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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영덕 영해면, 대한민국 변방에서 ‘도시재생’ 중심으로

도시. 우리는 그것을 대부분 딱딱한 건물과 도로로 구성된 사물의 집합체로 인식해 왔다. 하지만 최근 도시를 살아있는 유기체, 즉 생명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늘고 있다. 태어나서 성장하고, 전성기를 맞은 후 쇠퇴하는 우리 사람처럼. 문제는 지방의 도시들 대다수가 생명력이 다해 이제는 소멸의 위기에까지 몰린 것이다. 각 지방자치단체들은 살아남기 위해 저마다의 생존전략을 발휘해 경쟁하고 있지만 결국 엄혹한 진화의 과정에서 소수의 생명만이 ‘도시’라는 유전자를 남길 수 있을 것이다.그런 가운데 최근 영덕군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다. 영덕군은 수많은 공모를 통해 국비를 끌어 모은 후 여러 사업들을 연계해 관할구역인 영해면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대단위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작은 지방자치단체에겐 대담한 도전이 될 이번 프로젝트의 성패는 지방소멸의 위기 속에서 생존의 갈림길에 놓인 다른 수많은 지방자치단체들에겐 하나의 지표가 될 것이다. 과연 영덕군 영해면은 대한민국 도시재생의 모델하우스가 될 수 있을까? ◇ 왜 도시 ‘재생’ 인가때는 바야흐로 2002년. IMF 외환위기 이후 얼어붙은 경기의 부양정책으로 ‘뉴타운·재개발’ 사업이 붐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허름한 건물을 밀어버리고 휘황찬란한 고층건물을 세우면 모두가 도시인의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꿈꿨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뉴타운·재개발 사업은 대실패로 막을 내렸다.영덕군이 성장 중심의 재개발·재건축이 아닌 지속가능성 중심의 도시재생을 선포한 이유는 이러한 역사적인 교훈의 발로이며 그 핵심가치엔 공공성이 있었다. 주민들이 소외되는 그 어떤 개발사업도 명분이나 효능이 없다는 것이다. 영덕군의 이러한 기조는 되새길만하다. 새로운 인구유입을 기대하기 어려운 지방도시에서 주민들을 배재한 개발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결국, 영덕군이 영해면에 그리는 ‘도시재생’은 시대적 요구이며, 전성기가 지난 도시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공간의 기능을 회복시킴으로써 주민들의 생활여건을 실질적으로 개선시킬 사회, 경제, 문화, 주거, 환경에 대한 종합적인 비전과 실천인 셈이다.◇ 뉴딜을 넘어 도시재생+SOC확충의 콜라보레이션영해면에 시행될 도시재생사업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영덕군은 2018년부터 2025년까지 8년간 영해면 일대에 1천700여억원의 예산을 투여한다. 모두 국비를 확보한 사업들이다. 영덕군의 도시재생사업이 여타 시군의 뉴딜사업과 차별화되는 것은 비단 그 규모의 우월성만은 아니다. 각각의 사업들이 독립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개별 도시재생사업들 간의 연계, 그리고 도시재생사업과 사회간접자본(SOC) 구축사업 간의 연계가 유기적으로 융합해 서로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게 설계됐기 때문이다.그 예로, 최근 국비를 확보한 ‘도시재생 뉴딜사업’은 대상지인 영해면 성내리 일원의 주거환경정비와 골목상권 활성화를 위해 143억원이 투입되는데, 이 일대와 교집합을 이루어 ‘근대역사문화공간 조성사업(450억원)’, ‘농촌중심지 활성화사업(150억원)’과 같은 기존에 국비를 확보한 도시재생사업들이 긴밀히 연계돼 있고, 여기서 다시 ‘예주 행복드림센터 조성(147억원)’, ‘3.18만세시장 보행환경 조성(16억원)’과 같은 SOC 구축사업이 융·복합되면서 각각의 사업들이 마치 거미줄처럼 서로를 보완·견인하고 있다.영덕군의 이러한 복안은 도시를 수많은 세포가 모이고 각각의 기관이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생명체로 바라보는 철학에서 기인한다. SOC 구축으로 뼈를 형성하고, 그 위에 도시재생사업으로 근육을 단련하며, 그 속에 주민들의 사회적·경제적 활동에 생기를 북돋아 장기를 강화한다. 영해라는 생명활동의 중심에 ‘지역공동체’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실제 영덕군은 여러 도시재생사업의 계획착수 단계부터 주민역량강화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주민협의체와 주민위원회의 발족을 이끌어 민관이 긴밀히 협조해 사업을 추진함으로써 주민들을 사업의 주체로 세워내는 노력들을 아끼지 않았다. ◇ 영해 도시재생사업의 핵심은 ‘도시 정체성’ 복원!그렇다면 과연 영해라는 생명체의 정신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영덕군이 영해면에 시행하는 과감하고 도전적인 일련의 도시재생사업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주’로 기억되는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확립하는 일, 바로 영해의 정체성을 공표하고 이를 도시경쟁력으로 확보하는 것이다.지방소멸이 가속화되고 지자체간의 경쟁이 심화된 오늘날엔 도시의 이미지를 결정하는 역사·문화적 정체성이 그 도시의 경쟁력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낡은 건물을 밀어버리고 새 건물을 번듯하게 올리는 것이 전부인 재개발사업은 시간이 지날수록 주위에 새로 조성되는 신도시에 의해 상대적으로 가치가 낮아질 수밖에 없지만 고유한 역사와 문화가 깃든 지역은 절대적인 가치를 유지할 수 있다. 우리보다 먼저 태어나 쇠퇴기를 겪는 서구의 도시들이 역사와 문화를 도시재생의 핵심전략으로 삼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영해는 2,000년 전 삼한시대의 신비로운 우시국을 시작으로 남쪽의 경주, 북쪽의 강릉과 버금가는 동해안의 거점도시였고, 고려 해안방어의 요충지로 읍성이 건축됐으며, 일제에 대한 민중의 저항정신을 상징하는 신돌석 의병장의 항일운동과 동해안 최대 만세운동이 펼쳐진 충절의 도시이다. 영덕군의 여러 도시재생사업이 영해 주민들의 생활근거지이자 역사·문화의 상징인 만세시장을 중심으로 폭넓게 융합된다는 것은 도시의 정체성을 복원하고 계승하는 것이 영덕군 도시재생사업의 본질임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이를 활용한 지역경제 활성화와 지역공동체 통합이 바로 영해의 경쟁력이 될 것이다.지금까지 살펴본 영덕군의 도시재생사업은 ‘영해가 확 바뀐다’, ‘동해안 중심도시로 도약’ 등과 같은 과장되고 상투적인 언어로는 표현될 수 없다. 모든 도시가 그렇듯 쇠퇴기를 겪는 ‘영해’가 건강한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남다른 케어 프로그램을 가동했다고 볼 수 있다. 영덕군의 도전적인 도시재생사업에 관찰이 아닌 관조의 시선이 보내지는 것은 변화될 ‘영해’가 보여줄 드라마이며 그것이 끼칠 영향력일 것이다. 하나의 생명체로서./박윤식기자 newsyd@kbmaeil.com

2021-11-01

역사의 파도 넘어 포항에 정착, 수필 명작 남겨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한흑구는 해방공간의 소용돌이에서 남한으로 향한다. 미군정에서 권세를 누릴 수 있는 자리를 잡지만 이를 내팽개치고 포항에 정착한다. 평양에서 미국을 거쳐 다시 평양에서 서울로 향한 ‘검은 갈매기’의 여정은 포항 바닷가에서 마무리된다.임종석(임) : 한흑구는 귀국 후 평양에서 활동하게 되는군요.박이득(박) : 광복 무렵 고당(古堂) 조만식(1883∼1950)을 만나 활동해. 하지만 공산당이 한흑구처럼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은 평양 외곽으로 격리하지. 한흑구와 조만식을 따르던 젊은이들이 조만식에게 남한으로 가자고 권하지만 조만식은 북쪽에 남겠다고 해. 그리고는 트럭 한 대를 구해 젊은이들에게 남한으로 가라고 하지. 한흑구는 그 트럭을 타고 남한으로 왔는데, 그때 조만식과 함께 오지 못한 게 두고두고 후회된다고 여러 번 말했어.한흑구의 부친인 한승곤과 흥사단을 이끈 안창호, ‘조선의 간디’라 불린 조만식은 한흑구를 이해하는 열쇠 말이다. 그리스도교에 바탕한 안창호와 조만식의 사상과 행동에는 상당한 연관성이 있다. 안창호가 별세하자 조만식이 일제의 방해를 뚫고 장례위원장이 되어 장례를 집행한 것도 짚어볼 대목이다. 조만식이 월남을 거부한 상황은 아래 글이 상세하게 설명한다.그해(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한국의 신탁통치를 가결하자 여기에 반대하는 민주주의 진영과 찬성하는 공산주의 진영이 나뉘게 되었고, 이것이 조선민주당(당수 조만식)의 결말을 가져왔다. 소련군 사령관 스티코프와 김일성은 수차에 걸쳐 조만식에게 신탁통치를 지지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그(조만식)는 끝까지 거부하였고 이로써 1946년 1월 5일 소집된 소위 평남인민정치위원회는 위원장인 조만식을 축출하고 그를 ‘반민족주의자’로 날조 매도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참여했던 이윤영 등 민족진영은 월남하여 서울에서 조선민주당을 재건함으로써 평양에서의 민족진영 운동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1월 5일 회담 이후 평양 고려호텔에 감금된 조만식은 그를 구출하려는 청년들이나 그를 방문한 미군정청의 브라운에게 “나는 북한 일천만 동포와 운명을 같이하겠소”라며 월남을 거부한 채 외로운 투쟁을 계속하였다. - 고당 조만식 선생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임 : 남한으로 온 후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박 : 미군정이 들어서고 서울시장의 통역 담당 보좌역으로 발탁돼. 당시에 그만한 능력을 갖춘 사람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어. 그런데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그 자리가 편안할 리 있었겠나. 온갖 청탁과 유혹, 압박이 있었겠지. 한흑구 성품에 그걸 어떻게 견뎌내겠어. 결국 서울시장에게 부탁해 미군정 도서관으로 옮기게 돼. 이때 영미시를 번역해 발표하고 나중에 이 원고를 묶어 출간했지. 미군정 때 서울에서 문학 하는 사람치고 월급 받는 사람은 한흑구가 거의 유일했어. 한흑구가 월급 받는 날이면 문인들이 모여 거하게 한잔했다고 해. 한흑구는 월급의 반쯤은 배고픈 문인들에게 나눠주었어. 이승만이 한흑구에게 공보처장을 권했는데 다른 사람을 소개해주고 자신은 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임 : 포항과는 연고가 없을 텐데 어떤 이유로 오게 되었습니까?박 : 문인들과 고적지를 순례하려고 경주에 왔다가 포항이 좋은 곳이라는 문인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일행과 떨어져 포항에 잠시 온 게 계기가 되었지. 한흑구가 폐결핵을 앓고 있었는데 당시엔 난치병이었어. 의사가 바닷가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요양하는 것이 좋다고 했는데 영일만을 보고는 바로 여기다 싶었던 거야. 그래서 서울로 간 후 곧바로 식구를 데리고 포항으로 왔지. 그때가 1948년이었어.한흑구가 포항의 바다를 어떻게 대했는지는 그의 첫 수필집인 ‘동해산문’(일지사, 1971) 서문에서 느낄 수 있다.항상 푸르고, 맑고, 볼륨이 넓고, 거센 바닷가에서 한가히 살고자 동해변으로 온 지가 꼭 20년이 되었다.거의 하루같이 바닷가를 걸어 보았다.인생 자체를 항해에 비하지만, 나는 바닷가에 혼자 서서, 나의 존재의 미미함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임 : 포항에서는 어떻게 살아가셨습니까?박 : 처음에는 미군 통역관으로 일하다가 1958년에 포항수산초급대(현 포항대)에서 교수로 모셔갔고, 여기서 정년을 맞아. 그후에 효성여대에서도 강의했지.임 : 지역 문화예술계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박 : 포항에 정착한 뒤 ‘서울 문단’과는 별다른 교류가 없었지만 ‘서울 문단’과 이어진 유일한 통로였지. 지역 문화예술에 대한 애정이 지극했어. 시인 박경용, 아동문학가 손춘익, 김일광과 함께 ‘흐름회’를 만들어 문화예술계를 이끌었지. 한흑구 덕분에 지역 문화예술의 수준이 높아졌고, 한흑구 없이는 포항의 문화예술을 이야기하기 힘들어.문단에서 한흑구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는 ‘동해산문’에 실린 서정주의 발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그는 1930년대에 6여 년의 공부를 마치고 미국에서 돌아온 뒤 몇 해 동안 우리 시단에 그 글을 보이더니, 이래 1945년의 해방 때까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우리들의 눈에 띄지 않게 지내 왔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다시 붓과 소주를 벗해 서울에 나타나서 1950년의 6·25 사변 가까울 무렵까지 우리를 기쁘게 하더니, 또 이내 어디론지 사라져 자취를 감추었다. 뒤에 들으니 신라 고도 경주에서 산 하나 넘어 포항의 바닷가에서 누가 그를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20여 년, 그는 그의 글도 세상에 내놓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의 벙글거리는 항시 동안(童984F)의 얼굴도 우리 앞에 나타내지 않았다. 그런 그가 오랜 동안의 침묵을 깨고 동해 바닷가의 이십 수년의 정신의 체험을 문장화하여 이 정선(精選)한 수필집을 우리에게 다시 보이게 되었다. 한흑구의 문학적 위상은 다음의 글에서 가늠할 수 있다.그의 작품 활동은 그 시대의 신문이나 잡지에 나타난 것으로 미루어 매우 활발했으며, 그것도 문학 전반에 걸쳐진 것으로 보이나, 특히 1930년대에서 비롯되는 미국시 및 그 밖의 역시(譯詩) 활동은 8·15해방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다. 휘트먼과 흑인시의 번역 소개는 물론, 미국 문학 및 작가론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걸쳐져 있음은 당시의 다른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도미(渡美) 유학까지 했었던 경력으로 미루어 그의 전신자적(轉信者的) 역할은 보다 정확한 지식과 이해를 바탕으로 했었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김학동, ‘한국 근대시의 비교문학적 연구’, 일조각, 1981, 206∼207쪽.임 : 환갑이 지나서야 ‘동해산문’, ‘인생산문’ 두 권의 수필집을 냈습니다.박 : 출간 과정에서 손춘익이 역할을 많이 했지. 한흑구는 책을 내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어. 서상은, 손춘익, 김삼일, 김일광이 한흑구를 잘 모셨지.임 : 부인 방정분 여사도 지역에서 교편을 잡고 많은 제자를 길러내셨지요.박 : 한흑구는 누님 두 분과 여동생이 있었어. 이화여전 성악과를 다니던 여동생이 동기동창을 한흑구에게 소개했지. 그분이 방정분(1913∼1989) 여사야. 황해도의 이름난 부잣집 딸이었고 홍난파와 같이 공연도 했어. 포항의 공립학교에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지. 포항제일교회 합창단을 만들기도 했고.임 : 가까이서 느낀 한흑구는 어떤 분이었습니까?박 : 점잖은 신사였지. 얼마나 이야깃거리가 많겠어. 그런데 자신의 이야기는 잘 안 했어. 그것이 아픈 일이든 좋은 일이든. 자기 자랑은 손톱만큼도 하지 않았지. 포항에 한흑구가 왔다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야.일제강점기에 많은 문인이 친일 대열에 합류하지만 한흑구는 이를 거부한다. 그리하여 임종국은 ‘친일문학론’에서 “단 한 편의 친일 문장도 쓰지 않은 영광된 작가”라는 헌사를 바쳤다. 미국 시절부터 상당한 양의 시와 수필, 소설, 평론, 번역시를 발표했지만 그의 이름으로 발간된 책은 두 권의 수필집과 한 권의 편역서(‘현대미국시선’(1949))뿐이다. 2009년 탄생 100주년을 맞아 ‘한흑구 문학선집’이 나왔고, 2012년에 두 번째 문학선집이 출간되었다. 스스로 드러내지 않았으니 그를 아는 사람은 많을 수 없지만, 그를 접하게 되는 순간 그 품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를 실감하게 된다. 한흑구의 삶과 문학을 총체적으로 정리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은 “항상 푸르고, 맑고, 볼륨이 넓고, 거센 바닷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몫으로 남아 있다.박이득1941년 포항에서 태어나 서울 인창고를 졸업하고 건국대 국문학과와 계명대 무역대학원을 수료했다. 포항 동지고 국어 교사, 포항 MBC PD·기자, 영남일보 기자를 거쳤으며, 한국예총 포항지회장, 경북문인협회 부회장, 한흑구 선생 문학비 건립추진위원장, 포항독립운동사 발간 추진위원장을 역임했다. 수필가로 월간문학, 포항문학 등에 작품을 발표했고, 제1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 최세윤 의병장 기념사업회 이사장, 포항문화원 부설 포항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을 맡고 있다.대담 : 임종석(경북매일신문 부사장) / 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

2021-11-01

경북도립대가 공유대학으로 지역 전문대학 교육을 견인해야

경북도립대학교는 경북도가 설립하고 재정을 투입해 운영하는 대구경북지역의 유일한 공립대. 취업률 1위에다 등록금이 아예 없는 작지만 강한 경도대가 개교 25년을 맞았다.김상동 총장은 경도대가 고등교육 거점 공유대학으로 지역 전문대학을 선도해야 한다는 야심 찬 기획을 준비하고 있다. 대학마다 독립적으로 모든 자원을 갖추는 것보다 대학들이 협력해서 자원을 공동 활용하는 대학 간 협업과 공유대학을 만들어야 하며 공립인 경북도립대가 선도하겠다는 구상이다. 경북도의 정책과 재정적 뒷받침으로 전문대학 교육 시스템을 경북도립대가 견인하겠다는 것이다. - 정원의 82%를 뽑는 1차 수시모집 기간이 끝났다. 올해 수시모집의 성과는 어땠나.△지난해보다 경쟁력은 조금 낮아졌지만 지원자들의 경도대 선호도가 뚜렷하더라. 외형적인 지원율에 일희일비 않는다. 문제는 합격자를 얼마나 지켜내느냐다. 이를 위해 학과장은 물론 총장도 서한을 보내는 등 경도대에 매력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경북도립대의 장점이 무엇인가. 무엇으로 학생들을 유인하고 있나.△우선 2022학년도에 입학하는 모든 신입생은 실질적으로 등록금이 없다. 입학생 모두에게 등록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지급한다. 또 졸업생들의 2020년도 취업률이 72.8%로 전국 7개 도립대학 중 1위다. 그냥 취업률이 아니다. 교육부가 확인하는 유지취업률 조사에서 우리 대학이 모두 1위를 기록했다.- 어떤 학생들이 경도대를 지원하고 있나.△우리 학교는 작지만 강한 명품대학이다. 경상북도가 설립하고 지원하는 공립대학이다. 12개 학과 전체 신입생 355명의 소규모지만 지역 출신은 60% 정도고 나머지는 전국에서 찾아온다. 입시위주의 교육에서 숨겨진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학생들의 잠재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졸업 후 경제적 독립을 보장하는 고등공교육을 실현하는 것이 경북도립대학의 임무다.- 경북도립대학교의 설립목적과 우리나라 대학의 현실과의 관계는 어떻게 보고 있나. 교육전문가로서 우리나라 대학교육은 어떻게 진행돼야 한다고 생각하나.△대통령선거를 불과 4개월 남짓 앞두고 있는데도 대선 예비후보 어느 누구도 고등교육 관련 공약이나 비전을 내놓지 않고 있다. 분개할 일이다. 지금 대학의 어려움인 입학자원의 감소는 앞으로 계속될 것이기에 대학들은 단순히 신입생 확보를 목적으로 하는 전략에서 벗어나야 한다. 시스템을 개선해야지, 4년제 대학에서 전문대학의 인기학과까지 복제 모방해서 입학자원을 싹쓸이해서는 안 된다. 일반대학은 연구중심과 교육중심 대학으로 재편해야 한다.전문대학은 모든 분야의 전문인력 양성을 목표로 하기보다 개별 대학과 지역 특성에 맞는 특정 분야의 전문기술 양성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것이 필요하다.- 경북도립대학교가 공유대학으로 전문대학을 선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상동 총장이 주장하는 공유대학이란 어떤 형태인가.△지방자치단체의 주요 특화 산업에 필요한 자원을 기동성 있게 배출하기 위해 광역단체와 대학이 연합하는 형태다. 특화 산업 분야에 70% 이상의 공동 교육과정을 이수토록 하고 개별대학에서 나머지 30% 과정을 수행하면서 두 대학의 학위를 복수로 주는 것이다. 대학은 국가와 자치단체 특화산업에 공동 참여해 개별 대학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고 학생 감소에도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되고 중복 투자도 피할 수 있게 된다. 개별대학이 참여하는 공유대학 시스템으로 대학과 지역 소멸을 넘어 지역균형발전에도 기여하게 될 것이다. 이런 공유대학은 경북도가 설립하고 재정을 지원하는 경북도립대학교가 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하필 경북도립대학교가 해야 하나.△공립으로서 경북도의 고등교육정책을 보여줘야 한다. 서울시립대가 4년제 대학의 모범을 보이고 있는 것처럼 경도대가 지역 전문대의 교육시스템을 견인해 나가야 한다. 투자는 많이 해야 하고 돈은 안 되니 공립인 도립대가 나서야 한다. 다른 대학들에 혜택을 주는 것이다. 도립대를 통해 고등교육 정책과 시스템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 스마트농업이 대세다. 농업의 새로운 트렌드를 전문대가 만들 수 있다. 경도대가 만들고 다른 대학들이 합류하고 참여해서 농업공유대학을 만드는 것이다.- 경도대의 자동차과는 이미 괘도에 올랐다는 평가다.△우리 대학은 전공별로 현장 맞춤형 교육과정을 편성하고 산업체나 기관과 업무협약을 통해 현장 실습을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자동차과의 도장 기술 인력 양성 프로그램은 학생들의 도장 기술 숙련도를 높여주는 실습프로그램으로 전국적으로 특화된 기술이다. 지난 9월 한독상공회의소와 ‘아우스빌둥 직업훈련교육 업무협약’을 통해 더욱 특성화됐다. 교육훈련생으로 선발된 2022년 신입생은 자동차 도장 및 정비 기술에 관한 이론교육을 받고 졸업 후에는 대학의 전문학사 학위와 독일 연방 상공회의소의 아우스빌둥 인증서를 받게 된다. 이들은 BMW그룹코리아나 메르세데스 벤츠 코리아, 아우디 폭스바겐코리아 등 자동차 기업에 취업해 숙련된 전문인력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경도대는 경북도가 설립했고 지원해준다. 그렇다면 대학과 경북도와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나.△경도대는 경북도가 운영하는 경북도 직속기관으로 경북도의 고등교육 정책 실현 최일선에 있는 대학이다. 학생수가 적은데다 저렴한 등록금과 많은 장학금 때문에 등록금 자체가 대학 재정에 큰 의미가 없었다. 따라서 경북도와 경북도의회는 가성비를 생각하지 않는 적극적 재정 투자와 지원을 통해 더 많은 학생들에게 최상의 교육 환경을 제공하는데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대학은 또 학생 교육과 복지, 지역사회 기여 등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나는 경북도의 정책자문위원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경북도의 정책 수립과 이를 위한 업무나 자료 제공으로 경북도 발전에 대학이 기여하면서 상생해야 한다.- 지역에서의 대학의 역할과 대학 사회의 발전에 대한 총장의 생각은 어디까지인가.△대학의 설립 목적이자 존재 이유는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와 기여다. 특히 인구 격감 시대에는 지방소멸에 맞서는 유일한 기관으로 남을 것이다. 이스라엘에는 인구가 없는 지역에도 국방의 개염으로 대학이 존재하고 있다. 청년들을 머무르게 할 수 있고 지역을 이해시킬 수 있는 곳이 대학이다.- 경도대의 예천 지역에서의 역할은.△지역민에게 양질의 교양교육 및 진로변경 교육 등 평생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경도대는 경북도의 평생교육정책에 맞추어 도민행복대학, 예천평생교육원 운영 등 평생교육을 실현하고 있다. 앞으로는 대학 운영도 다양한 성인 학습자를 정규교과과정과 연계하는 학사조직을 만들 계획이다. 단순히 성인교육에 참여하는 지역민 대상 교육뿐만 아니라 학습자에게 의미있고 지역 특성을 반영하는 학습자 위주의 교과과정으로 함께 상생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생활체육과의 육상부 운영으로 예천군 육상대회 유치에 도움을 주고 있으며 축산과에서 경북축산농업인들에게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여 지역사회에 기여하고 있는 식이다.- 지난 이야기지만 경북대 총장 임명 당시 언론에 오르내렸다. 그래서 국정감사에서도 논쟁을 벌이는 걸 봤다. 경북대 총장을 꼭 해야 할 이유가 있었나.△총장 재임하면서 4번의 국정감사를 받았다. 한 번은 감사 2시간 중 1시간50분을 혼자 답변하면서 정말 고군분투했다. 나중엔 ‘수첩에 이름’ 이야기까지 나오니 총장을 그만 두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다고 작정하고 맞받았다.노동일 총장 시절 교무부처장과 기획관리실장 등 보직을 맡았다. 그 때 경북대의 발전 방안이 있음을 알았다. 내가 총장이 되어서 경북대를 제대로 바꿔 반석 위에 올려놓고 싶었다.- 총장 재임 시절 경북대의 위상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경북대가 라이덴대학 THE세계대학영향력평가에서 세계 99위를 했더라. 경북대 총장재임중 제일 큰 업적으로 무엇을 꼽고 싶나.△학교의 외형을 번듯하게 만드는 하드웨어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소프트웨어의 변화다. 경북대의 세계적 평가 소식에는 나도 깜짝 놀랐다. 국내에서는 3위였다. 또 상하이 자오퉁대학 평가에서 국내대학 공동 7위를 차지했다. 드디어 라이벌 부산대를 젖혔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정말 경북대 총장으로서 업적이라면 교양학점 상한제를 만든 것이다. 졸업에 필요한 학점 중 전공을 제외하고 모두 교양과목으로 학점을 채우는 학생들이 있었다. 심하게는 140 졸업학점 중 80학점을 교양과목으로 메꾸는 학생들이 있었다. 이를 교양과목은 42학점을 상한제로 묶었다. 2년 걸렸다. 졸업장도 4M(메이저, 매크로, 마이너, 마이크로)으로 구분했다. 말로만 하던 융합을 실제 적용한 예라고 자부한다.- 경북대가 올해도 RIS(지자체-대학 협력기반사업) 선정에서 탈락했다. 경북도립대에도 영향이 있나.△RIS는 교육부가 대학의 지역 혁신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프로젝트다. 경북대총장시절 대구시장과 경북도지사에게 지역 혁신 발전을 위한 아이디어를 제공해 성공한 휴스타 사업이 그 모델이다. 2019년 휴스타 사업은 지역 기업을 통해 높은 성과가 입증됐다. 그런데 올해 경북대의 RIS 지원 기획은 학령인구 감소에 대비한 선도적 사업인데 탈락했다. 오히려 새 캠퍼스를 조성하겠다는 충남대전세종 지역 사업을 선정했다. 정부의 지방균형 발전과 지역강소대학 집중 육성이라는 공약이 무색해졌다. 경북도립대도 컨소시엄에 참여했고 기대했는데, 우리 지역은 우리 스스로 해결해 나가야 하게 됐다. /이경우 편집위원 ◇김상동(62) 경북도립대학교 총장경북 상주, 경북고, 경북대 문리대 수학과 졸, 서울대 수학과 석사. 미국 코네티컷 주립대 석사. 미국 위스콘신대 박사. (응용수학, 수치편미분방정식 전공).경북대 사대 수학과 교수, 자연대 수학과 교수.경북대 교무부처장, 교수학습센터장, 기획처장.교육과학기술부 기초기술연구회 선임직 이사. 대학수학능력시험 수리영역위원장.경북대총장(2016. 10 ~2020. 10).2004년 과학기술부의 세계적 선도과학자 선정.창의성이 따르지 않는 교육은 유사문제 풀이에 불과하고 교수는 학원강사에 불과하다며 계속 수학을 연구하는 학자이고 싶은 교육행정전문가.

2021-11-01

일본제철 대규모 구조조정 치명상… 한국, 경계 늦춰선 안돼

일본제철은 한때 세계 철강업계의 벤처마킹 단골 메뉴였다. 세계적 기술력으로 품질 좋은 철강 생산을 했고, 지역사회와의 협업 등 배울 점이 많아서였다. 포스코 또한 초기엔 일본제철로부터 기술을 이전받으며 성장판을 마련했다.그런 일본제철이 최근 구조조정에 나서고 있다. 글로벌 3위 철강 기업 일본제철에서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철강도시 포항으로서는 일본제철 사례가 궁금증을 낳을 수밖에 없다. 현지 매체에 보도된 내용 등을 통해 그 배경을 살펴봤다.1950년 창업한 일본제철은 매출 6조2천억 엔(62조 원), 종업원 수 10만6천 명에 달하는 거대 기업이다. 1970년 일본 아와타 제철과 후지 제철이 합병해 신일본제철로 이름을 바꾼 이후, 2012년 스미모토 금속 공업과 합병해 ‘일본제철’로 탄생했다. 이후 일본 전국에 15기의 용광로를 운영하며 세계 최대 조강생산량과 판매량을 기록한다.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일본 경제를 견인해 왔고, 세계 철강 업계를 주름 잡기도 했다.그랬던 일본제철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대규모 구조조정 계획을 내놨다. 지난 3월, 동일본제철소 카시마 지구의 고로 2기중 1기를 2024년 말까지 폐쇄하겠다고 발표한 것. □ 글로벌 경쟁 심화·탈탄소 압박 등이 요인일본제철의 고로 가동 중단은 당장 일본 산업계에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일본제철은 국내 수요의 감소, 수출 채산성 악화,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철강사 경쟁과열 등을 구조조정의 이유로 밝혔으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수요 감소도 한몫 한 것으로 분석된다.OECD에 따르면 2019년 일본의 조강 생산 능력은 1억3천만t이지만 실제 생산량은 9천900만t에 그쳤고, 지난해에는 8천319만t까지 감소했다. 중국 철강 업체들의 공격적인 증산으로 인한 공급 과잉, 채산성 악화로 인해 위기를 겪고 있던 일본제철은 코로나19로 인해 수요가 더 축소되자 결국 카시마 제철소 고로 추가 폐쇄라는 극약 처방을 내리기에 이르렀다.일본제철의 구조조정 발표가 나오자 일본 내에서 다양한 분석들이 쏟아졌으며 그 여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당시 닛케이신문은 일본 정부의 탈탄소 정책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도했다.일본 정부는 우리 나라와 마찬가지로 205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0으로 감축하는 것을 목표로 내건 상태.석탄을 원료로 하는 코크스를 이용하는 고로사의 부담은 자연스레 커질 수밖에 없다. 코크스를 사용하지 않는 전기로를 이용해도 되지만, 고로에 비해 전기로는 불순물 제거가 어려워 자동차에 사용되는 고장력 강판이나 전기자동차의 모터에 활용되는 전기강판 등 고성능 강재 생산에는 한계가 있다. 고로를 이용한 자동차용 강재 생산이 주력인 일본제철에게 탈탄소 정책은 상당한 부담이 되었을 것이 관련 학계 및 산업계의 는 분석이다. □ 고로 불 꺼지면 도시를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동일본제철소 카시마 지구 고로 1기가 구조조정 대상에 포함되면서 가장 충격을 받은 측은 제철소 소재 지방정부다. 이바라키현 남동부에 위치하고 있는 인구 6만여명의 작은 도시 카시마시는 철강과 함께 성장한 지역이다.스미모토 금속공업의 주력 제철소였던 동일본제철소 카시마 지구는 2012년 스미모토공업과 신일본제철이 합병하면서 일본제철 소유로 넘어갔고, 1968년 가동을 시작한 이후 자동차와 가전제품용 박판 등 일본 주력 수출품의 소재를 생산하면서 지역 경제를 든든히 받쳐왔다.카시마시와 일본제철과의 연관은 각종 지표로도 확인된다. 인구 6만7천여 명 중 일본제철의 종업원만 3천 명, 하청회사를 포함하면 거의 1만여 명이 일본제철과 관련된 업무에 종사하고 있다.도시 인구의 약 15%가 일본제철에 생계를 의지하고 있는 셈인 것이다. 일본제철은 고로 폐쇄에 따라 일자리를 잃게 생긴 인력을 타지에 위치한 제철소로 전환 배치하여 고용을 유지하겠다는 계획을 밝혔으나, 카시마시에 이미 기반을 마련한 일부 직원들은 강재가공회사 등이 위치한 인근 치바현 등으로 이직을 시도하고 있는 상황인 것으로 현지 매체들은 보도하고 있다.카시마시와 이바라키현 등 지방 정부는 제철소 일부가 폐쇄되면 고용과 납세 등에 타격을 받기 때문에 비상이 걸려 있다.카시마시 니시키오리 고이치 시장은 그동안 “고로 1기가 폐쇄되면 협력업체 뿐 아니라 음식업 등 여러 형태 사업장의 어려움으로 5천명 정도가 고용에 나쁜 영향이 받을 걸 각오해야 한다”고 예상했다. 그러면서 “결국 도시를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한다”며 위기 상황임을 토로했다.카시마시는 앞서 철강 산업 구조조정으로 인해 쇠락의 길을 걸은 이와테현 가마이시시를 따라가는 것은 아닌지를 가장 우려하고 있다.일본 근대 제철산업의 발상지로 불리는 가마이시는 1978년부터 1989년 사이 석유파동과 엔고(円高) 현상으로 현재 일본제철의 전신인 신일본제철이 고로 2기를 폐쇄하는 구조조정을 단행하자, 지역의 근간을 이루던 산업이 쇠락의 길을 걸었고, 조선소와 하청업체도 도산하거나 공장을 이전하면서 도시 자체가 무너졌다. 1975년 기준 가마이시 제철소 종업원 수는 가마이시 지역 종사자 전체의 약 15%, 제조업 종사자 수의 약 61%였으며 1963년 철강 산업이 번성할 당시에 인구는 9만2천명에 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해 3월 기준 인구는 3만2천명까지 내려앉았다.이런 선례가 있다 보니 그간 경제 특구에 의한 공업용수와 수도요금 인하, 녹지율 완화 등의 지원을 해 온 이바라키현과 카시마시는 구조조정을 막기 위해 고로 2기 조업 유지와 관련해 필요한 100억 엔 규모의 지원을 일본제철에 제안한데 이어 탈탄소 정책 기조에 맞춘 수소환원제철 기술 개발에도 50억 엔 상당의 지원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일본제철의 계획을 막지 못해 현재 비상이 걸려 있다. □ 다양한 대책 발표했지만, 기업도시로 재생은 어려울 전망그동안 일본제철과 20여 회 접촉하며 현재 체제 존속을 위해 나섰으나 협상에 실패한 이바라키현은 고로 폐쇄 발표 이후 대안으로 수소환원제철법 개발, 제로카본스틸 생산, 그린 수소 생산 등 수소를 테마로 한 탄소 중립 산업 거점으로 성장시키겠다며 재도약 시책을 내놓고 있다.카시마시 역시 공업 용수 가격 인하, 지역 교통 접근성 개선 등의 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현 상태에서 더 이상 기업도시로의 재생은 어려울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일본제철의 구조조정은 앞으로도 더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올해 철강업계가 유례없는 호황을 맞이하면서 일본제철의 경영 상황도 반전되었지만 구조조정에 대한 일본제철의 입장은 확고하다.실제 일본제철은 지난 2분기 경영실적 발표 연도 전체(21.4~22.3·일본 회계연도 기준) 영업이익 6조 원을 전망했으며 연결기준 조강생산량은 4천600만t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2019년 수준의 생산량을 회복하고 수익성도 나아졌으나 일본제철은 계획대로 구조조정을 실시하겠다는 방침이다.실적 발표장에서 향후 고정비를 절감하고 고부가가치재 위주 생산체계를 수립해 수익성을 극대화할 것이라고 밝힌 일본제철은 대대적인 설비 구조조정도 실시, 계획대로 기존 15기 고로를 순차적으로 폐쇄해 10기로 축소하고 조강생산능력을 20% 줄일 예정이라고 거듭 확인했다. 이후 고로가 가동 중인 다른 지역은 일본제철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며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10-31

부족함보다 특별함에 집중… 교육변화 희망을 쏘다

학교는 지속 가능한 지역사회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 조건 중 하나다. 인구 감소로 지방소멸이 이뤄지고 있는 농촌 지역, 특히 면 지역에서 작은 학교의 존재가 갖는 의미는 더 특별하다.작은 학교는 오랜 시간 동안 학생과 학부모, 교사, 관공서 등을 잇는 지역사회의 중추 역할을 해오고 있기 때문이다.그렇다고 해서 소수 학생이 다니는 작은 학교에 지속적으로 수많은 예산을 투입하는 것에 대해서 과연 다른 시민들은 이해할 수 있을까. 경제적 논리로만 살펴본다면 이는 결코 효율적인 투자가 아니다.하지만, 때로는 관점을 조금 바꿔 생각해 볼 필요성도 있다. 작은 학교 살리기 운동이 교육변화의 신호탄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학생과 학부모는 학구 내에 배정된 초·중·고등학교를 다녀야만 했다. 일부 학부모들은 이사하면서 아이들이 다닐 학교에 대해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다수는 주거지에서 가까운 학교로 배정되고 그 학교에 다니는 경우가 더 많다.그로 인해 도심지역에 있는 대부분 학교는 학생 수 유지에 대한 부담이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들 학교는 시대적 변화에 따른 교육 프로그램의 환경 개선에 대해 능동적인 태도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반면, 작은 학교의 상황은 정반대다. 교육 수요자인 학생과 학부모가 작은 학교를 택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의미에서 작은 학교를 살린다는 것은 학생과 학부모가 원하는 교육을 알아보고, 이를 통해 교육 시스템이 재개편되는 선구적 역할을 할 수 있다. 글 싣는 순서1. 소멸 위기에 놓인 시골학교의 현실2. 시골학교에서 부르는 희망노래Ⅰ3. 시골학교에서 부르는 희망노래Ⅱ4. 경북도교육청 작은 학교 자유 학구제 명과 암5. 지속 가능한 시골학교 상상 아닌 현실로 □ 분교와 폐교 위기에 놓인 포항지역 학교포항교육지원청에 따르면 교육부의 ‘적정 규모 학교 육성 권고 기준’은 초등학교 경우 면·벽지 60명 이하, 읍 지역 120명 이하, 도시 지역 240명 이하다. 중·고등학교는 면·벽지 60명 이하, 읍 지역 180명 이하, 도시 지역 300명 이하가 기준이 된다.지난 3월 1일 기준으로 지역에 위치한 교육부 권고 기준 이내의 학교는 초등학교 26개교, 중학교 13개교 총 39개교인 것으로 집계됐다.학생 수가 10명 이하인 ‘중점추진 통폐합 대상학교’는 죽장초등학교 상옥분교장(학생 수 3명)과 장기초모포분교장(학생 수 4명)이다. 특기 장기초모포분교장의 경우에는 재학생 수가 10명 이하이고, 신입생도 없어 5년 안으로 폐교가 될 상황에 놓였다. 현재 이 학교는 2학급, 학생 수 4명이 전부이고 6학년에 재학중인 학생 2명이 졸업하고 나서 더 이상 신입생이 입학하지 않는다면 폐교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다.□ 폐교·분교 위기에 놓인 학교를 되살리자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포항교육지원청은 지난 2019년 작은 학교 자유 학구제 시범 대상인 죽천초등학교에 운영 예산 2천만원을 지원했다. 또 2020년 초등학교 12개교에 1천만원, 중학교 1개교에 2천만원 총 1억4천만원을 전달했다.이후 2021년 초등학교 13개교와 중학교 4개교 중 중복사업 대상인 2개교(경북미래학교로 선정된 흥해서부초와 자율재능학교인 청하중)를 제외한 15개교에 1천만원씩 총 1억5천만원을 지원했다.뿐만 아니라 작은 학교에 방과후학교와 특기적성교육 프로그램을 무료로 운영하고, 교재·교구·도서 개발 운영 및 구입을 도와준다. 또 학생들이 통학하기 쉽게 차량 임차와 구입, 운영비 부담을 해 줬다.포항교육지원청은 작은 학교에 특색프로그램 개발비를 지원해 작은 학교에 대한 교육력을 강화하고, 작은 학교로 학생이 유입될 수 있도록 언론기관 및 홈페이지 홍보, 현수막 게시 등 다양한 방면으로 홍보를 병행하고 있다. □ 작은 학교 살리기 운동의 성과현재 작은 학교 학구제가 운영되고 있는 학교는 죽천초, 곡강초, 신광초, 송라초, 월포초, 흥해서부초, 문충초, 장기초, 양포초, 대송초, 남성초, 기북초, 죽장초, 장기중, 대송중, 청하중, 서포중 등 모두 17개교다. 작은 학교 학구제가 시행된 첫해인 2019년도에는 22명이 이듬해에는 108명의 학생이 작은 학교로 유입됐다.특히 지난 9월 1일 기준으로 올해는 모두 142명의 학생이 작은 학교를 다니는 것을 택했다.2021학년도 작은 학교 자유 학구제 유입학생 현황을 살펴보면 죽전초와 곡강초, 청하중이 22명으로 유입학생이 가장 많았고, 장기중 21명, 문충초 18명 흥해서부초 9명, 양포초 8명, 장기초와 남성초 7명의 학생이 작은 학교행을 택했다.1970년 개교한 흥해서부초는 올해까지 1천44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해냈다. 하지만, 흥해서부초는 1990년대부터 입학생 수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고, 2010년에는 전교생 수가 29명까지 줄어들며 폐교 대상 학교로 지정돼 행정적·재정적 지원이 끊기도 했다.하지만, 교직원들의 헌신적인 학생지도와 특색 있는 교육과정 운영 프로그램이 학부모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이후 전교생 수는 2017년 95명에서 2019년 100명, 2021년 현재 106명으로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특히 작은 학교 자유 학구제 대상 학교로 선정되면서, 재학생 중 14명의 학생이 서부초로 유입됐다.□ 작은 학교 살리기의 최종 목표작은 학교 살리기는 작은 학교만의 특색과 교육경쟁력을 강화를 시켜 다양한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것이다. 또 작은 학교든 큰 학교든 간에 학교의 크기와 상관없이 모든 학생들에게 학습권을 보장하고 양질의 교육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또 적정한 규모의 학교를 키워나감으로 인해 교사가 수업에 대한 부담을 낮출 수 있고, 이후 수업 연구시간을 확보해 수업의 질이 향상된다면 그만큼 학생들의 교육수준도 높아질 수 있다.포항교육지원청 관계자는 “작은 학교를 특화해 인근에서 전학을 오고 싶은 학교를 만들기 위해서는 교직원의 열정과 학부모의 지원, 지역사회의 협력이 필요하다”며 “앞으로도 다양한 작은 학교 살리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고른 성장을 지원하는 교육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이시라기자 sira115@kbmaeil.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끝

2021-10-28

가장 낮은 곳에서 높이 빛나는 교회 ‘빈자의 미학’ 기적을 보여주다

만약 신(神)이나 절대자가 실재한다면 어떤 곳에 머무르기를 원할까?웅장하고 화려한 교회나 성당, 절이나 모스크에서 행복한 미소를 지을지, 아니면 작고 소박하더라도 자신을 섬기는 진실한 이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환하게 웃을지.한국은 대도시이건 조그만 도시건 교회 건물이 높고 큰 것이 보편적이다. 첨탑에 세운 십자가를 눈에 띄게 네온사인으로 장식하는 경우도 흔하다. 성당과 절 역시 대형화하는 게 일종의 흐름이나 추세인 걸 부정하기 어렵다.농담처럼 전해져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유럽에서 한국으로 여행 온 사람들이 밤늦게 산에 올랐다. 산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수십 개의 네온사인 십자가. 어디서건 쉽게 보이는 빨간 십자가에 놀란 한 여행자가 말했다고 한다. “어… 한국의 야경은 유럽의 공동묘지 같네.”그는 아마도 독일이나 프랑스의 묘지에 세워진 수많은 십자가를 떠올린 것이리라.‘웅장하고 눈에 확 띄게’ 지어져 눈길을 사로잡는 대부분의 한국 교회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교회가 있어 주목받고 있다. 20여 평 작은 규모의 소박한 벽돌 건물. 경산시 하양읍에 자리한 무학로교회다. 인위적 화려함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독특한 예배당하양읍은 인구가 3만 명이 되지 않는 그야말로 소읍(小邑). 특별한 관광지가 없는 이곳으로 최근 1~2년 사이 전국에서 찾아오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바로 무학로교회를 보기 위해서다.지난 26일 찾아가서 직접 확인한 교회는 듣던 그대로 조그맣고 아담한 예배당이었다. 어깨를 붙이고 앉는다고 해도 50~60여 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 사실 신축 예배당이 생기기 이전 무학로교회의 신자는 30여 명 남짓이었다고 한다.갈색의 벽돌로 묵묵히 쌓아올린,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건물. 예배당 내부에도 설교를 하는 사람과 설교를 듣는 사람의 눈높이를 달리하게 만든 강단조차 없었다. 첨단의 조명 시설과 음향기기도 보이지 않았다.신축 교회는 2층으로 만들어졌다. 옥상인 2층에 올랐다. 거기서도 일체의 인위적인 장식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조용하게 묵상과 기도를 할 수 있는 조그만 벽돌 벤치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을 뿐.작은 정원에도 야외 예배당이 꾸며져 있었는데, 그곳도 벽돌 벤치에 벽돌 설교대만 있는 심플한 모습. 동네 사람들이 와서 언제든 쉬어갈 수 있다고 했다.이전 교회와 새로 만든 교회 뒤쪽으로는 낡은 살림채가 그대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무언가를 현란하게 꾸며서 보여주려는 의도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담백함에 오히려 마음이 끌렸다. 눈빛이 선량한 조원경 목사를 교회 마당에서 만났다.“2019년 초반에 무학로교회를 신축했어요. 2년 6개월쯤 시간이 흘렀는데 그간 7천500명 넘는 사람들이 여길 찾아왔습니다. 지금 화장실을 수리하고, 에어컨을 새로 설치하고 있는데 그 비용도 모두 교회를 찾아준 분들의 헌금으로 충당하고 있습니다. 고마운 일이지요.”일체의 장식과 군더더기를 배제하고 ‘기도하고 묵상하는 공간’이라는 교회가 가진 본질에만 충실하고자 애쓴 건축가의 흔적이 역력했다.그럼 신축 무학로교회는 누가 설계하고 어떤 사람들이 만든 것일까? 이런 궁금증이 생긴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목사와 건축가, 스님과 지역 주민이 함께 만든 공간몇 년 전. 조원경 목사는 지역 문화 관련 세미나 모임에서 건축가 한 명을 만난다. 교인들이 30년을 사용한 오래되고 낡은 교회에서 예배를 보는 게 안타까웠던 조 목사는 건축가에게 묻는다.“우리에게 7천만 원이 있습니다. 이걸로 새 교회를 지을 수 있을까요?”이 질문에 “네. 할 수 있습니다”라고 답한 사람이 건축가 승효상(69·제5기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이다.건물의 설계와 건축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순박한 시골 교회 목사의 작은 희망을 기꺼이 받아들여 무료로 무학로교회를 설계한 승효상은 미술사학자 유홍준의 집 ‘수졸당’과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설계했던 한국의 대표적인 건축가 중 한 명.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무인도에 가서 사는 삶이 아닌 이상 더불어 산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르지만 어떻게 서로 많은 가치를 공유하고, 나누면서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던 승효상은 저서 ‘빈자의 미학’으로도 유명하다.빈자의 미학을 “가난한 사람의 미학이 아니라, 가난할 줄 아는 사람의 미학”이라고 정의한 승효상이 그가 설계하는 건축물에 어떤 철학을 담아온 것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가능하다.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가치를 함께 나누는 공간이 굳이 크고 화려할 필요가 있을까? 무학로교회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말없이 들려주고 있었다.신축된 무학로교회엔 조 목사와 건축가 승효상의 노력과 땀만 들어간 게 아니다.‘작은 시골에 평화로운 마음의 안식처를 만들고 싶다’는 뜻에 동의한 대구의 한 벽돌공장 대표는 10만 장의 벽돌을 선뜻 기부했고, 인근 영천시에 위치한 사찰 은해사도 기꺼이 교회 신축에 300만 원을 보탰다. 하양읍 주민들도 크고 작은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무학로교회엔 은해사 주지가 심은 나무 한 그루가 서있고, 그 아래엔 ‘아름다운 우리의 인연이 영원히 이어졌으면 한다’는 내용의 표지석이 새겨져 있다. 그걸 보면서 섬기는 신은 달라도 결국 종교의 핵심은 사랑과 자비, 이해와 용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목사와 건축가의 순수한 우정과 종교 간의 벽을 훌쩍 뛰어넘은 화합, 여기에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신앙심을 보여준 사람들. 무학로교회는 이 모든 것들을 재료로 만들어진 듯했다. ‘공간 물볕’도 하양읍의 새로운 명소로 떠올라비단 기독교인만이 아니라, 외로움과 번잡함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위로를 주는 공간이라는 입소문이 나면서 무학로교회엔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다.세상에서 상처받은 이들이 혼자 조용히 찾아와 한참을 예배당에 앉아 있다 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귀띔. 여기에 더해 승효상의 스타일과 건축 철학을 직접 느껴보고자 하는 학생 여행자들도 방문한다고 했다.얼마 전엔 무학로교회 맞은편에 카페와 갤러리, 야외 전시장 등으로 구성된 ‘공간 물볕’이 또 하나의 ‘하양읍 명물’로 들어섰다. 깔끔하게 정돈된 정원과 감각적으로 디자인된 카페, 여기에 작고 예쁜 전시 공간까지.‘물볕’은 무학로교회가 있는 하양(河陽)의 순우리말이다. 여기를 설계한 건 승효상의 아들인 승지후. 그도 아버지처럼 건축가로 일하고 있다. 건물의 이름인 ‘공간 물볕’을 제안한 것은 아버지 승효상, 그 이름에 어울리는 건물을 구체화시킨 건 아들 승지후다.지척에 있는 무학로교회와의 조화를 위해 설계 과정에서 여러 고민을 했다는 게 어렵지 않게 느껴지는 ‘공간 물볕’.그곳 정원과 갤러리에 전시된 그림과 사진을 천천히 둘러보고, 카페에 마주 앉아 향기 좋은 커피를 마시는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가 다정해 보였다.기실 성(聖)과 속(俗)은 완벽한 반대의 개념이 아니다. 성스러움 속에는 속됨이 숨겨져 있고, 속된 것들 안에서 성스러움을 찾아내는 게 우리네 삶이 아닐까. 무학로교회와 ‘공간 물볕’이 불화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주며 옹기종기 공존하고 있는 것처럼.다시 한 번 질문을 던져본다.“신이나 절대자가 기꺼이 머물며 사람들에게 사랑과 나눔을 설파하는 공간은 반드시 크고 권위적이어야 할까? 작고 소박한 곳에선 이타적이고 선한 행위가 이뤄지기 힘든 것일까?”이 물음에 관해 경산시 하양읍 무학로교회가 들려주는 답이 궁금하다면 언제든지 찾아가도 좋을 것 같다. 환한 가을볕과 규모는 작지만 큰 위로를 선물할 예배당이 당신을 반길 게 분명하다.돌아오는 길. 고무신을 신은 조 목사가 잔잔한 웃음으로 기자를 배웅했다. 교인들과 함께 가장 낮은 곳에서 높이 빛나는 교회를 만들고자 했던 그의 꿈이 하얀 고무신에 투영되고 있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10-27

아름다운 컨테이너 숲 그 곳에 청년의 꿈이 산다

컨테이너를 이용한 트렌디한 공간 이자 젊은이들을 위한 공간인 FXCO(펙스코)가 대구에 들어서면서 최근 새로운 명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대구 젊은이들의 꿈의 공간 ‘펙스코(FXCO)’는 세계적으로 각광받고 있는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대학의 알록달록한 컨테이너를 활용해 만든 기숙사 ‘스페이스 박스’, 2013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오픈한 ‘컨테이너 파크’ 등과 같이 화물수송을 목적으로 하는 금속 상자인 컨테이너를 젊은 아티스트를 위한 공간, 개방형 문화 공간, 최신 트렌드의 쇼핑 소비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대학은 알록달록한 컨테이너를 활용해 기숙사인 ‘스페이스 박스’를 만들었다. 크레인을 이용해 3층으로 쌓아 올린 스페이스 박스는 학생들을 위한 쾌적한 주거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무주택자들을 위한 공간으로 네덜란드의 다른 도시에서설치되기도 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는 2013년 ‘컨테이너 파크’가 오픈했다. 카지노 밀집 지역과는 조금 떨어진 다운타운인 상권이 침체되어 있는 곳이었다. 침체된 상권을 살리기 위해 시작된 프로젝트가 컨테이너를 재활용해 만든 복합 쇼핑센터인 ‘컨테이너 파크’로, 이 곳에는 개성 넘치는 각종 소규모 상점들과 식당, 그리고 아이들을 위한 놀이시설까지 갖추고 있어 인기를 얻고 있다.지역 청년들과 상생하는 패션-문화복합공간 펙스코는 대구시가 지역 패션분야 신진디자이너 브랜드의 판로확대를 지원하기 위해 기획해 10월 1일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건물 공사때부터 모아진 시민들의 관심과 기대를 증명하듯 사전 오픈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마스크를 쓴 시민들의 발걸음이 이어져 대구의 새로운 랜드마크를 반기고 환영하는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고 있다.펙스코는 Fashion X Coexistence(패션과 공존)의 의미를 담아 이름 붙여진 트렌디한 컨테이너형 건물 3개동에 3층 연면적 1천839㎥ 규모로 완공된 대구 최초의 컨테이너형 패션·문화 복합공간이다. 패션 신진디자이너 브랜드의 상품을 모아 선보이는 편집 매장과 지역 청년들의 창업의 꿈을 실현하는 아트숍, 카페, 레스토랑, 일상에 작은 기쁨을 선사할 무료 전시와 아기자기한 리빙 소품 매장이 한 곳에 모인, 지역의 선도적 라이프 스타일을 주도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1층에는 펙스코 개관을 기념해 기획된 특별전 ‘뉴 트렌드 아트 마켓’(New Trend Art Market)이 전시되고 있다. 부모님과 아이를 동반한 가족 혹은 친구나 연인과 함께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전시회는 민경숙, 오영실, 정영숙 등 대구 대표 산업, 섬유를 모티브로 작가들의 감성을 더한 작품인 ‘Textile Sensibility’, 김정혜, 문경, 이승준, 주후식외 작가들이 동물을 소재로 회화, 세라믹, 키네틱아트의 형식으로 동물의 다채로운 모습을 표현한 ‘Animal Love’, 박우성, 박준상 외 작가들이 서브컬쳐로 대변되던 마니아 중심의 피규어에 시대를 관통하는 유머와 해학을 첨가한 ‘Figure Impressionism’이 전시돼 감동을 선사한다.또 바쁘고 지친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아로마테라피(향기요법)를 천연 유래 성분의 제품으로 개발해 선보이는 자연주의 방향 브랜드 쌩스네이쳐(Thanks Nature), 예술이 있는 삶을 지향하는 독립 예술가들의 작품을 발굴해 다양한 상품으로 제작하고 합리적인 가격으로 일상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는 라이프 스타일 아이템을 선보이는 아트 플랫폼이자 편집숍인 뚜누(Tounou), 소소한 일상에 즐거움을 선사하는 감성·토탈·리빙브랜드인 데일리 라이크(Daily Like), 최근 지역에서 떠오르고 있는 애리스 커피 스탠드(Arris Coffee Stand)가 입점해 있어 젊은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2층에는 상품을 만들고도 독립 매장이나 판로를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패션 신진 디자이너들을 위한 편집매장인 펙스코숍(fxco#)이 들어서 있다.대구시는 섬유패션산업에 대한 지속적인 노력과 정책 지원사업으로 국내를 대표하는 것은 물론 세계적으로 빼놓을 수 없는 섬유패션 도시로 확고한 입지를 이어가기 위해 패션산업을 이끌어갈 신진디자이너의 지원과 브랜드 육성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대구시는 2002년부터 계명대학교 산학협력단과 함께섬유패션디자인창업보육센터를 설립하고 경제적, 체계적 기반이 약한 예비및 초기창업자의 디자인 기획, 생산, 유통에 대한 전문교육을 운영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또 한국패션산업연구원을 통해 크리에이티브 디자인 스튜디오(CDS: Creative Design Studio)를 마련해 지역 기반의 신진 디자이너들을 위한 창작공간과 비즈니스 활동에 필요한 각종 홍보, 마케팅, 교육, 컨설팅맞춤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1, 2차에 걸친 디자이너 인큐베이팅프로그램인 셈이다.이번에 오픈하는 펙스코숍(fxco#)은 3차 프로그램에 해당한다. 지난 1월 25일부터 2월 10일까지 입점 브랜드 모집 공고를 내고 1, 2차에 걸친 심사를 통해 총 35개 브랜드가 선정됐다. 여성복 18개 브랜드, 남성복 5개 브랜드, 신발, 가방, 쥬얼리를 포함한 잡화 10개 브랜드, 대구의 또다른 대표 산업인 안경 브랜드와 소품을 선보이는 라이프 스타일 2개 브랜드의 상품들을 선보인다. 오프라인 매장뿐만 아니라 펙스코 온라인숍(www.fxcomall.com)을 통해서도 개성있고 트렌디한 디자인의 상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향후에는 이들의 중국시장 진출을 위한 지원과 해외 바이어 초청, 수주상담 및 전시회 참가, V-커머스 및 촬영 공간 지원 등 대구시 섬유패션사업의 다양한 혜택도 지속적으로 계획하고 있다.또 펙스코를 디자인으로 발전시키고 캐릭터화까지의 스토리를 소개하고 제품화된(굿즈) 상품을 선보이는 팝업 공간인 ‘펙스코드림숍(FXCO Dream#)’, 크리에이터들의 라이브 커머스, 리얼타임 이벤트를 위한 메타버스(온라인 가상세계) 공유 제작 스튜디오인 ‘메타버스 드림 스튜디오’가 상설 운영 중이며, 스페인 캐릭터 브랜드로 MZ 세대에 인기있는 무인숍 ‘쿠쿠스무스(Kukuxumusu) 카페’가 입점해 있다.3층에는 떡볶이와 튀김, 쫄면 등 익숙하고 당연한 맛의 메뉴를 세련된 감성으로 풀어낸 대구 대표 분식 브랜드인 ‘해피 치즈 스마일(Happy Cheese Smile)’, 깨끗한 공기와 물이 흐르는 밀양의 무농약 수경재배 야채들을 공수해 건강 도시락을 만드는 ‘컴앤헤브(Come and Have)’, 라곰파스타와 리조또,부채살 스테이크 등 퓨전 양식당인 ‘라곰 키친(Lagom Kitchen)’, 일곱 가지 드레싱 샐러드와 다양한 계절 과일로 만든 에이드,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건강한 맛의 부리또와 간편한 컵 와인을 즐길 수있는 카페 ‘소울 샐러드 위드 와인(Soul Salad with Wine)’이 입점해 있다.코로나19로 인해 자유로운 외출이 부담스럽다면 ‘방콕쇼핑’이 가능한 펙스코 VR투어도 가능하다. 펙스코몰의 홈페이지(www.fxcomall.com)에 접속한 다음 첫 화면 상단의 VR TOUR를 클릭하면 마우스의 움직임에 따라 마치 직접 걸어 다니면서 공간 곳곳을 둘러보는 것 같은 3D 입체 환경을 경험할 수 있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FXCO는 라이프스타일, 아티스트편집숍 등 청년 창업브랜드들에게 항시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온오프 마케팅 및 글로벌 시장 판로 지원사업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한다.특히, 신진패션디자이너 브랜드의 브랜드아이덴티와 상품성 향상을 위해 주기적 고객반응 기반한 맞춤컨설팅 및 매출향상을 위한 라이브커머스, 마케팅 지원, 상품생산 지원, 중국, 일본 등 해외시장 진출을 위한 수주상담 및 전시회참가 등 실질적인 지원을 통해 신진브랜드에서 앵커브랜드로 성장시켜 지역을 넘어 글로벌 스타 브랜드로 육성할 계획이다.(주)모라비안앤코 펙스코(FXCO) 사업단 김윤찬 실장은 “대구의 랜드마크로써 팝업공간인 Colorful-X공간에서 매시즌 새로운 문화콘텐츠를 구성해 매번 방문할 때마다 새롭고 재미있는 공간으로 다시 찾고 싶은 공간으로 만들겠다”며 “펙스코 마당에서 펼쳐지는 시민들과 함께 하는 청년아티스트들의 공연, 실험적인 패션쇼, 시민들과 함께 하는 플리마켓 등으로 활력과 재미, 공감이 있는 패션·문화·복합공간으로 업그레이드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이곤영기자 lgy1964@kbmaeil.com

2021-10-27

세월을 버틴 나무들… 벌거숭이에서 울창한 숲이 되다

우리 주위에는 나무가 참으로 많다. 나무를 빗댄 노래도 많고, 문학 작품도 수두룩하다. 그 뿐인가. 상상 속의 나무를 가져와 민초들의 꿈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판타지적인 이야기를 풀어내기도 한다.외가가 있었던 경상남도 창녕군 모전마을의 입구에는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까막눈이 시절 기억에 모전 마을 나무에는 색색이 종이를 매단 기다란 줄이 감겨 있기도 했고, 특별한 날에는 오래된 한복을 입은 마을 어르신들이 나무를 향해 수차례 절을 올리기도 했다. 모르긴 몰라도 모전 마을의 나무는 수백년 이상 살아온 마을의 수호신이었다. 외할아버지도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에게 ‘나무 등을 타고 놀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도 그러한 것이 마을 저수지의 머릿구에 서 있는 나무는 생명력 없는 검은 색깔을 가지고 있지만, 여름 한 철에는 녹색잎을 토해내기도 했다.「예전에는 아이가 태어나면 나무를 심었다. 여자 아이가 태어나면 오동나무를,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소나무를 심었다. 딸아 자라 시집갈 때가 되면 그 오동나무를 베어 가구를 만들어 혼수로 보냈다. 소나무는 아들과 평생을 함께 하다가 생을 마감할 때가 되면 베어 관을 짜는데 썼다. 아이들마다 각각 내나무가 있었다. 이처럼 내나무는 나의 탄생과 더불어 나와 숙명을 같이하고 죽을 때에는 더불어 묻히는 존재였다. (이규태 수필 ‘내나무’ 가운데)」□ 울진 금강송면의 나무나무에 대한 아련한 기억을 품고 울진의 금강송면을 찾았다. 왕피천의 물줄기를 따르다 보면 멀리서 울창한 나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울진군 북서부에 있는 금강송면은 본래 서면으로 불렸다. 하지만 2015년 4월 금강송면으로 개칭됐다. 면의 전 지적이 태백산맥에 속하여 500~1천m 이상의 험준한 산지를 이룬다. 한참의 시간을 걸려 금강송면에 있는 소나무숲길로 들어섰다.“울진 금강송면의 소나무숲길은 미국 CNN에서 선정한 세계 50대 명품 트레킹 장소에도 소개됐었죠.”한 관계자의 이야기처럼 곧게 뻗은 소나무 가지들은 마치 길을 들어서는 사람들에게 인사라도 하는 마냥 의연하기만 하다. 울진군 등에 따르면, 금강송면의 소나무숲길은 산림청이 국비로 조성한 전국 1호 숲길이기도 하며, 산림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되어 있다. 어찌보면 우리나라에 트레킹과 둘레길에 많은데, 그중에서 으뜸으로 치는 곳이 바로 금강소나무숲길이 아닌가 한다.「태백산맥줄기를 타고 금강산에서 울진, 봉화와 영덕, 청송일부에 걸쳐 자라는 소나무는 주위에서 흔히 보는 꼬불꼬불한 일반 소나무와는 달리 줄기가 곧바르고 마디가 길며 껍질이 유별나게 붉은데, 이 소나무는 금강산의 이름을 따서 금강소나무(金剛松) 혹은 줄여서 강송이라고 학자들은 이름을 붙였으며, 흔히 춘양목(春陽木)이라고 알려진 나무이다. 결이 곱고 단단하며 켠 뒤에도 크게 굽거나 트지 않고 잘 썩지도 않아 예로부터 소나무 중에서 최고의 나무로 쳤다. 경북 울진군 서면 소광리 금강소나무 집단 분포지는 숙종 때 황장봉산으로 지정 관리하였으며, 1959년 육종림으로 지정된 후 2001년 산림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할 정도로 유명한 숲으로 금강소나무 미인송(520년 된 할아버지 소나무)이 있는 지역으로서 특별 보존 관리하고 있는 청정지역이다. 500년이 넘은 천연수림의 소나무 터널을 통과하면서 금강소나무들의 열병 사열을 받아 볼 수 있다. 소나무 숲이 품어내는 식물성 호르몬인 피톤치드도 느껴볼 수 있다.(한국관광공사 ‘대한민국 구석구석’ 중에서)」그 중에서도 금강송면의 유명한 나무는 무엇이 있을까. 우선 천연기념물 제408호인 산돌배나무가 있다. 금강소나무숲길 2구간인 ‘한나무재길’을 걷다보면 만날 수 있다고 한다.“닥발골에서 또 한모퉁이 돌아서면 쌍전리 산돌배나무가 있는 큰닥발골이죠.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산돌배나무 중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로 생물자원으로서의 보존가치가 커요. 수령이 약 250년이고, 높이 25m, 가슴높이 4.3m죠.”또 금강소나무숲길 3구간인 ‘오백년소나무길’에는 소광리 금강송 군락지를 볼 수 있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대의 금강소나무 군락지다.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일제강점기의 엄청난 금강송 수탈에도 훼손되지 않았다. 남아 있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곳이 산이 깊고 교통의 오지였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병정소나무’도 있다. 6대의 아름드리 금강소나무가 한 줄로 서 있는 모양이 병정들이 정령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서 ‘병정소나무’라 부른다. 과거 송진채취로 인한 아픈 흔적이 남아 있다.금강소나무숲길 4구간인 ‘대왕소나무길’에는 수령이 600년으로 추정되는 대왕소나무수종이 남아 있다. 아쉽게 볼 수는 없었지만, 사진으로 보는 자태는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 한반도와 나무 그리고 사람갑작스레 궁금증이 일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는 어디에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생각외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는 울릉도에 있었다. 경북 울릉군 도동리 산8, 도동향뒤 바위산 중턱에 위치한 향나무는 수령이 2천500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더 나아가 지난 2018년 울릉군발전연구소는 “도동리 향나무의 나이테를 조사한 결과, 5천~6천년으로 추정된다”고 하기도 했다. 이어 강원도 삼척시 도계면 늑구리 210-2에 있는 삼척 늑구리 은행나무는 수령 1천500년을 자랑한다.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은행나무와 부부 사이라고 전해지고 있다.하지만 한반도의 산과 들에 지금처럼 나무가 많았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일부 사유지를 제외하고는 민둥산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 어른들의 이야기다.흔히, 나무가 없어 붉게 토양이 드러난 벌거숭이 산을 ‘민둥산’이라고 부른다. 사실 국토의 65% 가량이 산림인 우리나라에 민둥산이 펼쳐지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 국토에 산림 황폐화가 진행된 것은 조선시대 말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랜 기간 동안 화전(火田)으로 인한 산림 훼손과 온돌을 사용하는 가옥구조로 인해 나무를 땔감으로 쓸 수밖에 없었고, 이후 일제가 목재를 수탈할 목적으로 그나마 남아있는 나무들을 마구 베어가면서 상황이 더욱 나빠졌다. 또 6·25전쟁을 겪으며 험난한 전투 속에서 산림의 황폐화는 더욱 가속화되었다.이러한 산림 황폐화는 조금만 비가 와도 산사태와 홍수로 이어졌고, 약한 바람에도 황토먼지가 날리며, 비가 오지 않으면 금방 가뭄이 드는 일로 이어졌다. 산속에는 새와 동물이 점점 사라져 생태계도 망가졌다. 하지만 여기 우리나라의 민둥산을 산림이 우거진 산으로 바꾼 인물이 있었다.“평생을 나무하고만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나무는 내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됐고 내가 나무 속에 있는지 나무가 내 속에 있는지조차 모를 느낌이 들 때가 많다.”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임목육종학자 고(故) 현신규 박사(1911~1986)가 생전에 남긴 말이다. 그는 일본의 수탈과 6·25전쟁을 거치며 황폐해진 조국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이에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리기테다소나무’, 한국 토양에 잘 맞는 포플러나무인 ‘은수원사시나무’를 육종해 산림을 다시 푸르게 하는 데 기여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9년 국토 녹화에 공헌한 현 박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은수원사시나무에 그의 성을 따서 ‘현사시나무’라는 이름을 붙였다.1911년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태어난 현 박사는 철학이나 문학을 전공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를 서울대 농과대학 전신인 수원고등농림학교에 입학시켰다. 이후 일본 규슈대 임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에서 연구직으로 일했다. 산림조사에 나갈 때마다 헐벗은 숲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낀 그는 다시 규슈대 박사과정에 들어갔지만 1945년 전쟁 막바지 한국인으로서 신변에 위협을 느껴 귀국해야 했다. 이후 수원농업전문학교에서 조교수로 교편을 잡으며 연구자료를 정돈해 규슈대로 보냈고, 1949년 한국인 최초로 임업 분야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1-10-26

푸르고, 맑고, 볼륨이 넓은 바닷가에 날아온 검은 갈매기

수필가인 박이득 선생은 포항문인협회 창립을 주도했고, 한국예총 포항지회장을 맡으며 지역 문화예술의 수준을 높이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해왔다. 문화예술 분야에 많은 이야기가 있겠으나 우선 흑구(黑鷗) 한세광(1909∼1979) 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들어보았다. 그의 삶과 문학에는 그만한 무게와 깊이가 있는 까닭이다. 임종석(임) : 한흑구는 문학적 위상에 비해 조명과 평가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수필 ‘보리’로 유명한 분이시지요.박이득(박) : ‘보리’는 1955년 동아일보에 발표했는데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수필 문학의 백미(白眉)지.너, 보리는 그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자라나고, 또한 농부들은 너를 심고, 너를 키우고, 너를 사랑하면서 살아간다.보리, 너는 항상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흑구, ‘보리’ 부분박 : 한흑구를 이해하려면 그분이 살았던 시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특히 부친 한승곤(1881∼1947)을 알아야 해. 평양에서 최초로 목사가 된 분으로 기독교계에서 명성이 높지.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1912년에 평양 산정현교회 제1대 담임 목사가 되었으니까. 그런데 1911년에 ‘105인 사건’이 터져. 일제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 모의 사건을 조작해 105명의 애국지사를 투옥한 사건이지. 이때 평양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계 항일세력이 많이 검거돼. 이 사건에 연루된 한승곤은 1913년 미국으로 망명해. 미국에서 흥사단(興士團)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는데 의사장(議事長) 등 중책을 맡지. 도산(島山) 안창호(1878∼1938)와 가까웠고, 장이욱(1895∼1983)과 함께해. 장이욱은 서울대학교 총장을 하고 미국대사도 한 분이야. 독립운동사 자료를 보면 한승곤, 안창호, 장이욱이 함께한 사진이 있어. 1936년 귀국한 한승곤은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안창호를 비롯한 흥사단 동지들과 투옥돼. 1947년에 돌아가셨고,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지.수양동우회는 안창호가 조직한 흥사단 계열의 민족운동단체다. 1937년 5월 ‘멸망에 함(陷)한 민족을 구출하는 기독교인의 역할 운운’이라는 인쇄물을 산하 국내 35개 지부에 발송했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면서 모두 181명이 체포되었다. 일본 경찰의 혹독한 고문으로 최윤세, 이기윤은 옥사하고, 김성업은 불구가 되었다. 안창호도 수감되었다가 1937년 12월에 병보석으로 풀려나지만 이듬해 3월 경성대학부속병원에서 간경화증으로 별세했다. 다른 수감자들은 5년여에 걸쳐 석방되지만 사건 관련자 상당수가 친일파로 전락하고, 흥사단의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미군정청 통역관 시절의 한흑구(1946). 임 : 한흑구가 미국으로 간 것은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겠습니다.박 : 그렇게 봐야지. 평양에서 태어난 한흑구는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다니다가 1929년 스무 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 노스파크대학교(North Park Univ.)에서 영문학을, 필라델피아 템플대학교(Temple Univ.)에서 신문학을 공부해. 검은 갈매기, 흑구(黑鷗)라는 필명은 일본 요코하마항을 떠나 미국으로 가는 여객선 갑판에서 떠올린 거지.하룻밤을 자고 나서 갑판에 올라, 갈매기가 다 달아났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배꼬리 쪽을 살펴보았더니, 웬일인지 검은색의 갈매기 한 마리, 단 한 마리가 긴 나래를 펴고 쫓아오고 있었다. 그 검은 갈매기 한 마리는 하와이에 올 때까지, 바람이 불거나 비가 와도 그냥 한 주일이나 쉬지 않고 쫓아왔다.“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옛것을 버리고 새 대륙을 찾아서 대양을 건너는 검은 갈매기 한 마리, 어딘가 나의 신세와 같다.”이런 구절을 일기에 쓰다가, 문득 나의 필명(筆名)으로 사용하기로 생각했다. (중략)나는 조국도 잃어버리고 세상을 끝없이 방랑하여야 하는 갈매기와도 같은 신세였기 때문이었다.- 한흑구, ‘나의 필명(筆名)의 유래’(1972) 부분임 : 네 살 때 헤어진 아버지를 스무 살에 만나러 미국으로 가는군요. 미국 생활도 힘들지 않았나 싶습니다.박 : 나라 잃은 처지에 이역만리에서 고학했으니 오죽했겠어. 간혹 거친 흑인들과 부딪쳤는데 주먹이 강해서 밀리지 않았지. 선천적으로 체력이 좋았고 축구도 잘했어. 고향 친구인 안익태를 만나 한동안 함께 지내며 도움을 주는데, 그 이야기는 수필에 실려 있지.그 수필은 ‘인생산문’(일지사, 1974)에 실린 ‘예술가 안익태-젊은 시절의 교우기’를 말한다. 이 글을 보면 한흑구가 안익태에게 얼마나 큰 도움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한(한흑구) 군! 자네 학교 음악과에 잘 말해서 나를 장학생으로 좀 넣어주게나. 자넨 총장을 잘 알지 않나.”안은 침착한 태도로 말하였다.안의 말대로 나는 찰스 베리(Charles Buery) 총장을 만나 안을 소개해서 내가 다니고 있던 템플대학교 음악대학 기악과에 외국인 장학생으로 무난히 넣을 수 있었다.임 : 이 시기에 작품 활동을 활발하게 하지요.박 : 교민단체에서 발간한 ‘신한민보(新韓民報)’라는 신문과 흥사단 계열에서 발간한 ‘동광(東光)’이란 잡지에 여러 편의 시와 번역시, 평론, 소설을 발표했지.‘신한민보’는 1909년 2월 10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교민단체인 국민회(國民會)의 기관지로 창간되었으며, 독립운동을 고취하고 교민의 권익을 옹호하는 언론 활동을 전개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조). 안창호와 관련이 깊고, 1914년에 춘원 이광수가 이 신문의 주필로 내정되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미국에 가지 못하고 귀국한 일화가 있다.‘동광’은 1926년 5월 20일자로 창간된 종합잡지다. 안창호가 1913년 미국에서 조직한 독립운동단체 흥사단을 배경으로, 또 같은 계열의 단체로 1926년 1월에 조직된 수양동우회의 기관지 성격을 띠고 발행되었다(최덕교, ‘한국잡지 백년 2’, 현암사, 2004.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이광수가 창간을 주도했고 주요한이 편집인 겸 발행인을 맡았다.임 : 모친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1934년에 귀국하는데, 그 후에는 어떤 활동을 하게 됩니까?박 : 한흑구의 모친은 한흑구가 귀국한 1934년에 작고해. 한흑구는 평양에 머물면서 ‘대평양(大平壤)’과 ‘백광(白光)’의 창간에 참여하고 문학 활동을 활발하게 하지. ‘백광’에는 쟁쟁한 문인들이 참여했어. 이효석이 평양에 왔을 때 한흑구가 ‘백광’에 원고를 부탁했고 이효석이 승낙했는데 마감을 안 지키더라는 거야. 그래서 한흑구가 이효석을 찾아가 받아낸 원고가 ‘낙엽을 태우며’라는 수필이라고 해. 미국에서 돌아온 한흑구는 활발한 문학 활동을 펼친다. 1935년 한 해만 보더라도 ‘신인문학’에 시 ‘밤의 사막’(3월), ‘님은 나의 산’(6월) 등을 발표하고, ‘동아일보’에 ‘D.H. 로렌스(Lawrence)론’(1935. 3. 14∼15), ‘조선중앙일보’에 ‘윈덤 루이스(Windham Lewis)론’(1935. 9. 17∼9. 22), ‘조선문단’에 ‘바이런(Byron)의 생애와 그의 시’(1935. 5)를 발표했다.1934년에 창간된 ‘대평양’과 1937년에 창간된 ‘백광’은 평양에 기반한 종합잡지다. ‘대평양’은 1934년 11월 11일 창간된 종합잡지로 편집 겸 발행인은 전영택, 주간은 한흑구다. 한흑구는 창간호에 창간사, 시, 소설, 논문, 잡문 등 10편 이상을 수록했다(최덕교, 위의 책 참조).‘백광’은 1937년 1월부터 그해 6월까지 통권 6호를 발간했으며, 평양에서 조선 전역을 상대로 발행된 최초의 종합잡지다. 전영택이 편집 겸 발행인으로 이름을 올렸고, 편집 실무는 주간이었던 백선행의 양아들 안일성과 한흑구가 담당했다(‘한국 근대문학 해제집 III-문학잡지(1927~1943)’, 현암사, 2017, 117∼119쪽 참조). 한흑구는 창간호에 ‘명사순례기’와 소설 ‘인간이기 때문에’를 발표했다.한흑구의 고향 선배인 소설가 전영택(1898~1968)은 1930년 미국에서 흥사단에 가입했고 한흑구와 가까웠다. 두 사람은 귀국 후에 평양에서 ‘대평양’과 ‘백광’의 창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임 : 연보를 보면 1937년에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속되는데 어떤 이유입니까?박 : 흥사단 사건으로 알려져 있는데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수양동우회 사건’이지. 부친 한승곤도 이 사건으로 구속되어 고초를 당해. 그런 맥락에서 한승곤, 한흑구 부자(父子)를 이해하려면 흥사단을 깊이 알아야 해. 박이득1941년 포항에서 태어나 서울 인창고를 졸업하고 건국대 국문학과와 계명대 무역대학원을 수료했다. 포항 동지고 국어 교사, 포항 MBC PD·기자, 영남일보 기자를 거쳤으며, 한국예총 포항지회장, 경북문인협회 부회장, 한흑구 선생 문학비 건립추진위원장, 포항독립운동사 발간 추진위원장을 역임했다. 수필가로 월간문학, 포항문학 등에 작품을 발표했고, 제1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 최세윤 의병장 기념사업회 이사장, 포항문화원 부설 포항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을 맡고 있다.대담 : 임종석(경북매일신문 부사장) / 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

2021-10-26

대구미술관의 위상이 시민의 수준이고 도시의 격이다

세계적 미술가들이 대구에 왔다. 프랑스 국보인 마르크 샤갈의 대표작 ‘La Vie(삶)’를 비롯, 프랑스와 한국의 대표 작가 78명의 작품들이 대구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다.2011년 5월 대구시 수성구 삼덕동 산비탈에서 개관한 대구미술관은 10년 동안 110여 차례의 전시 기획을 통해 지역 미술 활성화에 앞장서 왔다.최은주 대구미술관장은 대구시민의 미술에 관한 식견과 관심을 높이 추켜세운다. “서울을 제외하고 이렇게 꾸준히 작가들이 배출되는 도시, 끊임없이 전시가 이어지는 도시, 세계적인 작가들이 등장하는 도시가 많지 않다. 화랑이 60개가 넘고, 미술시장이 형성되어 있고, 컬렉터들이 끊임없이 후원해 주는 곳, 바로 대구다.”대구미술관의 위상은 미술을 넘어 시민의 수준과 도시의 격을 업그레이드하고 있다. - 어쩌다 한 번씩 오는 길이지만 그때마다 익숙하지 않다. 도심 명소는 아니더라도 접근성이 아쉽다. 미술관 입구도 심심하다. 서비스 공간은 불편하다.△주변이 좋아지고 있다. 지금 고쳐가고 있으니 차츰 나아질 것이다. BTL로 지어져 전시 외 수익사업을 할 수 없는 맹점이 있고 어려운 부분들도 있지만 아트숍 커피숍 등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 가고 있다.간송미술관이 들어서서 고대미술 중심 전시관이 되고 부속동을 리모델링해서 근대미술관으로 운영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이 일대는 암스테르담이나 마드리드의 뮤지엄지구처럼 변신하게 될 것이다.- 대구미술관이 개관 10년을 맞았다. 지금 전시하고 있는 작품들은 어떤 의미인가.△지금은 ‘모던 라이프’기획전을 열고 있다. 마르크 샤갈, 알렉산더 칼더, 알베르토 자코메티, 호안 미로, 피에르 솔라쥬, 페르낭 레제 같은 프랑스 매그재단의 주요 소장품과 서세옥, 박서보, 이강소, 이우환, 김창열 등 대구미술관의 주요 소장품을 함께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모두 당대의 빛나는 작품들이다. 개관 10주년을 기념해서 10개의 전시를 기획했고 그 중 하반기에 해당하는 전시다. 대구 미술의 뿌리와 현재, 세계 속의 대구 미술을 통해 ‘로컬이 곧 한국이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기획이다.- 최근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웰컴 홈’을 공개해 시민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정말 많은 분들이 오셨다. 미술관이 차 한 잔 마실 수 없었고 휴게 공간도 없었는데 진지하게 작품을 감상하고 가시는 분들을 보고는 대구의 문화수준이 대단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대구 시민들의 작품 감상에 대한 욕망에다 삼성과 대구와의 연고를 인식하는 시민들의 관심이 상승효과를 가져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건희 컬렉션 21점에 대구미술관이 보유하고 있던 근대미술품 중 전시 주제와 맞는 작품들로 특별전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건희 미술관이 대구에 들어서지 않더라도 수많은 이건희 컬렉션을 대구 시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안은 없나.△정책입안자가 아니고 미술관장의 입장에서 긍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싶다. 대구근대미술관 건립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대구미술관은 시 소속이고 대구시 자산으로 보유하고 있는 소장품이 500점이 넘는다. 또 대구시에는 근대 미술을 다룰 수 있는 대구미술계의 인적 자원도 충분하다. 소장품은 기획전이 구성되지 않는다면 소개되기 쉽지 않다. 근대 대구 주요 작가들의 작품을 테마 별로 보여드릴 수 있는 상설 전시장을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덕수궁 미술관장 시절(1999년) 국립현대미술관의 근대 소장품이 1천200여 점이었다. 덕수궁 전시관이 생겨 전시가 기획되면서 근대미술품을 모을 수 있었고 지금은 3천점에 이르고 있다. 이런 성장 동력은 덕수궁 미술관이 생겼기 때문에 가능했다. 근대 작품을 모으고 연구하는 체계적인 국립근대미술관이 대구 같이 의미 있는 도시에 세워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대구가 한국 근대미술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고 역량도 물적 자원도 갖추고 있으니 미술관이 세워진다면 지역에 흩어져 있는 미술품들을 모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대구 근대미술관이 너무 과대 포장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대구 근대미술의 실체에 접근하기보다 말로만 근대 미술의 의미를 과장하고 있다는. 대구가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한국근대미술사에서 대구는 경성(서울) 평양과 함께 3대 도시 중 하나였다. 근대에 가장 걸출한 작가들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이인성 이쾌대 등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작가들 중에 대구 출신이 많다. 만약 한국에 근대미술관이 설립된다면 서울뿐만 아니라 대구도 검토 대상이 될 수 있는 도시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이다. 덕수궁 관장 시절 전시를 기획할 때마다 대구를 내려와야 했다. 대구는 전쟁 피해가 적어 근대미술품이 남아 있는 도시다. 한국을 대표하는 근대 화가들의 이야기가 있고, 근대미술 컬렉터, 근대미술 작가들의 유가족들이 남아 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다.-대구미술관장으로 임명돼 첫 임기를 마치고 재임용됐다. 대구에 부임하기 전 인상과 실제 대구에 와서 본 대구미술관의 실체는 어떻게 변했나.△올 4월 2년 임기를 마무리하고 2024년까지 임기가 3년 연장됐다. 국립미술관에 오래 있었는데 그 때 지역 미술관들을 유심히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대구는 굉장히 현대적이고 또 공격적인 미술관 운영을 하고 있었다. 쿠사마 야요이, 장 사오강 같이 중앙에서도 유치하기 힘든 해외교류전을 과감히 벌였고 그렇게 명성도 쌓았다. 미술관 명성은 ‘세계적인 작가들이 그 미술관에서 전시를 했느냐’로 결판나는 경우가 많은데 대구미술관은 그 전략을 잘 했다는 생각이다. 대구미술관장으로 부임하고 보니 그런 명성은 좋으나 조직 체계가 매우 느슨했다. 미술관이 가져야 하는 역할과 기능이 미흡했다. 소장품 수집, 연구, 전시 기획, 교육 기획, 홍보 등을 해야 하는데 소장품 수집 팀도 없이 전시 기능만 가진 학예연구실이 있었다. 부임 첫해에 미술관 시스템을 정비했다. 수집연구팀과 전시기획팀, 교육팀의 3팀 체제로 기본 체계를 갖추었고 전시 관련 회의 체계를 만들어 전시 기획을 시스템화했다. 관장으로서 큐레이터들과 전시 기획 회의를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지역미술 활성화를 위해 대구미술관은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시립미술관으로서 전시 교육 이벤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지역미술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구지역 중견 원로 개인전인 ‘다티스트(DArtist)’와 30대 미만의 젊은 작가를 지원하는 ‘Y아티스트’ 프로젝트, 이인성을 기리는 ‘이인성 미술상’과 ‘대구포럼’ 등이 그것이다. 특히 대구포럼은 동시대 현대 미술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는가 하는 큐레토리얼 어프로치가 필요한 전시다. 열린 공간에서 현대 미술을 토론하고 주제를 찾고 작가를 찾아내는 국제전시다.-미술관은 올해 10주년 기념전처럼 수시로 시즌 기획전을 열고 있다. 대구미술관 자체 역량으로 기획이 아닌 소장품을 활용한 전시가 가능한가.△기획전이 없을 경우 소장품 활용 전시가 가능하려면 적어도 3천점은 확보해야 한다. 취임 초에 소장품이 1천300여 점이었다. 5개년 계획을 세웠다. 목표를 달성하려면 해마다 140~150점을 구입하고 200점의 기증이 이루어져야 한다. 다행히 지난해와 올해 기증은 원활하게 이루어져 목표를 채울 수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 사태로 소장품 매입은 목표치에 다다르지 못했다. 예산을 확보해서 목표를 달성해 나갈 생각이다.- 대구의 미술품 기증문화를 칭찬했다. 어떤 작품들을 기증 받았나.△지난해 대구출신 패션 디자이너 고 박동준 분도갤러리 대표 105점, 작가 및 소장가 70점 등 175점을 기증받았고 올해 상반기에도 이건희 컬렉션 21점 등 223점을 기증받았다. 지난해에는 권정호 최학노 서근섭 공성훈 작가 등의 작품을 기증받았고 올해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수묵화가 서세옥 화백의 작품 90점과 최만린 조각가의 작품 58점, 한운성 화백의 작품 30점 등을 기증받았다. 그러고 보니 이태동안 기증된 작품만도 400점이 넘는다. 이런 기증문화가 대구에 있음을 확인하니 가슴 벅차다.- 대구 미술계에는 작가들이 클 수 있는 컬렉터 문화가 있다고 했다.△미술관은 미술시장과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공적 기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 저변에서 창작자가 계속 나오고 그들을 후원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후원자와 창작자를 매개하는 기획자들이 있는 도시가 대구라는 생각이다. 대구미술관이 잘 성장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미술관이 되고 미술관과의 활동을 통해 대구에서 세계적인 작가가 배출된다면 더이상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 길을 향해서 묵묵히 가는 사람들이 미술관 사람들이다.-공공미술관의 기능 중 교육과 관련, 어떤 전략을 갖고 어떤 사업을 계획하고 있나.△비전, 전략, 목표를 큰 틀로 하여 ‘평생 교육을 실현하는 미술관’을 위해 대상별 연령별 주제별 교육을 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유례없는 역경 속에 시민의 삶을 회복하는 응원으로 대구미술가를 소개하는 ‘나의 예술세계’, 소장품 이해를 돕는 ‘보물찾기’ 등 비대면 온라인 콘텐츠뿐 아니라 4인 이내 가족단위로 체험교육을 실시한 ‘전시연계 워크숍’, 송수신기를 이용해 전시 설명 프로그램 ‘도슨트’ 등을 지속적으로 이어왔다. 지난해 대구미술관에서 온 오프라인 교육을 통해 3만9천900여 명의 참여자가 미술관 교육과 함께했다.-다른 도시와 비교해서 대구시의 대구미술관에 대한 지원은 만족할 만한가. 대구시민들의 태도에 대해서도 코멘트 해 달라.△국립현대미술관에서 26년, 경기도미술관에서 4년 있었다. 대구미술관 2년반 동안 경험해 보니 가장 ‘나이스’하더라. 전문가로서의 관장 이야기, 의견들을 존중해 준다. 전문적인 식견 의견 태도를 발휘할 수 없었던 곳과는 달리 대구에서는 미술관 경험을 바탕으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미술관은 우리의 삶과 함께하는 곳이어야 한다. 우리의 삶이 스미고 우리 삶의 한 영역으로 작동하는 곳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긴 호흡으로 보고 응원을 부탁한다. ◇최은주 (58)△서울생△서울대 서양학과, 서울대 대학원 석사, 미술교육 박사△1989년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학예연구사)로 출발, 1994년 28살에 전국 최연소 학예연구관으로 승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3번의 학예실장, 2번의 덕수궁관장, 서울관 운영부장 등 26년 근무했다. 2015년 정년을 8년8개월 남겨두고 ‘나를 위해’ 명예퇴직하고 경기도 미술관장에 지원, 임용됐다. 그리고 2019년 대구미술관장으로 왔다.△서양화 전공이지만 책 보는 것을 엄청 좋아한다. 2005년 박사과정에 입학하고도 논문 쓸 시간을 갖지 못하다가 14년 만인 정년 후에야 여유를 찾아 ‘R. 타고르의 교육철학과 산티니케탄 미술학교 칼라-바반 연구’로 학위를 받았다./이경우 편집위원

2021-10-25

역사의 격랑을 거치며 정치인들 운명도 엇갈려

1960년 4·19혁명 후에 국회가 자진 해산하면서 7월 29일 민의원·참의원 의원을 동시에 선출하는 총선거가 실시된다. 제5대 민의원 의원 선거에서는 3개 선거구 모두 민주당 후보가 당선된다. 포항시 이상면(42·대학 중퇴), 영일군 갑구 최태능(51·농업·중졸), 을구 최해용(39·수산업)이 당선자다. 초대 참의원 선거는 대선거구제로 치러지는데 포항 지역 출신 후보 중에는 민주당 이원만(55·무역협회장), 무소속 김장섭(49·변호사·민의원)이 당선된다. 임종석(임) : 4·19혁명 후의 정치 상황으로 들어가기 전에 초대 포항시장을 한 최기봉이 어떤 분인지 들어보았으면 합니다.박이득(박) :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1949년에 초대 포항시장으로 8개월 정도 근무했지. 포항시장으로 있으면서 시 행정을 현대식으로 바꿔놓은 공이 있어. 포항시장을 마치고 나중에 워커힐호텔 사장이 되었지. 한국에 주둔한 미군들이 한국에서는 놀 곳도 쉴 곳도 없으니까 주로 일본으로 갔어. 일본에 가서 쉬고 놀며 돈을 쓰니까 한국에서도 그런 게 가능하도록 워커힐호텔을 만든 거야. 워커힐은 미군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국고도 채우기 위해 만든 일종의 국책 호텔인 셈이지. 최기봉이 그 호텔 사장을 맡았으니 정부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았던 거라고 할 수 있겠지.임 : 4·19혁명 후에 치러진 선거에서 민주당이 포항시, 영일군 지역구를 휩쓸게 됩니다. 포항, 영일 지역에서는 전무후무한 일이지요. 당시의 특수한 상황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겠는데, 그 와중에 자유당 소속이던 김장섭이 4대 민의원 의원에 이어 처음 치른 참의원 의원 선거에서도 당선되는 게 눈에 띕니다.박 : 앞서도 말했지만, 김장섭은 어릴 때부터 수재로 소문이 파다한 인물이었지. 일본에 유학해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를 졸업하고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어. 일제강점기 때부터 판사·검사를 했고 1954년에 서울지검 검사장을 했지. 제1공화국 말기에는 내무부와 농림부에서 차관을 지냈고. 1960년 제4대 총선 보궐선거에서 자유당 공천으로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하는데 4·19혁명 후에 참의원 의원에도 당선되지. 1963년 6대 총선과 1967년 7대 총선에서도 민주공화당 공천을 받아 당선되는데, 포항, 영일 지역에서는 4·19와 5·16을 거치면서 정치 생명을 이어간 거의 유일한 인물이야. 오천중학교와 동해중학교를 설립하기도 했어. 일 처리가 깔끔하고 점잖아서 시중의 평가가 좋았지.임 : 선생님은 김장섭과 인연이 없습니까?박 : 젊은 날에 친구인 이대공이 김장섭의 둘째 아들인 김종원과 인사를 시켜주더군. 한때 김종원과 가깝게 지냈지.임 : 제5대 민의원 의원을 지낸 최태능은 어떤 인물입니까?박 : 흥해 출신으로 휘문고를 나왔지. 서울에서 학교를 다녀 인맥이 넓었고 주변 사람에게 후해 인심을 많이 얻었어. 제헌의회 때부터 4대 민의원까지 영일군 갑구에서 계속 출마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4·19 후에 5대 민의원 의원 선거에서 처음 당선되지. 하지만 5·16이 일어나면서 국회가 해산되는 바람에 국회의원 임기가 불과 9개월 정도밖에 안 돼. 그 후 흥해중학교 재단 이사장을 맡아 인재 양성에 힘쓰지. 1963년 11월 26일 제6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된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정당별 비례대표제가 도입되고 지역구 의석은 감소되며, 지역사회에서는 포항시, 영일군, 울릉군을 합해 국회의원 1인을 선출하게 된다. 이 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 김장섭 후보가 당선되었다.임 : 1967년 5월 3일 제6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당선되고, 그해 6월 8일 제7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됩니다. 포항에서는 민주공화당 김장섭, 민중당 하태환, 신민당 최원수, 민주당 이상면이 출마해 김장섭이 당선되는군요.박 : 포항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이 출마해 선거가 치열했지. 유권자들 입장에서는 볼만한 선거였어. 득표 차이도 얼마 나지 않았고.이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김장섭 4만 7천868표, 민중당 하태환 3만 9천488표, 신민당 최원수 2만 411표, 민주당 이상면 1천361표를 득표해 김장섭이 당선된다. 김장섭이 종합제철 공장을 월포에 유치하겠다는 공약을 1번으로 내건 게 이채롭다.임 : 제7대 선거에서 비례대표를 선출하는데 포항 출신인 민주공화당 이성수가 순위 23번으로 당선됩니다.박 : 이성수는 대송 사람이지. 어릴 때 별명이 장개석이었어. 그만큼 머리가 좋았다는 이야기지. 대송국민학교 다닐 때 담임 선생님이 바쁘거나 몸이 아프면 이성수가 대신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해. 당시에는 교사가 부족해서 1년 단기 국민학교 교사 단기 양성소가 있었는데 이성수는 그곳을 거쳐 국민학교 교사를 하다가 다시 중등 교사 양성소를 거쳐 중등 교사도 했지. 그러다 6·25전쟁이 터지고 서울대학교 사범대에 들어갔어. 그 당시 학번을 6·25학번이라고 불렀지. 이성수는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지역구로 나와 또 한 번 당선돼. 1981년 선거는 포항시, 영일군, 울릉군을 한 선거구로 묶어 2명을 선출하는 중선거구로 치르는데 민주정의당 이진우 1위, 한국국민당 이성수가 2위로 당선되지. 이성수는 공부 욕심도 많고 일 욕심도 많은 사람이었어.임 : 이진우 의원 이야기가 나왔는데 박이득 선생님께서 한때 모셨던 인연도 있고 이야깃거리가 많은 분이지요?박 : 포항국민학교 다닐 때부터 1등을 도맡아 한 수재였지. 공부만 잘한 게 아니라 음악도 잘했고 글도 잘 썼고 외국어에도 능통했지. 다방면에 뛰어났지. 이명석 선생의 장남으로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한 후 서울 영등포지청과 경주지청에서 근무했어. 경주지청에 5~6년 근무했는데 그때 포항 사람들이 이진우 검사 덕을 좀 봤을 거야. 가끔 포항에 오면 사진작가 박영달 선생이 운영하던 청포도다방에 들러서 단골이던 부친과 한흑구 선생에게 깍듯이 인사했지.임 : 이진우 의원이 음악에도 조예가 있었습니까?박 : 서울에서 연합 성가대 지휘를 맡기도 했어. 피아노, 클라리넷, 색소폰, 나팔 4개 악기를 다루었고. 과거 포항시민의 노래와 포항고등학교, 포철공고 교가도 작곡했지. 특히 포항시민의 노래는 이명석 작사에 이진우 작곡이야. 부자지간에 작사 작곡을 한 거지. 그 노래는 유명한 음악가인 박태준이 심사해서 선정되었어. 문장도 정확하고 글솜씨도 뛰어났지. 후배 검사가 쓴 글에 일본어 잔재가 보이면 “문장이 그게 뭐냐. 국어 공부 좀 해”라고 나무라기도 했어. 국어순화운동을 하기 위해 전국 강연을 다니기도 했고. 수필집도 여러 권 냈는데, 그의 수필 ‘눈을 들어 하늘 보라’는 아름다운 작품이야. 이진우는 제11대, 제13대 총선에서 민주정의당 공천을 받아 당선되었으며, 민주정의당 정책위의장, 청와대 정무제1수석비서관, 제14대 국회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임 : 많은 정치인이 있습니다만 사정상 한 분만 더 하고 정치 이야기는 마무리했으면 합니다. 이기택 의원도 잘 아시지요?박 : 7선 의원을 한 큰 정치인이지. 청하국민학교 5학년 때 부산으로 이사 갔어. 고려대학교 학생회 회장을 하고는 큰누나와 자형이 경영하던 태광산업에 들어갔지. 그리고 1967년 7대 총선에서 신민당 비례대표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이 돼. 만 29세 때 국회의원 배지를 단 거야. 비례대표로 당선되었으니 다음 선거는 지역구를 노리지 않겠어. 이기택이 원래 염두에 둔 지역구는 고향인 영일군이었지. 그래서 나를 포함해 포항 출신 몇 사람을 부르기도 했어. 그런데 8대 총선을 앞두고 신민당 내부 사정으로 부산 동래구에 출마하게 된 거야. 여기서 당선되고 9대, 10대에도 잇달아 당선되면서 부산과 신민당을 대표하는 정치인이 되었지. 박이득1941년 포항에서 태어나 서울 인창고를 졸업하고 건국대 국문학과와 계명대 무역대학원을 수료했다. 포항 동지고 국어 교사, 포항 MBC PD·기자, 영남일보 기자를 거쳤으며, 한국예총 포항지회장, 경북문인협회 부회장, 한흑구 선생 문학비 건립추진위원장, 포항독립운동사 발간 추진위원장을 역임했다. 수필가로 월간문학, 포항문학 등에 작품을 발표했고, 제1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 최세윤 의병장 기념사업회 이사장, 포항문화원 부설 포항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을 맡고 있다.대담 : 임종석(경북매일신문 부사장) / 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

2021-10-24

공단도시에서 숲의 도시로 거듭나는 ‘구미’

구미시가 ‘전자산업도시’, ‘회색공단도시’라는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치유의 도시’, ‘숲의 도시’로 거듭난다.구미시는 1960년대부터 한국산업의 기틀을 마련하며 한국의 고속성장을 이끌었다.이로 인해 금오산, 천생산, 태조산 등과 낙동강이 관통하는 천혜의 자연환경에도 불구하고 산업도시라는 이미지에 가려져 있었다. 이런 구미가 최근 산림청·한국산림복지진흥원 주관으로 처음 실시한 2022년 녹색자금 지원 ‘치유의 숲’전국 공모 사업에 경북도 대표로 응모해 최종 선정됐다. ‘산업도시’, ‘공단도시’로만 알려졌던 구미가 ‘치유의 숲’ 전국 공모에 선정된 것은 구미가 이제서야 천혜의 자연환경을 알릴 수 있다는 의미로 그 의의가 깊다.특히 코로나19 장기화로 지친 심신에 산림치유가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가 연이어 발표되고 있어 구미의 ‘치유의 숲’은 더욱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이에 본지는 구미가 준비하고 있는 ‘치유의 숲’이 어떤 것인지 알아봤다. ◇구미시, ‘치유의 숲’ 전국 공모사업 최종 선정코로나19와 급속한 고령사회 등으로 늘어만 가는 산림치유와 휴양문화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다양한 산림휴양시설 확충사업에 총력을 기울여왔던 구미시가 최근 ‘치유의 숲’ 전국 공모사업 최종 선정돼 시민 모두가 함께 누리는 행복한 산림복지 구현에 한발 더 다가섰다.이번 공모사업은 복권 수익금 재원으로 마련된 녹색자금으로 조성된다.녹색자금은 산림의 기능을 증진하고, 가치있는 산림자원 등 공익적 사업 조성을 지원하는 목적으로 운영된다.구미시는 이번 전국 공모사업에 경북도 대표로 응모해 1차 서류심사, 2차 현장심사, 3차 발표심사(PPT) 등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전남 신안군과 함께 최종 선정됐다.구미는 입지여건·접근성·자연환경·기반 인프라 등에서 최고의 점수를 받았으며, 사업 계획의 적정성, 관리계획의 구체성 등과 구미시의 적극적인 의지와 기관장(시장)의 관심도 분야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구미시는 이번 ‘치유의 숲’선정으로 마련된 총 사업비 70억원(녹색자금 60% 42억원, 도비 12% 8억4천만원, 시비 28% 19억6천만원)으로 선산읍 노상리 일원 시유지 50㏊에 시민들의 심신치료, 휴양, 힐링 등 복합적인 녹색공간을 조성할 계획이다. 사업기간은 2022년부터 2025년까지 4년간으로 기본·실시설계 2년, 시공 2년으로 추진된다. ◇도심 속에 조성되는 ‘치유의 숲’코로나19 장기화로 시민들이 느끼는 스트레스가 점차 늘어남에 따라 숲이 주는 위로, 심신치료, 심리적 안정, 면역기능 강화 등 치유에 대한 숲의 관심도 역시 급증하고 있다. 숲이 가지고 있는 자연환경요소인 경관, 소리, 향기, 피톤치드, 음이온, 물, 광선, 기후, 지형 등이 인간의 신체조직과 생리적·감각적·정신적으로 교감해 심신건강을 증진시킨다는 연구결과가 연이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또 숲에서의 이뤄지는 각종 체험프로그램은 긍정적인 감정을 증가시켜 우울 수준을 낮추고 스트레스 호르몬 감소, 면역력 증가 등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이러한 ‘치유의 숲’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치유의 숲’이 갖춰야 할 조건들도 점차 강조되고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조건이 바로 접근성이다.이에 구미시는 도심과 가까운 곳에 ‘치유의 숲’을 조성해 시민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구미시는 뛰어난 자연환경과 주차장 등과 같은 기반시설 등을 이미 갖추고 있고, 접근성 또한 매우 용이한 선산읍 노상리 산8-2번지 일원(선산뒷골)에 도심 속 녹색 공간과 산림치유가 함께 공존하는 구미만의 ‘치유의 숲’을 조성할 계획이다. 이 곳에는 치유센타, 테마 치유숲(4개), 무장애 숲길 등 현지 여건에 맞는 도심형 복합 숲이 조성된다. ◇테마가 있는 ‘치유의 숲’구미시는 ‘치유의 숲’을 테마별로 다양하게 구성해 각계각층의 시민들에게 맞춤형 산림복지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계획이다.이를 위해 우선 내부시설을 유니버셜 디자인을 적용한 체험실, 건강측정실 등으로 구성된 ‘치유센타’를 건립해 치유의 숲 관리·안내 및 프로그램을 운영할 방침이다.또 △촉각 치유 숲 △바람소리 명상 치유 숲 △향기 치유 숲 △동행의 숲 등 4가지 테마로 구성된 숲을 조성하고, 차별화된 산림치유 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이다.‘촉각 치유 숲’은 숲 구성 요소들을 질감을 손과 발 등 피부로 직접 느낄수 있도록 해 다양한 감각 회복을 통한 스트레스 해소 및 아토피 완화 등에 도움을 주는 공간이며, ‘바람소리 명상 치유 숲’은 바람소리를 들으며 마음의 평화를 찾아가는 공간으로 소규모 편의시설을 함께 설치하며 명상 및 산림욕 등을 즐길 수 있다.‘향기 치유 숲’은 숲속에서 풍기는 산림향인 피톤치드와 좋은 향기를 가진 수종으로 후각적 치유를 하는 숲으로, 향기를 이용한 감정 아로마테라피 프로그램 등을 시행할 예정이다.마지막인 ‘동행의 숲’은 숲을 산책하고, 관찰하며 산림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숲으로 조성한다.또 교통약자도 쉽게 접근·이용하도록 휠체어 교행을 고려한 무장애 데크로드를 설치한다.◇차별화된 구미만의 산림치유 프로그램 운영구미시는 이번 ‘치유의 숲’에 구미만의 차별화된 산림치유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다.우선 국내 최대 산업단지를 보유하고 있는 구미의 특색에 맞게 기업체 노동자 맞춤형 쉼(休) 치유프로그램을 개발한다. 산림치유가 각종 공해와 환경오염, 소음과 같은 환경적 스트레스와 직업 환경에 따른 직무 스트레스 등을 해소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여러 연구결과가 있기 때문이다.이에 구미시는 산업단지 내 기업체와 MOU를 체결해 노동자들에게 산림복지서비스 등을 지원할 방침이다.또 일반시민들을 위해 가족과 함께하는 소통·화합 프로그램, 학생들을 위한 다양한 신체활동 치유 프로그램으로 신체적·정서적 성장과 안정을 선사할 예정이다.이를 위해 전문 산림치유지도사의 컨설팅을 반영한 연령주기별 맞춤형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이용객들의 니즈에 부합하는 구미시만의 차별화된 산림치유 프로그램을 개발·운영할 계획이다.여기에 시민단체와도 협약을 체결해 소외계층을 위한 숲체험과 산림휴양 서비스를 제공한다. 또 숲이 가진 문화적, 인문학적 가치를 발굴하고, 이를 다양한 산림휴양서비스와 접목해 숲에서 시민들이 건강과 함께 정서적 충만감도 느낄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장세용 구미시장은 “코로나19 상황이 오랜 기간 지속되는 국가적 재난 상황 속에서 이번 산림청 녹색자금지원 공모사업 ‘치유의 숲’선정은 구미시민들의 삶의 희망과 여유의 안식처를 만들기 위한 시민들의 염원이 함께 어우러진 값진 결과”라며 “앞으로도 새로운 산림휴양시설 확충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해 시민 모두에게 다양한 산림복지서비스를 제공함은 물론 행복지수 향상과 정주여건 개선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구미/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21-10-24

학령인구 감소… ‘작은학교 자유학구제’로 반전 꾀한다

아이들이 줄어들고, 학교가 사라지면서, 농촌지역 마을들이 점점 더 힘을 잃어가고 있다.실제로 올해 경북지역의 합계출산율(여자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은 1.00명을 기록했다. 이는 현재 인구를 유지하기 위한 합계출산율인 2.1명의 절반 수준에도 못 미치는 수치다. 이미 지역 내 출생아 수는 2018년 1만6천79명에서 2019년 1만4천472명, 2020년 1만2천873명으로 해마다 평균 1천500명씩 급감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경북지역의 출생아 감소 속도는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섰다.출산율 감소는 학령인구의 감소로 이어지게 된다. 학생 수가 감소하면서 경북지역의 폐교 수는 전국에서 2번째로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교육부 통계 자료를 보면 1982년부터 올해 3월 1일까지 폐교된 전국의 초·중·고교는 3천855개교다. 특히 지역 내 폐교 수는 732개교인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전남(833개교)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수치다.이 같은 위기에 직면하자 경북도교육청은 ‘작은학교 자유학구제’를 운영하며 반전을 꾀하고자 노력하고 있다.경북도교육청의 작은 학교 살리기에 대한 모토는 ‘농어촌 소규모학교의 교육여건 개선’, ‘맞춤형 지원을 통한 교육력 회복’, ‘작지만 강한 학교 육성’이다. 글 싣는 순서1. 소멸 위기에 놓인 시골학교의 현실2. 시골학교에서 부르는 희망노래Ⅰ3. 시골학교에서 부르는 희망노래Ⅱ4. 경북도교육청 작은 학교 자유 학구제 명과 암5. 지속 가능한 시골학교 상상 아닌 현실로 □ 작은학교 자유학구제 도입 필요성 대두저출산과 고령화, 도시 집중화에 따른 농어촌 지역의 학령인구 감소로 인해 소규모 학교가 대폭 늘어나고 있다. 농산어촌 지역 작은 학교들의 열악한 교육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작은 학교 중심의 자유학구제 운영 필요성이 커졌다.경북도교육청은 지난 2019년 3월부터 작은 학교 학구를 큰 학교 학구까지 확대·지정해 큰 학교 학생들이 주소 이전 없이 작은 학교로만 전입 가능한 ‘작은 학교 자유학구제’를 만들었다.이에 대해 경북도교육청 관계자는 “학생 수 증대를 통한 작은 학교 활성화 및 지역 사회 붕괴 막기 위한 조치”라며 “적정규모학교 육성으로 통폐합학교의 재통합 방지를 위한 노력”이라고 전했다.자유학구제 대상학교는 ‘작은 학교’의 경우 읍·면 소재지에 위치해 있으면서 60명 이하 또는 초등학교 6학급, 3학급 이하 학교 중 희망하는 학교가 인근의 큰 학교 학구와 묶여 선정된다. ‘큰 학교’는 시·읍 지역에 있으면서 전교생 200명 이상을 유지하는 학교여야 한다. 경북도교육청은 작은 학교에서 큰 학교로 입학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작은 학교로 배정된 학생은 큰 학교에 입학할 수 없도록 했다. □ 작은학교 학구제의 도입자유학구제에 선정되면 학교당 1천만원 이상의 예산이 지원되고, 학교별 특색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다. 올해는 143개교에 총 15억6천만원의 예산을 지원해 운영하고 있다.경북교육청은 지난 2019년 3월 초등학교 29개교를 시범학교로 지정했다. 이후 지난해에는 모두 108개교(초등학교 97개교, 중학교 11개교)가, 올해는 143개(초등학교 123개교, 중학교 20개교)가 참여하는 등 작은학교 자유학구제의 신청을 원하는 학교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작은 학교학구제를 통해 유입되는 학생은 매년 늘어나고 있다. 도입 첫해인 2019년 134명, 2020년 460명, 올해 661명의 학생이 유입됐다. 지난해의 경우 안동 풍산중이 54명으로 유입학생이 가장 많았고, 포항 장기중 22명, 영주 이산초·포항 죽천초 19명이다.□ 작은학교 자유학구제의 효과작은 학교 자유학구제를 운영하면 과밀 학급을 해소할 수 있다. 그 예로 풍천중학구 학생 54명이 올해 풍산중으로 입학을 했다. 이들 학생이 풍천중으로 입학했을 경우 1학년의 한 학급당 평균 29명이 되는데, 이는 읍면 한 학급당기준 인원인 24명을 초과하게 돼 과밀학급이 되어버리는 상황이다. 다행히 이들 학생은 풍산중의 입학을 선호했고, 통학버스 2대를 이용해 통학을 하고 있다.뿐만 아니라 복식 학급(2개 이상의 학년을 한 교실 또는 한 명의 교사에 의해 운영하는 학급)을 해소하는 장점도 있다.실제로 포항 곡강초, 포항 남성초, 경주 연안초, 안동 서후초, 구미 옥성초, 영주 순흥초, 영천 청통초, 상주 은척초, 군위 우보초, 영양 입암초, 봉화 봉성초 등 모두 11개교의 학교가 복식 학급(12학급)이 감소하는 효과를 얻었다. 복식수업이 해소되게 되면서 교사들은 수업에 대한 부담을 줄게 되었고, 수업연구 시간이 더 확보되면서 수업의 질적 수준이 이전보다 더 향상되는 등의 이점이 있었다.특히 포항 장기중학교는 2020년 작은학교 자유학구제 시범학교로 지정된 후 ‘사군자(四君子)’ 교육 프로젝트, 1인 3악기 연주 재능 갖추기, 사제동행 아침 독서 등 특색프로그램 운영으로 지난해 14명이 입학했으며, 올해는 33명의 학생이 배정을 신청해 10여년 만에 1학년이 2학급 체제로 편성되는 성과를 얻었다. □ 자유학구제 완전 정착은 기다림이 더 필요경북도교육청이 최근 실시한 자유학구제 현장 설문조사 결과에서 96.04%가 ‘보통 이상 만족’한다고 답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조사에는 자유학구제 운영으로 큰 학교에서 작은 학교로 유입된 학생 288명, 학부모 486명, 작은 학교 교원 563명 등 총 1천337명이 참여했다. 설문 조사 결과 매우 만족 63.13%(844명), 만족 26.78%(358명), 보통 6.13%(82명)을 각각 차지했다.자구책을 마련한 소규모 학교들이 반전에 성공하는 경우도 있지만, 한계는 여전히 존재한다.설문에 참가한 이들은 ‘불만족’을 선택한 이유로는 통학 시 안전 문제, 상급학교 진학 문제, 교우 관계, 시설물의 노후화, 교원의 업무량 증가와 생활지도의 어려움 등을 지목했기 때문이다.세부적으로 작은 학교의 경우 구기종목과 토론수업에 참여할 적정 규모의 학생수가 여전히 부족하다. 또 학생·학급간 선의의 경쟁체제 이뤄지지 않는 등 교육과정 운영이 곤란한 측면도 있다. 교직원들은 복식수업으로 인한 부담이 크고, 공문처리 건수 과다로 수업연구 소홀 및 수업의 질 하락을 걱정하고 있다.경북도교육청 관계자는 “전교생이 10명 이하인 작은 학교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통폐합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학부모와 학생들의 의견을 많이 수렴해 결정을 하려고 한다”며 “오는 2022년부터 자유학구제에 대한 시행 예산을 1천만∼3천만원 각 학교에 차등 지원해 특색프로그램을 더욱 알차게 만들고자 한다”고 밝혔다./이시라기자 sira115@kbmaeil.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1-10-21

‘순수한 사랑’ 희망 찾으러 청춘들이 온다, 포항으로 온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평소 TV 드라마를 보지 않는 사람이라면 궁금증을 가질 만했다. 포항 외곽 조그만 전통시장에 50여 명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이곳저곳에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모습은 눈에 익지 않은 낯선 광경이었다.포항시 북구 청하면 미남리에 자리한 청하시장은 1920년대부터 형성돼 과거엔 인근 지역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었다. 그러나, 시내에 대형 마트가 우후죽순 들어서면서 갈수록 규모가 축소돼 지금은 5일마다 한 번 열리는 장날에만 예전 기억을 간직한 이들이 찾아오는 조그만 장터. 그곳에 왜 이렇게 많은 20~30대 여행자들이 몰리는 걸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청하시장 입구에서 좌판을 펼치고 오징어를 구워 파는 할머니의 입에서 나왔다.“드라마 때문에 안 그렇나. 쉬는 날에는 사람들이 더 많이 온다.”이전엔 양념한 돼지고기가 맛있는 식당이 있다는 정도로만 알려졌던 청하시장과 인근 월포해수욕장은 요즘 밀려드는 관광객들에 놀라고 있다.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한적한 시골마을까지 먼 길을 마다않고 달려오고 있는 것.최근 종영된 tvN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의 인기에 힘입어 촬영지인 청하시장 일대가 함께 주목받고 있다. 여름부터 지금까지 식을 줄 모르는 열기다.기자가 거길 찾아간 건 지난 18일. 휴일이 아님에도 가족과 커플 단위의 여행객이 눈에 띌 정도로 많았다. 드라마에 등장했던 장소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려는 이들이 줄을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릴 정도였다.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예전에는 없던 푸드 트럭과 크고 작은 좌판들이 생겨났고, 청하시장에서 식당이나 카페를 운영하는 이들은 그 어렵다는 ‘코로나19 시대’에 찾아온 반가운 손님을 맞느라 바쁘게 손길을 놀리면서도 환하게 웃었다. ‘낭만적 사랑’이 이뤄진 공간을 찾는 관광객들젊은이들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끈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에서는 현실적인 깍쟁이 윤혜진(신민아 분)과 무뚝뚝하지만 속 깊은 홍두식(김선호 분)이 만들어가는 좌충우돌 로맨스가 펼쳐졌다.두 사람이 만나는 곳은 가상의 바닷가 마을인 청호시 공진동. 드라마 제작진은 포항 청하시장 일대를 공진동으로 설정하고 촬영을 진행했다. 청하시장에 몇몇의 세트가 만들어졌고, 인근 월포 바다와 한적한 어촌마을도 ‘갯마을 차차차’의 촬영장이 됐다.삶과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 전혀 달랐던 혜진과 두식. 하지만, 잦아지는 만남 속에서 연애감정이 싹트고 결국엔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연인이 된다는 드라마의 전개. 낭만적 사랑이 이뤄지기까지의 과정을 유쾌하게 따라가는 로맨틱 코미디라 할 수 있는 ‘갯마을 차차차’는 주연 배우들과 함께 김영옥, 조한철, 강형석 등 조연을 맡은 배우들까지 맛깔스런 연기를 보여줘 시청률을 높였다. 공진반점, 보라슈퍼, 청호철물, 카페 ‘한낮엔 커피, 달밤엔 맥주’ 등의 간판을 단 가게들은 드라마 제작진이 촬영을 위해 청하시장에 만든 세트.소박한 스타일로 소읍의 분위기를 제대로 살려낸 그 공간은 포항을 찾은 여행자들이 ‘인생 사진’을 남기는 핫 플레이스가 됐다. 어린 딸을 품에 안고 보라슈퍼 앞에 선 젊은 아버지의 웃음이 따스해 보였다.“연차 휴가를 내고 대전에서 왔다”는 30대 연인은 포항이 처음이라고 했다. ‘한낮엔 커피, 달밤엔 맥주’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기다리는 둘에게 물었다.“포항 어때요? ‘갯마을 차차차’의 인기 비결은 뭐였을까요?”“현실에서라면 혜진과 두식의 사랑이 이뤄지기 힘들었을 것 같아요. 그러나, 드라마는 그렇지 않았죠. 순수한 사랑에 대한 긍정과 희망 같은 걸 보여줘서 좋았어요. 오다가 해변에도 들렀는데 포항 바다가 이렇게 예쁠 줄 몰랐어요.” 여행자와 주민들, 서로 배려해 청하시장 인기 이어지길한국의 시골이 대부분 그렇듯 젊은 세대를 보기 힘든 청하시장 주변. 그곳에서 오래 생활해온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은 오랜만에 들려오는 청년들의 웃음소리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질 것도 같았다.그러나, 이것 하나는 잊지 않아야 한다. 관광객들에겐 아주 가끔 찾아가는 공간이 주민들에겐 일상을 영위하는 생활의 터전. 건물의 문을 함부로 열어본다거나, 쓰레기를 버리는 등의 행동은 삼가야 서로 얼굴을 붉히는 일이 없을 것이다.‘갯마을 차차차’는 불륜이나 폭력이 등장하지 않는 이른바 ‘착한 드라마’였다. 그 드라마의 팬들이 찾아오고 있으니 이건 쓸데없는 기우(杞憂)이려나?모처럼 찾아든 활기에 시끌벅적한 에너지로 넘쳐나는 청하시장을 나와 월포해수욕장을 향했다. 승용차로 채 5분이 걸리지 않는 거리다.포항시청은 인기 높은 지역 관광지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는 월포 해변을 이렇게 소개한다.“길이 900m, 폭 70m의 백사장에 하루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 물이 맑고, 수심이 얕아 해수욕을 하기에 좋다. 월포방파제에선 낚시도 가능하다. 남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내려가면 솔밭이 있어 삼림욕도 함께 즐길 수 있다.” 짙푸른 가을 바다 위로 수백 마리의 갈매기가 비상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지는 하얀 포말. 이 역시 도시에선 보기 어려운 낭만적인 장면이었다. ‘갯마을 차차차’의 두 주인공 혜진과 두식의 애정이 깊어가는 공간으로 역할을 한 월포 바닷가에도 적지 않은 여행자들이 드라마가 남긴 여운을 즐기는 중이었다. 그날은 바람이 꽤 차가웠음에도 몇몇은 추위에 신경쓰지 않고 서핑을 하는 여유까지 보였다. 월포해수욕장은 파도타기를 즐기는 이들에겐 이미 유명한 곳이다.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예쁜 카페가 적지 않은 월포 해변. ‘제2의 혜진과 두식’을 꿈꾸는 연인들이라면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드라마 속 장면처럼 알콩달콩 밀어(蜜語)를 속삭여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시간이 넉넉하고 기차가 선물하는 낭만을 좋아하는 관광객이라면 포항에서 동해선 기차를 타고 월포역까지 가보는 것을 권한다. 잠시잠깐이지만 흥미로운 체험이 될 것이다. 역에서 해변까지는 그야말로 지척이다.해변에 도착해서는 혜진처럼 신발을 벗고 한가롭게 바닷가를 산책하거나, 두식처럼 머리칼을 적시며 서핑을 해봐도 근사하지 않을까. 갑갑한 현실에서 벗어나 드라마 속 로맨스 속으로…‘갯마을 차차차’를 따라가는 여정은 청하시장과 월포해수욕장에서 끝나지 않는다.드라마에선 두식이 멀리 푸른 물결 일렁이는 바다를 배경으로 배를 수리하는 모습이 나온다. 놀란 눈빛으로 이를 지켜보는 혜진의 얼굴도 시청자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이 장면이 촬영된 곳은 사방기념공원. 공원은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1960~1970년대 사방사업(沙防事業·산, 강가, 바닷가 따위에서 토사가 유실되거나 붕괴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나무 등의 식물을 심는 사업)에 힘쓴 이들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아니나 다를까. 그곳도 여행자들로 가득했다. 전문가가 아닌 보통 사람이 찍더라도 ‘엽서 같은 사진’을 만들어줄 풍경에 배가 놓인 언덕 위에 오른 연인과 가족들이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혜진의 드라마 속 직업은 치과 의사다. 그렇다면 두식과의 달콤한 로맨스가 만들어지기도 했던 혜진의 병원은 어디에 있을까. 이곳 역시 월포해수욕장에서 멀지 않다. 청하면 해안 도로를 따라가다 보니 청진3리 어민복지회관을 세트로 개조한 ‘윤치과’가 나타났다.윤치과 앞에도 줄을 서서 자신의 촬영 순서를 기다리는 젊은 여행자가 가득했다. 동네 주민인 듯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생선을 말리며 손자 또래의 관광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멀어진 자신의 청춘을 추억하고 있었을 것이다.여기까지 둘러보고도 ‘갯마을 차차차’와 헤어지기 아쉬운 사람이라면 드라마의 또 다른 촬영지인 곤륜산과 구룡포 석병리를 찾아가면 된다. 그리고, 하루쯤은 파도 소리가 잠을 깨우는 포항의 해변 숙소에서 묵어가면 어떨까.이미 막을 내렸지만 ‘갯마을 차차차’ 열풍은 아직 진행형이다. 갑갑한 현실과 일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드라마 속 로맨스의 공간을 찾는 여행자들의 발길 또한 한동안 이어질 게 분명하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10-20

‘검정고무신’·‘달려라 하니’… 추억의 한국만화

2천년대 이전을 살아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오전 8시께 텔레비전 앞에 앉아 눈 앞에 펼쳐진 화려한 그래픽의 향연에 입을 벌리고 손뼉을 쳤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도 아니라면 케케묵은 냄새가 나는 만화방에서 수십권의 만화책을 쌓아놓고 자장면 곱배기 한 그릇을 냅다 해치웠던 기록이라도 말이다. 하물며 만화책 종이종이에 묻었던 이물질이 그리 더럽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 역시.현대 한국 만화의 효시는 1909년 6월 2일에 창간된 ‘대한민보’ 창간호에 실린 ‘삽화’라는 이름의 1칸 만화이다. 일종의 만평인 셈이다. 해당 만화는 화가 이도영이 그렸다. 한 전문가는 말했다. “아마 이도영의 만화를 처음 본 사람들은 신기했을 겁니다. 앞다투어 신문을 펼쳐든 사람들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신문 기사가 아니었으니까요. 바로 1면 중앙에 배치된 독특한 그림. 한 칸을 가득 채워 그린 개화기 신사의 모습과 인물에서 뻗어나온 선을 따라 쓰여진 글자들이죠. 그것이 바로 최초의 만화였습니다. 일본의 내정간섭이 극도에 달하며, 국민들의 불안감이 높아가는 가운데 애국단체 대한협회가 발간한 ‘대한민보’ 창간호가 파격적인 선택을 한 것이죠.”우리나라 시초 만화의 내용은 이랬다. ‘국가 정세를 바르게 이해하고, 한민족의 혼을 통합하여 백성의 목소리를 모아 보도 내용을 다채롭게 하겠다’다만, 한국 역사상 최초의 만화는 지난 1990년 충북 선산에서 발견된 의열도(義烈圖)로 여겨진다. 의열도는 조선시대 초 1745년, 선산의 부사였던 권상하가 지역에 내려오는 각종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서민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일부 이야기는 그림으로 묘사했다. 이 중 주인을 구한 소 이야기를 담은 의우도와 주인을 구한 개 이야기를 담은 의구도는 사실상 4컷 만화다. 하지만 의열도는 어디까지나 최초의 한국 만화였을 뿐, 다른 작품으로 이어지는 뿌리가 되거나 훗날 한국 만화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 만화의 시초라고 보긴 어렵다. □ 그후 100년, 한국 만화 산업은 세계 5위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세계 만화 시장의 규모는 78억7천800만 달러(약 9조2천억원)로 추정됐다. 이것도 순수한 만화 콘텐츠 시장 규모만 따진 것이다. 여기에 지식재산권(IP)과 부가가치를 합치면 웹툰 시장 규모는 훨씬 더 커진다. 물론 지식재산권 전체 만화 콘텐츠 시장의 절반 이상인 40억1천800만 달러를 일본이 차지할 것으로 예상됐다. 2위는 마블코믹스와 DC코믹스의 본고장인 미국(10억2천700만 달러·약 1조2천억원), 3위는 인구 대국인 중국(8억6천만 달러·약 1조100억원)이 차지했다. 한국은 2018년 3억1천300만 달러로 6위였지만, 2019년에는 5위로 올라섰다.“아마도 뿌리 깊은 천시 때문일 겁니다. 과거에도 글자를 모르는 백성에게 그림으로 교화한다는 사상이 있었잖아요. 만화 역시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보는 것이라는 풍조가 있었죠.”실제로 만화에 대한 저질시비는 상당히 뿌리깊은 악습이었다. 1920년대 조선일보에 4컷 만화 ‘멍텅구리’ 시리즈를 연재했을 때에 일부 식자층에게 ‘어른들을 단순 사고만 해대는 바보처럼 묘사하고 미련하게 표현했다’는 식으로 만화의 저질성이 지적된 바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비판은 상업 어린이 만화 시대가 도래한 1948년 7월 5일에 발행된 잡지 ‘백민(白民)’에 실린 수필가 양미림의 글 ‘만화시비’였다.「끝으로 결론삼아 몇 가지 만화에 대한 공통된 시비를 요약해 말해보면 첫째로 그 제재가 허무맹랑한 것과 미신적 내지 비과학적인 내용인 점이며 그 위에 또 회화예술의 소양이 매우 부족한 솜씨로 그려진 졸렬한 색채. 제멋대로의 사투리와 한글 철자법 사용 등이다. 감수력이 강렬하고 예민한 청소년들에게 주어지는 더구나 정화가 아닌 만화그림인 즉, 그 저작자와 출판자는 잘 팔리는 데만 정신이 팔리지 말고 모름지기 그 영향의 결과까지를 고려에 넣는 양심적 출판행동을 해야 할 것이다. (양미림의 ‘만화시비 중에서’)」하지만 2021년 현재 한국 만화 시장은 평균 1.5% 이상의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더욱 그러하다. 만화 시장 상위 10개국 중 가장 높은 성장률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기도 하다. 특히, 한국 웹툰사들의 수출 성과가 가시화하고 있다는 점이 기대 요인이다. 웹툰은 한국이 개발해 해외에 진출한 플랫폼이라 한국 기업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한국이 선점한 시장이기 때문에 시장이 형성되면 한국이 차지할 파이가 크다.업계 관계자는 “해외 디지털만화는 종이만화를 단순히 모니터로 옮긴 형태로 소비돼 왔지만 한국 웹툰은 모바일 환경에 최적화한 플랫폼을 선보였다”고 설명했다.“지금 이현세나 박봉성, 허영만 등 만화가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전선욱, 주호민, 이말년 등의 이름은 젊은층 사이에서 유명하죠. 이들의 수익도 상상을 초월합니다. 일부 인기 작가들은 강남에 빌딩을 가지고 있다고도 하더라구요.” 2008년 서울 강동구 주민등록증을 받은 달려라 하니. □ 코끝을 간지르는 추억의 만화아기공룡 둘리와 달려라 하니, 천방지축 하니, 떠돌이 까치 등 우리의 눈과 귀를 브라운관 앞으로 모이게 하는 것들은 많이 있었다. 지금도 일부 사람들은 유튜브 등 동영상 스트리밍 사이트를 통해 과거의 추억에 젖어들고는 한다. 웹툰이 만화 시장을 접수한 2천년대 이후의 추억은 영화나 드라마로 나타났다. 인기 웹툰이 영화화되고 드라마화된 것이다.지난해 글로벌 인기 웹툰 ‘여신강림’은 동명의 드라마로 첫 선을 보였었고, 글로벌 누적 조회 수 12억뷰를 자랑했던 웹툰 ‘스위트홈’은 넷플릭스에서 인기를 끌었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JTBC 월화드라마 ‘선배, 그 립스틱 바르지 마요’는 네이버 시리즈 웹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이외에도 웹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은 지난해 9월 영화 ‘신과 함께’ 제작사 리얼라이즈픽쳐스와 극장용 장편 영화 5편 제작에 대한 판권 계약을 맺었다.그렇다면 우리의 추억을 자극할 수 있는 만화는 어떠한 것이 있을까. 우선 ‘검정 고무신’은 어떠할까. ‘검정 고무신’은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1969년을 배경으로 기영이와 기철이 형제의 풋풋한 성장 이야기를 들려주는 가족 만화다.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됐다. 이영일(필명 도래미)이 스토리를 쓰고 이우영이 그렸다. 1992년 소년 챔프에 연재된 이후 2006년까지 연재해 한국 코믹스 만화 사상 최장수 연재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특이한 것은 아동용 만화임에도 불구하고 “엄마 나 군대가”, “으~ 술이 안 깨”, “진노 쓴물”과 같은 말이 등장한다. 3기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편에서는 도승이가 기철이에게 껌과 초콜릿을 줘서 계급이 상승하는 장면 등 풍자적인 모습도 나온다.‘달려라 하니’는 이진주 작가가 그린 순정만화다. KBS에 의해 만화 영화화된 초기 방송용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읜 소녀 주인공 하니가 역경을 딛고 육상 선수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만화는 86년 아시안 게임과 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둔 시점인 1985년부터 1987년까지 만화 잡지 ‘보물섬’에 인기리에 연재됐으며, 1988년 만화영화가 되었다. 특이한 것은 해당 만화의 출판사가 육영재단이라는 점이다.2천년대 이후에는 만화보다는 웹툰이다. 요사이 만화는 웹툰과 동의어로 쓰이는 것 같기도 하다. 2천년대 이후 웹툰의 추억은 무엇이 있을까.호연 작가의 ‘도자기’는 수묵화 같은 느낌의 필치와 아기자기한 그림체로 한국의 도자기에 관해 다루는 웹툰이다. 단순한 그림체가 주는 편안함과 섬세한 내용이 주는 잔잔한 감동, 기발한 상상력으로 풀어가는 도자기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2007년 1월에 연재를 시작해 9월까지 총 93화로 완결됐다.군대 생활을 기반으로 한 웹툰도 빠질 수가 없다. 그 시초격이라고 할 수 있는 ‘꾸나꼬무이야기’는 작가 겔부가 2006년부터 2012년까지 스포츠 투데이에 연재한 웹툰 형식의 만화다. 요사이에는 넷플릭스에서 드라마화된 ‘디피(D.P.)’도 화제다. ‘디피(D.P.)는 작가 김보통의 원작 웹툰 ‘디피: 개의 날’을 기반으로 한다./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1-10-19

하태환, 문달식… 짧지만 강렬한 발자취

1952년 개헌에서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가 채택됨으로써 국회는 민의원과 참의원으로 나눠지지만, 1954년 5월 20일 제3대 선거에서는 민의원 의원을 선출하는 선거만 실시된다. 이 선거에서 정당 공천제가 처음 실시되는데 자유당이 제1당, 민주국민당이 제2당이 된다. 임 : 1954년 제3대 민의원 의원 선거에서 영일군 갑구에서는 박순석, 을구에서는 김익로가 자유당 공천을 받아 당선됩니다. 하지만 포항은 무소속의 하태환(41·일본 리쓰메이칸대학 법문학부 졸·동지상고 교장)이 자유당 공천을 받은 김판석 의원을 누르고 당선되는 이변이 일어납니다.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박 : 당시 선거판이 치열했고 자유당 횡포가 심했어. 하태환은 제헌의원 선거와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영일군 을구에 출마하지만 제헌의회 때는 사퇴하고 제2대에서는 낙선의 고배를 마시지. 하지만 하태환은 보통 인물이 아니야. 어려운 형편에 일본 유학을 다녀왔고, 한쪽 다리가 불편한 몸으로 동지교육재단과 포항대학을 세웠지. 그리고 정치에 뛰어든 사람이야. 위트와 유머가 넘치고 선거에는 귀재였어. 타고난 정치인이 아닌가 싶어. 1954년 선거 막판에 묘한 일이 벌어져. 하태환 후보의 선거운동용 차량이 사라진 거야. 몸이 불편한 사람이 차량이 없으니 선거운동을 어떻게 하겠어. 난리가 났지. 그런데 그 차량을 사흘 만엔가 동빈내항에서 건져낸 거야. 이 사건 때문에 포항이 시끌벅적했어. 선거 막판에 대형 이슈를 만들기 위해 하태환 측에서 자작극을 벌였다는 소문이 돌았어. 하지만 내 판단에 그 소문은 헛소문이야. 몸이 불편한 하태환 후보가 스스로 차량을 수몰시켰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지. 여하튼 그때 무소속이 자유당을 누르고 당선된다는 것은 굉장한 사건이었어. 하태환은 국회의원 당선 후에 자유당으로 옮기고 국방위원장이라는 노른자위 상임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지. 하지만 4·19혁명 후에 정치적 날개가 꺾이고 말아. 당시 선거 상황을 ‘포항시사’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이 선거에서는 집권 자유당이 공천한 후보자를 당선시킬 목적으로 무제한의 공권력이 동원되었다. (중략) 심야에 후보자의 선거운동용 차량이 동빈동 항만에 수장되는 보기 드문 사건이 일어났으며 선거 당일에도 투표 방해와 공공연한 무더기표 투입 등이 있었다. 그러나 지나친 물리적 관권 개입이 민심을 극도로 자극하여 많은 시민이 탄압받는 후보자를 동정하고 그 선거운동을 자원하는 사람이 속출하고 지지세가 급증하여 선거는 예상 밖의 결과를 낳았다.-‘포항시사’, 1999, 534∼535쪽.임 : 하태환이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던 것은 선거에 이점이 되었겠습니다.박 : 내가 그때 동지중학교 3학년이었어. 선거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될 때였는데 담임 선생님이 종례하면서 저녁 먹고 학교로 나오라고 하는 거야. 누군가 학교에 불을 지른다는 소문이 돌았거든. 자유당 횡포가 심해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었어. 투표일에는 오전 수업을 마치고 투표소 주변을 돌기도 했지. 동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투표소를 어슬렁거리면 상대측에서 겁이 났을 거야. 학생들은 한마음으로 우리 학교 선생님(하태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임 : 포항시 선거구 낙선자 중에 소방서장 문달식(37·포항수산대 졸)이란 인물이 있습니다.박 :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소방서장을 했지. 수산업도 꽤 크게 했고. 무엇보다 유도에 큰 발자취를 남겼어. 유도 6단이었거든. 대한유도회 창설의 근간을 만들었고 포항에 유도를 도입했지. 덕분에 포항이 유도가 아주 강한 도시가 되었어. 1967년 도쿄 유니버시아드대회 라이트헤비급에서 은메달을 획득해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대한체육회장을 지낸 김정행이 문달식의 제자야. 해마다 포항에서 ‘동암(東庵) 문달식 추모 전국유도대회’가 열리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지. 포항시의 초대 민선 시장은 박일천이다. 1952년에 지방자치제가 처음 시행되면서 그해 5월 20명의 시의원이 간접선거로 시장을 선출하는데, 이때 당선자가 박일천이다. 문달식은 1960년 4·19혁명 후 5월 13일 제8대 포항시장으로 취임해 그해 12월 1일 임기를 마친다. 그리고 12월 19일 포항시장 선거에 출마하는데, 이 선거가 시민이 직접 시장을 선출하는 최초의 선거다. 이 선거에서 문달식이 당선되어 제9대 시장으로 12월 30일 취임하지만 이듬해 5·16 군사정변으로 인해 6월 20일부로 사임하게 된다. 문달식은 두 차례 시장에 취임하지만 임기는 13개월 정도에 불과했다.임 : 1958년 5월 2일 제4대 민의원 의원 선거가 실시됩니다. 그 이전의 선거 결과를 보면 1, 2위 득표차가 얼마 나지 않았는데 이 선거에서는 득표차가 굉장히 크게 납니다. 포항시, 영일군 갑·을 3개 선거구 모두 자유당 공천자들이 압승을 거두는 것이지요. 포항에서는 하태환이 재선에 성공하고, 영일군 갑구에서는 박순석, 을구에서는 김익로가 당선됩니다. 그런데 영일군 을구에서 ‘재재선거’라는,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 벌어집니다.박 : 자유당의 횡포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지. 오죽하면 선거를 두 번이나 더 치렀겠나. 민주당에서 김상순(41·하얼빈국립대학 3년 졸) 후보가 등록했는데 무효 처리가 된 거야. 그 바람에 김익로가 압승했지. 그런데 김상순이 등록 무효가 부당하다고 소송을 제기해서 승소해. 다시 치른 선거에서 김익로가 300여 표차로 겨우 당선되었어(김익로 1만 4310표, 김상순 1만 3986표).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야. 김상순 측이 재선거도 불법으로 치러졌다고 소송을 제기해 또다시 선거 무효 판결을 받아냈지. 재재선거는 1960년 1월 23일 실시되는데, 국민 여론이 어떠했겠나. 자유당은 악화된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김익로 대신 김장섭을 공천했고, 민주당도 타 지역 출신인 현석호를 공천했는데 김장섭이 큰 표차로 당선되었지.임 : 당시에 부정선거가 어느 정도 심했습니까?박 : 그때 현장을 취재한 기자가 ‘동아일보’ 이만섭이야. 8선 의원으로 국회의장을 지냈지. 이만섭이 1932년생이니 젊은 시절의 이야기지. 이만섭이 재선거 개표장인 대송초등학교에 몰래 들어갔는데 밤 10시께가 되자 갑자기 전원이 차단되고 투표함에 정식 개표원이 아닌 사람의 손이 막 들어가더라는 거야. 그 장면을 이만섭이 카메라로 찍고는 필름을 교실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동료에게 던졌지. 그 동료는 곧바로 대구 팔공산 송신소로 달렸고, 그곳에서 ‘동아일보’ 본사로 넘겼어. 다음 날 ‘동아일보’에 그 사진이 특종으로 실렸지.당시 상황을 다음의 글이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1958년 5월의 4대 국회의원 선거는 엉터리였다. 대리투표가 비일비재했고 야당 참관인을 쫓아내고 투표함도 바꿔치기를 했다. 부정선거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그해 9월 경북 영일군에서 재선거가 치러졌다. 당시 이만섭은 현장 취재를 갔다. 자유당 정권이 동원한 정치 깡패들이 개표장의 전기를 끊고 모아둔 표 중 민주당 표만 가지고 달아나자 민주당 참관인이 “표 도둑이야!”라고 고함쳤다. 이만섭도 “이 표 도둑놈들아” 하고 외치며 쫓아갔다. 취재만 하면 되는 기자가 울컥하는 마음에 뛰어갔다가 깡패들한테 많이 얻어맞았다. 몇 시간 후 개표가 재개됐다.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사과를 돌리자 이만섭은 분한 마음에 “나쁜 놈들”이라며 사과를 내던지며 항의했다. 그 후 자유당에서 “이만섭이 선거 개표를 방해했다”며 선거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라고 해서 열흘간 피해 다녔다.- 최영훈, ‘영원한 청년, 내가 본 이만섭 의장’, ‘용기와 양심의 정치인 청강 이만섭’, 청강 이만섭 평전 간행위원회, 박영사, 2018, 394쪽.임 : 김상순 후보는 비록 낙선했지만 이만섭 기자가 아주 고마웠겠습니다.박 : 이만섭과 김상순의 우정은 이만섭이 국민당 총재가 될 때까지 이어졌지. 내가 황대봉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있을 때 마침 이만섭 의원이 나를 불러 “자네 포항에서 왔나, 혹시 김상순을 아나?”라고 묻길래 “가끔 인사드린다”고 했더니 옛일을 이야기해주더군. 박이득1942년 포항에서 태어나 서울 인창고와 건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포항 MBC, ‘영남일보’기자를 거쳤으며, 한국예총 포항지회장, 경북문인협회 부회장, 한흑구 선생 문학비 건립추진위원장, 포항독립운동사 발간 추진위원장을 역임했다. 수필가로 ‘월간문학’ 등에 작품을 발표했고, 제1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 최세윤 의병장 기념사업회 이사장, 포항문화원 부설 포항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을 맡고 있다.대담 : 임종석(경북매일신문 부사장) / 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10-19

‘스마트도시’ 달서구, 지속가능한 대구 미래 이끈다

대구미래 변화의 중심에 달서구가 있다.최근 대구는 KTX 서대구역세권 개발사업과 대구시 신청사 이전, 4호선 순환선(트램) 건설로 서남부생활권으로 대구도심이 변화하고 있다.전국에서 3번째로 주민수가 많은 거대자치구인 달서구는 교통, 교육, 주거환경 등 정주여건이 뛰어난 곳이지만, 급속한 도시화에 따른 교통체증, 환경오염 등의 새로운 도시문제에 직면했다.이러한 도심문제는 전 세계적으로 디지털과 그린혁신의 바람을 일으켰고, 우리가 받아들여야하는 진화의 흐름이 됐다.세계뿐만 아니라 전국 자치단체는 디지털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애쓰고 미래성장동력으로 육성하기 위한 노력 중이다.지난해 코로나19 라는 대위기 속에 디지털 혁신정책은 계속 확대 강화해 나가야하는 전략으로 급부상했고, 같은해 7월 정부는 ‘한국판 뉴딜1.0’발표에 이어 올해 7월 14일 한 단계 더 진화된‘한국판 뉴딜2.0’ 추진전략을 발표했다.이에 달서구도 당면한 위기극복 뿐 아니라 지역문제를 선도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체계적 인프라 조성과 탄탄한 민·관·산·학·연 협업체계를 구축해 비수도권 자치단체 중 최초이며 유일하게 세계지식포럼행사에서 ‘2021 대한민국 지식혁신 스마트시티 우수상’을 받았다.지속 성장하는 대구 미래를 위해 대구 중심에 선 달서구는 주민에게 귀 기울이며 동참을 끌어내 대구미래를 선도하는 자치구로서 4차 산업혁명의 대표 아이콘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나갈 계획이다. □ 스마트도시 달서구는 이렇게 준비했다우선, 추진체계와 제도부문 정비를 위해 지난해 7월 대구 기초지자체 중 최초로 스마트도시 전담조직을 신설하고, 이달부터는 스마트도시 전문가 인력풀(30여명)을 구성해 분야별 전문가와 정기·수시회의를 통해 사업발굴 및 미래도시에 대한 비전을 만들어가고 있다.특히, 내부역량강화를 위해 ‘스마트도시 연구 학습동아리’를 구성·운영했고, 자유로운 소통과 토론을 위한 직원 ‘브라운백미팅’을 열었다.또, 사업부서 담당자 역량제고를 위한 전문가 초청 컨설팅 간담회 및 세계스마트시티 엑스포 견학으로 현장체험교육 강화에도 노력했다.지난해말 스마트도시사업에 대한 제도적 근거 마련을 위해 ‘달서구 스마트도시 조성 및 운영 조례’를 지역 최초로 제정했고, 부구청장을 위원장으로 대학, 기업, 공공기관, 연구원, 공무원 등 각계 ICT 관련 전문가 18명으로 ‘달서구 스마트도시위원회’를 구성했다.올해는 달서구형 스마트도시 모델 창출을 위한 중장기 종합계획 수립 등의 내용을 담은 ‘달서구 스마트도시 조성 5개년 계획’을 수립 중에 있고, 주민들이 참여해 삶의 현장에서 다양한 도시·사회문제를 발굴하고 해결에 함께 참여하는 ‘주민참여 리빙랩(Living Lab)’도 운영하고 있다.이밖에도 국내·외 스마트시티 서비스 우수기업 등과 업무협약을 체결하는 등 스마트도시 분야 비즈니스 생태계 활성화를 위해 노력한 결과 현재 달서구는 다양한 첨단 스마트서비스가 제공되고 있다.□ 도심환경을 위한 스마트그린도시 서비스달서구는 지난해부터 다양한 정부 공모사업에 14개 사업이 선정돼 87억원의 국·시비 인센티브 예산을 확보했고, 자체사업으로 26억 규모로 스마트도시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달서구는 도심 한가운데 대규모의 성서산업단지가 위치한 지역 특성을 반영해 드론과 IOT를 활용한 입체적 환경감시망을 구축했다.실시간 미세먼지 측정 및 상황실 운영으로 지난해 7월 행정안전부로부터 ‘우수 적극행정’으로 선정됐다.또한, 2020년 9월에는 행안부·과기부의 협업공모사업에 ‘미세먼지 저감 도출을 위한 지도기반의 미세먼지 및 바람길 모니터링 시스템 구축’사업이 선정되어 앱을 통해 주민에게 미세먼지 농도 및 알림서비스를 제공하고, 모스월·소형분진흡입차량 등 저감장비를 운영해 미세먼지 대응시스템을 구축했다.현재 미세먼지 강창안심구역으로 선정된 호산동 일원에 국·시비 2억원으로 미세먼지 저감사업을 추진 중이며, 지역 내 경로당에는 미세먼지 정보알리미 및 고효율 에너지 공기순환기 등을 설치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 혁신 신기술 활용한 안전도시 구축지난해 7월 국토교통부 ‘스마트시티 통합플랫폼 기반 구축사업’에 선정돼 방범·소방·교통 등 스마트 서비스들을 연계할 수 있는 통합플랫폼을 지역 최초로 구축·완료했다.이에 따라 달서구관제센터 2천여대의 CCTV영상을 경찰서·소방서·재난상황실과 연계해 실시간 영상확인으로 출동시간 단축 및 긴급대응으로 구민이 안전하고 편리한 삶을 누리도록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또한, 특화서비스로 달서안심이 앱서비스, 전통시장 화재알림서비스, 체납차량 위치알림서비스도 추가로 제공하고 있다.이뿐만이 아니다. 올해 3월 선정된 국토교통부 ‘2021년 스마트시티 솔루션 확산사업’은 37억5천만원 규모의 사업으로 어린이 교통사고가 많은 위험예상 지역에 스마트횡단보도 23곳을 설치하고 스마트 버스정류장(쉘터) 4곳과 스마트폴 8식을 설치해 첨단 신기술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이다.아울러, 올해 4월에는 행정안전부 공모사업 ‘주소체계 고도화 및 주소산업 창출 공모사업’에 전국 최초로 선정돼 공원·버스정류장·안심귀갓길 등 주소가 필요한 시설물에 사물주소를 부여해 주민에게 통합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이다.□ 지역경제를 위한 혁신적 노력지난해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진행하는 ‘스마트 시범상가’ 사업에 성서와룡시장이 선정돼 스마트상가(45개 점포)로 거듭났다.비대면 주문·배송서비스와 스마트(디지털) 메뉴판, AR을 이용한 스마트미러 등 여러 스마트 기술을 시장현장에서 접할 수 있게 됐다.올해도 성서아울렛타운, 두류젊음의 광장 상가가 스마트시범상가에 선정돼 지역 특성에 맞는 스마트시스템을 제공할 예정이다.올해 3월부터 대구지역 최초로 네이버 ‘동네시장 장보기’ 사이트에서 서비스를 개시한 서남신시장은 언택트 시대에 맞춰 누구나 쉽게 온라인·모바일로 전통시장을 이용할 수 있도록 쇼핑환경을 제공하고 있다.특히 지역 내 전통시장 중 화재에 취약한 예전우시장, 달서시장, 서남신시장, 와룡시장, 성서용산시장, 상원시장 등 6곳 시장에 스마트 화재알림시설을 구축하고, 스마트시티 통합플랫폼과 연계해 실시간 화재영상 확인 등으로 안전한 전통시장으로 변모하고 있다.더불어, 성서산업단지가 전국 최초 스마트산단으로 지정돼 제조공정혁신 및 창업 지원, 근로환경 개선, 산단 인프라 확충 등 산단 대개조사업이 올해부터 본격 추진돼 달서구에서 제공되는 스마트도시서비스와 함께 시너지 효과를 낼 예정이다. □ 사회적 약자를 위한 스마트 돌봄서비스 제공보건복지부에서 시행하는 응급안전안심서비스사업을 통해 안전 사각지대에 있는 지역 1천634가구에 화재·가스감지센서 등을 설치해 응급상황 발생시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119에 자동신고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달서구 특화사업으로 1인가구 위기상황 예방을 위한 달서안심 돌봄플러스사업은 지난 7월부터 취약계층 66세대에 스마트플러그를 보급해 전력량 및 조도변화 확인으로 안전확인 및 고독사 등 위기를 예방하고 있다.또한, 초등학생대상 구강위생검사 후 검사결과에 따라 맞춤형 온라인 구강보건교육을 제공하는 ‘언택트 구강보건교육’ 서비스사업도 올해 5월부터 지역내 56곳 초등학교 2학년 5천200명을 대상으로 시범 운영 중이다.□ 대구미래는 스마트도시 달서가 선도달서구 스마트도시의 중장기적 비전 및 체계적 추진방향, 스마트도시 미래상, 로드맵 설정, 재원조달방안 등의 내용을 담은 ‘달서구 스마트도시 조성 5개년(2022~2026년) 계획’이 이달말 확정될 예정이다.이 계획을 토대로 달서구는 스마트그린산단을 기반으로 한 청년층 인구유입 확대와 이들의 정주여건 개선을 통해 도시 활력에 노력을 기울일 방침이다.이와 더불어 중앙정부 정책 흐름(데이터 활용, 탄소중립, BIM)에 부합하면서 동시에 데이터 기반 비즈니스 생태계 조성에 선도적 역할을 수행해 나갈예정이다.정부가 지난 7월에 발표한 ‘한국판 뉴딜2.0’의 주요 추진전략인 디지털뉴딜, 그린뉴딜, 휴먼뉴딜 등이 지역균형의 프로젝트로 부상한 만큼 급변하는 전환의 중심에서 달서구 전체 공무원이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해 나가기로 했다.달서구는 미래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내부직원 역량 제고는 물론 주민주도 참여기반 마련을 위한 스마트도시 네트워크 강화 및 소통채널을 구축하는 등 첨단기술을 활용해 주민이 체감할 수 있는 사람중심의 스마트도시 조성에 더욱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이태훈 달서구청장은 “지역사회 발전을 견인하는 스마트 선도 자치구가 되기 위해 전 부서, 전 직원들이 한마음으로 함께 이러한 진화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도록 역량을 집중해 나가겠다”며 “지속 성장하는 대구의 미래를 위해 대구 중심에 선 달서구가 구민 수요에 귀 기울이고 동참을 끌어내 민·관·산·학·연이 함께 만들어가는 ‘대구미래를 선도하는 4차 산업혁명의 아이콘’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언급했다./심상선기자 antiphs@kbmaeil.com

2021-10-18

생태계 복원으로 코로나19를 극복해야 한다

나무는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자신을 지켜낸다. 인간의 역사는 나무와 함께 했다. 나무는 인간보다 먼저 지구에 뿌리를 내렸다. 나무는 숲을 이루었고 숲은 인간의 울타리였다. 나무는 인간에게 조건 없이 베풀었다. 그런데 인간이 숲을 해치고 나무를 배신했다. 그러자 판도라 상자가 열리듯 대역병이 창궐했다.“4차 산업혁명 시기에 코로나19가 함께 온 것은 문명대전환기의 황금시대를 꿈꾸는 인간에 대한 복수다.” 나무에게서 삶의 지혜를 배우고 나무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추구하는 생태사학자 강판권은 생명 가치의 동등성을 주장하며 생태계 복원을 강조한다.가을비가 여름 장마처럼 내리던 날, 계명대 인문국제대학 연구실에서 만난 강 교수는 시내 초등학교 특강에서 막 도착했다며 가쁜 숨을 골랐다. -특강은 예정대로 진행됐나. 비가 오는데도 야외에서 하는 이유가 뭐냐. 학생들에게 교내의 나무를 세어보라고 과제를 낸 이유도 궁금하다.△ 물론이다. 나무를 관찰하는 것이다. 비가 오면 그런 대로 운치도 있고 나무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무를 가까이서 관찰하면서 관찰자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나무를 세기 위해서는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하고 나무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만드는 것이다. 실제 학생들에게 나무 관찰 일기를 쓰게 하면 스스로 변하게 되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는 것, 그래서 자기 자신을 찾게 되는 것이다. 관찰자의 창의성이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나무는 살아 있다는, 그래서 변화한다는 세상의 원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답변이 굉장히 사변적이고 철학적이다. 동양사학을 전공한 인문학자가 나무 공부를 하고 나무 관련 저술을 내고 강의를 한다니 선뜻 연관이 되지 않는다.△ 나무가 자연과학의 대상이어서 인문학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나무는 인문학뿐 아니라 모든 학문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군자에서 보듯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나무를 인문학의 대상으로 삼았다.-스스로를 생태사학자라고 했다. 어떤 학문인가. 또 학생들에게는 어떤 과목으로 강의하며 학생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역사를 생태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생태사학이다. 생태(Eco)는 평등한 ‘관계성’을 뜻한다. 인간의 삶은 자연생태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역사 연구는 정치 경제 사회 등 주로 인문이나 사회 생태만 다룰 뿐 자연생태에 해당하는 식물이나 토양 등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태학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생명 가치의 동등성을 인식하는 것이 생태의식이다. 그래서 역사를 자연생태까지 포함해서 연구하는 나 스스로를 생태사학자라고 부른다.학생들에게는 전공과목으로 동양사를, 교양과목으로 전통생태문화, 숲과 문화, 나무와 선비문화 등 나무와 관련한 강좌를 강의한다. 특히 나무를 인문학적으로 접근하는 교양강좌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은 아주 좋다고 평가받는다.-생태사학자가 보는 나무의 덕목은 무엇인가. 인간이 나무에서 배우는 지혜는 어떤 것들이 있나.△ 나무의 덕목은 아낌없이 주는 존재라는 것이다. 나무에게는 최대의 찬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무가 열매나 목재를 주는 것만으로 이런 평가를 하는 것은 단편적이다. 나무가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이유는 한 순간도 쉼 없이 살아가는 자강불식(自强不息)의 삶의 태도 때문이다. 나무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도 그렇다. 소나무가 늘 푸른 것은 2년마다 솔잎이 떨어지면서 그 푸르름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애쓰기 때문이다. 나무는 어떤 경우에도 피하지 않고 정면 승부하는 자세로 자신의 미래를 개척한다. 특히 인간에게 그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자신의 삶에만 집중하는 경(敬) 공부의 대가라 할 만하다. 이런 태도는 성리학자들이 추구한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실천이라 할 만하다.-도대체 언제부터 인간은 나무에게 기대고 살아왔나. 역사적으로 나무와 인간과의 관계는?△ 인간은 직립보행하기 전에 나무위에서 살았다는 것이 인류학자의 견해다. 나무에서 내려온 인간은 결국 손을 사용하면서 생존 방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인간이 준비한 생존수단은 도구였다. 산업혁명 이전까지 인간이 사용한 도구의 절대다수는 나무였다. 그래서 산업혁명 이전 단계를 ‘목재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지금까지 인류가 만든 청동기, 철기, 의식주 등은 대부분 나무 덕분이었다. 결국 인간의 역사는 나무 없이는 설명할 수 없을 지경이다.-우리는 나무를 어떻게 보고 또 어떻게 대해줘야 하나. 학생들에게는 어떻게 강조하나.△ 근대 이전까지는 대부분 나무를 인간에 대한 효능 가치로 평가한 본초학적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본초학은 식물을 인간과 같은 생명체로 보지 않고 ‘식물인간’이란 말에서처럼 사람보다 못한 존재로 인식한 점이다. 인간의 식물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바로 나무를 생명체로 인식하는 ‘생태의식’이다. 일상에서 늘 만나는 식물을 생명체로 인식하는 순간 경제적으로 한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그러면 나무와 숲과 인간과의 관계는 어떻게 변해왔나. 지금 지구 환경의 위기라는 온난화도 숲과 관계 지을 수 있나.△ 직접 관계있다. 인간의 역사는 도구의 역사이고 이는 곧 숲을 제거한 역사이기도 하다. 인간이 숲을 파괴하고 일군 문명은 매우 화려했지만 그림자도 그만큼 짙었다. 현재 인류가 경험하고 있는 지구온난화는 지구 자체의 변화와 더불어 인간의 행동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결국 유사 이래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현실에 직면한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식의 전환이 절실하다. 무엇보다 인간은 숲이 인간 생존의 기본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코로나19가 세계를 휩쓸고 있다. 생태사학자로서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나.△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의 대전환기는 종전 청동기까지와 비교하면 도구의 변화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18세기말 산업혁명은 이전의 대전환기와 차원이 달랐다. 증기기관이 이끈 산업혁명은 단순히 인간의 삶을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이후에도 엄청난 대전환을 이끌어낸 것이다. 1차 산업혁명이 일어난 지 1세기만에 전기에너지를 기반으로 하는 2차 산업혁명이, 20세기 중엽에는 컴퓨터와 인터넷 기반의 3차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21세기 초에는 IT기반의 4차 산업혁명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불과 250년 만에 일어난 대전환이다.2020년 1월까지만 해도 인간은 4차 산업혁명을 이끈 AI(인공지능), IoT(사물인터넷), 빅데이터, 모바일 등 첨단기술이 경제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데 분주했다. 4차 산업혁명이 인간들의 삶도 좋게 바꿀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 그런데 코로나19가 발생한 것이다.인간이 만들어낸 4차 산업혁명까지의 긴 과정에서 잉태한 현상이다. 4차 산업혁명은 결과적으로 코로나19를 탄생시킨 총결산의 원인 중 하나로 전락한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판도라 상자가 열린 것이다. 코로나19는 지금까지 일어난 문명 대전환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또 다른 대전환 시대를 이끄는 출발점으로 보인다.-코로나19가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인간 역사의 산물이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포스트코로나19의 대책은 어떻게 세워야 하나.△ 처방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코로나19의 발생 원인을 정확하게 규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UN에서 SDG(지속가능발전목표고위급회의)를 개최하고 기후변화에 초점을 맞춘 연구가 속속 등장하는 등 방법을 찾고 있지만 세계 모든 국가에서 코로나19 확산을 막는 데 급급한 모습이다. 세계 각국이 백신 접종을 실시하고 있지만 이는 근본 대책이 될 수 없다.-코로나19의 팬데믹 상황에 인문학자로서 역할이 있나.△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것이 인문학의 역할이라면, 지금 이 시대야말로 인문학자들이 나서야 한다. 자신의 전공이 무엇이든 코로나19와 연결해서 고민해야 한다. 코로나19 시대에 인문학자가 제 역할을 담당하지 않는다면 인문학은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단언한다. ‘축의 시대’ 예수와 공자와 석가가 그러했듯 인문학자들이 그간의 학문적 성과를 총동원해서 축의 시대 선각자처럼 대전환시대에 인류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해야 한다.-코로나19의 대응 방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포스트코로나19 시대에는 무엇보다 방역이 중요하다. 방역은 단순히 백신과 치료제 개발 차원에 그쳐서는 안 된다. 최근 백신 접종이 코로나19 정복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처럼 평가하기도 하지만 접종률이 높은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는 여전히 우리나라보다 신규 환자 발생률이 높다.근본 대책은 원인을 해결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숲의 제거는 코로나19 발생원인 중 하나다. 또 숲의 제거는 기후 변화와도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한국의 지형과 숲은 포스트코로나19 시대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대상이다. 숲을 살리는 길이 생태계를 복원하는 길이고 코로나19를 극복하는 길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나무인문학자로서 개인적으로 코로나19에 대응하기 위한 노력을 한 것이 있나.△ 진행하던 작업을 중단하고 코로나19의 발생 원인과 포스트코로나19의 대안을 제시하는 새 책을 준비하고 있다. 코로나19는 한국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세계가 인정하고 높이 평가하는 K방역의 우수성이다. 주곡인 벼 생산에서 공동 노동과 주식인 밥을 함께 먹는 공동체 문화는 성리학과 함께 공동체를 이념적으로 유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코로나19를 맞아 선방하고 있는 배경 중 하나로 자발적인 마스크 사용과 국가 정책에 적극 동참하는 등의 한국인의 의식 문화는 코로나19를 평가할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까지 이런 분석을 내놓은 사람은 없었다. ◇강판권(60)계명대 사학과 교수, 생태사학자.경남 창녕 출생. 계명대 사학과, 계명대 대학원 역사학과 석사, 경북대 사학과 박사.대구생명의숲 공동대표, 대구사학회 이사 등 활동 경력.연속 올해의 저술상(2010년 숲과 문화회, 2011년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을 받은 ‘역사와 문화로 읽는 나무사전’과 베스트셀러 ‘나무철학’(2015)을 비롯 ‘나무열전’(2007) ‘숲과 상상력’(2015) 등 2002년 ‘어느 인문학자의 나무세기’에서 지난해 ‘위대한 치유자, 나무의 일생’까지 30권의 나무 관련 저서를 냈다.‘한국사 연구의 새로운 동향’(2018) 등 8권의 공저, ‘미국의 중국 근대사 연구’(폴 코헨 저, 2007) 등 7권의 공역서 저술한 동양사학자. 중앙과 지방 방송과 신문 잡지에 특강과 기고 활동도 활발한 전천후 멀티플레이어이자 나무와 인간과의 관계, 나무를 통한 인간의 길 찾기를 모색하는 나무인문학자./이경우 편집위원

2021-10-18

최원수, 변석화… 시대를 앞서간 인물

지혜로운 원로는 그 지역의 작은 도서관이자 박물관이다. 박이득 선생을 만나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선생은 정치, 경제, 문화, 체육 등 다방면의 이야기를 구성진 말솜씨로 풀어냈다. 우선 정치 부문의 이야기를 전한다. 일제강점기, 광복, 전쟁, 혁명, 군사정변 등 역사의 거센 소용돌이를 헤쳐나간 포항 정치인들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통해 오늘의 포항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임종석(이하 임) : 선생님께서는 포항 역사를 가장 잘 아는 원로로 알려져 있습니다. 먼저 정치 분야부터 들어보았으면 합니다. 선생님은 많은 정치인을 지켜보거나 보좌하셨는데 정치를 잘하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박이득(이하 박) : 철이 없다는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시근머리 없다’고 하지. 정치를 잘하려면 ‘시근머리’가 있어야 해. 역사를 통찰할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하고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냉철하게 살펴볼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해. 물론 그게 쉽게 될 리는 없겠지. 내가 여러 정치인을 모셨는데, 그들이 부족한 점을 둘러보게 하게나 보듬어주는 게 내 일이었어.임 : 그럼 본격적으로 정치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948년 5월 10일에 제헌의원 선거가 실시됩니다. 현재 포항시에 해당하는 당시 영일군 갑구·을구 선거구에서 의원을 선출하게 되지요.박 : 제헌의원 선거는 처음 하는 선거라 비교적 조용히 치른 편이지. 2대 선거부터는 출마자도 많고 양상도 복잡해져. 육거리를 중심으로 영일군 갑구와 을구로 나누었는데, 갑구는 박순석, 을구는 김익로가 당선되었어.제헌의원 선거는 정당정치가 틀이 잡히지 못해 전국적인 조직을 갖춘 정당은 한국민주당(약칭 한민당)뿐이었고, 사회단체들이 정당과 유사한 성격을 띤 채 치러졌다. 영일군 갑구 당선자 박순석(45·무소속)은 경성신학교를 졸업한 목사였고, 김익로(44·무소속)는 소학교 졸업 학력의 신문국장이었다. 박순석은 2대 선거에 낙선한 후 3대·4대 민의원 선거에 당선되며 3선 의원이 되고, 김익로는 2대·3대에 잇달아 당선되며 역시 3선 의원이 된다.박 : 박순석은 지역에서 정치에 진출한 최초의 기독교계 인물이 아닌가 싶어. 김익로가 열정적인 활동가였다면 박순석은 점잖은 편이었지. 국회의원이 된 김익로는 지략이 뛰어났어. 당시에 땔감이 부족하니까 사람들이 산에 가서 나무를 베고는 했지. 그러다가 경찰에 걸리면 파출소로 연행되었어. 김익로가 그 소식을 듣고는 파출소를 찾아다니며 “시골 사람들이 생나무라도 베어야 먹고살지”라며 풀어주라고 했다는 거야. 그 장면을 보며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겠어. 국회의원은 저렇게 해야 한다면서 김익로를 칭송했지. 김익로가 국회의원이 되어 가장 잘한 일은 영일중학교를 설립한 거야. 나중에 최상하 선생이 학교를 인수해 더 번듯하게 키웠지. 김익로가 또 잘한 일은 국책사업으로 오어지(吾魚池)를 만든 거야. 오어사와 보경사는 포항을 대표하는 고찰(古刹)이잖아. 못을 막아 오어지가 조성된 덕분에 오어사의 경치가 더욱 수려해지고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지. 나중에 항사(恒沙) 위쪽으로 못을 막았는데, 그것이 오천(烏川) 주민들의 식수원으로도 쓰였어.임 : 1950년 5월 30일에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됩니다. 제헌의원 임기가 2년으로 정해졌기 때문이지요. 당시 지역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데, 1949년 8월 15일 포항읍이 시로 승격된 것입니다. 기존의 영일군 갑구·을구에 포항시가 더해져 선거구가 3개가 됩니다. 13명이 출마한 포항시 선거구에서는 대한청년단의 김판석(30)이 당선되고, 8명이 출마한 영일군 갑구에서는 최원수(39)가, 역시 8명이 출마한 을구에서는 김익로가 당선됩니다. 이 중에 최원수라는 인물이 눈에 띕니다. 그는 일본 리쓰메이칸대학(立命館大學) 예과 2년을 중퇴했고 영일군수를 지냈으며, 포항신문사 사장을 맡았더군요.박 : 일제강점기 때 포항에서 머리 좋기로 소문난 두 명이 있는데 최원수와 김장섭이지. 최원수는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인 경성제1고보(京城第一高普)를 다녔는데 졸업은 못 했어. 이상(理想)이 높은 큰 지도자 타입이지. 죽장중학교와 기계중학교 그리고 청하중학교의 전신인 해아(海阿)중학교를 모두 최원수가 설립했지. 점잖은 분이었고 하태환과는 먼 친척이었어. 2대 선거에 당선된 후로는 번번이 낙선하고 말아. 이 지역에서는 정치적으로 비주류였기 때문이지. ‘포항시사’에 소개된 최원수의 행적이 범상치 않다.당시 경성고등보통학교 입학시험에 수석으로 합격되었다고 하니 파격의 대경사로 흥해 고을이 떠들썩하였다. 3년간 수학하다가 가정형편이 여의치 못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학교를 중퇴한 후 고향에 돌아와서 손에 책을 들지 않는 날이 없었다고 한다. 그 부친 최봉래 공(公)이 “내가 한약의생 경영하니 너도 한약방을 경영하여 나의 후계자로 양성하고저 한다”고 타이르니 20세 미만의 소년이 “아버지는 사람의 병을 고치는 데 전념하십시오. 저는 이 나라 이 세상의 병을 고치는 데 전념하겠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역시 그 포부를 알 만하다고 할 것이다. (중략)영일군수로 재직할 때 포항시 승격 추진 운동을 전개하여 이일우, 박동주, 박일천 등과 더불어 시 승격 진정차 상경하니 내무부 어느 국장이 농담조로 “포항읍이 시로 승격되면 영일군수의 산하에서 이탈 행정구역이 독립되는데 군수가 솔선하여 시 승격 운동을 하러 상경하여 진정하는 예(例)는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어찌 최 군수는 앞장서서 진정을 하러 다닙니까” 하고 물으니 최원수 군수가 말하기를 “내가 백 년 동안 영일군수로 있는 것도 아닌데 포항은 내 고장이라 영일군의 발전보다 포항이 시가 되어 번영하는 것이 국가백년지대계를 위하여 바람직한 일”이라고 대답하였다. ‘포항시사’, 1987, 879∼880쪽임 :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살펴보면 포항시, 영일군 갑·을 3개 선거구에 모두 29명이 출마합니다. 그중 유일한 여성 출마자인 변석화(41)라는 인물이 궁금합니다.박 : 포항시 선거구에서 출마했다가 낙선했는데 포항 최초의 여의사지. 남편이 역시 의사인 김두수라고, 포항시의사회 회장을 여러 번 했어. 변석화는 말솜씨가 탁월했는데 그만큼 명석한 인물이었어. 선거 유세장에서도 뛰어난 언변으로 분위기를 압도했다고 소문이 자자했지. 그때 당선되었다면 박순천 같은 큰 정치인이 되었을 텐데 말이야.다음의 글을 보면 변석화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다.지역민들이 한결같이 포항의 여성 선구자로 꼽고 있는 변석화는 1908년에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1933년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에 세브란스의대 출신 김두수와 결혼, 시댁이 있는 포항에 정착했다.변석화는 결혼 후 이곳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 해방과 6·25전쟁으로 혼란한 시기에 이 고장 여성과 청소년을 위해 헌신하였으며, 여성이 사회적으로 제자리를 찾지 못하던 시절, 포항 제1의 갑부 집안사람이면서 부부 의사로 편안한 삶에 안주하지 않고 건국 후 모든 것이 부족하던 시절 여성운동에 뛰어들었다.의료정책연구소, ‘우리나라 근현대 여성사에서 여의사의 활동과 사회적 위상’, 2012, 75∼76쪽임 : 광복 이후에 포항 정치계에 걸출한 인물들이 활약했다는 것을 선생님 말씀을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3대 총선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당시 정치 지형에 대해 잠시 들어보았으면 합니다.박 : 1951년 12월 23일에 자유당이 창당되는데 포항에서는 아무래도 자유당 계열이 강했지. 자유당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이 민주당 계열이 되는데, 어떤 면에서 민주당의 발상지는 전라도가 아니라 대구라고 봐야 해. 그때는 대구가 대한민국 최고의 야당 도시였어. 박정희 대통령이 등장하면서 대구, 경북은 공화당의 중심에 서게 되지.박이득1942년 포항에서 태어나 서울 인창고와 건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포항 MBC, ‘영남일보’기자를 거쳤으며, 한국예총 포항지회장, 경북문인협회 부회장, 한흑구 선생 문학비 건립추진위원장, 포항독립운동사 발간 추진위원장을 역임했다. 수필가로 ‘월간문학’ 등에 작품을 발표했고, 제1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 최세윤 의병장 기념사업회 이사장, 포항문화원 부설 포항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을 맡고 있다.대담 : 임종석(경북매일신문 부사장) / 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 /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10-17

학교, 도농교류·도농상생으로 가는 징검다리가 되다

‘위기는 곧 기회다’수도권 집중에 따른 지역 소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지역 주민과 광역·기초자치단체, 교육기관 등이 힘을 합쳤다는 소식이 전국에서 들려오고 있다.날이 갈수록 소멸 위험이 심각해지고 있는 농촌마을을 중심으로 사회 구성원들이 지역 특색에 맞는 인구유입 정책과 사업 등을 펼치며 ‘소멸’에서 ‘회생’으로 대반전을 이룩하고 있기 때문이다.특히 ‘작은 학교 살리기’의 목표는 폐교 위기에 놓인 ‘학교’살리기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농촌공동체 활성화’에 있다. 쉽게 말해, 교육을 매개로 외지에서 들어오는 학부모들이 마을 주민과 함께 힘을 모아 작은 학교 살리기에 동참하면서 도농교류와 도농 상생 활성화를 꾀하는 것이다.앞서 지난해 경남 거창군 신원면과 신원초등학교는 ‘신원신바람위원회’를 구성하고, 폐교위기에 처한 작은 학교를 살리기에 나섰다. ‘신원신바람위원회’는 귀농 농가에 빈집과 일자리를 소개하고 면민과 동창회에서 기금을 조성하는 등 학교특성화 교육과 학생복지를 늘리기 위해 힘써왔다. 이같은 노력의 결과로 마을에는 귀촌을 택한 젊은이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으며 폐교 직전에 놓인 학교와 마을에도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글 싣는 순서1. 소멸 위기에 놓인 시골학교의 현실2. 시골학교에서 부르는 희망노래Ⅰ3. 시골학교에서 부르는 희망노래Ⅱ4. 경북도교육청 작은 학교 자유 학구제 명과 암5. 지속 가능한 시골학교 상상 아닌 현실로 □신원초의 번영과 쇠퇴경남 거창군 신원면에 위치한 신원초등학교는 지난 1926년 개교해 졸업생 2천660여명을 배출해 낸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학교다. 1980년대 당시 신원면의 학생 수는 약 1천2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때 신원초의 재학생 수는 200여명이 넘었다. 그런데 1990년대부터 이촌향도 현상이 발생하며 인구 유출이 가속하기 시작했다.이후 출산율 감소로 인한 학령인구 급감 등의 영향으로 1996년부터 현재까지 신원면에 있는 4개 학교(율원초등학교, 산수초등학교, 중유초등학교, 용현초등학교)가 모두 신원초등학교로 통폐합됐다.신원초도 2000년대부터 재학생의 수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고, 지난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전교생 수가 20∼30명 내외에 그쳤다.특히 지난해 신원초의 재학생 수는 모두 26명(초등학생 23명, 유치원 3명)이었다. 뿐만 아니라 2021학년도 신입생이 없어 6학급에서 5학급으로 감축될 위기를 맞닥뜨리기도 했다.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오는 2023학년도에는 4학급으로 학급수가 대폭 줄어들게 되고, 3∼4년 뒤면 신원초는 자연스럽게 분교와 폐교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위기를 직감한 신원초는 같은 해 8월부터 본격적으로 ‘작은 학교를 살리기’운동에 돌입했다.학교는 ‘신바람 신원 교육’(신나는 배움, 바른 몸과 마음, 자람과 보람이 있는 생활)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학교 특성화 교육 홍보 활동에 열을 올렸다.우선 해외수학여행과 승마장 체험 등과 같은 폭넓은 현장체험학습을 통해 재미있는 교육활동을 하고, Non-GMO 친환경 급식과 감염병 걱정 없는 안심학교(코로나 청정지역) 등을 적극 어필하며 학생 유치에 나섰다.신원초는 같은해 8월 10일 거창군으로부터 ‘폐교 위기 탈출 컨설팅 대상 학교’로 선정되며 지자체의 도움을 받아오며 홍보활동을 펼칠 좋은 기회도 얻게 됐다.뿐만 아니라 9월부터 신원초가 폐교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졸업생 및 향후회, 마을 주민, 학부모들도 ‘신원신바람위원회’를 꾸린 뒤 폐교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두팔을 걷어붙였다.이들은 자체적으로 ‘작은 학교 살리기’를 위해 기금 모금을 전개했고, 그 결과 4천280여만원의 기부금이 조성됐다. 회원들의 따뜻한 마음이 모인 귀중한 기부금은 전교생 장학금, 전(입)학생 장학금·복지·수학여행 등과 모두 학생들을 위해 사용됐다. □작은학교 마을의 희망으로 피어나다민·관·학 모두가 힘을 합쳐 노력한 결과 지난달 24일 기준 병설유치원에는 3명이 입원을 했으며, 초등학교는 9명(1학년 2명, 2학년 4명, 4학년 2명, 5학년 1명)이 전·입학하는 쾌거를 거뒀다. 그뿐만 아니라 서울, 경기, 부산, 경북 등 전국 각지에서 전입 상담을 문의하는 경우가 끊이지 않고 있다. 대기 가구만 40가구에 달한다.학교는 이 같은 추세가 지속된다면 2022학년도 유·초등 학생 수가 50명에 이를 것을 예상하고 있다.특히 올해 신원면에는 네 가정이 전입했으며 앞으로 두 가정이 추가로 전입할 예정이어서 신원면 인구 또한 지난해 말과 비교하면 28명이 더 증가했다. 이는 지난 2019년 8월 인구 1천500명의 선이 무너지면서 같은 해 9월 1천448명까지 감소한 이후 2년여 만에 거둬들인 성과인 셈이다. 신원면의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라는 점에서 눈여겨 볼만 한 대목이다.신원면의 인구 증가의 주요 요인은 신원초의 폐교위기 극복을 위해 추진 중인 ‘작은 학교 살리기’에 따른 성과로 연결할 수 있다.마을 주민들은 “누군가에게는 학생 수가 적어 없어져야 할 학교지만, 우리에게는 그 시설의 추억과 마을을 위해 나설 수 밖에 없다”며 “신원초 마저 폐교되어 버린다면 신원면에는 초등학교가 단 하나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고 우리는 이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또 최근 거창군 신원면은 겹경사를 맞았다.지난 8월 국토교토부가 주관한 지역수요 맞춤지원 공모에 ‘신원면 신바람 주거 플랫폼 구축사업’이 선정돼 국비 28억원을 확보하는 쾌거를 거뒀기 때문이다.신원면 ‘신바람 주거플랫폼 구축사업’은 폐교위기 탈출을 위한 LH공공임대주택 신축사업과 연계해 생활 SOC 정주 여건을 개선하는 것으로 커뮤니티 거점 조성, 체육관 리모델링, 보행환경 개선을 전액 국비로 추진하게 된다.거창군은 폐교된 신원중학교 유휴부지에 다목적 홀, 공유카페 등 개방형 공유공간인 어울림센터와 전 연령층이 이용할 수 있는 작은 숲 도서관을 조성할 계획이다.또 옛 신원중학교 체육관은 리모델링을 통해 생활체육시설로 탈바꿈해 지역 주민과 이주민이 소통할 수 있는 문화·체육 플랫폼 공간으로 만들 예정이다.거창군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와 협약을 맺고 작은 학교 살리기를 위한 LH공공임대주택 신축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신원면에는 지역에 2022년을 목표로 임대주택 12호가 완공되면 신원초 전·입학 전입세대에게 우선으로 공급할 계획이다.제인식 신원초등학교장은 “지금까지의 성과는 학교뿐만 아니라 지역주민, 신원면 졸업 동문, 신원면 관계기관 등 열정을 가지고 노력한 결과라고 생각한다”며 “적극적인 학생 유치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넘치는 안전한 배움터 신바람 나는 신원초등학교를 만들고, 신원초만의 특성화된 교육과정을 통해 아이들이 행복한 학교를 만들어 나갈 예정이다”고 밝혔다./이시라기자 sira115@kbmaeil.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1-10-14

터키처럼 러시아 여행길도 다시 열리기를

최근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관련해 러시아의 자존심이 무너진 일이 언론을 통해 한국에 알려졌다.러시아는 세계 최초로 코로나19 백신을 만들었다. 이름하여 ‘스푸트니크V’. 하지만, 이 백신은 아직 세계보건기구(WHO)의 공식적인 승인을 받지 못했다. 러시아 사람들조차 스푸트니크V의 효과를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이런 상황이니 비교적 오가기 쉬운 인근 동유럽 국가로 미국이나 영국에서 개발한 코로나19 백신을 맞으러 가는 러시아인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러시아의 ‘코로나19 사태’는 여전히 심각한 현재진행형이다. 지난주에도 1일 확진자가 3만 명에 이르렀고, 숨지는 이들도 하루 1천 명에 가깝다고 한다.현재까지 러시아의 코로나19 누적 확진자는 770만여 명. 사망자 역시 21만 명을 넘고 있다. 백신 접종률도 30% 안팎으로 다른 국가들에 비해 낮은 편. 여러 조건을 감안할 때 아직은 안전한 러시아 여행이 힘들어 보인다.노모와 함께 다시금 블라디보스토크행 크루즈에 몸을 싣는 꿈 ▲낭만적인 기억으로 남은 포항-러시아 크루즈 여행형편이 이러하니 러시아로 떠나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은 더 커지고 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몸을 싣고 아름다운 바이칼 호수와 만나는 꿈, 몇 시간이고 끝없이 이어지는 해바라기밭을 바라보는 꿈은 당분간 미뤄둘 수밖에 없을 듯하다.러시아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다. 국토의 면적이 미국과 중국을 합친 규모에 육박한다. 그러니 특정 지역을 여행한 것만으로는 “러시아에 가봤다”고 말하는 게 우습게 들린다.기자의 경우엔 극동 러시아 지역인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이 근사한 추억으로 가슴에 새겨져 있다. 이동 수단이 비행기가 아닌 크루즈였다는 게 여행의 낭만성을 배가시켜줬다.블라디보스토크로 항해한 이탈리아 크루즈 ‘네오 로만티카(Neo Romantica)’가 포항을 떠난 건 코로나19 사태가 일어나기 불과 1개월 전. 그때만 해도 낯설고 끈질긴 바이러스가 지구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것이란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지 못했다.어쨌건 그 항해는 즐거웠다. 자그마치 30시간 넘게 배 안에 있었지만 지겨운 줄 몰랐다. 60층 높이의 빌딩을 눕혀 놓은 크기의 거대한 크루즈 안에선 시간마다 다양한 공연과 이벤트가 펼쳐졌고, 끼니마다 제공되는 어지간한 호텔 수준의 음식은 입을 즐겁게 했다.크루즈 여행의 특성상 나이 지긋한 관광객들의 만족도는 더 높아 보였다. 먼 거리를 걸어서 이동하거나 흔들리는 버스를 장시간 타야 하는 보통의 여행과는 달리 배에서 모든 서비스를 제공받는 편안함이 있기에 그런 것 같았다.지금의 코로나19 사태를 알 수 없었던 포항시는 전 세계 크루즈 승객이 3천만 명에 이르던 2019년의 상황을 고려해 포항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오가는 크루즈의 취항을 준비했었다. 그건 해양경제시대를 맞은 포항이란 도시의 관광 경쟁력을 획기적으로 높일 방법의 하나이기도 했으니까. ▲노모와 블라디보스토크로 갈 날을 기다리며그러나, 불과 2년 사이에 크루즈 여행이 애물단지로 취급받고 있는 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2020년 초반. 세계 각지에서 크루즈 여행을 즐기던 사람들 모두가 배에서 내리지 못하고 크루즈 자체가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온상’으로 취급받는 장면을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봐야 했다.여행하고 싶다는 열망은 그곳에 쉽게 갈 수 없을 때 더 증폭된다. 크루즈를 타고 도착했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또한 그런 여행지가 됐다.겨울이면 기온이 영하 20℃ 이하로 떨어지는 곳이지만, 입김을 뿜으며 돌아다니던 혁명광장과 독수리 전망대, 도시 곳곳에서 볼 수 있던 유럽 스타일의 예쁜 건물들이 눈앞에 삼삼하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맛본 큼직한 킹크랩을 떠올리면 지금도 군침이 돈다.포항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복하는 크루즈가 상설화됐다면 일흔다섯 살 노모를 모시고 한 번쯤 배에 오르려 했다. 그건 효도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자식의 소박한 꿈이었다.항해 중에는 노인들을 위해 준비된 각종 이벤트와 게임·노래자랑을 즐기게 해주고, 매일 식구들의 음식을 준비하느라 긴 세월 고생한 모친에게 한국에선 맛보기 어려운 러시아 특유의 요리를 대접하고 싶었는데….이런 마음이 들 때면 ‘영원히 지속되는 수난과 고통은 없다’는 잠언을 떠올리게 된다. 블라디보스토크를 포함한 러시아 전체가 코로나19가 가져온 수난과 고통에서 한시바삐 벗어나기를 기원한다.그렇게 된다면 매서운 극동 러시아의 찬바람도 기꺼이 맞으며, 일주일쯤 기차를 타고 멀고 먼 모스크바까지 달려 매력적인 러시아 관광지 곳곳을 돌아보고 싶다는 바람 간절하다. 22개월 만에 열린 터키 하늘길… 그리운 아나톨리아, 카파도키아 ▲터키로 가는 하늘길은 이제 열렸다는데...터키 역시 러시아만큼이나 코로나19로 인한 피해가 컸던 국가다. 누적 확진자가 745만 명에 이르렀으니까. 하지만, 사망률은 0.9%로 다른 나라들에 비해 비교적 낮은 상황이다.관광 관련 산업은 터키의 주요한 수입원 중 하나였다.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위치했기에 두 대륙의 특성을 모두 지니고 있는 터키 최대 도시 이스탄불로 관광객들이 몰려들었다.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20~30분쯤 배를 타면 아시아 지구에서 유럽 지구에 도착할 수 있는 도시가 바로 이스탄불.인위적으로는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는 풍경이 여행자를 매료시키는 터키 카파도키아 지역은 기암괴석으로 만들어진 외계 행성처럼 느껴졌다. 조그만 마을 괴레메에서 숙소로 이용한 어두컴컴한 동굴호텔은 또 얼마나 흥미로웠던가.지난해부터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상당수의 국가가 여행자의 방문을 자제시켰던 것처럼 터키도 관광객의 유입을 어쩔 수 없이 막았다. 그런데 최근 22개월 만에 터키로 가는 하늘길이 다시 열렸다는 뉴스가 들려왔다.여행사의 전언에 따르면 코로나19 백신 2차 접종을 마친 사람들은 터키 여행 후 2주간의 자가 격리를 면제받을 수 있다고 한다. 다만 출국 72시간 전 PCR(유전자 증폭) 검사는 필수다. 터키 외에 몇몇 유럽 국가와 싱가포르 등도 여행이 작년보다는 훨씬 쉬워졌다. 자신이 생활하는 일상의 공간을 벗어나 낯선 곳에서 다른 문화와 생활양식을 체험하고 싶었던 이들에겐 오랜만에 들려온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유럽의 입구, 아시아의 출구”로 불리는 터키는 1920년대 술탄(Sultan·이슬람국가의 최고 통치자)이 없어지기 전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오스만 투르크 제국으로 익숙했다. 공화국이 된 건 불과 100여 년 전.이란, 아르메니아, 이라크, 시리아, 불가리아 등과 국경을 접한 터키는 흑해, 지중해, 마르마라해 등 아름다운 바다가 사시사철 반갑게 손짓하는 곳이기도 하다. 해안선 길이가 자그마치 7천200km에 이른다. 해변도시 안탈리아는 로마 시절부터 유명한 휴양지였다.동방과 서방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해온 국가였기에 정치·사회적 우여곡절도 많았다. 아직도 분쟁을 겪는 이웃 나라가 있을 정도다.국민의 대다수가 이슬람교를 믿지만, 종교적 도그마가 여행자의 기분을 상하게는 하지 않는다. 이는 오스만 투르크 시절부터 몸에 배인 이방인에 대한 포용력이 터키 국민들의 핏속에 흐르기 때문인 듯.한 달쯤 터키를 여행한 경험에 의하면 이스탄불과 흑해 주변도 좋지만, 아나톨리아 고원지대가 특히 매력적인 여행지다.1950년대 초반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땐 적지 않은 터키 젊은이들이 한국으로 왔다. 파병된 그들은 한 번도 보지 못한 나라의 자유와 인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분명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터.그런 역사 때문에 흰 수염이 멋진 70~80대 터키 할아버지들은 한국 청년 여행자들을 손자처럼 여기기도 한다. 기자 역시 몇몇 가정에 초대받아 달콤한 홍차와 터키식 피자 ‘피데(Pide)’를 대접받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코로나19 바이러스에 막혔던 여행길이 많은 나라에서 여전히 뚫리지 않았지만, 터키 등을 필두로 이제 서서히 열리고 있는 추세다. 한국도 ‘위드 코로나 시대’를 준비하며 해외 관광객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다가오는 겨울엔 러시아의 새하얀 설원과도 기쁘게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10-13

우리 곁 경북도 지정문화재 1천399점… 여러분은 아시나요?

어린 시절, 아버지의 고향인 달성군 시골집 인근에 있던 사당은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다소 괴기스러운 모습이기도 했고, ‘귀신이 나온다’는 동네 형들의 귓속말은 또래 사내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특히나 쾌쾌한 냄새가 나는 연못 오른편에 놓여 있었던 작은 석탑 주변은 무성하게 자란 풀떼기 만큼이나 시간을 보내기에 가장 좋은 곳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200년은 넘은 사당’이라는 동네 어른의 이야기에 놀라움을 표했다. 또 어린 아이의 치기라고 할 수 있는 문화재를 훼손하는 장난보다는 멀찍이 떨어져서 200년의 세월을 감상하는 조금은 어른스러운 행동을 가지게 됐다.진부한 질문이지만, 대한민국의 국보 1호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숭례문을 이야기할 것이다. 조금 나이가 있는 사람이라면 남대문을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리라.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보물 1호는 무엇일까. 더 나아가 경상북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경상북도의 지정문화재 1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이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국가지정문화재 : 문화재위원의 심의를 거쳐 문화재청장이 지정한 문화재이다. 국보와 보물, 사적, 명승, 천연기념물, 국가무형문화재, 국가민속문화재가 이에 속한다.」「시·도지정문화재 : 국가지정문화재가 아닌 문화재 가운데 특별시장·광역시장·특별자치시장·도지사 또는 특별자치도지사가 지정하는 문화재이다. 시·도 지정 유형문화재와 무형문화재, 민속문화재, 기념물 등이 이에 속한다.」「문화재자료 : 국가지정문화재와 시·도지정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문화재 가운데 향토보존상 시·도지사가 지정한 문화재이다.」경상북도청에 따르면, 2020년 12월 말 기준으로 지역의 국가지정문화재는 모두 793점이다. 하지만 경상북도 지정문화재는 국가지정문화재의 2배에 가까운 1천399점이 존재한다. 구체적으로 문화재자료가 581점으로 가장 많고, 유형문화재가 473점, 민속문화재가 154점, 기념물이 152점, 무형문화재가 139점이다. 다만, 경상북도가 지정한 유형문화재는 552호까지 있다.그렇다면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어린 시절 시골 동네에서 가까이서 보았던 우리 지역의 문화재는 어떠한 것이 있을까. 다시 한 번 진부한 질문이지만, 경상북도의 지정문화재 1호는 무엇일까?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경상북도가 지정한 유형문화재 1호와 2호는 존재하지 않는다. 명칭조차 ‘미상’이다. 본래 경상북도의 지정문화재 1호는 대구 중구 경상감영공원에 있는 선화당이었다. 선화당은 경상도 관찰사가 공적인 일을 하던 건물로 안동에 있던 것을 조선 선조 34년(1601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그 뒤 현종 11년(1670년), 영조 6년(1730년), 순조 6년(1806년) 3차례에 걸친 화재로 타버렸다. 지금의 건물은 순조 7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이후 경상북도 도청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1981년 7월 1일 이전까지 경상북도의 지정문화재 1호였으나, 대구시가 대구직할시로 승격됨에 따라 경상북도에서 분리되어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1호로 재지정됐다.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 2호였던 징청각 역시 대구시의 분리로 현재 대구시 유형문화재 2호로 재지정된 상태다. 선화당과 마찬가지로 경상감영공원에 위치한 징청각은 경상도 관찰사가 살림채로 쓰던 건물이었다. 조선 선조 34년에 선화당, 응향당 등 여러 건물과 함께 지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3호는 지난 2010년 2월 24일까지 존재했었다. 경북 예천군 상리면 명봉리에 있었던 ‘명봉사경청선원자적선사릉운탑비(鳴鳳僿境淸禪院慈寂禪師凌雲塔碑)’가 주인공이다. 유형문화재 3호는 그해 보물 제1648호로 승격됐다.현재 경상북도가 지정한 유형문화재의 제일 앞줄에 있는 것은 영주시 풍기읍 비로사 경내에 있는 ‘비로사진공대사보법탑비(毘盧寺眞空大師普法塔碑)’다. ‘비로사진공대사보법탑비’는 비로사 안에 있는 진공대사의 탑비다. 고려 태조 22년(939년)에 세운 비이며, 현재 일부가 파손된 상태다.경북 경주시 배동 산72-6번지에 있는 경상북도 지정 유형문화재 19호와 21호도 눈길을 끈다. 유형 문화재 19호는 ‘삼릉계곡마애관음보살상(三陵溪谷磨崖觀音菩薩像)’이며 21호는 ‘삼릉계곡선각육존불(三陵溪谷線刻六尊佛)’이다. 2개의 문화재 모두 1972년 12월 29일 지정됐다. 불상은 정확한 연대와 조각자가 알려져 있지 않으나, 통일신라시대인 8~9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경상북도 지정의 유형문화재 63호는 오래된 초상화다. ‘농암영정후사본및금서대 (聾巖影幀後寫本및金犀帶)’라는 이름의 그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시조작가인 농암 이현보(1467~1555) 선생의 초상화다. 추사 김정희의 소개로 소당 이재관이 분강서원에서 그렸다고 한다. 현재 개인 소유다. 경상북도 지정 유형문화재 248호인 ‘영주가흥리암각화 (榮州可興里岩刻畵)’는 본래 마을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향토사학자에 따르면, “1990년 8월 7일 문화재 지정 이전에 아이들의 낙서가 많았다”고 한다. 가흥리 암각화는 청동기 시대의 것이다. 청동 동구로 쪼아서 새기는 방법을 사용하여, 3~5개의 선을 옆으로 연결했는데 그 의미는 아직 알 수 없다.2020년 말 기준으로 경상북도 지정 유형문화재의 막내는 550호와 551호, 552호인 ‘최벽 관련 고문헌(崔璧 關聯 古文獻)’, ‘안동 용수사 소장 용산지(安東 龍壽寺 所藏 龍山誌)’, ‘안동 용수사 소장 통진대사 양경 비편(安東 龍壽寺 所藏 通眞大師 讓景 碑片)’이다. 이 가운데 ‘안동 용수사 소장 통진대사 양경 비편’은 원래 안동 태자사에 있던 통진대사 양경(879∼954)의 비문으로 추정된다. 학자들은 “범일-행적-양경으로 이어지는 사굴산문의 계보 및 고려 초기의 역사적 사실과 관련한 귀중한 자료”라고 판단하고 있다. □곁에 있는 지정문화재, 관심과 보존 필요근래에 경북 포항시 남구 효자동에 있는 연일향교를 찾았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하더니 고층 아파트의 옆으로 기와집이 늘어져 있었다. 효자동 입구에 ‘연일향교’라고 쓴 표지판이 작게 있었지만, 누군들 관심이 있었을까. 뜻밖에 연일향교는 1985년 8월 5일 지정된 경상북도의 문화재자료 1호였다.「연일향교는 고려 말기에서 조선 성종 이전에 처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으로 구성되어 있고, 정면에 있는 중앙 칸의 칸살을 퇴칸보다 넓게 잡고 측면의 칸살은 뒤칸 앞쪽보다 2배 정도 더 넓게 잡은 칸잡이법을 사용했다. 건물의 구조와 공포 형식이 조선후기의 장식성이 강한 면을 보이고 있다. 대성전은 뒤에 위치하고 내삼문 앞으로 명륜당을 배치시키고 있다. 또한 주건물과 외상문이 동일축선상에 있어 전학후묘의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조성권이 쓴 상량문에는 조선 태조 7년(1398년)에 대송면 장흥리에 처음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어 숙종 때 성좌동으로 옮겨 다시 건립되었다고 한다. 고종 8년(1871년)에 현감 원우상이 읍치를 효자동으로 옮기게 되면서 향교 역시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게 되었다.」 연일향교는 마치 백성을 내려다보듯이 제법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주변에 집이 없었던 과거라면 형산강과 연일 뜰이 한 눈에 보였을 것 같았다. 특히, 연일향교는 새로 손을 본 것인지 깔끔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과거의 손때가 여기저기 묻어 있는 것도 보였지만, 고즈넉한 분위기와 함께 도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문제는 1시간 가까이 연일향교를 둘러보는 사이, 어느 누구도 이곳을 찾지 않았다. 국보와 보물에 몰두된 우리의 관심에 서글퍼지는 순간이었다.사실 국보와 보물도 지정 호수 2자리가 넘어가면 관심이 없는 것이 현대인의 삶이라고 했다. 하물며 광역자치단체가 지정한 문화재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과분한 일이기는 하다. 다만, 대다수의 지정문화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보와 보물에 비해 접하기가 쉬운 것도 사실이다. 지정문화재에 대해 공부를 하며 만났던 한 향토사학자는 “경상북도의 지정문화재라고 하지만 문화재의 등급을 매긴 것에 불과하다”면서 “지정문화재이건 비지정문화재이건 작은 관심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1-10-12

“포항의 어제와 오늘을 주제로 사진전 해보고 싶어”

작가 이도윤은 평생 사진을 찍으면서 어떤 일을 겪었을까? 그리고 사진작가는 어떤 자세로 사진을 대해야 한다고 생각할까? 그 밖에 남은 생에 그가 이루고 싶은 일에 대해 들어보았다. 조 : 평생 사진을 찍으면서 에피소드가 많았을 것 같습니다.이 : 오죽하겠어. 별일이 다 있었지. 간첩으로 몰려 파출소에서 조사받은 적도 여러 번 있었어. 무거운 카메라를 메고 버스 타고 걸어서 시골로 들어가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니 이상하게 생각했겠지. 당시에 시골 사람들 신고 정신이 투철했거든. 카메라 장비를 도난당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지. 부산 서면에 촬영대회가 있어서 새벽에 버스를 타고 움직였더니 촬영이 끝난 후에는 지칠 대로 지쳤던 거라. 부산에서 만원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데 어느 순간 카메라 가방에 있던 카메라가 사라진 거야. 카메라는 말할 것도 없고 고생해서 찍은 필름도 없어져 정말 속이 쓰렸지. 이건 자랑 같은데 포항 시의원 중에 내가 인물을 찍은 사람은 모두 당선되었어. 그 소문을 듣고 시도 의원들이 내 사진관에 와서 졸면서 기다리기도 했어. 울릉도에서 찾아온 군의원도 있었고.조 : 사진관으로 찾아온 사람도 많았겠습니다.이 : 지금이야 휴대전화로 사진을 쉽게 찍을 수 있으니 사진관 갈 일이 별로 없지만 과거에 사진관 가려면 큰맘을 먹어야 했지. 환갑 사진을 찍을 때는 온 가족이 버스를 대절해 오기도 했어. 그렇게 사진관에 오면 맨 처음 가족 전체 사진을 찍고, 큰아들 가족, 작은아들 가족, 부부 사진, 개인 사진 순으로 찍는 거야. 그 사진이 영정 사진도 되는 거라. 돌 사진, 백일 사진, 약혼 사진은 물론 언약식 사진을 찍으러 오는 경우도 많았지. 그러고 보면 시대마다 계절마다 복장도 다양했어. 그래서 유행이 바뀔 때마다 서울 동대문, 남대문으로 옷을 구하러 다니기도 했어. 학교 졸업앨범도 많이 했지. 대개 증명사진을 찍을 때 한 번 찰칵 하면 다 찍었다고 하는데 나는 여러 포즈를 신경 쓰며 고개를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주문하며 세밀하게 여러 번 찍고 가장 잘 나오는 것으로 인화했지. 그래서 학생들 앨범 촬영하는 게 정말 힘들었어. 그래도 사진 잘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피로가 눈 녹듯이 사라졌지. 한번은 누드 사진을 찍으러 온 아가씨가 있었어. 저녁 무렵에 퇴근하려는데 한 아가씨가 조심스럽게 들어오더니 누드 사진을 찍으러 왔다는 거야. 그때만 해도 누드 사진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던 때여서 나도 의아했지. 왜 누드 사진을 찍고 싶냐고 물으니 상체에 자신이 있어서 사진으로 남겨두고 싶은데 누구한테 부탁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포항에서는 이도윤이 가장 유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는 거야. 어떡하겠나, 사진을 찍어주었지.조 : 선생님 사진을 살펴보면 ‘생업’이란 제목이 여러 개 보입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이 : ‘생업’은 단순히 직업을 말하는 게 아니라 살기 위해 절실한 마음으로 일하는 것이지. 이 사진은 내 사진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찍었는데 우체국 앞이야. 눈발이 날리는 어느 날 한 아낙네가 얇은 옷차림에 고무 대야를 이고 어디론가 바삐 걸어가는 장면이지. 고무 대야에는 감자 몇 알이 담겨 있고. 아낙네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감자를 팔러 장으로 가는 것일까, 아니면 어린 자식들에게 저녁을 먹이러 가는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사진이지. 이런 삶을 생업이라 보는 것이지.다큐멘터리를 넘어 깊은 진실과 교감하려는 이도윤의 작가정신은 다음 글이 잘 설명해준다.“사람들의 표정과 몸짓에서 고달팠던 삶을 읽도록 해야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사진을 찍었다.”작가가 담아내려 했던 것은 그 순간의 어떤 진실만큼이나 그 진실이 담겨진 더 큰 그릇이라 할 수 있는 당대의 사회적 현실이었고, 그 현실을 직조하고 있는 우리네 삶의 진득한 기록이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사진은 잊혀짐과 망각에 대한 저항, 기록인 것이며, 그러한 순간순간의 기록이 모여 역사를 이룬다. 거창하기만 한 거대 서사가 아닌 평범한 이들의 일상들이 쌓이고 쌓인 역사이기에 그 의미는 더욱더 남다를 수밖에 없다.작가의 사진은 이처럼 순간의 진실이 하나하나 모여 이루어진 우리네 평범한 이웃들의 씨줄 날줄로 엮어진 풍경이며 역사인 것이다. 아울러 그저 단순히 차가운 객관적인 다큐멘터리로서의 진실만이 아닌, 그 속에 담겨진 진실과 교감하려는 작가적 애정이고 태도이기에 더 큰 울림을 전한다.- 민병직, ‘그리운 포항, 사람들’, 포항시립미술관, 2012, 8쪽.조 : 지금도 찍고 싶은 사진이 있는지요.이 : 특별히 찍고 싶은 사진이 있다기보다 사진전에 가면 사진을 찍고 싶은 충동을 느껴. 이건 이렇게 찍으면 안 되는데, 저건 어떤 앵글로 찍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나 안타까움이 생겨. 아프기 전에는 쉼 없이 계속 움직였지. 매일 아침 6시 전에 나가 오전 10시까지 촬영했어. 사진은 역광이 중요하니까. 지금도 사람들이 나를 보면 사진 촬영하느냐고 물으면서 사진 좀 가르쳐달라고 해. 내 처지가 이러니 어디 가서 어떻게 찍어라고 말해주는 게 전부야.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카메라로 넘어오면서 사진을 더 많이 찍었지. 디지털이 아무리 편리하다고 해도 아날로그보다는 못해. 사진의 톤과 디테일에서 아직은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따라오지 못하지. 조 : 선생님 말씀을 들어보면 카메라 성능이 아무리 좋아져도 근본적으로 사진에 임하는 자세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이 : 사진을 편안하게 찍으려고 해서는 안 돼. 근성이 있어야 해. 한 장면을 찍어도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해야지. 이명동 선생 같은 열정과 프로 근성을 배워야 해. 요즘 사진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 사진작가의 혼이 작품에 담겨 있다는 느낌이 별로 안 들어. 화가들이 왜 사진을 가볍게 여기겠어? 화가는 사력을 다해 그림을 그리잖아. 사진작가도 과연 그럴까? 한번 생각해볼 문제지. 그런 의미에서 흑백 사진을 많이 했으면 좋겠어. 그림도 살릴 수 없는 것을 흑백 사진은 살릴 수 있어. 사진을 배우는 사람들이 흑백 사진을 찍게 되면 사진 예술의 본질을 깊이 이해할 수 있거든. 내 사진 중에 ‘돼지몰이’, ‘생업’은 흑백 사진이 주는 최고치의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지.조 : 끝으로 사진계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해주시지요.이 : 사진은 나에게 삶 그 자체지. 매 순간 사진을 생각했고 매일 사진을 찍었어. 그러다가 목표가 생겼는데 사진을 사회와 접목해보자는 것이었어. 그리고 그 길을 향해 열심히 걸어갔지. 나는 이 모든 걸 내가 좋아서 했어. 그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준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 요즘 사진전에 가보면 사진과 관련된 사람들만 오는데 이건 좀 아쉬워. 내가 개인전을 할 때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많이 왔지. 지역 유지들도 찾아와서 좋은 작품 만든다고 고생 많았다며 격려도 해주고 그랬어. 왜 사람들이 사진전에 별로 오지 않는지 사진계에서 고민하고 개선책을 찾아야 해. 그리고 이 이야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여지는데, 내 사진과 필름을 어떻게 할까 고민이야. 포항시립미술관에 맡길지, 한국사진협회 포항지부에 맡길지. 여건이 되면 ‘포항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주제로 사진전을 해보고 싶군. 이도윤 작가 이도윤1940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났다. 1967년 포항에 정착하면서 사람들의 삶과 풍경을 사진에 담아왔다. 1973년 포항 맥심다방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2012년 포항시립미술관에서 ‘그리운 포항, 사람들’이란 주제로 여섯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프랑스 국제사진전 우수상, 아시아태평양 사진전과 유네스코 사진전 우수상, 중화민국 사진전 3회 입선, 대한민국 미술대전 2회 입선, 대한민국 사진대전 입선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한국사진작가협회 포항지부장, 영상동인회 전국 회장, 선린대학·포항대학 강사 등을 역임했다.대담·정리 : 조혜경(시인)

2021-10-11

국가 권력의 폭력으로부터 인권·법질서 지키는 것이 변호사

인권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는 자부심과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법률 전문가라는 자존감과 고난도 관문을 통과하고 사회 최상위 계층으로 진입했다는 자긍심으로 뭉쳐진 변호사.한 해 1천명 정도 배출되던 변호사는 로스쿨 도입 이후 1천750명까지 늘어났다.회원 700여 명의 대구지방변호사회는 1948년 설립된 법정단체로 1985년 부산고등법원이 생길 때까지 경상도 전체를 관할하는 역사와 위상을 갖고 있다. 이석화 대구지방변호사회장은 “변호사가 월등한 고소득자일 이유는 없지만 약간의 소득적 메리트조차 보장되지 않는다면 고비용을 들여 변호사가 되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말한다. 변호사 기피현상이 생기면 국가 전체가 선진국의 하청업체로 전락할 위험도 있다고 경고한다. 그래도 전문 법률지식과 지갑을 열어 기꺼이 사회에 기여하고 봉사함으로써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그들은 변호사다.-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는 범죄자에 대한 변호사 수임과 사회 정의 구현이라는 변호사 임무 사이에 충돌은 없나.△변호사는 범죄자로 의심이 가더라도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의뢰인을 변호함으로써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아무리 여론이 나쁘고 중죄인으로 의심 되더라도 정당한 재판을 받도록 하는 것이 변호사의 역할이다. 누구나 피의자가 될 수 있다. 국가 권력은 언제든지 폭력으로 변할 수 있고 이 권력으로부터 인권을 지키고 법질서를 지키는 것이 변호사다. 그래서 인권의 보루이자 최후의 방패라 한다.-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 제도의 문제점이 생겨나면서 사법시험을 부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로스쿨 제도의 문제점과 존치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다.△로스쿨 3년 과정이 너무 고비용이어서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보완제도가 필요하고 변호사시험 불합격자 누적으로 고시낭인 같은 사회적 병폐를 개선하기 위해서 로스쿨 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으로 보인다. 그러나 10년 이상 시행해 온 로스쿨 제도를 또다시 전면 수정한다는 것은 사회경제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변호사를 너무 많이 뽑는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방법은 없나.△로스쿨은 25개 법전원의 정원 2천명에서 매년 1천500명 정도를 변호사로 뽑으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해마다 1천750명 가량 변호사가 배출되면서 변호사 숫자가 급격히 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우리보다 먼저 로스쿨제도를 도입한 일본에서는 변호사 시험 합격률이 낮아 경쟁력이 떨어지는 로스쿨은 입학생을 모집할 수 없어 로스쿨 인가를 반납하는 대학이 생겨났고 입학생 숫자가 줄어들어 변호사 시험 합격자를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로스쿨 결원 보충제’가 있어 상위권 로스쿨로 재입학해서 생기는 결원을 다음 해 신입생으로 뽑을 수 있도록 보장해 줘 로스쿨이 줄어들지 않고 변호사시험 합격자도 줄어들지 않고 있는 것 같다.- 판사 임용 자격을 현재의 법조경력 5년 이상에서 내년부터 7년으로 늘였다. 2026년엔 10년으로 늘어난다. 법관 충원에 문제가 없나.△실력도 있고 경력도 쌓은 인격적으로 훌륭한 법관을 뽑으려는 것은 법원의 욕심이지만 법조 경력이 쌓인 그런 변호사는 이미 자리가 안정돼 판사직을 지원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경력과 실력을 갖춘 훌륭한 법관을 뽑는 것은 제도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우리나라 판사의 업무량이 너무 많은 것도 문제이고 더구나 최근에는 판결에 따른 비난이 일기도 한다. 판사의 희생만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판사 수를 무한정 늘일 수도 없다. 근본적으로 판사의 처우가 개선돼야 한다. 사회적으로도 판사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판결을 존중하는 풍토도 조성돼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변호사회 가입자만이 변호사 개업을 할 수 있다거나 유사 법조 직역으로부터 변호사 업무 영역 수호를 위한 과잉 대응은 변호사 집단의 기득권 지키기로 보인다.△소송은 전문적인 영역인데 이 업무를 기득권 지키기로 보는 것은 곤란하다. 변론을 잘못 해서 재판에서 패소하는 경우가 생기지 않도록 소송은 법률 전문가가 맡아야 국민이 피해를 입지 않기 때문이다. 유사 법조 직역에서 간단한 소송을 수임해서 대리하도록 해 달라는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법무사는 변호사의 숫자가 적었던 제도 시행 초기 법원의 등기 등 일부 업무를 사법서사에 위임했던 데서 출발했다. 또 변호사는 세무사의 자격을 갖고 있으며 일부 변호사는 세무사보다 더 업무에 적합할 수도 있고 소송까지 가는 문제가 생기면 결국 변호사가 맡아야 하는 것이다. 결코 변호사가 회계사나 변리사 등 다른 직역의 업무를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다.- IT 산업의 발전과 함께 법률 시장에도 온라인 법률 플랫폼 로톡이 등장했다. 국민으로서는 법률시장 접근이 쉬워지고 선택권을 넓힐 수 있는 제도라고 보는데 변호사회는 강력 규제로 대응하고 있다. 이 또한 기득권 지키기 아닌가.△로톡은 변호사에 대한 정보 제공을 넘어 고객을 적극 유인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다 소수 유료 회원을 적극 추천 알선하고 있어 합법적 광고의 범위를 벗어난 형태를 보이고 있다. 변호사는 법의 지배를 정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법률 전문직으로서 자존심과 사명감을 가지고 국민에 봉사해야 한다. 변협은 로톡이 변호사의 공공성과 독립성을 훼손하고 있다고 규정했다. 대구지방변호사회를 비롯한 전국의 변호사회가 변호사 소개 플랫폼에 대해 엄정 대응키로 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강력 규제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검경 수사권 조정이 오랫동안 나라 여론을 달궜다. 수사권 조정에 대한 의견은, 또 변호사 업무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경찰의 수사권은 강화되었으나 그 통제기능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경찰 내부의 통제기능만으로 우리가 비판해 온 검찰 수사 권력의 폐해가 또다시 재현될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검찰 수사지휘권을 무력화시키는 현 제도는 보완되어야 하며 현재 경찰조직을 행정과 수사로 철저히 분리하여 독립기관으로 분리할 필요가 생겼다. 변호사의 업무가 크게 달라질 것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경찰 수사단계에서부터 적극 변호업무를 수행해야 할 필요성은 높아질 것이다.- 우리 형법은 ‘공연히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사실임에도 명예훼손죄로 처벌되도록 하는 법이 언론 보도를 위축시키고 있다.△헌법재판소가 개인의 인격권 보호를 위해 명예훼손적 표현에 대한 처벌조항을 5대 4 의견으로 합헌 판단했다. 온라인 공간의 팽창으로 언론 매체가 다양해지고 전파 속도와 파급 효과가 커진 때문이다. 일단 훼손되면 완전한 회복이 어렵다는 것이 명예훼손죄의 특성이다. 그러나 내용이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이면 처벌을 면하도록 하고 있어 공적 인물에 대한 비판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남용되지 않도록 하는 조항이 있어 합헌으로 판단했다.위헌이라고 본 재판관들은 진실을 적시할 경우 명예훼손보다는 표현의 자유 보장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문제는 사실적시에 대한 입증 책임에 달려 있는데 우리의 현행 법 체계를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에는 행위자에게 입증 책임을 지울 것이 아니라 사생활의 비밀 침해만을 처벌하도록 하고 이를 검찰이 입증하도록 개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형사 사건에서 억울한 피해자가 많은데 비해 변호사가 범죄인을 변호하고 국선변호인 제도를 두는 등 형사법 운용이 피의자 중심으로 치우친 것 아닌가.△처벌 대상인 범죄인에게 국가 예산을 들여 보호할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비판도 있다. 그러나 피의자·피고인의 보호는 범죄인 보호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권력에 의한 일반 국민의 권익 침해를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패막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에는 범죄피해자의 보호에 소홀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고 범죄피해자 구조제도, 성범죄피해자 국선보조인제도, 피해자 진술권 보장 등을 통하여 범죄피해자의 지위를 강화하는 추세에 있다.- 변호사 출신 정치인들이 법 위반으로 자주 여론에 오르고 일반 국민이 법과 현실의 괴리를 느끼는 경우가 많다. 법 없어도 살 수 있는 나라와 법 없으면 살 수 없는 나라 중 어느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나.△사람들이 관계를 맺어 사회를 형성하는 한 법 없어도 살 수 있는 나라는 존재할 수가 없다. 더구나 다양한 사회관계가 형성되는 현대사회에서 법은 더욱 복잡해지는 것이 필연이기도 하다. 우리는 법을 위반하지 않는 사람을 ‘법 없어도 살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그 사람도 따지고 보면 법의 보호를 받으니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법이 없다면 힘 있는 자의 핍박으로 하루도 살아갈 수가 없을 것이다.‘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처럼 약자를 위한 법은 없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법 집행의 공정에 관련된 것이지 법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법 집행을 공정하게 하자면 우리 사회가 좀 더 투명해져야 할 것이다. 그러자면 언론의 자유가 더욱 보장되어야 하고 언론의 책임 또한 강조되어야 한다.- 변호사는 우리 사회에서 대표적인 기득권자로 인식되고 있다. 사회적 인식에 걸맞은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고 있다고 보나.△로스쿨 제도 도입이후 변호사 수는 급격히 증가하였고 자격 취득을 위하여 투입한 비용에 비하면 소득은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변호사가 과연 기득권자인지는 개인적으로 의심해 보기도 한다. 기득권자 논쟁은 아웃사이더에게 진입 장벽을 형성해서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데 있었고 그 해결책으로 로스쿨제도가 도입됐다. 하여간 재능보다 태생이 중요한 사회가 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할 것이다.대구지방변호사회는 변호사의 공익적 지위에 맞추어 많은 공익적 사업을 하고 있다. ‘국선변호’ 활동이 그것이며 법원과 경찰서 시청 사회복지관 등에서 하는 ‘무료법률상담’이 그것이다. 또 소외계층 연탄나누기, 급식행사, 소외계층에 대한 사회봉사금 전달과 사회복지시설 기관에 대한 기부금 전달과 법률지원을 하고 있다. 해마다 대구의 인권활동가를 선정하여 ‘애산인권상’을 시상하고 있다. 대구지방변호사회가 매달 지급하는 사회봉사금과 기부금이 1천여 만원이고 그 밖에도 회원들은 각자 개인적으로 상당한 금액을 기부하면서 나름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다. ◇이석화(李錫華)대구지방변호사회장(60). 영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겸임교수. 변리사.성광고, 고려대 법법학과 졸. 1997년 사법시험 39회 합격 사법연수원 29기 수료.(재)한빛문화재연구원 대표이사.2012년 헌재로부터 모범 국선대리인 표창을 받았다.지난해 12월 55대 대구지방변호사회장단 선거에서 98%의 압도적 지지로 당선.성장기와 변호사 경험을 바탕으로 엮은 수필집 ‘얼굴에 먼저 이른 봄빛’을 냈다.6·25 참전 군인으로 다부동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아버지를 가장 존경한다. 친구를 좋아하고 술은 ‘청탁불문(淸濁不問)’이지만 아버지의 “남의 술을 마시고 취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고수./이경우 편집위원

2021-10-11

‘마을이 살아나기 시작하다’ 지역사회 구심점으로서의 학교

학교의 존폐가 지역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상당하다. 특히 농촌지역에서 학교는 단순히 교육을 제공하는 기관의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사회 공동체의 구심점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가 설립될 당시에 마을 주민들이 땅을 무료로 제공해 주는 등 학교 건립에 어떠한 형태로든 동참했다면 학교는 교육기관 그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된다.이 같은 상황에서 ‘작은 학교 통폐합’과 ‘적정규모학교(학생들의 교육력 향상을 위해 교육과정을 정상적으로 운영하는 것을 목표로 교육결손 최소화 및 교육적 효과 극대가 가능한 규모로서의 학교) 육성’ 등과 같은 교육정책은 지역 인구 감소를 부추기고 결국 ‘농촌 공동화’ 현상을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는 곧 마을 주민들의 활동을 위축시키고, 지역 사회의 황폐화를 이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입장으로 바라볼 수 없다.청성초는 민·관·학이 힘을 모아 ‘작은 학교 살리기’를 일궈낸 곳이다. 분교 격하 위기에 놓였던 청성초는 ‘교육 이주 정책’을 통해 난관을 극복해 냈고, 그렇게 찾아온 이주 가정은 학교를 넘어 청성면에까지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글 싣는 순서1. 소멸 위기에 놓인 시골학교의 현실2. 시골학교에서 부르는 희망노래Ⅰ3. 시골학교에서 부르는 희망노래Ⅱ4. 경북도교육청 작은 학교 자유 학구제 명과 암5. 지속 가능한 시골학교 상상 아닌 현실로 □청성초의 번영과 쇠퇴충북 옥천군에서 산비탈을 따라 굽이굽이 올라가다 보면 조그마한 초등학교 한 곳이 나온다. 이곳이 바로 1932년 3월 개교한 청성초등학교다.청성초는 개교 이래 지난 86년 동안 모두 3천921명의 졸업생을 배출해 낸 지역의 전통 있는 명문학교로 손꼽힌다. 청성초는 1970∼1980년 베이비 붐 세대들이 초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시절 전교생이 한때 1천여명에 이를 정도로 학생 수가 많았다. 그런데 1990년대부터 이촌향도 현상이 발생하며 인구 유출이 가속하기 시작했다.2000년도에 접어들어서는 출산율 감소로 인한 학령인구 급감 등의 영향으로 지난 1995년부터 현재까지 청성지역에 존재하는 4개(신서분교장, 묘금분교장, 화성분교장, 능월분교장)의 초등학교는 모두 이 학교로 통폐합하게 됐다.마을 주민들은 “학교가 차례대로 문을 닫기 시작한 이후에 지역 인구도 꾸준히 줄어들고 있다”며 “2015년 이후부터 마을에서 갓난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어본 기억이 언제인지 가물가물 정도”라고 전했다.실제로 청성초의 전교생 수도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해 지난해 16명을 기록하게 됐다.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청성초는 ‘학생배치계획에 따른 학교 학생 수 추이’를 분석해 봤다. 그 결과 오는 2022년에는 15명, 2023년 13명, 2024년 10명, 2025년 15명, 2026년 16명이 될 것으로 예상됐다.문제는 전교생이 20명인 상황이 3년 이상 지속될 경우 학교를 분교장으로 격하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같은 추세가 계속되면 2024년이면 청성초등학교가 결국 ‘청성분교장’으로 격하된다.청성초마저 사라져 버리면 이 마을에는 초등학교가 단 한 곳도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민·관·학이 협력한 ‘청성초 살리기 운동’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마을 주민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청성초 살기기 운동’에 두 팔을 걷어붙였다. 본격적인 움직임이 시작된 건 지난해 12월부터이다.우선 청성면 마을주민과 청성면사무소, 청성초, 교육지원청 등이 모여 ‘지역공동체 협력에 따른 소규모 학교 살리기’ 첫 대책회의를 열었다.청성초 동문회 등은 십시일반 모금된 성금으로 장학사업 이외에 교육 이주 주택수리비, 어학연수비, 교육 프로그램비, 학교 선후배가 함께하는 멘토·멘티를 계획했다.또 이들이 가장 중점을 둔 건 전학 가정에게 거주할 ‘주택’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학교 총동문회에서는 마을의 빈집부터 찾기 시작했다. 먼저 마을회관 한 층 전체를 새로운 주거 공간으로 변화시켰다. 또 자치단체에서 조성한 ‘귀농인을 위한 집’도 활용하기로 했다.인근에 위치한 산계 3리와 구음2리에 있는 빈집을 전학가정이 전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도배와 장판, 보일러 등 100∼200만원 정도의 비용 지원으로 시설 보수를 해줬다. 이주 가구에는 보증금은 이주자 본인이 부담토록 하고, 1년 동안 총 120만원의 월세를 제공해 줬다.이주민들이 도시에서 생활하다 귀농을 하게 될 경우 어떻게 별다른 일자리가 없어 애를 먹는데, 이를 도와주고자 마을 주민들은 이들을 위한 일자리도 소개해줬다. 실제로 근처 포도연구소 등의 공공 일자리를 제공하는 방안과 마을 대단위 가족 기업에서 일할 기회도 제공했다.교육활동에 대해서는 학교에서 1.5㎞ 이상 떨어진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학생을 대상으로 등하교 지원을 위한 통학차량이 운행된다. 학교는 방과후학교 프로그램 및 방과후학교에서 실시하고 있는 교육비 및 교육재료비에 대해 수익자 부담없이 전액 무료 지원을 하고 있다. 전교생의 오후 돌봄 및 마을공동체 방과 후 프로그램의 비용 전체를 학교 및 교육청에서 담당한다.□학교를 살리자 ‘마을이 되살아 났어요’이러한 노력에 대한 결실로 지난 9월 말 기준 모두 8가구 14명(유치원생 4명, 초등학생 10명)의 학생이 청성초로 전학을 왔다. 그뿐만 아니라 양주, 오산 등 2가구가 새로 이사 올 예정이다. 전입 상담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대기 가구만 9가구(유치원 10명, 초등학생 6명)에 달한다.여기에 ‘청성면 산성문화마을 주거플랫폼 구축사업’이 국토교통부의 ‘2021 지역수요 맞춤지원 공모사업’에 선정되면서 전입 인구 증가에 대한 기대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군은 내년부터 85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2024년까지 청성면 산계리 131-1번지 일원에 초등학교 전학생과 인근 산업단지 근로자를 위한 공공임대주택 15호와 복지센터, 주차장, 친환경 숲 속 놀이터 등을 조성할 계획이다. 최소 1가구에 4명만 잡아도 60명의 인구가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박희경 청성초교장은 “학생 감소로 분교 위기에 있던 유난이 힘든 시기에 미래 사회를 살아갈 우리 학생들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애써주신 마을주민, 총동문회에 고맙다”며 “더 많은 학생이 청성초에서 따뜻한 인성을 기르고 슬기롭고 바르게 서로 어울려 따뜻한 인성, 창의, 융합적이고 복합적인 사고를 갖춘 아이로 자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전했다./이시라기자 sira115@kbmaeil.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1-10-07

인도와 이란, 코로나19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무엇보다 귀한 인도의 관광 자원은 사람들의 미소먼저 두 가지 질문. 가난 속을 살면서도 세상 무엇도 부럽지 않다는 듯 행복하게 웃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는 어딜까?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이 없음에도 남을 돕는 걸 일상 속에서 실천하는 이들은 어디에 많이 살까?30여 개 나라를 여행한 경험에 한정시켜 말하자면 첫 번째 물음에 대한 답은 인도, 두 번째 질문에는 이란이라고 답할 수 있을 것 같다.인도의 거리에선 찌푸린 사람을 보기 어렵다. 좌판을 펼치고 채소나 과일을 파는 상인들은 물론, 심지어 걸인까지도 미소와 멀어지지 않고 산다. 현세는 잠시잠깐이고 내세에 보다 나은 삶을 얻어낼 수 있다는 종교적 믿음 때문일까?이란에선 영어로 소통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페르시아 말을 하지 못하는 여행자들도 큰 불편을 느끼지 못한다. 크고 작은 도움이 필요할 때면 피붙이처럼 다가와 자기 일처럼 도와주려는 이란 사람들을 어느 도시에서건 쉽게 만날 수 있기에 그렇다.선량하고 순수한 사람이 많은 인도와 이란은 많은 이들에게 다시 가고 싶은 여행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왜냐? 여행이란 ‘사람들과의 관계 맺기’이기도 하기에. ▲확진자 증가에도 바이러스와의 공존 모색하는 국가 늘어눈에 보이지 않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눈에 보이는 여행자들의 길을 막아선 게 벌써 2년째다. 인도와 이란을 향하는 관광객들은 거의 제로(0)에 가깝게 대폭 줄어들었다.그도 그럴 것이 두 나라의 ‘코로나19 사태’는 세계 어느 곳보다 심각한 상황을 거치고 있다. 흉악한 역병은 착한 사람들을 피해가지 않았다. 바이러스가 야기한 인도와 이란의 피해는 컸다.현재 인도의 코로나19 누적 확진자 수는 3천400만 명에 이른다.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다. 사망자 역시 45만 명에 가까운 숫자. 안타까운 일이다.코로나19로 인해 죽은 사람들을 태우는 화장터 사진과 아내의 시신을 자전거에 싣고 가다가 통곡하는 남편을 찍은 사진을 본 많은 이들이 인도로 눈길을 돌렸고, 연민의 마음을 전했다. 이제는 전력난까지 겪고 있다니 인도의 상황은 앞으로도 전망하기가 어렵다.이란 역시 560만 명 이상의 국민이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감염됐다. 그중 12만 명은 죽음을 맞았다. 다소 폐쇄된 형태를 가진 국가라 피해 관련 뉴스가 많이 전해지진 않지만, 아직도 하루 확진자가 1만 명 이상씩 나오고 있어 사태가 안정화되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코로나19 사태가 본격화된 지 21개월째. 많은 국가들이 정책 방향을 바꾸고 있는 중이다. 무조건적인 바이러스 배척이 아닌 함께 공존하는 방식으로 코로나19에 대응하고 있는 것.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인도로는 코로나19 백신 지원이 이어지고 있고, 이란은 19개월 만에 관광 목적의 비자 발급을 다시 시작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두 나라로 가는 하늘길이 열리고, 예전처럼 인도와 이란의 넉넉한 인심과 환한 웃음을 보는 날이 속히 오기를 바라며 과거 좋았던 기억을 떠올려본다. ▲코로나19 아픔 딛고 인도 특유의 천진한 미소 되찾길코로나19 바이러스가 세상을 지배하기 한참 전 경험한 ‘28일간의 인도 여행’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꾸미지 않고 사심 없이 웃는 사람들을 가장 많이 만난 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어떤 난처한 상황에서도 인도 사람들은 “No problem(아무 문제 없어요)”이라며 크게 웃었다. 손을 내밀며 적선을 요구하는 이들까지도 “지금 내가 당신에게 좋은 일을 하도록 해주고 있고, 그로 인해 당신은 다음 생에 부자로 태어날 것”이라고 미소 섞어 말했다.그런 그들이 밉지 않았다. 국적과 결혼 여부, 여기에 아버지 이름과 월급까지 궁금해 하는 수많은 인도인들의 질문이 처음엔 곤혹스러웠으나 여행의 기간이 길어질수록 웃으며 답해주는 여유가 생겼다.태어난 곳에서 70년을 살며 마을 밖으로 한 번도 나가보지 않은 인도 할머니는 “여기서 먹고 사는 게 다 해결되는데 뭐 하러 다른 마을에 가느냐”며 천진하게 웃었다.작은 거짓도 섞이지 않은 순정한 그 말에 마땅한 답변을 찾기가 어려웠다. 인도 사람들이 삶과 죽음을 대하는 방식은 우리와는 전혀 달랐다. 그게 옳다 그르다를 판별하는 건 기자의 능력 밖에 있는 일.1857년 무굴제국이 멸망한 후 영국의 식민지가 된 인도는 10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영국의 정치·경제적 지배를 받았다. 독립된 건 1947년.파키스탄, 중국, 네팔, 방글라데시 등과 국경을 마주한 인도는 많은 국민들이 사망하는 심각한 국경·종교 관련 분쟁을 숱하게 겪었다. 그럼에도 울음보다는 웃음에 익숙한 게 어떤 측면에선 놀랍기도 했다.불교가 생겨난 인도는 국토가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넓고, 인구도 중국에 이어 세계 2위다. 이는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이야기.수도인 델리와 경제 발전이 눈부신 뭄바이는 인도의 대표적인 거대 도시이자 관광객들이 사랑하는 지역이다. 10명 중 8명의 국민이 힌두교도이기에 생사관(生死觀)이 한국인들과는 많이 다르다.우리와는 1973년부터 외교 관계를 본격화했고, 한국으로 철광석, 원면, 피혁제품 등을 수출하고 있다.낯설지만 매력적인 여행지 인도에선 힌두사원과 이슬람교당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석굴 사원과 고대 문명의 흔적도 뚜렷하다. 이런 이유로 유럽과 북미 관광객들은 ‘아름답고 신비한 나라’로 인도를 인식한다.그러나 무엇보다 귀한 인도의 관광자원은 순박하고 세파에 찌들지 않은 사람들의 미소다. 그 웃음과 만날 날을 기다리는 여행자들이 적지 않다. 이방인에 피붙이처럼 다가와 도와주는 이란 사람들 ▲이란, 친절과 타자 향한 배려로 역병 이겨내길페르시아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이란은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에 당당히 맞서 공동체의 자존을 지키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다. 2천500년 전 페르시아는 지구의 1/3을 지배한 대제국이었다.이란 사람들은 강한 자존심과 더불어 타인에 대한 배려와 친절을 지니고 살아간다. 기자는 그 친절을 직접 몸으로 겪었다.출근길은 한국이나 이란이나 몹시 바쁘다. 페르시아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여행자가 내민 쪽지. 거기엔 찾아갈 숙소 이름과 주소가 삐뚤빼뚤 적혀 있었다. 그걸 받아든 테헤란의 직장인 한 명이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면서 기자를 숙소 앞까지 데려다줬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베푼 조건 없는 친절.서로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는 둘은 1시간 넘게 동행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상대를 바라보며 멋쩍게 웃었을 뿐. 말로 전하지 못하는 고마움을 악수로 대신하며 서로의 이름을 알려줬던 이란 여행 첫날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거칠고 교조적”이라는 선입견과 오해 속에서 살아가는 이란의 이슬람교도들. 그러나, 기자가 거기서 본 것은 폭력적인 편견이 아닌 다른 나라에선 체험하지 못한 사람에 대한 진심 어린 배려였다. 아마도 그건 종교와는 무관한 인간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었을까?코로나19 사태 초기부터 이란은 큰 혼란과 수난을 겪었다. 확진자 수도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많다. 하지만, 수난 이후에도 이웃과 타자를 대하는 방식은 달라지지 않았으리라 믿고 싶다. 이타심(利他心)은 이란인을 특정 짓는 단어 중 하나이기에. 파키스탄, 터키, 이라크, 아제르바이잔과 인접한 이란은 유럽과 아시아의 중간에서 동양과 서양을 잇는 문명의 다리 역할을 해왔다.이슬람 시아파(이슬람교 2대 종파의 하나로 마호메트의 사위인 알리가 후계자가 되어 세운 교파)의 주도국인 이란은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산유국이다.정치권력은 최고 종교지도자인 이맘(Imam)이 가졌다. 호메이니에 뒤를 이어 이맘에 오른 사람은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고전적인 아름다움 가득한 궁전과 단아한 왕비의 사원이 여행자를 놀라게 하는 이스파한과 영화 ‘300’에 등장하는 페르시아 황제의 별궁 페르세폴리스는 이란이 내세우는 관광지다.수백 년 전 흙벽돌로 만들어진 독특한 건물이 가득한 사막 도시 야즈드와 지구에서 가장 큰 호수 카스피해에서 즐기는 낭만과 맛있는 생선 요리 또한 빼놓으면 아쉬운 이란 여행의 즐거움.저녁 무렵 조그만 시장 거리에서 갓 구운 따끈한 빵을 먹어보라며 내밀던 이란 할머니의 잔잔한 미소를 다시 한 번 보고 싶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10-06

“송도에 염전이 있었고 칠성천에 맑은 물이 흘렀지”

어느 도시나 변화를 겪게 되지만 포항은 철강도시가 되면서 변화의 속도가 어느 도시보다 빨랐다. 순식간에 사라진 마을도 있고 새로 조성된 동네도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은 서서히 사라지지만, 사진은 과거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사진의 가치는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빛난다.조 : 그동안 사진전을 모두 여섯 번 하셨더군요.이 : 첫 번째 개인전은 1973년 중앙동 맥심다방에서 했지. 그때는 다방이 문화계의 사교장이었거든. 다방에 사람들이 가득 찰 정도로 성황이었어. 다방에서 사람들이 담배를 얼마나 피워대는지 담배연기가 온몸에 배었지. 여섯 번째 개인전은 ‘그리운 포항, 사람들’이란 주제로 2012년 8월 포항시립미술관에서 했어. 지역에서 관심을 많이 보여주어서 여러모로 고마웠지. ‘포항시사’ 3권(2010, 113쪽)에서는 이도윤의 첫 번째 개인전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했다.1973년 지역에서는 최초로 본격 개인전을 열었다. 그전까지 박영달, 김상용, 박원식 등이 개인 전시를 했으나 본격적으로 하지 못하고 청포도다방이나 자기 사진실에서 10여 폭 미만의 작품을 걸어두고 지인들이 찾아오면 작품을 설명해주는 수준에 그쳤다. 이 시기에 이도윤이 최초로 본격 개인전을 열어 자신의 사진 예술의 전부를 시민들에게 선보였다. 변변한 전시공간 하나 없던 때라 번화가에 있는 다방의 벽면을 빌린 조촐한 자리였으나 당시 수준으로 제법 형식과 틀을 갖춘 전시회였으며, 전시장에 예술사진을 관람하는 관람객이 붐벼 큰 바람을 일으킨 전시회라는 평가를 얻었다.조 : 전시회를 하면 기분이 어떻습니까?이 : 기분이라기보다는 사진은 기록이라는 나의 소신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돼. 글 쓰는 사람은 글로, 그림 그리는 사람은 그림으로, 사진 찍는 사람은 사진으로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하지. 그런 마음, 그런 자세로 사진을 찍고 전시회를 하고 사진집을 낸 거야. 스무 살 이전부터 사진을 시작해서 사진에 나의 온 생이 들어 있어. 내 삶에서 사진을 빼면 이야기할 게 없어. 사진이 전부야. 아직 전시할 사진이 많은데 힘들어 하지 못하고 있어. 누가 기획을 해주면 좋을 텐데. 내가 찍은 사진 한 장 한 장이 모두 포항의 역사인데 사람들이 그 가치를 모르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야.조 :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숙연해집니다. 이번 대담을 기회로 선생님의 사진 세계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전시도 가능해졌으면 합니다. 앞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선생님은 포항에 정착한 후로 포항의 급격한 변화를 지켜보고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그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면서 누구보다 감회가 새로웠을 것 같습니다.이 : 이야기를 듣고 보니 포항제철 구경 간다고 형산강 나루터로 자전거 타고 가던 사람들이 생각나네. 포항제철이 들어오면서 포항은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변화가 있었지. 나는 가슴 설레며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고. 마을이 통째로 없어지는가 하면 염전과 논밭에 새로운 길과 마을이 생겼지.조 : 해도 염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이 : 해도뿐만 아니라 송도에도 염전이 있었지. 송도 가는 다리를 놓기 전에 송도에도 염전이 있었어. 아마 송도에 염전이 있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야. 다리를 놓기 전에는 배를 타고 송도에 들어갔어. 동빈내항에서 낚시도 하고 아이들이 헤엄치고 놀기도 했어. 근래 운하를 만들어서 물길을 트고 준설도 하면서 수질이 좀 깨끗해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멀었지. 포항제철이 들어오면서 송도의 그 좋던 명사십리가 사라지고 환경문제가 심각해져 과거 그대로 보존되었다면 관광도시로 발전할 수 있지 않았겠냐고 하는 사람도 있지. 하지만 포항제철 덕분에 포항이 경제적으로 융성해지고 그 파급효과가 대단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야.조 : 혹시 송도에 다리 놓을 때 찍은 사진이 있는지요?이 : ‘소달구지’라는 작품이 송도 다리 공사할 때 찍은 것이지. 기초를 쌓을 때 나무다리를 먼저 놓아야 하거든. 강원도에서 나무를 싣고 왔는데 바다로 온 것인지 강을 따라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소달구지로 건져서 싣고 갔어. 송도 다리가 엉성해서 차가 지나다가 빠졌는데, 해녀들이 건져내기도 했지.조 : 칠성천 주변은 어땠습니까?이 : 내가 포항에 왔을 때는 칠성천에 맑은 물이 흘렀지. 포항제철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많이 유입되면서 칠성천이 점점 오염되더군. 도시화 현상이라고 볼 수 있겠지. 어쨌든 칠성천 주변에는 늘 활기가 넘쳤어. 부둣가에 배가 들어오면 생선을 내리잖아. 그러면 가난한 사람들은 생선을 줍거나 훔쳐서 팔기도 했어. 그래서 배가 들어오는 날은 아이들이 바글바글했지. 나는 그걸 찍으러 시장을 돌아다녔고. 동빈동과 남빈동은 오징어 덕장이었어. 그물과 그물을 잇대서 오징어, 노가리, 가자미 등을 말렸지. 그곳에서 아이들이 고무줄놀이도 하고 비석치기도 하고 숨바꼭질도 하며 놀았지. 축축하고 비린내 가득한 그물 밑에서도 아이들은 즐겁게 놀고 잘 자랐어. 굿도 잊을 수 없지. 굿이 너무 재미있어서 항구에서 몇 날 며칠을 자며 구경했어.조 : 말씀을 들어보면 1970년대 포항은 산업도시로 변모하면서 활력이 넘쳐나는 곳이 아니었나 싶군요.이 : 그렇게 볼 수 있지. 도시에 역동성이 있었고 사진작가인 나도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포항제철 건설과 함께 새마을운동이 맞물려 돌아갈 때지. 포항에서도 새마을운동을 많이 했는데 부인들이 열심히 했어. 부녀자들이 리어카를 끌고 악착같이 일했지. 포항 MBC 앞에서부터 시내까지 다 논밭이었는데 새마을운동으로 다 없어졌어. 외지 사람들도 포항에 많이 왔어. 대구, 영천, 구미 사람들이 회 먹으러 단체로 기차와 버스 타고 몰려오고 그랬지. 포항역과 시외버스 터미널에 사람들이 북적거렸거든. 죽도시장과 중앙상가가 번창할 수밖에 없었지.조 : 사진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이 사진은 선거 때 찍은 사진이군요. 이 : 중앙상가에 있는 포항우체국 앞이군. 선거에 출마한 사람들은 예외 없이 이 우체국 계단에서 연설했어. 눈에 잘 띄고 동서남북 길이 열려 있고 소리도 잘 퍼져나가니 집회와 연설 장소로는 안성맞춤이지. 포항의 정치 역사에서는 아주 중요한 장소야.조 : 이 사진은 큰 공사 현장입니다.이 : 포항제철 배수로 공사할 때 찍은 거네. 포항제철소 안에 이런 관이 수천 개 박혀 있을 거야. 정말 힘들고 대단한 공사였지. 지금도 그렇지만 포항제철에는 아무나 카메라를 들고 들어갈 수 없어. 그때 포항제철 직원들이 얼마나 큰 사명감을 갖고 일했는지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를 거야.조 : 포항 구석구석이 선생님의 사진 속에 담겨 있군요. 포항의 사진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선생님의 사진을 봐야 할 것 같습니다.이 : 내 호주머니에는 늘 필름이 가득 들어 있었어. 자나 깨나 필름을 보면서 분석하고 공부했지. 사실은 포항의 사진 역사를 쓰려다가 여러 사정으로 못 쓰고 있어. 이걸 쓰려면 포항에 사진이 맨 처음 전수된 시기와 전수받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내야 하는데 그게 참 힘드네. 선배들한테 물어봐도 아는 사람이 없어. 내 손으로 이걸 해보고 싶은데 이제는 욕심이 아닐까 싶군.이도윤1940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났다. 1967년 포항에 정착하면서 사람들의 삶과 풍경을 사진에 담아왔다. 1973년 포항 맥심다방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2012년 포항시립미술관에서 ‘그리운 포항, 사람들’이란 주제로 여섯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프랑스 국제사진전 우수상, 아시아태평양 사진전과 유네스코 사진전 우수상, 중화민국 사진전 3회 입선, 대한민국 미술대전 2회 입선, 대한민국 사진대전 입선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한국사진작가협회 포항지부장, 영상동인회 전국 회장, 선린대학·포항대학 강사 등을 역임했다.대담·정리 : 조혜경(시인) / 인물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10-05

“전국의 청년들이 경북서 꿈과 희망을 찾길 기대합니다”

경북매일신문에서는 지난 5월부터 경상북도의 시·군에 정착한 도시 청년들의 이야기를 연재했다. 멜빵총각이라는 이름으로 토마토를 재배하는 청년도 있었고, 독일에서 귀국한 바이올리니스트도 있었다. 이들의 정착 스토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흐뭇함을 안겨주기도 했다. 도시 청년들의 시골 정착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이철우 경북도지사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편집자주 - 경북에 정착한 도시 청년들은 도시청년시골파견제의 도움이 컸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사님은 도시청년시골파견제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있으신가요?△ 경상북도를 청년들에게 기회의 땅으로 인식하게 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재능있는 청년들이 경북에서 꿈을 펼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또 단순 정착에서 벗어나 지역 사회에 문화예술, 지역자원을 활용한 콘텐츠 개발과 사회서비스 제공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이 사업을 통해 지역에 연고가 없는 청년들이 새로운 마을의 구성원으로 자리 잡으면서 지역 사회에 활력을 불러일으키고, 그들과 상생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도 도시청년시골파견제와 비슷한 사업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사업이 성과와 평가를 대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불균형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데 균형발전을 위한 지사님의 견해는 어떠신지요?△ 1949년 경북인구는 321만 명으로 전국 1위였습니다. 당시 서울인구는 144만 명이었는데, 1970년 서울에 역전되어 2위가 됐습니다. 대구와 경북 분리 이후 더욱 빠른 속도로 추락하고 있습니다. 분리 직전인 1980년 대구·경북 인구는 495만 명이었는데, 2020년 505만 명으로 40년 동안 겨우 10만 명 증가하는데 그쳤습니다. 같은 기간 수도권 인구는 무려 1천262만 명 증가했습니다.대한민국은 수도권 공화국입니다. 인구의 절반, 전국 상위 20위 대학 중 12개, 100대 기업 중 84개, 좋은 일자리의 80% 등이 수도권에 몰려 있습니다. 청년들은 공부시켜 놓으면 취직하러 서울로 가버립니다. 지방소멸은 국가적 문제가 되었지만 수도권 중심 사고는 요지부동이며, 중앙정부의 모든 정책이 수도권만 살찌우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역대 정부마다 균형발전을 외쳤고 현 정부 역시 연방제에 준하는 지방분권 정책을 내세웠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지방자치단체의 권한과 행정체계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균형발전을 위해서는 확실한 지방분권이 되어야 합니다. 대구·경북 행정통합도 규모를 키우고 지방분권을 강화하여 균형발전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시도한 것입니다. 장기과제로 넘기게 되었지만 판을 바꾸지 않으면 안됩니다. 날로 거대해지고 있는 수도권과 맞서기 위해서는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합니다.- 인터뷰를 진행한 대다수의 청년들은 로컬 정착을 위해 인프라 확장과 지역 네트워크 확대를 꼽았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우리 도에서는 청년을 위한 단순한 지원 정책을 넘어 청년들의 무한한 잠재력이 발현되어 실현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고 상호 네트워킹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마련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또 청년들의 생각을 소통하고 삶을 공유하기 위한 청년 네트워크 구축에도 힘쓰고 있습니다. 청년공동체 활성화 사업을 통해 다양한 분야의 청년공동체를 발굴하여 지역사회와 적극적인 소통을 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으며, 청년연합회, 청년회의소, 4H연합회 등 청년단체들과 유기적인 체계를 구축하여 현장의 목소리를 도정에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향후 청년정책에 대한 통합적인 정보 제공과 소통 창구의 역할을 수행할 청년정책 플랫폼을 구축하여 청년이 원하는 정보를 원스톱으로 지원하고 청년의 목소리가 정책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안타깝게도 경북의 다수 지역이 인구절벽과 소멸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청년인구 유출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와 도시 청년들의 관심도 많았으면 하는데요?△ 경기도와 세종시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청년인구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경북은 청년인구 유출이 타지역에 비해 많은 편입니다.청년인구 유출 원인은 일자리, 주거, 문화, 교육, 복지 등 매우 다양하고 복합적입니다. 우선은 일자리 문제가 청년들을 외부로 나가게 하는 주 요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 2020년 전출 사유를 조사해보니, 32.7%가 직업을 이유를 꼽았습니다. 양질의 일자리 창출이 청년 유출을 막는 첫 단추인 셈입니다. 지방소멸을 막기 위해서는 도시 청년들의 지역에 대한 관심이 중요합니다. 우리 도는 ‘도시청년 지역상생 고용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청년창업 지역정착사업’과 ‘자립마을 활성화 지원사업’을 구상하고 준비하고 있습니다.아울러 청년정착 지원정책이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일자리뿐만 아니라 주거, 문화, 교육, 복지 등 종합적으로 추진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중소기업 근로 청년들에게 교통비와 연 100만원의 복지카드를 지원해서 청년들의 문화복지 지원도 늘려갈 계획입니다. 이외에도 ‘청년발전소’를 통한 청년활동가 양성과 ‘청년마을 만들기 사업’도 진행 중입니다.- 향후 경북을 찾으리라 예상되는 청년들을 위해 해주실 말씀이 있으시다면요?△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추진된 수도권 중심 발전 전략으로 인해 기업, 교통, 문화·예술, 생활 SOC 등이 수도권에 집중되어 왔습니다. 이에 청년들은 수도권이 아닌 지방에서 일자리도 구하기 어렵고, 일상적인 문화생활도 누리기 어려운 곳으로 인지하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상상 이상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과밀해진 수도권에 비해 지방은 새로운 성공의 기회들이 창출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신생활방식으로 정립되고 있는 ‘메타버스’와 비대면 일상은 세계 어디서든 일하고, 배우고, 즐길 수 있도록 물리적 제약을 풀어헤치고 있습니다. 청년들이 주거 문제로 받는 고통도 줄여주기 위해 우리 경북은 월세 지원 등 많은 정책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경북에서 전국 최초로 만든 ‘이웃사촌 시범마을’처럼 청년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가장 멋지고, 빠르게 만들어 보겠습니다. 전국의 청년들이 경북에서 꿈과 희망을 찾기를 기대합니다. “청년의 성장, 버틸 수 있는 힘을 기를 때까지 기다림이 중요” 이미나 경북행복경제지원단 과장. 파종과 추수 사이에는 ‘정성’과 ‘기다림’이 필요하듯, 청년을 지역 사회에서 다양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주체로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적절한 관심과 사랑이라는 ‘정성’뿐만 아니라 ‘기다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경상북도는 2018년부터 시행한 도시청년시골파견제를 통해 전국 최초의 청년유입정책 1.0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시작은 2017년 ‘청년U턴 일자리 지원사업’이라는 시범사업을 통해 문경에서 10명의 도시 청년들이 보여준 희망과 가능성이었다. 10명의 청년들은 6개월 이상 경제 활동을 포기하고, 비즈니스 모델을 구체화했다. 또 지역 공동체 일원으로 성장하기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였다. 행정과 청년의 콜라보로 탄생한 노력의 결과물은 대단했다. 청년들은 인구소멸 문제로 골치를 앓던 시골 마을을 월평균 8천 명이 다녀가는 명소로 탈바꿈시키며, 지역의 인적자원으로 자리매김했다.지방소멸 위기에 처해있는 시골 마을에서 청년 스스로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청년공동체를 복원시키는 이상적인 그림을 실현시킬 수 있었던 비결은 보이지 않는 정성과 기다림, 간절함과 진정성이었다. 현재 수도권, 비수도권 할 것 없이 전국의 지자체들은 인구감소에 따른 위기의식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청년유입 및 정착지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주요 내용은 해당 지자체로 이주해온 청년에게 경제활동을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허점이 있다. 우선 국가 전체 인구는 그대로인데 지자체에서 예산을 투입하여 제로섬 게임에 몰두하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제로섬 게임에서 뛰게 되는 선수가 실패 경험이 많지 않은 청년이라는 점이다. 첫 번째 문제도 문제지만 두 번째 문제가 더 심각하다. 두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문제를 문제의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행정이라는 시간 속에서 제한 시간 내에 청년을 선발하고 약정된 지원금을 지급하고 사업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절차상 과정 속에서 그 누구도 청년의 삶을 면밀히 관찰할 여유도, 그들이 요구하는 내용에 대해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성공모델이 되기를 꿈꾸는 아이러니한 현실이다.세상에 공짜는 없다. 지자체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이주와 정착을 하게 되는 청년들은 행정에서 요구하는 시간 내에 그들에게 주어진 다양한 미션을 수행해야만 한다. 그런데 미션 난이도에 대해서는 누구도 미리 알려주지 않는다. 지역에 이주해온 청년들이 낙오되지 않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이 보장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부 예산을 받은 청년들은 게임판의 경주마가 된 것처럼 빠른 시간 내에 성공모델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경주마가 된 청년 개개인의 삶 자체에 대한 책임감은 행정영역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단지 청년 개인의 능력부족으로 치부되고, 행정 낭비에 대한 책임은 고스란히 중간지원 조직에서 청년들과 소통한 담당자 또는 지자체 담당 공무원이 떠안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 보니 청년의 비빌 언덕이 되어주어야 할 주체들은 관심과 사랑이라는 정성을 쏟기보다는 결과물에 대한 책임소재를 걱정할 수 밖에 없다. 또 청년이 지역사회 안에서 스스로 버틸 수 있는 힘을 기를 때까지 기다려주기보다는 성과물에 대한 관리감독자로서의 역할에 치중하게 된다. 대도시와 같은 인적·물적 인프라가 충분치 못한 지방도시에서는 청년을 바라보는 여유가 미덕으로 작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조급함은 청년들에게 그대로 전가되는 것이 현실이다.도시청년시골파견제의 시작은 간절함과 진정성이었다. 청년을 맞이하는 지역의 자세도, 새로운 꿈을 찾기 위한 청년도, 그리고 이들을 바라보는 유연한 행정도 모두 한 마음 한 뜻이었다. 그래서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청년이 스스로 성장하여 지역사회 일원으로서, 지역의 경제를 이끄는 주역으로서 버텨낼 수 있는 힘을 기를 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는 여유야말로 지역사회가 청년을 맞이하는 가장 중요한 자세가 아닐까.이미나 (경북행복경제지원단 과장 / 교육학박사)/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1-10-05

박영달과 구왕삼의 영향으로 성장한 포항 사진

포항의 사진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어떤 사진작가들이 영향을 미쳤을까? 또한 어떤 단체와 교육과정을 통해 사진을 접하게 되었을까? 그 밖에 포항에서 맨 처음 열린 사진 촬영대회는 언제인지 등에 대해 이도윤 선생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조 : 포항의 사진 역사에 대해 들어보았으면 합니다. ‘포항시사’를 살펴보면 사진이 다른 장르보다 먼저 사단법인이 결성됩니다. 사단법인 포항사진작가협회가 1965년 9월 4일 인준되었고, 그 과정에서 박영달 선생이 역할을 하셨더군요.이 : 내 선배 세대로 박영달을 선생을 비롯해 김상용, 박원식, 김덕수, 허치권 선생이 있었지. 박영달 선생과 친목 모임을 함께하면서 여름에 기타 들고 오어사, 보경사에 가기도 했어. 사실 포항 사진은 대구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 6·25전쟁 이후에 대구는 사진의 수도였거든. 많은 작가들이 대구를 무대로 활동했지. 대구의 구왕삼 선생이 한 달에 한 번 포항에 와서 사진 강의를 했어. 구 선생은 좋은 작품은 어떤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도록 직접 작품을 보여주면서 가르쳤지. 대구 사진의 선구자인 신현국 선생도 포항에 공모전 심사가 있으면 다녀갔는데 그분 영향도 있었고. 그 후 포항의 사진 수준이 많이 향상되었어. 허치권의 ‘내 것 사이소’, 박영달의 ‘시집가는 날’, ‘노도의 위험을 뚫고’가 동아 사진콘테스트에서 입상했지. 박영달은 1913년에 태어나 1986년에 작고한 사진작가다. 1958년 조일국제사진살롱에서 입상한 것을 비롯해 국내외 유수의 사진 공모전에서 입상했다. 미술평론가 박경숙에 따르면 박영달은 1938년 대구일보 포항지사 기자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되었다. 이후 47년간 포항을 지키며 한국 사진 예술사와 포항 문화 예술계에 굵은 발자취를 남겼고, 그런 측면에서 포항 문화의 르네상스를 주도한 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가 운영한 ‘청포도다방’은 지역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2016년 포항시립미술관에서 박영달 회고전이 열렸다. 구왕삼은 1909년에 태어나 1977년 작고한 사진작가로 이명동, 임응식 등과 리얼리즘 사진 이론을 전개하며 사진 평론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동요 작곡, 음악 평론 등 음악 분야에서도 폭넓은 활동을 했다. 신현국은 1924년에 태어나 1997년 작고한 사진작가이며 매일신문 사진부장으로 활동했다. ‘생존’등의 사진집을 남겼다.조 : 구왕삼 선생은 “사진은 무성(無聲)의 시(詩), 시(詩)는 유성(有聲)의 사진”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구 선생이 리얼리즘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선생님의 사진관(觀)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이 : 사진은 화가가 데생하듯이 그리는 게 아니고 ‘사진이 아니면 안 된다. 사진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찾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카메라를 들어야 해. 나는 사진을 살롱 사진과 리얼리즘 사진으로 구분하지. 쉽게 말해 살롱 사진은 아름다운 풍경 사진이고, 리얼리즘 사진은 휴머니즘이고 살아 움직이는 사진, 순간을 놓치면 재현할 수 없는 사진이야. 내가 왕성하게 활동할 무렵에는 살롱 사진이 드물었어.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쉽게 하는 사진은 안 하고 싶어. 구왕삼 선생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런 면에서 구 선생의 사진관과 맥을 같이한다는 의견에 동의해. 구왕삼, 최민식 선생의 사진은 정말 배워야 할 가치가 있어. 두 분의 사진에는 휴머니즘이 생생하면서도 깊이 있게 살아 있지.최민식은 1928년에 태어나 2013년 작고한 우리나라 1세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 인간을 소재로 한 사진을 평생 찍었다. 제1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선 이후 국내외 여러 사진 공모전에서 입상하였으며 옥관문화훈장(2000) 등 많은 상을 받았다. 1968년 개인 사진집 ‘인간(Human)’제1집을 펴낸 후 2010년 제14집까지 출간했으며, 그 밖에도 많은 사진집을 냈다.조 : 선생님은 어느 분한테 사진을 배우셨습니까?이 : 동아일보 사진기자로 이름을 떨쳤던 이명동 선생께 배웠지. 이 선생한테 사진을 배우러 서울에 가기도 했고, 이 선생이 포항에 오면 내 집에서 숙박도 했지. 그분은 김두한이 연설하다 단상을 엎은 사진도 찍었어. 두들겨 맞을 각오를 하고 찍었지. 1960년 3·15 마산 의거 때는 카메라를 세 대 메고 다녔던 분이야. 카메라를 뺏길 것에 대비해 예비 카메라를 들고 다녔지. 사진 찍는 사람은 그런 근성이 있어야 해. 매일신문 신현국 선생을 찾아가 그분 암실에서 현상하는 방법을 배웠어. 사진 현상은 고도의 기술이 있어야 하거든. 신 선생도 배울 게 참 많은 대단한 분이었지. 한국 사진 역사 그 자체라 불리는 이명동은 1920년에 태어나 2019년 타계했다. 6·25전쟁 때 육군 7사단 종군 기록 사진가로 활동하며 무공훈장을 받았고, 4·19혁명을 비롯한 격변의 현장을 앵글에 담았다.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며 ‘동아사진콘테스트’와 ‘동아국제사진살롱’ 창설을 이끌었으며 월간 ‘사진예술’을 창간했다.조 : 과거에 사진작가를 포함해 예술인들의 모임이나 단체가 있을 법했겠습니다.이 : ‘나울회’라고 있었지. 문학, 미술, 서예, 사진, 음악 이렇게 다섯 분야의 사람 중에 성향이 비슷한 사람이 모인 단체였어. 예술에 대한 뜻과 생각을 너울지듯이 펼치자는 취지로 모였지. 1971년에 창립전을 열었고. 고문은 최영태 교수가 맡았고, 서예가 신대식 선생이 많이 도와주었어. ‘나울회’가 포항예총의 모태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야.조 : 선생님은 모임이나 단체를 만든 적이 없는지요?이 : 나는 서클을 만들었지. 1978년 ‘칠광회’를 시작으로 ‘포영회’, ‘영상동인회’를 만들었어. 이 서클을 통해 좋은 후배와 제자를 길러내고 싶었지. 아마 포항에서 제자를 길러낸 사진작가는 내가 처음일 거야. 이 서클이 계속 이어졌다면 좋았을 텐데. 모든 분야가 그렇지만 사진도 후배들이 잘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해. 지금은 내가 작업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환경이 좋아졌잖아. 역설적이게도 환경이 좋아지면서 진정한 사진의 길은 어려워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기력이 회복된다면 사진 강의를 더 하고 싶군.조 : 그러잖아도 대학생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셨지요?이 : 포항전문대학(현 포항대학교)과 선린전문대학(현 선린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지. 정식 교과는 아니고 사회교육원에서 사진 수업을 했어. 여성문화회관에서도 강의를 했고. 열심히 가르치고 배웠지. 포항의 두 대학 사진반에서 사진 촬영대회를 개최하기도 했어. 재미있는 건 두 대학의 사진반 학생들이 경주 동국대학교 사진반 학생들과 연락해 한데 뭉친 거야. 그렇게 모여서 즐겁게 놀고 사진도 열심히 하더군. 교수들도 많이 도와주고. 참 좋을 때였지.조 : 여성에게 사진을 권한다는 선생님의 칼럼을 읽었습니다.이 : 사진은 여성이 하기에 좋은 것 같아. 여성이 꼼꼼하고 섬세하잖아. 카메라의 세세한 부분을 이해하는 데 잘 맞고 감성적으로 여성과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여성문화회관과 포항종합제철 직원 부인들 대상으로 ‘주부를 위한 카메라 다루는 법’이라는 강좌를 개설해 강의했지.조 : 그렇게 강의를 하고 후학을 양성한 이유가 궁금합니다.이 : 내가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 사진을 오래 하다 보면 사명감이 생겨. 일종의 역사의식 같은 것이지. 예쁜 꽃만 찍는 것은 사진이 아니야. 누구나 찍을 수 있는 사진을 찍어서는 안 돼. 생활 현장에서 생생한 삶의 모습을 포착해야지. 작가로서 사진에 대한 이런 신념을 사회에 알리고 확산해야 한다고 생각해.조 : 포항에서도 사진 촬영대회가 열렸을 텐데 최초로 열린 대회는 언제입니까?이 : 1968년 개항제가 열렸는데, 꽤 큰 규모의 문화 행사였지. 그 행사 중에 포항에서 처음으로 사진 촬영대회가 열렸던 걸로 기억해.‘포항시사’ 3권(2010, 113쪽)에서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1968년 포항에서 처음 문화제가 열렸으니 제1회 개항제가 그것이다. 제1회 개항제는 이명석이 주도했으며 오실광(초대 상공회의소 회장), 김유(상의의원), 정명바우(상의의원) 등 지역 상공인들이 크게 도왔다. 그런데 당시로서는 처음 보는 문화제요 예술제인데다 개항제 행사의 일환으로 미인대회를 겸한 모델대회가 열렸는데 포항에서 모두가 처음 있는 일이라 구경꾼이 구름처럼 모였다고 한다.당시 번화가 인근으로 포항 시민의 최고 휴식처인 수도산에서 2차에 걸쳐 모두 50여 명의 사진작가들이 치열한 사진 촬영 경합을 벌였는데, 당시만 해도 촬영대회 자체가 생소했을 뿐만 아니라 번화가에서 뜻밖에 열리는 행사였으므로 매우 성공적일 수밖에 없었다. 카메라 등 장비가 열악했던 시절이었음에도 사진 예술에 대한 관심을 드높인 의미 있는 행사라고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이도윤1940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났다. 1967년 포항에 정착하면서 사람들의 삶과 풍경을 사진에 담아왔다. 1973년 포항 맥심다방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2012년 포항시립미술관에서 ‘그리운 포항, 사람들’이란 주제로 여섯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프랑스 국제사진전 우수상, 아시아태평양 사진전과 유네스코 사진전 우수상, 중화민국 사진전 3회 입선, 대한민국 미술대전 2회 입선, 대한민국 사진대전 입선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한국사진작가협회 포항지부장, 영상동인회 전국 회장, 선린대학·포항대학 강사 등을 역임했다.대담·정리 : 조혜경(시인)

2021-10-04

지역경제 활성화와 고용창출… 지속가능 도시발전 이룬다

김충섭 김천시장은 민선7기 시장으로 취임하면서 ‘지역경제 활성화와 고용창출’을 시정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일자리 친화적인 우량기업 유치에 올인했다. 그 성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올 12월 준공예정인 김천1일반산업단지 3단계 부지에 35개 기업 2천900개의 일자리와 6천500억원의 투자를 유치했다.리쇼어링(re-shoring) 1호기업인 아주스틸, e-커머스 1위 기업인 (주)쿠팡의 첨단물류단지, 신선식품기업 대정, (주)현대에이알씨코리아 등이 김천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김천∼거제 간 남부내륙철도 건설사업은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사업으로 현재 전략환경영향평가와 기본설계를 시행 중이다.이번 ‘제4차 국가철도망구축계획’에 시행 중인 사업으로 포함돼 2022년 착공하게 된다. 총연장 172㎞에 4조7천억원이 투입되며, 철도가 개통되면 1시간 10분만에 김천에서 거제까지 갈 수 있어 물류교통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김충섭 김천시장. 김 시장은 지난 6월 한국매니페스토 실천본부에서 진행한 민선7기 전국공약이행 평가에서 최고등급인 SA(최우수)를 받아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선거공약을 가장 잘 실천하고 있는 자치단체장으로 인정받았다.김 시장은 기업유치, 공약사업이행, 철도망구축 등 시정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민선 7기 마무리에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 지속가능한 미래발전을 위해 추진하고 있는 주요 현안사업에 대해 알아본다.◇시청삼거리∼환경사업소∼유한킴벌리 10월말 도로개통김천시는 시가지 교통체증 해소와 지역균형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1천483억원을 투입해 시청 삼거리∼환경사업소∼유한킴벌리∼혁신도시간 연장 5.6㎞에 4~6차로의 도로개설 사업을 추진 중이다.2023년 전 구간 개통 예정으로 최근 삼애원 터널공사와 국가하천 감천(甘川)을 횡단하는 교량, 그리고 공사구간 중 최고 난공사인 경부고속도로 횡단교량(덕곡교) 거치를 완료했다.◇70억원 들여 공공산후조리원 2022년 상반기 완공김천시는 ‘엄마와 아이가 행복한 김천’ 만들기 공약사업의 일환으로 공공산후조리원을 건립하고 있다. 모암동 김천의료원 인근 1천689.6㎡ 부지에 70억원을 투입해 지상 2층 연면적 1천432㎡ 규모로 건립되며, 지난 6월 착공해서 2022년 상반기에 완공 계획이다.‘김천시공공산후조리원’ 모자동실에는 개인 좌욕기와 거동이 불편한 산모를 위한 전용 샴푸실, 감염병 예방을 위한 비대면 면회실을 배치하고, 신생아실은 베네 캠(Bene cam)을 통해서 언제 어디서나 신생아의 상태를 볼 수 있도록 하는 등 타 시군의 시설과 차별화하고 있다.◇50억원 투입 장애인회관 2022년 12월 준공시내 곳곳에 산재해 있는 장애인 단체 사무실을 단일 건물 입주로 통합해서 장애인 단체 간의 연대를 강화하고, 장애인의 편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옛 응명초등학교 부지에 ‘장애인회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총사업비 50억원, 연면적 2천480㎡(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지난 7월 설계공모를 완료하고, 현재 실시설계 중에 있다. 올 연말에 착공해서 2022년 12월 준공할 예정이다.◇66억원 들여 노인건강센터 2022년 10월 준공김천시는 노인인구(65세 이상)가 전체인구의 23%로 이미 초고령 사회에 진입함에 따라 남산동 중앙공원에 66억원을 투입해 연면적 2천973㎡(지하 1층, 지상 5층) 규모로 올해 1월 착공해 2022년 10월 준공예정이다.노인건강센터는 노후생활에 꼭 필요한 다양한 시설과 프로그램을 갖추고 각종 노인복지 서비스를 종합적으로 제공하는 중심센터 역할을 하게 된다.◇263억원 투입 감호지구 도시재생 2024년 완료‘감호지구 도시재생 뉴딜사업’은 지역주민과 상인협의체의 적극적인 참여로 정정당당 은빛복지센터, 보행자 안전 우선도로, 문화광장, 행복한 가게프로젝트 창업공간 조성사업 등의 설계가 원활히 진행 중이다.감호지구 도시재생 뉴딜사업은 국비 141억원을 포함 총 263억원을 투입해 2024년 사업 준공을 목표로 생활 SOC시설 등 8개 분야 23개 사업을 차질없이 추진하여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과 도심기능 회복 및 지역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평화동 도시재생, 행복주택 2022년 4월 입주김천시 평화동 원도심을 활성화하기 위해 지난 6년간 프로젝트 사업으로 추진 중인 ‘평화동 도시재생사업’이 어느덧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2016년에 공모에 선정된 ‘평화동 도시재생사업’은 3개 분야, 18개 세부사업으로 연차별 계획에 따라 차질 없이 추진되고 있으며, 연내 마무리될 예정이다.도시재생사업 중 가장 눈에 띄는 사업은 김천역 인근 지하 2층, 지상 15층 규모로 건립 중인 복합문화센터 및 행복주택 조성사업으로 1~4층까지는 청년센터와 건강다문화센터로 활용하고, 5~15층까지는 청년, 신혼부부, 대학생 등을 위한 행복주택(99호)이 들어서게 되며, 2022년 1월 완공해 4월부터 입주가 시작된다. ◇통합보건타운 건립으로 도심 활성화평화동 옛 김천대학교 창업보육센터 일원에 계획하고 있는 ‘통합보건타운’ 건립은 총사업비 348억원을 투입해 연면적 1만1천200㎡(지하 2층, 지상 3층) 규모로 9월부터 설계공모에 들어가 2022년 8월 착공해서 2024년 상반기에 개소할 계획이다.‘통합보건타운’은 보건소, 중앙보건지소, 치매·정신건강복지센터를 단일 건물에 통합·운영함으로 시민들에게 양질의 보건의료 서비스를 한 곳에서 종합적으로 제공한다.근무인력 200여명과 시설 이용자들의 유동인구 증가로 침체돼 있는 평화동 원도심 활성화에도 큰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시내 가로수, 화이트 핑크 삼색버드나무 심어김천시 평화로에 시민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도 쾌적하고 아름다운 도시경관을 연출할 수 있는 화이트 핑크 셀릭스(삼색버드나무)를 식재했다.이 수종은 계절에 따라 잎이 핑크, 화이트, 그린 3가지 색으로 변하는 신품종으로 맹아력(萌芽力, 싹트는 힘)이 좋아서 원하는 다양한 수형을 연출할 수 있어 가로수, 정원수, 공원수 등으로 많이 식재되고 있다.◇고성산 둘레길, 느긋하게 천천히 걷는 트래킹 코스고성산은 도심 시가지(평화남산동, 양금동, 대곡동)와 연접해 시민들이 쉽게 찾을 수 있는 김천의 대표적인 도시 숲으로 시민들에게 쉼터와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있다.최근에는 가족들과 산책을 즐기고, 가벼운 조깅도 할 수 있는, 느긋하게 천천히 걷는 트래킹코스가 각광받고 있다. 이에 발맞추어 현재 계획 중인 ‘고성산 둘레길’ 또한 김천의 대표적인 트레킹 코스로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시민들의 건강과 활력을 지켜주는 쉼터로 조성할 계획이다.◇복합혁신센터 건립 공정률 46%, 내년 완공김천혁신도시의 정주여건 개선과 주민들의 다양한 문화욕구 충족을 위해 건립하고 있는 김천복합혁신센터의 공정율이 46%를 보이는 가운데 2022년 완공을 목표로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다.김천복합혁신센터는 국도비 114억원을 지원받아 총 363억의 사업비를 투입해 8천287㎡ 부지(육아종합지원센터 옆)에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연면적 1만163㎡)로 건립한다.이곳에는 도서관, 다목적강당, 청소년실, 휴게실 등 다양한 문화공간을 꾸며 지역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된다.지난해 공모를 거친 건축디자인은 김천시의 대표 무형문화재인 ‘빗내농악’의 상징적 의미를 형상화하여 빼어난 건축미를 더했고, 가족열람실, 종합자료실, 열람실, 공연 및 음악회, 야외전시, 강연 및 강좌, 세미나, 힐링·카페 독서공간과 청소년 활동공간으로 구성했다. ◇농산물종합유통타운, 농산물 유통구조 혁신김천시는 교통의 중심지이자 과실류 집산지인 강점을 살려 대형 장기프로젝트인 ‘농산물종합유통타운’ 건립을 계획하고 입지선정을 위한 준비 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농산물종합유통타운 건립사업은 산지의 조직화, 규모화, 전문화를 통한 통합마케팅 체계구축, 농산물 유통구조의 혁신과 더불어 소비자 중심의 미래 먹거리변화에 적극 대응하기 위해 과수거점 산지유통센터, 비상품화농산물 자원화센터, 로컬푸드 복합센터(로컬푸드 직매장, 농가 레스토랑 및 테마카페 등), 전송물류센터, 체험형 축산테마공원 등 최근 소비트렌드 변화에 따른 농산물 유통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계획이다.이를 위해 김충섭 김천시장은 지난해 9월 김현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을 방문, 농산물종합유통타운 건립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충분히 설명하고 국비지원 등을 건의했다.◇황산공원, 가족단위 휴식공간으로 조성장기미집행 공원 일몰제에 대비해 추진된 지좌 황산공원은 2019년 설계에 착수해 현재 토지보상 및 용역을 추진 중에 있으며, 올해 보상 및 설계를 완료하고 2022년 착공할 예정이다.주요 도입시설은 산책로, 광장, 물놀이시설, 흙놀이터, 초록쉼터, 네트어드벤처 등이 있다.그동안 급경사로 인해 이용이 불편했던 황산에 다양한 산책로와 데크길을 만들어 주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접근성을 높인다.또 지좌 황산공원에 흙놀이터, 물놀이시설, 네트어드벤처 등을 설치해 가족들이 아이들과 편안하게 이용하도록 한다. 훼손된 숲은 복원하고 편백나무 숲 등을 조성해 치유와 휴식의 공간으로 재탄생시킬 예정이다./나채복기자ncb7737@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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