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어려서는 정말로 초록 봄비가 내렸다봄비가 내리면 새잎이 나고 꽃들이 새로 피어나기 시작했다새로 잎이 나는 나무며 풀들은 마치 운동회 날 뜀박질하며즐거워하는 아이들 같았고새로 피어나는 꽃들은 마치 장마당에 모여 북적대는 장꾼들 같았다아이들도 비를 맞으면 키가 큰다고 좋아했다요즘도 초록 봄비는 내린다그러나 그 초록 봄비는 화살촉 같은 날카로운 혓바닥을 숨긴 초록 봄비다산성비이고 방사능비라는 이름을 가졌다어른들은 절대로 밖에 나가서 비를 맞으면 안 된다고 가르친다오히려 아이들은 창 안에서 맨몸으로 초록 봄비를 맞고 있을나무며 풀들을 걱정한다봄비를 초록봄비라고 부르는 시인의 가슴 속은 연두빛 연초록빛이 가득하리라. 어릴 적 봄비가 내리면 앞다투어 피어나던 봄꽃들, 그 봄꽃 스러진 자리에 돋아나는 초록빛 새순들을 바라보노라면 이가 시려옴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봄비는 산성비이고 방사능비라 할 만큼 지구는 오염되고 변질됐다. 우리 인간들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자연물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는 우리가 돼버린지 오래됐다.시인
2012-02-20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지기(知己)의, 부음을 들었다그가 밥그릇 하나를 비웠다하루 세끼 신성한 의식을 엄숙히 집전하던 그는세상 골목을, 지친 그림자 끌고 다니며 머릴 조아렸다결코 넘치는 법 없던 그의 밥그릇따뜻한 밥이 담겨지는 동안은 그래도늘 행방불명이던 삶이 증명되었다이제, 식탁 위엔 그의 수저가 없다그는 지상 최대의 소신공양을 끝내고자신의 그릇을 온전히 다 비워냈던가움푹 패인 빈 그릇에웃자란 적막이 봉분처럼 수북하다친구의 부음을 들은 시인이 삶과 죽음에 대해 관조하는 작품이다. 그렇다 어쩌면 우리의 삶이란 따뜻한 한 그릇의 밥을 채워가는 일인지 모른다. 인생이란 최선을 다해 살다가 빈 밥그릇 내려놓고 가버리는 것인지 모른다. 인생이 그럴진대 무얼 그리 더 많이 가질려고 상처주고 상처받으며 살아야하는 건지 한 번은 겸허히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볼일이다.시인
2012-02-17
엄마가 쌀을 빻아왔다 고목나무보다 느린 걸음으로 골목을 돌아오신 것이다가으내 들일로 참깻대가 된 손에 찹살가루 버무린다 엄마는 내년쯤 돌아가실 예정팥 한층 쌀가루 한층 설설뿌리시며 야 떡 먹구 싶냐, 파도 부서진 물보라 처마에 쌓인다늦은 눈, 봄눈이 내리는 시골집 마당을 떠올려보자. 하얗게 내리는 눈을 맞으며 눈처럼 하얀 찹쌀가루를 빻아 오신 늙으신 어머니, 그 쌀가루에 팥 한 층 올려 시루떡을 안치는 어머니, 이제는 돌아가실 날이 멀지 않은 어머니지만 봄눈 내리는 날 아들에게 떡을 해 권하는 어머니의 따스하고 정겨운 사랑과 정성이 눈물겹다. 이 땅의 어머니들이 걸어온 길이다.시인
2012-02-16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조용히 울고 있었다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그는 몰랐다인간 존재의 비극적인 생명인식을 형상화한 신경림의 초기 시에 속하는, 많이 알려진 작품이다. 갈대를 흔드는 것이 바람도 달빛도 아닌 울음이라는 것은 인간존재의 근원이 슬픔에서 기인된다는 시인의 기본적인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 시인의 말처럼 우리네 삶이 어쩌면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은 아닐까.시인
2012-02-15
매운 바람매어 놓은소.울지도 못하고비치적거리다간 데 없는 …멍에 벗은몸.끊긴매듭 한 마디소슬하게 남았다심우도(尋牛圖)는 소를 찾는 동자가 망과 고삐를 들고 산 속을 헤매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처음 수행을 하려고 발심(發心)한 수행자가 아직은 선(禪)이 무엇인지 참마음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지만 그것을 찾겠다는 열의로 공부에 임하는 모습인데. 결국은 자기 자신을 찾고자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시인의 간결한 언어들에서 치열함이 묻어나는 작품이다.시인
2012-02-14
지난 봄 새순 말려 띄운작설(雀舌)을,늦가을 해어름에 비로소 뜯네기다려도 올 이 없는 산 중 삶인데고이고이 간직해온 심사는 뭘까뒤뜰엔 산수유 열매가 붉어메꿩 몇 마리 부리 쪼는데찌르레기 샘물 찍어 하늘 바래듯늦가을 홀로 앉아 차를 마시네기다려도 올 이 없는 외진 산방(山房)에가을 산과 대좌하여 드는 작설은지난 봄 이슬에 젖은 찻잎이오늘은 서릿발에향기도 차네새봄의 작설 한 줌을 늦가을 산방에서 울궈 마시며 시인은 외로움과 기다림에 눈을 감는다.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아득한 그리움 끝을 물고 새들은 날아갈 것이고 쓸쓸히 가을꽃들도 떨어질 것이다. 서릿발 차가운 시간을 건너가는 머언 기다림은 무엇을,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아침이다.시인
2012-02-13
봄날 기우는 해가따가우면 얼마나 따갑겠느냐해를 정면으로 받으며 걷는 길산불이 나면불은 이쯤에서 끊기리(…)봄꽃 나는 마음이여그 마음 끊기지 않아숲과 숲 사이에 난 길 임도갈 데까지 갔다가 돌아오는해 기우는 봄날해 기우는 봄날 봄꽃 피어 서러운 임도를 걸으며 시인은 생의 한 길을 생각하고 있다. 산야에 피어나는 봄꽃처럼 한 때는 하르르 피어나던 청춘의 봄이 있었지만 이제는 나이 들어 기우는 자신을 보고 있다. 나이는 들었어도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마음의 봄꽃을 어이하리. 쉬 꺼지지 않는 불꽃을 어이하리. 이게 인생이다.시인
2012-02-10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점판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이 갔다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눈물 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일제 강점기의 한(恨) 많은 삶을 산 어느 여인의 일생을 제재로 상실과 비애로 점철되는 우리 민중들의 비극적인 삶을 적은 백석의 대표작이다. 이러한 비극적이고 한스러운 삶이 어디 일제 때 뿐이겠는가. 경우와 정도가 조금씩 달라도 우리네 삶도 이런 아픔을 안고 건너가고 있는 건 아닐까. 읽을 때마다 명치끝이 먹먹해지고 까닭모를 서러움에 먼 데를 쳐다보게 해주는 시이다.시인
2012-02-09
배꽃 가지반쯤 가리고달이 가네경주군 내동면혹은 외동면불국사 터를 잡은그 언저리로배꽃 가지반쯤 가리고달이 가네
2012-02-07
목련꽃이 온 힘 다해문 여는 날 아침 나는목댕기 매며 몸의 문을 걸어 닫았다차가운 하늘 한 쪽이목련나무에 찔리는 걸 보았다언제였던가 처음으로목댕기하고 세상으로 나가던 날아버지 따라몇 굽이 꼬아 새 길을 끌어내려배꼽을 덮던 날바람은 사정없이 내 몸의 온 틈새를 뒤적이며 스몄다그때도 목련꽃이 하늘에 하얀 입술을 대던 날이었다미색 물방울무늬 소보록이 박힌 목댕기몸으로 스미는 바람새 봄날 궁금해진 햇빛들짤막하게 날아가는 것이 보인다새봄에 대한 기대와 함께 희망이 비쳐나는 시이다. 그랬다. 청춘의 시절 처음으로 세상에 나가는 나에게 아버지는 여러가지 조심하고 경계해야할 것들과 지켜야할 것들을 가르쳐주신 적이 있다. 몸에 정신에 헛바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목댕기를 단단히 졸라매듯이 정신과 마음의 문을 단단히 단속하라고 하신 것이 기억난다. 목련꽃이 피어나던 이른 봄날이었다.시인
2012-02-06
하늘의 북소리 받아 저 화염의 세상 속으로 밀어 넣어야 하는데내 시여, 너는 아직 멀었다자기 몸 허물어먼 길 가는 영혼을 위해아궁이를 놓아둔다젖은 눈빛, 그걸 들여다보는 것은생(生)의 욕망을 내려놓는 일꺼져가는 몸의 아궁이끝내 돌아가야 할 문이다문(門) 하나 나를 보고 있다새로운 세계,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열망이 훨훨 타오르고 있다. 자기를 태워 초월의 세계에 이르고자 하는 이른바 소신공양의 과정을 거쳐야 그 세계에 이르른다고 시인은 보고 있다. 육체의 세계는 욕망과 고통의 세계다. 탈육체의 세계 곧 현실을 벗어버리는 경지에 이르러서야 성취되는 그런 영원의 세계에 대한 열망이 뜨거운 작품이다.시인
2012-02-02
목련이 목련을 반성하는 데는꼬박 일 년이 걸린다詩가,詩에 저항하는 몸짓이듯이순순히 이룬 사랑의 일보직전을 되돌리는 데는꼬박 한 생이 걸린다생을 관조하는 시인의 눈이 깊고 멀다. 목련이 목련을 반성하는데 꼬박 일년이 걸린다는 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년을 기다려 최선을 다해 피워 올린 며칠 동안의 개화마저도 반성하고자하는 마음의 품새가 넓고 깊다. 순순히 이룬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시인의 말에 가만히 귀기울인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진지해질 것인가.시인
2012-02-01
내 머리통은 왜 저기 저렇게주인을 떠나 뒹굴고 있나길가에, 비닐봉지 옆에, 쓰레기에 치여분칠한 이목구비는 왜 햇빛 아래 젖어 있나동서남북을 바꾸나 흥얼거리나내용물은 왜 유통기한이 지나도 썩지 않나정수리가 뚫린 채왜 머리통은 산산조각이 나지도 않고다만 우그러지며 피를 흘리나현재의 자신에게는 머리통이 없다라고 말하며 시작하는 이 시에서 시인은 자기자신을 겸허하게 성찰하고 있다. 현실과 불화하며 길가에 비닐봉지에 쓰레기에 치여 버려진 자신의 머리통은 곧 자기의 정신 영역이 아닐 수 없다. 현실과 조화하지 못하는 자신은 정수리가 뚫린 채 우그러지며 피를 흘리고 있다. 진정한 자신에게로 돌아가려는 몸부림이 느껴지는 작품이다.시인
2012-01-30
“오매, 단풍 들것네”장광에 골 붉은 감잎 날아오아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오매 단풍 들것네”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오매, 단풍 들것네”구수한 사투리를 섞은 향토적인 서정이 물씬 풍기는 오래된 시이다. 마음을 붉게 물들이는 가을을 발견한 놀라움과 기쁨, 곧 추석이 오고 바람이 모질게 불어올 것을 걱정하는 누이의 걱정이 스며 우리의 전통적인 여인상을 느낄 수 있게한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깨끗하고 고운 가을의 빛깔과 소리에 우리의 감관(感官)을 조용히 열어볼 일이다.시인
2012-01-27
폐경이 된 여자아직 비린내가 싱싱한방금 소낙비 지난 자리 같은물의 자궁 밖으로 기어나오는 달팽이의 등 뒤에 눈 감은 강이 있고해 저문 산이 있다왈칵 불 꺼진해와 달의 박물관우물 속에 빠뜨린 그림자에서 푸른 싹이 돋는다굽이굽이 당신의 밤도 이쯤에서맑게 일렁이는 유리창 하나 내었으면 좋겠다햇볕도 슬그머니 고개를 돌린 곳달팽이가 천천히 겹겹의 그늘을 벗는다뿌리부터 축축하게 젖은기어코 당신이다생의 유통기한이라고 말하면 웃기는 말이 되는 걸까. 폐경이 이르른 여자, 햇볕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린 그 곳에 나이 먹은 인생들이 있다. 활발하게 유통되던 인생들의 축축한 뿌리가 스린 곳이다. 그러나 거기에도 달팽이가 기어다니고 푸른 싹이 돋는다. 평화롭고 원숙한 아름다움과 또다른 생명이 움트는 곳이다. 내리막길이 아니라 또 다른 오르막길이 놓여있고 아름다운 도전이 있는 곳이다시인
2012-01-26
누가 또 먼 길 떠날 채비 하는가 보다들녘에 옷깃 여밀 바람 솔기 풀어놓고연습이 필요했던 삶까지도 모두 놓아 버리고내 수의(壽衣)엔 기필코 주머니를 달 것이다빈손이 허전하면 거기 깊이 찔러 넣고조금은 거드름 피우며 느릿느릿 가리라일회용 아닌 여정이 가당키나 하든가천지에 꽃 피고 지는 것도 순간의 탄식내 사랑 아나키스트여 부디 홀로 가시라일제에 항거한 아나키스트들의 삶이란 늘 극한 시련과 죽음이 전제되어 있었으리라. 그들의 여정은 늘 `일회용`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무한히 자유스럽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투쟁이 있었다. 비록 죽음이 다가선다 해도 수의에 주머니를 달고 거기에 손을 찌르고 거드름을 피우며 느릿느릿 가겠다는 자유의지가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이러한 여유나 태연함은 조선의 선비정신이나 자유를 추구하는 자연인의 정신이 묻어나는 정신적 유산이 아닐 수없다.시인
2012-01-12
속창 다 빼고 빈 몸 허공에 내걸렸다원망 따위는 없다지독한 목마름은 먼 나라 얘기먼지 뒤집어써도 그만바람에 흔들려도 알 바 아니다바짝 마르면 마를수록맑은 울음 울 뿐산사의 추녀 끝 풍경소리가 날리어 가는 쪽에 목어가 헤엄치고 있다. 속창을 다 빼고 빈 몸으로 허공을 향해 저어가고 있다. 지독한 목마름도 원망도 없이 어디론가 목어는 헤엄쳐가고 있다. 인생이란 어쩌면 절집의 한켠에서 어딘가로 헤엄쳐가는 목어와 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기를 비우고 또 비우고 차오르는 욕망과 집착을 벗어버리고 무욕의 정신 하나로 헤엄쳐가는 것이 우리의 한 생이 아닐까.시인
2012-01-10
등본 속으로 겹겹이 눈이 치고말소와 등재가 거듭되는 동안아버지와 나는갑종 혹은 1종 등짝을 맞고 삼 년씩나라에 나갔다가 등본으로 돌아왔다살아서, 다리 잃지 않고푸른 스탬프 찍힌 이마로 돌아와제자리에 꽂혔다가끔 A4 용지에 프린트되기도 하는 나의 가계내 이름자 아래위로 걸쳐져 있는부양의 몫이 겨울처럼 무겁다아득한 물가로 다시 눈이 치는데저 눈을 헤치고 보충대로 아이를 보낸 아침구룡포 읍사무소 양철 캐비넷 속세로 먹물로 응고되어 있는알 수 없는 번호에 물려 다니며치료되지 않는 희망이 아직은 달라붙어 있는서랍 속의 가계를 생각한다질기고도 아프다거친 눈발 속 또 체부가 오고 있다삼대(三代)가 수행하는 국방의 의무를 이야기하는 위의 작품은 한 개인의 가계를 잇기가 얼마나 힘든가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현대사는 많은 가계를 지켜주지 못했다. 전쟁과 혼란과 탄압, 가난과 궁핍 속에서 개인의 일상은 여지없이 파괴되고 짓밟히고 어려움에 봉착해 온 것이다. 필자의 이 졸시도 그런 점에서 주변의 여러 삶들과 닮아있지 않을까 하는 아픈 생각을 해본다.시인
2012-01-05
치명(致命)에 들려서라도 돌파하고 싶었던연애가 있었다 하자, 그 찌꺼기까지기꺼이 받아 마실 어떤 비굴함도배 바닥으로 끌고 가면서할 수 있다면 나, 독배(毒杯) 끝까지 놓고 싶지 않았다아편에 저린 듯 자욱한 몽롱을 헤쳐 나왔지만난파한 뒤에도 오랫동안 거기 계류되어 있었다는 것이명처럼 흔들어서 나를 깨운 것은누구의 부름도 아니었다한 구덩이에 엉켜들었던 뱀들봄이 오자 서로를 풀고 서둘러 구덩일 벗어났지만그 혈거 깊디깊게 세월을 포박했으니이 독창 내가 내 몸을 후벼 파서 만든 암거(暗渠)!서로에게 흘려보낸 저의 독으로마침내 지우지 못할 흉터를 새겼으니허물 벗은 뱀은 제 허물이더라도벗은 허물 다시 껴입을 수 없는 것을!`독창`은 치명적인 사랑의 흔적이다. 사랑은 언제나 흔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비록 흔적으로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영원할 수 있는 것이리라. 사랑이란 어쩌면 영원히 지속이 불가능한 비영속성 같은 성질을 가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편에 걸린 듯, 사랑을 접은 뒤에도 거기에 계류되어있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 질기디 질긴.시인
2012-01-04
때마침눈높이로 뜬한 떼의 고추잠자리그 중에맴돌던 놈은연밥 위에 앉아 쉬고못 가본저승 일보다이승이 아득해 온다군더더기를 떨쳐버린 깔끔한 작품이다. 시인은 잠시 포착된 한 떼의 고추잠자리를 통해 이승과 저승 사이에 놓인 아득한 시간과 공간의 깊이를 본다. 우리 살아가는 동안 어느 순간 문득 눈에 들어오는 사소한 사물 속에서 우리 이승에서의 모습들과 우리 가야할 저승의 길이 아득히 보일 때가 있다.시인
2012-01-03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소나무 가지에 쉴새 없이 와서는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아, 보아라 보아라아직도 천년 전의 되풀이다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사람아 사람아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탐을 내는 사람아무변광대한 자연 앞에 너무도 변덕 심한 인간의 모습을 비춰보는 시인의 개탄스러운 심정이 참참히 깔려있는 작품이다. 그렇다. 천년을 변함없이 불어오고 있는 바람 앞에 오욕칠정에 눈이 멀고 마음을 허비해버리는 우리네 인생이란 얼마나 가소롭고 형편없는 것인지. 오늘 아침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 앞에 서서 번잡스런 마음의 평정을 되찾으며 천년의 시간을 느껴볼 일이다.시인
2011-12-30
반시간도 지나지 않아 의문이 온다 손깍지 베개를 하고 아스라이 누워 있는 저 사람은 누구인가? 나다 아니다 각자선생이다 아니다 점차 몽롱해지는 사이, 멀리서 자동차소리 들려온다 조카애들 까불대는 소리, 풋살구 떨어지는 소리….잡념은 끊이지 않고 정신은 집중력을 잃을 때가 있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시인은 크고 요란한 소리에서 시작해 가녀린 섬세한 소리를 듣기 시작하고 있다. 시끄러운 소리들 속에서 고요하고 평안한 경지에 이르려고 하고 있다. 우리는 너무 많이 그 시끄러움 속에서 상처받고 상처를 주기도 하고 마음의 안정을 잃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고요한 자기 자신에게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 간절한 아침이다.시인
2011-12-29
중부지역난방공사 앞마름 꽃만한 눈이 내리고손을 대면 금방 녹을 것 같은빠알간 겨울 열매,오전 열 시에서열 한 시 사이혼자된 동박새가갸웃갸웃 바라만보다날아가는눈 내리는 겨울 아침나절의 정밀한 풍경을 가만히 펼쳐 보이고 있다. 절대 평화가 흐르는 자연 속에 혼자된 동박새의 마음을 새겨 넣으며 시인은 그 고요한 평화의 향기를 이 아침 우리들에게 한 줌씩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시인
2011-12-28
유치원 가방을 멘 아이 손을 잡고할머니 느릿느릿 걸어간다아이가 급한 기색을 보이자서슴없이 길섶에 앉혀 똥을 누이고찹쌀떡처럼 하얀 엉덩이를 괜히 한번 찰싹 때리고는바지춤을 여며주며 함빡 웃는데오래된 금니 하나아침햇살에 반짝 빛났다일상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세상에 어떤 꽃이 유치원 가방 멘 어린 손주 같은 것이 있을까. 오래된 금니 하나 아침 햇살에 빛나는 저 행복한 할머니의 시간들이 오래오래 이어지길 빌어본다.시인
2011-12-27
먼 곳 수평선 푸른 마루에 눕고 싶다 했다타관 타는 몸이 마루를 찾아, 단 하나의 이유로 속초 물치항에 갔다그러나 달포 전 다솔사 요사체, 고요한 안심료(安心療)의 마루는 잊어버려요대패날이 들이지 않는, 여물고 오달진 그런 몸의 마루는 없어요근경(近境)에서 저 푸른 마루도 많은 날 뒤척이는 유민(流民)일 뿐당신도 나도 한 척의 격랑이오니 흔들리는 마루이오니마루는 푸른 수평선을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몸의 마루는 여물고 오달지지 못하고 푸석하고 부실하기 짝이 없다. 한 생을 건너면서 몸의 마루는 생의 격랑 속에서 흔들리고 뒤집히고 요동치기 마련이다. 마루가 가지고 있는 수평이라는 속성, 안온하고 편안한 속성이 한 생을 살아가는 인간들에게는 바라고 꿈꾸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시인
2011-12-22
하늘 한끝 걸터앚??옥탑방 앞에 걸린외줄기 빨랫줄에 바지가 펄럭인다한사코 바람을 미는 김씨의 두 다리쉰 나이 다 되도록 쉼 없이 달리고 달린바지에 밴 관성은 아직도 탄탄하여제 힘껏 하늘을 당겨 스스로 길이 된다오늘도 달려간 만큼 또 멀어질지라도희망이라는 허공, 허공이라는 희망을 향해소리쳐 달려 나가는 저 눈물겨운 바지 하나옥탑방 앞 빨랫줄에 걸려 펄럭이는 바지를 바라보면서 시인은 인생의 절망과 고통과 어둠의 한 면을 읽어내고 있다. 쉰 나이 넘도록 삶의 중심을 혹은 그 주변을 끝없이 달리고 달린 바지가랑이. 그런 그에게 다가온 것은, 그가 쥘 수 있었던 것은 절망과 좌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저앉지 않고 그는 달리고 또 달릴 것이다. 희망이라는 허공을 향해, 허공이라는 희망을 향해서.시인
2011-12-20
창문을 연다. 이름마저 잊어버린야생 난 한 포기 청초하다지난해 늦여름, 깊은 산에서 유배된 뒤세 계절을 이겨내고 여름 문턱에서홀로 시를 읊고 있는지, 그런 불을지피고 있는 건지, 유월 이 아침진보라 꽃들을 온몸에 달고 있다촘촘한 꽃잎들이 나를 올려다보지만잎사귀의 초록빛은 꼿꼿하고 차갑다산속이 아니라 지조를 지키려는지몸에 밴 절제 때문인지, 수절하며끝내 숨으려 하는 여인처럼새치름, 내 마음 흔들어 당기고 있다진보랏빛 야생란의 꽃잎 앞에서 시인은 자연과 자신이 합일됨을 느끼고 있다. 자연의 작은 반응에서 조차 거기에 투영되는 인간을 발견하고자 애쓰고 있음을 본다. 깨끗한 생명의 자연스런 발현에 대비해 우리 인간의 속물스러움을 비춰보고 자기를 정화해 가고자 하는 시인정신을 발견할 수 있어 좋다.시인
2011-12-15
정년을 맞아 모처럼 고향을 찾았다마을 어귀늙어진 팽나무만 덩그러니 맞아 줄 뿐이웃들 얼굴 하나 보이지 않는다텅 비어 있는 집바람에 짓눌려 부대끼는 대나무 숲오늘따라 새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일몰이 하산하는 뒤란할머니 가꾸시던 더덕과 도라지 향이예전 그대로 코를 찌른다작약꽃 창백한 얼굴로 하직하는 뜨락찍찍대던 쥐떼들 움직임 사라지고야생이 된 고양이 텃밭의 비닐 뜯으며무료함을 달랜다그리운 누이와 형제들떠나가신 아버지, 어머니 불러보아도내 목소리 바람에 쓸려간다이제 고향은 소리조차 끊어져바람만이 찾는 빈 시간의 창고로 박제되었다교직에서 퇴임한 시인이 기계면 봉계리에 있는 고향집을 찾았지만 낡고 기울어진 옛집과 늙은 팽나무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풍경 앞에서 세월의 무상함과 가슴에 스미는 쓸쓸함만 느끼고 있다. 박제된 빈 시간의 창고 같은 고향이지만 거기는 목숨을 얻은 첫 둥지요 부모형제의 사랑과 정성과 헌신이 녹아있는 정겨운 공간이기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곳이 아닐까.시인
2011-12-14
너처럼 사는 것이다마음 한 자락 큼직이 펼쳐놓고내리는 폭우구슬로 흩트리며지나가는 바람과 오래건들대더라도 꽃은함부로 피우지 않는 법이다싱거운 듯 밋밋하게그러나 땅 속 어둠처럼속 깊이 여무는 것이다진흙 깊이 뿌리를 내리고 무성한 줄기와 잎을 피워 올리는 토란을 보면서 우리 한 생의 길을 어떻게 가야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건네고 있다. 그리 무성한 생육의 상태에서도 쉬 꽃 피우지 않는 토란처럼 절제와 겸허함과 무욕의 정신을 본받으라고 이르고 있다.시인
2011-12-12
세월 속에는바람이 벼린 칼날이숨겨져 있나부다그러지 않고서야 어찌저 늙은 소나무가하얀 피눈물을다리께 젖도록 울겠는가민족현실과 민중적 생명력을 노래해온 시인이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며 깊은 침묵에 들고 있다. `세월 속에는 바람이 벼린 칼날`이 숨겨져 있고, `하얀 피눈물을 다리께 젖도록` 울었던 존재는 늙은 소나무이기도 하고 시인 자신이기도 하다. 가만히 눈 감고 지난 시간들을 생각해보고 싶은 아침, 아슴아슴 가슴에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시인
2011-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