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39세 대한민국 미술대전 대상… 온갖 역경 딛고 ‘석경 화법’ 완성

한상갑기자
등록일 2024-09-26 19:13 게재일 2024-09-27 14면
스크랩버튼
‘화업 50년’ 석경 이원동 반세기 서예인생을 만나다
석경 이원동
석경 이원동

먹을 듬뿍 머금은 큰붓이 한지에 마찰음을 내며

거친 사선(斜線)으로 뻗쳐 내려간다.

발묵(發墨)한 먹이 종이에 스며들자

붓을 곧게 세워 허공으로 뻗친 가지를 그리기 시작한다.

두어 번 큰 붓질에 고목의 태점(苔點)들이 뚜렷하고,

세필(細筆)이 가해지면서

한 그루 고매(古梅) 모습이 완연하다.

아교로 갠 붉은 물감을 점점이 입히는 홍매 채색,

흑과 홍의 극적인 대비에

보는 이들은 절로 감탄이다.

나뭇가지들은 화점(花點)으로 이어지고,

고목은 태점으로 연결되며

홍매화 가지의 암향(暗香)이

허공중으로 스민다.

대대로 유학 가문에서 성장한 석경(石鏡) 이원동에게 서예는 일상이요, 한학은 생활이었다. 어른들 손엔 언제나 경전이 들려 있었고, 집안엔 늘 묵향이 배 있었다.

“기억하기를, 연필보다 붓을 먼저 쥐었고, 동화책보다 천자문을 먼저 읽었습니다.”

어릴 적 석경은 희미하게나마 서예와 한학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다고 한다. 소질도 있었지만 워낙 글쓰기와 한문을 즐겼기 때문에 이 일이 평생 업(業)이 될지 모르겠다는 막연한 확신 같은 것이 있었다.

청년 시절 석경이 서예가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것인데, 뜻밖의 한 사건이 그를 묵연(墨硯)의 세계로 이끌었다.

“고등학교 때 미술교사가 천석(千石) 박근술 선생님이었어요. 어느 날 호출을 받고 작업실로 뛰어갔는데 선생님은 대나무 그림을 그리고 계셨습니다. 그때가 5월로 꽤 쌀쌀한 날씨였는데, 러닝셔츠 차림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작업하시는 겁니다. 그 모습에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글씨를 좀 쓰네’라는 주위의 칭찬에 들떠 손재주만 믿고 있었는데, 바로 그 자리에서 ‘화선(畵禪)일치’의 경지를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박근술은 석재(石齋) 서병오에 이어, 죽농(竹農) 서동균을 사사해 대구 서화계의 도도한 맥을 잇는 우뚝한 봉우리였다. 그길로 석경은 반(半) 학생, 반 제자가 돼 천석으로부터 서예와 문인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그의 서예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고, 마침내 그는 간절히 원하던 동국대 불교미술과에 진학하게 됐다.

유학 가문에서 성장, 한학·서예는 일상

고교 시절 천석 박근술 만나 서예 입문

1998년 대나무 그림으로 미술대전 대상

기존 화법 과감하게 탈피, 서예계 화제

서울 문화계·주류 화단서 숱한 러브콜

거액 제시하며 대형 기획전·초대전 제안

유혹 떨치고 작업 몰두, 한때 막노동도

정형화된 문인화풍·화법 과감히 탈피

‘서화일치’ 화두로 해마다 새 화풍 도전

화업 50년 맞아 삶 관조하며 후진 양성

◆ 대나무 화법 깨버린 대상작 오랫동안 회자

대학 졸업 후에도 석경은 대구를 떠나지 않고 서예와 문인화 작업에만 몰두했다. 그런 한편, 그는 무애자재한 ‘붓의 길’을 얻기 위한 구도(求道)의 방편으로 세상을 주유하기도 했다. 대가들의 작품 세계를 알기 위해 유명 작가, 예술인들을 찾아다녔고, 한때는 지리산 한 암자에서 외부와 문을 걸어닫은 채 좌선(坐禪)에 들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석경 화업 인생에 큰 획을 긋는 1998년이 다가왔다. 그해 석경은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 부문에서 영광의 대상(大賞)을 거머쥐었다. 그 당시 서예와 문인화가 통합 운영되던 시절이어서 예술계 관심은 미술대전에 집중됐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이 공모전에서, 석경은 서화계 내로라는 3000여 명 고수들을 제치고 대상을 차지했다. 그의 나이 39세, 본격 붓을 잡은 지 20년 만이었다. 그의 수상은 영남지역 서예를 일으킨 석재 서병오 문중의 경사요, 전국대회의 대상은 죽농 서동균 타계 이후 반세기 만에 이뤄낸 ‘사건’이었다.

당시 서예대전 출품작은 대나무(竹)였는데, 그 화법이 너무 독톡해 화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이때부터 석경에게 ‘대나무 작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게 되었다.)

기존의 대나무 그림이 줄기(竿)-가지(枝)-잎(葉)-마디(節)로 이어지는 패턴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석경은 이 틀을 과감히 깨버렸다. 석경의 대나무는 잎이 먼저 그려진다. 잎은 구도(構圖)의 소품이자 작가의 화의(畵意)를 드러내는 수단이다. 석경의 댓잎 배열은 구도상 공간배치를 잡아주는 소품이 아니라, 그가 지향하는 정신세계의 표현, 즉 화격을 보여주는 언어가 됐다.

가로, 세로 한지에 죽엽이 자리를 잡으면, 잎 사이를 뚫고 줄기가 순식간에 댓잎들을 관통하며 그림이 완성된다. 줄기는 이상과 관념들을, 번뇌와 고뇌들을 한 흐름으로 꿰뚫으며 작가의 지향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거침없이 뻗어나간 줄기는 수도자의 게송(偈頌)이요, 선승의 깨달음의 일갈(一喝)인 것이다.

평론가 이인숙은 “초기 필획과 여백의 이중주에 머무르던 석경의 묵죽이 후기에 이르러 담묵(淡墨), 선염(渲染)의 죽영(竹影)이 들어가 공간이 깊어지고 여백의 밀도가 높아진 삼중주로 나타나고 있다”고 평가했다.

지역 서단의 한 작가도 “석경의 죽(竹)에는 석재(石齋)의 웅장하고 호방함, 죽농의 아름답고 세련됨, 천석의 깔끔하고 간결함이 잘 녹아있다”고 평했다. 석경은 이 모든 것에 아울러 꼿꼿함과 소쇄함을 더해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 냈다.

석경 이원동의 부채 작품.
석경 이원동의 부채 작품.

◆ 한때 생활고 시달리며 노동판에서 노역도

불혹(不惑)도 안 된 나이에 미술대전 대상을 받으며 석경은 순식간에 화단의 블루칩으로 부상했다. 전화통이 불이 날 정도로 하루 종일 전화를 받았다. 축하 전화가 대부분이었지만 간혹 서울 문화계 쪽이나, 주류 서예단체의 러브콜도 상당수였다.

그들은 목돈을 제시하며 기획전, 초대전으로 그를 유혹했다. 수도권 주류 문화계에서는 ‘명망가’로 향하는 급행티켓을 제시했다.

그러나 ‘맹수는 무리지어 다니지 않는다’는 스승의 유훈에 따라 그는 시류와 타협을 거부했다. 오히려 은둔을 자처해, 세상으로 향하는 모든 길을 차단해 버렸다. 이후 10년 동안 두문불출 작업에만 전념했다.

자신만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세상의 ‘주류’를 외면한 후유증은 너무 컸다. 세상이 보내온 환대를 거절한 것은, 사실상 세상을 적으로 돌린 것이어서, 모든 공적인 활동, 전시의 길이 막혀버렸다.

스스로 자처한 궁핍과 고립은 오로지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도저히 가족을 건사할 길이 없어 막노동판에 나갔다. 공사판 생활 그 몇 년 동안 몸은 고되고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은 오히려 편안해, 영혼이 투명하고 맑아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제자들과 지인들이 ‘대상 작가가 막노동을 하느냐’며 우려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당시로써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중에는 그것 역시 근육이 돼, 오히려 주변의 제약이나 화단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마음껏 자신의 서화 세계를 펼쳐나갈 수 있는 힘이 됐다.

석경 이원동의 부채 작품.
석경 이원동의 부채 작품.

◆ 도전, 또 도전… 해마다 새로운 화풍 선보여

화가들은 쉴 새 없이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작업 경지를 넓혀가고, 피아니스트들도 끊임없이 새 주법을 시도하면서 마스터로 성장해 간다. 서예가들도 작품의 끊임없는 변화를 통해 자기의 작업 세계를 확장해 간다.

대나무 작품으로 대상을 받은 후, 석경에게 따라다니는 ‘대나무 작가’ 꼬리표는, 그에게는 되레 굴레였다. ‘그림이나 화풍에 어떤 작가가 떠오르면 그 작가는 이미 죽은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석경은 철저하게 자신을 객관화했다. 끊임없이 변화를 모색한 그는 대나무 장르 한 분야에서만 4, 5번의 변주(變奏) 과정을 거쳤다. 서법에서도 전서, 예서에 편식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끊임없는 변신을 시도했다. 매난국죽 문인화 가운데서도 다수가 외면하는 ‘국화’에도 많은 공을 들였다. 그뿐만 아니라 능소화, 장미, 포도 등 다양한 소재를 발굴하여 문인화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석경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정형화된 문인화의 틀에서 과감히 탈피했다. 패기 넘치던 시절 화두로 삼았던 ‘서화(書畵)일치’를 되새겨, 서예에 회화적인 요소를 도입한 것이다. 한때 동양화에도 소질을 보였던 그였기에, 이런 그의 재능이 징검다리가 되어 글과 그림의 접목이 자연스레 이루어졌다. 이런 그의 작풍(作風)은 보랏빛 담묵을 배경으로 그린 국화나, 천연색 녹색 죽영(竹影)을 과감하게 도입한 죽엽도에서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석경 이원동이 최근 대구시 중구 대봉동의 한 화랑에서 열린 부채전시회에서 관객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한상갑 기자
석경 이원동이 최근 대구시 중구 대봉동의 한 화랑에서 열린 부채전시회에서 관객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한상갑 기자

◆화선일치 반세기 맞아 작품에만 몰두

많은 예술가들이 ‘장르 외도’를 하고 끊임없이 변신을 모색한다. 그 과정에서 ‘버려지고 취하는 것들’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면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확립해나가는 것이다.

그런 수많은 취사(取捨)의 갈림길에서 석경은 끊임없이 장르를 파괴하고 구도를 깨뜨리며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다. 한때 그는 전통 문인화의 틀을 깨보려고 힘썼다. 그러나 그는 지금 크게 의미 없었던 것이 아닌가 회의한다. 다시금 정통 문인화법으로 회귀했지만 그는 아직도 정답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화업(畵業) 50년을 맞은 석경, 그는 오늘도 대구 대봉동 서실에서 조용히 먹을 갈아 붓을 세우고 있다. 20여 년 전 대상 작가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을 때, 그 역시 세속의 영화에 관심이 없기야 했겠나. 그러나 지금은 에둘러온 지난날 길을 되짚어보며 ‘그냥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할 뿐이다.

“아마 제가 서울로 갔더라면 시류(時流)와 영합해 대중이 원하는 그림만 그리는 장사꾼이 되었을 겁니다. 아니면 대중매체, 매스컴의 화려한 조명 밑에서 위선(僞善)의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랬다면 돈과 명예는 얻었겠지만 지금과 같은 평안이나 잘살았다는 자부(自負)는 없겠지요.”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기획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