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서울대 일본연구소 이경분의 추천사다. 이런 내용이다.
“정추의 초기 교향악은 서구 연주회장에 오르는 교향곡처럼 형이상학적이고 엘리트적인 것이 아니라, 농민들도 향유할 수 있을 정도로 이해가 쉽고 접근이 용이한 음악 장르가 될 수 있다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요구를 만족시켰다.”
그렇다면 여기서 언급되는 정추(鄭樞·1923~2013)는 누구인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광주와 평양을 거쳐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유학했고, 이후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활동한 작곡가다.
정철훈 작가 ‘카자흐스탄 망명음악가 정추 평전’ 출간… 흩어진 선대 예술가 3형제의 삶과 예술 완성
南·北·소련·카자흐스탄 잇는 정추의 생애 고스란히… “한민족 문화의 정체성 연구 길 열어준 선구자”
▲소련 유학 중 김일성 비판하고 카자흐스탄으로 망명
1945년 1월 오사카로 징병돼 노동부대원으로 있다가 일제가 패망한 직후인 1945년 8월 31일 현해탄을 건너 귀향하는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고, 한국 현대사의 거친 파도 속에서 북한으로 건너가 평양국립영화촬영소 음악과장, 평양음대 교수로 활동한 정추.
1952년 1월엔 모스크바 유학 7기생으로 선발돼 ‘차이코프스키 명칭 모스크바음악원’에 입학한 그는 소련의 저명 작곡가 아나톨리 알렉산드로프 박사의 지도 아래 6년간 작곡을 공부했다.
1956년 그가 작곡한 첫 오케스트라 교향곡 ‘조선적 주제에 의한 교향조곡’은 그를 소련 음악계의 신성으로 발돋움시켰다. 그러나, 마치 영화와 같았던 정추의 삶에 다시 비극이 닥쳤다.
1956년 2월 스탈린 사후 3년 만에 열린 소련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에서 흐루쇼프 제1서기가 스탈린의 독재와 개인 숭배 청산을 위한 비판을 하고 이어 큰 파장이 발생한 것.
흐루쇼프에 의해 찾아온 ‘모스크바의 봄’을 계기로 정추는 1957년 10월 모스크바 광산대학에서 열린 재소련 북한유학생 동향회에서 ‘김일성 우상화 반대’ 발언을 하고는 소련으로 망명했다.
그런 복잡한 상황에서도 정추는 1958년 8월 모스크바음악원의 졸업 작품발표회에서 하차투랸 등 심사위원 전원에게 만점을 받고 음악원을 졸업할 수 있었다. 그해 9월 정추는 모스크바를 떠나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정치적 망명을 한다.
알마티에 정착한 1961년 4월 그는 인류 최초로 우주 비행에 성공한 유리 가가린을 기념하는 공연에서 자작곡 ‘뗏목의 노래’를 피아노로 연주해 소련 연방 전역을 매료시켰다.
▲저자 정철훈, 시와 소설, 평전 등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
바로 그 정추의 생애를 고스란히 담아낸 책이 출간됐다. 이름하여 ‘카자흐스탄 망명음악가 정추 평전’(작가)이다.
남과 북, 그리고 카자흐스탄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던 선대 예술가, 3형제의 파란만장한 삶과 예술 세계를 조명한 작가 정철훈이 썼다. 자그마치 원고지 3500매 분량의 방대한 저작이다.
저자인 정철훈은 러시아 외무성 외교아카데미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7년 계간 문예지 ‘창작과비평’에 ‘백야’ 등을 발표하며 등단한 시인이기도 하다. ‘살고 싶은 아침’ ‘내 졸음에도 사랑은 떠도느냐’ ‘개 같은 신념’ ‘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 ‘빛나는 단도’ ‘만주만리’ ‘릴리와 들장미’ 등 여러 권의 시집을 출간한 바 있다.
장르를 넓혀 소설로 건너간 정 작가는 ‘인간의 악보’ ‘카인의 정원’ ‘소설 김알렉산드라’ ‘모든 복은 소년에게’ 등의 작품을 펴내기도 했다.
전직 문학기자인 그는 평전과 르포 형태의 글을 쓰는데도 빼어난 재능을 보였다. ‘북한 영화의 대부 정준채 평전’ ‘정근 전집’(전3권) ‘오빠 이상 누이 옥희’ ‘백석을 찾아서’ ‘내가 만난 손창섭’ ‘김알렉산드라 평전’ ‘뒤집어져야 문학이다’ ‘소련은 살아있다’ ‘옐찐과 21세기 러시아’ 등의 책이 그 재능으로 집필된 것들이다. 2024년엔 ‘박인환상’ 시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정추의 조카이기도 한 정철훈은 “선친인 동요작곡가 정근의 전집과 백부(伯父)인 정준채의 평전에 이어 이번에 정추 평전을 출간함으로써 남한과 북한, 그리고 카자흐스탄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았던 선대(先代) 예술가 3형제의 삶과 예술 세계를 조망하고자 했던 오랜 숙원을 이뤘다”고 말했다.
▲국적 4번 바뀐 디아스포라 정추의 삶 면밀하게 추적
한양대학교 세계지역문화연구소 김보희는 정추를 “카자흐스탄의 작곡가이자 음악인류학자로서 20세기 한민족 문화예술을 기록하고 보존하여 한민족 문화의 정체성을 연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선구자”라고 평가한다.
정추는 그의 90년 삶 중 22년은 남한의 국민으로, 13년은 북한에서, 17년은 무국적자로, 16년은 소련 공민으로, 22년은 카자흐스탄 공민으로 떠도는 삶을 살았다. 국적이 네 번이나 바뀌었다는 사실은 그가 냉전의 20세기 현대사가 낳은 ‘비극적 디아스포라’란 걸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책을 쓴 정철훈은 사반세기 동안 한국과 카자흐스탄을 오가며 정추를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그렇기에 에세이 형식으로 쓴 ‘프롤로그’― 알마티에서 온 편지, 첫 방문, 모스크바의 밤, 24시간만의 장례식, 죽음의 징후, 네 번째 희생양 등의 챕터를 완성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통상의 평전과는 다소 다른 형태를 보이는 문체와 서술 구조 등은 정철훈이 다수의 시와 소설을 완성해본 경험에서 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듯하다.
책에서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부분은 또 있다. 정추의 친형인 북한의 영화감독 정준채(1917~1980)의 서신을 통해 1950년대 북한 예술계의 동향과 두 형제의 예술을 향한 여정을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듯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을 펴낸 출판사는 ‘카자흐스탄 망명음악가 정추 평전’을 “시인이자 소설가, 탐사작가 정철훈이 완성한 필생의 역작이며, 카자흐스탄 망명음악가 정추의 삶과 예술 세계를 분단과 이산의 가족사를 넘어 민족사 전체의 차원으로 복원해냈다”고 소개하고 있다.
출판사의 설명이 책을 펴든 사람들에게도 설득력을 가진 문장으로 읽힐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하다. 이제 책에 대한 평가와 감상은 고스란히 독자들의 몫으로 남았다. 역사와 예술, 분단과 떠도는 인간에 대해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 권할 만한 책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