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우가 만났다<br/>서훈 (사) 민주화운동기념보존회 이사장
대구시내 한복판 중앙로 반월당 언덕배기에 위태롭게 자리하고 있는 2층 벽돌건물이 고색창연 하다. ‘못살겠다 갈아보자’에서 3선개헌 반대, 유신헌법 철폐, 군부독재 타도, 직선제 개헌 투쟁 등 담벼락을 뒤덮은 한 세기 전 선거벽보와 각종 시위사진들이 이 집의 내력을 대변해 준다. 독재 정치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것이 사명인 대구 민주화운동기념관. 이 집의 주인은 (사)민주화운동기념보존회다. 대구에서 무소속으로 2번이나 당선된 재선 국회의원이기도 한 4대 서훈 이사장은 “민주주의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며 야당 국회의원이라면 집권당의 잘못에는 목숨 걸고 투쟁해야 한다고 목청을 돋운다. 민주화운동기념회관을 번듯하게 빌딩으로 올리고 거기에 민주화 영령들의 위패도 모시고 대구 시민들의 정치소양 교육장도 만드는 것이 꿈이다.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은 오직 바르게 할 것이며 바르지 못하면 투쟁을 해서 바르게 잡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자기 보신이나 하고 영달만을 누리려면 정치의 길을 가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대통령 선거와 지방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그래서인지 후보가 되려는 사람들과 정치 지망생들의 보존회 출입 빈도가 잦아지고 있는 것 같다. 보존회가 지키고 있는 기념관은 어떤 성격인가.
△ 대구경북 정통 야당 당사였다. 광복 이후 독립운동가이자 헌법 기초위원장인 동암 서상일 선생을 필두로 권중돈 주병환 신도환 임순석 조일환 김순택 김재권 신진욱 등 대구경북의 뜻있는 민주인사들의 성원으로 마련한 야당 당사이다. 이승만 정권 당시 대안동에 있던 민주당사에서 병원이었던 현 건물을 사서 옮겨와 대대로 야당 당사로 썼던 건물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 전국의 야당 당사를 모두 국가가 환수 조치할 때 유일하게 지켜낸 건물이기도 하다.
- 대구 민주화운동기념관은 어디서부터 어떤 민주화운동을 기념하고 어떻게 보존하는가.
△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독재에 저항한 2·28을 위시한 4·19 의거와 박정희 정권 당시의 6·3 굴욕 한일회담 반대투쟁, 삼선개헌 반대, 유신헌법 반대, 전두환 정권의 군사독재 반대외 직선제 개헌 투쟁, 6·10 민주항쟁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각종 기록물과 사진 등을 전시하고 있다. 이런 민주화 투쟁을 진두지휘한 교육 현장이고 시위 현장에서 전투경찰의 방망이와 최루탄에 연탄재와 오물 페인트 투척으로 맞선 최전방 지휘소이자 취후 보루였다. 후배들에게는 민주 교육 현장이고 민주 역사의 박물관으로 대구 경북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장소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이다.
- 독재 정권에 반대하고 군사정권과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한 투쟁의 현장 이자 민주화의 성지라 할 만하다. 대구가 한 때는 정치적으로 야도라고 불리기도 했다. 현재 국민의힘이 제1야당이다. 전통을 잇고 있는가.
△ 민주화운동기념보존회는 광복이후 우리나라 역사 시작부터 군부정권이 물러날 때까지 각종 민주화 운동을 이끌어오고 진두지휘했다는 점에서 1회적 민주화 운동과는 다르다.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 이후로는 오늘날 야당과 달리 정치적으로는 중립적 위치에서 오직 민주화 운동의 정신만 이어가고 있다.
- 기념하고 보존하는 것은 무엇인가.
△ 우리나라 초대 야당이었던 민주당의 신익희 당수로부터 조병옥 윤보선 장면 박순천 김영삼 김대중에 이르기까지 역대 정통 야당의 당수들의 영정 및 대구 경북지역 야당인사 400여 명의 위패를 모시고 1년에 1차례 합동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그들의 반독재 투쟁 민주화 정신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 앞으로 민주화운동은 어떻게 진행해 나가려고 하나.
△ 대구시민의 민주 역량을 일깨우고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모든 독재에 항거한 대구 경북민의 민주화 운동 정신을 이어가야 한다. 보존회 차원에서 지역 민주인사를 키우고 교육시키는 일을 해나가고 있다. 민주반월보를 꾸준히 발행해내고 있고 지난 2019년 보존회가 주체가 되어 정치대학을 열어 시민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얻기도 했다.
- 재선 국회의원인데 2번 모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YS(김영삼 전 대통령)를 정치적 멘토로 모시면서 어떻게 당 공천을 못 받고 무소속으로 출마했나.
△ 정치란 그런 것이더라. 3당 합당을 했고 나보다 더 센 상대가 있어 공천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주영 현대 회장의 국민당으로 출마해 낙선하고 보궐선거에는 또다시 신한국당 공천을 받지 못해 무소속으로 나가 당선됐다.
- 선거 과정에서 기억나는 일화가 있나.
△ 정주영 현대 회장은 정말 명쾌한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동구의 숙원사업이 뭐냐고 묻기에 ‘동촌 K2 비행장이 문제다’라고 했더니 “그거 쉽다. 내가 대통령 되면 당장 해결해 준다. 그곳에 아파트 지으면 훨씬 좋은 시설의 공항을 지을 수 있다”고 했다. 지금 기부 대 양여 방식의 대구공항 이전 사업이 그 때 나온 것 아닌가 무릎을 쳤다.
- 무소속으로 당선되고 많은 화제를 뿌렸다. 자전거를 타고 등원해서 매스컴을 탔다. 후에 백바지 등원이나 원피스 등원이 화제가 되고 있는데 서 의원이 원조(元祖)격이 아닌가.
△ 깨끗한 정치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무엇인가 혁신하고 싶었다. 자전거를 타고 들어가니 입구에서 막아서 ‘그러면 들고 들어가겠다’고 해서 허락을 받았다. 비가 오는 날은 우산을 받쳐도 젖었는데 다른 의원들은 우산이 없어도 비를 맞지 않았다. 지하통로가 있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 의회에서 돌출 발언으로 심지어 동료 의원들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의원 신고에서부터 사고를 쳐서 스포트를 받았다.
△ 국회사무처에서 의원 신고할 때 읽으라고 적어준 쪽지를 펴 들고 의석을 바라보니 앞줄 초선보다 뒷줄 중량급 다선 의원들이 눈에 들어오더라. 순간 눈이 확 떠지더라. 보궐선거 기간 동안 지도급 중견 정치인들이 대거 내려와 나를 떨어뜨리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했던 사실들이 떠올랐다. 메모를 접고 일갈했다. ‘이 자리에는 비리를 저지르고 부정선거를 한 의원들이 모여 있다’고. 난리가 났던 기억이 난다.
- 지금 대구 정치에 원로가 없다고들 한다. 동의하나.
△ 정치야말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나이 들었다고 무조건 꼰대는 아니다. 대구의 선비정신과 꾸준한 자기 성찰이 필요하며 끊임없는 사회 참여 정신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 정신을 가진 선배 정치인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 지역 정치인들, 특히 국회의원의 존재감이 없다는 여론이다. 대다수가 야당인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인데 의정 활동이나 지역구 활동에서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 정치는 정(正)이라 했다. 바르게 한다는 것은 정의를 구현한다는 말이다. 정의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투쟁의 산물이다.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은 오직 바르게 할 것이며 바르지 못하면 투쟁을 해서 바르게 잡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자기 보신이나 하고 영달만을 누리려면 정치의 길을 가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금 문재인 정권에서 대통령을 탄핵해도 수십 번 할 수 있는 일들이 일어났다. 야당을 한다는 인사들이 투쟁다운 투쟁을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 시민들이 정치인 보기를 보신주의자나 자기 영달만 생각하는 고액봉급자로 볼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특히 최근 대구출신 야당 대표시절 투쟁과는 거리가 먼 입으로만 떠드는 인사를 우리는 보아왔다.
- 그렇다면 야당은 도대체 어떻게 투쟁해야 하나.
△ 야당은 집권당의 잘못을 지적하고 투쟁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야당 총재 시절을 기억해봐라. ‘닭의 목은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며 민주화와 직선제를 쟁취해 내지 않았나. 나는 김대중 대통령 시절 두류공원에서 ‘김대중 대통령 규탄대회’를 열기도 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얼굴은 포철이 생산해내는 120mm 철판보다 더 두껍다”고 비유해 김 전 대통령의 측근인 권노갑 한화갑 의원으로부터 ‘비유가 너무 지나쳤다’는 항의를 받기도 했다.
- 지금도 많은 정치인들과 소통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김부겸 총리와 이건희 미술관 건립 관련 대화를 했다고 전해 들었다.
△ 많은 후배 정치인들과 소통하고 있다. 그들에게 진정으로 충고해주고 있다. 김부겸 총리에게는 ‘대구 출신으로 대구에 이건희 미술관을 끌고 오도록 노력해 보라’고 했더니 “그런 말은 꺼내지도 못한다”며 “나보고 내려오라는 소리”라 하더라. 그래서 말해줬다. “당장 그만 두더라도 소신껏 할 말은 하는 총리가 돼야지”라고.
- 당시 이회창 총재의 대통령 후보선출에 반대했다가 한나라당 공천을 받지 못했다. 그런 투쟁 경력에 왜 3선의원이 되지 못했나.
△ 모두가 찬성하는 이회창 후보에 대해 말석에 앉은 내가 반대한 것이다. “전 국민이 자식을 군대에 보내고 노심초사하는 판에 후보가 아들 둘을 군대 보내지 않았다. 그런 후보가 국민들에게 표를 달라고 하면 국민이 표를 주지 않을 것이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당시 이회창 후보 옆자리에 앉았던 허주(김윤환)가 내게 와서 어깨를 두드리며 말렸다. 그러나 그도 결국 공천에 탈락하고 정치 인생을 마감했다.
- 지금 같은 상황이 되풀이된다면 지금도 반대할 것인가. 본인의 소신에 비해 대중이나 후배들로부터의 인기는 없어 보인다. 자신의 정치인생은 성공적이라고 평가하나.
△ 현실 정치와 맞지 않았다. 현실정치를 몰랐던 것이다. 돈이 있어야 조직 관리도 하고 사람들도 따른다는 사실을. 나도 3선의원이 되면 정치자금도 모으고 주변 관리도 하면서 소위 큰 정치인이 되겠다며 대권까지 생각했는데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도 헌정회에 가면 큰소리친다. 정치적으로 비겁하지 않았고 금전문제나 다른 비리가 없으니 어디서나 누구 앞에서나 떳떳하고 당당하다. 자식들도 저마다 제 노릇을 하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그렇지 못한 선후배 정치인들을 보면 나는 정치적으로는 실패했을지 몰라도 인생에는 성공적이라 자평한다.
□ 서훈 (79)
대구 동촌 출생. 영남고 경북대 법학과, 전남대 정치학석사, 대구대 행정학박사.
경북대 재학시절 총학생회장으로 6·3한일회담 반대운동.
팔공재건중학교 설립, 교장으로 야학운영.
김영삼 신민당총재의 특별보좌관으로 정계입문. 이후 유신헌법 반대와 직선제 쟁취 반독재투쟁하다 14대와 15대에 무소속으로 당선됐다. 이후 신한국당에 입당해 대구시당위원장을 했고 이회창 후보에 반대해 공천탈락하고 탈당해 16대에 민국당 후보로 출마해 낙선했다. 부정부패추방시민연대전국위원장을 맡았다. 이명박 정권에서 저작권단체 연합회 이사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서예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