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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여기에, 신라인들의 간절한 佛國 염원 담겨

등록일 2022-07-10 20:02 게재일 2022-07-11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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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함산에 깃든 신라 역사와 경주 이야기<br/>⑤ 불국의 나라를 꿈꾸다 ⑴
불국사

□임란 때 불태워지는 등 숱한 환란 겪어

앞에서 토함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펼쳐놓은 것은 결국 불국사와 석불사(석굴암)를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불국사를 다시 소환해 이야기를 풀어놓는다는 것은 사실 대단히 난감한 일이다. 경주라는 땅에 한 번도 발을 딛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경주에 와서 불국사를 가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불국사는 1980년대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기 전까지는 제주도와 더불어 신혼부부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었고, 중고등학생에게는 수학여행지로 유명했다.

그런데 정작 불국사에 대해 제대로 아는 이들은 드물다. ‘1000년 전 신라인들은 왜 불국사를 건립했던 것일까, 불국의 나라가 일반 백성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를 생각해본 이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해외에서 온 여행자들에게 인기 있는 불국사가 한국 사람들에게는 과소평가되는 것은 아닐까. 너무 유명한 관광지라는 인식으로 역차별받는 것은 아닐까.

불국사는 창건 이후, 숱한 세월 동안 우여곡절을 겪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의 방화로 불타 사라졌다가 조선 영조 41년(1795)에 대웅전이 다시 세워졌다.

 

삼국유사, 751년 김대성이 창건 불국사는 현세의 부모·석불사는 전세 부모 위해

이후 숱한 세월 우여 곡절 임란 당시 소실 됐다가 조선 영조 때 대웅전 다시 세워

일제 강점기엔 다보탑 속 사리 사라지고 해방 당시 석가탑 형체 알아보기 어려워

1969년 복원위원회 구성 1973년까지 5년간 인력 10만2천여명 투입 대대적 복원

조형·건축문화 최고 전성기… 신라인들 ‘아미타불’ 염불 외우며 세운 신심 결정체

불국사 대웅전 내부.
불국사 대웅전 내부.

일제강점기에 불국사는 사찰 곳곳이 무너져 내리고 전각이 골조만 남아 있었다. 1924년 대웅전을 수리하고 다보탑을 해체 보수했다. 이때 다보탑 속에 있던 사리가 사라졌다. 개보수 작업도 졸속으로 이뤄져 1945년 해방 당시 석가탑은 거의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1969년 정부에서 불국사 복원위원회를 구성하고, 1970년 2월 공사에 착수해 1973년 6월 복원을 마쳤다. 주춧돌과 빈터만 남아 있던 무설전·관음전·비로전·회랑 등을 복원했고, 대웅전·극락전·범영루·자하문 등을 새롭게 단장했다. 이때도 과학적인 고증이 이뤄지지 않은 채 졸속으로 복원이 이루어져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1973년 불국사 복원공사를 할 당시 10만2천여 명이 투입돼 무려 5년 동안 공사를 진행했다. 석공만 3만3천900여 명이었다고 한다. 공사에 들어간 자재도 엄청났다. 고령기와 30만 장, 목재 63만 재(才), 석재 42만5천t이 소요됐다.

불국사 석탑
불국사 석탑

엄청난 인력과 물량이 투입되다 보니 당시 돈으로 무려 4억 원의 복원 경비가 들었다. 당시 서울 반포아파트 한 채 가격이 500만 원 정도였으니 무려 아파트 80채 정도를 지을 수 있는 엄청난 돈이 복원공사에 들어간 셈이다.

불국사 공사는 창건 당시에는 엄청난 인력과 물량이 투여된 국가적 사업이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김대성이 751년(경덕왕10) 불국사 건설 시작해 774년에 완성하지 못하고 죽자, 국가에서 완성했다”고 기록돼 있다.

석가탑 훼손 현황. 1966년.
석가탑 훼손 현황. 1966년.

□751년 경덕왕 때 김대성이 창건한 것이 정사

불국사의 창건을 언급하고 있는 사료로는 삼국유사와 불국사사적(佛國寺事蹟),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 등이 있다.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751년 김대성이 불국사를 창건했다는, 불국사사적과 고금창기에는 528년(법흥왕15) 불국사가 창건돼 경덕왕 때 김대성에 의해 중창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불국사의 창건연대가 무려 223년이나 차이가 난다.

불교사를 전공한 사람들은 ‘삼국유사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에 가깝고, 불국사 사적과 불국사고금창기는 사료적 가치가 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유홍준 교수는 불국사사적과 고금창기가 “사찰의 연기와 옛날부터 전해오는 얘기, 그리고 화엄에 관계되는 것이면 불국사의 역사에 맞건 안 맞건 억지로 끌어 붙였다는 혐의를 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삼국유사 연기설화에 나오는 불국사 창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 모량리(牟梁里, 현재 경주 효현리 일대)에 경조(慶祖)라는 여인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아들이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이마가 아주 넓으며 정수리가 평평해서 마치 성(城)과 같았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큰 성이라는 뜻의 대성(大城)이라 지었다. 대성의 집안은 너무 가난해서 양육하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대성의 어머니 경조는 복안이라 불리는 부잣집에서 품팔이를 해 얻은 밭 몇 마지기로 간신히 생활을 이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점개(漸開)라는 스님이 흥륜사(興輪寺)에 육륜회(六輪會, 오늘날의 법회)를 베풀고자 복안에게 시주하기를 권했다. 신앙심이 깊었던 복안은 흔쾌히 면포(綿布, 베) 50필을 시주했다.

이에 점개 스님은 “당신이 보시를 잘하니 천신(天神)이 항상 보호해주실 것이오. 하나를 시주하면 만 배를 얻어 안락하고 장수할 것입니다.”라고 축원했다.

대성이 이 말을 듣고 집으로 뛰어 들어와 어머니에게 우리가 경작하는 밭을 법회에 시주해 후세의 복을 얻자고 설득했다.

어머니는 대성의 말을 기특하게 여기며 아들의 말을 따라 밭을 점개스님에게 시주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대성이 세상을 떠났다.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불국사.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불국사.

그날 밤 재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모량리에 살던 대성이라는 자가 지금 너의 집에 환생하리라.”

이후 김문량의 부인이 임신해 아들을 낳았는데, 아이가 왼손을 꽉 쥐고 펴지 않다가 7일 만에 손을 폈는데 손안에 ‘대성(大城)’이라 쓰인 금빛 두 글자가 있었다. 이 일을 하늘의 뜻이라 여긴 김문량은 환생한 아이의 이름을 대성이라 지었다. 또한 모량리에서 김대성 어머니 경조를 김문량의 집으로 데려와 부양했다.

대성은 장성한 후 장수사(長壽寺)를 세웠다. 장수사를 짓고 난 이후 불심이 더 깊어진 김대성은 자비심과 원력이 더욱 깊어졌다.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창건하고, 전세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石佛寺, 국보 24호 석굴암)를 창건했다고 한다. 물론 불국사와 석굴암이라는 두 불사를 개인이 일으켰다는 것에 의문을 품는 학자도 있다.

불국사 창건설화에서 알 수 있는 점은 당시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김대성이 공사를 총괄했고 불국사 창건에 신라가 총력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석가탑 기단 속에서 발견한 불상.
석가탑 기단 속에서 발견한 불상.

□부처님 나라 꿈꾼 신라인의 염원 녹아 있어

그렇다면 신라는 왜 그토록 엄청난 공사를 시작한 것일까? 불국사가 세워질 무렵 신라의 조형 및 건축문화는 최고전성기였다. 경덕왕은 통일신라 문화의 꽃을 피운 걸출한 위인이었다.

지금까지도 걸작으로 평가받는 성덕대왕 신종, 독특한 석탑 양식과 탁월한 조형미가 돋보이는 화엄사 4사자 삼층 석탑, 유려한 석재 가공 기술과 온화한 불상의 분위기가 잘 살아나는 감산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등이 대표적이다. 자연과 인공이 만들어낸 조형예술의 극치로 불리는 안압지도 이 당시 기술로 만들어졌다.

신라인들의 예술 감각은 멀리 당나라에서도 인정받았다. 경덕왕은 당 대종이 불교를 숭상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만 분의 부처님을 모신 3m 높이의 가산(假山)’을 만들어 보냈다고 한다. 당 대종은 이 선물을 받고 ‘신라의 교묘한 기술은 하늘이 만든 것이지 사람의 기술이 아니다’라고 극찬을 했을 정도로 신라 예술의 수준이 극에 달해 있었던 시점이었다.

이런 이야기들이 불국사 창건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불국사 창건이라는 국가적 대사를 무리 없이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신라인들의 염원이 모아진 결과였다. 우리는 흔히 국사를 진행하면 필연적으로 민초들의 희생이 따른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중국의 만리장성이 건립되었을 때 수많은 중국인들이 고된 노역에 희생됐다. 그러나 불국사를 건립했을 때 신라인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기록에 따르면 신라인들은 불국사를 지을 때 ‘아미타불’이라고 염불을 외웠다고 한다.

불국사는 강제 동원된 노동력이 아니라 신라인들의 순수한 신심과 염원이 모여 세워진 건축물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신라인들은 불국사를 지으며 기쁘게 자신을 희생했을까?

불국이라는 이름 자체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신라인들은 불국사를 세우며 부처님의 나라를 꿈꾸었다. 먼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 다른 나라가 아닌 바로 여기 신라가 부처의 나라가 되길 염원한 것이다. 부처님의 나라는 아무도 차별받지 않고 서로 연대하며 살아가는 이상적인 국가였다. 대립과 전쟁이 없는 나라이자 누구도 굶지 않는 평화의 나라를 꿈꾸었던 것이다. /최병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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