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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대학·지역사회가 동반성장하는 ‘청년 희망도시 경산’

인구 27만8천명에 예산 1조1천300억원의 도농복합 기능도시 경산시. 10개의 대학에 12만명의 대학생과 170개의 부설 연구소가 있으니 학원 교육도시라고 한다. 경제자유구역의 지식산업지구를 비롯한 300만평의 산업단지에 3천300여개의 자동차부품 화장품 바이오테크 관련 기업체가 있는 첨단산업도시라고도 한다. 원효와 설총과 일연이 탄생했고 관봉석조여래좌상(갓바위)과 임당동 고분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유적이 있는 문화유적 도시라고도 한다.최영조 경산시장은 “구태여 도시의 정체성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 지리적 여건과 정치적 위상이 인구 유입으로 이어지니 경산은 모두가 인정하고 찾아오는 살기 좋은 도시면 된다”고 여유를 부린다. 시민들이 풍요 속에 서로 돕는 착한 사회를 목표로 시정을 펼친다는 재정자립도 경북 2위의 부잣집 논리다. - 대구광역시에 떼어준 고산면과 안심면은 대구 수성구 시지지구와 동구 안심 혁신도시를 이뤄 경산과 울타리 없는 이웃이 되었고 경산시는 대구의 위성도시이자 베드타운이 됐다. 대구시 경산구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두 지역의 대구시 편입으로 경산이 가장 좁은 면적의 시(市)이지만 인구는 꾸준히 늘고 있다. 대구와 이웃해 있어 어쩔 수 없는 점도 있지만 장점이 많다. 지하철과 대중교통 환승이 가능하고 사통팔달 교통망에 문화 시설을 공유할 수 있으며 기후나 자연 환경 교육 등 정주 여건이 정말 살기 좋은 곳이다. 경산시만의 독자적인 자립보다 중요한 것은 지역민이 윤택하고 편리하게 살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경북도청이 안동으로 이전한 후폭풍도 경산에게 기회가 된 듯하다.△공무원 사회를 보면 그런 영향도 있다. 최근 도내 군 지역에서 7급을 포기하고 경산시청에 9급으로 신규 임용된 공무원도 있고 국가직을 포기하고 지방직으로 오는 공무원도 있다. 심지어 도청에서 지방으로 내려오면 예전에는 승진했는데 지금 경산으로 직급을 낮춰 내려오려는 공무원도 있을 정도다.- 청사 입구에서 확성기 시위가 떠들썩하다. 시장을 성토하는 현수막이 청사 앞을 뒤덮었다. 성남 대장동 개발 사업 특혜 논란으로 전국이 시끄럽다. 경산에도 대규모 택지개발과 산업단지 조성 사업 등이 진행되고 있는데 특혜 시비는 없나.△ 민자로 조성되는 상방공원 사업을 두고 지주들이 토지 적정보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미 토지 수용 절차에 들어갔고 곧 사업이 시행된다. 경산에서 수많은 택지개발과 산업단지 조성 사업이 일어나고 있지만 대장동 같은 시비나 논란은 없을 것이다.- 최영조 경산시장이 3연임하는 8년여 동안 경산의 가장 큰 변화를 꼽는다면 어떤 게 있나.△경산시의 속살이 튼실해진 것이다. 취임 당시 경산시는 국민권익위원회의 공공기관 청렴도 평가에서 최하위권에 머물러 있었다. 공직자들을 추슬러서 공공부문부터 바로 세웠다. 청렴도가 2014년부터 상승하기 시작해 2017년에는 전국 자자체 중 시(市)부문 1위를 차지했다. 시민들의 기부문화도 체계적으로 정착하고 있어 서로 돕는 아름다운 기풍이 시 전역 전 계층으로 확산되고 있다. 도내 22위였던 기부문화는 완전 정착해서 아너소사이어티(1억원 이상 기부자 모임) 참여자 수나 이웃돕기 성금 등 각종 모금활동에서 인구 대비 전국 1위를 지키고 있다. 일정액 이상을 기부하는 착한가게도 전국 제일을 차지하고 있다. 공직의 안정이 시민 생활의 윤택함으로 이어진 것이라 본다.- 그런 무형의 자산이 중요하긴 하지만 당장 피부로 느끼거나 눈에 보이지는 않는 것 같다. 시장의 치적으로 내세울 만한 것은 없나. 공약 추진 상황은 어떤가.△민선 7기에 들면서 현안사업과 미래를 위한 사업 등 8개 분야 99개 사업을 분석해보니 올 상반기 현재 30건이 완료됐고 49건이 정상 추진되고 있었다. 이행률 94%였다. 글로벌 코스메틱비즈니스센터 건립이나 대구선 복선 전철화 사업, 동의한방촌 조성사업 등이 완료됐다. 경산정수장 고도정수처리시설이 완공됐고 지역경제의 중심인 경산공설시장의 시설이 현대화됐다. 경북권역 재활병원이 건립 개원했다.- 최 시장이 치적으로 자랑하는 경산지식산업지구와 경산4일반산업단지 조성이나 대구도시철도 1호선 하양 연결 사업은 이미 최 시장 취임 이전부터 추진해 왔던 사업들 아닌가.△이들 사업들은 내가 취임하기 이전부터 서류상 추진해왔던 사업들이다. 그러나 실체가 없었는데 내가 들어와서 구체적으로 실현된 사업들이다. 지금 이들 사업들은 모두 착공해서 완공을 향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그런 사업들이 시장만의 노력으로 이뤄진 사업이라고 치부할 수 있나. 정치권과의 협력체제 구축으로 이뤄낸 것 아닌가.△물론이다. 경산시가 국비 확보를 통해 공약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지역 정치권과 협력체제 속에서 가능해진 일이다. 초임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이었던 최경환 전 국회의원이 실질적으로 많은 도움을 줬다. 국비 확보를 위해 장관실을 찾았을 때는 적극 나서 관계자들을 설득했다. 특히 1호선 하양 연장과 지식산업지구 조성은 최 전 장관의 대구경북에 과학기술 연구 사업을 적극 지원 진흥시키겠다는 공약이기도 하다.- 경산의 미래 먹거리 산업 터전이 될 것이라는 지식산업지구와 경산4일반산업단지는 어느 정도 규모이고 어떻게 추진되고 있나.△하양읍 대학리와 와촌면 소월리 일대 116만평에 2012년부터 내년까지 10년간 사업비 1조95억원을 들여 조성하고 있는 경산지식산업지구는 내륙형 경제자유구역으로 현재 1단계 산업 연구용지 86만평에 148개 업체와 6개 연구기관이 입주해서 가동중이다. 지난해 기공식을 마친 30만평 규모의 2단지도 현재 토지보상률이 94%로 순조롭게 조성되고 있다. 진량읍 신재리와 다문리 일대 73만평에 5천740억원을 들여 조성되는 경산4일반산업단지는 현재 공정률이 85%로 이곳에는 산업시설과 지원시설 주거시설 공공시설 등이 조성중이다.이들 산업지구가 모두 준공되면 경산은 300만평의 산업단지를 기반으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신성장 동력 기업들이 선도하는 기업하기 좋은 도시를 굳혀 갈 수 있게 된다.- 지식산업지구에 아울렛이 들어서는 것을 두고 특혜 시비가 일고 있다. 들어서긴 하나.△지식산업지구 2단계 지역에 신세계사이먼이 1천200억원을 투자해 대규모 아울렛을 설립키로 했으나 분양가를 두고 특혜 시비가 일어 현재 주춤하고 있다. 최근엔 김부겸 국무총리가 방문해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이 지역은 상업지구로 변경하고 조성원가 아닌 시가로 조정해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당초 예상한 5만3천평 규모보다 축소되겠지만 2023년 개설은 가능할 것이다.- 경산은 지역내에 대학이 10개나 되고 그래서 교육도시라고도 한다. 12만 대학생과 교직원, 학교 관계자들이 실제로 경산시에 어떤 도움이 되고 있나.△경산시와 지역 내 10개 대학의 상생 발전을 위해 총장들과 매년 두 차례 대학발전협의회를 열어 소통하고 필요한 부분은 도와주고 있다. 우리는 대학 문화 조성과 대학발전을 위한 각종 사업을 지원해주고 대학들은 경산 발전을 위해 각종 정책 제안 및 공동 사업 추진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경산시와 대학들이 ‘청년 희망도시 경산’ ‘청년이 미래대’ ‘Open 캠퍼스! Open 경산시!’ ‘상생발전’ 등 다양한 주제로 인적 물적 자원을 활용한 협력체계를 구축해 대학과 지역사회가 동반성장하는 기회를 만들었다.- 대학과 경산시 간 상생 협력 사업의 구체적인 사례를 듣고 싶다.△경산시가 추진하고 있는 화장품 산업의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될 글로벌 코스메틱 비즈니스 센터가 있다. 경산시 유곡동에 228억원을 투입해 설립한 이 센터는 국제 수준의 우수화장품 제조 및 품질관리기준을 갖췄다. 올 1월부터 가동되면서 경산은 화장품의 연구에서 생산을 거쳐 비즈니스까지 원스톱으로 지원할 수 있게 됐다. 경산시는 현재 이 센터를 중심으로 2025년까지 4만5천평 규모의 화장품 특화단지를 조성 중이다. 완공되면 생산 5조원에 기업유치 50개사, 일자리 3천500개 달성을 목표로 화장품 산업 인프라를 구축해 글로벌 K-뷰티 융복합 산업의 메카가 될 것이다. 지역 한의대에서 기술과 인력을 공급해 사업이 가능해 진 것이다.또 대구가 국가 로봇산업테스트필드를 유치하자 대구가톨릭대학교는 경산지식산업지구에 산학협력으로 로봇 산업에 필요한 인력을 공급할 캠퍼스대학을 설립키로 했다.- 경산에 대학이 있고 청년들이 있다. 이들을 위한 사업은 없나.△경산시는 2017년 청년희망도시 경산을 선포하고 여러 가지 청년 지원 사업들을 추진하고 있다. 청년 문화거리 조성과 청년문화 활성화를 위한 ‘청년희망 Y-STAR 프로젝트’ 청년들의 상상력을 사업화하는 ‘청년희망 팩토리’, 미디어 크리에이터 양성을 위한 ‘1인 미디어 콘텐츠 산업 육성사업’, 외식업 창업 과정인 ‘경북청년 키친 랩’ 등이 있다. 특히 게임과 웹튠 산업을 집중 지원 육성하고 있다.- 특별히 착한 나눔이라거나 청렴도를 강조하는 이유가 뭐냐.△보궐선거로 시장에 당선됐다. 전임자의 중간 하차로 보궐선거가 치러졌고 그 과정에서 공무원들과 시민들의 자존심이 상처를 입었다. 고위 공직자로서 고향을 살려야겠다는 충정에서 선거에 뛰어들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후보였고 덕분에 돈 들이지 않는 선거를 했다. 이 후 깨끗함을 모토로 시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공직자는 모름지기 공정하고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어떤 자세로 3연임하고 시정을 이끌어 왔나.△작은 불편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 시민들을 참을성 있게 설득해서 시정이 올바르게 펼쳐지는 것은 시장보다는 직원들의 힘이다. 공직자들을 바르게 이끄는 것은 인사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시장이 되고는 바른 소리, 싫은 소리 듣기가 어렵다. 듣기 좋은 말만 하지만 가려서 듣고 판단해야 한다. 모두가 만족하는 인사를 할 수는 없지만 원칙에 따라 깨끗하게 하니 불만이 있더라도 수긍하고 승복하더라. □ 최영조 (66)최영조 경산시장(66) 경산. 대구상고, 영남대 행정학과. 경북대 행정대학원 수료, 경일대 명예행정학박사.23회 행정고시로 경북도에서 공직 시작. 봉화부군수 영주 구미 부시장, 경북도 보건환경산립국장, 공무원교육원장, 경제통상실장, 문화체육국장, 경주엑스포사무처장 등을 거쳐 의회사무처장을 끝으로 공직을 사퇴하고 2012년 경산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해서 당선. 본인은 2번만 하겠다고 작정했으나 3선 연임에 성공했다고. 전국기초단체메니페스트 경진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내심에 반해 대하소설 ‘대망’을 두 번이나 읽었다는 최 시장은 ‘관청민자안’(官淸民自安. 공직자가 깨끗하면 민생은 저절로 편안해진다)이라는 명심보감 문구를 집무실 벽에 붙여두고 실천하는 바른생활 공직자의 전범(典範)./이경우 편집위원.인터뷰사진/ 심한식기자

2021-10-04

경제 활성화·체감형 복지·나눔으로 지역상생 앞장

금방 끝날 것 같았던 코로나19가 두 번째 추석을 지나도록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시간이 약’이라고 했다. 갑갑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던 마스크도 그새 익숙해졌는지 이젠 민낯이 더 어색할 지경이다. 마스크 쓰는 날이 길어질수록 소상공인의 시름도 함께 깊어지고 있다. 한국수력원자력(주) 한울원자력본부(본부장 박범수)가 있는 울진군 역시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관광객의 발길이 뚝 끊기면서 지역경제가 고사 직전이다. 어려울 때 의지할 구석 하나 있으면 참 든든하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울진군에 힘을 보태고 있는 한울원자력본부의 ‘울진 사랑’이 눈물겹다. ◇판로 개척부터 랜드마크 지원까지 ‘지역경제야 살아나라’코로나19로 가라앉은 경기를 살리기 위해 한울본부도 한 몫 거들었다. 판로가 늘 고민이었던 지역 사회적경제기업을 위해 우체국쇼핑몰에 ‘지역 농수산물 브랜드관’을 개설했다. 단순히 새로운 판매 창구를 열어준 것에 그치지 않고 할인 프로모션도 함께 마련해 판매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호평을 받고 있다.마른 오징어며 미역, 조청 등 울진지역에서 생산된 농수산물이 대표 선수다. 아는 이들만 알음알음 찾았던 상품들이 온라인 쇼핑몰을 통해 차츰 입소문을 타는 모양새다.우체국 지역브랜드관에 입점한 지역업체 대표는 “한울본부가 마련해준 온라인 장터의 재미가 쏠쏠하다”며 “어디서들 알고 오는지 작년 대비 매출이 큰 폭으로 뛰었다”고 말했다. 한울본부가 마련한 가격 할인 프로모션은 관련 예산이 소진될 때까지 계속될 예정이다.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울진읍 바지게시장도 코로나19로 인한 경기 침체를 피할 순 없었다. 장날만 되면 발 디딜 곳 없을 정도로 북적이던 시장이 허전하기 일쑤다. 깊은 고민 끝에 상인들은 가보지 않은 길을 걷기로 했다. 자체 온라인 쇼핑몰인 바지게몰닷컴이 바로 그것. 상인들의 새로운 도전에 한울본부도 힘을 보탰다. 지난 4월 창립 20주년을 맞아 바지게시장 쇼핑몰 신규 가입자에게 쇼핑지원금 1만원을 지급하는 이벤트로 소비자의 눈길을 끌며 지원사격을 톡톡히 했다.신규 관광객 유치를 위한 노력 또한 열매를 맺었다. 지난 8월 5일 개장한 ‘죽변 해안스카이레일’이 그 주인공이다. 죽변 해안스카이레일은 울진 죽변항에서 후정해수욕장까지 2.4km의 해안선을 따라 놓인 왕복 궤도시설로 최대 높이는 11m에 달한다. 한울본부는 사업비 약 230억원 중 95억을 부담했다. 동해안을 따라 펼쳐진 절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 관광객의 관심을 끌고 있다. 실제로 개장 이후 한 달 만에 1만8천명이 방문하면서 울진군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발돋움하고 있다. 지역사회에서도 해안스카이레일이 불러올 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 효과에 기대가 크다.◇전기요금부터 TV수신료, 수도요금까지 ‘고지서에서 직접 확인해보세요’울진군을 위해 다양한 지원사업을 펴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보편적 복지형 사업을 향한 지역사회의 호응이 뜨겁다. 개별 주민마다 실생활에서 혜택을 직접 체감할 수 있어서다. 한울본부는 1996년 시작한 전기요금 보조사업을 통해 매년 꾸준히 발전소 주변지역 3개 읍면(북면, 죽변면, 울진읍)에 전기요금을 지원하고 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지역주민의 경제부담을 완화하고자 다른 분야로 지원 범위를 점차 넓혀가고 있다.전기요금에 이어서 발굴한 분야는 건강검진이다. 건강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하는 중요한 가치인 만큼 울진군민들이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2013년부터 종합건강검진을 전액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다. 지난 8년간 한해도 거르지 않고 시행한 끝에 약 1만2천명이 혜택을 받았고 총 지원금은 57억원에 달한다. 거동이 불편한 주민들을 위해 병원까지 가는 셔틀버스를 함께 운영하는 세심한 배려로 주민 만족도가 크다. 올해도 지역주민 2천200명이 건강검진 서비스를 받을 예정이다.TV수신료도 지원한다. TV수신료는 한국방송공사(KBS)가 방송법에 따라 징수하는 요금이다. 한 가구당 2천500원씩 매달 전기요금과 함께 부과된다. 한울본부는 2018년 KBS와 협약을 맺고 발전소 주변지역 3개 읍면 가정용 TV 앞으로 나온 수신료를 전액 지원했다. 시범 운영한 사업이 지역사회에서 큰 호응을 얻자 이듬해 울진군 전체로 범위를 확대했다. 울진군에 등록된 TV 2만여대에 부과된 TV수신료 총 6억여원은 2019년부터 한울본부가 일괄 납부하고 있다.2022년부터는 수도요금도 추가된다. 모든 울진군 관내 가정용 급수전 사용 가구에 월 5천원 한도로 상수도 요금을 보조할 계획이다. 현재 한울본부는 울진군 맑은물사업소와 손잡고 수도요금 시스템 개선 및 고지서 변경 등 사전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올해 7월 기준 맑은물사업소 요금부과 현황 자료에 따르면 지역주민 2만 가구 정도가 혜택을 볼 것으로 전망된다. ◇따뜻한 이웃사랑 나눔 실천 ‘어려울 때일수록 도와야죠!’모두가 어려운 시기인 만큼 상생 협력의 자세가 빛을 발하는 때다. 한울본부 역시 지역과 함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지난 7월 16일 자체 봉사단을 꾸려 코로나19 백신 접종 현장을 찾았다. 지역주민들이 원활하게 백신을 맞을 수 있도록 일일 도우미로 나서 일손 부족으로 허덕이던 보건당국의 어깨를 가볍게 했다.이날 접종대상은 접종 절차가 낯선 노년층과 학생들의 비중이 높았던지라 한울본부의 친절한 안내는 더욱 큰 힘이 됐다.울진군보건소 최용팔 보건사업과장은 “한울본부 덕분에 수월하게 예방접종을 마칠 수 있었다”며 “이른 아침부터 나와 지역주민들을 위해 수고해줘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했다.이웃을 향한 나눔 행보도 이어갔다. 울진군은 동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을 뿐만 아니라 농어촌 지역 특성상 대중교통 접근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져 복지 서비스 사각지대가 발생할 수 있는 지역이다. 2006년부터 한울본부는 지역 복지기관이 효율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고 마을 구석구석까지 찾아갈 수 있도록 차량을 지원하고 있다. 그동안 지역 복지시설에 후원한 차량은 총 37대다. 올해 역시 승합차 3대를 비롯해 트럭, 경차, 의료용버스 등 총 6대를 전달했다. 지난 5월에는 경북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직원들이 십시일반 모은 성금 2억여원을 전달하며 나눔문화 확산에 앞장섰다. 한울본부가 내놓은 기부금은 지역 자원봉사단체 활동 지원, 복지시설 운영 프로그램 후원 등 취약계층 복지증진을 위해 쓰일 예정이다.뿐만 아니라 설·추석, 창립 기념으로 찾은 장보기행사는 조용했던 장터를 모처럼 떠들썩하게 했다. 세 차례 행사에서 총 8천만원 상당의 농수산물을 구입해 정성스레 선물꾸러미로 만들어 지역 취약계층에 전달하며 전통시장도 살리고 이웃사랑 정신도 실천하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았다.한울본부 지역복지사업 업무를 담당하는 김종미 과장은 “코로나19가 길어지면서 지역사회에서도 어려움이 많다”며 “울진지역을 대표하는 기업으로서 지역과 함께 어려운 시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상생 협력에 최선을 다하겠다” 고 말했다./장인설기자 jang3338@kbmaeil.com

2021-09-30

1970년 초등학생 574만명서 현재 267만명으로 절반이 감소

최근 저출산 고령화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전국적으로 학령인구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학생 수 감소에 따른 학교 존폐문제는 정규교육과정의 첫 시작인 초등학교부터 시작된다. 학령인구 감소는 수도권보다는 비수도권, 비수도권 중에서도 지방 중소도시에서 더욱 심각한 상황이다. 이른바 ‘시골학교’라 불리는 농촌지역 초등학교들은 분교로 격하되거나 폐교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본지는 폐교위기에 놓였던 시골학교가 여러 가지 방안 모색으로 인해 되살아난 사례를 찾아보고 경북지역 학교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대안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글 싣는 순서1. 소멸 위기에 놓인 시골학교의 현실2. 시골학교에서 부르는 희망노래Ⅰ3. 시골학교에서 부르는 희망노래Ⅱ4. 경북도교육청 작은 학교 자유 학구제 명과 암5. 지속 가능한 시골학교 상상 아닌 현실로 □소멸 위기에 놓인 시골학교의 현실교육부가 실시한 ‘2021년 교육기본통계 결과’자료를 살펴보면 올해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전체 학생 수는 595만7천87명인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보다 0.9%(5만2천919명) 감소한 수치다.1970년 우리나라 초등학교 학생 수는 574만9천301명을 기록했다. 이후 2000년에는 401만9천991명으로 무려 70여만명이 줄어들었고, 2010년 329만9천94명, 2015년에는 271만4천610명으로 해마다 감소했다. 이후 2019년 274만7천219명에서 2020년 269만3천716명으로 잠시 늘어났지만, 이마저도 올해 267만2천340명으로 다시 줄어들었다. 1970년 당시와 비교하면 절반에도 못미치는 수준인 것이다.안타깝게도 자연적으로 감소하는 인구를 예전 규모로 다시 회복시킬 수 있는 물리적 대안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이 떠난 자리에 학교와 같은 기반시설들마저 사라지게 된다면 마을을 다시 찾는 사람은 대폭 줄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학령인구 감소는 인구가 집중된 수도권 보다는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은 비수도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비수도권 지역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은 농어촌 지역에서 학령인구 감소는 폐교라는 최악의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지난 40년 동안 전국에서 폐교된 초·중·고등학교는 3만8천55개교에 이른 것으로 집계됐다. 특히 폐교가 가장 많은 지역은 전남으로 전체 문을 닫은 학교의 21%인 833개교를 차지했으며 바로 그다음이 경북(732개교), 경남(582개교), 강원(464개교) 순이었다.올해도 전국에서 6곳의 학교가 ‘재학생이 1명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휴·폐교에 들어갔다. 폐교된 학교 다수가 가진 공통점은 규모가 작은 농산어촌지역을 중심으로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저출산 현상이 심화하면서 학령인구가 꾸준히 줄어드는 가운데 2023학년도부터 향후 5년간 초등학교 입학 인원은 해마다 감소해 현재의 ⅔수준으로 급격하게 감소할 전망이다.2022학년도까지 42만명대인 초등학교 입학 인원은 2023년도부터 4년간 3만2천명, 4만8천명, 3만명, 2만4천명으로 계속 떨어지는 추세다. 2026학년도에는 초등학교 입학생이 29만5천명으로 대폭 감소한다.한국교육개발원 통계에 따르면 2020년 4월 기준 전교생 60명 이하 소규모 초등학교는 전국적으로 1천488개교로 집계됐다.특히 경북지역의 경우에는 231개교로 전국 17개 광역지자체 중 소규모 초등학교가 가장 많은 것으로 확인됐다. □‘시골학교 살리기 운동’이 불러온 기적입학생이 없어 폐교 위기에 처한 농촌지역의 학교들이 갈수록 느는 가운데 ‘시골학교 살리기 운동’이 전국 지자체를 중심으로 확산하고 있다.이 같은 노력에 부응하듯 ‘학교를 살리자 마을이 되살아났다’는 반가운 소식이 지역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일례로 1932년 3월 개교한 충북 옥천 지역에 청성초는 1970∼1980년 베이비 붐 세대들이 초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시절 전교생이 한때 1천여명에 이를 정도로 학생 수가 많았다.그런데 1990년대 말부터 이촌향도 현상이 발생하며 인구 유출이 장기화했고, 결국 지난해 전교생이 16명을 기록하게 됐다.문제는 전교생이 20명인 상황이 3년 동안 지속될 경우 학교를 분교로 격하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이에 지역 주민과 옥천군·총문회는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고 ‘청성초 살리기’ 운동에 두 팔을 걷고 나섰다.이들은 전국에서 유일한 정주 여건과 지원금을 함께 지원하는 ‘교육지원 정책’을 만들었다. 청성초는 숙소 무료 제공, 전교생 장학금 지급 등 각종 파격 혜택을 내세우며 적극적인 홍보를 펼쳤다. 전국의 맘 카페는 물론 학부모 모임 동아리, 교육자 모임 동아리 등 학생들과 관련한 모든 전산망에 홍보를 진행했다.이후 지난 8월 기준 8가구, 모두 10명의 학생이 이주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또 9월께 2가구의 이주로 학생 2명이 더 늘어날 것으로 보여 당분간은 분교 격하에 대한 걱정은 한시름 덜어 놓은 상황이다.경남 거창군의 신원초등학교도 지난해까지만 해도 올해 입학생이 없어 5학급으로 줄어들 위기에 놓여 있었다. 학교는 유치원 아이들의 수가 3명밖에 되지 않아, 앞으로 3∼4년 뒤면 자연스럽게 분교와 폐교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이 같은 상황을 알게 된 지역 주민과 동문회는 아이들을 유입 위해 ‘작은 학교 살리기’ 운동을 전개했고, 그 결과 올해 3명의 입학생이 신원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입학생뿐만 아니라 유치원생과 2학년, 3학년 학생도 늘어 20여명 남짓했던 전교생 수가 유치원생을 포함한 무려 32명으로 늘어났다.특히 올해 신원면에는 네 가정이 전입했으며 앞으로 두 가정이 추가로 전입할 예정이어서 신원면 인구 또한 지난해 말과 비교하면 28명이 더 증가했다.신원면의 인구증가 및 신원초 학생 수의 증가는 거창군과 협업해 학교에서 자체 계획을 수립하고, 과감한 학생 복지 및 시설 투자를 통해 학생들을 유치한 노력에서 이뤄진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경북지역의 시골학교 살리기 현주소경북도교육청은 소규모 학교를 살리기 위한 방안으로 2019년부터 ‘작은 학교 자유 학구제’를 도입하며 작은 학교 살리기에 나서고 있다.작은 학교 자유학구제는 작은 학교 학구를 큰 학교 학구까지 확대해 큰 학교 학생들이 주소이전 없이 작은 학교로 일방향 전·입학이 가능하도록 학교 선택권을 주는 제도다.2019년 첫해 29개 초등학교를 대상으로 시범 운영한 결과 작은 학교로 134명이 유입돼 학교당 평균 4.6명의 학생이 늘어나는 효과를 얻었다.경북도교육청은 올해 자유학구제 운영대상학교를 143개 학교로 확대하고 작은 학교를 살리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일 방침이다.하지만, 이 같은 교육청 차원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지역 주민과, 지역 기관단체 교직원들의 유기적인 협력을 통해 ‘가고 싶은 학교’를 만들기 위한 자구책 마련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누구 하나의 노력만으로는 이 같은 성과를 달성하기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경북도교육청 관계자는 “자유학구제는 지역 내 과밀학교나 학급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작은 학교를 살리는 ‘윈윈(Win-Win)’전략으로 생각한다”며 “작은 학교 자유학구제의 안정적인 정착과 활성화로 농산어촌의 작은 학교가 정상적인 교육과정 운영이 가능하게 해 도농 간 교육격차를 해소하겠다”고 밝혔다./이시라기자 sira115@kbmaeil.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1-09-30

추모와 함께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는 ‘공원’ 만들어야

백번 듣는 것이 한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뜻의 ‘백문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다.종합장사시설도 사진이나 영상 혹은 글을 통하는 것보다 직접 방문해 볼 기회가 있다면 꼭 방문해보길 추천하고 싶다. 같은 맥락에서 담당자에게 직접 듣는 조언도 소중할 수밖에 없다. 이에 인천가족공원 및 세종은하수공원 담당자와의 인터뷰를 대담형식으로 풀어봤다.인천가족공원은 인천시설공단 가족공원사업단 강서구 과장(이하 강)이, 세종은하수공원은 세종시설관리공단 은하수공원사업소 이현섭 팀장(이하 이)이 인터뷰에 응했다. 이어 전국 최고의 종합장사시설 마련의 포부를 가지고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포항시 담당자와의 일문일답도 준비했다. 글 싣는 순서 1. 장사시설과 장사문화, 우리는 장사를 어떻게 보고 있나 2. 포항시, 종합장사시설 마련 첫걸음 3. 장사시설 선두주자 인천 가족공원 4. 시민의 품 안에 세종 은하수 공원 5. 장사 문화 개선을 위해 포항이 나아가야 할 방향 인천시설공단 가족공원사업단 강서구 과장 / 세종은하수공원사업소 이현섭 팀장“공원화 통한 시민 인식 변화·편리한 접근성이 성패 관건”- 인천가족공원이나 세종은하수공원 모두 종합장사시설로는 선진적이고 모범적인 곳이다. 각 시설만의 장점이 있다면.강: 도심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을 인천가족공원의 장점으로 우선 꼽고 싶다. 인천가족공원은 인근에 지하철도 있고 버스도 다니고 해서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평일에도 3천명에서 4천명이 오가고, 명절에는 35만명이 방문한다. 아마 인천가족공원이 방문객 규모로는 전국에서 가장 많을 것이다. 공원 자체가 늘 확장하고 있다는 점도 꼽을 수 있다. 이를 통해 일반적인 장사시설이 아니라 공원화해서 시민들이 와서 휴식을 즐길 수 있게 조성하고 있다. 혐오에서 추모로 인식을 바꾸는 것이 일반적인데, 우리는 추모에다 휴식까지 플러스해서 개념이 들어간다고 보면 된다. 또 다른 장점으로 온라인 성묘도 있으며, 종합적으로는 항상 능동적으로 대처한다는 부분이 인천가족공원의 큰 장점이라고 볼 수 있다.이: 은하수공원의 가장 큰 장점은 장례부터 안장까지 모든 서비스가 한곳에서 제공된다는 점이다. 36만㎡의 부지에 10개 빈소의 장례식장, 초대형 화로 10개를 갖춘 화장장, 2만기 안장 규모의 봉안당, 그리고 공원형 장사시설로서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잔디장과 도시형 수목장이 조성돼 있으며, 현재 산림형 수목장과 화초장 및 어린이 테마장지를 추가로 조성 중에 있다. 또한 상조회사 가입 유무에 관계없이 24시간 상주하는 세종시설공단 장례지도사 직원들의 체계적인 종합장사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는 점도 큰 장점이다.- 조성과 관련해 지역 주민들과의 갈등은 없었나. 혹은 그들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은 어떤 것이 있었나.강: 인천가족공원이 위치한 이곳의 산 자체가 예전부터 일반 사용자들의 묘지였다. 이를 친 자연장으로 개장하며 보상을 적절하게 진행했다. 묘지 자체가 부지도 많이 차지하고 인식도 점점 좋지 않게 바뀌고 있는 상황이라 자연장으로의 개장에 대해 큰 반대는 없었다. 또한 근교에 꽃집을 마련해 우선순위로 이를 운영할 권리를 줬다. 이러한 점을 바탕으로 인천가족공원은 대규모 부지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인천가족공원의 화장시설은 전국 2위정도지만, 안치규모는 전국에서 최고의 규모다. 아직도 조금씩 확장해 나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전국최대규모가 될 수밖에 없다.이: 세종시의 조성과 함께 만들어진 곳이라 큰 반대는 없었다. 다만 설립 이후 주민들과의 긍정적 관계 유지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우선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견학프로그램을 운영해 화장을 통한 자연장의 장점을 적극 홍보했을 뿐만 아니라, 시니어클럽 어르신들과 시민 자원 봉사자들이 은하수공원 장례문화홍보관 운영에 직접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해 선진 장례문화 전파에 노력하고 있다. 또한 은하수공원에는 늘해랑이라는 시민공원이 조성돼 있는데 이곳은 평소 시민들의 산책 공간, 어린이들의 생태학습장으로 활용되고 해마다 가을에는 은하수공원 축제를 개최해 1만명 이상의 시민이 가족단위로 방문해 벼룩시장, 사생대회, 걷기대회 및 음악 공연을 즐기기도 했다.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화장 문화와 자연장에 대한 긍정적인 면을 알리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포항시가 새롭게 종합장사시설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포항에 조언을 한다면.강: 주민들의 인식을 바꾸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누구나 방문할 수 있는 공원을 만들겠다”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혐오시설이란 인식을 없애고 점차 공원화로 탈바꿈해야 주민들의 인식도 바뀐다. 접근성도 너무나 중요하다. 비용을 포기하더라도 접근성이 좋아야 한다. 가족공원을 처음 본 시민들은 대부분 잘 조성된 공원의 모습에 깜짝 놀란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기존의 부정적인 인식을 바꾸는데 몇십 년이 걸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접근성이 떨어져 주민들의 방문이 원활하지 않을 경우 인식 개선은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또한 인천가족공원에는 주민지원기금협의체란 것이 있다. 이를 통해 인근 4개 동에 화장시설의 일부 수익금 등을 기부했다. 공원의 개선과 발전도 주민이 있어야 가능하다. 주민의 민원과 비판이 있었고, 이를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과정을 통해 지금 인천공원으로서의 발전이 가능했다. 지금은 인천가족공원 자체가 인천의 큰 혜택이 됐고 행운이 됐다.이: 비록 은하수공원은 시민들의 큰 반대 없이 건립이 추진돼 원활하게 운영돼 왔지만, 장사시설은 무엇보다 인식 개선이 필요한 시설임에는 분명하다. 신규 장사시설을 설치하고자 하는 대부분의 지자체가 지역주민의 반대에 부딪히고 해당 지역 주민을 위한 혜택을 제시하지만 집단 동의를 얻기란 쉽지 않다.장사시설이 가족과 이웃에게 꼭 필요한 필수 시설임을 알려 갈등을 해소하고 서로 공생할 수 있는 보완책 마련에 대한 최우선적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포항시 한상호 복지국장“고인엔 존엄·가족엔 위로의 공간으로”- 종합장사시설 건립을 준비하면서 어려운 점이 있나.먼저 포항시추모공원건립위원회 발족 이후 현재까지 9회에 걸쳐 회의를 진행해오면서 다양한 주민지원방안 및 시민홍보방안, 주민 마찰을 최소화하려는 방안, 추모공원 내 문화·예술·관광·교육 및 힐링공원을 조성하기 위한 세부적인 방안 등을 마련하는데 있어 시의원, 환경단체, 시민대표, 공무원, 장사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위원들과의 시각 차이를 좁히는 부분이 어려웠다. 또한 시민과 눈높이를 맞추면서 선진장사시설의 잘된 부분을 본받는 동시에 잘못된 부분은 개선하면서 창의적인 공원건립을 위해 다양한 의견과 아이디어를 좁혀 가는 데 있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이러한 추모공원 건립사업은 마치 퍼즐 맞추기나 바둑을 두는 느낌이 든다고 생각된다. 단순한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포항시민의 전반적인 생각과 유치 지역민의 예상되는 요구 사항, 그리고 관련 부서별 행정적 처리절차 및 과정, 추후 예상되는 민원 등을 미리 생각하고 대책을 세워야 하는 일련의 복잡다단한 百年之大計(백년지대계)를 이루는 과정이라고 본다.- 앞으로도 갈 길이 멀다. 타 시군과 비교될 수밖에 없을 건데, 이와 관련해 준비하고 있는 포항시만의 특화된 내용은 있는지.포항시는 타지역 장사시설과 다른 특화된 지리적 환경을 보유하고 있고, 더불어 인프라 역시 잘 돼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사통팔달로 뻗어진 도로 및 철도 환경으로 인해 접근성이 용이하다. 여기에 산과 바다, 들녘으로 이뤄진 지리적 환경성을 최대한 활용하고 좋은 풍수에 추모공원이 자리한다면 더욱 금상첨화라고 생각된다.특히 포항시는 추모공원건립위원회에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통해 시민들이 만족하고 지역주민들에게는 유치에 환영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아이디어와 특화된 내용을 준비하고 있다. 추모공원 내 장사시설과 일반공원을 분리하고, 장사시설 내 추모객에게는 고인에 대한 존엄을, 가족에게는 위로가 되는 시설 등의 분위기를 만들 예정이다. 일반공원 내 방문하는 공원에는 명상공원 등 다양한 테마가 있는 공원 및 문화 콘텐츠를 통해 지역민뿐만 아니라 국·내외 많은 관광객이 방문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할 계획이다.- 향후 계획과 포항시민들에게 한 말씀.먼저 10월 중 후보지 공모를 시작으로 건립타당성 및 후보지 선정조사 용역을 거칠 계획이다. 이어 오는 2022년 6월 부지선정을 통해 주민지원기금 및 시설관리운영 조례를 제정하고 2025년 12월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추모공원 건립은 현재 포항시가 안고 있는 현안 중 무엇보다도 시민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사항이다. 시민 모두 크게 보면 추모공원의 필요성과 그 중요성을 인지하지만, 근시안적으로 본다면 사사로운 이익으로 큰일을 그르칠 수 있다. 이에 和而不同(화이부동) 철학으로 개인 각자의 생각을 모아 조화롭고 지혜롭게 해 모든 시민의 큰 뜻을 꼭 이룰 수 있도록 많은 응원과 성원을 부탁드린다.□ 추모는 복지다글을 마무리하며 추모(追慕)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사전적으로는 죽은 사람을 그리며 생각한다는 의미인데, 우리에게 왜 추모를 할 수 있는 장소는 혐오시설이 됐을까 반문한다. 또한 묘지, 사후세계, 장례, 죽음 등이 왜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을까란 의문도 든다.몇 년 전 지인의 추천으로 ‘코코’라는 애니메이션을 본 적이 있다. 2018년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한 명작이기도 하다. 멕시코의 시골에 사는 미겔이라는 소년이 사후세계를 방문하며 겪는 일을 풀어내고 있는데, 그 배경이 멕시코 고유의 명절인 망자의 날(Dia de Los Muertos)이다. 사후세계를 묘사한 분위기가 너무나도 밝고 아름답다는 점에 이끌려 망자의 날에 대해 좀 더 알아보니, 맥시코에서 망자의 날은 국가적인 명절이자 축제였다. 이 기간에 사람들은 해골 장식물을 만들고 분장을 하며 퍼레이드를 하거나, 각자의 집에 고인의 사진과 주황색 멕시코 국화 꽃잎으로 제단을 만들어 기린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여기에는 죽음에 대한 멕시코인들의 인식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멕시코인들은 기억해 주는 자가 이승에 아무도 없게 된 영혼은 결국 소멸한다고 믿었는데, 결론적으로 이들에게 추모는 사후세계에서 영혼이 존재하기 위해 꼭 필요한 조건이 된다. 추모가 일상에 녹아들어 있는 이유다.우리가 멕시코처럼 바뀌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장사시설은 혐오시설이며 장례와 추모는 단순한 개인적인 문제다”라는 비판 때문에, 종합장사시설 마련을 통해 소중했던 고인을 가까운 곳에 모시고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한다. 추모는 이제는 복지다. 그것도 몇몇에 국한된 것이 아닌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똑같은 복지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고, “아름다운 장소에서 생을 마감하고 가족으로부터 영원히 기억되고 싶다”라는 욕구는 모두에게 동일할 것이기 때문이다./전준혁기자 jhjeon@kbmaeil.com끝

2021-09-29

여행자들은 ‘코로나19’ 소멸을 기다리고 있다

한국인들의 여름휴가가 대부분 마무리되는 9월 말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우리네 일상을 깨뜨리기 전 이맘때쯤이면 ‘올해는 몇 백만 명의 사람들이 해외로 여행을 다녀온 것으로 집계됐다’는 뉴스가 TV 화면을 장식하곤 했다.슬그머니 찾아와 질기게도 떠나지 않으며 전 세계를 공황과 우울증 속으로 빠뜨리고 있는 코로나19. 이 ‘역병’은 벌써 2년 가까이 다른 나라로 가고자 하는 여행자의 의지를 막고 있다.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며 해외여행은 적지 않은 한국인에게 일상이 됐다. 신혼부부는 물론 가족이나 친척들, 연인과 친구들은 휴가 때면 삼삼오오 짝을 이뤄 가까운 아시아는 물론, 멀리 유럽을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모험심 가득하고 먼 곳에 존재하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설레던 청년들은 배낭 하나만을 메고 미지의 대륙이라 불리는 아프리카나 지구 반대편 남아메리카로 장기여행을 떠나기도 했다.‘코로나19 사태’는 여행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가로막았다. 바이러스의 높은 전염성을 우려한 많은 나라들이 코로나19 유행 초기에 국경을 닫았다. 불가피한 방문의 경우에도 격리 기간을 거쳐야 외국에 갈 수 있었다.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민족의 삶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고자 했던 여행자들은 실망감에 빠졌다.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유럽에서 아시아로 사람들을 실어 나르던 비행기와 배의 숫자가 대폭 줄었다.하지만 어떤 비극적 상황에도 끝은 있는 법. ‘코로나19 시대’가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은 소수지만 백신 접종을 완료한 몇몇 여행자들은 다시 해외여행에 나서고 있다. 이 추세는 앞으로도 가속화 될 듯하다.여행지에서 그 나라가 세운 방역지침을 철저하게 지킨다면 크게 불편할 것이 없다는 이야기도 조금씩 흘러나온다.“세상 어떤 것도 코로나19 이전과 같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미래학자도 존재한다. 그렇다고 다른 세계를 궁금해 하는 인간의 욕망이 코로나19 사태 이전과 달라질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낙관적인 감정을 가지고 코로나19가 사라지는 때가 오면 그곳으로 날아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싶은 나라를 떠올려보는 건 해외여행을 꿈꾸는 이들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한다. 아래 코로나19 시대가 끝난 후 가볼만한 여행지 몇 곳을 소개한다. 보석빛 바다가 역병 겪은 사람들 위로할 크로아티아 푸른 보석의 빛깔로 반짝이는 바닷가에서 수영을 즐기거나 비치베드에 한가롭게 드러누워 책을 읽는 건 여름을 보내는 가장 즐거운 방법이 아닐까.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여름다운 여름을 보내지 못해 발을 굴렀던 이들이라면 크로아티아로 떠나볼 것을 권한다.크로아티아는 10년 전쯤만 해도 한국엔 잘 알려지지 않은 여행지였다. 하지만 TV 프로그램에서 연예인들이 다녀온 크로아티아의 도시 두브로브니크와 스플리트 등을 소개하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동유럽의 보석’으로 불리는 이 나라는 붉은 지붕과 푸른 바다가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엽서 같은 풍경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해변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이른바 ‘인생 사진’을 건질 수 있는 두브로브니크는 역병에 몸서리쳤던 시간을 잊고 그곳을 찾은 여행자의 얼굴에 미소를 선물할 듯하다.아드리아해 동부에 위치한 크로아티아는 연중 쾌적한 지중해성 기후로 유명하다. 인구가 한국의 1/10이 채 되지 않아 관광지라 해도 조용하고 한가로운 느낌을 준다.이전엔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이루던 공화국의 하나였지만 1991년 독립했다. 앞서 말했듯 해변도 좋지만, 수도인 자그레브를 가로질러 흐르는 사바 강과 헝가리 국경으로 흐르는 드라바 강, 세르비아와의 경계가 되는 도나우 강의 풍광도 그저 그만이다.스플리트는 사파이어빛 바다와 고대 로마의 건축물이 조화를 이룬 유명 관광지인데 다녀온 한국 여행자만이 아니라 유럽인들도 이곳의 풍경에 엄지를 치켜세운다. 여기에 그림 같은 폭포와 진녹색 나무들이 동화적 풍경을 만들어내는 플리트비체 국립공원도 관광객들이 손꼽는 크로아티아의 핫 플레이스다.큼직한 오징어에 빵가루를 입혀 튀겨낸 ‘리그네’와 생선을 토마토와 함께 끓여낸 ‘브로데트’, 쇠고기를 갈아 만든 ‘체밥치치’ 등이 크로아티아의 특미. 시원한 맥주 한 잔 앞에 놓고 짙푸른 아드리아해를 바라볼 날이 빨리 왔으면. 앙코르와트 지붕을 물들이는 붉은 석양의 캄보디아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기 전 한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여행지는 동남아시아였다. 7~8월이면 베트남과 태국의 유명 관광지엔 어느 곳에서도 한국말로 대화하는 여행자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다낭, 나트랑, 방콕, 푸켓 등에는 그곳에 정착한 한국 사람들이 운영하는 여행사와 식당, 카페가 넘쳐났다. 비교적 저렴하게 여행할 수 있기에 비용에 대한 부담이 적은 여행지가 많았던 동남아시아. 베트남, 태국과 국경을 맞댄 캄보디아 역시 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찾았던 나라다. 여기엔 천년 동안 밀림 속에 모습을 숨겼던 크메르의 유적 앙코르와트가 있다. 유럽의 어떤 유적과 비교해도 격조가 떨어지지 않는 아름다운 석조 건축물. 아직 빈곤에서 온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캄보디아는 앙코르와트를 찾는 여행자들이 사용하고 가는 외화로 국가 기반시설을 만들고, 학교를 짓기도 했다. 그런 발전의 길을 바이러스가 막고 있으니 작지 않은 문제다.인도차이나 서남부에 위치한 캄보디아는 1970년대엔 수백 만 명의 국민이 죽는 혹독한 학살의 역사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국민들은 친절하고 외국인에 대한 경계심이 거의 없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탓에 유럽풍으로 만들어진 빵도 맛있다. 거리에선 주황색 승복을 입은 꼬마 스님들과 눈인사를 나누는 정겨운 풍경도 연출된다. 천연고무와 농산물, 목재 등을 주로 수출하는데 수도인 프놈펜과 앙코르와트가 있는 시엠립, 해변도시 시아누크빌엔 무역업과 관광업에 종사하는 한국인들이 많다. 그들도 코로나19 사태의 여파를 혹독하게 겪고 있는 중이다. 비행기로 4~5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캄보디아는 흙먼지 날리는 시장에서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자신이 살아온 삶을 진지하게 반추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여행지다.1천 년 전. 신이 되고자 했던 크메르 왕들의 지시로 만들어진 사원을 돌아보며 유한한 인간의 삶과 무한한 역사를 떠올릴 수 있는 도시 캄보디아 시엠립. 앙코르와트 지붕으로 떨어지는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던 때가 그립다. 푸른 초원에 누워서 밤하늘 별을 올려다보는 몽골 “밖으로 나가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바이러스 감염의 위험성을 높이는 행위다. 가능하면 집에 머물며 외출을 자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권고와 경고를 내내 들어야했던 게 코로나19 시대. 갑갑함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이들은 마음껏 산책하고 달릴 수 있는 탁 트인 공간이 간절했을 것이다. 푸른 초원이 주는 위로와 치유의 힘을 믿는 여행자라면 바이러스 소멸과 동시에 몽골로 떠나보는 게 어떨까.도심에서 30분만 차를 타고 나가면 끝없이 펼쳐지는 초원. 양과 말이 뛰노는 그곳엔 아시아에서 출발해 유럽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원나라의 황제 칭기즈칸의 후예들이 산다. 주위를 둘러싼 휘황한 네온사인과 콘크리트 건물에 가슴 답답해하던 한국 여행자들에게 몽골은 원시적이며 황량한 풍경을 보여줌으로써 ‘여행은 번잡한 일상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고요한 낙원’이라는 사실을 알렸다.아시아 중앙에 자리한 내륙국 몽골은 동서양 여러 국가에 사회·문화적 영향력을 미쳤다. 앞서 말한 칭기즈칸이 주도한 정복전쟁이 가져온 효과였다. 수도인 울란바토르에 대부분의 국민들이 살고 있지만, 몽골의 매력은 도시가 아닌 초원에 있다. 인접국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 세계에서 두 번째로 공산주의 국가가 됐지만, 얼마 전부턴 경제난 해결을 위해 자본주의 국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기에 여행자가 걱정할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과묵하고 진중하지만 관광객을 웃음으로 따뜻하게 맞아주는 몽골 사람들의 성정은 유목생활에서 생겨난 것처럼 보인다.작지만 옹골찬 몽골 말을 타고 초원을 돌아다니거나 트래킹을 즐기다가 이동식 텐트 게르에 몸을 누이기 전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낭만. 그걸 기다리는 여행자들을 위해서라도 코로나19 종식 소식이 어서 들려왔으면 좋겠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9-29

“경북 최초 전자상거래 라이브 커머스 인증 기업이죠”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초년생으로 현실의 벽에 좌절하고 ‘내가 뭐하러 공부를 했나’하는 자괴감에 빠지는 나이 20대. 때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에 고민하기도 하고, 소소한 행복을 맛보며 넌지시 웃음을 보이기도 하는 나이 20대. 그 20대의 나이에 경북 최초의 라이브 커머스(실시간 동영상을 통해 상품을 판매하는 방송)를 업으로 하는 회사의 대표인 청년이 있다.주인공은 1993년생인 김규식(28) 대표. 라이브 커머스와 마케팅, 무역을 주로 하는 ‘KCI’라는 회사의 어엿한 대표다. 현재 직원만 6명이며, 모두 도시에서 포항으로 이주한 청년들이다. 김규식 대표의 이력도 20대 청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화려하다. (재)환동해산업연구원 이사로 선임됐으며, 중국 비즈니스 협회의 이사도 겸하고 있다. 또 칭다오 도시개발구 협회 정회원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경상북도의 도시청년시골파견제의 도움을 받아 해삼을 중국에 수출하는 무역업을 했어요. 중국 절강이공대학에 교환학생으로 있으면서 인맥을 만들기도 했고, 코이카 활동을 했던 경험을 살려서 무역업을 했죠. 처음에는 성과가 좋았어요.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다른 분야로 눈을 돌려야 했죠.”현재 김규식 대표의 라이브 커머스 사업은 확장 추세다. 전문 쇼호스트 20여 명과 팀 계약을 했다. 이 중에 2명은 중국어가 가능한 전문 쇼호스트다. 이번 달에만 포항의 설머리 물회지구와 대구 약령시 청년몰을 홍보하는 라이브 커머스 방송을 진행했다.“올해 포항 설머리 지구의 횟집 한 곳을 대상으로 라이브 커머스 방송을 했어요. 근데 방송을 시작하고 10분도 안 돼서 480만원 가량의 매출이 일어났어요. 그야말로 센세이션이었죠. 물론 저희도 그만큼 매출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하지만 라이브 커머스의 시장이 커지면서 기대를 뛰어넘었죠. 방송의 효과가 좋았기 때문에, 9월 14일에는 설머리 물회지구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라이브 커머스 방송을 했어요.”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날도 마찬가지였다. 경북 성주에서 올라온 판매자들이 딸기로 만든 제품을 한가득 들고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리고 스튜디오 안에서 방송을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닌가.“저분들도 도시청년시골파견제로 시작한 분들이세요. 딸기청 등의 제품인데 오늘 라이브 커머스로 판매를 하려고 합니다.” □대구 청년, 포항에서 기지개를 켜다그렇다면 20대 청년 김규식 씨는 어떻게 해서 포항으로 오게 된 것일까. 사실 김규식 대표는 현재 포항에 큰 연고가 없다.“사실 어머니와 아버지의 고향이 포항이에요. 하지만 전 대구가 고향이구요. 그런데 아직 대학을 졸업하지는 않았어요. 창업을 할 당시에 한 학기가 남았었지만, 경상북도의 도시청년시골파견제에 지원하면서 휴학을 해야 했죠. 아직도 휴학생 신분이죠.(웃음) 그때 선택한 아이템이 해삼이었어요. 2019년이었죠. 당시에 저희 회사는 무역을 주로 했어요.”김규식 대표에 따르면, 초창기 해삼 무역은 ‘쏠쏠’했다. 중국의 인맥 덕분인지 주변의 도움도 상당했다. 하지만 갑자기 코로나19가 터지면서 해삼 사업은 타격을 받았다.“지금도 해삼 무역을 완전히 접은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코로나19 이전 만큼은 아니죠. 그때 생각한 것이 경북의 중소기업과 중국의 기업을 연결하는 바이오 매칭 사업을 생각했어요. 생각보다 좋았어요. 작년에는 DGIST의 해외 바이오 매칭 사업을 주관하기도 했고, 경일대학교 산학협력단과 해외전시관 사업을 했어요. 또 포항시 사회적기업협의회의 해외전시관 사업도 주관했구요. 그리고 올해는 무역 플랫폼인 알리바바 닷컴에 입점했죠.”“사업이 잘되니까 국내 온라인 유통 사업에도 도전을 해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경상북도에는 괜찮은 아이템이 많거든요. 보통 소상공인들과 제조업의 스타트업 기업들은 판로 개척이 제일 힘들잖아요. 그것을 내가 한 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죠. 그리고 열심히 하니까 주변에서 많이 도와도 주셨구요.”이렇게 김규식 대표의 도전이 성공하면서 그의 회사는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다. 투자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물론 그의 꿈이 크기 때문에 투자 제의는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현재 직원은 모두 6명이다. 직원들의 고향도 대부분 서울과 대구다. 김규식 대표의 포항 정착이 또 다른 청년의 유입을 가져온 셈이다.그런데 이러한 김 대표는 욕심이 많다. 사실 생긴 모습만 봤을 때는 순딩이었다. 약간은 통통한 느낌에 아기자기한 부분도 보였다. 다만, 말과 행동에는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저희가 2019년부터 사업을 시작했어요. 그리고 올해는 라이브 커머스 쪽으로 투자도 많이 했구요. 직원들이 대부분 중국어를 할 수 있어요. 최종적으로는 쇼호스트들을 중국에 진출시키는 것이 목표에요. 한국의 제품을 중국어로 중국에 판매를 하는 거죠. ‘왕홍’이라고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유튜버 또는 쇼호스트가 있어요. 대형백화점의 경우에는 유명한 왕홍을 초대해서 하루 매출 5천억원을 기록하기도 하거든요. 잘 될 것이라고 봅니다.” □맞춤형 인프라 필요, 청년들이 사업하기 좋은 경북이었으면그런 그에게 물었다. 평범한 대학 생활을 마치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 부럽지 않냐고 말이다.“저는 지금이 정말 좋아요. 만족하고 있죠. 하지만 사업을 하는데 있어 수도권이 인프라가 부럽기는 해요. 포항이 시골은 아니지만, 서울만 가면 제품 생산을 위한 인프라가 정말 좋아요. 지역에서는 제품을 만들기 위한 인프라가 정말 부족하죠. 라이브 커머스도 마찬가지에요. 실제로 저희는 지금도 일산이나 서울에 가서 촬영하는 일이 많아요. 가수 등 유명인들을 초청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죠. 지역에서는 그분들을 모셔오기가 힘들어요. 그분들을 포항에 부르기 위해서는 출연료로만은 안되거든요. 교통비에 숙박비 등등 지출이 많아요.”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김규식 대표의 사무실과 스튜디오를 둘러봤다. 직원들은 라이브 커머스 방송을 위해 알록달록한 소품들을 만들고 있었다. 마치 기성 제품과 같은 퀄리티였지만, “모든 것을 직원들이 직접 제작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다만 스튜디오는 조금 좁아 보였다. 사무실 한 켠에 방송용 조명과 무대를 만들고 작은 카메라를 이용한 방송을 하고 있었다.다만, 회사가 커지면서 직원 충원을 고민하고 있다는 김규식 대표. 그에게 청년들이 로컬로 부르기 위한 대책을 물었다.“가장 큰 문제가 대한민국은 너무 획일적이에요. 제조업에 치중된 것이죠. 모두 4차 산업, 6차 산업 등에 한정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좋은 제품을 만들어도 소비자들이 최소한 한 번은 사용을 해봐야 하잖아요. 그 제품이 퀄리티가 좋은지 좋지 않은지 알려면 말이죠. 그런데 이 제품을 판매를 하지 못해요. 그리고 회사는 도산하죠. 사실 지역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계속 반복되고 있어요. 결국은 판로가 있어야 하죠. 누구든지 사줘야 하는데, 살 사람이 없으면 안되잖아요. 그런데도 한국은 제조업에만 치중하고 있어요.”그리고 더 충격적인 이야기도 있었다. 바로 김규식 대표의 KCI가 경북 최초의 전자상거래 온라앤 판매 부분 인증기업이라는 사실이었다. 시작한지 만 3년이 안되는 기업인데 말이다.“경상북도에서 저희가 라이브 커머스 업체로는 처음으로 알고 있어요. 기술평가 인증기업으로는 유일하구요. 저희가 라이스에서 우수기업으로 인증을 받았어요. 경북에서 전자상거래의 온라인 판매 부분에서 인장을 받은 것은 저희가 처음이죠. 이제 사업을 시작한 시간이 3년도 안되는 데 말이죠. 사실 조금더 신경을 써주셨으면 좋겠어요. 정책적으로 말이죠. 저희 같은 기업들이 오래 살아남고 성과를 보이기 위해서는 맞춤형 지원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거든요.”그래서 물었다. 포항 영일대 해수욕장 주변에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전문적인 촬영장소가 있다면?“그러면 정말 좋죠. 일산이나 서울에 출장을 갈 일이 많이 줄어들거든요.” /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1-09-28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해야 진짜 사진이지”

평생 예술을 한 작가에게는 자신만의 세계관이 있기 마련이다. 이도윤 선생이 일관되게 추구해온 작가 정신은 무엇일까? 그에게 대한민국 미술대전(國展)과 국제사진공모전에서 입상한 작품들의 뒷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조 : 사진작가로 살아간다는 게 참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이 : 아내 도움이 컸지. 육거리에서 사진관을 할 때였는데 한 여성이 사진을 가르쳐달라고 왔더군. 그게 인연이 되었지. 내가 사진에 빠져 사는 바람에 가정에는 거의 신경을 못 썼어. 연탄 한 장, 쌀 한 가마니가 얼마인지도 몰랐지. 사진 촬영대회가 있을 때면 아내가 항상 따라가고 사진 작업도 많이 도와줬어. 좁고 꽉 막힌 암실에서 작업할 때는 아내가 30분에 한 번씩 노크해. 내가 살았나 죽었나 농담을 던지며. 사진작가 이도윤은 내 아내가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조 : 암실 이야기를 하셨는데 흑백 사진은 작업하기가 상당히 까다롭지요?이 : 요즘 디지털 작업과는 비교가 안 돼. 한 예로 흑백 사진을 만드는 마지막 과정에 수세(水洗)가 있는데 정착액을 씻어내는 것이지. 이게 참 중요하고도 어려워. 흐르는 물에 종이 인화지를 두 시간 정도 담궈야 하거든. 수세를 제대로 안 하면 사진이 금방 변해. 사이즈가 작은 사진은 대야에 담그면 되는데 큰 사진은 어디에서 하겠나. 수돗물도 귀한 시절인데.그래서 냇가에 가서 수세를 하는 사람도 있었지. 나는 새벽 1시에 인화지를 자전거에 싣고 형산강에 가서 인화지를 강물에 담그고 돌을 얹어 한참 놔두고 수세를 했지. 요즘 그렇게 하라고 하면 누가 하겠나. 솔직히 요즘 사진은 사진이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운 게 있어. 시간이 나면 한국사진작가협회에 나가서 흑백 사진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 안타까워.조 : 선생님 사진을 보면 인물의 솜털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이 : 섬세한 표현을 하기 위해 중형 카메라를 사용했지. 중형 카메라는 필름이 크기 때문에 확대 사진을 만들면 사진 품질이 소형 카메라로 촬영한 것보다 좋을 수밖에 없어. 사진을 만들 때도 인화 과정에서 흔들리면 안 되니까 차가 안 다니는 새벽에 작업했지.조 :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두 번 입선하셨지요?이 : 사진으로 국전(國展)에서 상을 받는다는 것은 하늘에서 별 따기였지. 지방에서는 특출나게 좋은 사진이 아니고는 입상이 힘들었어. 1975년 24회 국전에서 ‘리듬’으로 입선했고, 1979년 28회 국전에서 ‘출어 준비’로 입선했지. 1982년에 사진 부문이 분리되면서 대한민국 사진대전으로 명칭이 바뀌었어. 사진을 왜 국전에서 뺐는지 항의 서한을 보내려니까 사진계의 선배인 박영달 선생이 윗사람들한테 밉보인다고 말리더군. 그래도 내가 항의 서한을 썼지.조 :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 공모전에서도 여러 차례 상을 받으셨습니다.이 : 국내에서 상을 받으니까 국제 공모전에도 도전하고 싶더군. 마침 프랑스와 대만에서 공모전이 있다고 사진작가협회에서 공고가 났길래 영어 잘하는 사람을 찾아가 도움을 받아 작품을 보냈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더군. 그 당시 사진 하는 사람들은 국제대회에 거의 관심이 없었어.조 : 선생님은 사람들의 생생한 삶을 카메라에 담아오셨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이 : 사람의 내면이 살아 있는 모습을 포착해야 진짜 사진이라고 생각해. 오늘도 내일도 언제나 가면 찍을 수 있는 풍경 사진은 엄밀한 의미에서 사진이라 하기가 어렵지.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는 게 진짜 사진이고 사진의 본질이라고 생각해. 나는 리얼리즘이 결여된 사진은 사진으로 보지 않아. 그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호감을 주지 못한 점도 있지만 사진은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해야 하고 리얼리즘이 살아 있어야 한다는 소신에는 변함이 없어.조 : 선생님 작품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대화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리듬’이라는 작품이 눈에 띄던데 설명을 부탁드립니다.이 : 포항제철소에서 기름 탱크 작업을 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인데 국전 입선작이지. 계단을 오르내리며 일하는 사람의 모습이 피아노 건반을 디디는 것 같잖아. 음악적인 리듬이 생각나 제목을 ‘리듬’이라 붙였고 호평을 받은 작품이지. 후배 작가 몇 명은 ‘리듬’을 보고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고도 해. 이 사진에는 에피소드가 있어. 가로 사이즈는 짧고 세로는 길어서 세로 파노라마로 표구해서 국전에 냈거든. 그런데 사진은 액자로 내야지 동양화처럼 표구로 내면 문제가 생긴다는 거야. 결국 표구 때문에 감점이 돼 입선에 그친 아쉬움이 있지.조 : ‘돼지몰이’는 1980년 프랑스 국제사진전에서 우수상을 받은 작품이지요?이 : 심사위원들이 아주 세밀하게 작품을 검토하고 상을 주었어. 작품 속의 여성이 머리에 수건을 쓰고는 작대기를 쥐고 돼지를 쫓는 모습, 그리고 돼지의 발걸음까지 섬세하게 살펴보더군. 조 : ‘쟁탈’은 역동성을 느끼게 하는 작품입니다.이 : 그 작품은 여남 바닷가에서 찍었지. 당시에 카메라가 표준 렌즈밖에 없었어. 갈매기가 물을 차고 탁 들어가는데 렌즈 안에 갈매기가 작게 담기면 생동감이 떨어질 것 같아 목까지 물이 차는 줄도 모르고 바다로 들어갔지. 그렇게 온몸을 던져 겨우 한 장 얻어낸 거야.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물불을 안 가렸지. 그런 일이 다반사였어.조 : 그 밖에 생각나는 사진이 있으신가요?이 : 하루는 전시회를 하고 있는데 키가 훤칠한 청년이 나에게 다가오더군. 무슨 일인지 물었더니 ‘담소’라는 작품의 한 사람이 자신의 할머니고 등에 업힌 아기가 본인이라는 거야. 1980년대에 연일에서 찍은 사진이지. 그래서 청년에게 그 작품을 준 생각이 나. 1980년 동아국제사진살롱 입선작인 ‘빨래하러 가는 길’은 한국적이면서 생동감이 넘치는 작품이지. 나는 “사진도 연극처럼 무대를 만들어서 혼을 집어넣고 스토리를 만든다. 그러나 연출 냄새가 나지 않고 일상생활에 어울리는 사진을 찍어야 한다”라고 배웠어.조 : 어느 글에선가 “사진가의 길이 내 삶을 구제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 생각하며 사진가의 자세를 조금도 흩트리지 않을 것이다. 종교처럼 신앙심을 갖고 카메라를 잡을 것이다”라고 하셨더군요.이 : 사진에 젊음을 바치고 나의 생을 건다고 생각했지. 쉽게 말해 사진에 미쳤던 거야. 사진을 안 하고 다른 걸 했더라면 더 잘되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 나는 사진에 관해 세 가지 소신이 있어. 첫째 인간의 삶을 표현하고 역사의 중요한 장면을 기록한다. 둘째 리얼리즘 정신을 일관되게 추구한다. 셋째 사진은 종교처럼 내 생을 걸 만큼 중요하다.대담·정리 : 조혜경(시인) / 인물 사진 : 김훈(사진작가) 이도윤1940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났다. 1967년 포항에 정착하면서 사람들의 삶과 풍경을 사진에 담아왔다. 1973년 포항 맥심다방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2012년 포항시립미술관에서 ‘그리운 포항, 사람들’이란 주제로 여섯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프랑스 국제사진전 우수상, 아시아태평양 사진전과 유네스코 사진전 우수상, 중화민국 사진전 3회 입선, 대한민국 미술대전 2회 입선, 대한민국 사진대전 입선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한국사진작가협회 포항지부장, 영상동인회 전국 회장, 선린대학·포항대학 강사 등을 역임했다.

2021-09-28

“영웅이라는 찬사보다 전문직 의료인으로 당당하고 싶다”

백의의 천사, 영웅보다 전문 의료인이다.‘나의 간호로 환자가 안녕을 찾는다는 보람에 나이팅게일의 정신, 그 다함없는 희생과 봉사의 길을 간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세상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 혼돈의 최일선에서 몸과 마음을 사르는 주인공. “영웅이라는 찬사는 아껴 달라. 대신 간호사가 간호 전문직 의료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 달라. 그리고 그에 맞는 사회적 경제적 대우를 해 달라.” 백의의 천사 간호사들은 외친다. 우리가 저출산 고령 사회로 갈수록 다양화 전문화된 그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최석진 대구간호사회장은 “이제 더 이상 영웅 같은 립 서비스는 필요하지 않다. 전문직 의료인으로서 당당하고 싶다”고 말한다. 간호법 제정도 그 실현 중 하나다. -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전 국민이 피로감에 지쳐있다. 방역과 진료의 최일선 간호사들에게 국민들이 보내는 영웅이라는 성원이 전혀 지나치지 않다. 지난 총선에서는 대구 간호사가 국회의원으로 선출됐고 대구 경북 간호사회가 대구 경북 의사회와 공동으로 서상돈상도 받았다.△코로나 사태는 자원봉사 간호사에게 의존하는 주먹구구식 처방보다는 숙련된 간호사를 양성하고 확보해야 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줬다. 현장에서 말로만 ‘코로나19 영웅’이라고 치켜세우지 말고 간호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현실적인 간호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것도 그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간호사들의 전문성을 살릴 수 있는 간호법 제정이 시급하다.- 지금 법이 있지 않은가. 의사의 진료와 치료를 맡고 간호사는 간호를 맡는다는 의료법이.△현재 간호사는 의료기관뿐 아니라 지역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화된 간호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노인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전체 진료비의 45%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저출산과 고령화 사회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고 지역사회에서 통합 돌봄 등 다양화 전문화 되고 있는 간호 업무의 체계적 정립이 필요하다. 그런데 70년 전 제정된 의료법은 시대의 변화와 국민의 시대적 욕구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이미 90여개 국에서 간호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간호법의 필요성을 증명하고 있는 것 아닌가.- 간호법이 제정되면 간호사가 독자적으로 진료행위가 가능해져 의료분쟁이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또 의사협회나 다른 보건 의료직에서 간호사의 무면허 의료행위가 조장되어 국민 건강을 위협할 것이라며 반대도 만만치 않다. 국민들에게 직역간 밥그릇 싸움으로 보인다.△모두 오해다. 지금 국회에 3개의 간호법이 발의돼 있는데 모두 간호사의 진료영역에서 의사의 ‘지도’ 또는 ‘처방’에 따라 업무를 수행하게 돼 독자적 진료행위를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현재 의료법 상 ‘지도’를 ‘처방’으로 변경하는 것은 의료진 사이의 정확한 의사 소통을 위한 것이다. 더구나 의료법에 있는 무면허 의료행위 금지규정이 그대로 있어 무면허 의료행위를 조장한다는 것도 팩트가 아니다.- 코로나19 사태가 재조명했지만 간호사의 현실적 어려움이 많은 것 같다.△TV드라마에서 간호사들이 점심을 먹은 뒤 잡담하는 모습을 봤다. 기가 막히더라. 간호사들은 이런 장면을 보면 혀를 찬다. 화장실에 갈 여유조차 없어 커피 마실 여유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얼마 전 지역의 한 대학병원이 병상 수를 늘이면서 간호사를 충원하자 220명 중 60명이 이직을 했다. 그런데 새로 충원하는 간호사는 30명에 불과해 힘들게 일한다는 말조차 안쓰러울 지경이다.- 지난 해 대구 11개 간호대학에서 배출한 간호사가 1661명이었다. 전국에서는 2만3978명이 배출됐다. 해마다 2만 명 이상이 배출되는데 부족한 이유는 무엇인가.△교육부 통계를 보면 2019년 간호학과 졸업생의 취업률은 86.7%였다. 그러나 보건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전체 간호사 중 의료기관에서 근무하는 간호사는 49.6%로 나타났다. 보건소 등 보건직 공무원과 심사평가원, 보험회사, 학교 등으로 간호사들의 활동 영역이 넓어진 탓도 있지만 육아휴직 등으로 쉬고 있는 간호사들이 많아 의료기관 근무자들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초임 간호사들의 이직률이 높다는데 실제로 어느 정도인가.△대구 경북지역 신규 간호사들의 40%가 서울로 간다. 경기 부산 등 타지역으로 상당수 빠져 나가니 대구 경북 지역에 남는 간호사는 25% 정도다.경력 간호사들이 출산과 육아 문제로 병원을 떠나는 것과 달리 신규 간호사들은 업무 부적응을 이유로 병원을 떠나고 있다. 지난 2019년 입사자 2만4350명 중 44.5%인 1만836명이 1년도 안 돼 병원 현장을 떠난 것으로 집계됐다.- 간호사가 부족하다면 간호조무사를 교육해서 간호사를 충원하는 문제는 어떤가. 또 장롱면허를 재취업에 활용하는 방안도 검토해 볼 수 있지 않나.△현재 간호사는 모두 4년제 간호대학 졸업 후 면허를 얻은 의료인이다. 간호조무사 중 해마다 5천명 정도가 간호대학에 입학해서 만학도로서 공부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장롱면허의 유휴간호사를 현장으로 불러내는 문제는 간호협회에서도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단시간근무제 비정규직에 대한 고용불안과 높은 노동강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 때문에 재취업을 꺼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병원도 관리비용 부담으로 단시간근무자 채용을 기피하고 있는 것 같다. 간호사 재취업을 위해서는 유연근무제 도입 같은 방안도 고려해 볼 만하다.외국의 경우 신규 간호사가 배치되면 1년에서 적어도 6개월 정도 교육기간을 두고 교육시키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교육기간이 채 1달이 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상급병원에서는 교육전담 간호사제를 운영하고 있지만 병원급 이하에서는 병원 경영상 교육전담 간호사를 두는 것도 부담이다. 또 갓 입사한 신입에게 1년씩이나 봉급을 주면서 교육시킨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큰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간호사 1인당 환자 수가 얼마나 되며 외국과는 얼마나 차이가 나는가.△우리나라는 간호사 1명이 12명의 환자를 보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의료전달체계상 상급 종합병원(대구의 경우 5개 대학병원)이 12~13명의 환자를 돌보고 있으니 그나마 법정 규정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그러나 병원급 이상 의료기관 10곳 중 7곳 이상이 이를 지키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종합병원이 19명, 병원은 24명 이상으로 많은 환자를 간호사 1명이 담당하고 있다.일본은 7명을, 미국은 주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5.4명을, 캐나다나 호주는 4명을 담당하는 것과 비교하면 우리나라는 12명에서 24명 이상을 담당하고 있어 업무 강도가 2 ~4배 높은 실정이다.- 간호사의 이직률이 높은 것이나 특히 신입 간호사들의 1년 내 이직은 간호사 내부의 업무특성에 따른 전문직의 폐습이라는 것이 사회적 인식이다. 아직도 병원 내부적으로는 ‘태움’이라는 관습이 행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간호사는 24시간 환자 곁에서 환자를 끊임없이 모니터하고 판단하는 의료인이다. 갓 입사한 신입 간호사는 선배 간호사(멘토)로부터 하나부터 열까지 배워야 한다. 그러나 독자적으로 임무를 맡게 되면 학교에서 배운 이론대로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수혈만 하더라도 20개의 복잡한 과정이 수행되어야 한다. 응급환자에게 CPR(심폐소생술)을 할 때 환자가 죽어가는 상황에서 주위 의료진들이 모두 정신이 없이 돌아가는 판에 신규 간호사는 할 일을 못 찾아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애만 졸이고 있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그렇다고 병원에서 이런 신규에게 충분한 교육기회를 제공해주지 않는다. 그리고는 현실적으로 혼자 15명의 환자를 돌보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보면 된다.- 간호사 세계도 달라지지 않나. 사회가 변하고 있는데.△태움이라는 문제의 본질이 인력부족과 인권이라는 복합적 요인에서 출발한다. 근본적으로 도제식 교육이 갖는 수직적이던 간호사의 조직문화가 수평적으로 바뀌면서 표출된 문제가 태움이 아닌가 싶다. 인력 부족과 대우가 달라지면 해결될 것으로 본다.개인주의가 발달하고 참을성은 줄어든 MZ세대 간호사들은 발랄하다. 여기에다 2019년 7월 직장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된 뒤로는 ‘요즘 간호사 세계에서 역태움 현상이 나타난다’는 우스개도 나오고 있다. 병원 내부적으로도 상담활동을 강화하는 등 ‘별의 별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다.- 간호사의 업무 특성 상 의사와의 호흡이 중요하고 그만큼 마찰이 생기기도 쉬울 것 같다. 간호법 제정에서도 의사와의 갈등이 일부 표출되는 것처럼 보인다.△환자를 돌봄에 있어 가장 가까이서 호흡을 맞춰야 하는 의료인이 바로 간호사와 의사다. 그러나 두 직역 간에는 역할이 분명히 다르고 갈등 또한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또 간호사로서 제일 중요한 업무 중 하나가 의사의 오더가 필요한 것들이 실제로 오더가 되어 있는가를 확인하는 일이다. 수련기간의 의사가 냈던 오더가 문제가 있을 때면 서로 얼굴을 붉히는 문제가 종종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환자에게 최선의 케어를 제공하기 위해 동등한 위치의 의료인으로서 서로 존중하면서 의견을 주고받는 원팀으로 일을 하게 되면 이런 문제들은 없어질 것이다.- 간호사와 환자와의 관계에서도 종종 갈등이 불거지는 현상을 봤다.△하루 24시간 중 의사는 5분, 간호사는 23시간 55분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간호사는 환자 곁에서 일하고 환자는 병원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간호사와 보내게 된다. 그런데도 일부 환자들이 간호사를 막 대하는 경우가 생겨난다. 일부 환자들이 “당신들 돈 받고 일하는 거잖아. 그런데 뭐 그렇게 힘든 척 하느냐”는 막말에 충격을 받은 간호사도 있다. 많은 환자를 담당하고 있는데다 신규 간호사가 들어오면 멘토의 역할까지 해야 하니 간호사간의 문제가 발생할 뿐 아니라 환자와의 갈등도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간호사의 처우가 개선되어야 하겠지만 환자들도 환자를 돌보며 최선의 길을 찾아 애쓰는 간호사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가 큰 힘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 주셨으면 좋겠다. /이경우 편집위원 □ 최석진 대구광역시간호사회장 (61)대구대학교 간호학과 조교수(산학협력)대구 정화여고, 경북대 간호학과, 계명대 의료관리학 석사. 경북대 간호학 박사 수료.경북대학교병원 간호사(1983)로 임용된 뒤 수간호사, 팀장(간호과장) 등을 거쳐 간호부장으로 37년간 간호 업무에 투신.지난해 2월 대구에서 코로나19 확산당시 전국의 간호사 자원봉사자 모집에 앞장서 코로나 확산 방지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표창을, TV미스터트롯의 코로나극복 헌신 영웅 10인에 선정됐고 의료인의 봉사정신으로 공동체 위기를 극복한 공로로 서상돈상을 공동 수상한 천생 간호사.

2021-09-27

“포항의 변화를 사진에 담은 것은 작가로서 행운”

수화기 너머 들리는 목소리는 힘에 겨운 듯했다. 선생님은 여든이 넘어 고관절 수술을 하는 바람에 1년 가까이 댁에 있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인터뷰를 제대로 할 수가 있을까 고민을 안고 중앙상가에 있는 선생님의 스튜디오(천연사진관)를 찾아갔다. 1년 동안 비워두었다는 스튜디오는 뜻밖에도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깔끔한 양복을 걸친 선생님의 모습에서 꼿꼿한 작가 정신이 느껴졌다. 조혜경(이하 조) : 경남 남해 출신인데 포항에 터를 잡은 이유가 궁금합니다.이도윤(이하 이) : 사람 사는 곳이 어디 가나 비슷하지. 부산 용두산 아래 자형 집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용두산에 불이 나는 바람에 공원으로 바뀌었어. 그때 문득 내가 살아야 할 곳, 떠돌지 않고 정착할 수 있는 곳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어느 누가 가라고 한 게 아니라 스스로 그런 생각을 했어. 포항, 경주, 안동, 서울 네 곳을 두고 고민했는데 기차를 타니까 포항이 불쑥 떠오르더군. 그래서 포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어. 돌이켜 생각해보면 경주도 괜찮은 곳인데. 이런 선택을 두고 운명이라 할 수 있을까. 여하튼 포항은 바다와 산이 있는 내 고향과 닮아 친근감이 들었어.조 : 포항에 오신 게 언제쯤이지요?이 : 1967년이지. 그때 포항 인구가 5만에서 6만 명 정도 되었나. 조용하고 한적했지. 동빈내항에 돛단배가 다닌 게 인상적이었어.조 : 당시에 사진을 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이 : 카메라가 귀한 시절이었어. 사진 하는 사람도 얼마 되지 않았고. 중학교 졸업하고 부산에 있는 자형한테 간 게 사진을 접하게 된 계기가 되었지. 그때 자형은 한 백화점의 전무로 있었거든. 부산 서면에 크고 유명한 사진관이 여러 개 있었는데 어린 촌놈이 그 사진관에 전시되어 있는 사진을 보고는 신기하게 여겼지. 자형 소개로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배웠는데, 사진이 평생의 직업이 되리라고는 그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조 : 어린 나이에 객지 생활을 하셨군요.이 : 그런 셈이지. 고향이 경남 남해군 상주면인데 남해에서 부산으로 가려면 길이 멀었어. 상주에서 남해, 남해에서 노량, 노량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가야 했지. 그때 아버지와 둘이서 남해읍까지 50리 밤길을 걸어서 갔어. 지금 생각해도 아득히 먼 길이지. 남해읍에서 아버지가 감 두 개를 사서 손에 꼭 쥐어주었어. 어린 자식을 객지에 보내려니 맘이 아파 국밥이라도 먹이고 싶은데 시골에 무슨 돈이 있겠어. 빈속에 배 타면 멀미를 할까 봐 걱정되었던 거지.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려.조 :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지만 예술가도 부모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선생님의 부모님은 어떠셨나요?이 :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셨고 나는 6남매의 차남이야. 자식이 많으니 먹여 살릴 일이 큰 걱정이었고 농사일로 늘 바빴지. 아버지는 무뚝뚝하지만 자식들에게는 한없이 자상한 분이었고, 해 뜨기 전에 논밭에 나가 일하던 어머니는 미인이었어. 동네에서 제일 곱고 참한 분이었고, 생전에 큰소리 한 번 내지 않던 따뜻한 분이었지.조 : 부산에 가보니까 어떻던가요?이 : 덜컥 겁이 나더군. 이 넓은 곳에서 살 곳을 못 찾으면 미아가 되는 게 아닌가 하고. 배는 고프지, 가방이랑 보따리를 메서 어깨는 내려앉지, 사람들은 숱하게 많지, 눈앞이 캄캄했어. 그 순간 손에 감 하나가 딱 잡히는데 배 타기 전에 아버지가 준 그 감인 거라. 한 개는 먹고 한 개는 남겨두었는데 그게 손에 몰캉 만져지면서 와락 눈물이 나더군. 이제 진짜 혼자구나, 내 길은 내가 알아서 가야 하는구나 생각하며 울고 나니까 앞으로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생기더라고.조 : 다시 사진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혹시 처음 사용했던 카메라는 기억하시는지요?이 : 그걸 어떻게 잊어버리겠어. ‘캐논 큐엘(QL)’이 첫 카메라였지. 수동으로 초점을 맞추는. 한 번 찍고 레버를 돌려야 다시 찍을 수 있는 것이었지. 초점도 렌즈 왼쪽에 초점 링을 돌려가면서 맞춰야 했고. 나중에는 ‘아사이 펜탁스’를 갖게 되었는데 꽤 비싼 카메라였지.조 : 저는 어릴 때 예식장에 가면 사진사가 검은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찍는 카메라가 기억납니다.이 : 사오(4×5)판 뷰카메라를 말하는군. 검은색 주름상자로 초점을 맞추는 카메라인데 사용하는 필름이 사오(4×5)인치여서 그렇게 불렀지. 그 카메라는 렌즈에 셔터가 달렸어. 조명은 마그네슘 전구 조명을 썼고. 손에 전선을 감아쥐고 하나 둘 셋 하면 팡 터지는 조명이었지. 그다음에 셔터를 누르면 동시에 조명이 터지는 셔터 방식으로 바뀌었어. 그렇게 아날로그 카메라가 번성하다가 디지털로 바뀌었지. 나는 지금 디지털 카메라 캐논 5D를 사용하고 있어. 사진이 눈 깜짝할 사이에 많이 발전했지. 과거처럼 온갖 고생하며 사진 하라고 하면 할 사람이 있을까 싶군.조 : 요즘은 사진을 하게 되면 보정 작업 때문에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컴퓨터는 다루시는지요?이 : 뒤늦게 대학에 다니면서 보고서를 내야 하니까 컴퓨터를 안 배울 수 없었지. 컴퓨터는 겨우 보고서를 작성하는 정도의 실력밖에 안 돼.조 : 포항에 와서 사진관은 어디에서 열었습니까?이 : 육거리였지. 1967년 새파란 총각 때 이야기야. 육거리를 중심으로 작은 상점이 올망졸망 모여 있던 시절이야. 그때 포항에 사진관이 대여섯 개 있었어. 대구사진관은 나루끝에 있었고, 포항사진관, 문화사진관, 태양사진관이 있었지. 다른 사진관은 기억이 잘 안 나는군. 사진관 주인들은 나보다 서너 살이 많았는데 다들 돌아가셨어. 세월이 참 무상하네.조 : 사진관을 내면서 힘들지는 않았습니까?이 : 왜 안 힘들었겠어. 객지에서 왔으니 텃세가 있었지. 부산에서 사진을 배우고 왔기에 포항에서 사진 하는 사람들보다 아무래도 솜씨가 나았지. 그래도 어떡하나, 여기 있는 사람들하고 잘 어울리려고 애를 많이 썼지. 그러면서 사진에 더 빠져들었어.조 : 사진에 빠져들었다는 말씀이 어느 정도였는지 궁금하군요.이 : 우리 집 아이 둘이 어릴 때 이야기야. 하루는 둘이서 버스를 타고 집에 오다가 인형을 사려고 내렸는데 버스가 아이들을 못 보고 후진하는 바람에 사고를 내고 말았어. 버스 밑으로 들어간 아이들을 얼른 빼내 병원에 데려가야 하는데 버스 기사는 운전대만 붙잡고 벌벌 떨고, 아이들은 울고불고 난리가 났지. 다행히 아이들이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놀라고 아팠겠나. 병원에서 다리에 붕대를 감고 누워 있는 아이들을 보고 나는 어떻게 되었는지는 묻지도 않고 그 모습을 담으려고 카메라를 들이댔지. 그 일로 아직도 가족들한테 한소리를 듣지. 나는 그런 사람이야. 그렇게 살아 숨 쉬는 사진을 고집했지.조 : 살아 숨 쉬는 사진, 이 표현에 선생님의 사진관(寫眞觀)이 담겨 있지 않나 싶군요. 그런 맥락에서 선생님은 포항 사람들의 삶과 포항의 역사를 담은 사진가라는 평가를 받습니다.이 : 사실 포항은 짧은 기간에 엄청 변한 곳이지. 포항제철이 들어서면서 얼마나 변했나. 내가 포항에 올 때만 해도 제철공장이 들어선다는 걸 몰랐어. 비밀리에 진행된 일이니까. 육거리를 제외하고는 개발된 곳이 거의 없었는데 포항제철이 세워지면서 급속도로 개발되었지. 그렇게 포항의 큰 변화를 지켜보면서 사진을 찍게 된 것은 작가로서 행운이라고 할 수 있지.이도윤1940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났다. 1967년 포항에 정착하면서 사람들의 삶과 풍경을 사진에 담아왔다. 1973년 포항 맥심다방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2012년 포항시립미술관에서 ‘그리운 포항, 사람들’이란 주제로 여섯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프랑스 국제사진전 우수상, 아시아태평양 사진전과 유네스코 사진전 우수상, 중화민국 사진전 3회 입선, 대한민국 미술대전 2회 입선, 대한민국 사진대전 입선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한국사진작가협회 포항지부장, 영상동인회 전국 회장, 선린대학·포항대학 강사 등을 역임했다. 대담·정리 : 조혜경(시인) / 인물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9-26

‘일상의 휴식과 인생의 휴식이 공존하는 곳’

□ 이름처럼 아름다운 곳, 세종 은하수공원은하수공원은 세종특별자치시 정안세종로 1527(산울동)에 위치한 36만580㎡ 면적의 종합장사시설이자 추모공원이다. SK 및 LH의 무상기증을 통해 2010년 1월 12일 개장했다. 개장 당시 대부분의 시설은 위수탁 계약을 통해 관리했다. 화장장, 봉안당, 자연장, 장례식장 및 식당, 매점 등의 시설을 대상으로 민간기업과 위수탁 및 임대 계약을 진행해 운영했다. 그러다 2012년 7월 운영 및 일부 시설의 소유를 세종특별자치시로 이관했고, 이어 몇 번의 위수탁 계약을 거쳐 2017년 1월부터 세종시설공단이 직영하게 됐다. 글 싣는 순서 1. 장사시설과 장사문화, 우리는 장사를 어떻게 보고 있나 2. 포항시, 종합장사시설 마련 첫걸음 3. 장사시설 선두주자 인천 가족공원 4. 시민의 품 안에 세종 은하수 공원 5. 장사 문화 개선을 위해 포항이 나아가야 할 방향 시설은 크게 장례문화센터(장례식장, 봉안당, 화장장, 고객센터, 주차장)와 자연장지(잔디장, 수목장, 부대시설)로 나뉘어 있다.공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장례식장이 마주한다. 4천368㎡ 규모의 지하 1층·지상 3층의 건물로, 지상에는 빈소 및 접객실 10곳이 있고 지하에는 영결식장·염습실·안치실·매점이 위치해 있다. 연도별 이용실적을 보면 2015년 283건이었던 것이 2020년에는 612건을 기록하는 등 큰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은하수 장례식장의 특장점으로 △조문객수에 맞는 다양한 빈소(특실, 일반실) △품격과 격조를 더한 호텔급 고품격 인테리어 △장례, 화장, 안장(봉안, 자연장)까지의 종합장사서비스를 제공하는 원 플레이스(One Place) 서비스를 꼽을 수 있다.장례식장 뒤로는 화장장(해님의 집)이 있다. 지하 1층·지상 2층의 7천926㎡ 규모 건물로, 지하 1층은 유족 주차장, 지상 1층은 화장로 10기·수골실·고객쉼터가 있다. 2층은 유족대기실 10곳과 수유실 및 매점이 위치해 있다. 이곳 역시 2015년 5천22건이었던 이용실적이 2020년에는 1만887건으로 2배나 증가했다. 고인의 거주 지역에 따라 이용료를 차등 적용하나, 기본적으로 거주지역 등에 제한 없이 이용가능하다. 화장은 오전 7시 30분 1회차를 시작으로 오후 3시 7회차까지 진행한다.화장장 다음으로 고객센터와 홍보관, 유택동산이 자리하고 있다. 홍보관에서는 우리나라 및 주요 국가의 장례 문화와 역사를 살펴볼 수 있으며, 최신 트렌드에 맞춰 장례문화를 VR로 체험할 수도 있다. 특히, SK그룹의 사회공헌을 통해 공원이 마련된 만큼 이를 소개하는 코너도 마련돼 있다.장례문화센터의 마지막 시설은 봉안당(달님의 집)이다. 지하 1층부터 3층까지 3천292㎡ 면적이며, 2만353기(옥내 1만8천945기, 옥외 1천408기)를 모실 수 있다. 제례실 4곳을 비롯해 헌화대 등의 시설이 있다. 이용기간은 15년으로, 단 1회에 한해 15년 연장이 가능하다.이들 시설을 제외한 대부분의 장소에는 자연장지가 꾸려져 있다. 6만8천976㎡ 규모의 자연장지는 잔디장(가온마루)과 수목장(미리별동산)으로 이뤄져 있으며, 2015년 399건의 이용실적이 2020년에는 2천628건으로 가파르게 증가했다. 이용기간은 30년으로, 부부합장·가족장·종중장은 기간 연장이 가능하다. 올해는 화초장, 어린이 장지(산골장, 잔디장)가 개장할 예정이다. □ SK그룹의 지원과 행정수도 신도시 세종시의 만남세종 은하수공원의 가장 큰 특징은 민간 기업이 자발적으로 조성했다는 점이다. SK그룹의 최종현 회장은 폐암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등지기 전 “내가 죽으면 반드시 화장(火葬)하고, 훌륭한 화장시설을 지어 사회에 기부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묘지 난립으로 좁은 국토를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점을 평소 안타까워했던 최 회장이 사회지도층 인사 중 처음으로 화장을 택하면서 장례문화를 선도한 것이다. SK 최종현 회장은 생전에 하늘길을 주로 이용했는데, 공중에서 내려다본 국토가 묘지로 가득 찬 것을 보고 ‘이래서는 안되겠구나’고 생각했다고 한다. 최 회장의 시대를 앞선 유언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고 그의 사후 한 달 만에 ‘한국 장묘문화개혁 범국민협의회’가 결성돼 ‘화장 유언 남기기 운동’이 전개될 정도로 국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이후 SK는 최종현 회장의 유언에 따라 2010년 1월 은하수공원에 장례시설을 준공해 세종시에 기부했다. 물론 이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SK그룹은 화장장을 혐오시설로 보는 사회적 인식 때문에 터 선정에 난항을 겪었다. 애초 화장장 건립을 구상한 곳은 서울이었으나 지역민들의 반대 등에 부딪혀 진척이 없었다. 그러던 중 마침 세종시가 행정수도로 건설된다는 소식이 나왔고, 최종적으로 세종시가 낙점됐다. 이후의 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2007년 말 현재 터를 확보하고 착공한 지 2년여 만에 시설 공사를 마무리했다. LH공사에서 은하수공원 조성에 200억원을, SK에서 장례문화센터 조성에 500억원을 들여 현재 모습을 갖추고 이를 세종시에 기부채납했다.시민들과의 갈등이 거의 없었다는 점도 은하수공원이 현 모습을 갖추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세종시가 조성되면서부터 은하수공원도 동시에 개발을 시작했기 때문인데, 장사시설이 보통 기피시설로 여겨지고 있음에도 은하수공원만은 타지역과는 달리 큰 반대를 겪지 않고 시민의 품으로 들어왔다. 이렇듯 한번에 모든 시설이 들어오기 쉽지 않다는 일반적인 통념을 깨고 예외적으로 건립된 은하수공원은 여유 있는 부지로 인해 확장성 측면에서도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 즉 조그마한 규모로 시작해 점점 부지를 넓혀나가는 게 일반적인데, 은하수공원은 면적 전체가 다 장지라고 보면 되는 것. 실제로 건립 11년차에 접어들었으나 장지가 전체의 10퍼센트 정도밖에 차지 않아 이를 제외한 모든 곳이 공원으로 남아 있다.이 외에도 공립 의료원 등이 아닌 이상 종합장사시설 중에 장례식장 등을 직영하는 경우가 드문데, 화장장과 장례식장 등 시설 대부분을 직영한다는 점 역시 은하수공원만의 장점이다. 이런 장점에 따른 혜택은 유족들과 지역민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고 있다. 장사시설을 이용하는 비용이 전국적으로 가장 저렴한 수준인 동시에, 매점·카페의 운영권과 장지 표지석 및 봉안당 위패 판매권을 지역민에게 줘 상생의 모범을 보이고 있다. □ 장사시설과 도심공원의 두 마리 토끼를 잡다“여기가 장사시설이라고?”아마 미리 알고 오지 않았더라면 대부분은 이곳을 장사시설로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는 바로 세종 은하수공원이 건립 당시부터 공원형 장사시설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도심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언제나 방문할 수 있고, 잔디장과 수목장만 운영해 묘지가 없어 외관상으로도 공원처럼 보인다. 입구가 2곳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정면을 기준으로 오른쪽 출입구는 장사시설이 단계적으로 조성돼 있으나, 후문으로 불리는 왼쪽 출입구는 시민공원으로 바로 이어져 중앙 상징탑까지 가지 않는 이상 장지 등과 마주치지 않는다.최신 시설로 만들어져 환경적인 부분에도 많이 신경을 썼다. 아직까지 유해물질 배출 등의 민원이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실제로 세종시민 가운데서는 장사시설인 줄 모르고 방문하는 경우도 많다는 게 은하수공원 측의 설명이다. 훌륭하게 갖춰진 외관에 따른 이점은 또 있다. 각종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로 문의가 많이 들어와 장사시설에 대한 혐오를 줄이고 자연장을 홍보하는 역할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또한 야생화 단지로 꾸민 아름다운 생태공원에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등에서 놀이 및 소풍장소로 많이 찾기도 한다. 어린이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피크닉 명소로 잘 알려져 있으며, 특히 애완견주들에게는 애완견과 산책을 즐길 최고의 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일상의 휴식과 인생의 휴식이 공존하는 곳”이란 슬로건에 딱 맞아떨어지는 셈이다.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전인 2019년까지는 축제가 진행되기도 했다. 은하수축제라는 이름의 축제에서는 야외무대에서 어린이 사생대회도 진행하고, 푸드트럭도 자리를 잡아 해마다 만 명 이상이 모인 가운데 성황리에 거행됐다. 이 외에도 자연장지 등의 모든 시설명을 주민공모를 거쳐 지음으로써 주민들과 함께하는 시설로 다가가고 있다./전준혁기자 jhjeon@kbmaeil.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1-09-22

고약한 바이러스가 횡행하는 세상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다

그것이 외적인 문제에서 발생했건 내부에서 생겨난 것이건 고통은 인간에게 사색의 시간을 제공한다.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하면서부터 바깥에서의 활동이 눈에 띄게 줄어든 2년 가까운 세월. 우리는 조용히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경험을 싫든 좋든 하고 있다.스스로의 심연(深淵)을 바라보는 행위는 비단 철학자나 문인이 아니라도 반드시 필요할 터. 그러니 바이러스로 인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난 게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주말이면 가까운 곳이건 먼 곳이건 다니던 나들이, 퇴근 후 동료 혹은, 연인과 어울려 가지던 술자리가 부쩍 줄어든 지난해와 올해. 그걸 대신해 자아를 살피는 침잠의 순간을 가지는 것도 좋을 것 같다.바로 그 ‘자아 성찰’의 중요한 도구가 돼주는 게 책읽기다. 특히나 눈앞으로 다가선 가을엔 더욱 그렇지 않을까.‘만다라’를 필두로 김성동의 소설들은 진중함과 진지함을 담고 있어 그 문장들 속에서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가지게 한다. 이런 평가엔 한국의 문학비평가들 대부분이 동의하고 있다. 독자를 다독이는 진중하고 의로운 문장은 어디서…김성동은 병자호란 때 순국한 선원 김상용(金尙容·1561∼1637)과 1910년 8월 경술국치(庚戌國恥) 때 스스로 곡기를 끊어 자결한 김창규(金昌圭)의 후손이다.“제 아무리 빼어난 도둑도 정신과 피는 훔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김성동의 자아는 이런 가풍 속에서 형성됐고, 그렇게 만들어진 정신은 문학의 중요한 밑거름이 된 것으로 보인다.김성동의 선조인 김상용은 조선 중기의 문신. 1590년 병과에 급제해 승문원부정자와 예문관검열 등을 지냈고, 병조와 이조의 판서였으며 ‘만인지상 일인지하’라는 정승에까지 올랐다. 그의 시와 글씨가 지닌 품격은 당대 최고로 인정받았다.김상용이 일흔 살이 넘어 맞게 된 병자호란. 원로대신인 그는 왕세자의 아내와 장남을 보필해 강화로 피난한다. 그러나, 강화의 수비를 맡은 벼슬아치는 “여기까지 오랑캐가 올 일이 없다”며 전쟁 중임에도 주지육림에 빠져든다. 그 오판 탓에 아낙들이 능욕 당하고, 백성은 도륙된다.그러한 비극을 지켜보던 김상용은 화약이 보관된 망루에 올라 임금이 있는 곳을 향해 세 번 절하고는, 하인을 모두 피신시키고 화약에 불을 붙여 자결한다. 나라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선비가 택할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처신이었을 것이다.세월은 흘러 1880년. 앞서 말한 김창규가 태어난다. 여섯 살에 ‘논어’와 ‘맹자’, ‘중용’과 ‘대학’을 읽던 영민한 소년이었다. 열네 살이던 1894년. 갑오개혁이 있던 그해 조선의 마지막 과거시험에 급제해 왕으로부터 ‘교지(敎旨)’를 받은 김창규.그 역시 김상용처럼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 1910년 굴욕적 한일합방 소식을 접한 직후다. “오얏나무 꽃이 떨어졌으니 이제 이곳은 내가 머물 땅이 아니다”라고 일갈한 뒤 스스로 방문에 못질을 해 곡기를 끊은 것. 겨우 서른의 나이였다.김상용과 김창규. 그들 후손으로서 핏줄 속에 표시나지 않게 흐르는 의로움과 고통과 수난의 삶이 만들어준 진중함은 김성동 문학을 다른 작가의 작품들과 구분하게 해주는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다.바로 이 진중함과 의로움은 21세기 소설이 놓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는 게 몇몇 평론가들의 견해.김성동의 첫 소설 ‘만다라’는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절망에서 연유한 지산 스님의 만행과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뇌하며 끝없이 떠도는 법운 스님의 방랑을 그려내 당시 젊은이들의 감수성을 사로잡았다.“병 속의 새를 어떻게 꺼낼 것인가?”라는 책이 던진 화두는 법운만의 몫이 아닌 독자 전체의 몫이 되기도 했다.1981년 배우 전무송과 안성기 주연으로 임권택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된 ‘만다라’는 눈이 시린 겨울 산을 담아낸 아름다운 화면으로 한 번 더 대중들을 사로잡는다.이후에도 김성동은 많은 작품을 썼다. 조선조 말 몰락의 위기에 놓인 전통 예인들의 희망과 좌절을 당대의 정치, 사회, 풍속에 대한 철저한 고증과 탁월한 문장으로 재현한 ‘국수(國手)’, 시인 김지하가 ‘웃음과 풍자와 웅혼한 비약이 스며들기 시작했다’라 평한 소설 ‘길’, 가족공동체를 떠나서는 삶 자체가 존립할 수 없다는 깨달음이 읽히는 ‘집’, 그리고 아름답고 단아한 산문집 ‘먼 곳의 그림내에게’ 등등. 김성동의 유장한 문장과 우리 말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책 ‘국수’. 긴 호흡으로 코로나19 시대의 가을을 통과하려면…우울과 회한이 문득문득 곁에서 어두운 그림자를 드러내는 ‘코로나19 사태’ 속 2021년 가을. 김성동의 작품 ‘만다라’와 함께 권하고 싶은 건 ‘국수’다.책을 펴낸 솔출판사는 이 소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김성동의 장편소설 ‘국수’는 1991년 11월 1일 문화일보 창간호에 연재를 시작한 이후 27년 만에 완간됐다. 이 작품은 임오군변(1882)과 갑신정변(1884) 무렵부터 동학농민운동(1894) 전야까지 각 분야의 예인과 인걸들이 한 시대를 풍미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130여 년 전 조선의 역사를 정면으로 다룬 소설로, 정치사보다는 민중의 구체적 삶과 언어를 충실하게 복원해낸 풍속사이자 조선의 문화사에 가깝다. 소설의 제목인 ‘국수’는 바둑과 소리, 악기, 무예, 글씨, 그림 등 나라 안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예술가나 일인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 소설은 그 시대에 벌어진 사건들에 직간접적으로 맞닥뜨리고 때로는 그것을 일구기도 하는 인물 개개인을 중심으로 거대한 민중사적 흐름을 당대의 풍속사와 문화사 및 정신사적 관점에서 아름다운 조선말의 향연과 함께 펼쳐낸다.”긴 세월 끊임없이 단련해온 김성동 특유의 유장한 문장과 우리 말에 대한 애정이 곳곳에서 묻어나는 ‘국수’는 다섯 권의 책으로 만들어졌다. 짧지 않은 분량이고, 쉽게 읽기 어려운 긴 소설이다.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해 외출이 줄어든 가을임을 감안한다면 이 책과 함께 한 계절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 아닐까.언젠가 김성동에게 “대체 문학은 무엇인가”라는 답하기 힘든 질문은 던진 적이 있다. 그때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문학은 그리움이야.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그리움. 문학의 유효성이 어디 있냐고? 갈빗대 아래를 후비는 힘에 있지. 개인을 넘어서 세상을 위무하는 힘 말이야.”바이러스가 인간을 지배하는 듯 보이는 이상한 시절. 김성동의 문학은 이 시절 인간과 세상을 위무하는 힘으로 역할 할 수 있다는 게 기자의 생각이다. 이런 생각이 비단 혼자만의 것은 아니리라.보이지 않을 때가 있지만 언제나 ‘길’은 존재하는 것오래전이다. 김성동이 ‘만다라’를 개작해 세상에 선보였던 때.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런 기록을 남겼다.“구도소설(求道小說)이라…. ‘길을 찾는 이야기’라는 뜻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은 구도하고자 발버둥친 사람이 가장 잘 쓸 수 있을 터. 열여섯 살 입산한 이래 십여 년 넘게 길을 찾고자 했고, 환속 이후에는 다시 20년이 넘는 시간을 또 다른 길을 찾고 있는 사람 김성동. 김성동은 사바탁세(娑婆濁世)의 잔소리꾼이라 스스로를 낮춘다. 그러나, 세속에서 부처의 이치를 깨달은 이 잔소리꾼 구도자 덕분에 ‘만다라’는 세기를 뛰어넘어 다시 우리 곁에 올 수 있었다. 또한 그 ‘만다라’가 있기에 ‘우리도 이만한 구도소설을 가졌다’라 말할 수 있는 한국문학과 독자들은 행복한 게 아닐까?”소설가 김성동은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사람이다. 다른 돈벌이 수단을 가지지 못한 전업 작가임에도 원고료 셈에 서툴고, 집을 사고파는 매매행위는 물론 스마트폰 사용도 잘 못한다. 인터넷 만능시대에 컴퓨터를 켤 줄도 모른다.그는 속물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21세기 한국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문인이다. 그러나, 그럼으로 인해서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와 움직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독자들을 위로하는 힘을 가질 수 있었다.‘국수’와 ‘만다라’는 고약한 바이러스가 횡행하는 세상에서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혼란과 공황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해줄 듯하다.때로는 눈보라와 짙은 안개에 가려 길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길은 언제나 우리 곁에 존재했고, 존재하며, 존재할 것이다. 그건 변할 수 없는 진리다. 이 냉혹한 ‘코로나19 시대’에도.소설을 포함한 책을 읽는 게 일상이 아닌 특별한 행위가 돼버린 시절을 우리는 살고 있다. 책보다는 휴대폰과 컴퓨터, TV와 영화를 훨씬 가까이하며 살고 있는 현대인들. 과연 그것들이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사색의 시간을 제공해줄 수 있을지?한 번쯤 이런 의문을 가져봤다면 이번 가을만이라도 휴대폰에 표시되는 주식 시세와 현란한 컴퓨터게임 화면이 아닌 김성동의 ‘만다라’와 ‘국수’에 빠져보는 게 어떨까.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9-22

랜선으로 즐기는 추석놀이

가을이 들어서는 입추, 귀뚜라미의 애간장을 태우는 처서가 지났다. 오뉴월의 땡볕이 곡식을 여물게 했다면 산들바람은 농부의 땀을 식혀 주겠다. 추수의 때를 기다리는 들판은 황금물결로 물든다.인류가 정착 생활을 하며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봄에는 언 땅을 갈아엎어 씨앗을 심고, 여름에는 태풍 두어 개, 땡볕 한 아름 다 견뎌내며 곡식이 여문다. 가을이면 잘 익은 곡식을 거둬들이고 하늘에 감사의 예(禮)를 올렸다. 조상들은 추수한 곡식을 이웃과 나눠 먹으며 다양한 놀이와 흥을 곁들여 잔치를 열었다. 추석에 하는 놀이는 수확의례와 관련된 행사이다. 거북놀이, 소멕이놀이, 줄다리기, 사자놀이, 지신밟기 등이 있다.△소멕이놀이장정 두 사람이 엉덩이를 맞대고 엎드린 위에 멍석을 뒤집어쓰고, 앞 사람은 고무래 두 개를 두 팔에 하나씩 나누어 쥐고, 뒷사람은 작대기로 뿔과 꼬리를 가장하여 소가 된다. 앞뒤로 주인과 머슴을 가장한 사람들이 소를 몰고 밤늦게까지 마을을 돌아다닌다. 부유한 집에 가서 “엄매, 엄매” 하고 소 울음을 흉내 내며, “옆집의 누렁소가 평생 즐기는 싸리 꼬챙이와 뜨물이 먹고 싶어 찾아왔으니 내놓으시오” 하고 외치면 그 집 주인은 산적과 술을 내놓는다.이때 농악대가 뒤따르며 소로 분장한 사람이 여러 가지 동작과 춤을 보이고, 농악에 맞추어 일동이 춤도 추고 노래를 부르며 마을을 다닌다. 이 놀이를 하면 풍년이 든다고 한다.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담아 다음 해의 농사를 기원하는 놀이다.△거북놀이소 대신 거북을 썼는데, 멍석 대신 수숫대 잎이나 짚으로 거북의 모양을 만든다. 거북놀이도 소멕이놀이처럼 기호 지방에서 추석에 행했으며, 거북의 장수에 빗대어 장수·무병을 빌고 마을의 잡귀·잡신을 쫓는다고 하였다. 거북은 수신(水神)을 나타내는 신령한 동물임을 생각할 때, 이 거북놀이도 소멕이놀이와 마찬가지로 농신(農神)에 관련된 기풍행사의 하나이다. △사자놀이사자 모습의 탈 안에 두 사람 또는 세 사람이 들어가 사자의 동작을 흉내 내며 하는 놀이다. 나무나 대광주리, 종이로 만든 사자탈 속에 두 사람이 들어가 풍물을 치면서 마을을 돌아다닌다. 여유 있는 집에 들어가 마당에서 한바탕 춤을 추고 돈 뒤에, 집주인으로부터 사례로 곡물이나 금전 등을 받는다. 이것은 마을의 공공사업에 사용되었다. 지방에 따라서는 주지놀음, 사지놀음, 사자놀음이라고도 한다.△지신밟기지신밟기는 풍물패들을 선두로 소고패, 양반, 하동, 포수 머슴과 탈을 쓰는 각시 등이 집마다 지신을 밟으면서 지신풀이 가사를 창하며 춤과 익살, 재주를 연희하는 것으로 마을의 안녕과 풍작 및 가정의 다복을 축원하는 민속놀이다. 지신풀이가 끝나면 주인이 대접하는 음식을 먹고 전곡을 얻어 가지고 간다. 얻은 재물은 마을 공동의 경비에 사용한다.△줄다리기‘동국세시기’에는 제주도에서 행하는 줄다리기를 이렇게 소개했다. 매년 8월 보름날 남녀가 함께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좌우로 편을 갈라 길고 굵은 줄의 양쪽을 잡아당겨 승부를 겨룬다. 줄이 만약 중간에서 끊어지면 양편이 모두 땅에 엎어지고 구경꾼들이 크게 웃는다. 이를 조리지희(照里之戱)라 한다.이 밖에 추석에는 각 지방에서 씨름 대회를 하거나 전남 지방 남해안 일대에 부녀자의 특유한 유희로 강강술래를 했다.다음은 완도 지방에 전해오는 강강술래 노래이다.“달아달아 밝은 달아 강강술래이태백이 노든달아 강강술래저기저기 저달속에 강강술래계수나무 박혔으니 강강술래은도끼로 찍어내어 강강술래금도끼로 다듬어서 강강술래초가삼간 집을 짓고 강강술래양친부모 모셔다가 강강술래양친부모 모셔다가 강강술래천년만년 살고지고 강강술래”리듬은 대체로 4·4조로 되어 있다. 목청 시원한 여자 한 사람이 선창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강강술래’라는 후렴구를 하고 원을 그리며 춤을 춘다. 영남지방에는 남자들이 추는 ‘쾌지나칭칭나네’가 있고, 안동 지방에는 ‘놋다리밟기’ 등이 있다.조상들은 한해 농사를 갈무리하며 하늘에 감사하고 여러 가지 축제로 잔치를 벌였다. 음식을 나누고 놀이를 통해 단합하며 농사의 수고로움에서 회복의 시간을 가졌다. 이제 추석에 하는 놀이는 옛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남았다.코로나19로 인해 추석의 인사말이 바뀌었다. ‘모이지 않는 게 정, 몸은 멀리 마음은 가까이’라고 한다. 이번 추석에는 모이지 않고 랜선으로 축제를 즐기자. △챙겨요 건강 나눔 축제금산인삼축제, 풍기인삼축제, 산청한방약초축제가 있다. 코로나19로 건강의 중요성이 강조된 만큼 이와 관련한 온라인 축제도 큰 관심을 모은다. 금산인삼축제는 인삼주와 인삼 쉐이크 등 인삼을 소재로 한 체험 키트를 할인 가격으로 판매하고, 풍기인삼축제는 매일 오전 10시부터 유튜브를 통해 다양한 축제 프로그램을 생중계하고 풍기인삼을 경품으로 내건 이벤트도 수시로 연다.△랜선으로 즐기는 우리 문화온라인에서도 우리 문화의 매력은 빛을 발한다. 울산옹기축제는 옹기와 관련된 퀴즈를 풀고 옹기 쿡방, 옹기 홈쇼핑, 랜선 버스킹 등 다양한 콘텐츠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또한 문경 찻사발축제는 도자기를 굽는 과정에서 나오는 다양한 소리를 ‘ASMR 불멍’이란 이름으로 제공하고 ‘차담이와 떠나는 문경 랜선 투어’, ‘윤택의 시골 알바’ 등 자체적으로 제작한 영상도 공개했다.△윷놀이지방자치단체 건강가정지원센터에서 후원하는 우리 가족 추석놀이가 있다. 가족과 함께하는 대형 윷놀이는 비대면 방법으로 실시한다. 인터넷으로 접속하여 QR코드로 인식하면 자세한 방법이 나온다. 윷놀이에 필요한 키트도 워킹스루로 받을 수 있다. 가족과 놀이하며 사진을 찍어 제출하면 된다.△한국인의 흥이 느껴지는 품바축제집에서도 엉덩이가 들썩들썩, 어깨가 으쓱으쓱 신나게 몸을 흔들며 즐기는 음악 축제도 온라인으로 열린다. 매년 한국인의 흥을 끓어오르게 하는 음성품바축제도 온라인으로 열리고 유튜브에서 생중계를 즐길 수 있다. 품바 공연에 무려 2천개의 댓글이 달리며 뜨거운 호응을 끌어냈다. △산청한방약초축제산청한방약초축제는 온라인 홍보채널에서 ‘추석맞이 약초·농특산물 판매대전’을 선보이며 작년보다 판매 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고속도로 산청 휴게소 로컬푸드 행복장터와 단성IC근처에 직거래 장터를 마련, 청정자연에서 키워낸 산청약초를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며 구매자들의 호응을 얻었다.이번 추석놀이는 랜선으로 즐기자. 먼 내일의 우리는 ‘그땐 그랬지’라고 말하겠지. 미래의 우리는 또 어떤 추석놀이를 마주할까./이순혜(수필가)

2021-09-16

뛰어난 접근성·넓은 부지면적으로 확장성 무궁무진

□ 인천가족공원, 종합 장사시설의 모범이 되기까지인천가족공원은 인천광역시 부평구 평온로 61에 위치하고 있는 인천시의 종합장사시설이다. 기존 부평에 위치한 공동묘지를 전국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처음으로 예산을 투입, 전체 묘지의 일부를 재개발해 자연장지 및 공원을 조성한 곳으로 유명하다. 공동묘지(共同墓地) 형태로 1934년부터 자연적으로 조성된 이곳은 1971년 6월 당시 건설부의 묘지공원 결정고시를 시작으로 1977년 4월 화장장인 부평시립 승화원이 이전(화장로 7기)해오며 장사시설 조성에 발을 뗐다고 볼 수 있다. 당시에는 화장에 대한 수요와 인식의 한계로 묘지로서의 역할에만 집중했다. 그러다 1996년 11월 공동묘지가 만장이 되자 2002년 4월 인천시설공단이 화장장을 인수해 운영에 나서며 종합장사시설로의 변화를 위한 본격적인 움직임에 돌입했다. 인천시설공단이 운영을 맡은 해인 2002년 10월 구화장을 철거하고 11기의 신축 화장로를 가동했으며, 2003년 3월에는 추모의 집을 준공했다. 이듬해인 2004년 9월에는 화장로 4기를 증설해 총 15기의 화장로를 보유하게 됐고, 2005년에 부평묘지관리업무를 인수한 뒤 2006년에 명칭을 현 인천가족공원으로 변경했다. 2007년 금마총 준공, 2010년 만월당 준공, 2011년 승화원 증축 및 리모델링 공사 준공(화장로 5기 증설), 2016년 2단계 시설물 인수인계(봉안담, 외국인묘역 등) 등을 거쳐 2019년 별빛당을 준공해 현 상태에 이르렀다.글 싣는 순서1. 장사시설과 장사문화,우리는 장사를 어떻게 보고 있나2. 포항시,종합장사시설 마련 첫걸음3. 장사시설 선두주자인천 가족공원4. 시민의 품 안에세종 은하수 공원5. 장사 문화 개선을 위해포항이 나아가야 할 방향 이 중에서 눈여겨볼 것은 2006년 현 인천가족공원으로의 명칭변경을 기점으로 종합장사시설로서의 모습을 착착 갖추게 됐다는 점이다. 이는 현재까지 3단계로 나눠 시행된 가족공원 조성계획이 차질없이 진행된 결과로 풀이된다.먼저 2006년부터 2011년까지 진행된 1단계 사업을 통해 인천가족공원에는 만월당, 관리사무소, 홍보관, 상가, 생태하천 등이 조성됐다. 이어 2011년부터 2016년 진행된 2단계 사업은 평온당, 외국인묘역, 봉안담, 자연장, 쌈지마당, 소로 정비 등을 진행했다. 현재 추진 중인 3단계 사업은 2016년부터 2040년까지로 계획돼 5차에 걸쳐 진행되고 있다. 우선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진행된 3-1단계 사업은 봉안당 건립, 자연장 조성, 산림자원 복원 등이, 2020년부터 2040년까지 진행될 3-2단계∼3-5단계 사업은 자연장 조성과 산림자원 복원에 집중한다. □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는 종합장사시설의 모범인천가족공원의 가장 큰 장점은 뛰어난 접근성과 넓은 부지면적이다. 원래 공동묘지가 자연적으로 있었던 곳이기는 하지만, 인천의 발전과 확장 속에서도 외곽으로 이전되지 않고 꿋꿋하게 자리를 지켜 현재에 이르렀다. 일반현황을 보면 공원면적이 160만㎡(약 50만평)으로 국유지 71%, 시유지 18%, 사유지 11%로 이뤄져 있다. 장사시설로는 봉안시설, 자연장지, 화장장 등을 보유하고 있다.먼저 봉안시설을 살펴보자. 인천가족공원의 봉안시설로는 봉안당과 봉안담이 각각 5개씩 있다. 봉안당은 조성시기 순으로 △추모의집(2003년 3월) △금마총(2007년 12월) △만월당(2010년 5월) △평온당(2015년 4월) △별빛당(2019년 8월)이 있다. 안치능력은 추모의집 1만9천230기, 금마총 1만6천675기, 만월당 2만9천184기, 평온당 3만6천656기, 별빛당 3만5천104기다. 별빛당만 안치가 진행 중이며, 이를 제외한 4곳은 만장이다.봉안담은 2016년 5월에 5곳을 일제히 조성하기 시작했다. 이 중에서 회랑형(3천990기), 외국인(9천330기), 봉안담Ⅰ(부부, 1천140기)이 안치 중이다. 나머지 봉안담Ⅱ(가족, 1천696기)는 올해 11월부터 안치 예정이고, 봉안담Ⅲ(4천144기)는 조성을 진행하고 있다.이어 자연장은 총 9곳이 있다. 수목장림 및 자연장 6곳, 정원식 수목장 2곳, 가족정원장 1곳이 운영되고 있다. 이 중에서 2008년 7월 조성돼 1천366기가 안치된 수목장림, 2012년 6월 조성돼 1천321기가 안치된 늘푸른잔디장, 2012년 6월 조성돼 557기가 안치된 솔향기 정원식수목장, 2013년 7월 조성돼 2천604기가 안치된 하늘정원 잔디장, 2016년 5월 조성돼 2천63기가 안치된 별마루잔디장 5곳은 만장됐다. 현재는 2016년 5월 조성된 바람들녘 잔디장(2천600기), 바람정원 수목장(1천896기), 별하원(어린이전용 봉안시설, 720기)이 안치를 진행 중이며, 2018년 7월 조성된 가족정원장(336기)이 봉안담Ⅱ와 더불어 오는 2021년 11월 안치를 시작한다.화장장인 승화원은 연면적 5천608.22㎡에 건축면적 3천800.75㎡로, 화장로 20기를 보유하고 있다. 일일 처리능력은 72구로, 지하 1층부터 지상 2층까지 유족대기실, 화장로, 관망실, 접수실, 감시실, 수골실, 식당, 매점 등이 들어서 있다. 이 외에 인천가족공원묘지는 연면적 155만3천36㎡로 올해 7월말 기준 3만7천805기의 묘지가 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사실은 인천가족공원이 종합장사시설로는 전국 최초다시피 할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갖고 있지만, 확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이다. 만장 시기에 맞춰 준비해 온 계획대로 착착 시설을 확장하는 모습은 감탄을 자아낸다. □ 시민들과 함께하는 장소로인천가족공원은 국내 종합장사시설을 선도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시민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고자 노력함은 물론 그들의 삶 속에 함께하는 공간으로 자리를 잡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있다. 일례로 연중무휴 자유관람 형식으로 운영하고 있는 장사문화홍보관을 들 수 있는데, 우리 장사문화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로 이어지는 점층적 스토리텔링을 통해 친환경적인 자연장 홍보를 진행함으로써 새로운 장사문화 전환을 유도하고 있다. 또한 세계 각국의 장사문화 간접체험과 제사상 차림 등 장사 예절교육도 병행하고 있다.사이버추모관 역시 유족들을 위한 배려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인천가족공원 사이버추모관은 인터넷 컴퓨터 통신망을 기반으로 가상공간을 활용해 365일 언제 어디서나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면서 가족이나 친지 등 고인에 대한 영정과 음성을 보고 들으며 추모할 수 있는 온라인 서비스다. 인천가족공원에서 매장, 화장, 봉안, 수목장, 산골 등 장사 시설을 이용한 고인의 유가족을 대상으로 무료로 운영하고 있다. 사이버 추모관에서는 고인의 유족 및 단체의 방 관리자가 고인의 사진 또는 음성 및 동영상 자료를 50mb 내에서 자유롭게 게시·수정·삭제할 수 있으며, 유가족만을 위한 전용공간을 별도로 운영할 수도 있다. 고인을 추모하고자 하는 일반인의 경우 방 관리자가 특별히 제한을 두지 않는 범위 내에서 관리자가 게시한 자료의 열람 및 사이버 조문이 가능하며, 고인에게 소중한 마음이 담긴 편지를 자유롭게 보낼 수도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언택트 시대에 걸맞은 서비스라고 볼 수 있다. 고객만족을 위한 각종 사업에도 열심이다. 고객들의 목소리와 요구 사항에 귀를 기울이고자 고객만족도 설문조사를 실시, 이를 바탕으로 지난 하반기에는 △별마루잔디장 휴게공간 조성 △화장로 탄력 운영 △상가동 보수공사 △승화원 식당·매점·카페 운영 등의 사업을 진행했다. 올해는 △승화원 운구방식 변경 및 진입로 노면표시 도색 공사 △바람정원자연장 시설보완 환경개선 △늘푸른잔디장과 파고라 지붕보수 공사 △추모의집 대형주차장 장애인 편의시설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전준혁기자 jhjeon@kbmaeil.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1-09-15

‘역병의 시대’ 공포 앞에 선 인간에 내민 따스한 손길

역사와 이념이 야기한 아픔을 누구보다 크게 겪은 김성동 작가. 평화로운 마을을 갑작스레 덮친 낯설고 악랄한 도둑처럼 우리 곁을 찾아온 코로나19 바이러스. ‘금방 사라지고 다시 일상이 돌아오겠지’라는 기대와 바람은 2년 가까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이른바 ‘코로나19 사태’의 그림자는 여전히 짙고, 터널의 끝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그래도 가을은 왔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두 번째 가을이다. 훌쩍 떠나는 여행도, 친구와의 흥겨운 만남도 조심스러운 이때. 무엇이 우리를 위로할 수 있을까?아주 오래전부터 그랬듯 문학은 인간이 느끼는 외로움과 고립감을 이겨낼 힘이 돼준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가벼운 소설이나 시보다는 조금은 진지하고 무거운 책 한 권을 펼쳐보는 게 어떨지.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역병의 시대’를 살고 있는 기자는 최근 소설가 김성동을 떠올렸다. 2021년 오늘 못지않은 고통의 시대를 살아온 그의 생애와 작품을 2회에 걸쳐 소개한다. ‘코로나19 시대’의 가을을 견디고 있는 독자들에게 ‘위무’라는 작은 선물이 될 수 있기를. 1979년 출간… 여전히 독자들의 사랑 받는 이유는“한국에서 더 이상의 구도소설((求道小說)은 있을 수 없다”라는 평가를 받은 김성동의 출세작 ‘만다라’를 처음 만난 건 1987년 가을이 완연한 때였다.문학과 음악에 눈 밝은 사촌형이 있다. 한 일간지 신춘문예 희곡 본심까지 오른 글재주도 겸비한. 한국문학사가 발행한 1979년판 ‘만다라’를 만난 건 그의 책꽂이에서다.군만두를 안주 삼아 술 마시는 법을 가르쳤던 다섯 살 터울의 사촌형은 술만이 아니라 세상도 가르쳤다. 겨우 스물두 살의 나이였지만 1천 권이 넘는 책을 소장한 장서가이자, 클래식음악 애호가였던 그의 방.조르주 바타유와 에밀 졸라 같은 발음하기도 힘든 외국 작가들의 이름을 들었고, 오페라 ‘마적’의 ‘밤의 여왕의 아리아’를 처음 접했다. 바로 그 방 책꽂이에서 만난 김성동의 소설 ‘만다라’. 이상했다. 분명 그 소설엔 ‘희고 탄력 있는 여인의 육체’ ‘붉은 등이 켜진 사창가’라는 표현이 등장했고, “나는 그 여자와 이층을 만들었다”는 등의 성적인 은유가 담긴 대사도 곧잘 나왔지만 그것들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에로틱하다기보다는 서글펐다. 궁금증을 풀어준 것은 사촌형이었다.“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쓴 글에서만 읽히는 슬픔이야. 그 사람 승려였어.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불가(佛家)에서 축출 당했지. 그렇게 맑고 정직한 사람이 속세에서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모르긴 해도 곧 다시 절로 돌아갈 걸.”처음으로 책이 나온 후 여러 출판사에 의해 수차례 재출간된 ‘만다라’. 출판사 새움은 이 소설을 아래와 같은 명료한 문장으로 요약하고 있다.“한국 불교소설의 백미로 평가받는 김성동의 ‘만다라’는 저자가 20대 젊은 날에 겪은 삶에 대한 번민이 고스란히 서려 있는 잿빛 노트이면서, 당시 산업화의 병폐가 나타나고 있던 한국사회와 속세의 가치를 탐했던 불교에 대한 직관적인 비판이 녹아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종교적인 내용들을 모른다고 해서 작품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다. ‘만다라’는 불교라는 상자 안에 인생의 진리를 찾아 방황하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담아, 그 안에서 새로운 가치를 모색해 보려는 시도이며 맹목적으로 불교의 교리가 주입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정확한 이야기다. 기자가 몇 번을 다시 읽은 ‘만다라’는 불교라는 종교적 틀 안에서만 해석되는 작품이 아니다. 거기엔 인간 보편의 고뇌와 거기서 빠져나와 참된 생의 가치를 찾으려는 젊은이의 발버둥이 핍진하게 그려져 있다.출간된 지 42년이 지났지만 ‘만다라’가 여전히 독자들의 관심과 사랑 속에서 생명력을 유지하는 이유는 바로 이 보편성과 현재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970년대 인간들이 겪었던 고통과 수난은 그 형태와 양상을 달리해 2021년 오늘의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도 아마 그중 하나가 아닐까?그렇다면 소설 속에는 고통과 수난의 해결 방식도 담기지 않았을까? ‘만다라’를 펴든다는 건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일 터. 상대의 손을 따스하게 잡아주는 ‘위로의 힘’을 아는 작가작가 김성동을 실제로 본 것은 책을 접한 지 15년쯤이 흐른 뒤였다. 좋아해온 소설가를 대면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부풀었다. 그러나 ‘만다라’에 이르는 길은 수월치 않았다.법명 정각(正覺), 속명 김성동(金聖東)을 찾아가는 길엔 애초 선배 두 명이 동행키로 약속돼 있었다. 하지만, 만남이 있던 날, 그 둘은 예기치 않은 일을 이유로 함께 갈 수 없음을 알려왔다.난감했다. 초행길을 혼자 나서야한다는 당혹감은 물론이거니와, 더 곤혹스러운 건 김성동과 둘이 마주앉아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하는 난처함이었다. 당시 김성동은 경기도 양평과 강원도 화천의 중간 지점에 살고 있었다.버스에 올라서도 걱정은 여전했다. 하지만 버스가 서울 시내를 벗어나 교문리를 지나고, 다산 묘소에 이르자 들썩이던 심장이 다소간은 가라앉았다.도심에서 고작 30여 분을 달렸을 뿐이지만, 차창을 스치는 풍광은 도시의 그것과는 천양지차였다. 오랜만에 달려본 시골길은 아름다웠다. 김성동의 소설에서 묘사되는 풍광처럼.코앞까지 다가온 산에는 희끗희끗 잔설이 저녁 햇살에 빛나고, 팔당댐의 물빛은 울렁거리던 가슴을 진정시키기에 넉넉했다. 혼잣말을 했다.“그래 가보자. 정각의 말처럼 진리는 길 위에 있고 나는 지금 길 위에 서있지 않은가.”양수리에서 완행버스를 타고 양평, 거기서도 4~5km를 더 들어가는 골짜기. 김성동의 집에 도착했을 땐 짧은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가방을 내려놓고, 외투를 벗으며 그와 악수를 나눈 순간. 그때까지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있던 두려움과 막막함의 부스러기를 훌훌 털어낼 수 있었다. 김성동의 손이 너무도 따뜻했던 것이다.앞서 ‘코로나19 시대’의 위로에 관해 이야기한 바 있다. 어려움과 공포 앞에 서있는 인간을 위로하는 힘은 무엇보다 따스한 온기일 터.김성동의 문장에선 떨고 있는 사람의 어깨를 다독여주는 손길이 느껴진다. 비단 ‘만다라’만이 아닌 다른 작품들에서도 마찬가지다. 소설가가 겪어야 했던 소설 같은 가족사인간은 현재 자신이 겪는 아픔과 서러움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인 줄 안다. 그게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 이전에도 인간은 고통 속을 살았다.사람의 평생을 더듬어보면 누군들 아픈 사연이 없을까. 김성동 역시 역사와 이념이라는 단어에 짓눌려 춥고 배고픈 유년과 허무에 휘청거리는 청년시절을 보냈다.김성동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직전 예비검속으로 교도소에 수감됐고, 1950년 대덕 산내에서 죽음을 맞았다. 좌익이라는 이유였다. 제삿날도 모른다.김성동의 어머니는 60년 이상을 남편의 생일날 제사상을 차렸다. 그녀 또한 남편의 이념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고문을 모질게 당했다. 여기에 김성동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외가? 말도 마라. 그쪽은 좌익들에게 풍비박산이 났어. 외숙부는 면장을 했는데 반동 부르주아라는 이유로 인민재판에서 처형당했지. 하긴 그때 우리 집안만 그랬겠어. 좌우의 대립이라는 한국 현대사가 남긴 상흔이지.”젖먹이 김성동에게 공무원과 장교가 될 수 없고, 고시를 통과해도 임관될 수 없으며, 비행기 타는 것조차 자유롭지 못한 ‘좌익의 아들’이란 멍에를 남기고 떠난 아버지. 그러나 김성동은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말로 부친을 두둔했다. 코로나19가 주는 공황과 우울을 잠시나마 잊게 해줄 소설 ‘만다라’. “아버지는 당대의 이상주의자였고, 내겐 원초적 그리움의 대상일 뿐이야. 살면서 단 한 번도 아버지를 의심한 적이 없어.”1950년대. 남편 없는 아내와 아버지 없는 아들이 세상을 버텨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다.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자 애썼다.애초 김성동에게 소설은 고문 후유증으로 앓아누운 어머니를 위로하는 수단이었다. 열두 살 소년에겐 고통을 멎게 해 줄 약을 살 돈이 없었다. 떠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는 가족의 이야기를 지어내 공책에다 끼적였고, 그걸 어머니에게 읽어줬다. 가만히 듣던 모친이 말했다고 한다.“너무 슬퍼서 눈물이 나네.”고래로부터 문학은 허구를 수단으로 현실을 위로해왔다. 반세기 전 이념 탓에 고통 받는 어머니에게 카타르시스를 줬던 김성동은 문장은 세월을 뛰어넘어 분명 코로나19로 인해 공황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오늘의 우리를 따스하게 어루만져줄 것이다.청명하게 높아가는 하늘 아래서도 마냥 환하게 웃기 힘든 2021년 가을. 바이러스의 횡포 앞에 선 이들에게 소설 ‘만다라’가 전하는 위로와 만나보길 권한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9-15

참외를 아이스크림에 쏙~로컬서 즐기는 ‘건강한 맛’

경상북도 성주의 한 외딴 지방도. 이곳에는 수제 아이스크림을 파는 곳이 있다. 가게 이름은 ‘능행’이다. ‘임금이 능에 행차한다(陵幸)’라는 왠지 거창한 이름은 아니다. ‘能(능할 능)’과 ‘行(행할 행)’의 ‘할 수 있다’라는 뜻이다. 어쩌면 청년이기에 지을 수 있는 가게의 이름이라는 생각도 든다. ‘능행(能行)’의 주인장은 두 사람이다. 동생인 권은아(37) 대표가 언니인 권세라(41) 대표와 함께 하고 있다.이들은 ‘시골에 사는 아이스크림’이라는 프로젝트명으로 성주에서 참외를 활용해 아이스크림을 만들며 6차 산업을 향하는 길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가공식품인 아이스크림이 ‘시골’에서 만들어져 더 천연에 가깝고, 자연 친화적인 느낌을 주어 건강한 아이스크림 컨셉을 전달하고 싶었어요. 여기에 아이스크림을 의인화해 시골에서 살고 있다고 표현을 했고 친근함을 담았어요. 사업명을 저희 컨셉으로 설정하고 상호명은 모든 뜻을 함축한 ‘능행(能行)’이라고 짓게 됐죠. 진정한 행함을 위해서는 수많은 노력과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모든 것을 감내하고 나아가려는 저희의 진정성을 담고 싶었어요.”그래서 ‘능행(能行)’ 아이스크림의 주된 재료는 참외다. 그동안 참외를 이용한 아이스크림은 수제 젤라또 가게에서 참외 샤베트를 만드는 정도로 밖에 접할 수 없었다. 참외가 수분이 많고 향이 약한편이라 샤베트 형태로 만들 수 밖에는 없었다. 참외를 이용한 아이스크림은 지난한 연구의 결과물이었다. 성주군 농업기술센터에서 참외향이 풍부한 참외동결건조분말을 개발했다. 이를 우유와 접목하니, 3가지 맛의 아이스크림이 탄생했다. 아이스크림에 대한 평가도 좋다 보니, 사업도 확장됐다. 아이스크림을 판매하는 가게의 형태에서 공장이라는 제조업으로 발을 넓힌 것이다.“처음부터 제조업을 계획하고 창업을 시작했어요. 아이스크림은 특히, HACCP 인증이 필수죠. 단순히 잘 팔리는 제품을 만들어서 많이 팔면 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품을 위생적이고 안전하게 만들어서 많이 팔아야 하는 거죠. 이 부분을 한결같이 유지 및 관리를 해야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인 것 같아요.”다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능행(能行)’의 행보에 제동을 걸고 있다.“코로나19는 정말 타격이 커요. 올해 초에는 과감하게 가게 문을 닫기도 했어요. 직원 보호도 있지만, 저희 가게에서 발생할 수 있는 고객 간의 교차 전염을 막는 목적이었죠. 하지만 당장의 고정비들이 나가는 저와 같은 자영업은 힘들죠. 정말 월급 받는 분들이 부럽기도 했어요. 매출이 약간의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던 시점에서 판매가 거의 차단되어 버리니, 그동안의 홍보에 든 비용과 노력 또한 ‘0’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서 참 마음이 쓰렸죠.” □ 대구 토박이 자매… “시골이 편해요”본래 권세라·권은아 자매가 창업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권은아 대표는 1년 정도 스낵 및 식품 제조회사에서 직장생활을 했지만, 단 한 번도 창업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여느 직장인과 마찬가지로 회사에 충성하고 팀원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다. 퇴사를 결심했지만, 어학연수를 떠날 계획을 세웠을 뿐이었다.“학교에서 석사까지 마친 후 대기업 제과회사에 입사했어요. 당과와 스낵류 연구개발이 주된 업무였죠. 이후에는 사촌 오빠가 대구에서 비정제 사탕수수당 회사를 시작했고, 저는 품질연구 업무의 책임자로 스카웃되어 5년간 일했어요. 가족이 하는 회사다 보니, 맡고 있는 업무 외의 전반적인 경영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됐어요. 아마 창업에 대한 실전 경험이 저도 모르게 쌓인 것 같아요. 그래서 퇴사 후 다양한 갈림길 앞에서 3년 전부터 저에게 요청을 하셨던 거래처가 있으셨는데, 판로가 어느 정도 확보된 아이스크림 제조업을 하고자 하게 됐죠.”언니인 권세라 대표도 영어에 능통하면서 식품 업계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함께 창업을 할 수 있는 믿음직한 동료가 됐다. 그렇게 해서 처음 제품화한 것이 ‘능행 젤라또’였다. 12가지 맛을 볼 수 있는 이 제품은 온라인을 통해 판매되고 있다.그렇다면 왜 하필 경상북도 성주였을까. 사실 이들 자매는 성주에 아무런 연고가 없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사투리를 진하게 사용하는 ‘대구 토박이’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교와 대학원도 대구에서 마쳤다.“식품의 근간은 땅이잖아요. 땅은 도시보다 시골에 있지요. 지금까지 해왔고, 앞으로도 해나갈 식품업이라면 땅과 가까운 것이 당연한 것 같아요.”물론 더욱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전체 아이스크림 시장은 축소되고 있지만, 카페 등 외식산업이 성장하면서 ‘젤라또’와 같은 고급 아이스크림 시장은 점점 늘고 있는 추세였어요. 그러나 ‘고급 아이스크림’의 공급 업체는 국내에서 손에 꼽히며, 특히, 남부지방 쪽에서는 생산업체가 전무했어요. 그래서 저는 이러한 공급업체로 성장하고 싶었죠. 하지만 당장 큰 공장을 차려서 운영을 하기에는 여러 가지 부담이 컸어요. 제가 생각한 방향은 수제 아이스크림 가게에서부터 시작해 제조업으로 점점 키워나가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높은 유지비의 도시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죠. 성주는 접근성이 뛰어나요. 외부 지역민의 유입도 많구요. 특히, 성주에 참외 생산 및 GAP 시설을 보유하고 있는 외사촌이 있어서 성주의 제1특산품인 ‘참외’를 아이템으로 정했어요.”이렇게 고향인 대구를 떠나 성주의 삶을 이어간 자매. 이들은 시골에서의 삶에 만족하고 있을까?“도시 사람이 시골로 가면, 소위 말하는 텃세가 있다고 하잖아요. 저희는 젊은 사람이 와서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서 그런지 텃세가 없어요. 오히려 저희 집주인 어르신부터 이장님까지 모두가 너무 잘해주셔요. 하나라도 팔아주시려고 하고, 소문도 내주시고 많은 도움을 받고 있죠. 물론 도시와 시골의 패턴은 너무나 다르죠. 다만, 이곳에서는 몇날 며칠을 일에 몰두할 수 있고, 쉬고 싶을 때는 여유롭게 시간을 안배할 수 있어요. 제 일에 대한 책임감이 훨씬 막중하지만, 제가 적극 개입하는 생활 패턴 오히려 더 마음의 여유를 주는 것 같아요.” □ 가치를 지키고 고민하고 실행할 수 있는 시간권세라 대표와 권은아 대표는 청년들의 시골 정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그래서 조금은 철학적일 수 있는 질문을 던졌다. 도시의 삶과 로컬의 삶이 어떻게 다른지 말이다.“(로컬은)조금 더 여유롭고 깊으며 폭넓은 사고를 할 수 있어요. 도시에서의 생활은 당장의 생활에 쫓기듯 살아가야 하죠. 눈앞의 생활비와 유지비 등 경제적인 문제가 가장 크죠. 하지만 로컬에서의 삶은 달라요. 제가 하고 싶은 것과 잘할 수 있는 것. 제가 추구하는 가치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실행할 수 있는 시간과 여건이 있죠. 팔리기 위한 제품이 아니라 의미와 추구하는 가치를 중심으로 고민할 수 있어요.”문제는 비전이었다. 청년들이 로컬에 들어와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가치가 있느냐의 문제였다. “분명 개인의 성향과 관계가 많은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저와 같이 여유롭고 조용한 생활을 원한다면 추천을 하죠. 하지만 빠른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할 사람들은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아직 고민 중에 있는 분들에게 말씀을 드리자면, 도시에서 하는 창업보다 시골 지역에서의 창업은 또 다른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시골 지역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지역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고, 그 네트워크가 큰 힘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사업에 참여를 하게 된다면, 오픈 마인드로 타 사업팀들과 적극적인 교류를 해서 탄탄한 네트워크를 쌓으면 좋을 것 같아요.”말 그대로였다. ‘능행(能行)’의 두 자매는 여러 가지 지역 사업에 참가하고 있었다. 클래스 1010 신사임당 강의에 나가기도 하고, 성주와 대구 및 김천의 플리마켓에 참가했다. 또 지역민들과 함께 ‘능행(能行)’의 동행 프로젝트를 진행했다.“앞으로의 계획이요? ‘능행(能行)’이라는 브랜드에 대한 고객의 무한신뢰를 확보하는 거죠. 이를 위해, 저희의 진실된 이야기를 알리고 인지시키고 싶어요. 또 저희의 방식을 오픈해서 많은 청년들과 공유하고 싶기도 하구요.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기에, 미래에 소신과 철학을 잃지 않는 행보였다는 평가를 받고 싶어요.”/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1-09-14

칠곡을 빚더미서 건져낸 작은 거인 백선기

낙동강 방어선과 다부동 전투에서 대한민국을 지켜낸 호국평화의 도시 칠곡, 대구시와 구미시 김천시 등 대도시에 포위된 인구 12만명의 시 승격을 지향하는 도농복합군이다. 지역 토착세력과 도시로 유입된 외부인들이 뒤섞이고 읍면별 성격도 뚜렷해 통일된 정체성보다 역동적이고 진취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3선으로 재임 10년을 맞은 백선기 군수는 호국의 고을 칠곡을 평화의 도시 칠곡으로 군 외연을 확장시켰다. 지역민의 다양성에서 오는 불협화음을 하나의 목소리로 순화시켜 계층간 화합을 이끌어 내고 최악의 적자 살림을 채무 제로의 건강체로 바꿔 칠곡을 빚더미서 건져냈다. - 코로나팬데믹이 2년째 전 세계를 휩쓸고 국내에서도 대다수 이렇다 할 축제들이 모두 중단되거나 무기 연기되고 있다. 이 판국에 칠곡은 낙동강 세계평화문화대축전을 개막했다. 어떤 자신에서 큰일을 벌였나.△ 많이 망설였다. 군민들이 그동안 너무 지쳐가고 있어 용기를 불어줄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참전 용사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고 평화의 메시지를 공유하기 위해 현장과 함께 메타버스 플랫폼을 활용한 온라인으로도 개최하게 되었다. 호국과 평화를 관광과 접목한 축제를 통해 온택트 시대를 칠곡군이 앞장서 열어가자는 의견을 반영했다.- 칠곡이 호국평화의 도시라고 했다. 축제도 시정도 모두 이런 슬로건아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군민들이 호국과 평화 브랜드에 만족하고 있나.△ 6·25 전쟁 당시 전투에서 이 강토를 지켜낸 참전용사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리고 나아가 칠곡군의 도시 정체성을 알리며 이를 관광산업과 연계시키기 위해 호국과 평화를 브랜드화 했다. 물론 군민들이 적극 동참하고 있다.- 관광을 성장 동력으로 삼겠다고 공약도 했고 호국 평화를 브랜드로 관광사업도 많이 벌인 것으로 안다. 왜관 낙동강철교를 중심으로 한 U자형 관광벨트를 핵심 사업으로 추진한다고 했는데 얼마나 진행되고 있나.△ 호국평화의 도시라고 했지만 호국의 다리와 다부동 전적기념관을 제외하면 도시의 정체성을 상징할 뚜렷한 인프라가 없었다. 그래서 2013년부터 10년간 1400억원을 투입해 호국의 다리를 중심으로 낙동강변 좌우에 U자형 관광벨트를 조성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군청에서 2km 떨어진 낙동강변 칠곡보 옆에 칠곡호국평화기념관을 조성하고 인근에 칠곡보 생태공원과 관호산성 둘레길, 향사아트센터, 꿀벌나라 테마공원 등을 조성했다. 호국 평화를 스토리로 한 역사와 안보, 자연과 생태, 문화 예술을 한 곳에서 체험할 수 있는 대규모 관광단지다. 내년 완공되면 이 일대 지도가 확 바뀐다.- 2011년 보궐선거로 군수에 입성해 재임 10년이 됐다. 재임 당시와 현재를 비교할 때 가장 달라진 점은 무엇이라고 꼽나.△ 부정적이고 서로 반목하던 각 계층간 민심을 화합시키고 통합시켰다. 지역 내 각종 사회단체의 장들로 군민대통합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그들의 의견을 겸허하게 수렴해서 군정에 반영했다. 그랬더니 시끄럽던 지역 민심이 조용하게 주저앉더라. 내가 복이 많았던 것 같다.- 취임 당시 빚덩이였던 칠곡군 재정을 채무 제로 상태로 바꿔 놓았다. 국가채무가 국가적 현안인데 군 단위에서 대단한 성과를 올렸다.△ 취임하고 보니 채무가 715억원이나 되더라. 예산의 21%가 넘었다. 군부 평균이 5.8%였으니 전국 82개 군 중 1위였다. 국가기관 채무뿐 아니라 시중 금융기관의 고금리 부채도 있어 한 해 이자만도 30억원이나 갚아야 했다. 2012년부터 재정건전화 로드맵을 마련하고 채무 청산 작업에 본격 나섰다. 결과 2018년 1월 행안부 청사정비기금 58억원을 청산하면서 드디어 채무제로 상태에 돌입할 수 있었다.- 말처럼 쉽지 않았을 것인데, 어려움은 없었나.△ 나 자신 오랜 관료 생활에 젖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선거에 나서면서 ‘군수로 누릴 부분을 과감히 포기한다’라는 스스로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먼저 군수 관사를 없앴다. 도청 감사관실에서 단체장의 관사 예산 집행부터 보고 감사했던 기억을 살렸다. 주위에서는 ‘쇼를 한다’거나 ‘기존 관사보다 더 좁고 낡은 집을 구할 것’이라는 조건을 걸기도 했지만 솔선함으로써 군민들로부터 호응을 얻어냈다.- 빚을 갚는다고 허리띠를 졸라매면 다른 곳에 쓸 돈이 줄어들어 군민들 불평이 많았을 것 같다. 특히 목돈이 들어가는 SOC 사업도 못하게 된 것 아닌가.△ 기획재정부와 국토부에 실무 사무관을 직접 찾아가 군정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기도 했다. 도청에서는 김관용 도지사께서도 진정성을 알고 국가균형발전특별회계 예산으로 측면 지원을 해 주셨다. 왜관3산단 진입도로 건설비 488억원을 전액 국비로 지원받아 사업이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 관호산성, 역사너울길, 꿀벌나라 테마공원, 박귀희 명창 테마공원 등은 모두 100억원이 넘는 사업비가 들었는데 국비와 도비로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래도 재원 마련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에피소드 있으면 소개해 달라.△ 재원마련이 절실하지만 그렇다고 군의 알짜 자산을 매각하지도 않았고 꼭 필요한 사업을 없애고 무리하게 빚 청산에 매달리지는 않았다. 지역의 세븐벨리 골프장이 50억원을 체납하고도 운영을 계속하고 있어 과감히 공매처분을 신청했다. 체납액도 컸지만 그 파급효과가 더 클 것이라 판단했다. 그랬더니 몇 차례 유찰되면서 낙찰 가능성이 높아지자 2년 분납 하겠다는 협상안을 제시해서 받아들였다. 과정에 수많은 압력과 방해가 있었지만 직원들의 의지로 관철해냈다. 3선을 못 해도 좋다는 결단으로 실행하긴 했지만 인기만 생각했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채무도 갚고 이제 군민을 위해 쓸 재원이 여유 있는 것 같다.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군민에게 지원금을 지급했나. 계획은 있나.△ 지급하지 않았다. 코로나로 힘든 중소 상공인들에게는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 전체 군민 1인당 10만원을 지급한다면 120억원의 재원이 필요하다. 그 지원으로 군민들의 생활이 좋아지거나 코로나 상황이 끝난다면 지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10만원은 그런 효과를 가져 오지 못한다고 본다.- 왜관읍내에 미군부대가 있다. 군민과의 마찰은 없나? 군정에 방해가 되지는 않는가.△ 칠곡군은 전국 어느 자치단체보다 미군 부대와 긴밀한 협업 관계를 유지하고 상생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군은 6·25 전쟁 당시 자고산에서 북한군에게 포로로 잡혀 학살당한 미군 희생사 41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 2017년 한미 우정의 공원을 조성했다. 미군은 캠프 캐럴 담장의 60년 된 녹슨 원형 철조망을 자체 예산을 들여 시야를 방해하지 않는 직선 형태의 신형 철조망으로 교체하고 각종 행사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호국 평화의 도시라고 하면서 미군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기지 설치에는 반대하고 백 군수가 삭발 투쟁까지 했다.△ 사드 배치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사드 부지 선정을 위한 자치단체와의 어떠한 검토도, 요청도, 협의도 없는 상태에서 언론을 통해서만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나왔다. 적어도 단체장에게는 과정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어야 했다. 정부에서 사드 관련 정확한 정보를 국민들에게 제공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것을 반대했다.- 칠곡군의 시 승격을 위해 행정력을 집중하겠다고 공약했는데 어떻게 추진되고 있나.△ 시로 승격되기 위해서는 인구(15만 명 이상)와 구성 가구의 도시적 산업 종사 비율 등 조건이 있는데 칠곡군은 인구증가와 지방자치법 개정이라는 투 트랙으로 시 승격을 추진해 왔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인구절벽 상태에서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다. 시로 승격되면 500억원 안팎의 지방교부세를 추가로 받을 수 있어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재산세 과표기준의 상향이나 국민건강보험료 감면혜택 상실, 농어촌 특별전형 제외 등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 인구 증가로 생활하수와 쓰레기 문제 등 환경문제도 뒤따를 것이다.- 칠곡군은 대구광역시와 구미시 김천시 사이에 끼인 도농복합도시다. 지리적인 이점도 크지만 불리한 점도 있을 것 같다.△ 대도시와 인접해 숙박형 관광산업 발전에는 불리한 면이 있으나 체험형 관광은 유리하게 작용한다. 또 대도시 한가운데 위치해 공단 조성과 물류산업 발달에도 크게 도움이 된다. 왜관의 소상공인들이 상당수 대구와 구미에서 출퇴근하고 있어 코로나 방역에는 애를 먹기도 한다.먹고 사는 문제는 백화점식 산업이 발달한 칠곡만의 특징이 있다.농업인구가 11%이지만 성주 참외나 청송 사과처럼 특화된 지역브랜드가 없다는 약점이 있다. 소지역별로 작목반에 따라 만든 브랜드를 군에서 포장재를 지원해주며 한 개의 브랜드로 통합해 가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3번 선거 중 어느 선거가 가장 힘들었나. 또 체급을 올려 도지사에 도전할 생각은 없나.△ 처음 출마했던 보궐선거가 가장 힘들었다. 지역 출신이지만 객지를 떠돌며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출마하니 공무원 세계에서는 알려져도 지역민들은 잘 몰랐다. 나 자신도 지역을 제대로 안다고 할 수도 없었고 현안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상대 후보가 굴러온 돌이라며 공격하는 통에 힘들었다. 재직 중 출마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그럴 일은 없다. 칠곡에 터 잡고 살 것이다. 대구의 아파트도 처분했다.-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 챙기지 못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남은 임기 중 미진했던 부분을 마저 완성하고 싶다. 민생 안정과 도약의 발판을 마련해 놓아야 한다. □ 백선기(66)칠곡 약목초등 청구중 순심고 방통대 행정학과 경북대 행정대학원 석사칠곡군에서 공무원으로 출발해서 경북도 총무과장, 청도부군수 등 도청 공무원으로 재직. 전임 장세호 군수의 선거법 위반으로 2011년 10월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 출마해 당선됐다. 이후 내리 3연임에 성공하며 칠곡군 최초로 3선에 이름을 올렸다.6·25 참전국 에티오피아에 새마을운동을 전파하고 참전용사를 두 차례나 초청했다. 다부동 전투 당시 1사단장이었던 고 백선엽 장군을 해마다 직접 찾아보고 사망 후에는 유족과도 진한 연대를 이어가고 있다. 호국의 영웅들과 의리를 지키는 작은 거인.

2021-09-13

칠십 넘어 독립 소극장 만든 영원한 현역

바다를 배경으로 여름밤의 신나는 연극 무대를 만들고 소외계층에 연극을 보여주기 위해 ‘찾아가는 연극’도 하게 된다. 그리고 고희(古稀)를 넘어 평생 꿈꾸던 일을 실천에 옮긴다. 그에게 은퇴는 없다. 헌 : 포항바다국제연극제는 포항을 대표하는 연극 행사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습니까?김 : 포항이 바다의 도시 아닌가. 여름밤 바다의 정취를 살리면서 세계 여러 나라의 작품을 무대에 올려 연극팬들에게 색다른 재미를 선사해보자는 취지로 2001년에 시작했어. 포항연극협회 회장이던 신상률 선생과 나 그리고 ‘은하’의 백진기 대표를 중심으로 여러 연극인이 의견을 모았고 이 과정에서 백진기 대표가 애를 많이 썼지. 처음에는 환호공원에서 인근 아파트 주민들과 소박하게 시작하다가 시민들의 참여가 늘어나 공연무대를 중앙상가 실개천으로 확대했고 영일대해수욕장 임시 공연장으로 무대를 넓혀나갔어. 그러고 보니 이 행사를 시작한 지도 벌써 20년이 넘었네.헌 : 바다국제연극제가 연극의 대중화에 상당한 기여를 하지 않았나 싶군요.김 : 그렇게 볼 수 있지. 시민들 입장에서는 여러 나라의 수준 높고 다양한 연극을 편하게 볼 수 있으니까. 헌 : 2003년부터 포항시립극단이 ‘찾아가는 연극’을 하게 되는데, 이 프로그램도 연극의 대중성 확보를 위해 만든 것으로 볼 수 있겠군요?김 : ‘찾아가는 연극’은 문화예술 소외계층을 위해 만들었지. 연극을 보고 싶어도 여건이 안 돼 평생 연극 한 편 못 보는 사람들이 있잖아. 그런 사람들을 위해 만든 프로그램이라고 보면 돼. 지역에서 연극의 대중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포항시립극단의 공공성도 확보하자는 취지였어. 무대장치와 음향장비, 의상 등 공연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준비해서 시민들이 그동안 접하지 못했거나 접할 수 없었던 작품을 공연한 거야. 시민들의 반응이 아주 좋았지. 이런 시도는 앞으로 계속 이어져야 할 필요가 있겠지.헌 : 어떤 작품을 무대에 올렸습니까?김 : 설해순 작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를 2003년 3월 23일 포항청소년수련관에 가장 먼저 올렸고, 이듬해 차범석 작 ‘옥단어’를 포항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 올렸지. 그리고 선린애육원 복지관과 신광면사무소 회의실 등에서 공연을 이어갔고.헌 : 선생님께서는 지역의 정체성(正體性)을 살려나가는 데 많은 관심을 가졌고, 또 그것을 작품으로 만드셨지요?김 : 창작 뮤지컬 ‘연오랑 세오녀’가 대표적이지 않나 싶군. 포항문화예술회관 개관 10주년을 기념해서 무대에 올렸지. 지역에서 예술하는 사람들이 지역의 역사를 깊이 공부하고 또 지역의 정체성을 살려가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 맥락에서 포항을 대표하는 설화인 ‘연오랑 세오녀’는 언젠가 때가 되면 무대에 올리고 싶었어. 포항시 일월동 일월지(日月池)라는 지명을 통해 민족의 정서와 공감대를 이끌어내고 오늘날 시민과 관객들에게 유대감을 심어주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지.헌 : ‘연오랑 세오녀’ 외에도 지역성을 담은 작품을 소개해주신다면.김 : ‘연화재의 통곡’이란 작품이 있어. 신라시대 포항의 대표적인 전설인데 정절을 지키다 숨진 한 많은 여자의 일생의 통해 인간의 숭고한 영혼과 포항의 정체성을 표현한 작품이지. 포항 장기에 유배 온 정약용을 다룬 ‘다산 정약용’도 있고.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항거해 분연히 일어선 포항 출신 산남의진(山南義陣) 창의장군인 의병장 최세윤을 다룬 작품도 빠트릴 수 없겠네.헌 : 이런 작품들은 포항의 자부심과 긍지를 세우는 문화적 토대가 되지 않았나 싶군요. 포항 100년사를 연극으로 승화했다는 평가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겠군요? 김 : ‘의병장 최세윤’의 시대적 배경이 1908년에서 1916년까지고, ‘아! 그날의 함성, 포항의 3·1운동’은 1916년에서 1919년까지 이어지지. 그리고 1920년에서 2009년까지 다룬 작품이 ‘형산강아 말해다오’야. 내가 연출한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이어보면 자연스럽게 포항 100년사가 되는 셈이지. 100년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그 안에 면면히 흐르는 일관된 정신, 가치를 연극으로 표현해보고 싶었어. 물론 평가는 관객이 하는 것이지만.헌 : 2013년 3월에 ‘김삼일 자유소극장’이 문을 열게 됩니다. 칠십이 넘어서 선생님만의 공간을 만든 것인데, 이 나이면 대개 모든 것을 내려놓지 않습니까? 그런데 선생님은 더 의욕을 내서 독립적인 공간을 만들어 관객을 불러모았습니다. 이유가 궁금합니다.김 : 대학에서 은퇴하고 조용한 곳에 연구실을 내는 학자들은 간혹 있지만 나이 칠십이 넘어서 나처럼 활동하는 연극인은 거의 없다고 봐야지. 이곳에서 관객과 함께 마음껏 꿈꾸겠다, 이렇게 마음먹었네. 2020년까지 8년간 ‘김삼일 자유소극장’에서 마음껏 행복했지. 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모두가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닌데, 이렇게 행복한 순간을 맞이한 것은 연극이 있었기 때문이야. 이 소극장은 나의 마지막 꿈이었어. 물론 소극장을 경영하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긴 했지만.헌 : ‘김삼일 자유소극장’의 개관 기념작은 어떤 작품입니까?김 : 러시아의 대문호 안톤 체호프의 ‘백조의 호수’를 각색한 ‘노배우의 고백’을 무대에 올렸어. 포항은 물론 서울까지 소문이 나더군. 마침 내가 연극에 입문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에 무대에 올린 뜻깊은 작품이지.헌 : 작품이 범상치 않을 것 같습니다. 작품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김 : 바실리치라는 노배우가 주인공이야. 러시아 연해주 한 지방 극장의 명배우 바실리치는 나이 칠십을 바라보지. 극장 지배인과 관리인은 그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불법 해고를 하려고 해. 하지만 바실리치는 자신이 걸어온 배우 생활을 돌아보면서 자신이 주연으로 무대에 섰던 ‘오셀로’ 등 유명 작품을 재공연하지. 그 작품 속에서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내일은 다시 태양이 뜰 것이다”라고 말해. 이날 무대에서 노배우 역을 맡은 배우 최희만의 대사를 잊을 수 없어. “이곳에 내 전부를 바쳤어. 그 모든 게 어디로 사라진 거지? 이 무대가 내 인생 45년을 삼켜버렸어”라며 최희만이 회한의 눈물을 흘리자 관객들도 함께 울더군. 나에게 연극은 그런 것이야. 관객들에게 진한 삶의 냄새를 느끼게 하는 것. 그 감동을 함께하는 것 말이야.헌 : 끝으로 연극계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해주시지요.김 : 현실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미래를 생각하며 살았으면 좋겠어. 앞이 잘 보이지 않을지라도 자신의 꿈을 향해 꾸준히 정진하는 것, 그것이 멋진 인생이 아닌가 싶어. 김삼일1942년 울산 출생으로 1963년 KBS 포항방송국 전속 성우 1기생이다. 1964년 대구에서 여러 연극인과 극단 ‘태백산맥’을 창단했고 ‘나는 자유를 선택했다’에 주인공 역으로 연극에 입문했다. 1965년 포항에서 극단 ‘은하’를 창단했으며 1983년부터 2012년까지 포항시립연극단 연출자를 지냈다. ‘햄릿’, ‘산불’, ‘원효대사’, ‘맹진사댁 경사’ 등 연극 160여 편에 출연하거나 연출을 맡았다. 2004년 조선일보 이해랑연극상, 2005년 MBC 제1회 홍해성 연극상, 2009년 대한민국 자랑스러운 연극상, 1985년 전국연극제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다. ‘김삼일 자유소극장’을 운영했으며, 대경대 석좌교수를 지냈다.대담·정리 : 김동헌(시인) /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9-12

올 秋夕 ‘영주 농특산품’으로 따뜻한 마음 전하세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높은 하늘과 황금색 들판, 수줍은 미소를 보이는 밤 송이 등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한가위가 찾아왔다.서로 환한 웃음과 나눔의 미덕이 어우러졌던 추석, 하지만 올해 추석은 코로나 19로 서로의 마음만을 전해야 할 듯하다.풍요롭고 행복한 추석의 즐거움, 농심의 정성이 가득한 영주 농특산품이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이어 준다. ◇풍기인삼국내 최초 재배삼의 시효지인 영주 풍기 지역은 500여 년의 재배인삼 역사를 통해 우수한 인삼을 생산하고 있다.소백산록의 유기물이 풍부한 토양에서 생산되는 풍기인삼은 타 지역 인삼에 비해 내용과 조직이 충실하고 인삼향이 강하며 유효사포닌 함량이 매우 높다.다양한 홍삼제품은 웰빙건강 식품 뿐만 아니라 선물용으로도 크게 인기를 얻고 있다.홍삼제품은 홍삼절편삼, 홍삼차, 홍삼정과, 홍삼정, 홍삼타브렛, 홍삼액, 홍삼분말, 인삼분말, 홍삼캡슐, 홍삼비누, 홍삼젤리, 홍삼캔디 등이 있다.인삼은 혈압조절, 간장보호, 항암작용, 항당뇨, 피로회복, 식용증진, 면역력 강화에 좋은 것으로 알려졌다.문의 : 풍기인삼공사영농조합법인 054)638-2304, 풍기인삼협동조합 054)636-2714◇영주사과영주시는 국내 사과 생산의 14.5%를 차지하는 전국 제1의 사과 주산지다.이곳에서 생산되는 사과는 풍부한 일조량과 깨끗한 공기,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에 의해 맛과 향이 뛰어나며 성숙기 일교차가 커 당도가 높다.영주사과는 대부분 15kg 상자로 포장돼 출하되고 있으나 다양한 소비자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포장단위를 5kg, 10kg 단위로 다양화 체제를 갖췄다.미국 및 동남아 시장에서 영주사과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수출 물량도 매년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사과는 피로회복, 피부미용, 위장장애 등에 좋은 것으로 알려졌다.문의 : 영주농협공판장 054)636~8594, 풍기농협공판장 054)636-3209 ◇영주한우천혜의 환경을 자랑하는 소백산 맑은 물과 깨끗한 공기에서 사육된 영주한우는 개량된 암소에 1등급 정액으로 인공수정해 생산된 우량 수송아지를 5~6개월에 거세하고 한우고급육 표준사양관리프로그램에 의거 사육한다.비육 후기에는 특수사료 급여와 초음파 육질 진단을 실시해 출하 적기를 판단, 고품질의 육질만을 생산·판매한다.영주한우는 위생 및 질병 안정성을 위해 부루세라병 등의 악성가축전염병을 차단하고 축산물의 위생·안정성에 대한 소비자 신뢰확보를 위해 사육· 도축·가공·판매에 이르기까지 정보를 기록·관리하는 쇠고기 이력추적시스템을 2006년부터 실시해 소비자들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안전한 축산물을 생산하고 있다.문의 : 영주축협본점직판장 054)630-6710◇풍기인견풍기인견은 천연섬유라 가볍고 시원하며 몸에 붙지 않고 통풍이 잘 되며 땀띠가 예방되고 촉감이 좋아 냉장고 섬유, 에어컨 섬유라 불린다.인견은 땀 흡수력이 탁월하며 정전기가 없고 부드러우며 식물성 자연 섬유로 피부가 여린 갓난아기, 알레르기성 피부, 아토피성 피부 등 피부가 약한 분들에게 좋은 건강섬유다. 가볍고 얇아서 여름 실내복, 반바지, 잠옷, 침구류, 천연염색을 한 외출복 등 다양한 제품들이 출시되고 있어 선물용으로 인기가 많다.◇영주복숭아소백산 자락의 청정 자연환경 속에서 자란 영주복숭아는 과실이 크고 육질이 연하며 과즙이 많고 당도가 매우 높을 뿐 아니라 비타민A와 펙틴이 풍부해 향이 뛰어나다.복숭아에 함유된 구연산 등 유기산은 니코틴 해독과 항암작용, 펙틴 성분은 장을 부드럽게 해 변비에 좋으며 혈액순환을 도와 관상동맥경화 등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복숭아는 단맛이 강하지만 실제 당분은 10% 정도에 불과하며 펙틴 성분으로 인한 포만감으로 다이어트에도 도움을 준다.영주복숭아는 베트남, 홍콩, 태국, 몽골, 인도네시아 등에 수출을 하고 있다.◇단산포도단산포도는 간이비가림 시설과 저 농약 고품질 호맥재배로 생산 되는 유기물 생산품이다. 단산포도는 미숙과는 출하하지 않고 적정량을 착과시켜 품질이 우수하다.특히, 유기물효소를 균형시비하고 선과와 포장을 철저히 관리한다.단산 포도의 특징은 포도생육에 가장 적합한 최적의 기후조건과 비옥한 토양에서 유기농업으로 재배해 육질이 조밀하고 맛과 향이 뛰어나다.◇소백산 오정주옛날 사대부가의 선비들이 건강 약용주로 마시던 술로서 소백산 청정약수, 우리 쌀, 우리 밀로 만든 누룩, 소백산에서 자생하는 약초로 빚어 만든 전통 명주다.저온에서 백일이상 장기 숙성해 뒤끝이 깨끗한 오정주는 영주시 고현동 박찬정 가에서 4대째 그 비법을 전수해 오고 있다.문의 : 소백산오정주 054)633-8166 ◇상떼마루천혜의 자연속에서 재배된 지역 특산물인 영주사과로 만든 100% 순수 천연제품으로 설탕과 알코올이 전혀 첨가되지 않은 제품이다. 상떼마루 아이스와인은 2013년 샌프란시스코 국제와인품평회에서 은상을 받은바 있는 지역 특산품이다.◇고구마빵맑고 깨끗한 청정지역 영주에서 재배 가공한 자연 웰빙 건강제품으로 고구마는 칼륨성분이 많은 알칼리성 식품으로 소화촉진, 변비해소, 노폐물 배출, 간의 신진대사, 피부노화 방지, 체내지방 분해, 체중감량에 효과적이며 각종 비타민과 무기질 및 식이섬유가 함유된 국내산 100% 고구마로 만든 빵으로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고구마빵이다. ◇정도너츠영주지역에서 생산되는 국내산 찹쌀을 주원료로 사용하는 찹쌀 도너츠로 지역의 특산물인 인삼, 사과, 생강, 고구마 등을 재료로 만든 웰빙 식품이다.찹쌀을 주재료로 하기 때문에 밀가루로 만든 도너츠 보다 영양 성분검사를 해보면 지방함량이 낮게 나오며 콜레스테롤과 트렌스지방 또한 낮아 먹을거리로 맛과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순흥기지떡기지떡은 서리꽃처럼 희고 아름답다는 뜻으로 상화떡, 상화병이라고도 하며 기지떡은 술로 빚어 여름철에도 쉬지 않아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다. 칼로리가 낮고 속을 든든하게 해줘 여성들의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인기가 높다. 한국 전통음식 조리법을 대표하는 발효 과정을 거친 떡이라 살아있는 유산균 덩어리로 단순한 계절떡, 의례떡과 달리 기지떡은 건강을 생각한 고품격 떡이다.◇선비촌한과전통의 맛을 지켜가는 선비촌한과는 영주지역의 특산품인 인삼, 마, 자연 식품인 쑥, 솔잎 등을 이용해 생산되고 있다.달지 않고 담백하며 고소한 맛이 특징으로 제수용, 선물용, 혼수용으로 구분 생산된다.영주시에서 생산되는 특산품들은 소백산록의 자연환경과 전통기법에 따른 생산 방식을 선택해 그 맛과 품질이 우수하며 무엇보다 농심과 정성이 가득 담긴 제품으로 한가위 선물 및 제수용품으로 그 가치를 높이 인정받고 있다./김세동기자 kimsdyj@kbmaeil.com

2021-09-12

켜켜이 쌓인 추억은 또 천년을 이어가고…

경주는 산책하기 좋은 도시다. 이 말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코로나19 사태’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여행자들의 발을 묶고 있는 상황이지만, 경주에는 여전히 ‘도시 산책자’가 적지 않게 보인다.동궁과 월지를 취재하며 늦봄부터 여름의 끝 무렵까지 모두 6차례 경주를 찾았다.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려 대릉원과 첨성대를 거쳐 월지에 이르기도 했고, 어떤 때는 황리단길에서 시원한 음료수 한잔을 마시고 복원된 동궁 건물지 앞으로 가기도 했다.시원스런 돌담길 건너편에 청아한 자태로 피어있는 새하얀 연꽃과 만나고 국립경주박물관 내 월지관을 돌아본 날의 경험도 기억에 남았다.걸음을 빨리 하면 30~40분, 주위의 풍경을 감상하며 천천히 걸어도 1시간 남짓이면 터미널을 출발해 동궁과 월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걷는 여행’의 즐거움을 선물해준 경주.몹시 덥던 지난 7월 말이다. 60대로 보이는 동창생 서너 명이 동궁과 월지 입구에서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었다. “야, 격세지감이네. 여기가 이렇게 변했어?”“세월이 많이 흘렀잖아. 우리가 수학여행 온 게 40년은 됐으니까.”“맞아. 그때는 여길 안압지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안압지… 안하지… 동궁과 월지소년시절을 추억하는 그들의 기억은 정확했다. 발굴과 복원작업을 거쳐 동궁과 월지로 불리기 전 연못의 이름은 안압지(雁鴨池)였다. 안압지 발굴조사 당시의 에피소드와 성과를 담은 책 ‘못 속에서 찾은 신라’엔 그와 관련한 설명이 담겼다.“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안압지는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드는 연못’이라는 뜻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동경잡기(東京雜記)’ 등 조선시대의 문헌에서 처음 나타난다.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간행되기 전 김시습(1435~1493)이 지은 시에 안하지(安夏池)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안압지와 비슷한 발음을 가진 표현이 15세기 무렵 이미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600여 년 전까지는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다니는 연못이라고 해서 안압지, 혹은 유사한 발음의 안하지로 불리던 이 연못이 동궁과 월지로 개칭된 것은 언제였을까. 위의 책은 이렇게 부연한다.“안압지에서는 1975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의봉4년 개토(679)’명 기와와 ‘조로2년(680)’명 전돌이 출토되었는데, 이 유물을 통해 안압지 주변 건물지가 문무왕 19년(679)에 지은 동궁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안압지라는 명칭은 1982년 당시 국립경주박물관 관장 한병삼에 의해 ‘안압지는 월지다’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그 명칭의 타당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안압지에서 나온 ‘동궁아일(東宮衙鎰)’명 자물쇠, ‘세택(洗宅)’명 목간, ‘용왕신심(龍王辛審)’, ‘신심용왕(辛審龍王)’명 접시 등에 새겨진 명문은 ‘삼국사기’ 직관지에 나오는 동궁 소속 관청 가운데 세택(洗宅), 월지전(月池典), 월지악전(月池嶽典), 용왕전(龍王典) 등과 관련이 있다…(후략)”이런 과정을 거쳐 1963년에 사적 18호로 지정됐던 안압지를 포함한 신라왕궁 별궁터 경주 임해전지는 2011년 경주 동궁과 월지로 명칭이 바뀐다. 문헌 기록과 출토 유물 등의 재검토를 통해서였다.바뀐 이름과는 무관하게 이 연못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역사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통일신라의 화려했던 전성기를 떠올리게 해준다.이는 40년 전이나 2021년 오늘이나 변함없이 많은 관광객들이 동궁과 월지를 포함한 경주의 유적을 찾는 이유일 터.깔끔하게 단장된 동궁과 월지에 입장하면 연못을 바라보며 유유자적 천년왕국의 역사 속을 산책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주위엔 소나무가 많아 시원한 그늘 아래서 잠시 더위를 피하기에도 좋다.조그맣게 마련된 야외 전시장에선 월지 발굴 현장에서 출토된 유물도 만나볼 수 있다. 아이들과 함께 방문했다면 빼놓지 않고 둘러봐야 할 곳이다.앞서 말한 동창생들은 하얗게 변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고등학생 시절을 돌이켜보는 듯 동궁과 월지에서 한참을 머물며 추억담 속에 빠져 있었다. 오랜 우정을 간직한 그들의 모습이 좋아 보였다. 진귀한 새와 짐승 뛰놀던 화원… 이제 젊은 연인들이고색창연함을 간직한 고도(古都)인지라 경주에는 나이 지긋한 관광객이 다수일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천만에다. 예전에도 그랬고, 현재도 마찬가지인데 경주에는 젊은 여행자들이 의외로 많다.얼마 전부터 전국적 핫 플레이스로 떠오른 황리단길에서만이 아니다. 대릉원, 첨성대 앞, 계림 부근과 국립경주박물관에서도 20~30대 청년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경주시는 21세기의 관광 트렌드에 발맞춰 도시를 변화시키고 있는 중이다. 역사의 현장에 문화·예술 스토리를 입히고, 젊은이들의 요구에 응답하는 거리를 조성하고, 다양한 즐길 거리와 특색 있는 숙소를 개발하고 있는 것.실제로 황리단길에서는 세계 각국의 음식을 맛볼 수 있고,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카페와 주점도 지속적으로 생겨나고 있다. 또한 다른 도시에선 보기 힘든 근사한 한옥 숙소도 즐비하다.대릉원은 이른바 ‘인생 사진’을 남기는 장소로 20대 여행자들에게 이름을 알리고 있다. 여기에 더해 학구적인 청년들에게 경주박물관은 ‘역사 지식의 보물창고’로 역할 한다.황리단길에서 조그만 오토바이를 빌려 타고 동궁과 월지를 찾은 20대 초반 연인들은 역사에 관한 궁금증이 큰 모양이었다.표지판의 설명을 읽다가 눈을 동그랗게 뜬 여자가 물었다. “옛날엔 여기에 진귀한 동물이 많았다네. 신라시대엔 어떤 게 진귀한 동물이었을까?”남자친구를 대신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간행한 ‘신라의 건축과 공예’가 들려준다.“문무왕 시대를 서술한 ‘삼국사기’를 보면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 기록된 ‘진금기수(珍禽奇獸)’는 흰 사슴, 희거나 자줏빛인 노루, 흰 말, 흰 까마귀, 흰 꿩, 흰 매, 흰 까치, 앵무새, 공작새, 학들이다. ‘일본서기’에는 백제나 신라가 진금기수를 일본에 전해준 기록이 있는데 낙타, 양, 앵무새, 공작새, 까치, 흰 꿩 등이 그것이다.”그러고 보면 동궁과 월지는 ‘아름다운 신라의 화원’인 동시에 1천300여 년 전 만들어진 ‘신기한 동물원’이기도 했던 듯하다. 실제로 월지 발굴에선 포유동물의 뼈가 228점, 조류의 뼈가 14점, 치아가 29점 나오기도 했다.‘신라의 건축과 공예’에 따르면 월지엔 진귀한 새와 짐승만 있었던 게 아니다. 많은 종류의 꽃과 나무도 식재돼 있었다. 이런 설명이다.“화분 분석에 따르면 동궁과 월지에는 총 25 품종의 식물이 식재됐던 것으로 나타났다. 버드나무, 잣나무, 소나무, 굴피나무, 이팝나무, 배나무…(중략) 그 외에 신라시대에 흔히 식재됐다고 생각되는 수종으로 복숭아, 오얏, 대나무, 장미, 해당화, 모란을 들 수 있다.”통일신라의 왕족과 귀족들은 바로 여기서 화사하게 피어난 꽃들의 향기를 맡으며 진귀한 새의 날갯짓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봤을 것이다. 그 모습을 상상하는 건 동궁과 월지가 선사하는 드물고도 흥미로운 체험이다. 낮과 밤, 맑은 날과 흐린 날… 언제 찾아도 좋은 곳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기억의 회로’는 구체적 사물을 매개체로 작동을 시작한다. 동궁과 월지에서 만났던 60대 동창생들과 20대 연인들은 화려했던 통일신라의 화원 월지와 세련된 미적 감각으로 만들어진 유물 가득한 동궁을 매개체로 경주를 기억했으며, 앞으로도 기억할 것이다.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둥근 파문을 일으키는 월지를 바라보며 한참을 망연자실 서있던 기억이 난다. 빗물에 머리칼을 적시며 ‘삼국사기’ 등 고문헌에 등장하는 신라 왕들의 이름을 하나씩 떠올리다가, 문득 1천 년 전 서라벌 사람들을 생각했다. 무언가 애틋하고 사무치는 감정이 맑은 날 동궁과 월지에선 느껴보지 못한 것이라 이채로웠다. 그 옛날 신라인들 역시 비 내리는 날이면 섬세해진 마음으로 이 연못 주위를 서성이지 않았을까? 이름 모를 풀벌레가 우는 밤이면 어둠을 밝히는 화려한 불빛이 월지와 동궁을 감싼다. 동궁과 월지의 야경(夜景)은 낮 풍경 못지않게 근사하다.비단 같이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는 밤이 주는 평화로움. 색색깔 조명의 아름다움에 취한 여행자들은 곁에 선 가족과 연인의 손을 잡는다. 그 따스했던 기억이 그들을 다시 한 번 경주로 향하는 차에 오르게 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끝/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9-08

올 10월 주민공모 통해 후보지 결정 후 타당성 조사

□ 포항 종합장사시설 마련 어디까지 왔나경북 제1의 도시 포항의 경우 종합장사시설(추모공원) 조성사업이 조례제정과 시민의견 수렴을 거치면서 급진전되고 있다. 포항시는 투명한 공개모집을 통한 부지선정의 절차를 거쳐 오는 2025년 12월 개원을 목표로 종합장사시설 조성사업을 추진 중이다. 포항시는 공무원, 전문가 및 시민사회단체 등으로 구성된 민·관이 함께하는 거버넌스 중심의 추진위 발족과 함께, 종합장사시설이 기피시설이 아니라 포항의 랜드마크이자 장묘문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할 수 있도록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즉, 약 10만여 평에 이르는 조성부지의 20%를 장사시설로 설계하고 나머지 80%는 문화, 예술 및 시민 여가시설 등 공원부지로 조성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앞서 포항시는 지난 2019년 6월 시민공청회와 장례문화 인식개선 홍보를 거쳐 2020년 2월 시의회의 의결을 통해 ‘포항시 종합장사시설 설치조례’를 공포해 본격 추진에 나섰다. 조례제정에 따라 추모공원건립추진위원회는 세종시와 인천 등 26곳의 국내 선진 장묘시설을 찾아 시설과 구체적 건립과정까지 살펴봤다. 오는 10월로 예정된 주민공모를 통해 후보지역이 결정되면 이를 대상으로 엄격한 부지 타당성 조사용역을 거칠 예정이며, 기본건축설계와 부지조성 문화상징물 및 공원시설 설치 등 도로망 구축 등 행정절차를 마무리 짓는 2025년 하반기부터 일반시민의 이용이 가능할 전망이다. 이러한 포항시의 장사시설 마련을 위한 시도와 노력 자체에는 박수를 쳐줄 만하지만, “좀 더 일찍 준비해 사업을 시작해야 했어야 한다”는 일각의 지적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도 사실이다. 관련해 경북 외 국내 타 지자체의 사례를 잠깐 짚어보자. 글 싣는 순서1. 장사시설과 장사문화,우리는 장사를 어떻게 보고 있나2. 포항시,종합장사시설 마련 첫걸음3. 장사시설 선두주자인천 가족공원4. 시민의 품 안에세종 은하수 공원5. 장사 문화 개선을 위해포항이 나아가야 할 방향 우선 인천가족공원은 부평에 위치한 공동묘지를 전국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처음으로 예산을 투입해 전체 묘지의 일부를 재개발해 자연장지 및 공원을 조성했다. 가족 유대와 자연친화적 장사 문화 공간 조성을 위한 가족장사시설 마련에 있어서 선두주자인 셈이다. 2005년부터 2040년까지 단계별로 조성사업을 추진 중이며, 3-1단계 사업(2016년∼2021년, 사업비 515억)을 통해 봉안당(별빛당) 건립, 자연장지 등을 조성 완료했으며, 3-2단계(2020년∼2025년) 사업은 봉안당(2만기) 건립, 자연장지(1만기) 조성, 산림복원 등을 추진하고 있다.세종 은하수공원 또한 눈여겨볼 만하다. 지난 2010년 개장한 대지면적 36만580㎡에 건축연면적 1만7천293㎡인 이곳은 장례식장(빈소10, 접객실10), 화장장(고별실 4곳, 화장로 10기, 수골실 2곳, 유족대기실 10실), 봉안당(봉안당 2만34위, 봉안담 1천408위)을 비롯해 관리동, 홍보관, 유택동산, 식당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또한, 잔디장, 수목장, 화초장 등의 자연장지도 품고 있다. 특히 자연과 어우러진 공원의 형태를 갖춰 주민들에게는 친숙한 휴식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포항 장사시설 현황새로운 발걸음을 내딛기 전, 포항 장사시설의 현주소를 가장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일단 범위를 좀 더 넓혀 경북 내에서 보면, 화장시설의 경우 2020년 말 기준 총 12곳이 설치됐으며, 화장로는 43로가 설치됐다. 2011년 상주, 2012년 경주, 2014년 의성을 비롯해 2016년 이후에 3곳(안동·구미·울진)을 신축하는 등 2000년대 들어 7곳이 신축됐다. 그러나 포항의 경우 우현화장장은 1941년도에 설치돼 운영되고 있어 경북에서 가장 오래된 화장시설이며, 같은 포항지역의 화장시설인 구룡포 화장장 역시 1978년도에 설치돼 운영되고 있는 오래된 화장시설이다.화장 다음으로 알아볼 것은 봉안시설이다. 화장률의 증가는 봉안시설의 안치율 증가를 가져왔으며, 이에 따른 수요공급을 위해 봉안시설의 설치는 꾸준하게 증가해 왔다. 포항시에는 (재)대한불교 관음종 원진사와 (재)대구구천주교회 유지재단, 한국불교태고종 금강사, 무량사 하늘윤장대부모은중경회 총 4곳의 ‘종교단체’ 봉안시설만이 있다. 공설 봉안시설은 물론 법인 봉안시설도 없는 셈이다. 이 외 기타 봉안시설로 개인 5곳, 종중·문중 10곳, 종교단체 1곳(봉안탑) 등 16곳이 있는데 이들 모두는 북구에 자리 잡고 있다.자연장지도 살펴보면 공설은 없으나 사설의 경우 총 6곳인데, 가족자연장지 1곳과 문중자연장지 4곳을 빼면 실질적으로는 원진사 지장회 1곳이 전부다. 이 외 장례시설의 경우 병원장례식장을 비롯해 남구 5곳과 북구 5곳 총 10곳이 있다. 묘지의 경우는 동산공원묘원과 포항공원묘원 등 총 2곳의 법인묘지 등이 있으나 여기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는다.이렇듯 포항시의 장사시설이 비슷한 규모의 지자체는 물론 훨씬 소규모의 지자체와 비교해서도 열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 중에서도 화장시설의 경우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지난 2019년 포항시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포항시립 화장장을 이용하면서 불편함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77.4%가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이어 불편함을 느낀 이유를 묻는 질문에는 “시설 협소 및 노후화” 52.9%, “화장 대기시간 지연” 22.9%, “화장 후 이용할 수 있는 장사시설(봉안당, 자연장지, 유택동산 등) 미설치” 12.3% 순으로 응답했다. 불편함을 가장 많이 느꼈다던 ‘시설 노후화’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 노후화된 포항 화장시설포항시에는 현재 우현화장장이 3기, 구룡포화장장이 1기의 화장로를 운영하고 있다. 2018년 기준 4천388구를 화장했으며, 우현화장장은 1기에 3.67구/일, 구룡포화장장은 1.013구/일을 화장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는 아무래도 경북에서 가장 오래된 시설이니만큼 화장장의 화장로 크기가 과거 한국인 체형을 기준으로 설계돼 있어 체형이 초과될 경우 관을 해체해 화장절차를 진행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즉 노후화된 시설에 대한 보수나 교체가 아닌 신규 건립만으로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다.그렇다면 현 부지에서 화장시설을 확장하는 것이 가능 하느냐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은 어떨까. 이 역시 부정적이다. 시설 설치 당시 화장장 부지는 도심지 외곽이었으나, 도심이 팽창하면서 현재 부지 인근은 교육 및 공동주택이 다수 위치해 생활권이 포함된 인구밀집지역으로 변모했다. 특히 포항 화장수요의 92.7%를 처리하는 우현화장장의 경우 직선거리로 200m 내에 중·고등학교가 인접하고 있다. 구룡포화장장 역시 포항시 중심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접근성에서 취약하고, 진입도로의 여건상 15인승 이상 버스의 접근이 불가하다는 점에서 이용자들이 선호하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다. 물론 화장장 인근 부지 중 자연녹지지역을 시설확충 대상지역으로 검토할 수 있으나, 종합장사시설로 계획하기에는 부지면적이 협소해 화장로를 추가하는 수준에서의 개선만 가능한 실정이다. 다만 이 경우에도 최근의 기술적 연구성과물 적용한 화장시설을 설치하기에는 한계성이 있어, 향후 예측되는 화장률 및 미래 화장 수요 등을 고려해 환경친화적이고 에너지 사용량을 최소화할 수 있는 화장로 설비를 갖춘 신규 건축물을 건립할 필요성이 크다.이러한 현황들을 토대로 해결책을 도출해본다면 결론은 명백하다. 장례식장, 화장장, 봉안당, 자연장 등 모든 장사절차를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원스톱 종합장사시설이, 그것도 한시바삐 포항에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점을 말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전준혁기자 jhjeon@kbmaeil.com

2021-09-08

한복과 비단의 결합… 전통의 아름다움을 말하다

여기 어려움을 이겨내고 시골에서 새로운 도전을 즐기는 사람이 있다. 경북 고령에서 한복을 활용한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의 비단’ 박윤주(32) 대표가 주인공이다.“대구가 고향이에요. 원래 대구에서 요식업 사업을 했었죠. 사고로 인해 발목 골절 수술을 받고 건강상의 이유로 요식업 사업을 계속 이어갈 수 없었어요. 수술 후 재활을 받으며 꿈을 잃었다는 생각에 낙심도 했구요.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어렸을 때부터 손재주가 남달랐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 한국의 미에 대한 관심이 많았어요. 특히, 한복에 매료됐죠. 한복을 짓고 남은 자투리 원단을 버리기 아까웠어요. 그래서 이것저것 생활 소품을 만들면서 사업 아이템을 구상하게 됐죠.”큰 교통사고로 1년 동안이나 입원했었다는 박윤주 대표.요리를 좋아했던 그녀는 2개의 분식점을 운영했었다. 누구보다 활발하게 활동했던 그녀는 큰 수술을 받고, 쪼그려 앉지도, 계단을 오르내리기도 힘든 신세가 되었다고. 그것도 20대의 젊은 나이에 말이다. 1년이라는 절망의 시간을 보내고, 그녀의 머리를 스친 것이 바로 한복이었다고 한다.“인터넷으로 알아보니 대구에서 한복을 가르치는 아카데미가 딱 한 곳 있었어요. 그때 너무 간절해서 선생님께 말했어요. ‘저는 정말 죽을 때까지 먹고 살 수 있는 기술을 배우고 싶어요. 혹시라도 제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아무 일을 못하더라도 제가 먹여 살릴 수 있는 그런 기술을 배우려고 해요’라고 말이죠.”그렇게 시작한 것이 지금의 ‘한국의 비단’이다. 현재 한복 원단으로 패션잡화와 액세서리 등 다양한 생활 소품을 디자인하고 제작한다. 이는 온라인으로 판매하며 출강과 공방을 함께 운영 중이다. 특히, 오프라인 출강은 한복 원단을 활용한 원데이 클래스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지역 주민들의 관심이 아주 많다고 한다. 매출도 상당했다. 지난해에는 기대하지 않았던 제품의 판매량이 많아지면서 최고 매출을 찍었다. □에너지를 주는 로컬의 삶대구를 기반으로 살고 있던 박윤주 대표가 로컬인 고령으로 내려온 까닭은 무엇일까. 어차피 온라인으로 판매하는 한복 원단 제품이라면 시골보다는 도시가 더 좋지 않을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녀 역시도 “고령은 사업 아이템 원재료 부자재 시장이 멀다. 인터넷으로 자재를 배송시키지만, 값을 더 치러야 한다. 배송까지 2~3일이 소요되어, 불편하더라도 자재는 시장에 구매하는 편”이라면서 “시장 가는 날은 하루를 완전히 비워야 다녀올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실제로 박윤주 대표는 귀농과 귀촌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시골살이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은 없었지만, ‘한복의 비단’은 대구에서 시작을 고려하고 있었다.“남편의 직장이 이곳에 있었어요. 결혼을 앞두고 신혼집을 의논하던 중에, 출근 지옥에 시달리고 싶지 않다는 남편의 바람으로 이곳에 정착했어요. 개인적으로 이곳에 와서 도시에서 느껴보지 못한 신선한 바람과 여유로움, 조용함, 아늑함이 저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도시에서는 누군가 쫓지 않아도 쫓기는 느낌이 들었죠. 그런데 고령에서의 삶은 일상이 여유로워 정신이 건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많이 느껴요. 장날 시장에서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대형마트보다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고, 가끔 콩나물 서비스도 주시는 장날이 더 좋아요. 거짓말이 아니라 도시에서 1년에 2~3번은 걸리던 감기가 고령에서는 한 번도 걸린 적이 없어요.” 그렇게 그녀는 고령에 사업장을 마련하고 다양한 아이템을 만들어 SNS에 올리고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대표적인 핸드폰 액세서리 중 하나로 관련 인기 상품 목록 10위권에 드는 제품도 수두룩하다. 소비자의 의견도 반영했다. 제품 자체가 화려해서 좋다는 사람도 있지만, ‘지나치게 화려하다’는 의견을 반영해 버전도 달리했다.“사실 한복이 요즘 뜨는 원단도 아니고, 시장 가치가 과연 있겠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저는 생각이 달랐죠. 오로라와 같은 고급스러운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고, 유행에 동요하지 않는 청아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특히, 한복 원단으로 기성품과 거의 차이가 없는 제품을 만드는 사람은 아마도 저밖에 없지 않을까요?”그래서 궁금했다. 그녀는 지금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까.“요즘 새로운 제품 제작 때문에 조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 지금 생활과 이곳에서의 삶은 100%와 1천% 만족하며 살고 있어요. 도시에서 있을 때와 지금을 비교하자면, 삶이 너무나 많이 바뀌었어요. 먹는 음식부터 공기와 분위기, 정신적인 여유로움, 조용함 등이요. 그리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그로 인해 행복해지면서, 정신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을 건강하게 해서 몸도 건강해지는 것 같아요.” □청년들이 ‘나도 도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졌으면…이러한 그녀에게는 한 가지 소망이 있다. 청년들이 자신의 스토리를 보고 ‘나도 도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졌으면 하는 것이다.사실 그녀는 정부의 지원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경험도 없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 막막했다. 경북경제진흥원에서 진행하는 사업계획서 발표에도 달랑 A4지 한 장만 들고 갔다고 한다.“혼자 쭈뼛쭈뼛 발표할 내용을 적은 A4지 달랑 들고, 너무 부끄럽고 주눅이 들었죠. 다른 팀에서는 노트북을 활용한 PPT도 준비하시고 레이저도 들고 멋지게 하시더라구요. 이렇게 멋지고 프로페셔널하게 준비를 하시는 분들에게 죄송할 정도였죠. 얼마 후 문자로 온라인에서 합격 여부를 확인하라는 메시지를 받고, 1%의 기적을 생각하며 확인했죠. 그런데 제 이름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지더라구요.”이렇게 고령에 정착한 그녀는 과거 교통사고의 후유증에서 거의 벗어났다. 그간 몸을 활발하게 움직이기 힘들어 운동량이 대폭 줄어들었지만, 이제는 몸과 마음에 활력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향후 그녀는 주얼리와 한복 원단을 결합하는 또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귀걸이와 반지, 팔찌 등에 한복의 아름다움이 결합하면 제품군도 늘릴 수 있고, 수요층도 더 넓어질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주얼리 공방에 다니면서 주얼리의 제품 특징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여러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중이라 출시가 더디지만, 전통을 일상으로 녹아드는 제품을 제작하는 것이 저의 사업 목표죠. 그에 걸맛는 대중적인 작품이 나올 것 같아요. 또, 고령군 내 공예가 선생님들과 ‘수재들’이라는 작은 모임에 참여하고 있어요. 손으로 직접 만든 ‘수제’와 손재주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에서 가져온 팀명이죠. ‘수재들’팀과의 협업도 계획 중에 있어요.”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청년들이 로컬에 오기 힘든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말이다. 또 청년들이 로컬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말이다.“통상적으로 청년들은 꿈을 쫓아 도시로 가는 것 같아요. 저의 경우처럼 청년이 꿈을 로컬에서 키울 수 있는 지원사업이 꾸준하게 활성화되면, 많은 청년들이 꿈을 쫓아 로컬에 정착하지 않을까요? 물론, 저는 우연한 기회에 고령에 정착했어요.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도시에서의 삶보다 이곳에서의 삶이 더 나은 삶이라는 확신이 정착의 계기가 된 것 같아요. 피치 못할 사정이 없다면, 저는 도시로 다시 가고자 하는 생각은 전혀 없거든요.”“저는 로컬에 비전이 충분하게 있다고 생각해요. 문화 활동이나 여가시설, 편리한 소셜 서비스 등에는 제한이 있죠. 하지만 저의 경우에는 불편함보다 좋은 점들이 더욱 많아서 한 번도 도시가 그리워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어요.”‘우리의 전통을 지켜가야 한다’는 당위적인 말을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것을 꾸준하게 염두에 두고 현실을 지켜나가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기반시설이 거의 전무한 시골에서 말이다. 그래서 그녀의 도전이 더욱 빛이 나는 것이 아닐까./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1-09-07

전국에서 두 번째로 시립극단 창단한 포항

포항에 시립극단이 창단된 것은 포항을 넘어 전국 연극계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포항시립극단은 전국연극제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상임 연출자인 김삼일 선생은 이해랑 연극상 수상자로 선정되는 영예를 누린다. 포항시립극단이 공연을 전면 유료화한 것도 문화계에서는 신선한 자극이었다. 헌 : 1983년에 포항시립극단이 창단되는데 그 의미가 간단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당시 전국에서는 두 번째로, 중소 도시로서는 처음으로 시립극단이 창단됩니다.김 : 어떻게 하면 극단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시립으로 하면 좋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지. 지역에서 민간이 극단을 계속 끌고 간다는 것은 여러모로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어. 사실 그동안 고생도 많이 했고. 신상률 선생과 내가 정충검 포항시장을 만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포항시립극단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는데 다행히 정 시장이 수용해주더군. 그 점에서 정 시장에게 고맙지. 1983년 5월 ‘은하’를 주축으로 신상률 선생이 초대 단장을 맡고 내가 상임 연출을 맡아 민간 자율단체 성격의 포항시립극단이 탄생하게 된 거야. 덕분에 전국 여러 도시에서 시립극단이 생겼지.헌 : 포항시립극단의 상임 연출을 맡으면서 전국연극제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게 됩니다.김 : 1985년 6월 청주에서 열린 제3회 전국연극제에서 차범석의 ‘대지의 딸’을 연출해 대통령상과 여자 연기상(이휘향)을 차지했지. 포항 연극이 대단하다고 전국 연극판에 소문이 안 날 수 없었어. 사실 이 작품의 무대가 포항 이웃 마을 안강이거든. 배우들의 대사도 경상도 사투리였지. 지역 문화예술을 꽃피우고자 노력하며 지역과 관련된 주제에 천착한 결과였다고 봐. 1985년은 ‘은하’가 창단된 지 20주년이 되기도 했어. 그동안 기쁨도 있었지만 얼마나 힘들었겠어.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무대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단원들의 연극에 대한 순수한 열정 덕분이라고 생각해.헌 : 1989년에는 포항에서 제7회 전국연극제를 개최하게 됩니다.김 : 감개무량한 일이었지. 이 연극제를 앞두고 포항시민회관은 700석 규모로 확충하고 조명과 음향도 신예화하면서 연극제 참가자들에게 호평을 받았어. 보름 동안 열린 연극제에서 ‘은하’는 차범석 작 ‘산불’로 연출상과 문공부장관상, 여자 연기상(황영란)을 차지했지.헌 : 전국연극제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은 어땠습니까?김 : 연극제에 학생 4천여 명이 다녀갔는데 당시로서는 굉장히 많은 숫자야. 포항에서 전국연극제가 열리고 ‘은하’가 큰 상을 차지하면서 시민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지.포항시립극단은 1990년까지 극단 ‘은하’와 합동 공연을 지속하다가 1991년부터 분리된 채 공연했다. 1990년 ‘노비문서’(백진기 연출), 1991년 ‘우리읍내’(신계호 연출), 1992년 ‘칠수와 만수’(이협수 연출), 1993년 1992년 ‘모닥불’(이원욱 연출), 1994년 ‘등신과 머저리’(류충렬 연출), ‘베비장전’(백진기 연출), 1995년 ‘어물전의 새벽’(이협수 연출), 1998년 ‘어머니’(이협수 연출) 등이다. 1999년 김삼일은 포항시립극단의 상임 연출자로 복귀하면서 그해 ‘작은 할머니’(엄인희 작) 와 ‘번지 없는 주막’(김상렬 작) 두 작품의 연출을 맡았다. 특히 ‘번지 없는 주막’은 30여 년 만에 새롭게 각광받은 악극 형식의 공연으로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헌 : 2004년 제14회 이해랑 연극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의미가 컸겠습니다.김 : 그렇게 볼 수 있지. 마침 환갑을 막 넘겼을 때 그 상을 받았으니. 방송 생활 때문에 공백기가 있었지만 포항시립극단 상임 연출자로 복귀하면서 매해 정기공연과 사실주의 연극, 해외 명작 공연 등 연극에 혼신의 힘을 다한 결과였어.‘조선일보’는 2004년 4월 1일자에 ‘이해랑 연극상’ 수상자로 김삼일이 수상한 이유에 대해 “심사위원들은 연극의 불모지 포항에서 상업주의와 타협하지 않고 연극 열을 불태웠다는 점에서 지방 연극 활성화에 큰 역할을 했다”고 보도했다. 그의 수상 소식은 포항의 연극인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인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헌 : 지역에서 연극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도운 분은 없었는지요?김 : 여러 사람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영일고등학교 최상하 교장을 꼽을 수 있지. 최 교장은 포항 연극의 숨은 공로자라 할 수 있어. 사실 연극인들은 무대를 준비하는 것도 벅찬데 관객을 확보하기 위해 홍보까지 해야 하니 오죽 힘들겠어.그런데 최 교장이 어느 날 나를 부르더니 학생들을 직접 인솔해 단체 관람을 하겠다고 하더군.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는 거야. 이게 계기가 되어서 다른 학교에서도 단체 관람이 이어졌고 포항 연극계에는 큰 힘이 되었지. 최 교장은 단순히 연극인들을 돕기 위해 단체 관람을 이끈 게 아니라 학생들의 인성 교육에 연극이 효과가 있다고 판단한 거야.헌 : 공짜표와의 전쟁 선포, 포항 연극계에 이런 일도 있었다면서요?김 : 당시 포스코는 국내 최고 수준의 효자음악당(현 효자아트홀)을 건립하고 서울의 유명 공연물을 유치해 무료 공연을 했거든. 포스코 직원들이나 시민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좋을 수밖에 없지. 하지만 지역의 문화예술계에서 보자면 심각한 위협이 되는 거야. 힘든 여건에서 분투하고 있는 지역 문화예술을 외면하고 지역 극단의 창작물을 도외시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지. 이런 상황에서 2010년 하반기부터 포항시립극단의 공연을 전면 유료화했고, 그 결과 유료 관객과 입장 수입이 증가하게 되었어.당시 ‘경북매일신문’은 ‘포항시립연극단 유료 공연 시행 1년’이라는 제목으로 포항시립극단의 성공적인 유료화를 다루었다.“포항시립연극단(상임 연출 김삼일)이 지난해 11월 포항시립예술단 3개 단체(교향악단, 합창단, 연극단) 가운데 제일 먼저 유료화를 시행한 뒤 지난 1년 동안 유료 관객 1만 3천762명에 총 입장 수입 4천516만 원을 올려 대성공을 거둔 것으로 나타났다. (중략) 특히 지난 11월 24일부터 12월 4일까지 포항시립 중앙아트홀(객석수 270석)에서 11일간 18회의 장기 공연을 한 셰익스피어 작, 김삼일 연출 ‘햄릿’은 4천64명의 유료 관객이 모여드는 기적을 연출하는 등 대성공을 거둬 시민들로부터 재공연을 해야 된다는 여론이 높아가고 있다.”경북매일신문 2010년 12일 20일자헌 : 공연을 전면 유료화한다는 것은 작품에 자신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지요. 포항시립극단이 작품에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이맘때쯤 어떤 작품을 무대에 올렸습니까?김 : ‘햄릿’을 비롯해 셰익스피어 4대 비극과 ‘베니스의 상인’, ‘로미오와 줄리엣’, ‘말괄량이 길들이기’ 등을 공연했지. 이 7대 작품을 20일에서 한 달까지 장기 공연했어. 포항시립극단 작품 공연 유료화와 함께 세계 고전 명작의 장기 공연 시대를 열었지. 김삼일1942년 울산 출생으로 1963년 KBS 포항방송국 전속 성우 1기생이다. 1964년 대구에서 여러 연극인과 극단 ‘태백산맥’을 창단했고 ‘나는 자유를 선택했다’에 주인공 역으로 연극에 입문했다. 1965년 포항에서 극단 ‘은하’를 창단했으며 1983년부터 2012년까지 포항시립연극단 연출자를 지냈다. ‘햄릿’, ‘산불’, ‘원효대사’, ‘맹진사댁 경사’ 등 연극 160여 편에 출연하거나 연출을 맡았다. 2004년 조선일보 이해랑연극상, 2005년 MBC 제1회 홍해성 연극상, 2009년 대한민국 자랑스러운 연극상, 1985년 전국연극제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다. ‘김삼일 자유소극장’을 운영했으며, 대경대 석좌교수를 지냈다.대담·정리 : 김동헌(시인) /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9-07

‘THE 실용적 교육’ 열어가는 직업교육 중심대학으로 오세요

경북도립대학교는 작지만 강한 명품 대학이다. 대학에서 10분 거리에 도청 신도시가 들어섬에 따라 그동안 약점으로 지적됐던 청년 문화 공간 부족 문제가 해소됐다. 인구 10만의 도청 신도시가 완성되는 2027년에는 경북 북부권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가 될 전망이다. 2021년 3월에는 제8대 신임총장으로 전(前) 경북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김상동 총장이 취임했다.김 총장은 취임 후 ‘PROMISE 2025 비전 선포식’을 통해 ‘THE 실용적 교육을 열어가는 직업교육 중심대학’이라는 비전 아래 △감동을 주는 교육복지 실현 대학 △끊임없는 교육기회를 제공하는 대학 △머무르고 싶은 대학 △이웃하는 혁신 협력 대학 △각자의 개성과 진로를 열어주는 대학을 5대 중점과제로 발표하며 경북도립대학교의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예고했다. ◇2022학년도 신입생 등록금 전액 장학금 지급경북도립대학교 학생은 등록금 걱정이 없다. 2018학년도에는 신입생의 입학금을 폐지해 교육비 부담을 낮췄고, 2022학년도부터는 신입생 모두에게 연간 등록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지급한다.국가장학금 외에 경북도 장학금을 추가로 지급함으로써 실질적으로 학생들이 부담하는 등록금은 0원이다. 등록금 장학 외에도 사회적 약자와 저소득층을 위한 다양한 장학제도를 마련하고, 기초수급대상자와 아동보호시설에서 진학한 학생에게는 생활비를 지원해 공립대학으로서의 공공성 강화라는 역할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든든한 경북도가 설립하고 지원하는 공립대학인 경북도립대학교는 미래를 이끌어 갈 대학생들이 교육비 걱정 없이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감동을 주는 교육복지 실현 대학으로 거듭나고 있다. ◇2020년 유지취업률 전국 도립대 중 1위경북도립대학교의 2020년 취업률은 72.8%다. 단순 취업률은 전국 평균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단순한 취업률이 아닌 취업의 질을 측정하는 유지취업률을 봐야 졸업생들이 얼마나 양질의 일자리에 취업했는지 알 수 있다.유지취업률은 대학 졸업생이 취업 후 취득한 건강보험직장가입 자격을 유지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취업의 질을 측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손꼽힌다.교육부는 대학별 유지취업률을 매년 4번 조사하는데 경북도립대학교는 2020년 4번의 유지취업률 조사에서 전국 도립대학 중 3월(93.4%, 1위), 6월(86.1%, 1위), 9월(84.1%, 1위), 11월(82.1%, 1위) 모두 1위를 기록, 경북도립대학교 졸업생들이 질 좋고 안정적인 일자리에 취업하고 있음을 증명했다.이 밖에도 경북형 일자리센터 운영, 학과 맞춤형 취업캠프, 모의 입사지원서 경진대회, 구직활동지원비 지급, 청년 고용정책 설명회 등 다양한 취업 지원프로그램을 운영해 학생들의 취업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공무원이 되고 싶다면 경북도립대학교를 선택하라경북도립대학교는 공무원 양성대학으로 유명하다.지난 3년간 일반행정직, 사회복지직, 토목직, 소방직 등 91명이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2020년 대학정보 공시를 분석한 결과 경북도립대학교 졸업생이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에 취업한 비율은 25.3%로 전국 전문대학 평균인 4.3%보다 5배 이상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이 같은 결과는 공무원 집중 양성을 위한 ‘공무원 양성원’(기숙형)을 운영,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별도의 기숙사를 제공, 기숙사비와 식비, 교재비 및 인터넷 강의비 지원, 성적 우수자 장학금 지원, 무료 특강, 개인 독서실 지원 등 전폭적인 지원도 한 몫을 하고 있다. ◇현장 직무능력 중심 교육으로 산업체가 원하는 인재 양성경북도립대학교는 현장 직무능력 중심의 교육과정을 운영한다.12개 학과 각 전공별로 학생들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편성하고, 100여 개 산업체 및 기관과의 업무협약을 바탕으로 현장실습을 강화해 직업교육의 명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이렇게 직무능력을 갖춘 경북도립대학교의 인재는 해외에서도 인정받고 있다.향후 한독상공회의소와의 MOU체결로 자동차과는 아우스빌둥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며, 자동차 판금 및 도장기술력을 인정받아 호주 등 해외지역까지 전문 인력을 공급하는 등 현장 직무능력 중심 교육과정의 모범이 되고 있다.앞으로도 대학은 산업 현장에 최적화된 인재 양성에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제2기숙사 신축으로 학생복지 극대화농촌 지역 소재 대학이라도 불편함은 없다.경북도립대학교 인근에 위치한 도청 신도시에는 대학생이 즐겨 찾는 각종 프랜차이즈 매장들이 즐비하다.사실 학생들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대학이 강의, 특강 등 촘촘한 교육과정을 제공하기 때문에 불편할 여유도 많지 않다.교육과정이 촘촘한 만큼 재학생 10명 중 6명이 기숙사에서 생활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한 기숙사를 제공하고 있다. 기숙사비는 학기당 65만 원 정도로 아주 저렴하다.여기에 더해 2022학년도에는 대지면적 83,072㎡, 지하 1층, 지상 4층의 156명을 수용할 수 있는 최첨단 신축 기숙사가 완공돼 학생들에게 더 나은 교육환경을 제공할 계획이다. 기숙사에 입사하지 못한 영주·안동·점촌·상주 등 학교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사는 학생들은 매일 통학버스로 등하교할 수 있으며 대구와 구미, 청주, 서울에 사는 학생들은 매주 운행하는 통학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물론, 통학버스는 무료다. 김상동 경북도립대학교 총장 ◇받은 것보다 더 돌려주는 대학,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대학대학이 학생들에게 등록금이나 계절학기 수강료 등으로 받은 금액 대비 대학이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 투자한 금액을 비율로 나타낸 교육비 환원률이라는 지표가 있다.경북도립대학교 2020회계연도 재무보고서에 따르면 경북도립대학교의 교육비 환원률은 673.5%이다. 쉽게 말해 대학이 매년 학생들에게 받은 것의 6배 이상을 돌려주고 있다는 의미이다.대학의 취업률, 교육비 등 대학 선택의 기준은 여러 가지다. 경북도립대학교는 공립대학인 만큼 재학생들이 자신의 꿈과 미래를 차곡차곡 준비할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하고 있으며, 졸업 후 학자금대출에 발목 잡히지 않고 성공적인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경북도립대학교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교육부, 중소벤처기업부로부터 각종 국책사업에 선정되는 등 명실상부한 명문 공립대학으로 발돋움하고 있다.신도청시대 중심대학으로서 경북 도정 발전 전략의 싱크탱크, 지역공동체 HUB 기능 등 공익적 역할이 앞으로 더욱 더 기대되고 있다.경북도립대학교는 10일부터 10월 4일까지 2022학년도 신입생 수시 1차 원서접수를 실시한다.선발인원은 전체 모집인원 355명 중 정원 내 290명, 정원 외 12명으로 총 302명을 모집하며, 이는 정원 내 전체모집 인원의 81.7%다./정안진기자 ajjung@kbmaeil.com

2021-09-06

민주주의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대구시내 한복판 중앙로 반월당 언덕배기에 위태롭게 자리하고 있는 2층 벽돌건물이 고색창연 하다. ‘못살겠다 갈아보자’에서 3선개헌 반대, 유신헌법 철폐, 군부독재 타도, 직선제 개헌 투쟁 등 담벼락을 뒤덮은 한 세기 전 선거벽보와 각종 시위사진들이 이 집의 내력을 대변해 준다. 독재 정치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것이 사명인 대구 민주화운동기념관. 이 집의 주인은 (사)민주화운동기념보존회다. 대구에서 무소속으로 2번이나 당선된 재선 국회의원이기도 한 4대 서훈 이사장은 “민주주의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며 야당 국회의원이라면 집권당의 잘못에는 목숨 걸고 투쟁해야 한다고 목청을 돋운다. 민주화운동기념회관을 번듯하게 빌딩으로 올리고 거기에 민주화 영령들의 위패도 모시고 대구 시민들의 정치소양 교육장도 만드는 것이 꿈이다. - 대통령 선거와 지방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그래서인지 후보가 되려는 사람들과 정치 지망생들의 보존회 출입 빈도가 잦아지고 있는 것 같다. 보존회가 지키고 있는 기념관은 어떤 성격인가.△ 대구경북 정통 야당 당사였다. 광복 이후 독립운동가이자 헌법 기초위원장인 동암 서상일 선생을 필두로 권중돈 주병환 신도환 임순석 조일환 김순택 김재권 신진욱 등 대구경북의 뜻있는 민주인사들의 성원으로 마련한 야당 당사이다. 이승만 정권 당시 대안동에 있던 민주당사에서 병원이었던 현 건물을 사서 옮겨와 대대로 야당 당사로 썼던 건물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 전국의 야당 당사를 모두 국가가 환수 조치할 때 유일하게 지켜낸 건물이기도 하다.- 대구 민주화운동기념관은 어디서부터 어떤 민주화운동을 기념하고 어떻게 보존하는가.△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독재에 저항한 2·28을 위시한 4·19 의거와 박정희 정권 당시의 6·3 굴욕 한일회담 반대투쟁, 삼선개헌 반대, 유신헌법 반대, 전두환 정권의 군사독재 반대외 직선제 개헌 투쟁, 6·10 민주항쟁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각종 기록물과 사진 등을 전시하고 있다. 이런 민주화 투쟁을 진두지휘한 교육 현장이고 시위 현장에서 전투경찰의 방망이와 최루탄에 연탄재와 오물 페인트 투척으로 맞선 최전방 지휘소이자 취후 보루였다. 후배들에게는 민주 교육 현장이고 민주 역사의 박물관으로 대구 경북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장소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이다.- 독재 정권에 반대하고 군사정권과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한 투쟁의 현장 이자 민주화의 성지라 할 만하다. 대구가 한 때는 정치적으로 야도라고 불리기도 했다. 현재 국민의힘이 제1야당이다. 전통을 잇고 있는가.△ 민주화운동기념보존회는 광복이후 우리나라 역사 시작부터 군부정권이 물러날 때까지 각종 민주화 운동을 이끌어오고 진두지휘했다는 점에서 1회적 민주화 운동과는 다르다.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 이후로는 오늘날 야당과 달리 정치적으로는 중립적 위치에서 오직 민주화 운동의 정신만 이어가고 있다.- 기념하고 보존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나라 초대 야당이었던 민주당의 신익희 당수로부터 조병옥 윤보선 장면 박순천 김영삼 김대중에 이르기까지 역대 정통 야당의 당수들의 영정 및 대구 경북지역 야당인사 400여 명의 위패를 모시고 1년에 1차례 합동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그들의 반독재 투쟁 민주화 정신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민주화운동은 어떻게 진행해 나가려고 하나.△ 대구시민의 민주 역량을 일깨우고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모든 독재에 항거한 대구 경북민의 민주화 운동 정신을 이어가야 한다. 보존회 차원에서 지역 민주인사를 키우고 교육시키는 일을 해나가고 있다. 민주반월보를 꾸준히 발행해내고 있고 지난 2019년 보존회가 주체가 되어 정치대학을 열어 시민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얻기도 했다.- 재선 국회의원인데 2번 모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YS(김영삼 전 대통령)를 정치적 멘토로 모시면서 어떻게 당 공천을 못 받고 무소속으로 출마했나.△ 정치란 그런 것이더라. 3당 합당을 했고 나보다 더 센 상대가 있어 공천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주영 현대 회장의 국민당으로 출마해 낙선하고 보궐선거에는 또다시 신한국당 공천을 받지 못해 무소속으로 나가 당선됐다.- 선거 과정에서 기억나는 일화가 있나.△ 정주영 현대 회장은 정말 명쾌한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동구의 숙원사업이 뭐냐고 묻기에 ‘동촌 K2 비행장이 문제다’라고 했더니 “그거 쉽다. 내가 대통령 되면 당장 해결해 준다. 그곳에 아파트 지으면 훨씬 좋은 시설의 공항을 지을 수 있다”고 했다. 지금 기부 대 양여 방식의 대구공항 이전 사업이 그 때 나온 것 아닌가 무릎을 쳤다.- 무소속으로 당선되고 많은 화제를 뿌렸다. 자전거를 타고 등원해서 매스컴을 탔다. 후에 백바지 등원이나 원피스 등원이 화제가 되고 있는데 서 의원이 원조(元祖)격이 아닌가.△ 깨끗한 정치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무엇인가 혁신하고 싶었다. 자전거를 타고 들어가니 입구에서 막아서 ‘그러면 들고 들어가겠다’고 해서 허락을 받았다. 비가 오는 날은 우산을 받쳐도 젖었는데 다른 의원들은 우산이 없어도 비를 맞지 않았다. 지하통로가 있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의회에서 돌출 발언으로 심지어 동료 의원들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의원 신고에서부터 사고를 쳐서 스포트를 받았다.△ 국회사무처에서 의원 신고할 때 읽으라고 적어준 쪽지를 펴 들고 의석을 바라보니 앞줄 초선보다 뒷줄 중량급 다선 의원들이 눈에 들어오더라. 순간 눈이 확 떠지더라. 보궐선거 기간 동안 지도급 중견 정치인들이 대거 내려와 나를 떨어뜨리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했던 사실들이 떠올랐다. 메모를 접고 일갈했다. ‘이 자리에는 비리를 저지르고 부정선거를 한 의원들이 모여 있다’고. 난리가 났던 기억이 난다.- 지금 대구 정치에 원로가 없다고들 한다. 동의하나.△ 정치야말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나이 들었다고 무조건 꼰대는 아니다. 대구의 선비정신과 꾸준한 자기 성찰이 필요하며 끊임없는 사회 참여 정신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 정신을 가진 선배 정치인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역 정치인들, 특히 국회의원의 존재감이 없다는 여론이다. 대다수가 야당인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인데 의정 활동이나 지역구 활동에서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정치는 정(正)이라 했다. 바르게 한다는 것은 정의를 구현한다는 말이다. 정의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투쟁의 산물이다.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은 오직 바르게 할 것이며 바르지 못하면 투쟁을 해서 바르게 잡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자기 보신이나 하고 영달만을 누리려면 정치의 길을 가지 말아야 할 것이다.지금 문재인 정권에서 대통령을 탄핵해도 수십 번 할 수 있는 일들이 일어났다. 야당을 한다는 인사들이 투쟁다운 투쟁을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 시민들이 정치인 보기를 보신주의자나 자기 영달만 생각하는 고액봉급자로 볼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특히 최근 대구출신 야당 대표시절 투쟁과는 거리가 먼 입으로만 떠드는 인사를 우리는 보아왔다.- 그렇다면 야당은 도대체 어떻게 투쟁해야 하나.△ 야당은 집권당의 잘못을 지적하고 투쟁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야당 총재 시절을 기억해봐라. ‘닭의 목은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며 민주화와 직선제를 쟁취해 내지 않았나. 나는 김대중 대통령 시절 두류공원에서 ‘김대중 대통령 규탄대회’를 열기도 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얼굴은 포철이 생산해내는 120mm 철판보다 더 두껍다”고 비유해 김 전 대통령의 측근인 권노갑 한화갑 의원으로부터 ‘비유가 너무 지나쳤다’는 항의를 받기도 했다.- 지금도 많은 정치인들과 소통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김부겸 총리와 이건희 미술관 건립 관련 대화를 했다고 전해 들었다.△ 많은 후배 정치인들과 소통하고 있다. 그들에게 진정으로 충고해주고 있다. 김부겸 총리에게는 ‘대구 출신으로 대구에 이건희 미술관을 끌고 오도록 노력해 보라’고 했더니 “그런 말은 꺼내지도 못한다”며 “나보고 내려오라는 소리”라 하더라. 그래서 말해줬다. “당장 그만 두더라도 소신껏 할 말은 하는 총리가 돼야지”라고.- 당시 이회창 총재의 대통령 후보선출에 반대했다가 한나라당 공천을 받지 못했다. 그런 투쟁 경력에 왜 3선의원이 되지 못했나.△ 모두가 찬성하는 이회창 후보에 대해 말석에 앉은 내가 반대한 것이다. “전 국민이 자식을 군대에 보내고 노심초사하는 판에 후보가 아들 둘을 군대 보내지 않았다. 그런 후보가 국민들에게 표를 달라고 하면 국민이 표를 주지 않을 것이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당시 이회창 후보 옆자리에 앉았던 허주(김윤환)가 내게 와서 어깨를 두드리며 말렸다. 그러나 그도 결국 공천에 탈락하고 정치 인생을 마감했다.- 지금 같은 상황이 되풀이된다면 지금도 반대할 것인가. 본인의 소신에 비해 대중이나 후배들로부터의 인기는 없어 보인다. 자신의 정치인생은 성공적이라고 평가하나.△ 현실 정치와 맞지 않았다. 현실정치를 몰랐던 것이다. 돈이 있어야 조직 관리도 하고 사람들도 따른다는 사실을. 나도 3선의원이 되면 정치자금도 모으고 주변 관리도 하면서 소위 큰 정치인이 되겠다며 대권까지 생각했는데 이뤄지지 못했다.그러나 지금도 헌정회에 가면 큰소리친다. 정치적으로 비겁하지 않았고 금전문제나 다른 비리가 없으니 어디서나 누구 앞에서나 떳떳하고 당당하다. 자식들도 저마다 제 노릇을 하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그렇지 못한 선후배 정치인들을 보면 나는 정치적으로는 실패했을지 몰라도 인생에는 성공적이라 자평한다. □ 서훈 (79)대구 동촌 출생. 영남고 경북대 법학과, 전남대 정치학석사, 대구대 행정학박사.경북대 재학시절 총학생회장으로 6·3한일회담 반대운동.팔공재건중학교 설립, 교장으로 야학운영.김영삼 신민당총재의 특별보좌관으로 정계입문. 이후 유신헌법 반대와 직선제 쟁취 반독재투쟁하다 14대와 15대에 무소속으로 당선됐다. 이후 신한국당에 입당해 대구시당위원장을 했고 이회창 후보에 반대해 공천탈락하고 탈당해 16대에 민국당 후보로 출마해 낙선했다. 부정부패추방시민연대전국위원장을 맡았다. 이명박 정권에서 저작권단체 연합회 이사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서예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2021-09-06

열정 하나로 지역에 연극의 뿌리내려

포항 최초의 극단 ‘은하’는 연습 장소가 없어 고생하다가 포항에 현대식 공연장인 시공관(市公館)이 건립되면서 활기를 띠게 된다. 하지만 연극에 대한 무관심과 예산 지원 부족으로 또다시 위기에 처한다. 그 전말을 들어보았다. 헌 : 당시 포항에서 연극 연습할 장소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김 : 있을 리가 없었지. 연습 장소가 마땅치 않아 동빈부두에서 하다가 수도산, 북부해수욕장을 찾아다니다가 심지어 상원동 골목에서 연습하기도 했지. 하루는 골목에서 연습하고 있었는데 처음 뵙는 분이 대뜸 묻는 거야. “여기서 와 이라노”라고. 그분이 바로 이명석 선생이었지. 이명석 선생이 나를 시내에 있는 청포도다방에 데리고 가 박영달 선생을 소개해주셨어. 박영달 선생이 주시던 삶은 달걀 기억이 나는군. 이명석 선생이 연습 장소뿐만 아니라 많은 도움을 주셨어.헌 : 그런 상황에서 1960년 포항 육거리에 현대식 공연장인 시공관이 개관한 것은 포항 연극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겠습니다.김 : 당시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큰 사건이었지. 대구도 공회당 같은 곳에서 연극을 하고 음악·무용 발표회를 했는데, 인구 6만 명밖에 안 되는 포항에서 600여 석의 현대식 극장이 들어선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어.헌 : 포항 최초의 장막극(長幕劇, 2막 이상으로 이루어진 긴 연극)을 그곳에서 올렸지요?김 : 시공관 명칭을 시민회관으로 바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범석의 ‘별은 밤마다’를 무대에 올렸지. 1966년 9월로 공연 날짜를 잡고 포항문화원과 포항소방서 강당에서 연습했던 기억이 나는군.헌 : 1980년대 후반에 시민회관 매각설이 돌았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김 : 1988년에 실제로 시민회관 매각설이 시중에 돌아다녔고, 연극인들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지. 만약 시민회관이 민간에 매각되면 연극인들은 사실상 둥지를 잃게 되는 것이니까. 신상률 선생과 의논 끝에 포항시민회관에 1989년 제7회 전국연극제를 유치하기로 하고 백방으로 뛰어다녔지. 다행스럽게 그 일이 성사되면서 국비로 시민회관 내부를 전면 보수하고 조명과 음향 시설도 현대식으로 교체하면서 매각 이야기는 쑥 들어갔어. 연극인들의 힘으로 포항시민회관을 지켜낸 것이지.헌 : 다시 극단 ‘은하’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은하’는 언제 첫 작품을 무대에 올리게 되는지요?김 : 최동주의 창작극 ‘비와 대화’를 1965년 7월 애린예식장에서 올렸지. 연출은 백야 선생이 맡았어. 애린예식장 좌석이 150개였는데 200명은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지. 그런데 관객은 겨우 4명뿐이었어. 이명석 선생이 인사말을 하면서 호통을 쳤지. 대체 준비를 어떻게 했길래 관객이 4명뿐이냐고. 김삼일은 이런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계속 연극에 매진하면서 지역에 조금씩 연극의 뿌리를 내렸다. ‘포항 연극 100년사’에 그 과정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그러나 그들은 멈추지 않고 1966년 하유상 작, 김삼일 연출 ‘어느 날의 환상’ 공연을 준비한다. 이 작품은 남자 배우 3명이 등장하는데 김삼일과 정정화가 2명의 역할을 하고 나머지는 연기자가 없어 녹음으로 대체하여 공연한다. ‘은하’ 극장의 제2회 공연 ‘어느 날의 환상’은 공연장인 애린예식장에 200여 명의 관객이 몰려 성황을 이룬다. 이에 힘입어 ‘은하’ 극장은 한 해 동안 유치진 작 ‘토막’과 ‘조국’, 차범석 작 ‘별은 밤마다’, 유진 오닐의 ‘고래’ 등 5편의 연극을 이어 공연했다. 특히 ‘별은 밤마다’는 단막극만 해오던 ‘은하’ 극장이 최초로 도전한 2막극으로, 포항시민회관 700석의 객석을 모두 채우고 입석까지 1천여 명의 관객이 모여들어 ‘은하’ 극단이 이후 매년 연극을 올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헌 : 선생님의 연극 인생에서 이해랑 선생과의 인연이 아주 중요한데, 어떻게 만나게 되었습니까?김 : 1966년 신문에서 ‘이해랑 이동극장 단원 모집’ 광고를 봤어. 이 극장에 들어가고 싶더군. 그래서 면접을 보려고 서울에 갔다가 이해랑 선생과 처음 만난 거야. 면접 후에 이해랑 선생이 지방에도 좋은 연극인이 있어야 한다며 포항에서 연극을 하는 게 좋겠다고 하셨지.‘이해랑 이동극장’은 어두침침한 소극장에서 뛰쳐나와 넓은 광장에서 대기를 마시며 연극을 하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계몽성 연극 운동으로 시작했는데, 활동 3년 만에 이해랑이 국회의원이 되면서 막을 내렸다.헌 : 대구에서도 성우 생활을 하셨지요?김 : 1966년에 KBS 대구방송국에서 성우 선발 공고가 나서 응시해 합격했지. 대구에서는 성우, 포항에서는 연극을 하게 된 거야. 그런데 3년 후에 KBS 포항방송국 기자 발령이 나더군. 그 바람에 낮에는 취재 현장을 다니고 저녁에는 ‘은하’ 대표 겸 연출가로 활동했지.헌 : 앞으로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지만 그동안 들은 이야기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연극에 대한 열정이 아무리 뜨겁다 해도 여러모로 힘든 여건을 헤쳐나가기가 어려웠을 텐데요.김 : 그래도 그때는 열정 하나로 버틸 수 있었어. 이 무렵 우연히 세계적인 극작가 미국의 유진 오닐이 어촌의 허름한 부두 극장에서 연극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나와 비슷한 처지잖아. 유진 오닐이 나에게 위안도 되고 힘도 되었지.헌 : ‘은하’가 국립극장에서도 공연을 했더군요.김 : 1967년 5월 문화공보부 주최 전국 신인예술상 경연대회 본선에 진출해 서울 명동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했지. 지방 극단으로는 최초로 국립극장에서 연극을 했으니 쾌거였지.헌 : 이맘때 재경 유학생들과 연극을 했던데 어떤 내용인지요?김 : 1967년 12월로 기억해. 포항과 대구를 오가며 연극 운동을 하고 있을 때였지. 덕수동 포항문화원에 들렀는데 이명석 문화원장이 2층 강당에서 재경 유학생들이 연극 연습을 하고 있으니 도와주라고 하시더군. 그날부터 합류해 그들의 연기 지도를 하고 연출도 맡았지. 2개월 정도 연습이 끝나고 1968년 2월 무대에 올렸는데 반응이 좋았어. 그해 겨울에는 안톤 체호프 작 ‘청혼’을 준비해 이듬해 2월 국제극장 무대에 올렸는데 500석을 가득 메우는 성황을 이뤘지.1960년대 재경 유학생들의 애향심과 자부심은 대단했다. 이들의 열정은 포항의 황량한 거리를 연극의 열기로 채웠다. 1970년대 초반 재경 유학생회는 ‘심맥회’라는 이름을 짓고 서울에서 정기모임을 가졌다. 1973년 겨울에는 ‘심맥회’ 회원들이 기획, 연출, 출연한 연극 ‘수업료를 돌려주세요’를 포항문화원 강당에 올려 박수갈채를 받았다. 헌 :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은하’가 흔들리게 되는데 이유가 무엇입니까?김 :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지역사회에서 연극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고 예산 지원도 신통치 않은 게 가장 컸지. 나는 이때 KBS 포항방송국 기자로 일하면서 ‘은하’ 대표와 연출가 업무를 겸하고 있었거든. 한계에 부딪혔다고 해야 할까. 과로로 입원까지 했어. 어쩔 수 없이 1975년부터 1978년까지 4년 동안 ‘은하’는 정기 공연을 중단하고 말았지.헌 : 그 후의 상황은 어땠습니까?김 : 1979년 5월 포항시민회관에서 김천중 연출로 쥘 르나르 작 ‘홍당무’를 올렸는데 2천여 명의 관객이 몰릴 정도로 대성공이었어. 김천중은 서울 극단 ‘산울림’의 조연출로 활동했는데 직장 문제로 포항에 오면서 나와 최희만 등과 의기투합해 ‘홍당무’를 무대에 올렸지. 이 작품은 ‘은하’의 재기작이 된 셈이야. 여기에서 힘을 얻어 포항에서는 처음으로 뮤지컬 ‘철부지’를 공연했는데 반응이 꽤 좋았지. 그해 한국연극협회 포항지부가 인준되었고 1981년까지 내가 지부장을 맡았어. 1980년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를 연출했던 기억도 나는군. 이 공연에서 어머니 역을 맡은 정옥희가 연기력을 인정받았어. 이듬해 차범석의 ‘왕교수의 직업’을 포함해 4편의 작품을 연출했는데 ‘은하’의 힘으로 포항 연극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발판이 되었지.이를 계기로 1981년 10월 22일 극단 ‘은하’는 서울신문사가 제정한 제1회 향토문화상을 수상했다. 당시 서울신문은 ‘문화 불모지에 꽃 피운 연극예술’ ‘정열만을 지주 삼아 17년, 관객 4명이 4천 명으로’ 등을 내용으로 문화면 머리기사에 ‘은하’를 소개했다. 김삼일1942년 울산 출생으로 1963년 KBS 포항방송국 전속 성우 1기생이다. 1964년 대구에서 여러 연극인과 극단 ‘태백산맥’을 창단했고 ‘나는 자유를 선택했다’에 주인공 역으로 연극에 입문했다. 1965년 포항에서 극단 ‘은하’를 창단했으며 1983년부터 2012년까지 포항시립연극단 연출자를 지냈다. ‘햄릿’, ‘산불’, ‘원효대사’, ‘맹진사댁 경사’ 등 연극 160여 편에 출연하거나 연출을 맡았다. 2004년 조선일보 이해랑연극상, 2005년 MBC 제1회 홍해성 연극상, 2009년 대한민국 자랑스러운 연극상, 1985년 전국연극제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다. ‘김삼일 자유소극장’을 운영했으며, 대경대 석좌교수를 지냈다.대담·정리 : 김동헌(시인) /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9-05

기피를 멈추고 추모로

□ 전문장사시설은 주민편의를 도모하는 사회 필수시설로 공공성, 안정성, 연속성 등을 고려해 지역수요에 맞는 시설을 확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주민들에게는 기피시설이자 혐오시설로 인식돼 있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나 경북지역은 장사 시설 확충에는 앞서고 있으나, 이를 주민들과 함께 생활 속의 하나의 문화로 들이는 부분에 있어서는 보수적인 편이다. 우선 해외부터 보자면 대부분의 해외 장사시설은 도심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즉, 장사시설을 혐오시설로 인식해 기피하는 한국과 다르게 언제든 망자를 추모하러 가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친화적인 생활공간으로서 인식되고 있는 것.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공원 혹은 문화유적지의 개념으로 조성돼 지역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서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관광객들의 방문명소로 활용되고 있다. 역사가 오랜 해외 장사시설들은 변화하는 장묘문화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기존 조성된 묘지의 재개발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친환경적인 봉안시설, 자연장시설, 유택동산 등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특히, 주변 자연환경을 훼손하지 않고 원형을 이용한 장사시설을 조성해 일상생활 속에서도 지역주민들이 휴식과 편의시설로 활용할 수 있게 공원화했으며, 장례문화를 알리기 위해 장사시설 내 박물관 혹은 도서관을 조성하거나 문화유적지의 개념으로 묘지 투어나 콘서트 등의 문화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례도 있다. 유족의 개별 종교나 전통문화를 수용할 수 있는 추모구역을 별도로 운영함으로써 인간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장사시설들도 있다. 화장시설의 경우 최첨단 설비를 새로이 설치해 지속적으로 관리함으로써 화장시설의 유해물질 등을 최대한 저감시키려 노력하고, 유골함도 친환경적 소재로 제작하는 등 화장이나 매장에 따른 환경오염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다. 제한된 공간의 활용성을 높이기 위해 시한부 매장제도를 도입해 묘지를 재사용하기도 하며, 공동체묘·합동대량무덤·합장식묘지 등 유골을 공동 매장하는 형태로 영구 매장할 수 있도록 한 장사시설들도 있다. 이렇듯 장사시설이 우리 생활의 일부이며 함께 일상에 녹아들어야 함에도 아직 국내에서의 인식은 많이 다르다. 이를 극복하고자 국가나 지자체 등 행정에서 각종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실제 국내에서 시민들 품에서 어우러지는 종합장사시설로 자리를 잡고 있는 곳도 꽤 된다. 이들 사례를 살펴봄으로써 종합장사시설 설립을 앞두고 있는 포항시의 방향성을 제시해 본다.글 싣는 순서1. 장사시설과 장사문화, 우리는 장사를 어떻게 보고 있나2. 포항시, 종합장사시설 마련 첫걸음3. 장사시설 선두주자 인천 가족공원4. 시민의 품 안에 세종 은하수 공원5. 장사 문화 개선을 위해 포항이 나아가야 할 방향 □ 장사문화일반적으로 장사(葬事)란 죽은 사람을 땅에 묻거나 화장하는 일을 말하며, 장사를 지내는 예식을 장례(葬禮)라고 한다. 이 둘은 서로 구분하지 않고 혼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일단 장사의 방법에는 매장, 화장, 자연장 등이 있다.매장(埋葬)이란 시신이나 유골을 땅에 묻어 장사하는 것을 말하며, 화장(火葬)이란 시신이나 유골을 불에 태워 장사하는 것을, 자연장(自然葬)은 화장한 유골의 골분(骨粉)을 수목·화초·잔디 등의 밑이나 주변에 묻어 장사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종류의 장사문화는 해당 지역이나 국가의 종교에 따르는 모습을 보이는데 불교는 화장을, 유교나 기독교 등은 매장을 주로 해왔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인구가 급증하며 묘지 부족 문제가 상당히 심각해지는 상황에 이르렀고, 이를 해결하고자 매장은 점차 기피되고 화장을 기본으로 하는 자연장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추세다. 우리나라 역시 좁은 국토를 가진 한계로 화장의 비율이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한국장례문화진흥원의 장사 관련 통계에 따르면 2021년 5월 잠정치 화장률은 90.1%로 이미 국내에서는 화장이 대세가 됐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연도별 화장률 통계에서 1994년 화장률이 20.5%였던 것을 생각하면 말 그대로 급격한 증가세를 바탕으로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 됐다고 볼 수 있다. □ 자연장, 이제는 대세다그럼 화장 이후에는 고인을 어떻게 모시고 추모할까. 포항시가 수행한 연구용역 자료를 바탕으로 국외 사례를 몇 가지 소개한다.가장 먼저 살펴볼 나라는 스위스다. 세계 최초로 수목장 방식을 도입했으며, 숲에 있는 기존의 나무를 그대로 활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자연을 해치는 건축물이나 안내표지판 등 어떠한 시설물도 설치하지 않아 숲으로 인식돼 지역 주민의 반대가 적다. 주로 2∼3㏊ 정도의 소규모의 자연장지를 조성했으며, 대표적인 바인펠덴(Weinfelden) 수목장림의 경우 울창한 숲에 조성돼 있다. 또 부흐(Buch) 지역의 수목장림은 정원에 조성됐으며, 테게르빌렌(Tagerwilen)에서는 어린나무나 잡목 등으로 조성된 동산을 활용한다. 이러한 수목장은 별도의 유골함 없이 분골한 유골을 나무 밑 30∼40㎝ 구덩이에 그대로 묻는 방식으로 안치한다. 추모목에는 한 그루에 10명의 분골까지 안치할 수 있는 가족추모목과 10명의 친족이나 지인의 분골을 안치할 수 있는 친지추모목,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묻는 공동추모목 등이 있다. 운영 방식도 눈여겨 볼만하다. 개인 관리회사인 프리드발트사(社)가 산 주인과 지방정부에 산림사용허가를 받아 추모목을 사용자에게 판 뒤 이를 관리하고, 수익금의 일부를 산 주인과 지방정부에 지급하는 방식으로 운영한다. 그러나 산림 자체의 관리는 정부기관인 영림서가 담당하고 관리 비용도 지자체의 예산으로 충당한다는 특징이 있다. 프리드발트는 추모목을 100년간 관리해주며, 추모목의 위치를 기록으로 남겨 산불로 추모목이 훼손되거나 죽었을 경우 복원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다음으로 살펴볼 국가는 영국이다. 영국은 자연장이 보편화돼 있으며, 국가 차원에서 자연친화적 자연장 정책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다. 100㏊ 규모의 정원형(화초·수목)으로 조성해 인공연못, 추모의자, 벽걸이현판(고인명패 부착), 고인표식 등의 시설과 함께 조성한다. 안치는 묘역 내의 성인목을 추모목으로 삼는 방식을 사용한다. 즉 유골을 묻고 고인의 인적사항을 새긴 작은 묘비를 나무뿌리 부분에 설치한다. 또 분골을 묻은 후 그 위에 관목이나 1∼2m의 작은 나무를 심는 방식도 사용하는데, 이 경우에도 고인의 인적사항을 새긴 작은 묘비를 나무뿌리 부분에 설치한다. 이 외에도 길이 10∼20m, 폭 2m 화단에 높이 2m 내외의 단목을 조성해 분골을 묻고 표찰을 지면에 꽂는 장미정원 방식도 사용된다. 영국의 수목장은 모두 공원묘지 시설 내에서 이뤄지며, 기존 묘역을 이장할 때는 대부분 수목장으로 전환한다. 화장률이 높은 국가인 스웨덴도 모범적인 자연장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자연장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돼 있으며, 이를 반영하듯 10개의 시립묘지 중 8곳이 자연장이다. 400㏊의 대규모로 산골(散骨) 및 잔디·화초형으로 조성하며, 별도의 추모장소, 회상의 숲, 산책로 등의 시설도 함께 마련한다. 회상의 숲과 관련된 조례도 있는데, 스웨덴의 수도이자 화장률이 90%가 넘는 스톡홀름시의 장묘 관련 조례에는 ‘회상의 숲’을 익명의 특성을 가진 무덤으로 분골이 공공의 장소에 묻히거나 뿌려질 수 있는 곳으로 정했다. 또한 산골 장소에는 표시를 하지 않으며, 개별적으로 꽃 등의 식물을 심거나 정돈하지 못한다고도 정의했다. 안치방법을 보면, 화장한 분골을 뿌리거나 묻을 수 있으며 유골함을 묻는 경우에는 약 20㎝ 깊이로 묻는다. 독특하게 옥수수 성분으로 된 재질의 유골함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 외에도 집단묘지 내 자연장 장소에 하지 않을 경우 주 정부의 허가를 받아 화장한 유분을 처리해야 한다는 유의사항도 있다. 특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스톡홀름 시립 묘지인 스콕스시르코고덴(Skogskyrkogarden) 묘지는 고인을 추모할 수 있는 장소는 별도로 있으며, 산골을 할 때 유족들을 일절 숲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묘지관리소 직원이 직접 산골을 한다./전준혁기자 jhjeon@kbmaeil.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1-09-01

문무왕부터 경순왕까지… 영욕의 역사와 함께하다

동궁과 월지는 신라의 왕과 왕자, 귀족들의 생활공간인 동시에 그들이 국빈과 연회를 열던 장소였다.사철 내내 희귀한 짐승이 뛰고 새가 날며 온갖 아름다운 꽃이 피어있던 곳이었고, 통일신라 예술의 정점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건축물과 조각, 예술품들이 가득한 미려한 정원이기도 했을 동궁과 월지.여기서 신라 왕들은 구체적으로 뭘 했을까? 궁금증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멀리는 1천350년, 가까이 잡아도 1천 년 이전의 아득한 역사에 대한 호기심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일 터.월지와 동궁은 각종 고문헌에서 여러 차례 언급된다. 때로는 짤막하게, 어떤 경우엔 그보다 상세하게. 그 사례들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동궁과 월지는 어떤 곳들을 포함한 영역이었는가를 알아보자. 한국고대사탐구학회가 발행한 김병곤의 논문 ‘신라 동궁의 역할과 영역-임해전 및 안압지와의 상관성을 중심으로’에는 아래와 같은 설명이 등장한다.“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5년간의 시차를 두고 건립되고 동궁 관련 명문 유물이 다수 출토된 안압지와 임해전을 동궁 부속 시설로 이해한다.또한 ‘삼국사기’ 직관지에 따르면 동궁 부속 관서로 동궁아, 어룡성, 세택, 급장전, 월지전, 승방전, 포전, 월지, 용왕전 등이 있는데 안압지의 신라시대 명칭을 월지로 간주하고 월지전, 월지악전은 안압지 관리 부서로 그리고, 급장전과 포전은 안압지와 임해전에서 개최된 연회를 지원하는 부서로 보았다.그 결과 안압지 주변 일대는 물론 ‘신번동궁세택’명 청동접시 등이 수습된 인왕동 왕경 유적 일대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동궁 영역으로 추정하기에 이르렀다. 동궁은 태자의 권위를 드러내며 독자적인 주거 공간의 제공과 군왕에 어울리는 자질 향상을 위해 각종 교육을 실시하는 장소였다.”‘삼국사기’에 여러 차례 언급되는 동궁과 월지적지 않은 부속 건물을 두고 철저한 관리를 통해 고대왕국 신라의 권위와 위상을 높였던 것과 더불어 왕의 자리를 이어받을 왕자를 교육하는 귀한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던 동궁과 월지.그곳이 어떤 변화 과정과 사건을 겪었는지 추정해볼 수 있는 대표적인 고문헌이 ‘삼국사기’다.이희준의 논문 ‘동궁과 월지 동편 신라왕경 유적의 조성 시기 및 성격 검토’에는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월지 관련 언급을 보기 좋게 정리한 표가 실려 있다. 다음은 그걸 다시 요약한 것이다.△문무왕 14년 2월(674년) 궁 내에 못을 파고 가산을 만들고, 화초를 심고 진이한 금수를 길렀다.△문무왕 19년 8월(679년) 동궁을 짓고 궁궐 안팎 여러 문의 이름을 지었다.△효소왕 6년 9월(697년) 임해전에서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경덕왕 11년 8월(752년) 동궁아를 설치하고 상대사 1인, 차대사 1인을 두었다.△혜공왕 5년 3월(769년) 임해전에서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소성왕 2년 4월(800년) 폭풍으로 인해 나무가 부러지고 기왓장이 날아가고 임해문과 인화문이 파괴되었다.△애장왕 5년 7월(804년) 임해전을 중수하고 새로 동궁 만수방을 지었다.△헌덕왕 14년 1월(822년) 동복 아우 수종을 부군으로 삼고 월지궁에 들였다.△문성왕 9년 2월(847년) 평의전과 임해전을 중수하였다.△헌안왕 4년 9월(860년) 왕이 임해전에 군신을 모았다.△경문왕 7년 1월(867년) 임해전을 중수하였다.△헌강왕 7년 3월(881년) 임해전에서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주연이 무르익자 왕이 거문고를 타고 좌우에서 노래를 부르며 매우 즐겁게 놀고 파하였다.△경순왕 5년 2월(931년) 고려 태조가 기병 50여 명을 거느리고 수도 근방에 이르러 만나기를 요청하였다. 왕이 백관과 더불어 교외로 나와 맞이하고 궁으로 들어와 마주 대하며 정성을 다하여 극진히 예우하고 임해전에 모셔 연회를 베풀었다.간략하게만 봐도 자그마치 250여 년의 세월, 10명이 넘는 왕이 고문헌 속에 등장한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역사를 볼 때 동궁과 월지는 통일신라의 번성과 쇠락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을 것이다.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이 만들었고, 이후 많은 왕들에 의해 낡고 허물어진 건물을 고쳤던 때를 거쳐 새롭게 등장한 왕국 고려에 의해 국운이 기울던 시기까지 신라의 역사와 함께 한 게 바로 동궁과 월지다.통일신라 왕들의 환희와 고통 지켜봤을 공간통일신라를 완성한 문무왕은 무열왕 김춘추와 문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유신 등과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제압한 그는 당나라 세력까지 축출한 탁월한 전략가인 동시에 동궁과 월지의 건설을 명령한 통치자이기도 했다.그로부터 시작된 월지와 동궁의 역사는 이후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부침(浮沈)을 거듭한다.여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효소왕은 원선, 당원과 같은 나이 많은 대신들의 도움으로 안정적인 국정을 유지했고, 할아버지가 만든 월지의 근사한 건물에서 신하들에게 화려한 잔치를 열어줄 수 있었다.소성왕은 800년 음력 6월에 왕위에 오른 지 2년도 되지 않아 사망한다. 그가 죽던 해에는 전과 달리 잦은 기상 이변이 있었고, 그로 인해 월지와 동궁의 일부가 파손되기도 했다.소성왕의 맏아들이었던 애장왕이 이를 중수한 것은 동궁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아버지를 기억 속에서 불러내기 위한 행위이기도 했을 것 같다.7세기에 만들어진 동궁과 월지는 9세기에 이르러서도 문성왕, 헌안왕, 경문왕 등에 의해 보다 아름답게 다시 만들어졌고, 여기서는 왕과 귀족, 외국 사신들의 크고 작은 연회가 펼쳐졌다.신라의 제49대 왕인 헌강왕은 글 읽기를 좋아했으며 한 번 본 글귀는 모두 입으로 읊을 수 있을 정도로 명석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왕이 된 후에도 문화와 예술에 기반한 정치를 펼친 그는 신명도 남달랐던 듯하다.최고 권력자가 월지의 근사한 풍경을 보며 직접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헌강왕의 기질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그래서일까. 일부 사학자들은 그를 두고 “사회적 안정과 풍요로움을 누렸으나, 중앙 귀족들과 함께 향락적 문화를 즐기는 데만 몰두하고 신라 하대 사회의 불안정성을 근원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았다”는 비판적 평가를 내놓기도 한다.동궁과 월지에 관련된 ‘삼국사기’의 언급 중 가장 비극적인 건 경순왕 때의 기록이다.모두가 알다시피 927년부터 935년까지 왕위에 있었던 경순왕은 신라의 마지막 왕이다. ‘고려 태조에게 나라를 바친 왕’이라는 불명예스런 사실은 경순왕에 관한 역사적 평가를 인색하게 만들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56대 992년간 지속됐던 고대왕국 신라는 사라졌다.만약 동궁과 월지가 살아 숨 쉬는 생명체였다면 경순왕이 고려 태조를 비롯한 다른 나라 병사들을 신라의 선대왕들이 아꼈던 공간에 초청해 굴욕적으로 접대하던 모습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을까.빛과 어둠, 햇살과 그림자가 공존했던 신라의 역사. 동궁과 월지의 역사 역시 장구하고 드라마틱했던 신라사(新羅史)의 주요한 한 부분이었을 것이 분명하다.인간은 사라져도 신라 유적은 여전히 남았으니…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간행한 ‘신라사 총론’은 경순왕대의 신라 멸망과 그 이후를 이렇게 쓰고 있다.“935년 경순왕이 반란국가의 하나였던 신흥 고려 태조 왕건에게 천년 사직을 바친 뒤 신라 역사의 위용과 그 찬란했던 문화는 한국인의 뇌리에서 차츰 잊혀져갔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천년 고도 경주는 동경(東京)으로 격하되었지만, 그래도 3경의 하나로 중시되었다.하지만, 조선시대가 되면서 8도의 하나인 경상도 감영의 소재지로 다시 격하되었다가 그나마 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에는 대구로 감영이 옮겨짐에 따라 일개 부(府)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후략)”1천 년 가까이 이어지던 고대왕국 신라의 역사가 종말을 고하기 4년 전인 931년 동궁과 월지에서 이뤄졌던 경순왕과 왕건의 만남. 이는 기나긴 우리 역사 속에 존재하는 행운의 하나였을까? 아니면 불행한 사건이었을까? 누구도 쉽게 대답을 내놓을 수 없는 질문이다.‘삼국사기’의 기록에 등장하는 왕들 외에도 ‘아름다운 화원’ 동궁과 월지에서 기쁨과 슬픔을 맛보며 제 삶의 한 부분을 보낸 신라의 왕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그들은 최상위 권력자였지만, 태어나고 성장하고 쇠하고 결국에는 소멸하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의 환희와 고뇌를 오롯이 기억하는 건 이제는 유적으로 남은 동궁과 월지가 아닐지.취재를 위해 동궁과 월지를 여러 차례 찾았다. 그때마다 실감했다. 인간의 유한함과 시간의 무한함을. 또한 진지하게 생각했다. 역사의 연구와 복원이 왜 중요한 것인가를./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9-01

장생포에서 포항까지, 그리고 극단 ‘은하’ 창단

울산 장생포에서 살던 소년 김삼일은 작은 고래와 헤엄치고 놀며 평화로운 시절을 보낸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면서 그의 삶도 큰 변화를 겪게 되는데, 그 와중에 연극을 만나게 된 것은 인생의 묘한 아이러니가 아닐까. 헌 : 울산 장생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는데 장생포는 고래가 유명한 곳이지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군요.김 : 나는 우체국에서 근무했던 아버지의 둘째 아들이었지. 지금 포항 동빈내항은 수심이 얼마 안 돼 큰 배가 못 들어오지만 과거 장생포항은 수심이 깊어 큰 상선들이 많이 들어왔어. 다섯 살 때부터 수영을 배웠고 수영이라면 자신이 있지. 집에서 방문을 열면 바다가 환히 보였어. 내가 어릴 적에는 참고래, 혹등고래, 귀신고래가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잡혔지. 고래가 내항으로 들어와 장관을 이루면 우리도 고래 옆에서 같이 헤엄쳤어. 작은 돌고래는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아서 그렇게 같이 놀 수 있었고 수많은 갈매기가 그 위를 날아다녔지.헌 : 말만 들어도 환상적인 장면이군요. 그렇다면 연극은 어떻게 접하게 되었습니까?김 : 6·25전쟁이 수많은 사람의 운명을 바꿔놓았는데 나 또한 그렇지.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때 전쟁이 터졌는데 많은 사람이 남쪽으로 피난 가게 되고 유랑극단도 그 무리에 섞여 있었어. 포항도 인민군에게 함락되어 안전한 곳이라고는 울산과 부산밖에 없었지. 그런데 우리 집이 피난민들의 거처가 된 거야. 우리 집은 할아버지 때부터 장생포에서 하나뿐인 고래 삶는 집으로 유명했어. 솥에 고래고기를 삶아서 우리 식구와 피난민들이 함께 나눠 먹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 유랑극단 사람들도 다른 피난민들처럼 우리 집 마당과 고래 창고에서 잠을 자고 밥도 같이 먹었지. 먹고 자는 일이 해결되자 그들은 고마운 마음에 돈을 받지 않고 연극을 했어. 30대 초반의 삼촌이 연극 소품을 구해주었고. 그러다 삼촌이 연극에 단역으로 출연했고 주인공도 했지. 나도 어쩌다 극 중에 꼬마 역할이 있으면 참여하게 되었어.헌 : 전쟁 중에도 연극은 했고 그것이 선생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네요. 그 후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김 : 울산 장생포동 205번지가 우리 집이었는데 150m 떨어진 곳에 농막이 하나 있었어. 그 농막에서 삼촌이 발성 연습을 했지. 삼촌이 연극에 완전히 빠진 거야. 휴전이 되어 유랑극단이 떠나자 삼촌이 유랑극단을 조직해서 방어진 읍내를 돌아다니며 공연을 했지. 삼촌이 신파극단 주인공으로 활약하면서 나도 덩달아 연극에 대한 열망이 커졌어. 국민학교 시절, 독립군으로 열연하는 삼촌을 보고 감동을 받았지. 삼촌처럼 멋진 연기자가 돼 무대에 서보고 싶은 꿈을 품게 된 거야. 그런데 삼촌은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어 그 농막에서 일찍 돌아가셨지. 그 터는 지금 그대로 남아 있어.헌 : 전쟁이 끝난 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요?김 : 1954년에 장생포국민학교를 졸업하고 3년 후에 울산 대현중학교를 졸업했지. 그리고는 울산 농림고등학교 축산과에 입학했는데 가세가 기울어 중퇴하고 말았어. 아버지가 하던 사업이 실패했거든. 이 바람에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불만이 쌓여 반항의 나날을 보냈고, 부산 영도에 있던 할머니의 도움으로 부산으로 가게 되었지. 영도 대평동에 있는 대평약방에서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야간 고등학교에 가기로 했는데 현실은 그게 아니었어. 온종일 일만 해야 하는 탓에 야간 고등학교에 가는 건 엄두를 낼 수 없는 거야. 그러니 얼마나 실망하고 불안했겠어. 그때 4·19혁명이 터졌지. 대평약방 주인이 자유당 부위원장을 지냈거든. 학생들이 약방 앞에 몰려와 항의하고 난리가 났지. 나는 시위에 참여하지 못하고 약방이나 지키고 있는 처지를 비관하다가 다시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부모님께 편지를 썼지. 헌 : 포항에는 어떻게 정착하게 되었습니까?김 : 1959년 그 유명한 사라호 태풍이 지나간 이듬해 식구들이 포항으로 이사를 왔어. 포항은 정조부 때부터 8대에 걸쳐 200여 년 조상이 살았던 곳이야. 우리 가족이 정착한 곳은 항구동인데, 당시 항구동은 오징어, 노가리, 가자미 등을 말리는 천혜의 생선 건조장이었지. 식구들이 포항에 먼저 와 있었고 나는 부산에서 포항으로 가게 되었지. 부산에서 동해남부선을 타면 종착역이 포항역이었거든. 포항역에 내리니까 식구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어. 그렇게 포항에 와서 생선 말리는 일 등을 하며 생계를 도았지.헌 : 학업은 어떻게 이어갔습니까?김 : 고등학교를 다니다 말았으니까 어떻게든 다시 다녀야 했지.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울산으로 가라고 하시더군. 그래서 울산고등학교 3학년으로 편입하게 되었고, 1964년 경희대학교 사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했지.헌 : 그리고는 다시 포항에 오시게 되는데 그 과정이 궁금합니다.김 : 경희대학교에 입학한 후 KBS 포항방송국에서 전속 성우를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응시했는데 합격되었지. 그렇게 취업이 되고 나서 포항수산대학 경영학과에 재입학했어. 성우 생활과 대학 생활을 병행한 거지. 이때 평생 스승으로 모신 극작가 겸 연출가 신상률 선생과 인연이 되었고, 대학학보사 기자로 일하면서 편집 주간인 한흑구 선생을 만났어.헌 : 학창 시절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은 없습니까?김 : 6·3한일협정반대운동 때 시위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잡혔지. 밤샘 조사를 받고 풀려나 근신 처분을 받은 기억이 나는군.헌 : 당시 학생들의 문화 활동은 어땠습니까?김 :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그때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문화 활동을 열심히 했지. 대표적인 예로 KBS 포항방송국에서 포항학생방송서클이 진행하는 방송을 내보낸 거야. 포항수산대학에서는 김영호와 내가 주축이 되고, 포항고 양정봉, 동지상고 안석수, 포항여고 최순향과 이순예, 포항수고 김성태가 중심이 되었지. 그 외에도 봄가을에 이명석 선생이 운영하는 애린공민학교 강당에서 예술제를 개최했어. 시 낭송, 연극, 독창, 기악 연주 등 다양하게 했지. 소박하긴 해도 이런 활동 하나하나가 포항 문화예술의 씨를 뿌린 게 아닌가 싶어.헌 : 선생님은 연극계에 어떻게 입문하게 되었습니까?김 : 1964년에 대구에서 극단 ‘태백산맥’이 창단되면서 배우를 뽑았어. 그때 오디션을 보고 합격해 ‘태백산맥’의 창단 멤버가 되었고, 그해 10월 크라브첸코의 ‘나는 자유를 선택했다’의 주인공 역을 맡았지. 이때 평생의 연극 동료가 되는 탤런트 이원종과 연출가 이필동을 만났고.헌 : 포항에서 본격적으로 연극이 시작된 것은 언제인가요?김 :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1963년 12월 KBS 포항방송국이 라디오 드라마를 제작하기 위해 극작가와 성우를 모집하거든. 이듬해 신상률 선생이 극작가로 당선되고, 나를 포함해 전영치, 공설자, 강신홍, 김옥자가 성우로 뽑히지. 신상률 선생이 연출을 맡아 주 1회 30분 분량의 드라마를 제작했어. 한 회를 만들기 위해 성우들끼리 모여 1주일 내내 연습했지.헌 : 라디오 드라마와 연극이 어떻게 연결되는지요?김 : KBS 포항방송국 차철훈 국장이 극단을 만들어 지역을 계몽해야 한다고 했지. 그런 격려도 있었고 나를 비롯한 동료들도 연극에 대한 열정이 있었어. 그렇게 KBS 포항방송국 성우들이 주축이 돼 1964년 12월 극단 ‘은하’를 창단하게 된 거야. 세찬 겨울바람이 부는 영일만 밤하늘을 바라보며 ‘저 하늘의 은하수처럼 우리 극단도 영원하자’는 취지였어. 창단 선언문은 내가 썼지.여기 불모지에 꽃을 심으렵니다.그 꽃이 시들어지고 또 짓밟혀 쓰러져도그치지 않고 또다시 심으렵니다.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도 샘물을 찾아우리는 발버둥 쳐 푸른 화원을 이 고장에 이룩해 보렵니다.- 극단 ‘은하’ 창단 선언문헌 : 1964년에 많은 일이 일어나는군요?김 : 그해 내 인생에도 포항 연극계에도 의미 있는 일이 잇달아 있었지. 김삼일1942년 울산 출생으로 1963년 KBS 포항방송국 전속 성우 1기생이다. 1964년 대구에서 여러 연극인과 극단 ‘태백산맥’을 창단했고 ‘나는 자유를 선택했다’에 주인공 역으로 연극에 입문했다. 1965년 포항에서 극단 ‘은하’를 창단했으며 1983년부터 2012년까지 포항시립연극단 연출자를 지냈다. ‘햄릿’, ‘산불’, ‘원효대사’, ‘맹진사댁 경사’ 등 연극 160여 편에 출연하거나 연출을 맡았다. 2004년 조선일보 이해랑연극상, 2005년 MBC 제1회 홍해성 연극상, 2009년 대한민국 자랑스러운 연극상, 1985년 전국연극제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다. ‘김삼일 자유소극장’을 운영했으며, 대경대 석좌교수를 지냈다.대담·정리 : 김동헌(시인) /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8-31

“고향·풍경·자연… 영천을 담은 디자인 만들어요”

경북 영천에는 고향을 디자인하는 아가씨가 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한창이었던 지난 5월에는 첫 채용 공고도 냈다. 그 한 달 전에 진행한 플리마켓에서는 청년들과 지역민들과의 만남의 장을 만들기도 했다. 그것도 펜션 체험권과 경품을 퍼준다는 주제를 걸고서 말이다. 만복기획의 정유영(35) 대표는 자신이 좋아하는 디자인과 굿즈 제작으로 눈을 돌리고 영천에 정착한 청년이다.“처음에는 모션 그래픽 분야의 외주 중소기업에 근무했어요. 모션 그래픽이 뭐냐구요? 요즘 TV에 많이 쓰이죠. 자막에서부터 각종 기호의 움직임, 실제 인물과 그래픽의 합성 등이 대표적이에요. 보통 모션 그래픽이 많이 사용되는 분야는 선거방송이죠. 온갖 화려한 그래픽이 등장해 선거 득표 현황을 중계해요. 그런데 촉박한 시간 안에 정교한 움직임을 구현해야 하기 때문에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어요. 7년을 일하면서 말도 못하게 힘든 시절을 겪었어요.”일이 힘들어 프리랜서로 전향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전망도 밝아 보이지 않아 자신의 미래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한다.“처음 시골이라는 곳에 내려간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대가 심했어요. ‘이제 겨우 손발을 맞춰 놨더니 시골로 내려가냐’면서 심하게 타박하기도 했죠. 그런데 더 이상 서울에서 버틸 힘이 없었어요. 더 이상 제가 소속된 도시의 디자인 시장에서 이룰 것이 없을 것 같다는 불안함과 도시의 소모품으로 사는 것 같은 생활패턴에 염증을 느끼던 평범한 청년 디자이너였죠.” □지역 콘텐츠, 정착을 위한 사업 아이템으로“처음 서울에서 일할 때는 자존감이 완전히 바닥이었어요. 함께 일하는 PD와 손발도 안 맞고, 제 작업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계속해서 재작업을 요청했죠. 차라리 화라도 내면 좋겠는데, 화도 내지 않고 재작업을 시키니까 너무 힘들었어요. 사흘 밤을 새는 일도 허다했죠. 그렇게 서서히 제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데 무려 3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어요. 힘들게 이뤄온 경력인 만큼 그 분야에서 저의 영역을 구축해야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문제는 서른 살이 넘어서도 감당하기 힘든 생활이 계속되었다는 점이었어요.”그나마 경북 영천은 그녀의 고향이었다. 보통 고향이 주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푸근함과 안정감, 그리고 휴식이다. 여기에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는 곳이 고향이 아닐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또 반대로 무엇인가를 시작하려고 해도 ‘근거를 알 수 없는 자신감(근자감)이 힘을 주는 곳’이 바로 고향이다. 정유영 대표도 아마 그런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게 정유영 대표는 고향 영천과 자신의 장점인 디자인·굿즈를 접목시키기 시작했다. 그녀의 애초 꿈도 굿즈 제작이었기에, 재미도 있었다. 자신이 만든 디자인 제품을 사람들이 마음에 들어 하고 사용하는 것이 좋았다.그 결과가 만복기획의 첫 시작이었던 ‘영천문구점’이었다. 왠지 조금은 식상해 보이는 이름. 다만, 영천이라는 지역을 배경으로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해 굿즈와 문구를 만들고, 아이디어 상품을 개발하겠다는 의도는 좋았다. 특히, 지역 콘텐츠를 살린다는 점에서는 독특한 접근이었다.“영천의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하는 스토리와 우리나라 토종 동물 캐릭터를 이용한 ‘영천 프렌즈 캐릭터 상품’, 실생활에 쓰임새가 있는 패브릭 포스터, 추억이 담긴 엽서를 만드는 ‘고향풍경’이라는 브랜드도 생각했어요. 또 도시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담긴 멜로디 카드, 정겨운 경상도 사투리가 담긴 사투리 머그잔도요. 아마 제 고향이 영천이라 기획할 수 있었겠죠?” 그녀의 이러한 지역 친화적이고 독특한 기획이 통한 것일까. 1년 반 정도가 지나자 그녀의 사업은 번창하기 시작했다. 자체 디자인을 통한 굿즈 제작도 순조로웠지만, 지역 업체 여기저기서 디자인 의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SNS를 보고 서울에서도 연락이 왔으며, 서울에서 살고 있는 그녀의 친구가 시골에 오고 싶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는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성공적이라고 자평한다. 프리랜서를 할 때는 한 달에 많으면 400만원, 적으면 200만원 정도를 벌었다. 그런데 로컬에 내려와 2020년에는 월 평균 600만원 정도고 올해는 매출 1억원을 목표로 했다. 물론 코로나19의 장기화로 목표를 살짝 수정한 것은 ‘안비밀’이다.“사실 처음 고향에 왔을 때만 해도 자체적인 디자인 수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그저 시골의 스토리를 잘 반영해서 원하는 디자인과 굿즈를 만들면 좋다고 봤죠. 그런데 막상 부딪혀 보니 상상 이상이었죠. 농사짓는 분들조차 예쁜 농산물 박스를 만들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시골에서 디자인 수요가 많다는 것을 알았어요.”□또래와 함께 하는 두레반 활동그렇다면 그녀는 고향, 로컬에서의 삶에 만족하고 있을까. 아무래도 아직 젊은 아가씨의 문화적 만족도를 떨어트리고 있지는 않을까.“물론 없지는 않아요. 가족끼리도 말이 잘 안 통해서 ‘영천 사람들 원래 그렇다’는 우스개 소리를 할 만큼, 소통이 어려운 지역이라는 것은 알죠. 직접 사회인으로 겪어 보니 더 힘들었어요. 청년 창업가를 바라보시는 주변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이야기도 들어서, 1년 정도는 몸을 사리기도 했구요.(웃음) 그리고 지역 내에 청년들이 즐길 수 있는 문화행사나 커뮤니티가 없는 상황이었죠. 막상 지역에서 살아보니 청년에 대한 정책과 교육, 활동 등은 거의 없었구요. 결국 소수의 지역 청년들이 먼저 모여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작은 행사들을 만들며 2~3년을 버틴 셈이죠.”그녀의 말대로였다. 지역의 청년들은 ‘영천 청년네트워크 두레반’으로 모였다. 또래 친구들이 없는 것에 갈증을 느끼던 영천 친구들이 만나고 연대하기 위해서 시동을 건 셈이다. 정유영 대표는 두레반 친구들의 “영천에서 친구들이 떠나는 게 싫다. 우리끼리 의미 있는 재미를 만들어 가면서 여기서 오래 살아보자”는 말이 기억에 남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친구들은 현재 ‘문체부 지역문화우리 - 영천 노포 기록 프로젝트’와 ‘경북 청년 공동체 활성화 프로젝트’를 통해 영천에 사는 청년 친구들과 지역을 기록하고 공동체를 활성화하는 일을 함께 하고 있다. “이렇게 의미 있는 일에 힘을 보태고, 그것이 수익창출로 이어지기까지 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도시에 있을 때, 저와 같은 업종에 있는 선후배들과 함께 열정을 불태웠던 시간이 소중했었고, 지금은 제 에너지를 필요한 곳에 쓰고 있다는 것에 만족하죠. 아무래도 도시에서의 삶은 속도와 경쟁에 휩쓸려 제가 무엇을 하고 사는지 모르고 지나가던 시간이었는데, 지금은 어느 하나 잊어버리기 싫은 좋은 순간들을 살고 있어요.“바쁜 걸로만 따지면 서울에서나 지금이나 큰 차이는 없어요. 그래도 이곳 영천에서는 스트레스를 훨씬 덜 받아요. 미팅을 위해 움직일 때마다 차창 밖으로는 산과 나무를 볼 수 있고, 맑은 공기가 있어 기분이 좋아지죠. 더욱이 시골 생활에서는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을 다시 느끼고, 음미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어요. 제가 ‘인심’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고 있더라구요. 말할 때도 그렇고, 일기에도 그렇구요. 제가 시골에 와서 인심을 많이 느꼈기 때문인 것 같아요.”그래서 물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로컬과 청년의 교집합은 무엇일까. 그리고 청년들이 로컬에 오기를 꺼려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도시에서 누리던 문화나 기술을 빠르게 접하지 못한다는 두려움 때문인 것 같아요. 실제로 그런 환경이 맞죠. 그래도 너무 두려워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익숙한 이야기 속에서 지역의 것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있다면 로컬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지 않을까요? 비전이요? 로컬은 유니크해요. 누구나 다 하는 그런 일들이 아니라, 지역에서 지역만의 색깔을 가지고 재창조할 수 있는 것이 지역에서의 비전이 아닐까요? 물론 도시에 대한 향수는 많죠. 그래도 제가 살고 있는 곳이 어디에 있건, 정성을 들인다면 문제들은 본인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포기하지 말고 주변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좀 더 자세히 보시면, 생각보다 지역의 발달되어 있는 문화가 있더라구요.”/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1-08-31

영양군민의 염원 통곡의 길열다

영양군은 서울까지 약 270㎞, 경북도청사까지 90㎞로 이웃의 청송군과 비교해서 직선거리로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청송은 읍소재지에 바로 옆에 고속도로IC가 있어 실제 운행시간이 20∼30여분 정도 줄어든다.영양군은 수도권이나 주요 대도시를 가고자 할 때 고속도로 이용이 쉽지 않다.가장 인접한 고속도로는 영양읍내에서 30분 거리의 동청송영양IC를 통한 당진~영덕 고속도로이다. 이런 불편한 교통상황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2017∼2021년 국가재정운용계획 SOC(교통) 분야 보고서 발표에 따르면 전국의 30분 내 고속도로 접근 가능지역은 약 70%로 조사됐다. 그러나 영양군은 직접적으로 접근 가능한 고속도로가 없을뿐더러 전국의 고속도로망이 거미줄처럼 얽힌 와중에도 영양지역만이 소외돼 있다.그나마 상주∼영덕 고속도로 준공으로 동해안 방면이나 충청 방면은 이전보다 접근성이 높아졌지만 수도권 방면은 여전히 접근성이 낮다.이에 영양군에서는 주민들의 의견을 모아 국토교통부, 기획재정부 등의 중앙부처에 지속적으로 건의하고, 정치권을 통해서도 경제적 타당성 이외에 지방자치단체 생존권 보장과 국토 균형발전의 명목으로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 국도 31호선 선형개량사업의 예비타당성조사에 통과되는 성과를 얻었다.국도 31호선 선형개량사업은 입암~영양 간 16km 중 위험하고 굽은 도로 3개 구간 5.43km를 직선화하는 사업이다. 도로는 2차로다. 이제 영양군은 교통오지의 오명을 벗고 주민들의 불편사항이자 숙원인 교통 인프라 구축을 위한 출발선상에 서 있다. ◇ 교통오지에 갇혀 있는 영양군영양군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4차선 도로가 없으며 고속도로IC와 철도가 없는 지역(교통 3無)이다. 군민들은 교통오지에서 수십 년 동안 교통 불편을 감수해오며 살아왔다.영양군에서 가장 가까운 동청송영양IC까지는 영양읍에서 24.6km로 30분이 걸리고 가장 먼 수비면에서는 50km로 1시간이 걸리는 거리이다.이런 상황에 영양군민들은 고속도로 접근성을 높이고, 도로교통시설 간의 연계를 강화해줄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다.특히 영양군의 상당수 도로 구간이 산악도로 구간이기 때문에 낙석위험이 많다. 외부와의 유일한 통로인 국도 31호선은 태풍과 장마 등의 자연재해 발생 시 통행이 불가능하다.노인인구가 많은 도시지만 병원과의 접근성이 낮아 치료가능사망률이 전국 최하위를 차지하고 있어 생존권이 위협을 받고 있다.지역 명소인 국제밤하늘보호공원과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 영양 죽파리 자작나무 숲 등은 코로나19로 인한 언택트 관광 시대에 각광을 받고 있어도 접근성이 떨어져 관광객 유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영양군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도로망 확충이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다. ◇ 생존권 보장·지역균형발전 측면 강조돼야영양군은 전국에서도 교통 인프라가 최하위인 지자체로 국가균형발전 차원에서 국가의 특별 배려가 필요한 지역이다. 4차선, 고속도로, 철도가 없는 국내 유일한 도시이기도 하다. 영양군은 지금까지 31번 국도의 교통량이 많지 않기 때문에 교통영향평가분석에서 매번 통과되지 못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4차선 도로를 갖추지 못한 영양으로서는 외부인의 방문자 수가 적기 때문에 국가재정운용계획 SCO(교통) 분야 분석결과에서 목표치에 미치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그래서 영양군은 경제성보다 지역 균형발전과 생존권 차원의 보장이라는 측면을 지속적으로 호소한 결과 국도 31호선 선형개량사업이 예비타당성조사에서 통과될 수 있었다. ◇ ‘통곡의 길’ 열 영양군민통곡위원회 출범영양군민들도 국도 31호선 개량을 위해 한마음 한뜻으로 뭉쳤다.영양군의 80여 개 민간단체가 모여 영양군민 통곡위원회를 만들었다.통곡위는 국도 31호선이 군민들에게 위협이 되는 도로라는 표현으로 “통곡의 길”이라 명명했다. 도로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 자체 유튜브 동영상을 제작·배포했다.2019년 8월에는 영양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국도 31호선 개량을 촉구하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통곡위는 전 군민의 마음을 담은 호소문을 청와대와 국회, 정부 등 관계기관에 전달했다. 호소문을 통해 영양군민들이 전국에서 가장 열악한 교통환경에서 생활하고 있음을 강조했다.옷 한 벌 사고, 병원 한 번 가기 위해서 인근 지자체까지 1시간 이상 가야하는 열악한 도로여건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농산물 유통을 위해 반드시 이용해야 하는 낙석사고 위험 도로를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도 호소문에 명시했다.영양군민 모두의 간절함이 중앙부처에 전해져 군민들의 염원인 통곡의 길이 열리길 기대하고 있다. ◇ 국도 31호선 선형 개량사업 예타 통과영양군은 교통복지 소외에서 벗어나고자 군민 안전과 지역 균형발전이라는 명목으로 국도 31호선 개량사업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경북도에 2017년 제5차 국도·국지도 건설 5개년 계획 건의를 시작으로 2019년 국도·국지도 건설 5개년 국토교통부 계획에 반영되면서 국도 31호선 선형 개량사업은 영양군민들에게 희망을 주게 됐다.이후 2020년 1월 기획재정부 예비타당성 조사가 시작됐고, 2021년 8월 24일 드디어 국도 31호선 선형개량사업 예비타당성 조사(예타)를 통과했다. 이로써 국토교통부에서는 기본 및 실시설계를 시작으로 5년간 국도 31호선 영양구간인 입암~영양 사이의 3개 구간 5.43㎞(총공사비 920억원) 2차로 선형개량 공사를 위한 사업을 추진할 수 있게 됐다.이 사업은 영양군에서 시행되는 관급공사 단일사업 최대 규모로서 국비 100%가 투입되는 사업이어서 그 의미가 크며, 5년간의 사업시행으로 관내 일자리 창출과 지역경제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남북6축 고속도로 조기건설 추진국도 31호선 선형개량 사업의 예비타당성조사 통과는 ‘교통오지’라는 오명을 벗는 출발점이 됐다. 민선7기 핵심 공약사업이기도 하면서 군민들의 가장 큰 염원이 교통 인프라 확충이었다. 그 희망의 첫 단추가 국도31호선 선형개량사업이며, 이번 예비타당성 조사 통과를 계기로 4차선 확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영양군은 아직 큰 성과가 없는 남북6축 고속도로 조기건설에도 힘을 쏟을 계획이다.군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있어 가장 필요한 부분이 도로망 구축이기 때문이다.이번 예비타당성 조사 통과를 계기로 생활SOC 구축에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국도 31호선 4차선 확장과 남북6축 고속도로 조기건설이란 군민들의 꿈이 한껏 부풀고 있다.오도창 영양군수는 “제5차 국도·국지도 5개년 계획에 포함된 입암∼영양구간 선형개량사업이 완료되면 각종 물류비용 감소와 생태체험 관광객 증가 등으로 영양군이 재도약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 사업을 조기 준공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장유수기자 jang7775@kbmaeil.com

2021-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