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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이 분리되지 않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왕릉’

등록일 2022-10-10 18:45 게재일 2022-10-11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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⑭  낭산과 토함지구에 묻힌 신라왕릉            (2) 신문왕릉, 효소·성덕왕릉, 원성왕릉
신문왕릉
신문왕릉

◇진위논란에 휩싸였던 신문왕릉

경주의 왕릉은 아름답다. 무덤이 아름답다는 말은 썩 어울리지 않지만 신라왕릉을 갔다 온 사람들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둥그렇게 원형을 그린 언덕에 부드럽게 솟은 곡선은 주변의 수풀과 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시내에 있는 왕릉들은 현대적인 건물에 둘러싸여 있는데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다.

죽음이란 두렵고 낯선 것이다. 하지만 왕릉은 낯설고 두려운 공간이 아니다. 왕릉은 살아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왕릉은 죽음과 삶이 분리되지 않는다.

섬세한 조각과 많아진 장식물의 ‘신문왕릉’

신문왕의 아들이자 형제인 효소왕·성덕왕

빈약한 ‘효소왕릉’·화려한 ‘성덕왕릉’ 대조적

경주 왕릉 중 방문객이 가장 많은 ‘원성왕릉’

현대건물 속 원래부터 자리잡은 듯한 왕릉

정확하게 확인된 신라왕릉 주인은 몇 기 뿐

유적 발굴조사 등 학계선 ‘추정’으로 전해져

성덕왕릉
성덕왕릉

친근감까지 느껴지는 왕릉이라고 하면 신문왕릉이 으뜸이다. 신문왕은 문무왕의 맏아들로 지난 호에도 언급했던 ‘만개의 파도를 잠재운다’는 만파식적(萬波息笛) 신화와 관련된 인물이다. 신문왕은 귀족들에게 주는 땅인 녹읍을 폐지해서 귀족의 힘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했다. 교육기관인 국학을 정비해 유교 교육을 행하고 지방행정과 군제를 정비했던 왕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12년(692) 가을 7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신문이라 하고 낭산 동쪽에 장사 지냈다”고 기록돼 있다. 신문왕릉은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데 이전 시대 왕릉보다 장식물이 늘어나고 섬세한 조각들이 돋보인다.

신문왕릉은 신문왕의 능이 아니라 아들인 효소왕의 능이라는 견해가 있다. 효소왕릉설의 근거는 황복사 삼층석탑의 금동사리함기에 두고 있다.

본래 황복사 삼층석탑은 신문왕이 692년 7월에 죽자 왕후와 왕위를 계승할 효소왕이 건립했다. 몇 년 뒤에 신목왕후와 효소왕이 죽자 706년에 신문왕의 차남 성덕왕이 금동사리함에 불사리나 다라니경을 넣어 죽은 신문왕, 신목왕후, 효소왕의 명복을 빌었다.

경주 낭산 동쪽에 있는 황복사 터 옆에 능터가 있는데 그것이 진짜 신문왕의 능이라는 것이다. 이 능은 신라왕릉 주변을 장식하는 십이지신상이 파괴된 채로 흩어져 있었으며 봉분도 무너져 있었다. 구황동 왕릉지라 불리는 이 유적은 2017년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구황동 왕릉지는 왕이 묻힌 무덤이 아니라 미완성된 왕릉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신문왕릉이 사실은 효소왕릉이라는 견해는 빛을 잃었다. 이근직 전 경주대 교수는 황복사 터 동쪽에 있는 진평왕릉이 신문왕릉이라는 견해를 펼치기도 했다.

왕릉의 주인이 정확하게 확인된 경우는 몇 기가 안된다. 선덕여왕릉과 왕릉비의 일부가 발견된 무열왕릉, 흥덕왕릉, 원성왕릉, 성덕왕릉, 헌덕왕릉 정도만 이견 없이 왕릉의 주인이라는 것을 인증받았다. 대부분의 신라왕릉은 ‘OO왕릉으로 추정된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토함산 근방에 있는 대표적인 왕릉은 효소왕릉과 성덕왕릉이다. 두 사람은 형제 관계로 신문왕의 첫째와 둘째 아들이다. 32대 효소왕이 먼저 왕위에 올랐고 효소왕이 승하하자 33대 성덕왕이 왕위를 이었다.

효소왕은 이름이 이홍이며, 695년 서시전(西市典)과 남시전(南市典) 등 시장을 개설해서 경제력을 확충하고 당나라와 일본 등과 활발하게 수교를 진행했던 왕으로 알려져 있다. 왕릉은 둘레석도 없고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 무덤으로 아무런 특징이 없다.

오히려 친동생인 성덕왕릉의 무덤이 외견상 더 화려하다. 둘레석은 물론이고 병풍처럼 판석을 삼각형 받침돌이 받치고 있다. 받침돌 사이에는 십이지신상도 있고 돌사자상과 석인상까지 있다. 왕릉 전방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대형 비석 받침인 귀부(龜趺)도 남아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신문왕릉의 무덤이 효소왕릉이 아니냐는 주장도 왕릉이라기에는 효소왕릉이 너무 빈약해 보이기 때문이다.

 

원성왕릉
원성왕릉

◇무신상이 이채로운 원성왕릉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원성왕릉은 경주에 있는 신라 왕릉 중 방문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원성왕릉은 신라 38대 국왕 김경신의 능이다. 원성왕은 즉위한 후 지방행정 개혁을 단행해 총관을 도독으로 바꿨다. 무엇보다 신분으로 관리가 되는 족벌제를 타파하고 준 과거제도인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여 능력 있는 관리들을 대거 등용했다. 독서삼품과를 통한 관리제도의 개혁은 진골 귀족의 견제로 큰 실효는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독서삼품과는 신라 사회를 문치주의로 바꾸며 훗날 고려가 유교를 확립하고 과거 제도를 도입하는 계기가 됐다.

또한 저수지의 효시가 된 벽골제를 증축하고 발해와 외교관계를 맺는 등 독자적인 외교를 펼치기도 했다. 원성왕은 798년 12월에 별세했다. 사후 왕의 유해를 봉덕사 남쪽에서 화장했다고 하는데, 삼국사기에는 화장한 후 왕의 유해를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이 때문에 현재의 원성왕릉이 실제로 원성왕의 유해가 묻힌 곳이 맞느냐는 논쟁이 일기도 했다.

왕릉을 조성한 자리에는 본래 곡사라는 절의 연못이 있던 자리인데 연못을 메워 능을 조성했다. 능자리가 샘이 솟는 곳이다 보니 물이 괴어 왕의 시신을 바닥에 그대로 안치하지 못했다. 궁리를 거듭하다 양쪽으로 관을 거는 장치를 만들고 거기에 시신을 안치했다. 이런 이유로 걸 괘(掛)자를 써서 괘릉(掛陵)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연못에 돌을 쌓고 그 위에 시신을 걸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관을 거는 장치를 만들었다는 것이 유력한 설로 내려오고 있다.

실제로 괘릉에 가면 능 뒤편으로 깎은 석축에서 물이 흐르는데, 물줄기를 돌리기 위해 수로를 따로 만들었음을 볼 수 있다. 흙으로 덮은 둥근 모양의 무덤 아래에는 무덤을 보호하기 위한 둘레석(護石)이 빙 둘러 있다. 이 돌에 무복을 입은 십이지신상이 조각돼 있다.

한때 괘릉은 문무왕의 가묘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문무왕은 왕의 유언대로 시신을 화장해서 동해바다에 뿌렸다지만 제사를 지낼 장소가 필요했을 터이고, 괘릉이 물과 관련된 설화가 있는 만큼 문무왕의 가묘가 아니냐는 주장이었다. 일견 설득력이 있지만 문무대왕릉으로 알려진 대왕암이 발견되면서 원성왕릉으로 인정됐다.

괘릉은 신라의 왕릉 중 완성도가 높고 보존상태가 뛰어나기로 손꼽힌다. 괘릉의 십이지신상이나 여러 석물은 그야말로 괘릉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유물들이다. ‘경주 원성왕릉 석상 및 석주’는 보물 제1429호로 지정됐다. 경주 원성왕릉을 중심으로 좌·우 입구에 한 쌍씩 석조상들이 배치돼 있으며 문·무인 4점, 사자상 4점, 석주 2점으로 총 10점이다.

호인상(胡人像)이나 석사자 등 석물의 구성, 괘릉의 앞에 놓인 단면 육각형 기둥, 그리고 무덤과 배치 관계를 보면 당나라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고 해도 될 만큼 당의 왕릉과 많이 닮았다. 신라 후기부터 당의 복식이나 일부 제도들을 모방했으므로, 당나라 묘제를 왕의 무덤에도 비슷하게 적용했다고 보고 있다.

석물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눈이 깊고 코가 큰 서역인 모습을 한 무인상이다. 무인상은 소그드인(페르시아인)으로 추정된다. 무인상은 동서문화의 교류적 측면에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무인상은 외투 안쪽에 갑옷을 입고 칼을 차고 있다. 뒤쪽에는 복주머니 같은 것을 둘렀는데 계산기 역할을 하는 주판 등을 넣는 산낭(算囊)이라고 추정된다. 성덕대왕 능 석인상을 계승한 원성왕릉 문·무인상들은 통일신라시대 조각의 절정이다.

효소왕릉
효소왕릉

◇네모 형태의 독특한 구정동 방형분

효소왕릉과 성덕왕릉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는 구정동 방형분은 독특한 고분 중 하나다. 엄밀하게 말하면 구정동 방형분은 신라 왕릉이 아니다. 경주 신라왕릉은 대부분 둥근 구형인데 이 무덤은 방형(네모 모양)으로 조성됐다. 당시 방형 무덤은 장군총이나 태왕릉 모양에서 알 수 있듯 고구려식 왕릉의 특징 중 하나다. 방형 무덤의 주인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다. 고구려의 왕족으로 통일신라에서 벼슬을 얻어 귀족이 된 안승이나 그 후손의 무덤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네모 모양이라는 점 외에 내부는 전형적인 신라 후기 굴식 돌방무덤이다. 무덤 외부의 호석 십이지신상이나 무인상, 사자상도 신라 후기 왕릉 양식이다.

무덤 한쪽에 안으로 통하는 출입구가 있는데 내부는 이미 도굴당해 돌로 만든 관만 있고 텅 비어있다. 내부가 열려있어 들어가서 볼 수 있다. 쪼그려 앉아 내부를 살피니 지하실 특유의 냄새와 습기가 밀려온다. 앞쪽 중앙에는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있지만 입구가 낮고 좁아서 잘 보이지 않는다.

네 모서리에 기둥이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만 남아있다. 이 기둥에 원성왕릉의 무인상과 같은 이방인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 조각은 원성왕릉 석상 및 석주 일괄, 경주 월지의 입수쌍조문 사자공작무늬 돌 등과 함께 통일신라와 서역이 교류했던 증거로 꼽힌다. 이 기둥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 전시하고 있다.

/최병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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