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의진(山南義陣) 기억하고 추모하자 <2>
1907년 10월 2일 영천군 자양면 검단동의 본가가 불타버린 것을 확인한 후 포항 기계 안국사로 돌아온 정용기는 야간회의를 열고 북상에 대한 부장(副將)들의 의견을 다시 모았다.
이날 회의에서 정용기는 병사들에게 ‘10일간 휴가를 보낸다’라는 결정을 내렸다. 병사들 대부분이 기계·죽장·청송·청하·영일·흥해 등지에 본가를 둔 사람들이었기에 집안도 둘러보고 가족도 만나볼 수 있는 여유를 주고, 강릉 북상을 위해 그동안 입고 있던 얇은 의복을 동복으로 바꾸어 입고 오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영장(營將)들에도 각기 부하를 끌고 각지로 가서 의복을 구해오도록 하였다. 정용기 자신은 본진 150여 명을 이끌고 죽장면 매현리(梅峴里)에 유숙하며 휴가를 간 장병들의 귀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입암 침투 왜군 선제공격한 의병들
일본군 병력 속임수에 역공격 당해
민가 소실·학살·약탈 등 패전 참화
2대 대장 맡은 정용기 아버지 정환직
산남의진 재정비 본격적 활동 이어가
△이세기 부장, 일본군을 선제공격 했지만…
그런데 1907년 10월 6일 오후 4시에 갑자기 척후로부터 ‘우리를 추격하는 일본군이 청송에서 죽장으로 이동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에 정용기는 일본군이 만약 죽장면으로 들어온다면 중심 마을인 입암리에 유숙하리라 예측하고, 당시 매현리 본영에 함께 있던 부장 중 우재룡·김일언·이세기 등에게 각기 부대 하나씩을 이끌고 적소에 매복하여 있다가 적의 길목을 차단하도록 지시하였다.
만약 적이 들어오기만 하면 10월 8일 새벽에 입암을 공격할 것이며, 이때 적의 퇴로를 차단하여 적 전부를 섬멸할 계획임도 주지시켰다.
1907년 10월 7일 정용기의 명을 받은 세 부장은 작전에 따라 명령받은 매복 장소로 향하였다. 그런데 선발대로 나선 이세기 부장이 죽장면 광천(廣川)으로 매복 나갔다가 왜병 수 명이 이미 죽장면 소재지인 입암 1리 안동 권씨 문중 재실에 들어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더군다나 왜병들은 고지기(庫直)인 안도치(安道致)에게 저녁밥을 시켜놓고는 대청인 영모당(永慕堂)에 총을 모아 세워둔 채 보초 없이 모두 누워 쉬고 있다는 것이다.
이세기는 왜군들로부터 주문을 강요받고 닭을 잡아서 재실 앞 개울로 내려와 잡은 닭을 손질하던 안도치로부터 적의 병력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는 본부에 연락할 필요도 없이 현재의 군사로도 충분히 방심한 적들을 제압할 수 있다고 봤다. 이런 기화가 다시는 없다고 생각한 의병들은 왜군들을 향하여 일제히 선제공격을 가하였다. 갑자기 총소리를 듣고 놀란 것은 인근 매현에 있던 정용기 이하 본진의 군사들이었다. 그들은 매복 나간 군사들이 급습을 당한 줄로 알고 단숨에 달려와 영문도 모른 채 이세기 부대에 합류했다. 의병 150명은 이날 밤 9시 30분 시무나무걸(야연림·惹煙林) 소하천 둑을 따라 엎드린 채 왜군들이 있는 영모당 대청을 향해 집중사격을 가했다. 한참 동안의 집중사격 뒤, 일본군의 응사가 없자 의병들은 일본군이 모두 전사한 것으로 판단하고, 원촌(院村) 입암서원 쪽으로 퇴각했다.
의병들은 서원 맞은편에 있는 길옆 주막에서 승전을 자축하며 늦은 저녁밥을 먹었다. 권씨 재실에 들어간 일본군 청송수비대 11중대 미야하라(宮原) 소대가 의병들로부터 공격을 받자 마루 밑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죽은 시늉만 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상대방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른 채였다.
△통곡의 입암지변(立巖之變)
이날 의병들은 사정거리로 인정할 수도 없는 100여m 밖 원격사격으로 러·일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는 일본군 청송수비대 병력을 건드리기만 했던 셈이다.
상대방이 오합지졸이라는 것을 파악한 소대장 미야하라 소위는 치밀하게 의병들의 움직임을 주시하였다. 이들은 의병들이 그곳으로부터 약 1.5㎞ 떨어진 입암서원 앞 주막에서 술과 야식을 먹으며 방심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파악했다.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접수한 수비대는 10월 8일 오전 0시 20분부터 공세로 전환하였다. 고성능 무라다(村田) 연발총으로 무장한 일본군 수비대는 의병들이 모여있던 주막을 둘러싸고 집중사격을 가하였다.
의병들의 화승총과 창칼은 이들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화력과 전술로 비한다면 일본군 1명이 의병 100명을 상대하고도 남았다. 9월 초하루여서 달빛도 없었다. 그때 의병들은 대부분 흰옷을 입고 있었고 왜군들은 검은 군복을 입고 있었으니 이것 또한 결정적으로 불리한 점이었다. 이날 약 4시간 30분 동안 벌어진 입암서원 격전에서 대장 정용기,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좌영장 권규섭 등 수뇌부를 비롯해 19명의 의병이 한순간에 전사했다. 반면에 일본군은 2명의 부상자밖에 나지 않았을 정도로 전쟁은 일본군의 일방적 승리였다.
입암마을 수십 동의 민가도 소실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일군들은 양민 수십 명까지 학살하고 동민들이 보관하고 있던 귀중품들을 약탈해갔다. 입암 전투는 패전의 참화를 전국에서 가장 먼저 겪은 의병항전이었다.
△아버지가 아들의 대장직을 이어받다
1907년 10월 8일 새벽, 정환직은 영일 기북면 막실에 있는 처남 이능추의 집에서 입암전투의 비보를 접하고 놀란 나머지 황급히 현장으로 달려갔다. 입암서원에 도착하여 확인한 아들 정용기의 시신에는 총상이 10여 군데나 있었고, 핏자국이 서원의 온 집안에 퍼져 있었다. 정용기가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어 재기한 지 5개월 만에 또다시 의진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입암 전투로 의진의 지휘부가 무너지자 남은 장령들이 정환직에게 의진을 이끌어 줄 것을 간곡히 청하였다.
정환직도 의진 총수로서 지금까지 이를 총괄해 왔던 만큼 더는 사양하지 못하고, 제2대 대장직을 맡았다. 그때 정환직의 나이 64세였다.
정환직은 의진을 재편하고, 1907년 10월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의진은 청송 보현산과 영일 북동대산(北東大山)을 거점으로 삼았다. 이곳은 오늘날 청송군·영덕군·영천군·포항시(영일군)의 접경지로 공격과 후퇴가 쉬울 뿐 아니라 진영을 분산·집합시키는 데에도 적합한 천혜의 요충지였다.
본격적인 진용을 정비한 정환직은 1907년 10월 16일 약 200명의 의병을 이끌고 흥해분파소를 공격하여 적 수 명을 죽이고 분파소 및 관계 건물을 소각하였다.
10월 29일 다시 의병 약 150명을 인솔하여 흥해 분파소를 습격하여 우편국과 분파소를 불태우고 소장 이치하라 다메타로(市原爲太郞)와 그의 처 지요(千代)와 딸 우시키쿠(午菊)를 총검으로 살해하고 그곳에 보관된 돈 300여 관(貫) 및 기타 군수물을 빼앗고, 건물 13동을 불태웠다. 살아남은 일본 순사들은 겁에 질려 가족들을 인솔하여 포항으로 피신해버렸다.
11월 3일에는 의병 약 50명으로 영천 신령을 공격하여 분파소에 보관하던 총기 60여 정을 빼앗고 분파소 및 순검의 주택을 소각하고 이튿날에는 군위군 의흥(義興) 분파소를 습격하여 분파소를 불태우고 총기 49정을 빼앗았다.
다시 청송으로 가서 11월 8일 청송군 유전(楡田)에서 일본군을 만났으나 패전하여 무기 131정을 빼앗기고 의병 조재술은 좌측 다리에 관통상을 당하였다. 그런데도 11월 11일 청하에서 영천수비대와 교전하였고, 11월 16일 정완전(鄭完全)· 우재룡과 함께 흥해를 습격하여 분파소를 불태우고 일본 순사 곤지(權治) 및 한국인 순검 정영필(鄭永弼)을 죽이고 순사 숙사 2동, 한인 순사 가옥 1동, 관유 건물 3동을 소각하였다.
/이상준(향토사학자·본지 객원 편집위원)·홍성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