 알려진 불국사와 석불을 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제대로 알고 있는가?
허황한 미명이 아닌 입체적이고 살아있는 불국사와 석굴암의 실체를 느낄 수는 없을까. 신라인들이 불국사와 석불을 만들면서 전해주고자 했던 불국정토의 꿈을 공유하고 싶어 지금까지 엄청난 이들이 토함산에 올랐을 터다. 필자 마음도 똑같다. 토함산 취재에 나서면서 신라인들의 소박한 숨결만을 느끼고 싶을 뿐이었다. 출발에 앞서 불국사와 석굴암의 예술적 문화사적 의미 등은 이번 기획에서 아예 내려놨다. 필자가 그만한 역량을 갖춘 것도 아니고 이미 수많은 이들이 빼어난 저술을 남겨놓은 바 있어 말을 보탬은 무지의 소치만 드러낼 뿐이니까. 오히려 가장 순진무구한 눈으로 토함산의 예술문화를 찬찬히 살펴보려 한다. 있는 그대로 살피다 보면 문득 신라인들이 전해주려던 진심에 닿아있지 않을까?
불국사와 석굴암을 품은 토함산. 다른 산들도 저마다 정기를 가지고 있지만 적어도 토함산에 비견키는 어렵다. 토함산은 신라초기 위대한 제왕 석탈해와 연결되면서 역사의 전면에 나섰고, 경주 신라와는 영광과 아픔 등이 얽히고 설켜 있다.
이번 연재는 토함산을 시작으로 석탈해의 신화는 물론 불국사와 석굴암 등 토함산에 깃들어 있는 다양한 요소들을 하나씩 그려내려 한다. 취재를 마칠 무렵에는 신라인들이 우리에게 전해주려는 염원의 일단을 독자들과 함께 느낄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글 싣는 순서
1 토함산의 역사와 전설
2 토함산의 동·식물
3 토함산의 수호신 석탈해
4 토함의 전설 담긴 영지
5 ~ 8 불국의 나라를 꿈꾸다
9 ~11 신이 빚은 솜씨 석굴암
12 유흥준 교수와의 대담
13 천년고찰의 향기 기림사
14 흔적만 남아도 부처님 형상 폐사지
15 토함산 자락의 마을들
16 ~17 토함과 얽힌 문화예술 인사
18 토함의 과거를 이야기 하다
19 토함의 현재를 이야기 하다
20 토함의 미래를 이야기 하다
한자 吐含山은 '머금고 토하는 산'의 뜻
수호신 석탈해 이름서 유래했다는 說도
동해와 맞닿아 국방의 요새 역할 맡아
BC14년께 박혁거세 아들 남해차차웅
왜인 토벌 당시 낙랑군과의 일화 등도
삼국사기 기록으로 남아 중요성 짐작
□ 구름을 토하고 삼키는 형상에서 유래
토함산을 제대로 느끼려면 역시 온몸으로 부딪혀야 한다. 책이나 인터넷 검색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한 걸음씩 토함산에 발을 내디뎌야 비로소 산이 가진 역사성이 체득되게 마련이다.
길을 오르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동악 토함산의 유래다. 토함산은 한자로는 ‘吐含山’이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머금고 토하는 산’이라는 의미다.
토함의 유래를 살펴보니 대략 세 가지 정도의 설이 전해진다. 먼저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토함산은 바닷가 근처에 있어서 안개가 자주 끼고 사라지는 모습이 마치 구름을 삼키고 토하는 것 같다 해서 붙여졌다는 것이다. 토함산에는 동해의 습기와 바람이 변화무쌍하게 올라와 마치 그 형상이 안개와 구름을 삼키고 토하는 비현실적인 모습을 연출한다.
실제 토함산의 날씨는 변화무쌍하다. 지척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안개가 온산을 뒤덮다가 어느새 안개가 순식간에 걷히고 한 폭의 동양화가 펼쳐지듯 비현실적인 경관을 연출한다.
불교 보물을 품고 있는 산답게 부처님의 진리를 언제든 머금고 토해낸다는 의미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다른 설은 토함산의 수호신인 석탈해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석탈해의 탈해는 토해(吐解)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석탈해왕의 또 다른 이름인 토해가 토함과 비슷한 음으로 발전해 토함산이 되었다는 것인데, 조금은 억지스럽기도 하다. 아마도 석탈해왕과의 인연 때문에 생겨난 설화인 것으로 추정된다.
토함산이란 지명이 석탈해에서 유래했다는 설은 다소 설득력이 떨어질지 몰라도 석탈해의 주요 근거지는 토함산인 것은 분명하다. 석탈해가 동악의 신, 즉 토함산의 신으로 추앙받는 것도 그의 주요 활동무대였기 때문이다.
□ 토함산 무한한 가능성 가진 길지
풍수적으로 토함산은 명당의 풍모를 갖춘 곳이다. 토함산의 옛 이름은 토월산이었다. 풍수가들은 반달(半月) 혹은 초승달 모양의 땅 모양(地勢)을 길지로 본다. 초승달과 반달은 막 시작하거나 아직 성장하고 있는 과정이므로 앞으로 무한한 발전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반달형의 지세를 풍수적 길지로 보고 그런 곳에 동읍지를 정하거나 주택을 지어 살게 되면 모든 기운이 상승해 발복과 장래의 발전성을 가져다준다고 한다.
울산 쪽 방향인 경주 외동읍에 있는 영지에서 토함산을 풍수적으로 보면 ‘여성이 머리를 감고 있는 모양(옥녀세발형)’이라고들 한다. 토함산에서 경주 시내 쪽으로 뻗은 산의 형세도 여성의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신라 천년의 힘이 어쩌면 토함산에서 발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토함산은 동해와 맞닿아 있다. 그래서 바다로 침입해 오는 외적의 침입을 빨리 감시할 수 있었다. 소위, 국방의 요새였던 것이다. 토함산과 관련해 우리 역사의 전면에 나선 최초의 기록도 전해진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BC14년(신라 남해차차웅11년)에 왜인들이 민가를 약탈하자 박혁거세의 아들인 남해차차웅이 6부의 군사 1천명을 동원해 왜인을 내쫓았다. 신라군이 왜인들을 토벌하느라 신라왕성을 비우자 신라와 적국이었던 낙랑군이 재빨리 당시 신라의 수도였던 금성을 공격했다. 낙랑군의 공격이 이뤄진 날 밤에 묘하게도 낙랑진영으로 유성이 떨어졌다. 혼비백산한 낙랑군이 퇴각을 하면서 신라군의 추격에 대비해 돌무더기를 알천에 쌓아놓고 물러갔다. 토함산의 동쪽에서 추격에 나선 신라 병사들이 알천에 이르러 낙랑군이 쌓아놓은 돌무더기가 많은 것을 발견하고 적병이 많다고 여겨 추격을 중단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토함산과 시내 알천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연상시켜주고, 적당한 선에서 멈출 줄 아는 신라 병사들의 지혜를 돋보이게 해준다. 역사가들 또한 동해에서 경주로 진입하는 중간에 토함산이 있었기에 외적이 경주 침입을 계획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데에는 의견을 같이한다. 토함산의 역할과 중요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토함산을 오르는 길은 다양하지만 불국사 주차장에서 천천히 올라 석굴암 정문에서 토함산 입구로 몸을 틀어 성화채화지를 거쳐 정상에 오르는 방법이 일반적이다.
□ 토함산 ‘3년 동안 화재’ 흥미로운 기록도
한참을 가파른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울창한 편백 나무 숲길이 나타나고, 편백 나무 숲길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성화채화지 입구가 나온다.
이곳 토함산의 성화채화지는 매년 개최되는 경북도민 체육대회 때 성화 채화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성화와는 결이 다른 이야기지만 삼국사기에는 토함산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이야기 나온다. “신라시대 진평왕 31년 정월 모지악의 땅이 타기 시작하여 그해 10월에 꺼졌다.” “무열왕 시대에 토함산의 땅이 타다가 3년 만에 꺼졌다”는 것이다. 토함산이 무려 3년간이나 불탔다는 것은 아마도 천연가스나 석유가 매장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낳기도 한다. 토함산이 성화채화지가 된 것도 어쩌면 우연이 아닌 역사의 배려가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성화채화지를 지나면 울창한 나뭇가지 사이로 토함산의 정상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이어진다. 정상에 서면 보문호와 덕동호를 비롯해 멀리 문무왕 수중릉이 있는 감포 앞바다까지 굽어볼 수 있다. /최병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