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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소극적 누나와 적극적 동생의 콜라보 사진에 영양을 담아요”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동서상가 3층 ‘단듸랩’. 있어 보이는 이름 만큼이나 아기자기한 또는 이쁘게 꾸며진 스튜디오로 생각했다. 실상은 오래된 건물에 오래된 화장실, 바로 옆에 아이들을 위한 작은 교습소가 있는 곳이었지만 말이다. 이곳에 현실남매 허진희(32)·허진수(30) 씨가 꿈을 키워가고 있다.“조금 스튜디오가 그렇죠? 영양에서 스튜디오를 구할 때, 군청 주무관님과 함께 돌아다녔지만 한정된 예산에 넓은 장소로 구할 수 있는 곳이 많이 없었어요. 그래도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생각하면, 나쁘지는 않아요.”‘건물 외관과 스튜디오가 다르다’는 기자의 말에 웃으면서 대답한 진희 씨의 말이다. 실제로 ‘단듸랩’의 스튜디오는 외관과 달리 흰색 배경을 바탕으로 넓직하게 꾸며져 있었다. 사진을 위한 배경 공간과 아기자기한 탁자 등 여느 사진관과 큰 차이는 없다.‘단듸랩’은 ‘단디해라(제대로 해라)’라는 경상도 방언에서 따왔다. ‘단듸랩’은 가족사진과 단체사진, 증명사진 등 인물사진부터 제품사진, 스냅샷, 광고편집 디자인 등 전문 사진촬영·편집을 제공하는 스튜디오다. 현재는 인물사진보다는 제품의 스냅샷 등을 주력으로 하고 있다고…. “저희가 어려서 그런지 영양분들이 잘봐주시는 것들도 있더라구요. 물론 제품의 스냅샷과 광고편집 디자인 같은 것은 지금까지 영양을 비롯해 경상북도에 흔하지 않은 사업이었어요. 그래서인지 대부분 의뢰해주시는 분들이 만족해주시더라구요. 저는 감사할 뿐이죠.”‘단듸랩’의 작은 성공에는 동생 진수 씨의 몫도 크다. 누나인 진희 씨의 말로는 ‘인싸(인사이더)’의 교과서라는 진수 씨다. 진수 씨에 따르면, 우선 하루 커피 두 잔은 기본이다. 동네 형님(?)들과 함께 하는 축구 모임은 필수고 골프도 수준급이며, 지난해에는 산나물 축제위원회 추진위원도 맡았다. 처음에는 난생 처음 보는 외지인이 나타났으니 “저 녀석들은 누구야?”라는 텃세 아닌 텃세를 겪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가 형님이다. 사실은 아버지뻘의 나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농사짓는 형님’, ‘비료 장사하시는 형님’ 등 영양군 곳곳에 형님들이 포진해 있으니 사진과 디자인 관련되는 일만 있으면 무조건 ‘단듸랩’이 추천 대상 1순위인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요즈음 고추농사도 시작했어요. 500평 정도 되죠. 아! 물론 아는 형님께서 추천해주신 거죠. 매일 새벽에 나가서 고추를 돌보고 있어요. 벌레가 먹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고, 농작물의 수확이 좋지 않을까 걱정을 하죠. 애착이 가기도 하고, 이미 시작했으니 결과가 좋아야죠.”동생 진수 씨의 고추 농사 이야기에 누나 진희 씨는 “동생은 이미 영양 사람 다 됐어요”라고 했다. 그 말대로, 영양에서 2년을 넘기지 않은 진수 씨의 얼굴은 검게 타 있었다. 손가락 역시 도시 청년의 그것은 아니었다. 여기저기 그을려지고 상처가 있는 손가락이었다. □꿈이 현실로… 영양에서 차근차근현실남매인 허진희 씨와 허진수 씨는 서울 인근인 고양시 출신이다. 영양에는 어떠한 연고도 없다. 이들이 시골 중의 시골인 영양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무엇일까.진희 씨는 서울 상수동과 여의도 벤처기업에서 마케팅 업무를 했다. 출퇴근을 위해서는 매일 1시간 이상 지하철에서 보내야 했던 시간이었다. 특히, 마케터로서의 일 자체는 즐거웠지만, 자신이 부품 취급을 당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미래가 불안정하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고, 그로 인해 우울해지기까지 했다. 그러던 가운데, 떠오른 곳이 영양이었다.“물이 너무 깨끗하고 공기도 좋잖아요. 분위기도 좋고요. 늘 생각했던 것이 영양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거였죠. ‘단듸랩’도 마찬가지에요. 옛날부터 사진을 취미 이상으로 했어요. 회사 생활을 하면서 제품 사진 정도는 찍었으니 취미 수준은 아니었죠. 다만, 소극적인 성격이 문제였어요. 그래서 동생이 필요했구요.”소극적인 진희 씨와는 달리 적극적인 진수 씨는 남매의 사업에는 적격이었다. 대학에서 체육과 관광을 전공했고 천성이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며, 단체에 소속되어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심지어 과일 장사, 유아 체육 강사, 스키강사, 회사 영업사원 등 그동안 해온 거의 모든 일이 활달하고 유쾌하지 않으면 못하는 일이었다. 어찌보면 누나와의 사업 궁합은 좋은 셈이었다. 가족 관계는 모르겠지만 말이다.“매일 싸워요. 늘 사소한 문제로 투닥거리죠. 그래도 일하는 것에는 완벽해요. 서로 조율해야죠. 누나도 마찬가지고 저도 목표가 있거든요.”진수 씨의 말대로 현실남매의 목표는 영양에서 기반을 잡는 것이다. 미래를 위한 수입을 안정화하는 것. 그래서 진희 씨와 진수 씨의 사업도 다각화 중이다.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가 통한 것일까. 처음 1년 1천500만원으로 잡았던 매출이 매달 평균 400만원의 매출로 껑충 뛰었다. ‘단듸랩’이 생각하는 사진 콘셉트를 영양분들이 받아들이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기분 좋은 오산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하지는 않는다. 이제 32살과 30살의 청년이 영양에서 미래를 꿈꾸기 위해서는 말이다.“고추 농사를 시작한 것도 목표를 이루기 위한 것이죠. 이제는 영상 쪽으로 발을 넒히고 싶어요. 준비도 하고 있구요. 또 관광과 관련한 일도 생각하고 있어요. 대체적으로 지역의 축제는 농산물 판매에 초첨이 맞춰져 있어요. 물론 저도 그것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축제 자체를 즐길 수 있고, ‘꼭 오고 싶은 영양’을 모토로 지역 관광을 활성화하고 싶어요. 독특한 콘텐츠로 무장하면 분명히 가능할 것 같아요. 영상 디자인이 그 중의 하나일 수도 있구요.” □영양에 청년들이 많았으면 좋겠어요경북의 오지라고 불렸던 영양에서 기반을 만들어가고 있는 허진희 씨와 허진수 씨. 이미 두 사람은 스스로를 영양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다.“아직 서울이나 수도권에서는 영양에 대해서 잘 몰라요. 저희가 택배를 주문한 적이 있는데, 택배 기사분이 전화가 오더라구요. ‘강원도인데 단듸랩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씀이셨죠. 택배기사분이 경북 영양을 강원도 양양으로 착각하신 거에요. 친구들도 영양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도 같구요. 그런데 저희가 이곳에 내려오고, 영양에 다녀갔던 친구들이 많아요. 그리고 영양의 자연과 주위를 보고 반한 친구들도 많구요.”그래서 진희 씨와 진수 씨에게 물었다. ‘영양으로 온 것에 대해 만족하고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이들의 대답은 단호했다.“만족하고 있어요. 물론 아직 넘어야 하는 산이 많은 것도 사실이죠. 그래서 더욱 노력하고 있는 것이구요. 서울의 남자친구에게 이야기를 했어요. 이후의 일이지만, 주말부부도 생각하고 있구요. 근본적으로는 남자친구와 결혼하게 되면, 영양에 살고 싶어요.” “저도 여자친구에게 영양에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여자친구의 조건이 연봉 5천만원이더라구요.(웃음) 처음에는 불가능할 것 같았지만, 지금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더 커요. 농사를 짓고, 앞으로 계획하는 일이 제대로 된다면 분명히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마지막으로 진희 씨와 진수 씨에게 질문을 던졌다. 영양에 청년들이 많아졌으면 하냐고 말이다. 이들은 말했다.“당연하죠. 청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아는 사이에 동업은 절대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그것도 현실남매라면 오죽하랴. 하지만 서로를 밀어주고 끌어줄 수 있다면 ‘동업’도 나쁘지는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각자가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시너지 효과를 내고 하나가 되면, 또 다른 사업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 진희 씨와 진수 씨 남매처럼 말이다. 처음에는 도시 생활에 대한 염증으로 시작한 영양 생활. 그저 영양의 자연이 좋고, 행운이 가미되었던 귀농 생활. 하지만 스스로가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까./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1-07-27

집콕생활에 지쳤다면?은어축제 접속하세요!

봉화은어축제는 문화체육관광부 지정 5년 연속 우수축제로 선정됐으며, ‘대한민국 축제 콘텐츠 대상’에서 2020년 축제관광부문 대상, 2021년 비대면 축제 대상을 수상하는 등 매년 50여만 명이 찾는 대한민국 대표 한여름 축제이다.지난해 코로나19로 촉발된 언택트 문화의 확산에 따라 ‘온라인’ 축제로 개최돼 축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올해로 23번째를 맞은 봉화은어축제는 지난해에 이어 두번째 ‘온라인’으로 개최한다. △ ‘내 곁에 ON, 봉화은어축제’봉화군이 주최하고 (재)봉화축제관광재단이 주관하는 제23회 온라인 봉화은어축제는 ‘내 곁에 ON, 봉화은어축제’라는 주제로 31일부터 8월 8일까지 봉화은어축제 전용 온라인 채널 ‘봉화은어TV’와 축제 홈페이지, SNS 등 다양한 플랫폼을 기반으로 열리게 된다.올해 주제는 코로나19로 지친 일상에 봉화가 주는 선물로 ‘온라인을 통해 당신 곁으로 찾아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전 국민들에게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희망과 긍정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봉화군과 (재)봉화축제관광재단은 최근 코로나19의 확산세가 꺾이지 않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개최가 확정된 봉화은어축제는 당초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추진하고자 노력해왔으나 지역주민들과 관광객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 비대면 온라인으로 개최하기로 최종 방침을 정했다.따라서 축제의 핵심 콘텐츠인 은어 반두잡이와 맨손잡이 체험이 전격 취소됐으며 이와 관련된 구이체험과, 물난장 놀이터, 전시행사 등 각종 오프라인 행사들도 취소 또는 대폭 축소돼 운영된다. 대신 주무대를 온라인으로 옮기는 만큼 한층 강화된 온라인 프로그램과 이벤트로 관광객들의 아쉬움을 달랠 계획이다. △ LIVE로 만나는 온라인 콘텐츠지난해 처음 도입돼 높은 판매고를 올리며 큰 호응을 얻은 은어 판매 드라이브 스루는 올해 축제 개막에 앞서 7월 24일부터 판매를 시작,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구입이 가능하다.차량에 탑승한 상태 그대로 은어를 구매할 수 있어 간편하며 무엇보다 관광객 밀집을 예방할 수 있어 방역에도 효과적이다.판매가격은 kg당 1만5천원으로 시중에서 구입하는 것보다 저렴한 가격에 은어를 맛볼 수 있다. 올해는 즉석에서 만든 은어구이와 튀김을 함께 판매함으로써 다양한 은어요리를 맛있고 간편하게 즐길 수 있다. 은어 판매 드라이브 스루는 다음 달 15일까지 계속될 예정이며 행사 물량 소진 시 조기종료 될 수 있다.유튜브 채널 봉화은어TV에서는 축제기간 동안 매일 오후 2시 30분에 봉화은어축제를 주제로 다양한 온라인 프로그램이 전개된다.유명 쇼호스트, 개그맨과 함께 라이브로 만나는 은어 드라이브스루 판매 ‘드라이브 커머스’, 전문 요리사가 전하는 명품 은어요리 소개 코너 ‘수박향 은어! 요리 클라쓰’가 방송돼 봉화은어축제를 다채롭게 즐길 수 있다.또 봉화의 유명산을 배경으로 최소한의 캠핑 도구들만 이용해서 펼쳐지는 ‘와일드 캠핑 브이로그’와 최신 트렌드인 차박(자가용 이용 캠핑)으로 봉화에서 하루를 만끽하는 ‘그린 봉화, 차박 봉박’ 등 1급 청정지역인 봉화의 자연을 알리는 프로그램도 준비돼 있어 캠핑 애호가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8월 6일부터 8일까지는 코로나19로 지친 일상에 선물을 준다는 온라인 봉화은어축제의 취지에 맞게 코로나19로 고생하는 의료진들을 응원하기 위한 ‘LIVE IN 봉화, 덕분에 콘서트’가 매일 오후 7시 30분 ‘봉화은어TV’라이브를 통해 무관중 콘서트로 진행된다. △ 남녀노소 즐기는 온라인 콘테스트축제 홈페이지와 SNS에서는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 가능한 온라인 이벤트가 펼쳐진다.은어축제를 주제로 한 창작 만화 그리기 대회인 ‘봉화 4컷 웹툰 그리기 대회’와 제2회를 맞는 ‘I LOVE 봉화 랜선사생대회’가 개최되고 축제 마지막 날 온라인 시상식을 통해 소정의 상품도 증정한다.이 외에도 ‘은어 숏폼 챌린지’, ‘봉화은어축제 6행시 짓기’, ‘알쏭달쏭 초성퀴즈’, ‘은어축제 틀린그림 찾기’ 등 은어축제만의 특색 있는 이벤트를 통해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할 계획이다.자세한 소개 및 참가방법은 봉화은어축제 공식 홈페이지(http://www.bonghwafestival.or.kr)를 통해 확인 가능하다.엄태항 봉화군수는 “지난해 좋은 평가를 받았던 ‘온라인’ 봉화은어축제의 성공적인 개최 경험을 토대로, 올해는 보다 새롭고 참신한 온라인 프로그램과 이벤트로 집에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축제를 만들겠다”며 “변화하는 시대의 요구에 발맞춰 봉화은어축제의 변화와 도전을 바탕으로 새로운 축제문화를 선도해 나갈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하겠다”고 밝혔다./박종화기자 pjh4500@kbmaeil.com

2021-07-27

12년 공직생활의 끝자락… “아직도 마무리 할 일 많아”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달성군에는 여전히 유효하다. 2010년 17만6천여 명이었던 달성군 인구는 전국적 인구 절벽 속에서도 10년 동안 9만 명이 늘어나 6월말 현재 26만 명을 넘어서며 변화와 도시성장을 증명하고 있다. 2010년 3천611억원이었던 군 예산도 지난해엔 1조113억원으로 3배 가량 커졌다.2010년 첫 취임한 이래 11년째 군수실을 지키고 있는 김문오 군수는 행사가 없는 시간이면 집무실 CCTV화면을 집중한다. 비슬산 대견사와 송해공원, 도동서원, 사문진 등 달성군의 문화 관광 8개 거점 지역을 실시간 모니터하는 것이다. 방송국 앵커 출신에 3선 단체장 경력의 김 군수. 그의 달성자랑은 막힘도 거침도 주저함도 없이 숨 가쁘다. -3선 민선군수로 이제 임기가 10달도 못 남았다. 남은 임기동안 어떤 일들에 집중할 생각인가.△나는 아직 할 일이 많다. 비슬산 케이블카 건설, 송해기념관 준공, 도동서원 누리길사업, 다사 행정복합타운 건설과 현풍의 충혼탑 재건립, 화원읍사무소 리모델링, 여성문화복지센터 마무리 등 벌여놓은 일들을 해야 한다.-누가 달성 군수가 되더라도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김문오 군수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 남아있나.△그것들이 모두 내가 해야 할 일들이다. 왜냐하면 모두 내가 벌였던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할 일들이 끝이 없다.-김 군수의 재직기간동안 달성군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김 군수가 일을 많이 한 것은 전국적으로도 소문이 났다. 스스로 평가해 본 적이 있나. 자랑을 한 번 해 달라.△돌아보니 지난 11년은 달성군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변화를 이뤄낸 시간이었던 것 같다. 대구 변방의 존재감 없던 달성군은 이제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고 이제는 대구를 넘어 대한민국의 중심 도시로 당당히 자리매김해 나가고 있다고 자랑하고 싶다. 그야말로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변하는 발전을 거듭하며 달성의 위상을 드높였다. 지난해 달성군은 개청 이래 전국 82개 군 단위에서는 유일하게 예산 1조원을 돌파했고 전국적인 인구 절벽의 위기 속에서도 조출생률 전국 2위, 합계 출산율 전국 15위를 기록하며 줄어가는 대구 인구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됐다고 자부할 수 있다.-지난달엔 김 군수가 거버넌스 지방정치대상 최우수상을 받는 등 달성군은 도시 발전만큼 각종 상도 많이 받은 것으로 안다. 상이란 상은 죄다 받으려 하는 욕심 많은 군이라고도 하더라.△최근 고용노동부로부터 전국 지방자치단체 일자리대상 우수상을 받았고 지난달 행안부의 국가재난관리 유공 대통령상과 서울국제관광박람회에서 최우수상을 받는 등 올해에만도 중앙행정기관 등으로부터 13개의 상을 받았다. 지난해엔 42개나 된다. 모두 군민과 직원들이 열심히 일 한 결과일 것이다.-군수로서 소임을 충실히 한 것인데, 군민들도 자부심이 상당할 것 같다.△달성은 낙동강과 비슬산, 국가산업단지와 테크노폴리스라는 동력을 발판 삼아 성장했다. 인구가 늘어나 유가 옥포 현풍 등 3개면이 읍으로 승격하면서 군내에 6개 읍 체계를 갖추게 됐다. 균형 발전과 보편적 복지, 다양한 교육 문화 정책을 통해 떠나가는 달성이 아닌 ‘머무는 달성’으로 변화시켰다. 2020년 하반기 행정수요 조사에서 지역민 80%가 ‘달성군에 계속 살고 싶다’고 답했다. 군민들의 자부심이니 군수로서는 군 경영에 성과를 거둔 셈이다.-달성의 발전은 특히 인구 증가로 드러난다. 인구 증가와 경제성장, 지역 문화관광 산업 인프라 구축 등 분야마다 변화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 같다. 배경과 전망을 듣고 싶다.△처음 군수 취임당시 17만6천900여 명이던 달성군 인구가 지난 달 현재 26만 명을 넘어서 꾸준히 상승곡선을 그리며 30만 명을 바라보고 있다. 달성군은 대구 산업 경제의 70%를 책임지는 신성장 허브 도시다. 테크노폴리스와 대구국가산단이라는 산업 경제 인프라 쌍두마차를 발판으로 인구성장과 경제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것이다.유가읍과 현풍읍에 걸쳐 조성된 테크노폴리스가 국내외 연구 및 교육 집적단지를 갖춘 미래형 첨단 과학도시로 자리를 굳혀 가고 있다. 국가산업단지도 물산업 클러스터와 초대형 물류센터, 업체의 입주가 본격화되면서 영남권 중추산업단지로 부상하고 있다. 여기에 일자리를 찾는 젊은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인구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코로나19 팬데믹으로 관광 산업이 위축되면서 가까운 관광코스들이 언택트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달성군은 관광산업 인프라에도 많은 투자를 했고 성과도 얻었다. 달성의 관광 현황과 앞으로의 전망은.△코로나로 관광산업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언택트 관광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코로나 사태에 안전한 여행을 원하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달성은 비슬산 대견사 중창부터 마비정 벽화마을, 사문진 역사공원, 송해공원, 비슬산 관광명소화 사업까지 체계적이고 과감한 정책을 추진해서 실질적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하고 있다.-달성이 과학산업단지로 성장한 이면에 문화도시로서의 역량도 주목받고 있다.△코로나가 기승을 부린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많은 문화 행사와 축제들이 미뤄졌지만 달성군은 지난 10년 동안 문화와 관광에 역점을 두고 행정력을 집중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달성 100대 피아노 콘서트’와 ‘달성 대구현대미술제’는 대한민국 대표 문화축제로 자리매김했다. 100대 피아노 콘서트는 지난해 코로나로 열리지 못했는데 올해는 코로나가 숙지면 더욱 내실 있게 준비해서 10회를 대한민국 대표 명품축제로 열 계획이다.달성은 지난해 대구 최초로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는 예비문화도시로 지정됐다. 대구에서는 달성군이 유일하다. 화원읍에서 진행된 문화적 도시재생사업이 지역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내년에는 법정 문화도시로 승격할 것을 자신한다.-대구시가 신청사를 달서구 두류정수장 부지로 옮기기로 했다. 달성군이 시청 청사를 유치하려다가 실패했다. 군민들의 실망감이 클 것 같다.△오히려 군의 위상을 높이는 정말 좋은 기회였다. 시청 유치를 희망하면서 26만 달성군민이 하나로 똘똘 뭉쳤다. 군민이 대구시청 청사 유치라는 하나의 목표를 놓고 화합하고 단결하는 축제의 장을 만들었다. 대구의 변방으로 인식되던 달성군이 대구의 절반을 차지하며 대구의 중심이라는 실상을 알리는 기회가 됐다. 달성의 브랜드 가치를 한껏 드높였으니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무상의 자산이자 큰 성취를 얻은 것이다. 군민의 자긍심을 높인 계기가 됐다.-앞으로 대구시의 달성은 어떤 도시를 지향해 가야 한다고 생각하나.△대구 땅의 절반을 차지하는 달성군은 낙동강과 비슬산이라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고 있다. 대구가 발전하려면 달성을 활용해야 한다. 달성은 군이지만 인구의 5%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군의 평균 연령이 41세로 젊은 도시다.21세기는 환경과 정보 관광이 문화와 접목해서 먹거리를 생산하는 구조로 나가야 한다. 국가산업단지와 테크노폴리스를 중심으로 한 문화 관광 산업도시를 지향해 나가야 할 것이다. 내년 본격 분양될 달성산단은 강소기업을 유치해서 대기업과 안배하는 방향으로 추진했으면 한다.-세 번의 선거 중 두 번을 무소속으로 출마해 상대를 꺾었다. (한 번은 정당 공천을 받아 무투표 당선됐다.) 무소속 군수로 군정에 어려움은 없었나. 자치단체장의 정당 추천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선거 과정에서 상대 진영의 진정과 고소 고발이 이어져 심리적으로 힘들고 성가신 일이 많았다. 별 것도 아닌 일로 선거법 위반이라며 걸고 넘어졌다. 물론 지금은 모두 무혐의로 판정 났고 다 지나갔다.무소속이어서 개인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특히 꼭 필요한 예산을 삭감당할 때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정당에 가입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았고 피해를 입은 것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기초단체장은 정당 추천제를 없애야 한다는 것이 소신이고 현재도 무소속이다.-3선 군수로서 후회 같은 것은 없나. 어떤 군수로 남고 싶나.△아무 미련도 후회도 없다. 처음 민선 5기 군수로 취임하면서 ‘인기 있는 군수보다 기억에 남는 군수가 되겠다’고 약속했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그 약속을 지킬 수 있게 해 준 27만 달성군민에게 감사한다. 군수에 처음 당선됐을 때의 초심, 군민에 대한 공복으로서 군민을 위해 한 몸 불사른다는 열심을 군수를 마칠 때까지 지킨다는 뒷심으로 남은 임기동안 군정에 임할 것이다. 그래서 비슬산 참꽃보다 더 활짝 핀 100년 달성의 꽃에서 달성 발전의 화룡점정을 기어이 찍겠다.-아직 이른 질문 같은데, 임기를 마치면 그다음엔 어떻게 100세 시대를 보낼 것인가. 세간에는 중도에 군수직을 사퇴하고 국회의원에 도전할 것이라는 설도 있었는데, 계획이 있나.△사생활의 복원이다. 그동안 골프도 손 놓고 오직 군정에만 매달렸던 지난날들이었다. 그런 의혹 때문에 군정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단호히 ‘군수직을 성실히 수행하겠다’고 천명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이제 군수직을 내려놓으면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김문오(金文澳)1949년 대구. 경북대사대부고, 경북대 법대 졸.대구MBC 보도국장과 뉴스데스크 앵커, 한국언론재단 기금이사를 거친 언론인 출신.2010년 무소속으로 출마해 선거의 여왕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총재가 지원하는 후보를 꺾고 5대 민선 달성군수에 당선됐다. 6대 지방선거에서는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해 무투표 당선되는 기록을 세우더니 지난 2018년 7대에서는 또다시 당 공천에 반발,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해 자유한국당 후보를 꺾고 압도적 표차로 당선됐다./이경우 편집위원

2021-07-27

우리의 딸들을 위해 정계에 뛰어들어

과거 포항에서 주목받는 여성 예술인은 누가 있었을까. 또 어떤 이유로 여성의 정치 진출이 이루어졌을까. 지역 여성들의 활동상을 갈무리한 ‘포항여성사’는 어떻게 발간되었을까.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 여성들의 활동 폭은 넓어지고 깊이도 더해진다. 김경희의 목소리에도 힘이 붙는다. 최 : 문화예술 쪽 얘기를 들어보고 싶군요. 과거에 여성이 예술을 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으니 그 세계에 대해서도 잘 아실 것 같습니다.김 : 서울대학교 미대 회화과에 입학해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중간에 그만두고 포항에 왔다. 그런 사정 때문에 예술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솔직히 부담스럽다. 하지만 미술 교사를 했었기에 미술 교육에 대해서는 몇 마디 할 수 있겠다. 미술 쪽은 비용이 많이 들어 학교 현장에서도 힘든 점이 있었다. 재료 살 돈이 없어서 목탄 대신 버드나무를 썼고, 비싼 유화 물감 대신 수채화를 지도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고민했고 최선을 다했다. 그때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고맙게도 제자들이 열심히 해주어서 미술대학에 진학하고 미술 교사로 재직하며 다시 학생들을 지도하는 선순환 구조가 이루어졌다. 참 고마울 뿐이다. 나와 동연배의 예술인들은 대부분 그러했을 것이다. 예술 각 분야에서 자신의 작업에 최선을 다하며 후배와 제자들을 헌신적으로 이끌어주었다.최 : 다른 예술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한 여성은 누가 있는지요?김 : 재능을 가진 분들이 의외로 많다. 다만 여성이기 때문에 능력을 인정받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남편을 따라 타 지역에서 포항으로 온 여성 예술인들도 설 자리를 잡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특히 기억에 남는 분은 시조 명창 김정미와 동해안별신굿 이수자 정채난이다. 그리고 문인화를 하는 손성범도 있다.시조 명창 김정미는 1978년 포항에 정착해 대한시우회 포항 지회에서 시조창을 가르치며 국악 인구의 저변 확대를 위해 앞장선 국악인이다. 그의 열정 덕분에 포항에서 많은 명창이 배출될 수 있었다. 동해안별신굿 이수자 정채난은 김재출(동해안별신굿 김정희 이수자의 아버지이며 김석출의 동생)과 결혼해 포항으로 온 후 남편에게 소리와 춤을 배웠다.최 : 포항여중, 포항여고 재학 시절에 방정분 선생에게 음악을 배웠지요. 방정분 선생의 역할이랄까, 영향력은 어느 정도였습니까?김 : 방정분 선생은 이화여전 성악과를 졸업하고 1950년대 초부터 포항여고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그 당시 학생들은 음악이 낯설 정도로 음악에 대한 이해가 낮았다. 그렇기에 방정분 선생이 학생들에게 미쳤던 영향은 적지 않았다. 나 또한 그가 꾸려가는 합창단에서 노래를 배우며 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포항 여성 예술인들의 활동이 뚜렷해졌다. 문학, 국악, 음악, 미술, 서예, 무용, 연극, 사진 등에서 여러 모임과 단체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1990년대로 넘어가면서 더 활성화된다.최 : 정계에도 뛰어들었습니다. 쉽지 않은 결단을 한 것 같은데.김 : 지역에도 여성 정치인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섰다. 누군가는 깃발을 들어야 했다. 남성 정치인이 대부분인 상황에서 거의 모든 정치적·사회적 현안은 남성 중심적 사고로 관철될 수밖에 없다. 여성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안은 여성의 의사가 반드시 반영돼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고, 주변 사람들과 상의 끝에 어렵게 결단을 내린 것이다.최 :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얘기해주신다면.김 : 1995년 제2대 지방자치선거에서 민주자유당 비례대표 1번을 받아 당선되었다. 이때 도의회에 다섯 명의 여성이 진출했는데 모두 비례대표였다. 나는 교육사회복지위원회 소속으로 의정 활동을 했다. 경상북도 여성발전기금 조례, 여성정책개발원 설치 조례 제정 등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최 : 여성의 인권 신장을 위해서도 앞장섰는데. 김 : 남녀차별금지에 대해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남자나 여자나 똑같은 사람이다. 그것이 기본임을 알기에 그걸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을 일깨워주고 싶었다. 여성 중에서 여성에 대해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생각을 바로잡아주려고 애썼다. 결코 남성을 겨냥한 활동은 아니었다. 그리고 여성단체가 일을 제대로 하려면 여성 공무원들에게 기회가 주어지고 능력이 제대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성 공무원 편에서 힘이 될 수 있는 일을 도왔다. 우리들의 딸과 그 딸의 딸들을 위해 그들이 차별받지 않는 삶을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앞장섰다.1960~1970년대 여성을 무시하고 여성단체는 단체 취급도 하지 않던 사회 분위기에 정면으로 맞섰던 김경희. 자유당 말기 변석화가 국회의원에 출마한 이후 맥이 끊겼던 여성의 정계 진출은 김경희가 경상북도 의원에 당선되면서 새로운 지평을 연다. 이는 단순히 김경희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 여성사에 작지 않은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최 : 2001년 ‘포항여성사’가 발간됩니다. 당시 사회 상황을 고려하면 간단한 작업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김 : 새 밀레니엄을 맞이하면서 ‘포항여성사’ 발간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여성의 권익 신장이 올바른 방향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여성운동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잘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정장식 포항시장의 배려로 사업 계획이 확정되었고, 편찬위원과 집필진이 꾸려졌다. 여성에 대한 기록, 그것도 포항 여성에 대한 생활, 문화, 경제, 교육 등 다방면의 기록을 하나로 모으고 엮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 일에 참여한 사람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추진했기에 가능했다.2001년 2월 10일, ‘포항여성사’ 발간을 앞두고 여성사 내용에 대한 평가와 포항 여성의 과제 그리고 발전 전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김경희, 황복희, 김보미, 김귀현, 김조숙자 다섯 명의 여성이 모여 여성 발전을 위해 해야 할 일에 대하여 논의했다. 그 자리에서 어떤 부분이 취약한지, 어떤 부분을 더 채워나갈지를 살펴보며 여성문제는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며 여성들만이 노력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라는 시사점을 얻었다. 그리고 여성의 잠재력을 개발하여 좀 더 활발하게 지역사회 발전에 응용할 수 있는 방향이 모색되어야 하고, 또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개인과 사회의 발전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최 : 다른 지역보다 여성사가 먼저 발간된 것은 포항 여성계의 저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입증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김 : 그렇게 볼 수 있다. ‘포항여성사’ 발간은 단순히 책 한 권을 내는 사업이 아니라 포항 여성의 역량을 역사적 맥락에서 점검하고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사업이었다. 여성의 시각에서 여성의 활동을 중심으로 일련의 과정을 서술한다는 것이 얼마나 깊은 의미가 있는가. 각 분야별로 편찬위원과 집필위원이 고생을 많이 했다. 특히 1970년대 이전의 자료와 사진을 찾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지만 후대(後代)에 더 중요한 일이기에 결코 쉽지 않은 일을 해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우리 지역에서 여성들의 활동하는 모습을 하나로 묶어 발간할 수 있었던 것은 의미가 큰 작업이었다. 김경희포항에 산 지 올해로 여든여덟 해가 지났다. 그사이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와 4·19가 있었지만 유년의 기억은 늘 가슴 뛰게 빛났다. 포항여중과 포항여고 재학 당시 합창부와 미술부를 병행할 정도로 예술을 사랑하는 소녀였고, 미술부원들 간의 약속을 지키고자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할 만큼 신뢰를 소중하게 여겼다. 모교인 포항여고에서 교직 생활을 했으며, 결혼 후 4녀를 둔 가운데 여성 권익과 여성 교육을 위해 쉼 없이 뛰었다. 1973년 포항새마을 부녀회장, 1977년 새마음봉사단 단장을 맡았고, 같은 해 죽도동 여성회관추진위원회에 총무로 있으며 여성회관이 건립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했다. 1981년부터 죽도유아원과 새마을 협동유아원 원장으로 5년간 근무했고, 1984년 포항불교여성회를 창립해 지금까지 37년간 회장직을 맡고 있다. 1987년에는 포항의 여성단체를 총괄하는 여성단체협의회를 조직해 회장직을, 1989년에는 전문직 여성클럽(BPW)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1990년에 포항여성회관 초대 관장(5급)으로 추대되었지만 봉사 정신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과는 맞지 않음을 깨닫고 자리에서 내려왔다. 1995년 통합 여성단체협의회 회장직을, 같은 해 경상북도 5대 도의원에 당선되었으며, 포항시 여성상을 수상했다. 1985년 대통령 훈장 근면장을 받았고, 2003년에 한국불교여성개발원이 선정한 108인에 추대되었으며, 2001년에는 포항시민상과 대통령 공로장을 받았다.대담·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

2021-07-27

“구룡포에서 포경선 탈 때 한 해에 고래 50마리 잡아”

구룡포에서 포경선 선원 두 명을 만났다. 먼저 소개하는 이영식 씨는 1936년 구룡포 구평리에서 태어나 17세에 구룡포에서 포경선을 처음 탔다. 10년 동안 구룡포에서 고래잡이를 하다가 장생포로 건너가 선장까지 했고, 국제포경위원회(IWC)가 1986년부터 전면적으로 고래잡이를 금지하면서 포경선에서 내렸다. 김도형(김) : 여러 종류의 어선이 있는데 포경선을 탄 이유가 궁금합니다.이영식(이) : 일반 어선을 타다가 포경선을 탄 사람도 있는데 나는 선원 생활을 포경선에서 시작했다. 무엇보다 포경선이 다른 어선보다 안전한 편이었다. 비가 내리거나 바람이 강하게 불면 바다에 나가지 않았고 야간작업도 거의 없었다. 작은 사고는 이따금 있어도 큰 사고는 드물었다.김 : 처음 탄 포경선은 어떤 배였습니까?이 : 구룡포 강두수 씨가 선주인 영어호(永漁號)와 해승호(海勝號)를 탔다.김 : 구룡포에서 포경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혹시 알고 계신지요?이 : 광복 전에 강두수 씨가 구룡포에서 일본인 선주 사무장을 하다가 광복되면서 포경업을 했다고 들었다. 목선(木船)에 망통(고래를 발견하기 위한 전망대)과 총을 달아 포경선으로 썼다.김 : 포경선에는 몇 명이 탔습니까?이 : 목선은 보통 일곱 명이고, 나중에 장생포에 들어온 철선(鐵船)은 여덟 명에서 열세 명 정도 된다. 목선에는 포수, 선장, 기관장, 갑판장, 1등 세라 두 명, 2등 세라 한 명이 탔다. 철선에는 3등 세라도 있고, 고래 해체를 전담하는 해부장도 있었다.김 : 포경선은 포수 역할이 중요하겠지요?이 : 포수가 대장이다. 선장보다 포수가 높다. 선장은 배를 좀 탄 사람 중에 시력이 좋은 사람이 맡았고 실제로 포수가 다했다. 월급도 포수가 가장 많이 받았다. 그런데 포수는 면허가 없다. 선장과 기관장은 면허가 있어야 했다. 선박 검사를 받을 때는 선장, 기관장 면허가 필요했다. 혹시 문제가 생기면 법적인 책임은 선장이 지고, 실질적인 책임은 포수에게 있었다.김 : 포경선의 특징을 얘기해주신다면.이 : 세계 포경의 선구자는 노르웨이다. 일본이 그걸 배웠고 우리가 그걸 또 배웠다. 그래서 포경선에서는 일본어를 많이 쓰고 영어도 좀 섞어 쓴다. 배 방향을 오른쪽으로 바꿀 때는 ‘시나볼’, 왼쪽은 ‘보루’라 했고, 총을 오른쪽으로 향할 때는 ‘미기’, 왼쪽은 ‘히라이’라 했다. 포경선은 무리 지어 다니지 않고 각자 알아서 움직인다. 새벽 4시 반쯤 나가서 해가 지기 전까지 고래를 찾아다녔다. 망통에 두세 사람이 올라가서 고래를 찾았다. 쌍안경으로는 고래를 볼 수 없다. 불과 1, 2초 사이에 고래가 나타났다 사라지는데 쌍안경으로 보이겠나. 정신 바짝 차리고 바다를 살펴야 했다. 고래가 입을 치밀 때나 꼬리를 끄덕 들 때 총을 쏜다. 경험 많은 포수들은 헛방이 거의 없었다. 소나(SONAR, 음파탐지기)가 들어오면서 사람이 망통에 올라가는 일이 없어졌다. 조업을 나가면 가까운 항구에 정박하고, 밤에는 고래를 잡을 수 없으니까 야간작업은 거의 없었다. 해 질 녘에 고래를 딱 한 번 잡아봤다. 장생포에서 선장 할 때였는데, 고래가 배에 딱 붙어 왔다. 운이 좋은 날이었다.김 : 포경선에 달려 있는 총은 어떤 종류인가요?이 : 50밀리(㎜)에서 90밀리까지 있다. 구룡포 목선은 50밀리였다. 60밀리도 있긴 했는데 70밀리가 가장 많았다. 70밀리는 일제 때 쓰던 걸 부산에 가서 수리해 썼다. 80밀리는 울산에 있는 공업사에서 만들었고. 90밀리는 이승만 대통령 때 우리 해역을 넘어온 일본 포경선에서 압수한 것이었다.김 : 고래는 언제 잘 잡혔는지요?이 : 밍크고래는 5월에 가장 많이 잡혔다. 6, 7월에는 나가수(참고래)도 꽤 잡혔다.김 : 고래 해체는 어떻게 했는지요?이 : 목선은 고래를 끌고 와서 항구에서 해체하고, 철선은 배 위에서 바로 해체했다. 목선도 15자(4.5m) 정도의 작은 밍크고래는 배 위에서 해체하기도 했다. 장생포에는 정식 해체장이 있었고, 구룡포에는 해체장이 없어서 위판장에서 해체했다.김 : 당시 잡았던 고래는 어떤 게 있습니까?이 : 밍크고래가 가장 많았고, 나가수, 돌고래도 있었다. 놀이공원에서 보는 돌고래는 진짜 돌고래가 아니라 일본 말로 ‘고시’라고 하는데 뱃사람들은 별로 안 쳐주었다. 진짜 돌고래는 ‘고꾸’라고 불렀다. 길이가 50자(15m)나 됐고 나가구 가격의 두 배에 거래될 정도로 비쌌다.김 : 돌고래 얘기를 좀 더 해주시지요.이 : 돌고래는 음력 10월 말 시베리아 쪽에서 한반도 동해안으로 오는데, 연안에 딱 붙어서 이동했다. 이듬해 봄 남쪽으로 돌아서 다시 북쪽으로 갔다. 고래 중 가장 맛있고 껍질이 두껍고 기름도 많이 나왔다.김 : 밍크고래는 크기가 어느 정도였는지요?이 : 새끼는 10자(3m)보다 조금 더 크고, 대개 14자(4.2m)에서 20자(6m) 정도 됐다. 혜성호를 탈 때 포항 용덕리 앞바다에서 29자(8.7m)를 잡았는데 그게 가장 컸다.김 : 나가수는 어땠나요?이 : 나가수는 태평양에서 자라다가 성장하면 우리 연안에 나타났다. 아무리 적어도 40자(12m)는 되었다. 포수들은 밍크고래보다 참고래 잡기가 힘들다고 했다. 힘이 좋고 빨리 움직이기 때문에 조준하기가 힘들 수밖에 없다. 통상 한두 마리가 다니는데 드물게 20~30마리가 몰려다닐 때도 있었다.김 : 구룡포 시절 고래를 얼마나 잡았는지요?이 : 1960년대 초 영어호 탈 때는 영일만은 물론 강원도 주문진, 경북 죽변, 경남 욕지도를 두루 다니면서 한 해에 밍크고래 50마리 가까이 잡았다.김 : 고래 가격은 어느 정도였나요?이 : 좀 큰 밍크고래는 1천만 원 정도 했다. 가장 맛있는 부위는 일본 말로 ‘오노미’라 하는 꼬리살이다. 일본 사람들이 그걸 좋아했는데 양이 얼마 안 나왔다. 처음에는 국내에서 소비되다가 일본에 수출했다. 수출하는 고래고기는 아무래도 좀 비쌌다. 울산 사람들이 구룡포 고래고기를 사들여서 일본에 수출하기도 했다. 구룡포 어판장에서 솥 걸어놓고 삶아서 팔기도 하고, 고래고기집도 몇 군데 있었다.김 : 구룡포 포경선 선원은 어느 지역 사람이었나요?이 : 구룡포와 흥환, 대보, 삼정 사람들이 많았고, 용덕, 칠포 사람도 있었다.김 : 포경선을 타면 수입은 어느 정도 되었는지요?이 : 구룡포에서는 만 원 수입이 생기면 선원은 2천200원을 받았다. 장생포에서는 기본급에 수당이 따로 붙었다.김 : 장생포 쪽이 후했나 봅니다.이 : 그랬다. 내가 장생포로 옮긴 것도 그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장생포 포경선이 목선에서 철선으로 바뀌고 일본에서 소나가 들어오면서 고래 잡는 숫자가 구룡포와 차이가 많이 났다. 그러니 선원들에게 돌아가는 몫도 구룡포보다 장생포가 많았던 것이다.김 : 포항 쪽 포경선 얘기는 기억나는 게 없는지요?이 : 구룡포보다 포항에 포경선이 먼저 있었다. 장생포가 포경기지로 크고 포항은 사업이 잘 안 되니까 구룡포보다 먼저 포경업을 접은 게 아닌가 싶다. 선배들한테 들은 얘기인데, 포항 출신 김성룡 공군 참모총장이 한때 포항에서 포경 회사 사무장을 했다. 광복 전에 일본에 있다가 광복이 되고 포항에 왔는데, 그때 잠시 그 일을 했다는 얘기다.김 : 구룡포에 포경선은 언제까지 있었는지요?이 : 영어호가 포경 금지될 때까지 남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김 : 구룡포에서 포경선 탔던 분들 근황은 어떻습니까?이 : 살아 있는 사람이 다섯 명 정도 될까 싶다. 나이가 있으니까 아프기도 하고 자주 보지는 못한다. 나머지는 다 고인이 되었을 거다. 김 : 포경선 타고 어디까지 가봤는지요?이 : 구룡포 목선은 강원도 주문진에서 통영 욕지도까지 갔다. 장생포에서 철선 탈 때는 흑산도, 어청도까지 갔다. 어청도에는 해체된 고래를 운반하러 가기도 했다. 그걸 부산 가서 팔았다. 선배들 얘기가 산둥(山東)반도 쪽에는 물 반 고래 반이라 했다. 소나가 들어오면서 서해 고래를 엄청 잡았다. 그때 중국에는 포경선이 없었으니 오죽했겠나.김 : 포경선 탈 때 언제 가장 기분이 좋았는지요?이 : 포경선 탄 사람은 다 그랬겠지만 나 역시도 큰 고래 잡아서 만선기 달고 고동 울리면서 항구에 들어갈 때가 최고였다.김 : 고래 잡으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이 : 1985년 일본 근해에서 밍크고래 여덟 마리를 봤다. 암놈이 젖 떨어지고 새끼 가질 때 되면 수놈이 그걸 알고 몰려든다. 암놈 한 마리에 새끼 한 마리, 그리고 수놈 여섯 마리 도합 여덟 마리를 한꺼번에 다 잡았다.김 : 구룡포읍 행정복지센터 앞마당에 있는 포경선은 어떤 배입니까?이 : 10t쯤 된다. 원래 포경선은 아니고 일반 어선에다 망통 올리고 70밀리 포를 달았다.김 : 혹시 사고 경험은 있는지요?이 : 장생포 시절에 명신호 선장을 했는데, 부산 앞바다에서 충돌 사고가 나서 두 사람이 죽었다. 큰 사고였다. 내가 탄 배는 아닌데, 창원호라고 장생포 배가 양포 앞바다에서 사고 난 적도 있다. 고래가 보여서 총을 쐈는데 헛방이 되었고 롤러로 감다가 제대로 안 감겼다. 그 바람에 창살이 튀어서 선원이 즉사하고 말았다.김 : 포경이 금지된 후에 보상은 얼마나 받았습니까?이 : 장생포에서 포경선 선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보상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단체행동을 해야 했고 돈도 모았다. 예산은 법이 있어야 만들 수 있는데 포경선 보상을 해줄 수 있는 법이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보상금이 나왔는데 기본 100만 원에 경력 30만 원을 더해 130만 원을 받았다. 그런데 소문은 5천만 원 받았다고 났다. 포경 금지 후에 일본이 고래를 잡으니 우리도 잡자는 얘기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대담·정리 : 김도형(THE OCEAN 편집위원)

2021-07-26

‘따스한 나눔 복지’ 실천으로 주민 생활 살피는 청송군

복지란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삶의 질에 대한 기준을 높이고, 국민 전체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어 노력하는 정책’을 의미한다는 설명이 이어진다.보편적 인권을 중요시하는 현대사회에 있어 복지의 중요성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 대부분 전문가들의 일치된 목소리다.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고, 밝음이 존재하는 곳엔 어두움도 있기 마련이다. 복지는 빛의 반대편에 있는 그늘과 밝음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어두움에 눈 돌리지 않고 관심과 손길을 보내는 행위를 의미할 터.21세기 한국의 지방자치단체들은 바로 이러한 적극적 복지정책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다. 청송군 역시 마찬가지다. 청송군은 더불어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따스한 지역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이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멈추지 않고 있다.최근에도 청송군은 노년층을 위해 경로당 개·보수와 환경 개선을 진행했고, 어르신들을 위한 다양한 복지정책을 만들어냈다.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제기되고 있는 출산율 저하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도 고심 중이다. 진보키즈카페 등의 설립과 운영이 이와 관련된 복지 정책이다. 안정적인 보육 환경의 조성은 출산율을 높이는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가 될 수 있다.공부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경제적 여건 때문에 절망하지 않도록 청송인재양성원을 운영해 균등한 교육의 기획도 제공하고자 노력했다. 학교 급식 등 교육 여건 개선사업도 상시적으로 추진되고 있다.지난해와 올해는 장기화되고 있는 ‘코로나19 사태’로 위기를 맞은 지역민들을 위한 복지 지원 서비스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경북재난긴급지원금과 정부재난지원금으로 저소득층이 생활안정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처럼 일상적이며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청송군의 각종 복지정책이 어떤 방식으로 준비되고 실현되었는지를 아래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지역 어르신들의 행복과 편안함 위해 노력 기울여청송군은 ‘함께여서 따뜻한 나눔 복지’라는 군정 목표 아래 민선7기 3년 동안 지역 주민의 욕구를 반영하는 다양한 복지정책을 추진해 군민 모두가 행복한 포용적 복지실현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고 있다.청송군은 먼저 어르신이 행복한 청송 건설을 위해 경로당 7곳을 신축하고, 경로당 134곳을 개·보수해 어르신들의 쉼터인 경로당 환경을 개선했다.또한 다양한 경로당 프로그램 제공으로 어르신들의 행복한 노후와 여가생활을 지원했고, 만70세 이상 노인 5천여 명에게 본인부담금 1천원으로 목욕을 할 수 있도록 목욕비를 지원하고 있어 좋은 평가를 받았다.아울러 일상생활에 손길이 필요한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노인돌봄서비스 사업을 시행해 생활 안정을 도모했으며, 특히 노인일자리 및 사회활동 지원사업으로 노령층의 소득을 보전하고 더불어 경제적 안정까지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출산 장려와 보육환경 개선사업도 진행 중아이 키우기 좋은 보육 환경 조성과 출산 분위기 장려를 위한 노력도 청송군의 주요 과제였다. 이를 위해 진보키즈카페를 만들었는데 이 사업은 윤경희 청송군수의 공약사업으로 2018년 12월부터 추진됐고, 2020년 8월에 개장해 운영하고 있다.실내 놀이시설(472㎡)과 실외 바닥분수(330㎡)로 구성된 키즈카페는 어린이들에게는 다양한 놀이공간을, 주민들에게는 쉼터 역할을 하고 있으며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하고 있다.이에 더해 청송군 내 아동이 있는 저소득 가정에 공평한 양육 여건 및 출발 기회를 보장하기 위한 ‘드림스타트’ 사업을 통해 임산부 및 만0~12세 아동과 그 가족의 건강, 복지, 보육을 통합한 전문적 맞춤 서비스를 제공했다. 그 결과 보다 나은 양육 환경과 자녀 관계 증진 등의 긍정적인 효과를 거뒀다.다음으로 양질의 보육환경 조성을 위해 민간어린이집을 국·공립어린이집으로 전환했고, 청송어린이집이 국토교통부 공공건축물 그린리모델링 공모사업(사업비 3억8천만 원)으로 선정돼 쾌적하고 안전한 보육 환경을 조성할 수 있었다. ◆청송인재양성원 통해 양질의 교육기회 제공21세기를 준비하는데 반드시 필요하다고 할 수 있는 교육 환경 개선과 양질의 교육기회 제공을 위해서는 청송인재양성원을 운영하고 있다.지역 학생들에게는 장학금를 제공하고, 이와 함께 중·고등학교 신입생 교복구입비를 지원함으로써 학부모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고, 관내 22개 초·중·고교와 청송교육지원청에 학교급식 및 교육 여건개선 사업비를 지원해 교육의 공공성을 강화하고 교육복지를 실현시켰다는 것은 청송군의 빼놓을 수 없는 주요 복지 정책 중 하나다.장애인들을 위해서는 장애인의 자립을 돕고 소득을 보장하기 위해 장애인 일자리사업을 활성화 하는 등 장애인의 안정적인 생활 향상에 힘쓰고 있다. 신체적·정신적인 사유로 일상생활이 어려운 장애인에게는 장애인활동 지원서비스를 통해 사회참여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 청송군의 일관된 방침이다.또한 4개 장애인복지시설에서 수어교육, 여성장애인 일자리교육(재봉틀·한지공예), 시각장애인 점자교육, 목공교육, 상담 등을 실시해 장애인의 사회활동 참여를 장려하고 있다.◆코로나19로 인해 어려움 겪는 주민들도 지원청송군은 국민기초생활보장을 위해 부양의무자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군민들에게 생계비, 의료비, 주거비, 자녀 교육비를 지원하고 있다.더불어 우울증, 정신질환, 알코올중독, 사회부적응, 가족관계 해체 등의 문제를 안고 있는 관내 가구에 대해서도 전문가 그룹의 사례 관리가 이루어지도록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 군청의 설명이다.특히 오랜 기간 이어지고 있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어려움에 처한 저소득 주민을 지원하기 위해 경북재난긴급지원금과 정부재난지원금(한시생계지원·위기가구 긴급생계지원) 등으로 9천726가구 1만3천753명에게 60억2천300만원을 지원함으로써 코로나19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는 저소득층의 생활안정을 지원하고 있다.이와 동시에 자원봉사센터를 통해 저소득·취약계층을 위한 이웃사랑 자원봉사 활동과 다양한 행사에서의 질서유지, 환경 정화 등의 봉사활동도 전개 중이다. 특히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군민 백신 접종 및 예방 활동에서 자원봉사자의 역할이 크게 빛을 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또 자원봉사단체와 연계한 지역 주민들이 각자가 가진 재능을 기부하는 형태로 안심케어주택 지원사업을 운영해 열악한 주거환경을 개선해 주는 등 취약계층의 주거안정도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맞춤형 복지서비스로 행복한 복지청송 건설이밖에도 권역별로 배치돼 있는 맞춤형복지팀은 복지사각지대에 놓인 대상자를 발굴해 맞춤형 복지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군 관계자는 “앞으로도 청송군지역사회보장협의체, 명예사회복지공무원, 마을 이장 등의 촘촘한 인적안전망을 구축해 복지서비스 수준을 향상시켜 나가겠다”고 말했다.이러한 꼼꼼한 복지정책으로 보다 살기 좋은 청송군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윤경희 군수는 “군민 모두가 행복한 복지청송 건설을 위해서는 정부의 지원뿐만 아니라 지역 내 다양한 복지욕구에 적합한 맞춤형 복지서비스 제공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앞으로도 복지가 필요한 곳을 찾아내 현실에 맞게 지원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을 전했다./김종철·홍성식 기자

2021-07-26

위기의 삶, 시민 일상 속 ‘문화 돌봄’으로 사회를 잇다

“이제 단순한 문화콘텐츠를 제공하기 위한 문화 정책은 그 한계를 넘어서야 합니다. 시민들에게 문화예술 향유와 체험이 주는 행복감뿐 아니라 재난, 환경, 경제, 사회 전반의 위험 요소 속에서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문화적 연구가 필요합니다. 법정문화도시 선정에 이어 문화로 사회 곳곳을 진단하거나 처방하고 시민의 일상 속 문화 실현을 위한 문화안전망 체계를 준비하는 이유입니다.”법정문화도시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문화적 돌봄 차원의 ‘문화안전망’ 사업을 선제적으로 시작한 포항문화재단의 설명이다. 포항시는 지난 2017년 규모 5.4 촉발 지진이 지역사회를 강타한 사건을 계기로 문화도시 사업에 적극성을 띠고 있다.아직 국내에서 명확한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회적 안전망과는 다른 ‘문화’가 지닌 가치와 강점을 바탕으로 한 문화적 연결망을 구축해 나가고 있다. 법정문화도시 사업의 일환으로 포항문화재단이 추진 중인 문화안전망의 개념과 의미에 대해 진단하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사회에 대비해 우리가 준비할 것이 무엇인지 모색해 본다. □위험사회, 일상이 멈추다코로나19 팬데믹의 장기화가 어느덧 2년이 다 돼가고 있다. 사람과 사람과의 물리적인 ‘거리 두기’만큼 우리 사회의 모든 면에서 정상적인 작동이 멈췄다.근래 우리 사회가 부르짖는 큰 가치 중의 하나인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다. 바이러스의 전염이 이 정도까지 우리 삶을 장악할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문제는 이러한 위기는 우리 삶, 도처에 도사리고 있고 언제 어떤 모습으로 우리의 삶을 덮칠지 모른다는 것이다.SF 소설가 제임스 호건은 그의 저서 ‘광장의 오염’에서 “새롭게 등장한 위험은 더이상 특정 지역이나 집단에 한정되지 않는다”고 밝히면서 근대화가 진행될수록 그로 인한 위험과 불안이 증대하는 위기의 일상화가 된다고 서술하고 있다.또 사회학자 울리히 백은 사회가 발전할수록 위험사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위험사회’란 현재형의 ‘위험한 사회가 아닌, 위험이 사회의 중심 현상이 되는 사회’를 의미한다. 위험이 중심으로 작용하는 사회이며 위험을 결정하기 위해 늘 점검해야 하는 사회라고 말하고 있다.그러면서 21세기의 위험은 ‘danger’가 아니라 ‘risk’라고 규정하고 있다. 자연재해나 전쟁 같은 불가항력적 재난이 아니라 정체경제사회적인 환경과 결합돼 나타나는 재난이라고 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과 기술발전, 환경훼손, 경제사회 발전에 따른 의도되지 않은 부작용이거나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해킹, 미세먼지, 지구온난화, 플라스틱 폐기물, 남미와 아프리카의 자연파괴, 테러, 세계금융위기,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회, 세월호 사건 등 재난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이 많다.멀리 생각할 것도 없이 포항지역만 하더라도 2017년 지진과 철강산업 다변화에 따른 지역 경제위기 등의 재난요소로 인해 시민의 삶을 위기의 혼돈 속으로 몰아넣었다.재난으로 인해 삶의 축이 흔들리면서 다양한 사회현상학적 패러다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불안한 미래로 인한 결혼과 출산 거부 등 솔로 사회가 만연화되고 있고 경쟁과 적대, 혐오의 시선이 사회적으로 팽배해지고 있다.지난 8일 제주 서귀포에서 진행된 문화도시 정책포럼에서 조한혜정 연세대 교수는 기조강연에서 “위험 요소가 만연한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은 삶과 인간이 도구화되지 않는 사회실현을 위해서는 사회적 모성 즉, 모두를 돌보며 상생하는 ‘사회적 돌봄’, ‘사회적 탯줄 잇기’의 필요성과 실천”에 대해 역설했다.이처럼 재난, 환경, 경제, 사회 전반의 위험요소 속에서 사회적 차원의 안전망 시스템은 이제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필수불가결한 논제가 됐다. □ 문화로 사회 곳곳을 진단 및 처방, 시민의 일상 속 문화 실현문화안전망 사업은 2017년 포항에 지진이 발생되면서 시작됐다. 흥해지역을 중심으로 상당한 재산피해를 입었고 보상과정에서 주민사회의 갈등이 양상화되면서 가뜩이나 힘든 지역사회에 큰 상실감을 안겨줬다. 무엇보다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주거지의 상실로 인해 우울감 등 심리적 방역이 뚫리면서 시민의 평범했던 일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당시 법정문화도시 예비사업을 준비 중이던 포항시와 포항문화재단이 지진으로부터 상실된 시민의 일상복귀를 위한 다양한 문화적 방식을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 문화안전망 사업의 출발이었다. 당시만해도 지진피해의 대책이 물리적 복구와 주민 피해보상 중심으로 진행되던 상황이었고 국내에서는 그동안 발생한 적 없는 초유의 재난사태라 그 어떤 사례나 문화적 연구가 전무했다.무엇보다 시민의 일상 회복이라는 추상적이고도 담론적인 과제에 대해 ‘문화적 방식’이라는 명확한 개념 도출이 쉽지가 않았다. 다만 물리적 피해가 아닌 시민사회의 공동체 상실 등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부분에 대한 진단과 회복의 실마리는 ‘문화’가 지닌 가치와 힘에서 결국 답이 나올 거라는 기대감이 있을 뿐이었다.문화안전망의 사업추진을 위해 지진 이후 시민의 삶을 들여다보고 이를 문화적 차원에서 고민하고 기획활동을 담당할 민간 문화재생활동가(F5)를 발굴하고 양성했다. 워크숍 등 역량강화 과정을 거친 이들이 각기 다른 시민의 관점에서 재난도시들과의 교류를 통해 포항에 적용할 프로그램 연구를 진행했다. 2019년 ‘재난 도시 간 유쾌한 어깨동무’ 포럼 개최 등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복구과정에서 활약한 민간활동가들과의 교류, 세월호 아픔을 겪은 안산과 지하철 참사를 경험한 대구 등 국내 재난도시들과의 교류를 진행하며 재난의 동질적 아픔을 공유하고 문화적 방식의 매뉴얼을 연구했다.이후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이 전 세계적으로 강타하면서 포항 문화안전망 사업은 지진에서 나아가 다양한 사회적 범주로 확장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인식하게 된다. 더불어 재난은 우리 삶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고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닥칠지 모른다는 일상적 관점에서 고민하고 접근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됐다.코로나19로 인해 생명존엄의 상실, 두려움, 불안한 미래, 우울감, 그로 인한 일상의 멈춤은 심각단계를 넘어 삶을 위협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따라서 문화안전망에 대한 방향 또한 시민 일상을 보다 확대한 다양한 계층 발굴과 사회 현상학적 접근을 통해 우리 사회의 문화 사각지대를 탐사하고 발굴하는 것으로 확대했다. 사회안전망 테두리 안에서 문화가 시민 일상에 밀도있게 연결돼 불안한 삶에서 안전한 삶으로의 전환을 모색해야 함을 다양한 시민그룹들과의 공론과정에서 도출됐다.따라서 문화안전망은 문화로 사회 곳곳을 진단 및 처방함으로써 시민의 일상 속에서 문화를 실현하고, 공동체의 문화자치 도시의 문화주권을 강화함으로써, 문화사회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회 안전망의 하나다.포항 문화도시 문화안전망 사업은 문화재생활동가 F5를 중심으로 집담회 등 다양한 시민그룹과의 소통과 공감프로그램을 통해 이뤄졌다. 시민의 목소리와 바람을 듣고 기록하며 그들에게 어떤 방식의 문화적 처방을 해줄 지에 대한 연구와 기획도 했다.문화도시사업의 일환인 문화안전망 사업은 이와 동시에 포항문화재단 전 사업부서의 프로젝트와 연결해 코로나 팬데믹 사회에서 보다 다양한 시민들에게 문화적 소외가 없는 문화안전망 사업을 추진했다. 또 코로나로 인해 잃어버린 시민 일상을 아카이빙한 전시 ‘잃어버린 봄을 찾아서’, 코로나로 인해 등원을 못한 미취학 어린이를 위한 ‘문화돌봄교실’, ‘시네마테라피’, ‘일상기록키트 방문 전달’‘예술인창작지원’ ‘시민커뮤니티 발굴 및 거점공간 지원’ 등이 대표적인 사업들이다. □ 명확한 개념 설정, 입체적이고 빈틈없는 촘촘한 안전망체계 구축해야지진과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며 재난이라는 국소적인 접근에서 출발한 포항문화안전망 사업은 이제 시민의 삶 전체 영역을 아우르는 문화연결망 구축을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문화안전망’의 보다 명확한 개념 설정과 구체적인 방법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지진과 코로나라는 특수한 영역을 넘어 모든 시민에게 보편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포항형 문화안전망에 대한 구체화된 매뉴얼과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 특히 급속한 경제성장과 도시구조의 재편에 따라 포항제철 설립을 중심으로 유입된 인구층과 포항 1세대 은퇴인구, 직업으로서 유입됐지만 정서적으로 안착되지 못한 외부유입층, 매연과 공장 굴뚝에 휩싸여 정서적 여유로움을 보장받지 못한 공단 근로자 등 산업화 중심의 성장구조에서 발생한 문화적 소외 계층, 도농공산어촌의 도시특성, 특수한 상황에 놓인 개별 맟춤형에 이르기까지 입체적이고 빈틈없는 촘촘한 진단체계를 갖춰야 할 것이다.그와 동시에 문화기본권에 기초한 시민의 문화 권리적 측면에서 다양한 시민층과의 논의의 과정을 통해 시민의 삶과 문화를 연결하는 제도화된 문화안전망 시스템 구축도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일 것이다.법정 문화도시사업을 추진 중인 포항문화재단 문화도시사업단은 올해 시민포럼의 주제를 ‘문화안전망’으로 설정하고 총 4회에 걸친 포럼을 통해 시민, 전문가가 머리를 맞대어 ‘포항형 문화안전망 구축’을 위한 토대 마련에 나섰다. 시민논의 과정을 거친 후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문화안전망이 실효적으로 적용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포항문화재단 관계자는 “문화기본권적 측면에서 시민의 고른 문화적 향유가 이뤄질 수 있는 문화안전망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문화적으로 고립되고 소외받는 일이 없도록 하는 문화생태 조성을 위해 더 촘촘한 문화연결망을 구축해 나가겠다”고 밝혔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1-07-25

“남자들 기죽이는 건 다 해보자”

세상에 첫길을 내려면 여러 사람이 함께 걸어야 한다. 혼자 걸어서는 첫길을 낼 수 없다. 포항 여성사도 마찬가지다. 여러 사람의 지혜와 힘이 모여 포항 여성의 역사가 서서히 만들어졌다. 물론 일이 이뤄지는 과정에는 누구보다 먼저 고민하고 앞장선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포항 여성들은 언제 어떻게 한마음이 되어 모였으며, 어떤 일을 했을까.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최 : 포항의 여러 여성단체 역사를 살펴보면 김경희란 이름이 자주 등장합니다.김 : 내 나이 아흔이 다 되어가는데 친목계까지 합하면 17개 단체에 나가고 있다. 새마을부녀회 활동이 출발이 됐고, 가장 오랜 기간 회장을 맡고 있는 단체는 불교여성회다. 1984년부터 지금까지 회장을 하고 있으니 장기 집권이 아닌가 싶다. 절은 산 중에 있다. 젊어서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찾아다닐 수 있지만 나이 들면 몸이 따라주지 못하겠다 싶었다. 그래서 쉽게 찾아가 수양할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주변 사람들과 그런 취지에서 의논을 했다. 스스로 자유롭게 모여서 기도하는 단체를 만들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고, 불교계의 YWCA 같은 불교여성회가 조직된 것이다. 조직이 구체화되자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차원태 변호사 건물의 5층을 빌려서 했다. 그런데 인원이 40~50명 되니까 장소가 협소했다. 회관을 지을 생각도 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부산각 건물 2층을 빌려서 모이다가 부산각 지하가 넓어서 그쪽으로 옮겼다. 법회를 한 후 바로 식사를 하기에도 편리해서 지금까지 그곳에 터를 잡고 불교여성회 모임을 하고 있다.한국여성불교연합회 포항불교여성회는 1984년 포항시민회관에서 6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장이두 큰스님을 모시고 설법회를 열며 창립총회를 했다. 그 후 전국불교 연합회 포항불교여성회로 개칭했다.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과 나라의 평화를 이룩하여 세상을 불국정토로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최 : 불교여성회에서는 어떤 일을 했는지요?김 : 매년 어린이 심장이식기금을 전달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봉사도 함께 해왔다. 봄가을에는 성지순례도 하는데 이름 있는 절이란 절은 다 다녔다. 회원들은 내가 나눠준 좋은 글을 참 좋아한다. 혼자만 알고 느끼면 뭐가 좋은가. 나는 좋은 것은 모두 나눠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깨우침이 가득한 스님들의 좋은 말씀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 스님들의 좋은 말씀을 복사해두었다가 매달 모임 때 회원들에게 나눠주었다. 그 일도 20년 넘게 하고 있다. 코로나 이후 모임이 끊어졌지만 그 일이 내 평생의 일임을 알기에 불교여성회는 내가 목숨을 다하는 날까지 이어갈 것이다.최 : 1980년대 포항에는 어떤 여성단체가 있었는지요?김 : 봉사 단체가 많았다. 변석화가 초대 회장이었던 대한부인회, 안인화가 초대 회장이었던 포항적십자 봉사대, 박경애가 초대 회장이었던 걸스카우트 포항지부, 홍윤옥 회장이 맡았던 포항YWCA, 그리고 포항차인회 등의 단체가 있었다.최 : 그 많은 단체를 하나로 묶은 여성단체협의회 회장을 맡았더군요.김 : 김보미 포항시 과장이 나를 불러 개별적으로 활동하는 여성단체를 하나로 묶는 총괄 단체가 있으면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전적으로 동의했다. 지역의 여성단체들이 서로 협력하고 힘을 모은다는 점에서 아주 긍정적인 제안이었다. 그렇게 포항시 여성단체협의회가 발족되었고, 새마을부녀회장이었던 내가 초대 회장을 맡았다. 처음에는 사무실도 예산도 없었다. 김보미 과장이 예산을 만드느라 고생이 많았다.1970년대에도 크고 작은 여성단체가 있었지만 친목을 위한 단체가 대부분이었다. 여성이 주축이 되어 여성의 일을 추진할 수 있는 단체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여성단체를 통해서 여성들의 활동 영역이 넓혀지기를 김경희는 원했고, 그것이 가능하도록 최선을 다했다.최 : 여러 단체를 하나로 결집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김 : 여러 사람, 여러 단체를 상대하다 보면 내 생각을 진솔하게 전달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느끼게 된다. 아무리 좋은 의견도 삐딱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진심은 통한다는 믿음을 품고 여성단체 관계자들을 만나 협의회 결성의 취지를 설명했다. 그렇게 활동한 결과,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성단체 대부분이 협의회에 가입했다. 회원 수가 무려 2만 6천여 명에 달하는 명실공히 포항을 대표하는 여성단체협의체가 결성된 것이다. 이 협의체를 통해 여성의 능력 개발, 사회참여 확대, 성차별 해소, 여성 지위 향상 같은 여성 사업에 한결 더 힘이 실리게 되었다.포항시 여성단체협의회는 보건복지부의 여성단체 활성화 방안의 일환으로 추진된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 방안도 결국은 여성이 주축이 돼 일궈낸 일이다. 출범의 계기가 어떠하든 여성단체협의회는 많은 일을 해냈다. 여성의 사회참여 확대를 위해 여성 지도자 양성 과정을 만들었고 여성단체 활동 평가회 등을 개최했다. 회원 단체 간의 정보 교환과 공동 관심 사업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또한 여성의 시정 참여 확대를 위해 포항시의 각종 위원회에 여러 회원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다.최 :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업이 있는지요?김 :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높일 수 있는 좋은 방법으로 무엇이 있을지 의논한 끝에 여성문화축제를 해보자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전국 최초로 여성문화제가 기획되었다. 포항여성문화제에서는 여성백일장, 서예대회, 바둑대회 등 포항 여성들의 기량을 뽐내는 대회를 열었다. 특히 서예대회는 백일장처럼 시간제한을 두고 여성들의 서예 능력을 겨루었다. 행사 당일 문화예술회관 안팎에 화선지를 펼치고 붓을 들던 여성들의 모습이 장관을 이뤘다. 여성들만 참가하는 바둑대회, 패션쇼, 사진전 등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사실 남자들 기죽이는 건 다 해보자는 마음도 있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게 이런 것인가를 온몸으로 느꼈다. 그리고 정말 뿌듯한 것은 포항여성상을 제정한 것이다. 여성들의 권익 신장을 위해 크게 공헌한 여성을 선정해 시상하자고 내가 제안했다. 그렇게 안이화, 손정식, 박경애, 홍윤옥, 김봉순이 제1회 포항여성상 수상자가 되었다. 포항여성상은 포항시가 1997년부터 여성의 권익 증진과 봉사활동에 기여한 지역 여성을 선정해주는 상으로, 2016년 제19회까지 이어졌다. 2017년 이후 포항시는 실질적 양성평등 실현이라는 여성 정책 패러다임의 변화로 조례를 개정하고 양성평등상을 시상하고 있다.최 : 전문직여성클럽은 어떻게 결성되었는지요?김 : 여성이 힘을 가지려면 공적 체제와 결합해야 한다. 그런 역할을 해줄 공무원이 필요했는데 김보미가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면 그는 그것을 행정의 틀 안에서 소화해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나도 그도 서로의 전폭적인 지지자였다. 그를 만나 여러 가지 일을 해냈다. 전문직여성클럽(Business Professional Women‘s clubs)도 그중 하나다. 전문직 여성을 모아보면 어떻겠느냐고 김보미가 제안했다. 지역에도 전문직 여성들이 꽤 있는데, 그들을 모아서 여성의 권익을 향상하는 데 힘을 보태면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곧바로 전문직 여성들을 만나 뜻을 전했고, 대구 클럽의 후원으로 1989년 포항클럽이 결성되었다.전문직여성클럽(B.P.W) 포항클럽은 1989년 4월, 김경희 초대 회장을 중심으로 김춘희, 김보미, 김희숙, 박영희, 이순자, 이정주, 한정자가 모여 결성되었다. 초창기에는 친목 도모에 머물렀으나 1994년 포항에 전국대회를 유치하며 활기를 띠었다. 특히 1990년대 중반부터 지역 내 여중·고생들을 대상으로 전문직 진로 교육에 적극적으로 나섰다.최 : 그 밖에 주목할 만한 여성계의 활동이 있는지요?김 : 여성 신년 교례회도 주목할 만하다. 새해에 여성들이 모여 한 해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를 논의하는 자리다. 여성 정치인들과 여성단체에서 활동하는 분들을 모았다. 여성 언론인도 있고 시장 부인, 국회의원도 있다.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힘을 보태주니 힘이 났다. 김경희포항에 산 지 올해로 여든여덟 해가 지났다. 그사이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와 4·19가 있었지만 유년의 기억은 늘 가슴 뛰게 빛났다. 포항여중과 포항여고 재학 당시 합창부와 미술부를 병행할 정도로 예술을 사랑하는 소녀였고, 미술부원들 간의 약속을 지키고자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할 만큼 신뢰를 소중하게 여겼다. 모교인 포항여고에서 교직 생활을 했으며, 결혼 후 4녀를 둔 가운데 여성 권익과 여성 교육을 위해 쉼 없이 뛰었다. 1973년 포항새마을 부녀회장, 1977년 새마음봉사단 단장을 맡았고, 같은 해 죽도동 여성회관추진위원회에 총무로 있으며 여성회관이 건립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했다. 1981년부터 죽도유아원과 새마을 협동유아원 원장으로 5년간 근무했고, 1984년 포항불교여성회를 창립해 지금까지 37년간 회장직을 맡고 있다. 1987년에는 포항의 여성단체를 총괄하는 여성단체협의회를 조직해 회장직을, 1989년에는 전문직 여성클럽(BPW)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1990년에 포항여성회관 초대 관장(5급)으로 추대되었지만 봉사 정신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과는 맞지 않음을 깨닫고 자리에서 내려왔다. 1995년 통합 여성단체협의회 회장직을, 같은 해 경상북도 5대 도의원에 당선되었으며, 포항시 여성상을 수상했다. 1985년 대통령 훈장 근면장을 받았고, 2003년에 한국불교여성개발원이 선정한 108인에 추대되었으며, 2001년에는 포항시민상과 대통령 공로장을 받았다.대담·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

2021-07-25

밍크고래의 집단 서식지였던 영일만

포항 남구 구룡포읍 행정복지센터 앞마당에는 한 척의 어선이 전시되어 있다. 제1동건호라는 명칭의 어선이다. 뱃머리에 총이 달려 있어 한눈에 포경선임을 알 수 있다. 작고한 구룡포 유지 김건호가 기증한 이 배는 구룡포가 포경 기지였음을 보여주는 상징이다.흔히 고래 하면 울산 장생포를 떠올린다. 지난 2008년 고래문화특구로 지정된 울산 장생포에는 고래박물관, 고래문화마을, 고래바다 여행선 등 다양한 고래 관광 인프라와 국립수산과학원 고래연구센터가 들어서 있다. 국내 고래 관련 논문을 보더라도 대부분 울산 장생포를 무대로 작성되었다.그렇다면 포항과 구룡포는 어떠한가? 포항과 구룡포에도 과거에 고래가 많았고 포경업이 활발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이야기의 흔적이 제1동건호이고 포항과 구룡포의 고래고기 전문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이야기를 입증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자료는 빈약하고 연구논문은 전무한 실정이다. ‘포항시사’, ‘구룡포수산업협동조합사’ 등에 포경 자료가 일부 있으나 그 실체를 보여주는 데는 한계가 있다.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포항과 구룡포의 포경에 관한 역사적 실체를 확인하고, 이를 통해 이 지역 고래의 분포와 포경의 연구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쓰였다. 다행스럽게도 한국 포경에 관한 독보적 저작인 박구병의 ‘한국 포경사’(수산업협동조합중앙회, 1987)에서 포항과 구룡포의 포경에 관한 특기할 만한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이 글에서는 우선 ‘한국 포경사’를 중심으로 포항과 구룡포의 포경 역사를 정리하고, 현재 구룡포에 거주하고 있는 고령의 포경선 선원 2명, 고래 전문 중매인 1명과의 대담을 싣는다. 19세기부터 고래 무덤이 된 동해포경업은 19세기 내내 왕성하게 이루어졌다. 조명용 램프 연료로 고래기름을 쓰는 방법이 고안되면서 고래의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고래 뼈는 여성용 코르셋으로, 수염은 칫솔 등으로 사용되는 등 버릴 부분이 하나도 없을 만큼 고래 한 마리의 유용성은 대단히 높아 고래 관련 제품, 고래기름 없는 생활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다케다 이사미, ‘바다의 패권 400년사’, AK커뮤니케이션즈, 2021, 72∼73쪽 참조).이러한 이유로 고래의 천국이던 바다는 고래의 무덤이 된다. 동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 선조들은 동해를 ‘경해(鯨海)’라 부를 만큼 동해에 고래(鯨)가 많았지만 조선 시대까지 포경은 산발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서구 열강이 동해에 진출하면서 양상은 달라진다. 1849년 약 120척의 미국 포경선은 동해를 거침없이 드나들었고, 19세기 말에는 일본과 러시아의 포경선이 동해에서 각축전을 벌인다. 조선 정부도 뒤늦게 포경에 눈을 뜨고 1883년 3월 김옥균을 동남제도개척사겸관포경사(東南諸島開拓使兼管捕鯨事)로 임명하지만, 의미 있는 활동을 하지는 못했다.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데 이어 1910년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면서 동해의 고래를 독차지한다. 영일만 근처에서 수많은 밍크고래 포획포항이 한국 포경사에서 주요한 무대로 등장하는 시점은 1940년이다. 한일병합 이후 일본은 울산, 제주도, 대흑산도, 대청도, 유진, 장전 등을 근거지로 참고래, 대왕고래, 향고래, 돌고래, 보리고래, 귀신고래, 긴수염고래 등을 대거 포획하다가 1940년부터 밍크고래와 해돈(海豚)으로 눈을 돌린다. 1937년에 시작된 중일전쟁이 장기화되고 식량 등 각종 물자가 부족해지자 그 대응책으로 수산업 분야에서는 종래 포경업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소형 고래인 밍크고래와 해돈류를 잡기 시작했다. 태평양전쟁 후에는 이러한 시도가 더 강화되었다. 박구병은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밍크고래, 해돈 대상의 포경업은 비록 소규모 경영이고 일본인 주도의 것이기는 하였으나 그것이 한국에 소재한 회사 ‘조선수산개발주식회사’가 한국에 선적을 둔 포경선을 사용하여 행한 포경업이었다는 점에서 포경사에서 별도의 장을 할애하여 서술할 만한 의의를 지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구병, 위의 책, 312쪽조선수산개발주식회사는 처음에 시험·조사 어로(漁撈)의 명목으로 포경업을 시작하는데, 여기에 동원된 포경선은 18t 규모 제1호환(鯱丸), 5t 규모 제1환일환(丸一丸), 16t 규모 제2환일환이다. 이 세 척의 소형 포경선은 선체가 경쾌하여 방향 전환이 용이하고, 선상에서 총을 쏘아 강철 작살로 고래를 사살할 수 있다.이들 포경선은 모두 포항에 근거지를 두고 영일만을 중심으로 조업하였다. 1941년 4∼5월에 첫 출어를 하는데 영일만의 만구(灣口)와 만내(灣內)에서 가장 많은 밍크고래를 잡았다. 이 점에 대해 박구병은 밍크고래 자원 연구에서 참고할 가치가 큰 자료라 하였다. 조선수산개발주식회사가 작성한 1941년 월별 밍크고래 포획 두수(頭數)를 보면, 1941년 4월부터 12월까지 제1호환이 84두, 제1환일환이 37두, 제2환일환이 61두이며, 그중 제1호환이 영일만 근처에서만 무려 62두를 포획하였다. 이 결과를 보면 영일만 근처에 수많은 밍크고래가 서식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밍크고래의 크기는 6∼7m 정도가 가장 많았다. 세 척의 포경선은 이후에도 포항을 근거지로 계속 활동했으며, 1941년 182두, 1942년 240두, 1943년 183두, 1944년 168두의 밍크고래를 포획하였다. 포경기지에 고래처리장은 필수 시설이다. 1941년 7월 1일자로 조선어업보호취체규칙 제8조에 규정된 고래처리장 설치에 관한 허가를 받는데, 그 장소는 포항을 비롯해 속초, 장전, 덕원에 있으며 처리장 면적은 각 50평이었다.광복 후에도 포항은 밍크고래의 근거지조선수산개발주식회사는 일제강점기에 포항에 주재소를 두었고 여기에서 포경 업무를 담당하였다. 광복 이후에 이 회사는 귀속 사업체로 존속되었으며 포항 주재소는 출장소로 격상되었다. 밍크고래 포경업은 미군정청의 방침에 따라 두세 척의 어선을 인수받아 포항을 근거지로 계속되었다. 포항 출장소가 작성한 1946년 7월 1일부터 1947년 3월 18일까지 제11대경환(大慶丸)호가 동해안을 주어장으로 밍크고래를 포획, 판매한 실적을 보면 39두 포획에 34두를 영일어업조합에서 판매하였다. 이 자료를 볼 때 광복 후에도 포항은 밍크고래의 근거지였음을 알 수 있지만 6·25전쟁 후에 상황은 서서히 변한다.1952년 말 부산수산대학 재학생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19척의 포경선 중에 포항에는 원문길 소유의 제3해산호(海産號), 나원신 소유의 제3호호(鯱號)가 있고, 구룡포에는 강두수 소유의 해승호(海勝號), 제9영어환(永漁丸)이 있다. 3년 후 1955년경 부산수산대학 재학생이 다시 조사한 자료에는 국내 19척의 포경선 중 포항에 안달문 소유의 해덕호(海德號), 구룡포에 강두수 소유의 해승호(海勝號), 제9영어호(永漁號), 주길호(住吉號)가 있다. 1959년 한국포경어업수산조합이 작성한 포경업자 현황에는 구룡포 강두수가 있으나 포항의 포경업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자료를 종합해보면 포항은 6·25전쟁 후에 포경업이 하향세를 보이다가 1950년대 말에 공식 자료에서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구룡포는 강두수 중심으로 포경업이 자리를 잡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울산 장생포에 밀리는 구룡포 포경업1962년 한국포경어업수산조합이 작성한 조합원별 포경선 현황에는 강두수 소유의 제9영어호, 제13영어호가 있으며, 이 해에 제9영어호는 밍크고래 12두, 제13영어호는 14두를 포획한다. 일제강점기에 비해 포획 두수가 크게 줄어든 것이다. 8년 후 1970년 3월 12일 포경어업협동조합이 작성한 포경선 현황에는 총 22척 중 제9영어호와 제13영어호가 있지만 이후 공식 자료에는 보이지 않는다.1970년의 이 현황은 포경 역사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69년 6월 건조된 동방수산 소유의 제1동방호, 제3동방호, 제5동방호가 새롭게 등장하는데 세 척 모두 철조선(鐵造船)에 81.9t, 450마력의 위용을 갖추고 있다. 그에 비해 1935년에 건조된 제9영어호와 1953년에 건조된 제13영어호는 목조선(木造船)에 17t 미만, 50마력 미만에 불과하다. 울산 장생포에는 큰 자본이 유입되면서 최신식의 대형 포경선이 투입된 반면, 구룡포는 노후화된 소형 포경선으로 지탱하면서 두 지역은 경쟁력에서 큰 차이가 난다. 이에 따라 구룡포의 포경선 선원들도 울산 장생포로 이동하게 되고, 구룡포는 포경기지의 명성을 차츰 잃게 된다.제9영어호와 제13영어호가 공식 자료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구룡포 포경업의 명맥이 끊겼다고 단정할 수 없다. ‘구룡포수산업협동조합사’와 구룡포 주민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1970년대에도 구룡포에서 포경은 계속 이루어졌고, 당시 구체적 상황에 대해서는 조사가 필요하다. 포항과 구룡포에서 고래 위판이 활발하였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포경선이 사라진 포항은 물론 구룡포도 고래 위판으로 한동안 각광을 받았고, 이곳에서 위판된 고래고기는 일본으로 수출되기도 했다. 포항과 구룡포의 고래 이야기는 아직도 많은 궁금증을 품은 채 계속 이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구룡포에 거주하고 있는 포경선 선원과 고래 전문 중매인의 육성을 통해 그 궁금증의 일부를 풀어보고자 한다.글/김도형 THE OCEAN 편집위원

2021-07-21

정치·문화·예술 ‘통일신라 최전성기’ 꽃피우다

예술과 문화를 꽃피우기 위해서는 탄탄한 정치·경제적 토대가 우선돼야 한다는 것은 이미 역사를 통해 증명된 바 있다.나라의 곳간이 텅텅 비어있고, 외세의 침략이 빈번한 상황에서 대규모의 화원을 조성하고, 신하들을 위로하며 격려할 공간을 만들고, 왕자의 교육과 왕위 계승에 도움을 줄 궁전을 축조하는 왕은 없거나 드물 듯하다.경주의 대표적 유적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동궁과 월지도 이런 전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고대왕국 신라가 만든 동궁과 월지의 발굴조사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경주 동궁과 월지 조사·연구 마스터플랜 수립 연구’에서 동궁과 월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사적 제18호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의 궁원지로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 제30대 문무왕 14년(674) 2월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그곳에 온갖 화초를 심고 진기한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을 시작으로 953년 신라가 고구려에 귀부(歸附)할 때까지 262년간 왕이 군신(群臣)을 위해 항연을 베풀었던 장소이자 태자(太子)가 거처하는 동궁(東宮)으로 알려져 있다.”이 설명처럼 동궁과 월지는 7세기 중반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이 시기의 신라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분명 국력과 나라의 기세가 약했을 때는 아닐 것이다. 태종무열왕에서부터 시작된 신라의 전성기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펴낸 책 ‘신라사 총론’은 위의 질문에 아래와 같이 답하고 있다.“신라 중대(654~780)는 제29대 태종무열왕대부터 제36대 혜공왕대까지로, 태종무열왕과 그 직계 후손이 재위한 시기였다. 중대 초기 신라는 당과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켰다.그러나 당이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려는 야욕을 보이자 신라는 이를 무력으로 물리치고 드디어 삼국통일을 달성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이전보다 영토와 인구가 크게 늘어나고, 발달된 선진 문물을 수용함으로써 이후 100여 년에 걸쳐 유례없는 번영을 이룩하였다.”앞서의 언급처럼 ‘신라 중대’가 ‘유례없는 번영을 이룩한’ 시기라면 태종무열왕과 그의 아들 문무왕, 손자 신문왕이 통치했던 7세기 중후반은 신라 번영기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는 동궁과 월지가 만들어진 때와도 일치한다.그렇다면 나라의 힘을 키워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하고, 불교문화와 예술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까지 만들어 통일신라의 골격을 형성시킨 태종무열왕, 문무왕, 신문왕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당나라와 연합해 백제를 굴복시킨 태종무열왕은 654년부터 661년까지 신라를 통치했다. 그의 이름 김춘추는 굳이 역사서만이 아니라 신라를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서도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다.폐위된 진지왕의 손자였던 태종무열왕에 관해서는 흥미로운 기록들이 많은데, ‘두산백과’가 소개하는 것들을 인용하면 이렇다.“‘삼국사기’에 따르면, 무열왕은 풍채가 영준하고 거동이 위엄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세상을 다스리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그가 하루에 쌀 서 말과 꿩 아홉 마리를 먹었으며,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는 아침과 저녁 두 끼만 먹었는데도 하루에 쌀 여섯 말과 술 여섯 말, 꿩 열 마리를 먹었다고 나온다.‘삼국사기’에는 무열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인 642년에 딸인 고타소가 백제군에게 죽임을 당하자 직접 고구려로 가서 원병을 요청해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으려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태종무열왕 김춘추는 진골(眞骨) 출신의 최초 신라 왕이었다. 그는 정치적 욕망의 실현을 위해 당대의 거물 김유신의 누이와 정략결혼을 했는데, 그 이유를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김춘추는 김유신의 누이인 문희와 정략적인 측면에서 혼인함으로써, 왕위에서 폐위된 진지왕계와 신라에 항복해 새로이 진골귀족에 편입된 금관가야계간의 정치적·군사적 결합이 이루어졌다.즉, 진지왕계인 김용춘·김춘추는 김유신계의 군사적 능력이 그들의 배후세력으로 필요하였다. 또한 금관군주 김구해계(金仇亥系)인 김서현·김유신은 김춘추계의 정치적 위치가 그들의 출세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아버지가 닦아 놓은 터전에서 통일 이룬 문무왕아버지 김춘추와 어머니 문희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신라 제30대 왕에 오른 문무왕은 김유신 등과 힘을 합쳐 고구려를 제압하고 당나라 세력을 축출함으로써 삼국 통일을 이뤄냈다. 그는 661부터 681년까지 20년간 신라를 통치했다.‘동궁과 월지의 건설자’이기도 한 문무왕이 이뤄낸 삼국 통일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역사학자들이 적지 않다. 이와 관련해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행한 ‘신라의 삼국 통일’ 중 한 대목을 읽어보자.“현재 ‘한국사’ 교과서에는 ‘신라가 당을 축출함으로써 삼국 통일이 완수되며,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은 하나가 되어 단일한 민족문화와 사회를 만들 수 있었다’고 묘사되어 있다.또 ‘이 시기의 예술세계는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켜 통일과 균형의 아름다움을 통해 불교세계의 이상을 실현하였다’고 하여 신라의 삼국 통일이 갖는 민족사적 의의와 통일 이후 신라의 문화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신라의 삼국 통일 과정에서 보여준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헌신적 지도력, 신라 화랑의 빛나는 용기 등에 대해서도 신라 당대부터 끝없는 찬사가 이어져왔다.”‘인물한국사’에 의하면 문무왕은 태자 시절부터 아버지 태종무열왕 이상의 능력을 보여줬다고 한다. 아래와 같은 서술이다.“아버지가 왕위에 오르기도 전인 진덕여왕 때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고, 늦게 왕위에 오른 아버지를 도와 병부령(군사에 관한 업무를 총괄하던 우두머리)의 자리에서 나라의 기강을 잡았다.아버지는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사비성을 함락한 승전보 속에 생애를 마쳤지만, 아들은 계속되는 백제의 부흥운동을 제압하고, 고구려를 쳐서 멸망시킨 다음 당나라 군사마저 쫓아내기까지 과중한 임무를 맡아야 했다.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태종무열왕의 업적이 화려한 서곡에 불과할 정도로 문무왕은 통일의 주역으로서 자신의 몫을 다했다.”동궁과 월지 등 현재까지도 그 흔적이 남이 있는 유적을 여럿 만들어낸 문무왕은 죽음과 묘지 선택까지 드라마틱했다.그의 묘는 경주시 문무대왕면 봉길리 앞바다 바위 아래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해변에서 200m쯤 떨어진 곳이다. 사람들은 이를 ‘문무대왕릉’이라 부르고 있다.최고 권력자인 왕의 유택(幽宅)이 땅 위 거대한 봉분 속이 아닌 유실의 위험성이 높은 바다 한가운데 마련된 이유는 “내가 죽으면 용이 되어 우리 백성들을 괴롭히는 왜구를 막아 내겠다”는 문무왕의 유언 때문이었다고 한다.정치적으로나 문화·예술적으로 ‘성공한 군주’라 평가 받는 문무왕이지만, 그와 아버지 태종무열왕이 이뤄낸 삼국 통일에 관해서는 비판적 평가도 없지 않다.세상사 모든 일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책 ‘신라의 삼국 통일’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실려 있다.“‘한국사’ 교과서나 개설서에는 ‘신라의 삼국 통일은 당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였고 고구려의 고토 만주를 잃어버린 불완전한 통일’이라는 통일의 한계점을 강조하는 부정적 시각도 반드시 곁들여져 있다.심지어 ‘신라의 삼국 통일은 통일이 아니며, 단지 백제의 멸망에 불과하다. 고구려를 이어 발해가 등장했기 때문에 삼국시대에서 양국시대 또는, 남북국시대로 바뀐 것에 불과하다’는 통일 자체를 부정하는 견해까지도 나와 있다.”신문왕, 장인까지 처형하며 왕권을 강화하다문무왕 사후 신라 제31대 왕에 오른 신문왕은 문무왕의 장자다. 태자가 된 것은 665년, 681년에 왕의 자리에 올랐고 12년간 재위했다. 그는 신라 역사 속에서 강력한 전제 왕권을 만들어낸 통치자로 평가받고 있다.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김용만은 ‘인물한국사’에서 왕권의 강화를 위해 장인까지 처형한 신문왕에 관해 아래와 같이 쓴다.“681년 7월 1일 삼국 통일의 영웅 문무왕이 세상을 떠났고, 16년간 태자 자리에 있던 정명이 왕위에 올라 신문왕이 되었다. 신문왕은 자신의 역할을 정확히 알고 있던, 냉정하면서도 판단력과 실천력이 뛰어난 임금이었다. 그는 즉위한지 한 달 만인 8월 8일 반란 모의죄로 소판(蘇判) 김흠돌, 파진찬(波珍6E4C) 흥원, 대아찬(大阿6E4C) 진공 등을 처형했다. 놀랍게도 김흠돌은 신문왕의 장인이었다.”여기서 이름이 언급된 김흠돌, 흥원, 진공 등은 삼국 통일까지의 전쟁 과정에서 큰 공을 세운 이들이었다. 그럼에도 신문왕이 즉위 직후에 그들을 처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역사학계는 외척들의 호가호위(狐假虎威)와 왕 주변에 포진한 귀족들의 저항을 싹부터 잘라내려는 의도에서였다고 보고 있다.이 추정은 김흠돌 처형 이후 신문왕이 왕의 권력과 권위를 넘볼 이들이 없는 집안의 여자를 새로운 왕비로 택했다는 것에서 힘을 얻는다.동궁과 월지가 만들어지던 7세기 중후반은 삼국 통일에 이은 왕권 강화로 대규모의 토목공사가 별다른 걸림돌 없이 진행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무열왕, 문무왕, 신문왕으로 이어지는 이 시기는 ‘통일신라 최전성기’로 불리는 8세기 초중반의 토양으로 역할하지 않았을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7-21

“사람들에게 파티 문화 알리고, 우리의 꿈도 펼쳐요”

7번 국도를 따라 경상북도의 끝자락으로 향한다. 뜨겁게 내리쬐는 여름바다를 구경하고 있노라면, 어느새 경북 울진군의 한자락에 다다른다. 대게와 원자력발전소 등으로 유명한 곳. 한 때는 강원도의 일부이기도 했기에 독특한 지역색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곳에 ‘파티공작소’라는 생소한 이름의 카페(?) 아니 케이터링 업체가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박지영(35) 씨와 이미영(34) 씨. 이들은 도시에서 울진으로 정착한 청년들이다. “경력단절 여성들의 재취업 프로젝트라는 생각을 가지고 시작했어요. 저는 영상제작을 전공했고, 미영이는 제과·제빵을 했죠. 그리고 지금은 공부를 위해 쉬고 있지만 막내는 호텔 경영을 전공했어요. 우리가 3명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파티라고 하면 소품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서 음식 만드는 것, 준비하는 것까지 하게 된다면 우리의 능력을 모두 발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죠. 곧바로 아이템을 파티로 잡고 파티공작소라는 이름으로 창업을 했어요.”말 그대로 두 사람은 모두 경력단절 여성이었다. 울산이 고향인 지영 씨는 부산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영상제작을 전공하고 서울에서 영화현장 스태프와 보도국 스태프로 일했다. 미영 씨의 고향은 울진이다. 결혼 전까지 개인 제과점과 대형 스파의 고객관리팀장으로 일했었다. 하지만 지영 씨와 미영 씨는 결혼과 함께 전업주부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이런 두 사람이 만나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저는 울진에 연고가 없어요. 처음 울진에 왔을 때, 큰 아이가 12개월 되던 무렵이었죠. 귀촌 후 외롭다기보다는 나만의 세상에 온 듯한 느낌이 있을 때, 미영이를 만났어요. 첫째가 동갑이라는 공통점과 경력단절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금방 가까워질 수 있었죠. 나름 미영이 고향이 울진이라 유익한 정보들도 얻을 수 있었구요. ”“저는 울진이 고향이고 부모님과 형제들이 울진에 있어요. 다시 적응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죠. 하지만 저도 지영이 언니처럼 매장을 오픈하기 전까지는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였어요. 현재는 파티공작소에서 메뉴개발과 매장관리를 맡고 있죠.”□ 나의 꿈과 아이를 위한 선택한참을 바쁘게 살아갈 시기의 이들이 내륙의 외딴섬이라고 불렸었던 울진으로 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도 촌사람들에게는 생소한 ‘파티’라는 아이템을 들고 말이다.“경력단절 여성을 위한 강의를 듣다가 취업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친구들을 모으고 준비를 하는 과정에 구청에 자문을 많이 구했거든요. 그때 담당했던 주무관님이 ‘이 아이템이라면 도시청년시골파견제를 통해서 더욱 성장할 수 있는 아이템’이라고 말씀해주셔서 용기를 가지게 됐어요. 아! 울진이요? 사실 도시 생활이 너무 삭막하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신랑이랑 귀촌을 해보자하고 마음을 먹고 있었죠. 그리고 ‘아이 낳고 살기 좋은 울진’이라는 슬로건을 보고 정착했어요.”그렇다고 이들에게 부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파티공작소’를 생소하게 바라보는 울진의 시선을 견뎌야 했고,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막내를 떠나보내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하는 옛 어른들의 말씀이 진리일까. 울진의 파티공작소는 어느새 지역의 명물로 자리를 잡았다. 박지영 대표에게 지금의 느낌을 물었다. “시골파견제의 도움을 받기도 했고, 어쨋든 저는 지금 너무 만족하고 있어요. 울진이라는 곳이 공기도 너무 좋고 아이들을 키우기에도 너무 좋은 환경이더라구요. 도시에서 느낄 수 있는 문화생활은 부족하지만, 내 아이들을 위한 너무 좋은 환경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어서 만족해요. 우리는 청년이기도 하지만 엄마거든요.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죠. 하지만 늘 노력하고 있어요.”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 대체 울진의 파티공작소는 무엇을 하는 곳일까. 포털의 검색창과 주위의 도움을 구해도 알 길이 없었다.“아직도 도대체 뭐하는 곳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아요. 여러가지 아이템을 보유하고 있어서인 것 같아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파티를 바탕으로 한 복합공간이에요. 파티를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많잖아요. 음식도 당연히 필요하지만, 기획을 하는 사람과 음악, 소품들이 함께 있어야 파티가 빛이 나죠. 저희는 이러한 파티를 울진의 경단여들과 함께 만들어 가고 싶어요. 코로나19 때문에 조금 더디게 진행하고 있지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싶어요. 일종의 꿈?” 기억에 남는 것은 울진에서 처음 진행했던 초등학생들을 위한 원데이클래스라고 한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디저트 만들기라고 할까. 울진에서는 처음 진행하는 것이라 설렜다는 박지영 씨는 수업을 위한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반응은 좋았다. 카프레제와 카나페를 퓨전한 메뉴를 만들기도 했고, 크래커 위에 장식을 놓기도 했다. 파티공작소에서 직접 구워간 머핀에 아이들이 생크림 토핑을 하는 모습도 흐뭇했다고….□ 망설이지 말고 도전하라울진이라는 시골은 이들에게 어떠한 의미일까. 도시가 그립지는 않을까. 그리고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어떠할까하고 말이다. 사실 지영 씨와 미영 씨의 귀촌은 선택 사항이 아니었다. 남편의 결정에 따랐던 것. 오히려 오고 싶지 않은 마음이 조금은 있었다고 한다. 오히려 친정 어머니는 울진에 이사한 지영 씨를 보고 우시기까지 하셨다고 하니 말이다. “큰 도시는 이미 많아요. 제가 직접 아이를 키우고 살다보니 부족한 것들이 있더라고요. 성장앨범 찍어줄 수 있는 곳도 없고, 애들을 데리고 체험을 할 수 있는 곳도 부족했고, 그래서 제가 직접 한번 해보자. 다른 아이들에게도 기회를 주고 싶다는 생각에 울진에서 하면 잘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물론 처음 귀촌을 계획했을 때는 이상적인 삶을 꿈꾸기도 했어요. 회사 생활의 스트레스와 안녕하고, 해보고 싶은 일을 하고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고, 내 아이들을 흙과 물이 넘치는 그런 곳에서 놀 수 있게 하고 싶었죠. 아마 불영계곡을 넘어 내려오던 중 만난 푸른 주변 풍경과 에메랄드 빛 바다가 보이는 해안가로 펼쳐진 7번 국도가 유혹을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은 어떠할까.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이들에게 귀농과 귀촌에 대한 솔직한 느낌을 물었다. “로컬이 고향이 아닌 친구들에게는 낯선 환경, 그리고 귀향하는 청년들에게는 어른들의 시선이 아닐까 싶어요. 이런 청년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가 필요한 것 같아요. 나의 적성과 직업을 찾아 돌아오는 청년들을 실패자나 낙오자가 아닌 우리 마을을 실리러 오는 구원투수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큰 도시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돌아온 마을의 자랑? 그리고 무엇인가 도전하는 청년들에게 연륜과 경험에서 나오는 지혜들을 팍팍 전수해주셨으면 하구요.”그랬다. 지영 씨와 미영 씨는 울진에서 새로운 꿈을 마련한 셈이다. 그리고 이들의 5년과 10년 후는 어떠할까.“파티공작소를 사회적 기업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계획을 하고 있어요. 귀향한 청년들과 전문직 경단여를 필요한 직군에 모집하고, 커뮤니티를 형성해 지역 발전을 위한 재능기부를 하는 것이 목적이에요. 코로나19로 많이 늦춰졌지만 조급해 하지는 않아요. 천천히 한 단계씩 나아가겠죠.”“저희는 울진의 파티플래너 1호라고 자부하고 있어요. 파티플래너라는 이름으로 지역의 학생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갓난아이를 데리고 도시로 나가 성장앨범 촬영을 하는 번거로움을 해소시키고자 셀프스튜디오를 운영하기도 했죠. 아이들과 베이킹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 없어 원데이클래스도 열었구요. 이렇게 아이템이 늘어나는 이유는 울진이 아닌 주변 도시에서 소비생활을 하는 군민들을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에요. 망설이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도전을 먼저 했으면 좋겠어요. 그저 저만의 꿈으로 간직할 수밖에 없었을 텐데 말이죠. 다른 분에게도 새로운 시작이 되는 그런 사업이었으면 좋겠어요.”/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1-07-20

새마을복 입고 포항 구석구석 안 다녀본 데 없어

여성단체가 거의 없던 시대,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조직된 새마을부녀회는 여성들이 사회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적인 통로였다. 그 통로에 첫발을 딛고 열정적으로 걸어갔던 김경희. 세 번째 만남에서는 1970년대 포항에서 일어났던 새마을운동을 중심으로 포항의 변화와 여성들의 움직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최 : 삶을 돌아볼 때 가장 잘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김 : 새마을운동이 아닌가 싶다. 사실 1970년대 포항은 거의 모든 면에서 뒤떨어져 있었다. 생활도 그렇고 교육도 그랬다. 그 어려운 시절에 새마을운동이 있었기에 포항이 자생력을 갖추었다고 본다.최 : 약력을 살펴보니 1973년부터 포항새마을부녀회장을 맡았습니다.김 : 돌아보면 그 자리를 맡게 된 것도 행운이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그걸 맡았기에 마음껏 일해볼 수 있었다.최 : 주로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김 : 포항시 24개 동에 새마을부녀회를 알리기 위해 여기저기 바쁘게 다녔다. 허구한 날 바깥으로 나다녔으니 다른 집 같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싶다. 남편이 이해해주지 않았으면 벌써 쫓겨났을 것이다. 동네마다 가서 과수원이 있으면 함께 과일도 따고, 농사를 짓고 있으면 비료도 함께 날랐다. 새마을복 세 벌을 번갈아 입으며 포항 구석구석 안 다녀본 데가 없다.최 : 새마을부녀회의 목표는 무엇이었는지요?김 : 여성들의 의식을 계몽하고 식생활을 개선하는 게 주안점이었다. 당시에는 여성에게 배움의 기회가 적어 새마을부녀회원들 대부분이 국민학교 출신이었다. 학력과 상관없이 새마을 교육에 참여했던 회원들은 일주일간 교육을 받고 나오면 모두 새마을 지도자가 되었는데 자부심이 대단했다. 초창기 회원들은 ‘잘 살아보자’는 일념으로 열성적으로 활동했다.새마을운동은 물질적 풍요는 물론, 정신적 풍요를 동시에 누리는 마을 혹은 공동체를 만들자는 운동이었다. ‘새마을부녀회’는 1970년대 초 생활개선 구락부, 가족계획 어머니회, 부녀 교실, 저축 금고 새마을 어머니회로 활동하던 각각의 여성단체를 하나로 모아 1977년에 통합 조직하면서 탄생되었다.최 : 지금처럼 교통편이 좋은 것도 아니고 식당이 많은 것도 아닌데 어려운 점이 많았겠습니다.김 : 요즘처럼 탈것도 먹을 것도 흔한 시절이 아니었다. 튼튼한 두 다리로 걸어다녀야만 했다. 그때 만났던 사람이 김보미 포항시 계장〔전 포항시 북구청장〕이다. 김보미와 당시 읍면동 회장이었던 김영자와 함께 장성동 어머니 친목회 행사에 갔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아파트 대단지가 들어서 있지만, 그때는 장성동 주변이 다 산골짝이었다. 비포장도로를 한참 걸어가야 하는 외곽지였다. 그런 곳이니 당연히 먹을 것, 입을 것이 풍족할 수 없었다. 장성동 부녀자들과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다 보니 점심때가 훌쩍 지났다. 얼마나 배가 고팠겠는가. 그 시절에는 서로 챙길 줄 알았다. 먹을 것이 없으니 집집마다 탁주를 받아와서 커다란 다라이에 바닷가에서 뜯어온 거뭇거뭇한 진저리 해초를 넣고 조선파를 썰어 넣어 간장에 버무렸다. 그걸 가운데 놓고 대청마루에 둘러앉아 주민들과 탁주에 진저리 나물을 먹으며 점심을 해결했다. 지금이야 진저리가 거름통으로 들어가지만, 그때는 그걸로 한 끼를 때웠다. 그렇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며 탁주를 마시고, 흥이 나서 노래도 하고, 그러다 더욱 흥이 나서 또 마시다 보면 너도나도 취해서 시름이 다 사라졌다. 그날 나는 김영자에게 업혀 왔다. 그때는 그렇게 살았고 일했다.최 : 새마을부녀회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요?김 : 1980년 9월 창립해서 생활개선 사업, 가족계획 사업 등을 추진했다. 생활개선은 말 그대로 주변의 더러운 것들을 하나하나 치우고 정리하는 일이다. 부녀회원들이 동마다 구석구석 하수구 청소를 했고 부엌도 개조했다. 그리고 생활개선을 위해 요리 전문가를 초빙해 포항여고 기숙사에서 포항의 여성 대표들을 먼저 가르쳤다. 포항 여성들의 계몽 교육과 바른 먹거리 식생활 교육도 이루어졌다.최 : 잊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을 것 같습니다.김 : 산아제한 교육도 새마을부녀회에서 맡았다. 주로 학교 강당 같은 데서 ‘하나만 낳아야지 둘셋 놓으면 거지 만든다’는 내용의 교육을 했다. 피임 교육도 동네별로 했는데, 교육을 하고 나면 동네 아이들이 콘돔을 풍선인 줄 알고 입에 물고 다니기도 했다. 여자들에게는 먹는 피임약을 줬는데, 시어머니가 며느리 혼자 좋은 약을 먹는 줄 알고 며느리가 집을 비울 때마다 두세 알씩 몰래 먹기도 했다. 지금은 아이를 낳지 않아 심각한 문제인데, 그때는 산아제한 때문에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많았다.가족계획 사업의 주요 내용은 피임약 보급, 피임 시술, 사회적 지원, 계몽 홍보 교육 등이었다. 1912년부터 광복 전까지 우리나라 출생률은 상승과 하락을 반복했다. 그리고 급격한 인구 증가가 국가적인 문제였던 1960~1980년대에 정부는 강력한 산아제한 정책을 펼쳤다. 정부의 산아제한 정책이 지속된 탓에 한국의 합계 출산율은 목표였던 인구 대체 수준 2.1명을 달성한 후에도 빠르게 감소했다. 그리고 1984년에는 1.76까지 떨어졌다. 최 : 새마을부녀회에서 했던 여러 가지 일 중에서 보람된 일은 무엇인지요?김 : 1985년 포항에서 전국소년체전이 개최되었다. 종합운동장에서 대회가 열렸는데, 출전하는 선수들 밥을 해먹이겠다는 마음에 24개 동 새마을부녀회에서 모두 나와 운동장에 텐트를 쳤다. 그런데 당일 새벽부터 비가 내리는 바람에 앞이 깜깜해졌다. 부녀회 회원들 모두가 나와 팔을 걷어붙였다. 누가 시켰다면 그렇게 했을까. 종합운동장에 고인 물을 손바닥으로 퍼내고 걸레로 닦아내기 시작했다. 정말 한마음으로 빗물을 닦았다. 며칠 후 미국에 있는 후배가 신문에서 나를 보았다며 전화를 했다. 우리가 운동장에 고인 빗물을 손으로 퍼나른 이야기가 미국에서 보도되었다는 것이다.최 :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네요.김 : 그만큼 단결도 잘되고 화합도 잘되었다. 그래서 새마을부녀회를 잊을 수 없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방향을 알려준 것이 바로 새마을운동이다. 이 일을 하지 않았다면 과연 내가 무슨 일을 했을지 모르겠다. 새마을복 세 벌이 내 인생의 옷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새마을부녀회는 공동기금 마련을 위해 구판장 운영, 절미 저축, 공동 경작 등의 사업을 했으며, 정부에서 추진하는 민간 계몽과 정부 시책 홍보 및 실천 조직으로서 전방위 역할을 했다. 농산물 직거래 활동, 강원도 감자 사주기 운동, 농촌 일손 돕기 자원봉사 등을 매년 실시했으며 새마을 알뜰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다. 건전한 휴가 보내기, 호화 혼수 안 하기 등 근검절약 분위기 조성과 기초 질서 확립 캠페인, 나라 사랑 국기 달기 캠페인을 전개했고, 납세 의무자와 시민의 역할 교육과 우리 동네 개혁 운동을 위한 간담회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96년 고철 모으기 캠페인에서는 경상북도 1위를 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최 : 어떤 단체보다 희생정신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김 : 현장에서 험한 일을 마다 않고 헤쳐 나갔다. 하수구에 있는 쓰레기도 건져내고 쥐도 잡고. 회원 모두 남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일이라 여기며 일했기에 가능했다. 사실 먹고 사는 게 어려웠던 시절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고아원에 가려 한다, 노인들 밥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십시일반으로 쌀이 모였다.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곡식 창고는 열쇠로 여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여는 것이었단 생각이 절로 든다. 그것뿐이었던가. 여성도 남성만큼 할 수 있다는 패기를 보여주자며 해병대에 가서 1박 2일 훈련도 받았다. 총 쏘는 것도 배우고 험한 훈련도 했다. 다른 지역 부녀회에서는 감히 생각도 못할 일을 포항에서 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그렇게 열성적으로 일한 공로로 포항시 새마을부녀회장 1대 김경희, 2대 정경숙, 3대 김숙자, 4대 서차분 그리고 5대 황복희를 비롯해 읍면동 회장으로 활동한 김영자, 박순조, 김미자, 권양자, 정수남 회장이 대통령 훈장을 수훈했다. 새마을부녀회가 있었기에 여성들의 단체가 조직적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김경희포항에 산 지 올해로 여든여덟 해가 지났다. 그사이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와 4·19가 있었지만 유년의 기억은 늘 가슴 뛰게 빛났다. 포항여중과 포항여고 재학 당시 합창부와 미술부를 병행할 정도로 예술을 사랑하는 소녀였고, 미술부원들 간의 약속을 지키고자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할 만큼 신뢰를 소중하게 여겼다. 모교인 포항여고에서 교직 생활을 했으며, 결혼 후 4녀를 둔 가운데 여성 권익과 여성 교육을 위해 쉼 없이 뛰었다. 1973년 포항새마을 부녀회장, 1977년 새마음봉사단 단장을 맡았고, 같은 해 죽도동 여성회관추진위원회에 총무로 있으며 여성회관이 건립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했다. 1981년부터 죽도유아원과 새마을 협동유아원 원장으로 5년간 근무했고, 1984년 포항불교여성회를 창립해 지금까지 37년간 회장직을 맡고 있다. 1987년에는 포항의 여성단체를 총괄하는 여성단체협의회를 조직해 회장직을, 1989년에는 전문직 여성클럽(BPW)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1990년에 포항여성회관 초대 관장(5급)으로 추대되었지만 봉사 정신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과는 맞지 않음을 깨닫고 자리에서 내려왔다. 1995년 통합 여성단체협의회 회장직을, 같은 해 경상북도 5대 도의원에 당선되었으며, 포항시 여성상을 수상했다. 1985년 대통령 훈장 근면장을 받았고, 2003년에 한국불교여성개발원이 선정한 108인에 추대되었으며, 2001년에는 포항시민상과 대통령 공로장을 받았다.대담·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

2021-07-20

생활체육 통해 전문체육인 육성해야 한다

대구시체육회가 관선의 굴레를 벗고 특수법인으로 출범한 지 이제 한 달. 관선과 민선을 줄타기하면서 살림을 맡아오고 있는 신재득 사무처장(63)의 명패는 사무실 책상 위에 굳게 박혀 있었다. 전문체육과 생활체육을 통합해서 2016년 재출범한 대구시체육회에서 생체협 출신인 신 처장은 특별히 ‘풀뿌리 체육의 활성화’를 강조한다. 법인으로 독립했지만 청사는 여전히 대구시 소유인데 ‘나가라고야 하겠나’ 하면서 구태여 넘겨받을 생각은 없어 보인다.대구시체육회는 지난해 7월 40년 북구 고성동 시대를 마감하고 대구스타디움이 내려다보이는 수성구 대흥동 대덕산 기슭의 새 집으로 이사왔다.-체육회가 최근 엄청난 변화를 몸소 겪고 있다. 지난해 대구시장이 회장을 맡던 관선 체제에서 민선으로 바뀌고 1달 전에는 특수법인으로 법률적으로도 독립했다.△지난 6월 8일 특수법인으로 정식 출범했다. 사실 종전까지는 임의단체로 정체성이 모호한 면이 있었다. 이제 법인이 됐으니 안정적인 기반으로 자율적 독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셈이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안정적으로 예산을 지원받을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기부금을 받아도 영수증 처리할 수 있게 됐고 수익사업도 벌일 수 있게 됐다.-종전 대구시장이 맡던 회장을 민선으로 뽑았다. 관선 체제와 민선 체제에서 무엇이 달라졌나.△사무처장의 역할은 민선 시대라고 달라지지 않았다. 회장의 지휘 감독을 받아 사무처의 업무를 총괄하고 소속 직원을 지휘 감독하며 회장님을 필두로 체육회의 임원, 종목단체 회장들과 함께 체육을 통해 시민들의 건강과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체육을 통해 대구의 브랜드를 높이는 데 기여하는 것이고 거창하게 말하면 대구 체육의 위상을 국제적으로 드높이는데 역할 하는 것이다.-법인화와 민선 회장으로의 변화라는 대전환에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닐 것 같다. 재정 독립 방안에는 문제가 없나.△기대만큼 우려 또한 없지 않다. 지켜봐야 하겠지만 여전히 예산을 지방자치단체가 쥐고 있으니 자치단체장과 정치색이 다른 민선 회장이 들어서서 알력이 생길 수도 있다. 경기도 등 일부 지역에선 벌써 불협화음이 나오는 곳도 있다고 들었다. 이제 민선으로 출범한 지 한 달이 됐으니 앞으로 잘 꾸려나가야 할 것이다.-대구시체육회 사무처장으로 전국 17개 시도체육회 사무처장협의회 회장도 맡고 있다.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중요한 문제다. 체육회가 법인이 되긴 했지만 지방자치단체가 예산을 삭감하는 문제는 언제든지 생길 수 있다. 지방체육회 차원에서 지방체육회에 대한 지방비 보조를 의무화하도록 국민체육진흥법을 바꾸려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지방자치단체가 자치권 침해를 이유로 법안 통과가 미뤄지고 있다. 체육회와 자치단체가 체육회에 대한 지자체의 재정 지원을 ‘해야 한다’와 ‘할 수 있다’로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사실 종전 체육회는 엘리트체육 중심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체육회는 최근 이원화돼 있던 생활체육과 엘리트체육을 2016년 합병했다. 신 처장은 종전 대구시 생활체육협의회 부회장이었다. 두 영역간의 관계는 어떻게 되고 합병 이후 어떻게 운영되고 있나.△체육은 모든 국가정책의 기본이다. 거기서 생활체육과 전문체육을 나눠서 운영하는 나라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난 권위주의 시대에는 국위선양이라는 명분으로 전문체육을 중시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생활체육의 중요성이 더 커지고 있는 추세다. 일본에는 초등학교에 전문 체육선수가 없더라. 중국도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운동을 시키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풀뿌리 체육의 활성화를 모토로 삼고 있다.-대구시체육회도 법인화하면서 기구를 개편했나. 엘리트체육과 생활체육을 어떻게 조화시킬 작정인가.△전문체육과 생활체육의 영역이 가능하면 자연스럽게 융화될 수 있도록 노력해왔다. 이번 기구 개편에서도 생활체육과 엘리트체육의 부서를 통합했다. 서로에게 이로운 상호 작용을 하는 유익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생활체육이라는 기초 위에 엘리트체육이라는 벽돌을 쌓아 나갈 때 비로소 어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튼실한 시스템이 갖춰질 것이다.엘리트체육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가 좋은 성적을 내고 또 훌륭한 지도자로 자리 잡아 다시 생활체육에 기여하는 선순환 구조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두 영역을 굳이 구분하여 관계 지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상호 보완적이며 필수 불가결한 형태로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생활체육이 활성화되는 것이 중요하다. 대구시체육회의 모토가 ‘건강 백세 시대, 체육으로 행복한 대구’라고 들었다. 국민 소득이 높아지고 선진국으로 갈수록 소수 체육 엘리트보다 모든 시민이 삶의 질 향상과 개인의 행복을 위해 체육도 기여해야 하는 것으로 해석하면 되겠나.△이제 엘리트 체육과 생활 체육을 나누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생각한다. 당장 마주친 고령사회에서 스포츠를 즐기며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국민의 권리를 국가가 책임지고 지원해줘야 한다. 대구시체육회는 지역 실업팀의 경기력을 유지하면서 풀뿌리 체육을 확산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해서 시민 누구나 체육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나가려 한다. 생활체육을 통해 전문 체육인을 양성하는 시스템으로 가는 것이다.-그러면 운동선수에게 대학입시에서 특별히 대우하거나 병역 특혜를 주는 개발도상국가 시절의 양성 시스템은 이제 벗어나야 할 때가 됐다는 말인가. 심하게 말해서 올림픽이나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에게 또 특별 예우하거나 혜택을 주는 것도 이제는 바꿔야 할 때라며 시비 거는 사람이 있는데.△운동선수들의 대학입학이나 군 특례제도는 과학 예술분야에서 행해지는 시스템으로 운동선수들만의 특례는 아니다. 이런 시스템은 사회 전체의 변화와 발맞추어 체육 분야에서도 일부 개정은 돼야 한다는 데 공감한다. 그렇지만 체육 분야만 고쳐야 한다는 데는 동의하기 어렵다. 올림픽이나 세계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것이 개인 영광이지 국위 선양이 아니라는 생각은 너무 편협하고 나가도 너무 나갔다. 우리가 손흥민 류현진 김연아 선수들에게 환호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개인의 영광보다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제도적인 보완은 필요하지만 구시대의 유물이라 폄하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코로나19 사태가 체육계도 비켜가지 않았다.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결해 나갈 생각인가.△지난해 7월 새집으로 이사 오면서 한창 상승 무드를 타던 대구 체육이 코로나로 직격탄을 맞은 꼴이다. 대구시가 2019년 전국체전에서 18년 만에 7위를 했는데 지난해엔 연기됐고 많은 체육 행사들이 취소되면서 예산도 운영에 필수적인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대구시에 반납했다. 그 돈은 코로나 재난지원금으로 활용됐다. 올해 전국체전이 경북 김천에서 열릴 예정인데 불투명하다. 개최지가 경북이어서 대구와 상생 무드를 조성하기 좋은 분위기인데 정말 아쉽다. 대구FC와 삼성 라이온즈의 성적도 좋고 체전을 준비하고 있는 선수들도 열심인데 코로나19의 확산세를 보면 초조하다.-그렇다고 아주 경기를 안 할 수도 없을 것 아닌가. 더구나 시민들은 체육활동을 통해 코로나 시대를 극복하려는 움직임도 있는데 체육회가 그런 시민들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할 것 아닌가.△선수들은 방역 지침을 지켜가면서 훈련하고 있고 체육회도 방역지침을 지켜가면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올해 ‘2021 대구국제마라톤대회’를 언택트 레이스로 개최하고 ‘언택트 컬러풀 혼운챌린지’ ‘2021 대구 마스크 쓰GO 시민정신 걷기대회’ 등을 비대면으로 진행하기도 했다. 또 생활체육 지도자들이 영상 편집 교육을 통해서 코로나 확산에 대비한 비대면 수업을 진행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또 시민들에게는 체육을 통해 건강하고 일상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도록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맞는 다양한 비대면 사업을 새롭게 발굴해서 나가겠다.-우리 사회에서 선후배 간 갑질이나 남녀간 성폭력 문제가 예민하게 두드러지고 있다. 특히 체육계에서 더욱 심각한 것 같은 느낌이다.△시대가 바뀌었다. 어디에서든 일어나서는 안 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다만 운동선수들은 합숙훈련 등 선수들끼리 같이있는 시간이 많아서 좀 더 일어날 소지가 높은 것이 사실이다. 특히 성폭력 문제는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실업팀 선수들에게는 체육회 차원에서 외부 강사를 초빙해서 성인지 감수성 교육을 하는 등 교육과 지도를 통해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체육계에 오래 몸담아 온 사무처장으로서 개인적으로 욕심이 있다면.△법인이 됐으니 우리 사회에 기부문화가 체육회로도 더 확산됐으면 좋겠다. 그래서 선수들에게 장학금을 줘서 재능 있는 선수들이 대학가서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할 수 있도록 지원했으면 한다. 지금 스포츠는 과학적으로 훈련해야 한다. 좋은 성적을 기록하려면 재정적 뒷받침이 필요하다.또 육상과 수영 등 기초종목을 육성하고 싶다. 특히 수영을 위한 인프라가 필요하다. 육상 종목의 인프라는 어느 정도 마련됐는데 수영장은 너무 부족하다. 구태여 국제 규격의 수영장일 필요는 없다. 일반 시민들이 참여하는 프로그램들을 늘여 생존수영도 가르치는 수영장을 접근성 좋은 곳에 많이 확보하고 싶다. ◇신재득 (申載得)1958년 대구 출생. 영남대 체육과와 스포츠과학대학원 석사, 계명대에서 체육정책으로 체육학박사를 받은 체육행정가. 축구명문 청구고 졸업후 축구부 후원회장을 맡아 전국 합숙훈련을 동행했다. 이후 대구생활체육회 부회장과 대구시체육회 정책협력관을 거쳐 2019년 통합된 대구시체육회의 공모직 사무처장에 임명됐다. 17개 시도체육회 사무처장협의회 회장과 달구벌스포츠클럽 대표, 대구경북체육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이경우 편집위원

2021-07-20

아이스케이크 팔아 모은 돈이 여성회관 건립의 종잣돈

두 번째 만남 전에 점심 도시락 2인분을 준비했다. 나와 그의 도시락이 아니라 그와 남편의 도시락이었다. 동갑내기로 60년 이상 함께 살고 있는 남편의 점심이 늘 걱정이라고 첫 인터뷰를 할 때 지나가는 말로 했다. 두 번째 인터뷰도 점심 전에 마쳐야 한다고 해서 도시락을 드리며 조금이라도 더 붙잡고 싶은 마음에 준비했다고 말했다. 그는 유쾌하게 웃었고, 포항여성문화회관 건립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최 : 포항여성문화회관은 시 사업소로 운영되고 있지만 당초 민간 차원에서 자생적으로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김 : 1970년대 초반 여성단체는 새마을어머니회가 가장 규모가 컸고, 한국부인회 등이 미약하게 활동했다. 여성단체 대부분이 친목과 봉사 위주로 활동할 때였다. 어느 날 포항여고 총동창회 손정식 회장이 몇몇 사람들과 함께 나를 불렀다. 그때 나는 여자청년단 총무 자격으로 자리에 함께했다. 다양한 얘기가 오갔는데 무엇보다 여성과 어린이들을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 시급한 것은 재원이었다. 건물을 지을 자금이 필요했다. 그래서 여성회관 건립 추진위원회가 만들어졌고, 독자적으로 자금을 마련키로 합의했다. 모임 회비만으로 건립 기금을 마련하기는 어려워서 추진위원회 결정으로 송도해수욕장에서 수익 사업을 하기로 했다. 그렇게 장사를 시작했다.최 : 장사는 어떻게 했는지요?김 : 아침에 포항극장(현 롯데시네마)에 가서 잔돈을 바꾸고 아이스케이크, 사이다, 빵, 담배 등을 리어카에 담아 송도해수욕장으로 갔다. 그곳에 낡은 텐트를 치고는 가지고 온 것들을 팔았다. 밤에는 팔다 남은 물건들을 모래에 파묻었다. 그렇게 두 달 동안 송도에서 살다시피 했다. 해수욕장에서 맨발로 두 달을 버텼으니 새까맣게 탔다. 매일 교대로 나가며 장사해서 돈을 모았다.최 : 많이 힘들었겠습니다.김 : 손정식 선배가 나 아니면 믿을 사람이 없다고 해서 내가 나선 것이다. 그때 막내가 네 살인가 다섯 살이었다. 매일같이 남편을 설득해 송도에 나갔다. 남편이 아이를 업고 나를 찾아 송도에 오기도 했다. 내가 남편이었다면 이해할 수 있었을까 싶다. 남편은 나를 믿었고, 그래서 아직도 남편이 고맙다. 남편이 없었다면 절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유명한 태풍, 사라호도 거기서 맞았다.여성회관 건립 추진위원회의 위원장은 손정식이 맡았다. 어렵게 마련한 건립 기금으로 여성회관을 지었지만, 강사 섭외가 쉽지 않았다. 손정식이 수산전문대학(현 포항대학) 등을 찾아다니며 강사를 초빙했고, 자신도 교양과목을 가르쳤다. 손정식은 여성회관 초대 명예 관장으로 여성회관을 운영하며 여성의 삶 개선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고, 그 곁에 김경희가 있었다.최 : 그렇게 자금을 확보해서 여성회관이 죽도동에 건립된 것인가요?김 : 그 자금이 종잣돈이 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했다. 하지만 그렇게 건립 자금이 모인 게 화제가 돼 각계각층에서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시 예산과 지역의 기업 등에서 후원해주지 않았다면 여성회관 건립은 무산되었을 것이다. 최 : 1974년 여성회관이 죽도동에 현판을 내걸었을 때 감회가 남달랐겠습니다.김 : 나는 당시 새마을부녀회 회장으로 늘 새마을복을 입고 다녔고, 그날도 복장이 다르지 않았다. 여성회관 개관식에 정말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 여성회관 옆에 죽도1동 동사무소가 있었는데 동장 나이가 우리 아버지보다 많아 보였다. 그런데 시장이 와서 갑자기 준비를 덜 했다고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동장에게 험한 말을 하는 게 아닌가. 경상북도에서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와 있고 포항에서도 내로라하는 인물들은 다 와 있는데 말이다. 게다가 나에게 “아주머니, 아주머니!”라며 막 부르면서 함부로 대하질 않나. 정말 꾹꾹 참았다. 행사가 끝난 후 관장 사무실에 여성들이 모두 모여 차를 마셨다. 국회의원 부인, 포항시 부시장 부인도 함께 있었다. 내가 여권신장부터 하자고 말문을 열고는, 어떻게 시장이 이런 행사에서 막말을 할 수 있느냐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랬더니 다음 날 아침 일찍 시장에게 전화가 왔다. 아마 부시장 부인이 시장 부인에게 말했지 싶다. 시장은 다짜고짜 화를 내며 여자들 앞에서, 그것도 국회의원 부인도 있는데 자신의 험담을 해서 되겠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조목조목 시장의 언행을 짚어주고는, 시장이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 하고 전화를 탁 끊었다.최 : 어떻게 그렇게 당찰 수 있었는지요?김 : 바른말 하는데 뭐가 무섭나. 그 후로 시장을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중앙국민학교에서 열린 행사에 갔다가 만나게 됐다. 새마을어머니회에서 예비 훈련을 받아야 된다고 해서 수백 명이 자비로 군복을 입고 중앙국민학교에서 결성식을 했다. 단상에 올라가보니 시장과 나 단 둘만 있었다. 24개 동 새마을어머니회 여성 전부가 군복을 입고 시장에게 경례를 붙이자 시장 기분이 어떠했겠는가. 뿌듯하지 않았겠는가. 그 순간 시장이 낮은 목소리로 “회장님, 미안합니다. 그때는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라고 말을 건넸다. 그래서 나도 미안하다고 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손정식 관장이 나에게 “쪼매난 게 간도 크다”고 했다. 잘못되었다고 판단되면 바로잡아야 하는 게 내 성격이다. 그래서 별명이 싸움꾼이 된 것이다.그가 여성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과감하게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말을 듣는 내내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는 젊은 날의 그를 만날 수 있었다.최 : 여성회관은 1989년 시 사업소로 전환되었지요?김 : 민간단체로 운영하다 보니 예산이 늘 문제가 되었다. 어떻게 해결해보려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운영위원 회의에서 여성회관을 시 조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고, 시 사업소 직제인 포항시여성복지회관이 된 것이다.여성회관이 민간기관에서 시 직제로 바뀐 후 교육시설은 물론 운영 사업 전반에 걸쳐 눈에 띄는 변화가 있었다. 포항시여성복지회관은 전국 어느 사회교육기관 못지않은 수준으로 올라섰다. 그렇게 10년을 운영하게 되자 교육 수요가 확장되고 공간 문제도 대두되었다. 매년 수강생을 1천800명씩 배출하니 더 넓은 공간과 현대식 시설을 갖춘 여성회관의 신축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1998년 우현동에서 새 회관의 기공식을 갖고 2001년 입주하게 되었다. 현재 포항시여성문화관은 수영장을 겸한 지하 2층 지상 3층으로, 지역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교양강좌를 운영하며 시니어 대상 강좌와 남성 교양강좌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최 : 1988년에 여성복지회관 관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관장직을 그만두는데, 무슨 일이 있었나요?김 : 손정식이 명예직 관장으로 있다가 내가 그 자리를 맡게 되었다. 그때 그 자리는 공무원 5급 대우가 되었다. 두 달 동안 서울에서 관장 교육을 받고 석 달쯤 관장 업무를 해보니까 내 적성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이내 사표를 냈다. 남들은 그 좋은 자리를 왜 그만두느냐고 난리였다. 하긴 그 당시에 여성 공무원이 5급까지 가기도 쉽지 않은데, 일반 여성이 공무원 5급 대우 자리를 스스로 내던진다는 게 이해가 되었겠는가. 그런데 말이다. 매일 현장을 살피며 일하던 사람이 종일 의자에 앉아 있으니 한 번도 아프지 않던 몸이 슬슬 아프기 시작했다. 그래서 과감히 사표를 냈다. 사표를 내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가자 거짓말처럼 펄펄 날아다녔다. 그때 숙명처럼 알았다. 나, 김경희는 평생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걸. 김경희포항에 산 지 올해로 여든여덟 해가 지났다. 그사이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와 4·19가 있었지만 유년의 기억은 늘 가슴 뛰게 빛났다. 포항여중과 포항여고 재학 당시 합창부와 미술부를 병행할 정도로 예술을 사랑하는 소녀였고, 미술부원들 간의 약속을 지키고자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할 만큼 신뢰를 소중하게 여겼다. 모교인 포항여고에서 교직 생활을 했으며, 결혼 후 4녀를 둔 가운데 여성 권익과 여성 교육을 위해 쉼 없이 뛰었다. 1973년 포항새마을 부녀회장, 1977년 새마음봉사단 단장을 맡았고, 같은 해 죽도동 여성회관추진위원회에 총무로 있으며 여성회관이 건립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했다. 1981년부터 죽도유아원과 새마을 협동유아원 원장으로 5년간 근무했고, 1984년 포항불교여성회를 창립해 지금까지 37년간 회장직을 맡고 있다. 1987년에는 포항의 여성단체를 총괄하는 여성단체협의회를 조직해 회장직을, 1989년에는 전문직 여성클럽(BPW)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1990년에 포항여성회관 초대 관장(5급)으로 추대되었지만 봉사 정신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과는 맞지 않음을 깨닫고 자리에서 내려왔다. 1995년 통합 여성단체협의회 회장직을, 같은 해 경상북도 5대 도의원에 당선되었으며, 포항시 여성상을 수상했다. 1985년 대통령 훈장 근면장을 받았고, 2003년에 한국불교여성개발원이 선정한 108인에 추대되었으며, 2001년에는 포항시민상과 대통령 공로장을 받았다.대담·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 /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7-18

천년왕국 신라 ‘다른 보물들’ ‘또 다른 매력’으로 손짓하네

이탈리아 로마에 가서 콜로세움만 보고 오는 사람이 있을까? 단언컨대 없다. 로마에 갔다면 콜로세움과 함께 도시에 즐비하게 들어선 수많은 고대 유적을 보고, 이탈리아 전통가요인 칸초네가 흘러나오는 카페에서 얇고 담백한 피자 한 판은 맛보게 된다. 어떤 관광객이건.프랑스 파리에 간다면 어떨까? 딱 에펠탑만 보고 파리를 떠나는 여행자가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게 분명하다. 센 강에서 유람선도 타보고, 그 유명한 프랑스 포도주도 한 병 마시고, 밤에는 물랑 루즈에 가서 화려한 쇼도 보게 된다. 그게 새로운 도시를 발견하는 즐거움이다.경주도 마찬가지다. 단 하나의 유적이나 유물과 만나기 위해 긴 시간 자가용이나 버스, 기차를 타고 경주에 가는 이들은 드물다. 그 사람이 특정한 유물이나 유적 한 가지만을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라면.동궁과 월지는 빼놓을 수 없는 경주 여행의 보물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곳만을 하루 종일 돌아볼 수는 없는 일 아닌가.그러기엔 동궁과 월지 주변에 너무나 많은 천년왕국 신라의 ‘다른 보물들’이 흩어져 여행자를 기다리고 있다. 걸어서 30분 안팎이면 갈 수 있는 곳에 있으니 크게 힘을 들일 필요도, 번거로울 것도 없다. 동궁과 월지 지척엔 또 다른 관광 랜드마크가…흥미로운 관광지로서 동궁과 월지의 위상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수원대학교 양정석 교수는 ‘세계유산으로서 동궁과 월지의 가치와 보존’에서 이렇게 쓴다.“사적 제18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경주 동궁과 월지는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26번지에 위치한다. 이 유적은 사적으로 지정된 1963년부터 2011년 명칭이 변경되기 전까지는 경주 임해전지로 불렸다.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경주 임해전지나 동궁과 월지보다는 안압지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고 있다. 이미 임해전지라는 명칭으로 사적 지정이 되었지만, 발굴조사 당시에도 그리고 보고서가 나온 후에도 그 명칭은 안압지였다. 이렇게 안압지로 잘 알려져 있던 경주 동궁과 월지는 현재 경주 역사문화관광의 랜드마크가 되었다.”양 교수의 표현처럼 동궁과 월지는 떠오르는 21세기 경주 관광의 랜드마크다. 낮과 밤이 모두 흥미롭고 아름답다. 이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다.하지만, 앞서 말했듯 동궁과 월지 한 곳만을 방문하기에는 뭔가 아쉽다. 왜냐? 주위에 ‘또 다른 경주 역사문화관광의 랜드마크’가 여럿 있기 때문이다.지난 5년 동안 취재를 위해 경주를 50여 차례 찾았다. 그 경험을 토대로 신라 역사와 문화의 향기를 품고 있는 동궁과 월지 주변 관광지 몇 곳을 소개하려 한다. 더불어 젊은 여행자들에게 각광받고 있는 경주의 핫 플레이스까지.‘코로나19 사태’가 전 세계를 덮치기 전엔 적지 않은 유럽 사람들을 경주에서 볼 수 있었다.2017년 초여름이다. 20대 초반의 독일 여대생 둘을 만났다. 자기들 상식의 영역에선 ‘작은 산’처럼 보이는 능(陵·왕의 무덤)이 줄줄이 늘어선 생소한 풍경에 크게 뜬 눈으로 입을 벌리고 서 있는 그녀들에게 물었다. “어때요? 놀랍죠?”“네. 근데 저게 정말 무덤 맞나요?”멀고 먼 유럽에서 10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날아온 독일 학생 둘을 깜짝 놀라게 한 경주의 유적지는 다름 아닌 대릉원이었다.동궁과 월지에서 천천히 걸어도 채 30분이 걸리지 않는 곳에 자리한 신라의 또 다른 보물. ‘나무위키’는 대릉원을 이렇게 설명한다.“경주시 황남동에 있는 옛 신라의 왕, 왕비, 귀족층의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고분 밀집 지역. 사적 제512호다. 대릉원이란 이름의 기원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미추 이사금을 대릉에 장사지냈다’는 부분에서 따와 지었다.대릉원이라고 하면 좁게는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 황남동 고분군 쪽을, 넓게는 바깥쪽의 노서동, 노동동 고분군 등을 포함한다.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데다 경주 시가지에 있어 접근성이 좋고, 천마총처럼 신라 왕릉 내부를 관람할 수 있는 고분도 있기에 경주를 찾는 관광객들은 거의 필수로 찾는 곳 중 하나다.”대릉원이 매혹적인 건 거대한 왕들의 무덤을 볼 수 있다는 것만이 아니다. 능의 앞뒤로는 철마다 다른 꽃들이 피어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으며, 여기에 더해 대릉원을 둘러싼 돌담길은 낭만적인 연인들의 산책 코스로도 그저 그만이다. 천마총을 봤다면 다음은 길 건너 첨성대로대릉원에 들어가서 천마총을 보지 않는다면 소가 빠진 만두를 먹는 것과 같지 않을까? 천마총은 동산처럼 솟아 있는 경주의 왕릉 내부가 어떤 형태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비단 역사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은 둘러볼 가치가 충분하다며 경주시 문화관광 홈페이지가 천마총 방문을 권한다.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대릉원의 고분군 중 유일하게 공개하고 있는 155호 고분 천마총은 옆에 위치한 황남대총을 발굴하기 위해 시범적으로 발굴한 곳이다. 당시 기술로는 황남대총 같이 거대한 규모의 무덤을 발굴하기가 힘들었기 때문.1973년 발굴 과정에서 부장품 가운데 자작나무 껍질에 하늘을 나는 말이 그려진 말다래(말을 탄 사람의 옷에 흙이 튀지 않도록 가죽 같은 것을 말의 안장 양쪽에 늘어뜨려 놓은 기구)가 출토돼 천마총(天馬塚)이 되었는데, 이 천마가 말을 그린 게 아닌 기린을 그린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천마총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축조된 고분으로 추정되는데 금관, 금모자, 새 날개 모양 관식, 금 허리띠, 금동으로 된 신발 등이 피장자가 착용한 그대로 출토되었다. 천마총 금관은 지금까지 출토된 금관 중 가장 크고 화려한 것이다.”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는 우리들 생각처럼 명확하고 분명한 게 아니다. 인간의 삶 내부에는 언제나 죽음이 똬리를 틀고 있고, 삶 이후의 죽음이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그게 최고의 권력을 행사했던 왕이건, 이름 없이 살다간 필부(匹夫)건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인간의 본질을 고민하게 하는 공간 대릉원과 천마총을 살펴봤다면 다음은 거길 나와 조그만 도로를 건너 첨성대와 만나보면 어떨까.대릉원에서 10분쯤 걸어가면 여행자의 눈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첨성대.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 석조 건축물은 신라 선덕여왕 때(632~647년)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펴낸 책 ‘신라의 학문과 교육·과학·기술’은 신라의 천문과 역법을 설명하며 첨성대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신라의 천문학을 논할 때 우리는 흔히 두 가지 측면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하나는 신라 왕궁 월성의 북쪽 노지에 우뚝 서 있는 첨성대(국보 31호)의 존재이고, 다른 하나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수록된 30건의 일식 기록이다.첨성대는 그 말뜻이 별을 바라보는 대라는 점에서 일찍부터 천문관측대로서의 조형물이라는 인식이 팽배하였고, 정상부에 놓인 우물정자형 사각 틀과 아래로 갈수록 넓어지면서 둥그스름해지는 상방하원 형태의 곡선형 조형미가 가히 신라인의 하늘 이상을 잘 담아내는 것으로 주목받았다.”그 옛날 신라인들의 미적 감각과 빼어난 과학기술을 알게 해주는 첨성대는 중년의 한국인들에겐 ‘수학여행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로도 유명하다.1970~80년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던 이들의 집에는 까까머리나 갈래머리를 하고 교복을 입은 채 첨성대 앞에서 친구들과 포즈를 잡고 찍은 사진 한두 장은 있기 마련.그래서일까? 첨성대 주변에선 들뜬 목소리로 자녀들에게 자신의 청춘시절을 이야기해주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경주, 특히 첨성대가 보이지 않는 곳이라면 쉽게 포착되지 않을 정겹고 훈훈한 풍경이다. 경주 와서 황리단길을 빼놓으시려고?낯선 도시를 여행하는 즐거움 중 빼놓을 수 없는 하나가 ‘맛집’ 아닐까. 경주를 찾는 이들에게 이미 고유명사로 자리 잡은 황리단길은 독특한 감각의 인테리어로 꾸며진 카페와 세계 각국의 요리를 세련되게 차려내는 식당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황리단길 역시 대릉원, 첨성대와 묶어서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다. 산보하듯 걸으면 금방이다. 한국관광공사의 설명을 보자.“황남동 포석로 일대의 ‘황남 큰길’이라 불리던 골목길로, 전통한옥 스타일의 카페나 식당, 사진관 등이 밀집해 있어 젊은이들의 많이 찾는 곳이다. 황리단길이라는 이름은 황남동과 이태원의 경리단길이 합쳐진 단어로 ‘황남동의 경리단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1960~70년대 낡은 건물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어 옛 정취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거리다.”정갈하게 개조된 한옥 레스토랑에서 크림파스타를 먹거나, 늘어선 기와지붕이 한눈에 보이는 루프탑 주점에서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들이켠다면 여행의 기쁨이 보다 커질 게 분명하다. 주머니가 가벼운 관광객이라면 황리단길 길거리 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좋다.이처럼 동궁과 월지 주변엔 ‘또 다른 매력’을 갖추고 사람들의 발길을 기다리는 곳이 적지 않다. 이 여름이 다 가기 전 그 매력에 빠져보길 권한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7-14

도민 모두가 디지털 세상을 누릴 수 있도록

(재)포항테크노파크(이하 포항TP)가 경상북도의 인공지능(AI)·소프트웨어(SW) 인재양성에 앞장서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디지털 인재 양성을 위해 오는 2025년까지 약 1조원을 투자해 AI·SW 핵심인재 10만명 양성계획을 마련, 지난해부터 추진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기획한 D(Data)·N(Network)·A(AI) 기반의 대한민국 회복전략프로젝트인 ‘디지털 뉴딜’의 일환이다.정부의 계획과 발맞춰 포항TP 경북SW진흥본부는 경북지역 SW전문강사를 양성해 일자리를 창출하고, 체계적인 초·중·고 SW교육과 AI복합 전문과정 등을 운영하고 있다. 모든 경북도민들이 AI·SW교육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찾아가는 방문교육 및 실시간 온라인 교육방식도 강화하고 있다.포항TP 경북SW진흥본부는 올해 과기정통부가 선정하는 ‘SW전문인력양성기관’으로 지정됐다. SW전문인력양성기관은 소프트웨어진흥법에 근거해 매년 우수한 SW인재양성 기업·기관을 대상으로 선정된다. 과기정통부는 2021년 총 24개의 SW전문인력양성기관을 선정했는데 경북지역에는 유일하게 포항TP 경북SW진흥본부가 뽑혔다. 지난해부터 핵심인재양성사업인 SW미래채움사업과 지역 ICT이노베이션스퀘어 확산사업 등 SW인재양성사업을 수행해 온 포항TP 경북SW진흥본부는 지역 내 SW교육 전문기관으로서의 역할에 더욱더 충실할 수 있게 됐다. ◇SW미래채움 사업인재 양성의 핵심사업 중 하나인 ‘경북SW미래채움 사업’은 경북 지역의 SW교육의 불균형 해소와 SW교육 환경 조성이 목표다. 이를 위해 환동해·백두대간 SW미래채움센터 구축 및 SW체험 프로그램 운영, SW전문강사 양성, 단계별 SW교육 프로그램 개발·운영 등을 수행하고 있다.큰 성과를 내고 있는 아이템은 SW강사양성과정이다. 지난해 SW강사양성과정을 운영해 경북지역의 미취업 청년(17명), 경력단절 여성(32명), 퇴직전문가(4명) 등 100명에게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등 지역사회에 보탬이 됐다. 대표적으로 포스코ICT에서 상무로 퇴직해 현재 강사로 활약하는 김춘식 강사가 있다.김춘식 강사는 “기업에서 은퇴 후, 제2의 인생의 설계하면서 SW미래채움 강사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됐다. 34년간의 직장생활에서 체득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초중등 학생과 원만히 소통하며 저의 경험을 공유하도록 하겠다”고 SW강사로서의 각오를 밝혔다.SW전문강사들은 경북도 내 초·중·고 학생들에게 체계적인 교육을 제공하고, 도서 벽지의 학생들에게는 ‘찾아가는 SW교육’과 같은 적극적인 활동도 진행 중이다. SW교육을 널리 알리고 활성화하는 노력 덕택에 지난해 경북지역 초·중·고 SW교육 수료생은 3천119명이나 배출됐다. SW미래채움 코딩프로젝트 챌린지와 수업과정안 공모전에서 과기정통부 장관상(최우수상)을 각각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춘 SW체험교육의 활성화를 위해 포항과 안동에 각각 환동해 SW미래채움센터와 백두대간 SW미래채움센터를 각각 구축, SW체험교육장과 VR체험존 등을 마련해두고 있다. 최근에는 울릉중학교 전교생을 대상으로 SW체험캠프를 개최하는 등 지역아동센터나 도서 벽지 학교를 대상으로 한 SW교육도 확대해나가고 있다.포항TP 이점식 원장은 “이번 울릉중학교 SW체험캠프를 통해 도서 지역 학생들에게 SW교육이 더욱더 필요하다고 느꼈다. 도서, 산골 등 교육 소외지역에 찾아가는 SW교육을 더욱 확대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ICT이노베이션스퀘어 확산사업‘ICT이노베이션스퀘어 확산사업’은 지역산업의 미래경쟁력 확보를 위해 AI 및 블록체인 핵심인재 양성을 목표로 하며, 개발공간과 테스트 장비 등을 제공하는 경북ICT이노베이션스퀘어 운영과 AI, 블록체인 실무 인재 양성을 위한 AI복합 교육운영으로 크게 구성돼 있다.김천혁신도시에 위치한 경북ICT이노베이션스퀘어는 창업 특강, 기술 세미나, 멘토링, 경진대회, 취·창업 행사, 혁신 기술 아이디어 교류 등 지역의 교육 거점이자 아이디어 사업화 및 창업 지원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AI·SW 개발에 관심 있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개방형 창의공간과 고성능 PC 및 테스트용 스마트 기기 등을 제공하며, 이용자는 사전 신청(ictcog.or.kr)을 통해 모두 무료로 이용 가능하다.AI복합 교육운영은 경북·강원·대구지역 일반인 대상으로 AI·블록체인 기본·고급·BM(Business Model) 과정 등 단계별 맞춤형 전문가 교육(80∼160시간)과 지역산업과 연계한 특화과정을 실시간 온라인과 대면 교육방식으로 병행 진행하고 있다. 기업현장에서 진행되는 현장 실습프로젝트 과정을 제공한다.지난해 ICT이노베이션스퀘어 조성사업은 AI·블록체인 전문가 양성교육을 통해 권역 내 761명의 실무인재를 양성했으며, 취·창업을 준비하는 수료생 중 9% 정도가 실제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는 성과를 거뒀다. 그 결과 사업 평가에서 1위를 달성해 인센티브로 2021년도 국비 28억원을 추가 확보하게 됐다.사업을 운영하는 포항TP 경북SW진흥본부는 올해 ICT이노베이션스퀘어 확산사업을 통해 인공지능·블록체인 양성교육 1천50명, 취·창업 프로그램 37회 등 전년대비 목표를 상향 조정해 추진할 계획이다. 아울러, 인센티브로 확보한 예산은 지역기업과 연계한 실습 프로젝트 중심의 교육과정 등을 운영해 교육 수료생에게 지역기업으로의 취업 연계 및 현장 실습을 지원한다.포항TP 경북SW진흥본부 관계자는 “앞으로 SW미래채움사업과 ICT이노베이션스퀘어 확산사업의 연계를 통해 AI·SW 인재양성의 저변 확대뿐만 아니라 실무인재 양성에 더욱 주력할 계획”이라면서 “경북도민 모두가 디지털 격차와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노년층을 대상으로 건강을 체크하고 병원 예약까지 가능한 인공지능 건강지킴이 교육, 농민들에게 사물인터넷을 적용한 인공지능 스마트팜 체험 교육, 소상공인을 위한 비대면 온라인 비즈니스 교육 등 모든 도민을 대상으로 필요한 AI·SW교육을 제공하겠다”고 전했다./이바름기자 bareum90@kbmaeil.com

2021-07-14

“우리의 이야기를… 그림 그리고, 책과 영화에 담아요”

“5년과 10년후요? 지금과 크게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지금처럼 주어진 일을 하면서 살 것이고, 책을 만들고 영화를 제작하겠죠. 큰 욕심이 없는 것일 수도 있구요. 그래도 의성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저희의 책들을 많은 분들이 봐주시고 공감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은 있지 않을까요?”경북 의성의 안계. 시장을 끼고 도는 골목길에서 청년부부 황영 대표와 그의 아내 김은영 대표를 만났다. 첫인상을 이야기하자면, 만화 캐릭터를 닮은 바가지 머리와 바캉스를 연상시키는 옷차림이랄까. 동심과 함께 산다는 느낌을 받으며 들어선 그들의 작업실, 아니 전시 공간에는 빼곡한 작업물들이 촘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의성의 안계시장길에서 그림책 출판과 전시를 하는 ‘고라니북스’의 황영 대표와 아내 김은영 대표, 이들은 같은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하며 만난 사이다. 대구 출신인 이들은 자신들의 창작 작업과 생계를 위해 별도의 돈벌이를 하며 예술가의 길을 걷고 있다. 일명 ‘돈 안되는 길’“빌어먹고 산다”는 예전 부모님들의 2대장인 ‘시인’과 ‘미술가’, 아이러니하게도 황영 대표와 김은영 대표는 책을 만들고 그림을 그린다. 여기에 영화까지 만들고 있다고 한다. 이미 출품한 독립영화만 여러편이다.“의성에 와서 풍족하지는 않지만 먹고 살만큼은 벌고 있어요. 여러가지 일을 받고 있거든요. 대구에서 하던 일을 포함해서 의성군에서도 도와주시구요.”이들의 길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보통의 국문과와 미대 출신들이 선택하는 학원과 학교, 기업의 길을 가지 않았기 때문에 생계 유지를 위한 아르바이트는 필수였다. 그중에는 아파트 외벽에 그림을 그리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아파트 외벽에 그림을 그리는 일은 상당한 고액 아르바이트다. 그만큼 힘들기 때문이다. 한 달만 일을 해도 몇 개월 치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을 정도다. 이 일을 아내인 김은영 대표가 했다고 한다.일명 ‘도슨트 알바’도 이들의 일거리였다. 전시회에서 관람객들에게 작품과 작가에 대해 설명하는 일이다. 또 갤러리에 그림을 거는 ‘디스플레이 알바’도 있었다. 주위에 따르면, 황영 대표가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무려 9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군복무 시기를 빼더라도 9년 중 3년 정도는 아르바이트로 보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2년 전부터 정착한 의성은 이들에게 또 다른 기회의 땅이다.“독립출판을 하고 있어요. 독립영화도 만들고 있고요. 독립출판요? 생소하실텐데, 일반적이지 않은 책들을 만들어요. 기성서점에는 들어가지 못하죠. 성인들을 위한 동화도 있구요. 화장실 등에서 간편하게 볼 수 있는 작은 책들도 있구요. 물론 출판과 영화가 돈이 되지는 않아요. 하지만 이런 경험들을 바탕으로 저희가 하고 싶은 영화를 제작하는 거죠.” □고라니북스?… 이제 시작그런데 독립출판도 하고, 독립영화도 제작하는 이들이 기반도, 연고도 없는 경북 의성에 정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경상북도의 ‘도시청년시골파견제’가 도움이 됐다고는 하지만, 앞으로의 진로를 결정하는 데는 이유가 부족하지 않을까.“제일 큰 것은 생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경쟁률이 좀 쎄더라구요. 애초에 높은 경쟁을 피하려고 합격률이 높은 의성에 지원한 것도 있죠. 도시에서는 가만히 있어도 심장이 빨리 뛰었어요. 자극을 선택하지 않아도 자극이 자동으로 주어지는 세계였으니까요. 하지만 시골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자극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으니, 그렇지 않은 시간에는 온전히 자신에게 몰입할 수 있는 장점이 있죠. 그리고 처음에는 안경 디자인 회사에 다녔어요. 그런데 조금 답답한 마음이 있었죠. 안경 디자인이 파격적인 시도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단순 반복적인 일이 많거든요. 틀을 벗어날 수도 없고, 창의적인 일도 아니었어요. 여러가지 갈증도 있었구요.”그러면서 주섬주섬 전시되어 있는 책들을 가져와 보여준다. 모두 독립출판의 결과물이다. 대부분의 책들에는 글자보다 그림이 훨씬 많다. 이들이 미술학도라는 증거다. 물론 얼핏 이해하기 어려운 책들도 있는 것이 사실.“대구에 있을 때는 한 권 정도 출판한 것이 전부에요. 그런데 나머지는 의성에 와서 출판한 것들이죠. 지금은 전국에 있는 독립출산물 서점으로 나가고 있어요. 고라니북스의 이름을 달구요.”‘고라니북스’는 황영 대표와 김은영 대표의 사업체 이름이다. “도로 위에 있는 고라니를 본 순간, 갈 길 잃은 우리 시대의 청년들을 보는 것 같았다”는 것이 작명의 이유다. 아이러니하게도 경북 의성을 비롯한 북부지역 곳곳에서는 외곽 도로에서 가끔씩 고라니가 출몰한다. 그리고 이들이 고라니를 처음 본 것도 답사를 위해 의성을 찾았을 때다. 처음으로 경험해보는 광경을 목격한 순간, 오히려 의성이 예술활동을 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라는 기대감이 생겼다고.“이미 저희는 의성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도 찍었구요. 9월에도 한 편의 영화를 제작할 겁니다. 궁극적으로는 장편 영화를 제작하는 거에요. 저희의 이야기가 담긴 영화거든요. 지금 시놉시스 정도가 완성된 상태에요. 여기 전시를 해놓은 것들이 영화의 콘티죠.”□도시에서는 숨겨야 했던 우리의 이야기그런데 황영 대표와 김은영 대표를 만나면서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출판을 하고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프라가 중요하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투자도 있어야 하고 말이다. 시골인 의성에서 어떻게 가능할까.“사실 크게 부족하다고 느끼지는 않아요. 독립영화에 대한 지원도 있거든요. 부족한 것은 저희가 충당하구요. 제작 장비나 배우들은 물론 서울이나 도시로 가야하죠. 그런데 그것이 불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물론 갑갑한 면도 있죠. 예술하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쯤은 아내와 함께 서울 등의 도시를 찾아요. 공연도 보고 전시회도 감상하구요.” “일도 대구에서보다 더 많아요. 의성에서 막걸리나 수제 맥주를 만드는 분들이 저희에게 라벨을 의뢰하기도 해요. 비용을 많이 받지는 않지만, 제가 만든 캐릭터와 연동해서 라벨을 만들면 서로에게 좋지 않을까 해요. 또 우리 캐릭터를 활용해서 과일박스를 만들면 그냥 판매하는 것보다 소비자의 구매의욕을 더 높을 수 있고, 지역 브랜드를 한 차원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어요. 애초 의성으로 오는 것이 단지 작업장을 옮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하죠. 저희가 생각하는 영화 제작을 더 착실하게 준비할 수 있구요.” 그렇다면 황영 대표와 김은영 대표에게는 의성에 정착한 것이 일종의 꿈을 이루는 과정이었을까. 하지만 ‘꿈’이라는 이야기에 황영 대표는 고개를 갸웃거린다.“꿈이라기 보다는…. 지금 의성에서 하고 있는 것들은 조금씩 실현이 되고 있는 것 같아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영화 제작에도 한 걸음 나간 상태구요. 아마 대구에 있었다면, 여전히 꿈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아마도 과거에 황영 대표가 만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이라는 독립영화가 ‘서서히 알아주는’이라는 이상으로 변해가는 것이 아닐까. 현실 세계에서 살고 있는 뱀파이어 여자 노동자는 출중한 능력을 가지고도 자신의 꿈을 숨기고 살아가야만 한다. 한 때 황영 대표는 뱀파이어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도시에서 알바를 병행하며 자신만의 삶을 추구했던 개인 창작자의 삶. 하지만 의성에 정착한 이후 뱀파이어는 조금씩 자신의 능력을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저희의 이야기가 담긴 장편 영화를 꼭 완성하고 싶어요. 그것을 위해서 의성에 온 것이구요. 물론 그 한편으로 끝나지는 않을 거에요. 아직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야기는 많잖아요. 그리고 의성에 보탬이 되는 일도 하고 싶구요.” /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1-07-13

동네병원 문 닫으면 국민이 피해 본다

숙지는가 싶더니 또 다른 변이가 생겨나 지구촌을 긴장시키는 코로나19는 확산과 진정을 반복하면서 어느덧 일상이 됐다. 코로나19가 우리 사회를 밑바탕에서부터 흔들며 바꾸어놓았는데 의료계야말로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다. 코로나19가 대구를 강타했을 때 그 최전선에 대구의 의료인들이 있었고 D방역은 세계적으로 K방역의 모델이 되었다.환자 진료를 마치자마자 한달음에 의사회관으로 달려온 정홍수 대구시의사회장은 ‘코로나19가 언제쯤 끝이 날 것 같냐’는 질문에 “내년이면 집단 면역이 형성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금 수도권을 중심으로 코로나19 확산세가 무섭다. 종식을 위해 의사회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대구시의사회는 백신접종지원센터를 직접 운영하고 많은 의사들이 위탁의료기관에 참여하는 등 전방위적으로 국가적 현안인 코로나 19의 종식을 위해 뛰고 있다. 또 시민들이 안심하고 백신 접종에 참여하도록 유튜브를 제작 보급하고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시민들에게 객관적이고 검증된 의학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코로나19 백신 접종 양상이 처음보다 많이 달라졌다. 너도 나도 백신 접종을 하겠다고 하니. 그런데 처음에는 왜 그렇게 접종 예약률이 떨어졌을까. 지금 백신 공급 사정도 원활하지 못한 것 아닌가.△백신 접종 부작용에 대한 언론의 지나친 관심이 시민들에게 부정적 여론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올 3월만 해도 우리나라의 백신 접종률이 아프리카 후진국보다 낮은 세계 100위권 밖이었다.백신 공급에 문제가 생긴 것은 코로나19 팬데믹 초기엔 방역에 치중했고 또 코로나 치료제 개발에 공을 들였던 때문인 것 같다. 방향이 달랐던 것이다. 백신 아닌 치료제 개발로, 결과적으로 오판한 셈이 됐다.-정치권에서 수술실 CCTV 설치를 법제화하려고 하는데 의료계에서는 반대하는 것 같다. 당연히 CCTV를 설치해서 환자를 보호해야 하는 것 아닌가.△수술실의 CCTV 설치 문제는 정말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환자들에게 득보다 실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환자의 프라이버시나 인권 측면에서도. 한 예로 지금도 환자의 신상을 담은 영상물이 시중에 돌아다니고 있지 않나.의료계에도 문제가 크다. 감시 받으면서 적극적인 수술을 하려 않을 것이다. 수련의 교육에도 문제가 생긴다. 의료기술의 발전과 의료 수준 향상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국민의 80% 이상이 수술실 CCTV 설치에 찬성한다고 들었다. 대리수술 등 최근 의사들의 일탈도 문제가 심각하다.△공직자들이 근무시간에 무엇을 하는지, 국회의원 사무실에 CCTV를 설치하자는 설문조사를 해보면 찬성률이 훨씬 높게 나올 것이다. 대리수술 등 불법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수술실 입구에 CCTV를 설치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인기에 영합하는 정책이 아니라 무엇이 국민을 위한 것인지에 대한 공감의 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의사의 의견도 들어보고 시범사업 등 단계를 거쳐 누가 생각해도 타당한 방법으로 진행돼야 한다.일부 의사들의 일탈 문제는 사회적 논의 이전에 의사회 차원에서 자율적 정화를 강화하고 있다. 대리수술 뿐 아니라 사무장병원 운영이나 불법 환자 유인 등에 대해서도 의사회는 자율정화위원회를 통해 고발하고 면허 박탈까지도 조처하는 등 강력히 처리해 나갈 것이다.-최근 정부가 의원급의 비급여 진료비 공개를 확대하려고 하고 있다. 환자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 시대적 추세이고 또 의료 발전을 위해 바람직한 현상인 듯 보이는데 의사회의 입장은 어떤가.△현재 우리나라 건강보험 제도는 최선의 진료가 아닌 보편적 진료를 추구하고 있다. 환자는 누구나 최선의 진료를 받고 싶어 한다. 그런데 현실은 한정된 보험 재원으로 모든 환자에게 최선의 진료를 할 수 없다. 비급여 진료비용 공개가 전면 시행되어 진료비가 통제되면 앞으로는 환자가 최선의 진료를 받고 싶어도 불가능해 질 수 있다.과도한 규제는 결국 의료의 질을 낮추는 결과를 낳게 된다. 정부가 비급여 진료비 공개를 통해 진료비를 통제하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도 된다.-원격진료에 대한 의료계의 입장은 무엇인가. 특히 코로나19 사태 이후 비대면 진료는 국민들의 의료 편의를 위해 가야 할 길인 것 같은데?△진료의 기본 원칙은 대면진료다. 우리나라 의료 접근성과 시스템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런데 정부에서는 환자의 편의성과 경제성을 내세우며 비대면 진료를 추진하고 있다. 원격 진료는 이득보다 오진과 그에 따른 책임소재 불분명 등 단점도 고려해야 한다. 의료산업화 측면이 아니라 보건의료 정책 차원에서 추진해야 하고 대면진료의 보완 수단이어야 한다.-비대면 원격진료를 반대하는 것은 의사들의 이기주의와 기득권 지키기인 것 같다. 환자의 입장에서는 시간과 비용을 절약하면서 전문의의 진료를 받을 수 있으니 좋은 것 아닌가.△모든 것이 대형화되고 서울로 집중되는 현실에서 의료마저 서울 큰 병원으로 집중되면 의료전달체계가 왜곡되고 결국 국민들이 피해자가 된다. 서울대병원에서 전국 명의들을 고용해서 도서벽지에서 강원도 오지까지 환자들의 원격진료를 맡게 되면 동네의원들은 모두 문을 닫아야 한다. 병원 문턱이 높아 간단한 진료에도 몇 달씩 기다려야 한다는 다른 나라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았나. 우리에게도 현실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그래서 진짜 원격진료가 필요한 곳은 의료접근성이 떨어지는 도서 벽지와 오지 등으로 제한하고 1차적으로 지역의원에서부터 원격진료를 실시하자고 주장한다.-그러고 보니 의사회는 정부와 정치권의 정책에 반대만 하는 것으로 보인다.△모든 것을 법으로 규정하려는 정책 당국 탓이 더 크다. 부동산 정책이 그걸 대변해준다. 그때마다 많은 규제를 만들었지만 부동산 정책이 결국 실패하지 않았나. 의료정책은 그보다 더 심한 것 같다. 의사 문제가 생기니 의사면허관리법으로 면허를 규제하려 하고, 대리수술 문제가 생기니 CCTV 설치법을 만들려 하고, 성범죄특별법, 실손보험청구간소화법, 의료기사법, 안경사법, 간호사법, 물리치료사법 등 현실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보지 않고 법으로 해결하려 하니 국민이 피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한번 법이 제정되면 부작용으로 폐기하기까지 10년 20년이 걸리니 의사회가 법 제정 이전에 충분히 논의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메디시티 대구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의료산업 육성을 추진하지만 주위에서는 아직도 대구의 의료기술을 믿지 못하고 서울의 대형병원을 찾는 환자들이 많은 것 같다. 솔직히 대구 의료계의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대구의 의료 수준은 서울 뿐 아니라 세계 어디에도 뒤처지지 않는 최고 수준이라고 자부한다. 한국인에게 흔한 위암이나 대장암의 경우 서울과 대구의 대학병원 간 치료 성적이 동등하다는 연구 결과도 논문으로도 확인됐다. 또 지역 환자의 지역병원 입원 치료를 말하는 입원환자의 자체 충족률은 대구가 82%로 전국 최고 수준이다. 근거 없는 소문이나 추측만으로 지역 의료 수준을 낮춰 보는 인식은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중병이나 희귀병은 서울 대형병원으로 가야 하지만.이 부분에서 지역 상급병원의 능동적인 자세 전환도 필요하다. 특정 분야에서 실력과 명망 있는 교수와 특화된 병원의 적극적인 홍보로 지역에서도 스타 교수를 키워야 한다.-지역 의료기관의 발전을 위한 실질적인 노력도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대구시의사회가 지역의 5개 상급종합병원과 함께 ‘지역의료발전과 의료전달체계 개선’을 주제로 공청회도 갖고 함께 종합체육대회를 열어 친선을 다지는 등 지역의료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동네의원에서 환자를 서울 아닌 지역 종합병원 전문의를 소개하거나 직접 안내하고 종합병원은 가벼운 환자를 동네의원으로 보내주고 있다. 대구에서 서울로 빠져나가는 의료비가 연간 5천억원으로 추산되고 교통비 등을 합하면 연간 1조원이 증발한다. 서울에서 수술하고 지역에서 예후 진료를 받는 환자들로서는 사실 피해를 보는 것이다. 종합병원이 혈압약이나 정형외과 약을 6개월, 10개월씩 처방해주는 행위도 지양해야 한다.-국내에서도 지방과 서울 등 대도시간 의사 수급 불균형이 심각하다. 지난해에는 공공의료기관 설립문제로 한바탕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국민보건 차원에서 의과대학 정원을 늘리거나 지역공공의과대학 설립은 필요한 것 같은데….△도시와 지방 간 의사수급 불균형은 의사 공급의 문제가 아니라 의사가 지방에서 의원을 유지할 수 없는 현실 때문이다. 현재 의료 시스템으로는 지방에서 의원 경영상 유지가 안 되니 경쟁이 심하더라도 인구가 많은 도시에서 개원하려는 거다. 의사숫자를 아무리 늘려봐야 도시에서 미용 등 비보험 진료 의사만 늘어나지 지방에서 개원하는 의사는 늘지 않을 것이다.현재 매년 배출되는 의사만으로도 몇 년 후면 한국 인구증가율 대비 의사 공급이 넘쳐 날 것이라는 OECD 통계도 있다. 굳이 통계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대구의 경우 시민 누구든지 예약 없이 당일 어떤 전문의의 진료든지 받을 수 있다. 심지어 같은 질병으로 하루에 여러 의료기관을 방문하는 환자도 수두룩한 것이 현실이다.-결국 우리 의료수가가 현실적으로 너무 낮게 책정돼 있다는 것인가.△다 아는 이야기다. 지방에 흉부외과 산부인과 일반외과 등 필수 의료인력이 부족하다고 하는데 막상 이들 전문의들은 일자리가 없어서 도시에서 자기 전공과는 상관없는 미용관련 진료를 하고 있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근본적으로 지방병원에서는 내원하는 환자수가 적은 흉부외과 등을 개설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의사수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저수가 때문에 의사들이 일 할 자리가 부족한 것이다. 아주대병원의 이국종 교수 사례가 증명해 보였다./이경우 편집위원

2021-07-13

전후의 폐허에서 청보리처럼 푸르렀던 포항 여성의 기개

김경희 여사와의 첫 만남은 봄이 막 들어서려는 3월 초였다. 전화로 간단히 인사를 나눴을 때, 그의 나이를 잊어버릴 만큼 목소리에 생기가 넘쳤다. 장소를 섭외하다 시내 쪽이 괜찮겠다는 그의 말에 꿈틀로 내 청포도다방으로 약속을 잡았다. 1935년생 김경희를 만난다.최미경(이하 최) : 포항 토박이라고 들었습니다.김경희(이하 김) : 그렇다. 88년을 포항에서 살았고, 선조들을 되짚어 올라가면 600여 년을 포항에서 살았다. 뼛속까지 포항 사람인 셈이다.최 : 격동의 시기, 아픔이 많은 시절을 겪으셨는데.김 :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국민학교 4학년 때 해방을 맞았다. 학교에 뒤늦게 들어가 중학교 2학년 때 6·25전쟁이 터졌다. 어렸을 때는 잘 몰랐지만 돌이켜보면 나나 우리 부모 세대나 곡절 많은 세월을 견디고 살아왔다.최 : 6·25 이후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으신지요?김 : 중앙국민학교에 3785부대가 주둔해 있었고, 여성계에서는 변석화 씨가 활발하게 활동했다.최 : 변석화라면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분을 말하는지요?김 : 그렇다. 변석화 씨가 중앙국민학교에 주둔한 군인들을 위해 ‘왕자호동과 낙랑공주’ 위문 공연도 주선했고 주먹밥도 나눠주었다. 변석화 씨의 딸과 친구여서 우리는 함께 학교 운동장이나 강당 같은 데서 변석화 씨의 연설을 들었다. 사실 연설을 들었던 사람은 어른들이 아닌 우리 같은 아이들이었다. 강당 마룻바닥에 소복이 앉아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는 연설을 들으며 신나게 박수를 쳤다. 그 시절엔 여성이 앞에 나서는 걸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못마땅하게 여겼다. 변석화 씨는 지금 생각해보면 시대를 앞서간 참 당찬 분이었다. 변석화는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포항 최초의 전문의다. 그는 세브란스병원에서 만난 김두수와 결혼해 남편의 고향인 포항으로 왔다. 연설 솜씨가 뛰어났던 변석화는 높은 인기와 지지에도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때문에 낙선했다. 변석화는 산부인과 의사를 하면서 대한부인회 포항시 지부장(1946~1956)을 맡아 활발히 활동했다. 특히 김경희의 기억처럼 6·25전쟁 이후 포항에 주둔한 3785부대 상이군인과 헐벗은 군인들을 위해 가정주부들과 장사하는 아주머니들을 끌어와 연극과 합창 공연을 마련하기도 했다. 김경희는 변석화를 여성 권익을 앞장서서 개척한, 포항여성사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라고 강조했다.최 : 당시 여성들이 제대로 교육을 받기엔 사회 분위기가 녹록지 않았지요?김 : 딸은 학교에 잘 안 보냈다. 그래서 학교에 보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부모님께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사실 집안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주전부리를 할 거리가 없어서 껌을 씹고 나면 꼭 기둥에 붙여놓았다가 다시 씹곤 했다. 대부분 형편이 어려울 때라 겨울이 오면 교실 안에 난로를 지폈는데, 석탄은 비싸서 엄두도 못 냈다. 그래서 주말에 친구들과 산에 올라가 솔방울을 따서 석탄 대신 뗐다. 봄에는 쑥떡으로 점심 끼니를 대신한 적도 숱했다.최 : 포항에서 다닌 학교 이야기가 궁금하네요.김 : 누가 포항 토박이 아니라고 학교에 모두 ‘포항’이 들어간다. 내가 학교 다닐 때에는 포항여중과 포항여고가 분리되지 않았고, 포항여고도 4년제, 5년제, 6년제 이렇게 달랐다. 그래서 나는 원래 10회 졸업생인데 12회 졸업으로 되어있다.포항여자중학교와 포항여고는 1939년 3월 13일 조선총독부 고시 제213호로 포항고등여학교 설립 인가를 받았다. 1943년 제1회 졸업식에서 첫 졸업생으로 51명을 배출하였고, 해방 이후 1946년 포항여자중학교로 교명을 개칭했다. 그리고 1950년 6·25전쟁으로 휴교했고, 그해 8월 14일 폭격으로 학교 건물이 무너졌다. 1951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으로 학제가 변경돼 포항여자고등학교로 교명이 다시 개칭되면서 다음 해인 1952년 3월 31일 포항여중 1회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최 : 학창 시절엔 어떤 학생이었나요?김 :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합창부와 미술부를 병행할 정도로 활달했다.최 : 한흑구 선생의 부인인 방정분 여사가 교편을 잡고 있지 않았나요?김 : 방정분 선생님은 아주 당차고 활기찼다. 이화여전 출신으로 포항여중과 포항여고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학생들에게 얼마나 허물없이 대했는지 거의 매일 한흑구 선생님 댁에 놀러갔다. 한흑구 선생님이 나를 보고 “경희야, 경희야.” 불렀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수필 ‘보리’를 쓴 한흑구 선생님은 포항 문학계에서는 놓칠 수 없는 분이다. 방정분, 한흑구 두 선생님 덕분에 자연스럽게 예술을 접하게 되었고, 내게 예술적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최 : 이력을 살펴보니 포항여고 졸업 후에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셨던데.김 : 공부를 잘하기보다는 그림을 잘 그렸기에 서울대 미대에 갔지만 졸업은 못 했다. 형편이 넉넉지 않아 자취할 때 숯불을 피웠는데 그게 몸을 망가뜨렸다. 바싹바싹 말라가는 나를 보고 부모님이 학업을 중단하라고 하셨다. 안타깝게도 1년을 못 버티고 포항으로 돌아왔다.최 : 모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셨지요?김 : 1950년대 중반에는 미술이나 음악 교과를 가르칠 수 있는 교사가 흔치 않았다. 그래서 수학을 가르치는 분이 미술을 가르치기도 했고, 도덕 선생님이 음악 수업을 맡기도 했다. 당시 포항을 통틀어 피아노가 있는 학교는 포항여고 딱 한 군데였다. 학생들에게 예능 교과 수업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교장의 부탁으로 처음에는 특별 교사로 미술을 가르쳤다. 미술사를 가르쳤고 실기도 함께했다. 딱히 교과서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내가 전부 만들어 썼다. 세계 명화 같은 것을 오려서 칠판에 붙여놓고 따라 그리기도 하고 물감으로 칠도 했다. 그렇게 2년 동안 포항여고에 있으면서 미술대학에 보낸 학생도 있다. 그리고 포항여고 교장이 김천여고로 가면서 나를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도 2년간 학생들에게 미술 전임 교사로 수업을 이어갔다. 그러다 결혼하면서 교직을 그만두었다.최 : 남편의 고향이 포항이 아닌 걸로 들었습니다만.김 : 목포 출신이다. 나만 보고 포항에 왔고, 나로 인해 포항에 정착했다. 남편의 외조가 아니었다면 이후 포항에서 활동했던 많은 일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최 : 포항여고 동문회에서 중심축 역할을 하셨다지요.김 : 내가 나서기 전에 포항여고 동문회를 만들려고 선배들이 노력했다. 하지만 번번이 무산되고 말았다. 일할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중 포항여고 1회 졸업생 출신 손정식 선배가 나를 불렀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포항여고 출신들을 만나 동문회를 만들어야겠으니 네가 나를 좀 도와야겠다고 했다. 그때는 정말 겁이 없었다. 아니면 무모했던가. 손정식 선배와 7회 졸업생 배순자 선배, 나 이렇게 셋이 모여 무작정 서울로 갔다. 그리고 ‘서울신문’에 광고를 냈다. 포항여고 출신들은 오후 2시까지 비원(祕苑, 창덕궁 후원)으로 모이라는. 그런데 생각해봐라. 갑작스레 신문에 광고 한 줄 냈다고 동문들이 올 리 있겠는가. 셋이서 한참을 앉아 동문들을 기다리고 있자니 배가 너무 고팠다. 배순자 선배가 소주 한 병에 오징어 한 마리를 사 왔다. 셋이서 오징어를 뜯어 먹고 있는데 하나둘 선배들이 나타났다. 그렇게 서울에 있던 포항여고 동문들이 스무 명 가까이 비원에 모였다. 동문회를 조직한다니까 선후배들이 흥이 나서 저녁도 먹고 나이트클럽에도 갔다. 그때는 통행금지가 있어서 얼른 숙소로 가야 하는데 배순자 선배가 춤이 좋아서 무대에서 내려오질 않았다. 손정식 선배가 내게 배순자를 데리고 나오라고 해서 수십 명이 춤을 추고 있던 무대에 용감하게 올라갔다. 그리고 “배순자, 어디 있노! 배순자!”라고 큰 소리를 치며 무대를 헤집고 다녔다. 그렇게 서울 지부가 성공적으로 결성된 멋진 밤이었다. 최 : 서울 말고 다른 지역에도 동문회가 결성되었는지요?김 : 그 후에 부산과 대구도 갔다. 부산에서는 동래관광호텔에 모였는데, 사람이 모여 있으면 우선 재미있어야 하지 않나. 내가 무대에 올라갔다. 그래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면서 온갖 광대 짓을 했다. 대구 지부는 경산에서 했는데 온천에서 모였다. 그렇게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포항여고 출신들을 하나로 묶었다. 외따로 나와 있을 때는 힘을 받지 못하지만 하나로 합쳐지자 포항여고 동문회가 포항의 여성 활동에 큰 힘이 되었다.포항여고 개교 80주년을 기념해 2019년 발간된 ‘연원 80년사’를 보면, 1947년 포항여자중·고등학교 총동창회 창립총회가 개최되며, 초대 회장으로 1회 최복순이 선출된다. 1954년 8월 제2차 정기총회가 개최돼 1회 손정식이 2대 회장으로 선출되며, 1964년에 동창회 전국 지부가 설치된다. 이 내용은 1964년 동창회 전국 지부 과정에서 있었던 이야기다.김경희포항에 산 지 올해로 여든여덟 해가 지났다. 그사이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와 4·19가 있었지만 유년의 기억은 늘 가슴 뛰게 빛났다. 포항여중과 포항여고 재학 당시 합창부와 미술부를 병행할 정도로 예술을 사랑하는 소녀였고, 미술부원들 간의 약속을 지키고자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할 만큼 신뢰를 소중하게 여겼다. 모교인 포항여고에서 교직 생활을 했으며, 결혼 후 4녀를 둔 가운데 여성 권익과 여성 교육을 위해 쉼 없이 뛰었다. 1973년 포항새마을 부녀회장, 1977년 새마음봉사단 단장을 맡았고, 같은 해 죽도동 여성회관추진위원회에 총무로 있으며 여성회관이 건립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했다. 1981년부터 죽도유아원과 새마을 협동유아원 원장으로 5년간 근무했고, 1984년 포항불교여성회를 창립해 지금까지 37년간 회장직을 맡고 있다. 1987년에는 포항의 여성단체를 총괄하는 여성단체협의회를 조직해 회장직을, 1989년에는 전문진 여성클럽(BPW)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1990년에 포항여성회관 초대 관장(5급)으로 추대되었지만 봉사 정신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과는 맞지 않음을 깨닫고 자리에서 내려왔다. 1995년 통합 여성단체협의회 회장직을, 같은 해 경상북도 5대 도의원에 당선되었으며, 포항시 여성상을 수상했다. 1985년 대통령 훈장 근면장을 받았고, 2003년에 한국불교여성개발원이 선정한 108인에 추대되었으며, 2001년에는 포항시민상과 대통령 공로장을 받았다.대담·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 /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7-13

기합 준 박태준, 재경향우회장 맡아준 김창성

포항종합제철 건설 과정에서 담당 공무원으로 있었으니 박태준과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영포목우회와 재경포항향우회 설립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 인터뷰 마지막까지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안 : 포항 이야기를 하는데 박태준 회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이 : 내가 포항제철 관련 일을 할 때 박태준 회장한테 행실이 안 좋다는 얘기를 여러 번 듣고 기합도 많이 받았지. 그분한테 대들었던 건 도로 문제 때문이었어. 포항제철 물동량이 포항 시내로 들어와서 경주 시내를 거쳐 고속도로로 가는 건 곤란하다고 말했지.안 : 일리 있는 말인 것 같습니다. 지금이야 여러 산업도로가 생겨 사정이 나아지긴 했지만 처음부터 도로에 좀 더 신경을 썼다면 좋았을 것 같은데.이 : 내 생각대로 할 수 없었던 건 아마 공사비 때문이었을 거야. 당시에 도로가 포항을 관통하지 않고 연일을 거쳐 안강으로 붙이면 큰 트럭들이 포항 시내로는 안 들어가도 됐지. 그런데 포항 시내로 큰 트럭들이 오가면 매연 나오고 시끄러워서 문제가 된다고 내가 주장했거든. 그 때문에 네가 뭘 아느냐고 기합도 많이 받았지만, 나한테 그만큼 달려든 사람은 너밖에 없다고 나중에 그러더군. 내가 수많은 사람을 겪어봤지만 박태준 회장 같은 사람이 없어. 세월이 한참 흘러 박태준 회장이 일본에서 돌아와 포항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때 일 좀 도와라고 하더군. 그래서 3년 정도 도와드렸지. 인연이란 그런 거야.안 : 1970년에 포항을 떠나 건설부에서 공직 생활을 마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포항을 오랫동안 떠나 있었지만 포항에 관심과 애정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이 : 포항에서 민원서류가 오면 나한테 많이 왔는데 온갖 민원이 다 밀려오는 거야. 박명재 전 국회의원이 총무처 인사과장을 맡고 있을 때 나도 과장이었는데 나이는 내가 많지. 박 의원에게 우리 지역 출신 서기관급 이상 명단 좀 달라고 하니 왜 그러냐고 물어. 그래서 민원서류가 이렇게 많다고 했지. 지역 출신이 여남은 명은 되더라고. 우리 집에 모여서 만든 게 영포목우회야. 조선 시대에 공무원을 목민관(牧民官)이라 했잖아. 영일군 포항시 목민관이라 해서 영포목우회라고 했는데, 박 의원이 지은 거야. 지역에서 민원서류가 오면 반포 근처의 우리 집에 모여 의논하기도 했어. 순수한 취지였고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지. 그런데 이걸 정치적으로 몰아세우고 두들겨 팬 적이 있지. 말도 안 되는 일이야.안 : 영포목우회 외에도 재경포항향우회 설립에도 앞장섰다고 들었습니다.이 : 향우회 회장은 목우회와 달리 거물을 앉히고 싶었지. 이름 있는 분이 향우회 회장을 맡아야 향우회에 힘이 실리고 많은 사람을 모을 수 있으니까. 물론 재력이 좀 있기도 해야 되겠지. 몇 분을 접촉해보니 아무도 안 맡으려고 하는 거야. 사실 그 자리가 부담이 되긴 하지. 고민 끝에 김창성씨에게 부탁하니 흔쾌히 수락하는 거야. 그분이 누구냐면 김용주 선생의 맏아들이야. 전남방직 회장을 했고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도 했지. 포항 출신 중에서 진짜 거물이야. 그렇게 김창성씨가 초대 회장을 맡고 최성해씨가 초대 총무를 맡아서 향우회 발족을 했지. 지금도 매년 재경포항인 신년교례회를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하고 있어.안 : 건설부에 있는 동안 자료를 수집해 자비로 ‘포항 땅 이야기’를 출간했다. 방대한 자료를 정리한 이유는 무엇입니까.이 : 건설부에서 다양한 근무를 했는데 가장 문제되는 곳이 국토계획국의 토지이용계획과장 자리야. 여기만 가면 모가지가 날아가. 국토를 공업지구, 농업지구 이렇게 지정하는데 돈 장난이 너무 심했지. 아무튼 내가 국회에서 근무한 후 이 자리로 갔는데 국토의 8%가 고시(告示)가 안 됐어. 미고시 지역을 검토해보니 그 지역마다 특성 있는 곳이 있는데, 그걸 중요하게 여겼지. 고시할 때 절이나 관광지가 있으면 손을 못 대도록 분류해. 이런 일을 하면서 땅의 의미와 역사적 배경을 모르는 채 함부로 손대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지. 내가 그 작업을 할 때 후임이 국토지리원으로 진급돼 갔어. 국토지리원에서 주요 명승지 등을 조사하는 일을 했지. 당시에 퇴직하면 자서전 쓰는 게 유행이었는데, 그 직원이 나한테 땅 지명 자서전을 만들라고 아이디어를 줬지.안 : 그럼 포항 자료는 국토지리원의 도움을 받은 것인가요.이 : 국토지리원에 포항을 중심으로 자료를 좀 뽑아달라고 해서 받은 게 180개쯤 돼. 그걸 바탕으로 1천 개 정도 정리했는데 너무 힘이 들더군. 2년쯤 하다가 포기했어. 그러다가 책상에 쌓인 자료를 보면 아쉬워지고. 하다가 버리고 또 하다가 버리고. 그 작업이 습관이 되어버렸지. 안 : 젊은 세대에게 해주고 싶은 인생의 교훈이 있다면.이 : 삶에 변화가 없으면 인생은 녹슬어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녹은 쇠에서 생기는데, 녹이 오래되면 쇠 자체를 못 쓰게 만들지. 이건 법정 스님이 한 말인데, 항상 삶에 변화를 주려고 노력하고 성실한 자세를 가져야 해. 책을 가까이하고 늘 배우는 자세로 임하면 언젠가는 그때 배운 것들이 인생에 큰 도움을 줄 때가 오는 법이야.안 :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주십시오.이 : 앞에서 말했지만 1960년대에 나병 고치는 약을 만드는 대명제약에 1년 정도 다녔어. 대명환이라는 약을 지어서 원주를 중심으로 나환자(한센병)들에게 공급하는 구라(救癩) 사업을 하면서 나환자들을 많이 만났지. 나도 이 일을 하면서 사람이 많이 순해졌지. 그 경험 덕분에 건설부에 가서 큰 득을 본 적이 있어. 한강 북쪽 비행장 건너편 개발을 할 때 한쪽에 나환자촌이 있었어. 개발을 하려고 들어가니 나환자들이 농사도 짓고 공장도 지어서 세를 받으며 살고 있는 거야. 그곳을 철거하려니 나환자들이 가만있겠어? 들고 일어나 진행이 안 되는 거야. 건설부에서는 내가 책임자였고, 환경청, 보사부도 함께 갔지. 나환자를 만나 설득해야 하는데, 누가 나환자를 만나려고 하겠어.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가서 차 한 잔 달라고 하니 나환자들이 깜짝 놀라는 거야. 나환자는 크게 네 부류로 나눠. 물집 같은 것이 툭툭 터지는 결절나, 겉보기에 멀쩡한데 아파 죽는 신경나, 이 두 가지가 혼합된 혼합나, 반점이 나는 반점나. 나는 딱 보면 알지. 내가 그 자리에서 사람들을 불러 모아놓고 나환자 분류를 했어. 그러니 나환자들이 꼼짝 못 하고 일도 잘 풀렸지. 젊었을 때 힘든 일도 성심성의껏 하면 언젠가는 도움이 될 때가 있는 법이야.안 :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이 : 포항은 특별한 곳이지. 까마귀를 보면 알아. 까마귀처럼 좋은 새가 없어. 까마귀는 효자 새야. 늙은 까마귀에게 먹이를 주는 게 젊은 까마귀지. 일본은 까마귀가 길조인데 우리는 싫어해. 몽골 쪽에 기마민족이 살 때는 까마귀가 많았어. 그런데 과거에 몽골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바람에 까마귀를 질색하게 된 거야. 하지만 포항은 까마귀를 좋아해. 연오랑세오녀(延烏郞細烏女) 설화, 오천(烏川), 오도(烏島) 같은 지명에 까마귀 오(烏) 자가 들어가지. 전국에 까마귀 지명을 가진 곳이 몇 없어. 관선 시장 시절에 중앙에서 시화(市花)를 정하라고 할 때 그냥 장미가 되고 말았는데, 장미와 포항이 무슨 관계가 있나. 꽃에도 포항의 뜻을 담아야지. 해가 뜨고 지는 곳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이 포항이잖아. 포항은 해를 아주 중요하게 여기니 해바라기를 시화로 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인터뷰 내내 그는 기억을 더듬느라 애썼는데, 숫자와 연도에 관한 기억은 대부분 정확했다. 그만큼 과거의 일이 삶의 지문처럼 각인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터뷰 중간에 그의 휴대전화는 자주 울렸다. 그에게 조언을 구하는 사람이거나 그를 아끼는 지인들 같았다. 그렇게 그는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가 들려준 법정 스님의 말처럼 녹슬기를 거부하는 대못과 같은 삶을 사는 것 같았다. 2년 전 그는 미스터 경북 선발대회에서 최고령자로 참가했다. 사진 속의 단단한 그를 보면서 영화 ‘007 스카이 폴’에도 나온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 ‘율리시즈’가 떠올랐다. 짧았지만 인상 깊었고, 그래서 이 지면에 다 담지 못한 그의 이야기를 못내 아쉬워하며 대담을 마무리한다.비록 우리의 힘이 옛날처럼 하늘과 땅을 뒤흔들 수는 없더라도, 그래도 우리는 우리다. 모두 하나같이 영웅의 기개를 가진 우리는, 시간과 운명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약해졌다 하여도, 강력한 의지로 싸우고, 추구하고, 발견하고, 결코 굴복하지 않겠도다. 이석수 선생. 이석수1933년 경북 영일군 연일읍에서 태어나 국민학생 시절에 해방을 맞았고, 6·25전쟁에 참전해 동족상잔의 참혹함을 직접 겪었다. 포항수산대학을 졸업한 후 타지에서 목재상과 제약회사에서 잠시 근무했다. 1963년 2월 오천면사무소에서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건설부 소속으로 행정사무관, 국회 건설위원회에서 행정서기관, 건설부 과장, 국장 등을 거쳐 원주지방국토관리청장으로 공직 생활을 마쳤다. 퇴직 후 대한건설협회 상임감사로 일하다가 1995년 경상북도 정무부지사를 맡았다. 공무원 시절이나 퇴직 후에 고향을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가장 큰 일은 26년간 자료를 모아 자비로 ‘이석수의 포항 땅 이야기’를 출간한 것이다. 이 책에는 약 3천 꼭지의 포항 땅에 얽힌 이야기와 최신판 사진이 수록돼 있다. 대통령 근정포장(건설사업유공), 황조근정훈장 등 여러 기관에서 수여하는 상을 받았다.대담·정리 : 안준우(소설가) / 인물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7-11

천삼백 년 전 저 달빛은 빛바랬을까, 눈부셨을까

신라 천년의 비밀을 간직한 ‘월지’는 문학의 좋은 소재가 될 수도 있다. 포항에서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강(49)씨가 월지를 공간적 배경으로 하는 짤막한 소설을 보내왔다. 아래 게재한다. 2017년 심훈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온 김강 씨는 소설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고, 작가인 동시에 내과의사이기도 하다. 편집자 주칠흑 같은 혹은 그저 어두운 밤이었다고. 아니다. 너는 밤에 대해 조금 더 말을 하려 한다. 그날 밤에 대해 설명하려면 조금 길어지겠지만, 혹자는 이 또한 사족이라 지우라 하겠지만 그럼에도 네가 이야기하려는 이유는 밤이 다 같은 밤이 아니기 때문이다.그러니까 그 밤은 특별했다는 것, 잣나무 꽃가루와 소나무 꽃가루가 무리지어 몰려다니는 그와 같은 밤이 돌아올 때마다 여전히 방 안을 서성인다는 것을 너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숨을 내쉴 때마다 가슴팍 어딘가에서 휘파람 소리가 나는 그런 밤을 겪어보지 않았다면 밤에 대해 입을 대지 말라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와 같은 밤이 돌아올 때마다 월지로 향하는 너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대략 표현하자면 그날의 밤은 이랬다. 구름에 가려진 보름달이 뜬 밤. 너와 그는 월지에 있었다.-아홉 시 이십 분. 열 시가 되면 문을 닫습니다. 그때까지는 나오셔야 합니다.그와 너는 고개를 끄덕이며 월지의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둘은 손을 잡기도 했고 서로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걷기도 했다. 가끔 두 발이 엉켜 발걸음을 멈췄다. 어깨에 올린 팔이 저려와 슬며시 내리기도 했지만 누가 봐도 그럭저럭한 연인이었다. 어쩌면 아주 뜨거운 연인일 수도 있었다. 그의 엉덩이를 스친 너의 손바닥과 너의 볼에 붙어버린 그의 볼을 모두 우연이라 할 수는 없으니.-구름이 달을 벗어났어.그가 맞잡은 손을 풀어 달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는 그의 손을 따라 달을 보았다.-그러네, 저 달 근처 목성이 있을 텐데. 달이 밝아서 그런가? 보이질 않네.-목성은 왜?-오늘 목성의 달, 유로파에서 물을 발견했다네.너는 우연히 보았던 기사를 떠올렸다. 갈릴레오 탐사선이 목성의 위성 유로파에서 물을 발견했다는 기사. 너는 지구에서 목성까지의 거리와 오늘 밤 하늘 어디서 목성을 볼 수 있을지, 그리고 지구에 있는 물의 양을 검색해 읽어보았었다.-물을 찾아서 거기까지 갔데. 지구에 무려 십삼억 삼천만 세제곱 킬로미터의 물이 있는데 말이야.-그런 것 까지 알고 있었어? 그냥 막 던진 숫자지?-아니. 사실이야. 오늘 오전에 잠깐 찾아봤었어. 지구에 그렇게 많은 물이 있는데 구억 육천오백육십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까지 물을 찾으러 가다니, 재밌네, 하고 생각했어.-오빠도 주위의 많은 여자들을 두고 나를 만나러 왔잖아. 사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까지.너와 그는 1호 누각이라 쓰인 표지석을 지나쳐 누각 안으로 들어갔다. 누각 곳곳에 조명등이 있었지만 짙고 검은 월지의 수면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서너 개씩 무리지어 올라있는 연잎들마저 검은, 흑백사진 같은 월지를 너희 둘은 가만히 보았다. 구름이 달을 벗어날 때마다 월지에 달빛이 비쳤다.-두 가지 색만 남은 스테인드글라스 같아. 오래되어 색이 바랜. 그런데 그런 게 있나?그가 난간을 잡고 있는 너의 손등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그러게. 그러면 천삼백 년 전에는 칼라풀 했을까? 월지에 비친 달빛이.-그랬을 수도 있겠다. 배를 띄우고 잔치를 했다지. 여러 색의 빛들이 연못위에 비춰졌을 수도 있겠어. 그런데 오빠, 여기 유물들, 전시되어 있는 것들 말이야. 저기 적혀 있는 것들 모두 사실일까? 이곳 월지 말고도 다른 곳의 땅에서 나온 유물들의 사연들, 모두 진실일까?-당연 그렇겠지. 그런 것 확인하려고 전문가가 있는 것 아니겠어. 고증을 잘 해야지. 잘해서 입증된 것만 이야기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 그건 그렇고,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빨리 움직이자. 저기, 저 안 쪽이 좋겠어. 가자.너는 그를 재촉해 월지를 돌아 누각 반대쪽으로 향했다. 너는 시계를 보며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확인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금방이면 돼, 너는 그에게 말했고 뭔데 그래, 그는 물었다. 너는 그의 손을 잡고 묵묵히 그리고 빠르게 걸었다.누각의 반대편에 다다라 너는 주위를 살폈고 그는 너를 살폈다. 관리인들이 사용하는 작은 보트가 바위에 둘러진 밧줄에 묶여 있었다. 연못 가장자리 바깥으로 움푹 들어간 곳, 숨어 있기 좋은 곳이었다. 관리인들이 반대쪽 누각으로 플래시를 흔들며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몇몇 커플들, 사람들이 정문으로 돌아가고 있었다.-뭐 하려는 거야? 이렇게 으슥한 곳에 끌고 와서는. 오빠, 이상해.너는 대답 없이 등에 멘 작은 가방을 내려 지퍼를 열고 신문지로 감싼 무언가를 꺼냈다. 마침 구름이 달을 벗어났고 네가 꺼낸 무언가는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그게 뭐야? 뭔데?그가 너의 곁으로 와 붙으며 물었다. 너는 그의 손바닥에 그것을 올려놓았다.-이게….-스테인리스에 각인을 한 거야. 너와 나, 우리의 만남, 사랑, 그런 이야기. 월지에 던져 넣으려고. 나중에, 미래에 누군가 보게.언젠가, 아주 나중에, 몇 백 년이 지난 후에 월지의 바닥을 준설하거나 다시 발굴하는 날이 오지 않겠냐고, 그때 이 스테인리스 조각이 발견되면 우리 사랑이야기를 알게 되지 않겠냐고, 한 조각 남겨진 이야기가 그 시대를 대표하는 경우가 많으니 우리 사랑이 우리 시대의 사랑이 되지 않겠냐고, 그렇게 우리는 영원히 사랑할 수 있는 거라고, 너와의 사랑은 누구에게 보여도 부끄럽지 않은 것이라고. 너는 흑과 백의 사진 속 유일한 붉은 얼굴로 그에게 말했고 그의 얼굴도 붉게 달아올랐다. 둘은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분명하게 하나, 둘, 셋을 헤아렸고 스테인리스 조각을 월지로 던져 넣었다.퐁! 연 옆에 앉아 있던 개구리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너와 그는 정문으로 돌아왔다. 빠르게 걸었던 탓에 둘 다 숨이 찼다. 숨을 몰아쉬는 그와 너를 보며 관리인이 물었다.-도대체 어디 있었던 겁니까? 분명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고 말했는데 기어코 들어가더니 때맞춰 나오지도 않고 말이지.-죄송합니다.너와 그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손을 꼭 잡은 채로.주차장으로 걸어가는 그와 너 뒤로 관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어디서 뭘 하고 있었기에 저렇게 숨이 차는 거야. 요즘 젊은 것들이란. 쎄고 쎈게 모텔이고 방인데 말이야. 소설가 김강 여섯 번의 여름과 다섯 번의 겨울이 지났다. 언젠가 꽃은 지는 법. 목성 주위를 돌던 갈릴레오 탐사선이 목성 궤도를 이탈하며 임무를 마친 그 해, 너와 그의 사랑도 끝났다. 여섯 번의 여름과 다섯 번의 겨울이 각인된 스테인리스 조각만이 월지의 어느 바닥에 남았다.그것이 문제다. 밤의 어둠 속에서 더욱 반짝일 영원한 사랑의 맹서. 작은 상처를 주고받아 아픈 날도 있었지만 그것 또한 사랑이었다고, 바람 부는 세상 서로 기대며 살았고 꽃 같은 세상 온전히 서로의 것이었다고, 마지막 날 손을 잡고 입을 맞추며 눈을 감았다고 깊이 새겨놓은 각인. 월지의 작은 보트 근처 어딘가의 스테인리스 조각.배롱나무 헐벗은 가지들을 흔들고 동백의 꽃을 툭툭 떨어뜨리며 오는 밤. 지키지 못한 것들에 대한 후회, 거짓과 진실이 뒤바뀐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한 밤. 그와 같은 밤이 오고 있다. 너는 검은 잠수복을 챙겨 나선다. 월지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고개를 집어넣고 손을 휘저어 무언가를 찾는다.너는 문득 묻는다. 우리가 건져내야 할 것이 지난 사랑의 각인뿐인가?

2021-07-07

변화와 혁신으로 다양한 분야 미래도약 기틀 착착 마련

성주군엔 ‘군민중심 행복성주’를 군정 비전으로 민선7기의 닻을 힘차게 올렸던 ‘이병환 성주군수 출범 3년’을 맞아 변화와 혁신의 바람이 불고 있다.이 군수는 지난 3년간 쉼없이 달려왔고 많은 고민과 노력의 결과,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많은 일들을 이루어냈다.군민 모두가 함께 염원하고 총력을 기울인 남부내륙고속철도 성주역 유치와 열정과 땀으로 각종 공모사업 및 국도비 최다 확보로 본예산 5천억 시대 달성, 참외 조수입 2년 연속 5천억원 돌파, 성주군 도시재생 뉴딜사업 1,2단계 박차, 위드코로나 시대 성주문화관광 신르네상스 개막, 재난으로부터 안전한 성주 등 다양한 분야 곳곳에서 성과를 보이며 미래도약의 기틀을 마련하고 있다.이 군수는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민선7기 10대추진 전략을 마련하고 ‘군민중심 행복성주를 완성시키겠다’는 각오를 취임 3주년에 맞춰 발표했다.민선7기 10대 추진전략은 △사통팔달의 새 역사 창조, 교통도시 성주 △농업 조수입 1조원 시대를 열어가는 부자 성주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명품 관광도시 성주 △구도심의 재탄생, 활력충전 성주 △웰니스 시대, 행복 100세 성주 △안전과 친환경을 생각하는 안전그린 성주 △경제가 살고 기업하기 좋은 희망경제 팡팡 성주 △즐거움과 풍요로움이 넘치는 거주희망 1번지 성주 △경북의 행정을 선도하는 제1리더 성주 △나은 내일을 준비하는 미래도시 성주이다. ◇사통팔달의 새 역사 창조, 교통도시 성주성주의 오랜 숙원이며 군민과 함께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 온 남부내륙고속철도 성주역 유치가 사실상 확정되면서 성주발전의 또다른 성장동력이 되고 있다.중부내륙·동서3축 고속도로와 국도30호선 6차로 확장 등 4개의 간선도로의 신설 확장이 보태지면 ‘1철도 2고속도로 4간선도로’ 가 동서남북을 관통하는 사통팔달 광역교통의 요지로 탈바꿈할 전망이다.이에 더해 낙동강 연안도로 군도 7호선 지방도 승격 및 제2성주대교(성주-칠곡간 광역도로) 건설로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교통인프라 확충과 통합신공항과 접근성 강화 등으로 ‘혁신도시 시즌2’ 공공기관 유치에 유리한 고지 선점 뿐 아니라, 물류·유통의 거점도시로도 성장할 수 있어 성주의 새역사 창조가 가능해진다.◇농업 조수입 1조원 시대를 열어가는 부자 성주성주참외 조수입은 올해에도 5천억원을 상회할 것으로 예상된다.내년엔 6천억원 돌파의 기대감도 커지면서 참외의 본고장과 명품참외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성주참외 스마트팜 혁신밸리 조성, 라이브커머스 등 전략적 마케팅과 수출판로 확대 및 지원, 신품종 신기술 개발·보급으로 참외의 무한변신을 꾀하는 동시에, 성주참외 농촌융복합 산업지구 조성 및 각종 가공식품 연구개발로 농업 분야 1조원 시대 전망도 밝게 하고 있다.변화하는 농업트렌드 및 시장에 대응해 참외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미래농업을 선도, 모든 농업인이 행복한 부자 성주를 만드는 게 목표이다.◇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명품 관광도시 성주천혜의 자연환경 가야산과 성주댐, 과거 영남의 큰고을이라는 문화자산을 보유한 성주는 이제 경북의 숨은 관광지가 아닌 전국민이 찾아오고 싶은 명품 문화관광도시로 부상중이다.심산문화테마파크 조성과 생활사 문화탐방로 개설, 법정 문화도시 선정, 성주호 일대 관광단지 지정, 가야산 일대 관광활성화, 성밖숲-성주역사테마파크-성산동고분군전시관을 잇는 도심지 네트워크 관광 활성화 등 굵직한 프로젝트들을 성공적으로 추진해 즐겁고 안전한 체류형·언택트 관광의 새 지평을 열어가고 명소로 거듭날 수 있도록 총력을 기울인다.또한 생명문화축제, 성주참외페스티벌, 성밖숲 ‘와숲’, 썸머아트바캉스를 일상회복 프로그램으로 추진해 뉴노멀시대 문화관광 컨텐츠를 선도하고 성주를 생명문화의 성지로 자리매김토록 할 계획이다.◇구도심 재탄생, 활력충전 성주총 사업비 1천억 이상이 투입되는 도시재생 뉴딜사업 1,2단계와 별빛이 흐르는 이천친환경조성사업으로 지역에 생기를 불어넣고 성주읍 도심이 재생과 힐링의 공간으로 재탄생될 예정이다.전국 최초 군직영 전기마을버스 운행, 임시 버스정류장 신설과 건강행복쉼터 마련, 버스정보시스템(BIS) 및 지능형교통체계(ITS) 도입, 광역환승제 추진, 공영주차장 확대, 예산(KT)사거리 회전교차로 설치 등 교통체계 개선으로 정주여건을 도심 수준으로 차츰 향상시켜 나갈 계획이다. ◇웰니스 시대, 행복 100세 성주본격적인 웰니스라이프 시대가 펼쳐짐에 따라, 노인·보훈·장애인·자활·청소년 계층을 망라한 종합복지타운과 선남 복합문화체육센터, 스마트타운(경로당)을 조성하고, 생활체육 및 전문체육시설, 전지훈련 등이 가능한 종합스포츠센터를 건립하는 큰 그림을 그려 남녀노소 각계각층에 빈틈없는 복지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코로나19 선제검사와 철저한 방역관리로 방역의 원칙과 기본을 흔들림없이 지키고 예방접종의 차질없는 완벽한 마무리로 군민이 건강하고 삶이 풍요로운 행복한 도시를 만들어 가고자 한다.◇안전과 친환경을 생각하는 안전그린 성주선남·용암 재해위험개선지구 정비사업, 초전 대장 풍수해 생활권 종합정비사업, 가천 마수지구 급경사지 붕괴위험지역 정비사업 등 사람중심 재해예방사업으로 군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있다.또 통합바이오가스에너지화시설 설치사업, 자원순환센터(소각시설) 증설 등 성주읍 삼산리 일대 친환경에너지 생산시설 확충으로 지속가능한 친환경 성주를 만들어 간다.◇경제가 살고 기업하기 좋은 희망경제 팡팡 성주구미, 김천, 칠곡과 연계한 성주산단 대개조 추진 및 산업단지 혁신지원센터 구축, 제3일반산업단지, 스마트팜 기자재 농공(특화)단지 조성과 더불어 일자리지원센터 기능강화로 인력수급문제를 해결하고 혁신기술개발 지원, 수출기업 지원, 마케팅, 금융상담 등 성주군과 기업이 상생하는 환경을 만들어가고 있다.성주사랑상품권 확대발행과 소상공인 특례보증 및 별빛골목길 조성사업 등으로 특색있는 전통시장을 만들고 지역 소상공인 경영 안정화와 골목상권 살리기에 혼신의 힘을 다한다.◇즐거움과 풍요로움이 넘치는 거주희망 1번지 성주놀벤져스 1~3호, 성주참외체험형테마파크 ‘참외랑 아이랑관’, 성산동고분군전시관 ‘어린이체험실’, 아이나라 키즈교육센터 등 어린이놀이시설 확충 및 운영 활성화, 청소년 과학탐구·놀이시설 건립으로 부모와 아이가 행복하고 아이 키우기 좋은 성주를 위해 다양한 시설을 갖춰 가고 있다.더불어 성주군 Start 농-UP 지원센터를 건립하고 폐교부지 활용 개발로 청년과 귀농귀촌인 등 다양한 인구 유입으로 젊어진 농촌과 아이 목소리 가득한 거주희망 1번지로 조성할 예정이다. ◇경북의 행정을 선도하는 제1리더 성주2018년 4천10억원이었던 예산을 2021년 5천220억원까지 확보하면서 본예산 6천억 시대 도약을 예고하고 있다.이는 작년에 비해 2배 이상 늘어난 국도비 확보와 3배이상 늘어난 공모사업 선정 예산으로 이뤄낸 성과로써 지역발전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남은 기간에도 국도비 사업 및 각종 공모사업 발굴 확대로 성과와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모든 공직자가 혼연일체돼 총력을 기울인다.아울러 주민과의 다양한 소통창구를 마련해 공감행정 및 격의없는 소통행정을 실천하고 적극행정으로 규제의 벽을 넘고, 공직사회에 부적정한 관행과 낡은 행정풍토를 타파, 젊고 패기넘치는 공직분위기를 집중 조성한다.◇나은 내일을 준비하는 미래도시 성주성산포대 이전과 후적지 개발로 성산되찾기를 본격 추진하고, 세종대왕자태실 유네스코 등재 추진, 가야산 불교 역사문화자원 관광거점화 등으로 성주의 역사·문화·정신을 되찾아 자부심과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한다.성주역 연계 종합발전계획 수립과 광역교통망을 구축하고 합천군 및 해인사와 주변지역 관광·상업·주거 지역개발 등을 연계, 협력 추진한다.사드배치로 분열된 민심을 통합하고 지역발전을 견인하기 위한 지역현안 건의사업도 조속 추진할 예정이다.남은 1년이 지난 3년보다 중요한 때이며 위기극복을 넘어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내는 것이 민선7기의 남은 과제다.이병환 군수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지금까지 추진한 분야별 사업을 잘 매듭짓고 남은 1년이 성주군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다는 자세로 임하겠다”고 밝혔다.또 “행정통합과 통합신공항, 자치분권, 서대구역개통, 대구외곽순환고속도로 등 성주군을 둘러싼 급격한 대내외 환경변화와 코로나19로 가속화되는 새로운 세상에서 성주군은 앞으로 다가올 어떤 고비도 거침없이 대응하고 군민 한분 한분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도록 우직한 걸음으로 흔들림없이 나가겠다. 다가올 미래의 모습을 기대해 달라”고 말했다./전병휴기자 kr5853@kbmaeil.com

2021-07-07

포항 해녀의 문화적 가치에 대한 연구 필요

2006년부터 제주도는 해녀를 ‘사라질 위기에 처한 공동체’로 규정하고 지속 가능한 해녀 보존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해녀가 사라지면 해녀 문화가 사라지므로 해녀 문화 가치 정립을 위한 기록 사업을 추진하고 조례 제정을 통해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지원 사업을 마련하였다.2009년에는 ‘제주특별자치도 해녀 문화 보존 및 전승에 관한 조례’를, 2012년에는 ‘제주특별자치도 해녀 문화콘텐츠사업 진흥 조례’를 제정하였다. 이러한 노력이 밑거름이 되어 제주 해녀는 2015년 제1호 국가중요어업유산으로 지정되었고, 2016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네스코는 제주 해녀 문화가 맨몸으로 물질해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친화적인 물질 방법, 바다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경험, 해녀 공동체 문화가 미래사회로의 지속가능한 발전 모델이라는 인류의 문화적 유산으로 평가하였다. 해녀 문화는 인류 모두의 상징과 가치를 반영하는 해양 문화로 제주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어업 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경북 해녀의 문화적 가치 정립되어야해녀는 자연과 공존하는 삶을 보여준다. 공기 공급 장치 없이 숨을 참고 바다 깊이 잠수해 해산물을 채취하고 스스로 남은 산소의 양을 감지하고 수면까지의 잠수 시간을 조절한다. 바다 속 지형과 해산물의 서식처에 대한 지식을 겸비하고 생태 환경에 대한 민속 지식은 해녀의 몸과 머리에 각인되어 있다. 마을 어장을 자율적으로 관리하며 채취기 잠수 시간, 해산물 크기를 규정하고 물질 작업에 필요한 기술과 도구를 통제한다. 물질하는 바다 속을 ‘바다밭’으로 인식하여 해안가와 조간대(潮間帶)에서 공동으로 잡초를 제거하고 소라나 전복 종묘를 마을 어장에 뿌리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해녀는 전국에 분포되어 있다. 경북 해녀는 제주도 다음으로 많고 내륙 시·도 중에서 가장 많다. 경북 해녀 중 70% 이상은 호미곶과 구룡포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어 이곳이 경북 해녀 어업의 발상지임을 추측할 수 있다. 경북 해녀는 미역 어장을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1970년대 해녀 잠수복인 고무옷이 도입됨에 따라 기혼 여성, 30~40대의 여성이 물질을 배워 해녀가 되었다. 제주 해녀가 10대부터 해녀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면 경북 해녀는 기혼 여성이 자식을 키우기 위해 해녀 어업을 선택하고 자발적인 노력으로 해녀가 되었다는 점에서 독특한 문화적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경북 해녀는 제주 해녀와 동일한 물질 기술을 가지고 있으나 해녀로 성장하기까지 훈련과정이 다르고, 바다 자원에 대한 인식도 다르다. 따라서 포항을 중심으로 경북 해녀의 문화적 가치 정립을 위한 체계적인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며 그 가치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책임감 강한 어머니상포항에서는 결혼한 30~40대 여성이 물질을 배워 해녀가 되었다. 해방 후 우뭇가사리가 중요 수출 품목이 되면서 1948년부터 구룡포, 양포, 대포, 청하, 축산, 영해, 감포 등지에서 2천여 명의 제주 해녀가 경북어업조합의 지원으로 우뭇가사리 채취 작업을 하였다. 제주 해녀의 집단 이동과 어업으로 경북 어촌 여성들은 수산물의 가치를 알게 되었고 해조류 채취에 참여하였다. 1960년경 어머니를 따라 바다로 나간 영덕군 노물리 김 해녀는 “엄마 파도 온다. 들어온나”라고 하며 우뭇가사리를 채취하는 어머니를 겁에 질려 불렀다고 한다. 그렇게 자란 그녀도 해녀가 되었다.포항 지역 어촌 여성들은 미역, 전복, 성게, 문어 등을 채취하면 돈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해녀를 직업으로 선택하였다. 제주에서는 대개 초등학교 졸업 후에 어머니나 직계가족으로부터 해녀 수업을 받고 해녀 사회로 입문하지만, 포항에서는 결혼한 여성이 스스로 물질을 익혀 해녀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포항 등 경북 해녀는 어머니로서 책임감, 생계를 위해 스스로 물질을 익혔다는 점에서 제주 해녀와 다른 문화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책임감이 강한 ‘어머니 해녀상’을 경북의 해녀 문화 콘텐츠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자랑스러운 직업관경북 해녀는 1970년대 해녀복이 고무 잠수복으로 대체되면서 해녀로서 직업관을 가지게 되었다. 1985년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물질을 시작한 33살의 포항 해녀는 “나는 해녀가 싫다 이런 거 없어요. 그렇게 재미있어. 난 바다가 재미있어. 우리 해녀들 다 글타는데. 왜냐하면 땅에서 하는 일은 시간이 지루하잖아. 바다에서 물건을 잡다 보면 거기에 신경을 몰두하니까 시간 가는 줄 모르겠더라”고 말한다.제주 해녀는 일본제국주의의 노동력 착취로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로 이동하면서 어장 이용을 반대하는 주민들로부터 무시당하고 핍박받았지만, 포항 해녀는 미역 중심으로 어장을 개발한다는 차원에서 확실한 직업관을 정립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포항 등 경북 해녀는 육지에서 일하는 것보다 바다에서 물질하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경북 해녀는 자신의 물질 기술에 긍지를 가지고 있고 자신의 직업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원정 물질경북 해녀는 해녀가 없는 마을을 돌아다니는 원정 물질을 한다. 자기 마을에서 작업을 우선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다른 마을로 원정 물질을 간다. 1950년대 제주 해녀가 경북 어촌으로 물질을 왔듯이 구룡포, 석병, 강사, 구만리 등 영일만 일대의 해녀들은 해녀가 없는 마을로 원정 물질을 간다. 3∼4월 미역철이 되면 원정 물질로 해녀들은 바쁜 나날을 보낸다. 해녀가 없는 마을에서 전복이나 해삼 채취는 스쿠버를 고용하는 경우도 있으나 미역만은 해녀를 고용한다. 해녀 마을에는 ‘구룡포차’, ‘석병차’, ‘강사차’라는 이름으로 물질 어업을 가는 그룹이 형성되고 자신들이 어장을 사서 경영하기도 한다. 원정 물질을 다니면서 직업인으로서 자부심과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경북 해녀의 원정 물질은 제주 해녀 문화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제주는 해녀 없는 마을이 없고 해녀가 자원을 직접 관리하는 공동체적 어업 문화가 지속되었다. 그 때문에 경북 해녀는 바다 자원에 대한 관리의식이 희박하고 책임의식도 부족하다. 어장이 자본가에게 판매되면 자본가는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어장 관리를 소홀히 하고 자원은 남획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어촌계의 어장 판매에 대해 영덕군 축산면 축산리 김 해녀는 “뭐 동네를 위해가지고 해녀들 한두 명 보고 안 팔지는 못하지”라며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해녀는 어장에 들어갈 수 없고 혹시 해녀가 물에서 나오는 것을 보면 어장 주인은 “두룽박 올려보세요. 확인하고 어촌계 고발한다고 뭐 도둑질, 강도질하는 맨치로 인식하고…… 말이 많아서 자제하려고 노력한다”고 하였다(‘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나는 해녀 할 거야’, 영덕군·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20. 참조). 앞으로 해녀 없는 마을이 증가할 것이고 공동 어장의 바다 자원을 어떻게 관리하고 공동체를 지속시켜 나갈지 구체적 대안이 필요하다.경북도, 해녀 어업 보존 및 육성 계획 발표경상북도와 포항시는 해녀 어업을 보존·육성하고 해녀 문화를 전승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경상북도는 2012년 제정된 ‘경상북도 잠수어업인 진료비 지원 조례안’에 따라 진료비와 해녀복 등을 지원하고 있다. 또한 2020년 9월 ‘경북도 해녀 어업 보존 및 육성 계획’을 수립해 ‘경북형 해녀 어업문화 전승 및 보전을 통한 지속가능한 어촌마을 공동체 조성’을 목표로 3대 핵심전략 10대 추진과제를 선정했다.3대 핵심전략 중 경북 해녀상 확립 분야에는 △경북 해녀증 발급 △해녀 아카이브 구축 및 해녀 기록화 사업 △해녀 학술조명 및 해녀Day 지정 등의 추진과제를 선정하고, 해녀 어업 활동지원 분야에서는 △해녀휴게실 확충 및 해녀진료비 지급 △해녀마을 박물관 조성 △IoT(사물인터넷) 활용 해녀 어업 안전장비 지원 △마을 어장 연계 수산물 복합유통센터 조성 사업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해녀 연계 어촌 마케팅 분야에서는 △해녀 키친 스쿨 및 해녀 요리 레시피 개발 △해녀↔청년 콘텐츠 개발 △해녀 CI 제작 및 문화상품 개발 등을 추진할 계획이다. 한편 2020년 10월 23일 포스텍 경북씨그랜트센터는 IoT 기반 해녀 어업 안전장비 ‘스마트 태왁’과 ‘해녀용 스마트 시계’ 개발을 발표한 바 있으며, 2021년부터 지역 해녀들에게 보급한다는 방침이다.포항시도 2013년 ‘포항시 나잠어업(해녀) 보호 및 육성 조례안’을 제정하고 진료비 지원을 비롯해 어업인 안전보험 가입비 지원, 치패 방류, 해녀 문화 전승, 갯바위 닦기, 어장 관리 CCTV 설치 등의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해녀의 고령화, 감소는 전국적인 현상이다. 신규 해녀의 양성 없이 지속 가능한 해녀 사업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실은 지방의 소멸, 농어촌의 붕괴와도 연계되어 있기에 해법이 간단치 않다. 경북도가 ‘해녀 어업 보존 및 육성 계획’을 발표하고 포항시도 다양한 해녀 지원 정책을 펼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앞으로 경북도와 포항시는 물론 대학, 언론 등 민간 분야에서 지역 해녀의 역사적 정체성을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해녀 문화의 가치를 보존·계승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기울인다면 ‘해녀 담론’이 보다 풍성해지고 지속 가능한 해녀 사업을 위한 실질적인 기반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글 : 김수희(독도재단, 경제학 박사)사진 : 김수정(사진작가)

2021-07-07

“공연·문화·예술 열정 많은 문경에 꿈과 행복 찾아 왔어요”

경북 문경에 바이올리니스트가 있단다. 그것도 독일에서 15년 동안이나 아티스트로 활동을 한 그 바이올리니스트가 말이다. 바이올리니스트? 우아한 유럽식 인테리어 배경과 함께 비싼 악기를 가지고 선율을 뽑아내는 예술가가 일반적인 사람들의 시선이다. 특히나 시즌제를 통해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에서는 상류층의 전유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닌가.“바이올린이요? 물론 전문적인 것은 수억원 이상하죠. 하지만 연습용이거나 일반인들이 즐길 수 있는 바이올린은 20만원도 안해요. 어쩌면 기타보다도 가격이 싼 게 바이올린이에요.”장마가 오기 전,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문경에서 만난 ‘클래식 한 스푼’ 고경남 대표는 ‘바이올린을 배우기 위해서는 돈이 많이 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정말이었다. 포털에서 검색한 바이올린의 가격은 4만원대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레슨용이나 조금 비싼 것이 50만원 안팎에서 판매되고 있었다. □ 행복을 찾아 왔죠‘클래식 한 스푼’의 대표이면서 바이올리니스트인 고경남 씨는 지난 2019년 클래식 음악 공연장의 오픈과 함께 문경에 정착했다. 경상북도에서 추진하고 있는 ‘도시청년시골파견제’의 도움을 받았다. 그렇다고 그녀의 이력이 나쁜 것은 아니다. 독일에서 자브뤼켄 국립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다양한 연주활동과 바이올린 연주자로서 독일 순회공연을 가지기도 했다. 또 대구의 경북예술고등학교와 대구가톨릭 대학교 평생교육원 초빙교수로도 활동했다. 그런 그녀는 왜 문경에 왔을까.“독일에 살면서 남편을 만나 아이를 낳았어요. 행복한 시간이었죠. 그러다 한국에 들어왔어요. 몸이 안좋아진 이유도 있었구요. 서울에서 1년 정도 있었는데, 조금 답답한 마음이 들었어요. 이것이 행복일까 하는 생각이었죠. 다행하게도 남편과 아이들이 이해를 해줬어요. 문경이라는 곳이 마음에 들기도 했구요. 물론, 문경에 연고는 없었어요. 문경이 대도시에 비해 문화적으로 기반이 취약하지만 시민들의 공연이나 문화·예술에 대한 욕구는 많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문경이라면 제 꿈과 행복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고경남 대표의 말대로, 그녀는 지금 주말부부다. 남편과 초등학교 5학년·1학년의 아이들은 모두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다. ‘주말을 이용해 서로 서울과 문경을 오가고 있다’는 고 대표다. 하지만 두 아이의 엄마인 그녀에게 지금의 상황이 힘들지는 않을까. 그래서 넌지시 물었다. ‘행복하냐고’ 말이다.“음…. 지금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려운 점이 없지는 않아요. 또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생활하면 가질 수 있는 기회도 많겠죠. 하지만 문경이라고 다를 바는 없다고 생각해요. 우선 답답한 것이 없잖아요?”그러고보니 지난 2년 동안 그녀는 문경에서 많은 일을 했다. ‘쓴 커피에 달콤한 설탕 한 스푼처럼, 음악으로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뜻의 ‘클래식 한 스푼’처럼 말이다. 경상북도와 문경시 등에 따르면, 고 대표의 ‘클래식 한 스푼’은 로컬에서 수준 높은 공연과 색다른 기획 공연으로 관객과 소통하고,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를 다루며 지친 일상에 신선한 즐거움을 나누는 활동을 한다. 또 기획한 소공연을 통해 문경에서 접할 수 없었던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클래식 한 스푼에서 바이올린을 접하고 있는 분들 대다수가 아마추어에요. 이렇게 아마추어 바이올린 연주자들이 어우러져 연주도 하고, 다양한 음악 공연을 통해 클래식 음악을 가까이 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문화 길라잡이 역할을 할 수 있어 참 행복하죠.” □ 시골 바이올린? 의외로 많아요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아무래도 문경을 비롯한 시골 구성원의 연령대는 대도시에 비해 높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그렇지가 않더라구요. 코로나19 이전에 저와 함께 하시는 문경분들이 40명 정도 됐어요.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20명 정도지만요. 그런데 생각보다 바이올린을 접하신 분들이 엄청 많으시더라구요. 어린 시절에 바이올린을 배웠던 분들도 계시고요. 음…. 어떤 분은 결혼 전에 바이올린을 오래하셨던 분인데, 이곳에 사시면서 바이올린을 접었던 분이에요. 그런데 ‘클래식 한 스푼’이 생기면서 다시 바이올린을 꺼냈다고 해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 가운데 50대 이상인 분들도 많죠. 문경이 서울보다 시설적으로 뒤지지만, 예술에 대한 욕구마저 뒤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방과 후 아이들도 생각보다 예쁘구요.”실제로 고 대표는 문경읍 갈평리에 있는 용흥초등학교에서 전교생을 대상으로 방과 후 수업으로 바이올린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녀에 따르면, 문경 생활에서 축복이라고 할 정도로, 학교로 가는 길도 아름답고 아이들도 해맑고 수업에도 열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학교에 갈 때마다 항상 반겨주고 도시 아이들보다 순수하고 예쁜 모습.“정이라고 하죠? 서울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죠.”하지만 여전한 궁금증이 있었다. 일반인이 바라보는 클래식에 대한 선입견이었다. 고급스럽다거나 어렵다거나 하는 식의 선입견 말이다.“일부 음악가들은 MR(Mastering Record, 음악반주)를 사용하지 않아요. 그런데 저는 가끔 공연에서 쓰거든요. 그만큼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혼자서 예술적인 부분을 강조한다면, 어디 조용한 산속으로 들어가서 바이올린만 켜고 있지 않겠어요? 바이올린이 어렵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아요. 연습을 하면 누구나 할 수 있죠. 얼마전에도 연습하신 분들과 함께 공연을 했는데, 엄청 좋았거든요.”그랬다. 고 대표의 계획은 꾸준하게 공연예술 기획을 하며, 바이올린 아카데미도 성장시켜 아마추어 앙상블 단체로 활동하는 것이다. 또 지역 문화에 또 다른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과 지역에서 배출된 여러 예술인을 비롯해 문경으로 오고 싶은 예술인들과 모여 예술·문화도시 문경을 만드는 것이다. □ 자립하는 예술인… 생활이 가능하다면 예술인 귀농도?그렇다고 어려움은 없었을까. 그녀에게 물었다.“요즘 저를 원장님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더라구요. 저는 원장이 아닌데 말이에요. 저는 바이올린을 교습하는 학원을 오픈한 것이 아니거든요. 물론 저희 ‘클래식 한 스푼’에서 바이올린을 배우는 분들이 회비를 내지 않는 것은 아니에요. 아무리 예술가라고 하지만 지역에서 정착하기 위해서는 먹고 살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 공연도 마찬가지죠. 저는 외부에서 공연 요청이 오면 대부분 수락을 해요. 특히, 회원들과 함께 하는 공연이라면 더욱 좋죠. 그런 회원들에게 성취감을 느끼게 해주고 싶거든요. 적은 수준의 정성이지만, 회원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잖아요.”그랬다. 현재 고경남 대표의 ‘클래식 한 스푼’은 위치가 모호한 상태다. 마을기업이나 협동조합도 아니면서, 학원과 같은 교습소도 아니다. 그럼에도 지역의 주민들과 함께 앙상블을 하겠다는 그녀의 의지는 확고한 상태다. 그런 그녀에게 현재 예술가들이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해 넌지시 이야기했다.“일부죠. 다른 직업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음악인들도 어려움이 많아요.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장 좋은데 가장 어렵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음악을 포기하기도 하구요. 여기 문경에서 다시 시작한 분들이 있듯이 말이에요. 그런데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는 기회가 많이 없어요. 제가 답답함을 느꼈듯이요. 문경과 같은 로컬에서 음악인, 예술인들이 자립할 수 있는 환경이 된다면 이들의 귀농·귀촌도 있지 않을까요?” /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1-07-06

인구증가·소득증대·시민 삶의 질 향상 위해 뛴다

문경시는 코로나19 팬데믹의 어려움 속에서도 그동안 제시한 시책의 청사진이 현실화되는 성과를 올렸다.국가투자예산확보를 위한 적극적인 노력의 결실로 예산 8천억 원의 시대를 열었고, 변화하는 시대 흐름에 맞춘 명상과 치유의 관광 인프라 구축, 고령화된 인구구조 개선과 지방소멸의 대응을 위한 인구 및 청년 정책 추진, 코로나19 등 선제적이고 철저한 대비로 재난 대응 선도도시를 만들었다.고윤환 문경시장은 “남은 임기 동안 미래 문경을 위한 초석을 다지고, 안전하고, 살고 싶은 문경을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 민선7기 취임 3주년 성과△ 예산 8천억 원 시대 개막신기동 문경시멘트공장의 도시재생 뉴딜사업, 상권 르네상스 사업, 신북지구 풍수해생활권 종합정비사업, 보림천 생태하천 복원사업, 지역영화창작스튜디오 구축사업 등 중앙부처 및 경북도 공모사업 131건, 4천465억 원의 예산을 확보해 예산 8천억 원 시대를 열었다.2018년 일반회계 채무 상환도 완료했다. 2019년에는 공기업 특별회계 채무 상환을 완료하는 등 총 326억 2천400만원의 지방채무를 상환해 재정 건전성 향상을 위해 노력해왔다.△ 소득이 증가하는 부자 농촌 도시 건설귀농·귀촌 지원사업을 맞춤형으로 추진해 2019년 1천51세대, 1천350명, 2020년 1천164세대, 1천399명이 정착하는 성과를 거뒀다.이에 그치지 않고 귀농인의 안정적인 정착을 위한 다양한 신소득작물 개발에 힘써 표고버섯 스마트 재배단지 36동, 고품질 체리 생산단지 21곳을 시범 조성하고 귀농인 소득작물 시범포장 하우스 및 작업장도 조성해 운영했다.또한, 문경 평천과 호계 부곡에 과실전문생산단지를 조성하고 유통시설을 확충했으며, 로컬푸드 문화센터 건립, 농촌 신활력 플러스 사업 추진 등 농가 소득 증대와 농업 브랜드 가치를 이끌었다. △ 명상과 치유의 관광 인프라 구축변화하는 관광 트렌트 흐름에 적극 대응하고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해 새로운 관광인프라를 구축했다. 그 결과 문경단산관광모노레일은 지난해 4월 개장해 현재까지 7만 명의 관광객이 다녀갔으며, 문경생태미로공원은 개장 1년 만에 입장객 10만 명을 돌파했다. 문경새재는 코로나 시대의 비대면 관광지로 각광 받고 있으며 우리나라 전통의 참선과 명상으로 몸과 마음을 치유받을 수 있는 공간인 문경세계명상마을은 하반기 준공을 목표로 차질 없이 진행 중이다.△ 문경돌리네습지, 생태관광지 조성점촌지역 랜드마크 지역은 귀농인 소득작물 재배시설과 미돈가, 시설원예 시범단지와 송정산 산책로는 완료되었고, 영강생활체육공원과 딴봉, 송정산 일대를 연결하는 영강 보행교가 준공되면 명실상부한 점촌지역의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한다.△ 2년 연속 출생아수 증가‘문경시 출산장려기금 설치 및 운용 조례’를 제정해 출산장려금과 아이돌봄 서비스 지원을 확대하고, 저출산 대응과 인구증가를 위한 다양한 맞춤형 보육 인프라를 조성해 출생아 수가 2년 연속 증가했다.이는 전국 226개의 기초자치단체 중 부산 동구, 인천 강화군, 안산시 단원구, 전남 장흥군과 함께 5개 시·군에 불과하다.△ 내실 있는 공교육 위한 투자문경시 장학회를 운영해 장학기금 100억 원을 조성했고, 3천360명의 학생들에게 다자녀 생활장학금 25억 원을 지급하고, 문경사랑 장학금, 지역대학 장학금 등을 지급해 인적자원 개발에 힘을 쏟았다.내실있는 공교육을 위해 꾸준히 노력한 바, 2020년 초·중·고등학교 사교육비 조사 결과 지역 월평균 사교육비는 전국 평균 29만 원에 비해 현저히 낮은 19만 원으로 조사되었다.△ 재난 대응 선도도시 구축코로나19라는 국내·외 큰 어려움 속에서 한발 앞선 선제적이고 창의적인 대응으로 신속한 방역시스템을 구축해 문경형 방역으로 안전도시의 롤모델이 되었으며, 2019년부터 전 시민을 대상으로 시민행복안전보험을 가입하고, 생활안전 CCTV 572대 증설, 무선방송시스템 1만7천 여 대를 설치해 재난정보를 신속·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다. 집중호우에 대비한 신북지구 풍수해생활권 정비사업, 모전오거리, 점촌역 일대의 하수도정비사업도 추진 중이다. ◇ 문경의 미래 발전 방향△ 10만평 규모의 문경 역세권 개발사업 추진중부내륙철도의 단절구간인 문경-김천 구간과 점촌-영주 구간의 전철화 사업이 제4차 국가철도망구축계획(안)에 반영됐으며, 울진에서 서산을 잇는 중부권 동서횡단철도와 서울부터 거제까지 국토를 종단하는 철도, 울진에서 서산까지 동서를 가로지르는 철도까지 열십자 철도망의 중심에 문경이 있게 된다.2023년 개통 예정인 중부내륙철도, 중부내륙고속도로, 통합신공항을 연계한 문경 역세권 개발사업은 10만평 규모에 주거시설, 관광시설, 상업시설, 물류시설, 공공시설 등 단지를 조성해 문경의 미래를 이끌 성장 동력을 만들고 있다.△신기동 문경시멘트공장 도시재생 뉴딜사업지난해 국토교통부 공모사업 중 지자체 단독 사업으로 전국 최대인 3천532억 원 규모의 사업에 선정되었다.시는 문경시멘트공장 부지에 신재생에너지 공급을 위한 수소연료전지발전소를 건립하고 관광객 유치 등을 위한 문화와 경제의 플랫폼을 만든다. 수소연료전지 발전소로 향후 20년간 세수 약 500억원 증가, 4천여 명의 고용 창출이 지역 경기 활성화로 이어질 전망이다.△ 귀농·귀촌 으뜸 도시 부상예비 귀농인의 시행착오를 줄이고 재배기술의 현장 교육을 위해 오미자연구소 등 3곳에 농·축산물 시범단지를 조성하고 있으며, 토착미생물을 활용한 친환경 홍익농법을 마을별 특화 작물에 접목시켜 맞춤형 귀농·귀촌 전략을 수립한다. 도시민에게는 시유림을 힐링공간으로 제공해 정착인구 증가를 도모한다.△ 문화·체육 분야 회복 지원코로나19의 불가피한 상황 속에서 많은 대회들이 연기·취소됐지만 상황이 종료되면 전국 규모의 대회를 개최해 스포츠 도시로써의 위상을 제고해나간다. 그리고 어려움을 겪는 지역 예술인을 위해 비대면 공연을 지원하고 다양한 문화 컨텐츠를 개발한다.△ 다양한 행정수요·사회적 현안 해결개편된 행정조직으로 가용할 수 있는 행정자원을 적극 활용해 효율적인 행정을 도모하며, 낡은 관행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색다른 관점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여 끊임없이 변화해 나간다. △ 코로나19로부터 안전한 도시지역 백신 접종률은 전국 평균을 웃돌며, 전 시민의 70%인 5만 명을 목표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안전하고 편안하게 백신을 접종할 수 있도록 빈틈없이 추진하고, 섬세하고 창의적인 방역 행정으로 안전한 도시, 모범도시를 만들어 나갈 예정이다.민선7기 문경시는 ‘새로운 도약, 일등 문경 건설’을 위해 모두가 최선을 다해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상황 속에서 전국에서 가장 안전한 행복도시 문경을 만들어 왔다.민선7기의 시작과 함께 약속한 10개 분야, 63개의 사업은 93.7%로 추진하고 있다.시는 지방자치단체 생산성 대상 평가에서 출산율 증가 부문에 만점, 채무비율, 취업자 증가율, 문화기반시설 확충 부문 등 26개 지표에서 두드러진 기량 향상을 보여 살기 좋은 지방자치단체에 선정되는 쾌거도 이루었다.문경을 찾는 관광객은 코로나 발생 이전의 80% 수준으로 회복했으며, 지난 한 해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법인 지방소득세가 10억 원이 증가하는 등 여러 지표들이 경기 회복의 흐름을 보이고 있다.고윤환 시장은 “문경의 새로운 동력이 될 문경역세권 개발사업, 신기동 시멘트공장의 도시재생 뉴딜사업, 점촌지역 랜드마크 사업 등 사업들을 적극 추진해 시민들의 기대와 희망에 부응하고, 인구증가, 소득증대, 시민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나갈 계획이다.”고 말했다./강남진기자 75kangnj@kbmaeil.com

2021-07-06

포항 사람도 모르게 종합제철소 부지 선정 진행

종합제철소가 포항에 들어서면서 한 도시의 운명이 바뀌게 된다. 극비리에 추진된 종합제철소 입지 선정 과정, 그리고 제철소 부지에 있던 원주민 마을에의 이주 과정에 대한 생생한 체험담을 들어본다.안 : 당시 포항 부자들은 주로 어떤 사업을 했는지요?이 : 거의 도정 공장을 했지. 한때는 대단했어. 내가 영일군 양정계에서 근무하던 1966년 3월까지는 굉장했지. 그런데 외국미가 떨어지고 나니 국내산만으로는 채산이 안 맞아서 공장이 문을 닫았어. 포항 동빈항은 1962년 6월 국제항으로 개항하면서 외국 선박과 외국 원조미를 조달하는 대형 선박이 입항하게 된다. 원조미의 60퍼센트는 포항에서 도정하고, 40퍼센트는 경주, 영천, 영덕 등에서 도정했다. 당시 지역에 변변한 산업 기반이 없었기에 도정업자들이 지역경제를 이끌었는데, 세금도 가장 많이 내고, 은행에서도 큰손 역할을 했다. 특히 현재 영남병원 앞에 자리했던 삼화압맥공장은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할 만큼 명성을 날렸다. 압맥은 기계로 누른 납작보리를 말하는데, 보리에 적당한 수분과 열을 가해 눌러줬기 때문에 통보리보다 밥을 지을 때 연료가 적게 들고 소화도 잘됐다. 연료가 부족했던 군대에 보급되던 압맥의 대부분은 삼화압맥공장에서 생산되었다. 여기에서 나온 겨는 경주의 축산지로 보냈다. 원조미를 하역하려면 1톤에 보통 14장의 가마니가 필요했고, 원조미 2만 톤이 하역될 때마다 28만 장의 가마니와 엄청난 양의 새끼줄이 있어야 했다. 이를 전량 포항에서 조달했는데, 흥해에서만 일주일에 평균 5천여 장의 가마니를 생산했다.안 : 포스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일군에서 근무할 때 포항종합제철 건설이 결정되었고, 관련 업무를 맡았다고 들었습니다.이 : 1948년에 포항이 읍에서 시로 승격됐지만 사실 시(市) 행세를 못 했어. 거의 모든 업무는 사실상 영일군에서 했다고 봐야지. 어느 날 위에서 울산특별건설부 포항공사사무소를 설치하니 수도, 전기 사용이 가능한 100평 정도의 사무실을 내놓으라는 공문이 왔어. 포항에 그런 건물이라곤 소방서가 유일했지. 안 : 당시에도 소방서가 있었는가요?이 : 일제 때부터 있었지. 경찰서 맞은편에. 경찰서는 나중에 생겼고. 소방서도 위에서 요구하는 100평이 안 됐어. 80평쯤 됐지. 펌프 같은 시설물을 포항국민학교 뒷마당에 갖다 놓고 텐트를 치고 근무했지. 그렇게 해서 소방서가 건설공사 사무실이 됐어. 그런데 그때는 포항종합제철이 들어오는지 아무도 몰랐어. 사무소 현판도 울산공업단지 포항공사사무소라고 했으니 누가 알았겠어. 나중에 정식으로 포항종합제철이라고 새겼어.안 : 제철소 입지 선정이 비밀리에 추진되었다는 얘기인가요?이 : 포항 사람들도 한참 동안 몰랐지. 그냥 큰 공장이 오는 줄 알았어. 1966년 말에 사무실을 구하고 이듬해 기공식을 했거든. 1965년에 한일협정으로 일본에서 지불한 대일청구권자금 일부가 포항제철 건설에 쓰였어. 아무튼 한 1년 동안 시민들은 전혀 몰랐어. 골탕 먹는 건 우리 실무자들이었지. 우리도 그렇게 큰일인 줄 몰랐어. 나는 조례를 만들고, 도에 가서 승인받는 일을 했지. 제철소 기반 조성에 필요한 토지 규모 등을 전부 조사하는데 4, 5개월밖에 안 걸렸을 거야. 포항이 제철소로 선정된 과정은 몇 가지 설이 있는데, 건설부의 류호문 계장의 역할이 컸다는 게 가장 유력해.안 : 포항이 제철소 부지로 선정된 이유가 궁금합니다.이 : 제철 사업은 두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해. 첫째 물이 풍부해야 해. 포항은 형산강이 있지. 둘째 운송이 자유로워야 해. 그래서 바다를 끼고 있어야 하는데, 포항은 영일만이 있지. 원료도 철도 무거워서 이걸 운송하려면 바다를 통하지 않고서는 안 되는 거지. 한마디로 바다가 없으면 철을 못 만들어. 이런 조건에 부합하는 제철소 후보지를 건설부가 물색했어. 삼천포와 몇 군데를 후보지로 정하고 마지막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 공무원과 기술 전문가들이 오천 비행장에 내려 보니 광활한 평야가 있고, 강이 보인단 말이지. 그전에는 포항이 희망을 안 했으니까 위에서는 몰랐는데 이렇게 좋은 데가 있나 싶었던 거지. 300만 평 규모가 되면 공장을 짓겠는데, 300만 평이 넘는단 말이야. 그래서 류 계장이 건설부가 지정한 여섯 군데 후보지에 포항을 추가로 넣었고,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이 ‘이거 됐네’한 거야. 계획에도 없던 포항이 그렇게 제철소 부지로 지정되었지. 이 모든 과정이 극비리에 지정되는 바람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배수환 영일군수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어. 그분이 나중에는 포항시장이 되었지.안 : 비밀리에 그것도 단기간에 그렇게 큰일이 진행되다 보니 어려움이 많았겠다. 가장 힘들었던 업무는 무엇이었습니까?이 : 실무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일은 이주 대책 문제였어. 굉장히 어려웠지. 전문가들이 와서 도면을 보고 ‘이걸 해야 한다’ 하면 우리는 그냥 ‘그래요’ 하고 따라갈 뿐이지 한마디 말도 못 했어. 당시에 나는 주사에 불과했어. 서울에서 오는 사람들은 전부 장관 바로 밑에 있는 사람들이라 군수도 말을 편하게 못 했지. 그런데 일개 주사와 이야기해보니 잘 통하고 일 처리도 척척 된단 말이야. 공무원 생활하기 전에 사업을 해본 게 큰 도움이 됐던 거지. 그러니 자꾸 나만 찾게 되고 내가 창구 역할을 다 했어. 그래서 나중에 건설부에서 날 데리고 갔지.안 : 제철소 공사하던 중에 건설부로 옮겼나요?이 : 제철소 착공하고 내 손으로 조례 만들고 일을 한참 하다가 1970년에 갔지. 여기서는 3년 6개월가량 일한 거지. 안 : 실무 중에 이주 문제가 가장 힘들었다고 했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신다면.이 : 말썽이 있었는데 당시는 군정시대야. 꼼짝 못 할 때였지만 반발이 심한 곳도 있었지. 내가 옆에서 봤을 때는 이주 보상을 받고 다른 데 가도 남을 정도는 된 거 같아. 그때는 집값이란 게 없어. 초가삼간이라는 게 9평이야. 그게 몇 푼이나 되겠어? 보상은 나름대로 했고, 부족한 사람은 특별 상납금 같은 걸 만들어서 해줬지. 그래도 반발이 심한 곳은 불도저 앞에 드러눕기도 하고, 안방에 앉아 끝까지 버티기도 했지. 자기 집을 철거하러 간 공무원이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지붕에 올라가서 고함치는 일도 있었고. 이런저런 사연들이 왜 안 있었겠나.안 : 건설 후보지에 마을은 얼마나 있었나요?이 : 많았지. 동촌이라는 큰 동네가 있었어. 지금 포스코 본사 바로 맞은편이지. 그게 마을 가운데야. 굉장히 큰 동네였지. 양색시촌도 있었고. 동촌 맞은편에 인덕이 있었어. 현재 동촌 앞바다가 신항만이지. 길 건너는 청림이고. 청림은 살았고 동촌은 싹 사라졌지. 포스코 고로에서 100미터만 나가면 바다야. 거기는 송림이야. 송림 안쪽은 동네 이름이 송내야. 거기는 부뜸질하는 데라. 불에 뜸질을 한다고 해서 부뜸질이라 해. 요즘 말로 하면 일광욕하는 거지. 여름에 꼭 해야 할 것이 해수욕장에서 부뜸질인데, 그래야 피부병도 없어지고 건강에 좋다고 했지. 우리 어릴 적에는 피부병이 많았어. 멘소래담 이런 거 외엔 약이 없으니까 시꺼멓게 태우는 거라. 해수욕하는 것을 놀러 가는 것이 아니라 부뜸질하러 간다 그랬어. 거기가 포항 시내보다 좋은 부뜸질 장소였어. 바닷가는 송정이고 안에는 송내고. 그래서 송정, 송내 두 마을이 있었지.안 : 이주 문제 외에 다른 문제는 없었나요?이 : 동촌에서 기공식을 하기로 했는데, 마을 뒤 당산목을 베어야 했어. 그런데 그걸 누가 하려고 하겠나. 아무도 안 나서지. 기공식에는 대통령이 오기로 돼 있었지. 내가 공무원 생활하기 전에 목재상도 잠시 했기에 나무하는 사람들을 좀 알아. 대구에 50채 정도의 집을 지을 때 나무를 팔았지. 아무튼 평창에 있는 최수용인가 하는 사람한테 갔어. 나무는 둘이서 톱으로 베야 한다면서 돈을 많이 달라고 하는 거야. 돈은 달라는 대로 준다 하고 데려왔는데 막상 현장을 보더니 여기 사람들이 피하는 이유를 알겠다는 거야. 제단(祭壇)이기 때문에 잡신이 많이 붙는다면서 안 하겠다고 해. 그래서 나무를 베고 난 다음에 그 사람들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다 책임지겠다고 약속한 후에 굿을 이틀하고 나무를 벴지. 그리고 나서야 기공식을 했어. 그런 일도 일종의 풍속이어서 큰일을 하려면 받아들여야 했지. 그걸 받아들이지 않고 공사하다가 혹시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되겠어. 큰일을 할 때는 제사도 지내고 밥도 먹여야 해. 기공식을 할 때 박 대통령은 못 오고 장기영 부총리가 왔는데, 대전쯤 올 때 파면 조치가 됐지. 그래도 기공식에 와서 오늘 내가 부총리를 그만둔다고 말하더군. 그 사람이 한국일보 사장을 했지. 그때는 한국일보가 대단했어. 이석수 선생. 이석수1933년 경북 영일군 연일읍에서 태어나 국민학생 시절에 해방을 맞았고, 6·25전쟁에 참전해 동족상잔의 참혹함을 직접 겪었다. 포항수산대학을 졸업한 후 타지에서 목재상과 제약회사에서 잠시 근무했다. 1963년 2월 오천면사무소에서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건설부 소속으로 행정사무관, 국회 건설위원회에서 행정서기관, 건설부 과장, 국장 등을 거쳐 원주지방국토관리청장으로 공직 생활을 마쳤다. 퇴직 후 대한건설협회 상임감사로 일하다가 1995년 경상북도 정무부지사를 맡았다. 공무원 시절이나 퇴직 후에 고향을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가장 큰 일은 26년간 자료를 모아 자비로 ‘이석수의 포항 땅 이야기’를 출간한 것이다. 이 책에는 약 3천 꼭지의 포항 땅에 얽힌 이야기와 최신판 사진이 수록돼 있다. 대통령 근정포장(건설사업유공), 황조근정훈장 등 여러 기관에서 수여하는 상을 받았다.대담·정리 : 안준우(소설가) / 인물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7-06

대학 학제를 3학기 3년제로 바꾸자

위기의 대학 사회가 뜨거운 감자를 선물 받고 뒤숭숭하다. 우동기 대구가톨릭대 총장이 온라인 단과대학을 신설하겠다는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영남대 총장 이후 13년 만에 다시 대구가톨릭대학 총장을 맡아 이제 막 한 학기가 지났다. 진출혁세(震出革世)라는 주역 괘사(卦辭)에서 뽑아온 그의 호 ‘진혁(震革)’처럼 역시 변화를 몰고 다니는 사람임엔 분명해 보인다.총장실 문을 활짝 열어 젖혀놓고 기다리고 있던 우 총장은 요즘 대학사회 분위기를 묻자 대뜸 사이버대학 관련 신문기사를 내밀었다.“코로나19가 우리 교육을 10년 앞당겼다. 정말 대학에 변화의 기회를 준 것이다. 기존 사이버대학에서 반발하고 있지만 이건 피할 수 없는 대세다.” 그는 대학이 변해야 한다면 이 길이 그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지금도 대학에서 온라인 강의를 하고 있지 않은가. 굳이 100% 온라인 대학을 신설해야 하나. 어떻게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나.△지금까지 일반 대학은 20% 이내에서만 원격수업을 할 수 있었는데 교육부가 규제를 풀었기 때문이다. 100% 온라인으로 강의는 물론 학위를 받을 수도 있도록 했다. 그래서 우리 대학교가 전국 최초로 모든 과목을 온라인으로 수업하는 단과대학을 내년부터 신설키로 한 것이다. 일반대학 정원을 감축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대신 4개학과에서 252명을 뽑는 유스티노 자유대학을 신설했다. 온라인 대학으로 학과별 정원은 따로 규정이 없다. 경쟁력이 없는 학과는 자연 도태될 수도 있는 것이다.-지금 전국에 사이버대학이 21곳이나 되는데 그들이 반발하지 않겠나.△물론 반발하겠지만 이건 시대 흐름이다. 자신들이 20년 규제 속에서 구축해 온 온라인 대학의 아성을 일반대학들이 무임승차하는 것이니. 그러나 서울의 이화여대도 100% 온라인대학원 설립을 발표하는 등 변화를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다. 최근 방송통신대학의 인기가 다시 부상하고 있다고 한다. 지역에서도 많은 대학들이 온라인 대학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비대면 교육이 변화하는 시대 오프라인 교육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입학정원 미달로 대표되는 우리나라 대학 사정이 위기를 넘어 벼랑 끝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판에 대학교 총장직을 다시 맡았다. 어떤 비책이 담긴 비단주머니를 갖고 왔는가.△대학의 위기는 이미 20년 전부터 오고 있었다. 그걸 말로만 대비한다면 시기를 놓치고 만다. 영남대 총장 시절 무용학과 폐지를 놓고 6박7일간 감금당한 적도 있었다. 그때 이미 위기에 대응하는 변화가 힘들 것이라고 예견했다. 당시엔 2024년쯤 정원 미달사태가 올 것이라고 추측했는데 재수생 등 변수를 예측 못했으니 허를 찔린 셈이다. 입학정원 미달 사태가 더 앞당겨졌다. 대학의 변화가 더욱 절실해졌다.또다시 총장 책임을 맡은 건 비책보다 거절할 수 없는 이문희 전 대주교님과의 약속 때문이기도 했다. -온라인 대학이 유일한 해결책인가. 온라인 강의의 문제점도 적지 않을 것인데.△우리 대학 내의 문제부터 하나씩 고쳐 나가고 있다. 강의실에서 교내 전체가 온라인 교육이 가능한 시스템의 구축과 교육시설의 확충, 방송국에서 방송 편집 전문가를 초빙하는 등 하나씩 해결해 나가고 있다.강의실에서 오프라인 강의 150분을 온라인으로 하면 절반인 75분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실제 확인했다. 온라인의 강의 밀도가 오프라인의 1.5배라는 말이다. 학생들도 집중해야 하고 무엇보다 교수들이 긴장하고 변화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비대면 교육에 따라 발생하는 학생들의 학력 격차는 보완해야 할 과제다.-지난 5월 국회에서 열린 고등교육위기극복방안 공청회에 주제발표자로 참석해서 정원조정과 수도권 대학 정원 감축을 주장했다.△지금 우리나라 대학의 문제점이 어디 온라인 대학 하나로 해결될 일인가. 무엇보다 신입생 미충원 문제는 발등의 불이다. 정원감축도 해결책 중 하나다. 모든 것이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현실에서 대학도 수도권은 정원 외 모집까지 하면서 지방대학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수도권대학의 외국인 유학생이나 농어촌학생 특별전형 등 각종 정원 외 모집을 줄이는 것만으로도 지방대의 숨통을 일부분은 틔워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대학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근본대책은 어떤 것이 있겠나.△먼저 우리 교육의 학제부터 바꿀 것을 제안한다. 1년 2학기 4학년제가 당연시돼 왔으나 이것도 부숴야 하는 관습이다. 대학이 1년 2학기제를 고집하면서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등 쉬는 교육시설과 인력은 낭비가 된다.-학제를 어떻게 바꾸는 것이 좋겠나.△3학기제로 하는 것이다. 영남대에서 3학기제를 도입해 봤는데 지금은 없어진 것 같더라. 3학기제를 하면 학생들도 수업연한 4년을 3년으로 줄일 수 있다.-그건 대학 재정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좋은 방법이 못될 것 같다.△지금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이자 변화의 시대다. 이제 직업의 생명 주기가 4~5년으로 짧아지고 있다. 5년 써먹기 위해 대학이 4년 붙잡아놓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낭비다. 더 이상 4년 등록금 내고 30년 써 먹는 교육으로는 이런 변화의 시대에 적응해 나갈 수 없다. 생애 1번 교육받아 살아가는 시대에서 이젠 평생 교육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 시대에 맞는 교육을 시켜 배출시켜 내겠다는 것이다. 5년 주기로 재교육을 받아야 적응해 나갈 수 있는 사회가 됐고 재교육을 대학이 담당하는 것이다. 학과도 생성과 소멸의 과정이 있고 교수도 평생 보장받을 수 없다. 수요에 맞춰 변화해야 한다.또 있다. 우리나라는 OECD 평균보다 학제가 길고 따라서 직업에 진출하는 연령이 높다. 특히 남자는 군대 2~3년 갔다 오고 긴 학제에 따라 더욱 그렇다. 가뜩이나 직업주기도 짧아지는데 직업 진출 나이가 늦춰지는 것은 사회적 국가적으로 손해다. 개인의 평생 근로시간이 경쟁국가보다 짧아지며 국가의 노동생산력도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이다. 대학에서 학생을 오래 붙잡아 두지 말고 빨리 사회로 내보내야 한다. 3학기제의 개편은 그런 의미도 있다.-지난 개교 107주년 기념사에서 대학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이런 의미로 해석해도 괜찮겠나. 정치적 의미는 없나.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대학이 학생들을 모집했으면 훌륭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교육시켜 배출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로 육성할 책임을 지겠다는 뜻이다. 우리 대학의 교육목표이다.-지난 5월 경북도청에서 열린 지역 대학총장 간담회 자리에서 지역출신 대학생들의 무상교육을 제안했다.△지역 대학의 문제는 결국 지역의 문제다. 대학이 설 자리를 잃으면 지방도 같이 소멸된다. 인구 문제는 출산을 아무리 장려해도 대학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 다산 정책이 먹혀들더라도 실제 대학 입학까지 효력을 발휘하기에는 무려 20년이 걸린다. 그래서 지역 출신 대학생의 등록금을 기초단체와 경북도, 대학이 각각 3분의 1씩 나눠 부담하는 대학 무상교육을 제안했다. 이미 고교까지 무상교육을 하고 있으니 대학교육을 무상으로 하자는 것이다.-그런 정도의 능력을 가진 지방대학이 많지 않을 것 같다. 현실적으로 지방 사립대학의 재정 문제가 있지 않나.△국회가 사립대학의 퇴로를 열어 주어야 한다고 지난번 공청회에서도 주장했다. 사립대학이 문을 닫으면 재단의 재산을 국고로 귀속시키지 말고 사회 복지나 공익사업 등에 이용할 수 있도록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논의가 되고 있으나 아직 결론은 없다.-영남대 총장 이후 대구시교육감으로 중등교육을 책임졌다. 이번에 다시 대학교 총장을 맡았다. 중등교육과 대학교육 간 문제는 어떤 것이 있나. 또 어떻게 해결하려 하나.△대학 총장에서 교육감이 되고 보니 우리 대학교육의 문제점을 알겠더라. 중고교에서 이미 토론식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대학에서는 아직도 일방적으로 강의식 수업을 하는 식이었다. 대학교수들은 학생들이 고교에서 무엇을 배우고 왔는지, 커리큘럼도 모르고 수업 방식도 모르는 것 같았다. 한 학생을 두고 전혀 다른 교육체계를 적용하고 있으니 교육의 단절이 심각한 것이 현실이다.특히 대학에서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고 교육을 하려니 더 큰 문제가 되었다. 이미 고교생의 80%가 대학에 진학하니 학생들의 학습 능력이 차이가 크게 났다.대학교수들에게 고교 교과서를 나눠주고 교육과정을 이해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고교 교육경력이 있는 교수들을 우선 선발하는 등 대학에서 중등 교육을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대가대는 교육청과 고교학점제 지원체제 구축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맺는 등 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짧은 직업 생애주기에 맞춰 대학교육시한을 줄이고 졸업 후 사회인의 재교육도 대학이 맡아야 한다. 평생교육을 통해, 그것이 대학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정치권에서는 30대 제1야당 대표가 나왔다. 우리 교육계와 대가대에는 어떤 파장을 가져올 것으로 보나.△교육에도 변화하라는 메시지이자 바꿀 수 있다는 시그널로 받아들인다. 지금의 대학 위기는 총체적 위기다. 저출산과 고령화, 학령인구 감소와 대학 재정악화 등 요인은 이미 예견됐던 충격이다. 더 이상 장유유서의 고정관념을 벗어나 사회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대구가톨릭대학교가 앞으로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창학의 각오를 다시 다짐하게 만들었다./이경우 편집위원

2021-07-06

밭일보다 물질이 낫다는 포항 해녀

포항 등 경북의 어촌 여성은 제주 해녀를 통해 물질 어업과 바다 자원에 대한 가치를 알게 되었다. 어촌의 기혼 여성이 밑천 없이도 애를 키우면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물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포항 남구 호미곶면 강사2리 강 해녀는 “바다에서 돈벌이는 물질하는 거뿐이었어. 그러니까 인자 남자들이 들어가는 게 아니고 여자들이 들어가야 되니까 여자들이 배워가지고 제주도 사람 말고 여기 사람도 많이 하게 됐어”라고 말했다.강 해녀는 포항 해녀가 제주 해녀보다 물질을 더 잘한다고 하였다. 실제로 경북 해녀의 물질 기술은 제주 해녀를 능가할 정도로 발전하였고 해녀 수도 급격히 증가하였다. 1970년대 수산물 가격이 상승하고 천초(天草), 전복, 성게의 일본 수출길이 열린 것도 경북 해녀들이 본격적으로 물질 작업에 뛰어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 33살에 고향으로 돌아와 처음 물질을 시작한 구룡포 성정희 해녀는 “애를 키우면서 할 수 있는 일은 해녀뿐”이라고 하였다. 해녀가 된 이유는 고소득이라는 거. 내가 바다를 좋아하다 보니까 수영은 잘하잖아요. 수영만 하면 된다 하대. 애 키우면서 하기는 좋아. 해녀는 서너 시간만 하고 오면 되잖아. 시간적인 단축이 있더라고, 애 키우는 데 좋지. 몇 시간만 애 맡아달라고 하면 되겠더라고. 그런 이점이 있더라니까 ‘경북 해녀의 일·삶·문화’, 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17경북 해녀는 생계 위해 뒤늦게 물질에 뛰어들어영덕군 강구면 삼사리 김 해녀는 23살에 해녀가 되었다. 딸이 세 살 무렵이었다. 마침 앞집에 사는 경이 엄마가 제주도 해녀 출신이어서 그에게 해녀가 되는 과정을 배웠다.제주도에서 나온 해녀들이 기술도 있고 물건도 마이 한다니께. 우리들하고 다르다니께. 제주도 사람들이 가만히 보이 생활력이 억수로 강하잖아. 여기 제주도서 나온 사람들 다 생활력이 강해. 내려가다 보면 물건을 봐도 이 귀가 먹어. 귀가 먹으면서 압력 때문에 수경이 빨려 들어가고 귀가 먹먹할 때는 물건 보면 얼른 한 마리만 따고 그 옆에 꺼는 못 따고 얼른 올라와야 해.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나는 해녀 할 거야’, 영덕군·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20영덕군 병곡면 금곡리 권 해녀는 32살부터 물질을 시작하였다.나는 헤엄질도 할 줄 모르고 비닐봉지 머리에 덮어쓰고 이렇게 했다끼네. 물질은 가르쳐 준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보고 내가 해야 되는데 헤엄을 잘 못 치다 보니까 안 늘어. 하다 하다 안 될끼네 물질을 포기하고 미역 할 때만 나가지. 요새도 헤엄은 서툴러. 깊은 데는 못 가지.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나는 해녀 할 거야’, 영덕군·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20경북 어촌에서는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물질을 배운 사람도 있고, 가족 중에 해녀가 있어 해녀가 된 사람도 있지만, 어촌으로 시집온 여성들이 생계를 위해 뒤늦게 물질을 배운 경우가 다수다. 제주에서는 대개 10살부터 숙련 과정을 거쳐 16살에 해녀로 입문하지만, 경북에서는 헤엄을 배운 경험이 없는 여성들이 30살이 넘어 생계를 위해 물에 뛰어든 경우가 많다. 제주와 경북은 해녀가 되는 과정이 확연하게 다른 것이다.울진군 기성면 김 해녀는 1982년 32세 때 본격적으로 물질을 시작했다. (물질을) 따로 배운 게 없고 처녀 때 고향에 있을 때 보면 저 두렁박도 없었고 해녀복도 없어가지고 검은 광목이라고 있었어요. 그걸 두 자씩 받아가지고 물옷을 만들어서 그거 입고 속에 팬티 입고 그랬어요. 티셔츠에 팬티 하나 입고 바다에 들어가기도 하고, 그래서 귀에 물이 들어가고 귓병도 앓고 그러다 보니 해녀들 다 귀가 잘 안 들려요. 그래도 내가 해녀 시작할 땐 잠수복 입고 시작했지.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나는 해녀 할 거야’, 영덕군·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20이런 사례처럼 경북 해녀는 제주처럼 훈련 기간 없이 스스로 물질을 배웠기에 귓병에 걸려 청력에 이상이 있는 해녀가 많다.고무 잠수복 도입으로 물질 작업 크게 개선돼1970년대 고무 잠수복의 보급은 해녀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재래 해녀복은 광목으로 만든 짧은 원피스형 해녀복이다. 이 해녀복을 입으면 수온의 변화에 따라 물질 시간이 정해지기 때문에 조업 시간이 짧고 수입도 적다. 경북 해녀는 밀가루 포대나 검은색 광목으로 재래식 작업복을 만들어 입었고 작업시간은 30분을 넘기지 못했다. 물질 중간마다 상륙해 하도불(불턱)에서 옷을 말리고 다시 물에 들어가기를 서너 차례 반복하였다. 1회당 1시간 정도 물질을 하지 않으면 수입이 나지 않았고 체온을 유지할 수 없었다.경북 어장에 도입된 고무 잠수복은 겉감에 고무 재질을 덧입혀 보온성이 강하였다. 이 잠수복은 목까지 내려오는 통으로 된 모자와 원피스 형태의 상의, 발목을 덮고 가슴만큼 올라오는 바지 형태의 하의로 수온에 관계 없이 3시간에서 5시간까지 조업이 가능하다. 또한 고무 잠수복을 입으면 부력 덕분에 쉽게 물질이 가능하다는 장점도 있다. 실제로 영덕읍 석리 김 해녀는 이웃 해녀가 “고무옷 입고 오리발 신고 이래하면 된다”라고 권유한 덕분에 해녀가 되었다고 한다.고무 잠수복은 맨살을 드러내지 않고 모든 부위를 고무로 감싸는 구조로 되어 있어 해녀의 직업 의식을 강화시켰다. 영덕군 축산면 경정리 김 해녀는 재래식 해녀복을 입었을 때는 “내가 물에 하는 게 뭐 위축되고 자꾸 그래. 남한테 천대받는 것 같고 돈 벌어도 뭐 물에서 한 건데”라는 부끄러운 직업으로 여겼다. 하지만 고무 잠수복을 입고 나서 그러한 생각이 없어졌다. 13살부터 물질을 시작한 영덕읍 창포리 김 해녀도 고무 잠수복을 착용한 후로 물질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졌다고 한다.영덕군 영덕읍 대부리 전 해녀는 “다시 태어나도 해녀 해도 되지. 뭐 힘 안들고”라고 했고, 영덕읍 노물리 김 해녀도 “주변 사람들은 해녀 억수로 부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 해녀들이 바다에 나가 돈을 많이 버니까 우리 여자들을 억수로 부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제주와 경북은 해녀가 되는 과정도 다르지만 직업관에서도 분명한 차이가 난다. 제주 해녀는 “물질보다 밭일이 쉽다”고 한다. 다시 태어나면 물질을 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쓴다”는 제주의 이야기는 해녀가 위험한 직업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타향을 왕래하는 목숨값으로 인식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반면에 포항 등 경북 해녀는 “밭일보다 물질이 쉽다”고 하며 직업에 대한 자부심도 갖고 있다.제주 해녀는 가혹한 제주 역사의 산물인 반면에 경북 해녀는 이 같은 역사 체험이 없고, 기혼 여성이 밑천 없이 손쉽게 경제 활동을 할 수 있으며, 특히 1970년대 고무 잠수복의 보급으로 물질을 용이하게 할 수 있게 된 점이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글 /김수희(독도재단, 경제학 박사)사진 : 김수정(사진작가)

2021-07-05

고령군, 문화·체육·복지 시설 확충으로 삶의 질 ‘UP’

현대인들은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 즉 경제적인 만족감만으로는 제대로 된 삶이 계속될 수 없다고 느낀다. 이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인식으로 자리 잡았다.문화와 복지에 대한 관심과 욕구는 지난 시대에 비해 갈수록 커져간다. 이러한 경향은 대도시와 중소도시에 사는 이들이 다르지 않다.이를 증명하듯 대다수의 지방자치단체는 주민들의 문화 욕구와 복지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각종 정책과 사업을 매년 의욕적으로 추진 중이다.고령군 역시 ‘삶의 만족도 1위, 대한민국 대표 행복도시 대가야 고령’을 미래의 큰 그림으로 그려놓고, 이를 이루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문화·체육·복지시설의 확충과 개선사업도 모두가 이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평가된다.발 빠르게 추진되고 있는 고령군의 문화와 복지 관련 인프라 확대와 개선은 대규모 예산의 확보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모든 사업엔 예산이 선결요건이자 필수다.고령군은 중앙부처와 경상북도에서 실시한 국도비 공모사업을 통해 2021년 고령군민체육관 건립사업(130억 원·국도비 49억원)과 파크골프장 확충사업(국도비 8억 원) 등을 의욕 있게 추진하고 있다.또한 군민체육시설 확충과 다산건강가족센터 조성사업(121억 원·국도비 53억 원), 쌍림행복이음터 조성사업(26억 원·국도비 19억 원) 등의 생활SOC사업 조기 착공과 육아 부담 경감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시대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뛰어든 것이다.위에 언급한 사업과 더불어 다함께돌봄센터(다산면, 대가야읍)도 운영·확충해 고령을 생활 터전으로 삼아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군민들 삶의 질을 높이고자 바쁘게 뛰고 있는 중이다.아래 최근 진행되었거나 향후 추진될 고령군의 문화, 체육, 복지 관련 사업의 구체적 사례들을 살펴본다. ◆고령군민체육관 건립으로 삶의 질 향상고령군민체육관은 부지 면적 9천950㎡, 지상 3층, 건축 연면적 3천925㎡로 건립된다.농구, 배구, 배드민턴 등을 즐길 수 있는 다목적 실내체육관 역할은 물론이고 각종 행사를 진행하고, 재난이 발생했을 때는 임시대피소 등으로 사용될 수 있는 다목적 공간이라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현재는 건축설계 공모를 완료해 기본 및 실시설계 중이며 오는 9월경 입찰을 통해 착공하고, 2023년 4월 준공을 목표로 공사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것이 고령군청의 설명이다.이와 관련해 군청은 “새로운 다목적 실내체육관인 고령군민체육관을 건립해 체육·문화활동 장소의 공급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고령군민의 요구에 효율적으로 답하는 적합한 체육시설을 만들어 군민의 체력 증진과 삶의 질 향상을 도모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파크골프장 확충사업도 원활하게 진행 중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대도시 대구와 인접한 지리적 위치를 감안하면 파크골프장에 대한 수요를 확충하는 것은 지역의 경제 활성화와도 연관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군민의 건강 증진과 여가 활용 등 함께 파생되는 파급효과까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고령군은 대가야 회천변 둔치를 활용해 18홀 규모의 제2파크골프장을 추가로 조성하는 사업을 진행한다.골프장 부지 면적은 2만2천㎡다.현재는 부지 조성, 잔디 식재 등이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오는 2021년 10월 개장이 목표라는 게 고령군청의 이어지는 설명이다.이곳이 완공되면 고령군은 총36홀 부지 면적 4만7천㎡의 파크골프장 시설물을 보유하게 된다. 이는 공공체육시설 조성의 모범적인 사례가 될 것이라는 게 고령군의 부연이다. ◆군민 건강 책임질 다산건강가족센터 조성사업다산건강가족센터는 부지 면적 4천748㎡, 건축 연면적 3천700㎡의 지상 3층 건물로 만들어진다. 국민체육센터(수영장, 건강관리실, 키즈카페 등) 및 가족센터(공동육아나눔터, 상담실, 교육실 등)가 조성돼 군민들의 건강 관리에 도움을 줄 예정이다.현재는 건축기획용역이 진행 중이며 이후 건축설계 공모와 기본 및 실시설계를 완료해 착공에 들어갈 계획이다. 이 공사는 2023년 하반기 준공을 목표로 진행할 예정이라는 것이 고령군의 설명. 그간 다산면은 새로운 중심생활권으로 발전하고 있으나 지역 주민을 위한 체육 활동 공간과 가족복지서비스 인프라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어왔다. 이에 다산건강가족센터를 조성함으로써 맞춤형 체육·복지시설을 제공한다는 것이 고령군의 복안이다. 이는 지역의 인구 유출을 방지하고, 더욱 살기 좋은 마을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쌍림행복이음터 조성사업은 보편적 복지에 기여쌍림행복이음터는 부지 면적 1천301㎡, 건축 연면적 1천245㎡의 지상3층으로 축조될 계획이다. 건물엔 국민체육센터(헬스, 요가 등), 국공립어린이집, 작은도서관, 생활문화센터가 만들어지게 된다.지금은 실시설계가 완료돼 증축 및 리모델링 공사가 진행 중이다. 오는 2022년 1월 준공을 목표로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향후 공사 기간을 준수하고 건설 과정에서의 각종 위험을 방지하는 노력이 이어질 것이란 게 고령군의 설명이다. 쌍림행복이음터 조성사업은 쌍림면 주민들의 문화·체육·복지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키고, 주민 건강을 위한 휴식을 제공하게 된다. 또한 여가 공간, 주민 커뮤니티 공간을 마련함으로써 군민 삶의 질 향상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또 아동·여성·노인 등 전 연령대를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 복지서비스의 제공으로 보다 선진적인 정주여건 조성까지 기대되고 있다. ◆아이들을 위한 고령군 다함께돌봄센터 개소고령군 다함께돌봄센터(다산면 마을돌봄터)는 맞벌이 가구의 육아 부담 경감과 방과 후 돌봄 사각지대 해소를 위해 다산면 다산로 685-12(평리리)에 147.5㎡ 면적으로 지난 2020년 12월에 문을 열었다.현재 사단법인 다함께 행복한 복지누리에서 위탁운영하고 있다. 다함께돌봄센터(다산면)는 개소한 지 6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정원 29명을 다 채우고 등록하려면 대기를 해야 할 정도로 학부모와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뜨거운 호응을 받고 있다는 것이 군청 관계자의 설명이다.고령군 다함께돌봄센터 이용 시간은 학기 중에는 오후 2시부터 저녁 7시까지이며, 방학 중에는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기본 운영시간은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음)까지 이용이 가능하다. 지금까지는 주 5일(월~금요일) 운영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다함께 돌봄사업은 초등학교의 정규교육 이외 시간 동안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아이들의 안전한 보호, 안전하고 균형 있는 간식 제공, 등·하교 전후 긴급 상황 발생 시 돌봄 서비스 제공, 체험활동 및 교육·문화·예술·체육 프로그램의 연계, 돌봄 상담 등을 목적으로 한다. 그런 까닭에 돌봄 사각지대에 있는 아이들을 위한 유익한 프로그램으로 평가받고 있다.대가야읍 마을돌봄터(고령군 다함께돌봄센터 2호점)는 대가야읍 연조리에 위치한 옛 공공도서관 1층에 2021년 하반기 개소 예정으로 현재 관련 작업이 추진되고 있다.고령군은 다함께돌봄센터 설치로 증가하는 초등학생 돌봄 수요에 부응하고, 맞벌이 가정 보육문제 해소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한다.이러한 각종 시설 건립과 개선에 관해 곽용환 고령군수는 “국비와 도비 확보 등을 통한 체육·문화·복지시설의 조기 착공으로 군민들의 건강을 지키고, 삶의 질을 높여 행복도시 고령의 완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전병휴 기자 kr5853@kbmaeil.com

2021-07-05

“오천면 9급 때 만든 식량증산계획 보고서가 전국 2등 차지”

영일군청. 1916년 신축했으며 6·25전쟁 때 소실되고 1953년에 다시 지어졌다. 육거리에서 포항세무서 방향으로 난 길에 있었다. /사진 출처 : 이재원, ‘사진으로 읽는 포항도심’, 나루 6·25전쟁 이후 포항에 다방은 몇 개나 있었을까? 또 극장은 있었을까? 그리고 농촌은 어떤 처지에 놓여 있었을까? 포항에서 청춘을 보내고, 5·16 직후에 공무원이 된 이석수 선생의 육성을 들어본다. 안 : 군 제대 후 진로는 어떻게 되었는지.이 : 더 이상 공부하기는 곤란한 상황이어서 동서의 추천으로 서울에 있는 대명제약에 상임이사로 갔지. 가게 된 동기가 좀 웃겨. 대명제약이 불량배나 상이군인들 때문에 장사를 못 하는 거야. 그 사람들이 자꾸 와서 뭐 해달라 요구하고 괴롭히니까 말이지. 그래서 회사에서는 나 같은 사람이 필요했던 거야. 상이군인들도 나한테는 못 덤비니까. 전쟁은 끝났지만 여전히 전쟁 상태였지. 질서도 없었고. 경찰도 제대군인이나 상이군인들한테는 힘을 못 썼어. 작대기를 들고 마구 대드니까 경찰도 감당이 안 됐던 거야.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의 무법천지였지. 그렇다고 아주 악랄하거나 못된 행패를 부리진 않았어.안 : 1950년대 중후반 포항의 청춘 문화는 어땠나요.이 : 겨우 간다면 다방 정도지. 커피 마시는 게 최고였어. 술 중에 막걸리는 일꾼들이 먹었고. 좀 노는 사람들은 어쩌다 소주를 먹고. 소주를 맑은 술이라 했지. 정종이나 청주 같은 고급술도 맑은 술인데, 제사 때 같은 특별한 날에나 마시지 보통 때는 못 마셨어.안 : 당시에 극장 같은 문화시설은 없었습니까.이 : 1955년까지 다방이 다섯 개도 안 됐어. 그때 포항 인구가 5만 명이나 됐을까. 극장은 창고 같은 곳이 하나 있었는데 6·25 때 없어졌지.안 : 사회생활을 하면서 다른 지역도 다녔을 텐데, 전쟁 후에 다른 도시와 포항을 비교하면 어떻습니까.이 : 대구, 밀양, 울산, 경주, 부산은 그나마 괜찮았지. 6·25 때 피해 지역이 아니니까. 나머지는 다 잿더미였지. 포항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 유강 쪽도 인민군들이 야전병원을 차렸다고 아군 함포가 다 부숴버렸어.안 : 포항에서 전쟁의 상흔이 사라진 게 언제쯤이었나요.이 : 1960년대 접어들어서였지. 5·16 이후에 사회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고 질서도 잡혀나갔어.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사람들도 움직였지. 그전까지는 전쟁 때문에 논둑도 엉망이었고 농기구도 별로 없었는데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정리되었지. 그전에는 모심는 것도 두세 달 걸렸어. 수리개량사업이 안 돼 있어 물 대는 사람은 대고 못 대는 사람은 못 대고 그랬지.안 : 공무원 생활은 언제부터 시작했습니까.이 : 5·16 후 민선 지방공무원 연일 선출 1호야. 군(郡)에서 필요한 인원을 모집하는데, 영일군 지방공무원임용채용시험을 내가 처음 쳤지. 1963년 2월쯤이었고, 3월 15일 발령 났지.안 : 주로 어떤 일을 했나요.이 : 세 명이 성적순으로 발령 났는데 내가 1호였어. 오천면이 첫 발령지인데 행정직 자리가 없어서 9급 지방농업기원보로 발령 났지. 농업직으로 업무를 해보니 가장 중요한 농지 정리가 안 돼 있었어. 그때 농업증산계획을 수립하는 게 중요한데, 수리조합관계, 수리시설관계 등 농지 정리가 돼 있어야 했지. 논둑 정리 같은 기반을 조성하는 것이 우선 업무고, 동시에 식량 증산을 위해 각종 작물을 재배하는데 그전까지는 주먹구구였지. 그래서 농촌 지도소라는 전문기관이 생긴 거야. 식량 증산을 하려면 땅을 일궈야 하고 비료도 배급해야 하는데, 각 시군에 농산물 증산 운동을 하면서 농작물 재배계획서를 내라고 했지. 각종 작물에 대해 각 읍면에 계획서를 내줘야 하는데 식량 증산 5개년 계획이라고 해. 영일군은 12개 읍면인데, 오천면이 1등 했어. 내가 1등을 한 거지. 비결이 뭐냐 하면, 오천면은 영일군 전체의 농지구획사업 시범지구로 두고 농지구획사업을 하는 거야. 각 작물이 어느 동네에서 얼마만큼 생산되는지 나와야 해. 마을별로 작물 이름이 나오는데 그게 잘 안 되니까 보고를 못 하는 거야. 벼가 얼마, 옥수수가 얼마, 보리가 얼마인지 나와야 하는데 잘 안 돼. 작물 숫자가 보통 열다섯에서 스무 가지 정도 되지. 그런데 이 숫자가 잘 안 맞는 거야. 내가 주산 4급이야. 글씨도 잘 썼고 보고서도 반듯했지. 그때가 서른한 살이었어. 나이도 많고, 대학도 나왔고, 직장 생활도 했으니까 세상 보는 눈이 있어 공무원 생활에도 적응을 잘한 셈이지.안 : 그때는 식량 증산이 국가적으로 얼마만큼 중요한 일이 였습니까.이 : 식량 증산 계획이 나와야 비료 수급 계획도 나올 수 있고, 이런 계획이 우리나라 농업 정책의 밑바탕이 되었지. 1963년이 시발점이야. 내가 만든 보고서가 영일군에서 경상북도로 가고 농림부까지 간 거야. 전국에서 계획서가 다 올라가는 거지. 그때 내 보고서가 전국에서 2등을 해서, 청와대에 보고해야 했어. 작성자와 담당자 호출이 와서 나하고 농촌국장이 청와대로 갔지. 내가 면서기라 하니까 청와대에서 깜짝 놀랐어. 바로 서울로 오지 않겠냐고 하더군. 그때 서울 갈 형편이 안 됐어. 얼마 후에 영일군에서 날 데려갔지. 처음에는 농업직이니 농산계에서 식량 증산 계획 업무를 했는데 얼마 후에 양정(糧政)계에서 사고가 나는 바람에 그쪽으로 가라 그래. 안 : 양정계 사고는 무슨 얘기입니까.이 : 암행감사가 오는데 외국미가 들어오는 입항지로 와. 포항이 입항지니까 포항으로 감사가 온 거지. 외국미는 벼로 가져오니까 도정을 전부 포항에서 해야 하고, 도정을 하려면 가마니가 필요해. 우리나라에서 가마니 생산으로 손꼽는 데가 흥해(興海)야. 많이 나올 때는 하룻밤에 1천 장씩 나와. 말이 쉬워 1천 장이지 전부 손으로 짜는데 엄청난 거지. 새끼는 혼자서 꼬지만 가마니는 혼자서 못 짜고 둘이 해야 해. 집집마다 밤새도록 가마니를 짜면 2, 3개 정도 만들어. 원래 농사 때문에 흥해에서 새끼와 가마니를 많이 생산했지만, 연안 고기를 잡는 어장(漁帳)을 만드는 데 필요해서도 많이 만들었지. 그물을 가라앉히려면 추를 달아 내리는데 가마니에 모래를 넣고 가라앉혀. 위에는 나무로 띄우고 밑에는 가마니에 모래나 흙을 넣고 가라앉혀야 해. 그래서 이 동네는 가마니가 무지하게 많이 들어가는 거야. 내가 양정계에서 근무할 때 가마니 짜는 게 기계화되기 시작했어. 그런데 1964년 2월쯤 사고가 났지. 감사원에서 부둣가에 재어 놓은 가마니를 검사하는데 가마니가 없는 거라. 돌리면 꼬부라진 나무가 들어가는 기계가 있어. 가마니 재어 놓은 데를 푹 찔러서 돌리면 안에 있는 게 조금씩 나와. 그러면 쌀 나오는구나, 보리 나오는구나 하는데, 이게 겉돌아요. 감사가 창고 문 쪽에 있는 가마니를 푹 찔렀는데 이게 겉도는 거야. 입구에만 가마니를 재어 놓고 뒤에는 전부 헛것이었어. 앞쪽의 가마니를 밀쳐보니 뒤에는 아무것도 없는 거야. 무려 2, 3천 장이 없었지. 당장 3, 4월에 벼가 들어오면 큰일 아닌가.안 :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이 : 군수가 대책을 세워보라는데 방법이 있나. 그래서 군수한테 비는 수밖에 없다고 했지. 담당관을 조사해보니 어장에 가마니를 다 팔았다는 거야. 겨울어장을 설치했다가 2월이 되면 봄 고기가 들어오니까 어장을 바꿔야 해. 그러니 새로 그물을 가라앉히려면 가마니가 필요했던 거지. 보통 다음 달이면 이왕 채우니까 팔아먹은 건데 채우기 전에 감사가 온 거지. 그래서 사정을 설명하고 일주일 뒤 포항에 오면 완벽하게 채워놓을 테니까 용서해달라고 사정을 하니까 양해가 됐어. 그사이 일주일 만에 가마니 3천 장을 밀어 넣은 거야. 감사관들이 보고 깜짝 놀랐지. 도대체 이 많은 가마니를 어디서 가져왔냐는 거야. 그래서 공장 한 번 보여주고, 불법이지만 이 지역 특성상 어장에 가마니를 줬는데 언제든지 미곡이 들어오면 대응할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주니까 용서해주더군.안 : 민간에서 만든 가마니를 군에서 사서 보관하는데, 그걸 어장 설치하는 사람들이 급하니까 먼저 빼돌려 쓴 것이네요?이 : 그렇지. 농수산부에 가면 조작계라고 있어. 태평양 쪽에서 오는 배가 목포로 가느냐 동래로 가느냐, 아니면 포항에 가느냐 무전 치는 걸 조작이라고 하는데, 배가 오는 게 조작 담당관 마음대로야. 쌀을 필요에 따라 어디로 가져가야 하는지에 따라 운송비가 차이 나. 그래서 포항에 많이 들어왔어. 포항이 우리나라에서 도정하는 데 최고였으니까.안 : 당시 공무원 월급이 어느 정도였는지. 아마 공무원 초년 시절에는 화폐개혁 전이라 환(圜으로 받았을 것 같은데.이 : 그때는 환으로 받았지. 당시에도 공무원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있었는데 정규직은 월급과 함께 밀가루를 받았어. 내가 공무원이 되기 전까지 공무원은 정규직이 얼마 안 되고 촉탁이 많았어. 당시에는 월급으로 현금을 별로 안 주고, 밀가루 같은 걸로 줬지. 국가재건에 재정이 많이 들어가니까. 1970년대 초까지도 월급보다는 물건이 많이 나왔어. 내가 1969년에 서울 갔는데 서울에서는 밀가루를 안 주더군.선생은 월급명세서를 아직 모아놓고 있었다. 슬쩍 본 1970년대의 어느 명세서에 봉급 15만 500원, 수당 2만 원, 일반 공제액 6만 6천477원으로 차인지급액 10만 4023원이라고 적힌 빛바랜 잉크가 그 시절을 말하고 있었다. 이석수 선생. 이석수1933년 경북 영일군 연일읍에서 태어나 국민학생 시절에 해방을 맞았고, 6·25전쟁에 참전해 동족상잔의 참혹함을 직접 겪었다. 포항수산대학을 졸업한 후 타지에서 목재상과 제약회사에서 잠시 근무했다. 1963년 2월 오천면사무소에서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건설부 소속으로 행정사무관, 국회 건설위원회에서 행정서기관, 건설부 과장, 국장 등을 거쳐 원주지방국토관리청장으로 공직 생활을 마쳤다. 퇴직 후 대한건설협회 상임감사로 일하다가 1995년 경상북도 정무부지사를 맡았다. 공무원 시절이나 퇴직 후에 고향을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가장 큰 일은 26년간 자료를 모아 자비로 ‘이석수의 포항 땅 이야기’를 출간한 것이다. 이 책에는 약 3천 꼭지의 포항 땅에 얽힌 이야기와 최신판 사진이 수록돼 있다. 대통령 근정포장(건설사업유공), 황조근정훈장 등 여러 기관에서 수여하는 상을 받았다. 대담·정리 : 안준우(소설가) / 인물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