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함산에 깃든 신라 역사와 경주 이야기<br/> ③ 토함산의 수호신 석탈해
토함산을 이야기하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신라 4대 왕 석탈해다. 유리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석탈해는 고대국가 신라를 탄탄한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역사 속에서 석탈해는 대단히 미스터리한 인물이기도 하다.
신라 4대 왕 ‘석탈해’… 미스터리한 역사적 인물
왕비가 임신 7년만에 큰 알 낳자 바다에 버려져
알에서 깨어나 고기잡이 노파에 길러졌다 기록
출중한 인물, 학문·지리 등 능통 최고관직 올라
양남면 탄강비각·토함산 사당터 등 곳곳에 흔적
□ 왜국 동북 1000리서 온 것으로 추정
석탈해는 출생부터 의문에 싸여있다. 석탈해는 용성국(龍成國) 혹은 다파나국(多婆那國)의 왕자로, 왕비가 임신 7년 만에 큰 알을 낳자 아버지인 함달파왕이 이를 불길하게 여겨 버리라고 했다. 왕비는 비단에 알을 싸서 보물과 함께 궤짝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배는 처음에 금관가야 해변에 이르렀는데, 금관인들이 배의 알을 보고 괴이하게 여겨 다시 바다로 띄워 보냈고 이후 진한(辰韓) 아진포구(阿珍浦口)에 닿았다.
마침 해변에 있었던 한 노파가 배를 발견하고 궤짝을 열어보니 알을 깨고 나온 작은 아이가 있어 거두어 길렀다는 것이 신라본기에 나오는 석탈해의 출생에 관한 기록이다.
여기서 말하는 용성국은 왜국의 동북 1천리에 있다고 전해진다. 삼국유사에도 “나는 본래 용성국 사람”이라는 구절이 있다. 용성국은 정명국이라고도 하고 다파나국, 완하국, 화하국이라고도 한다. 당시 왜국은 지금의 일본 규슈섬을 가리킨다.
용성국의 위치에 대해 다파나와 음이 비슷한 일본의 다지마국(但馬國)이나 히고노국(肥後國) 다마나군 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지만 신빙성이 부족하다. 어떤 이는 일본의 고대 소국 중 하나인 탄바(丹波)국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고구려 개국공신인 협보가 세운 국가이다 보니 이곳이 다파나국이 아니냐는 주장이 설득력 있다. 왜국 동북쪽 1천리 바깥에 있었다는 사료에 근거한다면 석탈해는 오히려 러시아의 캄차카 지방에서 온 것이라는 설도 있다. 캄차카 일대에 석탈해의 탄생설화와 비슷한 설화가 있다. 철을 다루는 야장을 타르사드(tarxad) 혹은 타르퀴안(tarquan)이라고 하는데 탈해라는 발음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주장은 석탈해가 절강성 일대 양쯔강 하류에서 왔다는 것이다. 이 부근에서 유일하게 한반도 남부 지방에 있는 남방계 고인돌이 발견됐다는 게 근거다. 고인돌을 만들던 사람들이 바닷길을 따라 절강성과 한반도 남부를 왕래했던 기록으로 보아 석탈해가 이들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마한 진한 변한 등 삼한과의 세력 다툼에서 밀려나 배를 타고 동쪽으로 탈출한 세력이라는 설도 있다. 실제로 석탈해를 마한사람으로 기록한 사서도 있다.
석탈해는 외모도 특이했다. “신장이 3척이요, 머리둘레가 1척(삼국유사)”이라는 기록이 있고 “너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고 골상이 특이하니(삼국사기)”라는 기록도 있다.
□ 알에서 태어난 특이한 출생 이력
사람이 알에서 태어난다는 난생설화(卵生說話)는 짚어봐야 할 대목이다. 고대신화에서 영웅이나 건국 시조의 탄생을 신비화하고 초인적(超人的)인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알 속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난생설화다.
역사학자 이덕일은 난생설화가 회이족~동이족 등에 걸친 문화이며, 은나라의 시조도 난생설화를 사용했음을 강조한다. 난생설화는 동이족에서 보이는 공통된 특징으로, 일본과 중국에는 난생설화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일본의 경우 모모타로(桃太郞)라는 복숭아에서 나온 사람이 장성해 영웅이 되었다는 설화는 있지만 알 속에서 사람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없다.
현재 중국인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한족(漢族)의 원류가 되는 화하족에서는 난생설화가 보이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서국(徐國)의 32대 군주인 서언왕 신화에서 난생설화가 보이는데 서국이 동이족 국가인 것을 보면 결국 난생설화는 고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설화라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부여를 비롯해 고구려·신라·가락의 건국신화는 모두 난생설화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와 석탈해(昔脫解)·김알지(金閼智)·수로왕(首露王)·동명왕(東明王) 등이 모두 그러한 예다. 고구려 건국신화에 나오는 물의 신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와 해모수(解慕漱) 가 결혼해 고구려 시조 동명왕을 낳았다. 동명왕도 커다란 알에서 나온 난생설화의 주인공이다. 박혁거세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줏빛 알에서, 수로왕은 구지봉에 내려온 황금알에서 태어났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난생설은 고대 민족의 신앙에서 비롯된 우주관이고 민족 철학이라 한다. 이러한 설화는 특히 동북아시아 지방 민족에게서 많이 볼 수 있다.
난생설화는 터무니없는 이야기 같지만 실제로 현대인도 마치 알에서 태어난 것 같은 현상을 볼 때가 있다. 일반적으로 태아는 어머니 뱃속에서 양막에 둘러싸여 성장하다 출산 전에 양막이 파열하면서 세상에 나오게 된다. 드물게 파열하지 않은 양막에 둘러싸인 채 아기가 태어나는 경우가 있다. 이 모습이 마치 알에서 나온 것처럼 보여 난생설화가 유래된 것이 아니냐고 추측하는 이들도 있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아도 양막에 쌓여 태어난 아이의 모습은 신기한데, 천 년 전 신화와 전설의 시대에 이런 아이가 태어났다면 당연히 알에서 사람이 태어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난생설화를 확장하면 조류를 숭상했던 우리 조상들의 문화와도 일맥상통한다. 민간신앙으로 세운 솟대는 성역이나 경계의 상징 또는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했다. 이 솟대에 올려진 조각은 물오리나 봉황, 황새, 기러기 같은 새의 형상이다. 새는 대표적인 난생 동물이다. 이런 이유로 인물의 상서로움이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알에서 태어났다’는 설화를 퍼트린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 학문과 예절이 출중한 인물로 성장
고기잡이하는 노파의 손에서 자란 석탈해는 학문과 지리에 두루 통달했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머리도 대단히 영특했다. 당시 재상인 호공의 집이 좋다는 것을 알고 이를 빼앗고자 그의 집에 몰래 숯과 숫돌을 묻어두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집안은 원래 대장장이인데 호공의 집이 원래는 자신의 집이라고 관가에 소를 제기했다. 관가에서는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를 대라고 했다.
이에 석탈해는 땅을 파면 숯과 숫돌이 나온다고 말하고, 한번 파보라고 했다. 땅을 파보니 숯과 숫돌이 나오자 이를 근거로 호공의 집을 빼앗았다.
삼국사기에 나온 이 이야기는 원문 그대로 이해했다고 보기 어렵다. 당시 경주 동해 변에 이주한 석씨 일가가 수렵 생활을 했으며, 철을 다룰 줄 알았고, 이주민인 석탈해 집단과 원주민인 호공(박씨 일가)과 대립해 석씨 집단이 승리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당시 2대 왕인 남해차차웅은 학문과 예절에 뛰어난 젊은이가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탈해를 입궁시킨다. 신체도 출중한 그에게 이름을 물으니 말하지 못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성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남해왕은 “청년이 태어날 때 까치들이 울다가 날아가고 남은 아기였으니 까치작(鵲)에서 새(鳥)를 날려버리고, 남은 글자인 옛석(昔)으로 성을 삼고, 궤를 열고 알에서 태어났으니 이름은 탈해(脫解)로 함이 좋겠다”고 해 석탈해라는 성과 이름을 얻게 됐다.
석탈해는 이후 기원전 8년, 남해왕 5년에 왕의 맏딸 아효 공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고, 10년에는 신라 최고의 관직인 대보(현 국무총리)의 자리에 오른다. 이후 곧바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지만 사양했다. 자신보다 지혜가 더 뛰어난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유리이사금이 나이가 석탈해보다 더 많고, 치아가 한 개 더 많다는 이유로 먼저 왕이 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이후 유리이사금에게 왕위를 넘겨받은 석탈해는 서기 57년 신라 제4대 왕으로 등극했다.
□ 경주 곳곳에 석탈해 왕의 흔적 남아
석탈해 왕의 흔적은 경주 일대 곳곳에 남겨져 있다. 양남면에는 석탈해 왕의 탄생을 기리기 위한 탄강비각이 있다. 동천동에는 석탈해 왕의 왕릉이 있고, 그 옆에는 석탈해 왕을 기리고 제사를 모시기 위해 광무 2년(1898년) 건립한 숭신전(崇信殿)이 있다. 매년 춘분이면 전국의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다.
삼국통일의 과업을 이룬 문무왕은 600여 년 전 황산진에서 가야군과 싸워 크게 이긴 석탈해 왕의 유골을 파내 생전 모습 그대로 조각상(塑像)을 만들고 토함산에 봉안했다. 이후 석탈해 왕을 토함산에 동악신으로 모시고 계속 국사(國祀)를 지냈다고 전한다. 국사를 지낸 흔적이 있는 토함산 정상의 석탈해 사당터에는 고려 후기에 중건된 건물의 흔적도 있다. 중심 건물지의 서편에서 토석축으로 벽체를 조성한 1칸의 부속 건물지도 확인됐고, 이 건물지에서는 철제마(쇳물을 부어 만든 말 인형), 토제마(흙으로 구운 말 인형)를 비롯해 청동방울, 통일신라시대 암막새편, 평기와, 고려시대 명문기와, 해무리굽 청자, 상감청자, 분청사기 등이 출토됐다. 화로나 잔 받침 등 제사와 관련된 청자와 분청사기도 발견됐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고려 후기 몽고족의 침입 이후 계사년(1353)에 불국사와 함께 탈해 사당도 중건됐음을 알 수 있는 자료”라며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경잡기 등 지리지와 여러 문집의 기록을 보면 탈해 사당에서 조선 전기까지 제사를 지냈다”라고 말했다. /최병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