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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두고 온 내 마음은 아직 거기에 남아있을까?

등록일 2024-09-24 19:25 게재일 2024-09-25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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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신성한 보고(寶庫) 선도산 <br/>&lt;8&gt; 단편소설 ˝두고온 마음˝  (上)
김도일의 단편소설 내용을 인식시켜 Chat GPT로 작업한 그림.

선도산과 서악마을 일대는 신라 천년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수많은 설화와 흥미로운 전설이 깃들어있다. 그 이야기들은 소설의 소재로도 얼마든지 사용이 가능할 터. 부침을 거듭했던 한 국가의 역사 이상으로 개인의 기억도 귀하고 소중하다는 걸 일깨워주는 김도일 작가의 단편소설을 2회에 걸쳐 분재(分載)한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선도산과 서악마을이다. /편집자주

부처와 보살들이 새겨진 암석은 오랜 세월 동안 깎이고 패이고 닳아져 있었다. 특히 중앙의 불상은 그 훼손 정도가 심하여서 얼굴의 절반 이상은 형체를 알 수 없었고 바위가 깨지면서 날카롭고 뾰족한 흔적을 남겨 놓았다. 그나마 양쪽 보살들은 세월을 따라 부드럽게 닳아 형체만 희미했을 뿐 날카롭지는 않았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한 자리에서 한참 동안 불상을 바라봤고 어느 순간 나 자신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떨어져서 보면 평범하지만 가까워질수록 날카로움과 뾰족함을 드러내는 것이 나와 똑같았다. 보살들의 밝은색과는 달리 검은 바위에 새긴 모습 또한 근본이 어두운 내 성격에 비교되었다. 이것은 아무리 내가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수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저 바위들의 본성처럼. 그래서 내 마음과 달리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멀어지게 하는 것인가? 가슴이 답답해졌다.

신문사에 있는 선배에게 전화가 온 것은 해가 아파트 동과 동 사이에 막 접어들 때였다. 수은주를 뚫을 듯한 기세가 한풀 꺾일 시간이었지만 한낮의 더위에 의식마저 녹아 방바닥에 흥건히 고인 기분이었다. 에어컨 바람 앞에서 의미 없이 TV 리모컨만 괴롭히다가 수신 단추를 눌렀다.

“김 선생, 내가 어제부터 매주 연재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경주 선도산에 관한 이야기야. 매번 취재 기사만 올리면 독자들이 식상해하니 연재 중간에 김 선생 소설이 한두 번 들어갔으면 좋겠어. 생각 좀 해보고 답을 줘요. 나와 시간을 맞춰 취재를 같이 가보는 것도 괜찮고.”

평범한 원고청탁의 전화였다. 그러나 통화의 여운은 한참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 저 깊은 곳으로 내려간 얇은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게 느껴졌다. 마치 잊고 있었던 커다란 기억이 삼십 년을 시간을 거슬러 떠오르는 것을 예고하듯.

1994년, 대학 학보사의 오월은 창문 너머 캠퍼스의 활기찬 기운과는 다른 세상이었다. 총학생회 출범식을 앞두고 취재 방향을 정하고 대학방송국, 교지편찬위와 공동기자단을 꾸릴 준비, 처음으로 큰 행사를 경험하는 1학년 수습기자들을 교육하는 것이 내 몫이었다. 대학의 낭만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고달픈 기자 생활을 못 견뎌 다 떠나버리고 3학년 편집장 선배와 2학년인 나와 동기, 이렇게 셋이서 격주로 신문을 내야 했다. 그래서 사망한 북한 지도자의 분향소를 설치해 논란이 된 다른 지역 대학의 취재도 나 혼자 가야 했고 학교 재단 비리를 파헤치는 단체의 움직임도 놓칠 수 없었다. 수업은 고사하고 집에도 들어가지 않은 채 학보사에서 먹고 자는 게 일상이었다.

소파의 높낮이를 등으로 느끼며 잠에 빠져 있는데 밖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전날 밤도 선후배들과 결론 나지 않을 주제로 떠들며 냉동식품과 과자를 안주 삼아 소주를 나눠 마신 후 그대로 쓰러진 것이었다. 두통과 속쓰림에 괴로워하며 일어나니 학보사에는 아무도 없었다. 테이블을 더듬어 담배를 찾았지만 치우지 않은 테이블 위에는 종이컵마다 가득 박힌 담배꽁초만 역한 냄새를 내고 있었다.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어, 네가 웬일이냐? 들어와. 담배 있냐?”

“어제도 여기서 잤냐? 와, 냄새 지린다. 아무리 집에 안 들어가더라도 좀 씻고 다녀라.”

같은 과 친구 H가 가방에서 새 담배를 꺼내 갑 채로 던지고는 앉을 만한 자리를 찾았다. 나는 내 책상 의자에 앉아 담배의 비닐을 벗겨 불을 붙이고는 옆 책상의 의자를 친구에게 내주었다.

“과는 잘 돌아가지? 교수님들도 다 잘 계시고? 안부 좀 전해주라. 근데 누추한 분께서 이 귀한 곳에는 어쩐 일이냐?”

“저 주둥이는 여전하네. 아무리 여기 꿀단지가 있어도 한 번씩 수업 들어와서 성의도 좀 보여라. 교수님 화 많이 나셨어. 이번에 조별 과제에도 참여 안 하면 너 졸업할 때까지 교수님 수업 들어오지 말래. 전공 교수가 들어오지 마라는 건 너 졸업 안 시키겠다는 거야 임마. 내가 교수님께 사정사정해서 너랑 같은 조 하겠다고 했어. 너 인간 만들겠다고 약속하고 말이야. 어쩌다 너 같은 놈하고 친구가 돼서 내 청춘이 꼬이는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우연히 내 오른편에 앉은 H와 그 오른편에서 이미 H와 친해 보이던 Y, 군을 전역하고 입학을 해 또래보다 네 살이나 많은, 왼편에 앉아 있던 J형과 나는 처음부터 마음이 맞아 학기 초부터 붙어 다녔다. 숫기 없는 내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쩔 바를 모르고 힘들어하는 게 그들에게 전달되었는지 내게 제일 먼저 말을 건 사람이 J형이었고 두 번째가 H였다. 1학년 수업은 시간표가 거의 똑같았기에 우리는 학교에서 늘 함께였고 내가 학보사 일로 하교가 늦어지면 그들은 학교 근처 시장에 있는 분식집에서 나를 기다렸다. 2학기가 되자 수습 딱지를 떼고 정식 기자가 되었고 학보사 일은 더 바빠졌다. 어쩔 수 없이 수업을 빠질 때가 많았고 과제물 제출도 빼먹기 일쑤였다. 이미 학사경고를 예상했고 그렇게 된다면 2학년이 되기 전 휴학과 입대를 선택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그렇기에 학사경고를 면한 성적은 꽤 의외였다. 나를 위해 J형이 대리출석을, H와 Y는 과제물을 대신 써서 제출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이렇게 나를 이해해주고 바라는 것 없이 나를 챙겨주는 그들이었다. 특히 H는 한 번씩 학보사로 생사 확인을 한다며 찾아와 시험 족보와 담배 따위를 던지고 가며 나를 물가에 내놓은 동생 취급하듯 했다. 학보사 사람들이 H를 내 여자친구로 오해를 해 이를 전해 들은 넷이서 크게 웃은 적이 있었다.

답사지인 무열왕릉으로 가려면 기차로 한 시간 반을 달려 역 앞에서 시내버스를 타야 했다. H가 시키는대로 일회용 카메라 하나만 챙긴 나와 달리 H는 배낭에 무언가를 가득 담아 왔다. 2명이 조를 맞춰 수행해야 하는 과제는 포함해야 하는 요구사항이 하나 있었는데 반드시 답사지에서 조원 두 명이 들어간 사진을 찍어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누군가 혼자 과제를 하고 나머지 하나는 숟가락만 얹는 (나 같은) 얌체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임을 알았기에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시내버스에서 내리자 벌써 열한 시 반이 지나 있었다. 주말이라 사람들이 많았고 도로 건너 넓은 주차장에도 버스와 차들이 가득 차 빈 곳을 찾기 어려웠다. 무리를 지어 놀러 온 사람들 속에 섞이니 내 마음에도 공간이 생기는 것 같았다. 흐리지 않지만 희고 두꺼운 구름이 높은 곳 군데군데에서 태양열을 가려 주어 덥지 않은 상태에서 푸른 하늘을 누릴 수 있는 날씨였다. H는 내게서 받은 카메라로 입구의 조감도를 찍었고 나는 뒤에서 H의 배낭을 멘 채 그녀가 하는 것을 지켜보며 담배를 피웠다.

왕의 무덤과 그 뒤로 왕을 호위하듯 네 기의 무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무덤과 무덤 사이에는 생의 활력들이 소란스럽게 돌아다녔다. 살아서는 고귀한 존재였다가 죽어 누운 자리가 구경거리가 된 기분은 어떨까를 생각하며 사진 찍는 H를 따라다녔다.

“야, 여기에 내려놓고 거기 앞주머니에 자리 있을 거야. 그거 깔고 가방 안에 있는 것 꺼내 예쁘게 한 번 차려 봐. 누님이 시장하시다.”

“또 오라버니한테 까분다. 근데 이게 다 뭐냐? 너희 집 식당이나 반찬가게 같은 거 차렸냐?”

“야, 말도 마라. 새벽부터 이거 준비하느라고 아주 죽는 줄 알았다. 이 누님이 어디서 죽도 못 얻어먹을 것 같은 너 먹이려고 이 고생을 한 거 아니겠냐.”

“오, 좀 감동인데? 우리 H 시집보내도 되겠다. 그러고 보니 오늘 좀 차려입은 것 같다? 얼굴에도 분칠 좀 한 것 같고.”

“쉰 소리 그만하고 먹기나 해, 물도 먹어가며. 야, 근데 나한테 장가오는 남자는 확실히 땡잡을 것 같지? 이 차린 것 봐라. 내가 만들었지만…… 감동이다 감동.”

준비한 음식은 내가 좋아하는 것 위주였고 맛도 상당히 좋았다. 맛있는 음식과 끊이지 않는 즐거운 대화, 맑은 공기와 선명한 색깔의 경치는 우리 앞에 놓인 과제를 잊게 했고 주위의 다른 사람들처럼 여행이나 소풍을 나온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점심을 먹고 왕릉을 둘러본 후 나가기 전 아기를 유모차에 태운 부부에게 우리 둘의 사진을 부탁했다. 친밀한 포즈를 취하라는 아기 아빠의 요구에 나는 손가락으로 V를 그렸고 H는 내게 팔짱을 꼈던 것 같다.

왕릉 옆에 있는 마을에서 선도산 정상까지는 삼십 분 거리의 산길이었다. 술과 담배에 몸을 맡긴 대가를 근육과 폐의 고통으로 치르는 것 같았다. 따라오는 기척이 없자 한심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며 기다려주는 H와 가다 쉬다를 서너 번 한 후 겨우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의 저질스러운 체력과는 별개로 산 정상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러나 낮은 높이와는 달리 산은 아래로 도시와 도시를 감싸고 펼쳐진 들판, 그 평야를 가르는 고속도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풍경을 제공하였다. 바위를 품고 있는 산 정상에는 절벽 한쪽을 깎은 불상 셋이 있었는데 여기가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였다.

부처와 보살들이 새겨진 암석은 오랜 세월 동안 깎이고 패이고 닳아져 있었다. 특히 중앙의 불상은 그 훼손 정도가 심하여서 얼굴의 절반 이상은 형체를 알 수 없었고 바위가 깨지면서 날카롭고 뾰족한 흔적을 남겨 놓았다. 그나마 양쪽 보살들은 세월을 따라 부드럽게 닳아 형체만 희미했을 뿐 날카롭지는 않았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한 자리에서 한참 동안 불상을 바라봤고 어느 순간 나 자신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떨어져서 보면 평범하지만 가까워질수록 날카로움과 뾰족함을 드러내는 것이 나와 똑같았다. 보살들의 밝은색과는 달리 검은 바위에 새긴 모습 또한 근본이 어두운 내 성격에 비교되었다. 이것은 아무리 내가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수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저 바위들의 본성처럼. 그래서 내 마음과 달리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멀어지게 하는 것인가? 가슴이 답답해졌다.

“진짜 보살이라도 되었나? 왜 그리 넋을 놓고 있어?”

“H야, 내가 왜 수업에도 들어가지 않고 학보사에 눌러있는지 아냐? 물론 학보사 사정도 있지만 사실은 Y 때문이다. J형이랑 넌 몰랐겠지만 우리 작년에 잠시 사귀었어. 그런데 Y가 싫다네. 가까워질수록 내가 어두운 사람이래. 친해질수록 너무 날카로워서… 그래서 자기가 상처를 많이 받는단다. 내 의도와는 달리 걔는 그렇게 느꼈나 봐. 그런 말 듣고 관계가 일방적으로 정리되니까 Y 얼굴을 마주할 용기라 안 나더라. 반박할 수도 없고. 그러니까 학보사는 내 도피처야. 앞으로 누굴 만나도 상처만 줄 것 같아. 특히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이런 내가 앞으로 누굴 좋아할 수 있겠냐? 아까 올라올 때 돌탑에 돌 하나를 보태면서 Y에 대한 마음, 이성으로서 누굴 사랑하겠다는 마음을 탑 위에 얹었다. 하, 털어놓고 나니 시원하네. 어이 친구, 그만 내려가자.”

다음 해 H는 휴학을 한 후 일본으로 갔고 나는 입대를 하였기에 자연스럽게 우리 넷이 모이는 일도 사라졌다. 내가 말년 휴가를 나왔을 때 J형이 결혼했는데 식장에서 만난 H는 학생 때의 선머슴 티 대신 우아하고 성숙한 여성이 되어있어 아직 군인인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복학을 하고 자퇴 신청서를 들고 온 H와 다시 만났다. 전공을 바꿔 일본에서 공부를 새로 할 예정이며 유학 중에 만난 남자와 거기에 터를 잡을 예정이라고 했다.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앞날을 응원하고 헤어진 후 피운 담배 연기에 눈이 따가웠다. Y의 소식은 어느 곳에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때 돌탑 위에 마음을 두고 온 때문인지, 아직 닳지 못한 성격 탓인지 등 떠밀리다시피 한 결혼이 처참한 실패로 끝나버린 후 몇 번의 만남이 있었지만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십 년 동안 선도산 지척에 살며 거기에 한 번 가볼 생각은 왜 나지 않았던 걸까? 그때 두고 온 내 마음은 아직 거기에 남아있을까? 다음 주 잡은 선배와의 취재 약속 전에 혼자 삼십 년 전 그 길을 좇아 걸어봐야겠다.

소설가 김도일(49) 은 2017년 ‘포항 소재 문학상’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자신의 생활 터전인 포항과 경주 등 경상북도 일대를 소설의 무대로 삼는 경우가 많다.

명료한 문장과 곡진한 세계 인식으로 주목받는 그는 소설집 ‘어룡이 놀던 자리’를 썼고, 공동창작집 ‘당신의 가장 중심’ ‘작은 것들’ ‘쓰는 사람’ ‘최소한의 나’ 등에 필자로 참여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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