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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고객들 두번 걸음 않도록‘야물딱지게’ 고쳐주는게 최고의 서비스 아닙니까

몇 해 전. 오랜 시간 동양철학을 공부한 학자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일생 세상과 인간의 깊숙한 내면을 관찰해온 70대의 그는 “사람의 구두와 걸음걸이를 보면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성격이 급한 사람은 구두의 앞부분이 먼저 닳고, 뻣뻣하고 거만한 이들은 구두 뒤축을 자주 갈 필요가 없다고 그랬다.“높은 굽의 구두를 신고도 뛰듯이 바쁘게 걸어가는 남녀를 보면서는 시간과 돈에 쫓기는 현대인들의 마음 상태를 감지한다”는 말도 들었다.곰곰 생각해보면 설득력과 합리성을 갖춘 해석이다. 눈 밝은 이들에겐 개개인이 소유한 물건이나, 행위 자체가 ‘인간 해석’의 수단이 될 수도 있는 법.시인들 중에도 ‘구두’를 시의 소재로 삼았던 이들이 적지 않다. 검거나 혹은, 누런 구두를 보며 소의 짧고 서러운 생을 떠올리는 이경우의 ‘구두를 신다가’도 그런 작품 중 하나다. 이런 노래다.신장에서 구두를 꺼내다가문득 이 구두는한 많은 생을 마친 어느 소의가죽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평생이 겨우 반경 몇 킬로미터를 벗어나지 못한 채고단한 노동의 현장을 살다간 영혼이죽어서라도 자유롭게, 낯선 땅을 밟아 보고파한 켤레 인간의 구두로마무리 되었나보다신장에서 구두를 꺼낼 적마다나도 모르게어디든 떠나고 싶어지는 것은혹여, 소의 필생의 염원이다시 살아난 것은 아닐까가엾은 소의 영혼을 위하여구두창이 다 해지도록자유로워지고 싶은 시간왕방울 같은 눈을 끔벅이며순한 소 한 마리가코뚜레가 박힌 얼굴을 내밀고 있다.△ 구두와 함께 울고 웃어온 반세기 세월은…죽도시장 개풍약국 옆 노점에서 구두를 수선하는 안도호(70)씨는 20대 초반부터 수제화를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이후 1980년대 중반 무렵 저렴한 기성품 구두가 쏟아져 나오면서 수제화 시장이 위축되자 ‘구두 제작’에서 ‘구두 수선’으로 직업을 바꾼 안씨.만들거나 수선하며 그가 구두와 함께 살아온 게 자그마치 반세기다. 강산이 5번은 변하는 시간. 그쯤이면 안도호 씨도 앞서 인용한 철학자나 시인 정도의 깨달음을 ‘구두’를 통해 얻지 않았을까?대장장이는 눈앞에서 타오르는 불의 빛깔만 보고도 온도를 가늠한다. 긴 세월 설렁탕을 끓여온 할머니는 도축된 소고기의 촉감만으로도 신선도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였다. 아래와 같은 질문을 던진 이유는.-구두를 얼핏 보기만 해도 그게 비싼 구두인지, 싼 구두인지 알 수 있나? 그리고, 구두굽이 닳는 속도를 보면 그 사람의 성격도 짐작되는지.(기자의 갈색 구두를 내려다보며) “100퍼센트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대충 가격까지도 알 수 있다. 비싼 구두는 세련된 디자인은 물론이고, 튼튼해서 오래 신는다. 가죽이나 밑창 등의 부속이 싸구려와는 다르다. 구두굽을 자주 갈아야 하는 사람은 느긋한 성격이 아닐 것이란 건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알 수 있지 않겠나.(웃음)”-구두와 인연을 맺은 건 언제부터인가.“경상남도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포항으로 이주했다. 구두 수선을 시작한 건 40년에 가깝다. 그전엔 조그만 공장을 여러 곳 옮겨 다니며 수제화를 만들었다. 수제화 시장이 몰락하면서 막노동을 하거나 뱃일을 하는 등 직업을 바꾼 동료들도 적지 않았다. 나는 구두 만들고, 수선하는 게 천직이라 생각하고 1980년대 중반부터 죽도시장 입구에 자리를 잡고 구두, 가방, 우산을 고치는 일을 시작했다.” △ 무엇이건 쉽게 버리는 세태에 구두 수선도 줄어1950년대 한국전쟁을 전후한 절대적 가난의 시대는 아니었지만, 지금보단 모든 게 부족했고, 절약이 보편적이던 1980년대. 당시 구두굽을 가는 비용은 500원이었다.죽도시장에선 점심을 때울 국수 한 그릇을 300원에 팔았다. 구두 한 켤레가 1~2만원 안팎이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안씨의 벌이가 나쁘지 않았다. 어지간한 월급쟁이는 부럽지 않았으니까.2022년 6월 현재 굽 수선을 하려면 남자 구두의 경우 1만5천원, 여자 구두는 1만3천원을 지불해야 한다. 구두굽 교체 비용이 30배 오른 것이다. 그럼에도 안도호 씨의 경제적 형편은 1980년대만 못하다. 구두를 포함한 대부분의 생활용품을 쉽게 사고, 고민 없이 버리는 세태 탓이다. -죽도시장에 처음 들어왔을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많은 것들이 변했을 것 같다.“맞다. 40년 가까이 한 곳에서 일하다보니 보지 않으려 해도 세상과 사람들이 보인다. 빗방울을 막아주는 아케이드가 생기고, 거리는 깔끔하게 포장됐다. 그런데, 그런 발전과 함께 사람들의 절약정신과 서로를 위해주는 애틋한 정은 사라진 것 같아 아쉬울 때도 있다.”-그래도 즐거운 기억이나 경험도 있을 것 같은데.“손님들이 내가 수선한 구두를 신고 이 앞을 지나다가 ‘잘 고쳐줘서 구두가 편하고 튼튼해졌다’고 말해주면 그날은 행복하다. 포항 KBS 최규열 아나운서도 그런 손님 중 하나였다.”-거리에서 일하다보면 마음 상하는 일도 있을 듯하다.“자랑할 만한 직업은 아니지만, 구두를 고치며 아이들 키우고 아내와 생활을 이어왔다. 다만, 오가며 술 취한 사람 등이 괜한 시비를 걸 때는 기분이 좋을 수 없다. 하지만, 어쩌겠나. 먹고살려고 여기 나와 있으니 웃어 넘겨야지.”△ ‘없어지면 아쉬운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안씨는 “구두를 잘 고치는 특별한 방법은 없다”고 했다. 그저 오랜 경험을 통해 얻어진 작은 기술들이 하나둘씩 모여 좋은 구두 수선공을 만드는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그러나, 안도호 씨는 구두는 물론, 가방과 우산을 고칠 때마다 매번 최선을 다한다. 손님들에게 친절하고, 수선을 위해 다시 다른 가게를 찾지 않도록 ‘야물딱지게’ 고쳐주는 게 최고의 서비스라고 믿기 때문이다.조그만 몸피에 선량한 눈빛을 가진 안씨. 그래서였을까? 인사를 나누며 일흔 살이라는 나이를 이야기 들었을 때 잘 믿기기 않았다. 노인에게선 발견하기 힘든 소년 같은 순정함의 그림자를 느꼈기 때문.그걸 신는 사람의 많은 것을 은유적으로 알려주는 구두. 평생 구두를 만들고, 고치며 살아온 안씨의 꿈을 뭘까?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점포도 없이 길에서 일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서비스와 기술 좋은 구두 수선집’으로 기억해주고, 만약 내가 일을 그만둔다면 ‘그 사람이 없으니 아쉽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 너무 거창한 꿈인가?(웃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6-07

영주 미래 100년, 산업·문화·먹거리로 키워나간다

영주시는 지역의 균형적 발전과 미래지향적 행정 계획을 바탕으로 후손에게 물려줄 경쟁력 있는 도시 건설을 위해 다양한 제도의 개선과 100년 먹거리 마련을 위한 노력에 중점을 두고 역량을 모으고 있다.이 가운데 산업을 통한 미래 역량을 결집한 베어링산업 국가산단, 2022영주세계풍기인삼엑스포, 세계 속의 문화관광 중심 도시로서의 성장, 한 테마파크 사업으로 추진 중인 선비세상은 영주 미래의 새로운 동력이 될 전망이다.◇첨단베어링산업 국가 산단첨단베어링 국가산업단지조성사업 시행예정자인 경상북도개발공사가 국가산업단지계획 승인 신청서를 지난달 26일 국토부에 제출해 본격적인 절차에 들어갔다.영주시는 국내 베어링산업 앵커기업인 일진그룹 (주)베어링아트를 발판으로 첨단베어링산업을 지역의 대표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국내 유일의 베어링 전문연구기관인 하이테크베어링 시험평가센터 건립, 베어링 관련기업, 연구소 유치에 나서는 등 베어링산업 중심지 기반구축을 적극 추진 중이다.베어링 클러스터 사업은 총 5천억원 규모로 국토부 사업으로 2천500억원이 투여 되는 베어링국가산업단지 조성사업과 산업부 사업으로 2천500억원이 투자 되는 첨단베어링 제조기반 구축, 핵심원천기술 개발과 고부가 베어링 제조기술개발, 베어링 전문 인력 양성 및 사업화 지원 사업으로 구분된다.사업대상지는 영주시 적서동, 문수 권선리 일원에 130만㎡ 규모로 조성된다.영주를 중심으로 인접한 중부내륙 3개도 8개 시군(충북동부, 강원남부, 경북북부) 1만5천개 일자리 창출과 인근 동양대학교 외 6개 지역대학 인재확보 및 청년 일자리 창출에 큰 몫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베어링클러스터 조성 사업은 2027년까지 준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서산~영주~울진 잇는 중부권 동서횡단철도중부권 동서횡단철도는 충남 서산을 출발해 당진·예산·아산·천안, 충북의 청주·괴산을 거쳐 경북의 영주·문경·예천·봉화를 지나 울진까지 한반도 동서를 가로지르는 330㎞의 철길이다.중부권 동서횡단철도는 문재인 정부 100대 국정과제였지만 경제성 평가에서 낮은 평가를 받으며 지난해 6월 정부의 제4차 철도망 구축 계획에 반영되지 않았다.그러나 이번 대선 과정에서 여·야 후보가 모두 중부권 동서횡단철도 공약을 내놓으면서 탄력을 받을 수 있을지 주목 되고 있다.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당시 동서횡단철도를 공약에 반영시키고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동서횡단철도를 예타 면제사업으로 적극 추진할 것이라 해 사업 추진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동서횡단철도가 성사될 경우 영주시는 철도구간 연계 12개 도시와 관광,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부분에 접촉이 가능해져 지역간 균형발전 및 영주지역 성장에 또다른 토대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중부권 12개 시·군은 동서횡단철도 건설을 촉구하고자 2016년 시장·군수들로 구성된 협력체를 구성, 사업의 조기 추진을 위해 공동으로 대응해왔다. ◇한(韓) 테마파크 선비세상한국문화의 전통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선비인성 교육의 중심지가 될 한국문화테마파크 선비세상은 다양한 체험 콘텐츠와 차별화된 인성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 명실상부한 한국문화·선비문화의 메카로 개장을 앞두고 있다.대한민국 한(韓) 문화의 중심지가 될 선비세상은 한복, 한식, 한옥, 한글, 한지, 한음악 등 6가지 테마의 매력 있는 한 스타일을 담아내고, 전통문화와 선비정신의 세계화, 관광화, 산업화를 이루어 영주의 100년 미래 문화산업으로 키워나가게 된다.영주가 가진 유네스코 세계유산 소수서원과 선비촌을 활용한 인성 프로그램 활성화와 세계인성 포럼 개최, 선비대상 시상, 국립인성교육진흥원 유치로 인성교육의 중심도시로 성장시켜 나갈 예정이다.선비세상은 전국 단일 최대 전통문화 단지로 한옥, 한복, 한식, 한글, 한지, 한음악 등 브랜드 6개 분야가 주 테마다.선비세상은 총 사업비 1천473억 원을 들여 순흥 선비촌 인근에 96만974㎡ 규모로 조성 중이다.영주시는 옛 전통과 선비문화를 영주의 대표적 경쟁력으로 키운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이를 위해 순흥면과 단산면 일원 960,974㎡(약 30만평)면적에 총사업비 1천670억원을 들여 한테마파크 선비세상은 한문화 RD지구, 전통숙박, 전통문화지구로 꾸며진다.◇2022영주세계풍기인삼엑스포5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국내 재배삼의 시배지인 영주시 풍기읍 풍기인삼문화팝업공원 일원에서 ‘인삼, 세계를 품고 미래를 열다!’라는 주제로 올해 9월 30일부터 10월 23일까지 2022영주세계풍기인삼엑스포를 개최한다.이번 엑스포는 인삼의 ‘생명력’, ‘인류 행복’, ‘미래 산업’ 등 3가지 핵심 가치를 바탕으로 고려인삼의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알려 인삼 종주국으로서의 위상 회복과 국가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인삼이 먹을거리로서만이 아니라 다양한 산업으로 나갈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고자 개최된다.2022영주세계풍기인삼엑스포는 국내·외에 풍기인삼의 브랜드 가치 극대화를 통한 미래가치를 공유하고 고려인삼 산업의 해외 진출과 투자 활성화를 통한 영주시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풍기인삼을 기반으로 한 신산업 육성과 지역 경제 도약의 발판으로 삼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엑스포를 통해 생산유발 2천474억원, 부가가치 유발 1천5억원, 취업인구 2천798명과 인삼산업 경쟁력 강화와 발전을 통해 산업적 기반 조성과 인삼의 주산지이자 시배지로서의 위상과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사회적, 문화적 발전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신소득 작목 영주 별사과, 한라봉영주시 봉현면 가을향기 농원을 운영 중인 장석철(59)씨가 품종 개발한 ‘별 사과’가 소비자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영주시의 새로운 신소득 작목으로 주목 받고 있다.영주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별 사과는 가을 스타라는 신품종으로 한입 크기의 사과로 생김새가 별모양을 닮았다.별사과는 2017년 5월 국립종자원에 품종등록을 했다. 별모양이 선명하고 빨간색을 띠는 가을 스타는 10월 말부터 수확이 시작된다.당도는 17-19Brix로 육질이 단단해 저장 기간이 길며 맛과 향이 깊다. 별 사과는 육질이 단단해 저장 기간이 길고 유통 과정에서 발생하는 변질 가능성이 낮아 상품화에 경쟁력이 높다.별사과는 재배농가가 늘면서 작목반을 형성하는 등 영주 신소득 작목으로서 기반을 다져나가고 있다.시는 IoT 기반으로 2018년도부터 실시한 만감류 지역적응 시험연구를 통해 한라봉으로 널리 알려진 부지화가 영주지역에서 재배 가능하고, 경영비 분석 결과에도 신소득작목으로 육성 가능한 것으로 확인됐다.만감류는 감귤나무 품종과 당귤나무(오렌지) 품종을 교배해 새로 육성한 감귤류 과일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육비대와 열과 방지를 위해 5~6월에는 하우스 내 주간 온도가 28℃이하로 관리를 해야 하고, 7~9월에는 하우스 내부 온도가 30℃이하로 관리한다.영주시에서 생산되는 부지화는 스마트팜을 통한 생산량 증가와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네이밍으로 소비자들에게 쉽게 기억되며 많이 찾는 농산물 브랜드로 성장 가능성을 높여 별사과와 함께 신소득 작목으로 미래 농업을 열어나가고 있다. 영주/김세동기자

2022-06-07

육체적 정신적으로 삶에 활력을 주는 파크골프

신생아 1명이 태어날 때 노령인구는 2명 꼴 늘어난다. 이늘 노년들이 건강하게 즐길 수 있는 여가와 운동으로 파크골프가 무섭게 확산되고 있다. 시내 어느 곳에서는 30분에서 1시간이면 즐길 수 있는 파크골프는 남녀노소 누구나 저렴한 비용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국민체육이다. 대구파크골프협회 회장 김광기씨. 그는 약을 통한 국민 보건 건강증진에 앞장섰던 약사에서 이제는 운동을 통한 건강지킴이로 나섰다. 전 대구시 약사회장으로 의약분업 설계에 적극 참여했고 시민들의 보건 증진과 약사들의 권익 보호에도 앞장섰다. 지금은 파크골프 회장으로 시민들의 건강과 여가선용, 나아가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 골프장이 일대가 시장통이다. 코로나19 상황에서 가장 성황을 이룬 곳이 골프장이라고 들었는데 파크골프도 코로나와는 관계없는 곳인가.△그만큼 파크골프 인구가 많기 때문이다. 이곳 강변 파크골프장만 하더라도 하루 800여명이 이용한다.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까지 풀타임으로 골프장이 운영된다. 이만큼 시민 건강에 이바지하는 체육시설이 파크골프 말고 또 있겠나. 이용객들이 얼굴을 꽁꽁 싸매고 있는 것은 스스로가 코로나19 방역수칙을 준수하기도 하면서 햇빛 차단을 위해서이다.- 대구를 전국 파크골프의 메카라고 한다. 골프장 숫자와 골퍼 인구 때문인가.△대구시내에는 작게는 9홀에서부터 이곳 강변의 45홀까지 모두 27개 파크골프장(61개 코스)이 있고 회원만도 8개 구군별 협회와 시니어연맹, 장애인 연맹까지 10개 연맹 600여 클럽에 1만7천 명 정도이고 파크골프 동호인은 4만 명 이상 될 것으로 추산한다. 전국 파크골프 회원의 23%를 대구 골퍼들이 차지하고 있다. 최근에는 신협이나 마을금고까지 직장이나 모임별로 파크골프 동호회를 조직하고 있는 추세다.거기에다 대구 골퍼들의 실력이 또 만만찮다는 거다. 전국체전이나 파크골프 축전을 비롯, 전국의 유명 파크골프 대회에서 상위권을 대구가 휩쓸기 때문에 대구 골퍼들의 실력을 인정해 주는 것이다. 대구파크골프협회 사무실도 지난 5월 신축 개장했다.-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파크골프 붐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산천어 축제로 유명한 화천군은 지금 파크골프로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산천어 축제는 한 철이지만 파크골프는 연중 계속된다. 화천군으로 골프를 치러 오는 관광객들이 줄을 이으니 지역민들이 대환영하고 있다고 한다. 며칠 동안 화천군에 와서 자고 먹고 하는 파크골프가 화천군의 새로운 관광 자원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이웃 경기도 연천군에서도 파크골프장을 관광 자원으로 조성하고 있다. 지역마다 파크골프는 골프보다 접근하기 좋고 동호인들이 많아 지자체에서도 경쟁적으로 골프장을 조성하고 관광객 유치를 위한 전략을 세우고 있는 모양이다.- 파크골프가 인기가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육체적 운동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유익한 여가 활동이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60대 이후 인생의 제2 황금기에 삶의 질을 높여 줄 수 있는 활동으로 그만이다. 적은 경비에도 근교에서 자연과 호흡하면서 동반자와 소통을 통해 생활에 활력을 주는 것이 파크골프다. 30분에서 1시간이면 골프장에 닿을 수 있고 장비도 골프채 한 개만 하면 되니 얼마나 접근하기 쉽나. 회원 중에는 암 투병중이거나 관절염 신경통 등 지병으로 고생하다가 파크골프를 만나 건강을 되찾고 인생에 새로운 의욕과 자신을 얻었다고 감사하는 사람을 많이 봤다. 대구시체육회의 72개 경기종목 중 역사가 짧은 신생종목이면서도 회원 수나 경기 회수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종목이기도 하다.- 회장으로서 바라는 바가 있다면.△ 파크골프가 특히 나이 든 사람들에게 더없이 좋은 운동이다. 정부에서 경로당에만 지원할 것이 아니라 파크골프에도 관심을 더 가져달라고 주문하고 싶다. 지금 골프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으나 골프장이 충족시켜주지 못해 이곳은 2부제로, 심지어 수성구와 북구의 경우 수요를 감당 못해 4부제로 골프장을 운영해야 할 지경이다. 시내 근교에 더 많은 파크골프장을 만들어 시민 건강도 살피고 도시 환경도 정비했으면 좋겠다.- 약사로 대구시 약사회장을 맡기도 했다. 현재 대구시약사회 자문위원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사태 당시 약사들은 어떤 역할을 했나.△코로나19 발발 초기 대구에서 확진자가 대량 발생하자 마스크 품귀 현상이 일어났다. 당시 마스크를 구하려는 시민들의 긴 행렬에 대구시 약사회는 마스크의 안정적 수급을 위해 지역 도매상과 협력하여 물량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시민들이 불만을 약사들에게 토로하고 그 불평이 약사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보건의료인으로서 사회적 역할을 위해 많은 약사들이 희생을 감수했다. 시내 1200여 약국이 코로나에 노출될 위험을 감수하면서 공적마스크 취급처로 참여하여 방역 최전선에서 안정적으로 마스크를 공급했다. 또 공적마스크 시행이 종료될 때까지 매주 주말과 공휴일까지 최소 100개에서 많게는 300개 약국이 휴일지킴이 약국으로 근무하며 마스크의 안정적 공급에 최선을 다했다. 이처럼 약사들의 적극적인 코로나 방역 참여는 코로나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계속됐다.- 대구시 약사회장 시절 파란이 많았다. 특히 약사들의 한약 취급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됐다.△ 약사들의 한약 취급문제를 두고 한의사 단체와 집단으로 충돌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한약 붐이 일었고 한약 취급에서 과학적 조제를 주장하는 약사와 전통 방식을 고수하는 한의사간 다툼이 시민들에게 밥그릇 싸움으로 비쳐졌다. 약사의 한약 조제 투쟁을 벌이면서 대구시내 약국들이 파업으로 맞섰다. 그러자 당국은 약사회장을 주동자로 규정했고 나는 검찰에 불려 들어가 24시간 구금당했다가 각계의 구명 운동으로 추석을 앞두고 석방됐다.결국 시험을 통해 합격한 약사만 한약을 취급할 수 있도록 하면서 사태가 해결됐으나 이후 한약 붐이 식어버렸다. 결과적으로 약사와 한의사가 모두 손해를 본 것이다. 서로가 상생하는 방법을 찾았더라면 한약 붐이 이어졌을 것이라 생각하니 윈 윈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깝다.- 의약분업 시행 22년이 지났다. 김 회장이 약사회장이던 시절에 비해 약국의 수입 면에서나 약사들의 사회적 위치에 있어서 변화가 있는 것 같다.△예전에는 지역에서 가장 좋은 위치에 약국이 들어섰다. 그런 유명세가 지금은 밀려나고 있다. 지금 가장 목 좋은 곳에는 커피숍이나 카페가 들어서 있지 않나. 이와 함께 경영이 어려운 약국들도 많다. 그렇지만 정년이 없는 면허업이라는 장점이 대학 입시에서 약대의 인기가 떨어지지 않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기도 하다. 지금 전국적으로 수많은 요양병원들이 들어서서 약사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또 약사들은 사회적으로도 보건 복지 분야에서 여전히 중요한 위치에서 활약하고 있다.- 의사들의 처방전 발행에서 제품명 처방 아닌 성분명 처방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직도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환자들의 복약편의를 위해서도 성분명 처방이 바람직하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코로나19 백신 접종 초기 방역 당국에서 백신 접종 후 발열시 ‘타이레놀’을 복용하라고 지침을 내린 것이 대표적이다. 타이레놀 외에도 게보린 사리돈 같은 진통제도 있고 ‘아세트아미노펜’ 성분인 낙센이나 아스피린 탁센 등 대체의약품도 있는데 구태여 특정 제품명을 이야기해서 시중에 타이레놀 품귀 현상이 빚어진 것이다.의사들이 성분명 처방을 하면 환자들도 약을 싼 가격에 구매할 수 있고 보험공단의 재정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의약분업 초기부터 주장해 온 성분명 조제가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편의점에서 일반의약품을 판매하는 문제는 어떻게 되나. 확대하는 것이 시민편의를 위해 바람직한 것 아닌가.△갑자기 열이 나거나 가벼운 증상에서 긴급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의약품이 편의점에서 일부 판매되고 있다. 의사의 처방전 없이도 구입할 수 있는 일반의약품으로 약사법으로 정한 안전상비의약품으로 해열진통제 5종, 감기약 2종, 소화제 4종, 파스 2종 등 13종이다. 이런 약들은 의사의 처방전 없이도 24시간 운영되는 편의점에서 구매해서 사용할 수 있다.그런데 일부에서는 시민 편의를 위해 이런 일반의약품의 종류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약사회에서는 편의점 판매 확대에 대해 반대한다. 의약품의 관리 문제 뿐 아니라 약의 오남용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약에 따라 복약 지도가 필요하며 국민 보건과 국민 불신 해소를 위해서도 편의점의 일반약품판매 확대는 반대다. 일부 시민들이 주장하는 취약시간대의 의약품 판매는 공공 심야약국 도입으로 안정성과 공공성을 충족시키고 있다.- 대구시 약사회에서 처음 시도한 심야약국은 현재 잘 운영되고 있나.△대구에서 처음 시도한 심야약국 제도는 대구시민들의 편의 증진이라는 전폭적지지 속에 현재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운영되고 있다. 이와 함께 대구시 약사회는 구군별로 365약국도 운영중이다. 이들 약국은 연중무휴로 운영하면서 시민 건강 증진에 기여하고 있다. 이런 약국들이 운영되고 있어 일반의약품의 편의점 확대 판매도 재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의약품의 인터넷 판매나 비대면 진료에 따른 약 배달 판매가 문제가 되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비대면 진료에 따른 조제약 배달은 의약품의 오남용과 무분별한 사용을 유발할 우려가 높다. 전문의약품은 취급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특히 환자 본인에게 직접 전달해야 하는데 배달이나 인터넷 판매는 이를 확인할 수 없고 변질 등의 우려도 있다. 그리고 문제가 발생하면 책임소재가 불분명하고 여러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 약사회는 비대면 투약과 의약품 배송에 반대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건강하고 즐거운 삶을 누릴 수 있겠나.△인생은 경제활동 일선에서 물러나 활동할 수 있을 때까지인 65세부터 75세까지가 가장 좋은 황금기라며 이 때 삶의 질을 높여주는 생활체육으로 파크골프가 최고라고 추천한다. 파크골프는 골프처럼 요란하거나 절차가 까다롭지 않아 누구든 쉽게 접근할 수 있다.파크골프도 골프처럼 매너를 지키면서 해야 하는 운동이다. 골퍼들이 동반자를 구하지 못하거나 이런 저런 이유로 파크골프장을 많이 찾고 있다. 그런데 파크골프는 거리나 상황에 따라 클럽을 바꿔 플레이하는 골프와 달리 1개의 클럽으로 운동해야 하는데 골퍼들이 풀 스윙을 해서 안전사고가 더러 발생하기도 한다. 매너를 지키면서 운동했으면 좋겠다. □ 김광기(金光紀) 대구파크골프협회회장·전 대구시약사회장대구출신. 계성고, 영남대 약대.대구시 북구 약사회장, 대구시북구 약사 새마을금고 초대이사장. 북대구JC회장, 팔공환경복지연구소장.대구시약사회 회장. 대한약사회 부회장. 한국마약퇴치운동분부 대구지부장, 대구시약사회 총회의장.현 대구시약사회 자문위원, 햇살요양병원 약사.지금은 대구시 파크골프 협회 회장으로 운동을 통한 시민 건강 증진에 앞장서고 있지만 대구시 약사회장이 됐을 때는 30년 경영하던 약국을 닫고 회무에 전념했고 그때부터 약사회장이 되면 회무에 집중하는 선례를 만들었다. 10년 전 약국을 완전히 접고 요양병원에서 근무하며 취미생활에 빠졌고 엄격한 자기 관리는 약사 후배들의 닮고 싶은 선배가 됐다. 술과 담배 대신 월 1회 먼 산을, 2회 동네 산을 찾는 등산애호가가 됐다. 그 통에 야생화 사진은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섰다./이경우 편집위원

2022-06-06

피어린 의병 격전지이자 3대 대장 최세윤 출생지 포항엔 추모비 하나 없어

의병들은 홍해 전투 이틀 후에 다시 청하군 읍내를 공격해 순검 김학윤의 의복 및 관급품을 빼앗고 연이어 흥해 분파소를 공격해 적 2명을 죽이고 무기를 압수하였고, 분파소 및 관계 건물 3동을 소각했다.12월 5일에는 영덕군 주방(周防)에서 일본군 영덕분견대를 야간에 습격해 격파하였으나, 12월 6일 새벽에 일군경의 기습으로 의병 제2초장 남경숙이 전사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이날 의병들은 마산(馬山·이전평 동방 약 4리)으로 퇴각했다. 이튿날 남경숙의 전사에 격분한 정환직이 부하 83명을 데리고 영덕을 역습했다. 이때 무기 28정을 빼앗고, 쟁암동(靜岩洞)에서 적 2명, 유암동(酉岩洞)에서 적 1명, 도천동(道川洞)에서 적 4명을 죽인 후 영덕읍의 분파소 및 관계 건물을 소각시켰다.이에 일본군은 바닷길을 이용해 도망했다. 영덕에서 일본군이 패하여 도망가자 정환직은 본진을 이끌고 청하로 회군했다.이 무렵 일본군은 계속 지원을 받아 그 기세가 강성했던 반면, 의진은 탄약과 장비가 고갈된 상태. 정환직 부대의 관동으로의 북상계획은 현실적으로 좌절되었고 눈앞에 있는 적과 투쟁하기에도 힘겨웠다.1907년 12월 8일 청하군 각전(角田·뿔밭)에 모인 의병들에게 정환직은 힘겨운 결정을 내렸다. “내가 먼저 관동에 들어가 여러분들을 기다릴 것이니 여러분들은 각지로 나아가 탄약과 의복 등을 구해 관동으로 들어오라”고 명했다.이에 따라 의병들은 별도로 계획을 세우고 상인 혹은, 농부로 변장해 각지에서 탄약을 구한 뒤 관동지방에서 다시 회합하기로 기약 없는 약속을 하고 소부대별로 헤어졌다. △정환직, 죽장 상옥에서 체포돼 영천에서 피살청하군 뿔밭에서 소부대로 나눈 의병들은 각자 무리를 이루어 일본군을 공격하면서 북상을 시도했다. 정환직은 대부분 부하를 해산시킨 후 6명만 데리고 청하군 북면 고천동(高川洞·현재 죽장면 상옥리)에 사는 동서 구칠서의 집으로 갔다.나머지 분산된 의병들은 뿔밭에서 고개를 넘어 상옥을 거쳐 영덕 옥계계곡을 지나 개별적으로 북상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1907년 12월 10일 옥계계곡 끝머리에 있던 영덕군 대서면 옥녀암동 민가에서 북상하던 정환직의 부하 이봉수와 박기원이 미리 정보를 알고 포위망을 좁혀오던 일본군 보병 14연대 11중대에 포로로 잡혔다.니시오카 중대장이 이끄는 11중대는 이들을 고문해 정환직의 움직임과 각 부대가 사방에 흩어져 은신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정환직의 은신처를 알아낸 니시오카는 이날 오후 1시경 부대를 출동시켜 1907년 12월 11일 오전 5시 30분 상옥리 계곡에 산재해 있는 90여 호에 달하는 민가를 수색하기 시작했다.한편, 정환직은 전날 상옥1리에 있는 구칠서의 집에서 하루를 묵었다. 정환직은 같이 데리고 온 의병 6명을 턱골바위 고개에 배치해 적의 동태를 살피게 했다.1907년 12월 11일 아침 8시 30분경 정환직은 급히 구칠서의 집을 빠져나와 그곳에서 북쪽으로 약 500m 떨어진 턱골바위 매복지로 갔다. 이때는 이미 일본수비대가 상옥 2리 쪽에서 그곳을 향하여 내려오는 중이었다.이를 본 의병 보초 중 몇 명이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도망가지 않고 현장에 남아있던 3명의 의병은 정환직을 보호하기 위하여 끝까지 응사하였으나 일부는 현장에서 즉사하고 일부는 체포됐다.정환직 역시 이날 오전 8시 40분경 일본군들에게 체포되었다. 정환직은 청하군에 있던 수비대에 인치되었다가 1907년 12월 17일 대구로 호송되던 중 영천 남교(南郊)에서 총살됐다. 산남의진의 총수이자 제2대 의병 대장이었던 정환직이 일본군에게 재판도 없이 총살당함으로써 산남의진은 또다시 큰 시련을 맞게 되었다.1907년 12월 11일, 정환직이 체포되던 날, 일본군 수비대는 사지를 갈가리 찢어 누구 시체인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훼손한 의병의 시신 3구를 죽장면 상옥리 현장에 둔 채 정환직만 데리고 떠나버렸다.이 시신들은 3일간 현장에 방치되다가 왜군들이 완전히 철수한 것을 확인한 마을 주민들이 대충 사지와 목을 맞추어 관도 없이 그곳에 묻었다. 이들이 끝까지 목숨을 걸고 정환직을 보호하기 위해 항전한 것으로 보아 산남의진 본부에 속한 심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그들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흥해 사람 최세윤 3대 대장, 옥중에서 순국정환직이 일본 군사들에게 총살을 당함으로써 대장이 없는 과정에서도 산남의진 의병들의 투쟁은 계속 이어졌다.1908년 1월 8일 의병 약 30명이 영천 북안면에서 일본인 오우라 다쓰조(大浦辰藏)를 살해하였다. 1월 12일 손수조 등 의병 200여 명이 이석이의 지휘로 청하주재소를 공격하였으나, 의병 19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보았다.의병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이튿날 의병 수십 명이 흥해 순사주재소를 습격해 일본인 순사 1명과 한국인 순사 1명을 총살했고, 1월 25일 의병 약 50명이 의성분파소의 적수비대를 습격했으나 소득 없이 퇴각하였다.같은 날 이진규 등 의병 수십 명이 청하군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였으나, 이진규가 체포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이후 산남의진은 흥해사람 최세윤을 추대해 3대 대장으로 삼았다.최세윤 부대는 무기와 인원, 보급 등 여러 가지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경상북도 전역에서 1910년 6월경까지 활동을 했다. 그러나 결과는 무수한 희생자만 나왔다.이런 피해는 산남의진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1907년 7월부터 1908년 5월 19일까지의 의병 희생자가 총 1만3천445명에 달했다. 이에 비하여 일본 측은 수비대 56명, 경찰 55명, 헌병 4명으로 모두 115명이 사살되었다.단순계산으로 일본 군경 1명당 의병은 117명이 숨졌다. 이를 보면, 1905년부터 1910년 말까지의 국권 회복을 위한 의병 활동인 후기의병 전쟁은 의병과 일본 군경 간의 전투라기보다는 일본 군경에 의한 일방적인 의병 학살 전쟁이라 해야 맞는 말이다. 결국, 최세윤은 1911년 초가을, 장기군 용동에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생활 중 순국했다.△포항에도 최세윤 추모하는 비석 하나는 세워야3대 대장까지 없어진 산남의진은 각기 흩어져 항전을 계속하다가 대개는 순절, 투옥 또는, 국외로 망명했다. 산남의진 선봉장으로 끝까지 살아남았던 우재룡은 1915년 7월 15일 대한광복회를 결성한 주역 중 한 사람이 되었다.일제강점기 36년의 설움을 극복하고 나라를 되찾았을 때, 그 광복의 중심에 섰던 대한광복회에서는 그 이듬해인 1946년 2월에 산남의진 창의대장 정용기와 참모장 손영각 등 많은 장졸이 전사한 포항 죽장 입암전투지를 찾아 위령제를 올렸다.이를 계기로 산남의진의 역사를 공적인 기록으로 남기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집필자인 이종락·이병기 등은 의진에 직접 참여하여 활동하였던 이순구를 비롯한 참여 의사들의 증언과 유족들의 증거자료들을 참고하여 ‘산남창의지’를 써서 남겼다.그간 이어진 3회의 연재기사를 통해 확인했듯 일제강점기 참담한 상황에서 보여준 산남의진의 애국심과 투쟁의지는 실로 위대한 것이었다.그렇기에 산남의진의 대장 정용기·정환직 부자의 출생지인 영천은 일찍부터 산남의진 의병들을 추모하는 기념물을 건립하고 관련 행사를 열어왔다. 인근 영덕 또한 당시 의병장이던 신돌석 장군을 추모하며 신돌석기념관을 세웠는가 하면, 성역화사업을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하지만, 산남의진 3대 대장 최세윤이 태어난 포항엔 그를 기념하는 추모비 하나 없다. 산남의진 1~3대 대장들과 함께 나라를 지키고자 목숨을 걸었던 700여 명의 의병들은 대부분 포항 죽장 일대 사람들이 아닌가. 그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이야말로 지역의 정체성과 자긍심의 문제와도 연결되는 것일 터. 그래서 제의한다.포항시민의 힘으로 도시공원 한 모퉁이에라도 좋으니 산남의진 추모비 하나쯤은 세우자. 이름 없이 죽어간 의병들의 넋을 거두고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도 이제 이 일을 더 이상 늦출 수 없다. 포항 흥해 사람 최세윤 대장이 지하에서나마 웃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이제 우리들의 몫이다. /이상준(향토사학자·본지 객원 편집위원) 홍성식기자끝

2022-06-02

죽장 입암리 항일 무장투쟁… 통곡의 전투로 남다

1907년 10월 2일 영천군 자양면 검단동의 본가가 불타버린 것을 확인한 후 포항 기계 안국사로 돌아온 정용기는 야간회의를 열고 북상에 대한 부장(副將)들의 의견을 다시 모았다.이날 회의에서 정용기는 병사들에게 ‘10일간 휴가를 보낸다’라는 결정을 내렸다. 병사들 대부분이 기계·죽장·청송·청하·영일·흥해 등지에 본가를 둔 사람들이었기에 집안도 둘러보고 가족도 만나볼 수 있는 여유를 주고, 강릉 북상을 위해 그동안 입고 있던 얇은 의복을 동복으로 바꾸어 입고 오도록 하기 위함이었다.영장(營將)들에도 각기 부하를 끌고 각지로 가서 의복을 구해오도록 하였다. 정용기 자신은 본진 150여 명을 이끌고 죽장면 매현리(梅峴里)에 유숙하며 휴가를 간 장병들의 귀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세기 부장, 일본군을 선제공격 했지만…그런데 1907년 10월 6일 오후 4시에 갑자기 척후로부터 ‘우리를 추격하는 일본군이 청송에서 죽장으로 이동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에 정용기는 일본군이 만약 죽장면으로 들어온다면 중심 마을인 입암리에 유숙하리라 예측하고, 당시 매현리 본영에 함께 있던 부장 중 우재룡·김일언·이세기 등에게 각기 부대 하나씩을 이끌고 적소에 매복하여 있다가 적의 길목을 차단하도록 지시하였다.만약 적이 들어오기만 하면 10월 8일 새벽에 입암을 공격할 것이며, 이때 적의 퇴로를 차단하여 적 전부를 섬멸할 계획임도 주지시켰다.1907년 10월 7일 정용기의 명을 받은 세 부장은 작전에 따라 명령받은 매복 장소로 향하였다. 그런데 선발대로 나선 이세기 부장이 죽장면 광천(廣川)으로 매복 나갔다가 왜병 수 명이 이미 죽장면 소재지인 입암 1리 안동 권씨 문중 재실에 들어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더군다나 왜병들은 고지기(庫直)인 안도치(安道致)에게 저녁밥을 시켜놓고는 대청인 영모당(永慕堂)에 총을 모아 세워둔 채 보초 없이 모두 누워 쉬고 있다는 것이다.이세기는 왜군들로부터 주문을 강요받고 닭을 잡아서 재실 앞 개울로 내려와 잡은 닭을 손질하던 안도치로부터 적의 병력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그는 본부에 연락할 필요도 없이 현재의 군사로도 충분히 방심한 적들을 제압할 수 있다고 봤다. 이런 기화가 다시는 없다고 생각한 의병들은 왜군들을 향하여 일제히 선제공격을 가하였다. 갑자기 총소리를 듣고 놀란 것은 인근 매현에 있던 정용기 이하 본진의 군사들이었다. 그들은 매복 나간 군사들이 급습을 당한 줄로 알고 단숨에 달려와 영문도 모른 채 이세기 부대에 합류했다. 의병 150명은 이날 밤 9시 30분 시무나무걸(야연림·惹煙林) 소하천 둑을 따라 엎드린 채 왜군들이 있는 영모당 대청을 향해 집중사격을 가했다. 한참 동안의 집중사격 뒤, 일본군의 응사가 없자 의병들은 일본군이 모두 전사한 것으로 판단하고, 원촌(院村) 입암서원 쪽으로 퇴각했다.의병들은 서원 맞은편에 있는 길옆 주막에서 승전을 자축하며 늦은 저녁밥을 먹었다. 권씨 재실에 들어간 일본군 청송수비대 11중대 미야하라(宮原) 소대가 의병들로부터 공격을 받자 마루 밑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죽은 시늉만 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상대방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른 채였다. △통곡의 입암지변(立巖之變)이날 의병들은 사정거리로 인정할 수도 없는 100여m 밖 원격사격으로 러·일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는 일본군 청송수비대 병력을 건드리기만 했던 셈이다.상대방이 오합지졸이라는 것을 파악한 소대장 미야하라 소위는 치밀하게 의병들의 움직임을 주시하였다. 이들은 의병들이 그곳으로부터 약 1.5㎞ 떨어진 입암서원 앞 주막에서 술과 야식을 먹으며 방심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파악했다.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접수한 수비대는 10월 8일 오전 0시 20분부터 공세로 전환하였다. 고성능 무라다(村田) 연발총으로 무장한 일본군 수비대는 의병들이 모여있던 주막을 둘러싸고 집중사격을 가하였다.의병들의 화승총과 창칼은 이들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화력과 전술로 비한다면 일본군 1명이 의병 100명을 상대하고도 남았다. 9월 초하루여서 달빛도 없었다. 그때 의병들은 대부분 흰옷을 입고 있었고 왜군들은 검은 군복을 입고 있었으니 이것 또한 결정적으로 불리한 점이었다. 이날 약 4시간 30분 동안 벌어진 입암서원 격전에서 대장 정용기,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좌영장 권규섭 등 수뇌부를 비롯해 19명의 의병이 한순간에 전사했다. 반면에 일본군은 2명의 부상자밖에 나지 않았을 정도로 전쟁은 일본군의 일방적 승리였다.입암마을 수십 동의 민가도 소실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일군들은 양민 수십 명까지 학살하고 동민들이 보관하고 있던 귀중품들을 약탈해갔다. 입암 전투는 패전의 참화를 전국에서 가장 먼저 겪은 의병항전이었다. 죽장면 방흥리 이한구의 묘. 1908년 봄 최세윤은 권대진, 정화재, 정진소 등과 함께 죽장 임암전투 전사 현지에 가매장 했던 이한구를 죽현산(竹縣山)으로 이장했다. △아버지가 아들의 대장직을 이어받다1907년 10월 8일 새벽, 정환직은 영일 기북면 막실에 있는 처남 이능추의 집에서 입암전투의 비보를 접하고 놀란 나머지 황급히 현장으로 달려갔다. 입암서원에 도착하여 확인한 아들 정용기의 시신에는 총상이 10여 군데나 있었고, 핏자국이 서원의 온 집안에 퍼져 있었다. 정용기가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어 재기한 지 5개월 만에 또다시 의진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입암 전투로 의진의 지휘부가 무너지자 남은 장령들이 정환직에게 의진을 이끌어 줄 것을 간곡히 청하였다.정환직도 의진 총수로서 지금까지 이를 총괄해 왔던 만큼 더는 사양하지 못하고, 제2대 대장직을 맡았다. 그때 정환직의 나이 64세였다.정환직은 의진을 재편하고, 1907년 10월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의진은 청송 보현산과 영일 북동대산(北東大山)을 거점으로 삼았다. 이곳은 오늘날 청송군·영덕군·영천군·포항시(영일군)의 접경지로 공격과 후퇴가 쉬울 뿐 아니라 진영을 분산·집합시키는 데에도 적합한 천혜의 요충지였다.본격적인 진용을 정비한 정환직은 1907년 10월 16일 약 200명의 의병을 이끌고 흥해분파소를 공격하여 적 수 명을 죽이고 분파소 및 관계 건물을 소각하였다.10월 29일 다시 의병 약 150명을 인솔하여 흥해 분파소를 습격하여 우편국과 분파소를 불태우고 소장 이치하라 다메타로(市原爲太郞)와 그의 처 지요(千代)와 딸 우시키쿠(午菊)를 총검으로 살해하고 그곳에 보관된 돈 300여 관(貫) 및 기타 군수물을 빼앗고, 건물 13동을 불태웠다. 살아남은 일본 순사들은 겁에 질려 가족들을 인솔하여 포항으로 피신해버렸다.11월 3일에는 의병 약 50명으로 영천 신령을 공격하여 분파소에 보관하던 총기 60여 정을 빼앗고 분파소 및 순검의 주택을 소각하고 이튿날에는 군위군 의흥(義興) 분파소를 습격하여 분파소를 불태우고 총기 49정을 빼앗았다.다시 청송으로 가서 11월 8일 청송군 유전(楡田)에서 일본군을 만났으나 패전하여 무기 131정을 빼앗기고 의병 조재술은 좌측 다리에 관통상을 당하였다. 그런데도 11월 11일 청하에서 영천수비대와 교전하였고, 11월 16일 정완전(鄭完全)· 우재룡과 함께 흥해를 습격하여 분파소를 불태우고 일본 순사 곤지(權治) 및 한국인 순검 정영필(鄭永弼)을 죽이고 순사 숙사 2동, 한인 순사 가옥 1동, 관유 건물 3동을 소각하였다./이상준(향토사학자·본지 객원 편집위원)·홍성식기자

2022-06-01

아프리카에 희망 전하는 달콤따뜻한 ‘사랑의 호떡’

아직 본격적인 여름에 접어들지 않았지만, 목덜미로 땀이 흘러내릴 만큼 더웠다. 당연했다. 바로 코앞에 뜨겁게 달아오른 철판이 있었으니.포항 죽도시장 입구에 조그맣게 자리한 호떡 노점. 고명희(62)씨는 그 자리에서 14년을 일했다. 그녀에 앞서 고씨의 어머니가 1980년부터 ‘할매호떡’을 시작했으니, 모녀가 대를 이어 호떡을 구워 판 세월이 벌써 42년.지난해부터는 고명희 씨의 아들까지 일을 거들고 있으니 ‘호떡집 3대’라 불러도 무방하다.인터뷰는 호떡을 굽는 번철(燔鐵)을 사이에 두고 진행됐다. 30분 남짓의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기자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8월에는 얼마나 더 더울까?그럼에도 낙관적인 웃음이 그려진 고씨의 얼굴은 환하다. 고생을 고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듯했다. 이유가 뭘까.“오래전 엄마에게 방송사에서 인터뷰 제의가 왔어요. 그때 엄마는 ‘내가 이 일을 하면서 한 거라곤 내 자식 키운 것밖엔 없다. 남을 도와준 것도 아닌데 무슨 인터뷰할 자격이 있나’라며 거절했죠. 그 이야기를 듣고 생각이 많아졌어요.”당연지사 그게 무슨 생각이었는지 궁금했다. 물었다.“그래서요? 생각 끝에 뭘 했습니까?”“얼마 전에 아프리카 우간다(Uganda)에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작은 학교를 짓는데 2천만 원을 기부했죠.”정말이지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담담하게 들려주는 고씨의 이야기에 적지 않게 놀랐다. 할매호떡은 좌판을 차려 운영되는 가게다. 우간다에 기부한 돈 2천만 원이면 시장에 점포를 얻어 좀 더 편하게 장사를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글쎄요…. 점포를 세낼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요. 그것보단 어려운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게 더 가치 있지 않을까요?” △ 호떡처럼 달콤한 사랑과 나눔긴 시간 노점에서 일하고, 가끔은 예의 없는 손님도 맞아야하는 고씨임에도 표정과 말투가 소녀처럼 밝았다. 그러한 삶에 대한 긍정이 어디에서 연유했는지 알고 싶었다.-호떡을 만들어 팔기 전에는 무슨 일을 했는지.“엄마가 1980년에 여기 자리를 잡았다. 나는 초등학교 앞에서 문방구를 했었다. 나이가 들면서 힘이 부치는 엄마를 돕기 시작한 게 2005년 즈음이다. 3년쯤 반죽 제대로 만드는 것부터 호떡 맛있게 굽는 방법 등을 배웠고 2008년에 일을 이어받았다.”-짧지 않은 시간이다. 많은 것이 변했을 것 같은데.“1980년엔 호떡 한 개가 100원이었다. 내가 이어받았을 땐 500원이었고. 지난해까지 700원을 받다가 올해 밀가루 값과 식용유 값이 너무 올라 할 수 없이 1천 원으로 올렸다. ‘내가 못 먹는 음식은 만들지 말자’는 것이 우리의 장사 원칙이다. 그건 엄마와 내가 똑같다.”-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낀 때는.“나는 신앙을 가졌다. 거기서 사랑과 나눔이 중요하다는 걸 배웠다. 우연한 기회에 아프리카에 갔었다. 그곳에서 가난 속에서도 꿈을 키워가는 아이들을 만났다.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었다. 아직 여러 분야에서 경제적인 발전이 이뤄지지 않은 나라인 우간다는 학교를 짓는데 한국처럼 큰돈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 내 형편껏 기부를 했는데, 아이들보다 내 마음이 더 행복했다. 그게 보람이라면 보람이었다.”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잘 웃는 고명희 씨의 맑은 얼굴은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있다는 나름의 긍지와 보람에서 만들어졌다는 게 어렵지 않게 짐작됐다.조건을 달지 않고, 대가를 기대하지 않으며 기부와 봉사를 실천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1천 원짜리 호떡을 얼마나 팔아야 2천만 원의 이익을 남길 수 있을까? 그걸 남에게 선뜻 내준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고씨에겐 사랑과 나눔을 통해 얻어지는 행복감이 호떡보다 더 달콤한 것 같았다. △ 밀가루, 찹쌀가루에 비법 재료… 호떡의 9할은 반죽만두가게에 가면 만두 이야기를 해야 하고, 결혼식장에선 신랑과 신부 이야기를 해야 한다. 호떡집을 갔으니 호떡 이야기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할매호떡의 메뉴는 3가지. 대표 메뉴는 1천 원짜리 전통호떡이고, 치즈호떡과 씨앗호떡은 1천500원이다.-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풀렸다. 장사에 도움이 되는지.“지난 2년간은 매출이 30% 이상 줄었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만 코로나19 사태 이전만은 못하다. 게다가 호떡은 겨울에 더 맛있게 느껴지는 음식이다. 11월부터 2월까지의 손님이 여름에 비해 2배는 많다. 하지만, 어려운 시절도 잘 버텼으니 이제 갈수록 좋아지지 않겠는가.”-세 가지 호떡 중 어떤 게 가장 많이 팔리나.“아무래도 전통호떡이다. 손님 열 명 중 일곱 명은 그걸 찾는다. TV드라마의 영향으로 포항이 흥미로운 여행지로 알려지면서 젊은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는데, 그들은 씨앗호떡과 치즈호떡도 좋아한다.”-하루에 판매되는 호떡의 양은.“20kg 밀가루 한 포대를 반죽해서 아침 9시에 호떡을 굽기 시작한다. 재료가 다 떨어지면 문을 닫는다. 오후 3~4시가 될 때도 있고 6시쯤이 될 때도 있다. 가장 많이 팔았을 때는 한 포대 반, 그러니까 밀가루 30kg 반죽한 걸 모두 판매한 적이 있다.”고명희 씨는 “호떡이 10이라면 반죽이 9”라고 말한다. 2~3시간의 숙성이 필요하니, 고씨가 반죽을 시작하는 건 매일 새벽 4시 30분 무렵. 41년은 직접 손으로 반죽을 했다. 반죽기계를 구입한 것은 아들이 일을 돕기 시작한 지난해 가을.밀가루와 찹쌀가루를 일정한 비율로 섞고, 여기에 며느리에게도 알려줄 수 없는 ‘비법 재료’ 몇 가지를 더해야 반죽이 완성된다. 그 비율과 들어가는 재료는 고씨의 어머니가 장사를 시작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 아직 못다 한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한 사랑고명희 씨의 아들은 대기업에서 일하다가 “직장생활보다는 장사가 내게 맞는 것 같다”며 호떡집 3대가 되기를 자처했다.회사를 그만둔 후 야시장에서 호떡을 구워 팔며 경험을 쌓았고, 지금은 포항시 이동에서 호떡 밀키트(Meal Kit·손질된 식재료와 조리법을 세트로 구성한 제품) 가게를 운영하면서 어머니를 돕고 있다.아주 어렸던 아이가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돼서도 할매호떡을 찾아줄 때가 가장 즐겁다는 고씨. 이런 말을 자신 있게 하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조그만 호떡집이지만 여든일곱 살 할머니부터 스물여섯 살 손자까지 3대가 이어가며 한다는 자부심이 있다. 손님 모두가 우리 가게 호떡을 먹으며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그 행복을 만드는 일이니 건강이 허락된다면 오래오래 하고 싶다.”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을 때 고씨는 “아직 아프리카에 나눠줄 사랑이 조금 더 남아 있다”며 웃었다. 우간다 아이들을 위해 기부를 더 하겠다는 이야기임을 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호떡은 따뜻하고 달콤하다. 고명희 씨는 호떡보다 더 뜨겁고 달콤한 나눔의 기쁨을 아는 사람이 분명해 보였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5-31

흥해·청하·장기·죽장… 포항 영일권, 의병 격전 중심에 서다

산남의진(山南義陣)은 을사늑약 직후 영일과 영천, 청송 등지의 백성들이 산남(문경새제 이남이란 뜻으로 영남 또는 교남과 같은 말이다)에서 일으킨 민간저항운동 조직의 하나다.영해 방면의 신돌석 의진, 장기(長䰇) 방면의 장헌문 의진과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면서 일본군 수비대를 교란했다. 의진의 창의소(倡義所)는 영천시 자양면 검단동(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자양면 충효동)에 두었지만, 실질적인 의병본부가 전반기에는 포항 송라면(당시 청하군) 북동대산에, 후반기에는 포항 장기면(당시 장기군) 남동대산에 있었다.의군 참여자들도 영일군 죽장·상옥 지역의 유림과 산간포수들이 많았다. 산남의진의 대장들이 순국하거나 체포된 장소 또한 모두 포항권역이었다.제1대 정용기 대장은 죽장면 입암 전투에서 순국하였고, 제2대 정환직 대장은 죽장면 상옥에서, 제3대 최세윤 대장은 장기면 용동에서 체포되었다.큰 격전지도 흥해와 청하, 장기, 죽장, 상옥 등지였다. 산남의진의 전 활동 기간 포항 영일권은 항상 그 중심에 놓여있었던 것이다.산남의진은 정환직(鄭煥直)이 처음 결성했다. 그는 1887년 44세의 늦은 나이로 벼슬길에 올라 의금부도사·중추원의관 등을 두루 역임했으며 누구보다도 고종의 신임이 두터웠다. 을사늑약 직후인 1905년 12월 5일 고종황제는 그에게 밀지를 내려 창의를 준비하라고 했다. 정환직은 장남 정용기(鄭鏞基)를 불러 그 뜻을 알리고, 고향인 영천으로 내려가 의병을 일으켜 경북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라는 지시를 내렸다.1905년 12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정용기는 절친한 동지 이한구, 손영각, 정순기와 같이 영천 자양면 검단동에 창의소(倡義所)를 마련하고 의병을 모았다. △아들 정용기(鄭鏞基)가 1대 대장을 맡다산남의진은 정환직을 총수, 정용기를 대장으로 하고, 그 아래 중군·참모장·소모장·도총장·선봉장·후봉장·좌영장·우영장 등 16개 부서의 부대장(部隊長)을 뒀다. 전체 병력은 약 1천여 명. 각 부 장령은 본영의 지휘에 따라 각기 50~100명의 소부대를 지휘하였다.그 무렵, 영해(寧海)에서도 신돌석(申乭石)이 의병을 모아 기병했다. 두 의진은 서로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협조해 싸우기로 하였다. 당시 신돌석은 안동 진위대(鎭衛隊)의 공격을 받고 있으므로 산남의진이 남쪽에서 동해안을 따라 공격해 올라가면 견제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산남의진 또한 영일 죽장을 거점으로 하여 북진하면서 영덕 신돌석 장군과 합세한 후, 동해안을 따라 산악유격전을 펼치며 서울로 쳐 올라가기로 작전을 세웠다.정용기는 1906년 3월 행진을 시작하여 영천· 청송지방을 경유하고, 각 부대를 조종하며 북상했다. 서울에 머물던 정환직도 군대를 탈영한 군인 등 4월 중순에 모집된 의병 100여 명을 강원도 강릉의 남쪽 금광평(金光坪)으로 보내 남으로부터 올라오는 산남의진을 맞이하도록 모든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런데 의진이 출진한 지 달포가 지났을 무렵, 정용기를 대장으로 하는 산남의진은 신돌석(申乭石)의진이 영해에서 일본군 수비대에게 패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정용기는 이를 돕기 위해 수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영해 방향으로 진군해 들어갔다.경주 진위대가 이런 움직임을 눈치 채고 저지에 나섰다. 정용기 부대가 1906년 5월 21일, 영일군 신광면 우각리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한 무리의 병사들이 나타나더니, 자신들은 경주 진위대의 병사로서 대장 참령(參領) 신석호(申錫鎬)의 명을 받고 왔다며 인사를 했다.정용기는 본진 군사들을 진정시키고 이들을 만나보니 한 통의 편지를 꺼내 놓았다. 그 내용에는 ‘어느 대관이 서울에서 체포되었다 하니 존공(尊公)의 아버지(大人)가 아닌가? 이 일을 해결하자면 좋은 기회가 있기에 공을 만나고자 요청한다’라는 내용이었다.여기서 ‘존공의 아버지’는 바로 정환직이었다. 정용기는 이 편지를 진실로 믿고 뒷일을 중군장 이한구에게 맡기고는 혼자 경주로 신석호를 만나러 갔다가 붙잡히고 말았다.결국, 경주 진위대의 속임수에 걸려든 것이다. 정용기는 대구에 있는 경북경무서로 이송되어 구속되었다. 이렇게 서울 진공 작전은 출발부터 난관에 봉착하였다. △의진 재기를 논의해 다시 의병을 모으다한편, 아들 정용기의 구금 소식을 들은 정환직은 백방 요로에 힘을 써서 5개월 만인 1906년 9월 20일 경북경무서에서 아들을 석방하는 데 성공했다.정용기는 고향 영천으로 돌아와 옥고의 여독으로 수개월 동안 병상에 누워 있다가 몸을 추스른 뒤 1907년 4월에 들어 이한구·손영각·정순기 등과 만나 의진 재기를 의논했다. 이들은 1907년 6월 초순부터 본격적인 의병모집에 들어갔다. 정용기의 구속 등으로 1906년 7월 말 의진 활동이 중단된 지 약 1년 만에 다시 의진이 재결성된 것이었다.진용을 정비한 산남의진은 1907년 7월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에 들어갔다. 때맞춰 일본군 토벌대의 감시와 탄압도 강화됐다. 의진은 정환직으로부터 1907년 5월에 관동으로 들어가 서울로 진공하라는 명령을 받은 적이 있었으나 정용기가 오랫동안 신병을 앓고 있었는데다 군사 모집과 군수물자 확보 또한 여의치 않아 약정은 실현되지 못했다.그 과정에서 일본군과의 항전은 이어졌고 의진은 수많은 희생자를 냈다. 특히 무기도 열악했지만 탄약은 극히 부족한 상태였다. 의병들은 탄약과 보급이 떨어지면 산중 사찰이나 동굴을 근거지로 삼아 숨어 있다가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이 접근해 오면 대항하여 싸웠다. 그 결과 수많은 의병이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사살됐다.‘영릉의진(寧陵義陳)’의 신돌석 부대도 전반기에는 울진과 삼척을 공격하여 맹위를 떨쳤지만, 후반기에 일본군이 적극적으로 공격하고 나서기 시작하면서 관동으로 북상할 수 있는 통로를 열지 못하고 있었다.정용기는 신돌석 부대를 지원하는 한편, 동해안 쪽으로 척후병을 파견하면서 줄곧 길을 찾았다. 1907년 8월 초에는 청송·신령·의성 등지로 부대를 이동하면서 무기와 군량을 모으고 지역 실정과 적세를 탐지했다.1907년 8월 25일 의병 약 300명으로 청하 읍내를 공격하여 적 1명을 포살하고 분파소(分派所) 및 관계 건물을 소각했다. 일본군의 공세를 피하기 위해 이동할 때에는 부대를 해산하고 개별적으로 농민이나 상인 등으로 위장하여 약속한 장소로 모이게 하는 식으로 추격을 따돌렸다.△의병의 본거지 안국사가 불타다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일본군 남부수비대장 요다(依田) 소장은 특별 조처를 내렸다.1907년 9월 5일 일본군 제14연대와 제47연대의 병력을 동원하여 경북지역 의병을 탄압하기 위한 ‘토벌대’(대장: 菊池 대좌)를 편성한 것이다. 기쿠치(菊池) 대좌가 이끄는 토벌대는 조직적으로 의진을 공격했다.정용기도 물러서지 않았다. 1907년 10월 2일 의병 약 150명으로 고향인 영천 자양(紫陽)을 공격하였다. 이날 일본군인 1명을 생포하여 사살했다. 정용기의 보폭이 넓어지면서 1907년 10월 2일 흥해 분파소 순사들에게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그들로부터 통보를 받은 일본군 14연대 소속 영일수비대와 청송수비대는 연합작전으로 정용기 부대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1907년 10월 4일 포항 기계면 안국사(安國寺)가 일본군에 의해 소각당했다. 일본 측 보고서에 따르면, 그들이 안국사를 불태운 이유가 의병의 본거지이고 그 절에 있는 승려도 폭도였기 때문이라고 했다./이상준(향토사학자·본지 객원 편집위원)홍성식 기자

2022-05-31

열섬 대구를 녹색공원도시로 만든 행동대장

대구는 여름이면 덥고 겨울이면 추운 도시다. 날씨만큼은 대구가 전국의 어느 도시에도 양보해 줄 수 없다. 그런 대구가 푸르게, 녹색의 도시로 바뀌었다. 대구의 여름, 팔공산과 비슬산을 비롯해 도시 곳곳의 소공원이나 가로수를 보면 더위를 이겨내려는 대구시민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푸른 대구, 그 주인공은 33년여 대구시청에서 근무하며 가로수를 교체하고 대구수목원을 조성한 이정웅 전 녹지과장이다. 퇴임 후에도 그는 달구벌 얼 찾는 모임 대표, 대구생명의 숲 이사장 등 시민단체 운동을 통해 푸른 대구 만들기와 지역문화 역사 살리기에 앞장서고 있다. - 1천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 대구를 녹색 도시로 만든 장본인 아닌가.△나는 행동대장이다. 당시 문희갑 대구시장이 식견과 의지가 있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대구시 공무원으로 시장을 여러분 모셨다. 취임사에서는 모두들 ‘대구를 푸르게 만들겠다’고 했지만 립 서비스에 그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돈이 들고 조직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문희갑 시장은 달랐다. ‘세계적 숲의 도시로 만들겠다’고 했을 때 또 립 서비스로 끝날 줄 알았다. 경제전문가로만 알았던 문 시장은 도시 녹화에 대한 의지도 강했고 ‘문핏대’로 불릴 만큼 열정도 대단했다. 대구를 녹색 공원도시로 만든 총연출자다.- 대구수목원이 개원 20주년을 맞았다. 수목원을 조성하고 초대 수목원장을 지냈으니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많은 반대와 곡절을 겪으면서 수목원이 개원됐다. 수목원 골짜기마다 내 발자국이 남아 있을 것이다. 주말과 휴일을 가리지 않고 수목원을 누비며 조성했다. 당초 계획과는 달리 일부 일탈도 있지만 연간 200만 명이 찾는 대구의 새로운 명소가 됐다. 이제 이곳에서 ‘숲속 음악회’ 같은 것도 열렸으면 좋겠다. 또 세미나 같은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대구수목원은 인근 도원지의 물을 끌어들여 용수로 확보하고 실개천을 조성해 조경도 살리는 방안을 검토해 볼 수 있다.서울의 한밭 수목원은 후발주자인데도 대형 유리온실의 열대수목원을 조성, 겨울에도 열대의 삼림을 서비스하고 있다. 대구수목원도 업그레이드 시켜야 한다.- 수목원의 조성 당초 컨셉은 어떤 것이었나.△수목원은 공원이 아니다. 국립 광릉수목원이나 사설 천리포수목원 등과는 다른 차별성 있는 수목원으로 조성하려 했다. 대구에 역사적인 약령시가 있지만 정작 한의사들도 한약재는 건재여서 그 약초들의 제 모습을 모르는 경우가 있다. 이런 약초들을 모아 약용식물 정원을 조성하는 것이다. 또 산야의 수많은 야생화들을 옮겨 심어 어떤 야생화라도 대구수목원에 가면 볼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수목원 7만4천평이 시민에 공개되기까지 조성 중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무엇이었나.△시민단체와 언론의 반대였다. 1998년 3월 1단계 공사를 발주하자 지역 환경단체에서 기다렸다는 듯 ‘수목원 계획을 전면 취소하라’는 성명서를 냈다. 그들은 “수목원 계획을 검토하고 현장을 답사한 결과 계획의 무모성 무지성 허구성을 발견하고 시 당국이 예산을 낭비하는 데 대해 분노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지역의 방송과 신문들이 덩달아 무차별 공격을 해댔다. 심지어 한 방송에서는 없는 매립가스 분출을 연출까지 해가며 조성을 반대했다.환경과 조경 전문가들의 자문과 검토를 거쳐 진행된 공사를 비전문인들이 여론몰이로 공격해일시적으로 화도 났다. 논리적으로 맞받아쳤지만 당시 언론과 맞서서는 이로울 것이 없다는 주변의 권유로 토론회를 거치고 예산 규모를 줄이는 등 일부 수정하면서 수목원을 완성했다. 그러나 엉터리 조작 보도한 방송사와 기자는 반성하지 않았고 끝내 사과 한 번 하지 않고 있다.- 수목원은 처음부터 대곡동에 수목원으로 설계되었나.△지산동에 있던 대구시 양묘사업소가 택지개발로 이전해야 할 처지가 됐다. 대구 전역을 검토하다가 대곡동 쓰레기 매립장 부지를 활용하기로 했다. 양묘사업소를 임업시험장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검토 단계에서부터 곡절이 많았다. 당시 박병련 부시장이 찬성하면서 사업이 한 단계 진전했다. 제주시 기획실장 당시 한라수목원을 조성한 경험이 있었던 박 부시장은 이를 벤치마킹하라는 구체적 지시까지 했다.- 양묘사업소 이전이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나.△당시 조해녕 시장은 ‘기회비용 검토’라는 조건으로 결재를 미뤘다. 캐비닛 속에 잠자던 계획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만났다. 조 시장이 민선시장 출마를 위해 사표를 내기 전에 ‘밀린 결재 가져오라’는 청내방송을 우연히 들었기 때문이었다. 산불감시 등으로 늘 현장에 나가있어야 했는데 마침 그날 청내에서 근무하다가 그 방송을 들었다. 시장 결재는 과장이 가야 하는 선례를 깨고 계장인 내가 직접 서류를 들고 시장실로 들어갔다. 시장에게 “그동안 준비를 철저히 해서 당선돼 오시면 멋진 포지(圃地)를 만들어 놓겠다”고 해서 결재를 받았다. 야생화 전시포, 잔디광장 등과 함께 대구수목원이 대곡동에 들어설 수 있는 양묘사업소 이전계획이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조 시장이 낙선하고 실제 공사는 문희갑 초대 민선시장 때 시작됐다.- 나무박사로 알려졌고 이팝나무를 사이버 상 이름으로 쓰고 있다. 특별히 이팝나무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나.△수목원에서 제일 먼저 심은 나무가 이팝나무다. 수목원을 한창 조성중일 때 달성 유가초등에서 도로확장으로 수령 200년이 넘는 이팝나무를 베어야 할 처지에 놓였다. 달성군에 공사 중단을 요청하고 2그루를 수목원으로 옮겨 심었는데 한 그루는 수목원 입구에서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 이팝나무를 대구의 시목으로 지정하자고 주장했다.△대구의 시화 목련은 원산지가 중국이고 꽃은 꽃샘추위가 한창 기승인 3월에 핀다. 영하의 날씨에 더러 개화도 못하고 낙화하는 꽃을 보면 안쓰럽기도 했다. 대구의 풍토에도 맞지 않아 대구의 상징물로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했다.이팝나무는 계절의 여왕인 5월에 핀다. 대구가 원산지라 향토성도 있고 모양도 아름다우며 이식해도 잘 산다. 그래서 시화를 이팝나무로 하자고 제안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대구를 푸르게 만들기 위한 대구시의 특별한 노력은 어떤 것이 있나.△대구시에서 발주하는 공사에서는 수종의 20%를 교목으로 심도록 했고 민간 공사는 10%를 교목으로 심도록 권장했다. 그러면서 이팝나무를 심었다. 앞산 순환도로에도 이팝나무를 가로수로 심었다. 한 때 이팝나무 묘목 수요가 늘어났고 뒤늦게 심었던 사람들은 가격 폭락으로 어려움을 겪었다는 소리도 들었다.특히 가로수의 경우 산림청 훈령은 8m마다 1그루씩 심도록 돼 있지만 대구는 시내에서는 6m당 1그루씩 심도록 바꿨다. 또 폭 5m이상 인도와 상가가 없는 곳에는 2줄로 심도록 했다. 30m 이상 도로의 아파트 담장 쪽에도 같은 수종으로 1줄 더 심어서 가로수를 2줄로 만들었다.- 대구의 녹지는 전국 평균보다 넓다. 특히 대구의 가로수는 대프리카 열섬 대구를 식히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대구 가로수 때문에 한전과 많은 갈등을 겪었다. 가로수 전정을 너무 많이 해서 전봇대처럼 흉물스럽게 되니 조경은 물론 그늘 조성 등 가로수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이다. 대구시에서는 고압선이 지나 위험하고 태풍에 노출돼 위험하다는 한전과 가로수 전정을 두고 싸움을 벌이다 일본 사례를 찾아봤다, 그래서 타협한 것이 고압선이 자나는 경우 1m까지만 자르고 계속 자라면 그때는 한전 몫으로 한다는 조건이었다.또 가로수 수종도 병충해 적고 그늘이 많으며 잘 자라면서 수형도 아름다운 느티나무로 많이 바꿨다.- 대구시가 금호강의 하중도를 개발하려 한다.△하중도 개발은 찬성이다. 강수가 범람하면 침수하는 지역으로 건물은 지을 수 없는 곳이다. 역사적으로 태종 이방원의 처남 민무질이 대구에 유배 와서 11개월 정도 머문 적이 있다고 한다, 명시하진 않았지만 ‘섬’이었다고 하니 하중도일 수도 있고 그 후손도 있을 것이다. 그런 역사적 사실도 첨가해서 하중도를 개발하고 시민이 가까이 접근할 수 있도록 계절별 꽃밭을 꾸미는 등 활용할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시가지 조경에 충고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시가지에 조성하는 가로변 정원 등에 심는 화초가 메리골드 팬지 데이지 외래종이 대부분이다. 우리 꽃도 예쁘고 아름다운 꽃들이 많다. 특히 그 이름도 아름다운 야생화들을 활용했으면 좋겠다.대구으아리, 세뿔투구꽃 같은 야생화는 대구에서 발견돼 그 이름이 지어진 것들이다. 화원동산이나 봉무동에 자생하는 모감주나무는 대구서만 발견됐다. 이런 소중한 자산들은 교육에도 활용할 수 있고 시민의 자긍심도 높이게 될 것으로 본다.- 퇴직 후에도 대구를 푸르게 가꾸기 위한 녹화 사업과 향토사 연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달구벌 얼 찾는 모임 대표시절 북구 사수동에 ‘한강공원’을 조성했다. 한강 정구는 72세에 사수에 와서 78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저술활동을 한 유학의 대유학자다.팔거역사문화연구회 회장 시절 사수초등학교가 들어서면서 학부모들이 ‘재수도 싫은데 4수가 뭐냐’며 학교 이름을 강산초등으로 바꿔 줄 것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 나는 “사수(泗水)는 공자가 태어난 곡부의 강 이름이다. 우리가 교육을 하는 것은 공자 같은 인격체를 키우는 것”이라 설득해서 이름을 지켜냈다.칠곡은 조선 후기 도호부로 대구 도호부와 세를 겨뤘다. 역사적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있다. 칠곡의 역사와 문화유산, 함지산 사람들 등 저서는 역사적 근거를 찾아낸 기록이다. 최근 칠곡도호부 관아 복원 운동을 펴고 있다. 소설가 이태원을 기리는 이태원길도 칠곡 문화유산 찾기의 하나로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 대구 생명의 숲 운동에 몰두 하고 있다. 어떤 단체인가. 어려움은 없나.△자연과 이웃과 나무를 사랑하는 모임이다. 나무를 심고 생태공원을 조성하고 시민들에게 해설해준다. 대구를 녹색으로 만드는 일에서 대구시가 놓치는 부분을 민간에서 보완하고 있다. 시민 정서를 순화하고 미세먼지와 기후변화 시대에 숲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있다. 회원 200여 명의 회비로 활동하는 데 아직은 인식이 부족한 것 같다.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기업의 기여도가 선진국에 비해 낮은 편이다.-오늘 같은 여름날, 대구의 가로수 길을 걸으면 어떤 생각이 나나.△녹지과장(서기관)으로 퇴직했으니 공무원으로서는 소위 출세(?)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많은 환경 시민단체의 반대와 언론의 부정적 보도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대표적 혐오시설인 쓰레기매립장에 수목원을 조성하는 일을 마무리해서 오늘날 대구의 새로운 명소가 되게 한 것은 보람이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이경우 편집위원 □ 이정웅(李貞雄) 대구 생명의 숲 대표·전 대구시 녹지과장의성 단밀. 상주농잠고. 방송통신대 행정학과. 계명대 정책개발대학원 행정학 석사.대구시 산림계장, 녹지계장, 임업시험장장, 녹지과장.대구가톨릭대 조경학과 겸임교수.대구시 문우회장, 대구시 도시경관자문위원, 도시디자인위원, 팔거역사문화연구회 회장 등 역임.현 달구벌 얼 찾는 모임 대표. 대구 생명의 숲 이사장. 대구시 녹색성장위원회 위원, 수성문화원 향토사 연구소 연구위원.저서 ‘며느리밥풀꽃’(시집), ‘팔공산을 아십니까’ ‘나의 사랑, 나의 자랑 대구’, ‘ 푸른 대구 이야기’, ‘나무, 인문학으로 읽다’, ‘대구가 자랑스러운 12가지 이유’ 등.고교 졸업 후 농촌지도소에 잠시 근무하다 군 제대 후 1969년 대구시 공채로 농림직으로 공직에 들어온 뒤 임업직으로 2003년 퇴직할 때 까지 대구 녹색화에 앞장섰다. 직원들을 격려해서 행정직이 맡았던 과장(서기관) 자리를 임업직이 차지하고 임업직 사무관 자리도 늘리는 등 조직관리에서도 능력을 발휘했다. 문희갑 시장 시절 기술직의 편견을 업무를 통해 인정받게 된 것을 ‘고기가 물을 만났다’고 표현한다.

2022-05-30

“안전과 타협은 없다” 아버지때부터 지켜온 철칙이죠

벌써 20년이 훌쩍 넘은 1990년대 중반의 일이다. 포항시는 환경정화 차원에서 형산강변에 줄줄이 늘어서 있던 포장마차를 단속·철거했다.포장마차 운영으로 자식들 공부시키며 삶을 이어가던 상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대책을 세워 생존권을 보장해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궁여지책으로 낮에는 천막으로 된 포장마차를 걷었다가, 저녁에 다시 펼쳐 장사를 하는 방식이 포항시와 상인들 사이에서 합의됐다.그런데, 예상치 않은 어려움이 발생했다. 당시의 포장마차는 천막을 철제로 된 기둥과 볼트로 고정하는 방식이었다. 이걸 해체했다가 다시 조립하는 과정이 2~3시간 소요되는 중노동이었던 것.그 시기 아버지와 함께 죽도시장에서 부산천막을 운영하던 윤성원(52) 대표는 반짝이는 사업 아이디어를 동서(同壻)에게서 얻었다.“서울에서 판매되는 접이식 천막을 가져와 팔아보면 어떨까요?”사소한 조언이 부산천막의 매출액을 단기간에 급증시켰다. 1개월 동안 자그마치 200여 동의 접이식 천막을 판매·설치해준 것.3시간 가까이 걸리던 작업 시간을 10분으로 단축시킬 수 있으니 포장마차 업주들 모두가 너나없이 구매하겠다고 나서는 건 당연했다.컴퓨터를 이용해 인터넷으로 천막을 주문하는 게 보편화되기 전이라 생산자와 소비자를 효율적으로 연결시켜준 윤 대표는 짭짤한(?) 재미를 봤다고 한다. 그가 아버지에 이어 천막 제작·설치를 직업으로 택한 초반 무렵 이야기다. △ 아버지 뒤 이어 천막 제작·설치를 ‘평생의 업’으로이제는 경력 30년의 베테랑이 된 윤성원 대표가 천막 제작과 설치를 처음 시작한 건 20대 초반이었던 1993년 11월.윤 대표의 아버지는 1970년대 초부터 천막 관련 일을 해왔으니, 부자가 50년간 같은 일을 하며 나이 들어온 것이다.고등학생 때도 여름방학이 되면 아버지의 작업을 도왔다는 윤 대표. 그는 무언가를 만들고, 그것을 유용하게 쓰는 사람들을 보는 게 좋았다고 한다. 아버지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수입도 월급쟁이보다 훨씬 나았다고.그렇게 윤 대표는 부친과 함께 ‘천막’을 자신의 평생 업(業)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새파란 청년이었던 윤성원은 이제 20대 중반의 딸을 둔 중년의 가장이 됐다.-처음 죽도시장에 들어왔을 때와 비교해 지금은 많은 것이 달라졌을 텐데.“아버지가 이 일을 시작할 땐 죽도시장 인근 대부분의 집이 천막을 사용해 만들어져 있었다. ‘집수리’가 곧 ‘천막 수리’로 이해되던 시절이다. 천막가게가 호황을 누렸던 때였다. 그때와 비교해 지금은 많이 어렵다. 짐작하다시피 천막 제작과 설치는 이제 사양 산업에 가깝다.”-천막 가게도 ‘코로나19 사태’의 영향을 받았는지.“직접적 영향은 크지 않았다. 다만, 식당이나 창고업 등 천막을 필요로 하는 업소의 상인들이 어려움을 겪었다. 내가 힘든 것보다는 우리 가게에 작업을 의뢰하던 손님들이 매출 감소 등으로 힘겨워하니 그걸 보는 게 마음 아팠다.”-천막 가게의 주요 고객은 어떤 사람들인가.“상점을 운영하는 이들 모두가 고객이다. 사실 천막은 우리 생활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차양막과 어닝(햇볕과 비를 막아주는 동시에 디자인 개념까지 포함된 천막), 농작물을 건조하는데 쓰이는 비닐, 회사나 학교 행사에 사용되는 그늘막, 포장마차 등이 넓게 보자면 모두 천막이다. 그러니, 고객의 범주도 상당히 넓다.”-그럼 캠핑 장비인 텐트도 천막인 것인지.“텐트는 보다 세밀한 작업을 필요로 하는 품목이다. 단가와 제작 장비, 재단 기술의 차원에서 볼 때 천막이라 부르기엔 적당하지 않다. 텐트 아래에 까는 방수막은 천막으로 봐도 무방하다.”△ ‘안전 문제’에 관해선 고객과 타협하지 않아세월의 흐름 속에서 천막을 만들고 설치하는 일이 호황을 누릴 때도, 불황을 겪는 지금도 윤성원 대표는 변함없이 성실하게 일하고 있다.아침 8시면 가게 문을 열고, 죽도시장의 하루가 끝나는 해질 무렵까지 부산천막을 지키거나 천막을 주문한 곳으로 가서 설치 작업을 진행한다. 해가 긴 여름에는 밤 8시까지 하루 12시간 작업이 이어진다.주 5일제 근무가 보편화된 요즘도 윤 대표는 토요일은 일하고 일요일만 쉰다. 30년째 주 6일 근무다.천막을 주문하고 설치를 의뢰하는 고객들이 많던 과거엔 2~3명의 직원을 두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런 좋았던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 이제는 혼자서 일하는 경우가 흔하다.조금 큰 규모의 외부 작업을 나갈 때는 일당을 주는 일용직을 찾거나,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한다.천막 관련 일이 예전만 못하지만, 그렇다고 지나온 시간 안에서 얻은 보람이 없을 수 없다. 강산이 3번 바뀔 만큼의 기간이었으니 거기서 생긴 ‘사업운영의 원칙’도 있을 법 했다. 그래서 물었다.-부산천막을 운영하며 가장 기뻤던 때는.“특별히 기억되는 순간은 없다. 다만 이 일을 하며 결혼해서 두 딸을 낳고 공부시켰다. 아이들이 잘 커줬고 스물일곱과 스물셋이 된 딸들이 이젠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돼준다. 남들은 어려웠다는 IMF 시절에 아버지와 함께 노력해 우리 가게가 입주해 있던 건물도 매입했다. 아버지도 그렇고, 나도 이 정도면 괜찮은 삶이었다고 생각한다.”-나름의 장사 원칙이 있을 것 같다.“손님이 요구하는 건 대부분 들어주려고 한다. 그러나, ‘안전’에 관한 건 타협하지 않는다. 일하다가 사람이 다치면 안 되니까 그렇다. 결과물은 고객이 원하는 대로 만든다. 하지만, 작업 과정에서의 안전 문제는 협의의 대상이 아니다.” △ “월급쟁이가 부러울 때도 있지만…”변하는 세태에 따라 천막을 만드는 일은 갈수록 유망한 업종에서 멀어지고 있다. 예전에는 천막 주문이 들어오면 윤 대표와 아버지가 직접 치수를 재고, 제작해 고객의 업소에 설치까지 했다.헌데 지금은 대형 공장에서 대량으로 기성품 천막을 만들어 판매한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주문제작 천막과 한꺼번에 많은 물량을 쏟아내는 기성품 천막은 경쟁상대가 될 수 없다. 부산천막 역시 어쩔 수 없이 기성품 천막을 판매한지 오래다.윤 대표도 전업(轉業)을 진지하게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함께 일할 숙련된 기술자를 구하기가 힘들고, 고객도 줄어들면서 우유 대리점을 해보려고 했었다”는 게 그의 고백.그러나, 평생 천막을 만들고 설치하면서 살아왔고,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이 천막 제작이란 걸 고심 끝에 깨달은 윤 대표는 부산천막 간판을 내리지 않았다.“외부 작업은 나이를 먹으면 힘이 부쳐 어렵다. 하지만, 가게에서 하는 천막 제작은 일흔 살까지는 할 수 있다. 앞으로 20년쯤은 더 일해야 하지 않겠나”라며 웃는 윤성원 대표.처음 시작할 때는 직장에 다니는 친구들보다 벌이가 훨씬 좋았다. 지금은 상황이 역전됐다. 직장생활 30년차의 월급보다 부산천막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이 적을 수밖에 없는 시대다. 하지만, 윤 대표는 아직 희망을 말한다.“장사는 경험의 축적이다. 죽도시장에서 오랜 시간 가게를 꾸려온 다수의 상인은 젊은 시절부터 시행착오를 겪고, 땀 흘리며 자신의 영역을 개척한 사람들이다. 그 결과물이 바로 한군데, 한군데의 가게다. 그것들이 쉽게 무너지겠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5-24

로봇을 대구 미래산업으로 끌어올린 한국의 로봇 대통령

4차 산업혁명시대, 기술 융합의 최종 결론은 로봇이다.미국의 오바마 전 대통령이나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 일본의 아베 전 총리 등 세계의 지도자들이 모두 로봇을 활용해 경제를 부흥하겠다고 선언했다. AI(인공지능)와 IoT(사물인터넷), 5G 등 첨단 기술이 융합된 로봇이 농업에서부터 의료와 국방 등 전 산업에서 혁명적 발전을 이끈다고 결론 내린 것이다. 그런 세계적 추세에 우리나라도 동참한 결과가 대구의 로봇산업 기반조성이다.문전일 DGIST(대구경북과학기술원) 부총장은 로봇을 대구의 미래 산업으로 굳힌 주인공이다. 그는 대구의 자동차 부품 산업도 기계 중심에서 소프트웨어와 전자 중심으로 개편돼야 하며 미래는 인간과 로봇이 공존하는 환경을 만들어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DGIST(디지스트.대구경북과학기술원) 연구부총장 겸 융합연구원장을 맡고 있다. DGIST와 지역과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하고 있나.△대학은 지역에 봉사하고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을 교육시키지만 강제로 지역 기업에 배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대신 교원들의 연구 성과를 기업 매출에 활용할 수 있도록 기술 상용화로 기여하고 있다. 대학의 연구 결과를 지역 기업이 활용하면 연구원으로서는 그만큼 지역에 기여하는 것이 된다.그동안 경북대 등에 의존하던 대구시의 많은 사업들을 디지스트가 떠맡게 된 것이 변화일 것이다. 특히 대구가 물과 의료 미래형자동차 에너지 등과 함께 로봇산업을 대구의 신산업으로 설정한 것은 디지스트의 적극적 지원이 있어 가능했다.앞으로 대구경북통합신공항이 열리고 주위에 산업단지가 들어서면 디지스트가 경북도와의 협력도 확대해 나갈 것이다.- 디지스트의 연구본부장 시절 2020년까지 국가 최고수준의 기술사업화와 상용화를 실현하겠다고 했다.△한국 이공계 대학 평가에서 5년 연속 특허출원 1위(2017 ~2021)를 기록했다. 특허는 차별화된 기술사업화와 상용화 실현의 근간이기도 하다. 그만큼 전방위적으로 창업 및 육성 지원을 통해 전국 대학중 상위권 성과를 내고 있다. 또 2018년 대구지역 대학 최초로 기술이전 수입 연 20억원을 달성했다. 누적 기술이전 수입금과 건수의 60% 이상이 지역 기업을 대상으로 했다. 지역기업의 기술 상용화와 기업 경쟁력 강화에 기여한 것이다.- 로봇공학자로서 지난해까지 한국로봇산업진흥원장을 맡으셨다. 로봇산업의 세계적 추세와 전망을 어떻게 보나.△선진 강국 대부분 국가들이 로봇을 활용한 제조혁신을 선언하고 이를 통해서 경제부흥을 이루고자 정책적으로 실행하고 있다. 국내외 선도 기업들도 로봇 부문을 신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이 추세다.- 우리나라가 세계4대 로봇 강국이 되겠다고 했다. 우리나라 로봇 산업의 현황과 세계 속 위상은 어느 정도인가.△우리나라의 로봇 산업 생산 규모로는 5위 수준이다. 생산으로는 미국 일본 독일 중국이 우리나라보다 앞서 있다. 로봇 산업의 매출은 10조원 규모이지만 생산액으로는 7조원 정도다. 인구 1만명당 로봇 사용대수는 1~2위를 다툰다.우리나라가 4대 강국이 되려면 미국을 뛰어넘어야 한다. 가치 사슬 측면에서 보면 후방산업인 소재 부품 등은 일본과 독일이 앞서 있고 미국은 기술 분야, 즉 서비스를 위한 소프트웨어 솔루션을 선도하고 있다. 로봇을 활용한 전방산업(로봇 시스템, 로봇 서비스 등)을 선점해 나가면서 소프트웨어 솔루션 같은 후방산업과 로봇 제품의 경쟁력을 확보해 가는 전략을 병행해 나가야 한다.- 최근 LG와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KT 등 대기업들이 신사업으로 로봇 사업에 본격 가세하고 있다.△결국 기업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일 것이다. 현대자동차의 매출은 줄어들지만 기업 가치는 올라가고 있다. 로봇 신산업에 대한 기업의 관심을 시장이 인정한 것이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사업과 연계해서 기업의 보유 역량을 기반으로 한 사업다각화에 그 목적이 있다. 그리고 혁신기술과 융합시너지를 통해 기업 가치를 제고하려는 것이다. 또 기업으로서는 패러다임 변화에 대응하고 정부 정책과 연계해서 미래먹거리를 준비하려는 것이다.코로나19 팬데믹으로 비대면 서비스가 확산되고 저출산 고령화 시대를 맞으면서 기업 환경이 변화하는 데 선제적으로 대응하려는 것이 로봇산업 진출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류로봇이나 돌봄로봇, 웨어러블 로봇의 확산 보급 움직임은 이런 배경을 두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기업의 움직임이다.- 대구가 로봇 산업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국내외적으로 인정받게 됐다.△대통령이 참석한 유일한 로봇 산업 행사가 대구에서 열렸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로봇산업육성전략’ 발표회에 참석한 것이다.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대구가 로봇 산업의 심장이라고 추켜세우고 로봇산업이 대구의 미래 신산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밝혔다.지역의 로봇산업 사업체수와 생산규모는 전국의 33% 수준(2020년 기준)이다. 수도권(52%)을 제외하면 최대 규모다. 사업체 구성은 산업용로봇 208개, 로봇 부품과 소프트웨어 427개, 로봇시스템 201개, 로봇서비스 477개, 서비스용 로봇 106개 등이다.- 대구가 로봇산업의 심장으로 인정받는 기반으로 어떤 것들이 있나.△대구지역의 로봇 산업은 지난 10년 동안 인프라를 비롯한 산업 생태계가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구축되어 왔다. 2010년 한국로봇산업진흥원이 대구에 들어섰다. 이어 2012년부터 2017년 로봇 클러스터 구축사업이 완성됐고 로봇시장 창출과 로봇가치사슬 사업을 추진할 수 있게 됐다. 2020년에는 로봇 규제자유특구로 지정됐고 지난해에는 ‘국가로봇테스트필드’를 대구 테크노파크에 유치해 내년부터 2029년까지 본격적으로 로봇 테스트필드 구축사업을 펼 수 있게 됐다.- 지난해 대구가 유치한 로봇테스트필드는 어떤 의미가 있나.△로봇 산업으로서는 대단한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전국 6대도시가 경쟁했고 특히 서울시가 비싼 땅을 제공해가며 상당히 노력을 했는데 대구가 유치에 성공했다. 대구가 로봇산업 중심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근거가 또 하나 마련된 것이다. 한국로봇산업진흥원장으로 재직 당시 로봇 테스트필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대구가 유치할 수 있는 기반을 상당부분 닦았다. 그리고 DGIST 차원에서 유치를 적극 지원했다.- 로봇 테스트필드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되나.△기업이나 창업자들이 새로운 로봇을 개발하면 그 로봇을 활용하기 위한 테스트 시스템이 필요하다. 설거지 로봇이 개발되면 로봇을 어떻게 활용하고 어디에 적용할 것인지를 시험하기 위한 시스템이 필요한 것이다. 택배를 위한 배달 로봇은 아파트 경비실까지 배달된 물건을 개별 세대 문 앞까지 배달해 주는 서비스 환경의 구축이 필요하다.또 로봇 테스트필드를 계기로 장차 로봇 서비스 경진대회를 대구에서 개최해야 한다. 또 로봇산업 창업 경진대회를 대구에서 열어 로봇산업의 실질적 중심 기능을 맡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전국에서 참여 기업과 관계자들이 대구의 로봇 테스트필드를 이용하기 위해 대구를 찾게 되고 체류를 위한 숙박과 편의시설의 확장 보급도 뒤따를 것이다.- 로봇산업에 대한 규제를 풀어야 산업이 성장할 수 있다고 한다. 어떤 규제가 있나.△로봇이 움직이면서 안전 문제가 풀어야 할 문제들이 많다. 로봇이 할 수 없게 만든 엘리베이터를 타는 문제, 횡단보도를 건너는 문제 등 제한된 규제를 풀어야 한다. 대구는 로봇규제자유특구로 지정됐다. 외팔 달린 모바일 로봇이 안전 문제와 관련 없이 대구 전역에서 서비스 실험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최근 대한의료로봇학회 차기 회장으로 선출됐다. 의료로봇의 진화 현황과 추세,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으로 전망하나.△의료로봇은 수술과 재활 등 활용과정에서 안전성이 검증돼야 하고 시험과 평가, 임상시험 등 식약처의 인허가 기준을 통과해야 한다. 나는 지난 10년동안 의료로봇의 국제 표준화를 위한 한국대표로 활동하면서 의료로봇의 문제점과 해결책을 꿰고 있다.대한의료로봇학회가 다루고 있는 로봇의 영역은 재활과 수술 등 전문서비스용 로봇이다. 현재는 의료분야에 로봇 활용을 확산 활성화시키기 위해서 산업부와 식약처를 중심으로 의료로봇의 안전성과 효과성 확보, 그리고 법과 규제 개선 등 이슈들을 풀어나가고 있는 단계다. 재활로봇을 이용하여 재활치료를 할 때 적정 보험수가를 산정하기 위해 보건복지부 산하 기관들과 지속적으로 논의중이며 일부 재활치료에 대해서는 아직 미흡한 수준이지만 보험수가가 점차 현실화 돼가고 있다.한국 의료계가 보수적이고 브랜드를 좋아한다. 국산 의료용 로봇이 가격이 3분의 1 정도이지만 구태여 미국이나 독일제 의료기기를 들여놓고는 병원에 커다랗게 현수막을 붙여 자랑한다. 의료보험도 되지 않으니 환자들이 손해를 보는 셈이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것이다.- 우리나라 로봇 산업의 문제점과 해결책은 무엇인가.△로봇 가격 경쟁력에서 밀리고 있다. 중국산보다 성능과 내구성은 우위에 있으나 가격경쟁력이 약하다. 유럽산과 일본산에 비해서는 전반적으로 경쟁력이 취약한 편이다.또 소재와 부품, 소프트웨어 플랫폼과 모듈 등 로봇 후방산업의 경쟁력이 떨어지는 편이다.로봇을 활용한 시스템 구축과 운영, 서비스별로 로봇을 활용한 비즈니스 모델 발굴과 구축 등 전방산업 선점에 집중하면서 후방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한 노력도 함께 해서 해결해야 한다. 국무총리실이 중심이 되어 신산업 규제혁신을 주도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로봇산업 규제혁신 로드맵’을 수립해서 추진중이다. 규제 개선과 로봇을 활용한 서비스 활성화를 통해 로봇산업 육성뿐 아니라 서비스산업 활성화에도 기여해 나가야 한다.- 로봇 대통령이라 불렸다고 하더라. 대구와의 인연과 대구의 미래 산업에 대해서도 조언해 달라.△평생을 로봇 산업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대기업(LG산전)에 있을 때는 ‘돈 되지 않는 연구에 투자만 한다’고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동안 10여 종의 산업용 로봇을 개발해서 상품화했다. 대학에서 로봇학과를 만들고 가르쳤다. 그러다가 2010년 당시 DGIST 이인선 원장의 간곡한 삼고초려에 이끌려 대구에 왔다. 로봇학과를 만들고 로봇 관련 연구조직을 만들고 로봇을 DGIST의 핵심 프로젝트로 만들고 대구의 미래산업으로 끌어올렸다.한국로봇산업연구원장 시절 해외에 나가서는 원장을 President라 하니 한국의 로봇 대통령이라 불린 것이고 그것이 별명이 됐다.로봇을 대구의 미래 산업으로 기반을 만든 것이 가장 큰 보람이다. 자동차 부품도시라지만 사실 자동차는 전자와 소프트웨어 산업이다. 더 이상 기계산업이 아니다. 대구는 그 기로에 있다. 중소기업 중심의 대구 자동차 부품 산업은 자율차와 전기 수소차로 이행하면서 산업구조가 개편돼야 한다. 로봇 산업은 그야말로 미래 산업이다. 로봇과 인간이 공존하면서 도시와 산업 발전을 이루어야 한다.□ 문전일(文全一) DGIST 연구부총장 겸 융합연구원장제주 오현고. 서울대 기계설계학, 한국과학기술원 기계공학과 (로봇제어)석사, 미 시라큐스대학 기계항공공학과(지능제어)박사.LS산전(구 LG) 중앙연구소장, 임원. 호서대학교 로봇공학과 교수.DGIST연구본부장, 연구부총장, 융합연구원장. 로봇공학전공 교수 겸임.한국로봇산업진흥원 원장(2018 ~2021),현 식품의약품안전처 의료기기위원회 전문가. 대한의료로봇학회 차기회장(2023~ ). 한국공학한림원 회원.1984년 석사과정 논문부터 로봇관련 연구를 시작해서 38년째 로봇관련 산·학·연·관을 두루 경험한 한국 로봇계의 대부.2011년부터 지금까지 DGIST와 한국로봇산업진흥원에서 대구의 로봇산업 기반을 조성하고 로봇 산업을 대구의 미래 산업으로 구축한것이 가장 큰 보람이다.로봇관련 개발 기술의 상용화와 상품화가 소신이며 기술을 응용한 로봇기업 창업 육성에도 적극 역할하고 있다./이경우 편집위원

2022-05-23

청송군, 천혜의 자연환경에 관광산업을 더하다

그간 청송군은 ‘내륙의 섬’이라 불릴 만큼 오지로 인식돼 왔다. 경상북도의 다른 지자체와 마찬가지로 인구도 줄어들고 있는 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하지만, 주왕산과 주산지 등이 만들어내는 깨끗한 자연환경과 전국적으로 유명한 특산물인 사과, 여기에 ‘산소카페’라는 도시 슬로건에 어울리는 맑고 시원한 공기가 합쳐져 관광지로서의 매력은 결코 작지 않은 곳이 청송군이다.재론의 여지없다. 21세기 최고 유망산업 중 하나는 관광업이다. 최근 청송군은 이에 착안해 2가지 사업을 의욕적으로 펼치겠다는 미래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어 주목된다.대중제 골프장을 필두로 하는 산림레포츠 휴양단지 조성사업과 여행자들의 호평 속에 성장하고 있는 ‘산소카페 청송정원’의 획기적인 보완과 개선이 바로 그것.이러한 사업들의 추진은 ‘골프 대중화 시대’를 맞아 증가하고 있는 골프 애호가의 만족도를 높이는 것은 물론, 가족단위 관광객들에게 매력을 어필하는 청송정원의 아름다움까지 더해져 괄목할 정도의 상승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듯하다.아래에서 그 2가지 프로젝트의 현재 진행 상황과 향후 전망을 세밀하게 짚어보고자 한다. □골프장 등 산림레포츠 휴양단지 조성으로 관광산업 비전 제시청송군이 열정적으로 추진 중인 ‘청송 산림레포츠 휴양단지 조성사업’의 실적은 이제 가시화 단계에 들어섰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평가다.군은 파천면 신기리 산30번지 일대에 청송 산림레포츠 휴양단지 조성사업을 추진할 민간 사업시행자 공모를 지난 3월 23일부터 진행했다.국제산악연맹 청송 아이스클라이밍 월드컵을 비롯해 전국산악자전거 대회, 청송사과 트레일런, 전국모터사이클챔피언십 등 굵직한 전국 단위 대회를 해마다 열어온 청송군은 여기에 더해 산림레포츠 휴양단지를 조성함으로써 앞으로 ‘산림레포츠를 선도하는 도시’로 입지를 굳힐 것이란 의지를 드러낸 바 있다.이와 관련 “2025년 완공을 목표로 민간투자를 유치해 185만 5천227㎡ 부지에 27홀 대중제 골프장과 산림레포츠 시설을 조성할 계획”이라는 게 청송군 관계자의 설명이다.민자 유치 공모의 핵심은 144만 1천142㎡ 규모로 만들어질 골프장의 운영을 맡을 민간 사업시행자의 모집.사업대상지는 군유지가 75% 이상이며, “현재 경상북도에 용도 지역 변경신청 절차를 앞두고 있다”고 청송군은 부연했다.군은 입지조건도 덧붙여 공지했다. 사업이 진행될 지역은 당진과 영덕을 잇는 고속도로의 청송IC에서 8분 거리에 위치한다. 교통 접근성은 물론, 주왕산 국립공원과 가까워 편리함에 탁월한 전망이 더해진다. 골프장이 들어서기에 최적의 자리다.“향후 공모에 선정된 민간사업자에게 토지를 매각해 사업자가 건립 후 소유·운영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추진할 것”이란 게 청송군이 내놓은 방침이다.사업 신청자격은 신청접수 마감일 기준 재무상태표 상의 자본총합이 100억 원 이상인 법인(컨소시엄 포함)이어야 한다. 4월 1일까지 사업 참가 의향서를 제출받은 결과 모두 17개 업체가 신청할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청송 산림레포츠 휴양단지 조성사업의 신청접수 마감은 6월 10일이다. 마감 후 청송군은 신청자가 제출한 사업계획서를 평가해 6월 16일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해 발표할 예정.평가는 이 사업과 관련된 전문가로 구성한 우선협상대상자 선정심의위원회와 청송군이 진행하게 된다. “절대평가 부문과 상대평가 부문을 합한 점수가 가장 높은 업체가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다”는 것이 청송군의 부연이다.사업 신청 마감을 앞둔 청송군은 “골프장을 포함한 양질의 산림레포츠 휴양단지를 만들어 미래 관광산업의 비전을 제시하겠다”며 “민간사업자가 선정되면 일자리 창출과 상권 활성화 등 지역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지역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는 ‘산소카페 청송정원’청송군이 ‘산소카페’라는 도시 슬로건에 어울리게 조성한 청송정원은 파천면 신기리 일원 13만6천m²에 만들어졌다. 이곳은 국내 최대 규모의 백일홍 화원이다.지난해 9월 1일에 개장한 청송정원은 평일 평균 약 1천 명, 주말 평균 약 5천 명에 달하는 여행자들이 방문해 그해에만 총 10만 여 명이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송의 새로운 관광명소가 된 것이다.‘산소카페 청송정원’을 운영한 청송문화관광재단은 주말마다 꽃밭음악회와 버스킹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했고, 관계 부서와 협력해 청송사과즙 나눔 행사, 청송사과빵 시식회도 진행했다.코로나19 사태의 기나긴 그늘 속에서 우울해하던 사람들은 1억 송이에 달하는 백일홍의 자태와 향기에 큰 위로를 받았다. 향후 ‘위드 코로나 시대’가 일상화되면 청송정원의 매력은 더욱 크게 부각될 전망이다.이미 지난해 말 청송군은 입장료 3천원을 내면 정원에서 나갈 때 청송사랑화폐 3천원을 되돌려줌으로써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 안정적인 운영과 체계적인 방역시스템을 구축해 청송정원이 새로운 랜드마크가 될 수 있도록 향후 다양한 개선책을 내놓겠다는 방침을 세웠다.올해도 산소카페 청송공원의 인기는 지난해와 다르지 않았다. 아니 더 높아졌다. 지난 5월 5일 청송정원에서 열린 어린이날 행사에는 3천여 명의 인파가 몰렸고, 아이들과 부모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이는 ‘코로나19 사태’로 지난 2년간 청송에서 어린이날 행사가 열리지 못했던 만큼 기대감에 부푼 지역 어린이들과 가족들은 물론이고, 인근 시·군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행사장을 찾은 결과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가족간 사랑 확인하는 이벤트 열릴 청송정원으로미세먼지 한 점 없는 날씨에 짙푸른 청보리가 넘실거리고 푸르른 하늘까지 더해져 청송의 5월은 싱그러움의 절정을 이룬다. 그랬기에 산소카페 청송정원은 방문객들의 발길을 오랫동안 붙잡을 수 있었다.이날 행사에 참석한 어린이들은 청송정원 걷기, 꿈의 오케스트라, 마술쇼, 댄스, 태권도 시범 등의 다채로운 공연에 푹 빠졌다. 에어바운스 체험과 예쁜 사진 콘테스트, 장기자랑과 각종 체험행사 등의 프로그램은 아이들은 물론, 함께 온 부모들까지 환한 미소로 이끌었다.청송정원을 배경으로 가족사진을 찍던 방문자들은 “오랜만에 아이들과 함께 아름다운 정원을 걸으니 기분이 너무 좋고, 마음까지 시원스러워졌다”고 입을 모았다.어린이날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른 청송군은 앞으로도 가정의 화목과 가족간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각종 이벤트를 마련하겠다는 계획을 밝혀 앞으로 청송정원을 찾을 여행자들의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산소카페 청송정원과 청송 산림레포츠 휴양단지 조성사업으로 탄생할 골프장 조성이 예정된 지역은 약 2km의 가까운 거리. 이 두 곳의 유기적이고 효과적인 연계는 미래 청송 관광산업의 발전을 이끌 핵심 키워드가 될 듯하다./김종철·홍성식 기자

2022-05-23

문화유산 품은 자연 속 문경… 여행 떠나볼까

◇ 한국 관광의 별 문경새재한양과 영남을 이어주는 영남대로의 관문, 문경새재백두대간의 조령산을 넘는 이 고갯길은 옛 길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걷기 좋은 길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그 중 아이들의 소풍지로 문경생태미로공원과 옛길박물관을 추천한다. 문경생태미로공원은 문경새재 옛길박물관 건너편 자연생태공원 부지 안에 조성되었으며, 기 조성된 생태연못, 생태습지를 중심으로 도자기 미로, 연인의 미로, 돌미로, 생태미로 등 4개 테마로 이루어진 미로를 비롯한 유아체험 숲 놀이터, 각종 동물 조형물과 항아리 계곡 등 다양한 볼거리로 꾸며져 있다.특히, 4개 미로 중 돌미로에는 쿨링포그 시스템이 설치되어 미로찾기에 즐거움이 더해지고 있다.쿨링포크 시스템은 정수 처리한 깨끗한 물을 특수 노즐을 이용해 미세한 크기의 인공안개로 분사된다. 여름철 쿨링포크 시스템의 분사된 물 입자는 주위 온도를 최대 10℃까지 낮춰 무더운 날씨에도 미로공원을 이용하는 관광객들이 시원하게 즐길 수 있고, 물안개가 시야를 적당히 가려 한층 더 마로 찾기에 즐거움을 더할 것으로 기대된다. 옛길박물관은 이름 그대로 옛길을 주제로 만들어진 박물관이다.문경에는 문경새재, 우리나라 최고의 고갯길인 하늘재, 옛길의 백미 토끼비리, 영남대로 상의 허브 역할 담당했던 유곡역 등 길과 관련된 문화유적이 많다. 옛길박물관은 이러한 문경의 역사 문화적 정체성을 잘 나타내기 위해 건립된 박물관으로 옛길 위에서 펼쳐졌던 각종 문화상을 담아내고 있다.옛 사람들은 여행을 하면서 무엇을 지니고 다녔으며, 괴나리봇짐 속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작고 앙증맞은 유물들을 감상할 수 있다. 그 옛날 길 위에서 이루어졌던 각종 여행기와 풍속화, 중요민속자료 제254호인 문경 평산 신씨 묘 출토복식과 같은 문경의 문화유산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문경단산관광모노레일 · 편안히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방법문경 단산관광모노레일은 단산(해발 956m) 북쪽 능선의 약 1.8km 구간을 오르내리는 장거리 산악 모노레일이다. 상행 35분, 하행 25분 소요되는 8인승 모노레일을 타고 오르다 보면 사방이 탁 트여 백두대간의 광활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등산이 어려운 아이들, 어르신들에겐 산 정상을 체험하기 쉽지 않으나, 문경에서는 모노레일로 쉽게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어 힐링 관광지로 인기를 얻고 있다.상부 승강장에 내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으로 이어진다. 활공장과 곳곳에 설치된 포토존(초승달 포토존, 그네 포토존, 어린 왕자 포토존, 하늘쉼터)에서 인생샷을 남겨도 좋다.최근에는 하부 승강장에 VR장비를 착용하고 게임을 즐기는 가상체험존이 만들어져, 대기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다. ◇돌리네? 교과서에서 배운 ‘돌리네’ 직접 찾아가보자!생명의 보금자리 문경 돌리네습지.습지라고 하면 하천이나 호수, 갯벌과 같이 물이 느리고 고이며, 머무는 곳을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산 속에서 습지를 만날 수 있다면? 국내 유일의 내륙형, 산지형 습지. 돌리네습지가 바로 문경에 있다.돌리네(Doline)라는 지역명은 석회암지대에 생성된 접시모양의 움푹 파인 땅을 의미한다. 그 지하부에는 탄산칼슘이 지하수에 씻겨나간 자리에 크고 작은 천연동굴이 형성된다.이 동굴을 통해 비가 오는 족족 빗물이 빠져나가니 돌리네는 보통 건조한 지형이다. 하지만 문경시 산북면 굴봉산에 위치한 문경 돌리네습지는 석회암 지역이지만 특이하게도 물이 풍부하게 고여 있고, 한여름에도 물이 마르지 않아 매우 희귀하다.그 이유는 오랜 세월 석회암이 빗물에 녹아내리고 남게 된 점토 물질인 붉은 땅, 테라로사에 있다. 물 빠짐이 잘 안 되는 테라로사에 물이 고이고, 식물이 자란다. 이곳에서는 물이 풍부해 예부터 농사를 지었는데, 지금도 농사짓던 논과 오미자 밭, 사과나무 과수원이 있다.또한, 돌리네습지에는 습지 생태계, 초원 생태계, 육상 생태계가 공존해 731종에 이르는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특히 수달, 담비, 삵, 구렁이 등 멸종위기 야생동물과 꼬리진달래, 낙지다리, 들통발 등 희귀식물까지 서식하고 있어 학생들의 학습장으로 최적이다. ◇ 문경에코랄라 광부의 하루를 디지털 실감 콘텐츠로 체험문경에코랄라는 국내 최초의 문화·생태·영상을 테마로 하는 문화콘텐츠 테마파크이다. 주요 시설로는 백두대간의 생태와 문화, 영상 콘텐츠 체험을 할 수 있는 에코타운과 에코스튜디오, 유아 및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야외체험시설로 꾸며진 자이언트 포레스트와 함께 석탄박물관, 탄광촌, 가은오픈세트장, 모노레일 등이 있다.백두대간과 생태에 관한 미디어아트 전시 공간인 에코써클과 나만의 영상을 기획하고, 각종 특수장비로 촬영 후 편집이 가능한 에코 스튜디오는 높은 만족도와 성취감을 안겨준다. 에코랄라에 왔다면 광부의 하루를 체험할 수 있는 은성갱토 실감체험관을 만나볼 것.1994년 은성탄광이 문을 닫은 이후 석탄을 채굴하던 갱도는 문경석탄박물관 개관과 함께 실제 갱도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이용되었다. 석탄을 캐던 갱도 공간에는 홀로그램, 증강현실 등 첨단 기술과 음악이 합쳐져 마치 광부들과 함께 탄광 속을 탐험하는 것과 같은 생생함을 느낄 수 있다.◇ 문경철로자전거석탄을 실어 나르던 폐선로에 자전거를 전국 최초로 도입한 문경.문경 철로자전거는 2005년 개통한 진남역 구간을 시작으로 총 5개 구간을 운영하다가 현재는 진남역과 구랑리역 2구간을 운영하고 있다.문경 여행에서 철로 자전거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는 아름다운 문경의 절경을 온 몸으로 감상하며, 힐링 여행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문경 철로자전거는 반자동 철로 자전거를 운영하고 있지만, 최근 진남역 구간에 전자동 철로 자전거를 도입해 시범 운영하고 있어 힘들이지 않고 편안하게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게 된다./강남진기자75kangnj@kbmaeil.com

2022-05-22

최고의 재료에 정성 한가득… 방송도, SNS도 인정했다

장사란 물건을 팔아 이익을 남기고, 손님들에게 좋은 인상까지 줘야하는 행위. 결코 쉽지 않다.음식 장사는 더욱 그렇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돈 주고 사먹는 음식에 까다롭고 예민하다. 이는 철저한 준비 없이 만든 음식점이 오래 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어느 분야 할 것 없다. 무한경쟁의 21세기. 시장이나 도심 상가에서 어제 본 간판이 오늘 사라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동네마다 미식가를 자처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인 한국. 한 가지 음식만으로 손님들의 입맛을 사로잡아 30년을 이어왔다면 그 가게의 맛과 영업 전략은 보통이 아닌 게 분명하다.포항운하가 지척인 죽도시장 끝자락에 위치한 유화초전복죽. 큼직큼직하게 썰어 넣은 전복을 듬뿍 얹은 연녹색의 맛깔스런 죽은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도 포항시민과 관광객들을 유혹 중이다.유화초전복죽의 주인은 유화초(76)씨. 자기 이름을 걸고 음식점을 운영한다. 맛이건 위생이건 자신 있다는 이야기다.“우리 가게는 1kg당 8미(마리)짜리 전복을 쓴다. 죽에 사용되는 전량을 완도에서 가져오고 있다”고 유 대표가 말하기에 되물었다.“그럼 1마리가 130g쯤 된다는 말인데, 그게 큰 건가?” 웃음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 해물탕에 들어가는 조그만 전복은 1kg이 20마리쯤 된다.” △“좋은 재료로 정성껏 만들면 손님이 먼저 안다”전라남도 영암에서 태어난 유 대표는 인심 좋은 아버지 밑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어릴 때부터 입맛 까다로운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맛있는 것, 멋스런 것을 먹고 보며 자랐다.결혼 후 포항에 정착한 것은 서른네 살 때. 처음엔 미장원을 운영했고, 이후엔 횟집도 한 경험이 있다.전복죽을 만들어 팔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아들이 어릴 때다.대부분의 음식점이 부침(浮沈)을 겪듯, 유화초 대표의 전복죽집도 잘 될 때가 있었고, 조금 어려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유 대표의 죽을 접한 손님들의 평가는 한결같았다. “맛있고 푸짐하다”는 것.지난 ‘코로나19 사태’의 광풍 속에서도 유화초전복죽은 고전하지 않았다. 오히려 택배를 통한 주문량은 늘었다고 한다.-코로나19로 인해 음식점들이 어려움을 겪었는데.“전복이 면역력 강화에 좋다고 알려져 오히려 많이 팔았다. 젊은 손님들이 나이 드신 부모를 위해 주문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상 밖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면서 손님이 조금 줄었다. 하지만, 남들 안 될 때 우리는 장사를 잘 했으니 섭섭하지 않다. 지금까지 고생한 다른 가게도 함께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나?(웃음)”-30년을 큰 어려움 없이 운영할 수 있었던 비결은.“처음 죽집을 시작하며 다짐한 게 있다. 좋은 전복을 사용하고, 딸려 나가는 반찬의 재료 또한 최고의 것을 쓴다는 것이다. 조금 비싸도 돈보다 가게의 앞날을 먼저 생각했다. 싱싱한 전복으로 정성을 다해 끓이면 그 누구보다 손님이 가장 먼저 알아준다. 그게 비결이라면 비결이다.”유화초전복죽은 이른바 ‘유명 맛 전문가’가 음식점을 소개하는 TV 프로그램에도 한두 차례 소개된 바 있다. 그러나, 손님들은 방송에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가게를 찾진 않는다. 그런 가게라면 유화초전복죽 말고도 많다.유 대표는 직접 먹어본 사람이 인터넷에 남기는 ‘식당 방문 후기’가 영업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고 했다.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블로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의 SNS는 유화초전복죽의 든든한 우군(友軍)이다.△ 생에 대한 낙관과 웃음으로 건강 유지아무리 ‘100세 시대’라지만, 일흔여섯은 적지 않은 나이다. 종일 주방에 서서 일해야 하고, 많게는 하루 100그릇의 전복죽을 만들어 포장하는 건 손자가 대학생인 할머니에겐 어려운 일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유 대표는 항상 웃는 얼굴이다. 목소리도 우렁우렁 활기에 차있다. 멍게젓과 꼴뚜기젓, 동치미와 고추장아찌 등 내오는 반찬 인심도 넉넉하다. 게다가 반찬 하나하나가 죽만큼이나 맛있다. 노령임에도 크게 아픈 곳 없어 보이는 유화초 대표의 건강을 지켜주는 건 아마도 생래적인 낙관성과 환한 미소가 아닐지. 그런 성격은 인터뷰에서도 드러났다.-처음 죽도시장에 왔을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어떤가.“젊은 시절엔 미장원과 횟집도 운영해봤다. 죽도시장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은 건 전복죽집을 하면서다. 어떤 사람은 ‘예전이나 현재나 살기가 어렵다’고 앓는 소리를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이 아무리 어려워도 처음 장사를 시작하던 47년 전보다야 백번 낫다.”-유화초전복죽은 어떤 사람들이 찾는지.“죽집엔 나이 지긋한 손님이 대부분일 것이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젊은 손님이 훨씬 많다. 30~40대가 8할은 되는 것 같다. 그들이 먹어보고 부모님들 몫으로 포장을 해가거나, 택배 주문을 한다.”-전복죽 이상으로 딸려 나오는 반찬이 맛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던데.“메인과 서브가 두루 맛있다니 음식 장사하는 사람으로서 듣기 좋은 말이다.(웃음) 반찬 만드는 특별한 방법이 있냐고? 없다. 그저 제철에 나오는 좋은 멍게를 깨끗하게 까서 좋은 소금에 절이는 게 전부다. 동치미도 제주산 무를 사서 직접 만들고, 고추장아찌도 내가 담근다. 앞서 말했듯 그 과정에선 식재료의 가격보다 품질을 먼저 본다.” △ 죽도시장서 인천 소래포구로 이어진 ‘손맛’유화초 대표는 2015년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만드는 전복죽을 특허청에 상표 등록했다. 가게엔 특허청장의 직인이 찍힌 서비스표등록증이 걸려 있다.유 대표의 정갈한 손맛은 며느리에게로 이어졌다. ‘유화초’라는 이름을 걸고 전복죽을 만들어 팔 수 있는 곳은 전국에 단 두 곳. 포항 죽도시장과 인천 소래포구에만 있다.인천 유화초전복죽도 손님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유 대표가 알려준 30년 축적된 노하우로 만들어지는 죽과 반찬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포항의 몇몇 산부인과는 유 대표의 빼놓을 수 없는 단골이다. “옛날부터 산모의 젖이 모자라면 전복을 먹였다”는 게 유 대표의 설명. 아기를 낳은 후에도 먹지만, 임신 중 입덧이 심할 때도 전복죽을 먹으면 속이 편안해진다고 한다.“호주와 싱가포르에서 온 관광객도 손님으로 받은 적이 있고, 서울과 강원도는 물론, 전복을 공급받는 완도에서도 전복죽 택배 주문이 온다. 그럴 때면 고생은 까맣게 잊고 웃음 짓게 된다”는 유 대표의 얼굴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이제 막 식당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조언할 게 있냐”는 물음에는 간명하면서도 당연한 이야기를 들려줬다.“내 식구가 먹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다들 시작할 땐 그런 초심을 가진다. 그걸 잊는 순간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유화초전복죽이 유명해지면서 체인점을 하고 싶다는 이들도 늘었다. 지금까지 제의받은 것만도 60여 건. 여든 살쯤 되면 적절한 대가를 받고 그들에게 맛있는 죽과 반찬 만드는 방법부터 음식점 운영 방식까지 모두 알려준다는 게 유 대표의 계획이다.“이후엔 뭘 할 거냐고? 그땐 나도 좀 쉬어야지. 좋아하는 노래 배우러 노래교실도 다니고…. 지금껏 고생했으니 그래도 되지 않겠어?”/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5-17

“나무처럼 땅과 상생 공존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길은 처음부터 길이 아니었다. 사람이 다녀서 길이 만들어진 것이다. 모든 것은 사람이 만들어 가야 한다. 여기서 개체적 생명, 인간의 자유 의지가 가능해지고 자유로운 인간이 탄생하게 된다. 양명학의 정신이다.‘세상의 모든 이치는 이미 정해져 있고 인간은 그 속에서 움직여야 한다’는 주자학에 반기를 들고 태어난 것이 양명학이다. 양명학자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는 동양철학을 연구하면서도 저술활동과 시, 그림, 기고, 강연 등 활동에 영역이 따로 없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이스인 조르바가 환생한 듯, 그의 생도 자유로운 인간을 추구하며 전위적이며 분방하다. 인간의 삶은 지구를 떠나 존재할 수 없으니 나무처럼 땅에 기대어 우주와 교감해야 한다는 식물성 사유를 주창한다. - 일찍 대학교수가 됐고 평생 직업이 됐으니 꽃길을 걸어온 것 같다. 그런데 글은 도발적이고 반시대적 불평과 ‘시니컬’하면서 패러독스로 무장한 듯 농담조에 때로는 낙천적이어서 종잡을 수가 없다.△내가 삐딱하고 허접해 보이는 것은 유아기 모성결핍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어릴 적 어머니가 쓴 일기를 보니 젖이 나오지 않았던 모양이더라. 그래서 모성이 결핍됐을 것이고 자연인으로서 스스로 결핍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91년 29살의 나이로 교수(전임강사)가 됐고 40살도 전에 교수가 됐다. 그러니 자연 ‘안티’가 많아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유림의 본산이기도 한 영남에서 이단으로 치부되는 양명학을 전공한 것도 이유가 될 것 같다. 조선은 주자학의 나라였고 양명학은 정통 주자학에 반하는 ‘마이너’였다.- 30여 년 동안 교직에 있으면서 많은 작업을 했다. 지금 하고 있는 강의나 저작활동은 어떤게 있나.△명품강의 반열에 오른 스무살의 인문학을 비롯, 인간관계와 철학, 노자와 인문학 등 6개 강좌에 17시간 강의가 있고 대학원 수업과 외부강의, 교수신문과 다수 일간지 정기 및 비정기 기고와 칼럼, 방송 출연 등으로 일과가 짜여졌다. 그런 중에도 시작과 그림을 그리고 주말이면 농장에서 땀 흘리는 농부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내 키만큼 책을 쓰겠다고 작정했더니 고려대 김언중 교수가 나를 ‘등신(等身)교수’라고 했다. 뜻을 풀어보니 불쾌해 할 수도 없었다. 쓰다가 죽는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교수신문에 연거푸 올해의 사자성어에 선정되는 실력을 발휘했다.△양식있는 시민으로서 정치권에, 사회에 쓴소리를 한 것이 먹혀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이후인 2017년엔 파사현정(破邪顯正)을, 문재인 정권의 2019년 한 몸에 두 개의 머리를 가진 공동운명체 공명지조(共命之鳥)를, 조국 사건이 불거진 뒤인 2020년에는 내로남불을 지적하는 아시타비(我是他非), 지난해에는 고양이가 잡아야 할 쥐와 같이 살아간다는 묘서동처(猫鼠同處)를 이야기했다. 모두 그 시대를 관통하는 정신을 지식인의 눈으로 본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서는 최 교수를 진보나 좌파로 분류하기도 한다. 동의하나.△ 나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다. 나는 누구에게 잘 보이려 한 적 없다. 나대로 살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다. 어정쩡하게 살아왔다는 표현이 더 적확할 것이다. 이념적으로도 중도에서 좌 쪽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좌도 아니다. 내 양심대로, 교수의 양식대로 살아왔다. 내게 이념과 친소관계는 다르게 작용한다. 태극기 부대를 포용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인문학의 포용력이다. 마찬가지로 시인 서정주의 친일과 그의 작품은 다르게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불이익을 당하거나 불편했던 적은 없었나.△박노자 오슬로대 교수를 초청해서 특강을 하고 난 뒤 국정원에서 찾아와 “박근혜 대통령 시대를 어떻게 비판할 수가 있나”하고 추궁조로 물었다. 나는 “대학은 좌도 우도 없고 독도를 지키는 데는 진보도 보수도 없다. 더구나 독도를 지키는 데는 저런 분이 필요하다”고 되레 꾸짖었다. 5공 6공 시대도 아닌 지금 어떻게 국정원이 대학 강의를 트집 잡는지 불쾌했다.아마 박정희 전 대통령을 창씨개명한 일본 이름으로 불러가면서 강의한 것 때문이라 생각한다.한번은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총장실에 갔더니 당시 총장님이 “교수가 복장이 그게 뭐냐?”고 하더라. 마침 함께 간 카이스트의 뇌 과학자 김대식 교수가 반바지를 입고 있어서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최 교수가 연구하는 양명학은 어떤 학문인가.△16세기 중국 명나라의 왕양명이 제창했던 학문이다. 당시로서는 보편적 주류였던 주자학에 반기를 들고 자기의 독창적 사상을 펼쳤던 것이 양명학이다. 주자학은 ‘세상의 모든 이치는 이미 있다. 불변하는 이치가 모든 사물의 근저에 있다’고 했다. 이런 이치[理]의 선험성에 대해 왕양명은 ‘그런 것은 없다. 결국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라며 반론을 폈다.모든 이치란 사람이 만든 것이고 사람이 만들어 가면 그것이 이치가 된다는 주장이다. 심즉리(心卽理)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길이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고, 내가 걸어가면 길이 된다. 잘못되면 바꾸면 된다’ 이런 식의 이야기다.- 그러면서 영남퇴계학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아이러니 아닌가.△역설적이기도 하다. 영남이 그만큼 개방됐다는 이야기도 될 것이다.- 철학자로서 시를 쓰고 그림도 그린다. 일찍이 등단했고 시집도 여러 권 냈다.△철학은 추론하고 논리적이지만 철학으로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감성적 작업을 통해 풀어나간다. 이 작업이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가 ‘나는 소외된 존재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영혼의 결핍, 소외감 같은 것을 해소하는 창구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나는 이념적으로 좌도 우도 아니다. 나는 특정 이념이나 논리나 이슈 같은 것에는 동조하지 않는다.어릴 때부터 시를 쓰고 소설도 썼다. 중고교 이후 집중적으로 시를 썼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아마 철학을 하지 않았다면 시인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시인이었다가 철학자가 됐다는 말이 맞는다. 지금은 철학에 더 신경을 쓰고 시가 소외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철학의 문제나 내용에서 보면 시적 표현이 많이 있다. 결국 내 내면에는 시와 철학이 동거하며 상생적으로 작업을 일궈나가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인문학의 위기라고 한다. 인문학자로서 어떻게 해석하고 또 해결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지금까지 인문학이 위기 아니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인문학자의 위기’이며 ‘인문학적 방법론의 위기’라 할 수 있다. 인문학을 다루는 주체인 인문학자가 시대를 캐치해내고 선도해가기 위해서는 늘 깨어있어야 한다. 시대를 성찰하고 반성하며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지금 인문학자들의 사고는 너무 분화됐고 오로지 자기 영역에만 몰두하고 다른 영역에는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온 말이 융복합이다. 융복합적이란 말은 방법론적인 것인데 이마저도 분과학문의 하나로 자리 잡는 듯해 좀 못마땅하다.인문학의 위기에 대해서는 우선 인문학자 개개인의 자각과 성찰, 노력에 기반한 창의성과 독창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다음 국가와 대학 자체의 제도적 뒷받침이 지속돼야 할 것이다. 인문학을 공공적인 것으로 보고 공동선을 위해 지속시켜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돈이 되거나 안 되거나 관계없이 ‘인간다움’을 위한 공동의 방향에서 지속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철학과 교수로서 독도연구소를 맡고 있다.△10년 이상 독도연구소장직을 맡고 있다. 일본에서 공부했고 일본어를 할 수 있고, 넓은 의미에서 동아시아 근세 근대사상을 공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론적으로 독도 문제는 대한민국의 영토 문제이고 평화와 연관된 문제다. 우리 영토에 대한 정확한 학습과 교육의 문제는 인문학의 과제이기도 하다. 또 국가 간의 평화라는 것은 윤리적 철학적 문제이기도 하다.독도에는 역사적 국제법적 외교적 정치적 등의 문제가 맞물려 있어 좀 복잡하다. 역사 속에 이루어진 문제이기 때문에 다루어야 할 고문서 등 자료들이 많다. 거기에다 섬으로서 자연 생태 지질학적 해양적인 문제도 껴안고 있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라서 대륙과 해양 두 방면에서 접해야 할 문화적 외교적 문제를 늘 안고 있다.- 앞으로 인문학은 어떻게 진전될 것으로 보나. 또 최 교수는 앞으로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나무를 좋아하고 식물성 사유에 대해 구상중이다. 대지의 철학, 지구의 철학으로 식물성 사고에 대해 천착할 예정이다. 이미 동양의 철학 사상에는 이런 요소들이 풍부하다. 식물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 우주와 교감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지구를 떠날 수 없다. 나무처럼 대지의 정치를 해야 한다. 지구와 대지를 새롭게 바라보고 상생 공존하는 방향을 생각해야 한다. 그 속에서 인간의 위치와 의미를 묻는 것이 인문학의 큰 흐름이 될 것으로 본다. 자꾸 지구를, 땅을 벗어나고 배반하는 삶을 살면서 갈등이 생겨나고 고뇌와 번민이 자라는 것이다.- 생명철학은 최근 타계한 김지하 시인이 주창하기도 했다.△신문사 주간으로 당시 김지하 시인과 생명 프로젝트를 함께 하기도 했다. 그가 고문으로 일그러진 몸뚱이를 부르르 떨면서 “내가 감옥에 있던 당시 너는 어디에 있었어?”라고 꾸짖던 장면이 떠오른다. 아무도 대꾸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궈야 했다. 운동권에서도 그 열매만 챙기는 세력들이 따로 있음을 일갈했던 것이다. 고인이 된 김 시인을 생각하면 그 장면부터 떠오른다.- 성과 인문학이라는 다소 엉뚱한 책을 쓰기도 했다.△엉뚱하게 보이겠지만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없다. 한국의 성 문화는 보수적이고 경직돼 있다. 역설적으로 병리적 현상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이 땅의 진보는 진부(陳腐)가 되었다. 모두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 책을 구상했고 썼다. 해원상생(解51A4相生)해야 한다. 마광수를 포용할 수 없는 진보와 지성은 이미 죽은 사회다. 그런 사회는 비정상의 사회이고 미투(Me too) 같은 사건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나대로 살았다, 어쩔래’라는 시집을 냈다. 앞으로도 나대로 살아갈 것인지, 계획 같은 것은 있나.△나 스스로의 매력이라면 ‘촌스러움’이라 생각한다. 농촌에서 태어났고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자 하기 때문에 지극히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발터 벤야민처럼 세상을 두리번거리며 호기심 많게 사는 존재일 것이다. 운명에 사로잡히거나 굴복하지 않고 저돌적으로 뭘 해보려고 하는 그런 정신, 그것도 촌스러움이라 본다. 그래서 호도 돌돌(乭乭) 돌구 이런 것이다. 시냇가 어디에나 있는 돌처럼 촌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삶의 철학이기도 하다. □ 최재목(崔在穆) 영남대 철학과 교수상주출생. 대륜고. 영남대 철학과 졸, 일 츠쿠바대 문학석사, 문학박사(철학사상 전공) 양명학 자. 시인. 저술가. 한국일본사상사학회 회장과 한국양명학회 회장, 영남대 도서관장과 신문방송사 주간 등을 역임했다.현 영남대 독도연구소장, 퇴계학연구원장.하버드대와 도쿄대 베이징대 등에서 객원연구원으로, 네덜란드 라이던대에서 방문학자로, 중 절강이공대 객원교수를 지냈다. ‘나는 폐차가 되고 싶다’ 등 8권의 시집과 ‘동아시아 양명학의 전개’ ‘동양철학자 유럽을 거닐다’ ‘톨스토이가 번역한 노자의 도덕경’ 등 35권의 저서를 냈고 앞으로 출간할 도서목록까지 작성해 뒀다.스스로를 결핍된 존재로 규정짓고 하는 일은 허접하다면서도 늘 저지르고 주목을 받으려 노력하는 아방가르드적 자유인.“나는 아나키스트가 되고 싶다. 모든 억압된 체제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자연과 자치를 모토로 살아가려 한다. 나는 자유를 존중하고 생명주의자이다.”/편집위원 이경우

2022-05-16

실용적인 맞춤 요금제로어르신들 쌈짓돈 지켜요

훤칠한 키에 환하게 웃는 얼굴부터가 호감이 간다. 인사성도 밝다. 이른바 ‘어르신들이 사위 삼고 싶어 할 청년’으로 느껴졌다.복개된 포항 죽도시장 칠성천 입구에서 핸드폰을 판매하는 행복텔레콤 고은성(32) 대표는 나이 지긋한 시장 할아버지와 할머니들 사이에서 ‘손자 같은 상인’으로 통한다.고 대표가 건넨 명함 뒤쪽엔 이 청년상인이 마음속에 세워둔 장사의 원칙이 적혔다.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손님들이 의심하지 않게, 진심을 담아, 나가는 분들이 행복하게 웃을 수 있도록.”간명한 문장이지만 그 옛날부터 물건을 사고파는 원칙이라 할 상도(商道)가 고스란히 담겼다.스스로 “이 일이 너무 좋다”고 말하는 그는 죽도시장에서 가게를 열기 전 삼성에서 소프트웨어 관련 업무와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를 맡아 일했다.고등학교 때는 자동차에 관심을 가지고 정비 등을 배웠다. 무언가 만들고 고치는 일이 좋아서였다.대학은 조리학과를 다녔는데, 일식 요리를 익혔다고 한다. 상대방에게 웃음과 만족감을 주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은 일찍부터 있었다.“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너무 비싼 요금제의 핸드폰을 쓰는 게 안타까웠어요. 보통 3만 원에서 5만 원 정도의 요금제를 사용하시는데, 사실 월 1만1천 원의 요금으로도 크게 불편 없이 쓰실 수 있거든요. 어렵고 치열한 시대를 힘들게 살아오신 어르신들에게 복잡한 서류 작업을 대신 해주고, 적절한 금액의 핸드폰과 요금제를 안내해드리고 싶었어요.”이는 고은성 대표가 말하는 ‘노인들이 많이 찾는 죽도시장에서 가게를 연 이유’다.삼성에서 소프트웨어 관련 업무와 노인 대상 강의를 맡아 일하다 1년 전 가게를 열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너무 비싼 요금제의 핸드폰을 쓰는 게 안타까웠어요. 보통 3만 원에서 5만 원 정도의 요금제를 사용하시는데, 사실 월 1만1천 원의 요금으로도 크게 불편 없이 쓰실 수 있거든요. 복잡한 서류 작업을 대신 해주고 적절한 금액의 핸드폰과 요금제를 안내해드리고 싶었어요. 요금제는 유튜브와 관련 인터넷 사이트 등을 보면서 조금만 정보를 수집해도 자신에게 꼭 맞는 걸 선택할 수 있답니다. △ 환하고 깨끗한 매장은 죽도시장 어르신들의 쉼터고 대표가 운영하는 핸드폰 매장은 보통의 전통·재래시장 가게와 달리 채광이 좋아 밝고 환하다. 거기에다 깨끗이 정돈돼 있어 흡사 카페처럼 보인다. 사탕과 바나나 등의 간식도 늘 준비돼 있다.1년 전 죽도시장에 정착하며 안면을 익히게 된 몇몇 어르신들은 행복텔레콤 매장에서 차 한 잔을 마시며 한참 동안 쉬어가기도 한다.-아무래도 어르신 손님이 많이 올 듯하다. 어려움은 없는지.“젊은 사람보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편합니다. 예전 직장에서도 어르신들을 자주 만났던 터라 노인 응대가 어색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그분들을 보면서 어린 시절 나를 귀여워해주던 조부와 조모의 모습을 다시 만나는 것 같아서 좋아요. 저렴하고 실용적인 핸드폰과 요금제를 추천해주면 맛있는 것도 사주고, 칭찬도 해주시는데 그럴 땐 보람을 느끼죠.”-가게를 연 후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손님은.“핸드폰을 4대나 가지고 다니는 할아버지가 있었어요. 어느 날 가게에 들어와 핸드폰을 바꾸고 싶다고 하셨어요. 그때 놀랐습니다. 한 달 핸드폰 요금이 40만 원이 넘더군요. 그분은 사실 그만큼 요금이 나온다는 것도 잘 모르고 있었어요. 차분하게 설명을 해드리고 해지하는 걸 도왔습니다. 우리 매장에서 핸드폰을 구입하지는 않았기에 내게 이익은 없었지만, 밝게 웃으며 나가시는 모습만으로도 좋았습니다. 그분은 그날 이후에도 가끔 오셔서 내가 손자처럼 보인다고 하시며 쉬다 가시곤 합니다.”△ 꼼꼼한 비교와 정보 수집이 저렴한 핸드폰 구입의 비결-자기에게 적절한 핸드폰과 요금제를 고르는 노하우를 알려준다면.“사람들은 신기하게도 싼 물건은 꼼꼼하게 비교하면서 구입하는데, 핸드폰처럼 고가의 물품은 머리 아프고, 귀찮다고 고민 없이 구매 서류에 사인을 해버립니다. 보험과 적금, 펀드도 가입할 때 여러 조건이 있는 것처럼 핸드폰 요금제도 마찬가지에요. 유튜브와 관련 인터넷 사이트 등을 보면서 조금만 정보를 수집해도 자신에게 꼭 맞는 걸 선택할 수 있습니다. 어렵지도 않아요. 만약 제게 도움을 청한다면 보다 좋은 조건으로 선택해 고를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웃음)”각각의 성향에 따라 다르지만, 고 대표의 또래 친구들은 아무래도 개인 사업을 하기보다는 직장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기자와는 세대가 다른 30대 초반의 청년들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고 했다.“‘코로나19 시대’가 3년 가까이 이어지면서 친구들이 ‘안정적인 직장생활이 편하다’는 이야기를 하긴 합니다. 상황이 녹록지 않으니 자기 사업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친구들도 개업을 망설이긴 하죠. 하지만, 직장 안에서 겪는 상사와의 갈등이나 스트레스를 떨치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흥하든 망하든 자신의 책임 아래서 삶을 살아가는 게 개인 사업의 매력이니까요.”그렇다면 고은성 대표가 안정적 직장생활을 떠나 핸드폰 매장 운영이라는 사업의 길을 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뭘까? 그 궁금증에는 이런 답이 돌아왔다.“직장에선 크건 작건 차별과 부조리함을 만나게 되고, 동료들과의 실적 다툼을 하게 되죠. 자신이 회사를 구성하는 하나의 부속품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많았습니다. 남들보다 더 빨리 승진하기 위해 무한경쟁의 톱니바퀴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썩 달가운 일은 아니었죠. 반면 사업은 주변 환경과 상황에 따라 변수가 있지만, 선택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가 안고 가야 하기에 남에게서 성공과 실패의 원인을 찾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는 성장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좋은 것 같아요.” △ 지금의 꿈과 앞으로 10년 후 미래 계획자신이 하는 일에 긍지를 가지고 바쁘게 살아가는 젊은이는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건 희망의 에너지를 주변에 선물한다. 고 대표도 그런 사람인 듯 보였다.그러나 정작 자신은 죽도시장에서 산전수전 겪으며 험한 세파 헤쳐 온 나이 많은 상인들에게서 힘을 얻는다고 하는 고은성 대표.“쉬는 날 없이 부지런히 일하시는 주변 어른들을 보면서 많은 걸 배웁니다. 죽도시장 상인들 대부분에겐 넘치는 열정과 자부심이 있습니다. 잘 모르시는 분들은 ‘자기가 사장인데 아무 때나 쉬고, 마음대로 가게 문 열면 되지 않냐’고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아요. 다른 직업을 가진 이들보다 일찍 아침을 열고, 늦게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매일 더 좋은 장사 방법과 손님 응대 방식을 고심하는 선배 상인들을 보면서 사업 초보자인 저는 존경의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앞으로 10년 후엔 보다 많은 손님들에게 신뢰를 얻어 매장을 넓히고, 저렴한 핸드폰과 요금제를 권유하며 사업을 키워가고 싶다는 고 대표.현재 전세로 살고 있는 집을 벗어나, 내 집 마련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 자식을 낳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소박하지만 옹골찬 미래 계획을 이야기하는 그는 나이보다 어른스러워 보였다.마지막으로 물었다.“이 말은 빼놓지 않고 꼭 하고 싶은 게 있다면?”“당신의 핸드폰 요금은 안전한가요?”라고 되묻는 고 대표.자신의 의사를 짤막하고 재치 있게 전달하는 이 어법만을 놓고 보자면 반짝이는 작은 귀고리가 썩 잘 어울리는 고은성 대표는 영락없는 ‘21세기 신세대 청년’이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5-10

오·감·만·족 ‘V로드’ 따라 걸어볼까요

봉화군은 물야면 물야저수지를 활용해 포스트 코로나에 대응한 새로운 관광 콘텐츠 개발에 적극 나서고 있다.물야저수지는 내성천 시발점인 선달산의 계곡물이 주 수원으로 연중 수량이 풍부함은 물론, 봄철 약 2~3km 정도의 화려한 벚꽃을 구경하기 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장소이다.또한 과거에는 봉화 보부상들의 활동 거점으로 알려져 있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특색있는 스토리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이에 봉화군은 물야저수지의 다양한 스토리에 차별화된 콘텐츠를 입혀 새로운 변신을 준비하고 있다.◇물야저수지내성천서 흐르는 선달산 계곡 주 수원봄철엔 2~3km 벚꽃 화려한 장관옛날 보부상 활동거점으로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스토리 품어◇V로드물야저수지 지형 본떠 붙여진 이름1.6km 친환경 웰니스 산책로 조성내년까지 구간별 특별한 콘텐츠 부여◇물야 오전리‘오동나무에 봉황이 죽실 먹고 산다’봉황산 밑 마을 ‘오전’이라 불려보부상 정원, 조형물·경관 조명 설치봉화객주, 갓 구운 참나무 화덕피자에족욕체험장 갖춰 피로 함께 푸는 힐링장 ◇ 흔한 저수지, 새로운 관광명소로 재탄생하다포스트 코로나 시대, 최근 관광 트렌드는 친환경과 힐링이 대세로 자리매김하고 있다.특히 물야저수지는 수려한 주변 경치와 연분홍빛 화려한 벚꽃으로 인해 꾸준히 관광객들이 찾는 힐링의 공간으로 정평이 나있는 곳으로 군은 여기에 관광의 요소를 더욱 가미해 더 큰 도약을 계획하고 있다.이를 위해 총 52억 원의 사업비가 투입되는 친환경 웰니스 관광자원화사업, 약칭 V로드 조성사업을 추진 중이다. V로드라는 말은 물야저수지 지형이 영문자 V와 비슷해 붙여진 이름으로 총 3개 구간에 차별화되고 특색있는 콘텐츠를 담을 계획이다.지난해 1차 사업구간(생달 입구~마을)은 데크와 야자매트를 활용해 1.6km 산책로를 조성하고 있으며 올해 6월이면 마무리가 된다.올해는 도비 포함 20억 원의 사업비를 확보해 2차 구간 사업을 계획하고 있으며 세부구상 용역 완료 후 실시설계를 통해 10월경 사업을 발주한다.마지막 3차 구간은 2023년 예산 확보 후 사업을 추진해 총 공사가 완료되는 시점인 내년 하반기가 되면 관광객들에게 그 모습을 선보일 예정이다.특히, 지난 1월 V로드 총 구간에 대한 특색 있는 콘텐츠를 발굴하기 위해 세부구상 용역을 진행하고 있어 전국에서 흔히 보는 둘레길이 아닌 봉화만의 콘텐츠가 조성될 것으로 기대가 된다. ◇ 물야 오전리, ‘娛(즐거울 오) 廛(터 전)’ 즐거움이 가득한 장소로 거듭나다물야면 오전리는 봉황산 밑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봉황이 오동나무를 좋아하고 죽실을 먹고 산다고 해 오전(梧田)이라고 불렸다. 군은 이러한 오전리를 娛(즐거울 오) 廛(터 전), 즐거움이 가득한 장소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해왔다.지난 2020년에는 오전약수관광지 내에 보부상을 테마로 한 보부상 정원을 조성하고 달·토끼 조형물을 설치해 볼거리를 더했으며 경관조명, 쉼터 등 관광 인프라를 더욱 확충해 관광객들이 편히 찾을 수 있도록 했다.특히 지난해 관리사무소를 리모델링해 오픈한 봉화객주(카페)는 오전약수관광지 활성화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여기에는 맛있는 화덕피자와 커피 등 다양한 먹거리는 물론 족욕체험장이 함께 운영되고 있다. 카페 입구에는 참나무 화덕이 있어 직접 손으로 반죽해 화덕에서 갓 구운 피자를 맛볼 수 있으며 육즙이 그대로 살아있는 부드러운 치킨스테이크도 함께 즐길 수 있다.또한 카페 안에는 차를 마시며 족욕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 관광객들의 여행 피로를 풀어주는 이색적인 힐링 공간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오전 V로드가 모두 조성되면 오전리 일원은 봉화 관광거점의 역할을 톡톡히 할 것으로 예상된다. ◇ 포스트 코로나에 대응한 친환경 힐링 도시 ‘봉화군’ 만들다코로나19 이후 일상회복에 따라 치유와 휴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웰니스 관광이 계속해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군은 이에 발맞춰 물야저수지 일대를 ‘머무르며 힐링할 수 있는 관광지’로 발전시키며 친환경 관광지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한다는 계획이다.봉화군은 지금까지 개별 관광지의 기능을 하던 오전약수관광지와 물야저수지를 하나로 엮어 새로운 형태의 관광자원으로 만드는데 노력하고 있으며 추후 오전V로드 조성으로 오전리 일원의 관광자원과 연계해 지역 새로운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봉화군 금대원 문화관광체육과장는 “친환경 웰니스 관광자원화사업(V로드)이 완공되면 지역의 대표 관광지로 거듭날 것으로 기대하며 앞으로도 청정도시, 힐링도시 봉화의 명성을 제고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들을 추진해 나가겠다”라고 말했다.봉화/박종화기자 pjh4500@kbmaeil.com

2022-05-10

‘골목투어’로 대구를 세계 관광지로 만들다

관광이란 걸으면서 먹고 보고 즐기는 것이다. 런던, 파리, 뉴욕, 동경 등 세계 유명 관광지가 모두 도시인 이유다. 도시에는 그 도시만의 색깔이 있고 냄새가 있고 그것이 골목에서부터 비쳐지고 풍겨진다. 대구가 근대 골목투어를 통해 세계적 관광 도시로 부상하고 있다.윤순영 여성과 도시 대표(전 대구 중구청장)는 골목을 통해 도심을 되살리고 골목투어를 이끌어낸 골목대장이다.골목투어는 골목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날것 그대로 외부인에게 노출되는 예민하고 위험한 게임이다. 윤 대표는 “관광객들이 보는 대구의 속살이 깊숙한 골목에 감추어진 빈곤과 한숨이어서는 안 된다”며 “(당시) 중구청이 주민들의 삶을 가꾸는 데 신경을 썼고 복지시스템이 가장 잘 정비된 지자체가 된 이유”라고 말한다. 그래서 골목투어는 주민들의 은근하고 사소한 행복까지 들여다보는 투어가 됐다. - 여전히 바쁘고 신명나게 사는 것 같다.△구청장 때보다 더 바쁜 것 같다. 청장 12년의 활동을 퇴임 후 4년 동안 다시 집중적으로 하고 있다. 청장 재직 시 ‘내가 시민으로 돌아갔을 때 시민으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을 하고 있다.- 여성과 도시는 어떤 성격으로 만들어졌나.△우리가 사는 도시를 여성의 눈으로 보고 아름답게 꾸며 가는 것이다. 이런 일에 돈이나 행정적 지원이 따르면 무엇엔가 구속되고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회원 모두가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문직 여성 아닌가. 우리가 받은 혜택을 시민들에게 돌려주자며 만들어진 것이 여성과 도시다.- 고 박동준씨를 기리는 박동준 기념사업회 이사장과 갤러리 분도까지 맡고 있다. 대구를 더 아름답고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겠다는 열정이 청장 재직시절을 무색케 한다.△박동준상은 매일신문과 공동으로 올해 3회째 패션 부분을 시상하게 된다. 첫해 패션, 다음해 미술부분 시상을 했다. 영남일보와 공동으로 기획한 미터상(美와 우리 사는 땅을 말하는 터의 합성어)도 올해 3회째 시상하게 된다. 그동안 TBC와 함께 도시다큐 재생 프로그램으로 외국과 한국의 골목과 도시재생이야기도 필름에 담았다. 외국은 덴마크 코펜하겐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국내에서는 서울과 부산 그리고 목포와 대구의 달성을 담았다. 서로 비교해 가면서 도시 재생과 그 터전을 주민들이 어떻게 꾸며 가는지 담아냈다.- 골목과 도시재생 프로그램에 목포가 들어 있다.△목포는 항구도시지만 우리 문화가 잘 보전돼 있더라. 군산에서부터 완주 목포로 이어지는 라인이 아주 색깔이 있었다, 주민들의 살아보겠다는 의지와 생명력이 느껴지는 도시였다. 바닷가지만 근대의 일제 잔재가 많이 남아있고 특히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예능인을 많이 배출한 예도답다고 느껴졌다.추억과 흔적을 소중히 여기는 풍토였다. 문화관광으로 먹고 살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러웠다. 이곳 예술인들, 차범석 임방울 윤심덕 등 근대 예술인들의 맥을 지금도 이어오고 그 터전과 흔적을 보전 보존하고 있더라.그런 도시들에 비하면 대구는 너무 똑똑한 사람들이 많다. 개성들이 강한 것 같다.- 2006년 여성 전략 공천으로 경선을 거쳐 후보가 됐다. 정치인도 행정가도 아닌 사회운동가가 보수적 조직인 구청에 들어갔는데 기득권인 조직의 반발은 없었나.△선거 때는 정치인이 아니니 순수하다고 보고 밀어주어 당선됐던 것 같다. 취임하니 과장급 이상 간부공무원 중 여성은 단 1명뿐이더라. 그런데 임기 말년엔 여성 간부를 30% 수준으로 만들었다. 재선 캐치프레이즈로 ‘일 잘하는 공무원 만들겠다’고 약속했는데 직원들이 따라주었고 주민들이 믿어줬다. 여성 공직자들이 텃세 센 남성사회에서 죽기 살기로 일하니 성적순 승진에서 제대로 평가받았던 것 같다.- 취임했을 때 주위에서 중구청은 민주노총이라며 걱정들을 했다.△나는 노동조합도 필요하다고 했고 그들도 녹을 먹는 공직자들이니 국가를 위해 일할 것을 믿었다. 무엇보다 공정을 내세웠고 그걸로 노조도 설득했다. 안 되는 것, 비합리적이고 불합리한 요구는 들어주지 않았다. 한때는 출근길 팻말을 내걸고 따라다니며 반대 시위를 하기도 했지만 결국 대화와 설득을 통해 공정한 처리로 해결해 나갔다.- 선출직 자치단체장에 여성이 없다. 어떻게 여성으로 3연임을 했나.△지금까지도 여성 단체장이 없다는 것이 답답하고 안타깝다. 단체장은 살림을 사는 것이고 살림살이는 여성의 섬세함이 더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여성의 섬세함과 어머니의 포근함으로 감동시켰다. 일 잘하는 직원을 일부러 드러내 표창할 순 없지만 세심히 관찰하고 기회를 포착해서 칭찬해준다. 직원 생일 파티를 해 주기도 했다. 그 직원이 소속된 부서를 무심히 찾아 회식 기회를 만들고 직원의 생일임을 조직원들에게 상기시키며 미리 준비한 케이크를 자르는 이벤트를 벌인다. 물론 나는 사전 준비한 행사지만 직원들은 감동하게 된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서 공감대를 만들어 감동하고 화합하게 만드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라 생각한다.- 구청장 12년 동안 중구청 문화를 바꾸었다고 한다.△2006년 취임하니 구청 홈페이지가 4년 전에서 멈춰 있더라. 아무도 안 보고 관심도 없어서 갱신하지 않고 업그레이드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아직 간부 중에서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은 공무원도 상당수 있었다. 아침마다 신문을 스크랩해서 올라왔다. 지금 세상에 인터넷으로 직접 검색하고 스크린 하는데, 이런 20세기식 문서를 없애고 줄이라고 했다.이런 일들은 내가 재선되고 난 뒤 정부에서부터 전자결재 시스템이 도입되고 디지털화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환되는 과도기였기 때문일 것이다.또 국장급에서 9급 직원까지 누구에게도 반말을 하지 않고 존대했다. 나이 든 간부들이 부하 직원들에게 하대하는 문화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직원들을 인간적으로 존중해 주면서 신뢰를 쌓아갔다.- 대구를 관광객이 몰려드는 한국의 관광 도시로 만들었다. 대구 관광은 중구 골목에서 시작됐고 그래서 윤 대표를 골목대장이라 부른다.△대구 중구는 재개발 재건축이 아닌 보존과 재생이 도시발전의 키워드가 돼야 한다는 것이 신념이다. 구청장이 되어 새 아파트를 짓는 대신 재생 보존하겠다고 했더니 지역민들부터 강력 반발했다. 나는 “현재 사는 집을 아파트보다 더 비싸게 만들어 주겠다”고 설득했고 또 그것이 가능해졌다. 그들이 나를 믿은 것은 동성로 노점상을 철거한 행정집행력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 동성로 노점상 철거로 완성된 동성로 공공디자인의 성공은 어떻게 시작됐고 또 추진됐나.△동성로 노점상 철거는 혁명이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중구에는 국회의원도, 구청장도 재선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 3선을 했다. 내가 재선을 하게 된 것은 동성로 노점상 철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 번 하고 그만 둔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했다. 도대체 지금까지 정치인 시장 구청장들은 무얼 했나 싶더라. 동성로 노점상들을 어떻게 저대로 둘 수 있나. 만약 불이라도 나면 소방차도 진입 못하는 것 아닌가. 어떻게든 철거해야 했다. 계획을 발표하자 노점상은 물론 시민단체들까지 그들을 비호하면서 반대했다. 전국노점상들도 가세했다. 그러나 노점들을 철저히 조사했더니 노점들은 전주가 따로 있거나 외제차를 모는 기업형도 있었고 폭력조직도 가세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재산등록 1억원 이하의 노점상 30%는 정비해서 존치하고 나머지는 전부 철거시켰다. 그 동성로를 관광객과 젊은이들에게 돌려줬다.- 어떤 정치인도 해결하지 못한 ‘방안의 고릴라’ 같은 노점상을 어떻게 정비할 생각을 했나.△청장이 되기 전에 이상화 고택 보존사업을 한 경험이 있다. 고택 앞으로 소방도로를 뚫겠다기에 이를 막고 고택을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언론과 시민들의 도움으로 고택을 살릴 수 있었다. 그 때 살펴보니 중구에 정말 골목이 많았다. 골목의 역사를 찾아 기록하고 스토리를 살려 골목 본래의 기능을 되찾는 것이 골목을 살리고 대구를 살리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를 구청장이 되자 실천에 옮긴 것이다. 중구는 파괴와 재개발이 아닌 재생으로 정체성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이 때 갖게 됐다. 선출직이 표를 의식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된다.- 대구 근대골목 투어 1, 2, 3, 4, 5코스를 만들었다. 왜 하필 골목인가.△도시는 우리 눈이 보고 싶도록 만들어야 한다. 도시 디자인을 해야 한다는 거다. 그런데 아파트도 300세대 이상 건축은 대구시장 권한이어서 구청장은 관여에 한계가 있다. 또 4차선 도로 이상은 대구시장 권한이고 구청장은 2차선 이하 골목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대구 중구는 골목이 그렇게 많고 또 골목마다 스토리가 많았다. 대구 문화재의 45%가 중구에 있다는 것도 실사를 통해 확인한 것이다.직선은 곡선으로 바꾸면 부드럽고 유순해진다. 그런데 우리는 굽은 길을 바로 펴려고만 했고 좁은 길을 넓히려고만 했다.구불구불하게 굽은 길을 가 보아야 천천히 걷는 법과 뒤를 돌아보는 여유도 부릴 수 있다. 모퉁이를 돌아보아야 가다가 쉬는 순간을 짚어낼 수 있다. 막다를 길을 만나 보아야 잘못 들어선 길을 깨달을 수 있다. 길도 삶도 구불구불해야 재미있다.오래되고 낡은 골목에는 저마다의 특별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골목마다 숨어 있는 역사를 현재로 불러내어 새 생명을 불어넣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술과 행정이 만나는 접점이다. 근대골목,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등 골목에 스토리를 입히고 역사를 기록했다. 파괴와 재개발 대신 골목에 숨어 있는 문화 예술적 가치를 재발견하여 되살리는 도심재생사업이 구정의 핵심이 된 이유다.- 지금 단체장 등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보궐선거를 앞두고 있다. 구청장 퇴임 후 윤 대표에게 선출직에 출마하라는 요청은 없었나.△구청장은 3연임 제한이 없다면 한 번은 더 하고 싶었다. 그러나 국회의원이나 시장 직은 생각 없다. 지난 번 보궐선거에도 나오라는 권유를 많이 받았지만 ‘착각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은 나더러 ‘무소속으로 나와도 승산 있다’며 다시 한 번 중구와 대구를 위해 일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국가에 대한 봉사는 구청장 12년으로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또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어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이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역과 지역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내 소명이다.- 지역의 여성 정치지망생들에게 충고해 준다면.△남성문화가 만연한 대구다. 지연 학연이 활개치는 사회에서 여성이 선택받기 위해서는 남성보다 2배 3배 노력해야 한다. 평소 자신을 부끄럽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해야 한다. 또 도전정신이 있어야 한다. 지역 정서가 여성에게 힘들지만 그렇다고 홍시가 떨어지길 기다려서는 차지할 수 없다.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 윤순영(尹順永) (사)여성과 도시 이사장상주여고. 경일대 경영학과. 중앙대 문화예술행정학 석사. 대구가톨릭대학교 예술학 박사과정 수료.전 대구시 중구청장(2006 ~2018),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 중구 도심재생문화재단 이사장. 현 여성과 도시 이사장, (사)박동준기념사업회 이사장. 갤러리분도 대표, 아름다운가게 대구 대표, 대구아트페어 운영위원, 대구국립박물관 자문위원장. 지방자치행정대상(2018), 올해의 지방자치 CEO 대상(2015), 대한민국 글로벌리더 대상(2016, 2017)대구근대골목은 2012 한국관광의 별(장애물 없는 관광자원)에 선정됐고 저서 ‘골목, 별이되다’(2014)는 교보문고 판매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5남매의 막내딸로 사촌형제만도 30명이 넘는 대가족 속에서 아버지의 귀염과 기대 속에유년기를 보낸 문화기획가이자 사회운동가이다. 자신은 “아버지에게서 세상과 타협하지않는 법과 카리스마를 물려받았고 평생을 대가족 맏며느리로 살아온 어머니의 지지로 당당하고 멋진 자유인으로 살고 있다”고 술회한다./이경우 편집위원

2022-05-09

5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웃음꽃 가득한 날’

제100주년 어린이날을 기념해 포항시가 주최하고 경북매일신문이 주관한 ‘100주년 기념 2022 포항 어린이날 행사’가 5일 포항 철길숲 한터마당 일원에서 성대하게 열렸다.코로나19 여파 등으로 인해 놀이문화를 잃어버린 미래 세대의 주역인 어린이들에게 새로운 콘텐츠로 신나는 하루를 선사해 주기 위해 열린 이날 행사는 어린이, 학부모 등 2천여 명이 철길숲 전체를 가득 메우며 웃음꽃을 피웠다. 이날 포항지역의 낮 최고기온은 28℃를 웃돌며 초여름 날씨를 보였지만, 어린이들은 무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행사장 곳곳에 비치된 체험부스를 누비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오전 10시30분부터 진행된 어린이날 기념식에는 이장식 포항시장 권한대행과 박치민 포항남부소방서장, 류득곤 포항북부소방서장, 최윤채 경북매일신문 사장 등 내빈들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식전행사에는 지역 학교에 재학 중인 모범 어린이 20명에게 표창을 수여했으며, 포항예술고 학생들의 챔버 앙상블과 버블쇼, 마술쇼, K-pop 댄스 등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공연이 이어져 박수와 환호가 끊이지 않았다. 또한 행사장 곳곳에 마련된 체험부스에서는 3D 입체 퍼즐 체험을 비롯해 비눗방울, 자석 그네 만들기, 회전목마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 키트를 아이들에게 선물로 나눠줬다. 특히 어린이들이 무대 위로 직접 올라와 푸른 화분에 물을 주고 빨간색 꽃이 피어오르는 퍼포먼스가 진행되면서 분위기가 더욱 무르익었다. 이장식 포항시장 권한대행은 “100주년이라는 기념적인날 포항 어린이 여러분들을 만나뵙게 돼 기쁘다”면서 “대한민국의 미래이자 희망인 여러분의 꿈을 포항시에서도 응원하겠다”고 밝혔다.권경애 포항시의회 복지환경위원장은 “여러분의 건강하고 행복한 모습을 직접 보니 덩달아 행복해진다”며 “오늘의 주인공은 어린이 여러분이니 가족과 함께 다양하고 소중한 추억을 가지고 갔으면 한다”고 말했다.최윤채 경북매일신문 사장은 “코로나19로 인해 2년 6개월 만이지만 협소한 장소에서나마 어린이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게 돼 기분이 좋다”며 “오늘 어린이날 행사 주제가 ‘웃음꽃이 피었습니다’인 만큼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가셨으면 한다”고 밝혔다.한편, 이날 행사는 온라인 체험 이벤트도 함께 진행됐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야외 스튜디오를 찾아오는 어린이들에게 집에서 가족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체험 키트를 나눠줬으며 유튜브를 통해 함께 만들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아울러 ‘2022 포항 어린이날 행사’의 각종 행사도 포항시 홈페이지 유튜브 채널을 통해 생중계됐다. /이시라·김민지기자 5일 어린이날을 맞아 포항지역 어린이와 학부모들에게 소중한 추억을 한아름 선사했던 ‘100주년 기념 2022 포항 어린이날 행사’의 이모저모를 카메라에 담았다.사진=이용선기자

2022-05-05

더 늦기전에… 거룩한 희생 ‘정당한 평가’ 이뤄져야

장사상륙작전 참전 학도병의 훈장 추서와 수여에 의미 있는 파란불이 켜졌다.본지의 기획연재 ‘99세 노병의 잃어버린 훈장’2022년 4월 6일, 13일, 20일, 27일 보도을 통해 제기된 문제에 윤석열 정부의 첫 국방부장관 지명자인 이종섭(62)씨가 관련 입장을 표명한 것.이 국방장관 지명자는 최근 국민의힘 강대식 의원이 청문회와 관련돼 보낸 서면질의서에 포함된 “장사상륙작전 참전 학도병들의 국가를 위한 희생과 헌신에 합당한 예우 방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공적을 최대한 발굴해 합당한 예우가 이뤄지도록 관심을 가지겠다”고 약속했다.이에 더해 장사상륙작전이 “(한국전쟁 당시) 동해안 장사리 일대 북한군 점령지역에서 전개된 상륙작전임을 알고 있다”며 “영덕 및 포항지구에 압박을 가하던 북한군 2군단의 붕괴에도 상당한 기여를 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답변했다.“국가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신 분들에 대한 예우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취임하게 되면 공적을 확인하겠다”는 것도 그가 밝힌 향후 계획이다.이 국방장관 지명자는 현역 시절 국방부 정책기획차장과 합동참모본부 차장을 지낸 국방정책 분야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 72년 세월이 흐르고서야 주목받는 장사상륙작전 학도병들곽경택·김태훈 감독이 연출한 영화 ‘장사리-잊혀진 영웅들’로도 제작돼 사람들의 관심을 모은 장사상륙작전.6·25전쟁 초기였던 1950년 9월 ‘육본 작전명령 174호’에 의해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경북 영덕 장사해변으로 772명의 학도병들(육군 독립 제1유격대대)이 상륙한다.제대로 된 군사훈련을 받지 못했고, 변변한 무기도 갖추지 못한 10대 후반의 그들은 조선인민군 2군단에 맞서 북한군의 보급 루트를 차단했고, 아홉 곳의 인민군 진지를 파괴하는 전공을 세웠다.치열한 전투 과정에서 학도병 139명이 전사하고, 100명이 넘는 이들이 부상을 입거나, 북한군의 포로가 됐다.이에 UN군 사령관을 지낸 더글러스 맥아더는 1960년 “헌신적이고 충성스러운 전우로 당신들을 기억할 것”이란 내용의 친서를 전달하며 장사상륙작전 참전 학도병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2019년 6월 24일엔 국군통수권자인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전쟁 유공자를 초청한 청와대 행사에서 장사상륙작전기념사업회 류병추(91) 회장을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공헌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그럼에도 이들 772명 학도병들의 애국심과 희생에 값하는 예우가 아직은 미흡하다는 지적이 없지 않다. ‘전쟁 혹은, 국가 비상사태 때 전투에 참가해 무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는 무공훈장’ 추서와 수여가 이뤄지지 않은 것 때문이다.이와 관련한 육군본부의 공식 입장은 “한국전쟁 관련 문서를 통해 실명과 공적이 기록된 분들이 아니면 훈장 추서와 수여가 어렵다”는 것.장사상륙작전 참전 노병들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본지는 지난 3월 취재팀을 구성해 생존 노병 3명(류병추, 이영희, 배수용)을 인터뷰했고, 그들을 영덕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으로 초대해 1950년 9월 당시 치열했던 전투의 전후 상황을 상세하게 이야기 들었다. 이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장사상륙작전 관련 논문들을 검토한 다음 “명백한 정황 증거가 있고, 참전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증인이 있을 경우 장사상륙작전 참전 학도병의 서훈 추천을 고려할 수 있다”는 방향으로 법 개정을 추진하자는 분위기 조성에 힘을 쏟았다.이번 국회 국방위 강대식 의원과의 인터뷰도 이러한 일련의 과정 중 하나로 준비됐다.장사상륙작전을 포함한 6·25전쟁 학도병들의 예우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진 강 의원의 질의에 응한 이종섭 국방장관 지명자의 답변은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다.장사상륙작전에 참전한 구순의 노병들이 무공훈장을 들고 열여덟 살 학도병으로 함께 싸운 전우들의 유택(幽宅)을 찾는 날이 머지않아 오기를 기대한다. 국회 국방위에서 한국전쟁 유공자의 명예 회복에 힘쓰고 있는 강대식 의원. 인터뷰 - 국회 국방위 강대식 의원“국방부·육군본부·국회 법제실과 논의… 관련법 개정 적극 검토할 것”국회 국방위원회에서 활동하는 국민의힘 강대식(대구 동구을) 의원은 그간 안보정책은 물론, 한국전쟁과 관련한 보훈정책에 대해서도 다각도로 고민하며 적극적인 입법 활동을 펼쳐왔다.장사상륙작전 참전 학도병 772명의 훈장 추서와 수여 문제도 강 의원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안 중 하나.아래는 장사상륙작전이 한국전쟁사에서 가지는 위상과 향후 참전 학도병 서훈 문제에 관해 강대식 의원과 주고받은 이야기다.-한국전쟁 초기엔 정규군의 자리를 적지 않은 학도병(17~19세 학생들)이 채웠다. 이들의 순정한 애국심이 정당한 평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한국전쟁 관련 문서를 통해 실명과 공적이 기록된 분이 아니면 훈장 추서와 수여가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이유로 학도지원병들의 공적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어 아쉬움이 크다.-장사상륙작전에 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6·25전쟁 초반 국군이 낙동강 전선으로 밀린 상황에서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실시 하루 전에 UN군 사령부가 북한군을 교란하기 위해 전북 군산과 경북 영덕에서의 양동작전을 지시했다. 낙동강 전투가 치열했던 경북에서 벌여진 상륙작전이 장사상륙작전이다. 이 작전은 인천상륙작전에 쏠린 북한군의 주의를 분산시키고, 낙동강 전선 북한군의 방어태세를 약화시킨 작전이며, 인천상륙작전에 크게 기여한 작전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인천상륙작전에 가려져 오랜 세월 동안 주목받지 못한, 학도병의 희생에 모든 것을 맡긴 슬픈 전쟁의 역사라고 기억하고 있다.-장사상륙작전 참전 학도병에 관한 평가가 미진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장사상륙작전이 있었기에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다고 평가하는 분들이 많다. 작전과 전투에 참여한 772명 학도병의 희생을 잊지 않기 위해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과 기념공원이 조성돼 있다. 다만 국방부와 육군본부는 상훈법에 따라 공적을 세운 사람, 전쟁사·전투상보 등을 통해 개인의 공적이 확인되는 사람을 무공훈장 대상으로 추천하고 있다. 전투에 참가하거나 부상당한 것만으로 무공훈장을 수여하는 것이 아니라 뚜렷한 무공이 있어야 서훈이 가능하다고 안내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당시 참전 기록의 확인이 어려운 분에 대해선 정당한 평가가 미진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회 국방위에서 활동 중이다. 장사상륙작전 참전 학도병들의 훈장 추서와 수여가 논의된 적이 있는지.△ 그간 국방위에서는 장사상륙작전만을 위한 활동은 부진했으나, 나를 포함해 국회 국방위 소속 의원들은 6.25전쟁 참전 소년·소녀병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여야 가릴 것 없이 법안을 발의하고 있다. 이는 그분들의 공적을 적극적으로 발굴해 국가에 대한 희생과 헌신에 합당한 예우가 있도록 노력하고자 하는 차원에서다. 국방부도 장사상륙작전 참전 학도병들을 포함한 6·25전쟁 참전자에 대한 추가 서훈을 절차에 따라 진행 중이며, 오는 6월에도 추가 서훈 수여가 예정돼 있는 것으로 안다.-장사상륙작전 등과 관련해‘명백한 정황증거가 있고, 참전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증인이 있을 경우 서훈 추천을 고려할 수 있다’는 방향으로 법 개정을 논의할 의향이 있는지 궁금하다.△ 21대 국회에서 첫 발의한 법안이 ‘6·25 참전 소년·소녀병 보상에 관한 법률’제정안이다. 국민과 국가를 위해 희생한 소년·소녀병 및 이중징집자들의 명예와 예우를 보장해주는 것은 국가의 의무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희생을 감내해야 했던 소년·소녀병들의 명예회복과 헌신에 따른 보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곧 6·25전쟁 72주년을 맞이한다. 21대 국회에서 반드시 법안이 통과돼 지금은 고령이 된 소년·소녀병들에 대한 국가의 예우가 꼭 이뤄지도록 하고 학도병, 소년·소녀병 모두를 잊지 않고 있다는 걸 확인시키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아울러 ‘명백한 정황증거가 있고, 참전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증인이 있을 경우 서훈 추천을 고려할 수 있다’는 방향으로 법 개정안 발의가 가능한 것인지를 국방부와 육군본부 및 국회 법제실과 논의해 적극 검토하려 한다.끝/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5-03

영남의 힘 시대정신,근원은 역사자료에서

기록의 민족답게 무궁무진하다. 외침으로 기근으로 피폐해진 일상 속에서도 우리 선조들은 보고 듣고 겪은 세상사를 종이에 또 목판에 새겨 놓았다. 한국국학진흥원이 지금까지 수집 보관하고 있는 자료만도 고서 18만4천여 점, 고문서 32만4천여 점, 목판 6만6천여 점, 서화 5천500여 점, 현판 1천300여 점 등 58만5천여 점에 이른다.정종섭 한국국학진흥원장은 “이 방대한 자료에 담긴 정보와 가치들을 찾아내고 활용 가공해서 우리 삶에 보탬이 되도록 하겠다”고 말한다. 문화유산 보고로서의 대구 경북의 위상을 드높이는 것은 물론 지역 정신의 정체성 확립에도 기여하겠다고 했다. - 한국국학진흥원장으로 자리를 옮긴 지 1년이 지났다. 주위에서는 아주 적성을 찾아 잘 왔다고 한다.△학자로서 자기 자리에 온 것 같다. 평생을 학자로 살아왔는데, 현실정치에서 못 이룬 꿈을 이제 후배들이 이룰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것이다.- 국학원 자료가 방대하다. 수장고에서 평생 햇빛을 못 볼 수도 있는 작품들을 꺼내어 해석하고 이용할 수 있게 하려면 언제쯤 가능할까.△지금까지의 자료들이 주로 관(官) 중심의 역사인데 진흥원 자료는 현장의 역사와 일기 같은 개인의 소상한 기록들이다. 대학교수에서부터 전문가들이 번역을 지원해주고 있지만 지금의 속도로는 백년하청(百年河淸)이다. 다행히 이철우 경북도지사도 예산 증액을 약속했고 안동시와 경주시가 시 차원에서 협력하고 있다. 앞으로 더 많은 시군에서도 참여하면 시간이 당겨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디지털 시대, 국학 자료도 디지털화는 어떻게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나.△국학진흥원이 보관하고 있는 58만여 점의 자료를 안전하게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료에 담긴 방대한 정보와 엄청난 가치들이 우리 삶에 이익이 되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4차산업혁명 시대에 대비해 진흥원의 자료 58만점을 국학분야의 인공지능 자동번역시스템 구축 사업을 통해 올해부터 2030년까지 9년간 단계적으로 번역하고 있다. 국학진흥원은 자료의 가치 있는 활용을 위해 우선 고서와 고문서를 스캔해원문 이미지를 제공하고 한문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를 위해 원서를 한글로 번역하여 온라인으로 제공하고 있다.또 자료에 담겨 있는 다양한 스토리를 발굴, 문화콘텐츠의 원천 소스로도 제공하고 있다.- 국학진흥원 자료를 활용한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 사업은 성과가 대단하다고 한다.△현재 진행하고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 사업은 자료들을 이용하고 있는 대표적 케이스다. 2009년 대구 경북의 30명으로 시작한 이야기할머니 사업은 지금까지 연인원 5천명이 교육을 받았고 현재 3천500여명이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유치원생과 대화를 통해 선조들의 지혜를 교육을 하고 있다. 자라나는 미래세대에게는 선조들의 지혜를 통해 인성을 길러주고, 참여하는 어르신들에게는 일거리와 자아실현을 통한 삶의 질을 높여주는 상생 사업이기도 하다. 이야기할머니는 엄정한 심사를 거쳐 선발하는데 은퇴한 교수나 교장 출신들이 몰려들어 최고 기록이 50대 1을 넘기도 한다.- 정종섭 원장이 부임하고 지난해 7월 한국국학진흥원의 변화와 혁신을 위한 ‘국학 30비전’을 선포했다.△‘새 시대를 열어가는 문화 콘텐츠 개발에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기관으로 성장하겠다’는 포부와 함께 계승 전문 향유 상생 책임의 기관 핵심가치와 5대 경영목표를 혁신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새로운 원동력을 발표했다.국학 30비전이란 “Culture, Future, Picture · 문화로 미래를 그리다”는 슬로건이다.문화는 국학 자료의 연구를 통한 한국문화의 새로운 원형을 창출하고, 미래는 국학 자료의 보급과 활용으로 미래를 선도하며 한국적 가치를 교육을 통해 문화국가 실현에 이바지한다는 거창한 비전이다.- 국학진흥원의 현안은 무엇인가.△지금까지는 자료 수집에 전력을 기울였다면 앞으로는 이들 자료를 활용해 그 결과물을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소장자료 중 가치가 높은 것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을 비롯해 국가문화재에 등재시킴으로써 경북의 문화적 위상을 제고하겠다.유교책판과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고 국보 징비록을 비롯해 전체 자료의 12% 정도를 문화재로 지정시킨 경험을 갖고 있다.- 국학진흥원의 30비전을 보니 정 원장의 행정자치부 장관 시절 추진한 국가대개조론이 연상된다.△세월호 참사 이후 국가는 모든 분야에서 총체적 위기 상황이었다. 나는 김영삼 정부 시절 30대 학자로서 국가설계를 한 적이 있다. 장관 취임 이후 정치 사회 경제 정부 전 분야의 대개조를 통해 정상적인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자 했다. 그러나 뜻대로 안 됐다. 결과적으로 실패한 정치인이 됐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정책을 지지해주지 않았나.△박 대통령은 국가 개조에 대한 소신이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안다. 4대 공공개혁은 시대적 소명이었지만 정치적인 고려를 한다면 결코 추진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대단하게 결심을 했다. 강성 개혁론자인 나를 불러냈고 나도 소신대로 장관직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원하는 결실은 끝내 얻지 못했다.-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나.△학자로서의 이론이 현실 정치와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학자는 이론적 근거만으로 주장하고 비판하지만 실제 자기실현까지는 책임질 필요가 없다. 그런데 정치인이 돼 현실에 적용하려니 정부 모든 부처가 생각을 같이 해야 하고 공무원들이 인식을 같이하고 움직여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다.- 그 때 대통령제의 개헌 필요성이 나오기도 했다.△나는 옛날부터 대통령제의 폐단이 심각함을 지적해왔다. 김영삼 정부 때부터 문민정부는 기대만큼 국민들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고 정상적인 국가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대통령이 모든 것을 하고 대통령의 의지가 헌법 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권력이 헌법 위에 있으면 국가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국가 기관의 일은 모두 헌법에 규정돼 있는데 권력이 ‘내가 하겠다’고 나서면 법의 지배가 아닌 권력의 지배가 된다.우리는 ‘역사에 남을 대통령이 되라’고 요구하지만 인간에게 호소해서는 실효성이 없다. 물러가는 대통령을 향해 비난하기는 쉽다. 그러나 남은 국민은 뭐가 되나. 국민들의 행복은 누가 책임지나. 이런 방식의 비난과 요구가 반복되는 것은 모두 대통령제에서 기인한다. 제도로 정상화시켜야 하고 그것은 개헌을 통한 개조여야 한다.- 결국 국가의 정상화는 대통령제를 바꾸는 개헌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보는 것인가.△대통령제의 폐해는 너무 많다. 대통령은 ‘정치적 중립’을 요하는 5대 권력기관에 자신의 핵심을 임명함으로써 오히려 ‘정치적’으로 만들어 버렸다. 대통령이 ‘수사’를 지시하고 수사기관이 무리한 수사를 함으로써 최종심에서 무죄가 나오는 사건이 생겨나기도 했다.80년대 말 학자로서 대의정치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참여민주주의를 제안했다. 그러자 노무현 정권에서 컨텐츠를 도용하고 이름까지 ‘참여정부’라 했다. 그러나 진정한 참여는 좌파나 우파만의 참여가 아닌, 전 국민의 참여여야 하는데 자기들만의 참여정부가 돼 버린 느낌이다.헌법 개정을 통해 내각제로 가거나 대통령 직선 내각제로 바꾸는 것이 해법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국민적 합의를 거쳐 결정해야 한다.- 장관으로서 모시던 대통령이 탄핵됐다.△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이후 당시 국무위원으로서 공동 책임을 져야 한다며 모두 사표를 쓰자고 제안했었다. 동의하는 동료도 있었지만 반대자도 있었고 혼자만이라도 실행하기에는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때 (임기 3년이상 남은) 국회의원은 그만 하기로 결심했다. 그렇지만 당장 (재선 불출마를) 공개할 수는 없었다. 선거 막판까지 ‘끝까지 나간다’고 했지만 불출마는 탄핵 후 바로 결심했다. 더 이상 국회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헌법 개정은 무산됐고 선거법과 정치자금법을 고치려던 정치개혁도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학자로서 정치계에 뛰어들었다. 국회의원 시절 원칙대로 했나.△국회의원은 국가의 대표로 국민 전체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데 지역의 대표는 아니다. 그런 현실 속에서 갈등은 있었지만 살아온 철학만큼은 한 길이었다고 자부한다.공항이 내 지역에 위치하는 것보다 다른 지역이 국가 이익에 부합한다면 그렇게 주장해야 하는 것이 헌법의 원리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지역구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이 상충된다면 국가의 이익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대구 동구의 숙원사업을 위해 확보한 예산이 국가 전체로 보면 다른 지역에 지원돼야 할 예산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정치인의 말은 절대로 믿지 마라”는 말도 있다.△정치인으로 일부러 거짓말을 해야 할 때도 있고,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 할 때도 있다. 정치인이었던 때 나도 그랬다.- 국학진흥원 자료를 통해 본 영남인의 정신은 어떤 것인가.△영남 남인들이 권력에서 배제돼 있는 동안 끊임없는 성찰과 훈련을 통해 내공을 쌓았던 것이다. 국학진흥원 자료를 보면 이 지역에 많은 정자는 시가로 음풍농월하는 한가한 놀이 장소가 아니었다. 치열하게 현실을 고민하고 친구를 찾아 함께 논의하는 장소였다. 특히 영남 남인들은 출사에서 봉쇄된 상황에서 지식 탐구와 논쟁을 통해 지금 우리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음을 발견하고 놀랐다. 특히 영남의 본거지 대구를 ‘수구’로 몰거나 ‘뒤쳐졌다’고 하는 비난에는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개혁의 선도자였다. 역사적으로 나라가 어려울 때 항상 시대정신에 앞장선 것이 이 지역민이었다.특히 영남인의 치열했던 삶은 이 지역 선조들의 독립운동에서도 두드러진다. 당시에도 외국 유학으로 새 시대를 개척했던 사람들과 달리 전답을 처분해서 일가족이 만주로 이주해 간 독립운동가들은 시대의 문제를 자기문제화 해서 역할을 마다 않고 앞장섰던 선각자들이었다. 그들은 퇴계의 학통을 이은 유림들이었다. 그들의 치열한 삶을 보면 결코 수구꼴통이 아니다. 지금 국학진흥원 자료를 근거로 영남의 정신을 다시 부흥하는 운동이라도 펴야 한다.- 지금 국학진흥원장이라는 학자의 길로 다시 왔다.△공부를 왜 하느냐고 물을 때는 유학의 퇴계와 율곡의 삶을 대비해서 이야기한다. 율곡은 자신의 안위보다는 국가를 위해서라면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몸을 던진 것이다. 반면 퇴계는 현실과는 거리를 두고 자신의 완성으로 세상을 감화시키려 했다. 제자를 출사시켜 현실 정치를 개혁하려고 했던 것이다. 징비록을 몇 페이지만 읽어도 “이게 나라냐” 하는 화가 치민다. 그러나 서애는 욕을 먹으면서도 자리를 지켜가면서 이순신을 발탁해 나라를 구해냈다.젊은 시절 평생을 학자의 길을 가겠다고 작정했는데 국가 개조를 작정하고 현실 정치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했다. 지금 청량산을 걸으면서 ‘퇴계의 길로 갔어야 했나’ 자문해 보기도 한다. 정종섭(鄭宗燮) 한국국학진흥원장경주, 경북고, 서울대 법대, 경희대 법학석사, 연세대 법학박사.헌재 헌법연구관, 서울대 법대 교수, 서울대 법대 학장, 법전원 원장.헌법학원론 등 저서 62권국회의원, 행정자치부 장관.대의 민주주의를 전공한 헌법학자, 관련 저서만도 65권이나 된다. 학계에서 현실 정치를 따갑게 비판했다. 참여민주주의를 처음으로 역설했고 책임총리제와 특별검사제를 제안했다. 정치권에 들어와서는 대통령제 폐지 헌법개정과 정치개혁 등 자신의 국가개조를 뜻대로 이루지 못했다./이경우 편집위원

2022-05-02

누구나, 어디서든배움의 재미 찾게

안동시는 지난 2020년 ‘국제교육도시연합(IAEC) 세계총회’의 유치를 시작으로 글로벌 평생학습도시로 도약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국제회의 유치의 배경에는 2003년 대구·경북 최초의 평생학습도시로 선정된 이후로 시민 누구나 평생학습에 참여할 수 있도록 힘써온 20년 동안의 안동시의 노력이 녹아 있다. ‘배움으로 활력 넘치는 글로벌 평생학습도시 안동’이라는 비전 실현을 목표로 늘 배움의 도시 조성에 매진하고 있는 안동시의 평생학습에 대해서 알아본다. △ 제16회 안동 국제교육도시연합(IAEC) 세계총회 성공개최 준비 총력평생학습도시 안동시는 ‘제16회 안동 국제교육도시연합(IAEC) 세계총회’의 성공 개최를 위한 빈틈없는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세계총회는 올해 10월 25일~10월 28일까지 ‘안동국제컨벤션센터(ADCO)’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국제교육도시연합(IAEC)는 1994년 설립된 이래 전 세계의 35개국 500여 개의 도시가 회원으로 가입돼 있는 역사와 권위를 가진 교육관련 국제기구이며, IAEC에서 주관하는 ‘IAEC 세계총회’는 전 세계의 교육도시들이 한 자리에 모여 각 도시들의 교육 사례들과 비전을 공유하는 국제회의로써 2년 단위로 개최되는 IAEC의 가장 중요한 활동이다.‘전통에서 미래교육을 보다’라는 주제로 진행되는 이번 세계총회에는 세계 각국의 회원도시 시장단과 평생학습 관계자, 학자 등 2천여 명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안동시는 ‘글로벌 학습도시’의 브랜드 이미지를 제고하고 우수한 교육시스템과 문화유산, 관광자원을 전 세계에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도록 준비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특히, 성공적인 총회 개최를 위해 전담조직인 ‘IAEC 세계총회 TF팀’을 구성, 유관 기관들과의 업무협약을 통해 자문위원회와 학술위원회를 출범했으며, 지난 3월부터 행사 주관사(PCO) 선정을 위한 입찰을 진행하는 한편, 각 부서의 역량을 결집할 수 있도록 이상학 부시장을 단장으로 23개 부서가 참여해 4개 반, 10개 팀으로 국제회의추진단을 편성했다.또한, 권영세 시장은 이번 세계총회 개최 홍보를 위해 IAEC 정례회의 및 상임위원회의에 참여해 안동총회를 소개하고 현장 참여를 독려했으며, 9월 중 TV 스팟광고, SNS, 유튜브 등 다양한 홍보 전략을 기획하고 있다. 이와 함께 ‘IAEC세계총회 서포터즈’ 발대식을 통해 다양한 현장 홍보활동을 실시하고, 자원봉사자 모집 등 세계총회 운영을 지원할 인력 양성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 시민이 함께 만드는 평생학습 도시안동시는 평생학습원을 중심으로 배움을 원하는 시민들이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원하는 때, 원하는 학습을 할 수 있는 학습 환경을 구축해 나가고 있다.시민참여 프로그램 운영 활성화를 위해 평생학습 우수프로그램 및 학습동아리 공모사업에 7천500만 원을 지원한다. 지난 2004년부터 이어 온 우수프로그램 공모사업은 시민들에게 다양한 학습 기회를 제공하고 평생학습 참여 분위기 조성을 위한 사업으로 평생학습도시 안동의 근간이 되고 있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 참여하는 프로그램으로 매년 관심도가 증가하고 있으며, 올해도 12개의 평생학습 우수프로그램과 6개의 우수학습동아리를 선정해 지원하고 평생학습 저변확대 및 학습문화진흥을 위해 적극적인 지원책도 마련한다.마을 평생학습체계 구축을 위한 ‘행복학습센터’는 지역주민들이 근거리에서 언제든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동네배움터로, 안동시는 3개소의 행복학습센터를 운영 중이다. 용상동 행복학습센터에서는 용상동 주민센터에 위치하고 있으며, 기타, 퀼트, 댄스 등 정규과정과 다양한 토요가족 특강 등을 운영하고 있다.안동병원 내 반올림행복학습센터는 지난 2014년 국내 병원 가운데 최초로 문을 열고 입원 환자들과 가족, 요양센터 입소 어르신, 외국인 환자들뿐만 아니라 병원을 방문하는 지역 주민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 운영해 오고 있는데, 병마에 지친 환자들에게 치료활력을 더해 주고 있어 많은 환자들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또한, 지난해 행복학습센터로 신규지정 된 안동시종합사회복지관(옥동행복학습센터)에서는 시민을 위한 원데이 클래스, 유아동을 위한 창의교육프로그램, 가족 단위의 체험교육을 위한 캠핑프로그램 등을 운영해 지역 내 다양한 계층과 연령을 위한 평생교육 프로그램 개발, 시민의 교육 만족도 제고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올해는 성인, 유아동, 가족 대상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청소년이 참여하는 요리 프로그램을 개설해 교육에 참가하는 청소년들이 만든 반찬을 지역 내 독거노인에게 전달하는 봉사활동과 연계 진행할 예정이다.안동시에서 2018년부터 추진하고 있는 ‘길거리 교실’사업은 5인 이상의 시민이 모여 강좌를 신청할 경우 길거리 교실로 선정된 커피숍, 식당 등에서 원하는 강좌를 개설해 배울 수 있으며, 원하는 강좌를 원하는 장소에서 수강할 수 있어 시민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지난 해 관내 10여개의 길거리 교실에서 미술, 어학, 공예 등 35개 강좌가 코로나로 인해 사회 활동이 제한되는 가운데에서도 소규모 인원으로 교육을 운영돼 코로나로 지친 시민의 심신을 평생교육을 통해 치유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시민강사 9단’사업을 통해 재능을 가진 시민고수를 강사로 발굴, 시민 주도적 평생학습 모델 구축에도 앞장서고 있다.안동시민의 체계적이고 수준 높은 평생학습 기회 제공을 목표로 개설된 ‘경북도민행복대학’은 지난 해 제1기 교육생 50명 배출을 시작으로 올해는 제2기 교육생 50명 모집을 마감해 3월부터 본격적인 강의 운영을 시작했다. 금융, 인문학, 경제, 역사, 문화, 지역학, 미래학 등 30개의 다양한 분야의 강좌로 교육과정을 구성했으며, 강의는 매주 화요일 진행된다. △ 소외계층 맞춤형 프로그램 운영안동시는 급변하는 사회 환경 속에서 장애인의 자립생활능력과 사회적응능력을 높이기 위한 체계적이고 제도화된 교육환경 조성을 위해 ‘장애인 평생학습 진흥조례’를 제정해 장애인 평생학습권 보장의 기틀을 마련하고, 3천만 원의 예산을 투입해 ‘발달장애인 맞춤형 평생학습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한편 장애인 행복학습센터 사업을 시범추진, 장애인을 비롯한 누구도 소외됨 없이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다.마리스타학교, 용상평생교육원, 안동시종합사회복지관에서는 학령기에 빈곤·남아선호사상 등의 사유로 기초교육을 받지 못한 비문해자를 위한 ‘성인문해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글을 읽고 쓸 수 없어 사회참여가 제한되었던 비문해 성인들이 다시 사회의 구성원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으며, 보건·안전·금융 분야 등 생활 교육을 병행하며 교육 참가자들의 사회 참여도 및 자존감 제고와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교육인프라가 부족한 읍·면지역에는 교사가 직접 해당지역을 방문해 한글교육을 실시하는 ‘찾아가는 한글배달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찾아가는 한글배달교실’은 읍·면지역의 경로당 또는 마을 회관 등의 시설을 활용해 관내 15개소를 운영하고 있는데, 안동시와 한국수자원공사안동지사, 한국남부발전(주)안동빛드림본부가 업무협약(MOU)을 체결하여 예산을 지원하고 있다.특히, 지난 해 부터는 한글배달교실 중 8개 교실이 초등학교 학력인정과정으로 지정되면서 전체 3년 과정(총 720시간)의 교육과정을 이수하면 검정고시를 보지 않고도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지난 해 부터 국비 선정되어 운영을 시작한 가정방문형 문해교실 ‘집집마다 한글교실’은 거동·교통이 불편해 문해교육기관 방문이 어려운 비문해 성인을 위해 문해 교사가 학습자의 가정을 방문 3~5명의 학습자를 대상으로 그룹 맞춤형 한글 교육을 진행하는 교육프로그램으로, 올해는 총 20개소 100명을 대상으로 주1회 2시간 교육을 30주간 진행할 예정이다.이 뿐만 아니라, 일반학교에 적응하기 어려운 학생들의 진학과 사회진출을 돕기 위한 위탁형 대안학교인 ‘나섬학교’와 마리스타학교에서 운영하는 검정고시 야간학교 운영을 지원하며 누구나 교육의 기회를 공평하게 누릴 수 있는 평생학습도시 조성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김병진 평생교육과장은 “안동시는 100세 시대를 맞아 시민들이 행복한 도시, 글로벌 학습도시 안동을 만들고 지방소멸의 해법으로 평생교육을 제시하면서 ‘16만 안동시민들과 함께 살기 좋은 안동을 만드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목표를 밝혔다./피현진기자 phj@kbmaeil.com

2022-05-01

이제는 ‘국군통수권자’ 대통령이 결단 내릴때

지난 2019년 10월 14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장사상륙작전 참전 용사 중 단 1명도 훈장을 받지 못했습니다’란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1950년 9월 15일 139명의 전사자와 92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경북 영덕 장사해변에서의 전투에 참여한 학도병 가족 중 한 명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청원(請願)은 전쟁을 겪지 못한, 곧 국방의 의무를 지키려 입대할 20대 청년들의 눈길까지 끄는 것이었다.선친이 한국전쟁 당시 장사상륙작전에 참전했다고 밝힌 청원인은 “대부분 15세에서 18세의 어린 학도병으로 참전한 용사들은 최근까지도 그 존재가 잊혀졌다”고 지적했다.이에 덧붙여 “참전용사들과의 대화에서 이 작전에 참전한 학도병 중 단 한 명도 훈·포장을 받은 분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며 안타까워했다.6·25전쟁의 전세를 뒤집은 인천상륙작전에 작지 않은 도움을 줬음에도 장사상륙작전은 오랜 시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게 군사전문가들을 포함한 세간의 평이다.청원인은 “해군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장사상륙작전에 참여한) LST문산호의 선원 10명이 올해(2019년) 6월 8일 무공훈장을 수여받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면서도, “수많은 희생자를 낸 참전용사들은 왜 한 명도 훈장을 받지 못한 것인지…”라는 의문을 드러내며 정부와 국방부, 육군본부의 무관심을 질타했다.그러나, 이 절절한 장사상륙작전 유족의 청원은 대답 없는 메아리로 남았다. △ 대통령의 전공 평가와 상찬(賞讚)이 있었음에도같은 해인 2019년 6월 24일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전쟁 참전 유공자 182명을 청와대 영빈관으로 모셨다. 대부분이 80대와 90대인 이들이 호텔이 아닌 청와대로 초청돼 식사를 대접받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이날 문 대통령은 6·25를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이 함께 전쟁의 폭력에 맞선 정의로운 인류의 역사”라 평가했다.또, 장사상륙작전 참전 학도병인 류병추(장사상륙작전기념사업회장·91)씨를 가리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공헌하셨다”고 말했다. 이른바 ‘6·25전쟁 영웅’을 소개하는 순서에서였다.대한민국 대통령은 이 땅의 모든 군인을 총괄·지휘하는 국군통수권자다. 국군통수권(國軍統帥權)이란 육·해·공군을 포함한 국방기구와 그 아래 편제된 모든 국군을 지휘통할(指揮統轄)하는 권한을 지칭한다.우리의 헌법과 법률, 그리고 국군조직법에 근거하면 국군의 최고통수권자는 바로 대통령이다.장사상륙작전이 있고난 후 자그마치 69년이 지나서야 국군통수권자로부터 전투에서 세운 공적을 인정받고 칭찬받은 류 회장을 포함한 772명의 학도병들.이는 소년의 티를 갓 벗은 18살 청년들이 아흔을 넘긴 노인이 돼서야 자신의 행위가 나라를 구하는 힘이 됐다는 걸 인정받은 것으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2020년 개관한 경북 영덕의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 그곳에 들어서는 관람객들은 가장 먼저 아래와 같은 가슴 찡한 글귀와 만나게 된다.“학생들은 학업 대신 조국을 지키기 위해 학도의용군을 조직하고 조국을 수호하는데 앞장섰다. 학생의 신분으로 조직된 학도의용군은 한국전쟁 초기부터 국가의 위기 극복에 기여했고, 전쟁 중에 현역으로 충원됨으로써 국군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전승기념관에선 전사자와 부상자가 속출하는 조선인민군과의 전투 속에서 총 한 번 쏴본 경험이 없는 어린 학도병들이 어떤 애국심과 용기를 보여주었는지도 확인이 가능하다.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공적 인정이 있었고, 여기에 더해 최근엔 장사상륙작전의 전공을 기리는 기념관까지 세워졌음에도 어째서 참전 노병들에 대한 훈장 추서와 수여는 지지부진한 것일까. △ “훈장 추서와 수여? 이젠 지쳐 기대도 하지 않지만…”지난달 류병추 회장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서운함과 허탈함을 이렇게 설명했다.“대통령과의 청와대 오찬이 열린 다음해 육군본부에서 사람이 찾아왔더라. 내가 그랬다. ‘훈장이란 전쟁 당시에 공훈을 세우면 주는 건데, 세월이 이렇게 흐르고 나서야 찾아왔는가? 훈장을 줄 것 같았으면 이승만 전 대통령이나, 정일권(한국전쟁 당시 국군 총참모장) 소장이 줘야했던 게 아니냐’고. 이후 내가 관련 자료와 책을 주고, 이야기도 여러 차례 나눴으나 지금까지도 서훈 추천 문제는 가타부타 말이 없다. 이젠 지쳐서 기대도 안 한다.”2020년 류 회장과 만난 한국전쟁 참전군인 서훈 추천 담당 육군본부 사무관과의 통화를 통해 전후 상황을 물었다.“장사상륙작전 참전 학도병에 관해선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서훈 추천을 검토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그분들이 훈장을 추서 받거나 수여 받지는 못했다. 국회 차원의 특별법 추진 등이 과거에 논의 됐다고는 들었는데…”라며 안타까움을 전했다.앞서 언급처럼 류병추 회장을 비롯한 장사상륙작전 참전 학도병과 청년지원병들은 작전이 끝나고 조치원함에 실려 부산으로 철수한 이후에도 군대에 남아 한국전쟁이 휴전될 무렵까지 여러 전투에 투입됐다.류 회장은 경북 영천, 강원도 홍천과 춘천, 경기도 청평까지 행군하며 군인으로 복무했다. 그의 예편 일자는 1953년 4월 22일.장사상륙작전 전우인 이영희(전 옥천군 교육장·91)씨와 배수용(한국전쟁 참전 유공자회 경북도지부 고문·99)씨 역시 국군 2군단과 3군단에서 전투병과 작전병으로 짧지 않은 기간 군대 생활을 이어갔다.가장 빛나는 청춘시절 2~3년을 나라를 위해 기꺼이 바친 학도병들.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연필 대신 총을 들었던 그들은 ‘군번 없는 학도병’으로 입대해 ‘군번을 가진 국군’으로 끔찍하고 비극적인 한국전쟁을 치러냈다.미국은 국가에 헌신한 군인들의 유해를 외국에서 국내로 송환하는 일에 수십 년째 천문학적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이는 ‘나라를 위해 죽은 이들을 절대 잊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한국의 국회와 국방부는 이런 의지를 보여주면 안 되는 걸까.현재까지 살아남은 20여 명 장사상륙작전 참전 학도병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왜 우리의 전투는 그토록 오랜 기간 국군의 역사에서 잊혀졌던가.” 이젠 노병들의 물음에 국군통수권자가 답해야 할 때가 아닐까? 육군 독립 제1유격대대가 올린 전과(戰果)장사 해안 주요거점 200고지 점령… 북한군 병력 분산에 혁혁한 功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된 부대인 ‘육군 독립 제1유격대대’는 전체 인원 중 8할이 10대 후반의 학도병으로 구성됐다. 1950년 9월 15일 장사해변 전투에서 처음으로 총을 쏴 본 이들이 대부분이었다.그럼에도 순정한 애국심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지키겠다는 젊음의 열정은 잘 훈련된 베테랑 군인들 못지않았다.이종훈의 ‘무명용사의 열혈전투실기’ 등엔 “해안에 상륙을 완료한 독립 제1유격대대는 15일 오후 3시경에 장사동 해안지역의 주요 거점인 200고지를 점령했다. 유격대는 39명의 적을 사살하고 3명의 포로를 생포했으며, 9곳의 토치카(진지)를 파괴하고 직사포 2문, 포탄 450발, 지프차 1대, 기관총 45정, 로켓포 1문, 다발총 5정, M1총 9정, 소련제 장총 12정, 박격포 1문, 그리고 다량의 실탄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는 학도병들의 전투 행적이 드러난다.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발행된 논문에도 이 부분이 인용됐다. 이에 더해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은 참전 학도병과 청년지원병의 전공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작전 기간 중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인명 손실을 겪었지만, 적 270명을 사살하고 학살 직전의 청년 10여 명을 구출하는 전과를 올렸다.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기만으로 북한군을 분산시키고, 심리적으로 위축시킨 전술은 대성공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4-26

시민과 더 가까워지는 문화예술인 활동공간 대구아트파크

코로나19로 전 국민을 힘들게 만들었던 거리두기가 드디어 풀렸다. 따라서 예술인들의 활동 공간도 넓어지고 숨통도 틔워질 것 같다.문화 예술의 도시를 만들어 시민들 모두가 행복한 대구를 만들기 위한 지역 예술인들의 노력은 끝이 없다. 음악인들에게 공연 장소를, 미술인들에겐 전시 장소를, 연극이나 무용인들에게도 공연 장소를 제공해주고 시민들과 쉽게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들어섰다.사설 복합 문화예술회관을 개관한 박재환 대구아트파크 대표는 “문화는 갈등을 치유하고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다”며 힘닿는 데까지 공간을 운영해서 예술을 하는 후배들에게 힘이 되어 주겠다고 다짐한다. - 대구아트파크는 작은 사설 대구문화예술회관이라 할 만하다.△예술은 예나 지금이나 배고픈 직업이다. 더구나 코로나19 팬데믹 상황 아래에서는 그야말로 직격탄을 맞은 곳이 예술계라 할 수 있다. 전공으로 직업을 삼는 나로서는 참으로 혜택받은 존재이고 후배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있다. 그들에게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었다. 문화예술회관장을 하면서 음악 이외의 예술 분야에 대한 식견을 넓히게 됐고 그들에게도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체감했다. 또 시민들에게도 이런 예술 분야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 것으로 판단했다.그래서 더 나이가 들기 전에 그런 장소를 만들어야겠다는 오랜 신념을 드디어 실행에 옮긴 것이 대구아트파크다,- 대구아트파크가 개관 2년째를 맞았다. 공간과 지난 1년 성과를 소개해 달라.△공연장이자 전시 회의장 복합문화예술 공간이다. 지하 1층 지상 5층의 연면적 800㎡ 규모 종합예술공간이다. 지하 아트홀 ‘예현’은 70석 규모로 클래식 국악 무용 영화감상 등 공연과 연습실로 사용할 수 있도록 꾸몄다. 2층 ‘스페이스 샘’은 50석 규모의 소규모 행사 모임을 위한 연회장으로 사용할 수 있다. 2층에는 또 40명 정도 인원이 야외음악회와 가든파티들 할 수 있는 ‘테라스 바람’과 옥상 ‘루프탑 하늘’이 있다. 3층 ‘갤러리 나무’는 청년 작가 및 아마추어 미술가들에게 전시 기회를 제공하고 미술 작품을 판매하거나 대여해주는 곳이다. 4층 ‘프리미엄 아카데미’에서는 음악 미술 무용 뮤지컬 댄스 강좌와 인문학 강의도 할 수 있다. 5층 ‘대구문화산업연구소’는 대구 문화예술 발전을 위한 세미나와 포럼 등을 개최할 수 있다.- 개관이후 어떤 행사들이 대구아트파크에서 일어났나.△개관하고 첫 한 달 동안 공연으로는 대구국악협회의 공연과 소프라노 이윤경 독창회를 열었고 계명앙상블, 대구무용협회 팀의 발레와 현대무용 한국무용 실용무용 같은 공연이 있었다. 또 박경숙 첼로 독주회도 성황리에 열렸다.전시는 대구를 대표하는 구상작가 43명과 비구상작가 20명의 전시회를 갤러리 나무에서 가졌다.- 대구아트파크에서 미술작품 렌탈 사업은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문화예술회관장 시절 발견한 사실인데 일반인들이 미술품을 접할 기회도 많지 않고 구입해 소유하기에는 너무 고가여서 망설이더라. 그들에게 작품 가격의 100분의 1 수준으로 작품을 접할 기회를 확대해 주기 위한 방안이다. 서울에는 이미 일반화되었는데 대구에는 아직 초기단계다. 시중 병원이나 기업들과 MOU를 맺고 작품을 빌려주고 있다. 대구 작가 150명으로부터 3천점 확보를 목표로 작품을 수집하고 있다. 현재 50명으로부터 500점을 확보해 홈페이지에 올려놓고 이 중 30여 점은 렌탈해 주고 있는데 점차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플루트 연주자다. 플루트는 오케스트라나 관현악에서 악기 중 어느 정도 위치인가.△국내에서 연습용으로 연간 7만 ~8만 대가 팔린다고 들었다. 어쨌든 연주자 수로는 피아노 바이얼린 다음에 플루트 연주가 차지할 것으로 생각한다. 음악대학에서 학생을 뽑을 때도 관현악 전공이 가장 많고 그 중 플루트가 반드시 포함된다. 오케스트라에서도 작은 규모인 2관(단원 70명 정도) 편성일 경우 플루트 주자가 2명이고 대구시향 같은 3관(단원 100명 정도) 편성일 경우 3명이다. 뉴욕 필이나 베를린 필처럼 4관 편성 오케스트라는 단원이 120명이 넘는다.- 일반인들의 취미 생활로 색소폰이 인기다. 그런데 왜 색소폰이 음대에 전공자도 없고 오케스트라에는 끼지 않는가.△색소폰이 대중적인 악기인 것은 분영하다. 지금은 음대에 따라 색소폰 전공자를 뽑고 있는 것으로 안다.그러나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색소폰 연주자를 선발하지 않는 것은 연주곡 중 색소폰이 들어가는 곡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색소폰이 필요할 때면 전문 연주자를 초빙하는 것이다. 상주단원으로 선발하기에는 필요에 비해 너무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색소폰 연주가 들어가는 곡으로 쇼스타코비치가 작곡한 ‘재즈왈츠 No. 2’는 알토 색소폰이 연주하는 정말 아름다운 곡이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곡이다.- 많은 악기 중 플루트를 연주하게 된 계기가 있나.△고교에 들어가니 악대부가 있어 너무 기뻤다. 내 발로 악대부를 찾아 입단했는데 선배들이 귀엽다며 ‘하고 싶은 악기를 하라’고 선택권을 줬다. 처음 트럼펫을 시작했는데 소리 내는 것이 힘들었다. 어느 일요일 혼자 플루트를 연습하던 선배(이성호 플루트 연주자)를 보고 ‘나도 불고 싶다’고 해서 바꿨다. 또 나보다 나중에 들어온 후배가 나보다 트럼펫을 더 잘 불어 속이 상한 것도 플루트로 바꾼 이유 중 하나일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중에 온 후배는 초등학교때부터 트럼펫을 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경력 중 부산시립교향악단과 대구시립교향악단이 있다.△대학 졸업 후 부산시향에 입단했다. 꽤 괜찮은 보수를 받았고 주말에 대구로 올라오면 후배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막걸리 파티를 벌이곤 했다. 그때부터 후배를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군대도 상무대 군악대에 들어갔다. 제대 후 5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대구시향에 들어갔다.- 그러다 미국 유학을 가게 된 계기는 무엇 때문인가.△당시 외국유학 붐이 불 때였다. 제자들이 찾아오면 일자리를 만들어줘야 하는데 아무래도 유학을 다녀와야 힘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위에 유학을 다녀온 선배나 친구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유학 가면 정말 훌륭한 선생을 만날 수 있을까 기대도 했다. 그래서 결혼해서 아이 둘을 데리고 36세라는 늦은 나이에 유학길에 올랐다. 대학 2학년 이후 내 스스로 학비를 마련했고 유학 경비도 내가 벌어둔 돈으로 다녀왔다. 시향 단원으로 있으면서 레슨을 했고 미국 유학 (뉴욕 주립대학 펄처스칼리지) 4년 동안 한인사회에서 레슨을 열심히 했다. 그 시절 유학 가서 고생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자랑할 만한 성과가 있다면 어떤 것인가.△전국 처음으로 대학 음악과에 플루트 전공과를 만들고 플루트 오케스트라와 앙상블 레피토아를 비롯, 플루트 수리까지 교육과정에 편성했다. 당시 음악과 신입생 60명 중 플루트 전공만 12명을 선발했다.- 대구음악협회장 시절 대구 출신 음악가 현창사업을 벌이기도 했다.△당시 한국최초 가곡인 동무생각 작곡가 박태준 선생과 한국최초 오페라 춘향전 작곡가 현재명 선생 현창사업을 벌이다가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민족문화연구소측과 마찰이 있었다. 세미나 등을 통해 박태준 선생의 친일파 논란은 해소했으나 현재명 선생에 대해서는 ‘공과 과를 함께 기록해 달라’는 주문에 대구시의 ‘부담스럽다’는 입장을 보여 중단했다.- 대구문화예술회관장 시절 찾아가는 음악회를 통해 클래식을 대중에게 접근시켰다는 평가다.△클래식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대중화 노력의 하나로 찾아가는 음악회를 구상했다. 그런데 대상이 주로 시설에 치중돼 있었다. 김범일 대구시장에게 찾아가는 음악회를 제안했더니 아주 반기더라. 그래서 먼저 대구시청 월례 조회에 찾아갔다. 월례회에 본청뿐 아니라 구군청과 경찰 소방 등 시청 산하 전 기관의 공직자들이 참여했는데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자기들 기관으로 와서 연주해 달라는 신청이 쇄도했다.- 어떤 식으로 공연했기에 그런 인기를 얻었나.△공연은 성악팀과 관현악팀, 무용팀으로 구성했다. 노래도 그냥 클래식은 아무래도 무거우니 대중적인 곡을 선택하고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했다. 남성4중창단이 부르는 빨간 구두 아가씨에 청중들 모두 신나 하는 장면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당시 찾아가는 음악회는 연 100회나 열었더라. 구청과 소방서 등 공공기관에서 혁신도시로 파급돼 감정원과 가스공사 등에서도 음악회를 가졌다.- 찾아가는 음악회 말고도 클래식을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안이 있을 것 같다.△문화예술회관에서 실시하는 예술 아카데미에도 직접 참여하기 어려운 시민들을 위해 출장 아카데미를 열었다.31절이나 광복절 기념식에는 그냥 기념 노래나 부르고 끝내는 기념식에서 탈피해 기념식 사이에 20분짜리 공연을 집어넣었다. 함께 노래 부르고 태극기 휘날리며 만세도 부르고 장내를 동적인 공간으로 만들었다. 미래 관객인 학생들을 상대로 창의체험학습을 위한 상설 투어를 실시했다.- 예전에 비하면 예술에 대한 정부 기관의 지원이 늘어난 것 아닌가.△기관의 예술에 대한 지원이 순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예전에 비해 문화 예술에 많은 지원을 해주고 있다. 특히 대구시의 경우 생활예술에 지원이 치우치고 있는 느낌이다. 그 많던 미술학원 피아노학원 음악학원 같은 시설들이 모두 주민생활지원 센터나 공공도서관 등 기관 산하로 이양돼 버린 것 아닌가. 수용자들은 적은 비용으로 예술을 직접 혜택을 받으니 문턱이 낮아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 예술의 수준이 낮아지고 있음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음악인으로, 예술인으로 정부에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면.△기초예술에 더 관심을 가져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기초예술의 발전이 있어야 생활예술, 대중예술의 발전이 가능해진다. 처음엔 물론 턱이 높고 힘이 든다. 그러나 클래식에의 투자가 소수 마니아만을 위한 투자가 아닌 것이, 그 클래식의 저변확대와 발전을 통해 대중음악이 더욱 발전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대구아트파크의 미래와 자신의 소망은 무엇인가.△나는 1980년대 음악을 전공하면서 교육과 사회적 혜택을 받았던 마지막 세대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고 음악을 평생직장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음악계 후배들은 한 마디로 어렵다.음악인들에게는 공연 기회와 장소를, 미술인들에게는 전시장을, 연극 무용계 인사들에게도 그들의 땀과 재능을 펼쳐 보이고 발전시킬 수 있는 공간으로 대구아트파크가 필요함을 증명하겠다. 문화예술에 예산을 퍼붓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과 같다는 비난을 예술의 힘으로 바꿔놓겠다. /이경우 편집위원 □ 박재환(63) 대신대 교수· 대구아트파크 대표대구출신, 영남고, 계명대 음대. 미 뉴욕주립대 음악석사. 줄리아드음대 오케스트라 지휘토스 수료.전 부산시립교향악단. 대구시립교향악단.전 대구음악협회장, 전 대구문화예술회관장.초등학교 4학년때 고적대로 활동하면서 음악적 소질과 재능을 스스로 발견했다.고교에 입학하면서 악대부에 자발 입단했고 음대를 졸업하고 풀루트 연주자로 평생 직업을 삼았다.“나는 더 많은 혜택을 받아 전공을 직업으로 한 선배”라며 힘닿는 데까지 대구아트파크를 운영하면서 지역 예술인들을 돕겠다고 약속한다.

2022-04-25

올해는 ‘황금의 빛 대가야’… 희망과 치유 메시지 전한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코로나19 사태’가 오래 이어지면서 전국의 지역 축제가 2년 동안 열리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됐다.최근 정부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실행했던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해제했다. 이에 따라 지역 축제가 경북 곳곳에서 펼쳐질 예정이다. 고령군도 예외일 수 없다.1천500여 년 전 찬란한 철기문화를 꽃피웠던 고대왕국 대가야의 진면목을 선보임으로써 호평 받은 경북의 대표적 지역 축제 중 하나인 ‘대가야 체험축제’도 새롭게 단장해 관광객과 만날 준비를 마쳤다.세계축제이벤트협회(IFEA)로부터 금상을 받은 바 있고, 대한민국 대표축제 전통문화 부문 대상을 수상했으며, 2013년부터 2019년까지 문화관광부 지정 대한민국 문화관광 우수·유망축제로 선정된 고령의 대가야 체험축제.고령군 관계자는 “오는 5월 5일부터 8일까지 대가야생활촌 일원에서 다양한 이벤트와 볼거리, 먹을거리까지 두루 마련된 즐거운 축제가 열릴 것”이라고 예고했다.완연해진 봄 날씨 속에서 오랜만에 가족, 친구들과 함께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대가야 체험축제’는 어떻게 준비되고 있을까? 그 현장 속으로 미리 떠나본다. ◆다양한 전시와 행사, 체험과 공연이 함께 하는 축제앞서 언급했듯 고령 대가야 체험축제는 1천500년 전 대가야 시대의 이야기들을 흥미롭게 담아낸다. 대가야인들의 생활, 문화, 예술 등 삶 전체를 테마로 해 방문자들이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올해 축제의 주제는 ‘황금의 빛, 대가야’. 고령군관광협의회는 “황금과 빛을 통해 희망과 치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며 “예부터 지금까지 귀한 광물로 여겨지는 ‘황금’이란 테마로 축제 참가자 모두가 코로나19로 인해 상처 받은 마음을 달랬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고령군 또한 “지난 2년간 개최하지 못한 축제의 재시동으로 군민과 관광객을 위로하고, 지역 경제 회복에도 힘을 보태고자 축제 개최를 결정했다”고 부연했다.올해 축제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전시 분야에선 축제의 주제인 ‘황금의 나라, 대가야’ 전시장이 마련되고, 이와 하모니를 이룰 감성 포토존 또한 설치된다.개막 행사로는 ‘대가야 종각 현판식과 타종 행사’가 준비됐고, 폐막식에선 ‘자랑스런 군민상 시상식’이 열린다. 창작뮤지컬 ‘가얏고’와 어린이·가족뮤지컬, 지역 주민이 준비한 공연도 관심을 모은다. 오프라인만이 아닌 온라인에서도 ‘대가야축제TV’가 만들어지고, 인플루언서들의 방송도 진행될 예정이다.고령의 특산물을 선보일 홍보관이 마련되고, 라이브 커머스를 통한 판매도 계획돼 있다. 지역민의 축제 참여를 적극 유도할 부스도 설치된다. ◆코로나19 장기화에 지친 사람들 위로할 ‘안전한 축제’로능동적으로 축제를 즐기기 위해 2022년 대가야 체험축제의 주요 프로그램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올해 축제의 메인 무대는 대가야의 옛 모습을 재현한 대가야생활촌이다. 여기는 메나릿골(용사체험장), 발굴체험학습장, 연조마을(공방촌), 인줄마을(고상가옥촌), 불묏골(제련소), 고아동 고분전시관으로 나눠져 있다.대가야 체험축제의 주제 체험이라 할 ‘황금테마체험’은 대가야생활촌 안에서 이뤄진다. 체험은 사금 채취, 대가야 금관 만들기, 금속공예 등으로 구성됐고, 이중 사금 채취는 캐낸 금을 유리병에 담아 가져가는 것으로 참가자들의 관심을 끌 듯하다.올해는 밤에 진행되는 프로그램도 강화된다. 대가야생활촌의 야간 조명을 따라 옛 이야기를 들으며 산책할 수 있는 대가야생활촌 야간투어와 고분이 들어선 구역의 밤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문 보트(Moon Boat ) 체험’에 열기구 체험까지 준비되는 것.축제의 주제관에선 ‘황금의 나라 대가야’ 관련 영상을 확인할 수 있다. 대가야의 금제 유물과 지역 작가들의 작품도 전시된다.창착뮤지컬 ‘가얏고’는 고령군의 역사·문화 콘텐츠를 활용한 공연 프로그램. 올해는 ‘가야의 여신들’이라는 타이틀 아래 문화누리 우륵홀에서 펼쳐지게 된다. 행사 첫날인 5월 5일 어린이날에 관객들과 만나게 될 가족뮤지컬 ‘캐리와 친구들’도 기대를 모으는 작품이다.대가야 문화누리 야외공연장 등 행사장 전역에선 소규모 버스킹 공연도 진행될 예정이다.고령 지역 문화예술단체의 공연으로 ‘지역민과 함께하는 축제’라는 지향도 드러낸다. 읍·면 홍보 부스 운영을 통해 각 지역의 특산물과 명소도 소개할 계획을 세웠다. 다양한 온라인 프로그램 역시 기대된다. 메타버스 공간에서 대가야 체험축제를 즐길 수 있고, 대가야 역사문화퀴즈, 가야금 연주게임을 만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현장을 직접 찾기 힘든 이들을 위해 ‘대가야축제TV’ 유튜브 채널도 운영된다.고령군 관계자에 의하면 “대가야수목원에서 진행될 숲 해설 체험도 기대해도 좋다”고 한다.고령의 특산물인 딸기를 테마로 한 ‘딸기 카페’와 개실마을, 가얏고마을 등 4개 마을이 참여해 만든 농촌체험은 도시 생활에 익숙한 아이들에게 즐거운 경험을 선물할 것으로 보인다. “올해 대가야 체험축제는 코로나19 장기화로 지친 군민과 관광객을 위로하고, 침체된 지역 경제를 되살리는 것에 중점을 두고 안전한 축제로 운영할 것”이란 게 고령군의 설명이다. ◆축제와 함께 고령의 관광 명소도 둘러보면 어떨까고령군관광협의회는 대가야 체험축제를 찾을 관광객들을 위해 ‘추천 코스’를 안내했다. 그중 ‘따스한 5월 걷기 좋은 길’로 불릴만한 ‘대가야박물관→지산동 고분군→주산성→철쭉단지→청금정→반룡사’ 코스와 농촌문화를 맛볼 수 있는 ‘대가야 역사테마관광지→반룡사→개실마을→우륵박물관→대가야수목원’ 코스가 매력적으로 보인다.이와 함께 고령군은 방문객들을 위해 고령의 관광 명소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지산리에 자리한 지산동 고분군은 한국 최초로 발굴된 순장묘 지산동44·45호분을 포함한 크고 작은 700여 기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어 낭만을 느끼며 산책하기 그만이다.대가야 왕릉이 모여 있는 주산 기슭의 대가야박물관은 지산동44호분을 재현해 당시의 무덤 축조 방식과 순장자의 매장 형태를 확인할 수 있어 아이들에게 역사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킬 수 있는 공간이다.가야금을 만든 악성 우륵의 생애와 음악을 중심으로 꾸며진 우륵박물관에선 전문 장인이 가야금 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거기서 가야금 제작 체험도 즐길 수 있다고 한다.선사시대 사람들이 바위 위에 그린 그림이나 도형을 확인할 수 있는 고령 양전동과 안화리도 눈길을 끈다.영남학파 종조인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아오는 개실마을은 우리의 전통문화가 가진 매력을 몸으로 느낄 수 있어 인기를 모은다.그 외에도 대가야수목원과 ‘팔만대장경’을 해인사로 옮긴 역사로 인해 이름 붙은 개경포 등도 빼놓을 수 없는 고령의 관광 명소다.‘코로나19’로 인해 발이 묶였던 여행자들은 지난 2년의 아쉬움을 달래줄 대가야 체험축제를 기다리고 있다. 이 기다림과 기대를 잘 알기에 고령군은 축제 준비에 더욱 노력을 기울이는 중이다. /전병휴기자 kr5853@kbmaeil.com

2022-04-24

국가는 772명 어린 희생양들을 모른 척 했나?

먼저 1950년 9월 14일 장사상륙작전에 학도병으로 참전한 이영희(91)씨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본다.“출동 전날인가, 출동하는 날이었던가…. 교관이 손톱과 발톱, 머리카락을 깎아서 나눠준 봉지에 넣으라고 하더군요.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몰랐지. 나중에야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군사작전에 동원된 사람들이 치르는 일종의 의식이란 걸 알았죠. 근데, 한참 후 들어보니 그때 700명 넘는 우리 전우들이 잘라낸 손발톱과 머리카락은 보관하지도 않고 버려졌다고 하더라고요.”아래는 이씨의 증언을 뒷받침해주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양영조 책임연구원의 논문 ‘6·25전쟁 초기 장사상륙작전의 전개과정과 성격’의 일부다.“1950년 9월 14일 오전 육군 독립 제1유격대대(장사상륙작전 학도병 부대)는 육본 연병장에서 출동준비를 완료하였다…(중략) 출정식에 참석한 유격대 대원들은 육군본부 연병장에 질서정연하게 집합했다. 이들 전원은 출동에 앞서 각자의 머리카락, 손톱, 발톱의 일부를 잘라서 봉투에 넣어 육본에 보관시켰다. 작전지역으로 출동하기에 앞서 죽음을 각오하자는 결의의 표시였다.”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겠다는 순수한 애국심에 입대를 자원한 학도병 772명. 그들은 손발톱과 머리카락을 깎은 그날 오후 부산항 4부두를 출발해 ‘죽음이 기다리는’ 장사해변으로 떠났다. LST문산호를 타고서였다.그중 139명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고, 100명이 넘는 이들이 다치거나 조선인민군의 포로가 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군인이자 소설가였던 월터 카릭(Walter Karig·1898~1956)은 ‘6·25전쟁에 관한 전투 보고서(Battle Report the War in Korea)’에 “독립 제1유격대대의 유격대원들 중 약 80%에 해당하는 600여명이 주로 18~19세에 불과한 학생들이었고, 심지어 15세의 어린 학생도 일부 포함돼 있었다”고 기록했다. △ 장사상륙작전은 어떤 이유로 잊혀진 전투가 됐을까“한국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킨 인천상륙작전에 도움을 줬다” “낙동강 전선에서 고전하던 한국군 제1군단의 작전에 기여했다”는 군사전문가들의 호평이 있었음에도 어째서 장사상륙작전은 2009년 한국프레스센터에서의 학술세미나가 개최되기 전까지 59년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을까?10대 후반에서 20대 초·중반이던 학도병과 청년지원병이 주축이 됐던 ‘육군 독립 제1유격대대’는 국군 총참모장이 서명한 ‘육본 작전명령 174호’에 의해 상륙작전과 전투에 투입됐다.북한군의 동해안 보급 루트를 끊고, 당시 조선인민군 최정예 제2군단의 2개 연대와 전차에 맞서 용맹한 전투를 벌였음에도 왜 장사상륙작전 학도병들에겐 훈장 추서와 수여라는 희생에 값하는 위로와 격려가 없었을까?2020년 8월 발표된 군사편찬연구소 박종상 책임연구원의 논문 ‘6·25전쟁 시 장사상륙작전에 대한 재검토’는 “많은 시간이 지나 장사상륙작전이 일반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가고 있을 무렵인 1980년 7월 14일 참전자들에 의해 ‘장사상륙참전유격동지회’가 결성됐다”고 쓰고 있다.이 논문에 의하면 장사상륙작전이 새롭게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97년 3월 6일 장사리 앞 해안을 수색하던 해병대 제1사단 해병대원이 바닷속에 묻혀 있는 LST문산호를 발견한 이후”다.장사상륙작전이 있은 후 70년이 지나서야 만들어진 영덕 장사해변의 전승기념관. 지난 3월 중순 이곳을 찾은 학도병 류병추(장사상륙작전기념사업회장·91), 이영희, 청년지원병 배수용(99)씨는 “아마도 우리들은 희생양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큰 전투(인천상륙작전)의 승리를 위해 희생자가 발생할 것이 분명한 작은 전투(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된 어린 군인들.그들에겐 군번도 없었다. 그러니, 문서로 남은 인사 기록이 정확하지 않고, 전투에서 세운 공적에 대한 명확한 평가 또한 없다.참전 후 70년이 지나서야 육군본부에서 받아본 류병추 회장의 ‘거주표’엔 정확한 예편 일자와 생년월일은 기록돼 있지만, 이름조차 오기(誤記)돼 있다. 류병추가 아닌 ‘유병식’으로 적힌 것.이런 상황을 감안한다면 “한국전쟁 당시 미군과 한국군 문서에 실명과 공적이 정확하게 기록된 분들에 한해 서훈 추천을 할 수밖에 없다”는 육군본부의 해명은 옹색해 보인다. △ 조선인민군 군가까지 배우며 분투한 학도병은 희생양?희생양은 ‘다른 사람의 이익이나 목적을 위해 목숨, 재산, 명예, 이익 따위를 빼앗긴 사람’을 비유하는 단어다.그런데, 장사상륙작전 참전 학도병들은 지향점이 판이한 ‘다른 사람’을 위해 싸운 게 아니었다.류병추, 이영희, 배수용 씨를 포함한 장사상륙작전 참전 학도병과 청년지원병 772명은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와 친구, 이웃, 더 큰 의미에선 조국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자처한 젊은이들이었다.그러니, 사전적 의미의 ‘희생양’과는 다른 형태로 해석되고, 평가받아야 마땅하지 않을까.1950년 8월 대구역 앞엔 ‘내가 총을 들고 전장에 나가는 것이 나라에 작은 도움이라도 된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젊은 혈기와 신념으로 참전을 결심한 학도병 지원자들이 수천 명 모여들었다.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된 학도병도 바로 여기서 선발됐다. 부모에게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기차에 오른 이들은 경남 밀양에 도착해 쌀을 보관하던 창고에서 가마니를 깔고 자며 낯선 군사훈련을 받았다. 식사라곤 차갑게 식은 주먹밥이 전부였다고 한다.류병추 회장은 2주간 훈련을 받던 그 시기를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1주일쯤 지났을 때다. 교관이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다. 손을 든 이들에겐 귀가가 허락됐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10명 중 1명도 되지 않았다.”당시 스물여섯 살이던 배수용 씨는 “나이가 많으면서 모범적으로 하지 못한다고 조교에게 맞기도 많이 맞았다”고 했다.그럼에도 절대다수의 학도병들은 편안한 집 대신 생명을 걸고 싸워야하는 전투 현장으로 가겠다고 스스로 선택했다.장사상륙작전은 조선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으로 학도병을 보내는 것이기에, 여차하면 인민군으로 위장하기 위해 북한 군가까지 배웠다.“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으로 시작하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다. 배수용, 류병추, 이영희 3명의 노병은 아직도 그 노래의 가사를 기억하고 있었다.이전까진 총 한 번 쏴본 적 없는 어린 학도병들은 그렇게 부산항 4부두를 떠나 조선인민군 2군단이 버티고 있는 영덕군 남정면 장사해변으로 떠났다. 앞서 언급한 ‘육본 작전명령 174호’가 그들을 사지(死地)로 보냈다.1950년 9월 14일 오후 4시였고, 동해가 태풍 케지아(Kejia)의 영향권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날이었다. 육본 작전명령 174호는…독립 제1유격대대 보급·수송 지시 명령서… 참전 학도병 명백히 밝힐 자료 활용해야한국전쟁 때 국군 최고 책임자였던 총참모장 정일권(1917~1994) 소장의 직인이 찍힌 ‘육본 작전명령 174호’는 단기 4283년(1950년) 9월 10일 작성됐다.경북 포항과 안강의 전황을 설명하고, 작전에 참여할 독립 제1유격대대의 보급과 수송, 통신과 의료 관련 사항을 지시하고 있는 이 명령서는 ‘군사 극비’로 분류됐다.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된 학도병과 청년지원병은 바로 이 육본 작전명령 174호에 따라 이동·상륙·상륙 후 전투를 수행했다. 이는 명백하게 남아있는 ‘한국전쟁 당시 관련 문서’다.이를 토대로 참전 학도병의 이름을 찾아내 확인하는 게 대한민국 육군본부나 국방부에겐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참전자들의 전공(戰功)은 이미 각종 군사 관련 문헌이나 자료가 있으니 확인이 가능할 것이다. 정확한 성명과 전공. 현재 법률로선 훈장 추서와 수여는 이 두 가지가 선행돼야 가능하다.장사상륙작전 생존 학도병들은 입을 모은다.“지금 와서 공명심에 훈장을 바라는 게 아니다. 국가가 우리를 잊지 않았다는 걸 확인받고 싶다”고.장사상륙작전 전우 772명 중 현재 생존자는 20명이 채 되지 않는다. 이미 아흔을 넘긴 그들에겐 시간이 많지 않다.‘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다’는 군인의 본분은 장성과 학도병이 다를 리 없다. 정일권 소장은 1950년 을지무공훈장을, 1951년엔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4-19

참외는 땅의 능력과 환경에 맞춰 재배해야

서울 시내 백화점에서도, 남해의 섬에서 강원도 산골까지 전국 과일전의 참외는 성주참외가 평정했다. 과일 생산지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지만 참외만큼은 경북 성주가 전국을 석권하고 있다. 4천300여 농가에서 올해 수익 6천억원을 목표로 하는 성주참외는 이제 국민과일의 반열에 오르고 있는 듯하다.재배기술은 연작 피해를 극복하고, 생산시기가 여름이라는 계절적 한계를 뛰어넘어 달싹하고 아삭한 식감의 싱싱한 참외를 전 국민이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농민들의 노력과 농업기술센터를 비롯한 관계 기관들의 지원 덕분이다.“참외는 기술보다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는 참외 명장 박진순 씨는 “참외의 성장 속도를 읽어내고 적기에 참외가 필요로 하는 조건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 참외 재배의 열쇠”라고 말한다. - 시중에 참외가 한창인 것 같다. 지금이 참외 성수기인가. 하루에 얼마나 생산되고 있나.△오늘(4월 12일)도 ‘생산자 박진순’이라고 큼직하게 찍힌 성주참외 188상자(상자당 10kg)가 가락동시장에 올라갔다. 요즘 하루 180상자 이상 출하하고 그러면 1천만원 이상씩 현금으로 통장에 꼽힌다. 열흘이면 1억이다. 올해는 2월 8일 처음으로 58상자를 수확했다. 참외 성수기는 5월이 되어야 한다. 이런 생산량이 한동안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기를 반복하며 8월까지 수확이 계속된다. 이 재미로 농사를 짓는 거 아닌가.- 도대체 참외 농사를 얼마나 짓고 있나. 참외 농사에서 영농비는 얼마나 차지하고 순수익은 얼마나 되나.△올해는 800㎡(250평) 규모 비닐하우스 25개동에서 참외 농사를 짓는다. 지난해엔 21개 동에서 3억원의 조수익을 올렸는데 올해는 그보다 좀 많을 것 같다.그 중 30%는 영농비로 들어간다. 경험상 10개 동을 농사지어서는 남는 게 없더라. 10개동을 넘어서면 그때부터 이문이 생기는 것 같았다. 영농비는 자재비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비닐하우스 1동의 시설비만도 300만원이 들어가는데 시설의 수명은 20년 정도지만 비닐은 3년이면 바꿔줘야 하고 속 터널 비닐은 해마다 새로 한다. 비료 농약 박스값 등 영농비도 만만찮다. 오늘 참외 수확에만도 인부 6명이 동원됐다. 참외 농사와 관련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더불어 같이 먹고 사는 거다.- 지금처럼 수확하려면 언제부터 참외농사를 시작해야 하나.△ 추석이 지나면 농사 준비를 해야 한다. 10월이면 참외를 심을 밭을 물로터리로 고르고 퇴비를 넣고 땅을 만들어서 씨앗을 넣는다. 11월이면 접붙이기를 한다. 한겨울 비닐하우스에서 참외가 자라면 수정을 거쳐 수확한다.- 경상북도의 참외명장 1호 타이틀 보유자다. 명장이 되고 무엇이 달라졌나.△ 명장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또 처음 참외명장에 선정되고는 명예나 자랑보다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았다. 그전에는 그냥 참외 농사를 지으면 되었는데 명장이 되고 나니 수많은 사람들에게 참외 농사의 노하우를 전수해 줘야 했다. 무엇보다 참외농사도 남들보다는 잘 지어야 했다. 지금은 스스로 명장 값을 하려고 노력한다.- 무엇으로 참외명장이 되었다고 생각하나.△열심히 부지런히 농사지었다. 특히 주위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다른 사람과는 반대 농법으로 농사를 지었다. 수많은 시행착오도 겪었다. 그렇지만 역발상이 땅의 이치와 작물의 이치를 꿰뚫어보고 스스로 적용한 것이 성공한 때문일 것이다. 참외를 이식하기 전에 로터리 친 땅을 단단하게 다지자 이웃 사람들이 나를 미친 사람 취급했다. 그런데 그 농법이 통했고 이젠 모든 농가들이 ‘이랑 다지기’를 하니 이것 때문에 명장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내 농법이 인정받은 셈이다.- 명장 이외에도 많은 상을 받았을 것 같다.△농업단체에서 주는 상은 수도 없이 받았다. 2016년에는 참외 농사로 대통령 포장을 받기도 했다. 그때도 농업기술센터에서 와서 귀찮게 굴더니 나중에 박근혜 대통령이 산업포장을 주더라. 참외 기술 컨설팅을 하러 다니면서 지난해에는 경북농업기술원으로부터 현장 명예 연구관이라는 직책도 받았다.- 참외 농사를 짓기 전에 수박 농사도 지었고 그전에는 도시 생활도 했었다.△가난한 농사꾼의 자식으로 5남매의 맏이였다.유산은 손재주와 남에게 지지 않겠다는 의지뿐이었다. 중학을 다니는 둥 마는 둥 했다. 어차피 고등학교 진학은 못할 형편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학창시절엔 덩치는 작았지만 동기들에 기죽지 않을 만큼 ‘좀 까불었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야심 하나로 일찍 대구로 나와 공장 생활을 했으나 성에 차지 않았다. 양복점 일을 배웠다. 남보다 앞서 재단까지 배워 양복점을 열었으나 양복점이 사양 사업이 되고 임대 점포가 재개발로 헐리게 돼 3년 만에 접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직 20대였다.- 참외 농사는 재미가 있었나.△처음엔 수박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재미가 적었다. 그래서 오래 수확할 수 있는 참외로 바꿨다. 새벽에 일어나 참외 농장에서 일을 하고는 9시면 오전 일과를 마친다. 그때부터 동네 농장들을 순회하면서 내 농법을 다른 사람과 비교도 해보고 다른 사람들의 농법을 배우기도 한다. 그리고는 오후 4시쯤이면 다시 내 농장으로 돌아와 일을 하곤 했다. 부지런하고 억척같이 일했다.- 비닐하우스 작물 재배에 자동개폐장치가 인력난을 해결하는 획기적 발명품이 됐다. 자동개폐장치 개발에 박 명장의 기여가 크다고 알려졌다.△우리 작목반 23명 모두가 최소 억대가 넘는 참외 농사꾼들로 한 사람은 지난해 5억4천만원의 수익을 올렸다. 혼자서 그렇게 많은 농사가 가능한 것은 모두 자동개폐기 덕분이다. 하우스 보온덮개를 예전에는 모두 수동으로 했다. 친구들과 놀다가도 밤 10시면 보온덮개를 덮으러 갔다. 뒤에서 친구들이 ‘농사 너 혼자 짓나?’ 하면서 핀잔을 주기도 했다. 당시 하우스 18동의 덮개를 모두 덮고 나면 새벽 1시가 넘고는 했다. 그래서 농업기술센터에 자동개폐장치를 개발해 줄 것을 끈질기게 요청했다. 자동개폐장치가 개발되면서 이젠 한 사람이 60동까지도 참외농사가 가능하게 됐다.- 참외재배 기술은 남에게 잘 가르쳐주지 않는다던데, 참외를 재배하려는 사람들에게 기술을 전수해주나.△ 참외 농사는 다른 작물에 비해 까다롭다. 그래서 참외 농사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코로나19 역병이 돌기 전에는 경북대 농대와 농업기술센터 등에서 참외 재배 컨설팅을 했다. 정부 농촌수출지원단의 일원으로 교수들과 조를 이뤄 참외 재배 컨설팅을 하러 다녔다. 우리 농장으로도 참외 재배 기술을 배우겠다는 사람들도 해마다 수 백명씩 찾아오고 있다.컨설팅에서 참외 재배 농가에 강조하는 것이 환경이다. 참외 재배 환경을 조성하고 난 다음에 참외를 재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땅의 능력과 특성부터 제대로 정확히 알아야 한다. 토양 성분이나 토질이 다르고 일조량이 다르고 주변 여건이 모두 다른데 한 가지 방식만 고집해서는 참외 재배에 실패하기 마련이다. 참외 재배는 기술보다 환경 조성이 먼저다.컨설팅에서 또 강조하는 것이 ‘참외는 채소지만 나무처럼 키워라’는 것이다. 참외는 열매를 키우는 것인데 잎만 무성한 채소가 되어서는 품질 좋은 참외를 많이 수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잎은 나무처럼 작고 적어야 한다.- 참외 재배 현장 컨설팅에서 주로 발견하는 실패 사례는 어떤 것이 있나.△현장을 확인해보면 무엇이 잘못 됐는지 한눈에 ‘탁’ 보인다. 주위만 봐도 알 수 있다. 땅을 제대로 편편하게 고르지 않으면 물이 한쪽으로 쏠린다. 그러면 작물이 고루 자라지 못한다. 병충해가 농사를 망치기도 한다. 노균병 흰가루병 등 많은 병들은 모두 수분 때문에 생기는 병이다. 그렇다고 너무 많은 약을 쳐서 약해(藥害)로 수확량이 줄어들기도 한다. 수확량의 3분의 1은 병충해 때문에 줄어든다.대학을 나왔다고, 학식이 풍부하다고 농사를 잘 짓는 것은 아니다. 특히 참외 농사는 기술보다는 환경이라고 말하고 싶다. 컨설팅을 갔을 때 산 밑에 하우스가 있어 일조량이 절대 부족한 하우스에서 전력을 기울여 농사짓는 사람에게 하우스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조언했다. 그늘에서는 참외 농사를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참외 재배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어렵나.△물관리만 하더라도 참외의 성장 속도에 따라, 토양에 따라 다르다. 처음 이식하고 겨울 동안은 물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참외가 한창 자라고 수확기인 지금은 물을 계속 줘야 한다. 토양도 사질토와 마사토 성분의 토양에 따라 다르다. 작물이 크는 속도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물이 필요한지, 비료가 필요한지, 비료는 어떤 성분이 필요한지, 역병은 어떤 병이며 어떤 약을 쳐야 하는지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어찌 말로 설명될 수 있겠나.몇 해 전 서울의 한 대학 농학박사가 참외 재배를 연구한다며 우리 농장에 왔다. 그는 처음에는 Ph 농도를 낮춰야 한다고 주장하고 여러 실험들을 하더니 나중에는 ‘내 이론은 이 농장의 현실에는 맞지 않는다’고 스스로 실토했다. 어느 날 그가 소리 없이 올라가고는 그 후로 소식이 없더라.- 귀농인들에게도 참외 농사 비법을 아낌없이 전수해 준다고 소문났다.△젊은 사람이 참외 농사를 짓겠다고 할 때는 최상품의 참외로 돈을 벌 수 있도록 조언해준다. 젊은이들이 의지만 가지면 농업에 대한 각종 지원도 많고 혜택도 많아 도시보다도 더욱 빠른 시간에 자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적극 권유한다. 그런데 환경 논리와 일머리를 모르면 아무리 노하우를 가르쳐 줘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실천하기 어렵다. 이건 학식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지금은 참외 재배도 스마트농업 시대다. 스마트폰으로 실시간 하우스 안 참외 성장 상태를 확인하고 원격제어로 온도 습도를 관리할 수 있다.- 나이 들어 은퇴하고 농업에 뛰어든 사람들에게도 같은 조건으로 할 수 있나.△나이 든 귀농인들에게는 적당히 농사지으라고 가르치고 권한다. 돈을 따라가다 보면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고 충고해 준다. 농사, 특히 참외 농사는 마음만으로 되지 않는 까다로운 작물이고 힘든 작업이기도 하다. 또 규모의 농사를 해야 일정 수확을 올릴 수 있다.- 참외 명장으로서 바람이 있다면.△4년 전부터 참외 농사는 주로 아들에게 맡기고 나는 쉬엄쉬엄 지원하는 편이다. 아들 상현(32)은 농수산대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참외 재배에 뛰어들었다.바람이 있다면 개인적으로는 가업으로 참외농사를 이어받은 아들이 나보다 참외를 더 잘 재배한다는 칭찬을 들었으면 좋겠다.또 농부로서, 농업인이 우대받고 농민들이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세상이 오기 바란다.□ 박진순(朴鎭淳) 경북 참외명장 1호. 섬들농장 대표.성주 월항.빈농의 아들로 손재주와 ‘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유산으로 물려받았다.중학교 졸업 후 대구로 나와 공장 직공과 양복점 경영을 하다 20대에 귀향.수박 농사를 시작하다 5년만에 참외를 바꿔 현재 연 3억원의 조수익을 올리고 있다.토양의 성질과 참외 성장과정을 면밀히 관찰해 지역에 맞는 재배 기술을 습득했다.2004년 경북도 참외명장 1호로 선정되고 2016년 참외 재배로 대통령 포장을 받았다.연간 수백명이 참외 재배 기술을 배우러 그의 농장을 방문하고 자신도 지역 대학과 농민들을 상대로 참외재배 컨설팅을 했다.전수받은 아들이 참외 재배에서 자신을 능가하기를 바란다. /이경우 편집위원

2022-04-18

문경, 농업예산 1천억 돌파… 농축산 유통 중심 도시로

문경은 도농복합 도시라 어느 한쪽에 집중 투자하기가 곤란한 구조지만 작년 우리시 농업예산은 1천억 원을 넘어섰다. 국가 전체 예산 중 농업예산 비중은 사상 처음으로 2%대로 떨어졌지만 ‘농민이 잘 사는 부자농촌’ 건설을 위한 시정 목표아래 끊임없는 농업인들의 역량강화와 10년 동안 꾸준히 농업분야 지원을 확대한 결과의 산물이다.지난해 문경시에서는 산지유통기능 활성화와 농산물 가공산업, 마케팅 관련 예산 142억, 축산경쟁력 강화 및 경영안정화, 악성 가축전염병 차단방역을 통한 친환경 축산 예산 109억 등 총 251억을 확보해 농업인의 소득 향상은 물론 문경 농업발전을 위하여 역동적인 행정을 추진했다. 그에 힘입어 문경은 대를 이어 농사를 지을 청년들이 몰려들고 있어 조만간 농업도시로 등극 할 날이 멀지 않았다. ◇ 유통 성장기반 다지기 ‘착착’ 진행 그리고 도약문경 마성면에 위치한 문경거점산지유통센터는 문경사과의 메카이다. 입구부터 향긋하고 달달한 사과향의 유혹이 시작된다. 선별 작업장에는 규격별로 분류된 명품 문경사과가 형형색색의 박스에 포장되어 전국으로 팔려 나간다. 2009년 개장 이래 지난해까지 11년 연속 흑자 경영은 물론, 2020년에는 매출 300억을 달성하는 성과를 올리며 문경사과 산업의 큰 축을 담당했다.지난해는 개장 12년만에 30억원을 들여 최첨단 기능을 강화한 자동화 시설로 탈바꿈했다. 무게와 색태, 당도는 물론 내부의 부패 정도까지 판별하는 최첨단 선별라인과 로봇이 적재를 대신하는 무인화 시스템 도입으로 작업자의 피로도를 대폭 줄였다. 이 외에도 기존 중앙집중 냉각방식의 저온저장고를 개별 냉각방식으로 전환해 저장수율을 한층 높였다.이로써 문경거점산지유통센터는 대내외적으로 확고한 경쟁력을 갖추게 됨은 물론 유통채널의 다각화를 꾀할 수 있게 됐다.하지만, 또 다른 해결과제도 산적하다. 문경 산북면과 동로면을 중심으로 한 동부권역의 사과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수확 철 저장시설이 부족해 유통시설의 확장요구도 이어지고 있다. 매년 타 지역의 공판장으로 유출되는 물량이 늘고 있어 그에 따른 농가의 불편과 비용이 증가하고 있는데, 이는 문경시 유통조직들의 규모화와 통합체 구성을 통해 해결 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지역의 농협들과 통합마케팅 조직 구성을 추진하고 있어 문경시 전체를 커버하는 유통조직의 탄생이 멀지 않았다.시는 농식품 가공시설 신·증설 지원으로 가공을 통한 지역농산물의 안정적 생산을 실현하고 있다. 사업여건과 농가수요를 반영하여 매년 10여개의 농식품 가공업체를 발굴, 3억여 원의 재정적 지원과 다양한 경영기법도 지도하고 있다.고소득 농산물이 다양한 문경에는 사과, 오미자에 이어 절임배추 관련 사업이 후발 주자로 떠오르고 있다. 절임배추는 취향에 맞는 양념을 간단하게 버무리기만 하면 맛있는 김치가 되어 그 시장이 확대되고 있다. 이에 시는 질 좋은 배추 생산량이 많은 농암지역에 절임배추 관련 가공산업을 육성하고 지원을 확대하기로 했다.가공산업은 1차 생산물 중심 농업에서 벗어나 유통과 서비스업을 아우르는 6차 산업의 원동력이 되는 분야인 만큼 문경의 작은 나비의 날개짓이 대한민국 전체 가공산업의 큰 물결을 일으키길 기대해본다. ◇ 다양한 마케팅 전략으로 농·특산물 최고 매출 달성코로나로 인해 2020년부터 전반적으로 농산물 판매가 감소했으나, 문경시는 지난해 농·특산물 직판장의 적극적인 판촉 행사와 온라인 쇼핑몰인 ‘문경사랑 새재장터’의 리뉴얼을 통해 역대 최고인 34억원의 농특산물 판매실적을 올렸다.올해에도 문경새재와 고속도로 휴게소 농·산물직판장의 물품 다양화와 판로확대에 중점을 두고 설 명절 특판 행사를 개최해 3억 원의 지역 대표 농·특산물을 판매했는데 이는 작년 설 보다 9.4%가 증가했다.또한, 위 직판장에 입점하는 모든 농특산물은 철저한 안전성 검사를 실시해 부적합 농·특산물 유통을 사전에 차단해 문경시 농·특산물의 대외 신뢰도를 높여 고객 모두가 안심하고 구매할 수 있는 지역 대표 농·특산물 직판장으로 만들어 가고자 노력하고 있다.광범위하고 적극적인 판매방법 중 하나가 TV홈쇼핑이다.시는 사과, 오미자의 TV홈쇼핑 판매를 지원하여 2021년 28억원의 매출을 올렸다.특히, 공영홈쇼핑 9월의 인기상품으로 문경오미자가 선정되기도 하여 문경농산물은 귀한 몸이 됐다. 올해는 작년보다 TV홈쇼핑 지원을 확대해 온라인 마케팅 기반을 공고히 다져나갈 계획이다.국내 농산물 시장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판로를 찾기 위해 해외판촉 행사와 박람회에도 참가해 해외 시장 개척도 나서고 있다. 지난해 러시아와 미국에 오미자김과 오미자 액기스를 수출했고, 수출촉진을 위한 수출물류비도 적극 지원해 농특산물 판로 확대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 각종 대회 휩쓸며 축산업 중심지로 도약2021년은 축산경쟁력 강화와 친환경 축산조성의 노력의 결실을 수확하는 한해였다. 전국한우능력평가대회 입상과 경상북도 한우경진대회에서 최고상인 챔피언상 수상, 낙농육우협회가 주관한 깨끗한 목장 가꾸기 운동에서 농림축산식품부장관상 수상 등 각종 축산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기 때문이다.축산경쟁력 및 경영안정 도모, 청정미래 축산업 구현, 친환경 축산조성, 악성가축전염병 차단방역을 위해 한 해 약 80억의 사업비를 투입하여 지속가능한 축산업 기반 구축에 힘쓰고 있다.차별화된 축산농가 소득증대를 위해 가축개량, 시설장비 현대화, 축산업 선진화를 위한 ICT 융복합사업 등에 14억, 축산분뇨로 인한 환경오염 예방과 악취를 제거해 자연 친화적인 깨끗한 축산농장 조성을 위해 20억 예산을 지원하고 있다.이러한 정책과 지원이 축산농가의 소득향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다각도로 노력하고, 지역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은 물론 귀농·귀촌인 정주여건 개선에 도움이 되어 사람이 모이고 쾌적하게 함께 살 수 있는 국내 최고의 미래형 축산업 중심지가 목표이다. ◇ 순풍의 날개를 단 문경약돌 브랜드육문경약돌한우 매출액은 재작년보다 89%, 문경약돌돼지 매출액은 22%가 증가해 많은 소비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번 문경약돌 브랜드가 주목받게 된 배경에는 브랜드 농가와 관련단체의 노력과 문경시의 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문경시는 지난 2015년 브랜드 상표사용 확대를 위해 조례를 전면 개정했고, 2022년에는 문경약돌한우 1곳, 문경약돌돼지 3곳을 상표권 사용업체로 선정해 현재 28개 업체가 문경약돌 축산물을 전문적으로 유통·판매하고 있다.또한, 2018년 12월 문경약돌축산물융복합명품화사업단(이하 명품화사업단)을 출범, 다각적인 홍보 전략을 구사해 문경 약돌 브랜드를 전국에 널리 알리고 있다.축산물 유통의 멀티플렉스인 문경약돌축산물유통센터를 2020년 12월에 준공해 개장 1년여만에 문경시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으며, 코로나19 시대에 맞춘 온라인 비즈니스 밴드(문경장터 약돌며느리), SNS홍보, Youtube와 라이브커머스 등을 운영해 다양한 판매망을 구축했다.그 외에도 타 지자체와 MOU를 통한 홍보·판매 활성화 및 신제품(약돌곰탕, 약돌돼지 불고기, 꼬리곰탕)을 개발·상업화 했으며, 최근 샤키테리 아카데미(소시지 전문가 육성)교육으로 가공품 전문가 양성과 이후 지역 내 개인 창업과 연결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상시거점소독시설 설치 운영으로 가축질병 완전차단 기대시는 아프리카돼지열병 및 고병원성 AI의 원천 차단을 위해 거점소독시설 24시간 운영과 공동방제차량, 살수차, 광역방제차량를 동원한 양돈 및 가금 사육 농가 소독을 철저히 실시하며 총력대응 중이다.문경시 사육현황은 돼지 20호 43천두, 가금 22호 1천 522천수로서 돼지 이동 및 가금 출하 전 정밀검사를 실시하고 있으며 전담관리 공무원을 지정해 전화예찰·방역수칙 준수상황 점검 및 소독에 관한 지도를 강화하고 있다.지난 2월 이근 시·군에 이어 문경읍 관음리에서 야생멧돼지 ASF 양성 확진 폐사체가 발견됨에 따라 긴급 차단 울타리 설치, 경광등, 기피제, 출입통제 안내문, ASF 발생지역 입산금지 현수막을 설치하고 집중수색을 실시해 현재까지 추가 발생은 없는 상황이다.아울러 악성가축질병의 유입차단과 질병발생 시 신속한 차단방역으로 질병확산을 최소화하기 위해 현재는 시민운동장 주차장에 임시로 소독시설을 운영하고 있지만 축산차량이나 운전자를 소독하기에 미흡하다.이를 보완하기 위해 불정동에 14억원의 예산으로 250㎡ 규모의 거점소독시설을 공사 중에 있다. 사무실, 차량소독실, 대인소독실, GPS 축산차량 인식기능은 물론 오폐수 처리시설을 완비한 최첨단 시설로 지워진다. 4월말 공사를 마치고 한 달 간의 시험운전을 거친 뒤 6월부터 정상 가동되면 완벽한 동물전염병 차단이 가능해져 우리 문경은 가축전염병 청정지역으로 더욱 거듭나게 된다.농업이 ‘생명산업’이라면 가공과 유통은 ‘생명연장산업’이다.축적된 경험과 기후의 보장이 1차 농산물 생산의 성공 조건이라면 가공과 유통은 다양한 아이디어와 끝없는 재화 보급이 성공의 필수조건이기 때문에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만 고용창출과 부가가치가 높은 분야이기도 하다.코로나19 팬데믹에 따른 노동시장 불안정, 기후불손, 예상하기 힘든 가격 변동에 더하여 소값 하락과 사료값 폭등으로 올해도 농업 현실은 녹록치않다. 하지만 끝임 없는 농업인들의 자기 개발과 행정의 지원의 조화로 농업은 문경을 대표하는 산업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강남진기자75kangnj@kbmaeil.com

2022-04-18

“청년이 조국 위해 희생하는 건 당연하지 않나”

훈장(勳章)이란 ‘국가나 사회에 공로가 뚜렷한 사람에게 나라에서 그 공적을 표창하기 위해 수여하는 기장(記章·기념장)’을 뜻한다.범위를 좁혀 볼 때 무공훈장은 ‘전쟁 혹은, 그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 때 전투에 참가해 뚜렷한 무공을 세운 자에게 수여하는 훈장’을 의미하는 것.72년 전. 한국은 국가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처해 있었다. 소비에트연방의 지원을 받은 북한 조선인민군은 단 3개월 만에 남한 땅 거의 대부분을 집어삼켰다. 국군과 UN군의 최후 방어선이 낙동강 일대에 구축됐다.숫자나 화력 모두에서 조선인민군의 위세에 눌렸던 국군 수뇌부는 젊은이들의 애국심에 호소해 적지 않은 학도병과 청년지원병을 모았고, 이들은 체계적인 군사 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급하게 전선으로 투입됐다.한국전쟁 초기. 10대 후반 학도병과 20대 초중반 청년지원병이 주축이 돼 눈에 띄는 전과를 올린 전투가 적지 않았다. 1950년 9월 15일 장사상륙작전도 그런 사례의 하나다. ▲조선인민군 2군단과 전투 과정서 적지않은 이들 생명 잃어미국이 제공한 상륙선 LST문산호에 오른 772명의 학도병(청년지원병 포함)은 목숨을 건 전투를 조선인민군 2군단과 벌였고, 작전 수행과 퇴각 과정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생명을 잃었다.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양영조 책임연구원은 논문 ‘6·25전쟁 초기 장사상륙작전의 전개과정과 성격’에서 아래 3가지를 강조한다.첫째 “육군 독립 제1유격대대는 문산호의 좌초와 태풍으로 인한 파고 등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부대장의 지휘 아래 피해를 최소하고, 상륙작전을 전개했다.”둘째 “낙동강선 일대의 북한군 주력의 전력을 약화시킴으로써 한국군 제1군단 작전에 크게 기여하였다.”셋째 “아군의 유격부대가 적의 후방인 영덕지구에 상륙하여 적의 판단을 흐리게 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간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었다.”배수용(99·한국전쟁 참전 유공자회 경북도지부 고문), 류병추(91·장사상륙작전기념사업회장), 이영희(91·전 옥천군 교육장)씨는 앞서 언급된 육군 독립 제1유격대대의 전우다. 72년 전 포탄이 바로 눈앞에서 떨어지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함께 울고 웃으며 싸웠던.18세 학도병과 26세 청년지원병이던 그들은 이제 모두 아흔을 넘겼다. 애써 말을 참지만 그때 죽어간 139명의 전우와 장사해변에 남겨졌던 50명 가까운 친구들이 피로 세운 전공을 국가가 모른 척하는 것 같아 내심 서운하다.‘전쟁 혹은, 그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 때 전투에 참가해 뚜렷한 무공을 세운 자에게 수여하는 무공훈장’을 아직 장사상륙작전 참전 학도병들에게 추서하거나 수여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육군본부는 “한국전쟁 관련 문서에 이름과 공적이 명백하게 남아 있는 사람에 한해 서훈 추천을 할 수 있다”는 원칙적인 답변을 내놓는다.육본측의 입장도 일면 이해가 가지만, 생존 학도병들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답답함을 느꼈다.아래 배수용, 류병추, 이영희 씨가 학도병과 청년지원병으로 참전하게 된 이유와 장사상륙작전 당시의 경험을 요약하는 것으로 이 답답함이 기자만의 것인지 독자들에게 묻고 싶다. ▲진로 고민하는 외손자에게 “투철한 국가관을 가진 군인이 되라”경북 경산시 백천동에 거주하는 배수용 고문은 거의 한 세기를 살아낸 사람이다. 그 나이면 육체가 쇠할 때가 됐다고 생각되지만, 천만에다.배 고문은 혼자서 1시간 30분 버스를 타고 경산에서 포항으로, 거기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영덕군 장사해수욕장으로 왔다.그곳은 자신이 1950년 9월 쏟아지는 조선인민군의 기관총탄 속에서 두려움 떨쳐내며 싸웠던 장사상륙작전의 현장. LST문산호를 본떠 만든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 앞에 선 그가 말했다.“내년이면 백 살이 된다. 1950년에 지원병으로 참전해 1954년까지 군대에 있었다. 장사상륙작전 이후 육군 2사단에 편입돼 수십 차례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했다. 두렵지 않았냐고? 청년이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건 당연한 게 아닌가.” 진로를 고민하는 외손자에게 “투철한 국가관을 가진 군인이 되라”고 조언한 것도 배수용 고문이었다. 지금은 육군사관학교를 마치고 소령으로 근무하고 있는 외손자는 지난해 10월 1일 국군의 날 행사가 열린 포항을 찾았다. 한국전쟁 참전 군인으로 행사에 초대받은 할아버지와 함께였다. 외조부가 생명을 걸고 지킨 나라를 이제 손자가 지키고 있는 셈이다.배 고문은 경북 영덕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조그만 사업을 하다가 “국군이 북한군에게 밀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결정해 지원을 결심했다. “그 결심에는 지금도 후회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 장사상륙작전 당시 파도에 휩쓸려 죽을 고비 넘겨서울 을지로에 자리한 장사상륙작전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만난 류병추 회장도 아흔한 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했다. 청년 이상의 유머감각도 갖추고 있어 놀랐다.류 회장은 18세에 학도병으로 자원했다. 대구 대건중학교 5학년에 다니던 때다. 집으로 찾아온 모병관이 “나라가 위태롭다. 후방을 지키는 걸 도와주면 좋겠다”는 권유에 망설임 없이 그를 따라나섰다.“대구역 앞에 가니 나 같은 학도병들이 많았다. 뒤늦게 조부와 아버지에게 인사도 못한 게 생각나서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저는 잠시 집을 떠납니다. 늦을 수도 있습니다’란 작별 인사를 했다. 두 분은 내가 어딜 가는 줄도 몰랐다.”류 회장은 그때도 신문을 열심히 읽었는데 징병을 피해 외국으로 도피한 사람들에 관한 기사를 보고는 혀를 찼다고 했다.“대구역에서도 그렇고, 지원병을 태운 기차 안에서도 그랬고, 훈련장에서도 도망칠 수 있는 기회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도망칠 것 같았으면 아예 자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류병추 회장은 함께 학도병이 된 친구 강정관(당시 대구 계성중학교 5학년)씨와 “우리는 절대로 흔들리지 않고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청년에게 주어진 국방의 의무를 수행할 것”이라 약속했고, 그 약속은 한국전쟁 기간 내내 그대로 지켜졌다.독립 제1유격대대 3중대 소속 학도병이던 열여덟 살 청년 류병추는 장사상륙작전 당시 파도에 휩쓸려 죽을 고비를 넘겼고, 장사상륙작전에서 퇴각한 이후에도 영천과 홍천, 춘천과 청평에서 생사를 건 전투를 여러 차례 치렀다.춘천에서는 잠깐이지만 조선인민군의 포로가 됐었고, 총상을 입어 군 병원에 오래 입원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류 회장의 태도는 단호하고 명쾌하다.“나라가 없다면 내가 있을 수 있겠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는데 작은 몫이나마 했다는 자부심이 나를 전쟁 이후에도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해줬다.” 장남을 전장으로 보낸 아버지 심정은…이영희 전 교육장아버지 뜻에 따라유서 쓴 후 학도병 지원옥천군 교육장을 지낸 이영희(91)씨 역시 장사상륙작전에 참전한 학도병이다. 그는 자신이 겪은 경험을 ‘장사상륙작전의 군번 없는 학도병’이란 책으로 펴냈다. 이 책은 이 전 교육장의 생생한 전쟁 체험을 담고 있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한국전쟁이 시작됐을 때 충북 영동농업중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 전 교육장은 전쟁의 포화를 피해 아버지와 함께 대구로 피난을 갔다.너무 어려 보여 입대를 피할 수 있었으나, 이영희 전 교육장의 아버지는 가문을 이어갈 금쪽같은 장남에게 입대를 권한다.‘다른 학생들은 모두 조국을 위해 싸우는데 내 아들만 군대에 보내지 않는 것은 정도(正道)가 아니다’라고 생각한 부친의 뜻을 알아챈 이 전 교육장은 유서를 쓴 후 아버지와 함께 대구역 앞으로 가 학도병에 자원한다.모병된 수백 명 학도병들 사이에 섞여 멀어지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 전 교육장 부친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전장(戰場)으로 아들을 보내는 아버지의 마음. 짐작조차 쉽지 않다.장사상륙작전에서 조선인민군의 고지로 진격하다 포로가 된 이영희 전 교육장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탈출했고, 이후 육군 3사단과 9사단에 소속돼 정전 협정 때까지 학도병으로 위국헌신 했다. 전쟁이 끝난 후 학업을 마친 이 전 교육장은 평생 교육자로 살았다.그는 말한다. “어떤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인간은 결코 희망을 꺾지 않는 강하고 아름다운 존재다. 나는 그것을 전쟁을 통해 깨달았다”고./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4-12

붓으로 먹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서예다

서예란 무엇인가. 그냥 붓으로 쓰는 글씨에 그친다면 서예가를 욕보이는 소리가 될 것이다. 필가묵무(筆歌墨舞), 붓이 노래하고 먹이 추는 춤이다. 생명이 있어야 한다. 서예는 살아 있는 예술이어야 한다.서예가 율산 리홍재에게 서예는 춤이고 음악이고 스포츠다. 그는 끈질기게 자기를 고집한다. 자기 목소리를 찾아 자기 노래를 부르듯 글자 한 자 한 자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일을 한다. 그것이 타묵 퍼포먼스든 한글이든 한문이든 상관없다.첫눈에 보고 ‘우와’하는 환성이 나오는 것이 예술이다. 그에게 서예는 스스로 감동하고 엑스터시를 느끼며 예술적 오르가즘의 지경에 닿게 하는 마법이다. 노랫말에 리듬과 강약과 박자와 고저장단을 넣으면 노래가 되듯 서예는 화선지에 먹물로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다. 그것이 자신의 노래여야 진정성이 있고 생명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 코로나 팬데믹에도 창작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지난해에는 한국예총으로부터 한국예술문화명인 타이틀을 얻고 퍼포먼스도 벌였다.△코로나로 모든 대면활동이 일시 정지된 2021년엔 명인전과 TV생중계된 서예퍼포먼스를 통해 시민들에게 팬데믹 상황을 이겨내라는 응원 활동을 했다. 2019년에는 독도에서 퍼포먼스를 펼쳐 국민들의 독도에 대한 관심을 끌어냈다. 나이 60에 ‘율산 이홍재 60년 명품전’을 열었다. 그동안 작품을 망라해서 서예인 이홍재를 보여줬는데 올해는 내 나이 66에 맞춰 미(美, 六十六)전을 가질 생각이다. 미(美)를 풀어쓰면 한자 六十六을 거꾸로 쓴 상형이 된다. 서예는 예술 창작활동이어야 하고 어떤 이유로도 중단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기획하는 거다.- 우리가 서예라고 부르는데 같은 한자 문화권인 중국에서는 서법(書法)이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서도(書道)라고 쓴다.△서예 서도 서법 다 같은 것이다. 글씨를 쓸 때 중국은 필법을 중시하고 일본은 검도 다도처럼 글씨도 도를 닦듯 수양해야 한다는 뜻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서예라고 해서 도를 무시하거나 법을 몰라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말이 나라별로 문화가 달라 그렇다는 것이지 모두 붓으로 쓰는 글씨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장기화되면서 서예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 같다. 서예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은 역입이니 중봉이나 삼절 등 서법 기초부터 배우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붓글씨를 배우는 사람들이 너무 법첩(法帖)에 의존하거나 중봉(中奉)을 의식하는 데 대해 나는 반대한다. 파중봉해야 글을 제대로 쓸 수 있다고 강조하곤 한다. 많은 사람들이 중봉을 붓의 끝으로 알고 있는데 사람이 허리로 서 있고 움직이듯 중봉은 붓의 허리다. 붓끝이 아니다.기초가 중요하지만 늦은 나이에 서예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기초부터 시작해서는 죽을 때까지 제대로 글씨 한 번 써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서예를 시작하고 30년이 되어도 아직 초보자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많은 서예가들을 보아왔다. 잘못된 교육 탓이다. 마치 평생 영어교육을 받아도 외국인을 만나면 영어 한마디 못하는 영어교육과 같은 것이다. 예전에 한국인 교사가 a b c d부터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원어민 교사가 Good morning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공을 멀리 던지기 위해 팔을 뒤로 빼서 다시 앞으로 던져야 하지만 가까이 던지는 것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더구나 그 동작도 익숙해지면 순간 이동이 가능해 진다. 언제까지 뒤로 빼기만 하여서는 더 이상 진보가 없다.지금 잘 걷고 있는 성인들에게 새로 걸음마를 가르치기보다 지금 걷는 걸음걸이를 수정하고 숙달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잘 걷고 있는 성인이 느닷없이 걸음마를 새로 배워서야 언제 달리겠느냐.- 아주 우문 같지만 어떻게 해야 글씨를 잘 쓸 수 있나. 글씨를 잘 쓰려면 기초부터 차근차근 그렇게 배워야 하는 것 아닌가. 서예를 가르치는 서실에서는 왕희지나 구양순 등 옛 서예가들의 법첩을 따라 쓰기를 강조한다.△따라 쓰는 데 너무 집착하지 마라. 처음은 따라 쓰더라도 지금 왕희지를 배우고 닮아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2천년전의 법첩을 따라 쓰는 것은 현실을 넘어설 수 없다.세상사 다 그렇다. 글을 잘 쓰려면 욕먹을 각오를 해야 한다. 욕먹는 것을 두려워하면 안 된다. 욕 얻어먹을 줄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그리고 무엇보다 내 것을 만들어야 한다. 필법에 억매이고 법첩에 갇히게 되면 창작의 의지가 밟혀버린다. 전통은 답습하는 것이 아니다. 법고(法古)는 창신(昌新)에 방점이 찍혀 있다. 철두철미 내 것을 만들어야 한다. 먼저 자신이 반해야 한다. 자신의 글씨를 보고 자신이 흡족해 하고 만족해야 한다.글씨체에서도 전서와 예서, 해서, 행서와 초서는 우리 몸의 다섯 손가락처럼 모두 한몸이고 그 다섯을 아우르는 글씨를 쓰는 것도 같은 이유다.- 서예가 캘리그라피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서예가 세계화하기 위해서는 어떤 절차나 노력이 필요한가.△갤리그라피를 통한 서예의 세계화는 우선 작가들의 능력부터 쌓아야 한다, 서예가 예술이라면 서예의 세계화도 그렇다. 한 번에 딱 보고 ‘뻑’ 가야 한다.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추상화를 보고도 감탄하듯 멋진 글씨 앞에서는 감탄사부터 나오게 된다. 그것이 예술로서의 서예다. 그렇다면 열심히 글씨를 본뜨듯 베껴서야 쓴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일찍 서실을 열었고 수많은 제자를 길렀다.△내게서 배워서 다시 후진들을 교육하는 서예가가 전국적으로 100명은 넘을 것이다. 그들은 더러는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수준의 서예를 가르치기도 할 것이고 혹은 대학생 수준의 서예를 가르치기도 할 것이다. 나에게서 배웠다고 모두 같은 방법으로 같은 수준의 교육을 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그랬듯. 저마다 색깔을 갖고 가르치고 있을 것이다.- 전국적으로 수많은 서예 공모전이 실시되고 있다. 시전과 국전 등 크고 작은 서예전의 심사위원을 해 본 경험으로 어떤 작품들이 많이 나오고 어떤 작품들이 입상할 가능성이 높나.△공모전은 공모 주최측의 입상 조건이 있을 것이고 거기에 맞춰주는 것이 중요하다. 수많은 공모전의 심사를 맡아본 결과 보통 서예전에서는 대작이나 걸작이 나오지 않더라. 그 수준이 초보를 벗어난 정도가 대부분이다. 예술작품은 거의 없었다. 그러니 입상이라는 것도 서예를 ‘앞으로 열심히 해라’ 하는 식의 격려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특히 우리나라에서는 툭 하면 국전을 붙이는데 대한민국 국전이라면 대통령이 상을 주어야 국전이 된다. 마찬가지로 시전이면 시장이, 도전이면 도지사가 대상을 주어야 한다. 나는 심사할 때면 자신의 색깔이 분명한 글씨를 입상작으로 뽑으려 노력한다.- 20대에 이미 개인전을 열고 40대에 국전 초대작가 반열에 올랐다. 이른바 세상이 인정하는 서예의 대가가 됐다. 유홍준은 추사를 이야기하면서 글씨에 신품(神品)과 법품(法品)과 묘품(妙品)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본인은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신품이라는 평가를 인정하나?△그렇지 않다. 어릴 때부터 붓을 잡긴 했지만 남보다 서예에 소질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엄청난 노력을 했다. 수많은 글씨를 배우고 썼다. 그런 면에서는 배우고(學而) 노력하는(困而) 형이었다고 해야 하나.서당 훈장이던 조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한자에 호기심이 많았다. 또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 미술반에 들기는 해도 서예의 길을 평생 걷게 될 줄은 몰랐다. 단지 한자를 즐겨 익혔고 한문 공부를 독학했던 정도였다. 그러다 스무 살에 대한서예원에 들어갔다. 스승은 석재와 죽농의 맥을 이은 죽헌 현해봉 선생이었다. 그 스승한테 배운 것은 글씨보다는 의리 하나였다. 그분은 펜글씨를 정말 잘 쓰셨다. 그러나 붓을 잡으면 왜 그런지 머뭇머뭇하셨다. 나는 스승이 볼 때는 법첩을 따라 썼지만 스승이 보지 않을 때는 내 멋대로 글씨를 만들어 쓰고 연구했다.- 스물둘에 서실 원장이 됐고 스물넷에 서울미술제 초대작가가 돼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이십대에 4번의 개인전을 연다. 율산의 색깔은 어떤 색인가.△서예야말로 아는 만큼 보인다. 알아야 한다. 많이 써봐야 한다. 자꾸 써야 한다. 그런데 법만 따지지 말고 쓰면서 터득해야 한다. 자신의 것을 만들어야 한다. 노래로 말하면 자신의 노래를 만들어야 한다. 조용필 나훈아의 노래는 아무리 잘 불러도 조용필 나훈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지금 젊은이들의 아이돌의 음악을 봐라. 자신들의 노래를 부르지 않는가. 지금 세상은 쓰는 서예에서 보는 서예로 바뀌고 있다.가수들은 저마다의 색으로 노래한다. 서예도 그런 것이다. 모두가 똑같을 수는 없다. 나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 감동을 주어야 한다. 감정을 실어야 노래가 되듯 글씨에도 자신의 감정을 실어야 된다.- 서예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통념이다. ‘소년 문장은 있어도 소년 명필은 없다’는 말에는 동의하나.△아니다. 소년 명필도 있을 수 있고 실제 있다. 지금 재주가 있는 사람이 제대로 배우고 닦으면 명필이 될 수 있다. 나이가 들면 경륜이 쌓이고 글이 연륜이 묻어나 완숙해진다. 잘못 시작하면 30년 써도 초심자를 면하지 못한다.- 1997년 대형 붓으로 서예 퍼포먼스를 펼친 이래 ‘타묵(打墨)’은 율산을 전국적 명사로 만들었고 드디어 한국예술문화명인에 선정됐다. 덕분에 서예계에서는 이단아라거나 예술계에서는 괴짜라는 별명도 얻었다. 대가의 반열에 오르고도 기인이라는 평도 있다.△괴짜라고? 그야말로 아는 만큼 보이는 거다. 처음 타묵 퍼포먼스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서예를 욕보인다. 예술을 형편없이 실추시킨다. 서예를 희화화하지 마라’는 식으로 반응하면서 타묵을 비난하기도 했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그랬다. 그런데 그냥 쇼를 하는 것이 아니다. 정적인 예술인 서예를 대중이 현장에서 눈으로 보는 순간의 무용과 소리로 듣는 음악의 경지로 승화시킨 것이 타필비묵(打筆飛墨)이다. 지금은 퍼포먼스에서 업그레이드 돼 공공 행사에서 자주 공연되고 있기도 하다. 세상이 인정한 증거다.- 율산의 서예 세계 지향점은 어디인가.△예술은 기술이 아니다. 예술은 그 끝이 없다. 예술은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롯이 나로 붓으로 노래하고 춤추는 서예가이고 싶다. 그 속에서 예술적 오르가즘을 느끼는 것, 그것이 율산 서예의 진수다.예술은 야생에서 자란다. 온실에서 키워낸 나물은 다르다. 온실에서 자란 봄나물이 산야에서 겨울 추위를 견뎌내고 피어난 봄나물의 맛을 내지는 못한다. 그런 야생화 같은 예술을 할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붓을 잡고 지금을 즐기며 가슴으로 노래하고 춤추는 서예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할 일 많아 죽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나의 작품으로 전시관을 열어 서예 전 과정을 전시하는 것이 목표다. /이경우 편집위원

2022-04-11

청송 리모델링… 낮과 밤을 모두 아름답게

작지만 깨끗하고 인정 넘치는 도시. 전국적으로 유명한 특산물인 사과와 철마다 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주왕산의 절경, 빼놓으면 아쉬운 사진 촬영 명소인 주산지….청송군을 떠올리면 이어지는 이미지들이다. 수려한 자연 경관과 더불어 매년 심혈을 기울여 진행한 도시 환경 정비로 청송은 ‘산소 카페’라는 별칭을 확인하기 위해 누구나 한 번쯤은 다녀오고 싶은 매력적인 여행지로 발돋움하고 있다. 주민들 삶의 질도 높아졌다는 전문가의 평가도 나온다. 취재를 위해 3월 말 돌아본 청송 시가지는 거미줄처럼 어지럽던 전선이 사라지고, 낡고 허름한 간판도 깔끔하게 교체돼 있었다. 이는 청송군청 공무원과 군민이 힘을 합쳐 도시재생을 위한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한 결과다.그렇다면 몇 년째 쉼 없이 지속된 청송군의 도시 환경 정비·재생사업은 어떤 구체적인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을까. 아래에서 이를 세밀하게 짚어본다. ◆전신주와 통신주 지중화로 도시 미관 개선 효과청송군은 지난 2020년 봄부터 청송읍 소재지에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전신주와 통신주를 지중화함으로써 ‘전선 없는 깨끗한 거리’를 만들기 위한 사업을 추진했다.더불어 군은 가로 경관도 정비해 도시브랜드로 설정한 ‘산소카페 청송군’의 이미지에 걸맞은 깔끔한 도시 미관을 구축한다는 방침을 세웠다.사업은 청송읍 월막리 중앙로(청송버스터미널-구 군민회관) 1.3km 구간에서 진행됐다. 총 사업비는 67억원. 한국전력공사가 30억원을 부담하고, 통신사가 12억원, 청순군비도 25억원이 투입됐다.본격적인 사업 추진을 위해 한국전력공사와 4개 통신사(LGU+·SKB·SKT·LG헬로비전)가 사업이행 협약서를 체결했고, 그해 5월 실시설계를 발주한 후 여름엔 주민공청회를 거쳤다. 사업 추진 과정에서 청송군이 특히 신경을 쓴 부분은 주민들의 통행에 불편이 없도록 하는 것. 이를 위해 사업비 이외의 별도 군비 17억원을 사용해 포장 복구, 보도와 상·하수도 개선 등 가로 경관의 정비에도 힘썼다.“전선 지중화사업은 청송읍 농촌중심지활성화사업과 연계해 추진됐고, 보행환경과 도시미관 개선을 통해 ‘산소카페 청송군’의 이미지 개선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 청송군청 관계자의 설명.당시 청송군은 청송읍 금월로 전선지중화사업도 2022년 연말 준공을 목표로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다.올 3월엔 진보면 소재지 전신주·통신주 지중화 사업도 진행됐다.사업 구간은 진보면 소재지 중심도로(이촌리 마을회관-진보체육문화센터) 2.57km. 여기엔 132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됐다.이 도로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고 도로 폭이 좁아 주차난이 극심했다. 또 전봇대까지 설치돼 있어 주민 안전도 위협해 왔다. 이에 청송군은 도로 확장과 인도 정비, 상·하수도 보수 등 가로경관을 새롭게 정비하는 것으로 깨끗한 도시 미관을 구축한다는 계획이다.사업은 한국전력공사와 통신사의 협약 체결 완료 후, 행정절차를 마친 뒤에 오는 9월에 착공해 2024년 12월 마무리될 예정이다. ◆깔끔하고 세련된 간판은 도시의 얼굴 역할무질서하게 들어선 간판을 정리하고 개선하는 사업도 청송군이 추진한 주요한 도시 환경 개선사업의 하나다. 이를 위해 지난 2020년 여름 ‘청송읍 중앙로 3차 간판개선사업 주민설명회’를 열었다.군은 아름다운 거리 조성과 쾌적한 주거환경 정비를 위해 2019년에도 ‘중앙로 2차 간판개선사업(청송농협-청송터미널 구간)을 진행한 바 있다.이 사업을 위해 도비 1억500만원을 포함해 총 3억5천만원이 투입됐다. 그 결과 금곡1리 56곳, 월막1리 41곳, 달기약수탕 인근 부곡지역 30곳 등 모두 127곳의 낡은 간판이 새롭게 디자인된 깨끗한 간판으로 바뀌었다.도시환경 전문가들은 “간판개선사업은 아름다운 경관조성 뿐만 아니라 사람들 삶의 질 향상과 관광객 유치에도 도움이 된다”고 조언한다.지난해 12월 3일엔 행정안전부가 주관하는 ‘2022년 행안부 간판개선 추가공모사업’에 청송군이 최종 사업지역으로 선정됐다. 이를 통해 진보면 진보로와 진안로 일대 450m의 거리 환경을 새롭게 단장 중이다.행안부의 추가 공모사업에는 전국 7개 지자체가 최종 선정됐다. 경북에서는 청송군이 유일하다. 군은 공모사업으로 1억8천만 원의 국비 예산을 확보해 군비 1억2천만원을 포함한 총 사업비 3억원으로 진보면 중심소재지 64개 업소를 대상으로 노후화된 간판을 매력적인 디자인으로 교체하게 된다공모사업 선정 후 청송군은 “이번 간판개선사업은 낡은 간판을 예쁘고 감각적인 간판으로 바꿈으로써 쾌적한 거리 환경이 조성될 것”이라 기대하며 “거리의 간판 조명등도 LED등으로 교체해 에너지 효율도 높여갈 방침”이라고 말했다. ◆지속적 도시재생 추진으로 낮과 밤이 모두 아름다운 도시로도시재생을 위한 청송군의 노력도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2020년 11월엔 ‘진보진안의(義) 상생(相生), 함께하는 삶’이라는 명칭의 프로젝트로 국토교통부가 주관하는 도시재생뉴딜사업 공모에 선정됐다.도시재생뉴딜사업은 노후 주거지와 쇠퇴한 구도심을 지역 공동체 주도로 활성화해 주거환경 개선과 공동체 활성화, 일자리 창출 등을 통해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는 사업이다. 당시 국토교통부로부터 국비를 지원 받은 지차체는 전국 47곳이었다.청송군은 이 공모사업 선정으로 마중물 사업비 130억원을 확보했고, 2024년까지 생활SOC 공급, 골목길 재생사업, 상권 활성화사업 등을 펼쳐 진보진안지구 맞춤형 재생사업을 진행하게 됐다.진보진안지구 사업을 시작으로 2027년까지 청송 2개 지구, 진보 1개 지구에 추가로 도시재생뉴딜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이와 관련해 진보진안지구 도시재생 주민협의체 권동준 위원장은 “도시재생뉴딜사업의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도록 주민협의체를 중심으로 지역 발전을 위한 상생·협력관계를 구축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지난해 7월에도 경사가 있었다. ‘청춘, 인생 제 2막을 열다! 5080 청춘삶터’ 사업이 국토교통부 주관 도시재생인정사업 공모에 선정된 것.도시재생인정사업은 위험·장기방치 건축물의 긴급정비 등 시급한 사업을 지원하는 것이다. 최종 심의를 통해 공모에 선정된 지자체는 모두 11곳.공모사업 선정으로 총사업비 83억3천만원을 확보한 청송군은 2023년까지 구 보건의료원(건축물 안전등급 D)을 철거해 ‘5080 신중장년층 세대’를 위한 건강·취미활동·소통공간으로 신축한다.도시재생뉴딜사업부터 도시재생인정사업까지 선정된 청송군은 “일련의 도시재생 사업을 의욕적으로 진행해 지역이 활력을 되찾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내놓았다.일찍부터 도시재생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이에 공을 들여온 청송군은 이미 2019년 군청에 전담 부서를 만들고, 도시재생주민대학도 운영해 왔다. 체계적 계획 수립을 위한 주민공청회도 여러 차례 열렸다.지난해 말엔 국토교통부 주관의 ‘용전천 마실길, 사람이 모이는 월막(月幕) 만들기’ 사업에 선정되는 겹경사도 있었다.이 사업은 총사업비 1억5천만원으로 주민 참여형 마을 가꾸기 등을 진행하게 된다. 사업이 진행되는 지역은 용전천 마실길 일원이다.이외에도 청송군은 ‘밤이 낭만적인 도시’를 만들기 위해 청송읍 용전천 주변에 경관 조명을 설치해 어두운 밤을 환하고 밝혔다. 이는 치안 유지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이처럼 도시환경 개선과 도시재생을 위한 청송군의 노력은 오늘도 현재 진행형이다. 2022년 새 봄을 맞은 청송은 낮과 밤이 모두 아름다운 도시로 진화하고 있다./김종철·홍성식 기자

2022-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