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토함산은 신앙적 측면과 함께 국방 수호의 의미

등록일 2022-11-13 19:17 게재일 2022-11-14 15면
스크랩버튼
(19) 박방룡 신라문화유산연구원장과의 대담
불국사 대웅전.

경주의 영산 토함산을 취재하면서 드러나지 않은 것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토함산에 있는 불국사와 석불사(석굴암)는 유네스코 지정 문화유산이지만 실제로 문화유산의 미학적, 역사적 가치에는 무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이 일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t Carr)는 명저(名著)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토함산의 숨겨진 다양한 이야기를 이해해야 통일신라시대와 오늘날의 경주를 통찰력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연재를 마감하면서 필자 역량의 한계로 토함산의 문화유산에 담긴 밝히지 못한 이야기들이 무수히 남아 있음을 고백한다. 경주 문화유산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박방룡 신라문화유산연구원장과 대담을 마련한 것은 독자들에게 필자가 미처 짚지 못한 이야기를 전문가의 눈으로 밝혀주기 위함이다.

토함산과 석탈해왕은 불가분의 연관

삼국유사 따르면 탈해왕의 무덤을 파내

토함산에 유골 안치·동악신으로 모셔

조선시대까지 제사… 국방적인 기록

석굴암은 암벽 파서 만든 인도·중국 등

다른 나라 석굴사원과 달리 돌 쌓은 형태

건축·수리·기하학 결합된 조형예술 걸작

세계적 문화유산 품은 영산 토함산,

활발하고 체계적인 연구 본격화될 때

통일신라시대 역사 생동감있게 다가올 것

석탈해 유물이 묻힌 사당.
석탈해 유물이 묻힌 사당.

◇불교적 이상국가 건설이 집약된 토함산

“토함산은 신앙(산신신앙)적인 면과 함께 불교에서 지향하는 이상적인 나라를 건설하려는 신라인의 열망과 국방 수호의 의미가 있는 영산입니다”

박방룡 신라문화유산연구원장은 지난 8일 본지와의 대담을 통해 통일신라기 최고의 문화예술작품인 불국사와 석불사(석굴암)가 토함산에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라며 이같이 말했다.

박 원장은 “토함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 21권에서 신라의 중사(中祀)를 지내던 오악(五岳) 중 동악(東岳)으로 기록돼 있다”고 했다. 신라오악은 산악숭배사상에서 비롯됐으며, 오악동서남북 4방에 가운데의 중방을 합친 것으로, 오악신앙은 5개의 산천을 성역화해 제사지내는 데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동악인 토함산은 해 솟는 방향과 일치하고 석탈해가 산신으로 모신 점으로 보아 석씨 세력의 상징적인 산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고 밝혔다.

그는 토함산은 신앙(산신신앙)적인 면과 함께 국방 수호의 의미가 있다고 했다. “‘삼국사기’ 3 신라본기 3 나물이사금(奈勿尼師今) 9년(364)조의 내용에서 볼 수 있듯이, 동해안을 통해 침입하는 왜인(왜적, 왜구)의 1차 방어선으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한편으로 토함산은 불교 유적의 성지이기도 했다고 박 원장은 밝혔다. 현재까지 토함산에서 위치가 확인된 불교 유적만 총 19곳이며, 위치를 확인하지 못하는 유적까지 포함하면 총 27개의 불교 유적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경주 남산 다음으로 많다고 한다.

경주를 넘어 대한민국의 불교 유적 중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불국사와 석굴암이 토함산에 자리 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박방룡 원장은 이승에 부처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은 신라의 오랜 꿈이었을 정도로 불교가 나라를 지탱하는 이념이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신라인들은 자신의 나라가 바로 ‘부처의 나라’라고 믿었기에 불국사를 곧 부처님의 나라가 현세에 실현된 낙원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측면으로 박 원장은 신라왕경에서 동해(울산)로 향하는 교통의 요충지에 있다는 점을 들었다.

석탈해왕릉.
석탈해왕릉.

◇신라왕경에서 동해안 가는 길 왕릉과 사찰

신라 왕경에서 동해안으로 가는 길은 크게 두 갈래로, 첫 번째는 월성이나 황룡사에서 시작해 분황사, 낭산 북쪽, 명활산성, 천군동사지, 고선사지, 기림사를 지나 감은사로 향하는 경로가 있으며, 두 번째는 불국사, 장항리사지, 감은사로 연결되는 길인데 이 길은 경주 월성에서 시작해 낭산 서편(사천왕사나 망덕사 남쪽)을 지나 현재의 7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이어지다가, 구정동 인근에서 다시 불국사 가는 길로 연결됐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이 길이 중요한 이유는 신라왕경에서 동해안으로 가는 길에 왕릉급 무덤이나 사찰이 있기 때문이다.

“불교미술의 권위자인 최선아 명지대 교수는 7세기 후반 사천왕사, 망덕사, 전(傳)황복사 등 왕실과 관련된 주요 불사(佛寺)와 신문왕릉, 효소왕릉 등의 조성이 낭산 일원에서 이뤄졌고, 8세기 전반에는 왕실 관련 사업들이 토함산 일원으로 확장되었다는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여러 불교 사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해볼 때 이 시기가 신라 제33대 성덕왕 전후로 추정됩니다. 신라왕경에서 동해안으로 가는 경로의 울산 방향 끝에는 성덕왕 21년(722)에 조성한 관문성이 있는데 이 성은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는 역할과 기능을 했을 것을 보여지며, 사찰과 왕릉이 입지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박 원장은 “토함산의 산신이 된 석탈해 왕은 이주민이 신라의 권력을 잡은 대표적인 경우로 석탈해왕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 원장은 석탈해왕이 ‘삼국유사’ 제1 기이(紀異) 제4 탈해왕조(脫解王條)에 탈해가 지략으로 호공의 집을 빼앗은 점을 들며 대단한 지략가라고 평가했다. 지략가적인 측면은 남해왕이 자식을 제치고 사위인 석탈해를 태자로 삼을 정도로 석탈해가 남해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것이다.

“토함산과 석탈해왕은 불가분의 연관이 있어요. ‘삼국유사’ 1권 기이 1 탈해왕조에서 볼 수 있듯이 탈해왕의 무덤을 파내 유골을 토함산에 안치하고 동악신(東岳神)으로 모셨다는 것은 국방적인 것을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삼국통일 직후 토함산과 가까운 경주시 양남면 동해안 일대에 왜구의 침입이 잦았으므로 문무왕을 동해의 대왕암(大王岩)에 장사 지내고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했으며 관문성의 신대리성(新垈里城)을 구축하는 등, 이에 대비하는 과정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신라 왕경을 수호하는 호국산신 동악신에게 행하는 제사는 ‘삼국유사’가 편찬된 13세기까지 약 700년간 끊이지 않았으며 조선시대로 이어집니다. 2020년 석탈해왕 사당터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명문와 및 공반 유물을 보면 조선 후기까지 제사가 계속됐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다른 나라의 석굴사원과 석굴암이 다른 점에 대해 박 원장은 “석굴암에서 본존을 안치한 주실은 유사사례가 없는 원형당(圓形堂) 형식을 지니고 있으며, 석굴암 건축과 부분적으로 유사한 유적은 있지만 석굴암의 주요한 건축적 요소를 모두 지닌 예는 찾을 수 없으며, 이에 그 원류나 모델로 특정 유적을 지목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석굴암은 암벽을 파서 만든 인도와 중국 등 다른 나라의 석굴과는 달리 돌을 쌓아 만든 특이한 사례라는 것이다.

“석굴암과 유사한 유적으로 대표되는 중국 맥적산석굴 제 43굴과 용문석굴 사안동에서 볼수 있는 둥근 평면과 둥근 천장의 형태는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만, 석굴암 주실이 지닌 정연한 원형 평면과 비교할 만한 사례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비교적 석굴암 조성 시기와 유사한 아프가니스탄 바미얀 석굴(6~8세기)은 벽면 상부나 천장에 감실을 반복해 배치된 점 등이 석굴암과 비슷하나 석굴 중앙에 불상이나 예배대상이 없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석불사 본존불과 주실안의 존상.                                                                                                                                                                /고(故) 한석홍 제공
석불사 본존불과 주실안의 존상. /고(故) 한석홍 제공

◇건축, 수리, 기하학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걸작

박 원장은 다른 나라 석굴사원과 괘가 다른 석불사는 ‘조형예술의 걸작’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특히 신라 불교예술 전성기에 조성한 석불사 본존불상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완벽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 돼 있는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말했다.

“석불사의 돔형 천장을 구성하는 360여 개의 돌은 주실 천장의 또 다른 연판을 향해 모아지는 형태로, 이는 건축적으로 그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본존불상인 석가여래좌상은 높이 3.45m로 연화좌(蓮花座) 위에 앉아 있습니다. 불상은 결가부좌 상태에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라는 손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는 깨달음을 얻은 부처가 지신(地神)을 소환해 자신의 깨달음을 증명할 때 취했던 동작이죠. 금강역사상, 팔부신장상, 천부상, 보살상, 나한상, 사천왕상 등의 다른 조각들도 모두 세부적인 자연스러움에 주의를 기울여 정교하게 조각됐습니다”

말도 탈도 많았던 석굴암 복원 논쟁에 대해 박 원장은 1960년대 석굴암 수리 공사를 전후해 제기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당시 주요 논쟁 요소는 돔 전면 광창 설치 여부, 비도 전면의 대문 설치 여부와 그 형태, 목조 전실의 유무, 전실 팔부신중의 평면 형태(절곡형 또는 일직선형) 등이었다.

현재까지 석불사 복원과 관련한 논쟁은 진행형인데 현재의 과학으로 밝혀진 부분도 있고 상당 부분은 추정과 가설인 경우도 있어 속단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박 원장은 토함산과 그 자락에 있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부족하다고도 했다.

박방룡 신라문화유산연구원장
박방룡 신라문화유산연구원장

“불국사는 인공적으로 쌓은 석조 기단 위에 지은 목조건축물로, 신라 불교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어 석굴암(석불사)과 함께 대표적인 불교 유적으로 손꼽히며, 우리나라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유산(1995)에 등재됐습니다. 이런 문화유산을 품고 있는 영산 토함산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될 때 통일신라시대의 역사가 보다 생동감 있게 후손들에게 느껴질 겁니다”

 

박방룡 신라문화유산연구원장은 제20대 국립부여박물관관장과 제8대 부산박물관관장을 역임하고 현재 신라문화유산연구원장에 재직하고 있다. 2013년 제16회 자랑스런 박물관인상을 받았으며 ‘신라도성’(학연문화사) ‘경주’(열린어린이) 등을 저술했다.

/최병일 작가

<끝>

토함산에 깃든 신라 역사와 경주 이야기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