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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우주를 향한 꿈… 나로호, 내일 다시 쏜다

23일 오전 발사체 이송… 오늘 최종 리허설25일 발사 2시간여 전부터 연료 주입 시작 `다시 한번 우주로!`역사적인 한국 첫 우주발사체 나로호(KSLV-I)가 오는 25일 오후 5시를 전후해 재발사된다. 나로호는 재발사 이틀 전인 23일 오전 8시12분 전남 고흥군 봉래면 나로우주센터 종합조립동을 출발해 발사대로의 이송을 시작, 발사 D-2 단계에 재돌입했으며 발사 하루 전인 24일 최종 리허설이 다시 실시된다. 1시간여 걸쳐 발사대로의 이송이 완료되면 나로호는 각종 기계·전기적 케이블이 연결돼 발사체 기립에 착수, 이날 오후 3시30 기립을 마무리한다. 나로우주센터는 이후 나로호에 대해 발사대와의 각종 연결장치와 탑재 장비 등에 대한 상태를 점검하고 나로호의 방위각을 측정해 기립의 정상 여부를 확인할 예정이다. 발사체 이송 개시는 발사체와 연료공급선의 문제 또는 기상이변이 없으면 발사 15분전 자동 카운트다운까지 순차적으로 발사단계가 진행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나로우주터센터는 발사 당일인 25일 오전부터 발사운용을 시작해 발사 4시간여 전에 최종 발사시각을 확정한 뒤 발사 2시간여 전부터 연료 주입을 시작할 예정이다. 역사적인 나로호의 최종 발사 명령은 발사 20분 전쯤에 내려진다. 이후 발사 15분 전 자동 카운트다운에 들어가 발사 3.8초 전에 1단 엔진이 점화되고 추력이 142t에 도달되면 나로호가 이륙하게 된다. 나로호는 이륙 215초 후 고도 177㎞ 상공에서 위성을 감싸고 있던 페어링이 떨어져 나가고 이륙 232초 후 고도 196㎞에 이르면 발사체 1단이 분리돼 나간다. 이어 이륙 395초 후 2단 로켓이 점화되기 시작해 고도 300여㎞ 상공에 도달하는 이륙 540초 후 시점에서 목표궤도에 진입한 과학기술위성 2호가 분리된다. 따라서 나로호의 발사성공은 과학기술위성2호가 분리되는 이륙 540초 후에 결정되며 성공 여부 확인은 데이터 분석 작업을 거쳐 발사 40분 뒤 공식 발표될 예정이다. 과학기술위성 2호와 대전 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 지상국과의 첫 교신은 발사 후 12~13시간 뒤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7년여 교육과학기술부와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이하 항우연)은 한국 첫 우주발사체이자 새로운 로켓 모델인 나로호의 개발과 발사를 위해 노력해왔다. 우주 선진국들도 첫 발사 성공률이 27% 수준이지만 나로호 발사 성공에 대한 기대감은 어느 때보다 높다는 분석이다. 이번 나로호 발사는 `우리 땅에서 우리 위성을 우리 발사체`로 쏘아 올리면서 자연스럽게 우주강국으로 발돋움한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100㎏급 인공위성을 지구 저궤도에 진입시킬 목적의 나로호 개발 사업은 지난 2002년 8월 시작됐으며 항우연이 2004년 10월 러시아 후르니체프사와 발사체 시스템 협력을 계약하면서 본궤도에 올랐다. 나로호는 1단 액체 엔진과 2단 킥모터(고체연료 엔진)로 구성된 2단형 발사체로, 1단은 러시아와 공동으로 개발했으며 2단은 순수 국내기술로 개발됐다. 앞서 나로호는 지난 19일 오후 5시 발사예정 시간을 7분56초 남긴 시점에서 자동시퀀스상 압력을 측정하는 소프트웨어의 결함으로 발사 중지됐다./연합뉴스

2009-08-24

용서·화해, 그리고 평화… 마지막 가는 길 애도

전·현직 주요인사 등 정파·노선떠나 대거 참석남북 화해·민주주의 정착 등 고인의 업적 기려김대중 전대통령의 마지막 가는 길은 화해와 용서, 그리고 평화와 화합이 숨 쉬는 공간이었다.입법·사법·행정 등 3부의 전·현직 주요 인사와 학계, 종교계, 재계, 시민사회 등 각계 지도층 인사들은 이날 국회 잔디마당에서 열린 영결식에 대거 참석해 정파와 노선의 차이를 넘어 `화합과 통합`의 장(場)을 연출했다.참석자들은 김 전 대통령이 현대사에 아로새긴 민주주의와 인권신장, 남북화해와 협력,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노력 등 업적을 회고하면서 한마음으로 고인의 영면을 기원했다.장의위원장인 한승수 국무총리는 조사를 통해 “생전에 당신 스스로를 추운 겨울에도 온갖 풍상을 참고 이겨내는 `인동초`에 비유했던 것처럼 투옥과 연금, 사형선고와 망명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험난했던 삶이었다”며 “평범한 사람이라면 한 번도 감내하기 어려웠을 수많은 시련을 대통령께서는 불굴의 의지와 집념으로 이겨내셨다”고 김 전대통령의 삶을 기렸다.한 총리는 이어 “대통령께서 이루고자 하셨던 민주주의 발전과 평화적 통일 그리고 국민 통합에 대한 열망은 우리의 미래를 열어가는 소중한 길잡이가 될 것”이라며 IMF 외환위기 극복, IT 강국 건설 등 김 전 대통령의 치적을 회고하면서 “특히 어려운 이웃과 소외된 계층을 위한 대통령님의 각별한 관심과 배려도 오늘의 우리들이 한층 더 받들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그는 또 “대통령님은 생전에도 늘 `남북으로 갈라진 것도 모자라 동서로 갈라지고 계층 간에 대립하고 세대 간에 갈등해서는 우리의 미래는 없다`고 강조하셨다”면서 “특히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반목해온 해묵은 앙금을 모두 털어내는 것이 우리 국민 모두의 참뜻일 것”이라고 말했다.이어, 이희호 여사의 대학 후배로 여성운동을 하면서 김 전대통령과 이 여사가 결혼하기 전부터 각각 알고 지내며 1987년 김 전 대통령이 총재로 이끌었던 평화민주당의 부총재였던 박영숙 전 부총재가 추도사를 낭독했다.조사에 이어 고인의 신앙이었던 천주교를 시작으로 불교와 기독교, 원불교의 순으로 종교의식이 진행됐고, 영결식장 양쪽 무대에 설치된 대형 전광판을 통해 김 전 대통령의 행적을 기리는 생전 영상이 방영됐다. 영상에는 국민의정부 당시 김 전 대통령의 성과로 평가되는 `IMF 외환위기 극복`, `IT 강국 건설`, `6.15 남북정상회담`, `2002년 월드컵의 성공 개최 ` 등의 내용이 담겼으며 약 4분가량 방영됐다.이어진 헌화 및 분향은 이희호 여사 및 아들 홍일, 홍업, 홍걸 등 유가족, 이명박 대통령 내외,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인 권양숙 여사와 아들 건호 씨, 전두환. 김영삼 전 대통령을 비롯 전직 대통령(예우), 한승수 장의위원장, 여야 정당 대표, 해외조문사절단, 주한 외교단 순으로 진행됐다.끝으로 “너무 쓰리고 아픈 고난의 생을 잘도 견딘 당신을 나는 참으로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라는 이희호 여사의 마지막 편지글과 21발의 조총으로 영결식은 마무리됐으며, 고인의 유해는 여의도 민주당사와 동교동 사저 등을 둘러본 후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09-08-24

`영원한 비서실장` 박지원

국민의 정부 시절 `DJ의 복심`마지막 길까지 묵묵히 지켜`“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 나타났다. 마지막 가시는 길을 정중히 모시겠다”민주당 박지원 의원사진이 지난 18일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공식발표하는 브리핑에서 한 말이다. 국민의 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실장 등을 지내며 DJ의 `복심`으로 통하는 박 의원은 영면의 순간까지 곁을 지킨 `영원한 비서실장`이 됐다.DJ 퇴임 후에도 지근거리에서 보필했던 박 의원은 DJ가 지난달 13일 입원한 뒤 하루에도 몇 번씩 국회와 병원을 오가며 병상을 지켰고 눈을 감는 순간도 함께했다.당 대변인 시절부터 새벽마다 동교동과 일산의 DJ 자택을 찾아 수첩에 깨알같이 메모를 하며 성실함을 인정받았던 그는 누구보다도 DJ의 의중을 잘 아는 `DJ의 입`으로 불렸고 참여정부 들어 대북송금 특검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지난해 4.9 총선으로 정계에 복귀한 뒤에도 매일 동교동 사저를 찾아 정국현안에 대한 의견을 나눌 정도였다. DJ는 총선 당시 민주당 공천에서 탈락,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목포에 무소속 출마한 박 의원에게 부인 이희호 여사를 보내 지원유세를 펼쳤고 당선되자 본인의 일처럼 기뻐했을 정도로 각별한 애정과 신뢰를 보냈다.그는 DJ 서거 후 의료진과 함께 공식 브리핑을 한 데 이어 DJ측 대표 자격으로 장례형식 등 후속절차에 대한 정부측과의 조율 창구를 맡는 등 진두지휘하며 DJ 사후에도 비서실장 역할을 계속하고 있다. 특히 장례절차 문제 등을 놓고 자칫 정부측과 불협화음이 연출돼 `주군`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확정되지 않은 사안에 대해선 최대한 발언을 자제하며 차분하게 현장 관리에 나섰다. 지난 20일 입관식 직후 이제는 고인이 된 DJ 앞에서 “이희호 여사를 잘 모시고 하신 말씀을 잘 기억하겠다”며 `마지막 보고`를 올리는 자리에서는 끝내 참았던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아들들과 함께 빈소에서 상주 노릇을 하고 있는 권노갑 한화갑 한광옥 김옥두 전 의원 등 DJ와 정치적 고락을 나눠온 동교동계 가신그룹도 박 의원과 긴밀한 협의를 벌이며 고인의 마지막 길을 지켰다.동교동계 인사들은 3개조로 나눠 24시간 빈소에 상주했다./연합뉴스

2009-08-24

“고난의 생 참고 견딘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너무 쓰리고 아픈 고난의 생을 잘도 참고 견딘 당신을 나는 참으로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자랑스럽습니다” 이희호 여사는 지난 20일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입관식에서 생의 반려자이자 동지로 `동행`했던 47년을 떠올리면 써내려간 이러한 내용의 편지를 안겨보냈다.이 여사가 자랑스러워한 김 전 대통령의 영욕의 삶은, 김 전 대통령이 생전 “아내가 없었다면 내가 오늘날 무엇이 되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다”고 밝힌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여사 자신의 삶이기도 했다.유복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화목한 유년기를 보낸 이 여사는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하고 당시에는 드물게 미국 유학까지 한 엘리트 여성운동가였다.이 여사 스스로 “꿈이 큰 남자의 밑거름이 되자고 결심하고 선택한 결혼”이라고 밝혔듯 김 전 대통령이 옥고를 치를 때는 옥바라지로, 미국 망명 때는 후견인으로, 가택연금 때는 동지로, 야당 총재 시절에는 조언자로 정치 역정을 함께 했다.1976년 3.1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남편이 진주교도소에 구금되자 이 여사는 진주와 서울에서 일주일씩 지내며 남편 곁을 지켰다. 면회는 한달에 한번뿐이지만 가족에 가까이 있다는 것이 위로가 되리라는 생각에서였다.이 여사는 수감중인 남편에게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편지를 썼다. 겨울에도 안방에 불을 넣지 못하게 했다. 유난히 추위를 타는 남편이 영하의 감방에서 떨고 있는데 혼자서 따뜻하게 지낼 수 없다는 이유였다.내란음모 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이 사형 판결을 받았을 때는 지미 카터 미 대통령에게 구명을 청원하는 편지를 보내는 등 국제사회를 향해 구명 운동을 벌였고, 각종 선거 때는 전국을 누비며 헌신적으로 지원유세를 펼쳤다.김 전 대통령은 저서 `내가 사랑한 여성`에서 “내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바로 아내와의 헤어짐이 너무도 아쉽고 슬프기 때문일 것입니다”라는 말로 아내를 향한 무한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연합뉴스

2009-08-24

DJ묘 현충원 유공자 묘역 하단 조성

국립서울현충원은 20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역을 현 국가유공자 묘역 하단에 조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서울현충원 정진태 원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김 전 대통령의 유가족과 행정안전부와 협의한 결과 서울현충원의 국가유공자묘역 하단부에 김 전 대통령의 묘역을 조성키로 했다”고 밝혔다.묘역 위치는 국가유공자 제1묘역 하단으로, 인근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과 중종의 후비인 창빈안씨의 묘소가 있다.정 원장은 “유가족이 묘역을 최대한 소박하고 검소하고 친환경적으로 조성해 달라고 요청했다”면서 “묘역은 국립묘지설치법에 따라 봉분과 비석, 상석, 추모비 등을 합해 80여평(16mⅹ16.5m) 규모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그는 “오늘부터 묘소 정비작업에 착수하고 21일에는 묘소의 틀을 갖추는 `활개치기` 작업이 진행될 것”이라며 “22일에는 봉분 조성과 진입로 개설, 임시재단 등을 설치하고 23일까지 조경작업을 모두 끝낼 것”이라고 밝혔다.현충원 관계자는 “묏자리는 지관(地官)과 김 전 대통령의 장조카가 정한 것으로 안다”면서 “장소가 굉장히 협소하지만 유족들의 뜻에 따라 결정됐다”고 전했다.김 전 대통령의 묘역은 추후 유족이 원할 경우 부인 합장도 가능하다.서울현충원에 조성된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역은 주차장과 진입로 등을 모두 합쳐 각각 500평, 1천100평이다. 김 전 대통령 묘역에는 주차장은 들어서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현충원 관계자는 전직 대통령의 서울현충원 추가 안장 가능성에 대해 “현충원이 답변할 사항이 아니다”며 조심스러운 반응을 나타냈다.정부는 서울현충원에 국가원수 묘를 쓸 공간이 부족하자 2004년 6월 대전현충원에 전직 국가원수 서거에 대비해 8위의 안장이 가능한 9천653㎡ 규모의 국가원수 묘역을 조성했다./연합뉴스

2009-08-21

DJ, 마지막까지 맺은 국회 인연

국회는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있어 정치적 삶의 터전이었다.지난 61년 5대 민의원에 당선된 이후 6선(5,6,7,8,13,14대) 의원을 지낸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라는 일생의 과업을 국회의 장(場)을 통해 달성하고자 한 철저한 의회주의자였다. 4수 끝에 15대 대통령에 당선된 김 전 대통령은 98년 2월 국회 앞마당에서 대통령 취임선서를 함으로써 수평적 정권교체의 첫발을 내딛는 동시에 의회 민주주의 완성시대를 열었다. 특히 사후(死後)로 가는 마지막 길을 국회로 택함으로써 의회주의 신봉자로서의 삶을 마감한다. 지난해 2월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때 국회를 찾았던 김 전 대통령은 20일 1년반만에 다시 국회를 찾게 됐다.민주당 박지원 의원은 “국회는 민주주의의 상징이고 미래의 전당”이라며 “김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의회주의를 위해 많은 공적을 남겼다”며 국회를 빈소 및 영결식 장소로 선택한 배경을 설명했다.■철저한 의회주의자61년 치러진 5대 민의원 보선에서 생애 첫 금배지를 달았다. 3수 끝의 국회 입성이었지만, 당선 사흘뒤 5.16 쿠데타로 의원선서도 하지 못했다.김 전 대통령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6대 의원 때부터다. 정치적 본산인 목포에서 당선된 김 전 대통령은 6대 국회 초반 6개월간 13차례나 본회의 발언을 함으로써 `달변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줬다. 특히 64년 당시 김준연 의원의 구속동의안 처리시 본회의장에서 5시간19분 동안 물한모금 마시지 않고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한 것은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의 유명한 일화다.이후 갖가지 정치적 변곡점에서 김 전 대통령은 국회를 통한 해결에 우선순위를 뒀다. 오랜 야당 지도자로서 숱한 장외투쟁을 해왔지만, `원내외 병행투쟁`이 소신이었다는 게 정치권 관계자들의 공통된 전언이다.신군부의 집권 계기가 된 12.12 사태에 대한 투쟁 노선을 놓고 야권내 이견이 격화됐던 94년 당시 민주당 이기택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등원을 촉구, 정면충돌한 것은 지금도 정치권에서 회자된다.김 전 대통령은 지난해 미국산 쇠고기 파동으로 민주당이 장외투쟁을 이끌었을 때도 국회 복귀를 훈수했었다.■정치권, DJ에 대한 추억한국 현대사의 거목(巨木)이었던 만큼 여야 구분없이 현역 정치인과 김 전 대통령의 접촉면은 넓었다. 김 전 대통령에 대한 회고가 이어지고 있는 것도 이때문이다.특히 현재 여야의 중진이자 핵심이 된 정치인들은 김 전 대통령과 자신만이 간직하는 추억이 하나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야권 인사들은 한결같이 김 전 대통령을 `어버이와 같은 분`(정세균 대표), `정치적 사부`(정동영 의원), `정치적 아버지`(이강래 의원) 등의 표현으로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고 있다.정치적으로 대립각을 세워온 현 여권 인사들도 김 전 대통령에 대한 회상에 젖어있다.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인 한나라당 이재오 전 최고위원은 “두번째 감옥에 갔을 때 고문을 많이 당했는데, 석방 후 동교동에 인사를 하러 갔더니 (김 전 대통령이) 웅담을 하나 주며 `고문에는 웅담이 좋으니 자기 전에 먹고 자라`고 했다”며 “저녁마다 웅담을 먹은 덕분에 빨리 회복됐다”고 회고했다./연합뉴스

2009-08-21

홈피서 공개된 DJ 마지막 친필 연설문

“북한은 핵포기·미국은 국제사회 일원으로 수용해야”“오바마에 “대북 적대관계 종식 용기있는 결단” 당부”김대중평화센터 홈페이지를 통해 최근 공개된 이 연설문에서 김 전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출현으로 미국의 일방주의 시대가 종식되고 대화와 협력의 시대가 시작됐지만, 한반도 문제만은 예외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김 전 대통령은 “오바마 정권은 (이란과 시리아 등 그간 적대관계였던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유독 북한에 대해서만 언급하지 않고 차별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태도에 실망하고 위협을 느낀 북한은 극단적 반발 자세로 나오고 있다”라고 분석했다.그는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문제를 둘러싼 북한 내부 상황이 사태를 더욱 촉진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북한이 지금 절박한 입장에 처한 것은 사실이다.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해 안심하고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든지 아니면 사생결단의 자세로 생존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은 북한이 결코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북한은 1994년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를 통해 핵을 포기했지만 부시 정부가 당시 합의된 약속을 잇따라 파기하면서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와 IAEA(국제원자력기구) 감시요원 추방, 핵실험 강행 등 상황이 발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그는 “모두가 알다시피 북한 핵 문제는 전쟁으로 해결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북한에 대한 경제봉쇄도 중국이 협력하지 않는 한 성공의 가능성은 없다. (결국) 대화와 협상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강조했다.김 전 대통령은 “오늘의 북핵문제 해결방안은 북한은 핵을 완전히 포기하고 미국은 관계정상화를 통해 북한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길뿐이며 이 외에 대안은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제안했다.그는 “북한의 근본적 목표는 국가안보와 체제보장, 북미 국교 정상화와 경제협력을 통한 국제사회의 진출이며 한국과 미국의 궁극적인 목표는 북한으로 하여금 핵과 장거리 미사일을 포기시켜 태평양 국가들의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다”라고 해석했다.즉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조건은 안전보장, 핵과 미사일 문제의 해결이며 이는 이미 2005년 9월19일 6자회담의 공동성명으로 합의된 바 있다”면서 “다시 9.19 선언으로 돌아가 동북아시아에 평화와 안전, 협력의 시대를 열어가자”라고 호소했다.김 전 대통령은 오바마 대통령이 북한과의 적대관계를 종식하는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그는 “`비핵화를 통한 점진적 관계개선`이라는 장기간이 소요되는 단계별 접근방식을 지속하기에는 상황이 달라졌고, 사태가 급박하다. (미국은) `관계정상화를 통한 비핵화`란 근본적이고도 포괄적인 접근방법으로 전환할 때가 됐다”라고 역설했다.김 전 대통령의 측근인 최경환 비서관은 이 연설문에 대해 “아마 대통령께서 직접 원고를 작성하시고도 연설을 못하신 마지막 연설문이 아닌가 싶다. 원고를 작성하시면 항상 연설하셨는데 그런 경험이 없다. 매우 귀중한 원고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연합뉴스

2009-08-21

“DJ는 큰 역사의 흐름속에 기억”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 19일 기자 시절 피랍 후 귀환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인터뷰했던 일화를 전하며 “큰 역사의 흐름속에 기억될 인물”이라고 회고했다.최 위원장은 이날 방통위 전체회의에 앞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를 추도하는 묵념 시간을 가진 뒤 “김 전 대통령의 85년 인생은 어찌보면 우리 현대사의 큰 고비이자 큰 획이었다”며 개인적인 소회를 털어놓았다.그는 “김 전 대통령이 갈등하고 타협하고 도전하고 성취하는 모습을 지켜본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며 “언론인과 여론조사인으로 활동하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만나서 조언을 듣는 등 오랜 인연을 맺어왔다”고 전했다.그러면서 동아일보 기자 시절이었던 1973년 일본에서 납치됐다 생환했던 김 전 대통령을 동교동 자택에서 인터뷰했던 일화를 꺼냈다.그는 “당시 유신체제여서 동교동 자택에 연금된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외부인 접촉이 금지됐는데 억지로 찾아들어가 지하 집필실에서 4~5시간 만나 진솔한 얘기를 나눴다”며 “굉장히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당시 김 전 대통령은 도쿄에서 납치돼 배에 실리는 과정, 수장될 뻔하다 살아 돌아온 과정, 서울로 돌아와 `팽개치듯` 버려진 과정 등을 `최 기자`에게 전했다.최 위원장은 “인간의 운명과 인권, 생명에 대한 자연인 김대중의 진솔하고 생생한 얘기였다”면서 “당시 상당히 긴 기사를 작성했으나 유신체제여서 보도를 할 수 없었고 그 기록도 사라지고 말았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최 위원장은 올 1월에 세배를 가서 김 전 대통령을 만난 것이 가장 최근에 만난 일이었다고 전했다.그는 “정치적 견해를 같이할 수도, 달리할 수도 있지만 지난 80여년 인생을 그렇게 진지하고 쓰러지지 않고 성취한 사람으로서 역사에 크게 기록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연합뉴스

2009-08-20

DJ와 영욕 함께한 세아들

야당 지도자의 아들로 지근 거리서 보필대통령의 아들 격상 후 비리로 비운겪어김대중(DJ) 전 대통령과 세 아들 홍일, 홍업, 홍걸씨는 부자지간이면서 정치적으로는 동지로서 고난과 영광을 함께 했다.세 아들은 아버지의 구속과 연금 등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어려워진 집안을 이끌었고 `DJ의 아들`이란 이유로 정치적으로 억압을 받을 때도 지근 거리에서 아버지를 도와 훗날 대통령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김 전 대통령은 이런 아들들에게 미안함과 함께 애틋한 부정(父情)을 보였다.사형수로 수감됐던 1980년 12월 세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너에게 준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 생각할 때 아버지는 언제나 너에게 본의 아닌 일을 한 것 같아 죄책감을 느껴왔다”고 토로하기도 했다.장남 홍일(61)씨는 아버지의 정치적인 굴곡을 그대로 뒤따랐다. 아버지가 대선에 출마, 박정희 전 대통령에 맞섰던 1971년에는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고초를 겪었고 1980년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다.그는 1980년 결성된 30만명 회원 규모의 청년조직인 민주연합청년동지회(민청)를 실질적으로 이끌면서 국민의 정부 탄생을 외곽에서 도왔다.하지만 50대 중반 들어 내란음모사건 때 고문을 당한 후유증이 악화되면서 사실상 정치활동을 접고 투병생활을 해왔다.차남 홍업(59)씨도 형과 함께 정치권 주변에서 아버지를 도왔다. 김 전 대통령 망명 시절엔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설립했고 광고이벤트 회사 `밝은 세상`을 운영하면서 선거 홍보 책임을 맡아 아버지의 당선에 공을 세웠다.그 역시 내란음모사건으로 형과 함께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이희호 여사가 낳은 3남 홍걸(46)씨는 일찍이 미국에 머물며 `민주투사`였던 두 형과는 다른 삶을 살았지만 고교생 때인 1980년 아버지의 구속과 사형언도를 지켜봐야 하는 등 어릴 적부터 마음고생이 심했다.꿈만 같았던 아버지의 대통령 당선과 함께 세 아들은 탄압받는 야당 지도자의 아들에서 `대통령의 아들`로 신분이 격상됐지만 이번에는 주위에서 가만두지 않았다.권노갑 전 의원의 양보로 15대 때 목포·무안갑에서 금배지를 단 홍일씨는 재선의원 때인 2003년 `나라종금 로비` 수사 과정에서 돈을 수수한 혐의가 드러나 불구속 기소됐다.또 홍업과 홍걸씨는 2002년 `이용호·최규선 게이트`에 연루돼 아버지의 재임기간 구속되는 비운을 겪었다. 당시 야당과 언론에서는 세 사람을 `홍삼트리오`라고 불렀고, 이런 낙인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채 이들의 진로에 족쇄가 되고 있다.홍업씨는 17대 무안·신안 재보선에 출마해 금배지를 달았으나 18대 때 비리 전과로 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한 뒤 낙선했다. 정치권 안팎에 있는 두 형과 달리 홍걸씨는 중국에 머물며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난 자신만의 삶을 모색하고 있다는 후문이다./연합뉴스

2009-08-20

DJ 법정 족적… 사법부 과거청산 물꼬 터

민주화 운동의 최일선에 섰던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질곡 많은 사법부 역사에도 깊은 족적을 남겼다.“법에 의해 신군부를 단죄하고 저의 무죄를 밝혀줘서 국민과 역사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2004년 1월29일 오후 2시 서울고법 303호 법정에서 열린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재심 공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김 전 대통령은 서초동 법원 청사를 나서면서 소회를 이같이 밝혔다.당시 재심 재판장은 최근 `촛불재판` 개입 논란을 빚은 신영철 대법관이었다.서울고법 부장판사로 사건을 맡은 신 판사는 김 전 대통령에게 지워진 내란음모와 계엄법 위반 혐의에 대해 “헌정질서 파괴 범죄에 맞서며 헌법의 존립과 헌정질서를 수호하려 한 정당행위였다”며 무죄를 선고했고, 국가보안법 위반과 반공법 위반, 외국환관리법 위반 혐의에 대해선 면소 판결했다.몇 달 뒤엔 김 전 대통령이 1980년 5월18일부터 949일 동안 불법 구금당한 데 대해 국가가 구금일수 하루당 10만원씩 총 9천490만원을 보상하라고 판결했다.1980년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이끄는 신군부가 5.18 광주민주화 항쟁을 내란음모로 규정하고, 배후로 지목된 김 전 대통령과 문익환 목사, 고은 시인 등 26명을 연행하면서 시작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은 암울했던 1970~80년대 사법부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긴 사건 중 하나다.당시 군법회의는 1심에서 김 전 대통령에게 구형대로 사형을 선고했고, 항소심에도 사형을 유지했으며, 대법원은 상고심에서 사형을 확정했다.김 전 대통령은 이후 미국 백악관과 교황청 등 각국 각계의 구명 운동에 힘입어 1981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1982년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20여년간 조작 의혹 속에서도 미제로 남아있던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은 1999년 연루자들이 낸 재심청구가 법원에 받아들여진 뒤 무죄 선고를 받으면서 빛을 보게 됐다.이는 이후 사법살인으로 불리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 간첩 누명을 썼던 `함주명씨 사건`, 교사·공무원 등 무고한 시민을 반국가단체 구성원으로 몰아 중형을 선고한 `아람회 사건` 등 비극적인 시국·공안 사건들에 대한 재심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했다.김 전 대통령은 이 같은 암흑기 사법부의 피해자 중 한 명으로 역사에 기록돼 있으며, 이후 재심 등을 통해 사법부가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는데 나름대로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연합뉴스

2009-08-20

“아~ 나로호” 발사 중지에 항우연 `침울`

“7년간 준비해 온 나로호가 이렇게 허무하게 발사중지되다니….” 19일 발사 7분56초를 앞두고 한국의 첫 우주발사체인 `나로호(KSLV-I)`의 발사가 전격 중지되면서 발사 장면을 지켜보기 위해 한국항공우주연구원 대강당에 모여 있던 300여명의 연구원들은 안타까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발사예정 시간 30여분을 앞두고 대형스크린이 설치된 300석의 강당을 모두 채우며 나로호 발사에 대해 강한 자부심과 기대감을 보였던 참석자들에게 발사중지 소식이 전해지자 강당안은 순식간에 탄식과 좌절 섞인 목소리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추진체 연료를 곧 배출`하고 발사체 기립설비를 재기립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일부 연구원들은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그래도 혹시나 발사작업이 재개되지 않을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연구원들도 예정시간인 오후 5시가 지나고, 발사가 어려울 것 같다는 소식에 침울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의 사무실로 되돌아갔다. 일부 연구원들은 착잡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삼삼오오 건물 밖에 모여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한 연구원은 “동료 연구원들이 갖은 노력끝에 만들어 낸 발사체가 하늘을 힘차게 날아오르는 모습을 멀리서나마 꼭 보고 싶었다”면서도 “발사실패가 아닌 발사중지인 만큼 꼼꼼히 원인을 해결한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전국 곳곳의 발사중계 현장에서 나로호의 발사 모습을 지켜보던 시민들도 갑작스런 발사중지 소식에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나로우주센터가 있는 전남 고흥군 남열해수욕장에는 전국 각지에서 10만여명의 관람객이 모였으나, 발사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대형 스크린을 통해 발사중지라는 뜻밖의 소식이 전해지자 탄식을 내뱉으며 아쉬워했다. 관람객들은 오전 일찍부터 나와 한국 첫 우주발사체의 성공적인 발사를 기원하며 함성을 지르는 등 기대감을 드러냈었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자 송림 그늘에서 나와 우주센터를 향해 이목을 집중시켰던 10만명의 시민들은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보려는 듯 물밀듯이 해수욕장으로 나갔다. 경기도 과천 국립과천과학관 앞마당에 설치된 대형전광판을 통해 카운트다운을 지켜보던 600여명의 관람객들과 대전 한밭야구장에서 현장 중계를 지켜보던 시민들도 발사중지 소식에 실망하며 서둘러 자리를 뜨는 모습이었다. 나로호에 탑재된 과학기술위성 2호와 교신을 맡은 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 연구원들도 모니터를 통해 나로호의 발사 모습을 지켜보며 성공을 기원했으나, 안타깝게도 발사가 중지되자 허탈해하는 모습이다. /연합뉴스

2009-08-20

나호로, 발사 직전 카운트다운 중지

한국 첫 우주발사체 나로호가 개발 7년만인 19일 발사될 예정이었지만 발사 직전 가동되는 자동시퀀스의 기술적 문제로 발사가 연기되는 상황을 맞았다. 나로호는 2002년 8월 개발 사업이 시작된 이래 6차례의 연기를 겪은 경험이 있어 이번 발사 연기는 더욱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렇게 우주로켓의 발사가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채연석 한국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 연구위원은 “우주개발 기술은 기계공학, 화학공학 등 모든 과학기술의 총합”이라며 “이 기술의 어느 한 부분만 잘못돼도 처참한 실패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도 지적하고 있지만, 로켓 발사성공이 쉽지 않은 것은 먼저 복잡한 우주발사체 구조를 들 수 있다. 추진시스템(Propulsion)과 로켓 구조, 항공전자시스템, 분리시스템, 전기장비 시스템 등 로켓을 구성하는 많은 부분 중 하나만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로켓 발사의 실패는 물론 심각한 물적·인적 피해까지 불러올 수 있다. 항우연이 1957~2003년 사이에 발생한 우주발사체 비행실패의 원인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발사체의 추진시스템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비행실패 원인 가운데 추진시스템 관련은 66.2%로 가장 높은 비율을 기록한 것. 추진시스템이란 가장 중요한 액체엔진 및 고체 모터를 비롯해 추력기, 동력장치(TVC), 연소실, 노즐 및 노즐밸브, 연료 및 산화제, 터보펌프, 점화 장치, 연소실 내부의 단열장치 등을 말한다. 우리 나로호와 같이 `처녀비행`을 대상으로 한 통계에서도 추진시스템 문제로 발사가 실패한 비율은 56%로 가장 높았다. 두번째로 중요한 실패 원인으로는 나로호 등과 같은 2단형 이상 발사체에서 1, 2단 및 페어링 분리 메커니즘에 문제가 있거나, 분리를 위한 전기적 연결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꼽히고 있다고 항우연은 분석한다. 분리 기술 문제는 전체 비행실패 건수의 12.6%를 차지한다. 세번째로 높은 비행실패 원인은 항공전자공학(Avionics) 기계장치 문제로 전체 원인의 10.6%를 차지했다. 여기에는 발사체 탑재 소프트웨어와 컴퓨터를 비롯해 회로 보드, 비행안전 관련 장치, 비행 및 유도 제어 장치, 내부 측정 장치, 텔레메트리 장치, 비행장치 등이 있다. 이밖에 △고체로켓모터 내부 구조, 모터 케이스, 점화기 하우징(housing), 각종 탱크, 단 연결구조, 페어링, 발사체 외피 등과 관계된 구조부문(4.5%) △전기연결 및 배선, 전력공급장치, 전력 릴레이 박스, 솔레노이드 등 전기장비(4.0%) △번개 등 기상환경, 통신의 문제 등과 관계된 기타 요소(2.0%)가 있다. 전문가들은 “로켓 발사 카운트다운 10초를 남겨두고도 문제가 감지되면 발사를 중지시킬 정도로 항공우주산업에서는 작은 결함이 천문학적 비용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로켓 발사에는 신중을 기할 수 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연합뉴스

2009-08-20

김 前 대통령 장례 `6일 국장` 결정

국회서 영결식… 장지는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원수묘역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 형식이 가장 높은 예우를 갖추는 국장(國葬)으로 결정됐다.정부 핵심관계자는 19일 “국장이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는 일부 의견도 있었으나 이명박 대통령이 이에 대한 보고를 받고 대국적 견지에서 결단을 내렸다”고 말했다.이와 함께 김 전 대통령의 장지는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원수묘역으로 결정됐다.정부는 이날 오후 8시 한승수 국무총리 주재로 국무회의를 소집해 이 같은 장례 방안을 의결했다.김 전 대통령의 장례 형식과 절차를 놓고 정부는 국민장을, 김 전 대통령 측과 민주당은 국장을 각각 주장해왔으나 긴 협의 끝에 결국 `6일 국장`이라는 절충안이 채택됐다.그리고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빈소와 분향소, 영결식 장소는 국회로 결정됐다.김 전 대통령측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19일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내 임시빈소에서 기자 브리핑을 갖고 “민주주의와 의회주의의 전당인 국회에서 영결식을 치르기로 했다”고 말했다.박 의원은 “영결식과 빈소, 분향소를 국회 광장에 차리기로 정부와 협의를 끝냈다”면서 “정부에서 빈소와 분향소 등을 준비하면 내일 오전 중 그쪽으로 모시도록 하겠다”고 밝혔다./연합뉴스

2009-08-20

'김대중 前 대통령 서거' 대구·경북 각계 반응

“생전에 숱한 고초 잊고 편히 쉬셨으면…”시·도민 “대한민국 위대한 지도자 한분 잃었다”정치권 “국민화합·남북평화 승화되는 계기 되길”18일 오후 서거 소식을 접한 지역 정치권과 학계를 비롯한 시·도민들은 서거 소식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대한민국의 위대한 지도자 한 분을 잃었다”며 “생전에 수감생활, 해외 망명 등 숱한 고초를 겪었셨던 만큼 이제는 좋은 곳에서 편히 쉬셨으면 한다”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한나라당 대구시·경북도당= 오늘 우리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지도자 한 분을 잃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는 누구보다도 민주화, 인권,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 헌신해오셨다.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생전에 이루고자 했던 숭고한 뜻이 국민화합과 남북 평화로 승화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민주당 대구시·경북도당= 김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인권, 남북화해, 평화통일, 중산층의 권익 보호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위대한 지도자다. 고인의 가르침을 받아야 할 일이 너무 많은데 먼저 가시니 어버이를 잃은 것처럼 황망하고 허전하다. 민주당은 고인의 뜻을 계승해 민주주의, 남북통일, 따뜻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을 계속해 나가겠다.◇자유선진당 대구시당=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한평생을 바치신 큰 별이 안타깝게 서거하셨다. 김 전 대통령은 한평생을 민주화 투쟁과 인권신장, 통일운동에 평생을 헌신하셨으며 남북정상회담을 비롯한 남북화해협력 시대를 열었고 그 공로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정치권도 분열과 갈등에서 벗어난 지역갈등을 없애고 화합하는 계기가 되어 우리 정치가 한층 성숙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창조한국당 대구시당= 김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통일, 그리고 경제발전을 위해 온몸을 던지신 한국현대사의 진정한 지도자였다. 김 전 대통령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 그리고 애민애족의 정신은 후세에도 영원히 빛날 업적으로 남을 것이다. 특히 대립과 대결보다 화해와 협력으로 상생하는 대한민국과 국제사회를 꿈꾸었던 그의 꿈은 남은 자들에 의해 반드시 이룩될 것이다.◇이종용씨(57·교사·대구시 동구 신암4동)=“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소식에 깜짝 놀랐다. 김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 민주화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한국 현대사의 거목(巨木)이셨는데 이렇게 가셔서 너무 안타깝다”며 “부디 하늘나라에 가셔서도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해 애써 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김미주씨(여·27·대학생)=“아직까지 김 전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과 만났던 그 감격스런 장면이 눈에 선하다. 김 전 대통령이 남북화해를 위해 노력한 숭고한 뜻을 후손들인 우리가 잘 이어갔으면 좋겠다”면서 “생전 독재정권에 맞서 투옥, 수감생활, 해외 망명 등 숱한 고초를 겪어셨던 만큼 이제는 좋은 곳에서 편히 쉬셨으면 한다”고 했다.◇이용환씨(남·45·공무원)=“우리나라 헌정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와 해방 후 첫 남북정상회담을 이룩하고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김 전 대통령의 업적과 뜻을 남아있는 우리들이 잘 이어나갔으면 한다”면서 “서거한 김 전 대통령이 바라셨던 남북 화해가 하루빨리 이뤄졌으면 한다”고 전했다./사회1·2부

2009-08-19

DJ 입원부터 서거까지 투병 37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37일 동안 위험한 고비를 수차례 넘기며 쾌유를 기원하는 가족과 지지자 등에게 희망을 줬지만 18일 끝내 병환을 이기지 못해 유명을 달리했다.고인의 병세가 세인에 처음 알려진 것은 지난달 13일. 가벼운 열이 나는 등 감기 기운이 있어 병원에 입원했고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된 것.85세의 고령임에도 지난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빈소를 직접 찾아 조문하는 등 최근까지 비교적 정정한 모습을 보였기에 김 전 대통령이 입원했다는 소식에도 많은 사람은 곧 회복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건강상태는 병원 바깥의 기대와 달리 매우 심각하게 악화했다.김 전 대통령은 입원 사흘 만인 지난달 15일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다음날에는 산소포화도가 처음으로 정상치를 밑도는 86%까지 떨어져 인공호흡기를 달아야 했다.다행히 며칠이 지나자 스스로 호흡할 수 있게 됐고, 7월 22일 인공호흡기를 떼고 일반병실로 옮기면서 회복 가능성을 보여줬다.안도와 희망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반병실로 옮긴 바로 다음날 폐동맥이 막히는 폐색전증이 갑작스럽게 나타났고 김 전 대통령은 다시 중환자실로 옮겨져 인공호흡기를 달았고 이때부터 심각한 고비가 잇따라 찾아왔다.상태는 날로 악화해 김 전 대통령은 7월29일 기관절개 수술을 했고 갑자기 혈압이 떨어질 때마다 의료진은 강심제 같은 약물을 투여해야만 했다. 이때부터 가족과 측근들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김 전 대통령의 투병이 길어지자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은 물론, 과거 경쟁 또는 반목 관계에 있던 이들도 병상을 찾아와 극적인 `화해 드라마`를 연출하기도 했다.8월 10일에는 평생의 맞수로 최근까지도 불화를 빚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문병와 화해의 손을 내밀었고, 14일에는 김 전 대통령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을 1980년 권력의 정점에 서 있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찾아와 쾌유를 기원했다.고인이 병실에서 투병하는 동안 여야 정치권 인사들은 물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시린 에바디 노벨평화상 수상자 등 세계 곳곳에서 800명이 문병하기도 했다.많은 사람의 간절한 바람에도 18일 오전부터 다발성 장기부전 때문에 김 전 대통령의 혈압과 산소포화도는 크게 떨어졌고 오후 1시43분 한국 현대 정치사의 거인이던 고인은 끝내 운명했다./연합뉴스

2009-08-19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

50년 정치인생을 마감하고 서거한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궤적에는 그가 남긴 수많은 어록이 수놓아져 있다.김 전 대통령은 때로는 치밀한 논리로, 현안의 핵심을 찌르는 표현으로, 때로는 화려한 수사로 좌중을 압도한 달변가이자 뛰어난 대중연설가였다.군사정권 시절 그가 남긴 말들은 쉽사리 세상 빛을 보지 못한 채 `옥중서신` 등을 통해 재야 및 운동권 인사들 사이에서 `조용히` 퍼져갔다.이후 사면·복권으로 그가 세상 밖으로 나온 87년 이후 쏟아진 거침없는 발언들은 그를 지탱해준 최대의 정치적 무기였다.“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 “현미경처럼 치밀하게 보고 망원경처럼 멀리 봐야 한다” 등은 그가 생전에 즐겨 쓰던 문구들이다.“정치는 살아 꿈틀거리는 생물과도 같다”는 표현은 그가 몸담았던 한국 현대 정치사의 역동성을 대변하며 지금까지도 정치권에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92년 대선운동 과정에서는 “자유가 들꽃처럼 만발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며, 통일에의 희망이 무지개처럼 피어오르는..”이라는 감성적 수사로 표심을 자극했다.97년 `준비된 경제대통령`이라는 구호로 대권 도전 4수끝에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에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 `햇볕정책`, `제2의 건국` 등으로 자신의 통치철학을 드러내기도 했다.김 전 대통령은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언급해가며 강조하고자 하는 새로운 주제를 하나씩 추가해 나가는 `얼레(reel) 화법`을 구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연합뉴스

2009-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