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수국’ 6선
세상의 길들에 존재하는 다양한 것들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긴 혹은 짧은 여행을 떠났다.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이 급습하기 전까지는. 사나운 빗줄기처럼 몰아쳐 온 역병의 기세는 한참을 집 주변만 서성이게 했다.
이제 비가 걷히고 어두운 구름이 물러간다. 해가 비쳐 살갗에 닿는 공기가 다르게 느껴진다.
우리의 여행은 다시 시작된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 들판에 핀 꽃들과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이 전하는 소소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좋겠다. 이곳에 펼쳐놓는 여행의 단상과 기록들이 길잡이가 되어 길 위에서 뜻밖의 풍경들을 마주하길 바란다.
6월의 제주에는 수줍은 신부의 부케 같은 꽃다발이 지천으로 피어난다. 노란 유채꽃이 봄의 전령이라면 파스텔을 칠해 놓은 듯한 탐스러운 수국이 제주의 여름을 알린다. 화사한 봄꽃이 저문 제주에 여름이 짙어지면 다양한 빛깔의 수국이 향연을 펼친다.
어떤 색을 뿜어낼지 그 속내를 알 수 없어 더 신비로운 수국은 색마다 다른 꽃말을 지닌다. 한결같은 사랑을 속삭이다가 쉽사리 마음이 변하는 변덕을 부린다. 심보가 도깨비 같아 도채비꽃(도깨비꽃)이라고 불리는 수국이 다채로운 색을 뽐내는 여름 제주로 꽃놀이를 떠나보자.
6월 제주도에는… 다양한 빛깔 ‘수국’ 향연
하얀·핑크·보라·파란·붉은빛 수국꽃 만개
한림공원·혼인지 등 명소마다 관광객 유혹
토양 따라 꽃색깔 변해 ‘도깨비꽃’이라 불려
□ 제주 서쪽 관광명소 트로피칼 한림공원
제주시 한림읍에 있는 한림공원은 1971년 10만여 평의 황무지 모래밭에 야자수 씨앗을 심어 일군 테마파크다. 에메랄드빛이 물든 협재해수욕장과 금능해수욕장 사이에 있어 수많은 사람이 찾는 관광명소다.
이 테마파크에 계절마다 다른 꽃을 피우며 매월 축제가 열린다. 6월에는 수국 동산에서 하얀빛, 핑크빛, 붉은빛, 보랏빛, 파란빛까지 다양한 색이 쏟아져나온다. 꽃잎의 색이 다른 이유는 토질 때문이다. 수국의 안토시아닌이라는 성분이 산성토양에서는 알루미늄 이온과 만나 푸른색 꽃이 피고, 염기성 토양에서는 알루미늄 이온과 결합하지 못해 붉은색 꽃이 핀다. 한그루에 다양한 색의 꽃이 피는 경우는 여러 갈래로 뻗은 뿌리가 닿는 토양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국이 도깨비 같은 변덕을 부리는 이유인 셈이다.
한림공원은 수국만 보고 가기에는 아깝다. 한라산 화산 폭발로 용암이 흘러 생긴 경이로운 동굴도 있다. 천연기념물인 협재굴과 쌍룡굴은 용암동굴이면서 석회동굴에서 볼 수 있는 석순과 종유석들이 자라고 있다.
여름 수국을 즐기다가 시원한 동굴 안에 들어가 흘린 땀을 식히기에도 더할 나위 없다.
□ SNS 수국 명소 카페 마노르블랑
서귀포시 안덕면에 있는 마노르블랑은 경관이 빼어난 산방산이 정원 배경이다. 개인 소유의 카페는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언덕 위에 얹은 하얀 집이 그림 같고, 정원에서 계절마다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 SNS 사진 명소로 입소문이 나 있다.
6월이면 카페 정원에는 어김없이 수국이 만개한다. 웅장한 산방산과 어우러진 꽃밭은 수국 명소로 알려지면서 수많은 사람이 찾아온다. 가족, 연인, 친구와 함께 야외 스튜디오처럼 잘 가꾼 포토존에서 꽃을 배경 삼아 인생 사진을 남긴다.
산책로에는 사람 키를 훌쩍 넘는 붉은 수국 담길이 이어진다. 꽃이 열어 놓은 사잇길을 걷다 보면 삶에도 꽃길이 펼쳐질 것 같다. 산방산만 바라봐도 좋은 곳에 아름다운 꽃들이 덤으로 피어 있으니 시원한 커피 한 잔과 더불어 눈의 호사를 누려보면 어떨까.
□ 조용한 바다마을 위미리 수국길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는 남쪽의 조용한 바닷가 마을이다. 옛날에는 ‘쉐미, 뛔미’라 이름 불렀고 한자로 ‘우미촌(又尾村)’이라 표기했다. 해안 산기슭을 따라 중산간 지역까지 길게 펼쳐진 마을 북쪽에는 큰동산·족은동산·쇠동산이 있다. 쇠동산의 지형이 마치 소가 누워있는 모습이고, 족은동산(작은동산)이 소의 꼬리와 닮아 ‘우미’라 부르다 지금은 ‘위미’로 바뀌었다.
서귀포에서 남원까지 이어지는 해안도로의 잔잔한 풍경을 따라가다가 닿게 되는 위미리는 겨울에는 바닷가 동백나무 군락지에서 붉은 꽃이, 여름에는 길가에서 푸른 꽃이 반긴다. 위미리 수국길의 꽃들은 여름의 아름다운 한 장면을 위해 인내하다가 길가에서 짧고 굵게 피어난다. 마을은 고즈넉한 포구를 품고 있다. 위미항 방파제에 핀 한 다발의 수국은 엽서 한 장에 담긴 그림 같다. 화려하게 가꿔 놓은 수국 명소보다 조금 쓸쓸하지만 항구를 포근하게 감싼 서정적인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보면 제주의 속살을 마주한 듯 마음이 따뜻해진다.
□ 사랑을 맺어주는 혼인지 수국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에 있는 혼인지도 수국 명소로 이름난 곳이다. 짙은 파란색 수국이 가득한 혼인지에는 설화가 전해진다. ‘제주’는 고려시대에 붙여진 이름으로 그 이전에는‘탐라’라 불리는 섬나라였다.
탐라국의 시조인 삼신인(三神人)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는 수렵 생활을 하다가 온평리 바닷가에 떠밀려 온 오색찬란한 나무상자를 건져 올렸다. 상자 속에는 벽랑국의 세 공주와 오곡백과가 들어 있었다. 삼신인은 세 공주를 각자의 배필로 정하고 온평리 혼인지 연못에서 혼례를 올렸다.
나무상자에서 나온 망아지와 송아지를 기르고 오곡 씨앗을 뿌려 농경 생활을 시작했다. ‘온화하고 평화롭다’라는 뜻의 온평리는 탐라국의 시작을 알린 곳으로 이때부터 제주가 흥하게 됐다는 전설이다. 이런 이유로 온평리는 혼인지 마을로 불리면서 전통혼례를 치르고 싶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혼인지에 수국 피는 계절이 오면 연못가에서 푸른 꽃들이 물안개처럼 피어오른다. 돌담을 따라 삼공주추원사까지 이어진 꽃길은 공들여 장식한 결혼행진 무대처럼 화려하다. 햇살에 부푼 꽃다발 앞에서 두 손을 꼭 잡은 커플들의 얼굴이 꽃잎처럼 화사하다.
□ 환상의 드라이브 길 종달리 수국길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는 작은 종달새의 지저귐이 들릴 듯한 조용한 마을이다. 조선시대 제주에 부임한 제주 목사(지금의 제주도지사)가 성산읍 시흥리를 시작으로 마을을 순회하다 종달리에서 행차를 마쳤다고 해서 ‘마칠 종(終)’, ‘도달할 달(達)’을 써 이름 지었다. 끝에 도달한 동네, 종달리는 제주목의 마지막 마을이자 제주 올레의 마지막 코스다.
낮은 지붕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은 유명한 소금 생산지였다. 소금의 질이 좋아 임금에게 진상했다고 한다. ‘소금바치’라 부르는 소금밭 자리에 지금은 억새가 자라고 철새가 날아든다.
마을 한가운데 우뚝 솟은 오름, 지미봉에 오르면 푸른 바다와 성산일출봉, 우도까지 시원하게 내다보인다. 제주다운 모습을 간직한 마을 해안은 용암이 식으면서 구멍 뚫린 기암괴석이 널려 장관을 이룬다. ‘고망난돌(구멍난돌)’을 시작으로 6㎞나 해안을 따라 나 있는 드라이브 길은 수국의 성지다. 바다와 엉킨 꽃무리는 환상적이다. 바다 너머 우도를 배경으로 도드라진 꽃들은 제주 수국 여행의 백미다.
□ 석양빛에 물든 우도 수국
제주시 우도면의 우도는 ‘소가 누워 머리를 내민 모습과 같다’라고 해 이름 붙여진 화산섬이다.
1697년 조선 숙종 때 국유목장을 짓고 국마(國馬)를 사육하기 위해 섬에 사람들이 드나들었고, 헌종 때 김석린 진사 일행이 정착했다. 구좌읍에 속해있다가 1986년 우도면으로 승격했다. 제주 본섬에서 약 15분 정도 배를 타고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우도는 산호가 반짝이는 백사장과 우도 8경이 신비로운 섬이다.
여름이면 소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쇠머리오름과 우도 등대공원 일대에는 수국이 들꽃처럼 피어난다. 바람 많기로 유명한 섬, 바람이 흥겹게 노래하면 꽃들이 현란한 춤을 춘다. 색의 일렁임을 따라 천천히 쇠머리오름 정상에 오르면 시원하게 펼쳐진 바다 너머로 한라산과 성산일출봉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숙박이 아니면 차량 진입이 금지된 섬 안에서 스쿠터나 우도 전기차를 빌려 마을을 달리다 돌담 따라 핀 수국을 마주하는 것도 즐겁다. 해가 바다로 내려앉으면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섬은 고요하다. 섬에서의 하룻밤, 석양이 짙어질수록 쪽빛 바다는 붉게 물들고, 파스텔 수국 빛은 아련하다.
/제주=글·사진 이솔 객원기자 esol@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