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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하슬라역 ... 이 애 리

구름에 가려 찬란한 일출을 보지 못하고동해안 철길 해송을 카메라에 담지 못해도겨울비가 기차 레일 위에서 훌쩍여도 좋다회비령에 진눈깨비 날리다 금세 폭설로 변해오가는 사람들 발목을 덜컥 붙잡아도 좋다역내에는 해연풍 같은 음악이 흐르고마지막 남은 담배 한 개비를 궁글리며주머니에 라이터가 없어도 허전하지 않겠다철도신문을 뒤적이다 해국(海菊)같은 하슬라역을배경으로, 한 잎의 시를 써 내려가도 좋다따스한 커피를 건네는 역무원의 배려에귤 두 개로 화답하며 시간 멈춰도 좋고마구 퍼붓는 괘방산 함박눈에 혼을 빼앗겨밤새껏 소금별 숫눈길을 헤매다녀도 좋다눈 속에 파묻힌 기차 레일을 찾아내서그대와 거리를 조율하듯 가깝게 좁혀놓고해맞이 온 사람들 행선지가 바다로 향해도밤 파도의 포말을 밀어내듯 발뺌하면서심곡항 등대처럼 밤새 글썽거려도 좋다하슬라역은 강릉의 옛 지명에서 유추한 상상의 역 이름이다. 그곳은 희망과 생성의 공간이고 번잡한 현실을 초월하는 곳이기도 하다. 각박하고 살벌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하슬라역 하나 쯤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현대인에게는 단순한 현실도피를 위한 것이 아니라 위로와 휴식, 평화와 안식을 위해 꼭 필요한 곳이 아닐까 생각한다.시인

2012-03-22

봄의 절반...박 정 수

경칩(驚蟄) 지나 춘분(春分) 의료원과 성당 사이 텃밭에 계분을 뿌리는 부부 냄새는 금방이라도 비를 몰고 올 것만 같다 췌장을 잘라낸 지난 해 여름처럼 헐거워진 땅의 틈을 밀고도 밭고랑의 봄은 좀처럼 서두르질 않는다 아내는 멀찍이 마음을 기댄 채 꽃몰이를 하는 듯 어깨에서도 바람이 일고 남편을 향한 기도처럼 계분을 뿌리듯 자신을 뿌린다 흩어지는 독한 냄새 암세포를 밀어내며 봄은 피고 약봉지 안 캡슐에 담기는 성당의 종소리, 삽자루의 오전은 천천히 건너가고 아내의 장화 신은 발을 뒤따라 남자는 가벼운 발자국 찾느라 콧날이 찡한 봄 한 움큼을 삼킨다 남자의 절반을 일구며 계분더미에 앉은 나비 같은 여자가 웃는다 후드득 몰려오는 빗방울을 닮아가는 파종의 시간, 봄의 절반을 빠져나온 성당의 종소리는 아주 멀리까지 젖고엄동을 견딘 땅에 경칩 지나 춘분이 오면 새 생명의 움이 돋는다. 텃밭에 선 부부. 거름을 뿌리고 그 봄을 반가이 맞아 여러 준비에 바쁘다. 또 한 봄을 맞이하는 아내의 병력. 그녀에게 절반은 남편이다. 남편에게 절반도 역시 아내이리라. 봄밭에 파종하는 씨앗은 싹을 틔울 것이다. 부부의 소망처럼 그들의 아픔도 치유되리라는 믿음이 따스하게 깔려있는 작품이다.시인

2012-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