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 바다의 도시 포항은 초록 산세(山勢)도 빼어나다. 내연산, 동대산, 도음산, 비학산, 운제산 등이 은은하게 이어지며 포항을 감싸고 있다. 그 산을 타고 내려오면 강과 들판이 아득하게 펼쳐지고 그 끝자락에 동해 물결이 넘실거린다. 산과 강, 들판, 바다가 저마다의 빛깔을 발산하며 어우러지는 곳이 포항이다.포항의 여러 산 중에서 사람들의 발길이 가장 많이 닿는 곳은 내연산이다. 태백 구봉산에서 솟구친 낙동정맥이 청송 주왕산을 거쳐 남하하다가 동해안 쪽으로 뻗어가 솟은 산이 내연산이다. 내연산은 한마디로 속이 깊은 산이다. 비학산이 큰 날개를 펼치고 있는 학의 형상을 사방에 드러내고 있다면, 내연산은 바깥에서는 그 모습을 알 길이 없다. 산속으로 한 발 두 발 계속 들어가야 비로소 그 경치가 보인다.골이 깊고 경치가 아름다운 내연산은 영남의 소금강(小金剛)이라 불린다. 보경사 일주문을 지나 계곡을 따라 자박자박 올라가면 양옆으로 억겁의 세월이 느껴지는 수직의 단애(斷崖)가 나타나고 그 사이로 폭포와 소(沼)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 까닭에 내연산에서는 풍경을 음미하며 쉬엄쉬엄 걸어야 한다. 다행히 내연산에서 가장 큰 폭포인 연산폭포까지는 경사가 완만해 남녀노소 누구나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내연산은 사계절마다 색깔이 확연히 다르다. 봄에는 곱디고운 벚꽃길, 여름에는 계곡과 폭포의 시원한 물줄기, 가을에는 울긋불긋한 단풍, 겨울에는 산길의 호젓함이 사람들의 마음을 불러낸다. 조선 사대부들의 창작 공간예부터 많은 사람이 내연산을 찾았는데,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발길이 이어진 기록도 남아 있다. 사대부들은 계곡의 바위 곳곳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그들 중에 처음으로 내연산의 아름다움을 작품 소재로 삼은 이는 청하 현감이자 당대의 문사인 옹몽진(邕夢辰, 1518~1584)이다. 그가 귀향하며 경주 부윤인 구암(龜巖) 이정(李楨, 1512~1571)에게 내연산의 아름다움을 알렸고, 이정이 1562년 내연산을 찾은 후로 사대부 사회에서 명산으로 부각되며 많은 시문의 창작 공간이 되었다(김희준, 박창원, ‘인문학의 공간 내연산과 보경사’, 포항문화원, 2014, 21쪽 참조). 이정은 내연산을 이렇게 읊었다.오늘 아침 구름안개 활짝 개어종일토록 냇물의 근원을 찾아 푸른 이끼를 밟았네꽃과 버들 산에 가득한데 누가 있어 그 뜻을 헤아릴까한 줄기 계곡물, 바람과 달만이 홀로 서성이는 것을- 이정 ‘내영산에 노닐며(遊內迎山)’, 김희준, 박창원, 위의 책, 21쪽.조선 숙종도 어느 봄날 내연산에 와서 계곡과 폭포 그리고 새소리, 비바람 소리와 분분히 지는 봄꽃에 취해 붓을 들었다. 숙종이 쓴 시는 당나라 때 산수전원시파를 대표하는 시인 맹호연(孟浩然, 689~740)의 ‘봄날 아침(春曉)’이다. 보경사 성보박물관에 판각(板刻)된 숙종의 글이 있다.봄잠에 날 밝는 줄 알지 못하다곳곳에 새 우는 소리 듣게 되었네밤새 비바람 소리 들려왔으니꽃들은 얼마나 지고 말았나- 맹호연 지음, 이성호 옮김, ‘맹호연 전집’, 문자향, 2006. 겸재의 걸작 ‘내연산 삼용추’가 탄생한 곳내연산에는 하류의 상생폭포부터 보현, 삼보, 잠룡, 무풍, 관음, 연산, 은폭, 복호1, 복호2, 실폭, 시명 등 높이 7∼30m의 폭포 열두 개가 연이어 펼쳐져 이를 십이폭포라 한다. 그중 상생, 관음, 연산폭포가 특히 빼어나 삼폭포라 부른다. 쌍폭인 상생폭포는 단아하고, 역시 쌍폭인 관음폭포는 선일대, 비하대, 관음대 등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둘러싸여 신비감을 자아낸다. 십이폭포 중 가장 큰 연산폭포는 웅장한 폭포 소리를 일으키며 폭포의 진경을 보여준다. 비 내린 다음 날 연산폭포 앞에 서면 땅을 울리는 폭포 소리와 하얗게 일어나는 물보라에 세속을 까마득히 잊게 된다.겸재 정선의 걸작 ‘내연산 삼용추(三龍湫)’도 이곳에서 탄생했다. 겸재는 1733년 58세에 청하 현감으로 부임해 2년 남짓 머물면서 청하와 내연산을 화폭에 담았다. 삼용추는 잠룡과 관음, 연산폭포를 일컫는다. 겸재가 머문 청하 시절의 의미를 유홍준은 이렇게 정리했다.겸재는 청하 현감 시절에 ‘내연산 삼용추’, ‘금강전도’같은 명작을 그리며 사실상 겸재의 진경산수 화풍을 완성하였다. 더욱이 이 그림들은 조선시대 회화로서는 보기 드문 대작이니 가히 본격적인 작품이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청하는 겸재의 화력에서 기념비적 이정표가 되는 곳이다.- 유홍준 ‘화인열전1’ 역사비평사, 2001, 255쪽.겸재는 청하 현감 시절에 ‘청하성읍도’, ‘청하 내연산 폭포도’ 같은 작품을 남겼는데, 이 작품들은 우리 미술사는 물론 지역사에도 귀한 가치가 있다. 내연산은 이처럼 오래전부터 시심과 화풍(畫風)을 일으켜온 산이었다.내연산의 폭포는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로 종종 등장했다. 영화 ‘남부군’에서 남부군 대원들이 목욕하는 장면을 잠룡폭포 주변에서 찍었고, KBS 역사 드라마 ‘대왕의 꿈’ 일부 장면도 연산폭포에서 촬영했다.내연산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연산폭포를 보고 발길을 돌린다. 연산폭포에서 가파른 계단을 걸어 폭포 뒤로 넘어가면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등산객이 드물어 스산한 느낌마저 드는 이 산길에도 계곡과 폭포는 계속 이어져 제8폭포인 은폭부터 제1폭포인 시명까지 여덟 개의 폭포를 만나게 된다. 산길 중간중간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도 남아 있다. 화전민으로 추정되는데 그들은 여기서 어떤 연유로 어떻게 살아갔을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삼지봉과 향로봉 등 큰 봉우리 여섯 개가 이어져내연산의 원래 명칭은 종남산(終南山)이다. 중국 당나라의 명산 중의 명산으로 일컬어졌던 종남산과 산세가 비슷하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다가 신라 진성여왕이 여기에서 견훤의 난을 피한 후에 내연산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고 전한다. 내연산은 주봉(主峯)인 삼지봉(710m)을 비롯해 최고봉인 향로봉(930m), 문수봉(622m), 매봉(816m), 삿갓봉(716m), 우척봉(천령산, 736m) 등 여섯 개의 큰 봉우리가 이어지며 그 사이로 크고 작은 봉우리가 어깨를 맞대고 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봉우리를 잇는 능선 종주를 즐긴다.향로봉은 내연산에서 서쪽에 있는데 북으로 청송군 동면, 동으로 영덕군 달산면, 남으로 포항시 송라면으로 이어진다. 맑은 날에는 향로봉에서 팔공산과 주왕산은 물론 저 멀리 동해의 푸른 물결까지 바라볼 수 있다. 향로봉은 한국전쟁 때 격전지로 전사(戰史)에 남아 있다. 이토록 빼어난 풍경도 전쟁의 참화를 비켜갈 수는 없었으니 전쟁의 비정함을 실감하게 된다.
팔면보경을 묻었다는 보경사내연산 들머리의 솔숲을 지나면 보경사가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보경사는 신라 진평왕 25년(602)에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지명(智明) 법사가 창건했다. 지명은 왕에게 진나라의 한 도인으로부터 받은 팔면보경을 묻고 그 위에 불당을 세우면 주변 국가의 침략을 받지 않으며 삼국을 통일할 수 있다고 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지명과 함께 동해안을 거슬러 오르다가 내연산 아래 큰 못에 팔면보경을 묻고 못을 메워 금당(金堂)을 조성한 후 보경사라 했다.천왕문과 적광전 사이에는 ‘금당탑’이라 부르는 오층석탑이 있다. ‘보경사 금당탑기(寶鏡寺 金堂搭記)’에 각인(覺仁) 스님이 문원(文遠) 스님과 의논해 “절이 있으니 탑이 없을 수 없다”하여 장인을 부르고 재물을 모아 오층탑을 만들어 대전(大殿) 앞에 세웠다고 전한다. 탑을 건립한 시기는 신라 성덕왕 22년(723)이라는 설과 고려 현종 14년(1023)이라는 설이 있는데, 기록이 정확하지 않아 어느 쪽으로도 확정할 수 없다. 경내에는 고려 때 이송로(李松老)가 세운 원진국사비(보물 제252호)와 사리탑(보물 제430호) 등이 있다.보경사 경내에 서면 내연산의 능선이 보이고, 눈을 감으면 계곡의 물소리며 폭포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내연산에 둘러싸인 보경사는 내연산의 기운을 품고 있는 천년 고찰이다. 절이 산이고 산이 곧 절임을 보경사 뜨락에서 내연산 능선을 바라보며 깨닫게 된다.산을 왜 오르는 것일까? 아름다운 풍경을 보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궁극에는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산의 깊이, 자신의 내면을 만나기 위해 산길을 걷는 것이 아닐까? 속이 깊은 산, 내연산은 그런 화두를 넌지시 던진다.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
2022-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