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정을 거듭하는 정권을 심판하자”는 구호와 “야당의 부도덕한 범법자들에게 표를 주면 안 된다”는 주장이 대립하는 2024년 봄이 지나고 있다. 오늘은 22대 국회의원 선거일. 가파르게 상승하는 물가와 뉴스를 통해 연일 들려오는 국회의원 후보자들의 탈법과 불법 사례, 양보와 화합이 아닌 극한 대결로만 치닫는 정치권을 보고 있으면 “봄은 왔으나 봄이 봄 같지 않다”는 끌탕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여당과 야당 모두에게 실망했다고 해서 유권자로서의 권리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정치학자들의 말처럼 ‘선거란 최선이 아닌 차악을 선택하는 행위’다. 식상한 레토릭이지만 ‘나의 소중한 한 표’가 이 땅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기에 다시 투표장으로 향하는 발걸음들. 일찌감치 투표를 끝낸 독자들이 있다면 오후엔 아래 추천하는 영화를 보며 한국의 정치와 선거에 관해 곰곰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길 권한다.
자연스레 현실에서의 국회의원 선거를 떠올리게 하는 ‘특별시민’
배우 최민식이 뿜어내는 아우라(Aura)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영화 ‘명량’에서 열세에 몰린 조선 장군의 고뇌를 연기할 때도, 타자의 고통에 전혀 반응하지 않는 연쇄살인범으로 변신한 ‘악마를 보았다’에서도, 크나큰 상처를 지낸 채 살아가는 지리산 호랑이 사냥꾼으로 분한 영화 ‘대호’에 출연했을 때도 그는 돌올했다.
사람에 따라 평가는 갈리지만, 최민식이 ‘연기 잘하는 배우’란 걸 부정할 영화팬은 많지 않을 듯하다. 그가 지닌 가장 큰 장점은 캐릭터와의 밀착력이다. 감독과 관객이 원하는 존재로의 자연스러운 변신, 영화 속 인물로의 완벽한 몰입.
“배우라면 그게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최민식 정도의 변신과 몰입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게 기자의 생각이다.
출연하는 영화마다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켜온 최민식이 3선 국회의원 출신의 재선 서울시장으로 나오는 영화가 ‘특별시민’이다.
비단 한국만이 아니다. 세계 어느 곳 할 것 없이 정치인들이 벌이는 최고의 이벤트라 할 선거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쇼(Show)’라는 단어가 발견될 게 분명하다.
‘특별시민’은 눈앞에 닥친 선거의 승리를 위한 정치인들의 복마전과 이전투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유권자들 앞에서는 “국민 행복과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를 외치다가 이내 돌아서서 “나와 가족의 이익을 위하여”라며 음흉하게 웃는 정치인과 선거의 어두운 이면에 카메라를 들이댄 것이다.
‘특별시민’의 무대가 되는 공간은 한국의 서울시. 서울시청사는 물론, 여의도 국회의사당과 청와대까지 거침없이 비추는 연출자 박인제 감독의 카메라는 2024년 4월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국회의원 선거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만든다.
‘특별시민’은 상영 시간 내내 영화와 현실의 경계에서 쓴웃음을 짓게 한다. 거듭되는 저급한 수준의 네거티브 공세와 공작 정치의 향기가 진하게 풍겨오는 선거캠프의 운동원들, 함량 미달의 정치인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기 위한 억지스러운 미디어 연출…
이쯤 되니 ‘특별시민’은 허구를 재료로 만든 극영화가 아닌 사실에 근거한 다큐멘터리처럼 보일 지경이다. 시종 흥미와 긴장감을 유지하는 사실적 연출은 ‘특별시민’을 특별하게 느껴지게 한다. 이는 박인제가 성취한 연출의 승리다.
하지만, 박 감독이 이룬 작은 승리의 배후에는 영화 속 서울시장 후보 변종구의 큰 승리가 있다.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면 래퍼 분장도 마다치 않고, 묘하게 조작된 동영상을 통해 대중들의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선량한 정치인을 가장하는 변종구. 그러면서도 아내에게는 폭력적이고, 아랫사람에게는 권위적인 이중성을 시시때때로 드러내는 변종구….
누구라 특정할 것도 없이 우리는 지금까지의 한국 정치 현실에서 얼마나 많은 ‘변종구’를 봐왔던가. 거기서 생긴 실망감이 ‘정치(선거) 허무주의’로 이어졌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그렇지 않아 보인다.
최민식은 다중성을 지닌 자신의 극 중 캐릭터 변종구를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앞서 말한 능수능란한 영화적 변신과 몰입을 통해. ‘특별시민’이 최소한 ‘재밌는 영화’로는 불릴 수 있는 이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정치와 정치인을 다룬 이전의 한국 영화들과 달리 ‘특별시민’은 끝까지 선과 악에 대한 감독의 자의적 가치 판단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 모호함이 세련됨으로 관객들에게 다가오는 건 영화가 주는 덤이다.
부패한 정치인과 조직폭력배에 관한 영화적 성찰 ‘레전드’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용감했던 여기자’를 꼽으라면 누구도 감히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다. 오리아나 팔라치(1929~2006)가 바로 그 위치를 점한 사람이란 것에 관해.
레지스탕스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뿐이랴. 베트남 전쟁의 포화 속으로 겁 없이 뛰어들었고, 혁명이 한창이던 멕시코에서는 총에 맞기도 했다.
세상 대부분의 남자들이 두려워하던 이란의 아야툴라 호메이니,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미국의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자신이 주도해 인터뷰를 이어가던 무시무시한 여자.
바로 이 오리아나 팔라치가 아래와 같은 말을 했다. “당신이 만난 권력의 최정점에 섰던 정치인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면서다.
“그들은 보통의 사람들보다 똑똑하지도 선량하지도 않았어요. 좋은 가정교육을 받지도 못했고, 상대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능력도 없습니다. 게다가 배려와 연민에서는 아주 먼 사람들이었죠. 그들이 가진 능력이라곤,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자신의 욕망을 이루려 했으며,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몹시 악랄한 수단도 마다치 않았다는 것이죠.”
유명한 영국의 조직폭력배 형제 이야기를 다룬 영화 ‘레전드’를 보면서, 왜 이탈리아 출신의 여기자 오리아나의 진술이 떠올랐는지….
조금 오래된 이야기지만 기자가 젊었던 시절 ‘L.A 컨피덴셜’을 보고 놀랐던 적이 있다.
치고 빠지는 능수능란한 할리우드적 전술로 자국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성공을 거둔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는 브라이언 헬겔랜드. 아카데미 각색상을 받은 그가 만들었다는 것에 기대를 걸고 ‘레전드’와 만났다.
그런데, 결론을 말하자면 영화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연출에선 힘이 빠졌고, 주연 톰 하디를 제외한 나머지 배우들의 캐릭터는 이전 이탈리아 마피아를 소재로 한 영화나, 1930년대 금주법 시대를 그린 미국 갱스터영화의 복사판이었다.
얼핏얼핏 비치는 ‘깡패도 휴머니티가 있다’는 식의 짜 맞추기식 화면 구성의 동어반복도 눈 높은 갱스터영화 팬이라면 참고 봐주기 힘든 수준.
‘레전드’의 꽤 긴 상영 시간을 지겹지 않게 만드는 게 있다면, 1인 2역을 맡아 빼어난 연기로 이를 소화한 톰 하디(레지 크레이·로니 크레이 분)의 열연 정도다.
어린 시절 나치의 폭격으로 정신이 이상해진 동생 로니와 그에 비해 훨씬 이성적인 쌍둥이 형 레지의 캐릭터를 동시에 연기하긴 어려웠을 게 명약관화한 일. 그럼에도 톰 하디는 군계일학의 연기력으로 이를 극복해낸다. 영화 ‘레전드’의 미덕을 하나만 더 꼽으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조직폭력배와 부패한 정치인은 결국 동질이형(同質異形)의 인간이란 걸 재치 있게 보여 준다”고.
영화에서 묘사되는 런던의 고위직 경찰 간부와 영국의 상원의원은 추악하고, 위선적인 정도가 깡패와 다를 바 없다. 아니 오히려 더하다. 앞서 언급한 오리아나 팔라치의 진술과 유사하게.
다행히 ‘우의’를 통한 에두른 세상의 비판이 ‘레전드’ 속엔 눈곱만치라도 담겼다. 이것이 난파 직전의 영화를 구하는 주요한 키워드로 역할 한다. 그나마 다행이다.
영화가 끝나고, 마지막 엔딩 자막이 올라올 때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영화답게 ‘레전드’는 형제 조직폭력배 레지 크레이와 로니 크레이가 어떻게 최후를 맞았는지 알려준다. 그때 문득 떠오른 생각 하나.
만약 ‘독설가’인 이탈이라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가 아직도 살아있다면 이런 말을 ‘레전드’의 감독 브라이언 헬겔랜드에게 하지 않았을까.
“영국이건 한국이건 조직폭력배와 부패한 정치인이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라는 걸 여태 몰랐던 겁니까?”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