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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나주 소년, 해사 생도가 되다

한국인이면서도 자유롭게 한국어를 말할 수 없던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 태어나 8·15 광복과 6·25 전쟁을 겪었다. 청장년 시절엔 포항의 허허벌판에 거대한 제철소가 들어서는 역사적 과정에서 작지 않은 역할을 해냈다. 포항제철 건설본부장으로 일했던 한경식(韓璟植) 선생의 삶에는 ‘왕국의 몰락-식민지-해방된 가난한 나라-참혹한 민족 간 전쟁-비약적 경제 발전’으로 요약되는 한국의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겼다. 지난 늦봄, 현재 그가 거주하는 전남 순천을 찾아 사흘에 걸쳐 드라마틱했던 인생 편력을 세세하게 들었다. 홍성식(이하 홍) : 고향이 전남 나주라고 들었습니다. 아직 주소가 기억나시는지요?한경식(이하 한) : 나주 영산포 오량리야. 지금은 행정구역상 명칭이 오량동으로 변했다고 해.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 태어났지.홍 : 지금 세대들에겐 까마득한 옛날이라 느껴질 겁니다. 어린 시절 기억이 아직 남았습니까?한 : 아버지와 어머니는 평범한 농부였어.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 광복되었지. 그전 일제강점기 때는 동네에서 쇠로 만든 절굿공이와 놋그릇 같은 걸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빼앗겼어. 전쟁에 사용할 물자가 필요하니까. 할머니가 아끼던 무쇠 화로를 강탈당하지 않으려고 애쓰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라. 그런 것을 뺏기지 않으려고 집 안 곳곳에 숨겨야 했지. 우리 동네에도 이른바 ‘친일파’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숨긴 물건들을 찾아내려고 집집을 뒤지던 게 기억나. 그러니 어린 마음에도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감정이 좋을 수 없었지.홍 : 또 다른 잊히지 않는 추억이 있을까요?한 : 소나무에서 흘러내리는 송진을 가져오라고 해서 그걸 모으느라 고생하던 것도 떠올라. 겨우 열 살 안팎의 애들에게는 힘든 일이었지. 게다가 학교에선 우리말을 못 하게 하고 일본어를 억지로 쓰게 하던 시절이었어. 심지어 집에서도 일본어를 쓰라고 교사들이 강요했지. 홍 : 나라를 뺏긴 민족의 서러움을 제대로 겪으신 거군요.한 : 그렇지. 형제끼리도 서로 감시하게 했으니까. 일본은 태평양전쟁이 확대되면서 전쟁 물자 조달에 총력 동원을 실시했다. 이 때문에 식민지인 우리나라는 물자 부족으로 비료와 농기구 같은 농업 생산에 필요한 물자까지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힘들었다. 여기에 노동력까지 징발해가니 농촌사회는 더욱 힘든 상황이 되었다고 ‘국사편찬위원회’는 설명한다.홍 : 형제들이 많았습니까?한 : 일곱 남매야. 남자 둘에 여자 다섯. 형님이 한 분 계시고 여동생이 많았어. 우리 집만이 아니라 예전엔 대부분 그렇게 자식을 많이 낳았지. 홍 : 다들 가난하고 어려웠지만 공부는 열심히 했을 듯합니다.한 : 지금처럼 동네마다 학교가 가까운 곳에 있는 게 아니라서 꽤 먼 길을 걸어 다녀야 했는데도 모두 열심히 다녔어.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이 공부밖에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나이 많은 학생들도 있어서 1등은 하지 못했지만 공부는 제법 잘했어. (웃음)홍 : 1945년 광복 즈음의 기억이 나는지요? 동네 분위기 같은 것 말입니다.한 : 광복되니까 선생님들이 우리말을 하셨어. 그리고 “앞으로 일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나라가 잘되려면 여러분이 더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을 해주셨지.홍 : 이른바 친일파, 일본에 우호적이던 사람들은 광복 이후 어땠나요?한 : 30년 이상 억눌린 감정이 있으니, 동네 사람들이 공출에 앞장서며 일본에 협력하던 이들을 잡아서 망신을 주고 단죄하려고 했는데 우리 아버지가 나서서 말렸어. “저들도 먹고살려고 친일한 것이니 과거는 용서해주자”고 하더라고. 부친이 동네에서 신망이 두터웠거든. 그러니까 성난 사람들도 화를 조금 가라앉히곤 했지.홍 : 중학교는 어디로 진학하셨지요?한 : 고향인 나주를 떠나 광주로 가서 광주농업학교에 입학했어. 그때는 중학교 입학시험을 쳤지. 당시 광주사범학교와 광주농업학교는 성적이 좋아야 갈 수 있었어. 그러니 그 학교에 입학하면 동네 어른들이 크게 칭찬해주었지. 지역에서 조합장을 하던 아버지도 동네 사람들에게 한턱냈어. 내 기억에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풍족하진 않아도 자식들을 대처로 보내 공부시킬 형편은 되었던 것 같아.홍 : 선생님이 중학생이던 시절에 전쟁이 터졌겠군요.한 : 맞아. 중학교 2학년 때 전쟁이 터졌어. 전쟁 탓에 학교에 못 가고 집에 와 있는데, “학생들은 학교에 인명 등록을 해야 한다”고 하는 거야. 그래서 나주에서 광주까지 여덟 시간 넘게 걸어서 갔지. 그런데 학교 농기구 창고 근처에 가니 누군가 두들겨 맞는 소리가 나더라고. 이른바 좌우익의 심각한 대립과 갈등이 학교에도 있었던 거지. 다행히 그때 나는 겨우 열다섯 살이었으니 어리다고 인명 등록만 하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어. 그즈음 우리 동네에서도 몇몇 사람은 맞아 죽기도 하고 그랬지. 전쟁이란 게 참혹하다는 걸 어린 나이에 알게 되었어.홍 : 전쟁이 끝난 후엔 어땠습니까? 한 : 광주농업학교에서 다시 시험을 보고 광주고등학교에 들어갔어.홍 :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 좀 해주시죠.한 : 1950년대 중반이었는데 그때 자취를 했어. 어머니가 귀한 아들 굶으면 안 된다며 쌀을 보내주셨지. 내가 쌀 한 말을 들고 나주에서 광주까지 오고 그랬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자식들 공부시키기가 쉽지 않았지. 신문 배달을 하면서 스스로 학비를 벌었어. 나주와 광주 사이를 오가는 버스가 다니다 말다 했으니, 집에 오가기도 쉽지 않았지. 다행히 좋은 담임선생님을 만나 학비를 면제받기도 하고, 먼저 광주에 가 있던 누님의 친구가 도와주기도 해서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어.홍 : 광주고 졸업 후엔 해군사관학교에 입교했다고 들었습니다.한 : 서울대 공대를 가려고 했는데, 해군사관학교 입학시험이 그보다 먼저 있었어. 바다를 좋아했기에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했지. 어릴 때 고향 동네 길거리에서 만나던 마도로스(matroos)들이 멋져 보였거든. 게다가 해군사관학교는 학비를 내지 않고 다닐 수 있었어. 나 말고도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많이 지원했지. 그때 사관학교 인기는 어떤 명문대학보다 높았어.1946년 1월 17일 해군병학교로 개교한 해군사관학교는 한국의 해군 및 해병대 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교육기관이다. 줄여서 ‘해사’라고 불리며, 경상남도 진해에 자리한다. 한경식 선생이 입교하던 1950년대엔 가정형편이 어려워 일반 대학 진학이 힘든 우등생 다수가 육군사관학교와 해군사관학교를 선택하기도 했다.홍 : 해군사관학교 시절 이야기가 궁금합니다.한 : 나는 해사 13기로 입학했어. 스무 살이 넘으면 키가 안 자란다던데 나는 거기서 7센티미터나 컸지. 고등학교 때는 잘 먹지 못하다가 제대로 영양을 섭취하니 그랬던 것 같아. 공부도 열심히 했어. 학년에서 5등 안에는 들었으니까.한경식1935년 전남 나주 영산포읍 오량리에서 태어났다. 광주농업학교를 거쳐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갔으나 4학년 때 중퇴했다. 이후 전남대 전기공학과에서 공부했다.대학을 마친 후 1961년 대한석탄공사에 입사해 장성광업소 전기계장으로 일하다가 1968년 포항제철로 회사를 옮긴다. 제2고로 건설과장, 제1고로 개수추진부장, 제선공사부장, 건설본부장(상무이사) 등을 거치며 포항제철의 초기 역사를 눈앞에서 지켜보았다. 1990년대엔 포스코 계열사라고 할 수 있는 승주골프장 대표이사를 지냈고, 축구팀 전남드래곤즈의 창단 작업을 주도해 사장을 맡았다.수준급의 솜씨를 지닌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하다. 홍익대 미술대학원 현대미술 최고위과정을 수료했으며, 여러 차례 개인전과 회원전 등을 열었다. 한국 제철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1981)과 산업포장(1988)을 받았고, 프로축구대상 특별상(1995)을 수상했다.대담·정리 : 홍성식(본지 기자)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한경식

2023-09-06

김춘추는 김유신이 과감하게 투자한 ‘블루칩’

출중한 능력에 빼어난 외모, 거기에 정치적 혜안까지 갖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아들은 마냥 행복하기만 할까?말이 나왔으니 연이어 질문 하나 더.그렇게 잘난 아버지는 물론, 나라 전체의 군사통솔권을 쥐고 수백 명 고위관료 위에 우뚝 군림한 외숙부까지 가졌다면 어떨까? 이 또한 조카에게 행복의 조건으로만 작용할까?한적한 평일 오후. 푸른 파도 일렁이는 경주 봉길리 해변에서 문무왕의 수중릉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런 의문들이 떠올랐다.661부터 681년까지 신라를 통치한 문무왕 김법민. 그는 무열왕 김춘추의 아들이며, 신라 태대각간(太大角干) 김유신의 조카다.재론의 여지없이 좋은 ‘외적 조건’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신라는 물론 660년 무너진 백제의 땅과 백성들까지 아버지에게 물려받았고,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는 과정에선 외숙부의 조력을 얻어낼 수 있었다.이건 각종 서적과 여러 고문헌을 통해 이미 상당수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그런데, 기자를 포한한 몇몇 사람들은 다른 각도에서 궁금증을 가지기도 한다. ‘문무왕에게는 열등감이 촉발한 내적 콤플렉스와 갈등이 전혀 없었을까’ 하는 것.문무왕은 1천342년 전 사망했다. 죽은 사람을 불러내 직접 물어볼 방법은 없으니, 그의 내면 풍경은 그저 주관적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비교적 정답에 근접한 추측을 도출해내기 위해 일단 시간을 되돌려 김춘추와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가 연애를 시작했던 시절로 가보자. 아직 문무왕이 태어나 전이다. ◆김유신, 김춘추라는 우량주(優良株)에 투자하다‘화랑세기’에는 김춘추와 문희가 맺어지게 되는 과정이 흥미로운 이야기 형태로 실려 있다. 그 시작은 이렇다.“어느 날 문희의 언니 보희가 잠 속에서 산에 올라 바라보니 서라벌에 홍수가 났다. 불길한 꿈이라 생각한 보희는 그 꿈을 동생 문희에게 비단을 받고 팔아버린다. 열흘 후 김유신이 김춘추와 축국(蹴鞠·남성들의 공놀이)을 하다가 실수로 김춘추의 옷을 찢어버리게 된다. 김유신의 부탁에 의해 바느질로 김춘추의 옷을 꿰맨 게 문희였다. 이후 김춘추와 문희는 사랑에 빠진다…(후략)”김유신은 신라가 아닌 몰락한 금관가야 출신이라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열등감의 극복을 위해선 신라 정통 귀족과 어떤 형태로든 이어지는 게 중요했다. ‘혼맥(婚脈) 형성’이 그 방법으로 선택된 듯하다.신라는 물론 당나라에서까지 탁월한 외교 협상력과 빼어난 문장을 인정받던 김춘추는 김유신이 미래를 보고 과감하게 투자한 ‘블루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그러니, 찢어진 옷을 수선한다는 이유를 들어 김춘추와 동생 문희를 만나게 한 건 철저하게 준비된 김유신의 계획이었을 터. ‘화랑세기’는 이렇게 이어진다.“1년쯤의 시간이 흐른 후 문희가 임신을 했다. 그때 김춘추에겐 이미 부인과 딸이 있던 상황. 문희를 받아들일 수도, 매정하게 내칠 수도 없었던 김춘추는 갈등했다. 그 갈등에 종지부를 찍은 건 김유신이다. 아버지를 알 수 없는 아기를 가져 집안을 망신시킨 문희를 태워 죽이겠다며 장작에 불을 붙인 것. 선덕여왕과 산책을 즐기던 김춘추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김유신의 집으로 뛰어갔고, 문희를 구한 뒤 자신의 집에 들인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김춘추와 먼저 혼인한 부인이 죽었고, 문 희는 첩이 아닌 정식 부인이 된다”는 스토리.그게 신라시대건 현대건 인간의 통념상 동생을, 그것도 뱃속에 아기를 가진 누이동생을 불에 태우는 끔찍한 방법으로 죽이는 오빠가 존재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그러니, 장작에 불을 붙이고 문희를 겁박한 김유신의 행위는 요즘 말로 하자면 ‘할리우드 액션’일 가능성이 농후하다.‘어이, 김춘추. 이래도 내 동생 문희와 결혼하지 않을 거야?’라는 협박성 제스처 말이다.◆‘삼국사기’가 평가한 문무왕의 외숙부 김유신“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봉준호가 연출한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다. 1천400년 전 김유신에게도 ‘계획’이 있었다. 그 계획은 김춘추와 문희의 결혼이 성사됨으로써 절반 이상 성공된 듯하다.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김춘추는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에 이어 신라 29대 왕이 된다. 김유신은 멸망한 나라의 망명객에서 왕의 손위 처남으로 신분이 격상됐다. 문명왕후(文明王后)가 된 동생 문희는 신라의 30대 왕에 오를 태자 김법민(문무왕)을 낳았다.김유신과 김춘추는 오랜 세월 서로가 서로에게 ‘호랑이 등에 달린 날개’ 역할을 했다. 당나라와 협정을 맺고, 백제를 병합하고, 신라 내부의 권력관계를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둘은 부정할 수 없는 동업자 관계로 살았다. 삼한일통(삼국통일)의 주춧돌이 그 시절에 놓였다.생애를 걸고 베팅(Betting)한 김춘추라는 우량주가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위치로 폭등했고, 아끼던 여동생은 다음 번 신라 왕 자리를 차지할 젖먹이를 출산한다. 바로 그 ‘젖먹이’ 어린 김법민을 바라보던 김유신은 얼마나 흐뭇했을까?김유신이 설계한 ‘혼맥 형성 프로젝트’는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수익을 가져왔다. 거기에 더해 자신의 명성 또한 천정부지로 높아졌다. 능력과 행운이 합쳐진 결과였다.김유신 사후(死後) 50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을 때 김부식에 의해 쓰여진 ‘삼국사기’에서도 ‘신라 장군 김유신’의 높은 위상이 확인된다.그와 관련된 단국대학교 사학과 전덕재 교수의 논문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의 원전과 그 성격’을 아래 인용한다.“김유신열전은 ‘삼국사기’의 열전 10권 가운데 무려 3권이나 차지할 정도로 분량이 많다. 그 이유는 일차적으로 ‘삼국사기’ 찬자(撰者·책을 쓴 사람)가 신라의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김유신을 매우 숭앙하였던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김유신열정 말미에 기술한 사론(史論)에서 ‘비록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보고의 의용이 있었더라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다면 기록이 없어 알려지지 않을 뻔하였다. 그런데 유신과 같은 이는 사람들이 칭송함이 고려시대까지 끊이지 않고 있으니, 사대부가 알아주는 것은 당연할 뿐만 아니라 꼴 베고 나무하는 어린아이조차도 능히 알고 있으므로, 그 사람됨이 반드시 다른 이들과 차이가 있다’고 언급했다. 이는 고려 사람들이 김유신을 역사를 빛낸 위대한 위인으로 칭송하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인데…(후략)” ◆문무왕의 업적 또한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지만…‘삼국사기’ 속 ‘열전’의 3할을 차지할 만큼 주요한 역사 인물인 김유신에게는 밀리지만, 문무왕 역시 허술하거나 만만한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외숙부 김유신과 아버지 무열왕이 닦은 토대 위에서 문무왕 김법민은 빛나는 행보를 보여줬다.‘한국학중앙연구원’이 요약하고 있는 문무왕의 업적은 여타의 신라 왕은 물론, 이후 우리나라 왕조의 어떤 통치자와 비교해도 부끄러울 게 없어 보인다. 이런 설명이다.“왕에 오르기 전부터 외교 활동과 백제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즉위 초에는 백제 부흥세력을 제압했고, 666년엔 당나라와 연합해 고구려를 병합시켰다. 이후 삼국 전체를 자국 영토로 삼으려는 당나라의 노골적인 대규모 침공을 물리치고 삼국통일을 완수했다. 5소경제와 군사조직인 9서당의 단초를 마련해 확장된 영역의 통치를 위한 기반을 다졌다.”이처럼 괄목할 만한 삶을 살았음에도, 문무왕에게 드리워진 외숙부 김유신과 부친 김춘추의 그늘은 너무 크고 짙었다. 때론 그 그늘이 안온함이 아닌 부담감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다음번 기사에선 김유신과 함께 문무왕에게 콤플렉스를 안겼을 수도 있는, 또 다른 한 사람 ‘무열왕의 삶’은 어떠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볼까 한다. (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9-05

초록으로 물든 즐거운 사색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기찻길을 따라 자리한 철길숲.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역사가 공존하는아름다운 생태공간으로 바뀌었다.포항의 도심을 가로지르는 철길숲에 발을 디디면녹음 짙은 나무와 푸른 하늘의반가운 인사를 들을 수 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순간평온함과 함께바람이 나뭇잎을 부드럽게 스치며아늑한 분위기가 가득하다.새들의 노랫소리가 귀를 즐겁게 감싸며일상의 번잡함을 잊게 해준다.기차의 단조로운 리듬이이제는 고요한 발걸음으로 바뀌었지만그 기적(汽笛)의 무게는 여전히 숲속에 머물러 있다. 철길숲을 따라 걷는다는 건도심의 한복판에 새겨진 옛 추억의 흔적을 따라 걷는다는 것.포항의 시간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딘다는 것.아련한 향수와 자연의 아름다움이 어우러지고과거와 현재, 인간과 자연이 스며드는 순간을 느낀다는 것.초록으로 물든 철길숲은우리의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쉼터이자창의적인 영감의 원천.그 길을 걸으며 사색에 잠겨 본다. 글 : 김재건(서울대 국문과 박사 수료) 최수정 최수정 197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포항에서 성장했다. 계명대 서양화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6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포항지부, 현상회, 계명회 등의 회원이며 포항에서 갤러리m을 운영하고 있다. ‘호미곶 이야기’, ‘비밀이 사는 아파트’, ‘꿈꾸는 복치’ 등의 책에 그림을 그렸다.

2023-09-04

“기온·습도·강수량·바람… 24시간 하늘 관측하지요”

태풍 시 행동 요령으로 중요한 것은 날씨 정보를 청취하며 기상 상황을 지속해 파악하는 일이다. 최근 태풍이 북상할 때, 경북 동해안이 가청권인 라디오를 청취했다면 이 사람을 만났을 것이다. 채널을 불문하고 많게는 하루에도 서너 번씩 태풍의 이동 경로와 전망을 실시간으로 알려주며 피해 최소화를 당부한 포항기상관측소 김정희 소장이다. 기상 현장의 최전선에서 23년간 날씨 서비스를 제공해 온 기상 전문가이다.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된 기상 정보를 더 밀착해서 제공하기 위해 시간을 쪼개어 주민들과 소통한다. 지난 9월 1일 자로 대구지방기상청으로 자리를 옮겼기에 지금은 ‘전(前) 소장’이 된 그녀를 지난달 말, 송도 솔밭에 있는 포항기상관측소에서 만났다. -포항 날씨의 기준은 포항기상관측소가 위치한 송도라고 들었다.△흔히 방송에서 나오는 ‘포항의 날씨’는 관측소에서 나온 값이다. 이외에 호미곶과 구룡포, 기계, 죽장, 청하에 무인 기상관측 장비가 있다. 포항기상관측소는 1943년에 운영을 시작했다. 대한민국 기상관측사 중에서도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곳이다. 처음에는 두호동에 있다가 60년대 송도로 이전했다. 국내에 80년 기상관측 역사를 가진 곳은 많지 않다.-밖에서는 몰랐는데 들어와 보니 잔디밭이 상당히 드넓다.△대기 상층의 기상 상태를 관측하는 ‘고층기상관측’을 위해서다. 관측장비를 실은 풍선을 날리려면 부지가 넓어야 한다. 포항기상관측소는 지난 2004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세계기상기구(WMO)가 지정한 고층 기후관측소로 등록됐다. 고층관측소가 되려면 관측의 연속성, 관측의 정확성, 관측 횟수와 고도, 관측기록 등의 항목별 요구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포항기상관측소는 60여 년 동안 5천여만 회의 고층관측 기록을 가진 고층관측의 메카이다. -기상관측소에서의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나.△매시간 기온과 습도, 강수량, 바람 등 기상 상황을 관측해서 전문을 만든다. 이렇게 만든 자료는 실시간으로 모여 국내외 정보통신망으로 공유한다. 지상관측 외에도 고층관측은 하루 네 차례, 오존관측은 매주 한 차례 수요일에 실시한다. 악천후일 경우 수요일 전후의 최적 일을 택한다. 이외에도 해상관측 등을 하며 특이기상 상황은 상시로 관측한다. 위험 기상 시에는 관계기관이나 언론과 협업하고 시민들의 전화나 방문도 처리한다. 태풍이 북상하는 저녁이면 전국 기상청에서 심심찮게 받는 전화가 있다. 태풍 사라가 몇 년도에 왔는지에 대한 문의다. 근무지를 옮겨도 똑같은 전화가 걸려 오는 걸 보면 사라에 대한 기억이 깊게 남은 것 같다. 이러한 일들을 주야간 교대근무로 처리하므로 관측소는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다.-고층관측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인가.△관측장비를 풍선에 묶어 하늘로 띄운다. 하늘에서 풍선이 터졌을 때 천천히 내려오도록 낙하산을 매달고, 풍선에 가스를 주입하고, 넓은 야외로 이동해 기구를 날리는데 준비 과정만 한 시간이 넘는다. 만약 풍선이 터지거나 정해진 고도까지 못 가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가스가 주입된 풍선은 성인 키보다 커서, 바람이 많이 불면 풍선을 붙잡고 이동하는 것조차 힘들다. 관측소에서 비양 지점까지 백 미터 넘게 포복 자세로 기어갈 때도 있다.-고생스럽게 일일이 사람 손을 거쳐야만 하나.△고층기상 관측용 자동 발사 장치가 개발되어 작년에 도입되었다. 이 장치는 정해진 시각에 자동으로 풍선에 가스를 주입해 사람 손이 닿지 않아도 하늘로 날려준다. 하지만 안정적인 기상 상황이 아닐 때는 사람의 손이 필요하고, 오존관측의 경우 센서를 달아야 해서 수동 관측만 가능하다. 오존관측은 고층관측에 비해 손이 많이 가고 까다롭다.-오존관측은 왜 하는 것인가.△대기 중의 오존은 성층권 오존과 대류권 오존으로 구분된다. 성층권 오존은 유해 자외선으로부터 생태계를 보호하고, 태양에너지를 흡수해 지구의 기후변화에 영향을 준다. 반면 대류권 오존은 주로 배기가스로 알려진 질소산화물 등에 의해 생성되며 환경에 악영향을 미친다. 오존의 90%가량은 성층권에 분포되어 있어 성층권의 오존 관측은 기후변화 감시에 중요하다. 포항기상관측소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세계기상기구(WMO)가 인정한 오존관측소이다. 1994년부터 현재까지 30여 년간 운영 중이다. -포항기상관측소의 국제적 위상이 그 정도인지 몰랐다. 말씀을 들어보니 고층관측과 오존관측은 방식이 비슷하다.△존데(Sonde, 전파를 이용한 기상 관측 기계)를 풍선에 매달아 하늘에 띄우는 방식은 동일하다. 다만 오존관측은 사전 테스트와 당일 테스트를 모두 거쳐야 하므로 일반적인 기상관측에 비해 훨씬 많은 시간과 전문성, 세심한 관측 기술을 요구한다. 고층 관측용보다 풍선이 커서 강풍이 부는 날에는 띄우기까지 위험한 상황도 빈번하게 발생한다. 최소 2명이 팀으로 움직이며 최종 관측자료 생산까지 담당한다. 오존존데 시약 제조와 고층 관측용 헬륨가스 취급 관리도 병행하고 있어 전문성이 요구된다. -하늘에서 임무를 다하고 떨어진 존데는 어떻게 되나.△풍선이 하늘에서 터지면 낙하산을 펼치면서 떨어진다. 보통 해상으로 떨어지지만, 간혹 육상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혹시나 시민들이 놀랄까 봐 설명서와 연락처를 붙여놓는다. 그래도 찜찜한지 신고하는 분들도 계시는데 존데를 발견한다면 분리해서 버리면 된다.-송도에서는 관측기구를 매단 대형 풍선이 날아가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겠다.△주민들은 자주 봐서 그런가 보다 하지만 간혹 관광객의 신고로 경찰서에서 연락이 온다. 기상장비를 매단 풍선은 희귀한 볼거리인 만큼 포항 송도로서는 굉장한 자산이라 생각한다. 고층관측 기준시간은 08시 20분, 14시 20분, 20시 20분, 02시 20분으로, 그즈음 송도해수욕장 인근이라면 하늘을 유심하게 살펴보시길 권한다.- 직원들의 노고에 비해 기상청에 대한 국민 신뢰는 낮은 편이다.△ 일상생활은 날씨와 불가분의 관계니만큼 국민적 관심은 큰데, 자연현상을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일에는 오류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어느 농민은 예보에 없던 소나기로 콩 농사를 망쳤다고 항의를 하고, 어민들은 날씨가 좋은데 왜 특보를 내려 출항을 못 하게 만드냐고 따져 든다. 관측소에서 송도삼거리만 나가도 날씨가 다르고, 해상은 육지와 완전히 다른 기상이 전개된다는 걸 충분히 설명해 드리는 수밖에 없다. 기상청은 국민 신뢰 회복을 목표로 ‘하늘을 친구처럼 국민을 하늘처럼’을 내세우고 있는데 이 문구를 늘 마음에 새긴다.- 기상청 사람들의 직업병도 있을 것 같다.△ 하늘을 수시로 쳐다본다. 구름 모양을 잘 기억하는 편이다. 1분 전에 쳐다본 구름 모양이 이렇게 변했다는 것을 기억한다. 근무지를 자주 옮기다 보니 주말부부이다. 보통 가족끼리 안부를 물을 때 “밥 먹었냐?”고 묻지만, 우리 가족은 “거기 날씨 어때?”부터 묻는다. 10년 넘게 교대근무를 하면서 굳혀진 생활 패턴도 있다. 지금은 교대근무를 안 하는데도 관측 시간만 되면 여전히 긴장한다. - 기상청에서 일하면서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 가끔이지만(웃음) 칭찬받을 때가 있다. 수고했다, 기상청이 있어 태풍을 안전하게 지났다는 한마디에 힘듦이 스르륵 녹는다. 울릉도에서 3년을 근무하고 나오면서 “이렇게 열정적으로 일하는 분은 여태껏 본 적이 없다.” “계속 여기 있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들었는데 눈물이 다 나더라. 포항에 와서는 태풍을 대비한 유관기관 긴급대책회의에 참석해 힘을 보탰다. 또 장기예보를 분석해 불빛축제 등의 행사 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도와 지자체에서 감사패를 받았다. -기후변화로 날씨의 중요성은 커졌다. 기상 전문가로서 어떤 역할을 하고 싶나.△우리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날씨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제공되어야 한다. 태풍이 동해안으로 빠져나가면 태풍이 지나갔다고 안도하지만, 울릉도는 그때부터 시작이다. 울릉도에 가보니 주민들이 기상예보에 소외감을 가지고 있었다. 울릉도기상관측소장으로 재직하며 울릉도, 독도에 대한 맞춤형 기상예보 시스템을 구축해 큰 호응을 얻었다. 오지나 벽지일수록 밀착형 기상서비스가 절실하다. 변방의 장수가 유능해야 나라가 튼튼하다는 말처럼 기상청의 역할이 필요한 현장에 더 관심을 두고 살필 것이다. 김정희 대구지방기상청 기상주사는 환경에 관심이 많아 대학에서 환경대기학을 공부했고, 2000년에 기상청 사람이 되었다. 국가직 공무원이라 여수와 부산, 안동 등 전국을 돌아다녔다. 이렇게 힘든 일인 걸 알았다면 이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 거라고 하지만 지난 23년간 최일선에서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기상 서비스를 제공했다. 2018년부터 3년간 울릉도기상관측소장을 지낸 뒤 2021년부터 2년간 포항기상관측소장을 지냈으며, 지난 9월 1일 자로 대구지방기상청으로 발령받았다. 우리나라 최동단 섬인 울릉도와 독도에서 위험기상 대응강화를 위해 ‘울릉도·독도 맞춤형 태풍기상브리핑’과 ‘독도기상정보표출시스템’을 구축했다. 지자체와 방재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울릉군과 포항시에서 방재업무유공 감사패를 받았다. 울릉도의 힘든 기상 상황을 떠올리며 쓴 시 ‘그해 겨울’로 기상청 문예전에서 시 부문 1위를 받았다. 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지나간 겨울 지나/ 다시 봄이 오면/ 가족 실은 배도 고향 찾아 돌아오고/ 바다 건너 찬바람이 꽃밭이 되어 온다.” 헌신적인 공무원에게 주는 대한민국공무원상을 올해까지 3년 연속 국민에게 추천을 받았다. 기상청 내부가 아닌 국민에게 추천을 받는 일은 드문 일이다.   /배은정 작가

2023-09-04

포스코, ‘영일만의 기적’ 넘어 ‘찔레곤의 기적’ 만든다

산업의 기초가 돼 ‘산업의 쌀’ 이라 불리는 철강. 철강 패권을 거머쥐는 것은 곧 제조업의 근간을 다진다는 뜻. 철강은 제조업 전반에 소재로 쓰이고 있기에, 제조업 발달을 위해서는 안정적인 철강 소재 확보가 필수적이다.한국은 일찌감치 ‘철’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 미국, 유럽, 일본에 비하면 후발주자지만 철강으로 나라를 다시 일으키겠다는 열정은 뒤지지 않았다. 전후 최빈국이었던 1960년대 대한민국은 일관제철소 건설에 사활을 걸었다. 실패하면 바다에 빠져 죽겠다는 ‘깡다구’로 만들어진 포항의 한국 최초 일관 제철소는 이후 반세기 동안 산업 성장의 기수가 돼 ‘산업의 쌀’로서 역할을 다해왔다. 철강이라는 토대 위에서 한국 산업은 꽃을 피웠다.포스코가 이룬 ‘영일만의 기적’은 한국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50년 역사 속에서 어느덧 아시아 철강 산업의 희망이 됐다. 포스코는 동남아시아 최초의 일관제철소를 인도네시아에 건설했다.글 싣는 순서1. 포항 영일만의 기적, 인도네시아에 닿다2. 이차전지 날개 단 인도네시아, 포항시 기회 찾으려면3. 인도네시아와 포항 기업 간의 교류 현 주소4. K기업문화, 인도네시아에 퍼진 한국기업 저력5. 탄소중립 시대, 인도네시아에서는 어떻게 ◇ 영일만 신화, 인도네시아에 닿다인도네시아는 포스코의 첫 해외 일관제철소 건설 기지였다. 포스코는 2008년 인도네시아에 제철소 건설을 결정했다. 2008년 인도네시아와 한국 정부가 맺은 기본 합의를 바탕으로 포스코는 인도네시아 국영 철강사인 크라카타우 스틸(Krakatau Steel)과 손잡고 연산 300만t 규모의 제철소 ‘크라카타우 포스코’ 를 건설했다.2000년대에 들어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는 빠른 경제 성장을 겪으며 새로운 시장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는 그 중에서도 가장 유망한 시장이었다. 200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5~6%의 안정적인 성장을 지속했고, 인도네시아 정부가 사회간접자본(SOC)확충과 조선업육성정책을 추진하면서 건설, 조선 산업이 크게 성장했다.그러나 인도네시아 철강 산업의 성장은 더뎠다. 2008년까지 인도네시아의 철강 수입 의존도는 52%. 철강 수입 증가율도 해마다 13.6% 가량 높아졌다. 철강 수요는 높은데, 철강 생산 능력은 턱없이 부족했던 것.인도네시아 시장의 잠재력을 본 포스코는 과감한 투자를 결정했다. 동남아시아 최초의 일관 제철소를 인도네시아에 짓겠다는 것이었다. 대부분 철강 기업이 제품을 생산하는 하공정 설비만 해외에 건설해 반제품을 해외에 판매하는 전략을 세워오고 있었기에 상·하공정을 모두 해외에 짓겠다는 포스코의 발표는 이례적이었다. 포스코는 인도네시아 내 하공정 공장을 이미 보유하고 있는 일본 철강사들 사이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고로 건설을 결정했다.야심찬 해외 시장 진출이었던 만큼, 건설 초기 인도네시아로 가던 포스코 직원들의 마음가짐은 비장했다. 한국과 다른 기후환경, 철강 시장 악화 등의 악재가 겹쳐 준공 이후 제철소가 안정화되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그러나 영일만 신화를 만들어낸 특유의 집념으로 포스코는 포기하지 않았다.약 10년간 이어진 고군분투의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2021년 크라카타우 포스코의 영업이익은 5억200만 달러로 창립 이래 최고점을 찍었다. 다음해인 2022년에도 2억2천100만 달러의 영업이익을 달성했다. 무엇보다 영업이익률에서 큰 성과를 냈다. 크라카타우 포스코의 2021년, 2022년 영업이익률은 각각 20%와 10%로, 같은 해 포스코 본사의 영업이익률을 상회했다.모두가 기피하는 일관제철소를 건설한 ‘뚝심’도 빛을 발할 것으로 보인다. 인도네시아 내에 고로부터 제품 공장까지, 상·하공정을 모두 보유하고 있는 기업은 포스코가 유일하다. 하공정만 보유한 기업의 경우, 반제품을 수입해 가공해야하기 때문에 무역 리스크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에 반해 자체 고로를 보유하고 있는 포스코는 비교적 외풍으로 인한 영향이 적어 안정적인 철강 생산이 가능하다. 향후 자동차 강판 생산라인까지 구축되면 인도네시아 철강 산업의 패권도 쥘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수많은 자동차 기업들이 인도네시아에 진출해 있지만, 일관제철소를 보유한 것은 크라카타우 포스코 뿐이다.실제로 ‘영일만의 기적’을 넘어 ‘찔레곤의 기적’을 만들기 위해 포스코는 크라카타우포스코 제철소에 고로 1기를 추가 건설해 연간 조강량을 600만t 이상으로 확대하고, 자동차 강판을 비롯한 냉연 설비를 구축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포스코는 향후 2030년까지 1천만t 철강 클러스터를 구축하는 야심찬 포부를 품고 있다. 포스코만의 K-기업 신화가 인도네시아에까지 널리 뻗어나간 셈이다. ◇ 포항 영일만, 역사의 시작한국 제조업을 견인한 철강 산업의 원류는 바로 포항이다. 한국 최초의 일관제철소, 포스코 포항제철소가 탄생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탄생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1964년 12월 4일 제102차 경제장관회의에서 박정희 정부는 철강공업 육성계획을 의결했다. 종합제철 건설을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 뿐만 아니라 상당한 수준의 기술이 뒷받침돼야하기 때문에 당시 철강 선진국이었던 미국, 유럽, 일본 등의 협조가 필요했다. 그러나 선진 우방국조차 이제 막 전쟁이 끝난 ‘아시아의 빈곤하고 작은 나라’가 추진하는 종합제철 건설에 선뜻 힘을 보태려 하지 않았다.그럼에도 정부는 종합제철 건설계획안을 수립하고 국제차관단 구성을 위해 발벗고 나섰다. 1966년에는 미국, 서독, 영국, 이탈리아 4개국 7개사와 한국에 종합제철을 건설하기 위한 기본사항에 합의하고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을 발족했다. 1967년 1월 프랑스가 추가로 참여해 구성원은 5개국 8개사로 늘어났으며, 1967년 10월 종합제철 건설에 관한 기본협정을 체결했다.이후 1967년 7월 포항을 종합제철 건설을 위한 최종 입지로 선정하고, 1968년 4월 1일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가 공식 출범했다.그러나 KISA 출범으로 빠른 진전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KISA를 통한 차관 교섭이 여의치 않자, 1969년 1월 31일 정부와 박태준 사장 일행은 KISA 대표단과의 담판을 위해 미국으로 향했다. 경제적 타당성 부족을 이유로 KISA를 통한 차관 조달은 결국 실패했고, 1969년 9월 2일 시효가 만료됨에 따라 KISA와의 기본협정은 자동적으로 해지됐다.종합제철 사업의 좌초를 막기 위해 새로운 자금 공여처와 기술 제휴처를 확보해야만 했다. 한일 양국이 농림수산 부문에 주로 투자하기로 합의한 대일청구권자금 일부를 종합제철 건설 자금으로 전용하고 일본 철강업계의 기술지원을 받는 것만이 제철소 건설사업 실현을 위한 마지막 대안이었다.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 민관 합동 노력에 나섰다. 일본 정부를 설득해 자금을 제철소 설립에 유용하는 것에 합의했다. 일본 철강업체들의 기술협력 분위기를 조성해 극적으로 제철소 건설사업이 추진될 수 있었다.정부 수립에서부터 한일 간의 기본협약이 체결되기까지는 무려 여섯 차례의 종합제철 건설 시도가 있었다. 결국 그 결실이 눈앞으로 다가온 것이다.자금이 마련되고 제철소 건설은 빠르게 진행됐다. 창립 2주년을 맞은 1970년 4월 1일 경북도 영일군 대송면 동촌동 건설 현장에서 포항 1기 설비 종합 착공식을 거행했다. ◇ 한국 최초 일관제철소 만든 집념, ‘아시아 철강’ 시대 이끌다포항 1기 사업은 조강 연산 103만t(톤) 규모, 1973년 7월 완공을 목표로 계획됐다. 당시 언론은 종합 착공 관련 보도를 통해 포항제철소 건설사업이 유사 이래 최대 규모 단일투자라는 점을 강조하며 철강재 자급 촉진, 국제 수지 개선 및 고용 증대, 자주국방 능력 강화 등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됐다고 평가했다.제철소 건설이 시작되자 박태준 사장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건설현장을 시찰하며 모든 건설요원들에게 “민족의 숙원사업에 동참한다는 긍지와 사명감을 가질 것”을 주문했다. 특히 “선조들의 피값인 대일청구권자금으로 건설하는 만큼 실패하면 민족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니 우향우해 영일만에 빠져 죽어 속죄해야 한다”는 남다른 각오를 요구했다.이러한 각오는 곧 빠른 제철소 건설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열연 비상’ 사건이다. 생산설비 중 가장 앞서 1970년 10월 1일 착공했던 열연공장은 1971년 4월 콘크리트 타설 공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계획이 여러 번 변경되면서 설계가 지연됐다. 건설업체의 자재와 인원 부족에 여름 장마까지 겹치면서 공기지연 문제가 표면에 떠올랐다. 공기를 맞추기 위해 포항종합제철은 전사적 비상체제에 돌입했다. 관리, 행정 직원까지 모두 투입돼 24시간 ‘돌관공사’에 들어간 것이다. 수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밤낮없이 공사에 참여했다. 그 결과 2개월만에 5개월 분의 콘크리트를 타설할 수 있었다. 심지어 건설 공기를 예정보다 1개월 단축할 수 있었다.산업 역군을 자처하고 나선 직원들의 곧 한국 최초 일관제철소 완공이라는 결실로 이어졌다. 1973년 7월 3일 포항제철소는 1기 종합 준공을 무사히 완수했다.박태준 사장은 종합 준공에 대해 “종합제철의 탄생은 정부의 강력한 지원과 온 국민의 열의의 소산”이라며 “우리나라 철강공업의 기틀이 되고 중화학공업의 핵심적인 위치를 점해 더욱 비약적인 국가 경제 발전에 공헌할 것”이라고 밝혔다.박정희 대통령은 치사에서 “초현실적인 제철소를 준공하게 된 데 대해 감개무량함을 금할 수 없다”고 회고하며, “조강 연산 103만 톤의 종합제철공장을 완공하게 된 것은 우리나라가 중화학공업의 문턱을 넘어서 훨씬 더 깊은 곳에 도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전했다.포항제철소가 국가 경제 발전에 공헌할 것이라던 박태준 사장의 말은 곧 현실이 됐다. 포항 1기 설비 건설은 국내 철강산업 성장을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자동차, 조선, 전자, 건설 등 국내 수요산업에 소재를 공급할 수 있게 됨으로써 국내 산업의 경쟁력 제고와 비약적인 성장의 밑거름이 됐기 때문이다. 역으로 이를 통해 성장한 국내 수요산업 또한 철강산업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든든한 수요 기반이 되며, 선순환 구조를 이룰 수 있게 됐다. 계속/인도네시아에서 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3-09-03

댐 준공·국가산단 승인 겹경사… 영주시 ‘미래로 간다’

영주시의 최대 숙원사업이었던 영주댐과 첨단베어링국가산단이 각각 준공과 최종 승인이 발표됨에 따라 영주시가 추진 중인 미래 발전을 위한 경쟁력 확보에 청신호가 켜졌다.영주댐 다목적댐은 지난달 22일 환경부로부터 최종 준공 승인이 나면서 본댐 준공 7년만에 그 결과를 얻으며 영주시의 새로운 관광 지평과 경제적 성장에 큰 발판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영주 첨단베어링 국가산업단지는 지난달 25일 국토교통부로부터 최종 승인을 받아 최근 5년간 신청된 국가산업단지 가운데 가장 빨리 국가산단으로 승인받는 성과를 이뤘다.국가산단은 영주시는 미래 전략사업인 소재부품 산업 중심지 도약을 통한 지역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할 전망이다. □ 영주댐 준공영주댐은 낙동강 유역 수질개선을 위한 하천 유지용수 확보, 이상 기후에 대비한 홍수 피해 경감 등을 위한 목적으로 2016년 본댐이 조성됐다.그러나 문화재 이전과 복원, 각종 개발사업 추진 과정에서 관련기관 간의 의견 차이가 발생하면서 오랜 기간 표류해 왔다.영주시는 그동안 승인이 늦어지면서 각종 개발사업이 지연되는 등 지역주민들의 불편이 야기되자 문화재 이전·복원 사업비 조정 및 처리방안 확정 등 준공에 필요한 절차를 모두 이행하고 준공을 앞당기고자 노력해왔다.특히 지난달 9일에는 수자원공사 영주댐지사에서 박남서 시장을 비롯한 각 분야별 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댐 준공을 위한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었다.영주댐은 7년간의 표류 끝에 최종적으로 준공인가가 고시되면서 영주시민의 숙원사업을 해소하고 지역 발전의 새로운 발판을 마련했다.시는 댐 주변 지역을 치수 시설 외에 대규모 관광단지로 개발하겠다는 구상이다.이중 야간 경관을 위해 용마루 공원 일대에 빛 조명을 활용한 일루미네이션파크 조성과 숙박시설과 음식점 등 민자를 유치하려는 방안도 검토중이다. 경상북도가 투자심사 중인 영주댐 수변 생태자원화 단지와 영주댐 레포츠 시설 조성사업, 스포츠 콤플렉스, 영주댐 어드벤쳐 공간, 수상 레포츠 시설 등 체험형 관광시설을 확충해 영주댐 주변을 건강과 관광, 스포츠가 함께하는 명품 관광지로 만들어 나갈 계획이다.또, 이산면 번계들, 개산들 일대에 대통령 공약사항인 영주댐 수생태 국가정원 조성사업을 추진하는 등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관련 사업들도 함께 추진한다.특히, 댐 주변의 무분별한 난개발을 막고 체계적인 개발이 이뤄질 수 있도록 영주댐 주변 개발사업 기본구상 및 타당성 조사용역을 추진해 댐의 수변 자원을 활용한 경관 사업과 함께 지역의 생태계와 환경보전을 위한 사업을 함께 추진해 나갈 수 있도록 검토한다.영주댐은 댐 건설 초창기에 시민 간 찬성과 반대 등의 의견이 부딪치며 순조롭지 않은 여정을 걸어왔다.영주댐은 당초 영주시 평은면, 이산면, 문수면을 비롯한 봉화군 일대를 포함한 대형 다목적 댐으로 건설할 계획으로 추진됐지만 댐공사의 적절성을 두고 표류하다 2009년 정부가 영주송리원댐과 영천 보현댐 건설을 확정하고 안동댐과 임하댐을 도수로로 활용하는 방안을 발표했다.당시 일부 영주시민들과 댐 수몰 예상지구 주민들을 비롯해 봉화군민들은 송리원댐 반대 투쟁위를 결성해 댐 건설 반대 운동을 펼쳤다.송리원댐은 영주다목적댐으로 이름을 정하고 담수 면적을 줄이는 등 현재 규모로 조성안을 세웠다.영주댐은 내성천과 낙동강이 모이는 합류점인 평은면 내성천 인근 유역면적 500㎢, 길이 400m, 높이 55.5m, 유효 저수 용량 1억3천800만㎥, 총저수용량 1억8천110만㎥ 규모다.댐 주변에는 국내 최장인 길이 51㎞의 순환도로와 수몰 마을 주민들을 위한 이주단지 3개소 66세대, 영주댐 물 문화관, 영주호 오토캠핑장, 전통문화 체험장 등의 편의시설이 조성돼 있다. □ 첨단베어링국가산업단지영주시가 첨단산업도시의 날개를 달았다.영주 첨단베어링 국가산업단지가 지난달 25일 국토교통부로부터 최종 승인을 받았다. 2018년 8월 영주시가 국가산업단지 후보지로 지정된 후 약 5년간의 여정 끝에 맺게 된 결실이다.국가산단이 준공되면 우수기업과 인재들이 모여들 수 있는 여건이 마련돼 영주시는 미래 전략사업인 소재부품 산업 중심지로 도약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또, 영주시를 중심으로 베어링 국산화 등 첨단산업 육성 동력이 마련돼 직·간접 고용 4천700여 명 등 1만300여 명의 인구증가 효과와 영주시 관내에 연간 760억원의 경제 유발 효과를 얻을 전망이다.승인 고시에 따르면 영주 첨단베어링 국가산업단지는 적서동과 문수면 권선리 일원에 118만㎡(36만평) 규모로 최종 결정됐다. 단지는 산업시설용지 60.3%(71만㎡), 지원시설용지 4.2%(5만㎡), 공공시설용지 34.3%(40만㎡) 등으로 구성된다. 유치업종은 베어링, 기계, 경량 소재 등 16개 업종이다.시는 국가산업단지가 승인됨에 따라 올해 하반기부터 토지보상계획 공고 및 감정평가 등 본격적인 보상을 위한 절차 이행을 시작해 2024년 착공, 2027년 준공을 목표로 관련 사업을 추진한다. 이와 함께 첨단베어링 산업과 베어링 전후방 기업 및 경량소재 관련 기업 집적화의 토대를 마련하고 소재·부품산업의 발전을 이끌어갈 유망 기업을 유치하고자 입주기업 재정지원, 산업인프라 구축,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등 지역과 기업이 함께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관련 정책을 추진해 나갈 방침이다.영주시와 첨단베어링클러스터 조기 조성 시민추진위원회는 25일 시청 강당에서 국가산단 지정·승인에 따른 비전 선포식을 개최했다.이번 선포식은 경북 북부권 최초 국가산업단지 지정 승인을 축하하고 산업단지 조성부터 성공적인 기업 유치까지 베어링 중심도시로 도약을 위해 마련됐다.2019년 8월부터 2020년 1월까지 경상북도개발공사에서 실시한 입주 의향 리서치에서 73개 기업, 분양면적 대비 129%의 기업이 입주 의사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영주시는 총사업비 2천964억원을 투입해 추진하는 국가산단의 기업 유치를 위해 평당 120만원으로 산정된 조성 원가를 50만원선으로 하향하고 조성원가 대비 분양가 차액에 대해 국비를 포함한 1천859억원을 단계적으로 지원하게 된다.김진영 영주시민추진위원장은 “끊임없는 노력 끝에 영주 첨단베어링 국가산업단지가 현실화됐다”며 “지정 승인을 위해 업무추진에 힘써 준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박남서 영주시장은 “10만 영주시민을 비롯한 지역사회 구성원 모두의 꾸준한 관심과 협조가 있었기에 영주 첨단베어링 국가산업단지가 최종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며 “첨단산업을 선도할 유망 기업들을 유치해 영주지역은 물론 경북북부지역의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며 각오를 밝혔다./김세동기자 kimsdyj@kbmaeil.com

2023-09-03

“지역사를 후손에게 잘 전승하는 게 우리의 소명”

다섯 번째 인터뷰하던 날에 비가 내렸다. 우산을 쓰고 선생과 동해면 신정리 선돌과 금광리 고인돌군을 둘러보고 금광저수지를 산책했다. 함께하는 네 시간 내내 선생은 우리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야기했다. 선생의 눈에는 지역의 거의 모든 것이 역사의 흔적이었고 이야기보따리였다. 신정리 선돌을 보러 가던 중에 선생이 승용차의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황인(이하 황) : 저기가 ‘학삼서원’인데 현판을 김구 선생이 썼어. 그걸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려는지? 김구 선생의 글 원판은 잃어버리고 말았어. 그걸 수소문해보니 어떤 고문서 수집가 손에 들어가 있었어. 그 중요한 걸 그냥 둬서는 안 되겠다 싶어 포항문화원을 찾아가 사정을 얘기하고 수집가를 만나게 되었지. 그런데 그 수집가가 값을 너무 비싸게 부르는 바람에 결국 못 사고 말았어. 그뿐 아니라 포항에는 많은 역사와 문화의 이야깃거리가 있어. 하지만 사람들이 그걸 잘 모르고 기록이 잘못되어 있기도 해서 안타까워.여국현(이하 여) : 선생님이 보실 때 아쉬운 일이 많겠습니다.황 : 연오랑세오녀만 해도 그래. 동해면에 있는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이 처음 개장했을 때 연오랑세오녀가 거북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되어 있었어.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거북이 아니라 바위를 타고 건너갔다고 기록되어 있지. 그래서 내가 바위를 타고 건너갔다고 했더니 고쳐놓더군. 이런 내용은 관련 문헌을 충분히 검토해야 해. 우리가 보존해야 할 역사와 문화유산이 잊히고 없어진 게 많아. 오천 문충리에 가면 포은 정몽주 생가터가 있는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 승마석뿐이지. 그래도 거기가 정몽주 생가가 아닌가. 정몽주 무덤이 있는 용인에서는 축제도 한다는데, 생가를 복원하는 게 불가능하진 않을 텐데…. 이육사 시인도 고향은 안동이지만 일제강점기 때 도구에 있는 동양 최대 규모의 포도 농장에서 그 유명한 ‘청포도’를 구상했지. 또 호미곶에 있는 등대에는 조선 왕실의 배꽃 문양이 그대로 남아 있어. 이런 게 사소한 것 같지만 잘 보존해서 시민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전해야겠지.여 : 저도 몰랐던 이야기가 곳곳에 있군요.황 : 어디 그뿐인가. 장기는 예부터 명망 높은 선비들이 귀양을 많이 왔지. 장기에 유배 온 대학자들이 장기는 물론 경북 일대의 학문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어. 우암 송시열이 장기에 4년 있다가 떠난 뒤 우암의 공덕을 기린 죽림서원이 세워졌고, 다산 정약용도 장기에 220일 머무는 동안 150여 수의 시를 지었지. 장기초등학교에 있는 우암과 다산의 사적비에는 두 분으로 인해 장기가 최고 수준의 학문을 전수받은 것은 행운이었다고 적혀 있어. 이런 걸 역사 시간에 가르치고, 학생들이 보고 듣고 체험하는 기회를 갖도록 하는 게 우리가 할 일이지. 우리 향토사부터 제대로 알고 기억하고 후대로 이어주는 게 참 중요해. 그런 점에서 내가 고맙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어. 포스코 문화재돌봄 봉사단이 진각국사 사당과 남파 대사 무덤에 가는 길 앞에 안내판을 설치하고 관리하는 등 애를 많이 썼어. 정말 고마운 일이지. 여 : 동해면에 목장성(牧場城)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황 : 동해면 흥환리 일대에 제주도를 제외하면 전국에서 가장 큰 말 목장이 있었어. 과거에 북벌 정책의 하나로 군마를 기르고 임금이 신하들에게 하사하거나 중국에 조공으로 바치는 말들을 사육하려고 만든 곳이지. 이곳이 특이한 건 말을 방목해 길렀다는 것이야. 말들이 있던 목장 둘레에 성을 쌓았는데 그게 목장성이야. 원래 둘레가 8킬로미터가 넘었는데 지금은 5킬로미터 정도의 흔적만 남아 있어. ‘감목관(監牧官)의 공덕비’라고, 목장을 관리하는 관리의 공덕비가 있고, ‘울목김부찰노연영세비(蔚牧金副察魯延永世碑)’ 같은 역사적 자료가 될 비도 남아 있지.여 : 포항에 봉수대 터도 꽤 있지요.황 : 모두 열세 개가 있어. 장곡, 대곶, 복길, 사화랑, 도리산, 오봉산 등등. 내가 그걸 두고 몇 번인가 포항시 정신문화자문위원회에서 이야기했지. 포항에서 불빛축제를 할 때 봉수대 터를 복원해서 봉홧불을 올리고, 등댓불도 이어서 밝혀보자고 말이야. 우리 지역에 남아 있는 역사의 흔적을 살려내 사람들이 쉽게 접하는 스토리텔링을 만드는 것, 그게 진짜 역사고 사람들한테 관심을 끌 수 있는 일인데, 좀 아쉽지.금광저수지를 돌면서 선생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그동안 역사와 연관된 이야기만 해왔던 터라 교사로서 선생이 기억하는 일화도 궁금해졌다. 개인적인 이야기라고 머뭇거리던 선생은 세 가지 이야기를 꺼냈다. 하나는 김규호 학생 이야기, 다른 두 이야기는 학생들과 했던 활동이었다.여 : 동해중학교 김규호 학생 이야기는 당시 지역방송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학생이 골수암 판정을 받았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치료를 받을 수 없었더군요.황 : 1998년에 이 사실이 지역 언론을 통해 알려져 당시로서는 거금인 5천만 원이 모금되었고 김규호 학생은 서울의 한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지. 그때 참 많은 사람이 도움을 주었어. 어느 날 한 포스코 직원이 출근하면서 봉투 하나를 주고 가더군. 이름이라도 가르쳐달라고 했더니 그냥 가버렸어. 당시에 그런 일이 참 많았지. 당시 나는 우리 세상이 아직은 살 만하다고 생각했어.여 : 포항여자전자고등학교에 계실 때 동해안에서 전승되던 민속놀이 ‘월월이청청’을 복원해 2001년 전국청소년민속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더군요.황 : 학생 100여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공연이었지. 전통 민속놀이를 발굴하고 복원한 것이라 참여한 교사와 학생들 모두 보람을 느꼈어. 이런 활동이 학생들에게 우리 지역과 나라의 역사를 제대로 알리는 기회지. 선생은 학생들을 문화재 현장에 데리고 가서 역사를 직접 느끼고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1980년대부터 6월이 되면 보이·걸스카웃 학생들을 데리고 이 지역의 의병 장헌문(蔣憲文) 대장과 임창규(林唱圭) 의사의 묘소를 참배하는 일을 20년 넘게 계속했다. 선생의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거둬 장헌문 대장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고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여 : 요즘은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어떻다고 보십니까?황 : 우리 지역에는 아직 발굴되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문화재와 유물이 많아. 다행스럽게 지역사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조금 늘어났어. 하지만 짧은 지식으로 역사를 자기식대로 해석하는 건 위험해. 사료에 대한 고증이 우선이지. 그렇지 않으면 역사가 다음 세대로 제대로 전달될 수 없어. 역사는 있는 그대로 기록해야지 미화해서도 폄훼해서도 안 돼.여 : 이제 인터뷰를 마무리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끝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면.황 : 지금이라도 우리 정신문화의 풍성함을 찾아야 해. 그게 멀리 있는 게 아니고 우리 역사와 문화 속에, 우리 선조가 살아왔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의 기록과 흔적 속에 남아 있지. 우리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잘 보존해서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 그것이 우리의 중요한 소명이라고 생각해.끝황 인1950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대구로 이주해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영남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동해중학교에 교사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닿았으며, 포항정보여고와 동성고에서 2008년까지 재직한 후 정년 퇴임했다. 포항 지역의 고인돌을 처음으로 조사·발굴해 ‘영일군사’에 소개했고, 지역 민속놀이인 ‘월월이청청’을 조사·발굴한 후 포항정보여고 학생들과 공연해 제7회 청소년 민속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흥인군의 비석과 남파 대사의 비석을 발견해 비각을 세우도록 했고, 석곡 이규준 선생의 목판을 경북 문화재 자료로 지정하게 했다. 또한 석곡의 사상과 학문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알려 석곡기념관 건립의 기틀을 마련했다. ‘포항시사’ 집필위원을 역임했고, 현재 포항문화원 향토조사 연구위원 등을 맡고 있다. 2022년 제12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대담·정리 : 여국현(시인)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황 인

2023-09-03

세상사 번뇌·시름말끔히 씻어 볼까

울진은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지니고 있다. 울진의 늦여름은 어린아이의 말간 얼굴이 연상된다. 순수한 자연과 향기조차 그윽한 금강송 송이가 있는 곳. 계곡 사이로 수정처럼 맑은 물이 흐르면 세상사 시름과 번뇌조차 말끔히 씻어지는 곳. 이제 얼마있어 가을이 오면 그리운 사람을 찾아가듯 울진을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조선시대 보부상의 애환이 서린 길울진의 산은 그리 높지 않아도 등성이가 제법 험하다. 사람의 손길을 많이 타지 않은 산은 마치 부끄러운 듯 돌아서 있다. 울진금강소나무숲길은 조선 시대 보부상의 애환이 서린 십이령옛길과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금강소나무 군락지가 어우러진 길이다.금강산에서 시작해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을 따라 자라는 ‘금강송’은 줄기가 곧고 속까지 알차며 강도 또한 일반 소나무에 비할 바가 아니다. 소나무의 명품이어서 주로 왕실에서 쓰인다.금강송이 시원하게 뻗어 있는 소광리 금강송숲은 들어서는 순간 시원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소나무의 바다다. 소나무 원시림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했다는 이곳에는 금강송이 100만여 그루 이상 자라고 있다. 수령만 해도 200~300년이 넘는다.생태숲 초입에는 금강송 중 무려 540년이나 된 금강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조선조 제9대 임금 성종 시대에 태어난 것으로 추측되니 그야말로 조선 시대의 흥망성쇠를 모두 겪은 역사 그 자체다. 오백년소나무라는 이름이 붙은 금강소나무는 지름 96cm, 키 25m, 수령 약 540년이다. 흔히 소나무는 200~300년 되면 노송(老松), 300~500년은 고송(古松), 500년이 넘으면 신송(神松)으로 불린다. 오백년소나무 외에도 못난이소나무, 육백년소나무 등 신송이 있다.오백년소나무 옆 금강소나무전시실에는 금강소나무와 일반 소나무를 비교하는 자료가 있다. 금강소나무는 일반 소나무보다 나이테가 3배쯤 촘촘하다. 척박하고 추운 지역에서 더디게 자랐기 때문이다. 뒤틀림이 적고 강도가 높은 금강소나무는 궁궐이나 사찰 등의 건축재로 사용됐다. 일제강점기에는 삼척, 울진, 봉화 등 내륙의 금강소나무가 대량 벌채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해방 후 금강소나무 집산지(봉화 춘양역) 이름을 따 ‘춘양목’이라 부르기도 한다.이 때문에 금강송은 ‘소나무의 제왕’으로 불린다. 속이 황금빛을 띠어 ‘황장목’이라고도 불린다. 궁궐과 천년고찰의 대들보로 쓰이니 살아서도 영광이요, 죽어서 목재가 돼도 천년을 이어 영화를 누린다.금강송이 귀한 소나무이니 예전에는 금강송이 있는 숲에 일반인들의 출입을 엄격히 금했다. 황장금표가 바위에 새겨진 것도 이 때문이다. 조선 시대에는 금강송을 1그루만 베어도 곤장 100대에 3년을 복역할 정도였다. 요즘으로 쳐도 중범죄에 해당할 정도니 조선 시대 사람들이 얼마나 금강송을 귀하게 여겼는지 능히 짐작이 간다.울울창창한 소나무숲 사이로 산책로가 잘 정비돼 있다. 빽빽한 소나무숲 틈틈이 들어오는 햇살이 얼핏얼핏 얼굴에 닿으면 그지없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쪽동백나무 커다란 잎사귀 사이로 들어오는 투명한 햇살이 보석처럼 빛난다. 숲길을 20분쯤 걸으니 넓은 공터가 나온다. 여기가 탐방이 끝나는 지점에 ‘송낙정’이 있다. ◇향긋한 명품 송이버섯금강송 밑에는 또 하나의 명품이 자란다. 송이버섯이다.송이버섯은 향긋한 솔잎향이 코끝에 오래 머물고 한입 베어 물면 착 달라붙는 식감이 일품이다. 산의 기운을 받고 자란 송이는 오래된 소나무 뿌리 끝부분에 붙어 기생한다.송이버섯이라 해도 모두가 명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울진 금강송 송이버섯은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한 식감과 향기를 지녔다. 기생목인 명품 소나무 금강송에 화강암이 풍화돼 생긴 마사토와 바닷바람이 키웠기 때문에 타 지역 송이에 비할 수 없는 명품이 된 것이다.울진 송이는 표피가 두껍고 향이 진하며 맛이 잘 변하지 않는다. 양양의 송이도 일품으로 치지만 울진 송이 또한 송이가 나는 어떤 지역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 맛을 자랑한다.송이는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일미다. 버섯이 나오면 대개 구워 먹는 게 일반적이지만 울진 사람들은 날것을 그냥 길게 찢어서 단숨에 입으로 옮긴다. 불로 구워 먹는 게 아니라 혀로 구워 먹는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동의보감’에는 송이는 성질이 서늘하고 열량이 낮아 보양식으로 제격이라고 기록돼 있다. 항암효과도 뛰어나다. 항균·해독에도 좋아 한방에서는 귀한 약재로 여겨져왔다.인공 재배가 안돼 9~10월 잠깐 시중에 나오는데 올해는 비도 많이 오고 늦더위까지 겹쳐 물량이 부족할 것으로 보인다. 가뜩이나 송이값이 비싼데 물건이 귀하다보니 가격이 올랐다. 1㎏ 단위로 상품(上品)이 70만원선, 중간 등급이 40만~50만원선이다. 그나마 이 정도인 게 다행이다 싶다. 한때 송이가 귀했을 때는 ㎏당 80만원을 호가한 적도 있다. ◇신선이 노닐던 듯한 신선계곡의 풍취울진엔 오지가 많다보니 구불구불한 심산유곡이 많다. 불영사까지 이르는 불영계곡도 뛰어나지만 백암산이 품고 있는 신선계곡은 금강산의 유수한 계곡보다 빼어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름 그대로 사방에 있는 계곡의 아름다움이 신선이 놀던 곳과 같다 해서 지어졌다. 기암절벽에 소나무와 참나무가 어우러진 울창한 수림계곡 곳곳의 담과 소는 비경 그 자체다.백암산의 품에 안긴 신선계곡 6㎞의 풍경은 물이 많고 길며 기기묘묘한 바위와 계곡수의 조화가 화려하다. 용이 살았다는 용소를 비롯해 바위 아래로 파고든 계곡수가 함지박만한 그릇을 만들어낸다. 물은 온갖 사물이 되어 흘러내린다.그릇처럼, 호리병처럼, 너른 접시처럼 다양한 형상이 되어 사람들의 시각을 홀린다.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합수곡이 나타나고 독골용소는 바닥을 모를 깊이로 선뜻한 느낌마저 준다.맑은 물이 흐르는 여름에도 뛰어나지만 단풍이 드는 가을철에는 실경이 아닌 선경이 펼쳐진다. 밑의 매미소를 지나 상류로 올라가면 작은 소들이 옥빛을 띠고 있고 바위 사이로 작은 폭포까지 아기자기하게 펼쳐진다.가족탐방로 주차장에서 18km쯤 구불구불 이어진 도로를 내려오면 불영사 주차장에 닿는다. 주차장에서 불영사계곡을 끼고 미끈한 금강소나무가 가득한 산비탈을 10분쯤 걸으면 불영사 마당으로 들어선다. 마당에 정갈한 고추밭이 인상적이고, 넓은 연못에 노랑어리연꽃이 만개했다.대웅보전(보물) 계단 양쪽으로 돌거북이 머리만 내민 모습이 재미있다. 두 마리 거북이 대웅보전을 업은 형상이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불영사가 있는 자리가 화산(火山)이어서 불기운을 누르기 위함이라고 한다. 연못 앞 벤치에 앉으면 산에 폭 안긴 듯 마음이 편안하다.여행 정보예전에는 울진금강소나무숲길은 워낙 오지여서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곳이었지만 예능프로그램 ‘1박2일’을 비롯해 다양한 방송매체에 소개된 후 찾는 이가 부쩍 늘었다. 산림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예약탐방제로 운영된다. 홈페이지(www.uljintrail.or.kr)를 통해 예약을 하고 출발장소인 울진금강소나무숲길 안내센터까지는 직접 이동해야 한다. 구간마다 탐방 인원을 하루 80명으로 제한하고, 자격증이 있는 숲 해설사가 안내한다. 홈페이지에 7개 구간 소개와 난도, 소요 시간 등이 자세히 나온다. 울진금강소나무숲길은 산림청이 국비로 만든 1호 국가 숲길로, 2010년 7월에 1구간이 열렸다. 총 7개 구간(79.4km) 가운데 현재 5개 구간을 운영한다(1·5구간 정비 중). 1구간(보부상길)과 2구간(한나무재길)은 보부상이 소금을 지고 다니던 십이령옛길이고, 3구간(오백년소나무길)과 3-1구간(화전민옛길)은 금강소나무 군락지를 지나는 길이다. 4구간(대왕소나무길)과 5구간(보부천길)은 600년 넘은 대왕소나무를 만나는 길이고, 가족탐방로에서는 오백년소나무와 못난이소나무 등이 반긴다./최병일 작가

2023-08-31

석곡기념관 건립의 기틀을 다지다

포항이 낳은 큰 인물로 석곡(石谷) 이규준(李圭晙, 1855~1923)이 있다. 석곡은 포항 동해면 출신으로 한의학은 물론 문학과 철학, 천문학 등을 폭넓게 연구한 학자이며 선비 의사의 삶을 살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포항시는 석곡을 기리는 기념관을 지난 7월 말 임시 개관했고, 오는 10월에 정식 개관할 예정이다. 남구 동해면 도구리 일원에 건립된 이 기념관은 지상 2층 규모다. 석곡의 삶과 학문을 재조명하고 그 의미와 가치를 널리 알려온 이가 황인 선생이다. 황인 선생이 석곡기념관을 건립할 수 있도록 기틀을 마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석곡은 누구이며 그의 발자취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들어보았다.여국현(이하 여) : 선생님은 근대 한의학의 선구자로 추앙받는 석곡 이규준을 재조명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석곡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황인(이하 황) : 사실은 나도 석곡을 잘 몰랐어. 그런데 우연히 포항 시내에서 한의원을 하는 김학동 원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석곡이 참 대단하다는 말을 들었지. 김학동 원장이 소속된 소문(素問)학회에서 해마다 10월 마지막 일요일에 석곡 선생의 묘소를 참배한다고 하더군. 얼마나 대단한 분인가 알아보고 싶은 마음에 석곡 묘소에 참배할 때 따라갔지. 현장에 가서 석곡의 제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석곡이 참 대단한 학자였다는 걸 알게 되었어. 여 : 그때 어떤 말씀을 들으셨는지요?황 : 석곡은 독학했고, 전국을 다니며 대학자들과 토론하면서 학문을 쌓았지. 어느 날 청도의 한 서당원장이 학문이 대단하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해. 그런데 그때 거기서 무위당(無爲堂) 이원세(李元世)가 공부를 하고 있었어. 생판 모르는 사람이 찾아와서 스승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자기가 봐도 학문이 대단한 거라. 이원세가 석곡을 붙들고 배움을 청하러 찾아가겠다고 하니 석곡이 대구에 서병오라는 사람 집에 가 있으면 연락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이원세가 서병오 집에 8년 정도 머물게 돼. 서병오가 누군가 하면 어린 나이에 대구에서 천재라고 소문이 나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눈에 들었고, 나중에는 영천 군수에 오른 사람이지. 서병오가 혈압이 높았는데 누구도 못 고치는 걸 석곡이 고쳐준 뒤로 석곡에게 한의학을 배우게 되었어. 하여간 이원세가 서병오 집에 머물면서 석곡의 제자가 된 거야.여 : 서병오와 이원세 두 분 다 석곡의 제자들인 셈이군요. 그렇다면 그분들을 통해 소문학회가 만들어져서 석곡을 기리게 된 건가요?황 :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조금 더 이야기가 있어. 나중에 이원세가 부산에 갔을 때, 부산에서 한의학을 공부하던 사람들이 이원세를 모시고 함께 공부하게 되었지. 인원이 점점 늘면서 이원세가 스승인 석곡의 학문을 연구하자고 제안해 석곡학회가 창립되었어. 그렇게 석곡학회를 만들긴 했는데, 여기서는 석곡의 한의학 공부만 하는 거라. 하지만 석곡은 수학, 천문학, 유학 등 다방면의 학문에 관심을 가졌던 터라 석곡학회를 한의학만 공부하는 소문학회로 바꾼 거지. 이분들이 매년 음력 10월 마지막 일요일에 석곡 선생의 묘소에 참배하면서 석곡 선생을 기려온 거야. 여 : 하지만 포항에서는 아직 석곡이 누구인지,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황 : 1885년 포항 동해면 임곡리 출신인 석곡은 근대 한의학의 선구자로 알려졌어. 원래 유학에 바탕을 둔 학문에서 출발해 성리학까지 통달한 분이지. 사실은 유학과 성리학을 증명하기 위해 한의학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놀라운 일은 이분이 모든 학문을 독학으로 했다는 것이지. 그러면서 삼십 대에 ‘춘추(春秋)’, ‘주역(周易)’, ‘의례(儀禮)’ 같은 경전을 산정(刪定)해 26책으로 된 ‘육경소주(六經疏註)’를 펴냈어. 어디 그뿐인가. ‘논어’, ‘대학’, ‘중용’, ‘예운(禮運)’, ‘곡례(曲禮)’, ’효경(孝經)’, ‘명심보감’ 등도 산정해 많은 책을 펴냈고. 특히 유학의 이기론(理氣論)을 벗어나 기일원론(氣一元論), 심성정동일론(心性情同一論) 철학과 심양기론(心陽氣論) 의학의 바탕이 되는 ‘석곡심서(石谷心書)’는 대단한 저서로 인정받지. 여 : 독학으로 그 모든 학문을 습득하셨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산정’은 무엇인지요?황 : 산정(刪定)은 꼭 필요하지 않은 자구(字句)나 문장을 다듬고 정리하는 것을 말해. 석곡은 경전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배운 학문의 견해를 바탕으로 썼지. 그런 자세가 석곡의 탁월함이 아닌가 싶어.여 : 그러려면 경전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물론 석곡의 학문적 입장도 확고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 같습니다. 석곡은 한의학자로도 유명하다고 하셨지요?황 : 선생은 말년에 한의학 연구에 성심을 다했지. 한의학의 원전이자 이론의 기초라고 일컬어지는 책이 ‘황제내경(黃帝內經)’인데, 선생은 이 책의 본래 내용 가운데 필요 없는 건 정리하고 꼭 필요한 것만 추려서 ‘황제소문절요(黃帝素問節要)’를 쓰셨어. 또 ‘동의보감’을 선생의 이론으로 다시 정리해서 ‘의감중마(醫鑑重磨)’를 펴냈지. 약초에 관한 저서인 ‘본초(本草)’는 지금도 많은 한의학자가 찾는 명저 중의 명저야. 그러니 “북쪽에 사상의학을 주장한 이제마가 있다면, 남에는 이규준이 있다”는 말이 회자되지. 여 : 자료를 찾아보면 석곡은 ‘부양론(扶陽論)’을 강조했다고 하는데 알기 쉽게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황 : 부양론은 말 그대로 양기를 북돋운다는 말이지. 석곡은 인간의 몸의 중심은 마음(心)이라고 보았어.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 자리한 심장(陽)이며, 심장의 기운이 부족할 때 모든 병이 생긴다는 거야. 이는 중국의 주진형(朱震亨)이 주장한 이론과는 반대되는 이론이지. 거기서는 음기의 부족이 병의 근원이라 보았으니까. 그래서 기운이 약해지면 음의 기운을 돋우는, 즉 신장의 기운을 살리는 처방을 했어. 그런데 석곡은 양이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중요한 것은 사람 몸에 양의 기운이 부족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지. 그래서 어릴 때나 나이 들어서나 양기를 돋우는 약을 복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던 거야.여 : 선생님 말씀을 들을수록 석곡은 대단한 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황 : 내가 처음 석곡 묘소에 간 게 2008년이야. 소문학회 회원들이 석곡 묘소의 참배를 다닌 지 14년쯤 되었을 때지. 그 후로 방송에 나갈 때마다 석곡을 이야기했고, 그다음 해 묘소를 참배할 때는 지역 언론사의 기자들과 함께 갔어. 그때 석곡 묘소 참배하는 것을 YTN에서 소개하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지. 『동의보감』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한 안상우 박사가 그 방송을 보고 나를 찾아와 석곡의 학문을 번역해주겠다고 해서 큰 힘이 되었어. 그렇게 석곡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게 되었지. 여 : 선생님의 그런 노력이 마침내 석곡기념관 건립으로 이어지게 되었군요.황 : 여하튼 석곡기념관이 건립된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고 앞으로 많은 시민이 찾는 곳이었으면 좋겠어.석곡기념관은 소강당,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48호로 지정된 석곡 선생의 저술 목판을 보존하기 위한 수장고가 있는 1층과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영상관이 있는 2층으로 구성돼 있다. 외부는 전통가옥 구조물인 서까래 형태의 처마를 적용한 모양을 하고 있다. 포항시는 석곡의 일생과 학문, 사상 등을 소개하는 상설 전시와 함께 시문학, 유학, 천문학, 수학 등 석곡의 학문은 물론 후학과 관련한 주제 전시와 소장품 특별전 등 다양한 기획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황 인1950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대구로 이주해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영남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동해중학교에 교사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닿았으며, 포항정보여고와 동성고에서 2008년까지 재직한 후 정년 퇴임했다. 포항 지역의 고인돌을 처음으로 조사·발굴해 ‘영일군사’에 소개했고, 지역 민속놀이인 ‘월월이청청’을 조사·발굴한 후 포항정보여고 학생들과 공연해 제7회 청소년 민속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흥인군의 비석과 남파 대사의 비석을 발견해 비각을 세우도록 했고, 석곡 이규준 선생의 목판을 경북 문화재 자료로 지정하게 했다. 또한 석곡의 사상과 학문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알려 석곡기념관 건립의 기틀을 마련했다. ‘포항시사’ 집필위원을 역임했고, 현재 포항문화원 향토조사 연구위원 등을 맡고 있다. 2022년 제12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대담·정리 : 여국현(시인)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황 인

2023-08-30

330년 고택에서의 하룻밤, 봉화 바래미마을로 오세요

처서가 지나고 어느덧 여름의 끝자락에 서있다. 비가 오고 무더웠던 여름 더위의 기세도 한풀 꺾이니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는 것만 같다.아직 휴가를 떠나지 못했다면 여유롭고 한적한 고택에서 늦여름의 정취를 느껴보는 건 어떨까.봉화군에는 옛 아름다운 정서를 고이 간직한 고택들이 모여 있는 전통문화마을이 있다. 과거에 마을이 하상(河上)보다 낮아 바다였다는 뜻을 가진 바래미마을이다.바래미마을은 봉화읍에서 영주쪽으로 약 2㎞ 정도 떨어진 해저리에 있다. 자연과 사람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옛 정취가 지금까지 간직되어 내려온 작은 마을로 독립운동 훈장을 받은 유공자만 14명이나 배출한 유서 깊은 마을이기도 하다.병풍을 두른 듯한 마을에는 수십여 채의 한옥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고즈넉한 운치를 느낄 수 있다. 고택마다 가지고 있는 매력이 달라 취향껏 고르는 재미가 있으며, 하룻밤을 머물며 다양한 전통체험도 함께 즐길 수 있다. □ 330년이 넘은 국가 지정 문화재 만회고택바래미마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만회고택은 영주·봉화 지역의 첫 국가민속문화재이자 바래미마을 내에서는 유일한 국가 지정 문화재이다.만회고택의 안채는 1690년에 준공돼 33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전통 한옥이다. 사랑채는 200년이나 된 국가문화재로 문화유산부문 최고등급인 관광공사지정 명품고택으로 지정됐다.만회고택은 최소 1인에서 최대 4인까지 이용가능한 객실들이 준비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방 내부에 화장실이 있어 불편 없이 이용할 수 있다.만회고택에는 정자와 방이 함께 있는 명월루가 있는데 그 시절에는 보기 힘든 건축양식으로 풍경이 특히 아름다운 곳이다. 여름에는 태백산의 바람이 루를 감싸고 돌아 자연이 주는 바람의 진수를 느낄 수 있다. 밤이면 이름에 걸맞게 밝은 달을 품고 있어 이곳에 앉아 있으면 자연에 둘러싸인 봉화의 매력에 흠뻑 빠져든다.또한 삼애실에는 다락방을 개조해 만든 전용 공간이 있는데 계절별로 소품 등을 바꿔 꾸며 놓는다.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공간으로 사진을 찍으며 소중한 추억을 간직하기에 좋다.이곳에는 어린 자녀를 둔 가족들 혹은 커플들이 즐겁게 체험할 수 있는 것들도 가득하다. 부채, 보석함 등을 채색해 보는 민화체험과 컵매트 등을 만들어 보는 직조체험, 이밖에도 악세사리를 만드는 칠보체험 등을 해볼 수 있으며 체험들은 일정 인원수 이상 사전 예약을 통해 가능하다. □ 1천500평 규모의 아름다운 정원을 갖춘 토향고택토향고택은 11대째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오고 있는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명품 고택이다. 고택의 방은 전통을 느낄 수 있으면서도 현대식이라 불편함 없이 편안한 밤을 보낼 수 있다.객실은 한 칸 크기의 아담한 문간방을 비롯해 최대 4명까지 이용가능한 다양한 객실이 마련되어 있으며 간단한 과일로 구성된 아침식사가 제공된다.특히 별도 마련된 독채는 최대 8명까지 머물 수 있는 신축 한옥으로 가족들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용호정이라는 신축 한옥에서는 연꽃 연못을 바라볼 수 있어 운치 있는 하루를 만들어준다.고택정원에는 연못과 다양한 꽃들이 있어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다. 토향고택 이곳저곳을 산책하며 맑은 공기와 함께 온전한 휴식을 누리면서 하루를 보내기에 충분하다.토향고택 앞 정원에는 연꽃 연못과 각종 야생화와 나무, 산책길, 도자기 장작가마, 바비큐장 등이 있으며 마을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야생화 언덕과 함께 전통그네와 투호던지기, 활쏘기를 할 수 있는 민속놀이터도 마련되어 있다.특히 도자기 체험, 서예 체험은 토향고택의 독특하고 특별한 자랑으로 자연과 예술이 함께 하는 힐링과 재충전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일상에서 벗어나 차분한 휴가를 즐기려는 가족 나들이객들에게 인기가 많다. □ 고즈넉한 한옥의 멋이 매력적인 소강고택과 남호구택소강고택은 100여 년이 넘은 말 그대로 전통한옥집이다. 조선조 후기의 전형적인 양반가의 형태로 문살 하나까지 전부 춘양목으로 지어졌다. 중후한 멋이 깃든 만큼 조선 후기의 양반가의 옛 가옥을 느껴볼 수 있다.소강고택의 객실은 어사방부터 사랑방까지 총 6개이며 많은 객실 중 도령방은 고택에서 유일한 황토방으로 방문을 열면 사랑마당과 큰 정원, 담 넘어 나지막한 산이 보이는 정겨운 풍경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다.소강고택 맞은편에 위치한 남호구택은 응방산 줄기의 낮은 야산을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양질인 고급 목재를 사용해 100년이 넘은 고택인데도 불구하고 변형되거나 보수한 흔적이 많지 않다. 대청마루와 사랑채의 문을 올리면 넓은 공간이 생기는데 많은 사람들이 한 번에 이용할 수 있고 마당까지 넓어 워크숍 같은 행사 장소로도 이용 가능하다.특히 별채 영규헌은 옛날 도서관 용도로 지은 건물로 독채로 되어있다. 방 2개, 대청마루로 구성되어 있으며 최대 6인까지 지낼 수 있어 가족 단위로 조용하게 하룻밤을 보내기 좋다.널뛰기, 제기차기, 투호, 윷놀이 등 민속놀이가 무료로 이용 가능하며 한복 입고 사진찍기 체험을 비롯해 사전 예약을 하면 전통혼례 체험도 가능하다./박종화기자 pjh4500@kbmaeil.com

2023-08-29

그렇게 왕 지렁이가 되었다

삼국통일이 이뤄진 7세기는 소설의 소재가 될 만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당나라를 축출한 문무왕 김법민은 죽어서 용이 됐다는 설화가 전한다. 바로 그 설화에서 소재를 얻은 김강 씨가 짤막한 소설 한 편을 완성해 본지로 보내왔다. 딱딱한 연재기사를 잠시 쉬어간다는 차원에서 이를 게재한다. 2017년 심훈문학상 수상자인 김강 씨는 작품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 등을 출간한 소설가다. 편집자 주#1구릉과 계곡의 휘어진 길을 벗어나자 시야가 탁 트였다. 맑은 날이면 수평선이 보인다 했는데. 흐린 하늘이 이어져 끝을 가늠할 수 없었다. 저기쯤이겠지. 무채색 건물들의 낮은 지붕 너머 흐린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건물과 버스 사이 중간 즈음 짙은 회색 구름 덩어리가 보였다. 저 아래는 비가 오고 있으려나.얼마 지나지 않아 차창으로 빗방울이 부딪혔다. 한동안 차창을 비스듬히 가로지르던 빗물이 아래로 방향을 틀었고 우리는 버스에서 내렸다. 막 베어낸 보리 짚단이 여기저기 쌓여있는 밭을 옆으로 두고 섰다.“비가 오네.”용대가 우산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우산 챙겨 나오라고 했잖아. 내가.”용대는 한번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손으로 횡단보도를 가리켰다. 우산대를 잡아끄는 용대를 따라 걸었다.“비가 안 올 줄 알았지. 그리고 준비성 좋은 네가 있잖아.”용대는 씩 웃었다.“하긴 비가 온 건 아니지. 우리가 들어간 거지.”“뭐라고?”“아니다. 저기다. 가자.”#2분명 용이었다.취침 옵션, 세 시간으로 해두고 잠이 들었는데 에어컨이 꺼지자 땀이 흘렀고 몸이 찌뿌둥해진 탓에 나는 일어나 앉았다. 베개 위에 덮어두었던 수건을 들어 이마와 목덜미를 닦았다. 에어컨을 다시 켜야겠다, 마음먹은 나는 더듬어 리모컨을 쥐었지만 어두운 탓에 버튼이 잘 보이지 않았다. 불을 켤까? 생각했지만 아내가 마음에 걸렸다. 아내는 중간에 잠이 깨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할 수 없이 핸드폰의 배경 화면 빛으로 어찌 해보려던 그때, 큰길 쪽으로 난 커튼으로 그림자가 비쳤다.굵고 긴, 나선으로 꿈틀거리는 무엇. 창의 너비로는 감당할 수 없는 무엇이었다. 그리고 곧, 침대 머리맡 커튼에도 그림자가 나타났다. 명확하게 뿔인지는 알 수 없으나-그림자였으니까-, 크고 뾰족한, 위로 솟구친 두 개의 무엇과 그것들 앞으로 길게 내민 주둥이-그림자였지만 직감적으로 무언가의 주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가 커튼 밖에서 아래위로, 좌우로 흔들렸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핸드폰과 리모컨을 양 손에 쥔 채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두 개의 그림자를 볼 뿐이었다. 머리에서부터 이마를 거쳐 뺨으로 흘러내리던 땀방울도 제자리에 멈춘 듯했다. 숨도 쉬지 못하고, 땀방울도 놀라 멈췄는데 오직 심장만이 거칠게 뛰었다. 멍했다. 눈썹위에 멈췄던 땀방울이 제 무게를 못 이기고 아래로 내려왔다. 땀이 눈 속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휴, 어설프게 숨을 내쉰 나는 창가로 다가갔다.바깥을 살피려 커튼을 잡으려던 순간, 그것이 움직였다. 부드럽게 그리고 우아하게 회전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다시 멈칫 했고 그것은 큰길로 난 창에서 침대 머리맡의 창을 거쳐 사라졌다. 그것이 사라지고 난 뒤 커튼 틈으로 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가로등 불빛이 환했고 하늘은 검었다. 여전히 깊은 밤이었다.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상상하다, 아내를 깨울지 말지 고민하다, 다시 잠을 자야할지 어떨지 망설이던 중이었다. 그림자가 다시 나타났고 한동안 창 밖에 머물다 움직였고 사라졌다. 그러기를 두 번, 그것은 세 번 우리 집을 휘돌고 갔다. 세 번째 돌아나갔을 때 나는 그것이 용이라 확신했다. 이후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에어컨을 다시 켠 것 같기도 하고 베개의 수건을 갈은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잠이 든 것 같기도 하고.출근 준비 할 시간 아니냐며 아내가 몸을 흔들었을 때 나는 놀란 듯 허억,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었다. 그리고 아내에게 말하려했다. 지난밤 우리 집에 용이 왔었어.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이렇게 말했다.있잖아. 어젯밤에, 새벽에 말이야. 그러니까…….정리를 해서 깔끔하게 이야기해야겠다, 잠시 뜸을 들이던 중이었다.새벽에 뭐? 새벽에 일어나서 핸드폰 좀 보지 말라고. 그러니까 잠을 설치는 거잖아. 아휴. 애나 어른이나. 나 바빠. 애들 밥 차려야해.아내는 방을 나갔고 나는 열린 방문을 바라보기만 했다.#3마주보고 선 탑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천 년을 마주보았을 그들이었다. 백 년마다 한 마디씩 나누었을까? 아니면 천 년 동안 서로 바라보기만 했을까? 이상한 상상을 했다. 우리는 벤치에 앉으려다 바지가 젖을 듯해 그냥 서서 대종천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았다. 짙은 회색 구름은 물길을 따라 바다로 움직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그쳤다.“용이 돌아가는 모양이네.”용대가 무슨 말이냐며 물었고 나는 지난밤 용에 대해 말해주었다.“그러니까 꿈에 용이 나온 것하고 여기하고 무슨 관곈데?”지난밤의 일을 용대에게 말한 직후였다. 용대는 주저하지 않고 꿈이라 했다.“꿈이 아니라니까.”“꿈이 아니면? 그 말을 믿으라고? 그리고 나는 왜 데려 온 거냐? 내 이름이 용대라서?”“저기 저 쪽 바닷가에 문무대왕 수중릉이 있잖아. 동해를 지키기 위해 용이 되었다고 하잖아. 그 용이 이곳 감은사 아래까지 왔다 갔다 했다지, 아마. 지금 보이는 저 대종천을 거슬러 올라왔다 돌아가고는 했다네. 간밤에 용이 우리 집을 세 번 돌고 사라지는데 이상하게 문무대왕이 생각나더라고.”용꿈을 꾸었는데 로또를 사야지, 수중릉을 찾아오는 것이 정상이냐, 로또를 사고 당첨이 되어서 친구에게 크게 한 몫 떼어주는 게 정상인 것 아니냐며 용대는 비아냥거리다 투덜대다를 반복했다.“정상이 아니지. 그런데 와보고 싶더라니까. 로또야 돌아가는 길에 사면 되는 거고. 근데 웃기지 않냐? 그 시절 사람들은 용, 하면 나라와 백성을 지키고 비를 내리고 또 뭐냐 나쁜 놈들을 벌주고, 뭐 그런 생각을 했는데 말이야. 우리는 용, 하면 로또부터 생각하지. 재밌네, 재밌다니까. 암튼 이제 내려가자. 여긴 다 보았으니. 대왕님 뵈러 가야지. 어젯밤에 왜 우리 집에 왜 오셨는지 물어도 보고.”수중릉으로 가는 동안 용대는 자기 이름이 용대라서 같이 가자 한 것이냐 다시 물었고 나는 그런 점이 조금은 영향을 준 것 같다고 대답했다.#4바다에 다다른 회색 구름은 이내 흩어졌다. 흐린 하늘이었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사장(沙場)에서 바다로 뻗어나간 수중릉 돌무더기위로 갈매기들이 앉아 쉬고 있었다. 온 김에 사진 한 장 찍어주겠다며 용대는 나를 세워두고 몇 걸음 물러났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으려던 용대가 갑자기 웃었다.“왜?”“이게, 화면으로 보니까, 꼭 주먹감자 같단 말이지. 저쪽 건너편 섬나라를 보며 내민 주먹감자.”“그러네, 맞네. 딱 주먹감자네.”#5우리는 오래 있지 못했다. 근무시간 내 사무실로 복귀해야했다. 거래처에 다녀온다며 사무실에서 나왔고 거래처 주차장에 차를 두고 왔었다. 나는 거래처로 가는 내내 주먹감자를 내밀고 있는 용의 모습을 상상하며 픽픽 웃었다. 거래처에 다녀온다 했으니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담당자를 만나 이미 합의했던 사항과 지나간 업무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담당자는 우리가 방문한 이유를 궁금해 하는 눈치였지만 우리는 소소한 안부를 묻고 날씨 이야기를 하다 돌아왔다.직장으로 복귀하는 차 안에서 용대가 물었다.“그래서 수중릉에 가니 용이 무슨 계시를 주더나?” 소설가 김강. 나는 대답할 거리가 없었다. 간밤의 흥분, 수중릉까지 찾아가며 가졌던 기대는 어느새 사라지고 지난밤의 용이 사실이었는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어설픈 잠 속의 꿈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모르겠다. 그게 용이었는지, 이무기였는지, 왕 지렁이였는지.”“네가 너무 거창한 생각을 하니 그렇지. 자, 받아라, 오백 원. 여기 둘게. 그리고 저기 저 앞에 편의점에 좀 세워라. 살게 있다.”용대가 오백 원짜리 동전을 컵홀더에 넣으며 말했다.“이게 뭔데?”“일단 세우라니까.”나는 차를 세웠고 용대는 급하게 문을 연 뒤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그 꿈 내가 샀다. 복권 사러 간다. 당첨되면 좀 줄게.”

2023-08-29

등대의 불빛과 고래의 전설이 있는 곳

원시의 바람을 느끼고 싶다면 호미곶으로 가야 한다.망망한 수평선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은갈기를 휘날리며 한반도의 동쪽 끝으로 몰려온다.바람이 거세 쌀농사가 힘들었기에 온통 보리밭이었다.호미곶 처녀는 시집갈 때까지쌀 서 말을 못 먹는다고 했다.호미곶 구만리에 보리가 피어나면초록의 물결이 온 누리를 뒤덮는다.차가운 땅 밑에서 키워 온 생명의 기운은사람의 마음밭도 초록으로 물들인다.이른 봄 샛노란 유채꽃이 피어나면하늘색과 바다색도 더 짙어진다.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유채꽃밭으로 뛰어들어한 송이 꽃이 된다. 세워진 지 백 년이 지난 순백의 등대는일몰에 불빛을 켜고 일출에 불빛을 끈다.먼바다를 향해 빛을 뿌리는 등대가 있어호미곶 밤바다는 쓸쓸하지 않다.호미곶 앞바다는 아득한 옛날부터 고래의 바다였다.사람이 오기 전에 고래가 평화롭게 다니고 있었다.출산한 어미 고래가 미역을 먹으러얕은 바다까지 들어왔다는 옛이야기도 전한다.한반도의 동쪽 끝 호미곶에 가면하얀 파도의 노래를 들려주려고래 한 마리가 다가오리라. 임주은 임주은 1982년 포항에서 태어났으며 대구가톨릭대 공예과를 졸업했다. 개인전 2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아트페어에 서양화 작가로 참여했다. 현재 포항문화재단 이사, 포항청년작가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 포항지부, 경북청년작가회 등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3-08-28

고려 진각국사 배천희·조선의 큰스님 남파 대사 배출한 포항

황인 선생은 포항이 고인돌, 선돌 같은 선사시대 유물 외에도 명망 높은 고승을 낳은 곳임을 발견하고 널리 알려왔다. 특히 고려시대 진각국사(眞覺國師) 배천희(裵千熙)와 조선시대 남파(南坡) 대사에 대한 재조명은 선생의 대표적인 업적이다.(여국현=여) : 선생님은 고려시대 배천희 국사에게 많은 관심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황인=황) : 배천희 국사는 1307년 흥해 출신으로 13세에 출가해 19세에 승과에 합격했지. 그 후 10여 개 사찰의 주지를 지내다가 1367년(공민왕 16년)에 국사가 되었고 1382년 76세로 입적하셨어. 당시 국사(國師)는 국가 최고의 정신적 지주를 일컫는 말이니 배천희 국사는 대단한 인물이었지. 이 사실도 우연히 알게 되었어. 어느 날 우리 학교 출신 제자를 만났는데, 그 제자의 남편이 자기 조상 중에 유명한 스님이 있다고 말하는 거야. 그러면서 지금도 자기들이 그 스님 무덤에 제사를 모시고 있다고 하더군. 여 : 스님은 무덤이 아니라 사리탑 같은 걸로 모시지 않는지요?황 : 나도 그게 이상해 스님이 무슨 무덤이냐고 했지. 사리탑이나 부도가 있어야지 했더니 틀림없이 무덤이 있다고 하는 거야. 제사도 지내고. 그러니 더 궁금했지. 알아보니 천곡사 입구에 사당도 있고, 포항 공원묘원 안에 ‘국사배선생유허비(國師裵先生遺墟碑)’까지 있는 대단한 분이더군. 이분이 흥해에서 태어났다고 왕이 흥해를 현에서 군으로 승격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더군. 나중에 스님이 입적했을 때는 ‘진각국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비를 세우라 명했는데, 그 탑비의 비명(碑銘)을 당대의 문장가 목은(牧隱) 이색(李穡)에게 쓰라고 했어. 그것만 봐도 배천희 국사가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알 수 있지.여 : 배천희 국사가 고려 말 원나라 간섭기를 벗어난 개혁 시대의 주체적 한국 불교를 이끈 인물이라는 평가도 있습니다.황 : 맞아. 그러니 우리 지역에서 이런 인물이 나왔다는 건 대단한 일이지. 스님의 무덤은 크기도 하지만 왕이나 큰 스님의 무덤 앞에 세우는 당간지주 모양의 석물이 양쪽에 떡하니 서 있는 게 한눈에 봐도 평범해 보이지 않았어. 게다가 제자 남편의 말이 수원에 가면 스님을 기리는 비석도 있다는 거야. 그 말을 듣고 가만있을 수 있나. 그 탑을 보고 탁본을 뜨려고 수원까지 갔지.여 : 그 먼 데까지 탑을 보러 가신 것도 놀랍지만 탁본 뜨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황 : 그랬지. 겨울방학 때 찾아갔는데, 엄청 추운 1월 초였어. 물어물어 수원성에 갔더니 허름한 비각에 탑이 있는 거야.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彰成寺眞覺國寺大覺圓照塔碑)’라는 그 탑은 보물 14호인데 온전치는 않더라고. 우여곡절 끝에 수원시청 문화공보실을 찾아가 배천희 국사에 대한 자료를 주면서 탁본하러 왔다고 했지. 담당자가 일언지하에 거절하길래 그날은 그냥 그렇게 앉아 있다 나왔어.여 : 그럼, 그 먼 길을 가셔서 탁본도 하지 못하고 그냥 오셨나요?황 : 아니지. 그냥 올 수는 없었어. 근처 여관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다시 수원시청에 출근했지. 문화공보실에 가서 그냥 앉아 있다가 문화공보실 직원들에게 커피도 사주고 신문도 보고 이야기도 하면서 하루를 보냈어. 다음 날에 또 가서 얼굴도장을 찍었지. 그렇게 며칠 출근하다시피 하니 공보실장인가 하는 사람이 진심을 알았는지 탁본을 딱 한 장만 하라고 아주 조심스럽게 말하더군. 그래서 탁본하러 갔는데 수원시청 담당자가 탁본을 보관할 수 있게 두어 장 더 할 수 있느냐 해서 내가 탁본을 더 해줬지. 그렇게 그 비의 탁본이 지금 남아 있게 된 거야. 여 : 문화 유적이나 유물, 그 기록을 남기고 보존한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선생님 말씀을 들으며 실감합니다. 배천희 국사에 대한 보존 사업은 잘되고 있는지요?황 : 이분이 대단한 분이라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되고 포항시에서도 그런 사실을 확인했지. 2009년에는 국사를 포항시의 인물로 지정해서 선양사업도 했어. 국사의 형인 배전(裵詮)의 후손들도 매년 음력 10월 7일에 국사를 기리는 제를 올리고 있고. 유허비와 천곡사 앞에 있던 사당이 허물어져 가는 걸 문중에서 새로 건립했으니 정말 다행이었지.여 : 선생님께서 노력하신 덕분에 포항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인 배천희 국사가 새롭게 조명되고 관련된 유물과 유적들이 보존되었군요. 선생님은 남파 대사의 유적지 보존도 주장해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황 : 남파 대사는 조선 중기에 선(禪), 교(敎) 양 종단을 이끌고 승병의 최고 책임자인 수호도총섭(守護都總攝)을 지낸 분이지. 포항 장기면 묘봉산 자락에 있는 석남사지(石南寺址)에 그분의 비석이 있어. 문살이 훼손되고 대나무 숲 가운데 방치될 것 같아 내가 보존이 필요하다고 수차례 주장했지.여 : 저도 선생님을 뵙기 전에는 남파 대사가 어떤 분인지 잘 몰랐습니다.황 : 남파 대사는 1740년 장기에서 태어났고, 이름은 화묵(華默)이야. 열두 살 때 삭발하고 승려의 계를 받았는데, 승과에 합격한 후 대사(大師)까지 올랐어. 앞에서 말한 것처럼 밀양에 있는 표충사의 수호도총섭을 지낸 분인데, 조선시대 선, 교의 맥을 이은 화엄경의 조종(祖宗)으로 일컬어질 정도의 고승이었지. 내가 남파 대사가 주지로 있던 석남사지를 발굴해 문화자원으로 조성하자고 했고, 방치되었던 남파 대사의 비도 보존하자고 주장했어. 그래서 포항시에서 2005년 11월에 비각을 세워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지. 남파 대사 비의 비문은 조선 최고의 명필 가운데 한 명인 계오(戒悟) 스님이 쓰셨으니 서체 연구로도 가치가 있지. 그러니 문화재 지정을 해서 보존 대책을 세우는 게 무엇보다 시급해. 그건 누구 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포항 사람들 모두의 책임이지.여 : 포항에는 불교문화의 유적이 많은 듯합니다. 보경사, 천곡사, 오어사 같은 사찰의 문화적 의미가 큰 것 같습니다.황 : 그렇고말고. 신라시대에 창건된 세 사찰은 그 자체로 귀중한 문화유산이지. 보물 제252호인 원진국사비가 있는 보경사는 602년 진평왕 때 창건된 천년 고찰이고,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된 천곡사에는 선덕여왕의 전설이 있지.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선덕여왕이 세상 좋다는 약은 모두 써봐도 효력이 없다가 한 신하의 권유를 듣고는 동해안 천곡령(泉谷嶺) 아래에 있는 석천(石泉) 약수로 며칠간 목욕한 뒤 완쾌되었다는 거야. 그러자 약수의 효력에 감복한 선덕여왕이 서라벌로 돌아와 자장율사에게 절을 짓게 하고, 그 이름을 천곡사로 했다는 전설이 있어. 그곳엔 고란초(皐蘭草)가 유난히 많이 자라지. 여 : 오어사에 관해서는 이름에 얽힌 이야기가 재미있다던데요.황 : 오어사는 신라 진평왕 때 창건된 천년 사찰이지. 처음 지었을 때는 항사사(恒沙寺)라 했는데 오어사란 이름을 갖게 된 일화가 재미나. 어느 날 원효대사와 혜공 스님이 계곡에서 고기를 잡아먹고 변을 봤는데 물고기 두 마리가 튀어나와 한 마리는 물을 거슬러 가고, 한 마리는 아래로 내려갔다는 거야. 두 스님이 그 물고기를 보고는 물을 거슬러 가는 고기가 서로 자기 고기라고 우겼다는 이야기에서 오어(吾魚), 즉 ‘저 고기가 내 고기’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하지.여 : 속세의 장난꾸러기 청년 같은 스님들의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해학이 느껴지는 일화 같기도 합니다. 오어사에는 특별한 유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황 : 우리나라에 몇 안 남은 동종(銅鐘)과 목비(木碑) 등 불교와 관련된 희귀한 유물이 보존되어 있어. 신라시대부터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는 불교 역사의 귀중한 사료의 보고로도 그 역사적 가치가 대단하지.황 인1950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대구로 이주해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영남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동해중학교에 교사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닿았으며, 포항정보여고와 동성고에서 2008년까지 재직한 후 정년 퇴임했다. 포항 지역의 고인돌을 처음으로 조사·발굴해 ‘영일군사’에 소개했고, 지역 민속놀이인 ‘월월이청청’을 조사·발굴한 후 포항정보여고 학생들과 공연해 제7회 청소년 민속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흥인군의 비석과 남파 대사의 비석을 발견해 비각을 세우도록 했고, 석곡 이규준 선생의 목판을 경북 문화재 자료로 지정하게 했다. 또한 석곡의 사상과 학문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알려 석곡기념관 건립의 기틀을 마련했다. ‘포항시사’ 집필위원을 역임했고, 현재 포항문화원 향토조사 연구위원 등을 맡고 있다. 2022년 제12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대담·정리 : 여국현(시인)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황 인

2023-08-27

“포항에 고인돌이 많았다는 것은 살기에 좋았다는 뜻”

황보 집성촌을 찾아가던 선생은 우연히 고인돌을 발견하게 된다. 이 우연은 이후 선생이 포항의 고인돌과 선돌을 비롯한 선사시대 유물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여 : 단량의 일화가 선생님께서 포항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직접적인 계기라고 할 수 있겠군요.황 : 그렇기도 하지만 내가 더 놀라고, 포항이 예사 고장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 건 그 집성촌(구룡포읍 성동3리)을 찾아가던 도중에 일어난 일 때문이지. 내가 그 마을을 찾아가는 길에 방앗간이 하나 보이더군. 여기에 웬 방앗간이 있나 싶어 가보았더니 방앗간 뒤에 고인돌이 있는 거야. 하나도 아니고 자그마치 네 개나. 그러고는 상정 쪽으로 조금 가다 보니 왼쪽에 언덕이 보이는데, 거기 농가에 또 고인돌이 있고, 또 조금 가다 보면 고인들이 주욱 있더라고.여 : 그러니까 선생님께서 고인돌이 있다는 걸 알고 찾아다니다가 발견한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죠?황 : 그렇지. 황보 집성촌을 안 것도 그렇고 방앗간 뒤 고인돌도 그렇고, 그게 다 우연이었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을 텐데 내가 국사학을 전공했으니 보이기도 한 거지. 여 : 그저 운이기만 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처음은 우연이었더라도 직접 찾아 나선 선생님의 관심 그리고 수천 년의 시간을 견뎌낸 고인돌이 자기를 알아본 선생님을 부르는 힘이 더하여 이 모든 일이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황 : 그렇기도 하겠지. 하여간 이것 참 재미있다 싶은 생각이 들어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봤어. 당시 컴퓨터가 있나 인터넷이 있나. 그냥 닥치는 대로 논문집을 뒤져보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지. 그런데 논문집에 이쪽 지방(구룡포)에는 고인돌이 없고 기계(杞溪)에 몇 기(基)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어. 그래서 우선 ‘여기 고인돌이 있습니다’ 하고 문교부에 조사보고서를 냈지.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어. 고인돌이 한두 군데에 있는 게 아니야. 성동1리에 가니 거기는 논 가운데에 고인돌이 여섯 개나 있더라고. 그때부터 내가 이게 보통 일이 아니다 싶어서 직접 보고 조사하고 기록하기 시작했지. 안 다닌 데가 없다시피 돌아다녔어. 주말이면 아예 집을 나와 미친놈처럼 논이며 밭이며 산을 헤매고 다녔지.여 : 주말마다 그렇게 다니다 보면 기억에 남는 일도 많았을 것 같군요.황 : 웃지 못할 일이 많았어. 황보 입향조 비석을 탁본하러 뇌성산(磊城山)에 갔을 때 일이야. 내가 그 비를 발견하고는 문화재 관리 지원을 받으려고 탁본하러 갔어. 뇌성산에서 탁본하고 내려오는데 경찰관이 기다리고 있다가 파출소로 데려가는 거야. 못 보던 사내가 양복을 입고 사진기, 나침반, 지도에 카메라까지 들고 산에서 내려오니 마을 사람들이 간첩이라고 신고한 거지. 별일 없이 풀려나기는 했지만 그런 황당한 일이 한두 번 아니었어.여 : ‘영일만의 3천 년 문화유산’이라는 방송을 보니까 선생님께서는 고인돌을 비롯해 발굴한 문화유산을 전부 지도에 기록해두었더군요.황 : 그랬지. 다 기록했어. 직접 찾아다니며 얻은 자료를 보면 포항 지역에 500여 기의 고인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돼. 내가 하나하나 다 기록했는데, 사진만 해도 500장이 넘어. 내가 기록한 고인돌 조사 지도를 가지고 방송국에서 영일만 지역의 고인돌 분포도를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었어. 그렇게 해서 기계면에서만 65기, 흥해와 동해에 각 30기 등 포항에 213기의 고인돌이 있는 것을 확인했지. 그러고 나니 나중에 대학교수들도 내게 찾아와 자료를 받아 갔어. 그런데 그 고인돌이 지금은 많이 사라졌어. 남아 있는 게 얼마 안 돼. 여 : 그건 정말 안타깝습니다. 고인돌 외에 포항의 선사시대 유적 가운데 대표적인 것을 말씀해주신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황 : 암각화와 선돌도 많지. 암각화는 대표적인 것으로 1990년 흥해읍 칠포리에서 발견된 게 있어. 약 3천 년 전 청동기시대 유물로 경북 유형문화재 제249호로 지정되었지. 청하면 신흥리 암각화는 특별한 성혈(星穴)을 보여줘 더 중요한 의미가 있어. 아마 하늘의 별자리를 표시한 게 아닌가 추측하는데 그 성혈이 바위에 여럿 남아 있지.여 : 선돌은 무엇을 말하고, 어떤 것이 있는지요?황 : 선돌은 말 그대로 돌을 세워놓은 것이지. 주로 마을의 경계를 표시하거나 어떤 믿음을 표현하거나 어떤 사건을 기념하려고 세운 것으로 보면 될 거야. 동해초등학교와 신정리 마을에 세워둔 게 있는데, 동해초등학교에 있는 거는 할배짝지돌, 신정리에 있는 거는 할매짝지돌이라 부르기도 해.여 : 두 이름이 서로 어울리는 걸 보니 마을 어귀에 서 있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처럼 서로 한 쌍을 이루는 것처럼 들립니다.황 : 그렇지. 그런데 두 선돌에도 사연이 있어. 원래는 할배짝지돌만 발견되었는데, 기록을 살펴보니 할배짝지돌에서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할매짝지돌이 있더군. 그걸 찾고 싶어서 신정리, 금강리 부근을 몇 년 다녔는데 결국 못 찾았지. 그러던 어느 해 신정리 마을청년회장한테 연락이 왔어. 마을 앞 보(洑) 공사를 하다가 도랑에서 커다란 돌을 하나 찾아서 꺼내 놨다고. 그래서 가보니 수년간 찾던 바로 그 할매짝지돌이었어. 그걸 수호신으로 삼아 마을 입구에 세워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지.여 : 선생님께서 선돌을 찾아다니시는 걸 알고 신정리 마을청년회장이 연락했군요. 그걸 평범한 돌로 여겨 버리거나 깨버리기라도 했다면 사라지고 말았겠습니다.황 : 그럴 수도 있었지. 사실 여기 와서 내가 고인돌을 찾아다닐 때만 해도 사방에 고인돌이 보였어. 상정, 중산, 공당까지 밭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사방에 고인돌이 늘어서 있었거든. 그런데 그때는 사람들이 그게 중요한 걸 알았나. 문화재라는 개념이 있었어야 말이지. 밭 간다고 쟁기질하다가 걸리면 치워버리거나 깨버렸고 나중에는 포클레인으로 부수기도 했지. 그렇게 사라진 고인돌이 셀 수 없이 많았어. 여 : 고인돌이나 선돌 같은 거석문화의 유물이 청동기시대의 흔적을 보여준다는 것을 고려하면 우리 지역의 고인돌, 선돌이 제대로 보존이 안 된 것은 정말 아쉽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지역에 고인돌이 많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일까요?황 : 고인돌은 쉽게 말해 부족을 이끄는 족장의 무덤이야. 고인돌이 많다는 것은 큰 규모의 부족이 살았다는 증거이고, 그것은 예부터 우리 지역이 그만큼 살기에 좋은 곳이었다는 걸 말해주지. 고인돌과 선돌이 많이 사라졌다는 건 3천 년 된 우리의 역사가 사라진 것이나 다를 게 없으니 가슴 아픈 일이지.고인돌과 선돌, 암각화는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만 그것을 만들고 세우고 깎아낸 선사시대인들의 삶의 흔적, 곧 그들의 문화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고인돌 하나, 선돌 하나, 암각화 하나가 사라지는 것은 곧 선조들의 삶의 흔적이 지워지고 잊히고 사라지는 것이다.우리가 기억하고 보존하고 물려주어야 할 문화는 특정한 물건이나 대상만이 아니다. 그 안에 담겨 전해지는 우리보다 앞서 살아간 이들의 삶의 방식이자 역사다. 다행히 선생의 발굴과 발견은 그 후 지역의 많은 관심을 불러와 고인돌을 보존하는 마을 자치 모임이 생기는 등 다양한 노력으로 이어졌다.황 인1950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대구로 이주해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영남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동해중학교에 교사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닿았으며, 포항정보여고와 동성고에서 2008년까지 재직한 후 정년 퇴임했다. 포항 지역의 고인돌을 처음으로 조사·발굴해 ‘영일군사’에 소개했고, 지역 민속놀이인 ‘월월이청청’을 조사·발굴한 후 포항정보여고 학생들과 공연해 제7회 청소년 민속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흥인군의 비석과 남파 대사의 비석을 발견해 비각을 세우도록 했고, 석곡 이규준 선생의 목판을 경북 문화재 자료로 지정하게 했다. 또한 석곡의 사상과 학문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알려 석곡기념관 건립의 기틀을 마련했다. ‘포항시사’ 집필위원을 역임했고, 현재 포항문화원 향토조사 연구위원 등을 맡고 있다. 2022년 제12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대담·정리 : 여국현(시인)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황 인

2023-08-23

고구려 정복 후 드러낸 한반도 지배야욕… 동맹국서 적으로

무열왕 김춘추, 흥무왕 김유신, 문무왕 김법민. 인척(姻戚) 관계로 맺어진 이 세 사람은 ‘삼한일통(삼국통일)의 트로이카’라 불러도 무방하다.무열왕과 김유신은 660년 의자왕과 계백을 제압하며 백제를 병합했고, 무열왕 사후(死後)인 668년엔 무열왕의 아들인 문무왕이 외숙부 김유신의 도움을 받아 연개소문 자식들의 갈등으로 혼란스러웠던 고구려까지 절멸시킨다.하지만, 온전한 삼국통일을 위해선 한 가지의 문제를 더 해결해야 했다. 바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동맹세력으로 활동했던 당나라를 내몰아야 한다는 것. 외부세력의 축출 없는 삼한일통은 반쪽짜리에 불과했을 터이니.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나라는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7세기 지구 위 초강대국. 고구려 멸망 이후 ‘승전동맹국’이라 할 신라와 당나라는 전후(戰後) 처리를 놓고 갈등을 지속했다.당시의 정치 지형과 역사적 상황을 경북대학교 대학원 전경효의 논문 ‘7세기 후반 나당(羅唐·신라와 당나라)관계와 김유신’은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7세기는 한국사에서 변동의 시기였다. 특정 국가 내에서 일어난 정치적 변화가 대외관계에 영향을 끼치는가 하면 대외관계가 국내 정치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특히 당의 등장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심화시켰다. 또한 전쟁의 양상은 국지전에서 전면전으로 변화하기 시작했으며 총력전의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따라서 7세기는 여러 국가가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인 시기였다.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후략)”한때는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처럼 손을 잡고 어떤 일을 도모했으나, 이후에 서로가 가진 입장 차이와 일 처리 과정의 불협화음 탓에 파국을 맞는 경우는 개인은 물론 국가 사이에서도 흔했다.◆ 세계 제2차대전 종전 후처럼 신라와 당나라도 갈등 겪어신라, 백제, 고구려, 당나라가 때로는 갈등하고, 어떤 부분에선 협력하며 경쟁하던 7세기만이 아니었다.전쟁이 끝난 후 각자가 많은 몫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이전투구(泥田鬪狗)의 다툼을 벌이는 현상은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20세기까지 끊임없이 지속됐다.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돼 1945년에 끝이 난 세계 제2차대전은 수천만 명의 사람이 죽거나 다친 인류사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다.이 전쟁이 미국과 소련을 주축으로 한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이후 ‘제 몫 챙기기’로 인한 불화가 7세기 신라와 당나라의 갈등처럼 수면 위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세계 제2차대전 종전 후의 역사를 기록한 각종 문헌이 정리된 ‘위키백과’는 “연합국은 점령한 오스트리아와 독일 영토에 점령 지역 행정부를 세웠고 처음에는 각각 서방 연합국이 서쪽을, 소련이 동쪽을 통제하는 지역으로 나누어 통제했다. 하지만 두 연합국은 서로 갈라졌다…”는 서술로 유럽에서의 승전국 간 갈등을 보여준다.반목과 갈등은 ‘원자폭탄 투하’라는 극단의 방법으로 군국주의 일본을 항복시킨 아시아 지역이라고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위키백과’의 설명은 아래와 같이 이어진다.“미국이 일본 본토와 일본이 통치했던 구 서태평양 도서 지역을 점령했고, 소련은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점령했다. 일제강점기 치하에 있던 한국은 1945년부터 1948년까지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이 분할 점령하면서 분단됐다. 1945년에는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에 각각 자신이 한반도 전체의 합법적인 정부라고 주장하는 별도의 공화국이 수립됐고,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이어졌다…(중략) 전후 세계도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NATO)와 소련이 주도하는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두 편으로 갈라졌다. 두 세력 사이의 오랜 정치적 긴장과 군사 경쟁인 냉전이 시작됐고, 냉전 기간 동안 전례 없는 군비 경쟁과 전 세계의 수많은 대리전이 이어졌다.” ◆ 신라와 당나라, 얻어낸 땅을 누가 차지하느냐로 다투다위에 언급된 세계 제2차대전 종결 후 일어난 갖가지 사건처럼, 668년 나당연합군의 고구려 병합 이후에도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선 쉽사리 타협과 협상이 불가능한 문제가 여럿 발생한다.그중에서도 문제의 핵심은 전쟁으로 얻은 고구려 영토의 점유와 관련된 것이었다. 신라도, 당나라도 큰 희생을 치르며 얻어낸 땅을 한 평이라도 더 가지고 싶었을 터. 그와 관련해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출간한 ‘통일신라 시기 1-중앙과 지방’을 간략하게 인용한다.“무열왕 김춘추와 당 태종 이세민은 나당동맹을 체결하면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후 대동강 이남의 땅은 신라가 차지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이 시기 고구려의 수도 평양은 대동강 북쪽에 있었다. 때문에 당은 고구려 수도를 차지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 결과 신라는 대동강 이남의 땅을 차지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당은 신라와 공동 군사작전을 펼쳐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후에는 한반도 전체를 자신의 직할영토로 하려 했고, 신라는 김춘추와 당 태종 사이에 맺어진 전후 처리 합의대로 대동강 이남을 영토로 하려고 했다.”국가와 국가 사이에 체결된 약속이 깨질 경우 통상은 두 나라 가운데 더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가 보다 유리한 입장에 서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동서양의 지나온 역사를 되짚어 봐도 대부분이 그러했다.하지만, 신라는 달랐다. 당나라가 애초에 맺은 협정을 부정하며 백제와 고구려는 물론, 신라의 영토까지 ‘식민지화’ 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이를 거칠게 거부한다.입으로는 동맹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삼한(신라·백제·고구려)을 한꺼번에 집어삼키려 했던 당나라의 야망은 이미 백제가 절멸된 660년 직후부터 시작됐다. 이 사실은 다음에 인용되는 ‘나무위키’의 서술을 읽어보면 이해가 가능하다.“백제를 멸망시킨 이후 아직 고구려와 본격적으로 싸우기 이전부터 영토 문제를 비롯한 당나라와의 여러 이익들이 상충되기 시작하면서, 신라의 불만은 점점 축적돼 갔다. 당에게 주권의 일부까지 바치다시피 하면서 전쟁을 수행했지만, 실익은커녕 위협까지 생긴 격이었으니 말이다. 특히 이런 불만 속에서 663년에 당 조정이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삼고 문무왕을 계림주 대도독으로 임명하는 등의 행태를 보였다. 물론 실제로는 신라가 멀쩡히 존재했으니, 구 백제 땅에 설치한 웅진도독부와 달리 당나라의 계림대도독부로 기능하는 건 아니었지만 상징적으로 당나라에 편입시킨다는 의도가 엿보이는 행위였다.”문무왕과 김유신을 비롯한 7세기 후반 신라의 집권층은 마구잡이로 뻗어가는 당나라의 정치·사회적 욕망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그럴 경우 백제와 고구려를 무릎 꿇리기 위해 사용된 국력의 손실을 어디서도 보상받을 수 없었기 때문.그래서다. 신라는 부득불 당나라와의 결사항전(決死抗戰)을 백성들에게 선언한다. 황산벌전투와 평양성전투에 이어 다시 한 번 많은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 전쟁이 눈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 676년, 마침내 당나라를 축출하고 이룬 온전한 삼한일통대부분의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건 일이나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이 아닌 최종 결과다. 그렇다면 신라와 당나라 간의 전쟁은 어떻게 끝이 났을까?이에 관한 결과부터 먼저 이야기하자. 많은 이들이 역사책을 읽어 잘 알고 있듯 이 전쟁에선 신라가 이긴다. 다시 한 번 ‘통일신라 시기 1-중앙과 지방’의 한 대목을 옮긴다.“(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수 없던 신라는) 당의 정책에 정면으로 대결했다. 이리하여 나당전쟁이 벌어졌다. 7년간 행해진 이 전쟁 가운데 매소성전투와 기벌포해전의 승리로 신라는 마침내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완성했다.”참으로 길고 긴 싸움이었다. 660년 백제가 무너지고, 8년 후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굴복한 뒤로부터도 8년의 시간이 더 흘러서야 신라는 완성된 형태의 삼한일통(삼국통일)을 제대로 맛본다. 676년. 마침내 당나라가 신라에게 백기를 들고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간 것.“신라는 자력으로 당나라의 한반도 지배 야욕을 저지하고 쫒아냈다. 신라가 승전했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 쉬우나, 나당전쟁은 오늘날로 치면 중견국이 어떤 나라의 지원군이나 경제적인 도움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초강대국과 1대1로 싸워 물리친 것과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국력 차이를 지혜롭게 극복한 위대한 승리였다.”위의 문장은 ‘나무위키’가 나당전쟁의 역사적 의미를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다.(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8-22

“전 세계의 아름다운 바닷속을 더 많은 이들과 다니고파”

심해를 맨몸으로 유영하는 프리다이버의 모습은 신비로움 그 자체다. 땅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외계의 생명체 같다고나 할까. 실제로 바닷속 환경은 우주와 가장 유사하다고 알려진다. 행성을 탐사하기 전 우주비행사들이 대서양 아래서 훈련하는 이유기도 하다. 바다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프리다이버가 많다고 한다. 바닷속 가장 신비로운 생물들에게 다가가는 빠르고 효율적 방법이 프리다이빙이기 때문이다. 우주를 유영하듯 바닷속을 헤엄치려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훈련이 필요하다. 우주를 유영하듯 바닷속을 오가는 사람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도전하는 프리다이버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 비영리 프리다이빙 단체 한국지부로 연락했고, 포항에서 ‘수심 좀 탄다’는 이수형 프리다이버와 만날 수 있었다. -프리다이빙을 사진으로는 접했지만 아직은 생소한 스포츠이다.△최근 소셜미디어를 타고 수중에서 촬영한 프리다이버 사진이 인기를 끌면서 실제로 배우려는 사람도 늘고 있다. 프리다이빙은 물속에서 호흡을 돕는 장비를 사용하지 않고 잠수하는 운동이다. 말 그대로 모든 것에서 벗어나(free) 한계에 도전한다. 국내에 도입된 지 10여 년 됐다. 종종 해외에서 배우고 들어온 사람들은 있었지만, 교육시스템을 갖추고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스킨스쿠버와 무엇이 다른가.△‘스킨스쿠버’는 스쿠버다이빙과 스킨다이빙을 아우르는 말이다. ‘스쿠버다이빙’은 공기통을 사용하는 수중 스포츠이고, ‘스킨다이빙’은 우리가 흔히 아는 ‘스노클링’이다. 프리다이빙은 장비 없이 자신의 숨을 갖고 하는 운동이므로 스쿠버다이빙에 비해 진입장벽이 낮다.-프리다이빙을 시작한 계기는.△포항이 고향이라 어릴 적부터 물에서 하는 스포츠를 좋아한다. 6년여 전 서핑 강사를 하면서 프리다이빙에도 관심을 두게 됐다. 국내에서 배우다가, 강사를 가르치는 트레이너 자격증은 필리핀에서 땄다. 그전에는 프리다이빙의 전신인 ‘스피어 피싱’을 취미로 즐겼다. 물속에서 숨을 참으며 작살이나 총으로 물고기를 잡는 원초적인 어로 활동으로 현재 국내에서는 불법이다.-훈련은 주로 어디서 하나.△제한 수역과 개방 수역이 있다. 제한 수역이라면 수영장과 다이빙 풀이 있고 개방 수역이라면 먼바다를 말한다. 포항에는 전용 풀장이 없기에 울산과 대구, 울진으로 가야 한다. 이곳들의 최대 깊이는 5미터이다. 국내 최대 수심은 경기도 용인에 있는 사설 풀장으로 수심 36미터이다.-수심 5미터를 내려가려면 숨을 얼마나 참아야 하나.△초급자가 묻는 말도 안 되는 질문 중 하나이다. 숨을 참는 건 하기 나름이다. 프리다이빙은 숨을 오래 참는 운동이 아니다. 예를 들어 10미터를 다녀오는 과정이라면, 몇 초 만에 다녀오든 상관이 없고 10미터에 도달하기만 하면 된다. 숨을 참는 시간은 훈련을 지속하면 늘어난다. 맨 처음 나는 1분 15초 정도 숨을 참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훨씬 길어졌다. 참고로 강사 자격을 따려면 최소 4분 이상 숨을 참아야 한다.-숨을 오래 참는 훈련은 어떻게 하나.△편안한 상태를 유지한 뒤 ‘호흡 충동’을 다스려야 한다. 숨을 참고 어느 정도 지나면 딸꾹질이 난다거나 침이 꼴깍 넘어가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등의 불편한 반응이 일어난다. 이산화탄소가 배출되지 못하고 몸에 쌓이면서 나타나는 호흡 충동 반응이다. 호흡 충동을 어떻게 조정하고 능숙하게 다루는지가 관건이다. 호흡 충동 간의 거리를 늘리는 것도 중요하다. 처음에는 누구나 불편하다. 욕심을 부리면 물에서 기절하는 사고가 일어난다.-숨을 참다가 기절까지 한다면 위험한 운동 아닌가.△무리하면 저산소증으로 블랙아웃(일시적 기절)이 오기도 한다. 기량을 늘리려는 선수들에게 종종 나타난다. 숨을 조금씩 늘리면 문제없다. 목표치를 수없이 반복해서 완벽해지면 조금씩 늘린다. 성급하면 안 하던 실수도 하게 되니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어서 늘 상태를 의심해야 한다. 무엇보다 프리다이빙은 2인 1조로 움직인다. 다이버의 근긴장이나 떨림, 날숨, 청색증 등을 살피는 사람을 ‘버디’라고 한다. 다이버 또한 버디에게 수신호로 상태를 알려야 한다. 올라오는 도중이나 수면으로 상승하기 직전에 블랙아웃이 올 수 있기 때문에 버디가 수면 아래 3분의 1지점까지 마중 갔다가 같이 올라온다. 이수형 프리다이버. -프리다이빙 경기는 무엇을 겨루는지 궁금하다.△먼저 정지된 상태에서 오래 숨을 참는 ‘수면무호흡(STA, Static Apnea)’이 있다. 수면에 떠서 숨을 참는 이 종목의 국내 최고 기록은 7분 30초 정도 된다. 세계 기록은 10분대이다.그리고 물속에서 멀리 나아가는 ‘수평 잠영(DYN, Dynamic Apnea)’, 모노핀을 착용하고 내려가는 ‘수직하강(CWT, Constant Weight)’, 줄을 잡고 내려가는 ‘자유하강(FIM, Free Immersion)’ 등이 있다. 더 오래, 더 깊이, 더 멀리 가느냐를 겨루는 것으로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목표 거리를 호흡이 되는 만큼 다녀오는 것이다. 마라톤의 시간 단축 훈련처럼 자신의 기록을 깨는 운동이다.-수영을 잘해야 프리다이빙을 할 수 있을 것 같다.△수강생의 3분의 1은 수영을 못 한다. 물공포증 극복이 목표인 수강생도 있다. 욕심을 버리고 천천히 하면 누구든 할 수 있다. 교육할 때도 “천천히 하세요”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한다.무리하지 않기 위해 밟아야 할 단계가 있다. 다이빙하기 전에는 반드시 짧은 수심을 오가면서 자신의 체력 상태를 점검한다. 무리하면 목 안이 찢어지거나 폐를 다친다. 표가 안 나는 상처지만 회복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므로 다이버 스스로가 조심한다. 다이빙하기 직전에는 힘을 빼고 마음을 편하게 내려놓아야 한다. 물에 들어가기 전에 준비 호흡이 필요하고, 그다음 크게 숨을 들이마시는 최종 호흡을 한다. 깊게 수심을 탈 땐 숨을 멈추고,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회복 호흡을 한다. 가볍게 내뱉고 재빨리 들이마시길 세 차례 반복하고, 회복이 끝나면 버디에게 오케이 사인을 보내야 한다.-숨을 참아가며 물속으로 들어가는 까닭은.△대부분 다른 종목은 다른 사람과 겨루는 스포츠라면 다이빙은 스스로 한계에 도전하는 스포츠이다. 나를 이기는 느낌, 성장하는 재미를 느낀다. 1년이 넘도록 진전이 없던 수강생이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을 붙들고 있더니 얼마 전에는 강사 과정에 도전하겠다고 연락이 왔더라. 프리다이빙을 가르치는 강사로서 그럴 때 흐뭇하다.-물에 들어가면 무슨 생각이 드나.△보통은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내 호흡 외에는 잡념이 사라지는 점이 프리다이빙의 매력이다. 바다로 나가면 바닷속 생물들 보는 재미에 푹 빠진다. 필리핀의 말라파스쿠아나 보홀, 사이판 로타섬, 일본의 오키나와, 미아케지마 등으로 다이빙 투어를 다닌다. 최근에는 고래를 보러 일본에 다녀왔다. 고래는 공기 방울을 싫어해서 산소통을 메면 가까이서 마주하기 힘들다. 일본은 돌고래 투어 상품이 다양하게 개발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상품화만 안 됐을 뿐 울릉도 오가는 선박에서 돌고래를 볼 수 있다.-바닷속 상황이 안 좋다고 하는데 실제로 어떤가.△바다가 너무 나빠지고 있다. 특히 해양쓰레기 문제는 심각하다. 전국이 다 그런 것 같다. 최근에 울릉도와 독도를 다녀왔는데 그나마 울릉도는 쓰레기가 적었고 독도는 다행히도 깨끗했다.-프리다이빙을 즐기기에 포항은 어떤 곳인가.△대구 경북지역에서 접근성이 이 정도로 좋으면서 시야가 잘 확보되기로는 포항만 한 곳이 없다. 하지만 전국 다이버들에게 포항은 먹거리 다이빙으로 악명이 높다. 화산지형인 제주나 울릉도와 달리 포항의 해저 지형은 밋밋한 편이다. 해저에 볼거리가 없다 보니 포항을 찾는 다이버의 90%가 전복이나 문어를 보고 온다. 그러니 다이버들이 바닷속 쓰레기를 줍는 플로빙 활동에도 어민들은 민감할 수밖에 없다. 세계적인 다이빙 포인트에서 아이디어를 구하면 어떨까? 다이버들의 성지인 이집트 바다에는 24미터짜리 코끼리 동상이 있고, 스페인의 물속에는 박물관이 있다. 바닷속에 볼거리를 만들면 관광객도 늘고 수산물을 무단으로 채취하는 사건도 감소할 것이다. 강릉은 최근 바다에 난파선을 빠뜨리고 해산물 불법 포획이 줄었다고 한다. 포항시에, 스틸아트페스티벌에서 전시한 작품을 바다에 빠뜨려 달라고 건의한 적이 있다. 로봇 태권브이 같은 조각상이 바닷속에 있다면 훌륭한 다이빙 포인트가 될 것이다.-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나.△개인적으로는 동해에서 수심 80미터 이상을 타는 것이 목표이다. 마지막으로 내려간 수심은 65미터이다. 울릉도에서 프리다이빙 대회를 개최하고 싶은 바람도 있다. 동해는 냉수대가 심해 여건상 어려움은 있지만, 울릉도 바다는 20미터 이상 시야가 확보되어 해외 어디 내놔도 부럽지 않은 다이빙 포인트이다. 전 세계의 아름다운 바닷속을 더 많은 이들과 다니고 싶다. 투어를 다녀온 사람들이 평생의 버킷리스트를 이뤄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할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전율을 느낀다.이수형 프리다이버는용인대학교에서 체육학을 공부하고 석사학위를 받았다. 격투기 종목을 두루 섭렵해 용무도 4단, 태권도 4단, 유도 3단, 주짓수 브라운 벨트 등 합이 무려 17단에 달한다. 자동차 관련 사업으로 돈도 제법 벌었지만 자유로운 생활을 쫓아 프리다이버가 됐다. 포항에서 유일하게 프리다이빙 강사를 가르치는 트레이너이며, 수중사진 강사 트레이너, CMAS(세계수중연맹) 프리다이빙 심판, 민간해양구조대원 등으로 활동한다. 다이빙 전문 여행사를 운영하며 전 세계 바닷속을 누비고 있다./배은정 작가

2023-08-21

초록 향기 짙은, 마음의 고향

포항은 바람의 땅사람도 꽃도 나무도 채소도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자란다.영일만에서 샛바람이 거세게 불면육지는 모래투성이가 되었다.일제강점기에 송도 백사장에나무를 촘촘히 심어 방풍림을 조성했고이를 송림이라 불렀다. 나무는 쑥쑥 자라 어느새 하늘을 가렸고울창한 숲을 이루었다.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빽빽했고다람쥐, 청설모, 산토끼, 노루가 무리를 지어 다녔다.세월이 흘러 송림은 사람들의 아늑한 쉼터가 되었고어린 학생들이 소풍을 즐기는 곳이 되었다.술래잡기, 보물찾기를 하기에 더없이 좋았고나무 아래 팔베개를 하고 누우면 솔향기가 온몸을 감쌌다. 송림에 변화의 바람이 솔솔 불고 있다.세련된 스틸아트가 세워졌고맨발로 걷는 사람도 있고찻집도 하나둘 둥지를 틀었다.눈을 감고 송림을 떠올리면시원한 바닷바람과 바람결 따라 휘어진 소나무싱그러운 솔향기가 느껴진다.조선소에서 배 만드는 소리도 들려온다. 어느 날 문득 마음의 고향이 그립다면초록의 향기 짙은 송림에 가볼 일이다. 최수정 최수정 197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포항에서 성장했다. 계명대 서양화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6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포항지부, 현상회, 계명회 등의 회원이며 포항에서 갤러리m을 운영하고 있다. ‘호미곶 이야기’, ‘비밀이 사는 아파트’, ‘꿈꾸는 복치’ 등의 책에 그림을 그렸다.

2023-08-21

구룡포읍 성동리에 황보 씨 집성촌이 있는 까닭은

선생은 황보 집성촌에 찾아가 황보인 가문의 충직한 여종 단량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뿐만 아니라 갑연, 순량 등 여종들의 충절을 기리는 비(碑)가 있다는 사실을 통해 포항이 예부터 충절과 보은의 고장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여 : 황보인이라면 조선시대 영의정을 말씀하시는지요?황 : 그렇지. 내가 거길 가보니 진짜 황보 성을 가진 사람들의 집성촌이라.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알아보니 사연이 기가 막혀. 계유정난 때 황보인이 수양대군 손에 죽었다는 건 역사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지. 그때 한양 황보인의 집에서 황보인의 둘째 아들 흠이 단량이라는 여종에게 황보인의 손자인 황보단(皇甫端)을 데리고 도망쳐 가문의 대를 이어달라고 부탁했다는 거야. 단량이 그 길로 황보단을 물동이에 넣고는 뒷문으로 도망쳤어. 단량이 황보단을 데리고 경북 봉화의 닥실마을까지 갔다는 거야.여 : 그 먼 길을 어린애를 데리고 사람들 눈을 피해 다녀야 했으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황 : 그랬겠지. 어쨌거나 단량은 황보인의 딸이 시집가 있던 봉화에 갔어. 조카를 데리고 찾아온 단량을 본 황보인의 딸과 사위 윤당은 기가 찼겠지. 한편 곰곰이 생각해보니 조카를 데리고 있다가는 다 같이 죽을 게 뻔했어. 그래서 단량에게 노잣돈을 주며 땅끝까지 도망가 숨으라고 일렀지. 그 길로 단량이 찾아간 데가 바로 지금의 호미곶면 구만리 짚신골이었어. 거기서 살다가 나중에는 구룡포읍 성동리에 옮겨 평생을 숨어 살면서 황보인의 손자 단을 키웠던 거지. 황보인 가문의 대가 안 끊기고 구룡포읍 성동리에 영천 황보씨 집성촌이 형성된 데는 그런 사연이 있었던 거야. 여 : 정말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무엇보다 황보인 후손들로서는 단량에게 정말 큰 은혜를 입었군요.황 : 그렇지. 그러니 계집종이었던 단량에게 비석까지 세워주며 기리는 거지. 지금도 구룡포읍 성동리 광남서원(廣南書院)에 가면 단량을 기리는 비, 충비단량지비(忠婢丹良之碑)가 있어. 처음엔 나도 그걸 보고 깜짝 놀랐지. 계집종의 비석이 있으니. 그 당시 노비의 비석을 세운다는 건 생각도 못 할 일이었거든. 노비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어. 그러니 계집종의 비석을 세웠다는 건 정말 대단한 거야. 단량이 그만한 일을 하기도 했지만 말이지.여 : 당시는 더할 나위 없이 엄격한 신분사회였으니 아무리 단량이라 해도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황 : 얼마나 놀랍고 흥미로운 이야기인지 몰라. 그 이야기를 듣고 생각했지. 아, 여기 우리 고장에 이런 대단한 이야기가 있구나. 그런데 나중에 보니 단량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니더라고.여 : 단량 말고도 놀라운 이야기가 또 있다는 말씀인가요?황 : 단량비 말고도 포항에는 여종을 기리는 비가 두 개 더 있어. 용흥동 연화재에 있던 충비갑연지비(忠婢甲連之碑)와 흥해 곡강 야산에 있는 충비순량순절지연(忠婢順良殉節之淵)이지. 사연을 들어보면 기가 막혀. 갑연(甲連)은 조선 순조 때 영일현에서 주막을 하던 송 씨 성을 가진 과부의 종이었어. 그런데 나쁜 패거리들이 홀몸인 송 씨를 해코지하려고 하니 송 씨가 더러운 꼴을 안 당하려고 형산강에 몸을 던지고 말았어. 그걸 본 여종 갑연이 주인을 따라 강에 뛰어들어 송 씨는 구해냈는데, 그만 힘이 다해 자기 목숨은 못 건진 거지. 이 이야기가 당시 암행 감찰을 하던 경상도 관찰사 박기수(朴岐壽)를 통해 조정에 알려져 비를 세우게 된 거야.여 : 가슴 아프지만 당시로 보자면 목숨으로 주인을 섬긴 충절을 높이 살 만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순량(順良)은 어떤 인물인가요?황 : 순량은 선조 때 흥해 이씨 집안 아씨의 몸종이었는데, 어느 날 한 한량이 빨래하는 아씨를 보고 희롱을 한 거야. 꼴에 선비라고 시를 써서 수작을 걸었는데, 이 아씨가 아주 대찬 답시를 썼지. “내 일찍이 중국 땅 형남(荊南)의 보배로운 옥덩이로 진나라의 열다섯 성(城)과도 못 바꿀 이였거늘, 어찌 계림의 한 썩은 선비와 같이하리.” 이 글을 본 한량이 화가 나서 친구인 흥해 군수에게 일러바치니 그 군수도 유유상종이라, 사령(使令)에게 이 씨를 추포해오라고 명을 내렸지. 하지만 사령은 양심이 있었던지라 아씨에게 도망가라고 말미를 주는데, 아씨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도망은 왜 가느냐며 유서를 써서 순량에게 주고 그 길로 곡강의 절벽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은 거야. 이걸 본 노비 순량도 아씨 없이는 내가 어찌 사나, 그러면서 같이 강물에 몸을 던지고 말지.여 : 두 사연 모두 안타까운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갑연이나 순량 모두 주인을 따르는 마음이 지극해 보입니다. 대단한 충절이 아니었나 싶군요.황 : 순량의 이야기는 잊히고 말았지만 순량이 목숨을 끊은 지 30년 후에 흥해 군수가 알게 되었지. 그 군수가 순량이 투신한 절벽 맞은편 천연바위에 암각으로 비를 새겨 기려주었는데, 그 비가 바로 ‘충비순량순절지연’ 비야. 그런데 비 제막식 날에 흥해의 곡강이 붉게 변하고 새도 한 마리 안 날았다고 하지.여 : 단량도 그렇고, 갑연, 순량 모두 애절하고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알게 되었을 때 선생님께서는 어떤 느낌이 드셨는지요?황 : 내가 작년 애린문화상 수상식에서도 말했는데, 여종들을 위한 비를 세우는 것이 당시 신분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보상이었다 해도 포항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참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래서 묻혀 있는 조상들의 이야기를 좀 더 알아보자는 생각에 여기서 살아보자고 마음먹게 되었지. 여 : 선생님께서 포항과 포항 사람들에게 정을 느끼고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세 여종의 충절 이야기였군요. 저는 세 가지 이야기 가운데 특히 단량의 이야기가 놀랍습니다. 한 가문을, 그것도 역적으로 몰려 대가 끊길 뻔한 가문을 살린 단량이 정말 대단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황 : 조금 아쉬웠던 점은 1978년에 황보인 집성촌에 가보니 비각을 지어 비석을 세웠는데, 황보인 후대가 새로 만든 비석은 오석(烏石)으로 아주 잘해서 비각 안에 넣어두었어. 그런데 옛날 비석은 그대로 볼품없이 담벼락 옆에 서 있더라고. 문중에서는 나름대로 낡은 옛 비석은 그대로 두고 새 비석을 만드는 정성을 보인 것인데 오히려 주객이 전도된 거지.여 : 그러니까 원래 비석 대신에 새로 만든 비석을 비각 안에 보관했군요.황 : 그렇지. 내가 문중의 사당 관리인에게 “비각 바깥에 있는 게 원래 단량 비석인데, 이 비가 안에 있어야 안 되겠나?” 했지. 그리고 “이 비석이 오래되었고 역사적으로도 중요하니 문화재 신청을 하면 좋겠다”고 제안해서 문화재 신청을 하게 되었어. 문화재청 관계자들이 와서 보니 정말로 원래 단량 비석은 비각 바깥에 방치된 채 있고 안에는 황보씨 문중에서 새로 세운 비석이 있는 거야. 세월이 흘러 2015년 3월에야 원래 단량 비석이 비각 안에 가도록 비석 위치를 바꿔놓았지. 끝내 문화재로 지정은 못 받았어. 나는 지금이라도 그 비가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면 좋겠어.여 : 그렇군요. 그처럼 의미 있는 유적이라면 이제라도 다시 문화재 신청을 해서 지정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충성스러운 여종 단량의 충절과 희생으로 대가 끊기는 화를 피한 황보 가문은 4대째 숨어 살다가 숙종 때 역적 누명이 풀려 황보인과 두 아들인 황보석, 황보흠은 관적을 회복했다. 그 후 황보인의 손자 황보단을 살려서 키워준 단량의 고마움과 뜻을 기려서 비를 세웠고, 그 비는 현재 구룡포의 광남서원에 있다.황 인1950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대구로 이주해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영남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동해중학교에 교사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닿았으며, 포항정보여고와 동성고에서 2008년까지 재직한 후 정년 퇴임했다. 포항 지역의 고인돌을 처음으로 조사·발굴해 ‘영일군사’에 소개했고, 지역 민속놀이인 ‘월월이청청’을 조사·발굴한 후 포항정보여고 학생들과 공연해 제7회 청소년 민속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흥인군의 비석과 남파 대사의 비석을 발견해 비각을 세우도록 했고, 석곡 이규준 선생의 목판을 경북 문화재 자료로 지정하게 했다. 또한 석곡의 사상과 학문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알려 석곡기념관 건립의 기틀을 마련했다. ‘포항시사’ 집필위원을 역임했고, 현재 포항문화원 향토조사 연구위원 등을 맡고 있다. 2022년 제12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대담·정리 : 여국현(시인)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황 인

2023-08-20

고적하면서도 예술향기 물씬

일본의 중부도시 시코쿠(四國) 북동 해안 에히메현(愛媛縣)의 마쓰야마는 소박하고 한적하지만 따뜻한 곳이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인 도고온천을 비롯해 일본의 국민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도련님(坊っちゃん·봇짱)’의 배경지이기도 한 마쓰야마는 깊은 여운이 남는 곳이다. 예술의 섬 나오시마도 마찬가지다. 때로 여행은 볼거리가 많지 않아도 번잡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즐거울 수 있다. 소도시 마쓰야마와 나오시마가 바로 그런 곳이다. ◇도고온천, 3000년 역사 지닌 문화재마쓰야마 첫 여행지가 이마바리 타월미술관이라고 했을 때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숱한 여행지를 두고 겨우 수건을 보러 가느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타월미술관을 둘러보고 나서는 편견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실감하게 해줬다.타월미술관은 일본 내 타월 생산의 60% 이상을 생산하고 있다는 이마바리시의 타월문화를 소개하는 세계 최초의 타월을 주제로 한 미술관이다. 땀이나 물기를 닦는 수건이 이곳에서는 예술의 옷을 입고 작품이 됐다. 전시관으로 향하기 전에 타월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도록 기계 설비를 전시해놓았다. 실제 공장과 똑같은 시설이지만 3분의 1 속도로 기계가 가동한다. 제품을 만드는 흉내만 내는 것이 아니라 실제 판매하는 물품을 생산한다고 한다.본격적인 전시관에는 원피스 모양의 타월을 비롯해 일본의 타월전문작가가 만든 회화를 방불케 하는 작품도 전시돼 있다.하이쿠(일본 전통 시), 한시, 동화 이야기 등도 타월로 디자인돼 있어 보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핀란드 작가 토베 얀손의 작품 ‘무민’의 세계를 그린 ‘무민 특별 박물관’도 전시돼 있다.마쓰야마에서 가장 큰 관광지는 역시 도고온천(道後溫泉)이다. 일본 최고(最古) 온천이기도 한 도고온천은 무려 30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연간 한국과 중국 등에서 한 해 2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몰려온다. 1894년에 지어진 도고온천 본관은 1994년에 온천 시설로는 일본 최초로 국가의 중요 문화재로 지정됐다.3층 목조 건물로 ‘가미노유(신의 온천)’ ‘다마노유(령의 온천)’등 2개의 욕실을 선택할 수 있고, 목욕 코스는 ‘다마노유 3층 개인실 코스’ ‘다마노유 2층석 코스’‘가미 노유 2층석 코스’ ‘가미노유 아래층 코스’ 4가지로 나뉘어 있다. 무엇보다 도고온천이 유명한 것은 일본의 유명 애니메이션 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가 2001년에 감독한 만화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배경지이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처럼 도고온천은 고색창연하고 입구와 기와형태까지 비슷하다. 몸무게를 재는 저울까지 바늘이 움직이는 아날로그 느낌이 물씬나는 도고온천은 낡고 퇴색했지만 왠지 마음을 따스하게 만든다.도고온천 본관에서 걸어서 3분 거리에는 도고 기야만 유리 박물관이 있다. 물과 녹음이 우거진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는 유리박물관은 관내는 빨간색과 검은색을 기조로 한 현대적인 구조로, 밤에는 조명을 비춰 환상적인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관내에는 도고온천 본관의 상징인 진 로각의 빨간 판유리를 비롯해 에도 시대의 희귀한 유리제품과 메이지, 다이쇼 시대의 일본 유리작품 약 300점을 전시 중이다. 큰 볼거리는 아니지만 소소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마쓰야마 시내에는 도고온천역이 있다. 한국에도 도고온천역이 있는데 같은 이름의 역이 한국과 일본에 나란히 있다는 사실이 묘하다. 도고온천역에는 스타벅스가 입점해 있다. 고베의 기타노이진칸점처럼 역사적 유적지에 스타벅스가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도고온천역 앞 광장에는 메이지시대에 사용했던 대형 솥에서 흘러나오는 온천수를 이용해 만든 무료 족탕시설인 호조엔이 있다. 호조엔 옆에는 1994년 도고온천 본관 10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자동인형시계가 세워져 있다. 오전 8시~오후 10시까지 매시 정각이면 시계 속에서 ‘일본의 셰익스피어’로 추앙받는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도련님’속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이 음악과 함께 차례로 나타난다.일본 1000엔권의 화폐인물이기도 한 나쓰메 소세키는 마쓰야마의 중학교를 배경으로 그의 대표작인 소설 ‘도련님’을 집필했다. 자동인형시계의 대각선 방향으로 증기기관차가 세워져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증기기관차는 1888년부터 67년간 실제로 시내를 달리고 있고, 소설의 영향으로 ‘봇짱열차’라고 불리게 됐다. 현재 시내를 달리고 있는 열차는 2001년에 디젤 기관차로 복원한 것인데 복고풍의 차량이 관광객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기차표는 물론 승무원 유니폼도 옛날 유니폼을 재현했다. ◇순례자의 길을 걷거나 성을 구경하거나도고온천에서 차로 10분 정도 이동하는 거리에 있는 이시테지(石手寺)는 728년에 쇼무 천왕의 칙명으로 국사 오치 다마수미가 창건했고, 본존인 약사여래상은 교키 스님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1318년에 불사한 ‘인왕문’이 국보로 지정돼 있으며, 본당, 삼중탑, 종루 등 국가 중요 문화재 6개가 있다. 일본의 4개 주요 섬 중 가장 작은 시코쿠에는 88개의 절을 걸어서 도는 1200㎞에 이르는 순례길이 있는데 이시테지는 51번째 절이다. 88개의 절을 걷는 사람들을 오헨로(걷다)라고 부르는데 순례길을 가리켜 시코쿠 오헨로라고 한다. 시코쿠 오헨로는 1200년 전 진언종의 흥법대사가 88개의 절을 걸은 것에서 유래됐다. 자발적인 순례자들은 길을 따라 절을 순례하며 참배를 한다. 불교신자가 주를 이루겠지만 굳이 신자가 아니어도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자들처럼 많은 이들이 길을 걷는다. 사원 주변 식당에서는 이시테지의 명물인 ‘오야키’라고 불리는 떡을 팔고 있다.에히메현 중앙에 있는 마쓰야마 성은 현재 전국에 12개 밖에 현존하지 않는 에도시대 이전에 건축된 천수각을 가지고 있는 성곽의 하나다. 축성 당시의 천수는 5층이었지만 후에 3층으로 개축됐다. 히메지 성, 와카야마 성과 함께 일본 3대 연립식 평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가토 요시아키가 축성을 시작했다. 마쓰야마란 지명의 유래는 이 시기 가토 요시아키가 자신의 영지를 마쓰야마라 칭했기 때문이다. 마쓰야마성은 국가 사적으로 21채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돼 있으며 벚꽃 명소로도 이름이 높다. ◇아트 프로젝트로 살아난 나오시마여행의 하루를 예술의 섬인 나오시마에서 보내기로 했다. 마쓰야마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다카마쓰에서 북쪽으로 13㎞에 있는 나오시마는 원래 구리 제련소였다. 한때 지역경제가 활성화됐지만 제련소에서 나온 폐기물로 섬이 황폐화되면서 주민들이 하나둘씩 떠났다. 다 죽어가던 섬이 다시 살아난 것은 출판기업인 ‘베네세’가 1989년 시작한 ‘아트 프로젝트’ 덕분이었다. 섬 전체를 하나의 미술관으로 재탄생시킨 아트 프로젝트의 중심에는 일본이 낳은 천재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있었다. 그는 파격적 형태의 미술관인 지추(地中) 미술관을 건축해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모으는 데 일조했다.지추미술관은 섬 남부 산 위에 있는 계단식 밭 형태의 염전 터 지하에 만들어졌다. 시설 전체가 지하에 묻혀 있으면서도 자연광을 받아들여 하루 중에도 시간에 따라 작품이 달라 보이는 것이 매력이다. 프랑스 인상파 거장 클로드 모네와 월터 드 마리아, 제임스 터렐 단 3명의 작품만 전시돼 있다. 모네의 전시공간은 이탈리아 대리석 70만 개로 바닥이 장식돼 있으며 마리아의 전시공간은 엄숙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안도 다다오의 건축물뿐만 아니라 실내외에 놓여 있는 다양한 예술 작품부터 일본의 옛 모습이 그대로 보존된 마을 풍경까지 섬 곳곳에서 예술과 문화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나오시마의 입구인 미야노우라항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설치 미술가인 쿠사마 야오이의 작품인 대형 호박이다. 1993년 제45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거울로 장식된 방에 설치돼 있던 작은 호박이 1994년 나오시마에 검은 무늬가 있는 대형 호박 조각으로 이어졌다. 물방울 무늬와 무한 증식하는 반복과 통일의 호박은 어느새 나오시마를 상징하는 예술품이 됐다.항에서 거리를 돌아가면 곳곳에 재미있는 미술품을 볼 수 있다. 공중목욕탕이 예술품이 된 아이러브유(I Love Yu (I♥湯))가 대표적이다. 탕(湯)을 의미하는 일본어 발음 ‘유’를 재치있게 활용한 공중목욕탕으로 2009년 오타케 신로가 실제로 입욕할 수 있는 미술시설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나오시마의 입구인 미야노우라 항구에 만든 작품이다. 욕실에는 코끼리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욕조와 욕탕 내 그림 화장실의 변기까지 익살스러우며 독특하다.안도 다다오의 또 하나의 건축물인 미술관과 부티크 호텔이 결합한 베네세 하우스는 그 자체로 예술품이다. 거친 대리석 계단을 내려가면 숲으로 이어지며, 아트리움에서 자라는 나무들이 객실 창문을 넘나들 정도다. 예배당을 연상시키는 중앙 갤러리 위에는 유리 피라미드가 삐죽 솟아 있다. 어디에서나 윤을 낸 콘크리트 벽과 옅은 빛깔의 나무 바닥을 볼 수 있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가와 일본에서 떠오르는 신성들의 작품이 놓여 있다. 관람객들은 미술관에서 하룻밤 묵으며 밤이나 낮이나 조각 작품을 손으로 만져보고, 그림을 코앞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 여행 정보시코쿠 섬 내 국제공항은 마쓰야마 국제공항, 다카마쓰 국제공항 등 두 곳이다. 국내 항공사 중에서는 제주항공과 에어서울이 각각 인천~마쓰야마 노선, 인천~다카마쓰 노선을 운항한다. 다카마쓰에는 우동을 만드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시설이 있다. 가가와현은 사누키 우동의 본고장으로, 수타 체험을 할 수 있다. 체험이 끝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우동을 먹을 수도 있다. 손으로 쳐낸 우동은 가지고 돌아갈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졸업 증서를 붙인 족자를 받을 수 있다. 이 족자에는 우동 만들기 비법이 붙어 있으며, 부속으로 달려 있는 막대는 면 밀대로 사용할 수 있다. 마쓰야마의 먹거리 중 명물로 꼽히는 것은 다이메시(도미밥)다. 쌀에 다시마를 깔고 도미 한 마리를 통째로 뚝배기에 얹어 짓는 향토요리. 도미와 다시마의 풍미, 간장의 고소함이 쌀에 스며들어 깊은 맛의 밥이 된다.올 시코쿠 레일 패스(ALL SHIKOKU Rail Pass)는 외국인 관광객만을 대상으로 판매하는 교통 패스로 시코쿠 전역을 연결하는 6개 철도 노선(약 1100㎞)을 이용할 수 있다. 3일권, 4일권, 5일권, 7일권이 있으며 국내에서 미리 구입하는 것이 현지보다 저렴하다. 11만300원부터./최병일 작가

2023-08-17

바다가 좋아 선택한 동해면의 한적한 중학교

이 글은 필자가 포항 지역의 사학자 황인 선생과 나눈 다섯 번의 대담과 수차례의 통화 그리고 서면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당시 선생은 임플란트 시술 중이었고, 필자 또한 서울과 포항을 오가야 하는 상황이라 인터뷰가 순조롭지 않을 수 있겠다고 우려했으나 기우였다. 첫 만남의 대담부터 선생은 매번 두 시간이 넘도록 포항의 역사와 문화, 문화재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었다.“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역사학자 E. H. 카의 말이다. 이 말이 맞다면 개인 또는 사회가 자신의 역사를 잊거나 혹은 왜곡해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은 그 개인과 사회의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끊기고, 과거와 현재가 단절되는 것이다.그렇다면 우리 지역은 어떤가. 우리 지역은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기억하고 기록하여 전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가. 다행히 우리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힘든 여건에서도 몇몇 분이 그런 노력을 기울여왔는데, 향토사학자 황인 선생은 그들 중 한 명이다.황인 선생은 1977년 포항 동해면 동해중학교에 부임한 이래 발굴되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포항의 역사와 문화 유물,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탐사, 기록, 보존하고 전하는 일에 헌신해왔다. 선생과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선생이 포항과 첫 인연을 맺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갔다. 여국현(이하 여) : 선생님께서 1977년 동해중학교 교사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을 맺었다고 들었습니다. 대학에서 국사학을 전공하셨으니 교사가 아닌 다른 길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교직을 선택하신 것과 당시로 보자면 낯설고 외진 동해를 첫 근무지로 선택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황인(이하 황) : 대학 시절부터 교사가 되려고 했던 건 아니지. 그 이야기를 하자면 좀 길어. 군에 입대해서 대구 의무사령부 군의학교에 있었는데, 한 대학 선배가 대민 지원사업으로 형편이 어려워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중학교 과정을 가르치고 있었어.여 : 그러니까 야학 같은 것이었군요.황 : 그렇지. 그 선배가 제대할 때 교직을 이수한 내가 적격이라고 생각했는지 그 자리를 내게 소개해준 거야. 지금은 없어졌는데, 효목고등공민학교에서 검정고시 과목을 가르쳤지. 1, 2, 3학년별로 교실 하나, 교무실, 숙직실 하나뿐인 작은 학교였어.여 : 군대 생활도 힘들 텐데 일과 후 학생들을 지도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황 : 피곤하긴 했지만 학생들이 워낙 열심히 하고 잘 따라서 보람이 컸어. 학교가 지금의 동대구 고속버스터미널과 동부시외버스터미널 사이에 있었는데, 당시 11월에 치르는 전국 검정고시 합격률이 98퍼센트나 될 정도로 성적이 좋았지. 게다가 운이 좋았는지 내가 가르친 그해 졸업생이 전국 검정고시에서 1등을 해서 졸업생 이름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났어. 지원하는 부대 사령관 이름까지 떡하니 나왔지. 사령관도 기분이 좋았던지 별이 박힌 지프차를 타고 부하 장교들을 주루룩 데리고 학교에 찾아와 교사로 있던 부대원들을 격려했지. 여 : 학생들과 선생님이 얼마나 간절히 공부하고 열심히 가르치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결과도 좋았으니 참 보람 있는 시간이었겠어요.황 : 그랬지. 그때 나한테 배운 학생들 가운데 한 친구는 영국 유학을 갔고, 교사, 목사, 호텔 총지배인이 되기도 했어. 육십이 넘은 제자들이 우리 집에 찾아와 같이 회를 먹고, 손자를 봤다고 찾아오기도 하니 정이 많이 들었지. 하여간 그때 가르치며 보람을 느꼈던 것이 나중에 교사를 하게 된 동기가 되었어. 그런 이유로 대학을 졸업하고 바다가 가까운 동해중학교로 오게 되었지. 여 : 어려운 상황에서 배우는 학생들이었으니 절실함과 고마움이 더욱 컸을 것 같습니다. 저도 포항제철에 다니면서 대학 생활을 했고 지금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서 그때 선생님과 학생들이 함께 느꼈을 마음이 헤아려집니다. 그런데 대구나 포항 도심에서 근무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텐데, 동해중학교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황 : 나는 그전부터 도시보다 조용한 시골이 좋았어. 특히 바다와 꽃을 좋아해서 학교를 정할 때 바닷가 근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사실 그때 동해는 포항과 한참 떨어진 데다 길도 포장이 안 되어서 한적할 거라 생각하고 지원했어. 당시 교장 선생님은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교사가 시골 학교로 오겠다 하니 걱정이 되었는지 얼마나 있을 거냐고 먼저 묻더군. 그러면서 학교가 포항에서 오가기도 편하고 사람들 왕래가 많아 외진 시골이 아니라는 점을 유독 강조했지. 다른 교사들이 부임했다가 시골구석이라고 금세 떠나곤 했던 모양이야. 그 말을 듣고 나는 오히려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 좋아서 지원했다고 했더니, 그제야 이곳이 외진 데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더라고. 그렇게 해서 동해중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지.여 : 당시 학교생활은 어떠셨어요? 생각만큼 만족스러우셨는지요?황 : 한적한 바닷가 학교는 나한테 더없이 좋았어.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다른 면이 있기도 하더군. 학교 현실에서는 학생들을 잘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때는 가난하던 때라 등록금을 잘 거두는 교사, 성적 잘 내고 결석 안 시키는 것으로 교사를 평가하니 내심 갈등이 없지 않았어. 하지만 인생이 어디 다 좋기만 하고 나쁘기만 한가. 좋은 것이 있으면 조금 맘에 안 드는 것도 있고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이지. 정년퇴직한 지금 그 시간을 돌아보면 교사로 일해온 것을 큰 보람으로 여기지.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평생 할 수 있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어. 여 : 선생님께서 좋아하시는 일은 포항에서 알려지지 않은 중요한 역사를 찾아내고 널리 알리는 것일 텐데, 그 일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는지요? 사실, 맨 먼저 여쭙고 싶은 질문도 이것인데요.황 : 계기라면 계기랄까. 우연이라는 게 참 이상하더라고. 내가 처음 역사 교사로 부임해서 반에 들어가 보니 황보(皇甫) 성을 가진 학생이 유독 많은 거야. 하루는 학생들한테 물었지. 그랬더니 성동리에 황보 성씨가 많이 모여 살고 자기들 조상인 황보인(皇甫仁)이라는 분의 비석도 있다는 거야. 황보인이라는 이름을 듣고 깜짝 놀랐어. 설마 계유정난 때 영의정이었던 그 황보인인가 싶어 눈이 번쩍 뜨였지.선생의 말씀처럼 황보인은 조선의 6대 왕 단종 재위 시절의 영의정이었다. 그는 나중에 세조가 되는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 때 역적으로 몰려 목숨을 잃었다. 역적의 자손은 삼족을 멸한다는 당시의 법 혹은 관행대로라면 그의 자손들이 살아남을 수 없었을 텐데,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그 말이 역사 교사인 선생에게 놀라움을 안겨준 것은 당연했다.그러나 황보 집성촌이 형성된 배경에는 역사 교사인 황인 선생이 몰랐던 놀랍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 황보인 가문을 살려낸 충성스러운 여종 단량(丹良)의 이야기였다. 여종 단량과 황보인 가문의 이야기는 선생이 포항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황 인1950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대구로 이주해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영남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동해중학교에 교사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닿았으며, 포항정보여고와 동성고에서 2008년까지 재직한 후 정년 퇴임했다. 포항 지역의 고인돌을 처음으로 조사·발굴해 ‘영일군사’에 소개했고, 지역 민속놀이인 ‘월월이청청’을 조사·발굴한 후 포항정보여고 학생들과 공연해 제7회 청소년 민속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흥인군의 비석과 남파 대사의 비석을 발견해 비각을 세우도록 했고, 석곡 이규준 선생의 목판을 경북 문화재 자료로 지정하게 했다. 또한 석곡의 사상과 학문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알려 석곡기념관 건립의 기틀을 마련했다. ‘포항시사’ 집필위원을 역임했고, 현재 포항문화원 향토조사 연구위원 등을 맡고 있다. 2022년 제12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대담·정리 : 여국현(시인)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황 인

2023-08-16

아우는 ‘신라’로, 장남은 ‘당’으로… 연개소문家의 자중지란

668년 고구려의 붕괴와 기원전 207년 중국 진나라의 멸망에서는 적지 않은 유사점이 발견된다.두 사건 사이에는 900년 가까운 시차가 있지만, 양국 모두 호걸(豪傑)의 사망과 간신의 횡포, 죽고 죽이는 형제간 다툼이라는 악재가 단시간에 겹쳤다.진나라의 최초 통치자는 모두가 알다시피 진시황(秦始皇·재위 기원전 246~기원전 210)이다.학자들을 산 채로 땅에 묻고, 농사법과 실용기술에 관련된 책 외에는 모두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린 ‘분서갱유(焚書坑儒)의 독재자’로 이름이 높지만, 진시황은 그렇게 두부 자르듯 한마디로 단순하게 평가될 인물이 아니다.적게는 수만 명에서 많게는 수백만 명의 백성과 수천 명의 관료를 거느리고 국가를 다스린 인물이라면 그에겐 ‘빛’과 ‘그림자’가 동시에 존재할 터.‘냉혹하고 독선적인 왕’이라는 건 진시황의 그림자다. 그렇다면 그의 ‘빛’은 어떤 영역에서 환하게 반짝였을까. ‘위키백과’가 이에 답하고 있다.“진시황은 도량형을 통일하고 전국시대 국가들의 장성을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했다. 또한,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 제도와 군현제를 닦음으로써 이후 2천년을 이어질 중국 왕조들의 기본 골격을 만들었다.”중국 최초의 통일왕조 진나라는 진시황이 사망한 직후 바로 무너진다. 환관(宦官·내시) 조고(趙高)는 자신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 나라의 기강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뒤를 이은 진나라의 2대 황제 호해(胡亥)는 아둔한 사람이었다.조고와 호해는 순행(巡幸·왕이 나라 안을 살피며 돌아보는 일) 도중 숨진 진시황의 유서를 조작해 황태자 부소와 몽염을 죽이기까지 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는 진나라의 절멸을 아래와 같이 요약한다.“백성들은 오랜 전란이 그치고 통일이 되면 평화로운 시대가 오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진시황릉과 아방궁 등의 대규모 공사가 계속됐고, 변방의 수비에도 수시로 불려 나가야 했다. 엄청난 노동의 강요와 무거운 세금, 엄격한 법률은 백성들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진시황이 죽자 농민의 원성은 폭발했고, 마침내 진승, 오광 등의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봉기 소식은 전국에 퍼져나갔고, 여기저기서 농민들이 성난 파도처럼 일어났다. 봉기의 열매는 농민들의 손에 쥐어지지 않았지만, 최초의 통일 왕조 진나라는 이를 계기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진나라의 멸망 과정과 유사한 길을 걸었던 고구려누구도 흉내 내기 힘든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정치·군사적 실권을 제 손 안에 틀어쥐고 유일한 지배자로 군림했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진시황과 닮았다.연개소문은 시종일관하는 일기당천(一騎當千)의 기백으로 전투에서 맞붙은 적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고,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후엔 실질적 왕의 역할까지 맡았다.‘한국사 개념사전’은 연개소문의 집권 배경과 타협을 거부하는 거칠고 직선적인 대외 정책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고구려를 무리하게 침략하느라 국력이 약해진 수나라는 결국 멸망했다. 수나라가 멸망한 뒤 들어선 당나라는 세계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고구려에 쳐들어오려고 했다. 이를 눈치챈 고구려는 중국과 맞닿은 국경선에 천리장성을 쌓고 이에 대비했다. 당시 고구려는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서 정치가 혼란스러웠다. 그 틈을 타 연개소문은 642년 당시 임금이었던 영류왕 대신 보장왕을 세우고, 대막리지(大莫離支·고구려 말기의 최고 관료)가 돼 정치를 장악했다. 연개소문은 강한 대외 정책을 써서 신라와 당나라에 맞섰다. 백제와 힘을 합해 신라를 공격했고,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라는 당나라의 요구도 거절했다.”‘천리장성의 축조자’이자, ‘거대 제국 당나라를 두려워하지 않는 맹장’으로 고대 왕국 고구려를 쥐고 흔든 최고 권력자였지만, 연개소문 역시 ‘삶이 유한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도 진시황과 마찬가지로 눈앞에 다가선 죽음만은 이기지 못한다. 666년. 고구려라는 이름이 역사에서 사라지기 2년 전 숨을 거둔 연개소문. 이후 진나라의 붕괴 과정에서 생겨난 것과 유사한 사건들이 고구려에서도 일어난다. ◆진나라 조고=고구려 연정토, 진나라 호해=고구려 연남생진시황이 죽은 뒤 간신 조고는 지록위마(指鹿爲馬·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 한 행위)로 진나라 2대 왕 호해를 조롱한다. ‘모든 관료들이 왕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진 나를 두려워하니, 사슴을 말이라고 해도 감히 반론하지 못할 것’이란 걸 보여주기 위한 악행이었다.고구려가 망해가던 무렵 조고처럼 영악한 행위로 나라를 망친 건 놀랍게도 연개소문의 동생이었다. 이름은 연정토(淵淨土).그는 형의 아들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의 사이를 이간질해 셋을 형제가 아닌 원수로 만들어버렸다. 연정토와 관련해서는 ‘삼국사기’와 ‘신당서(新唐書)’ 등에 그 기록이 남아있다. 이런 내용이다.“형인 연개소문이 세상을 떠난 이후 그의 아들인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3형제간에 권력 다툼이 벌어져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 그러다 장남 연남생이 권력 다툼에서 밀리는 양상이 되자 적국인 당나라에 도움을 청하는 사태까지 이어지고, 이에 고구려는 당나라와 신라의 양면 전선에 놓인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다. 이런 때에 연정토는 666년 12월 고구려 남부의 12성 763호의 주민 3천543명을 신라에 바치고 투항했다.”고구려 멸망의 길에서 연정토가 진나라 조고와 비슷한 배역을 맡았다면, 연개소문의 큰아들 연남생은 진나라의 두 번째 왕 호해처럼 우매한 배역을 자처했다.아버지 덕에 아홉 살 어린아이임에도 선인(先人)이란 관직에 올랐고, 부친 사후에는 2대 대막리지가 됐던 연남생은 동생들과의 피 튀기는 권력투쟁에서 밀려나자, 연개소문이 그토록 적대시하던 당나라로 도망친다.‘내가 고구려의 지배자가 되지 못할 것이라면, 동생들 역시 망하게 할 것’이라는 이기적이고 단순무지한 선택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다음은 그의 행적에 관한 ‘위키백과’의 서술이다.“연개소문이 세상을 뜨자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연정토 넷이 권력 다툼을 크게 벌였다. 결국 연남생이 얼마 동안 대막리지에 올랐으나, 남건·남산이 남생의 아들 헌충(獻忠)을 죽이고, 남건이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남생을 쳤다. 이에 남생은 패하여 국내성으로 달아나 그의 아들 헌성(獻誠)을 당나라에 보내 항복하고 구원을 청했다. 결국 668년 당나라는 연남생을 앞세워 고구려를 공격했다. 연남생은 요동 지역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했다. 또한 당나라 사령관 이적과 함께 고구려 수도인 평양성을 공격한다. 그 공적으로 연남생은 당나라로부터 작위를 하사받았다.” ◆무열왕이 만든 배경 아래서 고구려를 병합한 문무왕아우는 적국(敵國)이라 불러야 할 신라 밑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었고, 장남은 또 다른 적성국(敵性國) 당나라에 항복한 대가로 벼슬까지 받는다.연개소문이 살아있었다면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궁금하다. 아마도 분노와 서러움에 땅을 치며 통곡하지 않았을까?그랬다. 로마 제국이나 남아메리카 잉카 제국처럼 내부로부터 무너지고 있었으니, 신라-당나라 연합군과 맞붙은 평양성전투에서 고구려가 패배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길게 말할 것도 없다. ‘두산백과’의 짤막한 요약은 이렇다.“평양성전투는 고구려 보장왕 때인 668년 도성인 평양성에서 신라·당나라 연합군과 벌인 전투로, 고구려가 패해 함락됐다.”이로써 문무왕은 아버지 무열왕이 백제를 병합한 660년으로부터 8년이 지난 뒤 고구려까지 절멸시키게 된다. 무열왕은 ‘왕위를 이어갈 아들’이란 자리를 만들어줌과 동시에 ‘김유신의 조카’라는 타이틀까지 문무왕에게 선물한 셈이 됐다. 삼한일통(삼국통일)의 초석을 놓은 무열왕과 ‘일통’의 여정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김유신, 고구려 병합으로 ‘통일’의 90% 이상을 완료한 문무왕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박찬흥의 논문 ‘김유신 관련 사료를 통해 본 시기별 인식’에 등장하는 아래와 같은 대목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조선시기에도 무열왕·문무왕과 신라 김유신의 절대적인 신임관계로 인해 김유신이 큰 공적을 세웠다는 평가가 지속됐다. 그리고, 김유신은 신라의 武(무)를 대표하는 인물이거나 신라 왕조 전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됐다.” (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8-15

“프로의 뿌리인 아마추어 체육에 더 많은 관심 가져야”

인터뷰는 매번 최인수 선생의 단골 식당에서 점심을 하고 나서 진행했는데 메뉴는 늘 된장 전골이었다. 식사하는 동안 선생은 필자가 물을 따르거나 수저를 놓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고 손수했다. 어린 아들에게 밥을 먹이는 아버지 같은 행동이었다. 최인수 선생은 포항시 체육회 부회장에서 물러난 후에도 지역 체육계를 보살피는 일을 계속해 나간다.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김 : 건강은 어떻습니까?최 : 몇 달 전에 녹내장 수술을 했어. 언젠가부터 눈이 침침하고 초점이 잘 안 맞았는데 나이 탓이려니 하고 방치해 적절한 치료 시기를 놓쳤나 봐. 수술 후에도 예전처럼 회복이 안 되는군. 더 나빠지지 않도록 관리를 잘해야겠지. 그 밖에는 크게 아픈 곳 없이 건강한 편이야.김 : 체육회를 떠나신 후에는 어떻게 지내셨습니까?최 : 바깥에 나가 체육회를 바라보니 체육회가 학교체육과 엘리트 체육 위주로 운영되고 있고 생활체육은 등한시하더군. 현역 시절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이었어. 그러던 차에 이상구 포항생활체육협의회 회장이 생활체육협의회 상임부회장을 맡아달라고 하더군. 체육회를 떠난 지 얼마 안 됐고 생활체육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많아 고민했지만 엘리트 체육과 생활체육 간의 간격을 좁힐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수락했지.김 : 생활체육협의회에 들어가보니 어떻던가요?최 : 예상은 했지만 체육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조직이나 재정 면에서 미흡하더군. 그나마 2009년 양학동에 국민체육센터가 개관돼 시민들이 체육을 접할 기회가 확대된 게 다행스러웠지. 생체협 지도 선생님들의 처우가 열악한 게 문제였어. 개선해보려고 했지만 뜻대로 안 되더군. 그분들한테 참 미안했지.김 : 생활체육협의회 상임부회장의 보수는 어느 정도였습니까?최 : 보수라고 할 게 있나? 상임부회장이라는 직책은 무보수에 봉사직이어야 한다는 게 변함없는 생각이야. 어느 날 사무국 직원이 활동비라면서 몇십만 원을 주더군. 당시 생활체육 지도교사가 여섯 명 정도 있었는데, 이분들은 지도 요청이 있으면 먼 곳까지 본인 차량을 이용해야 했어. 그래서 그 돈으로 주유 상품권을 사서 나눠주었지. 그나마 돈이 얼마 안 돼 다달이 번갈아 지급했어.김 : 생활체육협의회 업무가 쉽지는 않았겠습니다.최 : 맨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는 엘리트 체육 지도자들이 생활체육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것이었어. 생활체육이 활성화되어야 엘리트 체육도 발전할 수 있지. 그런데 당시 엘리트 체육인들은 그런 생각이 별로 없어 보였어.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양쪽 관계자들이 참여하는 산악회를 만들어 정기적으로 산행을 했지.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양쪽이 좀 더 가까워지고 신뢰도 생겼어.김 : 상임부회장 재직 후에는 ‘포항 체육을 사랑하는 모임’을 결성하셨지요?최 : ‘체사모’라고 부르는 단체지. 포항에 거주하는 체육회 산하 가맹단체 원로들이 모여서 2014년에 만든 단체야. 체육 인재를 양성하고 체육인들의 친목 도모와 포항 체육 발전을 위해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모였어. 내가 8년째 회장을 맡아서 일하는데 회장직을 맡으려는 사람이 없어 걱정이야.김 : ‘체사모’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합니까?최 : 회원은 27명이고 회장과 고문, 자문위원, 정회원으로 구성되어 있어. 회원들에게 월 회비와 찬조금을 받아 운영하는데 체육 꿈나무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하거나 도민체육대회에 출전하는 포항 선수단에게 격려금을 전달했지. 그 밖에 체육회와 체육인들을 격려하고 후원하는 사업을 하고 있어.김 : 앞으로 ‘체사모’ 활동도 기대됩니다.최 : 다른 지역의 체육 원로들도 ‘체사모’에 관심을 보이고 벤치마킹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경북에서 체육 원로들이 모여서 활동하는 단체는 ‘체사모’가 유일하거든. 포항 체육을 홍보하기 위한 활동을 계속하고 장학사업을 확대하고 싶어. 현재 회원은 60∼70대가 주축인데 30∼40대도 가입할 기회를 만들려고 해.김 : 포항은 긴 해안선을 접하고 있어 해양 스포츠가 발달하기에 좋은 환경인 것 같습니다.최 : 그렇지. 포항은 해안선의 길이가 204㎞에 이르는 천혜의 해양도시야. 이를 충분히 활용해 전 연령과 활동 수준에 맞는 맞춤형 해양 레저스포츠를 체험할 기회를 시민들에게 제공해야 해. 그리고 해양 스포츠팀을 육성하고, 해양 스포츠센터, 계류장 같은 기반시설을 확충해 해양 스포츠를 산업으로 키운다면 포항의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겠지. 김 : 프로스포츠도 한번 짚어주시지요. 포항에 스틸러스 축구단이 있습니다만.최 : 포항 스틸러스가 적은 재정으로도 준수한 성적을 내고 있지. 스틸러스가 자생력을 더 키워 포항의 브랜드 가치를 키우고 스포츠 선진 도시라는 이미지를 만드는 데 기여했으면 하는 바람이야. 한때 박지성 선수가 뛰었던 영국 프리미어리그 명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연고지 맨체스터는 인구가 40만 명이야. 포항보다 작은 도시지. 그런 곳에 맨체스터시티와 더불어 두 개의 세계적인 명문 구단이 있어. 포항 스틸러스도 50년 전통을 가지고 있어. 일본 J리그 경우를 보면 우리보다 10년이나 프로리그 출범이 늦었지만 몇몇 구단을 제외하고는 거의 흑자 경영을 하고 있거든. 지역민들의 사랑이 커서 가능한 일이야. 스틸러스도 포항 시민의 관심과 사랑을 더 끌어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해.김 : 2012년 포항에 정식 야구장이 개장된 것도 포항 체육사에서 중요한 대목인 것 같습니다.최 : 포항에 1만2천 석 규모의 야구장이 건립된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지. 이 야구장이 건립되어 포항에 프로야구 유치를 할 수 있었고, 전국 규모의 아마추어 야구도 계속 열 수 있었어. 사회인들도 이 야구장에서 뛰면서 만족도가 크게 높아졌지. 하지만 프로야구의 근간이 되는 고등학교 야구의 현실을 보면 씁쓸함을 금할 수 없어. 경북 제1의 도시 포항의 유일한 고등학교 야구부가 존폐 위기에 놓였거든. 포철공고가 2013년 마이스터 고등학교로 전환하면서 관계 법령에 따라 야구부, 축구부가 포철고로 이관되었지. 마이스터 고등학교는 운동부를 운영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 말야. 그래서 포철고에서 야구부와 축구부를 운영하는데 작년에 학교에서 느닷없이 야구부를 해체하겠다고 선언했지. 충격적인 일이었어. 야구부 학부모와 포철고 동문들이 들고 일어나 야구부 해체가 백지화되긴 했지만 이 사안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되었어. 상황이 이러니 포철고 야구부에 우수한 선수들이 오겠냐 말이야. 포철고 야구부는 2018년 청룡기에서 준우승을 하는 등 어려운 여건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뒀는데, 참 답답한 일이지. 프로스포츠의 화려한 면만 보지 말고 그 뿌리인 아마추어를 육성하려는 의지가 아쉬워.김 : 이제 인터뷰를 마무리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끝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면 전해주시지요.최 : 몇 번 강조했는데 시민들의 관심을 모을 수 있는 사업이 필요해. 올해 울진에서 열린 경북도민체육대회에서 포항이 또 우승했어. 그런데 그 사실을 포항 시민들은 잘 몰라. 도민체육대회가 체육인들만의 잔치가 된 거나 마찬가지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선수를 양성하고 대회에 나가는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한번 생각해봐야 해. 그리고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내야 하고 말이야. 그러려면 생활체육을 활성화해야 하지. 또 한 가지 당부하자면, 포항이 경북 제1의 도시로서 경북 전체를 아우를 만한 그릇으로 키워야 해. 작은 것은 통 크게 양보하고 다른 시·군의 의견을 경청한다면 향후 포항체육회가 큰일을 도모할 때 힘이 되어줄 거라고 믿어.최인수1946년 서울에서 태어나 6·25전쟁 때 가족과 대구로 피난했다. 대구상고 시절 정구 선수로 활동했고 경북대학교 체육교육학과 재학 때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대학 졸업 후 대구 효성여고에서 교편을 잡았고, 1975년 포항 대동고등학교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되었다. 1979년 포철공고로 옮겨 야구부와 축구부 창단을 주도했다. 포항시 사립중·고등학교 체육교사협의회 회장, 포항시체육회 부회장, 포항시 생활체육협의회 상임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문체부장관 표창, 경상북도교육상, 포항시 최고체육 공로상 등을 수상했고 2007년 정년 퇴임했다. 2014년 종목별 원로들로 구성된 ‘포항 체육을 사랑하는 모임’(체사모)을 결성해 회장을 맡고 있다.끝대담·정리 : 김도일(소설가)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최인수

2023-08-13

도민체전의 살아 있는 역사… 44년간 선수와 임원으로 참가

1963년 제1회 경북도민체육대회가 대구에서 열렸다. 대구와 경북의 행정구역이 분리되기 전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정구 선수로 제1회 도민체육대회에 출전한 최인수 선생은 이후 44년간 선수, 혹은 임원으로 도민체육대회에 참가하게 된다.김 : 포항시 체육회에도 오래 몸담으셨지요?최 : 1975년에 포항으로 온 지 얼마 안 돼 체육회 이사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어. 그때는 포항시와 영일군이 통합되기 전이었고 체육회도 지금처럼 조직적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았지. 변변한 사무실도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거든. 체육을 전공한 사람이 흔치 않은 데다 내가 정구대회에도 출전하다 보니 여러 방면에 쓰임이 있어 보였던 모양이야. 그때 이사직을 수락해 맺은 인연이 2009년 부회장으로 퇴임할 때까지 34년 동안 계속됐어. 김 : 체육회는 주로 어떤 일을 합니까?최 : 종목별로 활동하는 체육인들의 구심 역할을 할 조직이 필요해 체육회를 만들었지. 그러다가 사회적으로 체육의 역할이 커지면서 체육회의 위상도 단순히 체육인의 권익을 대변하는 것을 넘어서게 되었어. 지금 체육회는 학교체육과 생활체육 진흥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는 것은 물론이고 시민의 건강과 체력 증진, 여가 선용과 복지 향상에 이바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 한편으로는 우수 선수를 양성해 경북도민체육대회나 전국체육대회 등에서 포항의 위상을 높이는 목적도 있겠고.광복 직후 사회적 혼란 속에서 포항은 1946년 대구의대 운동장에서 열린 3·1절 기념 경북도내 중학 축구 춘계 리그전에 포항중 등 8개 학교가 참가했다. 같은 시기에 포항중, 동지중, 포항여중 등에서 학교 운동부가 활동하기 시작해 포항 체육 발전의 디딤돌이 되었다.포항시 체육회는 축구인들이 주축이 되어 1947년 4월 1일 창립되었다. 초대 회장 김병준은 체육회의 재정적 후원자로 체육회 사무실 또한 그의 사업체인 수산회사 내에 있었다. 체육회가 발족한 해에 광복 2주년을 맞아 영흥초등학교 건너편 염전에서 ‘제1회 남선 체육대회’를 개최하는 등 포항에 본격적인 체육 활동의 계기가 마련되는 듯했으나 제자리도 잡기 전에 6·25전쟁이 발발해 활동이 정지되고 만다.한동안 침체기에 빠져 있던 포항 체육계는 1965년에 ‘포항시체육회재건위원회’가 결성되면서 명맥이 유지되었다. 1966년 어려운 재정 형편에도 경주시 황성공원에서 열린 제4회 경북도민체육대회에 450명의 선수단을 구성해 참여함으로써 체육회 결속을 꾀하였고 1973년에 열린 제11회 경북도민체육대회에서는 처음으로 종합 우승을 하는 등 중흥기를 맞았다. 1974년 제12회 경북도민체육대회가 포항에서 처음으로 열렸고 성공적인 대회 개최를 발판 삼아 ‘학교체육 육성 10개년 계획’을 수립해 체육 저변 확대, 지도자 양성, 체육 시설 확충에 전력을 쏟는 등 포항 체육 진흥의 기틀을 잡았다.1995년 포항시와 영일군이 통합함에 따라 체육회도 통합 체육회로 재구성되었고, 2016년에는 포항체육회와 포항생활체육회가 통합되었다. 2020년부터는 시장이 당연직으로 체육회장에 취임하던 것에서 변경되어 선거를 통해 체육회장을 선출했다.김 : 경북도민체육대회 이야기를 좀 해보죠. 선생님은 1회 때부터 선수로 출전하셨지요?최 :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도민체육대회가 열렸지. 10개 정식종목과 5개 시범종목에 33개 시·군이 참가한 것으로 기억해. 대구는 구 단위로 출전했는데 나는 대구상고가 있는 남구 대표로 나갔어. 전국체육대회처럼 성화도 있었는데 경주 토함산에서 채화해 경기장까지 봉송했지. 김 : 그 후로는 어떻게 참가하셨습니까?최 : 1974년까지 남대구 대표로 출전하다가 1975년부터는 포항 대표로 나갔지. 포항 선수로 뛴 것만 해도 20년이 넘어. 선수를 그만두고는 대회 임원으로 참가했으니 거의 반세기 동안 도민체육대회에 나간 것이지. 나도 그렇게 오랫동안 참가한 줄 몰랐는데 한 해 한 해 쌓이다 보니 그렇게 되었군.김 : 그렇게 오랫동안 참가하다 보면 재미있는 일도 많았을 것 같은데, 기억나는 일이 있으십니까?최 : 남동생이 둘 있는데 테니스를 했어. 1996년 도민체육대회 때 삼 형제(인수, 인국, 인호)가 모두 포항 대표로 출전했지. 두 동생이 테니스 선수로 출전하다가 그해에는 정구로 바꿔서 출전했어. 1999년에 포항에서 경북체육대회가 열렸는데 내가 개회식과 폐회식의 총지휘를 맡았어. 대규모 행사에서 막중한 임무를 맡다 보니 부담이 꽤 컸는데 실수 없이 잘 치른 덕분에 보람이 컸지.김 : 도민체육대회가 포항에서도 여러 번 개최됐지요?최 : 작년에 열린 대회까지 합하면 모두 여섯 번 개최했어.포항에서 처음 개최한 제12회 도민체육대회는 1974년 5월 18, 19일 이틀간 열렸다. 이 대회는 포항이 치른 최초의 도 단위 체육 행사였다. 성공적인 대회 개최로 지역 체육인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고 지역 체육 발전에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었다. 두 번째는 1987년 5월 4일부터 6일까지 3일간 열린 제25회 대회였다. 대구시가 광역시로 분리된 직후여서 다른 시·군에서 개최하는 데 어려움이 따랐기에 포항과 경주에서 종목을 나누어 치른 대회였다. 그 후 1990년(제28회), 1999년(제37회), 2010년(제48회), 2022년(제60회) 경북도민체육대회가 포항에서 열렸다.김 : 전국체육대회도 포항에서 한 번 열렸지요?최 : 전국체육대회 이전에 1985년에 제14회 전국소년체육대회가 지방 중소도시 최초로 포항에서 개최되었어. 제15회와 제16회 전국소년체육대회 때는 사격, 축구, 체조, 수영 등 일부 종목이 포항에서 진행되었고. 그 후 10년이 지나 제76회 전국체육대회가 1995년 10월 2일부터 7일간 포항에서 열렸지. 전국소년체육대회 때 조성된 체육관, 종합운동장(제1종 육상경기장), 수영장, 사격장 등 경기 시설과 대회를 개최하면서 축적된 운영 경험이 전국체육대회 유치의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고 생각해. 도청 소재지가 아닌 중소도시에서 열린 최초의 전국체육대회이자 사실상 경상북도에 열린 최초의 전국체육대회였거든. 1995년은 광복 50주년이 되는 해였고 30년 만에 부활한 지방자치 시대의 원년이기도 했어. 이렇게 뜻깊은 해에 포항에서 전국체육대회가 열려 포항은 잔치 분위기였지. 다행스럽게 대회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포항의 위상을 전국에 알렸고 나 자신도 포항 체육인으로서 자부심을 느꼈어. 김 : 포항에서 열린 굵직한 체육대회에는 선생님의 노고가 더해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말씀대로 보람이 컸을 것 같은데 보상도 있었습니까?최 :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고 자부심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되었지. 고맙게도 여러 기관과 단체에서 격려해주었어. 2001년에 포항시 최고체육상 공로상을 받은 게 각별히 기억에 남는군. 이 상은 학교장이나 가맹 경기단체의 장 또는 재정적 지원을 한 상공인이 받았는데 일선 교사는 내가 처음 수상하게 돼 무척 영광스러웠어.김 : 그만큼 포항체육회에 기여한 공이 컸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체육회에서도 많은 일을 하셨을 텐데요.최 : 오랜 기간 체육회에 있으면서 무난하게 일 처리를 해서인지 2005년에 체육회 부회장에 임명되었어. 학교체육 위원회장을 겸하는 자리였지. 부회장을 맡는 동안 학교체육의 기본 방침과 진흥에 대해 자문 역할을 했고 학생스포츠클럽 활성화와 신인 발굴, 꿈나무 육성 등 학교 운동부 운영에 대한 사업 전반을 살폈지.김 : 체육회 부회장은 언제까지 하신 겁니까?최 : 2009년에 부회장직을 내려놓고 체육회를 떠났지. 그 두 해 전에 교직 생활을 마감했고. 시간이 지나니 후배들에게 자리를 넘겨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더군. 앞만 보고 열심히 달리다 보니 지치기도 했고. 그동안 체육회에 몸담으면서 최선을 다했다고 느꼈기에 아쉬운 마음 없이 떠날 수 있었어.최인수1946년 서울에서 태어나 6·25전쟁 때 가족과 대구로 피난했다. 대구상고 시절 정구 선수로 활동했고 경북대학교 체육교육학과 재학 때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대학 졸업 후 대구 효성여고에서 교편을 잡았고, 1975년 포항 대동고등학교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되었다. 1979년 포철공고로 옮겨 야구부와 축구부 창단을 주도했다. 포항시 사립중·고등학교 체육교사협의회 회장, 포항시체육회 부회장, 포항시 생활체육협의회 상임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문체부장관 표창, 경상북도교육상, 포항시 최고체육 공로상 등을 수상했고 2007년 정년 퇴임했다. 2014년 종목별 원로들로 구성된 ‘포항 체육을 사랑하는 모임’(체사모)을 결성해 회장을 맡고 있다.대담·정리 : 김도일(소설가)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최인수

2023-08-09

연개소문 아들들의 ‘골육상쟁’이 부른 망국의 길

동서와 고금이 크게 다를 바 없다. 대저 ‘제국(帝國)’이 멸망하는 이유는 강력한 외세의 위협도, 바깥에서 오는 충격파 탓도 아니다. 내부가 무너지는 게 가장 큰 몰락의 시그널이다.고구려는 1천500여 년 전 신라와 백제를 포함한 우리 땅 고대 3왕국 중 가장 큰 영토를 차지했고, 당대의 강대국이었던 인근 수나라와 당나라의 모골을 송연하게 한 군사 대국이었다.그럼에도 668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게 무참하게 패배해 기원전 37년 동명성왕이 세운지 705년 만에 역사 속에서 이름이 지워진다. 허망하고 슬픈 마지막이었다.신라는 고구려의 절멸로 인해 삼한일통(삼국통일)에 한 발 더 성큼 다가선다. 당시 신라의 최고 권력자 문무왕 김법민과 태대각간(太大角干) 김유신은 고구려의 최후 항전 ‘평양성전투’에서도 승리를 맛본다.지금도 역사학자들은 고구려 멸망의 신호탄이 어디서 쏘아 올려진 것인지를 논쟁한다. 그 논쟁과는 별개로 고구려 말기의 흥망과 성쇠는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요약될 수 있다.2016년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간행한 ‘통일신라 시기-중앙과 지방’의 인용이다. “고구려는 오랜 기간 진행된 수나라·당나라와의 국운을 건 싸움에서 이김으로써 한동안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를 올렸다. 특히 642년 정변을 통해 집권한 연개소문이 군사력을 강화화고, 그를 기반으로 여러 차례에 걸친 당나라의 침공을 물리치는데 성공함으로써 내부의 정치적 안정을 되찾아갔다. 이로 말미암아 뒤이어진 당나라의 공격도 차례로 물리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대외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내부의 국력 소모가 만만치 않았다. 대외적 위기 속에 강압적 통치를 일삼던 연개소문이 666년 사망하자 그동안 누적돼온 모순이 즉각 겉으로 표출됐다. 연개소문이 죽자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으니 세 아들 사이의 정쟁이 그것이다. 장남 남생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막리지의 지위에 올랐지만 지방을 순행하는 사이에 동생 남건과 남산에 의해 쫓겨났다. 이에 남생은 평소 중앙정부에 반감을 갖고 있던 국내성 세력을 거느리고 당나라에 투항했다. 이로 말미암아 고구려는 예상 밖으로 쉽게 멸망하고 말았다.”◆‘태대각간’ 김유신에 필적했던 ‘대막리지’ 연개소문위에서도 여러 차례 이름이 거론되는 연개소문(594~666)은 김유신, 계백과 함께 삼국시대를 이야기할 때 신라, 고구려, 백제의 그 어떤 왕보다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다.보편적 대중들은 김유신을 가야 출신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고 삼한일통을 이룬 신라의 초특급 스타로, 계백은 풍전등화(風前燈火) 형국이었던 조국 백제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만고충신(萬古忠臣)으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대막리지(大莫離支) 연개소문은 어떤가.김유신의 벼슬 ‘태대각간’은 현대의 개념으로 보자면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근데, ‘대막리지’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겸 행정안전부장관’이라 말할 수 있는 것.그러니, 고구려의 마지막 통치자 보장왕(재위 642~668)은 ‘연개소문이 내세운 허수아비에 불과했다’는 이야기가 떠돈다.삼국통일 과정을 다루면서 연개소문의 삶과 죽음을 빼놓는다면 그건 ‘단팥이 빠진 찐빵’의 맛을 논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대막리지 연개소문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고구려 말기 그의 위상과 영향력을 말하기에 앞서 먼저 ‘당대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신라 김유신의 위상부터 살펴보자.육군사관학교 정재민 교수는 그의 논문 ‘영웅형 무장의 원형 김유신’의 서두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우리나라 최고의 명장을 꼽는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을지문덕, 김유신, 계백, 강감찬, 최영, 김종서, 이순신, 권율, 곽재우, 임경업 등 많은 장수들의 이름을 떠올릴 것이다. 이들 모두는 누란의 위기 속에서 나라를 구해낸 명장들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김유신은 다른 장수들에 비해 남다른 측면이 있다. 그는 7세기에 백제와 고구려를 합병해 삼국통일을 이룩했으며, 사후에는 흥무대왕으로 추존되었다. 또한, 軍威(군위·군대의 위신)에서는 將軍神(장군신)으로, 江陵(강릉)에서는 大嶺山神(대령산신)으로 마을을 수호하는 신격으로 숭배되고 있다.”살아있는 내내 권력의 정점에 있었고, 죽어서는 왕으로 추존(追尊)됐으며, 강원도 강릉을 포함한 일부 지역에서는 인간을 넘어 신(神)으로까지 추앙받는 게 김유신이다.이는 고대 왕국의 역사가 ‘승자독식(勝者獨食)의 관점’에서 기록되고, 그 기록이 영웅전설을 낳는다는 것을 감안하면 얼마든지 이해가 가능하다.◆당나라까지 위협한 맹장(猛將)이었으나 그의 자식들은…헌데, 연개소문은 삼국통일 전쟁 과정의 승자가 아닌 패자임에도 가진 권력의 크기와 전장에서 떨친 용맹이 김유신을 위협하는 형국이다.여러 고문헌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앞뒤는 물론 좌우에서도 감히 바라보기가 두려운 거구의 맹장이었고, 전투에 나갈 때면 엎드린 호위병들의 등을 밟고 말에 올랐으며, 고구려의 어떤 귀족도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고 한다.영류왕을 죽이고 무력을 독점한 ‘쿠데타의 수장’ 연개소문은 뭇사람들에게 공포를 느끼게 하는 독재자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런 부정적 모습만이 그의 전부는 아니다.당시 중국 대륙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던 당나라의 왕들 또한 연개소문을 무서워했다.게다가 그는 고대 왕국의 틀을 갖추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권력의 중앙집중화’에도 적지 않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길고 드라마틱했던 연개소문의 생애를 아래와 같이 짤막하게 서술하고 있다.“연개소문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28대 보장왕의 즉위와 관련된 장수다. 동부대인이던 아버지의 직을 계승했으나, 귀족세력들이 영류왕과 함께 자신을 제거하려 하자 정변을 일으켜 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세워 국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당나라의 도사들을 맞아들여 도교를 육성했다. 당시의 국제 정세는 당나라의 대외팽창 정책으로 긴박한 형세였는데 강경 일변도의 대외정책을 구사했다. 화평을 청한 신라의 요청을 거부했고 당나라와의 전쟁도 불사했다. 연개소문이 살아 있는 동안 당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하지 못했다.” 연개소문은 나이 지긋한 중국인들이 너나없이 좋아하는 경극(京劇·노래와 춤과 연극이 혼합된 전통극)에까지 등장한다.다섯 자루의 칼을 휘두르며 당나라 태종 이세민(598~649)을 겁박하는 연개소문의 모습에서 1천400여 년 전 그가 가졌던 ‘대체 불가의 카리스마’를 짐작할 수 있다.하지만, 연개소문의 시대는 마냥 지속되지 않았다. 아들 셋을 남기고 연개소문이 사망한 건 고구려가 멸망하기 2년 전인 666년.그가 죽은 후 장남인 연남생이 대막리지 벼슬을 이어받는다. 사태가 어그러진 건 차남 연남건이 ‘이제 고구려의 권력은 내가 가져야겠다’는 야심을 품으면서부터였다.형 연남생이 궁궐을 비운 틈을 타 연남건은 동생인 연남산과 모의해 “이제는 형이 아닌 내가 대막리지”라고 선언한다.연남건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형 연남생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연헌충의 목숨까지 끊어버린다. 이는 ‘고구려판 계유정난’(癸酉靖難·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끌어내려 죽이고 왕위에 오른 일)이라 불릴 만한 중차대한 사건이었다.연남생은 동생에게 당한 배신과 모욕을 참지 못하고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모아 당나라에 투항해버린다. 이로써 연개소문의 아들 셋은 따스한 정을 나누는 혈육이 아닌 철천지원수가 됐다.◆평양성전투에서 고구려의 패배는 이미 예견된 것형제간의 골육상쟁으로 내부에서부터 붕괴의 조짐을 보였던 멸망 직전의 고구려.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맺은 신라의 고구려 침공은 이처럼 유리한 상황에서 전개됐다.신라는 문무왕과 김유신, 김인문(629~694·진골 왕족으로 무열왕의 아들이며 문무왕의 동생)이 수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서, 당나라는 고종(당나라 3대 왕·재위 649~683)의 명령에 따르는 수많은 정예군으로 고구려의 평양성을 포위하고 1개월 이상 공격을 지속했다.지금으로부터 1천355년 전인 668년 늦여름. 한때는 유럽과 북아프리카를 넘어 서부 아시아까지 호령하던 로마 제국이 퇴폐와 방탕이라는 내부적 요인에 의해 무너진 것처럼 고구려의 운명도 저녁 하늘처럼 어둡게 저물고 있었다.(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8-08

하늘빛 닮은, 맑고 푸른 강이 흘러

포항은 예부터 물의 고장이었다.아호(阿湖), 두호(斗湖), 환호(環湖)라는 세 개의 큰 호수가 있었고형산강과 지류가 흐르며 다섯 개의 큰 섬을 낳았다.그리하여 포항을 삼호오도(三湖五島)라 했다.강은 포항의 곳곳을 적시며 흘렀다.형산강과 동빈내항 사이에도 유장한 강물이 흘렀다.지금 동빈내항보다 폭이 더 넓은 강에서아이들은 헤엄치며 조개를 잡았고 어른들은 낚싯대를 드리웠다.세월이 흐르며 그 강은 사라지고 말았다.형산강 너머 철강공단이 들어서고 주거지가 필요해지면서 강은 매립되고 말았다.매립된 강 위로 집들이 이마를 맞대고 촘촘히 들어섰다.강의 흐름이 끊기자 동빈내항의 수질은 나빠졌으며동빈내항과 인근 도심에 사람들의 발길도 뜸해졌다. 그 강이 다시 살아났다.포항운하라는 이름으로 형산강과 동빈내항 사이에 다시 물길을 냈다.운하 주변에 꽃과 나무를 심고 형형색색의 스틸아트 작품도 세웠다.‘찰랑교’라는 이름의 산뜻한 다리도 들어섰다.강의 흐름이 다시 이어지면서 동빈내항의 수질이 좋아졌으며동빈내항과 인근 도심에 사람들의 발길도 잦아졌다. 포항운하에서 출발한 유람선이 동빈내항을 지나 송도 바다를 지난다.유람선이 지나갈 때 갈매기 떼가 따라가며 즐겁게 합창한다. 포항운하에는 하늘빛 닮은, 맑고 푸른 강이 흐른다.물의 도시 포항은 강이 살아야 생명력이 넘친다. 임주은 임주은 1982년 포항에서 태어났으며 대구가톨릭대 공예과를 졸업했다. 개인전 2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아트페어에 서양화 작가로 참여했다. 현재 포항문화재단 이사, 포항청년작가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 포항지부, 경북청년작가회 등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3-08-07

“젊고 힘 있는 고령 만들자” 인구증가 정책 추진 총력전

인구 감소로 인한 지역 소멸 위기는 어느 특정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는 한국 농어촌이라면 모두가 고민하고 있는 보편적 문제다. ‘앞으로 한 세대가 더 지나면, 우리 마을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은 경북 역시 마찬가지로 가지고 있다.결국 문제는 인구 감소와 지역 소멸에 어떻게 효과적으로 대처할 것인지가 아닐까? 이를 위해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는 구성원들의 지혜를 모으고, 예산을 투여하며, 여러 형태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으로 개별 지자체의 존속을 위해 낮밤 없이 애쓰고 있다.고령군도 이런 추세에 발 빠르게 적응 중인 것은 당연한 이치. 이와 관련 이남철 고령군수는 “젊은 고령, 힘 있는 고령이란 군정 목표의 성공을 위해서도 모든 정책이 인구 늘리기 정책이 될 수 있도록 전 행정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지역에 맞는 실효성 있는 정책의 내실 있는 추진을 통해 활력 넘치는 고령군을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힌다.아래에서 인구 감소를 효과적으로 막아내고, 지역 소멸이란 위기의식을 잠재우기 위해 고령군이 펼치고 있는 각종 정책을 상세하게 알아보고자 한다. □ 지역 소멸 위기 극복을 위해 조직개편 후 인구정책과 신설가장 먼저 고령군이 선택한 주요 정책은 지역 소멸 위기 극복과 인구 감소 문제 대응을 위해 지난해 10월 조직개편을 통해 인구정책과를 신설한 것이다.그간 지역의 인구 감소 문제에 대한 단기대책으로 ‘고령사랑 주소갖기’ 운동에 행정력을 집중해 매월 30여 명에 달하는 인구 자연감소 폭을 최소화 하고 있다. 또한 이에 발맞춰 고령군 인구증가시책 지원 조례 개정을 통해 전입장려금을 전입자 1인당 10만원 지급하고 있다. 이주세대에 대한 주택대출 이자 지원, 인구 증가 우수마을에 대한 상사업비 지원 등도 전입 유도를 위한 정책 강화 차원에서 진행 중이다.또한 지난해 12월 교육, 청년, 여성, 학부모, 농업인, 기업인 등 각 계층을 대표하는 55명의 위원으로 ‘인구증가시책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는 것이 고령군의 설명. 이와 관련해 아파트 예비입주자 모임, 고령군 거주 희망 청년, 다자녀가구 등 각계각층의 주민들과 소통간담회를 통해 다양한 의견을 듣고 정책에 반영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단기대책과 더불어 중장기대책도 수립했다. 지방소멸대응기금 160억 원을 투자해 청년창업센터, 임대형 스마트팜, 농산물가공센터, 문화예술창작소 등의 지역 정착여건 향상을 위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것. 또한, 주민의 정주여건 개선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해 행정복지센터, 마을 소공원, 어르신 돌봄시설, 아이 돌봄시설, 주민 커뮤니티시설, 공용주차장 등의 주민복지·편의시설과 주민 대상 교육·컨설팅 등을 포함하는 농촌마을 종합개발사업에도 2019년부터 2026년까지 총 사업비 700억 원을 투자한다. 현재 관련 사업이 8개 읍·면에서 60여 개 추진 중이다.인근 신도시로의 전출이 인구 유출의 주요 원인으로 보고, 취약한 주거환경 개선을 위한 신규 주거단지 조성도 적극적으로 진행 중에 있다.곽촌지구 도시개발사업은 경북개발공사가 시행한다. 다산면 곽촌리 일원 26만2천917㎡ 면적에 인구 수용 4천600명, 주택 계획 1천849세대의 규모로 개발이 예정돼 있다. 현재 개발제한구역 해제 절차를 진행 중이며, 향후 도시개발사업 구역지정 및 개발계획 승인 절차를 밟은 후 2025년 착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대가야읍 도시개발사업은 민간기업에서 시행하는 사업이다. 올해 투자계획을 받았으며, 대가야읍 장기리 189번지 일원, 8만1천690㎡ 면적에 인구 수용 1천250명, 주택계획 625세대의 환지 개발방식으로 추진된다고 한다. 총 사업비는 1천700억 원으로 예상된다.□ 미래세대인 청년을 위한 각종 사업에도 노력 기울여그밖에도 고령은 삶과 일자리, 문화와 교육이 결합된 로컬주거단지를 조성하는 경상북도 역점사업인 ‘천년건축 시범마을 조성사업’에 경북 8군데 대상지 중 한 곳으로 선정됐다. 이와 함께 앞으로 국토교통부, 행정안전부, 문화체육관광부 등 7개 부처 협력사업으로 주거·문화·복지·일자리·돌봄·여가 등을 통합한 주거단지를 조성하는 사업인 ‘지역활력타운 조성사업’에도 공모할 계획이라는 게 고령군청의 부연이다.주요한 사업은 또 있다. 가장 많이 지역을 떠나고 있는 세대인 청년인구를 붙잡기 위한 다양한 지원정책도 펼치고 있는 것.올해 일자리·청년창업지원센터와 청년소통 플랫폼 ‘드루와樂’을 개소했으며, 청년 월세 지원사업, 청년근로자교통비 지원사업, 청년창업자 임대료 지원사업, 청년 창업공간 리모델링 지원사업 등을 통해 가능하면 많은 청년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 중이다.또, 경북도내에서 두 번째로 산후조리비 지원사업을 실시해 출산을 돕고 있고, 청년 임대주택 조성사업, 전통시장 청년몰 조성사업, 청년 복합귀농타운 조성사업 등도 순조롭게 추진되고 있다는 게 고령군청의 설명이다.이런 청년정책의 성과로 최근에는 행정안전부 주관 ‘2023년 청년마을 만들기 지원사업’에 고령군 1호 청년기업인 청년다운타운의 ‘플레이리스트(Playlist)’가 최종 선정돼, 3년간 국비 6억 원을 지원받게 됐다. □ 인구 늘리기 정책 통해 머물고 싶은 고령으로올해 1월부터는 인구감소지역지원특별법이 시행됨에 따라 지역에 월 1회 이상 체류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생활인구’ 개념이 도입됐고, 이러한 정책 변화에 대응한 결과 경상북도 공모사업에 3건이 선정돼 총 51억5천만 원의 사업비도 확보했다. 도시 사람들이 지방에 제2생활거점을 마련해 체류할 수 있도록 하는 ‘작은정원(클라이가르텐)사업’에 40억 원, 전입자의 주택 신축, 리모델링, 도로, 상하수도, 전기 등의 기반시설을 지원하는 ‘생활SOC 지원사업’에 10억 원, 도시지역 중장년들이 지속적으로 고령을 찾고, 교류하기 위한 프로그램인 ‘1시군-1생활인구 특화프로젝트’에 1억5천만 원을 확보한 것이다.이밖에도 생활인구의 주요한 축인 외국인의 지역 정착을 위한 ‘지역특화형 비자 시범사업’에도 선정돼 지금까지 33명의 외국인이 지역 정착을 위한 혜택을 받았다.인구 감소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처함으로써 지역 소멸을 막아내기 위해 고심하고 있는 이남철 군수는 “군정 목표 달성을 위해 우리가 추진하는 모든 정책의 중심에 인구 늘리기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고령의 지역적 특성에 맞춰 진행되고 있는 ‘인구 감소-지역 소멸’을 막기 위한 각종 사업들이 ‘가고 싶은 고령, 머물고 싶은 고령, 활력 넘치는 고령’이란 군정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발걸음에 실질적인 힘을 실어줄 수 있을 것인지 주목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전병휴기자 kr5853@kbmaeil.com

2023-08-07

박태준 회장의 특명, 운동부를 창단하라

1980년 5월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은 포철공고에 축구와 야구 중 교기 육성 종목 하나를 선정해 창단하라고 지시했다. 이 업무를 맡은 최인수 선생은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충분한 기초자료를 수집한 후에 우수 선수를 많이 확보할 수 있는 종목을 선택한다. 김 : 포철공고로 가서 1981년에 야구부를 창단하게 됩니다.최 : 포철공고에서 근무를 시작한 이듬해에 박태준 회장님이 축구와 야구 중 하나를 정해 교기(校技)로 육성하라고 지시하셨어. 그래서 먼저 선수 확보를 위해 경북도내 중·고등학교 운동부를 대상으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지. 당시는 대구가 경상북도에서 분리되기 전이었어. 자료를 살펴보니 야구부는 공립 중·고등학교에서 주로 운영하고 축구는 사립학교에서 운영하더군. 이게 왜 중요하냐면 축구를 하는 사립학교는 선수가 중학교를 졸업하면 거의 다 같은 재단의 고등학교로 진학하거든. 그만큼 선수 확보가 어렵다는 거지. 반면에 야구는 연계된 상급학교가 따로 없어서 선수 확보가 쉬운 편이고. 그래서 야구를 선정하게 된 거야.김 : 어느 학교가 야구부를 운영하고 있었습니까?최 : 중학교는 포항중, 경주중, 경주 무산중, 대구중, 경상중, 경복중이 있었지. 고등학교는 경북고, 대구상고, 대구고에 야구부가 있었고.김 : 그래도 신생 학교가 선수를 확보하려면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요.최 : 오히려 그 반대였어. 포철공고의 장점이 뭐냐면 선수들의 학비와 운동회비를 면제하는 것은 물론, 장비 일체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이었어.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야구 장비는 꽤 비싸서 선수와 학부모가 부담스러워했거든. 이런 조건을 걸고 선수 확보를 했더니 전국 상위권인 대구중학교 3학년 전원이 포철공고를 지원한 거야. 그랬더니 대구 지역 고등학교에서 난리가 났어. 경북고, 대구고, 대구상고가 합심해 경북교육위원회에 대구 지역 중학교 야구부의 포철공고 진학 포기 협조 요청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지. 김 : 선생님께서 참 난감하셨겠습니다.최 : 그랬지. 교육감님이 포철공고 교장에게 전화해 조금만 양보하라고 설득하더군. 결국 경북교육위원회 중재로 포항중 야구부 전원은 포철공고로 입학하고 다른 중학교 선수들은 각 고등학교에서 돌아가며 한 명씩 지명하는 방법을 택하지. 전국 최초로 드래프트 제도를 시행한 거야. 포철공고의 양보로 성립된 중재안이었어, 대구 지역 고등학교가 ‘제2의 장효조’라 불리던 대구중 정성룡 선수를 포철공고에 양보함으로써 갈등이 해소되었지.김 : 야구부가 창단된 다음해에 프로야구가 개막합니다. 시기가 참 절묘합니다.최 : 그런 셈이지. 원래 고교야구가 전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었는데 프로야구가 생기면서 야구 붐이 일었어. 야구를 하는 학생들에게도 커다란 동기가 유발되었고 말이야.김 : 야구부의 성적은 어땠습니까?최 : 야구부는 창단하고 얼마 되지 않아 큰 성과를 거뒀어. 창단 3년 차에 봉황대기, 청룡기, 전국체육대회, 황금사자기에서 준우승을 했고 무등기에서는 3위에 입상하며 돌풍을 일으켰지. 우승도 곧 할 수 있을 것 같더군. 그런데 아직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어. 오죽하면 내가 정년 퇴임사에서 “야구부가 준우승만 네 번 하고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한 게 한으로 남는다”라고 했겠나.김 : 그래도 훌륭한 선수를 많이 배출했지요?최 : 정성룡, 김성범, 최해명, 오봉옥, 강민호, 권혁, 최준석, 김동현, 김정혁, 이민호, 신동주, 김희걸, 김인철 등이 기억에 남아. 강민호는 지금도 삼성 라이온즈에서 없어서는 안 될 선수지.김 : 강민호 선수는 고향이 제주도인데 어떻게 포철공고로 오게 되었습니까?최 : 강민호는 제주 신광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포철중학교로 진학했어. 제주도에 야구부가 있는 중학교가 제일중학교밖에 없었지. 고등학교 야구부는 아예 없어 야구를 계속하려는 학생은 육지로 진학했고 대부분은 중학교 졸업 후에 그만두었어. 소년체전 때 강민호의 재능을 눈여겨본 포철중학교 감독이 스카웃했지. 강민호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권혁과 함께 금메달을 목에 건 것은 포철공고의 보람이기도 했어. 김 : 야구부를 창단하고 4년 뒤 축구부도 창단됩니다.최 : 그에 앞서 1983년에 포철중학교 축구부가 창단돼. 원래는 그 학생들의 고등학교 진학에 맞춰 1986년에 창단하려고 했는데 박태준 회장님의 지시로 한 해 앞당겨 창단한 거지.김 : 축구는 대부분 연계된 상급학교가 있어 선수 확보가 어렵다고 하셨는데.최 : 당연히 힘들었지. 게다가 1981년에 대구직할시와 경상북도의 행정구역이 분리되는 바람에 선수를 확보할 수 있는 학교가 더 줄었어. 선수를 데려올 수 있는 학교가 안동중, 강구중, 풍기중, 울진중 정도였지. 포철중은 3학년이 없어서 불가능했고. 고등학교는 안동고, 경주고, 영덕종고, 동지상고 등이 있어서 이전에도 고등학교끼리 선수 확보 경쟁이 치열했어. 게다가 기존 학교 보호를 구실로 경북축구협회에서도 비협조적이더군. 당시 경북축구협회가 안동에 있었거든. 경북축구협회에 가서 포철공고에 축구부를 창단하려고 한다니까 부회장이 대뜸 창단할 수 없다고 하지 뭔가. 너무 어이가 없어 언쟁을 벌어졌는데 사무국 직원이 뜯어말리느라 혼났지.김 : 그렇다고 축구부 창단을 포기할 수는 없었겠지요.최 : 하는 수 없이 경북체육회에 가서 선수등록부를 보고 연락처로 일일이 전화했어. 그랬더니 소식을 들은 중학교 감독과 코치들이 자기들 모르게 선수를 빼간다고 난리가 났지. 사실대로 말하고 사과한 후 협조를 구했어. 그렇게 해서 강구중 6명, 풍기중 2명, 울진중 2명을 확보했고, 서울 한양공고 2학년 재학생 4명을 전학시켜 인원을 채웠지. 안동중은 안동고가 있으니 끝까지 거절하더군. 골키퍼를 결국 못 구해 일반 재학생 중 소질 있는 한 명을 선수로 등록해 15명으로 1985년 3월 29일 창단했어. 김 : 포철공고 축구부는 성적이 정말 좋았지요.최 : 엄청났지. 내가 학교에서 나올 때까지 대통령배, 문화체육부장관기, 전국체전, KBS배, MBC배 등 전국대회에서 우승과 준우승, 3위를 각 8회씩 했으니까. 특히 이동국 선수가 입학한 1995년부터 최고 전성기였어. 1997년 KBS배 전국대회에서 우승했을 때 해병대에서 지원해준 차를 타고 포항 시내에서 카퍼레이드를 했지. 일본 시즈오카에서 열린 한국, 일본, 캐나다 3개국 고교 축구대회에 포철공고가 한국 대표로 초청받아 참가하기도 했고. 이동국 외에 이창원, 이원재, 남의경, 박원재, 황진성, 오범석, 이수환, 이재동, 신광훈, 김강현, 신화용, 임경훈, 오주포, 김대한, 신수진, 김석근이 포철공고 출신의 최상급 선수들이야. 김 : 이동국 선수의 기량은 출중했지요.최 : 이동국은 원래 포항동부초등학교에 다녔어. 동국이가 4학년 때 포항시 초등학교 육상대회에 나가서 100m, 200m, 400m 계주, 멀리뛰기에서 우승했지. 동부초등학교는 육상부도 없어서 출전하는 데 의의를 두었는데 동국이 덕분에 단체 3위를 했거든. 동국이를 눈여겨본 포항 스틸러스 유스팀 이영환 감독이 동국이에게 축구를 권한 거야. 그래서 포철동초등학교로 전학한 거지. 동국이는 축구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차범근 축구상’을 받을 정도로 소질이 뛰어났고, 고등학교 때 전국 최고의 스타가 되었어.김 : 포철공고 운동부가 다른 학교와 비교했을 때 특별하게 운영되었던 게 있습니까?최 : 야구나 축구를 하는 학생 중 상급학교 진학이나 실업·프로팀으로 진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 이를 대비해 전 선수들이 훈련 후에 기능사 자격 취득을 위한 교육을 이수하도록 했어. 또 선수들의 정신교육과 체력 단련을 위해 매년 해병대에 입소해 유격훈련을 실시했지. 특히 축구는 우수 선수를 선발해 포항 스틸러스에서 브라질 유학을 보내주었어.최인수1946년 서울에서 태어나 6·25전쟁 때 가족과 대구로 피난했다. 대구상고 시절 정구 선수로 활동했고 경북대학교 체육교육학과 재학 때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대학 졸업 후 대구 효성여고에서 교편을 잡았고, 1975년 포항 대동고등학교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되었다. 1979년 포철공고로 옮겨 야구부와 축구부 창단을 주도했다. 포항시 사립중·고등학교 체육교사협의회 회장, 포항시체육회 부회장, 포항시 생활체육협의회 상임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문체부장관 표창, 경상북도교육상, 포항시 최고체육 공로상 등을 수상했고 2007년 정년 퇴임했다. 2014년 종목별 원로들로 구성된 ‘포항 체육을 사랑하는 모임’(체사모)을 결성해 회장을 맡고 있다.대담·정리 : 김도일(소설가)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최인수

2023-08-06

싱그러운 초목과 깨끗한 물, 올 여름은 ‘산소카페 청송군’으로

올 여름은 ‘엘니뇨 현상’으로 오랜 기간 폭염과 열대야라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와 동시에 가파른 물가 상승의 여파 등으로 어려운 경제 상황도 지속되고 있는 실정이다.그럼에도 ‘코로나19 사태’의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왔기에 고약한 바이러스의 영향에서 일정 부분 벗어난 ‘엔데믹 시대’를 즐기려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렇기에 관광에 대한 갈증을 시원하게 해소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 여행자들의 요구도 높아지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모두가 알다시피 ‘코로나19 사태’가 초래한 가장 큰 변화 중 하나가 언택트 생활문화의 확산과 정착이다. 이는 기존의 관광 형태를 대폭 변화시켰다. 이와 관련해 여행과 관광 전문가들은 “휴가와 휴양을 즐기는 다양한 요소들이 적지 않게 바뀔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한다.이런 추세를 반영한 듯 2023년 여름 현재 보이는 관광·여행 트렌드의 가장 큰 변화는 과거에 관광명소로 유명세를 떨치던 휴양지보다 비교적 사람들이 몰리지 않는 여행지를 선호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는 것.그 연장선에서 조용하고 공기 맑은 산과 계곡을 곁에 두고 편안한 마음으로 일상의 스트레스를 풀어낼 수 있는 경북의 여행지는 어딜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들이 많다.이미 오래전부터 깨끗하고 청정한 자연을 배경으로 최고의 여름 휴가지로 각광받고 있는 지역 중 하나가 청송군이다. 청송을 휴가지로 선택해 여행한 사람들은 “행복하게 여행하려면 가벼운 마음이 필수다. 청송은 사람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는 선물 같은 관광지”라고 입을 모은다.‘청송군 세일즈맨’이자 ‘청송 관광홍보맨’을 자처해온 윤경희 군수는 “힘들고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 성큼 다가온 여름의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고민하는 분들 많다”며, “번잡한 도심을 피해 싱그러운 자연과 깨끗한 물, 한여름 8월의 풍성한 기운을 받으며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산소카페 청송군’에서 여유롭게 삶의 쉼표 하나를 찍어보시면 어떨까요”라며 청송 방문을 적극 권유하고 있다.이번 여름. 청송을 휴가지로 선택한 여행자들을 위해 ‘청송 100배 즐기는 방법’을 미리 알려주고자 한다. 그럼 지금부터 볼거리와 먹을거리, 거기에 더해 즐길거리까지 풍성한 청송으로 떠나보자. 출발지는 싱그런 녹음이 유혹하는 신성계곡이다.□ 여유로운 여름 산책 즐기는 ‘신성계곡 녹색길’신성계곡 녹색길은 관광공사 주관해 평가한 ‘여름철 관광지’로 선정된 걷기 좋은 여행길이다.갯버들 하천 길, 갈대 봇도랑 길, 방호정 길, 자암 길, 하천 과수원 길, 백석탄 길로 이어진 12km의 짙푸른 녹색길은 맑은 물과 푸른 숲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여기에 보너스로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까지 들으며 걷다 보면 갑갑한 일상에서 훌쩍 벗어났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특히 녹색길을 아우르는 신성계곡은 절경과 맑은 물, 그리고 빽빽한 소나무숲을 자랑한다. 방호정에서 고와리 백석탄에 이르는 계곡 전체가 청송군의 빼어난 아름다움으로 불리는 청송8경의 제1경으로 지정된 곳이다.또한, 이곳은 신성리 공룡발자국 화석산지, 방호정 감입곡류천, 백석탄 포트홀 등 청송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지질명소 4곳을 품고 있기에 아이들의 지구 환경 학습 장소로도 안성맞춤이라는 게 다녀온 사람들의 공통된 평가다.신성리 공룡발자국 화석산지는 2003년 태풍 매미 때 산사태가 발생해 약 400개의 공룡발자국이 발견된 곳이다. 공룡 모형이 설치돼 있는 소공원은 학습장의 역할과 동시에 사진 찍기 좋은 포토존으로도 활용되고 있다.방호정 감입곡류천은 아름다운 하천, 퇴적암 절벽, 도지정 민속문화재 ‘방호정’이 어우러진 명소로 유명하다. 방호정은 조선시대 선비 방호 조준도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해 생모 안동 권씨의 묘가 바라다 보이는 곳에 세운 정자다. “신성계곡을 찾게 된다면 이곳을 빼놓으면 안 된다”는 게 청송군청의 친절한 설명이다.안덕면 고와리 계곡에 위치한 백석탄 포트홀은 알프스산맥의 미니 암봉 같은 바위 군이다. 하얀 바위 사이로 흐르는 깨끗하고 맑은 물은 ‘이곳은 신선이 산다는 선계(仙界가 아닐까’라는 착각까지 불러일으킨다.계곡의 흐름에 따라 오랜 시간 동안 침식돼 바위에 항아리 모양의 깊은 구멍들이 생겨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조선 인조 때는 경주 사람 송탄 김한룡이 백석탄의 시냇물이 맑고 아름답다 하여 고계(금)라 칭한 적도 있다고 한다. □ 깊은 골짜기에서 나무 향기와 함께 하는 ‘청송 얼음골’신성계곡을 돌아봤다면 다음 방문지로는 청송 얼음골을 추천한다. 여름의 최고 여행지로 손꼽히는 청송의 또 다른 명소가 얼음골이다.얼음골 계곡 주변은 한여름 외부 온도가 섭씨 32℃를 넘으면 얼음이 어는 것으로 유명하다. 일종의 더위가 불러오는 기적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자연의 신비로움을 간직한 장소이기도 하다.청송 얼음골은 골이 깊고 갖가지 나무들이 울창하며 상대적으로 인적이 드물어 산새들의 지저귐 속에서 일상의 피로를 날려버릴 수 있다. 또한, 계곡 골짜기를 따라 부는 시원한 바람과 맑은 공기를 한껏 호흡할 수 있는 잘 알려진 관광명소다.□ 달기·신촌 약수 한잔 마신 후엔 약수 백숙 먹으러달기약수탕은 청송읍 부곡리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30여 년 전 조선 후기 때 금부도사를 지낸 권성하가 벼슬을 마치고 낙향해 이곳 부곡리에 살면서 마을 사람들과 수로 공사를 하던 중 바위틈에서 솟아오르는 약수를 발견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수로를 만들던 이들이 물을 마셔보았더니 소화가 잘 되고 속이 편안해져 그 후 주민들이 즐겨 마시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 달기약수탕은 아무리 가뭄이 심해도 솟아나는 양에 변함이 없고, 찬바람 부는 엄동설한에도 얼지 않는다. 여기에 더해 색과 냄새가 없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상주-영덕간 고속도로 동청송IC 인근에 있는 신촌약수터는 조선 말 조정에서 전국의 약수를 점검하고 평가한 일이 있는데, 당시 이곳 약수가 가장 무겁고 맛이 독특했다는 보고가 있었다고 한다. 이 약수는 위장병에 효험이 있다는 소문이 전해지면서 여행자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됐다는 후문이다.달기약수터와 신촌약수터에서 솟아나는 물에는 철분이 많아 약수터 주변이 붉게 산화된 모습을 볼 수 있다.탄산수는 톡 쏘는 맛이 특징인데, 이를 제대로 음미하려면 근처 가게에서 판매하는 달콤한 엿과 함께 먹어보는 것도 좋다. 또 약수로 밥을 지으면 푸른색 윤기가 도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밥은 찰기가 있어 지친 여름철 입맛을 돋우는데 그만이라고 한다.약수터에서 시원한 달기약수를 한 모금 마셨다면, 주위의 먹을거리를 찾아보는 것 역시 여름휴가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즐거움일 것이다. 달기·신촌 약수탕 근처에는 이곳 약수를 사용해 우려낸 약수 닭백숙이 여름철 보양식으로 잘 알려져있다.약수 닭백숙은 철분 함량이 높은 약수가 닭의 지방을 제거해줘 맛이 담백하고 소화가 잘돼 위에 부담을 덜하다.약수에 닭, 인삼, 황기, 감초, 대추, 녹두를 넣어 푹 고아서 닭이 알맞게 익으면 닭은 건져내 따로 담고, 국물에 쌀을 넣고 죽을 쒀 닭고기와 함께 먹는다. 닭죽은 위장병에 좋고, 몸의 기운을 돋우어 준다고 해서 많은 여행자들이 약수탕 인근 백숙 식당을 찾고 있다.□ 청송 여행의 마지막 보너스는 쾌적한 ‘캠핑장’수려한 산세와 울창한 수목을 가졌기에 전국에서 가장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장소로 호평 받는 청송군에는 캠핑과 삼림욕을 즐길 공간도 적지 않다.청송자연휴양림, 부남면 청송오토캠피장, 상의자동차야영장, 수달캠핑장 등이 바로 그런 곳들이다. 청송의 휴양림과 캠핑장, 야영장 모두는 비단 여름만이 아닌 봄과 가을, 겨울에도 가족단위 관광객들이 캠핑을 즐기며 여유로움을 만끽하는 공간으로 이름을 높이고 있는 중이다./김종철·홍성식 기자

2023-08-03

책을 보며 온전하게 휴식 취하는 북스테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책을 보면서 온전하게 휴식을 취하는 여행을 꿈꿔본 적이 있을 것이다. 책과 더불어 그림 같은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북스테이(book stay)가 최근 인기를 끌고 있다. 아직 우리에겐 북스테이가 다소 낯설지만 유럽에는 책방이나 북스테이와 관련된 체험공방 등이 마을 전체에 들어선 곳이 적지 않다. 그런 곳을 책마을이라고 부른다. 영국 웨일스 지방의 ‘헤이 온 와이’, 벨기에 플랑드르의 ‘담(DAMME)’, 프랑스 부르고뉴의 ‘퀴즈리’ 같은 곳이다. 여름의 절정, 책과 함께 쉼을 얻는 북캉스를 떠나보면 어떨까? 북스테이를 하기 좋은 두 곳의 서점과 전북 완주에 있는 한국형 책마을을 소개한다. ◇ 온전히 책 속에 몰입하다… ‘숲속작은책방’10년전 국내 최초 충북 괴산에 터 잡아소설부터 팝업북까지 책 3천여권 소장산막이 옛길 산책코스도 함께 즐겨볼만충북 괴산의 ‘숲속작은책방’은 국내에서 가장 먼저 북스테이를 시작한 곳이다. 서울에서 작은 어린이도서관을 운영하던 김병록·백창화 부부가 이곳에 터를 잡고 서점과 북스테이를 시작한 지 올해로 벌써 10년째다.숲속작은책방은 오봉산 기슭 평온한 전원마을에 있다. 유명세를 치른 곳이니 구경삼아 들락날락하는 사람은 없을까. ‘책방에 들어오면 책을 꼭 사는 것’을 원칙으로 내걸었더니 ‘인증샷’을 찍으려는 이들이 눈에 띄게 줄었단다.정갈한 정원에는 해먹을 걸어둔 정자와 피노키오를 조각한 오두막이 있고, 그 뒤로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듯 예쁜 이층집이 그림처럼 서 있다. 책방의 1층에는 인문서를 비롯해 에세이, 소설 등 3000여 권의 책이 진열돼 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그림책과 팝업북도 빈틈없이 갖췄다. 서점 벽면을 가득 채운 책꽂이와 가구는 모두 김병록 씨가 만들었다. 볕 잘 드는 거실 창 옆으로 그림책 작가를 위한 원화 전시공간도 마련했다. 창가 쪽에는 부부가 좋아하고 추천하는 책이 놓여 있는데, 책마다 일일이 소개 글과 감상을 적어 띠지로 둘렀다.2층은 오롯이 북스테이를 위한 공간이다. 두 곳의 객실을 서재와 침실로 꾸몄다. 서재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그림책이 대부분이지만 ‘식객’‘송곳’ 같은 유명 만화도 있다. 침대와 에어컨을 갖춘 침실에 텔레비전을 두지 않은 건 조용한 공간에서 편안히 독서를 즐기라는 책방지기의 배려다. 특히 거실은 여느 작가의 서재 같다. 김병록 씨는 “책을 편하게 읽을 공간이 없어서 책을 잘 안 읽게 된다”며 “어느 곳에서든 책을 접하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공간이 이곳의 콘셉트”라고 말했다.제약이 많은데도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것에 대해 책방지기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는 책에 관한 얘기, 사는 얘기를 주고받으며 하루를 보내면 금세 ‘가족’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곳에선 이름난 관광지 여느 펜션의 밤 풍경을 떠올리면 안 된다. 마당을 거닐며 머리를 식히고 의자에 앉아 달과 별을 보며 게으름을 부리는 일은 가능하다. 마당도 정갈하다. 북스테이 공간에는 작은 책상과 노트가 놓여 있다. 묵었다 떠날 때에는 반드시 노트에 글을 한 편 남기는 것도 원칙이다. 다시 찾았을 때 각자의 글을 펼쳐보며 추억을 곱씹고 마음도 다잡아보자는 취지란다.숲속작은책방이 있는 미루마을 산책도 꼭 해볼 만하다. 원래 교육문화를 테마로 조성된 전원마을이어서 동네 전체가 그림책에서 방금 튀어나온 것처럼 아름답다. 집집마다 파스텔톤 외벽으로 단장했다. 잔디 마당과 정성스레 가꾼 나무와 화초를 품은 정원도 갖췄다. 평온한 마을 풍경이 마음까지 편안하게 만든다. ‘산막이 옛길’까지 갔다 오는 이들도 있다. 숲속작은책방에서 산막이 옛길까지 걸어서 약 20분 거리다. 산막이 옛길은 칠성면 사오랑 마을에서 산막이 마을까지 괴산호를 따라 약 4㎞에 걸쳐 만들어진 산책로다. 호수를 끼고 가는 길은 풍경이 수려하고 오래된 느티나무 위에 만든 ‘괴음정’, 바닥을 강화유리로 마감한 고공전망대, 연하협 구름다리 등이 볼거리도 많다. 대부분 구간이 나무데크로 조성돼 걷기가 편하고 경사도 거의 없다. 30~40분이면 완주할 수 있다. 산 좋아하는 이들은 산책로 말고 호수를 에두른 등잔봉(450m), 천장봉(437m), 삼성봉(550m)을 잇는 능선 길을 타기도 한다. 등잔봉과 천장봉 중간에선 산막이 옛길의 상징이 된 ‘한반도 지형’도 볼 수 있다. 숲속작은책방에서는 갈론구곡(갈은구곡)도 가깝다. 자동차로 약 15분 거리에 있다. 화양구곡, 쌍곡구곡 등 괴산의 이름난 계곡에 비해 조금 덜 알려진 곳이다. 칠성면 갈론마을을 지나 2~3㎞ 계곡을 따라 거슬러 가면 강선대 등 9곳의 비경이 펼쳐진다.숲속작은책방 북스테이 입실은 오후 3시, 퇴실은 다음날 오전 10시다. 오직 한 가족만 이용할 수 있다. 1박 숙박 비용은 조식 포함, 2인 10만원, 3~4인 15만원, 5~6인 20만원(매주 수, 목, 금, 토요일 운영) ◇ 책 속에서 노는 ‘이루라책방’네이버 예약으로 하루 한팀만 이용 가능오두막·루프탑서 즐기는 바다전망은 덤200여 권의 책으로 만든 ‘책조명’도 이색강화군 내가면 구하리에 있는 ‘이루라책방’도 대표적인 북스테이 전문 책방이다. 이루라책방은 운영 시스템부터 특이하다. 네이버 예약을 통해 매일 시간대별로 단 한 팀만 받아 방문객이 방해받지 않고 책방 공간 전체를 오롯이 누릴 수 있도록 했다. 내부는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북카페 분위기다. 아동서부터 소설·경제·문학 등 다양한 책이 3층 높이의 책장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책방에 앉아 있으면 통유리창 밖으로 강화의 시원한 풍경이 그대로 들어온다. 바닷바람과 정원 너머의 푸른 숲 덕분에 저절로 힐링이 되는 느낌이다. 200권의 책으로 만든 ‘책조명’이 특히 눈길을 끈다. 책방지기인 이정훈 씨의 작품이다. 책방을 연 김영선·이정훈 씨 부부는 모두 작가다. 부인 김씨는 아동문학계에서 이름이 알려진 동화작가, 남편 이씨는 경제·경영 관련 베스트셀러를 냈다.숙박 공간은 2층과 3층으로 분리돼 있다. 3층은 멀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글램핑장으로, 주로 가족 단위 방문객이 찾는다. 2층의 다락방처럼 생긴 오두막에서는 천창을 통해 달을 보면서 책과 함께 뒹굴 수 있다. 오두막 손님만을 위한 벚꽃정원도 따로 마련돼 있다.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3층 루프톱의 글램핑 시설에서는 황홀한 노을을 감상하고 온갖 새 소리, 개구리 소리를 들으며 자연을 만끽할 수 있다. ◇ 한국형 책마을, 완주 삼례 책마을일제 강점기때 만들어진 양곡창고 개조희귀한 동서양 고미술품 판매숍도 인기서점 옆 박물관에선 ‘만화전’ 등 열기도 전북 완주시 삼례에는 책마을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김제와 익산, 정읍 등지의 쌀을 옮기기 위해 만들었던 양곡창고를 개조해 조성한 삼례책마을이다. 영국의 책마을 ‘헤이 온 와이’를 모델로 삼았다. 북 하우스, 한국학아카이브, 북 갤러리, 삼례책마을센터 등이 오밀조밀 모여 있다. 책마을로 들어서면 2층 천장까지 들어찬 책더미에 순간 멈칫한다. 입구에 옛 책방의 향수가 느껴지는 무인서점이 자리잡고 있어 누구나 마음에 드는 책을 구입할 수 있다. 희귀한 동서양의 고미술품을 전시, 판매하는 뮤지엄 숍도 인기다.서점 옆 박물관은 1년에 두세 차례 기획전을 열어 볼거리를 더하고 있다.박대헌 삼례책마을 이사장이 중학생 때부터 수집해온 희귀 기록과 인쇄물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시집 연애보’와 ‘철수와 영이: 김태형 교과서 그림’ ‘옛날은 우습구나: 송광용 만화일기 40년’을 전시 중이다. /글·사진=최병일 작가

2023-08-03

대동고를 거쳐 포철공고 교사가 되다

최인수 선생은 1975년에 포항 대동고등학교에 부임하게 된다. 대구 효성여고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한 지 1년 만의 일이었다. 20여 년간 터를 잡고 살아온 대구를 떠나 객지로 오기까지 결심이 쉽지 않았을 것이고 오는 과정에서도 우여곡절을 겪었을 터이다. 김 : 대구에서 포항으로 온 이유와 과정이 궁금합니다.최 : 효성여고에서 정신없이 보내다 보니 어느덧 겨울이 되었지. 방학인 데다 테니스부 운동도 잠시 쉬는 기간이라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는데 어느 날 한 친구가 집에 찾아왔어. 고등학교 때 같이 운동한 친구인데 포항에 자리를 잡고 있었지. 예전에 복잡한 일 때문에 생각을 정리할 겸 포항에 바람 쐬러 간 적이 있는데 그때 송도 근처에서 우연히 이 친구를 만나 크게 대접받은 적이 있었어. 친구가 술 한잔하자기에 그때 진 신세를 갚을 겸 따라나섰지. 당시에 일명 ‘나라시’라고 부르는 장거리 합승 택시가 있었거든. 대구역에서 그걸 잡아타고는 경주에 가자고 하더니 가는 도중에 포항으로 행선지를 바꾸지 뭔가. 제대로 얻어먹으려나 보다 생각하고 아무 말 없이 포항까지 갔어. 술자리가 파한 후(선생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 어릴 적 부친이 술로 건강과 재산을 잃는 과정을 본 까닭이다.) 다음 날 오전 10시에 포항전화국 옆 다방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여관방에서 하룻밤을 보냈지. 다음 날 아침, 다방에서 친구를 기다리는데 약속한 시간이 되어도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어. 대신 다른 사람이 다가오더군.김 : 그 사람이 누구였습니까?최 : 김현호 대동고등학교 교장이었어. 김현호 교장은 포항정구협회 회장을 맡고 있어서 예전부터 친분이 있었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드리며 여기는 어떻게 오셨는지 물었어. 나를 만나러 왔다고 하면서 사실은 여름에 대구 효성여고에서 열린 전국사립고등학교 교장 회의에 참석했다가 선수를 지도하는 나를 보고 대동고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고 하시는 거야. 그래서 친분이 있던 내 친구에게 자리를 마련해달라 부탁해서 나를 포항에 데리고 온 거라고 하더군. 내가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데 마침 친구도 나타났어.김 : 김현호 교장이 선생님을 데리고 오려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요?최 : 1973년에 대동고등학교가 개교했으니 2년이 지난 시점이었지. 신생 학교여서 학생 유치에 어려움이 많았던 모양이야. 교장은 이를 해결할 방안으로 당시 교사들 사이에 인기가 많은 정구대회 개최를 생각한 거야. 무슨 말이냐면 그 대회에 중학교 교사들을 초청해서 우수 학생들을 보내달라고 홍보할 구상을 한 거지. 그뿐 아니라 대동고등학교에도 정구부를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러던 차에 효성여고에서 나를 보고는 이 계획을 실행할 적임자로 생각했나 봐. 이런 얘기를 하면서 대동고로 오면 안 되겠냐고 간곡히 부탁했어. 친구도 자기와 운동을 같이하며 포항에서 살자고 설득했고. 그렇지 않아도 여고 근무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터라 잠시 고민하다가 그러자고 했지.김 : 효성여고에서도 선생님이 필요했을 텐데 전근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습니까?최 : 왜 없었겠나? 사립학교 교사가 다른 사립학교로 옮기려면 전(前) 학교 교장의 허가가 있어야 하거든. 대동고로 가겠으니 허락해달라고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며 펄쩍 뛰었지. 아주 난리가 났어. 몇 번을 찾아가서 사정하고 온 가족이 포항으로 이사했다고 거짓말도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어. 하지만 이미 마음이 떠났는데 붙잡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는지 결국에는 못 이기는 척하고 승낙해주더군. 허가서를 주면서 “최 선생, 거기 가면 분명히 후회하고 돌아오고 싶을 거다. 앞으로 3년 동안 최 선생 후임자는 뽑지 않을 테니 그 안에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돌아오라”고 하셨어. 정말 죄송하고 또 고맙더군. 우여곡절 끝에 대동고등학교에 부임했을 때는 이미 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이 지나 있었지.김 : 대동고등학교의 첫인상은 어땠습니까?최 : 포항터미널에 내려 택시를 타고 기사에게 대동고등학교로 가자고 하니까 대동고등학교를 모르는 거야. 동료 기사에게 묻고 물어 학교에 도착하니 입구가 비포장이라 시커먼 진창길이야. 건물 두 개 중 하나는 아직 완공되지 않은 상태였어. 지나가는 학생에게 고등학교 건물이 어디냐고 물어보니 짓고 있는 건물을 가리키더군. 그 순간 효성여고 교장이 한 얘기가 떠올랐어.김 : 다시 대구로 돌아가고 싶었겠습니다.최 : 김현호 교장을 만나 인사를 드리는데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어. 김 교장도 내 웃음의 의미를 알았는지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3년만 도와주면 안 되겠냐고 하더군. 나도 그 난리를 치고 왔는데 자존심 때문에 바로 돌아가기는 싫었어. 그래서 3년은 하고 돌아가자고 생각했지. 그렇게 대동고등학교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시간이 지나자 차츰 학교에 정이 들었어. 얼마 뒤에는 대구로 돌아갈 생각을 아예 안 하게 되었고 말이야. 김 : 당시 학교의 체육 교육은 어땠습니까?최 : 신생 학교라 시설이 완공되지 않았지만 운동부는 꽤 활성화되어 있었어. 육상부와 조정부가 있었지. 이듬해에 검도부가 창단되는 등 당시에는 체육 교사가 흔치 않았는데도 운동부 육성에 열성적이었어. 그 당시 대동고 외에 동지상고(현 동지고)에도 검도부가 있었고 포항수고와 동지여상(현 동지여고), 포항실업전문대(현 포항대학)에 조정부가 있었지. 1978년에는 포항고에 사격부가 생겼고.김 : 하지만 3년 뒤에는 대동고등학교를 떠나게 되는군요.최 :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어. 포항에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결혼했어. 학교 앞 주택에 신혼집을 차렸는데 집주인이 교장 선생님의 동생이었어. 동생도 교사였는데 울진 매화중학교로 발령을 받아 내가 그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지. 그런데 집주인이 갑자기 포항으로 다시 오겠다고 하는 바람에 당장 집을 비워주고 다른 집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 된 거야. 집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무렵에 포항제철에서 공립이었던 포항공고를 인수했어. 포항제철이 필요한 인력을 직접 양성하겠다는 조치였지. 그게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야. 그런데 포항공고에서 근무하던 교사 중 다른 공립학교로 전근한 이들이 많아서 교사가 부족했지. 그때 포철공고에서 교사로 오면 13평 아파트를 제공해준다는 거야. 그런 이유로 학교를 옮기게 되었지.김 : 선택의 여지가 없었겠습니다.최 : 그게 아니었다면 대동고에 남았을 거야. 김현호 교장은 내가 학교를 옮긴다고 하니 엄청 화를 냈지. 내가 학교에 남아 학생 유치에 도움을 주고 정구대회에도 같이 나가주길 바랐으니까. 얼마나 화가 났는지 나한테 아예 포항을 떠나라고 하더군.김 : 전후 사정을 얘기해보지 그랬습니까?최 : 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옮긴다는 것을 사실대로 말했으면 오해가 풀렸을 텐데 자존심 때문에 그러지 못했어. 그 후 몇 년 동안은 우연히 만나 인사를 드려도 아는 체도 하지 않더군. 참 마음이 아팠어. 그러다가 어느 해, 크리스마스카드에 용서를 비는 말과 함께 대동고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자세하게 적어 보냈어. 그제야 관계가 회복되었지. 그 후로는 교직원 국가대표로 일본에 같이 다녀오고 내가 포항사립중·고등학교 체육교사협의회 회장에 취임할 때 축사도 해주셨어. 최인수1946년 서울에서 태어나 6·25전쟁 때 가족과 대구로 피난했다. 대구상고 시절 정구 선수로 활동했고 경북대학교 체육교육학과 재학 때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대학 졸업 후 대구 효성여고에서 교편을 잡았고, 1975년 포항 대동고등학교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되었다. 1979년 포철공고로 옮겨 야구부와 축구부 창단을 주도했다. 포항시 사립중·고등학교 체육교사협의회 회장, 포항시체육회 부회장, 포항시 생활체육협의회 상임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문체부장관 표창, 경상북도교육상, 포항시 최고체육 공로상 등을 수상했고 2007년 정년 퇴임했다. 2014년 종목별 원로들로 구성된 ‘포항 체육을 사랑하는 모임’(체사모)을 결성해 회장을 맡고 있다.대담·정리 : 김도일(소설가)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최인수

2023-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