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기획ㆍ특집

“청하 소년, 임학(林學)을 품다”

몇 해 전 무궁화 꽃이 피는 한여름에 아이들과 찾은 식물원의 대숲 길을 막 지나온 뒤였다. 손으로 팔꿈치와 목덜미를 훑으며 모기를 쫓던 아이들을 한 노인이 불러 세웠다. “이건 명아주 잎인데 모기 물린 자리에 발라주면 금방 사그라진단다” 하며 작은 잎을 뭉개 아이들의 팔에 발라주었다. 그가 바로 기청산식물원 이삼우 원장이었다. 이후 우리는 우연히 꽤 자주 마주쳤고, 한동안 그에게서 꽃과 나무 이야기를 들었다. 인연이었을까. 다시 만난 이삼우 원장에게 남다른 그의 삶과, 우리나라와 포항의 식물 생태계에 관한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 납매 향이 숲속 가득 낮게 깔리는 식물원 안 찻집 ‘꽃멀미’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김강(이하 김) : 농대에 진학해서 임학(林學)을 전공하셨습니다.이삼우(이하 이) : 모든 사람에게 DNA라는 것이 있지. 아마 DNA와도 연관이 있을 것 같네. 우리 집 업(業)이 농업, 그러니까 과수원을 했으니까.김 : 농업의 DNA가 있다는 말씀이시군요.이 : 우리 선고(先考)께서는 요즘 같으면 대형 슈퍼마켓 비슷한, 그런 상회를 하셨거든. 그전에는 교편을 잡으셨고.김 : 부친 이야기로 올라가야겠군요.이 : 선고께서는 자수성가한 분이지. 상회를 운영하시다가 후에는 과수원을 운영하셨고. 그 시절에는 과수원 하면 부자였거든. 정미소, 과수원, 양조장을 운영하면 그 마을에서는 일급 부자에 속했어. 아무튼 선고께서 과수원을 운영하는데, 과수원에 반갑지 않은 손님들이 찾아왔지.김 : 손님이라 함은?이 : 까막까치도 오고 사과 서리하는 도둑이 많이 설쳤거든. 그러면 내가 원두막에 올라앉아 까치를 쫓고, 몽둥이 하나 들고 사과를 따 먹으러 들어온 청년들을 내쫓기도 했지. 그렇게 성장하다 보니 뭐랄까 농촌 DNA가 생긴 것 같아. 농촌이 늘 마음에 있는. 그렇다고 도시 생활이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전원생활이 좋아졌지. 중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지금의 대구가톨릭대학교 자리에 조그마한 사과밭을 가지고 있었어.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 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 선생님이 농촌 이야기, 농업 얘기를 해주셨지.김 : 중학교 시절에 말이지요? 어떤 학생이셨습니까?이 : 중학교 졸업식 때 내가 우등생 대표로 상을 탔어. 특등 학생은 따로 있었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봉사활동도 성실히 했지. 3학년 때는 학급 반장도 했고. 담임선생님이 대구농업중학교 출신이었어. 농업 이야기를 종종 하셨지. 농업 DNA가 농업학교를 나온 담임선생을 만난 거라.김 : 그렇다면 중학교 3학년 때 진로를 결정하셨어요?이 : 그때 농대 가겠다고 작정했고, 임학을 전공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였지.김 : 일반적으로 중3, 고3 때 진로를 그렇게 구체적으로 정하지는 않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이 : 고3 때 나는 주로 교실에 남아 자습을 했지. 경북고등학교 교실에서 앞산이 훤히 보였어. 민둥산이었어. 어느 날 창밖으로 물끄러미 산을 바라보다가 문득 나무를 심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야. 그리고 임학을 전공하겠다는 결심을 했어. 어떻게 하든 열심히 배워서 빨리 농촌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지.김 ; 빨리 돌아가 나무를 키워야 한다?이 : 그렇지. 봄방학 때 한번은 야산에 식목하러 나갔어. 사방조림(沙防造林)을 하는데, 그때는 집집마다 한 사람씩 부역으로 나갔어. 우리 집은 내가 자진해서 나갔는데, 현장에 가보니 대다수가 노인층이었어. 우리 마을 노인들 몫은 내가 대신 심어주곤 했지.김 : 임업을 전공했으니까 더 잘하셨겠습니다.이 : 나무 심는 일은 신바람이 나는 거야. 다른 사람들보다 다섯 배 가까이 더 심었지. 이 산을 내가 가꾸면 전부 내 거다, 이렇게 생각했거든.김 : 포항에서 진행된 조림 행사에 대해 좀 더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이 :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국토 녹화사업을 거국적으로 했어. 그런데 포항 일원은 이암(泥巖)층인 탓에 형편없는 민둥산이었지. 큰비만 내렸다 하면 산사태가 나고 흙탕물이 곳곳에 범람했어. 사방조림을 시작하고 10년도 지나지 않아 민둥산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사방 사업이란 국토의 녹화와 보전, 재해방지와 경관 회복을 위해 산지 사면에 토목공사를 실시하고 생태계가 안정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을 말한다. 1954년 포항 지역 해안 사방을 실시했고, 1955년 포항 사방 관리처가 설치되었다. 1973년 영일, 의창 사방 사업소로 개편, 1977년 영일지구 사방 사업이 완료되었다. 포항 지역은 식생이 어려운 이암 지대로 사막처럼 황폐화되어 있었으나 사방 사업 후 세계 사방사에서 ‘영일만의 기적’으로 평가될 만큼 울창한 숲으로 바뀌었다. 포항시 북구 흥해읍 오도리는 사방 사업이 성공한 대표적인 지역이다. 근대적 사방 사업이 시작된 지 100주년이 된 것을 기념해 오도리에 사방기념공원이 조성되었다. 이삼우 김 : 나무를 키우면서 가장 먼저 이것을 심어야겠다고 생각하신 것이 있습니까?이 : 맨 먼저 낙우송과 은행나무 묘목을 생산했지. 은행나무는 식물도감에 1번으로 나오니까. 그리고 낙우송은 하체가 굵어.김 : 예, 저기 있는 킹트리(king tree)가 낙우송 아닙니까?이 : 그렇지. 원뿔형으로 아랫도리가 굵고 묵직하니 아주 믿음직해.김 : 대학교에 남아 학자의 길을 갈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이 : 그게 드라마지. 3, 4학년 때 변수가 생겼어. 내 꿈은 귀향해서 농부도 행복하고 보람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면서 농촌 계몽도 하는 것이었거든. 그런데 그 길을 벗어날 뻔했지. 대학 시절에 정구부 주장을 했어. 책임감이 커서 정구장 관리도 도맡아 했지. 내 별명이 땜쟁이였어.김 : 코트 파인 곳을 땜질하는?이 : 그렇게 봉사하며 열정적으로 운동했는데 종종 게임을 같이 즐기던 교수 한 분이 임업 행정학 교수였어. 그분이 어느 날 우리나라 임업 행정을 한번 공부해보는 게 어떠냐고 하시는 거야. 자기 연구실에 들어와서 석박사 학위도 따고 이 나라 민둥산을 제대로 바꿔야지, 하시면서 말이야.김 : 좋은 제안이었군요.이 : 팍 넘어갔지. 좋습니다, 하고 당장 결정했어. 그랬는데 그 교수님이 대학 본부에서 농촌교육학과 신설 특명을 받고 미국으로 연수를 가게 된 거라.김 : 같이 가자고 안 하시던가요?이 : 아니. 내 방 잘 봐줘, 하고 가버린 거야. 지도교수 없는 연구실을 홀로 지키게 되었지만, 이 방 저 방 각종 연구실 들락거리며 여러 분야를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어. 그게 운명이지. 돌이켜보면 인생은 무언가 미리 결정된 게 있구나 싶어.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임업 행정가로 서울 사람이 되었을 텐데. 고향에서 지금처럼 이렇게 살아라, 하고 정해져 있었던 것 같아.김 : 귀향하셨을 때 부친께서 별말씀 없으셨나요?이 : 선고께서는 자식들에게 인생의 진로에 대해서는 전혀 말씀을 안 하셨어.김 : 원장님을 믿으셨군요. 당시 농업 상황이 어땠습니까?이 : 산업화로 우리나라의 근본 토대가 바뀌고 있을 때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서열이 깨지고 사공상농(士工商農)으로. 농(農)이 최하위로 밀려났어. 농촌 땅값도 참 쌌어.김 : 농지 말이지요?이 : 땅 팔고 도시로 떠나가는 이들이 많았기에 땅값이 날로 내려가는 판이었어.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서 “형님, 저 대구로 이사 갑니다. 우리 밭 사주이소”라고 부탁하면 “얼마씩 쳐주면 되겠나”라고 했지. 상답(上畓) 값 쳐달라고 하면 흥정도 안 하고 땅문서 두고 가라고 했어. 계약서도 없이. 그런 식으로 농지를 모았어. 은행 융자를 받아서. 그런데 내가 농지를 그렇게 사 모으면서도 땅을 재물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김 : 농부니까, 농사짓는.이 : 그렇지, 농부니까.이삼우1941년 포항 청하에서 태어나 경북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임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청하중학교에 부임해 학생들을 가르치며 농사를 시작했다. 1969년 기청산농원을 열었고, 이 농원을 모태로 1991년 기청산식물원을 설립했으며, 1991년 노거수회를 창립했다. 사단법인 한국식물원협회 회장(3,4대)과 ‘영일군사’ 편집위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관송교육재단 이사장과 기청산식물원 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수필집 ‘나는 새요 나무요 구름이요’ 등이 있다.대담·정리 : 김강(소설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2022-08-01

초의선사 머물며 추사 김정희와 아름다운 편지 나눠

□초의선사가 불국사 머물며 시 짓기도불국사는 통일신라시대 과학 기술의 수준과 건축술, 예술적 감수성이 오롯이 담겨 있는 시대의 걸작품이다. 오랜 역사를 버티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자리잡은 만큼 숨겨진 이야기가 풍부한 곳이기도 하다. 불국사와 관련된 유명인사 중 추사 김정희(1786~1856)와 초의선사의 이야기는 대단히 흥미롭다. 추사 김정희는 잘 알려있듯이 추사체를 일군 조선 최고의 서예가다. 1817년 김정희는 우정을 나눈 초의선사와 경주에 머물고 있었다. 초의선사는 법명이 의순(1786~1866)으로 해남 대흥사의 제13대 종사이자 국내 다도의 중흥자로 유명한 스님이다. 다도만큼 학식도 높아서 추사 외에도 실학의 선구자인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마음의 위안을 준 덕승(德僧)이었다. 김정희와 초의선사는 서로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깊게 교류했다. 그중에서도 초의선사가 불국사에 머물며 지은 시에는 김정희와의 만남을 고대하는 장면이 나온다.불국사에서 옛일을 생각하며 9수 [佛國寺懷古 九首 丁丑六月在慶州]오래도록 순시하고 있는 그대가 못내 그리워 / 苦憶先生久在行자하문 밖 맑게 갠 하늘을 바라보네 / 紫霞門外看新晴세상에서 불국은 차라리 얻기라도 쉽지만 / 佛國人間寧易得서로 만나 못 다한 정을 누릴 수 있을까 / 相邀始可遂閑情시를 받은 김정희는 당대 문장가 답게 아래 시를 써서 화답했다.초의의 불국사시 뒤에 쓰다 [題草衣佛國寺詩後]연지의 다보탑이 법흥의 연대라서 / 蓮地寶塔法興年선탑의 꽃 바람이 한결같이 아득하이 / 禪榻花風一惘然이게 바로 영양이 뿔을 걸어 놓은 데라 / 可是羚羊掛角處어느 누가 괴석에다 맑은 샘을 쏟았는고 / 誰將怪石注淸泉마지막 연의 괴석에 맑은 샘은 물은 수구를 통해 연지의 괴석 위로 떨어지는 장면을 그리고 있는데, 지금도 비가 내리는 날 불국사 청운교 옆에서 볼 수 있다. □이병기, 이태준 등 수많은 문인들이 경탄김정희와 초의선사가 주고받은 시의 소재가 된 불국사는 수많은 문학예술인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우리 문학 속에 불국사가 본격적으로 거론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제 강점기였다. 불국사와 석굴암의 가치에 대해 주목한 것은 조선인이 아니라 고미술품의 가치를 알고 있었던 일본인들이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의 불국사를 일본의 유명사찰인 동대사나 청수사보다 더 높은 수준의 절로 인식했던 것 같다. 당시 일본인들에게 경주는 불국사와 석굴암을 비롯해 수많은 문화재를 품은 보물같은 곳으로 알려졌다. 일본의 고미술학자나 사학자들이 경주로 몰려들었다. 경주 붐이 일자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은 왜 일본인들이 경주에 대해 경탄 하는지 알고 싶어서 경주를 하나둘 찾기 시작했다.조선의 내로라 하는 지식인들이 경주를 찾고 글을 남기자 그 뒤를 이어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오기 시작했다. 경주가 ‘수학여행 1번지’가 된 것도 이때 부터였다. 수학여행은 대체로 2박3일 코스였고, 불국사와 석굴암은 당시에도 중요 관람 코스 중 하나였다. 휘문고보 선생이었던 가람 이병기는 수학여행 인솔교사로 3번이나 경주를 방문했고 여행기를 언론 매체에 기고하기도 했다. 이병기 선생이 1927년 10월 조선일보에 연재한 ‘가을의 경주를 찾아서’에는 당시 불국사의 풍경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주지 스님은 두어 상좌를 데리고 날마다 이 보배들을 구경하러 오는 손님네의 치다꺼리를 하느라고 염불도 할 겨를이 없는 모양이다”이병기 선생은 석굴암과 관련한 시조를 쓰기도 했다.한 고개 또 한 고개 고개를 헤어오다토함산 넘어 서서 동해바다 바라보고저믄날 돌아갈 길이 바쁜 줄을 모르네보고 보고 지어 이곳에 석굴암이험궂은 고개 넘어 굽이 굽이 도는 길을잦은 숨 잰 걸음 치며 오고 오고 하누나(석굴암(石窟庵) 전문) 1925년 한국 최초의 서사시집으로 불리는 ‘국경의 밤’을 간행한 파인(巴人) 김동환도 불국사를 사랑한 문인이었다. 유명잡지인 ‘삼천리’에 ‘불국사의 동백꽃’이라는 시와 ‘백마강과 불국사를 주제로 한 기행문, ‘불국사의 서전(瑞田) 황태자’라는 수필문을 기고하기도 했다. 현진건 불국사의 아름다움에 몰입했던 소설가는 ‘빈처’의 현진건이었다.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시절 고도순례(고도순례)-경주(1929)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신라 천년의 화려했던 역사를 지면 위에 살려냈다. 특히 불국사의 아름다운 정경과 석굴암의 빼어난 예술적 감각 등을 섬세하게 묘사한 이글은 지금까지도 명문(名文)으로 손꼽히고 있다. 불국사에 깊은 인상을 받은 현진건은 이후 석가탑의 설화를 바탕으로 한 ‘무영탑’이라는 소설을 내기도 했다.상허(尙虛) 이태준의 불국사 사랑도 현진건 못지않았다. 한국 근대문학의 첫 번째로 꼽는 명문장가인 그는 1935년 ‘조광’지에 발표한 ‘불국사 돌층계’라는 작품을 통해 불국사를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다.“신라 사람들이 밟던 층계로구나! 생각하니 그 댓돌마다 ‘쿵’ 울리면서 예전 사람들의 발자취 소리가 어느 틈에서고 풍겨 나올 것 같았다. 그들은 어떤 모양의 신발을 신었던 것일까? 그때 부인들의 치맛자락은 얼마나 고운 것이, 또 얼마나 긴 것이 이 층계를 쓰다듬으며 오르고 내린 것일까? 나는 아득한 환상에 잠기며 그 말 없는 돌층계를 폭양(暴陽) 아래에 수없이 오르고 내리고 하였다. 지나간 사람들 발자취, 우리는 어디서 그것을 만져 볼 것인가. 바람에 쓸리고 빗물에 닳았으되 그들이 밟던 돌층계만이 그래도 어루만지면 무슨 촉감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어서 가을에 한번 다시 가서 그 돌층계를 만져도 보고 밟아도 보고 싶다.”- 수필 ‘불국사 돌층계’ 일부이태준의 단편 소설 ‘석양’에도 불국사가 나온다. 소설 속 여주인공 타옥에게 불국사는 절이라기엔 너무나 목가적인 서정이 무르녹아 있다. 청운교, 백운교의 흐르는 듯한 돌층계에는 곧 무희라도 나타나 춤추며 내려올 듯하다고 표현한다. 석가탑, 다보탑 두 탑과 범영루에 걸터앉아 흰 구름을 보기도 한다. 호텔에서 영지를 내려다보며 슬픈 전설을 통해 또한번 허무를 이야기한다. 불국사에서 사흘을 머물며 석굴암의 예술적 황홀감에 사로잡히기도 하며 십일면관음상의 손등을 만져보기도 한다.소설 속 이야기는 해운대에서 마무리되지만 경주가 주무대다. 오릉과 불국사, 석굴암 영지 등 유적지 명소들을 배경으로 남녀 간 사랑의 덧없음과 허무를 이야기하고 있다. ‘YMCA 야구단’ □영화 ‘YMCA 야구단’의 촬영지촬영지로도 불국사는 인기가 높았다. 1970년대 무협 홍콩 영화를 보면 불국사가 종종 소림사로 나올 때가 있다. 1978년 성룡이 출연한 ‘권정(금강혈인)’이 대표적이다. 당시 중국이 경직된 사회여서 본토 촬영이 불가능했고 홍콩 땅은 너무 좁아서 사찰을 배경으로 할 촬영지가 별로 없었다. 그나마 전통건축이 비슷하게 생긴 한국에서 중국 무협 배경으로 촬영하곤 했는데 불국사는 가장 적합한 촬영지였다고 한다.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불국사가 신라 황궁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영화 ‘YMCA 야구단’에서는 여주인공인 정림(김혜수)이 동료인 대현(김주혁)과 함께 불국사의 다보탑을 방문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 역시 불국사에서 직접 촬영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사실 옥의 티에 가깝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을사조약을 전후한 구한말인데, 당시 불국사는 폐사지에 가까웠기 때문이다.가수 현인의 데뷔곡이자, 현인을 가요계의 정상에 오르게 만들어 준 곡인 ‘신라의 달밤’의 가사 1절에는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 온다’라는 가사가 나온다. 또한 그의 노래 중에서 ‘불국사의 밤’은 불국사를 배경으로 한 노래다.세계 언론 속에 불국사러 국영뉴스채널·스페인 일간지신비함 간직한 꼭 찾아야할 명소‘2021 트래블러스 초이스 어워드’경북 대표 관광지로 첫 이름 올려불국사는 한국의 대표적인 사찰로 전세계 언론에 소개됐다.2014년 불국사와 석굴암, 템플스테이, 한글이 러시아 국영뉴스채널 24TV를 통해 소개됐다. 24TV는 “오랜 신비함을 담고 있는 한국의 불교 사찰들”이라는 제하로 불국사와 석굴암 방문기를 보도했다. 방송은 불국사가 ‘행복한 나라의 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소개하며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사찰이 여러 번 훼손되었지만 한국인들은 항상 불국사를 재건했다고 설명했다. 또 불국사는 서울에서 상당히 먼 거리인 경주에 있지만 고속열차를 이용하면 2시간 만에 경주역에 도착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불국사의 상징인 석가탑과 다보탑은 불국사 사원과 조화를 이루고 주변의 자연경관과 혼연일체가 된 듯 자연스럽다고 감탄하기도 했다. 석굴암에 대해서는 해발 750m에 있는 동굴 사원으로 연꽃 위에 앉은 부처가 동쪽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어 매일 아침마다 첫 태양빛을 받는다고 묘사했다.스페인 일간지 엘 파이스(EL PAIS)는 2019년 한국 관광을 할 때 꼭 찾아야 할 명소는 경주 불국사라고 소개했다. 기사에 따르면 불국사는 신라 시대의 절로 주변에 국보 7개나 있으며 토함산 중턱의 암자 석굴암과 공동으로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사실도 밝히고 있다.엘파이스는 황룡사가 거대한 규모로 유명한 절이라면, 불국사는 치밀한 구성의 완성도와 아름다움으로 유명한 절이라고 소개하고 있다.글로벌 최대 여행 플랫폼 ‘트립어드바이저’에서 선정하는 ‘2021 트래블러스 초이스 어워드’에 경북의 대표 관광지 불국사가 처음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전세계 1위 여행 전문 사이트 트립어드바이저(Tripadviser)는 매년 약 9억여 건의 여행자들의 리뷰와 의견을 기반으로 전세계 상위 10%의 우수한 여행지를 선정해 ‘트래블러스 초이스 어워드(전세계 여행자 선정 관광지)’를 발표한다. /최병일 작가

2022-07-31

“1조 원 소득 실현으로 희망찬 봉화시대 열겠다”

민선 8기 제46대 봉화군수에 취임한 박현국 군수(국민의 힘·전 도의원·63)는 ‘군민이 주인인 희망찬 봉화’를 슬로건으로 정하고 힘찬 출발을 했다.박 군수는 군민과 희노애락을 함께하고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공감 행정을 통해 군정의 모든 정책에 군민참여를 실현하고 정체되어 있는 봉화 발전을 위한 참신한 정책추진으로 ‘1조 원 소득의 희망찬 봉화시대’를 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박 군수가 내세운 5대 핵심공약은 △부자농업인 육성 △국내 최대 산림클러스터 조성 △사계절 테마 국제 관광벨트 조성 △봉화형 정주여건 조성 △열린 군정 실현 등이다. 특히 봉화의 우수한 농산물을 비롯한 풍부한 산림자원, 청정한 관광자원을 기반으로 지속가능한 봉화형 먹거리 산업들을 추진해 지역경제에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희망찬 봉화를 만들겠다고 강조했다.민선 8기 박현국 봉화군수를 만나 앞으로 4년간 이끌어 가게 될 군정 운영 방향에 대해 들어봤다. -민선 8기 봉화군수로 취임한 소감은.△군민 여러분이 보내주신 과분한 지지와 성원에 힘입어 제46대 봉화군수에 취임하게 됐다. 저를 믿고 봉화의 미래를 맡겨주신 군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봉화에서 태어나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봉화를 가슴과 눈에 담으며 고향 사랑을 키워왔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기반으로 하는 봉화형 농업과 체류형 관광산업으로 농촌과 상경기를 살리고 인구가 늘어나는 봉화를 군민들과 함께 만들어 가겠다.-현재 가장 시급한 현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지금 봉화의 현실은 그리 밝지 않다. 계속되는 인구감소, 심각한 노령화, 불안정한 농가소득 등 지방소멸의 위기를 절실히 체감하고 있다.최근 발표된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봉화군의 1인당 총소득은 26백만 원 수준으로 급속한 기후변화로 농작물 작황은 부진해지고 농촌인구의 고령화로 농업 경쟁력이 갈수록 떨어지는 상황이다. 또한 현재 지역 관광산업의 패러다임이 머물다가는 관광으로 바뀌고 있지만 봉화군은 관광객들이 머물 수 있는 체류형 숙박시설이 부족한 실정이다. 봉화의 주 소득원인 농업의 경쟁력과 부가가치를 높여 부자농촌을 만들고 관광산업을 농업과 더불어 육성해 나가는 데 있어서 고민이 깊다. 이러한 문제들을 지역 여건에 맞는 다양한 정책개발을 통해 앞으로 해결해 나가려고 한다.-‘1조 원 소득의 봉화시대’를 열겠다고 밝혔다. 5대 핵심공약을 자세히 소개한다면.△대표적인 공약으로 창의적인 농정혁신을 통해 부자 농업인을 육성할 계획이다. 작목별 농민 보조금 지원을 확대하고 외국인근로자 농촌일자리 중개센터를 건립해 영세농업인의 안정적인 소득을 보장하겠다. 또 봉화형 스마트팜 기반 조성사업, 6차 산업 창업 및 활성화 지원 등 농업의 신성장동력 확보를 위한 과감한 투자로 변화하는 영농 트렌드를 선도해 미래형 농업도시로 탈바꿈시켜 나가겠다. 기후변화에 대응한 대체작목 발굴을 지원하고 청년농업인 육성을 위한 인큐베이팅 사업을 통해 지속가능한 농업생태 구축을 위해서도 적극 노력할 예정이다.봉화의 풍부한 산림자원을 활용해 국내 최대 산림클러스터 조성에도 힘쓸 계획이다. 한국임업진흥원 분원 유치 등으로 산림분야 연구 인프라를 확충하고 산림 고부가가치 산업을 적극 육성해 군 면적의 83%를 차지하는 산림을 봉화발전의 새로운 장으로 만들어 나가겠다.이와 함께 봉성~춘양~소천~명호를 잇는 사계절 테마 국제 관광벨트 사업을 역동적으로 추진해 스쳐가는 관광이 아닌 머물다가는 관광으로 관광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전환하고 봉성 베트남마을 조성과 분천산타마을 테마파크 조성 등 국제적 수준의 관광콘텐츠 확충으로 지역 관광의 매력을 한층 더 끌어 올리겠다.또한 지방소멸 위기 극복을 위해 공공임대주택 확충과 귀농귀촌인 문화·복지 인프라 확충 등 봉화형 정주여건 조성에 힘쓰며 군민 소통행정 강화를 위한 군민참여 군정자문위원회를 구성하고 상시적 주민소통 행정시스템을 구축해 군민의 목소리를 가까이하고 군민이 참된 주인이 되는 열린 군정을 실현하겠다.-고령농 중심 봉화의 농업이 발전하기 위한 방안은.△농촌 인구의 고령화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지만 고령농가의 노후준비는 미흡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농업에 종사하는 노인들은 노후복지가 되는 국민연금과 노인기초연금, 노인일자리 참여급여 등에 국한되어 영농에 종사하지 않으면 노후생활이 어려운 형편이다. 고령화에다 농번기 일손 부족으로 농작업 근로인력 확보를 위해서는 농협과 연계한 농촌중개인력센터 운영과 외국인의 계절 근로자 도입도 확대해 노동력 고령화를 대체할 수 있는 인력 수급지원 체계로 농업경영의 안정화를 하도록 할 계획이다.노인들에게 재배하기 편리한 기후변화 대응 대체작목의 발굴지원, 영농작업의 원활한 위탁이 되도록 위탁영농 농업법인 육성확대, 작목별 농업분야 보조금과 농산물 판로대책도 소농, 영세농 등 고령 농업인들에게 우선 배려할 것이다.농업용 드론 기구를 통한 벼재배 병충해 방제작업을 밭작물에도 확대하고, 대형농기계 사용이 어려운 고령 농업인을 위한 소형농기계의 권장 보급, 어르신 전용 농기계에 대한 수리센터 운영 등 고령 농업인들이 많은 배려를 받을 수 있는 농정시책을 추진할 계획이다.또한 농업 외 안정적인 소득확보를 위한 사회서비스형 노인일자리 확대, 안정적인 노후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농어촌공사와 농지를 담보로 연계한 농지연금 제도도 권장할 계획이다.-농특산물 활성화 방안은.△봉화가 자랑하는 3대 작목인 사과, 고추, 수박은 국내 최고의 맛과 품질을 자랑하는 봉화의 대표 우수 농산물이다.우리 지역 대표 농산물들이 하루빨리 전국적인 브랜드로 자리 잡아 우수한 농산물을 생산하고 있는 농가의 수익이 개선되고 봉화 농업의 체질이 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우선 봉화 대표 농산물 통합 브랜드 CI 및 BI 개발을 시작으로 최근 SNS 마케팅 시장에서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라이브커머스, 인플루언서 브랜디드 콘텐츠, 웹드라마 등 다양한 공감형 온라인 콘텐츠 제작과 적극적인 SNS 바이럴 마케팅을 수반하는 뉴미디어 마케팅 전략을 펼치겠다. 더불어 대도시 프로모션 행사와 상설 온라인 농산물 축제 등 다양한 프로모션이 진행된다면 봉화의 대표 농산물들이 전국적인 명품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끝으로 앞으로 4년간 군정을 어떻게 이끌어나갈지.△평소 지속가능한 봉화발전의 미래비전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을 해왔고 위기를 극복하고 대처할 수 있는 현실적인 실행방안들도 차곡차곡 챙겨 왔다. 이제부터 군민을 위한 봉화의 시간이 시작되도록 그동안 준비해온 군민행복 실천방안들을 과감하게 추진하겠다. 군민 모두를 진영·계층·지역 가리지 않고 화합의 장으로 모시고 소통하면서, 주민들의 의견을 군정에 적극 반영해 진정으로 군민이 주인이 되는 봉화를 만들어 가겠다.봉화/박종화기자 pjh4500@kbmaeil.com

2022-07-31

“바다와 시장을 무대로 살아온 인생, 후회는 없어”

1990년대 중반 죽도시장은 칠성천 복개와 아케이드 설치 등을 진행하며 현대적인 모습으로 바뀌었다. 시의원이던 최일만 선생은 자신과 수많은 상인의 삶의 터전인 죽도시장의 환경 개선을 위해 밤낮없이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상세하게 들었다. 그와 함께 향후 수산업계가 어떤 방식으로 미래를 설계해야 하는지, 또한 포항의 청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물었다. 홍 : 시의원으로 일할 때 어떤 마음가짐이었나요?최 : 당시는 칠성천 복개가 시급한 사업이었어. 지금 공영주차장이 있는 자리지. 시의원에 당선되던 1995년부터 그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했어. 또 죽도시장에 아케이드를 설치하는 것에도 주력했어. 그때는 시의원에게 월급이나 활동비를 주지 않았지. 내 몸과 정신을 성장시킨 죽도시장과 시장의 구성원인 상인들에게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일했다고 믿어주면 좋겠어.홍 : 그 당시 포항시의원 수는 몇 명이었죠?최 : 지금과 같은 33명이었지. 기초의회는 박정희 정권 때 지방자치제가 없어지면서 사라졌다가 1995년에 부활했어.홍 : 죽도시장 개선 사업은 어떻게 진행되었습니까?최 : 그즈음 죽도시장과 죽도동의 구획정리는 큰 도로만 되어 있었을 뿐 골목은 옹색한 샛길에 불과했어. 인근 대부분이 갈대밭이라 상습 침수지역이기도 했고. 시의회에 들어가 보니 예산은 적고 주민들의 요구사항은 많더군. 죽도시장 사람들은 예산이 많이 들어가는 사업을 요구했고, 그런 요구에 부응해야 했지. 쉽지 않았어. 시의원은 두 번 한 뒤 스스로 그만뒀어.홍 : 시의원을 해보겠다고 결심한 이유나 계기가 있었나요?최 : 죽도시장은 포항을 대표하는 시장인데 1990년대까지 시장은 물론, 인근의 주거환경이 정말 열악했어. 가진 게 없는 사람일수록 힘들게 살았지. 죽도시장과 죽도동 일대의 하수구 시설도 노후돼 해마다 장마철이면 물이 넘치곤 했어. 수리하려고 해도 도시계획에 묶여 문짝 하나 바꾸는 것도 어려웠어. 내가 70년 넘게 살아온 지역의 답답한 환경을 보면서 시의회에 들어가 이런 고충을 이야기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출마를 결심했지.홍 : 평생 장사와 사업을 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을 위한 봉사를 생각한 것이군요.최 : 사실 나는 좀 덜렁거리는 성격이야. 그런데도 1990년쯤엔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되었지. 운이 좋았어. 자식들도 큰 문제 없이 잘 성장했고. 그때가 되니 죽도시장의 영세 상인들과 지저분한 골목이 눈에 띄더군. 시의원이 되면서 봉사활동을 한다는 생각으로 사업을 건의하고 추진했어. 당시 시의원들은 자기 돈을 써가며 일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어. 가슴 뿌듯했던 시절이고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지.홍 : 시의원 할 때 포항수산 대표를 겸직한 겁니까?최 : 그렇지 않아. 시의원을 할 때는 전무에게 사장직을 넘기고 나는 회장으로 물러앉았어.홍 : 재선에 성공했지요. 3선엔 왜 도전하지 않았나요?최 : 그때 회갑을 넘긴 나이였어. 목적한 일을 어느 정도 이루었고, 과한 욕심은 사람을 추하게 만들지. 젊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어.홍 : 죽도시장에서 인생을 다 보냈습니다. 기억에 남는 일은 뭡니까?최 : 칠성천이 복개되었던 순간에 행복감을 느꼈어. 시장에 아케이드를 설치할 때는 노점상 할머니들이 걱정되더군. 죽도시장 골목과 주변 도로에는 적지 않은 70~80대 노인들이 좌판을 펼치고 장사를 하고 있었거든. 아케이드가 생기기 전부터 그곳에서 생계를 이어가던 분들을 아케이드를 만든다고 내쫓으면 어떻게 하겠나? 낮에는 정해진 구역에서 물건을 팔고, 저녁에는 좌판을 한쪽으로 치워 청소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약속을 하고 계속 장사를 이어갈 수 있도록 배려했지. 그게 고마워서인지 아직도 시장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는 노점 할머니들이 있어.홍 : 수산업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최 : 포항의 수산업은 1980년대까지는 좋았어. 지금 같은 어려움이 닥친 건 수자원 남획이 그 이유야. 역설적이게도 어법(漁法)이 발달하면서 수산자원이 고갈되고 수산업이 위기를 맞게 되었지. 포항 인근 바다를 오가는 회류성 어종이 크게 줄어들었어. 산란기 조업 금지를 철저하게 지키고, 치어는 잡지 말아야 해. 현대화된 어구로 큰 생선, 작은 생선을 다 잡아들인다면 언젠가는 수산물의 씨가 마를 거야. 오징어와 대게 등을 잡을 수 없는 금어기(禁漁期)를 철저히 지키도록 단속을 강화하는 것은 이런 위기의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지. 홍: 키워서 먹는 양식업이 대안이 될 수 있겠습니까?최: 포항 일대에서 물고기 양식을 시작한 게 30년 정도 되었어. 초기에는 광어 양식을 많이 했지. 그런데 구룡포, 감포, 영덕 지역은 물고기 양식에 적합한 수온이 아닌지, 기술 부족 탓인지 잘되지 않았어. 앞으로는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국영기업 형태로 양식장을 운영했으면 하는 바람이야. 오염 등의 바다 환경 변화로 양식하던 물고기가 집단폐사한다면 개인의 경제력으로는 버텨낼 재간이 없거든. 수산물은 후손들의 귀한 미래 식량이야. 그 중요성을 인식한다면 국가가 나서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겠나.홍 :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요.최 : 1980년대 초에 포항에서 피조개를 양식해보려고 하다가 실패했어. 당시 사업 파트너의 권유로 경상남도 진동에서 피조개 종패(種貝)를 4톤 트럭 10대에 싣고 와 바닷가 뻘밭에 뿌렸는데, 3개월 후에 다 죽고 말았지. 나의 참담한 양식업 실패담이야.홍 : 죽도시장에서 살아온 긴 세월을 돌아보신다면.최 : 한창 공부할 시기에 아버지를 도와 장사를 시작하며 온갖 일을 겪었고, 어느새 여든 살을 훌쩍 넘겼어. 지금도 나는 바다와 시장 일밖에 몰라. 모두들 사는 게 그렇겠지만 살다 보면 좌측통행도 하고 우측통행도 하지. 사업하다가 검찰 조사를 받기도 했고, 회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사들과 충돌하기도 했어. 짧지 않은 인생이었으니 이런저런 일이 있었고, 수많은 사람을 만났지. 나에 대한 여러 평가가 있겠지만 개의치 않으려 해. 홍 : 앞으로 수산업계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떤 게 해결되어야 할까요?최 : 바다에서 미래를 찾으려는 청년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필요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어업 관련 교육기관을 만들고, 그 기관을 수료하는 젊은이들에게 저금리 대출 등 지원책이 있어야 하지.홍 : 포항의 젊은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무엇입니까?최 : 크게 성공한 삶도 아니고 모범이 되는 인생도 아니었으니 청년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은 없지. 하지만 아버지에 이어 평생 바다와 시장을 접하며 살아온 인생에 후회는 없어. 오랜 시간을 바쳐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을 달인이나 명인이라고 부르잖아. 포항에 그런 젊은이가 많았으면 좋겠어. 한 가지만 더 부탁하자면 어렵게 살아가는 이웃들에게도 관심을 가졌으면 해.대담·정리 : 홍성식(본지 전문기자)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김진호(사진작가)

2022-07-27

선비들이 노니던 곳서 고즈넉한 휴식을…

당연한 이야기지만, 세상 어느 누구도 폭염과 폭우가 지루하게 반복되는 여름날의 더위를 피할 수 없다.그 옛날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봉건국가의 최고 권력자인 왕도 움직임을 자제하고 가만히 앉아 있거나, 약해진 기력을 보충할 보양음식을 먹었을 뿐 별다른 피서법이 없었다. 왜냐? 1902년 전엔 에어컨이라는 게 없었으니까. 존재하지 않는 걸 왕과 고관대작의 방에 설치할 수는 없지 않은가.많은 이들이 에어컨의 혜택(?)을 누리는 21세기가 됐지만, 더위가 가져오는 불쾌지수의 상승을 온전히 막을 수는 없다. 24시간 내내 에어컨 밑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요즘처럼 그칠 줄 모르는 무더위가 장기간 지속되면 누구나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된다. 사소한 일에도 짜증을 내고, 그럴 일이 아닌데도 다툼은 잦아진다.이럴 때면 조용한 활엽수 그늘 아래서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어주는 시 한 편을 읽는 것도 효율적인 피서법이 아닐까?백석문학상 수상자인 박철(62) 시인의 ‘그대에게 물 한 잔’은 힘겹게 2022년 여름을 지나고 있는 우리들에게 작지만 맑은 힘을 준다. 이런 노래다.우리가 기쁜 일이한두 가지이겠냐마는그중의 제일은맑은 물 한 잔 마시는 일맑은 물 한 잔 따라주는 일그리고당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불쾌지수 상승과 폭발하는 스트레스를 잠시잠깐이나마 잠재우는 짧고도 편안한 시다. 나도 한 잔 마시고, 사랑하고 아끼는 이에게 시원한 물 한 잔 따라주고 싶어지는. □ 옥산서원 계곡서 만나는 퇴계 이황 글씨인격의 도야와 학문의 완성을 삶의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았던 조선의 선비들 역시 겉으로 엄살을 떨지는 않았겠지만, 힘들게 여름을 났음이 분명하다. 그들 역시 더위와 추위를 느끼는 인간이었을 테니.하지만, 세상에 이름을 떨친 조선 유학자들의 피서법은 오늘날 보통 사람들과 달리 호들갑스럽진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경주 옥산서원 뒤편 넓고 평평한 바위엔 회재 이언적이 이름을 짓고, 퇴계 이황이 쓴 글씨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세심대(洗心臺)’다. 이름 그대로 마음을 씻는 공간. ‘대한민국 여행사전’은 세심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옥산서원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 등과 함께 ‘동방오현(東方五賢)’ 중 한 사람인 회재 이언적을 모신 서원이다. 선조 5년(1572) 사당을 세우고 그 후 선조 7년(1574) 서원으로 승격되면서 선조로부터 옥산서원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사액서원이 되었다. 서원 앞으로는 계류가 흐르는데 작은 폭포 용추 위로 걸린 외나무다리가 서원으로 드는 제 길이고 용추 위 백여 명도 앉을 만한 너른 바위가 세심대다.”옥산서원 세심대 주변엔 시원한 물이 흐른다. 더위를 식히고자 이곳을 찾은 경주시민과 여행객들에겐 최상의 피서지.아이들은 물장구를 치거나 물총을 쏘며 놀고, 어른들도 체면 불구하고 양말을 벗은 채 뜨겁게 달아오른 맨발을 계곡물에 담근다.그렇다면 조선의 선비들은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이른바 ‘양반 체면’에 옷을 벗고 물에 뛰어들었리는 만무했을 테고, 방이나 정자에서 유교 경전을 읽다가 하루에 한두 번쯤 세심대에 서서 세상사와는 무관하게 오랜 세월 흘러온 물을 보며 시상(詩想)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 회재 이언적은 독락당에서 어떤 여름을왕에게 권위를 인정받은 옥산서원은 서원 자체의 아름다움과 주변 풍광의 시원스러움이 한국의 어느 서원에도 빠지지 않는다.서원을 거닐던 70대 어르신 한 명은 “안동을 비롯해 경상북도의 서원을 여러 군데 가봤지만, 옥산서원만큼 자연과 잘 어우러진 풍경을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곳은 보기 드물다”고 했다.직접 가서 둘러본 기자로선 그 말에 반박하고 싶지 않았다. 이 옥산서원의 핵심 중 핵심이자, 가장 근사한 건축물이 독락당(獨樂堂)이다.“제 아무리 어진 선비라도 삶의 어느 한 순간엔 세속의 일을 잊고 스스로의 즐거움을 찾는다”는 솔직하고 낭만적인 이름을 가진 독락당.‘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이란 책에는 독락당을 그림 그리듯 묘사하는 문장이 나온다. 그 일부를 아래 인용한다.“회재 이언적의 은신처로 만들어진 독락당은 자연과 어울리는 멋진 모습을 보여준다. 계정과 함께 가옥의 한 공간을 차지하는 사랑채를 독락당이라 칭하지만 특별한 구분 없이 안채와 사랑채, 별채를 함께 독락당이라 부르기도 한다. 뾰족한 솟을대문을 지나 만나게 되는 것은 나지막한 담장이다. 안채와 사랑채를 가로지르는 담장은 부녀자의 생활공간인 안채를 분리시키고 찾아오는 이방인들을 자연스럽게 사랑채 공간으로 안내한다. 미로를 걷는 듯 복잡한 낮은 담장 길은 양편을 막는 사잇길을 지나 옆을 흐르는 시냇물로 연결된다. 회재가 학문을 연마하고 문학과 예술을 즐겼을 독락당 창살을 열어젖히면 계곡과의 경계를 짓는 담장 사이로 시냇물을 살펴보는 열린 공간이 펼쳐진다. 마루에 앉아 바라보는 계곡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다…(후략).”책의 설명은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만나본 옥산서원, 세심대, 독락당은 비교적 번잡스럽지 않게 삼복더위를 피할 수 있는 맞춤한 여름 여행지였다.회재와 퇴계 등 조선 성리학의 완성에 작지 않은 역할을 한 선비들의 역사적 흔적, 여기에 짙은 그늘과 차가운 물소리의 시원스러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앞서도 말했지만, 더위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여름 한철의 고통이자 짜증스러움이다. 세상과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던 500여 년 전 회재의 여름도 다를 바 없었을 터.무더위가 주는 고통과 짜증스러움을 현명하게 이겨낸 사람에겐 ‘가을’이라는 자연의 선물이 주어진다. 그 옛날 독락당에서 회재 이언적이 받았던 그 선물을 우리도 기다려보자. 영원히 지속되는 여름은 없으니. ‘숨은 보물' 정혜사지 13층석탑독락당 인근 ‘신라시대 석탑'독특한 축조 방식 눈길 끌어옥산서원과 세심대, 독락당을 돌아보고 물놀이까지 즐겼다면 인근에 ‘숨은그림찾기’처럼 존재하는 정혜사지 13층석탑을 찾아가보면 어떨까?독락당 지척에 우뚝 선 이 탑은 국보 제40호다. 서원에서 조선 선비의 숨결을 느껴보고, 세심대 인근에서 시원한 계곡의 풍광을 만끽한 후에 주어지는 보너스 같은 게 바로 정혜사지 13층석탑 인근 풍광.오가는 사람들이 적은 곳에 있지만 이름 그대로 ‘국보’이니 탑에 지나치게 가까이 접근하면 스피커를 통해 경고방송이 나온다는 걸 알고 가야 놀라지 않는다.지금은 터만 남은 정혜사는 신라 선덕왕 원년(780)에 중국 당나라에서 온 백우경이란 사람이 살던 집을 절로 고친 것으로 알려졌다.정혜사지 13층석탑은 1층은 크고 높은데 비해, 2층부터 급격히 작아지는 독특한 형태로 주목받는다. 이 탑은 일반적인 신라시대의 축조 양식에서 벗어난 형태고, 신라 석탑 중 유일한 13층탑이라고 한다.“옥산서원을 지나 옥산리의 독락당에서 북쪽 700m쯤 되는 곳에 있다. 정혜사지 일대의 경작지에는 기왓장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데 과거 정혜사의 중심을 이루었던 사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13층석탑은 각 부의 양식과 조성수법에서 오직 하나 밖에 없는 특이한 유례를 보이고 있다. 1962년에 국보로 지정됐다”는 것이 정혜사지 13층석탑에 관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설명.비단 고대 건축과 역사에 큰 관심이 없더라도 어디서도 보기 힘든 특이한 양식의 이 탑을 피해갈 이유는 없다. 게다가 쉽사리 만나기 힘든 ‘국보’ 아닌가.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7-26

감염병 시대의 라이프 케어는 한의약의 일상화로

‘얼마나 사느냐’가 아닌, ‘어떻게 사느냐’가 화두가 되는 세상이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같은 감염병의 대유행은 주기가 짧아지고 일상화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제 보건의료 패러다임도 질병 중심의 ‘헬스 케어(Health care)’에서 생애 전주기 삶을 관리하는 ‘라이프 케어(Life care)’로 바뀌고 있다. 삶을 바라보는 태도도 바뀌어야 한다.정창현 한국한의약진흥원장은 “한의약은 오랜 세월 수많은 감염병과의 싸움에서 안전성과 유효성을 입증했다”며 코로나19 같은 감염병에도 한의약이 해답을 줄 수 있다고 자신한다.바이러스를 죽이는 치료법이 아닌, 바이러스가 살 수 없는 환경을 만드는데 중점을 두는 한의약은 수시로 변이하는 바이러스의 종류에 상관없이 증상에 따라 곧바로 적절한 치료를 시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한의약은 과학화를 통해 안전성과 유효성을 입증해 왔다는 정 원장은 “국민들의 한의약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한의학을 예방의료로 일상화 생활화 대중화 하겠다”고 말한다. - 한국한의약진흥원장으로 취임한 지 1년이 지났다. 진흥원이 하는 일은 주로 어떤 것인가.△한의약 산업을 육성하고 이를 통해 국민 건강과 국가경제에 기여하는 것이다.한의약 발전 정책 개발과 관련 제도 개선, 한의약 혁신기술 개발, 한의약 산업 육성 및 세계화, 한의약 중심 지역 건강 복지 증진 등 진흥원은 한의약과 관련된 국민 복지와 산업 전반에 대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한의약 산업 발전을 위해 한약제재생산센터와 한약비임상시험센터 등 전담 연구 인프라를 구축하고 한의약의 안전성과 유효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한의약이라고 하면 비과학적이라는 인식이 있다.△그야말로 편견이다. 서양의학에 고대 중세 근대 현대 의학이 있듯 한의학도 시대적 구분이 있다. 지금 한의학은 현대 한의학이며 현대인의 눈높이에 맞게 표준화 과학화를 이루고 있다. 한의학은 그동안 끊임없는 연구와 토론, 임상실험을 통해 변화 발전해 왔다.설명도구나 접근 방식이 서양의학과 다르다고 비과학적이라 단정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입증이 안 됐을 뿐이지 없는 것이 아니다.오히려 최근 첨단물리학의 입자, 파동, 양자 관련 이론이 한의학 이론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는 점은 눈여겨 볼 일이다. 과학의 발달로 한의약의 효과가 하나 둘 밝혀지고 있기도 하다.우리에게는 ‘동의보감’처럼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우수한 한의학 문헌들이 있다. 수천 년 동안 축적된 임상경험을 체계적으로 기록한 문헌이 비과학적이라고 폄하하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한의약진흥원은 이런 소중한 자산을 과학적으로 입증해 그 가치를 밝히고 소중한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표준화하고 있다.- 한의약진흥원의 임상경험 표준화 노력이 가시적인 성과를 낸 것이 있나.△한의약진흥원이 2016년부터 6년동안 진행한 ‘한의표준임상진료지침’이 대표적이다. 의료 현장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의사결정에 도움을 주기 위한 근거 기반 기술서라고 할 수 있다. 감기, 견비통, 고혈압, 만성 피로, 갱년기 장애 등 30개 질환에 대해 총 330억원을 투입해 국제적 수준의 지침을 개발했다. 여기에다 현재 후속으로 추진중인 한의약 혁신기술개발사업을 통해 2029년까지 70여 종의 질환에 대한 한의표준임상지침을 개발해 고도화하고 연구 성과를 확산 보급해 나갈 계획이다. 한약과 양약 병용 투여 연구와 중점질환 연구센터 지원 등 근거 중심의 한의약 과학화, 표준화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한의약의 대중화가 무엇보다 시급해 보인다. 이를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는 어떤 것인가.△과학화 표준화 현대화를 통한 한의약의 대중화 일상화가 중요한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학문이든 산업이든 사상이든 그 어떠한 것도 대중과 함께 하지 않으면 사라지기 마련이다.한의약은 수천 년 동안의 임상 경험과 연구를 통해 방대한 정보를 갖고 있으며 그 속에는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이 담겨 있다. 이를 현대적 언어와 개념으로 변환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진흥원이 현재 한의약 임상정보 빅데이터 구축사업을 펼치고 있는 것도 그 중 하나다.- 한의약의 대중화에는 빅데이터 구축만큼 국민들의 신뢰를 얻는 것도 중요할 것 같다.△물론이다. 지금까지 한의약계는 표준화 현대화 과학화를 통해 유효성과 안정성 입증에 노력해 왔다. 이제는 이를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 한의약에 대한 국민적 인식을 개선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아울러 문화의료, 예방의료로서 한의학의 특징을 살려 요람에서 무덤까지, 의식주 전반에 걸쳐 한의학적 요소를 접목시켜 한의학의 일상화, 생활화, 대중화를 만들어 내려고 한다.- 한의약의 표준화와 이를 기반으로 한 한의약 기술개발이 필요할 것 같다.△진흥원은 한의약 혁신기술 개발사업을 통해 의료서비스의 질적 개선을 위한 질환별 가이드라인 개발과 의료 기술 최적화를 통한 질 향상, 그리고 첨단의료 및 과학기술의 융합을 통한 치료기술 개발 등 국민 건강증진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또 지금까지 축적한 연구 성과, 인프라 및 우수 연구인력 등을 적극 활용해 한의약 관련 기업의 신기술 신제품 개발과 산업화에도 지원하고 있다.- 국민 건강 증진과 의료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적용 질환 및 절차 등 한의약 건강보험급여에 대한 제도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첩약을 비롯한 한방의료의 건강보험급여 적용 확대는 한의약계가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할 과제다. 한방의료의 건강보험급여는 국민건강보험 전체 급여의 3%에 불과하다. 2021년 실시한 한약소비실태조사에서 한방의료 분야의 개선점으로 50% 이상이 보험급여 적용 확대를 꼽았다. 한의사 대상 설문조사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현재 한방의료의 건강보험 급여는 근골격계 질환에 대한 추나요법을 비롯해 한약제제, 한방물리요법 분야에서 일부 적용되고 있다. 첩약(탕약)은 현재 안면신경마비, 뇌혈관질환 후유증, 월경통 3개 질환에 대해 건강보험 시범사업으로 진행되고 잇다. 그런데 적용 일수 등 급여 범위가 낮고 처방 절차도 복잡해 보완이 필요하다.- 코로나19 감염병이 재유행 조짐을 보이고 있다. 감염병 전문가로서 어떻게 전망하며 한의약계의 대응은 무엇인가.△감염병의 유행과 위험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예견됐던 일이었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감염병 대유행 주기가 짧아지고 미래는 감염병이 일상화 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현재와 같은 서양의학 일변도의 감염병 관리체계는 나름 성과도 있지만 여러 한계와 문제점을 갖고 있다. 바이러스가 조금만 모습을 바꿔도 기존의 치료제나 백신은 무용지물이 된다. 새로운 치료제나 백신 개발을 위해 우리는 또 수개월, 수년을 기다려야 한다. 시간과의 싸움인 감염병 관리에서 오랜 공백은 실로 치명적이기까지 하다. 또 다른 문제는 항바이러스제의 경우 바이러스가 인체에 침입한 후 24~48시간 이내에 투여해야 유효하며 그 이후는 효과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결국 항생제나 스테로이드제 등을 사용할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한 부작용이 결코 가볍지 않다.한의약은 이같은 문제들을 보완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어떤 질병이든 변종이 가능하다. 바이러스 규명을 위해 굳이 수개월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한약의 유효성을 의심하기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한약은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감염병과의 싸움에서 안전성과 유효성을 입증했다.- 코로나19 팬데믹에서 한의약계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 같다.△코로나19 극복 과정에서 한의약계의 활동이 보이지 않았다고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의사협회는 여러 차례 보건당국에 참여를 제의했고 감염병 단계별 대응 매뉴얼을 제작해 배포하기도 했다.대한한의사협회에서는 지난해 12월 22일부터 올해 4월 15일까지 코로나19 재택 치료자와 코로나 후유증 및 백신접종 후유증 환자를 대상으로 ‘코로나19 한의진료접수센터’를 운영했다. 하루 최대 2만 명이 진료 및 치료한약을 요청할 정도로 큰 사랑을 받았다. 또 한의진료접수센터를 통해 진료 받은 8천42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만족도 조사에서 비대면 한의약 치료를 받은 재택치료자 중 94.4%가 만족감을 표시해 한의약이 감염병 예방과 치료에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한국한의약진흥원도 범 한의계의 구심점이 되어 감염병 대응 매뉴얼부터 제도적 기반 마련, 한약제제 개발과 산업화까지 국민 건강을 지키는 큰 울타리가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서양의학과 한의학의 바이러스 치료에서 근본적 차이는 무엇인가.△서양의학의 치료법이 바이러스만 죽이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한의학은 바이러스가 살 수 없는 인체환경을 조성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지금처럼 바이러스의 규명과 제거만을 목표로 삼는다면 인류는 감염병을 극복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바이러스는 수시로 변이하기 때문이다. 한의학은 바이러스 유형보다는 그것이 일으키는 질병의 특성을 중시하므로 바이러스 종류와 상관없이 증상에 따라 곧바로 적절한 치료를 시행할 수 있다. 한의학은 감염병을 초기 중기 말기 단계별 80여 가지 유형의 병증으로 나누고 바이러스 특성에 맞춰 처방하는 이론체계를 갖추고 있다. 이처럼 한의학의 장점으로 서양의학의 부족한 점을 보완한다면 감염병으로부터 보다 안전하게 국민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한의약이 국민 건강과 의료에 미치는 영향을 확대하기 위한 방안은.△앞으로의 시대는 안타깝게도 ‘전염병과 고령화로 인한 만성병’이 풀어야 할 가장 큰 난제일 것으로 보인다. 최대 화두는 ‘얼마나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되고 있다. 유병장수가 아닌 무병장수가 인류의 가장 큰 소망이기도 하다. 천문학적 의료비 증가로 국가 재정은 날로 악화되고 전 세계적으로 저비용 다효능의 방편으로 전통의약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또한 신종 감염병 등 난치성 질환이 늘어나면서 질병의 치료보다 예방의 중요성에 공감하고 있다. 한의약은 질병의 예방과 회복에 장점이 있고 경제성 안전성 효율성 면에서도 탁월하다. 최근 코로나 후유증 치료를 위해 한의원을 찾는 환자수가 크게 증가한 것이 그 한 예이다.보건의료의 패러다임이 ‘헬스 케어(Health care)’에서 ‘라이프 케어(Life care)’로 바뀌고 있다. 예방이나 치료의 질병 중심 사고에서 생활 전반에 걸쳐 적절한 삶의 방법을 제시하는 생애 전주기 관리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한의약의 장점 중 하나인 양생의학은 라이프 케어에 최적화된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한의약은 미래 의약을 주도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경우 편집위원 □ 정창현(丁彰炫·54)전남 보성 출생. 광덕고, 경희대 한의학과 졸, 경희대 한의대 한의학 석사·박사. 경희대 한의대 교수. 한의학과 학과장. 한의학고전연구소장.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UNC) 아시아센터 방문교수. 경희대 한의과대학 교학부학장. WFMC(세계중의약학회연합회) 중의약문화전업위원회 부회장. 대한 한의학원전학회 수석부회장. 경희대학교 교수회의 사무총장.대학에서 한의학의 원전인 황제내경(黃帝內經)을 주로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한의학의 사상과 가치를 가르쳤다. 학술적으로는 실용방면의 연구를 좋아했고 특히 양생실천방면과 전염병 분야 전문가다. 양생이론의 실상을 알고자 도가사상을 연구했고 그 과정에서 산림치유, 무용치유 등에 관한 한의학적 개념을 정리했다.한방분야의 감염병학인 온병학(溫病學)을 보급, 최초로 정규과정에서 강의했다. 신종플루가 유행할 때는 한의감염병학회 창립을 주도했고 코로나19 사태 때는 코비드19 한의방역지침 작성에 참여했다.지금은 한의약진흥원이 미래 한의약 산업을 선도하는 기관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다지고 그 후 대학으로 돌아가 후진 양성과 연구에 전념하겠다고 한다.

2022-07-25

은어 잡으며 더위 ‘훌훌’봉화로 ‘休’하러 오세요

코로나 사태로 온라인으로 진행됐던 봉화은어축제가 3년 만에 오프라인 축제로 돌아왔다.제24회 봉화은어축제가 7월 30일부터 8월 7일까지 9일간 봉화읍 내성천 일원과 신·구시장에서 ‘봉화에서 COOL하게! 은어로 FUN하게!’라는 주제로 열린다.봉화은어축제는 2019년까지 문화체육관광부 지정 5년 연속 우수축제로 선정됐으며, 2020년엔 ‘대한민국 축제 콘텐츠 대상’에서 축제관광부문 대상, 2021년엔 비대면 축제 대상을 수상하는 등 매년 50여만 명이 찾고 있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한여름 축제이다.올해는 3년 만에 대면 축제로 개최되는 만큼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따른 축제관광 트렌드에 맞춰 내성천의 깨끗하고 시원한 물에서 은어와 함께 무더위를 시원하게 날려 버릴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준비했다.은어 반두·맨손잡이 체험, 은어 먹거리 장터 등 행사·체험 프로그램과 눈과 귀를 즐겁게 해줄 풍성한 음악 공연, 아이들이 좋아하는 샌드아트 모래 놀이장 및 물놀이장까지 전 연령층이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했다. □ 은어잡이 행사·체험 프로그램봉화은어축제의 핵심 콘텐츠인 은어 반두·맨손잡이 프로그램은 축제 기간 동안 매일 진행된다.반두잡이는 주중 3회·주말 4회, 맨손잡이는 주중 4회·주말 5회로 운영되며, 입장료는 1만 원이다.(축제장 내 부스에서 사용가능한 상품권 3천 원이 포함)봉화 최고의 은어잡이를 뽑는 제3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배 어신(魚神)선발대회도 8월 6일 오후 4시 내성천 반두잡이 체험장에서 개최된다. 300명 한정 신청자를 사전 접수(참가비 2만 원) 받아 제한된 시간동안 반두로 가장 많은 은어를 잡은 어신 1, 2, 3등을 선발해 상과 상금을 수여한다.축제 속의 야시장은 8월 2일과 3일 양일간 내성천 특설무대를 중심으로 열리며 저녁 시간 무더위를 날려줄 시원한 음료와 봉화에서만 맛볼 수 있는 송이빵과 같은 별미들이 판매될 예정이다.봉화군의 주요 관광지를 둘러보는 문화유적 탐방투어 버스는 축제기간 동안 오전과 오후 각 1회 운영된다. 문화관광해설사의 고품격 해설을 들으며 분천산타마을,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생태예술제(문수골 가재마을)를 탐방할 수 있다. □ 축제와 함께 즐기는 연계·부대행사 프로그램은어축제기간 동안 다채로운 연계·부대행사도 함께 진행될 예정이다.코로나19 여파로 2년간 온라인으로 개최됐던 한여름 분천산타마을이 올해는 7월 23일 개장식을 시작으로 8월 21일까지 30일간 운영된다.‘여름’이라는 콘셉트에 맞게 무더위를 시원하게 날려 줄 트리전망대 물총대전 등 주말 이벤트와 이색 거리 공연, 분천 산타 마을 캐릭터들과 즐기는 마칭밴드 퍼레이드 등 다양한 특별 공연을 선보일 예정이다. 또한 ‘도착! 미션 드림팀’, ‘찐 산타를 찾아라’ 등 게릴라성 현장 미니게임 이벤트도 열린다. 기차여행을 통해 잠깐의 휴식과 충전의 시간을 갖고 싶다면 백두대간 협곡열차(V-train)을 이용해보는 것도 추천한다. 코레일 관광열차 V-트레인은 내부가 통유리로 된 개방형 열차로 분천역에서 철암역 사이의 백두대간 협곡을 시원하게 감상할 수 있다. 열차는 1일 2회 운영되며 예매는 코레일 앱과 현장에서 가능하다.또한 봉화은어축제에 뜨거운 열기를 전해줄 전국여자 프로볼링대회가 은어축제 사전홍보 기간인 7월 26일부터 29일까지 4일간 봉화군 국민체육센터 볼링경기장에서 열린다. 여자부 개인전과 단체전이 펼쳐지며 결승전은 SBS Sports를 통해 생방송 될 예정이다.2022 생태예술제는 8월 6일과 7일 이틀간 문수골 가재마을에서 열린다. 가재 잡기 체험, 문화예술 공연, 예술인의 밤이 개최되며 은어축제 행사장에서 투어버스를 연계 운영한다. □ 다채로운 공연 프로그램봉화은어축제의 화려한 시작을 알리는 개막식 공연은 7월 30일 오후 7시 30분 특설무대에서 개최되며 봉화 출신 가수 최우진과 인기가수 김혜연, 유승우 등이 출연해 축제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킬 예정이다.이밖에도 은어축제 기간 동안 장민호, 이찬원, 임찬이 함께 하는 미스터트롯 콘서트와 인기 록밴드 국카스텐이 꾸미는 ROCK 콘서트 등 다양한 주제의 공연들이 매일 펼쳐진다.8월 7일 폐막식 공연에는 정동원, 오유진, 남승민, 김연자가 출연해 축제의 마지막 무대를 꾸미며 이어 진행되는 폐막 드론쇼와 불꽃쇼를 끝으로 봉화은어축제 마지막을 수놓을 계획이다.특히 봉화군은 코로나19의 장기 확산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축제기간 중 특별 방역대책을 추진할 예정이며, 코로나19 재유행 우려 및 감염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축제장 내 다중이용시설은 수시로 소독하고 일 2회 축제장 내 현장방역과 소독제 비치, 마스크 착용 등 관광객들이 방역수칙을 철저히 준수할 수 있도록 홍보할 계획이다.박현국 봉화군수(봉화축제관광재단 이사장)는 “3년 만에 대면으로 개최되는 은어축제인 만큼 즐겁고 유익한 다양한 콘텐츠를 많이 준비했다”며 “예전처럼 봉화은어축제장에 많은 분들이 찾아오셔서 추억과 재미, 감동과 기쁨을 모두 찾아가셨으면 좋겠다”라고 밝혔다.봉화/박종화기자 pjh4500@kbmaeil.com

2022-07-25

“칠성천 복개와 아케이드 설치가 큰 보람”

포항이 한때 울산과 더불어 고래잡이로 유명한 도시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제 많지 않다. 포경 금지령이 있기 전까지는 적지 않은 포경선이 동해를 오가며 밍크고래 등을 잡았다. 포획과 해체 과정을 거친 고래고기는 일본으로 수출되기도 했다. 전라북도 어청도를 거쳐 포항과 울산, 강원도까지 고래를 쫓아 거친 바다를 항해했던 뱃사람들은 이제 백발의 노인이 되었거나 세상을 떠났다. 70여 년 전에는 오징어 기름을 종이우산에 칠했다는 이야기도 요즘 세대에게는 생소하다. 모두가 20세기 중반의 이야기다. 이를 들려주는 최일만 선생의 목소리에 신명이 붙었다. 홍 : 고래잡이는 어떤 방식으로 이뤄졌나요?최 : 일제강점기 때 포항에 포경선 두 척이 있었지. 구룡포에서는 포경 금지령 직전까지 고래를 잡았어. 당시 영국에서 “1990년 이후엔 한국의 포경 금지령을 풀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아직 풀리지 않았지. 1970~1980년대 전국에 포경선이 스물한 척 정도 있었어. 매년 3~4월이 되면 포경업자들이 울산에 모여 회의를 했어. 언제쯤 고래가 처음 출몰하는 어청도에 갈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서였지. 고래는 다니는 길이 있어. 포항과 울산 근해에서는 5~6월에 밍크고래가 많이 잡혔지. 한여름에는 강원도 주문진 인근으로 포경선이 몰렸어. 고래잡이는 바다가 거칠어지는 겨울에는 하지 못하니까 10월이면 끝나. 고래를 잡을 수 있는 기간은 1년 중 7개월 정도야.홍 : 포항의 포경업 이야기를 좀 더 해주시죠.최 : 포경 금지령이 내리기 전 울산에는 포경선을 두세 척 가진 회사와 한 척만 가진 개인이 있었어. 배를 여러 척 가진 곳은 법인을 세워 운영했지만, 한 척을 가진 이들은 법인이 없어 우리에게 대신 고래고기를 팔아달라고 했지. 물량이 많을 때는 이런 요청을 거절했는데, 나중에는 이익금 중 30%를 효창수산이 가지기로 하고 위탁판매했어. 그러다가 포경 금지령이 내려졌지. 고래잡이 방식은 근해 포경과 원양 포경이 있는데, 일본은 원양 포경을 하는 회사가 일곱 개나 있었어. 한국에는 부산에 한 개가 있었는데 버티지 못하고 폐업했지. 선단을 구성할 만한 여러 척의 배가 없었고 재정 또한 어려웠던 탓이야. 그래서 한국의 고래잡이는 먼바다가 아니라 가까운 바다에서 이뤄졌어.홍 : 포항을 떠나 있던 기간은 군대에 있었을 때인가요?최 : 남들보다 조금 늦게 입대했어. 강원도 20사단에서 31개월 복무했지. 결혼은 1965년, 그러니까 스물아홉 살에 했고. 아이들 넷을 키우면서 일만 하느라 너무 바빴어. 자식들이 어릴 때 함께 놀아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고 후회스러워. 아이들의 입학식과 졸업식에도 가보지 못했거든. 그 시절에는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아버지가 식구의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눈코 뜰 새가 없었어. 직업 특성상 매일 새벽에 시장과 항구로 나가야 하니 다정한 아버지가 되기 힘들었지. 다만, 내가 어릴 때 서당에서 배운 사람살이의 기본을 자식들에게 자주 들려줬던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야.홍 : 연세에 비해 건강이 좋아 보입니다.최 : 아침 일찍 일어나는 생활습관 덕분인 것 같아. 지금도 아내와 매일 오전에 꽤 먼 거리를 걸어. 청년 시절부터 육체노동으로 단련된 것도 나이 먹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야. 수산물을 많이 먹는 일본 사람들은 장수하는 편이지. 내가 특히 좋아하는 요리는 오징어 내장과 시래기를 넣고 끓인 찌개야. 열일곱 살에 강원도에 일하러 갔다가 처음 맛본 음식인데,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로 맛깔스러웠어.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인데 오징어로 기름을 짜기도 해.홍 : 오징어 기름은 어떤 용도로 쓰입니까?최 : 과거에 울릉도와 구룡포에서 오징어 기름을 많이 짰어. 포항 영일대해수욕장 인근과 구룡포에 그 작업을 하는 공장이 있었지. 오징어 기름은 경상남도 의령과 함안의 죽세품 공장에 팔았어. 비닐우산이 생산되기 전에는 잘게 쪼갠 대나무에 종이를 붙여 우산을 만들었어. 종이가 비에 젖지 않으려면 기름칠을 해야 하는데, 그때 오징어 기름을 사용했지. 오징어 기름은 고급 페인트의 재료로도 썼는데, 모두 1950~1960년대 이야기야. 그때는 밤을 까서 일본으로 수출했고, 산초나무 이파리까지 따서 수출하던 시절이지.홍 : 오징어는 울릉도에서 많이 잡혔지요?최 : 그렇지. 오징어잡이 어선을 가졌을 때 몇 번 가봤고, 오래전에 여객선을 타고도 다녀왔어. 지금이야 쾌속선를 타고 세 시간 남짓이면 울릉도에 닿지만, 그때는 저녁 8시쯤 출발하면 다음 날 아침에야 도착했어. 1950년대엔 포항과 울릉도 사이를 목선이 오갔고, 한참 후에야 400t쯤 되는 청룡호가 취항했지.『한국세시풍속사전』에 의하면 오징어는 함경북도 연안과 울릉도, 독도 부근에서 봄부터 가을까지 많이 잡힌다. 오징어류는 염분이 높은 곳을 좋아한다. 이와 함께 부유생물을 주식으로 하기 때문에 밤에 표층으로 많이 올라온다. 오징어는 수직 운동이 심해 낮에는 100~200m 깊이에 있다가 밤이 되면 얕은 수면으로 올라와 소형 어류를 잡아먹는다. 이때 행동이 공격적이면서 불빛에 잘 모이는데 이 습성을 이용해 채서 낚는 채낚기가 대표적인 어법이다. 채낚기는 플라스틱, 나무, 납으로 미끼 모양을 만들어 낚시 채에 붙인다. 색채를 넣거나 형광물질을 발라 자연산 미끼처럼 보이도록 하고 집어등(集魚燈)으로 어획 효과를 높이는 게 특징이다. 홍 : 죽도시장에서 번영회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언제입니까?최 : 1990년 초부터 사단법인 죽도시장번영회 대의원과 이사를 맡았어. 회장이 된 건 1993년이야. 이후 2016년까지 회장직을 이어갔지. 마지막 7~8년 동안은 회장 자리를 넘겨주고 싶었는데 쉽지 않았어. 결국 ‘회장은 3년제로 연임할 수 있다’고 규정을 바꾼 후 그만뒀지.홍 : 죽도시장번영회 회장은 선거로 뽑나요, 추대인가요?최 : 경선도 했고 추대 방식으로 뽑기도 했어. 경선을 하다 보니 상인들 사이에 우애가 나빠져 추대 형식으로 바꿨지.홍 : 1990년대 이후 죽도시장은 어떻게 변했습니까?최 : 아주 오래전에는 시골 장터와 다를 게 없었어. 포항제철이 들어오면서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어. 열악했던 시장 환경도 점차 좋아졌지. 1990년대에 구획정리가 마무리되었고 화장실도 깨끗하게 정비되었어. 내가 1995년에 포항시의원이 되었는데, 그때는 칠성천 주변 환경이 좋지 못했어. 그래서 출마하기 전부터 시의원이 된다면 가장 먼저 칠성천을 복개하겠다고 결심했지. 7년간 시의원으로 일했는데 그중 칠성천 복개 과정이 뚜렷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 쉽지 않은 사업이었지만 보람이 컸던 일이야.홍 : 그즈음 아케이드도 설치되었지요?최 : 칠성천 주변의 환경이 개선될 무렵에 아케이드를 만들기 시작했어. 죽도시장의 규모가 작지 않으니 한꺼번에 설치할 수 없어 순차적으로 세웠지. 현재는 구 죽도파출소에서 남빈동 과메기거리까지 90%가량 아케이드가 설치되었어. 10년 이상 걸린 사업이야.홍 : 칠성천 복개와 아케이드 설치를 할 때 문제는 없었습니까?최 : 대부분의 죽도시장 상인들이 원했던 일이었어. 시장은 조그만 사업도 상인들 동의 없이는 진행하기가 어려워. 아케이드를 설치해야 하는데 도로에 기둥을 세웠던 상인들이 그걸 빼지 않겠다고 해서 마찰이 있기도 했어. 불법 건축물이었지만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점유권을 인정하지 않기가 어려웠던 탓이지. 하지만 칠성천 복개와 아케이드 설치처럼 공공의 이익과 관련된 문제라면 누가 나서서 추진해야 하지 않겠나?대담·정리 : 홍성식(본지 전문기자)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김진호(사진작가)

2022-07-25

천년의 세월… 당대 불교미술의 정수를 만나다

□ 신라인의 예술성 금동비로자나불불국사에는 불교 경전의 원리가 가람배치에 그대로 녹아있다는 것을 지난 회에 밝힌 바 있다. 불국사는 ‘법화경’과 ‘무량수경’, ‘화엄경’에 근거한 세 개의 불국토가 모여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는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 극락전을 중심으로 하는 아미타불의 극락세계, 비로전이 있는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의 세계가 모여 있는 것이 불국사가 염원했던 불국(佛國)인 것이다.불국사에 있는 유물들은 당대 불교미술의 정수가 담겨 있다. 금동비로자나불 좌상(국보 제26호)을 비롯해 금동아미타불 좌상(국보 제27호), 대웅전 앞에 있는 석가탑(국보 제21호)과 다보탑(국보 제20호)은 신라문화의 국제성과 독창성, 신라인의 예술적 창의력이 응집되어 있다. 우선 비로전에 모시고 있는 금동비로자나불 좌상부터 살펴보자. 비로자나(毘盧遮那)란 ‘빛을 발하여 어둠을 쫓는다’라는 의미다. 금동비로자나불은 불상외에도 황금으로 만들어진 대좌와 광배가 있었지만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 원래 금동비로자나불은 대웅전에 모셔져 있었지만 일본 제국주의 시절 금동아미타불상과 함께 극락전으로 옮겨졌고, 현재는 비로전 주존불로 안치됐다. 금동비로자나불상은 금동아미타여래좌상,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제 28호)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금동비로자나불 불상은 양감과 적절한 신체비례 등에서 이상적이면서 세련된 8~9세기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우선 눈썹이 길게 반원으로 그려져 있고, 이마와 눈두덩을 구별짓는 음각선이 한 줄 조각되어 있다. 불상은 남성적인 정취가 물씬 풍긴다. 어깨는 떡 벌어져 있고, 젖가슴은 중량감(量感)이 확연하게 느껴진다. 허리는 잘록하고 아랫배가 은근히 나왔다. 앉은 자세도 특이하다. 얕은 듯하면서도 옷감이 흘러서인지 유난히 넓게 앉아 있는 것 같다.천년의 세월을 견딘 불상인데도 마치 며칠 전에 제작이 끝난 것처럼 황금 도금이 벗겨진 것 없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광배를 제외하고는 손상된 부분도 거의 없다. 전신에 자비와 위엄이 넘친다. 반쯤 뜬 눈 뺨은 윤기있고 복스럽다. 턱은 두툼하면서도 약간의 군살이 있다. 그 모습 때문에 더 자애로운 느낌이 든다. 부처님의 법의는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도록 조각했는데 옷 무늬까지 처리한 부분이 대단히 사실적이다. 오른손 검지를 왼손으로 감싸고 있는 손 모양은 대단히 이색적이다. 고려와 조선시대 제작된 비로자나불이 대부분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형태이기 때문이다.불상의 예술성이 얼마나 뛰어난지 통일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문인인 최치원 선생은 ‘대화엄종불국사비로자나·문수·보현상찬병서(大華嚴宗佛國寺毘盧遮那文殊普賢像讚幷序)’라는 글을 써 칭찬할 정도였다.극락전의 본존불로 봉안된 금동 아미타불좌상은 ‘무한한 수명’이라는 산스크리트어로 ‘아미타유스’(Amitayus)에서 유래하여 중생들에게 염불을 통한 극락왕생의 길을 제시하는 아미타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한문으로 번역하면 무량수(無量壽)다.아미타불 좌상은 비로자나불좌상과 거의 동시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시기에 만들었지만 부처님의 형상은 비로자나불과는 조금 다르다. 원만하고 자비롭지만 동시에 약간 근엄한 느낌을 준다. 눈썹은 반원형이고 콧날은 오똑하다. 짧은 목과 양감이 느껴지는 건장한 남성의 체구, 두 무릎이 넓게 퍼져서 안정감을 주는 것은 비로자나불과 거의 비슷하다. 옷깃 안쪽에서 밖으로 늘어지는 옷 접힘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있게 형상화했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마치 상투처럼 두툼하게 머리카락이 솟아 있다. 어깨높이로 들어 약간 오므린 왼손은 손바닥을 보이고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에 올려놓고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약간 구부리고 있다. □ 석가탑 2층서 발견된 세계적인 보물불국사의 유적 중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은 역시 석가탑이다. 석가탑의 정식명칭은 불국사 3층 석탑이지만 석가탑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석가탑과 다보탑을 현재와 같이 동서로 나란히 세운 까닭은 법화경(法華經)의 내용을 구현했기 때문이다. 법화경에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데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이 옆에 나타나 설법내용이 옳다고 증명했다고 한다. 석가탑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說法塔)을, 다보탑은 다보여래상주증명탑(多寶如來常住證明塔)을 줄인 말이다.석가탑은 수많은 설화와 소설 속에서 거론된 불국사의 상징과도 같은 건축물이다. 유명세만큼 석가탑은 영욕의 세월을 묵묵히 견디어야 했다.1796년 정조대왕이 불국사에 하사품을 내려주었다는 ‘불교고금역대기’의 짧은 기록이 전부라고 할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불국사는 잊혀진 절이었다.그러다 불국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66년 9월 8일 중앙일보에 게재된 석가탑과 관련된 기사 때문이었다. 기사에 따르면 “불국사 대웅전 앞에 있는 국보 제21호 석가탑이 지난 8월29일 밤 동해 남부 일대에 있었던 미진(2도가량)으로 흔들려 탑이 6도가량 남쪽으로 기울어졌으며 탑신 4개 처가 떨어지고 2층 갑석 하단부가 균열이 있었음이 8일 현지 조사에 돌아온 도교육위원회 직원에 의해 밝혀졌다”고 했다.하지만 추후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놀랍게도 석가탑의 훼손 원인은 지진이 아니었다. 석가탑의 유물을 훔치려던 도굴꾼들이 벌인 짓이었다.도굴꾼들은 석가탑 안에 보물이 있다는 풍문을 듣고 유물을 훔치기로 했다. 9월 3일 야심한 밤 경주 지역 택시를 대절해 불국사에 도착한 도둑 일당들은 석가탑 1층 옥개석을 들어 올려 보물을 찾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돌이 너무 무거워서 돌을 들어 올리는 잭(jack)이 견뎌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당은 이튿날 밤 11시에 다시 석가탑으로 갔다. 이번에는 일당 중 한 명이 대구에서 긴급 공수한 더 큰 오일 잭을 동원했다. 1층 옥개석을 간신히 들어 올리긴 했지만 보물이 없었다. 며칠 후 다시 불국사를 찾은 일당들은 이번에는 3층 옥개석을 들어 올렸으나 유물을 찾지 못하고 석가탑에 상처만 입히고 말았다.석가탑의 파손이 도굴범들의 소행이라는 것을 뒤늦게 눈치챈 문화재보존위원들은 경찰에 정식으로 수사를 의뢰했고, 이후 9월 19일 도굴꾼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이들 도굴꾼들은 경주 불국사 뿐만 아니라 황룡사 초석, 통도사 승탑 등 무려 13개의 사찰에서 값을 헤아리기 힘든 보물들을 닥치는 대로 도굴했다고 한다.이후 문화재 관리국은 석가탑을 원상으로 복원하기 위해 10월 13일부터 석가탑 복원 공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복원작업은 엉망이었다. 당시 10월 14일자 ‘경향신문’을 보면 복원작업이 얼마나 문제가 있었는지 생생하게 알 수 있다.기사에 따르면 탑 위층부터 차례대로 해체하던 중 2층 옥개석을 들었을 때 2층 탑신석의 사리공 안에서 사리 장치를 발견하였다. 천만다행으로 도굴꾼의 손이 미치지 못한 곳이었다.보물을 발견했다는 기쁨도 잠시 2층 옥개석을 들어 올리던 장비가 부러지면서 2층 옥개석이 미리 내려놓은 3층 탑신 위로 떨어졌다. 3층 탑신은 세 조각으로 부서졌다. 아찔한 사고에 현장을 지켜보던 주민과 관광객들은 탄식과 함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도굴범들 때문에 훼손되었던 석가탑이 재차 큰 상처를 입은 것이다.다행히도 사리장엄구 등 탑신 2층에서 발견한 유물들은 훼손없이 무사히 수습할 수 있었다. 사리탑 안에는 작은 탑, 구리 거울, 구슬, 순금 종이로 감싼 진신사리가 들어 있는 은항아리 등이 천여 년이 넘은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온전한 형태로 발견됐다. 무엇보다 사람들을 흥분시킨 것은 같이 발견된 비단으로 싼 목판본 불경이었다. 전체 길이가 5m에 달하는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었다.하지만 석가탑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66년 11월 석가탑에서 나온 유물 중 사리 46개가 담겨 있던 녹색 유리 사리병을 한 스님이 옮기다 떨어뜨려 깨뜨린 것이다. 이후 깨진 유리 사리병은 억지로 이어붙인 상태로 국립경주박물관 창고에 보관 중이다. □ 화려하고 여성적인 다보탑의 매력석가탑과 함께 불국사의 상징과도 같은 다보탑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4m로 석가탑과 같다. 절 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10원짜리 동전에도 새겨져 있는 다보탑이다.석가탑이 남성적이라면 다보탑은 대단히 화려하고 여성적이다. 사면에 놓인 계단을 오르면 육중한 기단이 팔각의 몸체를 떠받치고 있다. 난간석과 연꽃잎 모양의 창문도 독특하다. 신라 조형예술의 집합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양한 조각들이 담겨 있는 것도 특징이다. 위로는 대나무, 매화 등 사군자 조각도 보인다. 다보탑은 1925년 일본인에 의해 전면 해체, 보수되었지만 아무런 보고서도 남기지 않고 또 탑 속에 발견된 사리 장엄구 등 많은 유물의 행방도 알 수 없어 큰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탑에 조각된 돌사자도 원래 네 마리였으나 세 마리가 일제 강점기에 사라졌다고 한다.앞에서 바라보는 다보탑은 한쪽이 살짝 기울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토함산의 능선과 기와지붕의 용마루 선과 탑의 정상부를 이루는 선이 일직선으로 떨어지다 보니 생긴 착시 현상일뿐 실상은 똑바로 서 있다고 한다./최병일 작가

2022-07-24

바람 춤추는 소나무숲, 청량한 물소리… 자연 품으로 간다

어떤 이들은 양산이 영축산 통도사 빼면 볼 것 없지 않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하지만 양산에서 통도사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코끼리 다리를 만지고 코끼리라고 하는 것만큼 우스운 이야기다. 양산 곳곳을 여행해보면 얼마나 많은 볼거리와 느낌있는 여행지가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낙동강 자락이 한 눈에 들어오는 임경대는 물론이고 ‘경남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내원사 계곡까지 가슴까지 청량해지는 눈부신 여행지가 가득하다. 자연속에서 힐링을 원한다면 양산으로 오시라. 오솔길을 걸어도 좋고 사찰 속에서 사색에 잠겨도 좋다. 양산에 가면 자연이 나를 푸근하게 안아주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불보사찰 통도사통도사를 가보지 않고 양산을 이야기 할 수 없다. 양산에 많은 절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역시 압권은 통도사다. 영축산 줄기에 자리한 통도사는 신라시대 선덕여왕 15년(646년)에 창건된 천년고찰(千年古刹)이다.통도사는 사찰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절경이다. 매표소인 무풍한송에서 일주문까지 보드라운 흙길이 이어진다. 무풍한송(舞風寒松)은 ‘바람은 춤추고 소나무는 차다’는 뜻이니 길이 가진 이름이 한 줄 시와 다름없다. 길 옆 작은 개울의 청량한 물소리를 들으면 더운 여름의 열기조차 사그러지는 것 같다.통도사에서 꼭 눈여겨봐야 할 것은 현판들이다. 당대 명필로 이름났던 추사 김정희와 흥선대원군의 글씨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통도사는 우리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 중 하나다. 삼보(三寶)란 불가에서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는 세 가지로 부처를 상징하는 불(佛), 부처의 말씀인 경전을 상징하는 법(法), 부처님을 따라 수행과 중생 구제를 하는 승(僧)을 말한다. 그중에서도 부처의 말씀을 기록한 대장경을 봉인한 해인사를 법보사찰, 보조국사 지눌을 비롯해 16명의 국사를 배출한 송광사는 승보사찰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금강가사를 모시고 있는 대표적인 불보사찰이다. 통도사에 모시고 있는 진신사리는 불골(부처님의 유골) 불아(부처님의 치아) 불사리(부처를 다비하여 얻은 유골)로 자장율사가 당나라로부터 가져온 것이다. 통도사 대웅전은 특이하게도 사면에 이름이 제각기 달려 있다. 동쪽은 대웅전, 서쪽은 대방광전, 남쪽은 금강계단, 북쪽은 적멸보궁의 현판이 걸려 있다.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의 위용 때문인지 대웅전에 불상을 모시지 않는다. 대신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불상을 대신한다. 금강계단은 ‘금강과 같이 단단하고 보배로운 규범’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이 항상 그곳에 있다는 상징성을 띤 것이기도 하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금강계단은 바로 부처님의 계 그 자체인 것이다. □ 서운암 수 천개 장독대 장관통도사의 암자여행은 또 다른 묘미를 준다. 통도사의 자장안에는 무려 19개의 암자가 자리하고 있는데 마치 통도사를 중심으로 요새를 이룬 것 같다. 통도사 암자 중 관람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서운암이다. 통도사 주차장 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보타암과 취운암을 지나 서운암이 나타난다.서운암은 고려 충목왕 2년인 1346년에 충현대사가 창건했고 조선 철종 10년인 1859년에 남봉대사가 중건했다고 전한다. 옛날에는 초막인 인법당이 전부였는데 근래에 성파(性坡)스님이 현재의 모습으로 일구었다고 한다. 스님은 지난해까지 통도사의 방장(方丈)을 지냈고 올해 한국불교 조계종의 제15대 종정(宗正)에 추대됐다.서운암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수 천 개는 족히 되는 장독들이다. 바람과 햇살에 익어가는 된장독과 고추장독, 간장독이 늘어선 풍경은 가히 장관이다. 전국을 돌며 장독을 모으고 옛 방식대로 장을 담그기 시작한 것이 성파스님이다. ‘신분제가 있었던 시절에도 왕족이나 양반, 상놈 할 것 없이 똑같이 사용했던 게 장독이니 우리에게 이만큼 소중한 문화유산이 어디 있겠느냐’라는 것이 스님의 생각이다. 그렇게 독을 모으고 장을 담근 지 10년이 넘었고 지금 서운암의 재래식 된장은 양산시의 특산품으로 지정되어 있다.서운암에 또 하나의 볼거리는 작은 불상이 무려 3천여 개나 모셔져 있는 삼천불전이다. 성파스님이 1985년부터 5년 동안 흙으로 구워낸 도자기로 만든 삼천불이다. 서운암 주변은 무려 100여 종이 넘는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 있는 야생화 군락지이기도 하다.통도사에서 반드시 들러봐야 할 곳은 극락암이다. 극락암은 우리 시대 큰 스님으로 이름이 높은 경봉스님이 정진했던 곳이다. 스님이 워낙 고명하다보니 수많은 이야기를 숨겨놓고 있다. □ 오봉산 임경대와 내원사 계곡도 절경양산 정취를 한눈에 굽어보려면 오봉산의 임경대를 찾아보는 것이 좋다. 양산 8경 중 7경이기도 한 오봉산 임경대(臨鏡臺)는 통일신라시대 대문장가였던 고운 최치원 선생의 시에서 유래한다.최치원 선생은 벼슬길에 물러난 뒤 문득 이 일대 암벽 위에 서서 낙동강을 바라보며 한 편의 시를 썼다.“안개 낀 봉오리 뾰족뾰족 물은 늠실늠실/ 거울 속 인가가 푸른 봉우리 마주했네/ 어디로 외로운 배 바람 잔뜩 안고 가나/ 별안간 날던 새 자취 없이 아득하네/ 낙동강의 비친 산의 모습이 마치 거울 같다”임경대는 이 시에서 유래했다. 임경대는 지난 2001년 개봉했던 ‘엽기적인 그녀’에서 전지현과 차태현이 이별을 했던 장소다. ‘견우야 ~미안해~’라고 애절하게 외치던 장소가 바로 임경대다.임경대의 풍경은 시시각각 변한다. 구름이 흘러갈 때는 운해로 뒤덮혀 바다처럼 떠다니고 황혼이 깃들 무렵이면 온 천지가 붉은 빛으로 물들여진다. 뿐이랴 눈이라도 내리면 설국이 펼쳐진다.양산의 또 다른 절경인 내원사 계곡은 ‘경남의 소금강’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절경이 펼쳐진다. 영남 알프스의 남쪽 주봉인 천성산에서 발원한 계류가 북쪽으로 흐르며 만든 내원사 계곡은 기암절벽이 계곡마다 펼쳐져 있어 신비한 느낌을 준다. 계곡 곳곳에 3층 바위와 작은 폭포와 소 병풍바위가 둘러 쌓여 있다.통도사가 남성적인 느낌이 강하다면 내원사 계곡에 있는 내원사는 다분히 여성적이다. 내원사가 비구니 스님들이 정진하는 곳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부드럽고 고운 선을 지닌 절의 모습이 어머니의 모습처럼 소담하기 때문이다. 내원사는 신라 선덕여왕 시기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한국전쟁 때 전소되었으나 1958년 비구니 수옥 스님이 중창했다.함께 가볼만한 곳양산에는 여름을 시원하게 즐길만한 곳이 많다.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이 햇빛을 받아 아름다운 오색무지개를 만든다 해서 붙여진 ‘무지개폭포’는 물이 차고 주변이 시원해서 여름철 피서지로 각광받고 있다. 가지산, 신불산, 영취산, 오봉산, 천태산 등이 만나는 곳에 있는 원동자연휴양림은 울창한 숲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천혜의 장소로 이름이 높다. 물을 테마로 한 양산테마파크와 도심 속 힐링장소인 양산디자인공원, 연인들끼리 방에서 편하게 영화를 볼 수 있는 양산영화공장도 들러볼만 하다.놓칠 수 없는 맛집양산 통도사 앞에 있는 산채전문점인 경기식당은 영축산에서 자생하는 고사리, 산나물, 푸른나물 등 7가지의 각종 산나물을 비빔밥 재료로 사용해 향이 독특하고 산나물 특유의 맛을 즐길 수 있다. 우거지 국도 담백하다. 양산의 향토음식이기도 한 민물 매운탕은 산바다집이 유명하다. 메기 매운탕을 특히 잘한다. 잡내가 전혀 없고 얼큰하면서도 시원하다. 손영환 비빔국수는 각종 야채와 과일을 자연 발효시켜 소스를 만들었다. 매콤달콤한 맛이 일품이고 뒷맛이 개운하다./최병일 작가

2022-07-21

일본 시모노세키로 복어 등 생선 수출

1960년대 후반 포항제철이 들어서면서 죽도시장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포항 인구가 급속하게 늘어났고, 도시 곳곳이 현대화의 과정을 겪는다. 도매시장의 역할을 담당했던 죽도시장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이전에는 어민들이 잡은 수산물을 서울로 보내기도 어려웠는데,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 수출까지 모색하게 된다. 급격한 변화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던 당시 죽도시장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나를 포함한 동업자들이 배 4~5척을 구해 일본 시모노세키(下95A2)로 생선을 보냈지. 포항 인근에서 많이 잡히는 방어와 삼치가 주종이었고, 고급 어종인 복어도 인기였어. 저녁 7~8시에 배가 포항을 출발하면 열 시간 정도 항해해 새벽 4~5시쯤 시모노세키에 도착하지. 그러면 하역 작업을 해서 입찰 등의 과정을 거치게 돼.홍 : 포항제철 건설과 함께 죽도시장도 큰 변화를 겪게 되지요?최 : 일거리를 찾아 사람들이 몰려오니 도시와 더불어 시장도 활성화되었지. 죽도시장은 소매도 하지만 도매시장의 역할을 했어. 생선뿐만 아니라 포항 인근에서 생산된 쌀 등의 곡물이 죽도시장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팔려나갔지. 울릉도로도 많이 판매되었고. 왜냐하면 울릉도는 쌀 생산이 안 되니까. 예전엔 수산물을 서울까지 가서 판매한다는 건 엄두를 못 내고, 대구가 근처에서 가장 큰 도시라서 생선 등을 실어다 대구에서 팔곤 했어.홍 : 서울로 생선을 보내는 방법은 따로 있었던 겁니까?최 :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서울의 경우 소량의 고급 어종을 기차에 실어 보냈어. 판매자가 포항역에 연락하면 화물 담당자들이 물건에 꼬리표를 달아 묶어 보내고, 서울역 화물 담당 직원이 물건을 받았지. 그때 서울역 바로 옆에 도매시장이 있었어. 조금 멀리는 가락동으로도 화물이 갔지. 나도 그 장사를 오래 했어. 서울에 내 물건을 위탁판매 해주던 상인도 있었지. 그로부터 한참 후에 일본으로 수출 길이 열렸어.홍 : 일본으로 생선 수출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나요?최 : 1970년대 초반으로 기억해. 선주들이 지분을 모아 수출업을 해보자는 제의가 있었어. 나를 포함한 동업자들이 배 4~5척을 구해 일본 시모노세키(下95A2)로 생선을 보냈지. 포항 인근에서 많이 잡히는 방어와 삼치가 주종이었고, 고급 어종인 복어도 인기였어. 저녁 7~8시에 배가 포항을 출발하면 열 시간 정도 항해해 새벽 4~5시쯤 시모노세키에 도착하지. 그러면 하역 작업을 해서 입찰 등의 과정을 거치게 돼.홍 : 일본을 상대로 사업하던 당시의 이야기를 좀 더 해주시죠.최 : ‘마구로(まぐろ)’라고 불리던 생선을 많이 수출했는데, 얼음을 넣어 선어(鮮魚)로 보냈지. 일본에서는 그걸 회로도 먹고 통조림으로도 만든다고 들었어. 일본 사람들이 선호하는 생선은 복어와 방어, 삼치 등이었어. 방어는 6킬로그램짜리부터 10~15킬로그램짜리가 있는데, 일본에서는 12킬로그램짜리를 선호했지. 12~13킬로그램짜리 방어가 가장 높은 가격을 받았어. 생선 수출은 1970년대 초반에 시작해 15년가량 했지. 그 일을 그만둔 건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기 전이야. 어획량이 눈에 띄게 감소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홍 : 일본 수출로 수입은 어땠습니까?최 : 장사를 해보면 많이 벌 때도 있고 밑질 때도 있지. 그때도 마찬가지였어.(웃음)홍 : 일본 사람들은 어족자원 보호에 관심이 각별하다고 하던데요.최 : 과거에도 철저했지. 일제강점기 때 아버지가 포항에서 경찰의 단속에 적발된 적이 있었는데, 어린 청어를 잡았기 때문이었어. 아주 오래전부터 일본인들은 산란기에 고기 잡는 걸 엄격하게 금했다고 해. 그런 원칙을 지켜야 특정 생선이 멸종되는 걸 막을 수 있지 않겠나? 일본 사람들이 만든 정책과 법이라도 이런 건 배워야 한다고 봐. 홍 : 수산업 관련 일을 오래 하셨습니다. 그중 독특한 게 있다면 뭡니까?최 : 어간유(魚肝油) 제조업을 했어. 어간유란 명태, 대구, 상어 따위의 간장에서 뽑아낸 지방유를 말하는데 비타민A와 비타민D가 많이 들어 있지. 그때 흰살 생선은 간이 있고 살이 붉은 등 푸른 생선은 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말하자면 상어, 명태, 조기, 아귀 등은 간이 있지만 청어, 삼치, 정어리는 간이 없지. 전쟁 직후인 1950년대 초반에 10년 정도 어간유를 만들었는데, 당시로서는 희귀한 사업이었어. 지금은 하는 사람이 거의 없지. 어간유를 만들 때 악취가 나고, 어간유를 만들고 남은 폐기물을 바다에 버려 해양환경에 악영향을 주기 때문에 사라진 것 같아. 어간유 외에도 생선에서 기름을 추출하는 일을 했어. 일제강점기엔 그것들을 모두 일본으로 가져갔다고 해. 오징어, 명태, 가오리에서도 많은 양의 기름이 나와. 그 기름으로 고구마나 감자를 튀겨 먹기도 했지.홍 : 환경 변화로 어획량이 줄어든 수산자원도 많지요?최 : 일본 사람들은 아귀 간을 무척 좋아했어. 나한테 아귀의 간만 잘라서 용기에 담아주면 좋겠다고 부탁한 일본 사람도 있었어. 지금은 귀한 해산물이 된 성게가 송도해수욕장 주변에서 다량으로 잡히던 때도 있었고. 높은 파도가 치면 성게 수백 마리가 까맣게 밀려오던 모습이 인상적이었지. 지금은 수온 변화와 해양 오염으로 그런 풍경은 옛이야기가 됐어. 심각한 문제인 만큼 고민과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홍 : 포항에서 한때 고래가 많이 잡혔지요?최 : 맞아. 포항에도 포경선이 있었지. 우리나라에 포경조합은 울산에 하나밖에 없었어. 그런 이유로 대다수의 포경선은 울산에 정박했지. 하지만 고래를 잡으러 항구를 드나드는 배를 포항과 구룡포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어. 내가 어릴 때는 포항에 포경선이 두세 척 있었고, 학산 앞바다에서는 고래 잡는 작살을 누가 잘 쏘느냐 겨루는 대회도 열렸다고 들었어. 1970년대 일본을 상대로 생선을 수출할 때는 고래고기도 한 품목이었지.홍 : 일본으로 수출할 때는 해체해서 운송한 겁니까?최 : 그렇지. 배에 싣기 전에 전부 해체했어. 고래가 워낙 크니까 통째로 운송하기가 어려웠거든. 해체하는 전문 기술자가 따로 없어서 어떤 때는 내가 고래를 부위별로 해체하기도 했어. 그 시절 가장 많이 잡혔던 건 밍크고래야. 밍크고래보다 더 큰 고래는 음력 8~9월 즈음에 잡혔지. 고래도 토속 어종이 아닌 회류성 어종이야. 고래를 잡으려면 울릉도와 독도 사이까지 배를 타고 가야 했어. 우리가 탄 배보다 더 큰 고래도 몇 번 봤다면 믿겠나?홍 : 요즘 고래고기는 비쌉니다. 그때도 그랬나요?최 : 1970년대엔 저렴했지. 밍크고래를 잡으면 학산천 밑 수협 마당에 올려놓고 해체했어. 고래고기가 돼지고기보다 쌌던 시절이야. 선박 사정으로 수출이 어려울 때는 국내에서 소비해야 하니까 싼 가격에 팔렸어.홍 : 고래는 버릴 게 없다고 하던데 무슨 뜻입니까?최 : 고래 껍데기, 꼬리, 뱃살, 내장, 잇몸, 뼈에 붙은 살 등을 골고루 삶아서 한 묶음으로 만드는데, 이런 걸 수십 개 쌓아놓으면 소매로 장사하는 아주머니들이 작업장으로 받으러 왔어.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포항 풍경이야. 땔나무가 비싸서 고래 뼈를 땔감으로 사용하기도 했지. 고래기름은 비누로도 만들어 썼고. 죽도시장에 고래고기가 담긴 바구니를 늘어놓고 돼지고기처럼 한 근, 두 근 팔던 때가 있었어.홍 : 고래를 잡을 수 없게 된 건 언제부터죠?최 : 1986년부터 전 세계에서 상업적 포경이 금지되지 않았나. 그전까지는 포항에서 고래가 적지 않게 잡혔어. 포획된 고래 중 큰 것은 62~63자, 그러니까 18미터가 넘었지. 그때도 그런 고래는 가격이 상당하니까 몇 자, 몇 치까지 치수를 쟀어. 포경선 선장들이 수첩에 고래를 포획한 날짜와 시간, 고래의 길이와 무게를 정확하게 기록했지.홍 : 포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가본 적도 있습니까?최 : 생선을 싣고 두어 번 갔었지. 여권 대신 선원수첩을 챙겨 갔어. 시모노세키의 검역소 앞에 배를 대면 세관원이 올라와 여러 가지를 조사했지. 생선을 선적해 일본을 오가는 주식회사 효창수산이라는 곳에서 전무로 일하던 시절이야. 가끔은 일본 업체에서 우리 물건을 위탁판매했어. 포항에 비슷한 사업을 하는 회사가 세 곳 있었는데, 효창수산이 가장 컸어.대담·정리 : 홍성식(본지 전문기자)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사진 제공 : 김진호(사진작가)

2022-07-20

초록그늘 아래서 역사의 숨결을 느끼다

여행 없는 여름이 너무 길다.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한여름에 훌쩍 떠나는 며칠간의 휴가는 삶의 에너지로 역할 한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그러나, 2020년 벽두. 누가 청하지 않았음에도 불현듯 찾아온 ‘코로나19 바이러스’ 탓에 제대로 된 여름휴가를 즐기지 못한 것이 벌써 3년째 접어들었다.사회적 거리두기 방침이 완화된 올해는 ‘그래도 좀 나으려니...’ 기대했건만, 그 기대가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2022년 여름이 야속하다. 한반도 중부에서는 연일 폭우가, 남부엔 견디기 힘든 폭염이 긴 기간 지속되는 와중에도 어김없이 여름휴가철은 눈앞에 다가왔다.다시금 증가한다는 코로나19 감염자 관련 보도를 보자면 아직 해외로 떠나기엔 시기상조(時機尙早)인 것 같고, 어쩔 도리 없이 사람들과 다닥다닥 붙어서 더위를 식혀야 하는 실내수영장과 워터 파크 등은 여전히 조심스럽다.이럴 땐 그래도 ‘거리두기’가 가능하고, 가까운 곳에 자리한 피서지를 찾는 게 인지상정. 그럼 어디에 그런 곳이 있을까?경북도에 거주하며 ‘물 좋고 시원스런 휴가지’를 검색하는 이들이라면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을 올여름 가족 피서지로 결정하는 게 어떨까 싶다.비교적 조용한 계곡에서 물놀이를 즐길 수 있고, 거기에 더해 조선의 우뚝한 유학자가 남긴 역사의 향기까지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옥산서원 일대다. □ 유네스코도 인정한 한국 정신문화의 핵심 공간평일 한낮. 다소 번잡한 경주 시내를 벗어나 옥산서원이 자리한 안강읍 옥산리로 가는 길. 여름을 여름답게 하는 매미 소리가 요란했다. 어느새 도시의 짜증스러움은 저편으로 사라지고, 잊고 살았던 어린 날 시골의 성하(盛夏) 풍경.쭉쭉 높다랗게 자라나 더위를 식히는 풍성한 그늘을 품은 수백 년 된 나무들이 도열한 군인처럼 옥산서원 방문자들을 반기고 있었다.입에 발린 수사지만 경치가 그저 그만이다. 더할 나위 없는 피서지로 느껴졌다.도착했으니 이제 옥산서원이 어떤 곳인지를 알아볼 시간. 서원 입구의 표지판이 사적 제154호인 이 서원의 연혁(沿革)을 설명하고 있다.“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李彦迪·1491 ~1553)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세웠다. 이언적은 조선 중종 때의 문신으로 그의 성리학은 퇴계 이황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종묘에 명종의 공신으로 모셔져 있다.그가 타계한 후 1572년에 경주부윤 이제민이 지방 유림의 뜻에 따라 서원을 창건했으며, 1574년에는 선조에게서 옥산서원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사액서원(賜額書院·왕으로부터 편액·서적·토지·노비를 받아 그 권위를 인정받은 서원)이 됐다.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렸을 때도 헐리지 않고 그대로 살아남은 47개의 서원과 사당 중 하나다.”사실 옥산서원은 서원 자체보다 맑은 물이 흐르고 산새가 지저귀는 주변의 빼어난 풍광으로 여행자들에게 더 유명하다.하지만, 서원이 지닌 가치와 그 안에 깃든 조선의 선비정신을 이해하고나면 옥산서원의 기와 하나, 사람들이 오가는 조그만 문 하나에 담긴 세세한 사연에도 자연스레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한국의 ‘서원’은 우리나라만이 아닌 세계의 역사·문화학자들이 지대한 관심을 가지는 건축물이다.그런 차원에서 유네스코(UNESCO·교육·과학·문화의 보급과 교류를 통해 국가간 협력증진을 목적으로 설립된 국제연합 전문기구)는 한국의 몇몇 서원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기도 했다.옥산서원은 소수서원, 도산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등과 함께 ‘조선시대 전국 각지의 지식인들이 제향을 올리고 강학을 하며 성리학 교육 체계를 만들어 가던 공간’으로 인정받았다.성리학이라는 조선의 통치·사회이념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 외에도 옥산서원은 건물이 지닌 형식미도 높게 평가받는다.전문가들은 “동시대에 만들어진 다른 사원들이 자유로운 건축 양식을 보이는데 반해 옥산서원은 틀에 짠 듯 질서정연한 형식을 갖췄다”고 입을 모은다.건축물 자체에서 긴장과 절제가 느껴진다는 건 ‘조선 선비’ 회재 이언적의 품성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 유학 강의 듣는 어르신들 모습에 겹쳐진 회재의 그림자방앗간을 찾았으면 떡을 뽑아야 하고, 포도청에 갔으면 억울한 사연을 알려야 하는 법. 서원을 방문했으니 안을 둘러봐야 하는 게 정해진 수순이다.옥산서원의 입구인 체인문을 지나 이언적의 위패가 봉안된 체인묘를 가장 먼저 만나봤다. 품격과 기품이 느껴지는 미려한 문이고, 건축물이었다.제사를 올리기 위한 제수를 보관하던 전사청을 지나 그 옛날 경주 지방의 유학자들이 학문을 연구하던 무변루와 구인당 등을 보러 가니,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 수십 명이 젊은 강사에게 ‘유학(儒學) 강의’를 듣고 있었다. 옥산서원에 썩 잘 어울리는 모습.그랬다. 이언적이 살았던 15~16세기 조선의 학자들은 땡볕이 쏟아지고, 장마철 습기가 방바닥에 곰팡이를 피우는 한여름에도 의관을 제대로 갖추고 사서(四書)와 삼경(三經), ‘춘추(春秋)’와 ‘예기(禮記)’를 읽었다. 그게 그 시절 선비들의 점잖은 피서방식이었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기자가 옥산서원을 찾은 날은 기온이 섭씨 35도를 오르내렸다. 말 그대로 찜통더위. 그럼에도 강사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메모까지 하는 어르신들 모습에서 ‘현대를 사는 회재’를 보았다고 하면 과장일까?이쯤에서 옥산서원의 주인이라 해도 좋을 회재 이언적이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기자의 얕은 역사지식으론 짧고 알기 쉽게 설명하기 어려우니 아래 ‘한국 미의 재발견-궁궐·유교건축’의 한 부분을 인용한다.“회재는 조선 중종 때의 성리학자이자 문신이다. 주희의 주리론적 입장을 성리학의 정통으로 밝힘으로써 조선시대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정립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호를 ‘회재’라 한 것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의 호인 회암(晦庵)에서 회(晦)자를 취함으로써 주희의 학문을 따랐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회재의 성리학은 이후 퇴계에게 이어진다. 회재는 1610년(광해군 2년) 9월에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 등과 함께 문묘에 종사됐다. ‘동방오현(東方五賢)’이라 불리는 이들은 조선조 도학(道學)의 우뚝 선 봉우리로 평가받는다.회재의 고향은 경주 양동마을이다. 만년에 관직을 그만두고 양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경주 안강읍 옥산 시냇가에 자리를 잡은 후 안채를 짓고 개울에 면하여 사랑채 독락당(獨樂堂)과 정자 계정(溪亭)을 경영한다.자연을 벗 삼으며 약 6년간 성리학 연구에만 전념했다. 그런 연유로 회재가 세상을 떠난 후 독락당에서 가까운 곳에 계곡을 사이에 두고 옥산서원이 창건되었다.” □ 옥산서원 계곡에서 들려오는 아이들 웃음소리물론 다른 견해도 있겠지만, 회재에 관해서는 “고위직을 두루 거치고 높은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음에도 어느 한 편에만 서지 않고 중용(中庸)을 지킨 조선의 학자”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이에 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쓰고 있다.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이언적은 사화(士禍·조선시대 선비들이 정치적 반대파에게 몰려 참혹한 화를 입었던 사건)가 거듭되는 사림(士林)의 시련기에 살았던 선비로서, 을사사화 때는 좌찬성·판의금부사의 중요한 직책으로 사림과 권력층 간신 사이에서 억울한 사림의 희생을 막으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사화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그래서일까? 이언적의 넉넉한 품이 옥산서원과 주변 자연환경까지 자신의 풍모를 닮게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서원을 나와 졸졸거리는 물소리를 따라 검고 평평한 바위가 인상적인 계곡으로 올라갔다.유치원에서 소풍을 온 것인지 아장아장 걷는 아이들이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고 한낮의 무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그래. 어리다고 더위를 느끼지 않을 턱이 없다. 그네들의 천진난만한 피서가 더 없이 귀여워 보였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7-19

“문경 발전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

신현국 문경시장이 지난 1일 취임 이후 문경발전을 위해 동분서주 하고 있다.긍정의 힘만이 문경 발전을 앞당길 수 있다는 신현국 시장은 필사즉생(必死卽生)의 각오로 문경의 미래를 개척해 나가겠다고 한다.자신을 지지해준 시민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는 신현국 시장.그는 주어진 4년 임기 중 자신의 약속을 반드시 지켜 문경시민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주저없이 내비쳤다.대구지방 환경청장을 역임하고 문경시장을 두 번이나 거친 그는 공직과 행정에 대한 경험이 풍부하다.취임사에서 찬밥, 더운밥 가리지 않고 문경 미래에 도움이 되는 것은 뭐든지 하겠다고 했다.새롭게 문경시정의 책임자로 돌아온 그에 대한 문경시민의 기대도 남다르다.취임 직후 MOU 체결, 국민의 힘과 당·정 정책간담회 개최 등 광폭 행보를 보이고 있는 신현국 시장을 잠시 만나 시정구상과 각오를 들어봤다. -취임직후부터 엄청 바쁘신 것 같습니다.△네, 지난 8일에 골프장인 버드힐 문경CC 조성사업, 12일에는 경비행기 이착륙장, 훈련장 등을 갖춘 항공테마파크 조성 MOU를 체결했습니다. 그리고 9일에는 당·정 정책간담회를 가졌고, 그 외에도 서울, 세종, 대구 등 공약사업 추진을 위해 분주하게 다니고 있습니다.-시장 취임 전부터 상당한 준비를 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지난 6월 1일 지방선거에서 당선이 확정되고 제가 시장으로서 해야 할 일만 생각했습니다. 무엇이 문경을 발전시킬 것인지, 시민들이 진정 원하는 바는 무엇일지. 이번에 체결한 업무 협약 건도 취임 전부터 준비해왔기에 빨리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현재 문경은 인구 감소 문제로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문경을 살릴 길은 ‘개발’에 있습니다. 대학·공공기관 유치하고, 기업과 민자사업 유치해야 문경이 발전합니다.앞으로 우리 시는 투자양해각서(MOU) 체결을 최대한 활용하여, 사업에 추진력을 받게 할 것이고, 시는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적극 지원할 것입니다.또한 찬밥, 더운밥 가리지 않고, 문경에 도움이 되는 일은 무조건 도전할 것입니다. -시장님의 각오가 시정 슬로건에 담겨져 있는 것 같으신데.△민선8기 시정 슬로건을 ‘긍정의 힘! Yes 문경’으로 정하였습니다.1% 가능성에도 포기하지 않고 국군체육부대를 유치한 것처럼 소극적 시정, 부정적 관점을 타파해 발전도 Yes, 화합도 Yes, Yes! 긍정의 힘으로 시정을 이끌겠습니다. 대학 유치, 기업 유치에 온 힘을 다해 인구 늘리고, 경제 살리는데 집중할 것입니다.-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문경도 인구감소, 원도심 공동화 같은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인구증가와 원도심 활성화 방안을 이야기해 주시죠.△저는 인구 감소 해결책으로 대학 유치, 기업유치와 같은 대규모 유치를 통한 인구 유입이 바람직하다고 보고 있습니다.특히 저의 공약 사항 1번과 2번이 대학 유치인데, 학교 유치로 학생들을 유입해 상주 인구를 늘리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 숭실대의 경우 교양 과정 캠퍼스로 문경 캠퍼스를 활용하는 것입니다. 기존의 주소 갖기 운동 등은 숫자 늘리기 밖에 안 되기에 문경에서 소비하고 생산하는 경제 인구를 증가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또 문경의 원도심이 많이 위축되어 있습니다. 코로나19 장기화의 영향도 있고, 인구가 줄어들다보니 빈 점포도 많이 생겼습니다. 저는 원도심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문화의 거리를 활성화시키고, 제2청사도 시내에 설치하고, 점촌역 인근의 도심지를 개발할 방안도 계획하고 있습니다.하지만 무엇보다 원도심이 활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인구 증가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이에 학교 유치, 기업 유치에 더 집중하고자 합니다.-선거로 갈라진 민심을 하나로 묶을 방안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제가 11년 만에 다시 문경시장(민선 4, 5기 시장역임)으로 취임할 수 있도록 해주신 이유도 이것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갈등과 반목을 지속해서는 안됩니다.문경은 인구 감소, 상경기 위축 등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해묵은 갈등은 털고, 오직 문경 발전만을 보고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런 측면에서 공무원 인사 역시도 실력 위주로 탕평책을 쓰겠다는 것이며, 취임 직후 공무원들에게도 공정한 행정을 주문하였습니다. 지켜봐주시기 바랍니다.문경/강남진기자

2022-07-19

순간의 감동을 영상으로 전해주는 사진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 변화의 순간을 찰나의 빛으로 포착해 붙잡아 둔다. 사진이다. 사진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시간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사진은 기록이고 그것은 때로 증언하고 고발하는 역사가 된다.그런데 피사체의 순간을 일정한 틀 속에 가두면서 사진가의 의도가 개입된다. 무엇을 어떻게 어느 순간을 선택하느냐 하는 선택은 전적으로 사진가의 안목이다.50여 년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어 온 사진가 강위원. 그는 “자신이 느낀 감동을 영상언어를 통해 보는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 사진이라고 한다.사진을 오래 찍으면 촬영 기술이 발전할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대상을 보는 안목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것이 경륜이고 그래서 사진가는 ‘아는 것만 보이고 보이는 것만 찍을 수 있다’고 한다. - 요즘 스마트폰으로 손쉽게 동영상을 촬영한다. 동영상과 사진의 차이는 무엇인가.△동영상은 전후의 움직임과 소리를 넣을 수 있어서 보다 사실적이다.그러나 사진은 정지된 화면 속에서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보다 더 섬세한 조율을 필요로 한다.- 주로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어왔다. 신문 사진과 사회고발성 사진 등과 어떻게 다른가.△다큐멘터리 사진과 저널리즘 사진 사이에는 비슷한 것과 서로 다른 것이 존재한다.둘 다 보는 사람들에게 의사전달(Communication) 기능을 가지지만 다큐멘터리는 스토리를 가지며 여러 장의 사진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저널리즘 사진은 한두 장의 사진에 모든 것을 집어넣어야 한다. 특히 신문 사진은 독자의 눈높이에 맞는 사진과 신문의 마감시간이라는 시간적 제약을 받는다. 사회고발성 사진은 다큐멘터리 사진에서 다루는 소재로서 마감시간에 여유가 있는 잡지 등에서 테마로 다루고 있다.나의 작업은 다큐멘터리 작업인 경우가 많지만 사회 고발적이거나 저널리즘적인 요소보다는 기록적인 면을 중시하여 역사적이거나 민족적으로 의미 있는 ‘그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는 교육적인 면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사진에서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어디에 있나.△사전적 의미에서 프로와 아마의 차이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느냐, 아니면 자신의 이념이나 사상 등을 가지고 개인적 작업을 하느냐로 구별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프로 사진가는 의뢰를 받은 대상이나 개인적인 작업에 관계없이 철저한 사전조사와 준비를 갖추고 작업을 하는 사람이다. 특히 개인적으로 추구하는 작업은 언젠가는 매체의 요청으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언제나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분야에 대해 정보 수집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아마추어의 특권은 주제나 이즘 등에서 자유롭다는 것이다. 즉 어떠한 소재라도 본인의 욕구에 따라 작업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아마추어들은 대부분 목적의식 없이 작업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들은 유명인들이 발표해서 성공한 대상들을 소재로 다루거나 공모전 입상을 목표로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진 찍기를 취미로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취미로 사진을 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좋아하고 잘 아는 분야를 택하라’고 권한다. 나는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는 논어 구절을 사진 작업의 좌우명으로 삼는다. 그만큼 좋아하고 잘 아는 분야는 쉽게 접근할 수도 있고 깊게 빠져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어떠한 경우라도 깊은 관찰과 노력이 없이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성취를 이룬 사람이 사진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면 훨씬 깊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권한다.- 예술사진이란 어떤 사진을 말하나. 모든 사진은 예술사진인가.△사진은 예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제작 당시에 예술적인 목적으로 작업을 하며 그 목적을 달성했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서도 예술사진으로 대우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출발은 저널리즘이나 다큐적인 사진이라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서는 예술작품의 대접을 받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로버트 커파의 ‘쓰러지는 병사’나 ‘노르만디 상륙작전’ 같은 사진은 촬영 당시에는 저널리즘에 속했지만 지금에는 그것들이 예술사진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예술사진은 철저하게 미학적으로 계산되어 만들어진 Making Photo쪽의 사진이거나 시공을 초월한 걸작들을 일컫는 말이다.- 촬영 현장에서 연출하고 싶은 충동이나 유혹은 없었나.△현장을 정리하거나 재구성하는 경우와 현장을 조작하는 것은 엄청나게 다르다. 이는 본질을 유지하느냐, 본질을 왜곡시키거나 형태를 변화시키느냐의 문제다.사진을 시작할 당시 내 생활 주변을 무대로 촬영했는데 지금 보면 연출한 사진도 있다. 차츰 대상을 넓히면서 있는 그대로 가식 없는 모습을 촬영하려 애썼다.결정적 순간, 감동을 주는 순간을 찾으려 애쓰면서 연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가식 없는 모습’을 담았다. 당시에는 주목 받지 못했지만 그 모습들이 사라진 지금 보면 본질에 충실한 도큐멘트였다.- 잘 찍은 사진과 좋은 사진은 같은 말인가.△기술적으로 잘 찍은 사진이라고 해서 모두 좋은 사진은 아니다. 좋은 사진은 촬영자의 의도를 보는 사람에게 제대로 의미전달을 하면서 감동을 주어야 한다. 사진을 보는 순간 무엇인가 큰 울림이 있으면 완벽한 사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에서 찍는 기술이나 기법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한다. 사진에서 인문학은 소용없나.△사진은 누구나 찍을 수 있고 기술적인 면을 습득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 누구나 짧은 시간에 기술을 습득할 수 있다. 그러나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문제는 쉽게 터득할 수 없다. 그것은 사진이라는 매체가 갖는 다양한 영상문법을 터득해야만 가능하다. 인문학적인 요소는 사진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사진이 단순한 기술적인 매체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을 조율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은 사진 속에 인문학적인 바탕이 깔려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사진은 사진 독자적으로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러나 사진이 다른 분야와 호흡을 맞출 때에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예술사진이나 다큐멘터리 사진, 광고 사진이 모두 인문학과 연결돼 위력을 발휘하는 사진들이다.- 50여 년 사진작업을 하면서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특히 기억에 남는 작품이나 자랑하고 싶은 작품은.△내가 촬영하고 발표한 모든 사진들이 하나하나 기억을 자극한다. 기억, 한 장 한 장 사진을 볼 때마다 촬영했던 당시가 생각나며 느꼈던 감동을 되살려 준다. 내가 감동을 받지 못했던 대상을 가지고 누구를 감동시킬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생각했다.특히 기억을 되살린다면 처음 사진에 입문해서 내가 살고 있는 주변을 기록한 사진들이다. 50년이 훨씬 지났다. 모두가 사라지고 누구도 믿지 않을 모습이다. 사진의 기록성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백두산을 많이 찍었다. 계기가 있나.△1990년부터 수십 차례 백두산을 찾아 촬영했다. 1980년대 후반 대구 시민회관에서 구보다 히로시(久保田 博二)의 ‘북녁의 산하’라는 사진전을 보면서 언젠가는 백두산을 가봐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다가 1990년 당시 경북산업대학(현 경일대학교) 교수들을 포함한 지인들이 관광을 포함한 탐사팀을 만들 때 합류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백두산 촬영은 그 뒤 10여 년 동안 계절을 달리하면서 한 해 서너 차례씩 수십 차례 계속됐다.언제나 천문봉 부근 기상대에 베이스캠프를 치고 움직였다. 천문봉 자하봉 화개봉 등에 접근했고 때에 따라 현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았다. 새벽 3시면 출발해 해 뜨기 전에 촬영장에 도착해서 해 뜬 후 1 ~2시간 촬영하고 11시면 기진맥진해서 숙소로 돌아왔다.천의 얼굴을 가진 백두산 날씨는 종잡을 수 없었다. 백두산에서 300일 이상의 밤을 지냈지만 정말 운이 좋은 날이 있었다. 그 날은 필름을 80통이나 찍을 수 있었다. 내 백두산 10년 사진 중 최고작 40편을 꼽으면 절반이 그날 하루 찍은 것이었다.-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공공기관 등 곳곳에 걸려있더라.△백두산 작업을 모아 1993년과 1995년 전시회를 열고 작품집을 발간했다. 특히 1995년 광복 50주년 기념 ‘백두산 4계와 야생 동식물전’은 나의 사진 인생에 한 획을 긋는 영광스러운 전시였다.촬영에는 학술진흥재단의 연구비를 지원받는 행운도 누렸고 학교의 지원으로 전시회를 열 수도 있었다.인문학자와 공동 연구가 가능한 것이 백두산 사진의 성공이 됐고 같이 갔던 사진기자가 자기 이름으로 회사에 전송해 이름을 도용당하기도 했다. 백두산 자연보호국에 근무하면서 백두산과 야생 동식물을 촬영한 중국인 왕영씨와 함께 한 전시로 경향 각지에서 개최됐다.백두산 촬영을 통해 지금까지의 풍경 사진에 대한 개념을 바꾸게 됐다. 돌 한 개, 나무 한 그루라도 단순한 시각에서 벗어나 의미를 찾고 역사적 사실과 연결시켜 정신적 요소까지 강조하는 이퀴발란스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사진기자로 월남전에 종군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한국 기자들이 취재가고 있다.△월남전과 우크라전은 모든 것이 다르다. 월남전을 회고하면 전쟁이란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당시 월남의 마을에 남자라고는 팔 다리가 떨어져나간 부상자와 노인이 있을 뿐이었다. 젊은 여자들은 모두 도회지 술집으로 나갔다. 지금 생각하니 그런 현장을 찍었어야 했다. 전쟁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사진이니까.- 사진가로서 평시에 사물을 대하는 태도는 일반인과 어떻게 다른가.△사진을 처음 접하는 순간에서부터 지금까지 사진 속에 빠져서 살아왔다. 초기의 사진과 지금의 사진 속에서 사진적으로는 변한 것이 없는 것 같다.단지 인간적으로 숙성이 되고 인문학적으로 단련이 되어서 대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50년이 넘는 시간을 사진이라는 분야에 외골수로 파묻히다 보니 대상을 보는 눈이 새롭게 뜨이는 것 같다. 내가 표현한 이미지가 어떤 느낌을 보여줄 것인가는 항상 고민하는 화두다.□ 강위원(姜衛遠·73)사진가. 전 경북산업대 교수. 영상인류학자.대구출생. 대구공고, 영남대 공대 화학공학과 졸. 홍익대 산미대학원 사진전공 미술학석사.경북공고 교사, 경일대 사진영상학부 교수 역임.연변대 예술학부 초빙교수 역임, 북경 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역임.대한민국사진전람회 초대작가, 운영위원장, 심사위원 역임. 대구사진대전 초대작가, 운영위원, 심사위원 역임.‘팔공산’ ‘백두산의 사계’ ‘조선족의 오늘’ ‘보고싶다’ 등 사진집 및 저서 16권.광복 50주년 기념 ‘백두산 4계와 야생 동식물전’ 등 국내외 개인전 27회,금복문화상(2002), 녹조근정훈장(2010), 대구시문화상(2018), 한국사진문화상 공로상(2018) 수상.외삼촌의 영향으로 화학공학을 전공했으나 1968년 월산예술학원에서 사진에 입문하면서부터 사진에 매료됐다. 자연을 재해석해 환상적인 색의 세계를 보여준 ‘Fantasy of Nature’ 사진집 출판과 개인전으로 주목을 끌었고 사진집 ‘팔공산’으로 인정받았다. 스스로를 ‘영상인류학자’로 정의하는 그의 사진 작업은 사진예술의 한계를 초월해 시대를 기록하고 역사적 흔적을 담아내려 노력했다. /이경우 편집위원

2022-07-18

구획정리로 2층 건물 여러 채 들어서

변변한 건물 하나 없이 뻘밭과 시금치밭 주위로 하천이 흐르던 죽도시장의 1940~1950년대 풍경. 6·25전쟁 직후에는 적지 않은 피난민이 몰려와 시장에서 힘겹게 생계를 이어갔다. 냉장 시설과 운송수단이 없어 어렵게 잡은 생선이 썩어가는 걸 지켜보기만 하던 시절이다. 그러나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면 문제의 해결책은 언제나 존재하는 법. 반세기 전 죽도시장의 상인과 포항 어민들은 어떤 방식으로 답답한 그들의 상황을 헤쳐 나갔을까? 홍 : 처음 죽도시장에 들어갔을 때의 풍경이 기억나십니까?최 : 물론이지. 주변은 온통 뻘밭, 시금치밭, 갈대가 자라는 하천이었어. 시장 인근에 배를 올리는 도크가 있었지. 송도다리 근처부터 죽도시장 앞까지 조선소가 늘어서 있었고, 그 옆 뻘밭에서 염전을 만들어 소금을 생산했어. 친구 아버지가 작은 염전을 운영했는데, 소금을 햇볕에 널어 말리고 밑에 볏짚을 깔아 제염(製鹽)을 했지. 돌아보면 아득한 추억이야.홍 : 그게 6·25전쟁 이전이군요.최 : 그렇지. 길가에 작은 좌판을 펴놓고 아버지가 학산에서 생선을 사다 주면 그걸 팔았어. 그 돈으로 형님은 초급대학을 졸업했지. 나는 둘째 아들이야. 아버지는 내가 당신을 돕길 원했어. 밑으로 동생들이 많으니 누군가는 일하고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 온 식구가 먹고사는 문제에 매달려야 했던 시절이지.홍 : 6·25전쟁 때도 죽도시장은 운영되었습니까?최 : 온전히는 아니지만 상인들은 장사를 이어갔지. 조선시대에는 포항에 시장이 없었어. 연일과 오천, 흥해에 큰 시장이 있었지. 포항 시민들은 거기서 장을 봤다고 해.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중앙국민학교 옆에 일본인들이 이용하던 작은 시장이 만들어졌지. 그때 죽도시장 쪽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1930년대 들어서면서 아주 미약한 형태의 죽도시장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들었어. 멀리 보면 죽도시장의 역사가 거의 100년에 이르지.홍 : 전쟁 때 포항에도 피난민들이 왔었는지요?최 : 과거 남빈사거리에 육지와 바다를 이어주는 다리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도개교(跳開橋)가 있었고, 칠성천을 따라 포항역 앞까지 배가 오갔어. 그 아래는 뻘밭과 갈대밭이었고. 칠성천에서 시작해 동빈부두까지 모조리 그랬지. 6·25전쟁 이후 1960년대까지 그곳에 연탄재가 상당히 오랜 기간 매립되었어. 그런 과정을 거치며 죽도시장이 조금씩 커졌지. 전쟁 때 북에서 피난민들이 많이 내려왔어. 그들은 큰 밑천 없이 시작할 수 있는 장사를 했지. 그때는 뻘밭에 좌판을 깔고 앉으면 바로 자기 자리가 되었어. 아이들과 늙은 부모를 먹여 살리기 위해 장사에 나선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죽도시장에 적지 않았어.6·25전쟁 초기인 1950년 8월 5일부터 8월 20일까지 포항에서도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이른바 ‘포항 전투’다. 이는 부산 교두보 전투의 일부이자 당시 벌어진 큰 규모의 교전 중 하나였다. 포항 전투는 3개 북한 사단이 동해안으로 침투하려는 공세를 유엔군이 저지함으로써 유엔군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이후 고향을 떠나 피신해 있던 포항 시민들은 일상으로 복귀한다. 그러나 폭격으로 초토화된 도시를 보면서 많은 사람이 절망에 빠졌다. 전쟁 이전의 모습으로 포항을 바꾸려는 노력은 한국전쟁 기간 중에도 계속됐다.홍 : 독립적인 사업을 해보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까?최 : 어려운 시절이니 젊은이들이 뭘 해보겠다는 계획을 세우기가 힘들었어. 그저 먹고살기에 바빴지. 아버지가 고기를 사오면 그걸 건조해서 팔고, 가게 뒷바라지를 거의 7~8년 동안 했어. 그러면서 스무 살을 훌쩍 넘겼지. 1961년에 개정된 법이 ‘1도시 1시장제’였는데, 포항시가 농협(농산물 도매시장), 수협(수산물 도매시장), 채소와 과일을 파는 시장의 허가를 내줬어. 일정 시간이 흐른 후 수산물 도매시장 업무 대행을 법인을 설립한 포항수산이 맡았지. 법인 설립에는 생선을 판매하던 사람들, 과일과 채소를 팔던 사람들이 더불어 참여했어.홍 : 시장에서의 청년 시절은 어땠나요?최 : 다른 바닷가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포항 역시 운송수단이 부족했어. 낡은 미제 트럭을 빌려 생선을 싣고 와 죽도시장에서 팔았지. 일제강점기와 광복, 전쟁이 이어지면서 시장에는 질서가 제대로 잡히지 못했어. 어수선했던 시절이야. 땔나무를 하거나 고기를 잡아도 옮길 방법이 없어 팔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면 믿겠나? 나의 20대는 그렇게 우여곡절 속에서 흘러갔지.홍 : 죽도시장의 변화가 시작된 건 언제쯤인지 기억하십니까?최 :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구획정리사업이 진행되었지. 그전까지는 뻘밭 위에 점포와 좌판을 벌여놓으니 질서도 없고 정확한 경계도 없었어. 그런 곳들을 구획정리해 7평 규모의 2층 건물을 여러 채 지었어. 형편이 좋았던 사람들은 자기 집 외에도 옆집을 사서 소유 토지를 넓히기도 했고. 당시는 아파트가 없던 시절이야. 가게 앞에 물건을 놓고 장사하다가 밤이 되면 살림집으로 개조한 2층으로 올라가 잠을 잤어. 다들 어렵게 살던 시절이라 웬만한 집은 대부분 방 한두 칸이 전부였지. 공동화장실에선 아침마다 전쟁이 벌어졌어. 대소변을 보려고 길게 줄을 섰고, 소액이지만 돈을 지불한 후에야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었어. 상수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때라 구획정리사업 기간 전후로 길가마다 수돗물을 받으려고 물통이 줄지어 서 있었지.홍 : 죽도시장에서 거래되는 생선의 종류는 어떻게 변해왔죠?최 : 과거 포항 바다에서는 고등어, 꽁치, 오징어가 주로 잡혔고, 구룡포에서는 상어도 많이 잡혔어. 거래되는 품목은 지금도 크게 변한 게 없어. 포항 특산물로 불리는 과메기는 일제강점기 때도 먹었지. 광복 무렵에는 청어 과메기가 많이 만들어졌어. 꽁치 과메기도 1970년대부터 시작되었으니 역사가 반세기를 넘겼지. 흥미로운 건 과메기는 엄청나게 많이 잡히는 청어를 제때 처리하지 못해 만들었다는 사실이야. 냉장 시설도 운송수단도 턱없이 부족하던 때였으니 그랬지. 서울을 포함한 다른 지역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반으로 쪼개 말린 과메기를 택배로 보내게 된 건 20년이 채 안 돼. 홍 : 죽도시장 이야기를 하면서 대게를 빼놓을 수 없지요.최 : 1940~1950년대엔 월포리 앞에서도 대게를 잡았지. 어부들이 대게를 잡아 밤새 삶아서 새벽에 죽도시장 아버지 가게로 가져오면 소매상인들이 그걸 받으러 오곤 했어. 그때는 킹크랩도 곧잘 잡혔는데 가격은 지금처럼 비싸지 않았어. 대게가 그렇게 많이 잡히던 때가 아니라서 소비도 잘 안 됐고. 다들 일하느라 바빠서 대게를 삶거나 쪄서 먹을 시간도, 삶의 여유도 없었지.홍 : 그렇다면 언제부터 대게가 유명세를 타게 된 겁니까?최 : 동해의 대게와 홍게가 유명해진 건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야. 킹크랩은 이제 거의 전량을 러시아에서 수입하지. 내가 어릴 땐 포항 바다에서 잡힌 대게는 물론, 아이만한 커다란 킹크랩을 먹어보기도 했어. 그리고 거제도나 가덕도만큼은 아니지만 한동안 후포에서 대구가 많이 잡혔어. 포항역 앞에서 트럭에 그걸 싣고 부산, 마산, 진주로 팔러 다니던 시절이 있었지. 내가 20대 중반이던 때야. 그때 먹어본 진주의 기막힌 대구뽈찜 맛이 아직 기억나는군.홍 : 오랫동안 몸담은 포항수산의 설립 과정을 설명해주시죠.최 : 포항수산은 내가 30대 때 합자회사로 설립되었어. 설립자는 정영달 씨야. 나는 회사가 만들어지고 1년 후에 지분을 일부 사서 참여했어. 포항수협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있었고, 포항수산은 당시 갓 만들어졌으니 두 곳의 다툼이 있을 수밖에 없었지. 포항수협과 포항수산의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은 꽤 오랜 기간 이어졌어. 그렇지만 발전은 갈등 속에서 오는 것 아닌가? 독점은 횡포를 낳지만, 경쟁은 발전의 디딤돌이 된다고 생각해. 그 과정에서 어획 방법이 진일보했고, 국내를 넘어 수산물의 해외 수출 길도 열렸지.홍 : 포항수산에서 맡았던 직책은 뭡니까?최 : 마지막에 대표까지 했어. 정영달 씨가 손을 뗀 후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인수했고, 조세창 씨가 대표를 맡았을 때 내가 전무를 맡았지. 조 대표는 오래 재직하지 못했어. 나는 포항수산 대표로 10년 넘게,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일했어.대담·정리 : 홍성식(본지 전문기자)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사진 제공 : 김진호(사진작가)

2022-07-18

‘산소 카페’ 청송군으로 떠나는 여름휴가 어때요?

예년보다 일찍 다가온 폭염과 폭우가 사람들을 힘겹게 하고 있다. 어느 곳 할 것 없이 지역 불문이다.아침부터 푹푹 찌는 더위가 시작되거나, 예상하지 못한 급작스런 소나기에 난처한 경우가 적지 않다. 이른바 ‘견디기 힘든 여름’이 지속되고 있다. 올 여름은 뜨거운 공기를 외부로 내보내지 못한 채 그 열이 스트레스와 폭염을 부르는 ‘열돔 현상’으로 낮 최고기온이 영상 38도를 오르내리는 더위와 잠을 이루기 힘든 열대야가 벌써부터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 세계적 경제 침체로 인해 사람들의 몸과 마음 모두가 지쳐가고 있는 상황. 한 가지 어려움이 또 생겼다. ‘코로나19의 재확산’이 눈에 띄게 드러나면서 팬데믹과 엔데믹의 무너져버린 경계로 인해 혼란스러움까지 가중되고 있다.몇 해 전이라면 여름휴가 계획을 세우며 행복감에 들떴을 시민들은 스태그플레이션의 영향 아래 물가 변동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겹친 사회적 악재 속에서 어쩔 줄 모르는 상태에 빠져 있다. 누구랄 것 없이 힘든 2022년 여름을 맞고 있는 것. 이럴 때는 차라리 모든 걸 잠시 잊고 일상에서 벗어나 맘 편히 쉬어가는 것도 마음과 몸을 달래는 하나의 방편이지 않을까?이런 상황 속에서 청정 자연을 배경으로 시원스런 여름 휴가지로 각광받고 있는 청송군이 느긋한 쉼을 갈구하는 이들에게 “행복한 여행을 위해서라면 모든 걸 가볍게 준비해야 한다”는 말을 전하고 있어 주목된다. 여러 가지 조건이 즐거운 여행을 막고 있지만, 모처럼 다가온 휴가철을 마냥 걱정 속에서 보낼 수만은 없는 일.‘맑고 깨끗한 공기를 맛보며 편안하게 쉬어갈 수 있는 여행지’를 지향하는 ‘산소 카페 청송군’이 준비한 볼거리와 먹을거리, 그리고 즐길거리를 아래 소개한다.건강과 치유를 동시에 맛볼 수 있는 공간으로의 떠남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정보가 될 수 있을 듯하다. ▲역사와 힐링의 공존하는 ‘신성계곡 녹색길’가장 먼저 소개할 곳은 청송군 신성계곡이다. 여기는 관광공사가 주관한 여름철 관광지로 선정될 만큼 피서의 명소로 유명하다.갯버들 하천 길, 갈대 봇도랑 길, 방호정 길, 자암 길, 하천 과수원 길, 백석탄 길로 이어진 12km의 길은 맑은 물과 푸른 숲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길게 이어진 녹색길을 따라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걷다 보면 일상에서 벗어나 코로나 블루(우울증)로 인해 지친 영혼을 치유하는 안식의 시간을 갖게 된다. 또한, 이 길은 신성리 공룡발자국화석, 백석탄 등 4곳의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명소를 품고 있다.신성리 공룡발자국의 경우 2003년 산사태 발생으로 발견된 곳으로, 발자국 수는 약 400개.공룡 모형이 설치돼 있는 소공원은 학습장과 포토존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리고 인근 신성리지질학습관에는 지질공원에 대한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신성계곡은 절경과 맑은 물, 그리고 빽빽한 소나무 숲을 자랑하며, 방호정에서 고와리 백석탄에 이르는 15km의 계곡 전체가 청송8경의 1경으로 지정된 곳이다.도지정 민속문화재 제51호인 방호정은 방호 조준도가 지은 정자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생모 안동 권씨(安東權氏)의 묘(墓)가 바라다 보이는 곳에 세운 정자다. 신성계곡을 찾게 된다면 꼭 들러봐야 할 명소.여기에 더해 안덕면 고와리 계곡에 있는 백석탄은 알프스산맥의 미니 암봉 같은 바위군으로 하얀 바위 사이로 흐르는 옥 같이 맑은 물은 ‘이곳이 바로 선계가 아닌가’라는 착각 속으로 방문객을 이끈다.계곡 흐름에 따라 오랜 시간 동안 수마(水磨)되고 침식돼 암반에 항아리 모양의 깊은 구멍들이 생겨 있으며, 조선 인조 때 경주 사람 송탄 김한룡이 이곳의 시냇물이 맑고 아름다워 고계(高溪)라 칭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달기약수탕에 갔다면 약수 닭백숙도 맛보길이미 전국적으로 유명한 달기약수탕은 청송읍 부곡리에 위치하고 있다. 그 유명세가 시작된 것은 지금부터 130여 년 전 조선 철종 때다.금부도사를 지낸 권성하가 벼슬에서 밀려나며 낙향해 부곡리에 살면서, 마을 사람들과 수로공사를 하던 중 바위틈에서 솟아오르는 약수를 발견하게 됐다고 한다.그 물을 먹어보았더니 갑갑했던 가슴에서 시원한 트림이 나오고 속이 편안해져 그 후에도 즐겨 마시게 되었다.이곳 달기약수탕은 아무리 가뭄이 심해도 솟아나는 물의 양에 변함이 없고 엄동설한에도 얼지 않으며, 색과 냄새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또 약수로 밥을 지으면 푸른색 윤기를 돌면서 찰기도 있어 지친 여름철 입맛을 돋우는데 그만이라고 한다.또한 매년 음력 3월 30일이 되면 마을 주민들은 이곳에서 권성하 공을 기리며 약수가 끊이지 않고 솟아오르기를 기원하는 약수령천제를 지내고 있다.그 명맥이 40년 넘게 유지되고 있어, 청송 달기약수터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또 하나의 흥미로운 볼거리를 제공해 준다. 달기약수탕까지 와서 시원한 달기약수 한 모금을 마셨다면, 주위의 먹을거리를 둘러보는 게 당연한 순서일 것이다. 이는 더위에 지친 몸의 원기를 회복하고 싶은 여름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즐거움이다.달기약수탕 인근에는 약수와 각종 약재를 사용해 맛깔나게 끓여낸 약수닭백숙을 여름철 보양식으로 판매하는 식당이 적지 않다. 이중 한 곳에 들러 백숙을 맛보는 것도 청송 여행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약수닭백숙은 철분 함량이 높은 약수가 닭의 지방을 제거해 맛이 담백하고 소화가 잘된다고 알려졌다. 위에도 부담이 적다.달기약수에 닭, 인삼, 황기, 감초, 대추, 녹두 등을 넣어 푹 고아서 닭이 알맞게 익으면 닭은 건져내 따로 담고, 국물에 쌀을 넣고 죽을 쒀 닭고기와 함께 먹는 게 이른바 ‘청송 약수닭백숙 맛있는 먹는 방법’이다.이 닭죽은 위와 장에 좋고 몸의 기운을 돋우어 준다고 해서 해마다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온다. 그렇기에 청송군엔 경치 좋은 곳에 자리한 오래된 닭백숙 맛집이 유난히 많다. ▲얼음골과 잘 정돈된 캠핑장도 청송의 매력폭염과 폭우가 반복되는 여름이라면 청송군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매력적인 여행지가 바로 청송 얼음골이다.얼음골 계곡 주변은 한여름 외부 온도가 영상 32도를 넘으면 얼음이 어는 곳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청송 얼음골은 골이 깊고 수목이 울창하며 다른 지역 관광지와 달리 상대적으로 인적이 드물다. 그렇기에 산새들의 지저귐 속에서 계곡의 골을 따라 부는 시원한 바람과 맑은 공기를 한껏 느낄 수 있는 명소로 잘 알려져 있다.수려한 산세와 울창한 수목 덕분에 전국에서 가장 맑은 공기를 맛볼 수 있는 명소로 자리 잡은 청송은 캠핑과 삼림욕을 즐길 곳이 많다는 것도 자랑 중 하나다.청송자연휴양림, 부남면 청송오토캠핑장, 상의자동차야영장, 수달캠핑장 등이 바로 그곳이다.이곳들 모두는 꼭 여름이 아니더라도 사시사철 가족단위 캠핑객들이 찾는 곳으로, 도시에서의 바쁜 삶을 짧은 시간이나마 잊고 자연 속에서 치유를 찾아가는 ‘힐링 여행지’로 이름을 높이고 있다.장기화 되고 있는 코로나 블루(Corona blue)에서 벗어나 진정한 휴식의 시간을 가지고 싶은 마음은 사람들의 보편적 심정이다.성큼 다가온 여름휴가 시즌을 맞아 도심을 피해 싱그러운 자연과 깨끗한 물, 여름이 주는 풍성한 기운을 즐길 수 있는 ‘산소카페 청송군’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마음의 쉼표’를 그려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김종철·홍성식 기자

2022-07-18

불국사 화려한 외양 뒤에는 불교의 원리가 녹아있다

□ 복원에서 제외된 구품연지터취재를 위해 수많은 사찰을 가봤지만 불국사만큼 사람의 마음을 끌리게 하는 절은 별로 없다. 여러 번 보았기에 가람 배치도 훤하고 절에 대해 잘 아는 듯하나 누군가 불국사에 대해 묻는다면 제대로 대답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실제로 불국사의 화려한 외양은 알아도 불교의 원리가 설계에 철저하게 녹아있는 절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문 것 같다.불국사 고금창기에 따르면 불국사는 규모가 무려 2천여 칸(3.64㎞)에 이르는 대가람이었다고 한다. 불국사는 임진왜란으로 대부분 소실돼 폐허가 됐다. 17세기 초부터 복구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사찰로서 명맥만 유지하다 1969~1973년에 걸쳐 현재의 형태로 복원했다. 유감스럽게도 복원은 온전한 형태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때 불교의 원리와 경전에 충실했던 초기 형태로 복원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청운교와 백운교, 연화교와 칠보교 사이에 구품연지(九品蓮池)라는 커다란 인공연못이 있었는데, 이 연못은 조선 영조 3년까지 존속하다 사라졌다고 한다. 절 내로 유입되어야 할 물이 고갈되고 토사가 덮치면서 자연스럽게 매몰된 것으로 보인다.1973년 불국사 복원 당시 구품연지터로 추정되는 동서 39.5m, 남북 25.5m, 깊이 2~3m 정도의 연못 석축이 발견됐다. 그러나 단체관람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복원에서 제외됐다고 한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보랏빛 물안개가 피어난다는 자하문(紫霞門), 물 위에 뜬 누각 같다는 범영루(泛影樓), 물 위의 흰 구름 같은 다리 백운교(白雲橋), 푸른 구름을 닮은 청운교(靑雲橋)도 모두 구품연지를 중심으로 붙여진 이름이기 때문이다.서방 극락정토를 묘사한 ‘관무량수경’에 “극락정토에는 연꽃이 피어있는 큰 연못이 있다. 물은 맑고 깨끗하여 바닥이 들여다보이고 꽃들은 황금빛으로 빛난다. 극락정토의 대중들은 이 연지에 둘러앉아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라고 쓰여있다. 이 연못이 바로 구품연지다.주요 사찰마다 연지를 조성하는 것은 일주문을 지나 경내에 들어서는 순간을 이미 사바세계를 떠나 불국토에 들어선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불국사 고금창기에 의하면 토함산에서 계곡을 타고 흘러 내려온 물이 절 마당의 지하를 거친 뒤 유구를 거쳐 구품연지에 흘러내리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해가 쨍하게 맑은 날이면 물가에 생기는 아름다운 무지개를 범영루에서 볼 수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물길도 막혔고 석재 유구만 남아 있다. □ 그렝이 기법으로 만든 불국사 석축불국사가 불완전하게 복원되었는데도 꾸준히 찾게 되는 이유는 어느 사찰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절의 형태 때문일 것이다.불국사는 사찰 입구를 지나면 가장 먼저 보이는 석축부터 남다르다. 유홍준 교수는 불국사 건축의 아름다움은 석축(石築)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불국사의 석축물들을 자세히 관찰하면 유 교수의 말에 저절로 수긍이 간다. 삼국유사에도 불국사 석축에 대해 “동부의 여러 사찰 중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라고 했을 정도다.불국사의 석축 조성방법은 크기가 다른 돌을 깎아서 맞추는 한국 전통 건축기법인 ‘그렝이 기법’을 사용했다. 경사지에 두 개의 단을 조성하고 거기에 석축을 쌓았는데, 아랫단은 자연석을 수평으로 절단하지 않고 곡면에 맞추었다. 윗단은 다듬은 돌로 인공적인 미가 풍기도록 쌓았다. 단순한 듯하면서도 변화를 주는 석축은 다른 사찰들과 확연히 다르다.‘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서서’를 쓴 미술사학자 최순우 선생은 불국사의 석축에 대해 “크고 작은 자연 괴석들과 잘 다듬어진 장대석들을 자유롭게 다루면서 장단 맞춰 쌓아 올린 이 석단의 짜임새를 바라보면 안정과 율동, 인공과 자연의 멋진 해화(諧和)에서 오는 이름 모를 신라의 신비로운 정서가 숨 가쁘도록 내 가슴에 즐거운 방망이질을 해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특히 범영루 아래의 석주는 절묘하기 이를 데 없다. 석단 위에 널판같이 뜬 돌인 판석(板石)을 세웠는데, 밑부분은 넓고 중간돌기둥을 지나면 다시 가늘고 길어진다. 기둥 돌은 전부 8개씩 다른 돌로 되어 있고,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조립했다. 범영루 석주는 수미산(須彌山)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수미산은 현실에 있는 산이 아니라 불교 설화 속에서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상상의 산이다.불국사의 석축물들은 단순히 불교 건축의 미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승과 속을 구분 짓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석축 밑은 범부의 세계이고 석축 위는 불국토인 셈이다. 흔히 청운교와 백운교가 좌우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계단의 윗부분이 청운교고 아랫부분이 백운교다. 돌로 만든 33개의 다리를 거쳐 자하문에 들어서면 대웅전과 석가탑, 다보탑이 나오는데 이는 상징적으로 불국정토에 들어섬을 의미한다. □ 각각의 건물이 독립된 독특한 가람배치불국사는 가람 배치도 특이하다. 일반적인 사찰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전각이 배열되었는데 불국사는 회랑, 즉 담장을 쳐 각각의 건물들을 독립시켰다.불국사의 주요 건물인 청운교, 백운교, 범영루, 자하문, 좌경루와 뒤쪽 대웅전까지 회랑이 빙 둘러 있다. 중심건물 뒤에 강당(무설전)을 둔 고대 가람의 전형적 배치형식이다. 회랑은 부처님에 대한 존경심이 반영된 건축물이다. 정문으로 바로 들어가 부처님을 마주하는 것은 불경한 행위로 여겨 회랑이 일종의 차양막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회랑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견이 있다. 원래 불국사 회랑이 지금처럼 꽉 막힌 모습이 아니라 기둥 위에 지붕만 얹은 일종의 개방식 회랑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이들이 많다. 아사달과 아사녀의 전설에 나왔던 석가탑과 다보탑의 그림자가 구품연지에 닿으려면 지금처럼 막힌 구조의 회랑이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불국사를 관람하면서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청운교와 백운교를 올라 자하문으로 들어설 수 없도록 막아버린 점이다. 자하문을 넘어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을 마주해야 하는데 오른쪽 언덕배기를 올라 대웅전과 무설전이 있는 경내로 바로 진입하게 된다.불국사 보존의 문제나 안전상의 이유가 있겠지만 사찰을 지을 때 석축을 만들고 구름다리를 만든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 33계단을 반드시 거쳐 경내로 들어오게 했던 이유는 세속의 인간이 계단을 하나씩 오르면서 부처의 경지를 깨닫기 바랐던 불교적 사유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자하문을 넘어 대웅전에 들어서야 석가탑과 다보탑의 존재가 명징하게 각인된다. 두 탑은 마치 대웅전을 호위하는 무사처럼 늠름하다.석가탑과 다보탑은 석가모니가 사바세계에서 법화경을 설법할 때 다보여래(다보부처님)가 현신한 다보탑이 땅속에서 솟아올라 그 설법을 듣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불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축물은 대웅전 서쪽에 있는 극락전이다. 서방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여래를 모시는 극락전은 칠보교와 연꽃 모양의 돌이 맵시 있는 연화교를 올라야 만날 수 있다. 연화를 넘어서면 극락세계의 정문인 안양문(安養門)이 나오고 극락전의 아미타불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2007년 정해년, 현판 뒤 처마 밑에 숨어 있던 길이 50㎝ 정도의 목조돼지상이 극락전에서 발견되면서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불국사 극락전은 임진왜란 때 훼손됐다가 조선 후기에 재건된 건물이다. 훼손되기 전에도 극락전 현판 뒤에 황금빛을 띤 목조돼지상이 있었다는 사료는 찾아볼 수 없다. 조선 후기 이후 복원과정에서 누군가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찰 건축에 돼지상을 만들어 숨겨 넣은 곳도 불국사가 유일하다. 황금돼지를 만든 이유에 대한 설은 대략 두 가지다. 황금이 뜻하는 풍요와 부를 중생들이 충분히 누리길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어졌다는 설, 앞만 보고 달리는 멧돼지처럼 수행자도 멈춤 없이 정진하라는 의미로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극락전의 황금돼지상이 유명세를 타다 보니 극락전 앞에 쇠로 만든 황금돼지상을 따로 만들었다. 외국 관광객들이 불국사를 찾아 황금돼지상을 어루만지며 인증 사진을 찍는 것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최병일 작가

2022-07-17

“화합·협치로 소통행정 ‘시민 행복시대’ 열겠다”

민선 8기 제10대 경산시장에 취임한 조현일 시장. ‘꽃피다 시민중심 행복경산’을 슬로건으로 28만 명의 경산시를 이끌어 나갈 조 시장의 시정은 변화의 중심에서 머물고 싶고 살기 좋은 도시, 차이가 차별되지 않도록 시민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 직접 발로 뛰어 시민과 소통하고 공유하며 좋은 기업을 유치해 일자리를 창출하고 아이와 부모가 모두 행복한 명품교육 도시, 살고 싶은 웰니스도시 조성 등 경산의 행복한 미래 대전환을 꽃피우는 것이다. 민생부터 챙기고 경쟁력 있는 도시, 명실상부한 대학도시, 교육도시, 시민의 행복공동체 구현, 시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겠다는 조 시장과의 일문일답으로 경산시의 미래를 예측해 본다. -민선 8기 제10대 경산시장 취임을 축하하며 앞으로 4년간의 경산시정 추진의 가장 중요 포인트는 무엇인가.△누구나 수긍하고 인정하는 인사다. ‘인사가 만사’라고 말하듯이 인사를 통해 공직자의 사기를 북돋우면 시민의 행복은 따라온다고 본다.28만 시민과 공직자들이 어우러질 때 양질의 행정서비스가 제공되고 시민 중심의 행정, 원-스톱의 행정으로 시민의 만족도는 저절로 높아질 것이다. 격무부서의 공직자들이 실제적인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인사를 정착시키고자 외부인사로 구성된 인사혁신TP 팀을 운용해 인사를 예측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할 것이다. 즉 관행과 정으로 포장된, 청탁으로 인사가 좌우되지 않을 것이다.-평소에 자주 사용하는 사자성어(四子成語)나 격언이 있다면 무엇이며 그 이유는.△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고진감래(苦盡甘來)다. 선출직은 어려움도 많고 힘든 사람들도 보게 돼 이들에게 늘 고생 후에는 좋은 일이 반드시 있을 것이니 희망의 끈을 놓지 말 것을 이야기했고 나 자신에게도 입버릇처럼 각인시킨 말이다. 희망은 모든 것을 견딜 수 있기 때문에 시민과 공직자들에게 말이 아닌 실천으로 고진감래의 모범을 보여 줄 것이다. 지금의 경산이 있는 이유가 우리의 앞사람들이 희망으로 열심히 살았기 때문이라 확신한다.-앞으로 4년간 경산시정에서 가장 이루고 싶은 것은.△와촌과 남천을 연결하는 종축 고속화도로의 완공과 신대구부산고속도로의 구일(남천) 하이패스 IC 개설이다. 종축 고속화도로는 국도 25호선과 4호선을 연결하고 청통와촌 IC에 연결돼 지역의 남·북부권의 균형발전과 산업단지의 물류 수송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종축 고속화도로의 한 축을 담당할 남산~남천 국도 대체 우회도로는 지난해 12월 제6차 국도·국지도 5개년 계획에 이미 신청됐다. -시민이 행복한 경산을 만들기 위해 △살고 싶은 도시환경 등 5대 시정목표를 설정했다. 5대 시정목표를 자세하게 설명해달라.△경산시정의 5대 목표는 살고 싶은 도시환경을 포함해 △일자리 중심 미래경제 △지켜 주는 행복 복지 △시민 중심 적극 행정 △사람 중심 교육문화 등이다.첫째, 살고 싶은 도시환경을 위해 대구 도시철도 1·2호선 진량 연장 순환선 추진과 대구 도시철도 3호선 경산 연장, 광역도로 신설로 동서남북 어디나 통하는 쾌적하고 안전한 도시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와촌~하양~진량~남산~남천을 연결하는 경산의 대동맥 종축 고속화도로는 지하철 연장과 맞물린 시너지 효과로 경산의 균형적인 발전의 큰 틀이 될 것이다.둘째, 일자리 중심 미래경제는 기업과 일자리가 넘치는 ICT(정보통신기술) 허브도시이자 미래경제도시 경산을 위한 것이다. ICT는 정보 기기인 하드웨어와 운영에 필요한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정보를 수집·생산·가공·보존·전달·활용하는 모든 방법을 말한다.대임지구의 경산지식산업센터와 경산미래융합타운, 대학들의 창업센터가 융합되면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ICT 창업의 메카로 경산이 자리 잡을 수 있다.셋째, 사람 중심 교육문화는 시대가 원하는 미래 인재의 숲, 명품 교육도시 조성과 다양한 문화와 찾고 싶은 즐거움이 넘쳐나는 웰니스(웰빙과 행복, 건강의 합성어) 도시를 조성하는 것이다. 교육혁신 시범도시 사업추진으로 대학이 지역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진정한 대학도시 경산을 건설하겠다.넷째, 지켜 주는 행복 복지는 근심 걱정과 차별 없이 지속 가능한 돌봄 서비스로 책임지고 늘 지켜 주는 복지를 실현하는 것이다.육아와 문화생활이 동시에 가능한 생활문화센터, 작은 도서관 등 생활권 문화시설과 프로그램 확충, 공공시니어타운 조성, 노인·장애인 일자리 확대 등을 시행하게 된다. 또 지역 곳곳을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풍부한 관광명소로 만들고 일상 속 소확행이 누구에게나 보장되는 ‘생활관광 핫플레이스 경산’을 완성하는 것이다.다섯째, 시민 중심 적극 행정은 존중받는 시민의 힘이 확실한 경산발전의 에너지로 작용하는 것으로 시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시민의 복리를 위해 신바람이 나게 일하는 즐거운 공직문화를 만들어내겠다. 시민 중심의 열린 행정, 현장에서 보고 들으며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을 시정에 담아내고 시민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안은 충분한 숙의 과정을 거칠 것이다. -시민들에게 부탁하거나 요구할 것이 있다면.△지켜봐 달라는 것과 힘내시라는 것이다. 선거로 민심이 갈라진 것을 봉합, 화합·협치할 시간을 주고 느긋하게 지켜봐 주는 것이다. 경산시정을 시장 독단이 아닌 경쟁자의 좋은 의견은 시정에 반영해 추진하는 협치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시민들의 가계 안정을 돕기 위한 특별지원금을 추석 전에 지급할 예정으로 추경과 정부의 교부세로 560억원의 특별지원금 재원을 마련해 1인당 20만원을 경산사랑카드로 지급해 지역의 내수경기를 활성화 시킬 것이니 민선 8기를 믿고 기다려 주었으면 한다.경산/심한식기자 shs1127@kbmaeil.com

2022-07-17

“광복 전부터 갈대밭에 형성된 죽도시장”

전통시장은 서민들의 꿈과 희망이 땀과 눈물을 매개로 영그는 공간이다. 포항 죽도시장 역시 다를 수 없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 이후 조그만 좌판 몇 개가 뻘밭에 들어서며 시작된 죽도시장의 역사는 포항 근현대사와 궤적을 함께한다. 포항수산 대표와 죽도시장번영회장을 지낸 최일만 선생은 바로 그 죽도시장에서 반세기 넘게 삶을 의탁했다. 그의 삶은 죽도시장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최일만 선생의 일생을 되짚어보는 건 죽도시장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면밀하게 들여다보는 행위와 동일한 의미일 터. 바로 이것이 그를 만나 오랜 시간 속 깊은 이야기를 들었던 이유다. 홍성식(이하 홍) :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좀 해주시죠.최일만(이하 최) : 1936년 영일군 대송면 송정동 120번지에서 태어났어. 당시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후릿배가 적지 않았지. 그물을 배 두 척에 싣고 바다로 나가 펴면 육지에서 배로 연결된 줄을 사람들이 당기는 방식의 어업이야. 선친이 그걸 운영하고 관리했어. 멸치와 조그만 물고기들이 잡혔고, 그걸 주변 숲에서 말리는 걸 보며 유년시절을 보냈지.홍 : 1945년 광복 무렵의 기억은 있습니까?최 : 내가 열 살 때 해방되었어. 일제강점기 10년을 살았는데, 다행인지 우리 동네엔 한국 사람을 괴롭히거나 고통을 주던 일본인은 없었어. 장흥초등학교(현 대송초등학교)에 다녔는데, 학교에 가기 전에는 동네에서 좀 멀리 떨어진 서당에서 천자문을 공부했지. 지금으로 치면 유치원에 해당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훈장님이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던 시절이야.홍: 어린 시절의 꿈은 무엇이었나요?최: 당시 아이들은 대통령이나 장군 같은 거창한 장래 희망을 가지지 못했어. 바다가 가까우니 배를 타고 먼 나라에 가보는 것이 꿈이라면 꿈이었지. 다들 먹고살기에 바빠 구체적인 희망을 가지기 힘들었어. 나도 열 살 무렵부터 집안일을 도왔어. 밭에 비료를 뿌리고, 볏단을 지고 날랐지. 그래야 겨우겨우 생계유지를 할 수 있었어. 그즈음에 부친이 후릿배 일을 그만뒀어. 청어를 많이 잡던 시절인데, 어느 날 집에 오니 아버지 배에서 일하던 선원 세 명이 파도에 휩쓸려 죽었다고 하더군. 아버지가 선주로서 책임을 져야 했지. 그 사고로 가세가 크게 기울어 힘들어졌던 기억이 생생해. 그래서 친구들과 놀기보다는 아버지 일을 많이 도와야 했어.홍 : 1948년에 고향에서 죽도시장 인근으로 이사한 겁니까?최 :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아버지 배의 선원 두 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또 발생했어. 아버지가 사건을 마무리한 후 대송면을 떠나 죽도시장 근처 포항 시내로 이사했지. 죽도동 3번지였던 것으로 기억해. 내가 국민학교 5학년 때 선친께서 어구(그물, 노 등) 파는 일을 시작했지. 그때는 포항 전체를 통틀어도 엔진 없이 노나 돛으로 움직이는 배가 대부분이었어.홍 : 죽도시장의 태동을 곁에서 지켜봤겠군요.최 : 죽도시장에 처음 들어온 것은 1948년 즈음이었어. 광복 전에도 작은 규모지만 시장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해. 주위가 사람들이 다니기 힘든 갈대밭이다 보니 규모는 작을 수밖에 없었지. 1948년쯤에는 어시장으로 배가 오갔어. 사람들이 건너다닐 다리가 없었던 탓이야. 시장 반대편 동네로 건너다닐 때는 줄로 연결된 바지선을 이용했지. 1950년대 초반까지 그랬어.죽도시장은 포항시 북구에 자리한 전통시장으로 부지 면적은 14만8천760㎡이고, 점포 수가 1천200여 개에 달한다. 죽도시장 역사의 출발점이 언제인지는 몇 가지 이견이 있다. 하지만 1950년대 포항 내항의 늪지대에 노점상이 모여들면서 자연적으로 형성되었고, 1969년 10월 죽도시장번영회가 설립되면서 본격적으로 출발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과거 죽도시장은 경북 동해안과 강원도 일대의 농수산물이 모여드는 장소인 동시에 유통의 요충지였고, 지금도 그 명성이 유지되고 있다홍 : 죽도시장에 정착한 1948년에는 어떤 생선이 주로 잡혔나요?최 : 청어가 많이 잡혔고 대구도 흔했지. 냉동고와 저장시설이 없어 고기를 많이 잡아도 보관이 어려웠어. 어획된 대부분의 생선은 명태처럼 덕장을 만들어 건조해서 먹었지. 아깝게도 잡은 생선이 썩어서 버리는 경우도 흔했어. 유통망이 거의 구축되지 않은 데다 소금도 비싸서 보관과 판매가 힘들었지.홍 : 당시 죽도시장의 풍경을 떠올려 보신다면.최 : 처음 죽도시장에 들어와 작은 창고 안에 방을 만들었어. 당시에는 땔나무가 귀했지. 영일, 기계, 흥해는 산과 들에 풀이나 나무가 많아서 땔감을 구하기가 쉬웠는데, 포항 시내와 죽도시장엔 땔나무를 구할 곳이 없었어. 그래서 외할머니가 1년에 한 번씩 참나무 숯 수백 포대를 사서 창고에 보관했지. 그 숯으로 풍로를 이용해 식구들이 밥을 지어 먹었어. 남빈동에 가면 연일 쪽에서 마른 솔잎과 장작을 팔러온 나무꾼 40~50명을 볼 수 있었지. 많이 사면 나무꾼이 지게에 지고 집으로 배달해주고, 적은 양을 구입하는 사람은 땔감을 직접 들고 가야 했어.홍 : 전쟁에 대한 기억도 있을 텐데요.최 : 6·25전쟁이 터졌을 때 외할머니가 창고에 보관하던 숯이 모조리 타버렸어. 그뿐만 아니라 폭격으로 죽도시장 대부분이 불에 탔어. 전쟁 때 죽도시장은 지금의 3분의 1 규모였는데 좌판과 점포가 주로 칠성천(七星川) 주변에 모여 있었지. 송정동으로 피난을 갔다가 포항에서 인민군이 물러간 후 외할머니 댁으로 갔어. 그때 훨훨 타고 있는 숯을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해. 포항국민학교 운동장에서 군인들의 부탁으로 소에게 먹일 꼴을 베어오던 생각도 나는군.홍 : 친척이나 친구가 전쟁통에 다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까?최 :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어. 나는 포항에 폭탄이 떨어질 땐 피난을 가 있어 인민군을 보지 못했어. 다만 친구들과 나무하러 갔다가 길가에서 군인 시체를 본 적은 있지. 그게 국군이었는지, 인민군이었는지는 모르겠어. 아이 때였으니 철모르고 수류탄과 탄피를 주우러 다니기도 했지.홍 : 바닷가 소년이니 수영은 잘했겠습니다.최 : 물에 빠지면 살아남을 정도는 했지(웃음). 형산강은 폭이 넓어. 강 사이에 섬이 있었으니까. 친구들과 헤엄쳐 섬 갈대밭에 가서 갈대를 꺾기도 했지. 그 갈대밭은 사라호 태풍 때 섬이 사라지면서 함께 없어졌어.홍 : 죽도시장에서의 본격적인 활동은 언제 시작한 것인지요?최 : 한국전쟁 직후인 열대여섯 살 때야. 그때 아버지가 어구 장사를 했어. 고향 사람들이 아버지 물건을 사주었기에 큰 어려움 없이 운영할 수 있었지. 선친과 내가 일생 경험한 것은 바다와 관련된 일뿐이었어. 당시 죽도시장엔 고등어와 청어 등을 파는 좌판 형태의 가게가 10여 곳 있었어. 냉장 트럭이 없던 시절이라 운송이 어려웠지. 그나마 생선을 자전거에 실어 나르는 것이 현대화된 형태였을 정도였어. 구룡포까지 가서 꽁치와 고등어를 실어오는 것도 큰일이었지. 그걸 좌판에서 손님들에게 팔았어. 그때를 죽도시장 형성기로 봐도 무방할 것 같아. 노인들은 힘에 부치니까 주로 젊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몇 시간씩 걸려 구룡포를 오가며 생선을 실어 날랐지. 당시 포항수협은 학산천 옆 하구에 있었어. 일본인들이 운영했던 냉동공장도 있었던 걸로 기억해. 바다에선 정어리가 엄청나게 잡혔고, 조금 지나서는 청어가 많이 잡혔어.홍 : 70년 전에도 포항에서 청어가 많이 잡힌 모양입니다.최 : 정치망으로 다양한 종류의 고기를 잡았지. 영일만에 포항제철이 들어서기 전에는 어장이 넓었어. 우럭, 장어 같은 토종 어종은 별로 없었고, 계절 따라 움직이는 회류성 어종이 대부분이었어. 소달구지조차 귀한 시절이라 대도동 쪽 바다에서 잡힌 고기는 조그만 배에 실어 날랐지. 당시 포항의 인구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었어. 팔지 못한 생선은 잘 덮어뒀다가 다음 날 팔곤 했지. 얼음을 구할 수 없어 생선 보관도 어렵던 시절이었거든. 지금 사람들은 믿기 어렵겠지만. ‘해양과학용어사전’에 따르면 정치망(定置網)이란 자루 모양의 그물에 테와 깔때기 장치를 한 어구를 어도에 부설해 대상 생물이 들어가기는 쉬우나 되돌아 나오기 어렵도록 만든 어구를 지칭한다. 잠망(蠶網), 장망(張網) 함정어법을 쓰는 어구를 말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유도 함정어법을 쓰는 것만을 뜻한다. 어구를 일정한 장소에 일정 기간 부설해두고 어획하는 어구 어법이며, 단번에 대량 어획하는 데 쓰인다. 대략 수심 50m 이하 연안의 얕은 곳에서만 사용하는 게 일반적이다.홍 : 죽도시장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최 : 10대 중반에 시장 사람이 되었지. 아버지를 따라 시장에 들어갔는데 무슨 거창한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었어. 생계가 어려우니까 궁여지책으로 죽도시장에 자리를 잡았지. 그때 남빈동 사거리 쪽은 집이 몇 채 없었고, 시장 규모도 지금의 30% 정도밖에 되지 않았어.최일만1936년 경북 영일군 대송면 송정동에서 태어났다. 선주이자 수산업자였던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1945년 광복 이후 죽도시장에 들어가 그곳에서 잔뼈가 굵었다. 좌판 생선 판매부터 시작해 해산물 운송, 위탁판매, 양식업, 수출업 등 다양한 수산 관련 일을 하며 죽도시장의 변화를 지켜봤다. 포항수산 대표와 사단법인 죽도시장번영회 회장으로 오랫동안 활동했으며, 1995년 포항시의원에 당선되었고, 다음 선거에서 재선했다. 2005년 죽도시장 활성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산업자원부장관 표창을 받았다.대담·정리 : 홍성식(본지 전문기자)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사진 제공 : 김진호(사진작가)

2022-07-13

TANGO 삶과 밀착된 춤을 바라본다는 것은…

지난 9일이었다. ‘특정한 사람’과 ‘소수의 동호인들’만이 즐기던 춤으로 인식됐던 남아메리카 춤 탱고(Tango)가 시원스런 바다를 배경으로 대중화돼 주목을 끌었다.한여름 밤을 뜨거운 열기로 수놓은 ‘영덕 고래불 해변 탱고 페스티벌’은 멀고 먼 나라의 이국적인 문화로 생각되던 탱고를 영덕군민은 물론, 경북도민들에게 한 걸음 더 가깝게 만들어준 행사로 호평 받았다.이 페스티벌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열려 뜨거운 열정과 서늘한 감각을 동시에 간직한 춤 탱고를 알리는 행사로 자리 잡을 전망이다.기실 탱고는 한국엔 덜 알려졌지만, 아르헨티나를 포함한 남미와 스페인 등 유럽 전역 춤 애호가들 사이에선 그 인기가 예전부터 높았다.그래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 거장들도 자신의 작품 속에 탱고를 주요한 소재와 핵심적 주제로 여러 차례 사용한 바 있다.뒤늦게 경상북도에 찾아온 ‘탱고 유행’. 몇몇 춤 평론가에 의해 ‘옷을 입은 채 느끼는 황홀한 감각’으로, 때로는 ‘절망을 이기는 흥겨운 에너지’로 이야기 되는 탱고를 다룬 영화 몇 편을 아래서 살펴본다. △ 그래도 삶은 아름다운 것… ‘여인의 향기’한때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고, 그 뜨거운 열정으로 인해 고위급 장교가 됐지만, 예기치 않은 운명으로 인해 눈 뜬 장님이 된 늙은 사내가 있다. 괴팍한 성격으로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미군 예비역 중령 프랭크(알 파치노 분).피해갈 수 없는 모모한 상황으로 인해 철없는 고교생 찰리(크리스 오도넬 분)는 이 괴팍한 예비역 군인과 어쩔 수 없이 내키지 않는 뉴욕 여행을 하게 된다. 때는 크리스마스 시즌.모두가 즐거운 그 기간에 둘은 티격태격 전혀 즐거울 것 없는 둘만의 여행을 억지로 지속한다. 그런데, 이 지루하고 권태롭던 여행이 ‘탱고 한 판’으로 반전된다. 영화 ‘여인의 향기’다.뉴욕의 고급 레스토랑. 오지 않는 연인을 기다리던 젊고 아름다운 여성 도나(가르베일 앤워 분)에게 프랭크가 “춤을 추자”고 청한다.처음 보는 늙은 사내의 뜬금없는 제의. 도나는 당혹스럽다. “나는 춤을 추지 못해요”라는 도나에게 프랭크가 말한다. “탱고는 추는 게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고.비싼 양복과 화려한 원피스를 갖춰 입은 식당 손님들 사이에서 프랭크와 도나가 심장 박동처럼 흔들리는 선율을 타고 매혹적인 탱고를 추기 시작한다. 춤이 시작되자마자 순식간에 두 사람에게 주목되는 수백 개의 눈동자.장님인 프랭크는 도나의 얼굴은 물론, 춤추는 공간의 넓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게 무슨 문제일까? 프로페셔널 댄서보다 더 멋지게 도나를 리드라는 프랭크의 탱고 스텝. 박수가 쏟아지는 건 당연지사.영화의 마지막. 아무 것도 혼자 힘으로 할 수 없는 장님이 됐다는 절망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프랭크에게 찰리가 말한다.“당신은 앞으로도 오래 살 자격이 있어요. 왜냐고요? 눈 뜬 사람보다 더 근사하게 탱고를 출 수 있잖아요.”영화 ‘여인의 향기’는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탱고는 어떤 죽음도 삶보다 따뜻할 수 없다는 걸 알게 해준다”고. △ 더 이상 꿈꾸지 못한다면 인생은 무엇인가?… ‘고래와 창녀’루이스 푸엔조(Luis Puenzo·76)는 탱고가 생겨난 나라 아르헨티나의 ‘생존한 최고 감독’이라 불러도 무방하다.탁월한 역사인식과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를 환상적 메타포 안에 효율적으로 엮어내는 루이스 푸엔조의 탁월한 연출력은 이미 아카데미를 비롯한 세계 여러 영화제에서 인정받은 바 있다.그의 대표작이라 칭해도 좋을 ‘고래와 창녀’는 2004년 감독한 영화다. 1936년. 이데올로기와 종교 탓에 수십 만 명의 사람들이 비참한 죽음을 맞았던 스페인 내전과 21세기 스페인 마드리드의 우울한 풍경의 교차.여기에 모성(母性)의 상징이라 할 여성의 가슴과 드넓은 ‘바다의 어머니’ 고래를 동일한 의미망 안에서 유기적으로 결합해내는 감독의 연출력은 ‘고래와 창녀’를 ‘금세기 놓쳐서는 안 될 영화’ 중 하나로 기억되게 했다.이 영화에도 탱고를 추는 장면이 등장한다. 아르헨티나의 땅 끝이자, 지구의 땅 끝이기도 한 파타고니아(Patagonia) 지방.1933년. 아름다운 스페인 여자 로라는 깊고도 깊고, 멀고도 먼 대서양 건너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로 간다. 이유는 단 하나. 20세기 초반 인간에겐 절대적 가치로 느껴졌던 ‘자유’와 ‘사랑’을 찾아서였다. 그러나, 개개인의 삶에는 희망과 더불어 절망이 병존하는 법. 그건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당신 없이는 세상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는 로라를 혼자 남겨둔 채 연인 에밀리오는 낡은 비행기를 타고 더 먼 곳으로 떠나버린다.고통과 절망의 끝에서 장님이 연주하는 반도네온(bandoneon·탱고에 사용되는 손풍금) 리듬에 맞춰 느리고 슬픈 탱고를 추는 로라.카페 안 수백 개 백열등의 환한 불빛으로도 달랠 수 없는 로라의 외로움을 반도네온 소리와 느린 탱고 스텝이 위로해준다.다음 날. 남극에서 불어온 차가운 바람이 몸과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해변에서 로라는 상처 입은 채 바닷가로 떠밀려온 거대한 고래를 만난다. 이 고래는 10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후 유방암을 앓는 로라의 손녀 베라에게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루이스 푸엔조는 ‘사라진 가슴’과 ‘사라진 고래’를 아르헨티나 탱고 선율 속에 부활시킴으로써 ‘예술적으로 승화된 은유’의 힘을 관객들에게 선물한다. 어디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아프지만 그렇기에 더 매력적인 풍경이었다. △ 환멸 속에서도 인간은 살아야 한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앞서 ‘여인의 향기’와 ‘고래와 창녀’가 그래도 남아있는 삶의 희망과 미래를 낙관한다면 지금 이야기 할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환멸의 오브제(objet)로 탱고를 삽입하고 있다.이미 오래전부터 문명과 진보의 정점(頂點)이라 지목된 도시 프랑스 파리. 제대로 된 정신상황을 가질 수 없었던 폴(마론 브란도 분)은 세상의 어떤 부분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우연히 만난 딸 또래의 여성 잔느(마리아 슈나이더 분)는 폴이 가진 서러움과 환멸의 일정 부분을 이해하는 듯하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는 건 나이와 무관하게 어려운 일.지난세기 ‘문명의 절정’이라 불리던 파리. 그 도시의 조그만 아파트에서 만난 둘은 ‘처음이자 마지막 같은 성교’를 치른다. 그 장면엔 어떤 화려한 장식도 없다. 그저 쓸쓸하고 메마른 시퀀스(Sequence).‘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다수의 영화평론가들이 “다시는 만들어지기 힘든 영화”라고 부른 작품이다. 이탈리아의 영화 거장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명성에 가장 큰 힘을 실어준.왜였을까? 그건 바로 ‘탱고 페스티벌’이 열리던 20세기 후반의 ‘기이한 풍경‘을 영사막 위에 옮겨놓았기 때문이 아닐까?‘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장동건보다 잘생긴 말론 브란도(Marlon Brando)가 출연한 거의 마지막 영화였다. 그는 말했다.“인간이 살아있다는 실감을 느끼는 건 춤추는 순간 뿐”이라고. 마지막.어쨌건 탱고는 춤의 하나일 뿐이지만, 삶의 많은 부분을 끌어안으며 오랜 시간 세상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이 애정이 올해부터 시작된 ‘영덕 해변 탱고축제’를 통해 어떤 방식으로 변화할까? 이를 궁금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7-12

“대학들도 경쟁과 협력으로 위기 돌파해야”

국민의 교육열과 국가 고급인재 수용이라는 중대한 역할을 맡았던 대학이 지금 백척간두의 끝에 서 있다. 2000년 이후 19개 대학이 폐교됐고 모두 지방의 사학이다.대학의 폐교는 지역 경제의 추락과 지방소멸로 확대된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나서야 할 일이다. 그러나 먼저 대학들이 자구책 마련에 적극 나서야 한다.홍덕률 한국사학재단 이사장은 ‘대학에 대한 규제 완화와 구조개선 지원’을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GDP의 0.6%인 정부재정 지원을 OECD 평균인 1%대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말한다. 사학도 변하고 있으니 국민의 사학을 보는 눈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이와함께 대학들의 대응을 주문한다. 경쟁의 룰을 지키면서 시설을 공유하고 교육 프로그램을 공동 운영하는 등 경쟁과 협력으로 위기를 돌파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 한국사학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한 지 1년이 지났다. 사학재단이 하는 일이 사학에 어떤 도움이 되나.△사학진흥기금을 조성하여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사립학교의 교육 환경을 개선하고 학교 발전을 지원한다. 2000년부터는 주로 사립대학의 교육환경 개선을 위한 융자사업과 청년 주거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행복기숙사 건립사업을 벌이고 있다. 대학에서 부지를 마련하면 사학재단이 기숙사 건설비를 지원해 주고 30년에 걸쳐 저금리로 분할 상환받고 있다.또 대학의 예산 결산 자료를 집계분석해서 교육정책 기초자료로 국회와 국민에게 정보로 공개하고 있다.강사 처우개선 지원사업, 사학혁신 지원사업, 그리고 실비로 교육 연수 컨설팅 사업도 제공하는 등 사학진흥기금을 활용하여 다각적으로 사립대학의 어려운 재정을 지원하고 있다.특히 지난해부터 폐교대학 종합관리기관으로 올해부터 본격적인 폐교 대학에 대한 종합 관리를 하고 있다. 현재 재단 부지 내에 금년 내 준공을 목표로 폐교대학 기록물 아카이브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폐교대학의 기록물 보관과 관리 활용도가 크게 늘어날 것이다.- 우리 교육에서 사학의 비중이 높다. 그런데 정부 지원은 공립에 비해 형평성이 부족하다고 불평한다.△대학 중 83%가 사학인 데서도 그 중요성이 나타난다. 나라가 어려울 때 사학 법인이 대학을 설립해 국민의 교육열과 국가의 고급인재 수요를 감당해 왔다.그러나 선진국이 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사학에 대한 지원은 여전히 부족하기 짝이 없다. 고등교육에 대한 재정 투자가 OECD 회원국의 경우 평균 GDP 대비 1%이지만 우리나라는 0.6%에 지나지 않는다.- 사학에 대한 지원을 이야기하지만 사학에 대한 국민적 시각이 부정적인 것은 사학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흔히 사학 비리라고 일컬어지는 불미스러운 사건 사고들을 말하는 것 같다. 사학 설립자 및 경영진의 권위주의적 태도, 전횡, 교비 빼돌리기, 족벌 경영 등이 그것이다.국민의 높은 교육열에 비해 국가의 투자 여력은 미치지 못해 사학을 권장하게 됐다. 이 통에 교육 철학이나 자질이 부족한 학교 경영자나 교수, 행정가 등이 사학을 설립하고 학교를 경영하면서 자질 부족 무자격자들이 사회적 물의를 빚은 것이다. 이들의 교육관과 철학 등은 민주화 바람 속에 내부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불화를 빚을 수밖에 없었다. 지역 대학들도 상당수 겪었고 전국 대학들이 대부분 겪었던 몸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학에 대한 규제를 혁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많은 대학 총장들은 규제 혁신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기도 하다.사실 사학과 사학법인들의 비리들은 그동안 교육부와 언론의 감독을 통해 많이 노출되면서 줄어들고 변화했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법으로 정한 개방이사제도, 대학평의회, 학생 대표가 참여하는 등록금 심의위원회 등도 많은 역할을 했다. 특히 사학진흥재단은 사학과 사학법인을 대상으로 한 재정 실태점검 및 회계감리 제도 등으로 사학법인의 비리를 줄이는데 많은 역할을 했다.이제 사학과 사학법인들의 재정 운용 등 경영이 과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투명해졌고 비리 요인들도 제도적 장치에 의해 사전에 차단되고 있다. 따라서 사학에 대한 규제도 대폭 풀고 자율적으로 책임 경영할 수 있도록 맡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학의 위기, 특히 지방 사립대학의 위기를 이야기한다.△사립대학의 재정 수입에서 등록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평균 54.9%다. 그런데 대학 등록금은 올해로 14년째 동결돼 있다.학령인구 급감으로 대학 정원이 줄어들었는데 그마저 정원 충원율도 줄어들었다. 물가와 경직성 경비는 계속 늘어나는데 수입은 14년째 그대로이니 사립대학의 재정 여건이 악화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그리고 그 사정은 국립대학에 비해 사립대학이, 수도권 대학에 비해 비수도권 대학이, 4년제 일반대학에 비해 전문대학이 더욱 심각하다.- 그럼 홍 이사장의 해결 방안은 무엇인가.△키는 정부가 쥐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110대 국정과제에는 ‘사립대학의 구조개선지원 특별법’ 제정이 담겨 있다. 사립대학의 위기를 인식하고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대학에 대한 규제 완화와 구조개선 지원’이 답이라고 생각한다. 윤석열 정부는 규제 완화를 천명한 바 있고 지난 달 15일 학교 자산 처분과 관련한 규제를 완화하는 내용의 조치를 발표했다. 우리 사학진흥재단도 교육부와 함께 사립대학의 재정 여건 개선을 위한 규제완화를 위한 논의에 참여하여 교육부 안을 만들었다. 앞으로도 고등교육 재정정보 전담기관으로서 대학의 재정이 개선될 수 있도록 새정부 정책에 맞추어 적극 역할할 것이다.또 사립대학 구조개선을 위한 지원이다. 사학진흥재단은 사립대학의 건전한 성장과 경영위기 대학의 원활한 구조개선을 제도적 법제화를 통해 지원할 계획이다. 한계대학의 폐교로 인한 교직원 학생 등 대학 구성원과 지역사회에 미치는 피해가 최소화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폐교 대학이 급증하고 있다. KEDI(한국교육개발원)은 최근 전국의 한계대학이 84개교에 이르며 비수도권에 74%, 사립대학이 94%라고 보고했다.△2000년 이후 폐교 대학은 19개 대학에 이르고 있다. 경영상 위기로 폐교되는 대학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겠지만 더 이상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과 교육 질을 담보하지 못하는 대학들이 폐교를 결정할 수 있도록 퇴로를 마련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재단은 폐교가 되는 과정에서 대학과 법인, 구성원들이 겪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지원하고 있다. 폐교대학 학생들의 특별편입학을 지원하고, 교직원들의 체불임금 변제를 위해 청산 융자를 지원해주고 있다.폐교대학 종합관리기관으로서 폐교대학의 기록물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해준다. 이와함께 한계대학의 회생을 지원하기 위한 정책포럼을 열고 ‘사립대학 구조개선을 위한 특별법’의 연내 입법을 위해 노력해 나가고 있다.- 소통과 통합의 리더십을 강조한다. 대학 총장시절 가장 보람 있는 일은 무엇인가.△대구대학교는 전국 대학들 중 가장 민주화된 대학이라 할 수 있다. 총장만 교수 직원이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단과대학 학장과 학과장까지 소속 교수들이 직선으로 선출한다.민주화된 조직에서 리더십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소통과 설득과 통합의 리더십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총장으로서 헌신과 봉사의 리더십으로 정책 결정을 하고 대학 구성원들의 지혜와 역량을 모아 위기를 타개하려 노력했다.학생회 임원들과도 수시로 만나 학생들이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대학으로 만들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토론했고 일반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SNS로 피자데이트를 신청해 수백명의 학생들과 즉석 간담회를 갖는 등 소통을 위한 다양한 채널을 가동했다.학생이 행복한 대학을 표방하며 학교 구성원들의 신뢰를 기반으로 재단 분규를 해결하고 대학 위상을 제고시킨 것이 가장 큰 보람이다.- 교수로 총장으로 대학에 오래 몸담았다. 지금은 한국사학진흥재단 이사장으로 신분이 바뀌면서 대학 교육에 대한 문제점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나.△오늘의 한국 대학 문제의 핵심은 재정위기와 미래를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나는 평교수로 있을 때는 교수협의회 간부를 하면서 혹은 신문 기고와 방송 토론 등을 통해 견해와 주장을 개진하려 노력했다.대학 총장으로 있을 때는 평소 소신과 문제의식을 정책으로 구현해서 책임지고 있던 대학의 학생과 교수 직원들에게 양질의 교육과 교육 연구 여건을 제공하는데 노력했다.한국사학진흥재단 이사장으로 옮긴 지 1년 동안 대학 총장으로 경험을 살리고 한편으로는 교육부 및 국회 등과 소통하고 협력하면서 전국 사립대학들을 대상으로 필요한 정책과 지원 조치들을 실천하는 것이 내 임무라고 생각한다.사학재단 이사장으로서 맡은 책임을 다해 지금의 위기에 처해 힘겨워하고 있는 전국 사립대학들에게 의미 있는 지원을 하고 싶다.- 언론에 칼럼 등으로 사회에 많은 활동을 했다. 홍 이사장의 교육관과 대학, 대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교육은 학생을 위한 제도다. 교육의 대상으로 그치지 않으며 더구나 돈벌이의 수단은 더욱 아니다. 학생을 정신적 인격적 지적 사회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의식적 활동이 교육이다.아울러 교육은 학생에게나 사회에게 미래를 준비하도록 하는 제도다. 전통을 계승하고 사회를 통합하는 기능을 갖고 급변할 때는 미래를 준비하는 것도 교육의 역할이다.대학은 학생이 행복한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하고 사립대학 법인이나 총장이나 교수 직원 모두 학생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2009년 대구대 총장에 취임하면서 ‘학생중심 대학운영’을 천명했고 2010년 후반에 들면서 전국 대학으로 확산됐다.- 어려움에 처해 있는 지역 대학들에게 조언을 해 준다면△지역 대학의 위기는 지역사회의 위기이고 국가경쟁력의 위기를 의미한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이 문제를 외면하지 말고 적극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이와함께 대학에서도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위기가 심해지니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지만 경쟁하더라도 룰은 지켜 조화롭고 균형있는 경쟁과 협력을 해야 한다.더 중요한 것은 협력할 주제에 대해서는 과감하고 폭 넓게 협력할 것을 주문한다. 인근 대학 사이 시설을 공동 활용한다거나 교수 교류, 학과나 교육 프로그램과 대학원 과정 등을 공동 운영하는 방안까지 적극 검토해야 할 때다. 대학 간 컨소시엄 구성도 적극 검토하고 가능한 주제부터 실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지역사화와의 소통, 협력, 상생을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 지역사회에 필요한 신산업을 발굴하고 첨단 인재를 육성 공급하며 지역민의 평생학습을 책임지는 등 지자체와 대학이 역할을 분담해 지역과 대학이 함께 사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홍덕률(洪德律·65)인천출신. 제물포고. 서울대 사회학과, 서울대 대학원 석사, 문학박사.대구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대구대학교 총장(10, 11대) 대구사이버대학교 총장(4대)대통령자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 대통령자문 사회통합위원회 위원.경북지방노동위원회 위원. (재)경북행복재단 이사장, 경북도 평생교육진흥원장.소통의 리더십을 강조하는 교육자이자 교육행정가.대구에서 대학 교수와 총장 등으로 30여 년 살아오면서 언론 기고와 각종 사회활동을 통해 지역사회에서 여론주도층 역할을 해왔다. 학내분규 당시 교수협의회 간사를 맡아 해직되기도 했고 지난 2014년 지역사회의 요청으로 대구시교육감 선거에 후보로 나서기도 했다.사학진흥재단은 작지만 일 잘하는 기관의 모델이라고 자평하며 전국의 사립대학들에 의미있는 지원을 하겠다고 한다./이경우 편집위원

2022-07-11

“어딜 가도 당당한 포항미술협회”

포항은 도시 규모에 비해 미술협회 출범이 늦은 편이다. 협회를 구성하기 위한 정족수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1987년 20여 명의 인원으로 한국미술협회 포항 지부가 설립되었고, 현재는 250여 명의 회원을 거느리며 지역 미술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척박한 땅에서 미술의 싹을 틔우고 경북 최대의 미술 단체로 거듭나는 과정을 들어본다. 배 : 포항미술협회가 출범하기 전에 활동하던 미술 단체가 있었습니까?김 : 포항일요화가회는 포항에서 가장 오래된 미술 동호회일 거야. 지역에서 미술인이 드물던 1970년대에 활동했지. 내가 포항에 오기 전부터 활동하고 있더라고. 나더러 그림 지도를 해달라기에 흔쾌히 함께했어. 회원들이 꽤 많았는데 포항사진협회를 만든 박원식 사진가도 회원으로 활동했어. 유채화를 주로 그렸던 기억이 나.배 : 포항일요화가회는 어떤 활동을 했나요?김 : 일주일에 한 번씩 야외 스케치를 나갔는데 인근에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로 많이 다녔어. 일요화가회전은 전시가 귀했던 시절에 시민들에게 그림을 접할 기회를 제공했지. 박수철 선생처럼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화가도 있었고. 포항에서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활동한 최초의 미술 단체로 보면 돼. 포항일요화가회는 포항 최초의 미술 동호인 단체다. 1970년대 중반부터 활동하다가 1979년 창립식을 가졌다. 김두호가 지도교사로 활동했으며 박수철이 초대 회장을 맡았다. 미술인뿐 아니라 포항제철 직원, 관공서 기관장 등 다양한 분야의 회원들이 참여해 미술 문화의 저변 확대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배 : 포항미술협회가 조직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김 : 협회를 조직하려면 5개 분과가 있어야 하는데 그만한 인원이 없었지. 서양화, 한국화, 서예 분과의 몇몇이 다였어.배 : 미술협회의 필요성이 대두된 계기는 무엇입니까?김 : 당시 경북의 지방자치단체마다 미술협회가 하나씩 생겨나는데 가장 큰 도시인 포항에만 없는 거야. 포항의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미술협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지.배 : 당시 경주 미술계는 어떤 분위기였나요?김 : 경주에는 일본에서 유학하고 온 원로 작가들이 있어서 포항보다 훨씬 앞섰어. 포항은 그림 분야가 빈약했기 때문에 경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지.배 : 1987년 포항미술협회가 출범했습니다.김 : 조희수 선생이 초대 지부장을 맡았어. 지금 아흔이 넘었을 거야. 경주에 계시는데 그림에만 전념하다 보니 생활이 어려웠어. 1980년대 초반에 선생님 자녀가 포항 환여초등학교에 첫 발령을 받는 바람에 조희수 선생도 포항에 정착했지. 그때 우리와 교류가 많았어.배 : 포항미협 창립 당시 인원은 몇 명입니까?김 : 서양화, 한국화, 서예, 도자기, 디자인 5개 분과가 있었고, 각 분과에 5명 정도 되었을 거야. 그렇게 인원을 확보했고 그 후로 차츰 인원이 늘어나서 여기까지 온 거지.배 : 선생님은 1995년부터 2년간 포항미협 지부장을 맡으셨더군요?김 : 포항미협의 기틀이 잡혀 있을 때였지. 변혁을 도모하기보다는 회원들이 잘 활동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어. 부지부장이던 배현철 선생이 많이 도와주었지.배 : 배현철 선생과는 대동중·고등학교에서 같이 교편을 잡으셨죠?김 : 동국대학교 예술대학의 최영조 교수가 서라벌예대 선배인데 학교에 자리가 없냐고 연락이 왔어. 포항에 가고 싶어 하는 제자가 있다고. 당시 내가 맡은 미술 수업이 너무 많아서 학교에 미술 교사를 더 뽑자고 얘기했지. 다행히 학교에서 내 뜻을 수용해주더군. 그렇게 오게 된 사람이 배현철 선생이야. 배 선생은 작가로서 참 괜찮은 사람이야. 지금도 시골 화실에서 열심히 작업하고 있지. 배 : 지부장을 역임하던 무렵 기억에 남는 활동이 있나요?김 :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延边朝鲜族自治州) 미술협회 지부장과 인연이 되어 연변에서 전시를 했어. 포항 작가들의 작품을 해외에 소개한 첫 사례였지. 그리고 일본의 자매도시 후쿠야마(福山) 시립미술관 초대전도 기억에 남아. 히로시마(広島)의 시모카마가리(下蒲刈) 란토가쿠(籣島閣) 미술관의 순회 전시도 갔고. 해외 어딜 내놔도 될 만큼 협회 규모가 커졌으니 뿌듯한 일이지.배 : 선생님의 귀한 자료가 거의 없어 안타깝습니다.김 : 모아둔 팸플릿이며 그림이며 사진 자료는 1998년 태풍 애니 때 모두 잃어버렸어. 당시 기상관측 이래 최대의 폭우라고 했는데, 어마어마했지. 대잠못 둑이 무너져 도로가 침수되고 단전에 단수는 물론 전화도 안 되었어. 대동중학교 부임하면서부터 20여 년 사용한 화실이 상가 1층이었는데 완전히 물바다가 되어버렸지. 작업실 바닥에 깔아놓은 그림이며 팸플릿은 흙탕물 범벅이 되어 모두 내버려야 했어. 그나마 유화 작품 몇 점은 말려서 닦으니까 좀 괜찮더라고.배 : 포항미술협회에서 현재 지역 미술사 자료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이런 작업을 통해 지역 미술의 가치가 제대로 조명받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포항 미술이 이제는 많이 성장했지요?김 : 지금은 경상북도에서 가장 크지. 회원만 200명이 넘으니까. 이제는 어딜 가도 당당해.배 : 후배 작가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김 : 그림은 누구나 그릴 수 있지. 하지만 어떻게 그려야 할지 깊이 생각해보고 그린 그림이 올바른 그림이 되지 않을까 싶어. 그림은 손끝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려야 해. 그림을 통해 많은 사람이 즐거움과 희열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우리 작가들의 몫이겠지.끝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박경숙(미술평론가)

2022-07-11

바로 여기에, 신라인들의 간절한 佛國 염원 담겨

□임란 때 불태워지는 등 숱한 환란 겪어앞에서 토함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펼쳐놓은 것은 결국 불국사와 석불사(석굴암)를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불국사를 다시 소환해 이야기를 풀어놓는다는 것은 사실 대단히 난감한 일이다. 경주라는 땅에 한 번도 발을 딛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경주에 와서 불국사를 가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불국사는 1980년대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기 전까지는 제주도와 더불어 신혼부부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었고, 중고등학생에게는 수학여행지로 유명했다.그런데 정작 불국사에 대해 제대로 아는 이들은 드물다. ‘1000년 전 신라인들은 왜 불국사를 건립했던 것일까, 불국의 나라가 일반 백성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를 생각해본 이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해외에서 온 여행자들에게 인기 있는 불국사가 한국 사람들에게는 과소평가되는 것은 아닐까. 너무 유명한 관광지라는 인식으로 역차별받는 것은 아닐까.불국사는 창건 이후, 숱한 세월 동안 우여곡절을 겪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의 방화로 불타 사라졌다가 조선 영조 41년(1795)에 대웅전이 다시 세워졌다. 일제강점기에 불국사는 사찰 곳곳이 무너져 내리고 전각이 골조만 남아 있었다. 1924년 대웅전을 수리하고 다보탑을 해체 보수했다. 이때 다보탑 속에 있던 사리가 사라졌다. 개보수 작업도 졸속으로 이뤄져 1945년 해방 당시 석가탑은 거의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1969년 정부에서 불국사 복원위원회를 구성하고, 1970년 2월 공사에 착수해 1973년 6월 복원을 마쳤다. 주춧돌과 빈터만 남아 있던 무설전·관음전·비로전·회랑 등을 복원했고, 대웅전·극락전·범영루·자하문 등을 새롭게 단장했다. 이때도 과학적인 고증이 이뤄지지 않은 채 졸속으로 복원이 이루어져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1973년 불국사 복원공사를 할 당시 10만2천여 명이 투입돼 무려 5년 동안 공사를 진행했다. 석공만 3만3천900여 명이었다고 한다. 공사에 들어간 자재도 엄청났다. 고령기와 30만 장, 목재 63만 재(才), 석재 42만5천t이 소요됐다. 엄청난 인력과 물량이 투입되다 보니 당시 돈으로 무려 4억 원의 복원 경비가 들었다. 당시 서울 반포아파트 한 채 가격이 500만 원 정도였으니 무려 아파트 80채 정도를 지을 수 있는 엄청난 돈이 복원공사에 들어간 셈이다.불국사 공사는 창건 당시에는 엄청난 인력과 물량이 투여된 국가적 사업이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김대성이 751년(경덕왕10) 불국사 건설 시작해 774년에 완성하지 못하고 죽자, 국가에서 완성했다”고 기록돼 있다. □751년 경덕왕 때 김대성이 창건한 것이 정사불국사의 창건을 언급하고 있는 사료로는 삼국유사와 불국사사적(佛國寺事蹟),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 등이 있다.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751년 김대성이 불국사를 창건했다는, 불국사사적과 고금창기에는 528년(법흥왕15) 불국사가 창건돼 경덕왕 때 김대성에 의해 중창되었다는 기록이 있다.불국사의 창건연대가 무려 223년이나 차이가 난다.불교사를 전공한 사람들은 ‘삼국유사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에 가깝고, 불국사 사적과 불국사고금창기는 사료적 가치가 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한다.유홍준 교수는 불국사사적과 고금창기가 “사찰의 연기와 옛날부터 전해오는 얘기, 그리고 화엄에 관계되는 것이면 불국사의 역사에 맞건 안 맞건 억지로 끌어 붙였다는 혐의를 면할 수 없다”고 말한다.삼국유사 연기설화에 나오는 불국사 창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 모량리(牟梁里, 현재 경주 효현리 일대)에 경조(慶祖)라는 여인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아들이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이마가 아주 넓으며 정수리가 평평해서 마치 성(城)과 같았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큰 성이라는 뜻의 대성(大城)이라 지었다. 대성의 집안은 너무 가난해서 양육하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대성의 어머니 경조는 복안이라 불리는 부잣집에서 품팔이를 해 얻은 밭 몇 마지기로 간신히 생활을 이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점개(漸開)라는 스님이 흥륜사(興輪寺)에 육륜회(六輪會, 오늘날의 법회)를 베풀고자 복안에게 시주하기를 권했다. 신앙심이 깊었던 복안은 흔쾌히 면포(綿布, 베) 50필을 시주했다.이에 점개 스님은 “당신이 보시를 잘하니 천신(天神)이 항상 보호해주실 것이오. 하나를 시주하면 만 배를 얻어 안락하고 장수할 것입니다.”라고 축원했다.대성이 이 말을 듣고 집으로 뛰어 들어와 어머니에게 우리가 경작하는 밭을 법회에 시주해 후세의 복을 얻자고 설득했다.어머니는 대성의 말을 기특하게 여기며 아들의 말을 따라 밭을 점개스님에게 시주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대성이 세상을 떠났다. 그날 밤 재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모량리에 살던 대성이라는 자가 지금 너의 집에 환생하리라.”이후 김문량의 부인이 임신해 아들을 낳았는데, 아이가 왼손을 꽉 쥐고 펴지 않다가 7일 만에 손을 폈는데 손안에 ‘대성(大城)’이라 쓰인 금빛 두 글자가 있었다. 이 일을 하늘의 뜻이라 여긴 김문량은 환생한 아이의 이름을 대성이라 지었다. 또한 모량리에서 김대성 어머니 경조를 김문량의 집으로 데려와 부양했다.대성은 장성한 후 장수사(長壽寺)를 세웠다. 장수사를 짓고 난 이후 불심이 더 깊어진 김대성은 자비심과 원력이 더욱 깊어졌다.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창건하고, 전세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石佛寺, 국보 24호 석굴암)를 창건했다고 한다. 물론 불국사와 석굴암이라는 두 불사를 개인이 일으켰다는 것에 의문을 품는 학자도 있다.불국사 창건설화에서 알 수 있는 점은 당시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김대성이 공사를 총괄했고 불국사 창건에 신라가 총력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부처님 나라 꿈꾼 신라인의 염원 녹아 있어그렇다면 신라는 왜 그토록 엄청난 공사를 시작한 것일까? 불국사가 세워질 무렵 신라의 조형 및 건축문화는 최고전성기였다. 경덕왕은 통일신라 문화의 꽃을 피운 걸출한 위인이었다.지금까지도 걸작으로 평가받는 성덕대왕 신종, 독특한 석탑 양식과 탁월한 조형미가 돋보이는 화엄사 4사자 삼층 석탑, 유려한 석재 가공 기술과 온화한 불상의 분위기가 잘 살아나는 감산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등이 대표적이다. 자연과 인공이 만들어낸 조형예술의 극치로 불리는 안압지도 이 당시 기술로 만들어졌다.신라인들의 예술 감각은 멀리 당나라에서도 인정받았다. 경덕왕은 당 대종이 불교를 숭상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만 분의 부처님을 모신 3m 높이의 가산(假山)’을 만들어 보냈다고 한다. 당 대종은 이 선물을 받고 ‘신라의 교묘한 기술은 하늘이 만든 것이지 사람의 기술이 아니다’라고 극찬을 했을 정도로 신라 예술의 수준이 극에 달해 있었던 시점이었다.이런 이야기들이 불국사 창건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무엇보다 불국사 창건이라는 국가적 대사를 무리 없이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신라인들의 염원이 모아진 결과였다. 우리는 흔히 국사를 진행하면 필연적으로 민초들의 희생이 따른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중국의 만리장성이 건립되었을 때 수많은 중국인들이 고된 노역에 희생됐다. 그러나 불국사를 건립했을 때 신라인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기록에 따르면 신라인들은 불국사를 지을 때 ‘아미타불’이라고 염불을 외웠다고 한다.불국사는 강제 동원된 노동력이 아니라 신라인들의 순수한 신심과 염원이 모여 세워진 건축물인 것이다.그렇다면 왜 신라인들은 불국사를 지으며 기쁘게 자신을 희생했을까?불국이라는 이름 자체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신라인들은 불국사를 세우며 부처님의 나라를 꿈꾸었다. 먼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 다른 나라가 아닌 바로 여기 신라가 부처의 나라가 되길 염원한 것이다. 부처님의 나라는 아무도 차별받지 않고 서로 연대하며 살아가는 이상적인 국가였다. 대립과 전쟁이 없는 나라이자 누구도 굶지 않는 평화의 나라를 꿈꾸었던 것이다. /최병일 작가

2022-07-10

쭉 뻗은 바다 위 대교 달리면 ‘여수의 섬’ 한눈에

‘섬은 멀리 있어야 아름답다’라는 시의 한 구절은 이제 옛말인가 싶다. 닿기 어려워 신비롭던, 저만치 혼자 떨어져 외로움이 묻어 있던 섬을 쉽게 드나들 길이 있으니 말이다. 배를 타고 물살을 가르며 섬으로 가던 바닷길은 이제 추억 속에 접어두자. 365개 섬들이 바다 위에 흩어진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여수에서 시리게 푸른 바다 위에 뻗어있는 대교를 달리면 아름다운 섬에 금세 닿는다. 심리적 거리가 좁혀진 섬, 화태도와 낭도에서 한여름의 낭만을 즐겨보면 어떨까.□ 걷고 싶은 섬, 화태도 한국 세번째로 긴 길이 1천345m 화태대교 건너돌산도 서남단 크고 작은 9개의 섬들로 둘러싸여아름다운 해안길·낚시 명소 등 아늑한 풍경 뽐내여수시 남면 화태리의 화태도는 돌산도 서남단에 있는 섬이다. 한반도 모양을 닮은 섬은 임진왜란 때 왜병이 쳐들어오는 것을 돌산도에 알렸다고 해 췻대섬이라 불렀다.이순신 장군이 마을 뒷산인 노적산을 군량미 적재지역으로 위장했다고 해 ‘벼 이삭 수(穗)’를 써 수태섬으로도 불렸다가 ‘벼 화(禾)’를 써 화태가 됐다. 화태도는 돌산도, 송도, 월호도, 개도, 대두라도, 나발도, 대횡간도 등 크고 작은 9개의 섬이 감싸 아늑하다.육지에서 배로 드나들던 화태도에 2015년 돌산도와 화태도를 잇는 화태대교가 놓였다. 화태대교는 길이가 1천345m로, 인천대교와 부산항대교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긴 사장교다. 쭉 뻗은 대교를 달려 바다를 건너면 섬 해안을 따라 둘러있는 아름다운 길을 걸을 수 있다.여수갯가길의 5번째 코스인 ‘화태갯가길’ 비렁길에는 동백나무와 후박나무가 수런거린다. 소나무 숲길은 청량하다. 바다와 섬들을 끼고 걷는 어촌마을은 호젓하다. 꽃머리산에 올라 내다보면 화태대교가 당당한 자태를 뽐낸다. 다도해에 떠 있는 수많은 섬은 신기루처럼 아득하다.화태도는 조선 중기에 기마 목장으로 지정돼 섬에서 말을 키웠다고 한다. 말을 운반하던 마족선착장은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성지다. 고기를 낚는 것인지, 세월을 낚는 것인지, 갯내음 나는 포구에 걸터앉은 강태공의 표정이 느슨하다.월전포구는 ‘달밭기미’라 불렀다. 기미는 ‘작은 만’을 뜻한다. 마을은 포구 쪽에서 떠오르는 달빛을 받아 그윽하다. 작은 항구를 비추는 노란 월전등대는 포구 끝자락에 달처럼 걸려있다. 등대 앞에 서면 나팔처럼 생긴 나발도가 보인다.화태갯가길의 마지막 여정지 묘두마을로 향한다. 바다로 툭 튀어 나간 섬의 지형이 고양이를 닮아 마을 이름을 묘두라 부른다. 둥근 곡선을 그리는 앞바다에는 가두리 양식장이 수상가옥처럼 떠 있다. 이곳 주민들은 대부분 양식업을 한다. 감성돔, 참돔, 우럭, 농어 등 여수 양식어류의 40%가 화태도에서 나온다니 화태도는 그야말로 멋과 맛의 보고다. □ 낭만의 섬, 낭도둘레길 비경의 집합소 ‘여산마을’ 따라 걷다보면바다·방파제·등대 등 최고의 절경 한눈에 펼쳐져주상절리·해식동굴 등 자연의 작품도 신비함 더해화양면에서 여수섬섬길을 따라 섬과 섬 사이를 달려가면 낭만의 섬 낭도를 만난다. 조발도를 잇는 화양조발대교, 둔병도를 잇는 둔병대교, 낭도를 잇는 낭도대교를 차례로 건너면 된다.섬 모양이 여우를 닮아 ‘이리 낭(狼)’을 써 낭도라 불리는 섬은 이웃한 섬들 가운데 가장 크다. 섬에 들어서면 여산마을이 마중한다. 마을을 두른 산이 수려한 여산마을은 낭도 여행의 핵심이다. 낭도 둘레길 3코스 중 여산마을에서 출발하는 둘레1길은 비경의 집합소다.마을을 천천히 걷는다. 마을 입구에 정박해 놓은 고깃배들이 소박하다. 집 담장마다 알록달록한 그림이 걸려있는 갱번미술길은 갤러리 같다. 바다로 눈을 돌리면 낭도방파제의 빨간등대가 보인다. 등대 너머로 고흥 나로도 우주발사대가 우뚝 솟아있다. 길을 따라가면 고운 모래가 펼쳐진 낭도해수욕장에 이른다. 파도가 잔잔한 바다는 호수 같다. 경사가 완만하고 물이 맑아 어린아이들과 해수욕하기에 좋다.바다를 따라 난 둘레길은 낭도 최고의 절경을 품고 있다. 주상절리와 해식동굴이 어우러진, 신선이 살만한 신선대는 자연 스스로 빚어낸 작품이다. 겹겹이 쌓인 퇴적층 기암절벽인 친선대는 신비롭다. 간조에 해수면이 낮아져 너른 바위가 드러나면 공룡 발자국 화석도 볼 수 있다. 1억 년 전 중생대 백악기 시절, 공룡들이 무리 지어 살던 땅. 긴 세월이 흘러 공룡은 전설로 남았지만 어린 공룡들은 이곳에 보행렬 발자국을 남겨 그들의 존재를 알린다.산타바해변 쪽으로 걸어가면 바위섬 끝자락에 하얀 등대가 서 있다. 남포등대는 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바위나 암초를 피하라며 뱃길을 밝힌다. 지나는 선박들이 언제나 그를 바라보니 홀로 있지만 외롭지 않을 것 같다. 바닷길을 나와 산타바오거리로 가면 둘레2길로 이어진다. 여기서 낭만 가득한 바다를 다시 만난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모래가 길게 펼쳐져 장사금(長沙金)이라 불리는 바다의 해안선은 그림 속에나 나올법하다. 산이 품어 초록으로 빛나는 해변은 영화 ‘킬링로맨스’의 촬영지이기도 하다.둘레길을 걷고 나면 마른 목을 적시고 싶을 터. 여산마을 입구로 되돌아오면 100년 전통 도가에서 빚은 낭도 명물, 젖샘막걸리를 맛볼 수 있다. ‘여수 앞바다 낭도에 하나뿐인 술도가에서 빚는 술. 억겁의 시간 졸여지고 졸여진 심층수 마른 젖 빨아 당기듯 뽑아 올려 빚었다는 술.’은 톡 쏘는 느낌 없이 목 넘김이 부드럽다. 탁하지 않은 우윳빛의 깔끔한 맛이다. 4대를 이어온 이유를 알 듯하다.어느덧 바다에는 섬 그림자가 드리운다. 물빛은 더 깊어지고 낭만이 물든 섬은 고요하다.‘에어비앤비 카테고리’에서 만나는 색다른 여름 휴가지무더위를 날려버릴 시원한 여름 휴가지를 찾는 사람들을 위해 에어비앤비가 새로운 검색 기능을 도입했다. 단순히 여행 목적지와 날짜를 검색하던 기존방식에서 ‘에어비앤비 카테고리’의 56개 카테고리로 수백만 개의 독특한 숙소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멋진 수영장’, ‘서핑’, ‘한적한 시골’, ‘열대 지역’, ‘기상천외한 숙소’ 등 여름휴가 시즌에 최적화된 카테고리를 활용해 보자. 새로운 여행지에서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멋진 수영장’을 가진 이색 숙소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진 수영장을 찾고 싶다면 ‘멋진 수영장’ 카테고리를 둘러보자. 여기에 해당하는 숙소는 첫 번째 사진에서 수영장이 표시된다. 숙소 위치도 지도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제주의 ‘아모르데이’는 바다가 내다보이는 수영장에서 바닷속을 노니는 돌고래들을 감상할 수 있는 이색적인 숙소다. 순천의 ‘빌라오’는 한옥 독채로, 마당에 프라이빗한 수영장이 있어 한적하고 오붓한 여름휴가를 보내기에 좋다. △‘서핑’하며 빈티지 즐기자서핑이 취미인 사람은 ‘서핑’ 카테고리에서 양양, 태안, 제주 등 서핑하기 좋은 해변에 있는 숙소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양양의 ‘월화여인숙’은 죽도해변과 인구해변 근처에 있으며, 1979년에 지은 오래된 여인숙을 새롭게 단장한 곳이다. 빈티지한 멋이 풍기는 우아하고 세련된 공간에서 휴식할 수 있다. 제주의 ‘바당올레662’는 바닷가 바로 앞에 있어 바람과 파도가 좋은 날이면 바로 나가 서핑을 즐길 수 있다. △‘한적한 시골’의 정취 제대로‘한적한 시골’ 카테고리에서는 조용한 시골 분위기가 가득한 숙소들을 만나볼 수 있다. 함양의 ‘소소한’은 햇살이 따사롭고 풍경이 아름다운 집이다. 하루에 한 팀만 머물 수 있어 여름휴가 동안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가평의 ‘모원당’은 전통적인 한옥 독채로 자연과 가까워 투박하고 정겨운 시골 마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이솔 객원기자 esol@kbmaeil.com

2022-07-07

“경제 살리기 최우선… 시민과 함께 새 구미시대 열어 나갈 것”

지난 7월 1일 민선8기 구미시장에 취임한 김장호 시장은 “혁신과 변화를 갈망하는 시민들과 함께 새롭게 도약하는 구미의 시대를 열어가겠다”고 다짐했다. 그의 이런 다짐은 새로은 시정 슬로건 ‘새희망 구미시대’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김 시장은 구미가 새롭게 도약하기 위해선 지역경제부터 반드시 살려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취임식 이후 첫 공식일정을 기업체 방문으로 시작한 것만 봐도 기업유치와 지역경제살리기를 가장 최우선에 두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김 시장은 청와대·행정안전부·국토부 등 중앙정부에서 쌓은 풍부한 경험과 탄탄한 인적 네트워크을 활용해 구미 경제를 반드시 살릴 수 있다고 자신한다. 이에 본지는 김장호 구미시장의 지역 경제를 살리기 전략이 무엇인지 살펴봤다. - 구미경제 활성화를 위한 구체적인 계획은△통합신공항 이전을 새로운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구미를 배후 중심도시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겠다. 신공항과 구미5공단은 직선거리로 12㎞ 떨어져 있어 하늘길이 열리면 가장 큰 혜택을 보게 된다. 그 혜택을 최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신공항과 연계된 철도와 도로건설에 집중하고 추진할 것이다. 서대구에서 신공항으로 오는 철도의 구미지역 역사조성, 장천에서 군위IC간 국도 확장, 구미5공단∼서군위IC간 지방도 확장 등 신공항과 연계된 철도와 도로건설을 추진하겠다. 또 공항이 조성되면 구미는 배후도시로서의 기능을 갖춰야한다. 통합신공항이 아시아의 거점공항이 되도록 해야한다. 구미 5개의 글로벌 산업기지와 함께 국제적인 업무 기능을 갖춘 시설들을 조성해 아시아의 중산층, 비즈니스맨들이 구미로 오도록 하겠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 젊은 청년들의 양질의 일자리가 생기고 인구 또한 늘어날 것이다.- 공무원 최초로 KORTA로부터 외자유치 기여공로를 인정받아 포상금까지 받은 것으로 안다. 앞으로 구미국가공단에 외자유치 계획은 있는지.△구미 경제를 살리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기업유치가 최우선이다. 이를 위해 각종 불필요한 규제를 타파해 기업하기 좋은 환경 조성을 만들겠다. 또 실무 중심으로 행정과 협업할 수 있는 ‘구미시 기업유치단’을 구성해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기업유치 활동을 펼칠 것이다. 큰 줄기로 첨단 소재·부품·장비 관련 대기업 증설유치, 통합신공항 조성에 발맞춘 항공관련 산업유치, 정부 과제인 국내 복귀기업·외국인투자기업 유치 등에도 매진할 것이다. 또 가용할 수 있는 인력풀, 예산투입, 정보력을 총동원해 실질적이고 괄목할 만한 성과를 반드시 내도록 하겠다.- ‘변화와 혁신’에 대해 설명한다면.△구미가 과거의 영광에 머무는 것이 아닌 세대를 이어 발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변화와 혁신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제는 변하지 않으면 살아 남지 못한다. ‘혁신’만이 살길이다. 구미의 산업은 제조업 중심으로 가면서 신성장동력을 확보하는 투트랙으로 가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특히, 신공항시대에 발맞춰 지속가능한 산업 생태계로 혁신해 지역경제를 활성화해야만, 청년들이 떠나지 않는 도시가 된다. 공무원 내부 조직에서의 혁신은 시장인 나부터 솔선수범할 것이다. 과거의 리더십으로는 안된다. 혁신이라는 것은 당연히 시장부터 혁신해야 간부들도 혁신하고, 그래야 다른 일반직원들도 혁신한다. 그런 차원의 혁신이 이뤄져야만 구미가 진짜 바뀌었다는 말이 나올 것이다. 작은부분이긴 하지만 지금 구미시는 서류가 꼭 필요한 보고를 제외하곤 모든 보고를 단톡방을 이용하고 있다. 시장으로 취임하자마자 직급별 단톡방을 만들었다. 거기서 시장인 나도 의견을 내고 다른 직원들도 자신의 의견을 거리낌 없이 내도록 했다. 또 지금같은 시대에 사무실까지 와서 보고를 하는건 이미 늦다. 불필요한 형식을 없애고 오직 시민과 구미시의 발전을 위한 일만 하는게 ‘변화와 혁신’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이계천 통합·집중형 오염지류 개선사업에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데△선거 당시 이계천 통합·집중형 오염지류 개선사업의 사업비가 840억원 정도인줄 알았는데 최근에 타당성조사에서 1천500억원, 지금은 사업비가 1천700억원으로까지 늘어난 것을 알게됐다. 사업비가 거의 두배이상 늘어났기 때문에 이 부분은의 원인을 정확하게 살펴봐야한다. 개인적으로는 이계천 사업을 원칙적으로 동의하지만, 사업비가 너무 많이 늘어났기 때문에 어떻게 하는것이 인동동과 진미동 주민들의 경제생활에 피해가 없도록 할 수 있는지 검토를 하고 있다. 가능하다면 사업을 완수를 하겠지만, 사업비 부담으로 진행하기 힘들다면 다른 방법이 있는지도 현재 연구하고 있다. 주민들의 의견도 들어봐야한다. 사업지역에 완충지역도 있고 여러 문제점이 산적해 있다. 지금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어떤게 구미전체 발전에 도움이 되는지를 우선적으로 검토해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인재 육성’필요성이 대두되는데 이를 위한 방안은.△구미시가 혁신하려면 ‘인재’가 매우 중요하다. 모든 혁신은 사람으로부터 나오고, 좋은 인재를 잘 육성하고 활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지역의 대학과 기업 그리고 관련 기관 등과 잘 협력해 인재를 키우고 잘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도록 하겠다. 또 구미시부터 공무원 스스로 혁신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인재가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 연공서열과 나이를 혁파하고, 인사에 있어 기회는 공평하게 주고, 평가는 공정하고 투명하게 해서, 결과를 누구나 예측 가능하도록 해 능력과 성과 중심의 인사를 하겠다. 김장호 구미시장 - 낙후된 농촌지역 활성화 방안은△구미는 도농복합도시로서 도시와 농촌이 상생하며 발전해야 한다. 제가 경험한 선진국의 농촌은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이었다. 농민이 잘 살아야 선진국이다. 우리의 농촌은 낙후되어 있고 심각한 고령화 문제를 안고 있다. 농촌에 편의시설과 문화복지시설을 확충하고 농축산분야 예산 확대, 스마트농업지원 등을 통해 농민이 잘살고 젊은이들이 농촌으로 들어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도록 노력하겠다.- 시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혁신을 통해 구미가 사람부터 경제까지 ‘구미가 변했다’는 이야기를 꼭 듣도록 하겠다. 그래서 구미가 다시 대구 경북을 먹여 살리는, 나아가 대한민국을 먹여살리는 경제와 산업 중심지로서 역할을 하도록 하겠다. 또 문화와 예술이 흐르는 낭만문화도시를 조성해 경쟁력을 갖추도록 하겠다. 41만 구미시민의 역량과 에너지를 모아 작금의 어려운 구미를 반전시키고, 통합신공항시대에 대비해 구미의 발전과 혁신의 밑그림을 착실히 그려 나가겠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 세상을 공평하게 만들 듯 제도가 잘 미치지 않는 곳부터 챙겨 구미시민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도시를 만들어 가겠다./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22-07-07

“내 그림의 변함없는 주제는 자연이야”

김두호 선생과의 인터뷰에 제자들이 동석했다. 세월을 거슬러 오르는 추억담이 이어지면 김두호 선생은 조용히 듣고 있다가 한마디씩 덧붙이곤 했다. 그는 배려하는 데 익숙했고 낮은 목소리에는 사족이 없었다. 선생의 그런 태도는 작품과 다르지 않다. 그가 흔들림 없이 추구해온 미술 세계는 자연이다. 그가 좋아하는 물과 돌과 산을 그린 화폭에는 푸른 정적이 흐른다. 파도가 치는 바다도 그렇고, 바람 부는 겨울 들판에도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정적이 감돈다. 이 점은 그의 그림에 기교가 없는 듯이 보이게 한다. 배 : 첫 번째 개인전은 언제 어디서 했는지요?김 : 용다방이라고, 중앙상가 우체국 앞 건물 2층에 있었어. 그때는 갤러리가 없어서 다방이나 시공간 부설 전시관, 상공회의소 회의실에서 전시했지. 1978년 2회 개인전은 최동하외과 지하의 수갤러리에서 했는데, 내가 기억하기로는 포항에서 전시시설을 갖춘 첫 번째 갤러리야.배 : 포항의 최초 전시 공간은 1952년 문을 연 청포도다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1970년대까지 다방이 전시장 역할을 했는데, 다방에서 전시가 자주 열린 이유가 궁금합니다.김 : 다방 업주 입장에서는 손님이 몰려 돈이 되었고, 예술 공간이라는 인식이 생기니까 품격도 있어 보였을 거야. 화가로서는 임대료 없이 관람객을 만날 수 있으니까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거지. 내가 첫 전시를 했던 용다방 주인은 여성이었는데 그림을 아주 좋아했어.배 : 선생님께서 거쳐간 개인전 공간은 포항 전시 공간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더군요. 1974년 용다방에서 시작해 1978년 수갤러리, 1985년 육거리 천마화랑, 1993년 아솜터갤러리, 2000년 포항대백갤러리 그리고 2010년 포항시립미술관에서 전시하셨습니다.김 : 1970년대는 주로 다방에서 전시했고, 1980년대 넘어오면서 작은 갤러리들이 생기긴 했는데 지속적으로 운영되지는 못했어. 대백갤러리가 1991년 개관되어 전시가 많이 열렸고, 1995년 개관한 포항문화예술회관에서 장두건 선생의 전시가 처음 열렸어.배 : 장두건 선생과는 언제부터 알고 지내셨나요?김 : 장두건 선생이 포항에서 개인전을 한 1986년쯤 처음 알게 되었지. 한국화 붐이 한창 일어날 때였어. 장 선생이 은퇴하고 고향인 흥해읍 초곡리에 오면서 지역 작가들과 교류가 많아졌어. 그만한 경력을 가진 대가가 포항에서 나왔으니 얼마나 자랑스러워. 후배들도 존경하며 많이 따랐고.배 : 1970∼80년대 포항에서는 주로 어떤 분들이 전시를 했나요?김 : 판매를 위한 수묵화 전시가 많았어. 서양화 전시는 대부분 미술 교사가 했지. 친구 이방웅은 동지중학교와 유성여고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풍경화 등 구상화를 주로 전시했어. 포항고등학교에 있던 김건규 선생은 나중에 대구로 갔는데 포항에서도 개인전을 했지. 미술 교사들이 미목회(美睦會)를 만들어 전시도 했어. 나도 참여했고.배 : 선생님의 그림을 보면 자연을 일관되게 추구해왔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김 : 그렇지. 내 그림의 소재는 풍경이야. 나는 자연의 모습이 마음에 들어. 그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바위와 물이지. 태어난 곳이 포항 바닷가여서 그런지 물을 대할 때면 마음이 편안해져. 개울이나 계곡도 많이 그렸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리며 마음을 달랬어. 배 : 가장 좋아하는 풍경은 무엇인가요?김 : 송도 솔숲에서 그림을 많이 그렸어. 송도는 소나무 숲이 좋고 동빈내항 쪽으로 보면 갈대가 많았어. 가을이면 갈대숲이 멋들어지게 펼쳐졌지. 갈대 주변이 그림 소재로 너무 좋은 거야. 조선소 역시 그림 소재로 최고였어. 교직에 있으면서 주로 그린 풍경이 조선소야. 배를 들어올리는 모습이나 파손된 배가 소재로 좋아서 여러 점을 그렸지. 그때 그려놓은 조선소 풍경이 몇 점 남아 있어.배 : 조선소가 그리기 좋았던 이유는요?김 : 조선소 주변 분위기가 좋았어. 지금처럼 정비된 조선소가 아니고 허름했지. 아무것도 없는 벌판에 레일을 놓고 배를 만들고 수리했지. 정돈된 것보다 허름한 조선소 분위가 좋더라고. 사람마다 보는 눈이 다르겠지만 당시 내가 봤을 때는 그만한 풍경이 없었어. 어딜 다녀 봐도 송도 조선소 분위기가 가장 마음에 들었어. 지금은 그런 분위기가 사라져서 아쉬워. 정비된 조선소는 그림의 소재가 되기는 어려운 것 같아.배 : 바다와 솔숲이 어우러진 송도야말로 선생님께서 선호하는 소재가 한곳에 모인 곳이군요. 요즘도 송도 숲에 나가보시나요?김 : 지금도 한 번씩 가봐. 많이 달라지긴 했어도 옛 풍경이 기억에 남아 있어 감회가 새롭지.배 : 인물을 대상으로 하는 그림은 못 본 것 같습니다.김 : 인물화는 대학 시절, 모델을 그린 것 말고는 거의 안 그렸어. 마음에 안 들더라고. 인물화를 그리려면 꾸며야 하는데 나는 그런 작업은 별로야. 억지로 만드는 느낌은 내 그림 속에 별로 없어.김 : 자연을 그릴 때는 꾸미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군요?배 : 물과 바위는 변함이 없으면서 깊은 느낌이 있지.다음의 글은 김두호의 미술 세계를 잘 설명해준다.김두호의 그림에는 잘 보이게 하려는 과장이나 기교가 없다. 그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그림은 자연을 담담하게 담아내려 한다. 온갖 기교와 눈속임 방법을 동원하여 마치 눈으로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 없이 순수하게 그렸다는 말이다. 따지면 자연은 자신을 드러내려는 허위와 허식이 없다. 계절과 시기에 따라 정해진 순서대로 움직일 뿐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참 순진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임창섭, 「自然은 자연이고, 그의 그림은 그림이었다」, 『아름다운 여정-포항 원로 작가 김두호전』, 포항시립미술관, 2010, 10쪽. 배 : 그림도 삶도 과욕하지 않고 순리에 따르는 자연을 닮아가는 것일까요? 공모전을 일부러 멀리하셨다고요?김 : 대학 시절 목우회(1958년 설립된 한국 구상미술 작가들의 미술 단체)에 작품을 출품한 적이 있어. 심사를 서라벌예술대학 교수들 중 목우회 회원들이 했는데 계산 빠른 친구들은 교수들을 찾아다니는 거야. 그런 친구들은 큰 상을 타고, 나처럼 그림만 그리는 사람은 운이 좋아야 입선이야. 그걸 몇 차례 겪고 나니 그림 세계가 이래서는 안 된다 싶더라고. 그 후로 공모전 출품은 안 했어. 상을 타려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상을 위해 그리는 그림이 과연 순수한 것인지를 한동안 고민하다가 나름의 결론을 내린 거야.배 : 그림을 그리는 자체로 충분하다는 말씀이군요.김 : 경력을 쌓기 위한 개인전도 마찬가지야. 요즘은 개인전을 하려면 돈도 많이 들어. 물론 열심히 하는 건 좋아. 그렇지만 수상과 경력 쌓기가 목적인 전시는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해. 작업 자체에 충실해야 한다는 이야기야.배 : 자연이라는 소재는 변함없더라도 소재를 대하는 태도나 화풍에는 변화가 있을 것 같습니다.김 : 물론 그림마다 같을 수는 없어. 형태나 색깔을 바꾸게 되지. 왜 파란색을 많이 쓰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더군. 나는 파란색을 좋아해. 색상과 소재를 선택하는 기준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지. 나는 후배들에게 무언가 독보적인 것, 나만이 할 수 있는 소재를 그려야 한다고 말해. 시대의 조류에 마냥 따라가지 말고, 시류를 반영하더라도 결코 얽매이지 말라고 하지.배 : 선생님은 자연주의적 화풍을 지키면서 색다른 경향을 보여주셨지요. 1970년대 후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앙데팡당(Ind00E9pendants)전 출품작은 선도적인 현대 회화 경향으로 평가받았고, 1980년대 중반 대구중앙미술관 초대전의 말린 생선 그림은 세태를 반영한 작품으로 기억됩니다.김 : 앙데팡당전에는 실험적인 작품이 주로 전시되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빨래집게를 그려 시간의 연속성을 표현한 작품인데 아쉽게도 사진이나 팸플릿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대구중앙미술관 초대전에 출품한 말린 생선 그림은 반응이 좋았던 걸로 기억해. 그 작품은 소장하고 있어.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박경숙(미술평론가)

2022-07-06

손상 없는 원상태 복원이 관건… 체계적 준비 ‘착착’

몇 해 전. 불교미술사학자인 동국대학교 한정호(52) 교수를 만난 적이 있다. 당시 한 교수는 아래와 같은 말로 신라를 포함한 고대 유적과 유물의 복원에 관한 조심스러움을 언급했었다.“(유적과 유물의 조사·발굴·복원은) 올해 발굴하는 것보다 내년에 발굴하면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다. 10년 후면 더 많은 정보를 빼낼 수 있다. 예를 들어 과거엔 유적 발굴을 하다가 쥐똥이 나오면 버렸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의 성분 분석만으로도 당시 사람들이 뭘 먹었고, 어떤 기생충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매장된 사람의 유전자 분석을 통해 성별은 물론 나이까지 알 수 있게 됐다. 지금도 유적 발굴 기술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기술은 끊임없이 진화한다. 또 하나는 보존처리 기술이다. 이것 역시 후대로 갈수록 발전할 것이 명약관화하다. 이 모든 걸 떠나서 유물은 ‘현재 상태’가 가장 안전한 상태다. 온전하게 보존돼 있는 것을 인간의 호기심을 해소하기 위해 파내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는 진지하게 논의돼야 할 문제다.”역사 속 유물과 유적의 발굴은 인류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힘겹지만 고귀한 행위라는 건 이론(異論)이 있을 수 없는 당연명제다.하지만, 그 과정이 어떠해야 하는 것인지는 학자들과 발굴자들, 문화정책 입안자와 집행자간의 의견이 갈릴 수밖에 없다. 이는 지향점과 목적이 다르기 때문. □ 세울 것인가? 그냥 그대로 둘 것인가?종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세상 모든 것에는 나름의 역할과 몫이 있다. 그건 부처상과 예수상이 마찬가지. 섬기는 신의 형상은 그 종교를 믿는 이들에겐 절대가치에 가깝다. 만약 손상되거나 파괴됐다면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게 더없이 중요할 터.오랫동안 기독교적 세계관을 음악을 통해 설파해온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64)는 이렇게 노래했다.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후략)남산 마애불과 종교적으로 보다 밀접하게 연관된 한국 불교계는 이보다 한 발 더 나아간 입장이다. 지난해 늦가을 열암곡에 쓰러져 있는 부처를 다시 세우기 위한 법회가 ‘경주 남산 열암곡 마애부처님 바로 모시기’라는 이름으로 열렸다.조계종 총무원장 등이 참석한 이날 법회에서는 “경주 남산에 쓰러진 채 엎드려 있는 마애불을 온전히 일으켜 세워 불교 중흥을 이루겠다”는 다짐이 여러 차례 오간 것으로 전해진다.이처럼 불교계의 지향은 남산 마애불이 일어서는 것에 맞춰져 있다. 불교가 신라의 통치이념이자 사회를 작동시키는 기본철학으로 역할했던 7세기와 8세기의 모습으로 바위에 새겨진 부처의 형상을 복원시키고 싶은 것. 하지만, 합리와 이성이 지배한 21세기 한국사회의 역사학자들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앞서 한 교수의 말처럼 섣부른 계획과 기술 아래 진행되는 유물의 복원은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기 때문.□ 경주문화재연구소 학자들의 오랜 노력들바닥과 겨우 5cm의 간격을 두고 쓰러진 채 발견된 남산 마애불을 8년 동안 연구·조사하고, 복원의 방법을 고민해온 경주문화재연구소의 학자들은 지난 2015년 ‘정비보고서’를 출간하며 그 과정의 어려움을 아래와 같이 서술한 바 있다.“마애불상(남산 마애불)의 보존과 안전을 위해 상태를 점검하고, 3D스캔을 이용한 형상분석을 실시했습니다. 또한, 보존 상태를 파악하고 그 변화를 알기 위하여 편광현미경, SEM-EDX, XRF, XRD분석을 통해 암석의 성분을 조사하고, 초음파 탐사와 적외선 열화상 탐사를 실시해 풍화 훼손 정도를 정량화했습니다. 이러한 조사·분석 결과는 이후 사면 안정성 평가를 가능하게 하였고 그에 대한 안정화 대책방안을 낼 수 있는 기초자료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마애불상의 발견 이후 그동안 보존·정비 방안과 주변 학술연구·조사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조사 분석한 내용을 바탕으로 각계 전문가 의견을 종합해 마애불상 원래의 상태로 복원하기 위한 최적의 이전 방안 등을 제시했습니다…(후략)”경주문화재연구소의 ‘정비보고서’를 꼼꼼히 읽어보면 2012년 봄과 여름 사이 짧은 기간에만도 여러 차례의 자문회의와 안전진단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래 인용하는 대목이다.△마애불상 변위측정 계측기 설치 및 점검(2012.03.20)△남산 열암곡 마애불상 암석 2차 안전진단(2012.04.10~2012.05.09)△마애불상 이전방안 1~3차 검토회의(2012.04.12, 2012.04.25, 2012.04.26)△마애불상 회전 방안 및 지반안정화 검토회의(2012.05.10)△마애불상 자문위원단 구성 및 자문회의 개최(2012.06.18) 이처럼 불교계와 역사학계는 각자의 방식대로 남산 마애불의 입불(立佛·쓰러진 부처를 일으켜 세우는 것)을 위해 오랜 시간 애쓰고 있다. 그 지향과 목적은 차이가 있겠지만.□ 경주시, 장기 계획 아래서 남산 마애불 복원에 애써남산 마애불이 쓰러진 상태로 발견된 지 15년. 그간 조사와 연구, 복원 프로젝트 수립에 애써온 이들이 적지 않다. 2022년 현재는 그 책임을 경주시와 문화재청 등이 맡고 있는 상황.경주시청 문화재과 관계자는 2015년 경주문화재연구소의 ‘열암곡 마애불상 정비보고서’가 발간된 이후 남산 마애불과 관련해 진행된 복원사업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2016년에는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이 쓰러진 남산 마애불 입불 방안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고, 2018년에는 불상 인근 정비 방안 연구와 실시설계가 추진됐다. 그 결과 지난해엔 열암곡 마애불상 주변에 옹벽과 보호각을 설치하는 정비공사가 준공됐고, 올해 5월엔 역시 한국건설기술원의 주도로 불상의 보존관리 방연연구가 시행됐다.”경주시는 쓰러진 채 오랜 세월을 지내온 남산 마애불을 일으켜 세우는 건 “신라 유물의 가치를 회복하고, 안전하고 편리한 관람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역사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새로운 교육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말한다.해당 마애불이 산 속 깊은 위치에 있다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암부착망(산사태나 장마 등에 바위가 붕괴되지 않도록 씌우는 철망), 배수로, 계측시설을 설치하고, 입불을 위한 각종 실험과 기본·실시설계를 진행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그러나, 남산 마애불을 일으켜 세우는 것에 반대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 “현대적 기술을 이용해 한시바삐 남산 마애불을 과거 존재했던 위치에 세워야 한다”는 의견만큼이나 “고대의 유적과 유물은 무너지거나 폐허인 상태로도 얼마든지 귀한 가치가 있다”는 목소리에도 힘이 실리는 것.경주시 문화재과 역시 이런 어려움을 “다시 복원하는 것이 좋을지, 그대로 두는 것이 더 좋을 것인지 등 입불에 대한 여러 견해가 많아 공론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부연하고 있다.또한 제대로 된 입불을 위해선 ‘실대형 실험(Full scale Test)’ 등의 안정적인 복원 방안도 지속적으로 연구돼야 하는 어려움 역시 엄존한다. 여러 조건을 볼 때 쉽지 않은 일이다.779년(신라 혜공왕 시절) 혹은, 1430년(조선 세종 시절) 쓰러져 긴긴 세월 땅을 보고 엎드린 남산 마애불은 내년 1월 ‘열암곡 마애불상 보존관리 방안역구용역’이 완료되고, 그해 입불을 위한 실대형 실험과 기본설계를 마치면, 80t의 거대한 몸을 일으킬 준비를 끝내게 된다.경주시는 실시설계와 입불 공사가 예정대로 진행된다면 오는 2025년엔 남산을 찾는 시민과 여행자들이 마애불의 얼굴만이 아닌 몸 전체를 볼 수 있을 것이라 예측한다.과연 그 과정에서 어떤 변수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질 것인지 적지 않은 이들이 쓰러진 경주 남산 마애불을 주목하고 있다.끝/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7-05

가난한 학생들 무료로 가르치며 포항에 미술 기반 닦아

김두호는 1970년대부터 포항에서 미술 교사로 재직하며 제자들을 길렀다. 전문적인 미술교육에 목말랐던 학생들은 그의 화실에 모여들었고, 그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무료로 가르쳤다. 그의 화실은 학생들이 미술에 대한 갈증을 푸는 공간이었다. 포항에서 처음으로 학생들의 미술 모임이 만들어진 것도 이때다. 김두호가 배출한 제자들은 현재 포항 화단의 구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배 : 1970년대는 미술을 전공한 교사가 드문 시절이죠?김 : 예체능 계열 전부 전공 교사가 드물었지. 교사들의 수업시수를 고르게 하려고 다른 과목을 떼어 맡기기도 했어. 수업시수가 적은 예체능 교사들은 더 그랬고. 대동중학교에 부임하니 한문도 가르치라고 하는 거야. 나는 음악을 맡겠다고 했지. 피아노를 배운 적이 있어서 중학생은 가르칠 수 있겠다 싶었거든. 그때 음악 과목은 서무실 여직원이 맡아 가르쳤는데 교사 자격을 가진 내가 한다니까 학교에서 반기더군. 그렇게 1학년 음악을 2년 정도 가르쳤어.배 : 음악은 언제 배우셨어요?김 : 혼자 익힌 거야. 그때는 건반을 제법 두드렸는데 나이가 들어 손이 굳으니 그전처럼 안 되더군. 악보 보는 눈과 손이 같이 가야 하는데 언제부턴가 손이 못 따라가.배 : 당시 미술을 전공한 교사로 배원복 선생이 있었지요?김 : 타지에서 온 교사는 간혹 있었지만 포항 출신으로 미술을 전공한 교사는 배원복 선생과 나뿐이었어. 배원복 선생은 내가 부임할 즈음 교감이 되었고, 뒷날 교장까지 했지. 유화를 전공했는데 한국화를 주로 그렸어.배원복(1926~2015)은 포항 흥해 출생으로 김천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주예술학교를 1회(1949)로 졸업했다. 경주와 포항에서 40여 년간 교직 생활을 했으며 포항미술협회 제5대 회장을 역임했다.배 : 당시 대동중학교 미술반 수준이 상당했다고요?김 : 미술반원이 꽤 많았고 다들 열심히 했어. 대회에 나가면 매년 단체 우승을 할 정도로 실력이 우수했지. 지금도 활동하는 제자들이 많아. 미술반을 운영하면서 보람을 많이 느꼈어.배 : 여러 학교 학생들이 선생님 화실로 찾아왔다고 들었습니다.김 : 학생들이 딱히 미술을 배울 곳이 없었으니까. 그때 개인 화실이 있었는데 방과 후에 학생들이 오면 지도해줬어. 그림 공부의 기본인 수채화와 소묘를 주로 가르쳤지. 그때 배운 학생 중 몇 명은 미술 교사가 되었어. 그 제자들도 이제 거의 정년퇴임을 했을 거야.김두호의 화실에 다녔던 최복룡 전 포항미술협회 회장에 따르면 당시 미대 입시생 상당수가 김두호의 화실을 찾았다. 가정형편이 넉넉한 학생들은 대구나 부산, 서울의 미술학원에 다녔지만 대부분 엄두도 못 내던 시절이다. 김두호는 미대 지망생들에게 큰 힘이 되었고, 지금 포항 미술계가 두텁게 형성된 데에 많은 기여를 했다.배 : 당시 그림을 그리던 고등학생들이 화란회(畵蘭會)라는 모임을 만들었는데 혹시 기억하십니까?김 : 모임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는 내가 교사 초기 시절이었으니까 열정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칠 때였지. 1970년대 김건규, 백해룡, 이방웅 교사와 미술대회를 많이 만들었어. 아마 그때 대회나 전시에 열심히 참여한 학생들이었을 거야. 화란회는 김두호의 지도를 받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창립된 포항 지역 고등학교 미술 학도들의 모임이다. 몇 년 후 없어졌지만 1970년대 포항 미술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단체다. 현재 포항에서 활동하는 중견 작가 가운데 이상락, 김왕주, 최복룡, 이경형, 김직구, 박계현 등이 화란회 출신이다.배 : 선생님은 가난한 학생들을 무료로 가르쳤다고 제자들이 말하더군요. 수업료 대신 연탄을 드렸다는 제자도 있고, 미술실에서 밥을 해먹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김 : 배고픈 시절이었으니까 다들 어렵게 공부했지. 내가 맡아서 가르쳤다기보다 그림 그릴 공간조차 없으니까 돈 없는 학생들이 찾아오면 편하게 그림 그리라고 허락했을 뿐이야. 오며 가며 지도도 했고.배 :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니 미술 환경이 좋을 수가 없었겠습니다.김 : 먹고살기 어려우니까 부모들이 그림 그리는 걸 말렸지. 그림 그리면 배고파서 안 된다는 이야기를 나도 많이 들었어. 그림 그리면 굶어 죽는다고 할 정도로 사회 분위기는 미술에 우호적이지 않았거든. 안타까운 일도 있었어. 대동중학교 미술반에 그림을 워낙 좋아하고 소질도 뛰어난 한 학생이 있었는데 부모가 반대했어. 그런데 그 학생이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자살해버린 거야. 그림을 계속 그리고 싶었는데 뜻대로 안 되니까 극단적인 선택을 한 거지. 그 학생의 부모가 그 이야기를 나한테 하면서 나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몰라. 왜 미술을 가르쳤냐는 거지. 미술반을 만들어 지도한 내 잘못이 아닌가 자책을 많이 했어. 먹고살기 어려운 시절이다 보니 그런 일도 있었지.배 : 미술반 활동을 반대하는 학부모가 많았겠군요.김 : 수업시간에 그림을 좀 그린다 싶으면 미술반으로 불러서 지도했거든. 그런데 그 사건 후에 학부모들이 찾아와서 자기 아이는 지도하지 말라는 거야. 내가 뭐라고 말할 처지나 되나? 포항제철이 들어서고 지역의 살림살이가 전반적으로 나아지면서 그런 학부모들이 찾아오지는 않았어. 그림 그리면서 겪은 일 중 가장 가슴 아픈 기억이 제자의 자살이야. 오로지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목숨을 바친 거잖아. 그 아이의 너무나 짧았던 생애를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마음이 아파. 그림을 계속 그렸다면 좋은 작가가 되지 않았을까 싶어 더 안타까워.배 : 교직과 병행하면 작업 시간이 부족했을 텐데, 작품 활동을 꾸준하게 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김 : 교사 생활을 하게 되면 작업 시간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어. 그래서 그림 그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계속 노력했지. 죽장에서 교직 생활할 때도 비록 그곳이 조용한 시골이지만 사람들이 모여 지내다 보니 개인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어. 그래서 대동중학교로 옮겨 바로 화실을 구했지. 그림 그리려고 술도 끊었어. 대동중학교에 근무할 때 동료 교사 둘과 친분을 쌓았는데 저녁마다 술판을 벌이는 거야. 당시 포항국민학교 옆이 거의 술집이었어. 퇴근하면 늘 거기 가자고 하는 거야. 나는 퇴근 후에야 그림을 그릴 수 있는데 술만 마시면 어떻게 되겠어?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고민 끝에 최동하 외과의원을 찾아갔지. 최동하 원장은 나중에 포항의료원장을 지냈는데, 그의 아들을 가르친 적이 있어. 최 원장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고 다시 술 먹으면 죽는다는 소견서를 적어달라고 부탁했어. 그걸 동료들에게 보여주고는 술을 딱 끊은 거야. 그 후로 수업을 마치면 바로 작업실로 갔지.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박경숙(미술평론가)

2022-07-04

기득권의 사회 구조를 국민 이익에 맞게 바꿔야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한 한국 사회는 더 이상 보수와 진보의 프레임으로 봐서는 실체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대신 기득권층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구분하면 실체를 선명히 볼 수 있다. 우리 사회는 학연·혈연·지연으로 엮인 연고주의나 공동체 의식이 결여된 기득권층의 횡포가 특히 심하다. 이건 보수뿐 아니라 진보를 표방하면서도 사욕 추구에 매몰된 탐욕적 기득권자들에서도 예외가 없다.조국 교수가 법무부장관 후보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맨 처음 주장한 신평 변호사는 “세상을 보는 국민의 눈이 ‘조국 사태’ 이전과 이후로 달라졌다”고 했다. “세상은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공정의 틀을 유지해야 한다”는 신 변호사는 기득권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 왜곡시킨 사회적 구조를 전 국민의 이익에 맞게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 사법제도 개혁을 끊임없이 주장했다.△올바른 사법제도의 핵심은 국민이 공정한 수사를 받고, 또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제도개선 혹은 개혁을 한 적이 없다. 그 결과 수사나 재판의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는 사람들 수가 많고 또 그 중에는 명백히 부당한 수사나 재판의 희생이 된 사람도 적지 않다. 이들을 ‘사법피해자’라고 한다면 이들이 내뿜는 피맺힌 절규가 전국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다.그리고 한국의 사법신뢰도는 국제적인 조사에서 매년 OECD 37개국 중에서 최하위에 머물러 있다. 이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진지하게 공정한 수사와 재판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개혁을 서둘러야 한다.- 우리 법률 중 현실과 맞지 않아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법률은 대표적으로 어떤 것이 있나.△ 지금으로 봐서는 문재인 정부에서 행한 소위 검찰개혁, 또는 ‘검수완박’으로 이루어진 여러 법률들을 다시 개정해야 할 것이다. 이는 정권에 대한 검찰의 수사를 막기 위해 행한 것으로 검찰의 권력 핵심에 대한 수사를 방해하고자 하는 것이 본질이다.나는 진정한 사법개혁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두고 민형배 민주당 의원이 당선됐을 때 직접 의원회관으로 찾아가 사법개혁 강의를 해주기도 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경우 케이스별로 처리하겠지만 폐지하는 것이 맞는 것 아닌가.△ 물론이다. 피해자를 위축시키는 법이다. 유엔에서도 그렇게 한국에 권고한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의 경우 처벌하지 않아야 하고 허위사실에 따른 명예훼손이라도 벌금형에 그쳐야 한다는 식이다. 언론의 자유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갖는 고귀한 가치에 비추어 심각하게 이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유전무죄’인 것 같다. 갈수록 변호사 의존하는 사회로 가고 있는 것 같고 세상이 변호사 중심으로 바뀌는 것 같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추세의 일면도 있고, 한편으로는 법조인의 과다배출이 야기한 과열경쟁에 의해 초래된 측면도 있다.- 현재의 로스쿨 제도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다.△지금 한국의 로스쿨 제도는 철저하게 기득권층을 위한 제도다. 많은 부분이 중·하위층 자녀들의 계층 상승 사다리를 봉쇄하고 있는 집안 자녀들에게 유리하도록 만들어졌다. 지금의 로스쿨을 우리 사회의 진보 귀족들이 만들기는 했으나 보수와 진보 기득권층이 모두 로스쿨 제도 개혁을 반대하고 있다.교육과정도 훌륭한 법관을 배출하기 위한 교육이기보다 교수를 위한 교육과정으로 편성돼 있다. 이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먼저 표준교과과정제를 실시하여 교과과정을 충실히 할 일이다. 또 등록금도 대폭 낮춰서 중하위 계층에서도 법조직역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하고 나아가서는 우리 실정에 맞는 법조인 양성제도를 개발해야 한다.- 변호사 숫자가 늘어나면서 자질론도 끊이지 않고 있다. 사법고시 부활론이 나오기도 한다.△며칠 전 현직 중견 법관을 만났더니 현재 판사 자질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우려하더라. 판사가 법 이론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부실한 로스쿨 교육 때문이라 생각한다. 거기에다 법원의 규율은 땅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큰일이다. 사법제도의 근간이 무너지는 것 같다.개인적 의견으론 사시부활론의 가리키는 사회적 사다리의 복구에 충분히 공감한다. 그러나 나는 사법시험제도, 로스쿨 제도를 넘어서는 새로운 제도의 창설이 필요하다고 본다.- 로스쿨뿐 아니라 대학입시나 공무원 임용에서도 공정하지 못하다는 지적이 있다.△우리 사회의 많은 부분이 공정하지 못하다. 공정하게 돌아가야 할 사회 시스템이 기득권의 이익을 지키는 쪽으로 불공정하게 돌아가고 있다.특히 586 운동권 세력들은 명예와 권력에 이어 이번 정부에 들어와서는 재물까지 탐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탐욕은 자신들을 위해서라면 국가제도를 바꾸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던 아름다운 사회적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걷어 차 버렸다. 뻔뻔스럽고 보수 기득권보다 더 교활하고 탐욕적이었다.계층 상승을 위한 사다리는 어떤 형태로든 유지돼야 한다. 그 사다리가 없어지면 불건전사회가 되고 압력이 폭발하게 된다. 있는 사람, 기득권 자녀를 좋게 고쳐놓은 법이나 대학입시 공무원 임용 등에서 기득권층의 탐욕스러움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지 않나.대학입시에서부터 불공정 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수시 전형의 많은 부분이 기득권 자녀들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져 있는 것이 그것이다.공직 사회의 경우에도 외교부에는 많은 직원들이 특채로 들어와 있다. 과거 외무고시를 통해 들어왔을 자리들이다. 현대판 음서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회가 공정하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어떤 방안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우리 사회가 공정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단순한 개혁을 넘어 이순신 장군의 ‘산하재조’(山下再造)를 본받은 ‘국가대개조’(國家大改造)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는 보수와 진보를 넘어 기득권자들이 그들의 이익에 맞게 왜곡시킨 사회적 구조를 전 국민의 이익에 맞게 바꾸는 것이다. 예산 뒷받침이 없이도 당장 실천할 수 있는 방안도 있다. 기득권 자녀에 유리하게 만들어진 대학입시 제도를 되돌려야 한다. 또 사무관 이상 공무원 특채를 줄이고 공정하게 선발하는 것이다. 로스쿨 제도를 바꾸는 것도 방안 중 하나다.- 문재인 정부 탄생에 많은 역할을 했다. 대통령 당선인 인수위에 몸담았고 친문 성향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는 윤석열 후보를 지지했다. 지난 정부에서 요직을 맡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그것이 안 돼 삐쳤다는 소문도 있다.△민주당 씽크탱크인 민주통합포럼 상임위원이기도 했고 대선 과정에서 민주당 중앙선대위 위원장도 맡았다. 그래서 대법관이나 감사원장 법무부장관 등에 하마평이 있었고 상당히 진전되기도 했었다. 그러니 삐친 것은 사실이 아니고 민주당에 등을 돌린 결정적 계기는 조국 법무부장관 때문이다.- 그렇다고 곧바로 윤석열 후보를 지지하게 됐나.△그가 검찰총장일 때 비판하는 글을 써 주목을 받았고 비판 언론들과 의기투합하기도 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의 무능과 위선을 그대로 두고는 나라가 바로 서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문 정권은 뉴욕타임즈가 지적한 ‘내로남불’ 정권이다. 그런 문 정권을 떠받치고 있는 운동권 세력들을 청산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미래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586운동권, 촛불 정부의 탄생으로 기대를 받았지만 한 꺼풀 벗겨보니 위선적이고 잇속 챙기는 사람들이었다. 진보 귀족이라 불릴 이들 운동권은 국정을 담당할 실력이나 식견은 없으면서 자신들의 잇속 챙기기에는 어느 부패 보수 세력에 뒤지지 않았다.그러던 차 주위에서 ‘윤석열이라는 사람이 괜찮으니 만나보라’고 권유했다. 그래서 실제 만나봤더니 사람이 믿을 만했다. 거기에다 주변에 필체 분석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전문가들로부터 윤 후보의 필체를 분석해 본 결과 신뢰하게 됐다.무능하고 위선적인 문재인 정권을 옹위하면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진보 귀족들에 대한 청산은 윤석열 후보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윤 대통령이 당선되고 취임한 지 50일이 지났다. 잘 해 나갈 것 같나.△통합과 개혁의 대통령이 되길 바란다. 통합은 잘 해 나갈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좋은 가정에서 훈육받은 성장 과정을 볼 때 우리사회의 모순에 대한 감수성이 약하지 않을까 생각도 된다. 지난 5년간 정치 사법 교육 부동산 등 국가 사회 전반에 걸쳐 헝클어진 질서를 수습해 줬으면 하고 기대한다.- 조국 전 장관과는 어떤 관계인가.△서울대 법대학보(Fides) 후배 편집위원이었고 나를 대법관으로 추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장관 후보가 됐을 때 내가 처음으로 ‘후보 사퇴하라’고 주장했다. 그 때부터 조국과 문 정부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하면서 민주당에 등을 돌리게 됐다. 조 전 장관 입장에서는 내가 야속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지금도 ‘그 때 사퇴했더라면 지금은 아마 조국 대통령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나서 막걸리라도 한 잔 나누고 싶다.- 판사 재임용에 탈락했다. 사전에 사표를 썼나, 탈락했나? 왜 그런 일이 생겼나.△탈락한 것이 맞는다. 당시 법관 사회에 돈 봉투가 횡행했다. 구체적으로 적시할 필요도 없을 지경이다. 그걸 비판하는 정풍 운동을 벌였다. 발단은 법관으로는 처음으로 일본 재판소에 파견됐고 그 때 쓴 책 ‘일본 땅 일본바람’에서 우리 법원 실정을 폭로했기 때문일 것이다.- 변호사 개업했을 때 전관예우는 좀 받았나. 경북대 로스쿨에서는 왜 사퇴했나.△예우는커녕 사건수임조차 없었다. 대가대 교수시절 한국헌법학회 회장을 맡아 이용훈 대법원장에게 인사하러 갔더니 “전관예우도 못 받아본 변호사”라고 하더라. 그게 언론에 공개되기도 했다.로스쿨 제도는 설계부터 잘못 되어 있음을 느꼈고 학교에 계속 있는 것이 불편했다.- 판사로, 교수로, 변호사로 여러 직업을 편력했다. 최근 정치인으로, 정치평론가로 활약하고 있다. 요즘은 아주 농부, 농업인을 자처하고 있다.△그 중에서 지금의 일이 가장 마음에 맞고 제일 낫다. 변호사 사무실은 몇 달 전부터 사건 수임을 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자유스럽게 독서하고, 농사를 짓고, 틈나는 시간에 어디에 얽매임 없이 글을 쓰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욕심을 버리고 이해관계에 얽히지 않아 사물을 보는 눈이 밝아진 것 같다. □신평(申平·66) 공정세상연구소 이사장. 변호사.대구출생. 경북고, 서울대 법학과 졸업. 서울대 석사. 영남대 법학박사제23회 사법시험 합격. 판사(서울 인천 대구 경주의 법원에서 근무)대구가톨릭대 법대 교수. 경북대 로스쿨 교수·학장.미국 중국 일본의 여러 대학에서 연구.한국헌법학회장, 한국교육법학회장, 엠네스티 법률가위원회 위원장. 국공립대학 교수회 연합회 정책위원장. 경북대 법학연구원장 역임.시와 수필로 등단한 한국문인협회 회원.2018년 대한민국법률대상 2016년 국회의장공로장, 2013년 철우언론법상. 2012년 일송정문학상 수상.현재 (사)공정세상연구소 이사장. 중국 런민(人民)대학 객좌교수. 한일비교헌법학회 한국회장.30여년 전엔 허허벌판이었던 경주에 터를 잡고 농사를 짓고 있다. 가난한 소작농이었던 부모에 대한 존경심과 땅에 대한 동경으로 농업인을 자처한다.하지만 흘리는 땀에 비해 수확은 터무니없는 보통 농부들에 비하면 농사를 직업이라 부르기에는 부끄럽다고 한다.최근에는 고 심정민 소령 추모사업회 회장을 맡았다./이경우 편집위원

2022-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