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함산에 깃든 신라 역사와 경주 이야기<br/> ⑮ 토함산의 신라 석탑 ⑵<br/> 석불사·마동·숭복사지 삼층석탑
◇비례와 비대칭의 조화 석가탑과 다보탑
신라시대의 석탑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이다. 이미 지난 연재에서 자세히 다룬 바 있지만 이번 회에서는 신라 석탑사에서 가진 의미에 한정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신용철 양산박물관장은 “대웅전 앞에 동서로 자리 잡은 석가탑과 다보탑의 아름다움은 완벽한 비례와 서로 다른 비대칭을 통한 조화의 미에 있다”고 했다. 석가탑은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놓고 그 위에 탑을 세웠는데, 이는 바위산으로 이루어진 인도의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탑 주변에는 장대석을 두르고 8개의 연꽃을 조각해 주위에 놓았다. 이곳은 석가의 설법을 듣기 위해 모여드는 대중들이 앉는 자리다. 3층으로 우뚝 솟은 외관에서는 당당함이 느껴진다.
석불사 삼층석탑, 면석 팔각… 다른 석탑서 볼 수 없는 모습 간직
마동 삼층석탑, 김대성이 곰 사냥한 뒤 곰의 넋 기리기 위해 건립
숭복사지 석탑, 전체적으로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탑 양식 보여
반면 다보탑은 갖가지 보석이 장식돼 있고 수천의 난간과 감실이 있다. 난간과 감실, 연꽃, 꽃술 등을 절묘한 형태로 고안해냈다. 다보탑은 땅에서 솟아난 탑이기에 위부터 살펴보면 원→팔각→사각이라는 구성으로 진행된다. 세부 조각이 정교해 화강암을 다듬어서 만들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다.
이렇게 서로 다른 비대칭의 쌍탑은 지대석의 너비와 기단과 탑신의 높이가 일치한다. 석가탑은 직선적이고 단순하며, 다보탑은 곡선적이고 복잡한 구조로 비대칭을 보이지만 양 탑이 모두 동일한 높이와 체감의 대칭을 지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아름다움을 통해 진리를 표현하려 했던 신라인들의 시대정신이 이 쌍탑을 통해 잘 나타나고 있다.
신 관장은 석가탑과 다보탑이 법화경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동아시아로 전래 된 대승불교에서 가장 널리 읽혔던 경전은 ‘법화경(法華經)’이다. ‘법화경’에서는 다른 경전보다 많은 부분에 걸쳐 불탑 공양과 그 공덕에 대해 말하고 있다. ‘법화경’에서 불국토는 석가여래와 다보여래의 만남으로 완성된다. 즉 석가여래가 진리의 법인 ‘법화경’을 설법할 때 다보여래가 그것이 진리임을 증명하기 위해 땅속에서 보탑의 모습으로 솟아난다.
석가탑과 다보탑은 이처럼 ‘법화경’을 통해 가장 극적인 장면을 담은 ‘견보탑품(見寶塔品)’에 의거 해 만들어졌다. ‘법화경’, ‘견보탑품’의 극적인 내용은 일찍이 중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아 많은 석굴 내 조각과 벽화로 조성됐다. 석가여래와 다보여래의 만남을 현실 공간에 탑으로 재현했을 뿐 아니라 경전에서 말하는 탑의 형태를 독창적 예술로 승화한 것이 석가탑과 다보탑이다.
두 탑은 기하학적인 비례를 보인다. 완전한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서다. 불국사가 43당척을 기준으로 정연한 질서를 보여주고 있는데, 석가탑과 다보탑도 마찬가지로 43당척의 1/3이 양 탑의 지복석의 길이와 비슷하며 이를 기준을 설계했다.
미술사학자들은 석가탑의 경우 7세기 감은사지탑 등에서 보이는 초기 전형 양식의 장중함에서 씩씩함만을 거두어 수려함을 덧입혔다고 평가한다. 석가탑은 8세기 석탑의 전형 양식이다. 이는 이후 우리 석탑의 보편 양식으로 계승되면서 우리의 미감을 대표하는 문화재의 하나가 되었다.
다보탑은 난간과 기둥, 지붕으로 구성된 누각식 건축으로 이국적이며 공예적이다. 탑은 기단부터 차례로 사각, 팔각, 원형의 기하학적 평면이 균형 있게 중첩됐다. 각 층은 다양한 모습의 난간, 기둥 등의 부재가 벽체로 막힘없이 결구 돼 내·외 공간이 겹쳐진다. 무엇보다 다보탑은 다양한 기교를 발휘할 수 있는 목조 건축의 양식을 잇고 있다. 돌을 떡 주무르듯 해서 만든 최고의 작품으로 당시 석탑 예술의 최절정이라 평가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팔각면석의 독특한 석불사 석탑
석불사에 있는 삼층석탑은 해발 565m, 석불사 석굴에서 동북쪽으로 약 150m 떨어진 언덕 위에 있다. 석불사 삼층석탑이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스님들이 수도하는 공간에 있기 때문이다. 사전 통보 없이 방문하는 경우 출입할 수 없다.
석불사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만든 석탑으로, 높이가 3.03m이다. 일제강점기에 무너질 위험이 있어 해체·복원한 바 있고, 1963년 기단부가 파묻혀 일부 복원했다. 기단은 2중이며 면석이 팔각으로 된 점이 다른 탑에서는 찾을 수 없는 특이한 모습이다. 대부분 신라시대 석탑 받침돌은 정사각형이다. 그러나 석굴암 삼층석탑 받침돌은 두 겹, 즉 이층이며 둥글다. 나머지 3층으로 된 몸돌과 지붕돌은 4각의 일반 석탑들의 모습과 거의 동일하다. 기단 위 탑신은 일반형 탑과 같은 방형으로 탑신과 옥개가 각각 1매로 돼 있다. 기단의 높이가 1.2m로 탑 전체 높이의 약 5분의 2를 차지하고 있다. 원과 팔각, 사각으로 이루어진 평면의 균형과 탑신부가 경쾌한 느낌을 준다. 삼층석탑은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 제911호로 지정됐다.
마동삼층석탑은 불국사 서북쪽 언덕의 밭 가운데 서 있는 탑이다. 경주 마동에 있어서 통일신라시대 중기의 마동삼층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대략 8세기 후반으로 추측된다. 석탑은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탑의 꼭대기 층에는 네모난 지붕 모양의 장식이 있다. 바리때를 엎어놓은 모습의 복발(覆鉢)을 제외한 부분은 없어졌다. 탑의 총 높이는 5.4m다. 기단은 2겹으로 쌓되 아래 기단의 돌 위에 포개어 얹은 납작한 돌(갑돌)과 가운데 돌은 각각 8매의 돌을 짜 맞추어 만들었다. 처마와 처마가 맞닿은 전각(轉角) 모서리와 아랫면에는 풍경을 달아매기 위해서 뚫은 구멍이 각각 7개씩 1조(組)를 이루며 배치돼 있다.
석탑이 있는 곳은‘삼국유사’권5, 대성효이세부모(大成孝二世父母)조에 기록된 장수사(長壽寺)의 옛터라고 전한다. 석굴암을 조성한 김대성은 무술을 닦을 때 사냥을 좋아했다. 하루는 토함산에 올라가 큰 곰을 잡았다. 날이 저물어 현재의 석탑이 있는 부근 민가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날 잠을 자는데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해 말하기를 “네가 나를 죽였으니 나도 너를 잡아먹을 것이다”라고 했다. 대성이 겁에 질려 용서해달라고 빌었더니 귀신은 “네가 나를 위해 절을 지어주겠는가?”라고 물었다. 대성은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했다. 그 후, 김대성은 일체 사냥을 금하고 곰을 위해 이곳에 절을 짓고 몽성사(夢成寺)라고 했다가 뒤에 장수사라고 개명했다.
마동삼층석탑은 한국 석탑의 전형 양식을 충실히 따르면서, 아무런 장식이나 조각이 없는 소박하고 단정한 모습의 석탑으로 평가받고 있다.
◇8부중신 조각 이채로운 숭복사지 석탑
경주시 외동면 토함산(吐含山) 기슭에 있었던 숭복사는 삼국시대 신라의 파진찬을 지낸 김원량이 창건한 사찰이다. 숭복사는 원래 ‘곡사(鵠寺)’라 했다. 원성왕이 죽자 이곳에 능을 만들고 지금의 자리로 절을 옮겼다.
숭복사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와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비문에 남아 있다. 헌강왕 때 이 절의 이름을 대숭복사로 했다고 한다. 그 뒤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지만, 절터에서 발견된 기와편으로 미루어 볼 때 조선시대까지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근래까지 절터가 어디인지 알지 못하다가 1931년, 세상에 알려졌다. 1931∼1935년 사이에 발견된 비편(碑片)을 통해 이곳이 숭복사지임을 알게 됐다. 이 숭복사 비편은 그 뒤로도 절터와 골동품점 등에서 잇달아 발견돼 현재까지 13편이 남아 있다. 총 100자에 달하는 글씨가 판독됐다.
숭복사지에는 동서로 탑 2기가 있다. 숭복사지 삼층석탑은 1985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기단부에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이 양각돼 있고, 1층 옥신의 4면에는 문비(門扉)가 조각돼 있다. 각 옥개석(屋蓋石)의 받침이 4단으로 된 삼층석탑이다. 동탑은 서탑과 같은 크기와 양식으로 보이나 현재는 일부 파괴된 기단부와 1층 옥신, 2개의 옥개석만 남아 있다.
서로 같은 규모와 양식을 하고 있어 아래·위층 기단에 기둥 모양을 새기고, 특히 위층 기단에는 기둥 조각 사이의 면마다 8부중신(八部衆神·불가에서 불법을 수호하고 대중을 교화한다는 여덟 무리의 수호신)의 모습을 조각했다. 탑신의 몸돌에도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1층 몸돌 네 면에는 문(門)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 받침을 두었다.
현재 두 탑은 일부 석재가 파괴되거나 없어진 채 남아 있다. 동탑은 기단 일부가 파괴되고, 탑신의 2층 몸돌과 머리장식이 없어졌다. 서탑도 기단 일부가 파괴되고, 탑신의 2·3층 몸돌과 3층 지붕돌, 머리장식이 없어졌다. 전체적으로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줄어든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토함산의 석탑들은 불교사원과 동시에 건립됐음을 알 수 있다. 토함산이 신라의 동악으로 숭상받아 오면서 왜구를 물리치는 진산 역할을 했던 만큼 사찰은 물론 석탑도 호국 성향이 짙었다. 또한 토함산의 석탑은 기존 석탑 양식을 기반으로 새로운 양식을 창출한 석탑의 발원지이기도 했다.
/최병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