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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몸짓으로 말하는 또 하나의 언어 ‘수어’… “모두의 언어 됐으면”

TV 뉴스 오른쪽 하단에는 말이 아닌 몸짓으로 보여주는 또 하나의 언어가 있다. 들리는 언어가 아닌 보이는 언어, 수어이다. 수어는 2016년 한국수화언어법이 제정되면서 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 농인의 언어가 됐다. 하단의 작은 사이즈로 갇혀 있던 수어 통역사는 코로나19 시기에 정책 발표자와 나란히 서서 화면 절반을 채웠다. 감염의 우려에도 마스크를 벗어야 했지만 일부에서 항의가 쏟아졌다. 수어의 특성을 몰라서 생긴 오해였다. 30여 년간 농인들과 인연을 맺고 수어 통역을 해온 이지영 통역사는 수어가 제2외국어처럼 자연스러운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예전에는 수화라고 했고 요즘은 수어라고 한다.△‘수화’냐 ‘수어’냐는 오랫동안 논쟁이 됐다. 수화는 손으로 하는 대화라는 의미지만, 수어는 언어임을 강조한다. 한국수화언어법이 제정되면서, 수화와 수어를 아우를 수 있는 ‘수화언어’를 줄여 ‘수어’라고 한다. 한국수어는 한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 언어이다. 수어도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고유한 어휘와 문법을 가지고 있다. 한국수어는 대한민국 농인의 고유한 언어이다.-청각장애인과 농아인, 농인도 혼재되어 쓰이는데.△‘농(聾)’은 일상생활에서 청(聽) 감각을 기능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농인’은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자신들만의 언어문화를 구축해가는 사람들이다. 농인 정체성이 뚜렷한 사람들은 청각장애인으로 불리는 걸 원치 않는다. 장애가 아니라 그냥 수어를 언어로 사용하는 소수민족으로 인정받고 싶어 한다. ‘농아인(聾啞人)’은 들을 수 없고(농) 말할 수 없는(아) 사람이라는 뜻이다. 농인은 수어로 대화가 가능하기 때문에 ‘농인’으로 통용하고, 상대적 개념으로 ‘청인’을 쓴다.-수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청각장애인은 어떻게 하나.△성장 과정에 따라 몸짓 언어인 ‘홈 사인(home sign)’을 사용하기도 한다. 가족같이 가까운 사이에 통용되는 홈 사인은 수어 통역사도 이해하기 어렵다. 문맹 농인의 의사소통을 돕는 농인을 ‘농통역사’라고 한다.-지난 2년간 코로나19 방역 브리핑으로 수어 통역사의 역할이 많이 알려졌다.△TV 화면에서 수어 통역사가 크게 나와서 후련하다는 농인들도 많았다. 코로나19 초기에는 불안감이 컸기에 마스크를 2개씩 포개 쓰면서도 통역할 때는 벗어야 하는 비애가 있었다. 농인들은 손동작뿐 아니라 입모양이나 표정으로 소통하기 때문이다.-수어에서 표정은 얼마나 중요한가.△수어는 수지(손동작)와 비수지(표정과 몸짓)로 구성된다. ‘괜찮다’는 말도 정말 괜찮은지, 괜찮은 척하는 건지 표정으로 구분한다. 그래서 수어 통역은 손동작 외에도 표정이 강조된다. 표정과 몸짓은 소리의 크기와 음률, 음색을 나타내며 음성언어의 억양과 같다. 표정이 안 들어가면 소통이 어렵고 오해가 생길 수 있다. 농인들은 표정 없는 수어를 죽은 수어라고 한다. -포항시수어통역센터에서 20년간 근무하셨는데 어떤 일을 하는 곳인가.△수어통역센터는 장애인복지법 규정에 따른 장애인 지역사회 재활시설로, 수어 통역과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고 수어 교육을 실시한다. 포항은 2002년 개소했고 주된 업무는 생활 밀착형 통역이다. 지금은 스마트폰이 있어 농인의 불편함이 약간은 줄었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생활 전반에서 의사소통의 불편함이 크다. 팩스는 여유 있는 이들이나 썼고, 무선호출기의 숫자로 암호를 만들어 소통하기도 했다. 동시다발 통역 요청 시 최우선으로 두는 건 병원 통역이고 교통사고는 만사를 제쳐놓고 간다. 수어를 알리고 농인에 대한 인식개선을 위해 한동대 학생들과 수어문화제도 개최했다.-포항에 거주하는 농인과 수어 통역사 수는.△포항에 등록된 청각장애인 수는 4천여 명이고 그중 500여 명이 농인이다. 포항시수어통역센터의 상근 수어 통역사는 6명이고, 비상근 수어 통역사는 10명이다. 지난해 정년퇴임한 나는 비상근으로 일하고 있다.수어는 오랫동안 농인들의 제1언어이지만 공식적으로 한국어로 인정받은 것은 2016년이다. 수어 통역이 전문적으로 양성되기 시작한 것도 최근에 이르러서다.사회복지 학계에서는 수어번역 형성기를 2002년부터로 본다. 대학 과정에 수어 통역학과가 설치된 것이 바로 그 즈음. 국가 공인의 자격시험은 2006년에 이르러서야 치러졌다. 1990년대 초반부터 농인들과 연을 맺고 포항에서 처음으로 민간과 국가공인 수어통역자격증을 획득한 이지영 통역사는 포항의 제1호 수어 통역사라고 할 수 있다.-수어 통역사도 없던 시절에 수어를 배운 계기가 궁금하다.△1991년 포항제일교회에서 ‘제1회 사랑의 수어교실’이 열렸다. 그때까지 농인을 만나본 적도 없고, 수어도 전혀 몰랐지만 현수막을 보는 순간 빨려 들어갔다. 포항명도학교에서 근무하는 두 분의 특수교사에게 배웠고, 이듬해부터 교회 농아부에서 통역사로 활동했다. 내게는 장애가 있고, 장애를 인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장애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고민했었기에 수어가 소명처럼 다가왔던 것 같다. -장애를 인식한 것은 언제쯤인가.△중학생 때까지도 키가 작다고만 여겼지 장애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몸집이 자그마해서 선생님이 자전거 뒤에 태워주시기도 했다. 그러다 사춘기에 의문을 갖게 됐고 어머니에게서 사정을 들었다. 1960년대는 다들 그렇듯 가난했고, 어머니는 나를 업고 나무를 하러 다니셨다. 잠든 걸 보고 잠깐 눕혀놓고 일하다 보면 능선을 넘기도 했었는데, 아차 싶어 돌아와 보면 놀고 있었다고. 두 살 무렵 갑자기 쓰러진 나를 의사들은 가망 없다고 했지만 외할머니가 선린병원 초대 원장을 찾아가 사정을 해서 치료를 시작했다. 병원에 계속 다닐 형편이 안돼서 나중에는 어머니가 주사 놓는 법을 배워서 집에서 치료했다.-사춘기라 방황했을 법도 한데.△성경에 시각장애인을 본 예수의 제자가 “저 사람이 보지 못하는 건 누구의 죄냐?”라고 묻는 대목이 있다. 예수님은 누구의 죄가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음성으로 들렸다. 모태신앙으로 극복한 셈이다.-뒤늦게 대학에 들어간 이유는.△가난했기에 대학 갈 형편이 안됐다. 등록금을 번다고 미루다 보니 15년이 흘렀다. 원래 특수교육을 꿈꿨는데 농인들을 만나고 더 광범위한 사회복지로 바꿨다. 대학에 가보니 농인 학생들은 유리방에서 채플 예배를 봤다. 교수님께 건의해 농인들을 맨 앞줄에 앉게 하고 목사님 바로 옆에서 통역을 했다. 내성적이고 앞에 나서는 일을 두려워하는 성격이라 덜덜 떨면서 단상에 올라갔는데 신기하게도 통역을 시작하면 괜찮아졌다. 수어는 ‘문장식’과 ‘농식(요약식)’이 있고 일상생활에서는 주로 농식을 사용하는데, 농인 학생들은 토씨 하나 안 빼고 듣길 원했다. 농인들과 눈을 맞춰가며 통역을 하는데 얼마나 신이 나던지. 청인들로부터 수어 통역 덕분에 설교가 더 은혜가 된다는 말도 들었다.-언어를 배운다는 건 문화를 알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농인들은 독특한 문화 중에 하나가 두 개의 이름을 가지는 거라고.△농인들은 ‘문자 이름’과 ‘수어 이름’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특징적인 면을 부각시킨 ‘수어 이름’을 주로 부른다. 이름의 자모를 하나하나 손으로 표시하는 건 힘들기 때문이다. 여성의 수어 이름은 ‘얼굴 특징+여자를 의미하는 새끼손가락’으로 표현한다. 농인인 남편이 ‘코가 예쁜+여자’라는 이름을 지어줬다.-배우자와의 인연도 수어로 닿은 건가.△남편은 집안 행사에 수어 통역을 자주 의뢰했다. 통역을 하면서 안타까웠던 일이라면 가족들이 수화를 배우지 않는 것이다. 청인 가족들은 의사소통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농인의 입장에선 소통을 포기하고 지낸다. 불화는 사소한 오해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가족 중에 누구 하나라도 수어를 하면 소통 문제를 극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결혼을 결심하게 됐다.-방송에서 수어 통역을 오래 하셨는데.△선거방송 후보자 토론의 경우 여럿의 말을 혼자서 2~3시간 통역한다. 후보들과 같은 공간이 아니라 따로 마련된 스튜디오에서 카메라만 쳐다보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인권위원회에서 수어 통역사 2명 이상을 배치하라고 권고도 내려왔지만 변화가 없는 상황이다. 후보자 연설 통역의 경우 연설문을 사전에 요청하지만 주지 않은 후보들이 있어 배경지식 없이 통역하기도 했다.-앞으로 바람이 있다면.△많은 이들이 수어를 배워 수어를 자연스럽게 쓰는 분위기가 되면 좋겠다. 한동대에서 수어를 오래 가르쳤지만 대학은 늦은 감이 있다. 어릴 때부터 수어를 제2외국어로 가르쳤으면 한다. 수어만 있으면 농인은 장애인이 아니다. 일상에서 수어라는 언어가 자연스러워지길 바란다.이지영 수어 통역사는포항에서 태어나 포항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91년 수어를 배우기 시작해서, 1997년에 한국농아인협회에서 주관하는 민간수어통역사자격증을, 2006년 보건복지부 공인 국가공인자격증을 획득했다. 농인들과 인연을 맺고 뒤늦게 사회복지를 전공하며 같은 대학에 진학한 농인들과 최고의 대학시절을 보냈다. 만학도로 영남신학대학교 사회복지학과와 나사렛대학교 재활복지대학원 국제수화통역학과를 졸업했다. 2002년부터 포항시수어통역센터에서 재직하면서 한동대학교와 포항선린대학교 한국수어 강사로 활동했다. KBS포항방송국 뉴스와 포항시청 인터넷방송 시정뉴스, 각종 선거방송 토론과 연설의 수어 통역을 담당했다. 좋아하는 수어는 ‘하나님’과 ‘은혜(덕분에)’ ‘괜찮아요’ ‘존경해요’ ‘감사합니다’이다./배은정 작가

2022-11-28

‘할아버지 의사’의 상처와 무늬

포항 동빈동에 흰색의 아담한 목조건물 하나가 있었다. 오래되었지만 따듯한 정감을 느끼게 한 그 건물은 선린의원이었다. 선린의원은 단순히 하나의 의원(醫院)이 아니라 파란만장한 현대사와 개인사가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있는 곳이었다. 6·25전쟁으로 초토화되어 수많은 전쟁고아가 길거리를 헤매고, 홀로 된 산모들이 흐느끼고 있는 포항에서 그들을 치료하고 섬기는 사명이 선린의원의 뿌리였고, 그 의원을 헌신적으로 이끌어 간 사람이 김종원(金鐘元, 1914∼2007)이었다.김종원은 이산가족이다. 전쟁 때 세 아들을 북에 남겨두고 남으로 왔고, 그 후 아이들을 만나지 못한 뼈저린 아픔이 그의 삶을 규정짓는다.평안북도 초산(楚山)군 출신인 김종원은 신의주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 1929년 김종원이 신의주고보 3학년 때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으며 그 불길은 멀리 신의주까지 옮겨붙었다. 김종원은 학생들과 함께 거리로 뛰어나가 조선 독립을 외쳤고, 즉결심판에 넘겨져 한 달 가까이 구류를 살았다.평양의학전문학교(평양의대의 전신)를 졸업한 김종원은 초산 도립병원 소아과 의사를 거쳐 1940년 1월 평북 위원(渭原)에서 개인병원을 개원해 1945년 8월까지 운영했다. 이 무렵 근대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인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 1861∼1930)의 책을 접하고 평생 그의 책을 탐독했다. 신의주고보 때 학생 운동을 한 경험과 우치무라 간조와의 만남은 그의 내면에 깊이 자리를 잡았다. 평양을 탈출해 대구 동산기독병원에서 근무김종원은 1946년 4월부터 평양의대 소아과에서 근무했는데 1950년에 터진 전쟁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국군이 평양을 점령한 후 김종원이 한국민사지원단(UNCACK) 병원에 근무하면서 미군과 한국군을 치료해준 게 화근이 되었다. 1·4후퇴를 앞두고 북한군이 평양에 진입할 태세였고, 북한군에게 체포되는 순간 그의 운명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했다. 3년 전인 1947년에 월남하려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혐의로 정치보위부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하고 투옥된 경험도 있었다. 걸을 수 있는 세 아들은 할아버지 집으로 보내고 아내와 맏딸, 젖먹이 막내아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황급히 내려왔다. 세 아들에게 곧 데리러 온다는 말을 남겼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훗날 그와 아내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던 것은 할머니의 등에 업혀 자랐던 세 아들이 날마다 기차역에서 해가 지도록 엄마를 기다리다 울면서 돌아왔다는 말이었다(손진은, ‘우리 이웃, 김종원’, 보이스사, 2014, 254쪽 참조.).평양을 탈출한 지 2주 만에 대구에 도착한 김종원은 육군제일병원(경북대학교 병원)을 찾아가 문관(文官)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 후 2개월쯤 지나 길을 가다가 북한에 있을 때 함께 근무한 간호사를 우연히 만났다. 간호사는 자신이 근무하는 동산기독병원으로 김종원을 데리고 가 황용운 원장 서리를 만나게 해주었다.평양 광성고보를 나온 황 원장 서리는 미국에서 10년간 유학한 의료계의 거목이었다. 신앙심이 깊었던 그는 “안 그래도 이 큰 도시에 병원이 하나밖에 없어 밀리는 환자들을 제대로 진료조차 못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라면서 아주 기뻐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동산기독병원으로 와서 도와달라고 했다(‘선린병원 45년사’, 선린병원, 1999, 106쪽 참조). 김종원은 그렇게 해서 동산기독병원 소아과에서 아이들을 진료하게 되었다. 포항 선린의원(1960년). 미 해병 기념 소아진료소 초대 소장 맡아6·25전쟁 때 폐허가 된 포항의 거리에는 전쟁고아와 홀로 된 산모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지만 이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시설은 전무했다. 미 해병 비행단 33연대 군목실에서 근무하던 김성호 목사는 미 해병 군목에게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 지역을 도와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러던 중에 대구 동산병원 황용운 원장과 미국 연합장로교 선교사로서 경동노회를 맡고 있던 라이언, 김종원 의사, 포항 북부교회 오근목 목사, 경주 제일교회 박내승 목사 등이 미 해병 군목실을 방문해 전쟁고아들을 무료로 진료할 병원 설립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그 과정에서 전쟁고아와 산모들을 위한 병원을 포항에 우선적으로 건립하는 데 뜻을 같이하고 미 해병 기념 소아진료소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손진은, 위의 책, 121쪽 참조.).이 무렵 김종원은 함께 피난 온 고모 가족을 만나러 포항에 왔다가 시내 우체국 뒤쪽에서 한 무리의 아이를 보게 되었다.웅덩이 속에 쪼그려 있던 아이들을 보는 순간에 내 심장이 멎는 것 같았어요. (중략) 내 애가 저들이겠구나 생각하니 뭐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지요. 한참을 서서 그들을 바라보다가 그 자리에서 결심했지요. 이곳에 와서 저들을 고치고 도와줘야겠다고. 그런 결심을 하고 나니까 내가 소아과 전문의가 된 게 또 감사가 돼요. 그러니 결코 내가 신앙이 좋아서 자선을 하겠다거나 그런 뜻에서 결심을 한 것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선린병원 45년사’, 선린병원, 1999, 108쪽.그 길로 김종원은 미 해병 기념 소아진료소의 초대 소장을 맡았고, 1953년 6월 5일 동빈동의 적산가옥 방 한 칸을 고쳐서 진료를 시작했다. 진료소가 만들어지고 운영되는 과정에서 박일천 포항시장, 미 해병대에 근무하고 있던 한흑구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김종원은 혼신의 힘을 다해 전쟁고아와 산모들을 돌보았고, 진료소는 문전성시를 이루다시피 했다. 한국 최초의 모자(母子) 보건 활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포항의 ‘할아버지’ 의사미 해병 기념 소아진료소의 운영은 포항에 주둔한 미 해병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1956년 미 해병이 철수하자 진료소는 방향 전환을 시도해야 했다. 일반 환자도 받으면서 그 수익으로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선린의원을 개원하게 된 것이다. 그때가 1960년 6월 10일이었다.선린의원으로 바뀐 후에도 김종원의 초심은 변함이 없었다. 전쟁고아와 산모, 그리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낮은 자세로 봉사한다는 신념으로 선린의원을 이끌어나갔다. 그리고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해 1962년 8월 선린병원으로 새롭게 출발하면서 병원을 재단법인 소유로 못박았다. 병원의 사유화를 원천 차단한 것이다.선린병원 소아과는 북새통을 이루었다. 서울에서도 선린병원 소아과를 찾을 정도로 김종원의 실력은 소문이 자자했다. 그는 새벽 4시에 일어나 냉수마찰을 하고 새벽 기도회에 갔다가 곧바로 출근했다. 아침 일찍 진료를 시작해 늦은 저녁까지 쉴 틈 없이 아이들을 마주했다. 하루에 무려 300명이 넘는 아이들을 진료할 때도 있었다. 그 와중에도 휴일이면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선린애육원을 비롯해 흥해애육원과 가톨릭애육원(성모자애원)을 찾아가 아이들을 보살폈다. 그의 진료를 받은 수많은 고아와 아이는 물론 그의 주변에 있던 여러 사람이 김종원을 ‘할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포항의 할아버지 의사가 되었다.진료실에 에어컨은커녕 선풍기조차 없어 일사병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많은 고학생에게 장학금을 주었다. 하지만 누구에게 도움을 주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한 것이다.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지만 모두 거부했고, 30년 된 텔레비전과 냉장고를 사용하는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집안 살림이든 병원 경영이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 그 뜻에 따라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선린병원 협동원장 시절의 김종원. 영결식 때 많은 고아가 눈물 흘려김종원의 호는 인산(仁山)이다. 1960년대 말에 서영욱 동산의료원 원장이 선린병원에 들렀다가 신문지로 코피를 막고 진료하던 김종원을 보고는 ‘인술(仁術)의 큰산’이라 하여 지어준 것이다.김종원의 삶에는 또 다른 상처가 있다. 피난 올 때 갓난아기였던 넷째 아들이 서울에서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하숙집에 머물다가 연탄가스에 중독된 것이다. 아들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그는 묵묵히 환자들을 보살폈다. 결국 아들이 숨을 거둔 후 장례식을 치르고 병원으로 돌아온 그의 머리가 허옇게 세었다.2007년 3월 김종원이 영면하자 조문 행렬이 끊이지 않았고, 하관식 때 그의 품에서 자란 많은 고아가 눈물을 흘렸다. 포탄의 웅덩이에서 놀던 고아들은 “예수님의 다른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선린병원 원장 이임사에서 고백한 그였다.김종원이 1953년 6월부터 출석한 포항 북부교회(현 기쁨의교회), 포항간호전문대학을 인수해 설립한 선린대학교, 이사장을 맡은 선린애육원, 그리고 선린병원은 그의 분신이라 할 수 있다. 포항 곳곳에 그의 영혼이 숨 쉬고 있고, 수많은 포항 사람의 가슴에 그의 이름 석 자가 남아 있다. 역사에서 받은 깊은 상처가 아름다운 무늬가 되는 것을 김종원의 삶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포항은 그 상처와 무늬를 잊을 수 없다.글 : 김도형 작가, 사진 제공 : 콘텐츠연구소 상상

2022-11-28

총천연색 터널 이어지는 보석 같은 길에서…

“먹는 것 조절하고 많이 걷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어.”자신과 아들 둘 모두 당뇨병을 앓고 있는 시인 A씨의 말이다. 주위를 돌아보면 당뇨로 고생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걸 알 수 있다.당뇨는 소변에 당분이 많이 섞여 나오는 병으로 탄수화물 대사를 조절하는 호르몬 단백질인 인슐린이 부족해 생기는 것이다. 갈증과 잦은 소변으로 고생하는 당뇨병 환자들. 정도가 심한 경우엔 인슐린 주사까지 맞아야 한다.인체에서 인슐린은 만들어지지만 그 양이 적은 경우인 ‘제2형 당뇨’는 고지방·고단백 음식이 일상화된 식단 변화와 운동 부족이 병의 원인인 경우가 흔하다고 한다.‘걷기 좋은 포항의 산책길’ 관련 기사를 쓰면서 당뇨에 관한 이야기를 왜 이렇게 길게 주절대는지 궁금할 수 있겠다. 다 이유가 있다.당뇨는 ‘관리가 가능한 질병’으로 불린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식이 조절과 더불어 꾸준히 운동을 이어간다면 당뇨의 급작스런 악화와 합병증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다는 게 의학계의 일반화된 견해다. ▲‘걷기운동’은 당뇨 환자 위한 효과적 치료법이제 가을도 끝자락에 이르렀다. 빨갛고 노란 낙엽이 거리 곳곳을 뒹군다. 며칠 후면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만추의 풍경이 곧 사라질 듯하다.더 늦기 전에 단풍 아래를 걷고 싶어 선택한 이번 산책로는 옛 포항역에서 덕수공원을 거쳐 학산동 포항도시숲을 오가는 구간. 대략 1시간 남짓이면 왕복이 가능한 도심의 보석 같은 길이다.지금은 철거됐지만, 지난 세기 많은 이들이 추억이 묻어 있는 옛 포항역. 현재는 폐철도공원으로 변화되고 있는 출발지에 서서 다시 한 번 시인 A의 말을 떠올렸다. “나 같은 당뇨 환자에겐 걷기운동이 무엇보다 좋은 약이지.”실제로 그렇다. 대한당뇨병학회는 “당뇨병 환자라면 매일 최소 30분씩 걷는 것이 좋다. 걷기는 당뇨인들에게 많이 권장되는 운동이다. 누구나 쉽게 시도할 수 있고 특별한 장비나 기술이 없어도 되며, 장소를 따질 것도 없이 집 근처, 혹은 회사 근처에서 언제든 할 수 있다는 것이 걷기운동의 장점”이라고 권유하고 있다.비단 당뇨 환자만이 아니다. 현대인들의 안고 사는 성인병 대부분이 운동 부족과 과도한 스트레스에서 온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바로 이 성인병의 주범 중 하나인 운동 부족을 비용 들이지 않고 해결하는 가장 간편한 방법이 걷기, 즉 ‘산책’이 아닐까?옛 포항역 부지에서 시작해 덕수공원으로 가는 길엔 정겨운 풍경들이 자주 눈에 띈다. 커피는 물론 향긋한 전통차와 과일주스 등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조그만 카페가 여럿 있다.아기자기하게 장식된 가게 안에서 커피나 차를 마셔도 좋겠지만, 기왕지사 산책에 나섰고, 한낮엔 아직 추위를 느낄 정도가 아니니 테이크아웃 한 음료를 길 곳곳에 마련된 벤치에서 즐겨도 좋을 것 같았다. 기자 역시 진한 커피 향을 느끼며 한참을 길가에 앉아 있었다. 머리 위로 붉은 단풍잎 몇 개가 떨어졌고, 잠시잠깐 삶에 단풍이 들기 전 푸르렀던 청춘의 한 시절을 회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짤막한 등산을 원한다면 덕수공원으로‘이 길이 예전엔 기차가 지나던 철길이었구나’라는 걸 알게 해주는 차단기와 철로를 지나니 서산터널이 보인다. 거길 스쳐 포항초등학교 뒷길로 들어서니 단풍은 더 농밀하고 짙어졌다. 곧게 뻗은 나무들이 만들어낸 총천연색 터널 같았다.노부부는 다정하게 손을 잡고 산책을 즐기다가 잠시 쉬기 위해 길 옆 나무 의자에 앉았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애틋해지는 게 부부의 정’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우리 영감님이 관절이 많이 안 좋아요. 그래서 격한 운동은 하지 못하고, 하루에 한두 시간쯤 함께 걷는 것으로 건강을 챙기고 있어요. 내가 사는 동네에 이런 산책길과 공원이 있다는 게 행운이죠.” 7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할머니의 말이 다정하고 따스하게 들렸다. 부부는 거리가 얼어붙는 한겨울이나 폭우 쏟아지는 장마철이 아니면 언제나 이 길에서 가벼운 걷기운동을 한다고 했다.반세기 이상을 함께 살았을 두 사람이 앞으로도 오래오래 해로(偕老)하기를 마음속으로 빌며 다시 산책을 이어갔다.길의 왼편으로 ‘덕수공원’이라 쓰인 커다란 바위가 보인다. 포항에서 7년 넘게 살았지만 기자는 처음 와보는 곳.어떤 곳일까? 이 궁금증에 한국관광공사 홈페이지 ‘대한민국 구석구석’이 자세하게 답한다.“덕수공원은 포항시 북구 덕수, 우창, 중앙, 용흥동 일부 지역으로 수도산에 위치한다. 부지 면적은 45만4천650㎡로 조경시설, 휴양시설, 운동시설(체력단련장·다목적운동장·게이트볼장), 지압로, 사찰, 사당, 전망대 등의 시설과 녹지로 구성돼 있다. 덕수공원은 인근 지역민들의 운동, 여가 보내기 장소로 사랑받고 있으며, 수도산을 찾는 관광객들도 꼭 한 번 들러보는 곳이다.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을 기리는 충혼탑과 향토문화 창달에 기여한 재생 이명석의 문화공덕비가 설치돼 있다.”덕수공원 입구에서 멀지 않은 충혼탑과 작은 연못 위쪽으로 수도산을 오르는 길이 보였다. 갖가지 장비와 단단한 결심 없이도 누구나 가볍게 오를 수 있는 등산 코스라고 한다.곧 우리 곁에서 사라질 가을 산의 아름다움과 정취를 느껴보고 싶은 이들은 따끈한 차 한 잔 보온병에 담아 수도산에 올라도 좋을 것 같다. ▲포항도시숲에서 오랜만에 들어본 새 소리10년 전쯤이다. 2주가량 동남아시아를 여행하며 라오스에서 며칠 머물렀다. 한국처럼 산이 많은 라오스 북부.그때 숲 속 조그만 호텔에서 묵었는데 새 소리에 잠을 설쳤다. 아침에 일어나 숲길을 걸었을 때도 이름을 알 수 없는 새 몇 마리가 날아와 구슬프게 울었다. 자주 듣거나 보지 못한 모습이었기에 그 기억이 쉽게 잊히지 않는다.사실 현대화된 도심에서 새 소리를 듣기는 쉽지 않다. 서울과 부산 등의 대도시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고층 아파트를 옆에 두고 버스와 택시가 도로를 달리는 포항 한가운데서 청아한 새 소리를 듣다니….덕수공원에서 내려와 길 하나만 건너면 키 큰 나무들이 줄지어 선 풍경이 산책자를 반갑게 맞이한다. 학산동 포항도시숲이다. 바로 거기서 새가 울었다.규모는 크지 않지만 잘 정돈된 나무들과 인상적인 조형물, 거기에 편하게 쉴 수 있는 여러 개의 벤치까지. 포항도시숲은 시민들에게 휴식을 제공하는 또 하나의 근사한 공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칼국수 가게에서 점심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도시숲을 가로질러 커피숍으로 걸어갔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것인지 다들 얼굴에 웃음꽃이 환했다.답답한 도시의 일상에서 잠깐이나마 벗어나 자연 속으로 들어온 그들의 웃음은 곱게 단풍 든 나무가 선물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다시 새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에서 노래하는 것인지 궁금해 하늘을 올려다봤다. 11월 중순의 하늘이 티끌 한 점 묻지 않은 푸른 비단처럼 펼쳐져 있었다.그 가을 하늘은 포항도시숲을 나와 다시 옛 포항역으로 걸어가는 내내 기자를 따라왔다. 아주 친절한 산책 파트너였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11-22

포항 바닷가에서 한가히 살고자 했던 영성의 담지자

1945년 9월 초하루 한흑구는 38선을 넘었다. ‘조선의 간디’ 조만식 선생을 모시고 월남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조만식은 죽어도 북의 동포들과 함께 죽겠다고 굳게 결심한 터였다. 조만식은 산정현교회의 장로였고,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해서 한승곤, 한흑구 부자(父子)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한흑구는 조만식 선생이 주선한 트럭을 타고 남쪽으로 향하는데, 그와 함께 월남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한흑구는 미군정에서 일하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고, 1947년 3월부터 1년간 『문화일보』를 발행하기도 했다. 1949년에는 『현대미국시선』(선문사)을 발간했는데, 다음의 글에서 당시 그의 작품 활동이 우리 문학계에 미친 영향을 가늠할 수 있다.그의 작품 활동은 그 시대의 신문이나 잡지에 나타난 것으로 미루어 매우 활발했으며, 그것도 문학 전반에 걸쳐진 것으로 보이나, 특히 1930년대에서 비롯되는 미국 시 및 그 밖의 역시(譯詩) 활동은 8·15해방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다. 휘트먼과 흑인 시의 번역 소개는 물론, 미국 문학 및 작가론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걸쳐져 있음은 당시의 다른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김학동, 『한국 근대시의 비교문학적 연구』, 일조각, 1981, 206∼207쪽. 하루같이 바닷가를 걸었던 사람한흑구는 서울을 떠나려 했다. 동해안과 서해안, 남해안을 다니며 거처를 물색했다. 이유는 두 가지다. 폐병을 앓고 있었는데 이걸 치료하려면 바닷가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신선한 해산물을 먹으면 좋다는 의사의 권유가 있었다. 또 하나는 머지않아 전쟁이 터질 수 있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마침 동료 문인들과 경주에 고적지 순례차 왔다가 포항 바다가 좋다는 얘기를 듣고는 포항에 잠깐 들렀다. 그 직후 식구를 데리고 포항으로 향했다. 1948년 가을이었다. 그는 가족에게 포항 송도 모래는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보다 좋다고 했을 정도로 포항 바다에 매료되었다. 한흑구는 거의 매일 포항 바닷가를 걸었는데 그때 심정은 그의 첫 수필집에 실려 있다.항상 푸르고, 맑고, 볼륨이 넓고, 거센 바닷가에서 한가히 살고자 동해변으로 온 지가 꼭 20년이 되었다.거의 하루같이 바닷가를 걸어 보았다. 인생 자체를 항해에 비하지만, 나는 바닷가에 혼자 서서, 나의 존재의 미미함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흑구, 「책머리에」, 『동해산문』, 일지사, 1971, 8쪽.어떤 이유인지 명확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한흑구는 바닷가에서 ‘한가히’ 살고자 했다. 그렇다면 그에게 포항은 어떻게 다가왔을까?그때 포항 인구 5만. 토착민은 2천 명 정도 될까, 라고 했다. 일본·만주 등 각처에서 모인 사람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섞여 살기가 힘들지 않은 것 같았다. 한국 속의 ‘뉴욕’과 같았다고 당시 포항 분위기를 살폈다. (중략) 서울 생활은 신의도 없고 거짓 생활이 많아서 마음에 들지 않다가 편안한 보금자리를 찾아온 것이라고 했다.-「작년 경북문화상 받은 한흑구 씨, 『영남일보』, 1973. 1월.그의 예견대로 전쟁이 터지자 온 식구가 7일간 걸어서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다행히 포항 집이 무사해 1950년 가을에 포항으로 돌아왔다. 당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포항 도심은 초토화되었는데 한흑구의 집은 장독 하나 깨지지 않았다. 만약 집이 파손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한흑구와 포항의 인연은 그렇게 이어졌다. 그 후로 그는 화려한 학력과 경력, 인맥을 거의 접다시피 하고 1979년 11월 7일 숨을 거둘 때까지 포항을 떠나지 않았다. 신사였고 베풀 줄 아는 사람한흑구는 포항에서 수필을 주로 썼고 소설도 발표했으나 과거에 비하면 과작(寡作)이었다. 수필 「나무」, 「보리」, 「닭울음」은 국어 교과서에 실리며 수필의 전범(典範)이 되었다. 시를 발표하지는 않았으나 “나는 늘 모래밭에, 또는 바다 물결 위에 시를 써 보았다”는 수필(「동해산문」)의 한 구절처럼 시심(詩心)으로 살았다. 책을 낸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으나 문인으로서 책은 꼭 발간해야 한다는 아동문학가 손춘익(孫春翼, 1940~2000)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여 환갑이 지나 『동해산문』과 『인생산문』(1974)을 냈다.한흑구를 기억하는 포항의 원로들은 그가 신사였고 베풀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서울 시절과 부산 피난 시절 동료 문인들을 만나면 밥값과 술값을 도맡아 냈고 용돈도 나누어주었다. 미국 유학 시절에는 필라델피아로 찾아온 친구 안익태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포항 오천 미군부대에 근무할 때는 지역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등 여러 가지 혜택을 주었다. 전쟁 때 길거리에 고아와 미혼모가 넘쳐나자 그들을 품어주기 위한 미 해병 기념 소아진료소가 포항 시내에 설치되었는데 그때도 한흑구의 손길이 닿았다. 전쟁 때 불타버린 포항여고 교사(校舍)를 복구할 때도 그는 어김없이 달려가 힘을 보탰다. ‘흐름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포항 문화예술에 향기를 불어넣었고, 1979년 포항문인협회 창립도 한흑구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아내 방정분 여사의 헌신적인 내조그는 허름한 선술집에서 자식뻘 후배들과 스스럼없이 술잔을 주고받았으며, 심야에 담배가 떨어지면 아들의 담배를 얻어 필 정도로 부자간에 격의가 없었다. 가장의 책임을 다하고자 한 성실한 생활인이었고 가족에게 자애로웠다. 낡은 집에 살았지만 1950년대에 아내를 위해 싱크대를 직접 만들어주었고, 어린 자식들과 나룻배를 타고 영일만에서 낚시를 즐겼다. 1968년 포항 청림초등학교가 개교할 때 “동해같이 배우고 태양같이 빛내자”는 노랫말을 써주며 어린 학생들에게 아름다운 꿈을 심어주었다.포구숲 둘러싸인 청림초등학교앞에는 푸른 동해 태양이 솟는다우리도 동해같이 끝없이 배우고우리도 태양같이 배워서 빛내자자유와 인권의 정신 드높여지덕체 함양해 나라를 빛내자- 한흑구 작사, 포항 청림초등학교 교가 1절.한흑구를 얘기하면서 그의 아내 방정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황해도 안악군(安岳郡)의 부잣집 딸이었던 방정분은 이화여전 음악과 재학 시절 동기였던 한흑구 여동생의 소개로 한흑구와 결혼했다. 홍난파(洪蘭坡, 1898∼1941)한테 배우고 음악 활동도 함께했다고 한다. 방정분은 결혼 직후부터 역사의 거센 바람을 남편과 함께 견뎌낸 반려자였다. 포항에 정착한 후 셋째 아들의 죽음을 겪은 슬픔을 삼키며 중·고등학교 음악교사로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한흑구의 장남 한동웅은 “어머니는 아버지를 존중했고 헌신적으로 내조했다. 어머니 없는 아버지는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 ‘흐름회’ 회원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한흑구 선생. 박영달 사진점은 현재 중앙상가 뱅뱅어패럴 자리에 있었다. 맑고 깊은 영성의 담지자한흑구는 무엇보다 맑고 깊은 영성의 담지자였다. 배금주의를 배격했고 거짓말하는 것을 혐오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교회에 나가지 않았지만 종교의 핵인 영성을 깊이 체현했다. 시의 운율이 흐르는 수필 한 편 한 편은 영성의 결정체이자 기도문에 가깝다.나는 나무를 사랑한다.아침에는 떠오르는 해를 온 얼굴에 맞으며, 동산 위에 홀로 서서, 성자인 양 조용히 머리를 수그리고 기도하는 나무.낮에는 노래하는 새들을 품안에 품고, 잎마다 잎마다 햇볕과 속삭이는 성장(盛裝)한 여인과 같은 나무.저녁에는 엷어가는 놀이 머리끝에 머물러 날아드는 새들과 돌아오는 목동들을 부르고 서 있는 사랑스런 젊은 어머니와 같은 나무.밤에는 잎마다 맑은 이슬을 머금고, 흘러가는 달빛과 별 밝은 밤을 이야기하고, 떨어지는 별똥들을 헤아리면서 한두 마디 역사의 기록을 암송하는 시인과 같은 나무.- 한흑구, 「나무」, 『동해산문』, 일지사, 1974, 9∼10쪽.미국에 망명 중이던 한승곤은 중학생인 외아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마다 “너는 십일홍(十日紅)의 들꽃이 되지 말고, 송림(松林)이 되었다가 후일에 나라의 큰 재목(材木)이 되어라”고 썼다. 공교롭게도 한흑구는 송림이 울창한 포항 바닷가에 와서 반평생을 살았지만 스스로 재목이 되기를 포기하고 바닷가에 혼자 서서 존재의 미미함을 느낄 뿐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한흑구의 작품을 읽고 그의 삶을 숙고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한동웅 제공

2022-11-21

노래는 분함과 답답함을 해소시켜 주고 삶의 애환 함께해준다

예부터 우리 민족은 노래를 즐겼다. 노래는 분함을 삭여주고 답답함을 뚫어주며 기쁠 때는 흥을 돋워주며 슬플 때는 위로해준다. 우리 민족의 삶에 깃든 애환을 겉으로 표현하고 속으로 다독여 시로 짓고 노래의 근원을 찾아 밝히는 이동순 가요평론가. 신춘문예 출신 시인이자 명예 대학교수인 그는 “대중가요라고 깔보지 마라”며 “가요는 일상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애환을 해소하고 여과시켜 주며 위로하고 격려해 주는 삶의 치료제”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가요를 모두 정리해 하나의 실로 꿰어내겠다는 당찬 포부를 보인다. -올해가 김춘수 시인의 탄생 100주년이고 지금 시인 김춘수를 기념하는 각종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학창시절 김춘수 시인은 거대한 언덕이었고 그런 스승 밑에서 공부하는 것이 정말 든든하고 자랑스러웠다. 대학 4년을 김춘수 선생을 흠모하며 시를 공부했고 석사과정에서 지도교수이기도 했다. 좋아하시던 담배에 불을 붙여주면 손을 덜덜 떨면서 담배를 피시던 스승이었다. 심지어 김춘수 선생의 기침 소리까지도 노트에 적어놓을 만큼 심취해 있었다고나 할까. 그만큼 김춘수의 초기 시는 매력적이기도 했다.-김춘수 선생의 추천을 받았나.△대학 3학년 때 시를 10편 적어서 연구실로 찾아갔다. 창밖을 내다보시며 ‘봉투를 두고 가라’고 해서 책상 위에 놓고 나왔다. 아무 말씀이 없으셔서 두 달 뒤 연구실에 갔더니 그 자리에 봉투가 밀봉된 채 그대로 있었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고 저항심도 생겨 도로 갖고 나왔다.-김춘수 선생과의 인연은 계속됐을 것 아닌가.△4학년 때 ‘전국대학생 현상작품공모전’에 ‘장마이후’ 등 3편을 출품해 당선됐다. 시상식에서 김춘수 선생은 ‘추천하고 싶다’며 작품을 가지고 오라 하셨다. 나는 이미 마음이 떠나 대답만 하고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했다.-1973년 ‘마왕의 잠’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기억이 생생할 것 같다.△당시 아르바이트 하던 집으로 당선통지서가 속달등기로 왔다. 현기증이 났다. 먼저 김춘수 선생에게 전화를 했다. 무언가 서운한 듯 축하해 주시더라. 대신 당시의 문단 흐름을 의식해서인지 ‘각별히 조심하라’고 경계의 말씀을 해주신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김춘수 선생은 순수시의 대표로 참여시의 대표인 김수영 시인과 여러 면에서 대비되고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때 나는 김수영에 대해 공부를 했고 김춘수에는 없는 정신을 김수영 시인에게서 발견하기도 했다. 내가 김수영의 시에 매력을 느끼고 접근하고 있음을 눈치 차린 듯 경계한 것이다.-신춘문예 당선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다.△당선 이전과 이후로 세상을 구분하게 됐다. 주위에서 누구도 하지 못한 중앙일간지 신춘문예 당선이었다. 당선 이전에는 상처투성이에다 콤플렉스 덩어리였고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했으며 누구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나였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을 일거에 해소해버리고 자신감으로 충만하게 만든 분기점이 신춘문예 당선이었다.-조부가 독립투사 이명균이다. 그 영향이 홍범도 서사시 등 작품에 투영된 것으로 보면 되나.△대학 재학 때는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웠다. 밤늦게 교수 연구실에서 닭털침낭을 펴놓고 자다가 숙직에게 발각돼 소동을 피우기도 했다. 2년 동안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갔고 신춘문예 당선도 그럴 때였다. 독립유공자의 후손이라고 대학 재학동안 등록금을 면제받은 것이 전부다.그러나 이승에서 육신으로 만나지 못했지만 집안 어른들의 이야기를 통해 독립투사 할아버지의 정신과 기질을 이어받은 것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할아버지의 유훈이 나를 길러낸 것이라 생각한다.-문학박사가 어떻게 가요를 연구 대상으로 하고 가요평론가가 됐나.△1980년 박사학위 논문이 ‘일제시대 무명 저항시가에 나타난 현실의식 연구’였다. 여기에는 일부 대중가요도 포함돼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릴 때부터 가요를 좋아했던 것 같다.-유행가에 대해 뽕짝이라 하고 가수는 딴따라라는 둥 폄시하는 풍조가 만연하던 때였다.△공부하다보니 우리 대중가요의 ‘가치’를 새삼 인식하게 된 것이다. 유행가 가사가 식민시대에는 극작가나 문학인들의 작품이 대부분이었고 이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가요를 연구한다는 것은 가사의 미학적 가치도 있지만 사회사적 배경에 대한 연구도 의미있다.-특히 대학에서 그런 시각이 심했을 것 같다.△대중가요에 대한 폄하는 시인이자 작사가인 조명암을 주제로 한 학위 논문 심사에서 심사위원이던 교수가 ‘그게 무슨 논문이냐’며 모욕을 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서울대에서 대중가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학생도 나오는 등 가요사 연구가 대학가에서도 학문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시인 조지훈은 고려대 교수 시절 시가 가요에 담긴 정서와 문학사적 배경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너무 외면해 왔다며 앞으로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실토하기도 했다.-대구가 유별 근대 대중가요의 메카가 된 배경은 뭔가.△1950년대 당시 오리엔트레코드사가 대구에 있었고 수많은 전쟁 가요들이 오리엔트레코드사에서 녹음됐다. ‘굳세어라 금순아’가 녹음되던 날은 새벽 5시 곡 녹음이 끝나려는 순간 ‘두부사려’ 하는 두부장사 목소리와 딸랑거리는 방울소리가 끼어들어 다 된 녹음을 이튿날 다시 하는 비극도 있었다. 이병주 사장의 집념은 대구를 대중가요 메카로 만들었지만 오리엔트레코드사는 지금 헐어지고 그 자리에 오피스텔이 지어지고 있다. 그 자리를 ‘대구근대음악박물관’으로 만들자고 여러 단체장들에게 제안했고 내가 자료를 모두 제공하겠다고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안타깝고 아쉽다. 나는 계명문화대 평생교육원 내에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를 만들고 음반전시관을 개관했다. 많은 레코드판을 모두 기증했다.-노래에 천부적 재질이 있었던 것 같다. 유전은 아닌가. 가요에 관심을 가진 것은 언제부터인가.△아버지가 흥얼거린 걸 들은 적은 있지만 잘 부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목소리도 얼굴도 모른다. 그러나 어릴적 친구 집에 놀러 가서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면 왠지 좋았다. 특히 여가수는 모두 어머니의 목소리로 들렸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표지도 없는 유행가 책에 ‘이동순’이라고 이름을 기록했을 정도로 노래를 좋아했다. 따라 부르면 곧 곡조가 익혀졌다. 가사를 받아쓰고 노래를 익힌 것이다. 누나들의 칭찬을 들으면서 레퍼토리를 늘려 나갔다. 중학생 때 벌써 500곡 이상의 노래를 익혔던 것 같다.-어머니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기억은 평생을 여가수 목소리에 목매달게 만들었던 것 같다.△어머니는 내가 태어나고 10달이 채 못돼 돌아가셨다. 6·25 전쟁 때 동네에 인민군이 들어오자 나를 잉태한 채 4km나 떨어진 문중 종산 산지기집으로 피난 가 있다가 3달 만에 돌아왔다. 그러나 나를 낳고 산후조리를 제대로 못 해 나한테는 젖 한 번 물려보지 못한 채 43살에 돌아가신 거다. 나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죄책감은 내가 모든 여가수의 목소리를 들으면 모두 어머니 목소리로 여기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여가수 목소리뿐 아니라 노래도 잘 불렀다더라.△고교시절 소풍 가서 학반대항 노래자랑 대회가 열리면 내가 늘 반 대표로 나갔고 또 1등을 했다. 우쭐했다. 심판을 맡은 선생님들은 나를 불러 소주를 한 잔 권하며 칭찬해 주셨는데 싫지 않았다. 대학입시에 낙방하고 재수할 때는 같이 공부하던 친구의 부모님이 일부러 불러서 노래를 시키고 특식으로 라면을 끓여 주시기도 했다. 그러면서 ‘너는 대학 가지 말고 가수 해라’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군대에 가서도 인기가 있었을 것 같다.△대학원을 졸업하고 뒤늦게 군에 갔는데 나보다 나이 어린 고참들이 곧잘 노래를 시켰다. 노래사역이었다. 그러면 부동자세로 ‘어머니’ 관련 노래나 ‘전선야곡’ 같은 노래를 불러 고참을 울렸던 기억이 난다.-시인으로 살면서 늘 대중가요와 함께 했다. 세기적인 가요대항전은 어떻게 생겼나.△시인 김지하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됐다가 풀려나왔을 때다. 김지하 시인은 술을 마시면 혼자 노래를 불렀다고 하더라. 그 때 한 후배가 ‘형보다 더 노래를 잘 부르는 후배 시인이 있다고 합니다’하고 염장을 질렀던 모양이었다. 김지하 시인이 당장 누구냐고 묻고는 직접 확인하겠다며 내가 있던 청주로 내려와 기상천외의 노래 대결이 펼쳐진 것이다. 그 상황을 소설가 김성동이 내 시집 ‘지금 그리운 사람은’의 발문에서 상세히 기록해 두었다. 전채린 교수의 13평 아파트 거실에서 저녁 10시에 시작해서 새벽 5시에 김지하 시인의 항복으로 결판난 사건이다.-지금 K팝이 세계 한류의 대세가 되고 있다. 우리 가요와는 어떤 관련이 있나.△물론이다. 비록 현재 아이돌이 중심인 K팝이 옛 가요와 시·공간적 분위기가 달라도 우리 민족이 겪은 수난과 핍박, 오욕과 영광의 정신사적 계보를 이어 온 것만은 분명하다. 결코 평지돌출 돌연변이가 아니라는 거다. 우리 노래? 이난영의 ‘진달래시첩’ 같은 노래를 리메이크해서 BTS나 블랙핑크 같은 아이돌 가수가 세계무대에 내놓는다면 또 다른 히트 한류가 될 것이라고 자신한다.-시인의 노래는 창밖으로 소리가 새어나갈까 두려워하며 가슴 저 밑으로 지그시 눌러가며 불러대는 맛이 있다. 소동파의 적벽부에서 노래에 맞춰 부는 퉁소 소리처럼 애잔하고 그러면서 가슴 깊숙이 파고드는 그런 소리다. 겉으로는 흔들리지도 않더라.△남인수의 ‘고향의 그림자’를 좋아하고 ‘명동 블루스’를 즐겨 부른다. 밤새도록 김지하와 노래 대결을 벌였을 때 김지하 시인은 온 힘을 다해 절규하듯 노래하더라. 그래서 내가 이길 것이라고 예견했다.- 시인이자 가요평론가로서의 이동순의 정체를 스스로 설명해 달라.△27살에 교수가 돼 안동간호대에서 3년을 보내고 30대에는 충북대에서 10년을 보냈다. 그리고 40대에 영남대 교수로 와서 정년 할 때까지 25년동안 시와 함께 가요 연구와 수집 채록으로 보냈다. 수많은 가요들이 모두 사연을 담고 있다. 그걸 그 시대와 함께 조명해보는 것이 목표다. 노래와 예술의 사회사가 될 것이다. 지금은 가요황제인 남인수 평전을 준비하고 있다. 그의 출생에서 데뷔하고 임종하기까지의 동선을 모두 찾아냈다. 그의 인간적 풍모와 그가 부른 노래의 가치를 풀어내려고 한다. 제주도에서 석 달 작정하고 있다. □ 이동순(李東洵·72) 시인, 문학평론가, 대중음악평론가김천 출생, 경북대 인문대 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발견의 기쁨’, ‘강제이주열차’, ‘고요의 이유’ 등 21권 발간.민족서사시 ‘홍범도’(전 5부작 10권) 발간.분단 이후 최초로 ‘백석시전집’ 발간(1987년, 창비)하고 시인을 문학사에 복원시킴.평론집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민족시의 정신사’, 가요에세이 ‘번지없는 주막-한국가요사의 잃어버린 번지를 찾아서’, ‘노래따라 영남을 걷다’, ‘한국근대가수열전’. 기행에세이 ‘실크로드에서의 600시간’, ‘시가 있는 미국기행’ 등 저서 70여 권.대구MBC라디오 ‘이동순의 재미있는 가요 이야기’에서 5년간 MC로 활동.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 라디오에서 ‘남북이 함께 부르는 노래’, ‘시로 만나는 남과 북’ 프로 10년 동안 매주 방송. 방송사 가요사 전문 패널로 활동.신동엽 창작상, 김삿갓문학상, 시와 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충북대학교 인문대 국문학과 교수,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소장 역임.현재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옛 가요 사랑모임 ‘유정천리’ 전국회장,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이경우 편집위원

2022-11-21

송도 바다 위에 시를 쓴 검은 갈매기

서울 시절의 한흑구. 해방공간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던 1948년 가을, 서울 필동에 살던 한 가족이 짐을 꾸려 서울역으로 갔다. 열두 시간 가까이 기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동해변의 포항이었다. 서울 필동의 이층집은 일제강점기 때 경성제국대학 교수가 살던 적산가옥으로 방이 여덟 개나 있었고 마당도 넓었다. 사고무친(四顧無親)한 그들에게 포항에는 마땅한 살림집조차 없었다. 임시변통으로 남의 집 아래채에서 살다가 집을 구하면 이사할 요량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지방에서 서울로 가게 마련인데, 이 가족은 왜 서울을 떠나 동해안의 변방으로 왔을까?식솔을 데리고 포항으로 온 가장은 수필 「보리」로 유명한 한흑구(본명 한세광(韓世光), 1909∼1979)다. 포항의 정신과 문화예술을 얘기할 때 한흑구를 빠트릴 수 없다. 그는 20세기 한반도에서 살다 간 지성 중에 비슷한 유형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인물이다. 1909년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1929년 20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5년 동안 머물며 영문학과 신문학을 공부했다. 그 후 평양으로 돌아와 광복 직후 월남했으며 미군정청에 있다가 포항에 와서 인생의 닻을 내렸다. 은자(隱者)로 살아간 한흑구한흑구는 수필가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다양한 장르의 글을 발표한 전방위 문인이다. 시와 수필, 소설, 평론, 영미 번역시를 발표했고, 특히 《동광(東光)》(1932년 2월호)에 「미국 니그로 시인 연구」를 발표하는 등 흑인문학을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했다. 평양에 있을 때는 잡지 《대평양(大平壤)》과 《백광(白光)》의 창간에 참여하며 여러 편의 글을 실었다. 도산 안창호가 조직한 흥사단에서 활동했고 월남해서는 미군정의 통역관을 했으나 밀려드는 청탁을 피해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겨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1819∼1892)의 작품 등 미국 현대 시를 번역했다. 그는 이효석(李孝石, 1907∼1942), 유치환(柳致環, 1908∼1967), 김광주(金光洲, 1910∼1973, 소설가 김훈의 부친), 황순원(黃順元, 1915∼2000), 서정주(徐廷柱, 1915∼2000), 조지훈(趙芝薰, 1920∼1968) 등 당대를 대표하는 문인들과 친분이 두터웠다.한흑구는 파란만장한 역경을 거치고 포항에 왔지만 그의 삶과 문학은 베일에 가려져 있는 게 많다. 포항에 정착한 그가 바다와 술을 벗하며 은자(隱者)로 살아간 까닭이다.겨레의 선각자였던 아버지 한승곤 목사한흑구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우선 그의 아버지 한승곤(韓承坤, 1881∼1947)을 알아야 한다. 선각자인 그는 우리나라 초기 기독교사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한승곤은 평남 강서의 지주로 원래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으나 부흥회 때 선교사의 감화를 받아 평양신학교를 나와 고향의 많은 땅을 처분하고 평양에다 산정현(山亭峴)교회를 세워 초대 목사가 되었던 유명한 목회자였다(김용성, 『한국현대문학사 탐방』, 현암사, 1991, 282·283쪽). 평양신학교에 다니던 1908년에는 한글맞춤법 교과서인 『국어철자첩경(國語綴字捷徑)』을 간행할 정도로 우리말 교육에 관심이 많았고,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셩신츙만』이라는 성령론을 집필했다.한승곤은 1916년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외아들 한흑구가 일곱 살 때였다. 한흑구의 수필 「파인(巴人)과 최정희」에 “105인 사건 때 상해로 망명하셨던 아버님이 미국으로 건너가서”라는 표현이 있는 것을 볼 때, ‘105인 사건’의 여파로 볼 수 있다. 이 사건은 일제가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 모의 사건을 조작해 105명의 애국지사를 투옥한 일이다. 평양의 기독교계 항일세력이 다수 검거된 이 사건은 한승곤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한승곤은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등의 한인교회에서 목사로 시무했으며, 1919년에는 안창호가 조직한 흥사단의 의사장(議事長)을 맡으며 흥사단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36년 귀국한 그는 이듬해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안창호를 비롯한 흥사단 동지들과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3년간 옥살이를 했다. 수양동우회 사건은 흥사단 계열의 민족운동단체인 수양동우회가 1937년 5월 ‘멸망에 함(陷)한 민족을 구출하는 기독교인의 역할 운운’이라는 인쇄물을 산하 35개 지부에 발송하려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그해 6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관계자 181명이 체포된 사건이다. 한승곤은 1947년 작고했으며,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망명한 아버지를 따라 스무 살에 미국으로 건너가아버지의 영향을 깊게 받은 한흑구는 문학 소년으로 성장했다. 1925년에 고향의 문학 소년들과 ‘혜성(彗星)’ 문학 동인 활동을 했고, 1926년에는 《진생(眞生)》에 시를 발표했다. 또한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전신) 시절이던 1928년에는 『동아일보』에 수필을 발표하는 등 문학 창작 활동을 했다(한명수, 「한흑구는 민족시인이다」, 《포항문학》 46호, 12∼13쪽). 중학생 시절에는 찰스 램(Charles Lamb, 1775∼1834)의 수필에서 “High thinking, plain living(고상한 이상, 평범한 생활)”이라는 구절을 접하고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보성전문학교를 다니던 한흑구는 1929년 3월 아버지가 있는 미국으로 떠났다. 검은 갈매기, 흑구(黑鷗)라는 필명은 일본 요코하마항을 떠나 미국으로 가는 여객선 갑판에서 떠올린 것이다. 하룻밤을 자고 나서 갑판에 올라, 갈매기가 다 달아났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배꼬리 쪽을 살펴보았더니, 웬일인지 검은색 갈매기 한 마리, 단 한 마리가 긴 나래를 펴고 쫓아오고 있었다. 그 검은 갈매기 한 마리는 하와이에 올 때까지, 바람이 불거나 비가 와도 그냥 한 주일이나 쉬지 않고 쫓아왔다.“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옛것을 버리고 새 대륙을 찾아서 대양을 건너는 검은 갈매기 한 마리, 어딘가 나의 신세와 같다.”이런 구절을 일기에 쓰다가, 문득 나의 필명(筆名)으로 사용하기로 생각했다.(중략)나는 조국도 잃어버리고 세상을 끝없이 방랑하여야 하는 갈매기와도 같은 신세였기 때문이었다.- 한흑구, 「나의 필명의 유래」, 『인생산문』, 일지사, 1974, 125쪽.1929년 2월 시카고에 도착한 한흑구는 영어를 익히기 위해 노스파크대학교(North Park Univ.) 부속고등학교에서 1년간 공부한 후 1년 가까이 미국 전역과 캐나다를 여행했다. 그 후 노스파크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했다가 필라델피아 템플대학교(Temple Univ.)로 옮겨 신문학과를 수료했다. 흥사단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했으며, 1929년 5월 2일 교민단체 국민회(國民會)의 기관지인 「신한민보(新韓民報)」에 조국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시 「그러한 봄은 또 왔는가」를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신한민보」와 흥사단 계열의 잡지 《동광》, 미국 유학생들의 잡지 《우라키(The Rocky)》에 시와 영미 번역시, 평론, 소설 등을 발표하며 활발한 창작 활동을 했다. 대부분의 작품 행간에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의 상황을 안타까워하고 독립을 갈망하는 심정이 배어 있다.단 한 편의 친일 문장도 쓰지 않은 문인결핵성 후두염을 앓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1935년 귀국한 그는 소설가 전영택과 잡지 《대평양》과 《백광》의 창간에 참여하면서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여동생(덕희)의 소개로 1937년 4월 이화여전(이화여자대학교 전신) 음악과 출신의 방정분(邦貞分, 1913∼1989)과 결혼했으나 그해 6월 수양동우회 사건이 터지면서 아버지와 함께 구속되는 처지가 되었다. 한승곤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3년간 옥살이를 했고, 한흑구는 기소 중지 처분을 받았다.수양동우회 사건은 독립운동과 조선 문단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사건의 핵심 인물인 안창호는 구속 후 병보석으로 가출옥하지만 고문 후유증을 견디지 못하고 1938년 3월에 숨을 거두었다. 지도자를 잃은 흥사단은 심대한 타격을 입고 국내 활동은 사실상 마비되었다. 수양동우회의 핵심 인물로 조선 문단을 이끌었던 이광수는 일본에 전향하면서 ‘친일 문인’으로 낙인찍혔다.수개월간 고초를 겪은 한흑구는 가산을 정리해 조상 삼대가 살던 평남 강서군 성태면 연곡리 안말로 거처를 옮겼다. 여기서 과수원을 일구고 이따금 낚시를 하며 작품을 썼다.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고 예술가들이 친일 대열에 합류할 때였다. 당연히 한흑구에게도 일본에 협력하라는 압박과 회유가 이어졌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뒷날 임종국은 『친일문학론』에서 한흑구를 일컬어 “단 한 편의 친일 문장도 쓰지 않은 영광된 작가”라는 헌사를 바쳤다.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한동웅 제공

2022-11-16

짙푸른 가을바다와 작은 어촌의 고요함에 스며들다

‘걷는다’는 행위는 단순히 물리적인 움직임만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산책, 도보, 걷기 등의 단어 속엔 ‘철학적 함의(含意)’가 담겨 있다.승려들은 일정 기간 동안 좁은 방이나 토굴에 스스로를 가두고 거기서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찾기 위해 정진한다. 우리가 동안거(冬安居)와 하안거(夏安居)라고 부르는 수양의 방식이다.그러나, 동안거나 하안거는 종교라는 매개체를 통해 상당한 경지에 오른 이들이 취하는 수양의 방법. 일상에 쫓기는 보통 사람들에겐 그럴 여유와 시간이 없다.승려들이 움직임을 최대한 자제하는 것으로 어떤 지향점에 이르고자 한다면, 일반인들은 부지런히 몸을 움직임으로써 사념(思念)이나 잡념을 떨치고 육체적 건강을 찾고자 하는 게 아닐지. 10여 년 전쯤이다. 너나들이로 지내던 선배의 아들이 큰 병에 걸렸다. 겨우 중학교 2학년인 자식이 의식을 잃고 병원에 누워 있으니 아버지는 넋이 나갈 수밖에.그즈음이다. 선배는 하루에 5~6시간을 목적지 없이 걸어 다녔다. 강변이나 호숫가, 심지어 동네 좁은 골목길까지 헤집고 다니는 그에게 물었다.“왜 그토록 걷기만 하는 겁니까?”돌아온 답은 간명했다.“그래야 지금의 아픔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으니까.”맹목적인 산책 혹은, 의도적으로 고민과 고뇌를 멈추고 무작정 걷는다는 행위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치료법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어렴풋이 알게 됐다. ▲잡스런 생각 떨치며 ‘설머리 물회지구’를 출발아들의 생사를 걱정하던 선배만큼은 아니겠지만, 누구나 한두 가지의 고뇌와 고민은 안고 살아간다. 삶이 지속되는 한 그것들은 온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게 인간의 생이다.갱년기에 들어서며 우울증을 호소하는 40~50대가 한국 어디에나 적지 않다. 의사들은 “그럴 땐 의식적으로라도 걱정거리를 떠올리지 말고 산책을 하는 게 좋다”는 조언을 한다.짙푸른 가을 바다의 풍광과 작은 어촌마을의 고요함 속을 걷는 건 비단 우울한 중년만이 아닌 지리멸렬하게 반복되는 생활에 지친 사람들 모두에게 위안을 선사할 듯하다.그래서다. 이번에 선택한 산책 코스는 설머리 물회지구에서 포항 해상스카이워크까지.3㎞가 조금 넘는 이 구간에선 청량한 동해의 파도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맑은 햇살 아래 멸치를 말리는 목가적인 풍광도 만나보는 게 가능하다.출발지점인 설머리 물회지구에 섰다. 수십 개의 횟집과 각종 해산물로 만든 음식을 파는 식당들이 가득하다.포항시 문화관광 홈페이지가 설머리 물회지구의 ‘특미’라고 불리는 포항물회에 관해 상세한 설명을 들려준다.“영일대해수욕장 끝에는 설머리 해안마을이 있다. 이곳은 바다를 끼고 있어 먹을거리가 풍성하다. 포항물회는 고기를 잡느라 바쁜 어부들이 급하게 한 끼를 때울 요량으로 방금 잡은 물고기를 회쳐 고추장과 물을 넣고 훌훌 들이마신 것에서 유래된 음식이다. 처음엔 어부들 사이에서 유행하다가 차차 주민들에게 알려지면서 포항물회라는 특유의 음식으로 정착했다. 물회의 재료로는 가자미, 광어, 도다리 같은 흰살생선을 주로 사용하지만, 오징어와 한치, 해삼, 성게 등의 해산물도 물회의 재료가 될 수 있다.”TV 맛집 소개 프로그램에 나왔다는 식당에서 물회 한 그릇과 서비스로 나온 매운탕을 먹고 해상스카이워크가 있는 여남동을 향해 출발했다. 테트라포드에 앉아 있던 갈매기 몇 마리가 길을 안내하듯 앞장섰다. ▲영화배우 하정우가 하루 3만보를 걷는 이유는설머리 물회지구를 지나 환호공원을 왼편에 끼고 해안 길을 걷는다. 바다 건너편으로 포항제철이 보이고, 멀리 구룡포가 가물거린다.평일 한낮이라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주말이면 포항의 새로운 관광 랜드마크(Landmark)가 된 스페이스워크와 해상스카이워크를 보려는 시민과 관광객들로 인해 주변 도로가 막힐 정도라고.환호공원 안에 설치된 스페이스워크는 길이 333m에 717개의 계단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조형물이다. 낮에 올라가면 포항 바다를 한 눈에 담을 수 있고, 밤이 되면 조명이 밝혀져 색다른 정취를 자아낸다.이번 산책의 종착점인 해상스카이워크는 유리로 만들어진 400여m의 보행로 아래 새파란 영일만 바다가 출렁이는 모습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환호공원 해안로를 지나 여남동으로 가는 길엔 여유로운 모습으로 낚싯대를 드리운 노인들이 몇몇 보였고, 날씨가 제법 차가운데도 반바지 차림으로 바다 곁을 달리는 이들도 있었다.포항의 산책로를 소개하는 기사를 연재하며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연예인들 중에도 ‘걷기운동’을 즐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그중 영화배우 하정우는 하루에 3만보를 걷는 ‘산책 마니아’인 동시에 2018년엔 ‘걷는 사람, 하정우’라는 책까지 냈다고 한다. 의외다.책을 낸 출판사에 따르면 하정우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이 세상의 맛있는 것들을 직접 두 손으로 요리해 먹고, 두 발로 열심히 세상을 걸어 다니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이다.“무엇 때문에 그렇게 많이, 오래 걷느냐”는 질문 앞에 설 때면 하정우는 이런 대답을 내놓는다고.“돌아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오직 걷기밖에 없는 것만 같았던 시절도 있었다. 연기를 보여줄 사람도, 내가 오를 무대 한 뼘도 없었지만, 그래도 내 안에 갇혀 세상을 원망하고 기회를 탓하긴 싫었다. 걷기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았던 과거의 막막한 날에도, 잠까지 줄여가며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지금도 꾸준히 나를 유지하는 방법이다.”이 정도의 진정성을 가진 ‘산책자 하정우’라면 분명 포항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걸을 수 있는 ‘설머리 물회지구-해상스카이워크 코스’도 좋아하지 않을까? 진지하게 포항행을 권하고 싶어졌다. ▲가을 햇살 아래 멸치를 말리는 여남동 사람들뒷목을 간질이는 햇볕을 받으며 항구초등학교를 지나니 정겨운 어촌마을 풍경이 펼쳐진다. 여남동이다. 여기에도 크고 작은 카페와 식당, 펜션 등의 숙박업소가 늘고 있다. 그만큼 찾아오는 이들이 많아진다는 증거일 터.거기까지 걸어가니 바다 색깔은 더 푸르러졌고, 공기가 한층 달콤하게 느껴졌다. 불과 몇km 거리인 시내와는 전혀 다른 빛깔과 냄새. 오른편으론 ‘미니 해수욕장’이라 불러도 좋을 조그만 백사장이 앙증맞게 자리를 잡았다.해변 주위엔 그물망을 펼쳐 눈부신 햇살에 멸치를 널어 말리는 작업장이 서너 군데 보였다. 잘 건조된 멸치는 현장 판매도 하고, 택배로도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모양이었다.도심에서 겨우 1시간 떨어진 곳에서 바닷가 소읍(小邑)의 풍광을 보게 될 줄 몰랐기에 한참을 멸치 건조장 앞에서 서성거렸다. 할아버지 한 분이 보이길래 물었다.“이거 사진 좀 찍어도 되나요?”“뭘? 멸치 말리는 걸? 허허허. 그걸 뭐 하러 물어봐. 그냥 찍어요.”11월 가을 햇살보다 환한 여남동 어르신의 너털웃음이 좋았다. 그날 산책에서 받은 가장 큰 선물 같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11-15

로컬크리에이터와 상생협력… 지역 창업생태계 살린다

대구·경북을 비롯해 부산, 경남, 울산 등 영남권역의 로컬크리에이터 발굴·육성에 앞장서고 있는 경북창조경제혁신센터의 노력이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경북창조경제혁신센터는 지난 2020년부터 영남권역의 유망 로컬크리에이터들의 사업화 자금 지원부터 네트워킹, 제품 및 기업 홍보, 판로지원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다. 로컬크리에이터 육성은 수도권 과밀화 현상, 지방 소멸 위기, 양극화 현상 등의 문제에 당면한 지방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키는 혁신주체로 성장하고 있다. 이에 본지는 경북창조경제혁신센터가 추진하고 있는 로컬크리에이터 지원 사업들과 성공 사례를 들여다봤다. 편집자주 □ 경북창조경제혁신센터의 로컬크리에이터로컬크리에이터란 지역을 뜻하는 로컬(local)과 콘텐츠 제작하는 사람을 뜻하는 크리에이터(Creator) 합성어로 지역에 남거나, 혹은 지역으로 돌아와 지역의 생활문화(Lifestyle) 및 유휴자원에 비즈니스모델을 접목해 지역 문제를 해결하고 ‘가치’를 만들어내는 창업가를 말한다.경북창조경제혁신센터는 지역의 고유한 특성을 살리면서 지역의 창조적 콘텐츠 발굴과 지역 특색에 맞는 로컬 산업의 성장이 지역 창업 생태계 활성화에 중요한 과제로 여기고, 로컬의 명소로 거듭난 부산 영도에서부터 천년고도 신라 문화와 황리단길 같은 문화·관광자원이 풍부한 경북 경주까지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며 다양한 유·무형의 자원을 가진 매력적인 지역에 맞는 사업을 지원하기로 하고 로컬크리에이터들을 선발했다.선발된 영남권 로컬크리에이터들은 지역 고유 자원을 바탕으로 로컬푸드, 지역기반 제조, 거점브랜드, 지역특화관광 등 다양한 로컬 창업 분야에서 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그 성과 또한 다채롭다.경북센터는 중기부 로컬크리에이터 사업 주관기관으로 올해 일반트랙 31개팀, 협업트랙(로컬크리에이터인 기업 3개사 이상이 한 개의 팀을 만들어 협업 과제를 수행) 2개팀을 육성하고 있다.□ 로컬크리에이터 지원경북센터는 영남권 로컬크리에이터에게 사업화 자금 지원부터 네트워킹, 제품 및 기업 홍보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지원하고 있다. 올해 로컬크리에이터 일반트랙에 31개사 선정해 운영중이며, 예비창업트랙 7개사(사업자등록이 없는 예비창업자)에게는 사업화자금 최대 1천만원을 지원하며, 기창업트랙 24개사(7년 미만 창업자)은 사업화자금 최대 3천만원을 지원한다.협업트랙은 2개사에게는 사업화 자금 최대 1억원을 지원하고 있다. 협업트랙 모집에 무려 66개팀이 지원해 33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보이기도 했다.사업자금 뿐만 아니라 로컬크리에이터의 비즈니스 모델을 구체화하고, 로컬 브랜딩 전략 전문 교육인 ‘로컬창업 아카데미’와 지역 내 로컬크리에이터 선진지를 탐방하고, 로컬 선후배 기업간 교류를 통해 우수 기업 벤치마킹 기회를 제공하는 ‘로컬 인사이트 트립’도 지원한다.이밖에도 로컬기업 대상 홍보영상 콘텐츠 제작을 지원한다. □ 므므흐스 부엉이버거로컬크리에이터 사업의 대표적인 우수사례로는 지역 농산물을 활용한 수제버거 판매와 6차산업 스마트마켓 등 체험형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므므흐스 부엉이버거’가 있다. ‘므므흐스 부엉이버거’는 지난 10월 28일 세종시 조치원 1927아트센터에서 열린 중기부 주관 ‘2022 로컬페스타’에서 올해의 로컬크리에이터 최우수팀에 선정됐다. 올해의 로컬크리에이터는 ‘2022년 지역기반 로컬크리에이터 활성화 지원사업’에 참여한 전국 170개 로컬팀 가운데 우수한 성과를 보인 팀에게 수여되며, 최우수 1개팀, 우수 5개팀을 선발했다.므므흐스는 ‘모든날 매순간 행복한 사람들’의 초성을 딴 약자로 경북 칠곡군 왜관읍의 매원마을에 위치해 있다. 1년에 약 8만 명이 찾는 ‘시골 수제버거집의 기적’으로도 불린다. 이 곳은 1980년대 마늘공장이었던 폐허공장을 수제버거매장으로 재탄생시켜 흑마늘 진액 햄버거 번, 능이버섯 패티 등 인근 농가의 친환경 채소와 토마토를 활용해 로컬과 건강을 모두 잡은 아이템이다.햄버거의 종류는 총 17가지로 매콤해서 깔끔하게 먹을 수 있는 오리지널버거, 불고기소스 맛을 내 어린이와 남성 손님이 많이 찾는 데장부버거, 5가지 버섯소스를 아낌없이 넣은 트러플머쉬룸크림버거 등 기본구성 버거 외에도 커스텀으로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므므흐스는 지역의 식재료를 탐구하고, 인근 농가와의 협업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가고 있다. 친환경 농법으로 재배하는 왜관 김인철 농부의 완숙 토마토를 버거 속재료로 사용중이며, 경북 양돈가를 살리기 위한 식재료 개발도 진행중이다. 협업한 농가에게는 무료로 홍보영상 제작을 진행해 유튜브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홍보하고 있다.구건호 대표는 청년창업사관학교 12기 출신으로 로컬식 재료의 RD 및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으며, 배민화 대표는 배달의민족 배민아카데미 사이다특강, 정부부처 멘토 등 다양하게 활동하며 므므흐스 브랜드를 알리기 위해 힘쓰고 있다.므므흐스는 로컬식재료와 음식점을 결합한 그로서란트 형태의 ‘므므흐스 로컬편의점’을 므므흐스 옆 공간에서 현재 공사중이며, 오는 12월 오픈을 앞두고 있다. □ 영남권 우수사례와 지속가능한 로컬크리에이터영남권 로컬크리에이터 우수사례로는 세계 수산업을 선도하는 통영 수산식품 ‘웰피쉬’가 있다. 경남 해양의 수산물 자원을 활용해 K-수산간편식의 세계화에 앞장서고 있다.2022년도 상반기 아마존을 통해 약 3만불의 수출실적을 달성했으며, 국내 유통부분에서는 GS25 편의점 납품 예정 등으로 전년도 대비 약 4배이상 매출 향상이 기대된다.통영 수제맥주 ‘라인도이치’는 지역을 대표하는 특산맥주로 인지도 확보하고, 전국 브랜드로 발돋음하고 있다.특히 2022년도 개봉작인 영화 ‘한산’의 콜라보 제품을 출시했으며, 전국프랜차이즈 ‘생활맥주’ 납품을 진행했다. 해외수출을 위해 미국 괌 하야트 호텔 등과도 협의 중에 있어 국내외 다양한 판로 확보와 성장이 기대되는 로컬기업이다.경북창조경제혁신센터는 오는 12월 6일 부산 영도 ‘무명일기’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지속가능한 로컬비즈니즈’라는 테마로 ‘2022 영남권 로컬크리에이터 페스타 - 영남에 있데이’를 개최한다.영남권 로컬 창업의 미래와 지속가능성에 대해 논의하고 네트워킹할 수 있는 자리로 로컬크리에이터 명사 특강, 로컬 제품 전시 및 체험 등으로 지역의 로컬크리에이터를 격려하고 응원하는 장으로 운영할 계획이다.이문락 경북창조경제혁신센터장은 “경북센터가 지역의 다양한 로컬크리에이터들을 지속 발굴해 청년 인구 감소로 인한 지방소멸 위기를 극복하고, 지역 창업생태계 활성화로 이어지는 선순환 체계를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구미/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22-11-14

30년 어류연구 외길 걷는 물고기 박사

박무억 민물고기연구센터 소장. 연어가 되돌아오는 계절이다. 북태평양으로 긴 여정을 떠났던 연어들이 왕피천으로 돌아오고 있다. 경북 민물고기연구센터에서는 매년 100만 마리의 치어를 방류한다. 그중 되돌아오는 연어는 단 0.1%! 자그마치 3년이나 걸려 지구 반 바퀴 거리를 헤엄쳐 돌아왔으니 기특하기 그지없다. 귀한 손님을 맞이하느라 어느 때보다 분주한 박무억 소장을 울진군 근남면에 위치한 민물고기연구센터에서 만났다. -올해 연어의 귀향은 언제부터 시작됐나.△처음 연어가 올라온 건 10월 17일이다. 10월 초부터 망을 치고 기다렸다. 3년 전에 왕피천에서 방류한 연어들이 미국 알래스카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것이다. 매년 20톤 트럭 5대 분량인 90만~100만 마리를 방류하면 0.1~0.2%가 돌아온다. 100만 마리에 1000마리 수준이다.-0.1%의 확률이라니 더 반갑고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먼 거리를 여행하는 연어의 신통한 능력은 어디서 오는 건가.△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지만 몇 가지 가설이 있다. 그중 하나가 지구 자기의 흐름을 감지해서 이동한다는 ‘자기설(磁氣說)’이다. 후각으로 찾아온다는 가설도 있는데 미국에서 후각을 마비시킨 산란기 연어가 고향을 찾지 못했다는 연구가 있다. -연어를 포획해 방류하기까지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치나.△어미로부터 채란한 알을 소독하고, 정액을 뿌려 수정시킨 뒤, 이물질을 씻어내고 소독을 두 차례 더 한다. 알이 부화해서 크기 5cm, 무게 1.5g의 치어로 성장하면 내년 3월 하천에 방류한다. 이후 2~3달 적응 기간을 거쳐 바다로 나간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크기가 3년이 지나면 어른 팔뚝만 해져서 돌아온다.-방류 기준이 5cm에 1.5g인 이유는.△우선은 연구소 양식장의 규모와 서식밀도를 고려해야 하고 무엇보다 어린 연어가 거친 바다에 적응할 수 있는 적절한 사이즈이기 하다. 수정란에서 부화한 치어는 3~4개월 자라면 5~7cm까지 큰다. 그때 하천과 바다의 경계에 방류하면 소금물에 서서히 적응한다. 대부분의 민물고기는 바다에 나가면 바로 죽지만 연어는 염세포가 있어 생존이 가능하다. 염세포는 몸속의 염분농도를 항상 일정하게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연어 말고도 방류하는 물고기가 많다고 들었다.△연어 이외 산천어와 송어, 다슬기와 동남참게 종자를 생산해 방류한다. 연어에 이어 곧바로 송어와 산천어 차례가 돌아오고, 다슬기도 방류하는 요즘이 최고로 바쁘다. 다슬기는 주민들의 소득 향상과 관광 마케팅을 위해 방류를 원하는 지역이 많아, 23개 시군을 4등분으로 나눠 차례로 진행한다. 이외 경북 동해안 하천의 생태계를 조사하는 것도 민물고기연구센터의 일이다.우리나라 1세대 어류학자인 고 최기철 교수는 사람을 세 부류로 나눴다. ‘민물고기 30종 이상 아는 유망한 사람’, ‘10종밖에 모르면 평범한 사람’, ‘10종도 모르는 불행한 사람’. 민물낚시가 취미가 아닌 이상 10종 넘기기가 쉽지 않다. 민물고기 종류가 얼마 된다고 어류학자의 욕심일 뿐이라는 변명도 마땅찮다. 박무억 소장에 따르면 지구상의 민물고기는 파악이 안 될 정도로 많고 아시아에서만 700종이 알려져 있다. 민물고기연구센터가 운영하는 민물고기생태체험관에만 100종이 넘는 민물고기를 전시한다. 참고로 경북에서 많이 사는 민물고기 1위는 피라미와 비슷하게 생긴 ‘갈겨니’이다.-하천 생태계 조사는 어떻게 이뤄지나.△하천에 통발을 넣어 어자원 분포를 조사한다. 예전에 많이 잡히던 고유어종이 안 보이면 어미를 구입해 알을 받는 기술을 개발하고 자원을 조성한다. 경북도내 동해안 유입 하천인 울진 왕피천과 부구천, 영덕 오십천, 포항 곡강천, 경주 대종천이 조사 대상이다. -예전과 비교해 하천 생태계는 어떤가.△그 흔했던 송사리와 피라미나 풍뎅이처럼 생긴 물방개도 사라지고 새우도 안 보인다. 물고기가 산란을 하려면 알을 붙일 풀과 바위가 필요한데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파헤친 곳들이 너무 많다.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면 그 강은 이미 죽은 강이나 다름없다. 그 여파는 우리 인간에게 미칠 것이기에 우려스럽다.-물고기에 관심을 갖고 어류학을 연구하게 된 계기는.△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이고 강이 많지만, 학교의 생물교육은 주로 가축이나 수목 위주이고 물고기는 거의 없다. 서점에서 우연히 물고기도 사람이 기른다는 책을 봤는데 미래에는 수산양식 산업이 유망하고 세계적으로 10대 직업군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관련 서적을 탐독했고 결국 고향 경주를 떠나 제주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을 결심했다.-경주에서 제주라면 꽤 먼 데, 제주를 선택한 이유는.△1982년도 대입을 앞두고 부산과 제주의 대학 두 곳을 고민했다. 부경대의 전신인 부산수산대학교는 민물 위주였고 제주대학교는 해산어 쪽인데, 이왕이면 광대하고 생물종이 다양한 바다에서 포부를 키우고 싶었다. 지도 교수였던 노섬 선생은 국내 양식업의 선구자로 전복과 광어 양식의 토대를 만든 분이다. 교수님의 지도 아래 저희 실험실에서 넙치 양식기술을 개발했다. 현재 여든이 된 노교수는 멸종 위기에 처한 해마를 대량으로 양식하는 기술을 개발해 중국에 수출하며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한다.미래학자인 앨빈 토플러는 일찍이 수산양식을 유망한 미래 산업으로 꼽았다. 현대 경영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피터 드러커는 “21세기에는 인터넷보다 수산양식에 투자하는 것이 더 유망하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10대에 벌써 수산양식의 발전이 가져다줄 무한한 미래를 꿈꾼 박무억 소장의 혜안이 놀랍다. 박 소장을 지도한 노섬 전 제주대 교수(2007년 퇴임)는 국내 양식·양어 업계의 대부라 불린다. 1970년대 중반 전복 양식과 80년대 말 광어 양식의 기술을 개발해 산업화의 토대를 만들었다. 박무억 소장은 노섬 교수의 연구실에서 국내 수산양식 발전사의 궤적을 함께 걸었다. -대학에서 특별히 관심가진 연구는.△흔히 우럭으로 불리는 조피볼락의 번식기구를 제어하는 기술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물고기는 대부분 알을 낳지만 볼락 종류는 새끼를 낳는다. 보통 4월에 낳는데 그 시기를 앞당기면 양식어가의 소득을 높일 수 있어 연구를 진행했다.-번식 시기를 어떻게 조정한다는 얘긴가.△조피볼락은 저수온에 강한 반면 고수온에 약하다. 여름이 되기 전에 상품성 있는 크기로 길러 출하하는 기술 개발이 절실했다. 조피볼락 암컷은 교미 후에 몸에 정자를 지니고 있다가 수온이 올라가면 체내에서 부화시켜 새끼를 낳는다. 이 시기를 조절할 수 있는 원리를 밝혀내어 볼락의 연중 종묘생산이 가능해졌다.-요즘은 어떤 물고기에 관심이 큰가.△송어의 사촌 격인 산천어이다. 송어는 바다에서 살다가 알을 낳을 때 강으로 올라온다. 하천에서 부화한 송어 새끼가 강에 남는 경우도 있는데 그게 산천어이다. 산천어는 물이 맑은 곳에 산다. 산천어 축제로 유명해졌지만 문제는 행사장에 풀어놓은 산천어 대부분이 외래종이라는 것이다. 현재 양식장에서 기르는 산천어 대부분은 러시아와 일본의 교잡종으로, 고유종보다 우세한 추세이다. 멸종 위기에 처한 토종 산천어를 복원하기 위해 강원도 고성의 비무장지대(DMZ)까지 다녀왔다. 지뢰 매설 위험지역을 피해 가며 채집했는데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비무장지대의 아름다움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비무장지대 내 계곡에서 채집한 토종 산천어 치어를 민물고기연구센터에서 사육해서 국내 최초로 인공 부화에 성공했다. 내년에 치어를 방류해 토종 산천어 보급에 나선다.-지구의 진정한 터줏대감은 물고기라는 말이 있지만 물고기의 터전은 점점 위태롭다. 물고기 연구자로서 앞으로의 바람이 있다면.△물고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환경에 민감하기 때문에 앞으로 다가올 환경변화를 미리 예측하는 지표종이기도 하다. 환경오염과 기상이변으로 강은 말라가고 토종 물고기는 멸종 위기다. 다양한 생명체의 원천이자 근거지인 수변 생태계 보호가 절실하다. 사라져가는 우리나라 고유 어종의 복원하고 자원을 회복시키는 역할을 하고 싶다. 우리 물고기를 단 1종 1마리라도 올바르게 물려주기를 희망한다.박무억 소장은경주에서 태어나 경주고등학교를 다녔다. 군인이 되어 이름을 빛내라고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이지만 물고기 연구에 푹 빠져 산 지 30년이 넘었다. 제주대학교 양식학과(현재는 해양생명과학과와 수산생명의학과로 나눠짐)에 진학하여, 노섬 교수의 지도 아래 국내 양식 산업 발전에 힘을 보탰으며, ‘조피볼락의 출산 조절을 위한 번식기구 제어’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덕에 위치한 경상북도 수산자원연구원에서 20여 년 근무했고, 2년 전 민물고기연구센터로 왔다. 물고기를 살리는 일을 하다 보니 낚시는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키운 걸 어떻게 먹을 수 있느냐고 배웠기에 생선을 즐기지도 않는다. ‘바다개척자’라는 의미를 담은 영문 이메일 주소를 사용한다./배은정 작가

2022-11-14

마음의 안식처가 되는 예배당

지역마다 도심에는 지역민들의 마음의 안식처가 있기 마련이다. 교회나 사찰, 성당이 그런 역할을 맡는 게 일반적이다. 물론 모든 종교 건축이 그럴 수는 없고 그중에서 지역민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깊은 신뢰를 받는 곳이어야 가능할 것이다. 그런 공간은 특정 종교의 울타리를 너머 지역 공동체와 허물없이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포항 도심에도 그런 공간이 있을까? 포항 북구 중앙동의 조용한 주택가에 자리잡은 옛 제일교회는 한눈에 봐도 고풍스럽다. 오래된 붉은벽돌과 빛바랜 첨탑에서 고색창연한 기품을 느낄 수 있다. 길을 걷다가 교회 앞에 이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지고 때로는 숙연해지기도 한다. 교회 마당에 참새나 비둘기가 내려앉아 모이를 쪼고 있을 때면 교회는 그렇게 평화로워 보일 수 없다.포항 제일교회는 1905년 5월 12일 창립되었다. 이날은 대구·경북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안의와(安義窩, James E. Adams, 1867∼1929) 선교사 일행이 포항을 처음 방문해 복음을 전한 날이다.안의와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소속으로 1897년 대구에 부임해 대구·경북의 모교회(母敎會)인 대구 제일교회를 설립한 후로 수많은 교회를 세웠다. 계성(啓聖)학교를 설립했으며, 제중원(濟衆院, 현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개원에도 참여했다. 동산의료원 초대 원장인 우드브리지 존슨(Woodbridge O. Johnson, 1869∼1951)과 더불어 대구에 사과나무를 처음 도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겨레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영흥학교 설립포항 제일교회는 1908년 중앙동에 초가삼간을 구해 예배당으로 사용했다. 이때 교회 설립의 기초를 닦은 인물은 초대 당회장(堂會長)을 맡은 미국 선교사 맹의와(孟義窩, Edwin Frost McFarland, 1878∼?)다. 맹의와는 1904년 대구에 부임해 대구 제일교회를 근거지로 영일, 경주, 고령, 달성 등에 20여 개의 교회를 설립한 선교사다.이러한 정황을 미루어 볼 때 19세기 후반 대구에 정착한 미국 선교사들이 대구 제일교회를 거점으로 대구·경북에서 여러 교회를 개척한 것이 대구·경북 교회의 초기 역사라 할 수 있다. 실제로 포항 제일교회를 비롯해 흥해교회(현 흥해중앙교회), 대도교회 등 영일군과 포항의 주요 교회는 20세기 초반 비슷한 시기에 설립되었다.포항 제일교회는 신도가 증가하면서 1910년에 초가 다섯 간을 매입해 예배당으로 사용했다. 당시 포항에 일본인 거주자가 증가하면서 그들의 자녀교육을 위해 심상(尋常)소학교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포항 지역에 우리 아이들을 위한 교육기관은 전무한 실정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포항 제일교회 신도들은 이 겨레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간절히 기도했고, 그 응답으로 1911년 11월 1일 영흥(永興)학교를 설립했다. 평일에는 예배당을 학교로 활용하고 주말에는 예배를 보는 방식의 지혜를 짜낸 것이다.후일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이를 거부한 평양 숭실학교 등이 자진 폐교하는 등 기독교계 학교가 혹독한 시련을 겪을 때 영흥학교도 폐교 위기에 몰렸다. 다행스럽게 1933년에 지역의 젊은 유지인 해촌(海村) 김용주(金龍周, 1905∼1985)가 학교를 인수하면서 새로운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3·1운동을 주도한 교인들1919년 3·1운동은 포항 제일교회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이다. 포항 제일교회 교인과 영흥학교 교사들이 포항 지역의 3·1운동을 주도한 것이다. 이 때문에 많은 교인이 체포되고 실형을 선고받는 등 포항 제일교회는 고난을 겪었지만 위축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교인이 증가하는 등 교세가 확장되었다. 겨레의 고난과 함께한 것이 교회 부흥의 계기가 된 것이다.교인이 증가하면서 예배 장소가 협소해지자 벽돌로 된 예배당을 짓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1926년 김영옥 목사가 2대 담임 목사로 부임하면서 새 예배당 건립에 힘이 실렸다. 1928년 9월 연와제예배당건축기성회(煉瓦製禮拜堂建築期成會)가 조직되었고, 벽돌 한 장 모으기 운동이 시작되었다. 마침내 1933년 6월 15일 총공사비 8천 원의 예산으로 연와제 2층 연면적 190평의 예배당을 기공해 그해 11월 19일 입당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포항 최초의 붉은벽돌 예배당은 그렇게 세워졌다.좌우 합작 단체인 신간회(新幹會) 활동을 했던 김영옥 목사는 청년회를 만들어 청년들의 활동을 살려 나가는 한편, 포항여자야학교를 설립해 여성 교육에도 힘쓰는 등 포항 제일교회가 지역에 뿌리내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처럼 포항 제일교회는 지역민들의 교육에 각별한 공을 들였다. 광복되던 해 12월 일본에서 귀국한 김영상이 제일교회에 등록해 일본에서 주일학교를 운영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듬해 교회당에 기독공민학교를 설립했다. 학생 수가 400여 명에 이르자 교회는 도저히 학생들을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포항에 주둔해 있던 미 해병대로부터 자재를 지원받아 현 육거리 대로변의 이명석 장로 사저에 교사(校舍)를 신축해 학생들을 받아들였다. 기독공민학교는 훗날 이명석 장로가 승계받아서 애린공민학교라는 교명으로 운영되었다.포항 전투 때 도심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교회당한국전쟁 때 포항 전투의 참상을 보여주는 한 장의 사진이 있다. 도심에 딱 하나의 건물만 남고 초토화된 사진이다. 그 건물이 제일교회다. 낙동강 방어선의 주요 축인 포항이 뚫리면 전세가 위태로워질 수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포항에 북한군이 진입하자 미 공군과 해군은 엄청난 폭격과 포격을 가했고 그 바람에 도심은 불바다가 되었다.미군이 제일교회는 피해서 폭격과 포격을 했다는 얘기가 전하지만 불바다에서 살아남은 것은 천우신조(天佑神助)가 아닐 수 없었다. 지금도 예배당 붉은벽돌 곳곳에는 총탄의 흔적이 남아 있다. 포항 제일교회는 이러한 역사의 파도를 넘으며 자연스럽게 포항의 모교회(母敎會)로 자리잡은 것은 물론 지역민의 신뢰를 받는 교회이자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다.교회가 발전하면서 중앙동 골목길의 예배당으로는 교인들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1993년 11월에 교회이전건축추진위원회가 조직되었고, 2003년 10월 26일 용흥동의 새 예배당에서 첫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로써 포항 제일교회의 100년 가까운 중앙동 시대는 막을 내렸고, 기존 붉은벽돌 예배당은 소망교회에서 인수했다. 생태적 삶과 영성 공동체를 지향하는 푸른마을교회포항 제일교회는 국내에 19개 교회, 해외에 29개 교회를 개척했는데, 포항 흥해읍 성곡리에 있는 푸른마을교회는 그중 하나다. 이 교회 이상은, 김이화 목사는 1997년 포항 학산동의 2층 상가를 얻어 처음 예배를 드렸다. 그 후 생태적 삶과 영성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교회 부지를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2003년 성곡리 숲속과 인연이 되었다.교회는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지만 처음 찾아가는 사람은 조금 애를 먹기도 한다. 그 이유는 교회의 노래가 말해준다.빠른 길 큰길도 아닌 / 사과밭 돌아서 작은 길로 / 울퉁불퉁 낡은 길 지나 /나무 계단 오르면 / 새 소리 바람 소리 / 주님 목소리 들려요- 김이화 작사, ‘푸른마을 가는 길’ 부분교회는 야트막한 산 중턱에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놓여 있다. 주변 환경을 위압하지 않고 함께 어우러져 있다. 어느 누구든 교회 앞에 이르면 잠시 숨을 고르고 노출 콘크리트로 된 교회 건물과 고즈넉한 주변 풍경을 찬찬히 살펴보게 된다.교회를 설계한 이은석 경희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자연을 부지로 받아들고 자연에 가장 잘 순응하는 수평의 길고 나지막한 겸손의 상자를 조심스럽게 놓았다”고 했다. 노출 콘크리트 공법을 채택한 것은 “꾸미지도 장식하지도 않은 재료이고 건설의 흔적을 그대로 지닌 것이다. 우리의 삶도 이처럼 순수하고 질박하면서도 자연스럽기를 바라기 때문이다”라고 했다.이상은, 김이화 목사의 생각과 이은석 교수의 아이디어가 한몸으로 섞이면서 “수평의 길고 나지막한 겸손의 상자”라는 독특한 교회 건축이 포항의 외딴곳에서 탄생한 것이다.예배당 내부의 십자가가 서 있는 자리는 자연 채광이 들어와 이상은 목사가 직접 만든 나무 십자가에는 햇볕이 은은하게 비친다. 이렇듯 푸른마을교회는 진정한 영성을 느낄 수 있도록 교회 곳곳을 세심하게 배려했다.교인들이 텃밭에서 함께 경작하는 모습이라든지 교회가 꾸준히 개최해온 ‘푸른마을 자연학교’에서 이 교회가 어떤 가치를 지향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다.붉은벽돌로 된 옛 포항 제일교회와 푸른마을교회는 몇 가지 면에서 대조적이다. 도심에 있는 제일교회는 지은 지 100년 가까이 되고 비교적 큰 교회다. 외곽에 있는 푸른마을교회는 건축한 지 20년도 되지 않은 작은 교회다. 하지만 두 교회는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다. 교인이든 아니든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에게 마음의 안식처가 되고 내면의 빛을 밝혀준다는 것이다. 이 교회를 찾아가 예배당 안팎을 느릿느릿 걸어 다니다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

2022-11-14

토함산은 신앙적 측면과 함께 국방 수호의 의미

경주의 영산 토함산을 취재하면서 드러나지 않은 것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토함산에 있는 불국사와 석불사(석굴암)는 유네스코 지정 문화유산이지만 실제로 문화유산의 미학적, 역사적 가치에는 무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이 일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t Carr)는 명저(名著)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토함산의 숨겨진 다양한 이야기를 이해해야 통일신라시대와 오늘날의 경주를 통찰력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연재를 마감하면서 필자 역량의 한계로 토함산의 문화유산에 담긴 밝히지 못한 이야기들이 무수히 남아 있음을 고백한다. 경주 문화유산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박방룡 신라문화유산연구원장과 대담을 마련한 것은 독자들에게 필자가 미처 짚지 못한 이야기를 전문가의 눈으로 밝혀주기 위함이다. ◇불교적 이상국가 건설이 집약된 토함산“토함산은 신앙(산신신앙)적인 면과 함께 불교에서 지향하는 이상적인 나라를 건설하려는 신라인의 열망과 국방 수호의 의미가 있는 영산입니다”박방룡 신라문화유산연구원장은 지난 8일 본지와의 대담을 통해 통일신라기 최고의 문화예술작품인 불국사와 석불사(석굴암)가 토함산에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라며 이같이 말했다.박 원장은 “토함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 21권에서 신라의 중사(中祀)를 지내던 오악(五岳) 중 동악(東岳)으로 기록돼 있다”고 했다. 신라오악은 산악숭배사상에서 비롯됐으며, 오악동서남북 4방에 가운데의 중방을 합친 것으로, 오악신앙은 5개의 산천을 성역화해 제사지내는 데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동악인 토함산은 해 솟는 방향과 일치하고 석탈해가 산신으로 모신 점으로 보아 석씨 세력의 상징적인 산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고 밝혔다.그는 토함산은 신앙(산신신앙)적인 면과 함께 국방 수호의 의미가 있다고 했다. “‘삼국사기’ 3 신라본기 3 나물이사금(奈勿尼師今) 9년(364)조의 내용에서 볼 수 있듯이, 동해안을 통해 침입하는 왜인(왜적, 왜구)의 1차 방어선으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한편으로 토함산은 불교 유적의 성지이기도 했다고 박 원장은 밝혔다. 현재까지 토함산에서 위치가 확인된 불교 유적만 총 19곳이며, 위치를 확인하지 못하는 유적까지 포함하면 총 27개의 불교 유적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경주 남산 다음으로 많다고 한다.경주를 넘어 대한민국의 불교 유적 중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불국사와 석굴암이 토함산에 자리 잡은 이유는 무엇일까?박방룡 원장은 이승에 부처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은 신라의 오랜 꿈이었을 정도로 불교가 나라를 지탱하는 이념이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신라인들은 자신의 나라가 바로 ‘부처의 나라’라고 믿었기에 불국사를 곧 부처님의 나라가 현세에 실현된 낙원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또 다른 측면으로 박 원장은 신라왕경에서 동해(울산)로 향하는 교통의 요충지에 있다는 점을 들었다. ◇신라왕경에서 동해안 가는 길 왕릉과 사찰신라 왕경에서 동해안으로 가는 길은 크게 두 갈래로, 첫 번째는 월성이나 황룡사에서 시작해 분황사, 낭산 북쪽, 명활산성, 천군동사지, 고선사지, 기림사를 지나 감은사로 향하는 경로가 있으며, 두 번째는 불국사, 장항리사지, 감은사로 연결되는 길인데 이 길은 경주 월성에서 시작해 낭산 서편(사천왕사나 망덕사 남쪽)을 지나 현재의 7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이어지다가, 구정동 인근에서 다시 불국사 가는 길로 연결됐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이 길이 중요한 이유는 신라왕경에서 동해안으로 가는 길에 왕릉급 무덤이나 사찰이 있기 때문이다.“불교미술의 권위자인 최선아 명지대 교수는 7세기 후반 사천왕사, 망덕사, 전(傳)황복사 등 왕실과 관련된 주요 불사(佛寺)와 신문왕릉, 효소왕릉 등의 조성이 낭산 일원에서 이뤄졌고, 8세기 전반에는 왕실 관련 사업들이 토함산 일원으로 확장되었다는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여러 불교 사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해볼 때 이 시기가 신라 제33대 성덕왕 전후로 추정됩니다. 신라왕경에서 동해안으로 가는 경로의 울산 방향 끝에는 성덕왕 21년(722)에 조성한 관문성이 있는데 이 성은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는 역할과 기능을 했을 것을 보여지며, 사찰과 왕릉이 입지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박 원장은 “토함산의 산신이 된 석탈해 왕은 이주민이 신라의 권력을 잡은 대표적인 경우로 석탈해왕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박 원장은 석탈해왕이 ‘삼국유사’ 제1 기이(紀異) 제4 탈해왕조(脫解王條)에 탈해가 지략으로 호공의 집을 빼앗은 점을 들며 대단한 지략가라고 평가했다. 지략가적인 측면은 남해왕이 자식을 제치고 사위인 석탈해를 태자로 삼을 정도로 석탈해가 남해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것이다.“토함산과 석탈해왕은 불가분의 연관이 있어요. ‘삼국유사’ 1권 기이 1 탈해왕조에서 볼 수 있듯이 탈해왕의 무덤을 파내 유골을 토함산에 안치하고 동악신(東岳神)으로 모셨다는 것은 국방적인 것을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삼국통일 직후 토함산과 가까운 경주시 양남면 동해안 일대에 왜구의 침입이 잦았으므로 문무왕을 동해의 대왕암(大王岩)에 장사 지내고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했으며 관문성의 신대리성(新垈里城)을 구축하는 등, 이에 대비하는 과정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신라 왕경을 수호하는 호국산신 동악신에게 행하는 제사는 ‘삼국유사’가 편찬된 13세기까지 약 700년간 끊이지 않았으며 조선시대로 이어집니다. 2020년 석탈해왕 사당터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명문와 및 공반 유물을 보면 조선 후기까지 제사가 계속됐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다른 나라의 석굴사원과 석굴암이 다른 점에 대해 박 원장은 “석굴암에서 본존을 안치한 주실은 유사사례가 없는 원형당(圓形堂) 형식을 지니고 있으며, 석굴암 건축과 부분적으로 유사한 유적은 있지만 석굴암의 주요한 건축적 요소를 모두 지닌 예는 찾을 수 없으며, 이에 그 원류나 모델로 특정 유적을 지목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석굴암은 암벽을 파서 만든 인도와 중국 등 다른 나라의 석굴과는 달리 돌을 쌓아 만든 특이한 사례라는 것이다.“석굴암과 유사한 유적으로 대표되는 중국 맥적산석굴 제 43굴과 용문석굴 사안동에서 볼수 있는 둥근 평면과 둥근 천장의 형태는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만, 석굴암 주실이 지닌 정연한 원형 평면과 비교할 만한 사례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비교적 석굴암 조성 시기와 유사한 아프가니스탄 바미얀 석굴(6~8세기)은 벽면 상부나 천장에 감실을 반복해 배치된 점 등이 석굴암과 비슷하나 석굴 중앙에 불상이나 예배대상이 없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건축, 수리, 기하학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걸작박 원장은 다른 나라 석굴사원과 괘가 다른 석불사는 ‘조형예술의 걸작’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특히 신라 불교예술 전성기에 조성한 석불사 본존불상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완벽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 돼 있는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말했다.“석불사의 돔형 천장을 구성하는 360여 개의 돌은 주실 천장의 또 다른 연판을 향해 모아지는 형태로, 이는 건축적으로 그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본존불상인 석가여래좌상은 높이 3.45m로 연화좌(蓮花座) 위에 앉아 있습니다. 불상은 결가부좌 상태에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라는 손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는 깨달음을 얻은 부처가 지신(地神)을 소환해 자신의 깨달음을 증명할 때 취했던 동작이죠. 금강역사상, 팔부신장상, 천부상, 보살상, 나한상, 사천왕상 등의 다른 조각들도 모두 세부적인 자연스러움에 주의를 기울여 정교하게 조각됐습니다”말도 탈도 많았던 석굴암 복원 논쟁에 대해 박 원장은 1960년대 석굴암 수리 공사를 전후해 제기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당시 주요 논쟁 요소는 돔 전면 광창 설치 여부, 비도 전면의 대문 설치 여부와 그 형태, 목조 전실의 유무, 전실 팔부신중의 평면 형태(절곡형 또는 일직선형) 등이었다.현재까지 석불사 복원과 관련한 논쟁은 진행형인데 현재의 과학으로 밝혀진 부분도 있고 상당 부분은 추정과 가설인 경우도 있어 속단하기 어렵다고 밝혔다.박 원장은 토함산과 그 자락에 있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부족하다고도 했다. 박방룡 신라문화유산연구원장 “불국사는 인공적으로 쌓은 석조 기단 위에 지은 목조건축물로, 신라 불교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어 석굴암(석불사)과 함께 대표적인 불교 유적으로 손꼽히며, 우리나라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유산(1995)에 등재됐습니다. 이런 문화유산을 품고 있는 영산 토함산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될 때 통일신라시대의 역사가 보다 생동감 있게 후손들에게 느껴질 겁니다”박방룡 신라문화유산연구원장은 제20대 국립부여박물관관장과 제8대 부산박물관관장을 역임하고 현재 신라문화유산연구원장에 재직하고 있다. 2013년 제16회 자랑스런 박물관인상을 받았으며 ‘신라도성’(학연문화사) ‘경주’(열린어린이) 등을 저술했다. /최병일 작가끝

2022-11-13

짙게 물든 오색단풍 문화여행… 가을 끝자락에 서다

가을의 끝에 비극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깊은 슬픔 속에도 일상은 이어지고 햇살은 온기를 나누려는 듯 따갑게 쏟아진다. 짙게 물든 산이 병풍을 두른 강원도 원주에는 자연의 품에서 차분히 빛나는 문화 예술 명소들이 있다. 넉넉한 품을 지닌 자연과 예술 명소를 찾아 아픔으로 멍울진 마음의 위로를 받아보면 어떨까.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과 자연이 조화로운 뮤지엄산(Museum. Space. Art. Nature.)원주시 지정면에 있는 뮤지엄산(Museum SAN)은 일본의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건축물이다.그는 오사카의 ‘빛의 교회’, 홋카이도의 ‘물의 교회’ 등 독특하고 창의적인 건축물을 내놓아 세상을 놀라게 했다. 산속 깊은 곳에 있는 뮤지엄산은 노출콘크리트, 빛, 물을 조화롭게 사용해 자연을 건축물에 담아내는 건축가의 철학이 담겨있다.뮤지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플라워가든을 만난다. 여름이면 정원에 붉은 패랭이꽃들이 지천으로 깔린다. 꽃밭 너머로 안토니 카로 등 세계 유명 작가들의 조각품들이 자연과 어우러진다. 산책로를 따라가면 하얀 자작나무가 숲을 이룬 길에서 상쾌한 공기가 뿜어나온다. 맑은 숨을 들이쉬며 걷다 보면 뮤지엄 외관에서 가장 돋보이는 빨간 조형물 ‘아치웨이(Archway)’가 길을 열어준다. 그 사이로 보이는 단정한 건물은 고요한 물에 반영돼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듯하다. 워터가든은 빛과 물을 이용한 건축물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아닌가 싶다. 워터가든과 이어진 본관은 네 개의 윙(wing) 구조물이 사각, 삼각, 원형의 공간들로 연결돼 있고, 종이박물관과 미술관으로 이용된다.내부에 전시된 작품 관람도 의미 있지만 자연을 건물 품 안에 들이고자 한 건축가의 의도를 찾아보는 것도 숨은 재미다. 종이박물관에서 청조갤러리로 향하는 길목에는 콘크리트 벽을 두른 삼각형의 작은 공간이 있다. 삼각코트 안에 들어가 고개를 들어본다. 벽으로 막힌 건물에서 삼각 모양으로 파란 하늘 보인다. 건축가는 이 장소를 무(無)의 공간이자 사람(人)을 상징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단절된 고요한 공간에서 하늘을 열어 대지와 하늘을 사람으로 잇고자 했다는 건축가의 마음이 드러난다. 세계적인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의 미디어 작품 ‘커뮤니케이션 타워’를 볼 수 있는 특별전시관, 백남준 홀도 인상적이다. 약 9m 높이의 원형 공간 천장에는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유리창이 나 있다. 동그란 빛은 돌벽에 반사돼 어두운 방 안을 환히 비춘다. 바닥이 투명해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작품은 빛을 받아 생동감 있다.건물 밖으로 나가면 뮤지엄의 마지막 정원 스톤가든이 나온다. 신라 고분을 모티브로 만든 정원은 돌을 쌓아 우리나라의 9개 산을 구현했다. 평평한 돌바닥에는 단아한 곡선이 아름다운 스톤마운드와 키 큰 소나무들이 솟아 있다. 해외 작가의 조각품이 더해진 정원은 근사하다. 스톤가든을 지나면 제임스 터렐관에서 빛과 공간의 예술가 ‘제임스 터렐’의 신기한 작품이 펼쳐진다. 건조한 콘크리트 건축물은 공간에 예술을 덧대고 계절마다 변하는 자연의 빛을 머금어 시시각각 다른 매력을 뽐낸다. ◇한 그루만으로 웅장한 반계리 은행나무은행나무는 수많은 그루가 줄지어 물들 때 멋이 난다. 원주 반계리에는 그런 은행나무들이 떼로 몰려와도 비교되지 않는, 존재감 넘치는 전설의 은행나무가 홀로 서 있다. 멀리서도 황금빛 수형이 보일 만큼 거대한 반계리 은행나무는 높이가 32m, 둘레가 16.27m나 된다. 촘촘하게 잎사귀가 달린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있어 나무는 더 웅장하다. 은행나무의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1964년 천연기념물 제167호로 지정할 당시 800년 정도 된 것으로 추정했다. 예전에 반계리에 살던 사람이 심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오랜 옛날 어떤 대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물을 마신 후 들고 있던 지팡이를 꽂아 놓고 간 것이 장엄한 은행나무로 자랐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모습 자체가 신비로워서였을까. 마을 사람들은 이 은행나무에 커다란 흰 뱀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이를 신성시해 아무도 손대지 못했다고 한다. 가을에 이 은행나무가 황금빛을 뿜어내면 다음 해 풍년이 든다는 전설도 전해진다.은행나무 앞에 가까이 서면 그 모습을 눈에 다 담을 수 없다. 나무 하나 빙 돌아보는데 숲을 둘러보는 기분이다. 황금빛 나무 아래 널따란 땅도 노랗다. 은행나무 하나 보기 위해 마을 좁은 길을 따라 하나둘 모여든 사람들 입에서는 저절로 탄성이 새어 나온다. 감히 가장 아름다운 은행나무라 꼽을 만큼 찬란한 반계리 은행나무에서 가을의 절정을 맛본다. ◇한국 문단의 대가 박경리문학공원흥업면으로 가면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이 살던 집을 공원으로 만든 박경리문학공원이 있다. 박경리 선생은 1980년 서울을 떠나 원주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해 18년간 살았다. 텃밭에서 채소 농사를 지으며 ‘토지’의 제4부와 제5부를 집필해 완성했다.‘토지’는 26년 긴 시간에 걸쳐 완성된 5부 20권 분량의 대하소설이다. 갑오개혁 이후인 1897년 한가위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한국 근대사를 배경으로 경남 하동 평사리, 지리산, 서울, 간도, 러시아, 일본, 부산, 진주 등에서 광활한 이야기가 펼쳐진다.박경리문학공원에는 ‘토지’의 육필원고와 만년필, 국어사전, 손수 옷을 지은 재봉틀, 귀하게 간직한 달항아리, 직접 조각한 여인상, 손수 지어 즐겨 입던 옷, 농사지을 때 쓰던 호미와 장갑 등 선생의 유품을 전시한 ‘박경리문학의 집’이 있다. 선생의 작품세계와 삶의 자취를 엿보고 나서면 그대로 보존된 집필실과 뜰이 있는 옛집으로 이어진다. 선생은 마당에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정붙이고 살았다. 마당에는 즐겨 앉던 바위에 고양이와 함께 앉아 쉬고 있는 모습의 동상이 있다. 선생이 뿌리를 내려놓은 듯 지금도 알이 굵은 배추가 자란다.소설의 배경지였던 평사리마당은 ‘토지’ 속의 주 무대인 평사리를 형상화했다. 마을 앞을 굽이치는 섬진강 물줄기, 선착장, 둑길 등을 소박하게 꾸며 놓았다. 옛집 뒤쪽에는 ‘홍이동산’이라는 언덕이 있다. ‘토지’의 어린 주인공인 ‘홍이’에서 이름을 따온 동산은 평사리 마을 뒷동산을 의미한다. 홍이동산에서 비탈을 따라 내려가면 평사리에서 신작로와 철길을 거쳐 간도 용정으로 떠나던 여정을 그려낸 용두레벌이 나온다. 하동 평사리에서 간도 용정까지 3천여 리의 무대가 3천여 평 작은 공원에 펼쳐진다.어깨 부빌 거리도 없고, 기대어볼 만한 언덕도 없었다던 추운 원주에서의 삶. 그러나 서울 갔다 오는 날 서원도로 들어서면 고향길 돌아온 듯 마냥 마음이 놓였다던 박경리 선생은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 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고 남몰래 시를 썼다. 선생이 정붙인 ‘옛날의 그 집’ 마당에는 가을빛 짙은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고 이내 후두둑 붉은 낙엽비가 내린다. /글·사진 이솔 객원기자

2022-11-10

영일만에 울려 퍼진 대서사시

한 도시에도 운명이란 게 있으리라. 20세기 접어들어 한반도가 겪은 거센 풍파는 포항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 역사적 경험은 한반도 전체가 겪은 충격이지만 포항은 그 정도가 유독 심했다. 전쟁 후 한적한 소도시였던 포항은 1967년 6월 30일 큰 변화의 계기를 맞게 된다. 정부의 역점 사업인 종합제철이 들어설 입지로 선정된 것이다. 당시 포항 인구는 6만8천여 명이었고, 전체 인구의 약 70퍼센트가 농어업에 종사하고 있었다.포항이 종합제철 입지로 결정된 후 항만과 철도, 댐 공사가 시작되었다. 많은 건설 인력과 장비가 몰려들면서 포항에 때아닌 활기가 넘쳤다. 1968년 4월 1일에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창립 기념식이 열렸으며, 박태준 초대 사장이 취임했다.종합제철 건설의 성공 여부는 무엇보다 막대한 자금 확보가 관건이었다. 그러나 종합제철 건설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높아갈 즈음에 정부와 포항제철이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기대했던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을 통한 외자 조달이 불투명해진 것이다. 부지 조성 공사를 한창 진행하던 1968년 11월 12일 박정희 대통령이 건설 현장을 처음 방문해 “이거 남의 집 다 헐어놓고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 건가?”라고 걱정 섞인 말을 하기도 했다. ‘우향우 정신’, 포항제철을 이끈 원동력대일청구권자금의 일부를 전용(轉用)해 종합제철 건설에 투입하자는 구상은 이런 난기류 속에서 나왔다. 이 구상을 실현하려면 일본 정부의 동의와 일본 철강업계, IBRD(국제부흥개발은행) 등 국제금융기구가 포항제철 건설의 타당성을 인정해야 하는 선결 과제가 있었다. 정부와 박태준 사장은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았고, 마침내 1969년 12월 3일 대일청구권자금의 일부를 종합제철 건설에 전용하기로 최종 합의하는 한일 간의 기본 협약을 체결했다.1970년 4월 1일 포항 대송면 건설 현장에서 포항 1기 종합 착공식이 열렸다. ‘산업의 쌀’을 생산하는 종합제철 건설은 단순히 한 기업의 성패를 넘어 국가 경제의 근간을 좌우하는 대역사(大役事)였다. 박태준 사장은 밤낮없이 건설 현장에서 직원들을 독려하며 그 유명한 ‘우향우 정신’을 강조했다. 한 인간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우향우’라는 단어는 포항제철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었다.경부고속도로 건설비의 세 배가 들어간 포항 1기 건설포항제철은 1972년 12월 31일 본사를 서울에서 포항으로 이전했다. 포항 1기 건설 총력 지원 체계를 갖추고 현장 제일주의 원칙을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모래바람 부는 허허벌판의 영일만은 점차 종합제철 단지로 변모해갔다.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30분, 1고로 출선구(出銑口)에서 첫 쇳물이 쏟아졌고, 임직원들은 감격에 겨워 만세를 불렀다.1973년 7월 3일 포항 1기 종합 준공식이 있었다. 제선, 제강, 압연, 지원설비 등 총 22개의 공장과 설비를 일관화한 사업으로 건설 인원은 연인원 315만 4천884명, 건설비는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의 세 배에 해당하는 1천204억 원이었다. 이 준공식은 대한민국이 중화학공업 시대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1973년 포항 인구는 10만9천여 명으로, 포항이 종합제철 건설의 입지로 선정된 1967년의 6만8천여 명에 비해 4만1천여 명이나 증가했다. 포항제철의 건설과 함께 포항이 얼마나 역동적으로 변모해가는지를 보여주는 통계라 하겠다. 이 무렵 노란색 작업복을 입고 형산교를 건너 출근하는 포항제철 직원들의 기나긴 자전거 행렬은 포항의 새로운 풍경이 되었다. 극장 상영용 뉴스인 ‘대한뉴스’에도 등장하던 그 풍경은 우리나라의 산업화를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포항 시내 오거리에 있던 ‘부산자전거’는 전국에서 자전거가 가장 많이 팔리는 점포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유명세를 떨치기도 했다.포항은 포항제철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도시포항제철은 수출과 내수 판매를 거의 같은 시기에 시작했다. 수출을 개시한 지 2년 만에 1억 달러 수출을 달성했고, 국내에는 외국 오퍼 가격보다 21∼42퍼센트까지 낮은 가격으로 공급해 국내 기업의 국제 경쟁력 확보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후 포항제철은 1976년 5월 31일 포항 2기를 종합 준공하고 조강 연산 260만 톤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국내 철강 수요의 55퍼센트를 담당할 정도로 고속 성장했다.포항제철 건설과 조업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특히 1977년 4월 24일 1제강공장에서 일어난 대형 사고는 파장이 컸다. 쇳물 44톤이 전로(轉爐) 밖으로 쏟아져 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일본에서 급파한 전문가들은 사고 현장을 조사한 후 완전 복구에 3∼4개월은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이때 포항제철 특유의 돌관 정신이 빛을 발했다. 정상조업 단계에 들어가는 데 불과 34일밖에 걸리지 않은 것이다.포항 3기 설비 공사는 건국 이후의 최대 공사여서 공기 준수를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1978년 6월 13일 ‘건설 비상’을 선포하고 전사 총력 건설 체제에 돌입했다. 1978년 12월 8일 3기를 종합 준공함으로써 조강 연산 550만 톤 체제를 구축했다. 3년 후인 1981년 2월 18일에는 포항 4기를 종합 준공해 조강 연산 850만 톤 체제를 구축했으며, 1983년 5월 25일 4기 2차 사업을 종합 준공함으로써 조강 연산 910만 톤 체제를 완성했다.포항제철이 내딛는 발걸음마다 ‘돌관’, ‘비상’, ‘총력’ 같은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비상한 시기에는 비상한 방법으로 대응해야 하는바, 포항제철의 건설 과정이 그러했다.1983년 포항 인구는 21만 3천여 명으로, 포항 1기 종합 준공식이 열린 1973년의 10만 9천여 명에 비해 배 가까이 증가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실감 나는 변화였다. 이제 포항은 포항제철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도시가 되었다. 광양 4기 종합 준공으로 사반세기 제철소 건설 대역사 완성1970년대 우리 경제는 가파르게 성장하면서 철강 수요 또한 계속 증가했다. 이때 제2의 종합제철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지만 석유파동으로 경기가 침체되면서 유야무야되었다. 국내외 여건이 나아지던 1977년 제2제철 건설이 다시 이슈로 떠올랐고, 민간기업들도 실수요자 선정 경쟁에 뛰어들었다.현대그룹이 제2제철 실수요자 선정에 적극적이라서 포항제철은 현대그룹과 논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포항제철은 국가기간산업인 제철 사업을 민간에 맡기면 부의 편재가 극심해진다는 점을 지적하고, 그에 따른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경제로 이어지는 폐단이 발생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결국 1978년 10월 포항제철이 제2제철 실수요자로 선정되었다.제2제철의 입지는 1981년 11월 광양만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당시 정부는 아산만을 제2공장 입지로 내정했지만, 포항제철은 경제적인 측면과 균형발전 측면을 고려할 때 광양만이 적합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정부가 포항제철의 의견을 수용하면서 광양만에 제2제철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1985년 3월 광양 1기 공사를 시작해 1992년 10월 광양 4기 공사가 종합 준공되었다. 이로써 포항제철은 1968년 창립 이후 사반세기에 걸친 제철소 건설 대역사를 완성해 조강(粗鋼) 연산 2천100만 톤 체제를 구축, 세계 3위 철강기업의 위상을 확립했다. 사반세기 건설 대역사를 완성한 다음 날인 1992년 10월 3일 박태준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해 대역사의 성공적 완수를 보고했다. 그리고 이틀 후인 10월 5일 이사회에 사직서를 제출했다.세계적인 연구중심 대학을 표방한 포항공대포항제철은 국가 과학기술의 백년지대계를 고뇌했다. 그 산물이 1986년 포항공과대학 설립이다. 1980년부터 포항에 4년제 대학 설립을 구상한 포항제철은 1986년 12월 3일 국내 최초로 세계적인 연구중심 대학을 표방하는 포항공과대학(POSTECH)을 개교했다.2002년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는 포스코(POSCO)로 사명(社名)을 변경했다. 자본도 기술도 경험도 없이 ‘제철보국(製鐵報國)’이라는 사명감으로 세계적인 철강기업으로 우뚝 선 포스코의 특별한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영일만이 어두워지면 포항제철소의 조명이 켜진다. 거대한 설치미술 같은 제철소의 야간 조명은 영일만의 밤을 형형색색 밝힌다. 눈에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포항 구석구석에 포스코가 깊숙이 들어와 있다. 포스코의 위용만큼이나 포스코가 포항에 미친 영향은 크고도 깊다. 그리고 그 영향은 과거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고 미래형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포항과 포스코는 한배를 탄 공동의 운명체가 아닐 수 없다. 포항에서 이룬 포스코의 대서사시가 더 웅장하게 울려 퍼질 수 있도록 포항과 포스코는 더 굳게 손을 맞잡아야 할 것이다.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

2022-11-09

호젓한 해변길 돌아 돌아서 만나는 낭만포구

11월의 하늘은 티끌 한 점 없이 잘 닦인 유리잔처럼 투명했다. 푸른 보석처럼 빛까지 났다. 선물 같은 날씨 속에서 ‘산책의 공간’을 찾아가는 여정은 유쾌했다.포항 시내에서 209번 버스를 타고 30분 남짓. 도구해수욕장이 지척인 동해면 행정복지센터 앞에 기자를 내려놓은 차는 다음 정거장을 향해 떠났다.행정복지센터 바로 옆엔 동해초등학교가 자리해 있었다. 야트막한 담장 뒤로 키 큰 소나무들이 근사하게 늘어섰다. 파스텔로 색칠한 그림처럼 예쁜 학교다.일제강점기인 1928년 동해공립보통학교로 개교했다니 역사가 100년에 가까운 초등학교.‘바다가 지척인 곳에서 꿈꾸며 자라는 이 학교 아이들은 아마도 마음까지 바다처럼 넓고 넉넉하겠지’란 생각을 잠시잠깐 했다.연이어 기억 회로에 새겨진 정일근의 시 한 편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유리창 청소’라는 부제가 붙은 ‘바다가 보이는 교실’. 이런 노래다.참 맑아라겨우 제 이름밖에 쓸 줄 모르는열이, 열이가 착하게 닦아놓은유리창 한 장먼 해안선과 다정한 형제섬그냥 그대로 눈이 시린가을 바다 한 장열이의 착한 마음으로 그려놓은아아, 참으로 맑은 세상 저기 있으니.시 속에 등장하는 ‘열이’는 어떤 바다가 보이는 교실에서 공부했던 아이일까. 동해? 서해? 남해?그런 건 궁금해 하지말자. 그곳이 어디면 어떠랴. 바다처럼 맑고 착한 마음을 가진 아이들이야 한국 어디를 가도 흔하지 않겠는가.분명 동해초등학교에도 ‘열이’처럼 자신이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하는 아이들이 지천일 것이다. 그것이 사소하게 보이는 ‘유리창 닦기’라 할지라도. 세상은 그런 마음들이 모여 ‘깨끗한 유리창’처럼 조금씩 아름다워지는 법. ▲한적한 가을 속을 걸어 도구해수욕장으로도심에서 벗어나 한적한 길을 걸어보고 싶어 선택한 이번 산책길은 동해초등학교를 출발해 도구해수욕장을 거쳐 임곡항까지 가는 30~40분짜리 코스. 같은 길을 되짚어 오면 약 10리쯤의 거리니 큰 힘 들이지 않고 유유자적 돌아보기에 적당해 보였다. 예상은 틀리지 않아 실제로도 그랬다.동해초등학교에서 2차선 도로를 건너니 바로 아래 해수욕장이 있음을 알리는 표지판이 서있다. 그야말로 손짓해 부르면 들릴 지호지간(指呼之間)이 바다다.포항이 품은 주요 해수욕장 가운데 하나인 도구해수욕장은 연오랑과 세오녀가 거대한 바위에 올라 먼 바다로 떠났다는 전설이 전하는 곳이다.800m에 이르는 백사장은 폭이 50여m. 큰 해변이지만 여름이 지난 바닷가엔 인적이 드물었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 나온 동네 주민 하나, 운동복 차림으로 해변을 뛰는 젊은이 한 명이 전부였다.도구해수욕장은 많게는 2만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작지 않은 규모다. 게다가 시내에서 멀지 않아 햇살 좋은 주말이면 나들이 하는 식구들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고 한다.그러나, 지금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늦가을. 거기다 평일 오후니 사람이 많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다.그래서다. 조용히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이들에겐 이즈음이 좋은 산책 시기.도구해수욕장은 1970~80년대 한국 사실주의문학에 뚜렷한 이정표를 남긴 소설가 황석영의 작품 ‘몰개월의 새’의 무대가 된 공간이기도 하다.베트남으로 떠날 군인들을 훈련시키던 곳. 지울 수 없는 역사의 상처가 배태(胚胎)된 도구 해변을 지나며 전쟁이 인간에게 준 아픔을 떠올렸고, 그 회상 위로 갈매기 두어 마리가 무심히 날아다녔다. ▲육지로 머리 눕힌 소나무 사이를 지나면 임곡항도구해수욕장에서 임곡항으로 가는 방법은 2가지다. 반듯하게 만들어진 아스팔트 길로 가도 무방하지만, 가능하면 바닷가에 접한 소나무 숲 사이로 걸어보는 걸 권한다.300~400m가량 이어지는 숲길은 소나무 냄새가 향기롭고, 나무 사이로 부는 가을바람의 정취를 느끼기에 그만이다. 숲 중간엔 벤치도 몇 개 있어 바다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길 수도 있다.관찰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이곳 소나무들이 하나 예외 없이 모두 육지를 향해 비스듬히 누워있다는 걸 알게 된다. 아마도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 탓이리라. 수십 년 이상 그 바람을 맞았으니 머리가 바다 반대편으로 기울어진 건 당연지사.인간의 생은 길어야 100년이다. 그처럼 삶이 유한한 인간과는 달리 바다와 바람은 수천, 수만 년을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존재해왔다.그 유구함을 새삼 곱씹으며 소나무가 만들어낸 그늘 아래를 걸었다. 쉽게 잊기 힘든 산책이 분명했다.걷기 운동이 건강에 좋다는 건 이미 다수가 알고 있다. 그러나, 계획 없이 마구잡이로 하는 산책은 외려 독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실수를 미연에 막기 위해 국민체육진흥공단이 알려 주는 정보 하나를 공유한다. 이런 것이다.“걷기 운동을 처음 시작하는 초보자의 경우 운동 강도가 30~40% 정도인 완보나 산보로 걷기를 하다가 점차 운동 강도를 높여 40~70% 정도인 속보, 급보로 걷는 것이 효과적이다. 운동시간은 자신의 목표 심박수에 도달한 상태에서 30~60분 정도 지속하는 것이 이상적이고, 초보자는 주당 3회 정도가 적당하며 체력이 향상되면 그 횟수를 늘려가도록 한다. 걷기 운동은 운동 강도가 낮기 때문에 속도를 빠르게 해도 목표 심박수에 도달하기 어려울 수 있을 것이다. 이때는 운동 시간을 늘려줌으로써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왠지 ‘어진 사람들’이 살 것 같은 임곡항도구 해변 한쪽에서 시작되는 소나무 숲이 끝나는 곳에 임곡항이 보인다. 그야말로 ‘20세기풍’의 낭만적인 포구다.블록으로 쌓아올린 담 너머 옛집 마당엔 까치를 위해 남겨둔 빠알간 감 몇 개가 그림처럼 선명했다.방파제와 벽에 그려진 익살스런 그림들도 일부러 그곳을 찾아온 기자를 반갑게 맞이한다. 짙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마을 풍경이 유년 시절 외가에 온 기분을 들게 했다. 오랜만에 맛보는 따스한 정취. 호미반도 해안둘레길 이정표.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방파제 위에 서서 반대편을 바라보니, 멀리 포항제철과 포항 시내가 가물거린다. 자신의 동네에 살지 않는 낯선 사람을 만나더라도 먼저 웃어주는 어촌 노인들의 인심 역시 좋았다.‘논어’ 이인(里仁)‘편엔 이런 구절이 나온다.‘이인위미 택불처인 언득지(里仁爲美 擇不處仁 焉得知)”.무슨 뜻이냐고?“사람이 사는 곳은 어진 기운이 있어야 한다. 어진 이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걸 선택하지 않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쯤으로 해석하면 될 듯하다.무슨 까닭인지 설명하긴 힘들지만, 포항시 남구 동해면 임곡리엔 이웃과 더불어 웃음과 울음을 기꺼이 나누는 어진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길을 되짚어 동해초등학교로 돌아올 때 이런 혼잣말을 했다.“조용하고 포근한 임곡항은 40년 전 떠나온 고향과 닮았구나.”/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11-08

우리 꽃과 나무로 이상향을 이루고자 한 곳

50년 넘게 가꿔온 독특한 빛깔의 민간 식물원이 포항에 있다. 청하면에 자리한 기청산식물원이 바로 그곳이다. 1969년부터 조성된 기청산식물원은 현재 9헥타르(2만7천여 평)에 2천500여 종의 다양한 식물을 품고 있다. 자생화원을 비롯해 아열대식물원, 수생식물원, 해변식물원, 약용식물원 등이 펼쳐져 있으며, 섬개야광나무 같은 울릉도 자생식물과 경상도에서 자생하는 멸종위기 식물도 보전하고 있다. 포항종합제철 기공식이 열린 때가 1967년 10월 3일. 우리나라 산업화의 대역사가 영일만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때, 낙동정맥이 병풍처럼 펼쳐진 조용한 청하면에서는 우리 꽃 우리 나무를 품은 식물원의 꿈이 커가고 있었다.기청산식물원에 들어서는 순간 여느 식물원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알록달록한 원색의 꽃이나 이색적인 모양의 나무를 기대한 사람이라면 고개를 갸웃거릴 수 있다. 목련과 산수유, 풍향수, 조릿대가 눈에 띄고 그 사이에 오래된 나무 의자와 평상이 놓여 있다. 사람의 손길이 닿은 듯하면서도 닿지 않은 듯한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그리고 잔잔한 음악과 돌확에 샘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방문객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연아송’의 유래매표소를 지나면 고사리 같은 양치식물이 나란히 피어 있고, 돌토끼고사리 옆에 활처럼 크게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를 만나게 된다. ‘연아송’이라는 별칭의 이 나무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식물원 수입원 중 하나가 나무를 파는 것인데, 크고 잘생긴 소나무는 인기가 좋았지만 이 나무는 외면당했다. 김연아가 한참 유명세를 탈 무렵, 식물원 원장이 이 나무를 바라보는데 문득 김연아의 포즈가 생각났다. 그 순간 이 나무에 ‘연아송’이란 이름을 붙였고, 그 후로 관람객의 사랑을 받는 나무가 되었다. 나무 안내판에는 “굽은 솔이 선산을 지키고, 눈먼 자식이 효자 노릇한다”고 적혀 있다.이처럼 기청산식물원에는 다른 식물원에서는 들을 수 없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풍성하다. 식물원을 둘러보는 데 한 시간 반가량 걸리는데, 꽃과 나무의 사연을 하나하나 귀 기울여 듣다 보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장담할 수 없다. 메타세쿼이아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메타세쿼이아라는 이름을 들으면 외래종일 것 같지만 60만∼100만 년 전부터 포항에서 자란 자생종이다. 그 증거로 포항에서 발견된 메타세쿼이아 화석을 기청산식물원이 보관하고 있고 그 사본을 전시하고 있다. 귀 조경이 최고의 조경식물원 한가운데 벤치 하나가 놓여 있다. 세 사람이 넉넉히 앉을 수 있는 나무 벤치다. 식물원을 걷다 보면 여기에 앉아 기념사진 한 장 남기고 싶어진다. 벤치 뒤편에 키 큰 나무들이 나란히 서 있는데, 참느릅나무다. 식물원에는 이 나무가 유난히 많다. 참느릅나무와 그 위로 펼쳐진 파란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게 식물원에서 누릴 수 있는 색다른 재미다.참느릅나무는 그 자체로 좋은 수종이다. 여름에 노란 꽃이 피면 벌들이 모여들고, 가을에 단풍이 들면 깊은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집 서북 방향에 심으면 복이 온다고 하고, 종양을 다스리는 약재의 효능도 있다. 식물원에 이 나무를 많이 심은 것은 이러한 이유에 더해 꾀꼬리를 불러모아 그 울음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뿌리가 깊은 참느릅나무는 웬만한 태풍에도 끄떡없어 새 둥지가 안전할 뿐만 아니라 꾀꼬리가 좋아하는 곤충이 많다. 이 나무 덕분에 식물원에는 5월부터 9월까지 노란색 철새들의 청아한 합창이 끊이지 않는다.귀 조경은 기청산식물원 이삼우 원장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눈으로 보는 조경은 얼마 못 가고, 귀로 들은 조경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최고의 조경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해 자연에 가까운 조경일수록 좋은 조경이라는 뜻이다. 그런 까닭에 기청산식물원에는 시각을 자극하는 식물이나 인공적인 시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자연 친화적이라기보다 자연 그 자체에 가깝다. 사람은 보여도 말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이 공간에서는 스스로 말을 자제하게 된다. 식물을 스치는 바람 소리와 영롱한 새 울음소리가 이따금 들릴 뿐이다. 식물원을 걷다 보면 관람자도 어느새 한 송이 꽃이나 한 그루 나무가 된다.낙우송을 살려낸 사연식물원을 대표하는 왕나무(King Tree)가 있다. 낙우송(落羽松)이 그 주인공이다. 높이가 20미터 정도 되는 늠름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왕나무라는 별칭이 왜 붙었는지 알 수 있다. 뿌리가 숨을 쉬기 위해 땅 위로 솟아오른 독특한 모습, 일명 호흡근도 신비감을 더해준다. 이 나무는 50여 년 전 이삼우 원장이 모교인 서울대 농대의 연습림에서 씨앗을 받아 키웠다. 이 원장은 이 나무를 지키기 위해 큰돈을 들였다. 어느 겨울날 아침 이 원장이 무심코 식물원 산책을 나왔는데 식물원 가까이에서 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낙우송을 훼손하려 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낙우송이 서 있던 자리는 식물원 터가 아니어서 인부들이 낙우송을 훼손하더라도 이 원장은 할 말이 없는 처지였다. 낙우송을 지키려면 낙우송이 서 있는 땅을 매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땅 주인과 상의 끝에 꽤 큰돈을 치르고 땅을 사들여 낙우송을 살려낸 것이다.용연지(龍淵池)라는 연못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진흙을 이겨 조성한 생태 연못으로, 참개구리, 잠자리, 도룡뇽 등 수많은 생명이 보금자리를 틀며, 수련, 창포, 붓꽃, 어리연꽃 등도 철 따라 어여쁜 꽃을 피운다. 용연지 관찰 데크는 식물원에서 조망하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아늑한 느낌을 준다.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잠시 자신을 잊어버리게 되고, 명당이 어떤 곳인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식물원의 마지막 코스는 오두막에서 따듯한 감태나무잎 차를 음미하는 것이다. 찻집에 주인은 따로 없다. 방문객 스스로 장작에 불을 피우고 무쇠솥에 물을 데워서 차를 마셔야 한다. 조용한 오두막에 앉아 새 울음소리 들으며 그윽한 차를 마시는 운치를 어디서 또 누릴 수 있을까. 참세상을 이루고 싶은 소망이런 식물원을 가꿔온 사람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삼우 원장은 몇 토막 이야기만 들어보아도 평범한 사람 같지 않다. 1964년 경북고를 졸업한 그는 서울대 농대 임학과에 입학했고, 학업을 마친 후 곧장 귀향해 농부의 길을 걸었다. 소년 시절부터 농사짓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농사도 잘하면 보람 있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산업화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을 때 학벌 좋은 청년의 이러한 선택을 누가 선뜻 이해할 수 있었을까? 이 원장은 ‘객기가 발동한 것’이라 하지만, 반세기 넘게 한길을 묵묵히 걸어온 것을 보면 남다른 용기와 항심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 하겠다.이 원장은 귀향 후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농사를 겸하다가 청하중학교 재단 농장 관리인으로 부임해 과수 농업을 하면서 기청산농원을 설립했다. 그리고는 식물 사대주의에 빠진 조경계에 환멸을 느껴 우리식 조경의 새바람을 일으키는 데 주력했고, 그 후로 지극히 자연스럽고 한국적이며 사람에게 널리 유익한 식물원으로 방향을 잡았다.기청산식물원이란 이름에는 이 원장의 꿈이 아로새겨져 있다. 청산 앞에 농기구인 ‘키’를 뜻하는 ‘기(箕)’를 붙였는데, 그 이유는 식물 세계를 키질해 쭉정이는 버리고 알짜만 모아 청산을 이룬다는 의지와 좋은 식물과 사람이 모여 참세상을 이루고 싶은 소망을 담은 것이다.갈수록 어려워지는 식물원 살림살이식물원에서는 많은 일이 이루어졌다. 포항의 첫 번째 천연기념물이자 세계적인 희귀수인 모감주나무의 가치를 널리 알린 것도 이 원장의 공이다. 포항의 산과 바닷가에 있는 모감주나무 군락지는 황금빛 잎이 피는 7월에 장관을 이루며 포항을 상징하는 풍경이 되었다. 이처럼 식물원은 우리 고유의 자생식물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것은 물론, 무궁화 축제 같은 사람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 문화를 확산하는 데 힘써왔다. 2004년에는 경상도에서 최초이자 민간 식물원으로는 두 번째로 멸종위기 야생 동식물의 ‘서식지 외 보전기관’으로 지정돼 섬개야광나무 등 멸종위기 및 보호 야생식물 10종의 인공 증식과 복원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식물원은 언덕이 없고 평지로 조성돼 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편안하게 산책할 수 있다. 새들이 지저귀는 꽃과 나무 사이를 거닐며 명상에 잠기고 싶은 사람들의 발걸음도 이어진다. 하지만 식물원의 살림살이는 어렵다. 세태는 자연과 멀어지고 유료인 민간 식물원을 찾는 발길은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기러기 떼가 비행하는 날, 그 울음소리도 들리는 곳이 기청산식물원이다. 자연 속에서 자연이 되어보고 싶은 날에는 우리 꽃과 나무로 이상향을 이루고자 하는 그 식물원에 가볼 일이다.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

2022-11-07

의료인력 불균형 해결은의료정책과 진료환경 개선부터

의료인력은 부족하지 않다. 공공의료 확대나 의대 신설은 의료인력 과잉을 가져오는 재앙이 될 수 있다. 의료인력 수급정책과 진료환경 개선이라는 구조적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료행위는 의사 면허를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다. 그것이 기득권이라는 시선은 오해라고 항변하는 이우석 경북도의사회장.비윤리적이거나 불법 의료행위를 하는 의사들은 의사세계 내부에서도 근절돼야 한다고 판단한다는 이 회장은 “의사회에 비리를 사전 스크린 할 수 있는 권한을 달라”고 주장한다. 아예 의원개설에서부터 막아내야 한다는 것이다.코로나19 팬데믹에 헌신한 의사에 대한 보상은커녕 실비에도 못 미치는 의료수가 현실화가 없다면 또 다른 위기에서 국가는 의사들에게 어떻게 도움을 요청할 것인지 묻는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의료계에는 어떤 변화를 가져왔나.△대규모 감염병 사태는 응급실과 중환자실이 포화상태에 이르고 의료대란을 몰고 왔다. 그러면서 필수의료분야의 붕괴가 가속화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료계는 환자 진료와 예방접종을 통해 지역사회에 코로나 전파를 최소화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고 자부한다. 일신의 안위보다 의사로서의 책임을 다하다 코로나19에 감염돼 숨진 의사들도 있었다. 경영상 어려움이 닥쳐 휴폐업하거나 손실로 고통 받는 의사도 많았다. 그럼에도 선별진료소를 자원하는 의사들의 행렬이 멈추지 않은 것은 의사로서의 사명감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정권이 바뀌고 의료정책에서 예상되는 변화와 우려되는 부분은 어떤 것인가.△새 정부가 제시한 보건복지분야 국정과제는 ‘필수의료 기반강화 및 의료비 부담 완화’ 등 11개다. 모두 의료계도 공감하고 타당하게 여기는 시의적절한 사안들이다. 그런데 초고령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추진중인 지역사회 통합 돌봄 기본계획과 모델 등에 의료가 빠져있다. 지금부터라도 의료를 중심으로 커뮤니티 케어의 틀을 재설계해서 국민 불만을 사전에 막고 사회적 비용을 줄여야 한다. 동네 병의원들이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일차 의료 중심의 커뮤니티 케어 체계를 구축하고 방문진료 활성화 방안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의료정책에 의료전문가들의 견해가 반영되지 않는다면 실효성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도시와 농촌의 의료수급 불균형이 국가적 문제가 되고 있다. 특히 경북지역에는 의사 부족 현상이 심각하다.△우리나라 의료 인력의 절대 수는 결코 부족하지 않다. 오히려 지금 추세라면 공급 과잉까지도 우려된다. 다만 인력 배치가 불균형한 문제는 분명 존재하기 때문에 고른 분포가 이뤄질 수 있도록 정책과 제도가 필요하다. 똑같은 국민인데 의료시설 불균형으로 동일한 수준의 의료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은 불공평하고 불합리하기도 하다. 대형 의료기관과 상급 종합병원이 특정 지역에만 치우쳐 있는 문제는 고질적인 의료불균형의 주요인이다. 어느 지역에 사느냐에 따라 사망률이 달라지는 현실은 고쳐져야 한다.-그렇다면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공공의료 확대는 해결책이 될 수 있나.△그렇다고 공공의료 확대가 해법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지역 간 의료격차 및 의료취약지 등의 인력부족 문제는 의사 수의 문제가 아니라 정부의 의사인력 수급 정책과 지역 및 의료취약지의 열악한 진료환경 등으로 인한 구조적 문제다. 의과대학 신설은 향후 의사 공급 과잉으로 인한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것이다. 이보다는 현재 의사인력 및 의사 교육 시스템 안에서 의과대학 교육과정에 공중보건 및 지역의료 등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는 것이다. 또 지역의료기관에 대한 행정 재정적 지원과 함께 지역 주민의 진료가능한 지역권 설정 등을 통한 지역의료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최근 대리수술이 문제가 되면서 수술실 카메라 설치가 논의됐다.△수술실 CCTV 설치가 내년 9월이면 시행될 예정이지만 문제해결보다는 오히려 민감한 개인정보 유출과 의료인과 환자간 신뢰 붕괴, 의료인의 자기결정권 침해 등 득보다 실이 훨씬 클 것이다. 하위법령에 수술실 CCTV의 정당한 촬영거부 기준과 설치위치, 보관기준 등 쟁점에 대해서도 최대한 의료인과 환자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방향으로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런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행위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수술실 CCTV 설치보다는 수술실 출입자 규제 강화와 의사단체의 자정 노력을 통한 해결, 전문가 평가제 활성화 및 자율규제 기구 설립 추진이 필요해 보인다.-필수의료 붕괴를 막고 의사들의 비윤리적 행위나 불법행위 의료기관 개설을 막기 위해 의사회가 적극 역할을 할 수는 없나.△필수의료 붕괴를 막고 지역간 의료인력 불균형도 해소하고 하려면 지역 의료기관에 대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강력한 지원이 있어야 한다. 환자진료나 의료행위와 관련 없는 경제사범이나 형사범에 대한 면허 취소는 의사들의 진료행위를 더욱 위축시키고 있다. 의료분쟁조정특례법이나 의료사고특례법 같은 입법지원으로 분만 사고나 불가항력적 사고에 대한 의사들의 보호가 뒤따라야 한다.무엇보다 의료기관 개설 신고 시 의사들의 불법적, 비윤리적 결격사유를 사전 스크린하고 제재할 수 있도록 의사단체가 권한을 가진다면 불법행위를 크게 막을 것으로 본다.-의료보험 수가에 대해 불만이 많은 것 같다.△의료수가는 의료기관들의 희생과 높은 직원고용률, 천정부지로 치솟은 임금 및 물가인상률 등을 반영해 합리적으로 결정돼야 하는데 턱없는 수치에 그치고 있다. 의원급 의료기관 종사자들이 더 이상 실망하지 않도록 충분히 인상돼야 한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의사들의 헌신과 노력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 대가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또 언제 다시 당할지 모르는 국가적 재난 상황에는 어떻게 의사들의 협조를 구할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일부이지만 의료기관의 과잉진료나 비보험 진료가 늘어나는 것도 문제다.△말 그대로 과잉진료는 일부 의료기관의 문제다. 이 또한 전체 의료기관의 문제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 오히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지 생각해보면 좋겠다. 우리나라 의료기관들은 정부에서 정한 수가제도의 통제 하에 있다. 건강보험제도 당연지정제라고 하는데 비보험 진료는 예외 항목들이다. 그래서 비보험에서 보험 급여가 가능해지는 항목은 심사평가원의 심사를 받게 되는데 의학적 필요에 따른 치료보다는 건강보험 재정을 고려한 한정된 치료의 영역에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제때 적절한 치료가 불가능해지는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비보험 진료는 최선의 진료를 해나가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의료보험 수가는 어떤 부분에서 문제가 생기나. MRI 등 비급여의 급여화를 포함한 문재인 케어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다.△건강보험 저수가는 일차 의료기관들의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요소다. 만성적인 저수가 문제는 전국민 의료보험이 실시된 1989년 이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수가 정상화는 의사의 진료권 보장과 생존을 위해서도 반드시 실현돼야 한다. 문재인 케어는 도입 당시부터 무분별한 급여화가 의료이용량 증가를 유발해 막대한 재정 지출을 불러올 것이라고 지적해 왔다. 건보 보장성 확대 결과는 예상대로 초음파 MRI 진료비가 2018년 1천891억원에서 2021년 1조8천476억원으로 3년 만에 10배로 늘어났다.-안과의 경우는 어떤가. 백내장 문제는 잘 해결된 셈인가.△안과의 백내장 수술은 보험사 입장에서는 실손보험 적자의 주요인이다. 백내장 실손보험금 지급을 거절하는 실손보험사들이 늘어나 환자들의 불만이 커지면서 금융감독원이 나서기도 했다. 의료보험과 실손보험사 간 분쟁은 실손보험이 대중화되면서 계속돼왔다. 보험사들은 적자를 만회하기 위해 의료기관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고 최근에는 보험업계가 백내장 갑상선 도수치료 미용성형 등을 상대로 보험사기 특별신고 보상금 제도를 운영할 정도가 됐다. 실손보험으로 인해 환자들이 피해를 보지 않으려면 정부가 실손보험의 문제점을 영리기업인 민간보험사 관점으로 보기보다는 가입자의 장기적 보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것 같다.-정부가 원격진료와 비대면진료를 추진하고 있는데 환자입장에서는 편리할 것 같다.△환자를 위한 최선의 진료는 대면진료라고 확신한다. 첨단 헬스케어 기기를 활용하면 환자와 의사 모두에게 편리할 수 있겠지만 원격진료 비대면진료만으로는 진료의 기본이 되는 시진 촉진 청진 타진 등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진의 위험성이 우려되는 것이다. 현재 의료계에서는 원격진료와 비대면진료에 대해 무조건적인 반대 입장이 아닌, 시대적 흐름을 감안해 의협을 중심으로 보조적 수단에 한해 유연하게 대처하는 등 여지를 두고 접근하고 있다. 환자들이 부정확한 진단 진료 가능성이나 의료사고 발생 문제 등으로 피해를 보지 않도록 정보의학전문위원회 운영 등을 통해 의료계가 원격진료 비대면 지료 관련 사안에 대응해 나갈 예정이다.-의사는 우리 사회의 대표적 기득권이다. 이를 놓지 않으려 한다는 지적도 있다.△외부에서 보는 시선은 기득권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건 오해이자 잘못된 판단이다. 의사의 의료행위는 건강보험제도 등 의료관련 제도권 속에서 각종 규제와 통제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의료는 인간의 생명과 건강을 다루는 고귀한 행위로서 의사 면허를 가진 자만이 의료행위를 할 수 있다. 이를 기득권과 결부시키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의사로서 지역민과 지역사회를 위한 활동을 든다면.△지난 태풍 힌남노가 포항을 강타했을 때 의료기관들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당시 남구 오천지역에서는 벽에 걸린 TV만 남기고 컴퓨터와 X레이, CT 등 의료기기를 모두 잃은 병원 등 의료기관 28곳이 피해를 입었지만 의사라는 이유로 정부 지원에서도 제외됐다. 대구시의사회에서 성금을 모금해 위로해 주었다. 경북도의사회는 사회공헌사업단을 발족시켜 의료봉사 등 사회공익사업과 보건교육사업에 매진하고 있다. 늘 낮은 자세로 지역민과 함께 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다.-의료기기의 발전과 함께 의술도 발전하고 병원 접근성도 좋아지고 있다. 안과 전문의로서 특별히 기억나는 이야기가 있나. 의료환경 추세는 어떠한가.△지금은 의료보호제도가 있어 어려운 사람들도 본인부담 없이 필요한 수술을 받을 수 있지만 안과전문의가 됐던 초기엔 백내장 본인부담 수술비가 소 1마리값인 100만원이나 되기도 했다. 그 때 가난한 농부의 눈을 뜨게 해주고는 ‘달아나라’고 귀띔한 적도 있다. 병원 측에서 환자를 찾아갔지만 워낙 형편이 어려워 수술비를 받지 못했고 결국 의료진들이 서서히 갚아나간 기억도 있다. 환자들도 의사에 맞춰 찾는 것 같다. 개원 초기엔 라식 수술을 하려는 젊은 환자들이 많았으나 지금은 중장년층과 백내장 수술 환자들이 많은 것 같다.-개인적인 소망이 있다면.△이젠 나도 건강검진을 받아봐야겠다. 2024년까지 남은 임기 동안 의사회를 무탈하게 이끌어가는 것이 첫째 소망이다. 그리고 나 자신과 가족의 건강이다. 병원 운영은 그 다음이다. 소아과 전문의셨던 아버지는 한창 일할 63세에 암으로 돌아가셨다. 쌍둥이 중 한 아들은 휠체어에 의지해서 겨우 눈빛으로 의사소통만 하는 정도의 중증 장애다. 그 아들을 돌보던 아내의 건강이 나빠졌다. 내가 역할을 분담해야 할 때라고 본다. 포항시의사회에서 경북도의사회까지 가족보다 의사회를 위해 보냈던 더 많은 시간을 이번 임기 뒤에는 내려놓고 이젠 자신과 가족을 위해 봉사하고 싶다.□이우석(李祐碩·59) 경북도의사회장·안과 전문의포항 출신, 서울 숭문고. 계명대 의대 졸, 계명대 의학대학원 의학박사.포항 선린병원 안과과장 역임.미국 존스홉킨스 의대 월머 안과연구소 펠로우십(2005∼2006년).포항시의사회장(2014~2015년)경북도 보건단체의료봉사단장(2016~2020년)경북도의사회 코로나19 대책위원장(2020년 2월~2021년 3월)자랑스러운 경북도민상(2021년)현 경북도의사회장, 대한의사협회 부회장.초교 6년 때 서울로 유학 가서 고교를 졸업하고 의사가 돼서 다시 고향 포항으로 내려왔다.포항시장애아수영연맹 부회장을 비롯, 사회단체에서부터 더러는 익명으로 수많은 사회단체를 통해 기부와 의료봉사를 해왔고 특히 장애인과 학대 받는 어린이들을 위해 노력해왔다. 아버지의 이름(이병철)으로 아너 소사이어티에 가입하기도 했으니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으로 실천하는 의사다./이경우 편집위원

2022-11-07

뛰어난 경관·풍부한 유적·편리한 교통이 만든 힐링 명소

금오산(金烏山)은 매년 3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 구미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1970년 6월 한국 최초의 도립공원으로 지정됐다. 금오산은 뛰어난 경관과 수많은 문화유적, 편리한 교통으로 전국 산악인과 관광객, 시민들에게 큰 사랑을 받아 오고 있다. 하지만, 관광객 대부분이 당일 일정으로 금오산도립공원을 찾다보니 금오산 지역을 관광활성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구미시도 이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을 하고 있다. 구미시가 지역의 신성장동력으로 추진하고 있는 관광산업을 금오산도립공원을 중심으로 알아봤다. ◇다양한 이름을 가진 금오산금오산(金烏山)은 다양한 이름을 가진 산으로도 유명하다. 지금의 금오산은 아도가 부처님의 자비를 전하고자 고구려에서 내려와 구미 도개에 있는 모례네 집에 머물고 있던 중 어느 날 저녁놀 사이로 황금빛(金) 까마귀(烏)가 바위산 속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고 그 산을 금오산(金烏山)이라 불렀다고 전해지기도 하고, 천지개벽이 일어나 온 세상이 물에 잠겼을 때 산봉우리가 거무(거미)만큼 남아서 금오산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또 한 때는 중국 달마대사와 소림사로 유명한 숭산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해 해주의 북숭산과 짝을 지어 남숭산이라고도 했다.금오산은 총 면적이 37㎢로 구미, 김천, 칠곡 3개 기초자치단체에 걸쳐 있다. 3개 기초자치단체에 걸쳐있어서인지, 아님 산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다 달라서인지 지역마다 금오산을 다 다르게 부르기도 했다. 산 동쪽인 칠곡·인동에서 바라보면 산 능선이 부처님이 누워 계신 모습과 닮았다하여 와불산(臥佛山)이라 부르고, 산 북쪽 선산에서 바라보면 산봉우리 끝이 붓끝 같다고 해 필봉(筆峰), 산 서쪽 김천에서 바라보면 부잣집의 곡식을 한데 쌓아놓은 노적 같다고 해 노적봉(露積峰)이라고 불렀다. ◇금오산 관광 자원금오산도립공원은 구미시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만큼 다양한 관광자원들을 품고 있다. 신라말기 도선이 창건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옛 대혈사 터 위에 1925년 다시 세워진 사찰 해운사를 비롯해 도선이 참선해 도를 깨우친 곳이라는 도선굴, 보봉(성주봉 933m) 아래 절벽바위에 새겨진 부처님 전신상인 마래여래입상, 약사봉 절벽에 붙어있는 암자 약사암, 세상을 먼저 떠난 손주가 다음 생에는 건강한 몸으로 태어나길 바라는 할아버지의 사연을 담고 있는 오형돌탑, 금오산성과 성안마을습지, 다혜폭포 등이 금오산의 대표적인 관광자원이다. 여기에 1974년에 개통돼 지금까지 운행되고 있는 케이블카와 험한 비탈길로 숨이 할딱거린다고 해 붙여진 이름의 할딱고개와 너른바위 전망대도 있다.60년 만에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온 관광자원도 있다. 달이 걸린다는 뜻의 금오산 정상 현월봉(懸月峯)이 그 주인공이다.1953년 주한미군이 산 정상을 포함한 2만2천585㎡ 부지에 통신기지를 세워 일반인들은 해발 고도로 10m 낮은 지점까지 올라가는 데 만족해야 했다. 그러던 중 2011년 구미시가 미군 측과 협상을 벌여 무인기지로 운영되던 군 부대 중 일부 5천666㎡를 돌려받았다. 이후 통신사 중계탑 철거 등의 작업을 마치고 2014년 10월 25일 공식 개방되면서 많은 산악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산 입구에는 호텔 금오산, 금오랜드, 성리학역사관, 채미정, 금오산 생태올레길 등이 관광객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금오산 올레길금오산의 사계절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금오산 올레길은 구미시민들에겐 일상의 공간으로, 관광객들에겐 잊지 못할 추억의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금오산 저수지는 1945년 1월 1일 저수지 공사를 시작해 1946년 완공한 인공 저수지이다. 644만 4천㎡ 규모 면적에 수혜 면적은 60만㎡이다. 금오산 올레길은 저수지 둘레 2.4㎞ 구간으로 조성됐다. 이 길에는 수변산책로, 부교, 생태습지, 수변공연장, 전망대, 조각공원, 휴식공간 등이 조성돼 있어 구미시민들이 사계절 가장 산책하기 좋은 장소로 꼽는다. 다른 지역의 여느 올레길과는 다르게 출발점이 정해져 있지 않다. 금오산 저수지 밑 대주차장에서 가장 많은 시민들이 출발하긴 하지만, 백운교 인근과 경상북도환경연수원 주차장에서 출발하기도 한다. 어떤이는 금오랜드 맞은편에 위치한 박희광 선생의 동상이 출발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지점에서 출발하든 금오산 올레길은 사계절 내내 절경을 선사해 주는 곳이다. 날이 좋은 날이면 수달 가족이 헤엄치는 모습을 볼 수도 있고, 백운교 밑에서는 잉어떼들이 모여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물위를 걷는 듯한 느낌을 주는 부교도 이색적인 체험이 될 수 있다.부교 끝 지점에서 야산으로 약 400m 올라가면 금오산 저수지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올레길을 걷다보면 곳곳에 인생샷을 남길 수 있는 포토존도 나온다. 또 금오산 올레길에는 구미시 최초 공립박물관인 성리학역사관이 위치해 있다. 2020년 10월 개관한 성리학역사관은 8만4천285㎡ 부지에 전시관 3개동, 체험관 3개동, 강당, 카페동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특히, 넓은 부지를 이용해 모든 시설을 한옥건물로 지어져 금오산 풍경과도 매우 잘 어울리며, 건물 사이사이 만들어진 연못과 폭포도 볼거리다. 어린 자녀들과 함께 금오산 올레길을 찾는다면 아름다운 풍광의 올레길을 걷다 잠시 성리학역사관에서 전통문화 체험도 해 볼 것을 추천한다. ◇금오산 관광활성화구미시는 금오산도립공원의 관광자원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한 다양한 계획들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금오산 관광 시설 개선을 위해 전망대와 케이블카 등의 관광인프라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시는 금오산 인근 관광 편의시설에 대한 실태조사를 통한 개발계획 수립을 위해 지난달 타당성조사 및 기본구상계획용역을 시작했다. 시는 내년 4월 공원계획변경 및 기본계획용역도 시행하고, 2024년 10월에는 실시설계 용역을 시행할 계획이다. 시는 이 모든 용역 결과를 바탕으로 2026년 5월쯤에는 금오산 관광자원개발 사업을 착공한다는 방침이다.구미시가 추진하는 관광활성화 방안을 들여다보면 우선 금오산도립공원 주 진입로 상습정체를 해결하기 위한 진입도로망 확장 및 우회도로 개설 사업과 금오지에 춤추는 경관분수 조성사업, 금오산 잔디광장 야외공연장 설치사업, 제5 주차장 조성공사, 할딱고개 전망대 설치공사, 등산로 위험구간 정비사업 등이 있다. 구미시는 케이블카 조성사업은 민자로 추진할 계획이다. 구미시의 이러한 노력을 당일 여행지였던 금오산도립공원을 머무는 여행지로 거듭나게 할 것으로 기대된다.구미시만 이러한 노력을 하는 것은 아니다. 구미의 대표 숙박시설인 호텔 금오산도 머무는 관광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객실 수 130개인 4성급 호텔 금오산은 그동안 관광객보다는 비즈니스를 위한 국내외 바이어들에 초점이 맞춰진 숙박시설이었다. 하지만, 구미시의 관광활성화 정책에 발맞춰 금오산도립공원과 연계한 관광상품으로 전국의 관광객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최근에는 인근 관광자원들과 연계한 상품을 만들어 홈쇼핑에서 판매하기도 했다. 금오산의 가을 정취를 고스란히 담은 이 상품은 방송시간 마감 전에 모두 소진되면서 매주 주말 80여 그룹의 전국의 관광객들을 금오산으로 불러모으는 역할을 하고 있다.구미/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22-11-02

형산강만이 붉은 강물을 기억하리라

한국전쟁 때 포항은 격전지였다. 물밀듯이 남하하던 북한군이 포항 시내를 통과해 형산강을 넘어가면 울산, 부산이 지척이었다. 형산강은 아군의 생명선이었기에 사력을 다해 지켜야 했다. 하늘에서는 미 전투기가 폭격을 가했고, 영일만에서는 군함이 함포 사격을 퍼부었으며, 육상에서는 군번도 계급도 없는 학도의용군까지 투입되었다. 북한군이 잠시 점령한 포항 시내는 폐허가 되었고, 형산강은 피로 물들어 ‘혈(血)산강’이라 불렸다.한국전쟁사에서 포항 전투는 한 페이지를 선명하게 차지하고 있다. 낙동강 전선의 공방전이 치열하던 1950년 8∼9월에 포항지구에서 국군 제3사단과 경찰부대, 학도병, 민부대(민기식 부대), 미군 특수부대 등이 북한군 제5, 12사단과 766유격부대의 거센 공격을 저지한 것이 포항 전투의 개요다. 당시 포항의 중요성은 다음의 글이 잘 설명한다.6·25전쟁 당시 경북 포항은 항만과 철도, 육로의 모든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는 동해안 최대의 병참기지일 뿐만 아니라, 포항 남쪽 6킬로미터 지점의 영일비행장은 미 제40전투비행대대가 주둔하면서 전쟁 기간 중 매일 평균 30∼40회 출격하여 공중폭격 등으로 지상부대 작전을 근접 항공 지원하였을 정도로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김정호 외, ‘포항 6·25’, 나루, 2020, 74쪽.아군은 어떻게든 지켜야 했고, 적군은 어떻게든 빼앗아야 하는 전략적 거점이 포항이었다. 만약 포항이 적군에 넘어가면 낙동강 전선의 한 축이 무너지면서 전쟁의 판도가 기울어질 수 있었다. 누란의 위기에 처한 아군은 가용 전투력을 총동원해 포항을 지켜야 했다.특히 영일비행장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이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원을 양성하기 위해 1943년 9월에 설치한 것으로, 미 제40전투비행대대 P-51 전투기 20대가 1950년 7월 16일부터 임무를 수행했으며(《국방논집》 제8호, 1989년 8월, 139쪽, 김정호 외, 위의 책, 74쪽 참조), 월턴 워커 장군이 여기서 낙동강 방어선 전투를 진두지휘하기도 했다. 북한군은 자신들을 집요하게 괴롭히던 미 공군력을 무력화하려고 영일비행장을 공략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포항여중 등 포항 곳곳에서 치열한 전투 벌어져전선의 위중함은 꽃다운 나이의 학생들까지 불러들였다. 1950년 8월 11일 새벽 4시 포항 시내로 진입하려는 북한군 제5사단과 766유격부대를 학도의용군 71명이 포항여중(현 포항여고)에서 저지한 것이다.북한군에 포위된 어린 학생들은 국군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열한 시간 반을 버텼다. 학도의용군의 항전 덕분에 북한군의 포항 시내 진출이 지연되었고, 육군 제3사단과 지원부대, 포항 시민이 형산강 이남의 안전지대로 철수할 수 있었다.이 전투에서 학도의용군 71명 중 김춘식 등 48명이 전사했고, 23명은 부상을 입거나 실종되었다.포항여중뿐만 아니라 포항 곳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포항 기계와 경주 안강 일대에서 국군 수도사단이 북한군 제12사단의 남진을 저지하는 전투가 8월 9일부터 9월 22일까지 벌어졌다.비학산에서 운제산까지 이어진 이 전투로 북한군 제12사단의 낙동강 전선 동부 지역 돌파 작전은 물거품이 되었다.송라면 독석리에서는 적에게 포위된 육군 제3사단을 구룡포로 철수하는 작전이 8월 10일에서 8월 17일까지 펼쳐졌고, 흥해 천마산에서는 육군 제3사단과 북한군 제5사단이 여섯 번이나 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혈투가 8월 21일부터 8월 27일까지 전개되었다. 형산강을 사이에 두고 양쪽이 전투력을 총동원한 전투가 9월 5일부터 9월 18일까지 벌어졌다. 인천상륙작전의 양동작전으로 9월 14일 포항 북쪽의 영덕 장사리에서 전개된 상륙작전은 성공을 거두었으나 많은 학도의용군이 희생된 것은 아픔으로 남아 있다. 탑산에 있는 두 개의 탑포항 전투는 양측이 사활을 걸고 총력전을 펼쳤기에 피해도 컸고 희생자도 많았다. 포항 곳곳에 전쟁 희생자를 추모하는 시설과 조형물이 조성되어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포항 용흥동에 있는 탑산의 명칭도 한국전쟁 후에 세워진 탑에서 연유한다.탑산의 원래 명칭은 죽림산(竹林山)이며, 산 아래에는 죽림사라는 고찰이 있다.탑산 입구에 위치한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 뒤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포항지구 6·25전적비’가 나타난다. 1980년 2월 21일 제막된 이 전적비의 전면에는 국군이 학도병의 어깨를 감싸는 청동상이 서 있고, 포항지구 방어의 주력부대인 국군 제3사단을 기념하는 금속 조형물이 있다.‘포항지구 6·25전적비’의 서쪽을 바라보면 ‘전몰학도 충혼탑’이 있다. 포항여중 전투에서 산화한 학도의용군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1957년 8월 11일 제막되었다. 탑의 전면에는 청동으로 된 천마상 부조물이 설치되어 있다. 이 부조물은 어린 영(靈)들이 이승에서 피워보지 못한 꿈을 천마를 타고 저승에서 마음껏 펼쳐 보라는 뜻에서 새겨 놓은 것이다.‘포항지구 6·25전적비’와 ‘전몰학도 충혼탑’은 누가 보더라도 성격이 비슷하다.그런데 불과 50미터 정도의 거리에 두 개의 조형물이 서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몰학도 충혼탑’은 서울대 미대 학장을 지냈으며 추상 조각의 선구자인 김종영(1915∼1982)의 작품이고, ‘포항지구 6·25전적비’는 김종영의 서울대 제자이자 구상 조각가로 명성을 떨친 백문기(1927∼2018)의 작품이다.지역 미술가인 박경숙에 따르면 1970년대 후반 군에서 ‘전몰학도 충혼탑’이 추상적이어서 포항 전투의 의미를 전달하는 데 한계가 있으므로 탑을 없애고 새로운 작품을 건립하자는 의견이 나왔다.그때 구상 조각가인 백문기에게 작품을 의뢰하게 되었다. 백문기는 작품 제작을 수락했으나 은사의 작품을 허물 수는 없었기에 군 당국과 상의 끝에 새로운 부지에 ‘포항지구 6·25전적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어느 학도의용군의 가슴 뭉클한 편지탑산 입구에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이 있다. 포항 출신으로 생존한 학도의용군들이 1979년 8월 탑산에 터를 잡고 학도의용군의 전적물 보존과 추념 행사 등을 해오다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기로 뜻을 모았다. 마침 국방부가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기념관 건립비의 일부를 지원한 데 힘입어 2020년 9월 16일 개관하게 되었다.기념관 전시실에는 학도의용군이 사용한 무기를 비롯해 사진, 노트, 연필, 안경, 교복 단추, 모표(帽標) 등 유물 200여 점이 전시되어 당시 분위기를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전시물 중 포항여중을 지키던 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 이우근 학생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편지는 관람객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상략) 어머님!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이 저희들을 살려두고 그냥은 물러갈 것 같지가 않으니까 말입니다.어머님, 죽음이 무서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머니랑 형제들도 다시 한 번 못 만나고 죽을 생각하니 죽음이 약간 두렵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돌아가겠습니다. 왜 제가 죽습니까. 제가 아니고 제 좌우에 엎디어 있는 학우가 제 대신 죽고 저만 살아가겠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천주님은 저희 어린 학도들을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하략)편지의 주인공은 가족 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천주님도 이 가여운 생명을 구하지 못한 것이다. 포항여중 전투에서 전사한 48명 중 10명만 신원이 확인되어 포항여중 앞에 가매장되었다가 1964년 4월 13일 국립현충원으로 봉송되어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 뒤의 화강암 속에 합동으로 안치되었다.탑산 외에도 수도산 덕수공원에 포항 출신 군경들의 넋을 추모하는 충혼탑이 있다.그리고 혈전이 벌어졌던 포항여고 정문 앞에도 ‘학도의용군 6·25전적비’와 ‘포항여중 전투 학도의용군명비’가 세워져 있다.민간인 희생자도 다수 발생해전투가 치열했던 흥해 도음산의 산림문화수련장에도 탑 하나가 세워져 있다. 탑의 명칭은 ‘한국전쟁 미군폭격사건 민간인희생자 위령탑’이다.전쟁 중에 미군의 오폭으로 다수의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고, 이들의 죽음을 위로하기 위해 2015년 8월 20일 제막된 탑이다.포항 지역 미군폭격사건 유족회에 따르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 결과 미군 폭격과 함포 사격으로 포항 13개 마을에서 550여 명의 민간인이 희생된 것으로 파악되었다.이제 ‘혈산강’을 기억하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강물처럼 흐르는 세월은 무상할 뿐이다. 말없이 흐르는 형산강만이 그 붉은 강물을 기억하리라.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

2022-11-02

해변과 항구 사이 걸음마다 볼거리… 불야성 ‘핫 스폿’은 덤

비단 여름 한철만이 아니다. 포항의 주요 해수욕장 가운데 하나인 영일대해수욕장에선 계절과 무관하게 젊은이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다.7~8월엔 수영과 일광욕을 즐기며 휴가를 보내는 청년들이 많고, 겨울엔 한적한 해변 풍경을 즐기며 삼삼오오 사진을 찍는 20~30대가 흔한 장소가 바로 영일대해수욕장.그렇다면 가을이 무르익은 요즘은 어떨까? 지난 주말 이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영일대 해변을 산책했다. 드물게 도시 한가운데 자리한 해수욕장인 그곳엔 크고 작은 카페와 주점을 포함해 젊은이들이 즐길만한 ‘핫 스폿(Hot spot)’이 적지 않다.여름 더위는 이미 물러갔고, 아직은 추위가 도착하지 않은 완연한 가을. 데이트를 즐기거나, 모처럼 휴일을 맞아 바다 정취를 맛보려는 청년들이 영일대해수욕장 주변에 가득했다.시끌벅적 야외에서 조개를 구워 파는 술집과 양고기가 맛있는 식당, 멀리 포스코가 네온사인을 밝힌 아름다운 야경을 바라보며 향기로운 차를 마실 수 있는 커피숍마다 그들이 속삭이는 밀어(蜜語)가 넘쳐나고 있었다.기왕지사 거기까지 갔으니 이제는 멀리 떠나버린 기자의 청춘시절을 추억하며 영일대해수욕장에서 동빈큰다리까지 3.1㎞쯤을 걸어보기로 마음먹었다.영일대해수욕장은 경북 포항시 북구 항구동과 두호동에 인접한 해변이다. 백사장의 길이가 1천750m, 너비는 40~70m 정도이며 면적이 38만㎡인 이 해수욕장은 물결이 잔잔한 여름엔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포항의 명소.해마다 방문객들을 위한 정비가 이뤄지기 때문에 백사장의 모래도 깨끗하다. 그렇기에 식구들이 함께 찾기에 적합한 동해의 근사한 해수욕장으로 이름을 높이고 있다. 물론 샤워장과 탈의장, 주차장 등 편의시설도 두루 갖췄다. ▲국내 최초 해상 누각에서 출발하는 산책‘코로나19 사태’가 한국을 뒤흔들기 이전엔 해마다 국제불빛축제와 바다국제공연예술제 등이 열린 곳도 바로 영일대해수욕장. 요트와 수상 오토바이를 타는 이들도 자주 볼 수 있었다.1976년 개장한 이 해수욕장은 이전엔 포항의 북쪽에 위치했다는 이유로 ‘북부해수욕장’으로 불렸다. 50대 이상의 포항시민들은 아직도 이 명칭에 익숙하다.지금의 이름으로 바뀐 것은 9년 전인 2013년.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영일대해수욕장’이란 이름을 확정했고, 그해 6월 29일에 명칭이 바뀌었음을 공식적으로 알렸다”고 ‘위키백과’는 설명하고 있다.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장미가 피어있는 영일대장미원은 영일대 해상누각 맞은편에서 위치했다. 꽃처럼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사진 파트너’가 또 있을까?나이 지긋한 중년 여성은 물론, 교복을 입은 10대 여고생들까지 장미와 얼굴을 맞대고 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세상사 고민과 걱정거리야 늙은이건 젊은이건 누구에게나 있겠지만, 꽃과 함께 하는 그 순간만은 다들 얼굴에 장미보다 화사한 꽃이 피었다. 바로 ‘웃음꽃’이다.코로나19가 힘을 잃기 시작한 후부턴 영일대 해상 누각 인근에서 건강을 위해 에어로빅을 하는 모습도 다시 볼 수 있게 됐다.조그만 단상 위에 올라 다이내믹한 춤 동작을 보여주는 강사의 모습을 열심히 따라하는 아주머니들이 적지 않다. 이 광경은 해질 무렵 영일대해수욕장의 진풍경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영일대 해상 누각은 낮에 봐도 좋지만, 불 밝힌 야경이 더욱 매력적이다. 바다 위에 만들어진 다리를 건너 고풍스런 누각에 도착하면 탁 트인 바다 풍경이 시원스러움을 선사한다.이 누각은 한국 최초의 해상누각으로 이름을 알렸다. 두호동행정복지센터 앞 해상 100m 지점에 자리했는데, 포항을 찾은 지인 중 하나는 해상 누각 지척에 위치한 행정복지센터를 보고는 “이런 경치를 보면서 근무하면 스트레스도 없을 것 같다”는 진심 담긴 우스개를 하기도 했다.젊은이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를 기꺼이 받아 안고, 느슨해진 신발 끈을 다시 묶었다. 영일대해수욕장을 출발해 40~50분 정도면 동빈내항을 거쳐 포항 북구 동빈동과 남구 송도동을 잇는 동빈큰다리까지 갈 수 있다. ▲‘완보’가 아닌 ‘속보’로 보다 큰 운동 효과를해상 누각에서 출발해 영일대해수욕장의 다른 편 끝까지 가는 길에서도 많은 선남선녀를 지나쳤다.만추를 느끼며 정겨운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그들은 야외 테이블에서 ‘치맥’을 즐기기도 하고, 여름보다 인적이 드물어진 해변에서 어깨를 감싸 안은 포즈로 둘의 모습이 담긴 ‘셀카’를 찍기도 했다. 대부분이 느긋한 태도로 산책을 즐기고 있었지만, 몇몇 사람들은 제대로 운동복을 갖춰 입고 제법 빠른 걸음으로 해변을 걸었다. 맞다. 운동 효과를 높이기 위해선 저 정도 속도의 걸음걸이가 좋다고 그랬다.천천히 걷는 완보에 비해 빠르게 걷는 속보는 심폐 기능을 강화하고, 뼈와 근육을 튼튼하게 해주는데 보다 큰 효과가 있다고 한다.국민체육진흥공단 체육과학연구원에서 발간한 ‘운동가이드’는 속보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팔을 앞뒤로 자연스럽고 활기차게 움직인다. 운동 강도는 50~70%이고 분당 80~90m의 속도로 시간당 5~5.5㎞를 이동하며, 분당 3.5kcal 이상의 에너지가 소비된다.”20분가량을 걸어 동빈내항의 입구라 할 수 있는 영일만 관광유람선 선착장에 이르렀다. 여기서 울릉도를 오가는 여객선이 출발한다. 60대 후반인 아주머니 두 분이 잠시 속보를 멈추고 배낭 속에 준비해온 물을 꺼내 마셨다.“추우나 더우나 매일 저녁 이 길을 걷는다”는 그들은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앞서 언급한 ‘건강가이드’에도 이런 말이 나온다. 이른바 ‘걷기의 효과’다.“걷기 운동은 체지방을 감소시켜 비만을 개선하고 당뇨, 고혈압, 고지혈증 등 성인병을 예방하는데 도움이 된다. 또한, 뼈를 자극해 골밀도를 유지하고 증진시켜 골다공증을 예방한다. 이에 더해 스트레스, 불안감, 우울증 감소에도 도움이 된다…(후략)” ▲어둠 내린 동빈내항엔 세월 낚는 낚시꾼이알록달록한 네온이 반짝이고, 철로 만든 갖가지 조형물과 모래조각까지 감상할 수 있는 영일대해수욕장에 비해 11월 초순의 동빈내항은 조금 쓸쓸한 풍경이다.포항에 태풍이 닥칠 때면 바람과 파도를 피하는 배들로 넘쳐나는 동빈내항은 형산강이 동해와 만나는 끝자락에 자리했다. 크지는 않지만 쓰임새가 적지 않은 항구다. 주변으로는 산책로도 잘 정비돼 있다. 이전엔 오염이 심해 악취 피해를 호소하는 주민들도 있었다지만, 지난 2017년부터 3년간 진행된 정화작업으로 지금의 동빈내항 일대는 과거보다 많이 깨끗해졌다.태풍과는 무관한 계절이라 동빈내항에 정박한 배들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인적도 영일대해수욕장에 비해 드물었다. 그래서일까? 거기에서의 산책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없지 않을 듯했다.그러나, 그런 두려움은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이 기자의 생각이다. 한국은 세계 어떤 나라보다 치안이 좋은 국가다. 게다가 동빈내항 인접 산책로엔 오렌지색 조명 시설이 밝게 켜져 있어 해가 진 이후 걷기에도 어려움이 없다. 항구 한가운데엔 해양경찰서 포항파출소까지 있으니 과한 걱정은 접어도 좋을 것 같았다.짭짤한 바다 내음을 실어오는 가을바람이 볼을 스치는 순간. 낮에 하는 산책 이상으로 밤 산책 또한 낭만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영일대 해상 누각에서 출발해 동빈큰다리에 이르는 걷기 운동이 끝나가고 있었다.저문 동빈내항엔 낚싯대를 드리운 이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물고기가 잡히기는 하는 걸까? 그러나, 이 의문은 이내 접었다. 낚시꾼은 물고기만이 아닌 세월을 낚는 사람이 아닌가./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11-01

여시오어, 농담 같은 화두가 있는 천년 고찰

형산강 이남의 진산(鎭山)인 운제산(雲梯山)에 오어사(吾魚寺)라는 절이 있다. ‘나의 고기’라는 뜻이니 절 이름치고는 좀 생뚱맞다. 신라 진평왕 때 창건된 오어사는 보경사와 함께 포항을 대표하는 절이다.이 절의 원래 명칭은 항사사(恒沙寺)인데, 불경에 나오는 항하사(恒河沙)의 준말이다. 항하(恒河)는 인도 갠지스강을 가리킨다.즉 항하사는 갠지스강의 모래알처럼 무수함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절에서 많은 수행자가 나오기를 바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그렇다면 항하사는 어떻게 오어사가 되었을까?운제산과 오어사를 이해하려면 ‘삼국유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운제산과 오어사에 관한 이야기는 물론 오어사에서 수행한 고승들이 ‘삼국유사’의 여러 대목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오어사의 명칭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그(혜공)는 늘그막에 항사사로 옮겨 살았다. 이때 원효는 여러 불경의 소(疎)를 지으면서 항상 혜공을 찾아가 의심나는 것을 물었는데, 가끔씩 서로 말장난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 원효와 혜공이 시냇가에서 물고기와 새우를 잡아먹고 물 위에 대변을 보았는데, 혜공이 그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네가 눈 똥은 내 물고기다.” 그래서 오어사라고 이름 지었다.- 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민음사, 2008, 443∼444쪽.“자네가 눈 똥은 내 물고기다”의 원문은 “여시오어(汝屎吾魚)”다. 그래서 “너(원효)는 똥을 누었고 나(혜공)는 고기를 누었다”라고도 풀이할 수 있다. 어느 쪽으로 풀이하든 “너 원효는 아직 멀었다”는 뜻이다. ‘항사’가 불가(佛家)의 전형적인 표현이라면 ‘오어’는 파격적인, 유쾌한 농담조다. 오어사의 명칭을 두고 다른 이야기도 전하지만 결국은 ‘여시어오’로 귀결된다. 가벼운 농담에 깊은 가르침, 곧 화두가 담겨 있는 것이다. 시가 있는 신라 4대 조사(祖師)의 수행처오어사는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절 이름 가운데 몇 안 되는 현존하는 절이며, 신라의 4대 조사(祖師)인 원효(元曉, 617∼686)와 자장(慈藏, 590∼658), 혜공(惠空), 의상(義湘, 625∼702)이 수행처로 삼았을 정도로 유서 깊은 절이다.오어사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어사에 가려면 포항에서 한참 놀아야 한다고 권하는 시인이 있다.오어사에 가려면포항에서 한참 놀아야 한다.원효가 친구들과 천렵하며 즐기던 절에 곧장 가다니?바보같이 녹슨 바다도 보고화물선들이 자신의 내장을 꺼내는 동안해물잡탕도 먹어야 한다.- 황동규 ‘오어사에 가서 원효를 만나다’ 부분그렇게 포항 분위기를 느끼며 시내를 헤매며 놀다가 “포항서 육십 리 길, 말끔히 포장되어” 있는 길을 달려가면 “오른편에 운제산이 나타나고 / 오어지를 끼고 돌아 / 오어사로 다가간다.” 그렇게 “원효 없는 원효 절”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가만!호수 가득거꾸로 박혀 있는 운제산 큰 뻥대정신 놓고 바라본다아, 이런 절이!누가 귓가에 속삭인다.모든 걸 한번은 거꾸로 놓고 보아라.뒤집어놓고 보아라.오어사면 어떻고 어오사면 어떤가?혹 절이 아니면?머리 쳐들면 또 깊은 뻥대- 황동규 앞의 시 부분시에서 ‘뻥대’는 ‘절벽’을 뜻하는 사투리다. 시인은 1400여 년 전에 지은 오어사에서 “모든 걸 한번은 거꾸로 놓고 보아라. / 뒤집어놓고 보아라”는 청(請)을 듣는다. 이 청은 시의 존재 이유이자 불가의 가르침이다. 사물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뒤집어놓고 보는 것이 시의 본질이고, 불가의 가르침인 것이다. 시(詩) 자체가 언어(言)의 사원(寺)이므로 시와 불가의 깨달음이 하나의 맥락임을 시인은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그런 까닭에 “오어사면 어떻고 어오사면 어떤가?”라는 구절도 자연스럽게 와 닿는다. 사뭇 다른 분위기의 자장암과 원효암오어사 대웅전은 영조 17년(1741)에 중건되었고, 그 외 당우(堂宇)들은 대부분 근래에 들어섰다. 오어사의 대표 유물로는 대웅전에 있는 원효대사 삿갓이 있다.오어사 경내에는 자장과 원효가 수행하던 암자가 있다. 자장이 머물렀던 암자의 근처에는 혜공의 수행처가 있었으며, 서쪽 봉우리에는 의상의 수행처가 있었다고 전한다.자장암은 ‘삼국유사’에 “낭떠러지로 가서 바위에 기대어 집을 만들었다”라고 했듯이 해발 600미터 기암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다. 오어사의 정취를 한껏 느끼려면 자장암 앞에 서봐야 한다. 오어사 경내는 물론 운제산의 아득한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른 아침이나 인적이 드문 시간에 자장암 앞에 서보면 자장이 왜 이 가파른 곳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었을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대웅전에서 서쪽으로 오어지(吾魚池)를 건너 야트막한 산길을 500미터 정도 걸어가면 원효암이 나온다. 거의 수직에 가까운 길을 올라가야 하는 자장암에 비하면 한결 수월한 길이다.원효암은 운제산의 부드러운 능선에 둘러싸여 찾는 이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준다.원효암 툇마루에 앉아 마당에 서 있는 감나무를 바라보며 원효는 여기서 무슨 화두를 들고 있었을까를 생각해보는 것도 괜찮겠다. 운제산과 대왕암 명칭의 유래오어사를 감싸고 있는 운제산은 정상이 해발 482m로 형산강 너머 포항 남쪽의 산 중 가장 높다. 산의 능선은 구룡포 방향과 경주 무장산(鍪藏山) 방향으로 이어진다. 혜공 등 신라의 4대 조사는 억새 군락으로 유명한 무장산 쪽에서 운제산으로 오고 갔을 것이다.운제산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원효와 혜공이 또다시 등장한다. 원효와 혜공이 머물던 암자 사이에 기암절벽이 있어 구름(雲)으로 사다리(梯)를 놓고 서로 오고 갔다고 해서 운제산이라 했다는 것이다. 신라 남해왕(南解王)의 비(妃)인 운제부인의 성모단(聖母壇)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나온다.남해거서간(南解居西干)은 차차웅(次次雄)이라고도 한다. 이는 존장(尊長)을 일컫는 말인데 오직 이 왕만을 차차웅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혁거세고 어머니는 알영부인이다. 비는 운제부인(雲帝夫人, 운제(雲梯)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영일현(迎日縣) 서쪽에 운제산(雲梯山) 성모(聖母)가 있어 가뭄에 비를 빌면 응험이 있다고 한다)이다.- 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위의 책, 62쪽.오어사는 그리 크지 않은 절이지만 구석구석에 이야기의 그물망이 펼쳐져 있어 신라판 판타지를 보는 듯한 느낌에 휩싸인다. 그럴듯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이 이야기를 누가 지어낸 것일까. 오어사 경내를 걷다 보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서사적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운제산 정상에 있는 대왕암이라는 큰 바위에도 이야기가 담겨 있다. 가뭄이 들면 운제산 인근 주민들이 대왕암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박혁거세의 비(妃)인 알령부인(閼英夫人)의 수호신이라는 전설이 있는가 하면, 영일만이 만들어진 전설도 내려오고 있다.옛날 왜국의 한 역사(力士)가 왜국의 모든 장사를 굴복시킨 후 한반도로 건너와 힘센 자가 있다는 소문만 들으면 달려가 모두 물리쳤다. 그러다가 운제산 대왕암에서 창해역사(滄海力士)를 만나 운제산이 뿌리째 흔들릴 정도의 격투가 벌어졌다. 결국 왜국의 역사가 뒤로 넘어지면서 손을 짚었는데, 그곳이 움푹 꺼지면서 바닷물이 밀려와 영일만이 되었다고 한다. ‘포항시사(하), 1999, 772쪽 참조’오어지라는 저수지를 지나칠 수 없다. 39만6694제곱미터(약 12만 평)에 이르는 오어지는 1961년 정부에서 오어사 아래쪽 계곡을 막아 조성한 농업용 저수지다. 오어지 주변에는 7킬로미터에 이르는 둘레길이 이어지는데, 잔잔한 저수지에 산 그림자가 비치는 것을 바라보며 쉬엄쉬엄 걸을 수 있는 이색적인 길이다.오어사는 오어지, 운제산과 어우러져 비경을 빚어내고 왠지 모를 신비감을 일으킨다. 여시오어, 농담 같은 화두가 성성(惺惺)한 오어사에서 인생의 화두 하나쯤 품어보는 것은 어떨까.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

2022-10-31

쏟아지는 별을 보며 자란 아이는 다르다

올해는 지구와 목성이 70년 만에 가장 가까워진 해다. 다음 기회는 무려 107년을 기다려야한다. 이번 가을이 평생에 단 한번 있는 목성 관측의 최적기라지만 하늘을 올려다봐도 별은 보이지 않고 천문대는 멀기만 하다. 예전에는 별이 이렇게나 드물지는 않았다. 개구리나 풀벌레 소리가 들리는 시골이 아니더라도 별 헤는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쏟아지는 밤하늘의 별은 추억에서나 존재하는 요즘, 누구에게나 공평했던 별은 이제 찾아보는 자의 몫이다. 여기 친숙한 별자리부터 일식과 월식, 유성 같은 귀한 순간들까지 대중들과 나누는 별지기가 있다. 30여년 간 별 보는 즐거움을 전파하고 있는 홍성창 한국아마추어천문학회 이사를 만났다. -한국아마추어천문학회는 어떤 곳인가.△천문학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별 보기 안내자’ 역할을 한다. 전국 15개 지부를 운영하며 일반인들을 상대로 강의를 하거나 일식, 월식 등 중요한 천체 이벤트가 있으면 보여 주기도 한다.-천문 관측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개교 때부터 근무한 포항제철초등학교에 별자리를 투영하는 플라네타리움과 천체망원경 등이 구비된 우주과학관이 있어 자연스레 천문학과 가까워졌다. 90년대 중반부터 과학교육에 관심 있는 교사들이 ‘미래마당’이라는 모임을 만들고 해마다 과학캠프를 열었다. 당시로는 획기적으로 서울에 있는 천문학자를 초청해 영천의 한 캠핑장에서 관측을 했는데 그때 처음 본 토성의 경이로움이 지금까지 밤하늘을 보게 만들었다.-밤하늘의 별이 다 같은 별은 아니라고.△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은 태양이다. 태양의 둘레를 도는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은 움직이는 떠돌이별 즉 행성이다.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은 아니지만 태양 빛이 반사되어 별처럼 보인다. 문학에서는 별에서 살 수 있지만 과학적으로는 살 수 없다. 그나마 지구는 태양이라는 난로가 있어 생명체가 살 수 있다. 생명체가 있을만한 곳을 찾으려면 별이 아니라 별 둘레를 돌고 있는 행성이나, 행성 주위를 돌고 있는 위성에서 찾아야 한다. 홍성창 한국아마추어천문학회 이사 -기억에 남는 관측이 있다면.△밤하늘의 천체는 망원경으로 봐도 대부분 흐릿하다. 장시간 빛을 담은 천체사진이 훨씬 나을 때도 많다. 그래도 토성의 고리, 목성의 띠와 4대 위성, 달 표면의 구덩이, 색깔 다른 쌍성인 알비레오(백조자리), 별 무리들인 성단 등은 선명하게 확인되어 보는 재미가 있다. 미국에 개기일식 관측 원정대로 참가한 것과, 몽골의 칠흑 같은 밤도 기억에 남는다. 몽골의 투명한 밤하늘이 얼마나 부럽던지 남북한의 상황이 나아져서 북한에 별을 보러 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지난 8월 ‘모두를 위한 천문학’을 주제로 세계최대규모의 국제 천문 학술대회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열렸다. 세계가 천문학의 대중화에 노력하고 있지만, 지역에서는 천체 관측을 누릴 기회가 부족하다.△가족끼리 저녁 먹고 들러서 별을 보고, 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시민천문대가 들어서면 좋겠다. 형산강변이나 철길숲 산책로도 좋다. 포항은 일월신화가 전해오고, 곳곳에 산재한 고인돌이나 암각화에 선사시대 사람들이 눈으로 본 북두칠성이나 남두육성 같은 별자리가 새겨져있어 천문 스토리가 풍부하다. 게다가 전문 인력도 충분하다. 한국아마추어천문학회 회원들도 있고 천문학에 관심 있는 교사들의 모임인 경북천문교육연구회에서 활동하는 분들의 역량이 출중하다. 현재 각 학교 단위로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하고 특별한 천문현상이 있으면 시민들을 위한 공개 관측회도 하는데 잘 알려지지 않아 아쉽다. 이와 함께 강변이나 산책로에 천체망원경을 설치해 별을 보는 ‘찾아가는 천문 관측 프로그램’이나 시민을 위한 천문학 강좌를 여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홍성창 이사가 제안하는 천문학의 대중화 방안은 시민천문대이다. 천문학자들이 연구를 목적으로 사용하는 천문대와 달리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볼 수 있는 곳으로, 지방자치단체가 건립한 천문대를 말한다. 2001년 대전을 시작으로 부산과 서울, 순천만, 영양, 청주, 충주, 남원 등 전국 30여 곳에 시민천문대가 있다. 일월신화를 간직하고, 용광로의 불빛으로 성장했으며 국제불빛축제가 펼쳐지는 포항에 천문대가 생긴다면 그것만큼 의미 있는 장소가 어디 있느냐고 말하는 홍성창 이사. 그는 시민들의 발길이 닿는 가까운 곳에서 누구나 별을 볼 수 있는 천문 도시를 꿈꾼다.-천문대가 도심에 있으면 별이 보이지 않을 텐데.△시민들에게 가까이 가려면 최고의 하늘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천문 관측 프로그램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상이 달과 토성인데 가로등이 밝아도 달은 보인다. 달의 분화구를 보는 것만으로 상상하는 천체의 모습이 실제와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다. 1년에 3분의 1 정도는 토성과 목성도 관측할 수 있다.-어르신들을 위한 강좌도 진행한다고.△천문학은 나와 다른 별개의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실생활과 밀착된 학문이다. 천문학은 원래 날짜와 방향을 알기 위해 시작됐다. 캄캄한 밤하늘에서도 북극성을 보고 방향을 찾을 수 있다. 달력의 기원이나 별자리와 관련한 정보를 알려드리면 어르신들이 굉장히 좋아하신다. 경북 봉화와 영양에서 천문지도사 교육을 받은 주민들은 마당에 천체망원경을 설치해 차별화된 한옥스테이를 운영하는 등 밤하늘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한다.-다른 분야도 그렇지만 특히나 별자리는 아는 만큼 보인다. 깊어가는 가을밤에 볼 수 있는 별자리는.△우리나라의 가을밤은 화려하지 못하다. 밝은 1등성이 다른 계절에 비해 적기 때문이다. 보통 한 계절에 세 계절의 별을 볼 수 있다. 초저녁에는 지난 계절의 별, 한밤중에는 그 계절 별, 그리고 자정 넘어 새벽에는 다음 계절의 별이 보인다. 11월 초저녁에 볼 수 있는 1등성은 거문고자리의 베가(직녀성)와 백조자리의 데네브, 독수리자리의 알타이르(견우성) 같은 여름별이다. 가을철 별로 분류되는 유일한 1등성은 남쪽물고기자리의 포말하우트로, 주변에 밝은 별이 없어 ‘고독한 별(The Solitary One)’로 불린다. 자정이 지나면 겨울철의 대표 별자리인 오리온자리를 볼 수 있다.-포항에서 별 보기 좋은 곳을 추천한다면.△별을 보려면 인공불빛이 없고 탁 트여야 한다. 경북 영양과 청송, 봉화 같은 곳이 그나마 은하수를 볼 수 있는 곳이다. 포항에는 신광 들판과 기북, 죽장면이 비교적 잘 보이지만 빛공해가 점점 심각해진다. 인공조명은 사람의 건강을 해치고 생태계를 위협하며 밤하늘의 별빛을 뺏어간다. 빛공해를 개선하기 위해 가로등에 갓을 씌우는 일이 시급하다. 아시아에서 최초로 국제밤하늘보호공원으로 지정된 경북 영양 수비면에서도 이런 노력들을 하고 있다.-11월에 특별한 천문현상을 만날 수 있다고.△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완전히 가려지는 개기월식이 오는 8일에 일어난다. 개기월식은 ‘태양-지구-달’이 일직선에 놓이면서 지구의 그림자에 달이 숨어들면서 발생한다. 지구의 그림자에 달의 일부가 들어가는 부분월식은 저녁 6시 10분부터 시작된다. 달의 전부가 지구의 그림자에 들어가는 개기월식은 7시 18분부터 8시 43분까지 관측할 수 있다. 검붉은 보름달인 ‘블러드 문(Blood Moon)’도 나타난다. 8일 오후 6시, 개기월식 공개 관측회를 포항제철초등학교에서 진행한다.-천문 관측에 관심이 생겼다면 망원경부터 사야할까.△천체 관측 초보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가 고가의 망원경부터 덜컥 구매하는 것이다. 일단은 눈으로 시작해보는 것이 좋다. 처음에는 쌍안경도 별 보기에 괜찮은 장비이다. 천체망원경은 상하좌우가 바뀌어 보이지만 쌍안경은 상이 바로 보이고, 무엇보다 휴대가 간편하다. 다만 쌍안경도 배율과 구경이 크면 무겁고 상이 흔들려서 삼각대가 필요하다. 맨눈으로 시작해 쌍안경, 망원경으로 이어지길 추천한다. 큰 돈 들여서 장비부터 갖추는 애호가들도 있지만 작은 망원경 하나로도 평생 하늘의 별을 다 보지 못한다.-천문학의 발전은 인간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더 큰 우주로 나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30년 가까이 별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어떤 변화를 느꼈는지. 별을 보는 경험이 주는 삶의 지혜가 있다면.△지리산에서 억누르듯 쏟아지는 별빛을 경험하며 우주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됐다. 우주는 생각 이상으로 멀고 광활하며 무엇보다 아름답다. 눈으로 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도 알려줬다. 개인적으로 교육활동에 보람이 크다. 아이들과 별을 보기 시작해서 그런지 지금도 혼자보다는 누군가와 함께 별을 보길 좋아한다. 특히 아이들이 별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행복하다. 별을 서너 개 본 아이와 쏟아지는 별을 본 아이는 다르게 성장한다. 쏟아지는 별을 경험한 아이들은 천문학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각자가 하는 일에 도움이 되리라는 믿음은 늘 가지고 있다. 문학을 하든, 음악이나 미술을 하든, 다를 것이라 믿는다.홍성창 이사는대구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 경북 청도의 공립 초등학교에서 근무했다. 1987년 개교한 포항제철초등학교로 옮기면서 천문학과 가까워졌다. 경주문화재야행 천체 관측 강사, 세계천문의 해 기념 ‘100시간 천문학’ 거리의 별 축제(2009)와 ‘별나라 우리나라’ 캠페인 집행위원(2010) 등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경북천문교육연구회 회원이자 한국아마추어천문학회 이사이다. 천문학의 대중화를 위한 활동으로 금성 태양면 통과 공개 관측회(2012), 네오와이즈 혜성 관측회(2020, 경북 봉화) 등을 진행했고, 개기월식이나 일식이 있을 때마다 공개 관측회를 열고 있다.배은정 1974년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사학과 졸업. TBC·포항MBC·경북교통방송 작가. ‘포항문화의 상징과 공간’ 공저.

2022-10-31

그 시대의 역사문화 속 오늘과 미래 문화도 존재

◇토함산의 과거 신라역사박물관과 추억의 달동네토함산 자락에는 경주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상징하는 듯한 다양한 시설들이 자리잡고 있다. 신라역사과학관은 경주인들의 과거를 소환하는 곳이다. 신라역사과학관은 경주 민속공예촌 내에 있다. 석불사 관람 전에 필수로 들러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석불사는 문화재 보호를 위해 유리벽이 설치돼 있어 석가탄신일 당일을 제외하고 내부를 볼 수 없다. ‘신라 불교미술의 정수’라 불리는 본존불의 아름다움은 유리창 안에서도 빛나지만 과학적으로 지어진 석굴 내부 곳곳을 둘러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이 든다.신라역사과학관은 일제의 잘못된 복원으로 습기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 석굴암 본존불에 대한 안타까움이 컸던 석우일 관장이 사재를 털어 석굴암의 연구 자료를 모아 전시관을 만들었다. 5/1 크기로 만든 석불사 모형을 필두로 지하전시실에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정교하게 짓고, 세밀한 조각까지 곁들여진 석굴 내부 곳곳을 살펴볼 수 있도록 전시해 두었다.본존불을 중심으로 석불사 내부의 제자상과 첨차석을 정교한 모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전시실에 들어가면 마치 유리막을 열고 석불사 안쪽 석실로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석굴의 수리적 원리를 최초로 밝힌 요네다 도면도 볼 수 있고 석굴암 관련 서적과 자료도 같이 전시돼 있다.신라역사과학관은 선조들의 놀라운 과학기술과 건축기법의 산물인 문화유적을 세세하게 뜯어볼 수 있는 곳이다. 1500년 동안 단 한 번도 무너지거나 크게 흔들림 없이 제 자리를 지킨 첨성대의 구조를 세밀하게 공부할 수 있는 1/10 첨성대 모형도 1층 전시실에 자리해 있다.경주 하동공예촌에 신라역사과학관을 만든 이는 석우일 관장이다.석 관장은 “과거의 역사 문화 속에는 과거만 있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는 현재를 살아가는 오늘의 문화도 있으며 내일을 살아갈 미래의 문화도 함께 내재돼 있다”고 말했다.석 관장의 생각처럼 전시실 내부에는 첨성대와 석불사 외에도 물시계와 해시계 등 신라시대의 하이테크 기술을 알 수 있는 다양한 과학기술의 성과물들이 전시돼 있다. 조선시대의 천문학적인 깊이를 알 수 있는 천상열차분야지도 목판본이나 세종 19년 만든 시계인 일성정시의, 앙부일구(해시계) 등도 정교한 모형도 같이 전시하고 있다.전시를 좀 더 풍부하게 이해하려면 매주 주말 오전 10시와 오후 2시에 진행하는 상설 해설 프로그램을 따라가면 된다.경주의 과거를 이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장소는 ‘추억의 달동네’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우리네 옛 삶을 엿볼 수 있는 근대사박물관인 ‘추억의 달동네’는 경주시 보불로 민속공예촌 옆에 있다. ‘추억의 달동네’는 근대사박물관이란 이름으로 지난 2014년 12월 개관한 곳이다. 세트장처럼 규모가 큰 것도 아니고, 재현이 좀 투박한 듯하지만, 150개 코너에다 6천여 개의 소품으로 장식해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비록 박물관 안에서 재현된 풍경일지라도 지나온 청춘을 바라보는 느낌은 아련하다. 다이얼을 돌리는 전화기, 길게 줄을 서서 사는 영화표, 튜너가 달린 TV, 교련복, 통기타…. 그 시대를 청춘으로 건너온 중년 이상의 세대들에게는 누추했어도, 누구에게나 빛나는 청춘의 시간이었을 것이었다. 그 빛나는 시간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겠지만, 그때의 물건과 정서로 가득 채운 여행지가 추억의 박물관이다. 옛 건물을 재현하고 오래된 물건을 가져다 놓은 곳인데, 그곳에서는 전시된 물건뿐만 아니라 저마다 건너온 자신의 과거의 시간과 마주치게 된다. 기억 속의 공간을 둘러보다 때로 가슴이 뭉클해지는 건 이 때문이다.이곳에서는 잊혀진 줄만 알았던 동네 풍경들, 이를테면 주황색 공중전화, 연탄재가 쌓인 골목길, 못난이 인형, 앉은뱅이 책상, 원기소, 뻥튀기 도구 같은 것들을 만날 수 있다. 골목 곳곳에 나붙은 ‘쥐를 잡자’ ‘10월 유신’ 포스터와 저우룬파(周潤發)가 등장하는 광고지 등도 현실감을 더해준다. 특히 50년대부터 서민, 평민, 양반층 등 계층별 삶의 모습뿐만 아니라 농업인, 이발소, 다방, 만화방, 비디오방, 학교 등 직업별로 당시의 삶을 엿볼 수 있도록 구성돼 있다.골목 주류문화를 꽃피웠던 1970년대 선술집을 재현하여 정과 흥, 그리고 문학과 예술이 함께하는 선술집 문화를 엿볼 수 있고, 군 막사에는 군대의 희로애락 역시 고스란히 재현해뒀다.이곳이 세트장과 다른 점은 풍경 곳곳에 마네킹 크기만 한 인형을 배치해 놓았다는 점. 구멍가게와 전파사, 국밥집, 복덕방의 공간 속에다 인형을 집어넣는 것으로 낡은 흑백 사진 속의 풍경을 완성해 놓았다. 국민학교(초등학교의 옛 이름) 교실의 풍경이며, 남녀 학생이 미팅하는 빵집, 경찰과 취객이 실랑이를 벌이는 파출소, 장발의 DJ가 있던 옛날식 커피숍, 가위를 들고 아이들을 부르는 엿장수 등의 모습이 슬며시 미소 짓게 만든다.애초부터 관람시설로 만든 곳이라 체험 거리가 풍성하다. 연탄불 위에 설탕을 녹여서 만드는 달고나도 있고, 구워 먹는 쫀드기도 있다. 잘 오려서 옷을 갈아입히는 종이 인형이나 주사위를 굴리며 놀던 뱀 주사위 놀이판도 판다. ‘초등학교’에서는 교복과 교련복을 빌려 입을 수도 있다. 과거의 공간 속에서 보고, 먹고, 사진을 찍으면서 추억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다.박물관 관계자는 “기존 딱딱하고 보기만 하는 박물관의 이미지를 탈피하고, 관람객이 옛 골목길을 걸으며 직접 체험하고, 함께 호흡하고 살아 숨 쉬는 체험형 박물관을 만들고자 했다”고 한다. ◇토함산의 현재 경주 자연휴양림경주시 양북면에 있는 토함산 자연휴양림은 경주 3대 성산의 하나인 토함산 남쪽 기슭 깊은 계곡에 있으며 소나무 등 침엽수림 외에 다양한 활엽수와 수목이 자생하고 있다. 1997년 7월에 개장한 토함산 자연휴양림은 천연원시림 안에서 산림욕과 보건 휴양을 할 수 있으며, 특히 활엽수 산림욕이 유명하다. 전체 면적은 123만㎡, 1일 수용인원은 300명이다. 가벼운 등산이나 삼림욕을 겸해 캠핑을 즐기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다양한 침엽수와 활엽수가 자생하고 있으며, 각종 야생동물이 있어 자연체험 학습장으로 제격이다. 캠핑장에는 일반 야영장 40면을 마련했다.휴양림에는 5.18㎞의 등산로를 비롯해 숲속의 완만한 경사면에 야영장이 있고, 숲속의 집, 삼림욕장, 전망대, 체력단련시설, 배드민턴장, 물놀이장, 활터, 씨름터, 산림욕장, 어린이놀이터, 캠프파이어장 등을 갖추었고, 임산물판매장, 민속놀이마당 등이 있다.바닥은 모두 데크로 이뤄졌으며, 사이트 크기는 가로 3m, 세로 3.5m부터 가로 4.7m, 세로 4.2m까지 다양하다.근처에는 신라 경덕왕 때 김대성이 창건한 사찰인 불국사(사적 및 명승 1)와 석굴암(국보 24), 문무대왕릉(사적 158), 감은사지, 보문관광단지 등 많은 문화유적과 관광지가 있다.◇토함산의 미래 경주 풍력발전토함산의 이웃 산인 조항산 정상부에는 경주 풍력발전이 있다.친환경 청정에너지 생산을 위해 한국동서발전과 동국SC가 건설한 상업용 풍력발전단지로 총 7기의 풍력발전기가 가동 중이다. 풍력발전기는 바람개비 모양을 하고 있다. 말이 ‘바람개비’이지 사실 ‘바람개비’라고 하기엔 너무 크다. 80m 높이의 타워 꼭대기에 무게 11톤, 직경 95m의 거대한 날개가 회전하는 이 피조물의 정식 명칭은 ‘풍력발전기’. 가까이서 올려다보면 거대하다 못해 위엄까지 넘친다. 그러나 조금만 뒤로 물러나 멀리서 바라보면 발전기는 어느새 작은 동산에 꽂혀있는 앙증맞은 바람개비로 변한다. 게다가 하늘과 바다의 푸른색을 배경으로 삼으면 그 풍광이 가히 목가적이다.1만여 가구가 쓸 수 있는 양인 평균 4만 mwh 정도의 전력을 연간 생산한다.산 능선을 따라 띄엄띄엄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세워져 있는데 ‘바람의 언덕’으로 부르는 이 일대를 365일 일반에 개방하고 있다. 풍력발전소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정자 ‘경풍루’가 있는 전망대와 함께 바람길 산책로, 피크닉 테이블 존 등이 갖추어져 있다.굽이굽이 만들어져 있는 바람길을 따라가다 보면 억새와 갈대처럼 가을 정취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경주풍력발전 ‘바람의언덕’은 일몰, 노을이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어 해 질 무렵 찾아보길 권한다. 전망대, 바람길 산책로 등 곳곳에서 석양을 감상하기 좋다. 더러는 일몰 후 조금 더 기다려 별빛 쏟아지는 낭만적인 밤까지 즐기고 가는 이들도 많다./최병일 작가

2022-10-30

‘단풍 맛집’ 찾아 가을에 떠나는여행

안동과 영천 등 유명 관광지에도 단풍이 곱게 물들고 있다. 한 번 가보고 싶어도 못가봤던 두 지역의 단풍명소들을 소개한다. 이번 주말 모든 것을 훌훌 털고 꼭 한번 단풍여행을 떠나보자.낙동강변 유려한 물길 따라 형형색색 안동이 빛난다△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내는 ‘낙강물길공원’은행나무와 메타세쿼이아 등이 주를 이룬 안동댐 수력발전소 입구는 10월 말이면 울긋불긋 색깔의 향연을 펼친다. 특히 발전소 입구 좌측에 자리한 낙강물길공원(구 안동폭포공원)은 초록의 수련이 짙게 깔린 인공연못 위로 붉게 물든 단풍나무가 드리워진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또한, 안동시가지까지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 안동루에 오르면 왼편의 샛노란 은행나무 길과 오른편의 새빨간 단풍나무 길이 마치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 가을 감성으로 가득해진다. △ 옐로우 카펫 따라 거니는 월영공원국내 최장 목책교로 안동호를 가로지르는 월영교가 있는 월영공원 은행나무 길은 가을을 만끽하기에 최고의 장소다. 특히 강변을 따라 백여 미터가 넘게 조성된 은행나무 길은 샛노랗게 물든 잎들이 길 위로 소복이 내려앉아 장관을 이루고 있다.연인과 걷기에는 최고의 장소다. 특히, 은행나무 길 뿐만 아니라 울긋불긋 소소한 단풍나무와 물안개 낀 월영교의 몽환적인 분위기가 함께해 매년 이맘때 즘 사진작가들로부터 사랑받는 곳이기도 하다.△‘안동민속촌’과 ‘안동호반나들이길’안동민속촌은 또 하나의 작은 안동이다. 안동댐으로 수몰된 민속 문화재가 한자리에 모여 있어 그 의미로도 남다르지만 안동호의 풍광을 안고 에두른 8만여 그루의 나무와 민속촌의 초가 지붕은 예 선조들이 보는 가을의 못브을 재현한다. 또한, 안동민속촌을 지나 안동댐 보조호숫가를 따라 도는 호반나들 역시 단풍 명소이다. 이 길은 호수 속에 반영된 단풍과 고요한 숲 내음으로 마음의 안식을 찾을 수 있는 곳이다.△천년사찰 세계유산 ‘봉정사’천년사찰인 세계유산 봉정사는 늦가을 정취가 만연할 때 고즈넉함이 더욱 깊어지는 곳이다. 봉정사를 에두른 비스듬히 살아온 고목들은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축물인 봉정사 극락전의 품위에 걸맞게 고혹적인 붉은 단풍으로 자태를 뽐낸다.특히, 이곳에는 단풍 외에도 가을 국화가 만개해 꽃과 단풍이 어우러지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세계유산 ‘하회마을’과 ‘도산서원’세계유산 하회마을에 가을이 오면 제방을 따라 심긴 벚나무와 전통가옥, 그리고 집안에 심어진 감나무 등이 단풍에 물들어 각각의 색깔을 뿜어내며 한 폭의 풍경화를 연출한다도선서원은, 진입로의 진 붉은 빛깔의 단풍나무는 물론 도산서당과 전교당에도 울긋불긋 단풍이 들어 아름다운 서원의 곡선미와 함께 더욱 화려해진다. 시사단을 마주하고 앉아 나지막이 내려다보이는 풍광에 노을까지 가세하면 그 풍광은 가히 최고라고 할 수 있다.△갑시다, 나랑. 나랑 ‘만휴정’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촬영장소로도 유명 ‘만휴정’도 추천하는 장소다. 가파른 기암에 흐르는 송암폭포 곁으로 자리한 아담한 정자가 하나 눈에 띄는데, 바로 만휴정이다. 이곳은 가을이면 본래 하나의 자연인 듯, 단풍으로 물든 깊은 산새 안에 어우러진 정자가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가을엔 핑크샤워 ‘안동강변 핑크뮬리 그라스원’울긋불긋 익숙한 가을단풍에 질리면 탈춤공연장 앞을 찾으면 된다. 바로 안동강변의 ‘핑크뮬리 그라스원’이다. 이곳은 가을이면 이색적인 ‘핑크샤워’ 할 수 있는 곳이자 영가대교를 배경으로 다양한 포토존을 담고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는 곳이다. 핑크뮬리는 실물로도 고혹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지만 사진에 담을 때 더 빛을 발한다. 살짝 밝은 필터를 적용하면 어디서나 인생샷을 건질 수 있다. 아기자기 숨은 단풍비경이 반기는 ‘별의 도시’ 영천별의 도시 영천 가을이 깊어가면서 밤 하늘의 별빛은 더 영롱해지고 대지는 울긋 불긋 오색 물감으로 물들어 간다. 영천은 천혜의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만큼 발길 닿는 곳마다 단풍이 선사하는 비경이 눈앞에 펼쳐진다.△하늘을 향해 걷는 길, 보현산 천수누림길전국에서 별이 가장 잘 보이는 영천시 보현산 정상(해발 1천124m)에는 국내 최대 천문대인 보현산천문대가 위치해 있다.보현산 정상인 시루봉에서 천문대로 약 1km 이어진 천수누림길은 천수를 누릴 수 있는 하늘길이라 해 붙여진 이름이다. 산림 훼손 없이 친환경적으로 조성된 데크길을 따라 걷다 보면 이름 모를 야생화와 오색 단풍나무로 가을의 정취에 흠뻑 빠질 수 있다.데크길 정상에 서면, 맑은 가을 하늘을 향해 걸어온 듯한 착각이 들 만큼 사방이 뻥 뚫려 영천시가 발아래 펼쳐진다. 산 정상에 있는 천수누림길로 가기 위해서는 산허리를 타고 구불구불 이어지는 도로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데 억새로 어우러져진 이 길 또한 절경이다. △ 자양면 곳곳에 숨겨진 단풍 명소자양면은 영천댐과 어우러진 수려한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자동차로 영천댐 일주 도로를 달릴 때 보이는 가을 경치는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장관을 연출한다. 영천댐은 높이 42m, 제당길이 300m에 9,640만톤의 저수량을 가진 다목적댐이며 댐 주변을 따라 펼쳐진 벚꽃나무 길로 계절마다 다른 절경을 이뤄 데이트 코스로 인기가 높다. 특히 자양면에는 문화유적도 곳곳에 산재해 있는데 자양면 소재지 입구인 성곡리에는 강호정, 하천재, 삼휴정 등 유형문화재인 6개의 고택이 모여 있는 고즈넉한 산길이 있다.영천댐 수몰지구로 편입되어 현 위치로 이건 되었으며, 들어오는 입구부터 우거진 소나무 숲은 찾아오는 이들에게 대자연의 청량함을 선사한다. 송림을 지나 단풍으로 둘러싸인 6개의 고택을 따라 걷노라면 속세에 찌든 고단함을 잠시나마 내려놓을 수 있다. △은해사 굽이굽이 암자 기행영천시 청통면에 자리 잡고 있는 천년고찰 은해사는 국보 제14호인 거조암 영산전을 비롯해 백흥암, 운부암, 중암암, 기기암 등 8개의 산내 암자와 54여 개의 말사를 거느린 조계종 제10교구의 본사로 그 위용이 남다르다.일주문을 지나 대웅전, 템플스테이 연수원까지 이어지는 알록달록한 단풍으로 뒤덮인 산길을 쉬엄쉬엄 걷다보면 가을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100년 넘은 소나무숲과 100여 년생 참나무와 느티나무가 서로붙어 자라고 있는 연리지가 방문객의 발길을 붙잡는다. 특히 천년고찰이라는 역사에 걸맞게 괘불탱(보물 제1270호), 대웅전 아미타 삼존불 등 많은 소장 문화재들이 있으며, 대웅전 보화루, 백흥암 등의 현판 글씨가 모두 조선시대 명필 추사 김정희의 친필이어서 더욱 새겨 볼만 하다.△ 500년간 자리 지켜온 은행나무가 있는 임고서원500년 동안 임고서원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은행나무는 가을에 더 우아한 자태를 뽑낸다. 가을이 되면 노랗게 흐드러진 은행나무는 은은하면서도 웅장한 자태에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지난 세월을 품고 있는 듯하다.영천시 임고면 양항리에 소재하는 임고서원은 고려 말 충절을 지킨 충신 포은 정몽주(1337~1392)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임고서원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도 알록달록하게 물들어 고즈넉한 서원의 지붕들과 어우러지며 아름다운 경치를 제공해준다.특히 임고서원 옆 임고 초등학교는 아름다운 학교 숲 대상에 선정된 적이 있을 정도로 플라타너스 나무와 은행나무 등 수령이 오래된 아름드리나무가 인상적이다./조규남·피현진기자

2022-10-27

“자연과 이야기 품은 ‘가을 정원’으로 감성여행 떠나요”

한국의 정원은 시간이 만든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제자리를 잡기까지 비우고 채우는 자연의 섭리가 작동한다. 정원은 단지 관상용이 아니다. 선비들의 숨은 이야기가 있고 정원을 만들기 위해 정성을 기울인 정원사의 땀이 섞여 있다. 정원을 거닐면 바람이 사각거리며 스쳐가고 울울한 대나무가 밤새도록 울어댄다. 한국관광공사가 추천하는 가을에 더 가까이 하고 싶은 정원들을 소개한다. ◇남종화처럼 아름다운 풍경-진도 운림산방진도 운림산방(명승)은 ‘남종화의 대가’소치 허련이 말년에 낙향해서 지은 화실이다. ‘첩첩산중에 아침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 숲을 이룬다’는 뜻으로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진도에서 태어난 허련이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를 스승으로 모시고,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가 돼서 임금 앞에 나아가 그림을 그리는 최고 영예를 누린 이야기는 운림산방의 격을 높인다. 운림산방은 허련의 삶과 주변의 빼어난 풍광, 아름다운 남종화까지 산책하듯 만나는, 가을에 딱 어울리는 공간이다.소치1·2관에는 허련부터 5대에 이르는 작품과 홀로그램, 미디어 아트 등을 선보여 여행자가 미술에 친근하게 다가갈 기회를 마련한다. 운림산방 관람 시간은 오전 9시~오후 5시 30분(동절기 오후 4시 30분 / 연중무휴)이다. ◇사유의 가을 정원,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옥상정원국립현대미술관(MMCA) 과천의 옥상에 ‘시간의 정원(Garden in Time)’이란 이름의 지름 39m 원형 구조물이 설치돼 있다.‘자연의 순환’ ‘순간의 연속성’ 등을 시각화한 작품으로 야외미술 활성화를 위해 기획한 프로젝트다.계절과 날씨에 따라 작품에 투영되는 빛과 그림자가 변화한다. 자연의 감각과 예술이 공명하는 시공간을 표현했다. 1층부터 3층까지 나선형 통로를 따라 이동하며 미술관의 미적 경험을 주변으로 확장한다. 원형의 옥상정원뿐만 아니라 인근 청계산과 서울대공원 호수까지 포괄하는 작품이다. ‘시간의 정원’ 안에는 황지해 작가의 ‘원형정원 프로젝트 : 달뿌리-느리고 빠른 대화’가 전시돼 있다. 옥상정원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개방한다. 월요일은 휴관한다. ◇사랑이 깊어지는 정선 로미지안가든강원도 정선에 자리한 로미지안가든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남편이 직접 가꾼 특별한 정원이다. 아내만큼 나무 한 그루, 돌멩이 하나도 소중히 여기다 보니 무려 10년 세월이 걸렸다. 이곳의 랜드 마크 ‘가시버시성’은 부부의 순우리말인 가시버시란 이름처럼 사랑과 믿음에 대한 글귀가 눈길을 사로잡는다.베고니아를 1년 내내 감상할 수 있는 ‘베고니아하우스’도 특이하다. ‘프라나탑’과 ‘붉은자성의언덕’ 등 정원을 꾸미는 동안 느낀 깨달음을 풀어낸 공간이 다양하다. 전문가와 함께 ‘금강송산림욕장’에서 명상을 하는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로미지안가든 관람 시간은 오전 9시~오후 5시다. ◇‘바람보다 앞서가지 마세요’, 천상의 정원수생식물학습원은 코로나19 시대를 거치면서 떠오른 명소다. 2020년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가을 비대면 관광지’에 들어 널리 알려졌고, TV 방송을 타면서 옥천의 대표 관광지로 자리 잡았다. 학습원을 가꾼 주서택 원장은 오랫동안 목사로 활동하다가, 이른 퇴임 후 도시 사람들이 자연의 품에서 쉴 수 있는 장소를 마련했다.학습원은 대청호 품에 안긴 사색과 성찰의 공간으로, ‘수생식물학습원’이란 공식 명칭보다 ‘천상의 정원’이란 별칭이 잘 어울린다. 이곳의 하이라이트는 ‘천상의 바람길’이다. 호젓하고 아기자기한 산책로 곳곳에서 불쑥 대청호가 나타난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교회당’, 학습원이 한눈에 펼쳐지는 전망대, 수련이 가득한 연못 등을 둘러보는 맛도 일품이다. 수생식물학습원 이용 시간은 오전 10시~오후 6시(동절기 오후 5시), 일요일에 쉰다.◇닫힌 듯 열린 마당 정원, 안동 봉정사 영산암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안동 봉정사에는 부속 암자 영산암(경북민속문화재)이 있다. 우화루의 작은 문으로 허리를 굽혀 들어가면 우리 옛집과 마당이 어우러진 신세계가 펼쳐진다. 영산암을 구성하는 크고 작은 전각 6동 가운데 자리 잡은 마당에는 소나무와 배롱나무, 맥문동 같은 화초가 어우러져 무심한 듯 아름다운 정원을 이룬다.‘한국의 10대 정원’으로 꼽히는 이곳은 3단으로 된 마당 아래쪽에 풀꽃이 있고, 가장 넓은 중간 마당은 바위 위에 솟아오른 소나무를 중심으로 배롱나무와 석등이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삼성각이 있는 위쪽에서는 마당이 한눈에 보인다. 영산암(봉정사) 관람 시간은 오전 7시~오후 7시(동절기 오전 8시~오후 6시/연중무휴)다. ◇조선 선비의 낭만 별서 정원, 밀양 월연정월연정(경남유형문화재)은 조선 중종 때 한림학사를 지낸 월연 이태가 관직을 버리고 낙향해 지었다. 쌍경당과 그 옆에 자리한 제헌, 월연정 등을 아울러 ‘월연대 일원(명승)’이라 부른다. 먼저 만나는 곳은 쌍경당. 쌍경(雙鏡)은 ‘강물과 달이 함께 밝은 것이 마치 거울과 같다’는 뜻이다. 쌍경당 옆에는 이태의 맏아들 이원량을 추모하는 제헌이라는 건물이 있다.쌍경당 옆 얕은 계곡에 놓인 쌍청교를 건너면 월연정에 닿는다. 월연정은 앞면 5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한가운데 방이 하나 있고 사방이 마루다. 마루에 앉으면 가을빛을 안고 흘러가는 밀양강이 내다보인다. 보름달이 뜰 때 달빛이 강물에 길게 비치는 모습이 기둥을 닮아 월주경(月柱景)이라 하는데, 옛사람들은 월주가 서는 보름마다 이곳에서 시회를 열었다고 한다. ◇가을 단풍 맛집 · 켄싱턴호텔 설악설악산을 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켄싱턴호텔 설악은 뛰어난 입지로 ‘가을 단풍 맛집’으로 손꼽힌다. 켄싱턴호텔 설악은 사계절 아름다운 설악산의 자연 경관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호텔은 지하 1층, 지상 9층 규모로, 총 108개의 객실을 갖추고 있다.애비로드 스카이라운지는 비틀즈 멤버 전원의 친필 사인이 새겨진 기타, 존 레논이 직접 착용한 오리지널 수트, 폴 매카트니의 친필 악보, 비틀즈의 첫 골든디스크 등 국내외에서도 쉽게 접할 수 없는 40여 종의 비틀즈 소장품이 전시돼 있다. 레스토랑 ‘더 퀸’에서는 영국의 로열패밀리가 보내온 왕실 연하장, 조지 6세의 친필편지, 윈저공작 부부의 사진과 친필사인 등 영국 왕실의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전시품들이 마련돼 있다.호텔의 각 층마다 국내외 유명 인사들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는 소장품을 만날 수 있다. 5층은 ‘스포츠 스타 플로어’로 야구, 축구, 농구 등 다양한 종목의 스포츠 스타들의 추억이 가득한 소장품, 6층은 40여 개국 주한대사의 소장품, 7층과 8층은 각각 ‘싱어 플로어’, ‘무비스타 플로어’로 유명 가수들과 영화배우들의 작품, 기념사진, 친필 사인이 새겨진 기증품을 만날 수 있다.켄싱턴호텔 설악은 호텔에서 완벽한 휴식을 위해 영국 콘셉트의 스위트 객실로만 구성된 ‘영국에서의 하룻밤 패키지’를 오는 12월 31일까지 선보인다. 패키지는 △스위트 객실 1박, △더 퀸 조식 뷔페 2인, △더 퀸 와인 파티 2인, △아메리카노 2잔(무제한), △비피터 하우스 투어, △설악산 입장권 2매로 구성됐다.패키지에 포함된 조식과 와인 파티는 영국 왕실의 소장품이 전시된 레스토랑 ‘더 퀸’에서 이용할 수 있다. 호텔 내 전시된 영국 및 국내외 유명 스타들의 소장품과 관련된 역사와 스토리를 소개하는 ‘비피터 하우스 투어’를 운영한다. 사전 예약제로 운영되며, 신청은 프론트 데스크에서 할 수 있다. 예약 및 문의는 (033)635-4001./최병일 작가

2022-10-27

시심을 불러일으키는 굽이굽이 십이폭포

쪽빛 바다의 도시 포항은 초록 산세(山勢)도 빼어나다. 내연산, 동대산, 도음산, 비학산, 운제산 등이 은은하게 이어지며 포항을 감싸고 있다. 그 산을 타고 내려오면 강과 들판이 아득하게 펼쳐지고 그 끝자락에 동해 물결이 넘실거린다. 산과 강, 들판, 바다가 저마다의 빛깔을 발산하며 어우러지는 곳이 포항이다.포항의 여러 산 중에서 사람들의 발길이 가장 많이 닿는 곳은 내연산이다. 태백 구봉산에서 솟구친 낙동정맥이 청송 주왕산을 거쳐 남하하다가 동해안 쪽으로 뻗어가 솟은 산이 내연산이다. 내연산은 한마디로 속이 깊은 산이다. 비학산이 큰 날개를 펼치고 있는 학의 형상을 사방에 드러내고 있다면, 내연산은 바깥에서는 그 모습을 알 길이 없다. 산속으로 한 발 두 발 계속 들어가야 비로소 그 경치가 보인다.골이 깊고 경치가 아름다운 내연산은 영남의 소금강(小金剛)이라 불린다. 보경사 일주문을 지나 계곡을 따라 자박자박 올라가면 양옆으로 억겁의 세월이 느껴지는 수직의 단애(斷崖)가 나타나고 그 사이로 폭포와 소(沼)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 까닭에 내연산에서는 풍경을 음미하며 쉬엄쉬엄 걸어야 한다. 다행히 내연산에서 가장 큰 폭포인 연산폭포까지는 경사가 완만해 남녀노소 누구나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내연산은 사계절마다 색깔이 확연히 다르다. 봄에는 곱디고운 벚꽃길, 여름에는 계곡과 폭포의 시원한 물줄기, 가을에는 울긋불긋한 단풍, 겨울에는 산길의 호젓함이 사람들의 마음을 불러낸다. 조선 사대부들의 창작 공간예부터 많은 사람이 내연산을 찾았는데,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발길이 이어진 기록도 남아 있다. 사대부들은 계곡의 바위 곳곳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그들 중에 처음으로 내연산의 아름다움을 작품 소재로 삼은 이는 청하 현감이자 당대의 문사인 옹몽진(邕夢辰, 1518~1584)이다. 그가 귀향하며 경주 부윤인 구암(龜巖) 이정(李楨, 1512~1571)에게 내연산의 아름다움을 알렸고, 이정이 1562년 내연산을 찾은 후로 사대부 사회에서 명산으로 부각되며 많은 시문의 창작 공간이 되었다(김희준, 박창원, ‘인문학의 공간 내연산과 보경사’, 포항문화원, 2014, 21쪽 참조). 이정은 내연산을 이렇게 읊었다.오늘 아침 구름안개 활짝 개어종일토록 냇물의 근원을 찾아 푸른 이끼를 밟았네꽃과 버들 산에 가득한데 누가 있어 그 뜻을 헤아릴까한 줄기 계곡물, 바람과 달만이 홀로 서성이는 것을- 이정 ‘내영산에 노닐며(遊內迎山)’, 김희준, 박창원, 위의 책, 21쪽.조선 숙종도 어느 봄날 내연산에 와서 계곡과 폭포 그리고 새소리, 비바람 소리와 분분히 지는 봄꽃에 취해 붓을 들었다. 숙종이 쓴 시는 당나라 때 산수전원시파를 대표하는 시인 맹호연(孟浩然, 689~740)의 ‘봄날 아침(春曉)’이다. 보경사 성보박물관에 판각(板刻)된 숙종의 글이 있다.봄잠에 날 밝는 줄 알지 못하다곳곳에 새 우는 소리 듣게 되었네밤새 비바람 소리 들려왔으니꽃들은 얼마나 지고 말았나- 맹호연 지음, 이성호 옮김, ‘맹호연 전집’, 문자향, 2006. 겸재의 걸작 ‘내연산 삼용추’가 탄생한 곳내연산에는 하류의 상생폭포부터 보현, 삼보, 잠룡, 무풍, 관음, 연산, 은폭, 복호1, 복호2, 실폭, 시명 등 높이 7∼30m의 폭포 열두 개가 연이어 펼쳐져 이를 십이폭포라 한다. 그중 상생, 관음, 연산폭포가 특히 빼어나 삼폭포라 부른다. 쌍폭인 상생폭포는 단아하고, 역시 쌍폭인 관음폭포는 선일대, 비하대, 관음대 등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둘러싸여 신비감을 자아낸다. 십이폭포 중 가장 큰 연산폭포는 웅장한 폭포 소리를 일으키며 폭포의 진경을 보여준다. 비 내린 다음 날 연산폭포 앞에 서면 땅을 울리는 폭포 소리와 하얗게 일어나는 물보라에 세속을 까마득히 잊게 된다.겸재 정선의 걸작 ‘내연산 삼용추(三龍湫)’도 이곳에서 탄생했다. 겸재는 1733년 58세에 청하 현감으로 부임해 2년 남짓 머물면서 청하와 내연산을 화폭에 담았다. 삼용추는 잠룡과 관음, 연산폭포를 일컫는다. 겸재가 머문 청하 시절의 의미를 유홍준은 이렇게 정리했다.겸재는 청하 현감 시절에 ‘내연산 삼용추’, ‘금강전도’같은 명작을 그리며 사실상 겸재의 진경산수 화풍을 완성하였다. 더욱이 이 그림들은 조선시대 회화로서는 보기 드문 대작이니 가히 본격적인 작품이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청하는 겸재의 화력에서 기념비적 이정표가 되는 곳이다.- 유홍준 ‘화인열전1’ 역사비평사, 2001, 255쪽.겸재는 청하 현감 시절에 ‘청하성읍도’, ‘청하 내연산 폭포도’ 같은 작품을 남겼는데, 이 작품들은 우리 미술사는 물론 지역사에도 귀한 가치가 있다. 내연산은 이처럼 오래전부터 시심과 화풍(畫風)을 일으켜온 산이었다.내연산의 폭포는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로 종종 등장했다. 영화 ‘남부군’에서 남부군 대원들이 목욕하는 장면을 잠룡폭포 주변에서 찍었고, KBS 역사 드라마 ‘대왕의 꿈’ 일부 장면도 연산폭포에서 촬영했다.내연산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연산폭포를 보고 발길을 돌린다. 연산폭포에서 가파른 계단을 걸어 폭포 뒤로 넘어가면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등산객이 드물어 스산한 느낌마저 드는 이 산길에도 계곡과 폭포는 계속 이어져 제8폭포인 은폭부터 제1폭포인 시명까지 여덟 개의 폭포를 만나게 된다. 산길 중간중간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도 남아 있다. 화전민으로 추정되는데 그들은 여기서 어떤 연유로 어떻게 살아갔을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삼지봉과 향로봉 등 큰 봉우리 여섯 개가 이어져내연산의 원래 명칭은 종남산(終南山)이다. 중국 당나라의 명산 중의 명산으로 일컬어졌던 종남산과 산세가 비슷하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다가 신라 진성여왕이 여기에서 견훤의 난을 피한 후에 내연산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고 전한다. 내연산은 주봉(主峯)인 삼지봉(710m)을 비롯해 최고봉인 향로봉(930m), 문수봉(622m), 매봉(816m), 삿갓봉(716m), 우척봉(천령산, 736m) 등 여섯 개의 큰 봉우리가 이어지며 그 사이로 크고 작은 봉우리가 어깨를 맞대고 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봉우리를 잇는 능선 종주를 즐긴다.향로봉은 내연산에서 서쪽에 있는데 북으로 청송군 동면, 동으로 영덕군 달산면, 남으로 포항시 송라면으로 이어진다. 맑은 날에는 향로봉에서 팔공산과 주왕산은 물론 저 멀리 동해의 푸른 물결까지 바라볼 수 있다. 향로봉은 한국전쟁 때 격전지로 전사(戰史)에 남아 있다. 이토록 빼어난 풍경도 전쟁의 참화를 비켜갈 수는 없었으니 전쟁의 비정함을 실감하게 된다. 팔면보경을 묻었다는 보경사내연산 들머리의 솔숲을 지나면 보경사가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보경사는 신라 진평왕 25년(602)에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지명(智明) 법사가 창건했다. 지명은 왕에게 진나라의 한 도인으로부터 받은 팔면보경을 묻고 그 위에 불당을 세우면 주변 국가의 침략을 받지 않으며 삼국을 통일할 수 있다고 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지명과 함께 동해안을 거슬러 오르다가 내연산 아래 큰 못에 팔면보경을 묻고 못을 메워 금당(金堂)을 조성한 후 보경사라 했다.천왕문과 적광전 사이에는 ‘금당탑’이라 부르는 오층석탑이 있다. ‘보경사 금당탑기(寶鏡寺 金堂搭記)’에 각인(覺仁) 스님이 문원(文遠) 스님과 의논해 “절이 있으니 탑이 없을 수 없다”하여 장인을 부르고 재물을 모아 오층탑을 만들어 대전(大殿) 앞에 세웠다고 전한다. 탑을 건립한 시기는 신라 성덕왕 22년(723)이라는 설과 고려 현종 14년(1023)이라는 설이 있는데, 기록이 정확하지 않아 어느 쪽으로도 확정할 수 없다. 경내에는 고려 때 이송로(李松老)가 세운 원진국사비(보물 제252호)와 사리탑(보물 제430호) 등이 있다.보경사 경내에 서면 내연산의 능선이 보이고, 눈을 감으면 계곡의 물소리며 폭포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내연산에 둘러싸인 보경사는 내연산의 기운을 품고 있는 천년 고찰이다. 절이 산이고 산이 곧 절임을 보경사 뜨락에서 내연산 능선을 바라보며 깨닫게 된다.산을 왜 오르는 것일까? 아름다운 풍경을 보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궁극에는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산의 깊이, 자신의 내면을 만나기 위해 산길을 걷는 것이 아닐까? 속이 깊은 산, 내연산은 그런 화두를 넌지시 던진다.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

2022-10-26

물결 일렁이는 강과 운하, 다리 건너 다니는 ‘재미 솔솔’"

TV와 라디오에 출연한 의사와 자칭 ‘건강 전도사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걷기만큼 좋은 운동은 없다.” 이는 재론의 여지없이 검증된 사실이다. 특별한 준비물이나 비용 없이도 가능한 ‘걷기’는 건강을 염려하는 이들이 반가운 선물처럼 선택할 수 있는 고효율의 운동이 분명하다. 아무런 노력이 없어도 기본적인 체력과 신체 건강이 유지되는 20~30대를 지나 중년에 이른 남녀들은 예전 같지 않은 몸 상태에 이른바 ‘건강 염려증’이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 이때 필요한 게 걷기, 그중에서도 산책이 아닐까?산책(散策)이란 ‘휴식을 취하며 건강을 위해서 천천히 걷는 일’을 지칭한다. 물질적 풍요 이상으로 육체의 건강을 중시하는 21세기. 한국의 지자체들은 이를 감안해 경쟁적으로 ‘OO길’을 만들고 있다. 포항을 포함한 경북 지역 곳곳에서도 적지 않은 OO길, 즉 산책로를 만날 수 있다. 이는 마음만 다잡는다면 얼마든지 ‘건강을 위한 걷기운동’이 가능해졌다는 이야기다. 시간과 돈을 들여 헬스클럽에서 개인 코치를 받는 것도 건강을 위해 나쁠 것 없다. 하지만, 그런 시간적·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이라면 산책으로 몸과 마음을 치유해보는 게 어떨까?소슬한 바람이 불어 덥지도 춥지도 않고, 푸른 하늘과 더 짙푸른 바다, 여기에 물결 일렁이는 강과 운하가 있는 포항의 가을. 휴일이면 종일 가벼운 읽을거리와 텔레비전을 끼고 살며 외출을 잘 하지 않는 게으른 기자가 동년배 중년들을 위해 큰 힘 들이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볼 수 있는 포항의 산책길 몇 곳을 소개하려 한다. ▲죽도시장에서 출발해 포항운하관으로…사람살이의 웃음과 눈물이 넘쳐나는 공간 죽도시장. 아귀와 고등어, 오징어와 청어 등 싱싱한 생선이 대량으로 거래되는 포항수협 죽도어판장 지척엔 송도교가 있다. 그 아래로 내려서면 포항운하를 따라 근사한 산책길이 펼쳐진다.평일 낮에 걸어본 그 길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많았다. 몸에 무리를 주지 않는 속도로 걸어가며 주변을 살피는 그들의 모습이 평화로웠다. 몇몇은 자전거를 타고 같은 길을 지났다.얼마나 걸었던 것일까? 해도1동 어린이공원 벤치에서 쉬고 있던 60대 어르신 한 분은 “말없이 혼자 걷다보면 지난날의 나를 돌아보게 된다”고 했다. 젊은 시절을 추억하는 그의 눈망울이 청년의 그것처럼 빛났다.일본의 의사 구리타 마사히로(栗田昌裕)는 지난 2005년 흥미로운 제목의 책을 펴냈다. ‘산책의 즐거움’이다. “15분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꽤 많다. 카트라이더, 커피 한 잔, 잠깐 동안의 수면 내지는 수다. 저마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는데 효과가 있지만 체력과 지적 능력을 동시에 향상 시킬 수 있는 15분 산책은 어떨까?”라고 권한 구리타는 ‘걷는다’는 행위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인식한 사람인 듯하다.책이 출간된 17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유롭게 걷는 ‘산책의 즐거움’은 변하지 않았을 터. 그래서다. 구리타의 이런 문장을 눈여겨 읽게 된다.‘주변에 있는 사물들을 자세히 보면서 걸어 보라. 걷기는 운동의 기본으로 일정 시간 꾸준하게 걸으면 건강에 좋다. 이는 최근 들어 의학적으로 속속 증명되고 있는 사실이다.…(중략) 몸과 마음의 병이나 지적 능력의 부족함 혹은, 정신적 불행을 호소하는 것은 기본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해서다. 산책은 이런 활동의 기본을 배우는 실천의 장이라고 할 수 있으며…(후략)’포항운하길을 걷는 이들 모두가 구리타의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독서 없이도 지속적이고 꾸준한 산책 이후의 몸 상태가 달라졌음을 알게 될 것이니까.70대 중반인 기자의 모친 역시 ‘산책 중독자’다. 또래 친구들 두어 명과 매일 1시간에서 2시간가량 집 주변 공원이나 야트막한 산을 찾는다.그렇게 10년 이상을 보내니 “찌뿌둥했던 몸이 가벼워지고 밥맛도 좋아졌다”는 것이 걷기운동 신봉자인 모친의 자평.고요하고 가볍게 출렁이는 운하의 물결을 보며 죽도시장에서 포항운하관까지 가는 1.5km 거리. 중년은 물론 노년들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산책 코스다.거기선 흥미로운 조형물도 여럿 만나게 된다. 포항 스틸아트 페스티벌을 통해 제작된 작품들을 상설 전시하고 있는 것. 포항운하길을 ‘아트 웨이(Art Way)’라고도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20~30대 젊은이들이라고 산책의 즐거움을 모를까? 밤이 내린 포항운하길을 찾은 그들은 카약(Kayak)에 몸을 싣고 이색적인 데이트를 즐기기도 한다. ‘해양스포츠 탐험’으로 명명된 이 프로그램은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운영된다. 카약과 페달보트를 대여하는 비용은 성인이 2만 원, 청소년은 1만 원이다. ▲돌아올 땐 반대편 길을 걸어보면 어떨까20~30분이면 송도교에서 운하를 오가는 크루즈 운행의 출발점 포항운하관까지 갈 수 있다. 짤막한 산책도 나쁠 것 없지만 30분은 걷기운동의 효과를 보기엔 다소 짧은 시간.포항운하길 주변엔 반대편으로 건너갈 수 있는 다리가 3개 있다. 이름이 재밌다. 탈랑교(橋), 말랑교(橋), 우짤랑교(橋)란다.영남 사람이 아니면 “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라며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겠다. 다리 이름의 뜻을 궁금해 할 사람들을 위해 “(운하를 오가는 저 배를)탈래요? 말래요? 어떡할래요?”라는 해석을 덧붙인다.위트 가득한 명칭이 재밌는 이 다리를 통해 포항운하를 건너 출발할 때의 반대편 길로 산책을 계속했다. 기왕 포항운하길을 걷는 것이니 포항운하에 대해서도 알아보는 게 좋겠다. 아래 관련된 간략한 설명을 인용한다.“포항운하는 2012년 5월에 착공해 2014년 1월에 준공됐다. 포항운하 건설사업 지역은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포항시 송도동과 죽도1동 사이로 동빈대교에서 형산강을 남북 방향으로 잇는 지역에 해당한다. 옛 포항역에서 반경 1km, 포항고속 터미널에서 0.5km내에 인접해 있다.”운하의 과거와 현재, 구체적 건설 과정이 궁금한 사람이 있다면 잠시 산책을 멈추고 포항운하관에 들르면 된다. 무료입장이니 금전적 부담도 없다. 불과 10~20여m 떨어진 길이지만, 걸어온 방향과 반대쪽으로 산책을 이어가니 건너편에선 보이지 않던 새로운 풍경이 눈에 띈다.매일 같이 봐오던 건물과 분홍빛 꽃들이 새롭게 느껴진다. 이런 작고도 사소한 ‘생활이 발견’이 가을날 길을 걷는 산책자의 소소한 행복이 아닐지. ▲햇살 속이 아닌 달빛 아래 산책은 어떤 매력이매달 셋째 주 목요일 저녁 7시엔 ‘해도동 건강마을 달빛걷기’란 행사가 열린다. 산책의 매력과 즐거움은 낮이 아닌 밤에도 빛나는 것이기에 마련된 건강 프로그램인 듯했다.환한 햇살 속이 아닌 교교한 달빛 아래서 만나는 포항운하의 매력은 어떠한 것일지 궁금해졌다. 그 궁금증이 아마도 기자를 다음번에 열릴 ‘달빛걷기’에 참여하게 할 것 같다.“걷기는 누구나 어디서든 할 수 있는 운동으로 인간이 하는 운동 중 가장 완벽에 가까운 운동이다. 걷는 것은 몸 전체를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 시키는 것으로 단순해 보이는 동작이지만, 이 과정이 제대로 진행되려면 관절, 뼈, 근육, 신경 등이 모두 조화롭게 움직여야 한다.…(중략) 걷기는 시간, 장소, 비용문제 모두에 구애 받지 않으면서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운동”이라는 게 국민체육진흥공단 체육과학연구원의 설명.걷기 중 첫 단계가 완보(천천히 걷기)다. 운동 강도가 20~40% 이며, 분속 50~60m의 속도로 시간당 3~3.5km를 이동하는 완보는 분당 2kcal 이내의 에너지가 소요되니 몸이 느끼는 부담이 덜하다.죽도시장에서 포항운하관까지 오가는 1시간쯤의 산책은 바로 이 ‘완보’에 맞춤한 코스로 보였다.출발할 때와 비슷한 속도로 걸어 죽도시장이 눈앞에 보이는 우짤랑교에 도착했다. 올려다본 하늘이 사파이어처럼 투명한 푸른빛이다. 늦은 점심으로 시장 수제비골목의 따끈한 칼제비(칼국수와 수제비를 섞은 음식) 한 그릇 먹어야겠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10-25

지방정부·기업·연구소·대학 함께 ‘혁신에너지’ 경쟁력 확보

5년만의 원자력 산업 생태계 부활이다. 지난 5월 윤석열 정부는 원자력 강국으로 재도약을 천명했다. 최근 원자력 산업 수출에도 강한 의지를 보였다. 탈 원전 정책으로 그간 성과는 추락했고 빛이 바랬다. 현 정부의 탈 원전 정책 폐기로 이제 원자력의 불확실 상황이 정리가 됐다. 새로운 도전을 격려하고 원자력 산업의 중심지인 경북·경주의 현재와 미래를 현 시점에서 짚어보기 위해 ‘2022 경북 원자력포럼’을 마련했다.25일 경주 블루원리조트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이번 포럼에서는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원자력산업과 관련된 화두들에 대해 심도있는 논의를 펼쳤다. 김무환 포스텍 총장의 기조강연을 시작으로 김호진 경주시 부시장, 김규태 동국대학교 교수, 박상덕 서울대학교 박사, 이병호 한국원자력연구원 박사가 주제발표를 진행했다. 김무환 포스텍 총장 기조강연 - 김무환 포스텍 총장“과학기술 인재 양성·기술개발로 지방소멸 대응”원자력-혁신에너지 등 미래 대표 과학기술분야의 인재 양성을 위해서는 분야 최고의 전문가 영입과 양성, 이들이 일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기업, 지속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정주 여건이 필수적이다. 또한 우수한 인재와 함께 세계적으로 기술적 우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연구가 지속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과 지방 정부, 연구소, 대학이 함께 장기적인 계획 아래 같이 움직여야 한다. 인재 영입과 양성, 기술 개발을 위해서는 필요한 자금과 함께, 지방 정부의 의지와 지원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그러나 지방 정부가 세계적 경쟁력을 가진 인재 확보와 매년 필요한 RD 비용을 충분히 투자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다. 그러다 보니 중앙정부 주도의 공모과제 선정의 기회를 기다리게 된다. 이제 경주시와 경북도가 선택 분야 육성을 위한 확고한 지원 의지와 협력을 통해 유·무형의 자원을 스스로 준비할 때이다. 중앙정부도 지방의 특색에 맞는 분야를 스스로 키울 수 있도록, 연구 예산 집행의 자율권을 부여하는 블록펀딩을 통한 지원을 대폭적으로 확대해야 한다.결론적으로 혁신에너지로서의 원자력 분야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지방정부와 연구소(문무대왕과학연구소), 기업(한수원, 한국원자력환경공단) 및 대학(동국대, 포스텍)이 한 방향으로 함께 협력해야 한다. 나아가 원자력산업에 필요한 융합 분야는 폭 넓은 타 지역과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함으로써 지방소멸을 같이 막아내야 할 것이다. 김호진 경주시 부시장 주제발표 - 김호진 경주시 부시장“클린에너지 문제 해결 SMR 국가산단 유치 과제”‘글로벌 첨단원자력 기술 허브 미래도시’를 지향하는 경주의 미래, 나아가 경상북도의 미래는 원자력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현재 경북은 국내 원전 24기 중 19기를 운용 중이다. 또한 울진 신한울 2기와 울산 지역 신고리 2기를 건설하고 있기도 하다. 2006년 한수원을 유치한 경주와 경북은 이후 양성자가속연구센터와 혁신원자력연구단지도 유치했고, 혁신원자력 연구단지도 지난해 착공했다.혁신원자력의 최적합 지역으로 주목받는 경주는 혁신원자력 RD 연구기반을 갖추고, 원전 수출 산업 생태계를 조성해 지역 상생의 기틀을 만들겠다는 이른바 ‘K-원자력 전략’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이는 미시적으로 4개 분야 12개 과제로 요약된다.그렇다면 이를 구체화시키기 위한 향후 경주의 전략과 과제는 무엇일까? 먼저 탄소중립과 에너지 안보에 기여하는 클린에너지 문제를 해결할 SMR 국가 산업단지다. 이는 제20대 대선 공약이자 국정과제로 채택되기도 했다.이외에도 문무대왕 과학연구소의 지속적인 발전 전략 수립, 초임계 CO2 발전시스템의 첨단화, 수소 에너지 혁신 클러스터의 구축, 원자력 신재생 상생단지 조성을 통한 신재생 에너지 보급 확대, 2040년까지 주요 사업으로 진행될 차세대 극한환경 연구개발 클러스터 조성, 같은 기간까지 진력할 양성자 가속기 첨단 연구단지 구축 등이 향후 남은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김규태 동국대 석좌교수 주제발표 - 김규태 동국대 석좌교수“고준위 방폐물 관리사업 성공추진 위해 힘 모아야”고준위 방폐물 관리정책 로드맵에 의하면 2023년까지 부지 선정절차를 착수하고, 2036년까지 관리시설을 확보하는 것이다.2043년까지 사용후핵연료 중간시설을 확보하고, 지하연구시설 건설 및 운영을 착수한 후 2050년까지 지하연구시설의 실증을 종료한다. 2060년까지 영구처분시설을 확보하는 것이다.이 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지역 지원과 소통체계의 구축, 기술개발과 인력의 양성, 전담조직의 구축과 법 체계의 개편이 필수적이다. 한편, 가압경수로 습식저장시설의 포화시점을 고려하고 사용후핵연료 중간저장시설의 확보 전까지는 주민의견을 수렴한다. 원전부지 내 건식저장시설을 구축하고 이 시설에 사용후핵연료를 저장할 계획이다. 향후 사용후핵연료 중간시설이 확보되면 즉시 원전 부지 내 건식저장시설에 저장된 사용후핵연료를 확보된 중간시설로 이송할 계획이다.현재 고준위 방폐물 관리 관련 국가정책의 법제화를 위해 김성환, 김영식, 이인선 의원 등이 고준위 방폐물 관리 특별법을 발의한 상태에 있다. 발의된 법안은 향후 국회소관위원회에 병합심사 예정이다.EU 의회에서는 금융이나 자금이 기업의 환경친화 경영과 투자를 유도하기 위한 가이드라인인 녹색분류체계를 올해 7월 가결했다. 이 체계에는 원자력이 포함돼 있다.국내에서는 지난 9월 원자력이 포함된 녹색분류체계 개정(안)이 발표된 상태에 있다. 박상덕 서울대학교 박사 주제발표 - 박상덕 서울대학교 박사“원자력 로봇·추진체 인간영역 확장에 기여할 것”최근 글로벌 화두는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탄소중립이다.탄소중립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원자력의 친환경성이 부각되고 있다. 무탄소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원자력을 청정에너지로 분류했고 유럽에서는 최근 친환경 에너지에 원자력을 포함했으며 우리나라도 이에 따라 친환경으로 분류하고 있다.원자력은 청정 전기를 직접 생산해 탄소중립에 기여하기도 하지만 고온수전해 기법으로 수소를 생산해 수송 부문이나 제철, 시멘트 공장 등의 탄소 배출을 저감할 수 있다. 고온 수전해는 저온 수전해와 비교할 때 전 세계적으로 초기 진입 단계이기에 우리나라가 중간진입 전략으로 원자력 강국이 된 것처럼 노력 여하에 따라 수소 강국도 될 수 있다.원자력 산업에도 4차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정보통신 기술을 접목해 컴퓨터에 원전의 쌍둥이를 만드는 디지털 트윈 기술이 있다. 이 기술은 원전의 안전성과 신뢰성을 대폭 높여 준다. 원자력 로봇은 방사선 준위가 높은 장소에서 사람이 하는 일을 대신해 작업자의 방사선 피폭을 줄이게 한다. 우주용 원자력 로봇이나 원자력 추진체는 인간의 영역을 확장하는데 큰 기여를 할 것이다. 3D 프린팅과 같은 혁신 제조 기법과 머신 비전과 같은 혁신 건설 기법으로 원자력발전소의 건설단가 상승을 억제해 싼값에 전력이 가능해 지고, 그 결과 가난한 사람들을 건강하게 지켜주는 사랑의 에너지가 될 것이다. 이병호 한국원자력연구원 박사 주제발표 - 이병호 한국원자력연구원 박사“소형모듈식 원자로 개발, 지속가능한 산업 시대로”소형모듈식원자로 SMR은 국제적으로 전기출력 300MWe이하의 작은 원자로를 칭하는 것으로 현재 한국의 전기 생산을 위한 대형 원자력 발전소와 크게 구분돼 나뉜다.여기서 모듈의 의미는 원자로내 주요기기 부품을 의미할 수도 있고, 원자로 자체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이렇게 여러 주요부품을 원자로 내에 모듈식으로 배치하거나 원자로를 모듈식으로 여러 기 배치함으로 안전성, 유용성, 경제성 등을 제고할 수 있다.SMR은 전기생산, 공정열 이용, 수소생산, 해수 담수화 등의 다양한 목적으로 적용이 가능하며, 특히 적절한 출력변동 등을 통해 재생에너지와도 공존이 용이하다.전세계적으로 70여 개 이상의 SMR이 개발중이며, 원자력선진국은 SMR 개발 주도권 확보를 위해 국가적 지원을 하고 있다.SMR은 지속가능한 원자력 산업전환의 기회다. 국내에서도 다양한 SMR이 개발 중이다. 국내 원전 추가 건설은 한계에 도달했다. 임계규모 유지가 어려운 대형 원전 사업구조와 공기업 위주의 독점 구조의 한계가 있다. 이러한 한계는 내수에서 수출로, 대형에서 소형으로, 공공에서 민간으로의 이동으로 극복해야 할 것이다. 또 대형원전 경험의 활용과 산학연의 긴밀한 협조, 인허가 기술 개발로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이다.특히 SMR 개발을 위해서 인공지능, 자율운전, 3D 프린팅 등의 선진 기술이 원자력에 접목된다. SMR 기술 개발의 완성을 통해 원자력은 미래에도 지속가능한 원자력 산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부용기자

2022-10-25

산소카페 청송서 즐기는 ‘사과의 향연’

특정한 어느 도시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이미지들이 있다. 그 이미지가 강렬한 곳 중 하나가 청송군이다.맑고 깨끗한 공기를 마시며 가을 산행을 즐길 수 있는 주왕산과 아삭아삭한 식감과 달콤한 맛으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사과는 ‘산소카페’를 지향하는 청송군이 내세워 자랑할 수 있는 이미지들. 맛있는 사과와 청정한 자연환경이라는 청송의 호감 가는 이미지는 그곳을 다녀온 이들의 머릿속에 오래 남는다. 여기에 즐길거리와 체험 관광이 더해진다면 어떨까? 도시의 이미지는 더 좋아지고, 관광객의 발길도 지속적으로 이어질 터.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청송군은 내달 초 지역의 대표축제로 자리 잡은 ‘청송사과축제’를 열어 답답한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즐거움의 시간을 선물할 예정이다.□ 코로나19로 미뤄졌던 축제… 3년만의 만남‘산소카페 청송군’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청정한 자연을 배경으로 성장하고 있는 고장이다. 바로 이 청송군이 청송사과 수확철을 맞아 풍성하고 다채로운 축제를 마련했다.제16회 청송사과축제는 ‘황금진 청송사과, 세상을 밝히다’란 주제로 오는 11월 2일부터 6일까지 5일 동안 청송읍 월막리 현비암 앞 용전천에서 많은 이들이 기다렸던 화려한 막을 올린다.청송군은 이번 축제를 통해 ‘산소카페 청송군’,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국제슬로시티’, ‘산소카페 청송정원’ 등을 효과적으로 알림으로써 청송이 최고의 청정 관광도시임을 부각시킬 계획이다.청송군 관계자는 “이와 함께 용전천 현비암 주변 경관에 화려한 빛을 수놓을 야간 경관조성사업을 축제와 연계해 다른 지역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축제장으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밝혀 기대감을 높였다.□ “축제 형태 다양화로 청송사과 우수성 알릴 터”전 국민을 공황과 스트레스 속으로 내몰았던 ‘코로나19 사태’ 이후 3년 만에 개최되는 청송사과축제는 대면 축제의 한계를 벗어나 시공간의 제약이 없는 지속가능한 프로그램 개발로 글로벌 축제로의 도약을 기대하고 있다.지난 13일부터 포털사이트 다음(daum)을 통해 ‘청송사과축제 대표 체험프로그램 4종’이라 부를 수 있는 ‘청송퀴즈’ ‘만유인력-황금사과를 찾아라’ ‘도전-사과 선별 로또’ ‘꿀잼-사과난타’를 온라인 게임으로 개발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맞게 축제 형태를 다양화했다는 것도 이번 청송사과축제의 특징이다.이를 통해 “대한민국 ‘문화관광축제’의 면모를 갖춰나감과 동시에 한국 대표 브랜드 청송사과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자 한다”는 것이 청송군의 복안. 여기에 볼거리와 즐길거리도 더해졌다. 기존 ‘청송사과 꽂줄엮기 경연대회’를 전국대회로 확대해 진행함으로써 보는 즐거움이 있는 축제로의 다양성을 모색했다. 이는 향후 시상 훈격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으로 격상시키고, ‘청송꽂줄엮기’를 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한 초석을 마련하기 위한 조처이기도 하다.제16회 청송사과축제를 주도적으로 준비한 이들은 “주민 참여 활성화와 완성도 높은 볼거리 제공을 위해 8개 읍·면 꽃줄엮기 코칭을 시행해 대표 프로그램의 인지도를 높여갈 계획”이라고 입을 모았다. □ 누구나 참여해 즐기는 다양한 프로그램 준비올해 청송사과축제는 청송군 대표 브랜드를 이미지화 한 ‘드론 라이트쇼’를 통해 축제의 흥겨운 개막을 알리게 된다.이어 사과축제의 킬러 콘텐츠인 ‘만유인력-황금사과를 찾아라’, ‘도전-사과 선별 로또’, ‘꿀잼-사과난타와 사과 방망이 체험’, ‘사과 낚시’ 등의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준비해 전 연령대의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한다는 것이 청송군의 계획이다.관광객과 주민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과 8개 읍·면 주민과 풍물단이 함께 하는 ‘청송사과 퍼레이드’, ‘청송군민 노래자랑’ 등의 프로그램이 상승효과를 일으킨다면 축제를 통해 군민과 여행자들 모두가 하나되는 계기도 마련될 것으로 전망된다.행사장 주무대에서는 11월 2일 김희재, 박서진 등이 출연하는 문화제 축하공연이 준비돼 있다.이어 11월 3일에는 현숙, 배일호, 강진, 최진희, 한혜진, 박상철, 금잔디, 류지광, 안성훈, 우연이 등이 함께하는 ‘MBC 가요베스트’ 녹화 공연과 청송 군민상 시상식, 명예군민 위촉식이 개최된다.11월 4일 이찬원, 양지은, 조명석 등 다양한 가수들이 참석자와 함께 흥겨움을 나눌 세계유교문화축전(트로트 콘서트)도 기대를 모으고 있다.이외에도 “축제 기간 동안 시니어 한마당, 독도사랑스포츠공연단 공연, 그 외 다수의 축하공연 등 다채로운 행사가 준비돼 있다”는 것이 청송군의 부연이다.□ 청정한 ‘산소카페 청송’ 알리는 축제로…또한 사과축제와 함께 하는 어르신 노래자랑, 재능기부공연 등의 소공연장 행사와 사과 깜짝 경매, 원산지 표시 위반자 의금부 압송 시연, 2022 청송황금사과배 전국 고교장사 씨름대회 등 특별 행사도 축제 기간 내내 관광객·주민들과 함께 한다. 더불어 청송사과 전시·홍보관 운영, 황금사과 품평회, 사과요리 전시와 체험, 사과 떡 나눔과 무료 차 시음 등의 상설행사도 마련돼 있다.다채로운 축제 프로그램과 여러 행사는 청송사과축제를 찾은 관광객들에게 볼거리와 즐길거리, 차별화된 경험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된다.“3년 만에 새롭게 개최되는 이번 청송사과축제는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 청송사과의 우수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한 윤경희 청송군수는 “산소카페 청송군의 도시브랜드 이미지 제고에도 이번 축제가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 온라인에서도 펼쳐지는 흥겨운 축제앞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2022년 청송사과축제는 오프라인과 온라인으로 동시에 진행돼 즐거움과 흥미를 배가시키고 있다.청송군은 지난 13일부터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제16회 청송사과축제’의 온라인 행사를 일찌감치 오픈해 ‘오프라인 축제와 유기적으로 연계시킨다’는 계획의 구체화에 힘을 더하고 있다.제16회 청송사과축제는 코로나19 사태의 장기화로 비대면 소통의 중요성이 높아진 축제 트렌드를 반영하고자 노력했고, 기성세대와는 달리 모바일 환경에 익숙한 MZ세대를 겨냥해 축제 형태를 다양화시키고자 고민의 시간을 가졌다.그 결과 대면 축제와 온라인 축제가 결합된 하이브리드 축제로 진행되는 것이 이번 청송사과축제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다.온라인 축제 프로그램은 청송사과축제 홍보와 더불어 킬러 콘텐츠라 불러도 좋을 청송 퀴즈, 만유인력-황금사과를 찾아라, 꿀잼-사과난타, 도전-사과선별로또를 온라인 게임으로 개발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남녀노소 모두가 참여하고 즐길 수 있도록 구성한 것이 장점.청송군은 참여 접근성이 좋은 포털사이트를 활용한 온라인 축제를 통해 사과축제 대면 프로그램을 간접적으로 체험함으로써 축제에 대한 적극적 관심과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이는 현장 관람객 유치를 확대하고, 향후 코로나19 사태와 같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해 청송사과축제 개최의 지속성과 안정성을 보여주는 효과를 얻고 있다. 더불어 “축제의 글로벌화를 위한 새로운 시도가 될 것”이라는 게 온·오프라인 축제를 준비한 청송군의 기대다.올해 청송사과축제는 오랜 시간 이어진 코로나19의 피로감에서 벗어나 지친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즐거운 행사와 흥미로운 공연을 즐기며 마음 속 응어리를 풀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11월 초순엔 다채로운 볼거리와 먹을거리, 즐길거리가 준비된 사과축제의 현장 청송군으로 가을 여행을 떠나보는 게 어떨까?/김종철·홍성식 기자

2022-10-24

형산과 제산 사이로 새떼가 날아갈 무렵 가장 아름다운 산

“어머니 같은 강”이라는 말이 있다. 한 지역에 강이 흐르면 대개 이런 표현을 붙인다. 포항에는 형산강이라는 큰 강이 흐른다. 형산강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어머니 같은 강”이라는 표현이 무심결에 떠오른다. 망망한 동해가 아버지 같은 인상이라면 유장하게 흐르는 형산강은 어머니 같은 느낌이다.포항과 경주가 만나는 곳에 형산과 제산이 있고, 그 사이로 흐르는 강이 형산강이다. 형산강은 울산 울주군 두서면에서 발원해 경주의 대천, 남천, 건천 등을 지나 안강의 동쪽 경계를 흐르다가 북동 방향으로 크게 꺾어 포항을 관류해 영일만으로 흐른다. 울산과 경주, 포항 일대의 여러 산에서 발원한 지류들과 합류하여 영일만으로 흐르는 강이 형산강이다. 강의 길이는 63.3㎞로 국내에서 열 번째로 길며, 동해로 흐르는 강 중에 가장 크고 유역에 형성된 충적평야도 가장 넓다. 전설과 설화가 흐르는 강형산강 옆으로 안강평야가 펼쳐져 있고, 여기에는 그럴듯한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 내려온다. 신라 때 남천, 북천, 기계천의 물이 안강 일대에 모여 호수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 호수가 자주 범람해 주변의 피해가 여간 심각한 게 아니었다. 이 고충을 해결하려고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의 아들인 태자 김충이 용이 되어서는 꼬리로 형제산을 내리쳐 형산과 제산으로 갈라지게 되었고, 그 사이로 안강 호수의 물이 강을 이뤄 영일만으로 흘러 들어가 형산강이 됐다는 것이다. 이 전설은 천여 년 전의 신라 때에도 치수가 얼마나 중요한 국정 과제였는지를 실감케 한다.물이 있어야 사람이 살 수 있으니 강은 문화와 문명의 모태이자 서사의 보고(寶庫)가 된다. 그리하여 강은 사람들의 다사다난한 이야기를 품으며 예술과 사상을 아우르기 마련이다. 신라 천 년의 역사는 물론이고 경주 유교 문화의 본거지인 양동 마을의 형성, 동학의 태동, 포항의 성장도 형산강을 떠나서는 말할 수 없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선사시대에도 형산강 주변에 광범위한 문화권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암각화 유적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95년 2월 경주 내남면 상신리 마을 앞 큰 돌에서 암각화가 처음 발견되었고, 그해 3월에는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앞 금장대에서도 암각화가 확인되었다. 신라의 건국 설화에도 형산강이 등장한다.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가 알에서 갓 태어났을 때 목욕을 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었다고 전하는 곳이 형산강의 지류인 알천이다.동방의 적벽, 그리고 물새들의 낙원포항의 진경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사진으로 형산의 정상에서 형산강과 제철소, 영일만 그리고 호미곶을 담아낸 장면을 빠트릴 수 없다. 포항의 맥이 흐르는 이 장면을 렌즈에 담기 위해 사진작가들이 애써 형산에 오른다.붉은 저녁노을이 번지는 형산과 제산 사이로 새떼가 날아갈 무렵, 햇살을 받아 윤슬이 반짝이는 강물 위로 물새들이 한가롭게 쉬고 있을 무렵의 형산강 하류는 참 아름답다. 500여 년 전 본관이 영일(迎日)이고 흥해 출신인 쌍봉(雙峯) 정극후(鄭克後·1577∼1658)는 초가을 달밤 형산강에서 경주 부윤인 죽계(竹溪) 김존경(金存敬·1569~1631)과 배를 타고 가다 시상(詩想)에 잠겼다.임술년 초가을 열엿샛날에공(김존경)께서 형산강에 나들이 오셨네형산강 드넓어 물결이 바다와 맞닿고깊은 밤하늘은 맑아 달빛 배에 환하네한줄기 구름 멀리 포구까지 뻗었고몇 줄기 긴 피리 소리 아름다운 물가에 가득하네동방의 적벽이 바로 여기니소동파의 이름만 홀로 남을 필요 없으리- 정극후 ‘형산강에 배를 띄우고 상공 김존경 좌하께 올리다(兄江泛舟奉呈金相公座下)’, 신상구 역정극후는 소동파의 ‘적벽부’를 떠올리며 형산강의 아름다움에 빠져들었다. 그 후로 기나긴 세월이 흘러 세상은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변했지만, 달빛이 환히 비치고 한줄기 구름이 멀리 포구까지 뻗어 있는 형산강은 변함이 없다.형산강은 물새가 날아오는 곳이어서 더 아름답고 생동감이 넘친다. 아득한 옛적에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물새가 날아왔을지 모른다. 지금도 형산강에 물새들이 날아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전국에서 사진작가들이 몰려든다. 간혹 멸종 위기에 처한 물수리나 흰꼬리수리가 날개를 활짝 펼치고 날아가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힌다. 형산강에 날아오는 물새들의 이름은 일일이 거론하기도 벅차다. 댕기물떼새를 비롯해 흰뺨오리, 흰비오리, 홍머리오리, 쇠오리, 청둥오리 등등이 있다. 백로와 왜가리 같은 텃새들도 형산강에서 자주 볼 수 있다. 황어, 숭어, 은어 같은 물고기들이 형산강에 서식하고 있으며, 1970년대까지 섬진강 재첩과는 비교도 안 되게 큰 재첩이 하류에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조선의 대표적인 시장 그리고 사상의 무대형산강 하류에는 조선의 대표적인 시장인 부조장(扶助場)이 있었다. 부조장은 1750년대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조선의 3대 시장인 강계장, 원산장, 마산장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큰 장터였다. 도로, 철도 같은 근대의 교통 인프라가 등장하기 전에는 수량이 풍부한 강이 중요한 교통로였고, 특히 형산강 하류는 영일만과 만나는 곳이라 큰 장터가 들어서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상인과 상선, 조랑말로 붐비던 부조장은 사라졌지만 과거의 번성을 입증해주는 유적은 남아 있다. ‘현감 조동훈 복시 선정비(縣監趙東勳復市善政碑)’와 ‘현감 남순원 선정비(縣監南順元善政碑)’가 그것이다. 강물은 유유히 흐르건만 세상은 과거의 흔적을 지우며 계속 변한다. 북새통을 이루던 부조장은 아련한 물그림자로만 남아 있다.시인 신동엽은 ‘금강’을 노래하며 “예부터 이곳에 모여/썩는 곳,/망하고, 대신/정신을 남기는 곳”이라고 했다. 그렇다. 강은 “정신을 남기는 곳”이자 새로운 사상이 움트는 곳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형산강을 무대로 신라의 불교와 양동 마을의 유교 그리고 동학이 꽃을 피웠다. 신라 천 년의 문화 가운데 우리 사상의 첫새벽이라 할 수 있는 원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효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간의 처절한 전쟁이 신라의 통일로 귀결된 7세기에 일심(一心)과 화쟁(和諍), 무애(無涯)를 설파했다. 그는 삼국 간의 처참한 전쟁을 지켜보면서 본디 서로가 하나임을 깨우치고 넉넉한 마음으로 화해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해 일심을 내세웠고, 그것의 구체적인 실현 방식이 화쟁과 무애인 것이다. 원효의 사상은 당대 현실에 대한 깊은 고뇌에서 길어 올린 것이며, 지금 우리가 되새겨야 할 화두이기도 하다.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 두 가문이 500여 년 동안 공존한 양동 마을은 회재 이언적의 사상이 무르익은 곳이다. 퇴계 이황의 스승이었던 회재는 조선 성리학의 기본 성격과 방향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여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과 함께 동방오현에 이름을 올렸다. 회재는 사화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던 시기에 온건한 해결책을 추구했지만 결국 사화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동학의 배경이 된 형산강형산강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녹두빛 강물은 동학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은 그의 살림터인 포항 신광에서 수운 최제우가 머물던 경주 용담까지 걸어 다니며 동학을 배우고 익혔다. 형산강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을 걸으며 동학의 뜻을 깊이 새긴 것이다. 1864년 1월 수운이 관군에 체포되는 순간에도 형산강에서 찬 바람이 몰아쳤다.“수운은 경주 형산강변의 어떤 나무 밑에 얽매어 놓아두었는데 얼굴에는 전면이 피가 되어서 그 모양을 알 수 없으며…. 체포된 신사(수운 선생)는 사다리의 한복판에 얽어매어 두 다리는 사다리 양편 대목에 갈라서 나누어 얽고, 두 팔은 뒷짐을 지웠고, 상투는 뒤로 풀어 사다리 간목(間木)에 칭칭 감고 얼굴은 하늘을 향하게 했다고 하였다. (중략) 수운은 제대로 입지도 못한 채 뼈를 에는 형산강의 찬 바람을 맞으며 묶여 있었다. 12월 10일(양 1864년 1월 18일)은 소한(小寒)의 절기여서 몹시 추웠다.”- 표영삼 ‘동학1-수운의 삶과 생각’, 통나무, 2004, 300쪽.“사람이 하늘이다”라는 동학의 가르침은 형산강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그 바람을 견디며 잉태했다. 그 가르침은 조선 후기 고난에 처한 수많은 사람의 가슴에 닿아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불빛이 되었고, 지금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해 저무는 형산강 강가에 서서 붉은 노을이 번지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새로운 사상은 찬 바람 속을 걸어가며 그 바람의 뜻을 새기는 고독한 자의 가슴에 움트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

2022-10-24

‘석조미술의 꽃’ 석가탑과 다보탑… 신라인들 시대정신 표현

◇비례와 비대칭의 조화 석가탑과 다보탑신라시대의 석탑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이다. 이미 지난 연재에서 자세히 다룬 바 있지만 이번 회에서는 신라 석탑사에서 가진 의미에 한정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신용철 양산박물관장은 “대웅전 앞에 동서로 자리 잡은 석가탑과 다보탑의 아름다움은 완벽한 비례와 서로 다른 비대칭을 통한 조화의 미에 있다”고 했다. 석가탑은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놓고 그 위에 탑을 세웠는데, 이는 바위산으로 이루어진 인도의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탑 주변에는 장대석을 두르고 8개의 연꽃을 조각해 주위에 놓았다. 이곳은 석가의 설법을 듣기 위해 모여드는 대중들이 앉는 자리다. 3층으로 우뚝 솟은 외관에서는 당당함이 느껴진다. 반면 다보탑은 갖가지 보석이 장식돼 있고 수천의 난간과 감실이 있다. 난간과 감실, 연꽃, 꽃술 등을 절묘한 형태로 고안해냈다. 다보탑은 땅에서 솟아난 탑이기에 위부터 살펴보면 원→팔각→사각이라는 구성으로 진행된다. 세부 조각이 정교해 화강암을 다듬어서 만들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다.이렇게 서로 다른 비대칭의 쌍탑은 지대석의 너비와 기단과 탑신의 높이가 일치한다. 석가탑은 직선적이고 단순하며, 다보탑은 곡선적이고 복잡한 구조로 비대칭을 보이지만 양 탑이 모두 동일한 높이와 체감의 대칭을 지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아름다움을 통해 진리를 표현하려 했던 신라인들의 시대정신이 이 쌍탑을 통해 잘 나타나고 있다.신 관장은 석가탑과 다보탑이 법화경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동아시아로 전래 된 대승불교에서 가장 널리 읽혔던 경전은 ‘법화경(法華經)’이다. ‘법화경’에서는 다른 경전보다 많은 부분에 걸쳐 불탑 공양과 그 공덕에 대해 말하고 있다. ‘법화경’에서 불국토는 석가여래와 다보여래의 만남으로 완성된다. 즉 석가여래가 진리의 법인 ‘법화경’을 설법할 때 다보여래가 그것이 진리임을 증명하기 위해 땅속에서 보탑의 모습으로 솟아난다.석가탑과 다보탑은 이처럼 ‘법화경’을 통해 가장 극적인 장면을 담은 ‘견보탑품(見寶塔品)’에 의거 해 만들어졌다. ‘법화경’, ‘견보탑품’의 극적인 내용은 일찍이 중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아 많은 석굴 내 조각과 벽화로 조성됐다. 석가여래와 다보여래의 만남을 현실 공간에 탑으로 재현했을 뿐 아니라 경전에서 말하는 탑의 형태를 독창적 예술로 승화한 것이 석가탑과 다보탑이다.두 탑은 기하학적인 비례를 보인다. 완전한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서다. 불국사가 43당척을 기준으로 정연한 질서를 보여주고 있는데, 석가탑과 다보탑도 마찬가지로 43당척의 1/3이 양 탑의 지복석의 길이와 비슷하며 이를 기준을 설계했다.미술사학자들은 석가탑의 경우 7세기 감은사지탑 등에서 보이는 초기 전형 양식의 장중함에서 씩씩함만을 거두어 수려함을 덧입혔다고 평가한다. 석가탑은 8세기 석탑의 전형 양식이다. 이는 이후 우리 석탑의 보편 양식으로 계승되면서 우리의 미감을 대표하는 문화재의 하나가 되었다.다보탑은 난간과 기둥, 지붕으로 구성된 누각식 건축으로 이국적이며 공예적이다. 탑은 기단부터 차례로 사각, 팔각, 원형의 기하학적 평면이 균형 있게 중첩됐다. 각 층은 다양한 모습의 난간, 기둥 등의 부재가 벽체로 막힘없이 결구 돼 내·외 공간이 겹쳐진다. 무엇보다 다보탑은 다양한 기교를 발휘할 수 있는 목조 건축의 양식을 잇고 있다. 돌을 떡 주무르듯 해서 만든 최고의 작품으로 당시 석탑 예술의 최절정이라 평가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팔각면석의 독특한 석불사 석탑석불사에 있는 삼층석탑은 해발 565m, 석불사 석굴에서 동북쪽으로 약 150m 떨어진 언덕 위에 있다. 석불사 삼층석탑이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스님들이 수도하는 공간에 있기 때문이다. 사전 통보 없이 방문하는 경우 출입할 수 없다.석불사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만든 석탑으로, 높이가 3.03m이다. 일제강점기에 무너질 위험이 있어 해체·복원한 바 있고, 1963년 기단부가 파묻혀 일부 복원했다. 기단은 2중이며 면석이 팔각으로 된 점이 다른 탑에서는 찾을 수 없는 특이한 모습이다. 대부분 신라시대 석탑 받침돌은 정사각형이다. 그러나 석굴암 삼층석탑 받침돌은 두 겹, 즉 이층이며 둥글다. 나머지 3층으로 된 몸돌과 지붕돌은 4각의 일반 석탑들의 모습과 거의 동일하다. 기단 위 탑신은 일반형 탑과 같은 방형으로 탑신과 옥개가 각각 1매로 돼 있다. 기단의 높이가 1.2m로 탑 전체 높이의 약 5분의 2를 차지하고 있다. 원과 팔각, 사각으로 이루어진 평면의 균형과 탑신부가 경쾌한 느낌을 준다. 삼층석탑은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 제911호로 지정됐다.마동삼층석탑은 불국사 서북쪽 언덕의 밭 가운데 서 있는 탑이다. 경주 마동에 있어서 통일신라시대 중기의 마동삼층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대략 8세기 후반으로 추측된다. 석탑은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탑의 꼭대기 층에는 네모난 지붕 모양의 장식이 있다. 바리때를 엎어놓은 모습의 복발(覆鉢)을 제외한 부분은 없어졌다. 탑의 총 높이는 5.4m다. 기단은 2겹으로 쌓되 아래 기단의 돌 위에 포개어 얹은 납작한 돌(갑돌)과 가운데 돌은 각각 8매의 돌을 짜 맞추어 만들었다. 처마와 처마가 맞닿은 전각(轉角) 모서리와 아랫면에는 풍경을 달아매기 위해서 뚫은 구멍이 각각 7개씩 1조(組)를 이루며 배치돼 있다.석탑이 있는 곳은‘삼국유사’권5, 대성효이세부모(大成孝二世父母)조에 기록된 장수사(長壽寺)의 옛터라고 전한다. 석굴암을 조성한 김대성은 무술을 닦을 때 사냥을 좋아했다. 하루는 토함산에 올라가 큰 곰을 잡았다. 날이 저물어 현재의 석탑이 있는 부근 민가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날 잠을 자는데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해 말하기를 “네가 나를 죽였으니 나도 너를 잡아먹을 것이다”라고 했다. 대성이 겁에 질려 용서해달라고 빌었더니 귀신은 “네가 나를 위해 절을 지어주겠는가?”라고 물었다. 대성은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했다. 그 후, 김대성은 일체 사냥을 금하고 곰을 위해 이곳에 절을 짓고 몽성사(夢成寺)라고 했다가 뒤에 장수사라고 개명했다.마동삼층석탑은 한국 석탑의 전형 양식을 충실히 따르면서, 아무런 장식이나 조각이 없는 소박하고 단정한 모습의 석탑으로 평가받고 있다. ◇8부중신 조각 이채로운 숭복사지 석탑경주시 외동면 토함산(吐含山) 기슭에 있었던 숭복사는 삼국시대 신라의 파진찬을 지낸 김원량이 창건한 사찰이다. 숭복사는 원래 ‘곡사(鵠寺)’라 했다. 원성왕이 죽자 이곳에 능을 만들고 지금의 자리로 절을 옮겼다.숭복사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와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비문에 남아 있다. 헌강왕 때 이 절의 이름을 대숭복사로 했다고 한다. 그 뒤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지만, 절터에서 발견된 기와편으로 미루어 볼 때 조선시대까지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근래까지 절터가 어디인지 알지 못하다가 1931년, 세상에 알려졌다. 1931∼1935년 사이에 발견된 비편(碑片)을 통해 이곳이 숭복사지임을 알게 됐다. 이 숭복사 비편은 그 뒤로도 절터와 골동품점 등에서 잇달아 발견돼 현재까지 13편이 남아 있다. 총 100자에 달하는 글씨가 판독됐다.숭복사지에는 동서로 탑 2기가 있다. 숭복사지 삼층석탑은 1985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기단부에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이 양각돼 있고, 1층 옥신의 4면에는 문비(門扉)가 조각돼 있다. 각 옥개석(屋蓋石)의 받침이 4단으로 된 삼층석탑이다. 동탑은 서탑과 같은 크기와 양식으로 보이나 현재는 일부 파괴된 기단부와 1층 옥신, 2개의 옥개석만 남아 있다.서로 같은 규모와 양식을 하고 있어 아래·위층 기단에 기둥 모양을 새기고, 특히 위층 기단에는 기둥 조각 사이의 면마다 8부중신(八部衆神·불가에서 불법을 수호하고 대중을 교화한다는 여덟 무리의 수호신)의 모습을 조각했다. 탑신의 몸돌에도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1층 몸돌 네 면에는 문(門)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 받침을 두었다.현재 두 탑은 일부 석재가 파괴되거나 없어진 채 남아 있다. 동탑은 기단 일부가 파괴되고, 탑신의 2층 몸돌과 머리장식이 없어졌다. 서탑도 기단 일부가 파괴되고, 탑신의 2·3층 몸돌과 3층 지붕돌, 머리장식이 없어졌다. 전체적으로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줄어든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토함산의 석탑들은 불교사원과 동시에 건립됐음을 알 수 있다. 토함산이 신라의 동악으로 숭상받아 오면서 왜구를 물리치는 진산 역할을 했던 만큼 사찰은 물론 석탑도 호국 성향이 짙었다. 또한 토함산의 석탑은 기존 석탑 양식을 기반으로 새로운 양식을 창출한 석탑의 발원지이기도 했다./최병일 작가

2022-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