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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이상적인 공산국가를 꿈꾸었던, 그들과의 만남

◇ 네바 강에서 펼쳐지는 러시아 해군의 관함식상트 페트르부르크 거리마다 군인들로 넘쳤다. 한눈에 봐도 해군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특이한 건 러시아 해군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군인들도 많았는데, 이렇게 해군들이 많은 이유를 함께 방을 쓰는 친구가 알려주었다. 매년 7월 마지막 주 일요일에 러시아 해군 창설 기념 관함식과 축제를 하기 때문에 러시아 해군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우호관계에 있는 다른 나라 군인들도 많은 거라고. 겨울 궁전이 바로 보이는 네바 강변에는 여러 척의 군함과 잠수함까지 도열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평일부터 그 광경을 보기 위해 북적였다. 지금 이 시기가 어쩌면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가장 붐비는 시기일지도, 금요일이 되자 빈 침대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8개의 침대 중 4개는 한 가족이 차지했는데 제대로 휴가를 즐기는 듯 저녁이 되면 그날 쇼핑한 것을 펼쳐놓고 정리하며 즐거워했다. 그들이 온 곳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3000킬로미터나 떨어진 첼랴빈스크였다.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우파로 올 때 머물지 않고 그냥 스쳐왔던 곳이다. 이렇게 온 가족이 휴가를 떠나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 것이다. ‘국내여행’이지만 거리로 치면 국내여행이라 할 수가 없다. 러시아 해군 창설일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왔는데 자기들은 이 날짜에 맞추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고, 나에겐 운이 좋다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하지만 딱히 이런 무기들을 늘어놓은 행사에는 관심이 없으니 그저 무심히 구경할 뿐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의 마지막 날, 일요일 밤엔 내내 네바 강과 전함들을 밝히는 화려한 불꽃놀이와 사람들의 함성이 이어졌다.러시아는 오랜 세월 유럽으로 진출하기 위한 부동항을 확보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태평양으로 나아가기 위해 제정 러시아 시대에 블라디보스토크를 태평양 함대의 군항으로 삼은 것도 그 때문이다. 과거 표토르 대제가 발트해에 접한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수도를 옮긴 것도, 현재 러시아 본토에서 동떨어져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국경을 거쳐 가야하는 항구도시 칼리닌그라드를 포기하지 않고 발틱함대 사령부를 두고 있는 것은 어떻게든 유럽을 견제하고 바다로 나가는 길을 열어 놓기 위함이다. 아무리 넓은 영토를 가졌어도 바닷길을 포기하면 위축될 수밖에 없다. 러시아로선 바닷길을 확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발틱 함대는 태평양 함대와 흑해 함대에 비해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수도 모스크바와 가장 가깝고 가장 많은 물류가 오가는 유럽 항로를 지켜야 하니 임무가 가장 막중하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오는 길에는 고속도로를 달렸다. 아직 공사구간인 곳을 제외하고 아주 여유롭게 모스크바로 들어올 수 있었다. 약 800킬로미터 거리인데 만약 일반 도로로 달렸으면 예정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속도로로 달렸음에도 쉬는 시간을 포함해 12시간이 걸렸다. 쉬는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였는데도 모스크바 시내에 들어와 정체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른 나라에 와서 고속도로를 달리면 왜 우리나라는 오토바이의 고속도로 통행을 막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세계에서 오토바이가 고속도로를 달릴 수 없는 국가는 우리나라와 베네수엘라, 인도네시아 정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는 한국이 유일하다. 배기량이 낮은 오토바이의 경우 통행을 제한하는 경우는 있어도 지금까지 여행한 국가 중에서 고속도로를 달리지 못한 나라는 없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속도로뿐만 아니라 자동차 전용도로도 오토바이를 달릴 수 없게 만들어 ‘통행의 자유’를 제한한다. 오토바이와 오토바이 운전자에 대한 차별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이렇게 고속도로를 달리다 다시 돌아가 차별 받을 걸 생각하면 참으로 아쉽다. 오토바이가 위험하기는 하지만 그건 차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오히려 가해의 위험은 자동차가 더 크다. 오토바이든 자동차든 단지 이동의 도구일 뿐 모든 건 운전자에게 달린 것이라 생각한다.모스크바부턴 이제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모스크바에 며칠 머무르는 동안 K 선생님 댁에서 지내기로 했다. K 선생님은 동향인데 모스크바에서 민박과 하숙집을 운영하고 있다. 모스크바에서 고향 사람을 만나 편안하게 지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K선생님의 민박집은 아르바뜨 거리와 가까워 관광하기도 편했다. 처음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는 시내와도 먼 곳에 숙소를 잡았고, 오토바이 부품을 구하느라 시간을 많이 쓴 탓에 제대로 시내 구경을 하지도 못했다. 이제 새로운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경험했던 길을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마음도 편안해졌다. 어떤 일이 생길지는 전혀 예상할 수는 없지만 처음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와는 다르게 조바심은 내려놓고 여유롭게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추위가 오기 전, 추석 전에 돌아가려면 무조건 마음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골목길에서 만난 엥겔스처음 모스크바에 왔을 때는 서점을 한 곳도 찾아보지 못했었다. 모스크바 대학 근처에 괜찮은 서점이 여럿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돌아오는 길에 가보자 싶어 명소 위주로만 돌아다녔었다. 숙소 가까이 있는 돔 서점을 찾았다. 지하 1층, 지상 2층까지 규모가 큰 서점이다. 우리로 치면 광화문 교보문고 같은 느낌이었다. 카페도 있고 장난감, 문구부터 모든 분야의 책을 모두 구할 수 있는 서점이다. 내부 인테리어도 훌륭했고, 직원들도 친절했다. 2층에 팔고 있는 미니북이 탐났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50년의 역사를 가진(1967년 개점)만큼 책과 관련된 행사들도 자주 열리는 듯했다. 서점을 나와 아르바뜨 거리 남쪽에 있는 톨스토이 국립 박물관과 푸쉬킨 기념관을 찾아 골목길을 걸었다. 아르바뜨 거리에 있는 헌책 노점은 책을 찾는 손님의 거의 없었다.아르바뜨 거리 남쪽에는 박물관과 미술관이 흩어져 있다. 이리저리 골목길을 헤매다 톨스토이 국립 박물관 근처에서 엥겔스의 동상을 마주했다. 그는 마르크스의 평생 동지였으며,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집필하는 동안 물심양면 도왔다. 산업혁명 이후 피폐해진 농촌을 떠나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들어온 농민들은 노동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삶은 곤궁했다. 그는 독일 출신이었으나 아버지가 경영하고 있던 영국 맨체스터 방직공장에서 일하며 노동자의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은 부르주아 계급이었으나 사회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마르크스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집안도 부유했고, 아버지는 변호사였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핍박받는 노동자의 삶을 기록하고 공산주의 이론을 정립하는데 평생을 보냈다. 노동자들의 혁명은 성공한 적이 있으나 이상적인 공산국가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정밀한 이론도 인간의 욕망이란 변수 앞에선 꼼짝없이 길을 헤맬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싶다.모스크바를 떠나기 전 시 외곽에 있는 푸드시티에 다녀왔다. 러시아 전역에서 생산된 과일과 야채, 각종 농산품이 모이는 거대한 시장이다. 특히 중앙아시아에서 생산된 견과류가 굉장히 쌌다. 구역별로 나뉜 거대한 트럭 주차장이 그대로 시장이었다. 밖에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트럭 뒷문을 열어놓고 자신이 가지고 온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려는 농민과 상인들의 에너지가 넘쳤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이 틀렸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자신이 살던 시대를 증명하는 가장 훌륭한 이론이었으나 세상은 하나의 이론으로 재단하고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바뀌고 있다. 당장 내일 닥칠 일도 알 수 없는 세상이다. 이제 모스크바를 떠날 일만 남았다.    /조경국

2020-07-14

길을 떠나야 세상이 보인다… 겨울 청량산 기행 떠나는 송암

지금은 건축가가 설계하고 건축주는 돈만 주기 때문에 건축주 자신의 혼을 담은 집이라기보다 건축가의 작품이다. 옛날 사람들은 건축주가 건축가였다. 스승 퇴계가 5채를 직접 터를 골라 지었듯이 제자들도 스승을 닮아 송암 권호문(1532~1587)도 자신의 뜻대로 집을 짓는다.문학하는 선비학자로 평생을 자연에 묻혀 살면서 덕망이 높아 송암을 모신 청성서원은 1608년(선조41)에 세웠다가 1767년(영조 43)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짓는다.#. 청운의 꿈을 접고충과 효가 절대적 가치를 차지하는 조선시대,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최고의 효도는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가는 입신양명이었다. 양명학이 심학을 중시한다면 주자학은 현실참여가 요체인데 조선은 주자학만이 정통이어서 특히 벼슬에 나가 가문과 집안을 살리고 주위에서 선망하는 만큼 부모의 기쁨이었다. 자연을 벗 삼기 좋아하는 농암 이현보가 당상관이 되자 농암의 어머님 권씨 부인은 종들에게 선반가 환영시를 지어 부르게 할 정도로 큰 기쁨이었고 최상의 효였다. 송암도 안동 권씨 금수저 집안에 태어나 공부하기 위한 백 그라운드도 최상이었다. 어머니는 퇴계의 큰형 이잠의 딸이라 퇴계는 외종조부가 되기에 15살에 퇴계의 문하에 들어가 임종까지 지켜본 제자로 혈연과 학연이 연결된다.송암은 어릴 때는 아버지 권육에게 글을 배워 6살 때부터 글을 읽었다. 사람은 어릴 때 습관이 평생을 간다는 말이 있듯이 송암은 책을 들고 자신의 집을 감싸고 있는 청성산의 백운암, 분암 등의 절에서 독서를 하였던 문학소년이었다. 송암도 평생을 안동에 살면서 자연과 벗 삼아 학문과 문학에 매진하는 삶을 산 것이다. 옛 선비들이 글 읽기 좋은 장소가 절이었고 80년대까지 고시원 역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과는 달라 당시 철저한 신분사회에서 절에 가면 최고의 대우를 받고 스님을 종 부리듯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송암도 주위의 봉정사, 청량사, 도산서원, 소수서원 등에서 학문의 깊이를 더해갔다.18살(1949년)에 아버지를 여의고 30살(1561년)에 어머님의 당부로 부(賦)와 시(詩)의 문예창작 능력을 보는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생원시, 진사시(사마시)에 합격한다고 벼슬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균관에 입학자격이 주어진다. 그리고 3년 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 시묘 살이 하면서 죽만 먹을 정도로 슬픈 예를 다한다. 그때 “애당초 과거에 뜻을 둔 것은 어머니 때문인데 이제는 급제한들 누가 자랑스러워하며 과거공부해서 뭣하겠는가.”하였다.37살(1568년)에 무슨 갈등이 생겼는지 집 뒤 청성산에서 학봉과 과거공부에 몰두한다, 학봉은 합격하고 송암은 떨어져 이때부터 본격적인 자연과 벗하며 문인의 길로 접어든다. 퇴계가 심신 수양했던 청량산을 자신의 산(吾家山)이라 했듯이, 송암도 호를 청성산의 바위와 산 이름을 딴 송암, 청성으로 했다.1585년 학봉은 17년 전 송암과 과거 공부했던 청성산을 자신의 은거지로 생각했는지 “청성산의 절반을 저에게 기꺼이 주시지 않겠습니까?”라는 편지를 쓴다. 송암은 학봉에게 청성산 반을 떼어준다. 학봉은 석문정사를 지었고, 지금도 청성산의 소유권은 그때 그대로다. 보통사람은 하기 힘든 통큰 선비였다.#. 한서재를 짓고초야에 묻혀산 선비 송암 권호문이 살았던 안동 서후면 교리에 있는 송암 고택과 청성서원에 갔다, 우리나라 지명에 교리, 교촌은 향교가 있던 자리인데 여기도 고려시대 관학인 향교가 있었다. 입구에 두어 집 있고 막다른 골에 송암 종택이 외롭게 있다. 종택 입구에 송암이 20살(1551년)때 지은 한서재가 퇴락한 채 서 있다.여기를 선택한 한서재기(寒棲齋記)에는 “시냇가를 거닐다가 우연히 소나무 밑 아슬아슬한 바위모서리에 앉아서 멀리 바라보니, 충분히 깃들어 살만했다. 이에 산 능선을 깎아 초가를 지었다. 한 칸은 따뜻한 방으로 하고, 두 칸은 시원한 마루로 만들었다.…. 유유자적하며 물상을 찾아다니노라면 들판의 푸른 풀, 긴 제방의 파란 버들, 봄날의 안개와 가을의 비. 아침 햇살과 저녁 노을 등이 사시사철의 아름다운 흥취를 제공해주며 세속의 티끌 묻은 생각을 씻어준다.” 그리고는 이곳에서 즐기는 여덟 가지를 읊는데 고요한 밤, 그윽한 창가에서 책을 덮고 홀로 앉아 달그림자 비추면 거문고에 노래를 실어 회포를 푸는 대월음(對月琴)이 마지막 여덟째라 했다. 이곳을 보고 와서 이 글 쓰고 있는 지금의 경주 수오재에는 달 대신 밤비가 하염없이 내려 청마루에 나가 앉았다. 처마에서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빗소리와 개구리 울음이 묘한 하모니를 이룬다. 송암은 달을 감상하면서 거문고에 노래를 불렀지만, 필자는 만물과 부딪힌 빗소리와 개구리 합창에 방해가 될까봐 단소는 불지 않자 온 몸에 소리가 스며드는 대우성(對雨聲)이었다. 절이 공부하기는 좋아도 일시적이지 장기적으로는 힘들고, 정자는 가유(可留) 지언정 불가거(不可居), 즉 머물 수는 있어도 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만의 창작공간이 필요하여 송암은 한서재를 지은 것이다. 여기서 송암은 끊임없이 내면의 이치에 몰두했다.#. 관물당과 청량산기행한서재 뒤에는 사람 살지 않는 종택이 좁은 골짜기를 꽉 메우듯이 앉아있다. 종택 안에 있는 관물당은 1569년 송암이 38살에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것으로 송암은 관아당(觀我堂)이라 했는데, 스승 퇴계가 “사물을 관찰하면서 대상을 눈으로 보는 것은 마음으로 보는 것만 못하고, 마음으로 보는 것은 이치로 보는 것만 못하다.”는 뜻의 관물당(觀物堂)으로 바꾸어준다. 송암은 25세 때 청량산을 유람하고 108운의 장편시를 퇴계에게 지어 올리자 퇴계는 “시를 자세히 보니 병폐가 적지 않다. 말을 길게 하고자 한 까닭에 지루하고 산만하다. 운을 가득 채우려고 어려운 문자를 끌어대다가 쓸데없이 길어졌다…” 이런 따가운 지적과 혹독한 비평은 퇴계의 수많은 제자 중에 문학을 이어받은 최고의 제자가 된 것이다.이 관물당을 짓고 다음해 1570년 39살 송암은 겨울에 한 달가량 청량산 기행을 떠나와서 기행문을 완성한다. 시도 1천700여 수가 있지만 기행문은 그 사람의 향기와 살아있는 진솔한 글이라 글쓴이의 내면을 알 수 있다. 기행작가인 필자도 선현들의 기행문을 아끼고 사랑한다. 송암도 겨울 청량산 기행을 계획하고 책과 지필묵, 벗과 퇴계에게 드릴 단술 두 항아리와 채소, 과일을 챙기고 떠나려하자 많은 사람들이 왜 하필 겨울 혹한이냐고 의아해 한다. 가다가 만난 지인들도 산은 봄, 가을이 좋고 겨울은 적합하지 않다 한다. 단 퇴계는 “그 산은 겨울 경치가 좋지, 다만 바람이 몰아칠 때는 숲이 흔들리면서 온갖 소리가 나고 다시는 잠잠해질 같이 않으니, 모름지기 남향으로 난 작은 암자가 있는 조용한 곳을 택하는 것이 좋을 것이네.”청량산 유람할 때 스님들이 길잡이에 심부름하고, 절에 도착하면 늙은 승려가 엎어질 듯이 달려나와 맞이하는 당시의 하늘과 땅 차이의 신분을 여실히 보여준다. 송암은 술을 매우 즐겨 떠나올 때 술 챙겨왔고 만나는 지인과 밤새 마시고 시를 주고받는 낭만이 넘치는 선비였다. 술을 마시고 흥이나 스님 둘을 불러 술병과 벼루와 종이를 들게 하고, 치원대에 올라 쉬고 있을 때 안중사 승려 대여섯 명이 나와 맞이한다.밤에 늙은 승려가 “노스님께서 저녁에 돌아가셨습니다.”고 하자 송암은 “죽고 사는 것은 떳떳한 이치이다. 천지 만물 가운데 오래 살며 죽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어찌 슬퍼하랴.이런 객관적 입장이 숙소 벽에 붙어 있는 김계순(1534~1570)의 시를 보고 먹이 아직 마르지도 않은듯한데 먼저 죽어 손으로 이름을 어루만지며 한참동안 슬퍼한다. 청량산 기행 중에 퇴계의 위중을 승려들이 알려와 곁에서 임종을 지켜보고, 시중든 사람이 70여 명이 있는 가운데 돌아가시자 태산이 무너지고 대들보가 꺾이니 그 슬픔을 어찌하랴 또 많은 눈이 내려 얼어 죽는 사람도 생기고 통곡은 이어진다.어젯 밤부터 진종일 비가 내리는 오늘은 검사, 인권 변호사, 시민운동가, 서울시장의 기득권을 가졌지만, 약자 편에서 많은 아름다운 일을 해오다 성 추행 의혹의 치욕적인 불명예를 죽음으로 사죄했지만, 새로운 불씨를 남긴 박원순 서울시장의 장례식이다.필자를 인터뷰하고 이틀을 우리 집 수오재에서 자면서 경주의 문화유적을 안내했던 인연으로 마음이 우울하고 먹구름이다. 그래서 세상 모든 죽음은 나와의 관계에서 슬픔의 강도가 달라진다.관물당을 나와 송암을 모신 청성서원으로 갔다. 1608년에 세워 1767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었고,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1909년 도내 유림들의 뜻에 따라 복원한 것이다. 사람은 배우는 것보다 접하는 것이 더 중요하듯이 길을 떠나야 세상이 보인다. 백두산기행을 남긴 당주 박종(1750~1793)은 험한 백두산을 떠날 행장도 준비 안 되었고, 아이도 앓고 있어 주위에서 만류하였으나 박종은 ‘만일에 근심걱정 다 가시고 행장을 갖추어 준비된 후에 가자면 평생을 기다려도 가볼 날이 없을 거라며 떠나듯이, 송암도 부인이 호랑이한데 물리는 일이 많아 걱정하자 “공부는 겨울에 하는 것이 좋다.”라고 하면서 청량산으로 떠난 것이다./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7-14

국책사업 유치·현안사업 해결 ‘미래 울릉 성장동력’ 마련

김병수 울릉군수는 지난 한 해 대형 국책사업 유치와 주요 현안사업 해결로 ‘미래 울릉 성장동력’을 마련했다.김 군수는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던 주민 정주여건 개선과 관광 특화 목표로 정부 공모사업에 적극 참여하고 지역 주요 현안사업을 해결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았다. 그 결과, 군 자체적으로 진행하기 어려운 대형 국책사업 공모 선정과 주민숙원사업의 단계적 해결이란 성과를 얻었다. 또, ‘코로나19’로 인해 침체된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다양한 분야의 지원 시책사업을 마련했으며 ‘코로나19 청정 울릉’도 사수했다.남은 임기 동안 김 군수가 추진해야할 과제와 울릉 발전방향에 대해 들어본다.- 울릉농업 6차산업 추진 동력 마련과 관련해 성과와 추진방향은.△낙후된 울릉 촌락지역 발전과 성장을 위해 농림축산식품부에서 주관하는 농촌 신 활력 플러스사업과 도시민 농촌유치 지원 사업에 공모해 선정됐다.울릉도는 육지 농촌지역과 달리 체계적인 발전이 어렵다. 이번 지원사업 선정은 울릉 농업분야에 새 변화를 일으킬 것으로 기대 된다.울릉도 농촌 신 활력플러스 사업으로 총 70억 원의 사업비를 2023년까지 투입, ‘울릉 화산섬 비즈니스플랫폼 구축’이라는 비전 아래 울릉의 유·무형 자산과 민간 조직을 활용해 특화산업 육성, 일자리 창출, 지역경제 활성화를 추구하는 농촌형 지역혁신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고령화와 인구감소 등으로 어려움에 처한 울릉군에 미래 농업 인력 확보를 위해 2023년까지 총 6억 원의 국비를 지원 받아 안정적이고 내실 있는 귀농·귀촌의 프로그램 등을 마련할 방침이다.귀농·귀촌 지원사업의 프로그램도 농림축산식품부 공모에 선정돼 다양한 지원을 통해 귀농, 귀촌이 활성화 되도록 노력하겠다.- 울릉도 스마트시티 통합플랫폼 기반 구축사업을 소개한다면.△국토교통부 주관 공모에 선정된 ‘스마트시티 통합플랫폼 기반 구축 사업’은 자연재해 피해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는 지역주민과 안전한 여행정보가 필요한 관광객들에게 ‘스마트시티 도시안전 5대 연계 서비스’를 기존의 울릉 알리미앱 등에 연계, 주민생활과 관광객에게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이다.총 12억원 규모의 사업이 완료된다면 기존의 방범, 교통, 재난 등 분산 운영되고 있던 개별 S-서비스의 통합 운영을 통해 서비스 효율성을 향상시키고, 생활에 치명적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자연재해에 대한 사전예방과 신속한 현장대응을 통해 피해를 절감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어촌항을 관광 복합형 항으로 개발해 풍요로운 어촌을 만들기 위한 방안과 관련 사업을 소개해 달라.△정부에서 주관하는 각종 지원 사업에 참여, 선정될 수 있도록 하겠다. 모든 사업은 정부로부터 예산을 지원 받는 국책사업으로 추진토록 하겠다.2019년 울릉 천부항이 어촌뉴딜 300사업에 선정됐다.정부예산 150여억 원을 투입, 천부항을 새롭게 탈바꿈시켰다.단일 항구 중 전국에서 가장 많은 예산을 배정받았다. 서면 태하항과 북면 웅포항은 2020년 어촌뉴딜300사업에 선정되는 성과를 얻었다.지역적 특수성을 살린 해양관광 명소로 개발하기 위해 태하항과 웅포항에는 총 182억 원을 투입한다.서면 태하항에는 총 사업비 89억원을 들여 해양심층수 체험센터, 황토구미 로드 등을 조성하고, 북면 현포 웅포항에는 총 사업비 93억원을 들여 친수레저 해양 체험 공간 조성, 소득기반 사업, 주민역량 강화사업 등을 추진, 어업과 해양레저의 복합화를 통한 어촌의 혁신 성장 인프라를 구축하게 된다.- 울릉도 주요 해안을 안정화 시키고 태풍 등 재난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대책은.△몽돌이 유실되지 않도록 하는 등 해안선 잠식을 막겠다. 태풍 등 재해를 예방할 수 있는 제3차 연안정비기본계획에 10년간 총사업비 1천404억원을 투입하겠다.태풍·자연재해에 취약한 5개 지구의 연안보호를 위해서는 이안제를 설치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매년 반복되는 태풍 피해를 차단하겠다.해양수산부에서 공모·선정한 이번 사업들은 기본적 인프라 및 콘텐츠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잠재력을 발현시키지 못하는 울릉의 어촌지역에 혁신성장을 주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돼 어촌경제 활성화의 촉매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19로 인해 지역 관광경기가 직격탄을 맞고 있다. 관광경기 활성화 방안은.△코로나19는 세계적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울릉도도 예외가 아니다.코로나19의 영향으로 작년 동기 대비 울릉군 방문 관광객의 수는 80% 가까이 감소했고, 관광 산업이 핵심 산업인 울릉군의 경제적 타격은 심각한 수준이다.이러한 코로나19의 심각성을 타개하고자 ‘울릉군 코로나19 총력대응 지역사회 지원과 경제활성화 종합대책’을 수립해 긴급 예산 지원, 소상공인 육성 자금 대출, 저소득층 한시 생활비 지원, 관광진흥 개발기금 특별 융자 등 다방면의 방안을 시행, 군민들의 경제적 피해를 줄이고 있다.코로나19 청정 지역유지와 관광객 유치를 위해 여객선 터미널 입도객 전수 체온 측정, 공공·민간 방역 물품 지원 등 방역에 최선을 다해 코로나19 확진환자가 0명인 ‘코로나 청정 지역’을 유지해 나가겠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관광객 유치 방안은.△개별관광 및 특화 관광프로그램 개발 등 다양한 방법으로 관광객모집에 나서고 있다.요즘 관광트렌드인 개별관광을 겨냥한 울릉(시티)투어패스 상품을 개발했다. 오프라인·모바일 티켓 검표 시스템을 통해 지역 관광자원과 주요시설을 하나로 엮어 관광객이 편리하고, 저렴하게 이용할 할 수 있도록 하는 사업이다.특히 개별여행 관광객들의 만족도를 높일 맞춤형 상품이다. 유료관광지 할인, 맛집(가맹점) 할인율 적용 등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관광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상품권(패스권) 구매 시 울릉공영버스를 활용한 5회 이용권 및 무제한 이용권을 통해 울릉도 시티투어 형태로 주요관광지를 자유롭게 이용할 기회도 갖도록 하겠다.국내·외 관광수요 주요 소비층인 20~50대의 개별관광객 만족도를 충족하기 위한 울릉visit 여행티켓을 출시해 여객선, 숙박, 렌트카, 유료관광지, 맛집 등을 할인받아 관광하는 상품 판매를 준비 중이다.단체관광 대상으로 ‘울릉힐링로드’프로그램을 개발, 울릉도의 특색을 살린 자연 속에서 오감을 힐링·충전할 체험형 관광상품도 계획하고 있다.이번 상품은 울릉도 개척 이후 선조가 다녔던 옛길로, 전체길이 3.8㎞인 내수전~석포길(울릉해담길)을 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체험, 쉬어가는 여행트렌드에 맞는 투어다.울릉군에서 개발한 ‘울릉힐링로드’ 체험관광상품은 경북도 공모전에서도 선정, 예산을 지원받게 되면서 가을에 추가로 출시할 계획이다.2020 경북관광의 해를 맞아 스마트폰의 일상화와 인터넷 기술 발달에 따른 SNS시대에 맞춰 관광홍보용 영상 2가지를 컨셉으로 구성, 인플루언서들의 SNS(블로그,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을 통해 온라인 관광홍보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겠다.- 다시 찾고 싶은 울릉을 만들겠다고 했는데.△발전 가능성과 역동적인 생태환경은 울릉의 무궁무진한 성장자원이며, 이러한 자원을 토대로 울릉군은 지속적으로 성장해나갈 것이다.대형 국책사업과 주요 현안 사업들을 적극 추진해 군민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정주여건 개선과 성장하는 지역경제에 뒷받침할 것이다.코로나19로 침체된 경기는 다양한 활성화 대책을 마련, 조속한 시일 내에 극복토록 하겠다. 울릉군은 지난 2년 동안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한 초석을 놓았다.이제 새로운 변화가 실현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계속 돼 꼭 다시 한 번 더 찾고 싶은 울릉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하겠다./김두한기자 kimdh@kbmaeil.com

2020-07-13

새로운 변화와 도전으로… 봉화 미래 100년 앞으로 ‘총력’

새로운 변화와 도전으로 군민이 풍요로운 봉화 건설을 선언했던 민선7기 봉화군이 출범 2주년을 맞았다.저출산·고령화로 인한 지방소멸의 위기와 불안정한 농가소득, 침체된 지역경제 등 다양한 현안을 해결하길 바라는 군민의 부름을 받고 출범한 민선7기는 지금껏 혁신적이고 과감한 정책을 선보이며 봉화군의 저력을 대내외에 알렸다.민선 7기 반환점을 맞은 봉화군의 성과를 짚어보고 앞으로의 비전을 소개한다.□ ‘최초’ 키워드로 보는 민선7기 2년민선 1기와 2기, 4기에 이어 대구·경북지역 ‘최초’로 4선에 당선된 엄태항 봉화군수의 이력만큼 봉화군 민선7기 2년은 유독 ‘최초’ 타이틀이 많다.봉화군 민선7기 2년의 주요 성과를 ‘최초’라는 키워드를 통해 들여다봤다.봉화군은 지난해 9월 경북 도내 최초로 농업인경영안정자금을 지급했다. 농업인들의 경영안정과 기본소득 확보를 위해 6천600여 농가에 50만원씩 33억원을 지급했고, 올해에는 40%를 증액한 연 70만원씩 봉화지역화폐로 지급해 농가경영안정은 물론 지역상인에게도 혜택이 돌아가도록 했다.또한, 경북도에서 최초로 에너지 전환정책 지방정부협의회 회원으로 가입하고 청와대 초청 재생에너지 사례발표 및 산학연과의 MOU체결 등 그린에너지 사업을 통한 지속가능한 미래 먹거리 창출에 앞장서고 있다. 태양광, 풍력, 수소, 바이오 등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그린에너지 사업을 추진해 정부의 그린뉴딜정책에 선도적으로 대응하고 있다.지난 6월에는 봉화군민 녹색에너지 협동조합 개소식을 통해 주민참여형 신재생에너지사업을 위한 본격적인 출발을 알렸다.대규모 국책사업 유치 성과도 눈에 띈다.전체면적 83%의 풍부한 산림자원과 인프라,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봉화군이 경북도와 중앙정부에 제안해 정부시책에 반영된 전국 최초 국가 주도의 문화재수리재료센터는 법전면 일원에 사업부지 약 21만㎡, 건축면적 9천 900㎡ 규모로 건립된다.문화재수리재료센터는 2018년 국회 예산심의를 거쳐 지난해 정부 예산 2억원을 확보하고 올해는 국비 18억원을 확보해 본격적으로 추진된다.아울러 여성가족부 주관 국립청소년산림센터 건립도 지난해 6월 착공에 들어갔다. 춘양면 서벽리 일대 약 10만여㎡ 부지에 사업비 243억 원을 들여 산림체험관, 청소년 및 가족생활관 등 건축 연면적 8천572㎡의 규모로 오는 2021년 준공될 예정이다.지난해 11월 착공한 봉화댐 건설도 큰 성과다.봉화댐은 전국 최초로 지방자치단체가 시행하는 댐 건설사업이다. 홍수 조절이 주목적인 봉화댐은 높이 41.5m, 길이 266m, 저수용량 310만t 규모의 중심 코어형 락필댐으로, 총사업비 499억원(국비 90%, 지방비 10%)을 투입해 2024년 완공을 목표로 추진되고 있다.이밖에도 민선7기 2년 동안 중앙정부 및 경북도 등 상급기관으로부터 38개 부문에서 표창을 받았다.2018년에는 농정평가 경북도 1위, 대한민국축제콘텐츠 대상에서 축제관광부문 대상, 2019년도에는 치매극복관리사업 최우수 기관상, 전국 기초단체장 매니페스토 우수사례 경진대회 우수상 수상 등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봉화퍼스트로 보는 민선7기 2년민선7기 봉화군정의 모든 정책과 사업들은 ‘봉화퍼스트’로 귀결된다.지난해 6월 ‘봉화군 봉화퍼스트 활성화 및 운영에 관한 조례’를 제정해 봉화퍼스트 활성화를 위한 추진 근거를 마련했다.지난해 한산했던 전통시장에 활력을 불어 넣었던 ‘시장愛 불금축제’는 지역을 살리는 확실한 대안임을 증명하며 인근 시·군에서 벤치마킹을 다녀가는 등 봉화퍼스트 정책의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봉화퍼스트로 대변되는 민선7기 역점시책을 군민 소득 증대와 지역경제 활성화 측면에서 살펴봤다.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소비확산, 소비패턴 변화에 발맞춰 ‘봉화퍼스트샵’ 구축사업도 추진한다.봉화군의 음식, 문화관광, 특산품, 숙박 등 관내 모든 정보를 통합 제공하고 소비까지 연결하는 통합관계형 플랫폼으로 이용객의 편의증대와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사람들 간 접촉을 최소화하는 언택트 문화도 급속히 확산됨에 따라 언택트 ICT 콘텐츠 개발을 통해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문화관광 트렌드를 주도해 나간다는 구상이다.내성천 일원에 레이져 쇼, 드론 군집비행 등 ICT기술을 활용한 문화공연을 자동차 내에서 관람할 수 있는 드라이브파킹 스마트 공연을 추진하고, 스마트체험관광센터를 건립해 현장에 직접 가지 않고도 봉화군의 문화관광 체험을 즐길 수 있는 신개념 콘텐츠를 구축한다.그린에너지 사업과 연계한 테마 전원주택 단지 조성으로 도시민들의 귀농·귀촌 활성화와 인구유입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도 도모한다. 체육, 문화, 복지시설을 두루 갖춘 100개 마을 총 5천호 규모의 전원생활 특구를 조성할 예정으로 현재 1~2차 사업부지 선정을 마치고 본격 사업 추진을 앞두고 있다.입주민에게 소규모 농장 부지제공, 버섯재배사 부지 장기임대, 스마트팜·소규모 태양광발전시설 설치 지원 등 도시민들이 봉화 정착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다양한 시책을 연계해 전원생활도 즐기고 안정적인 노후도 보장받게 한다는 계획이다.봉화군을 대표하는 새로운 랜드마크 사업도 본격 추진된다. 내성천 경관타워는 내성천을 경계로 분리된 생활권과 상권을 연결할 복합문화공간의 인도교(길이 115m, 폭 9.6m)와 봉화의 대표 특산물인 송이를 기본으로 한 세련된 디자인의 높이 62m의 전망타워로 조성한다. 타워 정상부 1층은 전망카페로 조성해 내성천과 읍내 전체를 조망하며 휴식할 수 있는 공간으로, 2층은 전망대 및 홍보관으로 활용할 계획이다.군은 남한의 소금강으로 불리는 청량산 일대를 봉화군 관광산업 재도약을 위한 핵심구역으로 설정하고 청량산 명승둘레길 조성사업에 박차를 가한다.총 192억원의 사업비로 2021년 실시설계 용역을 시작으로 2023년말 준공을 목표로 추진 중이며, 기존 탐방로를 대체할 신규 탐방로 약 1.1km 개설한다.탐방로 내에는 세계 최장의 산악 출렁다리 조성도 포함되며 총길이 600m, 높이 170m로 건설되면 세계 최장의 산악출렁다리 기록을 갱신하게 된다.이와함께 올 하반기 완공예정인 농산물 종합산지유통센터와 농축임산물 전시판매장 건립을 통해 지역농산물의 판로확대를 강화하고, 군의 양대 축제인 은어·송이축제와 관광산업을 총괄적으로 관리하고 전문적인 추진을 위해 봉화축제관광재단을 설립·운영해 전국 최고의 관광도시로의 경쟁력을 키워나가고 있다.엄태항 봉화군수는 “‘흙이 쌓여 산을 이룬다’는 적토성산(積土成山)이라는 말처럼, 봉화 미래 100년의 초석을 쌓는데 혼신을 다해온 2년이었다”며 “민선7기 반환점은 그저 절반의 의미가 아니다. 다시 한 번 새로운 변화와 도전으로 초심을 잃지 않고 군민이 행복한 봉화군을 만들겠다’고 말했다./박종화기자 pjh4500@kbmaeil.com

2020-07-12

‘위기를 기회로’… 시민이 행복한 경산시 조성 위해 뛴다

새로운 미래로 함께하는 희망 경산을 목표로 민선 7기 전반기 경산시정을 이끈 최영조 시장이 시민이 행복한 도시를 위한 하반기 업무를 시작했다.최 시장의 전반기 시정평가는 올해 초 코로나19라는 복병을 만나 지역과 시민이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성공적이라는 평가다.경산지식산업지구와 경산4일반산업단지 조성을 차질 없이 추진해 산업단지 300만 평 시대를 열었다. 경산지식산업지구 내에 철도차량융합부품기술센터와 무선전력전송기술센터, 메디컬 융합소재실용화센터 등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할 6개 국책사업을 모두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대구 안심역에서 경산 하양역까지 8.89km 구간의 대구도시철도 1호선 하양 연장사업을 2023년 개통하기 위한 초석을 다지는 등 대중교통망 확충과 경북권역 재활병원, 치매 안심센터, 경산사랑카드, 글로벌 코스메틱 비즈니스센터 등 경산의 미래 성장발판을 마련했다.최 시장은 시민에 대한 행정서비스와 시정은 제자리걸음이 아닌 진일보 해야 한다며 민선7기 후반기에도 시민의 삶을 질 향상을 더욱 매진해 나갈 것을 거듭 강조했다.-전반기 시정추진으로 많은 것을 이루었다. 한 마디로 평가한다면.△저출산 시대에도 지역의 인구와 재정이 지속적으로 성장해 본예산 1조원 시대를 열고 서부2동 인구 3만, 남부동 인구 2만을 돌파하는 등 인구 2만 이상 읍면동이 7개에 이르는 등 산업과 경제, 문화, 복지 등 전 분야에 걸쳐 조화롭고 활력이 넘치는 도시로 발전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살고 싶은 도시다.-현재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미래다. 미래를 위한 준비는.△시민의 관심은 행복한 삶과 먹을거리가 보장되는가에 있다.지금까지의 성과를 바탕으로 시민에게는 더 큰 행복을 주며 미래가 든든한 지역으로 거듭나기 위한 시책을 추진한다.특히 코로나 방역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며 경제회복을 조화시키고자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올해 시정 목표인 △미래형 첨단산업을 선도하는 창의지식도시 △일자리 걱정 없는 풍요로운 경제도시 △도시와 농촌이 고르게 성장하는 균형발전도시 △사람중심의 건강하고 안전한 스마트 도시 △시민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소통도시 △품격 있는 문화체육도시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균형발전과 많은 일자리, 알찬 교육, 안전이 시민에게 행복감을 주고 먹거리에 대한 부담감을 줄여 줄 것이다.-이를 시민의 입장으로 설명해 달라.△지역의 균형발전을 위해 남산~하양 국도 대체우회도로 건설과 하대~옥천 간 도시계획도로 개설로 동서남북을 잇는 사통팔달 교통망을 구축한다.남산면 하대리에서 하양읍 은호리까지 9.8km를 잇는 국도 대체 우회도로는 삼성현역사문화공원과 반곡지, 반룡사, 동의참누리원, 글로벌 코스메틱센터 등 많은 관광자원과 경관을 자랑하는 자인·남산지구로 연결된다.또 시민의 정주권을 보장하고자 경산대임 공공주택지구, 중산지구 시가지 등 인구 40만이 살아도 넉넉한 명품 정주기반 조성에 나서고 구도심에 도시재생사업으로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고 농촌중심지 활성화 사업도 추진한다.특히 공공근로와 지역공동체, 희망 일자리 사업 등 직접 일자리 사업을 통해 코로나로 어려운 시민들에게 1만4천300여 개의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고 경력단절여성, 청년들을 위한 지역주도형 청년 일자리사업, 교육 강화, 일자리 매칭 등 수요자 맞춤형 일자리 사업도 확대한다.-경산은 도심악취가 문제로 지적되기도 한다. 이에 대한 대책은.△도심의 확장성을 고려하지 못한 판단으로 대평동에 민원의 대상이 되는 폐수처리장과 도축시설, 분뇨처리장이 자리했다.이미 자리 잡은 시설의 악취를 절감하고자 공공하수처리시설의 증설과 클린에너지도시 프로젝트, 클린로드 시스템으로 악취와 불볕더위, 미세먼지로부터 안전한 도시환경을 조성하겠다.대평동의 악취는 그동안의 노력으로 많이 감소했으나 지속적으로 악취를 줄이기 위한 노력은 계속돼 생길 수 민원을 사전에 차단할 것이다.-관광사업은 미래의 최대 먹거리로 주목받고 있다. 지역 관광산업 활성화를 위한 복안은 있는지.△경산은 상대적으로 관광자원이 많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관광자원을 창출하고자 꾸준히 노력하는 관광 활성화 정책을 역점을 두어 추진할 것이다. 먼저, 소규모 가족단위 여행객을 대상으로 지역 특유의 콘텐츠를 온라인에서 먼저 맛보고 현장을 찾는 가상관광과 랜선 여행 등 다양한 형태로 관광자원을 소개하고 지역 음식의 레시피를 제공하는 식도락관광도 생각하고 있다.2023년 준공될 경산 센트럴파크를 자연과 문화, 예술이 어우러진 명품공원으로 조성해 누구나 한 번은 찾고 싶은 명소로 만들 것이다.기도 도량으로 유명한 팔공산 갓바위, 김유신 장군이 삼국통일의 전초기지로 삼았던 압독국의 유적 등 우리가 가진 관광자원을 하나로 묶는 관광벨트화도 적극 추진할 것이다. 스토리텔링도 하나의 방법으로 시민의 다양한 아이디어를 반영할 수도 있다.-경산은 대구에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예속되어 있다는 평가다. 해결방안이 있다면.△대구라는 광역도시 때문에 지역의 문화가 발전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이로 인해 지역의 많은 젊은이와 시민이 문화를 즐기고자 대구를 찾고 있다.지역의 고유문화를 살리기 위한 노력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다. 이를 해결하려고 문화예술회관을 건립해 향토색이 문화를 계승·발전시키고 고품격의 공연유치, 시립도서관 증축, 인공암벽장과 오토캠핑장, 산림욕장 설치 등 시민의 문화욕구를 지역에서 해결할 방안을 찾을 것이다.-시민의 바람은 소통과 참여다. 어떻게 소통하실 건가.△찾아가는 주민 대화와 주민참여 예산제도 등 다양한 주민참여 시책으로 시민이 제안한 정책을 시정에 반영하고 동부동과 남부동 행정복지센터와 시청사 증축사업으로 최상의 행정서비스를 제공하겠다.-원활한 후반기 시정을 위해 공직자와 시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지금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위기를 기회로 삼아 더 큰 발전으로 이뤄내야 한다. 자치단체장은 큰 그림을 그리고 공직자와 시민이 그 그림에 입혀가는 것이 시정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성공하려면 중간에 그만두지 않아야 한다. 성공을 위해, 시민의 행복을 위해 모든 공직자가 가져야 할 자세다.시민과 약속한 공약사항은 반드시 실천하고 정부부처의 동향을 긴밀히 파악해 국·도정연계사업, 국가 공모사업 등 신규 사업 발굴에 나설 것이다.아무리 좋은 계획도 혼자의 힘으로는 성취할 수 없고 서로 협력할 때 가능하다.공직자는 시민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시민은 공직자의 어려움을 헤아리는 등 경산시를 먼저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심한식기자 shs1127@kbmaeil.com

2020-07-09

고풍스런 기와·멋스런 초가, 때묻지 않은 풍광은 한폭의 그림 같아라

본문에 앞서 먼저 사적인 경험 한 토막.1970년대 초·중반. 영남의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던 외가를 자주 찾았다. 그때까지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기에 TV는 물론, 라디오와 전기밥솥도 없거나 드물던 곳. 모든 것이 지금과 비교하자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그럼에도 벽촌 구석구석까지 인터넷이 개통되고, 여든 살 촌로들도 휴대폰을 들고 다니는 2020년 오늘보다 매력적인 게 분명 존재했다. 동네를 걸으면 콧속으로 스며들던 향긋한 아카시아 향기, 기와를 머리에 인 고풍스런 집들이 만들어내는 풍경, 드물지 않게 멋스런 초가(草家)가 있었고, 장작을 때던 아궁이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매캐했지만 더없이 낭만적이었던 마을. 이것들을 보고 느낀 기억이 40년 세월이 흘렀음에도 또렷하게 떠오른다.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은 위와 같은 경험을 해본 50대 여행자들에게 견딜 수 없이 아릿한 노스탤지어를 소환해준다. 어디서도 쉽게 맛볼 수 없는 느낌이다. 기자 역시 그랬다.중년 이상의 사람들에게 향수를 선물하는 양동마을은 젊은 세대들에겐 ‘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런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 나를 키워냈구나’라는 깨달음을 선사한다.◆ 초여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양동마을을 거닐다간헐적으로 쏟아지는 빗방울과 이르게 찾아온 더위가 반복되던 7월 초순. 양동마을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정거장에서 마을로 가는 길. 일찍 잠에서 깬 매미가 ‘너의 유년을 기억해보라’는 듯 청량하게 울었다.이곳은 조선시대 빼어난 학문적 업적을 이뤄낸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가 대를 이어 살아오는 집성촌(集姓村). 미려한 산세는 물론, 풍수학적으로도 빼어난 지세(地勢)라 예부터 ‘사람이 사람답게 살만한 지역’으로 이름이 높았다. 인재가 모여들고, 권세가 생겨날 만했다.2010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공식 등재된 양동마을. ‘서라벌의 주요 관광자원’을 소개하는 경주시는 이 마을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안동의 하회마을과 함께 한국의 역사마을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마을의 주산인 설창산의 봉우리에서 네 줄기로 능선과 골짜기가 뻗어 내려와 물(勿)자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이 골짜기에 160여 호의 고와가(古瓦家)와 초가가 모여 있다. 조선조 과거급제자가 116명이나 나왔고, 우재 손중돈, 회재 이언적 등 명망 있는 관료와 학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주요 고택(古宅)으로는 회재 이언적에게 왕이 하사한 집 향단, 월성 손씨의 종택인 서백당(송첨종택), 회재 이언적의 부친이 기거하던 집 무첨당, 우재 손중돈이 살던 관가정 등이 있다.”내려쬐는 햇살을 등에 지고 그 옛날 반가(班家)의 자손처럼 서두름 없는 발걸음으로 마을을 돌아봤다.높이 솟아 우뚝한 조선의 성리학자 이언적의 흔적은 무첨당(無堂·보물 제411호)에 남아 있었다. 조선 중기에 세워진 이 건물은 종가의 일부로 손님을 접대하고, 책 읽는 공간으로 사용된 일종의 사랑채다. 여강 이씨 문중에서 1560년경 건립한 심수정(心水亭)도 톡특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안타깝게도 화재로 무너진 것을 20세기 초반에 복구한 것인데, 정자와 행랑채 등을 원래 모습 그대로 살리려 노력한 흔적이 곳곳에 가득했다.국가민속문화재 제23호인 서백당과 보물 제412호인 향단 역시 양동마을을 방문한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서백당은 이언적이 태어난 곳이고, 향단은 조선의 양반집이 가졌던 일반적 건축 구조와 다른 형태를 지녀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경주와 인근 형산강을 품에 안은 형태로 조선의 청백리 손중돈이 분가해 살던 관가정(觀稼亭)과 ‘물과 같이 맑고 구름과 같이 허허롭다’는 담백한 뜻을 담아 축조된 정자 수운정(水雲亭) 또한 살피지 않으면 아쉬운 양동마을의 자랑거리다.◆ 시간을 잊고 천천히 돌아봐야 더 아름다운 공간양동마을이 한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빛나는 문화유산’이 된 건 비단 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 때문만은 아니다.마을 곳곳에 자리한 초가와 한가롭고 때 묻지 않은 풍광은 방문객들을 조선시대 혹은, 1960~70년대로 데려간다. 마치 타임머신에 몸을 실은 듯하다. 여기선 여타의 여행지처럼 걸음을 빨리 해 유명한 고택 앞에서 이른바 ‘인증 샷’을 찍고, 서둘러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여행 방식이 어울리지 않는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리운 과거로 왔으니 그에 걸맞게 행동하는 게 좋지 않을까?기자를 포함한 여행자들은 소리소문 없이 은근슬쩍 찾아온 여름의 뜨거움을 핑계로 천천히 양동마을의 진면목을 하나하나 살폈다.흐르는 시간 따위 잠시 잊어버리고 천천히 마을의 안팎을 어슬렁거렸다. 모두가 쉽게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며.설창산과 장태골, 성주봉과 안락천에 둘러싸인 한적하고 평화로운 양동마을은 오래 전부터 인심이 좋고, 후한 품성을 지닌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 유명했다.‘경주연구’ 제21집 1호에 실린 신상구의 논문 ‘양동의 공간적 가치, 그리고 현실적 문제’는 ‘논어’ 이인편(里仁篇)을 인용해 양동마을이 인(仁·어질고 자애로움)의 덕목을 지켜낸 공동체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서술이다.“양동마을은 600여 년이라는 기간 동안 아름다운 가치(仁)를 지키며 살아온 마을이다. 600여 년 간을 한결같이 처음 마을을 형성하면서 지니고 있던 삶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지켜나가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아름다움 그 자체보다도 더 숭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킨다는 것에는 그만큼 어려움과 번거로움을 인내해야 하는 용기와 믿음이 필요하다. 양동마을이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전통문화와 가치를 세계인이 인정해 주었다는 것이므로 행복한 것이지만, 바꿔 생각해보면, 세계적인 역사·문화마을이라는 이름을 얻기까지 이 마을이 얼마나 많은 불편함을 감내해 왔는가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보존 가치가 있는 전통을 간직하고 이어가는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곳에서 생활하는 이들을 배려해야 한다는 위 논문의 지적은 우리 모두가 새겨들어야 마땅할 것으로 보인다.경주만이 아니라 안동시, 청송군, 봉화군 등 경북 지역엔 이름난 고택과 종가(宗家)가 적지 않다. 건물 자체가 문화재나 보물인 그곳엔 해마다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 그런데, 그곳들 중엔 지금도 후손들이 생활하는 집이 흔하다.남의 집에 들어설 때는 주인에게 허락을 얻는 게 보편의 상식. 그럼에도 양해를 구하지 않고 들어가 여성들이 거주하는 안채에서 마구잡이로 사진을 찍고, ‘출입 금지 표지판’이 세워진 고택과 종가의 비밀스런 공간까지 함부로 돌아다니는 행위는 한국이 관광선진국으로 가는 길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다행히 갈수록 그런 몰지각한 사람들은 줄어들고 있다. 1970년대 이후 급격하게 진행된 도시화로 전통문화의 속절없는 붕괴를 맛본 현대인들에게 양동마을이 주는 위로와 위안의 크기는 결코 작지 않다. 그걸 생각한다면 보다 세련된 시민의식이 관광객 모두에게 필요하지 않을지….◆ 양동마을을 벗어나 보다 먼 곳으로 산책을 권하며마을 입구에 자리 잡은 양동마을문화관에서 전시된 유물을 살펴보는 건 학생들에게 평소엔 접하기 힘든 좋은 공부가 된다.앞서 열거한 각종 보물급 고택과 문화재인 정자와 비각(碑閣), 강학당(講學堂)을 꼼꼼하게 둘러보는 것 역시 이 마을을 방문한 여행자의 즐거움임이 분명하다. 기자는 여기에 하나를 더 권하고 싶다. 바로 1~2시간쯤을 투자해 양동마을 주변을 산책해보라는 것. 그 옛날 선비의 마음가짐과 걸음걸이로.마을회관과 양동초등학교를 지나 이향정과 심수정을 거치면 두곡고택과 동호정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지척엔 울울창창 고목이 반기는 장태골이 있다.관가정과 향단을 뒤로 하고 야트막한 언덕길을 오르면 영귀정과 물봉동산이 당신을 반기고, 조금 더 힘을 내 설창산을 향해 가면 경산서당의 미려함과 기쁘게 만날 수 있다.근암고택, 상춘헌, 사호당, 서백당, 낙선당, 창은정사, 내곡정으로 이어지는 ‘안골 방면 산책길’의 정취도 빼어나다.조선 성리학의 한 축을 만들어냈다는 자긍심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양동마을. 그 진가를 발견해내는 길은 여러 가지다. 당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양동마을 여행의 기술’을 스스로 찾아보시길./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 이용선기자

2020-07-09

빛나고도 뜨거웠던, 곧은 충절·맑은 예술정신

맑은 공기와 조용한 도심 풍경이 인상적인 영천시. 거기서 태어나 역사 속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의 삶은 모두가 눈여겨 볼만하다. 학문적 성취는 물론 기개와 지조까지 지킨 포은 정몽주(1337~1392), ‘조선 가사문학의 큰 별’로 불리는 노계 박인로(1561~1642), 화약 개발로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최무선(1325~1395). 이들 모두의 고향이 영천이다. 영천시는 세 사람을 지칭해 “우리 고장의 3선현(三先賢)”이라 부르며 그들의 업적을 기록하고, 숭고한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정몽주, 박인로, 최무선의 삶을 살펴본다는 건 오늘날 우리가 잊고 사는 곧은 충절과 맑은 예술정신을 돌아보는 행위에 다름없다. 그렇기에 간략하게나마 ‘영천 3선현’의 생애를 요약하고자 한다.‘동방 성리학’의 큰 스승 정몽주고려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한다.“포은 정몽주는 기울어가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담보로 충절을 지킨 지조 있는 학자였고, 시묘살이 3년을 두 번이나 거듭한 효자였으며, 명나라와 일본의 우리가 아는 외국의 전부이던 시절 두 나라를 7번이나 다녀온 빼어난 외교관이기도 했다.”그러니 같은 시대를 살았던 포은의 스승 이색(1328~1396) 역시 “학문에서 어느 누구보다 부지런했고, 뛰어났으며, 그의 논설은 어떤 말이든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라는 상찬을 내놓은 게 전혀 어색하지 않다.영천의 임고서원은 정몽주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됐다. 소실된 건물은 1965년 복원됐고, 1999년까진 성역화사업도 진행됐다.서원 입구엔 거대한 석비가 우뚝한데 거기 새겨진 ‘東方理學之祖(동방이학지조)’라는 글귀가 방문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두말 할 것 없이 ‘동쪽 나라 성리학의 큰 스승’이라는 뜻.영천시 임고면 우항리에서 태어난 포은은 세 차례 이름을 바꾼다. 모친의 태몽에 난초가 나타났다 해서 몽란(夢蘭)이라 지어졌던 이름이 여덟 살 때 몽룡(夢龍)으로 바뀐다. 검은 용이 나무에 오르는 꿈을 꾼 게 개명의 이유였다. 우리가 아는 몽주(夢周)는 관례를 치르고 난 후에 얻은 이름. 앞서도 말한 것처럼 학식과 더불어 용기까지 출중했던 포은은 두둑한 배짱을 무기로 일본에 가서 인질로 사로잡혔던 백성 수백 명을 석방시킨 능력 있는 외교관이기도 했다. 1377년의 일이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로 시작되는 시조 단심가(丹心歌)를 통해 보여준 고려에 대한 변함없던 충성심은 이미 초등학생들도 알고 있을 터.그가 우리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김인규의 논문 ‘포은 정몽주의 생애와 그의 학문관’은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5천여 년 우리 역사 속에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충신과 열사가 있었지만, 포은 정몽주 선생만큼 후세에 영향을 미친 분은 없으며, 그 위상과 영향은 구한말까지 면면히 이어져왔다.”영천에 간다면 임고서원은 물론, 일대에 조성된 포은유물관(주요 유물 소장)과 충효문화수련원(전통문화 및 예절 교육기관)에 가보길 권한다. 정몽주의 정신을 이어가고자 하는 영천시의 노력을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예술가이자 무장(武將)이었던 박인로조선의 가사문학은 우리가 세계 속에 내세워 자랑할 수 있는 예술의 한 장르다. 바로 그 가사문학의 정점에 섰던 게 노계 박인로였다. 그는 송강 정철(1536~1593), 고산 윤선도(1587∼1671)와 함께 가사문학의 거두(巨頭)로 불린다.1561년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에서 태어난 노계는 총명함을 어린 시절부터 인정받았다. 요즘 같으면 스마트폰으로 게임이나 할 나이인 열세 살에 한시 ‘대승음(戴勝吟)’을 지어 동네 어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흥미로운 것은 탁월한 예술적 재능을 가졌음에도 무예에도 관심이 적지 않았다는 것. 언필칭 문무겸전(文武兼全)했던 노계는 1592년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예술가가 아닌 무장으로서 나라에 힘을 보탠다.경전을 읽던 책상에서 분연히 떨쳐 일어나 의병으로 전쟁에 참여한 것이다. 공도 많이 세웠다. 그랬기에 원종공신이 되기도 했다. 전쟁의 와중에서도 시를 쓰는 것은 멈추지 않았고, 고통 받는 병사들을 위로하는 ‘태평사(太平詞)’를 지었다.노계는 한음 이덕형(1561∼1613)과 둘도 없는 친구였다. 두 사람은 오랜 시간 학문적 교류를 했고, 인간적 우의를 지켰다. 고향 영천으로 돌아온 노계를 한음이 찾아온 것도 여러 번이었다고 한다.그가 쓴 ‘선상탄(船上歎)’은 전란으로 인한 수난과 그것의 극복을 기원하는 절창으로 남아 있다. 당시로선 드물게 여든을 넘겨 장수했던 노계는 그의 품성과 문학적 기량을 알아본 영천 인근 벼슬아치들의 행사에 조용히 가서 시조 한 수를 읊어주는 낭만을 지닌 로맨스그레이(Romance grey)이기도 했다.그의 생애를 짧게 약술한 손대현의 논문 ‘노계 박인로의 경제적 기반과 문학적 형상화’ 한 대목을 읽어보자.“노계 박인로는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병자호란 등이 일어난 혼란한 시기를 살다간 사람으로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으로 참전하였고, 과거 급제 이후에는 무관으로서 활동하였으며, 향리에 은거한 이후에는 유학에 침잠하면서 시조와 가사를 비롯하여 한시와 부(賦), 전(傳), 기(記) 등 다양한 형식의 많은 작품을 남김으로써 우리 문학사상 가장 주목받는 작가의 한 사람이 됐다.”영천 노계문학관에선 박인로의 생애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바로 근처에 노계의 위패를 모신 도계서원이 있으니 거기도 빼놓으면 안 된다. 문학관 전시실에선 조선가사문학에 담긴 예술혼을 확인해 보시길.화약 무기로 왜구의 횡포 막은 최무선고려 말. 늘상 밀리던 왜구와의 싸움에서 장쾌한 승리를 거둔 진포해전(鎭浦海戰·1380)과 관음포대첩(觀音浦大捷·1383)의 스타 최무선을 정성희의 ‘인물한국사’는 이렇게 설명한다.“고려후기 사회는 왜구의 침략으로 백성들이 많은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최무선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화약을 발명하고, 이를 이용한 무기를 만들어 왜구를 물리친 과학자이자 무인이었다. 그는 중국으로부터 화약을 수입하여 고작해야 불꽃놀이에만 이용하곤 했던 시기에 선구자적인 안목과 노력으로 화약을 개발해 국산화에 성공했다. 고려는 그가 발명한 화약과 새로운 무기를 가지고 해마다 쳐들어와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를 격퇴할 수 있었다.”병기학과 군사학에 관심이 컸던 선각자 최무선은 중국어 사용에도 어려움이 없었다. 자연과학과 언어학 모두에서 돌올했다. 그 또한 박인로처럼 문무 양쪽을 경계 없이 오갔던 청년.젊은 시절부터 국가를 위협하는 왜구의 약탈에 의분을 느끼던 최무선은 염초, 유황, 목탄을 혼합해 폭발력을 극대화시킨 화약에 주목했다. 그가 화약 분야 선진국이던 중국 배가 오가는 예성강 나루터를 헤맨 이유는 진토(塵土)에서 염초를 구워내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1376년 드디어 염초 기술자 이원(李元)으로부터 화약 제조법을 전수받은 최무선. 바로 그 시점이 고려가 ‘화약무기 보유국’이 되던 순간이었다.그는 당시의 통치권자들에게 “무기용 화약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갖췄으니, 화약을 대량으로 만들어낼 관청을 세우자”고 간곡하게 청한다. 이런 최무선의 열정은 ‘화통도감’ 설치로 이어졌다. 화약무기의 개발과 실전에서의 사용은 앞서 말한 진포해전에서 100척의 배로 왜구의 전투선 500척을 불태워버리는 전과로 나타난다. 이어진 관음포대첩은 고려의 군사들이 일본에 대한 두려움을 온전히 떨쳐내는 계기가 됐다.최무선과학관은 영천시가 여전히 최무선을 기억하고, 그의 애국의지를 계승하려 한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공간이다.최무선, 정몽주, 박인로. ‘영천 3선현’의 빛나고도 뜨거웠던 행적은 앞으로도 영천의 자랑이 될 게 분명하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7-08

“경제·일자리·인구 집중, 위기를 혁신의 기회로 만들 것”

고윤환 문경시장의 민선7기 전반기 2년은 전국 최고의 모범도시를 만들기 위해 열정과 집념을 쏟아온 시간이었다. 특히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코로나19 상황 속에서도 문경시는 매번 전국 최고의 위기 대응능력을 보여주고 있어 전국 최고의 안전 도시, 청정 도시, 건강 도시로 인정받고 있다.고윤환 시장은 “코로나19 선제적인 대응으로 우리 시를 잘 지켜냈던 것처럼 시민과 공직자 모의 뜻을 모아 경제를 살리고, 일자리를 만들고, 인구를 늘리는데 집중하겠다”고 전하며, “위기를 혁신의 기회로 삼고, 열정과 집념으로 일하겠다”며 민선7기 후반기에 대한 강한 추진의지를 밝혔다.□ 코로나 청정 문경지난 1월 코로나19 국내 확진자가 발생하자 즉각 비상방역대책반을 가동하는 등 정부 대응에 한발 앞서 심각단계 대응체제로 전환했다. 대인소독기 운영과 음압시설 확충, 대중교통 감염예방 차단막 설치, 전 시민 건강 전수조사 및 마스크 쓰기 운동, 드라이브스루 도시락 도입 공공청사 구조개선 등 모든 행정력을 동원한 선제적 조치로 코로나를 넘어 감염병으로부터 안전한 청정 문경을 만들고 있다. 또한 코로나19 장기화에 대비하고 경제 활성화를 위해 드라이브스루 경제살리기 추진본부를 3월부터 운영하고 있다. BC(Beyond Corona-19) 경제살리기 범시민추진본부를 지난 5월 각 분야별 전문가 및 시민이 참여한 가운데 출범시켰다.지난 6월 발행한 문경사랑상품권은 현재까지 100억 여 원이 공급되었으며, 그 중 50억 원이 도·소매업, 음식점, 전통시장 등 가맹점에 사용됐다. 미로공원 등 지역 내 주요 관광지에 쿠폰으로 지급돼 2차 소비를 이끌었다. 상품권은 6월말까지 출시기념으로 10% 할인해 판매했으며, 지역경제활성화를 위해 당분간 특별할인기간을 연장한다.□ 20년 공모사업 12건, 사업비 103억원 확보2020년 7천270억원(일반회계 6천400억원, 특별회계 870억원)으로 출발한 문경은 감염병에 대비하고, 취약계층의 생계지원 및 경제활성화를 위해 기정예산 대비 640억원 늘어난 8천 20억원을 2회 추경 편성, 동시에 속도감 있는 예산 집행을 실시하고 있다.국비사업 확보와 관련해 고윤환 시장은 지역현안 해결 및 국도비 예산 확보에 총력 대응하고, 문경의 미래를 책임질 주요 사업을 차질없이 준비 할 것을 주문했다. 2020년에는 문경지역 영화창작스튜디오 구축사업(문체부, 35억원), 문경석탄박물관 실감콘텐츠 제작 및 활용(문체부, 10억원), 경북도 지역특화콘테츠 개발지원(문체부, 3억3천만원), 골목경제 회복 지원(행안부, 8억원), 방방곡곡 문화공감 사업(문체부, 1억9천만원) 등 공모사업 12건에 국도비 등 사업비 103억원을 확보했다.□ 미래 성장동력 사업 추진지금 한창 공사 중인 수도권~문경을 잇는 중부내륙고속철도 등 주요철도 개통 후 늘어날 관광 수요에 대비하며, 기존 소재지인 점촌 지역의 도시재생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타워나 조형물 같은 건축물이나 구조물이 아닌 관광과 농업, 체험이 함께 어우러지는 랜드마크 조성사업을 추진해 지역 상공인과 농업인 등의 경제활동 터전을 마련하고, 관광객을 유치할 앞으로의 ‘문경의 새로운 미래 100년’을 위한 랜드마크 사업을 추진한다.문경은 그동안 사과, 오미자가 주된 소득원이었지만 열대·아열대 작목, 미나리 등 다양한 작물의 시범단지 조성으로 앞으로의 기후 및 과일 소비시장 변화에 대응한다. 이와 동시에 체험시설, 자생식물원, 미나리 및 산채작물 고기구이터, 영강 보행교 조성, 산책로 조성 등 점촌 시내에서 영강 주변으로 힐링 코스를 발전시킬 계획이다.□ 아이 웃음 소리 들리는 문경인구정책TF팀을 구성해 저출산과 인구감소에 대응할 실질적 정책인 ‘인구증가 5대 주요시책’을 발굴, 2019년부터 신혼부부 주택자금 대출이자 지원, 출산장려금 확대지원, 산모신생아 건강관리사업 확대지원, 아이돌봄 서비스 확대지원, 문경시 장학회 다자녀가정 생활장학금 확대지원 사업을 본격 추진하고 있다.특히 문경시에서 전국 최초로 시행한 다자녀 생활장학금은 3자녀 이상을 양육하는 관내의 모든 가정에 장학금을 지원하는 사업으로, 2019년에는 1천 811명에게 14억 5천만원을 지원해 시민들에게 다자녀 가정의 자긍심을 가지게 했다. 또한 ‘맘편한 돌봄공부방’, ‘다함께 돌봄센터’ 등 돌봄시설을 확충하고 신혼부부 등을 위한 흥덕행복주택을 건립 추진하는 등 아이 키우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는 데도 힘쓰고 있다.이러한 노력으로 2019년말 문경시 인구는 7만 2천 242명으로 전년 동기와 비교해 368명이 증가했고, 출생아수 또한 8년만에 감소세에서 증가세로 전환됐다.□ 명품 귀농·귀촌지최근 5년 동안 3천 880명에 이르는 귀농·귀촌인이 문경에서 새로운 인생2막으로 정착했고, 지난 한 해 동안 1천 51세대, 1천 350명이 전입하는 등 문경시만의 차별화된 시책이 큰 성과를 거뒀다.이는 귀농인 보금자리 확대, 맞춤형 정착지원 사업, 멘토·멘티 운영, 소득작물 시범 운영, 농장 임대료 지원, 연구회 운영 등 문경시만의 맞춤정착 시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또한 문경시는 농림축산식품부에서 시행하는 도시민 농촌유치지원사업 1, 2주기에 이어 3주기(2020년 ~ 2022년) 사업에도 연속으로 선정되어 국도비 3억 6천만원을 확보하는 성과도 올렸으며, 귀농인 소득작물로 미나리 재배 시범단지, 표고버섯 스마트 재배단지 등을 조성해 귀농인들이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시책을 적극 추진 중이다.□ 지역 균형발전신기동 틀모산 저수지 도시 숲 조성(20년 6월), 하신마을 ~ 모전2지구간 연결도로 개통(20년 5월), 문경새재 야외공연장 앞 정비 및 비가림 시설 설치(20년 5월), 도심 주차장 조성 확대(18곳, 290면 조성), 모전지구 송전선로 지중화 사업 추진, 도시가스 확대 공급, 안심귀가거리 조성, 마을무선방송 시스템 설치 등 시민이 살기 편한 주거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청정도시, 살기 좋은 고장인구증가 5대 주요시책을 지속 추진하고, 귀농귀촌귀향 1번지 문경 건설을 위해 농촌주거환경개선 TF팀을 구성해 농촌의 주거환경을 개선해 나갈 방침이다. 건강 기능주택을 설계, 제작해 맞춤형으로 보급한다.또한 지역 청년들의 유출방지와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 지난 4월 시의회·문경대학교와 손잡고 지역정착맞춤형학과 설치·운영지원에 관한 협약을 체결했다. 20여명의 입학생에게는 등록금을 지원하고, 졸업 후에도 취업을 알선해 실제로 거주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나갈 것이다. /강남진기자75kangnj@kbmaeil.com

2020-07-08

국경을 넘어… 상상 그 이상의 경험을 만나볼까

◇ 러시아 국경을 넘어 상트 페테르부르크로드디어 러시아로 들어왔다. 꽤나 더운 날씨였는데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들어와선 대차게 내리는 소나기를 피할 겨를도 없이 맞았다. 탈린에서 비 때문에 하루 더 쉰 보람이 허무하게 날아가 버렸다. 볕에 뽀송뽀송하게 말렸던 부츠도 슈트도 다시 물에 젖어버렸다. 말짱 도루묵!탈린에서 러시아로 넘어가려면 나바르라는 작은 국경도시를 지나야 한다. 그냥 국경 검문소를 통과하면 될 줄 알았는데 특이하게도 검문소에서 2.5킬로미터 떨어진 차량 대기소에 가서 통과요금(2.5유로)을 내고 영수증과 접수증을 받아 검문소로 가야한다. 대기소는 어마어마하게 큰 주차장인데 탈린에서 러시아로 넘어가는 차량이 그만큼 많은 듯하다. 가능하면 기다리지 않고 최대한 빨리 통과하기 위해 아침 6시가 되기 전 탈린에서 출발했다. 탈린에서 나바르까지 가는 길은 포장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소련으로부터 1991년 독립하고 난 후 에스토니아는 러시아보다 다른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결국 2004년 유럽 연합에 가입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한 후론 완전히 러시아와 관계는 소원해졌다.유럽으로 향하는 길과 러시아로 향하는 길의 포장상태만 봐도 그 관계가 어떤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 그건 에스토니아뿐만 아니라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도 마찬가지다. 8시 30분쯤 대기소에 도착해 수속을 밟고 러시아 국경 검문소를 통과하는데 걸린 시간은 3시간 남짓이었다. 500미터 남짓 국경을 넘는데 3시간이나 걸리니(거의 대기줄이 없었음에도) 자주 넘어야 하는 이들은 얼마나 피곤할지.국경검문소를 넘을 때마다 그곳 직원들의 반복된 질문이 바로 ‘영문차량등록증’이 진짜냐는 것. 외국으로 오토바이(차량도 마찬가지)를 가지고 나가기 위해선 차량등록사업소에 가서(면 단위는 면사무소) 영문차량등록증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게 직인만 찍혀있다 뿐이지 정식 공문서로 보기 어려운 수준이라 그들 입장에선 당연히 의심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원래 차량등록증도 마찬가지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오토바이나 차를 가지고 떠난 분들이 흔히 겪는 경험이다. 육지로 이동할 수 없는 섬이나 마찬가지인 우리에게 영문차량등록증이 필요한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극소수를 위해 제대로 만든 공문서 양식을 만드는 건 행정력 낭비일 수도 있겠지만, 필요한 일이라 생각한다.자유롭게 차량이 이동할 수 있는 시절은 아니지만 미리 이런 사소한 것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양식을 참고해 개선할 필요가 있다. 언젠가는 통일이 되고 자유롭게 아시아와 유럽을 다닐 날이 오지 않겠나. 에스토니아 검문소에서도 러시아 검문소에서도 차량등록증의 진위 여부를 가리느라 한참 기다려야 했다. 통관 서류부터 보험 서류까지 모두 보여야 했고. 특히 ‘도큐먼트’를 중요시하는 러시아나 구 소련권 국가의 공무원들은 우리네 차량등록증의 수준(?)을 이해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항상 의심 받는 영문차량등록증국경통과에 시간이 한참이나 걸리고 소나기까지 맞았지만 러시아에 오니 한결 마음이 편하다. 많은 나라를 여행한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인 성향이랄까. 러시아를 달리며 날씨로 고생한 것을 제외하곤 꽤 편안하게 다녔다. 러시아가 좋았던 이유는 역시나 물가가 저렴한 탓이었고, 상상하는 것 이상의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토바이 여행자에게 친절했던 사람들을 러시아에서 가장 많이 만난 탓이다. 이제 돌아갈 일만 남은 것도 마음이 편안 이유 중 하나겠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선 배를 개조해 만든 숙소에 짐을 풀었는데 1박에 7천 원 정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중심가에 이런 가격으로 묵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 일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들어오면서 고속도로를 이용했는데 페트로 그라츠키 섬(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여러 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다.)으로 들어오면서 거리에 비해 꽤 비싼 통행료를 냈다. 러시아에선 유료 도로를 이용한 적이 없었는데 에스토니아의 국경도시 나르바를 통과해 상트 페테르부르크까진 약 180킬로미터로 짧은 거리였지만 국경을 통과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써서 도심을 관통하는 길은 포기했다.만약 도심을 통과하면 예상보다 늦게 숙소에 도착할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 유료 도로를 벗어나 숙소를 찾기 위해 도심으로 들어오자마자 길을 잘못 들어 고생했을 뿐 아니라 숙소를 찾지 못해 또 길을 헤매느라 시간을 허비했다.네바강 지류에 떠있는 배가 숙소였던지라 배를 매어둔 선착장 입구를 찾지 못하고 그 주위를 계속 맴돌기만 했다. 오토바이를 세울만한 장소를 찾느라 또 이리저리 다니느라 녹초가 되어버렸다. 숙소 직원에게 길가에 주차된 오토바이 사진을 보여주며 괜찮은지 물었지만 문제가 생겨도 책임질 수 없다고 최대한 숙소 가까이 가져다 놓으란 이야기만 들었다. 하지만 더는 움직일 힘도 없어 그대로 방에 들어가 씻지도 않고 슈트를 입은 채로 누웠다.◇ 표트르 대제의 야망이 만든 도시, 상트 페테르부르크상트 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 대제에 의해 1713년부터 러시아 제국의 수도로 지정되었다. 그로부터 1917년 3월 혁명과 10월 혁명을 거쳐 로마노프 왕조가 끝나고 볼셰비키가 정권을 잡고 1918년 모스크바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러시아 제국의 중심지였다.표트르 대제는 유럽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네바 강의 하류, 핀란드 만과 접한 습지였던 이곳을 개발해 도시를 세우기 위해 엄청난 공력을 들였다. 습지를 메워 건물을 짓기 위해 기반을 닦을 엄청난 석재가 필요했는데 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과 배에 일정 무게 이상의 돌을 가져오도록 명령했다.표트르 대제가 모스크바를 두고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수도로 삼기위해 노력했던 이유는 그가 어린 시절 이복누이 소피아 공주의 쿠데타로 크렘린 궁에서 쫓겨나 외국인 거주지에서 살았던 경험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그는 외국인 거주지에서 살던 청소년기 영국, 네덜란드 등에서 이주해온 기술자들과 교류하며 석공과 목공뿐만 아니라 다양한 기술을 배우는데 열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럽의 변방으로 힘이 없었던 러시아를 어떻게든 유럽에 편입시키고 영토를 넓히고자 했던 표트르 대제의 꿈은 그 시절부터 키웠던 것이고, 말년에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수도를 옮기기 위해 거대한 토목공사에 집착했던 이유는 낡은 것을 버린 새로운 러시아의 상징을 자신이 죽기 전에 남기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을 것이다.유럽 어느 도시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만들기 위해 그는 자신의 아들이자 왕위를 물려받을 황태자를 죽음으로 몰고 수많은 반대자를 처형했으며, 토목공사에 지친 민중들의 반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민중들의 고혈을 짜내 도시와 성을 만드는 토목공사는 결국 권력자에게 비수가 되어 돌아오기 마련이다.침대에 누워 지도를 보며 지금까지 달려왔던 길과 그동안 저질렀던 실수들을 천천히 복기했다. 이제 출발해서 달려왔던 1만㎞를 그대로 따라가면 된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오토바이를 받아 시동을 걸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80일, 3만㎞ 가까이 달렸다.러시아나 유럽을 제대로 보기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는 게 두고두고 안타깝다. ‘주마간산’은 나 같은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이겠지. /조경국

2020-07-07

“취임 초기 약속한 ‘더 큰 고령, 더 행복한 군민’ 완성 최선”

곽용환 고령군수는 민선 7기 후반기 군정목표로 코로나 극복과 살기 좋은 부자 농촌 건설에 매진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곽 군수는 “코로나19가 불러온 위기에도 흔들림 없이 성원을 보내준 군민 여러분과 군의회, 공직자들께 감사드린다”며 “세계적 위기상황 속에서도 모두가 힘을 합쳐 어려운 시기를 슬기롭게 이겨내자”고 역설했다.곽 군수는 이어 “향후 정부의 한국판 뉴딜 정책에 맞춰 전략사업의 내용을 수정·보완해 나갈 계획”이라며 “문화·교육·교통 등 일상생활에서 군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실질적 대책 마련에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곽 군수는 “취임 초기 약속한 ‘더 큰 고령, 더 행복한 군민’이란 슬로건의 완성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며 “초심을 지켜가는 자세로 주민들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 기울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활력 있는 지역경제국가균형발전과 광역교통, 물류망 구축을 주도할 남부내륙 철도와 달빛내륙철도 고령역 유치를 추진한다. 이를 위해 남부내륙고속철도 고령역사 유치 전 군민 결의대회를 개최하고 고령역의 경제성과 연계성, 접근성 등 장점을 적극적으로 알릴 계획이다.군민 누구나 품격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문화체육, 보육의료, 복지시설 등 생활필수 인프라를 복합적으로 구축하는 생활SOC 사업도 추진한다. 생활SOC 복합화 시설을 통해 삶의 질 향상과 군민 소통·화합의 공간이 마련될 수 있도록 맞춤형 사업 발굴과 국비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령경제의 큰 축인 낙동강 경제벨트 완성과 레저산업의 활성화도 주요 과제이다. 공장 설립·등록 인허가 원스톱 서비스 확대, 중소기업 운전자금 확대, 지역 특화산업 육성으로 기업하기 좋은 환경도 만들어갈 방침이다. 사회적 기업 및 마을기업 육성사업과 도시청년 시골파견제 사업 등 공공과 민간부문에 안정적인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에도 소홀하지 않는다는 게 고령군의 각오다.□ 세계 속의 문화관광코로나19 사태의 어려움을 속에서도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적합한 청정 자연관광, 열린 관광, 거리두기 관광 등의 환경을 두루 갖추기 위해 노력 중이다.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른 디지털, 비대면, 저밀도, 건강 등의 키워드에도 주목하고 있다.지산동 대가야고분군은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역사문화권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고 대통령이 공포하면서 가야사 복원 사업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경북 환동해시대를 맞아 대가야 국제교류에 대한 연구와 해양교류사 재조명사업을 통해 대가야의 정체성을 확립한다는 것도 군의 계획이다. 이는 대가야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역사문화클러스터 조성사업과 지역관광추진조직 육성지원 공모사업도 힘을 받고 있다. 야영장 활성화 프로그램 등 고령만의 독특한 관광상품도 지속적으로 발굴할 방침이다. 이에 더해 대가야문화누리와 다산면 행정복합타운을 중심으로 수요자별 맞춤형 문화체육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살기 좋은 희망농촌농산물의 판로 확보와 산지 마케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지역 농협을 통한 통합마케팅을 추진한다. 고령군 APC, 다산농협 APC, 쌍림농협 APC 등이 앞장서고 있다. 각종 직거래장터와 박람회, 축제 참가를 지원하고 우곡수박·개진감자 직판장도 운영한다. 해외시장 개척에도 더욱 노력할 예정이다.양파·마늘 농가를 위해 농림축산식품부에서 주관하는 ‘밭작물 공동경영체 육성지원사업’에도 공모했다. 기후변화 대응 작물 개발로 미래농업의 성장동력을 확보하는 분야에서의 노력도 이어진다. 고품질 식량작물 기술보급, 토양검정실 미생물 배양실 등 과학영농기반도 중단 없이 구축되고 있다.쾌적한 농촌 환경 조성에도 관심을 쏟는다. 영농기반확충정비사업, 재해예방노후수리시설정비사업, 노후위험저수지정비사업 등이 그 실제적 사례다. 고령 농업의 부가가치를 향상시키기 위한 대가야농업기술대학 운영도 이어진다. 예비 귀농 희망자 영농기초 교육과 재배기술 멘토·멘티 운영도 고령군의 주요 농업정책 중 하나다.□ 공존하는 안전도시대가야읍 중심지역은 국토교통부가 실시한 2019년 도시재생뉴딜 공모사업에 최종 선정돼 사업비 133억 원을 확보했다. 앞으로 3년에 걸쳐 생활서비스 복합화와 상권브랜드 구축을 통한 도시경쟁력 강화사업이 진행된다.국지도 67호선 운수~용암 구간 조기 개통, 개진 열뫼~박석진교~현풍 구간 광역도로 개설 등 교통인프라도 새롭게 구축한다. 대가야읍, 다산면, 개진면 일원엔 연차별로 도시가스 공급이 확대되고 있다. 또한 권역별 마을 하수 처리시설 확대로 쾌적한 생활공간을 만든다.고령군은 환경부에서 공모한 노후상수도 정비사업에도 선정돼 올해부터 5년간 80억 원을 투입해 중점관리구역, 상습누수지역 등 교체가 시급한 노후 상수도관로 15.3km를 정비할 계획이다.여가와 휴식이 있는 삶을 위해 대가야읍 중화저수지에 생태습지, 생태관찰데크, 소리숲, 생태둘레길 등을 포함한 생태공원을 조성 중이기도 하다. 지난해엔 환경부 공모사업으로 소가천 생태하천 복원사업이 선정됐다. 이를 통해 덕곡면 원송리에서 후암리에 이르는 6.5km 구간이 생태복원을 추진 중이다.□ 희망·나눔 맞춤복지2014년 시작된 대가야희망플러스는 지역연계 모금사업으로 소외된 복지 사각지대 이웃을 위해 생계비, 의료비 등을 지원하고 있다. 대가야읍과 다산면엔 맞춤형 복지팀이 추가로 설치돼 주민의 복지체감도 향상과 복지사각지대 해소에 기여하고 있다. 8개 읍면에 총 4개의 맞춤형 복지팀을 운용해 ‘찾아가는 복지서비스’도 제공 중이다.지난해 12월 개관한 아이나라 키즈교육센터는 장난감도서관, 놀이공간과 교육실로 구성된 교육·문화 복합문화공간. 아동 복지환경 개선과 젊은 세대의 인구 유출을 방지하는데 기여한다는 게 고령군의 부연이다.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가임 여성의 비율이 갈수록 줄어드는 현실에서 저출산 극복은 국가와 사회가 함께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다. ‘아이 낳고 키우기 좋은 고령 만들기’를 슬로건으로 보건소 1층에 마련한 출산통합지원센터는 임신과 출산, 육아에 대한 원스톱 통합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2018년 경북에서 처음으로 치매안심센터를 개소한 고령군은 치매 예방은 물론 치매 환자와 가족들에게 다양한 도움을 주고 있다. 다문화가족의 안정적 정착과 사회 적응을 돕기 위해서는 방문교육 서비스, 한국어교육, 다문화가족 공부방 운영, 이중언어강사 일자리창출사업 등을 추진 중이다.□ 소통하는 열린 행정고령군은 경북 23개 시·군 중 9위, 군부 중 3위의 건전한 재정 운영을 하고 있다. 국비확보에도 총력을 기울여 예산 3천억 원 시대를 열었다.고령군의 공감행정은 지역 현안에 대해 각계각층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 있기에 군민들의 만족도가 높다. 효과적인 소통을 위해 SNS, 웹진 등 뉴미디어도 적극 활용 중이다. 고령군교육발전위원회는 군민들의 참여로 교육발전기금 270억 원을 모금했다. 이는 교육환경 개선과 우수인재 유출 방지를 위해 사용될 예정이다.학교 밖 청소년들을 위한 직업역량강화 프로그램의 추진과 관내 청소년 우호기업 발굴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단순한 직업훈련에 그치지 않고 실제 사업장에 투입돼 업무를 경험할 수 있는 인턴십은 학교 밖 청소년들의 자립 동기 강화와 사회적응에 도움을 주고 있다.주민들에게 평생교육의 기회를 주기 위해 읍면별 마을평생학습축제도 개최했다. 평생교육활성화 지원공모사업에 선정돼 덕곡면과 쌍림면이 각 마을당 사업비 2천만 원 지원받았고 현재 다양한 사업이 진행 중이다./전병휴기자 kr5853@kbmaeil.com

2020-07-07

부용대와 만송정, 그리고 이름만으로 가슴 울리는 하회

우리나라 수많은 마을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마을이 안동 하회마을이다. 우뚝 솟은 절벽, 마을을 감싸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옛 마을의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난 극복의 명재상 유성룡이란 대스타 때문이다. 스승 퇴계가 건축에 깊은 애착을 가졌듯이 서애도 30살에 낙수(落水)의 서쪽 언덕 밑에 서당을 지으려 할 정도로 건축에 일가견이 있다. 뜻은 이루지 못했지만, 자신의 호를 서애(西厓·서쪽 언덕)라 했다. 서애는 풍산에서 옮긴 병산서원 장소도 정해주었고, 원지정사도 지었으며 말년에 옥련정사도 지었다.#. 흐르는 강물, 부용대와 겸암정사하회, 이름만으로 가슴이 울리던 곳이다. 필자가 1985년에 처음 왔을 때 순수했던 하회마을은 눈물 나는 정겨움이었다. 그 뒤 많이도 와 보았지만 외부에 알려질수록 비례하여 점점 빤질빤질하게 망가져 지금은 철저히 상업화되어 자연 경관만 거시적으로 보고 미시적인 마을 구석구석은 보지 않는다. 오늘도 마을입구에서 마을을 피하고 강둑을 걸었다. 하얀 연꽃이 활짝 피어 여름의 서곡을 알리고 강둑의 벚나무도 세월이 흘러 굵은 나무에 잎이 무성하여 햇볕도 막아주고 바람도 일렁거린다. 하얀 백사장과 흘러가는 강물을 보니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의 눈물 나는 동요가 그림처럼 선명히 떠올라 깊은 정서의 우물로 빨려 들어간다.하회마을의 압권은 강 건너 조용히 서있는 부용대 바위다. 마을이 속세라면 강과 부용대는 극락인데 만송정 솔숲이 속세와 극락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예전에는 나룻배로 강을 건넜다면 지금은 섶다리를 놓아 걸어가는 낭만도 있고 부용대 가기도 쉬워졌다. 고운 모래를 적시고 흘러가는 강물은 묵묵히 자기의 길을 가고 있었다. 더운 날씨에 강물에 뛰어내리고 싶지만 마음만 강물에 적시고 부용대로 올랐다. 짜릿한 긴장감이 강물에 휘감긴다. 절벽 아래로 강물보다 넓은 백사장과 만송정, 기와집과 초가집이 적당히 어우러진 하회마을이 꿈결마냥 속삭이듯 고요히 숨 쉬고 있다. 올려다보는 앙시법(仰視法)은 우러러 보는 맛이 있지만, 이처럼 내려다보는 부감법(俯瞰法)은 드라마틱한 아름다움을 던져준다. 부용대 절벽 산길 타고 적당히 내려가면 은자가 조용히 사색하며 학문을 펼칠 수 있는 겸암정사가 나온다. 서애의 형 겸암 유운룡((1539~1601)이 1567년 학문연구와 제자 양성을 위해 지었고 하회마을 앞의 만송정 솔숲도 조성했다. 겸암은 16살 때부터 퇴계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고 31살에 또다시 향시에 합격하자 퇴계가 너무 연연한다고 나무라자 벼슬에 뜻을 접었다. 퇴계가 죽고 34살에 아버지의 권고로 고관의 자손에게 주어지는 음직(蔭職)으로 낮은 벼슬을 시작한다. 1584년, 46살에 동생 서애는 판서의 직위에 있을 때 인동현감을 6년 한다. 이때 목민관으로 경위표를 만들어 세금부정을 막고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선정비를 세워준다. 이 경위표에 힌트를 얻은 다산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새로운 경위표를 만들었다.명리를 떠나 민중을 위해 선정을 베푼 목민관으로 서애를 큰 인물로 키우는 뒷받침을 했고, 징비록 내용 일부는 겸암의 조언이 들어있다. 주인도 출타중이고 겸암도 떠난 정자에 올라 필자가 여러 번 여기에 앉아 특강했던 기억이 새롭고, 정자를 반질반질하게 잘 관리해놓은 후손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발길을 돌렸다.#. 서애와 옥련정사겸암정사에서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화천서원을 지나 옥련정사에 갔다. 서애가 1589년에 지은 집인데 단단하고 기품 있게 잘 지었다. 지금은 담장을 수리 중이었고 휘어진 소나무는 옥련정사를 더욱 품격 있게 한다.지승유인(地勝由人), 땅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명승지가 된다는 말이 있듯이 하회마을이 자연경관도 뛰어나지만 서애가 없었다면 하회의 명성은 반감되었을 것이다. 서애는 어떤 사람인가.“천자(天資)가 총명하고 기상이 단아했다. 학문을 열심히 익혀 종일 단정히 앉아 있으면서 몸을 비틀거나 기댄 적이 없으며, 남들을 대할 적에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듣고 말수가 적었다.” 한편 “이해가 앞에 닥치면 동요를 보였기 때문에, 임금의 신임을 오래 얻었으나 곧은 말을 드린 적이 별로 없었고, 정사를 오래 맡았으나 잘못된 풍습을 구해내지 못하였다.” 이렇게 상반된 인물평을 ‘선조신록’에는 기록해 놓았다. 그러나 공통적으로‘총명하고 기상은 활달하였으며 몸가짐이 단정하고 박식하여 사람을 탄복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다’고 했다.서애는 외가인 의성현 사촌리에서 강원도 관찰사 유중영의 둘째로 태어나 21살 때 퇴계 문하에 들어간다. 그가 주자의‘근사록(近思錄)’을 들고 퇴계에게 요목(要目)을 물어나가자 퇴계는 “이 젊은이는 하늘이 낸 사람이다”며 칭찬하였다. 25살 때 별시문과 병과로 합격하여 과직에 나가 영의정 하는 51살 때까지 당쟁의 소용돌이에서도 난관을 잘 헤쳐 나가 27년간 고위관리로 순탄한 벼슬을 지냈다. 서애가 임진왜란을 온몸으로 총괄하여 극복하였으나 전란 중 화의를 주장했다고 파직되어 이곳에 조용히 지내면서 전쟁 때 백성들의 고통과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의 교훈을 적은‘징비록’을 완성한다.#. 전쟁의 참혹함여러 경로를 통해 일본의 침략정보가 있었지만, 학봉 김성일이 일본의 침략은 절대 없다는 결정적 잘못된 보고로 전쟁대비도 제대로 못한 원인도 있지만, 속수무책으로 참혹하게 당한 것은 선조의 무능과 동, 서로 갈라진 당파싸움, 그리고 썩은 관료들 때문이었다.율곡 이이의 문인 중 가장 뛰어난 학자의 한 사람이면서 임진왜란 때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1천700여 명을 모아서 승병들과 합세하여 청주를 수복하고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공격하기 위해 금산으로 향하다가 그의 전공을 시기한 관군의 방해로 대부분의 의병들이 해산되고 겨우 700여 명의 의병으로 금산전투에서 모두 전사했던 중봉 조헌(1544~1592)이 전쟁 중에 올린 상소를 보자. 1583년 북쪽 오랑캐가 침입했을 때 백성들로부터 신의를 잃은데 있다고 보았다.그때 상민은 양민으로 올려주고 벼슬길도 열어준다고 했고, 군량을 바치는 자도 서얼의 신분을 면해주고 벼슬길도 열어 주겠다고 하여 용기 내어 적의 머리를 베어왔으며, 군량을 가진 자들은 재산을 다 털어 먼 경원까지 실어와 바쳤다. 그러나 전란이 평정된 후 권력을 잡은 신하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목숨을 걸고 싸운 자의 공은 인솔 장수 정언신(1529~1591)에게만 돌아가 북도의 용사들은 배신감에 원한을 삭였다. 조헌의 길고 긴 상소문을 보면 당시 상황을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 그는 “하찮은 종이라도 공이 있는 자를 승진시키어 우러러보는 백성들에게 감동을 주소서.”라고 절규했다.같은 시대 조선 중기 한문 4대가로 정주학자인 영의정 신흠(1566~1628)도 “오늘날 벼슬아치들을 보면 거의가 뇌물을 쓰고 등용된 자이거나, 아니면 임금의 사랑을 받는 권력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권력자가 뒤를 봐주는 자들이다.” 뇌물에서 시작한 자는 항상 탐욕으로 끝나고, 권력에서 시작한 자는 항상 포악으로 끝난다 했다.임란 당시 서울의 참혹함을 서애는 “1592년(선조 25) 4월 30일 임금의 어가가 서울을 빠져 나가자 백성들은 맨 먼저 장예원과 형조(법무부)를 불태웠는데, 이 두 곳이 공,사 노비들의 문서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을 불태워 궁궐이라고는 하나도 남겨두지 않았다. 그리고 왕세자 임해군의 저택과 병조판서(국방부장관) 홍여순의 집이 불탔는데 모두 적들이 들어오기 전에 우리 백성들이 태웠던 것이다.” 잠시 떠났던 백성들도 돌아와 적들과 함께 물품을 매매하고 점포들은 사람들도 가득찼고, 적첩(신분증)을 주어 자유롭게 출입하니 적들의 노역에 순종했다. 심지어 “누군가가 적을 죽이려 계획하면 밀고하여 그를 잡아다가 종루 앞이나 숭례문 밖에서 참혹하게 불로 지져 죽였다.” 왜군들이 서울을 빠져나가면서 하룻밤에 성안의 집들을 모조리 불태웠고, 백성들을 닥치는 대로 죽여 버려 얼마 남지 않았다. 살아남은 백성 중에는 굶주림과 유행병으로 죽은 자가 열 명 중에 팔, 구명이나 되었다면서 “결국 우리 백성들은 더할 수 없이 큰 액운을 당한 것이다. 아무리 사람의 실수에서 빚어진 결과라지만 이 역시 운명이 아니겠는가?”라고 기록해 놓았다.서애의 이엽의 죽음에 관한 기록을 보자. 포로로 잡혀가서 수군대장이라고 하니 풍신수길이 매우 융성하게 대접해주고 은과 비단 등도 주고 큰 집을 주어 편히 살도록 했다. 이엽은 그 물품들을 일본사람들에게 뇌물을 주어 환심을 사고 붙잡혀온 백성 수십 명과 도망치려다 현상금 쌀 200석에 우리 백성이 밀고하여 이엽은 배를 찔러 자결하고 나머지는 다 붙잡혔다. 왜장은 죽은 이엽의 뱃속에 소금을 넣어 풍신수길에게 보고 한 뒤 그의 목을 베어 저잣거리에 매어달고, 잡혀온 수 십 명은 산채로 불태워 매우 참혹하게 죽였다.당파적인 시각도 있겠지만, 조헌은 적과 화친을 주장하다가 적을 불러들인 서애를 진회보다 더 크다고 했고, 정여립 사건 때 수많은 인재들 1천 여 명이 옥사당할 때 동인을 구해주지 않았다고 비난받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학봉을 잡아오라고 하여 압송되어올 때 서애는 적극적으로 변호하여 직산까지 잡혀오던 학봉을 경상도 초유사로 보내게 하고 그가 죽자“평생 동안의 지우는 오직 그 한 사람뿐이었다”통곡하는 뜨거운 우정도 있었다.이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서애는 국난극복의 총 지휘자로 나라를 구한 위인으로 추앙받아 마땅하다.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7-07

“호국도시 칠곡으로… 혁신·변화로 살맛나는 도시 건설”

일명 ‘행정통’이라 불리우는 백선기 칠곡군수가 민선7기 2주년을 맞았다. 지난 2011년 10·26 재보선에서 칠곡군수로 당선돼 지금까지 3선에 성공하면서 칠곡군의 혁신과 변화를 이끌고 있다. 특히, 전국 1위의 채무도시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던 칠곡을 ‘일반채무 제로’도시로 탈바꿈 시켰다. 그리고 ‘칠곡 왜관 = 미군부대’라는 지역 이미지를 ‘칠곡군 = 호국도시’로도 바꾸는데 성공했다.- 민선7기 2주년을 맞은 소감은.△그동안 어떻게 달려 왔는데 이번 기회에 한번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갖게 됐다. 공직자로서 맡은 일을 제대로 했는지에 대해 생각해 봤는데, 보람된 일도 많았지만 부끄러운 부분도 많았다. 아직 부족한게 많고 더욱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그리고 군수 생활을 하면서 진정으로 군민들로부터 많은 도움과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깨닫게 됐다.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많은 생각과 감회가 있지만, 이제는 남은 2년을 어떻게 잘 마무리하는가에 역점을 두고 일을 진행하려 한다.- 칠곡군수로서 가장 보람된 일은.△아직도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재정위기를 극복하고 군비부담 ‘일반체무 제로’를 달성한 것이다. 2011년 10월 군수로 취임을 하고 보니 칠곡군이 예산 대비 채무 비율이 21.1%로 전국 82개 군 중 최고 높았다. 말그대로 전국 1위였다.군 재정이라는게 가정살림이랑 똑같다. 가정주부가 알뜰하게 살면서 단돈 얼마라도 저축을 할 여유가 있어야 살림을 꾸려나갈 재미가 있는데, 빚 갚기에도 빠듯하니 정말 아찔했다. 지금처럼 금리가 1%대 라면 갚을 생각을 하지 않았을 거지만, 당시에는 이자 비율이 가장 저렴한 것이 6∼7%대 였다. 그러다보니 이자만 1년에 50억원 이상이었다.주민 1인당 채무가 60만원으로 전국 군 평균보다 2배나 높았다. 어떻게든 빚을 갚아서 살림살이를 나아지도록 해야했다. 허리를 졸라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어떻게든 돈이 되는 사업들을 만들어야 했다.그러다보니 공무원들이 애를 많이 먹었다. 사업을 발굴하고 진행시키려니 일이 굉장히 많을 수밖에 없다.그래도 그런 사업들이 큰 성과를 냈으니, 공직자로서 보람이 클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꼭 인사를 해애할 분이 있다. 칠곡군의 채무제로의 가장 큰 공신은 사실상 김관용 전 경북지사이다. 호국관련 사업들을 한다고 했을때 김 전 지사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았다면, 사실상 채무제로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가장 힘들었던 일은.△가장 힘들었다기보다 가장 아찔했던 순간은 바로 우리지역에서 코로나19가 발생했을 때였다. 다른 시설도 아닌 중증장애인 시설에서 발병을 하다보니 여러 어려움과 걱정이 많았다. 그리고 당시 시설 관계자들이 병원에서 퇴원하고 난 뒤 자연휴양림에서 2주동안 자체 자가격리를 하도록 했는데, 그때도 5명이나 재양성자가 나왔다. 만약 그때 자체 자가격리를 하지 않았다면 또다시 확산될 수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그래도 그 어려운 시기에 힘과 용기를 보내준 많은 군민과 국민들을 보면서 코로나19는 반드시 이겨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됐다.- 부족한 예산에 대한 대책은.△민감한 사안이다. 칠곡군의 올해 교부세가 62억원이나 줄었고, 내년에는 73억원이 줄어든다. 중앙정부가 전체 예산을 줄였으니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재정상황이 안좋은 지방의 자치단체들은 매우 힘든 상황에 처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군 예산을 줄이기도 힘들다. 예산을 줄일 수 있는 부분은 매우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농업분야, 경제분야는 사실상 군 자체사업이 거의 없고, 대부분 중앙정부나 도의 보조금으로 이뤄진 보조사업이다보니 줄일 수가 없다. 사실 이 부분은 칠곡군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시장군수협의회를 통해 대책을 찾으려고 한다.지난달 29일 ‘민선7기 후반기 경북시장군수협의회 회장’에 만장일치로 저를 추대해 주셨는데, 이는 제가 앞으로 선출직에 나갈 사람도 아니고, 그동안 쌓은 행정경험 등을 지역을 위해 봉사하라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도비보조사업을 공론화 시켜 현실적인 방안을 찾으려고 한다.현재 국비보조사업의 경우 사업비 중 국비 50%, 도비 15%, 군비 35%의 매칭이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다. 국비보조금만 두고 보면 도비와 군비의 비율이 3대7의 비율인데 도비보조사업의 경우에도 국비보조금 사업과 같은 3대7의 매칭비율을 적용하고 있는 현실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관행이다. 보조사업이면 보조하는 곳에서 최소한 사업비의 반을 부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국비보조사업도 50%를 부담하는만큼 도비보조사업도 최소한 50%는 부담해야 도비보조라는 의미가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도의 재정도 녹록치 않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못된 점을 그대로 유지해 나갈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는 8월에 시장군수협의회 후반기 첫 회의가 열리는데 그때 이 사안을 적극 논의할 생각이다.- 경북시장군수협의회장으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그동안 시장군수협의회는 각 시군에서 도나 중앙에 건의할 사항들을 결정하는 정도의 일만 해왔다.하지만, 이제는 진짜 도가 우리 시군의 애로사항을 제대로 알 수 있도록 하겠다. 그리고 도에서도 애로사항이 있다면 와서 알려줄 수 있는 그런 자리가 되도록 하겠다. 시장군수협의회가 2달에 한번씩 열리는데 그동안 제대로 된 소통이 없었다.하나 예를 들면 코로나 발생 전 시도 통합문제에 대해 도에서 일방적으로 발표해 버렸다. 우리 시군과 한번도 논의하지 않았다. 이건 바람직하지 않다. 도가 일을 하기 위해선 23개 시군의 협조를 받아야 할 때도 있고, 시군도 도의 협조를 받을 일이 있다. 이런 소통부재는 시장·군수의 불만으로 이어지고 있다. 또 시군에서 어떤 사안에 대해 건의를 하면 도 실무자만 검토하고 위로 보고를 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다보니 도지사, 부지사 등과 시장·군수가 지역현안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가 있어도 소통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최소한 시장군수협의회에서 건의된 사항들은 부지사까지 보고가 되도록 하겠다.도에서 오랜 근무한 경험과 지사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도와 시군이 서로 신뢰하고 소통하는 중간자 역할에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앞으로의 계획은.△3선의 군수로서 남은 2년의 임기동안 진행되고 있는 사업을 마무리하는 것이다.현재 재정상태도 좋지 않은데 마무리를 잘 해놓지 않는다면 후임자가 애를 먹게 된다. 그래서 민선 7기 후반기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준비하면서 현안 사업과 공약 사업을 차질 없이 추진하는데 모든 역량을 집중할 생각이다.특히 U자형칠곡관광벨트 완성과 지속가능한 일자리창출 및 지역경제 살리기 집중, 군민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안전도시 칠곡 건설, 소득과 삶의 질이 향상된 살맛나는 부자농촌 칠곡 완성, 군민의 복지 체감온도를 올리는 따뜻한 복지도시 건설, 군민 누구나 참여하고 공감하는 군정혁신 등을 주력해 나갈 계획이다.이 중에서도 U자형칠곡관광벨트는 본인의 공약사업이자 9년에 동안 추진한 역점 사업이다. 이 관광벨트가 완성되면 호국평화를 테마로 한 맞춤형 체험관광 산업으로 지역 정체성 확보와 경제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남은 2년 항상 그래왔듯이 군민들의 행복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20-07-06

“시민 중심 소통, 다양한 방식의 지속발전가능한 도시로”

경북지역 유일의 여당 시장으로 큰 관심을 받았던 장세용 구미시장이 임기 절반을 보냈다. 그동안 보수의 상징으로 불리우던 구미에서 진보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시장으로 구미시를 이끌면서 초반에는 말도 탈도 많았다. 하지만, 도시재생의 전문가답게 차츰 구미시를 재생시켜 나갔다. 전국 최초로 LG화학과 상생형 구미일자리를 구축해 추진하고 있고, 미래형 스마트산단,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본격적으로 실행하고 있다. 또 무상급식, 출산축하금 확대 지원 등 보편적 복지체계도 구축했다. 민선7기 2주년을 맞아 다른 지자체장들은 새로운 사업들을 앞다퉈 발표하는 가운데 장 시장은 남은 임기동안 새로운 사업보다는 현재 진행 중인 사업들에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고 선언했다. 초선인 장 시장을 만나 그 이유와 앞으로 2년간 구미를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지를 들어봤다.-민선7기 2주년을 맞은 소감은△솔직히 너무 힘들게 2년을 보냈다. 내가 원헀던 바가 아닌 것으로 괜한 오해와 억측, 그런 것 때문에 처음 속앓이를 많이 했다. 그로인해 불필요한 시간 낭비도 많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정치적인 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무턱대고 공격하고, 무조건 반대부터 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정치에 많은 실망감으로 좌절도 했다. 하지만, 나를 끝까지 믿고 응원해 주시는 시민들이 계셨기에 그 모든걸 이겨 낼 수 있었다. 그런 시민들을 보면 초심으로 돌아가게 된다. 내가 구미시장이 되고자 했던 이유가 바로 시민을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구미시민들로 인해 2년을 잘 버텨왔다. 앞으로 2년도 구미시민들을 위해 한발한발 앞으로 나아가겠다.-2년 동안의 성과를 정리하자면△지난 2년간 중앙정부와 국회를 수시로 방문하면서 구미의 미래 먹거리를 만드는 데 주력하고, 지속가능한 성장기반을 확충했다는 점이 가장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상생형 구미일자리, 구미 스마트산업단지 조성, 경북 산단 대개조사업, 도시재생 혁신지구 국가시범지구사업, 홀로그램 기술개발사업, 푸드플랜 패키지 지원사업 등 정부의 대형 국책사업에 연이어 선정되면서 미래먹거리의 기반을 만들었다.또 1조2천억원 규모의 에너지센터 건설 투자협약 체결 등 국내외 투자유치 2조1천682억원을 달성하는 등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노력했다.이밖에도 5G기반 VR·AR 디바이스 개발지원센터 운영과 홀로그램 기반 기술개발 사업, 지역산업거점 스마트 특성화 지원사업, 로봇직업혁신센터 구축사업 추진으로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는 신성장동력을 꾸준히 확충했다.-경기침체로 많은 어려움이 있다.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지△경기침체로 어려움을 겪는 시민들을 위해 모든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 우선 시민들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소하는 문제를 최우선적으로 해결하고자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구미시는 지역상권 활성화를 위해 구미사랑상품권 490억원을 발행하고 가맹점 1만개 확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소상공인 특례보증 및 이차보전 지원을 확대하고 전통시장 이용 활성화를 위한 각종 특화사업을 추진하는 등 민생경제 활력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또 고용안정 선제대응 패키지 지원사업(7천명 고용창출), 지역거점형 콘텐츠기업육성센터 조성사업(청년일자리 2천500개 창출), 구미형 청년연구인력 지원사업 등 맞춤형 일자리 특화사업 추진으로 서민생활 안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밖에도 기업들의 투자를 이끌어 내는데 노력할 것이다. 지난 1일 민선7기 3년차를 투자기업 3개사와 6천690억원 투자양해각서 체결로 시작했다. 코로나19로 지역경제가 전례 없이 차갑게 얼어붙은 구미공단에 단비와도 같은 소식이었다. 앞서 지난 1월에는 700억원 규모의 이차전지기업 투자유치, 4월에는 1조 2천억 에너지센터 건설사업을 유치했다. 기업투자 유치와 더불어 전통적인 건설과 토목사업도 진행해 나가도록 해 현금이 지역에 돌도록 할 계획이다.-현재 가장 시급한 현안은△대구·경북 통합신공항 이전 문제라고 생각한다. 통합신공항이 당초 예정부지로 들어온다면 구미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에 속히 이 문제가 원할하게 해결되길 희망한다. 통합신공항은 사실 구미의 가장 큰 현안이라고 할 수 있는 5공단 분양 문제와도 직결돼 있다. 통합신공항 문제가 속히 해결이 된다면 그로 인한 여러 복합적인 교통편의와 인센티브 등으로 기업유치가 수월할 것이다. 또한 통합신공항 문제가 해결된 후에는 본격적으로 구미시와 군위군의 합병문제를 논의해 볼 계획이다. 통합신공항 이전 문제가 논의되기 전 군위군수를 만났을 당시 공항이전 문제가 결정 된 후 논의하기로 했었다. 만약 통합신공항이 결정되고 구미와 군위의 통합이 본격적으로 논의가 된다면 아직 계획이긴 하지만 6공단 설립도 추진할 것이다. 6공단은 현 군위지역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시민들과의 소통은 어떻게△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내가 구미시장을 되고자 했던 이유가 바로 구미시민이었다. 그만큼 시민들과의 소통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지난 1일 ‘온택트 시민공감 정책토크’를 온라인으로 진행했다. 온택트는 비대면을 일컫는 ‘언택트(Untact)’에 온라인을 통한 외부와의 ‘연결(On)’을 더한 개념으로, 온라인을 통해 대면하는 방식을 뜻한다.경북 최초로 실시간 방송을 통해 진행된 이날 행사는 시민들의 댓글, 사전질문에 본인이 즉문즉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400여명의 시민들이 참여할 정도로 큰 관심을 받았다. 시민들과 소통하면서 무엇을 원하는지, 부족한게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 실생활에서 꼭 필요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고, 앞으로 개선해 나갈 계획이다. 지난 2년간의 시정 운영에 대해 개인적으로 반성할 수 있는 계기도 됐다.앞으로도 시민들과 소통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을 찾아 실천해 나갈 것임을 약속한다.-구미시장으로서 가장 힘들었던 점과 앞으로의 계획은△시장으로서 힘든 점은 너무 많아 다 이야기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웃음)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든점이라면 구미시의 재정 문제을 꼽을 수 있다. 그동안 구미시는 재정자립도가 높다는 이유로 교부세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본인이 처음 시장으로 취임한 2년 전 구미시의 교부세는 500억원이 되지 못했다. 지금은 1천억원까지 끌어 올렸지만, 만족할 상황이 못된다.또 구미시는 돈이 많은 지자체도 아니다. 값어치가 나가는 시유지가 없는 실정이다. 요지에 시유지가 있어야 정부의 주요 공모사업들을 가져 오기가 수월한데, 구미시는 어떻게 된 것인지 쓸만한 시유지가 거의 없다. 시장이 되고 나서 이런 사실에 놀랐고 실망스러웠다. 대한민국의 최고의 산업도시라고 자부하는 구미시의 현실이 너무 참혹했다. 그렇다고 불평만하고 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정부의 돈을 많이 받아오는 방법밖에 없었고, 앞으로도 그렇다. 지금은 정부가 그냥 돈을 주지 않는다. 공모를 통해 사업을 가져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미에 대한 대내외적인 평가를 잘 받아야한다. 지속적인 발전가능성이 있는 도시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남은 2년동안 구미의 성격을 다양화 시키는데 총력을 모을 계획이다. 도시의 다양성이 기업의 유연화로 이어져 인구 50만 시대를 열 수 있도록 하겠다./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20-07-05

시내 한복판 담장 너머 거대한 능 수십 기… 역사를 품다

“벚꽃이 흐드러졌을 때 여기 못 와보셨죠? 아이고, 그때 오셔야 했는데…. 올해는 나라 전체가 바이러스로 난리가 나서 어쩔 수 없었겠지만, 내년에 꼭 한 번 다시 오세요. 아마, 풍경에 깜짝 놀라실 겁니다.”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대릉원 돌담길로 가는 5분 남짓의 짧은 시간. 나이 지긋한 택시기사 아저씨의 자랑은 끝없이 이어졌다. 이런 게 태어나고 자란 지역에 대한 자부심일까? 웃음 섞인 그의 이야기가 듣기 좋았다.난분분 춤추는 벚꽃 잎으로 환히 불 밝히는 봄날의 대릉원 돌담길은 이미 ‘한국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풍광’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다른 계절의 아름다움이 그것만 못할까. 그렇지 않았다.장마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일기 예보에 우산을 챙겨 들고 나선 길. 다행히 굵은 빗방울과 만나지는 않았다.대릉원 후문에서 시작돼 500m쯤을 이어지는 돌담길. 여름날의 대릉원도 봄의 대릉원 못지않았다. 여행자의 취향에 따라선 오히려 인적 드문 길의 호젓함이 더 좋아 보일 수도 있을 듯했다.‘경주를 경주답게 해주는 최고의 유적’이라 할 고분(古墳) 스물세 기가 높낮이를 달리하며 진기한 풍광을 만드는 대릉원. 그 정취를 만끽하며 걸을 수 있는 대릉원 돌담길.천마총과 황남대총, 미추왕릉은 물론, 철마다 피어나는 갖가지 꽃들이 어우러져 최고의 포토 존을 만들어내는 이곳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서라벌 최고 관광지’ 중 하나다.벚꽃, 목련, 백일홍이 그 자태를 뽐낸 후에는 울긋불긋 물든 단풍이 여행자를 유혹하고, 날씨가 추워져 눈이 내릴 때면 설경(雪景) 또한 그저 그만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매력이 각기 다른 ‘사계절 관광지’라는 말.일상을 벗어난 여유로운 오후. 느리게, 아주 느리게 대릉원 돌담길을 걸었다. 혼자였지만 외롭지 않았다. 가끔씩 담 너머로 수줍게 고개를 내미는 고분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담벼락에 새겨진 여러 편의 시(詩)를 읽으며,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벚나무 수백 그루와 동행했기 때문이다.◆낭만 넘치는 돌담길을 지나 대릉원 입구로대릉원 후문에서 시작되는 돌담길을 따라 느긋하게 10여 분을 걸으면 주차장에 인접한 정문이 나타난다. 입장권을 판매하는 매표소도 있다. 이쯤에서 대릉원이 어떤 곳인지 알아봐야 할 것 같다. 궁금증 해소를 위해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신라고분발굴조사단 심현철의 논문 ‘경주분지의 고지형과 대릉원 일원 신라 고분의 입지’ 도입부를 인용한다.“신라의 수도였던 경주 지역에는 수백 년 동안 무수히 많은 고분들이 축조되었다. 이 중 신라의 최고 지배계층인 왕과 왕족, 귀족들의 무덤은 대단위 토목공사를 통해 완성된 거대한 토목구조물로서 현재까지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대릉원 일원의 고분군에 대한 조사를 통해 밝혀진 사실은 이 일대에 조영된 고분의 주 묘제가 적석목곽묘(신라 특유의 양식으로 지하에 구덩이를 파거나 지상에 목곽을 짜 놓고, 사람 머리 크기의 자갈을 덮은 후 그 위에 흙을 입혀 다진 무덤)라는 것과 일부 석실묘, 그리고 그 하부와 주변에 목곽묘, 석곽묘 등이 축조되었다는 점이다.”시내 한복판에 작은 산처럼 거대한 봉분 수십 기가 솟아있고, 그 아래로 자전거를 탄 관광객과 시민들이 오가는 모습은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경주를 방문한 외국인들이 놀라며 감탄사를 터뜨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망설이지 않고 사적 제512호인 대릉원 안으로 들어섰다. 대릉원이란 이름은 ‘미추 이사금을 대릉에 장사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지었다고 한다.아주 오래 전부터 서라벌의 역사를 지켜봤을 나이 많은 나무들 사이를 걸으며 황남대총의 웅장함과 거기서 미추왕릉으로 가는 흙길에서 풍겨오는 초여름 향기를 즐겼다.역사학자들에 의하면 대릉원이 위치한 곳은 1천500여 년 전에도 지금과 같은 묘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천년 역사의 아득한 저편을 떠올리며 걷는 연인 몇 쌍의 표정이 밝고도 진지했다.대릉원 일대의 유택들은 문자화된 기록(비석 등)이 없어 조성된 시기를 정확하게 알지는 못한다. 다만 출토된 유물들로 미루어 볼 때 대략 서기 4~6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천마총, 고대 고분의 내부를 직접 보는 경험학업을 마친 후 20년 이상 경주에서 신라의 역사와 유적을 연구해온 한 선배가 “대릉원에 갔다면 천마총을 빼놓으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경주시 역시 대릉원 관광의 노하우를 아래와 같이 알려주고 있다.“12만6천500㎡의 대릉원은 그 규모가 작지 않다. 그중 5만 점이 넘는 유물이 나온 2개의 고분이 쌍봉낙타 등처럼 남북으로 이어진 황남대총과 함께 대릉원을 대표하는 고분이 천마총이다. 옥황상제가 하늘에서 타고 다닌다는 말이 지상에 내려온 듯 상서로워 보이는 천마의 그림, 말다래에 그려져 있던 ‘천마도’가 바로 이 무덤에서 나왔다. 천마총은 내부를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무덤으로,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꼭 찾아봐야 할 유적이다.”사실 기자가 천마총을 찾은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럼에도 고대를 살았던 신라인의 흔적을 바로 눈앞에서 보는 설렘과 감흥은 여러 차례 거듭된 방문에도 온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 가슴 두근거림을 또 한 번 맛본들 어떠랴. 중학생으로 보이는 어린 여행자 세 명이 금관을 비롯한 전시물들 앞에서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들도 시간이 흐르면 역사가 그저 무심히 지나버린 세월만은 아님을 알게 될 것이 분명하다.그들이 “천마총의 주인은 누구이고, 어떤 역사적 가치와 의미가 있나요”라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들려줘야 할까?경상북도가 간행한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제20권 ‘신라의 유적과 유물’을 구해 읽어보라는 답을 들려주면 될 것 같다. 거기 이런 문장이 나온다.“천마총에선 금관 등이 출토돼 왕릉으로 인식하기도 하였으나, 규모나 여러 양상이 황남대총과 비교할 때 처지는 점에서 피장자(被葬者·무덤에 매장된 사람)를 왕에 버금가는 왕족으로 볼 수 있다. 특히 황남대총을 중앙에 두고 같은 규모의 고분인 천마총과 90호분이 좌우에 배열돼 있어 피장자가 왕의 동생 등으로 추정된다. 축조 연대는 500년(지증왕 원년) 바로 전쯤으로 판단되고 있다. 단곽식의 적석목곽묘로서 지상식으로 분류되며, 신라 적석목곽묘의 발전상 가장 늦은 단계의 특징을 나타내는 전형적 고분으로 꼽힌다.”◆서양의 묘지처럼 삶을 돌아보는 유의미한 관광지로…동양 철학자들은 삶과 죽음을 전혀 다른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삶의 소중함은 죽음을 통해 증명되는 경우가 흔하다.또한 그들은 ‘삶=빛·죽음=어둠’이란 단순한 이분법적 분리 또한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나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건 부정하기 힘든 사실.그런 이유로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죽음이란 삶의 대극(對極)이 아닌 일부’라는 문장에 설득 당해 고개 끄덕인 독자들이 적지 않다.서라벌 가운데 자리한 대릉원은 현대인의 삶과 고대인의 죽음이 교차하고, 신라 사람의 사라진 꿈과 21세기 경주시민의 비등하는 꿈이 겹치는 공간이 아닐까? 결국 산다는 것과 사라진다는 것, 이 둘 모두는 인간 내부에 똬리를 튼 아주 오래된 욕망들.이탈리아 로마와 프랑스 파리에도 대릉원처럼 ‘관광지로 역할하는 묘지’가 있다. 지하에 만들어진 초기 기독교 신자들의 무덤 카타콤(Catacomb)과 오노레 드 발자크, 마르셀 프루스트, 에디트 피아프, 짐 모리슨 등 다수의 예술가가 묻힌 공동묘지 페르 라셰즈(Pere Lachaise)가 그렇다.1년이면 수백만 명의 여행자들이 찾는다는 카타콤과 페르 라셰즈. 이 사실을 놓고 보면 서양인들 역시 동양인과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죽음 곁에서 자신의 삶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새삼 떠올리는 경우가 많은 모양이다.해 질 무렵. 대릉원 천마총과 황남대총 위로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15세기 전 죽은 그 옛날 신라인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당신은 짧은 삶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를 묻고 있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 이용선기자

2020-07-02

“현장 소통·공감 행정으로 역동적인 민생 청도 건설”

밝은 미래 역동적인 민생 청도를 슬로건으로 변화와 혁신의 군정을 펼치는 이승율 청도군수가 지난 1일 취임 2주년을 맞았다.이 군수는 지난 2년 동안 5만 군민과 함께 발로 뛰며 현장의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적극적인 공감행정 추진과 더불어 군민의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열정적인 리더십으로 뚝심 있는 군정을 펼쳤다.청도읍 도시재생 뉴딜사업 선정과 아이쿱 영남권 자연드림파크 유치 투자협약 체결, 농축산물 가격안정 기금과 청도 인재육성장학금 및 노인복지기금 조성 등 군민 생활의 안정과 지역의 미래 발전을 위한 튼튼한 기반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지난 2년을 돌아보면 감회가 새로울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지난해 7월 개최한 100인 토론회다. 지역이 변하고 살려면 공무원부터 변해야 한다는 각오로 군민과 함께 청도의 미래를 설계한 소통의 장이었다.그 결과 지난해 중앙부처와 경북도 등이 주관하는 각종 평가에서 역대 최대인 40개의 기관상 수상과 동시에 상 사업비 3억4천만원, 시상금 5천300만원을 확보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다.특히 올해 정부의 새마을운동 50주년 기념행사에 초청돼 환경 분야 최고상인 대한민국 환경대상을 받은 것은 새마을운동 발상지로서의 위상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또 신규 사업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해 지난해 공모사업으로 627억원의 사업비를 확보하고 올해에도 18건의 공모사업으로 92억원의 사업비를 확보했다.-하반기 청도 군정은 어떻게 추진되나.△청도군의 군정은 현장에서 답을 찾는 것이다.현장에 가서 직접 보고 들은 이후 싸울 방책을 정한다는 ‘문견이정(聞見而定)’의 자세로 소통행정과 공감행정으로 역동적인 민생 청도를 건설하겠다. 이를 위해 청정 도시와 부자 농촌, 지역경제 활성화, 살기 좋은 지역, 영남권 경제 거점화, 청도정신 계승 등을 추진할 것이다.- 청정도시 보존과 지역경제 활성화 대책은.지역에서 뜻하지 않은 코로나19가 발생해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청도의 자랑은 청정지역이다. 병원에 입원했던 환자 129명은 5월 21일 전원 완치됐고 3월 14일 이후 현재까지 확진자가 없는 청정지역으로 지켜가고 있다.청정지역을 활용한 관광산업 활성화를 위해 휴업했던 관광시설들을 차례로 개장하고 SNS 홍보단 운영과 관광명소 소개, 다양한 관광 상품 개발과 단체 관광객에 대한 인센티브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도시재생과 도로정비도 청정 청도를 구축하는 데 한몫할 것이다.시가지 전선지중화 사업, 청도삼거리~청도교 4차로 확장, 도시재생 뉴딜사업, 공공임대주택 건설과 지역 생활 인프라 정비 등은 지역에 활력을 불어 넣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적극적으로 창출할 것이다.아이쿱 생협과 투자협약을 체결한 영남권 자연드림파크는 800명 이상의 일자리를 창출할 것으로 기대되고 농촌 신활력플러스사업, 수제맥주교육센터 건립 등 농촌의 유·무형 자원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발전시켜 나갈 예정이다.전통시장을 활성화하고 중소기업·소상공인 특례보증 지원 강화 및 청도사랑상품권 상시 할인판매를 통해 지역자금의 역외유출을 방지하고 지역 내 자금 순환을 촉진할 것이다.-청도는 농촌도시다. 농가소득을 위한 복안은.농특산물의 가격 폭락에 대비해 2023년까지 100억원의 농축산물 가격 안정기금을 조성하고 친환경 농업 육성 및 6차산업 활성화, 우수 농특산물 캐나다 등 해외수출 판로개척, 농산물 유통 다변화 추진 등 새로운 소득 창출과 판로 개척은 계속된다.이와 더불어 후계 농업경영인과 청년 농업인, 귀농·귀촌 농가 지원 등 미래농업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농작물 재해보험 가입, 농민사관학교와 농촌인력지원센터 운영 등 농업이 지역사회에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청도는 살기 좋은 곳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더 나은 고장을 만들 방안은.△살기 좋은 곳은 정주 여건도 중요하지만 2세를 위한 교육여건, 문화시설도 중요하다.쾌적한 정주 여건을 위해 전원주택단지 조성 지원 조례 제정과 귀농·귀촌 전담부서를 신설했고, 2세를 위해서는 친환경 안심놀이마당 조성과 책 꾸러미 사업, 찾아가는 가족문화공연, 가족캠프, 심리상담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보건소 내 외래산부인과 운영, 산모·신생아 건강관리사 지원, 신생아 및 입양 영아 건강보험료 지원, 출산장려금 확대, 가족센터 건립, 공동육아나눔터, 민간어린이집 국공립 전환·운영, 학교급식 지원 등 다양한 출산장려 정책으로 젊은 층을 배려하고 있다.또 30억원의 노인복지기금을 조성하고 노인 맞춤형 돌봄 서비스, 치매 안심센터 및 정신건강복지센터 등으로 맞춤형 치매 통합관리서비스를 제공하고 복지 사각지대가 없는 사회안전망 구축에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청도는 유·무형의 관광자원이 많다. 활용방안은.△관광자원은 지역을 살릴 수 있는 무한의 먹거리다.경쟁력 있는 문화·관광자원 콘텐츠 발굴로 관광객 유치를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이미 조성된 명소들을 관광벨트화로 시너지 효과를 높일 것인데 올해 개장하는 청도루지는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인근의 소싸움경기장과 용암온천, 프로방스, 와인터널 등과의 상호보완 효과가 기대된다.2021년 개장되는 청도자연휴양림은 비슬산 생태탐방로와 함께 치유와 힐링의 새로운 관광자원이 될 것이고, 유교 전통문화의 계승·발전을 위한 유림회관 리모델링과 지역문화 활성화를 위한 청도복합문화센터건립도 지속적으로 추진할 예정이다.청도반시축제와 세계코미디아트페스티벌, 청도읍성예술제, 미스경북선발대회 등 다양한 축제도 열어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제공할 예정이다.삼국통일을 이룩한 화랑정신과 조국 근대화의 한 축을 담당한 새마을운동의 발상지인 지역의 정신을 계승하고 새마을 환경축제와 새마을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해 청도의 위상을 높일 계획이다.베트남 토마을과 푸닌마을에 기초생활 인프라를 구축하고 인적 역량강화, 소득증대사업을 추진하는 등 새마을정신을 해외에 지속적으로 전파해 지역의 화랑정신과 새마을 정신을 배우고자 많은 사람이 찾도록 할 것이다.-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민선 7기 전반기는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군민의 새로운 수요에 부응하고 청도의 미래와 비전을 구체화하는 시기였다면 후반기는 지난 2년간의 군정 추진을 바탕으로 5만 군민 모두가 살맛 나는 행복한 청도를 만드는 시기가 될 것이다.이러한 성과를 얻으려면 모두가 함께할 때 가능하다. 군민이 합심해 코로나19 사태를 이겨낸 것처럼 새마을정신 아래 하나로 뭉쳐 후손에게 자랑스러운 청도를 물려주자./심한식기자 shs1127@kbmaeil.com

2020-07-02

“새로운 관광흐름 선도, 청정 관광지로 떠오르는 청송군”

민선7기 임기 절반이 지났다. 청송군은 지난 2년 ‘군민과 함께하는 행복 청송’이란 군정 비전 아래 ‘미래를 열어가는 희망 농촌, 함께여서 따뜻한 나눔 복지, 문화로 꽃피우는 지역 경제’라는 슬로건을 실현시키고자 숨 가쁘게 달려왔다. 그 결과 민선7기 공약사항 평가 2년 연속 최우수(SA) 등급 달성과 대한민국 대표브랜드 대상 2관왕이라는 눈에 띄는 성과물을 거둬들일 수 있었다.특히 8년 연속 대상을 받은 청송사과에 이어 산소카페 청송군브랜드도 첫 대상을 수상함으로써 그 위상을 드높였다. 이에 힘입어 청송사과축제가 대한민국 대표축제로 선정되면서 전국 농어촌자치단체 평가 종합2위, 주민만족도 9위(경북 2위) 등의 쾌거를 이룩하며 대외적인 각종 평가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인정받았다.윤경희 청송군수는 취임 당시 지역발전과 군민 삶의 질 향상을 위해 5대 분야 65개 사업을 공약으로 내걸었다.주요 사업으로 농산물택배비 지원, 천원목욕탕 사업, 키즈카페·정신건강복지센터·골프장 조성, 청송사과축제 도약, 청송사랑화폐 유통 등이 있는데, 이를 중심으로 민선 7기 전반기의 성과를 되돌아봄과 동시에 남은 임기 중의 비전을 살펴보고자 한다.□ 농업의 미래를 제시하는 청송청송군은 농업군의 롤 모델 역할을 자처해 농업환경 전반을 대폭 개선했다.지역농산물 소비 촉진과 유통망 확대, 농가소득 증가를 위한 농산물 택배비를 지원했고 전국 최고 수준의 농민수당을 지급해 농업경영 안정을 도모했다.또한 명품청송사과의 재도약과 사과산업 발전을 위한 청송사과유통센터 운영 체제를 변경하고 농산물 공판장을 개장, 시장 선도적인 브랜드 ‘황금진’을 개발해 농업인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다.다양한 홍보 마케팅 활동과 유통시설의 개선 및 확충, 지속적인 브랜드 관리를 통해 농업의 미래 청사진을 제시했다.□ 생로병사(生老病死) 비밀 병기 청송“육아비용은 사치, 아이 키우기 좋은 고장이다.”이는 청송에서 아이들을 양육하는 엄마들의 즐거운 외침이다. 출산장려금의 인상 지급, 돌사진 촬영비 지원, 공립어린이집 확충 등의 정책을 편 결과다.인프라적 측면에서도 최근 진보면에 전국 최고 시설을 갖춘 키즈카페를 조성했다. 우수 인재들에게 인재육성장학회에 조성된 장학금을, 중고등학교 신입생들에게 교복구입비도 지원하고 있다.지역의 70세 이상 어르신들이라면 누구나 천원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천원목욕탕은 건강증인사업의 일환이며 노인일자리를 대폭 증원해 노년의 활기찬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치매안심센터와 정신건강복지센터의 건립 또한 같은 선상에서 이루어진 사업이다.□ 새로운 여행 트렌드의 중심 ‘산소카페 청송군’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대한민국 대표축제에 지정된 청송사과축제는 단일 농산물 축제로는 독보적이다.취임 전부터 청송에 꼭 들어맞는 브랜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윤 군수는 맑은 공기 청정쉼터의 의미인 산소카페 청송군으로 네이밍을 짓고 청송 고유의 색깔을 입혔다.또 “축제란 지역민이 먼저 흥을 돋우고 어우러져야 타 지역민도 함께 할 수 있다”는 소신으로 축제 장소를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청송읍의 용전천변으로 옮겼다.축제기간도 연장하고 축제장 주변 경관 정비와 편의시설을 확충하고 ‘산소카페 청송군, 황금사과의 유혹’이란 주제로 성공적 결과를 이끌어내 대한민국 대표축제로 자리매김하게 됐다.더불어 수려한 자연자원을 활용한 산림레포츠 휴양단지 조성사업과 산소카페 청송정원 및 핵심 공약사업이었던 골프장 설치를 위한 민자 유치를 이뤄내 체류형 관광지를 조성하는데 한발 더 나아갈 수 있게 됐다.□ 군민 숨통을 틔워주는 경제정책청송군은 올해 260억 규모의 청송사랑화폐를 발행해 농민수당, 농산물택배비 등을 지원하고 있다.청송사랑화폐는 안정적으로 정착돼 실효성을 거둠으로써 지역화폐의 성공사례로 손꼽히고 있다.이는 코로나19의 다양한 지원금으로도 활용돼 소상공인과 소비자가 상생하는 지역경제 활성화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냈다.이밖에도 소상공인 특례보증 및 이차보전금 지원 등 지역경제의 뿌리인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을 위한 다채로운 정책을 추진해 지역경제에 온기를 불어 넣었다.또 수많은 전국단위 엘리트 체육대회를 지속적으로 유치한 것도 지역경제 활력에 한몫을 했다.5년간 재유치한 청송아이스클라이밍월드컵은 동계올림픽 정식종목 선정에 힘을 보태고 있어 향후 개최지로서 누리게 될 파급효과도 기대된다.□ 안전하고 쾌적한 청송2만6천 군민들의 안전보장을 위한 군민안전보험공제에 가입해 불의의 사고와 재난으로부터 대처할 수 있는 경로를 마련했다.내년 준공을 앞둔 청송소방서는 군민들뿐 아니라 540만 관광객들의 안전까지 책임질 수 있게 됐다.청송군지방상수도 현대화 사업비 250억을 확보해서도 군민들의 물 복지를 실현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청송읍농촌중심지활성화사업 180억을 확보해 중심 시가지를 특화 조성, 경쟁력을 갖춘 농촌 발전 거점으로 육성할수 있게 됐다.□ 신뢰를 바탕으로 한 따뜻한 소통청송군은 지역 주민들의 뜻에 따라 단순 방위 개념으로 명명된 청송도호부의 동쪽 ‘부동면’을 ‘주왕산면’으로 변경해 지역명칭이 청송발전의 브랜드로 작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고 공약사업 군민배심원단을 꾸려 군민들에게 한 약속을 함께 이루어 나가고 있다.비효율적인 마을방송을 탈피하기 위해선 휴대전화를 통한 스마트마을방송 시스템을 도입해 군민과의 원활한 소통을 이끌어내고 있다. 이는 이번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해 예방수칙을 비롯한 정보들을 빠르고 정확하게 전파해 지역 유입 확산을 차단하는데 기여했다.청송군 최초 민간위주 지역발전협의회를 구성해 집행부의 독단적인 의사결정을 지양하고 주민들의 눈높이에 맞추려는 노력도 기울이고 있다.□ 선제적인 코로나19 대응청송군은 코로나19의 즉각 비상체계를 갖추고 선제적인 대응으로 감염 전파를 최소화해 지역 내 전파자가 한명도 발생하지 않았다.치밀한 초동방역과 빈틈없는 방역시스템으로 바이러스 확산 방지를 철저히 한 결과이다.65세 이상 노령층과 취약계층에게 마스크를 제공하고 시장사용료 감면, 임대농기계 수수료 감면, 지방세 감면 등의 정책은 군민의 일상에 숨통을 뚫어 주었다.청송군 소상공인 특별생계지원비, 정부 긴급재난지원금을 신속히 지원했고, 청송사랑화폐 특별할인 등으로 주민이 체감할 수 있는 빠른 경기회복을 위해 힘쓰고 있다.□ 건강의 도시로, 내일을 말하다!윤경희 청송군수는 “청정과 사과의 고장, 우리 청송이 이제 깨끗한 이미지를 넘어 건강 도시의 바로미터가 될 수 있도록 한층 업그레이드 할 것”이라며 “인구 소멸지수가 전국에서 가장 높은 지역이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역동적으로 살아 숨 쉬는 고장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꼭 보여주겠다”고 의지를 밝혔다.윤 군수는 이어 “지난 2년간 눈부신 성장을 거듭해왔고 과분할 정도로 많은 주목과 칭찬도 받았다”며 “현장에 문제가 있고 길이 있고 답이 있다. 앞으로도 발로 뛰는 소통행정을 통해 일신우일신 하는 청송의 담대한 미래를 그려나갈 것”이라고 당찬 각오를 덧붙였다./김종철기자 kjc2476@kbmaeil.com

2020-07-01

울릉도의 소녀, 대구서 의료 예술의 장을 펼치다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가면 친구가 두엇 보이지 않았다. 울릉도의 거센 파도에 배가 제때 뜨지 않아 패혈증이나 맹장염으로 죽은 친구들이었다. 파도가 치는 날이면 울릉도는 무엇이나 속수무책이었다. 목숨은 늘 이 파도에 저당 잡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서 살아남는 방법은 아프지 않는 것뿐이었다. 후에 대학을 결정할 때 박언휘(박언휘 종합내과 원장)는 주저 없이 의과대학을 선택했다. 어릴 때 죽어갔던 친구들과 이웃들을 보면서 박 원장이 생각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박 원장의 어머니는 법대에 가기를 원했지만 옳은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이라도 이기면 유능한 변호사가 되는 것이 싫었다. 옳지 않은 것을 뻔히 알면서도 변호해야 하는 것이 적성에 맞지 않았다. 당시 박 원장이 다녔던 대구여고는 경북대병원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어서 의사와 병원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머리가 좋았던 그녀에게 의사의 길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박 원장이 어릴 적에 읽었던 위인전 중에 퀴리부인이라는 책이 있었다. 그걸 보면서 자신도 과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자연과학을 해서는 세상이 행복해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박 원장은 슈바이처 같은 의사가 되어 사람들을 죽음에서 구하고 싶었다. 환경이 열악했던 울릉도를 생각하면 당연한 결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늘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자랐다. 그런 박 원장에게 봉사란 무엇인지 물어보았다.“첫 번째는 아픈 사람을 치료해 주는 일이죠. 나는 내 직업이 봉사라고 생각합니다. 아픈 환자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고 통증에서 구해주는 일보다 더 큰 봉사는 없다고 생각하죠. 전 병원을 일요일에도 열어둡니다. 일요일이라고 아픈 사람이 없는 건 아니니까요. 그 다음이 주변 사람에게 잘해주는 것입니다. 우리 병원의 간호사들은 거의 장기근속을 해요. 17년씩이나 근무한 사람도 있어요. 주변 사람들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해지죠. 세 번째는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청소년들을 돌보는 것이에요. 나도 어릴 땐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런 청소년들에게 멘토 역할을 해주고 싶어요.”박 원장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정직이다. 미국에서 10년 동안 생활하면서 배운 것이다. 그런데 의사가 정직을 강조하니 이상해 보였다. 이미 그 직업만으로 충분히 그들은 정직한 사람들이지 않은가.“그렇지 않아요. 같은 병에 쓰는 약이 많게는 수십 종이나 되는데 나는 가장 효과가 좋은 약을 쓰려고 하죠. 같은 병에 쓰는 약은 성분이 모두 같다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다르죠. 환자들에게 좋은 약을 쓰고, 꼭 해야만 하는 치료를 하는 것이 의사의 정직입니다. 의사가 정직하지 않으면 환자는 좋은 약을 두고도 쓰지 못하죠. 다른 직업의 정직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나는 주사 약이나 일반 약이나 가장 좋은 것을 쓰려고 합니다. 그게 내가 미국에서 배운 정직입니다.”박 원장의 말을 듣고 나니 새삼 의사라는 직업이 새롭게 보였다. 사람의 아픈 몸을 치료하는 의사가 세상에서 가장 정직해야 할 직업 같았다.그녀는 지난 13년 동안 무려 15억 원어치의 백신을 요양원이나 독거노인에게 제공해 왔다. 노인들은 폐렴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은데 폐렴백신이나 독감백신은 꼭 맞아야 하는 백신 중 하나다. 그녀는 그 일로 2018년 대구시민대상을 수상했다. 그 봉사를 어쩌다 한 해 쉬게 되었는데 그해 노인들의 사망률이 더 높아지는 걸 보면서 그녀는 다시 봉사를 시작했다. 백신은 종류가 많지만 박 원장은 평생에 한 번만 맞으면 되는 폐렴백신을 제공하고 독감백신도 최고로 좋은 것을 제공했다. 정직한 의사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의사는 정직함도 중요하지만 봉사 정신도 중요하다고 그녀는 강조했다. 봉사란 나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야 이루어진다. 의사는 늘 타인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어야 했다.그렇게 의사 생활을 하면서 박 원장은 점자 약봉지를 개발해 특허 신청을 해놓았다. 시각장애인들이 약을 바꿔먹는 경우가 많이 생기고 부작용이 심각해지면서 시각장애인 환자, 컴퓨터 전문가와 머리를 맞대고 점자 약봉지 개발에 성공했다. 이제 정부 지원을 받아 각 지역마다 공급되면 시각장애인들이 약을 잘못 먹어 죽음에까지 이르는 일이 없어질 것이라고 본다.박 원장은 ‘돈 나오는 곳은 피눈물 나는 곳’이라는 어머니의 말을 늘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 몇 사람을 인터뷰하면서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들은 말은 돈을 많이 벌어야 봉사도 많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버는 만큼 타인을 위해 봉사하고 있었다.지금도 물만 보면 바다를 생각하고 고향을 떠올린다는 박 원장에게 울릉도는 꿈이 있던 섬이면서 눈물 나는 섬이었다. 어떤 때는 울릉도 해안까지 온 배가 파도 때문에 접안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경우도 있었고, 열두 시간이나 배를 타고 가다가 다시 돌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울릉도는 아이를 낳으려면 육지로 나와야 하는 서글픈 섬이기도 했다. 그 섬은 박 원장에게 마음의 정처였지만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배가 뜨지 못하면 내일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박 원장은 섬에 잘 가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자신도 모르게 몸에 스민 섬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내과 의사인 그녀는 의학 이외에도 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시 전문 잡지 ‘시인시대’ 발행인으로 있는 그녀는 문학이 치료의 또 다른 방법이라고 말했다.“엄마가 돌아가시고 6개월 정도 우울증이 왔었어요. 그때 글을 썼죠. 그런데 희한하게도 문학이 치유가 되더라고요. 의사의 존재 이유는 환자의 치료입니다. 그런데 환자를 치료하는 방법이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문학으로 치유하는 것도 치료죠. 나는 치유의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환자를 치료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한의대에서 10년 정도 강의도 했어요. 한의학이나 문학이나 양방이나 어떤 방법으로든지 환자에게 가장 적절한 치료 방법을 찾으려고 해요.”문학의 치유를 경험하면서 박 원장은 전국의사시인협회를 창립했다. 그리고 ‘시인시대’를 발행함으로써 시인들에게 발표의 장도 마련해 주고 싶었다.박 원장은 의학의 기본은 예술이라고 했다. 예술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는데 고통에서의 해방은 보이지 않는 예술이라는 것이다. 의사의 긍정적인 말과 사랑이 예술의 힘이라고 본다는 것. 놀라운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환자를 대하는지 그대로 느껴지는 부분이었다.박 원장이 마음의 고향 울릉도를 통해 배운 것은 거센 파도를 타는 법이다. 파도를 이기려면 파도를 절대 거스르지 않고 순응해야 한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파도와 싸우며 파도 타는 법을 익힌 박 원장은 파도에서 얻은 지혜로 어떤 일이라도 극복해 낼 수 있는 힘이 생겼다. 그 힘은 정직과 실력, 사랑, 기도의 힘이다. 박 원장의 입에서 자주 흘러나오던 정직과 봉사, 사랑이라는 말이 헤어지고 나서도 오래 머리에 남았다. 박 원장은 현재 ‘슈바이처 나눔 봉사회’ 이사장을 맡아 의료봉사를 펼치는 한편 대구 봉사단체 참길회에서 소록도 봉사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으며,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아너소사이어티 54호 회원으로 가입했다. 가입 후 자신이 미처 몰랐던 분야의 봉사를 새롭게 할 수 있어 즐겁다고 했다. 대구의 ‘얼굴 없는 천사’라는 그녀의 별칭이 참으로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울릉도의 소녀가 대구에서 봉사의 마당을 펼친 것이다.  /대담정리 천영애

2020-07-01

탈린에 관하여… 지식과 정보를 얻는 다양한 방법들

◇ 구글맵 안내를 무시한 걸 후회하다로시 데려와서 일본 일주를 다녀온 지가 4년이 지났다. 매년 하고 싶은 일 세 가지를 정하고 그것만은 좌고우면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도 7년이 지났다. 이제 돌아가면 올해 마지막 버킷 리스트(책방 이사)를 마무리해야 한다. 불혹이 지나며 그 이전보다 시간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는 걸 실감한다.세계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진 집단은 아마 구글이 아닐까. 숙소에서 나와 시내로 들어가려고 구글맵을 열고 경로를 검색하니 빠른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알려 준다. 무시하고 어제 왔던 빠른 길로 나가니 경찰이 통제 중이다. 구글맵이 안내를 믿어야 했다.인터넷만 연결되어 있으면 실시간 교통 정보를 반영해 길을 안내한다. 결국 처음 안내한 길로 돌아왔다. 안드로이드폰과 구글을 사용하는 모든 사용자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내가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들도 GPS나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으면 어디서 무엇을 찍었는지 기록이 남는다.얼마 전 재미삼아 구글 지역 정보에 올렸던 사진들이 조회수가 25,000회가 넘었다는 메일을 받았다. 그들은 이렇게 개인이 올린 정보를 바탕으로 더 몸집을 불리고 이익을 취할 것이다. ‘빅데이터’를 분석하는 능력이야말로 기업의 경쟁력이다.구글은 어느 기업도 넘보지 못할 정보력을 이미 갖추었고 데이터를 분석하는 기술에 엄청난 자본을 쏟아 붓고 있으니 구글을 뛰어넘으려면 새로운 ‘혁명’이 필요할 수도.2013년 7개월 동안 배낭여행을 떠날 때 가장 먼저 챙겼던 것은 ‘론니 플래닛’이었다. 고작 6년이 지났을 뿐인데 그 사이 정보를 얻는 방법은 책에서 인터넷으로 급속히 바뀌었다. 인터넷을 주로 사용하는 도구도 컴퓨터에서 스마트폰으로 이동했고. 책의 가치가 변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해졌고 ‘실시간’ 나의 행동을 결정하거나 바로 쓰고 버리는(?) 가벼운 정보를 책으로 얻는 시대는 저물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책은 더는 의심할 필요가 없는 고전을 재생산하고 영속해야 하는 지식만 담는, 책이 만들어진 시대 본연의 역할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소유욕을 충족시키는 물건의 역할도 포함해야겠다. 어느 시대라도 수집욕을 떨치지 못하는 장서가는 존재할 테니. 이런 시대에 헌책방을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고, 또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다.◇ 헬싱키에서 탈린행 페리를 타다헬싱키에서 탈린까지는 페리로 약 2시간 30분 거리다.(바이킹라인 오토바이 선적료 포함 편도 약 5만원) 페리가 하루에도 여러 번 왕복하고 그만큼 사람도 차도 물건들도 건너가고 온다. 스톡홀름에서 헬싱키로 올 때보다 오토바이 여행자들이 많았다. 배 안으로 들어가 주차하고 고정줄로 묶는 작업을 마쳐야 객실로 올라갈 수 있다. 제주도나 일본으로 오토바이를 실어갈 때는 직원들이 대신했었다. 어제 한 번 해봤다고 다른 라이더를 도와주는 여유까지 부렸다.탈린은 이웃 리가와 비슷한 분위기다. 오자마자 부츠를 볕에 말리고 빨래부터 했다. 말뫼에서 이곳까지 거의 달리기만 하고 이틀 비를 맞았더니 꼬질꼬질하기가 상거지나 마찬가지. 탈린에선 여유롭게 며칠 지내다 가기로. 여기서 상트 페테르부르크까진 약 350킬로미터. 이제 왔던 길을 돌아갈 일만 남았다. 근처 마트에 가서 장을 봤다. 500밀리리터 생수를 2유로를 주고 사마셔야 했던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선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물값 뿐만 아니라 기름값도 방값도 뭐든 다 비싸니 나 같은 여행자에겐 아주 가혹한(?) 곳이었다.탈린에 와선 마음껏 쇼핑을 즐겼다. 그래봐야 이곳에 있는 동안 먹을 식료품만 잔뜩 샀다.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곤 숙소에서 끼니를 대부분 해결한다. 탈린의 체감 물가는 북유럽 국가의 1/3 수준. 우유, 식빵, 뮤즐리, 잼, 소시지, 토마토, 마늘, 고추절임, 치즈, 계란, 빨랫비누 등등을 샀는데 21유로가 나왔다. 3일 동안 충분히 먹을 양이다. 전자레인지에 데운 소시지에 P선생님이 주신 쌈장을 발라 먹었는데 먹을 만했다. 고추절임도 맵싸하니 괜찮았다.러시아에 들어가기 전에 로시 상태를 점검해야 했다. 체인 장력 조절하고, 에어필터를 꺼내 대충 먼지를 털어냈다. 다행히 큰 이물질은 없었다. 지난 번 바르샤바 패트롤 모터스에서 교환할 때 날벌레들이 필터에 끼어 있었다. 아마 다시 시베리아를 지나갈 때 같은 일을 겪을 듯해 공기흡입구를 아예 방충망을 구해 씌웠다. 체인과 스프라켓도 적산거리가 60,000킬로미터가 가까워 모스크바에 가서 교체해야 한다. 집에서 여기까지 달린 거리도 약 27,000킬로미터. 사용할 수 있는 거의 한계까지 온 듯. 그래도 자주 체인 오일을 바른 것이 효과가 있었다. 사고만 없었다면 좋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하루 자고 나니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숙소에서 체크아웃했다. 지금 묵는 곳은 주인이 자리를 지키는 곳이 아니고 청소하고 체크인 시간에만 잠시 들렀다 간다. 주차장에도 로시만 덩그러니. 아무래도 구도심에서 떨어져 있고 무료 주차장이 있는 곳이라서 차를 가진 여행자들이 주로 찾는 듯하다. 우리 집인양 부엌도 샤워실도 사용할 수 있어 좋긴 한데 이렇게 휑한 분위기는 처음이다. 대부분 복작복작한 도미토리에서 지내다 큰 집을 전세낸 듯 있으니. 어제만 해도 거의 빈방이 없었다.◇ 시대 아우르는 건축물 가득한 탈린을 걷다탈린 구도심은 지금까지 들렀던 다른 도시들과는 다르게 옛 성벽이 일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성벽 안과 밖은 풍경이 딴판이다. 구도심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성벽 밖은 지나는 사람도 별로 없이 차분하다.탈린도 리가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건물을 올리고 이곳저곳 공사 중인 곳이 많다. 탈린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니 발트해로 나갈 수 있는 전초지가 될 수 있는 지역이다 보니 북유럽 국가와 러시아 사이에서 많은 부침을 겪었고,(구도심의 높은 성벽이 그 증거겠지.)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해가 1991년이니 신생 국가나 다름없는 셈이다. 외부로 나아가기 좋은 지역은 그만큼 외침의 가능성이 있으니 좋다 나쁘다 말하기가 어렵다.탈린 거리를 걷다보면 중세부터 현대까지 모든 시대를 아우르는 건축물이 그대로 남아 있어 이채롭다. 경제가 발전할수록 관광지인 구도심을 제외하곤 빠르게 개발되고 풍경이 바뀌지 않을까. 10년 후쯤 리가나 탈린을 다시 찾을 수 있다면 확실히 비교할 수 있겠지.숙소로 돌아오다 호텔 카지노 주차장에서 몸집 큰 두 남자가 차를 세우고 운전자를 윽박지르는 장면을 봤다. 그는 도박빚이 있는 것일까. 탈린으로 오는 페리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카지노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곤 놀랐었다. 스톡홀름에서 헬싱키로 넘어오는 페리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리가에서도 시내 중심가에 많은 카지노들이 있는 걸 보고 놀라웠는데 오랜 세월 공산국가였기에 오히려 자본주의의 폐해에 쉽게 물들 수 있는 것인가, 생각했다.아침부터 비가 내려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가는 걸 하루 늦추었다. 느긋하게 하루 더 쉬어 가기로. 오늘도 나 이외 다른 손님은 없었고 짐을 최대한 줄일 생각으로 모든 음식 재료를 꺼내놓고 끼니마다 요리해 먹었다. P선생님이 주신 쌀로 마늘밥을 짓고 뜨거운 물에 쌈장을 풀어 된장국까지 만들었다. 쌈장국(?)은 의외로 먹을 만했다. 파만 있었어도. 이가 없으면 잇몸이니까 있는 걸로 뭐든 만들어 먹는다.나만의 여행 3원칙은 먹을 수 있을 때 먹고, 잘 수 있을 때 자고, 쓸 수(기록) 있을 때 쓴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나중으로 미루면 후회와 낭패를 동시에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 쓰는 건 옵션으로 치더라도 먹고 자는 건 가능할 때 무조건 1순위로 둬야 긴 여행에서 버티기 쉬운 듯하다. 오늘은 내내 숙소에서 밥만 먹고 비 구경만 했다. 내일은 최대한 아침 일찍 출발해 러시아 국경을 넘을 생각이다. 이제 이번 여행의 마지막 장으로 넘어간다.

2020-06-30

“과감한 변화·혁신으로 경북 중심도시 자리매김할 것”

김학동 예천군수가 1일 민선7기 2주년을 맞았다.군민이 예천발전의 주체이고 군민들의 하나 된 마음 없이 발전은 이루기 힘들기에 화합과 소통으로 ‘잘사는 예천’ 만들기에 똘똘 뭉쳐 군민과 함께 군정을 풀어나는 군수가 되겠다고 의지를 밝혔다.특히, ‘변화’는 피할 수 없이 맞닥뜨려야 할 과제이고 ‘변화가 없으면 발전도 없다’는 신념으로 행정수요에 맞춘 다양한 정책개발은 혁신을 바탕으로, 선택과 판단의 기준은 군민의 잣대로 군민의 만족과 행복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민선7기 후반기 힘찬 발걸음을 내딛었다.◇ 취임 2주년 성과예천군은 지난해 농촌진흥사업 우수기관, 지역의료보건계획수립 평가 최우수상, 행복한 마을만들기 콘테스트 금상, 농정업무평가 9년 연속 수상 등 38개 분야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는 등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또, 한국공공자치연구원 평가 경쟁력 혁신 1위, 지방자치단체 예산효율화부문 대상을 수상했고, 전국 공공기관 청렴도 평가에서 도내 유일하게 5년 연속 2등급을 받은 자치단체로 이름을 올려 ‘청렴의 도시’라는 명성을 대내외적으로 각인시키기도 했다.국·도비 확보에 총력을 기울인 결과 2018년 총 28건 197억원 사업비 확보, 2019년 신도시 복합커뮤니티센터 330억, 신활력플러스사업 70억, 새뜰마을사업 42억 원 등 총 39건 756억 원을 확보하는 등 열악한 재정확충에 든든한 마중물을 채웠다.괄목할 만한 것은 예천군이 ‘2022 아시아주니어육상선수권대회’ 개최지로 확정됐다는 낭보이다. 이 대회는 아시아 45개국이 22개 종목 1천500명 규모가 참가하는 대회로 전국 군 단위에서 최초로 대회를 개최하는 것으로 예천군 브랜드 가치상승 기회와 스포츠도시 위상 제고는 물론 침체된 지역 경제활성화에 큰 보탬이 될 것으로 보인다.◇ 향후 추진계획민선7기 후반기에도 지역경기 활성화에 초점을 맞추고 과감한 ‘변화’와 ‘혁신’만이 예천의 밝은 미래를 보장한다는 신념으로 역동적 군정과 변화를 희망하며 군민이 꿈꾸는 새로운 예천, 군민 행복과 지역 발전을 위한 정책을 더욱 촘촘히 챙겨 나간다.△ 코로나19 철저한 대응·지역경기 활성화 집중코로나19는 2차 대유행을 예상하고 있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고, 지역경제 살리기 또한 시기를 늦출 수 없는 절박한 상황으로 방역수칙실천 생활화, 치밀한 방역체계 유지는 물론 방역물품 비축 등 만일의 사태에 철저히 대비해 나간다.또, 코로나19로 직·간접적 피해를 입은 군민을 위한 재난지원금 및 소상공인 피해점포 지원 등 각종 지원책으로 침체된 경기회복을 위한 다양한 방법으로 경제 활력을 높일 방침이다.지역경기 회복에 초점을 맞춘 중·장기 경기활성화 대책수립을 위해 세출구조 조정과 지방채 발행은 물론 공공부문 일자리를 확대하고 적극적인 기업유치와 지역 농산물 판로개척으로 군민들의 소득증진에 힘쓴다.△ 명품 도청신도시 정주여건 개선신도시민의 편의 증진을 위해 330억이 투입되는 복합커뮤니티센터 조성을 위해 10월 첫 삽을 뜨고 부족한 체육시설 충족을 위한 테니스장, 테마 숲 조성, 다함께 돌봄센터 5개소 등 점차 확대해 나간다.공동주택 입주민간 갈등해소와 건강한 주거공동체 문화조성을 위한 공동체활성화사업을 지속 추진하고 주민들이 명품 신도시의 주체로 다양한 취미활동과 교육 등으로 활용 가능한 호명면주민자치센터를 하반기에 마련해 건전한 여가생활을 돕는다.△ 예천읍 원도심 활성화, 공영주차장 확보일방통행 구상원도심의 인구 감소와 맞물린 경기침체는 장기화 된 과제다. 과감한 변화를 시도하지 않으면 원도심 활성화는 불가능하므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지속적인 군민 설득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 소통을 통해 변화를 위한 과감한 도전을 추진한다.먼저, 공영주차장을 확보해 나간다. 만연한 불법주차로 인한 군민 불편 해소를 위해 가장 효과적인 중심가 주변 5개소를 선정해 55억 원으로 부지를 매입하고 국비 16억 원을 포함한 사업비 30억 원으로 174면의 주차장을 조성할 계획이다.또, 일방통행 교통체계 구축이다. 서본리 굴머리에서 백전리 한전앞까지 2.8㎞구간을 일방통행 교통체계로 바꾸면 310여 면의 주차장이 추가로 확보될 뿐 아니라 인도를 넓혀 보행도 편하게 되고 교통의 흐름도 원활하게 되는 1석3조의 효과로 사람중심의 도로를 만들면 보다 쾌적하고 활기찬 모습으로 바뀔 것으로 기대된다.△ 농·축산업 현대화 및 유통구조 개선, 풍요로운 부자농촌농업분야 정책에 비중을 더해가고 농업소득 증진을 위한 시설원예 분야 전략품목 현대화사업, 농산물 유통 활성화, 친환경 농업 육성 등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농가소득 증진 사업도 적극 추진한다.농산물가공센터를 건립해 지역농산물을 이용한 부가가치를 높이는 6차 산업화에 속도를 더하고 적극적인 마케팅 전략으로 판매량이 증가하고 있는 온라인쇼핑몰 ‘예천장터’ 활성화는 물론 농산물 유통 및 수출확대 등 유통구조 개선을 위한 마케팅을 펼쳐 나간다.70억 원이 투입되는 신활력플러스 사업을 본격 추진해 경쟁력 있는 특화산업인 곤충의 고부가가치 상품개발로 농가소득을 올려 부자농촌, 희망농촌을 만드는데 역점을 둔다.△ 2022년 亞주니어 육상선수권대회 준비 착착‘스포츠마케팅이 곧 지역경제 활성화의 심장’이라는 각오로 공격적 스포츠마케팅에 행정력을 결집시켜 군민 자긍심 고취와 지역경기 활성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강한 열정을 쏟은 결과 ‘2022년 U-20 아시아주니어 육상경기 선수권대회’ 개최지로 선정되는 쾌거를 거뒀다.이 대회는 아시아 45개국이 22개 종목 1천500명이 참가하는 규모로 군 단위 최초로 대회를 개최한다는 점이 고무적이며 예천군 브랜드 가치상승 기회와 스포츠도시 위상 제고에 큰 보탬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육상의 메카’로 불리는 예천은 국내 유일의 육상전용 돔 훈련장, 경사로훈련장, 모래사장 훈련장 등 동·하계 전천후 훈련이 가능한 시설을 보유해 육상대회 개최와 전지훈련으로 선수들이 찾아와 지역경기를 견인하고 있다.앞으로 국제대회개최를 위한 공설운동장 리모델링부터 국내 리허설 대회 개최, 대회준비 조직위원회 구성 등 준비에 박차를 가해 성공적 대회개최에 최선을 다할 계획이다.김학동 예천군수는 “군민들과 소통하고 화합을 바탕으로 도농이 상생하는 경북 중심도시로 자리매김을 위한 변화와 도전을 계속하겠다”면서 “군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반영하고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과 소득증대를 위해 모든 역량을 결집해 군정 추진을 가속화 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정안진기자 ajjung@kbmaeil.com

2020-06-30

수많은 사연을 안고 자연과 어우러진 한국 서원 건축의 ‘백미’

우리나라 서원 중에서 가장 낭만적인 아름다움을 던져주는 서원이 병산서원이다. 이 병산서원은 속세의 극락같이 저만큼 앞에는 병풍이 두른듯 병산이 펼쳐져 있고 그 아래 강물은 소리 없이 흐느끼며 백사장을 적시고 흘러간다. 화산(花山), 이름하여 꽃의 산에 앉은 병산서원은 크지도 작지도 않게 알맞은 규모로 당당하게 앉아있다. 많은 사연을 안고 기막힌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어 자연과 조화로운 이상적인 건축의 실체를 여실히 보여준다.#. 드라마틱한 병산서원병산서원 가는 비포장 길 입구에 들어섰다. 산허리를 끼고 도는 비포장 길은 고맙기도 하면서 아련한 옛 사연을 던져준다. 저만큼 아래 강물은 흐르지 않고 정지되어 있는듯해 그리움도 멈추어버린다. 주차장 입구에서 병산서원 가는 길에 흙벽집이 아련한 삶의 흔적이 아련 거린다. 복례문을 지나자 만대루가 기다리고 있다. 왼쪽에 조그마한 연못 광영지가 옛 사람들의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天圓地方)의 우주관을 만들어놓았다. 병산서원은 평지가 아니라 산 언덕을 이용한 점층법으로 단을 쌓아 기하학적 구성원리로 자연 속에 있으면서 자연을 온통 끌어당기는 자연과 일체된 건축으로 한국 건축의 백미로 통한다. 서원의 주인공건물은 강당이다.강당 동쪽 명성재는 원장실, 서쪽 경의재는 부원장 겸 교무실인데, 아래 동쪽 동직재는 나이 많은 원생들의 기숙사이고, 서쪽 정허재는 나이 젊은 원생들의 기숙사다. 이 강당에서 과제를 받은 학생들이 보름에 한 번 열리는 강회 때 원장 앞에서 필기시험 아닌 구술시험을 친다. 여기서 합격해야 다음 과제를 받고, 유급되면 통과 못한 과제로 다시 공부해야 된다. 강당 뒷문을 열면 백일홍 여러 그루가 세월의 무게만큼 굵기가 사람을 압도한다. 장판각, 존덕사, 신문, 진사청 건물들 앞에서 호위하듯이 도열해 있다. 선비의 열정을 나타내는 백일홍은 스승 퇴계가 매화를 유독 사랑했듯이, 서애 류성룡(1542~1607)은 백일홍을 많이 좋아했던 모양이다. 목판을 보관한 장판각이 보인다. 책이 귀한 시절 필사본으로 공부하지만 필사는 사람에 따라 오, 탈자가 많이 생겨 책으로 인쇄할 수 있는 목판은 대단히 중요한 출판 기능을 했다. 존덕사는 서원의 선현봉사와 교육의 2대 기능 중 하나인 서애 류성룡과 셋째아들 수암 류진(1582~1635)의 위폐를 모신 곳이다. 강당과 동서재 그리고 제향공간으로 서원의 기능은 족하다. 그런데 병산서원의 압권은 이 중요한 기능도 아닌 휴식과 행사의 부수적인 공간인데 병산서원을 스타로 만든 것이 만대루다. 서원이나 궁궐 누각, 정자 등을 이름 붙일 때 사서삼경의 문구에서 많이 따오는데 조선 유학자들이 그토록 사모하던 주자(주희)의 무이정사(武夷精舍)에 만대정(晩對亭)이 있고, 삼국지의 유비가 최후를 맞이한 곳이 백제성이다. 당나라 시성 두보(712~770)는 그‘백제성루(白帝城樓)’의 시 /강도한산각(江度寒山閣) 강은 겨울 산의 누각을 건너고,/…. 취병의만대(翠屛宜晩對) 푸른 병풍 같은 산은 늦도록 마주 대할만하고./ 에서 따왔는데 여기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이름만으로 가슴 설레는 병산서원교회나 성당, 절 등은 종교적 신앙의 대상이라 사람을 유혹하는 속성이 있다. 그래서 화려하거나 권위적이다. 서원은 유교적 엘리트들을 교육시키고 선현을 배향하는 엄숙한 공간이라 검소하고 담백하다. 그리고 병산서원은 부분과 집합을 조화롭게 잘 배치하여 자연 속에 있으면서 자연을 끌어들여 자연과 하나 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사상이 접목된다.이 병산서원의 모태인 풍악서당은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으로 복주(안동)로 가기 전에 풍산 산성에 머물 때 풍산현의 지방유림 자제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감동받아 서책과 땅(지금의 풍산중·고)을 주어 유생들이 더욱 학문에 열중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도 하고(서원총람·1978년), 영가지(1608년)에는 1551년 권경진 등에 의해 창건했다 한다. 세월이 흘러 서당 가까이 집들이 들어서 시끄러워지자 서당을 옮길 궁리를 하다가 서애가 부친상을 당해 하회에 와있을 때 유생들이 자문을 구하자 서애는 병산(지금의 자리)가 적당하다고 하여 풍악서당을 1572년(선조 5년) 병산으로 옮기고 ‘병산서당’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불타고 1607년에 중건하고, 1614년 서애와 셋째 아들 류진을 배향한 존덕사 사우를 건립하면서 서원이 되었다. 1620년 여강서원(호계서원)에 서애의 위폐를 모셔 가면서 퇴계의 좌, 우 상석에 누구를 모시느냐의 병호시비가 시작된다.국가가 공인해주는 사액서원은 라이벌 학봉을 모신 임천서원이 1618년(광해군 10년), 호계서원이 1676(숙종 2년)에 사액 받았는데, 이 병산서원은 1863년(철종14년)에 받았으니 퇴계 적통싸움에서 제자군단 많은 학봉파에 밀린 것이다. 새옹지마라고 당쟁의 근원지인 임천서원, 호계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헐렸지만, 병산서원은 소외된 약자의 입장이라 서원의 건강성을 유지하여 철폐되지 않았던 것이다.그 옛날 여기서 공부하던 원생들이 과거에 급제라도 하면 서원에 못 들어오는 광대들은 이 만대루 아래서 풍악을 울리고 유생들은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여흥을 즐겼다. 이 만대루가 신분의 경계선이 되었다. 지금의 복례문은 동쪽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텅 비어있어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지금의 만대루가 좋지만 여기에 방도 넣었다가 없앤 것이다. 이처럼 사람이나 건축이나 처음부터 완벽한 것이 아니라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서 완결되는 것이다.#. 만대루서 흘러가는 강물을 보며코로나19 덕분에(?) 대낮에 혼자서 만대루에 한참을 앉아서 푸른 병산의 절벽을 마주 대하고 백사장을 옆에 끼고 말없이 흐르는 강물을 보았다. 수백 명의 여러 답사객들을 데리고 나름대로 열변을 토했던 지난 일이 주마등같이 스친다. 나는 얼마나 감동을 주었는가? 필자가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초대 총무로 유홍준 대표와 환상의 콤비가 되어 전국을 기행 할 때 병산서원과 백사장 모래밭에서 가슴 벅찼던 밤, 어느 여름 보름날 진주 삼현여고 독서반 학생들과 선생님들을 이 만대루에서 병산과 강, 허공의 달을 대하면서 안동의 안상학 시인의 이육사 문학과 나의 병산서원 특강이 달빛에 익어 허공에 맴돌다 강물에 젖었던 그 밤이 새록새록 하다.이 병산서원의 강당이나 동, 서재 그리고 만대루의 청마루 바닥은 언제와도 반질반질하여 신발 벗고 오를 수 있어 고마울 따름이다. 전국에 수많은 고택문화재, 특히 공간이 넒은 누정은 청소가 안 되어 신발을 벗을 수 없다. 여기 병산서원은 30년 넘게 서원 옆에 사시면서 매일 관리해온 류시주 님의 덕분이었다. 40~50명의 단체가 잠잘 수 있는 공간이 마땅치 않을 때 하회식당 겸 민박집이 유일할 때 단체로 몇 번이나 숙식했던 인연으로 인사 드리러 갔는데 출타 중이라 못 뵙고 왔다. 70대 후반인 지금도 이틀은 청소하시고 4일은 하회마을 보존회서 청소하고 있어 생기 도는 병산서원이 되어 만대루에 하염없이 앉아서 흐르는 강물을 볼 수 있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지난봄에 안동산불의 발원지가 저 건너 병산이라 탄 흔적이 보인다. 물은 간을 넘지 못해도 바람은 넘을 수 있는데 남동풍이 병산서원을 살렸다.사람들은 달빛이 강물에 부서지거나 흘러가는 강물을 보면 저마다 생각을 하게 된다.유학자들이 흠모하던 공자도 흘러가는 물을 보고 생각에 잠기자 제자 자공이 “왜 물만 바라보십니까” 물었다. 공자는 “물의 이치만 생각하고 있다. 물은 참으로 위대하다. 물은 만 번 꺾여 흐르지만,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 이것은 사람이 사는 의지와 같다.” 공자가 한국에 살았다면 동이 아니라 남으로 흐른다 했을 것이다. 세상 모든 이치는 자기가 사는 자연환경의 기준으로 사고할 수밖에 없다. 중국은 우리의 동고서저(東高西低)가 아니고 서고동저(西高東低)라서 동으로 흐르기 때문에 공자가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땅 덩어리 큰 중국의 산수는 기상천외한 것이 많다. 중국 사람이 그린 산수화는 실경이라도 그것을 흉내 낸 우리의 산수화는 관념화가 되는 것이다. 조선 후기 영, 정조시기에 조선의 문예부흥인 실학이 잠시 꽃을 피울 때 겸재 정선(1676~1759)의 진경산수화가 나오고 기름기 있는 중국서예가 아닌 원교 이광사(1705~1777)의 동국진채가 나왔다. 연이어 혜원 신윤복(1758~?)은 춘화도를 그려 궁중의 도화서에서는 쫓겨나지만 비디오 없는 시절에 양반들은 끽끽거리며 좋아했던 것이다. 양반들만 갖던 병풍을 거상들 중에 소금장수도 집에 소유했으니 그들의 눈높이로 맞춘 것이 단원 김홍도(1745~1806?)의 씨름도 등등의 풍속화인 것이다. 그때 조선의 깨어 있는 유학자들은 실학을 들고 나왔지만, 대부분의 유학자들은 모든 세계는 중국이었고 공자, 맹자의 자구 하나 가지고 티격태격 했던 것이다. 그 옛날 유생들은 여기 만대루에 앉아서 흐르는 물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강은 산을 넘지 못해 병산 큰 바위에 부딪힌 강물은 하얀 그리움을 토하듯이 병산서원 앞에 은빛 고운 백사장을 쏟아내고 하회로 흘러가는데….만대루에서 내려와 백사장 강가에 닿으니 물이 정지한 것이 아니라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멈추었던 그리움이 다시 긴 그리움으로 살아난다. 물은 흘러야 된다.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6-30

공간은 장소가 되고 장소는 고유한 의미로 영존한다

김연수는 1993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고, 1994년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3회 작가세계문학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하였다. 메타적 글쓰기, 풍부한 인문학적 교양, 혁명 이후 세대의 자의식 등으로 2000년대 한국소설계를 대표하는 작가 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1970년 김천에서 태어난 김연수는 한국문단의 김천 출신 삼인방(김연수, 김중혁, 문태준)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김천에서 함께 학창시절을 보낸 이들 삼인방은 세상이 모두 인정하는 친구 사이로 유명하다. 소설가 김중혁과는 ‘씨네21’에 일 년 동안 번갈아 가면서 영화관람기를 연재했다가 2010년에 ‘대책없이 해피엔딩’이라는 ‘대꾸 에세이집’을 출간하기도 했으며, 시인 문태준과는 상대방이 문학상을 받았을 때(문태준 2005년 미당문학상 수상, 2007년 김연수 황순원문학상 수상) 시상식에서 서로 축사를 해주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기도 하였다.‘뉴욕제과점’(2002)은 김연수의 자전소설로서, 실제 작가의 이력이 거의 그대로 반영된 작품이다. 김연수는 김천시 평화동에서 삼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자랐다. 부모님이 운영하던 뉴욕제과점은 김천역사에서 나오면 시청 방향이 될 왼쪽 편에 있었고, 살림집은 시내를 관통하는 3번국도 건너편 법원지청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또한 역 근처에서 자라면서 어린 김연수는 포장도로와 자동차와 철로 역전을 놀이터로 삼았다고 고백한 바도 있다.(‘청춘의 문장들+’, 마음산책, 2014, 56-59면)경북 김천은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고 김천역이 설치되면서, 근대적인 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철도의 영향과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의 길목이라는 지리적 이점으로 경상북도 서부권의 중심도시 역할을 하여 1949년에는 일찌감치 시(市)로 승격되었다. 또한 한국근대소설의 수준을 단번에 끌어올린 명작으로 평가받는 염상섭의 ‘만세전(萬歲前)’(1924)에도 김천이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한다. 동경 유학생 이인화는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서울로 가는 길에 부산을 거쳐 김천에 들른다. 김천에는 큰 형이 보통학교 훈도로 재직 중이었던 것이다. 긴 칼을 차고 나타난 형은 “여기두 좀 있으면 일본 사람 거리가 될 테니까 이대로 붙들고 있다가 내년쯤 상당한 값에 팔아 버리랸다.”라고 말하는데, 이를 통해 일제의 영향력이 점차 강해지는 김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그러나 김연수의 ‘뉴욕제과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김천이 1949년에 시로 승격되었다는 것이나 한국문학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만세전’에 김천이 등장한다는 것과 같은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을 아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은 아니다. 이유는 ‘뉴욕제과점’이 “연필”로 쓴 작품이라는 사실과 관련된다. 이 작품은 “나는 이 소설만은 연필로 쓰기로 결심했다. 왜 그런 결심을 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연필로 쓴 글은 언제든지 지우개로 깨끗이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다. ‘연필로 쓴 글’은 돌에 새긴 비석이나 만년필로 꾹꾹 눌러 쓴 글처럼 모든 이에게 동의를 강요할 수 없는 가변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것은 ‘나’의 기억을 통해 그려지는 ‘뉴욕제과점’이 공식적인 기록과는 무관한 사적인 것이며, 동시에 이 작품에서 형상화 된 뉴욕제과점이 하나의 장소에 해당한다는 것을 암시한다.인문지리학자들은 오래전부터 공간(space)과 장소(place)를 구분해 왔다. 공간이 추상적이며 객관적이고 사회적이라면, 장소는 구체적이며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공간에 개인만의 정서와 경험이 쌓이면, 이곳은 고유한 의미를 갖는 장소가 된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 나고 자란 이에게 김천이 단순한 공간에 불과하다면, 김연수와 같이 김천에서 나고 자란 이에게 김천은 대체불가능한 장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특히나 자신이 태어나고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았던 ‘뉴욕제과점’과 같은 곳은 ‘장소 중의 장소’이자 ‘장소의 원형’에 해당한다. 고향의 집은 인간 정체성의 토대이자 실존의 중심으로서 마음의 안정을 가능케 하는 절대적인 장소이기 때문이다.그렇기에 자전소설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뉴욕제과점’은 감히 김연수라는 한 작가의 고유한 본질 속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다. 뉴욕제과점은 작품 속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인간이 호명(呼名)을 통해 하나의 주체로 구성된다면, ‘내’가 “역전 뉴욕제과점 막내아들”로 불리워지며 성장했다는 것은 뉴욕제과점이 지니는 중요성을 보여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나’는 뉴욕제과점이 있었던 “그 거리에서 배운 것들과 그 거리 밖에서 배운 것들로 이뤄진 어떤 것”이지만, “그 거리에서 배운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또한 ‘나’의 몸 안에는 “어려서 본 상인들의 세계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질주하는 세상의 힘에 떠밀려 30년 이상을 같은 자리에서 버텨온 뉴욕제과점은 결국 1995년 8월 문을 닫는다. 1960년대에 문을 연 뉴욕제과점의 전성기는 1980년대의 시작과 함께 찾아온다. 처음으로 소비가 미덕인 시대가 찾아오면서, 빵이라면 고급 생과자만을 생각하던 사람들도 일상적으로 빵을 사먹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는 조금씩 쇠락하기 시작한다. 5공화국이 끝나갈 때쯤 손님들은 최신식 인테리어를 갖춘 제과점과 바게트와 같은 새로운 종류의 빵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김영삼 대통령이 세계화를 주창하던 무렵, 김천에도 파리크라상이나 크라운베이커리 같은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빵집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결정적인 타격을 받는다. 더 이상 새롭게 바뀔 능력이 없어서, 1980년대 풍으로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던 뉴욕제과점도 결국 문을 닫고 마는 것이다. 뉴욕제과점이 있던 자리에는 새로 24시간 국밥집이 새로 문을 연다.양심을 지키며 성실하게 살던 사람들이 자본의 공세 앞에 허무하게 무너져 버리는 이야기는 사회학적 상상력을 발휘하기에 적당한 서사이다. 실제로 한국현대소설의 주류는 억울하게 삶의 터전을 잃고 고통 받는 자들에 대한 관심을 기울인 것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김연수가 뉴욕제과점의 영고성쇠(榮枯盛衰)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회적 문제제기가 아니다. 작가는 이 세상에 생겨난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존재론적인 삶의 진실을 전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이가 자라나 어른이 되는 정도의 시간이면, “아무리 단단한 것이라도, 제아무리 견고한 것이거나 무거운 것이라도 모두 부서지거나 녹아내리거나 혹은 산산이 흩어진다.”는 명제가 이 소설의 한복판에 놓여 있는 것이다.그러나 모든 것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받아들이더라도, 인간에게 본원적인 정체성과 안정감을 제공하던 장소를 잃어버리는 것은 커다란 고통일 수밖에 없다. 안타까운 일은 엄청난 속도로 앞을 향해 돌진하는 현대사회에서는 장소의 상실이 더욱 전면화 된다는 점이다. 현대인들은 장소 내부에서 진정한 장소감을 경험했다가 이를 자의든 타의든 상실하는 장소상실(placelessness)을 너무도 흔하게 경험할 수밖에 없다. ‘뉴욕제과점’의 ‘나’는 이러한 장소상실의 경험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인물이다.한 가지 염두에 둘 것은, 카스텔라를 만들 때 나오는 기레빠시(부스러기)나 최신형 케이크 진열대나 아이스크림 냉동고가 지구상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그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들은 ‘나’의 마음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어 영생하기 때문이다. 사라지지 않는 뉴욕제과점은 이 작품에서 아름다운 불빛의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뉴욕제과점이 잘 나가던 시절, 이 작품은 제과점과 역전 근처의 거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으로 눈이 부실 정도였다. 뉴욕제과점은 사라졌지만, 온 세상을 밝게 물들이던 그 불빛들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서 반짝이며, ‘나’는 여전히 그 불빛의 힘으로 살아간다.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믿었던 것들이 실은 내 안에 고스란히 존재”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 불빛은 내 마음 속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사라질 수도 없으며 빛이 바랠 수도 없다. 심지어 역전 거리의 불빛들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애틋함과 슬픔으로 인해 “둥글게 아롱져” 보이기까지 한다.우리 모두에게는 자기만의 ‘뉴욕제과점’이 있을 것이다. 문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이상화의 대구 수성벌, 이육사의 안동 원촌, 한흑구의 포항 바다, 김동리와 박목월의 천년 고도 경주, 권정생의 안동 조탑동, 이문열의 영양 석보면 등도 작가들을 탄생시킨 문학적 자궁으로서의 장소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사라져 가는 장소들을 소중하게 되돌아보는 일은 우리의 삶을 보다 깊이 있게 만드는 길임에 분명하다.작가 김연수는…1970년 김천 출생. 전통과 새로움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독특한 문장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허구와 진실, 현실과 환상의 불분명한 경계선을 넘나드는 문장이 돋보인다. ‘작가세계’를 통해 데뷔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청춘의 문장들’ 등을 썼고, ‘대성당’ ‘달리기와 존재하기’ 등의 번역자다.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수상자이도 하다.끝/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6-29

전통한옥의 고즈넉한 멋… 고대와 현대가 숨쉬는 곳

경주 나들목을 지날 즈음 다시 내리기 시작한 비가 교촌마을 기와를 적시고 있었다.오래 전 멋을 그대로 간직한 고풍스런 마을 한가운데 자리한 경주향교 처마 아래서 가늘게 흩뿌리는 비를 보며 한참을 서있었다. 어디선가 학자들의 웅성거림과 학동의 글 읽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1천 년 가까운 세월을 버텨 온 왕조. 신라는 우리들 기억 속에서 여전히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제국’이다. 곳곳마다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유적과 유물이 가득한 경주. 수십 번을 다시 찾아도 여전히 풀지 못한 수수께끼를 던지는 공간.교촌마을 역시 마찬가지다. 자그마치 1천300여 년 전 나라의 인재를 제대로 키워내기 위해 서라벌의 지도자들은 최고의 교육기관을 만들었다. 국학(國學)이었다. 경주 교촌은 바로 그 국학이 자리했던 곳이다.기자가 교촌마을 찾은 건 이번이 3번째. 지지난해 늦여름 처음으로 방문했을 땐 알지 못했던 역사적 사실을 깨달았기에 땀 흘리며 마을을 돌아본 보람이 있었고, 다음 번 가을에 찾아갔을 땐 고대와 현대가 불화하지 않고 공존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교촌마을은 말끔하게 정비된 주차장이 있고, 첨성대, 동궁, 월지 등 경주의 다른 명소와 가까운 까닭에 적지 않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근처엔 이른바 ‘경주의 맛집’도 적지 않다.◆ 교촌마을의 중심 ‘경주향교’에 얽힌 이야기궂은 날씨 탓인지 여행자가 많지 않았던 초여름 평일 오후. 한참을 국학이 있던 자리에 만들어진 경주향교 아래서 고즈넉한 풍경을 즐기고 있자니, 교촌마을의 자랑이자 신라의 보물이기도 한 이곳이 어떤 이유로 세워진 것인지 궁금했다. 이 의문에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편찬한 책 ‘신라의 학문과 교육·과학·기술’이 친절한 답을 들려준다.“삼국통일 이후 신라는 제도를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신문왕 2년(682)에 국가 최고 교육기관이며 국립대학이라 할 국학을 확충하고 크게 정비하였다. 국학은 이후 약 1세기 동안 적지 않게 발전을 하였다. 왕들이 역대로 국학에 나아가 박사(博士)들에게 경의(經義)를 강론케 하는 등 명실상부한 유교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지금이나 옛날이나 통치자들은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국학은 바로 이런 깨달음에서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지금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경주향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1호다. 대성전, 명륜당, 전사청, 내신문 등이 세월의 이끼를 끌어안고 존재하는 곳.이곳은 신라시대 국학이 설치된 위치고, 고려 때는 향학(鄕學)이 있던 공간으로 추정된다. 학문을 탐구해 시대의 중심에 서고자 했던 청년과 선비들의 열정은 신라, 고려, 조선이라는 시공간을 뛰어넘고 있었다.얼핏 보아도 수많은 ‘흥미로운 스토리’를 간직한 교촌마을과 경주향교. 그래서일까? 이화여대 김민정의 논문 ‘스토리텔링을 적용한 문화적 장소 브랜드 디자인 연구’는 교촌마을의 변화·발전 방향을 아래와 같이 조언한다.“오늘날은 문화적 역량이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다. 문화는 국민의 삶의 질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가치가 되었고, 그중에서도 전통문화는 한 국가와 민족의 문화 정체성을 알 수 있는 수단으로 자리했다. 가히 문화는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힘의 원천인 문화유산을 보존·관리하며 가치를 높이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몫이다.”지역에 존재하는 문화재와 유적은 지방자치단체의 관광 경쟁력과 직결된다. 이 사실은 이미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특히 경주처럼 한국 어느 지방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국보·보물급 유적과 유물을 다수 가졌다면 이것들의 향후 보존·개선 방안을 수립할 때 위에 인용된 김민정의 주장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가진 자의 도리’를 다하고자 했던 경주 최부자집경주향교를 지나 우산 아래 다정하게 걸어가는 중년 부부의 뒤를 따라 교촌마을 곳곳을 돌아봤다. 곳곳에 세워진 관광안내판이 친절하게 여행자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외국인도 두어 명 만났다. 비교적 간략하게 경주의 유명 관광지를 요약·설명하고 있는 경주시 문화관광 인터넷 홈페이지를 보니 교촌마을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중요민속자료 경주 최씨 고택과 중요무형문화재 경주 교동법주가 자리 잡고 있는 교촌마을은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고 학문에도 힘써 9대에 걸쳐 진사(進士)를 배출한 경주 최부자의 얼이 서린 곳이다.최부자집에서 가훈처럼 내려온 원칙은 ‘벼슬은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손님을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말라,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것이다…(후략).”예나 지금이나 양심적인 부자가 되기는 어렵다. 물질적인 것이건 정신적인 유산이건 인간이 그걸 포기하거나 나누는 건 양보의 태도와 너른 마음씨 없이는 행해질 수 없기에.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앙가주망(Engagement·지식인의 사회 참여)이 쉽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다.짧지 않은 기간 동안 최상급의 부를 누리면서, 재산을 아낌없이 주위와 나누고자 했다는 지향만으로도 최부자 가문은 ‘높은 도덕성’을 지녔으리라 짐작된다.여기에 이 문중 사람인 최준(1884~1970)은 일제강점기에 가혹한 수난을 겪으면서도 항일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다니, 경주 최씨 집안은 그저 돈이 많은 가문만은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최준에 관한 보다 많은 정보는 교촌마을 안내판에서 얻을 수 있었다.“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에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했으며, 대한광복회 재무를 맡아 총사령관 박상진 의사와 더불어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돼 심한 옥고를 겪었다. 이와 함께 최준은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문화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여 1920년 경주고적보존회를 설립하고, 1932년 정인보 등과 ‘동경통지(東京通志)’를 편찬하는 등 신라문화의 유산을 지키고 널리 알리는데 기여하였다.”존재하는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현재의 경주 최씨 고택은 170여 년 전에 만들어졌다. 영남 지방 주요 건축물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췄고, 사용된 재목들도 일반 가옥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는 고급품이다. 한때는 부지 2천 평의 99칸 대저택이었으나, 1969년 화재로 사랑채과 행랑 등이 소실됐다. 여러 개이던 쌀 보관창고도 하나를 제외하고는 사라졌다. 기자가 찾은 날도 문화재청의 주도로 보수가 진행 중이었다.경주 최씨 고택은 빼놓을 수 없는 ‘서라벌의 보물’ 중 하나다. 많은 이들이 빨리 제 모습을 복원해 그 위상을 이어가길 기대하고 있다.◆ 활짝 갠 ‘빛나는 날’이 다시 오기를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폭풍이 한국을 휩쓸기 전 교촌마을은 예스런 전통가옥 안에서 이에 어울리는 각종 체험관광을 즐기는 여행자들로 붐볐다. 그런 흥겨운 시끌벅적함이 일상이었다. 아버지의 손을 잡은 딸은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카메라 앞에서 재롱을 부렸고, 어린 아들은 엄마를 따라 서툰 솜씨로 색깔 예쁜 국수를 밀었다. 국악을 들으며 신나게 떡메를 치는 관광객들의 웃음이 가득했다. 최근 찾은 교촌마을은 지난해에 비해 눈에 띄게 한산했다. 안타까웠다. 하지만, 루이제 린저(Luise Rinser·1911~2002)의 말처럼 세상에 영원히 계속되는 고통은 없고, 극복하지 못할 어려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는 법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주는 고통과 어려움 또한 마찬가지일 터.교촌마을을 나와 인근 식당에서 더위를 식혀줄 냉면 한 그릇을 주문했다. 바로 앞에선 내물왕릉이 비를 맞고 있었다. 경주에서만 볼 수 있는 그 돌올한 풍경을 보며 활짝 갠 교촌마을의 빛나는 날이 어서 다시 오기를 기원했다. 그건 비단 기자만의 바람은 아니었을 것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 이용선기자

2020-06-25

‘산소카페’ 브랜드로 ‘힐링 여행지로의 도약’ 초석 다졌다

한국의 모든 지방자치단체가 마찬가지다. 지자체의 가장 큰 역할은 주민들이 안전하고 편안한 환경 속에서 문화와 예술을 누리며 건강하게 살도록 지원하는 것. 여기에 지역 경제 발전을 통해 삶의 안락함을 더해준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일 터.청송군의 지향과 목표도 위와 다르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2020년 초여름. 벌써 민선 7기의 절반이 지났다. 그 2년의 시간 동안 청송은 어떤 가시적 성과를 이뤄냈고,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까? 이를 점검해본다.◆ 공약 평가 최우수 등급, 대한민국 대표브랜드 대상 등 실질적 성과21세기 새로운 관광의 트렌드를 주도하며, ‘힐링 여행지로의 도약’이란 비전을 세운 청송은 ‘군민과 함께하는 행복 청송’이라는 슬로건의 실현을 위해 ‘미래가 밝은 농촌’ ‘따뜻함이 함께 하는 복지’ ‘꽃 피는 문화 속에 발전하는 경제’라는 목표를 향해 매진했다.코로나19 사태라는 시련과 예측 불가능한 세상의 변화 속에서도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민선 7기 공약사항 평가 2년 연속 최우수 등급 달성’ ‘대한민국 대표브랜드 대상 2관왕’ ‘청송사과축제 대한민국대표축제 선정’ ‘전국 농어촌자치단체 평가 종합 2위’ 등의 눈에 띄는 성과를 선물 받았다.청송군이 이뤄낸 성과는 윤경희 군수의 취임 당시 약속이던 지역 발전과 군민 삶의 질 향상이 제대로 된 길을 걸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농산물 택배비 지원, 천원목욕탕 사업, 친환경 키즈카페·정신건강복지센터·골프장 조성, 청송사과축제의 도약, 청송사랑화폐 유통 등은 그 실질적 사례로 기록됐다.농업과 농촌의 미래를 위한 청송군의 노력도 돋보였다. 지역농산물 소비 촉진과 유통망 확대, 농가소득 증대를 위해 농산물 택배비를 지원했고, 전국 최고 수준의 농민수당도 지급했다.이와 함께 명품 청송사과의 재도약과 사과 산업 발전을 위한 유통센터 운영 체제도 과감하게 개선했다. 농산물 공판장 개장은 농민들의 웃음을 불렀다. 높아진 청송사과의 브랜드 가치는 청송의 지역 경제에 큰 도움을 줬고, 새로운 브랜드인 ‘황금진’의 개발로 한발 앞선 농업 선진화를 맞이하기도 했다. 청송의 대표적 특산품인 사과의 지속적인 홍보·마케팅 활동이 병행됐음은 말할 것도 없다.◆각종 복지 정책과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사업 전개오늘 현재 한국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인 ‘저출산’ 극복을 위한 청송군의 발걸음도 주목받았다. 군은 출산장려금을 대폭 인상해 지급했고, 진보면에 최상급 시설을 완비한 키즈카페를 만들었다. 돌 사진 촬영비도 지원하고 있다. 공립 어린이집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확충할 계획이다. 이는 ‘아이 키우기 좋은 청송군’을 위한 출산 장려정책의 일환이었다.더불어 지역의 우수한 인재들이 경제적 부담 없이 꿈을 키울 수 있도록 인재육성장학회의 기금으로 ‘다둥이 장학금’을 주고 있고, 지난해부턴 중고교 신입생들에게 교복 구입비도 지원 중이다.복지의 혜택은 노소가 다를 수 없다. 청송군은 어르신들을 위해서는 노인 일자리를 늘리고, 목욕비를 지원하는 등 노년의 삶이 편안하고 행복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치매안심센터와 정신건강복지센터의 건립·운영도 진행됐다. 이는 정신적 질병으로 인해 고통 받는 어르신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안겨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참전유공자들과 국가보훈유공자에게 지급하는 수당을 인상해 나라를 위해 헌신한 고령 유공자들의 명예와 품위를 높이는 것에도 관심을 기울였다.260억 원 규모로 발행된 청송사랑화폐는 농민수당, 농산물 택배비 지원에 유용하게 사용됐다. 청송군 공직자들은 앞장서 청송사랑화폐를 사용함으로써 지역 상권 부활에 힘을 보탰다. 그런 이유로 일부의 우려와 달리 청송사랑화폐는 안정적으로 지역 사회에 정착할 수 있었다. 실효적인 측면에서 ‘성공적인 지역화폐’로 인정받고 있는 청송사랑화폐는 코로나19 사태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지원금으로도 활용됐다. 이는 소상공인과 소비자가 상생하는 지역 경제 활성화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냈다는 호평을 받았다.대규모 체육대회의 지속적 유치를 통한 지역 경제 활성화 노력도 빼놓을 수 없다. 청송군은 ‘산악스포츠의 성지’로 불린다. 연간 15개 이상의 각종 산악스포츠 대회가 개최된 곳이기에 붙은 별칭이다. 청송은 아이스 클라이밍 월드컵을 5년간 유치해 아이스 클라이밍 저변 확대와 지역 경기 진작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은 바 있다.◆달콤한 청송사과를 맛볼 수 있는 ‘산소카페 청송’으로‘산소카페’라는 브랜드로 관광객을 매혹하는 청송군의 사과축제는 단일 농산물 축제로는 독보적 존재감을 선보여 왔다.경상북도 대표축제로 7년 연속 지정됐고, 작년엔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대한민국 대표축제에 선정됐다.청송사과축제의 위상 강화엔 윤경희 군수의 노력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항상 “축제란 지역민이 먼저 흥에 취해 즐기고 함께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 멀리서 찾아온 분들도 어우러져 즐길 수 있다”고 말해온 윤 군수는 축제 현장을 용전천변으로 옮기고, 기간 또한 연장했다. 주변 경관을 정비하고, 편의시설을 확충하는 작업도 쉼 없이 전개했다. 그랬기에 ‘산소카페 청송군, 황금사과의 유혹’이란 축제의 주제를 현실화시킬 수 있었다고 주변에선 입을 모은다.고민 끝에 나온 도시 브랜드 ‘산소카페 청송’은 청송 고유의 정체성에 특유의 색채를 결합한 이미지로 세간의 눈길을 끌었다. 이에 어울릴 수 있도록 청송IC 주변과 시가지에 ‘산소카페’와 ‘황금사과’를 테마로 조성한 경관 시설도 관광객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청송의 인구는 약 2만6천여 명. 이들의 안전 보장을 위한 군민안전보험공제 가입은 불의의 사고와 재난으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마련된 정책이다.화재를 예방하고, 진화하는 역할을 하는 소방서 역시 안전한 청송을 위해 필요한 시설. 내년엔 청송소방서가 새롭게 준공돼 주민과 관광객들의 안전을 보장하게 된다. 청송군 지방상수도 현대화 사업 역시 250억 원이 투입돼 ‘물복지 실현’을 한 걸음 앞당길 예정이다.‘공약사업 군민배심원단 구성’ ‘휴대전화를 통한 스마트 마을방송 시스템 도입’ ‘청송군 최초 민간 위주 지역발전협의회 구성’ ‘청송군 지역발전협의회의 내실 있는 운영’ 등도 민선 7기가 이뤄낸 성과라고 할 수 있다.올해 초 한국을 덮친 코로나19 바이러스. 청송군은 선제적 대처로 최악의 비극을 막아냈다. 치밀한 초동방역과 빈틈없는 방역시스템 구축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 또 노인들과 취약계층에게 마스크를 제공하고, 시장 사용료를 감면하며, 임대농기계 수수료를 깎아 준 것도 효과적인 코로나19 대응책으로 평가된다.◆‘희망차고 역동적인 청송’을 위한 앞으로의 노력은…‘2020 대한민국 대표브랜드 시상식’에 참석한 윤경희 군수.세상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 지나온 시간보다는 앞으로의 시간이 중요하다. 청송군 역시 지금까지 얻은 성과와 열매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땀과 수고를 아끼지 않겠다는 각오다. 이를 위해 ‘산소카페 청송군’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경쟁력 있는 마케팅을 지속적으로 진행할 방침이다. 이에 어울리는 브랜드 제품도 개발해 ‘건강도시’로서의 이미지도 확고히 한다는 것이 청송군의 계획. 스마트팜 연구단지를 조성하고, 기후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농업의 미래 방향도 적극적으로 모색하게 된다.‘청송사과 품질보증제’ 시행으로 소비자의 신뢰도를 높인다는 계획도 세웠다. 이는 청송사과의 경쟁력 강화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포스트 코로나시대’를 대비해 의료진 숙소 개축 등 보다 질 높은 의료 서비스 확충에도 노력한다는 게 청송군의 의지다.산남 지역엔 응급의료 전용 헬기장도 설치할 예정이다. 넓은 대지 위에 조성될 ‘백일홍 단지’는 청송의 새로운 관광명소가 될 것이고, 인근에 조성 중인 산림레포츠 휴양단지와 연계돼 주민과 관광객들의 안락한 쉼터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수소연료전지 발전소 유치와 풍부한 산림자원을 활용한 산림경영시범단지 조성에도 박차를 가한다. 진보·청송 도시재생 뉴딜사업, 청송읍 중앙로 전선지중화, 남북6축 고속도로 조기 건설도 청송에 활력을 더해줄 것으로 예측된다.이처럼 꼼꼼한 민선 7기 하반기 계획을 세우고 있는 청송군의 앞날은 어떠할까? 궁금증을 가지는 이들이 많다.이에 답하듯 윤경희 군수는 “언제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 숨 쉬는 역동적인 고장으로 발전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며 “발로 뛰는 소통행정을 통해 하루하루 새롭게 변화하는 청송의 미래를 그려가겠다”고 약속했다./김종철·홍성식기자

2020-06-24

비 내리는 날, 의지할 곳 없는 낯선 여행… 아름다운 풍경에 젖다

◇ 오슬로에서 마주친 난민들오슬로 시내에 나갔다가 온가족이(난민인 듯했다) 구걸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 대부분은 여성과 아이들이었다. 어디서나 여성과 아이들은 가난이나 차별 앞에 가장 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유럽으로 넘어오는 난민들이 계속 증가하고 유럽 대부분 국가들은 그들로 인해 갈등이 생기고, 반난민 정서가 확산되고 있다. 유럽 내 극우정당들은 국민들의 난민 혐오 정서에 기대 세를 불리고 있다.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정세가 안정되지 않는 이상 유럽도 내부적으로 끊임없이 갈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단순히 분쟁이나 정치적인 문제로 고향을 떠나는 난민뿐만 아니라 미래로 갈수록 기후 문제로 인한 난민도 늘 수밖에 없을 테니 미래가 낙관적이지만은 않은 듯하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걷잡을 수 없는 불황이라도 찾아온다면 극우 정당이 더욱 활개를 칠 것이다. 오슬로 시내는 주말이라 그런지 한산했다. 노르웨이 궁전에서 시청 광장으로 이어지는 거리만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공원에서 반라로 햇볕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겨울이 길고 맑은 날이 드문 북구에선 저렇게라도 햇볕을 쬐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모양이다. 숙소 근처 공원을 지나다 해수욕장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P선생님께서 손수 밥과 수육까지 하셨다. 현지 음식은 입맛에 맞지 않으셔서 여행하는 동안 대부분 직접 요리해서 드셨단다. 얼마 만에 먹는 밥인지 모르겠다. 대부분 빵과 치즈와 우유와 커피로 끼니를 해결했는데. 점심과 저녁까지 선생님과 함께 식사했다. 선생님께 쌀과 된장을 조금만 얻어 가기로 했다. 선생님과 렌터카 회사에 다녀왔다. 유럽에서만 판매되는 현대 i20을 빌려 운전하고 왔다. 하루 렌트 비용이 우리 돈으로 약 10만원. 수동 기어를 다뤄본 적이 오래고 네비게이션 보는 것이 익숙지 않다며 회사에서 숙소까지만 운전을 부탁하셨다. 함께 여행하던 분이 한국으로 돌아가고 일주일 동안 혼자 운전해서 다녀야 할 텐데 걱정스러웠다. 노르웨이에서 여행을 끝내고 아이슬란드까지 가실 모양이다. 일단 문제가 생기면 언제라도 다시 연락하기로 했다. 선생님께 쌀과 된장을 얻고 오슬로를 떠나 스톡홀름으로 출발했다.◇ 오슬로를 떠나 스톡홀름으로 향하다스톡홀름에 들어올 때까지 내내 비가 왔다. 기온이 10도 이하로 떨어지고 비까지 내리니 비옷을 입고 있는데도 한기가 스몄다.어제 날씨를 확인했을 때만 해도 분명 흐리다고만 했는데 500킬로미터 넘게 달리는 내내 쉬지 않고 비가 내렸다. 스톡홀름에 도착할 땐 온몸이 젖은 상태였다. 10시간 넘는 주행에는 비옷도 무용지물. 비를 맞으며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횡으로 가로지르는 동안 아름다운 풍경에 취했다. 비를 맞는 것쯤은 별 것 아니었다. 숲에서 숲으로 달리는 동안 거울 같은 호수와 강을 만났다. 내가 보았던 호수와 강은 모두 베네른 호의 자식들이었겠지. 오가는 차들이 거의 없는 고요한 스칸디나비아 숲길을 헬멧 쉴드에 흐르는 빗물을 닦아내며 홀로 달리는 경험은 무엇으로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스톡홀름에서 이틀 묵고, 이제 곧 헬싱키를 지나 다시 러시아로 넘어갈 예정.홀로 떠나야 아프고 약한 곳이 어딘지 확실히 드러난다. 의지할 곳이 있거나 관계가 이어져 있을 때 숨어 있던 감정이나 욕망이 온전히 혼자일 때 날 것으로 또렷이 보인다. 그걸 다스리는 것은 나중 문제고 우선 확인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행이 아니더라도 일상에서도 가끔 외부와 단절된 시간이 필요하다.관계라는 그물에 갇혀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끊임없이 에너지를 써야 하고 나중에는 다시 채울 기회조차 놓치고 만다. 물론 관계에서 힘을 얻는 사람도 있다. 그건 특별한 능력이 필요한 듯하다.스톡홀름에 도착해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 숙소 주변을 빙빙 돌았다. 눈치껏 오토바이를 세워둔 곳이 있으면 같이 두었을 텐데 어떻게 된 건지 길에 오토바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건물 뒤쪽에다 세워두었다. 무료 주차장이 있는 숙소는 시외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시내에 있는 숙소는 주차비를 내야 하는데 그게 만만치 않으니 ‘공짜’로 주차할 수 있는 곳을 찾다 동네 골목길을 도는경우가 종종 있다.덕분에 이곳 분위기가 어떤지 자연스럽게 살펴보게 된다.말뫼도 오슬로도 이곳 스톡홀름도 거리에 사람들이 별로 없다.저녁 6시 이후론 가게 문을 닫은 곳도 많고 오가는 사람이 없으니, 북유럽 사람들은 다들 집에서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는 걸까, 아니면 저녁과 밤의 시간대를 우리와는 다르게 대하는 태도와 문화가 있는 걸까 궁금했다. 만약 우리에게 밤 10시까지도 태양 빛이 어스름하게 남아 있다면 ‘열심히’ 일하거나 즐기는 사람이 많을 텐데. 오늘도 어제처럼 결국 비를 맞고 말았다. 바다를 곁에 두고 있는 스톡홀름의 날씨는 종잡을 수 없다. 어제 비를 맞은 휴대폰이 혼자 꺼지고 켜지고 반복하더니 배터리를 모두 쓰고 다시 충전하고서야 정상으로 돌아왔다.◇ 북유럽의 고요한 숲과 호수를 가로질러 발트해로휴대폰 인증 문제 때문에 페리를 예약할 수 없어 서울에 있는 친구에게 대신 예약해 달라 부탁했다. 스톡홀름에서 헬싱키까지 오토바이를 실어가는 최저 비용은 우리 돈으로 약 125,000원. 일찍 예약하거나 시즌에 따라 가격이 다른 모양이다.스톡홀름에서 헬싱키까진 뱃길로 약 500킬로미터. 페리로 투르쿠로 가서 내륙으로 약 200킬로미터 달리는 방법도 있다. 오후 4시에 출발해서 다음날 아침 9시 30분에 도착한다. 차량으로 페리를 이용할 때는 터미널이 아니라 차량 게이트가 따로 있다. 터미널에 가서 예약했다고 티켓을 받으려고 하니 영화배우처럼 잘 생긴 직원이 친절하게 지도를 출력해서 길을 알려주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하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두 사람 뿐이었고 자전거 여행자들이 많았다. 한 자전거 여행자의 짐 꾸림이 내가 보기엔 딱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아이 둘을 캐리어에 태우고 전기 자전거로 달리는 엄마도 봤다. 생활 자전거에 배낭만 질끈 묶고 일상복으로 배를 타는 이도 있었다. 그는 헬싱키가 집일 수도.온갖 종류의 자전거에 짐을 꾸려 싣고 떠나는 사람들을 보고 다음 장거리 여행은 자전거로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나 당분간은 불가능한 일인 듯싶다.3년쯤 있다가 정말 가보고 싶은 곳이 생기면... 그땐 정말 집에서 쫓겨날 수도. 발트해는 호수처럼 잔잔하다. 헬싱키에서 하룻밤 보내고 다시 페리를 타고 에스토니아 탈린으로 갈 생각이다.헬싱키로 페리로 넘어오며 소파에서 쪽잠을 잤더니 온몸이 뻣뻣. 비용을 줄이기 위해 객실, 식사 옵션을 모두 뺀 덕분이다. 객실을 예약하지 않은 노련한 여행자들은 미리 편안하게 누울 수 있는 소파를 선점하고 나처럼 뭘 잘 모르는 여행자들은 불편을 감수해야하는 곳으로. 원형 소파라 잔뜩 웅크려야만 자야만 했다. 스톡홀름에서 헬싱키로 오는 중에 마리에함 섬에 잠시 기항했다. 항구로 들어가는 걸 갑판에 나가 구경했는데 이렇게 큰 배가 바위섬들을 아슬하게 스쳐가며 항해하는 것이 놀라웠다.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을 듯한 작은 섬에도 집이나 건물이 있었다. 별장 같은 곳일까, 아니면 어부들이 사용하는 임시 거주지일까 궁금했다. 오는 동안 요트나 보트, 여러 작은 배들이 자유롭게 다니는 걸 보았고 저들은 저 작은 섬에도 쉽게 들락날락 할 수 있을 테니 음식과 연료만 충분하다면 저런 곳에서 한철 나는 것이 어렵지 않을 듯하다. 작게라도 숲이 있고 낚시 실력만 있다면 더 오래 있을 수도.헬싱키에 도착하니 많은 경찰이 도로에 경비를 서고 있었다. 무슨 큰 행사를 앞두고 있는 듯했다. 희한하게 축제나 행사를 잘 피해서(?) 다니고 있다. 축제 기간이면 잠잘 곳을 구하기도 힘들고 오토바이를 주차하는 것도 쉽지 않을 테니 나로선 피하는 게 오히려 득이다. 체크인 날짜를 어제로 예약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같은 침대 앞에서 나와 다른 여행자가 짐을 내려놓고 멀뚱하게 있었는데 숙소에서 보낸 메일을 확인하니 내 잘못이었다. 직원이 나를 원래 예약했던 방보다 더 나은 곳으로 배정해주었다.그 친구보다 아마 내가 훨씬 나이가 들어 보여 배려해준 것이리라. 아니면 청소가 끝날 때까지 묵묵하게 기다려준 덕분일 수도. 숙소 뒤편 숲길을 걷다 축구장에서 뛰어노는 친구들을 한참 구경하고 들어왔다. 헬싱키는 정말 점만 찍고 간다. 시내 구경은 내일 여객선 터미널에 주차해놓고 다녀오기로. 내일 오후 페리를 타고 탈린으로 간다. 북유럽에선 모든 것이 비싸니 지출을 줄이는 데만 신경 쓰고 있다. 이제 곧 러시아로 넘어가니 비용 걱정은 한시름 놓을 듯하다. /조경국

2020-06-23

‘친환경 성장·4차산업 혁신’ 새로운 경제 생태계 목표로

포항시가 ‘코로나19’의 장기화에 대한 대응과 경제회복을 핵심으로 하는 ‘포스트(post) 코로나’ 정책을 마련하고, 감염병으로 미뤘던 현장 행정을 다시 시작하는 등 포항을 다시 정상으로 돌려놓기 위한 노력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시는 우선 포스트 코로나를 기반으로 새로운 경제 생태계를 마련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인다는 방침으로, 그 바탕에는 시민과 함께하는 포항 만들기를 우선 과제로 둔다는 계획이다. 포항시의 지금까지의 노력과 앞으로의 계획 등을 살펴보고, ‘포항이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 본다.□ 국가전략특구 지정을 통해 활력 모색포항시는 최근 미래형 신산업 생태계의 기반을 확충하고 민생경제의 활력을 드높여 시민체감형의 경제 활성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왔다.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지역의 산·학·연 자원을 활용해 주력산업인 철강을 혁신하고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는 신성장 산업에 지속적인 투자와 미래의 먹거리를 창출하는 지역산업 육성체계를 꾸준히 만들어 온 것. 그 결과, ‘강소연구개발특구’, ‘배터리 규제자유특구’, ‘영일만관광특구’ 등 3대 국가전략특구 지정의 쾌거를 거두며 4차 산업혁명시대의 신성장엔진 확보는 물론 창업과 기업유치, 관광활성화 등 산업구조 다변화의 기반을 마련했다.지난해 6월, 전국에서 처음으로 지정된 ‘강소연구개발특구’는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한 지역의 혁신성장 플랫폼을 구축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특히 4세대 방사광가속기와 연계해 올해 완공 예정인 ‘바이오 오픈 이노베이션센터’ 등을 통해 바이오신약 클러스터를 조성하고, 관련기업 창업과 기업유치로 포항의 새로운 먹거리를 만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다.‘강소연구개발특구’에 이어 바로 지정된 ‘배터리 규제자유특구’는 우리나라 배터리산업을 선도하는 도시로서 주도할 수 있는 계기를 확보하면서, 최근에는 에코프로와 포스코케미칼, GS건설 등 관련업계의 빅(Big)3로 불리는 대기업들이 잇따라 포항에 인프라 투자를 결정하면서 관련기업들의 활발한 투자와 참여가 이어지고 있다.제2의 반도체라 불리고 있는 배터리시장의 폭발적인 성장 가능성, 전기차 수요증가 등으로 포항은 배터리산업의 메카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전망이다.이와 함께 ‘영일만관광특구’ 지정에 따른 핵심 관광지 육성과 산림복지단지, 둘레길, 케이블카 등 산림과 바다가 어우러진 차별화된 체험관광자원을 개발하는데 적극 나서고 있다.□ 그린웨이(Green way) 프로젝트, 친환경 포항의 기반이강덕 포항시장이 민선6기부터 줄곧 강조하고 역점적으로 추진해오고 있는 ‘그린웨이(Green way) 프로젝트’는 대한민국 친환경녹색 인프라를 대표하는 모델로 정착해가고 있고, ‘3대 도시재생사업’은 도시기능의 효율적인 재배치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다.지난 2016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그린웨이 프로젝트’는 포항이 친환경녹색도시로 변모하는데 큰 축을 담당하고 있으며, 시민들이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삶의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폐철도 부지를 활용한 도시철길숲 공원은 시민들이 다채로운 여가활동과 휴식을 즐기는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았고, 주요 도로변과 교통섬 등에 장미와 수목을 식재하는 도시녹화사업은 시민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도시철길숲은 국토교통부가 주관하는 ‘대한민국 국토대전’에서 경관부문 우수상을 수상한데 이어, 대통령 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의 ‘균형발전사업평가’에서 최우수상, 산림청의 ‘2019 녹색도시 우수사례 시상식’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는 등 2019년도 친환경 녹색생태도시 부분의 대외평가에서 3관왕을 차지하며 대외적으로 그 성과를 인정받기도 했다.특히 2018년 11월에 전국 최초로 착공한 ‘3대 도시재생사업’은 약 2조원 규모의 예산 투입을 통해 주거와 일자리, 사회통합, 도시경쟁력 회복 등의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공동체적 가치를 만들어 갈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강덕 시장은 중앙동의 경우 청년창업허브공간과 문화플랫폼을 조성하고, 신흥동에는 우리동네살리기형 도시재생을, 포항구항을 중심으로 한 송도동에는 ICT기반의 해양산업 플랫폼 구축을 통하여 도시의 기능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시켜 활성화한다는 계획이다.□ 문화도시로서의 포항포항시는 지난해 말 오랜 기간 숙원사업으로 준비해 온 ‘법정문화도시’에 선정되면서 앞으로 5년간 최대 200억 원 규모의 사업비를 통하여 도시발전과 궤를 같이하는 문화생태 구축사업 추진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됐으며 이를 통해 그동안의 산업도시의 이미지를 벗고 전국 지자체 중 문화도시의 선두그룹에 서게 됐다.지난 2016년부터 추진해 온 문화특화사업과 원도심을 중심으로 진행해 온 문화적 재생사업 추진과정에서 축적한 다양한 인프라를 바탕으로 공간의 확장과 함께 주체적인 문화시민 및 워킹그룹 양성, 민·관간의 협업을 통한 시민중심의 문화도시 사업 등의 성과들이 결실을 거뒀다는 평가이다. 이와 함께 ‘포항지진의 진상조사와 피해구제 등을 위한 특별법’의 제정은 빠질 수 없는 성과이다.이강덕 시장은 “무엇보다 지진의 고통과 아픔을 감내해 온 시민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면서 “지진피해에 대한 신속하고 실질적인 피해구제의 길이 열리고, 경제 활성화와 공동체 회복이라는 목표가 달성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재혁신을 통해 강화되는 주력산업 철강포항시는 경북도와 함께 위기에 직면한 철강산업의 재도약을 위한 노력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 결과 포항시·경북도가 정부에 건의한 ‘철강산업 재도약 기술개발사업’이 과기정통부 제4회 ‘소재·부품·장비 기술특별위원회’의 예비타당성 조사 우대 사업 선정을 앞두고 있어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지난 4월 19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철강산업 재도약 기술개발사업’과 ‘나노·소재융합 2030사업’과 예비타당성 조사 우대 사업으로 선정했다. 이 사업은 예타 기술 타당성 심의를 통과해 이달말께 예타우선 사업으로 최종 확정될 예정이다. 예타를 통과하면 ‘철강산업 재도약 기술개발사업’은 2021년부터 연구개발 및 산업공유자산 체계구축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추진된다. 고부가 R&D, 실증지원 및 성과확산 등 업계 지원 수요가 높은 분야들을 중심으로 2021년부터 2025년까지 5년간 총 2천898억원(국비 2천27억원, 지방비 124억원, 민자 747억원)의 대규모 사업비가 투입될 것으로 추산된다.경북도는 철강구조고도화사업이 추진되면 70여개 이상의 철강강소기업이 육성돼 8천억원 이상의 경제효과 및 4천여개 이상의 고용유발 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포항시 역시 ‘철강산업 재도약 기술개발사업’ 예타 통과를 대비해 포항블루밸리 국가산업단지를 중심으로 철강 사업 구조 정상화를 준비하고 있다.□ 바이오 중심도시 포항포항이 바이오 산업에 투자하는 노력도 눈여겨 볼만 하다. 대표적인 예가 포항융합기술산업지구인데, 이곳은 포항시 북구 흥해읍 대련리, 이인리 일원 146만㎡(약 45만평) 규모에 조성되는 차세대 프리미엄급 복합자족신도시다. 여기는 특히 경북도 제2청사인 환동해지역본부가 착공을 앞두고 있어 더욱 주목을 받는다. 아울러 신약개발 산업 활성화를 위한 국가급 연구기관인 ‘세포막단백질연구소’, 그린바이오산업 육성을 위한 국내 최초 식물기반 백신분야 기업지원시설인 ‘식물백신기업지원센터’, 미래선도형 창의 공간 구축 및 청년 창업기회 제공을 위한 ‘포항지식산업센터’ 등이 유치돼 있다. 또 세계 최초로 식물백신 제조품목허가를 취득한 (주)바이오앱을 비롯해 포항세명기독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의료법인 한성재단, 기술혁신 벤처기업인 (주)HMT과 각각 투자양해각서(MOU)를 체결하는 등 포항융합기술산업지구 자체가 차세대 바이오산업의 전진기지로서의 본격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큰 매력을 보유하고 있다./전준혁기자 jhjeon@kbmaeil.com

2020-06-23

400년 간 ‘병호시비’ 논란 종지부안동시, 국비·도비 등 들여 호계서원 복원

#. 여강서원에서 호계서원으로1575년(선조8년) 여산촌(안동댐으로 면자체가 없어진 월곡면 도곡동) 오로봉 아래 백련사 절터에 지방 유림들의 공론으로 퇴계의 위폐를 봉안하고 후학들에게 학문을 강론하기 위해 여강서원을 건립한다. 그러다가 1605년 대홍수로 유실되어 1606년 북쪽 100보 위에 다시 지었다. 1620년(광해군12년) 추가로 위폐가 봉안된 학봉 김성일(1538~1593)과 서애 유성룡(1542~1607)의 좌 배향 자리다툼이 시작된다. 즉 누가 상석인 퇴계의 좌 배향에 영의정(국무총리) 지낸 서애를 두느냐, 관찰사(도지사)로 4살 많은 학봉을 두느냐로 첨예하게 다툰다. 당시 서애의 제자이며 대학자였던 상주에 은거중인 우복 정경세에게 자문을 구한다. 우복은 5살 이상 차이가 나면 연장자로 대접하여 나란히 걷지 않는다는 견수(肩隨)와 한나라 때부터 시작된 고위직은 어디 가더라도 전용석에 앉는다는 절석(絶席)의 예를 들어 영의정과 관찰사가 같이 앉을 수 없다는 것으로 서애가 좌 배향이 된다. 당시 학봉의 후학들은 스승은 서애보다 4살 많고 학식이 뛰어나다며 반발했지만 세력이 약해 마지못해 따라야했다.여강서원은 1676년(숙종2년) 임금으로부터 ‘호계’라는 이름과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아 명실공히 사액서원이 되어 국비로 운영하는 경제적 기반을 다진다.잠재적 불씨는 안고 있다가 1805년 영남의 4현으로 불리는 서애, 학봉,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의 신주를 문묘에 배향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또다시 서애와 학봉 간 서열문제가 불거진다. 4명의 자손들이 서울에 모여 학봉, 서애, 한강, 여헌 나이순으로 상소를 조정에 올린다. 서애 쪽에서는 서열이 잘못됐다고 독자적으로 상소를 올렸고, 조정에서는 두 상소 모두 기각해 버린다. 이렇게 되자 한강, 여헌의 사림들이 대구 이강서원에 모여 독자적으로 상소할 것을 결정하고 영남 유림에 통보하자 안동의 유림들은 서애, 학봉 양파의 싸움을 중단하고 한강, 여헌 양파를 규탄하는 통문을 띄우기로 결정하고, 전주 류씨 무실파 호고와 류희문에게 통문을 작성케 했는데 학봉, 서애 순으로 작성했다. 이에 서애 파는 순서가 잘못 됐다며 학봉파와 다툼이 재촉발 되었고, 1812년 학봉의 후학들이 호계서원에 대산 이상정의 위폐를 추가로 모시자고 주장하자 서애 후학들의 반발로 호계서원과 절연을 선언해 버린다. 이로 인하여 안동 유림들은 호계서원과 병산서원으로 갈라서고, 퇴계는 제자 싸움에 도산서원으로 학봉은 임천서원으로 서애는 병산서원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적통의 자리다툼과 병호시비왕조나 기업, 가문들이 1대에는 서로 도우며 창업에 힘쓰다 2대가 되면 이해관계에 따라 형제를 죽이기도 하고 원수가 되기도 한다. 학통도 마찬가지로 스승의 제자일때는 동문수학으로 동창, 동기가 되기에 장점은 치켜세워주고 단점은 보완해주다가 스승이 죽은 뒤는 달라진다. 퇴계가 죽고 도산서당을 도산서원으로 사액 받고 퇴계의 모든 글을 망라한 문집을 발간하게 된다. 이때 15살에 퇴계 문하에 들어온 월천 조목은 그림자처럼 퇴계를 수발하면서 학문을 익혔다. 사후에도 극진히 사모하여 죽을 때까지 퇴계를 흠모하면서 추앙했다. 죽어서는 퇴계 제자 368명(편지 한 두통 등의 인연되는 모든 사람) 중에 유일하게 도산서당에 배향되고, 예안(지금은 안동) 인근의 조목, 금난수, 이덕홍, 김부륜, 김택룡, 금응협, 금응훈 등이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학맥을 이어간다. 퇴계의 팔고제자(八高弟子) 중에 중앙정계에 입신양명한 서애와 학봉이 합심하여 안동에 퇴계를 모시는 여강서원(1575년)을 만든다. 일종의 도산서원 분원 역할 격이다.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애는 전란의 영의정으로 임금을 호종하면서 전쟁과 외교를 총괄한다. 학봉은 일본 침략을 잘못 보고한 죄로 선조가 죽이려하자 서애가 기회를 주자고 하여 경상도 초유사, 관찰사로 의병을 모집하고 1차 진주성을 지켰지만, 2차전을 앞두고 진주관사에서 병사했다. 월천은 학문하는 청빈한 선비의 삶으로 동생과 두 아들을 데리고 곽제우 의병장 휘하에서 의병활동 했다. 1594년 서애의 일본과의 화친을 격렬히 반대하며 후배 서애와 갈라서게 된다. 그리고 퇴계의 문집을 발간할 때 월천은 퇴계의 전체 글을, 서애는 선택하여 만들자는 2차 충돌이 일어난다.학봉은 1593년, 월천은 1606년, 서애는1607년 세상을 떠나고 위에서 말한 대로 1620년 퇴계 좌, 우에 학봉과 서애 중 누구의 위폐를 모시느냐의 병호시비가 시작된다. 서로 도와주던 학봉과 서애가 이제 위폐문제로 집안 문중의 자존심에다 학맥의 정통성과 관련하여 치열한 논쟁으로 죽기 살기로 싸운 것이다. 흔히 영남학파의 종장으로 점필제 김종직→회재 이언적→퇴계 이황으로 이어졌지만, 퇴계에서 봉우리가 우뚝 솟아 퇴계 학통의 적통싸움까지 복잡하게 얽혀있다. 도산서원에 유일하게 배향되었지만 집안의 재력받침과 우뚝한 제자가 없었던 예안파의 월천(月川)은 시냇물의 달처럼 사라졌고, 달마는 인도에서 선종을 뿌리내리지 못해 동쪽 중국으로 가서 1대조가 되듯이, 퇴계의 학맥 적통은 안동서쪽 서후 금계의 학봉과 풍산 하회의 서애로 이동했다. 학봉파와 서애파의 합심으로 월천의 예안파를 따돌린 두 파는 깊은 계곡의 외나무다리의 무림(武林)이 아니라 낙동강가의 백사장에서 서로 통혼도 없이 원수같이 지냈지만, 죽이지는 않는 무강(武江)의 혈투를 192년(위패모신1620~신주 갖고 간 1812년) 동안 퇴계 적통서열 싸움이 병호시비다.#. 흥선 대원군과 되살아난 신묵패 호계서원 복원세도정치에 이골이 난 흥선대원군은 상갓집 개 형세하면서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서원이 학풍은 사라지고 도적의 소굴이 된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병호시비와 인조반정 이후 300년 집권한 노론에 소외된 영남 남인의 아픔도 잘 알고 있었다. 마침내 둘째아들 개통이(이재면)를 왕(고종)으로 등극시키고 첫 해에 서원에 경고문을 보낸다. 대원군의 서원철폐의지가 확고해지자 유생들은 정치적인 감각으로 흥선대원군의 직계 인평대군을 모시는 서원도 세운다. 대원군은 이것마저 철폐해버린다. 대원군이 당시 영의정 김병학에게 “서원이 온통 백성만 더럽게 괴롭히니 이게 웬 꼴이냐? 집집마다 서원을 만들고 한 사람을 대여섯 곳에서 모시는게 서원이냐? 제현을 존중한다면서 온통 지네 조상 모시는 게 서원이냐? 정말 책을 읽고 싶다면 향교 가서 읽어라. 향교는 장식이냐? 고종도 “너넨 서원이 없으면 성현을 존중할 줄 모르니?”했다.대원군은 조선의 3대 악으로 첫째가 평안도 기생, 둘째가 전라도 아전, 셋째가 충청도 양반이라 했는데 충청도 양반은 서원의 패악을 일컬음이다. 서원은 고려 말 사찰의 부패를 극복하고자 유교국가 이념을 실천할 엘리트 양성소였는데 꼭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병호시비도 양측 간 깊어진 갈등을 해소 하려고 대원군이 힘을 쏟았지만 실패하자 전국에 덜 타락한 47개만 남기고 모조리 훼철해 버릴 때 안동은 40개의 서원 중 도산서원과 병산서원만 남았다. 병파, 호파로 갈라선 블랙홀에 빠진 영남의 유림들은 어느 한쪽으로 붙어야했다. 비병비호(非屛非虎)했던 퇴계 후손들도 비양비상(非兩非商)으로 양반도 상놈도 아닌 것이 되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했다. 퇴계도 학봉도 서애도 말이 없는데 못난 제자, 문중들이 죽은 사람 시체 가지고 싸우는 격이다.학봉이 태어난 내앞 마을과 송림을 거처 임하댐으로 갔다. 대원군이 실각하자 헐어진 7년 뒤(1878년) 호계서원은 모실 신주도 없으니 강당만 세웠고, 1973년 안동댐 수몰로 임하댐 코밑으로 옮겼다. 호계서원 터는 잡초만 무성했다. 2013년 김관용 경북도지사와 안동시장의 중재로 서애, 학봉 문중과 40여 문중 합의 하에 호계서원 복설추진위원회에서 좌 배향에 서애, 우 배향에 학봉과 추가로 대산 이상정을 배향하기로 했다. 임하댐 여수로 물보라 습기에 견디지 못하고 국비, 도비 65억여 원 들여 국학진흥원 옆산 중턱에 옮겨 놓은 곳을 두 번째 갔다. 예전에 서원의 묵패가 관과 백성들에게 재산 갈취였다면, 지금은 국민세금(국비, 도비)을 뺏는 신묵패다. 이미 신주 없어 서원기능도 잃었고, 교육기능이 사라졌고 국가에서도 철거했는데, 예전의 90여 칸으로 “유교문화 및 인성교육의 장으로 교육생과 관광객유치로 지역경제에 큰 보탬이 된다”는 안동시라면 ‘정신문화수도’가 아니라 ‘정신문화부패수도’를 표방하는 것이다. 의미도 없지만 꼭 세우려면 문중 돈으로 해야지 국비, 도비로 한다는 것은 문중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퇴계, 서애, 학봉이 하늘에서 수치스러워 할 것이다.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6-23

전통문화자원·도심 인프라 연계 ‘관광 세계화’ 역량 충분

경북도와 대구시는 ‘2020 대구·경북 관광의 해’를 맞아 서로 의기투합해 ‘국제 경쟁력을 갖춘 상생(相生)관광’을 선도적으로 추진하기로 하고 힘차게 출발했다. 당시 경북과 대구가 공동으로 정한 목표는 4천만 명으로 경북이 3천만 명, 대구가 1천만 명이다.하지만, 올해들어 불과 두 달여 만에 ‘코로나19’ 사태라는 위기 상황에 대구·경북은 물론이고 전국의 관광 시장은 꽁꽁 얼어붙었다.특히, 지난 2월 말부터 지역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속출하면서 지역 경제는 물론이고 관광 산업은 초토화됐다.그로부터 약 4개월이 지난 현재, 전국적으로는 확진자가 지속해서 나오는 가운데 그나마 대구·경북 지역의 확진자 수는 눈에 띄게 줄면서 경북도는 대구시와 함께 추진하기로 한 상생 관광에 속도를 내고 있다.게다가 최근 지역 소상공인의 매출 회복세도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다. 최근 중소벤처기업부가 소상공인 사업장과 전통시장을 대상으로 벌인 매출액 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구·경북의 매출액 감소율은 22.2%로 전주보다 무려 21.1% 낮아졌다. 업종별로는 관광·여가·숙박업의 회복세가 단연 두드러졌다.이런 흐름에 맞춰 경북도와 대구시는 앞서 설정한 ‘상생 관광’이란 어젠다(agenda) 아래 △가장 한국적인 거점관광 △세계로 열린 글로벌 관광 △일자리가 있는 경제관광 △지속가능한 관광시스템 구축 등의 4대 전략과 16개의 공동 과제를 다시 추진하고 있다.이철우 경북도지사와 권영진 대구시장은 민선 7기 출범 직후 ‘대구·경북 한 뿌리 공동 선언문’을 채택, 가장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분야로 관광을 상생협력 1호로 삼은 바 있다.관광산업이 제조업보다 일자리 창출에서 월등히 앞선다는 조사 결과(2014년 한국은행/산업연구원 취업유발계수: 10억 원당 취업자 수-제조업 8.8명, 관광산업 18.9명) 등을 바탕으로 지역 경제에 활력을 가져올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여기엔 대구·경북의 관광 자원에 대한 자부심이 크게 작용했다.이들은 경북의 선비·유교·불교 등 전통문화 관광 자원과 대구의 공연·문화·숙박·쇼핑 등 도심 자원을 연계한 관광산업 활성화에 주목했다. 특히 석굴암과 불국사, 경주역사문화지구, 양동과 하회마을, 부석사와 봉정사에 이어 때마침 도동서원·옥산서원·소수서원·병산서원·도산서원까지 세계문화유산이 되면서 힘도 실렸다. 게다가 코로나19 확산 직전 안동시가 문화체육관광부의 관광거점도시에서 선정돼 분위기가 한껏 올랐다.대구·경북은 지난해 대구·경북은 공동과제로 공동 슬로건, 엠블럼 제작, 추진협의체 구성, 베트남·태국 공동 현지마케팅, 관광의 해 공동선포식 및 국제관광특별전 공동개최, 해외관광객 유치 특별판촉단 운영, 태국 TV방송 공동드라마 제작 등도 진행했다.□ 가장 한국적인 거점관광 개발대구·경북엔 오감을 자극하는 축제와 역사성을 간직한 다양한 문화유산이 많다. 지난해 경북에서 열린 축제는 81개에 달한다. 하지만 올해 상반기에는 코로나19로 인해 대부분이 취소되거나 연기된 상태다. 이에 대구를 비롯한 경북 도내 시·군들은 코로나19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축제 개최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이와 별도로 대구·경북은 우선 가장 한국적인 거점 관광을 위해 지역의 대표 여행상품을 개발에 나선다. 지역의 대표 관광콘텐츠를 활용해 체험·체류형 관광 상품을 개발하고 국내 5대 여행사와 시·도별 대표 여행사의 연계 마케팅도 지원한다.구체적으론 대구·경북 여행상품 개발, 홍보 마케팅 인센티브 지원, 경북의 역사문화, 백두대간 자연생태, 동해안, 농어촌 체험과 대구의 서문시장, 의료뷰티, 근대 골목 등 강점 관광콘텐츠를 결합한다.시·도민의 품앗이도 활성화한다. 대구·경북 축제와 전통시장 방문 단체 여행객을 위한 특별 지원책을 마련하고, 관광을 통한 지역경제 및 상권 활성화를 도모한다. 수도권, 영호남, 자매도시 등 광역투어 버스를 지원하고 문화관광 시장 활성화 프로그램 연계 투어 버스도 운행한다.한국을 대표하는 전통 문화와 인문 가치를 간직한 지역 정체성과 여행 트렌드를 연계한 릴레이 힐링 콘서트를 추진하는 등 인문코리아 힐링 캠프를 연다.대구와 경북에 산재해 있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 투어를 진행한다. 투어 코스는 달구벌 미래유산 코스, 낙동강 인문코스, 동해안 황금 코스, 백두대간 힐링 코스 등으로 나눠 운영한다.□ 세계로 열린 글로벌 관광세계로 열린 글로벌 관광을 위해 대구·경북은 맞춤형 공동 관광 마케팅 추진한다.구체적으로 △한류 콘서트·TV드라마 공동제작 및 마케팅 △공항·항만 연계 특화 관광 상품 개발 △대표축제 집중 마케팅 및 판매 등이다.우선 공동 관광 마케팅을 위해 중화권, 일본, 베트남, 태국 등 국가별 전략을 수립한다. 또 대구·경북 해외 현지사무소를 공동 운영하고 현지 관광 네트워킹도 강화한다.주요 관광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제작을 적극 유치하고 국내 거주 외국인 연예인의 해와 관광객 유치활동에 투입한다.경주 벚꽃 한류, 포항 해변달빛 한류, 안동인문하류 등 릴레이 한류 콘서트를 연다. 외국인이 선호하는 문화관광 축제를 대상으로 공동 홍보 마케팅을 전개하고, 관광사업체 연계로 특화 관광 상품을 판매한다.코로나19로 인해 열리지 못한 여러 축제 가운데 향후 열리는 축제와도 연계할 계획이다.□ 일자리가 있는 경제 관광대구·경북은 관광을 통한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경제 관광에 집중한다.우선 관광객 집중 유치를 위해 대구·경북 관광 그랜드 세일을 추진한다. 아울러 찾아가는 휴가 여행 설명회, 관광기업 및 단체 대상 여행콘텐츠 운영을 통해 일자리를 창출할 계획이다.개별여행객 대상 유치 특별프로그램으로서 쿠팡, 티몬 등 모바일 소셜커머스, 네이버, 다음 등 검색포털과 연계해 여행객의 방문 동기를 유발하는 실질적 인센티브를 제공할 예정이다.불특정다수가 아닌 기업, 협회, 단체, 학회, 학교 등을 대상으로 한 관광정보 제공 및 홍보로 잠재 관광객 유치에 집중한다.대구·경북 통합형 관광 인력을 양성하고 관광벤처, 체험관광 사업자 공동양성, 대구·경북 통합 가이드를 육성해 일자리 창출을 확대한다.□ 지속 가능한 관광시스템 구축대구·경북은 지속 가능한 관광시스템 구축의 일환으로 대구·경북 하나로 투어 패스를 비롯해 통합 여행지원센터와 원포인트 친절 안내소 등을 운영할 예정이다. 또 대구ㆍ경북 통합 관광ㆍ 교통 책자도 제작한다.개별 여행객을 위해 대구ㆍ경북 주요 관광지순회투어 패스를 개발하고 교통, 관광지, 숙박, 음식 등 원스톱 통합이용권도 판매한다.공항, 동대구역, 경주, 안동 등 대규모 관광객 명소나 터미널, 역 등에 대구ㆍ경북 통합 여행지원센터를 운영해 관광객들을 안내한다.대중교통, 자전거 대여, 시티투어 버스, 철도, 항공, 버스 승차 시간이 연계된 교통안내 관광지도를 제작해 배포할 계획이다.□ 포스트 코로나19 관광객 유치 전략 수정 필요대구·경북의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상생(相生)관광’ 정책이 코로나19 발생 이전에 설정한 만큼 ‘포스트 코로나19’에 따른 관광객 유치 전략 수정도 불가피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애초 대구·경북의 경우 대규모 축제와 연계한 관광객 유치 사업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여행 트렌드가 ‘소규모’, ‘힐링’, ‘비접촉’ 등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많은 사람이 찾는 호텔, 리조트 등은 이용객이 감소했지만, 캠핑과 단독펜션 등에는 오히려 이용객들이 늘고 있는 것도 이를 방증하고 있다.이 때문에 전국 지방자치단체들은 ‘포스트 코로나’시대 관광객 유치 전략을 짜느라 벌써 분주하다.대구시는 코로나19 사태로 큰 피해를 입은 이미지 회복을 위해 안정적인 코로나19 방역, 안전한 도시 이미지를 부각해 관광객들이 안심하고 대구에 방문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경북도는 ‘포스트 코로나 지역경제 활성화 아이디어 공모전’ 등을 열어 포스트 코로나 시대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다시 뛰는 경북을 만들어간다는 방침이다./손병현기자 why@kbmaeil.com

2020-06-22

맑고 정직한 신문 경북매일 탐구생활

경북매일신문은 1990년 2월 10일 일간지로서는 경상북도 1호로 신문등록증을 교부받아 준비과정을 거쳐 그해 9월 23일 창간호를 발간했다. ‘맑고 정직한 신문’을 모토로 30년 역사 동안 단 한 번의 결호(缺號)없이 독자와 애환을 함께하며 지역주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왔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정권에 순응하는 언론구조를 만들기 위해 ‘언론통폐합’을 강행했다. 이 과정에서 전국 64개 언론사 가운데 신문 14개, 방송 27개, 통신 7개사를 통폐합하고 언론인 1천여명을 강제 해고했다. 지방신문에는 ‘1도(道) 1사(社)’원칙이 적용돼 1개 언론사만이 살아남았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이후 언론통폐합의 근거가 됐던 언론기본법이 폐지되면서 잃어버린 10년을 보낸 경북에도 지역 만의 언론문화 창달을 위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당시 KBS포항, 포항MBC 등 경북 포항을 본사로 둔 방송국은 2곳이 존재했으나 지역일간지는 전무했다. 매일신문, 영남일보 등 대구지역 일간지가 포항에 주재기자를 두고 지역소식을 전해왔으나 보다 심층적인 취재를 위해서는 경북 최대 도시인 포항에 본사를 둔 지역일간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1989 신문사 모체인 (주)동경의 설립 등기를 마치고 언론불모지인 경북에 지역일간지로서 첫걸음을 내디뎠다.▶ 1990 ‘인간회복의 당위성 지닌 참신문 제작’이라는 머리기사로 20면 분량의 창간호(지령 2호부터는 8면)를 발간했다. 경북지역 첫 일간신문이 마침내 탄생한 것이다.▶ 2004 대구∼포항고속도로 개통에 앞서 경북매일이 주최한 전국 인라인 마라톤대회가 성황리에 열렸다는 소식을 전했다. 당시 대구∼포항고속도로 개통은 ‘교통오지’였던 포항에 새로운 시대를 열어줬다.▶ 2007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전신인 신문발전위원회로부터 신문발전기금 우선지원대상사로 선정되며 정부가 진행하는 각종 언론관련 사업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2011 제호를 다시 한 번 경북매일신문에서 경북매일로 변경한 뒤 신문사를 상징하는 CI도 현재의 모습으로 바꿨다. 사세가 확장되면서 새로운 사옥의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고 신사옥 착공준비에 돌입했다.▶ 2012 지역신문발전위원회에서 선정하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우선지원대상사로 선정됐다. 이후 2016년까지 5년 연속으로 우선지원대상사로 선정되며 기획취재와 시민기자의 필진 활용 등 각종 사업을 지원받았다.경북매일은 창간 이후 30년간 경북 지역사회와 함께 호흡하며 권력을 감시하고 지역민의 알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공정하고 신속, 정확한 보도를 통해 독자와의 신뢰관계 형성에 힘쓰고 있다.▶ 1997 국내는 물론 외국에까지 포항과메기를 알리는 신호탄이 된 제1회 포항과메기축제의 개막을 알리는 소식을 전했다. 과메기 축제는 이제 포항 외에 서울 등 전국 주요도시와 외국에서도 열리고 있다.▶ 2000 남북 정상이 만나는 소식을 특집으로 꾸몄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만남으로 인해 전세계 시선이 한반도로 집중됐고 양측은 핫라인을 설치하기로 했다는 부제가 눈길을 끈다.▶ 2004 인터넷 경북매일 홈페이지를 개설했고 같은해 11월 1일 제호를 경북매일에서 경북매일신문으로 변경했다. 2005년 2월과 9월 한국신문협회와 한국ABC협회에 잇따라 가입하며 지역일간지로서 입지를 다졌다.▶ 2009 땅속에 묻혀있던 ‘포항 흥해읍 중성리 신라비’ 발견 소식을 최초로 보도했다. 이후 중성리 신라비는 국보 제318로 지정돼 문화창달에 일익을 담당했다.▶ 2013 안동지역 공무원들이 도선운항에 사용될 연료를 상습적으로 빼돌린다는 내용의 보도를 심층 취재를 통해 단독 보도했다. 이 보도로 10여명의 공무원들이 입건되며 지역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2017 1월 15일 발생한 포항지진의 원인 규명에도 앞장섰다. 경북매일은 첫 지진이 발생했던 11월부터 여진이 지속됐던 이듬해 2월까지 관련소식을 연속성있게 다루며 지역민들의 애환을 함께 나눴다./박동혁기자 phil@kbmaeil.com

2020-06-22

화가 꿈꾸던 소년, 대구 예술계의 ‘키다리아저씨’로

그를 만나기 위해 한국의 집으로 찾아간 날, 잔디가 깔린 마당에는 분홍빛 차양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강렬한 여름 햇살을 거르기 위해 쳐진 차양 사이로 키 큰 은행나무 이파리가 흔들렸고, 마당은 한바탕 잔치를 벌일 듯 흥겨워 보였다. 저렇게 분홍빛으로 차양을 드리우기가 쉽지 않은데 역시 미적 감각이 탁월한 그의 안목이 돋보였다. 그 차양 아래 앉아 집을 둘러보니 한옥 기둥에 걸린 주련(柱聯)에 눈길이 갔다. 글씨는 마치 춤을 추듯 한옥의 기둥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대구의 중심인 종로에 품격을 더하며 날아갈 듯한 처마를 올린 한옥인 ‘한국의 집’을 지은 이는 대구 예술의 후원자 역할을 자처하는 신홍식씨였다. 그에게 주련에 대해서 물어보았다.“추사의 글씨지요. 글씨를 모방하기는 쉽지만 저 글씨 한번 보세요. 저건 추사 아니면 누구도 쓸 수 없는 거예요. 추사는 세 번이나 유배를 갔는데 그때마다 글씨가 많이 달라졌어요. 저 주련은 여덟자 병풍으로 된 한시를 가지고 만든 거예요. 이 종로 골목에 전각을 잘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각자를 했어요.”한국의 집에는 주련 말고도 소소하게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많다. 근대골목투어 제2길인 진골목은 대구의 거부였던 정병국의 집이었던 정소아과를 비롯하여 달성 서씨들이 세거(世居)하던 곳이다. 정병국의 사촌인 서재균이 약 100여 년 전에 지은 한국의 집 안채는 살릴 수 있는 것은 모두 살려서 리모델링을 했다. 당시만 해도 귀하던 실내 화장실과 굵은 대들보, 아궁이, 마당의 우물 등은 그대로 두었다. 진골목을 낀 담장에는 정조대왕이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는 화성(수원)현륭원으로 장엄한 행차를 하는 모습을 그린 ‘정조대왕 화성반차도’가 있다. 퇴색을 막기 위해 1300도의 고열에 두 번씩 구워 67장의 도자기에 전사(轉寫)한 이 그림에는 약 1천500여 명의 사람과 570마리의 말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모습이 전부 달라 가치를 더한다. 이 힘들고 어려운 작업을 해서 골목 담에 전시한 내력을 그에게 물었다.“우리 역사에서 문화가 가장 융숭했던 게 영·정조 시대잖아요. 이 그림은 그때의 화려한 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 지금은 박물관 수장고에 들어 있으니 일반 사람들이 접하기가 무척 어렵죠. 전 세계적으로 돌아봐도 이 그림처럼 화려한 그림이 없어요. 이런 대작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죠.”한참 그림에 대한 설명을 하던 그가 갑자기 일어서더니 작은 박스 하나를 들고 왔다. 박스를 열자 동그란 접시에 화성반차도 그림 한 부분이 그려져 있었다. 화성반차도가 그려진 컵과 함께 기념품으로 만든 것이었다. 갑자기 그림이 내 안으로 훅 들어오는 느낌이었다.사업을 잘 하던 그가 갑자기 예술 쪽으로 인생을 바꾼 것은 평생 돈벌이에 매이기 싫어서였다. 마침 그가 납품하던 금성사와 오리온 전기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던 무렵 그도 하던 사업을 정리했다. 뭘 할까 궁리하던 그에게 공장이 있던 대구 달서구의 어려운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우선 매달 20kg짜리 쌀 10포를 사서 이웃돕기에 나섰다. IMF 때라서 어려운 사람들이 많아질 때였다. 그렇게 시작한 쌀 기부는 현재 매달 80포까지 늘어나며 그에게 ‘쌀 배달 아저씨’라는 별명을 선사했고, 그 공로로 2017년 대한민국 자원봉사상 대상인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상했다.그는 어릴 때 화가를 꿈꿨다. 그러나 꿈을 이루고 사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다른 길로 가서 가지 못한 길을 그리워하며 산다. 그도 사업을 그만두고 불우이웃돕기를 시작하면서 어릴 적의 꿈으로 눈을 돌렸다. 새롭게 화가의 길을 걷기는 어려웠고, 화가들을 돕기 시작했다. 화가들은 작업실이 필요했지만 꿈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처음에는 더 이상 기계가 돌아가지 않는 공장을 비워줬다. 그러나 공장을 작업실로 쓰기에는 환경이 녹록치 않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성안오피스텔의 한 층을 통째로 구입하게 되었고 그곳을 화가들을 위해서 무료로 내놓았다. 20개의 방이 있는 560평의 공간이었다. 작업실이 필요했던 화가들이 그곳으로 모여 들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대구 예술계의 후원자가 되어가고 있었다.그러면서 그는 그림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화가의 꿈은 후원자와 컬렉터로 변형되어 이루어가고 있었다. 현재 그가 소장한 그림은 이응노의 작품을 비롯하여 장욱진, 김창열, 이대원 등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그가 100년이 넘은 한옥을 구입했을 때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을 시민들이 볼 수 있도록 한옥미술관을 지을 구상을 했었다. 그러나 막상 건축을 시작하자 예상치도 못했던 것들이 발목을 잡았다. 건물 지하에 넓은 미술관을 짓고자 했던 그의 꿈은 무산되었지만 언젠가는 한옥에서 상설전시를 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예술작품은 그늘에 있을 것이 아니라 밝은 바깥으로 나와야 가치를 더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그는 그림뿐만 아니라 동시에도 애착을 가지고 있다. 현재 대구의 대표적인 아동문학회인 혜암아동문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2019년에 동시 전문 계간지 ‘동시발전소’를 발행했다. 전국에서 동시 전문지는 ‘동시마중’과 ‘동시먹는 달팽이’, ‘동시발전소’ 3개뿐으로 대구라는 지방 도시에서 동시 전문지를 발행하기가 쉽지 않은데 동시에 대한 애정이 이 일을 이루게 한 것으로 보인다. 동시 작가이기도 한 그는 다른 지역에 비해 특히 동시가 활성화된 대구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그도 그랬지만 지금 어른 세대들은 어릴 때 변변한 공연 문화를 접하기가 어려웠다. 고작해야 영화를 보는 것이 문화생활의 전부였고, 그마저도 도시에 살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어릴 때부터 문화예술을 접하고 자란 사람은 악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지역에서 조금만 후원해 주면 문화예술이 활성화될 수 있는데 신씨는 자신이 그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평생 업으로 알고 힘닿는 데까지 후원할 생각입니다.”100년은 넘었을 듯한 은행나무 아래에서 동시를 말하는 그는 행복해 보였다.“대구는 우리나라 동시의 태동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동시가 발전해 왔죠.”어쩌다 보니 이런저런 후원도 하고 자리도 맡게 되었지만 그는 역시 동시 작가였다. 문화예술계의 후원을 업으로 생각하는 일은 쉽지 않다.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고 잘 살기에만 골몰하는 세태임에도 신씨는 그런 욕망에서 한걸음 비켜나 있는 듯이 보였다.은행나무가 한옥의 처마와 어울려 깊은 그늘을 드리우고 허공의 분홍 차양이 한들한들 바람을 만들어내는 동안 마당에는 시민들이 차츰 들어와 앉았다. 카페를 하는 안채의 손길도 덩달아 분주해졌다. 안채 옆에는 전통혼례 때 사용하는 가마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아궁이가 있는 처마 아래에는 목조건물의 화재를 막기 위한 드무가 녹이 슨 채 놓여 있었다. 현재와 과거가 묘하게 공존하는 공간, 그가 만들고 싶은 삶인지도 모른다.천영애시인“이제 우리나라도 잘 살잖아요. 나도 나이가 들고, 언제까지 쌀 봉사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앞으로는 청소년들에게 문화로 봉사하는 길을 찾아보고 싶어요. 문화는 지금 심각해져 가는 사회적 갈등을 풀어낼 수 있는 대안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이라도 문화적 환경을 조성할 여건을 만들어가야 해요. 그러면 사람들의 인성도 좋아질 거고, 사회적 갈등도 해소될 거라고 생각해요.”은행나무 아래에는 그가 직접 만들었다는 공예작품이 놓여 있었다. ‘I LOVE’를 형상화한 작품이었다. “아버지가 석물 공장을 했는데 나도 아버지 솜씨를 이어받았는지 저 정도는 만들 줄 알아요.” 수줍게 웃는 그의 눈가에 자잘하게 주름이 잡히면서 천진스러운 아이의 표정 같은 웃음이 묻어났다. 예술가로 살지는 못했지만 예술컬렉터로, 예술후원자로, 대구의 기부자로 살아가는 삶이 그를 만족스럽게 하는듯했다.본지가 창간 30주년을 맞아 새롭게 연재할 ‘시인 천영애의 대구·경북人’은 ‘사람’을 중심으로 지역의 문화와 예술, 사회와 경제를 밀도 있게 들여다보고자 기획됐다. 필자인 천영애 시인은 대구문학상 수상자로 ‘무간을 건너다’ ‘나무는 기다린다’ 등의 시집을 냈고, 다양한 매체에 문화예술과 관련된 글을 기고하고 있다.

2020-06-22

희망의 손길을 전하며 지역민들의 힘이 되어주는 경북매일신문을 응원합니다

문재인 대통령경북매일신문 창간 30주년을 축하합니다.경북매일신문은 ‘맑고 정직한 신문’의 깃발을 내걸고 창간하여 지난 30년 진실하고 공정한 보도에 힘써왔습니다. ‘경북지역 제1호 등록 일간신문’으로 향토언론의 첫 씨앗을 뿌렸고, 다양한 문화사업으로 지역민의 삶을 풍성하게 해온 경북매일신문 기자들과 임직원들께 감사드립니다.창간 이후 지역의 자부심을 높여준 경북매일신문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 ‘경북 사람’ ‘경북 문학기행’ ‘한 편의 시, 하나의 풍경’과 같은 기획기사를 통해 도민들은 경북의 역사와 가치, 문화에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경북의 명품사과와 우수 농산물의 해외홍보, 영일만항 수중환경 정화활동과 치어 방류사업 등을 통해 지역발전과 환경보호에도 큰 기여를 해 왔습니다.경북매일신문은 이제 ‘혁신’으로 새로운 30년을 열어가고 있습니다. ‘한손 뉴스’를 만들어 스마트 폰으로 경북도민은 물론 세계와 만나고 있으며, SNS상에서 기사를 편하게 볼 수 있도록 사진과 동영상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독자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경북매일신문을 응원합니다.경북매일신문은 코로나로 큰 어려움을 겪은 대구·경북 지역민들의 아픔을 함께 나눴고, 연대와 희망의 손길을 곳곳에 전하며 지역민들의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지역민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려는 여러분의 사명감이 오늘의 경북매일신문을 있게 한 힘입니다. 도민들께서도 경북매일신문의 ‘맑고 정직한’ 마음을 항상 믿고 지지할 것입니다. 지역에서 더 큰 자긍심을 만들어주시고, 존경받는 언론으로 성장하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대한민국 대통령 문 재 인

2020-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