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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드러나지 않은 포항의 다양한 이야기 더욱 발굴되길”

예술가는 돈을 이야기하고 부자는 예술을 이야기한다는 말이 있다. 진정한 예술은 돈을 좇지 않는다지만 가난한 예술가들은 돈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1980년대부터 포항에서 극단을 이끌어 온 이한엽 대표는 인터뷰 도중 여러 차례 예술이 돈을 좇는 세태를 비판했다. 가난이 숙명인 연극판. 그것도 변방의 민간 극단은 걸핏하면 물이 새고, 곰팡내 나는 지하 소극장을 전전해야 했다. 낮에는 직장인으로 밤에는 연극인으로 살아가며 사비를 털어 넣어도 적자를 면치 못한다.그러면서도 돈에 대한 꼬장꼬장한 태도의 근저에는 하고 싶은 연극을 마음대로 하겠다는 단단한 신념이 있었다.포항연극협회의 마카다연극축전의 공연작 ‘그대는 봄’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던 포항아트센터(불종로 73 석영빌딩 5층)에서 ‘극단 가인(佳人)’의 이한엽 대표를 만났다. -포항 시민들 가운데 포항아트센터를 아는 이가 얼마나 될지 싶은데도 평일 저녁의 공연이 만석이었다.△연극 ‘그대는 봄’은 한 시골 마을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온 70대 세 할머니의 이야기이다. 홀로 계신 어르신들의 외로운 삶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유쾌한 연기로 풀어내니 관객들의 반응이 좋았다. 두세 차례 관람 온 관객도 있고 지인을 이끌고 다시 찾아 준 관객도 있었다. 관람석이 80석 규모인데 엿새 동안 300∼400명의 관객이 온 것 같다.-포항연극협회의 마카다연극축전으로 열렸는데 어떤 행사인가.△‘마카’는 경상도 말로 ‘모두’라는 의미이다. 마카다연극축전은 말 그대로 모두 다 함께하는 연극 잔치라는 뜻이다. 포항연극협회원들이 소속 극단을 초월해 함께 만들어 가는 마카다연극축전은 올해로 11회째다. 연극은 다른 예술 장르와 다르게 극단 단위로 움직이니 함께 무대에 설 기회가 없다. 1년에 한 작품만이라도 해보자는 취지로 기획되었다.-포항에서 활동하는 극단은 얼마나 되나.△활동이 뜸한 극단도 있어 명확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포항시립극단과 극단 가인, 포스코 내 예맥, 은하, 라인극회 등이 있다. 확실한 것은 민간 극단이 점점 줄고 있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돈이 안 되어서다. 우리 극단에서도 서울로 간 젊은 배우들이 꽤 되는데 빛을 발하기는 어렵더라. 그래서 젊은 친구들에게 연극을 하려거든 일을 가지라고 권한다. 청춘을 연극에 받치지 말라고 말한다. 내가 아는 한 연극은 빵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요즘은 지원도 다양해지지 않았나.△관(官)은 배부르게 지원해 주지 않는다. 지원을 구걸하러 다니다가 상처도 받는다. 지원하되 간섭을 말아야 하는데 현실은 안 그렇다. 물론 단돈 얼마라도 가난한 극단에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지원의 대가로 올라야 할 무대가 많은데, 연극은 준비 기간이 길고 인원이 많아서 뚝딱 안 된다. 배우들이 행사장에 나가서 달고나를 만든 적도 있다.- 시간을 좀 더 앞으로 되돌려서 연극에 입문하게 된 시절의 이야기를 해달라.△강화도가 고향이다. 중학교 3학년 때 입시에 휘둘리는 현실이 싫어 특차 전형으로 포항의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첫 무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학교 예술제였다. 4, 50명이 모여 6개월 정도 연습했다. 방학에 고향도 안 가고 연습에 매진했는데 끝나니 허무하더라. 공연을 마치고 기숙사까지 걸으면서 우거진 나무 사이로 하늘을 보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 나중에는 연극을 질리도록 해봐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그 경험이 내 인생을 바꾸는 촉매가 됐다. 이후 포스코 사내 연극동호회인 ‘예맥’에서 활동하다가 1988년에 극단을 창단했다.-극단 가인의 탄생인가.△당시 극단명은 ‘늘푸른공간’이었다. 영흥초등학교 건너에 ‘연극무대 늘푸른공간’이 첫 소극장이었다. 창고로 쓰던 누추한 무허가 건물이었다. 단원들이 피 끓는 동지애로 천3백여만 원을 모아 보증금을 마련하고 부족한 돈은 몸으로 때웠다. 배우들이 등짐을 져서 만든 소극장이다. 이후로는 환호동과 상도동의 지하 공간을 전전했다. ‘극단 가인’으로 이름을 바꾼 건 상도동 시절이다. 한국전력공사 대구본부 포항지사 건너 건물 지하로 들어가면서 극단 이름을 ‘가인’으로 소극장 이름은 ‘삼통아트홀’로 바꿨다.-‘삼통’은 어떤 의미인가.△ 중학생 때부터 사진을 했는데, 카메라를 둘러메고 기계나 신광 등지로 돌아다니다 어르신에게 길을 물으면 “이녁은 어디서 왔능교?”라고 되물었다. ‘이녁’은 젊은 친구를 이른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그러면서 “삼통 가라”고 알려줬는데 “곧장 가라”는 의미였다. 극장 이름에 곧장 가자는 의미를 담았다.세상일이 얄궂은 것이, 그즈음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워낙 이슈가 커서 그랬는지, 개관 기념 공연 팸플릿에 ‘삼통아트홀’이 인쇄소의 실수로 ‘삼풍아트홀’로 찍혀 나왔다. 삼통아트홀에서 공연 준비를 하던 중에 IMF가 왔다. 극장은 물론 집에도 빨간딱지가 붙었다. 삼풍이 부정을 태웠나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망했다.-어떻게 다시 일어났나.△5년 만에 다시 모였는데 한 명도 흩어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2004년 재기작으로 조창인 원작의 ‘가시물고기’를 연출하면서 연기도 했다. 오랜만에 무대에 오르니 눈물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더라. 배역에 심취한 이유도 있겠지만 그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면서 울컥해서가 아닐까.-포항아트센터는 육거리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긴 것으로 안다.△육거리 인근에서 10여 년 있었다. 처음에는 연극협회 전용 소극장으로 시작했다가 ‘극단 형영’과 ‘극단 가인’이 공동 운영했다. 그러다 7년 전에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우리 소극장은 물과 얼마나 얽히는지 걸핏하면 옥상에서 물이 새고 물난리를 겪었다.-‘극단 가인’의 단원은 몇 명인가.△20여 명인데 각자 밥벌이를 해야 하니 상시 가동은 불가능하다. 배우가 부족하니 하고 싶은 작품을 마음껏 못 한다. ‘그대는 봄’도 포항시립극단 배우들이 흔쾌히 승낙해 줘서 수월했다. 출연 배우 중 한 명이 아내인 김용화 배우이다. 극단 가인에서 연극을 시작해서 20여 년 전에 시립극단으로 갔다. 당시 결혼 전이었는데, 못 먹여 살려주겠으니 월급 받으면서 연극을 하라고 보내줬다. -부부연극인으로 사는 것은 어떤가.△아직은 낯 간지러워 안 되지만 예순이 넘으면 ‘늙은 부부 이야기’를 함께 연기하고 싶다. 7살 차이인 아내는 고교 3학년 때 극단에 들어왔다. 그땐 나와 눈도 못 마주치던 소녀가 아내가 된 것이다. 나는 예전 생각에 군림하려 들고 아내는 동등한 부부라고 주장하며 충돌이 잦았다. 아내가 시립극단으로 간 뒤로는 공립극단의 역할에 관한 견해차로 치열하게 부딪혔다. 작품은 뭔가 꼬집어줘야 하는데 관(官)에 편승하는 것처럼 보였다. 예술인은 예술이란 이름으로 양심을 표현하는 것인데 돈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싫었다.-지역에서 민간 극단으로 활동하면서 어려움이 많았겠다.△1980년대 지방에는 민간 소극장이 거의 없었다. 우리 소극장이 경북에서는 제1호이다. 단원들이 등짐을 져가며 만들었는데 살아남아야 하잖아.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것이 공연 유료화이다. 입장료 2천 원을 받고 한 명을 앉혀놓더라도 공연했다. 단 한 명도 없어 공연을 못 한 적도 있다. 그렇지만 연극은 공짜라는 인식을 바꿔야 했다. 문화예술 향유를 위해선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런 풍토를 만들지 않으면 문화예술의 씨가 마른다. 단돈 천 원이라도 내고 오는 관객과 초대권 손님은 인식이 다르다.-지역 소재를 무대화하는 작업에도 관심이 많다.△누구나 우리 주위의 이야기에 솔깃하다. 철강 도시라는 육중함에 짓눌려 포항의 다양한 이야기가 드러나지 않아 아쉽다. 지난 2017년에는 포항의 중심가를 흐르는 칠성천을 소재로 한 연극 ‘칠성천 오동낭구’를 선보였다. 칠성천변에서 일본군에 짓밟힌 어린 위안부의 한 맺힌 절규를 그렸다. 그리고 작년에 포항지역 스토리텔링 창작극 ‘효자동 이야기-효자칠성(孝子七星)’을 공연했다. 칠성강 건너 과부 어머니가 홀아비 만나러 가는 길에 아들이 다리를 놓아주는 이야기이다. 오는 12월 초는 학도병을 소재로 한 ‘탑산의 삽화(揷話)’를 준비 중이다. 탑산에는 한국전쟁 당시 포항여중 전투에서 격렬하게 방어전을 치른 학도병 희생자를 기리는 충혼탑과 기념관이 있다. 포항의 이야기들이 더 발굴되길 바란다. 앞으로도 지역의 이야기를 무대화해서 시민들에게 돌려주는 작업을 계속할 계획이다.-앞으로 무대에 올리고 싶은 작품은.△개인적으로는 사투리 연극제를 해보고 싶다. 동일한 작품을 각 지역 사투리로 번안해서 공연하거나, 전국 사투리로 만든 작품을 한군데 모아서 올리는 방식이다. 지역 언어는 한번 소멸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배우들에게 몸에 밴 사투리는 극복의 대상이지만 사투리가 소멸 위기에 처한 지금은 달리 생각해 볼 수 있다. 지역민의 정서가 녹아있는 사투리의 문화적 가치에 관심이 크다.이한엽 대표는배우이자 연출가다. 1988년 ‘극단 가인’을 창단하고 경북 제1호 소극장을 만들었다. 한국연극협회 포항지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극단 가인’ 대표이자 포항아트센터 대표이다. 지금까지 연극 ‘늙은 부부 이야기’, ‘옥수동에 서면 압구정동이 보인다’, ‘마요네즈’,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 ‘황소 지붕 위로 올리기’, ‘아버지의 가수’, ‘영일만 친구’, ‘칠성천 오동낭구’, ‘효자동 이야기-효자칠성(孝子七星)’ 등을 무대에 올렸다./배은정 작가

2023-11-06

철강산업 ‘기술 인프라 구축’ 학습·경험 교류 발판으로

비행기 7시간, 기차 3시간. 총 10시간여의 머나먼 여정이었다. 인도네시아 산업부 산업인력개발청 청장 일행은 그렇게 철의 땅에 발을 들였다. 가을이 없는 나라의 계절을 지낸 이들은 처음보는 한국의 단풍에 쌓였던 피로를 단번에 잊었다.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짧았던 인도네시아 취재 기간에 만났던 크리카타루 포스코 직원인 나디라(Nadhira), 데시(Desi)이다. 두 달 만이었다. 멀리 와줘서 고맙고 잊지 않고 기억해 줘서 또 감사했다.인도네시아 산업부 산업인력개발청(BPSDMI) 청장(차관급) 일행 11명은 철강산업 이해와 철강과정신설을 위한 포스코 기술교육 인프라 견학을 위해 지난달 23~27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았다. 포항에는 24일 포항제철소와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 25일 체인지업그라운드와 인재창조원 포항기술교육센터를 방문했다. ◇ 인도네시아, 포항을 찾다포스코가 인도네시아 국영철강회사 크라카타우스틸과 합작 설립한 크라카타우포스코는 지난 8월 29일(현지시간) 인도네시아 산업부 PIDI 센터에서 인도네시아 산업부 산하 산업인력개발청과 철강산업 인력 육성을 위한 협약서(MOU)를 체결했다. 협약에 따라 인도네시아 산업부와 크라카타우포스코는 내년 7월까지 산업부 산하 기술대학교와 특성화고등학교에 철강산업 전문과정을 신설하기로 했다. 인도네시아 산업부는 인력과 예산, 교육 인프라를 제공하고, 크라카타우포스코는 철강산업 전문과정 강사 교육 및 학생 현장실습을 지원하게 된다.인도네시아 산업부 산하의 기술대학교와 특성화 고등학교에 포스코 기업 문화·한국어 과정 등이 포함된 철강산업전문과정을 신설, 3년간 이론 교육과 현장실습 후 우수 졸업생을 크라카타우 포스코 제철소에 우선 채용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포스코는 우수한 철강산업 인력을 육성해 한국의 포스코 뿐만 아니라 글로벌 포스코 그룹에서 근무하는 비전을 만들어 갈 계획이다.김광무 크라카타우포스코 법인장은 “프로그램을 통해 인도네시아 산업의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를 육성하고, 경험과 기술력을 겸비한 해외 숙련 인력이 한국에 들어와 산업계 기술 인력 공백을 일부 메울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오는 9일에는 크라카타우포스코와 인니 산업부 산하 기술대학 및 특성화고는 ‘철강산업기술과정’ 개설 협력합의서를 체결할 예정이다.포스코와 인도네시아 산업부는 같은 지향점을 갖고 양측간 MOU를 체결한 것이며, 한국의 철강산업과 포스코 제철소 및 기술교육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 포항에 방문하게 됐다. ◇ 기술 교육의 메카,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마스로칸 산업인력개발청장을 비롯해 다디 총괄국장, 반뜬 기술대학 수파르디 교장, 족카르타 특성화고 에닝 교장, 에미 센터장 등 기술 교육 관계자들은 특히 포철공고 교육 과정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이성열 포철공고 교장은 “본교는 1970년 개교해 기계, 금속, 전기, 전자 인력을 양성하고 있다”며 “올해 2월까지 졸업생 1만5천여 명을 배출했고 현재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현재 포스코에는 약 2천명의 졸업생이 재직 중”이라고 포철공고를 소개했다.이어 “마이스터고 지정이후 7년간 평균 취업률 94%, 1인당 평균 국가 기술 자격증 9.3개를 취득하고 있다”며 “인문학적 소양교육, 예체능교육에도 힘써 인성교육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이번 만남을 통해 상호 직업 교육을 이해하고, 인도네시아 철강법인 현장 인력 육성에도 도움이 되기를 기대했다. 이후에도 학생과 교사간의 상호 교류를 통해 직업 교육 이해의 폭을 넓히고, 글로벌 역량을 높이는 등의 발전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전했다.마스로칸 인도네시아 산업인력개발청장은 인사말에서 “이번 방문을 통해 금속 산업 분야에서의 직업 교육 관리와 교육과정 개발, 교육 시설과 기술 인프라 구축에 대한 학습과 경험 교류를 목표로 한다”고 말했다.이어 “인도네시아 산업부 산업인력개발청(BPSDMI)은 크라카타우포스코와 함께 2024년 족자카르타 특성화고에 철강산업기술과정을 개설할 예정”이라며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는 미래 산업의 리더로 성장할 젊은이들을 위한 품질 높은 교육을 제공하는 뛰어난 명성을 갖고 있다. 우리는 포철공고가 고품질 직업 교육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였는지 직접 보고 배우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또한 BPSDMI와 포철공고 간의 강화된 협력의 첫 걸음이 될 것을 희망했다. 그는 “새로운 지식, 경험의 향상, 직업 교육의 최고 사례에 대한 인사이트를 얻고자 하며, 이러한 통찰을 향후 우리 나라의 산업 인력 개발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라며 “포철공고와 미래 협력을 더욱 강화하고자 한다”고 밝혔다.질의 응답 시간에는 전공직무 능력향상, 융복합·글로벌·인성 교육 등에 대한 다양한 질문이 쏟아졌다.이들은 실습실, 방과후 활동실 등 학교 전체를 둘러본 뒤, 많은 것을 배워간다고 입을 모았다.에닝 족자카르타 특성화고 교장(Mrs. Ening)은 “포항제철공고를 방문해 학교 교육과정 및 실습실 현장을 모두 둘러 보았다. 학교가 매우 깨끗하고, 학생들의 활기찬 모습이 좋았다”며 “기술 교육 뿐만 아니라 음악, 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균형잡힌 교육과정을 실행하고 있음을 확인했기에 족자카르타 특성화고에도 꼭 반영하고 싶다”고 말했다.짠드라 산업부 직원(Mr. Chandra)은 “교장 및 모든 교직원과 학생들이 친절하게 맞이하고 설명해 줘서 감사하다”며 “인도네시아 산업부 산하 특성화고와 포항제철공고가 앞으로도 계속 교류할 수 있길 희망한다. 교사와 학생들이 인도네시아를 방문해 인도네시아 특성화고에서 함께 발전방향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고 밝혔다. 마스로칸 인도네시아 산업인력개발청장 “포철공고만의 특별활동 통한 균형 갖춘 인재 양성, 교육과정 모델 삼을 것”마스로칸 인도네시아 산업인력개발청장우수인력·창의성 ‘산업발전 견인’ 공감대기술대학·특성화고 운영 전폭 지원 인식포스코 사업 정책 지원도 아끼지 않을 터인도네시아 산업부 산업인력개발청(BPSDMI)은 다디 산업인력개발청 총괄국장과 실무진, 철강산업기술과정 신설 예정인 학교의 교사들과 함께 철강산업에 대한 이해와 포스코의 기술교육 인프라 현장을 벤치마킹을 하기 위해 지난달 24일 포스코와 포철공고 등을 방문했다.마스로칸 인도네시아 산업인력개발청장(57·사진)과 이날 포철공고 창의관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포스코 방문 소감은.△오전에 포스코 포항제철소 현장, Park 1538 역사관을 모두 방문했다. 철강산업이 국가산업 발전에 기여하는 기반 산업이며, ‘산업의 쌀’ 이라는 점을 확실히 이해했다. 특히, 포스코 ‘자원은 유한, 창의는 무한’ 이라는 슬로건에 감명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산업 및 경제 발전을 위해선 ‘풍부한 자원’ 이 아닌 ‘우수한 인력과 창의성’ 이라는 것에 공감한다. 인도네시아 정부도 이러한 점을 인식하고 향후 미래 인력 양성을 위한 정책과 지원을 강화해야 할것이다.-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 방문 소감은.△학교가 매우 깨끗하고 모든 것이 정비가 잘 되어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교육과정 및 교육실습 자재 등이 매우 잘 갖춰져 있고, 특히 학생들의 기술교육 뿐만 아니라 밴드, 운동 등 특별활동 교육을 통해 균형갖춘 미래 인재를 양성하는 것에 대해 인도네시아가 배울 점 이라고 생각한다.- 인도네시아 산업부 지원 사항은.△철강산업기술과정이 신설되는 ‘반뜬 기술대학’ 과 ‘족자카르타 특성화고’는 모두 산업부 산하(산업부가 직접 예산과 인력을 지원하는 산업부 직할 학교) 학교들이다. 철강산업기술과정에 세부 교육과정 개발, 필요한 교수진 채용, 학생 모집 및 강의 진행이 산업부 산하 기술대학 및 특성화고에서 진행될 예정이며, 두 학교의 운영 예산은 모두 산업부 예산과 인력으로 운영될 예정이다.- 포스코와 앞으로의 관계는.△포스코는 인도네시아에 크라카타우포스코 제철소를 설립해 우수한 품질의 철강제품을 생산해 인도네시아 산업을 강건하게 함과 동시에, 현재 배터리소재 사업, 팜농장 사업 등 다양한 산업에 진출해 인도네시아 산업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산업부는 포스코의 이러한 인도네시아 진출에 매우 감사하며 인도네시아 사업에 인도네시아 산업부가 정책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철강인력양성도 이제 시작하는 만큼 포스코와 협력하여 우수한 철강산업인력 육성을 위해 지속 협력할 것이다.- 포항시와의 교류는.△포스코의 시작이자 기반이 포항시라고 알고 있다. 특히 철강 및 금속산업 뿐만아니라 배터리소재 산업이 포항시에 많다고 들었다. 앞으로 인도네시아와 포항시와의 많은 교류가 있길 기대하며, 인도네시아 산업부도 관심을 갖고 할 수 있는 분야에서 지원토록 하겠다. /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

2023-11-06

지금부터 단풍 절정… ‘컬러풀 대구’ 속살과 만나다

전국이 울긋불긋 물드는 단풍시즌, 대구도 예외가 아니다.대구의 도심과 주변에는 가을의 정취를 흠뻑 느낄수 있는 단풍명소가 의외로 많다. 가족이나 친구, 연인과 함께 나들이 하기 좋은 단풍 비경지를 소개한다. △달성 대표 관광명소 옥연지 송해공원‘명품숲길 선정’ 금동굴로 이어지는 둘레길·백세교 산책로송해선생 이야기 담은 기념관 등 알찬 볼거리 많아 입소문이달 중순까지 열리는 가을 국화 전시회도 놓치지 말아야 옥포읍 기세리에 자리한 옥연지 송해공원은 달성군을 대표하는 관광명소 중 한 곳이다. 송해공원이 달성군 명예군민인 방송인 고(故) 송해 선생의 이름을 딴 장소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송해공원이 있는 옥포읍 기세리는 송해 선생의 아내인 故 석옥이 여사의 고향이기도 하다. 과거 한국전쟁 당시 월남한 송해 선생은 자주 옥연지를 방문해 실향의 아픔을 달랜 것으로 전해진다. 부부의 묘소 역시 송해공원 인근에 마련돼 있다.송해공원의 자랑거리는 다양한 볼거리와 걷기 좋은 산책로다. KBS ‘전국노래자랑‘을 떠올리게 하는 재밌는 조형물, 얼음빙벽 등도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다. 금동굴 등으로 이어지는 둘레길 데크와 백세교 등은 산책 명소로 전국에 입소문이 나 있다. 밤에는 화려한 조명분수 등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특히 가을에는 흐드러진 낙엽에 반한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달성군은 이곳에서 11월 중순까지 국화 전시회를 개최한다. 달성군 양묘장에서 공들여 생산한 대형 국화 작품과 포토존은 빼놓을 수 없는 포인트다.송해 선생의 이야기를 담은 송해기념관 선비체험관도 알찬 볼거리로 가득 차 있다. 송해 선생의 유품과 사진자료 등에서 그의 생애, 달성군과의 인연, 전국노래자랑 등 업적을 알 수 있다. 송해카페에서 다양한 음료도 맛볼 수 있는데 송해 선생의 캐릭터가 담긴 커피잔 등이 독특함을 더한다. 옥상에서 한눈에 내려다보는 탁 트인 송해공원의 풍경은 덤이다. 송해공원은 이 같은 풍성한 콘텐츠 덕분에 지난해만 100만명이 방문할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또 2018년 제21회 세종문화대상 올해의 명소, 2023년 산림청 걷기 좋은 명품숲길에 선정되며 그 명성을 인정받았다.달성군은 더 나은 송해공원을 만들기 위해 매년 약 3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시설 곳곳을 관리하고 있다. 향후에도 교통 접근성 개선, 계절별 꽃 식재, 테마가 있는 조형물 조성 등을 통해 더욱 많은 사람이 찾는 장소로 거듭날 전망이다. ‘달성 둘레길 걷기’ 등 송해공원의 뛰어난 시설물과 산책로를 활용한 행사도 꾸준히 개최할 예정이다. △ 볼 곳 많은 대구 수성구라이온즈 파크~진밭골까지 이어지는 생각담는 길 ‘내관지’다양한 오브제 눈길… ‘팔현생태공원’선 다양한 식물·꽃 감상수성못~들안길 투어버스 즐기다 다양한 먹거리로 입호강도 수성구에는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가을 명소들이 가득하다.우선 내관지가 소개할 만하다. 내관지길은 라이온즈 파크와 스타디움을 거쳐 내관지, 청계사, 진밭골까지 이어지는 생각을 담는길 5코스이다. 도심 가까이에 위치해 인근 주민들이 주로 방문하는 산책로로 경관이 수려하고 환경이 깨끗해 자연과의 깊은 교감이 가능한 코스로내관지의 넓은 수면과 인접한 산들이 조화를 이뤄 고즈넉한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비교적 많이 알려지지 않은 보물같은 장소이다.대흥동 유아숲체험원 일원에서 시작돼 내관지에 이르는 데크로드는 기존 왕벚나무 사이를 걸어가는 숲길의 느낌을 최대한 살려내었고, 내관지 내부에는 수상데크를 신설하여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다 가까이에서 경험할 수 있게 한다. 특히 차별화된 공간조성을 위해 전문가의 참여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신창훈 수성구 총괄건축가, 독창적인 작품활동으로 인정받고 있는 조진만 건축가, 대경솟대작가협회 등 여러 전문가와 협업해 관리용으로만 사용되던 취수탑과 연결교량을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품격있는 공간으로 변화시켰다.내관지길에는 ‘생각을 담는 길’의 독특한 테마를 더욱 부각할 수 있는 다양한 오브제(예술적 대상물)들도 설치돼 있다. 오르막 구간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인생문구가 씌여진 통나무의자,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솟대, 대나무터널 등 이야기가 있는 산책로가 되도록 조성했다.두번째는 팔현생태공원이다.이곳은 가을에 자연과 함께 휴식을 취하며 아름다운 식물과 꽃을 감상할 수 있어 많은 이들이 찾아온다. 생각을담는길 1코스 금호강길의 시작 지점이자 대구둘레길 16코스 팔현안심길에 위치해 있어, 금호강을 따라 산책하며 자연 생태를 느낄 수 있다.팔현생태공원에는 산책로와 초화원, 데크, 쉼터, 철새탐조대가 조성돼 있다. 가을에는 국화, 댑싸리 등 계절을 대표하는 식물들이 포토존을 만든다. 팔현생태공원 인근에는 수성패밀리파크와 고모역이 있어 함께 방문하기 좋으며, 금호강자전거길과 곳곳에 운동기구들이 잘 조성돼 있다.수성구라는 지역에서는 뺄 수 없는 곳이 수성못이다. 수성못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하는 국내 대표 관광지 100곳에 2차례나 선정될 정도로 대구를 대표하는 곳이다. 자연을 품은 도심 속 호수공원으로, 지하철 3호선 수성못역 등 대중교통을 통해 쉽게 방문할 수 있다. 수성못 카페거리, 들안길 먹거리타운 등 먹을거리도 다양해 연인·가족단위의 방문이 많다.올 4월 수성구는 수성못과 들안길 먹거리 타운을 스마트관광도시 사업지로 선정하고 관광 서비스 플랫폼인 대구 트립 앱도 구축했다. 수성못과 들안길을 잇는 수성투어버스도 운영 중이다. 25인승을 개조한 오픈 버스가 오전11시부터 오후 7시 40분까지 한 시간 간격으로 대구도시철도 3호선 수성못역∼수성못∼아르떼 수성랜드∼들안길 먹거리타운∼황금역 등 10개의 정거장을 오간다.15년만에 수성못 음악분수 시설을 새로 개선해 수성못의 밤을 더욱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또 가을밤 보랏빛 꽃으로 수놓는 맥문동 군락지를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버스킹 공연 등 낮부터 밤까지 다채로운 즐길 거리로 관광객의 발길을 모으고 있다. 수성못은 수성빛예술제, 수성못 페스티벌, 뮤직수제맥주축제, 비치발리볼 월드투어 등 주요 축제가 사계절 열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 중 수성구 대표 겨울축제인 주민과 예술가가 함께 빛작품을 만들어 전시하고, 밤하늘을 무대로 드론 공연을 펼치는 수성빛예술제가 예정돼 있다. △ 대구는 역시 팔공산평년보다 꽤 늦어진 절정 시기로 이제야 ‘만산홍엽’ 즐겨라이딩 성지 ‘한티재 고갯길’·케이블카로 가는 ‘소원바위’‘낙엽천국’ 팔공로·순환도로길은 드라이브 코스로 엄지척대구에서 팔공산을 빼고는 가을 단풍을 얘기할 수 없다. 특히 가을철에 팔공산은 더욱 웅장해진다. 대구의 진산인 팔공산(1192m)은 가을철에 단풍을 입어 울긋불긋하고 웅장해진 숲의 기세를 선보인다.기상전문업체 웨더아이에 따르면 올가을 첫 단풍과 절정기가 평년보다 느려졌다. 팔공산은 지난달 20일부터 단풍이 시작됐고, 현재 산 전체가 붉게 물들어 있다.‘한티재’ 고갯길에 가보는 것도 좋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든 멋진 가을 길이다. 자전거 마니아들 가을 여행길로 팔공산은 특히 인기다. 케이블카를 타고 팔공산 ‘소원바위’에 들러볼 수도 있다. “지극(至極)하면 이루어진다”는 소원바위에는 시민이 간절한 마음을 담아 동전을 따닥따닥 붙여 놓았다.가을철 낙엽이 아름다운 대표적인 구간은 팔공로(공산댐∼도학교)와 팔공산 순환도로(팔공CC 삼거리∼파계사 삼거리)이며, 이곳은 은행나무와 단풍나무가 만드는 노랗고 붉은색 물결을 드라이브하면서 마음껏 즐길 수 있다.팔공산에서 단풍을 구경하는 길은 파군재에서 출발하여 파계사 삼거리를 거친 다음, 동화사 삼거리로 내려와 다시 파군재로 돌아오는 여정이 ‘최고’로 추천할 만하다. 파계사 삼거리에서 우회전을 해 동화사 방향으로 나아간다. 나무들이 크기는 작아져도 그 대신 아담하고 아기자기해 또 다른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게 해준다.아울러 부인사, 옻골마을, 불로고분군 등도 가을 붉은 물결을 선보인다. 부인사는 몽고군이 쳐들어와 초조 대장경을 불태운 장소라는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아름드리 고목들이 많이 남아 있어 단풍 나들이 장소로 아름답다. 아울러 옻골마을은 주렁주렁 대봉감이 빨갛게 익어있고, 뒷산 단풍이 울긋불긋 물들어있다. 이곳에서는 고택도 즐길 수 있고, 다양한 가을 프로그램도 진행 중이다. 올록볼록 쏟아 있는 모양의 고대국가 무덤을 기억하는 불로고분군 역시 색다른 가을의 전망을 느낄 수 있다. /김재욱기자 kimjw@kbmaeil.com

2023-11-05

‘맛·흥·정’ 가득 문경 명실상부 ‘축제도시’

문경의 가을 황금들판이 축제로 영글고 있다. 문경을 대표하는 특산품을 주제로 다양한 축제 한마당이 펼쳐지며 전국 관광객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문경사과축제가 지난달 14일부터 16일 동안, 문경약돌한우축제가 지난달 7일부터 3일 동안 연이어 개최됐다. 앞서 지난 9월 문경오미자축제, 5월 문경찻사발축제를 성공리에 마무리하며 전국 으뜸 축제의 고장으로 명성을 확고하게 다져가고 있다.신현국 문경시장은 “전국에서 문경을 찾아주시는 많은 관광객들이 문경에서 열리는 축제장에서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 백설공주가 사랑한 문경사과문경시 대표 가을 축제인 2023 문경사과축제가 지난달 10월 14일부터 29일까지 16일간 문경새재도립공원 일원에서 ‘백설공주가 사랑한 문경사과’의 주제로 성황리에 개최됐다.주요 축제 내용으로는 △문경사과 판매장 운영 △문경사과 전시 홍보관 운영 △사과 따기 체험 △애플데이 행사 △문경사과 나눔 행사 △문경사과 모자 만들기 △문경사과 인생네컷 △사과 럭키박스 △사과 껍질 길게 깎기 등 가족과 연인들이 함께 즐기고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로 구성됐다.문경시에 따르면 이번 축제 동안 관람객 46만명이 축제장을 방문하고, 170t을 판매해 21억의 매출을 올린 것으로 집계됐다. 이번 행사 개막식에는 이찬원, 정동원, 영기, 한강 인기 트로트 가수의 공연으로 눈과 귀를 즐겁게 하며 축제의 서막을 알렸고 오프라인 사과판매부스와 온라인 사과 판매부스를 병행해 방문객의 구매 선택 폭을 넓혔으며, 문경사과 홍보관을 설치해 문경사과만의 차별화된 장점을 알렸다.□ 함께먹자 약돌한우제12회 문경약돌한우축제는 ‘함께가자 yes문경, 함께먹자 약돌한우!’라는 주제로 10월 7일부터 10월 9일까지 3일간 문경새재 제1주차장에서 개최됐다.축제는 약돌한우 할인판매, 복고체험 및 로데오, 약돌한우 시식프로그램 등으로 구성됐다. 문경시에서는 약돌한우축제의 개막에 앞선 지난 9월 21일 서울 중구청 광장에서 약돌한우축제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한 홍보 부스를 설치해 축제 홍보를 진행했다. 올해 약돌한우 축제는 그동안 아프리카돼지열병, 코로나 19 등 각종 악재에 밀려 규모를 축소하거나 소고기 판매부스만 운영하는 등 명맥만 유지하다가 2019년 개최 이후 4년만에 다시 열렸다.약돌한우축제에는 연인원 10만명이 행사장을 찾고, 7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특히 1천명이 동시에 이용가능한 구이터에서는 시세보다 20~33% 가량 저렴하게 약돌한우를 즐길 수 있도록 준비했고, 가족 단위의 관람객들도 즐겁게 즐길 수 있는 복고를 주제로 한 이색적인 체험 프로그램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 다섯가지 맛의 비밀 문경오미자2023 문경오미자축제가 지난 9월 15일부터 17일까지 3일간, 문경시 동로면 적성리 금천둔치 일원에서 ‘다섯가지 맛의 비밀, 문경오미자!’라는 주제로 열렸다. 올해로 19회를 맞은 문경오미자축제는 문경시의 4대 축제 중 유일하게 오미자의 주생산지인 동로면에서 개최됐다. 동로면은 올해 7월 집중호우로 인한 피해가 컸음에도 유실된 식생 블록을 교체해 금천 둔치를 정비하고, 원활하고 안전한 통행을 위해 철제계단을 설치했다. 축제 방문객을 위한 주차장을 추가로 정비하는 등 성공적인 축제 개최에 있어 철저한 준비를 기울였다. 축제에는 생오미자, 건오미자, 오미자당절임을 시중가 대비 최대 20% 할인된 금액으로 판매했고, 축제 기간 내내 빗줄기가 이어졌지만, 축제 3일간 5만여명의 관광객이 방문, 5억원(42t)을 판매고를 올리며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축제장에서는 특히, ‘백두대간 송어축제’도 함께해 더욱 풍성한 볼거리로 꾸며졌다. 송어잡기 체험의 경우 300여명이 몰려 참여인원을 제한할 정도로 인기 얻었다. 직접 잡은 송어를 바로 손질하여 송어회로 맛볼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여 좋은 호응을 이끌어냈다. 송어의 대중화 및 다양한 송어요리 개발을 위해 개최한 송어요리 경진대회 수상작 레시피는 관내 송어 판매점에 무료로 제공하여 송어 판매점의 매출 향상 및 송어 산업 성장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송어축제는 최근 일본이 후쿠시마 원전 처리수 방류를 시작함에 따라 해양수산물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신이 깊어져 자연스럽게 내수면 수산물의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기획됐으며, 성공적인 축제의 마무리로 문경 송어의 위상을 널리 알렸다.□ 찻사발에 담긴 천년의 불꽃문체부 선정 명예문화관광축제 ‘문경찻사발축제’가 지난 4월 29일 화려한 개막축하공연을 시작으로 5월 7일까지 총 9일간 문경새재 오픈세트장에서 성공리에 개최됐다.축제에 앞서 서울 청계광장에서 수도권 관광객 유치를 위한 현장 홍보를 시작으로 부산 벡스코 ‘제3회 대한민국 대표 축제 박람회’에 참여해 대중 선호도 부문 우수상을 수상하는 등 발로 뛰는 현장 홍보를 통해 관광객을 이끌었다.이번 축제는 9일 동안 24만여명의 관람객이 축제장을 방문하고, 방문객의 소비 지출액을 바탕으로 산출한 경제적 효과가 137억여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또한, 축제기간 동안 축제장 입장료와 주차요금, 전동차 운행을 전면 무료화로 관람객의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특히, 올해의 축제는 ‘전통’과 ‘실용’을 동시에 갖춘 문경 찻사발을 만나볼 수 있었으며, 생활자기 경매는 출품된 도자기가 모두 판매되는 기염을 토했다.문경찻사발축제의 주요 프로그램으로는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도자기 빚기 체험, 찻사발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찻사발 그림그리기’, 더위를 날릴 수 있는 페달보트장과 풀장 속 숨어있는 황금 찻사발을 찾는 ‘황금찻사발을 찾아라’등이 준비되어 있어 가족 단위 관광객의 인기를 끌었다.문경/강남진기자 75kangnj@kbmaeil.com

2023-11-02

“ 안동의 가을 속으로 단풍마중 떠나요”

발길 닿는 곳곳 오색빛깔이 사뿐히 내려앉은 가을이다. 낙동강변의 유려(流麗)한 물길 옆으로 크고 작은 산 능선에 물든 알록달록 단풍 길과 너른 황금들판 사이의 오랜 가옥과 옛길이 이룬 고즈넉한 안동의 가을이 여행객들의 발길을 사로잡고 있다. 가을 정취를 물씬 풍기는 안동 단풍길 따라 가을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내는 ‘낙강물길공원’은행나무와 메타세쿼이아 등이 주를 이룬 안동댐 수력발전소 입구는 가을이면 울긋불긋 색깔의 향연을 펼친다. 특히 발전소 입구 좌측에 자리한 낙강물길공원(구 안동폭포공원)은 초록의 수련이 짙게 깔린 인공연못 위로 붉게 물든 단풍나무가 드리워진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내, 연못의 징검다리는 물론 나무 아래 곳곳의 벤치가 여행객들로부터 사랑받는 포토존이 되고 있다. 여기에 안동댐까지 에두른 산책로와 월영공원까지 이어지는 수변데크가 있어 평상시 산책코스로도 안성맞춤이다. 수력 발전소 입구를 지나 직진하면 월영교는 물론 안동시가지까지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 안동루가 나온다. 안동루에 올라 내려다보면 왼편의 샛노란 은행나무 길과 오른편의 새빨간 단풍나무 길이 마치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 가을 감성으로 가득해진다. 2. 옐로우 카펫 따라 거니는 월영공원국내 최장 목책교로 안동호를 가로지르는 월영교의 월영공원 은행나무 길은 짙은 가을을 만끽하기에 최고의 장소다. 단풍이 드는 절정에 이르면 파란 하늘에 걸린 황금빛 오로라가 일렁이는 가을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강변을 따라 백여 미터가 넘게 조성된 은행나무 길은 샛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의 단풍잎들이 월영공원 길 위로 소복이 내려앉을 때는 그야말로 장관이다. 월영공원은 은행나무 길 뿐만 아니라 울긋불긋 소소한 단풍나무와 물안개 낀 월영교의 몽환적인 분위기가 함께해 매년 이맘때 즘 사진작가들로부터 사랑받는 곳이기도 하다. 해질녘 노을 아래 물든 가을의 낭만을 찾는다면 월영공원의 은행나무 길을 추천한다. 3. 가을 단풍 물들어가는 숲길로 ‘안동호반나들이길’안동댐 보조호숫가를 따라 도는 호반나들이 길은 호수 속에 반영된 단풍과 고요한 숲 내음으로 마음의 안식을 찾을 수 있는 곳이다. 대한민국 국토경관디자인대전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한 이력만큼 누구나 걷고 싶은 수변문화공간으로 안동 인근지역에서도 많은 여행객들이 찾는 장소 중 하나다. 특히 숲속 길에서 바라보는 월영교의 자태는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 신비감을 자아내 월영교와 짝을 이룬 관광코스로 사랑받고 있다. 4. 안동호를 품에 안은 ‘안동민속촌’안동호가 내려다보이는 성곡동의 안동민속촌은 또 하나의 작은 안동이다. 안동댐으로 수몰된 민속 문화재가 한자리에 모여 있어 그 의미로도 남다르지만 안동호의 풍광을 안고 에두른 8만여 그루의 나무가 안동민속촌의 가을을 붉게 물들여 지나는 발길을 저절로 멈추게 한다. 5. 가을 물길 속으로 들어가는 ‘선성수상길’물길 속으로 들어가는 듯, 그림 같은 경치를 벗 삼아 산책할 수 있는 안동 선성수상길은 가을이 되면 산악인들로부터 사랑받는 가성비 높은 등산코스로 사랑받고 있다. 특히 호수와 산길을 연계한 부교는 수위변동에 따라 유동적으로 움직여 안동호 위를 걷는 재미를 더한다. 9구간의 안동선비순례길 중 제1코스인 선성수상길은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도산방면에 있어 드라이브 코스로도 제격이며 선착장은 물론 선비순례길 마다 자리한 문화재를 만나는 유익한 즐거움도 더할 수 있다. 6. 천년사찰 세계유산 ‘봉정사’천년사찰인 세계유산 봉정사는 늦가을 정취가 만연할 때 고즈넉함이 더욱 깊어지는 곳이다.봉정사를 에두른 비스듬히 살아온 고목들은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축물인 봉정사 극락전의 품위에 걸맞게 고혹적인 붉은 단풍으로 자태를 뽐낸다. 특히 붉게 물든 산 아래 아침 안개가 드리운 봉정사의 새벽녘은 봉황이 곧 날아들 듯 그 유래만큼이나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7. 퇴계와 나란히 걷는 ‘도산서원’가을의 도선서원은, 진입로의 진 붉은 빛깔의 단풍나무는 물론 도산서당과 전교당에도 울긋불긋 단풍이 들어 아름다운 서원의 곡선미와 함께 더욱 화려해진다. 시사단을 마주하고 앉아 나지막이 내려다보이는 풍광은 퇴계의 사색을 잠시나마 벗하며 바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힐링의 시간이다. 8. 하회마을의 가을세계유산 하회마을에 가을이 오면 제방을 따라 심긴 벚나무와 전통가옥, 그리고 집안에 심어진 감나무 등이 단풍에 물들어 각각의 색깔을 뿜어내며 한 폭의 풍경화를 연출한다. 마을 뒤 황금빛으로 물든 들판은 더욱 평화롭고 고즈넉한 목가적 분위기로 잔잔한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곳이다. 9. 갑시다, 나랑. 나랑 같이 ‘만휴정’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에 자리한 만휴정은 조선 중기 문신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1431~1517)이 말년에 독서와 사색을 즐겨하던 곳이다. 가파른 기암에 흐르는 송암폭포 곁으로 자리한 아담한 정자가 하나 눈에 띄는데, 바로 만휴정이다. 얼마 전 종영한 미스터 션샤인의 촬영장소로 입소문이 퍼져 만휴정으로 들어서는 다리는 인생샷 명소로 주말이면 사람들로 북적인다. 특히, 본래 하나의 자연인 듯, 단풍으로 물든 깊은 산새 안에 어우러진 정자가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사색하기 좋은 계절 가을코스로 제격이다. 10. 가을에 핑크샤워해요 ‘안동강변 핑크뮬리 그라스원’탈춤공연장 앞 강변이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울긋불긋 익숙한 가을단풍 대신 조금은 특별한 나들이를 찾는다면 바로 안동강변의 핑크뮬리 그라스원을 추천한다. 이색적인 가을 정취로 ‘핑크샤워’를 할 수 있는 곳이다. 영가대교를 배경으로 다양한 포토존을 담고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핑크뮬리는 실물로도 고혹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지만 사진에 담을 때 더 빛을 발한다. 살짝 밝은 필터를 적용하면 어디서나 인생샷을 건질 수 있다. /피현진기자 phj@kbmaeil.com

2023-11-02

늘 한자리서… 위안과 용기 주는 가르침의 산실

요즘 아침 산책하다 보면 심심찮게 반려견을 데리고 나온 시민들을 만난다. 다양한 종류의 강아지에서부터 어미 개까지 촐랑거리며 걷기도 하고 뛰면서 주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지만, 때로는 큰 덩치의 험상궂은 불도그를 볼 때면 나도 모르게 움찔하면서 주춤거리거나 멀찌감치 떨어져 걷게 된다.반려견 주인은 괜찮다고 하나 그것은 그들의 생각이고 지나는 나는 그렇지 못하다. 더하여 가끔 반려견들이 본 변이 산책길에 그대로 방치되어있는 것을 보면 그리 유쾌하지만 않다. 날이 갈수록 주변을 돌아보아도 그렇고 언론 보도에도 반려동물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당연히 반려동물을 키우는데 드는 먹이, 치료 등 그에 따른 경제적 시장도 엄청나게 커져만 간다. 키우다 무슨 사정인지 모르지만, 유기되는 반려동물도 늘어나고 있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는 것이 현실이다. 반려(伴侶), 사전에서는 동무, 동반자로 표현한다. 사회가 다원화된 만큼 각자의 반려 또한 기호와 사정에 따라 다원화되는 추세다. 나의 반려는 노거수(老巨樹)다. 오래전부터 반려목 노거수를 키우고 있다. 아니 나의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이 더 맞겠다. 내가 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위안과 용기를 받고 있으니 말이다.경주 토함산 자락 외동읍 괘릉리 328번지에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소나무이다. 마을 주민들에게는 경배의 대상인 노거수가 내 마음 안 깊숙이 자리한지도 오래 되었다. 마을 주민들에게도 수호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경외하다. 언제 찾아가도 늘 한자리에 머물면서 곧은 절개와 푸름을 자랑한다. 그를 보면 허물어졌던 내 의지도 되살아나고 흔들리는 정의감도 바로 선다. 무언의 가르침, 스승이나 다름없다.20년 전에 처음 만났다. 지금은 한 개지만 그 당시에는 당집을 2개 가지고 있었다. 뿌리에서 뻗어 나온 힘찬 줄기도 4개나 되었다.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 웅장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와 푸른 솔가지의 아름다움에 반해 ‘노거수 생태와 문화’ 책 표지 사진으로 사용했다. 그간 이 반려목 소나무 노거수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줄곧 용기를 얻었다.노거수는 몸통의 둘레가 무려 10m이다. 그의 키와 맞먹는다. 나뭇가지는 아래로 늘어 떨어져 땅과 맞닿을 정도이다. 푸른 하늘 공간에 배열한 마디마디 굽은 잔가지의 모습은 예술작품 같고 꽈리를 틀고 있는 뱀처럼 붉은빛을 띠고 푸른 솔잎을 입에 물고 내려다보는 풍경은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온다. 그 누구든지 한번 접하면 황홀함에 넋을 잃고 그의 품속으로 빨려들게 된다. 반려목 노거수에 기대어 두 팔로 감싸 안고 얼굴을 갖다 맞댔다. 가을 햇살에 따뜻한 온기가 내 얼굴에 전해 왔다. 숨을 깊게 들어 마시다 뱉곤 했다. 솔향이 혈액을 타고 전신에 퍼졌다. 잡념이 사라지니 마음이 편하다.생명의 역사 속에서 단일 생명체로 가장 몸집이 크고 오래 사는 생명체는 노거수가 아닐까 싶다. 마을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중심 역할을 함은 물론이다. 주민들은 매년 공동 제사를 지낸다. 마을 수호신을 존중하는 예(禮)다. 동제를 통하여 마을 주민들은 화합과 결속의 동기를 다지는 등 무언의 대화를 주고받곤 한다. 노거수 생태계가 동민들에게 철학적 사고를 담아내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마을 주민들에게 노거수와 당집이 있는 공간은 신성함의 발로다. 출입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자연 그 자체를 신격화하고, 간혹 가지가 부러지거나 자연 고사하더라도 가져가 사용하지 않는다. 방치함으로써 생태적으로 분해자, 생산자, 소비자라는 고리로 자연순환을 이루게 해주는 것이다. 이는 자연보호 최상의 방법이다. 고서를 들춰보면 우리 조상의 나무 사랑은 그 어느 민족도 따라올 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반려동물 키우듯이 반려목 노거수를 키워보면 어떨까. 헤르만 헤세는 ‘나무야말로 진리를 말하는 가장 훌륭한 설교자라고 고백하였다.’ 그렇다. 마음이 이끄는 곳, 나만의 노거수를 찾아서 그곳에 머물면서 자연과 동화되어 보자. 자연에 대한 경외감, 평온함, 충만감과 고립감에서 탈출하여 이웃에 대한 유대감, 삶에 대한 애착심 그리고 이 모든 것에 교감하면서 감사의 마음이 몸과 마음속에 스며들고 또 우러나올 것이다. 내 마음속에 안고 있는 고민의 문제도 가을 햇살에 영글어 가는 벼알처럼 알곡으로 변할 터이다.아프로디테 말고는 ‘이 세상에서 꽃만큼 사랑스러운 것도 식물만큼 소중한 것도 없을 것이다. 인류 삶의 진정한 모체는 이 대지를 뒤덮고 있는 녹색식물이다. 녹색식물이 없다면 우리는 숨 쉬지도 먹지도 못할 것이다. 우리는 나무가 존재함으로써 덩달아 존재하는 작은 생명체일 뿐이기에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나무의 존재를 절대시해야 한다’라고 했다. 나는 식물과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하고 편안한 기분을 느낀다. 그것은 영적인 충만감에 젖어 있는 식물들의 심미적 진동, 에너지 파동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노거수는 이제 나의 반려목이 되었다. 기독교를 창시한 예수의 말씀을 담은 성경에도 에덴동산에서 금단의 열매를 맺는 나무 이야기를 하였고,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 역시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공자 역시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우리 주변 명찰이나 서원에 은행나무와 회화나무가 있고,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경주 양동마을에는 고택마다 노거수가 있다. 거기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스승이며 가르침의 산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요즘도 나홀로 명품 노거수를 탐방하는 길은 행복하다. 많은 가르침을 받고 또 즐기고 있다. 반려동물처럼 경제적으로 부담도 없고, 여행을 간다고 어디다 맡길 필요도 없다. 반려목 노거수는 자연이 연출하는 사계절의 아름다운 작품을 늘 품고 있어 무상으로 감상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쉽고 가치 있는 일은 없을 듯하다. 인간과 나무와 관련된 모든 것을 산림문화라 부른다. 시나 수필, 소설을 가미시켜 삶의 질을 높여 주는 표현 활동에 대해선 산림 문학이라 나름 정의해본다. 오늘도 나홀로 노거수 생태와 문화를 탐방하면서 거대함, 숭고함, 아름다움을 노래한다.나무사랑외동읍 괘릉리 328번지에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소나무는 나이가 320살쯤 된다. 마을 주민들의 극진한 보살핌과 정성이 엿보인다. 그러나 고령의 이 노거수는 지금 상처가 덧나 안타까움을 더한다. 아예 한줄기는 태풍에 부러진 채 땅에 누워있다. 다른 한 줄기는 반쯤 부러져 다른 동료 줄기 가지에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부러진 한 줄기는 생명이 간당간당하면서도 주민이 쥐어준 지팡이에 의존해 끈질긴 생명줄을 이어가는 모양새다. 세파 속에 다소 힘에 부쳤는지 줄기 모두 서쪽을 향해 비스듬히 기울어져 자라고 있다. 자연에 동화된 그 모습을 보니 경이롭기까지 하지만, 노거수는 부러진 몸 줄기 사이사이로 염증을 앓고 있다. 빗물이 스며든 것이 병을 유발한 원인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호수나 천연기념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 마음이 아프다. 얼마나 고통이 심할까하는 생각에 측은지심이 발동하여 내 눈물샘을 자극한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3-11-01

‘삼한일통’ 최선두서 이끈 무열왕 김춘추와 태대각간 김유신

서기 676년. 신라는 백제에 이어 고구려를 병합한 후, ‘7세기 아시아 초강대국’으로 불렸던 당나라 세력을 축출함으로써 삼국통일의 여정에 마침표를 찍는다.정치와 군사적인 면, 종교·문화적인 측면 등에서 고구려와 백제보다 발전이 늦었던 신라가 삼한을 하나로 묶어 통일왕국을 만들어간 과정은 드라마틱하면서 지난했다.탁월한 외교협상력을 발휘했던 무열왕 김춘추, 용장(勇將)과 지장(智將)의 면모를 두루 갖춘 김유신, 무열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 침공과 당나라 격퇴의 선두에 섰던 문무왕 김법민,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나라를 위해 바치겠다고 맹세한 젊은 화랑들…. 이들 모두는 삼한일통의 주역이었다. ◆신라, 백제·고구려·당나라를 차례대로 무릎 꿇리다660년. 의자왕이 가장 신뢰했던 백제의 명장 계백이 5천결사대와 함께 황산벌(지금의 충남 논산 일대)에서 유명을 달리한다. 백제의 붕괴가 현실로 닥친 것이다. ‘삼한일통’이라는 정치적 명분과 함께 신라 무열왕에겐 사적인 원한도 있었다.‘황산벌전투’를 ‘딸과 사위를 죽인 의자왕을 향한 무열왕 김춘추의 복수극’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 건 아래와 같은 이유다.전북대학교 박노석 교수의 논문 ‘백제 황산벌전투와 멸망 과정의 재조명’은 ‘삼국사기-백제본기’ ‘삼국사기-신라본기’ 등의 기록을 검토해 다음과 같이 서술된다.“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초기에는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릴 정도로 영특한 군주였다. 재위 2년(642년)에는 직접 신라를 공격해 미후(737C7334) 등 40여 성을 빼앗았으며, 윤충(允忠)으로 하여금 대야성을 공격해 점령하게 했다. 당시 대야성주는 김춘추의 사위인 품석(品釋·아내는 김춘추의 딸인 고타소)이었는데, 윤충은 품석 부부가 항복을 하자 이들을 죽여 머리를 도성으로 보냈다. 이때 김춘추는 기둥에 기대어 서서 앞에 사람이 지나가도 알지 못할 정도로 심한 충격을 받고 백제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다고 한다.”아버지 무열왕이 백제를 병합한 1년 후 세상을 뜨자, 연이어 고구려 병합의 길에 나선 건 아들 문무왕 김법민이었다.고구려는 멸망 2년 전인 666년부터 극심한 내부 분열을 겪었다. 카리스마 넘쳤던 ‘탁월한 고구려의 전략가’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그의 동생과 세 아들 사이에서 정권을 제 앞으로 가져다놓기 위한 골육상쟁(骨肉相爭)이 벌어졌다.서울교육대학교 임기환 교수의 논문 ‘고구려 멸망기 신라의 군사 활동’은 고구려 붕괴의 전조(前兆)와 당시 신라와 당나라의 동맹 상황에 관해 이렇게 쓰고 있다.“666년 6월 남생(연개소문의 아들 중 한 명)이 당으로 투항하면서 시작된 고구려에 대한 당(唐)의 공세는 668년 9월 평양성이 함락될 때까지 약 2년 여에 걸쳐 계속됐다. 이 과정에서 667년부터 당군은 신라에 군사적 지원을 요구하고, 신라가 고구려 남부 전선을 압박하면서 결국 668년에 신라와 당의 연합군은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신라는 당과 함께 승전국이 된다. 그런데 고구려 멸망 후 당은 신라의 공훈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드러낸다. 이는 백제 멸망 이후 당과 신라 사이에 내재된 갈등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백제 공격을 목표로 연합군을 구성했던 당과 신라는 백제 멸망 후 전후 처리과정에서 서로 다른 입장을 드러냈고, 고구려에 대한 공세 과정에서도 이러한 양국의 입장은 잠재되어 있었다.”평양성전투에서 거칠기로 이름 높은 고구려 군대는 굴복시켰으나, 위의 인용문에서 언급된 것처럼 ‘또 하나 신라의 적’ 당나라의 야심은 깊고도 은밀했으며 동시에 컸다.통일된 삼한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야심을 시시때때로 드러낸 당나라. 신라에겐 백제와 고구려보다 더 강하고 위험한 적을 몰아내야 할 숙제가 남았다.백제·고구려 병합 과정에서 일등공신으로 역할 했던 김유신은 당시 일흔을 넘긴 노장(老將)이었음에도 수많은 전투 경험을 토대로 조카인 문무왕 김법민을 조력하며 당나라 축출에 앞장선다.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모두가 아는 그대로다. 길고 길었던 싸움 끝에 676년 당나라 군대가 신라 땅에서 철수한다.‘나무위키’는 ‘나당 전쟁(신라와 당나라의 전쟁)’의 시각과 끝을 아래처럼 간명하게 요약하고 있다.“서기 670년 신라와 고구려 부흥군 연합의 요동 선제공격으로 시작돼 676년 기벌포 전투까지 7년간 진행된 신라와 당 사이의 전쟁. 여기서 신라가 승리해 당나라는 한반도에서 확보했던 옛 백제, 고구려 영토를 잃어버리고 신라가 한반도를 지배하게 된다.” ◆ ‘삼한일통’의 두 주역 무열왕 김춘추와 태대각간 김유신모두 20회로 연재된 2023년 연중기획의 타이틀은 ‘신라의 삼국통일-무열왕과 김유신의 시대’다. 이는 ‘삼국통일’과 두 인물이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관계라는 의미일 터. 실제로 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은 삼한일통을 최선두에서 이끈 인물이기도 하다.김유신의 경우 보통의 사람들은 빼어난 군사적 역량을 가진 장수로만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군사전략에만 밝은 무장(武將)이 아니었다. 충남대학교 김수태 교수의 논문 ‘신라의 삼국통일과 김유신’ 한 대목을 읽어보자.“7세기 후반 백제의 멸망 이후 전개된 신라-당나라 관계에서 김유신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고 한다. 그것은 문무왕이 고구려의 멸망 직후 신하들에게 김유신이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이 돼 그 공적이 많았다’고 언급했듯이 그가 재상으로서나 장군으로서의 역할을 모두 잘 수행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그는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그 모두를 서로 연결시키면서 활동한 인물이었던 것이다.”이처럼 문무(文武)가 동시에 밝았던 김유신을 손위 처남으로 둔 무열왕 김춘추는 신라는 물론, 백제·고구려·당나라를 통틀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정치협상력과 외교력을 가진 사람이었다.둘은 서로에게 ‘호랑이 등에 달린 날개’로 역할하며 삼국통일을 견인해낸다. 이는 이후 왕조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벤치마킹(Bench-marking)된다.이와 관련해 명지대학교 남재철 교수의 논문 ‘한문학을 통해 되돌아보는 삼한통일(三韓統一)의 역사2’를 인용한다.“조선조 지식인들은 태종 무열왕이나 문무왕이 김유신과 같은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여 군신 간에 화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삼한통일의 대업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보았다.”◆ 화려한 불교예술 꽃 피운 문화왕국 통일신라7세기 말에 삼한일통을 이룬 신라는 ‘빛나는 불교예술 왕국’으로 성장한다. 전쟁과 전투에 사용됐던 국력을 문화·예술에 투자함으로써 동서양 어떤 고대 국가도 흉내 내기 힘든 ‘문화왕국’을 만들어갔던 것.그 생생한 사례를 보여주는 것이 ‘동궁과 월지’, 그리고 ‘감은사’다. 현대에 들어서며 그곳에서 출토된 수많은 유물은 신라를 ‘황금의 나라’로 불리게 했고, ‘불교예술의 절정 속에 서있던 왕조’로 인식되게 했다. 다음은 ‘위키백과’의 설명이다.“월지는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룬 직후인 문무왕 14년(674년)에 황룡사 서남쪽에 조성됐다. 큰 연못 가운데 3개의 섬을 배치하고 북쪽과 동쪽으로는 무산(巫山)을 나타내는 12개 봉우리로 구성된 산을 만들었다. 이것은 동양의 신선사상을 상징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섬과 봉우리에는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동물을 길렀다는 가장 대표적인 신라의 원지(苑池)다. 5년 후인 679년에는 별궁인 동궁을 건축한다.”감은사는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이룬 후 짓기 시작해 그의 아들인 신문왕 김정명이 즉위 직후에 완공한 사찰이다. ‘쌍둥이 석탑’으로 유명한 이곳에서도 여러 점의 진귀하고 화려한 신라 불교예술품이 발견돼 역사학자들을 놀라게 했다.지금으로부터 1천347년 전 이뤄진 삼국통일. 그 과정과 통일 이후 신라의 변화·발전 과정을 공부해보는 건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불리는 21세기 경주를 보다 밀도 높게 이해할 수 있는 의미 있는 행위임이 분명하다. (끝)/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10-31

구룡포에 남은 한 마리 용은 어디로 갔나

아홉 형제 올려보내고 홀로 바다에 떨어진용 한 마리구룡포 땅 거닐며 무슨 생각했을까.땅 천 년, 산 천 년, 물 천 년삼천 년을 견디었건만부러진 뿔 뽑힌 발톱 흩어진 비늘들하나하나 주워 담으며또 하루하루 씹어 삼켜야 할눈앞의 천 년은 얼마나 아득했을까. 원망과 허탈을 되새김질하며 백 년쌓아 올린 토성에 제 몸을 감추며 백 년말목장성의 말갈기를 쓰다듬으며 백 년한적하게 그물 씻는 어민들을 지켜보며 백 년어느새 구백 년의 시간을 갑옷처럼 입으며백 년만 지나면 뒤돌아보지 않고하늘을 향해 날으리라 다짐할 때에포구에 정박한 이국의 배에서는낯선 말씨의 사람들이 내렸다.그들이 순진한 어민들의 그물을 낚아채고도미와 고등어와 정어리와 고래를 배에 가득 실어갈 때한때 튼튼했던 군마들도 이젠 허물어진 성벽도아무런 보호가 되어주지 못했다.그들은 기와집을 세우고 송덕비를 세우고마침내 그들의 신까지 이 땅의 머리 꼭대기에 세웠다.돌계단을 올라 도리이(鳥居) 너머 이글거리는이국 신의 음험한 미소를 바라볼 때에용은 마침내 천 년의 꿈을 내려놓았다. 아홉 형제 올려보내고 구룡포에 홀로 남아또다시 천 년 묵은 용 한 마리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르나이국의 신사를 허물어 낸 구룡포의 꼭대기에는마침내 용왕당이 세워졌다.- 글 : 이가은(서울대 국문과 박사 수료) 임주은 임주은 1982년 포항에서 태어났으며 대구가톨릭대 공예과를 졸업했다. 개인전 2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아트페어에 서양화 작가로 참여했다. 현재 포항문화재단 이사, 포항청년작가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 포항지부, 경북청년작가회 등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3-10-30

‘청송사과축제’서 새콤달콤 가을추억 만드세요

‘산소카페 청송군’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수려하고 청정한 자연을 배경으로 청송사과의 수확철을 맞아 풍성하고 다채로운 청송사과축제를 마련한다.제17회 청송사과축제는 ‘청송사과, 찬란한 금빛 향연’이란 주제로 오는 11월1일 청송읍 월막리 용전천(현비암 앞)에서 화려한 막을 올려 5일까지 5일간 개최된다.청송군은 이번 축제를 통해 ‘산소카페 청송군’,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국제슬로시티’, ‘산소카페 청송정원’ 등 최고의 청정 관광도시를 더욱 부각시키고 용전천 현비암 주변 자연경관에 빛을 수놓은 야간 경관조성사업을 축제와 연계해 그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축제장을 만들었다. □ 대한민국 대표브랜드 청송사과 우수성 알려청송군은 대면 축제의 한계를 벗어나 시공간의 제약이 없는 지속가능한 온라인 프로그램을 개발해 청송사과축제의 글로벌 축제 도약을 꿈꾼다.온라인축제는 지난 6일부터 11월 5일까지 포털사이트 다음(daum)을 통해 청송사과축제 대표 체험프로그램을 기반으로 한 게임 4종(청송퀴즈, 박터뜨리기, 도전-사과 선별 로또, 꿀잼-사과난타)을 선보여 축제 형태를 다양하게 변화시켰다.내달 1일부터는 축제장에서 군민과 관광객 모두가 하나 되는 화합과 소통의 장을 마련함과 동시에 대한민국 대표브랜드 청송사과의 우수성을 널리 알릴 준비도 마쳤다. □ 대표 프로그램 ‘청송꽃줄엮기 전국대회’‘청송꽃줄엮기 경연대회’를 전국대회로 확대해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이번 꽃줄엮기 경연대회는 최우수상 시상 훈격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으로 격상시켰다.청송군은 청송사과축제 대표 프로그램인 ‘청송꽃줄엮기’를 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한 초석을 마련하는 데 한걸음 다가가는 기회로 삼을 계획이다.□ 청송사과축제 홍보관 운영청송사과, 사과 요리, 사과 가공품 등을 전시하는 사과축제 홍보관을 지난해에 이어 210평 규모로 조성해 청송군의 황금사과를 특화 전시한다.역대 사과왕 화판과 올해의 황금진·사과왕 입상작을 전시하고 스마트 다단재배 시설 설치를 통해 청송사과의 역사와 선진화된 사과재배 기술은 물론 사과재배 최적지의 자연환경을 동시에 홍보한다.홍보와 더불어 사과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청송군 우리음식연구회에서 개발한 사과요리를 선보인다. 사과떡볶이와 사과떡갈비 등 청송사과와 지역 특산물을 활용한 6~8종의 요리 및 디저트도 시식·판매할 예정이다.또한 시네빔을 활용한 청송관광 홍보 동영상 상영으로 청송군의 대표 관광자원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기회도 만들었다. □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하는 프로그램 구성올해 축제는 청송사과축제의 킬러 콘텐츠인 도전-사과 선별 로또, 꿀잼-사과난타와 사과 방망이 체험 등 전 연령이 참여할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으로 꾸며진다. 또한 8개 읍면 주민과 풍물단이 함께 하는 ‘청송사과 퍼레이드’, ‘청송군민 노래자랑’을 통해 군민과 관광객 모두가 하나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행사장 주무대에서는 풍성한 공연 프로그램도 이어진다.연계공연으로 장윤정, 나태주, 홍지윤 등이 출연하는 ‘헬로콘서트 좋은날’ 녹화 공연과 송가인, 박지현, 박구윤 등이 출연하는 ‘세계유교문화축전’이 이어진다. 이찬원, 정동원, 조정민 등이 출연하는 ‘사과축제공연’과 손태진, 지원이 등이 초대가수로 출연하는 ‘청송군민 노래자랑’도 개최된다.이밖에도 축제 기간 동안 제26회 청송문화제, 시니어 한마당, 건강체조 경연대회, 독도사랑스포츠공연단 공연 등 다채로운 행사가 준비되어 있다.또한 소공연장 프로그램으로는 사과 올림픽 3종, 청송 골든벨, 청송군민이 구성하는 재능기부공연 등이 준비된다. 원산지 표시 위반자 의금부 압송 시연과 2023 청송황금사과배 전국고교장사씨름대회 등 특별 행사도 더해진다. 더불어 사과·사과즙·사과떡 시식·판매와 무료 차 시음 등의 상설 행사도 마련돼 청송사과축제를 찾은 관광객에게 볼거리와 즐길거리, 차별화된 경험을 선사할 예정이다. □ 꼭지 무절단 사과 판매청송군은 올가을 만생종 사과부터 꼭지 무절단 사과를 농산물산지공판장을 통해 출하할 수 있는 유통구조 구축을 본격 전개해 나가고 있다.꼭지 무절단 사과는 청송군에서 청송사과 산업의 경쟁력 향상을 위해 올해부터 역점시책으로 추진하고 있다. 사과 꼭지를 치지 않음으로써 농가의 인건비를 절감하고 과실 신선도 향상에 효과적이다. 소비자는 더욱 신선한 사과를 맛볼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이번 사과축제장에서 판매할 사과도 모두 꼭지 무절단 사과이다. □ 바가지요금 및 불공정 상행위 근절 신고센터 운영특히 올해는 전국적으로 축제장 바가지요금이 크게 이슈가 된 만큼 바가지요금 근절 대책반을 편성하고 사과축제장 내 신고센터에 전담 공무원을 배치 운영하는 등 바가지요금 없는 축제장, 후한 인심과 정이 넘치는 축제장을 만들어낼 방침이다.윤경희 청송군수는 “올해 역시 축제장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하고 있다”며 “이번 청송사과축제는 꼭지 무절단 사과로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 청송사과의 차별성과 우수성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윤 군수는 또 “유관기관과 긴밀한 협력체계 구축을 바탕으로 안전한 축제를 만들고 신고센터 운영을 통한 바가지요금 없는 축제장을 만듦과 동시에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큰 보탬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청송/김종철기자 kjc2476@kbmaeil.com

2023-10-29

은퇴 후 우리에게 맞는 ‘천자문’을 짓고 서예를 가르치다

사회생활을 하면 누구나 은퇴하게 되는데 정치인도 예외일 수 없다. 최원수 선생은 정계에서 물러나 어떤 일을 했으며, 무엇을 남겼을까? 그리고 그의 장남 최승태 선생은 어떤 길을 걸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들으며 최승태 선생과의 대담을 마무리했다.김도형((이하 김) : 최원수 선생은 정계에서 은퇴한 후에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최승태(이하 최) : 아버지는 동양 고전에 조예가 깊고 붓글씨를 잘 썼어. 서울시민회관에서 개인전을 열 정도였지. 아버지는 말년에 서울 장충동 쪽에 목운서실(木雲書室)을 열고 서예를 가르쳤어. 사실 그 서실은 정치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지. 유진산을 비롯해 고흥문 국회부의장, 유진오 고려대 총장, 권중돈 국방부장관 등 아버지와 친분이 깊은 분들이 드나들었어. 그리고 1977년에 ‘국민 천자문’을 냈지. 김 : 처음 들어보는 책입니다.최 : 쉽게 말해 아버지가 ‘천자문’을 직접 만들었어. 오랜 옛날 중국에서 만든 ‘천자문’은 우리 현실과 맞지 않으니 우리에게 맞는 새로운 ‘천자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거야.김 : 그 책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까?최 : 딱 한 권 남았어.최승태 선생이 건네준 국배판형의 ‘국민 천자문’은 “천신음우(天神陰佑) 단조시기(壇祖始基)─ 하느님과 신령님이 음으로 도와서 단군 할아버지께서 우리나라를 세우셨다”로 시작해 “사기동몽(使其童蒙) 서기편습(庶幾便習)─ 어린이와 초학자로 하여금 배움에 편리함이 있음을 바라는 바이다”로 끝이 난다.저자 서문에서 최원수 선생이 이 책을 낸 의도를 읽을 수 있다.이 ‘국민 천자문’은 우리나라 정치, 경제, 산업, 문화, 역사, 윤리 등 각 부문에 걸쳐 사자이행(四子二行) 팔자(八字)를 일구절(一句節)로 하고 국민 생활감정에 알맞게 뜻이 통하도록 하여 쉽고 빠르게 습득할 수 있고 이용가치가 많은 것으로 엮어 보았다. 우리 어린이나 초학자들이 이 책만 제대로 익히게 되더라도 붓글씨를 배움과 아울러 신문이나 잡지 등 한자가 섞인 여러 간행물을 용이하게 해독할 것이요, 각자의 인생관, 국가관이 은연중 확립될 것이며 민족정신의 함양과 나아가 민주국가의 공민의 일원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 바이다.유진오가 쓴 추천사에서는 최원수 선생의 성품과 서예 실력을 확인할 수 있다.목운(木雲)은 해방 전후를 통하여 독립과 건국에 그의 청춘을 기울였고 건국 후에는 초대 영일군수와 제2대 국회의원을 역임하면서 허다한 공적을 세운 것으로 믿고 있다. 원래 성품이 온아하면서 강직하여 권력을 멀리하고 오직 안빈낙도하는 청백한 기품으로 정계에서도 언제나 야측(野側)에서 시종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십수 년 전부터 정계를 물러나면서 고전의 연구와 함께 서예에 정진해온바 그 유려하면서 단정하고 웅휘하면서 자유자재한 필법은 이미 심오한 경지에 도달하였다 하겠고 역대 명필들의 진수를 두루 섭렵하면서 독창적인 일가를 이루었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김 : ‘국민 천자문’에 최원수 선생이 펼치고자 했던 뜻과 남기고 싶은 말씀이 담겼다고 봐도 되겠군요. 이제 최원수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장남의 눈에 비친 부친은 어떤 분이었는지요?최 : 앞서도 말했지만 할아버지는 사람들의 병을 고치신 분이고 아버지는 세상의 병을 고치려 한 분이지. 아버지는 신념과 원칙을 중요하게 여겼던 분이고 그 때문에 말 못 할 고초를 겪었어. 비록 가슴에 품은 큰 뜻을 모두 펼치지 못했지만 신념을 지키며 꿋꿋이 사신 아버지가 존경스러워.김 : 최원수 선생은 인생을 어떻게 마무리하셨는지요?최 : 지병이 악화되면서 1987년 초에 내가 살고 있던 울진으로 모셨지. 작고하신 후에 울진에 묘를 썼다가 2010년에 포항 죽도성당 추모관으로 옮겼어.김 : 이제 최승태 선생님의 삶에 대해서도 들어보고 싶군요.최 : 내 인생이야 할 이야기가 특별히 있겠나.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아버지의 뜻에 따라 포항에 오게 되었어. 포항에 있는 아버지의 동지들이 아버지의 정치적 기반을 지켜줄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지. 아버지는 서울과 포항을 오가는 형편이었으니 포항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지. 그런데 그 역할을 누가 하겠어. 장남인 내가 할 수밖에 없었지. 그래서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포항에 오게 되었어.김 : 포항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최 : 사업을 하면서 아버지의 사람들, 구체적으로 말하면 야당 사람들을 챙긴 거지. 당시 야당 생활은 참 고달팠거든. 밤마다 그 사람들과 어울려 소주에 노가리를 씹으며 울분을 달랬지. 김 : 선생님도 고초를 많이 겪었겠군요.최 : 오죽했겠어. 우리 집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경찰에서 일일이 확인했지. 내가 타지에 갔다 오면 정보과 형사들이 어디에 갔다 왔냐며 꼭 물었고.김 : 그 과정에서 각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말씀해주시지요.최 : 1983년에 YS가 단식할 때였어. YS가 민주화를 위해 결연한 각오로 목숨을 걸었지. 그런데 세상은 그런 엄중한 상황을 모르는 거야. YS의 최측근인 김덕룡 의원한테서 단식 상황을 적은 자료를 받아 포항 해도의 한일인쇄소에서 복사했지. A3 크기의 유인물을 포항과 영덕, 울진 곳곳에 뿌렸어. 그때 그 일을 김기철과 함께했지.김 : 김기철 선생과는 언제 인연이 되었습니까?최 : 1982년 겨울이었을 거야. 서울에 있는 김덕룡 의원한테서 전화가 왔어. 자신이 신뢰하는 김기철이라는 후배가 포항으로 가게 되니 잘 챙겨달라고 하더군. 그때 인연이 돼 지금까지 동고동락하고 있어.김 : 김기철 선생과도 에피소드가 있을 것 같습니다.최 : 김기철은 1986년 6월에 결혼했어. 3선 포항시의원을 한 차동찬이 부인이야. 오거리 남도예식장에서 식을 올렸는데 주례를 계훈제 선생이 맡았고 당시 유명한 야당 인사와 민주화운동 인사가 대거 왔었지. 그 바람에 전투경찰 2개 중대가 예식장 주변에 배치되었어. 결혼식을 마치고 계훈제 선생과 영일대해수욕장 횟집에서 식사를 함께한 기억이 나는군.김 : 선생님께서는 울진에도 계셨지요?최 : 한때 울진종합터미널을 운영했어. 울진에 있을 때 울진여고에 사격장을 지어주기도 했지.김 : 울진에서도 민주화운동을 하셨습니까?최 : 당연하지. 1984년에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천만인 서명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열렸어. 안동에서도 그 대회가 열렸는데 울진에서 사람들을 데리고 가려면 정보기관의 눈을 피해야 했어. 그래서 냉동차에 20여 명을 태우고 울진에서 안동으로 가는데 사람들이 숨을 쉴 수 없다며 고통을 호소하는 거야. 하는 수 없이 중간에 내려서 숨을 돌리고 다시 안동으로 갔었지.김 : 선생님의 자녀는 어떻게 되는지요?최 : 1남 3녀를 두었어. 아들 준석이는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포항 해병대에 입대해 만기 제대했지. 그 후로 LA에서 사업하고 있는데 준석이 사업장은 포항 출신 미국 유학생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어.김 : 선생님 가문은 세상 사람들의 사랑방을 마련해주셨군요. 이제 선생님과의 대담을 마무리해야 할 시간입니다. 끝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면.최 : 이제 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야. 아버지가 짧은 기간이나마 정치 지도자로서 이뤄낸 일의 의미는 결코 작다고 생각하지 않아. 지도자가 올바로 이끌어야 세상이 편안해지겠지. 앞으로 나라와 지역에 좋은 지도자가 많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이야.끝최승태1937년 포항에서 태어나 포항초등학교와 포항중학교, 계성고등학교, 국민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무역회사에서 근무하다가 포항으로 돌아와 사업을 하며 부친(최원수, 건국 후 초대 영일군수, 제2대 국회의원)의 정치적 기반을 지켰다. 민주화추진협의회와 민주산악회에 참여해 김영삼 대통령 당선에 헌신했으며, 경북사격연맹 회장, 국제사격연맹 심판관, 라이온스클럽 경북 309-N 지구 총재를 맡았다.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최승태

2023-10-29

섬진강 품은 곡성, 시선 머무는 곳마다 감성을 적신다

곡성은 시골스러운 풍경을 가장 잘 간직한 곳이다. 곡성을 휘감아 흐르는 섬진강은 어머니의 젖줄처럼 푸근하기만 하다. 맑은 물길은 들판과 만나고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감성을 적시는 풍경이 펼쳐진다. 가을의 중턱 연인이나 가족과 함께 자연의 순정함이 가득한 곡성으로 떠나보자. 곡성 섬진강 기차마을의 가을. ◇섬진강의 무릉도원 ‘침실습지’전남 곡성에 있는 섬진강은 수많은 보물을 품고 있다. 그중에서도 자연 생태가 고스란히 보존된 침실습지는 아름다움의 으뜸으로 칠 만하다. 침실습지는 섬진강과 곡성 군내에서 흘러든 곡성천, 고달천, 오곡천 등이 만나는 길목에 형성된 자연형 하천 습지다. 침실은 ‘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편안한 잠을 이룰 수 있는 명당’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천혜의 자연환경을 품어 ‘섬진강의 무릉도원’으로 불리는 침실습지는 203만㎡ 규모로 형성돼 있다. 수달과 삵, 남생이, 흰꼬리수리 같은 멸종위기 야생 생물을 비롯해 6천665종이 넘는 생물이 어우러져 살아간다. 습지 인근 주민들도 수달을 종종 목격하는데, 수달 서식지가 있다는 것은 습지의 생태 피라미드가 건강하다는 증거다.침실습지 전역에는 청정 지역에서만 자라는 버드나무 군락이 있다. 안타깝게도 지난해 홍수로 많은 나무가 쓸려 내려가 숲처럼 무성했던 모습이 사라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새살이 돋듯 조금씩 회복하는 중이다. 스스로 상처를 회복하는 습지의 모습에서 자연은 스스로 정화하고 치유하는 능력이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여울지는 강물과 물에 비친 산 그림자, 소박한 들꽃 등 침실습지의 주변 풍경도 매력적이다. 특히 새벽 풍경은 필설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다. 습지 사이로 갈대가 흔들리고 안개가 짙게 피어오르면 물고기들은 숨을 죽이고 밤을 새운 왜가리만 푸드덕거린다.새벽 추위를 떨치고 섬진강 서편 강둑에 새벽 출사를 나온 사람들이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카메라 렌즈로 강물을 응시하고 있다. 침실 습지가 제법 넓기 때문에 인근만 둘러보려면 침실목교와 퐁퐁다리를 왕복한 뒤 생태 관찰 데크를 거쳐 전망대까지 다녀오는 코스가 좋다. 습지를 가로지르는 침실목교는 제법 길고 외형이 아름다워 포토존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사진작가들이 모여드는 곳은 해뜰녘에는 고달교 남쪽으로 200m 지점에 있는 섬진강 서편 강둑이나 생태데크가 시작되는 지점, 혹은 침곡목교 위쪽이다. 해질녘에는 동악산으로 떨어지는 풍광을 렌즈에 담는 포토그래퍼들을 볼 수 있다.침실습지는 물을 바라보며 멍한 상태를 유지하는 ‘물멍’의 최적지다. 모든 시름을 떨쳐버리고 싶다면 이만한 곳이 없을 터다. 하이라이트 구간은 퐁퐁다리다. 철제 다리에 작은 구멍이 뚫려 물에 잠겨도 떠내려가지 않는다고 한다. 퐁퐁다리 한복판에 있으면 흐르는 물소리만 끊임없이 들린다. 쉴 새 없이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노라면 복잡하던 머릿속이 말끔히 비워지고 자연과 한층 가까워진 느낌이다. ◇코키아 단지가 조성된 곡성 섬진강 기차마을침실습지 인근의 또 다른 명소는 곡성 섬진강 기차마을이다. 4만㎡ 부지에 유리온실, 초콜릿을 만들어보는 로즈카카오체험관, 장미공원 등이 들어서 있다. 이국적인 분수대와 연못, 정자가 어우러진 장미공원은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가을 끝 무렵인 이맘때에는 붉게 물든 코키아(댑싸리) 단지가 사람들로 북적인다.기차마을답게 증기기관차를 타고 가정역까지 짧은 기차 여행도 할 수 있는데, 열차 안에서 쫀드기와 별사탕처럼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주전부리도 판다. 가정역에 내리면 섬진강을 따라 옛 전라선 철도를 달리는 레일바이크를 체험할 수 있다.기차마을에서 불과 10분도 걸리지 않는 곳에 곡성의 숨은 명소인 메타세쿼이아 길이 있다. 국도 17호선이 지나는 신기 교차로에서 곡성 군내로 들어서는 2차선 도로를 따라 메타세쿼이아가 하늘로 시원스레 뻗었다. 녹색으로 쭉쭉 뻗은 여름철에도 좋지만 나뭇잎이 갈색으로 물드는 가을 풍경이 으뜸이다. 800m 남짓 늘어선 나무 사이로 드러나는 논 풍경도 볼거리다.영화 ‘곡성’을 본 사람이라면 이곳에서 종구(곽도원 분)가 딸 효진(김환희 분)과 오토바이를 타고 가며 환하게 웃던 장면이 떠오를 것이다. 도로변에 주차공간이나 갓길이 없지만 차량통행이 적은 편이라 느긋하게 드라이브 하기 좋다.숲속에 스며든 가을 정취를 느끼고 싶다면 동악산 자락에 있는 도림사가 제격이다. 도림사(道林寺)는 신라시대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옛이야기에 따르면 도인이 숲처럼 모여들어 도림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규모는 작지만 보물로 지정된 과불탱과 아미타여래설법도 등 문화재를 품고 있다.도림사 앞에 이르면 돌을 층층이 쌓아올려 만든 돌계단이 보인다. 수작업으로 한 칸 한 칸 쌓아 올렸을 계단은 보기에 아름답고 편안하다. 절에 들어서기 전 계단을 천천히 오르며 마음을 추스른다. 한 칸씩 계단을 오를수록 도림사의 기품 있는 풍경이 눈으로 가득 들어온다. 고즈넉한 절 마당에 청량한 목탁소리가 울려 퍼진다. 푸른 숲을 배경으로 마치 자연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도림사의 전경 앞에 마음이 맑아지는 순간이다. 곡성 8경 가운데 하나인 도림효종(道林曉鐘)은 도림사의 종소리가 새벽 기운을 타고 먼 곳까지 은은하게 퍼진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요하고 한적한 경내에 맞은편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잔잔한 음악처럼 퍼지고 가을빛으로 물든 나무가 하나, 둘 잎을 떨어뜨린다. 계곡 암반에 앉아 계절이 지나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어느새 자연과 하나 된 자신을 발견한다.동악산 북쪽에 있는 치유의 숲은 가을철 산책로로 명성이 높은 곳이다. 산림청 산하기관인 한국산림복지진흥원에서 운영하는 곡성 치유의 숲에서는 동악산 등반, 꽃차 블렌딩을 비롯해 산림을 이용한 치매 예방, 수면 건강 증진 프로그램, 숲에서 실시하는 태교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다. ◇별빛 가득한 곡성섬진강천문대곡성섬진강천문대는 굽이쳐 흐르는 섬진강을 바라고 서 있다. 순하게 흘러드는 물줄기처럼 둥글둥글 참 유한 모습이다. 한데 여느 천문대와 달리 평지에 자리해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게다가 주변으로 민가도 더러 눈에 띈다. 사실 이곳 곡성섬진강천문대가 들어서 있는 고달면 가정마을길 일대는 천문대가 들어서기에 그리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지는 못하다.천문관측을 위해서는 주변의 인공광원이 없을수록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같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곡성섬진강천문대를 찾는 이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건 천문대 측이 마을주민들과 불리한 여건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합심하여 노력한 덕이다.우선 천문관측에 방해가 될 수 있는 마을과 도로에 설치된 가로등에 갓을 씌워 빛이 위로 향하지 못하게 했고, 천문관측이 이뤄지는 시간대 도로를 지나는 마을 차량들은 스스로 헤드라이트의 불빛을 끄고 지나기도 한다./곡성=글·사진 최병일 여행전문기자

2023-10-26

족청계 숙청되면서 정치 인생에 먹구름 드리워

최원수 선생은 영일군수와 제2대 국회의원 임기 동안 굵직한 성과를 내면서 지역에서 좋은 평판을 얻었다. 하지만, 1950년대 초의 혼란한 정치 상황은 그의 정치 인생에 먹구름을 드리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맡았던 이승만과 이범석의 관계가 벌어지며 최원수 선생에게도 위기가 찾아온다. 김도형(이하 김) : 최원수 선생 곁의 여러 정치인 중에 박일천 포항시장이 있습니다.최승태(이하 최) : 박일천 시장은 아버지가 마음 깊이 믿었던 분이지. 그분이 시장에 당선된 1952년 선거는 아주 치열했어. 시의원이 선출한 포항 최초의 민선 시장이라는 역사성도 있었고.김 : 시장 선거는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습니까?최 : 시의원 20명이 시장을 선출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국회의원이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었지. 영일 갑구 국회의원인 아버지와 포항시 국회의원인 김판석의 힘이 크게 작용했어. 시장 선거를 앞두고 매일 우리 집에서 대책 회의를 했지. 뚜껑을 열어보니 박일천이 11명, 상대 후보는 9명을 확보했어. 아슬아슬했지. 이를 두고 시중에서는 ‘11파, 9파’라고 했어.김 : 다시 최원수 선생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1954년 5월 20일 총선거에서 정당 공천제가 처음 시행됩니다. 이 선거에서 최원수 선생은 무소속으로 출마해 자유당 공천을 받은 박순석 후보에게 패합니다. 이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주시지요.최 : 이범석이 광복 직후에 족청(族靑, 조선민족청년단)을 조직해서 이끌었는데, 이승만이 이범석을 경계하면서 1953년에 족청계를 숙청하지. 그 바람에 이범석과 가까웠던 아버지도 화를 입게 된 거야. 사실 아버지는 의정 활동을 잘했기 때문에 지역에서는 아버지가 국회의원을 계속할 거라고 했어. 결국 공천을 받을 수 없었던 아버지는 1954년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지. 당시 선거는 정상적인 선거라고 하기 힘들었어. 불법이 난무했지. 자유당 공천을 받아야 당선될 수 있었어. 이승만과 자유당 정부는 그때부터 기울어버린 거야.조선민족청년단은 1946년 10월에 미군정의 전면적인 후원을 받으며 이범석이 조직한 우익청년단이다. 비정치, 비군사, 비종파를 내세우며 100만 명이 넘는 청년들을 조직했다. 사상적으로는 민족 지상, 국가 지상을 내걸어 강한 민족주의 성향을 보이는 한편 좌익 출신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했다. 1948년 11월부터 이승만의 지시로 청년단체 통합이 추진되어 새로 조직된 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되었다. 해산 뒤에도 족청 출신들은 ‘족청계’라고 불리는 세력을 형성해 자유당 창당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1953년 12월에 이범석을 중심으로 한 이들이 자유당에서 제명되면서 힘을 잃게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김 : 이범석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자유당에서 축출되자 이범석과 가까웠던 최원수 선생의 정치 인생에도 암운이 드리우는군요.최 : 그런 셈이지. 이승만이 이범석과 족청계를 숙청한 후 아버지는 엄청난 탄압을 받았어. 하지만, 그 후로 이승만과 자유당도 몰락의 길을 가게 되지.김 : 만약 최원수 선생이 국회의원을 한 번 더 했다면 어떤 일을 했을까요?최 : 포항과 흥해 사이에 있는 소티재를 편평하게 해서 포항과 흥해를 하나로 연결하려는 게 아버지의 꿈이었어.김 : 그 일이 가능했다면 굉장히 큰 사업이었겠군요.최 : 아버지는 큰 구상을 하시는 분이었으니까.김 : 1954년 총선에서 이채로운 건 하태환이 포항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겁니다. 자유당 공천을 받지 못하면 당선이 거의 힘든 상황에서 하태환의 당선은 이변이 아닐 수 없었겠지요. 하태환은 최원수 선생의 외사촌 동생이라고 들었습니다.최 : 그렇지. 하태환이 일본의 리쓰메이칸대학에 다닐 때나 동지교육재단을 세울 때 아버지가 많이 도와주었어. 1954년 총선은 불법이 난무해서 시민들의 불만이 높았지. 다리 한쪽이 불편했던 하태환은 지프차를 타고 다녔는데, 그 지프차가 동빈내항에 빠져버리는 사건이 있었어. 장안에 화제가 된 그 사건으로 하태환한테 동정표가 많이 갔을 거야. 그 선거에서도 아버지가 하태환을 많이 도왔지.하태환(1913∼1991)은 1958년 제4대 총선에서 자유당 공천을 받아 재선 의원이 된다(하태환에 관한 이야기는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1’(2021)에 실려 있다). 하태환과 함께 동지교육재단을 설립한 그의 처남 김병윤(1922∼2013)은 포항시장(1959∼1960, 간선)을 거쳐 1971년 제8대 총선(포항·울릉, 민주공화당)에서 당선된다.김 : 최원수 선생은 그 후로 선거에서 잇달아 패하게 됩니다.최 : 포항에서는 자유당과 공화당의 공천을 받지 못하면 당선이 힘들었지. 아버지는 야당을 지키며 고생을 많이 하셨어.김 : 정치를 하면서 다른 일도 하셨는지요?최 : 사업을 계속하셨지. 광복 직후에는 포항신문사를 경영했고, 그 후에 대한조선, 덕수양조장, 동운여객, 미흥방직 등을 운영했어. 사업에 전념했다면 크게 성공했을 거야.김 : 최원수 선생 곁에서 여러 정치인을 보셨을 텐데 기억이 남는 분이 있습니까?최 : 박경석 의원은 동아일보 기자 시절부터 아버지가 아끼던 고향 후배였지. 박경석의 중매를 아버지가 섰어. 아버지가 유진산 신민당 총재에게 박경석을 잘 부탁드린다고 했고, 유진산이 장홍염 의원에게 박경석을 소개해 박경석과 장홍염 의원의 딸이 결혼하게 된 거야.유진산(1905∼1974)은 7선의 거물 정치인이며, 장홍염(1910∼1990)은 전남 신안군 출신의 재선(제1, 2대) 국회의원이다. 박경석(1937∼2019)은 포항 송라면 지경리 출신으로 포항중·고등학교와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동아일보 정치부장 등을 거쳤다. 1980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전국구로 당선되었고,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정당 후보로 포항시·영일군·울릉군 선거구에서 출마해 서종렬 민한당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김 : 박경석 의원의 친동생이 박경용 시인이지요?최 : 박경용은 어릴 때부터 내 친구야.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동아일보’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同時) 당선되었으니 문학적으로 비범한 친구지. 박경석 의원이 모범생이고 자수성가한 사람이라면 박경용은 예술가 기질이 강했어. 박경석 의원이 한번은 나한테 “경용이가 머리는 나보다 좋다”고 하더군. 박경석 의원은 동생 경용이를 그렇게 아꼈어.박경용(1940∼)은 포항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라벌예술대학을 거쳐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출생지인 송라(松羅)가 그의 아호다. 1958년 동아일보에 시조 ‘청자수병(靑瓷水甁)’, 한국일보에 동시 ‘풍경(風磬)’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동시집 ‘어른에겐 어려운 시’, 시조선집 ‘적(寂)’, 시선집 ‘소리로 와서’ 등을 발간했으며, 세종문학상(1969)과 대한민국문학상(1984) 등을 수상했다. 포항에서 한흑구 선생이 주도한 흐름회에 참여하기도 했다.김 : 선생님 친구 가운데 떠오르는 분으로 또 누가 있는지요?최 :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포항에서 출마한 변석화라는 여의사가 있어. 남편이 김두수라는 의사였지. 그분 차남이 김여탁이라고 내 친구야. 김여탁은 포항국민학교와 경기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MIT에서 핵물리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어. 박정희 대통령 시절 핵 개발을 할 때 대덕연구단지에 왔다가 프로젝트가 중단되는 바람에 난처한 처지가 되었지. 그 후 미국으로 돌아가 사업가로 변신했어. 지금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나하고 통화해. 여탁의 형 김여대는 대우중공업 부사장이었는데 우리나라가 동구권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가교 역할을 했어. 안종식이라는 친구도 빼놓을 수 없군. 청하 출신으로 포항수산고를 졸업하고 파독 광부로 갔다가 미국 LA에서 봉제업으로 크게 성공했지. LA에 있는 한국 교민들의 고충을 해결해주는 마당발이기도 해. 포항시와 미국 롱비치(LongBeach)시가 자매결연할 때 이 친구가 다리를 놓았지.최승태1937년 포항에서 태어나 포항초등학교와 포항중학교, 계성고등학교, 국민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무역회사에서 근무하다가 포항으로 돌아와 사업을 하며 부친(최원수, 건국 후 초대 영일군수, 제2대 국회의원)의 정치적 기반을 지켰다. 민주화추진협의회와 민주산악회에 참여해 김영삼 대통령 당선에 헌신했으며, 경북사격연맹 회장, 국제사격연맹 심판관, 라이온스클럽 경북 309-N 지구 총재를 맡았다.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최승태

2023-10-25

나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전쟁에 뛰어든 젊은이들

화랑(花郞).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꽃 같은 사내’라는 뜻이다. 신라는 전략적으로 외모와 품성 모두가 빼어난 소년(청년)을 뽑아 나라의 지도자로 키웠다.삼한일통(삼국통일)에 이르기 위한 백제, 고구려, 당나라와의 전쟁과 전투가 끝없이 이어지던 7세기. 신라 화랑들은 그 명칭처럼 ‘꽃’이 아닌 매서운 ‘칼’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경우가 더 많았다.신라가 통일왕국을 이루는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두 사람, 즉 무열왕 김춘추와 태대각간 김유신 역시 젊은 시절엔 주목받는 화랑의 우두머리였다.660년. 국가의 명운을 걸고 백제와 맞붙었던 ‘황산벌전투’에서 1천400년 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을 인상적인 일화를 남긴 신라 청년 반굴과 관창 또한 화랑.그렇다면 화랑은 구체적으로 어떤 집단이었을까? ‘나무위키’는 “고대 신라에 있었던 소년들로 이루어진 심신 수련 및 교육단체다. 주된 목적이 심신 수련이지만 사실 창설 초기부터 관리와 군인 양성의 제도로 역할했다. 소년뿐 아니라 젊은 청년들도 많았다. 실제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으므로, 사실상 국가가 운영하며 주도한 소년병 제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강제하지 않았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화랑들끼리 주도해 전쟁에 참여했다”고 설명한다.‘위키백과’는 화랑의 편제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민간 청소년단체로서의 화랑도는 화랑과 그를 따르는 낭도(郎徒)로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576년 이후 신라의 국방 정책과 관련해 이를 신라의 관에서 운영하게 되면서 조직이 체계화됐으며, 이들 화랑의 총지도자인 국선(國仙)을 두고 화랑의 예하도 수개 문호(門戶)로 구성하게 했다. 화랑의 지도자인 국선은 원칙적으로 전국에 l명, 화랑은 보통 3~4명에서 7~8명에 이를 때도 있었으며, 화랑이 거느린 각 문호의 화랑 낭도는 수백에서 수천 명을 헤아렸다.”앞서 언급한 것처럼 김춘추와 김유신은 ‘국선’ 출신이다. 김유신이 이끌던 화랑의 무리는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렸는데, 리더인 김유신은 물론 따르는 낭도들까지 용맹과 총명함으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현대에 들어서 군사정권은 ‘화랑정신’ 교묘하게 이용하기도…10대와 20대 초반 청년들은 피가 뜨겁다.‘나라를 위해 내 한 목숨 바친다’는 대의명분(大義名分)만 있다면 싸움에 나서 죽기를 마다하지 않았다.당연지사 당나라, 고구려, 백제와의 전투에서 선봉에 섰던 화랑들 중에는 요절(夭折)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10대 소년 화랑 관창이 대표적이다.신라의 통치자 입장에서는 거룩한 순국(殉國)이었다.이런 화랑의 전통은 현대로 들어서면서 군사독재정권 시절엔 교묘하게 악용(?)되기도 했다.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최광식의 논문 ‘新羅의 花郞徒와 風流道(신라의 화랑도와 풍류도)의 관련 대목을 아래 인용한다.“화랑도는 군사단, 가무집단, 종교 제사집단, 인재 양성과 선발을 위한 수련집단의 성격 등 여러 가지 복합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戰士團(전사단)과 군사적 집회의 성격이 강조돼 왔는데, 이는 일제 시기 식민사학자들의 연구 경향을 답습한데서 기인한다고 보인다. 또한 이러한 연구는 군사정권 시기에 군인들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그들을 조국 통일의 역군으로서 신라 화랑도의 후예임을 강조해 통일의 역군으로 삼고자한 데도 그 요인이 있다고 하겠다.”이처럼 일부분에 있어선 비판적 태도를 취했지만 최광식 명예교수 역시 “신라시대에 활동했던 화랑도는 신라사회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들의 지도이념이었던 풍류도(風流道)는 신라의 정신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는 말로 화랑과 그들이 품었던 지향을 높이 평가한다. ◆화랑 김유신은 무(武)로, 화랑 김춘추는 문(文)으로 이름 떨쳐화랑도를 포함한 세상 어떤 ‘조직’도 다를 바 없다. 조직을 기반으로 크게 이름을 떨치고 입신양명(立身揚名)에 이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직의 규율과 강제 속에서 꿈을 펼치지 못하고 사라지는 이들도 많다.‘화랑’이라는 이름 아래서 최고의 권력을 움켜쥘 수 있었고, 1천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자신의 이름을 경향각처에 화인(火印)처럼 새긴 대표적 인물이 바로 김춘추와 김유신이다.한 사람은 신라의 지존(至尊)인 왕(무열왕 김춘추)이 됐고, 나머지 한 사람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겸 정무수석(태대각간 김유신)이 됐다. 그중 김유신은 화랑 역사에 대표적 무인(武人)으로 길이 남았다. 영남대학교 객원교수 이영찬의 논문 ‘김유신의 군인정신과 리더십 연구’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된다.“김유신(595∼673)은 신라의 무신으로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의 대업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15세가 되던 해 화랑으로 낭도를 이끌고 수련하다가 신라군이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할 때 최초로 전투에 참여해 공을 세웠다. 이후 압량주 군주로서 백제군을 격퇴하고 통일 전쟁에서 뚜렷한 공적을 세우는 등 신라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했다. 당나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신라까지 침략하려 하자 그는 군사를 지휘하며 지도자적 임무를 수행했다. 이순신이 우리나라를 침략해오는 왜적을 물리쳤다면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하고,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당나라를 물리쳐 명실상부 자주독립의 국가를 만드는데 크게 이바지했다.”긴 부연이 필요 없다. 학자가 한 사람을 향해 이같은 최상급의 칭찬을 내놓는 데는 이유가 있을 터.실상 김유신은 샤머니즘 차원에선 중국 초나라의 항우(項羽·기원전 232~202)처럼 무신(武臣·무관인 신하)이 아닌, 무신(武神·신의 반열에 오른 무관)으로까지 추앙받기도 한다.그렇다면, 신라 화랑 중 ‘문(文)’ 분야에서 빛나는 업적을 남긴 이는 누굴까? 맞다. 모두가 예상했듯 후에 무열왕이 되는 김춘추다. 빼어난 문장에 더해 김춘추는 해사한 외모로도 주목받았다.21세기 한국의 몇몇 영화배우와 보이 밴드 멤버는 이웃나라에서까지 인기를 누린다. 잘생긴 얼굴로. 1천400여 년 전 김춘추도 그랬다. 현재의 중국을 통치했던 당나라의 고위 관료와 귀족 부인들은 멀리 신라에서 온 김춘추가 지닌 헌헌장부(軒軒丈夫)의 풍모에 매료당했다.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청년 김춘추가 당나라에서 누린 인기가 어떠했는지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다음과 같다.“김춘추가 태자로 있을 때 고구려를 치고자 군사를 청하려 당나라에 간 일이 있었다. 이때 당나라 황제가 그의 풍채를 보고 칭찬하여 ‘신성한 사람’이라 하고 당나라에 머물게 해 사위로 삼으려 했지만 김춘추는 이를 사양하고 신라로 돌아왔다.”비단 중국만이 아니다. 당시 신라와 적대 관계에 있던 일본에서조차 ‘꽃 같은 사내’ 화랑 김춘추의 매력을 “신라가 상신 대아찬 김춘추를 사신으로 보내왔다. 김춘추는 용모가 아름답고 이야기를 통해 사람을 자신의 편으로 이끄는 능력이 있었다”고 쓴다. 647년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이다. ◆반굴과 관창같이 안타깝게 허리가 꺾인 화랑도 적지 않아김춘추와 김유신처럼 젊은 시절엔 화랑의 리더로 주목받다가, 나이가 들어서는 권좌에 앉은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10대 혹은, 20대 어린 나이에 전장(戰場)에서 숨진 화랑도 적지 않다.역사학자들은 신라시대 전체를 통틀어 화랑의 숫자를 200~300명으로 추정한다. 그중 절반 이상이 하늘이 내린 자신의 명(命)대로 살지 못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반굴과 관창도 그들 중 하나다.‘황산벌전투’에서 신라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전술적 차원에서 희생된 둘 중 관창은 사망 당시 나이가 겨우 16세. 요즘의 중학교 3학년 또래 소년이었다.반굴 또한 갓 아들을 낳은 20대 초반 청년이었다. 김유신의 조카이기도 했던 반굴을 향해 그의 아버지 김흠순(김유신의 동생)은 “오늘 나라를 위해 죽어, 영원토록 이름을 남기라”고 아들의 죽음을 부추긴다.황산벌전투를 소재로 한 이준익 감독의 영화 ‘황산벌’에선 이 모습이 희화화 돼 그려진다.기자는 이 장면이 너무나 슬펐다. 아무리 그럴듯한 대의와 명분 앞이라도 ‘인간’ 반굴과 관창에게 두려움과 공포가 없었겠는가? 그들이 화랑이 아닌 화랑의 할아버지였더라도. (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10-24

멈추었던 이야기가 다시 흐르는 곳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인 채 남아있을 수 있다는 건얼마나 큰 축복인가.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채로함께하는 사람과는 함께인 채로누구도 떠나지 않고무엇도 끝나지 않으며그렇게 영원할 수 있다는 것은.어렸을 땐 이야기의 끝이 무서웠다.그들의 행복이 영원할지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었으므로.그들이 떠나간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그들의 손 한번 잡아 볼 수 없고숨결 한번 느껴 볼 수 없으므로. 그럼에도 이야기의 끝이란 얼마나 큰 축복인가.시간이 멈춘 청하 공진시장을 거닐며공기에 벽돌에 슬레이트 지붕에 스며 있는사랑과 따스함을 만져 볼 수 있다는 것이.크릴새우 먹는 펭귄과바다사자 먹는 북극곰이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는 곳에우리도 크고 작은 발을 얹어 볼 수 있다는 것이. 그가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가 그를 사랑하듯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그 멈춘 이야기 속에 우리 이야기 한 스푼 섞어서다시 한번 이어 나가게 할 수 있다는 것이.- 글 : 이가은(서울대 국문과 박사 수료) 임주은 임주은 1982년 포항에서 태어났으며 대구가톨릭대 공예과를 졸업했다. 개인전 2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아트페어에 서양화 작가로 참여했다. 현재 포항문화재단 이사, 포항청년작가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 포항지부, 경북청년작가회 등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3-10-23

“잠수복 입은 해녀, 흑백사진으로 돋보이게 하고 싶었죠”

만나게 될 사람은 언젠가는 만나게 된다. 김수정 사진가와는 20년 가까이 인사를 나누던 동네 이웃이었다. 특유의 활달한 붙임성으로 해녀들과 작업한다고 했을 때 만해도 이토록 진심인지 몰랐다. 그 후로는 다양한 곳에서 김수정 석 자를 듣는 일이 많아졌다.그리고 지난 봄, 포항 북구 방석리 바닷가의 질펀한 굿판에서 김 작가를 만났다. 밤을 새우는 동해안별신굿을 렌즈에 담으면서도 고단한 기색은 없었다. 되려 사라져가는 것을 기록하는 사명감으로 하나라도 놓칠까 긴장을 늦추지 않는 모습이었다.도대체 무엇이 사진가를 드센 바다와 떠들썩한 굿판으로 부르는 것일까. ‘사진의 섬 송도’ 우수작가로 선정되어 전시를 열고 있는 김수정 동해해녀사진연구소장을 ‘갤러리포항’에서 만났다. -해녀가 사용하는 어구에 초점을 맞춘 전시 포스터가 인상적이다.△해녀들이 허리에 착용하는 ‘나바리’이다. 허리띠에 납을 연결한 것으로 수심에 따라 무게를 조절한다. 수심이 얕은 곳은 가볍게 착용하고 깊은 곳은 무겁게 착용한다. 뭘 잡느냐에 따라 나바리의 무게가 다르다. 해삼을 작업할 때보다 말똥성게 작업할 때 상대적으로 가볍게 한다. 나바리는 생각보다 무겁다. 연로한 여성이 메기는 더욱 그렇다. 무거울수록 잠수하기 수월하지만 물 위로 올라오기 힘들다. 물질에 지쳐 기운이 빠지면 위험에 빠질 수 있는 만큼 무게를 신중하게 정해야 한다. 물 위로 올라가는 일은 해녀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흑백 사진만으로 이번 전시를 구성한 이유가 궁금하다.△흑백의 단순함으로 잠수복을 입은 해녀를 돋보이게 하고 싶었다. 제복 판타지라고 해야 하나. 평상시는 평범한 촌로지만 잠수복으로 갈아입으면 그렇게 멋있게 보이더라. 해녀들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 보면 모질고 기구하기 짝이 없지만 해녀들에게는 강인한 성정이 있다. 운명처럼 또는 곤궁한 삶이 밀어내어 어쩔 수 없이 물질을 하게 됐더라도, 해녀들은 하나같이 바다가 고요하고 편안하다고 말한다. 물속이 예쁘다고 하더라. 맨몸으로 드센 물살을 가르는 해녀의 강인함을 색을 섞지 않고 전하고 싶었다. -해녀들을 렌즈에 담은 지 얼마나 되나.△부친 고향이 호미곶이고 할머니와 고모는 해녀였다. 그 모습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만 하던 차에, 2019년 포항문화재단의 권역별 사업 참여로 해녀들과 안면을 튼 뒤로 귀찮다고 할 정도로 쫓아다녔다. 당시 자료를 찾아보니 동해안 해녀에 관해서는 전무했다. 기록이 없다는 건 이들의 삶이 인정받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다행히 최근 해녀 문화에 관심이 높아졌다. 지난달 구룡포와 호미곶을 주축으로 경주, 영덕까지 아울러 경북해녀협회가 출범했다. 이들과 제주해녀축제를 참석해 카메라에 담았다.-사진가와 해녀들의 친근함이 사진에 배어 나온다.△지금에야 자연스러운 표정이 나오지만, 처음에는 뒤통수밖에 못 찍었다. 해녀들과 편안해지면서 서두르지 않고 구도를 잡거나 기법을 발휘할 여유가 생겼다. ‘사진쟁이’ 왔다면서 싫은 티를 팍팍 내던 해녀의 가족도 있었다. “내 마누라 찍지 말라”며 카메라를 박살 내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얼마나 무섭던지 벌벌 떨면서 쫓겨났는데 그대로 물러서면 안 되겠더라. 다음날 다시 가서 카메라값 천만 원이 있느냐고 따졌다. 그 뒤로 만날 때마다 인사를 드리니 지금은 포기했는지 받아주신다. 아내에게 험한 일을 시키는 것에 자격지심이 있었던 것 같다. 해녀들이 사진을 남기지 않으려는 이유는 천한 직업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사돈이나 친척들에게 험한 일 하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은 거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해녀를 대하는 사회적 인식이 변하고 있다.-촬영 현장이 늘 카메라를 반기지는 않을 텐데, 노하우가 있나.△작업 현장에서 스텝을 자처한다. 누가 나바리를 안 들고 왔다거나, ‘꼬께이(가기)’에 새 줄이 필요하다면 신속하게 나선다. 바닷물이 뚝뚝 떨어지는 해녀를 태우려고 뒷좌석에 대형 비닐을 구비해 놓았다. 미역 수레를 끌고 가다가 내가 보이면 실어달라는 분도 계신다. 흔쾌히 옮겨드리면 그냥은 또 안 보내주신다. 두둑이 배를 채우고 미역까지 얻어 온다.-듣자 하니 “해녀 집의 수저 개수까지 꿰고 있다”던데.△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하다. 해녀들도 밥으로 정을 나눈다. 점심쯤 되면 밥 먹고 가라고 전화가 걸려 온다. 힘들게 잡은 전복이나 소라, 미역도 나눠준다. 촬영하다 피곤하면 한 시간씩 낮잠을 자다 나오거나, 급하면 화장실을 내어주는 해녀도 있다. 사람 사는 정이 그렇다. 나라고 빈손으로 갈 수 있나. 수박이나 생수, 바나나, 에너지바를 사 들고 간다. 언제 만날지 모르니 늘 음료를 싣고 다닌다.-몇 년을 찍어도 더 찍을 것이 남아있나.△해녀들은 기량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뉜다. 상군은 바닷일을 전업으로 하지만 중, 하군은 식당이나 농사, 해산물이나 그물을 다듬는 허드렛일도 한다. 해녀들의 부지런함은 그냥 부지런한 정도가 아니다. 한창 물질을 할 때는 며칠 따라다니다가 몸살이 날 정도였다. 해녀들은 물질을 안 하면 밭일하고, 밭일이 없으면 소일거리를 찾아서라도 쉬지 않는다. 국숫집 하는 해녀 언니네 놀러 가보면 장사를 하면서 어느 날은 오징어를 손질하고 다른 날은 성게를 다듬는다. 그러면 그걸 촬영한다. 그러니 갈 때마다 새롭다.-해녀 하면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제주 해녀를 먼저 떠올린다. 피사체로서 제주 해녀와 동해안 해녀의 차이가 있나.△제주는 배를 타고 들어가서 작업을 한다. 반면 동해는 해녀가 걸어 들어가서 작업하기 때문에 연안에서 촬영이 가능하다. 바닷속 지형이 다르니 작업 여건은 물론 수확물도 다르다.(올해 동해안은 성게와 미역 수확량이 반으로 줄었고 문어도 시원찮다.) 제주 해녀들이 유네스코에 등재된 것은 공동체 문화이다. 육지 해녀들 또한 그들만의 공동체 문화를 가지고 있고 조명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사진은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예술이라고 한다. 해녀를 통해 무엇을 드러내고 싶은가.△해녀의 강인한 생명력과 끈기를 존경한다. 드센 바다에도 끄떡없는 해녀들은 절대로 꺾이지 않는다. 선주이던 남편의 억 소리 나는 빚을 물질로 갚더라. 해녀들은 가족을 먹여 살리고 마을을 살렸다. 이런 분들을 기억하지 않는 것에 화가 날 정도다. 해녀 사회도 고령화가 진행된다. 60대는 젊은 축에 들어간다. 70대 초반이 최고로 활발하고 수확량이 좋다. 여든이 넘으면 보통 은퇴하지만 일을 놓지 못하는 분도 있다. 해녀들이 왕성하게 활동할 때 최대한 기록해 두고 싶다. 고된 삶을 지나온 이들의 강인함에 집중해서 말이다.-동해안별신굿도 관심을 갖고 기록하는 것으로 안다.△매 순간이 위험인 바다에서 해녀들은 민간신앙을 신봉한다. 날이 궂은 날은 궂어서 걱정이고, 운 좋은 날이 계속되어도 불안하다. 물질은 욕심낼 게 아니기 때문이다. 자칫하다가는 사람의 숨이 아닌 물의 숨 ‘물숨’을 만난다. 제주 출신의 80대 해녀는 1년에 한 번 용왕제를 지낸다. 바닷가에서 쌀과 과일을 정성들여 차리고 두 손을 모아 “용왕님 덕분에 살았다”고 빈다. 해녀들은 오래전부터 액을 막고 가정의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무속에 의존했다. 코로나 사태로 미뤄졌던 굿판이 지난해부터 열리기 시작했다. 작년 구룡포 풍어제를 시작으로 영덕 금진리와 노물리, 포항 방석리와 영암 3리 등을 촬영했다. 굿판에는 낯설고 신기한 장면이 많다. 한번은 깃대를 든 아주머니가 심하게 흔들려 유심히 봤더니 깃대가 흔들리는 것이었다. 마을마다 기본 굿에 더해 색다른 굿이 있는 것도 이색적이다.-사진은 카메라가 찍는다지만 셔터를 누르는 사진가의 심성도 들어가게 마련이다.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하고 싶나.△해녀들이 옷을 갈아입는 컨테이너가 있다. 작업을 기다리면서 몸도 지지고 뒹굴며 쉬는 곳이다. 해녀들은 청력이 안 좋아서 고함치는 수준으로 대화한다. 컨테이너가 윙윙 울릴 정도이다. 그 안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찍고 싶은데 아직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200여 명의 해녀 프로필 사진을 촬영했다. 시간 날 때마다 경북 동해안 해녀들을 모두 만날 계획이다. 카메라를 메고 사람을 만나는 일이 즐겁다. 해녀는 평생을 같이하고픈 피사체이다.김수정 동해해녀사진연구소장은대구대학교 디자인대학원에서 사진영상을 전공했다. 꾸미는 것보다 자연스러움을 선호하고, 역사성과 사회성을 가진 대상에 관심이 간다. 성냥공장과 한지 공장, 코발트 광산, 호스피스 환자 등을 렌즈에 담다가 2019년부터 해녀를 주로 촬영한다. 개최한 전시로는 ‘꽃·사진·포슬린(포항중앙아트홀, 2015)’, ‘빛의 그림자(부산리빈갤러리, 2018)’, ‘호랑이 꼬리 해녀 이야기(꿈틀갤러리·새천년기념관·아라예술촌)’, ‘동해, 567km(미디어갤러리, 2021)’, ‘story in 구만리(갤러리포항, 2022)’, ‘해녀(부산리빈갤러리, 2023)’ 등 10여 차례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이 있다. 동해안 해녀 문화를 다룬 저서 ‘숨과 숨사이 해녀가 산다’, ‘포항의 해양문화’, ‘바다가 보물이라’ 등에 사진작가로 참여했다./배은정 작가

2023-10-23

영덕 바닷가 46m 청동 약사불… 노래하는 스님 ‘10년의 꿈’

영덕군 영덕읍 영덕대게로. 시원스레 펼쳐진 푸른 동해를 배경으로 거대한 약사불(藥師佛·약사여래, 약사유리광여래, 약사불로 불리는 부처. 불교에서 중생의 병을 고쳐주는, 즉 의사와 약사 역할을 하는 부처를 지칭)이 우뚝 서게 된다.길이 46m의 약사불 아래로는 법당을 만들어 10만의 부처를 봉안할 예정. 소요될 것으로 추정되는 예산만 200억 원. 어마어마한 프로젝트다. 이름하여 ‘청동 동해 약사불 대작불사(大作佛事)’이를 주도하고 있는 사람은 영덕 기원정사의 주지 자명 스님(58·속명 김상노).호방한 웃음과 거침없는 몸짓으로 대중에게 설법하고, 또한 자신이 작사한 노래를 통해 보다 친근하게 불교의 교리를 전하고 있는 그를 만났다. 청명한 가을 햇살이 좋던 지난 19일 오전이었다.그와 주고받은 이야기는 유쾌하고 희망적이었다. 자명 스님은 마주 앉은 사람을 편안한 웃음으로 이끄는 힘을 가진 승려였다.아래 그날 나눈 이야기를 바탕으로 자명 스님의 과거와 현재를 요약하고, 나아가 그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향후 10년의 꿈을 그려보려 한다. □ 가난했던 중고교 시절… “나를 위로해준 건 음악”1965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마산(지금의 창원시)으로 이주한 자명 스님.몸이 불편해 경제활동이 어려웠던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는 도축장에서 고기를 사다가 바구니에 이고 다니며 팔았다. 행상으로 3남 1녀를 키우던 어머니가 자명 스님이 열두 살이던 때 세상을 떠났다. 이어 3년 후엔 천식을 앓던 아버지까지 돌아가신다.불행은 연이어 오는 것일까? 자명 스님의 중고교 시절엔 형님 둘도 불귀의 객이 됐다. 안타까운 요절이었다. 소년 김상노(자명 스님)는 험한 세상에 누이와 단 둘이 남겨졌다. 그 시절 ‘외로운 소년 김상노’를 위로해준 건 라디오에서 들려오던 노래들.‘경남의 명문 고교’로 불리는 마산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대학 진학은 생각할 수 없었다. 학비가 없었으니까. 고교를 졸업하고는 고물 수집을 시작했다. 그런데, 남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고물을 모은 자명 스님은 20대 초반에 작지 않은 돈을 벌게 된다.자신이 번 돈으로 대학을 갈 수 있게 되자, 경남대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한다. 이후에도 막노동 등으로 학비를 마련하며 대학을 다녔다. 낙천적이고 활달한 기질은 대학에서도 자명 스님을 주목받게 했다. 학교를 마치고는 다소 생뚱맞게도 보험 영업에 뛰어들었다.자명 스님은 보험 영업에서도 최고의 성과를 거둔다. 당시 프로야구 선수 선동열이 약 1억 원쯤의 연봉을 받았는데, 자명 스님은 보험왕이 돼 한 달에 1천만 원 이상을 벌었다.드라마 같은 자명 스님의 인생은 30대에도 이어진다. 1995년엔 무소속으로 출마해 만 30세에 최연소 도의원이 된 것.그때 지역 아파트 단지에 주차된 차의 유리창을 닦아주고는 ‘맑은 세상을 만들겠습니다’라고 쓰인 조그만 명함을 와이퍼에 끼워둔 선거운동 방식은 지금까지도 마산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정치판에서 부대끼며 권력의 덧없음을 돈오(頓悟·갑작스런 깨달음)한 자명 스님이 출가를 결심한 건 2005년이다. 산속의 컴컴한 토굴에서 1년 6개월을 지내며 마침내 자명 스님은 석가모니의 진면목에 눈뜨게 된다.□ 스승 영경 스님의 화두 “칼끝에 묻은 꿀을 빨고 살지 마라”2012년 출가한 지 7년이 흐른 후 자명 스님은 양산 통도사에서 영경 스님의 상좌(上佐)가 된다. 스승은 이런 공안(公案·화두)을 자명 스님에게 던졌다고 한다.“대장부답게 살아라. 칼끝에 묻은 꿀이나 핥고 살아서는 안 된다.”자명 스님은 최근 10년 동안 10장의 찬불가 앨범을 만들었다. 사람들에게 설법하는 방식으로 ‘노래’를 택한 것이다. 그 이유는 뭘까? 자명 스님은 이렇게 답했다.“불교 신자들이 늙어가고 있다. 이는 저변의 약화로 이어진다. 한국에선 기독교 신자가 17%, 가톨릭 신자가 7%, 불교 신자가 16%쯤 된다고 한다. 이는 종교 자체에 무관심하거나 비판적인 사람들이 60% 이상이라는 이야기다. 1천600년 한국 불교의 역사와 부처님이 펼친 뜻을 보다 쉽고 편안하게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런 고민 끝에 나온 게 ‘노래로 하는 설법’이다.”거기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내가 만들어 부르는 찬불가가 사람들에게 작은 치유와 위로로 다가설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 동해안의 ‘랜드마크’가 될 수도 있는 청동 약사대불찬불가로 보다 친숙하게 불교의 교리를 설파해온 자명 스님은 지난 10년간 또 하나의 큰 불사를 차근차근 준비해왔다.영덕 기원정사 주변을 깔끔하게 정비하고, 입구에는 도로를 만들었다. 도로 개설 허가를 받고 완공하기까지 8년이 걸렸다고 한다.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다.이제 ‘청동 동해 약사불 대작불사’의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일단 오는 29일 일요일엔 ‘불두봉안(佛頭奉安) 봉축법회’와 이를 축하하는 ‘산사 음악회’가 열린다.‘불두봉안’이란 부처의 머리를 받들어 모시는 행사를 말한다. 이미 기원정사 인근엔 11m에 이르는 불두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날 음악회엔 가수 김범룡과 윤태화, 광우 스님과 범준 스님이 초청됐다.46m의 대형 청동 약사불만으로도 영덕을 넘어 동해안의 랜드마크가 될 가능성이 높은데, 자명 스님의 미래 계획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앞으로 10년 동안 대형 와불(臥佛·누워있는 불상)과 아미타불(阿彌陀佛·서방 극락정토의 주인인 부처)을 만드는 불사도 동시에 진행할 예정이다.”짙푸른 동해 곁에 우뚝 설 초대형 약사불의 ‘불두’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한 이들은 이번 휴일 영덕 기원정사를 찾아 가을날 정취와 찬불가, 가수들의 공연까지 즐겨보는 건 어떨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10-23

호국의 고장 영덕서 ‘우리의 영웅’을 노래하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숨결이 살아있는 영덕에서 지난 21일 호국 벨트 조성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호국보훈 음악회 ‘다시, 우리의 영웅들과 함께’가 성황리에 개최됐다.이날 오후 영덕군 장사상륙작 전승기념공원에서 열린 행사는 영덕군과 경북남부보훈지청이 주최하고, 경북매일신문이 주관했으며 김동희 영덕군 부군수, 김지현 경북남부보훈지청장과 손덕수 영덕군의회의장, 최윤채 본지 대표이사 등 내빈과 영덕군민 1천여명이 대거 참석했다.식전 행사는 영덕줌마난타의 신명나는 공연으로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어 인칸토솔리스트의 앙상블이 가을 하늘과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선율을 선보였다.이후 박문태 역사해설가의 장사상륙작전 의미에 대한 설명과 제2작전사령부 의장대의 절도 있는 시범 공연이 관람객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었던 772명 학도병의 숭고한 희생을 소재로 한 영화 ‘장사리:잊혀진 영웅들’ 장면을 보여주며, 국군장병들의 고마움과 행복한 오늘, 밝고 희망찬 내일을 기원하는 시간을 가졌다. 죠이풀어린이합창단의 맑고 청아한 음색과 흥겨운 율동은 관람객들에게 순수한 감동을 선사해줬다.곧이어 ‘미스트롯 2’ 경연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준 인기 가수 은가은을 비롯해, 듀엣가수 최성과 서후의 공연이 이어지자 관중들이 동시에 환호하며 한껏 열기를 더했다.이들은 댄스와 함께 신나는 ‘인기곡 메들리’로 열정적인 무대를 선사했다.마지막 무대의 주인공은 바로 마야였다. 마야는 ‘쿨하게’, ‘붉은 노을’, ‘진달래꽃’ 등 히트곡을 잇달아 부르며 분위기를 무르익게 했다.관객들은 객석까지 내려와 열창하는 출연 가수들과 함께 환호하고 춤을 추며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김동희 영덕군 부군수는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피지도 못한 이들의 넋을 기리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며 “호국의 고장 영덕에서 좋은 추억 많이 만들어 갔으면 한다”고 전했다. 김지현 경북남부보훈지청장은 “국토 수호를 위해 애쓴 호국영령들에게 존경과 감사를 드리다”면서 “그분들의 뜻을 받아 우리나라 발전을 위해 나아가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이어 손덕수 영덕군의회의장은 “오늘 음악회는 보훈단체 뿐만 아니라 주민과 함께하는 음악회다”며 “모두 즐기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고 덧붙였다.최윤채 경북매일신문 사장은 “오늘 이 자리가 영덕군이 호국보훈의 중심지로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영덕이 호국보훈의 성지가 될 수 있도록 국가적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윤식·이시라기자사진=이용선기자

2023-10-22

포항읍을 시로 승격시키고, 호리못을 만들어

최원수 선생은 1949년 1월 8일 영일군수에 임명되어 1년 3개월 동안 영일군을 이끈 후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총선(영일군 갑구)에서 당선된다. 군수와 국회의원의 임기를 합쳐 5년 3개월이라는 그리 길지 않은 공직 생활을 했는데, 그마저도 전쟁 때문에 온전한 의정 활동을 할 수 없는 여건이었다. 하지만 그가 해낸 굵직한 일을 살펴보면 진정한 지도자는 어떤 존재인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김도형(이하 김) : 당시 영일군수의 위상은 어느 정도였습니까?최승태(이하 최) : 경상북도 시장·군수 회의에 가면 큰 목소리를 낼 정도로 대단했지. 영일군이 농지가 넓고 어획량이 많았거든. 그리고 군수의 권한이 지금보다 훨씬 컸어. 경찰서장이 아버지를 깍듯이 모셨지. 경찰서 정보과의 힘이 셌는데 정보2계 담당이 거의 매일 아버지를 찾아와 동향 보고를 했어.김 : 최원수 선생이 영일군수로 재직할 때 업적이라면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요?최 : 영일군에 포항읍과 구룡포읍 2개 읍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포항읍을 시로 승격한 것은 큰 의미가 있지. 사실 당시 포항읍이 시로 승격될 만한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는지는 의문이야. 하지만 아버지가 워낙에 열정적으로 시 승격을 추진했고, 정부 인맥도 좋아서 시로 승격되었던 것 같아.포항시의 모체라 할 수 있는 영일군의 광복 당시 행정구역은 포항읍을 포함해 2읍 13면 1출장소 237정동리(町洞里)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당시까지도 경북의 1부, 22군, 11읍, 240면이 1943년 10월 행정구역과 같은 수로 나타난 것으로 볼 때 영일군의 경우도 정부 수립 때까지 읍면의 수는 변동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포항읍은 1949년 8월 14일 포항부로 승격되어 영일군에서 분리되었고 8월 15일 ‘지방자치법’ 법률 제32호에 의해 포항시로 개칭되었다. 포항시사편찬위원회, ‘포항시사’, 2010, 165∼166쪽 참조 다음의 일화는 최원수 영일군수의 안목과 추진력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영일군수로 재직할 때 포항시 승격 추진 운동을 전개하여 이일우, 박동주, 박일천 등과 시 승격 진정차 상경하니 내무부 어느 국장이 농담조로 “포항읍이 시로 승격되면 영일군수의 산하에서 이탈 행정구역이 독립되는데, 군수가 솔선하여 시 승격 운동을 하러 상경해 진정하는 예(例)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찌 최 군수는 앞장서서 진정을 하러 다닙니까” 하고 물으니 최원수 군수가 “내가 백 년 동안 영일군수로 있는 것도 아닌데 영일군의 발전보다 포항이 시가 되어 번영하는 것이 국가백년지대계를 위하여 바람직한 일”이라고 대답하였다. 포항시사편찬위원회, ‘포항시사’, 1987, 879∼880쪽김 : 최원수 선생이 영일군수로 재직할 때 기억에 남는 일이 있는지요?최 : 아버지는 도시락을 들고 출근하셨지. 특별한 연회 외에는 외식을 거의 하지 않았어. 할아버지처럼 아버지도 원칙주의자였지. 그리고 영일군 공무원들이 탄복할 정도로 글씨체가 좋았어.김 : 최원수 선생은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영일군 갑구에 출마해 당선됩니다. 그 직후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극도의 혼란 속에서 의정 활동을 하게 됩니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성과로 어떤 것이 있을까요?최 : 우선 흥해 신광에 있는 포항에서 가장 큰 저수지 용연지(龍淵池, 호리못)를 만든 것을 꼽을 수 있겠지. 당시 우리나라는 농업 기반의 경제였잖아. 사람들이 먹고살려면 농사가 잘돼야 하고 농사가 잘되려면 농업용수를 확보해야 했지. 하지만 당시 농지는 대부분 천수답이었어. 그래서 아버지는 전쟁 중에도 농림부에서 막대한 예산을 끌어와 용연지를 만든 거야. 그 덕분에 흥해의 경작 면적이 영일군 전체 경작 면적의 40% 가까이 된 걸로 기억해. 흥해 사람들이 감사의 뜻으로 공적비를 세워주었지.용연지는 1952년 8월 15일 착공해 1961년 12월 30일 준공되었다. 저수량은 657만t이며, 용수로는 2만 8천368m에 이른다. 공적비는 1990년에 세워졌으며 “흥해읍 매산리 외 52개 마을 농민들과 뜻있는 사람들이 정성을 모아 이 비를 세우다”라고 새겨져 있다.김 : 전쟁 중에 대규모의 저수지를 만드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최 : 오죽했겠어. 그 정도 공사를 하려면 불도저가 있어야 했지만 당시 포항에는 한 대도 없었어. 부산에서 불도저를 갖고 와 공사를 했지.김 : 최원수 선생의 이력을 보면 학교를 몇 군데 설립한 게 눈에 띕니다.최 : 해아중학교(현 청하중학교)와 죽장중학교, 기계중학교 세 곳을 설립했지. 아버지는 지역과 나라를 바로 세우려면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해 학교 설립에 앞장섰지. 김 : 학교를 세우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데 최원수 선생은 어떻게 짧은 기간에 학교 세 곳을 세우셨는지 궁금하군요.최 : 아버지는 학교를 하루빨리 개교하는 게 중요하니까 문교부에 일단 학교 설립 인가부터 내달라고 요청했지. 그뿐 아니라 동지중·고등학교가 설립 인가를 받는 과정은 물론 학교 건물을 지을 때 미군 부대에서 자재 지원을 받는 과정에서도 아버지가 큰 도움을 주셨어. 동지교육재단의 설립자인 하태환씨가 아버지와 외사촌이라는 인연도 있었지.김 : 최원수 선생은 용연지를 조성해 경제적 기반을 다졌고, 학교를 설립해 인재 양성에 힘쓰셨군요.최 : 그렇지. 나라와 지역의 기초를 단단히 다지려면 경제와 교육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셨어.김 : 그 밖에 기억나는 일이 있는지요?최 : 6·25 전쟁이 터지고 보도연맹 사건이 있었잖아. 트럭에 실려가던 억울한 보도연맹원들을 아버지가 여럿 구해냈어. 좌익으로 찍히면 죽음을 면치 못했는데 억울한 좌익 연루자를 여러 명 살려냈지.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에 빨치산이 포항에서도 암약했는데 대표적인 곳이 죽장이야. 죽장은 산악지대와 연결되면서 민가도 있으니까 궁지에 몰린 빨치산이 식량을 거둬가기에 좋은 곳이었지. 국군과 경찰로서는 죽장이 골칫거리일 수밖에 없었어. 그때 그 유명한 경찰 김종원이 죽장을 소개(疏開)하려고 하자 아버지가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울 일이 있냐며 강력하게 반대했어. 죽장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김종원과 대판 싸웠지. 아버지는 당시 비호(飛虎)라고 불리던 김동헌을 경찰지서장으로 투입해 양민은 보호하면서 빨치산을 제압했어. 아버지가 그때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더라면 죽장에 어떤 비극이 일어났을지 몰라. 죽장 사람들이 아버지가 죽장을 살렸다며 공덕비를 세워주었지.김종원(1922∼1964)은 광복 이후 육군헌병총사령부 부사령관, 경남지구 계엄사령관 등을 역임한 군인이자 경찰이다. 1951년 2월 ‘거창민간인학살사건’이 발생하자 3월 29일 국회의원 신중목이 사건의 진상을 폭로했고, 합동조사단이 구성되었다. 4월 7일 합동진상조사단이 거창군 신원면으로 가던 도중,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 김종원 대령이 부하들을 공비로 위장 매복시켜 합동조사단에 공포를 쏘아 현장 접근을 방해하도록 지시하고 실행했음을 밝혀냈다. 김종원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대통령 특사로 석방된 뒤 군에 복직과 동시에 파면 뒤 경찰로 이직했다. 1952년 7월 전북경찰국장을 시작으로 경북경찰국장 등을 거친 뒤 경찰 총수인 치안국장 등을 역임했다. 치안국장 재직 시절에는 1956년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의 배후로 밝혀져 파면된 뒤 구속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최승태1937년 포항에서 태어나 포항초등학교와 포항중학교, 계성고등학교, 국민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무역회사에서 근무하다가 포항으로 돌아와 사업을 하며 부친(최원수, 건국 후 초대 영일군수, 제2대 국회의원)의 정치적 기반을 지켰다. 민주화추진협의회와 민주산악회에 참여해 김영삼 대통령 당선에 헌신했으며, 경북사격연맹 회장, 국제사격연맹 심판관, 라이온스클럽 경북 309-N 지구 총재를 맡았다.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최승태

2023-10-22

이승만 눈에 들어 영일군수에 발탁 … 이범석과 가까워

1948년 5월 10일에 제헌의원 선거가 실시된다. 이 선거는 인구 10만 명 기준의 1개 선거구에서 1명을 선출하는 소선거구제였다. 전국 200개 의석 가운데 경상북도가 33개 의석을 차지했으며 영일군(현재 포항시에 해당)은 갑구·을구의 선거구에서 의원 2명을 선출했다. 최원수 선생은 영일군 갑구에 출마했지만 박순석 목사에 밀려 낙선했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1949년 1월 8일 영일군수에 임명돼 1950년 4월 20일까지 1년 3개월 동안 영일군을 이끌었다. 최원수 선생이 영일군수가 되는 과정과 당시 포항의 정치, 사회 상황 등에 대해 들어보았다. 김도형(이하 김) : 최원수 선생이 영일군수가 되는 과정이 궁금하군요.최승태(이하 최) : 아버지는 광복 후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영일군지부장을 맡으면서 지역 우익의 구심이 되었지. 학력이 좋은 데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활동도 열성적으로 했으니 정부가 출범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발탁했다고 보면 될 거야. 경북 지역의 시장·군수 중에 최연소였지.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는 1946년 2월 8일 서울에서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통합, 발족한 단체다. 발족 당시의 임원은 총재 이승만, 부총재 김구, 고문 김창숙·함태영·조만식 등이다. 전국의 시·도·군까지 조직을 확대하면서 국민운동 단체로서 방대한 조직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조직이 비대해지고 이승만, 김구, 김규식, 신익희 등 여러 계열의 파쟁으로 인해 발족 직후부터 간부 진영의 개편이 되풀이되었다. 이 단체는 후일 이승만 계열의 우익 국민운동 조직으로 변화하면서 남한 단독정부를 추진하는 이승만 지지 세력이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김 : 혹시 조부께서는 장남(최원수)이 가업을 이어받길 바라지 않았습니까?최 : 할아버지는 그런 마음이 있었지. 실제로 아버지는 한의학에도 조예가 깊어서 웬만한 한의사 못지않은 수준이었어. 하지만 아버지는 조용히 한의원을 하고 있을 분이 아니었지. 할아버지가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주는 분이었다면, 아버지는 세상의 병을 고치고 싶어 하셨던 분이었어.김 : 당시 일본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 중 상당수가 좌익 활동을 했지요. 최원수 선생은 어떻게 우익 쪽에서 활동하게 되었나요?최 : 일제강점기 때부터 포항에는 좌익이 많았어. 포항을 제2의 모스크바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한 예로, 일제강점기 때 영일군 경찰서장이 좌익이었는데 경찰서장이 죽자 좌익의 주도로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렀지. 좌익이 워낙에 득세하니 아버지는 세상이 사회주의로 기울어져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던 것 같아.김 : 당시에 좌익이 많았던 이유가 있을까요?최 : 일제강점기부터 많은 지식인이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는데 포항도 다를 바 없었지. 광복 후에는 사회경제적으로 사회주의가 확산되기 좋은 상황이었어. 대표적인 이슈가 토지개혁이었지. 남쪽에서 추진하던 토지개혁에 문제가 없지 않았거든. 사회주의 세력이 이걸 파고들었지.김 : 혹시 포항 좌익의 거점 같은 게 있었는지요?최 : 불종거리에 있던 수복여관, 죽도시장 앞에 있던 종로여관이 좌익의 아지트였어. 나중에 좌익 검거 바람이 불 때 종로여관의 주인이 일본으로 피신했지. 그 바람에 그 집 식구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어.김 : 좌우익 간의 갈등이 심했을 텐데 혹시 기억나는 일이 있는지요?최 : 아버지가 군수가 되기 전에 우리 집이 지금 북포항우체국 근처였어. 집에서 청년단체 사람들이 모여 회의하곤 했는데, 어느 날 어른 머리만 한 큰 돌이 창문을 깨고 집 안으로 들어왔어. 아마 누가 그 돌을 맞았으면 중상을 입었을 거야. 다행히 방바닥에 돌이 떨어져 사람은 다치지 않았지. 그 자리에 있던 박일천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 돌 던진 사람을 잡아왔는데, 아버지는 아는 사람이라며 풀어주라고 했어.약운(若雲) 박일천(1915∼1998)은 1952년 5월 시의원들이 간접선거로 선출한 포항 최초의 민선 시장이다. 시장 임기는 1952년 5월 5일부터 1953년 6월 30일까지 1년 2개월이었다. 최원수 선생의 신임이 각별했던 동지로 알려져 있다. 박일천은 광복 후 포항 지역 최초의 역사지인 ‘일월향지(日月鄕誌)’(1967)의 발간을 주도했고 포항종합제철 유치 운동, 포항 4년제 대학 설립 유치 청원 등에 앞장섰다. 4년제 대학 설립 유치 청원은 후일 포스텍 설립의 밑거름이 되었다. 1982년 발족한 포항지역발전협의회의 초대 회장을 맡았으며, 1998년 작고 후에는 유족들이 유산 2억 원을 포스텍의 발전기금으로 기탁해 미담이 되었다.김 : 그 후에도 선생님 댁이 좌익의 공격을 받았습니까?최 : 아버지가 영일군수에 취임한 후 관사로 이사 갔어. 지금 포항세무서와 포은중앙도서관 중간에 있는 적산가옥이 군수 관사였지. 그 관사가 수도산에서 가까웠어. 좌익이 수도산에서 나팔을 불며 시위하면 어린 나조차 공포감에 휩싸였어. 그뿐 아니라 좌익이 관사 담벼락에 붉은색 표시를 해놓고 테러 표적으로 삼았지. 어머니는 항상 물을 팔팔 끓여놓고 혹시 모를 테러에 대비했어. 좌익 쪽에서 갑자기 공격해 들어오면 끓인 물을 퍼부으려고 말이야. 당시에 우익 활동을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지. 김 : 최원수 선생이 광복 후 가깝게 지낸 분 가운데 기억에 남는 분이 있습니까?최 : 아버지는 많은 사람과 친분이 있었는데 철기 이범석 장군과 특히 가까웠지.철기(鐵驥) 이범석(1900∼1972)은 광복군 참모장이자 대한민국 정부 수립 때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장관을 겸임했으며 ‘국군의 아버지’로 불린다. 1915년 여운형과 중국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 교관 등을 맡았으며 1919년 10월 청산리대첩에서 제2제대(第二梯隊)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한 뒤에는 제2지대장으로 미국군과 합동작전에 참가했고 1945년에 광복군 참모장이 되었다. 1946년 6월 환국해 정부 수립 때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장관을 겸임했다. 1951년 12월 이기붕 등과 자유당을 창당했으며, 1952년에는 부통령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했고, 1953년 이승만의 족청계(族靑系, 조선민족청년단) 숙청으로 자유당에서 제명되었다. 1967년 1월 윤보선, 유진오, 백낙준과 함께 4자 회담을 성사시켜 통합 야당 신민당 출범에 이바지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김 : 이범석 장군과 최원수 선생 사이에 기억나는 일화가 있는지요?최 : 어린 나이에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한 이범석 장군은 중화요리를 잘 먹었지. 아버지는 이범석 장군 덕분에 중화요리를 잘 먹었고 중화요리에 대한 지식도 꽤 있었어. 아버지가 영일군수 시절에 집이나 군수 관사에서 가끔 연회를 열었는데 그때마다 동순관(同順館, 중화요리 전문점)의 화교 주방장을 불러서 중화요리를 부탁했지. 동순관 주방장이 중화요리를 잘 만들었거든.포항에서 처음 문을 연 중화요리 전문점은 화교가 운영했다. 제1호는 진가현, 강성모가 동업한 동순관으로 후일 부산각(富山閣, 진가현)과 길성관(吉星關, 강성모)으로 분가했고, 이와는 별개로 중흥관(中興關, 왕문옥)이 있었다. 부산각과 길성관, 중흥관이 포항 중화요리 전문점의 트로이카를 이룬 셈이다. 진가현과 강성모는 한국인 자매와 결혼해 동서지간이 되었다. 현재 중앙상가에 있는 길성관이 유일하게 그 맥을 잇고 있다.최승태1937년 포항에서 태어나 포항초등학교와 포항중학교, 계성고등학교, 국민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무역회사에서 근무하다가 포항으로 돌아와 사업을 하며 부친(최원수, 건국 후 초대 영일군수, 제2대 국회의원)의 정치적 기반을 지켰다. 민주화추진협의회와 민주산악회에 참여해 김영삼 대통령 당선에 헌신했으며, 경북사격연맹 회장, 국제사격연맹 심판관, 라이온스클럽 경북 309-N 지구 총재를 맡았다.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최승태

2023-10-18

사후 162년 흐른 뒤 ‘흥무왕’으로 추존된 김유신

7세기 신라엔 ‘삼한일통(삼국통일)을 이끈 스타급 인물’이 여러 명 출현한다. 백제를 멸망시켜 딸 고타소(古陁炤)과 사위 김품석의 원수를 갚은 동시에 통일의 초석을 닦은 무열왕 김춘추, 강력한 군사대국 고구려가 무릎을 꿇게 만들고, 지속적으로 내정을 간섭하던 당나라를 나라 바깥으로 내쫓은 문무왕 김법민, 통일왕조 권력의 중앙 집중화를 이뤄 문화·예술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신문왕 김정명 등.3명의 왕 모두가 삼국통일의 험로에서 큰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삼한일통 과정에서 가장 주목받아 마땅한 단 한 명의 인물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던져진다면 아마도 대다수가 “김유신”이라 답할 게 분명하다.김유신은 673년 여름에 죽는다. 당시 그의 나이 79세. 외과 수술과 항암 치료제가 없던 시절. 남성의 평균수명이 마흔 살이 되지 않던 고대였음을 감안하면 150세쯤 산 것과 다름없다.김유신의 장례식은 성대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의 조카이기도 한 문무왕은 ‘김유신의 사망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비단 1천 필과 조 2천 석을 부조로 보내고 군악의 고취수(鼓吹手) 100명을 장례식에 보냈다. 김유신의 유해는 금산원(金山原)에 묻혔고, 왕의 명령으로 그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이 무덤 앞에 세워졌으며 수묘인(守墓人)을 두어 무덤을 지키게 했다’고 한다. ◆사후(死後) 1천350년째 끊임없이 이어지는 신라의 ‘영웅 전설’김유신이 신라에서 지녔던 위상은 사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는다. 사망한 지 162년의 시간이 흐른 835년. 김유신은 마침내 그 지위가 왕으로 격상된다. 단군조선에서 고려까지의 역사를 기술한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김유신은 835년 흥무왕(興武王)으로 추존(追尊·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는 것)된다.”비단 통일신라 시대만이 아니었다. 김유신의 삶과 죽음은 이후 또 다른 왕조인 고려와 조선에까지 문헌과 구전(口傳)을 통해 전해졌다.까마득한 옛날인 1천350년 전 세상을 떠난 한 신라인의 이야기가 ‘영웅 전설’처럼 21세기인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것이다.국회도서관 자료조사관인 박찬흥의 논문 ‘김유신 관련 사료를 통해 본 시기별 인식’은 신라에선 김유신이 거의 ‘신격화’ 됐었다는 걸 알려주고 있다. 이런 대목이다.“김유신은 살아 있을 때는 물론이고 죽은 뒤에도 신라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살아 있을 때는 태종과 문무왕을 보필하여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룩한 최고의 신하로 평가받았다. 당나라는 물론이고 고구려와 일본에서도 김유신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 평가했다. 김유신은 죽은 뒤에도 태종(김춘추)을 도와 대업을 이룬 ‘좋은 신하’ 또는 ‘성스런 신하’라고 인식됐다. 또, 문무왕과 함께 ‘두 명의 성인’으로 추앙되었으며, 불교적으로 33천(우주의 중심)의 한 사람이 내려온 것이 김유신이라고 인식됐다.” ◆고려는 ‘신령스런 장수’로, 조선은 ‘신라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한 왕조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새로운 왕조가 등장하면, 이전 왕국의 영웅은 평가 절하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럼에도 김유신에 관한 평가는 고려와 조선에서도 결코 낮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높아졌다고 봐도 무방하다.심지어 고려는 김유신을 신(神)의 자리에까지 가져다 놓는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 역시 김유신을 지목해 만고충신(萬古忠臣)이라 추켜세웠다.앞서 언급한 논문 ‘김유신 관련 사료를 통해 본 시기별 인식’에서 이와 관련된 부분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고려 때 김유신은 신라에 이어 진천현 태령산의 사당에서 국가제사로 받들어졌다. 윤관은 김유신이 신령스러운 기적을 많이 일으킨 장군으로 인식했고, 이승휴는 김유신이 오묘한 병서를 얻어 무예에 뛰어났다고 말했다. 고려 말의 정추도 김유신이 기이한 능력을 가진 장수이고 큰 무공을 세웠다고 인식했다. 조선시기에서도 무열왕·문무왕과 신하 김유신의 절대적인 신임 관계로 인해 김유신이 큰 공적을 세웠다는 평가가 지속됐다. 그리고 김유신이 신라 왕조 전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 보았다. 김유신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무(武)를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됐다. 그리고 성리학적 관점에서 이러한 김유신의 행적을 통해 그를 충신이라고 인식했다.”고려와 조선왕조의 평가만이 아니다. 일연의 ‘삼국유사’와 김부식의 ‘삼국사기’ 등 고문헌에 등장하는 김유신의 청소년 시절 일화를 읽어보면, ‘이건 일반 인간에 대한 기록이 아닌 영웅 탄생 설화에 가깝구나’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한성대학교 한국고대사연구소 학술연구원 박승범의 논문 ‘김유신의 생애와 역사적 의의-그 가계(家系)와 활동을 중심으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서술된 이야기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김유신이 태어난 이후 청년기까지의 활동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한다. ‘삼국사기-김유신 열전’에서는 15세에 화랑이 돼 그를 따르는 이른바 용화향도(龍華香徒)를 거느렸다는 것과 17세에 고구려·백제·말갈 등 외적을 평정해 삼국을 아우를 뜻을 품고 수도하다가 신선으로 여겨지는 난승(難勝)이라는 노인으로부터 비법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이듬해인 612년 거듭된 적의 침입에 웅대한 뜻을 갖고 있던 중 보검이 영험을 얻었다는 것 등의 일을 전하고 있다. 이와 달리 ‘삼국유사’에서는 18세가 되던 해에 검술을 닦아 국선(國仙)이 되었는데, 이때부터 이미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정벌할 뜻을 갖고 있던 중 고구려 첩자의 꾐에 빠져 위기에 처했으나 신라 국가제사 중 대사에 해당되는 제장인 삼산(三山)의 신령들이 도움을 주어 위기를 벗어났다는 것을 기술하고 있다.” ◆비판하는 역사학자도 있으나, 빼어나고 돌올한 인물인 것은 분명해이처럼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위업을 이룬 ‘신화적 존재’로 부각돼온 김유신이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그를 우호적 시선으로 보지는 않는다. 사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가 좋아하는 인간’이란 세상에 없다.단재 신채호(1880~1936)는 한국 ‘근현대 민족주의 사학’의 효시이자 거두라 할 수 있는 인물. 단재와 그의 견해를 따르는 역사학자들은 김유신을 매섭게 질타한다. 단재의 저서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는 김유신을 지목해 ‘교활한 음모로 적국을 혼란에 빠뜨린 음험하고 무서운 정치가’라고 비판한다. 이에 수긍하는 후학들도 적지 않다.김유신에 관한 비판적 견해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고개가 갸우뚱한다. 앞서 인용한 박승범의 논문은 기자의 의문에 이런 답을 들려주고 있다.“김유신 가문은 금관가야 왕족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될 영화를 잃어버리고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신라 사회에 편입되었다…(중략) 김유신 가문은 왕족으로서 누려야만 했던 지위와 영화를 신라의 유력한 가문이 되면서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김유신 가문은 정당한 전략은 물론이고 때로는 비열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모략을 구사하기도 했다. 이러한 김유신의 모습은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평생의 공적을 전장에서 세운 사람이 아니라, 음모로 이웃나라를 어지럽힌 인물’이라고 평가할 만큼 부정적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김유신과 그 가문이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과 의지의 산물이었다. 신라만이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에 정복당한 다른 고대국가들은 최상의 경우 그 국명만 남겼을 뿐 구성원들의 존재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따라서 김유신이 보여준 생존전략을 단순히 협잡, 또는 음험함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할 수 있다.”길고 지루했던 여름이 끝나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지난 주말. 경주시 충효동을 찾았다. 봄에 이어 김유신의 묘를 다시 한 번 둘러보기 위해서였다.기나긴 세월 동안 숭배와 비난의 목소리를 모두 듣고 있지만, 걸출하고 돌올한 신라의 명장(名將)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김유신.화려하게 조성된 ‘삼국통일 주역’의 봉분은 높고 거대했고, 개국공 순충장열 흥무왕릉(開國公 純忠壯烈 興武王陵)이라 적힌 비석은 후손들의 자랑이 되기에 충분했다.궁금하다. 김유신은 자신의 이름이 1천35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지금도 인구에 회자될 것을 스스로도 예견했을지. (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10-17

저것은 나의 물고기야, 소리치고 싶은

삶이 부끄러워질 때무엇 하나 하는 일 없이 밥이나 먹고똥이나 싸는 존재로 느껴질 때면오어사로 간다.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지만,살다 보면 그렇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노력해도 손에 잡히는 수확이 없고고운 말을 듣고도 비뚤게 되받아치곤 한다.좋은 씨를 뿌린 곳에도 가라지가 자라지 않는가. 생각해 보면 참 당연한 일이다,분명 내가 먹은 것은 밥인데나에게서 나오는 건 똥이라는 사실은.당연하지만, 슬픈 일이다.비틀비틀 흔들리며 원효교를 지나갈 때다리 아래 물가에서 누가 나를 부른다.얘, 너는 똥을 누었구나. 나는 물고기를 누었단다.물고기를 먹었으니 물고기가 나오는 게 당연하지 않니.이리 내려다보렴, 이리 내려와 보렴.여기 이 물속에 나의 물고기가 가득하지 않니. 내려다보니 못에는 팔뚝만 한 회색 잉어들이 힘껏 노닌다.그 이름 오어지(吾魚池)의 어(魚) 자가 부끄럽지 않을 만큼.나는 내 이름 석 자가 왜 이리 부끄러운지 모르겠다.누구 하나 못난 이름 타고난 이는 없을 텐데.오어지의 포동포동한 잉어들을 들여다보노라면“나의 물고기, 저것은 나의 물고기야!” 하고나도 한번 소리쳐 불러 보고 싶어진다.- 글 : 이가은(서울대 국문과 박사 수료)임주은1982년 포항에서 태어났으며 대구가톨릭대 공예과를 졸업했다. 개인전 2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아트페어에 서양화 작가로 참여했다. 현재 포항문화재단 이사, 포항청년작가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 포항지부, 경북청년작가회 등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3-10-16

순국선열 기억하며… 영덕서 호국보훈 음악회 열린다

“영덕군은 목숨을 걸고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한 의병장 신돌석의 고향인 동시에, 일제강점기 애국항일운동의 역사적 한 장면으로 기록된 3·18 영해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다. 또한,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해낸 학도병들의 숭고한 희생으로 기억되는 장사상륙작전이 진행된 곳이기도 하다.”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숨결이 살아있는 영덕군과 오늘날 한국을 있게 한 국가 유공자에 대한 예우를 담당하는 경북남부보훈지청(지청장 김지현)이 ‘호국 벨트 조성 프로젝트’에 적극 나서고 있다. 실제로 영덕은 228명의 독립유공자가 생활하고 있고, 이는 군 단위로는 경북 최대 숫자다.김광열 영덕군수를 비롯한 공무원과 영덕군민들은 이러한 ‘호국보훈의 이미지’를 극대화시키고, 나라를 위해 기꺼이 희생한 이들의 넋을 기리고자 호국 벨트 조성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 것.오는 21일엔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영덕군과 경북남부보훈지청이 공동 주최하는 호국보훈 음악회가 열린다. 이름 하여 ‘다시, 우리의 영웅들과 함께’.21일 오후 2시 장사상륙작전이 펼쳐진 장사해수욕장 전승기념공원에서 진행될 이번 음악회엔 지역민들이 준비한 식전 공연이 열리고, 영덕군 어린이 합창단도 참여한다. 최성과 박혜민, 은가은, 마야 등의 가수는 공연을 통해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될 순국선열의 숭고한 뜻을 되새기게 된다.“이날 행사엔 생존한 애국지사와 독립유공자 어르신들도 초대한다”는 것이 영덕군청의 설명이다. 음악회 사회는 아나운서 문채희가 맡는다.향후 다양한 방면에서 추진될 영덕군의 호국 벨트 조성사업과 호국보훈 음악회 ‘다시, 우리의 영웅들과 함께’에 앞서 위에 언급된 신돌석 의병장과 3·18 영해 독립만세운동, 장사상륙작전에 관해 알아보고자 한다.이는 영덕군의 긍지이자, 나아가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다시 학습한다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서른 살이 되기 전 안타깝게 순국한 신돌석… 사후 건국공로훈장 추서의병(義兵)은 ‘국가가 적으로부터 침탈당해 위기에 처했을 때 통치권자의 명령 없이 스스로 뜻을 세워 외적에 대항해 싸우는 민간인 병사’다. 의병이 된다는 건 하나뿐인 목숨을 걸어야하는 일이니 누구도 선뜻 나서기가 쉽지 않다.조선이 기울어가던 무렵부터 대한제국을 거쳐 일제강점기까지 영덕에선 적지 않은 의병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나 조국을 위해 싸웠다. 그들이 보여줬던 애국정신은 오늘날까지도 선명하다. 사학자들은 영덕 출신 의병장 신돌석을 지목해 “최초의 평민 의병장으로 견인불발(堅忍不拔)의 용기와 저항의식을 보였기에 영덕을 넘어 경상북도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말한다.1878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서 태어난 신돌석은 어릴 때부터 부당한 일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던 기개 높은 소년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나라의 운명이 위험에 처하자 신돌석은 일본과 싸울 것을 결의하고, 1906년 영릉의병진(寧陵義兵陣)을 만든다. 이후 동해안과 태백산맥을 거점으로 일본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당시 신돌석은 일본군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신장군실기’는 신돌석을 “그 모습이 장대하고 여력이 뛰어나 수십 길의 언덕을 가볍게 뛰어 넘었다”고 썼고, ‘의병대장신동유사’는 “전신주를 뽑아 일본 공병 5~6명을 무찔렀다”고 기록했다.신돌석은 영덕과 영해를 넘어 강원도 삼척에서까지 우리의 농수산물을 약탈하는 일본군에게 치명적 타격을 가해 이름을 높였다. 그랬으니 1907년 경기도 양주에서 전국 의병장들이 모였을 때 교남창의(嶠南倡義) 대장으로 추대된 것은 당연한 수순.호국과 애국의 마음으로 자신을 나라에 바친 신돌석은 서른이 되지 못한 채 젊은 나이에 순국한다. 국가는 그의 높은 충절과 의기를 기려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다.□ 김세영과 권태원이 주축이 된 1919년 3·18 영해 독립만세운동3·18 영해 독립만세운동은 8명의 순국자와 16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1919년 대표적인 독립만세운동의 하나다. ‘두산백과’는 이 운동을 비교적 상세하세 서술하고 있다. 아래 인용한다.“영덕 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은 고종의 장례에 참례해 3·1운동을 직접 보고 귀향한 김세영이 구세군 참위 권태원 등 군내 인사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서 추진됐다. 권태원은 정규하·남효직·남여명·박의락 등과 뜻을 모아 영해읍 성내동의 장날인 3월 18일에 거사하기로 결의했고, 이 일대의 향반과 유지들에게도 참여 약속을 받아냈다. 당일 오후 1시. 정규하와 박의락이 영해 주재소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자 장터에 모인 3천여 명이 일제히 호응했다. 행진에 나선 시위대는 저지하는 일본 경찰에 저항했고, 영해공립보통학교와 영해면사무소, 영해우편소 등을 차례로 파괴했다. 이 만세 시위는 인접한 병곡면까지 이어져 밤이 새도록 시내를 누비며 ‘독립 만세’를 불렀다.” □ 장사상륙작전, 10대의 학도병들 나라를 위해 목숨 걸다장사상륙작전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초기 불리했던 전황을 단숨에 뒤집어엎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견인했다. 작전의 성공 뒤에는 수많은 10대 학도병들의 희생이 있었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지 3개월. 경상남·북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남한 땅이 북한군의 손에 들어갔다.한국군 수뇌부와 UN군 사령부에겐 상황을 단숨에 역전시킬 획기적 작전이 필요했다. UN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성공 확률이 낮고, 큰 희생이 예상된다”는 미국 워싱턴 정부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작전을 추진한다.그때 한국군 총참모장이던 정일권 육군 소장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의 승패가 좌우될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위해 여러 방안이 논의되고 만들어졌다.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몇 시간 전.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장사동 해변으로 학도병 772명이 헤엄을 치거나 해변 소나무에 연결된 로프를 이용해 육지에 올라섰다. 장사상륙작전의 시작이었다.90% 이상이 총 한 번 쏴본 적 없는 어린 학생들로 구성된 그들은 당시 북한 조선인민군 최정예 부대로 평가받던 2군단과 당당히 맞서 7번 국도를 봉쇄해 조선인민군의 보급 루트를 끊었고, 소련제 기관총이 쏟아내는 수천 발의 총탄 앞에서도 두려움을 이기고 ‘200고지’를 탈환하는 전과를 거둔다. 이는 학도병들의 순정한 애국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터.이번에 호국보훈 음악회 ‘다시, 우리의 영웅들과 함께’가 열릴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은 바로 이들 수백 명 학도병의 순수한 열정과 나라사랑 정신을 받들어 만들어진 공간이다. 영덕군의 호국 벨트 조성사업과 호국보훈 음악회 개최 소식을 들은 다수의 영덕군민들은 “내세워 당당히 자랑할 수 있는 영덕의 애국정신을 알리고, 독립과 자유를 위해 희생된 순국선열의 뜻을 기리는 의미 있는 사업과 행사”라고 입을 모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10-15

CCUS 최적지 인도네시아서 탄소 저장·활용 방안 찾는다

유럽연합(EU)의 탄소국경세 제도 시행이 본격화됐다. EU는 탄소배출량에 따라 수출 품목의 세금을 매기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시행을 위한 전환기 가동을 지난 1일부터 시작했다. 전환기 가동에 따라 2025년말까지 EU 외 제 3국에서 생산된 시멘트, 전기, 비료, 철 및 철강제품, 알루미늄, 수소 등 6개 제품군을 EU에 수출하려면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량을 산출해 EU에 분기별로 보고해야 한다. 이처럼 ‘탄소 배출량’이 무역시장 경쟁력 확보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지표로 떠오르면서 산업계는 저탄소 생산 프로세스 개발, 저탄소 친환경 제품 개발에 더욱 열을 올리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이런 세계 산업계의 흐름을 기회로 활용하고 있는 대표적인 국가다. 탄소중립과 관련된 친환경 사업에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인도네시아는 탄소중립 시대에 대응하고 있다.글 싣는 순서1. 포항 영일만의 기적, 인도네시아에 닿다2. 이차전지 날개 단 인도네시아, 포항시 기회 찾으려면3. 인도네시아와 포항 기업 간의 교류 현 주소4. K기업문화, 인도네시아에 퍼진 한국기업 저력5. 탄소중립 시대, 인도네시아에서는 어떻게 ◇ 인도네시아 탄소중립 정책인도네시아는 아세안(ASEAN) 국가 중 탄소배출량이 가장 높은 나라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와 함께 아세안 국가 중 가장 선도적으로 탄소중립에 뛰어 든 국가이다. 인도네시아는 한국보다 다소 늦은 2060년까지 단계적으로 탄소 중립을 달성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탄소중립을 위해 2025년까지 인도네시아 정부는 신재생에너지 비중을 23%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3천686기가와트(GW)에 달하는 동남아시아 최고 신재생에너지 발전 잠재력을 실현시키기 위해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토지 확보 절차를 간소화하고, 유리한 투자 환경을 조성하는 등 규제 장벽을 혁파하는 옴니버스법을 입안했다.최근 인도네시아 정부가 많은 공을 들이고 있는 전기차 비즈니스도 탄소중립 트렌드와 맞물려있다. 인도네시아는 전기차 산업이라는 고부가가치 산업 발전을 통해 탄소중립 시대 경제성장을 도모하는 동시에 자국 탄소 배출 저감을 꾀하고 있다.◇ CCUS, 국내 철강업계 ‘탄소’ 고민 해소하나인도네시아가 탄소중립시대에 주목하고 있는 또다른 사업은 바로 ‘탄소포집 및 저장기술(Carbon Capture Utilization Storage·CCUS)’이다. 제철, 화력발전 등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를 분리, 포집해 저장하는 것이다. CCUS 기술은 탄소중립 실현의 가교가 되는 ‘브릿지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2021년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50년까지 이산화탄소 감축량의 14%를 CCUS가 차지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탄소포집 기술을 이용하면 대기중에 배출되는 탄소를 포집해 고갈 유전, 가스전 등에 수십~수백만년 저장할 수 있다. 탄소 포집, 운송, 저장 기술은 이미 어느정도 상용화돼 있고, 기술 성숙도도 높아 단기간 내에 활용할 수 있다는 점도 큰 장점이다.인도네시아는 CCUS 사업을 추진하기에 최적지로 꼽히고 있다. CCUS 사업 추진 시 탄소는 주로 폐가스전, 폐유전에 저장되는데, 인도네시아는 수많은 가스전과 유전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는 탄소 저장 공간이 풍부한 점을 활용해, CCUS를 활용한 수소·암모니아 발전 기술 개발을 발표하는 등 친환경 정책을 내세우고 있다. 실제로 미국 석유기업 엑손모빌과 인도네시아 국영 에너지 회사 페르타미나가 진행한 공동 연구에 따르면 페르타미나 소유 석유 및 가스전에 10억 톤(t)의 잠재 탄소 저장 용량이 발견됐다. 한국의 경우, 이산화탄소 저장 공간이 부족해 탄소포집기술 활용이 제한적이다.한국석유공사(KNOC) 주도로 동해가스전 저장소를 개발하고 있지만, 연간 40만 t 수준에 불과하다. 철강업계에서만 연간 탄소배출량이 1억t에 달한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역부족인 상황이다. 이에 많은 민간 기업들은 탄소포집, 저장, 활용 기술을 개발하는 한편, 말레시아, 인도네시아 등 해외 탄소 저장소를 확보하고 있다.포스코는 인도네시아를 눈여겨보고 있다. 포스코는 인도네시아 국영가스공사인 ‘페르타미나(Pertamina)’와 탄소 포집 및 저장 사업을 추진하고자 협력하고 있다. 찔레곤에 위치한 크라카타우 포스코에서 50~250㎞ 떨어진 인근 해상에 고갈중인 유전과 가스전을 활용해 탄소를 저장하는 것이 계획이다. 포스코는 2030년부터 포집한 이산화탄소를 폐유전 및 가스전에 보관하는 실증사업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SK ES도 인도네시아 페르타미나와 MOU를 체결해 CCS 분야 공동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페르타미나는 미국 엑손모빌, 프랑스 에르리퀴드, 일본 미쓰이 등과 협업해 CCUS 기술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유전, 가스전을 탄소 저장소로 활용할 경우 탄소를 가스전에 넣는 과정에서 유전과 가스전에 남아있는 석유, 가스 또한 완전히 추출해 사용할 수 있어 탄소 저장과 활용 두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포항시, 탄소 중립 시대에 생존하려면포항시도 ‘탄소중립’이라는 글로벌 화두에 주목하고 있다. 포항시는 탄소중립에 따른 산업 구조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미래 먹거리 선점을 역점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포항시가 집중한 5대 신성장 사업은 이차전지, 수소, 바이오, 철강신소재, 미래기술 분야다. 이 중에서도 포항시는 탄소중립 이라는 시대적 흐름에 급부상하고 있는 이차전지와 수소 분야에 역량을 결집하고 있다.이차전지 분야에서의 성과는 뚜렷했다. 포항시는 빠르게 전기차 시장의 성장을 예견하고 전기차의 심장인 이차전지 산업 유치에 총력을 다했다.전국 최초로 배터리 규제자유특구 지정에 나선 결과, 지자체 중 유일하게 3년 연속 우수 특구에 선정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차전지 종합관리센터를 건립하고 관련 산업 육성 조례를 제정하는 등 이차전지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해 2023년 상반기에만 5조 5천억원의 기업 투자 유치를 이끌어냈다.포스코케미칼, 에코프로 등 유수의 이차전지 소재 업체들을 보유하고 있는 포항시는 올해 7월 이차전지 특화단지에 지정되며 지역 산업 구조 다변화의 성공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이차전지 산업과 더불어 수소 산업도 포항시의 역점 사업 중 하나다. 수소연료전지 클러스터 예타조사를 전국에서 유일하게 최종 통과하면서 포항시는 친환경 수소경제 허브도시 비전 실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2030년까지 수소 기업 70개사를 유치하는 등 수소 생산과 소비가 연결되는 수소도시로 거듭나겠다는 것이 포항시의 계획이다.핵심은 포스코의 포항제철소에 있다.포스코 포항제철소에는 이미 생산 공정에서 부생 수소가 발생하고 있다. 포스코는 지난해 이미 포항제철소에서 발생하는 부생수소 일부를 포항철강공단 내 수요기업에 공급하는 배관 공사에 착수했다. 총 172억원을 투입해 포항제철소 수소공장에서 수소저장탱크를 추가 건설하고 수소공장부터 포항철강산업단지 구간(5.4㎞)과 제철소 산소공장부터 포항철강사업단지 구간(4.3㎞)에 배관을 설치하는 사업이다. 포항제철소가 수소환원제철소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도 포항시에게 큰 기회다.포스코는 2050년까지 20조원을 투자해 포항제철소에 수소환원제철 설비를 건설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사업 추진에 따라 수소환원제철 설비 하이렉스 (HyREX) 3기, 전기로 1기, 제강공장, 수소저장설비, 원료저장설비 등이 신규 설치될 예정이다.포스코가 수소환원제철 방식으로 전환할 경우 포항, 광양 제철소에서 발생하는 포스코 자체 수소 수요만 연간 수백만t에 이르게 된다.포스코는 자체 수요를 바탕으로 2050년까지 연 700만 t의 수소를 생산하는 수소 기업이 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막대한 양의 수소 수요가 예상되는 만큼 수소 관련 인프라도 빠르게 들어설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안정적인 수요가 확보되고, 수소 공급, 운송, 저장 시설들이 들어서게 되면 연관 산업체 유치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수소, 이차전지가 유망산업인만큼 많은 지자체들이 두 분야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여러 지자체와의 경쟁 속에서 이차전지 산업이 포항에서 둥지를 틀 수 있었던 것은 이차전지 산업의 가치를 알아본 선구안과 빠른 행정력 덕분이었다. 아직 초기 단계인 수소산업이 포항에서 영글 수 있도록 지자체 차원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인터뷰 포스코 인니 최부식 박사“친환경 탄소중립, 탄소포집기술 중요”인간이 오랜 기간 사용 해 온 화석연료를 대체할 에너지를 개발한다는 것은 당연히 어렵고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기후 변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데, 언제까지 기술 개발을 기다릴 수는 없다. 화석연료를 대체할 기술이 개발될 때까지 지구에게 시간을 벌 기술이 필요하다.지난 8월 31일 자카르타에 위치한 포스코 인도네시아 법인 사무실에서 최부식(51·사진) 박사를 만나 탄소중립 및 인도네시아 투자 환경에 대해 들어봤다.- 탄소중립 시대에 탄소 포집이 왜 중요한지 설명해달라.△수소환원제철이나 신재생에너지 같은 기술은 기존에 탄소를 배출하던 산업의 생산 공정을 혁신해 완전히 탄소 배출을 없애는 것인 반면, CCS/CCUS 기술은 그대로 생산 공정을 유지하되, 배출하는 탄소를 포집해 격리해 이산화탄소에서 발생하는 환경 영향을 없애는 것이다. 전자는 원천적으로 탄소 배출을 없애는 혁신적인 기술이지만 개발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CCS/CCUS 기술은 탄소 배출을 원천적으로 없애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장공간이 언젠가 고갈될 수 있는 등 제약이 있지만 단기간에 상용화가 가능하다. 국제사회에서도 CCUS의 탄소 중립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EU는 그린 택소노미에 CCUS를 포함했고, 미국의 경우 IRA 법안을 통해 CCUS기업에게 세금 공제 혜택을 부여했다. CCUS를 탄소중립 핵심 수단으로 바라보고, CCUS 관련 기업에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정부 차원에서 동해가스전 시범 사업을 추진하고 있고, 많은 기업들이 말레이시아 등 해외에 저장소를 확보하고 있는 상황이다.- 탄소포집, 활용 기술만의 장점이 있다면.△비교적 빠른 상용화가 가능하다. 이미 탄소 포집, 운송, 저장 등 주요기술은 상용화가 됐고 기술성숙도도 최고 수준이다. 고갈 유전, 가스전에 저장할 경우 수십에서 수백만년 동안 안정적인 저장을 할 수 있다는 것도 확인됐다. 고갈돼 가는 가스전이나 유전에 이산화탄소를 투입하면 잔류가스나 석유를 추출할 수도 있다. 기존에는 물을 집어넣어 추출하는 방식이었는데 따로 잔류 가스, 석유 추출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이산화탄소 저장 과정에서 바로 자원을 추출할 수 있으니 경제적이다. 활용에 있어 여러 장점이 있어 포스코도 탄소포집기술을 눈여겨보고, 활용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한국은 아직 CCUS/CCS 기술 분야에 많이 주목하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탄소 포집을 할 수 있는 저장소로 주로 폐가스전, 폐유전이 사용된다. 가스나 석유가 나오는 나라들이 탄소포집관련 사업을 하기 유리하다. 철강 산업 최초 CCUS 프로젝트를 추진한 곳도 아랍에미리트 최대 철강사인 에미레이트스틸이다. 아부다비 국영 석유회사와 함께 저장소를 개발해 연간 80만t의 탄소를 저장하고 있다. 아세안 국가 중에서는 말레이시아가 각광받고 있다. 많은 한국 기업들이 말레이시아와 CCUS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에너지기업 페트로나스와 삼성, SK, GS로 구성된 한국 컨소시엄이 추진하고 있는 셰퍼드 프로젝트는 한국에서 포집한 이산화탄소를 말레이시아로 이송해 저장하는 사업이다. 현대중공업도 페트로나스와 이산화탄소 운송체 연구 개발을 하고 있고, 한국전력공사와 포스코 등도 관련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그 다음으로는 인도네시아다. 인도네시아도 산유국이기 때문에 폐가스전, 폐유전이 많다. 엑손모빌, BP 등 글로벌 석유 대기업 등이 총 15개의 CCUS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일본 정부가 CCUS 프로젝트 추진에 인도네시아를 많이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체 CCUS프로젝트 중 일본 정부 지원에 기인한 프로젝트가 40% 수준이다. 일본은 현재 2050년 연간 CCUS 저장량을 1.2~2.4억톤까지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가지고자본투자, 재무 지원부터 국가간 정책, 사업 협력 지원까지 다양한지원책을 내놓고 있다.- 포스코는 인도네시아에서 어떻게 CCUS 사업을 구상하고 있는가.△크라카타우 포스코 인근 50~250㎞ 해상에 고갈중인 유전과 가스전이 다수 포진해있다. 가스전 운영 주체인 국영 석유기업인 페르타미나가 현재 여기서 엑손모빌과 CCUS 활용을 연구하고 있다. 이런 환경을 활용해서 CCUS 허브를 건설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핵심은 운송비다. 한국에서 말레이시아에 포집한 이산화탄소를 운송하려면 해상으로 운송해야되는데, 운송비가 많이 소요된다. 크라카타우 포스코는 가스전 인근에 위치해 파이프라인을 건설해 운송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파이프라인을 활용하면 해송에 비해 획기적으로 운송비를 줄일 수 있다. 중장기적으로 탄소 저장소를 확보하고 탄소포집기술을 활용하면 거세지는 탄소 중립 변화에 안정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탄소포집기술을 활용해 만든 친환경 슬라브를 한국에 공급할 수도 있고, 한국 제철소에서 발생하는 탄소를 포집해 이송해 저장하는 방안도 활용할 수 있다. 다양한 가능성을 두고 여러 기관들과 협력해 고민하고 있는 단계다.끝/인도네시아에서 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3-10-15

경기고보 수석 입학한 흥해 신동

경북사격연맹 회장을 지낸 최승태(崔升泰) 선생을 만나 부친 목운(木雲) 최원수(崔遠壽, 1912∼1987) 선생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최원수 선생은 건국 후 초대 영일군수와 제2대 국회의원을 지낸 분으로 남은 기록도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시피 하다. 하지만, 그의 남다른 정치 역정을 보면 우리가 이어가야 할 뜨거운 정신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최승태 선생이 빛바랜 흑백사진을 보며 부친의 기억을 되살려내는 데에는 최승태 선생과 오랜 세월 함께한 김기철 선생의 도움이 있었음을 밝혀둔다. 김도형(이하 김) : 근황은 어떠신지요?최승태(이하 최) : 나이도 있고 하니 조용히 보내지. 지인들과는 틈틈이 연락하면서 일이 있으면 바깥에 나가기도 하고.김 : 선생님 집안은 원래 흥해에 있었다고 들었습니다.최 : 맞아. 포항으로 나오기 전에 흥해에 있었지. 할아버지가 흥해에서 한의원을 하셨거든.김 : 조부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군요.최 : 할아버지 이름은 최봉래(崔鳳來)야. 독학으로 한의사 시험에 합격할 정도로 머리가 좋은 분이셨지. 지금 포항세무서 건너편에서 구생(九生)한의원이라는 큰 한의원을 하셨어. 당시 포항에서 가장 큰 한의원이었을 거야. 한의원은 입 구(口) 자의 적산가옥으로 대지만 300평이 넘었거든. 나중에 포항역 앞으로 옮겼는데 거기도 대지가 300∼400평 정도 되었어. 6·25 전쟁 때 두 군데 모두 소실되었고, 전쟁 후에 덕수동에 한옥으로 한의원을 새로 지었지. 할아버지는 포항노인회 회장을 맡으셨는데 1962년에 돌아가셨어. 작고하기 직전까지 진료를 보셨지.김 : 조부께서 남긴 일화가 있는지요?최 : 한마디로 원칙주의자였지. 꼬장꼬장하셨어. 1950년대에 이런 일화가 있어. 제3대 부통령인 함태영이 포항에 왔다가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다며 어디로 오라는 연락이 왔어. 그런데 할아버지는 일언지하에 거절했어. 나어린 함태영이 찾아와야지 내가 왜 그를 찾아가느냐고 말이야.함태영(1872∼1964)은 함경북도 무산 출신으로 3·1 운동 후에 주동 인물로 잡혀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으며 광복 후에 한국신학대학장을 지냈다. 1952년에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제3대 부통령에 당선되어 1956년까지 재임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김 : 부친 최원수 선생은 어린 시절을 흥해에서 보내셨는지요?최 : 아버지는 흥해국민학교에 입학하셨는데, 그전에 서당에 다녔어. 청하에서 기청산수목원 가는 길에 있는 서당이었는데, 그곳에서 일곱 살이 되기 전에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다 뗐다고 해. 흥해에 신동 났다는 소문이 퍼졌지.김 : 최원수 선생이 흥해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경기고보에 수석으로 입학했다고 들었습니다.최 : 맞아. 흥해에서 국내 최고 명문인 경기고보에 수석 입학을 했으니 흥해가 떠들썩했겠지.1899년 개교한 경기고등학교는 1922년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로 교명을 바꾸었고, 1938년 4월 1일 경기공립중학교로 또다시 교명을 개칭했다. 따라서 최원수 선생은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 시절에 학교를 다녔다.흥해초등학교는 1908년 4월 4일 사립 의창소학교(義昌小學校)로 인가가 나면서 개교했고, 1911년 3월 18일 흥해공립보통학교로 설립 인가가 났다. 1937년 의창공립심상소학교, 1941년 의창공립국민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1946년 흥해국민학교로 변경되었고, 1996년 현재 교명이 되었다. 1970년 흥해서부초등학교, 1998년 흥해남산초등학교가 흥해초등학교에서 분리 개교했다. 흥해초등학교는 1906년 3월 11일 개교한 연일초등학교(개교 당시 사립 광남학교)와 더불어 포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초등학교다.김 : 최원수 선생이 어릴 때부터 친분을 나눈 분은 누구십니까?최 : 코오롱그룹 창업주이자 국회의원을 지낸 이원만과 검사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한 김장섭이 있지. 두 사람은 아버지와 동향(同鄕)에 흥해국민학교 동창이어서 가깝게 지냈어. 아버지와 이원만, 김장섭 모두 일본 유학생이라는 공통점도 있고. 어머니가 칼국수 끓이는 솜씨가 좋았는데 이원만과 김장섭이 이따금 우리 집에 칼국수를 먹으러 왔지.니혼대학(日本大學)을 중퇴한 이원만(1904∼1994)은 경북 영일군의 산림을 관리하는 산림 기수보로 근무하다가 1933년 일본 오사카로 떠나 1935년에 광고용 모자를 생산하는 아사히공예주식회사를 창업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코오롱그룹의 창업주로 우리나라에 나일론을 최초로 들여와 ‘현대판 문익점’이라 불린다. 정부에 수출입국, 공업단지 조성을 건의하고 한국산업수출공단 창립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구로공단과 구미공단 조성을 이끌었다. 1960년 참의원 선거에서 경상북도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고, 제6, 7대 국회의원(민주공화당, 대구 동구)을 지냈다.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를 졸업한 김장섭(1909∼1993)은 일본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후 일제강점기 때 판검사를 했으며 1954년에 서울지검 검사장을 했다. 제1공화국 말기에는 내무부와 농림부의 차관을 지냈다. 1960년 1월 제4대 총선 보궐선거(영일군 을)에서 자유당 공천으로 당선되었고 4·19 혁명 후 참의원(무소속)에 당선되었다. 이후 제6, 7대 국회의원(민주공화당, 포항시·영일군·울릉군)을 지냈다. 오천중학교와 동해중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김 : 경기고보를 졸업한 후에 일본 유학길에 오르셨지요?최 : 일본의 리쓰메이칸대학(立命館大學)에 입학했는데 졸업은 못하고 중도에 귀국했지.리쓰메이칸대학교는 1900년 일본 교토에서 설립된 사립 종합대학교다. 간사이대학(関西大學), 간사이가쿠인대학(関西學院大學),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과 함께 일본 간사이 지역의 4대 명문 사립대학으로 알려져 있다.김 : 중도 귀국한 이유는 무엇입니까?최 : 일본이 전쟁을 확대하면서 일본에 있던 조선 유학생들의 삶도 고달파졌지. 한반도는 물론 일본 열도에서도 온갖 무리한 일이 벌어졌고, 조선 유학생들은 결국 견디기 힘들게 된 거야. 단적인 예로, 식량 사정이 악화되어 단무지 하나로 밥을 먹었다고 하더군. 아버지는 어떻게든 참아보려 했지만,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귀국하셨지.김 : 귀국해서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최 : 포항으로 돌아와 형산면사무소에서 몇 년 근무하셨어. 일본 유학을 해서 일어에 능통했고 ‘아사히신문(朝日新聞)’과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을 평생 구독하셨지.김 : 일제강점기 때 포항에도 일본에 유학 갔던 조선인 자녀가 꽤 있었다고 들었습니다.최 : 지금의 중앙상가 북포항우체국 앞에 나가면 하오리(羽織)를 입고 뒷굽이 높은 게다(下駄)를 신은 일본 유학생들이 많이 다니던 모습이 생생히 기억나.지역 원로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제강점기 때 동해안은 어자원이 풍부해 포항·영일에서도 수산업으로 큰돈을 번 사람이 꽤 있었다. 이들 중에 자녀들을 일본으로 유학 보낸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최승태1937년 포항에서 태어나 포항초등학교와 포항중학교, 계성고등학교, 국민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무역회사에서 근무하다가 포항으로 돌아와 사업을 하며 부친(최원수, 건국 후 초대 영일군수, 제2대 국회의원)의 정치적 기반을 지켰다. 민주화추진협의회와 민주산악회에 참여해 김영삼 대통령 당선에 헌신했으며, 경북사격연맹 회장, 국제사격연맹 심판관, 라이온스클럽 경북 309-N 지구 총재를 맡았다.

2023-10-15

신문왕의 권력독점 뒤엔 수많은 이들의 희생 있었다

무열왕 김춘추의 돌올한 외교 수완과 정치력, 무열왕의 손위 처남 김유신의 탁월한 전쟁 수행 능력과 상대를 압도하는 전략적 병법(兵法)을 앞세운 신라는 660년 황산벌전투에서 승리하며 백제를 병합했다.이어 668년에는 평양성전투에서 고구려 군대를 궤멸시키며 삼한일통(삼국통일)에 한 걸음 더 다가섰고, 문무왕 김법민의 집권 이후인 676년엔 당대 아시아 최강대국 당나라 세력을 몰아냄으로써 온전한 통일국가의 형태를 갖춘다. 그리고, 삼국이 통일된 5년 후인 681년. 문무왕은 “죽어서도 나라를 위협하는 일본 해적들을 막아내는 용이 되겠다”는 말을 남기고 붕어(崩御)한다.문무왕의 아들이자 무열왕의 손자인 신문왕 김정명은 효자였다.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수용해 일본 도적들이 출몰하는 서라벌 바닷가에 문무왕의 뼈를 묻었다. 그리고, 인근에 완성한 사찰이 지금의 경주시 문무대왕면에 자리한 감은사(感恩寺)다. ◆통일 이후 최대 과제는 권력의 중앙집중화와 왕권 공고화7세기 후반 이처럼 새롭게 재정비된 신라 통일왕조의 제1과제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지방 귀족들에게도 나눠주었던 권력을 빼앗아 중앙으로 집중시키고, 통일 왕조 군주의 권력을 최대치로 강화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다. 자신 앞에 놓인 권력과 돈을 “저는 관심 없어요. 제가 가졌던 권력이건 돈이건 모두 가져가세요”라며 쉽사리 허락할 이는 드물거나 아예 없다. 남들이 가진 권력을 자신 앞으로 집중시키기 위해서는 강제력과 희생양이 필요한 법. 신문왕 김정명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그랬기에 신문왕 집권 초기엔 한 차례 거센 피바람이 불어닥친다. 수많은 이들이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다. 특히 처가가 풍비박산(風飛雹散) 났다.우리역사문화연구소 김용만 소장의 책 ‘인물한국사’엔 이와 관련된 서술이 등장한다. 다소 끔찍하기까지 한 내용이다.“신문왕은 냉정하면서도 판단력과 실천력이 뛰어난 임금이었다. 그는 즉위한지 한 달 만에 반란 모의죄로 소판(蘇判) 김흠돌, 파진찬(波珍湌) 흥원, 대아찬(大阿湌) 진공 등을 처형했다. 놀랍게도 김흠돌은 신문왕의 장인이었다. 김흠돌은 661년 6월 김유신을 도와 고구려 공격에 참여했고, 668년엔 대당총관 자격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해 그 공으로 고위 공직인 소판에 올랐다. 흥원과 진공도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사람들이다. 신문왕은 김흠돌을 처형한 지 8일 후에 그들을 참수한 이유를 발표했다. 김흠돌 등이 사악한 자를 끌어들이고 궁중의 내시들과 결탁해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는 것. 이어 얼마 후에는 이찬(伊湌) 군관의 목을 베었다. 신문왕은 그가 김흠돌이 반역할 것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형하고, 그의 장남까지 자살해 죽게 만들었다.”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장인어른”이라 부르던 사람에게도 가차없었던 게 신문왕. 아내가 슬픔 속에서 흘릴 눈물은 ‘통일된 국가의 왕권 강화’라는 대의명분 아래 무시됐다.◆중국과 일본, 조선왕조에서도 권력 독점을 위한 희생이…그런데, 권력의 독점과 강화를 위해 친족이나 처족을 죽인 사례는 비단 신문왕 통치 시기에서만 발견되는 게 아니다.우리와 가까운 나라 일본과 중국, 신라와 고려왕조 이후 등장했던 조선에서도 그런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에 이은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 시대. 그 카리스마가 수백 년 세월을 넘어 아직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권력을 나눠달라” 요구하는 동생의 목을 잘라버린다. 같은 시대 또 다른 다이묘(大名·중세 일본의 봉건 영주) 하나는 인근 지역 다이묘에게 생포된 아버지를 어렵게 빼내 와서는 죽여버린다. “늙은이가 바보 같이 사로잡혀 내 권력 쟁취 가도에 걸림돌이 될 뻔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무시무시하다.중국 최초의 통일왕조인 진나라의 시황(始皇)은 친모가 ‘노애’라는 사내와 밀통해 낳은 동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어머니를 찾아가 “다시는 임신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며 수십 차례 배를 걷어찬다.씨가 다른 젖먹이 동생은 가죽부대에 넣어 돌바닥에 패대기쳐 죽인다. 생후 몇 개월도 되지 않은 아기를. 그 젖먹이가 커서 자신이 독점한 권력을 찬탈할 걸 미연에 방지한 것이다. 중국 고서 ‘사기(史記)’에 등장하는 이 이야기 역시 잔인하기 짝이 없다.초나라 항우와 권력을 다투던 유방은 “당신 아버지가 포로가 됐다. 항우가 그를 끓는 물에 삶으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잘 삶기면 다리 하나 얻어먹으면 되겠네”라며 외면했다.이 일이 있기 몇 해 전에는 적군에게 쫓기는 상황에서 “마차가 무거워 속도가 나지 않는다”며 함께 탄 아들을 발길질해 마차 아래로 떨어뜨린 사람이 유방이다. 왕이 되기 위해서 아버지와 아들 관계라는 혈족의 인연까지 잘라버린 것이다. 결국 유방은 한나라의 제1대 황제가 됐다.일본이나 중국까지 갈 것도 없다. 조선 건국 초기. 태종 이방원은 이복동생 이방석을 쇠몽둥이로 때려죽였고, 계유정난(癸酉靖難)을 통해 집권한 세조 이유(李瑈)는 16세 어린 조카 단종 이홍위(李弘暐)의 목에 밧줄을 걸어 죽였다.조선이 기틀을 잡아가던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초반까지 왕들은 수많은 처가 사람들을 참수하고, 입에 사약을 퍼부었다. 이를 ‘살육의 역사’라 부르는 건 터무니없는 과장이 아닐 터. 모두 권력을 쟁취해 독점하고,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통일신라의 위엄과 권위를 위해 첫 아내 내치고, 새 아내 맞아신문왕이 신라의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오른 건 겨우 열여섯 살 때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병약하고 왜소했다고 알려진 그는 오래 살지도 못했다. 스물일곱에 사망했으니. 그러니, 집권 기간은 겨우 11년이다.그럼에도 신문왕은 괄목할 만한 정치·사회적 개혁을 주도한 군주로 평가받는다. 김부식이 집필한 ‘삼국사기’는 신문왕 김정명의 통치 당시 행적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신문왕은 지방 조직 정비와 지방 통치제도를 확립했으며, 전국을 9주5소경으로 나누고 행정조직을 강화했다. 청주에 서원경(西原京)을 설치하고 달구벌로 수도 이전을 계획하기도 했다. 687년 5월엔 문무 관료전을 최초로 지급했고, 689년 1월에는 귀족에게서 노동력 징발이 가능한 녹읍을 폐지해 귀족의 권한을 약화시킴으로써 왕권의 전제화를 이뤘다.”21세기인 요즘이라면 고등학교와 대학에 다니며 취직을 고민할 나이에 불과한 10~20대에 위와 같은 일을 해냈다면 신문왕은 ‘워커홀릭(Workaholic)’이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그런 그가 장인을 죽이고, 아들을 낳지 못한 아내를 궁궐 밖으로 내치고, 전처(前妻) 보란 듯이 새로운 아내를 성대한 혼인식 속에 맞아들인 냉혈한의 모습을 보인 것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앞서 언급한 ‘인물한국사’를 다시 살펴본다. 아래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전략) 신문왕은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들의 저항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 첫째가 외척의 발호를 막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막강한 권력을 가진 김흠돌을 제거하고 배후 세력이 없는 여성을 왕비로 새로 맞이했다. 신문왕은 김씨 왕후를 쫓아낸 지 2년 후인 683년 김흠운(金欽運)의 딸을 왕후로 삼기로 하고 폐백 15수레, 쌀, 기름 등 135수레, 벼 15수레를 보냈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5월 7일 그녀를 부인으로 책봉하고, 여러 대신들을 보내 그녀를 맞이하게 했다. 수레에 탄 그녀 곁에 시종하는 관원들의 숫자가 엄청났다. 이런 성대한 결혼식은 처가가 대단한 세력가였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결혼을 최대한 이용해 왕실의 위엄을 드러내 보이려는 의도에서였다.”그랬다. 바로 ‘왕실의 위엄’, 넓게 해석하면 통일왕국 권력의 중앙집중화와 왕권의 공고화(鞏固化)를 위해 처가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이는 삼한일통을 이룬 신라의 찬란한 빛 아래 숨겨진 또 하나의 ‘어두운 그림자’ 같은 역사가 아닐까.(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3-10-10

골짜기마다 폭포마다 시심이 무늬져 있는

태백 구봉산에서 솟구친 낙동정맥이청송 주왕산을 거쳐 남하하다가동해안 쪽으로 뻗어가 솟은속이 깊은 산보경사 일주문을 지나 계곡을 따라 걸어가면억겁의 세월이 느껴지는수직의 단애(斷崖)가 나타나고그 사이로 드러나는 폭포와 소(沼)조선시대 사대부들은산의 절경에 마음을 빼앗겨계곡의 바위 곳곳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고숙종은 붓을 들어 시를 써 내려갔다. 봄잠에 날 밝는 줄 알지 못하다곳곳에 새 우는 소리 듣게 되었네밤새 비바람 소리 들려왔으니꽃들은 얼마나 지고 말았나(*)산에는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큰 울음을 토해내는 폭포가 있으니십이폭포 중 으뜸가는 연산폭포,눈을 감고 그 소리에 잠겨 있으면세속은 저 멀리 물러선다. 천 년의 시간이 서려 있는 보경사고즈넉한 뜨락에 서서내연산 능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절이 산이고 산이 절임을 깨닫는다.(*)당나라의 시인 맹호연의 「봄날 아침(春曉)」 - 글 : 김재건(서울대 국문과 박사 수료)최수정 197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포항에서 성장했다. 계명대 서양화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6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포항지부·현상회·계명회 등의 회원이며 포항에서 갤러리m을 운영하고 있다. ‘호미곶 이야기’·‘비밀이 사는 아파트’· ‘꿈꾸는 복치’ 등의 책에 그림을 그렸다.

2023-10-09

“수개월에서 수년씩, 한평생 발굴현장을 누볐죠”

한 분야에서 중요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과의 만남은 설레는 일이다. 남시진 박사는 불국사와 천마총, 황남대총과 황룡사, 분황사, 감은사 등 고고학사의 굵직굵직한 현장마다 함께 했다. 국내 유적 발굴에서 실측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에 처음으로 측량과 실측을 담당하고 도면을 작성했다. 대한민국 발굴사의 시작을 알리는 천마총 발굴 조사원 중 유일한 경주 사람이다. 한국 고고학사의 오래된 사진 속에서 남시진 박사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불국사 복원을 위한 설계실, 천마총에서 금관을 수습하는 역사적인 순간, 분황사 발굴 조사를 위한 시삽식에도 그가 있다. 한국 고고학 최초의 실측가로 불리는 남시진 박사를 형산강이 내려다보이는 경주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한국 고고학사에 남을 굵직한 발굴에 다수 참여했다.△경주에서 이루어진 발굴은 거의 다 참여했다. 1969년 불국사 복원 정비를 위한 발굴이 그 시작이다. 65일간 발굴한 자료를 가지고 현지 사무실에서 바로 설계에 들어갔다. 현지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발굴조사부터 설계, 시공, 감독까지 체계를 갖추어서 추진한 것은 국내 문화유산 복원에서 불국사가 유일하다. 무설전과 비로전, 관음전, 대웅전 회랑, 극락전 회랑이 그때 복원됐다. 불국사 복원 공사 준공식이 열리기도 전에 바로 천마총 발굴에 투입됐다. 원래는 황남대총부터 발굴하려고 했지만, 한번도 도굴이 되지 않은 고분의 조사 경험이 없어 부담을 느낀 김정기 조사단장이 천마총부터 시작해 보자고 건의한 것이다.-어떤 계기로 발굴에 참여하게 됐나.△실업학교 건축과를 다니던 중에 ‘실습’으로 나갔다. 신문사 다니는 친척의 소개로 불국사 복원 현장을 소개 받았다. 학교 공부는 콘크리트 건축물 위주여서 목조가 새롭게 다가왔다. 유적지에서 도면을 그리는 일도 흥미로웠다. 발굴팀에서도 쓸만한 녀석이라고 여겨서 데리고 다녔다.-한국 고고학 최초의 실측가로 불린다. 일반적으로 발굴 현장은 고고학 전공자들이 많지 않은가.△실측이란 세워진 건물에서 부재 하나하나를 측정하여 도면을 그리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설계 도면을 작성해서 집을 짓지만, 실측은 반대로 지어진 건물을 도면화하는 작업이다. 절터를 조사하려면 건축학적 지식이 있어야 한다. 국내 발굴 현장의 책임조사원은 고고학자가 대부분이지만 일본에는 건축학 전공자도 많다. 7, 80년대는 실측가가 없어서 내가 각 대학에 강의도 다녔다. 지금은 다수의 고고학과에서 실측을 가르친다. -발굴 50주년을 맞은 천마총은 해방 이후 우리나라가 독자적으로 발굴한 최초의 신라 고분으로 기록된다. 반세기 전에는 무덤을 파헤치는 일에 거부감이 컸다고.△발굴을 하려면 고분 정수리에 말뚝을 박아 기준점을 정해야 한다. 사과를 네 쪽으로 자르듯이, 고분을 사 등분 해서 시차를 두고 무덤을 파는 방식이다. 말뚝을 박으러 올라간 인부들이 눈치만 살피더라. 성미 급한 내가 해머로 말뚝을 몇 차례 내리치니까 그제야 인부들이 달려들어 도왔다. 그때는 이유를 몰랐는데 시간이 흘러 당시 현장에 있던 기자와 선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다 다들 꺼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천마총 발굴이 경주 사람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한 일이었나.△신라 고분은 경주 사람들에게 신앙과 같은 곳이다. 천마총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1973년은 지독한 가뭄으로 모내기가 힘들 정도였다. 사람들은 우리가 무덤을 파서 비가 안 온다고 원망했다. 발굴터에 가건물을 짓고 숙직했는데 밤에 돌을 던지고 가는 취객도 있었다. 그러다가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천마총에서 금관을 들고나오는 순간 거짓말처럼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비가 쏟아진 것이다. 금관을 수습해 나오던 학예사가 그 자리에 상자를 두고 줄행랑을 쳤다. 나중에 들어보니 금은 전기가 잘 통하는 걸 알고 그랬다고 한다. 그날의 비는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도무지 불가해한 현상이다. 당시 발굴을 주도한 조사단 8명(김정기 조사단장, 김동현·지건길·박지명 조사원, 윤근일·최병현·남시진·소성옥 조사보조원) 가운데 나를 포함해 6명이 살아있으니 믿어주지. 혹여나 나 혼자서 그 이야기를 한다면 누가 믿어주겠나. -발굴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때라 어려움도 컸을 것 같다.△지금은 컨베이어벨트가 있지만 그때는 드럼통의 반을 잘라 만든 관으로 흙을 내려보냈다. 초보자라 항시 긴장된 상태여서 한여름에도 더운지 모르고 일했다. 특종을 위해 쌍심지를 켠 기자들과 각을 세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천마총 발굴조사는 국가적 관심 사업이라 중요사항을 일일이 청와대에 보고했다. 촬영한 필름을 통째로 고속버스에 실어 보내면 문화재관리국에서 전화로 내용을 받아적고 사진을 첨부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청와대 보고 전에 언론에 보도되는 걸 막으려 사투를 벌였다.-언론 취재 경쟁이 얼마나 뜨거웠나.△중앙의 각 신문사와 방송사의 문화부장들이 경주에 내려와 있었다. 언론사에서 헬기를 띄우면 넓은 천막을 쳐서 막았다. 발굴하고 나온 사람들의 신발에 묻은 흙을 보고 추측 기사가 나왔기 때문에 내부 작업용 신발을 따로 두었다. 취재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냐면, 기자가 인부의 집까지 따라가서 돈뭉치를 내놓으면 뭐가 나왔는지 한마디만 해달라고 집요하게 물었다더라. 그때 기자가 내놓은 돈이 15만 원이었다. 하루 일당이 700원이고, 80㎏ 쌀 한 가마니가 만 원 하던 때다. 인부가 이튿날 와서 그런 일이 있었다며 끝까지 함구했다고 전해주었다. 철저하게 관리해도 자꾸 특종이 터지니, 경주가 고향이고 친척이 언론사에 있는 나부터 의심받았다. 하루는 김정기 단장이 나를 단국대학교 발굴 현장으로 지원을 보냈는데, 그날도 어김없이 특종이 터지자, 의심에서 벗어났다. 범인을 종잡을 수 없게 되자 서로를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도대체 누가 범인이란 말인가.△당시에는 팩스나 메일이 없으니 보고하려면 유선으로 내용을 불러줬다. 우체국에 가야 시외전화를 걸 수 있던 시절이다. 경주우체국 수교환사가 모 신문사 기자 부인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특종을 잡을 욕심으로 교환사를 매수하는 언론사도 있었다고 들었다. 이후로는 어쩔 수 없이 울산과 포항우체국에 가기도 했다.-학생 신분으로 발굴지에 발을 디뎠다가 나중에는 책임조사원으로 현장을 누볐다.△불국사, 천마총에 이어 황남대총과 안압지 발굴 현장에 투입됐고 군에 입대해서도 휴가 때마다 발굴터를 찾아 용돈벌이했다. 제대한 뒤에는 본격적으로 황룡사에 매달렸다. 1978년에 ‘경주고적발굴조사단(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전신)’에 건축직 5급(지금의 9급)으로 취직했다. 감은사지를 시작으로 분황사지, 월성해자, 월정교, 춘양교, 전랑지(신라시대 궁궐터로 추정), 명활산성, 문경 조령원터, 여수 선소(거북선 조선소) 등에서 책임조사원으로 일했다. 특히 감은사지 2차 발굴조사는 남다른 보람과 긍지로 남아있다.-감은사지 발굴조사에 보람이 남다른 이유는.△감은사지는 1959년 김정기 박사가 일본에서 돌아와 1차 발굴을 한 곳이다. 정확히 20년 뒤 문무왕 호국 유적지 조성을 위한 2차 발굴조사가 이뤄진 것이다. 발굴보고서를 작성하면서 1차 기록과 상이한 3곳을 발견했다. 먼저 사리함 옆의 원형 구멍이 찰주공일 가능성을 제시했고(1차 보고서는 습기를 모아주는 구멍으로 기술), 김정기 박사와의 열띤 토론 끝에 금당지 기단 갑석 모양을 수정했으며, 석탑의 석질이 응회암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발굴을 통해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면 더 뜻깊겠다.△사찰은 주로 탑과 금당이 일직선에 배치된다. 그런데 분황사에는 금당인 보광전의 입구가 서쪽으로 향하여 전탑을 바라보고 있지 않아 특이했는데, 발굴조사로 궁금증이 풀렸다. 고구려의 1탑 3금당(一塔三金當, 사찰에서 탑을 중심으로 동·서·북쪽에 법당을 배치하는 방식) 양식을 수입해 신라화한 것이다. 고구려는 탑을 가운데 두고 3금당이 탑을 바라보지만, 분황사는 탑을 남쪽에 두고 3금당이 모두 남향하고 있다. 나는 그걸 신라식 ‘品(품)’자형 가람배치라고 이름 붙였다. -오랜 시간 공들여야 하는 작업이라 고되지는 않나.△1년 내내 발굴 조사가 이어지면 12월까지 야외에서 유구 실측을 하게 된다. 눈이 가물거리고 배가 출출해지는 오후가 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조사갱 속에서 술판이 벌어졌다. 4홉짜리로 시작하면 대병으로 두세 병을 비워야 끝이 났다. 주머니 사정이 다들 마찬가지라 10원짜리 라면땅이 안주였다. 분황사 서편에 술을 외상으로 주던 구멍가게가 있었다.-수개월에서 수년씩 이어지는 지난한 발굴 현장에서 기억나는 일화가 있다면 얘기해달라.△발굴 현장에 사내 결혼이 유독 많았다. 유물 발굴을 잘 하면 사람 발굴도 잘 한다고, 발굴은 사람 발굴이 제일이라고 우리끼리 농담할 정도였다. 동료들끼리 끈끈한 전우애 같은 것이 생겨서 발굴이 끝나도 인연을 이어가는 경우가 많다. 2차 감은사지 발굴조사 조사단장이던 조유전 박사가 보신탕을 좋아했는데, 발굴 조사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경주에 모여 보신탕 잔치를 벌였다. 감은사지 앞 대종천에서 은어 낚시도 많이 했다. 미끼 없이 낚싯대를 흔들어 낚은 은어를 초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평생을 몸담았던 공직에서 퇴임한 뒤에는 경주로 돌아와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을 열어 매진했다.△2000년도 본청인 대전에서 근무한 10년을 제외하면 평생을 경주에서 보냈다. 건축을 전공한 기술직이라 공무원 인생이 녹록지 않았다. 현장에 실습 나온 학생이 학예직으로 들어와 더 빨리 진급하더라.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50줄에 문화재학과에 들어가 학위를 받았다. 계림문화재연구원을 열어 문화재와 두 번째 인연을 시작하고 창림사 터와 천북 신당리 고분 등을 발굴하고 조사했다.-경주 유적발굴에 얽힌 생생한 이야기가 많아 한정된 지면이 아쉬울 뿐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평생을 몸 바쳐온 일에 자부심이 크다. 남들은 자식이 문화재 분야로 나간다면 말린다고 하지만 아들이 고고학을 한다고 했을 때 자랑스러웠다. 앞으로 남은 삶은 후배들과 시민들에게 내가 쌓아온 지식을 나눠주고 싶다. 문화재 정책에 대한 자문이나 문화재 인식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 남시진 계림문화재연구원 대표이사는1951년 경주 보문동에서 태어나서 계림초등학교까지 6킬로미터를 걸어 다녔다. 경주공고 재학중이던 1969년, 불국사 복원공사 발굴조사와 설계 작업을 시작으로 경주의 문화유산 발굴조사에 참여했다. 1978년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에 입사했다. 만학도로 경주대 문화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11년에는 계림문화재연구원장으로 취임해 창림사터와 천북 신당리 고분 등을 발굴하고 조사했다. 작년 12월 원장 직을 후배에게 넘겨주고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의 생생한 지식을 신문 칼럼과 저서, 강의를 통해 나누고 있다./배은정 작가

2023-10-09

역사강사 최태성 “김유신이 삼국통일 위업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김유신은 몰락한 금관가야의 후손이라는 태생적 약점에 절망하지 않고, 언제나 미래를 직시하며 노력과 땀을 아끼지 않았기에 무열왕 김춘추와 함께 삼국통일이라는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성큼 다가선 가을을 몸과 마음으로 실감할 수 있었던 10월 7일 오전. 경상북도와 경주시가 주최하고, 경북매일신문이 주관한 강연회 ‘신라의 삼국통일-무열왕과 김유신의 시대’엔 경주시민과 경북도민, 내외빈을 포함 1천500여 명의 사람들이 찾아 발 디딜 틈 없는 성황을 이뤘다.경주 화백컨벤션센터 3층 대강당에서 열린 ‘신라의 삼국통일-무열왕과 김유신의 시대’라는 주제의 강연회에 강사로 나선 이는 공중파와 케이블방송, 유튜브 등에서 ‘큰별쌤’으로 불리며 높은 인기를 얻고 있는 최태성 씨.최태성 강사는 백제와 고구려의 병합(660년과 668년), 당나라의 축출로 이어지는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김유신과 무열왕(김춘추)에 얽힌 이야기를 1시간 10분의 시간 동안 누구나 알기 쉽고 재밌게 풀어내 참석자들의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경주시장, 경북도·경주시 의원, 신라문화원장 등도 참석강연회엔 주낙영 경주시장과 이동협 경주시의회 부의장, 경주시의회 이경희, 정원기 의원, 경북도의회 배진석, 황명강 의원, 진병길 신라문화원장 등도 자리를 함께 해 시민들과 유쾌한 만남을 가졌다.강연회가 시작되기 전 무대에 오른 주낙영 시장은 “연휴의 시작을 신라 역사와 함께 하려는 분들이 이렇게 많을 줄 몰랐다. 최태성 강사의 인기를 실감했다”는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삼국통일이 이뤄진 7세기 중후반 우리나라의 역사에 관해 짤막하지만 인상적인 ‘소강연’을 펼쳐 참석자들의 이목을 끌었다.이어 이동협 부의장은 “경주시민은 물론 국회의원들까지 이번 강연회에 참가 의사를 전해왔었다”는 말로 ‘신라의 삼국통일-무열왕과 김유신의 시대’ 강연회에 쏠린 지역민들의 관심을 알려 박수를 받았다.강연회를 주관한 경북매일의 최윤채 대표는 “너무나 짧은 시간에 참가 신청이 마감돼 참석을 원했던 분들 모두를 이 자리에 모시지 못해 송구하다”며, “내년에는 더 큰 공간에서 보다 많은 분들과 함께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살필 수 있는 자리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김유신의 고뇌와 환희를 흥미로운 강연으로 풀어낸 최태성 강사본격적인 강연에 나선 최태성 강사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통치자 구형왕(김유신의 증조부)-김무력(김유신의 조부)-김서현(김유신의 부친)-김유신’으로 이어지는 가계도를 그려, 어떤 과정을 통해 다른 나라에서 밀려온 유민(流民)에 불과했던 김유신이 신라의 핵심 정치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인지 설명했다.그 과정에서 최 강사는 특유의 유머와 재치 있는 어법으로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과 어머니 만명부인의 러브 스토리’ ‘김유신과 기생 천관의 만남과 이별’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가 무열왕 김춘추와 결혼하게 된 사연’ 등을 자연스레 이끌어내 객석의 웃음과 감탄을 불러냈다.이날 강연회엔 아버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참석한 초등학교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이를 감안한 듯 최태성 강사는 아이들 곁으로 다가가 친절하게 신라와 삼국통일의 역사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아이들의 답변을 이끌어내는 정감 있는 모습을 여러 번 보여줬다.“자신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려는 노력이 있었기에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뤄낸 인물로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다”는 말로 강연을 마친 최 강사는 “여러분도 자신의 세운 목표를 향해 쉼 없이 꾸준히 달려간다면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란 말로 강연장을 찾은 어린 학생들에게 용기를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강연이 시작되기 30분 전부터 참석자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함께 찍는 사진에 포즈를 취해주는 등 ‘팬 서비스’에도 충실했던 최태성 강사의 ‘신라의 삼국통일-무열왕과 김유신의 시대’ 강연회.아침 일찍부터 준비해 경주 화백컨벤션센터를 찾은 울산의 한 가족. 딸과 아들의 손을 잡은 아버지는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선물 받은 강연회였고, 아이들에게 좋은 가을 선물이 된 것 같다”며 환하게 웃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10-07

가을에 물든 사찰·정자·고택으로 떠나볼까

가을이면 산사로 떠난다. 산사로 가는 길에선 왠지 청량한 향기가 나는 듯하다. 바람 소리, 물 소리, 새 소리를 벗 삼아 걷다 보면 세속의 번뇌가 시나브로 씻겨지는 듯하다. 경상남도 밀양의 작은 절인 만어사(萬魚寺)로 떠났다. 1만 마리 물고기에 관한 전설이 있는 만어사는 무려 2천년의 세월을 견딘 고찰(古刹)이다. 가을이 깊숙이 밀려온 만어사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이 가을 감성 가득한 여행지 밀양으로 떠나보자. ◇ 1만 마리의 물고기 같은 너덜이 펼친 절경경남 밀양 남쪽 삼랑진에 있는 만어산을 차로 오르다 보면 중턱쯤에 작은 절이 보인다. 만어사다. 만어사는 규모는 작지만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에 나올 정도로 오래된 절이다. 금관가야를 세운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 때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니 역사가 2천년 가깝다. 창건 이후 왕들이 불공을 올리는 장소로 이용됐고, 고려 명종 10년(1180년)에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지금의 만어사는 보물 제466호 삼층석탑과 근래에 지은 대웅전, 범종각, 삼성각이 전부인 조촐한 산중 사찰이다. 기이하게도 만어사의 가장 큰 볼거리는 사찰 앞마당을 가득 뒤덮고 있는 돌들이다. 크고 작은 돌이 쏟아져 내린 듯 널브러져 있는 곳을 흔히 ‘너덜겅 지대’라고 하는데, 전국의 너덜겅 지대 중 가장 규모가 크고 풍광이 빼어난 곳이 바로 만어사 주변이다.만어사의 너덜겅은 폭이 약 100m, 길이는 500m나 된다. 만어사는 바로 이 돌들을 1만 마리 물고기에 비유한 명칭이다. 한여름 소나기가 내린 날이면 수많은 물고기가 주둥이를 물 위로 내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너덜겅은 고기들이 변해서 된 것이라 하여 만어석(萬魚石) 또는 어산불영(魚山佛影)이라 부른다.믿을 수 없는 풍광이 펼쳐지는데 전설이 따라붙지 않을 리 없다.동해 용왕의 아들이 자신의 수명이 다한 것을 깨닫고 낙동강 건너에 있는 무척산이란 곳의 신승(神僧)을 찾아가 새로 살 곳을 마련해달라고 부탁했다. 신승은 용왕의 아들에게 ‘가다가 멈추는 곳이 바로 그곳’이라고 말해줬다. 용왕의 아들이 길을 떠나자 수많은 물고기 떼가 그의 뒤를 따랐는데, 그가 멈춘 곳이 만어사다. 만어사에 이르자 용왕의 아들은 큰 미륵돌로 변했고, 그를 따르던 물고기들은 크고 작은 돌로 변했다고 한다. 전설처럼 만어사의 돌들은 마치 물고기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이 돌들을 두드리면 맑은 종소리가 나서 만어산 경석이라고 부른다. 화강암의 성분에 따라 소리가 조금씩 다르다.경내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대웅전 옆에 있는 높이 5m의 자연석이다. ‘미륵바위’ 또는 ‘미륵불상’이라고 한다. 전설 속 동해 용왕의 아들이 변한 돌이다. 자연석 표면에 붉은색이 감도는 부분이 가사(袈裟)처럼 보인다고도 한다. 주지스님은 잉어를 닮았다거나 물고기가 입질하는 모양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고 전했다. 보존 상태가 너무나 좋아서 기나긴 세월을 견뎌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미륵바위는 병자호란이나 임진왜란, 갑오농민전쟁, 경술국치, 3·1만세운동, 6·25전쟁, 4·19혁명, 5·16 군사정변 등 역사적 격변의 시기마다 돌의 오른쪽 면에서 마치 눈물을 쏟듯 물이 흘러내렸다고 한다.신비한 이야기 때문인지 미륵바위에 기원하면 아기를 낳지 못하던 여인이 득남할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진다. 만어사의 돌도 특이하지만 사찰 마당에서 바라보는 첩첩의 산 능선이 절경이다. 마치 진경산수화처럼 산이 겹쳐 있는 운해는 밀양 8경으로 꼽힐 정도로 매력적이다. ◇ 이팝나무 ‘데칼코마니’가 매혹적인 위양지만어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신라 때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축조된 저수지가 있다. 경상남도의 문화재 자료이기도 한 위양지다. 위양지는 밀양 시내를 보호하듯이 감싸고 있는 밀양의 진산인 ‘화학산’ 아래 있는 연못이다. 저수지 주변의 수백 년 된 이팝나무가 물속에서 자라고 있는 모습은 이색적이면서 경이롭다. 아침에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저수지에 깔리면 몽환적이기까지 하다.위양지는 신라 때 축조된 저수지다. 위양지 주차장 앞 현판에는 “선량한 백성들을 위해 축조됐다”라는 설명이 쓰여 있다. 원래 논에 물을 대던 수리 저수지였지만, 인근에 거대한 가산저수지가 들어서면서 역할을 빼앗겼다. 대신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그 쓸모가 바뀐 셈이다.오랫동안 사진을 찍어온 사람들은 봄보다 가을의 풍경에 손을 들어준다. 저수지에는 겨울을 준비하는 청둥오리들이 한가롭게 물위를 떠돌며 산책을 즐기고 있고, 그 물속으로는 형형색색 옷을 갈아입은 산과 들이 그대로 담겨 있다. 호수 주위의 수백살 된 이팝나무와 느티나무는 물속에서 꿈꾸듯이 고요하다. 여기에 물에 투영된 산그림자는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보듯이 아름답다. 가을 이른 새벽마다 이 빼어난 풍경을 담으려는 사진 애호가들이 곳곳에 자리잡는 이유다. 특히 아침에 피어오르는 물안개에 젖은 저수지는 몽환적인 분위기까지 자아내 이색적이면서도 경이롭다.위양지는 사철 모두 아름답지만 봄에 특히 아름답다고 한다. 저수지 둘레의 오래된 이팝나무들이 일제히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저수지 가운데 5개의 작은 섬과 완재정이라는 작은 정자가 있다. 완재정은 안동 권씨가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든 재실로, 1900년에 조성된 정자다. 건축 당시 완재정은 배로 출입하도록 했지만 지금은 길을 놓아 걸어서 들어갈 수 있다. 가수 아이유가 주연으로 나온 ‘달의 연인 보보경심 려’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여행정보밀양강 지류인 남천가에 있는 금시당은 1566년 조선 명종 때 좌승지를 지낸 학자 이광진이 고향에 내려와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집이다.이광진은 ‘중종실록’‘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관직에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밀양강이 굽이치는 언덕 위에 금시당을 짓고 노년을 보냈다.금시(今時)는 지금이 옳다는 뜻. 금시당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는데 이광진의 5대손 백곡 이지운(1681~1763)이 복원했다. 백곡재는 이지운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재사(齋舍)로 금시당 동쪽 축대 위에 있다.금시당 백곡재의 자랑은 이광진이 직접 심었다는 450년 된 은행나무다.밀양 여행의 필수 코스 중 하나는 영남루다. 양쪽에 침류당과 능파당이란 건물을 거느린 웅장한 규모의 영남루는 진주 남강의 촉석루, 평양 대동강의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꼽힌다. 누각은 규모부터 현판의 글씨까지 시원시원하다.영남루는 밀양강 건너편에서 보는 야경이 특히 아름답다. 조명 켜진 영남루를 바라보면서 천변을 따라 느릿느릿 걷는 것만으로도 가을밤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다.‘기회송림유원지’는 영화 ‘밀양’의 촬영지로 유명해지면서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150여 년 전 남기리 기회마을 주민들이 북천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조성한 폭 200m, 길이 1천500m의 방수림이다./밀양=최병일 여행전문기자

2023-10-05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역대급 콘텐츠로 ‘대동난장’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2023이 구)안동역사부지, 원도심, 탈춤공원과 하회마을 등에서 9일까지 다채로운 축제 콘텐츠로 관광객들을 매혹하고 있다. 올해 탈춤축제는 10개국 11개 단체 해외 공연단이 국가별 특색있는 탈문화 공연을 진행한다. 또한, 축제의 킬러 콘텐츠인 대동난장 프로그램을 통해 탈을 쓴 사람들의 참여형 축제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와 함께 지역민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 공모에 이어, 전국을 대상으로 한 버스킹 공모사업으로 MZ세대 등 젊은 층이 축제에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마련했다. 여기에 매년 관광객으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탈놀이단은 ‘꽃눈깨비’라는 명칭으로 재미있고 역동적인 춤과 동작으로 신명나는 축제의 장을 만들어가고 있다. 또한, 축제공간 확대 및 지역상권 활성화를 위해 진행되는 전통시장에서는 국내·외 공연단이 참여하는 퍼레이드와 마임, 탈춤외전, 시장가면 등을 통해 축제장을 찾은 관광객이 전통시장까지 함께 관광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축제장에서는 300여 가지에 달하는 다양한 체험과 볼거리, 먹거리, 즐길거리 부스들이 운영 중이며, 시내 곳곳에서도 문화예술공연장과 세계탈전시관, 탈춤축제 메타버스 체험관, 옛사진 전시 등 탈춤 관련 콘텐츠들을 만나 볼 수 있다. 안동/피현진기자 phj@kbmaeil.com

2023-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