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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가정이 건강해야 사회가 건강해진다”

교육은 다양한 아이들을 각기 수준에 맞게 길러내는 개별화된 과정이어야 한다. 결코 일률적이고 획일적 방법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교육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하는 것이다. ‘교육자와 학습자가 서로 도와가며 함께 성장해야 한다’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이다. 그렇다면 지금 교실의 붕괴는 현장을 제대로 장악하고 수습하지 못하는 교사에게서도 상당 부분 책임이 있다.70여 년을 여성교육에 집중해 온 조양교육재단의 이욱 이사장(대구사립중고교연합회 회장)은 “가정이 건강해야 사회가 건강해진다”며 “현모양처는 오늘날에 더 절실히 요구되는 가정의 근본이며 우리 사회의 근간”이라 강조한다. 독립운동가 후손이면서 3대를 이어오고 있는 교육자 집안에 대한 무한한 자긍심을 갖고 있는 그다. -대구 경북지역 항일 독립운동의 산실이기도 한 조양회관이 건립 100주년을 맞았다. 조양회관 건립자의 후손으로서, 또 조양회관 이사장으로서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일제강점기 암울한 시기에 떠오르는 우리 민족의 희망의 상징으로 설립된 조양회관이 우리지역 독립운동사에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번 조양회관 건립 100주년을 기하여 선열의 희생과 헌신으로 이루어 낸 자주독립의 소중한 가치를 잊지 않고 기리고 경배하는 후손이 되기를 다시 한 번 다짐한다.-원화여중고의 학교재단 이름도 조양회관이다. 어떤 의미인가.△원화여중, 원화여고는 조양회관에서 설립되었고 ‘조선의 빛이 되어라’는 의미를 간직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청소년 교육이라는 책무를 성실히 수행해 왔다고 자부한다. 조양회관이 원화이고 원화가 곧 조양회관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100년 원화를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겠다.-동암 서상일 선생의 정신이 원화여중고 교육에도 지켜지고 있다면 어떤 것이 있나. 원화의 건학이념은 무엇인가.△우리 학교의 건학이념은 ‘나라사랑 겨레 사랑’이다. 학교 교육 전반을 통해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의 소중함을 늘 가르치고 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잘 이해하고 과거의 역사적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역사교육과 국제이해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유네스코가 강조하는 평화교육도 우리 학교의 중요 교육과정 중 하나다.-왜 여학교를 설립했나. 배경이 궁금하다.△당시 대구지역에 남학교는 여럿 있었지만 여학교는 경북여고와 신명여고 정도였다. 동암 선생은 여성과 소외계층에 대한 교육 열정이 상당하셨던 것 같다. 해방과 더불어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던 동암 선생과 창주 이응창 선생은 원화여중과 여고를 잇달아 설립했다. 원화에 야간부를 뒀고 여군반과 여승반도 있었다. 창주 할아버지 장례 때 운구차가 2군사령부 앞을 지나자 여군들이 도열해서 경례로 전별하기도 했을 정도다.-학교를 대신동에서 현 성당동으로 이전하면서 조양회관의 운명도 바뀌었다.△평준화 이후 급격히 늘어나는 중등교육 수요를 수용하고 보다 현대화되고 쾌적한 학습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학교를 이전하게 됐다. 대신동의 1천177평이었던 학교부지는 9천737평으로 10배 가까이 넓어졌다. 이 과정에서 재단은 대신동 교사와 함께 가창의 원화동산 2만평과 대명동 사택, 수익용 주식까지 모두 매각해야 했다. 학교는 1981년 현재 교사로 이전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대구 사학의 대표학교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학교 교무실과 강당 등으로 이용하던 조양회관을 함께 이전하지 못하고 현재의 망우공원으로 이전 복원하게 됐다.-할아버지 창주 선생과 동암 선생은 어떤 관계인가.△두 사람은 장인과 사위 관계이지만 부자(父子) 같은 관계였다고 생각한다. 동암 선생에게는 4명의 따님이 계셨는데 저의 할머니(서옥주)가 동암 선생의 맏따님이었다. 동암 선생과 증조부이신 우재 이시영 선생은 절친이셨는데 한 분은 외국에서 항일독립투쟁을, 한 분은 국내에서 경제활동과 국민계몽운동을 하신 것이다. 동암은 만주에서 무력항일투쟁을 하는 친구를 위해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고 또한 홀로 남은 친구 모자를 가족처럼 보살펴 주셨다. 그리고 경성사범을 마친 친구의 아들(이응창)을 대구사범을 졸업하신 할머니의 배우자로 선택하시고 사위로서, 그리고 교육동지로서 함께 하셨다. 당시 서문시장 인근에서 곡물과 숯을 파는 태궁상회를 운영한 동암 선생은 달성공원 인근에 100여호를 소유할 정도로 부를 이루셨지만 딸 넷에게 모두 고등교육을 시켰을 뿐 집 한 칸 마련해 주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래서 경주 산내에서 초임교사를 시작한 할아버지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대구 서부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한 할머니와 부부교사 생활을 했던 것이다.13살에 아버지(우재 이시영)를 잃고 외동으로 자란 창주 선생은 5남1녀를 모두 훌륭하게 대학교육까지 시킨 헌신적인 부모였다. 동암 선생은 해방 후 서울에서 나라 정치를 하시느라 따님들과는 다소 소원한 관계를 유지하신 듯하다.-동암 선생은 몇 차례 옥살이를 하는 등 가산을 털어 넣고 육체적 고통을 당해가면서 민족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다. 그 활동에 대한 국가의 보상은 적절했다고 생각하나.△동암 선생은 일찍이 미곡상을 하시면서 대구지역의 손꼽히는 경제인으로 성장하셨다. 1921년 대구지역 지도자들은 대구구락부 기성회를 조직하고 대신동 1번지 자신의 땅 500평에 조양회관을 짓기로 했다. 구체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독립자금을 마련하여 우재 선생을 통하여 해외 항일무장 투쟁도 지원했다. 나라를 잃고 백성이 고통을 받을 때 자신보다는 나라와 겨레를 위해 가산을 기꺼이 내놓으신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민주화운동을 빌미로 희생자의 후대에까지 지나치게 보상책을 마련하고자 하는 정치인들의 행태는 되돌아보아야 한다. 나라와 겨레를 위한 국가의 보상은 상징적 의미일 뿐 적절성 논란은 선열의 희생을 가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지금 교육 현장에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또 교육자로서 어떤 대책이 있나.△무엇보다 급격한 학생 수의 감소가 문제다. 국가적 어려움이기도 한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인구 감소가 예상되지만 대책이 없다는 거다. 일본이 반성하고 있는 여유교육(餘裕敎育)의 부정적 효과가 우리 학교 현장에도 나타나고 있고, 코로나 팬데믹 이후 하위계층 학생군에서 심각한 학업성취 부진이 나타나고 있다. 그 원인을 정확하게 분석 규명하는 것이 선결과제이고 대증요법보다는 개별화된 전문적 지원과 지도가 필요하다.-사학의 자율성을 달라고 하는데 동의하나. 사학에 대한 가장 큰 규제는 무엇인가.△우리 사학은 근대교육이 시작된 해방 이후 국가가 담당하지 못했던 절대 다수의 학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여 교육입국을 통한 국가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1969년 중학교 무시험제도, 1974년 고등학교 평준화를 통해 국민 다수에게 중등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려는 국가 시책에 적극 호응하여 ‘사립학교에 대한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제안을 수용했다. 그러나 사학에 대한 국가의 지원은 약속에 못 미치고 있다.-사학의 비리가 언론에 자주 오르곤 한다.△사학은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자산이다. 나는 사학을 건강한 우리 사회를 위해 끊임없이 퍼주는 나무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극히 일부 사학의 비리를 일반화하여 사회악처럼 영화로 희화화하거나 척결 대상으로 내모는 작금의 편견이 너무 안타깝다. 지난 100년간 묵묵히 국가와 겨레를 위해 헌신하신 사학 원로와 선배들의 노고와 헌신이 제대로 평가받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독수리가 하늘 높이 멀리 날기 위해서는 힘찬 양날개가 필요한 것처럼 국공립학교와 사립학교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한 쪽이 없이는 제 기능을 다할 수 없는 영원한 한 팀이라는 점을 간과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사학에 대한 지원은 사립재단에 대한 지원이 아니라 국가가 사립학교에 위탁한 정당한 납세자 자녀에 대한 당연한 지원임을 명심했으면 좋겠다. 사립학교는 위탁교육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학교법인의 건학이념을 충실하고 성실하게 구현해 나가고 싶다.-지금 학생 인권에 비해 교권을 이야기한다. 시대의 변화, 중고교 교육 현장의 변화와 대응하는 모습에서 가장 뚜렷이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오늘의 교사들은 최고 엘리트들이지만, 무한한 가능성과 엄청나게 다양한 욕구를 표출하는 학생들 사이의 괴리를 모두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성실과 모범의 표상인 교사집단과 개성과 다양성, 자유분방함을 추구하는 학생들 간에는 ‘우리’라는 교집합의 공감이 일어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진짜 문제는 품행방정하고 모범적인 학생보다는 저마다의 개성을 추구하는 더 많은 학생들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다양한 경험과 지혜를 지닌 교사를 선발하여 진정한 배움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교실붕괴를 막기 위한 방안은 어떤 것이 있나.△임용고사 성적만으로 교사를 임용하는 현재의 제도는 개선돼야 한다. 교사의 인지적 유능함 뿐만 아니라 정서적 도덕적으로도 존경받을 수 있는 여러 분야의 전문 지식과 소양을 갖춘 교사들을 선발할 수 있도록 채용의 다양성을 확보해야 한다. 다양성은 공동체를 건강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원화여고의 사례를 들어보고 싶다.△우리 학교는 지난 30년 동안 교사 임용에 앞서 인턴제를 실시해 왔다. 기간제 교사로 1, 2년 근무하면서 동료 교사와 학생, 학부형으로부터 인정받은 후 검증된 교사들을 채용해 왔다. 사립학교 특성상 한 번 임용하면 30년가량 같이 근무해야 하는데 우선 동료들과의 협업 능력과 상호 신뢰가 선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코로나19 팬데믹이 교육계에 끼친 영향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비대면 원격 수업이 일반화되면서 교사 사회가 디지털 세대와 아날로그 세대로 더욱 분명히 구분됐다. 학습과 학생 지도에서 현장과 경력을 앞세우던 교사들이 우세하던 교직사회가 디지털 이론으로 무장한 젊은 세대들의 우위로 역전된 것 같다. 그래서 명퇴 신청도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여학교의 장점이 있나. 원화만의 교육 목표는 무엇인가.△남녀평등의 시대라고 하지만 여성의 역할은 분명 있다. 가사나 육아를 물리적으로 분리할 수는 있지만 야구에서 포수가 리드하듯 가정을 지키는 것은 아내이자 엄마라고 생각한다. 건강한 사회는 여성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 지식뿐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배워야 한다. 그래서 현명한 아내와 어진 어머니로 대표되는 현모양처(賢母良妻)는 지금도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에게 “자녀는 엄마의 사랑으로 키운다”고 가르치고 “아무리 힘들어도 집에 남편 책상 하나는 꼭 놓아두라”고 ‘엄부자모’의 모습을 강조한다. ‘자유의 원화’를 모토로 원화의 딸들은 누구든지 자신의 자리에서 우리 사회의 건전한 주역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욱 대구사립중고교연합회 회장. □ 이욱(李旭·63)대구 출신. 학교법인 조양학원 이사장. 대구사립중고교연합회 회장.청구고. 경북대 지리학과 졸, 미국 콜로라도 주립대 교육행정학 석사, UC버클리대 교육행정학 박사.원화여고 교장, 영남대학교, 계명대학교 사범대학 겸임교수.전(前) 대구사립중고등학교 교장회 회장.미국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고 31살에 귀국해서 교장과 이사장으로 3대째 학교를 경영하고 있다. 설립자의 정신을 지키려 노력하지만 혜택은 없고 불이익은 많아 ‘억울한 것을 생각하면 끝도 없다’면서도 외부로부터 긍정적 평가를 받는 자긍심 하나로 버틴다.1971년 조부 이응창 초대교장이 경북도문화상을, 1992년 부친 이용 선생이 대구시교육상을 받은 데 이어 이욱 이사장도 2019년 대구교육상을 받았다./이경우 편집위원

2022-10-24

영주 풍기인삼 세계를 품고 미래를 열다

2022영주세계풍기인삼엑스포가 반환점을 돌아 종점을 향해 달리고 있다.엑스포는 한 국가, 또는 특정 지역의 문화나 산업 형태를 소개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엑스포는 일정한 기간과 장소를 통해 경제·산업·과학·학술·예술·문화·농업 등에 대한 상호 비교 분석 및 정보 교환, 산업의 발전을 키워나가는 형태를 갖추고 있다영주시가 지난달 30일부터 이달 23일까지 개최 중인 2022영주세계풍기인삼축제는 인삼을 주제로 한 6차 산업과 인삼산업의 다변화를 위해 개최한 행사다.이번 엑스포는 고려인삼의 홍보와 한국 최초 재배삼의 시배지인 풍기의 역사성 재조명, 우수한 풍기인삼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인삼산업 변화의 추구, 6차 산업의 새 지평을 여는 계기가 되고 있다. □ 2022영주세계풍기인삼엑스포풍기인삼축제는 24년을 이어온 지역의 향토 축제인 반면, 고려인삼의 시배지이자 세계 최대의 인삼시장을 자랑하는 풍기에서 개최하는 이번 엑스포는, 엑스포라는 말 그대로 국제적인 규모와 체제를 갖추어 개최되는 산업형 박람회다.인삼을 통한 인류의 건강과 생명에 대한 이해와 비전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코로나19 팬데믹이 세계적으로 장기화 되면서 국내는 물론 해외 수출과 관련해 인삼시장도 크게 위축받고 있다.이번 인삼엑스포를 통해 우리 인삼의 우수성과 가치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고 수출과 내수 시장 확대로 지역경제 활성화와 인삼 산업이 재도약하는 계기의 발판을 삼게 된다.이런 목적을 기반으로 2022영주세계풍기인삼엑스포는 9월30일부터 10월23일까지 경북 영주시 풍기인삼문화팝업공원 일원에서 개최 중이다. 이번 엑스포는 전시, 교역, 이벤트, 체험, 교육, 여가, 관광 등 다양한 분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00만 관람객을 목표로 하는 이번 엑스포는 폐막 5일을 앞두고 70만을 돌파해 폐막식이 있는 이번 주말 인파를 예상하면 당초 100만 목표를 달성할 것으로 보인다.세계시장 진출을 위해 40여개 기업체들이 인삼교역관을 통해 세계제일 풍기인삼에 대한 홍보와 세계시장 판로 확대를 위해 적극 나서고 있다.특히 인삼산업이 6차 산업으로 발전 할 수 있는 계기 마련을 위해 참가 기업 및 수출입 관련 바이어들의 상담이 이어지고 있어 인삼 산업의 새 지평을 열고 있다는 평이다. □ 볼거리, 체험거리, 이모저모2022영주세계풍기인삼엑스포는 인삼산업의 미래상, 생활과 접목성, 인삼의 효능과 특성, 세계시장을 겨냥한 판로 확대, 인삼의 역사, 인삼과 어우러진 한국 전통문화의 연계성과 학술대회, 체험과 볼거리가 있는 공연 이벤트가 어우러진 행사로 추진 중이다. 엑스포장 내 주제관은 인삼을 배우는 역사 이야기, 인삼의 최초 시배지 풍기의 역사적 사실과 배경, 한국 인삼의 발전상을 한눈에 볼수 있다.생활과학관은 우리 생활 속에 녹아 있는 인삼의 이야기와 현대 과학으로 증명된 인삼의 가치, 한의학적으로 바라보는 인삼과 인체에 미치는 영향 등을 엿보는 공간이다.인삼홍보관 국내 16개 인삼 도시와 인삼산업의 과거, 미래 비젼을 제시하고 약 50여개 기업이 인삼, 홍삼, 가공제품 전시 판매와 세계시장 진출을 위한 수출 협약을 맺는 공간으로 관광객들의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한국전통예술의 음악과 무용을 통해 풍기인삼의 우수성과 비상하는 미래를 알릴 수 있는 스토리로 진행 되는 주제공연과 흥겨운 길놀이와 상황극, 캐릭터 퍼포먼스가 함께하는 신명나는 놀이마당 형식을 통해 관람객과 소통하는 엑스포 퍼레이드, 전국 K-POP 커버댄스 경연대회, 전국 슈퍼밴드 경연대회, 전국 청소년트롯가요제 등 전국 경연 프로그램이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2022영주세계풍기인삼엑스포 경과2022영주세계풍기인삼엑스포는 2017년 엑스포 유치 선포식을 시점으로 올해까지 6년간 준비과정을 거쳤다.엑스포 예산은 총 317억으로 88만3천㎡ 규모의 주행사장 및 부대 행사장이 꾸며졌다.영주시와 (재)영주세계풍기인삼엑스포조직위측은 엑스포를 통해 생산 및 부가가치 유발 3천479억원, 취업유발 2천798명의 파급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2016년 고려인삼 시군협의회 출범과 함께 공동 발전 방안이 도출 되면서 엑스포의 밑그림이 그려졌다. 영주시는 2017년 주민 여론조사 및 부지선정 용역과 2018년 엑스포 기본구상 및 타당성 연구 용역을 완료했다. 2018년 농식품부 방문 엑스포 유치 관련 업무 협의를 시작으로 경북도 지방재정영향평가, 2019년 행안부 중앙투자심사 승인, 국토부 지역수요 맞춤지원 공모사업 선정, 엑스포장 부지매입, 2020년 엑스포 추진단 출범, 2021년 풍기인삼팝업공원조성 등을 거쳐 2022년 9월 30일 개장했다. □ 2022영주세계풍기인삼엑스포의 의미2022영주세계풍기인삼엑스포는 영주 역사상 최초로 개최되는 국제행사로, 인삼의 저변을 확대하는 국제 박람회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건강식품의 수준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생명산업으로 범위를 확장시키기 위한 학술대회와 포럼 등도 함께 개최돼 의미를 더한다.인삼의 종주국으로서 영향력 확대와 건강산업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엑스포 개최로 얻어지는 기대효과는 크게 세 가지로 꼽을 수 있다. 먼저 경제적 효과로는 생산 유발 효과 2천474억원, 부가가치 유발 효과 1천5억원과 2천798명의 취업 유발효과를 기대된다. 두 번째로 사회적 효과로 국내외 관광객 유치로 관광산업 인프라 구축, 관광상품 개발을 통해 새로운 도약 기반을 마련한다.마지막으로 지역주민의 적극적인 참여로 문화적 욕구 충족과 문화 지식 함양, 자긍심 고취, 지역의 화합 분위기를 조성하는 문화적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해외시장 수출길 청신호영주세계풍기인삼엑스포 기간중 수출협약 2천50만 달러, 수출상담 실적 1천506만달러를 달성했다. 이 수치는 기업과 바이어 간 40여 회의 상담을 통해 당초 목표한 500만 달러 수출계약과 1천만 달러 수출 상담을 크게 초과 달성한 것으로 산업엑스포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확인시켜주고 있다.엑스포 잔여기간을 고려하면 수출협약 및 상담액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인삼의 산업화·세계화를 위해 열리는 2022영주세계풍기인삼엑스포 K-인삼 산업의 수출 경연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특히 해외 시장 네트워크 구축이 쉽지 않은 국내 인삼업체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한류 콘텐츠의 선풍적인 인기로 인삼에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한 해외의 젊은 소비층을 공략하기 위해 액상형스틱, 차, 음료 등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인삼·홍삼 가공품을 다양하게 선보여 해외 바이어들의 관심과 문의가 높았다. 이런 현상은 다양한 고객층 증가에 따른 수출길 확대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된다. 영주시는 2022영주세계풍기인삼엑스포를 통해 인삼 교역 확대를 위해 세계 각국의 바이어를 대상으로 풍기인삼의 우수성과 지속적 수출 전략을 모색해 수출 지역을 다변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방침이다.2022영주세계풍기인삼엑스포는 가족 단위, 어린이 관람객들의 취향까지 사로잡으며 전 연령층을 아우르는 행사라는 평이다.이 같은 평가는 다양한 연령대의 관람객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콘텐츠 개발과 인삼, 세계를 품고 미래를 열다라는 엑스포 슬로건처럼 아이를 품는 것이 미래를 여는 일이라는 미래지향적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주시는 엑스포를 통해 새로운 영주의 미래를 개척한다는 계획이다. 영주/김세동기자 kimsdyj@kbmaeil.com

2022-10-19

없는 게 없는, 동해안에서 가장 너른 장터

동해안에서 가장 큰 전통시장은 포항에 있는 죽도시장이다. 시장 면적이 14만8천760㎢에 이르고 점포 수는 2천500개 정도 된다. 볼거리, 먹을거리가 풍성한, 없는 게 없는 너른 장터다. 모두 25개 구역이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수산물, 농산물, 청과물, 죽세공품, 한복, 수예, 이불, 주전부리 등 이 세상에 존재할 만한 거의 모든 품목이 진열되어 있다. 포항 사람치고 죽도시장에 한 번이라도 안 가본 사람이 없고, 외지인들도 포항에 오면 호기심에라도 한 번은 들르게 된다. 시장은 지역의 역사와 궤적을 함께하며 죽도시장 또한 그렇다. 일제강점기부터 포항의 원도심인 여천동에 시장이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시가지가 초토화되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와는 별개로 1930년대부터 죽도 갈대밭에 좌판이 옹기종기 모인 장터가 형성되어 점점 덩치를 키우다가 한국전쟁 직전에는 지금 죽도시장의 3분의 1 규모가 되었다. 하지만 한국전쟁 때 시장은 거의 불타버렸고 전쟁 후에 복구를 거쳐 1960년대에 구획정리사업이 전개되었다. 그 후 규모가 커지면서 1971년 11월 시장 허가를 받은 것이 죽도시장이다. 이런 발자취를 더듬어보면 죽도시장의 역사는 100년 가까이 된다.더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시대 3대 시장인 부조장(扶助場)이 형산강 하류에 있었다. 부조장은 ‘윗부조장’(경주 강동면 국당리 강변)과 ‘아랫부조장’(포항 연일읍 중명리 강변)으로 형성되었다. 부조장은 서해 강경장, 남해 마산장과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장터로, 포항 연안의 청어와 소금을 내륙으로 가져다 팔고 전라도와 경상도의 농산물을 거래하는 교역의 요충지였다. 당시 형산강 유역에는 수많은 황포돛배가 떠 있었고 전국의 보부상들이 모여들었다. 부조장은 20세기 들어 포항과 부산을 연결하는 동해남부선 철도가 부설되는 등 교통 환경이 급격하게 바뀌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역사의 흐름 속으로 보면 죽도시장은 부조장의 전통을 잇는 큰 장터인 셈이다.싱싱한 해산물의 백화점, 죽도어시장전통시장은 어딜 가나 붐비지만 죽도시장에서 가장 시끌벅적한 곳은 어시장이다. 상인도 많고 손님은 더 많아 늘 북새통을 이룬다. 전통시장이 예전에 비해 많이 힘들어졌고 죽도시장의 사정도 다를 바 없지만 어시장은 여전히 활기가 넘친다. 포항 연근해는 물론 전국 각지의 해산물이 모여 있는 죽도어시장은 싱싱한 해산물의 백화점이라 할 만하다. 다양하고 신선하고 저렴한 해산물이 지천으로 깔려 있어 대형마트보다 값싸고 물 좋은 생선을 살 수 있다. 대게, 홍게, 꽃게는 물론, 독도새우, 꽃새우, 닭새우가 있고 참소라, 뿔소라, 나팔소라가 있다. 고등어, 갈치, 오징어, 문어, 낙지, 전복이 있고 가자미, 조기, 도루묵, 소라, 고동, 멍게, 해삼, 가리비, 바지락이 있다. 그 밖에도 바다에서 나오는 거의 모든 해산물이 죽도어시장에서 거래된다고 보면 된다.죽도어시장에서 가장 북적거리는 수협 위판장은 포항의 새벽을 깨우는 곳이다. 새벽 별이 반짝이는 4시 30분쯤 위판장은 대낮처럼 환하게 불을 켜고 있다. 트럭에 실려 위판장에 들어온 생선을 상인들이 바닥에 가지런히 정렬하면 빨간 모자를 쓴 경매사를 필두로 중매인들이 우르르 모여 경매가 시작된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 경매사가 구성진 목소리로 이끌어가는 새벽 경매는 죽도어시장의 진풍경이다. 위판장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생선들이 하나둘 낙찰자를 만나 팔려나가고 장사 준비를 위해 상인들이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이에 동이 튼다.과메기, 대게, 고래고기를 맛볼 수 있어해산물은 아무래도 찬 바람이 불어야 제맛이다. 12월에 접어들면 죽도어시장은 과메기가 뒤덮다시피 한다. 어시장의 모든 점포에서 과메기를 내놓는데 꽁치 과메기가 대부분이지만 과메기의 원조인 청어 과메기도 더러 볼 수 있다. 속이 꽉 찬 대게도 겨울 어시장의 인기 품목이다. 어시장에 들어서면 수조에 대게가 꽉 차 있고, 대게 찌는 수증기가 풀풀 날리는 풍경을 볼 수 있다. 고소하고 담백한 대게 맛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시장을 계속 찾아온다. 대게의 주산지는 구룡포이며, 죽도어시장의 대게도 대부분 구룡포에서 온다. 사계절 내내 대게를 팔지만 대게의 제철인 겨울에 제맛을 맛볼 수 있다.죽도어시장에는 고래고기를 전문으로 파는 점포가 있다. 한자리에서 수십 년간 고래 수육과 육회를 팔아온 곳이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고래고기 맛을 아는 사람은 따로 있다. 흔히 고래고기는 열두 가지 맛이 난다고 하지만, 수십 년 동안 고래고기를 팔아온 분은 오십 가지 맛이 난다고 말한다. 고래고기는 부위별로 독특한 맛이 있는데 껍질이 두꺼워야 살코기에 기름기가 있어 맛이 좋다. 고래고기를 삶을 때 어떤 재료를 넣느냐에 따라 맛이 확연히 달라진다. 이 점포 앞을 지나가다 보면 대낮부터 고래고기를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십중팔구 고래고기의 깊은 맛을 아는 단골들이다.오징어가 ‘금징어’가 된 지 꽤 되었다. 싱싱한 오징어 한 마리에 4천∼5천 원이니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포항과 울릉도 쪽의 해양생태계가 바뀐 데다 중국 어선의 불법 조업이 겹쳐 오징어가 잘 잡히지 않는다. 근래에는 꽁치 어획량도 신통치 않아 꽁치 과메기로 겨울을 나야 하는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어족 자원 감소는 어민과 어시장 상인들의 큰 걱정거리다.1970년대 초만 해도 죽도어시장의 사업가들이 일본 시모노세키(下関)에 생선을 수출했다. 포항항에서 삼치, 방어, 복어 등을 선박에 실어 시모노세키로 보냈는데, 이런 수출은 15년가량 이어지다가 중단되고 말았다. 어획량이 줄어들어 손써 볼 방법이 없었다. 우리 연안에서 어획량 감소는 소리 없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현대적인 시설로 탈바꿈한 죽도시장전통시장이 어렵다는 이야기는 오래되었다. 죽도시장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2000년대 들어 아케이드를 설치하는 등 시장 현대화에 많은 공을 들여 이제는 전국 어느 전통시장과 비교하더라도 뒤지지 않는 환경이 되었다. 죽도어시장에서도 깨끗하고 위생적인 수산물을 제공하기 위해 2015년 7월부터 청정 해수 공급 시설을 가동하고 있다. 송도 연안 수심 6미터 지하의 해수를 취수해 여과기로 모래를 씻어낸 다음 2킬로미터의 해수관로를 통해 어시장에 청정 해수를 공급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해수 운반 차량으로 바닷물을 공급했는데, 해수관로가 설치되면서 수도꼭지만 틀면 청정 해수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죽도어시장은 도심 한복판에 있다. 동빈내항, 포항운하, 송도해수욕장, 중앙상가 등 포항의 명소와도 가깝다. 그래서 포항의 명소를 둘러본 관광객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어시장 횟집에서 하는 경우가 많다. 근래에는 포항운하에서 유람선을 타고 영일만을 한 바퀴 돌아본 다음, 어시장 횟집에서 시원한 물회나 대게를 먹는 관광객이 많다. 주말에는 포항의 명산인 내연산과 운제산을 등반한 후 어시장에서 회를 즐기는 산악회 회원들을 자주 볼 수 있다.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커피숍과 게스트하우스죽도시장을 걷다 보면 구석구석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징후를 느낄 수 있다. 그 많던 다방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하나둘씩 둥지를 틀고 있다. 시장의 분위기가 한결 젊어지고 있는 것이다. 건어물을 파는 ‘경동시장’은 ‘DOHSH’라는 산뜻한 브랜드를 개발해 다양한 마케팅을 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주단(綢緞)거리에 있는 커피숍 ‘죽도소년’은 젊은 여행객이 주 고객이다. 전통시장에 외지의 젊은이들이 찾는 커피숍이 있다는 게 생뚱맞게 들리기도 하지만 커피숍에 가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원래 이 자리는 ‘삼일라사’라는 양복점이었고, 뒤이어 ‘삼일주단’이라는 한복점이었는데, 2018년에 책과 그림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커피숍으로 바뀌면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화제가 되었다. 여기에서 만나 결혼한 커플이 있는데, 신부가 입은 웨딩드레스를 진열해놓기도 했다.낡고 오래된 여인숙을 개조한 게스트하우스 ‘오다가다’도 빼놓을 수 없다. 사양길에 접어든 여인숙을 감성적으로 개조해 이색적인 숙박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 게스트하우스는 여행객들끼리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여행 체험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 매력이다. 사람들이 외면하던 여인숙이 하룻밤 묵고 싶은 낭만적인 숙소로 변신한 모습을 ‘오다가다’에서 확인할 수 있다.과거 죽도시장은 아침이면 유료 변소 앞에 긴 줄을 서야 했고, 수시로 악다구니판이 벌어졌다. 돌이켜보면 그 살벌한 싸움은 시끌벅적한 장터에서 자기 영역을 지켜내며 식구들을 건사하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을지. 과거의 살풍경은 사라졌지만 이 풍진 세상을 살아내기 위해 쉴 새 없이 “어서 오이소”를 외치는 상인들의 목소리가 여전히 눈물겹다.

2022-10-19

晩秋, 영화 속으로 떠나는 가을 여행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 소슬하게 불어오는 바람, 저 먼 산에서 사람들을 유혹하는 색색깔의 나뭇잎….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집에만 있기에는 뭔가 아쉬운 가을날이 성큼성큼 지나가고 있다. 누구라도 가방을 꾸려 낯선 곳으로 떠나고 싶은 계절.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눈에 보이는 모든 게 새로운 공간으로 가고 싶어진다. 그러나, 여러 가지 문제로 집을 벗어날 수 없는 이들도 적지 않은 게 2022년 10월 오늘의 현실. 이 안타까움을 달래줄 적당한 방법이 없을까? 단풍 든 숲이나, 석양 아름다운 바닷가로 갈 수 없는 독자들을 위해 자신의 ‘가슴 안으로’ 떠나 지나온 삶을 돌아보게 하는 ‘여행 같은 영화’ 2편을 추천한다.중년을 소년 시절로 데려가는 ‘와이키키 브라더스’과거를 떠올리며 눈물짓는 따위는 분명 젊음의 몫이 아니다. 그러기에 시인 황지우는 이렇게 노래한다. “슬픔처럼 쌍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그렇다. 미래를 설계하지 못하고 과거에 기대 현실을 겨우 견뎌내는 삶은 분명 쌍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잊었던 유년의 기억에서 지금의 자신을 있게 만든 편린을 찾아내고, 그로 인해 젖어오는 가슴으로 훌쩍이는 인간을 단죄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군사독재 따위의 정치적 상황과는 무관하게 따스함으로 추억되는 1980년대와 정글의 법칙만이 남은 21세기를 오가며 진행되는 영화.‘와이키키 브라더스’가 그려내는 사람들. 현실에서 그들의 삶은 비루하고, 참혹하기 짝이 없다. 반면 그들의 과거는 비참한 지금의 삶과는 대비되는 빛나는 아름다움이다.오래된 온천 도시 나이트클럽에서 취객들의 흐느적거리는 춤을 위해 기타를 연주하는 성우(이얼 분). 하지만 그에게도 찬란한 시절은 있었다. 바로 보컬그룹을 이끌던 고교 시절.성우의 첫사랑 인희(오지혜 분)의 삶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남편과 사별한 채 야채트럭을 몰며 고무줄바지 차림으로 살고 있지만, 그녀에게도 조안 제트보다 더 멋지게 ‘아이 러브 로큰롤(I Love RockRoll)’을 부르던 여고 시절이 있었다. 성우의 고등학교 친구들인 민수와 수철, 인기의 삶도 지지부진하기는 마찬가지. 보컬그룹을 함께 하며 즐거운 추억을 공유한 친구들이지만, 그들을 묶어주던 음악이라는 연결고리는 끊어진지 오래. 민수는 약삭빠른 처세술을 익힌 속물로 전락했고, 시청 건축과 직원이 된 수철은 환경운동가가 된 인기와 사사건건 대립한다. 그들 사이에 우정 따위의 단어가 틈입할 여지는 없어 보인다.빛나던 그들의 과거와 참혹한 현재를 오가는 카메라. 그 속에서 자신의 과거와 현재까지 읽어낸 사람이 비단 기자 하나만일까?건들거리는 폼과 위악으로도 숨길 수 없던 맑은 꿈들. 별을 노래하는 시인이나, 아프리카 오지를 탐험하는 여행가가 되고 싶었던 소년들. 인간은 선하고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시절.그러나 지금은? 저마다 몇 푼 월급에 목을 매고, 꿈과는 동떨어진 일을 죽지 못해 해내며 스트레스로 마신 술에 위장에 탈이 나기 시작하는 중년으로 살고 있는 ‘한때 소년이었던’ 중년들.이런 생각을 하며 지켜보는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화면은 우리를 고문한다. 그러나 고맙게도 임순례 감독은 “인생은 환멸”이라는 결론으로 관객을 이끌지 않는다.죽음 곁으로 사라진 늙은 음악가를 대신해 나이트클럽 웨이터 기태(류승범 분)는 몰락해가는 성우의 밴드에 합류한다. 이는 ‘음악이 돈과 밥이 되어주지 못해도 그 길을 가려는 사람은 언제고, 어디에서고 있기 마련’이라는 예술에 대한 낙관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멤버들과 싸우고 밴드를 떠나 마을버스 기사로 살아가는 드러머 강수(황정민 분)와 호색한 건반 연주자 정석(박원상 분)이 핸드폰으로 나누는 ‘눈물의 화해’는 감독이 품고 있는 인간에 대한 낙관을 드러내기에 모자람이 없다.“그래도 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핵심어를 함축해 보여주는 영화의 라스트 신이 눈에 선하다.밀려나고 또 밀려나 가 닿은 남도의 끝자락 여수. 성우의 기타 연주에 맞춰 첫사랑 인희가 촌스런 무대의상을 입고 노래를 부른다. 더 이상 예쁘장한 여고생도, 자존심으로 뭉친 콧대 높은 소녀도 아닌 중년여자 인희가 노래를 부른다. 아직도 사랑은 포기 못한 우리의 희망, 그 은유가 아닐까? 비록 비루하고, 참혹할 따름인 세상일이라도 인생이란 진지한 것이며, 언제나 죽음보단 삶이 따뜻했다.. 둘이 함께 걷는 길의 따스함 ‘싱글라이더’정호승의 시(詩)에 가수 이지상이 곡을 붙인 노래가 있다. 사는 것이 덧없고 쓸쓸할 때면 볼륨을 낮추고 조용히 따라 부르고 싶은 노래.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도입부는 이렇다.울지 마라외로우니까 사람이다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염세주의 철학자들이 세련되게 해석한 비극적 세계관을 알지 못해도 좋다. ‘존재한다’는 것에 관해 한 번이라도 깊이 생각해본 사람은 안다. 인간의 내부엔 크건 작건 외로움의 사막 또는, 쓸쓸함의 우물이 들어서 있다는 사실을.여기 예상치 못했던 사건 탓에 잘나가던 증권회사 지점장에서 오갈 데 없는 실직자가 된 한 사내(강재훈·이병헌 분)가 있다. 영어도 배우고 자립 기반도 만들기 위해 멀고 먼 외국에서 2년 가까운 시간을 고생해 2천만 원의 돈을 모은 젊은 여성(유진아·안소희 분)도 있다.지점장과 성공한 호주 워킹홀리데이 경험자가 되기 위해 둘은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였을까. 하지만, 자신의 존재 바깥에 있는 ‘동정 없는 세상’은 두 사람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흘린 눈물과 땀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되물을 뿐이다.“그래서 어쩌라고? 세상에 슬픈 게 너 하나야?”이주영 감독은 자신이 각본까지 쓴 영화 ‘싱글라이더’를 통해 이 처참한 질문 앞에 선 두 사람의 길고도 짧은 궤적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담담하고 건조한 연출이 관객들을 슬픔으로 이끈다. 먼저 흥분하고, 교사처럼 가르치려는 감독은 분명 아닌 듯해 믿음이 간다.직장에서 밀려난 한 사내가 아내와 아들이 있는 호주를 찾아간다. 그러나, 아내는 이미 자신과는 다른 꿈을 꾸며 살아가고 있다. 갑자기 낯설어진 아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사내.20대 초반에 낯선 땅에 와서 죽으라고 일만 했다. 겨우겨우 모은 작지 않은 돈. 그걸 좀 더 좋은 조건의 환율로 바꾸고 싶었던 여학생은 불행한 사건에 직면한다.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친구가 된 두 사람. 둘 앞엔 누구도 쉽게 상상하지 못했던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데….강재훈이 처한 벼랑 끝 상황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무엇이 자신감 넘치던 그를 외롭고 난감한 처지로 이끌었을까? 그건 바로 아내를 포함한 타자에 대한 무관심과 소통의 부재가 아니었을지. 눈 밝은 이들은 이주영 감독이 무관심과 소통 부재의 사내 강재훈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 곤경에 처한 소녀 유진아였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아차린다.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고, 어려움에 처한 남을 돕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던 강재훈. 그는 유진아를 통해 자신의 메말랐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된다.‘싱글라이더’의 마지막 장면은 따스함으로 인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머물 듯하다. 원시의 파도가 몰려오는 황량한 공간. 그 무인지경의 길을 강재훈과 유진아는 혼자가 아닌 둘이서 걷고 있다.이지상이 노래한 정호승 시의 한 구절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라는 걸 우리는 이미 안다.하지만, 하나가 아닌 둘, 둘이 아닌 셋이라면 그 ‘견딤’이 조금은 덜 쓸쓸하지 않을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10-18

경주서 태어나 유적지 놀이터 삼아 성장 “이젠 돌려줄 차례”

“경주에서 시작해서 다시 경주에서 마무리하게 되어 행운이다.”지난 8월 31일 자로 신임 국립경주박물관장으로 부임한 함순섭 관장의 말이다. 경주에서 태어난 그는 유적지를 놀이터 삼아 성장했고, 69년 역사의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에서 연구자의 꿈을 키웠다. 경주라는 문화적 토양을 자양분으로 지금까지 온 것이다. 경주가 자신을 키웠으니 이제는 돌려줄 차례라고 말하는 함순섭 관장. 그에게 경주는 그 자체가 거대한 박물관이다. -학창 시절을 보낸 경주로 돌아온 소회는.△신라 고분이 밀집된 황오동에서 자랐다. 집에서 황남대총 발굴 현장이 보였고, 친구 집 안방 자리에서 발굴이 이뤄졌다. 지금의 나를 만든 토대는 내가 태어난 경주와 어린이박물관학교이다. 정년이 2년여 남았으니 시작한 곳에서 마무리하게 된 셈이다.-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는 어떤 곳인가.△1954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를 위한 박물관 교육 프로그램이다. 진홍섭 당시 국립박물관 경주 분관장과 윤경렬 향토사학자가 만들었다. 첫 강의실은 박물관장실이었다. 한국전쟁으로 피폐했던 당시로는 획기적으로 환등기로 영화를 관람하고, 슬라이드로 문화재 사진을 봤다. 대구미문화원에서 영사기와 영화필름을 매주 빌려왔다고 한다. 운영규칙이 셋 있는데,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 어떠한 명목으로도 돈을 받지 않는다. 수업은 존댓말로 한다는 것이다. 관장이 바뀌고 박물관을 나와야 했던 ‘경주어린이향토학교(1962-75)’를 거쳐, 1975년 현재 위치인 인왕동 신축 박물관으로 이전했다. 세계적으로 이처럼 오랜 역사를 가진 박물관 사회교육 프로그램은 드물다.-90년대부터 박물관장이 어린이박물관학교 교장을 겸하고 있다. 그야말로 금의환향한 셈인데 구체적으로 어떤 기억이 남아있나.△경주시립도서관 시청각실에서 수업하던 경주어린이향토학교를 다녔다. 인왕동으로 옮기고 거리가 멀어 그만뒀다가 중학생 때 친구들에 이끌려 다시 나갔다. 참여를 원하는 중학생들이 늘어나자, 1981년에 중·고등부가 만들어졌다. 경주박물관회 초대 회장을 지낸 김원주(1930~2007) 선생이 삼국유사 강독을 했는데 동국대학교 학생들이 와서 듣기도 했다. 청소년기 박물관학교는 안 가면 섭섭한 토요일의 일상이 됐고, 자연스럽게 박물관 계통의 일로 진로를 정했다.-박물관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길을 걸어왔네.△중학교 초반까지는 그림에 푹 빠져 지냈다. 화가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계림은 그림 그리기 좋은 곳이었고 화가들도 많이 찾았다. 경주는 문화적인 소양을 피부로 느낄 수 있고, 언제든지 미술 작가를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남한 최초의 예술전문학교인 ‘경주예술학교(1946-1952)’가 세워진 곳도 경주다. 우연히 일본에서 계림을 화폭에 담은 김창억 화가(전 홍익대 미대 교수)의 작품을 구입했는데 알고 보니 경주예술학교를 다닐 때 그린 거였다. 경주예술학교는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 탄생에 영향을 끼쳤다. 경주예술학교가 와해되고 좌절을 느낀 윤경렬 선생이 자라나는 어린이에게 희망을 찾았기 때문이다.-경주는 발길 닿는 곳마다 문화재가 넘쳐난다. 그중에서도 신라 금속공예를 전공한 이유는.△정양모 전 경주박물관장이 박물관학교 수강생들에게 신라금관을 보여준 적이 있다. 그때 금관의 화려함과 독특한 디자인에 매료됐다. 제대로 된 금관 연구자가 없어 안타깝다며 비밀을 밝혀달라던 당부가 오래도록 뇌리에 남았다. 금관을 복제하던 삼선방을 들락날락했던 경험도 소중하다. 삼선방은 경주박물관학교 1회 출신인 김인태 금속공예명장의 공방으로 어릴 때부터 드나들며 금관의 제작기법을 가까이서 봤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유효웅 도예명장이 작업하던 동방요(현재 신라요)가 친구 집이었다. 남들은 교과서로 배우는 유물의 제작 기법을 이웃이나 친구 네에서 실물을 보며 익히는 행운을 누린 것이다. 그런 경험이 나의 귀중한 자산이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로 시작해 전국 국립박물관 건립에 참여한 이력이 눈에 띈다.△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해 김해와 대구국립박물관 개관에 참여했다. 문화재나 공방 답사를 다녀선지 도면 보는 감각이 괜찮은 편이다. 어지간한 기술직 못지않다고 ‘학예 기술직’이라는 우스갯말도 한다. 박물관 시설의 효율적인 배치나 보존환경에도 관심이 많다. 항온과 항습을 유지해야하는 박물관은 에너지 소비량이 크다. 지금은 나아졌지만 90년대만 해도 전기료를 체납할 정도로 국립박물관 재정상황이 열악했다. 전기요금을 아끼려고 머리를 싸매야했다.-명색이 국립박물관인데 사정이 그 정도였나.△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하기 시작한 1991년, 첫 월급이 37만 원이었다. 생선 도매상이던 어머니가 10배는 더 벌었다. 내 월급을 보고 웃으시더라. 서울서 직장 다니던 친구들의 절반 수준으로 박봉이었고 운영 예산도 턱없이 부족했다.-서울과 영남권 국립박물관을 두루 거치며 기획한 전시가 다수다. 기억에 남는 전시가 있다면.△황남대총을 통해 신라 마립간 시기를 조명한 ‘황금의 나라, 신라의 왕릉 황남대총’(2010)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하나의 왕릉을 주제로 한 첫 특별전이었고, 전시 기간에 도록이 완판 되는 당시로선 드문 기록을 세웠다(감사하게도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다). 내 전공분야인 만큼 한 걸음 더 나아가려 노력했다. 고고학은 일본 학계의 주장이 여전한 분야다. 그걸 벗어나 새로운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기존 연구와 새로운 주장, 기획자로서 시각을 담은 세 편의 논문을 나란히 실었다.우리가 아는 고고학 자료의 대부분은 일제강점기에 발굴된 것이다. 박물관이라는 단어 자체도 ‘Museum’의 일본식 번역이다. 식민지 고고학의 그림자는 앞으로 학계가 극복해야 할 화두이다. 일제강점기에 부실하게 이뤄진 조사가 다시 연구되어야 하는 이유기도 하다. 함순섭 관장의 학문적 관심은 일제에 의한 고적조사를 비롯해 해방정국으로 이어지는 경주의 문화운동 전반으로 뻗어나간다. 그것이 자신을 키운 경주에 대한 연구자 본연의 책무라고 생각한다.-일제강점기에 관심을 두게 된 배경은.△90년대부터 일제강점기 고적조사를 연구했다. 오로지 유물만 대상으로 한 평면적인 연구를 넘어 발굴과 조사 과정을 입체적으로 살피기 위해서다. 결국 유물이 출토된 일제강점기와 역사적 맥락이 이어지고 그걸 파헤치다 보면 관변단체인 경주고적보존회까지 닿는다. 그렇게 조사 범위를 넓히는 과정을 통해 지식은 총합된다. 유물 배후의 모든 맥락을 조사해야 연구가 풍성해진다.-다방면의 관심사를 대중과 칼럼으로 소통한다. 오랫동안 갈고닦는 글 솜씨가 돋보인다.△박물관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능력이다. 대중적으로는 유홍준 교수가 유명하지만 부석사에 대한 글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쓴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1916~1984)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 아무리 짧은 글이라도 윤독하려 애쓴다. 이영훈 전 국립중앙박물관장도 후배인 내게 글을 보내오곤 했다. 교정할 때는 선후배도 없다. 직급도 권위도 내세우지 않는 윤독의 전통이 국립박물관에 이어 온다. 전시 설명문은 연구자 전원이 최소 6차례 윤독을 한다.-마음을 울린 유물이 있나.△전시된 유물보다 발굴할 때 자주 본다. 흙을 파다 보면 흙 색깔이 달라지는 지점이 있다. 아래 뭐가 묻혔느냐에 따라 흙 색깔이 다르다. 칠이 된 그릇은 노출되면 사라진다. 수습할 수 없으니 발굴자만 볼 수 있는 유물이다.-국립경주박물관에 와서 세 가지만 보고 가야 한다면.△성덕대왕 신종과 신라 금관, 백률사금동약사여래입상이나 미륵삼존불(남산 장창골 출토)을 추천한다. 불상이 전시된 신라미술관은 전시환경 개선 공사로 12월 초까지 휴관한다. 불교조각실을 신설해 이전보다 입체적으로 볼 수 있으니 기대해 달라.-국립경주박물관 수장으로서의 포부는.△국립박물관 수준은 여러모로 세계적이다. 디지털 콘텐츠 부분은 최첨단이고 설비도 마찬가지. 경주 지진에도 유물 손상은 없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교육시스템이다. 선진국에선 박물관에서 교육받은 교사에게 1차로 강의를 듣고 관람한다. 어린이박물관학교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경주박물관이 선도할 수 있는 부분이다. 퇴임까지 2년 3개월이 남았는데 욕심낼 기간은 아니다. 차별화된 전시 기획으로 경주만의 흥미로운 전시공간을 조성하는 것은 기본. 장애인 편의시설을 보강해 모든 이들이 차별 없이 이용하는 환경을 만들어나갈 계획이다. 더불어 직원들이 마음껏 쉴 공간도 마련하고 싶다. 그것만 제대로 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함순섭 관장은경북대학교에서 신라 금관을 비롯한 삼국시대 금속공예를 전공했다.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 개관전시팀장을 맡아 용산 이전부터 개관까지 전시를 총괄했다. 경주에 오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신설되는 박물관으로 발령받아, 이외에도 국립대구박물관과 국립김해박물관의 개관을 맡았다. 기획한 주요 전시로는 ‘쇠, 철, 강’, ‘한국의 허리띠, 끈과 띠’ 등이 있다. 2010년 국립중앙박물관 용산 개관 5주년 기념 ‘황금의 나라, 신라의 왕릉 황남대총’ 특별전은 국립박물관 전시 지평을 새롭게 넓혔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 8월, 국립경주박물관 신임 관장으로 부임했다. 경주를 찾는 관광객들이 국립경주박물관을 통해 신라를 경험하고 신라에 더 가까워지기를 바란다.배은정 1974년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사학과 졸업. TBC·포항MBC·경북교통방송 작가. ‘포항문화의 상징과 공간’ 공저

2022-10-17

포항의 애환과 역사가 흐르는 물길

형산강이 영일만으로 흘러 잠시 숨을 가다듬은 후 동해로 빠져나가고 그 주변에 여기저기서 모인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아가니 포항을 물의 도시라고 부를 만하다. 예부터 포항을 삼호오도(三湖五島)라 했는데, 세 개의 큰 호수인 아호(阿湖), 두호(斗湖), 환호(環湖)가 있어 삼호(三湖)라 했고, 형산강과 그 지류가 흐르며 다섯 개의 큰 삼각주가 만들어져 오도(五島)라 했다. 강과 바다에는 선박이 편히 드나들고 정박할 수 있는 항구가 필요해 포항항(구항)과 포항제철소 안의 신항, 국제컨테이너 터미널인 영일만항이 차례차례 만들어졌다.1962년 6월 개항장으로 지정·공포된 포항항은 청룡호, 동해호 같은 포항~울릉도를 오가는 선박은 물론 외국 선박도 드나드는 경북의 관문항이었다. 그 후 포항제철이 건립되면서 항만의 명칭과 역할이 바뀌었다. 즉 1968년 포항제철을 지원하는 항만이 건설되면서 이를 신항이라 불렀고, 기존의 포항항을 구항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포항에서는 구항보다 동빈내항(東濱內港)이라는 말이 익숙하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식 가로명(街路名)을 지으면서 동빈(東濱), 남빈(南濱)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이다. 포항 도심과 송도 사이에 있는 동빈내항은 아늑하고 안전한 항구다. 한 번이라도 동빈내항을 보게 되면 천혜의 항구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1923년 폭풍우 직후 본격적인 포항항 건설 추진포항의 근대적 인프라는 일제강점기 때 일부 조성되었는데, 항구(현 동빈내항)도 그때 골격이 만들어졌다. 당시 포항에 배를 정박할 수 있는 곳은 남빈과 동빈 일대의 형산강 하구였으나 형산강이 범람하면 토사가 가득 쌓여 배가 드나들 수 없었다. 경북도와 총독부에 포항의 고충을 호소해 1914년부터 1923년까지 항만 공사가 이루어졌으나 응급조치에 불과했고 근본적인 문제에는 손을 대지 못했다. 1923년 4월 12일 기록적인 폭퐁우가 몰아친 것이 포항항을 항만답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1923년 4월 15일자 ‘동아일보’에 포항의 사상자가 2천 명에 달한다는 기사가 실릴 정도로 폭퐁우의 피해는 심각했다. ‘전무후무한 대참사’를 겪고 난 후에야 경북도와 총독부는 포항의 항만을 동해안의 항구로 완성해야 한다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에 따라 물의 흐름을 일정한 방향으로 돌리고, 물의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해주는 포항항 도수제(導水堤) 축조 공사가 시작되었다. 또한 독립적인 형산강 치수 사무소가 개설되어 대형 개수(改修) 공사가 추진되었다. 그 결과 1926년 9월 다이쇼(大正) 일왕의 3남인 노부히토(宣仁) 친왕(親王)을 태운 일본 제2함대가 30여 척의 호위를 받으며 포항항에 상륙하기도 했다(김진홍 엮음, ‘일제의 특별한 식민지 포항’, 글항아리, 99∼103쪽, 115∼117쪽 참조).당시 일본 당국은 포항항 건설을 대단한 치적으로 홍보했다. 하지만 항만 공사를 하면서 흥해읍성을 허물어 매립용 돌을 확보하는 몰염치한 행동을 저질렀다. 항만 공사도 결국 그들의 필요에 따라 우리의 귀한 문화유산을 훼손하면서 무리하게 추진한 것이다.울릉도 사람들의 사연이 많은 곳항구는 사연이 많은 곳이다. 동빈내항에도 수많은 사람의 사연이 무늬져 있다. 배를 타고 떠나는 사람, 손을 흔들며 배웅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에 이야기를 품고 있기 마련이다. 항구가 번성하고 쇠락하는 과정에서의 갖가지 이야기도 항구에 아로새겨져 있다.동빈내항에는 울릉도 사람들의 애환이 많다. 울릉도를 오가는 선박이 동빈내항에 정박했기에 울릉도 사람들이 드나드는 여관과 식당, 가게가 많았다. 특히 울릉도 선착장 건너편의 여관들은 울릉도 사람들로 넘쳐났는데, 그중 대궁장모텔은 울릉도 사람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파도가 높아 울릉도 가는 배가 안 뜨면 울릉도 사람들은 몇 날 며칠 여기서 죽칠 수밖에 없었다. 동빈큰다리 인근의 울릉수퍼는 50년 세월 한자리를 지키다가 최근에야 다른 업종으로 바뀌었다.1970년대 울릉도 인구는 3만 명이 넘었다. 지금보다 세 배나 많은 사람이 울릉도에서 살았다. 울릉도의 경기가 좋으면 포항의 죽도어시장과 동빈내항의 경기도 좋았다. 울릉도의 전성기는 동빈내항의 전성시대였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동빈내항의 여객선터미널은 오래되고 비좁아 새 터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포항항만청 옆으로 여객선터미널이 이전하면서 동빈내항의 활기는 예전만 못하게 되었다.조선소와 철공소 등 즐비해동빈내항에서 이따금 깡깡깡 울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동성조선이라는 조선소에서 배를 건조하거나 수리할 때 나오는 소리다. 이 회사는 1945년에 설립된 향도조선(向島造船)이 모체로 1995년에 동성조선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1910∼1915년 사이에 일본 사람이 포항에서 조선소를 시작했는데, 일본이 패망하면서 철수하게 되자 그곳에서 목선(木船)을 건조하던 대목장(大木匠) 김춘생이 인수한 것이다.3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동성조선은 꽁치·오징어 채낚기선과 연근해 각종 어선을 비롯해 여객선, 화물선, 예인선, 바지선 등을 건조하고 있으며, 중소형 조선소로서는 전국에서 이름이 꽤 높다. 특히 1960년대까지 50톤 미만의 목선이던 동해안의 꽁치·오징어 채낚기선이 1970년대 접어들어 100톤 이상의 강선(鋼船, 철선이라고도 부름)으로 바뀔 때 동성조선이 절반 이상을 건조했다. 주목할 것은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목포에서 선박 주문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동해는 파도가 높아서 선박과 선원의 안전을 보장하려면 선박을 튼실하게 만들어야 하며 이것은 동성조선의 변함없는 원칙이다. 하지만 목포 연근해는 동해만큼 파도가 거칠지 않기에 목포 쪽 조선소의 선박 건조 과정이 조금 느슨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목포의 한 선주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배를 튼실하게 만드는 조선소를 수소문했고 포항의 동성조선을 알게 되어 주문하게 되었다.선박이 있으면 선박을 수리하고 부품을 조달하는 곳도 있기 마련이다. 동빈내항 인근에는 선박을 건조하고 수리하는 철공소와 작은 공장이 즐비하고, 선박에 필요한 얼음을 만드는 냉동공장도 있다. 통통 소리를 내며 항구를 드나드는 선박, 출어를 기다리며 어구와 어망을 손보는 어민, 한가로이 낚시를 즐기는 강태공 등이 철공소 등과 어우러지며 동빈내항의 풍경을 빚어낸다. 태풍 소식이 들리면 구룡포의 선박은 물론 멀리 울릉도의 선박도 동빈내항으로 몰려오는데, 선박으로 가득 차 있는 동빈내항은 또 하나의 절경을 이룬다.최근에는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커피숍, 식당 등이 점점이 들어서며 동빈내항의 풍경을 조금씩 바꿔놓고 있다. 1970년대까지 황포 돛단배가 다니던 곳에 요트가 물살을 가르고 있는 것도 동빈내항의 변화된 모습이다. 동빈내항이 변화해온 풍경은 포항 화가들의 그림과 사진작가들의 사진에 남아 있다. 매립된 하천을 복원해 만든 포항운하동빈내항과 형산강 사이에 포항운하가 있다. 원래 형산강의 물길이었으나 도시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매립을 거쳐 주거지가 되었다. 흐름이 끊긴 강을 강이라 할 수 있을까. 형산강에서 동빈내항으로 흐르는 물길이 막히면서 동빈내항의 수질이 나빠지고 동빈내항과 인근 도심에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는 악순환이 일어났다.주거지를 철거하고 1.3㎞에 이르는 물길을 복원하는 공사가 2012년 5월에 착공해 2014년 1월에 준공했다. 주택과 건물 480동이 철거되고 2천225명이 이주했다. 운하가 만들어지면서 형산강과 동빈내항 사이의 물길이 되살아났고, 동빈내항의 수질도 개선되었다. 또한 운하 주변으로 다양한 스틸아트 작품들이 배치되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선순환이 이어지고 있다.이제는 되살아난 물길 위로 크고 작은 유람선이 다닌다. 유람선은 포항운하에서 출발해 동빈내항과 송도해수욕장을 돌아온다. 유람선에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동빈내항과 영일만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은 포항에서 누릴 수 있는 색다른 즐거움이다. 동빈내항에 유람선이 지나갈 때 갈매기들이 떼 지어 따라다니는 장면은 포항의 새로운 풍경이 되었다.동빈내항과 포항운하는 과거에 어린아이들이 헤엄치며 놀던 맑은 강이었다. 이 물길이 점차 살아나고 주변이 가꿔지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밖에도 포항 도심에는 칠성천, 양학천, 학산천, 두호천 같은 하천이 있었으나 도시화 과정에서 오염된 후 복개되고 말았다. 최근 이 하천들을 되살리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데, 우선 학산천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물의 도시 포항은 물길이 살아야 생명력을 얻을 수 있음을 동빈내항과 포항운하를 걸으며 느낄 수 있다.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

2022-10-17

통일신라부터 조선까지 삼층석탑의 시원이 된 감은사지석탑

◇통일신라 불교문화의 상징 석탑신라시대는 불교문화가 찬란하게 꽃피웠던 시기였던 만큼 불국사와 석불사(석굴암)를 비롯해 수많은 사찰이 건립됐다. 경주에 천년고찰이 많이 남아있는 것도 불국을 꿈꾸었던 신라인들의 열정적인 불교 사랑에 기초했다. 경주에 석탑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설혹 사찰이 무너져 폐사지가 돼도 절의 근간이었던 석탑만은 굳건히 사찰을 지키고 있다. 석탑은 돌로 만든 불교식 탑이다.불교에서 탑은 부처님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석가모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탑을 세운 뒤 자신의 사리를 그 속에 보관하라고 하면서 탑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사리란 화장한 뒤에 남은 뼈(유골)를 말한다. 현대적 의미로 탑은 유골함인 셈이다. 탑 속에는 사리 외에도 옷가지와 발우, 문서 등도 함께 넣었다. 석탑의 구조를 간단히 살펴보면 탑의 몸체를 받쳐주는 기단부가 있고, 탑의 몸체에 해당하는 탑신부와 탑의 꼭대기 부분인 상륜부로 나뉜다. 보통 탑신부 안에 빈 공간을 만들고 부처님이나 이름 높은 스님의 사리를 보관했다.상륜부는 장식용 조형물인데 대개 위에서부터 보주, 용차, 수연, 보개, 보륜으로 나뉜다. 바퀴처럼 생긴 조형물을 보륜(寶輪)이라고 한다. 그 위에 왕관처럼 생긴 모자 모양의 보개(寶蓋)가 얹어져 있다. 보개 위에는 꽃씨 주머니 형태 혹은 불꽃 모양의 수연(水煙)이 있고 그 위에는 동그란 구슬 모양의 용차(龍車)와 보주(寶珠)가 자리한다.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해진 4세기 무렵에는 목탑을 많이 만들었지만 7세기부터는 석탑을 만들기 시작했다. 목탑은 아무래도 보존하기 힘들고 화재에 취약했기 때문이다.벽돌로 만든 전탑이나 돌을 벽돌처럼 쌓아 만든 모전 석탑, 청동으로 만든 청동탑, 쇠로 만든 금동탑 등이 있지만 우리나라는 석탑이 가장 많다. 석탑은 불탑의 중심이었다.인도와 중국이 전탑, 일본이 목탑이 많았던 것에 비해 우리나라에 석탑이 유독 많은 이유는 질 좋은 화강암이 많고 돌을 잘 다루는 석공들이 많았기 때문이다.석탑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삼국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백제는 목탑 형태가 많았고 신라는 전탑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백제의 익산 미륵사지 9층 석탑이나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 신라 경주의 분황사지 9층모전석탑에서 알 수 있듯 규모도 크고 모양도 제각각이었다.통일신라의 새로운 불교문화는 삼국통일 후 20여 년간 당나라와 전쟁을 끝낸 680년쯤부터 시작됐다.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에 당나라 문화를 전폭적으로 수용하여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통일신라의 석탑은 679년 건립된 사천왕사 목탑과 682년에 건립된 감은사삼층석탑에서 기본을 이루었다. ◇감은사지 석탑이 삼층석탑의 시원통일신라시대에는 이전의 탑 건축보다 재료가 다양해졌다. 석탑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목탑과 전탑, 금동탑들이 만들어졌다. 통일신라 이후 점차 탑의 규모가 작아졌으며 쌍탑으로 배치하는 것이 일반화됐다. 형태도 뚜렷하게 변화가 있었다. 이중기단에 삼층의 탑신을 갖춘 석탑인 감은사지 삼층석탑이 전형적이었다. 이 양식은 건립 이후 약 250여 년간 지속된다.통일신라시대는 다른 어떤 시기보다 많은 양의 탑이 건립됐다. 경주지역에 머물던 탑 건축은 9세기 이후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감은사지석탑은 통일신라 전(全)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세워진 모든 삼층석탑의 시원이 됐다. 석탑은 백제에서 시작됐으나 재료가 석재였을 뿐 목탑의 구조를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복잡한 목조 구조 형식의 석탑에서 거대한 판석을 다듬어 조합하는 판석식 석탑으로 단순화시킨 석탑 양식도 감은사지 석탑이 시발점이었다.요즘 말로 감은사지 석탑이 미니멀하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다. 무엇보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바뀌다 보니 번잡하고 불필요한 건축 요소를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 시기를 중심으로 많은 양의 석탑이 건립됐기 때문에 거대한 석탑보다 소형석탑이 대량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신용철 양산박물관장은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특징을 먼저 결구 방식이 변화했다고 밝혔다. 백제의 석탑과 8세기 이전 통일신라 초기 석탑은 기둥과 면석 지붕돌이 모두 다른 돌로 조각 결합 돼 있다. 8세기 이후의 석탑은 기단 덮개돌은 하층과 상층이 각각 8매, 4매의 돌로 결합 돼 있으나 기단 면석에는 기둥과 면석이 하나의 돌에 함께 조각돼 있다. 9세기에 이르면 탑의 부재는 더욱 간단해져 하층과 상층 기단 면석을 제외한 모든 부분을 각각 1매의 돌로 결구했으며, 심지어 탑신과 지붕돌을 같은 돌로 조각해 쌓기도 했다.이전 시대에 비해 탑의 비례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감은사지삼층석탑이나 고선사지삼층석탑과 같은 초기의 삼층석탑에서 2중 기단과 탑신은 시각적인 안정감을 주기 위해 지표의 점유 면적을 넓혔다. 8세기 이후 불국사 석가탑을 기점으로 안정감과 상승감이 동시에 추구됐다. 9세기 이후의 석탑은 안정감보다는 상승감만을 강조해 기단과 탑신이 가늘고 길게 (細長形) 변화했다. 단층기단 석탑이 자연 암반이나 토단 위에 건립되는 것도 가늘고 길게 만드는 비례감각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다. 이 같은 세장형의 탑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까지 그대로 전승됐다.8세기 이후 석탑의 공예화, 조각화가 이루어지는데, 조각상이 탑 표면에 나타난 것도 통일신라시대 탑의 특징이다. 토함산에 건립된 석탑에서 인왕상, 팔부중상을 새긴 석탑이 나타난다. 9세기 이후에는 탑의 크기가 더욱 축소되면서 좀 더 아름답고 화려하게 꾸미려고 하는 공예적 요소가 나타난다. 석굴암 삼층석탑의 경우에는 기존의 형태를 탈피해 건축한 토함산 석탑 예술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통일신라석탑은 8세기 이후에는 심오한 불교사상을 배경으로 독특한 형태의 독창적인 탑들이 만들어졌다. 불국사다보탑은 기단부터 탑신, 상륜에 이르기까지 화강암을 다듬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한 비례감을 보여주고 있다. 동일형태의 쌍탑이 일반화돼 있던 신라시대에 불국사다보탑과 같은 이형석탑은 불교미술의 토대가 되는 경전에 충실했다. 표현에 있어서는 다른 나라에 존재하지 않는 다양한 창안과 파격을 시도한 통일신라 탑파미술의 꽃으로 평가받고 있다. ◇호국적 성격을 띤 토함산의 석탑들현재 토함산 일대에 남아있는 불교사찰과 그곳에 건립된 석탑은 10기 남짓이지만 토함산 외곽으로 약간만 범위를 넓혀도 두 배가 넘는 많은 탑이 건립됐다.신용철 양산박물관장은 “토함산 석탑의 분포는 고대부터 발전했던 교통로와 그것을 중심으로 건립된 사찰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말한다.신 관장은 고대 교통로로 신라 및 통일신라 시기의 수도를 일컫는 신라왕경에서 동해구(東海口, 토함산 계곡에서 흘러나온 물이 모여 동해로 들어가는 하구 일대를 가리키는 말)에 이르는 길과 왕경에서 울산을 잇는 토함산 서쪽을 따라 진행하는 길이 있다고 밝혔다.먼저 신라왕경에서 동해구까지의 길에는 장항리사지 오층석탑과 만호봉사지 석탑이 있다. 두 석탑은 문무왕의 장례처인 동해구와 감은사에서 구해온 만파식적에서 알 수 있듯이 호국적인 성격을 띤다. 게다가 이 탑들은 탑신부 4면에 인왕상을 배치해 호국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신라왕경에서 울산을 잇는 토함산 서쪽을 지나는 길을 따라 형성된 사찰의 탑들은 석가탑과 다보탑, 마동 삼층석탑 등인데 신라탑파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밝혔다.토함산에 있는 석탑 중 이미 언급한 석가탑과 다보탑을 제외하고 가장 중요한 석탑을 언급하라면 장항리사지 오층석탑을 들 수 있다. 장항리사지 오층석탑은 이미 지난 회 폐사지 편에서도 언급한 석탑이다. 동탑은 계곡에 붕괴된 상태로 흩어져 있던 것을 수습해 금당터와 서탑 사이에 부재를 모아두었다. 서탑은 1923년 도굴범이 사리장치를 탈취할 목적으로 폭파한 것을 1932년 복원했다.여기서 다시 장항리사지 석탑을 언급하는 것은 이 석탑이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변화이행과정을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장항리사지 이전 석탑은 대개 각 부분을 여러 개의 판석으로 조립·제작한 것과 달리 각각 한 개씩의 돌로 제작했다. 즉 탑 부분을 결구하는 결구식 탑에서 완성된 부재를 쌓아 올리는 누적식 탑으로의 이행이 이 석탑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만호봉사지(일명 시부걸사지) 석탑은 사실 어디에 있었는지도 불분명하다. 인왕상이 부조된 돌기둥 상을 출토한 절터가 만호봉사지가 아닐까하는 추측이 있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미술관 1층에 전시하고 있다. 인왕상은 모두 나신의 상반신으로 중앙을 향해 몸을 꺾은 역동적인 자세로 모두 권법인을 취하고 있다. 하나의 상은 오른손에 보주를 쥐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유물 카드에는 1930년 10월 인왕상 석주 4기가 경주고적보존회에서 박물관으로 반입된 것으로 돼 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 학자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의 조사보고서에는 1931년 6월 만호봉사지에 대해 “사지는 만호봉 중턱에 남면을 하고 있으며 탑 잔석의 파편이 그 계곡에 있다. 옮겨진 탑 조각 잔석은 여기서 옮겨진 것으로 전한다”라고 돼 있다.학계에서는 만호봉에서 동쪽으로 약 300m 지점에 만호봉사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사지에는 옥개석 1매, 기단석 및 갑석의 일부가 남아있다./최병일 작가

2022-10-16

한번 맛보면 다시 찾는 ‘감홍사과’ 새콤달콤 매력 속으로

문경시는 오는 15일부터 30일까지 16일간 문경새재 야외공연장 일원에서 ‘백설공주가 사랑한 문경사과’라는 주제로 2022 문경사과축제를 연다.이번 축제는 △개막식, 폐막식, 축하공연 등 공식행사와 △문경사과 홍보관 등 전시행사 △사과특판, 온라인 스토어, 농특산물 판매 등 판매행사 △사과따기 체험, 사과럭키박스, 사과배 레이스 등 체험행사 △문경사과 학술 세미나, 애플데이, 사과나눔행사 등 특별행사 △문경산악체전, 전국 장애인 행복 걷기대회 등 연계행사로 치러진다.오는 15일 오후 2시 야외공연장에서 열리는 개막식에는 인기가수 이찬원, 홍자, 주미 등이 출연해 축제의 흥을 돋우고 방문객의 만족도를 높인다. 또한 축하공연으로 16일 가수 태진아, 주미, 임혁이 출연하며 25일은 현숙, 서지오, 문연주가, 폐막식인 30일은 주미, 남일해가 각각 무대를 달굴 예정이다.야외공연장 잔디광장에서 열리는 문경사과 홍보전시관에는 △문경사과 이야기 △문경사과 품평회 출품 사과 전시 △사과 가공품 전시 △문경사과 포토존 등으로 꾸며진다.옛길박물관 앞에서 펼쳐지는 판매장에는 19개 부스에서 감홍, 양광, 시나노 골드 등 이 시기에 출하되는 사과들이 판매되면 축제 홈페이지를 통해서도 구매가 가능하며, 문경농특산물 판매장에는 오미자, 표고버섯, 약초, 농산물 가공품 등 20여개 부스가 운영된다. 행사장과 13개 농장에서 이뤄지는 체험행사는 △사과따기 체험 △사과 럭키박스 △사과배 레이스 △사과 가위바위보 △사과 사행시 △사과 높이쌓기 △사과껍질 길게 깍기 △사과 빨리 쪼개기 △사과 바람개비 만들기 등이 있다. 25일 문경관광호텔에서 열리는 문경사과 학술세미나는 사과재배농업인과 농업인대학 교육생 등이 참석해 ‘지역에 맞는 사과재배기술 정립 및 문경사과 발전 방안’에 대해 열띤 토론을 펼칠 예정이다.문경농협 주관으로 열리는 애플데이 행사는 25일 야외공연장에서 문경사과 홍보와 노래자랑 및 장기자랑, 축하공연 등의 내용으로 진행된다.문경사과축제추진위원회는 축제 기간 중 주말에 문경새재 일원에서 방문객들에게 문경사과를 나눠주는 나눔행사를 가질 계획이다.사과축제와 연계한 행사로 22~23일 문경산악체전이 열리며, 26일에는 경북장애인체육회 주관으로 전국 장애인 행복 걷기대회도 야외공연장에서 열린다. 신현국 문경시장 최근 2년 동안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온라인 비대면 축제로 진행돼 많은 아쉬움을 샀던 문경사과축제가 드디어 3년 만에 일상으로 돌아와 대면축제로 개최됩니다. ‘백설공주가 사랑한 문경사과’라는 주제어로 문경새재도립공원에서 전시행사와 판매행사, 그리고 공연행사가 알차게 진행됩니다.문경사과는 일교차가 큰 백두대간 산간 분지 지역의 비옥한 토질과 기후, 기상재해가 없는 축복의 청정 자연환경에서 전국 최고의 사과재배 기술로 생산하여 육질이 단단하고 향이 짙으며 당도가 높아 꿀사과라 불리며, 특히 축제기간에 주력품종으로 판매되는 문경감홍사과는 높은 당도를 자랑하며 식감이 좋아 한번 먹어보면 다시 찾게 되는 대한민국 국가대표 사과로 인정받았습니다.문경시에서는 2008년부터 매년 한·일 사과재배 기술교류와 일본전문가 초청교육을 통해 해마다 500여명의 사과재배 농업인들에게 지속적인 선진재배 기술을 보급하고, 농업인대학 사과반 과정을 운영하며 매년 100여명의 수료생을 배출하고 있습니다. 또한 2009년 ‘사과연구소’를 건립하여 지역특성에 맞는 품종 시험재배와 농업인의 현장 실습 등을 꾸준히 진행하며 고품질 사과생산의 전초기지로 활용하고 있습니다.특히, 매년 사과축제기간 중 사과 품평회를 개최하여 문경지역 사과재배 농가가 출품 생산한 사과의 외관심사와 포장심사 등 엄격한 기준을 통해 선발하여 고품질 사과생산을 위한 내부 경쟁을 유도하고 있으며, 선발된 사과는 축제 기간 중 사과홍보전시관에 전시하여 문경사과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 데 사용됩니다.최근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인하여 잠시 주춤했던 지난 2년의 시간을 뒤로 하고, 사과 생산농가와 사과축제추진위원회에서는 이번 대면축제를 통해 재도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가기 좋고, 놀기도 좋은 문경새재에서 열리는 문경사과축제에 많은 분들께서 방문하여 이찬원, 태진아같은 인기가수의 공연, 맛 좋은 사과와 온가족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축제 프로그램, 그리고 가을을 품은 문경새재를 함께 즐기는 시간을 여유롭게 가져보시길 바랍니다.농촌진흥청 원예연구소에서 최초 육성된 국산품종인 감홍사과는 홍로보다 대중적인 인지도는 떨어져도 맛에서는 전혀 뒤처지지 않습니다. 10월 상·중순경에 수확하는 감홍은 재배가 까다롭고, 보관기간이 짧은 단점이 있지만 식감은 연하고 과즙이 많으며, 압도적인 단맛(15~16brix)에 약간의 신맛(산도 0.4%)이 잘 어우러져 한번 감홍을 먹어본 사람은 다시 찾게 되는 고유한 매력을 가진 품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우리시에서는 부사보다 평균 당도가 2~4brix 높고 식감이 좋아 경쟁력 있는 감홍을 지역특화품종으로 보급하기 위해 시범사업과 보조사업을 지원해왔고, 더불어 문경감홍사과재배연구회를 중심으로 재배기술을 교육하고 관리하여 문경의 감홍 재배면적은 10년 전보다 2배 정도 증가하여 2022년 현재 400ha에 이를 정도로 크게 늘어난 상태입니다.올해 초 포항에서 열린 과수산업 발전방안을 위한 농림축산식품부 주관 간담회에서는 시장 개방화에 대응하여 사과 경쟁력 제고를 위한 방안으로 문경 감홍사과의 집단보급 성공사례가 소개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코로나19의 예상치 못한 등장으로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진 지금, 특히 무엇을 먹든지 개성있고 맛있는 것을 선호하는 현상이 트렌드가 되며 맛에 있어서는 어떤 사과보다도 탁월한 ‘감홍’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문경사과축제 현장에 방문하셔서 직접 감홍사과를 맛보고 즐겨보시길 권해드립니다.얼마 전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던 문경오미자축제에서는 ‘축제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투자’라는 시정방향에 따라 모든 프로그램 구성 및 축하공연까지 전국 최고의 수준으로 진행되어 농가 매출 증대와 참여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내며 다시 한번 더 축제를 위한 투자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보름 간의 문경사과축제에서도 주력상품인 감홍사과의 주산지에서 열리는만큼 전국 최고의 위상에 맞게 탁월한 맛으로 대표되는 ‘문경사과’의 강점을 적극 활용하고 체험·판매행사의 완성도를 높여 성공적인 축제로 평가 받을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하였습니다.추후 우리시에서 개최하는 문경약돌한우축제와 더불어 내년 진행할 축제들 또한 적극적인 투자를 바탕으로 최고를 지향하며 코로나19로 위축된 지난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는 기회로 만들어 문경의 새로운 성장 동력원으로 구축하여 경제활성화에 앞장설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문경/강남진기자 75kangnj@kbmaeil.com

2022-10-13

인간 상록수의 못다 이룬 꿈

지금 포항에서는 의과대학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20여 년 전에도 포항에서는 선린병원과 한동대학교의 합병과 더불어 의과대학 설립 및 의대 부속병원 건립의 꿈이 무르익었고, 그 중심에 김종원 원장이 있었다. 김종원 원장은 지인들에게 자신은 소망을 거의 다 이루었는데 두 가지를 이루지 못했다고 말하곤 했다. 하나는 북에 두고 온 세 아들을 다시 만나지 못한 것이고, 또 하나는 포항에 의과대학과 의대 부속병원을 설립하지 못한 것이었다.김 원장은 교육사업에도 굵은 발자취를 남겼다. 1983년 포항간호전문대를 인수해 선린대학을 세웠으며, 1997년에는 의과대학 설립을 위해 자산 규모 1천억 원이 넘는 경북 최대 종합병원인 선린병원을 한동대학교에 기증했다. 의과대학 신설의 꿈은 끝내 이루지 못했지만 당시 재정적으로 어려웠던 한동대학교가 회생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 : 지금 인터뷰 장소인 선린대학 본관은 고인의 호를 따서 ‘인산관’이라 부르고, 고인의 유품이 전시된 기념관도 있습니다. 간호전문대학을 인수해 선린대학으로 바꾸셨는데 의료 인력 양성에 관심이 많으셨나 봅니다.김 : 당시 선린병원의 가장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 교육을 실현하는 것이었는데, 그 결실이 공립 포항간호전문대학을 인수함으로써 이루어졌지. 경북도립 포항간호기술학교는 1969년 개교 이래 교육정책의 변화에 따라 포항간호전문학교(1972년)와 포항간호전문대학(1979년)으로 개편되어 운영되다가, 1982년 말 재정난으로 허덕이던 모든 공립 간호전문대학을 사립화한다는 문교부의 발표가 있자 8개에 달하는 대구·경북 지역의 기관과 개인들이 학교를 인수하려고 뛰어들었어. 문교부의 방침이 나오자마자 선린학원 설립 이사회를 열고 김종원 원장이 초대 이사장을 맡아 본격적인 인수 절차를 밟았지. 대아그룹의 황대봉 회장도 인수를 추진하다가 평소 친분이 있던 김종원 원장님의 뜻을 알고는 흔쾌히 양보했어. 포항간호전문대학을 성공적으로 인수한 다음에는 내가 선린학원에 파견되어 부지 물색 등 행정 절차를 밟았지. 선린대학교는 이후 보건 계열의 명문 학교로 자리를 잡았어.이 : 한동대학교 기증과 의과대학 설립 추진은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나요?김 : 1995년 3월 한동대학교가 개교한 후에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았지. 어느 정도였냐면 상수도 요금을 못 냈어. 이듬해 김영길 한동대 총장이 김 원장님을 찾아왔어. 그때 원장님은 일선에서 물러나 협동원장으로 계셨지. 김영길 총장은 한동대학교의 학생 수가 470여 명밖에 안 돼 등록금 수입으로는 학교 운영이 어렵다고 했어. 그러면서 선린병원의 재정적 도움을 받기 위해 선린병원과 한동대학교를 합치자고 제안한 거야. 병원이 학교에 흡수되는 형태인데, 그렇게 되면 한동대학교 선린병원이 되는 거지. 이 : 그 계획은 결국 무산되고 재분리 절차를 밟게 되지 않습니까?김 : 당시 원장님은 평생의 꿈인 의과대학 설립과 부속병원이 가능하다 싶어 김영길 총장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기대도 컸었지. 한동대학교는 선린병원과 합치면서 금융기관으로부터 융자를 받을 수 있게 돼 학교 재정에 숨통이 트였어. 그런데 의과대학 신설은 지역 할당제라는 정부 방침 때문에 사실상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했어. 문제는 거기서 끝난 게 아니야. 의대를 세우고 부속병원이 되어야 비과세 혜택을 보는데 그게 아니다 보니 병원이 수익사업체가 되면서 수십억 원의 세금 폭탄을 맞게 되고, 그 바람에 잘나가던 선린병원의 경영에 큰 어려움이 닥쳤지. 그래서 다시 학교와 병원을 분리할 수밖에 없었어. 그 과정에서 학교와 병원이 소송전을 벌이며 불편한 관계가 되었지. 그렇게 분리해서 선린의료원이라는 의료법인을 만들었지만 건물 이전 등기 비용이 없을 정도로 경영이 어려워졌어. 김 원장님은 의과대학 설립의 꿈도 이루지 못하고 병원 경영도 어렵게 되는 걸 보시고 소천하셨으니 참 안타까운 일이지.이 : 한동대학교를 통한 의과대학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한동대학교에서는 원장님께 고마움이 크겠군요.김 : 김영길 총장님이 원장님 장례식에서 조사(弔辭)를 했는데 이런 내용이 있어. “한동대 개교 직후 초면인 저에게, 내 평생의 기도 제목은 지역 사람들에게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국내외 오지와 북한에 의료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라며, 풍전등화의 재정 위기 상태인 학교에 평생을 바쳐 키워 오신 선린병원을 한동대에 기증하셨고 그 뜻이 학교엔 큰 버팀목이 되었다.”이 : 사단법인 한국상록회는 국가와 민족에 헌신하고 봉사하며 올곧은 삶을 살아온 사회 원로를 ‘인간 상록수’로 추대하고 있는데, 김 원장님이 이 상을 받으신 것도 한동대에 선린병원을 기증하신 것 때문인가요?김 : 그렇지. ‘인간 상록수’는 한국상록회 전국 회원들이 만장일치로 추대하는 상이지. 1999년에 “평생 일군 재산인 선린병원을 후학 양성을 위해 한동대학교에 기증해 무소유를 실천하셨다”며 김 원장님을 제14대 인간 상록수로 추대하셨어.2007년 3월 26일, 가난하고 소외된 자에게 인술을 베푼 김종원 원장은 한 줌의 재로 돌아가셨다. 김 원장은 1984년 보건사회부장관 표창을 비롯해 1984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로부터 사회봉사상을 받았고, 1985년 대통령 표창과 1990년 제14회 월남상 수상에 이어 1991년에는 포항시민상을 수상했다. 1999년에는 제14회 인간 상록수상 수상자로 추대되기도 했다. 고인의 장례는 선린병원, 한동대학교, 선린대학, 포항북부교회(현 기쁨의 교회), 대한예수교장로회 포항노회 등 5개 기관 연합장으로 치러졌으며, 3월 28일 본원 발인 예배에 이어 포항북부교회 발인 예배 후 1983년부터 교육사업을 펼쳤던 선린대학교 교정을 거쳐 봄볕 따사로운 경주공원묘원에 안장되었다.김화문 기쁨의 교회 원로장로와의 인터뷰는 네 차례에 걸쳐 기쁨의 교회와 선린대학교 인산관에서 진행되었다. 인터뷰에는 기쁨의 교회 김정치 원로장로와 한동식 장로가 함께 배석해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해주었다. 수고해주신 두 분께 깊이 감사드린다.“저는 거룩하게 사회사업을 위해 이 병원을 한동대학에 기증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잠시 맡겨주셨던 것을 이제 하나님께 돌려드린 것뿐입니다.”- 《빛과 소금》 1998년 11월호.“이제 본인은 포항간호전문대학을 인수하여 양질의 의료 인력을 양성토록 추진할 것이며 보건계열 학과를 증설하고, 나아가서는 의과대학까지 발전시켜 고급 인력을 길러 지역은 물론 국가 발전에 기여하겠습니다.”- 1983년 1월 문교부 제출 선린학원 설립 허가 신청서 중에서.끝대담·정리 : 이한웅 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

2022-10-12

포스텍엔 따뜻하고 편안한 친구 같은 공간 카페 ‘커미’가 있다

커피가 ‘한국인의 기호품’으로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다. 21세기 초반만 해도 인스턴트커피에 설탕과 프림을 섞은 믹스커피가 주류였지만, 대세가 원두커피로 기운 후 향과 맛에 민감해진 이른바 ‘커피 애호가’도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전국이 그러하니 포항이라고 다를 바 없다. 관광객들에게 ‘푸른 물결 동해를 품은 포항의 핫 스폿’으로 불리는 영일대해수욕장엔 현재 수십 개의 커피숍이 성업 중이다.한꺼번에 100명이 넘는 손님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커피전문점부터 10여 평 남짓의 조그만 커피 가게까지 그 형태도 다양하고, 거기서 만들어내는 커피의 맛과 향 또한 소비자의 취향에 맞춰가며 다양해지고 있다.유별나게 느껴질 수도 있는 한국인의 커피 사랑은 각종 조사를 통한 데이터를 봐도 어렵지 않게 드러난다.올해 초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사람들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떤 음료를 가장 좋아합니까?”이 물음에 “커피”라고 답한 이들이 32.4%. 설문조사에 응한 답변자 셋 중 하나가 커피를 즐겨 마시는 음료로 지목했다. 탄산음료(7.7%)와 우유(11.3%)를 압도하는 결과였고, 2위로 조사된 과일주스(18.1%)보다 2배 가까이 높은 수치다. ▲커피전문점과 커피소비량 증가의 중심엔 ‘MZ세대’가...또 다른 조사에선 한국 커피전문점의 시장 규모가 43억 달러로 나타났다. 중국과 미국에 이어 세계 3위 규모다. 중국의 인구가 한국의 30배에 가깝고, 미국 소비자의 높은 구매력을 감안한다면 이는 의외의 결과로 다가온다.커피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커피 수입액은 1조 원에 육박했다. 이는 1년 사이에 2천 억 원이 증가한 것. 이쯤 되면 2022년 현대 한국인들은 옛사람들이 밥 먹고 숭늉 마시듯 커피를 즐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하다.한국 커피시장의 급격한 팽창과 늘어난 커피 소비량의 중심엔 세칭 ‘MZ세대’가 자리했다.남과는 다른 것, 기존에 있는 것들과는 구별되는 아이템을 선호하는 그들은 오늘도 새로운 맛과 향을 느낄 수 있는 ‘인생 커피’를 찾아 외국 커피 프랜차이즈점부터 원두 볶는 고소한 향기 가득한 동네 커피숍까지 찾아다닌다. 물론 나이 지긋한 이들 중에서도 커피 애호가는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회갑을 넘겼음에도 하루에 커피 4~5잔을 마시는 교수, “커피 향기 없는 아침을 상상할 수 없다”는 중년의 사업가도 기자 주위에 있다.현실이 이렇다보니 다수의 MZ세대와 기성세대가 함께 생활하는 공간인 대학에 커피전문점이 늘어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지난 2020년 말 포항공과대학교(POSTECH·총장 김무환) 내에 문을 연 coffee nearme(커피 니얼미·일명 커미)는 독특하고 특색 있는 커피전문점이다.포스텍에서 시작한 로컬 카페 ‘커미’는 포스테키안(포스텍 학생들과 구성원들을 지칭하는 단어)의 행복을 위해 학생들의 감성과 라이프스타일을 담아 학교에서 직접 기획한 카페로 이름을 알렸다.“이는 대한민국 공대 중 처음으로 학생들의 행복을 위해 기획돼 상표 등록을 마친 카페”라는 게 포스텍 복지회 이주상 팀장의 설명이다. ▲한국 공대 최초로 학교에서 기획해 상표 등록한 ‘커피 니얼미’“포스텍 학생들의 일상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커피가 함께 존재한다. 모닝커피로 하루를 시작하거나, 바쁜 강의와 일과 중에 잠시 여유를 즐기기 위해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밤샘 연구나 공부를 위해 ‘커피는 연료와 같다’며 즐겨 찾는 등 커피는 학생들에게 매우 가깝고 친근한 친구와 같다”는 부연이 이어졌다.덧붙여 몇 가지를 더 물었다.-학생들의 복지 확장 차원에서 카페를 오픈한다는 건 30년 전에 학교를 다닌 나로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지금과 그때는 많이 다르다.(웃음) 커미 오픈 당시에도 교내에 카페가 두 군데 있었다. 그곳들을 새롭게 리모델링할 시기도 됐었고, 포스텍 학생들에게 바로 내 옆에 있는 친구처럼 친근하고 따뜻하고 위로가 되는 카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포스텍 자체 브랜드 커미는 그런 이유로 론칭됐다.”-커피 니얼미의 오픈 과정이 궁금하다.“2020년 12월 7일 포스텍 학생회관 1층에서 처음 영업을 시작했다. 기존의 노후된 카페를 새롭게 만들고자 재능 기부 디자이너의 도움을 받아 브랜드 네이밍, 공간 리모델링, 카페 운영체제 개선, 웨이브온 커피와의 콜라보를 시작할 수 있었다. 포스텍 학생회관점 공간 리모델링 비용은 포스텍 철강대학원 이종수 특임교수가 기부금을 출연했다. 그리고, 국내 최고 카페 중 하나인 웨이브온 커피의 좋은 원두와 함께해 학생들로부터 호평 받았다. 커미 카페는 포스텍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근로 장소이기도 하다.”-‘웨이브온 커피와의 콜라보’라고 했는데, 어떤 의미인가.“웨이브온 커피는 부산 기장에 자리한 로스터리 카페(원두를 직접 볶고 갈아 커피를 만드는 가게)다. 아름다운 부산의 바다, 매력적인 장식으로 꾸며진 공간, 직접 로스팅한 커피로 유명하다. 불과 4~5년 만에 웨이브온 커피는 기장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2020년엔 한국 라떼아트 챔피언십 공식 원두 공급사로 선정되는 등 실력과 도전정신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웨이브온 커피의 모습이 젊고 도전적이며 실력을 갖춘 포스텍 학생들과 일맥상통 하는 게 있어 커미와 어울리는 파트너라고 믿게 됐다.” ▲포스텍 도서관 방문한다면 향기로운 커피 한잔을웨이브온 커피에서는 포스텍만을 위한 원두도 브랜딩했다. 이름하여 ‘P.320’. 포스텍엔 매년 유능한 공학도를 꿈꾸는 학생 320명이 입학한다. 소수정예다 P.320은 그 상징성을 담은 이름.이 원두의 선정을 위해 웨이브온 커피에서 기존에 제공하던 원두와 포스텍만을 위해 새롭게 브랜딩한 원두 등을 가지고 교내 구성원을 대상으로 블라인드 테이스팅(사전 정보 없이 시음하는 것)을 진행했다. P.320은 그 과정에서 가장 많은 이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고 한다.“브라질, 콜롬비아, 과테말라 커피콩을 브랜딩 해 로스팅 작업을 거친 P.320은 깨끗한 단맛과 탄탄한 바디감, 길게 이어지는 향기가 장점”이라는 게 포스텍 복지회의 설명. 더불어 우유와 섞어도 맛있는 커피라고 한다. 즐기는 방법도 에스프레소, 모카포트, 프렌치프레스, 핸드드립 등 다양하다.당연한 이야기지만 대학엔 학생 외에도 교직원 등이 함께 생활한다. 그들도 ‘커미’를 좋게 평가하는지 궁금했다. 또한, 학교 바깥의 커피전문점에 비해 가격 경쟁력이 있는지를 물었다.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학부생과 대학원생뿐만 아니라 교직원들도 커미를 애용한다. 포스텍 캠퍼스엔 커미 외에도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 포항의 로컬카페 등이 있다. 그중 커미 카페는 가장 접근성이 좋고, 저렴한 가격에 높은 품질의 원두커피를 제공하고 있기에 포스텍 구성원들이 즐겨 이용하고 있다. 아메리카노 가격은 레귤러 사이즈가 2천500원이다. 오픈 당시의 가격을 현재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얼마 전인 지난 8월 말에는 포스텍 학내 도서관인 박태준학술정보관 1층에 ‘커미 도서관점’이 새롭게 문을 열었다.포스텍은 박태준학술정보관을 지역사회 시민들에게 개방하고자 리모델링을 추진했고, 1층에 커미 카페가 입점하게 된 것.커피가 남녀노소 불문 ‘한국인이 가장 즐기는 음료’라는 사실을 감안해 정신의 향기를 높여줄 책과 향긋한 커피를 매칭시킨 것으로 보인다.그곳에선 커미 1호점인 학생회관점에서 판매하는 메뉴는 물론, 웨이브온 커피의 스페셜티 원두도 판매된다. 커미 학생회관점과 동일하게 가격이 저렴하고, 고급 원두도 판매하고 있어 포스텍 구성원들과 도서관을 방문하는 시민들에게 동시에 사랑받고 있다고.낙엽 떨어지고 차가운 바람 불어오기 시작한 만추지절(晩秋之節). 만약 포스텍 도서관을 찾는다면 향기로운 커피 한잔으로 가을의 우울을 떨쳐보면 어떨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10-11

스카이 워크 위를 걸으며 밤바다의 정취에 취하다

송도에서 동빈내항을 건너면 영일대해수욕장이 나온다. 1975년 개장 때부터 북부해수욕장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다가 ‘영일대(迎日臺)’라는 해상 누각을 조성하면서 2012년 6월에 현재 명칭으로 바뀌었다. 송도해수욕장에 사람이 몰리던 시절에 영일대해수욕장은 한가한 해변이었다. 하지만 송도해수욕장이 백사장 유실로 명성을 잃으면서 영일대해수욕장이 부각되었고, 어느새 포항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해수욕장이 되었다. 송도해수욕장처럼 백사장이 유실되지 않고 해수욕장으로서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영일대해수욕장에 사람들이 붐비는 이유라 할 수 있다. 포항의 대표적인 축제인 국제불빛축제 주행사를 비롯해 사계절 내내 크고 작은 행사가 열리는 곳 또한 영일대해수욕장이다. 바다는 늘 그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있는 듯하지만 순간마다 다른 빛깔, 다른 모습이다. 해가 뜨거나, 햇살을 받아 윤슬이 반짝이거나, 저녁노을이 물들거나, 달이 뜰 때면 바다는 전혀 다른 풍경화가 된다. 호수처럼 잔잔하거나 파도가 높거나 태풍이 몰려오면 바다는 또 다른 풍경화를 펼쳐 보인다. 바다는 그렇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풍경화를 품고 있다. 바다를 속 깊이 좋아하는 사람은 무심해 보이는 바다의 안부가 궁금해 매일같이 바다를 찾는다.사계절 내내 붐비는 영일대해수욕장영일대해수욕장은 사계절 내내 사람들로 붐빈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즐길거리와 먹을거리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횟집을 비롯해 커피숍, 식당, 술집, 숙박시설 등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1970∼1980년대의 한산했던 풍경을 떠올리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해 질 녘에 바다 위로 노을이 물들고, 어두운 바다에 선박들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면 영일대해수욕장도 화려한 불빛으로 갈아입는다. 제철공장의 거대한 조명이 불을 밝히면 영일대해수욕장의 밤은 더욱 화려해진다. 형형색색의 조명과 어우러지는 밤바다의 정취는 영일대해수욕장의 또 다른 매력이다.영일대해수욕장에서 북쪽으로 가면 설머리 마을이 나온다. 신라 경순왕 때 형산(兄山) 정상에 있는 형산사에서 동해 쪽을 내려다보니 고운 모래밭이 하얀 눈처럼 덮인 곳이 눈에 띄어 설(雪)머리라 했다는 얘기가 전한다. 그만큼 포항 해변의 모래가 고왔다.한적한 어촌이었던 설머리 마을에 고급 횟집이나 카페 같은 건물이 가득 들어차 있다. 포항에서는 유일하게 기존 어항에 요트 등이 정박할 수 있는 피셔리나(fisharina)도 갖추었다. 영일대해수욕장에 사람이 몰리면서 바로 옆에 있는 설머리 마을도 영일대해수욕장처럼 바뀐 것이다. 세월은 번화가를 쇠락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한적한 곳을 번화한 곳으로 바꾸기도 하는데, 설머리 마을은 후자 쪽이다. 영일만이 한눈에 보이는 환호공원영일대해수욕장에서 설머리 마을을 지나 여남(汝南)으로 이어지는 해안 길은 걷거나 드라이브하기에 좋다. 반려견을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 조깅을 하는 사람,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이 길은 설머리 마을의 아리랑횟집까지만 있었다. 그 위로는 길이 끊어지고 군부대의 해안 초소가 있었다. 을씨년스러운 초소를 철거하고 해안을 매립해 길을 이었으니 그 풍광이 오죽할까. 설머리 마을에서 여남 가는 길 중간에 환호공원이 있다. 국내 최대 규모의 체험형 조형물인 스페이스 워크가 조성된 후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는 곳이다. 공원에는 테마 소공원과 레저 공간, 전망대, 팔각정, 산책로 등이 곳곳에 펼쳐져 있다. 공원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영일만, 특히 보름달이 뜬 영일만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포항을 왜 일월(日月)의 고장이라는 하는지 실감할 수 있다. 캄캄한 밤바다에 은가루를 가득 뿌려놓은 듯한 풍경 앞에서는 말을 잃게 된다.영일만이 내려다보이는 환호공원 언덕 양지바른 곳에 손춘익 문학비가 있다. 손춘익은 한국 아동문학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작가다. 따뜻한 휴머니즘과 예리한 사회의식을 바탕으로 『작은 어릿광대의 꿈』 등 50여 권의 동화집과 『작은 톱니바퀴의 연가』 등 여러 권의 소설집을 남겼다. 평생 포항을 떠나지 않았으며, 포항의 문화예술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의 문학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외롭다는 것은 언제나 아쉽게 사라지는 것.하지만 오늘 하루 이 아름답고 황홀한 꽃 한 송이가사람들의 가슴속에 심어준 보석들은 영원히반짝이고 있을 것을 우리는 믿어도 좋을 것입니다.- 동화 「꽃피는 얼굴」 부분동해안굿의 상징 김석출이 태어난 여남환호공원을 지나면 여남이 나온다. 자연부락인 여남은 도심에서 떨어져 있는 조용한 어촌이었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대양초등학교도 2001년에 폐교되었다. 설머리 마을에서 여남까지 해안 길이 이어지고 마을 주변에 큰 횟집들이 들어서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근래 바다가 잘 보이는 야산에 커피숍이 하나둘 들어서더니 어느새 포항에서 고급스러운 커피숍이 가장 많은 곳으로 변했다. 영일만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의 가치를 여남의 변화가 보여주는 것이다.여남은 동해안굿의 상징인 김석출 만신(萬神)이 태어난 곳이다. 김석출은 1922년 이곳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부터 굿판에서 징채를 잡을 정도로 솜씨가 뛰어났다. 동해안굿은 그를 떠나서 얘기할 수 없다. 그의 삶과 예술적 궤적을 따라가야 비로소 동해안굿의 전모를 이해할 수 있다.김석출은 20대 중반에 부산으로 떠났지만 그의 일가는 포항에 남아 무업(巫業)을 이어갔다. 하지만 바닷가 마을마다 열리던 굿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이들이 활동할 수 있는 무대도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바닷가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긴 굿은 큰 놀이판이자 치유의 마당이고 종합예술이다. 바다를 무대로 한 뿌리 깊은 문화의 향연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는 것은 여간 쓸쓸한 일이 아니다. 김석출의 조카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에서 20여 년간 동해안별신굿을 전수하던 김정희가 2019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동해안굿이 처한 비극적 현실이다.김석출은 여러 장의 음반을 낸 것은 물론 해외에서 수차례 공연하며 호평을 받은 예인(藝人)이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땡큐, 마스터 킴〉은 호주 최고의 재즈 드러머(drummer)인 사이먼 바커(Simon Barker)가 김석출에게 매료되어 그를 만나러 가는 예술적 여정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땡큐, 마스터 킴’을 보는 동안 관객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김석출과 그의 음악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했던 우리 음악의 넓이와 깊이에 대해서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된다. 사이먼 바커의 팬들은 변화된 그의 음악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이전보다 음악적으로 성숙했다는 것을 팬들이 먼저 알아챘다. 내가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이전과 달라졌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고재열, 「굿 장단에 푹 빠진 외국인, 우리 가락을 영상에 담다」, ‘시사IN’ 155호, 2010.김석출이 태어난 곳에 그를 기억하는 상징물 하나 없다는 것이 아쉽지만 언젠가는 그의 이름 석 자를 새긴 아담한 돌 하나라도 세워지는 날이 오지 않겠는가.국내에서 가장 긴 해상 보도교, 스카이 워크여남의 바다 위에 특별한 구조물 하나가 들어서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2022년 4월 13일 해상 스카이 워크(Sky Walker)가 개장한 것이다. 스카이 워크는 평균 높이 7미터, 총길이 463m에 이르는 국내에서 가장 긴 해상 보도교다. 바닥이 투명한 특수유리로 제작되어 바다 위를 걷는 듯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출입구가 해안 산책로와 연결되어 바다와 육지를 넘나들며 영일만을 조망할 수 있고, 야간에도 개장하기에 밤바다의 정취를 감상할 수 있다.환호공원의 스페이스 워크에서 여남의 스카이 워크까지는 승용차로 7∼8분 거리다. 스페이스 워크에서는 우주를 걷는 듯한 느낌을, 스카이 워크에서는 바다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을 누릴 수 있다. 영일대해수욕장에서 여남까지는 다른 해변에서 누릴 수 없는 이색 체험을 만끽할 수 있다.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

2022-10-11

삶과 죽음이 분리되지 않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왕릉’

◇진위논란에 휩싸였던 신문왕릉경주의 왕릉은 아름답다. 무덤이 아름답다는 말은 썩 어울리지 않지만 신라왕릉을 갔다 온 사람들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둥그렇게 원형을 그린 언덕에 부드럽게 솟은 곡선은 주변의 수풀과 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시내에 있는 왕릉들은 현대적인 건물에 둘러싸여 있는데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다.죽음이란 두렵고 낯선 것이다. 하지만 왕릉은 낯설고 두려운 공간이 아니다. 왕릉은 살아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왕릉은 죽음과 삶이 분리되지 않는다. 친근감까지 느껴지는 왕릉이라고 하면 신문왕릉이 으뜸이다. 신문왕은 문무왕의 맏아들로 지난 호에도 언급했던 ‘만개의 파도를 잠재운다’는 만파식적(萬波息笛) 신화와 관련된 인물이다. 신문왕은 귀족들에게 주는 땅인 녹읍을 폐지해서 귀족의 힘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했다. 교육기관인 국학을 정비해 유교 교육을 행하고 지방행정과 군제를 정비했던 왕으로 알려져 있다.삼국사기에 의하면 “12년(692) 가을 7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신문이라 하고 낭산 동쪽에 장사 지냈다”고 기록돼 있다. 신문왕릉은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데 이전 시대 왕릉보다 장식물이 늘어나고 섬세한 조각들이 돋보인다.신문왕릉은 신문왕의 능이 아니라 아들인 효소왕의 능이라는 견해가 있다. 효소왕릉설의 근거는 황복사 삼층석탑의 금동사리함기에 두고 있다. 본래 황복사 삼층석탑은 신문왕이 692년 7월에 죽자 왕후와 왕위를 계승할 효소왕이 건립했다. 몇 년 뒤에 신목왕후와 효소왕이 죽자 706년에 신문왕의 차남 성덕왕이 금동사리함에 불사리나 다라니경을 넣어 죽은 신문왕, 신목왕후, 효소왕의 명복을 빌었다.경주 낭산 동쪽에 있는 황복사 터 옆에 능터가 있는데 그것이 진짜 신문왕의 능이라는 것이다. 이 능은 신라왕릉 주변을 장식하는 십이지신상이 파괴된 채로 흩어져 있었으며 봉분도 무너져 있었다. 구황동 왕릉지라 불리는 이 유적은 2017년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구황동 왕릉지는 왕이 묻힌 무덤이 아니라 미완성된 왕릉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신문왕릉이 사실은 효소왕릉이라는 견해는 빛을 잃었다. 이근직 전 경주대 교수는 황복사 터 동쪽에 있는 진평왕릉이 신문왕릉이라는 견해를 펼치기도 했다.왕릉의 주인이 정확하게 확인된 경우는 몇 기가 안된다. 선덕여왕릉과 왕릉비의 일부가 발견된 무열왕릉, 흥덕왕릉, 원성왕릉, 성덕왕릉, 헌덕왕릉 정도만 이견 없이 왕릉의 주인이라는 것을 인증받았다. 대부분의 신라왕릉은 ‘OO왕릉으로 추정된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시각이다.토함산 근방에 있는 대표적인 왕릉은 효소왕릉과 성덕왕릉이다. 두 사람은 형제 관계로 신문왕의 첫째와 둘째 아들이다. 32대 효소왕이 먼저 왕위에 올랐고 효소왕이 승하하자 33대 성덕왕이 왕위를 이었다.효소왕은 이름이 이홍이며, 695년 서시전(西市典)과 남시전(南市典) 등 시장을 개설해서 경제력을 확충하고 당나라와 일본 등과 활발하게 수교를 진행했던 왕으로 알려져 있다. 왕릉은 둘레석도 없고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 무덤으로 아무런 특징이 없다.오히려 친동생인 성덕왕릉의 무덤이 외견상 더 화려하다. 둘레석은 물론이고 병풍처럼 판석을 삼각형 받침돌이 받치고 있다. 받침돌 사이에는 십이지신상도 있고 돌사자상과 석인상까지 있다. 왕릉 전방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대형 비석 받침인 귀부(龜趺)도 남아있다.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신문왕릉의 무덤이 효소왕릉이 아니냐는 주장도 왕릉이라기에는 효소왕릉이 너무 빈약해 보이기 때문이다. ◇무신상이 이채로운 원성왕릉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원성왕릉은 경주에 있는 신라 왕릉 중 방문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원성왕릉은 신라 38대 국왕 김경신의 능이다. 원성왕은 즉위한 후 지방행정 개혁을 단행해 총관을 도독으로 바꿨다. 무엇보다 신분으로 관리가 되는 족벌제를 타파하고 준 과거제도인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여 능력 있는 관리들을 대거 등용했다. 독서삼품과를 통한 관리제도의 개혁은 진골 귀족의 견제로 큰 실효는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독서삼품과는 신라 사회를 문치주의로 바꾸며 훗날 고려가 유교를 확립하고 과거 제도를 도입하는 계기가 됐다.또한 저수지의 효시가 된 벽골제를 증축하고 발해와 외교관계를 맺는 등 독자적인 외교를 펼치기도 했다. 원성왕은 798년 12월에 별세했다. 사후 왕의 유해를 봉덕사 남쪽에서 화장했다고 하는데, 삼국사기에는 화장한 후 왕의 유해를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이 때문에 현재의 원성왕릉이 실제로 원성왕의 유해가 묻힌 곳이 맞느냐는 논쟁이 일기도 했다.왕릉을 조성한 자리에는 본래 곡사라는 절의 연못이 있던 자리인데 연못을 메워 능을 조성했다. 능자리가 샘이 솟는 곳이다 보니 물이 괴어 왕의 시신을 바닥에 그대로 안치하지 못했다. 궁리를 거듭하다 양쪽으로 관을 거는 장치를 만들고 거기에 시신을 안치했다. 이런 이유로 걸 괘(掛)자를 써서 괘릉(掛陵)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연못에 돌을 쌓고 그 위에 시신을 걸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관을 거는 장치를 만들었다는 것이 유력한 설로 내려오고 있다.실제로 괘릉에 가면 능 뒤편으로 깎은 석축에서 물이 흐르는데, 물줄기를 돌리기 위해 수로를 따로 만들었음을 볼 수 있다. 흙으로 덮은 둥근 모양의 무덤 아래에는 무덤을 보호하기 위한 둘레석(護石)이 빙 둘러 있다. 이 돌에 무복을 입은 십이지신상이 조각돼 있다.한때 괘릉은 문무왕의 가묘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문무왕은 왕의 유언대로 시신을 화장해서 동해바다에 뿌렸다지만 제사를 지낼 장소가 필요했을 터이고, 괘릉이 물과 관련된 설화가 있는 만큼 문무왕의 가묘가 아니냐는 주장이었다. 일견 설득력이 있지만 문무대왕릉으로 알려진 대왕암이 발견되면서 원성왕릉으로 인정됐다.괘릉은 신라의 왕릉 중 완성도가 높고 보존상태가 뛰어나기로 손꼽힌다. 괘릉의 십이지신상이나 여러 석물은 그야말로 괘릉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유물들이다. ‘경주 원성왕릉 석상 및 석주’는 보물 제1429호로 지정됐다. 경주 원성왕릉을 중심으로 좌·우 입구에 한 쌍씩 석조상들이 배치돼 있으며 문·무인 4점, 사자상 4점, 석주 2점으로 총 10점이다.호인상(胡人像)이나 석사자 등 석물의 구성, 괘릉의 앞에 놓인 단면 육각형 기둥, 그리고 무덤과 배치 관계를 보면 당나라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고 해도 될 만큼 당의 왕릉과 많이 닮았다. 신라 후기부터 당의 복식이나 일부 제도들을 모방했으므로, 당나라 묘제를 왕의 무덤에도 비슷하게 적용했다고 보고 있다.석물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눈이 깊고 코가 큰 서역인 모습을 한 무인상이다. 무인상은 소그드인(페르시아인)으로 추정된다. 무인상은 동서문화의 교류적 측면에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무인상은 외투 안쪽에 갑옷을 입고 칼을 차고 있다. 뒤쪽에는 복주머니 같은 것을 둘렀는데 계산기 역할을 하는 주판 등을 넣는 산낭(算囊)이라고 추정된다. 성덕대왕 능 석인상을 계승한 원성왕릉 문·무인상들은 통일신라시대 조각의 절정이다. ◇네모 형태의 독특한 구정동 방형분효소왕릉과 성덕왕릉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는 구정동 방형분은 독특한 고분 중 하나다. 엄밀하게 말하면 구정동 방형분은 신라 왕릉이 아니다. 경주 신라왕릉은 대부분 둥근 구형인데 이 무덤은 방형(네모 모양)으로 조성됐다. 당시 방형 무덤은 장군총이나 태왕릉 모양에서 알 수 있듯 고구려식 왕릉의 특징 중 하나다. 방형 무덤의 주인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다. 고구려의 왕족으로 통일신라에서 벼슬을 얻어 귀족이 된 안승이나 그 후손의 무덤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그러나 네모 모양이라는 점 외에 내부는 전형적인 신라 후기 굴식 돌방무덤이다. 무덤 외부의 호석 십이지신상이나 무인상, 사자상도 신라 후기 왕릉 양식이다.무덤 한쪽에 안으로 통하는 출입구가 있는데 내부는 이미 도굴당해 돌로 만든 관만 있고 텅 비어있다. 내부가 열려있어 들어가서 볼 수 있다. 쪼그려 앉아 내부를 살피니 지하실 특유의 냄새와 습기가 밀려온다. 앞쪽 중앙에는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있지만 입구가 낮고 좁아서 잘 보이지 않는다.네 모서리에 기둥이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만 남아있다. 이 기둥에 원성왕릉의 무인상과 같은 이방인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 조각은 원성왕릉 석상 및 석주 일괄, 경주 월지의 입수쌍조문 사자공작무늬 돌 등과 함께 통일신라와 서역이 교류했던 증거로 꼽힌다. 이 기둥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 전시하고 있다./최병일 작가

2022-10-10

“모든 국민들이 편하게 법의 보호 받도록 주민 곁에 있을 것”

우리는 법의 우산 아래에서 살고 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산권을 보호받고 행사하기 위해서는 더욱 법에 의존해야 한다. 그런데 사회가 다양화하고 다원화할수록 법률관계는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해 생기는 억울한 문제가 언제든지, 누구에게든지 발생할 수도 있다.배희건 대구경북지방법무사회 회장은 “국민의 재산권을 보호하는 일, 복잡하고 어려운 법률 절차를 시민 편에서 쉽고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법률전문가가 법무사”라고 말한다.“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법은 멀고 높은데 있다는 인식이 존재한다”는 배 회장은 법무사를 “국민 편에서 법률적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생활 법률 전문가”라고 자신한다. -국민들로서는 여전히 법률이 어렵고 문턱은 높은 것 같다. 법무사는 어떤 직업인가.△법무사는 국민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법률서비스를 제공하는 법률전문가다. 등기, 공탁, 경매사건 입찰대리, 회생 파산신청사건 대리, 민사소장, 가압류 가처분, 형사소장, 비송사건 등 업무를 하고 있다. 그리고 법원이나 검찰청에 제출하는 서류의 작성과 제출 대행 업무를 하고 있다. 법원에서 이뤄지는 재판 이외의 사건들에 법무사가 지원해주는 것이다.-법률전문가로는 변호사가 있다. 변호사와 어떤 차이가 있나.△변호사는 법무사의 업무를 포함하여 법률사무 전반에 대해 일을 할 수 있다. 실제 업무에서는 변호사는 소송 대리를 전문으로 하고 있다. 그러니 소송이 아닌 생활 법률사무는 법무사들이 맡고 있다고 보면 된다. 특히 등기 업무나 회생과 파산신청사건은 법무사가 처리하는 것이 의뢰인에게 경제적이고 시간적으로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한다.-재판에서 법무사와 변호사의 차이를 쉽게 설명해 달라.△법무사는 법률전문가이지만 소송대리권이 없다. 법무사의 업무는 소송 서류를 작성하고 제출을 대행하는 권한만 있고 법정에 소송대리인으로 출석할 수 없다. 그래서 법무사가 재판 관련 서류를 작성하더라도 재판에는 민원인이 직접 당사자로 출석해야 한다.-그렇다면 민원인으로서는 구태여 법무사를 찾을 필요가 없을 것 같다.△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실제로 소송사건 중 복잡하고 어려운 사건은 많지 않다. 그러니 재판 당사자가 어느 정도 지식과 능력만 있으면 구태여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더라도 법무사의 도움만으로도 법정에 출석해서 소송을 진행할 수 있다. 법무사가 시간과 경제적인 조건에서도 훨씬 유리하다는 거다. 법무사는 전국 곳곳에 포진해 있어 국민들이 주거지 주변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법률 조언을 받을 수 있다. 경북도내 시군마다 법무사 없는 곳은 없다. 무엇보다 경비도 저렴하다. 변호사는 법정에 출석해야 하니 수임료가 비쌀 수밖에 없지만 법무사는 그런 부담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하다.-법무사와 변호사의 직역 간 다툼은 없나.△법무사와 변호사는 경쟁 관계가 아니다. 서로 보완하면 윈-윈 할 수 있다. 이석화 대구지방변호사회장도 자주 만나 서로 의견을 조율하고 소통한다. 지난 여름 대구 변호사사무실 방화 참사사건 때도 우리 법무사들이 ‘도와줄 일이 없나’ 하고 먼저 제안했고 성금 2천만 원을 모아 변호사회에 전달했다. 국회에서 검수완박 법안 처리를 놓고 여야가 대결 국면에 들었을 때는 대구 법무사회도 반대 현수막을 내걸어 변호사회의 입장을 지지했었다.-최근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이 쏟아지면서 경쟁이 치열해지자 변호사들이 생존경쟁을 위해 활동 반경을 넓히면서 충돌이 생길 법도 하다.△사실 개업 변호사들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그런 우려가 일부 보이기도 한다. 법무사회에서 변호사회에 선의의 경쟁을 벌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등기사건에 대해 법무사와 변호사가 같이 선의의 경쟁을 하고 시장 질서를 무너뜨리는 덤핑은 하지 말자고. 그래야 등기 시장이 건강하게 살아나고 법무사와 변호사가 모두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아파트 등기의 경우 1천 세대 정도 등기 업무를 맡으면 한 때는 수억 원대의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시대가 지나갔다. 지나치고 무질서한 경쟁 탓이다.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 시공사가 하는 보존등기나 입주자가 하는 이전등기, 은행이 하는 설정 등기 등에서 경쟁자는 많고 수요와 공급이 밸런스를 이루지 못하니 규정에 따른 보수를 받는 것이 쉽지가 않다는 거다. 그래서 시장이 제대로 건강하게 돌아가야 한다며 변호사와 법무사가 선의의 경쟁을 해서 공존하자고 제안한 것이다.-현재 개업 변호사는 전국적으로 2만6천명 정도 되고 올해 변호사시험에 1천700명이 합격한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 법무사는 얼마나 되며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법무사는 전국 7천500여 명이다. 대구경북 회원 640명(9월 현재) 중 시험으로 법무사가 된 회원은 104명(16%) 뿐이고 법원 출신이 344명, 검찰 출신이 192명으로 대부분이 법조 경력자다. 법무사 시험은 어렵고 까다롭다. 로스쿨 못지않다. 그렇지만 해마다 120명 정도 인맥이나 경험도 없이 새로 진출하는 법무사에게 법률시장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젊은 변호사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법무사와의 영역 다툼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도 한 원인일 것이다.-이력이 특이하다. 중졸로 고졸자격 검정고시 출신으로 검찰 수사관이 됐다.△농사짓다가 평생 농군이 될 수는 없다며 스물일곱 청년시절 홀어머니를 남겨두고 성주에서 대구로 나와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하루 4시간 자고도 정신은 초롱초롱했다. 시험에 떨어지면 농사꾼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절박한 심정이 나를 몰아세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20대 1이라는 경쟁을 통과했으나 절박하면 최선을 다하게 된다는 경험을 얻었다.-하필 어렵다는 검찰사무직을 택했나.△당시 검찰사무직 시험은 수학이 없었다. 다른 과목은 독학으로도 가능했지만 수학의 미분 적분은 정말 해결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검찰사무직을 택했는데 지금 보니 적성에도 맞는 것 같았다.-검찰청에서는 주로 어느 부서에서 근무했나. 당시 검찰청 수사관과 검사와의 관계는 어땠나.△주로 특수부와 형사부 검사실에서 근무했다. 검찰수사관은 관리부서에 근무해야 승진 기회도 많은데 검사실에서 근무했다. 수사에는 베테랑이 됐고 사건처리를 잘 해서 내가 근무하는 검사실에는 미제사건이 적었다. 검사와 업무 협조가 잘 되었는데 그것이 후임검사에게 인수인계되면서 관리부서에서 근무할 기회를 놓친 셈이다. 검사로서는 미제사건이 적으니 고과점수가 높았겠지만 덕분에 나는 검사실 근무를 오래 하게 된 것이다. 강력통 검사로 알려진 김홍일 전 대검 중수부장은 대구지검에서 초임검사 시절 대부분의 검사나 수사관들이 기피하는 끔찍한 강력사건 현장이나 시신 부검 현장 지휘를 자발적으로 도맡다시피 했다. 끝까지 현장을 고집한 김 검사는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과 이명박 전 대통령의 대곡동 사건을 맡아 해결하는 등 그 능력을 인정받아 대검 중수부장과 부산고검장까지 승진해 법조인들이 존경하는 검사의 본보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검찰청에서 근무할 당시 기억나는 일화가 있으면 이야기해 달라.△억울한 사건은 내 일처럼 해결해줘야 직성이 풀렸다. 모두가 외면했지만 ‘반드시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끈기 있게 민원인의 이야기를 들어 해결해주어 ‘한을 풀어 줘서 고맙다’는 큰 절을 받기도 했다. 정동기 전 민정수석이 대구지검 특수부장일 때 대구 유명인사의 아들 사기사건이 있었다. 피해자는 몇 차례 고소해도 사건은 무혐의 처리되었고 고소인만 오히려 사업이 부도나서 피해 다니는 신세가 됐다. 고소인의 아버지가 찾아와서 ‘한을 풀어 달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정 부장에게 보고해서 ‘철저히 수사해 보라’는 허락을 얻고 수사해보니 피고소인은 “내가 누군데…. 네가 뭔데….”라며 안하무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YS(김영삼 대통령)와 직접 통하는 사이였고 여러 차례 진정과 고소에도 사건은 유야무야되고 있었던 것이다. 피고소인에게 “합의 안 되면 구속할 수밖에 없다”고 했더니 내가 거부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던지 당시로서는 유명 변호사를 선임했다. 그러고도 피해자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 결국 구속함으로써 사건을 해결한 적이 있었다. 모두가 외면하던 고위층 관련 사건을 원칙대로 처리해 해결한 것이다. 당시 고소인의 늙은 부모들이 검찰청에 찾아와서 진심으로 감사한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정 수석은 대구지검장과 고검장 시절에도, 그 후에도 기회 있을 때마다 연락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법무사로서도 억울한 일을 해결해 준 사건이 있나.△최근 한 친구가 찾아와서 ‘내 어머니를 찾아 달라’고 하소연을 했다. 친구의 어머니가 후취로 들어와 삼남매를 낳았으나 호적에는 그들 모두 큰어머니(전처) 소생으로 등록돼 있다는 것이다. 70대의 친구는 “자식들 키우느라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생모가 자식 하나 없다는 것이 너무 불쌍하고 억울하기도 하다”며 한을 풀어 달라는 것이다.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도 일만 복잡하고 돈 되지 않으니 자신이 없다면서 아무도 수임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관련 판례를 찾아보고 60년 전 초등학교 생활기록부 등 입증서류를 수집해 판결을 받아 친구의 소원을 풀어주었다. 개인적으로도 보람이었던 이런 사건이 법무사가 해결해야 할 생활 법률사무의 하나라고 생각한다.-변호사 수가 늘어나면서 법조일원화는 미뤄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법무사와 변호사의 법조직역 일원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등기 업무는 실무적으로 법무사가 오히려 유리하다. 법정의 소송사건이야 당연히 변호사가 전문이지만 사법보좌관의 업무, 서류 작성이나 절차법 같은 법무사가 유리한 영역이 있고 이를 인정해야 한다. 절차법에는 변호사보다 법무사가 오히려 유리한 점이 있을 수도 있다. 서로 조화롭게 보완하면 변호사와 법무사가 상호 공존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후배들에게 특별히 강조하는 말이 있나.△“우리는 국가의 혜택을 받았음을 잊지 말자”고 강조하곤 한다. 개인적으로도 회장으로서 후배들에게 보탬이 되는 일을 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사무실도 건물 안쪽에 자리 잡았다. 우연히 들르는 고객이 아닌, ‘일부러 알고 찾아오는 민원인’을 고객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다. 직원에게도, 후배에게도 “우리는 장사꾼이 아니다. 돈 안 되고 귀찮은 고객일수록 친절하게 대해라”고 강조한다. 법률 서비스를 통해 법률로부터 소외되고 불이익을 받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데 법무사가 한 부분을 맡아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 배희건(裵熙建·73)대구경북지방법무사회장. 성주 출생. 고졸 자격 검정고시. 1975년 가을걷이를 마치고 대구로 나와 1년 동안 독학 후 검찰수사관으로 출발. 주로 검찰에서 특수부장 형사부장실 검찰수사관으로 수사업무에 주력. 18년 대구지검 근무동안 검사장, 법무부장관 표창 등 5회 수상하고 1995년 법무사 개업.‘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좌우명이다.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야말로 그 자체로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늘 최선을 다하자’고 스스로 다짐하고 후배들에게도 강조한다. “독학으로 검찰수사관이 되고 보니 긴장이 풀렸는지 더 이상 노력하는데 느슨해졌다. 그 때 계속 공부해서 7급 공채에 도전했다면 국가와 국민을 위해 더 큰 봉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후회가 남는다.”법조직역인 변호사들에게는 ‘병 안의 새를 꺼내려면 주먹을 펴야 한다’며 공생을 강조한다. 욕심 부리지 말고 같이 가자는 것이다./이경우 편집위원

2022-10-10

인술(仁術)의 큰 산이라 하여 ‘인산(仁山)’이 되다

김종원 원장은 단순히 명의(名醫)가 아니라 한평생 사랑과 헌신의 인술(仁術)로 일관한 의인(義人)이었다. 인산(仁山)이라는 호(號)를 가진 그는 행동하는 신앙인으로 규칙적인 삶을 살았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냉수마찰을 한 후 집 앞 교회에 가서 100여 가지의 제목을 놓고 기도한 다음 병원으로 출근했다. 집과 교회, 병원을 오가는 절제 있고 규칙적인 생활이어서 병원 직원들은 그의 출근을 보고 시계를 맞출 정도였다.진료실이 높이 있어도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계단으로 걸어 다녔다. 단 하루도 결근하지 않았고 지각도 하지 않았으며, 날이 밝기 전에 집에서 나와 종일 환자를 돌보고 어두워져서야 집으로 돌아가는 삶을 평생 살았다.자신의 진료실에 에어컨은커녕 선풍기조차 없어 일사병에 시달리면서도 많은 신학생과 고학생들에게는 장학금을 지급해 학업의 길을 가게 했다. 아내 송공현 여사의 가계부를 보면 콩나물값까지 빼곡하게 적으면서도 수입의 60퍼센트 넘게 교회 헌금과 지인들의 장학금 지원으로 지출했다.그가 이 세상에 남긴 업적 가운데 하나는 선린병원을 한동대학교에 기증한 것이다. 1997년에 1천억 원이 넘는 병상 700개 규모의 선린병원을 한동대학교에 기증함으로써 당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는 한동대를 살리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그렇게 병원과 학교를 사회에 내놓고 그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으면서 나눔을 실천하는 삶을 살다가 떠났다.재산 소유나 증식의 기회가 충분히 있었지만 모두 거부하고 천명(天命), 즉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았다. 가난하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그들에게 헌신하며 살아간 것이다. 후배 의사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비즈니스 하지 마라. 히포크라테스 정신으로 진료하라”고 말했다. 힘들고 어려운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을 치료하고 헌신하는 자세야말로 큰 산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의 호가 ‘인술의 큰 산’을 뜻하는 인산(仁山)인 것은 아닐지. 이 : 원장님은 ‘명의’란 말로 단순화하기에는 너무나 의미가 깊고 큰 생을 사셨습니다. 지금 선린대학교의 본관 건물을 설립자의 호를 따서 인산관(仁山館)으로 붙였는데, 호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김 : 호는 김 원장님을 40여 년 동안 지켜본 서영욱 동산의료원 원장이 1999년에 지어주셨지. 서 원장님이 1960년대 말에 선린병원에 들렀다가 부드러운 종이가 없어 신문지로 코피를 막고 진료하던 김 원장님을 보신 모양이야. 그걸 보고서 아프리카 오지의 슈바이처 박사와 같은 인물이라며 ‘인술의 큰 산’이라고 하셨지. 사람이 항상 갖추어야 하는 다섯 가지 도리인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가운데 인이 으뜸이라고 덧붙이면서 말이야.이 : 김종원 원장님은 오래전에 자신의 전 재산을 병원과 대학 등 사회에 모두 환원하셨습니다.김 : 김 원장님보다 검소하게 사는 사람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어. 그분은 기독교 신앙관이 투철해서 재물은 잠시 맡았다가 주고 가는 것이라는 청지기관(觀)을 지녔지. 북에 두고 온 아이들을 생각하며 “내가 이렇게 잘 먹고 잘살아서 되겠나” 하시며 절약과 검소한 생활 원칙을 지키며 사셨어.이 : 본인의 선행을 알리는 것도 꺼리셨다면서요?김 : 원장님은 평소 일기를 썼는데 혹시 자신의 자서전이나 추모집을 발간할 때 근거자료가 될까 싶어 없애버렸지. 언론의 인터뷰는 한사코 거절하셨고. 한동대학에 병원을 기증했을 때도 서울에서 방송국과 신문사 기자들이 많이 찾아왔지만 모두 돌려보냈어. 선행은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셨지. 매달 수십여 곳에 도움을 주면서도 어느 누구에게 그 사실을 말한 적이 없어. 이 : 김 원장님이 평소에 근검하고 절약한 일화를 좀 들려주시지요.김 : 병원 수입을 철저히 투명하게 관리했어. 정작 본인이 받은 급여로는 교회 선교비와 장학금으로 썼지. 사모님은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가계부를 꼬박꼬박 적으셨어. 내가 경리 업무를 맡았을 때인데, 매일 수입 지출 장부와 현금통을 퇴근하면서 원장님이 사시는 사택에 갖다주고 아침 출근길에 찾아왔지. 아침에 장부를 받아보면 밤새 검토해서 한 푼도 허투루 사용되지 않도록 붉은색 사인펜으로 표시를 해두었어. 병원에 딸린 사택은 낡고 허름해서 비가 자주 샜지. 주일날 교회에 계시다가도 비가 오면 사모님에게 전화해서 서재에 보던 책이 있는데 비에 젖을 수 있으니 그걸 옮겨달라고 통화하는 걸 듣기도 했어.김종원 원장의 감동적인 삶은 다음의 기사가 잘 요약하고 있다.종합병원을 세웠으면서도 재산이라고는 병원에서 준 관사 하나와 매달 받는 월급이 전부. 월남할 때 업고 온 젖먹이 외아들이 객지에서 숨져 갈 때도 환자를 돌보느라 아들에게 달려갈 수 없었던 사람. 고아와 환자를 위해 몸 바친 훈훈한 이 할아버지 인술의 한평생.- 《주부생활》 1987년 1월호.이 : 경북 동해안에서 가장 큰 종합병원 원장이면서도 참 청빈한 삶을 사셨군요. 막사이사이상(The Ramon Magsaysay Award)을 수상한 장기려 선생님과 각별한 인연이었다고 들었습니다.김 : 두 분 다 북에서 남으로 오셨지. 평양의학전문학교를 같이 다녔고 평양의학대학에서 의사로 재직할 때 김종원 원장님은 소아과, 장기려 선생님은 외과에 계셨지. 두 분이 친해서 왕래가 잦았는데, 인술을 베푼 훌륭한 의사라는 공통점도 있지.이 : 장기려 선생님이 김 원장님을 만나러 포항에 오셨을 때의 일화를 들려주세요.김 : 한번은 부산에 계시던 장기려 선생님이 포항에 오셨는데 허름한 옷을 입고 있어 김 원장님이 죽도시장에서 양복을 한 벌 사서 입혀드렸지. 장 선생님은 양복을 입어보고는 고맙다며 인사를 하고 부산으로 가셨어. 그 후 김 원장님이 부산에서 장기려 선생님을 만나 그 옷이 괜찮았는지 물었더니 포항역에 있던 노숙자에게 훌렁 벗어주고 부산으로 갔다는 거야.김종원과 장기려의 인연인산(仁山) 김종원의 삶은 성산(聖山) 장기려의 삶과 여러모로 겹친다. 장기려는 1911년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태어나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일본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전쟁통에 월남한 후 부산 영도에 병원을 세워 피난민을 무료로 진료했고, 국내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을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도 치료받을 수 있는 기틀을 만들었다.김종원도 1914년 평안북도 초산군에서 태어나 평양의전을 졸업하고 장기려와 함께 평양의학대학병원에 근무하다 월남한 후 대구를 거쳐 포항에서 전쟁고아를 위해 세워진 무료 진료소에 자원했다.김종원이 북에 아들을 두고 온 것처럼 장기려도 아내와 네 자녀를 두고 단신으로 내려와 부산에 정착했다. 장기려는 노년에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집 한 칸 없이 소외된 사람들을 섬긴 ‘작은 예수’라 불렸으며, 김종원도 아낌없이 베푸는 무소유의 의술을 펼쳤다.대담·정리 : 이한웅 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

2022-10-10

숲길·물길 따라 퇴계가 사랑한 풍경 속으로

높은 산 아래 맑은 물이 흐르는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경상북도 봉화는 이름처럼 맑은 청량산이 커다란 품을 펼치는 고장이다. 청량산 깊은 골짜기마다 이름난 고찰을 품고 있고, 속세를 떠나 산속에서 글을 읽으며 지냈던 선조들이 남겨놓은 문화유산이 가득하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 붉은빛이 물드는 숲길 따라 물길 따라 봉화의 청량산으로 떠나보면 어떨까. △12개 봉우리와 27개 사찰 품은 청량산경북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 태백산맥 줄기에 솟아 있는 청량산은 자그마한 금강, 소금강(小金剛)이라 부를 만큼 봉우리마다 수려한 기암괴석이 장관이다. 1982년 경상북도립공원으로, 2007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으로 지정돼 산천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청량산에는 최고봉인 장인봉을 비롯해 선학봉, 자란봉, 연화봉, 자소봉, 금탑봉, 경일봉, 축융봉 등 12개의 봉우리(육육봉)가 연꽃잎처럼 산을 두른다. 봉마다 학소대, 금강대, 어풍대, 원효대, 반야대, 의상대, 밀성대 등의 대(臺)가 있다. 27개의 사찰과 암자 터도 있다.청량산은 신라시대에 높은 봉우리의 이름을 의상봉, 보살봉, 반야봉, 문수봉, 원효봉이라 부를 만큼 불교문화의 흔적이 가득했다. 유교가 국가이념으로 자리 잡은 조선 중종 39년(1544), 당시 풍기 군수였던 주세붕이 청량산을 다녀간 뒤 불교식 이름의 열두 봉우리를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시절에 따라 불가의 산은 유가의 산이 됐다.청량산을 이야기하면서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 퇴계 이황을 빼놓을 수 없다. 퇴계는 어린 시절부터 청량산에서 글을 읽고 사색을 즐겼다. 안동의 도산서당에서 제자를 가르치면서도 틈틈이 산을 찾았다. 서당을 세울 때 청량산과 현재의 도산서원 자리 중, ‘어디에 서당을 지을 것인가’ 고민할 만큼 청량산을 사랑했다. 퇴계의 시조 ‘청량산가(淸凉山歌)’의 “청량산 육육봉을 아는 이는 나와 백구(白鷗), 백구야 훤사(喧辭)하랴, 못 믿을손 도화(桃花)로다, 도화야 떠나지 마라, 어주자(魚舟子) 알까 하노라”는 구절에서 청량산이 세상에 알려져 더럽혀질까 걱정하는 마음이 드러난다. △청량산 최고의 풍경 연출하는 응진전청량산 아래에는 낙동강 긴 물줄기가 흐른다. 산 입구에서 바라보면 강을 따라 마치 주상절리를 옮겨 놓은 듯한 절벽이 솟아 있다. 이 절벽은 옛날부터 학이 날아와 새끼를 치고 서식해 학소대라고 부른다.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사이에 두고 학소대와 나란히 서 있는 금강대 또한 비경이다.청량산 입석에서 금탑봉을 향해 천천히 올랐다. 봉우리 사이로 가는 길은 마치 그림 속을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바위가 층층이 쌓아놓은 금탑 모양을 하고 있다는 금탑봉은 3층 층암절벽이다. 암벽 층마다 소나무들이 테를 두른다. 금탑봉은 예전에 신라의 대문장가 최치원의 이름을 따서 치원봉으로 불렀다. 봉우리 기암괴석 동굴 속에서 최치원이 마시고 더 총명해졌다는 총명수가 샘솟는다. 봉우리 아래에는 절벽이 병풍처럼 두른 암자, 응진전이 있다.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암자로 663년 세워졌다. 가을이면 오랜 세월이 녹아든 응진전에 붉은 단풍 물결이 덮쳐 청량산 최고의 풍경을 만든다.금탑봉보다 높은 곳에 있는 김생굴에서는 통일신라시대 글씨의 대가, 김생이 9년간 글씨를 수련했다고 한다. 여기에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어느 정도 실력을 쌓고 하산하려는 김생에게 갑자기 길쌈을 수련한 청량봉녀가 나타나 실력을 겨루자고 했다. 조선 최고의 명필 한석봉과 그의 어머니 일화처럼, 어두컴컴한 굴속에서 불을 끄고 서로의 실력을 발휘해 비교해보니 청량봉녀가 짠 천은 흐트러짐이 없었고, 김생의 글씨는 고르지 못했다. 부족함을 깨달은 김생은 1년을 더 수련하고 세상에 나가 최고의 명필이 됐다고 한다. 이곳에는 김생이 붓을 씻었다는 우물, 세필정도 남아 있다. △전설과 보물 간직한 천년고찰 청량사청량산 자락에는 응진전과 더불어 유서 깊은 문화유산이 있다. 연화봉 기슭 구불구불 험한 산길을 따라 거친 숨을 내쉬며 걷다 보면 활짝 핀 꽃 안의 꽃술처럼 청량산 열두 봉우리가 품은 청량사를 만난다. 천년고찰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 예전에는 연대사(蓮臺寺)로 불리며 30여 개의 암자를 거느렸던 큰 사찰이었다. 연대사는 무너져 터만 남았고, 연대사 부속 건물 중 하나였던 유리보전이 청량사라는 사찰로 이름을 바꿨다.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유리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소박한 건물에 팔작지붕을 얹었다. 처마 선은 단정하다. 기둥 위에 용머리와 용 꼬리가 장식돼 있다. 유리보전 현판은 고려 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에 왔을 때 쓴 친필이라고 한다.유리보전 앞에는 세 갈래로 가지가 뻗은 소나무가 서 있다. 적막한 산속에서 세월을 꿋꿋이 견뎌온 소나무에는 전설이 전해진다. 원효대사가 청량사를 지을 때, 절 아랫마을에서 논을 갈고 있는 농부와 소를 만났다. 뿔이 세 개나 달린 소는 농부의 말을 듣지 않고 날뛰고 있었다. 원효대사는 농부에게 소를 시주하라며 소를 받아 돌아왔다. 제멋대로였던 소는 절에 와 고분고분 말을 듣고 청량사를 짓는데 필요한 재목과 물건을 밤낮없이 날랐다. 절의 준공을 하루 앞둔 날, 소는 숨을 거뒀다. 원효대사가 죽은 소를 묻었더니 그곳에서 가지가 셋인 소나무가 자랐다. 이를 ‘삼각우송’이라 하고, 소 무덤을 ‘삼각우총’이라 불렀다.오랜 설화처럼 청량사에는 오래된 보물도 있다. 청량사 건칠보살문수좌상은 흙으로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삼베를 입혀 칠을 발라 말리는 과정을 반복하다 일정한 두께가 되면 조각해 만든 불상으로 눈 부위에는 장식을 새겨 넣었다. 보기 드문 건칠불상(종이불상)은 얼굴, 신체, 옷을 입은 모습으로 보아 12~13세기 고려시대 불상으로 추정된다. 복장유물은 불상을 만들 때 사리나 경전 같은 유물을 가슴이나 배속에 봉안한 것인데, 건칠불상과 함께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청량사 지장전에 봉안된 목조지장보살삼존상은 16세기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유교 시대에 만들어진 불상이 드물다는 점에서 조선 불교 조각의 흐름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청량사는 지금은 작고 소박한 사찰이 됐지만 신라,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을 간직한 거대한 박물관 같다.청량사 유리보전 옆 가파른 산길을 따라 오르면 하늘과 가장 가까운 다리를 만난다. 산이 하늘 높이 닿을수록 골짜기는 깊기에, 하늘다리를 향해 오르는 산길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고생 끝에 오른 청량산의 명물 하늘다리는 2005년 90m 길이로 설치됐다. 해발 800m의 자란봉과 선학봉을 연결한다. 깊은 산속에 설치된 다리를 건널 때 골짜기를 따라 불어오는 바람에 등골이 서늘하지만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게 펼쳐진 능선을 바라보면 두려움은 금세 사라진다. 같이 가볼만한 곳청량산 물길 매호유원지봉화군 명호면 도천리에 있는 매호유원지는 낙동강과 운곡천이 만나 청량산을 휘도는 부드러운 물길이 아름답다.태백산맥과 일월산맥 황우산의 만나는 곳이라 산수가 수려하다. 산과 물이 만나는 모습이 매화꽃이 떨어지는 모습 같아 매호(梅湖)라 부른다. 범바위에서 내려다보면 한반도 모양처럼 보이기도 한다.매호유원지는 은어와 잉어가 많이 잡혀 옛날부터 낚시터로 이름났다. 산이 깊고, 물길도 깊어 등산하면서 래프팅도 즐길 수 있다.낙동강과 운곡천이 만나는 지점과 가까운 곳에는 옛날 용이 살았다는 못, 용소가 있다. 명주꾸리 세 개를 풀어 넣어야 할 만큼 깊다고 한다.매호유원지 하류 암반에서는 마르지 않는 샘처럼 용천수도 흘러나온다. 봉화 청량산은 산 좋고 물 좋은, 그야말로 백두대간 천혜의 자연이다./봉화=글·사진 이솔 객원기자

2022-10-06

‘젊고 힘있는 고령’ 미래 위한 씨앗 뿌렸다

소통과 화합, 현장행정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이남철 고령군수가 오는 8일 취임 100일을 맞는다. 젊고 힘있는 고령의 미래를 준비하며 청사진을 그려온 이 군수.고령군은 역점시책으로 불리는 5·5·5프로젝트의 실현을 위한 각종 사업을 진행하며, 청년층 유입과 주거 환경 개선에 힘을 쏟고 있다. 또한, 공약 실천을 위한 구체적인 추진계획도 착착 수립하고 있는 상황. 미래세대인 아이들을 위한 교육 환경 개선과 현장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아래에서 민선 8기 100일을 맞이한 고령군의 현재 상황과 향후 미래 계획을 상세하게 알아본다. □ 지역 발전과 지방소멸 대응에 지속적 노력5·5·5프로젝트는 ‘인구 5만-신규주택 5천호-청년인구 5천’을 골자로 하는 민선 8기 고령군의 역점시책이다. 이 시책의 해결 방안은 ‘지속 가능한 산업경제’ ‘사람중심 고령발전 인프라’ ‘사통팔달 교통’ ‘앞서가는 미래 스마트 농업’. 신규 산업단지 조성으로 일자리를 만들고, 신도시를 개발해 대규모 주거단지를 조성함으로써 일자리와 주거, 교육문제로 인근 대도시로 빠져나가는 젊은 층을 정착시키는 동시에 지역으로의 유입과 접근성 향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령군은 프로젝트의 성공과 지역 위기 극복에 대한 의지로 최근 한국토지주택공사(LH) 본사를 방문해 군에 신규 주거단지와 산업단지 조성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다. 특히 인구 관련 사안은 고령군이 당면한 과제로 군은 특정 부서만이 아닌 전 부서와 전체 공직자가 하나 돼 협력해 나가야 할 중대한 사안임을 인지했다. 또한 지역 주민의 지속적인 관심과 협조도 당부했다.한편, 군은 청년일자리 창출을 위한 스마트 산업단지 조성과 함께 투자유치 업무의 효율적인 추진을 위해 조직 개편도 시행할 예정이다. 고령군은 2021년 10월 인구감소지역으로 지정됐다. 이후 TF팀을 구성하고, 지방소멸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청년, 농업, 정주여건에 대한 복합적 해결방안을 수립했다. 이런 노력의 결실은 지난 8월 지방소멸대응기금 170억 확보로 귀결됐다. 또한 공모사업의 경우 자연재해위험개선지구 정비사업 332억, 농촌공간 정비사업 250억, 다산 청년 복합귀농타운 조성사업 50억 등 민선 8기 출범 이후 3개월 간 총 15건 848억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뒀다. □ 군정 방향과 목표 설정 후 현장행정 추진지난 8월 말. 고령군은 민선 8기 공약 및 주요사업 보고회를 개최하고 50여 개의 공약을 확정하면서 향후 고령군이 그려갈 청사진을 공유했다. 군민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실질적이고 실현 가능한 공약사업을 시책화 해 앞으로의 추진계획을 수립하고 발표한 것이다.‘대가야’의 존재가치를 제고하며 가야문화 콘텐츠 글로컬화를 위해 스마트관광에 노력을 기울일 것이고, 낙동강변 다산 은행나무숲과 같은 자연을 활용한 새로운 관광거점을 개발할 것이며, ‘빛과 꽃’으로 물들이는 전반적인 도시경관 개선 향상을 위해 다각도로 힘쓸 계획이라는 것이 주요 방향. 교육 분야는 ‘대가야교육원’의 운영 방안을 전면 재검토하고, 아이들과 청소년을 위해 한 발 앞선 미래를 내다보는 4차산업 대비 교육정책이 반영된 방향으로의 개편이 필수적이라는데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를 위해 창의 융복합 프로그램 운영과 센터 건립 등을 구상 중이다.스마트 부자농촌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 시설 현대화 및 과학영농 기술 도입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 흐름. 거기에 따라 스마트팜 보급 확대와 지역농협과의 협력 및 외국 지자체와의 협약 체결을 통한 인력중개, 외국인 계절근로자 도입 등의 형태로 농촌인력뱅크를 운영해 농번기 인력수급 문제도 해결할 예정이다.민선 8기 출범 후 고령군은 현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군정으로 대가야역사문화클러스터 1단계, 도시재생 뉴딜사업, 동고령IC 물류단지 조성 등 주요 사업장에 대한 현장 방문을 실시했다.여기서 이남철 군수는 추진상황 파악 후 업무 관계자들의 애로사항을 청취하는 시간도 가졌다. 보다 나은 방향으로의 사업을 제안하고 피드백을 받기도 하는 등 현장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도, 예산집행의 합리적 운용과 안전사고 예방에 유의해 줄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지난 8월 수도권의 기록적 폭우에 이은 9월 초 태풍 힌남노의 북상으로 한반도 전체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남부권인 고령 지역도 안심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군은 재난 대비 시설물 점검에 앞장섰고, 직원들의 비상대기 또한 이뤄졌다. 그 결과 고령군은 큰 피해 없이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태풍이 지나간 즉시 재난 취약지대를 확인함과 동시에 민관이 합심해 가로 환경정비 등에 나서 안전한 지역민의 명절 연휴를 지켜낸 것. 고령군은 이에 그치지 않고 수해가 극심한 포항과 경주를 방문해 군수를 포함한 공직자와 민간단체 등 200여 명이 복구지원에 나섰다.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희망을 전한 것이다. □ 공감행정 실현과 지방시대 준비이남철 군수 취임 100일. 군 집행부와 고령군의회는 20회 가까이 8개 읍면의 주민들과 간담회를 열었다. 군민들의 의견과 바람을 듣고, 고령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SOC, 교육, 도시환경, 복지, 관광 등 주민의 질문과 요청사항은 다양한 분야에서 쏟아졌고, 고령군은 군민의 대표기관인 의회와 협심해 군민에게 최상의 공공서비스를 제공할 것을 약속했다. 고령의 미래를 위해 군민의 동행과 협조를 구하기도 했다.민선 8기 공약에도 확정됐듯 군민과 함께하는 소통콘서트는 앞으로도 계속 진행될 예정이다. 이게 바로 군민의 마음을 읽는 공감행정 아닐까.‘지방 소멸’의 위기 속에서 고령군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70억의 지방소멸대응기금을 확보했다. 이를 대도시로부터 유입되는 청년들을 위한 전반적인 정주여건 개선에 집중 투자할 계획. 청년 희망이음센터를 건립해 취업과 창업을 지원하고, 귀농·귀촌 통합플랫폼으로서 다산 좌학리 일원에 3천 평 규모의 스마트팜을 조성할 계획이다. 이는 청년 복합귀농타운 조성사업과 연계해 지원하게 된다.이밖에도 아이나라키즈교육센터 증축, 청년지원플랫폼 문화예술창작소 등 유입되는 청년층과 기존 젊은 세대에 안정적인 삶의 여건을 조성하고자 고령군은 앞으로도 다양한 사업을 추진해 나갈 예정이다.열린 지방시대를 맞아 지역 동반성장의 길 또한 함께 걷는다. 이웃 지자체로서 고령과 달성은 상생발전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상생사업으로 추진한 ‘사문진교 야간경관 개선사업’이 마무리 돼 지난 10월 1일엔 ‘달성 100대 피아노’ 공연에 앞서 공동점등식을 가졌다. 그보다 앞선 8월엔 고령군-달서구-달성군 3개의 지자체가 지역연계 관광사업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주요 관광지를 연계하는 ‘달리고’ 투어버스를 운영하는 등 행정구역을 넘어선 관광체계도 구축됐다. 지자체 간의 이런 협업은 지방시대를 열어가는 의미 있는 발걸음이 될 것이다. □ 화합과 상생 그리고, 젊고 힘있는 고령고령 다산면과 달성 다사읍을 잇는 강정고령보 우륵교 개통 문제는 수년째 이어져온 지역 현안이다. 생활권과 경제권을 함께 하는 인근 지역민 삶에 직결되고, 또한 지자체 간 민감할 수 있는 사안이라 고령군은 상호 발전적 방향으로 대응할 여러 접근방식을 모색 중이다. 우선 첫 단계로 강정고령보 개통을 위한 추진대응 TF팀을 구상 중이며, 구체적 운영계획과 실천과제를 발굴해 실행에 옮길 예정. 이 사안에 있어 기관 간의 우호적인 관계 유지에 계속해서 노력을 기울이면서, 민간 차원으로의 접근 또한 확장시켜 문제해결의 돌파구를 찾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고령군민의 오랜 숙원 해소와 지역을 초월한 화합과 상생협력의 가치를 실현시킬 더 큰 행정으로 나아갈 때가 아닐까.펜데믹 장기화에 따른 경기 침체와 인구 급감 등 지역의 위기를 극복하고, 젊음의 기운으로 들썩이는 새로운 희망의 바람이 고령에 다시 불어올 수 있을까. 군민과 함께 시작한 100일, 그리고 같이 걸어갈 4년. 화합된 힘과 변화하는 혁신으로 비상하는 고령의 저력이 유감없이 발휘될 수 있을지. 이전과 달라질 고령을 지켜보는 이들이 많다. 고령/전병휴기자 kr5853@kbmaeil.com

2022-10-06

아들이 죽어가는데도 청진기를 놓지 않아

한 사람이 특정 분야에 오랫동안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게 마음먹는 것도 어렵지만 실제로 행동하기는 더 어렵다. 김종원 원장은 전쟁고아와 어린이들을 치료하고 보살피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하루에 300명이 넘는 아이들을 진료하고, 그것도 모자라 틈나는 대로 포항의 고아원을 찾아다니며 의료봉사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었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다. 김 원장이 그 사실을 숨겼기 때문이다. 김 원장이 전쟁고아와 어린이들에게 헌신했던 이유와 상황에 대해 들어보았다. 이 : 김종원 원장님은 어린이와 고아들에게 각별한 사랑을 베풀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김 : 소아과 의사라는 점도 있지만 진심으로 어린이를 사랑하셨어. 그리고 세 아들을 북에 두고 온 것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겠지. 그 심정을 어느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보호자가 아이를 제대로 보살피지 않은 게 눈에 띄면 호통을 치는데, 세상에 어느 의사가 그렇게까지 하겠어. 아이들을 마음속 깊이 사랑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행동이지. 그래서 아이들, 특히 고아들을 만나면 늘 따듯하게 보듬어주셨어.이 : 어린이 환자들에게는 어떻게 대하셨나요?김 : 원장님은 어린이와 고아에 대한 뚜렷한 철학이 있었어. “누구나 사랑받을 자격을 가지고 이 세상에 왔는데, 그 피조물이 이렇게 아프다니 얼마나 안타까운가.”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한테도 같은 맥락에서 차별 없이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 원장님의 인술은 깊은 철학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어.이 : 아픈 아이가 진료를 받으러 오면 무엇부터 하시던가요?김 : 병원 진료실에 아이가 들어오면 안아서 등을 토닥이며 이름부터 불러주지. 그러고는 축복의 말씀을 해주고 나서 아이 엄마를 보고는 “아이를 어떻게 돌봤기에 이렇게 아프게 되었냐”며 한마디 하시지. 화장하고 오는 엄마들에게는 냄새와 알레르기 때문에 아이들이 더 아프다며 꾸짖는 바람에 병원 복도에서 화장을 지우는 엄마들도 많았어. 요즘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진풍경이지.이 : 미 해병기념 소아진료소의 초대 소장을 맡으면서 얼마나 많은 아이를 치료했는지 혹시 들어보셨는지요?김 : 내가 선린병원에 오기 9년 전의 일이지. 주변 사람들한테 들은 바로는, 소아진료소는 기증품으로 겨우 버텨 나갈 정도였는데 한 명이라도 더 돌보고 싶은 욕심에 전쟁고아를 무려 1천여 명이나 받았다고 해.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지. 그만큼 6·25전쟁 때 포항 전투가 치열했다는 얘기야. 길거리 곳곳에 고아와 남편을 잃은 산모들이 즐비했다고 하거든. 김 원장님은 어떻게든 한 아이라도 더 치료하고 보살펴주고 싶었던 거지. 포항뿐만 아니라 경주와 안강에서도 고아들이 몰려들었다고 들었어. 1960년 선린의원. /이한웅 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 이 : 병원 진료 외에도 고아들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하셨다면서요?김 : 원장님은 휴일이면 선린애육원을 찾아가 아이들을 돌보았다고 해. 당시 선린애육원은 120여 명의 전쟁고아를 돌보는 시설이었는데 잦은 병치레를 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어. 원장님은 틈나는 대로 선린애육원을 찾아가 아이들을 살폈을 뿐만 아니라 자전거를 타고 흥해애육원과 가톨릭애육원(성모자애원)까지 가서 아이들을 보살폈지.이 : 소아진료소가 1956년 4월 미 해병의 철수로 존폐의 기로에 섰을 때는 어떻게 하셨나요?김 : 원장님은 당장 약품을 구입해야 했기에 선린의원으로 이름을 바꿔 일반 환자들을 받기 시작했지. 하지만 여전히 고아가 최우선이어서 고아들에게는 무료 진료를 고수했어. 진료소는 1960년 6월 선린의원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962년 8월 재단 이사회를 구성해 선린병원으로 새롭게 출발했지만 병원 경영이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처음부터 재단법인 소유로 못박았지.이 : 김 원장님은 무리하게 진료하다가 몸이 많이 상했다고 들었습니다.김 : 의사이면서 정작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는 분이었지. 요즘 세상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분이 아닐까 싶어. 진료뿐만 아니라 온갖 잡일도 마다하지 않았지. 한번은 고아원의 겨울나기 준비를 하는데, 장작을 패다가 왼쪽 눈에 나뭇조각이 날아들어 동공을 다친 적도 있어. “환자 두고 갈 수 없다”넷째 걸수의 죽음김종원 원장에게는 남모르는 아픔이 있다. 그의 막내아들이 사고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도 그는 손에서 청진기를 놓지 않고 환자를 돌보았다. 유일하게 함께 월남한 막내아들 걸수가 서울에서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입시 공부를 하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목숨이 위태로웠다. 사고 소식을 접한 김 원장은 “내 아들은 아직 숨이 붙어 있으니 나를 바라보는 환자를 두고 갈 수 없다”면서 진료실을 지켰고, 끝내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지 못했다.김화문 장로에 따르면 “지금 서울에서 아들이 죽어간다”고 하자, 김 원장은 “내가 거기 간들 살릴 수 있나? 살릴 수 있으면 달려가지. 그런데 살릴 수 없는 애 때문에 내가 가버리면 하루에 300명 넘게 오는 애들은 누가 진료하노”라고 했다.김 원장의 부인인 송공현 여사가 급히 서울로 간 후 병원 직원과 북부교회 신도들은 김 원장을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결국 아들이 세상을 떠나자 뒤늦게 서울로 올라가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김 원장을 보고는 주위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40대였던 김 원장의 머리가 며칠 사이에 허옇게 세어버린 것이다. 이 같은 아픔 탓인지 김 원장은 나이 어린 환자들을 보면 눈가에 촉촉하게 이슬이 맺히곤 했다. 걸수는 경주공원묘역 양지바른 곳에 묻혔고, 수십 년이 지난 2007년 봄날 김 원장은 먼저 떠난 자식의 곁에 묻혔다.“폭격으로 군데군데 파인 포항 시내 웅덩이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서너 명의 고아들을 보자 북에 두고 떠나온 세 아들 얼굴이 겹쳐지더군요. 그래서 영영 만나지도 못할 아들들 대신 고아들을 내 자식으로 생각하고 영원히 돌보기로 결심했었죠.”“전쟁 통에 부모를 잃고 헤매는 아이들을 보면서 북한에 두고 온 우리 아이들도 저러고 있겠구나…. 허름한 폐가라도 들어가 출산하려는 임산부들이 내 가족 같습니다.”“그런데 내가 여기서 월급이나 받아가지고 밥이나 먹고 살아서 되겠는가 싶어서…. 내 작은 기술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사랑을 실천해보자는 마음으로….”- 김종원 원장 생전 육성 고백 중에서/대담·정리 : 이한웅 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

2022-10-05

진지하거나, 담담하거나… 영화로 사색하다

가을 여행지로 각광받는 유명한 산은 물론 우리가 생활하는 주변 이름 없는 조그만 산에도 울긋불긋 단풍이 물들어간다. 만산홍엽(滿山紅葉)의 가을이 무르익고 있다. 푸르게 높아진 하늘 아래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데이트 하는 젊은이들의 환한 얼굴이 정겹다. 중년들은 그 모습에서 자신의 과거를 본다.가을은 누가 뭐래도 ‘생각하고, 고민하는’ 계절이 아닐까? 그래서다. 오래전 선현들은 이때를 독서하는 시간으로 쓰라고 조언했다.‘활자’보다는 ‘영상’에 익숙한 MZ세대들은 아무래도 책 읽기보다는 영화 보기에 익숙한 듯하다. 인간이란 시대의 변화와 처한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 그러니, 독서 대신 영화 관람을 선택하는 이들을 나무랄 이유는 전혀 없다.사람들은 시기와 감정 상태에 따라 영화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달라진다. 더위가 짜증을 유발하는 여름엔 시원한 액션영화나 오싹한 공포물이 인기고, 슬프거나 우울한 날엔 고전 로맨스영화를 찾게 된다. 그렇다면 가을엔 어떤 영화가 어울릴까? 앞서 말한 것처럼 생각할 거리와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조금은 묵직한 주제의 영화가 좋지 않을까.다양한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영화를 찾아보기 쉬워진 시대다. 아래 소개하는 영화 2편을 만나며 사색하는 가을 속으로 들어가 보는 건 어떨지. ‘신과 인간’ 진지한 질문 던지는 ‘에이리언: 커버넌트’인간은 무엇이고 어디에서 온 것일까? 누군가의 피조물일까, 그게 아니면 수만 년에 걸친 생물학적 변화의 산물일까? 존재와 실존에 관해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한 명 예외 없이 떠올렸을 의문이다.인간이 창조된 존재인지, 진화의 과정에 있는 고등한 생물인지를 놓고 벌어진 설왕설래는 인류역사상 가장 뜨겁고 주요한 논쟁 중 하나였다.이른바 ‘창조론-진화론 논쟁’. 수많은 신학자가 이 논쟁에 끼어들어 창조론을 옹호했고, 자연과학자인 다윈(Charles Darwin)과 라마르크(Jean Lamarck)는 탁월한 연구 성과로 진화론에 힘을 실었다.수 세기에 걸친 인간 세상 화두였으니, 문학과 영화에서도 이 두 가지 학설이 갈등하고 충돌했던 것은 불문가지다. 학구적 정열을 간직한 시인이나 소설가 또는, 영화감독은 자기 뜻을 문학·영상으로 정리해 독자와 관객들에게 선보였다. 이런 문제적 작품들은 한쪽의 찬사와 동시에 다른 한쪽의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인간과 구별이 거의 불가능한 AI 월터(마이클 패스벤더 분). 리들리 스콧 감독은 AI를 창조론 옹호의 영화적 수단으로 사용한다.이미 40년 전 ‘블레이드 러너’를 통해 디스토피아가 된 미래사회와 인간의 형상으로 제작된 리플리컨트(복제인간)가 겪는 혼란과 갈등을 비판적으로 성찰한 리들리 스콧. ‘에이리언: 커버넌트’ 역시 이전 작품들과 유사한 철학적 질문을 사람들에게 던지고 있다. 이 영화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전작 ‘프로메테우스’와 여러 측면에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어찌 보면 후속편으로도 읽힌다.영화의 도입부. 인간과 구별이 거의 불가능한 AI인 월터가 자신을 만든 사람에게 묻는다.“당신이 나를 만들었다면, 당신을 만든 것은 누구인가요?”‘에이리언: 커버넌트’는 이에 관한 답변을 생략한 채 전개된다. “영화를 보면서 스스로 답을 찾아보라”는 감독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프로메테우스’는 아주 멀리 떨어진 행성에서 온 외계인의 DNA가 지구의 단세포생물을 만들어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는 진화론을 정면에서 부정하며 창조론의 손을 들어주는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더불어 논쟁을 부를 소지가 다분한 영화적 설정. 리들리 스콧의 창조론 옹호와 지지는 ‘에이리언: 커버넌트’에서도 연속해 드러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간을 외부적 환경변화에 한없이 무기력한 동물로 묘사하고, 우리가 통상 인간의 특질로 이해하고 있는 동정심과 합리적 결단력을 AI에게 부여하는 장면 등을 통해서다. 여기엔 “진화의 결과가 이 정도라면 참혹하지 않은가”라는 환멸의 질문이 깔렸다.리들리 스콧 정도의 감독이 연출한 작품이라면 갑자기 튀어나온 우주 괴물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유치한 권선징악의 결말이 아닐 것이란 정도는 영화팬이라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프로메테우스’에 이은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그 예상도 훌쩍 뛰어넘어 무겁고 난해하기 짝이 없다.여든다섯의 영화감독, 이제는 ‘철학자’로 불러도 좋을 리들리 스콧은 리하르트 바그너의 클래식이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에이리언: 커버넌트’의 결말을 통해 자신이 변하지 않을 창조론자라는 걸 보여준다. 그게 어떤 장면이냐고? 그걸 말해주면 영화 보기가 너무 싱거워지지 않겠나.마지막으로 남는 의문 한 가지. 합리와 과학을 신뢰하는 유럽에서 태어나 생활해온 리들리 스콧이 합리와 과학에 더욱 근접한 진화론이 아닌 창조론에 경도된 이유는 뭘까? 그가 독실한 종교인이라서? 그게 아니면, 삶보다는 죽음에 가까운 나이이니 곧 만날 신(神)과의 우호적 관계 설정을 위해서? 노감독은 영화 안과 밖에서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그러니,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재론의 여지없이 ‘사색의 가을’에 맞춤한 영화다. 답을 찾기 위해선 어떤 방식으로든 생각을 해야 하니까. 담담한 카메라에 담긴 괴물들의 세상 ‘소리도 없이’미세한 감정의 일렁임, 사소한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몸뚱이 피를 닦고 자루에 넣어 땅속에 묻는 사람.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를 술 섞은 음료수 먹여 장기매매 브로커에게 판매하는 사람. 유괴를 생존을 위한 비즈니스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세상의 비난과 손가락질을 받을 행위가 분명함에도 위와 같은 일들은 어제도, 오늘도 있어왔고, 내일도 행해질 것이 분명하다. 싫어도 부정할 수 없다.때때로 현실은 어떤 공포영화보다 끔찍하다. 그런데, 이런 세속 풍경에 카메라를 들이대면서도 침착함과 평정심을 지킨다? 쉽게 이르지 못할 경지. 이는 ‘소리도 없이’가 주목받는 영화인 이유다.몇 년 사이 개봉된 어떤 한국 영화와도 닮지 않았다. 답습과 반복의 흔적이 없다. 그래서다. 돌올하고 이채롭다. 신인 감독이 보여준 기대 이상의 연출력.거기에 멀쩡한 인간의 얼굴을 하고 끔찍한 짐승의 범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는 조연 배우들의 연기가 일품이다. 주연 유재명과 유아인에게 결코 밀리지 않는다.마지막 장면은 세칭 ‘열린 결말’이라 해석의 가능성이 다양하다. 그랬기에 영화에 관해 이렇다, 저렇다 입을 대는 관객들이 많았다. 좋은 영화는 많은 이들이 논쟁에 참여하게 하는 법.‘소리도 없이’는 법 없이 살 수 없을 듯한 착한 사람들이 법을 어기며 나쁜 짓을 하며 지내다가, 개입되기 원하지 않던 사건에 휘말리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착하고도 나쁜’ 어른 둘 사이에 ‘선악의 포지션이 불분명한’ 열한 살 아이가 끼어든다.그때부터다. 영화는 기존의 상식과 보편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어 의외의 결말을 향해 질주한다. 스토리는 치밀하고, 전개는 정교하며, 앞서 말한 것처럼 배우들의 연기는 핍진하다. 상업적 할리우드 스타일을 답습하는 한국 영화가 가진 약점 중 하나가 과잉이다. 관객이 흥분하기 전 연출자가 앞서 흥분하고, 울거나 웃을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울어라” 혹은 “웃어라” 먼저 옆구리를 찌르거나, 뺨을 친다. 이래서는 감동에 가닿을 턱이 없다.‘소리도 없이’의 가장 큰 미덕은 감독이 먼저 흥분하거나, 감정 과잉에 빠져 오버하지 않는다는 게 아닐까 싶다. 어떤 심각한 사건이 일어나도 홍의정 감독의 카메라는 정중동(靜中動) 담담함을 지킨다.물론 ‘소리도 없이’의 모든 게 다 좋지는 않다. 몇몇 장면에선 앞뒤의 인과가 흐릿하고, 영화에서 벌어진 일의 수습 과정을 납득할만한 설명 없이 건너뛰기도 한다.그러나, 이런 흠결은 전체의 맥락에서 보여준 큰 장점에 비하면 그야말로 소소하게 느껴질 뿐, ‘영화 보는 즐거움’을 깨뜨리지 못한다. 가을 밤, 진지한 표정으로 혼자 보기 딱 좋은 작품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10-04

포항 사람들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묻혀 있는 곳

동해안에서 가장 이름 높은 해수욕장으로 북에는 원산, 남에는 포항 송도라 했다. 송도해수욕장의 은빛 고운 모래는 명사십리(明沙十里)라는 말이 딱 어울렸고, 수온과 수심이 적당해 수영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방풍림으로 조성된 송림은 더위를 피하기에 그저 그만이었다. 그런 까닭에 송도해수욕장은 여름이 되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북적거렸다. 지금은 설치 작품처럼 외롭게 서 있는 다이빙대에도 까까머리들이 바글거렸다.포항이 면에서 읍으로 승격한 1931년에 개장한 송도해수욕장은 넓은 백사장과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전국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광복 후에도 송도해수욕장은 포항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휴양지였다. 여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사계절 내내 포항 사람들은 송도해수욕장과 송림에서 여가를 즐겼다. 학생들이 가장 많이 소풍을 간 곳도 송도해수욕장과 송림이다.대구 사람들에게도 송도해수욕장은 더할 나위 없는 피서지였다. 대구에서 송도해수욕장으로 오는 인파를 수송하기 위해 대구-포항 간 임시 열차가 다니기도 했다. 오죽하면 송도해수욕장을 ‘대구의 앞마당’이라고 했을까.1960년대 후반부터 영일만에 철강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그 고운 명사십리가 서서히 유실되고 송도의 명성도 차츰 기울었다. 북새통을 이루던 송도의 횟집이나 가게는 하나둘 문을 닫았다. 송도에 스산한 바람이 불었고, 송도를 지켜보는 포항 사람들의 마음에도 쓸쓸한 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1998년에 개봉한 영화 ‘파란대문’에서 주 무대인 송도는 쇠락한 해변으로 비친다. 2007년 송도해수욕장은 공식적으로 폐장되고 만다. 2023년에 재개장할 듯영일만의 너른 품은 송도를 내버려둘 수 없었다. 푸른 파도와 시원한 샛바람, 하얀 갈매기들이 송도를 서서히 살려내고 있다. 영일만과 호미곶이 잘 보이는 자리에 커피숍과 식당이 속속 들어서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아지면서 송도 역시 꿈틀거리며 살아나고 있다.2012년 10월부터 해수욕장을 복원하기 위한 공사가 시작되었다. 유실된 백사장을 복원하기 위해 모래 15만 세제곱미터를 채우는 양빈(養濱) 공사를 하고 있고, 모래가 더 이상 유실되는 것을 막으려고 수중 방파제(潛堤) 3기도 설치했다. 이 사업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어 포항시는 2023년에 송도해수욕장을 다시 개장할 방침이다.송도를 상징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평화의 여상(女像)이다. 1955년 7월에 세워진 여상은 원래 해수욕장 입구 쪽에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여상 여기저기에 흠집이 나자 2015년에 지금 위치로 옮겨 재건립했다. 조금 투박해 보이지만 오히려 그 점 때문에 정감이 가는 조형물이다. 여상 주변에서 사람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바다와 음악이 좋아서 스스로 즐기는 사람들이다. 멀리 중남미의 쿠바 사람들이 자유롭게 음악을 즐기는 풍경이 연상되는 장면이다. 송도는 그렇게 낭만의 선율이 흐르는 곳이다.노루와 꿩이 뛰놀던 송림바닷가 마을은 육지 방향으로 바람이 불면 모래가 마을로 날려서 갖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일제강점기 때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방풍림을 조성했다. 1911년 일본인 대지주 오우치 지로(大內治郞)가 송도 백사장 불모지 53여 정보(16만여 평)의 국유지를 대여받아 조림 사업을 전개했고, 십수 년이 지나 송림이 울창해져 1929년 어부보안림(魚附保安林)으로 지정되었다(‘포항시사’ 3권, 2009, 279쪽).넓은 방풍림을 조성하는 것이 쉬운 일일 수 없었다. 초기에 묘목을 심으면 뿌리를 못 내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모래흙에는 뿌리를 내리기 힘든 탓이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 자란 묘목을 뿌리째 뽑아 일꾼들이 지게에 지고 한 분(盆)씩 옮겨 심었다고 한다. 송림은 그런 난관을 이겨내고 만들어졌다.지금도 대낮에 송림에 들어서면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냉기가 돈다. 과거에는 하늘이 거의 안 보일 정도로 울창했다. 포항의 원로 문인 박이득은 송도의 옛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그 모래언덕에 올라서면 바다가 눈앞에 확 다가온다. 갑자기 다가오는 바다의 푸른색, 비릿한 바다 내음, 순백의 모래밭, 무수히 쏟아지는 햇빛, 모두 다 눈이 부시다. 소년이 아니라도 황홀할 수밖에 없다.당시의 송도는 10여만 평이 송림이었고,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너무 크고 빽빽해서 혼자 다니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숲에는 또 다람쥐, 청솔모, 산토끼, 노루, 꿩, 각종 새들이 무리 지어 제각각 송림의 주인이라고 소리쳤다.” - 박이득 ‘영일만, 그 푸른 해변의 노래’, ‘월간문학’ 2017년 2월호, 232쪽지금은 노루와 꿩은커녕 다람쥐나 청솔모조차 보기 어렵다. 세월은 송도해수욕장과 송림, 아니 포항의 모든 것을 너무나 많이 바꿔놓았다. 하지만 송림에는 여전히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2017년에는 포항시에서 송림 테마거리를 조성했다. 조용한 산책길 사이로 물길이 흐르고, 분수와 스틸 작품 등이 조화를 이뤄 남녀노소 누구나 편안하게 쉴 수 있다. 송도해수욕장 ‘평화의 여상’ 한흑구, 이육사와 송도의 인연송도는 예술가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여러 예술인이 이곳에서 얻은 감흥을 글과 그림으로 남겼다. 1948년 고적지 답사차 동료 문인들과 경주에 왔던 한흑구는 포항 바다가 좋다는 얘기를 듣고 송도에 잠시 들렀다가 그 직후 서울에서 식솔을 데리고 포항으로 이주했다. 그러고는 1979년 작고할 때까지 포항을 떠나지 않으며 ‘보리’, ‘나무’ 등 주옥같은 수필을 남겼다. 동해의 사색인이던 그는 매일같이 송도 바닷가를 거닐었다고 술회했다.이육사도 송도와 인연이 깊다. 1936년 7월 이육사는 서울을 떠나 대구에서 귓병을 일주일 정도 치료하고 7월 29일 경주 불국사를 관람한다. 그날 밤에 송도해수욕장 인근 친구 서기원의 집에 머무르고, 다음 날 신석초에게 엽서를 보낸다. 8월에는 동해송도원(東海松濤園)에서 상당 기간 체류하는데, 역사상 최장기 장마와 최강의 태풍이 몰려온다. 육사의 수필 ‘질투의 반군성(叛軍城)’(1937)에서 “태풍이 몹시 불던 날 밤, 온 시가는 창세기의 첫날 밤같이 암흑에 흔들리고 폭우가 화살같이 퍼붓는 들판을 걸어 바닷가로 뛰어나갔습니다. 가시넝쿨에 엎어지락 자빠지락 문학의 길도 그럴는지는 모르지마는 손에 들린 전등도 내 양심과 같이 겨우 내 발끝밖에는 못 비추더군요. 그러나 바닷가를 거의 닿았을 때는 파도 소리는 반군(叛軍)의 성이 무너지는 듯하고, 하얀 포말(泡沫)에 번개가 푸르게 비칠 때만은 영롱하게 빛나는 바다의 일면! 나는 아직도 꿈이 아닌 그날 밤의 바닷가로 태풍의 속을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라고 이때를 회고한다(도진순 ‘강철로 된 무지개-다시 읽는 이육사’, 창비, 2017, 304∼305쪽 참조).‘질투의 반군성’에서 육사가 송도에서 보낸 여름 한철이 얼마나 강렬한 체험이었는지, 그 후 육사의 문학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육사가 신석초에게 보낸 1936년 7월 30일 소인 엽서는 발신지가 ‘포항 행정(幸町, 지금의 포항시 중앙동)’으로, 대구와 경주를 거쳐 포항에 온 경로와 몸 상태 등이 담겨 있다. 이 엽서는 광복 77주년인 2022년 8월에 국가문화재로 등록 예고되었다.포항 출신의 화가 이창연은 포항의 바다를 즐겨 그렸는데, 그중에서도 송도를 그린 작품이 여럿 있다. 밝고 화사한 색채에 묘한 우수가 느껴지는 독특한 화풍으로 화단의 주목을 받았으나 2010년 55세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송림 테마거리에 많은 사람 찾아와송도에는 유서 깊은 배움터가 있었다. 포항대학의 전신인 포항수산학숙이 1953년 7월 이곳에서 문을 열었다. 포항의 대표적인 교육자이자 정치인인 하태환이 세운 포항수산학숙은 수산초급대학, 실업전문대학 등으로 교명이 바뀌다가 1989년 2월 죽천으로 옮겼다. 포항대학 출신들은 수산업을 중심으로 포항 산업의 기반을 만든 역군이고 지역사회 곳곳에서 알토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포항대학이 이전한 후에는 동지중·고등학교가 잠시 머물다가 2002년 3월 용흥동으로 옮긴 후 아파트가 들어섰다.송도(松島)는 지명에서 드러나듯 원래 섬이었다가 다리가 연결되면서 사실상 육지가 되었다. 그 후로도 바로 옆에 철강산업단지가 조성되는 등 큰 변화를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된 곳에서 자연에 변형을 가하는 것은 거의 보편적인 현상이고, 송도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던 그 곱던 명사십리가 서서히 사라지자 포항 사람들의 마음 한편이 아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송도는 다시 살아나 송도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늘어나고 있으며, 그 발길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포항 사람들에게 송도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묻혀 있는 곳이기에.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

2022-10-04

신명나는 공연에 어깨 ‘들썩’… 가족·친구·연인 추억 쌓았다

2022 안동 국제 탈춤 페스티벌과 경북매일신문이 주관한 낙동강 7경 문화 한마당 행사가 3일 안동시 경동로 탈춤 축제 메인 행사장 일원에서 열렸다. 하회 별신굿 탈놀이와 다양한 공연 및 체험 행사로 열린 탈춤 축제와 인기 가수의 신명나는 공연이 이어진 낙동강 7경 문화한마당의 이모저모를 화보에 담았다. 듀엣 1+1로 활동 중인 가수 김민교와 이병철이 문화한마당 객석에서 관객과 함께 호흡하며 흥겨운 공연을 펼치고 있다./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낙동강 7경 문화한마당 행사장을 깜짝 방문한 이철우 도지사가 객석에서 시민과 함께 흥겨운 공연을 즐기고 있다. 3일 오후 안동시 경동로 메인 행사장을 찾은 관광객들이 탈 조형물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3일 오후 안동시 경동로 거리무대에서 김종흠 명인이 장승 깎기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낙동강 7경 문화한마당 행사장에서 이병철 씨가 객석까지 내려와 시민과 함께하며 신명나는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낙동강 7경 문화한마당 무대에서 양하영 밴드가 가슴앓이와 갯바위 등 히트곡을 선사하고 있다. 낙동강 7경 문화 한마당 행사장을 찾은 외국인들이 K-트로트의 묘미를 만끽하고 있다. 낙동강 7경 문화한마당 무대에서 옛 안동역 앞에 노래비가 세워질 만큼 큰 인기를 끈 노래 ‘안동역에서’의 주인공 진성 씨가 자신의 히트곡을 열창하고 있다. 낙동강 7경 문화한마당 무대에서 미스 트롯 출신 강혜연이 자신의 히트곡을 열창하고 있다.

2022-10-03

거대한 공간 속 잠든 왕, 굽은 소나무 호위병 돼 지키고

◇ 경주 시내만 36기의 왕릉이 존재안개가 피어오르는 이른 아침 왕릉으로 향했다. 구불구불 우아한 자태로 세월을 이겨낸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잘 다듬어진 잔디 위에 봉긋 구릉이 솟았다. 무덤은 모두 5개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왕비인 알영비,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까지 한자리에 모인 무덤. 그래서 이름도 오릉이다. 오릉은 신라 왕실 무덤의 시조다.경주는 ‘신라왕릉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신라 건국의 시조 박혁거세를 비롯해 경주 시내에만 왕릉이 36기나 된다. 왕릉은 왕의 무덤이다. 살아있을 때 권력의 정점에 섰던 사람들은 죽어서도 거대한 공간 속에 잠들어 있다.신라왕릉의 무덤 옆은 거의 어김없이 소나무 숲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능의 소나무는 신기하게도 능 쪽으로 비스듬히 몸을 숙이고 있다. 마치 충성스런 호위병 같다. 소나무 숲을 거닐다 보면 신라왕들이 천년의 세월을 넘어 소곤거리는 대화가 들리는 듯하다. 왕릉은 떠난 이들이 영면하는 장소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산 자들도 즐겨 찾는 공간이 됐다. 신라의 왕릉이 처음부터 거대한 구릉 형태의 무덤은 아니었다. 신라 초기에는 주로 고인돌 형태였다가 지하에 판석이나 강돌을 함께 섞어서 장방형의 석관 시설을 갖춘 석관묘(돌널무덤)로 진화했다. 왕을 마립간이라고 부르던 시대에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으로 왕릉을 조성했다. 돌무지덧널무덤은 관이 중심에 있고 부장품들과 함께 묻을 것들을 주변에 놓은 다음, 다시 큰 목관 위에 냇돌을 쌓아, 그 위에 봉토를 덮은 형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굴식돌방무덤(석실묘)으로 변했다. 굴식돌방무덤은 쉽게 말하면 무덤에 방을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 돌로 방과 통로를 만들고 흙을 덮어서 만든 무덤으로 널방에 벽화가 남아있다. 벽화의 주제는 사신도, 신라인들의 생활 모습, 천문 등 다양했다.굴식 돌방무덤은 신라가 불교 국가화되면서 무덤 크기도 이전보다 작아졌다. 불교식으로 화장해서 부장품도 단순했다. 유골만 담은 뼈 항아리와 간단한 흙 인형 정도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았다.경주의 신라왕릉이 고구려와 백제 시대 왕릉에 비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는 것은 돌무지덧널무덤이 많았기 때문이다. 돌무지덧널무덤은 입구가 따로 없어서 구조가 견고하고 도굴범이 침입하기 어렵다는 게 특징이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뤄 고구려나 백제보다 왕조가 수백 년이나 지속되었다는 점도 신라왕릉이 지금까지 견고하게 자리는 지키는 원동력이 됐다. 현재 경주에 남아있는 왕릉 중 시가지 주변에 있는 대형 돌무지덧널무덤 양식의 경우 대부분 도굴된 적이 없었고 부장품도 그대로 남아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규모가 작은 고분이나 경주 외곽 산지 고분은 일부 도굴 사례가 있으나, 대체로 다른 왕조의 고분에 비하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신라시대에 왕은 박혁거세를 시작으로 56대 왕인 경순왕까지 모두 56명이었다. 이 중 화장을 한 왕은 문무왕(30대), 효성왕(34대), 원성왕(38대), 진성왕(51대), 효공왕(52대), 신덕왕(53대), 경명왕(54) 등이다. 화장했으니 당연히 무덤도 남아있지 않았다. 다만 문무왕만은 화장해 유골을 동해 입구에 있는 큰 바위에 장사지냈는데, 이 바위를 대왕암이라 했다. 일종의 수중왕릉인 셈인데 진위에 대해서는 아직도 학계의 논란이 분분하다. 능이 없거나 소재지가 명확하지 않은 왕도 16명이나 된다.물론 고구려의 동명왕릉, 백제의 무령왕릉만이 전해지는 것에 비하면 신라의 왕릉은 역사의 혜택을 받은 셈이다.◇ 석탈해왕도 풍수지리 활용초기 신라왕릉은 흙 봉분 외에 따로 비석이나 자연석 같은 시설을 설치하지 않았다. 무열왕릉부터 비석을 세우고 봉토 밑에 자연석으로 둘레에 호석을 설치했다. 신문왕릉부터는 문인상, 무인상, 십이지신상 등 수호석을 장식하기도 했다. 학계에서는 원성왕릉과 흥덕왕릉 시기에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는 능묘 제도가 거의 완성되었다고 본다.조선시대 왕릉은 대개 풍수지리를 따져서 소위 명당자리에 묘를 썼다. 그렇다면 신라왕릉은 어떤 자리에 묘를 썼을까? 풍수지리는 도읍·궁택·무덤의 터를 잡기 위해 점을 치는 일종의 관상학인 까닭에 상지학(相地學)으로 규정되며, 본래는 대지의 신을 믿는 지모신(地母神)적인 신앙에서 나온 것이다.삼국시대 이전에도 풍수지리는 이미 일상에 파고든 상태였다. 토함의 수호신인 석탈해가 반월성(半月城) 쪽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풍수지리를 참고했다는 사실은 삼국유사에도 나온다. 동해안으로 들어와 한동안 한지부(漢祗部)에 머무르던 석탈해는 하루는 토함산(吐含山)에 올라가 거주할 만한 땅을 선정하려 했다. 양산 아래 호공(瓠公)의 집터가 길한 땅임을 알고, 계략을 써서 그곳을 빼앗아 거주한 것도 풍수지리에 능통했기 때문이다.탈해에 관한 기사만으로 삼국시대 초기에 풍수지리설이 유행했다 할 수는 없지만, 당대에 풍수지리적 지식이 민간에까지 널리 퍼져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풍수지리적 지식은 궁실이나 왕릉·사찰 등의 터를 선정하는 데 중요하게 쓰였다. 원성왕릉을 위시해 오늘날 전해지는 왕릉이나 절터가 모두 풍수지리설의 조건에 맞는 곳이 있으니 말이다.원성왕릉의 경우 지하수가 흐르는 땅에 묘를 썼다. 이는 풍수지리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었다. 묘 아래로 물이 흐르는 곳은 흉지이기 때문이다. 이는 풍수지리에 대한 관념이 신라시대에는 조금 달랐던 것으로 추정된다.통일신라 말기 대학자인 최치원이 글씨를 쓰고 비문도 세운 숭복사비(崇福寺碑)의 내용에 따르면 왕릉을 정하는 기준이 여럿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비문에는 왕릉을 만들 때 좋은 땅을 찾아 토지를 구입해 관청과 고을 사람에게 명해 가시를 베고, 소나무를 심어 꾸미는 과정이 기록돼 있다. 삼국사기 ‘직관지’에 따르면 능색전(陵色典)이라는 왕릉 관리 관청을 따로 설치해 왕릉 입지 선정과 향후 관리가 체계적으로 운영됐음을 알 수 있다.경주 신라왕릉은 오릉을 중심으로 서남산지구에 11기가 있고, 동남산지구에 2기, 선도악지구에 6기, 금강산 지구에 2기, 낭산과 토함산지구에 모두 9기가 있다.◇ 업적에 비해 단출한 선덕여왕릉토함산지구에 있는 왕릉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곳은 선덕여왕릉이다. 선덕여왕릉은 정확하게 말하면 토함산이 아니라 낭산(狼山)에 있다. 선덕여왕은 우리 역사 최초의 여왕이라는 점 외에도 재위 시절 다양한 업적을 쌓은 군주였다. 그녀는 첨성대를 만들고 분황사를 건립했으며, 황룡사 9층 목탑을 축조하는 등 신라 건축의 금자탑을 이룩했다. 업적에 비해 저평가를 받아서인지 선덕여왕릉은 단출하기 그지없다. 봉분의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아랫부분에 자연석 석축 2~3단만 쌓았을 뿐이다.선덕여왕(善德女王 632~647)은 신라 26대 진평왕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진평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둘이 있었는데, 천명 공주와 덕만 공주였다. 덕만 공주가 선덕여왕에 올랐는데, 여성이 최초로 군주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은 신라의 폐쇄적인 신분제도가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신라의 왕은 성골만 오를 수 있었다. 성골의 경우 성골과 성골 사이에서 태어날 때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시의 성골 신분은 덕만 공주와 함께 진평왕의 동생인 국반 갈문왕의 딸 승만 공주(진덕여왕) 뿐이었다.선덕여왕의 치세 기간에 대한 평가는 양면적이다. 첨성대를 건립하는 등 신라 문화의 꽃을 피웠지만 백제의 의자왕에게 마두성을 포함한 40여 개의 성을 빼앗기기도 했다.647년에는 비담의 난을 겪기도 했다. 비담이 난을 일으킨 명분은 ‘여자는 나라를 다스리지 못한다’는 의미의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理)’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여성 군주에 대한 입지가 좁았음을 알 수 있다.선덕여왕을 떠올리면 결혼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음갈문왕(飮葛文王)’과 결혼한 것으로 등장하고 있다. 다만 아이는 낳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선덕여왕은 재위 중 여러 신하들에게 “나는 아무 해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 속에 장사지내도록 하라”고 유언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다. 신하들이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해 도리천이 어디냐고 하자 선덕여왕은 “낭산 기슭이 도리천”이라 일러주었다. 도리천은 불교에서 말하는 수미산 꼭대기로, 사천왕 위에 있는 부처님의 세계다. 인간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유언에 따라 낭산에 왕릉을 만든 지 32년 후, 능 아래쪽에 사천왕사가 지어졌다. 여왕이 잠든 곳이 ‘도리천’임이 증명된 것이다. /최병일 작가

2022-10-03

하루에 300명이 넘는 아이들을 진료하다

선린병원 현관에는 “하나님은 고치시고 우리는 봉사한다”는 글귀가 붙어 있다. 이 글귀에는 김종원 원장의 인생철학이 담겨 있기도 하다. 그가 선린병원에서 진료한 환자 숫자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그렇게까지 열정적으로 사람들을 치료하게끔 이끈 것일까? “하나님은 고치시고 우리는 봉사한다”는 글귀를 이해해야 비로소 김 원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김 원장이 어떤 여건에서 어떻게 환자들을 대했는지 들어보았다. 이 : 김종원 원장님의 우연한 포항 방문이 포항에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게 된 계기가 되었군요. 선린병원의 설립 목적은 무엇이었나요?김 : 법인으로 전환하기 전에는 전쟁고아와 전쟁 중에 남편을 잃은 임산부를 위한 모자 보건사업을 펼치는 것이었지.이 : 소아진료소가 1953년에 문을 열었고, 그 후 선린의원을 거쳐 재단법인 선린병원이 1962년에 설립되었군요.김 : 앞에서도 말했지만, 미 해병대의 도움으로 전쟁고아를 무료로 진료했는데 1956년 미 해병대가 철수하자 문제가 생겼지. 그들이 주고 간 약품과 장비로 몇 년은 버텼는데 무료로 병원을 계속 운영할 수 없었던 거야. 그래서 1960년에 일반 환자도 받으면서 그 수익으로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선린의원을 시작했지. 이 : 그때 병원의 진료 환경은 어땠습니까? 지금 포항의 50~60대 중에 원장님의 청진기를 몸에 대어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하던데요?김 : 50대, 60대뿐만 아니라 70대까지도 원장님의 청진기 앞에서 배를 보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지. 3대가 내리 원장님 진료를 받은 집안도 많아. 당시에는 포항에 의료시설이 거의 없다시피 했고, 할아버지 원장님의 실력이 전국에 소문이 나서 서울에서도 진료를 받으러 올 정도였어. 문제는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환자였지. 하루에 300명이 넘는 아이들을 혼자 감당하셨어. 통금이 해제되면 병원 복도에 아이들과 엄마들이 줄을 서 있는데 어쩔 거야. 에어컨도 없는 진료실에서 몸이 상하고 심지어 코피를 쏟으며 진료하셨지.이 : 일요일에는 휴식도 취하고 교회도 가야 했을 텐데, 감기와 열병이 유행할 때는 일요일도 없었다고 들었습니다.김 : 원장님의 철칙은 아파서 찾아온 환자가 있으면 마감 시간이 따로 없다는 거야. 원장님과 간호사들은 독감이 유행할 때는 주일날 예배시간을 빼고는 진료했는데, 그때도 점심시간과 화장실에 가는 시간 빼고는 환자를 보셨어. 그러다 보니 간호사나 약국 직원들도 퇴근이 늦어졌지만 불평 하나 없었지. 아픈 아이를 그냥 돌려보내면 밤새 고통받을 텐데 그렇게 할 수는 없다는 원장님의 신념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이 : 원장님을 가까이서 모신 직원들도 원장님의 신념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원장님은 평소에 어떤 말씀을 자주 하셨나요?김 : 나뿐만 아니라 직원들 대부분 평생직장처럼 병원에 오래 근무했어. 박봉이었고 근무시간이 따로 정해지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한없는 인술을 베푸는 원장님을 도와드려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지. 그리고 직원들에게 “이권에 절대 개입하지 마라”, “직장을 여기저기 옮겨다니지 마라”, “약속을 지켜라”는 말을 자주 하셨는데 대부분 그 뜻을 따랐어.선린의원의 규모가 커져서 선린병원이 되어서도 김종원 원장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소문은 여전했다. 1960년대 들어 일반 환자를 받으면서 소아과의 경우 환자들이 하루에 300~400명씩 몰려왔다. 1층 진료실의 반이 소아과 환자들로 북적댔다. 당시엔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였고, 변변한 응급실도 없던 시절이었다. 선린병원의 진료는 새벽 5시에 시작되었다. 그 시간에 이미 사람들이 몰려오기 때문이었다. 김 원장은 통행금지 해제 사이렌이 울리면 바로 출근했다. 밤새도록 아이가 아파서 울었을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80년 통금이 해제되고 난 후에도 그는 다른 의사들보다 한 시간 빠른 아침 7시에 진료를 시작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어린 환자들을 진료하고 나면 밤 9시를 훌쩍 넘기기 일쑤였다.현역에서 물러나 협동원장 시절, 김 원장은 한 방송 인터뷰에서 이렇게 술회했다.“일을 많이 한 셈이죠. 아침 6시부터 밤 9시까지 꼬박 진료를 했으니까요. 환자가 기다리고 있거든요. 당시 여름에 냉장고가 있습니까, 선풍기가 있습니까? 열사병에 걸려 머리가 빠개지도록 아팠어요. 그럴 때는 물과 소금을 먹으면서 진료했지요.” 미 해병기념 소아진료소 앞에서. 왼쪽 첫 번째가 김종원. /이한웅 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 제공 이 : 하루에 300명이 넘는 어린이 환자를 만나면 몸이 성할 리 없었겠습니다.김 : 원장님은 일사병은 달고 살았고 머리가 빠개지도록 아프다는 말을 자주 하셨어. 또 코피를 자주 쏟아 큰 수건을 옆에 두고 진료했지. 하루 종일 아이들의 울음소리 속에 지내다 보니 청력도 안 좋았어. 점심식사는 병원 뒤 사택에 가서 얼른 하고 오셨고. 보통 새벽 4시에 일어나 냉수마찰을 하고 새벽기도회 갔다가 바로 출근하시지. 그리고 여름에는 에어컨 없이 진료하다 보니 무더위에 일사병에 걸려 대야에 얼음덩어리를 띄워 놓고 진료하기도 했어. 1970년대 중반에 몇 번이나 진료실에 에어컨 설치 결재를 올렸다가 반려되자 직원들이 혼쭐날 각오를 하고 원장님 퇴근 후에 작은 에어컨을 설치했지.이 : 아이들에게는 자상했지만 부모들에게는 엄하기도 했다면서요?김 : 말도 말아. 애들 데리고 진료받으러 온 엄마들이 많이 울고 갔어. 특히 진하게 화장하고 매니큐어를 바르고 온 엄마들에게는 “당신 치장하는 시간에 아이를 잘 살폈다면 애가 이렇게 되지 않았다”면서 불호령을 내렸어. 한 번은 해병대 장교를 크게 꾸짖어 보내기도 했어. 그때만 해도 해병대 장교 하면 끗발이 있었는데 원장님이 보호자로 온 그 장교를 세워두고 “당신 이 아이 친아버지 아니지? 어떻게 친아비면 애를 이렇게 방치해놨냐?”면서 호통을 쳤어. 그 일화는 한동안 포항 시내에 퍼져 화제가 되었지.이 : 원장님이 마약사범으로 검찰 조사를 받은 적도 있다면서요?김 : 미군들이 철수하면서 두고 간 약품에 치료용 마약 성분이 있었던 모양인데 우리는 내용을 몰랐지. 그런데 어느 날 경주지청 마약수사반이 병원에 들이닥쳐서 그걸 조사하는 거야. 당시 이명석 선린애육원 원장의 장남인 이진우 검사가 경주지청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원장님과 잘 아는 사이인 데다 의도성이 없는 걸로 확인되어서 별 탈 없이 지나갔지.의사 김종원은 미 해병기념 소아진료소와 선린의원, 선린병원을 거치며 많은 포항 시민들에게 따듯한 인술을 베풀었다. 연탄가스로 일찍 세상을 떠난 김 원장의 4남 걸수의 친구였던 고(故) 정장식 포항시장은 김 원장의 장례식 조사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세 번씩이나 생사를 넘나들던 저의 어머님을 살려주셨습니다. 동빈로 부둣가의 파란색 2층 목조건물이던 세칭 ‘해병대병원’은 의료시설이 열악했던 1960~1970년대 포항 시민의 건강을 보살펴주던 귀한 병원입니다”라고 했다.대담·정리 : 이한웅 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

2022-10-03

“올겨울 잘 넘기면 좋아질 거라는 긍정적 희망을 가지자”

강재명 포항시 감염병대응본부장 코로나19의 기나긴 터널이 끝나간다는 신호가 곳곳에서 나온다. 최근 ‘팬데믹은 끝났다’고 한 미국 대통령의 말이 화제가 됐고, 국내 방역당국도 6개월 정도 뒤에 대유행이 종식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재작년부터 코로나 대응의 마지막 고비라는 말을 여러 차례 들어온 국민들은 반신반의한다. 끝날 것처럼 하다가 다시 불붙는 재유행의 반복은 이제 없는 것일까? 처음에는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선진 방역의 자부심이었다가 결국 장기화의 늪에 빠진 코로나19. 현재도 하루 만 명 이상의 확진자가 나오고, 수십 명이 사망하는 상황에서 엔데믹을 논해도 되는 것일까? 지난 2년간 포항지역 코로나19 방역의 최전선에서 위기 극복에 앞장섰던 포항시 감염병대응본부 강재명 본부장을 만나봤다. -코로나19가 발생한 지 3년이 되어간다. 정부에서는 내년이면 종식된다는데 가능할까.△한창 유행 때보다는 감소하고 있지만 아직 경북에서는 2000명 이상, 포항에서도 수백 명 이상의 확진자가 매일 발생하고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델타 변이에 비해 중증도가 감소하고 있고 국민의 절반이 감염됐으며, 90% 이상이 예방접종을 했기 때문에 올해 겨울을 잘 넘기면 상황이 좋아질 거라는 긍정적인 희망을 가져본다. 새로운 변이의 등장 같은 악재가 없다면 말이다.-큰 변수가 없다면 내년 봄에는 완전 종식을 기대해 봐도 되는 건가.△물론 완전히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치명률이 독감 수준으로 낮아지고 있지만 아직 80대 이상은 2%대의 사망률을 보인다. 상황이 좋아지더라도 코로나19는 풍토병으로 남아 독감과 비슷하거나 약간 중한 정도로 계속 유행할 것이다.-포항에서 첫 확진자가 나온 2020년 2월부터 방역의 최전선에서 치열한 날들을 보내셨다.△당시 대구에서 확진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포항에도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포항시 감염병대응본부가 꾸려졌다. 포항지역 5개 종합병원과 협의해 통합선별진료소를 포항의료원에 설치했는데, 전국에서 처음으로 제시된 민관합동 모델로 초기 코로나19가 포항에 유입되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았다. 지금은 코로나19의 특성을 잘 알고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됐지만 당시에는 의료진조차 공포가 컸고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까 두려웠다. 주말과 휴일 없이 힘든 나날이었지만 예상치 못했던 기쁨도 있었다. 시민들이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과 물품을 보내주신 것이다. 마음을 담은 손 편지들이 피로를 달아나게 만들었다.-코로나가 장기화되면서 의료진들의 정신적 스트레스도 심각한 수준이라고 들었다.△나의 경우 2년 정도 가족이나 지인들과 만남을 자제했다. 사람들과의 교류가 삶에서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은 시간이었다. 작년 말부터 정서적인 고립이나 스트레스, 우울감이 컸고, 방호복을 입고 진료하고 폐쇄된 곳에서 따로 식사하는 것이 저를 포함한 의료진들을 지치게 했다. 2020년 2월부터 2년 3개월간 감염병 전담병원으로 역할을 하던 포항의료원이 올해 5월 전담병원에서 지정 해제되고, 여러 병동에서 코로나19 환자를 나눠서 진료하면서 일의 부담을 덜게 됐다.-의료진은 일반적인 사회적 거리두기보다 훨씬 높은 사생활 제한과 감염에 대한 압박으로 부담이 컸을 것 같다.△매일같이 확진자를 돌봐야하는 상황이고 내가 걸리면 고위험군에 전파될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 조심한다는 것이 조금 과했던 것 같다. 지난 8월에 나도 확진 판정을 받았고 이후 면역이 생겼다고 판단해 사람들과 만나기 시작했다. 여름휴가 때 부모님을 찾아뵙고 난 뒤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코로나 후유증으로 병원을 찾는 환자들을 공감하는데도 도움이 됐다.-코로나19 후유증으로 감염내과를 찾는 경우도 많나. 감염내과가 주로 어떤 환자들이 찾나.△대부분의 질환은 감염과 관련이 있다. 쉽게는 감기부터 시작하는데, 감염내과를 찾는 대다수는 발열은 있는데 원인을 모르는 경우다. 결핵이나 에이즈 그리고 해외여행을 다녀온 후 풍토병에 걸린 환자들도 다른 의사는 경험이 없어 힘들어한다. 가을철 유행하는 쯔쯔가무시와 중증열성혈소판감소증후군(SFTS) 등도 진료한다. 요즘은 코로나 감염 후유증으로 기침이나 무력감, 피로감을 호소하는 환자도 많다. 당뇨가 악화되거나 갑상선, 부신 기능이 떨어지는 후유증을 동반하기도 하는데 원인을 찾고 치료를 돕는다.-코로나19 상황에서 감염내과 전문의의 중요성이 부각됐다. 경북지역 유일한 감염내과 전문의로 동분서주하셨는데 이후 변화가 있었나.△초기에는 경북에서 혼자였는데 지금은 세명기독병원에 한 분 더 계신다. 인구에 비하면 여전히 부족하고 지역 간 의료 격차는 해묵은 문제다. 사스와 메르스, 코로나19, 원숭이 두창 등 새로운 전염병은 계속되고 있다. 감염병 전문가가 더 필요하지만 감염내과는 3D 업종으로 지원자가 적다. 병원의 수익을 직접적으로 올리는 역할이 적다 보니 병원에서도 구인에 적극적이지 않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국가 감염병 대응체계를 구축하고 전문가 양성을 위한 정책적,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 코로나19로 감염내과가 가장 핫한 과가 되었지만 힘들다는 인식이 커져 지원자는 오히려 줄었다.-감염내과 전문의가 된 계기가 있나.△감염내과는 발열과 관련된 질환을 진료한다. 발열 원인으로는 감염뿐 아니라 암이나 류마티스 질환 등 굉장히 광범위하다. 어려서부터 셜록 홈즈 같은 추리소설을 좋아했는데 홈즈가 범인을 찾듯 여러 가설을 세워 병의 원인을 찾아내는데 재미와 보람을 느낀다. 현대의학은 자신의 전문분야만 진료하는 경우가 많은데 감염내과는 사람 전체를 두루 살핀다. 게다가 HIV(인체 면역결핍 바이러스), 결핵 등을 제외한 대부분 감염질환은 원인만 찾으면 환자상태가 확연하게 좋아지기 때문에 보람이 더 크다. -어려운 의료 활동에 재미를 느낀다니 의사가 천부적인 일인가 보다.△의사가 되고자 한건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어서다. 아무런 연고 없는 포항에 오게 된 것도 의료선교에 관심이 있어서였고, 한국인 선교사가 세운 캄보디아의 헤브론 병원으로 의료봉사를 다녀온 적이 있다. 댕기열이나 말라리아 같은 풍토병으로 어려움을 겪지만 의료가 낙후된 나라의 사람들을 도우며 큰 보람을 느꼈다.최근 실외에서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제되고 코로나 관련 국내 입국 방역조치도 모두 풀렸다. 4일부터는 요양병원과 요양원의 접촉면회도 허용된다. 코로나19 여름철 재유행이 끝물에 접어들고 서서히 끝날 것이란 전망이 나오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당장 올해 겨울을 안전하게 넘겨야 한다. 강재명 본부장은 코로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신종 전염병의 유행은 계속되리란 걸 유념해야 한다고 말한다. 코로나19라는 긴 터널의 마지막 구간을 지나고 있는 지금. 주기가 점점 짧아지는 전염병 대유행을 대비하기 위해 짚어야할 과제가 많다는 얘기다.-팬데믹을 겪으면서 국내 의료체계 약점이 많이 드러났다.△가장 시급한 곳은 요양원과 요양병원이다. 고위험 환자들이 밀집되어 있고 격리가 어려운 구조여서 집단 발병이 많았다. 종합병원도 다인실 위주여서 한 명의 감염으로 순식간에 퍼지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다음으로, 코로나 시기 동안 제때 병원을 찾지 못해 위기의 순간을 보내야 했던 분만이나 소아, 투석, 수술이 필요한 환자들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 실제로 119차량에서 분만하는 황당한 일도 발생했다. 지역별로 이런 상황의 대처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의료기관이 민간이기 때문에 재난상황에서 민관의 합리적이고 신속한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 포항에서는 민관협력이 잘 이뤄졌지만 국가적으로는 일방적인 행정명령과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정책으로 미흡한 점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미래의 재난을 막기 위해 이런 점들이 보완되어야 한다.- 전문 인력과 시설 부족은 사스 때부터 반복되는 문제 아닌가.△코로나 시기에 서울 한 대형병원에 마련된 감염병 전문센터의 경우 환자가 줄면서 최근 의료 인력을 다른 병동으로 옮겼다. 전염병은 언제 닥칠지 모르기에 유지관리 체계를 선제적으로 갖춰야 한다. 국가지원으로 시설을 유지하면서 평상시에는 다른 환자를 받아서 운영하고 감염병 전문 인력들은 주기적으로 훈련해야 한다. 코로나 초기 방호복을 입는 것부터 감염 환자 동선을 구축하는데도 어려움이 많았다. 평상시에 훈련이 되어야 신종 전염병을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다.-정부는 코로나19 대응의 마지막 고비는 이번 겨울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대비해야 하나.△오늘 인터뷰에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다. 올 겨울에는 독감과 코로나가 같이 유행하는 트윈데믹 가능성이 크다. 작년 겨울과 올봄에 코로나에 감염됐더라도 올 가을에 항체가가 떨어져 재감염 위험이 올라가게 된다. 코로나19와 독감이 동시에 감염되면 사망률이 2배가 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올 가을에 코로나19 2가 백신과 독감 예방접종 두 가지 모두 접종하길 바란다. 2가 백신은 코로나19 초기에 유행한 바이러스와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BA.1)를 동시에 대응하기 때문에 중증 예방효과가 크다. 특히 65세 이상 고령자와 당뇨병 등의 기저질환이 있다면 반드시 접종해야 한다.-백신 접종 후유증이 크다 보니 백신을 안 맞겠다는 분들 많다. 최근 한 조사에서도 국민 10명 중 3명은 코로나19 백신 추가 접종의향이 없다고 나왔다.△감염내과 전문의로서 예방 접종을 많이 해봤지만 여느 백신에 비해 코로나 백신의 부작용이 많았던 건 사실이다. 후유증은 부담되지만 그래도 지금은 맞아야 하는 상황이다. 부작용을 크게 겪었다면 의사의 처방을 받아 노바벡스나 스카이코비원을 접종할 수 있다. 이들 백신은 기존 백신 제작에 활용된 전통적인 유전자재조합 방식으로 제조되어 부작용 위험이 낮다.강재명 본부장은서울아산병원에서 전공의를 수료하고 감염내과 분과 전문의를 취득했으며 포항선린병원 감염내과 과장과 캄보디아 헤브론병원 내과 과장,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내과 외래 부교수를 지냈다. 현재 포항 성모병원 감염내과 과장으로 대한내과학회와 대한감염학회, 대한감염관리학회, 대한중환자학회 등의 활동을 통해 지역의 감염병 대응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오고 있다. 포항에서 첫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한 2020년 2월, 포항시 감염병대응본부장으로 위촉되어 포항지역 방역현장 최일선에서 코로나 방역을 진두지휘했다. 코로나19가 종식되는 그날까지 시민의 일상 회복을 돕는 든든한 조력자가 될 계획이다.배은정 1974년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사학과 졸업. TBC·포항MBC·경북교통방송 작가. ‘포항문화의 상징과 공간’ 공저./배은정 작가

2022-10-03

전쟁고아를 사랑하는 마음이 포항으로 이끌어

포항의 정신을 상징하는 사람으로 선린병원을 세운 김종원 원장을 꼽을 수 있다. ‘할아버지 원장님’이라는 호칭이 더 익숙한 김종원 원장은 이 땅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인술을 베푼 의인(義人)이었다. 김종원 원장이 1953년 포항에 세워진 미해병 기념 소아진료소의 운영을 맡은 이후 2007년 숨을 거둘 때까지 포항의 의료와 교육 분야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1962년부터 김종원 원장을 가까이서 모신 김화문 기쁨의 교회 원로장로에게 김 원장의 감동적인 삶을 들어보았다. 이한웅(이하 이) : 할아버지 원장님(김종원)을 곁에서 오랫동안 모셨지요?김화문(이하 김) : 1962년에 처음 뵈었으니 2007년 작고하실 때까지 45년간 모셨지. 내가 기쁨의 교회 전신인 북부교회에 학생으로 출석할 때 원장님을 교회 장로님으로 먼발치에서 뵈었어. 그러다가 미 해병기념 소아진료소가 선린의원을 거쳐 정식 법인병원으로 출발하던 1962년에 조직을 갖추려다 보니 사람이 필요했던 모양이야. 그때 나는 포항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포항대학의 전신인 포항수산초급대학 상학과 2학년이었는데, 영덕 강구에 있는 동일제관이라는 통조림 제조공장에서 실습을 하고 있었지. 그때 북부교회 이성도 집사님한테서 연락이 온 거야. 선린병원 원장 장로님이 찾으시는데 한번 찾아뵈라고 말이야. 선린병원이 설립될 때 병원 직원은 대부분은 병원과 가까운 북부교회 성도였어. 경리나 회계 쪽으로 직원이 급하게 필요했던 거지. 마침 나는 부기 2급에 상학과를 다니고 있어 유리한 조건이었던 것 같고, 교회에서 원장님이 눈여겨보신 것 같아. 그렇게 김종원 원장님과 만난 후 원장님이 2007년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인연이 이어졌지.이 : 병원에서 처음 맡은 업무는 어떤 것이었습니까?김 : 처음부터 경리 업무를 맡지는 않았아. 직원 수가 많지 않아 초기에는 모든 직원이 1인 3역, 1인 4역을 했지. 의약분업이 실시되기 전이라 병원 내에 약국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약봉지를 포장하고 배달하는 일부터 시작했어. 그 후에 경리와 회계 업무를 하고, 또 원무 등 병원 행정 업무를 두루 거치게 되었지.이 : 1962년 선린병원이 개원할 때 포항의 분위기는 어땠나요?김 : 6·25전쟁 후 전쟁고아를 미 해병기념 소아진료소가 미군이 철수하는 바람에 더 이상 약품과 재정적인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일반 환자를 받아 그 수익으로 고아들을 무료로 진료하기 위해 선린병원을 세웠어. 그런데 원장님의 철학이 영리를 추구하는 개인병원은 안 된다고 해서 돈의 흐름이 투명한 재단법인을 세웠지. 그래서 초기에는 직원들이나 원장님이나 봉급을 제때 받을 수 없었어. 마침 전후 복구가 활발히 진행될 때여서 1962년 5월에 포항이 국제개항장으로 지정되고 6월에는 도립 보건소가 설치된 데 이어 8월에 선린병원이 문을 열었지.이 : 장로님은 선린병원과 한동대 통합 업무를 위해 잠시 한동대학교에서 근무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선린병원에서 보내셨군요.김 : 선린병원이 법인으로 전환된 후 32년간 선린병원에서 김 원장님을 모셨지. 정년 퇴임하고는 한동대학 법인 사무처장으로 5년 있었고. 거기서 나오니까 원장님이 “나 죽을 때까지 같이 있어야지”라고 해서 다시 선린병원에 들어가서 2010년에 퇴직했지.이 : 김종원 원장님을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요?김 : 원장님을 할아버지, 할아버지 그렇게 부르면서 익숙해진 거지. 물론 처음부터 할아버지라고 부르지는 않았고, 환자로 온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할아버지라고 불러서 그렇게 된 거야. 사실 나한테는 아버지뻘이지. 원장님이 북한에 두고 온 맏아들 정수가 1938년생으로 나하고 나이가 같아. 그래서 유독 나를 챙기신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이 : 원장님이 북한에 아들 셋을 두고 온 사연이 궁금하군요.김 : 원장님은 북에 두고 온 세 아들 생각이 나서 그런지 주일날이면 교회 중고등학생들을 앉혀두고 이야기를 들려줄 때가 많았어. 애들을 참 좋아했지. 그때 월남하신 이유를 들려주셨어. 평양의전을 졸업하고 김일성대학 의과대학의 전신인 평양의학대학 소아과 의사로 근무할 때 두 차례나 공산당에 끌려가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해. 한 번은 환자가 남쪽으로 내려가 치료를 받겠다고 해서 진단서를 발급했는데, 이 사람이 38선에서 발각되는 바람에 원장님이 간첩으로 몰려 고문을 당하고 죽음 직전까지 갔다고 했어. 그때 마침 원장님이 평양에 파견된 러시아 고문의 아들을 치료해준 덕분에 가까스로 풀려났다고 해. 또 한번은 6·25전쟁 때 국군이 평양을 점령한 후 유엔 한국민사지원단(UNCACK) 병원에 근무하면서 미군과 한국군을 치료해준 것이 문제가 되었지. 1·4후퇴를 앞두고 인민군이 다시 평양으로 들어올 태세였는데 인민군에게 잡히면 처형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고 해. 그래서 걸을 수 있는 세 아들은 할아버지 집으로 보내고 아내와 맏딸 정숙, 젖먹이 막내아들 걸수만 데리고 야밤에 고모 가족과 함께 남쪽으로 급히 온 거야. 세 아들을 곧 찾으러 가겠다고 약속했지만 결국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만나지 못했지. 그 후 원장님은 고모 가족과 2주 만에 대구에 도착해 동촌 근처 동촌교 밑에서 피난 생활을 하셨어. 이 : 그럼 북에 두고 온 가족 이야기는 안 하시던가요?김 : 왜 안 했겠어. 원장님이 대구 동산병원에서 근무하시다가 포항으로 오신 것도 북에 두고 온 아들 생각 때문이지.이 : 그 이야기는 나중에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고, 이산가족 상봉도 있었는데 북에 두고 온 가족을 찾아보려고 노력하셨겠군요.김 : 당연히 했지. 국정원장을 지낸 임동원 씨와는 각별한 사이였어. 평양에 있을 때 같은 집에서 살았지. 임 원장도 1·4후퇴 때 단신 월남해 육군사관학교를 나왔잖아. 김 원장님을 아버지처럼 모시며 해마다 찾아왔지. 내가 김 원장님을 모시고 서울에서 임 원장을 만난 적이 있는데, 아들 삼형제의 안부도 확인했고 상봉할 수도 있었지만 스스로 포기하셨어. 혹시라도 본인의 신분이 노출되어 북한에 있는 아들들이 피해를 볼까 봐서였지. 가끔 그런 말씀을 하셨어. “공산당, 당해보지 않으면 몰라!” 그 후 미국 시민권을 가진 맏딸 정숙이와 사위가 평양을 방문해 세 아들과 만나고 원장님께 전하는 편지를 받아왔어. 원장님은 그 편지를 참 소중하게 품고 다니셨지.이 : 김 원장님은 대구에서 피난 생활을 하시면서 어떻게 남한의 의사가 되었습니까?김 : 원장님이 대구 동촌교 다리 밑에서 피난 생활을 하며 근처 공립병원에 일을 봐주다가 우연히 북한에서 함께 근무한 간호사를 만났지. 이 간호사가 자신이 근무하는 동산병원의 황용운 원장 서리를 소개해주었어. 원장님은 마침 북한에서 가지고 온 청진기와 평양의전 졸업장이 있어서 동산병원의 부탁으로 소아과 의사로 근무하게 되었지.이 : 포항에 별다른 연고가 없는 원장님이 포항에 정착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김 : 전쟁고아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지. 동산병원에 근무할 때 미국 선교단체와 동산병원, 미 해병대 그리고 경동노회 등 기독교계가 포항의 전쟁고아를 치료하는 진료소를 설립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그러던 차에 함께 남한으로 온 고모 가족이 포항에 있어서 찾아가다가 시내 우체국 근처의 포탄 웅덩이 속에 고아 여러 명이 들어가 있는 장면을 보게 된 거야. 그때 북한에 두고 온 세 아들이 떠오른 거지. 그 직후 대구로 가서 포항의 소아진료소를 자원했다고 해.김화문김화문 기쁨의 교회 원로장로는 김종원 원장을 그림자처럼 모신 인물이다. 그 시기는 1962년부터 2007년까지 45년 동안이다. 김 장로는 포항고를 졸업하고 포항수산초급대학 2학년 재학 중에 통조림공장에 실습을 나갔다가 김 원장의 부름을 받아 선린병원에 입사했다. 1938년생인 김 장로는 김 원장이 북한에 두고 온 아들 셋 가운데 장남 정수와 나이가 같다. 1962년 선린병원의 약국 보조사원으로 일을 시작한 김 장로는 경리과장, 원무과장을 거쳐 사무국장, 법인 사무처장을 거쳤다. 선린대학교 설립과 한동대학교 법인(사무처장) 업무를 맡았으며, 정년 후에는 선린병원과 한동대학교를 오가며 김 원장을 모셨다. 2007년 김 원장이 별세한 후에도 선린의료원에서 근무하다 2010년 퇴직했으며, 대동신협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대담·정리 : 이한웅 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

2022-09-28

영화 속 전쟁… 슬프고도 고통스런 나날의 기록

지난 2월 24일 블라디미르 푸틴의 명령을 받은 러시아 군대가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를 공습하며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모두의 기대와는 다르게 긴 시간 이어지고 있다. 전 세계적 경기 침체 속에서 두 나라의 전쟁은 원유와 천연가스, 곡물 등의 가격을 치솟게 만드는 주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세계인의 우려가 갈수록 커지는 상황. 경제 문제보다 더 걱정스러운 건 양국의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전쟁은 그것을 결정하는 소수의 통치권자가 아닌, 전쟁이 만들어낼 이익과는 무관한 다수 국민의 희생을 불러오는 비극이다. 엄청난 숫자의 사망자와 난민을 양산하고 있는 이 전쟁은 언제가 돼야 끝이 날까? 조속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전을 간절한 마음으로 비는 이들이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많다. 그들에게 시대와 장소 불문 ‘절대악’이라 불러 마땅할 전쟁의 슬픔과 고통을 스크린에 옮긴 영화 2편을 소개한다.태평양전쟁, 한·일 청춘의 비극 다룬 ‘호타루’영화 ‘호타루’를 보고 있노라면 과거사에 관한 미움과는 별개로 일본이 무척 아름다운 풍광을 지닌 나라란 걸 알게 된다. 눈이 시리도록 짙푸른 가고시마의 바다, 삭막해진 마음을 다독여주는 북해도의 설경(雪景), 흑백의 회상 장면에서 투박하게 빛나는 새하얀 포말….‘호타루’는 반딧불이를 뜻하는 일본어다. 세계 제2차대전 당시 미국 군함을 향해 목숨을 걸고 날아가던 자살특공대(가미카제·神風). ‘호타루’는 반딧불이가 돼서라도 고향에 가고 싶어 했다는 자살특공대원들의 소원에서 따온 제목이다.열여섯 어린 소년까지 ‘국가적 대의’라는 조악한 명분으로 희생시켰던 비극적 전쟁의 역사. 후루하타 야스오 감독은 반전과 평화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호타루’의 전개는 단순하고 간략하다. 1989년 히로히토(裕仁) 일왕이 사망한다. 그 죽음은 조용한 어촌에서 전쟁의 상처를 숨긴 채 살아가던 가미카제 대원 야마오카(다카쿠라 켄 분)를 회상으로 이끈다. 연인을 자신에게 맡기고 죽음을 향해 출격했던 한국인 소위 김선재와 지금은 자신의 아내로 살고 있는 김 소위의 여자 도모코(다나카 유코 분), 그리고,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자신이 죽을 차례만을 기다리던 공간 치란(마을 이름).영화는 현재의 공간 가고시마와 과거의 공간 치란을 오가며, 국가집단의 광포한 메커니즘이 강제한 전쟁이 개개의 인간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로 남는 것인지를 보여준다. 상처는 끈질겼다. 맹목적으로 히로히토를 숭배하던 열여섯 가미카제 대원은 백발의 노인으로 변했지만, 일왕이 죽었다는 뉴스를 듣고는 “이제 나의 시대를 끝났다”며 설산(雪山)으로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야마오카는 전쟁 때 죽은 한국인 김선재 소위가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고, 혼란스러움은 깊은 병을 앓고 있던 도모코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44년을 잠복해온 전쟁이 야기한 생채기.‘호타루’는 억지스런 설정과 어색한 강변으로 ‘반전·평화’를 외치는 유치한 영화는 아니다. 다카쿠라 켄과 다나카 유코의 농익은 연기와 감미로움과 비극적 서정을 동시에 표현한 쿠니요시 료이치의 세련된 영화음악, 눈부신 하늘과 바다의 색깔이 어울린 영화임은 분명하다.그러나,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치게 아름다운 풍경과 감미로운 음악은 메시지가 관객에게 건너가는 길을 차단해버렸다. 거기에 더해진 야스오 감독의 과도한 감정 이입은 영화를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일제강점기 식상한 신파극(新派劇)으로 만들어버렸다. 중심을 지켜야 할 감독이 흥분하면 배우도 흥분하고, 덩달아 관객도 흥분하기 마련 아닌가.그런 이유에서다. “자식을 죽으라고 명령하는 부모는 없다”며 어버이로서의 일왕이 아닌 전범(戰犯) 일왕을 힐난하는 할머니의 눈물도, “나는 대일본제국이 아닌 조선민족과 연인을 위해 출격하는 것이다”는 김선재 소위의 장엄한 유언도, 김 소위의 유품을 가지고 경상북도 안동을 찾아가는 야마오카와 도모코의 비장미 가득한 한국 방문도 핍진성에까지는 가닿지 못한다.그러나, 이런 약점도 이해 못할 것 없다. 이것 하나만 잊지 않는다면. 전쟁은 짙푸른 바다와 하늘을 나는 갈매기, 아름다운 설원뿐 아니라 인간까지 파괴하는 악(惡)이다.전쟁을 경험한 바 없고, 스스로 반전평화주의자라 생각한 적도 드물지만 ‘호타루’를 봤던 날, 독일 화가 케테 콜비츠가 제2차대전의 포화 속에서 아들을 잃고 그렸다는 판화의 제목이 가슴을 치는 이유는 뭐였을까?“더 이상 전쟁은 없다!” 전쟁을 이기는 유일한 힘은 사랑이라 말하는 ‘애수’미국이 이라크를 향해 ‘충격과 공포 작전’을 시작했던 2003년 3월. TV 화면이 폭격을 생중계하던 새벽. 평소 알고 지내던 화가 한 명이 전화를 걸어왔다.“우리는 인류에 대한 최소한의 연민조차 상실했다”고, “잿더미로 변한 바그다드는 우리들의 양심이 불타버렸음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그녀 목소리에 차마 ”나는 자고 있어다“고 말할 수 없었다.그리고 다음날. ‘아아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여’를 쓴 시인 김준태는 천년고도 바그다드에서 미 공군기의 폭격에 사망한 아이들의 피 묻은 눈동자를 곡(哭)했다.며칠 후. 지금은 유명을 달리한 철학자 리영희(1929~ 2010)가 사람들 앞에 나섰다. 그리고는 말했다.“전쟁을 멈출 수 있는 건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뿐”이라고. “예수를 믿건, 부처를 믿건, 알라를 믿건 우리는 지상에서 사랑을 아는 유일한 존재 인간임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전쟁은 과연 인간의 사랑까지도 파괴할 수 있을까? 영화 ‘애수’를 떠올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아무리 그럴싸한 명분을 갖다 붙이더라도 전쟁은 인간을 파괴하고, 인간이 딛고 선 세상을 황폐화시키는 악이다.어떤 국가도 다른 국가의 불행을 강요할 권리를 가질 수 없다. 당시 미국이 이라크를 향해 쏘던 미사일과 폭탄, 지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땅을 공격하는 미사일과 폭탄은 부정할 수 없는 절대악.미사일과 폭탄에는 아이와 여자를 피해갈 수 있는 눈이 달리지 않았다. 전쟁은 인간 안에 숨어있는 악마를 불러낸다. 우리가 경험한 역사는 피 흘리는 목소리로 증언한다. “아무리 좋은 전쟁도 최악의 평화보다 못하다.”누가 무어라 폄하의 말을 하더라도 사랑은 선(善)이다. 설레는 가슴으로 밤새 서툰 솜씨의 시를 쓰게 만들고, 청맹과니에게 세상을 보게 하며, 음치에게 감미로운 세레나데를 읊조리게 하는 사랑은 부정할 수 없는 절대선. 그런데, 절대악 ‘전쟁’이 인간의 유일한 희망 ‘사랑’을 깨뜨린다면? 마빈 르로이 감독의 영화 ‘애수(Waterloo Bridge)’는 바로 이 최악의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 전쟁으로 인해 처참하게 깨진 청년장교 로이 크로닌(로버트 테일러 분)과 발레리나 마이라 레스터(비비언 리 분)의 비극적인 사랑.영화팬들 귓가에 맴도는 주제곡 ‘올드랭사인(Auld lang syne)’의 비장미는 오랜 세월을 뛰어넘어 여전히 우리들의 가슴을 아프게 흔든다.세계 제1차대전 와중에 젊은 장교와 예쁜 무용수가 서로에게 끌려 사랑에 빠지지만, 전쟁터로 나간 장교는 돌아오지 않고, 지긋지긋한 전쟁과 자신의 삶에 절망해 거리에서 몸을 파는 여자로 전락하는 무용수.하지만, 전사한 줄 알았던 장교는 살아 돌아오고, 무용수는 연인에 대한 죄책감에 달려오는 트럭에 몸을 던진다.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전쟁은 ‘마이라 레스터’의 행복을 강탈해갔다. 비단 그녀뿐일까? 수많은 연인과 식구들의 헤어짐과 눈물, 이별과 죽음을 강제한 게 바로 전쟁이었다.영화를 앞으로 돌려본다.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마이라를 잊지 못하는 로이는 그녀가 남긴 마스코트(Mascot)를 매만지며 슬픈 표정으로 둘이 처음 만났던 자리를 서성인다.전쟁은 둘의 사랑을 온전히 파괴한 것인가? 한 사람의 가슴에서 다른 한 사람을 영원히 추방하지 않는 한 그럴 수 없을 터. 로이의 사랑은 그때까지도 현재진행형이었으며, 전쟁은 결코 사랑을 이기지 못했다.비극의 극단으로 치닫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인간들 가슴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사랑으로 인해 해피엔딩의 영화처럼 끝났으면 하는 바람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9-27

4만2천평 백일홍 화원 ‘청송정원’서 가을 정취 흠뻑

폭염과 폭우가 사람들을 괴롭혔던 이번 여름. 그러나, 영원히 지속되는 계절은 세상에 없다. 어느덧 아침과 저녁으론 서늘한 바람이 불고,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는 가을이다.기승을 부리던 ‘코로나19 재유행’도 다소 누그러지고 있다. 만산홍엽과 천고마비의 시절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이런 가을이면 누구나 일상의 공간이 아닌, 낯설고 아름다운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기 마련.산 좋고, 물 맑은 청송군은 청량한 공기를 호흡하며 농촌의 서정을 즐길 수 있는 ‘산소카페’로 이미 명성이 높다. 도시 브랜드로 확실하게 자리 잡은 ‘산소카페 청송’은 지역에 썩 잘 어울리는 네이밍으로 평가받는다.바로 그곳 청송은 가을여행에 맞춤한 곳이라는 게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게다가 지금은 화려한 색채의 백일홍과 코스모가 방문객들을 반기는 시기라 낭만과 즐거움이 더한다.청송정원의 백일홍단지에서 가을날의 추억을 쌓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아래 관련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한다. ▲산소카페 청송의 랜드마크가 될 백일홍정원청송군은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 지역에 어울리는 맞춤형 관광지를 개발해왔다. 이는 지역의 새로운 볼거리와 관광명소를 만들어 주민들과 관광객들에게 느낌과 쉼, 그리고 치유의 공간을 제공하려는 의지에서였다.이런 의지 끝에 만들어진 것이 바로 산소카페 청송정원 백일홍단지. 여행하기 좋은 시절 가을을 맞아 최근 청송군은 지역사회·지역단체와 마음을 모아 조성한 청송정원 백일홍단지를 무료로 개방한다고 밝혔다.운영기간은 백일홍단지가 개장한 지난 8월 29일부터 오는 10월 31일까지 약 2개월이다. 관람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저녁 7시까지. “당초 계획되었던 입장료는 코로나19 장기화에 지친 군민과 관광객들의 자유롭고 부담 없는 방문을 위해 별도 매표 없이 전면 무료로 이용하도록 했다”는 것이 청송군의 설명이다.이에 앞서 청송군은 지난해 7월 주민들과 함께 청송정원 백일홍단지를 국내 최대 규모로 가꾸어 9월과 10월 2개월 동안 약 1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을 유치했다. 이에 관광전문가들은 “백일홍정원은 청송군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확실하게 자리매김 했다”고 평가했다.청송군은 지난해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올해는 벤치 그늘막, 사과터널 등 각종 조형물과 포토존을 추가로 설치해 방문객의 볼거리와 편의시설을 확대하는 사업도 펼쳤다.구역별로 백일홍 색깔을 구분해 다채로운 경관을 조성하고, 주말 음악회와 버스킹 공연 등 각종 문화행사도 개최함으로써 앞으로 청송정원 백일홍단지를 찾는 방문객의 볼거리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이와 관련 윤경희 청송군수는 “지역 주민들과 단체가 협심한 결과 이런 대규모 단지를 성공적으로 조성할 수 있었다”며 “지속적인 관광객 유입을 통해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 청송정원 백일홍단지를 산소카페 청송군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추석 연휴에만 8천 명 넘는 이들이 찾은 청송정원화사함을 자랑하는 백일홍단지는 이미 청송의 최고 관광명소로 발돋움하고 있다. 청송군 파천면 용전천 일원에 조성된 백일홍 화원 ‘산소카페 청송정원’에서는 여행자는 물론 지역 주민들의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다.지역의 새로운 볼거리와 관광명소 조성을 목적으로 코로나19 시대에 다양한 관광수요를 예측하고, 주민들과 관광객들이 아름다운 공간에서 가을을 만끽하도록 하기 위해 4만2천 평 규모의 ‘산소카페 청송정원’을 조성한 것.독특한 관광지로서의 면모는 올해도 빛났다. 구역별로 백일홍 색깔을 구분해 다채로운 볼거리를 마련한 것이다.입장료 없이 가을의 정취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청송정원 백일홍단지의 큰 매력이다. 이를 반영하듯, 지난 8월 29일 개장 이후 지역 주민과 SNS 등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현재까지 1만 명이 넘는 관광객과 주민들이 백일홍을 보고 간 것으로 집계됐다.특히 추석 연휴기간에만 8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아와 청송군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우뚝 선 백일홍단지의 아름다움을 맛본 것으로 알려졌다.“앞으로도 다양한 각종 행사와 공연을 준비할 계획이니 가을여행을 계획한 분들은 청송을 찾아 신선한 공기와 향기로운 꽃 내음 속에서 주말을 즐기고 갔으면 한다”는 것이 청송군의 바람이다. ▲‘다시 찾고 싶은 여행지’ 청송으로 커가길실제로 청송군에서는 최근 눈에 띄는 행사가 여러 개 열렸다. 지난 17일에는 청송읍 농촌중심지활성화사업 지역 역량강화와 관련해 ‘2022년 청송 느림보대회’가 개최됐다.이 대회는 ‘걷고 싶은 환경조성, 주민의식 개선을 통한 슬로시티 실현’이라는 사업 취지 아래, 만개한 백일홍을 볼 수 있는 청정 휴양명소인 ‘산소카페 청송정원’에서 열려 이목을 끌었다.참가자들은 ‘산소카페 청송정원’의 걷기코스를 거닐며 가을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었고, 이와 함께 청송의 관광명소인 송소고택, 주산지, 청송정원, 청송사과축제를 주제로 한 부스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체험하는 즐거움을 누렸다.특히 제시된 미션에 성공하면 스탬프를 받고, 스탬프북을 활용해 코스 완주자에게는 상품도 증정했다.대회에 참석한 이들은 “특정세대가 아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진행돼 가족과 친구가 어울릴 수 있는 계기가 됐다”며 “이번에 보니 청송군이 가진 아름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란 걸 알았다. 청송이 다시 찾고 싶은 여행지로 성장하길 응원한다”고 입을 모았다. ▲꽃과 사람의 아름다움이 어우러지는 공간얼마 전 20일에는 ‘산소카페 청송정원-백일홍과 함께하는 음악회’가 열렸다.미스터 트롯 출연자 김희재, 류지광과 미스 트롯 출연자 강혜연, 그리고 김범룡, 우연이, 신계행 등 다양한 장르의 가수와 청송문화원합창단이 출연한 음악회는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지친 군민과 관광객들을 위로하며 재충전의 시간을 제공했다.“군민들과 관광객들의 문화 향유 기회를 제공하고, 가을의 문턱에 선 청송정원의 만개한 백일홍을 전 국민들에게 선보이기 위해 마련한 음악회”라는 것이 청송군의 설명이다.청송군의 새로운 자랑거리가 된 청송정원은 조성 단계에서부터 군민들이 함께했고, 지금도 관내 18개 기관과 단체, 지역민들이 구역별로 전담해 정원을 관리하고 있다.걱정과 근심이 많았던 코로나시대의 그늘을 잊고 다시 찾은 일상의 행복을 만끽하는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는 청송정원 백일홍단지는 지금 꽃의 아름다움과 사람의 아름다움이 어우러지는 곳으로 진화 중이다.만약 올가을에 청송을 찾는다면 백일홍단지와 함께 또 하나의 ‘꽃 장관’과 만나볼 수 있다. 주왕산면 하의리 주왕산관광단지에 활짝 핀 코스모스가 여행자들을 반기고 있는 것.청송군은 주왕산관광단지에 1만6천㎡ 규모의 코스모스 단지를 조성해 지역민과 관광객의 탄성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여기에 더해 진보면 객주공원(5천700㎡)에도 코스모스가 만개해 사람들의 행복감을 배가시킨다. 가을 여행객들은 이곳에서 각자의 추억을 만들기 위해 사진기를 들어올린다.이와 관련 청송군은 “지역 곳곳에 계절별로 화원을 조성해 많은 관광객이 찾아올 수 있도록 앞으로도 노력할 것이니, 청송에서 잊지 못할 2022년 가을을 보내시길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 /김종철·홍성식 기자

2022-09-27

파도 소리 들으며 걷는 영혼의 순례길

산과 강, 바다, 들판이 두루 펼쳐진 포항은 걷기에 참 괜찮은 곳이다. 내연산과 운제산을 걸어도 좋고, 형산과 제산 사이 형산강을 따라 강바람을 맞으며 걸어도 좋다. 비학산을 바라보며 흥해 들판을 걸어도 좋고, 동빈내항과 포항 운하, 송도와 영일대해수욕장을 갈매기와 함께 거닐어도 좋다. 산과 강, 들판, 바다, 도심을 따라 호젓한 길과 길이 그물코처럼 정겹게 이어져 있는 것이 포항의 매력이다.포항에 간다면 한 번쯤 바다를 바라보며 걸어봐야 하지 않을까. 포항은 바다를 떠나서는 말할 수 없는, 바다가 근본인 도시이기에. 경상북도의 해안선 428㎞ 중 포항의 해안선은 204㎞로 거의 절반에 이르고,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은 100여 ㎞에 이른다. 가는 곳마다 풍경은 다른 모습을 드러내고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중 포항의 색깔이 가장 짙은 길은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이다. 일월동에서 시작해 호미곶광장까지 25㎞에 이르는 이 길은 쉬엄쉬엄 걸어가면 예닐곱 시간 걸린다. 홀로 걸어도 좋고 다정한 길벗과 걸어도 괜찮은 길이다. 쉼 없이 밀려오는 파도와 하늘을 휘젓는 갈매기, 수평선 위의 선박들, 바닷가에서만 볼 수 있는 꽃과 나무와 암석 그리고 어촌의 지붕 낮은 집들과 선한 미소의 사람들을 드문드문 만날 수 있다. 4개 구간으로 된 이 길은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잔잔한 파도 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는 영혼의 순례길로 모자람이 없다. 연오랑세오녀길연오랑세오녀길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연오랑세오녀의 무대로 일월동 713번지에서 시작해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의 귀비고까지 6.1㎞에 이른다. 연오랑세오녀 설화는 신라 제8대 아달라왕 4년(157) 때 연오와 세오라는 부부가 바위에 실려 일본으로 건너가자 해와 달이 빛을 잃었는데, 세오가 짠 비단으로 제사를 지내자 빛을 되찾았다는 이야기다. 국보로 삼은 비단을 모신 창고가 귀비고이고,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이 영일현이다.좋은 문학 작품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영감을 선사한다. 이 설화 또한 다양한 해석이 열려 있는데, 영일만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동남 해안과 일본의 이즈모(出雲) 지방 사이를 오고 간 태양신화의 한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연오(延烏)와 세오(細烏)의 ‘까마귀 오(烏)’는 태양 속에 세 발 달린 까마귀가 살고 있다는 양오(陽烏, 태양) 전설과 연결되고, 영일현(迎日縣)이라는 지명도 태양신화와 이어진다. 포항의 이야기는 이렇듯 포항의 땅 안에 머물러 있지 않다. 해와 달을 품고 수평선 너머의 세력과 교류하고 혼융된 것이 포항의 역사이자 문화다.이육사의 대표작인 ‘청포도’도 이 길 위에서 탄생했다. 지금 해병 사단과 그 주변에는 일제강점기 때 약 200만㎡(60만 평)에 이르는 동양 최대의 포도 농장이 있었다. 1936년 이육사는 요양차 포항에 들렀다가 이 포도농장에서 영일만을 바라보며 ‘청포도’를 구상했고, 1939년 8월호 ‘문장(文章》’지에 발표했다. 이육사의 또 다른 대표작 ‘광야’는 항일 지사의 결연한 의지를 느낄 수 있는 반면에 ‘청포도’는 다양한 상징과 서정성 때문에 ‘광야’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다음의 글을 읽어 보면 이육사가 ‘청포도’를 얼마나 아꼈는지, 그리고 이 작품에도 일본의 패망과 조선의 독립을 향한 염원이 얼마나 강렬하게 깔려 있는지를 알 수 있다.육사는 ‘청포도’를 가장 아끼는 작품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1943년 7월에 경주 남산의 옥룡암으로 요양차 들렀을 때, 먼저 와서 요양하고 있던 이식우(李植雨)에게 털어놓은 말이다. 육사는 스스로 “어떻게 내가 이런 시를 쓸 수 있었을까?” 하면서, “내 고장은 조선이고 청포도는 우리 민족인데,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처럼 우리 민족이 익어간다. 그리고 곧 일본도 끝장난다”고 이식우에게 말했다고 한다.- 김희곤, ‘이육사 평전’, 푸른역사, 2010, 199쪽.이 시에 나오는 청포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연두색 청포도가 아니다. 당시 품종으로서 청포도가 포항의 미츠와(三輪) 포도원에서 양조용(釀造用)으로 재배되기는 했겠지만, 시에서처럼 손님 접대용으로는 거의 재배되지 않았다. 품종으로서 ‘청’포도가 아니라 익기 전의 ‘풋’포도여야 시가 제대로 독해된다(도진순, ‘강철로 된 무지개-다시 읽는 이육사’, 창비, 2017, 73∼74쪽 참조).선바우길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은 백사장과 해안의 몽돌, 자연석을 그대로 둔 채로 길을 냈다. 길이 끊어진 곳에는 데크를 놓아 길을 이었다. 바다 위로도 길이 나 있는 것이다. 데크 위를 걸어가면 발밑으로 파도가 철썩거린다. 이런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 곳이 선바우길 구간이다. 동해면 입암리에서 시작해 흥환해수욕장을 지나 흥환어항까지 6.5㎞에 이르며, 아름다운 바위와 절벽, 데크로드의 묘미를 한껏 누릴 수 있는 코스다.이 길에서는 태곳적부터 바람과 파도에 깎인 바위들이 기묘한 모습으로 자취를 드러내고 있다. 선바우를 비롯해 폭포바위, 여왕바위, 소원바위 등을 만날 수 있으며, 주상절리와 ‘한디기’라는 이름을 가진 하얀 절벽도 조우할 수 있다. 바위 구석에는 바다의 국화로 불리는 해국(海菊)이 수줍은 듯이 피어 있다. 다른 꽃들은 시나브로 시들어가는 가을에 피어나 겨울까지 빛나는 해국은 잎맥이 선명하기 그지없다. 누워서 자란다고 하여 누운향나무로도 불리는 눈향나무도 볼 수 있다. 붉은 해당화는 5월이 되면 바닷가에 지천으로 피었는데 이제는 드물게 볼 수 있는 희귀종이 되었다. 구룡소길구룡소길은 흥환리 어항에서 출발해 발산리를 거쳐 대동배까지 6.5㎞에 이르며 정감 어린 어촌 마을과 천연기념물인 모감주나무와 병아리꽃나무 군락지, 장군처럼 우뚝 서 있는 장군바위를 만날 수 있다. 이제는 바닷가에 가더라도 오래된 어촌을 보기가 쉽지 않다. 빛바랜 흑백사진에서나 볼 수 있는 어촌이 이 길 위에 있다. 마을 앞 포구에는 작은 어선이 정박해 있고, 길가에는 따사로운 햇살 아래 어망과 통발 같은 어구를 손질하는 어민의 손길이 분주하다. 계절에 따라 멸치, 오징어, 과메기 등을 말리는 풍경도 볼 수 있다.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을 걷다 보면 기암절벽과 움푹 팬 소(沼)를 이따금 만날 수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구룡소(九龍沼)다. 높이 40∼50m, 둘레 100여 m에 이르는 구룡소는 해안 절벽에 아홉 마리의 용이 살다가 승천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바위 주변의 움푹 팬 흔적은 용이 승천하면서 남긴 흔적이라고 한다. 누가 지어낸 이야기인지 알 수 없지만 구룡소를 보고 있으면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로 실감 나는 풍경이다. 마을 주민들은 이곳에서 풍어제나 출어제를 지낼 정도로 신성하게 여긴다.발산리에는 6월이 되면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 노란꽃이 피는 모감주나무 군락지가 있다. 종자를 염주로 만들기에 염주나무라고도 하는데, 서양에서는 ‘황금비를 뿌리는 나무(Golden rain tree)’라고 한다. 꽈리처럼 생긴 열매는 옅은 녹색이었다가 열매가 익으면서 짙은 황색으로 변한다. 하얀 꽃이 피는 모습이 병아리를 떠올리게 한다고 하여 병아리꽃나무라고 하는 나무도 이 길에서 만날 수 있다. 발산리의 병아리꽃나무와 모감주나무 군락지는 천연기념물 제371호에 지정되어 있다.호미길호미곶면 구만리 산39에서 시작해 호미곶 해맞이광장까지 5.3㎞에 이르는 호미길에서는 ‘까꾸리개’라는 독특한 지명이 눈길을 끈다. 과거에 과메기의 원조인 청어가 얼마나 많았던지 뭍으로 밀려 나오는 경우가 허다해 갈퀴(까꾸리)로 끌었다고 한다. ‘까꾸리개’의 ‘개’는 강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어귀로, 포구(浦口)를 뜻하는 지명에 쓰인다. 즉 ‘까꾸리개’는 청어 떼를 갈퀴로 쓸어 담은 포구라는 뜻이다. 이 이야기는 약간의 과장은 있을지언정 사실에 가깝다. 과거에 영일만과 호미곶 일대에서 청어와 정어리 등의 어획량은 엄청나게 많았다. ‘까꾸리개’는 호미곶 앞바다에 청어를 비롯한 고기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말해주는 지명이다.‘까꾸리개’에서는 독수리 머리처럼 생겨서 독수리바위라고 불리는 암석이 길손들의 시선을 붙들어 맨다. 특히나 바다의 일몰을 감상할 수 있는 드문 곳이어서 해 질 녘에 길손들의 발길이 잦다.이 길을 걷다 보면 바다에서 육지로 향하는 거대한 계단을 볼 수 있다. ‘해안단구(海岸段丘)’라고 하는 이 계단은 바다와 땅이 움직이면서 만들어진 아주 특별한 지형이다. 호미곶 일대는 계단 모양이 뚜렷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해안단구로 손꼽힌다. 이처럼 이 길에서는 억겁의 세월에 걸쳐 하늘과 바다와 땅과 바람이 어울리며 빚어놓은 기묘한 자연현상을 만끽할 수 있다.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

2022-09-27

붉게 타다 결국 잿빛으로… 2014년 능가하는 최악 상황

소나무재선충병이 전국으로 퍼지고 있다. 경북과 경남은 물론이고 경기도와 강원도 등 서울춘천고속도로를 따라 수도권으로까지 급속히 확산되는 추세다. 대도시인 대구광역시, 울산광역시, 부산광역시 등도 감염 확산이 멈추지 않고 있다.녹색연합은 본보 보도 이후 전국 소나무 재선충병 감염 실태 현장조사를 벌여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현장 조사 내용에 따르면 감염 정도가 가장 심각한 곳은 경북 포항∼경주∼울산∼부산 등지로 이어지는 동해안 감염벨트로 확인됐다.특히 경주의 세계유산과 국립공원, 안동의 문화재보호구역 등지에도 붉게 물들어 단풍 든 것 같은 소나무들이 즐비한 것으로 드러났다.서울춘천고속도로와 남양주, 양평, 가평, 춘천 등지와 중앙선 철도 청량리∼서원주 구간에도 재선충병에 걸려 붉게 타들어 가듯이 죽어가는 소나무가 곳곳에서 관찰됐다. 녹색연합은 현재 상황은 소나무 재선충병이 가장 극심했던 2014년 상황을 능가하는 정도라고 밝혔다. □대구 경북 재선충 감염 피해 심각현재 소나무 재선충병이 가장 심각한 경북 포항∼경주∼울산∼부산 등지로 이어지는 동해안 감염벨트는 곳곳이 보기 흉할 만큼 맹폭됐다. 이곳은 동해안을 이동해 보면 도로와 시가지에서 손쉽게 제선충이 관찰도 정도로 감염이 길고 넓게 퍼져 있다. 포항과 경주의 경우 해안선은 물론 내륙의 산지까지 소나무가 단풍든 것처럼 온 산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상태다. 산속에 들어가면 지난 겨울에 조사한 감염목을 그대로 내버려 둔 곳도 곳곳에서 확인된다.경주의 경우 세계 유산과 문화재보호구역내에 소나무 재선충병 감염목이 퍼져 있다. 경주 남산은 국립공원이면서 세계 유산인데 남산의 능선과 사면에는 곳곳에 소나무가 재선충병에 걸려 죽어 있다. 감염목들은 잎이 붉게 변하면서 타들어가 회색빛 가지만 남은 채 집단으로 고사했다. 그렇지만 문화재청, 산림청, 경상북도, 경주시, 국립공원공단 등 남산의 소나무와 관련 있는 행정기관들은 모두 손을 놓고 있다. 포항에서 영천을 거쳐서 대구광역시, 고령, 의성, 안동까지 소나무가 분포하는 경북의 주요 도시 곳곳에도 소나무 재선충병이 확산되고 있다. 안동은 세계유산을 비롯해 문화재가 곳곳에 있어 특별한 관리가 필요하나 소나무 재선충병은 안동 산림 전체로 번지고 있다.  대구와 구미 등지에도 우려 수준을 넘었다. 중앙고속도로와 중부내륙고속도로 곳곳에서 쉽게 소나무 재선충병의 감염목을 볼 수 있다. 대구광역시는 아파트 단지와 시가지에서도 감염돼 죽은 소나무가 적잖다. 녹색연합은 “포항과 경주를 비롯해 경북의 주요 도시들은 지난 6월부터 산 전체에서 소나무 재선충병 감염목이 확인되고 있었다. 하지만, 소나무 재선충병 방제대책을 총괄해야 하는 경상북도, 울산, 부산 등 광역자치단체와 기초자치단체 모두 상황을 관망만 했다”며 “세계유산과 국립공원을 이렇게 관리해도 되는지 안타까울 지경이다”고 말했다.  □수도권과 경남, 강원 등 전국 확산경상남도의 상황도 만만치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밀양을 중심으로 창녕, 김해, 창원, 진주, 거제, 통영 등 서부 경남 전체의 소나무숲 사이 사이에 재선충병 감염목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고속도로와 국도를 비롯해 도시녹지와 주요 산지 곳곳에 재선충이  침범했다. 하지만, 국가적 산지 재해라고 하는 소나무 재선충병 대책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자치단체는 없다. 녹색연합은 우려스러운 것은 수도권이라고 했다. 경기도 남양주, 양평, 가평, 포천 등지에서 소나무 재선충병이 급속히 퍼지고 있다는 것. 여기에 더해 강원도 춘천과 홍천 등으로 계속해서 확산하고 있다고 했다. 수도권에서 강원도 춘천으로 연결되는 중부권 벨트에 소나무 재선충병으로부터 공격당하고 있으나 경기도와 강원도 모두 감염목의 실태조사와 방제에 소극적이라고 밝혔다. 소나무재선충에 밝은 지역의 전문가들은 이런 양상은 올봄부터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소나무는 상록수로 연중 늘 푸름을 유지하는 나무여야 하나 전국 곳곳에서 마치 가을 단풍 든 것처럼 소나무가 재선충에 감염돼 숲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확산이 심각한 광역과 기초 지자체의 산림 당국에서 소나무재선충병 방제에 나서기에는 현재 무리이고 역부족이라고 했다.  현재 정부마저 소나무 재선충병 방제를 포기한 것처럼 보이는데 인력과 예산, 장비가 턱없이 부족한 지자체가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소나무 재선충병 대책 소나무 재선충병은 지난 1988년 부산에서 시작돼 2004년 전후에 전국으로 확산됐다. 그리고 2014년을 전후해 경상북도, 경산남도, 제주도 등의 소나무숲을 위협하며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당시 한해에 200만 그루가 넘는 소나무가 재선충병에 감염됐다. 산림 당국은 소나무재선충병을 국가적 재해로 규정하고 총력 대응을 했다. 2016년을 거치면서 피해목이 줄어는 추세도 보였다. 그러나 2020년을 전후해 다시 피해지역이 넓게 퍼지고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소나무재선충병의 조사와 감시에 일차적 책임이 있는 산림청을 비롯 시도와 시군은 소극적이 대응으로 일관했다. 실제 소나무 재선충병 대응시스템이 느슨해지면서 예찰부터 방제, 그리고 평가에서도 누락된 감염목이 갈수록 늘어났다. 특히 정부가 소나무 재선충병을 ‘국가적 산지 재해’로 규정하고 대응을 천명했으나 이런 기조와 달리 시도지사와 시장군수는 소나무재선충병의 대응에서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전국의 주요 소나무숲에서 소나무 재선충병은 활발하게 퍼져갔고 현재 산림이 골병든 상태다. 녹색연합은 지난 1988년 한반도에 감염이 유입된 이래 도로와 철도변 도심 곳곳에서 쉽게 관찰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으나 지금은 비일비재하다면서 그 자쳬가 재선충의 현주소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소나무 재선충병에 대해서 이제 근본적 접근을 해야 할 때가 됐다고 분석했다. 소나무를 지켜야 할 보호구역과 재해 위험이 매우 큰 지역은 사수하되 나머지 소나무숲은 재선충병의 확산을 받아들이고 확산을 인정하는 정책 등 현실에 맞는 대책이 나와야 하고 검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녹색연합은 “정부가 소나무를 재선충병으로부터 지켜야 한다면 이렇게 확산을 버려둬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현장의 상황은 ‘정부가 소나무 재선충병 포기 출구 전략을 찾는 것은 아닌지’ 강한 의구심이 생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준혁기자 jhjeon@kbmaeil.com

2022-09-26

동해에서 만파식적 얻은 신문왕이 쉬어갔다는 기림사

◇부처님의 수행처 ‘기림’이 절 이름토함산은 불국사와 석불사 외에도 19개소에 달하는 사찰이나 불교 유적지가 있다. 그중에서도 기림사와 골굴사는 반드시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찰들이다. 양북면 호암리에 있는 기림사는 ‘토함산이 동해의 안개를 마시고 내뿜으면 그것을 흡수하여 담아낸다’는 함월산 자락에 있다. 신라 신문왕이 동해에서 만파식적을 얻은 다음 왕궁으로 돌아갈 때 기림사 앞 개울에서 잠시 쉬어갔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유서가 깊은 절이기도 하다. 해방 전까지는 불국사를 말사로 거느린 큰절이었지만 지금은 도리어 불국사의 말사가 됐다.부처님이 수행하던 시절 인도에는 ‘죽림정사’와 ‘기원정사’가 있었다. 부처님은 20년 넘게 기원정사에 머물렀는데 그 정사가 있던 숲을 기림(祇林)이라 불렀다. 이곳 기림사도 부처님이 정진했던 기림에서 왔다. 기림사는 신라 초기 천축국(인도)의 승려 광유(光有)가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창건 당시 기림사의 이름은 임정사(林井寺)였다. 우물 정(井)으로 절 이름을 지었듯 이 절의 사적기(事跡記)에는 다섯 가지 맛을 내는 오종수(五種水)가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적광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 옆 장군수를 마시면 신체가 튼튼하고 기개가 있는 장군이 나온다는 이야기 내려온다. 장군수는 장군(독립운동가)의 출현을 두려워한 일본인들이 메워버렸다고 한다. 오종수는 장군수를 비롯해 물맛이 좋은 오탁수, 눈이 맑아지는 명안수, 마음이 편안해지는 화정수, 단 이슬과 같은 감로수인데 지금은 화정수만 기세 좋게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다.다섯 가지 물은 차를 달이는 최고의 물로 알려져 있다. 기림사는 창건 초기부터 차와 깊은 관련이 있다. 오종수를 길어 부처님께 차를 다려 공양하는 것(獻茶)을 수행법으로 삼았을 정도였다. 기림사 약사전에는 국내 유일의 헌다벽화(獻茶壁畫)가 있다. 이 절의 역사가 차와 함께 시작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희귀한 그림이다. 임정사는 이후 원효대사가 절(도량)을 확장하면서 기림사로 개칭했다. 창건 시기는 선덕여왕 12년(643년)으로, 14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고풍스런 사찰이다. 철종 14년(1863년), 본사와 요사채 113칸이 불타 없어졌는데 당시 지방관이던 송정화가 중건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기림사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고색창연한 대적광전을 비롯, 수령 500년 이상 된 큰 보리수나무와 목탑 터가 있는 지역과 성보 박물관, 삼성각, 명부전, 관음전 등이 있는 지역이다.선덕여왕 때 건립된 후 무려 8차례나 중건한 대적광전(大寂光殿)은 기림사의 주 건물로 정면 문짝에는 소슬 빗살로 문양을 만든 꽃 창살이 아주 예쁘게 장식돼 있다. 단청은 입히지 않았지만 채색을 한 어느 꽃보다 아름다워 몰래 떼어가고 싶을 정도다. 소박하면서도 단아하다. 부안 내소사 꽃살문이 천하일품이라 하지만 기림사의 꽃살문도 이에 못지않다. 대적광전은 이전에는 대웅전이란 명칭을 사용하다가 ‘진리’를 의미하는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塑造毘盧遮那三佛坐像)을 모시면서 대적광전으로 명칭을 바꿨다.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은 대덕광전 안에 모셔진 3불로서 중앙이 비로자나불이고 좌측이 약사불, 우측이 아미타불이다. 이 부처님들은 향나무로 틀을 만든 뒤 그 위에 진흙을 바르고 다시 금칠 한 것이다.대적광전의 적(寂)은 번뇌가 없는 고요한 진리의 세계를 말하며 광(光)은 참된 지혜가 온 우주를 찬란히 비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매월당 김시습의 영당도 있는 곳대적광전 오른쪽에는 응진전과 목탑 자리가 있다. 오백나한을 모신 응진전은 각기 다른 모습의 나한(부처님의 제자)이 모셔져 있다. 나한의 모습이 개성이 강하고 사실적이어서 앞에 서 있으면 마치 말이라도 걸어올 것만 같다.마당에는 통일신라 말기에 만들어진 기림사 삼층석탑이 있다. 불국사의 다보탑이나 석가탑처럼 웅장하지는 않지만 아담하고 단정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삼층석탑 지붕돌에는 세월의 더깨가 더덕더덕 붙어 있다. 기단의 오른쪽은 주저앉았고 받침돌 가운데는 홈이 파여 있다.기림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물은 관음전이다. 천수 천안(千手 天眼)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인데 수많은 손과 눈이 마치 공작이 날개를 펼친 것 같다. 천수 천안은 수많은 중생을 보아야 하고 수많은 중생에 손을 내밀어 구제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대적광전 왼쪽에는 약사전과 진남루가 있다. 진남루는 ‘남쪽을 제압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남쪽은 일본을 두고 한 말이다. 기림사는 임진왜란 때 전략적 요충지로 의병과 승병이 활동하던 진원지 역할을 했으며 승군지휘소도 이곳에 있었다. 삼천불전의 부처님은 불상마다 수인이 다르다. 삼천불전은 특이하게 고려청자 빛깔의 불상 삼천불이 모셔져 있다. 과거 천불, 현재 천불, 미래 천불의 부처님이 어디에나 항상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건칠보살반가상(乾漆菩薩半跏像)은 기림사 내 유물전시관에 보존돼 있는데 누구나 들어가서 무료 관람할 수 있다. 건칠불이란 진흙으로 속을 만들고 그 위에 삼베를 감고 다시 진흙을 바른 다음, 옷칠을 반복해서 만든 후 속의 진흙을 빼 버린 부처님이다. 국내에는 건칠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가치가 크다.기림사는 매월당 김시습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쓰며 머문 곳은 용장사였지만 매월당의 영당(사당)은 기림사에 있다. 매월당 생전에 인연이 없던 기림사에 영당이 차려진 이유는 용장사에서 치루던 제사가 고종의 금령으로 철거되자 경주 유림들이 이를 애석해하며 기림사 경내에 영당을 재건했기 때문이다.김시습은 원래 유학자였지만 단종 3년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세상사에 뜻을 버리고 불교에 귀의해 전국을 유랑했다고 한다.기림사 마당에는 수백 년의 세월을 견딘 보리수가 자란다. 목탑이 있던 자리에서 나와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가는 모습이 눈물겹기만 하다. ◇‘한국의 소림사’ 골굴사기림사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골굴사는 선무도로 잘 알려진 절이다. 절 입구에는 다양한 선무도 동작을 한 조각들이 열을 지어 전시돼 있다. 역동적인 입구부터 10여 분 정도 올라가니 골굴사 사찰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글이 보였다.선무도는 스님들의 참선 수행 방법 중 하나다.달마대사가 중국의 소림무술을 창안한 것처럼 우리 선승들이 깊은 산속에서 면벽수행(벽을 보면서 참선을 하는 것)을 하며 산짐승들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만든 것이 한국형 무술 선무도다. 국난이 닥쳤을 때는 스님도 승군이 되어 전쟁터에 나섰는데 선무도를 익힌 스님들은 그들을 이끄는 중추 역할을 했다고 한다.일주문을 지나 오솔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골굴사와 선무도 대학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이 나온다. 골굴사는 불교문화 체험 프로그램인 ‘템플스테이’가 생겨나기도 전인 1992년부터 선무도 수행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선무도 대학은 불교 무술로 알려진 선무도를 체계적으로 보급하기 위해 골굴사 주지 적운 스님이 설립한 곳이다.골굴사는 기림사를 창건한 광유 일행이 자연 굴을 다듬어 만든 국내 최초의 석굴사원이다. 석불사의 석굴보다 기원이 오래된 석굴인 셈이다. 조선 후기의 유명한 화가 정선은 이곳을 배경으로 유명한 ‘골굴석굴도’를 남기기도 했다.골굴암이 세워진 이곳은 옛날 화산 분출로 화산재가 쌓여 만들어진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암석은 비바람에 약해 쉽게 깎여나간다.암석이 비바람에 깎일 때 암석 안의 크고 작은 덩어리들이 빠져나가 수많은 구멍이 생겼다. 이 구멍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졌다. 이런 구멍들이 수없이 발달한 것을 ‘타포니(tafoni)’라고 부르는데, 골굴사의 골굴암은 타포니 동굴을 다듬어서 석실을 만들고 불상을 배치한 석굴이다. 단단한 화강암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특이한 것으로 신라인들이 암석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대웅전에서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바위벽을 타고 감실에 부처님이 모셔져있다. 자연 석굴에 지붕을 얹어 만든 간이 법당이다. 인공석굴로 가는 길은 제법 높이가 있는 돌계단으로 이어져 있다. 부처님께 향하는 길이 가파르고 길어 마치 한걸음, 한걸음 험난한 수행의 여정을 떠나는 것 같다.석회암에는 모두 12개의 석굴이 있다. 굴마다 작은 불상이 있거나 설법을 들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암벽 제일 꼭대기에는 마애불상이 온화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높이는 약 4m, 너비는 약2.2m다. 곱슬머리인 나발의 정수리에는 상투(육계)가 있고 귀는 길게 늘어져 있다. 왼손은 단전에 오른손은 손상된 모습이지만 오른쪽 무릎으로 향하고 있다.감실 밑 작은 석굴에는 원효대사가 열반에 든 법당굴이 있다. 겉모습은 일반 법당과 비슷하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천장도 벽도 모두 석굴로 돼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대사가 입적한 뒤 아들 설총은 아버지의 뼈를 갈아 실물 크기의 조각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설총은 한때 법당굴 부근에 살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최병일 작가

2022-09-26

전쟁의 비극을 잊지 않았으면

20대, 30대를 전장과 해병 훈련소에서 청춘의 뜨거운 시절을 모두 보낸 사람. 서른이 넘어서는 ‘해병대의 도시’ 포항에 정착해 후배들에게 해병 정신을 북돋으며, 전우회 활동을 통해 또 다른 사회적 봉사를 하고 있는 이봉식 선생. 그는 아흔둘이라는 나이에도 여전히 스무 살 청년처럼 보인다.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에게 그는 어떤 당부를 하고 싶을까? 홍 : 포항으로 이주할 때는 아직 창창한 시절이었겠습니다.이 : 내가 서른한 살 때인데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어. 막내는 포항에서 낳았지. 아내도 교사를 그만둔 때라 생활이 어려웠어. 포항으로 오기 전엔 해병 훈련소가 있는 진해에서 살았고, 아이들도 거기서 학교를 다녔지. 그런데 갑작스럽게 포항으로 왔어. 지금 돌아보면 포항과 나 사이에 특별한 인연의 끈이 있었던 모양이야. 제대 후 선배들이 “전매청 과장 자리를 줄 테니 서울로 오라”고 했는데도 안 갔으니. 지금 생각해도 미스터리야.홍 : 포항과의 60년 넘는 인연이 그렇게 시작된 것이군요.이 : 젊었을 땐 술을 좋아했고 친구들도 좋아했지. 성품이 그러니 술 한잔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많은 이곳이 좋았어. 그래서 해병대 전우들을 떠나지 못하고 포항에서 이렇게 살고 있군. 포항에 정착한 것을 후회하지 않아. 여기 와서 삶의 이런저런 보람과 즐거움을 많이 느끼며 살았으니까.홍 : 훈련소 시절에 해병들에게 가장 강조했던 건 무엇인가요?이 : 해병대에는 전통이 있어. 그게 해병대 정신이기도 해.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다.’ 이걸 강조했어. 강인한 체력과 정신을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었지. 해병대 정신을 심어주는 것이 내 임무였어. 그래서 교육을 혹독하게 했어. ‘이걸 감당하지 못하면 해병 전통을 이어갈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어. 해병대 1기는 하루에 한 끼를 먹고도 전투에서 물러서지 않았어. 싸우면 이긴다는 게 해병의 긍지야. 그걸 훈련병들에게 인식시키는 게 훈련소 교관이던 내 임무였어. 아직도 젊은 시절과 마찬가지로 해병대에 대한 애정은 물론이고, 함께 싸우고 고생한 전우에 대한 사랑이 여전해. 그런 마음이 나를 포항으로 이끈 것이기도 하고.홍 : 포항으로 오고 나서 1960~1970년대 이야기를 좀 해주시지요.이 : 군대를 나와 고향으로 가느냐, 서울로 가느냐를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포항으로 왔지. 그때까지 포항은 두 번 와본 게 전부였어. 20대 중반 때 부대 인수 작업을 하려고 왔더랬지. 당시엔 부대에 울타리도 없고, 미군들이 비행장을 꾸리고 있던 자리인데 그저 넓기만 했어. 그 인수 작업을 한다고 몇 달 동안 포항에 있었지. 포항에 오게 된 건 누구의 권유라기보다 스스로 해병대와의 인연을 끊지 못해서였어.홍 : 어떤 인연인가요?이 : 11년간 해병 생활을 하다 보니 해병대 사단이 있는 포항에 마음이 갔어. 당시엔 포항으로 해병부대가 속속 옮겨오던 때이기도 했고, 동기와 후배들이 많았지. 그들이 “함께 포항에서 지내자”는 얘기를 했었고, 마음이 움직였어. 해병대를 떠나고 싶지 않았던 거였지. 오천 인구가 3천 명 정도일 때 포항으로 왔어. 사격장 근처 마을에 방을 얻어 살림을 시작했어. 가진 것 없이 낯선 고장에서 생활을 이어갔지. 그때는 포항의 길 대부분이 비포장이었어. 먼지가 풀풀 날리던 과거 포항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 친구가 차린 회사에 다니기도 하고, 다른 일을 하기도 했어. 고생이 심했던 시절이야.홍 : 포항에 정착한 이후의 기억을 들려주시죠.이 : 오천에서 시내로 나오려면 지금 포스코가 있는 동촌을 지나야 했지. 온통 비포장길인데 걸어서도 나오고, 차를 얻어 타고도 나왔어. 차가 달리면 길 양쪽으로 먼지가 뽀얗게 일어났지. 당시 건설업에 손을 댄 친구가 있어서 그 일을 돕기도 했어. 형산강을 건너는 다리도 나무로 만들어졌던 시절이지. 다리 옆을 보면 갈대밭이 우거져 있었어. 지금 고속터미널 자리와 오거리 앞이 전부 갈대밭이었지. 죽도시장에서 할머니들이 생선 몇 마리를 놓고 팔던 게 기억나는군.홍 : 그 시절엔 다들 가난했지요.이 : 경작할 논밭이 넓은 것도 아니고,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을 배를 가진 사람도 드물었어. 그러다 보니 겨우 입에 풀칠만 하고 사는 이들이 많았지. 그런 상황이었으니 한때는 ‘내가 포항에 괜히 온 게 아닌가’ 하는 후회도 했어. 하지만 젊을 때였고 일단 결심하고 왔으니 잘살아보려고 노력했지. 아내도 오천에 작은 가게를 열어 시내에서 물건을 떼와 팔았어. 하지만 자존심을 버리지는 않았지. 목숨을 건 전투에서 살아남은 해병대 1기로서 당당하게 살고자 했어. 면장, 지서장, 우체국장 등도 좋은 자리가 생기면 나를 부르곤 했지. 홍 : 포스코가 건립되는 과정도 봤겠습니다.이 : 1960년대 중반에 대규모 월남 파병이 있었고, 그 무렵 포스코가 포항에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공장 건설을 위해 기술자들이 측량하고 그러니까 포항 사람들도 마음이 들떴고, 전국에서 건설업자들이 몰려들고 그랬지. 그러면서 인구가 많이 늘어났어.홍 : 어떤 일을 하며 포항에서의 청장년 시절을 보냈나요?이 : 작은 금융회사를 차려 직원 두세 명을 두고 일했어. 그때는 신고만 하면 그런 업종을 허가해줬지. 그런데 돈을 빌려주고 받는 일이 내 성격에 맞지 않았어. 게다가 같은 업종에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들기도 했고. 중도에 손해를 보고 접었어. 포스코가 만들어지던 시기에는 하청업체에서 잠시 일하기도 했는데, 내가 무슨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군대밖에 모르던 사람이니 쉽지 않았지.홍 : 죽도시장에서 점포도 운영했다면서요.이 : 지금은 현대화된 모습이지만, 내가 젊은 시절의 죽도시장은 비가 오면 장화를 신고도 발이 빠질 정도였어. 상인들은 고래고기와 생선 등을 노점에서 팔았지. 말 그대로 서민들의 애환이 가득한 곳이었어. 거기서 육계 사업을 했어. 닭을 사와서 파는 일이었지. 아이들 교육하고, 밥 굶지 않을 정도로 살았어. 나만 아니라 대부분의 포항 사람이 그랬지.홍 : 다른 일은 하지 않았나요?이 : 포항에서 만난 친구가 보경사 미술관 운영을 맡아달라고 해서 그걸 했어. 22년 전이었으니까 일흔을 앞두고 있을 때지.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일했어. 종무소 옆 사무실에 불교 관련 미술품이 많았는데 그걸 관리하고 판매하는 일이었지. 10여 년쯤 했어.홍 : 61년을 살았으니 이제 포항이 고향 같겠습니다.이 : 그렇지. 지내오면서 적지 않은 해병대 전우들, 기자들, 기관장들과 친분이 쌓였어. 사람이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는데, 그런 걸 오랜 세월 겪으면서 이제 포항이 제2의 고향이 되었어. 이웃이 다 친척 같고 그래. 내가 나이는 많지만 아직도 해병대 1기 자격으로 해병부대에 가서 부대원들에게 강연을 하곤 해. 잊지 않고 초청해서 말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는 해병대가 고맙지.홍 : 해병 후배들을 위한 강연은 언제부터 한 건가요?이 : 40대부터 시작해 2년 전까지 했어. 반세기 동안 한 거지. 나는 해병대와의 인연을 간직하고 평생 살았어. 포항의 해병부대에서는 신병들만이 아니라 사단 전체 모임을 열어 강연을 부탁하기도 했어. 강당에 1천여 명을 모아놓고 해병대 1기는 어떻게 훈련하고, 어떤 각오로 전투에 임했는지를 들려주곤 했지. 지금 해병대에 오는 젊은이들은 아주 명석해. 그런 후배들 눈빛을 보면서 내 과거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지.홍 : 포항 6·25회 회장이시지요?.이 : 15년 전에 맡았어. 지금은 고문이야. 해병대를 포함해 전역한 군인들은 사회활동을 통해 보람을 느끼지. 포항이 수해를 입었을 땐 빠른 복구가 필요해. 그럼 누가 나서겠어? 토사에 밀려 쓰러진 벼를 세우는 이들이 바로 해병대야. 해병대 사단 차원에서 민간을 지원하는 것이지. 그런 일이 있을 땐 사단장에게 전화해 “참 보기가 좋습니다”라고 얘기해. 총을 들고 싸울 때는 용감하게, 대민지원을 할 때는 누구보다 열심히 하는 게 해병대지.홍 : 해병대는 대민봉사에도 열심이지요.이 : 해병전우회는 일사불란하게 연락해서 포항에서 큰 행사가 열릴 때는 교통정리도 하지. 그런 모습을 볼 때면 내가 해병대 출신인 것이 자랑스러워. 요즘도 포항시에서 전승행사, 문화행사 등이 개최되면 해병전우회가 행사를 돕기도 해. 그런 것이 해병대를 홍보하는 효과도 있겠지.홍 : 마지막으로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이 : 전쟁의 비극을 잊지 않았으면 해. 6·25전쟁 때 참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어. 해병대원을 포함해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세상을 떠난 군인들의 희생을 기억해주면 좋겠어. 끝/대담·정리 : 홍성식 기자

2022-09-26