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일만 ④<br/>시의원 당선과 죽도시장의 현대화
포항이 한때 울산과 더불어 고래잡이로 유명한 도시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제 많지 않다. 포경 금지령이 있기 전까지는 적지 않은 포경선이 동해를 오가며 밍크고래 등을 잡았다. 포획과 해체 과정을 거친 고래고기는 일본으로 수출되기도 했다. 전라북도 어청도를 거쳐 포항과 울산, 강원도까지 고래를 쫓아 거친 바다를 항해했던 뱃사람들은 이제 백발의 노인이 되었거나 세상을 떠났다. 70여 년 전에는 오징어 기름을 종이우산에 칠했다는 이야기도 요즘 세대에게는 생소하다. 모두가 20세기 중반의 이야기다. 이를 들려주는 최일만 선생의 목소리에 신명이 붙었다.
1990년대에 구획정리가 마무리되었고 화장실도 깨끗하게 정비되었어. 내가 1995년에 포항시의원이 되었는데, 그때는 칠성천 주변 환경이 좋지 못했어. 그래서 출마하기 전부터 시의원이 된다면 가장 먼저 칠성천을 복개하겠다고 결심했지.
칠성천 주변의 환경이 개선될 무렵에 아케이드를 만들기 시작했어. 죽도시장의 규모가 작지 않으니 한꺼번에 설치할 수 없어 순차적으로 세웠지. 현재는 구 죽도파출소에서 남빈동 과메기거리까지 90%가량 아케이드가 설치되었어. 10년 이상 걸린 사업이야.
홍 : 고래잡이는 어떤 방식으로 이뤄졌나요?
최 : 일제강점기 때 포항에 포경선 두 척이 있었지. 구룡포에서는 포경 금지령 직전까지 고래를 잡았어. 당시 영국에서 “1990년 이후엔 한국의 포경 금지령을 풀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아직 풀리지 않았지. 1970~1980년대 전국에 포경선이 스물한 척 정도 있었어. 매년 3~4월이 되면 포경업자들이 울산에 모여 회의를 했어. 언제쯤 고래가 처음 출몰하는 어청도에 갈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서였지. 고래는 다니는 길이 있어. 포항과 울산 근해에서는 5~6월에 밍크고래가 많이 잡혔지. 한여름에는 강원도 주문진 인근으로 포경선이 몰렸어. 고래잡이는 바다가 거칠어지는 겨울에는 하지 못하니까 10월이면 끝나. 고래를 잡을 수 있는 기간은 1년 중 7개월 정도야.
홍 : 포항의 포경업 이야기를 좀 더 해주시죠.
최 : 포경 금지령이 내리기 전 울산에는 포경선을 두세 척 가진 회사와 한 척만 가진 개인이 있었어. 배를 여러 척 가진 곳은 법인을 세워 운영했지만, 한 척을 가진 이들은 법인이 없어 우리에게 대신 고래고기를 팔아달라고 했지. 물량이 많을 때는 이런 요청을 거절했는데, 나중에는 이익금 중 30%를 효창수산이 가지기로 하고 위탁판매했어. 그러다가 포경 금지령이 내려졌지. 고래잡이 방식은 근해 포경과 원양 포경이 있는데, 일본은 원양 포경을 하는 회사가 일곱 개나 있었어. 한국에는 부산에 한 개가 있었는데 버티지 못하고 폐업했지. 선단을 구성할 만한 여러 척의 배가 없었고 재정 또한 어려웠던 탓이야. 그래서 한국의 고래잡이는 먼바다가 아니라 가까운 바다에서 이뤄졌어.
홍 : 포항을 떠나 있던 기간은 군대에 있었을 때인가요?
최 : 남들보다 조금 늦게 입대했어. 강원도 20사단에서 31개월 복무했지. 결혼은 1965년, 그러니까 스물아홉 살에 했고. 아이들 넷을 키우면서 일만 하느라 너무 바빴어. 자식들이 어릴 때 함께 놀아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고 후회스러워. 아이들의 입학식과 졸업식에도 가보지 못했거든. 그 시절에는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아버지가 식구의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눈코 뜰 새가 없었어. 직업 특성상 매일 새벽에 시장과 항구로 나가야 하니 다정한 아버지가 되기 힘들었지. 다만, 내가 어릴 때 서당에서 배운 사람살이의 기본을 자식들에게 자주 들려줬던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야.
홍 : 연세에 비해 건강이 좋아 보입니다.
최 : 아침 일찍 일어나는 생활습관 덕분인 것 같아. 지금도 아내와 매일 오전에 꽤 먼 거리를 걸어. 청년 시절부터 육체노동으로 단련된 것도 나이 먹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야. 수산물을 많이 먹는 일본 사람들은 장수하는 편이지. 내가 특히 좋아하는 요리는 오징어 내장과 시래기를 넣고 끓인 찌개야. 열일곱 살에 강원도에 일하러 갔다가 처음 맛본 음식인데,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로 맛깔스러웠어.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인데 오징어로 기름을 짜기도 해.
홍 : 오징어 기름은 어떤 용도로 쓰입니까?
최 : 과거에 울릉도와 구룡포에서 오징어 기름을 많이 짰어. 포항 영일대해수욕장 인근과 구룡포에 그 작업을 하는 공장이 있었지. 오징어 기름은 경상남도 의령과 함안의 죽세품 공장에 팔았어. 비닐우산이 생산되기 전에는 잘게 쪼갠 대나무에 종이를 붙여 우산을 만들었어. 종이가 비에 젖지 않으려면 기름칠을 해야 하는데, 그때 오징어 기름을 사용했지. 오징어 기름은 고급 페인트의 재료로도 썼는데, 모두 1950~1960년대 이야기야. 그때는 밤을 까서 일본으로 수출했고, 산초나무 이파리까지 따서 수출하던 시절이지.
홍 : 오징어는 울릉도에서 많이 잡혔지요?
최 : 그렇지. 오징어잡이 어선을 가졌을 때 몇 번 가봤고, 오래전에 여객선을 타고도 다녀왔어. 지금이야 쾌속선를 타고 세 시간 남짓이면 울릉도에 닿지만, 그때는 저녁 8시쯤 출발하면 다음 날 아침에야 도착했어. 1950년대엔 포항과 울릉도 사이를 목선이 오갔고, 한참 후에야 400t쯤 되는 청룡호가 취항했지.
『한국세시풍속사전』에 의하면 오징어는 함경북도 연안과 울릉도, 독도 부근에서 봄부터 가을까지 많이 잡힌다. 오징어류는 염분이 높은 곳을 좋아한다. 이와 함께 부유생물을 주식으로 하기 때문에 밤에 표층으로 많이 올라온다. 오징어는 수직 운동이 심해 낮에는 100~200m 깊이에 있다가 밤이 되면 얕은 수면으로 올라와 소형 어류를 잡아먹는다. 이때 행동이 공격적이면서 불빛에 잘 모이는데 이 습성을 이용해 채서 낚는 채낚기가 대표적인 어법이다. 채낚기는 플라스틱, 나무, 납으로 미끼 모양을 만들어 낚시 채에 붙인다. 색채를 넣거나 형광물질을 발라 자연산 미끼처럼 보이도록 하고 집어등(集魚燈)으로 어획 효과를 높이는 게 특징이다.
홍 : 죽도시장에서 번영회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언제입니까?
최 : 1990년 초부터 사단법인 죽도시장번영회 대의원과 이사를 맡았어. 회장이 된 건 1993년이야. 이후 2016년까지 회장직을 이어갔지. 마지막 7~8년 동안은 회장 자리를 넘겨주고 싶었는데 쉽지 않았어. 결국 ‘회장은 3년제로 연임할 수 있다’고 규정을 바꾼 후 그만뒀지.
홍 : 죽도시장번영회 회장은 선거로 뽑나요, 추대인가요?
최 : 경선도 했고 추대 방식으로 뽑기도 했어. 경선을 하다 보니 상인들 사이에 우애가 나빠져 추대 형식으로 바꿨지.
홍 : 1990년대 이후 죽도시장은 어떻게 변했습니까?
최 : 아주 오래전에는 시골 장터와 다를 게 없었어. 포항제철이 들어오면서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어. 열악했던 시장 환경도 점차 좋아졌지. 1990년대에 구획정리가 마무리되었고 화장실도 깨끗하게 정비되었어. 내가 1995년에 포항시의원이 되었는데, 그때는 칠성천 주변 환경이 좋지 못했어. 그래서 출마하기 전부터 시의원이 된다면 가장 먼저 칠성천을 복개하겠다고 결심했지. 7년간 시의원으로 일했는데 그중 칠성천 복개 과정이 뚜렷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 쉽지 않은 사업이었지만 보람이 컸던 일이야.
홍 : 그즈음 아케이드도 설치되었지요?
최 : 칠성천 주변의 환경이 개선될 무렵에 아케이드를 만들기 시작했어. 죽도시장의 규모가 작지 않으니 한꺼번에 설치할 수 없어 순차적으로 세웠지. 현재는 구 죽도파출소에서 남빈동 과메기거리까지 90%가량 아케이드가 설치되었어. 10년 이상 걸린 사업이야.
홍 : 칠성천 복개와 아케이드 설치를 할 때 문제는 없었습니까?
최 : 대부분의 죽도시장 상인들이 원했던 일이었어. 시장은 조그만 사업도 상인들 동의 없이는 진행하기가 어려워. 아케이드를 설치해야 하는데 도로에 기둥을 세웠던 상인들이 그걸 빼지 않겠다고 해서 마찰이 있기도 했어. 불법 건축물이었지만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점유권을 인정하지 않기가 어려웠던 탓이지. 하지만 칠성천 복개와 아케이드 설치처럼 공공의 이익과 관련된 문제라면 누가 나서서 추진해야 하지 않겠나?
대담·정리 : 홍성식(본지 전문기자)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김진호(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