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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서 내려다 본 형산강 파노라마 뷰, 잊지 못할 감동

글·사진= 한상갑기자
등록일 2024-05-09 18:26 게재일 2024-05-1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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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형산-왕룡사-소형산 돌아보기
조선시대 문인 정극후는 형산강을 ‘동방의 적벽’이라고 칭찬하며 강 풍류를 즐겼다. 형산에서 내려다 본 형산강 모습.
조선시대 문인 정극후는 형산강을 ‘동방의 적벽’이라고 칭찬하며 강 풍류를 즐겼다. 형산에서 내려다 본 형산강 모습.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한 해양도시 포항에는 크고 작은 산들이 오밀조밀 펼쳐진다. 주로 서쪽으로 포진한 이 산들은 높낮이를 달리하며 제각각 존재 의미를 뽐낸다. 포항의 주산(主山)은 뭐니뭐니해도 내연산이다. 북구 송라면에서 산맥을 일으킨 내연산은 흥해에서 도음산과 만난 포항을 감싼다. 경주 강동을 끼고 남진하던 도음산은 양학산에 이르러 낮게 깔리며 호흡을 고른다.

산맥은 다시 남쪽으로 뻗어가다 형산강에 막혀 형산과 제산으로 분기(分岐)하는데 이곳이 후술할 ‘형산, 제산 전설’의 배경이다. 형산강에서 수기(水氣)를 머금은 후 산세는 다시 남진해 운제산에서 포항의 산맥을 완성한다. 오늘 소개할 형산(兄山)은 포항의 산은 아니다. 그러나 내연-도음-양학의 산세를 이어받아 운제산에 연결되는 산중 정류장으로써 의미를 갖는다. 관할구역은 경주(강동면)에 위치해 행정상으로는 포항과 벗어나 있다. 그러나 포항 지곡동, 효자동, 연일읍과 가까워 포항 시민들이 아끼고 오르는 산이다.

 

형산, 삼국사기에 등장 마의태자 김충이 산 갈라 물길 열리고 수해 벗어났다 설화 전해

정상 왕룡사 유적은 구석구석 뜻밖의 재미 선사… 절 동쪽엔 낮은 가부좌 튼 약사여래불

약사여래불 앞 작은 광장에 서면 포스코 힘찬 굴뚝 너머로 영일만 앞바다까지 한 눈에

태종무열왕·김유신 장군 목조상 모신 용왕전·외진 곳 자리한 산신각은 아기점지 열망이

왕룡사 무량수전.
왕룡사 무량수전.

◆ 신라 경순왕 때 처음으로 역사서에 등장

형산이 위치한 곳은 경주시 강동면 국당리. 강의 남쪽에 자리 잡은 해발 257m의 낮은 산이다.

사기에는 신라 왕궁에서 ‘중사’(中祀)를 치르는 북형산성(北兄山城)으로 언급돼 있다. 중사라면 국사(國祀)에 이은 다음 제례로 지금으로 치면 자치단체 축제에 해당한다.

동국여지승람에도 ‘중사를 지냈다는 기록’과 ‘영천의 소산(所山)과 통하는 봉수대가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삼국사기 신라 경순왕 조(條)에 형산은 다시 한 번 역사에 등장한다, ‘강동, 안강 지역에 큰산(형산, 제산)이 붙어있어 매년 수해가 발생해 주민 피해가 컸는데 태자 김충을 시켜 산을 두 개로 갈라 재해에서 벗어났다’는 내용이다. 용이 승천하며 산줄기가 뚫리고, 물길이 열린 후 강동면 일대에 넓은 평야가 드러나니 이곳이 유금들이다.

보통 두 산이 나란히 있을 때 큰산, 작은산이나 방위에 따른 동봉, 서봉으로 지칭하는데 이곳은 인칭을 썼고 더구나 형산, 제산처럼 혈연관계로 묶어 놓은 서사 구조가 특이하다.

앞서 언급한 형산 설화엔 마의태자(김충)부터 용(龍) 신화까지 등장하는데 그만큼 형산이 신라인들의 의식 속에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이후 형산은 역사 속에서 오랜 기간 등장하지 않다가 6·25 한국전쟁 때 ‘포항 형산강 방어전투’ 당시 구국의 요새로 등장하며 다시 한 번 현대사에 전면으로 등장한다.

약사여래불.
약사여래불.

◆ 왕룡사에서 내려다 본 형산강 뷰 백미

형산에는 경순왕 조에 등장하는 형산, 제산 전설 외 크게 주목할 만한 역사적 사실이 없고, 정상에 있는 왕룡사가 거의 유일한 사적이다. 창건 연대나 창립 인물에 대한 상세한 기록도 없어 역사성, 기록성 면에서도 주목받지 못하는 곳이다.

그러나 사찰 구석구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뜻밖의 재미있는 사실들과 만나게 된다. 먼저 여행객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절 동쪽에 위치한 약사여래불이다. 낮은 가부좌로 동해를 응시하는 부처의 눈길에서 ‘병에서 중생을 구제’하려는 인자함이 느껴진다. 부처를 향해 두 손을 모은 불자들의 모습에서 치유를 향한 강한 소망이 묻어난다.

약사여래불 앞으로 작은 광장이 펼쳐지는 데 이곳이 형산강을 조망하는 최고의 포인트다. 연일대교, 형산대교에 이어 포스코의 힘찬 굴뚝과 영일만 앞바다까지 파노라마로 펼쳐져 포항의 경관과 정체성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곳이다.

정상에서 만난 한 시민은 “왕룡사는 형산강의 전체 조망을 드론 뷰 수준으로 관람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며 “오션 뷰에 익숙한 포항 시민들이 다른 감흥을 찾아서 오기에 좋은 장소”라고 말한다.

김유신장군과 무열왕 목조상.
김유신장군과 무열왕 목조상.

◆ 태종 무열왕, 김유신 민간 신앙의 대상으로

무량수전 옆에 있는 용왕전도 반드시 들러야 할 코스. 이곳엔 아주 특이한 유물이 전해진다. 바로 태종 무열왕과 김유신 장군의 목조상이다. 기록에 의하면 일제강점기부터 전해진다고 하는데 정확한 기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우선 두 인물을 모신 곳이 ‘용왕전’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보통 역사 속 인물들은 동상이나 초상화, 영정(影幀) 정도로 예우하는데 ‘전’(展)에 따로 모셨다는 것은 이 분들이 위인(偉人)을 넘어 반신(半神)수준의 숭배대상이 됐다는 것을 뜻한다. 중국에서 관우(關羽)가, 한국에서도 최영 장군이나 곽재우 장군 등이 사당에 봉양되면서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되고 있는 현상과 유사하다. 일설에는 이 목조상이 경순왕과 마의태자라는 설이 있는데 이는 형산 일대를 신라 부흥운동과 연결해서 해석하는 시각이다.

미학적 측면에서 이 목상들의 수준은 볼품이 없다. 그러나 삼국통일 위업을 달성한 두 영웅에게 향했던 민초들이 존경심은 조각의 완성도를 넘어 시공을 초월해 이어지고 있다.

사찰의 가람 배치에서 재미있는 것이 산신각의 위치다. 아이 출산을 점지해준다는 산신각은 보통 절의 가장 외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대웅전이라는 훌륭한 기도처가 있고 그곳에는 전지전능한 석가모니가 있는데 왜 신도들은 외진 골방으로 찾아갈까.

기도자에 초점을 맞춰보면 의문은 금방 풀린다. 이곳 출입자들은 대부분 아기를 희망하는 여성들이다. 여인들은 사찰 맨구석에서 신과 1대1로 만나 ‘직거래’로 소원을 이루려한다. 석가모니에 드리던 기도가 총알이 흩어지는 ‘산탄’(散彈) 이라면, 산신각은 단발로 목표물을 명중시키는 로켓으로써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왕룡사 산령각 모습.
왕룡사 산령각 모습.

북당마을-왕룡사-부조정-소형산 코스 인기

형산을 오르는 루트는 다양하다. 강동면 북당마을에서 정상까지는 시멘트 포장이 돼 있어 자동차로 쉽게 접근할 수 있다. 10~30도를 오르내리는 경사도 때문에 익스트림을 즐기려는 자전거 동호인들도 자주 찾는다. 이분들에게 형산은 자전거 라이딩 외 왕룡사 참배나 형산강 뷰 관람이 목적이다.

산행이 목적인 등산 마니아들에게도 형산은 다양한 코스를 열어놓고 있다. 정국사 입구-전망대-왕룡사-약사여래불을 돌아보는 2시간 코스가 일반적인 코스지만, 3~4km 코스에 성이 차지않는 마니아들은 왕룡사에서 반경을 넓혀 맞은 편의 부조정터-소형산으로 연장하기도 한다. 단 임도에서 진입로가 불분명하고, 등산로 표지판이 준비가 덜 되어 초행길, 초보 산행자들은 상당한 주의를 요한다.

포항 사람들에게 바다는 늘 접하고 부딪히는 일상이다. 생업을 일궈 온 터전이고 삶의 수단으로써 의미를 갖는다. 늘 가까이에 있고,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기에 일찍부터 도시 발전과 문명을 일구는 기반이 되었다.

포항의 문명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있다. 바로 형산강이다. 고대부터 중국 한군현은 물론, 일본과 통하던 곳도 이곳이었다. 넉넉한 수량은 연일, 오천 뜰의 넉넉한 젖줄이 됐고, 수천년 동안 시민들의 생활용수, 상수원이 됐다.

오션 뷰에 잠시 식상했던 독자라면, 다른 자극을 찾고 있던 시민이라면 주말쯤 한번 형산으로 오르길 추천한다.

옅은 신록을 배경으로 강물이 은빛으로 일렁이고, 정극후(鄭克後·1577∼1658)가 ‘동방의 적벽’이라고 칭찬했던 형산강뷰가 발아래 펼쳐질 것이다.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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