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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 그것은 종교와 과학과 예술이 하나된 지고의 最美”

등록일 2022-08-07 19:59 게재일 2022-08-08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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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함산에 깃든 신라 역사와 경주 이야기<br/>⑨  신이 빚은 솜씨 ⑴  석불사 창건과 수난의 과정
석불사 본존불상. /경북나드리 제공

□생동감 넘치는 세계 유일의 인공 석축물

“이윽고 공단 같은 짙은 어둠 위에 뿌연 환영이 드러나심, 그 부드러운 돌 빛, 그 부드러우면서도 육중하신 어깨와 팔과 손길 놓으심, 쳐다보는 순간마다 분명히 알리시는 미소, 전신이 여명이 쪼여질 때는, 이제 막 하강하신 듯, 자리 잡는 옷자락 소리 아직 풍기시는 듯. 어둠은 둘래 둘래 빠져나간다. 보살들의 드리운 옷 주름이 그어지고 도틈도틈 뺨과 손등들이 드러나고 멀리 앞산 기슭에서는 산새들이 둥지를 떠나 날아간다. 산등성이들이 생선가시 같다. 동해는 아직 첩첩한 구름갈피 속이다. 그 속에서 한 송이 연꽃처럼 여명의 영주(領主)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이태준의 수필 ‘여명(黎明)’의 일부

신라 불교 예술의 전성기 경덕왕 시기 김대성과 이성룡이 창건 774년에 완성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으로 거의 방치되다 1907년에 우체부가 우연히 발견

日, 일본으로 반출 실패하자 복원했지만 방습 조치 미흡 본존불·조각상 마모

토함산에서 석불사(석굴암·이하 석불사)를 빼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유홍준 교수는 “석불사의 석굴, 그것은 종교와 과학과 예술이 하나 됨을 이루는 지고의 최미(最美)”라고 극찬했다. 석불사를 보고 경탄을 금치 못한 이가 어찌 이태준과 유홍준 교수뿐이겠는가!

유치환 시인은 ‘석불암 대불’에서 “목 놓아 터트리고 싶은 통곡을 견디고/ 내 여기 한 개 돌로 눈 감고 앉았노니/ 천년을 차가운 살결 아래 더욱/ 아련한 핏줄 흐르는 숨결을 보라”라고 노래했다.

미술적인 심미안이 부족한 필자의 눈에도 석불사의 석불은 놀라울 정도의 생동감이 느껴진다.

‘우담바라’를 쓴 소설가 남지심은 “가까이에서 마주한 본존불의 얼굴은 분명 돌로 조각된 것인데,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피부, 세포조직을 보는 것처럼 생동감이 느껴졌다. 감은 듯 보이던 눈은 선명하게 뜬 상태였고 금방이라도 숨소리가 들릴 것처럼 역동적인 모습이었다”고 석불의 모습을 묘사했다.

석불은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 세계 유일의 인공 석축물이고, 1995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신라 조각 미술의 정점이다.

석불사의 잘못된 이름인 석굴암이 널리 알려지다 보니 많은 사람들은 석불사를 암자로 생각하는 이가 많지만 실상 석굴사원에 가깝다. 석굴사원은 기원전 2세기경에 인도에서 시작해 실크로드를 통해 중앙아시아와 중국에 유행했다. 주로 사람들이 접근하기 힘든 절벽에 조성되다 보니 시내의 사찰보다 보존 상태가 좋고, 많은 석굴사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인도의 아잔타 석굴, 아프카니스탄의 바미안 석굴, 중국의 원강 석굴, 맥적산 석굴 등이다. 우리나라에도 석불사를 비롯해 굴골암이 있고 경주 남산 칠불암과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제2석굴암), 양산시의 미타암이 있다. 석굴사원이 발달한 중국이나 인도에 비해 우리나라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은 한반도가 조각하기 힘든 돌인 화감암과 석질이 단단한 청석(靑石)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조각 난이도가 높은 화감암으로 마치 살아 꿈틀대는 것 같은 매끄러운 석불을 깎은 것을 보면 한국인들의 손재주가 얼마나 탁월한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석불사 석불을 박근혜 전 대통령이 둘    러 보고 있는 장면.
석불사 석불을 박근혜 전 대통령이 둘러 보고 있는 장면.

석불사는 신라 불교 예술의 전성기를 이룬 경덕왕 시기 재상이던 김대성과 이성룡이 창건해서 774년에 완성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다.

작품의 완성도나 신비롭기 그지없는 불상의 모습만 보면 여러 세기에 걸쳐 사랑받았을 것 같은데 의외로 석불사에 대한 기록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신라시대 국가적 사업으로 지어졌지만 고려 건국 이후 귀족 세계에서 멀어진 석불사는 그 존재감이 약해져 일부 기행문에서 간간이 언급된다. 조선 중기 유학자인 정시한(1625~1707)의 산중일기를 보면 “석문 밖 양쪽 바위에 각각 불상 4, 5위씩 새겨져 있는데 기이하고 묘한 것이 하늘이 빚은 듯하다. 석문은 돌을 무지개처럼 쌓아 올렸으며 그 가운데에 커다란 석불상이 마치 살아있는 듯 생생하게 모셔져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후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석불사가 거의 기록에 나오지 않는다. 숙종 29년(1703), 영조 34년(1758)에 보수했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 말기 울산병사 조예상(趙禮相)이 크게 중수했다는 정도가 전부다.

1913년 당시 석불사의 모습.
1913년 당시 석불사의 모습.

□제국주의 통치를 위해 석불사를 이용한 일제

조선시대에 석불사가 세인의 기억에서 잊혀지게 된 것은 한양이 도읍지가 되면서 신라시대의 중심도시였던 경주가 평범한 지방 도시로 위상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불교가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차츰 세가 줄어드는 와중에 석굴암도 해발고도 565m 산중턱에 있다는 점까지 겹쳐 차츰 잊히고 방치되었다.

조선 말기에는 곳곳에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깊은 산 속의 치안이 불안해져 스님들이 산 아래로 내려가면서 빈 절이 많아졌다고 한다. 이 틈을 타고 도굴꾼들이 사찰 문화재를 마구 탈취하고 파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나마 석불이 높은 산중에 있어서 도굴꾼들의 손길이 미치지 못했던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1902년 8월 세키노 타다시, 1906년 이마니시 류 등 당대 일본제국의 유명 사학자들이 불국사를 보러 와서 사진도 찍고 조사했지만 석불사는 방문하지 않았다. 그만큼 석불사는 역사 속에서 존재가 희미했다.

1913년 당시 석불사의 모습.
1913년 당시 석불사의 모습.

조선 후기인 1891년 풍양 조씨 가문에서 석굴암이 중수되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한 우체부에 의해 석불사가 발견된 1907년까지 거의 방치되다시피 한 상태였다. 우체부는 토함산의 동산령을 넘어 동해안까지 우편 배달을 가다 지금의 양북면 범곡리에서 능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이 석불사인지 몰랐던 그는 당국에 문화재처럼 보이는 물건이 있다고 신고했다. 당시 조선에 거주했던 일본인 사학자들이 석불을 찾았을 때는 ‘본존불의 코가 깨졌고 연화대 또한 심하게 갈라져 파손되었으며, 천장 3분의 1이 이미 추락하여 구멍이 생겨 그 구멍에서 흙이 들어오고 있어 그대로 방치할 경우 모든 불상이 파손될 위험이 있다.’고 기록했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극히 불량했다.

당시 조선은 일본과 서구 열강에 의해 수탈당하던 때라 석불암이 있었는지조차 모르던 시기였다. 하지만 조선을 식민지화하려고 노골적으로 야심을 드러내던 일제는 석굴암에 주목했다. 비록 무너진 상태였지만 불교 조각의 걸작임을 알고 있었다.

1910년 조선통감부는 처음엔 산간벽지에 있는 석굴암을 해체해 경성부로 옮긴 후 일본으로 반출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막상 해체를 시작해보니 돌들의 무게가 워낙 무거워서 이전이 불가능했다.

석불사의 발견과 함께 석불사에 대한 가치평가가 진행됐다. 일제는 석불사를 ‘조선고적도보’에 소개했다. 국어학자 안확의 글과 일본인 건축학자 세키노 다다시의 조선미술사에서도 석굴암을 부각했다. 당시 일본 최고의 민예 이론가였던 야나기 무네요시는 ‘석굴암 조각에 관하여’에서 석불을 ‘영원의 걸작’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일제가 석불에 대해 집착한 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석굴암 등 신라의 미술문화를 한반도 문화의 최정점으로 두고 이후 문화가 점점 퇴락해 조선시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즉 조선은 퇴락하는 국가이고 일제가 석굴암의 가치를 재발견해 보수해 줄 정도로 고도로 문명화되었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함이었다.

1913년 당시 석불사의 모습.
1913년 당시 석불사의 모습.

□잘못된 보수로 인해 결로와 습기 생기기도

조선 총독 데라우치는 석불사를 시찰한 뒤 보수하기로 결정하면서 일제의 야심찬 유적 복원이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석불사의 석굴은 창건 이래 처음으로 완전해체되어 수술대에 놓였다. 1913년 10월부터 감개돌을 고정하기 위한 공사를 시작으로 석굴 천장 부분에 목제 가구(假構)를 설치했다. 1914년 8월 말에는 돔형 지붕을 분리하여 완전해체한 후, 1915년 5월 석굴을 재조립하는 등 1915년 9월까지 석굴을 완전히 해체하고 복원했다.

수리 과정에서 불상을 습기로부터 보호하고 석병을 보강하기 위해 콘크리트를 덮어씌웠는데, 이는 나름대로 당대 최신 건축 기법을 이용한 첨단 수리 방법이었다. 문제는 콘크리트가 방수에는 탁월해도 방습에는 취약하다는 점을 몰랐던 것이었다.

콘크리트로 인해 내부와 외부의 온도 차가 커져 석불 내부에 습기가 더 많이 차고 이슬이 맺히는 결로 현상이 발생했다. 게다가 시멘트에서 나오는 탄산가스(CO2)와 칼슘(Ca)이 화강암 벽을 손상시켰다.

당시 공사를 주도한 사람들은 석공 전문가가 아니라 철도를 놓던 터널 공사 전문가였다. 당연히 석굴암에 의도된 설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고, 이들이 방습을 위해 도입한 조치가 오히려 더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보수공사가 끝나자마자 엄청난 결로와 이끼가 출몰했다. 습기에 노출된 시멘트 콘크리트에서 탄산염과 칼슘염이 누출되어 화강암을 부식시키기 시작했다.

1917년에는 누수와 습기가 심해져 바닥과 천장 위까지 물이 스며들었다. 천장 방수를 위해 다시 보수공사를 했으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습기가 심해지면서 천장에 푸른 이끼까지 생겼다. 석불의 보수공사 비용만 무려 2만2천726원이었지만 결로나 이끼가 끼는 현상은 바로잡지 못하고, 이끼 세척과정에서 본존불을 비롯한 조각들이 마모되기까지 했다.

결로 현상은 해방 이후에도 해결되지 않아 급기야 1966년 내부의 습기를 제거하기 위해 에어컨을 설치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이런 상태로 석불을 개방했고 문제가 심각해지자 1976년에는 유리문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현재는 석굴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으며, 유리 차단막이 설치된 통로 밖을 지나면서 보는 것만 가능하다. 습기와 바람에 따른 문화재 훼손을 막기 위해 내부에는 현대 과학의 산물인 공기 순환 설비가 돌아가고 있다. 다만, 매년 단 하루 부처님 오신 날에만 예외적으로 차단막 안으로 들어가 옛날 신라인들이 했던 것처럼 본존불 주변을 한 바퀴 돌 수 있다. 이마저도 내부에선 사진 촬영은 금지된 상황이다. /최병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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