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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부터 조선까지 삼층석탑의 시원이 된 감은사지석탑

등록일 2022-10-16 19:06 게재일 2022-10-17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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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함산에 깃든 신라 역사와 경주 이야기<br/>⑮  토함산의 신라 석탑 ⑴ 장항리사지, 만호봉사지 석탑
경주 감은사지 삼층석탑 전경. /출처=국립문화재연구소

◇통일신라 불교문화의 상징 석탑

신라시대는 불교문화가 찬란하게 꽃피웠던 시기였던 만큼 불국사와 석불사(석굴암)를 비롯해 수많은 사찰이 건립됐다. 경주에 천년고찰이 많이 남아있는 것도 불국을 꿈꾸었던 신라인들의 열정적인 불교 사랑에 기초했다. 경주에 석탑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설혹 사찰이 무너져 폐사지가 돼도 절의 근간이었던 석탑만은 굳건히 사찰을 지키고 있다. 석탑은 돌로 만든 불교식 탑이다.

불교에서 탑은 부처님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석가모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탑을 세운 뒤 자신의 사리를 그 속에 보관하라고 하면서 탑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사리란 화장한 뒤에 남은 뼈(유골)를 말한다. 현대적 의미로 탑은 유골함인 셈이다. 탑 속에는 사리 외에도 옷가지와 발우, 문서 등도 함께 넣었다.

 

통일신라시대 고구려·백제·당나라의 문화 전폭적으로 수용 찬란한 불교문화 꽃피워

타국에 비해 우리나라에 석탑이 많은 것은 질 좋은 화강암·뛰어난 석공이 많았기 때문

경주에 머물던 탑 건축 9세기 이후 전국으로 확대… 다른 시기보다 많은 양의 탑 건립

토함산 장항리사지 오층석탑·만호봉사지 석탑 탑신부에 인왕상 배치 호국 의미 강조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석탑의 구조를 간단히 살펴보면 탑의 몸체를 받쳐주는 기단부가 있고, 탑의 몸체에 해당하는 탑신부와 탑의 꼭대기 부분인 상륜부로 나뉜다. 보통 탑신부 안에 빈 공간을 만들고 부처님이나 이름 높은 스님의 사리를 보관했다.

상륜부는 장식용 조형물인데 대개 위에서부터 보주, 용차, 수연, 보개, 보륜으로 나뉜다. 바퀴처럼 생긴 조형물을 보륜(寶輪)이라고 한다. 그 위에 왕관처럼 생긴 모자 모양의 보개(寶蓋)가 얹어져 있다. 보개 위에는 꽃씨 주머니 형태 혹은 불꽃 모양의 수연(水煙)이 있고 그 위에는 동그란 구슬 모양의 용차(龍車)와 보주(寶珠)가 자리한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해진 4세기 무렵에는 목탑을 많이 만들었지만 7세기부터는 석탑을 만들기 시작했다. 목탑은 아무래도 보존하기 힘들고 화재에 취약했기 때문이다.

벽돌로 만든 전탑이나 돌을 벽돌처럼 쌓아 만든 모전 석탑, 청동으로 만든 청동탑, 쇠로 만든 금동탑 등이 있지만 우리나라는 석탑이 가장 많다. 석탑은 불탑의 중심이었다.

인도와 중국이 전탑, 일본이 목탑이 많았던 것에 비해 우리나라에 석탑이 유독 많은 이유는 질 좋은 화강암이 많고 돌을 잘 다루는 석공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석탑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삼국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백제는 목탑 형태가 많았고 신라는 전탑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백제의 익산 미륵사지 9층 석탑이나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 신라 경주의 분황사지 9층모전석탑에서 알 수 있듯 규모도 크고 모양도 제각각이었다.

통일신라의 새로운 불교문화는 삼국통일 후 20여 년간 당나라와 전쟁을 끝낸 680년쯤부터 시작됐다.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에 당나라 문화를 전폭적으로 수용하여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통일신라의 석탑은 679년 건립된 사천왕사 목탑과 682년에 건립된 감은사삼층석탑에서 기본을 이루었다.

경주 장항리사지 서오층석탑.     /출처=국립문화재연구소
경주 장항리사지 서오층석탑.     /출처=국립문화재연구소

◇감은사지 석탑이 삼층석탑의 시원

통일신라시대에는 이전의 탑 건축보다 재료가 다양해졌다. 석탑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목탑과 전탑, 금동탑들이 만들어졌다. 통일신라 이후 점차 탑의 규모가 작아졌으며 쌍탑으로 배치하는 것이 일반화됐다. 형태도 뚜렷하게 변화가 있었다. 이중기단에 삼층의 탑신을 갖춘 석탑인 감은사지 삼층석탑이 전형적이었다. 이 양식은 건립 이후 약 250여 년간 지속된다.

통일신라시대는 다른 어떤 시기보다 많은 양의 탑이 건립됐다. 경주지역에 머물던 탑 건축은 9세기 이후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감은사지석탑은 통일신라 전(全)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세워진 모든 삼층석탑의 시원이 됐다. 석탑은 백제에서 시작됐으나 재료가 석재였을 뿐 목탑의 구조를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복잡한 목조 구조 형식의 석탑에서 거대한 판석을 다듬어 조합하는 판석식 석탑으로 단순화시킨 석탑 양식도 감은사지 석탑이 시발점이었다.

요즘 말로 감은사지 석탑이 미니멀하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다. 무엇보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바뀌다 보니 번잡하고 불필요한 건축 요소를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 시기를 중심으로 많은 양의 석탑이 건립됐기 때문에 거대한 석탑보다 소형석탑이 대량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신용철 양산박물관장은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특징을 먼저 결구 방식이 변화했다고 밝혔다. 백제의 석탑과 8세기 이전 통일신라 초기 석탑은 기둥과 면석 지붕돌이 모두 다른 돌로 조각 결합 돼 있다. 8세기 이후의 석탑은 기단 덮개돌은 하층과 상층이 각각 8매, 4매의 돌로 결합 돼 있으나 기단 면석에는 기둥과 면석이 하나의 돌에 함께 조각돼 있다. 9세기에 이르면 탑의 부재는 더욱 간단해져 하층과 상층 기단 면석을 제외한 모든 부분을 각각 1매의 돌로 결구했으며, 심지어 탑신과 지붕돌을 같은 돌로 조각해 쌓기도 했다.

이전 시대에 비해 탑의 비례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감은사지삼층석탑이나 고선사지삼층석탑과 같은 초기의 삼층석탑에서 2중 기단과 탑신은 시각적인 안정감을 주기 위해 지표의 점유 면적을 넓혔다. 8세기 이후 불국사 석가탑을 기점으로 안정감과 상승감이 동시에 추구됐다. 9세기 이후의 석탑은 안정감보다는 상승감만을 강조해 기단과 탑신이 가늘고 길게 (細長形) 변화했다. 단층기단 석탑이 자연 암반이나 토단 위에 건립되는 것도 가늘고 길게 만드는 비례감각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다. 이 같은 세장형의 탑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까지 그대로 전승됐다.

8세기 이후 석탑의 공예화, 조각화가 이루어지는데, 조각상이 탑 표면에 나타난 것도 통일신라시대 탑의 특징이다. 토함산에 건립된 석탑에서 인왕상, 팔부중상을 새긴 석탑이 나타난다. 9세기 이후에는 탑의 크기가 더욱 축소되면서 좀 더 아름답고 화려하게 꾸미려고 하는 공예적 요소가 나타난다. 석굴암 삼층석탑의 경우에는 기존의 형태를 탈피해 건축한 토함산 석탑 예술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통일신라석탑은 8세기 이후에는 심오한 불교사상을 배경으로 독특한 형태의 독창적인 탑들이 만들어졌다. 불국사다보탑은 기단부터 탑신, 상륜에 이르기까지 화강암을 다듬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한 비례감을 보여주고 있다. 동일형태의 쌍탑이 일반화돼 있던 신라시대에 불국사다보탑과 같은 이형석탑은 불교미술의 토대가 되는 경전에 충실했다. 표현에 있어서는 다른 나라에 존재하지 않는 다양한 창안과 파격을 시도한 통일신라 탑파미술의 꽃으로 평가받고 있다.

만호봉사지 인왕상 탱주석.
만호봉사지 인왕상 탱주석.

◇호국적 성격을 띤 토함산의 석탑들

현재 토함산 일대에 남아있는 불교사찰과 그곳에 건립된 석탑은 10기 남짓이지만 토함산 외곽으로 약간만 범위를 넓혀도 두 배가 넘는 많은 탑이 건립됐다.

신용철 양산박물관장은 “토함산 석탑의 분포는 고대부터 발전했던 교통로와 그것을 중심으로 건립된 사찰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말한다.

신 관장은 고대 교통로로 신라 및 통일신라 시기의 수도를 일컫는 신라왕경에서 동해구(東海口, 토함산 계곡에서 흘러나온 물이 모여 동해로 들어가는 하구 일대를 가리키는 말)에 이르는 길과 왕경에서 울산을 잇는 토함산 서쪽을 따라 진행하는 길이 있다고 밝혔다.

먼저 신라왕경에서 동해구까지의 길에는 장항리사지 오층석탑과 만호봉사지 석탑이 있다. 두 석탑은 문무왕의 장례처인 동해구와 감은사에서 구해온 만파식적에서 알 수 있듯이 호국적인 성격을 띤다. 게다가 이 탑들은 탑신부 4면에 인왕상을 배치해 호국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신라왕경에서 울산을 잇는 토함산 서쪽을 지나는 길을 따라 형성된 사찰의 탑들은 석가탑과 다보탑, 마동 삼층석탑 등인데 신라탑파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밝혔다.

토함산에 있는 석탑 중 이미 언급한 석가탑과 다보탑을 제외하고 가장 중요한 석탑을 언급하라면 장항리사지 오층석탑을 들 수 있다. 장항리사지 오층석탑은 이미 지난 회 폐사지 편에서도 언급한 석탑이다. 동탑은 계곡에 붕괴된 상태로 흩어져 있던 것을 수습해 금당터와 서탑 사이에 부재를 모아두었다. 서탑은 1923년 도굴범이 사리장치를 탈취할 목적으로 폭파한 것을 1932년 복원했다.

여기서 다시 장항리사지 석탑을 언급하는 것은 이 석탑이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변화이행과정을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장항리사지 이전 석탑은 대개 각 부분을 여러 개의 판석으로 조립·제작한 것과 달리 각각 한 개씩의 돌로 제작했다. 즉 탑 부분을 결구하는 결구식 탑에서 완성된 부재를 쌓아 올리는 누적식 탑으로의 이행이 이 석탑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만호봉사지(일명 시부걸사지) 석탑은 사실 어디에 있었는지도 불분명하다. 인왕상이 부조된 돌기둥 상을 출토한 절터가 만호봉사지가 아닐까하는 추측이 있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미술관 1층에 전시하고 있다. 인왕상은 모두 나신의 상반신으로 중앙을 향해 몸을 꺾은 역동적인 자세로 모두 권법인을 취하고 있다. 하나의 상은 오른손에 보주를 쥐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유물 카드에는 1930년 10월 인왕상 석주 4기가 경주고적보존회에서 박물관으로 반입된 것으로 돼 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 학자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의 조사보고서에는 1931년 6월 만호봉사지에 대해 “사지는 만호봉 중턱에 남면을 하고 있으며 탑 잔석의 파편이 그 계곡에 있다. 옮겨진 탑 조각 잔석은 여기서 옮겨진 것으로 전한다”라고 돼 있다.

학계에서는 만호봉에서 동쪽으로 약 300m 지점에 만호봉사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사지에는 옥개석 1매, 기단석 및 갑석의 일부가 남아있다.

/최병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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