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이 봄, 책속의 낭만을 찾아서

홍성식기자
등록일 2023-04-04 18:49 게재일 2023-04-05 16면
스크랩버튼
피고 지는 봄꽃들 속에서 읽어봄직한 2권의 책
책방을 돌아보는 건 꽃 사이를 산책하는 것 이상의 기쁨을 준다. /언스플래쉬
책방을 돌아보는 건 꽃 사이를 산책하는 것 이상의 기쁨을 준다. /언스플래쉬

앞다투어 화들짝 피어난 꽃들이, 한순간 난분분 떨어져 황홀한 분홍빛 풍경을 만들어내는 봄날이다. 4월은 연인끼리, 식구끼리, 심지어 혼자이어도 꽃 무더기 속으로 훌쩍 여행하고 싶은 좋은 시절.

하지만, 세상엔 꽃만 아름다운 게 아니다. 아르헨티나의 작가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는 “도서관은 지상에 존재하는 천국”이라 했다. 그의 말을 조금 확대하면 서점도 마찬가지 아닐까?

지금까지 개나리와 진달래, 매화와 벚꽃 사이를 거닐며 봄의 낭만을 즐겼다면, 이번 주말엔 책들 속에서 천국을 찾아보는 게 어떨지. 아래 봄꽃 닮은 문장으로 축조된 2권의 책을 권한다.

 

웃음·눈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자 했던 행복한 두 글쟁이

젊음이 사라진 자리에 채워진 촘촘한 지혜와 따뜻한 손길

문학이 아니라면 무엇이 이 지루한 생을 견디게 할 것인가

박철화의 ‘김현, 따듯하게 타오르는 사랑의 말’
박철화의 ‘김현, 따듯하게 타오르는 사랑의 말’

▲‘제자’가 사라진 ‘스승’에게 띄운 애틋한 편지

-‘김현, 따듯하게 타오르는 사랑의 말’

 

희귀한 상징과 은유에 관해 말하려면 먼 옛날이야기를 소급해야 한다.

지난한 자기 수련을 통해 ‘깨달은 자’가 된 석가가 사부대중(四部大衆) 앞에 섰다. 무슨 말이 나올까? 노심초사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그가 말라가는 연꽃 한 송이를 아주 천천히 들어올렸다. 모여든 이들 사이에서 술렁거림이 일었다.

“저건 뭐지?”

군중 사이에 석가가 귀애하던 제자 가섭이 자리했다. 스승의 눈길은 당연지사 거기로 향했다. 궁금했을 것이다.

“가섭아. 너는 이 상징과 은유를 이해하겠느냐?”

그런데, 제자가 씨익 웃는다. 더 놀라운 건 가섭의 웃음이 아닌 석가모니의 태도였다. 왜냐? 그가 제자보다 더 크게 웃었기 때문이다. 이는 누구나 아는 염화미소(拈華微笑)의 에피소드다.

최근 염화미소의 웃음에 더해 울음까지를 포함하며 2000년의 세월을 찰나처럼 뛰어넘는 문장을 확인했다. ‘스승’ 김현(1942~1990)을 아프고 아름답게 추억하는 ‘제자’ 박철화의 책 ‘따듯하게 타오르는 사랑의 말’을 통해서다.

제자의 아버지는 10명 가까운 형제의 장남이었다. 1960년대. 큰아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짐의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었을 터. 그 부담감은 폭음으로 이어졌다. ‘제자’는 혼자만의 공부방을 가져본 적도, 영어와 수학을 심화학습 시켜주는 학원도 다녀보지 못했다.

중고교 시절, 고생하는 어머니를 위해 재래식 화장실에서 밭으로 인분을 퍼 나르기도 했던 ‘제자’는 학력고사를 치르던 전날도 아버지의 주정 탓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붉어진 눈알로 시험을 봤다. 그럼에도 ‘제자’는 서울대에 합격한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기관지와 폐에 깃든 병과 예기치 못한 교통사고로 20대 초반을 캠퍼스가 아닌 병실에서 보내야했던 ‘제자’. 거기서 그는 고교 시절 스치듯 읽었던 ‘스승’의 책과 만난다. 병원에 누운 ‘제자’에게 ‘스승’의 문장은 죽음의 유혹을 견디게 한 치료제였다.

20대는 그런 나이다.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세상 모두가 우습고 시시하며 하찮아 보이는 시기. ‘제자’도 그랬다. 공부하는 것도, 문학에의 열망을 드러내는 것도 유치하게 생각됐다. 강의는 뒷전. 학교 인근 산을 오르내리며 시집을 읽고, 낮밤 없이 취하도록 술만 마셨다.

그런 ‘제자’를 ‘스승’이 연구실로 불렀다. 그리고는 숙제 하나를 낸다.

“강의에 들어오지 않은 걸 이해할 테니, 책을 하나 골라 그걸 비평해봐라. 네가 원한다면 포르노 소설도 좋다.”

박완서의 작품을 텍스트로 선택한 ‘제자’는 오래전부터 흠모했던 ‘스승’에게 부끄럽지 않을 리포트를 만들기 위해 악전고투(惡戰苦鬪)한다. 그걸 읽은 ‘스승’은 “너는 문장을 떠나서는 살기 힘든 인간”이라는 칭찬인지, 저주인지 모를 말을 했다.

“문학이란 것은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말의 가장 깊고 다양하며 섬세한 변주 양식이란 걸 스승은 내게 가르쳤다”고 ‘제자’는 말한다.

행복이란 주어지는 게 아니라 결핍과 고통과 싸워가며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임을 가르친 ‘스승’. 그 가르침 안에는 필연적으로 불행도 함께 존재한다는 걸 ‘제자’는 빨리 깨우쳐야 했다. 겨우 48세. 그 아까운 나이에 ‘스승’의 간에 암세포가 똬리를 틀었다.

1990년 여름. ‘스승’이 죽었다. 스물다섯이었던 ‘제자’의 울타리도 함께 무너졌다. 프랑스로 떠난 ‘제자’.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20년 넘는 세월 동안 그는 ‘스승’과 나누었던 개인적인 이야기와 둘만의 교류에 관해 입을 다물고 살았다.

여기까지 읽은 이들이라면 짐작할 것이다. 수차례 등장하는 ‘스승’은 열정적인 불문학 연구자이자 영민한 문학평론가인 김현이고, ‘제자’는 문학평론가이자 전 중앙대 교수인 박철화라는 걸.

‘따듯하게 타오르는 사랑의 말’은 전문 예술용어와 낯선 외국 언어·기호학자들의 이름이 줄줄이 열거된 책이 아니다. 생경한 문예사조와 난해한 인용으로 가득 찬 얼치기 문학평론가의 문장은 더더욱 아니다.

‘따듯하게 타오르는 사랑의 말’은 웃음과 눈물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자 했던 행복한 두 글쟁이의 ‘염화미소’인 동시에 발신인은 있지만 수신인은 부재한 ‘슬픈 연애편지’다. 그럼으로 이 봄에 읽기에 맞춤한 책이다.

박완서 단편소설집 ‘친절한 복희씨’.
박완서 단편소설집 ‘친절한 복희씨’.

▲부끄럽지 않은 삶이 만들어준 박완서의 문장

-‘친절한 복희씨’

예컨대 이런 풍경이다.

아직은 오염의 불길이 옮겨 붙지 않아 저녁놀이 핏빛으로 붉은 마을에 하나 둘 등이 켜진다. 은으로 만든 숟가락 달그락거리며 혼자 저녁식사를 끝낸 조그만 여자 노인이 바지런히 몸을 움직여 설거지를 마치곤 손에 묻은 물기를 앞치마에 훔치고 오래된 책들이 풍겨오는 향기 근사한 제 방 책상에 앉는다.

오동나무로 짠 수십 년 된 가구들. 배경 음악으론 리하르트 바그너의 장엄함보단 프레데리크 쇼팽의 섬세함이, 폴 앵카의 신명보단 조안 바에즈의 적요가 어울린다.

몸만큼이나 작은, 주름 가득한 손등 아래서 탄생하는 나이답지 않은 젊은 문장. 젊은 날의 열정이 사라진 자리엔 노인만이 획득할 수 있는 촘촘한 지혜가 들어차 새로운 세대의 무모한 모험을 안내할 지도가 그려진다. 다름 아닌 박완서(1931~2011)의 소설이다.

해가 기운지는 이미 오래. 보름을 기다려 살찌는 달의 마법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면 쪼글쪼글한 할머니는 어느새 열일곱 소녀가 된다. 그렇다. 할머니였던 시절에도 박완서의 문장은 영원히 소녀였다.

박완서의 단편 모음집 ‘친절한 복희씨’를 기쁜 마음으로 펼치며 책 마지막에 실린 ‘작가의 말’을 읽는다. 마지막에 적힌 단 한 줄의 문장.

 

‘아차산 기슭에서 길고 지루한 여름을 보내고 나서’.

 

위에 박완서가 살았던 상상 속 동네 풍경을 길고도 세세하게 묘사한 이유는 바로 이 문장이 주는 쓸쓸함 때문. 허나, 우리네 생이 매양 쓸쓸함으로만 차 있지는 않을 터. 이에 대한 박완서의 부연이 재밌다.

“이 책은 웃을 일이 없어서 내가 나를 웃기려고 쓴 것들이 대부분이다. 나를 위로해준 것들이 독자들에게도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농담 같은 문장이지만 여기에선 삶의 간난신고와 세상의 풍파를 온몸으로 겪어내며 나이 먹은 지혜로운 자의 겸양이 읽힌다.

그렇다. 문학이 아니라면 무엇이 있어 이토록 재미없고, 슬프며, 지루한 생을 견디게 할 것인가. 인간의 위무자로 역할 하는 소설, 지상의 비루함을 잠시나마 쓴웃음 지으며 잊게 하는 소설. 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친절한 복희씨’는 판타스틱을 넘어 ‘퍼펙트’하다.

이런 비유는 어떨까? 제 욕망에 못 이겨 10년 세월을 바깥으로만 떠돈 사내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등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주는 외할머니의 손길. 맞다. 박완서의 소설 아니, 그녀의 문장을 관통하고 있는 키워드는 ‘따뜻한 손길’이다.

다정하기 짝이 없는 박완서의 ‘어루만짐’은 이 책에서도 시종여일하다. ‘그리움을 위하여’ ‘그 남자네 집’ ‘촛불 밝힌 식탁’ 등으로 명명돼 실린 아홉 작품 중 어느 하나를 중뿔나게 지목해 구구절절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좋을 정도.

“박경리와 더불어 한국 현대문학의 한 산맥으로 오연하게 솟았다”라 말해도 좋을 박완서 문장의 따스한 엄정함 속을 헤매노라면 굳이 눈 밝은 독자가 아니더라도 박완서와 동시대를 살았다는 게 얼마만한 행운인지 단박에 짐작할 수 있다.

아래는 그중에서도 가장 빛난다고 생각하는 문장이다. 이런 건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온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게 아닐지.

‘그가 죽고 내가 죽는다 해도 이 세상엔 그만한 흔적도 남기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허공에서 치마 두른 한 여자가 한 남자의 깍짓동만 한 허리를 껴안고 일단 하늘 높이 비상해 찰나의 자유를 맛보고 곧장 강물로 추락하는 환을, 인생 절정의 순간이 이러리라 싶게 터질 듯한 환희로 지켜본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기획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