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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장군 말에 물 먹이던 마위지 아시나요?

심한식기자
등록일 2023-03-07 18:50 게재일 2023-03-08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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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 경산 알아가기
현재의 경산시 전경. 1970년대의 경산군(맨 아래 사진) 모습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현재의 경산시 전경. 1970년대의 경산군(맨 아래 사진) 모습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고대국가 압독국(押督國)이 문화를 꽃피우는 등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현재의 경산은 인근 대구광역시의 영향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인구 28만의 중소도시에 기업을 경영하기 좋은 도시, 문화가 살아있고 성장잠재력이 무궁한 도시, 10개의 대학에서 10만여 명의 대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는 젊고 살기 좋은 도시다.

본지는 과거와 현재를 바탕으로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경산을 살펴 지역민에게는 자긍심을, 후손들에게는 지역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내 고장 경산(慶山) 알아가기’란 주제로 기획연재물을 싣는다.

 

글싣는 순서

 

① 역사

② 산업과 경제

③ 문화와 관광

④교육과 사회복지

⑤ 미래

고대 읍락국가 압독국을 복속시킨 신라가 압량군 설치

압량군주로 군사 훈련했던 김유신 병영유적들 남아있어

조선시대 유교문화 꽃 피웠던 경산현·하양현·자인현

갑오개혁 때 군으로 개편, 일제 의해 ‘경산군’으로 통합

대구 발전과 함께 재정충원 일익 담당하는 위성도시 성장

영남대 캠퍼스 등 대학 이전·신설로 학원도시 새 이미지도

□ 경산의 유래

지역의 역사는 지역민에게 긍지와 자부심에, 과거와 현재를 통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경산은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과 선돌로 대표되는 공동체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청동기 시대와 성격을 달리하는 목관묘(木棺墓) 시대가 열리며 지금의 임당동과 옥곡동, 압량읍 신대리 일대에 임당동을 거점으로 강력한 읍락국가인 압독국이 자리 잡아 지역을 다스렸다.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압독국은 신라에 복속되고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성장하던 신라는 505년(지증왕 6)에 주군(州郡)을 설치하며 옛 압독국의 중심지에 압량군(押梁郡)을 설치했다.

삼국통일의 중심인물인 김유신이 압량군주로 군사를 훈련했던 병영유적과 말에게 물을 먹였다는 마위지 등이 남아 있다.

757년(경덕왕 16) 신라는 전국의 주·군·현(縣)의 명칭과 행정 체계를 대대적으로 개편하며 기존의 압독군을 장산군(獐山郡)으로 개칭했다.

시간이 흘러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는 940년(태조 23) 무렵 행정구역을 단행해 기존의 장산군을 장산군(章山郡)으로 개칭했다. 1308년 충선왕이 복위하자 왕의 이름인 ‘장(璋)’을 피하고자 고을 이름을 장산에서 경산(慶山)으로 개칭해 처음으로 경산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팔공산 자락에 금호강이 관통하는 경산지역은 조선 시대에는 경산현(慶山縣)·하양현(河陽縣)·자인현(慈仁縣)을 중심으로 유교 문화를 꽃피웠다. 1895년(고종 32) 갑오개혁의 하나로 경산현과 하양현, 자인현은 대구부(大邱府) 소속의 경산군·하양군·자인군으로 개편되었다가 1896년 13도인 도제(道制)로 경상북도로 편제되었다.

이후 1914년 식민지 정책에 적합한 지방행정 기구를 만든 일제에 의해 기존의 경산군과 하양군, 자인군이 통합되며 인근 신녕군의 일부가 흡수된 경산군이 기록에 등장한다.

이후 1981년 경상북도 대구시가 대구직할시로 승격되며 고산면과 안심읍이 대구광역시로 편입되고 현재 경산시의 면적이 되었다.

김유신이 훈련하던 말들에게 물을 먹였다고 구전이 전해지는 마위지 전경.
김유신이 훈련하던 말들에게 물을 먹였다고 구전이 전해지는 마위지 전경.

□ 부침의 역사

1914년 탄생한 경산군은 지금 경산시의 411.76㎢ 면적보다 넓은 473.01㎢이었다.

대구시가 1981년 7월 대구직할시로 승격되면서 고산면 일원 38.27㎢와 안심읍 22.98㎢이 편입되면서 경산군은 지리적인 손해를 입었다.

이들 지역이 발전을 거듭해 고산면은 대구시 수성구의 시지로, 안심읍은 동구 혁신도시의 바탕이 되는 등 대구시의 재정충원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어 경산으로서는 아쉬운 대목이다.

직할시는 1964년부터 1994년까지 정부의 직할하에 있던 지방자치단체의 행정구역으로 특별시와 함께 일종의 특별행정구역이었다가 1994년 12월 ‘지방자치법’ 개정으로 광역시로 바뀌었다.

경산군도 1989년 1월 오산시 등 12개 시 및 태안군 설치와 군의 명칭 변경에 관한 법률에 따라 경산읍이 경산시로 승격되며 시·군으로 분리되었다가 다시 1995년 전국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산시로 통합돼 현재는 3읍 5면 7동(행정동) 체제로 운용되고 있다.

경산의 역사에도 아픈 과거가 있다.

해방 이후 지역에도 좌익세력이 존재하며 1949년 빨치산에 의한 와촌면 박사리 양민학살사건이 일어났다. 이승만 정부에 의해 좌익세력과 일반 군민들이 보도연맹(保導聯盟)에 반강제로 가입되었다가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며 이들의 반발을 걱정한 군경에 의해 코발트 광산에서 1천여 명 이상이 죽임을 당하며 양민학살의 아픈 현장으로 기록되고 있다.

 

□ 지역의 고대국가 압독국

압독국은 경산지역을 대표하는 고대국가로 임당동을 중심으로 형성된 국가 이전 단계인 족장사회인 읍락국가(邑落國家) 였다.

압독국은 원삼국시대 영남지방에 분포하고 있던 진한의 소국 중의 하나로 삼국사기에 ‘압량소국(押梁小國)’ 또는 ‘압독국(押督國)’이란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권 34 잡지 3 지리 1 장산군편에 “장산군은 지미왕 때에 압량소국을 쳐서 빼앗아 군을 설치하였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장산군(章山郡)이니 영형이 셋이었다”고 기록하는 등 관련 기록이 여러 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현재의 압량읍이 이와 연관 있는 지명이다.

압독국이 알려진 것은 1980년대 초 임당동 고분군에서 도굴된 유물이 해외로 밀반출되려다 적발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에 걸쳐 유적 일대가 택지개발지구로 지정되며 임당유적 대부분의 발굴조사가 이뤄졌고, 임당 고분군이 옛 문헌에 기록된 압독국의 중심 고분군으로 서서히 밝혀졌다.

대구 동구 불로동 고분군과 임당동 고분군, 조영동 고분군, 진량의 신상리 고분군, 자인의 북사리 고분군 등으로 압독국의 최대 범위는 국읍(國邑)인 임당유적을 중심으로 과거 경산군 전체(대구에 편입된 고산면과 안심읍 포함)와 대구시 동구 불로동 일대까지를 포함했을 것으로 보인다.

압독국의 유적은 기원전 2세기 목관묘에서 기원후 7세기경의 석실묘까지 대략 800년 동안 단절 없이 지속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특히 5세기경에 축조된 고총 고분에서는 수많은 토기와 철기, 금동관과 금동관식, 은제 허리띠, 고리자루칼 등 최고 지배자를 상징하는 유물이 출토되기도 하는 등 번성한 문화를 꽃피웠다.

1970년대의 경산군 모습.
1970년대의 경산군 모습.

□ 지역의 발전

6·25전쟁이 끝나고 경산도 전후 복구 사업이 빠르게 진행돼 1956년 경산면이 경산읍으로 승격되고 1973년 하양과 안심이 읍으로 승격됐다.

1960년까지 경산은 금호평야와 산재한 분지에서 곡물 위주의 전형적인 농촌지역이었으나 1970년대부터 대구가 빠르게 성장하며 1980년 대구가 직할시로 승격된 뒤 점차 위성도시로서의 성격이 강해졌다.

1968년 영남대의 경산캠퍼스가 조성되고 대구지역의 대학들이 잇따라 경산으로 이전하거나 신설되면서 학원도시의 이미지가 강해졌다.

또 일반산업단지와 지식산업단지 등이 들어서고 2012년 대구지하철 2호선이 경산까지 연장되며 인구가 지속으로 늘어났고, 기업을 경영하기 좋은 도시와 살기 좋은 도시로 급성장해 가고 있다.

/심한식기자 shs1127@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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