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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결과에 유권자들 일희일비, 나무 ‘불변성’에서 교훈 얻길

홍성식기자
등록일 2024-04-16 18:58 게재일 2024-04-17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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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포기 못할 희망’을 찾는 2024년 4월이길
나무는 사랑, 공포, 희망 등 많은 상징을 담고 있는 사물이다.  /언스플래쉬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22대 국회의원 선거가 며칠 전 끝났다. 그 결과 야당은 크게 웃었고, 여당은 침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전 법무부장관이 만든 신생 정당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어 곧 개원될 국회에서 정치적 입지를 다지게 됐다. 필부(匹夫)에 불과한 기자로선 어느 당이 국회의 패권을 장악하건 입법 권력이 국민들에게 희망과 신뢰를 주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기자의 기억 속에 자리한 첫 국회의원 선거는 1985년 실시된 12대 총선. 유세가 진행된 인근 초등학교 운동장이 시끌벅적했고, 목소리 높인 후보들 간의 모략과 비방, 선거운동원들 사이의 욕설과 주먹질을 보며 ‘참으로 개판이군’이란 생각을 감출 수 없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기자는 선거를 통한 민주주의의 발전을 회의하는 사람이 됐다. 이를 ‘정치 허무주의’라고 비난할 사람도 없지 않겠으나, 어쨌건 지금도 여전히 한국의 정치와 정치인에게서 미래와 희망, 믿음과 화합을 기대하지 않는다.

 

괴테 ‘영원한 것은 생명나무뿐’ 간파

뒤카스 ,나무 위대함 한 줄 시로 설파

당시 겸손할줄 모르는 지성인들 질타

 

영화 ‘은행나무 침대’- ‘오아시스’도

사랑의 불변성·영원성 나무에 비유

정치 환멸 커도 생명에서 희망 찾길

그렇다면 어디서 희망과 믿음을 찾아야 할까? 볼프강 폰 괴테(1749~1832)는 자신의 희곡 ‘파우스트’에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이런 말을 하게 만든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오로지 영원한 것은 저 생명의 나무 뿐이다.”

 

이 문장에 등장하는 ‘나무’가 정확히 어떤 상징과 은유로 사용된 것인지에 관해서는 수백 년 동안 견해가 분분했다. 아직도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문학의 해석에서 정답이란 없는 것이기도 하고.

다만, 다른 예술 장르에선 ‘나무’가 어떤 은유와 상징으로 등장하는지 살펴본다면 해답에 조금은 가까이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불멸하는 사랑을 소재로 한 영화 ‘은행나무 침대’ 한 장면.
불멸하는 사랑을 소재로 한 영화 ‘은행나무 침대’ 한 장면.

▲시인 로트레아몽이 노래한 ‘나무’는…

 

에스파냐어를 사용한 작가 중 ‘19세기 최고의 표상주의 시인’으로 추앙받는 이지도르 뒤카스(1846~1870·로트레아몽)가 쓴 단 한 줄짜리 짧은 시가 있다.

많은 독자들이 읽었으나, 정작 그 안에 담긴 함의를 제대로 읽어내기는 어려운 단시(短詩).

시인을 꿈꾸던 수많은 문학청년들에게 ‘이런 걸 써낼 수 있어야 한다면 나는 절대 시인이 될 수 없겠구나’라는 깊이 모를 절망과 ‘기필코 나도 인간의 심장을 떨리게 하는 이런 좋은 시를 쓰고야말겠다’는 뜨거운 열망을 동시에 안겨준 작품. ‘나무’라는 제목을 단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나무는 자신의 위대함을 모른다.’

 

겸손할 줄 모르는 오만과 스스로의 능력과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터무니없는 자만에 콧대만 높던 문학소년들에게 로트레아몽의 ‘나무’가 던진 충격은 컸다.

하나를 알고도 열을 아는 것처럼 짐짓 목소리를 높이던 문청들을 한없는 자기반성 속으로 이끌었던 이 시는 “나무는 왜 위대한가”라는 의문을 동시에 던진다. 시인을 꿈꾸던 적지 않은 이들이 살아온 시간은 혹시 그것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과정이 아니었을까?

영화팬들에겐 두려움과 역겨움이 싫으면서도 공포영화에 집착하는 시절이 있다. 커다란 전정가위로 사람의 목을 잘라버리고, 바나나를 먹는 살찐 여자의 목에 나이프를 꽂는 미국 호러물에서부터 하얀 옷을 입은 귀신이 음습한 별장 지붕 위를 날아다니는 한국의 괴기영화까지.

공포영화에 대한 집착은 인간 외부에 자의와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두려움을 떨치기 위한 목적의식 때문이었을 터. 원래 젊은 시절이란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 것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열망에 휘둘리는 때이기에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그 공포영화들마다 나무가 등장했다. 늪지의 가장자리에 머리를 푼 원귀의 모습으로, 또는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뒤채는 은빛 여우의 울음을 울며.

그렇다면 나무의 은유 중 하나인 ‘위대함’이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어떤 두려움을 그 안에 간직함으로써 얻어진 것일까?

영화 ‘오아시스’의 한 장면.
영화 ‘오아시스’의 한 장면.

▲‘나무’가 상징하는 두려움과 사랑

 

하지만, 단순한 공포의 대상이 위대함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그건 아니다’라는 대답을 어렵지 않게 체득할 수 있다.

오랜 기간 한국을 철권통치한 군부 출신 정치인 박정희나 전두환이 두려움의 대상일 수는 있지만, 그들이 위대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처럼.

길게는 수십 년, 때로는 수백·수천 년을 한 자리에 꼿꼿하게 서서 비바람을 견딘다는 불변의 오만함 탓일까. 나무는 영원불멸의 사랑을 은유하는 대상으로도 곧잘 사용돼 왔다. 강제규 감독의 ‘은행나무 침대’, 노무현 정권 초기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일한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가 현실에서의 그 사례다.

저 먼 신라시대부터 20세기 말까지 자그마치 1천500년을 살아온 은행나무로 만든 침대에 전생(前生)에 목숨을 걸만큼 절실하게 사랑했던 여인의 혼이 들어있다는 설정(은행나무 침대)과 비록 성치 못한 몸이지만 서로의 아픔과 고통, 힘겨운 영혼까지 온전히 끌어안은 두 사람의 끈끈한 애정을 한밤에 베어지는 나무를 통해 형상화해낸 영화(오아시스).

‘은행나무 침대’와 ‘오아시스’는 우리로 하여금 “나무의 위대함이란 불변하는 사랑을 은유함으로써 증명되는 것이 아닐까”란 독백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역시 만족스런 해답은 아니었다. 세상에는 남녀 간의 사랑 외에도 불변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이미 알아버린 이후였기에.

희망과 믿음의 메시지가 담긴 영화 ‘희생’의 포스터.
희망과 믿음의 메시지가 담긴 영화 ‘희생’의 포스터.

▲희망·믿음, 무엇으로도 파괴할 수 없는 것

 

1990년대 중반. 우연히 극장에서 만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은 많은 관객들의 감수성을 자극하며 ‘나무’에 관한 예상치 못한 깨달음을 선물했다.

 

“태초에 말(言)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너는 그와는 무관하게 침묵하고 있구나. 마치 일생 말없이 물속을 헤엄치는 철갑상어처럼.”

 

이 독백으로 시작하는 구 소련 거장의 영화는 “바람 속을 떠가는 구름의 소리까지 카메라에 담아냈다”는 영화평론가들의 극찬과 함께 ‘주목할 만한 20세기 영화’ 중 한 편으로 기록된다.

영화 ‘희생’이 전하는 메시지는 의외로 간명하다.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닌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은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믿음. 이처럼 간단하지만 변하지 않는 진리의 잠언이 담긴 영화 ‘희생’.

그렇다. 오늘날 현실에서 정치와 정치인이 주는 실망과 환멸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건 인간이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희망을 믿는 사람들’을 이길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희생’에 등장하는 아버지가 이미 죽은 나무에 물을 주면서도 포기하지 못했던 생명에 대한 외경과 부활에의 믿음. 우리의 생은 바로 그런 희망과 신뢰란 벽돌로 축조돼 왔고 앞으로도 그것들로 만들어져 나갈 것이 분명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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