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우가 만났다<br/>윤일현 시인·교육평론가
학생은 꿈을 꾸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한 실력을 갖춰야 한다. 교사는 학생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제자 가르치는 것을 보람으로 삼아야 한다. 학부모는 자녀의 꿈이 실현되는 것을 지켜보는 기쁨을 느껴야 한다.
공교육과 사교육 현장에서 강사로, 교육 컨설팅과 교육설계자로, 언론을 통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바른 교육의 길로 이끌려고 노력한 윤일현 교육문화연구소 대표의 교육관이다.
대학입시, 목숨 걸고 명문대를 고집하기보다 ‘진짜 경쟁은 대학 입시 후 한다’는 긴 호흡으로 자신에게 맞는 대학을 선택하라고 충고한다. 우리가 목표로 삼고 있는 직업은 삶의 방편이고 이제는 과정을 즐길 줄도 알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가르치고 배우는 그 자체에서 행복을 느끼는 교육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글과 말은 그 사람의 세계다. 책을 읽어야 사고가 깊어지고 바르게 읽을 수 있어야 바르게 쓸 수 있다.” 무슨 교육이든 책읽기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시인이자 교육평론가 윤일현의 지론이다.
무슨 교육이든 책읽기부터 시작
진짜 경쟁은 대학 들어가서부터
길게보고 대학과 학과 선택하길
평가 없는 교육은 없다
소통·상생·협업 통한 능력발휘 위해
교육 제도·교과 과목 대폭 손질해야
- 올 수능은 ‘불수능’이라 하더니 실제 성적이 낮아졌다. 시험 난도가 수험생에게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가.
△수험생들은 문제가 어려워 다소 당황하고 혼란스러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난도 때문에 유불리는 발생하지 않는다. 전체 입시에 미치는 영향도 없다. 만점자가 1명에 그친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언론에 제발 ‘지난해보다 몇 점 어려웠다’ 같은 분석은 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상대평가는 문제가 어려워도 전체 응시자의 4% 안에 들면 1등급이 된다. 또 절대평가는 문제가 어려우면 1, 2등급 받는 학생이 적으니 피해를 본다고 말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그렇지 않다. 최저학력 기준을 충족한 수험생이 적어 수시에서 모집 정원을 다 뽑지 못한다면 정시로 이월해서 뽑는다.
- 수능시험 성적을 받아든 수험생과 학부모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수능시험은 수험생을 한 줄로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시험이다. 표준점수, 백분위, 등급 등을 대학 나름의 방식으로 조합해 수치화 한 후 지원자를 일렬종대로 세워 정원만큼 잘라서 합격시킨다. 문제가 어려우면 변별력이 좋아 앞뒤 사람의 간격이 넓어진다.
수험생에게 수능시험은 스포츠에서 선수 시드배정과 같은 것이다. 결승전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유리한 시드에 배정돼야 한다.
고교졸업생의 대학 진학률이 2016년을 기점으로 80% 아래로 떨어졌다. 학부모의 생각은 가장 현실적이다. 이제 대학 졸업장이 더 이상 사회 진출의 보증수표가 되지 못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학력에 관계없이 원하는 일자리를 얻을 수 있게 되면 그 때는 지금의 입시와 교육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수험생과 학부모들에게는 ‘진짜 경쟁은 대학에 들어가서 한다’는 긴 호흡으로 대학과 학과를 선택하라고 충고하고 싶다.
- 최근 여러 해 동안 수시가 대세가 되었다가 ‘조국 사태’ 이후 다시 정시 인원이 늘고 있다. 두 제도의 장단점과 현행 입시 제도의 문제점에 대해 말해 달라.
△대다수 학부모와 학생은 공정한 전형을 원한다. 공정성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확보하지 못하면 학생부종합전형을 기준으로 하는 수시는 정착되기 어렵다. 국민이 납득할 만한 신뢰성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다시 객관식 시험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래서 일단은 수시와 정시 비율을 5대 5 정도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기능공적인 지식인을 양산해야 하던 때는 공정성 시비가 거의 없는 단답식 또는 객관식 문제가 힘을 발휘했다. 지금은 창의력이 경쟁력이자 생존수단인 시대다. 교과 성적과 수능점수에 의한 한 줄 세우기를 지양하고 학생의 창의력과 잠재력을 중시하겠다는 학생부종합전형이 공정성과 투명성이 보장되고 학부모들로부터 신뢰받을 수 있다면 사교육을 억제하고 공교육을 정상화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 학생부종합전형은 왜 말썽이 되고 있나.
△1920년대 입학사정관제를 처음 도입한 미국에서도 이 제도가 특정 인종을 배제하고 원하는 학생들을 골라 뽑기 위한 도구로 악용된다는 논란이 일었을 정도다. 당시 아이비리그의 유대인 합격 비율은 하버드가 21.5%, 콜롬비아가 40%에 육박했다. 그러자 성적이 아닌 인성, 리더십, 과외활동, 봉사 등을 고려한 새로운 학생 선발 방식을 만들었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미국의 경우 대학마다 수십 명에 달하는 훈련된 전문 입학사정관이 있다. 그러나 계약직 입학사정관이 대부분인 우리 대학에서 단기간에 수백, 수천 명을 심사하여 창의력과 잠재력을 가진 학생을 뽑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성적 비중을 줄이고 비교과영역을 중시하라는 원칙에 위배되지 않으면서 단기간에 우수 학생을 변별하기 위해서는 수상경력이나 외국어 인증, 대외활동 등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신종 고급과외 시장이 형성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 학교 교육 현장에서 전국 단위의 학업성취도 평가를 중단하고 자율형사립고와 특목고를 폐지하는 등 급속도로 변화를 주려고 한다.
△평가 없는 교육은 없다. 맞춤식 수업을 하려면 학생의 현재 수준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반드시 학업성취도평가를 해야 한다. 다만 그 평가 자료에 석차를 매겨 우열을 가리는 식으로 악용되지 않게 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잘하는 학생은 더 잘 할 수 있게 자극을 주고, 좀 뒤처지는 학생은 좌절감이나 열등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다소 느리지만 배우는 기쁨을 맛보도록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공부 못하면 모든 것이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태도도 바꿔야 한다. 교과 성적은 다소 부진해도 다른 영역에서는 탁월한 학생이 많다. 자사고 특목고는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공적인 자리에서 평등론을 주장하고, 자사고 특목고에 반대하는 수많은 학부모를 만났다. 그들은 정작 자기 자녀의 문제에 가서는 거의 예외 없이 엘리트 교육을 하려고 했다. 그런 이중적 태도가 생산적 토론을 막고 있다고 생각한다.
- 수도권 상당수 대학은 더 좋은 학생을 뽑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고, 대부분 지방대학은 모집 정원을 못 채우고 있다. 여기에 대한 대책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수도권 상위권 대학도 정원을 줄여 수험생 감소에 대한 고통을 함께 분담해야 한다.
지방대학은 정부의 지원과 대책만 요구해서도 안 된다. 모집 정원을 과감하게 줄이고 산학연계를 강화해 지역이 필요로 하는 인재를 배출하도록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한다. 대학, 지자체, 지역 산업계, 교육, 언론계 등이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한다. 학원 강사로서 경북대 총장과 학장 등 보직교수들을 상대로 특강을 하면서 안주하고 있다고 질타한 적이 있다. 그들로서는 자존심이 상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변화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때 지방거점대학으로서 경북대가 변해야 하는 이유를 마라톤에서 1등 기록이 좋아야 2등, 3등도 성적이 좋아진다고 비유했던 기억이 난다.
- 국민소득 3만불 시대를 넘어 선진국에 진입했다. 이제 우리 교육도 행복을 이야기할 때가 되지 않았나. 언제까지 성적과 입시를 연관시키는 교육에 집착해야 하나.
△창의력을 가진 전문가를 배출해야 하는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과거의 교수·학습 방법을 바꿔야 한다. 앨빈 토플러가 말한 아프리카의 강 하류에서 살았던 원시 부족 이야기가 그걸 말해 준다. 백인들이 상류에 댐을 건설하고 있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카누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댐이 완공되자 그 부족과 그들의 문명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금 그 댐에는 인공지능(AI), 로봇 같은 물이 채워지고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아 가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카누 만드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4차 산업혁명을 선두에서 이끄는 구글이 가장 중시하는 덕목은 ‘협업’이다. 우리는 아직도 내 자식, 내 가족만 잘 되면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 ‘소통, 상생, 협업’ 같은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교육제도와 교과과정을 대폭 손질해야 한다. 앞으로는 창의력, 상상력, 협동심, 인문적 교양, 감성, 공감 등의 자질을 가진 사람들이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직업에 종사할 것이고, 보다 가치 있는 삶을 살 것이다. 의사, 판검사, 공무원 등 직업은 삶의 목적이 아니고 수단에 불과하다. 우리는 수단을 얻는데 진을 다 뺀다. 이제는 과정을 중시하고 즐길 줄도 알아야 한다.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서 ‘행복’이란 말이 늘 함께 하는 풍토를 조성해야 한다.
- 독서 교육을 특별히 강조했다. 최근 ‘그래도 책 속에 길이 있다’는 교육 평론 책도 펴냈다.
△오랜 교육 현장에서 직접 체득한 것이다. 제철고에서 독서반을 이끌면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독후감을 숙제로 냈다. 100페이지를 넘겨야 비로써 등장인물이나 스토리가 익숙해지는 장편인데 학생들을 통해 독서의 효과를 확인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상상력과 창의력이 중심이 돼야 하고 이를 고양하기 위해 시 읽기와 쓰기를 강조하는 것이다.
- 입시전문가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면서 입시학원에서 ‘교육문화센터’를 열었다.
△사설 입시 학원 진학지도실장으로 수많은 교육 컨설팅과 교육설계를 했다. 언론사와 공동 입시설명회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돈과는 인연이 없었음을 실토한다.
학부모를 상대로 한 인문학교실 ‘윤일현 금요강좌’를 15년 동안 280여 회 가졌고 거쳐 간 수강생만도 5000명이 넘는다. 인문학 강좌 붐이 일면서 백화점에서도 인문학 강좌가 개설되자 중단했다. 학부모들의 재개 요청에도 ‘아쉬울 때 끝내자’며 2019년 종강했다. 입시학원에서 문화센터를 연 것은 학원이라는 곳을 탈출하고 싶어서였다. 찰리 채플린이 ‘세상이 너무 슬퍼서 나는 웃긴다’고 했다. 학원이 너무 몸서리나는 무한경쟁의 장이어서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면 이해가 될까.
- 공교육과 사교육을 넘나들며 현장에서 40년 가까이 활동했고 지역 입시계에서는 산증인으로 알려졌다. 또 시인, 교육평론가,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며 팬이 많다.
△다양한 일을 겪었고 많은 고비가 있었다. 그때마다 바른길을 선택하려고 노력했다. 나 스스로는 동그란 구멍 속 네모 같은 존재였고 생각한다. 그래도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분들이 많다. 이제 읽고 쓰는 일에 좀 더 힘을 쏟으면서 개인과 단체가 도움을 요청하면 필요한 봉사를 하려고 한다. 힘든 시기를 함께 한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이 겨울 모두가 따뜻하고 행복하면 좋겠다.
윤일현(尹一鉉. 65)
대구 출생. 계성고. 영남대 영문학과 졸업
포항제철고 교사로 재직 중 전교조의 전신인 ‘민주교육전국교사협의회’ 초대 회장을 맡았다가 해직됐다. 이후 지역 주요 입시기관에서 최근까지 입시전문가, 교육평론가로 활동.
현재 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대구시인협회 회장. 저서로 시집 낙동강, 꽃처럼 나비처럼, 낙동강이고 세월이고 나입니다 등과 교육 평론 불혹의 아이들, 부모의 생각이 바뀌면 자녀의 미래가 달라진다, 시지프스를 위한 변명, 밥상과 책상 사이, 그래도 책 속에 길이 있다 외 다수가 있다. 조부가 척사유생(斥邪儒生)인 항일 독립 운동가의 집안에서 자랐고 5·18때는 수배명단에도 올랐다. 오랜 단절과 고립, 추방에 익숙하다며 스스로를 교육계의 투사도 현실주의자도 아닌 낭인(浪人)이라고 겸손해 한다.
/이경우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