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함산에 깃든 신라 역사와 경주 이야기<br/> ⑤ 불국의 나라를 꿈꾸다 ⑶ 불국사의 유물들
□ 신라인의 예술성 금동비로자나불
불국사에는 불교 경전의 원리가 가람배치에 그대로 녹아있다는 것을 지난 회에 밝힌 바 있다. 불국사는 ‘법화경’과 ‘무량수경’, ‘화엄경’에 근거한 세 개의 불국토가 모여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는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 극락전을 중심으로 하는 아미타불의 극락세계, 비로전이 있는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의 세계가 모여 있는 것이 불국사가 염원했던 불국(佛國)인 것이다.
불국사에 있는 유물들은 당대 불교미술의 정수가 담겨 있다. 금동비로자나불 좌상(국보 제26호)을 비롯해 금동아미타불 좌상(국보 제27호), 대웅전 앞에 있는 석가탑(국보 제21호)과 다보탑(국보 제20호)은 신라문화의 국제성과 독창성, 신라인의 예술적 창의력이 응집되어 있다.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 불리는 금동비로자나불좌상, 긴 눈썹·윤기 있는 빰 자애 넘쳐
도굴꾼에 의해 훼손된 석가탑, 복원공사 중 탑신 2층서 온전한 형태의 사리함 발견
현존하는 세계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사람들 흥분시켜
우선 비로전에 모시고 있는 금동비로자나불 좌상부터 살펴보자. 비로자나(毘盧遮那)란 ‘빛을 발하여 어둠을 쫓는다’라는 의미다. 금동비로자나불은 불상외에도 황금으로 만들어진 대좌와 광배가 있었지만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 원래 금동비로자나불은 대웅전에 모셔져 있었지만 일본 제국주의 시절 금동아미타불상과 함께 극락전으로 옮겨졌고, 현재는 비로전 주존불로 안치됐다. 금동비로자나불상은 금동아미타여래좌상,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제 28호)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금동비로자나불 불상은 양감과 적절한 신체비례 등에서 이상적이면서 세련된 8~9세기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우선 눈썹이 길게 반원으로 그려져 있고, 이마와 눈두덩을 구별짓는 음각선이 한 줄 조각되어 있다. 불상은 남성적인 정취가 물씬 풍긴다. 어깨는 떡 벌어져 있고, 젖가슴은 중량감(量感)이 확연하게 느껴진다. 허리는 잘록하고 아랫배가 은근히 나왔다. 앉은 자세도 특이하다. 얕은 듯하면서도 옷감이 흘러서인지 유난히 넓게 앉아 있는 것 같다.
천년의 세월을 견딘 불상인데도 마치 며칠 전에 제작이 끝난 것처럼 황금 도금이 벗겨진 것 없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광배를 제외하고는 손상된 부분도 거의 없다. 전신에 자비와 위엄이 넘친다. 반쯤 뜬 눈 뺨은 윤기있고 복스럽다. 턱은 두툼하면서도 약간의 군살이 있다. 그 모습 때문에 더 자애로운 느낌이 든다. 부처님의 법의는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도록 조각했는데 옷 무늬까지 처리한 부분이 대단히 사실적이다. 오른손 검지를 왼손으로 감싸고 있는 손 모양은 대단히 이색적이다. 고려와 조선시대 제작된 비로자나불이 대부분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불상의 예술성이 얼마나 뛰어난지 통일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문인인 최치원 선생은 ‘대화엄종불국사비로자나·문수·보현상찬병서(大華嚴宗佛國寺毘盧遮那文殊普賢像讚幷序)’라는 글을 써 칭찬할 정도였다.
극락전의 본존불로 봉안된 금동 아미타불좌상은 ‘무한한 수명’이라는 산스크리트어로 ‘아미타유스’(Amitayus)에서 유래하여 중생들에게 염불을 통한 극락왕생의 길을 제시하는 아미타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한문으로 번역하면 무량수(無量壽)다.
아미타불 좌상은 비로자나불좌상과 거의 동시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시기에 만들었지만 부처님의 형상은 비로자나불과는 조금 다르다. 원만하고 자비롭지만 동시에 약간 근엄한 느낌을 준다. 눈썹은 반원형이고 콧날은 오똑하다. 짧은 목과 양감이 느껴지는 건장한 남성의 체구, 두 무릎이 넓게 퍼져서 안정감을 주는 것은 비로자나불과 거의 비슷하다. 옷깃 안쪽에서 밖으로 늘어지는 옷 접힘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있게 형상화했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마치 상투처럼 두툼하게 머리카락이 솟아 있다. 어깨높이로 들어 약간 오므린 왼손은 손바닥을 보이고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에 올려놓고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약간 구부리고 있다.
□ 석가탑 2층서 발견된 세계적인 보물
불국사의 유적 중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은 역시 석가탑이다. 석가탑의 정식명칭은 불국사 3층 석탑이지만 석가탑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석가탑과 다보탑을 현재와 같이 동서로 나란히 세운 까닭은 법화경(法華經)의 내용을 구현했기 때문이다. 법화경에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데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이 옆에 나타나 설법내용이 옳다고 증명했다고 한다. 석가탑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說法塔)을, 다보탑은 다보여래상주증명탑(多寶如來常住證明塔)을 줄인 말이다.
석가탑은 수많은 설화와 소설 속에서 거론된 불국사의 상징과도 같은 건축물이다. 유명세만큼 석가탑은 영욕의 세월을 묵묵히 견디어야 했다.
1796년 정조대왕이 불국사에 하사품을 내려주었다는 ‘불교고금역대기’의 짧은 기록이 전부라고 할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불국사는 잊혀진 절이었다.
그러다 불국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66년 9월 8일 중앙일보에 게재된 석가탑과 관련된 기사 때문이었다. 기사에 따르면 “불국사 대웅전 앞에 있는 국보 제21호 석가탑이 지난 8월29일 밤 동해 남부 일대에 있었던 미진(2도가량)으로 흔들려 탑이 6도가량 남쪽으로 기울어졌으며 탑신 4개 처가 떨어지고 2층 갑석 하단부가 균열이 있었음이 8일 현지 조사에 돌아온 도교육위원회 직원에 의해 밝혀졌다”고 했다.
하지만 추후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놀랍게도 석가탑의 훼손 원인은 지진이 아니었다. 석가탑의 유물을 훔치려던 도굴꾼들이 벌인 짓이었다.
도굴꾼들은 석가탑 안에 보물이 있다는 풍문을 듣고 유물을 훔치기로 했다. 9월 3일 야심한 밤 경주 지역 택시를 대절해 불국사에 도착한 도둑 일당들은 석가탑 1층 옥개석을 들어 올려 보물을 찾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돌이 너무 무거워서 돌을 들어 올리는 잭(jack)이 견뎌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당은 이튿날 밤 11시에 다시 석가탑으로 갔다. 이번에는 일당 중 한 명이 대구에서 긴급 공수한 더 큰 오일 잭을 동원했다. 1층 옥개석을 간신히 들어 올리긴 했지만 보물이 없었다. 며칠 후 다시 불국사를 찾은 일당들은 이번에는 3층 옥개석을 들어 올렸으나 유물을 찾지 못하고 석가탑에 상처만 입히고 말았다.
석가탑의 파손이 도굴범들의 소행이라는 것을 뒤늦게 눈치챈 문화재보존위원들은 경찰에 정식으로 수사를 의뢰했고, 이후 9월 19일 도굴꾼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이들 도굴꾼들은 경주 불국사 뿐만 아니라 황룡사 초석, 통도사 승탑 등 무려 13개의 사찰에서 값을 헤아리기 힘든 보물들을 닥치는 대로 도굴했다고 한다.
이후 문화재 관리국은 석가탑을 원상으로 복원하기 위해 10월 13일부터 석가탑 복원 공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복원작업은 엉망이었다. 당시 10월 14일자 ‘경향신문’을 보면 복원작업이 얼마나 문제가 있었는지 생생하게 알 수 있다.
기사에 따르면 탑 위층부터 차례대로 해체하던 중 2층 옥개석을 들었을 때 2층 탑신석의 사리공 안에서 사리 장치를 발견하였다. 천만다행으로 도굴꾼의 손이 미치지 못한 곳이었다.
보물을 발견했다는 기쁨도 잠시 2층 옥개석을 들어 올리던 장비가 부러지면서 2층 옥개석이 미리 내려놓은 3층 탑신 위로 떨어졌다. 3층 탑신은 세 조각으로 부서졌다. 아찔한 사고에 현장을 지켜보던 주민과 관광객들은 탄식과 함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도굴범들 때문에 훼손되었던 석가탑이 재차 큰 상처를 입은 것이다.
다행히도 사리장엄구 등 탑신 2층에서 발견한 유물들은 훼손없이 무사히 수습할 수 있었다. 사리탑 안에는 작은 탑, 구리 거울, 구슬, 순금 종이로 감싼 진신사리가 들어 있는 은항아리 등이 천여 년이 넘은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온전한 형태로 발견됐다. 무엇보다 사람들을 흥분시킨 것은 같이 발견된 비단으로 싼 목판본 불경이었다. 전체 길이가 5m에 달하는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었다.
하지만 석가탑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66년 11월 석가탑에서 나온 유물 중 사리 46개가 담겨 있던 녹색 유리 사리병을 한 스님이 옮기다 떨어뜨려 깨뜨린 것이다. 이후 깨진 유리 사리병은 억지로 이어붙인 상태로 국립경주박물관 창고에 보관 중이다.
□ 화려하고 여성적인 다보탑의 매력
석가탑과 함께 불국사의 상징과도 같은 다보탑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4m로 석가탑과 같다. 절 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10원짜리 동전에도 새겨져 있는 다보탑이다.
석가탑이 남성적이라면 다보탑은 대단히 화려하고 여성적이다. 사면에 놓인 계단을 오르면 육중한 기단이 팔각의 몸체를 떠받치고 있다. 난간석과 연꽃잎 모양의 창문도 독특하다. 신라 조형예술의 집합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양한 조각들이 담겨 있는 것도 특징이다. 위로는 대나무, 매화 등 사군자 조각도 보인다.
다보탑은 1925년 일본인에 의해 전면 해체, 보수되었지만 아무런 보고서도 남기지 않고 또 탑 속에 발견된 사리 장엄구 등 많은 유물의 행방도 알 수 없어 큰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탑에 조각된 돌사자도 원래 네 마리였으나 세 마리가 일제 강점기에 사라졌다고 한다.
앞에서 바라보는 다보탑은 한쪽이 살짝 기울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토함산의 능선과 기와지붕의 용마루 선과 탑의 정상부를 이루는 선이 일직선으로 떨어지다 보니 생긴 착시 현상일뿐 실상은 똑바로 서 있다고 한다.
/최병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