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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고 서 있는 곳서 최선 다하리

의외로 담담했다. 지난 4월 총선 대구경북에서 미래통합당 공천을 받은 후보자 중 유일하게 낙선한 이인선 전 경북도경제부지사를 만나러 갈 때만 하더라도 아직은 낙담이 크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막상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눠보니 여유로움이 넘쳤다.대구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와 석사·박사 과정까지, ‘식품미생물학과’라는 실용학문으로 이학박사를 취득한 후에 계명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던 이 전 부지사는 여성으로서 대구경북에서 적잖은 자취를 남겨 회자되는 얘기가 많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자문위원,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ST) 원장을 거쳐 계명대학교 부총장을 지냈으며, 2011년 경상북도 정무부지사에 취임하고 4년 동안 정무와 경제부지사를 역임했다. 학계와 정계에 몸담는 동안 열정적으로 도전, ‘일벌레’라는 별명을 얻기까지 했다.-지금 어떤 일을 하시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세요.“교수와 미생물학 면역학 연구자로 출발했지만 지금은 지역에 국가기관을 만들어서 기업과 학생들을 지원하고 자원을 키우는 일을 하고 있어요.”기업이 잘 되어야 청년들이 고향을 떠나지 않고 지역에서 둥지를 틀고 살 수 있다는 확고부동한 의지가 그녀만의 아우라를 내뿜는다. 학생들을 가르치던 학자로서의 면모와 정계 일선에서 쌓아온 내공이 그녀의 전체적인 커리어를 형성해 준 느낌이었다. 지역협력연구소장으로 10년간 나라 일을 하고 대구과학기술원 원장을 지내며 대구시와 기업, 학교의 컨소시엄으로 전방위적인 일을 하며 늘 지역사회에 도움을 주려고 애썼던 그녀다.그 노력을 평가받아 2011년에 과학기술유공훈장을 수상했다. 할아버지 고(故) 이준석 지사도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며, 나라 일에 헌신하라는 운명을 타고났나 보다고 한다. 국제소화기암학회 젊은 과학자상과 제1회 대구시 여성대상, 여성공학인 공공부문 대상, 한국지방자치경영대상 지역공헌특별상 등 수상 경력은 다채롭기 그지없다. 대구경북과학기술원장, 제4대 대구경북경제자유구역청장 등 이력도 화려하다.제21대 총선에 출마, 역전된 결과로 좌절하고 말았지만 그녀는 언제든 불러주면 국민을 위해 일을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당찬 결의를 보였다. 2019년에는 산업부에서 주관한 전국경제자유구역 성과 평가에서 개청 이래 처음으로 최우수 등급을 달성하고, 한국지방자치경영대상에서 지역공헌특별상을 수상하는 등 대구·경북 경제자유구역 발전에 기여한 것을 보람으로 생각한다고 소회를 피력했다.-좌우명이 무엇인가요“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는 말이 있죠. 중국 당나라 임제선사의 언행을 담은 ‘임제록(臨濟錄)’에 나오는 말인데, 수처작주는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는 뜻이고, 입처개진은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모두 진리의 자리이니,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하겠다는 뜻입니다.”보수적인 성향이 짙은 지역에서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경제 부지사를 지낸 관록의 이 전 부지사는 아직도 에너지가 넘쳤다. 대구·경북민들이 맡기는 것이면 무슨 일이든 다 해낼 각오가 되어 있다고 당찬 의지를 내보였다. 대학과 공직에서의 오랜 경험을 지역구와 국가를 위해 더 낮고 뜨거운 가슴으로 사회에 환원하고 싶다는 뜻도 숨기지 않고 쏟아낸다. 서로 성격이 다른 구미의 창조경제핵심센터와 포항의 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히든챔피언벤처가 탄생하기를 기대하며 청년들에게 많은 일자리를 주려는 꿈을 안고 열심히 노력했다는 그녀의 꿈은 아직 유효하다.-자신의 꿈에 이르기 위해 청년들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의 꿈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이 전 부지사는 현대의 청년들 사이에 맴돌고 있는 ‘3포’를 무척 걱정했다. 3포란 취업을 포기하고, 결혼을 포기하고, 출산까지 포기하는 심각한 상황을 이르는 말인데, 지금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취업이고 경제적인 바탕으로 홀로 설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코로나19로 어려움과 곤궁함에 빠진 청년들을 진심으로 염려하기도 했다. 이 부지사는 말한다. 자신이 스스로를 일으켜야 한다고, 세상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살얼음판인 것을 한시도 잊으면 안 된다고. 자식을 위해서 목숨이라도 던지고 싶지만 어머니 아버지도 대신 살아줄 수가 없는 게 삶이라고 조언한다. 삶이 모질고 가혹한 것은 대타를 허용하지 않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라고 거듭 역설한 그녀는 목표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매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특히 여성들이 더 강해져야 한다고 했다. 자신 역시 여성이어서 받았던 불합리한 면을 언급하며, 이 사회는 아직도 여성에게 불신을 갖고 있으며, 여자와 남자 사이의 차이를 100%라고 꼬집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여성들이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삶 자체가 생존경쟁의 연속이고, 세상은 가차 없는 전쟁터이니 유리천장을 깨기 위해서는 여성이 가일층 스스로를 가꾸고 키워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어떻게 해서 지역사업과 정치 쪽에 발을 들이게 되었나요.“의과대학 면역학 연구원을 맡은 것이 시작이었어요.”이 전 부지사는 이과 학문이 기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책적으로 연결돼 공직에 들어서게 되었다. 식품가공학과 교수였던 그녀는 대구과학관 유치, 생산기술연구원, 기계연구원, 정보통신연구원 등 수목원에서 테크노폴리스까지 13km의 긴 터널을 뚫으며 20년간 공직 관련 길을 걷게 된다. 그 과정에서 지역을 위해 헌신하고 사는 게 자신의 일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레 접목됐다. 그런 마음가짐이 그녀를 여성 최초의 전통미생물자원연구센터장과 계명대학교 대외협력부총장을 지내게 했다. 또 여성 최초의 대구경북과학기술원장과 대구경북경제자유구역청장으로 일하며 매순간마다 온 힘을 다했다.-총선에서 홍준표 의원에게 졌는데 그때 어떤 마음이었어요.“부족했기에 패배했을 거라 생각했어요. 운도 없었고… 여성이어서 강력하게 주장하지 못하고 총선에서 졌다는 원망을 들을 때는 솔직히 약간 섭섭했었지요. 전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대구 선거 지형이 아직은 여성을 약하다고 판단하는 인식이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이제 바뀌었으면 합니다.”무소속으로 출마해서 당선되면 다 받아주는, 기준 없는 당권의 체제가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한 그녀는 말 속에 총선 패배의 아쉬움이 묻어났다.-교수직을 가장 좋아한다고 하셨는데, 정치인이 아니라 미생물학을 연구하며 학자로 살다 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으셨는지요.“그렇게 살 수도 있었는데, 운명의 흐름이 나를 정계로 이끌었어요.”-지금 다시 연구자로 돌아간다면.“다시 그쪽으로 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어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학생들이 벤처 창업이나 기업에 취업을 많이 할 수 있도록 지역에서 헌신하는 겁니다. 그 분야는 다른 일보다 더 잘 할 자신도 있구요.”내강외유(內剛外柔)! 그녀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하는 동안 이 말이 서너 번 떠올랐다. 최초의 여성 부지사로 테크노폴리스 터널을 뚫는데 필요한 예산타당성을 따낼 수 있었던 것도 내면에서 조용히 끓고 있는 강한 힘의 작용으로 여겨졌다. 온유하면서도 차분하게 한 걸음씩 내디디며 먼 일까지 내다보는 직관으로.-자신의 자리에 어떤 기억을 남기고 싶으세요.“요즘 그간의 발자취를 자주 돌아보며 많은 생각을 하고 있어요. 아직은 모자라지만 정말 지역을 위해 최선을 다해서 잘 살았다는 말을 들어야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대구 경북도 이제 지역에서 평생을 부대끼며 산 인사들을 좀 더 포용해 줬으면 합니다.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은 임기 동안 머물다 가버리면 그만이지만 지역 출신 일꾼들은 다르잖아요. 우선 눈에 보이는 화려한 스펙이나 배경만을 주목하기보다 정말 제대로 일을 하는 사람을 불러서 아낌없이 능력을 활용하고 발휘할 수 있도록 밀어주는 지역사회 전반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제대로 된 일꾼을 놓치지 않는 지역사회 풍토가 조성되었으면 좋겠다는 이인선 전 부지사. 그녀는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면역학교실 연구원으로 있을 때 암 예방 연구와 장기이식의 조직적합성을 10년간 연구했다. 함황식물인 브로콜리, 양배추에서 추출한 예방 물질을 췌장암에 걸린 햄스터에 먹여서 암 예방 효과를 살피는 연구였고, 현재 캐비신이란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다. 어떤 식품이 암으로 표식되기까지 8년이 걸리는데 1992년에 우리나라와 일본재단에서 15명을 각 분야별로 선정한 선진연구 교류에 선발돼 암 예방 연구에 18개월을 보낸 그녀가 자신만의 연구를 계속했더라면 어땠을까.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면서 그런 생각이 문득 든 것은 그녀가 지역사회와 정치에 쏟은 열정이었더라면 암 연구 분야에서 더 큰 업적을 쌓았고 빛났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0-11-25

조선 최고 예언가로 통하는 남사고, 그리고 독립운동가 주진수와 만화가 이현세

울진의 옛 이름이 선사(仙69CE)인데 중국 한나라 무제 때 장건이 선사를 타고 은하수에 올라 직녀를 만나서 베틀을 괸 돌을 얻어왔다는 고사다. 이런 신비한 이름의 울진은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자연환경으로 천년 석회석 자연동굴인 성류굴이 왕피천 옆에 바싹 붙어있어 신비로움을 더한다. 그리고 높고 깊은 계곡의 줄기만큼이나 얽힌 인생에 희망을 던져주는 예언을 한 격암 남사고의 생가와 만화가 이현세의 벽화거리가 있다.#. 신비한 울진 성류굴과 조선의 예언가 남사고우리나라는 제주도와 태백산을 중심으로 천년동굴이 분포되어 있다. 제주도는 화산으로 인한 용암동굴이라면, 울진의 성류굴은 석회암 동굴로 이루어져 있다. 태백산맥의 석회암지대(카르스트지형)가 물에 녹으면서 생긴 것인데 단양의 고수동굴이 대표적이고 영월의 고씨동굴, 북한 영변에 동룡굴, 삼척의 환선굴, 울진은 성류굴이 같은 지형으로 형제같이 분포되어 있다.울진의 성류굴은 왕피천 물이 흘러들어 석회암 지형에 침식작용을 일으켜 만들어진 동굴로 1963년에 발견했다는데 잊혀졌다가 알려진 것이 1963년이란 것이지 신라시대부터 있었다는 명문이 있어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근남면에서 왕피천을 따라 성류굴 가는 길에 플래카드가 바람에 나부끼는데 필자가 살고 있는 경주 글씨가 보여 한 번 더 보게 되었다. “축 김진영 경주시 5급(사무관)진급 노음초 36회, 제동중 3회 동기회” 삭막한 도시에서는 볼 수 없고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다니다보면 000자녀 박사. 000아들 사법시험합격. 003남 00장군진급 등등으로 서로 격려해주고 기뻐해주는 인정이 남아있다. 중소도시 학교 주위에는 00회 졸업 00합격, 00 시장, 00 국회의원 당선 등등이 심심찮게 붙어있다.왕피천 건너편에서 성류굴을 살펴보니 물가에 높다한 바위산이 우뚝 솟아 온 가을 햇살을 받고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사람 구경하기가 어렵다. 매표소에 두 남녀 관리인 외는 아무도 없는 성류굴에 안전모 쓰고 혼자 들어갔다. 중국의 동굴같이 배를 타고 넓은 동굴 안을 보는 것이 아니라 미로 같은 협소한 동굴을 둘러보면서 문득 임진왜란 때 이 동굴에 피난민들이 들어갔다가 왜군들이 불 지르고 입구를 막아버려 고통스런 죽음을 당한 그 찢어지는 참담함이 상상만으로도 아픈 고통이 느껴진다. 그리고 임란 때 근처 절에서 불상을 이 동굴에 모셔두었다고 성류굴(聖留窟)이라 했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울진에 신라의 봉평비가 존재하듯이 동해안 강릉(하슬라주)까지 신라의 영역이라 진흥왕(540~576년)이 성류굴에 다녀갔다고 석각해놓았다. “560년 6월 잔교를 만들고 뱃사공을 배불리 먹였다. 여자들은 교대로 보좌하며 펼쳤고, 진흥왕이 다녀가셨다. 세상에 도움 된 이(보좌) 50인이었다. (庚辰6月日 柵作8257父飽 女二交右伸 眞興王擧世益者五十人)”이 성류굴이 생성연대는 공룡이 지구상에 출현한 2억5천만년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월송정과 마찬가지로 신라 화랑 4명과 신선들이 신비한 절경에 놀았다고 선유굴로도 불린다. 삼국유사에는 신문왕 아들 보천 태자가 장천굴(掌天窟)에서 수구다라니경를 암송했는데 2천년 된 굴의 신이 불교에 감화되었다. 그 보천태자가 머물렀다고 해서 성류굴이라 했다.성류굴을 나와 왕피천 건너 산속 수곡리로 들어가면 격암 남사고 생가터와 유적지가 나온다. 여기도 유물관에 관리인 한 명 외는 아무도 없다. 남사고의 생가터로 추정하여 집을 짓고 서원과 전시관을 그 앞에는 공원을 조성해 놓았는데 생가터는 아무래도 저 산 밑이지 이 곳은 아닐 것이다.세상이 어지러우면 비기와 예언서 등이 나온다. 남사고가 살았던 조선중기는 거센 파도가 속으로 일렁일 때이다. 이 시기에 태어난 남사고(1509~1571년)는 유학자로써의 소양을 갖추고 그 밝은 지혜를 바탕으로 예언서를 쓴 것이다. 시골의 향시에는 합격했으나 대과에는 합격하지 못하자 “자네는 남의 운명은 잘 알면서 자기운명은 알지 못하고 해마다 과거시험에 헛되이 나가는가.” 그는 웃으면서 “사심(私心)이 움직이면 술법도 어두진다네.”이처럼 예언에는 능통했지만 자신의 사익(私益)을 위해서는 사용하지 않았다.#. 독립운동가 백운 주진수와 만화가 이현세의 벽화거리우리나라 마을이름을 보면 유식하게 매화마을을 매곡으로는 많이 사용하지만 울진 매화면은 아예 알기 쉽게 매화면(옛 원남면)으로 해버렸다. 매화면 소재지로 들어서면 내륙으로 들어와 있는 산골 마을이라 아늑하다. 평화로운 시기라면 정을 나누며 오순도순 정겹게 살 것인데 나라 잃으면 모든 것이 산산조각난다. 이곳 매화에는 울진교육의 요람이고 항일운동의 발상지이다. 백암 주진수(1878~1936년) 애국지사는 울진(죽변면 후정리 매정동)에서 태어나 일생을 교육과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였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1907년 지역유지들과 울진에 매화만흥학교를 설립하였고, 신민회 강원도 책임자로 활동하며 사동, 영해, 안동, 강릉 등에 학교 설립을 도왔다. 김구 선생과 조선총독부와 대립되는 도독부를 설치하여 활동하다 총독암살사건(일제의 조작)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의 옥고를 치루고 만주로 건너가 이시영, 이상룡 선생들과 신흥강습소를 세우고 만주 3·1만세운동을 이끌었다. 특히 김좌진, 이범석 장군의 참모로 청산리대첩에서 17명의 일본군을 죽이는 공을 세운다. 1926년에는 고려혁명당 중앙위원으로 당을 이끌기도 하였다. 그토록 열망하던 조국의 독립은 보지 못하고 1936년 59세에 주창열, 주창근, 두 아들을 남기고 만주에서 생을 마쳤다.가을햇살 받은 매화면 소재지 벽에는 매화대신 예술이 꽃피어 있었다. 천천히 걸어가면서 만화를 영화 보듯이 살펴보았다. 마치 영사기 돌아가듯이 발걸음 속도대로 필름 장면이 바뀐다. 이현세 고향이라고 만들어 놓았는데 부모님 고향이고 자신은 엄마 뱃속에서만 고향이었다. 울진에서 살 방법이 없어 어머님이 포항 변두리 농촌에 이사하여 농사짓다가 한 많은 사라호 태풍 때 농경지가 휩쓸려 더이상 대안이 없어 경주에 정착한다. 미술대학을 가려했으나 색약으로 쓰라린 가슴안고 포기하고 만화가의 길로 접어들어 ‘공포의 외인구단’, ‘까치’ 등으로 천대 받던 만화가 일약 대중의 마음을 뒤흔드는 위업을 이루었다.#. 가을을 슬프게 하는 말들한 분야에서 정상에 오르면 말이 진리가 되고 철학이 된다. 벽에 그려진 만화 대사 중에 걸음을 멈추게 하는 몇 문장들이 보인다. “벽을 눕히면 길이 된다.” “네가 원하는 곳에 집중해” “아부지(아버지)요 김유신이 더 씨(쎄)지요?” 그러자 아부지는 “끝까지 살아남는 놈이 씬(센) 놈이다.” “이 노무 세상에서는 살아남는 놈이 씬(센)놈이다.” 다음 문장에서 억센 경상도 특유의 특질이 필자를 묘한 생각으로 끌어간다. “주디(입) 닥치라 마! 돈은 인자부터 천지 빼까리(엄청 많이 무한대)로 들어올끼다.”“천지 빼까리” 이 말은 경상도 사람들이 옛적에 하던 말인데 올 가을 나훈아 콘서트 때 소크라테스를 갖고 논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노래 가사를 던지면서 이 말이 회자되었다. 보통사람이 공인된 방송에서 했다면 역겹지만 어느 단계에 들어간 사람은 어떤 말을 해도 천박하게 안보이고 설득력이 있다. 맞아 가면서 터득하여 챔피언 된 권투선수 홍수환은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였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일반 사람들에 각인되는 것은 한 구절이다. 올 가을에 생을 마감한 삼성 이건희 회장은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꾸라”만 남았다.이 가을에 유독 슬프게 하는 것은 코로나도 있지만, 국가를 개인 기업으로 활용한 이명박 전 대통령이 17년 감옥 가면서도 창피하고 송구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나를 가둘 수는 있어도 진실은 가둘 수 없다”고 진실을 모독 한 것이 슬프다. 그래서 MB회고록을 본 노회찬은 “786쪽 어디에도 철학과 고뇌는 없고 변명과 합리화만 넘쳐나는군요. 회고록은 이렇게 쓰면 안 된다는 소중한 교훈을 주는 책, 돼지고기 한 근 값인데 돈 주고 사서 볼 책은 아닙니다”라 했다. 정치인 아닌 고건, 안철수, 반기문 등등 다크호스로 잠시반짝이다 사라지는 것이 대선 지지율인데 현직 윤석열 검찰총장이 대선 지지율이 높다고 난리다. 자기는 부하가 아니다 해 놓고 아래 검사들은 부하로 취급한다. 대전 지검에 갈 때는 때지어 마중 나온 검은 양복 입은 검사들 보니까 보스 마중 나온 부하 같고 “등 두드려주려 왔다”고 하는 말과 행동이 꼭 조폭 두목 같고 안마 총장 같아 슬프다. 국민을 불모로 정의를 부르짖는데 자기들 식구들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선별적 고무줄 정의하는 검사들도 슬프다. 1963년 JP(김종필)는 일본 오히라 마사요시(大平五芳) 외상과 비밀회담할 때 독도를 “손톱만 한 섬, 차라리 폭파시켜 없애버립시다”에서는 섬뜩한 슬픔을 느끼지만 그래도 “자의 반 타의 반”이란 유명한 말을 남기면서 정치는 허업(虛業)이라며 “국민들에게 나눠 주는 것이 정치인의 희생정신인데 정치인이 열매를 따먹겠다고 하면 교도소 밖에 갈 때가 없다”는 바른말을 했다.50년 전(1970년)에 하루 16시간 재봉틀 미싱공들이 시급 100원 받을 때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며 한국노동운동의 불꽃을 피우고 약자를 사랑하고 분신한 22살 전태일의 외침이 아직도 이어지는 현실이 슬프다. 대선패배를 불복하는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도 슬프지만, 전 재산 29만원 뿐이라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뻔뻔함도 슬프고, 4·15총선을 부정선거였다고 외치는 사람들도 슬프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강남에 건물주 되는 것이 꿈”이라는 청소년들이 슬퍼지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슬픔을 딛고 희망을 안고 살아야 한다. /글·사진= 기행작가 이재호

2020-11-24

새싹들의 코로나 극복 희망메시지

경북도와 경북도교육청이 주최하고 경북매일신문이 주관한 ‘2020 경북어린이 백일장 및 사생대회’ 입상자가 19일 발표됐다. 경북어린이 백일장 및 사생대회는 1993년 시작돼 27년간 이어온 가장 오래된 경북 지역 어린이 백일장·사생대회로 경북의 어린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 이번 경북어린이 백일장 및 사생대회는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 온라인으로 진행됐다. 2천여 명의 참가 어린이들은 운문과 산문, 그리기 3개 부문 중 한 부문을 선택해 ‘코로나19 극복 내가 꿈꾸는 내일’을 주제로 작성하거나 그린 원고와 그림을 지난 2~13일 온라인 또는 우편으로 접수했다.백일장과 그림에는 코로나19 상황을 함께 이겨 내자는 희망 등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하는 메시지가 담긴 작품들이 출품됐다고 심사위원들은 전했다.운문 부문 최우수작으로는 김예원(구미 문성초등 4년) 어린이의 ‘지구촌이 하나 된 날’이, 산문 부문에서는 김소민(포항초등 4년) 어린이의 ‘내가 꿈꾸는 내일’이 각각 대상으로 선정됐다.최우수상은 운문 부문 황지훈(안동강남초등 6년)·류영찬(포항양덕초등 3년), 산문 부문 허지유(장성초등 6년)·하윤희(모천초등 2년) 어린이 각각 수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우수상에 강동헌(영천중앙초등 3년) 어린이 등의 작품 58점이 선정됐다.사생대회 부문에서는 이규민(포항양덕초등 5년)·송채윤(금릉초등 2년) 어린이가 대상을 받았으며 김채현(선주초등 6년)·김은성(경산압량초등 4년)·황지유(연일초등 2년)·이시현(왜관동부초등 1년) 어린이가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그밖에 강민주(왜관초등 6년) 어린이 등 316명은 우수상을 수상했다.사생대회 대상 이규민(포항양덕초 5학년)‘우리 함께 코로나를 이기는 그날’사생대회 대상 송채윤(금릉초 2학년)‘코로나가 없는 달나라’백일장 운문 대상 김예원(구미 문성초 4학년)‘지구촌이 하나 된 날’오늘까지만 아픈 날슬프고 마음 졸이며 사는 날오늘까지만우리 서로를 모르고 사는 날오늘까지만하나이지 못한 날가족이지만가족일 수 없던 날친구이지만친구일 수 없던 날오늘까지만 그런 날내일이면우리 모두 함께 하는 날모든 지구촌이 하나 되는 날지구촌의 모두가 아파한오늘딱! 오늘까지만내일이면지구촌 모두와웃음지을 수 있는 날지구촌은 하나인데서로를 미워할 수 밖에 없던오늘서로 경계하고 막을 수 밖에 없던오늘이제 내일이면한 마음으로받아들여 줄 수 있네이제 내일이면한 곳을 바라볼 수 있네내일이면같이 축제도 할 수 있네내일이면밥도 같이 먹고 함께 할 수 있다네내일이면 모두가 기다리던지구촌 축제의 날이라네지구촌 모든 사람들의행복한 내일백일장 산문 대상 김소민(포항초 4학년)‘내가 꿈꾸는 내일’4학년이 되는 3월에 학교에 가지 못했다. 코로나19 때문이다.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도 사라졌다. 새로운 선생님과 다시 만나자고 한 친구들을 못 본다고 생각하니 속상했다. 개학은 계속 미뤄졌다. 대신에 EBS 온라인 클래스를 들어야 하는데 적응이 되지 않아서 낯설었다. 집에서 컴퓨터로 하는 수업이어서 친구들과 같이 수업할 때 보다 집중을 못했다. 학원과 도서관도 못가니 코가 막힌 것처럼 답답하기만 했다.이렇게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니 엄마께서 아이디어를 내셨다. 그것은 바로 ‘세줄일기’를 쓰는 것이다. 엄마, 언니, 나랑 셋이서 매일 꾸준히 쓰기로 했다. 일기를 꾸준히 쓰려고 하니 집에만 있으면 안됐다. 그래서 집 근처에 있는 체육공원으로 향했다. 지나가는 길에 나뭇가지에 앉은 까치도 보았다. 파릇파릇 얼굴을 내미는 쑥도 있었다. 쑥을 뜯으며 엄마께서 어릴 때 자주 먹었다며 쑥떡을 만들어 주셨다. 다음날은 내 보물 1호인 킥보드를 타고 아파트를 한 바퀴 돌았다. 또 그 다음날은 환호공원을 산책했다. 사람들은 마스크를 썼다. 하지만 벚꽃보다 예쁜 미소도 보여주었다. 아빠가 사 오신 배드민턴도 쳤다. 가족끼리 웃는 시간이 많아졌다.매일 매일 쓴 일기가 모여 드디어 책 한 권이 되었다. 엄마께서는 코로나19가 우리를 괴롭혔지만 추억이 생겨서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다. 매일 쓰는 게 귀찮기는 했지만 나도 덩달아 뿌듯했다. 선물을 받는 것 같았다. 나는 내 꿈에 대해서 가족과 친구들에게 이야기한다. 그 꿈은 탐험가, 익스트림 스포츠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엄마, 아빠께서는 꿈을 가지는 것은 멋진 일이라고 응원해 주셨다. 또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스스로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부모님이나 언니는 내가 부탁하면 자주 도와주신다. 좋을 때도 있지만 세줄일기처럼 스스로 꾸준히 한다면 내 꿈이 진짜 이루어질 것 같았다. 그러면 별처럼 빛나는 꿈꾸는 내일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입상자 명단 (ctrl+f로 검색하시면 빠른 검색이 가능합니다.)□백일장◇운문부△대상 김예원(구미문성초 4-1)△최우수상 황지훈(안동강남초 6-4) 류영찬(포항양덕초 3-7)△우수상 강동헌(영천중앙초 3-3) 권나연(안동송현초 6-4) 권자연(효자초 2-4) 권지완(황남초 4-1) 김가은(포항제철초 3-2) 김가희(경산압량초 5-3) 김남혁(고령초 3-1) 김리원(성암초 5-4) 김사랑(안동송현초 6-4) 김성민(양서초 5-2) 김연호(안동영호초 3-3) 김윤희(용황초 4-5) 김재연(풍천풍서초 2-5) 김준희(운곡초 2-2) 김현석(구미문성초 2-5) 김효빈(창포초 3-2) 문지원(성주중앙초 4-1) 박예진(포항제철지곡초 5-6) 배경수(안동강남초 4-2) 배효진(예천초 4-3) 백승주(상영초 3-1) 서승현(포항해맞이초 2-4) 손형진(의성초 1-3) 유서준(구미문성초 3-4) 유서진(양서초 1-4) 윤시재(포항원동초 4-6) 윤시현(삼성현초 6-1) 이성준(양서초 1-3) 이수진(유림초 5-4) 이승은(삼성현초 4-5) 이은우(김천부곡초 1-1) 이하윤(포항해맞이초 5-3) 전지인(삼성현초 4-4) 정다원(영천초 2-2) 정재후(흥해초 3-2) 최세별(예천초 4-3) 최은유(옥곡초 2-4) 홍예성(양서초 1-6)◇산문부△대상 김소민(포항초 4-2)△최우수상 허지유(장성초 6-2) 하윤희(모전초 2-2)△우수상 고나연(울진초 3-2) 김소윤(포항초 6-2) 김수연(풍천풍서초 4-2) 김온유(양서초 1-1) 김제인(양서초 1-1) 김하정(영주가흥초 2-3) 류가형(포항제철지곡초 4-5) 신유리(유림초 3-4) 윤성욱(평산초 4-4) 이나민(포항송곡초 5-2) 이원홍(이동초 5-2) 이은유(유림초 4-8) 이하진(포항해맞이초 6-3) 전민경(경산압량초 5-1) 최승은(안동영호초 6-4) 최희영(풍기초 3-1) 하예린(포항해맞이초 6-2) 하윤승(모전초 4-4) 한소정(유림초 3-1) 황지우(안동강남초 1-3)□사생대회△대상 이규민(포항양덕초 5-7) 송채윤(금릉초 2-2)△최우수상 김채현(선주초 6-7) 김은성(경산압량초 4-6) 황지유(연일초 2-4) 이시현(왜관동부초 1-3)△우수상 강민주(왜관초 6-1) 강나빈(포항양덕초 1-5) 강민지(포항송곡초 1-2) 강승윤(김천부곡초 1-5) 강채원(김천부곡초 6-2) 고예은(도봉초 1-3) 곽서경(상산초 2-1) 곽초원(포항송곡초 1-5) 권민재(평산초 3-1) 권민찬(구미문성초 2-1) 권우진(구미문성초 3-1) 권은영(경산동부초 2-3) 권혜원(모전초 2-5) 길연우(구미문성초 2-3) 김가율(포항대흥초 1-4) 김건(포항해맞이초 4-2) 김견미(포항장원초 3-4) 김규리(양서초 3-6) 김근희(김천부곡초 1-2) 김나리(양서초 1-3) 김나린(포항송곡초 2-8) 김나영(대구학남초 4-4) 김나은(왜관동부초 2-1) 김나현(경산압량초 2-6) 김다빈(약동초 4-1) 김다원(울진초 1-1) 김다윤(용강초 2-1) 김다은(북삼초 2-2) 김다현(영천중앙초 1-2) 김도연(구미문성초 3-1) 김동영(포항송곡초 1-4) 김동주(대구학남초 4-2) 김두영(포항송곡초 2-4) 김라희(김천부곡초 1-4) 김명후(옥곡초 3-4) 김민송(포항송곡초 1-7) 김민아(김천동신초 5-4) 김민아(김천부곡초 2-3) 김민율(구미문성초 1-4) 김보경(율곡초 2-1) 김보미(포항송곡초 1-6) 김서영(용강초 2-3) 김서우(왜관초 1-2) 김서유(포항제철지곡초 1-6) 김서정(선주초 3-4) 김서진(황성초 6-1) 김선(왜관초 5-5) 김성재(포항송곡초 2-5) 김세현(포항양덕초 2-1) 김수진(대구학남초 2-1) 김승현(용강초 1-1) 김시우(경산동부초 2-3) 김시원(포항양덕초 1-1) 김아영(왜관초 3-3) 김아현(운곡초 2-4) 김연수(장성초 2-3) 김연아(포항송곡초 2-7) 김영찬(성암초 2-1) 김예빈(왜관초 3-2) 김예원(문성초 4-1) 김유빈(왜관동부초 3-3) 김유빈(동천초 3-1) 김윤해(계림초 5-1) 김은지(김천부곡초 3-5) 김이담(김천부곡초 3-2) 김재형(도봉초 2-5) 김정원(영천중앙초 1-4) 김지민(김천부곡초 1-3) 김지수(왜관초 3-2) 김지완(선주초 2-7) 김지우(포항송곡초 1-2) 김지윤(도봉초 1-1) 김지호(성암초 1-8) 김채민(양서초 3-5) 김채원(포항양덕초 5-7) 김채원(동천초 1-1) 김채희(포항양덕초 1-6) 김태형(유림초 4-1) 김태희(김천부곡초 3-3) 김하은(원남초 5-5) 김해강(왜관동부초 2-3) 김현민(김천동신초 1-4) 김현서(양서초 2-4) 김현석(구미문성초 2-5) 김현우(효자초 2-6) 김환희(왜관동부초 2-1) 나지원(포항송곡초 2-3) 남소은(대구경동초 3-1) 남예원(포항양덕초 1-5) 남하윤(운곡초 1-3) 노리우(선주초 3-3) 노유진(왜관초 3-3) 도경민(양서초 1-2) 디모스테네스아라(포항양덕초 2-7) 문성빈(구미봉곡초 1-2) 문슬빈(구미문성초 2-1) 문준서(오태초 3-3) 문지원(경산동부초 5-1) 민정원(대구관문초 1-1) 박가률(도봉초 4-3) 박가흔(선주초 2-3) 박규리(포항송곡초 1-5) 박다미(포항양덕초 1-1) 박민서(금릉초 2-3) 박서현(오태초 2-2) 박세윤(영천중앙초 1-4) 박세은(왜관동부초 3-1) 박세현(경산동부초 3-3) 박소연(농소초 1-2) 박소윤(포항송곡초 1-7) 박소현(구정초 6-1) 박승민(김천다수초 3-2) 박시윤(선주초 1-5) 박시후(왜관초 3-4) 박아림(양서초 3-1) 박연서(포항송곡초 2-1) 박연희(경산동부초 1-1) 박윤(도봉초 3-2) 박윤성(연일초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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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선(김천다수초 3-2) 조은서(왜관동부초 3-2) 조인아(포항송곡초 3-7) 조채아(포항송곡초 1-5) 조현경(대구경동초 1-5) 주하윤(왜관초 1-2) 진세경(경산압량초 4-2) 진수빈(도봉초 2-3) 차예림(용황초 4-3) 차현호(월항초 3-2) 채아현(동천초 5-3) 천은서(포항송곡초 2-3) 최근호(김천부곡초 1-3) 최나연(왜관초 4-3) 최다연(포항양덕초 3-3) 최서연(포항양덕초 3-8) 최서현(포항장원초 1-2) 최수현(구미문성초 2-1) 최신애(두호남부초 4-3) 최승아(동천초 2-3) 최나연(왜관초 4-3) 최연서(형일초 1-2) 최연우(선주초 1-2) 최예니(동천초 3-2) 최예림(포항송곡초 3-7) 최우성(경산압량초 1-5) 최유린(포항장원초 2-1) 최유이(선주초 2-1) 최유준(유림초 1-6) 최윤형(포항양덕초 4-5) 최정안(왜관초 3-4) 최지아(유림초 4-1) 최진하(구미문성초 4-2) 최현서(형일초 4-1) 최형석(포항송곡초 2-8) 최효람(동천초 6-1) 하로운(경산압량초 4-6) 한규리(포항양덕초 3-7) 한민주(풍천풍서초 5-4) 한소정(용강초 3-1) 한재서(왜관초 3-4) 한지혜(왜관초 5-4) 허윤슬(대구장산초 3-1) 허지원(고령초 2-4) 허지호(포항양덕초 2-8) 홍지아(선주초 1-6) 홍지원(포항양덕초 3-6) 홍태림(연일초 1-1) 황가은(영천중앙초 1-1) 황서현(포항송곡초 3-8) 황이빈(선주초 1-4) 황인준(포항제철지곡초 1-2) 황지현(대해초 2-1) 황현서(포항송곡초 1-4) 황현서(포항양덕초 3-3)/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11-19

다가온 겨울, 사람살이 위로하는 시인 허연의 노래

“눈 한 번 감았다 떴을 뿐인데, 생이 저물었구나”라고 탄식한 철학자가 있었다. 그만큼 세월은 빠르다. 떠들썩하게 시작된 2020년이 끝을 향해 치닫고 있다. 스산한 바람 속에서 어깨 움츠릴 겨울이 코앞이다. 쓸쓸한 날엔 그 쓸쓸함을 억지로 숨길 필요가 없다. 쓸쓸함을 즐기며 한껏 고독해지는 것도 겨울을 이기는 좋은 방법. 여기 막막하고 외로운 계절을 함께 걸어줄 좋은 친구가 있다. 바로 시인 허연의 시집과 산문집이다.▲책과 함께 살아온 사내의 고백 ‘그 남자의 비블리오필리’오래전이 아니다. 20세기엔 ‘발군(拔群)’이라 불러도 좋을 문학기자들이 있었다. 김훈, 이경철, 정철훈, 조용호, 최재봉….빼어난 감각과 문장을 가진 그들은 각기 다른 신문사에서 자신이 속한 매체의 품격을 높여준 기자들. 또한 그들 대부분은 소설가나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매일경제’에서 오랜 기간 기자로 일하고 있는 허연 또한 ‘발군의 문학기자’에 당연지사 속하는 사람이다. 시인으로서도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20여 년 전부터 기자 선배인 허연을 가끔 만나곤 했다. 주로 문학기자를 대상으로 하는 모임이나 문인들의 행사장에서였다. 해사한 얼굴에 긴 손가락을 가진 그는 보기 드문 ‘독특한 사내’였다.목소리 톤은 한없이 낮았고, 쉬이 웃거나 찡그리지 않았으며, 가끔씩 흐려지던 눈망울은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의 ‘너머’를 보고 있었다.그가 1991년 등단해 ‘불온한 검은 피’라는 시집을 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야 허연의 얼굴 속 침잠과 우수를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속화된 자본주의가 득세한 한국. 통속한 기자이면서 탈속을 지향하는 시인의 역할까지 해야 한다는 것은 얼마만한 고통과 번뇌를 배후에 깔아야 가능한 것일까? 굳이 묻지 않아도 세상으로부터 허연이 받았으며, 받고 있고, 앞으로도 받아야 할 상처의 깊이가 짐작 가능했다.허연의 산문집 ‘그 남자의 비블리오필리’는 문학기자를 하며 접한 수많은 책 중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들을 선별해 감상을 기록한 성과물. 그러니 ‘책 속에서 길을 찾아가는 한 사내의 이야기’쯤으로 불러도 좋겠다. ‘비블리오필리(Bibliophily)’는 책에 독립된 성격을 부여해 이를 감상하고 수집하는 취미를 지칭하는 단어. 서문엔 허연의 고백이 담겼다. 이런 것이다.“모범생이 아니었던 10대 시절. 교실에서 자리를 지키는 것보다 정독도서관에 가서 소설책을 읽는 게 더 행복했다. 당연히 앞날은 어두웠다. 고등학교 3학년 겨울. 집안에 처박혀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부모님의 책들까지 모조리 읽었다. 그때 아주 놀라운 깨달음이 다가왔다. 세상이 두려운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책이 준 힘이었다.”미래에 짓눌린 불안감과 자신에 대한 혐오에 시달리던 10대를 ‘독서’를 통해 극복해낸 허연의 ‘책 편력’은 이후 30년 넘게 이어졌고, 지금도 여전하다. 그런 까닭에 ‘그 남자의 비블리오필리’는 시인 허연의 자기 고백으로도 읽힌다.‘공산당 선언’과 ‘유교 아시아의 힘’에서부터 ‘목수 아버지’와 ‘단순한 열정’까지. 허연이 소개하는 166권의 책은 프리즘이 넓다. 특정 장르와 저자에 구애됨이 없이 그야말로 ‘자유롭게’ 책을 골라 주관적으로 감상하고 분석하는 글쓰기.여기에 명료하고도 적확한 허연 특유의 문장과 깊이 있는 세계인식을 맛보는 재미가 각별하다. 다음의 문장들을 보라.“아나키즘을 이루지 못할 꿈 정도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꿈이라 부르지 마라. 세상에 꿈이 아닌 사상이 있었던가. 왕조 시대에 공화제를 꿈꾼 것도 당시로서는 꿈이었다.”“낚시에서 고기를 잡고 못 잡고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내가 인생의 어느 한 시기에 흐르는 물을 잠자코 지켜봤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다.”책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했고, “책이 있어 세상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는 경지에까지 다다른 허연은 헤럴드 블룸(Harold Bloom)을 인용해 이런 말을 들려준다.“독서는 우리가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세속적 초월이다.”‘그 남자의 비블리오필리’를 읽은 소설가 조정래는 “기사든, 산문이든, 시든 그의 글에는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다름 아닌 예리함과 고집,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는 평가를 내놓았다.부록으로 묶인 ‘독서 방법’과 ‘본문 안의 책들’ ‘더 읽을 만한 책들’은 친절하기까지 한 허연이 독자들에게 선물하는 효율적인 독서를 위한 항해도(航海圖)다.▲스타일의 내면화 이룬 시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의 소설 ‘설국’이 준 정서적 충격에 시달렸던 청년 허연이 지천명(知天命)을 훌쩍 넘겼다.앞서 언급한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를 필두로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 ‘오십 미터’ 등의 책을 꾸준히 내놓았던 그가 최근 다른 어떤 시인도 흉내 낼 수 없는 스타일을 내면화하며 새 시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를 상재했다.그의 오랜 문우(文友)인 박형준은 ‘이곳에선 모든 미래가 푸른빛으로 행진하길’이란 제목의 발문을 통해 ‘허연의 시와 됨됨이’를 이렇게 진단한다.“허연 시에 대한 첫인상은 담백하고 슬픈 기운이었다.…(중략) 맑으면서도 예술가적 비애가 서려 있었다. 무엇보다도 쓸데없는 과장이나 수식이 없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중략) 주머니에 유리구슬을 가지고 있는 소년. 허연에게 시란 슬프고 더러워서 오히려 푸른 유리구슬로 세상을 들여다보는 일이었을 것이다.”얼굴에 감정을 쉬이 드러내지 않는 시인 허연.인간이 세계와 사물을 보는 눈은 크게는 비슷하고, 세부적으론 다르다. 기자 역시 박형준과 마찬가지로 허연의 새 시집에서 여전한 ‘슬픈 기운’과 ‘수식 없는’ 담담함을 찾아냈다. 이는 이전 시집에서도 익숙하게 보아온 것들.‘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를 통해 만나게 되는 허연의 작품들은 일가(一家)를 이룬 예술가의 절창에 보다 가까워져 있었다. 무르익은 스타일이 자신의 몸속으로 내면화되고 있는 모습이 어렵지 않게 느껴졌다.시인 스스로는 “소식은 없었다. 밤에 생긴 상처는 오래 사라지지 않는다. 도망치지 못했다”며 특유의 시니컬함으로 자신과 자신의 시를 낮추지만, 그건 말 그대로 겸양이다. 짤막하게 인용하는 아래 노래들의 품격이 어떤지 한 번 볼까.야근조의 눈에 반사된 십자가숯이 되어버린 길 잃은 양들버스를 가득 채운 근심스러운 성자들-‘세상의 액면’ 중에서.슬픔은 위엄이다…담장 안쪽에선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무반주’ 중에서.새는 덩치는 커졌지만 눈은 슬퍼졌다우리도 따라서 슬퍼지기 시작했다…새가 죽던 날취학 통지서가 배달됐다-‘경원선 부고’ 중에서.다시 우울과 막막함으로 은유되는 겨울이 왔다. 이 겨울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모피 코트나 두꺼운 패딩만으론 차가운 바람과 추위를 온전하게 막아내기 힘들 터.허연의 문장과 노래엔 겨울에 저항할 힘이 담겼다. 그걸 찾아내는 건 오롯이 독자의 즐거움이다. 게다가 시집과 산문집은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모피 코트처럼 비싸지도 않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11-19

오케스트라 선율로 아웃사이더의 손을 잡다

1999년에 사단법인 그랜드심포니오케스트라를 창단한(전문예술인 2호) 박향희 단장을 만났다. 그녀를 만난 곳은 문화파출소이다. 그녀는 경찰들이 떠난 빈 파출소를 지역 주민들의 문화향유공간으로 바꾼 문화보안관이기도 하다. 파출소를 문화공간으로 활용했다는 발상이 대단히 창의적이다. 2016년 문화체육 관광부와 경찰청이 협업을 통해 도원치안센터를 문화예술치유 공간으로 만들었다. 그 변화 과정의 중심에 박향희 소장이 있다. 그랜드오케스트라의 단장이라는 막강한 지위가 있지만 문화파출소에서만은 ‘소장’이라는 호칭이 더 어울린다.5년 전에 그녀는 문화예술 교육이라는 아이템에 대한 공모를 통해 막강한 지원 인파의 벽을 뚫고 문화보안관으로 낙점이 되었다.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오케스트라 단장으로 교육활동에 오래도록 몸 담아오는 동안 문화예술 강의는 잘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고, 그 자신감이 그녀를 그 자리에 우뚝 서게 했다.“문화파출소는 어떤 곳인가요? 올바른 개념을 일러주시겠어요?”“문화예술교육 인구 저변확대를 위한 공간입니다. 클래식 악기강좌와 서예, 꽃꽂이, 캘리그래피, 다도 수업 등의 다양한 문화강좌로 코로나 우울증에 시달리는 주민들의 심리적 안정을 돕고 목공예와 바리스타 교육, 각 나라별 특별한 요리강좌로 일상의 새로움을 추구하기도 합니다.”시민의 안전을 지키던 경찰 대신에 예술 강사들이 와서 주민들을 위한 강의를 하고, 사무실과 당직실, 민원실로 쓰던 방을 강의실 삼아서 어린이들에게 바이올린과 첼로를 가르치고, 어린이 명예 연주단을 발족해서 합주도 한다. 파출소의 원주인이었던 경찰이 주민들의 생활안전을 도왔다면 문화파출소는 음악으로 지역 주민들의 심리적 안정을 돕는 점이 조금 다르다. 공권력이 음악으로 바뀌었을 뿐, 주민들의 치안본부센터라는 본래의 의미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5년이면 어느 정도 성과를 타진해봄직 한데, 어떤가요?”“처음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성과를 내고 있어요.”그녀는 문화지킴이가 되면서 달서구로 이사를 오고, 주민자치위원회와 환경단체에 참여하며 함께 활동을 했다. 그분들에게 문화파출소가 어떤 곳인지 알게 해줄 필요가 있었다. 어느 때고 자신은 잠시 경영을 하다 훌쩍 떠나면 그만이지만, 나중에 주민들이 자치적으로 문화파출소를 운영해나갈 때를 대비해서 기초를 단단하게 다져놓을 필요가 있다며, 그녀는 문화파출소 초대 소장으로서의 굳은 의지를 내보였다.“교육지침이 뭔가요.”“문화 저변 인구를 확대한다는 생각으로 클래식을 비롯한 모든 문화예술을 가르치고 있어요. 어릴 때 접촉한 문화가 어른의 인성을 만들어 가니까 아이들에게 일찍부터 문화를 접촉할 기회를 만들어주는 게 바람직합니다.”공예, 치유, 우울증을 앓는 사람을 위해 심리치료, 다도 수업을 하고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서 얼굴을 익히며 활동하다 스스로도 몰랐던 재능을 발굴해서 주민강사가 되기도 한다. 재능 활용은 참으로 바람직한 방안이다. 문화파출소가 재능을 가진 사람들의 사회적 출구가 되어 그 활용도를 높인다면, 문화의 저변확대에 크게 기여하는 일이 되니 개인적으로도 보람이 클 것 같다. 사람들에게는 본능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어느 누구든 자신의 재능을 내보일 기회가 주어진다면 소득을 떠나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계기가 될 터이다.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자신이 가진 능력을 발휘하고 사는 건 자신의 삶에 가치를 더함과 동시에 지역주민을 돕는 충만감을 얻게 될 것이다.“문화파출소를 지키는 인원이 몇 명이에요?”“저를 포함한 예술 강사가 30명이지만 간혹 외국인 예술가를 초빙하기도 하고, 지역 주민들이 강사로 참여하기도 해요.”“교육의 효과나 성과를 어떤 방식으로 활용하시는지요.”“저의 오랜 예술 활동과 교육 경험을 살려 한·일 교류음악회도 열고, 국내는 물론 유럽 정상급 음악가들을 초청해서 공연기획도 합니다. 올해는 2020년 대한민국 어린이 청소년 페스티벌을 경주에서 개최했어요.”삶에 음악을 가까이 하는 문화저변 확대를 위하여 경찰청과 협력해서 어린이 명예경찰 연주단을 만들고 음악으로 사회경험을 하게 해준다. 3호선 모노레일에서 연주회를 갖고, 버스킹으로 거리음악회를 열기도 했는데, 이즈음에는 어린이 연주단의 초청공연이 많은 편이라고 한다.어릴 때 접촉한 문화는 곧 인성이 된다. 아이들에게 일찍부터 문화 접촉의 다양한 기회를 주자고 말하는 박향희 단장.“가장 기억에 남는 연주회가 있을 텐데요.”“녹향 헌정 음악회, 전국투어, 베르디 페스티벌 초청공연 등 큰 보람과 사명감을 느끼게 해준 연주가 많았죠. 매년 연말마다 가족 연주회를 가지는데, 27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공연을 했어요. 최고의 연주를 위해 대성그룹에서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셨어요.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올해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꾸준히 공연을 했다고 그녀가 슬쩍 자랑스러움을 내비친다. 열 번 중에 한 번만 실패해도 나머지 아홉 번의 수고가 날아가기 때문에 마지막 공연을 마치기 전까지는 마음을 놓지 못한다. 꽉 짜인 연주 일정에, 문화파출소까지 운영하고 있는 박 단장이 큰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많은 일을 하자면 예산이 필요할 텐데 어떻게 해결하느냐고 물으니 대구시에서 주는 것으로는 부족해서 틈만 나면 협연을 위해 뛰어나간다. 그녀에게는 책상이 따로 없다. 보안관 일을 하며 기획과 섭외 메세나 운동으로, 무에서 유를 만드는 운영에 바빠서 책상에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어떤 철학으로 일을 하세요?”“내가 가진 재능이 음악이고, 그 재능을 활용하는 게 음악을 하는 저의 의무라고 생각해요. 궁극적인 목표는 질적 삶의 가치를 높이는 거예요.”음악은 인간이 함께 할 수 있는 최고의 문화자산이고 그걸 최대한 활용하는 게 그녀가 해야 할 일이라며, 사회를 위해 봉사를 한다는 마음으로 오케스트라와 문화파출소 일을 한다고 했다.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이고 가장 행복해 하는 일을 하다 보니 오늘에 이르렀다며, 경제적 출혈이 심해서 어려움도 많지만 그녀는 스폰서의 지원만 바라보기보다 뛰어다니는 쪽을 택한다. 그게 음악가로서의 자존심이기도 하다.“대구의 음악 수준이 어떤가요?”“낮아요. 지역성이 너무 강한 게 방해가 되고 있어요. 더 좋은 음악회를 열어서 누구나 실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시장을 개방하는 것이 중요해요.”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개인적으로 어떤 음악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니, 그녀는 단조로 된 음악을 많이 듣는다고 한다. 뒤늦게 어려움을 많이 겪다 보니 자신의 감성에 한이 많은 걸 느낄 때마다 음악을 들으며 심리적 슬픔을 달랜다며 쓸쓸히 웃는다. 개인적으로는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좋아한단다.“어떻게 해서 오케스트라 단장을 하게 되었어요?”“제자들과 한 달에 한 번씩 실내악 공부하듯이 시작했어요. 하다 보니 단원들이 많아지게 되어 지금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되었어요. 할아버지가 많이 응원해주셨고 기를 살려주셨어요.”경험 부족으로 마흔이 넘어서 삶의 위기에 부닥쳤다.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힘든 시간이 있었지만 손을 잡아준 지인들이 많았다. 지금까지 음악적 철학과 신념을 지킬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녀를 끊임없이 응원해준 지인들이다. 언젠가 그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음악회를 열고 싶다고 한다. 기존의 음악계에서 보면 그녀는 분명히 아웃사이더이고, 기댈 곳 없이 혼자 처리해야 할 일을 산더미처럼 앞두고 있으니 그 외로움을 더 말해 무엇하랴.그렇다 해도 그녀는 문화파출소를 운영하며 세상이 점점 맑아지고 있다는 걸 느낀다. 아직도 그들만의 음악회가 되어 있는 게 안타깝다며, 타성에 젖어 있는 부분을 떨치고 새로운 인물과 능력 있는 사람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한다. 너무 무난하게 안정권에 머물려 하다 보니 좀처럼 분위기가 바뀌지 않는다는 지적이 따갑다. 예술뿐만 아니라 모든 방면에 문호가 개방되어야 인재가 자랄 수 있고, 문화를 접촉하는 사회적 안목도 바뀐다고 한다. 그녀는 오너로 활동하고 있지만 자신도 보호받고 싶고, 기대고 싶다며, 스스로 기운을 북돋워주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을 칭찬해준단다.“박향희, 너 정말 잘하고 있어.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니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야.” /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0-11-18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詩 한 수 남기고 東海로 행방을 감춘 충신

울진(蔚珍)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진짜 보배가 빽빽하게 많다는 뜻이다. 사람도 이름값 하듯이 울진은 흔히 3욕으로도 불릴 정도로 보배로운 이름값을 톡톡히 한다. 태백산맥 큰 줄기의 우리나라 최고 질 좋은 금강송 군락지의 산림욕, 망양, 구산, 후포 등등의 해안을 끼고 있는 해수욕, 응봉산 깊은 산속에서 용솟음치는 백암온천과 덕구 온천욕이 그것이다.운암서원은 구산해수욕장 가는 길옆으로 옮겨지었고 바닷가 구산에서는 울릉도로 떠나는 수토사들이 바다가 잔잔하기를 기다리던 대풍헌이 옛 흔적을 남기고 있다.#. 두 번이나 옮긴 소박한 운암서원울진에는 옛 평해 기성지역에 서원이 집중되어 있다. 기성면 정명리에 평해 황씨 황응청과 황여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671년(현종 12년)에 지방 유림들의 뜻으로 명계서원을 세웠고, 노동서원도 기성면 황보리에 있는데 1816년(순조 16년)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을 사모하여 울진지역의 유림들이 노동서원을 세웠다. 두 서원 다 1868년(고종 5년)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었다가 명계서원은 1881년 강학소를 세웠으며 1983년에 복원하였고, 노동서원은 1913년 강학소와 영정을 봉안했다가 1921년에 중건하였다. 명계서원은 서원기능 중 반쪽인 선현봉사의 기능은 하고, 노동서원은 평해 구씨(丘氏) 재실로 사용한다. 중국 한나라 때 평해 황씨 시조되는 황락이 평해에 올 때 같이 온 구대림 장군이 평해 구씨 시조가 된다. 이 운곡 서원은 전국적인 스타서원이 아니고 울진이란 한적한 동해바닷가의 조그마한 서원에 불과하다. 건물도 초라하거니와 공간배치라도 잘 했으면 소박한 맛이라도 날 텐데 너무 공간이 협소하여 보기가 불편하다. 차라리 주차장을 옆으로 하고 마당 공간을 충분히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여기는 백암 김제, 물제 손순효 두 분을 모셨는데 김제는 평해 군수로 있을 때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나라 잃은 관리로 망국의 한을 품고 시 한 수 남기고 동해(東海)로 행방을 감춘 고려의 충신으로 기우자 이행과 마찬가지로 불사이군의 두문동 72현(杜門洞七十二賢) 중의 한 분이다.물제(勿齊) 손순효는 성종 때 오늘날 대통령 비서실장인 도승지를 지냈고 성리학과 문장이 뛰어났고 대나무 그림을 잘 그렸다 한다. 도승지를 연상하니 김대중 정부 때 동서화합의 상징으로 울진출신 김중권 비서실장이 생각난다.이 운암서원은 1826년(순조 26년) 온정면 반암동에 세웠다가 1833년(순조 33년)에 온정면 노은동으로 옮겼다. 전국에 천여 개의 서원들이 온갖 민폐를 끼쳐 1868년(고종 5년)에 47개만 남기고 전국의 수많은 서원을 철폐할 때 운암서원도 철거한다. 그러나 대원군이 실각하자 전국 곳곳에 서원을 다시 세우는데 그때 이곳 구산리로 이전하여 세우면서 임진왜란 때 비안현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상주에서 순절한 백계 김희도 함께 배향했다.이 운암서원은 다른 서원과 달리 서원이 해단(海壇)이란 글씨의 건물이 있었다. 그것은 이 서원이 생기기 전인 1789년(정조 13년) 유림에서 제단을 만들어 김제 선생의 불사이군 충절을 기렸다가 서원으로 옮긴 것이다.#. 울릉도 출발지 구산마을과 대풍헌월송정에서 옛 길 따라 올라가면 길옆에 모래하천과 동해의 바닷물과 합수되어 물이 넘쳐 1603년(선조 36년)에 놓은 ‘평해 북천교비’가 세워져있고, 조금 위에는 운암서원이 초라하게 서있다. 곧이어 구산해수욕장이 나오고 해안으로 바짝 들어가면 포근하고 정겨운 구산마을이 나온다. 해안가에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들의 바쁜 손놀림, 울릉도와 독도의 모형을 만들어 놓았고 옛 사람들이 타고 가던 수토선이 놓여있다. 길 건너 산언덕 아래로 가면 조선시대 울릉도에 벌목과 어로행위를 하는 일본인들을 토벌하고 육지에서 죄를 짓고 도망쳐 들어간 죄인들을 수토하기 위해 수토사 들이 바다가 잠잠하기를 기다리는 대풍헌(待風軒)이 세월의 흔적을 안고 서있다. 대풍헌은 원래 동민들이 사용하던 동사(洞舍)였기에 대풍헌과 기성구산동사 현판이 걸려있다. 그 앞에 ‘수토문화전시관’이 주인공 대풍헌 건물보다 크고 어리하게 지어 놓았지만 코로나에 문은 닫혀있다. 뒷산을 올랐다. 확 트인 바다 아마도 수토사들이 여기에 올라 바다의 기후를 살펴보고 울릉도로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도 각오해야 되기에 희생자가 많았을 것이다. 그 추모광장이 엄숙하게 놓여있다. 언제부터 울릉도에 사람이 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기 써놓은 기록을 살펴보면 논농사도 지었고, 폭포와 산림 우거진 섬, 사람이 오를 수 없는 죽도(독도)도 묘사해 놓았다. 풍랑을 만나 4척 중 한 채는 수장된 1794년(정조 18년) 6월 3일 무오기록을 보면 숙연해지고 아찔하다. “항해 중 유시(酉時·오후 5~7시)에 갑자기 북풍이 일며 안개가 사방에 자욱하게 끼고, 우레와 함께 장대비가 쏟아져서 일시에 출발한 4척의 배가 뿔뿔이 흩어져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는데, 만호가 정신을 차려 군복을 입고 바다에 기원한 다음 많은 식량을 물에 뿌려 해신(海神)을 먹인 뒤에 격군들을 시켜 횃불을 들어 호응케 했더니, 두 척의 배는 횃불을 들어서 대답하고 한 척의 배는 불빛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또 1882년 (고종 19년) 6월 5일 기미 기록은 “우리나라 사람 중에 호남인이 제일 많은데 전부 조선(造船)을 하거나 미역과 전복을 따며 그 밖의 타도 사람은 모두 약재 캐는 일을 위주로 하였다고 한다. 고종이 하교하기를 “이 내용을 총리대신(總理大臣)과 시임(時任) 재상들에게 이야기 하여 주어라. 지금 보니 한시라도 등한히 내버려둘 수 없고 한 조각의 땅이라도 버릴 수 없다”하였다고 전한다.내려와 길 건너 수토선과 울릉도와 독도 모형을 한 번 더 살펴보고 아늑한 해안가 구산마을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울릉도와 독도를 지킨 사람들지금이야 배로 2시간이면 갈 수 있지만 섬이 많은 남해안과 달리 동해안은 섬이 있다고는 상상하기 힘들어 예전에 울릉도는 이어도 같이 상상의 섬이었다. 그러면 언제부터 울릉도와 독도의 존재를 알았을까? 최초의 기록은 512년(지증왕 13년) 아슬라주(강릉) 군주 이사부가 우산국(울릉도)을 정벌하여 “6월에 우산국이 신라에 속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다.그리고 고려 때는 울릉도와 독도를 행정구역에 편입시키고 백성을 옮겨 살게 했다. 조선에 들어서는 백성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모든 섬을 비워두는 공도(空島)정책을 한다. 그래서 태종 때 두 번 (1403년, 1406년) 세종 때 세 번(1419년, 1425년, 1438년) 울릉도에 사는 사람들을 육지로 데리고 온다. 그중 태종 때 울릉 안무사 김인우는 거주민들을 육지로 이주시키기 위해 출항하는데 갑자기 풍랑이 거세지며 갈수록 심해졌다. 지난 밤 꿈에 해신이 나타나 동남동녀 2명을 섬에 남겨놓고 가라 했는데 개의치 않고 출항했던 것이다. 그래서 어린아이 둘을 섬에 내려놓으니 잔잔한 바다가 되어 무사히 왔다. 몇 년 뒤 궁금하여 섬에 남은 두 아이는 수색했더니 유숙했던 그곳에 둘이 껴안은 채 백골이 되어 있었다. 그곳에 성하신당을 지어 매년 음력 3월 1일에 제사지내며 두 영혼을 위로해주고 있다.울릉도와 독도 하면 잊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 있다. 동래부의 노꾼 안용복(1658~?)은 왜관을 드나들며 일본어를 잘했다. 1693년 3월 울산 어부 40여 명과 울릉도에 고기 잡다 7척의 일본 어부들과 마주쳤고 조선바다라고 호통쳤으나 오히려 안용복과 박어둔을 납치해 가버렸다.7개월 억류되어 있으면서도 대담하고 논리적으로 호키 주 태수에게 강력히 항의하여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鬱陵島非日本界)”라는 문서를 받아온다. 협상에 유리하도록 안용복은 높은 조선관리관복을 입고 1696년(숙종 23년) 5월에 가서 에도의 막부로부터 울릉도가 조선 땅임을 확약 받고 8월에 오자 조정(노론)에서는 나라의 허락 없이 국제문제를 일으켰다고 안용복을 사형시키라고 벌떼같이 일어난다. 결국( 소론, 서인) 신여철(1634~1701년)은 “용복이 한일은 말할 수 없이 놀랍기도 하지만 나라에서도 할 수 없는 일을 그가 해내었으니 공로와 과오가 맞먹는다고 할 만합니다. 사형으로 논단할 수 없습니다” ‘구운몽’의 저자 소론 남구만(1629~1711년)도 “안용복을 죽임은 대마 도주만 기쁘게 할 뿐”이며 “사람됨이 걸출하고 영리하니 보통사람이 아니다. 마땅히 살려두어 뒷날에 쓰자”고 하여 죽음을 면하고 영동으로 귀양 간다. 그 뒤 행방은 알 수 없다. 국가가 관직을 주거나 시킨 것도 아닌데 일본을 두 번이나 가서 담판지은 뜨거운 용기와 실천력으로 우리 땅 이라는 것을 문서로 받아낸 엄청난 일을 한 대가는 귀양과 파멸이었다. 나이 40에….또 성종 때 김한경은 왕명으로 삼봉도(울릉도, 독도)를 탐사하고 보고를 하였으나 바다에 무지했던 당시 관료들에 의해 허위보고 혐의로 처형당하고 딸 김귀진도 노비로 끌려간 비극도 통탄스런 아픔이다. “이 땅이 뉘 땅인데”외치며 독도의용수비대를 결성하여 독도 경비를 펼친 홍순칠(1929~1986년)같은 분들과 같이 국가보다 국민들이 울릉도와 독도를 지켰다. 그래서 조선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1681~1763년)은 ‘성호사설’에서 “안용복은 바로 영웅호걸이다. 미천한 일개 군졸로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누대에 걸쳐 벌어진 분쟁을 종식 시켰으며…. 뛰어난 인물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상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형을 운운하고 귀양을 보내어 꺾어버리기에 급급하였으니 참으로 애통한 일이다.”했던 말이 아픔으로 마음을 때린다./글·사진= 기행작가 이재호

2020-11-17

참외는 성주군 발전의 동력… ‘명품 참외’로 세계 간다

2020년 현재 우리나라 농촌은 어느 지역 할 것 없이 고령화와 인구 감소, 지속적으로 높아지는 경영비 부담 등으로 농가 소득이 늘어나기가 어려운 실정에 빠져 있다.심지어 감소되는 지역도 적지 않다는 통계다.모두가 알다시피 최근엔 WTO 개도국 지위 또한 상실됨으로써 농촌의 힘겨움은 가중되고 있다.여기에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농업 소득 감소도 심각한 문제다. 이처럼 농촌과 농업의 현실은 날로 어려워지고 있다.그럼에도 희망의 활로를 찾기 위한 노력은 멈출 수 없는 법. 삶은 어떤 상황에서도 이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성주군도 군민과 군청이 힘을 모아 희망을 찾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성주참외 조수입 2년 연속 5천억 원 넘어서지난 10월 성주군은 올해 성주참외 조수입이 5천19억 원이라고 발표했다. 쉽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선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지난해에 이어 연속으로 참외 조수입 5천억 원을 넘겼다는 사실은 다른 지자체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성주군이 올해 ‘코로나19 사태’라는 커다란 위기 속에서도 2년 연속 참외 조수입 5천억 원 달성이라는 성과를 올린 배경엔 수입 과일의 감소라는 호재도 있었다.시중에 유통되는 외국 과일이 적어짐으로써 국내 과일인 성주참외 소비가 전년대비 택배 물량 기준 30% 이상 증가한 것.여기에 품질을 높여 가격도 일부 올랐고, 성주조합공동사업법인과 각 지역농협 중심의 통합마케팅도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농산물 전문가들은 “성주군 참외 농가들의 장인정신과 참외 산업 현대화·자동화를 위한 시설하우스 자동개폐기 등 각종 선진 기자재 지원이 참외 산업 발전을 이끌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2020년은 성주참외 재배 50주년을 맞는 해다. 지난 50년간 성주참외가 성주를 이끌어온 것처럼, 미래 50년도 참외는 성주의 산업과 경제를 견인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성주군은 성주참외의 명성을 이어 가고, 성주 농업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세우고, 이를 현실에서 실현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아래 성주군이 ‘명품 참외’를 만들기 위해 어떤 구체적인 정책과 지원책을 실행하고 있는지 상세하게 살펴본다.▲농업보조사업 지원 확대를 통한 고품질 참외 생산 기반 조성성주는 고품질 스마트 참외 농장 기반 조성과 참외 품질 제고, 노동력 절감 등을 위한 시설 현대화에 땀을 흘리고 있다.올해는 참외 고품질화를 위해 209억 원의 사업비로 측·천창자동개폐기, 파이프, PO필름과 보온덮개 자동개폐기 사업을 추진했다. 더불어 채소와 과수 분야에도 사업비 32억 원으로 농기계 등을 지원하고 있다. 향후 농가 지원은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될 예정이다.▲농산물 해외시장 수출 확대성주군은 일본, 싱가포르, 홍콩, 말레이시아 등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수출 중인 성주참외를 내년에는 태국, 대만 등으로까지 수출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신규시장 개척은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마케팅의 가장 주요한 포인트 중 하나다.올해는 항공료 상승과 선박 수송시 신선도 저하,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해외 판촉 불가 등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 와중에서도 전년 수출량에 근접한 415t의 성주참외를 해외로 수출해 수출 목표 대비 114%를 달성하는 저력을 보이기도 했다.앞으로는 해외 수출 확대와 참외 저장성 강화를 위해 신품종 및 포장지 개발 등을 추진할 방침이다. 또한 SNS(사회관계망 서비스)를 통한 비대면 마케팅도 확대해 나간다.아울러 해외 신규시장 개척과 해외 시장 확대, 하자 발생시 손실 보상 등 참외 수출을 위한 체계적인 사업을 담당할 ‘사단법인 성주참외 수출협의회’ 설립도 추진 중에 있다는 것이 성주군의 설명이다. 성주참외 수출협의회에는 관내 9개 농협과 1개 원협, 성주조공 등 총 10개의 단체가 참여하게 된다.▲성주참외 BI와 디자인 개발기존의 낡은 이미지로는 성주참외의 미래 발전 가능성을 제대로 담보하기 어렵다. 이에 성주군은 20~30대 젊은 세대가 원하고, 미래 소비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는 브랜드 이미지를 새로 리뉴얼하고 있다. 그 방편으로 캐릭터와 소비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설 디자인 등을 개발 중이다.또한 10kg 참외 박스를 무지(크라프트지)박스로 전환해 농가 경영비를 낮추고, 박스 제작에 화학염료 사용을 줄임으로써 친환경 농업에도 한 걸음 더 다가서고 있다. 개발 중인 새로운 디자인은 2021년 시범 적용과 홍보를 거쳐 2022년부터 전면 사용될 예정이다.▲참외 저급과 수매사업 변화전국에서 성주군만이 추진하고 있는 참외 저급과 수매사업은 성주참외의 이미지 향상과 품질 개선으로 참외 농가 소득 향상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내년부터는 이 사업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다.이를 위해 ‘참외 저급과 수매량을 납부 자조금에 따라 차등 적용’ ‘참외 수매시스템 자동화’ ‘수매장을 이용하지 않는 농가에도 낸 자조금 만큼 맞춤형 액비 공급’ 등의 혁신적인 변화를 준비 중이다.아울러 참외 저급과의 안정적인 처리를 위해 국비를 포함한 100억 원의 예산으로 ‘비상품화 농산물자원화센터’ 건립도 추진한다.▲성주참외를 활용한 헤어·미용제품 선보여참외 저급과의 고부가 가치 산업 발전을 위해서는 성주참외를 활용한 헤어·미용제품을 시장에 내놓았다.성주참외 헤어·미용제품은 참외 추출물이 미용 성분으로서 타당한가에 관한 계속적인 연구와 원물 추출 공정 개발 과정을 거쳐 생산까지 1년의 시간이 걸렸다.이 제품은 참외 원물 5%를 함유한 스케일러, 샴푸, 트리트먼트, 헤어토닉 4종으로 구성돼 있다. 오는 11월 말부터 온·오프라인으로 판매될 예정이며, 성주군에 자리한 미용실 74곳에서 직접 구매도 가능하다.▲성주참외 공식쇼핑몰 오픈과 온라인 유통 강화‘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오프라인 유통은 감소되었지만 비대면 온라인 유통 시장은 전년대비 30% 정도 성장했다.성주군은 온라인 유통 산업을 집중 육성해 농산물 유통 기반을 확대하려는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유통 판로 개척에 어려움을 겪는 소규모 농업인을 위해 ‘성주참외 온라인쇼핑몰’을 오픈한 것이 그 좋은 예다. 현재 참외를 포함한 버섯, 사과 등 성주군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농·특산품을 생산하는 농가업체 40여 개가 여기에 입점했다.성주군은 입점수수료를 없애 농가의 부담을 줄이고, 다양한 온라인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또 대형 온라인플랫폼과 업무협약 등을 맺어 오픈 2개월 만에 참외 판매 5천만원이란 목표를 달성했다.내년부터는 특판행사 진행, 택배비 지원 등을 추진해 온라인쇼핑몰을 통한 비대면 유통을 더욱 확대해 나갈 방침이다./전병휴 기자 kr5853@kbmaeil.com

2020-11-12

“설백자에 달을 향한 흰빛 염원 담아냈죠”

설백자!설백자의 청아한 살빛에 달이 비친다. 눈처럼 희고 맑아서 설백자인가. 달을 닮은 둥근 선, 백자기의 완만한 곡선과 흰 눈빛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 옛 어른들이 달을 보며 마음의 혼탁함을 걷어냈던 것처럼 설백자는 그 존재감만으로도 바라보는 이의 가슴에 이는 풍파를 재우기에 충분하다. 설백자에 담긴 창백한 매화, 살얼음 낀 연못의 잉어. 눈 위에 길고 처연한 목을 드리운 연밥 같은 그림이 백자의 흰빛을 더 빛나게 한다. 흰 빛을 가진 물체가 어디 달 뿐인가. 아기의 배내옷에서 맑은 한지, 흰 우유, 사람의 흰 눈자위, 하얀 달빛, 푸른 기운을 띤 해질녘의 청백색 이내까지, 많고 많은 흰빛 중에서 유독 겨울 눈송이의 흰 속살을 도자기에 담는 사람이 있다.지난해 5월에 백자의 맑고 고귀한 가치를 재해석한 공로로 스웨덴 스톡홀름 노벨재단의 초대작가상을 받은 경일대 이점찬 교수(대구미술협회장)를 만났다. 유순한 눈빛과 순연한 미소에 희디 흰 흙내가 묻어 있다. 노벨재단이 후원한 ‘김대중 전 대통령 노벨 평화상 수상 기념 특별초대전’에서 이 교수는 500여 년간 이어져 온 조선시대 백자의 전통적 아름다움과 여백, 절제의 미를 계승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또 올해 10월에는 ‘고만경 후원회’ 회장직을 수행하며, 자칫 역사의 어둠에 묻힐 위기에 처한 청송백자의 원형과 가치를 복원하는데 전심전력을 기울였고, 지역 도자기 예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공로로 ‘2020년 경상북도 문화상’ 조형예술부문의 포상을 받으셨다. 20년이 넘도록 도예가의 외길을 묵묵히 걸어온 공로와 실력을 한꺼번에 인정받았으니 그 기쁨을 어디에 비유하랴. 포상이 마냥 좋기만 하겠냐마는 ‘그 동안 수고했다’는 다독임이어서 그 의미가 더욱 크고 깊을 것 같다.수성못이 보이는 12층 라운지로 교수님을 모셨으면 기사를 쓰기 위한 질문을 해야 하는데, 도자기를 모르니 뭐라고 물어야 할지 모르겠다. 질문은 답변에 대한 답변까지 준비되어 있는 순간이어야 가능한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선생님께서 도자기를 구우며 느낀 감정이나 에피소드, 그 일에 생을 바치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 알아서 차근차근 들려달라고 말하고 싶다. 차라리 도자기를 ‘소설’이라는 수식어로 바꿔서 얘기해보면 어떨까. 소설을 언제, 어떤 계기로 쓰기 시작하셨어요? 소설에 어떤 얘기를 담고 싶으세요? 혹시 소설의 소재를 구하러 외국까지 답사여행을 다니기도 하세요? 여러 나라를 다녀본 중에 어느 나라의 소설이 가장 인상 깊고 마음에 드셨어요? 신기하게도 도자기를 소설로 바꾸어도 질문에 전혀 그르침이 없다.“도자기를 하시게 된 동기가 뭐예요?”“구미 선산이 고향인데 우리 논 옆에 굴이 하나 있었어요. 굴 전체가 조대흙이었는데 거기서 흙을 만지고 노는 동안 자연스럽게 흙과 친해졌어요.”조대흙으로 탱크를 만들고, 사람을 만들고, 구슬을 만들던 아이가 백토로 눈꽃송이처럼 희고 맑은 설백자를 굽는 도자기 장인이 되었다. 흙을 굽고 살라는 자연의 계시이고 선물이었던 것 같다.“교수님께서 선호하시는 도자기가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주로 백자를 만듭니다.”조선 500년 동안 끊이지 않고 계승 발전되어온 한문화는 백자뿐이라고 설명해주신다. 지금도 백자를 만들며 우리 시대에 맞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고. 초가집에서 아파트로 주택문화가 바뀌는 것처럼 시대에 맞는 미감도 그 문화에 맞게 바뀌어가고, 도자기 역시 모양과 장식, 채색을 달리하며 변화와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그 아름다움이 실현된다고 귀띔해주신다. 둥근 달을 날마다 볼 수 없으니 집안에 달 항아리를 올려두면 한 번씩 껴안기도 하고 소원을 빌 수도 있다는 말에 공감했다.“달 항아리는 채색을 하지 않고 비워두는 것이 더 아름다울까요?”“채색이 오히려 백자의 흰빛을 강조하는 극적인 대비 효과를 줍니다.”비워두기보다 그림을 그려 넣음으로써 달 항아리의 흰색을 더 강조하는 효과를 나타낸다는 말이 매우 인상 깊게 들렸다. 나무, 꽃, 새, 붕어의 전체를 그릴 수도 있고 형체만 그릴 수도 있다고. 마음에 흡족한 작품을 만들어냈느냐고 물으니 웃으시며, 전시가 끝나면 마음에 드는 작품을 집으로 가져와서 바라본다고 하신다. 다른 예술은 시간이 가면 어떻게든 완성이 되지만, 도자기는 마지막까지 지엄한 불의 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끝까지 마음을 놓지 못한다며, 1천300도의 고온이 가져다주는 혹독함을 견뎌야 비로소 예술품으로 탄생을 한다는 말이 매우 비장하게 들린다.자료를 찾아본 바에 의하면 백자도 종류가 다양하다. 백자를 무광만 쓰는 게 아녀서 안료의 빛깔에 따라 이름이 달라진다. 코발트빛의 청화백자, 흑갈회빛이 생생한 철화백자, 산화구리의 적갈색을 담은 진사백자, 눈빛처럼 차갑게 빛나는 순백자 등, 다양한 백자 중에서 이 교수는 흰색을 사랑하는 백의민족의 얼을 담은 설백자를 즐겨 굽는다. 집안 장식장에 달 항아리를 올려두고 매일 아침 두 팔을 벌려 한 아름 안아준다는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깎아지른 차가운 달의 곡선에 이마를 대고 있으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이 교수에게 달 항아리는 어떤 의미일까. 풍요로움? 어쩐지 백자기의 둥근 선이 가을 들판을 가득 채운 풍요로움 같기도 하고, 만삭에 이른 여인의 둥근 배와 같은 존엄성과 여유로움 같기도 한다. 돌을 갈아서 만든다는 백토가 물과 불이라는 극단적인 재료를 만나 아름다운 달 항아리로 환생한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에게는 달이 여럿이었다. 대추나무 우듬지로 가볍게 솟아오르는 보름달과 안방 장식장에서 자태를 뽐내는 달 항아리, 장독대의 정화수(井華水)에 뜬 달까지, 같은 듯 다른 얼굴을 한 달이 그렇게 여럿이었다.설백자는 단순한 사물의 의미를 넘어서서, 유난히 흰색을 사랑하는 우리 민족의 얼과 기원을 담고 있어서 더 귀하다. 옛 어머니들은 하늘에 뜬 달과 정화수에 뜬 달을 향해 두 손을 모았다. 먼 길 떠난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게 해달라고, 집안 대를 이을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과년한 딸이 좋은 짝을 만나서 잘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 외에도 한 많고 설움 많았던 우리 민족들에게는 오래된 당산나무나 큰 바위, 혹은 태양과 달을 보며 비손할 일이 많았다. 달 항아리는 그 많은 바람을 담은 소망의 실체였다.이 교수는 도자기가 사람의 몸과 같다고 한다. 사람의 몸이 그렇듯이 도자기도 뼈의 역할, 살의 역할, 피의 역할, 이렇게 세 가지 역할을 하는 성분이 흙 속에 섞여 있어서 도자기가 만들어진다고. 그러고 보니 사람의 뼈도 백토처럼 흰색이다. 하얀 뼈를 생각하자니 황순원의 소설 ‘독 짓는 늙은이’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병이 들어 더 이상 어린 아들을 키울 수 없게 된 송 영감은 방물장수에게 아이를 딸려 보내고 가마 안쪽 깊숙이 기어들어간다. 자신의 터져나간 독을 대신하려는 듯 송 영감은 단정히 무릎을 꿇고 앉는다. 생각난 김에 교수님께 물어보았다.“사람의 뼈가 도자기 흙에 섞이면 어떨까요?”“발색에 영향을 주죠.”그러면서 이 교수는 인 성분이 들어가면 발광이 다르다고 하신다. 사람의 뼈도 오랜 세월을 거쳐 흙이 되고 말듯이 세상 모든 흙의 원형은 돌이었다. 흰 암석으로 남아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돌은 사람의 뼈처럼 오랜 풍화작용을 거쳐 흙이 된다. 흙은 우리 땅에서 먼저 살다 간 선조들의 뼈와 살이고, 혼이다. 변하지 않는 것, 변할 수 없는 땅의 살이었던 그런 것.이 교수의 도예연구원이 남산면 흥정길에 있다. 학교에서 30분 거리라며, 처음 작업실을 얻을 때의 추억담을 들려준다. 4월 어느 날에 흥정리에 들어가니 사방이 온통 복사꽃이더란다. 그때가 1996년이었다고. 산에 잇따른 언덕바지 가득 복사꽃이 핀 절경은 봄이 주는 놀라운 환희다. 복사꽃이 만든 무릉도원 그 어디쯤에서 이 교수는 선대에서 물려받은 일도 아닌 도예를 위해, 스스로 일구고 가꾼 자기 길을 뚜벅뚜벅 걸어간다. 백자의 부신 흰빛을 향해.유럽이 채우는 문화라면 동양은 비우는 문화라고 한다. 서예나 사군자, 도자기 등의 우리 문화가 모두 비움을 중요시한다며, 가장 완벽하게 비운 것이 달 항아리라고. 흰색은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반면에 뭔가 흔적을 남겨야 한다는 충동을 받을 수도 있는데, 중요한 것은 ‘멈추는 것’이라는 말씀이 서늘한 여운을 준다./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0-11-11

망양정에 올라보니 바다 밖은 하늘인데 하늘 밖은 무엇인가

#. 선조들이 남긴 망양정의 그림과 글삼면이 바다로 둘러쌓인 우리나라의 해안에는 경치 좋은 절경이 많지만 기암괴석과 어우러져 푸른 물결 넘실대는 동해안이 단연 손꼽힌다. 그 중에서도 관동팔경이 유명한데 이 망양정을 관동팔경 중에 제일로 친다. 이 망양정같이 높은 곳에 세운 것은 단순히 주변경관을 높은 곳에서 바라보기만이 아니라 자연에 가까이 다가가 그 이치를 알아 하늘과 땅의 본질을 깨닫고 인간의 이치를 깨우치고자 하는 깊은 뜻이었다.또 이런 누각이 허물어지고 퇴락하면 힘을 모아 다시세우는 이유를 여말 선초의 문신으로 이방원을 도와 왕위에 오르게 했고 왕권강화의 기틀을 마련한 하륜(1347~1410년)은 “누(樓) 하나의 망가짐과 세워짐으로 한 고을의 슬픔과 기쁨을 알 수 있고, 한 고을의 슬픔과 기쁨으로 한 시대의 도(道)의 오르내림을 알 수 있다”고 정리했다.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 시절 황제나 왕들은 천하절경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 그래서 화공을 보내 그려오게 하여 그림으로 간접 감상하는 것이다. 그 중 숙종은 동해와 인연이 많다. 직접 방문하여 망양정을 보고 얼마나 가슴이 시원했겠는가. 경복궁의 갇힌 공간에서 인현왕후와 장희빈, 그리고 후궁들 간의 피 터지는 질투의 사랑에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그리고 신하들의 물고 물리는 처절한 당파싸움에 얼마나 진절머리가 났을까. 이런 숙종이 강원도 관찰사에게 관동팔경을 그려오라 하여 보고는 이 망양정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면서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친필 편액을 내렸다. 그리고 1689년(숙종 29년) 여기에 직접 와서 시 한 수를 짓는다.‘뭇 봉우리 첩첩히 둘러있고/ 성난 파도 거친 물결 하늘에 닿아있네/ 이 바다 변해서 술이 된다면 어찌 한갓 삼백 잔만 기울이겠는가.’라고 흉금에 쌓인 감정을 바다에 풀어 놓았다. 호학의 군주 정조대왕(1776~1800년)은 여기에 오지는 않았지만 시 한 수를 짓는다.‘푸른 하늘에서 해가 바다에 비치니/ 그 누가 이 망양정을 알아보겠는가./ 눈을 크게 뜨고 보니 마치 공자의 집 같이 보이고/ 종묘와 궁궐의 담장도 뚜렷하게 보이는구나.’고려 말의 어지러운 시대에 곧은 성품으로 이재현, 이색 등과 뜻을 같이했던 정추(1333~1382년)가 이곳에 와서는 ‘망양정 위에 오래도록 서 있으니/ 늦은 봄이 가을 같아서 마음 더욱 비감해지네./…. 일만 골짜기 알천 바위가 잇달아 놓였는데/ 산을 따라 돌아가고 산을 따라 오는구나/ 큰 물결에서 구름 일어 하늘을 다 감싸고/ 바람은 놀란 물결을 보내어 언덕을 치고 돌아오네. ’비장하면서 우수 어린 감회를 쏟아낸다.생육신으로 5세 신동이라 불리었던 매월당 김시습은 ‘십리 모래밭에서 큰 바다를 바라보니/ 바다와 하늘이 드넓고 아득한데 달빛은 푸르구나./금강산은 바로 지척인데 속세와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구나./ 사람은 명아주 한 잎가에 떠 있구나.’라고 읊었다.송강 정철(1536~1593년)이 1580년(선조 13년) 45세 때 강원도 관찰사로 와서 지은 유명한 ‘관동 팔경’ 가사 중 망양정을 보자. “하늘 끝을 끝내 못보고 망양정에 올라보니 바다 밖은 하늘인데 하늘 밖은 무엇인가? 가뜩이나 성난 고래(파도)를 누가 놀라게 하였기에 물을 뿜거나 하면서 어지럽게 구는가?…. 저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흰 연꽃 같은 달덩이를 어느 누가 보내셨는가? 이렇게 좋은 세상을 다른 사람 모두에게 보이고 싶구나.” 신선주를 가득 부어 손에 들고 달에게 묻는 말이 “옛날의 영웅은 어디 갔으며 신라 때 넷 신선은 누구더냐? 아무나 만나보아 영웅과 사선(四仙)에 관한 옛 소식을 묻고자 하니 사선(四仙)이 있다는 동해로 갈 길이 멀기도 하구나.”라고 가슴 벅찬 낭만을 풀어내었다.위의 서인 정철 때문에 이곳 평해로 귀양 온 동인의 영수 아계 이산해(1539~1609년)는 ‘바다를 베개 삼아 위태로이 서있는 정자를 바라보니 눈앞이 탁 트이고/ 정자에 올라와 있으니 가슴속이 확 씻기는 것 같구나/ 긴 바람이 불고 저녁달이 떠오르니/ 황금궁궐이 옥 거을 속에 영롱하게 비치노라.’라고 지었다.수서 박선장(1555~1616년)의 ‘망양정’ 시는 ‘가슴을 여니 아득히 삼신산은 먼데/ 눈길 닿는 저 끝까지 만경창파 펼쳐있네/평생에 바다 보이는 뜻 이루고자 하시거든/ 그대 부디 망양정에 올라보시게나‘라고 적었다. 당주 박종(1735~1793년)은 매월당 김시습(1435~1493년)과는 무슨 인연인지 300년 시차를 두고 태어난 해와 죽은 해가 똑같다. 1767년 9월 25일 33살의 박종은 경주 구경을 떠나면서 동해안 3도 27개 군을 거쳐 1천700리를 걸어서 4개월 9일 만에 경주에 도착한다. 그 과정에 망양정 기행문을 남기는데 아마 지금같이 11월초가 될 것이다.그의 망양정 기행문은 “울진부에서 남쪽으로 40리를 가면 바닷가에 있는데 그 위에 지은 정자를 망양정이라 한다. 바다의 풍경을 보기가 청간정과 같다. 대개 바다는 천지간에 가장 호탕한 것으로서 천지도 삼킬 듯 아득히 그 끝을 알 수 없으니 정말로 천하에 더없이 좋은 경관이다. 구구한 강이나 호수의 풍경과 어찌 견주어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북방 해변에서 태어나 바다를 보는 것은 하루 세 때뿐만 아니었다. 그러나 청간정 기행에서 예전에 보았던 그 고향 풍경을 잊어버렸으니 이 또한 새 것을 좋아하고 낡은 것을 싫어하는 성정에서 나온 것이다. 눈에 익은 풍경이라 하여 그 평가에서 정당성을 잃는 것은 마음의 거울이 공평하지 못함에서 기인된 것이니 이 또한 부끄러운 일이다. 정자에 숙종의 어제 시가 걸려 있다.”처음 옮겼던 이 망양정에서 한참을 서성인 아둔한 나그네는 푸르디 푸른 넒은 바다에 세상의 근심을 던져버리고 바다에 마음을 맡겼지만 시 한 수 못 짓고 내려왔다. 파도는 쉼 없이 밀려와 바위를 때리고 하얀 포말은 허공에 사라지고 울고 있는 동해바다를 가슴으로 안고 발길을 돌렸다. 인근 바닷가 철망에는 동해의 오징어들이 가지런히 매달려 해풍을 쪼이고 있었다.#. 관동 팔경의 유래와 두 번 옮겨온 지금의 망양정울진 근남면의 왕피천을 따라 바닷가로 가면 그 옛날 실직국왕이 피난 왔다는 왕피천 건너 울진 엑스포공원과 케이블카가 왕피천 물위로 쉼 없이 왔다갔다를 반복한다. 왕피천 끝나는 곳에 망양정 해수욕장은 지난 여름의 뜨거웠던 잔영만 아른거린다. 망양정해수욕장에서 250m 위로 오르면 옮겨지은 망양정이 나온다. 옛 망양정 자리보다 높이 솟은 산봉우리에 옮겨지은 망양정은 옛 망양정과 비슷한 풍광을 주지만, 바닷가에 바싹 붙어 있어 긴장감을 주면서 넓은 동해바다를 온통 끌어안는 옛 망양정의 기막힌 장소만큼은 못하다.‘바다를 바라보는 정자’라는 뜻의 망양정은 월송정과 마찬가지로 고려시대에 여기서 아래로 15km 떨어진 기성면 망양 해안가에 세웠으나 세월의 무게에 견디지 못하고 허물어진 것을 평해 군수 채신보가 1471년(성종 3년) 현종산 남쪽 기슭에 이전하였다. 1517년(중종 12년) 해풍과 비바람에 파손된 것을 1518년에 중수하였고, 1590년(선조 23년) 평해 군수 고경조가 중수했으나 허물어져 오랫동안 방치되어 왔다. 1854년(철종 5년) 울진현령 신재원이 옮길 것을 제안했으나 재정을 마련하지 못하였고, 울진현령 이희호가 군승 임학영과 1858년(철종 9년) 에 근남면 산포리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 여기서도 허물어진 것을 1958년 중건하였으나 퇴락하여 2005년 기존 정자를 해체하고 새로 건립한 것이 지금 있는 것이다.관동팔경은 관동(옛 강원도 동해안지역) 지방의 수많은 경승지 중 특히 손꼽히는 경승지 8개의 명승지를 지칭하는데 평해의 월송정과 망양정(지금은 울진으로 옮겼음), 삼척 죽서루, 강릉 경포대, 양양 낙산사, 간성 영랑호, 고성 삼일포, 통천 총석정이다. 이중 통천 총석정과 고성 삼일포는 1953년 휴전선으로 현재 북한지역이고 아래 월송정과 망양정은 1962년 강원도에서 경북으로 분리되어 지금의 강원도는 남북으로 2개씩 찢어졌다. 그리고 이 망양정이 인근도 아니고 이렇게 멀리 옮겨온 것은 울진에는 관동팔경이 없어 옛 평해에 2개(월송정, 망양정) 있어 하나를 갖고 갔다고도 한다. 숙종의 ‘관동제일루’ 편액도 을진 객사에 보관했다가 잃어버렸단다.정호승 시인은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언제나 찾아 갈 수 있는….” 이라고 했다. 그렇다. 누구나 자기만의 바닷가가 필요하다.이렇게 망망대해를 보면서 호연지기를 기르기도 하지만 저마다 바다를 대하는 관점은 다를 것이다. 필자는 탁 트인 망양정 같은 바다도 좋아하지만 이런 곳은 순간의 상쾌함은 있어도 가슴 시린 잔잔한 여운은 없다. 그래서 기암괴석에 은빛모래 소곤대는 아련한 사연이 있는 푸른 동해바닷가를 가슴에 담고 있다. /글·사진= 기행작가 이재호

2020-11-10

포항의 생명력이 숨 쉬는, 포항사람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

포항을 알고 싶다면 어디부터 가야 할까?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 있겠지만, 죽도시장은 단연 앞 순위에 놓인다. 그렇다. 죽도시장을 모르고서야 포항을 안다고 얘기하기는 곤란하다. 어물전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문어와 날랜 칼 솜씨로 생선을 손질하는 아낙, “잘 오소, 어서 사이소, 싱싱한 오징어가 좋니더” 외치는 상인의 구성진 목소리를 접해 보고, 건어물상, 청과상, 약재상, 떡집 등을 느긋한 걸음으로 슬렁슬렁 둘러본 후에 수제비 골목 좌판에 앉아 낯선 사람과 어깨를 부대끼며 뜨거운 국물 후후 불어가며 4천원짜리 수제비나 칼수제비 한 그릇쯤은 먹어봐야 비로소 죽도시장을, 포항의 속살을 잠시나마 느꼈다고 말할 수 있다.포항 원도심 한복판에 수많은 상점과 노점상이 모여 있고, 포항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죽도시장은 지역 서민경제의 심장이자 생명력의 원천이다. 동해안에서 규모가 가장 큰 전통시장으로, 14만8천760㎡ 면적에 2천500여 개의 점포가 들어서 있으며, 실제로는 어시장과 농산물시장, 그리고 죽도시장 세 개를 아우르고 있는 게 죽도시장이다. 총 25개 구역에 수산물, 건어물, 농산물, 식품, 청과, 떡, 약재, 의류, 한복, 포목, 이불, 주방용품, 제수용품 등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다양한 품목을 취급하고 있어 볼거리, 먹거리, 즐길거리가 풍성하다. 포항의 숨결을 느끼고 싶다면 죽도시장에 가봐야 한다.□ 포항의 역사와 함께해온 동해안 최대의 전통시장한 지역을 대표하는 시장은 그 지역의 역사와 궤적을 함께하기 마련이다. 강과 바다를 접하고 있는 포항은 역사적으로 타지역과 교류하기에 용이한 곳으로, 포항을 대표하는 설화인 연오랑세오녀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1732년 함경도에 대기근이 발생했을 때 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환곡을 저장하는 창(倉)이 포항에 개설된 것도 바닷길을 이용할 수 있기에 가능했다. 서해 강경장, 남해 마산장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장이 포항 부조에 존재할 수 있었던 것도 형산강 덕분이다. 부조장은 포항 연안의 청어와 소금을 내륙으로 가져다 팔고 전라도와 경상도의 농산물을 거래하는 교역의 요충지로 이름이 높았으나 일제강점기에 포항과 부산을 연결하는 동해남부선 철도가 부설되는 등 환경이 변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역사의 긴 흐름에서 보면, 죽도시장은 부조장의 전통을 잇는 큰 장터라 할 수 있다.일제강점기 포항의 시장 상황은 어떠했을까. 최근 발간된 두 권의 저서에서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눈에 비친 포항 시장의 한 단면을 확인할 수 있다.“조선의 상거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장이다. 일본인이 포항에 들어왔을 당시는 물론이거니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시장 거래 외에 점포를 갖춘 상인은 볼 수 없었다. 당시 포항에는 여천시장이 있었고 근처에는 연일시장, 흥해시장이 있었다. 특히 명태 거래에서 조선 남부 3대 시장 중 하나로 손꼽히던 부조시장에서는 생활필수품뿐만 아니라 많은 해산물과 곡물이 거래되고 있었다.”김진홍 엮음, ‘조선의 특별한 식민지 포항’, 글항아리, 2020, 287쪽“(포항은) 1914년 제1기 축항 건설 이후 제3기의 건설 완료로 이전의 부산을 경유한 수송에서 직접 수송이 되어 본격적인 발전으로 내디뎠다. 또한 1914년 도야마현(富山縣)의 하마다(濱田) 등이 개량한 청어정치(定置)를 경영하여 성과를 냈으며, 1917~18년경부터 하야시가네(林兼) 등의 운반선이 내항하여 급속히 발전하였다. 이 무렵까지는 어업 근거지라고 하기보다는 물자 교역의 시장과도 같은 존재였다.”요시다 케이이치 지음, 박호원·김수희 옮김, ‘조선수산개발사’, 민속원, 2020, 614~615쪽요컨대 일본인들이 포항에 이주하기 전부터 여천시장, 연일시장, 흥해시장, 부조장이 자리를 잡고 오랫동안 운영되었다. 또한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수산업을 일으키기 전의 포항은 어업 근거지라 하기보다는 물자 교역의 시장 성격이 더 강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해방 후 일본인들이 물러나고 1949년 8월 포항은 읍에서 시로 승격되지만, 6·25전쟁 때 시가지가 초토화되면서 여천시장도 사라진다. 전쟁 후에 지금 칠성천 복개주차장 쪽에 좌판이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었고, 이것이 점차 몸집을 불리면서 상설시장이 되었으며, 1971년 11월 시장 허가를 받은 것이 죽도시장이다.죽도시장이 동해안을 대표하는 전통시장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포항제철을 빼놓을 수 없다. 포항종합제철 제1기 종합 준공식이 열린 것이 1973년 7월 3일, 이때를 전후로 포항 인구가 큰 폭으로 증가하고 물자도 많이 필요해지면서 죽도시장도 외형을 키우게 된다. 포항시와 영일군을 합한 인구는 전쟁 직후인 1954년 20만9천369명이었으며, 1970년 27만8천144명을 기록한다. 1973년 처음으로 30만 명을 넘어 30만7천548명이 되었고, 1981년 40만1천772명, 1992년 50만273명을 기록하며 상승곡선을 그린다(‘포항시사’참조). 포항이 세계적인 철강도시로 발돋움하며 많은 인구가 유입하는 과정에서 죽도시장도 덩치를 키우게 되었고, 철강산업이 정체되면서 포항과 죽도시장도 성장세를 멈춘 것이다.□ 가장 먼저 새벽을 깨우는 죽도 어시장포항의 첫 새벽을 깨우는 곳은 죽도 어시장이다. 온 세상이 깊이 잠들어 있을 새벽 4시 30분께 죽도 어시장은 대낮처럼 환하게 불빛을 밝힌다. 트럭이 도착해 생선 궤짝을 내려놓으면 상인들도 재바르게 움직인다. 자정 무렵 위판장에 도착한 상인들은 쪽잠을 자다가 위판장에 생선이 들어오는 시간에 목이 긴 고무장화를 신고 새날을 시작한다.문어, 대게, 대구, 방어, 우럭, 가자미, 도루묵, 소라 등 물 좋은 생선이 위판장 바닥에 정렬된 직후 요란한 종소리를 울리며 빨간 모자를 쓴 경매사가 둥장하자 검은 모자에 각자의 고유번호를 단 중매인들도 우르르 모여든다. “허이∼ 허허이∼” 경매사가 굵은 목소리로 특유의 리듬을 타며 경매를 이끌어가고, 중매인들은 두툼한 점퍼 속에 숨긴 손을 펼쳐 보이며 갖가지 신호를 보낸다. 물 좋고 값 좋은 생선을 차지하기 위한 수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것이다. 생선마다 낙찰자를 만나고, 하루를 준비하기 위한 상인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지는 사이 죽도시장에 여명이 밝아온다.죽도시장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붐비는 곳도 어시장이다. 대형마트와 온라인쇼핑이 급성장하면서 전통시장에 심각한 위기가 닥쳤고, 죽도시장도 형편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어시장은 전국 곳곳에서 선도 높은 생선들이 모여들고, 가격도 괜찮은 편이어서 그나마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어시장에만 160여 개의 점포와 200여 개의 횟집이 있으며, 그보다 많은 좌판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가을이 깊어가는 이즈음 어시장에 가면 부산 고등어, 제주 생갈치, 목포 조기, 서해안 꽃게를 볼 수 있고, 제철을 맞은 방어도 만날 수 있다. 생오징어 다섯 마리에 2만 원인데, 제주 생갈치는 열 마리에 2만 원이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큰 대게는 세 마리에 10만 원, 2㎏ 문어는 5만 원 정도가 요즘 시세다.찬바람이 불면 죽도 어시장은 과메기 세상으로 바뀐다. 상점마다 쫀득쫀득한 과메기가 넘쳐난다. 꽁치 과메기가 대부분이지만, 과메기 원조인 청어 과메기도 이따금 볼 수 있다. 겨울철 죽도시장 경기는 과메기가 쥐락펴락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과메기가 많이 팔려야 어시장에도 활기가 돈다.죽도 어시장에는 다른 시장에서는 볼 수 없는 명물이 있다. 하얀 묵처럼 생긴 개복치는 포항에서 혼사나 장례같이 큰일을 치를 때 내놓는 귀한 음식이다. 생김새는 아귀, 물곰(곰치) 같은 일종의 못난이 어류인데, 큰 개복치는 길이 3m에 무게는 1t 가량 된다. 토막 낸 상어고기를 일컫는 돔배기는 제사 때나 볼 수 있는 음식으로, 꼬치산적을 굽거나 찜, 탕 요리를 하기도 한다. 고소한 고래고기 맛을 못 잊어 대낮부터 어시장 가게에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는 사람도 볼 수 있다.고래, 상어, 개복치 같은 대물은 아무나 손댈 수 없다. 초보자는 아무리 날카로운 칼을 잡아도 살집에 칼이 들어가지 않는다. 노련한 칼잡이라야 부위별로 깔끔하게 해체할 수 있다. 대물이 해체될 때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숨을 죽이며 지켜보는 장면도 죽도 어시장의 진풍경이다.□ 현대화와 함께 전통시장의 매력도 남아 있는 곳전통시장에 닥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죽도시장은 2000년대 들어 아케이드를 설치하는 등 시설 현대화에 많은 공을 들였다. 지금은 거의 모든 구간에 아케이드가 설치돼 전국 어느 시장보다 쾌적한 공간을 자랑하고 있다. 현대화의 흐름 속에서도 전통시장의 매력은 남아 있다. 술빵, 국화빵, 붕어빵, 대게빵, 호떡은 물론, 감주, 콩국, 우뭇가사리묵, 달고나, 강냉이 등 추억의 주전부리를 마음껏 할 수 있는 곳도 죽도시장이다.시장이 현대화되고 질서가 잡히기 전에는 악다구니가 넘쳤다. 상인들끼리 머리채를 움켜쥐고 장바닥을 이리저리 뒹굴며 살벌하게 싸우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살기마저 느껴지는 그 싸움은 척박한 지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식구들의 밥상을 차리고 아이들 공납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물건을 팔아야 했고, 그러려면 자신의 손바닥만한 영역이나마 어떻게든 지켜내야 했다. 그렇게 죽도시장의 너른 품 안에서 수많은 사람이 치열하게 푼돈이든 큰돈이든 벌어 식솔을 먹여 살렸다.죽도시장은 꼭 사야 하는 물건이 있어야 가는 곳이 아니다. 일 없이도 사람 구경, 물건 구경하러 가는 곳이 죽도시장이다. 싱싱한 횟감 사라는 고함 소리, 가격 흥정하는 소리, 철지난 유행가가 뒤섞여 있고, 수제비를 푸짐하게 담아주는 후덕한 아주머니, 묵묵히 전을 부치고 있는 무표정한 아주머니, 과일 몇 알 소쿠리에 담아 놓고 좌판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할머니 등 수많은 우리들의 자화상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죽도시장이다. 숱한 사람들의 애환이 서려 있고, 추억이 묻혀 있으며, 가슴 뜨거워지는 생명력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곳, 그리하여 죽도시장은 포항사람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다.끝사진/안성용글/김도형경희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예담출판사 편집장 역임. 현) 글로벌 해양수산 매거진 ‘THE OCEAN’편집위원, 현) 독도도서관친구들 이사, 현) 한국단백질소재연구조합 본부장.

2020-11-09

‘아이 러브 대가야 고령’… 살기좋은 도농복합도시로 도약

어느 지방자치단체 할 것 없이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는 축적된 힘과 목표를 향한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는 것이 지향점과 도착지를 요약하는 슬로건. 살기 좋은 도농복합도시를 만들려는 고령군은 최근 ‘아이 러브 대가야 고령!’이라는 캠페인을 펼치며 보다 나은 고장으로 성장하려 애쓰고 있다. 그 현장을 찾아 어떤 구체적 실천이 진행되고 있는지 살펴봤다.▲하향식 사업의 한계를 벗고, 주민주도형 발전으로상하로 겹쳐진 두 개의 하트와 둥근 서체가 어우러진 독특한 디자인. 최근 고령군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이 로고는 ‘아이 러브 대가야 고령’ 캠페인의 BI다. 고령은 이 캠페인을 통해 물질적 성장을 넘어 새로운 도약을 준비 중이다.‘아이 러브 대가야 고령’ 캠페인의 시작은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고령군은 안전하고 아름다운 환경의 조성이 지역경쟁력으로 이어진다는 인식 하에 ‘아름다운 고령 만들기’ 사업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안내간판 등 공공시설물 전수조사를 거쳤고, 270건의 시설물을 개선 조치했다.여기에 그치지 않고 고령군은 군민이 주도하는 자발적·상향적 마을 만들기 사업을 추진함으로써 ‘아름다운 고령 만들기’ 사업의 성과를 계승하고 있다.또한, 하향식 정비사업의 한계를 극복하고 도시 브랜딩을 통해 지역경쟁력을 제고하는 근본적인 변혁도 모색할 계획이다.지난해 9월에 시작해 2022년까지 3년간 추진될 ‘아이 러브 대가야 고령’ 캠페인은 누구나 살고 싶은 도시를 조성하기 위해 ‘깨끗하고 청결한 도시 고령’, ‘친절과 배려로 맞이하는 도시 고령’, ‘사랑이 넘치는 아름다운 도시 고령’을 지향하게 된다.이를 위해 고령군은 기존의 마을 정비 사업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을 도입했다. 그중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모든 게 주민주도형 사업이라는 것이다.캠페인 전반에서 마을 주민은 단순히 의견 수렴이나 인력 동원의 대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제 인식과 과제 선정에서부터 계획 수립과 과제 추진까지의 과정을 주도하게 된다.고령은 2019년 하반기에 행정기관, 사회단체, 읍면자치위원회 등이 참여하는 민·관 합동 ‘아이 러브 대가야 고령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추진위원회는 ‘기획·홍보, 청결, 친절, 아름다운’ 등 4개 분과로 이뤄졌다, 추진위원은 공동위원장, 공동부위원장, 분과위원장, 자문위원과 분과별 위원 등 총 88명.이들은 컨설팅, 역량교육, 실천과제 논의 및 선정을 위해 교육과 워크숍을 마쳤고, 추진위원장 선출 등 조직 구성도 마무리했다. 추진위의 공동위원장은 곽용환 고령군수와 김의순 전 축제추진위원장이다. 자문위원으로는 고령군의회 의원들이 선임됐다. 또한 각 읍·면마다 추진위원회도 구성했다. 읍·면 추진위원회는 주민자치위원회를 중심으로 199명의 위원이 참여한다. 군 추진위원 대다수는 읍·면 추진위에 중복 참여함으로써 긴밀한 협력도 가능해졌다.고령군은 이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올 7월 ‘고령군 아이 러브 대가야 고령 추진위원회 설치 및 지원 조례’를 제정해 자치법규에 추진위 설립 근거를 마련했다.▲분과별 회의 통해 ‘살고 싶은 도시 고령’을 위한 과제 선정지난 2월 추진위는 캠페인 실천과제를 발굴·선정하기 위해 청결 분과를 시작으로 분과별 간담회를 개최했다. 20명 전후의 분과별 위원들이 참석한 논의 결과 청결 분과에선 ‘도로변 적재물 정비’, ‘읍·면별 마을 대청소 실시’, ‘노인 일자리 활용해 수시로 마을 청소 및 분리수거 실시’가 결정됐고, 친절 분과에선 ‘사회단체·기관별 기초질서 지키기’, ‘고령 대표 친절왕, 가게 선정 및 인센티브 제공’ 등이 논의됐다.또한 각 분과는 ‘누구나 살고 싶은 도시’를 만들기 위한 15가지 건의사항도 군청에 전달했다.이들 분과 위원회에서 선정한 7가지 실천과제는 읍·면 추진위원회로 전달됐다. 읍·면 추진위는 즉각 환경 정비가 필요한 위생 취약지 등 지역 현황을 파악하고 실정에 맞는 추진 계획을 수립해 11월 현재까지 실천과제 추진에 매진하고 있다.그 구체적 사례로 공한지 화훼 단지 조성 등 마을 꾸미기 활동을 전개했다. 지저분하게 방치돼 있던 공한지나 자투리땅을 정돈하고 읍·면에서 꽃나무 등을 지원받아 심었다.또 마을 대청소 등 환경 정화 활동도 벌였다. 불법 투기된 폐기물 등으로 몸살을 앓는 위생 취약지에서 집중적인 환경 정화 활동을 추진했고, 매월 1회 마을 대청소의 날을 정해 실천했다.코로나19 대응 자체 방역 활동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친절 분과를 중심으로 코로나19 대응 자체 방역 활동을 전개해 ‘청정 고령’을 지켜내기 위해 땀을 흘린 것.여기에 더해 추진위는 농약병 분리수거 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고, 지역민들도 이에 호응해 작지 않은 성과를 올렸다.▲‘가야베리와 두근두근 첫 만남’ 인기 만점기획·홍보 분과는 고령군민을 대상으로 ‘아이 러브 대가야 고령’ 캠페인을 알리고 참여를 유도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SNS를 활용해 다채로운 홍보를 진행한 것이다. 이들은 가장 먼저 캠페인을 나타낼 상징물을 제작했다. 캠페인의 정체성인 ‘협력’과 ‘사랑’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BI를 개발했고, BI의 하트 디자인에서 캠페인 마스코트인 ‘가야베리’가 탄생했다.전단지 등 홍보물도 만들었다. 특히 캠페인 마스코트 ‘가야베리’와 젊은 감각으로 리뉴얼한 고령군 마스코트 ‘가야돌이’가 함께 등장하는 카카오 이모티콘 ‘가야베리와 두근두근 첫 만남’은 짧은 시간에 2만 건이 전부 소진될 정도로 인기 만점이었다.고령군은 ‘아이 러브 대가야 고령’ 캠페인의 2021년 핵심 사업으로 ‘아름다운 마을 콘테스트’를 기획하고 있다. ‘아름다운 마을 콘테스트’는 읍·면마다 하나씩 8개 마을을 선발해 집중적으로 지역을 정비하고, 참가 마을 가운데 가장 우수한 성과를 낸 곳을 가려 시상하는 마을 가꾸기 경진대회.콘테스트는 서류 심사와 현장 평가를 거쳐 우수 마을을 선정하는데, 우수 마을을 배출한 읍·면은 3천만 원의 상사업비를 배정받게 된다.이와 함께 고령군은 우수 마을 입구에 안내간판을 설치하고, 군청 홈페이지와 소식지 등 다양한 채널을 활용해 이를 홍보할 예정이다.‘아름다운 마을 콘테스트’가 주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다면, 다른 마을과 선의의 경쟁 속에서 공동체가 활성화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아이 러브 대가야 고령’ 캠페인은 도시 브랜딩 프로젝트다. 이는 고령군의 정체성을 정립하고, 이미지를 쇄신해 군민들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장기 프로젝트이기도 하다.지역의 브랜드 가치가 상승하면 주민들의 생활도 윤택해진다. 고령군이 청결하고 친절하며 아름다운 도시로 인정받는다면 군민의 자긍심이 높아지고, 고령을 찾는 관광객들에겐 신뢰를 선물하게 된다.이와 관련 곽용환 군수는 “아이 러브 대가야 고령 캠페인은 주민 모두가 함께 걸어야 할 길”이라며 더 크고 보다 행복한 고령을 위해 군민들이 지혜를 모아줄 것을 부탁했다./전병휴 기자 kr5853@kbmaeil.com

2020-11-05

동학 2대 교주 해월이 대동세상의 꿈을 키운 터

“복술은 보잘 것 없는 무리이면서 감히 황당한 잡술을 품어 주문을 지어내고 요망한 말로 선동을 했다. 하늘을 위한다는 설로 비록 저 양학을 배척한다 하지마는 도리어 사학(邪學)을 본떴으며, 이른바 포덕문이라는 것은 겉으로 거짓을 꾸미고, 몰래 화를 일으킬 하는 마음을 기르고자 하는 것이다. 주문과 약, 그리고 칼춤은 평화시 난을 꾸미려 하고 은밀하게 당을 모으고자 하는 짓이다.”‘일성록(日省錄)’, 고종 1년(갑자(甲子), 1864. 2. 29.이 글은 ‘일성록’에 실려 있는 경상감사 서헌순이 올린 장계(狀啓)의 일부이다. 장계를 들은 대왕대비 조씨는 복술을 이단으로 지목하고 목을 매달아 죽이도록 한다. 글 속의 복술은 바로 수운 최제우이다. 수운은 동학을 창도한 인물이다. 동학의 교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비변사등록’(제250책, 철종 14년 계해(癸亥) 12월 20일)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조령으로부터 경주에 이르기까지 400여 리의 10여 주군(州郡)에서 동학의 이야기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듣지 않음이 없고, 경주 주위의 여러 읍은 그 이야기들이 더욱 심하니, 주막의 부녀자들과 산골짜기의 아이들까지도 그 글을 전하여 읊지 아니함이 없다.”이 글로 미루어 볼 때, 조령에서 경주까지 거의가 수운의 동학에 매료, 경도되었고, 특히 경주, 포항지역에는 주막의 부녀자에서부터 산골의 아이들까지 동학의 글을 읽고 외우고 다닐 정도였다고 하니 동학에 대한 백성들의 관심과 기대는 대단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道氣長存邪不入(도의 기운을 길이 보존한다면 사특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리니)世間衆人不同歸(세간의 뭇사람과는 같이 돌아가지는 않겠다.)- ‘입춘시’ “동경대전”방황과 방랑의 세월을 보내다 기미년(1859) 10월 용담정으로 돌아온 수운이 쓴 첫 시이다. 수운의 용담정으로의 회귀는 조선사회의 현실적 모순을 뼈저리게 느끼던 15여 년의 방황의 세월에 대한 종지부였다. 용담정으로 돌아와서 쓴 ‘입춘시’는 새로운 삶에 대한 희구이며, 대도를 이루어보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리고 1860년 4월 5일에 동학을 창도한다. 해월 최시형이 수운을 만난 것은, 1861년(철종 12년) 6월, 해월의 나이 35세였다. 수운을 만난 처음에 해월은 어떤 깨달음을 얻었을까? 그의 글을 통해 더듬어 보자.“내가 젊었을 때 스스로 생각하기를 옛날 성현은 뜻이 특별히 남다른 표준이 있으리라 하였더니, 한번 대선생님을 뵈옵고 마음공부를 한 뒤로 비로소 별다른 사람이 아니요, 다만 마음 정하고 정하지 못하는데 있는 것인 줄 알았다. 요순의 일을 행하고 공맹의 마음을 쓰면, 누가 요순이 아니며 누가 공맹이 아니겠는가.”‘독공(篤工)’, “해월신사법설”수운을 만난 순간이 해월에겐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 순간이었다. 꽉 닫혀있던 마음이 열리는 순간이고, 막혀있던 갑갑증이 일시에 해소되는 순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해월의 이 말은 공자의 제자인 안연이 말한 “순(舜)은 어떤 사람이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舜何人 予何人]”라는 물음과 다름아니다. 안연의 물음은 “순이 사람이면 나도 사람이고, 순이 성인이 되었으면, 나도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또한 “순이 자신의 안에 있는 마음을 깨쳐 성인의 경지로 나아갔다면, 나 또한 내 안의 참 나를 발견하고, 확인하고, 깨쳐나간다면 성인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한마디로 ‘인간 존재에 대한 인식’이 일어나는 순간이었다.해월은 이후 용담정으로 가서 수운에게 가르침을 받는다. 그리고 1863년 7월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임명되고, 8월 14일 동학의 도통을 승계하면서 동학의 2대 교주가 된다. 동학 하면 수운의 신이한 행적과 참형, 전봉준의 동학혁명, 그리고 3ㆍ1운동을 먼저 떠올린다. 특히 녹두장군 전봉준의 모습은 동학을 ‘혁명을 위한 도구’로서 ‘사회변혁을 뒷받침하는 이론적인 수단’으로 이해하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해월에게 와서 동학은 비로소 신비한 이적(異蹟)을 벗고, 공허한 사상의 날개도 벗고, 변혁을 위한 혁명주의적인 요소도 벗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 의미에 대한 물음을 던지게 된다. 그리고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따뜻한 세상을 마주하게 한다.“내가 청주를 지나다가 서택순의 집에서 그 며느리의 베 짜는 소리를 듣고, 서군에게 “누가 베를 짜는 소리인가?”하니, 서군이 “제 며느리가 베를 짜는 소리입니다.”하는지라, 내가 또 “그대의 며느리가 베 짜는 것이 참으로 그대의 며느리가 베 짜는 것인가?”라고 물으니, 서군이 내 말에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어찌 서군뿐이겠는가? 도인의 집에 사람이 오거든 사람이 왔다 이르지 말고 한울님이 강림하셨다 말하라.”‘대인접물(待人接物)’, “해월신사법설”중세, 사람에게 귀천이 있고 상하가 엄연히 존재하던 시대, 사람을 사고팔 수 있던 시대, 결혼의 과정에서 여성의 존재가 무의미했던 시대, 해월이 던지는 “그대의 며느리가 참으로 그대의 며느리인가”라는 물음은 큰 울림을 준다. 계층과 계급이 사람을 사람 아니게 몰고 가던 때, 며느리를 한울님(하늘, 天)이라 천명하는 해월의 선언은 그래서 위대하다. 하지만 해월도 여기에 하나의 단서를 단다.“내가 바로 한울(天)이요 한울이 바로 나니, 나와 한울은 바로 한 몸이다. 그러나 기운이 바르지 못하고 마음이 옮기게 되므로 그 명(命)에서 어긋나고, 기운이 바르고 마음이 정해져 있으므로 그 덕에 합한다. 그러므로 도를 이루고 이루지 못하는 것이 전부 (나의) 기운과 마음이 바르고 바르지 못한 데 있는 것이다.”‘수도법(修道法)’, “해월신사법설”‘아시천천시아[我是天天是我]’이지만 나의 기운이 바르고, 나의 마음이 항상 바른 것을 행할 때 진정한 나가 되는 것이고, 이럴 때 한울님과 한 몸이 된다는 것이다. 해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도에 대한 한결같은 생각은 주릴 때 밥 생각하듯이, 추울 때 옷 생각하듯이, 목마를 때 물 생각하듯이 해라. 부귀한 자만 도를 닦겠는가, 권력 있는 자만 도를 닦겠는가, 유식한 자만 도를 닦겠는가, 비록 아무리 빈천한 사람이라도 정성만 있으면 도를 닦을 수 있다.”‘독공’, “해월신사법설”도는 일상을 통해서 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상이 도인데, “이 나라는 도 닦는 것도 부귀한 자라야, 권력 있는 자라야, 유식한 자라야 할 수 있다니”. 곧, “바른 삶, 바른 행동, 바른 마음을 지니고 실천하는 데에도 귀천이 존재하다”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태생의 귀천이 아니고, 권력의 유무가 아니라 ‘진실한 마음’, ‘진정성 있는 태도’에 있다고 말한다.순일한 것을 정성(誠)이라 이르고 쉬지 않는 것(無息)을 정성이라 이르나니, 이 순일하고 쉬지 않는 정성(誠)으로 천지와 더불어 법도를 같이하고 운을 같이하면, 가히 대성 대인이라고 이를 수 있다.‘성경신(誠敬信)’, “해월신사법설”해월에게 대성인, 대인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한결같이 순연한 마음을 견지하는 것, 오늘 하루가 아니라 매일, 또 매일 이러한 마음을 지니면서 법도대로 살아가면 성인이 되고 대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수운이 동학을 창도하고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진 기간은 3년여이다. 이후 40여년을 동학을 이끈 인물은 바로 해월이었다. 해월은 수운의 전기인 ‘도원서기’를 비롯해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과 수운의 노래인 ‘용담유사’를 간행하였다. 실제 해월에 와서 동학은 교단과 교세, 교리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경주에서 태어난 해월은 15세 무렵에 포항으로 온 이후 신광과 흥해 등지에서 생활한다. 17세 무렵에는 신광면 기일(基日, 터일) 마을의 제지소에서 일하며 성장하였고, 19세에는 흥해 매곡에 사는 밀양 손씨와 결혼하면서 이곳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28세에 신광 마북(馬北)으로 옮기게 되는데, 이곳에서 마을 이장 격인 ‘집강(執綱)’의 소임을 맡았다. 이후 33세에 다시 마을 안쪽의 검곡(금등골)으로 옮겨 갔다. 이곳에 머물 때 수운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동학교도로서의 삶이 시작된다.동학 2대 교주 해월, 경주에서 포항 신광으로, 차디찬 현실이라는 땅을 디디고 살았지만 대동세상, 평등세상을 꿈꾼 해월, 우리 내면의 깊은 곳에 있는 삶의 진정성에 대한 의문을 우리의 눈높이로 끌어내리면서, 진정성 속에 빛나는 생의 의미들을 그려나간 해월.해월이 걸어간 길 위에서 묻고 싶다. 해월이 꿈꾸던 세상은 이루어졌는가? 여전히 우리는 진정성이 결여된 사회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과 대화 속에서 문제의 근원을 찾아가기보다는 나와 너, 내외를 구분하면서 편한 길을 가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왜, 무엇이, 우리를 해월이 힘들게 걸어가야 했던 길에 여전히 머물도록 하는 것일까?사진/안성용글/신상구위덕대 자율전공학부 교수, 양동문화연구소 소장, 포항문화재단 이사. 동국대 국문과에서 ‘수운 최제우의 성경론과 문학적 실현 양상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저서 ‘치유의 숲’ 등 다수.

2020-11-04

희망 없음의 희망을 깨우는 일이 바로 우리가 할 일

문화재단은 아파트 마당에 자리 잡고 있다. 처음 오시는 분들이 건물을 찾느라 더러 헤맬 수도 있겠다. 지원금 신청할 때 서류 넣기가 어려워서 딱 한 번 사무실을 방문한 적이 있다. 주차공간을 가진 도로의 어떤 건물을 상상하고 온다면, 더부살이 하는 자취생 같은 문화재단의 위치에 다소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까.올해 7월초에 첫 출근 하셨다는 대구문화재단 이승익 대표님을 만났다. 인상이 좋으시다. 무슨 얘기든 다 들어줄 테니 편안히 해보라는 얼굴이다. 따끈한 커피부터 마시고 인터뷰를 시작했다.“문화재단에 대한 소개 말씀 부탁드립니다.”“문화재단은 2009년에 대구시 문화예술 플랫폼 기능을 표방하며 출범했습니다. 찾아가는 예술행정에 포커스를 맞추고 예술인 진흥사업과 예술인 교육사업, 생활문화지원 외에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대구 예술인을 위한 지원도 하고 있습니다. 생활문화의 비중이 높아지고 ‘시민 문화 본부’라는 조직이 만들어져서 일반인들의 생활문화육성도 돕습니다. 운영하는 시설로는 KTG를 리모델링해서 영국의 테이트 모던과 비슷한 예술창작공간을 만들어낸 예술발전소와 범어 아트 스트리트, 가창창작스튜디오, 대명공연예술 연습 공간 등이 있습니다.”예술인들에게는 경제적 창출도 중요하지만 작업을 할 수 있는 독립된 공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경제적 효과를 더한 고객과 소통할 수 있는 레지던스 사업은 모든 작가들의 생활을 돕는 방안이기도 하다. 지원할 공간은 한정되어 있고, 레지던스 입주를 원하는 사람은 다수여서 경쟁이 치열한 것이 문제다. 작가의 방 같은 작업공간만 주어져도 좋겠다.“대구 문화계의 발전을 위해서 어떤 변화가 주어져야 할까요?”“코로나로 인해서 문화가 많이 위축되어 있는데 단계적 과제로 예술인들이 안정된 기반 속에서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 지원 사업이 중요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문화예술의 생산 유통 전 과정에서 막힘 현상이 없도록 예술인과 생활문화인을 연결하고, 예술인과 시민을 연결하고, 기업과 매칭해서 창작활동에 도움이 되도록 출연금 확보 노력과 동시에 문화 메세나 운동이나 기부활동 등 여러 가지 운동을 진행할 예정입니다.”예술인 지원 사업의 공정성을 위해 심사 결과를 오픈하고, 탈락자를 대상으로 멘토링을 진행하는 등, 추가재원을 확보하려 애쓰고 있다는 말씀에 신뢰가 간다. 어려운 자리에 앉아 있어서 어깨도 무거울 것 같다. 어두울수록 더 무거운 법이니.“문화인재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시려는지 궁금합니다.”“대학졸업 예정자나 청년작가들을 위한 지원 프로그램이 많이 있어서 문화 예술을 통한 일자리 창출과 각종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창작지원 공연지원으로 홀로서기와 중견작가 중견예술인을 위한 생애 주기별 지원도 하고 있습니다. 이 밖에 해외네트워크를 통하여 외국에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대구와 베를린을 잇는 ‘다베 네트워크사업(DaBe Net work)’입니다. 그동안 두 도시간 교류로 많은 성과를 거뒀지만, 올해는 코로나19 여파로 교류가 잠정 중단되어 아쉽습니다.”다베(DaBe)는 대구와 베를린의 합성어로 아트 허브의 도시 베를린에서 예술 활동을 하도록 지원하는 사업이라고 귀띔해주신다. 그 외에 ‘멘티멘토’로 원로작가들이 청년들을 가르치는 프로그램도 확대하려 하신다.“기관장으로서의 포부가 있다면?”“대구는 교육과 문화의 도시입니다. 근대예술인의 근거가 많이 남아 있고, 6·25 때에는 예술수도 기능도 했어요. 국립극단의 본부와 임시행정 수도가 대구에 있었거든요. 대구를 보는 외부의 시각이 곱지 않아요. 문화가 낙후되어 있고 우리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문화적으로 정체된 느낌이 없지 않지만, 최근에 국채보상운동 정신을 이어받자는 얘기가 나오며 2·28운동의 자랑스러운 민주화 정신과 K방역으로 자부심이 깨어나고 있어요. 풍성한 문화 활동으로 시민들의 자긍심을 깨어주는 것이 문화재단이 해야 할 일입니다.”어려움에 처해 있는 동안 상처 받고 기죽은 자긍심을 깨우는 일, 루쉰은 그것을 희망 없음의 희망을 부르짖는 애타는 포효라고 했다. 희망이 보이지 않던 시대에 목이 아프게 외친 희망, 그게 바로 루쉰의 ‘납함’이다. 문화재단이 국채보상운동이라든가 2·28 민주화 운동으로 보여준 ‘대구의 정신’을 살리고 지역예술인들에게 기를 불어넣어주면서 대구시민과 소통하는 기관으로 나아간다면 20년을 향한 문화재단의 역할로 충분하고말고. 향후 계획은 문화재단과 예총의 협약으로 뭘 수행하고 무엇을 고민해야할지 논의하고 있다니까, 다 잘 될 거라고 믿어본다.“대구문화계에 소속된 예술인이 얼마나 되나요?”“예술인 활동증명 등록 인원이 2천600여 명이고 일 년 사이에 1천여 명 늘었습니다. 대구의 문화산업 사업체 비중은 전국 5.5% 가량이고, 예술 인원은 전체의 3.3%인데 문화산업 매출액 비중은 1.7% 밖에 안 된다는 점으로 볼 때 문화예술계가 얼마나 낙후되어 있는지, 예총만 해도 10개 단체가 있는데 실제로 그들이 창출하는 매출이 얼마나 저조하고 열악한지 알 수 있습니다.”“문화재단에 오기 전에 어떤 일을 하셨어요?”“언론계에 30년 동안 근무하며 글 쓰고, 방송하고, 방송토론회 사회도 봤어요. 언론인의 출현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언론인의 균형감각과 소통능력으로 문화재단의 변화를 추구할 생각입니다. 수성문화재단과 국채보상공원 기념사업회, 여성가족재단 등과 같은 기관에서 이사로 활동하며 경험을 쌓았고 문화가 경쟁력이 되는 문화재단의 중요성을 깨달았어요.”“혹시 임기 중에 꼭 이루고 싶은 계획이 있으신지.”“문화예술도 일자리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 합니다. 예술인 인큐베이팅 시스템을 구체화해 나갈 생각이고, 예술학교처럼 예술인이 창업하고 창작의욕을 발판 삼아서 홀로서기를 하도록 단계별 컨설팅을 구상 중입니다. 현재 대구시 재정과 일부기업에 의존해서 충당해나가고 있습니다만, 그것만으로는 예술인의 자율과 홀로서기를 지원하기에 턱없이 부족해서 문화기부 운동에 앞장 서 보려고 해요. 대구시민에게는 어려운 이웃을 돕는 DNA가 장착되어 있습니다. 예총회장님과 소액기부로라도 먼저 릴레이를 시작해서 문화기부 챌린지를 정착시키자고 협약했습니다.”일자리와 문화기부운동이 활성화되고 플랫폼이 형성되면 기부 매체로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을 거라며,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만약 다른 사옥으로 옮기게 되면 기부의 전당을 만들어서 거액기부자의 초상화도 그려주고, 기부를 자랑스러워하는 범사회적 분위기를 만들겠다고 하신다. 침체된 예술인들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기부의 씨앗을 뿌리고 싶다고. 임기를 마치고 나서 누가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왔느냐?’고 물으면 문화기부의 씨앗을 뿌렸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신다.“학부 때 얘기 좀 해주세요.”“경북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중국을 알기 위해 중국학 공부를 해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사회복지학 공부로 공공에 대한 봉사의 소양도 키웠고. 오랜 방송생활의 경험이 공공의 눈으로 이웃을 보게 해주었어요. 여러 가지 공부를 하며 혼자 즐기는 밀실문화가 아닌 거시 분야, 다시 말해 공동체와 공공 분야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건강을 위해 어떤 운동을 하세요?”“날마다 걸어서 출퇴근하고 30여 년간 수영과 헬스를 하며 건강을 다지고 있습니다. 해발고도 8611m의 K2 히말라야까지 갈 정도로 산을 좋아했어요. 무릎에 무리가 오며 수영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실내에서도 아령 등으로 근육 운동을 하고 있어요.”“대구예술인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해주세요.”“야외에서 만난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코로나 블루로 심리적인 부담을 느끼는 분들에게는 예술인들의 멘토 한 마디가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해요. 그 사실을 기억하고 예술인들이 자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어려운 때일수록 선후배가 함께 하는 영역발굴과 세대를 연결하는 노력으로 문화생태계를 살아 있게 이끌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어느 시인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예술가는 하늘에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고. 코로나19로 침체에 빠진 시민들에게 빛이 될 수 있도록, 예술인들의 몸짓이 문학으로, 그림으로, 무용으로 별빛처럼 활활 타오르기를 기다려봅니다.” /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0-11-04

누각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잃은 채 단군의 옛터가 쇠퇴함을 한탄하네…

관동(關東)이란 지명은 우리에게 푸른 동해의 아름다운 풍광을 연상하게 하지만 1923년 대지진으로 무고한 조선인이 살해당한 관동대지진과 일제강점기 때 만주의 악명 높은 관동군이 연상되기도 한다. 일본은 관토 지방을 관동이라 하고, 중국의 관동은 낙양 동쪽 하남성과 산동성을 일컫고 근현대에 들어서는 산해관 동쪽 만주(동북)지역을 일컫는다.성종 때 전국을 10도로 편성할 때 서울, 경기를 관내라 하고, 북쪽을 관북, 동쪽을 관동이라 했고, 좁은 의미로 대관령의 동쪽이니 오늘날 강원도의 영역이다. 울진이 옛 강원도에 속해 월송정과 망양정도 관동팔경이라 한 것이다.#. 관동팔경의 최남단 월송정관동 8경 중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정자가 울진군 월송정이다. 이 월송정도 지금 위치보다 450m 아래에 있었는데 홍수로 몇 번이나 유실되어 지금의 위치에 옮겨지었던 것이다. 울진의 남쪽 끝 기성에 접어들어 옛 국도 변에 월송정을 알리는 큰 대문이 웅장하게 서있다. 곧이어 평해 황씨 종택과 시제단이 나오고 좌우 솔밭의 호위를 받으며 헤집고 가면 끝자락에 양촌 권근(1352~1409년)의 ‘소를 타는 즐거움’의 글을 새겨놓았다. 권근은 목은 이색의 수제자로 여말선초의 학자로 유머러스 하면서 달관한 경지의 글을 필자는 익히 보아 왔든 터라 더욱 반가웠다. 그 옆에는 달밤에 소를 타고 산수를 즐기는 기우자 이행(1352~1432)의 행적과 고려에 머물던 일본 승려 석수윤(釋守允)이 그린 ‘월하기우도(月下騎牛圖)’를 새겨 놓았다. 여기를 그의 호를 따 ‘기우자의 길’로 명명했다.기우자 이행이 누구인가?이름과 자, 호가 예사롭지 않다. 이행(李行) 이름과 자 주도(周道·여러 길을 두루 다닌다)’만 보아도 평생 나그네이고 호 기우자(騎牛子)는 ‘소를 타는 사람’이니 진정한 나그네이지 않은가? 여말, 선초의 학자로 그가 단순히 소 타고 술동이 싣고 음풍농월이나 했다면 그냥 낭만적이라 별 의미가 없지만, 국가를 위하여 크나큰 일과 고위 관직에 있으면서도 직필로 자신의 명분과 가치관대로 살았기에 그 낭만이 더욱 빛나는 것이다. 즉 오늘날 제주도(탐라국)가 우리나라에 편입되는 큰 역할을 한다. 1386년(우왕 13년)에 탐라국으로 건너가 탐라국 성주 고신걸을 설득하여 그 아들을 고려로 데리고 와 그때부터 제주도는 실질적으로 고려 땅이 되었다.개경에 살던 이행이 열 살 때인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외가(평해 황씨)인 이곳에 피난 와서 살게 된 것이다. 17살에 생원시, 20살에 문과 급제할 때 시험관이던 목은 이색(1328~1396년)의 제자가 되는데 같은 나이에 이색의 최고 수제자인 권근과 절친이라 권근이 기우설(騎牛說·소를 타는 즐거움)이란 낭만이 흐르는 명문장을 남긴다.“나도 평소 아름다운 산수를 찾아다니기를 좋아하지만 그런 것은 근심 걱정이 없을 때라야 가능한 일이라서 자주 즐기지는 못한다. 평해에 사는 나의 벗 이주도(李周道)는 근심걱정이 없는 사람이다. 달 밝은 밤이면 가금씩 소 잔 등에 술동이를 싣고 산수 좋은 곳을 찾아 나선다.….사물을 볼 때 빨리 보게 되면 거칠어지고 천천히 보면 그 묘미를 다 얻을 수 있는데, 말은 빠르고 소는 느리므로 소를 타서 느리게 가고자 한 것이다.…. 세상만사를 뜬 구름 같이 여기고 맑은 저녁 바람에 휘파람을 불며 유유자적하여 고삐를 잡고 소 가는대로 내버려둔 채 마음껏 술을 따라 마시면 가슴이 유연해져서 더할 수 없는 즐거움 있는 것이다.….” 이 글도 권근이 20대에 쓴 것이니 이행도 이미 20대에 소 타고 달밤을 노니는 대 낭만의 자유인이었다. 후반기의 삶은 대사헌, 이조판서 등의 요직을 거치지만 강직하여 자신의 소신을 지킨다. 이색의 제자 중에 두 부류가 있다. 정도전 권근 같이 이성계의 조선개국 참여파와 정몽주, 이행 같이 조선개국에 참여하지 않는 두 부류가 생긴다. 이행은 정도전이 ‘고려사’를 편찬할 때 고려 말의 사관들은 뒤가 두려워 이성계의 조선 개국에 관한 사실을 거짓을 섞어 적당히 쓰자 춘추관 학사로 있던 이행은 태조가 죄도 없는 우왕 창왕, 변안렬 등을 죽였다고 직필했고, 정몽주를 죽인 조영규를 만고역적이라고 처벌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를 이유로 태조 2년(1593년)에 조영규의 탄핵으로 이곳으로 귀양 오는 묘한 인연의 땅이다. 그 뒤 태조와 태종이 벼슬길을 종용했으나 스승 이색과 같이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아들에게는 자기와 처지가 다르니 출사(出仕)할 것을 권한 현명한 판단을 내린다. 월송정 주차장 입구에는 경기체가로 관동별곡, 죽계별곡을 지은 안축(1287~1348년·순흥 안씨 호 근재)의 유허비가 길옆에 세워져 있다. 월송정 입구에 솔밭이 나그네를 맞이하는데 예전보다 소나무가 많이 자라 조금 볼만했지만 멋있고 울창한 솔밭을 보려면 50년, 100년 후에 후세들은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월송정에 머물다 간 사람들의 흔적솔밭 사이를 걸어 아무도 없는 월송정에 올랐다. 눈앞에는 여인의 살결보다 더 고운 하얀 백사장과 푸르다 못해 시린 물빛의 푸른 동해바다가 파란하늘과 격정의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월송정은 1326년(고려 충숙왕 13년)에 존무사 박숙이 처음 지었다가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의 핵심 박원종이 강원도 관찰사 때 중건했다. 퇴락한 건물을 1933년 일제강점기에 다시 중건하였으나 말기에 미군폭격기의 목표가 된다 하여 일본해군이 헐어버린다. 해방 후 1969년 재일교포들이 철근콘크리트로 전망대식 현대건물을 지었으나 옛 모습과 같지 않다고 헐어버렸다. 지금의 월송정 건물은 1980년 7월에 지은 것이다. 현판에 최규하 전 대통령의 범생이체 글씨가 있는 것은 전두환 국보위상임위원장의 서슬퍼런 시절 잠시 임시 대통령 했기 때문이다. 월송정은 충북괴산, 경남 고성, 대구, 청송 등 전국에 많이 있지만, 이중 울진의 월송정이 단연 스타 정자다. 그것은 바닷가의 장소와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감회어린 작품이 있기 때문이다.여기 월송정은 고려시대 처음 세울 때는 달구경 하고 감회어린 시를 짓는 정자가 아니라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망루 역할로 지었다. 그러나 사람은 전쟁 중에도 사랑이 피고 독서하고 시를 짓듯이 모든 것은 한 가지 역할만 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 월송정을 노래한 이는 수도 없이 많지만, 숙종의 어제시. 안축의 시, 그리고 이행의 시 등이 걸려있다.이행은 ‘평해 월송정’시에 “동해의 밝은 달이 소나무에 걸려있네/ 소를 타고 돌아오니 흥이 더욱 깊구나./ 시 읊다가 취하여 정자에 누웠더니/ 선계의 신선들이 꿈속에서 반기네.”라 적었다. 이행이 부귀권세 물리치고 험난한 길을 걸었지만 젊을 때부터 소 타고 여유롭게 노닌 자유인이라 당시의 수명으로는 보통사람들의 두 배를 산 81살까지 살았다.숙종의 ‘월송정’시는 “화랑들 옛 자취 어디 가서 찾을 고/ 만 그루 큰 솔들, 빽빽한 숲이라네./ 눈 앞 가득 흰 모래밭 백설인 것 같고/ 누에 올라보니 한 눈에 이는 감흥 그칠 줄을 모르겠네.”라고 노래했다. 동인의 영수였고 한음 이덕형의 장인인 아계 이산해(1539~1609년)가 여기에 귀양 와서 쓴 글을 보자.“월송정은 군청소재지의 동쪽 6~7리에 있다. 그 이름에 대해 어떤 사람은 ‘신선이 솔숲을 날아서 넘는다(飛仙越松)는 뜻을 취한 것’이라하고, 어떤 사람은 ‘월(月)자를 월(越)자로 쓴 것으로 성음이 같은 데서 생긴 착오’라고 하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그런데 내가 월(月)자를 버리고 월(越)자를 취한 것은 이 정자의 편액을 따른 것이다.…. 아아. 이 정자가 세워진 이래로 이곳을 왕래한 길손이 그 얼마이며, 이곳을 유람한 문사가 그 얼마랴. 그 중에는 기생을 끼고 가무를 즐기면서 술에 취했던 이들도 있고, 붓을 잡고 묵을 놀려 경물을 대하고 비장하게 시를 읊조리며 떠날 줄 몰랐던 이들도 있으며, 호산(湖山)의 즐거움을 자적하던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 같은 자는 이들 중 어디에 속하는가? …. 또한 솔을 심은 사람은 누구며, 솔을 기른 사람은 누구며, 그리고 훗날 솔에 도끼를 댈 이는 누구일까?”그렇다. 겸재 정선(1676~1759년)이 1738년 63세때 먼 친척 우암 최창억을 위해 그린 ‘관동명승첩’11폭 중 한 폭인 ‘월송정’ 그림을 보면 큰 소나무 빽빽하고, 월송정 아래에 건물도 몇 채 있다. 울창했던 솔숲은 일제강점기에 베어버렸고, 다시 소나무 심은 사람은 1956년 이 마을 사는 손치후라는 분이 사방관리소의 도움을 받아 해송 1만5천 그루를 심었던 것을 고맙게 보고 있는 것이다.신라의 화랑부터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수많은 문객들이 거쳐 갔지만 인근 영해에 귀양 왔다가 16년간 고생하다가 죽은 당주 박종(1735~1793년)의 ‘관동팔경’ 기행문 중 ‘월송정’을 보자.“망양정에서 남쪽으로 삼십 리를 가서 솔밭 사이로 나가 바다를 가면, 강가에 화려한 정가가 나타나는데 이것이 평해의 월송정이다. 오른쪽으로는 솔숲이 산과 가지런히 울창하고 왼쪽으로는 하얀 모래가 파란 바다에 끝없이 펼쳐져 있으며, 또 앞으로는 강이 들판을 가르고 흘러 한 폭의 비단 띠를 끄는 듯한데 두어 고을의 연기마저 노을인양 떠오르니 모두 한없는 정취를 자아낸다. 영랑이 놀았다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니랴!”이외 수많은 사람들의 감회어린 글들이 있지만, 근처 영덕 출신 태백산 호랑이 평민 의병장 신돌석 장군(1878~1908년)이 1904년 27살에 여기 월송정에 올라 지은, 대찬 포부의 시 한 수를 읊는다.“누각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잃은 채/ 단군의 옛터가 쇠퇴함을 한탄하네./ 남아 스물일곱에 이룬 것이 무엇인가/ 가을바람 불어오니 감개만 솟는구나.”의 시가 저 아래 동헤의 파도치는 물결마냥 일렁인다. /글·사진=기행작가 이재호

2020-11-03

호랑이 기운을 품은 태양과 바람의 땅

움베르트 에코는 문학 강의에서 상징은 텍스트에 의해 창출되는 의미 효과가 크며, 그렇다면 어떤 이미지나 단어, 대상이라도 상징 가치를 띨 수 있다고 했다. 호미곶은 원래 모양새가 말갈기를 닮았다고 해서 장기곶(長9B10串)으로 불리다가 2001년 12월 이름을 바꾸었다. 한반도 최동단의 이곳 지명이 호미곶으로 바뀌면서 한반도의 상징은 완성되었다. 조선 시대 풍수지리학의 대가였던 격암(格庵) 남사고는 한반도 모양새를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형상이라 했다. 백두산은 호랑이의 코, 호미곶은 호랑이의 꼬리에 비유하며 이곳을 천하의 명당이라 꼽았다. 일제는 한일 병탄 이후 한일 모든 교과서에 한반도는 토끼 모양이라고 실었는데, 최남선은 이에 반발해 ‘소년’ 창간호에 호랑이 지도를 발표했다. 이후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만주 벌판을 향해 포효하는 ‘근역강산맹호기상도’가 잇달아 그려졌으니 이제야 호미곶이 제 이름을 찾은 듯하다. 최남선은 호미곶의 일출을 조선 십경 중 하나로 꼽았다. 호미곶은 계절에 따라 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이다. 이렇듯 호미곶은 호랑이의 기운을 품은 태양과 바람의 땅이다. 이 풍광의 땅은 거칠면서도 아름답다. 파도는 해안가 인근에 유난히 많은 암초에 걸려 햇빛과 함께 부서지고, 그 거친 소리는 하루 종일 바람을 타고 호미반도에 맴돈다. 이 바람과 태양은 이 땅에 보리와 유채꽃, 그리고 말들을 키웠다.□호미곶광장 중심으로 등대, 박물관, 상생의 손 모여 있어호미곶으로 가는 길은 구룡포에서 2011년 새로 확장된 929번 지방도로를 타면 금방이다. 그러나 여유가 있다면 구룡포에서 강사리, 대보리를 지나 호미곶에 이르는 해안도로를 권한다. 이 도로를 지나면 옛길의 정취와 고즈넉한 어촌의 풍경,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 위 반짝이는 윤슬을 즐기며 운전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여정 중간에 펼쳐지는 주상절리 감상이나 조용하고 아담한 해변의 정취는 덤이다. 때를 잘 맞추면 대보리와 구만리 일대에 펼쳐지는 유채꽃과 청보리밭의 향연을 감상할 수도 있다.호미곶의 심장은 단연 해맞이광장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호미곶 등대, 국립등대 박물관, 상생의 손이 있다. 국립해양조사원의 ‘동해안항로지’에 따르면 호미곶 부근에는 암초가 산재돼 있어 해안선에서 2㎞를 벗어나 통항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돼 있다. 실제로 해안 주변에는 수심 3m 내외의 암초가 곳곳에 산재해 있다. 1907년 9월 일본 수산실업전문대학 실습선이 좌초돼 승선자 4명이 사망했다. 일제는 이 사건의 책임을 우리나라에 돌리며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억지를 부렸는데, 이 일을 계기로 1908년 호미곶 등대가 건립되었다. 호미곶 등대는 1900년 초반에 건설된 많은 등대 중에서 단연 압권이다. 자료나 증언마다 다소 차이가 있지만, 프랑스인이 설계하고, 중국인 기술자가 시공을 맡았다는 게 정설이다. 등대는 높이 26.4m, 6층짜리 팔각형 건물로 서구식 건축양식을 보여주는데 철근을 사용하지 않고 오롯이 벽돌로만 쌓아 올린 후 석회 몰타르로 마무리했다.□ 견고성과 건축미 자랑하는 호미곶등대등대에 올라서면 초속 10m의 바람에도 1㎝ 이상 흔들리는데, 지금까지 보수나 증축 없이 100년 이상의 풍파를 견뎠으니 그 견고성은 물론이고, 건축미학적인 가치도 뛰어나다. 벽돌만으로 그 높이까지 축조한 터라 하부의 안정성을 위해 아래는 펑퍼짐할 정도로 넓고 위로 올라갈수록 차츰 좁게 만들었다. 이렇게 수직선상의 곧고 우람한 기상을 살리면서도 안정감을 살린 건축미는 오늘날에도 결코 쉽지 않다고 한다. 출입문과 창문은 고대 그리스 신전 건축의 박공 양식으로 장식되었고, 여기에 정교한 사각형의 페디먼트를 각인해 르네상스풍의 품격을 살렸다. 층계는 모두 108개인데 주물로 만들어져 그 시대의 고전적 투박함이 드러나며, 바닥의 나뭇결도 세월을 이기고 그대로 살아있다.등대의 꼭대기, 등명기를 관리하는 일은 숭고한 작업이다. 적막한 밤바다를 향해 빛을 내보내는 일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그러니 층계를 오를 때마다 번뇌를 모두 잊고 숭고한 사명감만 가지라는 설계자나 시공자의 의도였을까? 등탑의 각 층마다 조선왕실의 상징인 배꽃 문양이 각인돼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당국은 배꽃을 철판으로 가리고 자신들의 문양인 국화를 새겨 넣었다. 해방 후 철판을 떼어내자, 그동안 숨죽이며 있던 배꽃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풍전등화의 앞날에도 주권의 위엄을 지키고자 했을 대한제국 왕실의 의지가 가슴 아프다. 2006년, 98여 년 동안 등명기를 비바람으로부터 지켜온 등롱만 교체한 후 지금까지 1908년 12월 20일 최초로 불을 밝힌 그때 그대로이다. 국내에서는 12번째로 100년을 넘게 불을 밝혀 온 등대인 것이다. 등대에 사용되는 전구는 700와트 하나로 가로등보다 조금 밝은 정도로 12초마다 깜빡이는데, 손으로 깎아 만든 렌즈는 이 빛을 40여 ㎞까지 뿌려준다. 호미곶 등대는 1982년 경상북도 지방기념물 제39호로 지정되었다.□ 대보리, 구만리는 유채꽃, 청보리밭의 향연장등대 바로 옆에는 국내 유일의 국립등대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은 유물관, 등대역사관, 체험관 등으로 나뉘는데, 세계 주요 등대뿐 아니라 등대의 역사, 건축 등 등대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망라하고 있다. 특히 유물관에는 등대의 눈이라고 할 수 있는 각종 등명기와 등명기 렌즈가 전시돼 있어 빛의 발생과 작동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등대박물관을 나와 해맞이광장으로 나오면 거대한 두 손을 볼 수 있다. 오른손은 바다에, 왼손은 광장에 제작돼 서로 마주보고 있다. 전쟁과 갈등으로 얼룩진 지난 천년은 한 손의 시대였다. 이 시대를 청산하고 평화와 희망으로 화해하고 서로 상생하는 새천년은 두 손의 시대이다. 그래서 이 손은 상생의 손으로 불린다. 일설에 따르면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은 정변 10년 후에 홍종우에게 살해당한다. 김옥균의 시신은 부관참시당해 머리는 마포의 양화진나루에 걸렸고, 사지는 찢겨져 조선 팔도로 보내졌는데, 그중 왼팔은 호미곶 바다에 던져졌다고 한다.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우리에게 좀 더 인내가 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일본의 세력을 등에 업긴 했지만, 완전한 자주독립과 개혁을 시도했던 그의 행동이 당시 봉건세력들과 상생을 도모했다면 우리의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진보와 보수, 대기업과 협력 중소기업들, 이웃과 이웃, 무엇에라도 대립하고 있는 우리 모두가 이 상생의 손을 되새긴다면 우리는 분명 한결 나아진 자신이 될 것이다.바다를 정면으로 광장의 왼쪽에는 전국 최대의 가마솥이 있다. 둘레가 무려 10.3m에 깊이가 1.3m나 되는 이 솥으로 한 번에 2만 명분의 떡국을 끓일 수 있다. 2004년 1월 1일을 시작으로 매년 새해마다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일출을 보며, 떡국을 맛볼 수 있다. 광장의 오른쪽에는 연오랑 세오녀의 동상이 있는데,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는 한반도 유일의 태양 숭배 설화이다. 호미곶에서 포항으로 빠져나가기 전인 동해면 임곡리에 연오랑 세오녀 테마공원이 조성돼 있다.호미곶 광장 주변, 대보리와 구만리 일대는 유채꽃과 청보리밭의 향연장이다. 10만여 평에 11월과 12월께에 파종해 4~5월에 개화하는 유채꽃과 청보리는 때를 잘 맞추어 온다면 빛의 향연을 감상할 수 있다. 하늘의 푸른색이 유채꽃, 청보리의 노랑, 녹색물결과 바다에서 맞닿은 풍경은 우리가 도저히 그릴 수 없는 한 폭의 그림이다. 호미곶의 보리는 겨울을 이기고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세찬 바람을 맞으며 자란다. 동네 처녀들이 쌀 한 말을 다 못 먹고 시집간다고 했을 정도로 이 일대는 보리밭 지천이었다.□ 한흑구의 ‘보리’를 떠올리게 하는 곳청보리밭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흑구(黑鷗) 한세광이 떠오른다. “너는 차가운 땅 속에서 온 겨울을 자라왔다.”로 시작되는 수필 ‘보리’처럼 한흑구는 일제 암흑기에 태어나 젊어서는 문학과 독립운동을, 해방 후에는 3년간 서울에서 살다가 포항으로 와 평생을 보냈다. 일제강점기에 시, 수필, 소설 등을 왕성하게 창작하였을 뿐 아니라, 미국문학을 번역해 소개하기도 했다.안준우 소설가. 201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악어의 눈물을 위하여’가 당선돼 등단. 단편 ‘헤밍웨이’ 등 발표.한흑구는 일제의 서슬 퍼런 억압에서도 이육사 등과 함께 단 한 줄의 친일 문학을 쓰지 않았다. 한흑구가 호미곶 보리밭 일대에서 작품 구상을 한 것은 호랑이의 기운이 그의 강건한 기개와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필자만의 억측일까.호랑이는 돌진할 때 꼬리로 몸의 균형과 속도를 조절하며, 무리를 지휘하는 신호를 보내기도 한다. 만주벌판을 향해 포효하는 호랑이 기개의 시작이 백두산이라면 그 끝은 호미곶이다.사시사철 동해로부터 거센 바닷바람이 불어오고, 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이다. 이 땅의 기운이 강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조선시대 군마들이 이 강한 기운의 땅을 박차고 거센 바람을 가르며 달렸던 곳이다.일반 말들은 이 강한 기운을 이기며 자라지도 못했을 것이다. 온 국민의 상생을 염원하는 두 손이 마주보고 있는 곳, 단 한 줄의 친일 문학을 쓰지 않았던 문학가가 사색하며 고뇌했던 곳, 호미곶은 한반도의 최동단으로 가장 역동적이면서도 상징적인 곳이다.사진/안성용글/안준우

2020-11-02

코로나 걱정 날려버릴 야외 콘텐츠 가득

문경은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관광지 100선’ 중 1위 문경새재와 ‘경북 8경 중 으뜸’ 진남교반을 비롯해 전국에서 가장 긴 백두대간 구간 110㎞가 지나고 있다.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 중 희양산, 주흘산, 대야산, 황장산 등 4개 명산도 있다.최근에는 코로나19로 실내 관광에 불안함을 느끼는 관광객들이 안심하고 즐기기에 최적화된 곳으로 더욱 각광받고 있다.국내 최초 복합생태영상 테마파크인 에코랄라와 최근 개장한 전국 최장 길이의 단산 모노레일은 문경시를 넘어 대한민국의 대표 관광지로서의 면모를 갖췄고 문경생태미로공원, 철로자전거, 관광사격장, 패러글라이딩, 짚라인 등 관광 자원이 풍부한 도시다.해외보다 국내로, 많은 사람이 모이고 즐기는 관광보다 힐링 관광이 주목받는 지금, 건강하고 안전한 도시 문경이 주목받는 이유다.◇ 문경단산관광모노레일올봄 개장한 문경단산관광모노레일이 주말 등 연휴기간 조기 매진되는 등 문경의 새로운 관광 명소로 자리잡아가고 있다.단산 정상부까지 레일을 따라 운행하는 문경단산관광모노레일은 해발 260m에서 출발해 860m까지 3.6㎞를 왕복하는 장거리 산악 모노레일이다.8인승의 아담한 모노레일이지만 승용차에도 견줄만한 안락한 시트 등을 갖추었고, 최고 경사인 42도 구간을 지날 때는 마치 우주왕복선을 탄 기분이 든다. 경사가 가팔라지면 헤드레스트(머리받침)을 조정해 목쿠션으로 사용할 수 있어 승객의 편의를 높였고, 출입문을 겸한 시원한 창문은 백두대간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모노레일을 타고 오르다보면 단산에 자생하는 금강송과 우리나라 고유의 소나무 숲, 신갈나무 등을 다양하게 볼 수 있고, 문경 산양삼이 식재돼 있어 7월이면 빨간 열매를 볼 수 있다. 단산의 지명유래가 된 박달나무 군락지도 볼 수 있다.해발 865m의 정상에 오르면 백두대간의 절경이 한눈에 펼쳐진다.정면으로 조령산, 주흘산, 좌측엔 백화산과 희양산, 우측으로 성주봉과 운달산, 멀리 포암산, 월악산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멋진 조망을 만날 수 있다.정상부에는 단산 숲속 캠핑장(16개소), 숲속 썰매장(6레일), 전망대, 산악 바이크 로드(21㎞, 초급·중급·고급 코스 등 다양한 코스가 마련) 등이 조성돼 있으며, 길이 200m, 폭 2.5m의 무장애 데크길도 마련해 유아, 노인, 장애인 등 누구나 편안히 산 정상의 정취를 맛 볼 수 있다.모노레일 승강장에서 단산 정상까지 1.9㎞ 걷기 좋은 데크로드도 조성돼 있으며, 소요시간은 왕복 1시간 40분이다.외지인이 모노레일을 탑승할 경우 상당금액을 문경사랑상품권으로 이용객에게 돌려주어 문경에서 사용할 수 있다. 매주 월요일은 안전점검의 날로 모노레일은 운영하지 않고, 인터넷 예약과 현장 판매를 동시에 실시하고 있다. 예약은 편리한 인터넷으로 하면 된다.◇ 문경 에코랄라문경시 가은읍에 있는 문경에코랄라는 2018년 9월 개관한 국내 최초 ‘문화·생태·영상 테마파크’이다. 주요시설로는 기존 시설인 석탄박물관, 가은오픈세트장, 모노레일, 철로자전거 등과 더불어 ‘에코타운’과 야외체험시설인 ‘자이언트 포레스트’가 있다.‘에코타운’에서는 백두대간의 생태와 영상콘텐츠를 기반으로 한 영상제작 체험을 할 수 있으며, ‘에코스튜디오’에서는 영화와 드라마 제작에 필요한 기획, 촬영, 편집 등의 모든 과정을 직접 체험하고 최종 영상을 만들어 볼 수 있는 장비와 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미리 예약을 하면 활용할 수 있다.9개의 테마공간으로 구성돼 유아 및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야외체험시설인 ‘자이언트 포레스트’에서는 자연과 사람의 상생을 주제로 한 촬영 체험과 자연과학 체험이 가능하다.거인을 테마로 한 거인광장, 거인숲, 거인언덕 등 창작동화 ‘거인의 숲’을 기반으로 해 이야기를 따라 숲의 주인인 거인을 깨우는 ‘AR(증강현실)’기반의 모험 공간이기도 하다.지난달에는 개장 2주년을 맞아 ‘자이언트 포레스트’ 내에 원내 순환열차, 회전목마, 어린이 바이킹, 범버카 등 라이드형 어트랙션 6기종 10여 개의 신규 콘텐츠 가족형 놀이시설을 오픈했고, 10월에는 사택촌에 조성된 복고감성 셀프사진체험 ‘은성사진관’ 운영을 시작했다.사진체험관은 70~80년대 광업이 활발하던 문경의 전성기를 추억하며 추억의 교복과 교련복 등 의상체험도 하고 스튜디오에 설치된 카메라로 셀프사진도 찍어볼 수 있는 체험이다.기존 석탁박물관, 가은 오픈세트장, 에코타운 등 볼거리와 개미열차(갱도체험), VR챌린지(지진체험), 에코스윙(짚라인 체험) 등의 체험상품에 교육, 모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추억여행까지 즐길 거리가 더욱 다양해졌다.문경시민과 오후 4시 이후 입장객은 50%, 인근 관광지 이용 고객은 20% 우대 요금으로 이용할 수 있다.◇ 문경생태미로공원지난 4월 개장한 문경새재 내 문경생태미로공원은 개장 후 6개월에 못 미치는 기간 동안 입장객 5만 명이 방문해 코로나19로 지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언택트 관광지로서 그 면모를 실감케 했다.문경생태미로공원은 길이 1.9㎞에 우리나라 자생식물인 측백나무로 특색있게 조성한 도자기 미로, 연인 미로, 생태 미로와, 문경에서 채취한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돌 미로 등 4개의 미로로 이루어져 있다. 미로별로 설치돼 있는 도자기 및 하트 조형물과 전망대, 트릭아트 존은 인증샷 포인트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도자기미로 출구로 나가면 유아숲체험놀이터도 조성돼 있다. 놀이터에는 자연숲 통나무놀이터, 인디언집, 악어, 평행놀이, 외나무다리, 기린 등 동물벤치 등이 있는데, 미로공원을 찾는 가족단위 관광객들의 휴식과 놀이공간으로 각광받고 있다. 올해 연말께는 연인의 미로 주변에 추가 조성할 계획이다.◇ 문경 오미자 테마공원문경 오미자 테마공원은 문경의 특산물인 오미자의 모든 것을 체험하고 즐길 수 있는 힐링 휴양공간으로, 3층 규모의 오미자 체험전시관과 길이 63m 출렁다리, 오미자 녹지공원으로 조성돼 있다.체험전시관 1층에는 오미자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휴식시설과 오미자 전시판매장, 오미자 명상관 등이 있고, 2층에는 디지털 오작교, 오미자의 사계, 오미자 수확 게임존 등 디지털 체험존이 있다. 3층에는 오미자 전문 차(茶) 하우스와 오미자 갤러리, 오미자 트리하우스 전망대가 있다.오미자가 생소한 관광객들이 오미자를 직접 만져볼 수 있는 기회인 오미자 청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도 마련돼 있다. 야외 녹지공원 두 곳에서는 오미자 터널길, 오미자 밭, 오미자 조형물 등을 체험하고 둘러 볼 수 있다.◇ 문경새재 반려동물 힐링센터문경새재 반려동물 힐링센터는 반려동물과 함께 문경을 여행하고 싶지만, 문경새재 도립공원이나 식당 등 반려동물을 데려 갈 수 없는 곳이 많아 아쉬웠던 반려동물 동반 관광객에게 편의를 제공하고자 문경새재 초입에 조성됐다. 위탁시설, 휴게실, 동물 미용실, 잔디 운동장 등 다양한 공간으로 구성돼 반려동물과 방문객이 함께 행복한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문경 힐링휴양촌청정자연을 자랑하는 문경새재 인근에 휴식과 체험을 통해 바쁜 현대인의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복합휴양시설이 지난해 4월 문을 열었다.우리나라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인 ‘진안성지’ 주변에 들어선 ‘문경힐링휴양촌’은 자연과 함께 명상과 휴양을 즐기면서 온천욕이 가능한 숙박시설이며,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할 수 있는 복합휴양공간이다.문경새재도립공원 초입에 위치하고 있으며 △문경의 보양 온천수를 이용한 스파를 즐길 수 있는 숙박시설 △문경의 특산품 차와 간단한 디저트 음식을 즐기고 체험할 수 있는 체험시설 △현대인을 위한 재충전과 치유의 명상 프로그램을 체험 수 있는 휴양명상시설 △ 문경의 향토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전통 한식당 및 특산물 판매장을 갖추고 있다. 이곳은 자연 속의 명상, 가족과의 휴양, 즐거운 체험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휴식의 공간으로, 어르신과 영유아 동반 가족 등을 배려한 BF(Barrier Free) 시설로 모든 방문객이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강남진기자 75kangnj@kbmaeil.com

2020-10-29

가을 산사로 발길 이끄는 이산하 시인 문장의 매력

산마다 울긋불긋 단풍이 물들어 장관인 시기다. 하지만 아직도 꼬리를 내리지 않은 ‘새로운 역병’ 코로나19로 인해 산 속 조용한 절에서 가을을 즐기기가 쉽지 않다. 그 아쉬움을 달래줄 방법이 없을까? 궁여지책으로 영민한 시인의 산사 기행문을 꺼내 든다. 그가 안내하는 만산홍엽(滿山紅葉)의 10월 속으로 들어가 보자.▲적멸의 문장으로 독자들을 설레게 할 ‘피었으므로, 진다’시인 정호승은 책을 접하고 이런 말을 남겼다.“여느 절 여행기와 달리 불교에서 최고의 성지로 꼽히는 5대 적멸보궁과 3보 사찰 그리고, 3대 관음성지 등을 골라 여행하면서 보고 느낀 것을 쓴 고감도 명상 여행 에세이다. 시인의 현란한 감성과 정제된 지적 사유가 돋보이는.”혁명과 해탈(解脫)은 지향하는 사람이 많지만, 완성되기가 몹시 어려운 불능의 명제라는 차원에서 이음동의어(異音同意語)다.‘모든 인간이 존엄을 갖추고 평등을 누리며,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의해 분배받는 세상’을 이야기하는 혁명가들. 그러나, 자신의 욕망 때문에 수만 명의 행복을 박탈할 수도 있는 게 사람이란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욕망하는 존재’로서의 인간들에게 혁명이란 요원한 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시적인 문장이 인상적인 ‘피었으므로, 진다’.다수의 승려들이 궁극적으로 이르고자 하는 해탈 역시 마찬가지. 살기 위해 숨을 쉬고, 배고파 밥을 먹고, 화장실에서 배설하는 인간 주제에 어떻게 ‘속세의 백만 가지 속박에서 온전히 벗어나 자유로운 정신에 이른 상태’에 가닿을 수 있겠는가? 이 역시 이룰 수 없는 꿈이 아닐지.여기 한 시인이 있다. 혁명과 해탈 사이에서 일생을 떠돈 사람. 이륭과 이산하라는 2개의 필명을 가졌던 사내다. 본명은 이상백.1960년 경상북도 영일 출생이니 올해가 갑년(甲年). 부산 혜광고등학교 재학 시절, 후배 시인 안도현과 함께 한국에서 열리는 고교생 대상 백일장의 절반을 독식했다. 상장 수십 개가 가난한 문학청년이었던 그를 경희대학교 문예장학생으로 만들었다.1980년대는 그가 시만 쓰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세칭 ‘운동권 대학생’이 되어, 지하신문을 만들고 시위 현장에서 돌을 던졌다. 수배가 떨어졌고 몇 년을 도망자로 살아야 했다. 그 시절, 목숨을 담보로 쓴 시집이 노란 유채꽃 위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한라산’. 군사 독재정권은 순정한 시를 쓰고 싶어 했던 겨우 스물일곱 살 청년을 듣기에도 무시무시한 ‘반란 수괴’라는 죄명으로 구속한다.이른바 ‘양심적 지식인들’도 증인으로 법정에 서는 걸 거부했던 살벌한 ‘한라산 필화사건’. 감옥을 나온 시인은 제주도를 방문해 4·3항쟁에서 살아남은 자들로부터 학살의 증언을 듣고는 붓을 꺾어버린다. 시가 혁명의 무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땅을 쳤다. 그가 다시 시를 쓰게 되기까지는 10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했다.이산하의 책 ‘피었으므로, 진다’엔 “시인의 산사기행(山寺紀行)”이란 부제가 붙었다.“평생 비종교적 관점에서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을 해온 사람이 왜 갑자기 절을 찾아다닌 거야?” 어떤 독자는 뜨악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이산하를 절반만 아는 이들의 푸념이다.이미 말했듯 다수가 행복한 사회를 꿈꾸는 혁명과 세속 초월 지향의 승려들이 꿈꾸는 해탈은 이음동의어다. 다르게 발음되지만 실제로는 같은 뜻을 가진 단어.젊은 날 이산하는 혁명을 꿈꾸며 청춘의 눈물과 주먹을 소비했다. 이제 이순(耳順)에 이른 그는 고요한 산그늘 아래 적요한 풍경소리 울리는 절에서 무엇을 찾고자 했을까?이 책을 펴든 독자는 알게 된다. 시인 이산하는 ‘피었으므로, 진다’를 통해 혁명과 해탈에 관한 구체적 진술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있음을.한때는 이산하와 ‘문학적 라이벌’이었던 시인 안도현은 “이 책은 눈부신 고요가 빚어내는 꿈결 같은 소리들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지혜로운 독자라면 이 유려한 산문집 도처에 고여 있는 수백 편, 아니 수천 편의 시를 덤으로 읽게 되리라”는 상찬을 바쳤다.후배 시인 김주대 역시 “북소리 따라 나를 치고 또 쳐 결국 인간의 존엄성에 이르는 시인. 그 시인의 발자국에 깊이 새겨진 적멸의 문장에 감사한다”는 뜻을 전했다. 당신은 ‘피었으므로, 진다’에 어떤 독후감을 남기게 될지 궁금하다.매혹적인 산사 기행집 ‘적멸보궁 가는 길’.▲이 가을에 던져진 화두 혹은, 공안 ‘적멸보궁 가는 길’세속의 명리를 버리고 산사에 은거(隱居)하는 스님들이나 가질 법한 초월의 웃음과 눈빛. 이산하의 그 ‘웃음’과 ‘눈빛’은 어디에서 왔을까? ‘적멸보궁 가는 길’은 이 물음에 답하는 책이다.이산하는 경상북도 깡촌에서 태어나 친구 없는 외로움을 책읽기로 달랬다. 장 폴 사르트르와 비트겐슈타인은 물론이고, 까까머리 중학생이 가스통 바슐라르의 ‘촛불의 미학’까지 필사해가며 읽었다.난독의 체험은 동년배들을 기죽이는데 유효적절하게 사용됐다. 그와 대학 동기인 문인들은 당시의 이산하를 지칭해 “유식 혹은, 개똥철학으로 언제나 나를 주눅 들게 했다”고 고백한다.다독(多讀)에다 다상량(多商量)이니 글도 잘 썼다.“경희대, 중앙대, 동국대, 서울예대, 문예잡지 ‘학원’, 각종 예술제 백일장까지 글 써서 받은 상장이 40개쯤 될 거야.” 이산하가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말이다.‘적멸보궁 가는 길’은 그가 한국의 대표적 명산대찰이라 할 5군데의 적멸보궁(부처의 진신사리가 보관된 절)과 많은 고승(高僧)을 배출한 3보 사찰, 불자들의 기도를 들어주는 영험이 있다는 3대 관음성지를 돌아보고 쓴 기행문이다.그러나, 책은 기행문보다는 ‘시집’에 가깝다. 책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5행의 짧은 시가 무심코 책을 펴든 독자를 놀라게 한다.나를 찍어라그럼,난,네 도낏날에향기를 묻혀주마.딱 20글자로 이뤄진 시 ‘나무’는 이 책이 가진 성격을 결정짓는다. 그가 절집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절집의 불심(佛心)이 이산하의 말투처럼 느린 걸음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인다.“눈 밝은 독자라면 이 책의 도처에 고여 있는 수백, 수천 편의 시를 보게 될 것”이란 평가는 과장이 아니다. 예컨대 아래와 같은 문장들을 보라.‘높은 것이 나쁜 건 아니다. 그러나 넓어지기도 전에 높아지는 것은 항상 위태로운 법이다’.‘자꾸만 벌어져가는 나이테의 간격보다도 조용히 깊어져 가는 가을 강의 속살을 먼저 떠올린다’.‘그럼에도 여전히 나를 매혹시키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백지뿐인 삶’.‘적멸보궁 가는 길’은 미려한 문장으로 축조된 아름다운 시의 성채다. 그 속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다. 이산하는 사찰이 생겨난 내력과 절 주변을 떠도는 민담과 전설, 이름 높았던 승려들의 일화를 책에 담았고, 자신이 불교에 경도됐던 이유까지를 때로는 정밀하게, 때론 담담하게 묘사하고, 털어놓는다.세상에 대한 반항심과 문학소년의 오만함으로 가득 찼던 청년 이산하가 회갑을 맞았다. 그리고 말한다. “다 지나가노니, 헛되고, 헛되도다”.삶과 세상에 정면으로 맞서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던 시인의 짧은 문장이 깊은 산 속 절의 붉디붉은 단풍처럼 강렬하다.여기에 이런 말도 덧붙인다. “아무래도 인생의 깊이는 깊은 강물보다 얕은 논물 속에 더 있어 보여. 난 언제쯤 그 깊이에 닿을 수 있을까?”‘적멸보궁 가는 길’은 2020년 깊어진 가을 우리에게 던져진 화두(話頭) 혹은, 공안(公案)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10-29

바닷바람과 파도에 오래된 이야기가 익어가는 곳

한반도 동남쪽에 위치한 구룡포는 장기반도의 동쪽에 해당하는 동해안 최대 어항이다. 어선들이 러시아 수역까지 조업에 나서는 동해안 어업전진기지로, 청어·방어·오징어·대게 등 어자원이 풍부하고 성게·미역·전복 등 신선하고 질 좋은 해산물이 모이는 곳이다. 밤이면 오징어배의 집어등 불빛이 밤바다를 수놓은 곳, 새벽이면 어판장에 대게, 홍게가 희망을 쏟아내는 곳, 겨울철 포항의 대표 특산물 과메기로 유명한 곳, 해안 절경을 따라 바다와 바람의 이야기가 익어가는 곳, 청보리와 해국, 유채와 억새가 피어 절경이 펼쳐지는 곳, 많은 해녀들이 물질을 하는 곳, 바로 구룡포다.□ 근대문화역사거리구룡포가 근대적 항구로서 활기를 띠게 된 것은 20세기 초반이다. 구룡포가 황금어장으로 알려지면서 1906년부터 일본인들이 구룡포로 이주하기 시작한다. 일본인들은 현대식 방파제를 건설하면서 구룡포를 동해안 최대 어업기지로 만드는 기반을 닦았다. 1932년 구룡포에 정착한 일본인은 287가구 1천161명에 이르렀다. 지금 구룡포에는 100여 년 전 일본인들이 살았던 가옥 40여 채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통조림 가공공장은 물론 음식점, 제과점, 주점 등이 들어서면서 구룡포는 최대의 상업지구로 이름을 떨쳤다. 그래서 이 상업지구인 장안동을 ‘종로거리’라 부르기도 했다. 구룡포 장안동 골목은 1991년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일본거리 촬영장으로 이용되었고, 2019년 인기리에 방영된 KBS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주요 촬영지이기도 했다.장안동 골목길은 새 단장을 거쳐 일본인 가옥거리, 혹은 근대문화역사거리라는 명칭을 얻었다. 이 거리에서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는 곳은 구룡포 근대역사관이다. 이 역사관은 1920년대 가가와현에서 온 하시모토 젠기치(橋本善吉)가 살림집으로 지은 2층 목조 가옥이다. 그는 구룡포에서 선어운반업으로 성공해 큰 부를 쌓았고, 건물을 짓기 위해 일본에서 건축자재를 직접 운반해왔다. 구룡포 근대역사관은 한국과 일본의 건축가들이 연구대상으로 삼을 만큼 가치가 높은 건축물로 명성이 나 있다.□ 구룡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구룡포공원구룡포 항구를 한눈에 보고 싶다면 구룡포공원에 가야 한다. 일본인 가옥거리에서 가파른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공원에 이를 수 있고, ‘용의 승천 새빛 구룡포’라는 작품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구룡포’라는 명칭은 신라 진흥왕 때 지금의 용주리에서 용 아홉 마리가 승천한 포구에서 유래되었다. 이 작품은 용들이 서로 어우러져 하늘로 승천하는 형상으로, 용의 승천은 구룡포가 하늘길로 통하는 유일한 땅임을 의미한다. 공원에는 선원들의 무사고를 빌던 용왕당도 있다.돌계단 양쪽으로 비석을 세워놓았는데, 왼쪽에 61개, 오른쪽에 59개의 돌기둥이 있으며 비석마다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영일군수 김우복, 영일교육감 임종락, 제일제당 구룡포통조림공장 하사룡, 이판길 등. 단기 4276년(1943년) 7월에 세웠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 계단과 비석은 일본인들이 세운 것으로,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집단 거주지를 만든 후 뒷산에 공원을 만들고 비석에 이름을 새겨놓았다. 그들이 떠나자 시멘트를 발라 덮어버린 뒤 비석을 거꾸로 돌려 그곳에 구룡포 유공자들의 이름을 새긴 것이다.□ ‘조선의 마지막 군마’를 기르던 장기 목장성영일에도 목장이 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그곳에 나고 자란 사람도 모른다. 영일 장기읍의 장기는 긴 장(長)에, 말갈기 기(9B10)자를 쓰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에 목장이 있었다는 사실에 의아해한다. 도대체 영일 장기목장은 어디로 간 것일까? 조선시대 최대의 국영 목장이었던 장기목장을 누가 우리의 기억에서 지운 것일까? (중략)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영일 장기목장에서는 244명의 목자가 1천여 필의 말을 사육하였다. 장기목장에서 나고 기른 말을 ‘장기 말’이라고 하고, 조선 군마 중 최고로 쳤다.-이정한 ‘장기목장’ 중에서, ‘조선의 마지막 군마’(김일광)‘조선의 마지막 군마’는 조선시대에 나라가 운영하던 가장 큰 목장인 영일 장기목장과 그곳에서 나고 자란 조선 최초의 군마인 장기마에 관한 김일광의 동화다. 장기목장성은 일명 석병성(石屛城)이라고 한다. 구룡포읍 창주리 석문동에서 시축한 성벽은 눌태리 계곡을 거쳐 응암산을 서쪽으로 돌아 공개산 서북편 산정을 지나 동해면 흥환리 배일리에 이르는 지대에 축성해 그 동편 전역을 목장으로 사용하는 길이 25리, 높이 10척에 달하는 장성(長城)이다.장기(長9B10) 동을배곶(冬乙背串)에 대한 세종 14년의 기록에 “이제 경상도 동을배곶에 이미 목장을 설치하였사오니, 청컨대 영일과 장기 두 고을 수령으로 감목관을 겸하게 하소서.”라고 남아 있다. 이 기록으로 보아 장기목장에서 말을 방목하기 시작한 것은 1432년 이후로 보이며 인근 지역 영일과 장기의 수령이 함께 관리하도록 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흥환리 진골에서부터 구룡포 사이에 목장성터가 남아 있으며, 1882년에 세워진 목장주민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감목관 민치억 영세불망비’와 흥인군 ‘이최응 영세불망비’ ‘울목김부찰노연영세불망비’가 있다. 전하는 말로는, 목장 입구는 현 구룡포읍 구룡포 3리에 얼마 전까지 있었던 큰 석문이며, 목장의 끝은 앞의 기념비가 서 있던 자리였다고 한다. 원래 기념비는 바닷가 한적한 곳에 방치되다시피 한 것을 주민들이 지금 장소로 옮겼다.영일권에는 조선 초기부터 장기목장 외에도 각 군현에 군소 목장이 있었다. 현재 흥해읍 곡강 일대에 봉림목장지, 초곡, 마장동에 마장목장지, 죽장 상옥에 경전목장지, 오천읍 일월동에 일월목장지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 전기 각 군현에 설치되었던 군소 목장은 1651년 마정을 개혁할 때 모두 폐하여 울산목장 소속의 장기목장에 옮긴 것으로 보인다.장기목장성과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을 연결하는 탐방로가 있다. 장기목장성은 말을 방목해 키우던 석성으로, 구룡포 돌문에서 동해 흥환까지 7.6㎞의 호미반도를 가로질러 2~3m 높이의 돌울타리를 쌓은 것이다. 훼손된 구간을 제외하더라도 5.2㎞가 존재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석성이다. 구룡포 말목장성길(구룡포초등학교~발산리 봉수대)에 이어 동해면 흥환리에서 발산리 봉수대까지 3.1㎞구간과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이 연결된다.오랜 역사를 품은 장기목장성과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 펼쳐지는 둘레길이 호미반도 해안둘레길과 발산리 모감주나무, 병아리꽃나무 군락지와 어울려 매력적인 휴양지로 입소문이 나 있다. 매년 가을, 구룡포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해질 무렵 출발해 말목장성터를 거쳐 봉수대까지 이어지는 길을 걸어가는 구룡포 말목장성 달빛산행 축제는 구룡포를 대표하는 축제로 자리를 잡았다.□ 주상절리의 절경이 펼쳐지는 ‘삼정리’구룡포에 와서 삼정리를 지나칠 수 없다. 삼정리는 주상절리(柱狀節理)의 마을이다. 신생대 제3기, 6천500만 년 전부터 170만 년 전 사이의 어느 날, 지금의 구룡포읍 삼정리에 대폭발이 일어났다. 화산이 폭발하고 나면 용암은 굳게 되는데, 이때 절리(節理)가 형성된다. 절리란, 외부에서 가해진 어떤 힘으로 인해 암석에 생겨난 금을 말하며, 기둥 모양이 발달하면 주상절리라 한다. 삼정리 주상절리는 5∼6각형의 감람석 현무암으로 이뤄진 돌기둥이 높이 5∼15m의 절벽을 이루고 있다. 1997년 발견돼 2000년 4월 천연기념물 제451호로 지정된 포항 연일읍 달전리 주상절리 못지않은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삼정리 해안 100여m에 절벽을 이루고 있는 주상절리는 파도에 깎여 바다에 삐죽 솟아 있는 인근 주상절리와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태양이 사는 곳, 땅끝마을 석병리이곳은 이제 그대로,갯목 시,해맞이 군,일어서는 바다 읍!- 박남철, ‘위대한 고향 포항시’ 부분1980~1990년대 한국 문단의 주목을 받았던 포항 출신 시인 박남철은 ‘포항 시’와 ‘영일군’의 주소를 이렇게 적었다. 국토지리정보원에서는 섬을 제외한 우리나라 최동단을 경북도 구룡포읍 석병리(石屛里)로 표기하고 있다. 이를 나타내기 위해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조형물로 만들어 세웠다. 지구본 모양의 둥그런 돌에 우리나라 지도를 양각하고 거기에 동쪽의 끝단을 표시해놓았다. ‘한반도 동쪽 땅끝, 경북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석병리, 동경(경도) 129 35 10, 북위(위도) 36 02 51’이라 새겨놓은 것이다.석병리는 마을을 끼고 있는 긴 해안선이 깎아놓은 듯한 기암절벽으로 되어 있다. 그 모습이 병풍을 세워둔 것 같다 하여 석병리가 된 것이다. 한반도의 최동단에 위치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해맞이의 고장, 태양이 사는 곳 석병리에서 이렇게 외친다.땅끝마을에서 이른 새벽을 보라!가장 먼저 쏟아 오른 희망을 보라!한 해를 살아갈 힘이 있는 곳에서.사진/안성용글/김동헌시인, ‘푸른시’동인, 2003년 ‘포항문학’ 신인상으로 작품활동, 2008년 ‘문장’ 신인상 수상, 포항문인협회 사무국장 역임, 시집 ‘지을리 이발소’.

2020-10-28

포항융합산업기술지구로! 속속 몰려드는 기업들, 바이오 ‘미래 도시’ 꿈꾼다

“가속기 등 첨단 시설들과 포스텍 등의 훌륭한 인적 자원까지 보유한 포항에 둥지를 틀게 돼 영광이다. 교육, 연구, 산업 시설에 더해 이 모든 것을 매듭지을 수 있는 혁신적인 메디컬 센터 구축이 최종적인 목표다”한미사이언스(주)가 포항융합기술산업지구에 3천억원 규모의 투자를 결정할 당시 임종윤 한미사이언스(주) 대표이사가 한 말이다.포항융합산업기술지구로 기업들이 몰려들고 있다. 철 이외의 산업 기반 구축을 위해 지난 10여년 동안 포항시와 경북도가 노력한 결과로, 이를 바탕으로 포항에 바이오산업 개막이 본격화되고 있다. 포항시에 따르면 10월 기준 포항융합기술산업지구에 입주를 결정한 기업은 총 12곳이다. 또한 한미사이언스를 비롯해 3개 기업이 세부사업내용을 협의하고 있으며 11월 산업용지 3차 분양 시 신청을 할 예정이다. 이 중에서 바이오 관련 기업은 총 입주 기업의 절반가량인 7개사로, 포항융합산업기술지구가 바이오 중심의 생태계가 마련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특히, 이미 입주를 결정했거나 입주를 예정하고 있는 총 15개 기업 중 12개 기업이 포항시 등과 MOU를 체결했는데, 총 투자금액 3천965억원에 고용인원 213명으로 그 규모 또한 엄청나다.포항융합산업기술지구에 둥지를 트는 기업 중 바이오 관련 기업을 중심으로 소개해 본다.□ 한미사이언스경북도와 포항시, 대구경북경제자유구역청은 올해 6월 15일 포항시청에서 한미사이언스(주)와 스마트 헬스케어 인프라 구축을 위한 3천억원 규모의 사업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날 MOU는 한미사이언스(주)가 코로나19 이후 바이오, 스마트 헬스케어, 비대면(언택트) 등의 신성장 산업 진출을 위해 포항융합기술산업지구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포항이 스마트 헬스케어 인프라 구축의 시작을 쏘아올렸다는 평가다. 구체적으로 한미사이언스(주)는 오는 2030년까지 포항융합기술산업지구 5만1천846㎡에 스마트 헬스케어 임상센터, 바이오 오픈 이노베이션 R&D센터, 시제품 생산시설 등을 건립할 계획이다. Medical Service(임상센터)와 R&D(연구개발), Manufacturing(시제품)을 함께 해 연구결과를 신속하게 산업화하고, 의료에 바로 적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한미사이언스는 MOU 체결과 함께 대내외적으로 미래 사업 비전도 선포했다. 발표된 비전은 △사이버 교육(Cyber Education) △디지털 바이오(Digital Bio) △오럴 바이오(Oral Bio) △시티 바이오(City Bio) △그린 바이오(Green Bio) △마린 바이오(Marine Bio) 6대 사업 과제로 압축돼 있다. ‘사이버 교육’과 관련해 한미사이언스는 지난해 11월 경상북도, 포항시, 포스텍과 K-바이오 글로벌 경쟁력 제고를 위해 전문 인력 육성 등에 힘을 합치기로 하는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바 있다는 점을 언급했다. 기존부터 구성하고 있는 협약을 바탕으로 한미사이언스와 경상북도, 포스텍, 포항시는 정상급 제약 바이오 산학클러스터를 함께 만든다는 계획이다. ‘시티 바이오’는 발표 당시인 6월 15일 포항시 등과 체결한 MOU와 관련이 있다. 관련해 한미사이언스는 시티 바이오(City Bio) 라고 이름한 포스트 코로나 비전 사업으로 그룹의 50년 노하우를 집약한 ‘미래 도시’를 포항에 건설하게 된다. 마지막으로는 ‘마린 바이오’가 있다. 한미사이언스는 포항융합산업기술지구에 융합 마린 바이오 센터를 개설하는 것을 시작으로 마린 바이오라는 생소한 영역에 출사표를 던졌다. 한미사이언스는 포항이 천혜의 해양 자원 입지 조건과 그를 입증하는 오랜 역사, 그리고 원조 4세대 가속기를 보유한 최적의 장소임을 밝히고, 이를 통해 진화 전·후 유전체 연구, 바이러스를 포함하는 미생물간 생태계의 이해, 인체 세포 기능의 기원 등을 연구할 방침이다.한미사이언스의 투자 결정은 제약업계에서도 관심을 보이는 사안이다. 제약업계 등은 포항시가 주력하고 있는 바이오시책이 본궤도에 오르면 포항에서 2026년쯤부터 신약산업군의 형성도 가능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난 9월 22일 한국제약바이오협회는 포항시와 포스텍, 대구경북경제자유구역청과 바이오·헬스산업 육성을 위한 MOU를 체결하기도 했다. 1945년 설립돼 국내 주요 제약회사를 포함한 210여개 기업을 회원사로 두고 있는 한국제약바이오협회는 제약바이오산업발전을 위한 관계 법규 및 제도 연구, 교육훈련사업 추진, 혁신을 통한 새로운 의약품 개발과 글로벌 시장 진출에 힘쓰고 있다. 이날 MOU을 통해 바이오산업 육성을 통한 기업 성장 지원 역할을 수행하며 포항 바이오산업에 힘을 보탤 예정이다.□ 바이오앱·의료법인 한성재단(주)바이오앱과 의료법인 한성재단도 주목할 만하다.포항의 벤처기업인 바이오앱은 포항융합산업지구 1만여평에 430억원을 투자해 돼지열병그린백신을 대량 생산할 계획이다. 지난 2011년 설립된 바이오앱은 2012년 ‘포스코벤쳐파트너스 멤버스기업’, 2017년 농림축산식품부 ‘신기술인증’, 2019년 ‘동물의약품제조업 허가’와 ‘허파백TM 돼지열병 그린마커 주’ 품목허가를 받은 그린백신 선도기업이다.특히, 바이오앱은 세계 최초로 식물에서 추출한 단백질 성분을 이용해 돼지열병 백신을 개발한 곳이다. 회사의 독보적인 기술력은 정부는 물론 촉이 빠른 벤처투자자들 사이에서도 입소문이 났다. 담뱃잎에서 추출한 물질로 돼지 열병 예방 백신인 ‘허바백’을 출시해 지난해 농림축산식품부로부터 과학기술대상 산업포장을 수상한데 이어 올해는 돼지열병 백신 효능 평가 실증기업으로 지정됐다. 정부가 바이오앱의 식물기반 차세대 동물용 백신을 국내 축산물의 해외 수출에 힘을 실어줄 유망 기술로 공식 인정한 것이다. 이러한 기업의 투자유치로 포항융합산업지구는 유치가 확정된 그린백신지원센터, 세포막단백질연구소 등과 더불어 바이오산업중심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됐다.의료법인 한성재단도 오는 2021년까지 43억원을 투자해 포항융합기술산업지구 내에 부지 4천132㎡ 건물 2천700㎡ 규모로 골수유래 줄기세포 치료제 연구개발을 위한 임상실험실, 생산공장을 건립할 계획이다. 의료법인 한성재단은 세명병원 등 기존 병원 운영에서 탈피해 줄기세포 치료제 플랫폼 개발을 위한 연구개발업을 사업 영역으로 확대하고 있어 포항 지역 바이오산업의 변화가 기대된다.이 외에 나노바이오소재를 주요 사업으로 하는 (주)에이엔폴리, 고순도 의료용 산수소나트륨 제조와 관련된 (주)바이오컴, 히알루론산 기반 세포치료제 등을 생산하는 (주)화이바이오메드, 휴대용 체성분 분석기를 제조하는 (주)원소프트다임이 바이오 관련 기업으로 포항융합산업지구에 둥지를 튼다.인터뷰 ▷▷ 황인환 포항공대 생명과학과 교수“세계적 규모 그린바이오 원천 기술 보유정부 기조 맞물려 국제적 허브 성장 기대”-포항에서 그린 바이오산업이 활발한 이유는.△포항공대와 바이오앱 등의 기업에서 세계적 수준의 그린 바이오 원천기술을 보유하고 있고, 포항시와 경상북도가 신성장동력으로 그린백신과 그린바이오 산업을 전략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지속적인 투자와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더욱이 한미사이언스가 최근 발표한 6대 비전(사이디오 시그마, Cydio Cigma)에 그린 바이오가 포함되면서 더 큰 동력을 얻게 됐다.-포항 그린 바이오산업의 전망은 어떻게 보는지.△지난달 정부에서 그린 바이오산업을 2030년까지 12조 원 규모로 키우겠다는 방침을 발표하면서 그린 바이오산업이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포항은 포항융합기술산업지구를 기반으로 포항공대-벤처기업(바이오앱·바이오컴 등)-대기업-식물백신 기업지원시설-포항시·경북도가 선순환의 연결고리를 만들고 있어 그 어느 지역보다 그린 바이오산업을 활성화하기에 좋은 환경이고 전망도 매우 밝다.-포항에 국제적 수준의 그린 바이오 클러스터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이 필요한지.△식물백신기업지원시설에 이어 관련 인프라가 추가적으로 조성된다면 더 좋을 것이다. 그린바이오 소재 기반 벤처기업이 공동으로 활용 가능한 연구시설, 상용화를 위한 파일럿 생산시설, 그린바이오 소재 생산을 위한 밀폐형 식물공장, 중소벤처기업 직원 주거 및 문화생활 지원을 위한 주거복합센터, 기업창업 및 네트워킹, 국제 컨퍼런스 등을 지원하는 인큐베이션센터 등이 들어선다면 그린바이오 기업의 창업과 유치에 큰 힘이 되는 것은 물론, 포항이 명실상부한 첨단 그린 바이오산업의 국제적인 허브가 될 수 있을 것이다./전준혁기자 jhjeon@kbmaeil.com

2020-10-28

만경창파 너른 물에 배 띄워놓고…

아리랑이 무엇일까?아리랑은 우리 민족에게 민중의 비애와 한을 담은 삶과 죽음의 대서사시이다. 권력에 대한 개인적 집단적 저항의지의 발현체이기도 하다. 아리랑은 삶의 마디마다 우리네 서러운 민중을 달래며 가슴 흥건히 고인 한의 정서를 삭이고 풀어준 소리였다. 그 아리랑이 2012년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되었고, 2015년 국가무형문화재 제 125호로 지정되었다. 지금 전해지고 있는 곡으로 강원도아리랑, 경기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정선아리랑 외에 무려 3600여 곡의 아리랑이 선조들의 사랑과 이별, 삶의 애환을 노래하며 전달되고 있다.영남민요연구회 영남아리랑 연구회 회장이기도 한 배경숙 선생님을 만났다. 양손에 들고 온 꾸러미가 무거워 보였다. 보자기를 풀자 민요와 아리랑에 관한 책과 공연 프로그램을 비롯한 자료가 한 보따리였다. 꼼꼼하게 자료까지 챙겨온 성의가 놀라웠다. 연구 자료를 듬뿍 안고 온 그녀가 아리랑전승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학자인가 하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예전에는 민요 속에 아리랑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아리랑이 유네스코에 등재되며 민요에서 분리되어 아리랑만의 독립 체제로 우뚝 서게 되었다고 설명해주었다. 아리랑은 전설이나 설화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달된 특성을 띠고 있어서 기록이 남아 있기 어려운데, 영남전래민요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필사본이 발견되면서 ‘줌치타령’을 비롯한 370여 곡의 영남민요아리랑이 전해지게 되었다. 배경숙 선생님이 보자기로 곱게 싸둔 책자를 꺼내어 보여주었다. 그것이 바로 이재욱 선생님이 쓰신 ‘영남전래민요’의 필사본이었다.경성제국대학 시절에 이재욱 선생님은 영호남 지역을 직접 다니며 민요를 채집했다. 자칫 사라질 뻔한 그 민요들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된 것도 이재욱 선생님의 필사본을 통해서였다. 배경숙 선생님은 ‘영남민요연구’라는 이름으로 석박사 논문을 쓰면서 이재욱 연구에 매달렸다. 국문학자였고 민요연구가였던 그분의 자료를 찾아서 도서관을 뒤지고 다녔다. 그분이 납북되면서 이름이 지워지고 자료가 흩어진 것이 안타까워 그것을 한곳으로 모으는 작업에 매달린 것이 20년이었다.우리나라 최초의 민요연구 학자였던 그분은 고월 이장희 시인의 조카였다. 1931년 조선어문학회 발기인으로 참가해서 해방 후 국립도서관장으로 위촉받아 ‘초대 관장’으로 취임했다. 우현서루의 초대 국립도서관장을 지내기도 했던 이재욱 선생님은 ‘영남민요’를 주제로 학위까지 받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요전공자이시다. 그런데도 정작 자료 조사를 시작해보니 그분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그 안타까움이 배경숙 선생님으로 하여금 그분을 연구하게 만들었다.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채집하고 연구한 자료가 ‘영남전래민요집’으로 묶여 나올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분은 배경숙 선생님이 영남민요연구에 매달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영남아리랑기행’이라는 주제로 대구일보에 칼럼을 쓰며 필사본에 실려 있는 가사에 곡을 붙여 작창도 했다. 그런가 하면 ‘서예로 담은 아리랑 일만 수’를 통해 배경숙 창작의 아리랑을 여러 편 소개하기도 했다. 선생님이 ‘배경숙 아리랑, 그리고 영남의 소리’라는 제목의 앨범 시리즈를 주셨다.“제가 가사를 쓴 곡으로 팔공산 아리랑과 구미아리랑, 경산아리랑, 의병아리랑, 봉화 아리랑, 청송 아리랑, 압량아리랑과 같은 창작아리랑과 이재욱 채록 전래민요를 포함한 재발견 영남민요 23수가 들어 있어요.”앨범 표지에 흰색 한복을 차려 입은 단아한 모습이 담겨 있었다. 연주회 때 어떤 식으로 곡을 전달하는지 들려달라고 했다.“스무 명 정도가 돌아가며 창과 군무로 이야기가 있는 무대를 꾸며요. 예전 어머니들이 해오던 것처럼 실제로 디딜방아를 구해서 방아를 찧기도 하고, 직접 물레를 돌리거나, 모심기를 하고 빨래 다다미질을 하며, 스토리텔링을 만들어서 창을 불러요.”화전놀이를 할 때는 직접 진달래꽃을 따와서 무대에서 화전을 구우며 공연을 한다는 얘기가 너무도 생동감 있게 들렸다. 창과 군무를 곁들여 스토리텔링으로 전달하니 이야기가 풍성하게 살아날 것 같았다. 아리랑이라는 곡에 맞춰 무대에 맞게 스토리를 구성하고, 인물과 사건을 만들고, 스토리에 삶을 담아내는 과정이 소설 쓰기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그녀의 이러한 아리랑 작창과 전형화 활동은 아리랑의 가치와 특성을 드높이기에 이른다. 아리랑은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라고. 신명의 소리인가 하면 한풀이이고, 옛것이면서 오늘의 소리라고 하신다.“가장 좋아하는 아리랑이 어떤 곡이에요?”“헐버트 박사의 ‘구 아리랑’을 좋아합니다.”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았다는 호머 헐버트 박사. 그는 조선의 독립을 갈구하며 순 한글로 세계정보는 물론이고 우리나라 여러 지역의 정보를 담은 ‘사면필지’를 쓰기도 했다. 그는 선교사로서 한성중학교와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경기민요 ‘군밤타령’에 음계를 붙이는 등, 그는 입으로만 전해온 아리랑을 악보에 기록했다. 그가 말한다. 한국인은 즉흥곡의 명수들이고 아리랑은 한국인들에게 쌀과 같은 주식이라고. 문경세재에 그의 아리랑비가 서 있다. 예전에는 아리랑을 아라령 아라리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렀지만 ‘구 아리랑’ 이후 아리랑으로 전형화되었다.세간에 알려진 바로는, 아리랑에 여러 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다. 사랑하는 님을 떠난다거나, 차라리 귀가 먹었으면 좋겠다거나, 아랑낭자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한 노래에서 나왔다거나, 구음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나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노동요의 성격을 띠며 두레노래로 불렸으며 구술과 암기에 의한 전승 또는 자연적 습득이라는 민속성을 띠기도 한다.“아리랑 연구로 20년을 보내셨으니 감회가 남다르겠어요.”배경숙 선생님이 민요를 시작한 것은 부부가 같은 취미를 갖자는 취지에서였다. 전주대사습에 빠져있던 남편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어 국악학원에 등록했고, 정은하 선생님과 이춘희 선생님, 서정화 선생님의 사사를 받았다. ‘영남민요의 재발견’과 201B영남의 소리’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배경숙의 영남아리랑’을 대구일보에 연재하며 영남민요를 널리 알리게 되었다. 모든 역사는 이렇게 숨은 조력자의 땀과 고통으로 이루어진다. 그들의 노력이 있어서 역사에 선조들의 삶의 기록을 담을 수 있는 것이다.한민족 모두에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노래를 손꼽으라면 백 명 중의 아흔아홉 명이 ‘아리랑’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국제경기 남북단일팀 공식 노래도 아리랑이고, 고종이 궁중에서 아리랑을 즐겼다는 얘기가 ‘매천야록(梅泉野錄)’에 기록되어 전해지는가 하면, 밀양 ‘아랑의 전설’에서 전해진다는 설도 있고, 어느 수필가의 설명에 의하면 아리랑의 ‘랑’이 고개 령(嶺)의 변음이어서 아리랑은 긴 고개를 뜻한다는 설명도 있고, 고려 말 백두대간과 동해안 일대 음악권 메나리조를 중심으로 전파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도 한다.그 유래가 어디서 시작이 되었건, 개인적으로 나는 떠돌아다니는 소리꾼들이 힘든 고개를 넘을 때마다 흥얼거렸던 구전이 널리 전해져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는 설에 가장 마음이 간다. 민족의 얼이 서려 있는 이 노래는 고단한 삶을 살아온 우리 민족의 가슴에 맺힌 한과 설움을 토하며 불렀던 노래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그렇기에 먼 타국에 사는 우리 민족들은 좋은 일 힘든 일에 맞닥뜨릴 때마다 함께 입을 모아 아리랑을 부르곤 했다. 그들을 하나로 만드는 음악, 그게 바로 아리랑이다.‘아리랑’이라고 하면 나운규 감독의 무성영화 ‘아리랑’이 생각난다. 주인공 영진은 3·1운동 때 잡혀서 일제의 고문으로 정신이상이 된 민족청년이다 작품의 주제를 민족항일투쟁에 맞추고 전통 민요인 '아리랑’과 연결해서 승화시킨 영화였다. 우리 농촌의 생생한 현장을 사실적인 기법으로 묘사했다는 평가와 함께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좋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평소에 생활철학이 뭔가요?”“감동을 주며 살자고 늘 얘기해요.”그 자신만만한 의지가 선생님을 무대에 서게 하고, 민요집 발간에 뛰어들게 하고, 책을 쓰게 만든다. 단순히 부부가 같은 취미를 가지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민요가 ‘아리랑’ 연구에 일생을 보내게 될 줄 몰랐다며 웃는다./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0-10-28

그린백신 연구 개발 기관 사업화 시너지 효과 누린다

K-바이오의 중심도시로 한발한발 내딛고 있는 포항시와 경북도. 이러한 바이오 산업의 투자에 있어서 경북도가 선도적으로 추진해 온 ‘가속기 바이오신약 클러스터’의 중심은 단연 포항융합산업기술지구다.경북도는 지난해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가속기 기반 신약개발 사업’의 최종 사업자로 선정돼 핵심사업인 세포막단백질연구소 설립에 국비 229억원을 확보했다.당시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민선 7기 핵심 사업으로 동해안권 메가사이언스밸리 전략을 구체화하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함께 ‘가속기 바이오 신약 클러스터’를 차질 없이 추진해 동해안권 산업경제 발전의 새바람을 반드시 일으키겠다”고 강한 의지를 밝힌 바 있다.세포막단백질연구소는 2019년부터 5년간 총사업비 458억원을 투입해 포항융합산업기술지구에 설립될 예정이다. 가속기 기반 신약개발은 2016년 세계 최고의 4세대 방사광가속기가 포항에 준공됨에 따라 급속히 성장하고 있는 신약개발 산업에서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경북도가 전략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사업이다.경북도는 민선 7기 핵심 사업으로 현재 ‘과학산업 전략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포항의 방사광가속기와 경주의 양성자가속기 등 국가 과학인프라를 토대로 한 ‘동해안 메가 사이언스 밸리’ 구축은 ‘가속기 기반 신약개발’을 핵심사업으로 하고 있다.정부가 오는 2030년까지 그린바이오 5대 유망산업을 2배 이상 키우는 ‘그린바이오 융합형 신산업 육성방안’을 최근 확정했는데, 이 역시 포항에는 호재다. 이번 정부 정책과 관련해 핵심기술개발 부분과 인적·물적 인프라 및 산업 생태계 구축 부분에서 포항시가 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우선 기술개발은 5대 유망산업 분야를 대상으로 진행하는데, 특히 동물용의약품과 생명소재 부문은 포항시가 전국 최고의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포항시는 지난 2016년부터 국내 심포지엄과 국제 컨퍼런스를 개최했고, 2018년 2월 그린백신·그린바이오산업 육성을 위해 관련 기업을 포함한 산·학·연·관 7개 기관이 협약(MOU)을 체결하는 등 그린백신의 신규 시장 창출 및 세계시장을 선도하기 위해 상호 협력해왔다.포항시는 또 경북도, 포항테크노파크와 긴밀히 협력해 그린바이오 산업을 신성장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 2018년 농림축산식품부의 ‘식물백신 기업지원시설 건립사업’ 공모사업에 선정되는 등 그린바이오 신산업 육성을 위한 발판을 마련해왔다.이렇듯 세포막단백질연구소와 식물백신기업지원시설가 포항시의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주목받고 있는데, 이러한 사업의 중심에는 포항융합산업기술지구가 위치하고 있다. 포항융합산업기술지구에 자리잡을 이들 시설에 대해 정리해 봤다.□ 세포막단백질연구소포항융합기술산업지구 내 건립되는 세포막단밸질 연구소는 4세대 방사광 가속기와 CRryo-EM(극저온 전자현미경)을 활용해 세포막단백질 구조기능 연구를 수행하는 바이오 신약개발 핵심 인프라다.CRryo-EM(극저온 전자현미경)은 최근 2017년 노벨화학상을 수상에 기여한 최첨단 장비로, 정제된 단백질(시료)를 초저온 초고속으로 얼리고 세포 모습을 최적의 이미지 영상 조건을 탐색 후 고해상도 카메라로 이미지 영상을 획득해 이미지 프로세싱을 통해 세포를 3차원 구조로 구현해 내는 장비이다.4세대 방사광 가속기가 작은 크기의 단백질을 고순도로 정제한 후 수개월에서 수년간 결정화 과정을 거쳐야하는 제약이 있지만 CRryo-EM(극저온 전자현미경)기술은 시료의 결정화 과정이 필요하지 않고 시료의 크기가 비교적 큰 세포를 규명하는데 시간이 단축된다. 질병유발 원인인 세포막단백질처럼 큰 세포 구조 구명에 유리하다.즉, 세포막단백질연구소는 질병원인의 60% 이상을 차지하지만 분석이 어려워 다루지 못했던 세포막단백질을 4세대 방사광가속기를 활용해 구조와 메커니즘을 밝히고 신약 후보물질을 발굴하는 국가 차원의 연구소다.기존의 대량화합물 스크리닝 방식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신약개발이 가능하고 신약 후보물질 도출에 투자되는 비용과 시간을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어 우리나라가 1천500조원의 글로벌 신약시장에서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는데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세포막단백질 전문연구소 설립은 독일, 미국에 이어 우리나라가 세 번째다. 국내에서는 일부 대학, 연구소 등에서 단편적인 연구는 있었지만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를 위한 국가 단위 연구소는 이번 경북도 세포막단백질연구소가 처음이다.세포막단백질연구소○ 위 치 : 포항융합기술산업지구○ 기 간 : 2019년∼2023년○ 사 업 량 : 부지면적 7천512㎡, 연면적 6천86㎡(지하1/지상4층)○ 사 업 비 : 458억원※ 2020년 3월 착공, 2020년 12월 준공○ 사업주체 :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경상북도, 포항시○ 향후운영 : 포스텍□식물백신기업지원시설포항융합기술산업지구 내 건립되는 또 하나의 바이오 클러스터 시설은 식물백신기업지원시설이다.식물백신 기업 유치 및 그린바이오 신산업군 조성을 위한 거점시설로, 기존 동물세포 및 미생물에서 백신을 추출하던 기술에서 식물에서 백신을 추출하는 새로운 카테고리의 생산공정이다.밀폐된 식물에 병원체를 주입해 배양 후 수확해 정제하면 백신으로 쓸 바이러스 단백질을 얻을 수 있는데, 이는 기존 동물세포 백신보다 제조기간이 짧고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에볼라 바이러스 백신인 ‘Z맵’은 담뱃잎에서 추출해 개발된 백신이다.국내에서는 포스텍 재향 기업인 ‘바이오앱’이 돼지열병에 유용한 식물백신 개발로 선전을 하고 있다. 향후 식물백신기업지원시설은 국내 식물백신 기업유치 및 그린바이오 신산업군 조성을 위한 전초기지이자 거점시설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시설은 완전 밀폐형 식물재배시설, 우수 동물용의약품 제조기준(KvGMP) 백신생산시설, 전임상 평가용 시설과 효능평가시설, 기업지원시설 등이 구축된다. 준공 이후에는 동물용 백신-인수공통 감염백신-인체백신으로 개발범위를 확대하고 현재 100% 수입하는 구제역, 돼지열병, AI 등 동물용 백신의 자급률을 2020년까지 40%까지 확대할 계획이다.식물백신기업지원시설○ 위 치 : 포항융합기술산업지구○ 기 간 : 2018년∼2021년○ 사 업 량 : 부지면적 6천843㎡, 연면적 4천810㎡(본관3층, 별관1층)○ 사 업 비 : 150억원 *부지매입비 15억원(지방비) 별도※ 2020년 6월 착공, 2021년 6월 준공○ 사업주관 : 농림축산식품부, 경상북도, 포항시·포항테크노파크○ 향후운영 : 포항테크노파크※ 입주업체 4∼5개 정도 계획(바이오앱, 바이오컴, 엔비엠 확정)□포항지식산업센터포항지식산업센터는 포항 4차산업혁명에 대비한 지역의 신규 일자리 창출, 우수 기업 발굴 등 지역경제 활력 제고를 위한 장기적으로 기업창업과 기술지원을 위한 플랫폼 구축이 필요함에 따라 추진되고 있다.포항의 미래공간을 선도하는 창의적 공간으로서 지역 내 미래 산업구조 개편을 위한 혁신산업 생태계 구축 및 청년층 취·창업 일자리 지속적 확대·성장 견인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포스텍과 한동대 등 우수한 인근대학 및 연구소, 테크노파크 등 기업지원기관과 지역 내 R&BD간의 연결성 강화 및 신산업 클러스터를 통한 시너지 효과 강화 기능을 할 예정이다.즉, 포항 지식산업센터는 중소 및 창업 기업 입주 인프라의 축을 담당하며 이들 기업의 R&D 사업화 지원의 중심 시설이 될 전망이다. 올해 말 센터가 준공된 이후 이르면 2021년 2월부터 기업들이 입주한다.포항지식산업센터○ 위 치 : 포항융합기술산업지구○ 사업기간 : 2017년∼2020년○ 사 업 량 : 부지면적 1만㎡, 연면적 1만3천300㎡(지하1/지상6층)○ 총사업비 : 250억원※ 2020년 1월 착공, 2020년 12월 준공○ 향후계획 : ※ 운 영 : 포항테크노파크(예정)※ 포항 지식산업센터 설립 및 운영조례 제정※ 입주업체 모집공고/전준혁기자 jhjeon@kbmaeil.com

2020-10-27

월송정과 푸른 동해바다·백사장 그리고 소나무가 아름다운 평해 황씨 종택

울진 하면 반공의 세대에게는 끔찍한 울진삼척무장공비 “공산당은 싫어요” 이승복 어린이(조선일보의 각색)가 생각나고 관동팔경의 월송정과 망양정 그리고 성류굴과 불영사 후포해수욕장 등등이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강원도인지 경북인지 헷갈리는 것은 예전엔 강원도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그 지역의 이름 따라 성씨의 본관을 따르는데 울진의 평해를 본관으로 하는 평해 황씨가 있다. 그리고 해월헌 건물을 종택으로 옮겨놓았다.#. 우리나라 성씨의 유래사람은 처음에는 자기를 낳은 어머니만 확실히 알고 아버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모계혈연을 중심으로 모여 사는 모계사회가 나타났다가 뒤에 부계사회로 전환되지만, 모계, 부계 할 것 없이 원시사회는 조상이 같은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모여 살았다. 이와 같이 인류사회는 혈연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원시시대부터 씨족에 대한 관념이 매우 강하였다. 자기 조상을 숭배하고 동족끼리 서로 사랑하고 씨족의 명예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고 각 씨족들은 다른 씨족과 구별하기 위하여 각기 명칭이 있었을 것이다. 그 명칭은 문자를 사용한 뒤에는 성으로 표현하였다. 동양에 있어서 처음으로 성을 사용한 것은 한자를 발명한 중국이었으며 처음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명이나 산, 강 등의 이름으로 성을 삼았다.중국도 하(夏)은(殷)주(周)시대 이전에는 남자는 씨를, 여자는 성을 호칭하였다가 후대에 성씨가 합쳐졌던 것이며 씨는 신분의 귀천을 구별하였기 때문에 귀한 자는 씨가 있으나 천한 자는 이름만 있고 씨는 없었다.중국의 성씨제도를 수용한 우리나라는 고려 초기부터 지배층에게 성이 보급되면서 성은 부계혈통을 표시하고 명은 개인의 이름을 가리키게 되었다. 한국의 성씨는 가족 전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부계의 혈통만을 표시하며 본관과 성을 결합해 혈족의 계통을 나타낸다. 본관은 성씨가 시작된 시조의 관향 명칭이며 그 지역명인 본관을 성과 함께 써서 혈족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다시 중시조에 따라 다양한 종파를 구분한다.그 결과 성은 그 사람의 혈연관계를 분류하는 기준이 되며 이름은 그 성과 결합하여 사회성원으로서의 개인을 남과 구별하는 구실을 한다. 이름 자체만으로는 독립된 인격행위를 할 수 없으며 어디까지나 성을 보조하는 기능을 가진다.성은 그 사람이 태어난 부계혈통으로 신분이나 호적에 변동이 생긴다 하더라도 혈통이 변하는 것이 아니므로 일생동안 아니 죽어서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우리나라 관습법이다.우리나라 성씨의 특징은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그것을 수용 보급하는 과정에서 성씨체계가 특이하고 고유한 점이 많다. 우리나라 성은 가족 전체를 대표하는 공동의 호칭이 아니라 부계위주의 그 자체의 칭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이 변동되더라도 성은 변하지 않아 호주와 다른 성의 어머니 며느리가 한 가족인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한 가정의 성은 같기 때문에 남편과 아내의 성씨가 같은 부부동성주의가 원칙인 외국인들은 개가하면 또 성이 바뀌기에 우리를 이상하게 본다. 이웃 일본도 일가일씨주의(一家一氏主義)다. 세상은 넓고 다양하여 아직도 지배층만 성이 있고 이름만 있고 성이 없는 나라도 많다. 천민들도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고, 오늘처럼 누구나 본관(本貫)과 성(姓)을 갖게 된 것은 처음으로 민적법을 시행한 1903년(융희 3년) 이후 1909년부터이다. 당시 성이 없던 사람이 가졌던 사람의 1.3배나 되었다.그리하여 귀화인을 제외한 우리나라는 2003년 기준 286성이고, 중국은 6천931여개, 일본은 12만3천여 개나 된다. 인구는 김씨(21.6)가 가장 많으며 이, 박, 최, 정씨의 5대 성이 인구의 50%이상을 차지한다.#.평해 황씨 종택여행과 답사를 떠날 때 식당을 예약하는 사람은 이과 형이고 필자같이 문과형의 자유로운 영혼은 단체를 제외하고 식당을 예약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의 답사 일정은 있어도 어디로 튈지 어디에 머물지 돌출 상황 때문에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식당을 고른다. 주로 돈 주고 광고한 인터넷의 맛 집은 절대 찾지 않는다. 더구나 줄서서 번호표 받아 대기하는 것은 자존심의 문제라 하지 않는다. 잘 모를 때는 기사식당 가면 후회는 하지 않는다. 현지 택시기사들은 매일 사먹기 때문에 입맛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오늘도 영덕 강구 못미처 순간의 감을 잡고 들어갔다. 사람 하나 없고 주인 아주머니는 김치 담는다. 갈 길이 바빠도 매일 매일 김치 담는다는 주인 아주머니의 정성에 푸른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기다리는데 사람들이 줄줄이 온다. 이상하게 필자가 식당에 들어가면 손님이 없다가도 사람들이 들어왔다. 맛있게 잘 먹고 나왔다.평해 황씨 종택 입구에 들어서니 황씨 시조 황락의 유허비가 서있고 ‘관동팔경월송정’의 큰 문이 소나무와 어울리게 서 있다. 종택 입구 담벼락 앞에는 애국지사 국오 황만영 선생 기념비가 종택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여러 황씨 중 평해 황씨를 종장으로 삼는 이유는 시조 황락이 중국 한나라 때 구대림(평해구씨 시조) 장군과 베트남(옛 교지국)에 사신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울진군 기성(지금의 평해) 월송정 근처에 표류하고 정착하여 황시 시조가 되기 때문이다.처음엔 지명 따라 기성 황씨의 시조가 되고, 기성이 평해로 바뀌면서 평해 황씨로 굳혀졌다. 평해 황씨는 우리나라 황씨의 종가로 시조 황락의 첫째아들 기성군으로 봉해진 황갑고의 후손들이다. 황갑고의 후손 중에 금오장군 태자검교 황온인을 시조로 한다. 황씨는 창원황씨 상주 황씨 우주 황씨 등등의 여러 황씨들이 있는데 조선의 명기 황진이(黃眞伊)는 우주 황씨 황 진사의 서녀(庶女)이다.입구에 들어서자 황씨 여러 문중에서 시조제단 참배기념비와 황씨 문중에 한자리한 분들의 비가 맨 앞에 선명히 서 있다. 봉사재 종택 건물은 오래되지 않았고 제단과 여러 건물과 정자 등도 새것으로 잘 가꾸어 놓았지만 주위를 감싸고 있는 소나무군락이 장쾌한 맛을 풍긴다. 역시 소나무는 언제 보아도 아름다움이 흐른다.#. 평해 황씨 해월헌 종택월송정과 푸른 동해바다와 백사장을 보고 다시 나와 평해 황씨 해월 종택으로 향했다. 황씨 종택서 옛 국도 타고 불과 100m 쯤 지나 길 아래 전병모. 전술모 형제 효자비에 갔다. 정선 전씨 전종복의 둘째, 넷째아들로 평소에도 부모님을 예를 갖추어 봉양하다가 아버지가 큰 종기로 위중해지자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고, 변의 맛으로 병세를 판단하여 약을 쓰고, 꿩고기를 구하여 원기를 회복시키고자 하였고, 아버지 병환을 자신이 대신해 달라고 하늘이 빌었단다. 병세가 위독하자 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시게 하고 부모님이 죽은 뒤에는 여막을 치고 정성을 다하여 묘를 지켰다 한다. 그래서 지역의 선비들이 건의하여 조정에서 1894년(고종31년) 형제에게 정려하였고 통정대부도정을 추증하였다. 이후 1913년 후손들이 효자비를 세웠다. 병원이 곳곳에 있는 지금 시대로는 이해기 힘들지만 그 당시는 그렇게 하지 않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 지극한 효심으로 최선을 다한 효자였다. 초라한 정려각 뒤로 소나무 몇 그루가 효자의 정성을 위로해주고 있는 듯했다.기성면 사동마을 평해 황씨 해월헌 종택에 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종택 전체를 수리 중이었다. 고택 감상하고 좋은 사진 찍기는 어려웠다. 마을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끝 산자락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 소나무가 산에서 감싸는 비슷한 지형이라 순간 안동의 간재 종택의 축소판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종택의 주인공 해월 황여일(1556~1622)은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고,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임진왜란 때는 도원수 권율의 종사관으로 공을 세운 문무를 겸비한 분이었다.어수선한 종택을 살펴보고 종택을 감싸고 있는 경사진 산언덕에서 내려다보았다. 역시 전체를 조망하는 데는 위에서 아래로 보는 부감법이 백미다. 빽빽이 둘러진 소나무의 위용은 강한 힘과 기상이 꿈틀대는 것 같다. 울진이 어떤 지역인가. 우리나라 최고의 질 좋은 금강송 군락지가 아닌가. 경사가 급한 산의 소나무는 꼿꼿이 힘 있게 종택을 호위하고 있었다. 마당에서는 포클레인이 기중기에 흙을 담아 지붕에 올려주면 와공은 받아서 흙을 깔고 기와를 이고 있었다. 아래서 흙뭉치를 둥글게 만들어 지붕에 던지면 받아서 기와 이던 장면은 단원 김홍도의 그림에서나 가능하다.필자가 1997년 수오재를 옮겨지을 때 흙을 지게에 지고 지붕에 올랐고, 지금은 한옥 짓는 모든 집에 장비로 흙을 지붕에 올린다. 이곳 종택으로 옮겨온 해월헌 고택은 해월 황여일이 33살(1588년)때 뒷산 중턱에 지어 바다를 바라보았고, 63세(1618년)에 동래부사를 마치고 낙향해서는 ‘나이 들어 왔다’는 의미의 만귀헌(晩歸軒)으로 고쳐달았다. 19세기 중엽 후손들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짓고 다시 호를 해월헌으로 환원했고 글씨는 선조 때 영의정 했던 아계 이산해(1539~1609)가 평해로 귀양 와서 쓴 글씨다.이산해는 북인의 영수로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토함 이지함의 조카인데 그가 쓴 해월헌기에는 “군자의 마음은 바로 광대하고 고명하여 길이 변치 않는 바다와 달인 것이다. 지금 그대가 이로써 헌(軒)의 이름을 삼았으니 마음을 보존하는 도리를 얻음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시속 가운데서도 변치 않는 것인가.”옛 선비들의 문장은 지금의 문장가와 격이 다르다. 집 앞에 초가집은 애국지사 황만영의 생가를 복원해 놓았다. 마을을 빠져나오다 시골집 감나무의 감이 푸른 하늘의 기운과 맑은 가을 햇살에 알몸인양 붉히고 있었다./글·사진=기행작가 이재호

2020-10-27

포항, 차세대 바이오산업 도시로… 미래 ‘펜타시티’ 가시권

“지금이 우리에게는 바이오헬스 세계시장을 앞서갈 최적의 기회다. 제약과 생명공학 산업이 우리 경제를 이끌어갈 시대도 머지않았다”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5월 충북 오송에서 열린 바이오헬스 국가비전 선포식에서 이같이 언급하고서 바이오헬스 분야를 시스템반도체, 미래형 자동차와 함께 차세대 주력산업으로 키우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이어 “정부는 민간이 기업가 정신을 발휘하도록 충분히 뒷받침하겠다”며 “특히 중견·중소·벤처기업이 산업 주역으로 우뚝 서도록 기술 개발부터 인허가·생산·시장 출시까지 성장 전 주기에 걸쳐 혁신생태계를 조성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국가적 주력산업으로 바이오산업이 떠오르고 있다. 특히 경북에서는 포항시가 가속기 기반의 신약 클러스터 조성과 차세대 그린 백신산업 등을 통해 풍요로운 지역의 미래 먹거리가 될 바이오산업 분야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다.포항의 이러한 바이오산업의 확장에서 가장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는 장소는 단연 포항융합산업기술지구다. 이곳은 포항시 북구 흥해읍 대련리·이인리 일원 147만㎡(약 45만평) 규모에 조성되는 차세대 프리미엄급 복합자족신도시다. 여기는 특히 경북도 제2청사인 환동해지역본부가 착공을 앞두고 있어 더욱 주목을 받는다.아울러 신약개발 산업 활성화를 위한 국가급 연구기관인 ‘세포막단백질연구소’, 그린바이오산업 육성을 위한 국내 최초 식물기반 백신분야 기업지원시설인 ‘식물백신기업지원센터’, 미래선도형 창의 공간 구축 및 청년 창업기회 제공을 위한 ‘포항지식산업센터’ 등이 유치돼 있다. 또 세계 최초로 식물백신 제조품목허가를 취득한 (주)바이오앱을 비롯해 포항세명기독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의료법인 한성재단, 기술혁신 벤처기업인 (주)HMT와 각각 투자양해각서(MOU)를 체결하는 등 포항융합기술산업지구 자체가 차세대 바이오산업의 전진기지로서의 본격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큰 매력을 보유하고 있다.□ K-바이오 클러스터 필요성미래 유망 신성장 동력 산업으로 주목받고 있는 바이오산업은 생명공학기술을 바탕으로 생물체의 기본정보를 활용해 인류의 건강증진, 질병예방, 진단·치료에 필요한 유용물질과 서비스 등을 통한 고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산업이다. 또한, 바이오산업은 다른 산업과 달리 연구개발 중심의 기술집약적 산업으로 기초연구에서부터 신약후보물질 발굴 후 제품화하기까지 소요시간이 길고 개발 비용도 큰 반면, 성공확률은 낮아 정부와 지자체의 전략적 지원이 필요한 산업이다. 이처럼 바이오산업은 연구개발, 임상실험, 상용화의 연결과 연구기관, 의료기관, 바이오 기업과의 긴밀한 연계가 성공의 열쇠이기에 클러스터(Cluster)조성이 필수다. 이에 포항은 바이오산업 선도 도시로 진입하기 위해 바이오산업 육성에 필요한 클러스터 조성을 해나가고 있다.특히 포항이 보유한 인프라는 국내에서도 수준급에 속하고 있어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다. 일례로 제4세대 방사광가속기를 들 수 있는데, 가속기는 노벨물리학상의 20%가 가속기를 활용한 연구에서 나올 정도로 첨단산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빛의 속도로 가속한 기본입자를 목표 물질에 타격시켜 물질의 구조를 분석하는 연구 장비이다. 한마디로 초고성능 대형 현미경인데, 이번에 준공된 4세대는 3세대의 1억배 밝기이고 태양보다 100경배 밝다. 활시위를 당기듯 전자를 쏘면 780m의 선형가속기를 거치며 빛의 속도로 빨라진다. X선 자유전자 레이저를 발생시켜 펨토초(1000조분의 1초)로 움직이는 물질을 분석할 수 있다. 생체 단백질 중 질병의 원인인 기능 이상이 생긴 세포막 단백질의 구조 해석에 유용해 표적단백질의 항체 후보물질 발굴 등 원천기술을 확보할 수 있다.인적 자원 역시 풍부하다. 포항의 포스텍과 한동대는 우수한 인재가 많은 연구중심 대학으로 양질의 논문이 많고 글로벌 연구 경쟁력도 갖춰져 있다.특히 포스텍은 수년간 정부에서 지원하는 핵심기초·원천 기술분야 연구 과제를 선도적으로 수행해왔다.최근에는 과학기술정통부의 키우리사업(바이오분자집게연구단)에 선정되기도 했다.키우리 사업은 바이오 핵심 기술 혁신을 이끌 연구 인재 역량을 강화하고 이러한 인재를 산업계와 교류해 바이오 기업 등으로 진출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어 줄 것으로 기대된다.□ 포항융합산업기술지구의 시작포항융합기술산업지구는 대구경북경제자유구역청에서 추진하고 있다. 경제자유구역은 외국 자본과 기술의 국내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금융·세재 혜택과 행정 편의를 제공하는 특별구역을 말한다. (주)포항융합티앤아이가 시행하고 현대엔지니어링(주)가 시공사로 참여한다. 2018년 9월 착공 후 현재 공정율은 50%에 육박하고 있다. 2008년 5월 경제자유구역으로 최초 지정된 후, 지난해 3월 4차 지구개발계획 변경이 승인돼 실시계획 변경 절차를 추진했으며 올해 4월에 승인·고시했다.2021년 하반기 부지조성공사 완료, 2022년 사업준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준공 후에는 국내외 혁신기업들과 연구기관들이 입주하고, 1만여명의 인구가 유입될 것으로 예상된다.물론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2008년 최초 지정 이후 사업이 부진하자 취소위기에 몰리기도 했는데, 2014년에는 실시계획 승인 신청 조건으로 시한을 연장받아 극적으로 부활된 바 있다. 이어 2015년 6월에는 포항융합기술산업지구 조성사업이 국토교통부 중앙도시계획위원회 심의를 통과하며 속도가 붙었다. 본격적인 사업은 2017년부터 진행됐다. 2017년 11월 사업시행자가 (주)삼진씨앤씨에서 (주)포항융합티앤아이(SPC)로 변경됐으며, 현대엔지니어링(주)과 도급계약을 체결했다. 2018년 5월에는 대출약정서 체결 및 대출 실행(2천억원) 이후 경자청-포항시-포항융합티앤아이-현대ENG 간 사업시행협약이 이뤄졌다. 지구조성 공사 착공은 2018년 9월 진행됐고, 같은해 11월 기공식이 개최됐다.□ 복합자족신도시, 펜타시티큰 틀에서 포항융합산업기술지구는 복합자족신도시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포항융합기술산업지구는 지난해 10월 포항융합기술산업지구의 성공적인 조성사업을 위해 도시브랜드 네임을 ‘펜타시티’로 정하고 포항시 죽도동에 홍보관을 개관했다. ‘펜타시티’는 5가지를 갖춘 도시라는 뜻으로 바이오, 에너지, 나노, 주거, 글로벌 비즈니스의 5가지 혁신성장 요소를 기반으로 하는 차세대 프리미엄급 복합자족신도시를 의미한다.포항의 풍부한 R&D 인프라를 기반으로 4차 산업혁명시대를 선도할 바이오, 그린에너지, 신소재 분야를 집중적으로 육성시키는 산업시설을 비롯해 상업, 업무, 주거시설이 갖춰지고, 행정 인프라까지 골고루 갖춘 완벽한 자족형 복합신도시로 조성될 계획이다. ‘펜타시티’는 블록형 단독주택과 공동주택 등 5천여 세대의 주거지와 풍부한 녹지와 공원, 상업, 편의시설을 갖춘 생활형신도시로 조성된다.KTX포항역이 5분 거리에 있어 전국 어디든 2시간대로 통하는 광역교통의 요지이며, 대구-포항고속도로, 울산-포항고속도로 등의 도로교통과 영일만항, 포항공항 등 다각적인 광역교통망을 갖추고 있어 입지여건이 매우 우수하다.또한, 펜타시티 내에는 경상북도 제2청사인 환동해 지역본부가 착공을 앞두고 있어, 100만 동남권 도민의 행정수요에 대응하며 지역균형발전을 촉진하는 뉴행정타운 역할도 하게 된다.이미 펜타시티에는 신약개발 산업 활성화를 위한 국가급 연구기관인 ‘세포막단백질연구소’, 그린바이오산업 육성을 위한 국내 최초 식물기반 백신분야 기업지원시설인 ‘식물백신기업지원센터’, 미래 선도형 창의 공간 구축 및 청년 창업기회 제공을 위한 ‘포항지식산업센터’ 등이 입주 예정으로, 이들 건축물은 올 초 착공했으며 2021년부터 본격적으로 운영해 대한민국의 혁신성장을 이끌어갈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대구경북경제자유구역청 관계자는 “펜타시티를 바이오, 그린에너지, 신약개발, 신소재분야 등의 R&D 특화지구로 개발해 포항이 가진 세계적인 R&D 인프라를 기반으로 국내외 혁신기업들의 연구, 실증, 사업화가 이뤄지는 혁신성장의 선도모델을 만들 예정이다”며 “펜타시티의 개발 완료 시점이 되면 이 일대는 펜타시티를 중심으로 KTX역세권, 이인지구, 초곡지구가 함께 거대신도시를 형성해 포항의 산업경제와 생활문화를 이끌어 갈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전준혁기자 jhjeon@kbmaeil.com

2020-10-26

우암의 정치 소신과 다산의 애민사상이 깃들어 있는 유배지

장기읍성 동문까지 승용차의 왕래는 비교적 자유롭다. 동문에 올라서면 저 위로 산 능선에서 흘러내린 성곽이 마치 꾸물거리는 뱀의 몸통처럼 아래쪽을 향하여 움직이는 것 같다. 이곳에 유배자들을 관리하는 현청이 있었다. 현청의 동문에는 조해루(朝海樓)란 누각이 있었다. 이곳에서 보는 일출은 조선 십경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유명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성곽 위에 배일대(拜日臺)라 적힌 바위가 동쪽 바다를 보고 앉아 있다. 장기 현감이 매년 정월 초하룻날 조정의 임금을 대신해서 해맞이했다고 전해오는 유물이다. 다산 정약용도 이곳에서 ‘동문에서 해 뜨는 것을 바라보며’라는 시를 지었다.□ 조선조 500년 동안 220여 명의 유배객 거쳐가성곽을 타고 남문지에 올라서면 저 아래 현내뜰과 신창리 바닷가, 그리고 고개 넘어 양포항이 시야를 확 트이게 한다. 동남쪽 계원리 복길봉수와 동북쪽 모포리 뇌성산 봉수대가 기하학적으로 읍성으로 연결된다. 바다에서 침입하는 적들을 대비했던 선조들의 지혜가 이 성의 입지를 결정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보면 장기면의 전체 입지는 삼면이 육지이고 한면이 바다에 인접해 있는 연해(沿海) 고을임을 실감할 수 있다.조선시대 유배지의 장소와 거리를 책정한 배소상정법(配所詳定法)에 따르면 장기는 경성을 중심으로 유 3천리 지역에 해당하는 빈해각관(濱海各官:서울에서 30개 역 밖에 있는 바닷가) 고을이었다. 그래서일까.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 같은 석학들을 비롯해 조선조 500년 동안 220여 명의 유배객이 이곳을 거쳐 갔다. 조선시대 장기로 오는 유배길은 영남대로를 이용했다. 한양-덕풍-경안-유춘-가흥-죽령-영주-안동-상주-함창-의흥-신령-영천-경주-장기로 연결되는 이 길은 서울에서 860리이다. 유배인들은 하루 95리를 걸어 9일 하고도 반나절 만에야 이곳에 도착하였다. 왕위 승계와 이에 수반된 당쟁, 그리고 사화와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이들이 최종적으로 도착해서 신고식을 했던 읍성 바로 아래 장기초등학교가 있다. 그곳이 우암의 적거지였다고 전한다. 우암이 직접 심었다는 교정의 은행나무가 오늘따라 더 무성하다.□ 우암, 제2차 예송 논쟁에서 패해 1675년 장기로 이배우암 송시열과 장기의 인연은 어땠을까. 우암은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1675년 정월 덕원으로 유배되었다가 5개월 후인 6월 10일 윤휴가 조사기, 이무 등과 함께 우암을 원악지(遠惡地)로 옮기기를 청하여 장기로 이배(移配)되었다. 장기에 도착한 우암은 장기성 동문 밖 마현리 사인(士人) 오도전 집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그로부터 1679년 4월 10일 거제도로 귀양살이를 옮기기까지 우암은 4년여 이곳 사람들과 호흡을 같이하며 살았다.우암은 동생들은 물론 부실(副室)과 아들, 손자, 증손자까지 함께 데리고 왔다. 이는 비록 유배객의 몸이지만 가족과 노복까지 대동할 정도여서 당시 우암의 입지를 반증하고 있다. 우암의 가솔들은 술을 빚어 모포리에 열리는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꾸리기도 했다.조선조의 관리나 지식인들은 유배지에서 학문적 업적을 쌓는 일이 많았다. 이황과 이이는 물론이고 정약용과 박세당 등 실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4년간의 장기현 유배생활 중에 우암은 수많은 저작을 했다. 우암의 장기 배소에는 수백 권의 서책이 비치돼 있었고, 독서를 하는 여가에 시를 짓기도 했는데, 이들 원고는 하나도 버리지 않고 상자 속에 간직했다.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라는 명저뿐 아니라, 1675년 6월에는 취성도(聚星圖)를 제작했다. 또한 이곳에서 ‘문충공 포은 정선생신도비문’ 외에 300수 내외의 시와 글을 지어 다양한 심회를 형상화했다.우암 거소 주인이었던 오도전은 4년간 열심히 우암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장기현의 훈장이 되었다. 우암이 장기를 떠난 후 28년 만에 우암의 문하에서 수학했던 오도전, 오도종, 황보헌, 이동철, 오시좌, 김연, 서유원, 오도징 등 장기 향림들과 대구의 구용징, 전극화 등이 주축이 돼 죽림서원을 건립하였다. 이들은 장기에서 노론 인맥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그 인맥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까지 존속되었다. 죽림서원에는 우암의 영정과 문집, 그리고 이곳에 유배를 왔다가 객사한 퇴우당 김수홍의 문집이 있었지만 서원이 훼철된 후 그 행방을 알 수 없다.시대의 거물인 우암이 장기에서 4년간 머물었다는 것은 장기뿐만 아니라 영남 지역 전체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낳았다. 한양에서 무수한 고관과 학자들이 장기까지 찾아와 우암에게 문안을 올린 것은 물론 학문을 전수받기를 간청했다. 우암과 그 후학들의 영향으로 학문을 숭상하고 충절과 예의를 중시하는 문화 풍토가 지역 곳곳에 조성되었다고 해도 결코 넘치는 말은 아닐 것이다.□ 다산, 신유박해 사건에 연루돼 1801년 장기로 유배우암이 장기를 떠난 지 126년 지난 무렵, 다산이 장기로 유배를 왔다. 다산의 18년 유배생활의 시작지가 바로 장기현이다. 다산은 1801년 1월 19일에 터진 신유박해 사건에 연루돼 1801년 2월 27일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되었다. 그해 3월 9일 장기에 도착한 다산은 읍성 객관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다음 날 저녁 무렵 다산은 관리에게 인솔돼 장기읍성 동문으로 나와 마현리 구석골 성선봉의 집에 도착해 그곳을 거처로 삼았다.당시 다산이 관리를 따라 나왔던 동문은 지금 장기읍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이고, 조해루가 있던 곳이다. 그때 다산이 걸어 내려온 길은 지금도 거의 남아 있다. 장기향교에서 동문을 거쳐 면사무소로 내려가는 길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황사영 백서사건 연루 의혹으로 그해 10월 20일 다시 서울로 압송되기까지 7개월 10일(220일) 동안 장기에서 머물렀다.장기에 온 다산은 틈나는 대로 장기읍성의 동문에 올라 해돋이를 구경하거나 가까운 신창리 앞바다에 나가 어부들이 고기 잡는 걸 바라보기도 했다. 마을사람들이 보리타작하는 것을 보기도 하고, 담배 농사 짓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다. 바닷가에 갔을 때는 처음으로 해녀의 물질을 구경했으며 오징어와 물고기를 보고 험한 정계에 뛰어들어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다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 살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자신의 처지를 우화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장기천을 따라 신창리 바다 쪽으로 녹음벽수의 장기숲이 펼쳐져 있었다. 다산은 그 숲길을 걸으며 자신의 처지를 시로 형상화하기도 했다.다산은 유배지에서의 한을 좌절과 절망으로 보내지 않았다. 불행한 역경을 불굴의 투지와 학문연구, 시작에 전념해 기성잡시 27수, 장기농가 10장 등 60제 180여 수에 달하는 주옥같은 시를 창작했다. 효종이 죽은 해의 효종의 복상 문제로 일어난 서인과 남인의 예론 시비를 가린 ‘기해방예변(己亥邦禮辯)’, 한자 발달사에 관한 저술인 ‘삼창고훈(三倉詁訓)’, 한자 자전류인 ‘이아술(爾雅述)’ 6권, 불쌍한 농어민의 질병 치료에 도움을 주는 ‘촌병혹치(村病惑治)’등의 저술도 이곳에서 남겼다. ‘촌병혹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병이 들어도 의서와 약제를 알지 못하여 치료하지 못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 간단한 치료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 지은 것이다. 그 당시 장기의 풍속은 병이 들면 무당을 시켜서 푸닥거리만 하고, 그래도 효험이 없으면 뱀을 먹고, 뱀을 먹고도 효험이 없으면 그냥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런 불쌍한 백성들을 살려내기 위해 ‘본초강목’ 등을 참고하고 자신의 경험을 종합해 간단한 한방치료책을 지은 것이다. 다산이 이 책을 짓게 된 동기와 내용이 일부 적힌 서문에는 여건상 참고할 의서들이 부족한 탓에 귀양살이가 풀려서 더 많은 의서들을 참고할 수 있다면 ‘혹(惑)’이라는 글자를 뺄 수 있다고 했다. 귀양 온 자신의 처지를 잊고 백성들의 생명구제를 위해 의서를 저술한 그의 뜻은 깊고도 높다. 이 귀중한 책이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옥에 갇혔을 때 분실되었다고 한다. 시와 저서 외에 장기에서 고향의 아들에게 보낸 세 통의 편지가 전한다.다산은 장기에서 시와 저술 활동만 한 게 아니었다. 실학자답게 어부들이 칡넝쿨을 쪼개 만든 그물로 고기를 놓쳐버리는 것을 보고 무명과 명주실로 그물을 만들 것을 권고하고,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소나무 삶은 물에 그물을 담궜다가 사용할 것을 가르치기도 했다. 또 개천에 보를 만들어 가뭄에 대비하는 방법도 전수했다고 한다.□ 우암과 다산의 유배길, 유배문화체험촌으로 연계돼우암 송시열의 유학에 기반한 정치 소신과 다산 정약용의 실학적 실용과 애민사상은 장기고을을 학문과 교육, 효와 충과 예가 실천으로 역동하는 고을로 이끄는 데 일조했다. 오늘날의 장기는 어떤가. 전시대의 유배 역사를 이어 쌓으며 새로운 기질과 문화를 생성시키고 있었다. 유배 문화에 대한 지역민들의 생각과 그를 재현하려는 노력은 ‘장기 유배문화체험촌’이라는 결과물로 재현되었다. 앞으로 이 공간은 유배와 문학에 대한 종합적인 지식, 정보 습득의 전문 공간으로 거듭날 것이다. 이는 찾는 사람들의 숫자와 호응도로 예견할 수 있다. 우암과 다산의 장기 유배길은 ‘장기 유배문화체험촌’과 연계해 성찰과 삶의 활력을 되찾게 하는 특별한 공간으로 다가오고 있다.사진/안성용이상준 향토사학자글/이상준향토사학자, 수필가, 포항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제9회 애린문화상 수상, 저서 ‘장기고을에 가면 조선왕조 500년이 있다’ 등.

2020-10-26

자연과 함께하는… 행복하고 건강한 아이들 공간으로

성주군이 ‘거주희망 1번지, 아이키우기 좋은 성주’만들기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교육과 육아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과 기적의 놀이터, 참외체험 등 새로운 놀이시설, 성장주기에 따른 다각적 지원방안 등을 마련했다.‘아이가 행복한 성주, 자연과 함께하는 놀이교육’으로의 패러다임도 전환했다.◇ 교육, 육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 운영현재 성주지역 13개소의 어린이집(공립 5, 가정 4, 민간 4)과 유치원 15개소 등 총 29개소의 영·유아 보육 및 누리교육과정이 운영되고 있다.지역 가야산 숲체험, 가을 사과따기 체험, 한개마을 전통놀이 체험 등 자연과 함께 자라는 어린이를 모토로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게 지도하고 있다.이에 더해 활용할 수 있는 각종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성주군 건강가정다문화지원센터는 아이가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자랄 수 있도록 부모, 자녀, (예비)부부 등을 대상으로 가족관계 개선 및 기능 강화를 위한 맞춤형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가족 내 다양한 갈등을 사전에 예방하고 해소하기 위한 가족상담을 하고 있다.현재 문화예술회관에 자리잡고 있으며 2022년 (구)버스정류장에 조성되는 가족센터에 둥지를 틀 예정이다.(문의: 문화예술회관 다문화부서 054-930-8222)아빠 육아 프로그램인 ‘옐로파파’와 ‘아이사랑 행복성주 가족사진 공모전’도 아이가 있는 가정에서 입소문이 날 정도로 빼놓을 수 없는 인기 품목이다. 아이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눈으로, 사진으로, 영상으로 남기는 즐거움을 아는 성주의 아빠들이 앞다투어 신청하며 다양한 체험 장소들을 아이들과 마음껏 즐길 수 있다.(문의:기획감사실 인구정책부서 054-930-6032)◇ 모험심·창의력 길러주는 새로운 놀이시설성주군종합사회복지관 3층에 위치한 ‘성주군 아이나라 키즈교육센터’는 지난해 개관한 성주군 최초의 어린이 전용 실내 놀이시설로 현재 많은 주민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인기 있는 곳이다.아이나라 키즈교육센터는 놀이터, 장난감도서관, 아이와 부모를 위한 각종 프로그램을 1일 3회 예약제로 운영하고 있으며, 회원(회비 연2만원)인 경우 각종 프로그램에 참여 가능하며 육아정보도 무료로 제공된다.(문의: 아이나라키즈교육센터 054-933-9447)대가면에 위치한 성주군농업기술센터는 지난달 노후된 청사 외벽을 보수하면서 청사 측벽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캐릭터 그림과 더불어 성주참외를 상징할 수 있는 그림으로 새로이 단장을 했다.성주군농업기술센터 내에 자리 잡은 ‘성주참외체험형테마파크 어린이실내놀이터’는 내부에 148㎡(45평) 규모로 참외장애물달리기, 트램벌린, 볼풀장 같은 놀이시설과 휴식 및 독서공간을 조성해 아이들이 뛰어놀고 즐길 수 있도록 조성됐다.또한, 시설 곳곳에 귀여운 참외 캐릭터들이 앙증맞게 비치돼 있어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아이들이 환하게 웃고 즐기는 모습을 추억으로 남길 수 있도록 사진촬영을 위한 캐릭터 포토존도 마련돼 있다.(문의: 농업기술센터 054-930-8012)올해 7월부터 성주읍 예산리 일원에 위치한 성주역사테마파크의 성주읍성 일부 구간을 임시개방해 주민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아이들이 뛰어 놀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다.성벽의 웅장함과 성벽에서 내려다 보이는 읍시가지의 전경은 구경거리와 포토존 역할을 톡톡이 하고 있다. 저녁에는 따뜻하고 은은한 조명이 성곽을 둘러싸고 가을밤의 정취를 만끽 할 수 있어 저녁식사 후 아이와 함께 온가족이 산책하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 이곳은 2017년부터 어린이공원과 분수공원을 운영 중에 있다. 그 너머장소에 성주읍성의 북문 및 성곽일부를 재현한 곳을 이번에 일부 개방했다. 조선전기 4대사고 중 하나인 성주사고와 조선시대 전통 연못인 쌍도정을 재현하는 사업은 현재 공사가 마무리 단계이다. 연말에 공사가 모두 마무리 되면 각종 문화행사를 진행 할 예정이다.(문의: 문화관광과 관광산업부서 054-930-6773)성산동고분군 입구에서 바라보면 드높은 하늘 아래 펼쳐진 고분군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현재 전시관이 미개장 상태라 실내놀이터는 이용할 수 없지만 시원한 가을 날씨에 외부 고분 산책로를 아이와 함께 손잡고 거닐거나 오른쪽에 조성된 꽃밭에서 추억사진을 연출해보면 어떨까.연말에 ‘성주 성산동 고분군 전시관’이 개관되면 상설전시관, 어린이체험관 등을 운영해 성산가야에 대해 이해 할 수 있는 좋은 학습 장소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문의: 문화관광과 고분군전시관부서 054-930-8386)기존의 단순하고 획일적인 어린이 놀이터와는 다른 신선한 어린이 놀이터가 곧 개장된다. 성주읍 백전리 646번지에 위치한 ‘놀벤져스 어린이 놀이터’는 지난해부터 사업을 시작해 올 10월 개장될 예정이다. 모험적이면서 창의성 및 감수성을 발달시킬 수 있는 안전한 놀이터를 목표로 했다. 대형미끄럼틀과 짚라인, 흔들다리 등을 설치한다.12월 완공되는 성주읍 성산리 2099-1번지의 어린이놀이터는 어린이들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자연친화적인 놀이공간을 조성할 예정이다.물놀이 가능 분수시설과 정글짐, 네트놀이대 등으로 꾸민다.(문의: 도시건축과 도시개발부서 054-930-6583)성주읍의 놀이터를 평소에 즐겨 찾았다면 주말에는 가야산의 자연을 느껴보자.가야산신 정견모주의 숨결을 전해듣는 가야산역사신화테마관에서 숲속 정견모주길을 통해 가야산야생화식물원 쪽으로 방향을 틀면 짚라인, 스페이스 볼 등 특별한 숲속놀이터를 만날 수 있고 야외식물원까지 산책도 할 수 있다.(문의: 문화관광과 관광산업부서 054-930-6774)◇ 성장주기에 따른 다각적 지원성주군은 아동양육의 경제적 부담을 경감하고 가정의 건강한 성장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여러 사업을 직·간접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만7세 미만의 아동에게 보육 지원(양육수당, 보육료, 유아학비)과 아이돌봄지원(365일 24시간) △만7세 미만의 아동에게 아동수당 월10만원 지원 △가정위탁, 입양아동, 보호종료아동 자립수당 지원 △결식이 우려되는 아동에게 급식지원 △저소득가정 아동의 멘토 역할(드림스타트) △방과후 아동보호 및 학습지원(지역아동센터) △청소년의 여가활동 및 상담(청소년문화의집, 청소년상담복지센터)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아동과 청소년에 대해 지역사회 연계를 통한 복지 사각지대 해소와 ‘살기 좋고 아이 키우기 좋은 성주’ 조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문의: 가족지원과 054-930-6976)이에 더해 임신에서 출산, 양육에 이르기까지 촘촘하고 다양한 지원도 받을 수 있다. 성주군에 임부등록한 임신부를 대상으로 찾아가는 산부인과를 매월 2회 보건소에서 산전기본검사 14종 등 무료로 진료받을 수 있다.출산·양육지원금은 출생신고를 성주군으로 하고 신청일 기준 6개월 전부터 계속 성주군에 주소를 두고 있는 영아의 부 또는 모에게 36개월 간 지원한다.출산 원스톱 신청으로 첫임신축하금(첫째아 10만원), 출산축하금(출산시 30만원) 등 다양한 혜택을 출생신고와 동시에 접수할 수 있다. 출산·양육지원금의 경우 2019년 출생아부터 기존에 12개월에서 36개월로 지원기간을 3년으로 늘려 지원한다.출생 순위별로 첫째아 월 10만원, 둘째아 월 20만원, 셋째아 월 50만원, 넷째아 이상 월 70만원씩으로 각 총액 420만원, 770만원, 1천850만원, 2천570만원이 3년간 지급된다.(문의: 성주군보건소 054-930-8142)양육친화적 고장 아이 키우기 좋은 성주에서 임신에서 출산, 보육에 이르기까지 맞춤형 보육 환경, 복합문화공간 등 다양한 지원 혜택들을 누릴 수 있다./전병휴기자 kr5853@kbmaeil.com

2020-10-25

코로나 시대… 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

‘코로나19 사태’로 나라와 나라를 이어주던 하늘길이 대부분 막혔다. 외국으로의 여행을 꿈꾸던 사람들의 발도 묶였다. 이런 상황에선 ‘책을 통한 대리 만족’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게다가 지금은 누구나 다 아는 ‘독서의 계절’ 아닌가. 여행작가 백경훈의 책 2권과 함께 한국인에겐 다소 낯선 여행지 무스탕과 파키스탄으로 떠나보자. 코로나19가 한시바삐 우리 곁에서 사라지기를 기원하며.여행자를 꿈꾸게 하는 책 ‘마지막 은둔의 땅, 무스탕을 가다’.‘숨겨진 왕국’이 유혹하는 땅으로 가고 싶다면…우리가 사는 세상엔 두 가지 부류의 인간이 있다. 자신의 내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전자의 경우가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여행을 꿈꾸는 삶을 산다면, 후자는 아이들이 부르는 단조로운 동요와 같은 일상을 그저 견딜 뿐 일탈의 용기를 내지 못한다.단 한 번뿐인 인생. 우리는 어떤 부류의 인간이 되기를 열망해야 할까? 시인이자 여행작가인 백경훈의 네팔 기행기 ‘마지막 은둔의 땅, 무스탕을 가다’는 위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한번 뿐인 인생, 네 영혼이 시키는 대로 살아라.”젊은 시절 백경훈은 세칭 ‘잘 나가는 광고쟁이’였다. 높은 연봉에 창의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광고대행사 CD(Creative Director)의 삶을 과감히 버리고 그가 설산(雪山)과 푸른 하늘의 네팔에 매혹된 이유는 뭘까?광고 촬영지로 적합할 지 검토하기 위해 우연히 회사 자료실에 비치된 네팔 관련 영상을 본 백경훈. 그것이 그의 미래를 결정지을 운명이었을까. 백씨는 화면 가득 펼쳐지는 히말라야의 신비로운 풍경에 완벽히 매료되고 만다.이후 오랜 짝사랑 끝에 마침내 9일의 휴가를 얻어 수천m의 설산들이 그 위용을 자랑하는 네팔 히말라야로 향하는 백경훈. 그 첫 여행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네팔의 주술’에 걸린 그는 마침내 ‘출근-근무-퇴근-출근’이 반복되는 일상의 고리를 스스로 끊어버린다.그때부터 한 번 가면 짧게는 한 달, 길게는 5개월 이상을 네팔에서 머물며 그곳 풍경과 사람들의 친구가 된 백경훈이 그 체험을 묵혀 ‘마지막 은둔의 땅, 무스탕을 가다’을 낸 것은 ‘수박 겉 핥기’식의 고만고만한 네팔 여행기에 질려버렸기 때문.그가 20여 일을 머물며 훑어본 무스탕은 네팔 중북부 산간에 위치한 왕국. 백씨가 여행할 당시엔 22대 국왕 ‘지그미 팔벌 비스타’가 통치하고 있었다.무스탕은 1992년에야 외국 여행자들의 방문을 공식적으로 허락한 지구 위 마지막 금단의 땅. 1년 내내 거센 모래바람이 불고, 해발 3천m를 훌쩍 넘는 곳에 위치한 탓에 이방인들은 고산병으로 쓰러지는 일이 흔하다. 그 존재는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누구나 찾아갈 수는 없는 왕국 무스탕. 백경훈은 위험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이곳을 향해 출발하며, 체코의 작가 밀란 쿤데라를 인용한다.“행동의 끝까지, 희망의 끝까지, 열정의 끝까지, 절망의 끝까지.” 모든 것의 끝, 심지어 세상의 끝까지 가보고 싶다는 열망이 추동한 여행이었다.멀리 낯선 땅에서 들려오는 “영혼이 자유로운 자, 내게로 오라”는 목소리. 백경훈은 지구 위에 남은 마지막 금단의 땅이자, 눈 덮인 웅장한 산들이 춤추는 무스탕의 초대에 기꺼이 응했다. 자신의 가슴 속에서 맹렬히 끓고 있는 순정한 욕망을 거부하지 않았다.책은 그가 그토록 열망했던 무스탕에서의 3주를 세세하면서도 애정 어린 시선으로 기록한 성과물이다. 사진작가 이겸과의 동행이었고, 이겸의 사진은 백경훈의 글 못지않은 울림으로 독자들을 유혹한다. “당신은 이처럼 용기 있는 떠남을 행할 수 있는가”라는 아픈 질문을 함께 던진다.너무나 푸르고 높아서 현실 같아 보이지 않는 하늘, 척박하지만 꿈을 품은 꽃들이 숨어있는 대지, 순정과 순수의 절정을 사는 사람들. 백경훈은 무스탕에서 “나와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이어주는 신(神)을 만났다”고 말했다.‘마지막 은둔의 땅, 무스탕을 가다’를 읽은 당신은 무엇과 만날 수 있을까? 책이 들려주는 막막한 바람 소리에 네팔로 향하는 배낭을 꾸릴지도 모른다.파키스탄이란 나라가 궁금할 때 펼치면 좋을 ‘신의 뜻대로’.선량하고 눈 맑은 아이들과 만나고 싶다면…시인 김수영처럼 말하자면 “먼 데서 먼 곳을 보는 눈빛”이다. 어떤 세속적 욕망의 때도 묻지 않은 투명한 눈망울. 죄 짓지 않고 산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선량한 표정이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착한 색채’로 물들일 듯하다.궁핍과 불편함이 주위 사방에 산재한 척박한 땅 파키스탄. 그러나, 소년의 눈 속엔 외부 환경이 가져다줬을 법한 서글픈 그늘이 없다. 백경훈은 이 소년을 보며 영혼이 흔들렸다고 한다.여행을 ‘직업’으로 삼은 이들은 고백한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생면부지의 땅에서 내 전생을 본다”고. 눈 맑은 파키스탄 소년을 만나 영혼의 흔들림을 경험했다는 백경훈. 그 역시 잊었던 전생의 자기 모습을 소년에게서 발견했던 것일까?여행기(旅行記) ‘신의 뜻대로-파키스탄, 그 거친 땅에서 만난 순수’는 예쁜 책이다. 시와 고전 인용을 적재적소에 배치한 백경훈의 물기 어린 미문(美文)과 유별남이 찍은 사람 향기 물씬 풍기는 사진의 결합. 두 사람이 빚어내는 하모니가 책 읽기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2개월 동안 파키스탄을 여행한 백경훈은 해발 6천m에 달하는 미답봉(未踏峯) 등반기와 오지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 여기에 기차로 37시간을 달려야했던 ‘이슬라마바드-카라치 구간’의 체험을 꼼꼼하고 세밀한 기록으로 남겼다.그렇기에 ‘신의 뜻대로’는 “잘 만들어진 파키스탄 가이드북”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하지만, 통상의 가이드북과는 또 다르다. 왜냐? 백경훈의 책에선 자신이 여행한 곳에 대한 꾸미지 않은 사랑이 읽히기 때문이다.설산이 녹아 형성된 투명한 호수에 발을 담근 파키스탄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간 그는 이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린다.“어린 소년, 소먹이일 듯한 풀짐을 짊어진 그 아이가 미소를 띠며 우리 앞에 서 있다. 두건 그림자 어리는 이쁘디이쁜 소년. 땡볕 아래 게슴츠레한 내 눈이 번쩍 커진다. 너, 누구니… 먼 길에 지친 나를 위로해주는 별 같은 아이야… 지금도 그 소년이 눈에 선하다. 나도 그런 표정을 가진 적이 있었을까.”몸이 아닌 마음으로 파키스탄의 산과 강, 사람들을 끌어안으며 옮겨 다닌 발걸음이기에 백경훈의 글에선 소년의 옷자락에 묻은 바람 냄새와 손끝 미세한 떨림까지가 그대로 전해져온다.파키스탄은 이슬람 국가다. 우리는 이때껏 ‘한 손엔 코란(이슬람 경전), 다른 한 손엔 칼’이란 문장을 읽으며, 이슬람교도의 비타협성과 폭력성만을 이야기 들어왔다. 서양, 특히 미국 중심의 시각에서 그들을 봐온 것이다.‘신의 뜻대로’는 그간 우리 내부에서 굳어진 이슬람에 대한 편견을 깨는 데도 작지 않은 도움을 준다.마지막 장에 묶인 ‘살람! 이슬람, 평화’는 요약된 이슬람의 역사와 왜곡·굴절돼 왔던 이슬람교도의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슬람 문명’ ‘무슬림 여성과 베일’ ‘세계는 평평하다’ 등 다수의 책을 읽고 핵심을 요약해낸 백씨의 성실성이 돋보이는 대목이다.여행을 마친 백경훈은 60일간의 떠돎이 제 삶에 끼친 영향과 자신이 꿈꾸는 미래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파키스탄에서의 여행은 혁명이다. 태양과 원초적 대자연 아래 자신을 허물고 부활을 꿈꿀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언젠가 청정의 땅, 파키스탄 길 위에 다시 서고 싶다. 신이 원하신다면, 신의 뜻대로… 꿈은 꾸는 자의 몫, 나는 계속 꿈을 꿀 것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10-22

동양 유교·정신 문화전 세계인에 알린다

◇ 세계 교육 올림픽 ‘국제교육도시연합 세계총회’ 미래 교육의 가치와 방향 제시2010년 국제교육도시연합(IAEC) 가입, 2019년 유네스코 글로벌 학습도시(GNLC)에 가입한 안동시가 1년간의 철저한 준비로, 첫 번째 도전 만에 세계교육 올림픽으로 불리는 ‘2022년 제16회 국제교육도시연합 세계총회’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국제교육도시연합(International Association Educating City)은 1994년 창설돼 현재 36개국 494개 도시가 회원으로 가입된 교육 관련 최고의 역사와 권위를 가진 조직으로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본부를 두고, 총회와 상임이사회, 사무국으로 구성돼 있으며 바르셀로나 시장이 의장직을 맡고 있다. 교육도시헌장에 부합하는 정책을 개발하고 회원 도시 간 평생학습 및 교육 시책 공유를 주요활동 목적으로 한다.IAEC 세계총회는 1990년 제1회 스페인 바르셀로나 총회를 시작으로 격년으로 개최돼 올해 총회가 폴란드 카토비체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취소됐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스페인 빌바오·간디아 제치고 안동시 선정이번 세계총회 유치는 2010년 IAEC 회원 도시로 가입한 안동시가 지난 1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위치한 IAEC 사무국에 유치신청서를 접수한 이후 애초 3월 핀란드 탐페레에서 열리는 정례회의 시 유치 제안발표 예정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의 전 세계 확산으로 인해 취소돼 지난 15일 오후 8시 30분 온라인(ZOOM)으로 유치신청 발표가 진행됐다.발표자로 나선 박성수 안동부시장은 15분의 발표와 30분의 질의·응답을 통역 없이 영어로 진행했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스페인의 빌바오와 간디아, 대한민국의 안동시 등 총 4개 도시가 신청해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투표결과 안동시가 50%의 지지를 받으며 2위 스페인 빌바오(30%)를 제치고 2022년 개최지로 최종 선정됐다.◇ 안동국제컨벤션센터 일원에서 3개 소주제의 세션으로 진행안동시는 이번 총회 유치를 통해 2022년 하반기에 도산면 일대에 조성된 안동국제컨벤션센터 일원에서 행사를 진행하게 된다.총회 기간은 3일간으로 전 회원 도시가 참가하는 총회, 상임이사도시회의, 주제별 워크숍, 교육도시 홍보부스 운영 및 세계유산 시티투어 및 개최도시 자체 연계 행사로 진행된다.기초지방자치단체 단독으로 국제회의를 유치함으로써 2003년 대구·경북 최초의 평생학습도시로 선정된 안동시가 추진하고 있던 글로벌 학습도시 사업이 더욱 탄력을 받게 됐다.이번 총회는 ‘전통에서 미래 교육을 보다’를 공식 주제로 정하며, 인문·사회·미학적 가치를 소주제로 정해 동양의 유교문화와 정신문화가 잘 살아있는 안동의 지역특성과 유럽의 인문정신을 조화롭게 끌어내 전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가장 한국적인 총회로 만들어 갈 예정이다.또 유네스코 세계유산 ‘하회마을’과 ‘봉정사’, 세계기록유산 ‘유교책판’에 이어 ‘하회별신굿탈놀이’의 인류무형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 그랜드슬램 달성을 노리는 안동시는 총회 기간 중 전 세계인들에게 안동의 우수한 문화유산을 홍보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이번 IAEC 총회 유치의 성공적인 요인으로는 안동시가 IAEC 회원 도시로 활동하며 △세계 최초의 종합병원 내 평생학습센터 설치 △수요자 맞춤형 평생학습 프로그램인 ‘길거리 교실’ △시민역량 강화를 위한 ‘시민강사 9단’ 등 안동시의 우수사례를 IAEC 회원도시와 공유하기 위해 사무국과 소통해 온 점 △2010년부터 4번의 세계 총회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는 등 지속적인 노력 △안동만이 가진 전통 인프라와 평생교육에 대한 비전을 적절히 조화시켜 ‘왜, 안동이 2022년 IAEC 세계 총회를 유치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철저한 대비를 한 점 △동아시아의 정신문화를 잘 접목한 주제선정과 국제회의 기준에 맞춘 컨벤션센터의 개관 △한국을 대표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이 심사에 참여한 상임이사 도시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특히 58%에 이르는 시민들의 평생학습 참여율과 국내 최대의 SK케미컬 백신생산 시설이 있는 코로나에 안전한 도시라는 이미지가 크게 주목받은 점이 유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2022년 하반기, 36개국(494개 도시) 2천여 명 참가 예정2022년 열리는 총회 기간 국내·외 약 2천여 명의 방문객이 안동을 찾을 것으로 예상하며 숙박, 음식, 관광 등 컨벤션 연관 산업을 비롯한 지역 경제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을 뿐 아니라 국책사업인 3대 문화권 활성화와 대한민국 관광거점도시, 유네스코 세계유산 도시로서의 참모습을 알리고 인구 16만의 소도시도 상상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느끼는 계기가 됐다.또 이번 총회를 통해 동양의 전통사상과 시민교육이 유럽의 인문학과 어떻게 융합하는지를 논의하는 과정을 거쳐 더욱 체계적이고 세계화 된 평생학습도시 안동을 전 세계 교육 전문가들에게 알리는 장이 마련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권영세 안동시장은 “지금까지는 아는 것이 힘이었지만 이제부터는 상상하는 것이 힘이다. 모두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을 1년간의 철저한 준비로 성공시킨 만큼 이제 총회까지 남은 약 2년의 기간 동안 총회의 내실 있는 준비를 위해 전담 TF팀을 구성해 ‘2022년 국제교육도시연합 안동총회’를 집중적으로 홍보하겠다”며 “앞으로 494개 회원 도시뿐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의 비회원도시 참여를 유도하고 국내 평생학습도시의 참여를 통해 서로의 우수사례를 공유하는 등 다양한 협력체계를 구축해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을 전 세계에 적극 알리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총회의 성공 개최의 강한 의지를 밝혔다./손병현기자 why@kbmaeil.com

2020-10-22

철길과 시장 사이, 재밌는 변화가 샘솟는 골목

골목길에 출입문이 있을 리 없지만 효자시장 골목길에 가려면 지곡건널목을 거쳐야 제대로다. 요란한 경고음이 울리면 제아무리 광을 낸 승용차라도 차단기 앞에 멈춰야 한다. 차단기가 올라간 뒤 홀로 시간이 멈춘 듯한 만물수퍼마켓을 지나야 비로소 골목의 진면목을 만난다.□ 효자가 살았다고 해서 ‘효자동’이라 불려효자가 살았다고 해서 효자동이냐고 생각했다면 당신의 짐작이 맞다. 효자는 전국 어디에나 살았기에 현재 효자동이 남은 도시는 서울과 전주, 춘천, 고양을 포함해 다섯 곳이다. 평안남도에서도 검색이 되니 그 이상일 수도 있겠다. 포항에 살았다는 효자는 전희(田禧)라는 조선시대 인물이다. 부친이 돌아가시고 묘소 옆에서 3년간 곡을 하자 효심에 감탄한 범이 밤마다 함께 지키다 날이 밝으면 사라졌다고 한다. 모친상에도 마찬가지였기에 조정에서 효자각을 사액했다. 세월이 흘러 비각은 사라지고 비석은 현재 효자초등학교 북쪽으로 옮겨졌다.효자동 전에는 버들골이라는 예스러운 이름도 있었다. 형산강변에 우거진 땅버들에서 유래했기에 땅벌동 혹은 유동(柳洞)이라고도 불렀다. 나룻배가 한가로이 떠다니는 한 폭의 동양화 같았을 마을이 개발된 것은 1960년대. 포스코가 사원주택단지를 지으면서 인부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을 상대하는 식당과 노점상이 들어선 곳이 효자시장이다. 시장 바로 앞에 포스코 직원들이 이용하는 효자역이 생겼고, 출퇴근 시간에는 직원들의 유니폼으로 노랗게 물드는 골목이 형성되었다. 이때가 효자시장의 전성기였는데, 2000년대 이후 이동지구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고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시장과 인근 상권은 서서히 내리막을 걸었다.□ 효자동 골목길의 ‘첫 가게’ 달팽이책방골목길 생태계를 경제학적으로 분석한 모종린의 ‘골목길 자본론’에 따르면 골목상권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그곳에서 처음 창업한 ‘첫 가게’에서 시작된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색 있는 첫 가게를 찾는 사람들로 유동인구가 증가하고 인근에 다양한 가게가 줄지어 들어선다. 그렇게 볼 때 효자시장 골목길의 첫 가게는 달팽이책방이다.2015년 1월 문을 연 달팽이책방은 포항에 처음 들어선 독립출판서점이다. 책방지기 블로그에 실린 일기에는 책방을 시작할 당시의 풍경이 이렇게 묘사돼 있다.책방을 오픈하고 2주 만에 친구와 ‘재미삼아’ 낭독 모임을 시작했다. 한겨울 그것도 인적 없는 골목에 문을 열었으니 손님이 있을 리 만무했다. 우리는 서가에 꽂힌 소설책 한 권을 꺼내서 국어시간에 하듯이 한 페이지씩 돌아가며 크게 소리 내어 읽었다. 소설을 낭독한다는 재미에 더해 각자 목소리톤에 따라 색다른 즐거움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신이 난 우리는 바로 SNS에 모임 공고를 내고 매주 같은 시간에 책을 읽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다음 주에 새로운 사람들이 찾아왔고 개중에는 경주나 울산 등 멀리에서 온 분도 있었다.효자시장 골목길의 변화는 이렇듯 소설 낭독에서 시작되었다. 저자가 직접 출판의 모든 과정을 진행하는 독립출판물은 일반 서점에서는 보기 어려운 독특하고 개성 있는 아이템이 많다. 자신의 취향을 찾아 달팽이책방으로 모인 사람들은 역사와 시, 소설, 희곡, 그림책 등 다양한 분야의 독서모임을 만들고, 넘치는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드로잉, 홍차, 와인, 잡지 제작을 배우는 수업들이 생겨났다. 책방의 한쪽 공간에서는 늘 작은 전시가 이어지고 저자 초청 북 토크와 인디뮤지션의 공연도 열렸다. 책을 파는 공간을 넘어 책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연결의 공간이 바로 달팽이책방인 것이다.달팽이책방이 좋아서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단골은 가까운 거리에 민들레글방을 열었다. 지금은 ‘달팽이 곁에 민들레’라고 해서 전국에서 찾는 골목책방 순례지가 되었다. ‘달팽이’와 ‘민들레’를 경험한 사람들은 자기 동네에도 책이 있는 공간들을 만들기 시작했고, 현재 포항 북구의 그림책 카페 ‘트레져아일랜드’와 동네 헌 책방 ‘리본’, 남구의 북카페 ‘지금책방’이 영업 중이다.출판사를 차린 사람들도 있는데, 포항 여남 해녀들의 이야기 ‘별따는 해녀’를 펴낸 ‘학교앞거북이’와 결혼이주여성들이 함께 매거진을 만드는 ‘포포포’가 그렇다. 달팽이책방을 드나드는 이들이 많아지자 인근 골목에는 특색 있는 식당과 디저트 카페, 공방, 아틀리에 등이 들어섰다.곳곳에 한번 보면 잊히지 않는 이름의 가게들과 독특한 디자인이 돋보이는 간판들, 규모는 작지만 청년 창업자의 취향이 한껏 발휘된 인테리어가 사랑스러운 곳들이다. 가게 하나하나에 깃든 개성은 독특하지만 소박한 골목과 전혀 어긋나지는 않는다. 놀랍게도 효자시장 골목길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가게는 대한민국 어느 골목에나 있는 편의점이다. 지나치게 큰 간판과 밝은 조명 탓에 너무 튄다고나 할까. 그에 비해 담박한 간판을 내건 가게들은 특색 있는 메뉴로 사람을 모은다. 수제버거와 라멘, 문어튀김, 쌀국수, 가정초밥, 낫토 통명란 덮밥, 대창덮밥 등은 젊은 입맛을 사로잡았다. 서두르지 않는다면 재료 소진으로 허탕 치기 일쑤고 서두른다 해도 식사시간에는 줄을 서야 한다. 개성 있는 상점들이 사람을 끌어들이고 동네를 바꾸고 있는 것이다.□ 찾는 이 많아지면서 임대로 부담도 커져사람들이 골목을 좋아하는 이유는 유난스럽지 않으면서 사람 사는 냄새가 나기 때문이 아닐까. 골목 구석구석에 겹겹이 쌓인 시간이 빛나고 혼자 걸어도 심심하지 않을 정도로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기 때문이 아닐는지. 반면 이름난 골목은 어떤가. 관광객들로 번잡하고 시끄러워 정작 주민은 문을 걸어 잠그고 지낸다. 고즈넉한 골목을 선호하면서도 골목상권 활성화라는 미명하에 골목의 정체성을 간과한 것이다.골목길이 주목받으면서 도시 공간에 즐거운 변화가 일어나고 풍요로워지는 건 좋지만 동시에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는 소비자들에게 일회용품처럼 소모될 위험도 커졌다. 달팽이책방의 책방지기도 서점에서 찰칵찰칵 소리 내며 사진을 찍고 SNS에 올린 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이들에게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혹여나 조용히 책읽기를 즐기는 주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사람들의 발길이 몰리면서 임대료 부담도 덩달아 커졌다. 대부분 젊은 취향의 가게들은 2년 단위로 사는 세입자라고 했다. 재계약 기간이 되면 임대료가 오르지 않을까 공포에 가까운 불안에 시달린다는 사실은 책방지기가 쓴 글을 통해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골목길 이름에 대한 진지한 고민 필요해효자시장 골목길이 2, 3년 전부터 주목을 받았던 배경에는 ‘효리단길’이라는 이름도 한몫을 한다. 효자시장과 효자교회 사이의 이 골목길은 예전에 빈 점포가 많았다. 후미진 골목이 예쁜 이름을 얻은 데다 사람들로 북적대기까지 하니 이름이 효자다 싶지만 덥석 받아들기에는 좀 더 생각이 필요하다.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리단길’이라는 명칭이 붙은 상권은 2018년 9월 기준으로 20개나 된다. 서울의 경리단길·망리단길·송리단길, 부산의 해리단길·망미단길·범리단길·전리단길·초리단길, 경주의 황리단길, 문경의 문리단길, 대구 봉리단길 등 일일이 언급하기에 숨이 찰 정도다. 이 가운데 몇 곳은 여전히 건재하고 또 몇 곳은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을 것이다. 유행에 편승하더라도 골목이 좋아진다면야 무슨 고민일까. 문제는 ‘○리단길’이라고 호명되었을 때 떠올리게 되는 어떤 풍경이 있다는 것이다. 소위 뜨는 골목에 편승해 홍보하게 되면 골목은 부풀려지기 쉽고 무엇보다 골목 자체의 매력을 담을 수 없다. 처음엔 독특한 자기만의 분위기가 있는 가게들이 형성되지만 이윤을 추구하는 사업자들이 몰려들면서 결국 잊혀져버린 골목의 스토리는 이미 차고도 넘친다.그렇기에 김주일 한동대 교수는 “○리단길 현상의 이면에는 새로운 시대의 도시문화라는 긍정과 의미성이 결여된 유행에 불과할 수 있다는 우려가 공존한다.”고 말한다. 결국 일시적인 유행이나 복제품이 되지 않으려면 그 속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한다.□ 사람냄새 나는 효자시장효자시장 골목길을 어디서 어디까지라고 말할 수는 없다. 흔한 안내판 하나 없고 자세히 알고 싶어도 문의할만한 행정기관 담당부서도 없다. 다만, 이 길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철길숲을 걷다보면 만나는 골목, 계속 걷다보면 효자시장에 이르는 골목으로 통한다.효자시장은 포항에서 죽도시장 다음으로 큰 시장이다. 달팽이책방 책방지기가 자란 동네이며 민들레 글방지기가 하루일과를 마치면 들러서 장을 보는 곳이다. 청년 창업가들이 재료를 구입하는 단골가게가 즐비한 곳이며 상가가 무려 220여 개나 되는 없는 게 없는 곳이다. 전국의 전통시장이 그렇듯 효자시장도 침체기를 겪었지만 2013년 상인회를 조직하고 상인대학을 개설했으며 다양한 정부사업을 따내며 혁신을 꾀했다. 상인회 소속 상인만 250여 명으로 전통시장 가운데도 혈기왕성한 젊은 시장인 셈이다. 시장 상인들은 골목길에서 일어나는 최근의 변화를 반갑게 맞는다.배은정 방송작가, TBC·포항MBC·경북교통방송에서 활동중.물론 젊은 취향의 가게와 경쟁해야 하는 상황도 있다. 그에 대해 효자시장상인회 손상용 초대 회장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발전해가고 소비자의 선택권이 넓어지니 고객을 더 모을 수 있다.”고 말한다. 골목에 사람이 모이면 시장도 좋고, 시장이 잘 되면 골목상권에도 득이란 얘기다.이제 관건은 속도다. 속도에 집착하다보면 골목은 정체성을 잃는다. 더디게 간다고 조바심을 낼 필요도 없다. 역사와 이야기가 있고 취향이 확실한 공간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모두가 알고 있는 골목을 찾아가는 시대는 지났다. 어디에나 있는 체인점이나 인테리어만 번듯한 카페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효자시장 골목길의 재미있는 변화가 지속되기를, 그래서 포항에도 매력 있는 골목길 하나가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글/배은정

2020-10-21

“피아노 조율은 물리공학” 명품소리 찾기 한길을 걷다

조율을 마친 스타인웨이가 우아한 모습으로 연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주를 듣기 위해서 찾아가던 문예예술회관 팔공홀의 무대에 올라서고 보니 그 장엄하면서도 고즈넉한 적요에 위압감을 느꼈다. 비어 있는 객석을 보며 피아노가 어떤 소리로 홀을 가득 채울지 상상했다.조율사 박상효 씨가 그랜드 피아노의 뚜껑을 열었다. 기다란 버팀봉으로 뚜껑을 고정시키자 갈비뼈처럼 질서정연한 프레임과 아우터 링의 모습이 훤히 드러났다. 연주용 피아노의 속살을 그렇게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건 처음이었다. 저기서 모차르트와 베토벤,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쇼팽 녹턴의 선율이 쏟아진다고 생각하니 피아노를 함부로 만지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대구에 있는 스타인웨이 중에서 가장 오래된 피아노예요그의 목소리에 강한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평생이라고 해도 좋을 47년이라는 시간을 오로지 피아노 조율만 하고 살았단다. 예술회관에 드나든 시간도 그에 못잖아서 스타인웨이가 그에게는 또 다른 자식이나 다름없다고. 조율할 때 무슨 음에서 시작하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a음이죠. 국제 표준음이고, 가장 안정적인 음이에요.조율사가 a음을 눌렀다. 연주회 시작 전에 악장이 누르던 그 소리. 연주회 시작 전에 악장이 오보에 수석을 쳐다보며 누르는 건반, 그게 바로 a음이다. 오보에가 a음을 울림과 동시에 오케스트라 전 단원이 그 음에 맞춰 조율을 한다. 조율을 마치고 연주가 시작되기 전의 짧은 침묵. 지휘자가 지휘봉을 드는 것과 동시에 연주가 시작된다. a음은 악기의 소리를 하나로 모으는 첫 음이고, 아기의 첫울음만큼이나 의미 있는 음이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a음으로 음정을 맞추듯이 조율사 역시 a음으로 피아노 음을 고른다. 리허설을 위해 사전 조율을 두 번 하고, 연주 당일 아침에 다시 한 번 음을 가다듬는다. 조율의 목적은 일정한 음높이를 맞추어 청중들이 가장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안정적인 평균율의 음계를 만들어내는데 있다. 조수미 씨는 연주 시작하기 전에 살짝 부탁을 한다던가. 440헤르츠로 맞춰둔 소리를 442헤르츠로 높여달라고, 작은 체구에 비해 음폭이 어찌나 넓은지 그녀가 노래를 하면 홀이 쩌렁쩌렁 울린다고 했다. 조수미 씨의 음량이야 충분히 짐작이 되고말고.- 피아노 조율은 언제부터 하셨어요?대학 시험을 쳤다가 떨어지고 기술이나 배우겠다고 오르간 만드는 곳에 근무하다 예술단 공보실로 자리를 옮겼다던가. 선배가 편한 일을 두고 힘든 곳으로 가겠다는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쳐다보더란다.예술회관 무대의 나무 벽이 둥글게 휘어져 있었다. 박씨가 둥글게 휘어진 나무판을 통통 두드리며 앞자리 뒷자리 어느 곳에서나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주는 음향판이라고 했다. 예술회관은 객석으로 좋은 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벽에 붙이는 음향판의 모양까지 과학의 힘으로 분석하고 연구를 한다고 했다. 소리가 울리는 것을 막기 위해 바닥에 카펫을 깐 적도 있는데, 지금은 소리를 흡수하는 카펫 대신에 마루를 깔아서 소리를 뱉어내게 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예술회관을 오래 드나든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이 나이에도 꼬박꼬박 찾아주는 사람이 있어요.조지 윈스턴이 한국에 연주를 하러 오면 대행사에서 와달라는 팩스를 보낸다고 했다.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이 있어서 더욱 책임감 있게 일할 수 있다며 강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조율사가 책임감을 갖고 일하면 피아노도 언제까지나 생생하게 살아 있을 수 있다며, 대구의 스타인웨이만 아직 한 각도 갈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혼자 일을 하는 시간이 많겠어요?- 늘 혼자죠. 조율하며 정교한 소리를 들어야 하니까.대부분 혼자 일을 하지만 큰 수리를 할 때는 무대 감독 하는 친구도 불러서 함께 일한다며, 자라섬에서 재즈공연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일어난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한꺼번에 천만 원을 벌었어요.모처럼 친구들과 외국여행 가려고 준비 중이었는데 재즈연주회에서 급한 일이 생겨 여행경비를 돌려받았다. 떠날 날을 하루 앞두고 갑자기 스프링클러 작동으로 피아노가 물벼락을 맞았다는 전화가 온 것이다. 박씨는 스텝의 전화를 받자마자 무대감독 하는 친구를 불러서 현장으로 달려갔다. 자신에게 가장 먼저 전화를 해준 스텝이 너무나 고마웠다. 사람에게만 골든타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피아노도 마찬가지다. 나무가 물을 먹기 전에 분해해서 닦고 말렸기에 망정이지, 그때 스텝이 박씨가 아니라 윗사람에게 먼저 전화를 했다면 여러 절차를 거치는 동안 스타인웨이는 골든타임을 놓쳐 영원히 회생하지 못했을 거라고 했다. 그랜드 피아노는 부속을 풀어놓으면 양이 엄청나기 때문에 관객을 다 내보내고 부속을 무대에 널어서 말렸단다.- 가장 감명 깊었던 연주회를 혹시 기억하세요?- 흑인 영가가 가장 인상 깊었어요.뉴욕 할렘가의 예술학교 학생 여섯 명의 보컬로 이루어진 ‘뉴욕 할렘싱어즈’의 공연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고 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 중에는 가스펠송도 있지만 휘트니 휴스턴의 명곡도 섞여 있어서 울림이 더 컸다며, 박씨는 흑인영가의 감동적인 공연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 밖에도 레스토랑에서 조율을 마치고 들었던 재즈싱어의 음악과 대봉성당 이층에서 들었던 여섯 명의 수녀님들이 부른 합창은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음악실이 이층에 자리 잡고 있어서 피아노 소리는 물론이고 성당 곳곳으로 울려 퍼지는 성가가 온몸에 소름이 돋도록 감동적이었다고 했다.-표정이 참 밝고 평화로워 보여요.내 말에 그는 마음을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갖는다고 했다. 무슨 일이든 자기 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선 먼저 자기 일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피아노를 옮기면 직접 가서 봅니다.피아노가 제자리에 앉는 걸 봐야 마음을 놓는 그의 극성에 일하는 사람들이 불편해 할 때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피아노 소리가 달라진다며 온습도가 적절할 때 피아노가 맑은 소리를 낸다고 했다. 피아노 탑보드를 닫아놓고 예술회관을 나오며 조율이 절대음감을 필요로 하는 일이냐고 물었다.- 조율은 물리공학이어서 절대음감으로 조율할 수 있는 게 아녀요.일을 하는 동안 오랜 숙련의 과정을 거쳐 체득된 것일 뿐, 자신에게는 절대음감 같은 건 없다고 했다. 박씨는 장인(匠人)들의 느낌이나 감은 오랜 숙련 끝에 가꾸어지는 기능이고 감각이어서 하루아침에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우리 사회가 인재와 기술자를 홀대하는 건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라고 토로했다. 예전에는 피아노 부속을 일일이 수제로 깎아서 만들었는데 지금은 기계로 찍어낸다며, 점점 사람이 필요 없는 세상으로 변하는 게 슬프다고 했다.- 장인(匠人)을 장인답게 하는 것은 직업에 대한 긍지와 소신이죠.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기 일에서 최고가 되는 것이 진짜 장인이다. 옻칠 장인이나 도자기 장인 같은 각계각층의 장인들을 만나 보면 모두 그 나름대로의 집념과 긍지를 갖고 있다며, 박씨는 그 고집스러움이 한 길을 걷게 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자기 일에 대한 소신이고 사랑이었다.- 젊은 기술자들이 직업에 대한 긍지와 소신을 가졌으면 좋겠어요.스타인웨이가 세계 최고의 명품이 된 것은 오로지 피아노를 위해 한 길을 걸어온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나라와 국민이 다 함께 고급 기술을 가진 인재를 아껴줄 때 최고의 상품을 만들 수 있다며, 박씨는 최고의 기술자들이 생활고를 해결하지 못하고 다른 일을 찾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가슴 아프다고 했다.- 스타인웨이가 최고의 음악가들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받는 이유를 빨리 깨달아야 우리도 명품을 가질 수 있어요.베테랑 기술자를 일용직 일꾼 취급하고 고급인력을 예사로 자르는 그릇된 풍토가 문제라고 박씨가 분통을 터뜨렸다. 나라의 경제를 이끌어가는 사람은 정치인이 아니라 기술자들과 노동자들인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며, 하루하루를 노동으로 일관하고 있다 하더라도 마음만은 스타인웨이의 위엄을 간직하고 살아야 한다고./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0-10-21

종은 울어야 생명인데…보존상태 점검한다고 꽁꽁 감싸놓아…

종은 허공에 매달려 있어야 할 운명으로 태어난다. 그래야 허공을 울리는 종소리를 온 산천에 알리는 것이다. 절에서의 범종은 지옥의 중생을 위하여 울리지만 속세에서는 시간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성덕대왕신종은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만들어 봉덕사에 걸었던 것이다. 그 봉덕사는 홍수(추측)로 절은 흔적도 없고 종만 북천가(지금의 경주세무서)에 뒹굴다가 네 번이나 옮기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리고 종을 매달았던 종각도 종 따라 옮겼다가 지금은 종과 종각은 따로 떨어져 있다.#. 성덕대왕신종을 4번이나 옮긴 사연신라 33대 성덕대왕(701~735)이 죽자 아들 경덕왕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종을 만들다 완성하지 못하고 릴레이 하듯이 바통을 이어받은 아들 혜공왕이 완성한다. 771년(혜공왕 7년)까지 34년의 길고 긴 시간과 신라장인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마침내 완성하여 봉덕사에 걸었던 것이다. 명작들은 각고의 노력과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성덕대왕신종이 있었던 네 곳과 마지막 자리 잡은 곳을 향하여 집을 나섰다. 처음 성덕대왕신종을 달았던 봉덕사 터였다고 추측하는 지금의 경주세무서(또는 성동동 제1사지)에 갔다. 현대식 건물이라 느낌이 없었지만 옛 봉덕사를 상상해보았다. 이 정도 오랜 세월과 씨름하여 만든 종을 둘 절이라면 보통 절은 아닌 국찰이었을 것이다. 언제 어떤 연유로 절이 없어졌는지는 알 수 없고 종만 뒹굴었던 것이다. 세무서 안이야 업무 때문에 간간이 왔었지만 오늘은 혹시라도 봉덕사의 흔적표지석이라도 있는지 외각을 다 둘러보았지만 없었다.이 봉덕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절 무너져 돌 자갈에 묻히게 되니./ 종 홀로 황량하게 버려졌었네./ 아이들이 두들기고 소는 뿔을 비볐다네.”의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의 ‘봉덕사’시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 전에 절이 폐사된 것을 알 수 있다. 19톤의 무거운 종이 본래의 자리에서 멀리 떠내려 갈 수는 없으니 북천냇가 인근인 이곳에 있었을 것이다. 홍수 때문이라는 것도 가능성의 추측일뿐이다. 어떻든 지진이나 홍수 등의 천재지변으로 봉덕사는 없어지고 거대한 종만 뒹굴었던 것이다.다시 이 종을 1460년(세조 6년) 경주부윤 김담이 영묘사(지금의 흥륜사) 옆에 옮겨 걸었다. 첫 번째로 옮긴 흥륜사를 찾았으나 스님 하나 보이지 않고 고요한 가을 햇살이 적막을 깨우고 있었다. 여기서 나온 턱이 깨어진 웃을듯 말듯한 수막새는 신라의 미소로 대표된다. 잘 정리된 도심 속의 흥륜사를 뒤로하고 이곳에서 1506년(중종 원년) 경주부윤 예춘년이 읍성 남문 밖 봉황대 곁에 종각을 짓고 성덕대왕 신종을 옮겨달았던 봉황대로 갔다. 종각건물은 봉황대 우측 옆에 지어져 있는 옛 사진대로 찍어 보았다. 이제는 절에서 명복을 비는 역할이 아니라 성문개폐와 군사 징집할 때 종을 쳤다. 무덤 주인을 알 수 없는 이 봉황대 앞에는 1924년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금관이 나온 금령총(126호분)은 다시 정밀발굴하고 있었고, 길 건너 붙어있는 금관총은 1921년 우리나라 최초의 금관이 나온 곳인데 몇 년 전에 정밀 발굴하였던 곳이다. 봉황대 꼭대기에는 6·25때 포진지를 구축했던 곳이고 민가집들이 즐비하여 동네 뒷동산이었고 아이들이 죽으면 봉황대에 묻었다. 그러나 이 성덕대왕신종은 여기서도 인연이 다하여 나라 잃은 일제 강점기인 1915년 (구)경주박물관(지금의 경주문화원)으로 종각과 종을 옮긴다. 북으로 1km도 안 되는 (구)경주박물관으로 향했다. 문화원 들어가서 왼편에 쓸쓸히 서있는 종각으로 갔다. 매끄럽고 고운목재라기보다 울퉁불퉁한 목재를 사용하여 힘 있고 단단한 위용을 갖추고 있었다. 19톤의 종을 말없이 달고 있었던 종각은 지금도 경주문화원 문 들어가자마자 왼편에 초라하게 서있다. 경주문화원 본관건물은 향토 사료관으로 사용하는데 그 앞에 어울리지 않는 하늘 높이 솟은 긴 나무가 바싹 붙어 있다. 1926년 10월 스웨덴 구스타프 6세 황태자와 태자비 루이즈가 기념식수한 것이다. 이 본관 건물 왼쪽으로도 정착하지 못하고 60년 있다가 1975년 현재의 국립경주박물관에 시멘트로 종각을 짓고 건물은 그대로 두고 종만 옮긴다. 건물 종각은 여기에 있는데 종은 떠났으니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영원한 이별이었다.#. 세계최고의 봉덕사종은 어떻게 옮겼을까?마지막 둥지를 튼 국립경주박물관으로 갔다. 코로나 때문에 손 소독하고 신분증과 전화번호 기재하고 들어갔다. 월요일 오전이라 사람은 간간히 보였고 곧바로 성덕대왕신종으로 갔다. 종을 보호한다고 꽁꽁 감싸놓아 들판에 볏단을 비닐로 감싸놓은 듯하고 정육점에 고기 매달아 놓은 것이 연상되어 안타깝다. 2022년까지 3년 동안 보존상태를 점검한다고 해괴하게 해놓았다. 다른 유물과 달리 종의 역할은 몸을 맞으면서 소리를 울리는 것이라 종은 깨어질 때까지 치다가 그때 보존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박살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박물관이 유물의 보존이 최우선이지만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종을 모독하는 것이다.세계에서 제일 큰 종인, 성덕대왕신종보다 10배나 더 큰 200톤의 러시아 크레물린 궁전의 ‘황제의 종’은 만들다 깨어져 한 번도 쳐보지 못했고, 마국의‘자유의 종’도 깨진 채로 보존되어 있다. 종교의 의례같이 매일 치는 것도 아니고 1년에 한번 치면 100년은 쳐도 100번인데 그 정도 쳐도 아마도 괜찮을 것이다. 그리고 수명이 다 할 때까지 맑은 깨달음을 전해주고 생명을 다하는 종은 얼마나 장엄한 아름다움인가?종은 무엇으로 평가하는가. 가수가 아무리 춤을 잘 추어도 노래가 안 되면 백 댄스를 해야 하듯이 종은 명복을 빌고 시간을 알리더라도 소리가 아름다워야 된다. 즉 종소리는 부처의 음성을 삼았기 때문에 얼마나 공을 들였겠는가. 서양종은 안에서 쇠와 쇠가 부딪치기 때문에 딸랑거리는 가벼운 쇳소리라 깊은 울림이 없다. 이에 비해 우리의 종은 나무로 금속을 치기에 소리가 융화되고 화합하여 부드럽고 장중한 깊은 울림이 온다.이 성덕대왕신종이 모양과 소리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지만 세계최고의 종이다. 여러 서양학자들도 극찬했지만 그중 독일의 고고학자 켄멜 박사는 “이 종이야말로 세계 제일의 종이라 부를만하다. 만약 독일에 이 같은 종이 있다면 종 하나만 가지고도 훌륭한 박물관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했다. 필자는 2002년 10월 9일 한글날 옆에서, 2003년 개천절에는 반월성 위에서 직접 들어보았다. 첨단 기계가 못 잡아내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맥놀이 현상의 여음을 들을 수 있었다. 녹음해놓은 테이프나 CD로는 그 여음을 못 잡아낸다. 성덕대왕신종 소리 듣고 다른 종소리 들으면 깡통 치는 소리가 들려 듣기 힘들다.그래도 종에 새겨놓은 630자의 서문과 200자의 명이 명문장이다. “성덕대왕신종 명을 한림랑 김필해(또는 김필계, 김필오)는 왕명을 받들어 짓는다. 무릇 지극한 도는 형상밖에 있으니 보려 해도 볼 수가 없고, 진리는 천지간에 진동하나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다. 그러므로 비유의 말을 내세워 오묘한 진리를 알게 하듯이 신종을 달아 일승 (一乘)의 원음을 깨닫게 한다. 경술년(771년) 12월 해와 달은 한층 빛나고, 음양의 기운은 고르며, 바람은 부드럽고 하늘은 고요하여 신종을 이루었다. 그 모습은 태산이 우뚝 선 것 같고, 그 소리는 우렁찬 용의 소리 같았으며, 위로는 지극히 높은 하늘과 아래로는 지옥에 이르기까지 막힘없이 울리어 보는 이는 기이함을 느끼고 듣는 이는 모두 복을 받을 것이다. 명문장이라 심금을 울리는 깊은 감동을 받아 가슴에 담아놓고 있다.종 왼쪽 하단에 세로로 깊게 파인 자국은 이 종의 가루를 끓여먹으면 남자를 낳는다거나 낙태된다고 파갔던 것이다. 종의 북쪽 아래는 주종 대박사 박대나마 기념비가 있다.성덕대왕신종은 어떻게 옮겼을까?1398년(태조 7년) 남한산성 주조소에서 종을 완성하고 한양(서울)의 보신각으로 옮길 때 1천300명의 군졸을 동원하여 10일에 걸쳐 옮겼다. 이에 비해 성덕대왕신종은 같은 시내 권에서 서로 3km를 넘지 않아 비교적 쉬웠을 것이지만, 현대적인 장비가 없던 시절에 소나 말을 이용한 그들만의 노하우는 있었을 것이다. 1975년에는 대한통운의 트레일러로 옮기면서 종과 트레일러의 총 50톤을 통과할 수 있는 다리가 없어 약간 둘러오는데 이제는 높이가 6m나 되어 당시 전깃줄이 걸려 한전 전공들이 차가 지날 때마다 전깃줄 끊고 다시 이었던 것이다. 경주시민 10만 명이 뒤따랐다는 전설적인 광경이었다.성덕대왕신종을 복제한 종은 제야의 종을 치는 서울의 보신각종, 미국 로스앤젤레스 인근에 있는 미국건국 200주년 기념 종(korean Bell of Friendship), 2016년 구 경주시청 자리에 신라대종이 있지만 소리는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다.이 종의 수난만큼 사라질 뻔한 큰 위기를 맡는다. 조선초기 숭유억불정책으로 전국에 종들을 녹여 무기를 만드는데 이 종도 대상이 되었지만 세종대왕의 특별조치로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이다. 한글 창제한 것만으로도 우리민족에게 위대한 업적이었는데 역시 세종은 성군이었다.종은 울어야 생명인데 지금은 생명 없는 죽은 종을 매달아놓아 안타깝다./글·사진=기행작가 이재호

2020-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