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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우리 손으로 다함께 만든 ‘스마트시티 포항’ 꿈꿔요”

미래도시라면 무엇부터 떠오르는가? 자율주행 버스가 달리고 드론 택시가 비행하는 도시. 혹은 인공지능이 자연재난을 예측해 대응하고, 물류는 지하 터널이 담당하는 교통정체가 없는 도시. 누군가는 힘든 노동은 로봇에게 맡기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는 도시와 더 나아가 해저나 우주에 건설된 도시를 떠올릴 수도 있다. 이처럼 도시의 미래에는 시민들 각각의 바람이 담기게 된다. 시민들이 상상하는 미래의 모습이 다양할수록 실제로 만들어갈 수 있는 도시의 폭도 넓어지게 마련이다. 포항의 미래도시 연구를 주도하는 포스텍 미래도시연구센터가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간 지 4년을 맞았다. 그동안 포항은 얼마나 미래도시와 가까워졌을까? 새로운 기술을 도시에 적용해 시민의 삶을 쾌적하고 효율적으로 바꾸고자 연구하는 미래도시연구센터의 곽지영 부센터장을 만났다. -한때 U-시티가 유행했고 요즘은 스마트시티가 흔히 쓰이는 듯하다. 미래 도시는 구체적으로 어떤 도시인가.△미래도시는 현재보다 진화된 형태의 도시를 의미한다. U-시티, 스마트시티 모두 미래도시의 모습들이라 할 수 있다. ‘U-시티(ubiquitous city)’는 연구된 지 30~40년 이상 된 분야이다. IT 기술을 활용하여 도시를 자동화하는 시도로 요약된다. ‘스마트시티’는 연결성과 지능화를 특징으로 하는 4차 산업혁명의 한 형태이다. 3차 산업혁명이 U-시티처럼 자동화에 역점을 두었다면, 4차 산업혁명은 신경망처럼 연결된 센서들을 통해 수집된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도시의 상황을 이해하고 적시에 필요한 조치를 실행하게 된다. 이를 위해 사물인터넷(IoT, Internet of Things), 5G를 비롯한 차세대 통신, 인공지능 기술 등 다양한 최첨단 IT 기술이 융복합적으로 활용된다.-그렇다면 미래도시연구센터의 미래도시는 스마트시티를 말하는 것인가.△미래도시는 다양한 형태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100% 재생 에너지를 사용하고 쓰레기 배출이 없는 지속가능한 도시나, 교통과 물류 방식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도시가 될 수도 있다. 심지어 그런 도시를 해저나 화성에 건설하자는 제안도 나올 수 있다. 현재의 도시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려는 목적을 가진 무엇이든 미래도시의 영역이다. 다만, 지금으로선 스마트시티가 좀 더 진화된 형태이고, 현재도 스마트시티의 개념과 방향이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만큼, 가장 유력한 미래도시의 하나로 보고 있다. 미래도시연구센터(FOIC, Future City Open Innovation Center)라는 이름은 설립 당시 미래의 도시 기술 연구에 공과대학의 역할을 강조한 김도연 포스텍 전 총장의 제안에서 비롯됐다.-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모든 예측불허의 시간을 말한다. 미래도시연구센터가 연구하는 미래는 얼마나 먼 미래인가.△내일도 미래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분명 필요하지만 현재는 없는 것들을 실현하는 것이 미래 기술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래도시는 지금 우리가 간절하게 바라는 무언가가 실현되는 세상이라고 보면 된다. 시민들이 어려움을 겪는 문제를 찾고 해결하는 것이 미래도시연구센터의 주된 연구목적이다. 미래도시는 다음 세대뿐 아니라 현세대를 위한 것이다.-도시는 굉장히 복합적인 공간이다. 미래도시를 만드는 우선순위는 뭔가.△2019년, 포항시와 스마트시티 전략을 수립하면서 미래 포항이 추구해야 할 핵심 가치를 시민 대상으로 설문 조사했다. 당시 지진 이후의 경제적 여파가 컸던 시기라 그런지 1위는 ‘경제’였고 그 다음이 ‘안전’과 ‘삶의 질’ 순으로 나타났었다. 설문조사를 기반으로 포항시를 위한 기본계획과 로드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 세 가지가 우리에게도 미래도시의 우선순위로 자리 잡았다.-지금까지 스마트시티 관련 사업의 주요 성과라면.△포항시, 포스코, 벤처기업들과 함께 수행 중인 국토부 주관 ‘스마트시티 챌린지 사업’이 가장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포항의 스마트시티 챌린지는 크게 안전, 삶의 질 측면의 도시문제 해결 관점과 지역소멸 우려를 극복하기 위한 미래 경제 동력 발굴을 목적으로, 네 가지 솔루션(도로 노면 감지, 갓길/보행로 위험요인 감지, 수요응답형 교통서비스, CCTV 영상 검색 시스템)에 대한 실증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평가 결과 최우수 지자체로 선정되어 국비 100억을 확보해 올해부터 본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안전사고 예측 시스템과 시민체감형 교통이 좋은 평가를 받은 걸로 안다. 구체적으로 어떤 기술인가.△‘도로 노면 감지 시스템’과 ‘갓길/보행로 위험요인 감지 시스템’은 인공지능으로 도로의 위험요인들을 미리 파악하는 기술이다. 포항은 대형화물차들의 잦은 통행으로 균열이 심각한 도로가 많다. 또 구도심의 도로가 좁은 구간에는 불법 주정차나 적치물이 보행자 안전을 위협하기도 한다. 공용차량이나 택시 등에 비전이나 사물인터넷(IoT) 기반의 각종 센싱 장치를 장착하여 실시간으로 노면과 도로변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정비가 필요한 도로를 행정 부서에 알려 안전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서비스이다. ‘CCTV 영상 검색 시스템’은 범죄나 불법행위, 실종사건 등의 이유로 CCTV 저장 영상을 활용해야 하는 경우, 인공지능을 통해 빠르고 정확하게 원하는 영상을 찾을 수 있도록 지원한다. 나아가 범죄나 불법 징후를 자동으로 감지해 빠르게 대응할 수 있게 한다. ‘수요응답형 교통(DRT, Demand Responsive Transport)’은 승객의 요청을 받아 운행 구간이나 운행간격, 빈도 등을 탄력적으로 운영하는 신개념의 대중교통 수단이다.-올해부터 진행하는 본사업은 예비사업과 어떤 차이가 있나.△교통 분야를 비롯해 시민들의 안전 전반을 위한 사업들을 진행하고, 기술적으로는 현실을 가상에 옮겨놓고 시뮬레이션해보는 디지털 트윈(Digital Twin)과 광역 데이터 허브 등으로 범위가 확대된다. 본사업인 만큼 시민의 참여가 중요하다. 대학과 시민, 기업이 참여하는 사용자 검증단을 구성해 서비스가 실질적으로 어떤 효과를 체감하는지를 리빙 랩(Living Lab) 방식으로 검증할 계획이다.곽지영 부센터장은 스마트도시를 만드는 과정에서 시민의 참여 그 중에서도 리빙 랩의 역할을 강조했다. 리빙 랩은 우리가 사는 곳이 바로 실험실이라는 의미이다. 신기술을 들여오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직접 써보고 안 맞으면 바꿔가는 방식이다. 이러한 리빙 랩은 미래도시가 나아가야할 방향성과 맞닿는다. 시민의 필요를 우선하는 것이 도시를 더욱 공정하게 건설하는 길일 뿐 아니라 기술을 빠르고 정교하게, 무엇보다 값어치 있게 만드는 길이기 때문이다.-미래도시를 만드는데 시민의 참여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과거 공급자 주도 도시 모델의 시행착오를 극복하기 위해서다. 세계적으로도 리빙 랩 같은 시민 참여형 접근법이 도입되고 있다. 시민이 초기 개발 과정의 일원이 되어 직접 운영해보면서 잘 안 맞는 부분을 수정하고 완성하는 방식이다. 그러려면 개발자와 사용자간의 소통이 중요한데, 중간 역할을 미래도시연구센터가 담당한다. 작년엔 예비사업이었기 때문에 소규모의 시민참여단을 꾸렸지만, 본사업에서는 더 많은 시민과 학생의 참여가 필요하다.-어떻게 참여하나.△조만간 다양한 채널을 통해 모집 공고가 나갈 예정인데, 참여를 원한다면 언제든 미래도시연구센터로 문의해 주시기 바란다. 적극적인 참여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외적, 내적 보상을 비롯해 다양한 동기부여 방법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있다.-미래도시를 만드는 과정에서 또 다른 고민이 있다면.△뭐니 뭐니 해도 ‘머니’라고 하듯, 자본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밑 빠진 독이 아닌 투자 대비 최대의 효용을 얻을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최선은 기업을 성장시키는데 투자하는 것이다. 스마트시티를 위한 지역자금을 벤처기업을 위한 투자금 개념으로 활용해 그걸 발판으로 기업이 실증과 사업화에 성공하고 해외 시장까지 진출한다면, 지역은 당초의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 환원 구조가 가능하다.-대기업에서 근무하다 대학으로 오셨다. 업무의 성격 차가 크지 않나.△포스텍으로 오기 전 삼성전자에서 13년간 근무했다. 총괄연구소에서 제품 간 연결성을 통한 새로운 사용자 경험(UX, User Experience) 제공을 모색했다. 삼성에서도 비슷한 분야에 있었기 때문에 한 번도 일의 성격이 변한 적은 없다. 기업에서 자사 제품 간의 연결성과 지능화를 모색했다면 대학에 오면서 공익적 성격인 도시로 영역이 넓어진 것뿐이다. 기본적인 프로세스는 동일하고 풀어야 할 문제가 달라지는 정도이다. 포스텍의 스마트 캠퍼스 구축도 함께 담당하고 있는데, 캠퍼스에서 문제가 해결되면 도시에도 확대 적용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게 진행하고 있다.-앞으로 일어날 우리 도시의 변화가 기대된다. 교수님께서 구상하는 가장 포항다운 미래도시의 모습은 무엇인가.△스마트시티는 편리하고 안전하고 사람들한테 좋으라고 만든 기술인만큼 시민들 가까이로 들어와 그 생활 속에 스며들어야 한다. 최고 수준의 과학기술대학인 포스텍을 품은 포항 시민들도 과학기술을 생활 속에서 친근하게 누렸으면 좋겠고, 미래도시연구센터의 사업들이 그 계기가 되길 바란다. 스마트시티가 따로 잘 차려진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사는 동네에 구현되고, 타지 사람들이 구경 와서 감탄할 때, 동네 어르신이 쉬운 걸로 웬 호들갑이냐며 원리를 설명해 주시는 그런 도시가 되면 좋겠다. 먼 훗날 포항을 일컬어 ‘우리 손으로 다함께 만든 스마트시티’라는 얘기를 듣는 것이 도시공학자로서의 꿈이다.곽지영 교수는인간공학의 매력에 이끌려 포스텍 산업경영공학과에 입학, 동 대학에서 석·박사를 모두 마쳤다. 졸업 후 미국 버지니아 공과대학(Virginia Tech)에 있을 때, 집중적으로 해외인력을 유치하던 삼성전자의 입사 제의와 당시 지도교수의 권유로 입사했다. 삼성전자에서 책임, 수석, 상무를 거치며 13년간 근무했고, 2016년부터 포스텍 산업경영공학과 산학협력교수로 재직 중이다. 회사의 일원으로서 미래 상품과 서비스를 제안하는 일도 즐거웠지만, 포항의 스마트화를 연구하고 학생들과 호흡하는 지금 좀 더 보람을 느낀다. 현재 포스텍 미래도시연구센터 부센터장, 연세대학교 겸임교수를 겸하고 있으며, 경상북도 정책자문위원회 공동위원장, 지역혁신협의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배은정 1974년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사학과 졸업. TBC·포항MBC·경북교통방송 작가. ‘포항문화의 상징과 공간’ 공저./배은정 작가

2022-09-26

유배객들이 바라보았을 쪽빛 바다는 변함이 없고

장기(長鬐)는 포항 해변에서 가장 남쪽에 있다. 위로는 구룡포가 있고 아래로는 경주 감포가 있다. 호미곶, 구룡포, 장기는 국토에서 호랑이 꼬리의 바깥쪽을 이루어 호미반도라 부르며, 과거에는 이를 통틀어 장기라 했다. 조선시대 후기의 지도를 보면 포항은 장기를 비롯해 흥해, 청하, 연일 4개 군으로 되어 있다. 장기는 그만큼 유서 깊은 지역이다. 파도를 타고 밀려오는 외적의 침입이 잦아 성(城)을 쌓아야 했고, 한양과는 너무 멀어 유배지가 되었다. 성(城)과 유배는 장기를 이해하는 열쇠 말이다.장기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은 장기읍성이다. 이곳에 서면 넓은 들판과 쪽빛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성은 역사가 길고도 깊다. 1011년(고려 현종2)에 여진족의 침략에 대비해 토성으로 쌓았다가 1439년(조선 세종21)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석성(石城)으로 다시 쌓았다. 장기의 진산인 해발 252m의 동악산에서 해안 쪽으로 뻗은 지맥 정상(해발 100m)의 평탄면에 위치하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 등의 문헌에 따르면 둘레가 2980척(약 903m), 높이는 10척(약 3m), 우물이 네 곳, 못이 두 곳 있었다. 조선 최고의 장기 일출장기읍성은 동, 서, 북쪽 방향의 성문 세 개와 문을 보호하기 위한 옹성(甕城)이 있다. 동문에는 조해루(朝海樓)라는 누각이 있었는데, 지금은 성곽 위에 배일대(拜日臺)라는 작은 바위만 남아 있다. 장기읍성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가히 절색이다. 육당(六堂) 최남선이 장기 일출을 조선 10경 중 하나로 꼽았고, 장기에 유배되었던 다산(茶山) 정약용도 벅찬 감회를 시로 남겼다.포항의 흥해, 청하, 연일, 기계 등 곳곳에는 옛 성의 자취가 남아 있다. 성의 성격과 구조는 각각 다른데, 장기읍성처럼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쌓은 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기와 어깨를 맞대고 있는 구룡포 병포3리에 있는 구룡성도 장기읍성과 같은 목적으로 쌓았다. 구룡성은 고려시대에 왜적을 막기 위해 수군 기지로 사용하다가 고려 말에 폐지되었고,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포항과 경주의 경계에 있는 북형산성(北兄山城)은 673년(신라 문무왕13)에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쌓은 대규모 성으로, 경주가 지척에 있기에 군사 전략상 매우 중요했다. 장기읍성과 구룡성, 북형산성은 포항이 과거부터 군사 요충지였음을 입증한다.군사용으로 조성된 장기숲장기를 얘기할 때 숲을 빼놓을 수 없다. 장기숲은 기계숲, 덕동숲과 더불어 포항에서 가장 유명한 숲이었다. 1833년에 발간된 ‘경상도읍지’에 장기숲의 길이는 7리(약 2.8㎞), 너비는 1리(약 393m), 면적은 19㏊라고 나와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 왜 이렇게 큰 규모의 숲이 있었던 것일까?느릅나무, 느티나무는 물론 탱자나무, 가시나무 등을 빽빽이 심어서 울타리를 삼았다는 ‘경상도읍지’의 기록을 볼 때 이 숲은 장기읍성을 보호하기 위한 군사용이었을 것이다. 숲에 들어가면 하늘이 안 보이고 길을 잃을 정도로 나무가 빽빽했다는 얘기가 지금도 전한다. 하지만 숲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 자리에 중학교가 들어서고 새마을운동이 전개되면서 경작지로 개간된 것이다. 장기중학교 교정의 몇 그루 고목이 숲의 흔적을 보여줄 뿐이다. 제2차 예송의 여파로 유배객이 된 우암구룡포에 가서 돈 자랑하지 말고, 장기에 가서 인재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있었다. 구룡포는 한때 바다에서 버는 돈으로 흥청거렸으니 돈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이해되지만, 장기에서 인재 자랑하지 말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한양에서 860리(약 338㎞) 떨어진 장기는 유배의 땅이었다. 향토사학자 이상준에 따르면 조선조 500년 동안 장기에 220여 명이 유배를 왔다. 유배 온 이들이 높은 수준의 학문을 전했고, 그들의 후손이 장기에 자리를 잡으면서 장기는 인재의 고장이 되었다. 실제로 장기는 마을 규모에 비해 학자와 고위 관료 출신이 많은 편이다. 사람이 살기에 척박한 유배지가 인재의 고장이 된 역설이 일어난 것이다.유배객 중 가장 이름이 높은 사람은 우암(尤庵)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이다. 우암은 ‘조선왕조실록’에 3천 번 이상 언급되는 인물이다. 그를 옹호하든 비판하든 그를 떠나 조선을 얘기하기란 어렵다. 그런 그가 장기로 유배를 오게 된 것은 1674년의 제2차 예송(禮訟) 때문이다. 효종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가 별세하면서 효종의 새어머니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로 서인과 남인이 충돌한 것이다. 이 논쟁은 학술 논쟁인 동시에 정치 투쟁이었다. 결국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면서 서인은 실각하고 서인을 이끌던 우암도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어 1675년(숙종1) 정월 함경도 덕원으로 유배되었다가 그해 6월 장기로 이배(移配)되었다. 그의 나이 69세 때였다. 우암은 1679년(숙종5) 4월 거제도로 이배되기까지 3년 10개월 동안 장기에 머물렀다.우암은 장기에서도 학문에 힘써 ‘주자대전(朱子大全)’에서 난해한 구절을 뽑아 주석을 붙인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완성했고, 조선 학계에 큰 영향을 미친 ‘이정전서(二程全書)’의 글을 유형별로 편집해 ‘정서분류(程書分類)’를 만들었다. 그리고 ‘정몽주신도비’ 등 300여 편의 시와 글을 지었다. 연일에 유배 왔던 이유(李瑜, 1691∼1736)가 쓴 ‘우암 선생 장기적거실기(長鬐謫居實記)’(1725)에서 스스로 근신하고자 하는 유배자 우암의 자세를 느낄 수 있다.우암이 장기를 떠난 지 28년 후인 1707년(숙종33)에 장기에 있던 그의 문하생들을 중심으로 죽림서원을 세웠다. 장기에서 그의 영향력이 어떠했는지를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죽림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뜯기고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 있다.백성의 삶을 지극히 보살핀 다산다산이 장기에 유배 온 것은 1801년(순조1) 3월, 다산을 총애하던 정조가 사망한 이듬해였다. 천주교인 300여 명이 희생된 신유옥사(辛酉獄事) 때 다산의 셋째 형 약종은 순교했고, 다산과 둘째 형 손암(巽菴) 약전은 유배객의 신세로 전락했다. 영·정조 때의 르네상스는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피비린내 나는 옥사가 일어나면서 다산 형제의 운명에도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 것이다.다산이 장기에 머무른 기간은 220일, 그렇게 긴 시간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한 인간으로서 감내하기 힘든 고난의 시기에 다산은 백성의 삶을 찬찬히 살펴 그 실상을 150여 편의 시로 남겼다. 왕의 인정을 받던 유능한 학자가 참혹한 국문을 당하고 유배객 신세로 전락했지만 그는 결코 꺾이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해 백성의 삶을 살피고 도탄에 빠진 나라를 걱정했다. 다산은 농사와 고기잡이로 살아가는 장기 사람들의 삶과 노동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한편 관리의 부패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실학의 대가는 문학적 묘사에서도 탁월했다.兒哥身不着一絲兒 실오라기 몸에 하나 안 걸친 아가가出沒鹺海如淸池 맑은 연못 들락거리듯 짠 바다를 들락이네尻高首下驀入水 꽁무니 들고 머리 처박고 곧장 물로 들어가서 花鴨依然戲漣漪 오리처럼 자연스럽게 잔물결을 타고 가네洄文徐合人不見 소용돌이 무늬도 흔적 없고 사람도 안 보이고 一壺汎汎行水面 박 한 통만 두둥실 수면에 떴더니만忽擧頭出如水鼠 홀연히 물쥐같이 머리통을 내밀고서劃然一嘯身隨轉 휘파람 한 번 부니 몸이 따라 솟구치네- ‘아가 노래(兒哥詞)’부분, 신상구 역다산은 백성들의 삶의 현장에서 그들의 고단한 삶을 개선하는 데에도 몸을 아끼지 않았다. 한 예로 백성들이 병이 들어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간단한 치료법을 정리한 ‘촌병혹치(村病或治)’를 저술했다. 고기가 많이 잡히면 칡넝쿨 그물이 터져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잦았는데, 소나무 껍질을 우린 물에 명주실과 무명실을 담갔다가 말려서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주자 문제가 개선되고 어획량이 크게 늘었다. 그는 이렇듯 유배지에서도 백성의 삶을 지극히 살피는 진정한 실학자의 길을 걸었다.다산은 황사영 백서 사건이 터지면서 1801년 10월 20일 한양으로 압송되어 또다시 국문을 당했다. 다산의 반대파인 홍낙안 등이 다산과 그의 둘째 형 손암을 죽음으로 내몰고자 황사영 백서에 그들을 엮은 것이다. 음모는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목숨을 건진 다산은 강진으로, 손암은 흑산도로 이배되었다. 진정 나라를 걱정한 대학자를 내버린 나라가 온전할 리 있을까. 조선의 국운이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역사가 말해준다.장기초등학교 교정에는 우암이 심은 것으로 전하는 은행나무가 있고, 그 곁에는 다산의 사적비가 있다. 한 그루 고목과 비석 하나가 역사 속의 쓰라린 운명을 침묵으로 말해줄 뿐이다. 그 주인공들이 물끄러미 바라보았을 장기의 청옥빛 바다는 오늘도 변함이 없다.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

2022-09-25

제대 후 운명처럼 포항으로 이주

한 사람이 한 도시와 인연을 맺는다는 건 ‘운명적’이다. 해병대 1기로 입대해 6·25전쟁을 거치며 온갖 수난과 고통을 겪었음에도 이봉식 선생은 전역 후에 자신이 살 곳으로 ‘해병대의 도시’ 포항을 선택한다. 만 18세에 해병이 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후배 해병을 교육하며 30대 초반까지 살았던 그는 어떤 이유로 고향이나 서울이 아닌 포항을 ‘제2의 고향’으로 선택하게 된 걸까? 홍 : 지금의 부인을 찾아서 부산을 헤맨 것도 전쟁이 한창이던 때군요.이 : 그렇지. 그즈음 해병대가 적 소탕 작전을 하며 북쪽으로 올라갔는데 춘천까지 가면서 수많은 산에서 전투가 벌어졌어. 죽은 대원도 많았고 부상병도 많았지. 남한에 내려온 중공군과 인민군 중 다시 북한으로 올라가지 못한 부대와 전투를 벌인 거야. 그들이 방공호를 파고 숨어 있으면 우리는 눈이 쌓인 곳까지 올라가 치열하게 싸웠어. 그 과정에서 희생자가 많았지. 이렇게 하면서 1951년 3월 하순에 홍천까지 올라갔어. 이후 후퇴해서 홍천 가리산에서 다시 전투가 벌어졌는데, 산 정상에 우리 부대가 주둔했어. 중공군이 못 내려오도록 진지를 치고 방어를 한 거지.홍 : 그 유명한 가리산전투가 벌어진 겁니까?이 : 중공군은 통상 야간에 습격하는데, 어느 날 아침에 총소리가 나서 순찰을 가다가 총에 맞았어. 쇄골 쪽을 만져보니 피가 흐르는 거야. 높은 지역에 있으니 부상당한 나를 데리고 내려가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잖아. 천만다행으로 총알이 뼈에 스치기만 했는지 목숨을 위협하는 큰 부상은 아니었어. 부대원들 8명이 달라붙어 나를 산에서 데리고 내려오는데 온통 바위산이고 고지대니 끌고 오기가 정말 힘들었을 거야. 두세 시간 걸려 겨우 내려오니 저만치 헬기가 대기해 있더군. 그걸 타고 대구 제1군병원으로 갔지.홍 : 다친 군인들이 많았겠습니다.이 : 많은 해병이 죽고 다쳤어. 대구에서 부산으로 가니 부상병이 많아 병실이 모자라더군. 복도에다 매트리스를 깔고 부상병을 받을 정도였지. 나는 해병대니까 진해로 후송해야 한다고 해서 다시 진해로 갔어. 해군병원 군의관이 “심각한 부상이 아니니 20일 후면 퇴원해도 좋다”고 하더군. 그 후 치료받고 회복되었지. 해병대사령부가 부산 용두산 꼭대기에 있을 때인데 퇴원하고 거기서 일주일가량 대기했어. 다들 “전투가 없는 부산에 있게 해주겠다”고 하는데, 나는 우리 대대로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지. 내 목숨을 살린 전우들 곁으로 가는 게 맞잖아. 전투를 치르며 부대원들과 정도 깊이 들었고.홍 : 전쟁터로 돌아가니 상관들이 뭐라고 하던가요?이 :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겠다는 마음으로 돌아갔어. 철이 없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가보니 ‘해병대 5대 작전’으로 불리는 도솔산전투가 진행되고 있었어. 대대본부에 가니까 “어? 너 여기 왜 왔어”라고 하더군. “후방에는 못 있겠습니다. 제 부대로 가겠습니다”고 하니 “그렇다면 대대본부에서 임시 작전선임 겸 근무선임하사를 하라”고 하더군.홍 : 전투병이 아닌 행정병이 된 거군요.이 : 험한 전투를 계속해야 하는데 대대 본부요원이 별로 없었어. 소대 병력이 거의 대부분 부상당하거나 죽을 경우에 시체를 수습하고 부상자 후송을 하는 인력이 필요했지. 심지어 대대장도 탄약통을 짊어지고 다닐 정도로 어려운 전투였어. 그런 전투를 15일 동안 치렀지. 그렇게 도솔산전투를 직접 겪고 인민군을 북쪽으로 퇴각시켰어. 도솔산전투가 끝난 후 다시 부대 편성을 하니 7월 초가 되었지. 그때 이승만 대통령이 부대를 위로하기 위해 방문했어.홍 : 이승만 대통령 방문 때는 어땠습니까?이 : 연대본부로 오라고 해서 갔어. 1~3대대 선임하사들이 전부 갔지. 한참 앞에서 대기하니 들어오라고 하더군. 그때 이승만 대통령이 ‘해병대는 무적이다’라고 쓴 글을 받았어. 우리가 “이게 뭐냐”고 물으니 “대통령이 하사하는 것”이라고 하더라고. 그때는 그게 귀한 줄 몰랐어. 대대에 갖다주며 “이걸 주던데요”라고 하니까 대대장이 챙겼지. 내가 가지고 있었다면 혼란스러운 전쟁통에 잃어버릴 수도 있었을 거야. 여하튼 그 후 우리 부대는 서울을 지키러 갔어. ‘강한 부대가 수도를 지켜야 한다’는 상부의 뜻이 있었겠지. 그래서 해병 1연대가 중동부 전선에서 철수했어. 전쟁 때 많은 전우가 죽었지. 휴전할 때까지 29기가 입대했는데, 그 기수까지는 지금도 참전 수당 35만 원가량을 받고 있어.홍 : 그 후 해병대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이 : 이승만 대통령이 방문한 후에 서해 쪽으로 옮겨갔어. 파주 장단지구지. 거기서 사천강 전투가 있었어. 적이 밤이면 밤마다 포를 쏘아댔지. 힘든 전투였어. 나는 대대본부에 있었기에 일선에서 싸우지는 않았지만 많은 희생을 지켜봤어. 지금 해병대 2사단이 있는 김포 앞을 해병대가 지킨 거야. 그러던 와중에 휴전되어 전쟁이 끝난 줄 알았는데, 조금이라도 점령지를 넓히려고 서로가 포를 쏘았어. 그러다가 전투가 멈췄지.홍 : 원산에서 만난 부인 이야기가 궁금합니다.이 : 전쟁이 잠잠해지니까 원산에서 만난 아가씨 생각이 났어. 큰아버지가 괴산 부군수를 했다는 얘기를 들었지. 그래서 편지를 썼더니 2년 만에 답장이 왔어. ‘외박을 가야 되겠다’고 마음먹고 파주 장단에서 청주를 거쳐 증평으로 완행열차를 타고 갔지. 아가씨 집은 증평에서도 20리쯤 떨어져 있었는데 ‘국민학교로 오세요’라고 해서 가보니 그 학교 교사였어. 20리를 가려고 자전거 점포에 들러 사정을 설명하고 자전거를 빌렸지. 선물하려고 당시에는 귀했던 간고등어를 사서 싣고 갔어. 홍 : 가보니 지금의 부인이 있던가요?이 : 학교에 도착하니 아내가 교무실에서 걸어 나오는데 2년 전에 잠깐 본 얼굴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했어. 어쨌건 아내 나이 스무 살 때 처음 만나고 스물두 살에 다시 만난 거야. 아내가 “우리 집으로 갑시다”라고 청해서 고개를 넘어 자전거를 끌고 집에 도착하니 아내의 어머니와 남동생이 있었어. 나중에 처남은 매형이 해병대에 있으니 해병이 되겠다고 해서 해병 간부후보생이 되었지. 항공병과였는데, 포항으로 와서 월남전에 두 번이나 참전했어. 헬기 조종사였고 해병대 중령으로 제대했지. 동아그룹 최원석 회장의 권유로 미국에 가서 헬기를 사오기도 했어. 그런데 안타깝게도 군포에서 안개 속을 비행하다가 사망했지. 아내의 유일한 동생이었는데 안타까운 일이었지.홍 : 전쟁이 부인과의 결혼을 맺어준 것이군요.이 : 올해로 만난 지 73년이고, 결혼한 지 71년이 되었어. 4남매를 낳았고 자식들 모두 포항에 살고 있어. 어디서 인터뷰를 청해오면 항상 이 사실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해. 개그맨 유재석이 진행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가서도 말했지. 아내는 큰 대회에서 상을 받을 만큼 글씨를 잘 썼어. 지금 부모를 보살핀다고 셋째가 와 있는데, 그 애 나이가 예순넷이야. 힘에 부쳐 셋째가 자리를 비울 때면 막내아들이 제 엄마를 돌봐주고 있어. 나도 아내를 챙겨야 하니까 외출하는 게 쉽지 않군.홍 : 자식 넷을 뒀으니 손자 손녀도 많겠습니다.이 : 많은 건 아니고 네 명 있어. 증손자도 있고. 모두 포항에 사니까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다는 게 가장 좋아. 세상 어디에도 피붙이처럼 서로를 위해주는 사람들이 없잖아.홍 : 1953년 휴전 이후 1962년까지 해병대 교관으로 일했다고 들었습니다.이 : 신병훈련소에서 구대장을 했지. 그 시절 해병대에는 일본 해군에서 복무한 사람들이 꽤 많았어. 지금은 대부분 사망했고, 살아 있다면 백 살을 넘었겠지. 휴전되면서 진해 덕산 비행장을 비워주고 훈련소를 경화동 앞으로 옮겼어. 거기에 목조건물이 있었는데 그곳을 훈련장으로 2~3년 사용했지. 그러다가 훈련소 일부를 전투 훈련을 하는 상남훈련대로 또 이전했어. 내가 훈련소를 떠나 보급 계통에서 일한 건 2년 정도야. 보급소대 선임하사도 했고 보급중대 관리도 했어. 1961년 10월 28일 제대하고 3~4일 만에 바로 포항으로 왔지.홍 : 제대 후 포항으로 오게 된 이유가 있나요?이 : 글쎄 말이야. 서울에서 해병대 선배가 좋은 직장을 마련해놓고 오라고 하는데도 가족들 데리고 포항으로 왔어. 이건 운명이라고밖에 못 하겠네. 내가 열아홉 살 때부터 죽음과 삶을 함께한 해병대 근처를 떠나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겠지. 처음엔 포항 오천 사격장 근처로 이사 왔어. 해병대와 결별하면 되는데 왜 해병대가 있는 포항으로 왔는지 모르겠어. 먹고살 길도 마땅치 않았고 친척이 있는 것도 아닌데. 다만 친구들이 포항에 많았지.대담·정리 : 홍성식 기자 / 사진 출처 : 해병대사령부 ‘사진으로 본 해병대 50년사(1949∼1999)’

2022-09-21

가을엔 고품격 관광… ‘천년의 향 송이와 한약우에 빠지다’

봉화군이 주최하고 (재)봉화축제관광재단이 주관하는 봉화송이축제가 오는 30일부터 10월 3일까지 4일간 ‘송이향에 반하고, 한약우에 빠지다!’라는 슬로건으로 봉화읍 체육공원 및 관내 송이산 일원에서 열린다.올해로 26회를 맞는 봉화송이축제는 지역의 우수 특산품인 한약우를 축제 속에 담아내어 축제의 품격을 한 단계 높였다.봉화군은 깊어가는 가을밤 천년의 향 송이와 한약우 맛을 즐기는 고품격 문화관광축제로 거듭나기 위해 지속가능한 축제방향을 제안하고 봉화군민의 자긍심 고취와 화합의 장을 조성하는 전략으로 올해 봉화송이축제를 추진한다는 계획이다.봉화송이와 한약우를 통해 지역을 대표하는 브랜드 가치를 창출하고 청명한 가을하늘 아래 축제장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을 위한 풍성한 먹거리와 볼거리, 즐길거리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일 예정이다.□ 송이 향에 반하다!관광객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송이축제 대표 콘텐츠인 송이채취체험은 축제기간 중 매일 오전 10시, 오후 2시 관내 송이산 일원에서 진행된다.솔향기 그윽한 소나무 숲의 맑은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며 송이를 직접 채취해 보는 체험은 각 회당 100명씩 선착순 사전접수를 통해 무료로 진행되며 봉화축제관광재단 홈페이지를 참고해 네이버 폼으로 신청 가능하다.전국 최우수 품질의 봉화송이를 직접 보고 안전하게 구매할 수 있는 송이판매장터도 운영된다. 특히 올해는 무료 송이 손질터를 마련해 구매한 송이를 손질해서 즉석에서 시식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500g 이하 단위로 송이 소량 판매로 관광객들의 부담을 줄이고 접근성을 높일 예정이다. □ 한약우 맛에 빠지다!안동봉화축협·봉화한약우 작목회가 주관하는 한약우 홍보 및 판매장터는 축제기간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8시까지 운영된다. 봉화한약우의 현재와 미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한약우홍보관과 맛과 품질이 우수한 봉화한약우를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는 한약우판매관을 만나볼 수 있다.먹거리 장터에서는 관광객이 직접 구매한 송이, 한약우, 버섯 등을 시식할 수 있도록 상차림을 준비한 식당들이 손님을 맞이한다. 이곳에서는 손질터에서 직접 손질한 송이와 전국 최고의 가성비를 자랑하는 한약우를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맛있게 구워 먹을 수 있으며 송이라면과 송이국밥 등 송이를 활용한 다양한 먹거리들도 판매해 관광객들의 입맛을 사로잡을 예정이다.또한 송이한약우 골든벨, 송이 한약우 가요한마당 등 송이와 한약우를 소재로 한 다양한 이벤트성 프로그램도 마련돼 있어 방문객들에게 색다른 즐거움도 선사할 계획이다.□ 눈과 귀를 채워주는 다채로운 공연!개막식이 열리는 9월 30일에는 봉화홍보대사 최우진과 나상도, 최연화, 설하윤, 박상철 등 인기가수들이 꾸미는 개막 축하공연이 안동 MBC와 함께하는 공개방송형으로 펼쳐진다. 또 10월 3일 폐막일에는 제16회 봉화군민상 시상식에 이어 박서진, 조은성, 장하온, 주미 등이 출연하는 폐막 축하공연과 화려한 불꽃놀이를 끝으로 봉화송이축제의 대미를 장식한다.특히 개막 첫날에는 봉화군 농산물의 우수성을 알리고자 지역에서 생산되는 나물과 봉화송이, 한약우를 이용한 오색오미의 맛과 멋이 조화된 대형 비빔밥 퍼포먼스가 펼쳐질 예정이라 기대를 모으고 있다. □ 넘쳐나는 볼거리·즐길거리 축제 콘텐츠 풍성!올해는 관광객층 확대를 위해 공식 공연행사 이외 축제 콘텐츠를 더욱 다양화했다.나만의 작품 만들을 만들어 볼 수 있는 ‘우당탕탕 키즈랜드 어린이 체험공방’을 비롯해 홀로그램 증강현실로 만나는 언택트 실내 운동 체험 ‘신통방통 홀로그램 디딤체험’과 축제장 방문을 기념할 수 있는 포토존 ‘남는건 사진뿐 포토스팟’ 등 전 연령 방문객이 만족하고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준비돼 있다.또한 지역 농·특산품의 우수성을 알리고 농가 소득 증대에 기여하고자 농·특산품 홍보 및 판매장터를 조성하고, 다양한 문화의 이해를 위해 아이부터 어른까지 맞춤형 문화체험을 할 수 있는 세계문화체험관을 운영한다. 전통시장을 활성화하고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축제기간 동안 매일 4회씩 신·구시장에서 지역예술인들의 감성 버스킹 공연도 열린다.축제기간 동안 진행되는 연계·부대 프로그램도 풍성하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제39회 청량문화제가 축제기간 동안 함께 열린다. 전국 한시백일장, 삼계줄다리기 재연, 학생 사생대회와 각종 예술작품 전시회 및 체험행사 등 봉화의 전통과 문화를 엮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경험해볼 수 있다.이밖에도 2022 봉화군 씨름왕 선발대회, 제10회 봉화송이 전국마라톤 대회, 계서 성이성 문화제, 은어공주와 송이원정대 뮤지컬, 청량사 산사음악회 등 지역민들의 화합과 관광객들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축제의 장이 펼쳐진다.한편, 군은 코로나19 재유행에 대비해 축제장 내 식당 등 다중이용시설의 수시 소독과 축제장 내 생활 방역 물품 비치 등 방역대응 계획을 수립해 관광객들이 안전하게 축제를 즐기고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할 계획이다.박현국 봉화축제관광재단 이사장(봉화군수)은 “코로나19로 인해 3년 만에 개최되는 봉화송이축제가 지역을 대표하는 축제로 성공적으로 개최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며 “봉화송이축제에 오셔서 지역의 우수한 농·특산품도 구매하시고 다채로운 프로그램들도 즐기시길 바란다”라고 말했다.봉화/박종화기자 pjh4500@kbmaeil.com

2022-09-20

에펠탑과 센강을 다시 만나는 즐거움

가본 사람은 물론이고, 심지어 가보지 않은 사람들도 안다. 프랑스 파리는 ‘낭만’이라는 단어로 요약되는 도시다.거길 찾는 여행자들은 환하게 불 밝힌 에펠탑 아래서 이른바 ‘인생사진’을 찍고, 센 강 위를 유유히 떠가는 유람선에서 에디트 피아프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샹송을 듣는다.남녀와 노소를 불문하고 사람을 들뜨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파리. 기자 역시 6년 전쯤 일주일간 파리에 머물 때 어디선가 좋은 향기가 풍겨오는 노천카페에 앉아 순수했던 소년의 마음으로 돌아가곤 했다.파리는 또한 영화와 문학의 도시다. 그래서다. 예술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은 일생 한 번쯤은 파리 거리를 목적 없이 떠도는 여행자가 되고 싶다.10대와 20대 시절 읽었던 장 폴 사르트르와 알베르 카뮈의 문장이 탄생한 곳. 그 작가들이 앉았던 카페에 들어가 서툰 프랑스어로 커피를 주문해보는 치기도 파리에선 부끄러울 게 없을 것 같다.영화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프랑수아 트뤼포와 한국 영화팬들에게도 익숙한 뤽 베송과 레오 카락스 감독 또한 파리가 주요 활동무대였다. 영화 ‘퐁네프의 다리’에 등장하는 장면을 흉내 내는 연인들이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물하는 도시.빛나는 예술만이 아닌 화려하고 맛있는 요리, 세련된 건축물, 세계적으로 이름 높은 박물관들, 홍세화가 말한 바 ‘톨레랑스(관용)’ 역시 매력적인 프랑스 파리의 관광자산이다. □ 낮보다 밤이 아름답고 매력적인 도시거대함 속에 미세한 매력을 곳곳에 숨긴 파리를 ‘나무위키’는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프랑스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로 경제, 문화, 정치, 외교 등 많은 분야에서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진 도시다. 유럽연합의 핵심 국가 중 하나인 프랑스의 수도이며, 런던에 이어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등과 함께 유럽에서 손꼽히는 금융 허브다. 게다가 파리는 오랜 역사에서 비롯되는 예술과 패션과 유행의 도시로 첫 손에 꼽히는 곳이며, 수많은 관광객들을 불러들이는 대표적인 관광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별명이 빛의 도시다.”여행자들에게 안전은 매우 중요한 문제. 위험한 나라나 도시는 제아무리 매력적이라 해도 선뜻 방문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파리는 어떨까.관광 안내책자가 ‘이 지역은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한 곳만 피한다면, 파리의 어떤 거리를 걸어도 그다지 큰 위험을 느끼지 못한다.여행자들이 자주 찾는 몽마르트르 언덕과 루브르 박물관 등 유명 관광지에선 좀도둑 정도를 조심한다면, 미려한 조각품 같은 건물들이 즐비한 파리 어느 곳이건 마음 놓고 다녀도 무방할 듯했다. 환한 햇살 아래 만나는 파리는 재론의 여지없이 아름답다. 하지만, 개인적 체험에 근거해 말하자면 ‘그 도시’ 파리는 낮보다 밤이 더 매혹적이다.파리에 도착한 첫날. 저물 무렵 에펠탑을 보러 갔다. 우편엽서에 인쇄된 사진과 그림으로 수백 번 봤기에 낯설지 않았지만, 실제로 대면하니 그 크기와 높이가 굉장했다.어둠이 조금 더 짙어지자 연한 주황색 조명이 에펠탑을 환하게 밝혔다. 인종과 국적이 각기 다른 연인과 관광객들이 탑 아래서 입맞춤을 하는 장면이 여러 번 연출됐다. 말 그대로 ‘낭만적’이었다. 그런 분위기라면 없던 사랑도 생길 것 같았다.프랑스관광청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제작된 첫 삽화엽서의 앞면을 장식한 게 바로 에펠탑이었다고 한다. 작가의 이름을 딴 리보니(Libonis) 엽서는 우체국이 있던 에펠탑의 2층에서 제작됐다고.수십만 부가 인쇄된 그 엽서로 인해 프랑스 전역에서 가족과 연인들을 이어주는 ‘엽서 열풍’이 불었다고 하니, 그때나 지금이나 에펠탑은 서로를 향한 마음이 식어버린 연인들의 애정을 다시금 부활시키는 병원 역할까지 하고 있는 듯.파리에서 보낸 첫 밤. 기자를 포함한 한국인 셋과 아랍인 하나가 모여 에펠탑 인근 소박한 식당에서 포도주를 곁들여 늦은 저녁을 먹었다. 아니나 다를까. 빵맛이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다.오밀조밀 파리의 맛집이 모여 있는 고풍스런 동네와 거길 지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가로수 이파리….그것들을 보고 있자니 프랑스 여배우 소피 마르소가 주연한 영화의 제목이 절로 떠올랐다. ‘나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 센 강 유람선서 맞이한 ‘바람의 맛’은…수많은 소설가와 시인, 화가와 음악가 등이 사랑한 도시 파리는 그 외 유명인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한때 영국의 왕세자비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다가, 서른여섯이란 젊은 나이에 안타까운 죽음을 맞은 다이애나 스펜서도 파리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 도시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파리를 찾은 관광객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필수 방문코스 중 하나인 센 강 유람선 선착장은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사망한 터널에서 가깝다. 비극과 낭만이 겹치는 미묘한 공간이다. 물론 프랑스 외 다른 나라에도 강물을 가르며 떠가는 유람선이 드물지 않다. 하지만, 센 강 유람선은 그 위상이 여타 유람선을 압도한다. 그 이유가 뭘까? ‘두산백과’는 유람선이 오가는 센 강의 매력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파리 센 강변에는 프랑스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서 깊은 건축물과 현대에 지어진 다양하고 독특한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낸 이 조화는 파리의 역사와 그 발전 과정을 보여준다. 센 강은 퐁네프와 퐁디에나를 비롯해 30여 개의 크고 작은 다리로 연결돼 있다.”센 강 유람선에 올랐던 날이 아직 기억에 선명하다. ‘예술품’이라 부르는 게 더 어울릴 다리 아래로 유람선이 떠갈 때 본 고딕양식의 성당들, 까마득한 중세시대에 축조된 건물들이 수백 년의 시간을 묵묵히 견뎌내고 우뚝 선 모습들은 파리가 여행자에게 주는 선물 같았다.어떤 관광객은 유람선에 오르면서부터 내릴 때까지 그 풍경들을 카메라에 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고, 또 다른 취향의 여행자는 그저 말없이 검은 강물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강의 끝에서 불어온 바람이 코끝을 간질였다. 유람선에 오르기 전 마신 맥주 두어 병의 취기가 갑자기 몰려왔고, 요절한 왕세자비의 얼굴이 물결 위에 그려졌다.인간의 삶 속에 존재하는 ‘낭만’과 ‘비극’이란 대조적인 두 단어를 곰곰 생각하니, 바람의 맛이 달콤하면서도 쓰디썼다. □ 거리에서 만난 파리의 예술가들예기치 않게 찾아와 오랜 기간 사람들을 괴롭힌 코로나19의 광풍은 파리로 향하는 비행기의 숫자를 줄였고, 그 도시의 매력에 목말라했던 여행자 역시 줄어들게 만들었다.프랑스도 다른 나라들과 다를 바 없이 ‘코로나19 사태’로 큰 몸살을 앓았다. 그러나, 어떤 비극에도 끝은 있는 법. 얼마 전부터는 파리 시내와 관광지가 다시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한 여행사는 최근 코로나19가 진정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되는 10월 여행자들이 선호하는 지역을 조사·발표했다. 그 조사에 따르면 “추석 연휴와 개천절, 한글날 등 대체 휴일이 있는 올 가을의 경우 유럽과 지중해, 튀르키예 등 장거리 여행지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10월 한국을 출발하는 해외여행에서 예약자들이 관심을 보이는 지역 1위는 서유럽. 알다시피 프랑스 파리는 서유럽의 중심지이기도 하다.파리를 여행했던 때. 쉽게 잊히지 않을 몇몇 순간을 경험했다. 지하철역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던 악사가 들려준 맑고도 구슬픈 멜로디, 몽마르트르 수많은 무명화가들의 화사한 붓질, 개선문 건너편 광장에서 바이올린을 들고 환하게 웃던 소년…,예술과 낭만의 도시 파리에서는 온갖 종류 악기를 연주하는 거리의 예술가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그들과 다시 해후할 날을 기다리는 가을의 초입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9-20

붉은 태양과 푸른 바다는 구룡포의 영원한 생명력

1945년 8월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하고 한반도에서 일본인들이 떠난 후에도 구룡포의 활기는 여전했다. 풍부한 어자원과 잘 정비된 항구는 구룡포를 동해안의 대표적인 항구로 유지하게 하는 기반이 되었다. 현재 구룡포의 인구는 1만 명이 채 안 되지만 1970년대에는 3만 5천여 명이나 되었다. 한때 구룡포에 가면 개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구룡포는 번성했다. 포항이 부럽지 않았고, 구룡포의 항구는 포항의 항구보다 활기가 넘쳤다. 구룡포항에서는 다양한 생선이 들어오고 위판된다. 한 예로 대게 하면 영덕 대게를 떠올리지만 사실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대게가 들어와 위판되는 곳이 구룡포항이다. 구룡포의 목 좋은 횟집은 대부분 대게를 주메뉴로 팔고 있다. 왁자지껄한 구룡포시장에 가면 웬만한 생선은 다 있고, 싼 가격에 살 수 있다.구룡포 뒷골목에 있는 고래 고깃집에도 단골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구룡포는 광복 이후 1970년대까지 포경업이 꽤 성행한 곳이다. 구룡포읍 행정복지센터 앞마당에 있는 제1동건호라는 포경선이 구룡포가 과거에 포경기지였음을 말해준다. 선체 앞에 부착된 70미리 포는 고래를 향해 작살을 날리던 실물이다. 포경선을 탔던 선원들은 대부분 작고했고, 지금은 대여섯 명만 생존해 있다.구룡포의 해녀도 명성이 높다. 호미곶과 더불어 경북에서 가장 많은 해녀가 있는 곳이 구룡포다. 이제 해녀는 모두 60대 이상의 고령이다. 수입은 그럭저럭 괜찮지만 바닷속을 누비며 성게, 미역, 전복, 소라 등을 채취하는 험한 일을 젊은 여성들이 선호할 리 만무하다. 고령의 여성들이 생계를 위해 바다로 뛰어드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 한구석이 짠해진다.구룡포는 뭐니 뭐니 해도 과메기의 고장이다. 과메기를 빼놓고 구룡포를 얘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겨울 한철 과메기를 팔아서 1년 내내 먹고사는 사람들이 꽤 있다. 코로나19 사태 이전인 2017년에는 과메기 매출액이 약 560억 원이었다. 과거에는 바닷가 덕장에서 과메기를 건조하는 모습이 구룡포의 상징이었지만 이제는 사라진 옛 풍경이 되었다. 지금은 과메기 공장에서 깨끗하고 위생적으로 건조한다. 세월은 과메기를 만드는 방식도 바꿔놓은 것이다.원래 과메기는 청어로 만들었지만 청어가 잡히지 않자 꽁치로 대체되었다. 얼마 전부터는 구룡포 연근해에 그렇게 많던 꽁치의 어획량도 줄어들자 원양에서 들어오는 꽁치로 과메기를 만들고 있다. 그렇다고 청어 과메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청어 과메기 맛을 잊지 못해 찾는 이들이 있어 적은 양이나마 유통되고 있다. 지역 내에서만 유통되던 겨울철 별미가 전국적으로 유통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과메기는 겨울이 되면 홈쇼핑, 포털사이트, 택배 등 다양한 경로로 전국에 팔려나간다. 앞으로 과메기가 어떻게 변신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어자원 감소는 구룡포의 골칫거리다. 최근에는 예전처럼 많은 고기가 잡히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어자원의 남획이 원인이라고 하지만 기후변화로 수온 등 바다 생태계가 바뀐 게 주원인이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어만리 호천리(漁萬里 虎千里)’라는 말이 있다. 하룻밤 사이에 바닷고기는 만 리를 가고 호랑이는 천 리를 간다는 뜻이다. 고기는 수온에 그만큼 민감하다. 바다 생태계가 바뀌면서 수온도 바뀌고 수온을 따라 고기도 움직이는 것이다. 어자원 감소는 구룡포뿐만 아니라 국내 모든 바닷가 마을의 공통 숙제다. 문제가 있으면 해결책도 있기 마련이다. 구룡포에 닥친 이 어려움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지켜볼 일이다.고인돌과 주상절리아홉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구룡포에는 아득한 옛이야기가 곳곳에 남아 있다. 구룡포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유적은 강사리에 있는 고인돌이다. 90톤이 넘는 이 고인돌을 통해 청동기시대 구룡포에 꽤 큰 규모의 공동체가 존재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강사리 바로 옆에는 고래의 전설이 살아 숨 쉬는 다무포 마을이 있다. 강사리의 고인돌과 다무포의 고래를 연결하면 이 마을에 고래 사냥을 하던 선사인들이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의 날개를 펴게 된다.구룡포 삼정리 구룡포해수욕장 근처에 가면 특이한 지질 현상인 주상절리(柱狀節理)를 볼 수 있다. 주상절리는 화산에서 분출한 용암이 지표면에 흘러내리면서 식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규칙적인 균열이 생겨 형성된 것이다. “우주는 지구를 저질러놓고/용암 같은 점액질의 시간을 흘려보냈다”(김주대, ‘시간의 사건’ 일부)는 시구절이 떠오르는 곳이다. 구룡포의 주상절리는 화산이 폭발하면서 용암이 분출되다가 갑자기 멈춘 듯한 독특한 형상을 하고 있다. 석병리, 동해안의 땅끝마을바람이 거센 바닷가 근처는 날렵하고 튼튼한 말을 키우기 좋은 적격지다. 거센 바람 속을 달려본 말들은 바람보다 빠르게 더 멀리 달릴 수 있을 터이다. 바로 조선 최고의 군마를 키우던 국영 목장이 구룡포에 있었다. 지금은 말을 방목해 키우던 석성(石城)의 흔적만 남아 있다. 석성은 구룡포읍 석문동에서 동해면 발산리까지 호미반도를 가로지르는 7.8㎞ 구간에 높이 2∼3m로 쌓았다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삼국유사’ 등의 기록을 보면 석성은 약 1400년 전에 쌓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1905년 을사늑약 이후에 폐쇄되었다.이 구간의 약 4㎞는 말목장성 탐방로로 조성되어 있다. 호젓한 산길을 따라 걷다 보면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국영 목장에서 성장하며 훈련받은 군마들은 한반도 곳곳을 달리며 용맹을 떨쳤을 것이다. 해발 205미터의 석성 정상에 오르면 봉수대 터를 만날 수 있고, 봉수대 터 옆에 있는 전망대에서 구룡포와 호미반도 능선, 영일만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전남 해남에 땅끝마을이 있듯이 경북 구룡포에도 땅끝마을이 있다. 한반도의 동쪽 끝은 구룡포읍 석병리다. 포항 출신의 시인 박남철은 석병리를 ‘태양이 사는 곳’이라 했다.“태양이 사는 곳, 땅끝마을 석병리이곳은 이제 그대로.갯목 시,해맞이 군,일어서는 바다 읍!”- 박남철 ‘위대한 고향 포항시’ 부분아홉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지명은 아무 곳에나 붙일 수 없다. 아홉 마리 용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을 감당할 수 있어야 비로소 ‘구룡’이라는 이름을 부여할 수 있다. 구룡포에 가면 지명을 감당할 수 있는 기운이 넉넉히 느껴진다. 비록 일제강점기의 아픔이 남아 있지만 구룡포의 장구한 역사를 생각한다면 그 기간은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구룡포의 오랜 역사와 자연 그리고 사람들의 의지는 그 아픔을 치유하고 새로운 구룡포를 꾸준히 만들어왔다. 무엇보다 구룡포는 태양이 사는 곳이자 늘 푸른 바다와 동의어가 아닌가. 결코 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명력이 구룡포를 늘 새롭게 만들어갈 것이다.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

2022-09-20

감은사지, 문무대왕의 왜구 격퇴 염원 서려 압도적 장엄함

◇항왜의 정신을 담아 건설한 감은사폐사지는 아무리 번성했던 절터라 해도 처연한 느낌이 든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흔적이기 때문이다. 대개의 폐사지는 풀 섶에 탑만 홀연히 서 있거나 돌덩어리나 기왓조각만 쓸쓸하게 흩어져 있다.그 텅 빈 공간에 무슨 아름다움이 남아 있을까 싶지만 폐사지를 방문하게 되면 묘하게 마음을 건드리는 것들이 있다.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풍경소리와 염불 소리가 낭랑하게 울리고 향 내음이 나는 것 같다. 지금은 고인이 된 사진작가이자 폐사지 여행전문가였던 이지누 선생은 “폐사지는 무엇을 외우는 곳이 아니라 교리나 절의 역사 이런 것 다 떼놓고, 천년 세월을 품은 주춧돌 위에 앉아 느끼는 곳”이라고 했다.그런 점에서 경주시 문무대왕면 용당리에 있는 감은사(感恩寺)지는 진정한 울림을 주는 폐사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감은사지는 혼자 있어도 다른 폐사지에서 느껴지는 적막함이나 쓸쓸함이 없다. 감은사지에서 시선을 압도하는 것은 장엄하게 서 있는 두 개의 석탑이다. 장대하고 압도적이다. 몇 개의 유구와 두 개의 삼층 석탑(국보 제112호)만 있는데도 드넓은 사적지가 꽉 찬 느낌이다. 유홍준 교수 말처럼 쌍탑이 연출하는 공간감이 장중하고 드라마틱하다. 탑은 부처님의 무덤이다. 부도탑이나 주춧돌, 기단석도 폐사지의 풍경을 이루지만 탑만 있어도 부처님의 형상이 느껴질 정도로 존재감이 확실하다.신라는 ‘탑의 나라’라 할 정도로 수많은 탑이 있다. 그 중 좌우에 같은 탑을 세우는 감은사의 쌍탑 1금당 형식이 수많은 사찰 가람배치의 표준이 됐다. 불국사 석가탑이 완벽한 조형미의 절정이라면 감은사 쌍탑은 석가탑으로 향하는 신라미술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셈이다.감은사지 석탑이 삼층탑이라는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백제의 정림사지나 의성 탑리의 석탑 장항리 석탑은 모두 오층석탑이다. 삼층석탑보다 오층석탑이 더 시각적으로 입체감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에 삼층석탑을 만든 이유는 통일된 새 국가의 이미지에 맞는 탑을 건설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주를 이룬다. 보다 장중하고 엄숙하고 안정된 탑이 새 시대에 각광 받았다는 것이다. 삼층 밖에 안되는 탑에 상승하는 이미지를 주기 위해 지대석을 사용했다. 상·하 지대석은 층수에 포함되지 않지만, 안정감을 주면서 동시에 상승감도 주는 역할을 한다. 상층부에는 길이가 3.9m나 되는 철찰주를 꽂았다.감은사탑은 우리나라 삼층석탑 중 가장 큰 규모로 총 높이가 무려 13m나 된다. 철찰주를 제외하고도 무려 9.1m나 되는 장중한 스케일을 자랑한다.감은사지는 토함산에서 발원해 양북면을 가로질러 동해로 흐르는 대종천의 하류에 있다. 감은사는 문무대왕의 왜구 퇴치의 염원이 담긴 절이다.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통일 군주 문무왕은 바다 건너 왜(倭)가 무거운 걱정거리였다. 왜의 침입은 신라를 초기부터 괴롭혔다.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대왕이 부처의 힘을 빌려 왜구를 격퇴하고자 감은사라는 절을 짓기 시작했다. 감은사의 원래 이름은 진국사(鎭國寺)였다. 하지만 불사 건축은 문무왕 생전에 끝내지 못했다. 문무왕은 승려 지의법사에게 “내가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문무왕은 유언에 따라 화장된 뒤 동해에 안장됐으며,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이 불사를 이어받아 682년에 감은사를 완공했다.원래 감은사지 금당터 돌계단 아래에 동쪽을 향해 구멍(용혈)을 하나 뚫었다고 한다. 용이 된 문무대왕이 절로 들어와 돌아다니게 하려고 마련한 것이었다. 감은사지 동쪽의 봉길해수욕장 맞은편에는 작은 바위섬이 있는데, 이곳이 왕의 유언에 따라 유골을 보관한 대왕암(大王岩)이다. 문무대왕릉(대왕암)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에는 문무대왕을 참배하기 위해 만든 작은 정자 이견대(利見臺)가 있다.이견대는 ‘주역’의 ‘비룡재천이견대인’(飛龍在天利見臺人), 하늘을 나는 용이 있으니 대인을 보는 것이 이롭다’라는 의미의 글귀에서 따온 이름이다. 삼국유사에 ‘커다란 용이 바다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돼 있다. 지금 건물은 1970년에 발굴조사 된 초석에 근거해 1979년 새로 지은 것이다.감은사는 문무대왕릉이 있는 바다와 물길이 이어지게 만든 구조 등을 보아 문무대왕릉과 함께 세트로 계획,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감은사를 완성한 신문왕은 동해에 있던 작은 섬 하나가 감은사 쪽으로 떠 내려와 파도를 따라 왔다 갔다 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신문왕은 이견대에 와서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 천존고에 보관했다. 그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가뭄에는 비가 내리고, 장마 때는 비가 그치고,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잠잠해졌다. 그런 이유로 피리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 명작 고선사탑경주시 보덕동 암곡리 경주박물관 뒤뜰에 있는 고선사탑은 감은사 석탑과 쌍둥이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 모양이 닮았다. 스케일과 형태는 거의 감은사탑과 비슷한데 하늘을 찌를 듯한 찰주가 없고 선의 마무리가 약간 부드럽다. 좌중을 압도하는 장중함은 감은사탑 못지않다.원래 고선사탑이 있던 고선사지는 토함산 북쪽 기슭의 암곡동에 있었다. 1975년 덕동호가 건설되면서 암곡동 고선사터가 물에 잠기면서 고선사터에 흩어져 있던 여러 문화재와 삼층석탑과 비석 받침 등을 국립 경주박물관 야외로 옮기게 된 것이다.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명작인 고선사탑이 감은사지 석탑에 비해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고선사는 신라 신문왕(681~692) 때 원효대사가 주지 스님으로 계셨던 곳이다. 고선사지를 옮기는 과정에서 원효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서당화상비(誓幢和尙碑) 비문 조각이 발견되기도 했다.비문을 지탱하던 비신 아래 거북이 모양의 받침 부분은 유실됐다가 1968년 경주시 동천동 인가 우물터에서 발견됐다. 동네 아낙들이 중요문화재인 것을 모르고 빨래판으로 사용했다고 한다.고려사에도 고선사가 나온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선사의 규모는 감은사보다 더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금당터는 물론, 강단터와 중문터 등의 건물 규모가 상당하고 기와 전돌 등 수많은 문화재가 발굴된 것으로 보아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었을 것이라고 학계에서는 추론하고 있다. ◇도굴범에 의해 훼손된 장항리사지토함산 동남쪽 계곡에 있는 장항리사지도 빼놓을 수 없는 통일신라시대 절터다. 절터가 있는 계곡은 대종천의 상류로 감은사터 앞을 지나 동해로 흘러간다. 절을 지은 연대나 절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데, 장항리라는 마을 이름을 따서 ‘장항리사지’ 혹은 ‘탑정사’라고 부르고 있다.절터에는 서탑인 오층석탑과 파괴된 동탑의 석재, 그리고 석조불대좌가 남아 있다. 금당으로 추정되는 건물터의 석조불대좌는 2단이다. 아랫단은 팔각형으로 조각이 새겨져 있고, 윗단은 연꽃을 조각한 원형대좌 모양이다. 서탑은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장항리사지 동쪽으로 약 1㎞ 지점에 금광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발파 작업을 위해 다이너마이트가 이용됐다. 1923년 도굴꾼이 서탑의 사리장엄구와 불상 내부의 복장물(腹藏物)을 노리고 광산에서 훔쳐 온 다이너마이트로 탑과 불상을 폭파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후 약 10여 년간 불상과 탑은 파손돼 흩어진 채로 방치됐다. 1932년 서탑을 복원하고 파손된 불상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탑은 1966년 대종천 계곡에 흩어져 있는 조각들을 모아 복구했다.장항리사지는 계곡 사이의 좁은 공간을 이용해 쌍탑을 세우고 그 뒤쪽 중앙에 금당을 배치한 점이 주목할 만하다. 쌍탑 1금당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을 보이나, 아직 강당과 회랑의 자리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최병일 작가

2022-09-19

원산에 상륙해서 만난 첫사랑

6·25전쟁은 남북한 거의 전체를 포연에 휩싸이게 했다. 경북과 강원도 동해안은 물론, 서울 수복 이후 전투 지역이 된 북한 원산도 전쟁의 비극을 피할 수 없었다. 포탄이 쏟아지는 전장에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애틋한 감정은 피어나는 법. 해병대 1기 이봉식 선생에게도 이 와중에 사랑이 싹텄다. 영화처럼 드라마틱한 자신의 ‘첫사랑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선생의 목소리가 열에 들떴다. 홍 : 인천 상륙 때 인민군의 저항이 거세지는 않았습니까?이 : 상륙 전에 오랜 시간 포를 쏘고 항공 폭격을 한 탓에 우리가 육지로 올라갈 때는 인민군이 기력을 거의 잃은 상태였어. 가끔 포 소리가 들리기는 했는데, 저항이 생각보다 격렬하지는 않았지.홍 : 미군과 한국 해병대 중 누가 선두에 섰나요?이 : 동시에 인천으로 들어갔어. 아까 얘기했듯이 상륙정이 해병대를 내려놓고 돌아가 다시 군인들을 싣고 가는 방식이었고, 미군과 우리 군대 모두가 그렇게 했지. 육지에 도착해서 엄폐물을 찾아 뛰어가 엎드리고……. 다행히 내 주변에서는 상륙하면서 죽거나 다친 사람이 없었어. 그렇게 육지에 오른 후 참호를 파고는 저녁을 먹고 오지 않는 잠을 청했어. 다음 날 새벽 5시에 기상해 시가전을 준비하고는 “각기 구역을 맡아 수색하며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어.홍 : 인천 시내는 어떻던가요?이 : 시내로 들어서니 많은 사람이 죽어 있었고, 시체가 불에 탄 채 널브러져 있었어. 우리 부대도 오전 11시쯤 대원 하나를 잃었지. 내가 분대장이었으니 죽은 전우를 위생병에게 맡겨 옮기도록 했어. 진격하다 보면 태극기를 흔드는 사람이 있고, 중공기와 인공기를 흔드는 사람도 있었어. 우리가 국군인지 인민군인지 모르는 사람도 있었던 거지. 중간에 인민군들이 손을 들고 나오기도 했는데 그들은 압송해서 포로수용소로 보냈지.홍 : 인천을 지나 서울로 간 겁니까?이 : 우리 부대가 인천을 출발해 김포를 거쳐 산개해서 서울로 밀고 올라가는 데 꼬박 일주일이 걸렸어. 그동안 치열한 전투도 여러 번 겪었지. 인천이 막히니 낙동강에서 전투를 벌이던 인민군 4개 군단이 북으로 돌아가려 했어. 그때 포로가 된 인민군들은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냈지. 감당을 못할 정도로 포로가 많았어. 서울로 들어가니 이미 중앙청 등이 수복돼 있더군. 나는 중앙청에 태극기가 다시 걸리는 장면을 봤어. 서울이 우리 품으로 돌아온 게 1950년 9월 28일이야.홍 : 그 후 어떤 전투에 참여했고, 어떤 전투가 기억에 남는지요?이 :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후에는 이를 축하하는 행사를 진행했지. 이후 해병 부대는 전부 인천으로 이동했어. 인천에 있는 한 국민학교 운동장에 집결해 다음 전투에 대비하기 위해 부상자를 치료하고 인력을 충원했어. 부대 재편성을 한 거지. 재편성은 7~8일밖에 안 걸렸어. 대대 병력이 운동장에 천막을 치고 재편성을 마치니 북으로 간다고 하는 거야. 다시 승선해서 전투함을 타고 동해 쪽으로 갔어. 2~3일쯤 지나니 금강산이 보이더군.홍 : 거기가 어디였죠?이 : 인천상륙작전 후에 후속 부대들이 우리가 서울을 점령하던 시기에 북한으로 가서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치고 올라갔어. 그걸 따라서 우리도 진격했지. 지난번처럼 인천에 이어 원산으로 상륙하나 보다 했지. 그런데 막상 배에서 내리니 작전 명령이 안 나왔어. 전투를 하는 것도 아닌데 일단 먼저 원산에 상륙한 거지. 우리는 원산에서도 전투를 벌일 줄 알았어. 그런데 인민군은 이미 흥남 쪽으로 후퇴했더라고. 해병대는 원산에서 하선했고 백사장에 천막을 쳤어. 전쟁 중이었지만 경치가 정말 좋더군. 각 분대와 소대별로 잠자리를 마련하고, 3대대 본부에 배속된 일부는 근처 국민학교 운동장으로 갔어.홍 : 그즈음에 지금의 부인을 만난 건가요?이 : 맞아. 학교에 진을 치고 있으니 전령이 분대장인 나한테 밥을 가져다주더군. 그러면서 하는 말이 “분대장님 반찬이 없어 저쪽 집에서 김치를 얻어왔는데 거기 예쁜 아가씨가 있더라고요. 한번 가보시죠”라고 하더군.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그래, 그럼 한번 둘러볼까” 하며 갔는데, 조그만 처녀가 야무지게 생긴 거야. 할 말은 별로 없었어. 그냥 “물 한 잔 얻어 마시자”라고 했지. 그런 다음 고향을 물어보니 충청북도 괴산이라고 하더군. 나도 충청도 사람이니 자연스레 대화가 이어졌지. 어떻게 괴산에서 여기까지 왔냐고 물으니 아버지를 따라 원산으로 왔는데 아버지가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고 했어. 그 만남은 그렇게 끝이 나고 나는 다음 날 출격 명령을 받아 평양으로 가게 되었지.홍 : 평양에서도 전투가 있었나요?이 : 전선은 형성돼 있었는데, 평양 도심에 들어가도 인민군의 공격이 없었어. 적들은 전혀 안 보이고 시체만 가끔 눈에 띄더군. 우리 부대가 정찰을 꼼꼼히 하는데도 적이 없었어. 평양 인근 아주 험악한 산악 지역까지 살폈지. 그래도 100리 안팎에서는 인민군이 발견되지 않았어. 홍 : 그 작전은 해병대 단독 작전이었습니까?이 : 맞아. 해병대가 단독으로 들어갔지. 인민군이 없으니 한국 해병대 3대대가 전투 준비만 하고 있었어. 그런데 곧 상급 부대에서 소식이 들려왔어. 중공군이 내려오고 있다는 거야. “중공군 4개 군단이 밀려오니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는 거였지. 우리는 마음을 다잡았어. ‘이번 전투는 힘겨울 것이 분명하지만, 전투 태세를 확실히 해서 명령 없이는 후퇴하지 않고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겠다’고. 이런 마음가짐으로 중공군이 올 때만 기다렸어.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며칠 후에 후퇴 명령이 내려와서 좀 놀랐지.홍 : 당시가 겨울이었지요?이 : 12월인데 눈이 많이 왔어. 북한은 그때쯤이면 폭설이 내린다고 하더라고. ‘작전상 후퇴’ 명령이 떨어지면서 퇴각했는데, 몇몇 중공군이 발견되면 방어를 하면서 후퇴했지. 그게 한 40리쯤 되었을 거야. 밤을 새우면서 전투하며 이틀에 걸쳐 후방으로 내려왔어. 원산이 보이는 곳까지 왔는데 중공군이 원산 쪽으로 장거리포를 쏘는 거야. 우리 부대는 포격이 쏟아지는 중간 지점에 있었지. 다행히 큰 교전은 없었고, 적이라고 해도 패잔병들과 맞붙어 한국군의 희생은 적었어. 그렇게 12월 말에 원산에 도착했지. 원산 시내에서 20~30리쯤 떨어진 지역으로 오니 미군들이 군용트럭 수십 대를 대기시켜놨어. 우리를 군함까지 태울 트럭이었지.홍 : 작전상 후퇴를 한 것이군요.이 : 그때 그곳에 우리 해병대 병력은 4개 중대 700명가량이었어. 나중엔 들은 이야긴데 중공군은 4개 군단, 즉 16개 사단이었어. 엄청난 병력이지. 그들이 인해전술을 쓰면서 내려온 거야. 우리가 아무리 해병 정신으로 맞서 싸운다고 해도 이기기가 힘들었겠지. 그러니 38선 이남으로 신속하게 작전상 후퇴한 거야. 원산에 오니 항구 앞이 난리였어. 민간인들도 앞다퉈 남쪽으로 내려가려고 했으니까. 저 멀리서는 중공군이 쏘는 포 소리가 들리고….홍: 흥남 철수처럼 원산도 혼란스러웠겠습니다.이: 그렇지. 나도 배를 타야 하는데 며칠 전에 김치를 얻어온 집 처녀가 걱정되는 거야. 그래서 전령을 보내 “빨리 남쪽으로 가야 하니 아무것도 챙기지 말고 몸만 나오라”고 전했지. 지금 아내가 된 사람과 어머니, 남동생이 보따리 하나씩을 들고 원산항으로 왔더라고. 그런데 민간인은 쉽게 배에 탈 수 없는 거야. 내가 나서서 겨우 승선시키고 나도 부산으로 갔어. 그때 원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수많은 사람이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가슴 아픈 역사지.홍 : 부산에 도착해서 그분을 찾았겠습니다.이 : 원산에서 출발해 이틀 만에 부산에 도착해 M1 소총을 메고 피난시킨 처녀가 있을 법한 피난민 수용소를 찾아다녔지. 그때 부산에 수용소가 서른 곳이 넘었는데 찾기가 쉽지 않더라고. 몇 군데를 헤매다가 못 찾고 우리 부대는 진해로 가게 되었어. 거기 육군대학에서 부대 재편성을 했는데, 해병대 신병 5~6기생이 교육을 받았어. 그리고 한 달쯤 지났을까, 우리 부대에 강원도 중동부 전선으로 가라는 명령이 떨어졌지. 그 명령에 따라 영덕에서부터 청송을 넘어 대관령과 양구까지 밀고 올라갔어. 인민군 패잔병들과의 전투도 계속되었지.대담·정리 : 홍성식 기자 / 사진 출처 : 해병대사령부 ‘사진으로 본 해병대 50년사(1949∼1999)’

2022-09-19

자기실현과 사회정의 실현에 충실한 인간이 되라

세상 모든 것이 변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사람다움, 사람답게 사는 것, 가장 나답게 사는 것이다. 일체 권위를 배제하고 모든 이데올로기와 권력과 결별하고 비주류 이단자로 나답게 살아가는 주체적 아웃사이더,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는 자유 자치와 자연을 이상으로 삼고 나답게 살기 위해 스스로에게는 무섭게 엄격하다.박 교수는 “우리 사회가 더 인간다운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물질주의 출세주의 성장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젊은이들에게는 끝없는 욕심을 버리고 정신을 살찌우라고 충고한다. 노인들에게는 스스로 홀로 서는 연습을 권한다. -법학자 박홍규가 철학자, 인문학자 박홍규가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나는 지금도 법학자다. 경북노동위원회 공익위원이고 학회 활동도 하고 있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 주차 문제로 자주 송사가 벌어지는데 그러면 나에게 자문을 구하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주차법이 아닌 노동법을 전공했다’고 말해준다. 내가 철학자나 인문학자라고 하기는 부끄럽다. 나는 법대 교수를 시작할 무렵부터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으며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그래서 80년대부터 이반 일리치 책을 번역해 내고 91년에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번역해 냈다. 그렇게 한 이유는 그 사람들의 사상을 소개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는데 아무도 번역을 안 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얼마나 책을 써 왔나. 작업은 주로 언제 하나. 농사일도 하고 있다. 퇴직 전후의 하루 일과가 어떻게 달라졌나.△100권은 훨씬 넘는 것 같은데 정확하게 헤아려보지는 않았다. (저서와 번역서 모두 150권도 넘을 듯.) 집필 작업은 주로 새벽과 오전에 한다. 저녁 8시면 잠자리에 들고 새벽 1,2시면 일어나 쓰거나 읽는다. 농사일은 아침과 저녁에 한 시간 정도씩만 한다. 자급자족을 위해 유기농법으로 재배하기 때문에 농사에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는다. 농약을 아예 쓰지 않으니 주변 농민들로부터 (잡초나 병충해 때문에) 싫은 소리도 가끔씩 듣는다. 퇴직 전이나 후나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집과 농장, 그리고 학교 도서관을 맴도는 일과다.-그동안 저술과 번역한 책의 원고료나 인세 수입만도 상당할 것 같다. 특별히 애정이나 의미를 두는 책은 어떤 책들인가.△내가 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은 없으니 인세 수입은 보잘 것 없다. 게다가 인세를 받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 중에 제일 많이 팔린 책은 1991년에 번역한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다. 31년이 지난 지금도 꾸준히 나가고 있으니까. 같은 사이드의 ‘문화와 제국주의’도 내가 아끼는 책이다. 물론 내가 쓴 모든 책을 사랑한다.-청소년기 미술에 소질을 보였고 지금도 직접 그리는 서양 회화는 상당한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림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 또 법학을 택한 계기가 따로 있나.△그림이 의미가 있으니까 그리는 것이다. 그림을 그릴 때에는 만사를 잊을 수 있고, 자연이나 대상의 묘사에 집중할 수 있으며, 무엇인가 아름다움을 창조한다는 게 희열을 느끼게 만든다. 법학을 택한 이유는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를 한 1970년 겨울에 대구 출신의 노동운동가 전태일 씨가 분신자살을 하면서 노동법 책을 태웠다. 그것을 보고 노동자들을 위한 법률가가 되려고 결심하고 법학을 택했다.-현실과 배치되거나 괴리가 있는 법률들은 대표적으로 어떤 것이 있나. 다양한 사회 구성원의 의견을 하나로 집약시킬 수 없으면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상식 아닌가.△노동법은 노동자들을 위한 법인데 현실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못한 것 같다. 헌법에서도 그런 노동법의 제정을 촉구하는데 우리나라의 노동법에는 아직 문제가 많이 있다. 다양한 의견이 있을 때 다수결에 따른 것이 상식이지만, 지금 우리 노동법이 그런지는 의문이다. 그밖에도 헌법에서 정한 인권과 괴리되는 법률도 많다.-사회 각 분야의 지도자급에서 독서를 제대로 하지 않고 그것이 사상의 빈곤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들이 자주 나오고 있다.△독서를 해야 사상이 풍부해지는데, 독서하지 않은 자들이 지도급이니 그 사회가 빈곤한 사상, 즉 무식에서 나오는 독선과 독주에 의해 흐려지고 있는 것이다. 지도급이 그 모양이니 대중들도 마찬가지로 책을 읽지 않아 무식하게 된다. 해결책은 모두들 독서를 해야 하는 것이다.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독서 버릇을 심어주는 교육을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교육은 입시용 수험 중심이니 평생 교과서나 참고서 외에는 독서를 하지 않는 인간을 기르고 있는 셈이다.-SNS로 소통하는 시대다. 그것이 즉흥적이고 피상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활자매체 시대 아날로그식과 비교해서 불편함이나 단점은 없나?△나는 SNS를 하지 않아 잘 모르지만,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깊이가 없고 단편적이라는 건 분명하다. 그러니 사고를 하지 않고 적당하게 베끼거나 흉내만 내고 있는 것이다. 소위 지도자급이 쓰는 석사나 박사의 학위논문까지 그 모양인 걸 잘 알지 않나? 이래서야 학문도, 사상도, 지성도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것을 해라’고 강조해 왔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이 먼저 마련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먹고 사는 문제부터 해결돼야 하는 것 아닌가.△물론이다. 먹고 사는 거야 기본이고 그것을 보장하는 사회 시스템이 갖추어져야 한다. 그런데 모두들 너무 잘 먹고 살아야 한다고, 모두들 벼락출세를 하고, 최고급 아파트에 외제 자가용을 굴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문제다. 나는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하면 ‘하고 싶은 것을 해라’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기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열심히 찾아가는 진지한 젊은이들이 많다고 본다.-지방대학을 나와 지방대학에 근무하면서 콤플렉스를 가졌던 적은 없나. 살면서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었나.△미국 대학에서 연구할 때도 그런 느낌을 가졌다. 서울 학회에 갔을 때 ‘아직도 그 학교에 있느냐?’고 이죽거리는 동료들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자신에게 콤플렉스를 주는 요인들을 잘 알고 그것들을 철저히 무시하고 경멸하며 이겨냈다. 서울 일류대학에 다니는 자들은 나보다 훌륭한 인간이 아니라 시험공부에만 열중한 속 좁은 인간들이라고 경멸하는 식이다. 그들을 숭배하거나 나 스스로를 멸시해서는 안 된다. 인간적으로 나는 더 훌륭하고 당당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우리 사회의 학연 혈연 지연이라는 인적 네트워크는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은 것 같다. 패거리문화의 폐해를 직접 경험하신 적이 있나.△엄청나게 자주 경험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사회의 선거만이 아니라 대학의 총장 선거 등에서도 경험했고….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너무 자주 겪고 있기도 하다. 심지어 일본에 있을 때도 국내의 지역주의를 일본에까지 끌고 와서 경상도 출신이라고 노골적으로 무시하기도 했다. 그것도 진보라는 청년 유학생들이. 또 언젠가 경북대학교에서 노동교육을 하는데, 지방 출신의 어떤 노동운동가가 뒤에 가서 노동자들에 반하는 정치를 하는 것에 대해 비판을 했더니, 한 사람이 일어나 ‘그 정치인이 당신의 고등학교 동창인데 그렇게 비판할 수 있느냐?’고 하더라. 이런 식으로 동창이면 무조건 지지해야 하고 선거에서도 찍어야 한다는 것이 문제다.-패거리 짓는 것을 싫어하고 인연을 중시하는 풍토를 비판한다. 그러면 학교나 학계에서 대표나 임원으로 활동하신 경력은 어떤 게 있나.△1990년대 후기에 민주주의법학연구회장을 하면서 전두환 노태우 재판에 앞장섰고, 2000년대 초기에 한국아나키즘학회 회장을 지내면서 아나키즘 연구를 했다. 최근 20여 년 간 한국과 일본의 노동법 학자들이 모인 한일노동법포럼의 한국 대표를 지냈다. -우리 사회는 교수를 지식인이자 기득권층으로 인식한다.△교수가 지식인인지는 모르겠지만 기껏 300∼400만원 월급쟁이인데 무슨 선택받은 기득권인가? 지금 내가 사는 시골 마을 앞뒷집에 군대 하사관으로 제대한 분이나 학교 직원으로 퇴직한 분들 등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다들 나보다 잘 살고 있다. 그런데 무슨 선택을 받았다는 말인가? 교수가 학문을 하는 사람이니 지식인 대접이야 받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 그게 무슨 명예인가? 나는 교수가 그렇게 잘 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도리어 평범한 시민이라고 강조하고 싶다,-지성인으로서, 대학교수로서 정치인과 재벌 등 기득권에 늘 비판적 시각을 견지해 왔다. 필요할 때는 필요한 목소리를 냈다고 생각하나. 지금 우리 사회에 충고를 한다면 어떤 말씀을 해 주실 수 있나.△글쎄, 필요할 때마다 글을 쓰거나 말을 할 기회가 반드시 많지 않았으니 항상 목소리를 내지는 못했다. 나는 지금 우리 사회가 제발 과도한 물질주의, 출세주의, 성장주의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이다. 먹고 살 정도만 있으면 된다. 내 주변을 보면 다들 잘 먹도 잘 살고 있다. 그런데도 욕심이 끝이 없어 보인다. 욕심을 버리라고 말하고 싶다. 그 대신 정신을 살찌우려고 노력해야 한다. 모두 돈 욕심만 부리니 기후변화도 오고 코로나도 오는 것이다. 그럼에도 반성을 하지 않는다. 정신 차려야 한다.-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정체성과 목표를 설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청년들에게 스스로의 경험을 살려 충고를 해 주신다면 어떤 말씀을 들려주고 싶나.△먹고 사는 것이 중요하지만 남보다 더 잘 먹고 살려고 하지 말고, 자기실현과 사회정의 실현에 더 충실하길 바란다.-우리 사회가 급격히 고령화하고 있다. 우리도 이제는 국민소득보다 행복을 이야기할 때가 되지 않았나.△노인들이 행복하려면 홀로서기 연습을 해야 한다. 40년 전 일본에 있을 때 마을마다 도서관이 있는 것이 부러웠다. 그 도서관이 문 열기 전부터 노인들이 줄서서 기다리다가 문 열면 들어가서 제각기 자기 공부를 하더라. 거기엔 시험 공부하는 중고생이나 대학생은 없더라. 우리도 노령사회를 맞아 노인들이 외로움을 견디고 이겨내는 자기만의 학습이 필요하다. 그런 것이 행복이 되어야 한다. /이경우 편집위원□박홍규(朴洪圭·70)영남대 명예교수(법학), 저술가.구미 출신, 경북고, 영남대 법대, 영남대 법학석사. 일본 오사카시립대 법학박사.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법학자로 모든 분야에 관심을 보였고 초기엔 헌법과 전공인 노동법 관련 저서를 쓰다가 20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철학과 문화 예술 관련 저술에 집중.‘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 수상(1997).노암 촘스키, 에리히 프롬, 반 고흐, 에드워드 사이드, 존 스튜어트 밀, 톨스토이, 이반 일리히, 조지 오웰, 간디, 카프카, 루쉰 등의 평전을 썼고, ‘내내 읽다가 늙었습니다’, ‘니체는 틀렸다’, ‘제우스는 죽었다’, ‘인문학의 거짓말’, ‘독서독인’,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 ‘독학자 반 고흐가 사랑한 책’, ‘메트로폴리탄 게릴라’, ‘플라톤 다시보기’, ‘반민주적인 너무나 반민주적인’ 등 저서를 썼다.패거리를 거부하고 정치권력과 결탁한 모든 문화 권력을 혐오하며 주류 사회로부터 자발적 따돌림에서 오는 고독을 즐기는 아웃사이더이자 진정한 자유인. 아나키스트. 지독한 엄격함이 때로는 오만함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2022-09-19

폭우 때마다 넘치는 냉천… ‘치수용 댐’ 건설 필요하다

‘치수(治水, flood control)’란 말 그대로 물을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고대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왕들에게 있어 ‘치수’란 나라를 책임지는 자로서 가져야 할 중요한 덕목 중 하나였다.이번 태풍 ‘힌남노’로 포항 곳곳에서 저지대를 중심으로 큰 피해가 발생했는데, 가장 큰 피해가 집중된 오천읍 일대의 침수 원인으로 냉천의 범람이 꼽힌다. 강의 범람이란 곧 ‘치수’에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냉천의 범람 원인으로는 상류의 홍수조절기능 부재와 정비 사업으로 인해 줄어든 강폭 등이 꼽힌다. 이러한 치수 실패를 계기로 지역에서는 결론적으로 ‘치수용 댐’의 역할과 필요성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 지리적 홍수 취약 도시, 포항포항은 대륙과 해양성 기후의 교차점에 위치해 지리적으로 홍수에 취약한 태생적 한계가 있는 도시다. 해마다 여름철 호우가 집중되는데 특히 남구 오천읍 신광천과 냉천이 홍수에 취약하다.냉천은 남구 오천읍 무장산을 좌측에 두고 진전리를 지나 오천으로 내려오고, 신광천은 운제산과 무장산 사이 오어사 앞 오어지에 모인 물이 흐르는 천이다. 신광천은 포항운전면허시험장을 거쳐 냉천으로 합류한다.냉천은 유로 연장 18.95㎞로 경사도는 1/82∼1/88이다. 태풍 내습 시 동해 해수면 상승과 배수불량 등의 문제가 있어 제방 범람 및 유실이 자주 일어나는 구조다.유로 연장 12.5㎞ 및 경사도 1/12∼1/59인 신광천 역시 길이가 짧고 상류 경사가 급해 단시간 내 많은 유량이 하천으로 유입되는 문제가 있다.이러한 문제점으로 냉천의 범람에 따른 피해는 집중호우가 발생할 때마다 일어났다.2012년 태풍 산바 및 집중호우 당시 오천읍에 644㎜의 강우가 내렸고, 농경지 153㏊ 침수 및 신광천 제방 30m 붕괴 등의 피해가 발생해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됐다. 2014년 집중호우로 포항지역 평균 167.9㎜의 강우가 내렸을 때에도 신광천의 제방은 또 붕괴했다. 2016년 태풍 차바 내습 당시에도 오천읍에 200㎜(200년 빈도)의 폭우가 내려 냉천이 범람하고 침수가 발생했다.이렇듯 오천읍이라는 대규모 시가지를 관류해 동해바다로 유입되는 신광천 및 냉천은 홍수로부터의 취약성을 여실없이 보여주고 있다. 대규모 홍수 피해 예방을 위해 유역 내 홍수조절능력 확충이 절실한 이유다. 더욱이 신광천이 합류하며 이어지는 하류지점은 대규모 도시지역으로, 인구가 밀집해 있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 진전지와 오어지의 치수능력 부족 유역 내 위치한 진전지(식수전용) 및 오어지(농업용)의 홍수조절 기능이 전혀 없다는 점도 밝혀져 충격이다. 진전지와 오어지는 각각 냉천과 신광천의 상류에 위치해 있다. 언제든지 위험에 노출될 우려가 있어 관계기관 간 유기적인 협의가 필요하나 오어지 홍수조절 기능이 없는 사실이 드러나 제대로 된 업무협조가 되는지도 의문으로 떠오르고 있다.냉천은 범람도 문제지만 그동안 가뭄에 있어서도 심각한 취약성을 보여왔다.따라서 진전지(식수전용)와 오어지(농업용)는 가뭄을 대비하는 역할에 더 무게가 실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실제 포항시 미급수 인구의 70% 이상이 남구 지역에 분포하고 있고 진전지가 식수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데, 진전지(180만t)만으로는 원수가 부족해 식수공급 중단 피해가 빈번하다. 이에 가뭄 발생 시 진전지 원수 부족으로 생활용수 제한 급수가 자주 발생했고, 물공급 안정성이 불확실한 오어지에서 비상 용수를 공급받기도 했다. 그러나 오어지 또한 원수 부족(50% 미만) 상태가 되면 물을 보내줄 수 없어 남구지역은 식수 공급 중단 사태가 늘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는 태풍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진전지는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고, 오어지도 지난 9월 3일 태풍을 대비해 방수문을 개방할 당시 저수율이 30%가 채 되지 않았던 점 등에서도 나타난다.우기에 편중된 강우 패턴으로 냉천 중·하류의 하천 건천화가 심각하다는 것 역시 짚어볼 점이다. 포항관측소 월별 평균 강우량은 최대 215㎜(7월), 최소 28㎜(12월)로 7.7배 이상 차이가 난다. 냉천 역시 태풍이 오기 전 물이 거의 메말라 바닥을 보였었다. 이렇듯 평·갈수기 냉천의 생태계는 파괴됐고, 하천 생태계 유지를 위한 하천유지유량 공급이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냉천 유역 특성상 타 유역에서 물을 가져와 유량을 확보하는 방안이 불가능해 신규 댐 건설을 통한 하천유지유량 확보가 필요했으나, 가뭄과 홍수를 조절할 기능을 모두 수행할 ‘항사댐’의 건설은 6년째 표류 중인 상황이다.임시방편으로 냉천 정비 사업을 포항시에서 추진했지만, 이마저도 재난을 막지 못했다. 오히려 일각에서는 냉천 정비 사업이 피해를 더욱 키웠다는 주장도 나온다.포항시에 따르면 시는 지난 2012년부터 2019년까지 취수의 안전성을 높이기 위해 ‘냉천 고향의 강 정비사업’을 진행했다. 이 사업으로 시는 예산 245억4천900만원을 투입해 포항시 남구 오천읍 진전저수지에서 동해면까지 8.24㎞ 구간의 하천을 재정비했다. 이후 포항시는 2020년까지 1.8㎞ 구간의 냉천 하류를 재정비했고, 산책로와 조경, 운동기구 등 조성작업을 목적으로 18억6천만원의 예산을 추가 투입한 것으로 조사됐다. 즉 취수 안정성과 더불어 ‘냉천을 시민을 위한 휴식공간으로 되돌리겠다’는 목표 아래 264억원이 넘는 예산을 투입해 공사를 진행했지만, 냉천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조경 사업은 오히려 냉천의 강폭을 좁게 해 이번 태풍에 의한 범람을 부추겼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하류로 갈수록 강폭을 넓히는 것이 하천 정비의 기본인데, 냉천 정비는 이와는 반대로 진행된 것이다. 그래서 향후 복구에 있어서 냉천 정비의 방향성이 원점부터 재검토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 항사댐 건설냉첨 범람의 해결책으로는 결국 ‘항사댐 건설을 한시바삐 완료해야 한다’에 방점이 찍힌다. 항사댐은 이강덕 시장이 처음 당선된 이후부터 적극적으로 추진해 왔으나 중앙정부에 발목이 잡혀 현 시점까지 계속 표류 중이다. 이 사업은 오어지 상류인 포항시 남구 오천읍 항사리에 유역면적 6.8㎢, 총저수량 476만㎥, 유효저수량 369만㎥, 저수면적 0.286㎢의 높이 50m·길이 140m의 댐을 건설하는 것이다. 항사댐이 건설되면 홍수조절용량 75만9천㎥, 용수공급량 283만㎥/년으로 홍수대비와 가뭄대처 기능을 모두 수행해 포항의 치수능력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항사댐은 2016년 10월 국토부 및 경북도의 ‘댐 희망지 신청제 시행’ 통보에 따라 포항시가 주민설명회에서 참석자 전원 찬성을 이끌어내며 2017년 3월 댐 희망지로 신청을 했다. 하지만 물관리 일원화를 위해 국토부에서 환경부로 업무가 이관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좀처럼 사업이 진척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항사댐이 건설되면, 75만9천㎥의 홍수조절용량 확보로 신광천 하구 도심지 홍수조절 능력이 확충돼 홍수에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또 200년 빈도 홍수량 기준 신광천 하구의 경우 최대 22% 저감(505㎥/s → 393㎥/s)이 가능해 이상기후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비상용수 확보로 가뭄에 대응하기도 한결 수월해진다. 연 144만㎥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어 오천·동해·장기 주민의 생활용수 불안감을 크게 해소할 수 있다. 안정적 하천유지유량 공급으로 하천 생태복원 및 수질개선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은 덤이다.‘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이 있다. 항사댐 건설이 미뤄지면서 소는 소대로 계속 잃고 외양간은 외양간대로 내버려두는 상황의 반복이다.이번에 포항은 태풍 힌남노로 엄청난 데미지를 입었다.또 다른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모든 역량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다. 현 시점에서 항사댐 건설은 그 대책의 정점에 있다. /전준혁기자 jhjeon@kbmaeil.com

2022-09-18

‘슬픈 근대’의 역사가 남아 있는 동해안의 대표 항구

꾸덕꾸덕 익어가는 생선이 있다. 과메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과메기는 겨울 해풍을 맞으며 얼었다 녹았다 반복하며 쫀득쫀득한 맛을 내는 포항의 대표적인 먹을거리다. 과메기의 주산지(主産地)는 동해안의 대표적인 어업 전진기지 구룡포다. 찬바람이 불면 구룡포는 과메기의 나라가 된다. 구룡포는 과메기뿐만 아니라 숱한 이야기가 익어가는 곳이다. 구룡포는 분주한 항구다. 크고 작은 어선이 수시로 물길을 가르며 포구로 드나든다. 어판장에는 오전 5시 30분 무렵이면 선어(鮮魚)를 가득 실은 트럭이 들어오고, 빨간 모자를 쓴 경매사와 경매인들로 북적거린다. 6시가 되면 경매사가 종을 울리며 경매가 시작된다. 딸랑딸랑 울리는 종소리는 구룡포의 아침을 흔들어 깨우는 소리다.구룡포는 근래 텔레비전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면서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주말이나 피서철에 구룡포의 도로는 전국에서 몰려온 차량으로 붐빈다. 구룡포는 왜 이렇게 주목을 받으며 찾아오는 사람이 많을까?구룡포에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구룡포의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 구룡포에는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인돌이 있고, 1400년 전에 군마(軍馬)를 키우던 국영 목장이 있었으며, 고려시대에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이 있었다. 이런 기록을 볼 때 구룡포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고,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군사적인 거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로는 눈에 띄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이웃한 장기(長9B10)가 조선의 대표적인 유배지임을 감안한다면 바람 센 동해안 마을에 특별한 역사적 사건이 있을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이다. 19세기 말까지 구룡포는 한적한 어촌이었을 뿐이다.하지만 한반도를 향한 일본의 침탈이 노골화되면서 구룡포의 운명은 바뀐다. 구룡포 주변의 풍부한 어자원과 포구로서의 좋은 입지 조건이 문제였다. 세상 어디나 자원이 풍부하고 교통이 좋은 곳은 침탈의 대상이 되기 쉬운데 구룡포도 그러했다. 일본은 1889년 조일통어장정(朝日通漁章程)을 체결해 경상·전라·강원·함경의 4도 해역에서 어업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사전 조사를 통해 구룡포 근해에 굉장한 어자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구룡포에 조성된 일본인 이주어촌요시다 게이치(吉田敬市)라는 일본 학자가 조선총독부 수산과의 의뢰를 받아 1954년에 ‘조선수산개발사’라는 책을 냈다. 원래 1942년에 의뢰받았는데 일본이 패망하면서 조사, 연구가 힘들어져 1954년에 발간되었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조선의 수산 분야를 어떻게 ‘개발’했는지 서술하고 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개발’이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명백히 ‘수탈’이었다. 2019년에 번역해 출간된 이 책을 펼쳐보면 포항과 구룡포에 일본인들이 언제 어떻게 들어와서 무엇을 했는지 간략하게나마 알 수 있다.구룡포 앞바다에 일본 어선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1902년이다. 야마구치현(山口縣) 도요라군(豊浦郡)의 어선 50여 척이 도미를 잡으려고 온 것이다. 4년 후 1906년에는 가가와현(香川縣)의 어선 80척이 고등어를 잡기 위해 출현했고, 고등어 성어기가 되자 어선과 운반선 2천여 척이 몰려왔다. 구룡포 앞바다를 일본 어선이 뒤덮은 것이다. 이에 편승하여 슬금슬금 구룡포에 자리잡은 일본인 이주자는 1933년에 220호가 되었다. 이후 정어리 어업이 성행하면서 구룡포는 그 중심지가 되었다(요시다 게이치 저, 박호원·김수희 역, ‘조선수산개발사’, 민속원, 2019, 621쪽 참조).일본은 조선 침략의 첨병 역할을 하고 조선 어민을 동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포항과 구룡포 등 한반도 연안 곳곳에 이주어촌을 조성했다. 구룡포에는 세토(瀨戶) 내해에 인접한 가가와현 사람들이 다수 이주했다. 그 이유는 해양생태 조건이 세토 내해와 비슷해 같은 어구와 어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 고려 때부터 약탈을 일삼았던 지역이라 낯익은 바다라는 점, 부산을 거쳐 시모노세키를 지나 자신들의 고향으로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이라는 점 때문이다(김준, ‘김준의 어촌정담- 구룡포가 꿈틀댄다’, ‘현대해양’, 2021. 3. 15. 참조).일본인들이 몰고 온 변화의 바람은 구룡포에 큰 충격을 던졌다. 항구를 만들자 더 많은 어선이 몰려왔고 도로가 건설되었으며, 상가와 주거지, 공원이 조성되었다. 20세기 초엽은 구룡포 역사에서 충격이자 분기점인 셈이다. 방파제 완공되면서 일본인들의 ‘엘도라도’ 돼구룡포에서 전망이 가장 좋은 곳은 구룡포공원이다. 계단을 따라 공원에 올라가면 구룡포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에 큰 비석 하나가 서 있지만 비문을 읽을 수는 없다. 누군가 비문에 시멘트를 덧칠한 것이다. 이 미묘한 비석에 구룡포의 ‘슬픈 근대’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비석의 주인공은 도가와 야사브로(十河 彌三郞)라는 인물이다. 1908년 구룡포로 온 도가와는 총독부를 설득해 구룡포 항구 건설을 주도했고 구룡포어업조합을 창립했다. 한마디로 구룡포 개발을 주도한 인물이다. 구룡포항의 핵심 시설인 방파제는 1926년에 180미터가 완공되었지만 태풍으로 파손되어 1935년에 복구되었다. 현재 방파제가 시작되는 지점에는 1935년 3월에 세워진 ‘구룡포항 확축(擴築) 공사 준공비’가 있다.도가와는 해산물 운송로를 확보하려고 구룡포에서 포항으로 가는 도로를 닦았다. 항만과 도로가 만들어지면서 구룡포는 일본인들에게 ‘엘도라도’가 되었다. 구룡포의 이주 일본인들은 도가와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일본에서 규화목(硅化木)을 가져와 1944년에 송덕비를 세웠다. 자신들의 나라가 곧 패망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처사였다. 결국 이 비석은 우리에게 수탈과 치욕의 상징이 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해방된 나라에 이 비석을 그대로 둘 수 없었던 대한청년단원들이 비문에 시멘트를 쏟아부었다.관광객으로 붐비는 구룡포공원과 근대문화역사거리(일본인 가옥거리)는 구룡포가 일본인들의 이주어촌이 되면서 조성된 공간이다. 구룡포공원은 원래 일본인들의 신사(神社)가 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 ‘종로거리’ 혹은 ‘선창가’라 불린 근대문화역사거리에는 상점, 요리점, 여관, 병원 등이 즐비했다. 포항 원도심에도 일본인들의 거주지가 있었지만 전쟁과 도시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반면에 구룡포는 전쟁의 참화를 비켜가고 개발 과정에서도 소외되면서 일본인 거주지의 형태가 웬만큼 남게 되었다. 그리고 포항시가 이를 보수하고 정비해 역사체험공간으로 조성하면서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의 촬영지로 인기를 끌고 있다.이 거리에 있는 구룡포 근대역사관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이 역사관은 가가와현 출신으로 구룡포에서 큰 부를 일군 하시모토 젠기치(橋本善吉)의 이층 목조 살림집이다. 하시모토는 1909년 구룡포로 이주해 다섯 척의 선박을 운영하면서 선어 운반업, 대부업, 유비(油肥) 공장, 담배점, 철공소 등을 문어발식으로 경영해 큰돈을 벌었다. 이 집을 짓기 위해 일본에서 건축자재를 갖고 왔을 정도다. 남의 나라에 와서 어자원을 수탈해 유세를 떨쳤던 일본 부자가 어떻게 살았는지, 이 집을 통해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구룡포와 포항을 연결하는 철도 건설을 일본이 구상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구룡포와 포항의 거리는 약 20킬로미터다. 당시 일본의 기세를 고려한다면 개연성이 충분하다.일본은 부산에서 포항까지 연결하는 동해남부선을 1935년에 완공했고, 동해중부선을 건설하기 위해 교각을 설치하고 굴을 뚫는 등 상당한 준비를 하는 도중에 패망했다. 물론 그 구상이 물거품이 되고 일본인들이 이 땅에서 물러난 것은 핍박받던 구룡포 사람들에게 큰 다행이라 하겠다.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

2022-09-18

자연과 문화 어우러진 신도시… 동그라미 길 위에 행복이

세종시는 행정중심복합도시라는 이미지가 강해서인지 도시 곳곳에 매력적인 관광지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지난 3월에 개통한 독특한 모양의 금강보행교를 비롯해 국내 최초의 도심형 식물원인 국립세종수목원, 식물원과 동물원이 함께 있는 베어트리파크까지 볼거리가 가득하다. 가을의 문턱에서 도심 속에서 힐링을 느낄 수 있는 세종으로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세종의 상징이 된 금강보행교세종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국내 최장 보행교인 ‘금강보행교’가 3년의 공사 끝에 지난 3월에 개통됐다. 금강보행교는 원형의 다리가 한글 ‘ㅇ’의 모양과 닮아서 ‘이응다리’라고 이름을 붙였다. 세종대왕의 한글 반포 1446년을 기념해 교량의 길이도 1천446m로 제작했다. 다리 위에도 ‘뿌리깊은 나무’를 테마로 조성한 조형물, 한글 열매가 달린 나무 조형물 등 세종대왕 업적과 관련된 여러 조형물을 설치했다. 금강보행교는 ‘2022년 올해의 토목구조물’ 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금강보행교는 복층 구조인데 1층은 자전거 전용, 2층이 보행자 전용이다. 보행자 전용 다리는 폭이 12m나 된다. 무리 지어 걸어도 넉넉하다는 얘기다. 사람들은 여기서 강바람을 맞으며 산책하고 1층으로 내려가 자전거도 탄다. 자전거는 쉽게 구할 수 있다. 주변에 배치된 공공자전거 ‘어울링’을 이용하면 된다.다리 주변에는 물놀이시설, 낙하분수, 익스트림 경기장 등이 들어서 있다. 증강현실 기술을 이용해 현실 이미지나 배경에 가상의 이미지를 추가해 보여주는 ‘가상현실 기술 AR망원경’도 설치했다. 다리 중간에 있는 흰색의 인공나무는 금강보행교의 포토존으로 인기가 높다. ‘빛의 시소’, ‘숲속 작은 연주회’, ‘뿌리깊은 나무’, ‘눈꽃 정원’, ‘빛의 해먹’같은 조형물도 눈을 즐겁게 만든다. 보행교 북측에는 높이 15m의 전망대와 클라이밍 체험시설, 익스트림 경기장이 설치돼 있다. 금강보행교는 해가 지면 가장 빛난다. 해 질 무렵이면 경관조명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하고, 깜깜한 밤이 되면 오색조명 빛의 축제가 시작된다. 금강보행교는 매일 오전 6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이용할 수 있다. 심야와 새벽 시간대는 안전사고 등을 막기 위해 이용을 금지하고 있다. 일몰 이후부터 밤 11시까지는 금강보행교 야경을 볼 수 있다. 도시의 불빛과 금강을 비추는 빛이 어우러진 또 다른 볼거리다.인스타그램 등에 노출되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자 한국관광공사 세종충북지사는 이 다리를 강소형 잠재관광지로 선정했다. 덜 알려졌지만 인기 관광지가 될 공산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사계절 온실 갖춘 국립세종수목원2020년 문을 연 국립세종수목원도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다. 국내 최초의 도심형 수목원인 국립세종수목원은 축구장 90개 규모(65㏊)에 사계절 온실을 갖추고 있다.국립세종수목원에서는 2천453종 161만 그루의 식물을 관람할 수 있다. 핵심 볼거리는 국내 최대 유리온실인 ‘사계절 전시 온실’이다. 꽃잎 세 장이 달린 붓꽃 모양으로 지어진 사계절 열대온실은 꽃잎 한 장마다 열대온실, 지중해온실, 특별전시온실이 자리한다. 동선에 따라 지중해온실로 먼저 발길을 옮겼다. 32m 높이의 전망대가 있는 지중해식물 전시원에는 물병나무, 올리브, 대추야자, 부겐빌레아 등 228종 1천960그루의 식물이 심어져 있다. 지중해온실에서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소설 ‘어린 왕자’에 나오는 바오밥나무. 아프리카 섬나라 마다가스카르에서 봤던 것처럼 우람하지 않다. 작고 연약한 모습이 ‘어린 왕자’ 속 바오밥나무와 더 가까운 것 같다. 지중해온실 한쪽에 있는 올레미소나무도 이채롭다. 올레미소나무는 중생대 백악기까지 살다가 멸종된 줄 알았으나 1994년 호주에서 발견돼 세상을 놀라게 했다. 공룡시대부터 살았던 올레미소나무에서 최근 화사한 꽃이 피었다. 꽃을 보니 수억 년 전의 시간과 조우한 느낌이다. 지중해온실 한가운데는 스페인 알람브라궁전 모양을 한 정원이 인증샷 명소로 자리 잡았다. 관람객들의 발길을 붙잡는 빨간색 부겐빌레아도 지중해온실에서 꼭 봐야 할 수목이다. 빨갛게 물든 건 꽃이 아니라 잎이다. 작고 수수한 꽃 대신 화려한 잎으로 벌과 나비를 유인하도록 진화한 것이다.열대온실에 들어서니 후끈한 열기가 느껴진다. 5.5m 높이의 관람자 데크 길을 따라가면 나무고사리, 알스토니아, 보리수나무 등 437종 6천724그루의 열대 식물을 볼 수 있다.열대온실을 둘러보며 알게 된 것은 우리가 즐겨 먹는 열대과일이 흔히 알고 있는 상식과 다르다는 사실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재배되는 과일 중 하나인 바나나는 나무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해살이풀에서 자라는 열매다. 다이어트 식품으로 각광 받는 아보카도는 인간이 아니었으면 멸종했을지도 모르는 식물이라고 한다. 아보카도 열매를 통째로 삼켜 씨를 퍼뜨려주던 매머드 같은 대형 초식동물이 멸종하면서 아보카도 역시 멸종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우연히 아보카도를 먹은 인간이 그 맛에 매료돼 대량 재배하면서 멸종을 면하게 된 것이다.열대온실은 특히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많다. 화려한 식물이 많기도 하지만 벌레를 잡아먹는 식충식물을 볼 수 있어서다. 파리지옥을 비롯해 끈끈이주걱, 사라세니아 등 여러 종의 식충식물이 전시돼 있다. △역사적 이야기 숨은 후계목정원 이채열대지방 휴양지마다 피어 있는 야자수도 종류가 다양하다. 베트남, 중국의 우거진 숲에 자생하는 생선꼬리야자는 마치 물고기 꼬리처럼 가지가 갈라지고 뾰족한 것이 특징이다. 인도네시아 전통주택 재료로 사용되는 락카야자는 줄기와 잎자루가 립스틱처럼 붉은색을 띠고 있어 ‘립스틱 야자’라는 별명이 붙었다.열대온실엔 국내에선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식물도 자란다. 강렬한 노란색 꽃이 아름다운 황금연꽃바나나와 하와이무궁화 종이 모여 있는 곳에는 빨간 산호히비스커스 꽃이 피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향수 샤넬 넘버5를 만드는데 사용하는 일랑일랑도 꼭 찾아봐야 할 식물이다. 일랑일랑은 필리핀 고유 언어인 타갈로그어로 ‘꽃 중의 꽃’을 의미한다.후계목정원도 이채롭다. 정이품송 2대 자손목을 비롯해 역사적으로 유명한 나무의 자식이나 손자뻘 나무들을 옮겨놓은 곳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뉴턴의 사과나무 후계목이다. 1665년 아이작 뉴턴은 영국 켄싱턴의 집 뜰에 앉아 있다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했다. 뉴턴의 사후 전 세계 대학과 식물원 연구센터의 요청에 따라 이 사과나무의 후손이 만들어졌고 여러 나라에 퍼져나갔다. 국립세종수목원에 있는 뉴턴의 사과나무는 3대손이다. 뉴턴 사과나무의 증손자인 셈이다. 같이 가볼 만한 곳△수목원과 동물원이 같이 있는 베어트리파크베어트리파크도 재미있는 산책공간이다. 국립세종수목원에서 자동차로 약 30분 거리에 있다.베어트리파크는 수목원이지만 이름처럼 반달곰과 여러 동물들을 함께 구경할 수 있다. 수목원이자 동물원인 셈이다.파크 안에서 반달곰이 뛰어놀기도 한다. 꽃사슴동산도 있다. 들머리의 연못에는 비단잉어가 물살을 헤치고 다닌다. 나무만 있는 수목원보다 분위기가 활기차다.베어트리파크에 자생하는 꽃과 나무는 1천여 종, 40만 점이 넘는다. 5개의 잎을 가진 오엽송 소나무, 크리스마스트리로 잘 알려진 독일 가문비나무 등 흥미로운 나무들이 수두룩하다. 산수화에서 볼법한 풍경을 축소한 듯 조경을 한 ‘만경비원’도 볼 만하다.호접란, 열대나무, 괴목, 고무나무 분재 등이 전시돼 있다.베어트리정원은 좌우대칭 구조의 입체적 조형미가 아름답고, 향나무와 소나무로 둘러싸여 포근한 느낌이 든다.하계정원은 꼭 봐야 한다. 주황색 문을 열면 태고의 풍경이 펼쳐진다. 죽은 향나무를 타고 오르는 능소화 넝쿨들이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최병일 작가

2022-09-15

내 생에 잊을 수 없는 상륙작전

해병대 창설 초기였던 1949년과 6·25전쟁 시기에는 해병대를 포함한 한국 군인들에게 변변한 무기 하나 없었다. 젊은 열정과 청년의 애국심이 가장 큰 무기였다. 그럼에도 해병대 1기생과 2기생들은 누구보다 용감하게 전투에 나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다. 미국 해병대와 함께한 인천상륙작전에서도 미군 못지않은 용맹스러움을 발휘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한 이봉식 선생은 함상에서 유엔군을 지휘하는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을 가까이에서 직접 보기도 했다고 한다. 홍 : 후배인 해병대 2기는 언제 입대했는지요?이 : 내가 입대한 뒤 3개월 보름 후 2기 450명을 뽑았어. 해군에 가입대(假入隊)한 인원 중에서 가려낸 것이지. 3개 중대 규모였어. 그러고 나니 해병대는 1기와 2기를 합쳐 750명 정도 되었지. 우리가 훈련과 교육을 마치고 수료식을 할 때는 해군에서 군복을 제공했어. 해군 세라복과 모자를 썼지. 수료식 후에는 진해 시내로 나가 아주 잠깐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홍 : 해병대 1기생들의 훈련 이후는 어땠습니까?이 : 훈련을 마친 후에는 사회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곧 전투에 나가야 했어. 우리가 “교육을 마치자마자 전투에 나갑니까”라고 물으니 “빨치산 1개 중대가 지리산에서 밤마다 파출소와 형무소를 습격하니까 너희가 가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어. 그때부터 해병대의 전투가 시작된 거지. 1949년 9~10월 사이에 2개 중대가 진주로 이동해 지리산에서 빨치산과 싸웠어. 지리산이 얼마나 험한 산이야. 어느 파출소가 약탈당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바로 거기로 출동해 전투를 하는 거야. 그게 12월까지 이어졌는데 3명 정도 전사했지. 그 뒤에는 해병대 1기와 2기생이 5개 중대로 편성돼 750명이 되었는데, 여기에 분대장, 소대장, 조교, 사령부 요원을 더해 1천여 명이 1949년 12월에 상륙선을 타고 진해에서 제주도로 갔어.홍 : 1기생과 2기생 사이에도 군기가 있었는지요?이 : 당연히 있어. 지금도 겨우 4개월 후배지만 2기생이 1기생에게 꼭 예의를 갖춰 대하지.홍 : 제주도에서는 어떤 일을 했는지요?이 : 사령부는 시내에 있었고 우리는 모슬포에 있었어. 낮에는 교육받고 수색할 곳이 있으면 한라산 큰 숲이 우거진 곳을 찾아 상황을 살피고 전투를 했어. 그때 제주도의 겨울이 얼마나 추웠는지 몰라.홍 : 전쟁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겠습니다.이 : 1950년 봄까지 제주도에 있었어. 그런데 여름 어느 날 전쟁이 터졌다는 거야. 사령부의 상관들이 “북한에서 인민군이 쳐들어왔다”고 하더니 며칠 후에는 “서울을 빼앗겼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 우리는 현장에 있던 사병들이니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었지. 그런데 “인민군이 수원까지 내려왔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정보는 들을 수 있었어. 국군과 인민군의 전투가 부산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도 이후에 알게 됐지.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어진 거라고 생각했어. 이제는 죽기 살기로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다짐뿐이었지.홍 : 또 어떤 이야기를 들었습니까?이 : 중대장과 대대장 등은 “전투 지역이 낙동강까지 내려왔다”, “대구와 포항을 기점으로 낙동강 전선이 확대되었다”, “부산을 뺐기면 제주도밖에 남지 않으니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한다”고 했어. 그때 인천상륙작전 얘기를 들었어. 이 전쟁에서 이기려면 한반도의 허리를 쳐서 남한으로 내려온 인민군을 막아야 한다고 했지. 안 그러면 북한에 진다는 거야. 내가 속한 해병대가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었어. 작전은 미국 해병대가 주력이 되지만, 한국 해병대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지.홍 : 인천상륙작전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요.이 : 그렇지. 한국 군대에 군함이 있나, 제대로 된 무기가 있나. 아무것도 없었어. 지급받은 총도 낡은 M1과 카빈 소총이 전부였으니. 하지만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잖아. 기존의 해병에다가 제주에서 뽑은 청년들로 1개 연대를 편성했지. 그때 군사훈련 경험이 있는 해병대 1기와 2기생이 분대장으로 선발되었어. 1950년 여름에 제주도에서 3기생 2천 명과 4기생 1천 명을 뽑았지. 대부분 제주 사람들이었고, 50~60명가량은 포항 사람이었어. 1개 연대를 만들어야 미 해군과 합동 상륙작전을 할 수 있으니 짧은 기간에 많은 군인을 뽑은 거야. 사실 3기생 가운데는 무학력자도 많았어. 17~18세 학도병들을 선발하기도 했고. 그런 3, 4기생들을 우리가 맡아 교육했지. 상부에서는 그들에게 해병대 정신을 심어주라고, 강한 군인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재촉했어. 사실 제주도 출신 해병들이 없었다면 인천상륙작전에 한국 해병대가 참전하지 못했을 거야. 홍 : 해병대는 통영상륙작전에도 참여했다고 들었습니다만.이 :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부대 편성을 하는 와중에 북한 인민군이 통영으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졌어. 통영을 뺏기면 부산까지 위험했지. 그래서 해병대 1기생 100여 명이 통영상륙작전에 투입되었어. 나도 거기에 갔지. 해병 250명 정도가 통영으로 갔어. 그런 와중에 나는 3, 4기생 교육 임무를 맡아 제주로 돌아왔어. 지금도 기억나는군. 당시 나는 해병대 제1연대 3대대 10중대 1소대 1분대장이었어. 3기생과 4기생을 20일 동안 교육했지. 각 소대에 총이 겨우 1정씩만 보급되던 어려운 시절이었어. 미군들이 사용하던 것이라 옷도 크고, 신발도 크고. 그래도 어떡하겠나? 줄일 것은 줄여서 사용했지.‘해병대 50년사’는 통영상륙작전을 “낙동강 방어선에서 교착 상태에 빠진 북한군 제7사단이 거제도를 점령하고 전략 요충지 마산과 진해를 해상에서 봉쇄하기 위해 통영에 침입하자, 해병대 김성은 부대는 1950년 8월 17일 일곱 척의 해군 함정 지원 아래 장평리 해안에 한국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을 감행해 이틀 만에 전술 요충지 통영을 탈환한 후, 원문고개에서 적의 집요한 공격을 격퇴하고 이 지역을 방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홍 : 인천상륙작전에 직접 참여했다고 들었습니다.이 : 1950년 9월 15일 인천에 상륙했어. 미군의 지원이 컸지. 미군은 1개 사단이고 한국은 1개 연대로 구성한 부대가 움직였어. 그렇게 합쳐서 인천 항구로 들어갔지. 보급품을 받았는데 처음 보는 음식이 많았어. 어떻게 먹는지를 몰라서 끙끙대던 생각이 나는군. 제주도에서 상륙함정을 타고 그해 9월 10일쯤 부산항 4부두에 내렸어. 그다음에야 우리가 인천으로 간다는 걸 알게 되었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해병들은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전투에 임했어. 장비를 싣고 부산항을 떠나 인천으로 가는 미군 배에 올랐지. 사나흘 걸려 인천에 도착해 미군과 합류했어.홍 : 그때 상황을 좀 더 상세하게 말해주시죠.이 : 인천상륙작전 3~4일 전부터 서해에서 인천을 향해 포를 쏘고 비행기가 폭격을 했어. 순양함과 수송함 등 군함 260척이 모였지. 어느 순간 그것들이 다 도착하고 나서는 더 이상 군함의 이동이 없었어. 우리가 인천에 도착하고 하루쯤 지났을까? 우리가 타고 있는 배에서 200미터가량 떨어진 곳에 정박한 군함에 맥아더 장군이 승선해 있는 게 보였어. 대량의 함포를 쏘고 상륙 지점으로 폭격이 떨어지던 시점이었지. 한국 해병대 1~4기 대부분이 거기 모여 있었어. 어찌 보면 대단한 장관이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은 참 자랑스러운 일이야. 내 생에서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지. 전 세계 전쟁사에서 인천상륙작전만큼 경이로운 작전이 없었다고 하잖아. 그만큼 어려운 작전이었어.홍: 인천상륙작전 당일은 어땠나요?이: 작전 당일 오후 5시에 상륙하라는 상부의 지시가 내려왔어. 한국 해병대 제1진 3대대 1열과 미 해병대가 함께 육지로 올라갔어. 뒤이어 군인들을 실은 배가 부둣가에 부대를 내려놓고 다시 돌아가 군인들을 싣고 오는 방식의 상륙작전이 시작되었어. 우리 부대는 인천 월미도 앞에서 분대가 산개해 방공호를 파고, 밤 9시쯤에 전투식량을 먹었던 기억이 나.대담·정리 : 홍성식기자 / 사진 출처 : 해병대사령부‘사진으로 본 해병대 50년사(1949∼1999)’

2022-09-14

“3년 만에 ‘대면축제’로 귀환 ‘문경오미자축제’서 만나요”

문경오미자가 세계 최고로 꼽히는 이유는 크게 네 가지다.생산자협회를 중심으로 한 청정제품 생산과 우수한 기술연구 시스템, 가공산업에 대한 당국의 지원, 업체들의 자생력이 그것이다.오미자생산자협회는 친환경 오미자를 생산하기 위해 뭉친 생산자 단체로 오미자 가공제품에 질 높은 원료를 공급하는 주역이다.문경의 오미자연구기반은 당연히 다른 지역에서는 쫓아올 수 없는 수준으로 친환경미생물센터, 토양검정실, 오미자연구소, 친환경오미자대학 등 다양하게 운영된다.특히, 문경시농업기술센터가 운영하는 가공지원센터나 향토음식학교는 새로운 오미자 음식 개발과 가공제품의 테스트 등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실제적으로 문경오미자 가공산업의 산파역을 한 곳이다.문경오미자축제가 오는 16일부터 18일까지 3일간 동로면 금천둔치에서 개최된다. 국내 유일 오미자특구 도시, 전국 일등 오미자의 고장, 문경시의 대표 농산물 축제인 문경오미자축제가 3년 만에 현장에서 대면축제로 개최된다.문경오미자축제추진위원회(위원장 이덕재)는 지난 8월 25일 호계면 문경로컬푸드문화센터 2층 회의실에서 축제추진위원 등 2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2022년 문경오미자축제 추진위원회를 개최했다.추진위원회는 올해로 18회를 맞은 문경오미자축제를 오미자 집중출하시기인 오는 9월 16일부터 18일까지 3일간 동로면 금천둔치(동로면 적성리 525-11번지 일원)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다섯가지 맛의 비밀, 문경 오미자!’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축제에서는 시중가격 1만 2천원/kg의 생오미자를 축제장에서 약 9% 저렴한 가격인 1만 1천원/kg에 특별 할인판매 한다.또한, 오미자 농·특산물 직거래장터, 오미자파우치 나눔 행사, 오미자청 담금 체험 등 풍성한 전시, 체험 행사 등을 중점적으로 준비 중에 있다.문경오미자 전시홍보관과 오미자 미각체험관에서는 오미자를 재료로 만든 다양한 가공품과 요리를 체험할 수 있다.아울러 최근 미스터 트롯으로 인기를 끌었던 정동원, 남승민과 전국 노래자랑 인기 초청가수 최석준 등 유명가수들을 초청해 수준 높은 공연을 구성해 축제장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킬 전망이다. “농가와 참여자 모두가 만족하는 축제 만들 것”▒ 신현국 문경시장 인터뷰-오미자 축제 개최 소감은?△지난 시간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비대면 축제로 진행됐던 문경오미자 축제가 3년만에 온전한 대면축제로 개최됩니다. ‘다섯가지 맛의 비밀, 문경오미자!’라는 상징성있는 주제어로 다양한 체험행사와 판매행사, 그리고 공연행사가 함께 어우러져 진행됩니다.신맛, 단맛, 매운맛, 쓴맛, 짠맛 5가지 맛을 모두 갖고 있는 ‘오미자’는 동의보감을 비롯한 옛 문헌에서 면역력과 원기를 북돋아주고 기관지와 시력강화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지난 1990년대부터 백두대간에서 자생하고 있던 야생 오미자의 시범 재배가 성공을 거두며 급속한 성장을 일궈온 ‘문경오미자’는 현재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대표 오미자로 자리잡고 있습니다.-문경 오미자의 현황은 어떤가?2000년대 들어 ‘문경시농업현대화사업’과 ‘문경오미자클러스터 구축사업’을 통해 본격 육성되었고, 지난 2006년 ‘문경오미자산업특구’로 지정되어 연구기반시설인 ‘문경오미자 연구소’와 관광객들을 위한 ‘문경오미자테마공원’이 상시 운영되고 있습니다.무엇보다도 ‘문경오미자’는 오미자 농가(생산자 조직)와 문경시(지자체), 가공업체(기업체)를 주축으로 하여 생산·가공·판매의 안정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세계 최초로 오미자를 이용한 가공식품 및 관련 제품들을 생산하면서 오미자 차, 오미자 원액, 오미자 즙, 오미자 청, 오미자 김, 오미자 막걸리, 오미자 와인, 화장품 등 다양한 형태로 판매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오미자 음료의 세계화라는 주제로 ‘FOODEX JAPAN 2018’의 참가로 수출시장 개척, 오미자 와인의 평창올림픽의 공식 만찬주 선정, ‘스타벅스’와의 콜라보 오미자 음료 출시등 판매 사업다각화로 보다 쉽게 우리 주변에서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저를 비롯한 축제 구성원 모두가 설렌 마음으로 막바지 축제 준비 중입니다. 오미자 본산지, 문경시 동로면의 맑은 가을 날씨 아래 개최되는 ‘문경 오미자 축제’를 많은 분들이 방문하여 다양한 오미자의 변신을 직접 확인하고 맛보고 즐기는 시간을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이번 축제의 특징과 추후 축제 운영 방향은?△제가 시정운영을 위해 세운 다섯 가지 원칙(긍정, 실용, 친절, 스마일, 소통)에 따라 ‘축제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투자’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농가와 참여자 모두가 만족하는 축제를 기획하였습니다.오미자 주산지이자 국내 유일 오미자 특구도시인만큼 크고 작은 기획 모두가 ‘문경 오미자’의 위상에 맞게 전국 최고, 최대 규모로 열리게 되며, 특히 행사를 빛내줄 축하공연도 인기프로그램 출신의 대형가수를 섭외하여 전보다 훨씬 많은 분들이 축제를 찾아오실 것으로 예상됩니다.코로나19에 따른 경기 불황과 물가상승으로 모두가 어려운 와중에도 ‘문경 오미자’의 본연의 강점을 적극 활용하고 체험·판매행사의 완성도를 높여 성공적인 축제로 평가 받을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하였으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추후 우리시에서 개최하는 가을 축제(사과, 한우) 또한, 최고를 지향하며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는 기회로 만들어 문경의 경제활성화와 새로운 성장 동력원을 구축하는데 앞장 설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문경/강남진기자75kangnj@kbmaeil.com

2022-09-13

성큼 다가선 가을, 책과 함께 고요한 사색 속으로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명절에 식구들 만나기도 어려웠던 지난해와 지지난해.다행히 ‘사회적 거리두기’가 대폭 완화된 올해 한가위엔 2년 넘는 시간 동안 소원했던 친척들이 얼굴을 마주하고 그간의 소식들을 전하며 정담을 나눴다.명절을 앞두고 포항 등 경북 일대를 덮친 태풍이 많은 수의 사상자를 내고, 재산 피해도 컸다는 건 안타까운 소식이다.온전히 추석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 이재민들에겐 앞으로도 위로와 온정의 손길이 필요할 듯하다.인간의 삶에서 수난과 고통이 없을 수는 없다. 다만, 어떤 고난도 함께 헤쳐 나가고자 하는 연민과 나눔의 마음이 있다면 극복이 불가능하지 않을 터.어쨌건 중단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시 가을이 왔다. 책을 읽는데 시간과 공간을 따지는 건 무의미하지만, 푸른 하늘이 높아지고 아침과 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기시작하는 9월 중순은 그 어느 때보다 독서하기 좋은 시절. 아래 소개하는 3권의 책을 친구 삼아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을 맞이하길 권한다. 소설가 김별아 소설가 김별아와 경주 월성 산책 어때요?소설 ‘미실’로 제1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했고, 조선 여성 3부작으로 불리는 ‘채홍’ ‘불의 꽃’ ‘어우동, 사랑으로 죽다’ 등을 발표하며 문단 안팎의 주목을 받은 김별아가 신간을 출간했다. ‘월성을 걷는 시간’.책엔 오랜 시간 계획을 세워 경주 월성 일대를 직접 돌아본 김별아가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월성을 포함한 신라 역사 이야기가 실렸다. 여기에 현재 경주에서 살아가는 이들과의 만남도 담아냈다.소설가 김별아는 경주의 진면목을 찾기 위해 지난 2019년부터 최근까지 경주 월성과 주변 지역을 여러 차례 답사했고, 서라벌을 근거지로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산문집 ‘월성을 걷는 시간’의 일부 내용은 ‘경북매일’에 연재되기도 했는데, 이번 책은 그 내용을 보완하고, 추가적인 취재를 통해 보다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더했다.책에선 ‘조심스레 얼굴을 드러내는 역사의 속살’이라는 부제를 단 월성 이야기를 시작으로, 고문헌인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등에 기록된 월성과 그 주변 유적들에 대한 이야기 등이 흥미롭게 전개된다.경주 중앙에 위치한 신라시대 궁궐이었던 월성은 그 안에 갖가지 사연과 수많은 유물을 지니고 있는 한국 역사의 보물 같은 공간이다.김별아는 꼼꼼한 사전 취재와 여러 차례의 현장 답사를 통해 그곳을 독자들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서게 만들고 있다. 책을 읽노라면 그런 느낌은 더욱 강해져 마치 소설가와 월성 주변을 산책하는 기분이 든다. 김별아는 보다 정확한 정보와 역사 지식을 전달하고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관계자, 월성 발굴 작업반장 등도 만났다.‘개의 이빨처럼 맞물려 있던 시절’이란 글에서는 백제와 고구려의 궁궐은 신라와 어떻게 달랐는지도 확인해 볼 수 있다.책을 펴낸 출판사는 ‘한해 방문객 수만 1천270만 명이 넘는 도시 경주. 한국 최고의 역사·유적 도시로서 수학여행의 단골코스이자, 힙한 황리단길로도 유명세를 떨치고 있지만 정작 우리는 경주가 품고 있는 역사와 공간적 의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라고 묻는다. 의미 있는 질문이다.이와 관련 김별아는 책의 서두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경주로 가는 발걸음은 언제나 설렌다. 신라와 서라벌에 대해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아는 듯하지만 여전히 많은 것을 모른다. 그리하여 월성이라는 비밀의 열쇠를 풀고 경주로 향하는 마음은 이미 알고 있는 것들과 여전히 모르는 것들 앞에 달떠 두근거린다”고 썼다.신라의 역사와 경주 사람들에 관한 애정이 담긴 이 말로 미루어 보자면 김별아는 월성과는 또 다른 ‘신라’ 혹은 ‘경주’ 이야기로 독자들 곁에 돌아올 수도 있을 것 같다. 여전한 상처 ‘세월호 아이들’을 위로하다기자가 아는 서성란은 성실한 작가다. 읽고 쓰는 것에 굴곡이 없다. 시종일관 무언가를 읽고 있으며, 항상 새로운 소설을 고민하는 것처럼 보인다.1996년 중편소설 ‘할머니의 평화’로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문단에 나온 서성란은 20년 넘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읽고 쓰는 것으로 삶을 시종했다. 특별한 다른 취미가 없다. 어찌 보면 문학을 향한 ‘무서울 정도의 성실성’이다.오늘날, 바로 지금 여기의 문제에 문학적 촉수를 뻗어온 소설가 서성란은 ‘모두가 사라지지 않는 달’ ‘풍년식당 레시피’ ‘쓰엉’ ‘마살라’ 등의 작품을 통해 독자들과 꾸준히 소통해왔다.얼마 전 오랜 시간의 준비 끝에 출간한 ‘달 아주머니와 나’ 역시 앞서 언급한 작품들의 연장선에 서있는 것으로 이해된다.서성란의 새 책은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은 ‘세월호 희생자’를 다룬다.“살아 있는 자들이 죽은 사람들을 애도하기 위해 추모의 문학작품을 내지만, 이 소설은 단지 죽음을 위로하는 ‘추모’의 작품인 것만은 아니다. 산 자가 죽은 자를 애도하기 위해 표현하는 슬픔이나 안타까움의 이야기가 아니라 죽은 자가 일정한 죽음의 시간을 지나며 직접 이야기하는 소설”이라는 게 출판사의 설명. 직접적으로 그날의 비극적인 죽음을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아래와 같은 서성란의 문장을 읽을 때면 어쩔 수 없이 어린 세월호 희생자들이 떠오른다.‘열여덟 봄은 열일곱 봄과 다르지 않았다. 열여섯, 열다섯에도 봄은 그럭저럭 무심하게 흘러갔다. 열네 살의 봄은 여느 해와 달랐다. 엄마가 떠났으니까 말이다.’- 위의 책 9페이지 일부 인용.‘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텐데도 아버지는 말을 아끼고 감정을 절제하면서 우물거린다. 나는 깊은 상념에 잠겨 길게 한숨을 내쉬는 아버지를 달래주지 못한다.’-위의 책 45페이지 일부 인용.이 가을. 아프지만 비극이 주는 카타르시스와 제대로 만나고 싶은 독자라면 ‘달 아주머니와 나’를 펼쳐보면 어떨까. 권경률 작가 우리가 몰랐던 ‘고려 장수’ 김종연역사는 승자의 행적만을 기록한다. 그건 동서양과 고금(古今)이 다르지 않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를 모르는 한국인은 드물다. 그러나, 그에게 맞서 또 다른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고려 장수 김종연의 이름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생소하다.포항 출신의 작가 권경률의 책 ‘모함의 나라’는 실제 역사에서는 패자였지만, 그 위상과 가치의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김종연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김종연은 고려 우왕 때 수차례 왜구를 토벌하는 공을 세운 장수다. 1388년에는 남원과 구례에서 왜적과 싸워 이겼고, 1389년엔 쓰시마를 정벌해 고려인 포로들을 구출하기도 했던 인물.그러나, 그런 공적이 있었음에도 모함으로 인해 옥에 갇혔다. 권경률은 김종연이 겪은 옥고가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방해하는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라고 판단했다.‘모함의 나라’는 독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고려 말 40년 동안 이어진 왜구와의 전쟁. 왜구 토벌전에 헌신하고 나라와 백성을 지킨 장수들은 역성혁명을 추진한 이성계 일파의 모함에 쓰러져갔다. 고려를 수호한 무인들은 어떻게 잊혔을까? 역사는 과연 정의로운가?” “이 책은 모함의 희생자로 보이는 실존 인물 김종연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고려 말 왜구 전쟁과 왕조 교체기의 권력투쟁을 실감 나게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 출판사의 이어지는 부연.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책의 1부와 2부에선 고려를 멸망에 이르게 한 왜구의 실체를 규명하며, 왜구 토벌 과정에서 이성계가 역사의 전면으로 부상하는 것에 포커스를 맞춘다.3부 ‘잊힌 무인들’과 4부 ‘호랑이 등에 탄 역사’에선 정권을 잡은 이성계가 명나라를 끌어들여 정적을 모함하고 고려 왕조를 붕괴시키는 일련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물론, 여기엔 김종연의 저항과 분투 과정 또한 상세하게 담겼다.‘모함의 나라’를 출간한 권경률은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했고, 회사원과 기자 등의 직업을 거쳐 현재는 역사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9-13

거센 바람을 견디며 순백의 등대가 빛을 뿌리는 곳

여기에 가보지 않고서야 포항에 가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일곱 번 답사해 한반도의 최동단임을 확인했다고 하는 곳,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있고 망망대해가 펼쳐지는 곳, 한반도에서 일출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곳. 바로 호미곶이다. 호랑이 형상의 한반도에서 꼬리에 해당하는 곳이기에 포항에 오는 사람들은 호기심 때문에라도 호미곶에 들르며, 그 숫자가 매년 200만 명을 넘는다.포항 시내에서 호미곶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다. 동해면을 지나 임곡 방향으로 가는 옛 도로가 있고, 동해면에서 직진해 구룡포를 통과하는 도로(929번 지방도로)가 있다. 임곡 방향의 도로는 구불구불한 곡선이고, 구룡포를 통과하는 도로는 반듯한 직선이다. 호미곶의 진면목을 느끼고 싶다면 임곡 방향으로 가는 게 좋다. 바닷가를 따라 유려한 곡선의 도로를 느린 속도로 따라가다 보면 대동배리, 구만리 같은 정겨운 이름의 마을이 드문드문 나타난다. 원색의 향연이 펼쳐지는 곳그 길의 끝에서 만나는 호미곶은 광활한 자연의 캔버스에 하늘과 바다와 땅의 원색이 펼쳐진다. 3월 중순 유채꽃이 피면 원색의 향연은 절정을 치닫는다.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눈을 찌를 듯 샛노란 유채꽃이 피어나면 하늘과 바다의 색상도 더 짙어진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유채꽃밭으로 뛰어들어 한 송이 꽃이 되고, 꽃밭 옆 포장마차에서는 대낮부터 소주 한잔 기울이며 술에 취하고 꽃에 취한다.호미곶 구만리에 보리가 피어나면 연초록의 물결이 온 누리를 뒤덮는다. 차가운 땅 밑에서 억세게 키워 온 생명의 기운은 사람들의 마음밭도 초록으로 물들인다. 땅에는 바람에 일렁이는 초록의 파도가, 바다에는 흰 포말을 일으키며 밀려드는 파도가 어우러지는 곳이 봄날의 호미곶이다.호미곶은 바람이 거세다. 수평선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줄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바람의 마을에서는 쌀농사가 힘들다. 과거에는 온 사방이 보리밭이었고, 먹고살기가 팍팍했다. 대보(호미곶의 옛 지명) 처녀는 시집갈 때까지 쌀 서 말을 못 먹는다는 말이 전한다. 보리밭이 많이 줄었지만 옛 모습은 웬만큼 남아 있다. 해 질 무렵 구만리 보리밭 사잇길을 걸으면 수평선 너머에서 전하는 바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등대가 세워진 사연바람이 거센 호미곶은 역사의 바람도 거셌다. 한반도의 최동단에 위치한 까닭에 군사적 요충지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었고, 러일전쟁이 일본의 압승으로 끝난 후인 1907년에는 일본 해군이 호미곶 인근 야산에 망루를 설치해 운영했다.1907년 9월 9일 호미곶 앞바다에서 조난 사고가 발생했다. 일본 도쿄수산강습소(도쿄수산대 전신)의 실습선 가이요마루(快鷹丸)가 호미곶 앞바다의 암초에 부딪혀 교관 1명과 학생 3명이 사망했다. 가이요마루는 일본이 우리 바다를 수탈하기 위해 시험조사사업의 일환으로 운행한 실습선이었다. 일본은 이 사건의 사망자를 기리기 위해 구만리에 조난기념비를 세웠지만 광복 후 훼손되고 뽑히는 수난을 겪다가 한일 관계 개선 후에 제 모습을 찾았다.일본은 대한제국에 이 사건의 책임을 물었다. 우리의 항만 시설이 부실해 사고가 났다는 억지 주장을 하며 대한제국의 비용으로 등대를 건설하라고 요구했다. 무기력한 대한제국은 일본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추진된 것이 호미곶등대 건설이다. 등대는 1908년 4월 13일 착공하여 그해 11월 19일 준공했으며, 12월 20일 점등했다. 일본이 강요한 이 등대는 프랑스인이 설계하고 중국인이 시공을 맡았다. 등대 앞 해안가에 선착장을 만들어 공사용 자재를 하역하고 주민들을 동원해 등대 건설 부지까지 운반했다.벽돌로 26.4미터를 쌓아올린 백색의 팔각형 등대는 일몰에 불빛을 켜고 일출에 불빛을 끈다. 12초에 한 번씩 먼바다를 향해 빛을 뿌리는데, 빛의 도달 거리가 16해리(약 40킬로미터)에 이른다. 거센 바람을 견디며 순백의 등대가 빛을 뿌리기에 호미곶 밤바다는 마냥 쓸쓸하지 않다. 외로운 밤바다에 더 외롭게 떠 있는 어선, 그리고 그 어선을 향해 빛을 뿌리는 등대를 바라보고 있으면 삶이 외롭지만은 않다는 것이 느껴진다.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탄생한 등대는 언제 보아도 단아하다. 위에서 아래로 살포시 흘러내리는 곡선은 빼어난 건축 미학을 드러낸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39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역사적, 문화적 가치는 그 이상이다. 해녀와 고래호미곶에서 해녀들이 물질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봄바람이 부는 바다에서 돌미역을 채취하는 것을 시작으로 전복, 소라, 성게, 멍게, 천초(우뭇가사리), 문어 등을 건져 올린다. 북쪽으로는 오호츠크해, 동쪽으로는 독도까지 간 제주 해녀들이 이곳에도 온 것이다.2017년 기준으로 포항은 제주와 울산 다음으로 해녀가 많다. 2020년 5월 현재 포항시 어촌계에 등록된 해녀는 879명이고, 이 중 호미곶면은 249명이다. 수입은 쏠쏠하지만 육체적으로 고된 작업이 안정적으로 이어질 리 없다. 지금 해녀의 나이는 대부분 60대 이상이다. 해녀의 수도 줄어들어 해녀가 사라진 어촌계가 늘어나고 있다.호미곶 앞바다에는 아득한 옛적부터 고래가 지나다녔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인간의 시간으로 확인할 길이 없다. 과거에 동해를 고래의 바다, 경해(鯨海)라 불렀고, 포항의 해안가 곳곳에 고래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하고 있다. 2005년에는 포항에서 1300만 년 전 돌고래 화석이 국내 최초로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다.1930년대까지 호미곶 주변은 밍크고래의 평화로운 집단 서식지였다. 한반도를 장악한 일본은 울산, 제주도, 대흑산도, 대청도 등을 근거지로 참고래, 대왕고래, 향고래, 귀신고래 같은 중대형 고래를 주로 포획했고 밍크고래 같은 작은 고래는 손대지 않았다. 하지만 중일전쟁 이후 상황은 급변해 호미곶 주변은 밍크고래의 무덤이 되었다. 전쟁 물자 동원을 위해 한반도의 자원을 철저하게 착취한 일본은 밍크고래도 포획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 후 고래는 명맥을 유지했지만 영일만에 제철공장이 들어서고 바다 생태계가 바뀌면서 그 수가 더욱 줄었다. 지금도 이따금 크고 작은 고래가 발견되고, 혼획된 고래가 경매에 부쳐진다. 불법으로 고래를 포획한 어선이 해경에 덜미를 잡히는 경우도 있다. 고래고기가 비싸게 거래되는 까닭이다.고래를 둘러싼 현실은 살벌하지만 고래의 옛이야기는 평화롭다. 호미곶면 다무포 마을에는 출산한 어미 고래가 미역을 먹으러 얕은 바다까지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고래가 산후에 미역을 먹는 것을 알게 되자 여인들이 산후조리로 미역을 먹는 풍속이 생겼다는 내용이 나온다. 우리가 왠지 모르게 고래에게 친숙감을 느끼는 정서는 이런 이야기에 담겨 있다. 고래를 영혼의 조상으로 섬기는 호주 원주민들이 아직도 존재하는 것처럼.김옥균의 왼팔과 상생의 손호미곶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에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이 등장한다. 그는 1894년 3월 27일 오후 상해에서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가 쏜 탄환 세 발을 맞고 즉사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의 시신은 중국 군함에 실려 인천으로 왔고, 왕명에 따라 마포 양화진 보리밭에서 능지처참되었다. 조각난 시신 중 머리는 일본인이 수습해 도쿄의 한 절에 묻었다고 전한다. 나머지는 전국 곳곳에 버려졌는데, 왼팔이 호미곶 앞바다에 던져졌다는 설이 있다. 정확한 출처는 찾을 길이 없으나 여러 신문기사와 단행본에 그 이야기가 전하며, 다음의 글이 구체적이다.“암살당한 개화파의 우두머리 김옥균이 여섯 토막으로 잘려 왼팔이 장기곶(현 호미곶) 앞바다에 던져진 것은 1894년 5월의 일이었다. 굳이 그의 시체의 한 토막을 이곳에다 버린 것은 동해로 튀어나온 장기곶의 지세가 역모의 기운이 서려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의 발견-경상북도’, 뿌리깊은나무, 1992, 199쪽.새천년을 앞둔 1999년 12월, 호미곶에 커다란 손이 솟아올랐다. 상생(相生)의 손 청동 조각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오른손(8.5미터)은 바닷속에, 왼손(5.5미터)은 호미곶 해맞이광장에 세워졌다. 상생의 손은 새천년을 맞아 모든 국민이 서로를 도우며 살자는 뜻에서 만든 조형물로 호미곶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비운의 주인공인 김옥균의 왼팔이 던져졌다고 하는 호미곶 앞바다에 상생의 손이 세워졌으니 이 우연을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까. /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

2022-09-13

“최강의 군인이 되고자 했던 해병대 1기”

해병대는 짙푸른 동해와 서민들의 삶이 생동하는 죽도시장과 함께 포항을 상징하는 선명한 이미지다. 1959년 해병 제1상륙사단이 포항으로 이전하면서 시작된 포항과 해병대의 인연이 어느새 63년에 이르렀다. 해병대 1기로 입대해 6·25전쟁 때 목숨을 건 전투를 수십 차례 치른 이봉식(91세) 선생은 인생의 3분의 2가 넘는 61년을 포항에서 살았다. 위국헌신(爲國獻身)이란 군인의 본분이 흐려진 시대에 이봉식 선생이 들려주는 생생한 ‘해병대 이야기’와 ‘6·25의 기억’은 비단 군인만이 아닌 포항 시민들도 충분히 귀 기울여 들어볼 만하지 않을까. 홍성식(이하 홍) : 태어나신 곳이 어딘가요?이봉식(이하 이) : 충청북도 보은이야. 바다와는 아주 멀고 강이 지척인 농촌에서 태어났지. 1931년 2월 19일생인데 우리 나이로 아흔둘이 되었네.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어. 위로 누이가 두 분이야. 이제는 형제가 거의 죽고 막냇동생이 천안에 살고 있어.홍 : 1931년에 태어나 광복 이전까지 유년시절은 어땠습니까?이 : 일제강점기 때는 농사를 지으면 일본인들이 전부 가져갔어. 우리 집은 광복이 되었지만 생활에 큰 변화가 없으니까 광복 직후에 고향을 떠났어. 1941년 가을에 일본군이 미국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나. 당시 트루먼 대통령이 “일본이 우리에게 도전했구나”라고 말했다는데, 태평양전쟁이 터졌지. 그때 난 열한두 살이었고, 한국도 어수선했어. 농촌에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객지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대전으로 이사하면서 학교엔 다니기가 쉽지 않았어.홍 : 그 시절에 대부분 그렇듯 힘든 유년이었군요.이 :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내가 가장 노릇을 했는데 대전에 가서 보니까 일본 사람들이 철수한 후 한국의 치안은 엉망이었어. 어리지만 이렇게 나라가 흔들려서야 되겠나 하는 걱정이 들었지. 그즈음 해군을 모집한다는 현수막을 봤어. 그게 1949년었으니까 내가 열아홉 살 때지. 당시 북한의 김일성이 중국에 가서 모택동(毛澤東)을 만나고 소련에 가서는 스탈린과 면담을 해 빨치산 2개 중대를 한라산과 지리산 등지에 파견했다는 소문이 돌았어. 그들이 형무소를 파괴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우리도 빨리 군대를 양성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내가 어린 나이에 해군에 입대한 이유가 그거야.홍 : 육군이 아니라 해군을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까?이 : 육군에서도 모집했지. 그런데 어린 마음에 군악대를 동원해 시가지에서 나팔을 불고 행진하는 해군이 멋져 보였어. 겨우 열아홉 살짜리가 세상을 알았겠나? 보기도 좋고 이왕 군대 갈 거면 해군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지. 두 살 밑 동생에게 “나는 군대에 가서 어떻게든 견딜 테니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을 부탁한다”고 말하고는 입대했어. 이후 동생들과 어머니는 대전에 있다가 고향인 보은으로 돌아갔어.홍 : 그즈음 이야기를 좀 더 해주시죠.이 : 3월 하순에 경남 진해로 갔어. 입대 날짜는 1949년 4월 15일이야. 아직도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해. 가보니 전국에서 해군에 가려는 인원이 1천400여 명이 넘었어. 입대하고 며칠을 기다리는데 광고 하나가 나붙었어. 입대한 사람들 중 해군으로 가고 싶은 사람은 남고, 해병대 300명을 뽑으니 지원하라는 거야. 그들이 해병대 1기가 된다는 거였지. 군복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그런 광고가 붙었던 거야. 해병대는 육지에서도 싸우고 바다에서도 싸운다고 하니 매력적으로 들렸어. ‘그럼 좋다. 나는 해병대로 간다’고 마음먹었지. 신체와 체력이 좋은 사람을 뽑는다고 해서 손을 들었고, 해병대 1기 300명 안에 뽑혔어. 해병대는 1949년 4월 15일 창설돼 1기 훈련생을 선발한다. 이어 1952년에는 해병 제1전투단이, 1954년에는 해병 제1여단이 생겨났다. 1955년 1월 15일 창설된 해병 제1상륙사단은 1959년 3월 28일 경기도 금촌에서 포항으로 이전했다. 베트남전쟁 시기인 1965년에는 해병대 청룡부대가 베트남으로 파병되었다.홍 : 어린 시절에도 성격이 괄괄하고 싸움도 하고 그러셨는지요?이 : 그러지는 않았어. 마음은 여렸지만 정신은 확고했지. 나이는 적지만 나라와 애국이 뭔지도 생각해봤고. 일제 치하에서 혹독한 시절을 보낸 게 그런 마음을 들게 했을 거야. 어쨌건 해병대 1기에 뽑혀 경남 진해 덕산비행장으로 갔어. 거기는 일제 때 해군이 주둔하던 자리인데 막사가 10여 동 있고 강당도 있었어. 부대 편성을 간단히 하고 보급품을 받은 기억이 나는군. 그렇게 해서 해병대 1기로 출발한 거지.홍 : 훈련이 혹독했을 것 같습니다.이 : 창설 시기나 시간이 흐른 지금이나 해병대의 훈련은 고된 것으로 유명해. 해병대 1기 300명에게 군번을 0번부터 299번까지 부여하더군, 내 군번이 174번이야. 150명씩 2중대로 편성해 며칠간 예비훈련을 하고, 4월 15일 이승만 대통령과 중화민국의 장개석(蔣介石) 총통이 와서 해병대 1기 창설을 축하했지. 그때 비행장에 300명이 줄을 섰는데 가족들도 오고 그랬어. 하지만 우리 식구들은 오지 못했지. 그때는 교통수단이 시원찮았고, 내 경우엔 식구들에게 말도 하지 않고 입대했으니까. 여하튼 바로 이 4월 15일이 한국 해병대의 시작이었어.홍 : 막 생긴 부대라 여러 어려움이 있었겠습니다.이 : 4개월간 군사교육을 받았는데 처음 창설된 부대라서 보급품이 엉망이었어. 보리와 쌀을 섞은 적은 양의 밥과 콩나물국, 된장 정도만 공급되었지. 그런데 훈련의 강도는 엄청났어. 이런 말은 시대에 안 맞는 이야기지만 얼마 전 신문에 ‘해병대 1기가 4개월간 훈련받을 동안 3천600대를 맞았다’는 기사가 나오더군. 그 증언을 한 사람이 현재 포항에 살고 있는 내 동기생이야. 해병 신병 교육훈련장에 가서 그때 얘기를 하기도 하는데, 요즘 해병들은 이해 못 할 거야. 과거 해병대는 매를 많이 맞았어. 다 전쟁터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으라고 가하는 체벌이었으니 지금 돌아보면 그저 허허 웃고 말지. 홍 : 군대 장비도 제대로 없었을 것 아닙니까?이 : 일본군이 버리고 간 철모와 목총을 분배받았어. 1개 분대가 12명인데 6명은 일본군이 사용하던 구형 99식 소총을 받고 6명은 목총을 받았지. 그러니 우습게도 총을 실제로 쏘는 게 아니라 총 쏘는 흉내만 내는 거야. 이렇게 교육을 받으면서 차차 제대로 된 보급품을 수령받았어. 하지만 정신교육만은 무서울 정도로 진지했지. 새벽 5시에 일어나 한 시간 이상 진해 시가지에서 구보를 했어. 다녀오면 젊은이들인데도 파김치가 되는데 이걸 4개월 동안 반복하니까 나중에는 모두가 살이 빠져 뼈만 남았지. 하지만 스스로 무쇠처럼 강해지고 있다는 걸 느꼈어.홍 : 그런데도 훈련 중 낙오된 경우가 없었다고 들었습니다.이 : 다들 ‘하면 된다’는 정신이 원체 강해서 낙오자가 없었어. 훈련 중 다쳐서 입원한 한 명을 제외하고는 말야. 그때 해병대 1기 300명의 훈련을 이끌던 사람이 일본 해군 출신이었지. 이 사람이 지금 100세인데 아직 살아 있어. 언젠가 해병대 예비역중앙회 총재가 된 그를 포항 영일대해수욕장 식당에서 만났는데, 우리가 “그때 왜 그렇게 때렸습니까?” 하고 물으니 “그랬기에 너희가 진짜 해병이 된 거야”라고 대답하더군. 요즘 시각으로 보자면 터무니없는 이야기지만 그때는 그랬어. 강한 해병대를 위한 고육지책이었던 거지.해병대사령부가 펴낸 ‘해병대 50년사’에는 해병대 창설의 이유와 초기 상황이 실려 있다. “삼면이 바다인 한국의 지리적 여건상 수륙양면 작전의 필요성이 높아 1949년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상륙작전을 주임무로 하는 해병대를 창설했다”는 것. 초대 사령관은 신현준 중령이었고, 해군에서 편입한 장교 26명과 하사관 54명, 해군 13기에서 특별 모집한 해병대 병 1기생 300명으로 한국 해병대는 출발을 알렸다.홍 : 한여름엔 훈련이 어렵지 않았나요?이 : 배고픈 게 무엇보다 힘들었어. 오전 네 시간, 오후 네 시간씩 훈련받고 저녁을 먹은 후에는 또 야간 교육을 했지. 팔꿈치에는 피멍이 들고, 군복이 너덜너덜하게 해져 곳곳을 꿰매 입었어. 사실상 맨살로 훈련받은 셈이야. 해병대가 최고로 강한 군대가 되려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야 한다는 게 훈련을 시키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공통된 생각이었어.이봉식1931년 충청북도 보은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나 소년 시절부터 가장 역할을 했다. ‘위기에 처한 국가에 힘을 보태고 싶다’는 열정으로 만 18세이던 1949년에 해병대 1기로 입대해 한국 전쟁사에 주요 전투로 기록된 인천상륙작전과 통영상륙작전, 도솔산전투와 가리산전투 등에 참여했다. 전투 중에 총상을 입었지만 후방이 아닌 전우들이 싸우고 있는 전투 지역으로 복귀를 자원했다. 휴전 후에는 진해 해병대훈련소에서 신병 교육 등을 담당하며 1961년까지 복무했다. 전역 후에는 ‘해병대의 도시’인 포항으로 이주해 지금까지 61년째 살고 있다. 40대 때부터 90대에 이르기까지 50년간 포항 해병1사단 장병들을 대상으로 한 각종 강연에 초청받아 자신의 경험과 해병 정신을 후배들에게 들려주었다. 현재는 해병대전우회 영포지구 원로회 회장과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경상북도지부 고문으로 있으며, 대민봉사와 어려운 해병 전우 돕기에 앞장서고 있다.대담·정리 : 홍성식기자·촬영 : 김훈 사진작가

2022-09-12

“꿈틀로 문화창작지구만의 오랜 전통 만들어 갔으면”

달빛을 은은하게 머금은 영국의 대성당과 오방색의 퀼트.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쌈솔 바느질한 등불. 영국에서 활동하는 섬유예술가 강경신(Magenta Kang)은 이민자의 삶을 씨실과 날실로 엮는다. 타국에서 살고 있지만 깊은 내면 속 한국인의 심지가 도드라지게 새겨진다. 한국의 전통직물을 영국식 직조방식으로 작업하는 그가 25년 만에 고향에서 ‘Through Korean eyes’전을 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즐겨 입던 모시옷과 제부의 상복을 뜯어 전통적인 한국 조각보 기법으로 이어 만든 작품 등이 호평을 받으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포항 도심의 꿈틀로 문화창작지구에 위치한 갤러리M(관장 최수정)에서 강경신 작가를 만났다. -얼마 만에 고향에 온 건가.△1997년에 영국으로 건너갔고 간간이 오가다 이번에 7년 만에 왔다. 최근에 두어 번 비행기 표를 끊었다가 코로나19로 취소했다. 고향에서 전시하는 건 25년 만이다. 서울과 울산을 거쳐 순회전의 마지막이 포항이다. 고향에서 전시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에 뭉클하다. 타국에서 어떻게든 작업을 이어가려고 아등바등하며 노력한 보람이 있다.-영국으로 가기 전 포항에서 한 전시는.△출국하기 전 2년 정도 포항청년작가회에서 활동했다. 그 후 연락이 끊겼다가 SNS를 통해 한 친구와 연결되어 회원들과도 인연이 닿았다. 1995∼1996년 여름으로 기억한다. 칠포와 영일대 해수욕장에 해변 설치 미술전을 열었다. 주제를 정하는 것부터 토론이 치열했다. 당시 포항제철에서 날아든 쇳가루가 심각한 이슈였기에 환경을 주제로 모기에 뜯겨가며 작품을 설치했던 기억이 있다.-영국에서 모시나 삼베 같은 전통직물로 작업을 한다니 흥미롭다.△내 작업은 크게 직조와 설치, 보자기 세 분야다. 대학원에서 ‘나의 정체성 찾기’를 주제로 논문을 쓰면서 한국 전통직물에 푹 빠졌다. 한국적인 재료를 영국식 직조 방식으로 작업한다. 영국에서 아티스트로 생존하려면 그들과 달라야한다. 재료는 어머니가 지인이 입던 옷이나 죽도시장 한복점에서 자투리 천을 모아 보내주신다.-영국의 대성당을 디자인한 작품이 많은데.△10년 넘게 거주하고 있는 케임브리지셔(Cambridgeshire)주의 일리 대성당(Ely Cathedral)이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즐겨 입던 모시옷과 제부의 상복을 뜯어 쌈솔 바느질을 했다. 작품 중에 이름을 새긴 것도 있는데 일리의 전쟁추모기념비에 있는 세계대전 전사자 223명의 이름이다. LED조명을 사용한 랜턴은 지난 5월 한 달 반 동안 성당 안에 걸었던 작품이다. 3년 동안 바느질을 해서 72개를 등갓을 만들었다.-아버지의 모시옷과 삼베 이불, 상복으로 만든 작품이 인상적이다. 작가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인가.△아버지는 포항 도심인 육거리에서 도장을 파는 인장(印章)과 인쇄업을 했다. 예닐곱 살부터 매일 새벽에 깨워 서예를 가르쳐주셨는데 그때 예술을 대하는 자세를 배웠다. 그런 영향인지 일찍부터 그리는 걸 좋아했고 자연스럽게 미술을 전공하고 섬유디자이너로 일했다.-영국으로 건너가게 된 계기는.△대학에서 섬유디자인을 강의한 적이 있는데 교수로부터 그림을 달라는 황당한 부탁을 받았다. 누가 내 작품으로 외국 대학에 합격했는데 원본을 제출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작품을 제공하는 대가로 전임 강사를 제안했다. 화가 나는 한편으로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때 나이 서른이었다.-유학하던 때가 IMF 시기 아닌가.△영국 런던에 있는 센트럴 세인트 마틴 대학(Central Saint Martin College)에서 저녁에 파트타임 과정을 듣고 오전에 카페나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러던 중에 한 교수가 자기 스튜디오에서 일해보자고 했다. 섬유에 붓으로 그린 패턴을 미국 뉴욕의 고급 의류매장에 판매했는데 내가 그린 디자인이 제법 많이 팔렸다. 유학생들이 귀국하던 IMF때도 조금이나마 돈을 벌었기에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지금까지 그 일을 계속하고 있는 건가.△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결혼을 했고 가정에 충실하고자 일도 그만뒀다. 그런 와중에 직조만은 개인 레슨을 받아가며 꾸준하게 작업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암투병과 수술, 이혼과 교통사고까지 연거푸 겪으면서 인생의 거센 파도를 만났다. -인생의 격랑을 어떻게 극복했나.△운 좋게도 한국인 상담사와 만났다. 홍콩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영국에서 훈련과정을 밟는 상담사와 1년 넘게 면담했다. 또 기적 같은 일도 있었다. 결혼 전에 방문했던 웨스틴 딘 대학(West Dean College)에서 ‘오픈 스튜디오’ 행사 초대장이 온 것이다. 10년 만에 그것도 이사 직전에 도착했다. 거기다 돈 한 푼 없는 상황에서 교통사고 보상금이 딱 대학원 1학기 등록금만큼 나왔다. 석사 1년 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했고 장학금으로 다음 과정을 이어갔다. 한국에서 어머니가 오셔서 아들을 돌봐주셨다. 그때 어머니가 내 작품을 보더니 외할아버지를 닮았다고 하더라. 외할아버지는 만주를 오가며 일했는데 한 달이 걸려 돌아올 때마다 스웨터를 짜올 정도로 손재주가 좋았다고 했다.-어떻게 공부해서 현지 학생들을 제치고 수석을 차지했나.△죽으려고도 했을 만큼 힘든 시기를 지나 다시 살려고 시작한 것이 대학원이다. 캠퍼스에 있는 600년 된 나무에 매일 마젠타 색의 붕대를 감는 작업을 했다. ‘마젠타’는 미대에 진학해서 지은 내 이름인데 밝은 자주색을 뜻한다, 6개월간 감은 뒤 열흘간 풀어서 의자를 짰다.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한 작업이었는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주영한국문화원에서 첫 개인전 ‘마젠타 트리’를 열었다.일명 ‘마젠타 트리’를 만드는 과정은 영상으로 남아있다. 처음에는 혼자 하던 붕대 감기를 누군가가 동참하고 동네 아이들이 그 나무를 타고 놀았다. 영상과 함께 작가의 흥얼거리는 노래가 흐르는데, 기도 같기도 하고 우는소리 같기도 했다. 강경신 작가는 힘든 시기를 겪었기에 그런 작품이 나왔다고 믿는다. 고통에서 벗어나려 몰두할 일을 찾게 됐고 작품도 깊이 있게 나온 것 같다고. 무엇보다 타인의 고통을 보는 눈이 생긴 것에 감사하다고. 영상은 ‘예술은 힐링이다’라는 문구로 끝난다. 예술로 치유 받은 자신의 작품으로 누군가도 치유받기를 바라는 마음이다.-한국에 들어오기 직전까지 영국에서 전시를 했다고 들었다.△잉글랜드 동부의 예술가 그룹 ‘우즈라이프(OuseLife)’와 일리 대성당에서 전시를 했다.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성당으로 포항에서 선보인 다수의 작품을 전시했고, 먹그림은 성당에 들어가서 스케치한 작품이다. 매년 7월이면 ‘케임브리지 오픈 스튜디오’에 참여하는데 올해는 한국에 오느라 못했다.-케임브리지 오픈 스튜디오는 80년 전통의 행사라고.△매년 7월, 예술가들의 작업실을 오픈하는 행사다. 참여 작가만 500여 명이다. 작가의 프로필과 작품, 작업실 위치 등을 앱으로 제공하고 매년 업데이트한다. 작년에는 차로 두세 시간 걸리는 런던에서 그림을 사러온 애호가도 있었다.-작업실을 오픈하고 시민과 교류하는 것은 예술가의 거리인 꿈틀로의 취지와 비슷하다.△안 그래도 작업실을 둘러보며 짚풀과 종이 공예를 배우고 있다. 영국에서는 오로지 내 작업에만 몰두했는데 고향이라 그런지 여유가 있고 영감도 얻는다. 꿈틀로에서 열리는 ‘아트마켓 298놀장’에도 가봤는데 활기가 넘쳤다. 문화의 불모지라고 여겼던 포항에서 뭔가 꿈틀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꿈틀로도 케임브리지처럼 오랜 전통을 만들어 가면 좋겠다.-나아지고 있다지만 지역 예술인의 현실이 녹록치 않다. 꿈틀로에 제안을 한다면.△지원받는 사업은 주최 측과 협상을 해야 하고 어느 정도 끌려갈 수밖에 없다. 케임브리지 오픈 스튜디오의 경우 작가들이 운영하기 때문에 활동에 제약이 적다. 예술의 자율성을 해치지 않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에서는 돌멩이를 던지면 이씨, 박씨, 김씨가 맞는다지만 영국에서는 아티스트가 맞는다고 할 정도로 예술 종사자가 많다. 예술에 대한 문턱을 낮추고 생활에서 즐기는 문화를 만들어갔으면 한다.-곧 영국으로 돌아갈 텐데 고향에서의 시간들이 앞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하다.△개막전 축사에서 류영재 선배(포항예총 회장)가 ‘바뿌제’로 동서양을 접목시킨 예술가라고 해서 다들 폭소했다. 잊고 있던 단어인데 정감 있고 지역색이 묻어있어 나중에는 ‘바뿌제’로 전시를 해볼까 한다. 최근 한류 열풍으로 영국에도 한국 전통문화에 관심이 높아 보자기 강의나 전시 일정이 2024년까지 잡혀있다. 타국에서 가장 생각났던 음식이 신선한 미역에 싼 과메기였는데 못 먹고 가서 아쉽다. 83세 어머니가 천천히 늙으시면 더할 나위 없겠다. 강경신(Magenta Kang) 작가는포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서울여자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영국으로 건너갔다. 1997년 영국 런던의 센트럴 세인트 마틴 대학(Central Saint Martin College)에서 공부한 후 런던에서 텍스타일 디자이너로 일했고 2012년에 웨스트 딘 칼리지(West Dean College in Chichester)에서 섬유예술 미술 석사를 받은 후 케임브리지셔(Cambridgeshire)주 일리(Ely)에 정착했다. 11세기 일리 대성당이 지배하는 번화한 시장 마을의 일상에 매료되어 대성당과 주변 정원 등에서 영감을 얻는다. 지난 8월 서울 북촌을 시작으로 울산과 포항에서 ‘Through Korean eyes’ 순회전을 열었다. 25년 만에 다신 만난 고향의 작가들과 죽도시장 칼국수와 호떡을 사먹으며 이게 꿈이 아닐까 볼을 꼬집어볼 정도로 행복한 기억을 쌓고 오는 15일 영국으로 돌아간다.배은정 1974년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사학과 졸업. TBC·포항MBC·경북교통방송 작가. ‘포항문화의 상징과 공간’ 공저./배은정 작가

2022-09-12

“갈등 없는 추석 명절… 조선시대 선조들처럼”

오는 10일은 추석 명절이다. 풍요롭고 즐거워야 할 명절이지만 명절갈등이라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대두되는 시기이기도 하다.하지만 조선시대 추석 풍경을 담은 일기를 살펴보면 차례를 모시는 장소와 참여 범위, 역할 분담에 이르기까지 오늘날보다 더 유연하고 합리적인 모습이 담겨 있다. 우리는 조선시대의 추석 풍경을 담은 일기를 통해 형식에 치우친 차례 문화보다 조상을 기리며 함께 모여 수확의 기쁨을 누린다는 추석의 의미를 되살려 가족 모두를 포용하는 추석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그 갈등의 시작…명절추석은 신라시대부터 내려온 우리의 명절로 수확의 기쁨을 가족과 함께 나누며 조상을 기리는 날이다. 옛 어른들은 추석을 얘기할 때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고 할 정도로 추석은 풍요로움을 상징했다. 더운 여름이 지나 날씨마저 덥지도 춥지도 않은 계절이거니와 막 추수를 시작하는 시기다 보니 먹을거리도 풍족했다. 이런 저런 걱정이 없으니 인심도 좋아져 서로에게 나누고 베푸는 그런 명절이었다.하지만 우리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풍요로움은 더 해갔고 먹을 걱정 입을 걱정이 사라지자 더 이상 명절이라고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아니게 됐다. 오히려 명절이 가족 간의 갈등을 부채질 하고 이에 따른 사건사고가 뉴스를 채우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그러다 보니 요즘은 명절이 시작되기도 전에 많은 부부들이 갈등을 겪거나 주부들이 고민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명절에는 유독 주부들의 할 일이 많아지고 시댁과의 갈등도 빈번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명절이 지나고 나면 많은 부부들이 후유증을 겪고 갈등을 극복하지 못해 결국 명절갈등이혼을 결정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이는 아직 우리사회에 남아 있는 가부장적인 사고방식도 어느 정도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명절 전·후 이혼율 11.5% 증가실제로 예전에는 가부장적인 관념 아래 여성의 일방적인 희생과 가사노동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보니 며느리가 명절에 시댁 찾는 것을 꺼리는 행동을 두고 전통적인 윤리의식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법원이 남편의 이혼 청구를 받아들인 판례도 있을 정도다.이러한 가부장적인 태도도 2000년대 들어 여성의 권리 신장과 가정 내 양성평등을 구현하는 쪽으로 많이 바뀌면서 시댁에 대한 일방적 양보와 희생을 강요할 수 없게 됐다. 요즘은 오히려 위 사례와 달리 이러한 것을 강요했다는 이유로 이혼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더 많다. 배우자로서 신의를 져버렸다는 것이 이유다. 즉 남편과 부인이 동등한 위치에서 책임과 의무를 다했는지 면밀히 따지는 추세로 변화한 것이다.통계청의 최근 5년간 이혼통계를 보면 설과 추석 명절 직후인 2월과 3월, 10월 11월의 이혼 건수가 직전 달보다 평균 11.5%나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즉, 명절 전후 갈등으로 인해 가족이라는 틀이 깨지고 있는 것이다.△더 이상 명절 차례를 지내지 않는 젊은세대이렇다 보니 요즘은 ‘명절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는 비율이 매년 증가하고 있다. 이는 아직 차례 문화를 이어가야 한다는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갈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지난해 5월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제4차 가족실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45.6%가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에 동의한다’고 대답했다. 특히, 20대 응답자는 63.5%가 제사 폐지에 찬성했지만, 70세 이상 응답자는 27.8%만 이에 동의했다. 여러 문항 가운데 세대 간 동의 비율 차이가 가장 크게 나타난 문항이었다.이처럼 명절 갈등의 원인은 조선후기 가례의 보급과 확산으로 양반 가문에 사당이 건립되고, 제례의 순서 및 제사상 음식의 조리법과 배치까지 정례화되면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신분제 동요와 재산상속 문제와 맞물려 더욱 보수화된 제례 문화가 현재까지 이어져 오면서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하지만 한국국학진흥원이 보유하고 있는 조선시대의 추석 풍경을 담은 옛 성현들의 일기를 살펴보면 현대 사회가 얼마나 잘못된 방향으로 변질됐는지 알 수 있다. 자료에는 차례를 모시는 장소와 참여 범위, 역할 분담에 이르기까지 오늘날보다 더 유연하고 합리적이었던 추석 모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산소에서 지내는 추석 차례, 차례와 성묘의 이중 부담 해소경북 예천의 초간 권문해(權文海·1534~1591)의 ‘초간일기(1582년 (음)8월 15일)’에는 “용문(龍門)에 있는 선조 무덤에서 제사를 지내서 어머니를 모시고 산소에 올라갔다”는 내용이 실려있다.안동 예안에 살았던 조성당 김택룡(金澤龍·1547~1627) 역시 ‘조성당일기(1617년 (음)8월 15일자)’에서 “술과 과일을 마련해 누이의 아들 정득, 조카 김형, 손자 괴를 데리고 가동(檟洞)의 선산에 올라 선영에 잔을 올리고 절을 했다”고 했다. 또한 그 전해에도 “가동의 선조 무덤에 제사를 지내므로 직접 그곳으로 갔다”고 적어놓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추석 차례를 가족과 친척이 산소에 모여 지내기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상주의 청대 권상일(權相一·1679~1759)은 ‘청대일기(1745년 (음)8월 15일자)’에서 “시냇물이 불어나 건너기 어려워 산소에 성묘하러 갈 수가 없었다. 해가 저문 뒤에 손자 복인과 아우 상기가 술과 포를 조촐하게 갖추어 성묘하고 돌아왔다”고 적어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는 간소한 제물로 성묘를 지낸 모습도 보여준다.△친가, 외가, 처가의 구분 없는 조선시대 차례문화, 함께하는 추석김택룡의 ‘조성당일기(1616년 (음)8월 15일자)’에는 “가동에서 합제(合祭·여러 사람에게 함께 제사를 지냄)를 지냈는데, 영해(寧海)의 외조부모도 함께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이 실려있다.다음 해 추석에는 산소에 가기에 앞서 집에서 외조부모의 제사를 지냈고, 선조의 무덤에서 차례를 지낸 후에는 “제물을 나눠 영해의 장인 에게도 절을 올렸다”고 기록돼 있다.안동 예안의 계암 김령(金坽·1577~1641)은 ‘계암일기(1621년 8월 15일자)’에서 “먼저 외가의 추석 차례를 지낸 후, 집의 사당에서 추석 차례를 올렸다”고 적어 추석 차례에 참석하는 친족의 범위가 지금과 달랐다는 사실을 알려준다.대구의 모당 손처눌(孫處訥·1553~1634)은 ‘모당일기(1601년 (음)8월 15일자)’에서 “오후에 조부 및 부친의 묘에서 돌아왔다. 동생 희로가 두 사위를 데리고 와서 참석했다”고 적었다. △같이하는 추석 준비, 모두가 행복한 명절 지내기김택룡은 1617년 성묘에 생질이 함께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김택룡 일가는 추석 준비도 함께했다. “조카 김형을 시켜 수록동(水錄洞)에 있는 조부의 묘소를 벌초하고 음식을 올리도록 했다(1616년)”, “누이의 아들 정득의 무리가 수록동에서 벌초했다(1617년)”와 같이 친가와 외가의 후손이 번갈아 산소의 벌초와 차례를 맡았다.또 음식 마련도 서로 도왔다. “가동의 제사에 범금과 임인이 술을 가지고 와 올렸다(1616년)”, “포태(泡太·두부를 만드는 데 쓰는 콩)를 보냈다. 내일 누님이 가동의 선조 무덤에 가려하시기 때문이다(1617년 (음)8월 13일자)”는 기록은 형편껏 역할을 분담해 서로 도와가며 추석을 지낸 모습을 담고 있다.한국국학진흥원 관계자는 “형식에 치우친 차례 문화는 명절의 본래 취지에 맞지 않는 것이다. 조상을 기리며 함께 모여 수확의 기쁨을 누린다는 추석의 의미를 되살려, 가족 모두를 포용하는 추석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피현진기자 phj@kbmaeil.com

2022-09-07

“어머니의 내조가 없었다면 아버지는 존재할 수 없어”

한동웅 선생은 대담 중간에 “나는 아버지를 닮아서 말이야”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아버지에 대한 깊은 존경심이 느껴지는 표현이었다. 대담을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장남의 눈에 비친 아버지 한흑구, 그리고 어머니 방정분 여사의 이야기를 들었다.김 : 한흑구 선생님은 1979년 11월 7일 작고하셨습니다. 그때 상황을 말씀해주신다면.한 : 몸이 불편해진 아버지는 포항의료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해서 죽도동 집에 계셨어. 그 무렵 남빈동에서 죽도2동 85-17로 이사를 했지. 그런데 어느 날 냉면이 먹고 싶다고 하시는 거야. 평양 사람이니까 냉면을 얼마나 좋아했겠어. 그 순간 느낌이 이상하더군. 육거리에 있는 로타리냉면의 냉면을 포장해서 아버지에게 가져다드렸더니 맛있게 드셨지.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장롱에 부딪히면서 넘어지셨어. 당시 빈남수 박사가 아버지와 자주 만나며 가정의(家庭醫) 역할을 하셨지. 빈 박사가 집에 와서 아버지를 살펴보더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고 하셨는데, 사흘 후에 돌아가셨어.빈남수(1927∼2003)는 경남 사천 출신으로 의사이자 수필가다. 한국예총 포항지회장, 한국문협 포항지부장 등을 맡으며 포항의 문화예술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수필집으로 ‘괄호 밖의 인생’(범우사, 1975), ‘망각의 이방지대’(시인사, 1983)가 있다. 김 : 죽천에 한흑구 선생님 묘소가 있습니다. 한흑구 선생님이 죽천과 어떤 인연이 있는지 궁금합니다.한 : 아버지를 경주 아화에 있는 공원묘원에 모시려고 계약을 마치고 빈소에서 조문객을 맞았지. 그런데 앞서 얘기했지만 광복 직후 서울에 있을 때 나에게 없던 삼촌이 생겼잖아. 그 삼촌이 우리 가족을 따라 포항까지 왔어. 오천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다가 경찰 시험에 합격해 경찰관이 되었지. 빈소에 온 삼촌이 장지를 묻길래 경주라고 했더니 잠깐 기다려 보라는 거야. 삼촌의 처가가 있는 죽천에 가서 다른 장지를 알아보겠다고 하면서 말이야. 그리고 다시 나타나서는 괜찮은 장지를 찾았으니 한번 가보지 않겠느냐고 해. 상중에 상주가 빈소를 떠나서는 곤란하잖아. 하지만 삼촌의 성의를 생각해서 따라나섰지. 현장에 도착해보니 바로 여기구나 싶은 거야. 아버지가 영일만을 얼마나 좋아하셨나. 삼촌이 찾아놓은 장지는 영일만이 한눈에 들어왔어. 그래서 단박에 그곳으로 결정했지.김 : 한흑구 선생님이 품어준 사람 덕분에 당신이 그렇게 좋아하던 영일만이 보이는 곳에 묻히게 되었군요.한 : 그런 셈이지. 아버지 묘소 뒤편에 개나리를 심었어. 갈 수 없는 고향 평남 강서군 연곡리 옛집에 피었던 개나리가 생각나서.김 : 그러고 보면 한흑구 선생님은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베푸는 삶을 사신 것 같습니다.한 : 광복 직후 서울 시절과 부산 피난 시절에 문인들에게 술도 사고 밥도 사고 많이 베푸셨지. 이북에 있을 때 서울에서 찾아온 최상수라는 민속학자가 있었다고 했잖아. 그분에게는 신당동에 집 한 채를 장만해주셨어. 포항 미군 부대에 근무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포항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지. 6·25전쟁 때 불타버린 포항여고 교사(校舍) 복구라든가 미해병 기념 소아진료소 지원에도 아버지 손길이 닿았어. 그때는 그런 일이 미군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거든. 아버지가 미군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지.한흑구는 미국 필라델피아에 체류할 때 평양 친구인 안익태에게 큰 도움을 준다. 안익태가 한흑구를 찾아왔을 때 안익태는 돌아갈 차비조차 없을 정도로 힘든 처지였다. 한흑구는 안익태와 한방에 살면서 눈물겨운 뒷바라지를 했다. 안익태는 그 덕분에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에 입단하게 되고, 이를 기반으로 유럽에 진출한다. 이 사연은 한흑구의 두 번째 수필집 ‘인생산문’(1974, 일지사) ‘예술가 안익태’에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특히 이 책 ‘책머리에’의 다음과 같은 글은 한흑구와 안익태의 관계를 짐작하게 한다.안익태 씨와의 젊은 날의 교유록(交遊錄)은 나의 온 기억력을 짜내서 기록하였지만, 우리의 우정에 얽매였던 사연의 백분의 일도 그려내지 못하였다.김 : 장남으로서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한 : 아버지는 중학생 시절에 읽었던 찰스 램(Charles Lamb, 1775∼1834)의 수필에서 “High thinking, plain living(고상한 이상, 평범한 생활)”이라는 구절을 발견하고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어. 뜻이 높으면서도 가장으로서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한 분이었지. 보성전문학교 상과에서 공부하고 미국 생활을 해서인지 현실적인 문제에도 밝았어. 식구들에게는 늘 자상하셨지. 자식들한테 매 한 번 들어본 적이 없고 상급학교 진학도 자식들의 결정을 존중해주셨어. 술에 취해 늦게 귀가했는데 담배가 떨어지면 내 담배를 얻어서 피우기도 하셨지. 그리고 부뚜막에 허리를 굽히고 조리하는 어머니를 편하게 해주려고 지금의 싱크대 같은 것을 직접 만드셨어. 부엌에 남자는 얼씬도 하지 않던 시절에 요리도 자주 하셨지. 김장김치 담그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고 만두를 아주 잘 빚었어. 남빈동 집 마당에 닭 230여 마리를 키우기도 했지. 아버지는 국수를 즐겨 만드셨는데, 그때 닭고기를 넣었어. 그 맛이 그립군.김 : 혹시 한흑구 선생님은 교회에 나가셨습니까?한 : 아버지는 교회에 안 나갔어. 자식들에게 종교는 가지되 광신도는 되지 말라고 하셨지. 나도 은퇴 장로지만 아버지 견해에 동의해.한승곤 목사는 평양 산정현교회의 목사였다. 그런데 그의 외아들인 한흑구 선생이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한편 한흑구 선생이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는 한흑구 선생이 기독교의 신을 인정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흑구 선생이 기독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는지는 한흑구 연구에서 중요한 사안이라 하겠다. 김 : 한흑구 선생님이 포항에 오신 직접적인 이유는 폐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폐디스토마라는 설과 폐결핵이라는 설이 있습니다.한 : 내가 어릴 때의 일이어서 정확하게 알기는 힘들어. 분명한 것은 영남병원 이상원 원장이 폐결핵으로 진단했다는 거야. 아버지가 새벽에 오천 미군부대로 출근하면서 각혈할 때가 있었어. 이 병의 유일한 치료약은 스트랩토마이신(Streptomycin)이야. 아버지 술친구 중에 평안도 출신인 봉 중사라고 있었는데, 오천 미군부대에서 의료 분야의 일을 했지. 이분이 아버지의 각혈이 멈출 때까지 스트랩토마이신을 구해주었어.김 : 방정분 여사님 얘기를 듣고 싶군요.한 : 황해도 안악(安岳)군에서 태어난 어머니는 이화여전 성악과를 졸업했어. 이화여전 성악과 동기인 덕희 고모의 소개로 아버지와 결혼했지. 홍난파에게 배우고 음악 활동도 함께했다고 들었어. 어머니가 결혼하고 난 후 한 신문에 평양으로 시집가는 바람에 아까운 재원을 잃었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로 촉망받는 분이다고 해. 황해도 부잣집의 아홉 번째 딸로 태어났는데 집안에 사연이 있어. 아홉 명의 자식이 모두 딸이었어. 그 바람에 어머니의 생모가 집에서 나가게 되었어. 새어머니가 들어와서 아이를 낳았는데 또 딸이 태어난 거야. 그래서 그분도 집에서 나가게 되었지. 세 번째 어머니가 들어와서 아이를 낳았는데 드디어 아들이 태어났어. 열한 번째 만에 아들이 태어난 거지. 전쟁 때 이북에서 피난민이 포항으로 내려오면 중앙국민학교에 모였거든. 어머니는 혹시 그 남동생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싶어 중앙국민학교에 자주 가셨어.김 : 방정분 여사님은 포항여고에서 교편을 잡으셨지요?한 : 동생 동현이가 일곱 살 때 뇌막염으로 유명을 달리했어. 어머니는 그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바깥일을 선택했지. 남빈동 집에서 포항여고까지 약 20리(7.85킬로미터) 길인데, 어머니 표현으로는 다리에 꿀물이 나도록 걸어 다녔어.김 : 방정분 여사님은 한흑구 선생님에게 어떤 분이었습니까?한 : 어머니의 헌신적인 내조가 없었다면 아버지는 존재하기 힘들었어. 어머니는 첫째 딸을 먼저 보내고 사 남매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하는 힘든 여건에서도 아버지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하셨지. 어머니의 일기를 읽어보면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느껴져.김 : 방정분 여사님이 포항에서 자주 교류했던 분이 있다면.한 : 황해도 출신의 여의사 두 분이 포항에 있었어. 한 분은 변석화라고 1950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던 당찬 분이고, 또 한 분은 홍씨 성을 가진 분인데 정확한 이름은 기억이 안 나네. 어머니는 두 분과 가깝게 지냈지.김 : 이제 대담을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끝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면.한 : 사실 나는 아버지를 잘 몰라. 문학을 모르니 문학을 하신 아버지를 어떻게 알겠어? 아버지의 문학관 건립에 관한 소식은 듣고 있지. 고맙기도 하고 기대도 되지만 걱정되는 측면도 있어. 무엇보다 아버지를 깊이 이해해주었으면 싶어. 문학관 건립이 추진되어 문을 열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지. 그 장면을 보려면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끝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2022-09-07

한가위 달밤, 동화 속으로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한다. 먹을 것이 풍요롭기에 생긴 여유가 마음의 양식을 찾기 때문이다. 더하여 한가위가 들어 피붙이들이 보름달 아래 모여 정겨운 답소를 나누기 좋은 시간이다. 올 한가위는 삼대가 모여 동화를 읽으면 어떨까. 각자 흩어져 휴대폰만 들여다본다면 피붙이가 한자리에 모인 의미가 퇴색된다. 어른은 어른을 위한 동화, 아이는 아이들을 위한 동화, 이에 읽을만한 동화책 세 권을 소개한다.어린이의 마음속에는 동심이 흐른다. 그것은 지하수와 같아서 때 묻지 않고 맑다. 동심은 순수하고 천진하고 난만하다. 그렇다고 모두 동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 가슴 깊이 흐르는 아이다운 정서를 찾아 두레박을 내려야 한다. 동심의 우물에서 길어 올린, 맑고 순수한 이야기를 읽어보자. 작품을 다 읽고 나면 어른도 맑은 동심 한 사발 마신 듯 갈증이 풀린다. ① 단편동화 ‘냄새폭탄 뿜! 뿜!’(박채현 글, 허구 그림)‘냄새폭탄 뿜! 뿜!’에는 다섯 이야기가 실려있다. 모두 동심이 흐르는 길목에서 퍼 올린 이야기다. 작가는 동심이 휘돌고 굽이치고 출렁거리는 자리를 안다. 그 자리에 우물을 파고 두레박을 내려 소재를 퍼 올려 이야기를 짓는데, 서사만 나열하지 않는다. 아이들 특유의 행동과 심리를 문장으로 절묘하게 녹여 이야기마다 동심이 살아 숨을 쉰다.‘너라도 그럴 거야’: 먹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용돈을 모아 병아리를 산 승표, 그런데 고양이가 병아리를 물고 가버린다. 승표는 며칠 동안 친구들과 고양이를 추적한다. 철거를 앞둔 집에서 고양이의 집을 발견한 승표는 아이들과 함께 간다. 회초리를 든 승표는 끝내 복수를 포기하고 만다. 이를 갈며 복수의 칼을 벼렸는데, 왜 승표는 회초리로 고양이를 때리지 못했을까. 그 이유를 알면 누구나 제목에 공감하게 된다.‘나 좀 읽어줘’: 엄마가 마음을 몰라준다고 심통이 퉁퉁 불은 동아, 엄마를 따라 헌책방으로 가는데, 헌책방 골목에 들어서지 책들이 나 좀 읽어달라고 아우성을 친다. 헌책방이라는 현실이 판타지의 세계가 되고 동아는 그 세계 속에서 헤맨다. 판타지 속에서 무엇을 경험했으며 또 어떻게 될까.‘냄새폭탄 뿜! 뿜!’: 학교에서 친구들의 놀림을 받아도 말 한마디 못 하는 금은파 이야기다. 은파는 벌을 따라 텃밭으로 가고, 텃밭에는 이런저런 생명이 자신을 지키며 산다. 대파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매운 냄새를 뿜는다. 대파는 은파에게 소리친다. “뿌리에서부터 냄새를 끌어 올려. 매운 냄새를 풍기라고. 줄기는 질깃질깃해야 살아남아” 은파도 대파처럼 씩씩하게 자기를 지킬 수 있을까.‘바보 여우와 작은 씨앗’: 보리수나무 씨앗이 바람에 떨어진다. 떨어진 씨앗이 다시 바람에 실려 벌판으로 가고, 씨앗은 붉은꼬리여우 조의 뱃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씨앗은 조의 똥에 섞여 다시 땅에 떨어진다. 싹을 틔운 씨앗은 여우의 보살핌으로 자란다. 늙고 병든 여우가 보리수나무로 아래로 찾아온다. 둘은 어떻게 될까. ② 중편동화 ‘걱정을 없애주는 마카롱’(성주희 글, 유경화 그림)어른의 걱정은 생존에 관한 것이 많다. 어떻게 먹고 살까. 아이를 어떻게 공부시킬까. 묵직한 걱정이다. 어른이 보기에는 아이의 걱정은 무겁거나 거창하지 않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소소한 걱정도 무겁다. 그 무게에 눌리면 동심은 더 무거워진다.작가는 엄마다.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들이 자잘한 걱정에 휩싸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작가도 어릴 적에 크고 작은 걱정에 시달렸기에 아이들 세계의 걱정을 들여다본다. 한 뼘 두 뼘 마음이 크는 과정에서 걱정은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걱정에 사로잡혀 아이다움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아이들이 안타깝다. 그래서 작가는 걱정하는 마음을 토닥여주고 걱정이라는 먹구름 뒤에는 맑은 하늘이 펼쳐진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다.집에 도둑이 들어오면 어떡하지? 자다가 불이 나면? 갑자기 땅이 흔들리면? 걱정왕 ‘왕기우’는 온갖 걱정을 달고 산다. 심지어 요즘 유행하는 ‘걱정두병’에 걸렸을지 모른다는 걱정에 시달린다. 엄마 친구 아들인 ‘오해소’는 이런 기우를 걱정왕이라며 놀린다.하루는 기우 앞에 묘한 유리병 하나가 나타난다. “당신의 걱정을 없애 드립니다” 일단 믿어보기로 한 기우는 병 안에 든 ‘걱정을 없애주는 마카롱’을 먹는다. 진짜로 온갖 걱정이 사라지고 기우는 모든 걱정에서 홀가분해진다. 그런데 기우가 놓친 게 있다. 걱정이 없는 날에도 걱정을 적어야 한다는 조건을 까먹은 것이다. 걱정을 만들어야 한다는 걱정에 걸린 기우는 어떻게 될까.아이들의 걱정을 판타지 기법으로 풀어낸 이야기다. 작가는 아이들이 마음껏 공상과 상상의 세계를 경험하고 단단한 마음으로 성장하는 힘을 얻기 바란다고 말한다. ③ 어른을 위한 동화 ‘책상은 책상이다’(페터 빅셀 지음, 이용숙 옮김)이 책은 어른을 위한 동화이다. 사고가 엉뚱하고 행동이 바보 같은 사람의 일곱 이야기다. 현실에 없는 이야기 같지만 나 또는 나와 가까운 데 있는 이야기다.‘지구는 둥글다’는 정말 지구가 둥근지 확인해보려고 길을 떠나는 남자의 이야기다. 남자는 계속 똑바로 나아가면 이 책상이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걸 안다. 알긴 하지만 믿을 수 없어서 남자는 길을 떠난다. 처음 떠난 자리로 정확하게 돌아오려면 어떡해야 할까. 어떠한 난관이 기다리고 있을까.‘책상은 책상이다’는 반복되는 일상 때문에 무료함이 극에 달한 한 남자의 이야기다. 이 나이 많은 남자는 아침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산책하고, 이웃과 몇 마디 이야기를 주고받고, 저녁이면 자기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남자는 “달라져야 한다고!” 외친 뒤, 침대를 ‘사진’으로, 의자를 ‘시계’로, 책상을 ‘양탄자’로 부른다. 주변 사물의 이름을 다 바꿔 부르다 보니, 시간이 흘러 타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다. 결국 자신도 타인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른다. 이 남자는 어떻게 될까.‘아메리카는 없다’는 왕의 무료함을 달래려고 궁정의 광대를 자꾸 교체하는 이야기다. 광대는 왕이 시키는 대로 무조건 복종한다. 왕을 위한 땅을 발견해야 한다고 명령하자 콜롬빈이라는 광대가 뱃사람이 되어 대륙을 발견하러 떠난다. 시간이 지나 찾지도 않은 땅을 발견했다며 콜롬빈이 나타난다. 사람들은 확인하지도 않고 그것을 믿는다. 너무 먼 곳에 있어 확인할 길이 없으니까.이외에도 ‘발명가’, ‘기억력이 좋은 남자’, ‘요도크 아저씨의 안부인사’, ‘아무것도 더 알고 싶지 않은 남자’가 실렸다. 모두 엉뚱한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그 결말은 슬프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쓴웃음이 나기도 한다.어른을 위한 동화를 다 읽고 나면 기분이 상쾌하지는 않다. 엉뚱한 사람들이 이야기는 역설逆說이 되어 나름의 메시지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 어딘가에 있는 바보 같은 남의 이야기 같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내 안에도 이러한 기질이 조금씩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김이랑 수필가·문학평론가

2022-09-07

천일야화 같은 이야기가 펼쳐지는 포항

근래 포항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은 어디일까? 환호공원에 있는 스페이스 워크(Space Walk)다.롤러코스터처럼 생긴 묘한 조형물을 보려고 많은 사람의 발길이 이어진다. 2021년 11월 18일 제막한 스페이스 워크는 독일계 예술가 부부인 하이케 무터(Heike Mutter)와 울리히 겐츠(Ulrich Genth)가 디자인한 국내 최초의 체험형 조형물로 총길이 333미터에 가로 60미터, 세로 57미터, 높이 25미터 규모다. 우주 공간을 유영하는 듯한 즐거움을 선사한다는 뜻에서 스페이스 워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이 조형물의 계단을 따라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걷다 보면 아슬아슬한 느낌이 든다.조형물 아래에서 바라보면 조형물 위를 걷는 사람도 조형물의 일부로 보인다. 보는 각도에 따라 은색 조형물은 수많은 장면으로 바뀐다. 파란 하늘과 에메랄드빛의 맑고 투명한 영일만을 배경으로 하기에 그 장면은 감탄사를 자아낸다. 서쪽 하늘에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면 관람객의 마음에도 홍시빛이 곱게 번진다.관람객들은 휴대전화로 이 장면을 담아내느라 여념이 없다. 이런 이유로 수많은 스페이스 워크 사진이 SNS로 공유되고 있다. 포항을 새롭게 조망할 수 있는 조형물스페이스 워크는 환호공원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아파트 5층 높이로 조성되어 사방이 탁 트여 있다. 동쪽으로는 영일만을 지나 호미곶까지, 서쪽으로는 흥해읍에서 가장 큰 산인 비학산(飛鶴山)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포항을 가슴 깊이 느끼기에 이처럼 좋은 곳은 또 없다.늘 보던 세상도 새로운 시각으로 보면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스페이스 워크라는 새로운 장소에 서면 포항이라는 도시가 새롭게 보인다. 단순히 재미나 쾌감을 넘어 포항을 새롭게 느낄 수 있는 체험을 제공하는 것이 스페이스 워크의 진정한 기능이 아닐까 싶다. 이 기획도 그러한 목적에서 출발했다. 늘 보던 포항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으로 포항을 찬찬히 살펴보고 음미해보고 싶은 것이다. 포항의 속 모습을 잘 보여주는 장소를 찾아다니며 그곳에 얽힌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그 이야기의 조각을 한데 모아 그동안 몰랐던 포항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화석, 고인돌, 암각화의 도시포털 사이트에서 ‘포항’을 검색하면 ‘호미곶’이 먼저 뜬다. 그다음으로 포스코, 과메기, 물회 등이 많이 알려져 있다. 포항에는 이것 말고도 풍요로운 자연과 흥미로운 역사를 배경으로 다양한 볼거리, 먹을거리, 이야깃거리가 있지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아쉬움이 있다. 아무래도 철강 도시의 이미지가 강한 탓이다. 포항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알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 몇 토막을 우선 펼쳐본다.포항은 화석의 도시다. 포항 토박이치고 동네 뒷산에서 조개나 나뭇잎 화석 하나 주워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화석 중 상당수는 세계적으로 보존 가치가 매우 높다. 스페이스 워크가 있는 환호공원은 화석의 보고(寶庫)로, 2017년에 경북 동해안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되었다.지질학자들은 포항 지역을 2000만 년에서 1500만 년 정도 된 신생대 지층으로 본다. 특히 화석이 잘 보존되는 이암(泥巖) 퇴적층이 발달해 바다와 육지 생물 그리고 곤충 등 다양한 화석이 발견되고 있다. 1995년에는 환호공원과 가까운 장성동에서 1300만 년 전 돌고래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한국에서 발견된 최초의 돌고래 화석이다. 포항은 고인돌과 암각화(바위 그림)의 도시이기도 하다. 그래서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인 고인돌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3만여 기의 국내 고인돌은 서해안을 따라 많이 분포되어 있는데, 영남에서는 영일만 일대에서 내륙으로 확산된다. 포항 일원에는 335기의 고인돌이 있으며, 기계면에 114기의 고인돌이 모여 있다.특히 1985년 기계면 인비리 고인돌에서 석검(石劍) 손잡이 모양, 즉 검파형(劍把形) 암각화가 발견된 데 이어 1989년 흥해읍 칠포리 곤륜산 인근에서 검파형, 석검형, 윷판형 등의 암각화 군집이 발견되면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이하우 한국선사미술연구소장에 따르면 칠포리 암각화군은 약 1.7킬로미터에 걸쳐 8개소에서 247점의 표현물이 발견된 한국 최대 면적의 암각화 유적이다. 오래전부터 일본과 교류 이어져포항의 대표적인 설화는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연오랑세오녀다. 신라 제8대 아달라왕 즉위 4년인 서기 157년 때의 이 이야기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오래전부터 포항 지역이 일본과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역사에 대한 관점은 우리와 다르지만, 일본에서도 포항이 일본과 많이 얽혀 있다고 본다. 그러한 시각은 1935년 일본인들이 발간한 ‘포항지(誌)’의 첫 대목에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포항항은 경상북도의 동쪽 끝에 위치한 조선 남부(南鮮) 동해안 유일의 무역항이다. 그리고 그 땅은 고대부터 일본과는 관계가 매우 밀접해 그 유명한 스사노오노미코토(素盞鳴尊)나 스쿠나히코나(小彦名)도 이곳 포항에서 도항했다던가. 또한 진구 황후(神功皇后)가 삼한 정벌에 친히 나섰을 때의 항로를 이곳으로 채택했다고 전해져, 지금의 포항역 뒤쪽 죽림산에는 황후가 상륙한 유적으로서 황후 신사가 세워져 있다. 그 밖에도 일본과 얽힌 이 땅의 신화 전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김진홍 엮음, ‘일제의 특별한 식민지 포항’, 글항아리, 2020, 40쪽.그 후로도 포항은 일본과 얽히고설키는 관계가 이어진다. 고려시대에 왜구는 우리 연안에서 약탈을 일삼았는데 영일만 일대도 주요 공략 대상이었다.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우왕 13년(1387) 통양포(通洋浦, 지금의 두호동)에 해군기지인 수군만호진(水軍萬戶鎭)을 설치하는데, 이를 계기로 포항은 동해안의 군사 요충지가 된다.조선시대에 창진(倉鎭)이 설치된 것도 포항 역사의 중요한 장면이다. 영조 7년(1731) 경상도 감사의 요청에 따라 흉년으로 고통받는 함경도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곡식 최대 보관량 5만 석, 거느린 배만 14척에 이르는 대규모 관창(官倉)이 포항에 설치되었다. 이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으며, 포항(浦項)이라는 지명은 이때 처음 등장한다. 포항 창진은 훗날 강원도, 전라도 등 다른 지역도 구제의 대상으로 삼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려시대 수군만호진, 조선시대 창진 설치는 요즘으로 치면 해군과 대규모 물류기지가 들어선 것이다. 형산강을 품고 영일만을 접하고 있는 포항의 독특한 지리가 군사적, 물류적 관점에서는 중요한 덕분이다. 훗날 포항에 해병대 1사단이 주둔한 이래 해병대의 요람이 된 것, 포항에 포스코를 중심으로 한 철강산업단지가 조성된 것, 동해안의 유일한 국제무역항인 영일만항이 개항된 것은 이러한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흥미로운 이야기가 수없이 펼쳐져1900년대 초반 포항은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연일군(延日郡) 북면 포항동에 불과했다. 당시에는 흥해군, 청하군, 장기군이 포항보다 규모가 크고 유서 깊은 곳이었다. 포항이 속한 연일군은 1914년 부군면(府郡面) 통폐합 때 흥해군, 청하군, 장기군과 영일군(迎日郡)으로 통합된다. 포항에 정착한 일본인들이 포항을 개발하면서 변화가 일어난다. 포항의 규모가 커지면서 1917년에 지정면, 1931년에 읍으로 승격되었다. 광복 후 1949년 8월 14일 포항부(府)로 승격되어 영일군에서 분리되었고, 이튿날 포항시로 개칭되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포항은 일제강점기에 근대 도시의 골격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포항의 풍부한 자원이 일본에 수탈당한 아픔이 있다.한국전쟁 때 초토화된 포항은 1960년대 후반 포스코가 설립되면서 운명이 바뀐다. 알려져 있다시피 포스코의 설립자금은 대일 청구권 자금의 일부다. 포스코의 성공으로 포항은 우리나라 산업의 심장이 되었고, 포스코가 설립한 연구중심대학 포스텍(포항공대)을 기반으로 첨단과학의 샛별이 되었다.1995년 1월 포항시와 영일군이 통합되면서 지금의 포항이 된다. 일개 동(洞)이었던 포항이 성장을 거듭하면서 모태인 영일군을 통합한 것이다. 1128.76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통합 포항시의 면적은 서울시의 약 두 배에 해당한다. 역동적인 역사가 전개된 포항에는 아득한 과거와 최첨단의 다양한 양상이 층층이 쌓여 있다. 신석기시대의 흔적을 담고 있는 화석부터 전 세계에서 4개국에만 설치된 4세대 방사광가속기까지 두루두루 품고 있는 곳이 포항이다. 그런 까닭에 세헤라자드가 밤마다 풀어놓는 ‘천일야화’처럼 포항의 강과 바다, 산과 들판,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수없이 펼쳐져 있다.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

2022-09-06

태국,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자유여행의 천국으로

젊은 시절. 배낭 하나 달랑 메고 낯선 아시아의 거리를 헤매본 사람이라면 잊을 수 없는 지명이 있다. 아니, 비단 배낭여행자가 아니더라도 적지 않은 한국인에게 분명 익숙한 이름일 것이다. 카오산 로드(Khaosan road).태국 방콕은 인근 국가인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 말레이시아 등을 묶어 1~2개월 혹은, 더 긴 기간 동안 돌아보고 싶은 청년들에게 거점 같은 도시다.패키지여행이 아닌 개별적인 자유여행을 계획한 이들이라면 보통 한국에서 방콕으로 날아가는 비행기 티켓을 구매해 가장 먼저 카오산 로드로 간다.거기서 좀 더 구체적인 여행 계획을 세우고, 인접국으로 향하는 기차표나 버스표 또는, 배표를 예매하는 게 동남아 배낭여행의 가장 보편적 방법이었다. 몇 해 전 발생한 ‘코로나19 사태’가 있기 전에는. □ 300m 남짓 거리가 배낭여행자들로 넘쳐났던 곳이…방콕공항에서 택시나 셔틀버스로 1시간 남짓 달리면 만날 수 있는 카오산 로드는 어떤 곳일까? ‘위키백과’가 간략하게 그곳을 요약해주고 있다.“카오산 로드는 태국 방콕 시내 프라나콘 방람푸 지역에 있는 짧은 거리 이름이다. 카오산 로드는 300m도 채 안 되는 거리지만, 전 세계 배낭여행객들의 집합소이자 젊은이들의 해방구다. 태국뿐만 아니라 동남아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여행자들에게 카오산 로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자 베이스캠프이기 때문. 이곳에서는 여행자 입맛에 맞는 다양한 음식도 먹을 수 있다. 방콕 왕궁과 왓 프라깨우가 있는 1km 북쪽에 자리한다.”2020년 초 코로나19가 불러온 ‘세계여행 암흑기’의 직격탄을 카오산 로드도 피해갈 수 없었다.1년 내내 유럽과 북아메리카, 아시아에서 온 여행자들로 넘쳐나던 그 거리가 인적 없는 유령도시처럼 변한 ‘코로나19 사태’ 이후 사진과 영상은 많은 이들을 충격에 빠지게 했다.한국보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맥주와 커피를 마시고, 태국 요리부터 인근 동남아시아 길거리 음식까지 맛볼 수 있었던 카오산 로드.자정을 넘겨 새벽에도 꺼지지 않던 거리의 불빛이 사라진 카로산 로드는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역 중 하나였다. 다행히 최근 언론 보도에 의하면 3년 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태국을 여행하려는 관광객들이 조금씩 늘고 있다고 한다.카오산 로드 역시 개점휴업 상태이던 상점과 카페들이 하나둘 활기를 찾아가며 야간 영업시간 확대까지 준비하고 있다고.기자 역시 배낭여행을 즐기던 30대 초반부터 40대 중반까지 대여섯 차례 이상 방문한 곳이 카오산 로드다. 당연지사 잊을 수 없는 추억도 여럿 만들었다. 처음 그곳을 찾았을 때 일본 와세다대학에 재학 중인 청년 하나를 만났다. 태국은 물론, 캄보디아와 라오스, 인도네시아를 거치며 3개월째 여행을 지속하고 있다는 그는 “앞으로도 3개월쯤 더 여행을 계속할 것”이라는 말로 기자를 놀라게 했다.사실 여행은 인생의 교과서로 역할 한다. 한국인들은 일본인에 비해 그 사실을 늦게 깨달았다. 아니, 늦게 알았다기보다는 알고 있다고 해도 해외여행이 수월치 않았다.이른바 MZ세대에게는 비행기를 타고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 멀리는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까지 가는 게 놀랍고 드문 일이 아니지만, 그 이전 세대는 달랐다.지금 50대 이상인 한국인들에겐 여권을 발급 받아 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탄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특권처럼 인식됐다. 그보다 이전엔 돈이 있어도 해외여행을 마음대로 갈 수 없던 시절도 있었다.세상은 빠르게 변했다. 21세기에 들어서며 적지 않은 한국 젊은이들도 태국 방콕 카오산 로드를 자기 동네 뒷산 드나들듯 가기 시작했다. 그 추세는 속도를 더했고, 이제는 해외여행 경험이 없는 대학생들을 보기 어려울 지경.□ 몸 추스르고 여행자 맞기 시작한 ‘카오산 로드’코로나19가 불청객처럼 찾아와 세상을 흉흉하게 만들기 1년 6개월 전. 그러니까 2018년 카오산 로드를 찾았다.거기서 대구에서 학교를 다닌다는 한 청년과 술잔을 기울였다. 스물셋. 2000년대 초반 만났던 와세다대학 청년과 같은 나이였다.“도서관이 아닌 낯선 세상에서 인생 공부를 해보고 싶어 여름방학 내내 공사장에서 힘든 일을 해 300만 원을 모았다”는 대구 청년은 “돈이 바닥날 때까지 동남아시아 곳곳을 떠돌아다닐 것”이라고 했다.전공서적이 아닌 낯선 풍경과 처음 만난 사람들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겠다는 그의 태도가 보기 좋았다.이미 생활인으로 몸과 마음이 굳어진 중년들과는 세상을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살아가고자 하는 방법이 확연히 달랐다.카오산 로드의 매력은 앞서 언급한 일본 청년과 한국 청년 같은 이들이 뿜어내는 젊음의 에너지를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비단 아시아의 청년들만이 아니다. 그곳에선 전 세계 각국에서 온 젊은이들이 가슴 안에 간직한 싱싱한 꿈과 희망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나이 지긋한 관광객들은 그걸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카오산 로드로 몰려드는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청년들이 얼마나 늘어났는지를 보면 아시아 배낭여행 시장의 회복 가능성도 점칠 수 있을 터. 앞서도 말했지만 카오산 로드는 단순한 방콕의 한 거리가 아니라, 동남아시아 여행의 가장 주요한 거점이기 때문이다.카오산 로드엔 저렴한 숙소가 많다. 하룻밤 1만 원 정도의 허름한 도미토리에서 깨어나 새벽부터 문을 여는 수상시장에서 힘겹지만 성실하게 살아가는 방콕 사람들과 만나보는 것, 다른 환경과 제도 아래서 살아온 세계 여러 나라 청년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친구가 돼보는 것.바로 이런 게 책에선 배울 수 없고, 찾을 수 없는 ‘살아있는 세상 공부’가 아닐까.그래서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카오산 로드가 조금씩 활기를 찾아가고 있다는 소식이 더없이 반갑다. 여행 속에서 인생을 배워가려는 청년들을 위해서라도 그 거리에 활력이 더해가기를 바란다.□ 보다 행복한 여행을 위해선 현지인들과 친해져야태국은 국민의 절대다수가 불교신자다. 인도에서 생겨나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 일대로 전파된 소승불교(小乘佛敎)는 무엇보다 개인의 해탈을 중요시한다. 알다시피 불교는 욕망을 버리는 수양을 통해 성숙에 이르고자 하는 종교.크고 작은 방콕의 사원에선 조용히 머리 숙이고 부처 앞에서 합장하는 적지 않은 태국인들을 볼 수 있다. 비단 사원에서만이 아니다. 불교는 태국 사람들 속으로 들어와 생활의 일부가 돼있다.상점과 카페, 심지어 술집과 거리에서도 불상을 볼 수 있는 곳이 태국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 불상 앞에 고개를 숙인다. 이처럼 독실한 종교적 자세는 보통의 태국 사람들을 겸손하고 선량하게 만든 듯했다.여러 차례 태국을 여행하면서 겪고 본 바에 따르면 태국인들은 크게 고함을 치며 치고받는 싸움을 하는 경우가 드물다.태국 사람들의 보편적 성정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이유가 있다. 여행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형성 노하우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비단 여행자와 여행자 사이에서만이 아닌, 여행자와 현지인 사이에도 그 기회는 존재한다. 처음 낯선 나라로 떠나는 사람은 현지인과의 관계 맺기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경우가 흔하다. 해외여행에서 만나는 이들은 서로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 진심을 전하기도 어렵다. ‘혹시 저 사람이 내게 사기를 치면 어떡하나’ ‘어두운 골목에 서성거리는 사람이 불량배면 어쩌지’라는 공포가 있을 수 있다.그러나, 그런 닫힌 마음과 지레짐작의 두려움으로는 제대로 된 여행을 할 수 없다는 게 기자의 생각이다.어느 나라에나 나쁜 사람은 있지만, 그래도 아직 세상엔 착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다수가 아닐까. 태국도 마찬가지다. 먼저 다가가 환하게 웃으며 물건 가격을 흥정하고, 예의를 지켜 길을 묻는 여행자에게 해를 끼치는 현지인은 드물 터.그러니, 마음을 열고 ‘세상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태도를 취하는 게 한층 즐거운 태국 여행으로 당신을 이끌 것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9-06

영일만과 동빈내항에 온갖 고기들이 넘쳐나

산업화 이전 포항의 바다 풍경은 어땠을까? 이북의 유년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낚시를 다녔던 한동웅 선생은 포항에 와서도 낚시를 즐겼다. 덕분에 누구보다 영일만과 동빈내항, 칠성천, 해도 염전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해낼 수 있었다. 김 : 교직에 오랫동안 계셨는데, 감회는 어떻습니까?한 : 우여곡절 끝에 교단에 섰는데 38년 6개월 근무하고, 그중 16년이나 교장을 했으니 복 받은 사람이지.김 : 교사로서 좌우명이나 원칙 같은 게 있었다면.한 : 나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어. 정의와 정직을 중요하게 여겼고, 그게 원칙이라면 원칙이었지. 간혹 학교에 납품하는 사업자가 미끼를 던질 때가 있는데 나는 원칙대로 단호하게 대처했어. 민주적인 교장이 되려고 노력했고, 교사들하고도 잘 지냈지. 교장으로 있으면서 교사들에게 고함을 지른 적은 딱 한 번이었어. 한 교사가 절차와 예의를 무시하고 행동하길래 화를 냈지. 그 직후 화를 낸 것은 사과하고 좋게 풀었어.김 : 교단에 있을 동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한 : 동지상고는 한 학년의 절반은 진학반이고, 나머지 절반은 취업반이었어. 또 진학반을 우열반으로 나누었는데, 한번은 내가 열(劣)반의 담임을 맡게 되었지. 나는 당연히 우(優)반의 담임을 맡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야. 그래서 교감에게 내가 왜 열반을 맡게 되었는지 물었더니, 우반 아이들이야 알아서 잘할 테지만 열반 아이들은 잘 이끌어줄 유능한 교사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하는 거야. 일리가 있는 말이었지. 그래서 열반을 맡고 보니 학급 아이들 태반이 태권도, 유도, 검도의 유단자더군. 그 단(段)을 모두 합하니 100단이 넘어. 그래서 내가 아이들에게 말했지. “나는 참 행복하다. 이렇게 든든한 무술 유단자를 제자로 거느리고 있으니 말이야.” 그 아이들하고 참 잘 지냈는데 기어이 사고가 나더군.김 :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나 봅니다.한 : 포항역에서 기차를 타고 경주로 가을 소풍을 가는 길이었어. 기차 안에는 경주의 한 고등학교 교사가 있었는데, 유도 유단자인 우리 반 아이와 시비가 붙은 거야. 해병대 출신인 교사가 아이한테 봉변을 당했지. 나는 그 교사한테 용서해달라고 빌었지만 용서는커녕 사건을 확대하려고 하더군. 나는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백방으로 애를 썼는데 결국 경북도교육청에서 사건을 알게 되었지. 그 일 때문에 나는 감봉 처분을 받았어. 동지교육재단 하태환 이사장에게 자초지종을 보고하니 특유의 목소리로 잘했다고 하시더군. 하태환 이사장은 그런 분이었어. 그 감봉이 교직에 있는 동안 내가 유일하게 받은 징계야.김 : 다른 얘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선생님은 낚시를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한 : 나는 낚시 마니아야. 낚시하다가 죽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어.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낚시를 배운 덕분이지. 한번은 릴낚싯대를 들고 호미곶에 갔더니 온 마을 사람들이 다 나와서 내가 낚시하는 장면을 지켜보더군. 호미곶 주민들이 릴낚싯대를 처음 본 거지. 포항은 낚시하기에 좋은 곳이어서 나는 이래저래 포항을 좋아할 수밖에 없어.김 : 부자지간에 낚시도 자주 다녔겠습니다.한 : 그랬지. 내가 어릴 때 아버지와 동생 동명이 그리고 나 셋이서 낚시를 자주 다녔어. 나룻배를 타고 영일만에 나간 적도 여러 번 있었지. 과거 영일만에는 고기가 엄청 많았어. 특히 바닥을 뱀장어로 깔아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뱀장어가 많았지. 하루는 얼마나 큰 뱀장어가 잡혔는지 아버지도 기분이 꺼림칙했던 모양이야. 영일만 이무기가 올라온 것 같다며 용왕님께 잘못한 걸 빌고 집으로 가자고 하셨어. 김 : 영일만에 어떤 어종이 많았습니까?한 : 온갖 고기가 다 있었지. 청어와 정어리는 정말 많았어. 물 반 고기 반이라는 말이 실감 날 정도였지. 조업 나간 뱃사람들이 청어와 정어리를 적당히 싣고 들어오면 될 텐데, 욕심을 못 이기고 갑판 가득 싣고 들어올 때가 있어. 그러다가 선착장 가까이 와서는 고기 무게를 못 이겨 배가 가라앉기도 했지. 고등어 떼가 영일만에서 뛰어오를 때는 장관이었어. 요즘은 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다는 감성돔도 지천이었고.김 : 고래를 보신 적도 있습니까?한 : 내가 어릴 때는 고래가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지. 1950년대 후반으로 기억하는데, 여름철 송도해수욕장에 고래가 얕은 바다까지 들어왔어. 그때 해병대 하계 휴양소가 송도에 있었거든. 해병대 대원들이 모터보트를 급히 띄워서 총을 쏘며 고래를 쫓아갔지. 피서객들은 박수를 치고 발을 동동 구르며 난리가 났어. 그런데 고래가 잡힐 리 있나. 도구 쪽으로 유유히 사라지더군. 영일만에 고래밥으로 통하는 곤쟁이가 많았어. 그러니 영일만에 고래도 많았을 거야. 학꽁치 잡을 때도 곤쟁이가 최고 미끼인데 지금은 구할 수가 없지.김 : 동빈내항이나 칠성천 쪽은 어땠습니까?한 : 비 내린 다음 날 동빈내항에 가면 황토가 씻겨 들어와 누렇게 변해 있었어. 그런 날에는 민물장어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잡혔지. 칠성천에는 상류까지 황어와 고등어 떼가 올라왔어. 어느 날엔가 칠성천에서 낚시를 하는데 탄띠가 올라오는 거야. 6·25전쟁 때 희생된 군인의 탄띠지. 그 실한 고기들이 사람 먹고 자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김 : 해도 염전 쪽에도 고기가 올라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한 : 염전 사이로 가자미와 숭어 떼가 올라왔지. 가자미는 힘이 좋아서 잡는 재미가 쏠쏠했어. 숭어를 잡으려고 해도 다리 근처에 사람들이 싸릿대로 물길을 막고 가마니를 깔아두었어. 그러면 팔뚝만 한 숭어가 싸릿대에 걸려서 가마니 위로 펄쩍펄쩍 뛰어올랐지. 그뿐만이 아니야. 당시에 송도다리가 ‘찢어져 있다’고 했어. 배의 돛대가 지나갈 수 있도록 다리 사이를 살짝 비워둔 거지. 그 위에 염전으로 유명한 염동골이 있었는데 거기까지 황어와 감성돔이 올라왔어.김 : 수영도 잘하셨습니까?한 : 강과 바다가 곁에 있으니까 웬만한 아이들은 수영을 잘했지. 동네 아이들과 헤엄쳐 형산강을 건너 송정까지 가기도 했어. 당시 송정에는 사람의 발길이 거의 없었거든. 송정 백사장에 멸치 떼와 숭어 떼가 뛰어오르기도 했어. 조개는 또 얼마나 많았던지 마대에 넣으면 무거워서 들지도 못했어.김 : 생선을 좋아하시겠습니다.한 : 말해 무엇하겠어. 특히 고래고기를 좋아해. 교직에 있을 때는 퇴근하면 시내 대흥식당에서 살다시피 한 적도 있어. 그 집에서 고래고기를 즐겨 먹었지. 아동문학가 손춘익이 아버지를 따랐기에 나와도 친했어. 하루는 손춘익과 구룡포에서 고래고기를 안주 삼아 술을 거나하게 마셨어. 남은 고래고기를 시멘트 포장지에 둘둘 말아서 포항행 완행버스에 탔지. 그러고는 버스 뒷좌석에 앉아서 고래고기를 꺼내 또 술을 마신 거야. 입맛을 다시는 승객들이 있길래 어울려서 술판을 벌였지.김 : 술 인심이 좋았던 시절의 얘기군요.한 : 아마 이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을 거야. ‘날로, 하머, 과타.’ 대폿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다 보면 그 옆에 한 술꾼이 쓸쓸하게 앉아 있을 때가 있어. 그에게 소주잔을 권하면 ‘날로’라고 해. 풀이하자면 ‘나에게 술잔을 주는 겁니까?’ 하는 뜻이야. 조금 있다가 또 술잔을 권하면 ‘하머’라고 하지. ‘벌써’라는 뜻이야. 한 뜸 들였다가 또 한 잔을 권하면 껄껄 웃으면서 ‘과타’라고 해. ‘과하다’라는 뜻이지. 난생처음 보는 술꾼끼리도 그렇게 정을 나누던 시절이었어.김 : 1940년대 후반부터 포항을 지켜보셨습니다. 포항의 변화상을 짤막하게 말씀해주신다면.한 : 1960년대 후반까지 포항은 한적한 항구도시였지. 그때는 구룡포항이 더 활발했어. 포항제철이 들어서면서 포항은 상전벽해의 변화가 일어났지. 포항이 이렇게 변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2022-09-05

비 수원 출신 첫 시장 당선… “진실성 알아봐 주신 거죠”

그야말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선거였다. 이재준 수원시장은 지난 6월 1일 전국지방선거에서 인구 100만 이상 특례시 가운데 유일하게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당선됐다. 2위 후보와의 표차는 2천928표. 고작 0.57%p 앞지른 초박빙 승부였다. 이 시장은 포항시에서 초·중·고교를 졸업했다. 수원은 전통적으로 지역색이 강한 도시다. ‘비 수원’ 출신으로 시장에 당선된 건 이 시장이 처음이다. 이 시장은 ‘수원을 사랑하는 마음’을 시민들이 알아준 결과라고 했다. -당선의 가장 큰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지.△수원 출신은 아니지만 ‘누구보다도 수원을 사랑하는구나’라는 진실성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끝까지 저를 지켜줬다고 생각한다.이 시장은 도시공학 박사다. 공학도로서 첫 걸음을 수원에서 내딛었다. 포항고등학교 졸업 후 출향(出鄕)해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도시가 수원이었다.-어떻게 수원에 자리를 잡게 됐는지.△성균관대학교가 수원에 있다. 그걸 모르고 수원에 온 거다. 짐 싸들고 스무 살 때 처음 도착했다. 수원은 시골 촌놈인 내가 정착하기 좋은 도시였다. 집값도 안정돼 있고 선택해서 살만한 적절한 도시였다. ‘같이 어울려서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은 공동체를 가진 도시였다.진학을 위해 수원에 들어왔고 젊은 나이에 교수가 돼 주거지를 정할 때도 수원을 떠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도시에 녹아들어 ‘수원 사람’이 됐고 인구 120만 대도시의 시정을 이끌게 됐다. 이 시장은 학창시절 포항시 남구 효자동에 살았다. 아버지는 일용직 노동자였다.-포항에 대한 기억은.△효자동에 살았다. 효자동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머릿속에 포항제철 사원주택을 생각하는데 거긴 산 위 동네고 저는 아래에 가난한 동네에 살았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고 많이 변했지만 예전에는 산 아랫동네와 윗동네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산 아래 효자동에 살던 소년은 산 위 포항제철 사원주택 단지를 동경했다. 녹지가 어우러진 단독주택과 문화 인프라는 소년에게 신세계였다.△산에 올라가면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이런 세상이 있구나. 이건 도대체 누가 만들었을까?’라고 생각했다. 위화감도 느꼈다. ‘우리 아버지는 왜 저런데서 못 사나’라고.이 시장은 우리나라 친환경 주거단지 연구의 선구자다. 15년의 학자 생활 동안 연구의 초점을 ‘자연 친화적인 주거 환경’에 맞췄다고 했다. 학자로서 포철 사원주택 단지는 지금 봐도 완벽에 가까운 도시 계획이라고 했다.-당시 포철 사원주택 단지가 어떤 점에서 ‘좋은 도시’로 평가받는 걸까?△공원 녹지 속 곳곳에 아파트가 들어가 있다. 문화예술 극장(효자아트홀)도 있다. 체육시설도 잘 갖춰져 있는데 이런 곳이 전국에 없다. 지금 도시의 아파트를 보면 공원 녹지가 어디 있나. 그냥 의무적으로 몇 퍼센트 겨우 들어가 있는 정도다. 어린 시절 동경이 깔려 있어서 그런지 학자 시절 15년을 생태와 도시를 연구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친환경적인 주거단지 계획을 연구하기도 했다.-자연과 어우러진 도시 환경이 왜 중요한가?△우리가 원래 그런 데서 살아왔다. 인간과 자연이 근접해서 또 동화돼서다. 그런데 기술과 욕망이 발전하니 자연을 능가하려 한다. 한계를 넘어가면 자연재해가 일어나고 코로나19와 같은 질병도 생긴다. 욕망이 너무 펼쳐진 결과다.학자의 길에 들어서기 전엔 학생운동을 했다.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이었기에 차별에 분노했고 열심히 투쟁했다.△어릴 때는 막연하게 ‘학자가 돼야겠다’는 생각은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선 학생운동을 열심히 했다. 아버지가 노동자였으니까. 그런데 3학년 말쯤 돼서 ‘노동 운동 현장으로 가야 된다’고 주장하는 선배들이 있었다. 구로나 안산 쪽 현장이었다. 나도 선택을 해야 하는데 갈등이 생겼다. 내 아버지가 일용직 노동자인데 ‘노동조합을 구성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운동을 해야 하나’라는 갈등이다. 아버지조차도 노조에 가입을 못 하는데….이 시장은 학생운동을 접고 전문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이후 박사 과정까지 내리 달렸다. 34살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됐다. 이때부터 시민운동을 시작했다. 경실련에서 도시개혁센터 정책위원장으로 활동했고 녹색연합 등에서 환경 운동을 했다. 이 시절 염태영 전 수원시장을 만났다.-선출직에 출마하겠다는 결심은 언제 하게 된 건지.△염태영 시장이 정치를 한다고 해서 도와줬는데 당선이 됐다. ‘열심히 하세요’ 하고 말았는데 갑자기 제2부시장 제도가 생겼다. 염 시장이 당선 3개월 뒤에 나에게 ‘당신이 정책을 만들어줬으니 시에 들어와서 집행을 좀 하라’고 했다. 부시장을 2년만 하려고 그랬는데 5년이나 하게 됐다. 그때도 정치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임기 말 쯤 ‘정치와 행정이 가진 힘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지난 6·1 지방선거 당선 과정은 드라마틱했다. 이 시장은 학연도 지연도 혈연도 없는 수원에서 당선될 수 있었던 건 자신이 섬겼던 ‘도시의 천사들’ 덕이라고 했다.△예를 들자면 부시장 시절 업무추진비가 항상 많이 남았다. 그때 정치를 할 생각이 있었다면 여러 사람들 만나는데 썼을 텐데….(웃음) 한동안 ‘어디다 업무추진비를 쓸까’ 생각하다 ‘우리 도시의 천사들에게 밥을 사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모범운전사, 방범대원, 환경미화원 같은 분들이다. 그 분들이 나중에 말씀하시더라. ‘밥은 고사하고 찾아와 준 사람도 없다. 당신이 우리를 섬긴 것을 알고 있다’고.이 시장은 기업 유치를 통해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겠다고 했다.△수원은 매력적인 도시인데 지금은 쇠퇴하는 느낌이 있다. 기업이 많이 줄었고 일자리가 줄었다. 도시 생기가 점점 떨어지는 거다. 행정가로서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수원은 기업을 유치하는 게 필요하겠다. 일자리를 만들고 기업을 통해 경제에 활력을 불어 넣는 게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첫 번째로 하고 있다. 최근 생활고를 겪던 어머니와 두 딸이 숨진 채 발견된 ‘수원 세 모녀 사건’. 이 시장은 복지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데 마을 공동체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지역의 이웃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위기 가구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아이디어를 추진 중이다.△그들을 찾지 못한 행정이 잘못한 거다. 제도가 갖춰져 있다 없다 논의는 둘째 문제고 그런 사람들을 돌봐야 하는 게 정부다. 사각지대가 너무 많다. 동네에서는 사람들이 다 안다. 누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지원을 받고 있는지. 공동체가 복지비도 사용을 하고 적극적으로 돕는 정책을 지금 추진 중이다.수원시와 포항시는 자매도시다. 2009년 두 도시가 결연을 맺은 이래 다양한 교류가 이뤄지고 있다. 2017년 포항지진 당시엔 수원시가 봉사단과 구호물품을 보내오기도 했다. 이 시장은 이번 포항불꽃축제를 맞아 포항을 방문한다. 시장 스스로가 도시간 우애의 상징이 됐다.△수원과 포항은 가장 끈끈한 자매도시다. 포항 출신이 수원시장이 되어 이번에 방문하게 됐다. 저로선 가슴이 벅차다. 이제까지 두 도시가 문화교류나 체육교류를 잘 해왔다. 나아가서 경제 교류까지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재준 시장은1965년 충남 연기군에서 태어났다. 경북 포항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1983년 성균관대에 입학 했고 서울대학교에서 석·박사 과정을 거쳤다. 협성대학교와 아주대학교 등에서 교수생활을 했고 경실련 도시개혁센터 정책위원장을 맡아 다양한 도시 관련 시민운동을 벌였다. 도시설계 전문가로 국내외 신도시 설계에 참여했다. 2011년부터 5년간 수원시 제2부시장 직을 맡았다.이재중TV조선 탐사보도부 기자. 우크라이나 전쟁, 파리 테러, 네팔 대지진, 로힝야 사태 등 국제 분쟁·재난 취재를 해 왔다. 국제부와 사회부 법조팀 등을 거쳐 현재 탐사보도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이다. 2016 한국기자상 대상, 2017 관훈언론상 등을 수상했다.

2022-09-05

한국문학 거장 동리와 목월에게 문학적 영감을 주다

□동리목월 경주가 낳은 위대한 문인토함산은 수많은 예술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토함산에 깃들어 있는 불국사와 석불사(석굴암)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인물은 수없이 많았다. 토함산과 불국사, 석불사를 가장 화려하게 표현한 이는 상허 이태준이었다. ‘조선의 모파상’이라 불리던 천재 소설가답게 그가 표현한 토함산은 매혹적이다. 김동리 선생 김동리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 ‘화랑의 후예’ 당선소설 ‘무녀도’ ‘황토기’ ‘등신불’ 등소재·정서에서 민족정신 ‘정수’ 느낄 수 있어작품 ‘을화’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박목월 시인 박목월경주의 자연, 문학적 상상력 터전과 자양분1954년 시 ‘불국사’ 발표불교적 선 의식 바탕 절제된 언어로 그려내동리·조지훈과의 인연이 맺어진 곳도 경주박두진과 함께 엮은 3인 시집 ‘청록집’ 펴내 “산의 고요함은 엄숙한 경지였고 잠이 깊이 들지 못함은 소리 없는 여명을 놓칠까 함이었다. 우리들은 보송보송한 채 중보다도 먼저 일어나 하늘이 트기를 기다렸다. 하늘이 튼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사람으로는 모래알만큼 적어서 기다리고나 있어야 할 거대한 탄생이었다. 몇만 리 긴 성에 화광(火光)이 뜨듯 동해언저리가 벙짓이 금이 도는 듯하더니 은하색 광채가 번져오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 어둠은 둘레둘레 빠져나간다. 보살들의 드리운 옷주름이 그어지고 도틈도틈 뺨과 손등들이 드러나고 멀리 앞산 기슭에서는 산새들이 둥지를 떠나 날아나간다. 산등성이들이 생선가시 같다. 동해는 아직 첩첩한 구름갈피 속이다. 그 속에서 한 송이 연꽃처럼 여명의 영주(領主)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토함산과 불국사를 사랑했던 또 다른 인물은 경주가 낳은 한국문학의 거장 김동리와 박목월이다. 토함산 불국사 주차장과 관광안내소를 지나면 동리목월문학관 이정표가 보인다. 불국사 정문 앞 작은 연못을 가로지르는 아치형 다리를 건너면 너른 마당에 푸른 기와의 동리목월문학관이 서 있다. 동리목월문학관은 2006년 건립됐고, 두 위대한 문인을 널리 알리기 위해 문학상도 제정했다. 문학관 로비 왼쪽의 동리문학관과 오른쪽의 목월문학관이 마주 보고 있다. 마치 쌍둥이처럼 닮은 두 곳의 문학관은 문인의 흉상과 서재가 재현돼 있고 자필 원고, 문학 자료, 생활 유품들이 전시돼 있다. 넓이도 각각 224.7㎡로 동일하다.이곳에는 동리목월기념사업회가 유족들로부터 기증받은 자료가 소장돼 있다. 두 작가의 자필 원고 200점, 시집·소설집 등 문학 자료 1천500여 점, 생활 유품 250여 점 등 국내 문학관 중 가장 많은 자료가 있다.‘동리문학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김동리(金東里·1913~1995) 흉상과 마주한다. 흉상 뒤편에는 ‘동리문학은 나귀이다. 모든 것이 죽고 난 뒤에 찾아오는 나귀이다’라는 이어령 교수의 글이 적혀 있다.김동리는 1913년 경상북도 월성군 경주읍 성건리 186번지에서 아버지 김임수와 어머니 허임순의 5남매 중 3남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시종(金始鍾)이다. 김동리 아버지는 늘 술에 취해 행패를 부렸고, 어머니는 그런 현실을 피해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 독실한 기독교인이 된다. 김동리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1934년 신춘문예 공고를 보고 각 신문사의 상금을 모두 타볼 작정으로 한 달 만에 소설 3편, 희곡 2편, 시 3편, 시조 3편을 써서 응모하는 열정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백로’만 가작으로 뽑힌다. 1935년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화랑의 후예’가 당선되고, 소설에 전념하기 위해 다솔사와 해인사 등에서 은거한다.동리의 작품 소재와 정서에서 민족정신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 그의 작품 ‘무녀도’, ‘황토기’, ‘등신불’ 등은 대부분 고향 마을 경주에서의 어린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들이었다. 특히 ‘을화’는 토착문화의 전통을 인류의 보편성으로 인정받으면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문학관에는 그의 작품을 바탕으로 제작된 애니메이션이 상영되고, 그의 작품과 손때 묻은 유품들이 전시돼 있다. □박목월에게 시적인 영감을 준 경주‘목월문학관’에서도 시인 박목월(朴木月·1915~1978)의 흉상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흉상 뒤에는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란 시구가 적혀 있는데,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시 ‘나그네’다. 문학관에는 시인의 생애와 문학작품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연보가 걸려있다. 목월문학관에는 친필 원고와 서신, 시집, 동시집, 산문집과 시인이 직접 발행한 잡지 ‘심상’과 ‘여학생’, 시인이 받은 훈장과 상패, 감사패 등이 전시돼 있다. 한국 문단의 거목이자 청록파 시인으로 잘 알려진 시인은 경북 월성군(지금의 경주) 서면 모량리에서 출생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태어난 곳은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 수남리다. 본명은 영종(泳鍾)이다. 1933년 동시 ‘통딱딱 통짝짝’과 ‘제비맞이’가 특선·당선되며 문단에 등단한다.그는 자연과 교감하면서 향토적인 서정을 작품에 담았다. 특히 그에게 경주의 산과 하늘, 자연은 그의 문학적 상상력의 터전인 동시에 시의 자양분이 됐다. 목월문학관은 박목월의 작품 시기를 초기·중기·후기로 나눠 구성했다. 초기 시는 자연과 향토적인 정서를 배경으로 창작한 작품들이다. ‘윤사월’과 ‘청노루’, ‘나그네’와 ‘산도화’ 등이 초기 시 중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중기와 후기 시는 삶에 대한 찬가와 문명 비평적 경향성을 띠고 있다.박목월은 경주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 이곳에서 시적 영감을 얻었다. 그런 이유로 목월문학관에서 경주를 배경으로 한 시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는 토함산을 시로 표현하면서 “밤 골짜기의 물소리./구름이 밝혀든 초롱을/아아 동해너머로 둥둥 떠가는 진보라빛 환한 봉우리 하나”라고 노래했다.목월의 아들 박동규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놀러 갔던 불국사에 대한 기억을 전하기도 했다.“초등학생 시절 아버지 회사에서 불국사로 야유회를 간 적이 있다. 신발을 살 여유조차 없던 때라 어머니는 야유회 전날 시장에서 옥양목을 끊어다 내 모자와 신발을 만들어주셨다. 먼 길을 걷느라 내 발에서 피가 났고 천으로 된 신발은 붉게 젖었다. 아버지는 뒤늦게 이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이놈아 내가 너의 아버지다. 아프면 아프다고 해도 괜찮아’하면서 등을 내미셨다.” 박 교수는 “그날 땀이 흥건한 아버지의 등에 업혀 토함산을 올랐고 집까지 업혀 왔다”며 “내 뺨에 아직도 아버지의 땀이 묻어있다. 그 땀에 사랑의 본질이 감춰져 있다”고 회상했다.그런 아들이 15세가 되던 1954년 목월은 시 ‘불국사’를 발표했다.“흰 달빛/자하문(紫霞門)//달 안개/물 소리//대웅전(大雄殿)/큰 보살//바람 소리/솔 소리//범영루(泛影樓)/뜬 구름//흐는 히/젖는데//흰 달빛/자하문//바람 소리/물 소리”목월의 자연 친화 사상과 불교적 선(禪) 의식을 바탕으로 한 이 시는 달빛이 내려 비치는 불국사의 고요한 정경을 절제된 언어로 그려냈다.불국사 청운교, 백운교를 건너면 자하문(紫霞門)이 나온다. 자하문에서 범영루(泛影樓) 좌경루를 지나 금당 옆문으로 들어가서 부처님을 친견한다. 긴 회랑들은 자하문, 범영루, 경루, 강당 등 큰 건물들과 어깨를 겨누고 둘러서서 대웅전과 탑을 중심에 두고 감싸고 있다.이런 전각들의 구조적 짜임새를 눈여겨봤던 목월의 탁월한 안목은 차치하고, 시에 등장하는 흰 달빛과 달안개, 솔 소리, 뜬 그림자 등은 불국사를 자주 드나들지 않았다면 보기 힘든 절경 중 절경이다. □목월, 김동리와 조지훈과 경주로 맺어지다김동리와 교류가 이뤄진 곳도 경주였다. 김동리는 박목월보다 세 살 위다. 대구 계성학교에 2학년까지 다니다 서울 경신학교로 전학해 박목월의 중학교 선배이기도 하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경신학교에 다니던 김동리가 휴학해 경주로 내려와 있던 1934년의 겨울방학 때였다. 목월은 동리가 1935년과 1936년 연이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문학적 자극을 받았다. 동리와의 만남으로 외로움을 벗어나기도 했지만 문학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시인 조지훈과의 지극한 인연의 시작점도 경주였다. 시 ‘승무’의 조지훈 시인도 월정사에서 1년여를 살다 나와 이듬해 봄 목월을 만나기 위해 경주를 찾았다. 서로 일면식은 없었지만 두 사람은 발표한 시를 통해 문학의 깊이를 알고 있었다. 목월이 기차역에서 한지에 ‘박목월’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써서 들고 있자 지훈이 이를 알아봤다. 당시 목월은 스물여섯, 지훈은 네 살 아래인 스물 두 살이었다.일제강점기 암흑의 시대를 절망 속에서 살아가던 두 시인은 이렇게 처음 만나 따뜻한 ‘문학적 동지’가 됐다. 지훈은 열흘 넘게 경주에 머물렀다. 불국사를 답사하던 중 석굴암 앞에서 촬영한 사진은 지금도 회자 된다.황금찬 시인은 박목월과 조지훈 시인이 석불사(석굴암)로 올라가던 날을 ‘석굴암 가던 날은 대숲에 복사꽃이 피고 진눈깨비가 뿌리는 희한한 날이었다. 불국사 나무 그늘 찬술에 취하여 떨리는 봄옷 외투를 덮어주던 목월의 체온이 생각난다’고 회고한다.조지훈은 경주에서 보름이나 머물렀다. 이때 조지훈은 경주에서 머물며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목월에게 바치는 한 편의 시를 썼다.“차운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리(칠백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이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완화삼’ 전문)‘목월에게’라는 부제가 붙은 이 시를 보내자, 목월은 ‘나그네’라는 시로 화답했다. 두 시인의 만남은 광복 후 박두진과 함께 엮은 3인 시집 ‘청록집’으로 꽃을 피운다.경주 토함산과 불국사, 석불사는 단지 역사의 아이콘일 뿐만 아니라 서정주, 박목월, 김동리 등 당대 최고의 시인과 소설가들이 모여 역사의 숨결을 느끼며 위대한 작품을 생산해 낸 문학의 산실이었던 셈이다. /최병일 작가

2022-09-04

제주의 초록숲에 물든‘예술가의 흔적’ 찾아서

여름 볕에 지친 제주의 초록 숲이 서늘한 바람에 흔들려 가을빛으로 물들어간다. 계절은 또 오고, 햇살은 깊어진다. 차분해진 제주의 풍경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미술관에서는 예술의 향기가 흘러나온다. 가을의 초입, 예술을 감상하며 사색하기 좋은 미술관으로 떠나보면 어떨까.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제주시 한림읍에 있는 김창열미술관은 ‘물방울 화가’로 알려진 김창열 화백의 대표작품 220점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예술성과 대중성을 모두 갖추어 한국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로 손꼽히는 김창열은 활동 초기에 6·25전쟁의 아픔을 형상화한 추상 작품을 그렸다. 1973년 파리에서 물방울작품을 처음 선보인 후, 캔버스, 신문지, 나무, 흑연, 모래 등에 오랜 세월 물방울만 그렸다.물방울은 캔버스 위에 포도알처럼 주렁주렁 달려 있기도 하고, 흩뿌려진 빗방울처럼 맺혀 있기도 하다. 금방이라도 바닥으로 또르르 흘러내릴 듯한 물방울은 작품을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색채로 빛나기도 한다. 미술관 곳곳에서 구르는 물방울을 감상하다 보면 마치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의 선율이 들리는 듯하다.미술관 건물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한자 ‘돌아올 회(回)’처럼 보인다. 물방울을 통해 무(無)로 회귀하고자 했던 작가의 철학이 공간에 투영되었다. 건축물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빛의 중정’은 글자의 모양처럼 건물 한가운데 자리한다. 하늘이 뻥 뚫린 정원 분수 한가운데 놓인 물방울 조형물은 쏟아지는 빛을 머금어 반짝인다. 비가 그친 뒤 무지개가 떠오르듯 분수의 물줄기가 꺼지면 오색찬란한 빛이 물방울에 맺힌다. 검은 송판 무늬의 콘크리트 건물은 화산섬에 깔린 현무암처럼 제주의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이중섭 미술관한국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황소’의 화가 이중섭의 예술혼이 담긴 이중섭 미술관은 그가 머물던 서귀포에 있다.이중섭은 일본 유학 시절 만난 야마모토 마사코(이남덕)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 두 아들까지 얻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 갔다가 제주도까지 내려오게 된다. 1951년 1월부터 1년간 지낸 서귀포에서의 생활은 궁핍했다. 그림 그릴 재료와 도구가 없어 나무판자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가난 속에서도 아이들과 바닷가에 나가 게를 잡거나 농장에서 감귤을 따며 소박한 행복을 누렸다. 그래서일까. 당시에 그린 ‘서귀포의 환상’, ‘섶섬이 보이는 풍경’, ‘바닷가의 아이들’ 등에는 따뜻함이 묻어있다.이중섭 미술관이라지만 소장한 작품의 거의 없어 한산했던 미술관은 최근 이건희 컬렉션의 12개 작품이 더해져 볼거리가 풍성해졌다. 70여 년 만에 서귀포 품으로 돌아온 대표작품 섶섬이 보이는 풍경은 이중섭 미술관 근처에서 그린 것으로 평화로운 마을의 모습을 담고 있다. 미술관 옥상에 올라가 내다보면 이중섭이 바라봤을 서귀포 앞바다의 섶섬이 여전히 푸른 바다 위에 그대로 떠 있다. △김영갑갤러리두모악 미술관서귀포 동쪽 성산읍에 있는 김영갑갤러리두모악 미술관은 폐교였던 삼달분교를 개조해 2002년 문을 열었다. 한라산의 옛 이름이기도 한 ‘두모악’에는 20여 년 동안 제주의 풍경과 도민을 필름에 담아온 사진작가 김영갑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김영갑은 서울에서 제주를 오가며 사진을 찍다가 제주의 풍경에 매혹돼 1985년 정착했다. 섬, 바다, 오름, 나무, 이름 없는 풀꽃들이 하나하나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그의 필름에서 작품이 되었다. 그는 구좌읍 종달리의 풀밭 오름인 용눈이오름을 가장 사랑했다. 사계절, 이른 새벽부터 달 밝은 밤까지 열정을 바쳐 평화롭고도 쓸쓸한 오름의 초원을 사진에 담았다.당근이나 고구마로 배고픔을 달래고 돈을 아껴 필름을 샀다. 창고에 차곡차곡 쌓인 사진을 전시할 곳을 마련하기 위해 버려진 초등학교를 구했다. 공간을 다져갈 무렵,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손이 떨리고 허리에 통증이 왔다. 루게릭병이라는 진단을 받고 카메라를 들지도, 걷지도, 먹지도 못할 지경이 됐다. 점점 퇴화하는 근육을 간신히 움직여 사진 전시관 만들기에 열중했지만, 투병 6년 만에 그는 사랑했던 섬 제주, 두모악에 잠들었다.김영갑갤러리두모악 미술관의 ‘두모악관’, ‘하날오름관’에서는 지금은 볼 수 없는 제주의 모습과 속살을 감상할 수 있다. 병과 힘겹게 싸우면서도 제주의 돌과 바람, 사람을 모티브로 손수 일군 정원에는 작은 뷰파인더로 세상을 바라보며 치열하게 살다 간 예술가의 설렘과 고통이 곳곳에 배어 있다. △우도 훈데르트바서 파크소를 닮은 섬, 우도에서는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와 함께 오스트리아 대표 예술가로 꼽히는 화가이자 건축가 훈데르트바서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숙박 시설, 카페, 갤러리, 뮤지엄이 한데 모여 있는 ‘훈데르트바서 파크’의 알록달록한 색채는 신비로운 섬에 이질감 없이 잘 어우러진다. 자연을 테마로 작품을 구상하는 훈데르트바서의 철학 때문일 것이다.뮤지엄 건물은 독일에서 제작해 공수해 온 78개의 세라믹 기둥, 궁전 같은 양파 모양의 돔, 131개의 크고 작은 창문들로 만들어져 자체가 예술품이다.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훈데르트바서하우스’의 화려한 색감과 곡선미 넘치는 건축물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훈데르트바서는 ‘직선은 부도덕하며 인간성의 상실로 이어진다’고 주장하며 그림과 건축물에 물이 흐르는 듯한 곡선만 표현했다.뮤지엄 회화관에서는 빛나는 원색을 좋아한 훈데르트바서의 회화가 진품만큼 강렬한 색채를 고스란히 전해준다. 판화관에는 훈데르트바서가 직접 그린 판화 22점도 소장·전시하고 있다. 환경 건축관에는 독일 다름슈타트(Darmstadt)의 ‘나선의 숲’ 건축물 모형이 전시돼 있다. ‘나선의 숲’은 독일 다름슈타트에 설계된 서민 아파트로, 환경운동가이기도 했던 훈데르트바서가 친환경 재료를 사용해 지은 나선형 모양의 건물을 지붕까지 산책하듯 오를 수 있게 만들었다.우도의 테마파크도 그의 정신을 불어넣어 건설했다. 부지에 자생하던 1600여 그루의 나무들을 건축물에 그대로 옮겨 심었다. 메마른 건축물에서 생명이 숨을 쉰다. 자연을 품은 화려한 색채의 건물은 우도의 아름다운 풍경에 그림처럼 스며든다. 한적한 제주 독채형 숙소로 GO~여행을 일상처럼 즐기고 싶은 여행자들에게 제주의 자연을 집 안에서 오롯이 즐길 수 있는 독채형 숙소가 사랑받고 있다. 취사 가능한 주방까지 갖춘 매력적인 숙소에서 가족과 편안하게 쉬고 싶다면 제주 속 보석 같은 에어비앤비 숙소를 찾아보자.▷탁 트인 창과 툇마루에서 만나는 제주의 자연, ‘송당미학’‘오름의 정원’이라 불리는 구좌읍 송당리에 있는 ‘송당미학’은 거실의 커다란 통창으로 보이는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다. 삼각 지붕의 높은 천장으로 쾌적하고 시원한 공간감을 느낄 수 있다. 통창을 열고 나가면 툇마루에서 오름의 능선과 먼바다가 내다보인다. 흔들의자에 앉아 새소리를 듣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온전한 휴식을 누릴 수 있다.▷제주 바다와 가까운 소박한 돌담집, ‘이플’제주 동쪽 구좌읍 한동리 작은 바다마을에 있는 ‘이플’은 소박하고 아담한 독채 숙소다. 바닷가 바로 앞에 있는 낡은 돌집과 마당을 정성 들여 가꾼 숙소 침실 창으로 아침볕이 가득 들어온다. 초록 잔디 마당을 두른 돌담 너머로 보이는 바다에서 아침에는 눈부신 일출을, 저녁에는 고즈넉한 일몰을 감상할 수 있다.▷하늘 보이는 자쿠지에서 누리는 제주의 운치, ‘북촌리브’제주시 조천읍의 ‘북촌리브’는 욕실 천장 창에서 하늘이 보이는 자쿠지가 있다. 안거리와 밖거리에 각각 잔디마당이 있다. 정겨운 돌담집 내부는 서까래 기둥을 살려 전통적이면서도 모던하고 깔끔하다. 마당에서 바비큐를 즐길 수도 있고, 바닷가 어촌마을에 있어 집 밖을 산책하며 바다를 만날 수 있다. /제주=글·사진 이솔 객원기자

2022-09-01

하태환의 배려로 동지상고에서 교편 잡아

대학 졸업 후 포항으로 돌아온 한동웅 선생은 우연한 기회에 영일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고, 4년 6개월 후 동지상고로 옮기게 된다. 교사자격증도 없이 시작한 교사 생활은 우여곡절이 계속 이어진다. 김 : 대학 졸업 후 포항에 오셨는데 당시 상황이 궁금합니다.한 : 그때는 대학 재학 중에 입대하면 1년 6개월 만에 제대할 수 있었거든. 그런데 1년 6개월이란 시간이 아까웠던 거야. 대학을 졸업하고 길을 잘 찾아보면 군 복무 기간을 줄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돌이켜보면 내 생각이 짧았던 거야. 군 소집 영장을 피해 다녔으니 진로 선택에 얼마나 큰 제약이 있었겠어. 국가 공무원 시험은 아예 볼 수도 없었지. 좀 쉬면서 때를 기다려 보자는 생각으로 포항에 온 거야. 군 복무는 나중에 동지상고 교사로 근무할 때 50사단에 가서 6주 훈련받고 끝냈어.김 : 포항에 와서는 어떻게 지내셨습니까?한 : 영어 강사로 바빴지. 영어를 잘 가르친다고 소문이 나서 자전거 타고 가정교사를 많이 다녔어. 포항여고 상위 학생들 그룹 과외를 했고, 한영빈 기독병원 원장의 아들도 가르쳤어. 영일군청 앞에 수학학원이 있었는데 포항여고 학생들이 많이 다녔지. 그 학원 대표의 제안으로 학원에서 영어 강의를 했는데 만원을 이루었어. 덕분에 돈을 많이 벌었지만 돈 쓸 시간이 없었지. 학원 바로 앞에 탁주집이 있었는데, 강의를 마치고 나면 거기서 탁주 곱빼기 한 사발 들이키는 게 낙이었어.김 : 교직에는 어떻게 들어갔습니까?한 : 포항수산초급대학에 김익하 교수라고 있었어. 영일중학교의 설립자인 김익로의 사촌으로 당시 영일중학교 이사장을 맡고 있었어.그분이 아버지에게 부탁한 거야. 영일중학교에 영어 교사가 필요하니 나를 좀 보내달라고. 나는 교직에 뜻이 없었어. 당시 대졸자는 신청만 하면 2급 정교사 자격증을 주었는데, 내가 선생 하겠냐는 생각에 신청조차 안 했거든. 그런데 조건이 딱 6개월 근무였어.김익하 교수가 아버지에게 어렵게 부탁한 것이어서 승낙했지. 그런데 영일중학교 근무 기간이 4년 6개월이나 되고 말았어.김 : 무슨 사연이라도 있었습니까?한 : 술과 정 때문이었지. 술을 좋아하다 보니 함께 술 마시던 교사들과 정이 들었고 아이들과도 정이 들었어. 이런 일도 있었지. 어느 날 도교육청에서 무자격 교사는 모두 내보내라는 지시가 내려왔어. 나는 어쩔 수 없이 학교를 그만두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지. 그런데 아이들이 난리가 난 거야. 특히 덩치 큰 규율부 아이들이 선생님 가시면 안 된다며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어.김 : 영일중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겠네요?한 : 그만두긴 했는데 학교에서 영어 교사를 못 구해서 결국 다시 부임했어. 여러모로 허술한 세상이니까 가능한 일이었지. 아이들을 계속 가르치려면 교사자격증을 취득할 수밖에 없었어. 그래서 교원자격 검정고시에 응시해 2급 정교사 자격증을 취득했지. 정치외교학과 출신이어서 사회과 교사자격증을 받았어.김 : 영일중학교 축구부가 강하지 않았나요?한 : 그랬지. 1950년대에 전국대회 우승도 했잖아. 굉장한 사건이었지. 교무실에 축구부가 받은 상장이 빼곡하게 있었어. 김 : 동지상고로는 어떻게 옮기게 되었습니까?한 : 동지상고 교사 중에 서석두라고 있었어. 나와는 절친한 친구였지. 장기가 고향인데, 알다시피 유배지인 장기 출신 중에 인재가 많잖아. 서석두도 그중 한 명이야. 포항중학교를 거쳐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수재였지. 술을 좋아하고 노래도 잘 부르던 낭만파였는데 나중에 포항제철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 퇴임해. 서석두가 장기중학교에 근무할 때 내가 버스 타고 그 먼 장기까지 가서 밤새 술 마시고 학교 숙직실에서 같이 자기도 했어. 그 친구가 동지상고 영어 교사 자리가 비었다고 오라고 한 거지. 서석두는 안타깝게도 수년 전에 작고했어.김 : 동지교육재단을 설립한 하태환 씨 권유로 동지중학교에 입학한 인연이 있는데, 다시 동지상고 교사로 가게 되는군요.한 : 그 과정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어. 4·19혁명이 일어난 후 지방으로 가서 4·19 정신을 전파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어. 나도 이 흐름에 동참했지. 혁명 후 국회가 자진 해산하고 7월 29일 역사상 처음으로 민의원의원 선거와 참의원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그 직전이었어. 나는 포항으로 와서 군중으로 가득 찬 육거리에서 연설했지. 한일은행(현 우리은행) 앞에 트럭을 세워두고 그 위에서 마이크를 잡고 목소리를 높였는데, 시공관(현 시립중앙아트홀) 앞에서 누군가 지프차를 세우더니 트럭 앞으로 다가오는 거야. 지팡이를 짚고 오는 사람은 하태환 씨였어. 당시 민의원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니 그 상황을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겠지. 특히 내 연설은 혁명 전에 자유당 의원이었던 하태환 씨 귀에 거슬리지 않았겠어. 그런데 막상 트럭 앞에 와서는 내 옆에 있던 친구 김박문의 가슴을 지팡이로 찌르며 나무라는 거야. 내가 한흑구의 아들인 줄 아니까 차마 나를 나무라지는 못하고 애꿎은 친구한테 분풀이를 한 거지. 그때 그런 일이 있었는데 하태환 씨가 세운 학교에 내가 지원했으니 어떻게 되었겠어?김 : 동지상고로 가는 게 쉽지 않았겠군요?한 :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겠지. 그런데 가능했잖아. 사연은 이래. 김병윤 씨라고 동지교육재단 설립과 운영에 크게 기여한 분이 있어. 하태환 씨의 손아래 처남인데, 이분이 하태환 씨를 찾아가 나를 동지상고 영어 교사로 채용하자고 말을 꺼냈어. 그랬더니 하태환 씨가 “그 친구는 한흑구 선생 장남 아닌가. 1960년 7월 선거에서 나를 낙선시키려고 한 놈인데 안 돼”라고 했다네. 김병윤 씨가 그때 일은 다 지나갔고 영어를 잘 가르친다고 소문난 교사인데 채용하는 게 어떠냐고 다시 건의하니 하태환 씨가 순순히 그렇게 하자고 했다는 거야. 훗날 누군가한테 이 대화를 전해 들었어. 하태환 씨는 그렇게 통이 큰 분이었지.김병윤은 1922년 포항에서 태어나 일본 오사카전문학교 법과를 중퇴하고 포항수산초급대학 증식학과를 졸업했다. 동지교육재단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포항시의회 의원, 포항시체육회 회장, 동지교육재단 이사장, 포항수산초급대학 학장, 포항시장(1959년), 농림부 차관을 역임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포항시·울릉군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김 : 친구 김박문 씨는 어떤 분입니까?한 : 포항중학교를 거쳐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했지. 죽도시장에서 신성상회를 운영하며 부를 일구었고, 신앙심이 깊어 제일교회 장로를 지냈어. 부친도 제일교회 장로였으니 대를 이어 장로를 한 거지. 재담이 뛰어나 친구들이 좋아했어. 제일교회에서 노인학교 교장을 했는데 재담 덕분에 인기가 높았지. 그래서 교장 임기가 끝났는데 노인들이 계속하라고 하는 바람에 교장을 더했다고 해. 건강이 안 좋은지 근래 연락이 통 안 되네.김 : 동지상고 교사 생활은 어땠습니까?한 : 1968년 8월 31일부로 동지상고 교사로 발령을 받아. 그런데 또 하나의 장애물을 만나게 돼. 나는 사회과 교사자격증을 갖고 영어를 가르쳤거든. 나처럼 중고등학교에서 자신이 전공하지 않은 교과목을 가르치는 교사를 상치(相馳)교사라고 해. 그런데 도교육청에서 상치교사가 있으면 안 된다고 자꾸 지적하는 거야. 그 바람에 나도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지.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고시검정이라는 걸 치러 영어 교사자격증을 취득해야 했어. 당시엔 고시검정이 사법고시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어. 결국 이 시험을 치렀고 최종 합격자 21명 안에 들었지. 정치외교학과 졸업생이 학교에서 마음 편하게 영어를 가르치게 되는 과정이 멀고도 험난했어.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2022-08-31

아시아·유럽이 공존 두가지 매력 속으로

이른바 ‘코로나19 사태’가 2년을 넘겨 3년째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다.이제 한국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도 이 바이러스가 ‘죽음을 부르는 치명적인 전염병 유발체’가 아닌 ‘감기처럼 누구나 언제든 감염될 수 있는 병의 하나’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코로나19 바이러스가 들불처럼 번지던 2020년 초반에는 국가들마다 국경의 빗장을 닫아걸고 외국인의 출입을 막았다. 예외인 나라가 드물었다. 하지만, 현재는 상당수의 국가가 나라 밖에서 찾아오는 관광객들의 입국을 허용하는 추세.사실 어떤 극악한 바이러스도 ‘내가 사는 이곳이 아닌, 가보지 못한 낯선 공간을 여행하고 싶다’는 인간의 본질적 욕망을 온전히 막을 수는 없다.올해 들어 부쩍 늘었다는 해외여행객들은 이번 여름휴가 기간에도 가까운 나라건, 먼 곳이건 외국을 찾았다. 관광객들의 해외여행 욕구는 연휴가 이어질 추석에도 통제되지 못할 듯하다.“1~2년에 한 번쯤 다녀오는 외국 여행이 지루하고 무료한 삶에 활력소가 된다”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기자 또한 이 말에 동의한다.코로나19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위드 코로나 시대’는 어쩔 수 없이 보편화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건 외국이건. 아직은 두려움과 망설임 속에서 외국으로의 여행을 주저하는 사람들이 더 많지만, 코로나19의 그늘이 보다 명확하게 걷히는 게 확인된다면 다시금 비행기를 타려는 이들이 공항을 채울 터.‘위드 코로나 시대’라고 해도 철저한 방역수칙 준수로 바이러스 감염의 가능성을 낮추는 건 중요한 일. 그걸 염두에 두고 몇 해 전 다녀온 튀르키예 여행을 추억하며, 아주 오랜만에 해외여행을 준비해본다. □ 한국을 ‘형제의 나라’로 부르는 튀르키예 노인들아직까진 ‘터키’라고 부르는 것이 더 익숙한 나라 튀르키예는 2022년 5월 그들 국가의 명칭을 바꿨다. 공식 영어 표기가 수정된 것이다. 터키(Turkey)는 영어로 칠면조라는 뜻이 있고, 또한 속어로는 ‘비겁한 사람’을 지칭하기도 한다.그러니, 과거 한때 아시아와 유럽에서 위세를 떨쳤던 ‘용감한 민족’으로 스스로를 말하는 튀르키예 사람들에게 ‘터키’라는 국호가 기분 좋게 들릴 리 없었다.실제로 튀르키예인들의 용맹성은 중세의 정복전쟁만이 아닌 1950년대 초반 한국전쟁에서도 발휘됐다. 속설처럼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튀르키예 군대에는 ‘작전상 후퇴’라는 게 없다고 한다. 무조건 돌격해 적이 굴복하거나 자신이 죽을 때까지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 모든 게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환경 속에서 한국전쟁에 참전한 튀르키예 군대는 우리 땅 곳곳에서 용맹하게 싸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6·25 한국전쟁 때 파병된 군인 숫자 대비 전사자가 가장 많은 나라도 튀르키예라고 한다.몇 해 전 튀르키예를 여행하면서는 한국전쟁 파병용사를 만나기도 했다. 이스탄불을 출발해 이란에서 가까운 튀르키예 동쪽으로 달리는 기차. 70대 노부부가 기자와 같은 침대칸에 탑승했다.할아버지는 함께 기차에 오른 사람이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볼 때마다 웃었고, “우리는 형제”라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30시간쯤을 같은 공간에 있었으니 할아버지가 건네주는 큼직한 빵과 할머니가 깎아주는 사과도 여러 개 얻어먹었다.비단 그 노부부만이 아니었다. 한 달쯤의 튀르키예 여행에서 “한국은 우리와 형제의 나라”라고 말하는 이들을 적지 않게 만났다. 그들이 때마다 홍차와 달콤한 튀르키예 과자를 권하는 건 하나의 정해진 수순 같았다.여행의 즐거움 중 절반은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선물한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튀르키예 여행은 한국인들에게 즐거움의 50%를 미리 보장해주는 여정이 아닐지.최근 몇 년 사이 튀르키예는 폭등하는 물가와 경제 성장 둔화로 적지 않은 국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한다. 기차에서 만난 친절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희망을 잃지 않고 건강하기를 빈다. □ 아시아·유럽 경계 지역에 위치… 다양한 볼거리가튀르키예는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그렇기에 두 대륙의 특성과 매력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여행지다.수도인 앙카라와 경제 중심지 이스탄불에서는 도시에서의 세련된 삶을 지켜볼 수 있고, 이란·아르메니아 등과 가까운 동부는 한국의 1970년대 같은 시골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2주를 이스탄불에 머문 기자는 거기서 독특한 체험을 했다. 그 도시는 유럽지구와 아시아지구로 나눠져 있는데, 두 지역을 넘나들려면 10~20분간 배를 타야 한다.한국의 버스 요금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아시아와 유럽을 한눈에 담아볼 수 있는 묘한 매력이 있는 이스탄불의 여객선들. 해변에 세워진 모스크와 고딕풍 건물들도 꽤나 인상적이라 관광객들은 배에 탈 때부터 내릴 때까지 카메라를 손에서 내려놓지 못했다. 배 위에선 500원 정도면 마실 수 있는 홍차를 독특한 모양의 잔에 담아 판매한다. 짙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그걸 마시는 재미도 놓치면 아쉽다.이스탄불 사람들은 우리와 달리 느긋해 보였다. 여행지에서 파는 엽서에 곧잘 등장하는 갈라타 다리 위에서 하루 종일 조그만 물고기를 낚는 강태공들이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는 풍경이 한적하고 평화롭게 느껴졌다.튀르키예의 이색적인 여행지는 이스탄불 외에도 숱하다. 카파도키아와 괴레메에서는 바위를 뚫어 만든 독특한 숙소에서 잠을 청하며, 기묘한 형상의 바위들을 둘러보는 체험이 가능하다.고대 로마의 유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파묵칼레 역시 튀르키예에 간다면 꼭 찾아봐야 할 곳. 바다로 떨어지는 폭포가 장관인 안탈리아 역시 한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관광지다.조금 더 모험심을 가진다면 튀르키예 동쪽 끝자락에 있는 도우베야지트도 방문하지 못할 게 없다. 이란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그 도시엔 ‘노아의 방주’가 만들어졌다는 아라라트 산이 있다.쿠르드족이 다수 거주하는 도우베야지트에선 그들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양고기는 물론 낙타고기로 만든 요리도 먹는 게 가능하다.낙타고기 맛은 어땠냐고? 지방이 적은 소고기를 먹는 것과 비슷했다. 여기에 더해 조그만 축제에서 본 쿠르드족의 애잔하고 슬퍼 보이는 전통춤은 잊기 힘든 기억으로 남았다. □ 큰 나라지만 비행기보다는 기차와 버스로 여행을고속열차가 나라의 끝에서 끝까지를 2시간 30분이면 달리는 한국. 이와 달리 튀르키예의 기차는 느리다. 하지만, 20세기풍의 낭만적인 기차여행을 원하는 사람들은 이를 반기기도 한다. 튀르키예 서쪽 끝인 이스탄불을 출발해 동쪽 도시들을 향해 가는 기차는 2~3일을 숨 가쁘게 달려 목적지에 사람들을 내려놓는다. 예전엔 그 기차가 이란의 수도 테헤란까지도 갔었다고 한다.며칠간 기차 안에서 잠을 자는, 한국에선 할 수 없는 경험을 해보는 게 가능한 곳이 튀르키예다. 기차 식당칸에서 튀르키예 전통요리를 맛보며 시원한 에페스 맥주 한잔 하는 것도 빼놓으면 섭섭하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광대한 아나톨리아 평원과 기묘한 형상의 바위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외계 행성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든다.국토가 넓고 관광업이 일찍부터 발달한 국가인지라 튀르키예는 유명한 관광지로 가는 버스 노선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이어져 있다. 기자가 갔었을 때는 한국에선 이미 사라진 직업을 가진 이들도 볼 수 있었다. 절대다수가 남성인 버스 안내원이 바로 그들.버스 안내원은 물과 음료수, 간단한 먹을거리를 승객들에게 나눠주기도 한다. 10시간 이상 버스를 타야 하는 경우가 흔하다보니 그런 서비스가 생겨난 것 같았다.튀르키예어를 하지 못한다고, 영어가 서툴다고 기차와 버스에서 만나는 현지인들을 서먹하게 대할 필요는 없다. 몸짓과 간단한 인사말만으로도 얼마든지 친해질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튀르키예인들이니까.근사한 풍광과 맛있는 음식,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반기는 튀르키예로 다시 떠날 날이 어서 왔으면 하는 바람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8-30

4·19혁명의 선봉에 서다

포항고등학교를 졸업한 한동웅 선생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다. 대학 3학년 때 4·19혁명이 터지고 청년 한동웅은 대열의 선두에 선다. 그리고 고려대 모의국회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 김 : 1951년 전쟁 중에 중학교에 입학하셨더군요.한 : 그때는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렀고 공립을 선호하는 분위기였지. 나는 포항중학교에 지원해 합격했어. 국민학교 때 공부를 별로 안 해서 중학교 입학 성적은 신통치 않았어. 그런데 실제로는 동지중학교에 입학하게 돼. 동지교육재단 하태환 설립자가 아버지와 친분이 있었거든. 하태환 씨가 아버지에게 나를 동지중학교에 보내달라고 부탁한 거야. 그러면 3년간 전액 장학금을 준다고 했고. 결국 아버지가 하태환 씨의 청을 못 이겨 동지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지. 김 : 중학교 시절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가 있다면.한 :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공부에 재미를 붙이고 열심히 했지. 중학교 1학년인가 2학년 때 서상원 선생님이 국어를 가르쳤어. 서상원 선생님은 서상은 전 영일군수의 형이지. 국어 교과서에 아버지의 수필 ‘나무’가 실렸는데, 수업시간에 서상원 선생님이 이 수필의 필자가 누군지 아느냐고 아이들에게 물었어. 아이들은 묵묵부답이었고, 선생님은 너희들의 친구 한동웅의 아버지라고 말했지. 그 순간 아이들이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어땠겠어. 삽시간에 소문이 퍼져 전교생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나는 언행을 조심할 수밖에 없었지.김 : 전쟁이 끝나고 이듬해인 1954년에 고등학교에 입학하셨습니다.한 : 고등학교는 포항고등학교로 가려고 했어. 대학을 가려면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야 하니까 당연한 판단이었지.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셨고. 그런데 동지중학교 3학년 때 담임인 장부두 선생님이 한사코 안 된다고 하는 거야. 동지중학교와 한 지붕 아래 있는 동지상고로 가라는 거지. 상고로 진학하면 대학 진학에 불리할 수밖에 없는데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겠어. 나는 포항고등학교로 가야 한다고 버티면서도 참 난감하더군. 결국 원서 접수 마지막 날 오후가 되어서야 장부두 선생님이 원서를 작성해서는 교무실 바닥에 탁 던져버리는 거야. 그걸 집어 들고 두호동에 있는 포항고등학교에 서둘러 가서 가까스로 제출했지. 포항고등학교에 가니까 심기철 교장선생님(제2대)이 반갑게 맞아주시더군. 장부두 선생님은 훗날 유성여고를 설립해 재단 이사장을 맡았지.김 : 당시 고등학교의 교육 여건은 어땠습니까?한 : 교사 수급이 원활하지 않아 정상적인 교육이 안 되었어. 체육 교사가 국어를 가르치기도 했지. 그 체육 교사는 국어 시간에 말문이 막히면 “그 어떠냐 하면…”이라고 운을 떼고는 시간을 끌곤 했어. 두호동 210번지에 있던 포항고등학교는 비가 오면 교사(校舍)와 운동장이 물에 잠겨 등교가 불가능한 경우가 더러 있었지. 1학년 2학기가 시작되던 9월에 대신동 74번지 신축 교사로 이전했어. 그때 전교생이 책걸상을 들고 그 먼 길을 걸어가는 진풍경이 펼쳐졌지.김 : 고등학교 시절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려주신다면.한 : 3·1절과 광복절 때 시가행진을 하는데 어느 고등학교가 선두에 서느냐를 두고 포항고와 동지상고의 신경전이 대단했어. 내가 1학년 때 양교의 규율부장이 맨주먹으로 겨뤄서 승자의 학교가 선두에 서는 걸로 했지. 대결 장소는 포항의료원 앞이었어. 세상에 그런 구경거리가 어디 있겠나. 포항의료원 주변은 문자 그대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지. 그런데 두 사람이 붙자마자 원투 펀치에 포항고 규율부장이 나자빠진 거야. 동지상고 규율부장이 권투를 했거든. 얼마나 맥이 빠지던지 어깨가 축 처져 학교로 돌아가던 게 기억나.김 : 포항고등학교 동기는 누가 있습니까?한 : 당시 포항고는 한 학년에 동(東)반, 서(西)반 두 개 반이 있었고, 졸업동기는 157명이었어. 허화평, 재생(再生) 이명석 선생의 차남 이태우, 로얄와이셔츠 대표 박엽래, 1군 사령관 허정, 비왕산업 대표 임용우가 동기야. 성적은 허화평이 1등이었고, 나도 곧잘 하는 편이었지.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허화평이 무소속으로 출마해 민주자유당 공천을 받은 이태우의 친형 이진우 의원을 누르고 당선되었어. 그때 우리 동기들은 허화평을 밀었으니 이태우는 섭섭했을 거야.김 : 아버지 영향으로 영어를 좋아하셨겠군요?한 : 아버지 서재에 있던 수많은 영어책 덕분에 영어와 친숙한 환경에서 성장했지. 포항고등학교 시절 정규용 선생님이 영어를 가르쳤는데 내 영어 실력을 아주 흡족하게 여기셨어. 대학도 처음에는 서울대 영문학과에 가려고 했어. 당시 서울대 인문계에서는 영문학과 커트라인이 가장 높았거든. 영어를 좋아했고 이왕이면 가장 높은 곳에 지원해보자고 생각한 거야. 결과는 불합격이었지. 서울대 영문학과에 이양하 교수라고 있었어. 평남 강서 출신으로 수필가와 영문학자로 명성이 높았던 분이지. 아버지와 가까운 사이였는데, 아버지가 이양하 교수에게 내 성적을 물어보니 근소한 차로 불합격되었다고 했다더군.김 : 그래서 재수를 선택하신 거군요?한 : 후기를 지원하느냐 재수를 하느냐 고민하다가 재수를 택했어. 그런데 공부가 마음대로 안 돼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데, 여름에 서울에서 재수하던 박춘식이라는 친구가 찾아왔어. 박춘식은 죽도시장에서 가장 큰 미곡상인 의성상회 아들인데, 훗날 고려대 농과대를 졸업하고 포항학원을 세웠지. 그 친구가 나더러 이러면 안 된다며 서울 가서 공부를 제대로 하자고 하더군. 그렇게 서울 가서 뒤늦게 공부에 열을 올렸지. 종로3가 EMI 학원에서 안현필 원장의 강의를 들었는데, 명성대로 실력이 대단했어. 두 번째 대학 지원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택했지. 서울대에 지원했다가 또 떨어지면 낭패니까 안전 지원을 한 거야. 정치외교학은 내 영어 실력이 통할 수 있는 분야라는 생각도 들었고. 그런데 경쟁률이 무려 12 대 1이어서 긴장이 되더군. 다행스럽게도 무난히 합격하고 신세계백화점 옆에 있는 중앙우체국에 가서 아버지에게 합격했다는 전보를 보냈지. 김 : 대학에 입학하니 어떻던가요?한 : 대학교 입학 환영식 때 이흥렬이 직접 작사·작곡한 ‘바위고개’를 불렀는데 참 감동적이었어. “언덕을 혼자 넘자니 / 옛 임이 그리워 눈물납니다 / 고개 위에 숨어서 기다리던 임 / 그리워 그리워 눈물납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지. 그 감흥을 담아 아버지에게 장문의 편지로 보냈어. 그러고 보면 나도 부모님을 닮아 예술적 감성이 있었던 모양이야. 대학에 입학하고 보니 정치외교학과 신입생 중에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 용산고, 경동고 출신이 거의 8할이더군. 포항 출신은 나밖에 없고. 학과별로 총학생회 대의원을 한두 명씩 선출했는데 나도 당선되었어. 당선되어 총학생회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지.김 : 대학 3학년 때 4·19혁명이 겪게 되는데요.한 : 알려진 것처럼 고려대 학생들은 4월 18일 교문 바깥으로 나가 태평로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했고, 이게 4·19의 도화선이 되었지.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교문 바깥으로 나갔는데 신설동 로터리에서 학생처장이 자동차 위에 올라가 학교로 돌아가라고 외쳤지만 소용없었어. 나는 대열의 선두에 있었지. 시민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학생들을 지지했어. 그런데 국회의사당 앞에서 집회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테러를 당했어. 당시 청계4가에 천일백화점이 있었는데, 그 앞을 지나다가 체인과 갈고리, 몽둥이를 든 깡패들한테 습격을 당한 거야.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어. 이 사건은 4·19혁명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지. 대열의 선두에 있던 나는 근처 포목점에 숨었는데 깡패가 휘두른 갈고리에 턱을 맞아 피가 많이 흘렀어. 깡패가 사라지자 그제야 경찰이 나타나더군. 깡패와 경찰이 미리 짰다는 이야기지. 나는 경찰차를 타고 이화여대 의과대학 응급실로 가 상처를 꿰맸는데, 하얀 턱뼈가 보일 정도의 부상이었어. 응급처치가 끝난 후 다시 경찰차를 타고 현인동 집까지 왔지. 턱부위의 흉터가 지금도 남아 있어.김 : 당시 고려대 모의국회는 대학 사회에서 꽤 유명했지요?한 : 고려대 모의국회는 전국 대학생 행사 중 가장 컸지. 50여 개 대학교 대표가 참가했고, 서울 명동 국립극장에서 열렸어. 모의국회가 열리면 극장이 미어터졌고, 극장 바깥에 스피커를 달아놓을 정도였어. 나는 2학년 때 모의국회 의사국장, 3학년 때 부의장을 맡았어. 4학년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의장을 맡고 싶더군. 모의국회 의장 14명 중에 8명이 국회의원이 될 정도로 의장의 위상이 높았어. 경쟁자는 같은 과의 김재묵이었는데, 군 복무를 마치고 늦게 입학해서 나보다 대여섯 살 많았지. 그런데 모의국회 의장은 총학생회장이 결정하게 돼 있었어.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나는 부산 영도 출신의 이상갑을 밀었고, 김재묵은 제주 출신의 고승민을 지지했어. 나는 이상갑의 찬조 연설을 하는 등 선거운동을 열심히 했고, 개표 결과 거의 두 배 차이로 완승했지.김 : 국회의장은 따놓은 당상이었겠습니다.한 : 그런데 날벼락이 떨어져. 5·16군사정변이 터진 거야.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모든 집회가 금지되었어. 나는 무기력하게 물러설 수 없었지. 정경대 학장을 찾아가 모의국회 전통을 이을 수 있도록 내부무장관을 찾아가 설득할 테니 허락해달라고 했어. 학장이 그렇게 하라고 하더군. 그래서 당시 내무부장관인 한신 장군을 찾아갔지. 을지로2가에 있던 내무부에서 한신 장군을 만나 모의국회가 개최될 수 있도록 허가해달라고 요청했어. 한신 장군은 가능하다고 하더니 조건을 다는 거야. 5·16 주체 세력이 내세운 의제를 다루라고 말이야. 그건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하고 내무부를 나왔지. 대학생들의 순수한 행사에 군사정변 주체 세력이 내세운 의제를 다룬다는 게 말이 되겠어. 그렇게 했다가는 모의국회가 어용국회가 되는 거지. 학교로 돌아와 정경대 학장에게 상황을 설명하니 잘했다고 칭찬하더군.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2022-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