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우가만났다<br/>변태석 B&B 커뮤니케이션스 회장
현재를 냉정하게 직시하면서도 언제나 미래를 내다보는 데도 게을리 할 수 없는 일은 방송과 광고가 다르지 않다.
MBC 대구문화방송으로 지역에 TV방송 시대를 열었고 TBC대구방송 초대 사장으로, 또 안동MBC사장으로 지역 언론사에 한 획을 그었다. 그리고 21세기 ICT 시대에도 여전히 현역으로 움직이는 변태석 B&B 커뮤니케이션스 회장.
“어려운 시절을 겪어봤다. 후손들이 잘 사는 미래를 물려줘야 한다.” 절제와 자기관리를 브랜드로 미수(米壽)를 바라보는 그의 바람이다. “나라가 잘 돼야 한다. 정치인이고 경제인이고 언론인이고 모두가 미래를 걱정해 줬으면 좋겠다.”
“대구를 비롯해 부산 대전 광주 제주에 TV방송국을 설립하라는 오더가 내려왔다. 직원 월급날이면 은행에서 방송 기계를 담보로 돈을 빌려 해결했다.
그랬는데 6개월 만에 광고가 들어오더라.
MBC라디오와 통합해서 대구문화방송으로 거듭 났고 1년 6개월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어섰다.
지역에 대형건설 사업이 일어나도 돈은 모두 서울로 빠져나가니 지역 경기도 더욱 어려워진다.
대형 건설사가 지역 협력업체를 50% 이상은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업 인허가권을 가진 대구시와 구청에서 지역 업체의 참여를 일정 부분 강제하는 제도를 확실하게 행사해 줬으면 한다.”
- 지금 지역 곳곳에서 재개발과 대규모 아파트 건설이 붐을 이루고 있다. 분양광고도 많을 텐데 광고업은 어렵다고 그런다. 언제나 어렵다고 하지 않았나.
△미디어산업이 다매체 시대여서 어려움이 더한 것 같다. 지금 상황으로는 미래조차 불투명하다. 물론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모두가 어려웠지만 지금은 또 다르다. 대구에 대형 아파트 건설이 잇따르고 있지만 서울의 대형 건설사들이 광고업체까지 패키지로 데리고 내려와서 지역 광고업계가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지역에 대형건설 사업이 일어나도 돈은 모두 서울로 빠져나가니 지역 경기도 더욱 어려워진다. 대형 건설사가 지역 협력업체를 50% 이상은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업 인허가권을 가진 대구시와 구청에서 지역 업체의 참여를 일정 부분 강제하는 제도를 확실하게 행사해 줬으면 한다.
- 대구MBC가 범어동 사옥을 처분하고 지난 9월 욱수동으로 이전했다. 개인적으로 감회가 남다를 것으로 안다.
△대구MBC가 대구시 체비지를 사서 중앙로 사옥을 수성구 범어동으로 이전했던 것이 1973년이다. 당시 대구MBC의 경영진들은 물론 대주주였던 쌍룡그룹 관계자도 반대했다. 어렵게 대주주였던 당시 쌍룡그룹 김성곤 회장을 현장에 모시는 기회를 만들었고 김 회장의 결단으로 부지 매입이 성사됐다. 그 자리가 범어동 1번지였고 그 거리가 MBC네거리가 됐다. 대구법원청사와 함께 수성구 시대의 중심으로 수성구 발전을 견인했던 대구 역사의 한 부분이다. 개인적으로대구 MBC를 떠나 안동으로 가면서 ‘나 죽으면 이 자리를 한 바퀴 돌아서 묻어달라’고 공개했을 만큼 애정이 담긴 곳이다. 지켜줬으면 하는 개인 욕심인데, 참으로 섭섭하다.
- 대구MBC 설립 멤버였다. 당시 언론계의 방송사 현황이나 광고시장의 분위기는 어땠나.
△대구를 비롯해 부산 대전 광주 제주에 TV방송국을 설립하라는 오더가 내려왔다. TV수상기도 없던 시절이라 ‘누가 본다고?’ 하는 회의론 속에 장소 물색에 나섰지만 대구시내엔 방송국이 들어설 만한 제대로 된 건물조차 없었다. 새로 건설하던 대구백화점 건물에서 영남TV 방송을 개시했다. 흑백TV 수상기조차 보급되지 않았던 때라 광고가 있을 리 없었다. 직원 월급날이면 은행에서 방송 기계를 담보로 돈을 빌려 해결했다. 그랬는데 6개월 만에 광고가 들어오더라. 마침 구미에서 삼성전자와 금성사(LG 전신)에서 흑백TV를 생산했는데 방송이 나가면서 수상기가 팔리기 시작한 거다. MBC라디오와 통합해서 대구문화방송으로 거듭 났고 1년 6개월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어섰다. 마치 모두가 반대하던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했던 상황이 연상되는 장면이다. 이 시기 구미와 창원 포항 등에 공단이 들어섰으니 우리나라 산업화의 씨앗을 뿌렸다는 자부심이 생기더라.
- TBC대구방송 초대 사장으로 재직하면서 TBC의 안정적 경영의 토대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듣는다.
△다매체 시대 방송의 어려움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아직 TBC는 흑자를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설립 당시 대구MBC보다 타이트한 규모를 지향해 적은 인원으로 출범했다. 그리고 안동과 구미 포항에 무인중계소를 만들어 경북지역까지 방송 영역을 확장하면서 비용을 줄이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MBC 시절의 경험이 밑거름이 됐다.
- 언론인으로 내세울 만한 업적이나 자랑거리를 든다면 첫 번째로 꼽는 것은 무엇인가.
△TBC를 개국하고 나서 전 직원들을 모아놓고 업무관련 금품을 일절 받지 않겠다고 선언을 했다. 그 해 추석 지역 유명인사가 봉투를 들고 직접 찾아와 돌려보내는데 애를 먹었다. 회사를 꼭대기부터 지하실까지 구석구석 직접 안내하면서 TBC를 소개하고 회사 입장을 설명했다. 그리고는 창사 기념품을 챙겨 주차장까지 가서 배웅했다. 성의를 거절했다며 ‘너희가 뭔데’ 라는 역풍을 맞게 될까봐 조바심 났다. 직원들이 따라 줘서 고맙게 생각한다.
- 개인 경력이 화려하다. 개인적으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여러 전력을 거쳤지만 역시 언론인이다. 5·16장학회와의 인연으로 MBC 문화방송의 설립부장으로 시작해서 대구문화방송 상무와 안동문화방송 사장까지 지냈고 TBC대구방송 초대사장을 지냈다. 대구경북언론인회의 전신인 달구벌클럽을 설립해 회장을 맡았고 지금도 아시아포럼21 이사장을 맡고 있다. TBC대구방송 사장 임기 1년 반을 남겨두고 지금의 광고회사 B&B를 만들었다.
처음 대학을 나와 상주고에서 화학과 물리과목 교사를 2년 남짓 했다. 당시 취직할 기업이라야 한국은행이나 철도청 정도였고 대학에서 제조화학을 전공했기 때문이다. 언론사 말고는 대구MBC 사우회와 재구상주향우회도 만들었다. 경북신용보증재단 초대 이사장을 맡았던 것은 당시 이의근 경북도지사의 간곡한 권유 때문이었다.
- 지금 광고기획사 B&B커뮤니케이션즈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광고회사 경영이 특이하다. 사원들에게 회사를 넘겨주겠다고 약속했다. 어떤 뜻인가.
△회사는 사원들의 것이다. B&B는 거송기획을 인수해서 1997년 재출범한 4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회사다. 이 회사의 영업권과 주식과 장비 일체를 직원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다. 대신 현금 10억원을 확보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회사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유동자금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아마 내년쯤이면 이 약속이 실현될 것으로 보인다.
- 고향 상주에도 많은 애정을 갖고 있더라. 개인적으로 기여를 했고 수많은 포상과 감사패를 받았던 것으로 안다. 의미 있게 생각하는 상은 어느 상인가.
△고향 상주시 내서면 서원리 주민들로부터 감사패를 받고 또 공로패도 받았다. 고향 밤원체험마을에 농촌 체험활동과 힐링을 할 수 있도록 토지를 기부했다. 고향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그 실천이 고향 사람들로부터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았을 때 정말 보람을 느꼈다. 상주시장으로부터 상주시민상 특별상을 받기도 했다.
- 대구경북언론인회가 시상하는 대경언론인상 제1회 특별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언론인이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현재 후배 언론인들을 위해서도 기부를 하는 등 많은 애정을 표시하고 있다.
△물론 언론인회의 상도 의미 깊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지난 해 대구경북언론인회와 대구경북기자협회 아시아포럼21에 각각 기금을 출연했다. 앞으로도 기회가 닿을 때마다 선배 언론인으로서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기부나 개인적 지출은 모두 개인 주머니를 털어서 쓴다. 앞으로도 지역의 언론인들을 위해 의미 있는 무엇인가를 하려 한다.
- 요즘 대선을 앞두고 여야 후보들의 공약이 나오고 있다. 여당 후보로부터는 친일파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유년기를 보낸 입장에서 코멘트해 달라.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해방을 맞았다. 매일 아침 등교하면 정문 앞에서 책보를 내려놓고 동쪽 신사를 향해 참배를 하고나서야 다시 책보를 챙길 수 있었다. 노는 시간에 동무들과 우리말로 장난이라도 치다가 일본 선생에게 들키면 어김없이 ‘귀싸대기’를 얻어맞아야 했다. ‘번갯불’이 번쩍했던 그때의 상처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 여당 후보 논리대로라면 그 시대 초등학교만 다녔어도 모두 친일파가 아닌가.
- 건강에 유별 관심과 신경을 쓰는 것 같다. 나이에 비해 정정하다는 평이다. 내년이면 우리 나이로 미수(米壽)인데 건강 비법은 무엇인가.
△건강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건강하기 위해 지금도 자기 관리를 꾸준히 한다고 자신한다. 자고 일어나면 발목 들기 운동부터 1시간30분가량 움직인다. 젊어서 시작한 골프도 틈틈이 인도어에 나가고 한 달 서너 차례 필드에도 나간다. 75세 때 처음으로 에이지 슈트(age shoot)를 기록한 뒤 여러 차례 에이지 슈트를 했다.
집에서 소백산맥 중턱에 있는 하령초등학교까지는 7km나 되는 산길이었다. ‘개다’(일본인 나막신)가 반대편 발 복숭아뼈를 건드려서 개다를 벗고 맨발로 걸었다. 그 훈련이 평생을 건강하게 만든 첫걸음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손수 운전을 해서 다닌다. 4층 사무실까지 걸어서 올라가는 것을 고집한다. 내려올 때는 더러 앨리베이터를 타기도 하지만.
- 인생을 마치 살얼음판 걷듯 행보가 진중하고 분명하다. 폭탄주를 들이켠다거나 친구들과 밤 새워 술잔을 기울이면서 세상과 인생을 이야기하는 그런 낭만의 주인공은 되고 싶지 않았나.
△술은 체질에 맞지 않아 마시지 않는다. 그래도 사회생활 하는데 불편하거나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TBC 사장 시절 지역 기관 단체 대표들과 저녁 자리에서 폭탄주가 돌았다. 내가 나서서 ‘폭탄주는 2차에 하고 1차는 주량 껏 권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 뒤로 술은 아예 안 마시는 것으로 치부하니 나도 편하더라. 술 말고도 다른 의미 있고 재미있는 일도 많다.
- 운동으로 골프를, 취미로 바둑을 두는 데 실력이 프로급이라 들었다.
△사무실에서 원로 언론인들 사랑방처럼 정기적으로 모여 바둑을 뒀는데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중단됐다. 이제 곧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회원 중에 프로급 실력자도 있고 내 실력은 아마3급 정도 될 것 같다. /이경우 편집위원
◇변태석(86)
호 이당(伊堂). 상주 출생. B&B커뮤니케이션즈 대표이사. 상주농잠. 국립부산수산대 제조학과 졸. 상주고 교사. MBC문화방송 지방방송 설립부장. 대구문화방송 총무국장, 관리국장, 상무. MBC안동문화방송 사장. TBC대구방송 사장. (사)대구경북언론클럽 회장. 계명대 신방과 초빙교수 겸. 경북신용보증재단 이사장. 건강관리협회 대구광역시 지부장(현), 아시아포럼21 이사장(현).
이웃집 인자한 할아버지. 그러나 경영에는 냉정했고 그 실력을 인정받아 가는 곳마다 초대 직함을 만들어냈고 그 자리를 후배들에게 물려주는 멘토가 됐다. 영원한 현역 언론인이자 지역 언론계의 대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